유정복 인천광역시장 경인일보 창간 79주년을 300만 인천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인천과 경기를 대표하는 언론사로서 공정보도, 정론직필이라는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 계신 기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언론사의 효율 경영을 책임지고 계시는 홍정표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님과 김영모 인천본사 사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1945년 태동한 대중일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인일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역사회 목소리를 대변하며, 공정하고 전문적인 보도로 독자들의 신뢰를 받아왔습니다. 지방자치가 오늘날 모습으로 발전하기까지 지역 언론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특히 인천시는 올해 인구 300만명을 돌파하고 지역 내 총생산 104조원, 지역 내 총소득 118조원을 달성하며 경제도시로서 새로운 인천시대 막을 열었습니다.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으로 지역균형발전과 미래 행정수요에 대비하고, 정부를 움직인 저출생, 주택 정책을 선도하고 있으며, 재외동포청을 유치해 전세계 1천만 한인 네트워크를 끌어안는 다양한 성과들을 이룬 그 과정에 늘 경인일보가 등대처럼 길잡이를 해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경인일보가 인천 발전과 대한민국 미래를 함께 만드는 동반자로서, 활발하고 건전한 소통을 이끄는 주축으로서, 인천지역 발전에 함께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경인일보 창간 79주년을 1천410만 경기도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컬 저널리즘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경기·인천지역 대표언론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계신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을 비롯한 언론인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1945년, 해방둥이로 창간한 후 지역민들의 든든한 동반자로 자리 잡은 경인일보는 1998년 경인지역 최초로 디지털 뉴스를 선보이며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언론의 모습으로 변화와 혁신을 거듭했습니다. 심도 있는 탐사보도 '경인 In-Depth', 옛 지면기사를 활용하는 기획시리즈 '레트로K'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와 소통하며 지역언론 본연의 모습도 잃지 않았습니다. 경인지역에서 가장 많은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결과가 바로 경인일보의 저력을 보여줍니다.경기도는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마음으로 경제, 기후위기, 민생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전환하기 위해 큰 걸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경기도가 열어가는 그 길에 경인일보가 비판적 감시자로서 소중한 제언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진경 경기도의회 의장 경인일보 애독자 여러분, 그리고 임직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경기도의회 의장 김진경입니다.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언론 환경 속에서도 경기·인천 지역의 다양한 소식을 진실하고 공정하게 전해 주신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을 비롯한 경인일보 임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79년 동안 경인일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와 독자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민의를 대변해 왔습니다. 아울러 올곧은 감시와 비판으로 시대의 문제를 지적하고,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지역의 발전을 이끌어 왔습니다. 언론은 사회의 성장과 늘 함께 발을 맞추어 왔습니다.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따뜻하게 지역 곳곳을 조명해 주신 언론의 노력 덕분에 우리 사회가 지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경인일보가 지난 79년이라는 시간 동안 경기도의 눈부신 발전을 함께해 왔듯, 앞으로 더 오랜 세월 도민의 곁에서 경기도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힘써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도민의 대의기관인 경기도의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격려를 통해 더욱 강화된 자치분권과 지방자치의 길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해권 인천광역시의회 의장 경인지역 최고의 대표 언론사로 정론직필의 길을 걸어온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945년 창간한 대중일보의 뿌리를 이어받은 경인일보는 7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익을 최우선하는 신문' '각계각층의 소통과 화합을 이끌어가는 신문' '지역 경제발전과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는 신문'을 표방하며 독자의 곁에서 정통 언론의 길을 걸어왔고, 이제는 수도권 최고의 종합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경인일보는 발로 뛰는 지역 밀착 보도를 통해 한국기자상, 편집기자상 등 각종 기자상을 수상했으며, 인천에 많은 애정을 갖고 송도국제마라톤대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바다그리기대회 등을 개최하여 지역사회에 공헌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바른 눈과 귀를 통해 지역 현안 발굴과 불공정·불합리 타파에 힘써 주시길 바라며, 열린 생각과 열린 마음으로 독자들과 지역 문제 등을 함께 고민해 주시길 바랍니다.인천광역시의회는 항상 경인일보를 응원하며 '함께하는 의정, 행복한 시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며 더 나은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의정활동으로 전국 최고의 광역의회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과 임직원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송도 매립' 의미와 전망 지자체의 '자발적 시도' 드문 일동북아 국제비즈니스 허브 꿈꿔새로운 전략·실행에 미래 달려꼭 30년 전 '인천 송도 앞바다 매립 신도시 기공식'이 열린 1994년 9월10일. 김영삼 대통령과 최기선 인천시장 등 내빈들이 공사 시작을 알리는 버튼을 눌렀다.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행사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인천의 꿈이 현실로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최 전 시장은 훗날 이날을 '인천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전망이 탄생하는 날'로 자서전에 기록한다.송도 매립은 새 역사를 쓰는 도전이었다. DJ정부 시절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을 역임한 이인석 전 인천발전연구원장은 "돌이켜 보면 인천이 처음으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첫 프로젝트였다"면서 "송도 매립 이전의 인천은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계획을 실행하는 손과 발 역할에 불과했다"고 말했다.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시도는 드문 일이었다. 주안·부평·남동국가산업단지 역시 인천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송도 개발이 순탄할 리 만무했다. 정부의 수도권 억제 정책과 맞물려 어려움을 겪었다.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 인천'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겠다는 비전으로 정부를 설득했다. '지방분권화' '세계화'라는 외부 요인도 작용했다. 인천국제공항, 송도신도시 등을 아우르는 동북아 국제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한 결과 현재에 이른다. 인천은 송도 매립을 기점으로 도시계획·산업·환경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됐다. 2001년 인천공항 개항은 송도를 비롯해 청라와 영종이 2003년 국내 1호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송도·청라·영종 개발은 인천의 도심을 다핵(多核) 구조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제조업 중심 도시에서 벗어나 글로벌 물류·서비스 허브 도시로 변모했다. 특히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글로벌 기업 유치는 바이오 산업을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하지만 송도 개발의 이면에는 그늘이 존재한다. 천혜의 갯벌을 잃었고 신·구도심 간 지역 불균형이 심화됐다. 특정 기업들의 성장뿐만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형성해야 하고, 개발과 환경이 조화를 이뤄야 하며, 신도시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구도심까지 미쳐야 한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과제들이다.아직 늦지 않았다. 남아 있는 송도를 어떤 모습으로 채워가느냐를 깊이 고민한다면 이 같은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송도 개발에 몸담았던 이들의 중론이다. 신도시와 구도심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도 시민들이 체감할 만한 성과를 낼 때가 됐다.움직이는 생물과 같은 도시를 만들어가는 일에 애초 정답이 있을리도 만무하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꿈을 현실로 만들어온 송도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 역시 끊임없는 도전의 장이라는 것이다. 인천의 꿈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전략과 실행에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느냐에 동북아시아 비즈니스 허브 송도의 미래가 달려 있다. → 관련기사 ([창간 79주년] '송도' 이야기… 눈부신 발전 | 물류·첨단산업 부상… 지각변동 이끈 '트라이 포트')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30년 전 송도 매립 시작은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드는 단순한 역사(役事)를 넘어 인천의 새판을 짜는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수도권 변방 인천은 송도 매립을 기점으로 국내 최대 해양물류 도시 부산과 어깨를 견주게 됐다. 5일 오전 6시34분 송도국제도시 마천루 뒤로 떠오르는 해를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 무의도에서 카메라에 담았다. 넘실거리는 파도 너머 송도국제도시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미완의 기획' 송도의 앞날을 잠시 떠올려 봤다. 2024.10.5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송도국제도시 전경. /경인일보DB
'개발과 보전' 가치로 본 50년 역사 '한강의 기적' 이루기 위해서는 팔당댐 건설 필연적수력발전소 유리한 지형… 수자원도 풍부한 최적지자본·기술 부족한 때, 프랑스 도움받아 1973년 완공이면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 수몰된 이들의 아픔도"필요에 의해 만들긴 했지만 형벌같은 비양심의 호수"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 팔당댐 건설은 필연적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해야 했다. 숱한 전쟁의 역사에서 보듯 내전이 일어난 땅은 상흔을 씻어내기 어렵다. 전쟁이 남긴 굶주림, 가난을 벗어나려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 곳곳에서 각종 산업과 개발이 일어났고 인재가 몰려들었다. 기반이 필요했다. 전기와 물이 절실했고 팔당은 이를 충족하는 매력적인 지점이었다.■ 가난한 시절, 경제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팔당댐"1965년부터 1978년까지, 경제개발을 해야 되는 시기였어요. 주로 한강수계 쪽에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한 발전용 댐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준공이 됐습니다. 그 중에 팔당수력발전소는 서울 중심부, 시청을 중심으로 동북방으로 35㎞ 지점에 설치됐고 잘 알다시피 팔당댐 상류 7㎞ 위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양수리에서 물이 합쳐져 7㎞ 하류에 연결됐죠. 그게 팔당수력이 위치한 자리입니다."윤준희 팔당수력발전소장은 팔당댐 건설의 비하인드를 이렇게 설명했다."팔당수력은 좌측에 예봉산이 있고 우측에 검단산이 있습니다. 두개의 산이 만나 골짜기가 형성되고 암반이 있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죠. 그리고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합류되며 수자원이 풍부했습니다. 이렇게 지리적 위치여건이 좋아서 최적지로 선정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이를 구상하던 1960년대 우리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수도권을 책임지는 수력발전소 건설지로 팔당을 집어내고 설계한 것도 프랑스의 도움이 컸다."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전업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조선전업에서 당시 주한프랑스 대사에 한강계 수력발전소 건설 지점을 조사할 수 있는 기술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죠. 그렇게 1963년, 프랑스 정부가 한강유역 전원 개발 지점을 조사했고 기본설계 용역까지 맡았습니다. 1966년 6월, 팔당수력발전소가 본격 착공을 시작해 73년 12월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7년6개월이 걸렸습니다."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시 우리는 최빈국이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을 때였다. 댐 건설은 상당한 기술과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한 고난이도 공사였다. 가진게 없었지만 반드시 건설에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다."빈곤국이다 보니, 자본이 없어 프랑스에 차관계약을 맺었고 주요 기기인 수차와 발전기를 프랑스산으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댐을 건설하고 주요 기기를 설치하는 작업은 그래도 국내 업체가 시행할 수 있게 돼 프랑스와 합동으로 진행했는데 아마 이 (팔당수력) 프로젝트가 최초의 국가합동공사죠. 당시 자료를 보면 그때 총 외자 1천408만달러, 국내 예산이 당시로 140억원 정도 소요됐습니다. 공사에 투입된 연인원이 157만명에 달했구요.""이 공사가 한강을 가로지르는 공사이다 보니까 수심이 거의 9m 이상 나오고 홍수가 나기도 해서 어려웠어요(실제로 건설기간동안 4차례의 홍수를 겪었다). 흙으로 가물막을 설치해서 흐르는 물을 막고 그 아래로 댐을 건설하는데, 69년과 72년도에 비가 워낙 많이 와서 가물막이 다 유실되고 기자재들이 많이 떠내려 갔습니다. 또 비가 오는 때와 오지 않는 때 하상의 높이가 워낙 커 당시엔 굉장히 난(難)공사였을 겁니다."■ 개발논리에 수몰된 자연·사람들국가 산업발전의 명운을 건 팔당댐이 건설되는 이면에, 불행히도 팔당이 본래 지닌 생태계의 변화에 대해선 따지지 못했다. 심지어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땅이 수몰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런 것을 재고 따질 형편조차 되지 못했다.한강은 태백산맥을 타고 예봉산과 검단산으로, 다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한반도의 허리를 타고 흐른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수천년을 흐르던 물줄기 안에는 그에 걸맞은 생태계가 있었다. 그 물줄기의 한 덩어리를 막은 게 '팔당댐'이고, 막아낸 물이 고여 '팔당호'가 됐다.팔당호 수질 및 수생태계를 연구하는 한강물환경연구소 강태구 소장도 댐 건설 전과 후, 생태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팔당은 원래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태백이 발원지인 남한강, 광주와 용인에서 흘러나오는 경안천이 만나서 만들어진 하천이었어요. 쉬리 같이 여울성 물고기들이 주로 살았죠. 흐르는 물이 유입되는 팔당 상류에는 아직 여울성 물고기들이 살고 있지만 댐이 형성되고 팔당호 내에는 완전히 정수성 어종으로 바뀌었어요. 벌써 댐이 만들어진 지 수십년이 지났으니까요."살던 곳을 빼앗긴 건 비단 팔당 하천의 물고기들뿐이 아니다."팔당댐을 보고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만감이 교차해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우리네(수몰민들)한테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형벌같은 것이에요. 우리에겐 비양심의 호수입니다."1963년생인 노국환씨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팔당댐이 생겼다. 양평 양서면 질울고래실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노씨는 현재 마을의 일부가 댐 건설로 사라졌다. 그래도 오랫동안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노씨에게 어린 시절 마을의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그때 우리 마을에 흐르던 그 강이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어요. 구조가 어땠냐면 논밭이 있었고 갈대밭이 있고 그 사이에 모래사장이 있었고 강이 흘렀어요. 강 폭이 좁고 얕아서 저녁이 되면 다슬기가 밖으로 나오기도 했죠. 주전자에 다슬기를 꽉 채워서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하고, 새우랑 고기도 잡았어요. 서울 사람들도 여름이 되면 놀러와서 여름을 나기도 했거든요. 지금은 그 논밭, 갈대밭, 모래사장이 전부 물 속으로 들어갔고 물이 꽉 차서 넓은 호수가 돼 버렸지만."■ 매번 충돌하는 두가지 가치 '먹고사는 일과 보전'정주공간이 사라지고 아예 떠난 주민도 있지만, 여전히 댐 인근서 고향을 지키는 주민들도 상당하다. 평범한 농부였거나 혹은 강을 오가던 뱃사공같이, 주어진 자연환경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던 주민들은 댐 건설 이후 삶이 통째로 바뀌었다. 국가 발전을 위해 인공적으로 '개발'된 팔당댐으로 인해 주민들의 모든 행위에 제동이 걸려서다. 새롭게 조성된 자연환경을 지키라는 요구 때문이다. 경제개발로 수도권은 나날이 인구가 팽창한다. 수도권 시민들의 먹는 물 안전을 위해 팔당을 둘러싼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이 됐다. 물길을 막아 자연의 섭리를 사라지게 해놓고, 새로운 자연은 지켜내야 하는 '이중고'가 팔당을 둘러쌌다.실제로 댐 건설 후 50년이 흐르는 동안 팔당은 거의 매일 '먹고사는 일(개발)'과 '환경보전'이 대립해왔다.1997년 10월10일자 경인일보에는 '팔당호야 썩든 말든 … 경기도 민선 이후 오폐수 업소 3천300여곳 허가' 기사를 통해 하수처리대책 없이 팔당호 주변에 마구잡이로 아파트 건설을 사업승인하고 식품접객업소, 숙박업소 허가를 해주고 있어 팔당호 수질이 악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98년 5월22일자 '팔당상수원 3급수 악화 하남시도 책임' 제하의 기사에는 2천만 수도권 시민의 식수원인 팔당상수원이 3급수로 떨어진 책임에 하남시가 단속내용을 통보받고도 조치하지 않아 직무유기로 비난을 받고 있다고 했다.다른 한편엔 1998년 5월 19일자 '상수원 관리비, 수혜자 부담 전환을' 기사는 팔당호 인근 지자체와 주민들의 고통이 담겼다. 경기도와 팔당호 주변 이천, 용인 등 7개 시군 및 주민들이 팔당호 관리비용 부담을 오염원인자 부담원칙에서 상수원 수혜자 부담원칙으로 전환해 서울·인천 등과 분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같은 해 5월22일자에는 '팔당댐 하류 수질악화 환경부 잇단 발표 "불순한 의도" 주민 반발' 제하 기사에 환경부가 팔당댐 하류지역까지 수질보전구역으로 지정키 위해 수질악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주민들의 반발을 담았다. /이종우·공지영·이시은기자 jyg@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광역5단계 상수도사업의 일환으로 경기, 인천 주민들에게 맑고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하게된 팔당댐. /경인일보DB경인일보 1966년 6월 10일자 1면에 실린 팔당댐 관련 기사. /경인일보DB1991년 4월 팔당 수질오염공해조사 시설. /경인일보DB1991년 8월 팔당유원지 주변 상가. /경인일보DB1994년 6월 30일 팔당호 안개피해. /경인일보DB1997년 7월 7일 팔당댐 쓰레기 환경오염. /경인일보DB1997년 6월 2일 팔당호에 세워진 팔당 상수원 보호 안내문. /경인일보DB1997년 6월 2일 팔당상수원 방류. /경인일보DB
지역민과 함께… 어둠을 밝히는 희망으로 먹고 사는 문제 해결 위해 세운 댐인공의 힘에 180도 달라진 생태계지금도 개발-보전 가치 놓고 충돌 "인류의 역사는 대자연에 도전하는 인간 의지의 승리의 기록이며, 팔당댐 건설은 인간 의지의 승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1974년 5월 24일 팔당수력발전소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말했다. 한강수계를 가로질러 거대한 물줄기를 막아선, 콘크리트 '성벽'을 바라보며 이것은 '인간의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애초에 팔당댐의 운명은 정해졌다. 자연으로부터 승리를 거머쥔 인간에게 유용하게 활용돼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팔당댐을 비롯해 당시 박정희 정부는 1980년대 초까지 전국에 8개 댐 준공을 목표로 건설사업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러한 댐 건설을 두고 언론에선 "80년대 초에 이룩할 중화학 공업 시대를 대비한 에너지 확보가 그 목적"이라는 정부의 의지를 전했다. 그만큼 목표가 분명했다.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반세기에 가깝게 찢기고 부서진 땅 위에 반드시 발전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의지였다. 모두가 헐벗던 시절,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이 쉽지 않았던 폐허의 땅에서 서울 한강을 배후로 댐을 건설하는 일은 그래서 인간의지의 승리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1974년에 팔당댐이 준공되고 자연스럽게 팔당호가 조성됐다. 이후로 2024년 현재까지, '팔당'은 수도권의 젖줄로 줄곧 기능해왔다.이렇게 부여된 숙명 탓에 팔당은 늘 외줄타기다.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해야 하면서도 깨끗하게 환경을 보전해야 하는, 모순된 두가지 조건이 늘 따라붙었다. 애초에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물길을 막은 건 인간이다. 인공의 힘으로 자연을 개발했고 생태계는 180도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쉽게 말하면 흐르는 물이 가진 속성에서 살았던 쉬리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됐고, 고인 물에 사는 잉어가 살게 됐다. 팔당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상 대대로 뿌리내린 마을이 한순간에 수몰됐다. 국가발전이라는 명제 앞에 팔당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는 형태로 삶이 뒤바뀌었다.어쩌면 수도권이란 범주 하에 광복 이후 지금까지 경기도와 인천의 숙명도 비슷하다. 인구도 산업도, 모두 포화된 서울을 뒷받침하기 위해 무조건 개발이 돼야 했고 무분별한 개발의 부작용도 어쩔 수 없이 떠안아야 하는 운명. 그럼에도 팔당댐이 없었다면 수도권 산업기반과 인구는 수용불가능이었고 세계가 찬사하는 한강의 기적도 이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종도와 송도 앞바다를 매립하는, 자연을 거스르는 결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가 갖는 경제적 부흥 역시 이뤄내기 어려웠다.먹고 살기 위해 개발해야 했고, 그로인한 자연·인간의 갈등이 50년동안 이어져왔다. 타고난 운명이 변하지 않듯, 쉰이 된 지금 팔당은 여전히 국가 미래성장을 위한 최전선에 서 있다. 또 영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비록 개발로 인해 주어진 생태환경일지라도 보전해야 하는 의무도 띤다. 창간 79주년 경인일보는 팔당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50년을 기록해왔다. 그 기록에 덧대어 준공 50년을 맞은 팔당의 현재를 취재하며, 여전히 '개발과 보전', 두 가치가 충돌하는 팔당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 편집자 주 → 관련기사 ([창간 79주년]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 | "국가 발전" 외칠 때 생계 잃고 터전 떠난 원주민)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밝아오는 햇빛이 팔당호로 흘러들어오는 물줄기를 비추고 있습니다. 팔당호는 지난 1974년 남한강과 북한강, 경안천에서 흐르는 물을 국가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인공적으로 막아 팔당댐을 조성하며 생겨났습니다. 팔당댐과 팔당호는 전기와 취수를 공급하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수도권의 '젖줄'이지만, 개발로 인해 당시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되고 생태계가 크게 변화하는 등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팔당호가 생태계 보전과 지속적인 개발 사이에 갈등을 겪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물줄기가 하나로 모인 곳에서 해답을 찾듯 우리도 희망을 하나로 모아 길을 열어나갑시다. 올해 창간 79주년을 맞은 경인일보가 그 여정에 지역민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준공 50년을 맞은 팔당호. /경인일보DB
세월 흘러 '인공호' 품은 자연 댐 건설로 상하류 오간 여울성 어종 살기 어려워지고1970년대엔 어업자원 도입 이유 배스·블루길 등 방류중하류 유속 느린 물에서 살던 토종 물고기 생존 위협여전히 다양한 어종 있는 건 조화 이루려는 생태계 힘"개발" vs "보전" 난제… 인간도 균형있게 풀어나가야 인간의 개입으로 조성된 '인공호수' 팔당호는 팔당의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산에서 강으로, 줄기를 따라 흐르던 물이 가두어지면서 기존에 살던 생물이 사라지고, 살지 않던 새로운 생물이 서식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것을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파괴됐다'고 비관하지만, 그렇게 이미 50년이 흘렀다. 가둬졌을지라도, 그 환경에 걸맞은 생태계가 자리를 잡았고 나름의 질서로 변화에 적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비록 인위적인 개발이지만 지난 50년, 자연은 인공호조차 품어냈다.■ 수중생태계 변화는팔당댐이 건설되고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건 수중생태계다. 댐은 물고기에게 일종의 '벽'이 됐다. 본래 상하류 물길을 오가던 여울성 어종은 이곳에서 살기가 어려워졌다.수몰되기 전 팔당에 살던 여울성 어종은 현재도 새로운 물이 유입되는 팔당호 상류 지점에서만 살펴볼 수 있다. 팔당호로 유입되는 조정천과 호수가 만나는 지점이 그 예다. 이곳은 대부분 수심이 1m 이내다. 유속이 빠른 편이어서 하천 바닥에는 성인 머리 크기 정도 되는 호박돌이나 주먹돌이 깔려있다. 수중에 녹아있는 산소(용존 산소)가 풍부하다는 특성도 있다.상류에서 종종 보이는 어종은 쉬리, 참갈겨니, 돌마자, 참종개 등이다. 이들은 대체로 크기가 작은 편으로 큰 돌 사이에 숨어 지내는 경우가 많다.상류를 벗어나 중·하류, 본격적인 팔당호에 들어서면 댐 건설 이후 바뀐 수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주로 유속이 느린 물에서 사는 정수성 어종이 서식한다. 그중에서도 잉어와 붕어가 많아졌다. 변명섭 한강물환경연구소 환경연구관은 '경제성'을 그 이유로 꼽았다."특히 정수성 어종 중에서도 붕어, 잉어가 많은 건 한국에서 대표적인 경제성 어종이기 때문이죠. 그런 어종은 방류를 많이 합니다. 어민들의 주요 수익원이니까요.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서 전부 다 물 밖으로 꺼내면 자원이 부족해지니까 정부가 나서서 인공 방류를 하는 거죠."광주 남종면 분원리에는 '붕어찜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팔당호에서 갓 잡아올린 붕어로 요리했는데, 전국적으로 입소문이 나며 한때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시를 대표하는 지역행사인 '분원 붕어찜축제'도 2012년까지 매년 5월마다 열렸다.잉어, 붕어, 강준치 등 토종 정수성 어종이 새롭게 팔당호에 터를 잡던 와중에 팔당호 수생태계는 또 한번 변화를 겪었다. 1970년대 정부가 내수면 어업자원을 도입한다는 이유로 외래 정수어종을 인공 방류하면서다. 이 역시 못먹고 못살던 시절의 경제적 이유였다. 당시 인공 방류된 외래 정수어종으로는 배스와 블루길이 있었다. 변 연구관은 이때 상황을 설명했다."큰입배스는 1975년에 팔당호 상류 조정천에 방류한 기록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조그만 새끼 500여마리를 도입해서 청평내수면 연구소에 2년 정도 순치과정을 거쳐 방류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국내에 배스가 방류된 건 팔당호가 처음이었어요."초기 생존율이 높고 포식 능력이 뛰어난 이들 외래어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토종 물고기의 생장과 번식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붕어가 알을 10만개, 잉어가 30만개 정도 낳거든요. 토종어종 역시 번식력이 밀리는 게 아닙니다. 근데 물고기는 보통 뭔가를 씹거나 잘라먹는 기능이 없는데, 큰입배스는 입에 들어가는 건 다 먹어요. 그러니 토종어종이 당해낼 재간이 없죠. 또 (큰입배스는) 알을 낳고 초기에 부화해 스스로 먹이활동을 할때까지 어미가 지켜주는데, 붕어나 잉어는 그렇지 않거든요…납자루, 각시붕어 등은 살아있는 조개의 패각(단단한 껍데기 두장으로 이뤄진 조개류) 안에 알을 낳습니다. 껍데기 안에 있어서 다른 물고기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건데, 부화하려할 때 껍데기에서 탈출합니다. 그때가 마침 배스 부화시기와 겹쳐요. 그래서 나오자마자 배스에 잡아먹히는 거예요."외래어종으로 인해 토종 어종이 크게 줄자 팔당호 인근 주민들의 불만도 끊이질 않았다. 팔당호에서 만난 어부들은 "블루길은 토종 물고기가 산란하면 알을 전부 핥아먹는다"며 "배스는 농어를 통째로 잡아먹는데 입이 하도 커서 사람 주먹이 다 들어갈 정도"라고 말했다.결국 환경부는 배스와 블루길을 생태계교란외래생물종으로 지정해 이식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한강유역환경청은 2016년 팔당호에서 생태계교란 어류 퇴치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큰 망을 넓게 쳐 블루길, 배스를 건져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광주에서 팔당호 어부로 일하는 안호명씨는 "예전에 팔당호에서 어부들이 어업 활동을 할 때는 외래어종도 잡아내면 정부가 수매해 갔는데, 지금은 어부들조차 거의 사라져서(외래어종 개체 수) 관리가 어렵다보니 정부가 직접 나서 관리를 하는 거 같다"고 말했다.그러나 강과 하천이 끊기지 않고 연결돼 있는 국내 수계 특성을 고려하면 특정 어종의 개체 수를 인위적으로 줄여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외래어종을 도입하던 시기에 팔당호 수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선제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새로운 생태계의 보고 팔당호의 현재팔당댐은 평소에도 수문을 수시로 열고 닫으며 수위 변동 폭을 최소화한다. 이로 인해 담수의 체류시간이 달라지는데, 특히 집중호우 시기엔 하루에도 몇번씩 팔당호 전체 물이 완전히 교체되는 특성도 가진다. 수도권 주민에게 깨끗한 물을 계속해서 공급하는 '취수원'이기 때문에 예민하게 관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특성으로 국내에 대표적인 하천형 인공호로 불리며 다른 인공호보다 다양하고 개방적인 생태계를 띠고 있다.또 물높이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점은 수변의 식생이 골고루 발달할 수 있는 안정적 조건이 되기도 한다. 팔당호에는 최근 부엽식물인 마름을 제거하자 붕어마름, 대가래, 민나자스말의 자생 면적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 식물은 유속이 느린 곳에서 살아가는 종이다.그중에서 어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식물은 '마름'이다. 마름은 뿌리가 땅속에 박혀있고 잎사귀는 수면 위로 늘어뜨린 식물이다. 마름이 주로 서식하는 곳에선 바닥에 가라앉아 썩는데, 죽은 마름이 쌓여 수심이 얕아진다. 그래서 팔당호의 오랜 문제로 꼽혀온 퇴적물 악취의 원인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팔당호에는 습지(물이 정체된 수역)도 넓게 분포해 있다. 이곳에는 주로 수생식물군락이 형성됐다. 팔당호 수면적(36.5㎢)의 11%가 수생식물서식면적(3.29㎢)에 해당한다. 이는 물 아래에 서식하는 침수식물 자생 면적을 제외한 수치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습지까지 고려한다면 그 면적은 더 넓을 것으로 추정한다. 습지에는 연꽃이 군락을 이루는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그중에서도 양수리습지는 봄철 어류의 산란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수련, 애기부들, 갈대 등의 다양한 정수식물이 용존산소 농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변 연구관은 "팔당호 전체가 블루길, 배스 등 외래어종 때문에 토종 어류가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현재까지 다양한 어종이 존재할 수 있는 건 팔당호 전체에 널리 퍼진 습지와 같은 자연공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연환경의 '개발 vs 보전' 5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난제수도권 경제개발을 위해 인공으로 만든 댐, 그리고 호수라는 태생적 한계로 팔당의 생태계는 늘 부정적 시선에 시달린 게 사실이다. 수십년째 팔당의 수생태계를 연구해온 변 연구관은 이 시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사람은 서식지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동식물은 서식지가 그곳에 사는 생물을 결정합니다. 흐르는 물을 가둬 호수로 바뀌는 변화를 겪었고 50년이 흘렀습니다. 그에 따른 생태계도 변화한 모습으로 충분히 적응했다고 볼 수 있어요."현재 팔당호 어종 생태계가 교란됐다고 비난받는 건 우리가 먹고사는 일, 즉 '경제적 이유'가 큰 것이지, 여울성에서 정수성으로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된 환경 속에서 오히려 수생식물 생태계는 오랜시간 적응하며 안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부연했다.여전히 팔당의 생태계를 두고 '먹고사는 일'과 '보전' 두 가치가 부딪힌다. 50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숙제를 떠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와 환경단체는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인 팔당호를 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오랜 세월 환경규제에 묶여 왔던 주민들은 개발이 필요하다고 반발한다.오랜 난제에 대해 강태구 한강물환경연구소 소장은 생태계가 가진 능력과 인간의 노력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고 말했다."생태계는 균형을 이루려고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느 한 개체가 많아지면 생태계가 스스로 바뀐 환경에 조화를 이루려고 하거든요. 인간은 죽지만 자연은 계속해서 남아있을 거니까요. 팔당의 생태계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보전과 개발의 대립을 어떻게 균형있게 가져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죠. 이를 정책으로 풀어갈 수 있어야 하고요. 환경을 다룬다는 건 늘 그렇잖아요." /이종우·공지영·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쉬리. /한강물환경연구소 제공납자루. /한강물환경연구소 제공각시붕어. /한강물환경연구소 제공큰입배스블루길. /한강물환경연구소 제공마름. /한강물환경연구소 제공단양쑥부쟁이. /한강물환경연구소 제공팔당호 물 위로 수생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시은기자/see@kyeongin.com
정부 '수도권 억제 정책' 극복 관건대한민국 미래 바꾼다는 명분 설득1994년 9월 10일, 대통령 참석 첫 삽 초고층 아파트 단지와 부러울 것 없는 공원, 유수의 첨단 바이오 기업과 국내외 유명 대학이 들어선 송도국제도시.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이 도시가 불과 삼십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닷물이 빠지면 시커먼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바다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바다를 메워 지도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구상은 당시 기준으로 '전무후무한 역사(役事)'에 가까웠다. 1994년 9월10일 첫 삽을 뜨기 전까지 이 일은 '무모한 도전' 혹은 '가능성 제로'의 일로 치부됐다.정부의 수도권 억제정책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수도권 인구 집중을 해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정부 방침대로라면 인천은 성장해선 안되는 도시였다. 정부 투자는 물론 민간의 투자 또한 불가능했다.1986년 인천시 도시계획국장을 맡아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박연수 전 소방방재청장이 "인천은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였다"고 설명한 이유다. 인천의 발전, 인천의 확장을 내세워선 안됐다.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인천이 아닌 대한민국의 지도와 미래를 바꾸겠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설득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인천국제공항과 송도신도시 등을 아우르는 '동북아국제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안)'(1986)다. 홍콩·싱가포르를 능가하는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 역할을 할 '최첨단 정보화 신도시'를 만들고, 이 도시와 전 세계를 연결하는 첨단 허브 공항을 확보하면서, 국제공항이 입지한 영종·용유·무의도에 매력적인 종합 관광 휴양단지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매번 인천의 구상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설득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 등이 이 계획을 보고 받았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박배근(3대)·이재창(4대)·심재홍(5대)·박종우(6대)·최기선(7대) 등의 관선 시장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던 1994년 9월 10일 '인천송도앞바다 매립 신도시 조성 기공' 현수막이 걸린 기공식 현장에 참모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최기선 인천시장 등의 모습이 보였다. 최기선 인천시장은 자서전에 이 날을 "인천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더 크게는 대한민국의, 더 넓게 보면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전망이 탄생하는 날"이었다고 설명했다. 송도 매립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1994년 9월 10일 인천 송도신도시 기공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최기선 전 시장. /경인일보DB
1990년 '영종도 신공항 계획' 탄력'공항·항만·국제도시' 연계 개발'한국형 실리콘밸리' 목표로 출발2003년 국내 첫 경제자유구역 지정전통제조업 벗어나 지역발전 견인운수·창고업 등 서비스 비중 늘고셀트리온·삼바 등 바이오 급성장입주기업 2천여개·종사자 6만여명송도 매립이 시작된 이후 30년간 인천은 산업구조의 대전환을 겪었다. 공항과 항만, 송도국제도시로 이어지는 '트라이 포트' 전략에 기반해 비약적 성장을 이뤘다. 매립으로 인한 도시 면적 증가와 함께 전통 제조업에서 벗어난 첨단산업 재편,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에 의한 물류업 확대 등이 맞물리면서 급격한 팽창을 이뤘고 대한민국 제2의 도시로 거듭났다.■ 제조업 중심 도시에서 동북아 물류 허브로인천의 산업은 1962년 정부 주도로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힘입어 성장했다. 1965년 제4단지가 인천 부평에 만들어졌고, 이어 1969~1973년 제5·6단지가 주안에 들어섰다. 이곳이 현재의 부평·주안국가산업단지다. 인천 제조업체는 1970년 580개에서 1981년 1천824개로 대폭 늘며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됐다. 1985년에는 전국 최대 규모 중소기업 전용 산업단지인 남동공단이 인천에 조성되며 제조업 기반이 확충됐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인천의 총부가가치는 12조4천773억원에서 20조7천719억원으로 66.5%의 성장률을 보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인천의 산업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제조업의 총부가가치 비중이 줄었고, 제조업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서비스업은 비중이 늘어났다.인천의 마지막 관선 시장이자 초대 민선 시장인 최기선 인천시장은 1993년 인천국제공항(Air port), 인천항(Sea port), 송도정보화신도시(Tele port)를 유기적 연계한 트라이 포트(Tri port)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처음 내놨다. 인천을 동북아 물류 정보의 중심 도시로 만들겠다는 비전이었다. 1990년 확정된 영종도 신공항 계획과 함께 송도 매립이 추진력을 얻었다. 1994년 9월 10일 '송도해상신도시'를 위한 매립이 동춘동 앞바다에서 시작됐다. 송도신도시는 1997년 한국형 실리콘밸리를 만들겠다는 정부 목표에 따라 '미디어밸리' 사업지로 선정됐지만, 곧이어 찾아온 외환위기 여파로 부침을 겪었다. 송도신도시는 2003년 2·4공구 부지 조성 및 기반시설 공사 완료에 맞춰 입주가 시작됐고, 대한민국 최초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됐다.■ 인천국제공항 개항, 경제자유구역 지정 이후 비약적 성장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2003년 경제자유구역(송도·청라·영종) 지정은 인천이 새로운 성장 국면에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2001~2005년 인천의 총부가가치는 25.6% 성장했다. 특히 서비스업(31.1%↑)의 성장이 돋보였는데, 인천국제공항 개항에 따라 운수 및 창고업의 비중이 2001년 8.7%에서 2005년 11.1%로 커졌다.또 송도국제도시에 자리잡은 셀트리온(2005년)과 삼성바이오로직스(2012년) 등을 중심으로 바이오의약품 제조업이 핵심 산업으로 부상했다. 인천의 바이오산업 생산량(국내판매 및 수출)은 2014년 5천781억원에서 2022년 4조9천943억원으로 764% 성장했다. 인천 전체 수출에서 의약품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4년 약 1.1%에서 2022년에는 약 6.6%로 증가해 지역경제의 새로운 수출 동력이 되고 있다. → 표 참조송도국제도시 입주 사업체는 2008년 183개에서 2015년 1천261개, 2021년 2천169개로 늘었다. 송도국제도시 입주 종사자는 2008년 6천431명에서 2021년 6만1천922명으로 증가했다.김하운 인천사회적은행 (사)함께하는인천사람들 이사장은 "인천국제공항의 등장으로 인천지역의 도·소매업과 운수업 등이 늘어났고, 수도권정비법 등 영향으로 제조업 비중이 줄었다"며 "인천의 제조업 중 석유화학제품업과 송도 매립으로 들어선 바이오제약 분야가 생산성을 올려줬다. 또 매립으로 인한 아파트 증가에 따라 건설업과 부동산업이 성장하며 인천 경제를 견인했다"고 했다. 이어 "과거 토지 의존적인 대규모 공장이 지방과 중국 등으로 이전하고 소규모 영세 공장들이 인천에 자리를 잡으며 부가가치가 줄었지만 송도 매립과 인천공항 등을 계기로 산업 구조의 전반적인 변화가 촉진됐다"고 했다. /조경욱기자 imjay@kyeongin.com/경인일보DB한 겨울 어민들이 갯벌에서 석화(石花)를 채취하던 2011년경 송도 앞바다 풍경. /경인일보DB'삼성바이오로직스' 4공장. /경인일보DB'셀트리온' 본사·공장. /경인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