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WC 2024' 참관 등 스페인서 존재감 알려 바르셀로나에 용인특례시관 개설… 참여 기업 기술 개발·수출 지원 약속이상일 시장, 컨벤션 전문기업 NEBEXT 본사 찾아 MICE산업 육성 협약세비야와 '경제·문화·관광·교육분야' 상호 발전 우호교류 의향서 교환도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이 모바일·반도체 등 첨단산업과 관련해 미국의 CES, 독일의 IFA와 함께 세계 3대 박람회로 꼽히는 'MWC(Mobile World Congress) 2024' 참관차 현지시간 지난달 20~29일 열흘 간 스페인을 방문했다. 이 시장의 해외 출장은 속된말로 '빡센' 편이다. 외유성 일정을 뺀 촘촘한 스케줄을 짜 의미와 성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이번 출장에서도 이 시장은 MWC 2024 참관에 그치지 않고 여러 도시를 찾아 용인시와의 우호 교류 관계를 다지는 한편, 반도체 산업을 비롯해 문화·예술, 도시재생, 컨벤션 등 다양한 분야의 벤치마킹 사례를 직접 확인하며 '짧지만 긴' 일정을 소화했다.■ 반도체 도시 용인, 첨단산업 시찰이번 출장의 가장 큰 목적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현지시간 지난 달 26~29일에 열린 MWC 2024 참관이었다. '미래가 먼저다'를 주제로 열린 올해 전시회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웹서비스(AWS), 구글 클라우드, 인텔, 퀄컴 등의 글로벌 기업을 비롯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국내·외 굴지의 기업들이 참여해 AI(인공지능)·클라우드·반도체·모빌리티·헬스 등 다양한 분야의 첨단기술을 선보였다.시는 이번에 처음으로 박람회 현장에 '용인특례시관'을 개설, 관내 중소기업들의 판로 개척을 지원했다. 박람회장에 독자적 부스 공간을 마련한 국내 지방자치단체는 경상북도와 용인시 단 두 곳뿐이었다. 이곳에는 AI 기반 가상스튜디오 플랫폼을 개발한 이모션웨이브(주)를 비롯해 (주)액션테크, 팀플레이어, 엔디에스솔루션(주) 등 관내 4개 기업이 참여했다. 시는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판로개척 등을 돕기 위해 전문 무역교육을 받은 인턴을 기업으로 파견하는 '수출인턴제도'를 이번에 처음으로 적용, 단국대 소속 4명의 학생들이 현장 부스에서 일을 보조하도록 지원했다. 이는 이 시장의 대표적 공약 중 하나다.이 시장은 "우리 시는 미국 CES에 관내 기업을 위한 독립 공간을 마련한 적은 있었지만, MWC에 지원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세계 첨단산업의 신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 전용 공간을 확보해 관내 기업들을 참여시키는 건 이들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전했다.이 시장은 현지시간 지난달 27일 박람회 현장을 방문한 뒤 이날 오후에는 관내 기업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진행, 기술력 개발과 수출 지원책 마련 등을 위해 시에서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이번에 참여한 4개사는 차별화된 기술로 현지 바이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총 346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따냈다. 가장 높은 계약 실적을 기록한 이모션웨이브(주)는 바르셀로나 뮤직테크 허브와 MOU를 추진하는 한편,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관계자와도 공동 연구를 위한 논의를 진행키로 하는 등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컨벤션·도시재생 스페인에 배운다이 시장은 현지시간 지난달 21일 공식 첫 일정으로 스페인 마드리드를 찾아 호텔·레스토랑·카페 관련 700여개 기업들이 참여한 'HIP(Hospitality Innovation Planet)' 박람회 현장을 둘러봤다. 이후 현지시간 지난달 28일에는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스페인 최대 규모 컨벤션 전문기업 NEBEXT 본사를 방문해 MICE 산업 육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이 시장은 용인에 조성 예정인 이동·남사읍 국가첨단산업단지와 원삼면 반도체클러스터 등을 언급하며 "단일 도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가 형성될 용인에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호텔과 컨벤션 시설"이라며 "기흥구 플랫폼시티에 주거·문화시설 외에도 컨벤션 시설과 호텔, 쇼핑몰 등이 들어서도록 계획 중인데 MICE 산업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가진 NEBEXT에서 많은 지혜를 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MICE 산업 구축은 용인이 글로벌 반도체 도시로 도약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했다.현지시간 지난달 23일에는 도시재생의 성공적 모델을 만든 빌바오를 방문, 시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철강산업 쇠퇴로 한때 쇠락의 길을 걸었던 빌바오는 구겐하임미술관 분관 유치 이후 관광산업을 통해 활력을 되찾았다. 지역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해당 지역의 경제를 살린다는 의미의 '빌바오 효과'라는 용어까지 탄생했을 정도로 도시재생사업의 성공사례로 유명하다. 이 시장과 만난 아마이아 아레지 제1부시장은 "빌바오가 한때 어려움을 겪었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공공디자인 실행으로 도시재생에 성공해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며 "앞으로 빌바오와 용인이 서로 지혜를 주고 받으며 공동 발전을 도모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이 시장은 스마트시티화를 선도하는 대표적 도시 바르셀로나에서도 도시 리모델링을 담당하는 시 산하 경제개발기관 액티바(Activa)와 스마트시티로의 전환에 주력하는 연구기관 시립정보기술연구소(IMI) 등을 잇따라 방문하며 관련 정책과 노하우를 배웠다.■ 우호교류는 글로벌도시 성장의 자양분이 시장은 현지시간 지난달 21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마드리드 무역관을 방문해 국내 기업 진출 현황과 지원책 등을 파악하는 한편, 주 스페인 대한민국대사관에서 박상훈 대사를 만나 용인과 스페인 도시들간 우호 교류를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다음날 이 시장은 스페인 금융·문화·관광의 중심지이자 4대 도시 중 하나인 세비야를 방문해 호세 루이스 산즈 시장과 회동, 우호 교류 의향서를 교환하며 향후 양 도시 간 경제·문화·관광·교육·환경분야의 상호 발전을 위해 협력키로 했다. 시가 우호 교류를 맺은 건 호주 레드랜드, 중국 타이안, 베트남 쾅남성, 중국 도문, 아랍에미리트 아즈만, 미국 텍사스주 윌리엄슨카운티에 이어 일곱 번째다.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위치한 세비야는 알카사르 궁전과 세비야 대성당 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포함한 다양한 관광자원을 보유한 데다, 섬유·자동차 등 제조업을 비롯해 금융·항공우주산업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곳이다.세비야 외에도 이 시장은 빌바오, 사라고사 등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용인의 발전상을 설명하며 우호 교류를 위한 협의를 이어갔다. 이 시장은 "세계 각국의 미래산업 도시와 자매우호 결연을 추진하는 건 민선 8기 공약 중 하나"라며 "용인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과 생태계를 가진 글로벌 반도체 도시로 거듭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용인/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 2024' 현장 내 용인특례시관 부스를 방문해 관내 기업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24.2.27 /용인시 제공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을 비롯한 시 방문단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HIP 박람회 현장을 찾아 NEBEXT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4.2.21 /용인시 제공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스페인 빌바오시 관계자들을 만나 도시재생 성공 사례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2024.2.23 /용인시 제공이상일 용인특례시장(오른쪽)이 지난달 22일(현지시간) 스페인 세비야 호세 루이스 산즈 시장과 만나 우호 교류 의향서를 교환했다. 2024.2.22 /용인시 제공
성매매 종사자, 인간 바리케이드"빵과 장미 아무도 주지 않았다" "용주골 여성들에게 빵과 장미를", "성 노동자 지켜라".세계여성의 날인 3월8일, '클리셰'는 이곳에서 사치였다. 이날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 농성 중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빵과 장미를 선물하는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여성' 노동자만을 위한 연대의식이었다.지난 8일 파주 용주골의 여성들은 칼바람과 함께 찾아온 '용역'에 맞서야 했다. 담벼락 위로 여성들이 다닥다닥 붙어 꼼작하지 않았다. 담벼락 아래 6명의 여성은 서로 팔짱을 끼고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이날 오후 1시30분께부터 벌어진 대치는 파주읍 관계자 등이 용주골과 연풍교 사이로 300m가량 뻗어 있는 가림막 형태 펜스를 철거하려 나오면서 시작됐다. 펜스가 노후화돼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철거는 이미 지난해 예고됐으나, 집행은 이날 처음 이뤄졌다.펜스는 세월이 흘러 낡아버렸지만, 용주골에서는 단순한 구조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국가가 암묵적으로 성매매 영업을 용인한 동시에, 성매매 종사 여성을 사회로부터 격리했던 일련의 과정이 담긴 이중적인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국가에 의한 방치'(2월20일자 3면 보도=인권 아닌 자본의 편에 선 국가… 도구로 쓰여진 존재 '성 노동자')라는 상징성이 깃들어 있다. 1990년대 전국의 성매매 집결지마다 '청소년통행금지구역' 팻말이 들어서던 때, 용주골에도 바로 옆 갈곡천 주변으로 펜스가 설치됐고 이후 '금단의 구역'으로 자리매김했다.아울러 이곳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그간 연풍교 옆의 유리방은 펜스 덕분에 하천 건너편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아 불법 촬영 위험을 낮췄다.그렇기에 펜스가 사라지는 건 본격적으로 용주골을 밀어내고, 이곳 여성을 한순간 세상에 낱낱이 드러냄을 뜻한다. 주민들이 펜스 철거를 '용주골 지우기'로 받아들이는 이유다.이곳 성매매 종사 여성과 연대단체 시민을 포함한 인근 주민까지, 100여명이 강하게 항의하면서 이날 철거는 진행되지 않았다. 1시간가량 대치한 끝에 용역이 떠났지만, 용주골 여성들은 웃음을 짓기보단 허탈해했다. 담벼락에 올라가 시위하던 여성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치기도 했다.인천에서 용주골까지 출퇴근한다는 B(40대 중반)씨는 이날 휴무였지만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기꺼이 나왔다. 그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8년째 '성 노동'을 하는 굴곡진 사연, 펜스 철거가 왜 부당한지 등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그러나 '여성의 날'이란 단어를 꺼내면서는 눈시울을 붉혔다."우리도 분명 시위를 하고 있는데 '빵과 장미'를 아무도 주지 않은 게 (용역이 온 것보다) 더 충격적이에요. 정말로 눈물 나요. 오늘 아가씨 한 명이 다치기도 했잖아요. 철거 인력이 물러갔지만 성공했다는 기쁨보다는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파요."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8일 오후 1시40분께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서 이곳 종사 여성과 연대단체 시민들이 파주읍의 ‘펜스 철거’에 맞서 서로 팔짱을 끼며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다. 2024.3.8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 용주골 여성들에게도 빵과 장미를 ❞ ❝ 성 노동자 지켜라 ❞ 3월8일의 '클리셰'는 이곳에서 사치였다. 세계여성의 날,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 농성 중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빵과 장미를 선물하는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여성' 노동자만을 위한 연대의식이었다. 지난 8일 파주 용주골의 여성들은 칼바람과 함께 찾아온 '용역'에 맞서야 했다. 담벼락 위로 여성들이 다닥다닥 붙어 꼼작하지 않았다. 붉게 녹이 슨 펜스 앞엔 항의 문구를 적은 종이 팻말이 붙었다. 담벼락 아래 6명의 여성은 서로 팔짱을 끼고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이날 오후 1시30분께부터 벌어진 대치는 파주읍 관계자 등이 용주골과 연풍교 사이로 300m가량 뻗어 있는 가림막 형태 펜스를 철거하려 나오면서 시작됐다. 펜스가 노후화돼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철거는 이미 지난해 예고됐으나, 집행은 이날 처음 이뤄졌다. 펜스는 세월이 흘러 낡아버렸지만, 용주골에서는 단순한 구조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국가가 암묵적으로 성매매 영업을 용인한 동시에, 성매매 종사 여성을 사회로부터 격리했던 일련의 과정이 담긴 이중적인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비주얼 뉴스 [편.zip] 으로 본 '용주골 종사자 이야기' 클릭) 역사적으로는 '국가에 의한 방치'(2월20일자 3면 보도=인권 아닌 자본의 편에 선 국가… 도구로 쓰여진 존재 '성 노동자')라는 상징성이 깃들어 있다. 90년대 전국의 성매매 집결지마다 '청소년통행금지구역' 팻말이 들어서던 때, 용주골에도 바로 옆 갈곡천 주변으로 펜스가 설치됐고 이후 '금단의 구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울러 이곳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그간 연풍교 옆의 유리방은 펜스 덕분에 하천 건너편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용주골 안을 누군가가 몰래 찍을 경우 이곳 여성들은 '삼촌'이라 불리는 사장에게 알리고, 곧바로 사진을 삭제하도록 조치했다. 그렇기에 펜스가 사라지는 건 본격적으로 용주골을 밀어내고, 이곳 여성을 한순간 세상에 낱낱이 드러냄을 뜻한다. 주민들이 펜스 철거를 '용주골 지우기'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하천 주변 업소에서 4년을 일해왔다는 A(40대 중반)씨는 “지금도 차 블랙박스로 몰래 찍는데, 펜스가 없어지면 더욱 심해질 거다. 민원도 많아질 게 뻔하다"며 “그래서 오늘 담벼락에 올라가 최대한 막을 수 있을 때까지 막아봤다"고 이야기했다. 이곳 성매매 종사 여성과 연대단체 시민을 포함한 인근 주민까지, 100여명이 강하게 항의하면서 이날 철거는 진행되지 않았다. 1시간가량 대치한 끝에 용역이 떠났지만, 용주골 여성들은 웃음을 짓기보단 허탈해했다. 담벼락에 올라가 시위하던 여성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치기도 했다. 인천에서 용주골까지 출퇴근한다는 B(40대 중반)씨는 이날 휴무였지만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기꺼이 나왔다. 그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8년째 '성 노동'을 하는 굴곡진 사연, 펜스 철거가 왜 부당한지 등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그러나 '여성의 날'이란 단어를 꺼내면서는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도 분명 시위를 하고 있는데 '빵과 장미'를 아무도 주지 않은 게 (용역이 온 것보다) 더 충격적이에요. 정말로 눈물 나요. '괜찮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아가씨 한 명이 다치기도 했잖아요. 철거 인력이 물러갔지만 성공했다는 기쁨보다는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파요."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레트로K : 보통의 역사-수원 남문편 일제강점기 설립 수원극장 시대 지고상권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극장 부상2009년 폐업까지 수원 대표극장 명맥"어디서 볼까.""일단, 남문 중앙극장 앞에서 보자."수원에 살았거나 화성, 오산 등 경기 남부 도시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누군가 만나야 한다면 두말 않고 외치던 그곳. 전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대문이 있는 도시, 그중에서도 팔달문을 중심으로 경기남부 최고의 상권이 형성됐던 수원 '남문상권' 한가운데, 중앙극장이 있었습니다.수원 중앙극장은 수원에선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핫'했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1952년에 수원남문 상권 중심부에 가건물을 지어 시작한 수원 중앙극장은 1960년대 조금씩 위상이 높아졌고 70년대, 8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2009년 폐업때까지 수원 대표극장의 명맥을 지켜왔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에 설립된 수원 중앙극장은 초기엔 수원 최초의 극장이었던 '수원극장'에 밀려 삼류 극장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수원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 관장은 당시 수원의 극장을 두고 'TV가 없던 시절, 보통 사람들의 유일한 문화여가생활'이라고 말했습니다. 70년대 남문 황금시대… 상가 장사진편리한 교통에 만남·회식 장소 '인기' "중앙극장은 영화를 보는 곳이기도 하지만 수원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어요. 삼성전자 월급날이 되면 중앙극장 앞은 사람이 미어터질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뿐인가요. 특히 명보관 같이 서울 주요 극장들보다 수원 중앙극장이나 수원극장 영화 티켓이 훨씬 쌌어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했습니다. 서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 인근 딸기밭에서 놀다가 버스 타고 남문 중앙극장에 와서 영화 보고 남문 시장 먹거리를 즐기는 게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였죠."당시 수원에는 중앙극장보다 앞서 1920년대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극장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수원극장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죠. 지금의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수원상업강습소 학생들의 학비마련을 돕기 위해 수원 기생들이 수원극장에서 자선공연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고, 일제의 수원헌병분대와 수원수비대가 해산을 앞두고 수원극장을 빌려 송별연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후 1930년대 지금의 수원 교동사거리로 자리를 옮긴 수원극장은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 연면적 160평 규모의 적벽돌 조적조 건물을 새로 지어 수원의 극장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영화 상영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열렸지만 해방 후에는 이념으로 두 쪽 난 한반도의 역사처럼 각종 정치행사들로 점철되기도 했죠. 하지만 1952년 팔달문 인근(팔달로2가 126번지), 영동시장 등 남문 상권의 중심에 중앙극장이 등장하며 독점적 인기를 누리던 수원극장의 시대가 저물었습니다.중앙극장이 수원극장을 제치고 전성기를 맞이한 데는 교통이 편리한 '입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원 전역과 화성·오산 등 인근 도시를 잇는 이른바 황금노선 버스들이 팔달문 로터리 정류장을 지나는 지점에 중앙극장이 자리했기 때문이죠.특히 1973년에 삼성전자가 수원 영통지역에 본사를 이전하면서 중앙극장, 그리고 남문상권의 '활황'이 본격화됐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의 월급날이 되면 중앙극장 앞에 '만남' '회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렸고 남문상권은 밀려오는 손님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합니다. 더구나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면서는 밤새 술 먹고 놀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려는 젊은이들로 남문상권은 말 그대로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최고의 시절을 누렸죠.1975년에 남문에 문을 연 한일레코드 사장님은 당시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저는 그 당시엔 남문 다른 가게에서 일을 해서 잘 기억해요. 정말 남문상권의 황금시대였습니다. (월급날이면) 삼성전자 사원들이 봉투를 들고 찾아왔어요. 그때는 남문 길거리에서 노점상만 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할 정도였죠. 실제로 노점상이 150~200개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도매시장에 가서 수원 남문에서 왔다고 하면 큰 손님 왔다고 대접할 정도로 전국 1등 상권 중 하나였어요. 예전에는 변진섭같이 인기 많은 가수들 신보가 나왔다 하면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몇 십 m씩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주변 상인들이 장사에 방해된다고 항의할 정도였어요.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진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됐죠."지금도 수원영동시장에서 타월 가게를 운영하는 이봉우 사장님은 당시 남문상권을 두고 지금의 서울 동대문 상권과 같은 곳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의류직물 도매시장의 메카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특히 포목점 같은 곳들이 활성화됐죠. 당시 주택 가격이 280만~380만원 할 때인데, 하루에 100만원씩 벌기도 했으니까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총알택시를 타고 배달할 정도로 거래가 활성화됐던 곳이었죠."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수원깍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남문상권에도, 그리고 잘나가던 중앙극장에도 내리막이 시작됐습니다. 바로 '동수원 개발'이 분기점이었죠. 논밭만 있던 허허벌판 동수원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남문상권 주변에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살며 수원에서 돈 있는 부자들의 자녀들이 하나둘씩 동수원에 개발되는 아파트로 옮겨가고, 큰 회사들이 자리를 옮겨 고층건물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돈이 동수원에 몰려드니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죠. 중앙극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수원 개발로 남문에 사람이 몰리지 않은 탓도 크지만 중앙극장을 비롯해 오래된 남문 상권엔 '주차장'이 있는 건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황금노선이 지나가는 대중교통의 요충지였지만 '마이카' 시대엔 무용지물이었죠.한동민 관장은 대규모 자본의 유입, 시대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패착이 중앙극장, 남문상권의 도태를 야기했다고 말합니다. "남문은 일단 땅값이 높고 공간도 부족해서 주차장을 만들지 못해요. 특히 이 점은 동수원이 개발되는 시점엔 큰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대형 자본이 동수원 쪽 지대가 싼 곳에 대형 쇼핑몰을 세우죠. 이때 상당수 가정에 자가용이 있는, 마이카 시대까지 도래하는데 남문에 가도 주차할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동수원에 있는 대형 쇼핑몰로 가서 편하게 밥도 먹고 소비도 하죠. 여기에 극장도 대규모 자본이 세운 멀티플렉스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동수원 개발 분기점… 점점 내리막길대형쇼핑몰·멀티플렉스 갖춘 곳 몰려주차장도 없어 자가용 시대 오자 쇠퇴 이렇게 수원 중앙극장의 흥망성쇠는 가깝게는 수원남문상권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고 멀리 보면 수원 개발의 역사와도 연결돼 있습니다. 중앙극장은 2009년에 문을 닫은 이후 건물은 그대로 남았지만 병원, 미용실 등 다른 업종들이 영업 중입니다. 곳곳에 공실도 눈에 띄고요. 수원극장은 1999년에 폐업한 이후 그 건물에 한복점이 들어섰지만 현재는 이마저도 그만둔 채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내부는 바뀌었지만 건물의 뼈대는 1930년대 지어진 그대로라, 건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도 합니다.중앙극장, 그리고 남문상권은 수원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공간입니다. 오랫동안 수원에 뿌리내린 경인일보도 한때는 남문에 본사를 두고 왕성한 취재활동을 해왔죠. 그래서 경인일보에는 수원에서 나고 자란 기자들도 많습니다. 남문상권을 활발히 오가던 그들의 젊은 시절 추억을 전해드립니다.지금까지 수원 중앙극장과 남문에 얽힌 이야기, 잘 읽어보셨나요. 이제 이들 장소에 간직한 여러분의 추억도 들려주세요. 기사의 댓글도 좋고 경인일보 SNS(페이스북·인스타그램·네이버포스트)에도 좋습니다. 소중한 추억을 담아 좋은 콘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공지영·김대훈기자 jyg@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84년 5월 개관한 수원 중앙극장. /경인일보 아카이브1974년부터 장사를 이어온 코끼리 만두.
30년 법생(法生) 담은 '마지막 주문'… "자신의 '집'에서 평온하길" 지난달 '미추홀구 건축왕' 남헌기에 '법정최고형' 징역 15년 선고고심끝 118쪽 달하는 판결문 작성… 이례적으로 '형량 개정' 역설재판 마치고 한 청년의 인사 감동… "존중받을 권리 모두에 있어" 장장 308일간의 재판이었다. 정년퇴임을 앞둔 판사는 출·퇴근하는 시간도 아깝다며 사무실에서 쪽잠을 잤다. 지난해 여름 법정 휴정기에는 휴가도 반납했다. 오기두(62)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마지막 재판에 그의 30년 법관 인생을 담았다.지난달 7일 열린 재판에서 그는 인천 미추홀구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를 벌인 속칭 건축왕 남헌기(62)에게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일당 9명에게는 각각 징역 4~13년을 선고했다.오 전 판사는 "해군 법무관 시절까지 합치면 약 35년을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살았다"며 "판사 재임기간엔 내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국민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지난해 4월5일 건축왕 관련 첫 재판 날, 오 전 판사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피고인의 유·무죄를 속단하지 않는 판사의 의무를 지키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법관의 양심에 따라 피해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남씨 측 변호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였다.오 전 판사는 "남씨 측 변호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언뜻 봐서는 사기죄 성립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며 "그런데 심리를 하면 할수록 대법원에서 요구하는 사기죄 성립 요건에 적합하다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남씨 일당은 2022년 1월부터 7월까지 인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세입자 191명에게서 전세보증금 148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섰다. 피해자들이 파악한 피해 가구는 총 2천753가구, 보증금 금액으로는 대략 2천억원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도 많다는 것이다.오 판사는 "2천700가구에 달하는 집을 어떻게 개인이 운영했는지, 왜 등기부등본상에는 실제 집주인인 남씨가 없는지, 왜 공인중개사를 고용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일당이 피해자들에게 정말 '나쁜 짓'을 했구나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피고인의 유죄를 확정하고 그는 큰 고심에 빠졌다. 일당의 엄벌을 탄원했던 주민들, 법정에서 울며 안타까운 사연을 토로했던 피해자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성경에 나온 예수의 고통이 조금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며 "어떻게든 피해자들을 구제해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아 마음고생이 컸다"고 했다.고심 끝에 그는 118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작성했다. 일반적인 단독 법정에서 나오는 판결문보다 약 4배가량 긴 분량이었다.그는 선고 날 법정을 가득 채운 피해자들과 취재진 앞에서 담담하게 판결문을 낭독했다. 다음은 오 판사가 작성한 판결문의 일부다."이 사건 피해자들의 각 임대차보증금은 피해자들이 대출을 받거나 퇴직금이나 평생 일하여 모은 돈으로서 피해자들의 거의 유일한 재산이다. 피해자들이 앞으로 금융기관에 갚아야 할 채무는 피해자들의 재정능력을 벗어날 정도로 막대하다. 피고인들은 피해자들로부터 살아갈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이와 함께 오 전 판사는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증언한 피해 사실도 읽어나갔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웃들의 사연에 피해자들은 눈물을 터트렸다.그는 "자연인 오기두가 아닌 대한민국 법관 오기두로서 감정을 최대한 빼고 판결문을 읽으려고 노력했다"며 "그런데도 마음이 참 아팠다. 내 딸이, 내 아들이 그런 말(증언)을 했다면 가슴이 턱턱 막혔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오 전 판사의 판결문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이례적으로 법정에서 사기죄 형량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판사로서 입법론을 함부로 논하면 안 된다. 3권분립 원칙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라면서도 "적어도 이 사건에서는 현 법률이 부족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그러면서 사기죄 개정을 주장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이 사건의 피해자만 191명, 3인 가족으로 치면 500여명이다. 2천700가구를 기준으로 하면 약 1만명의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며 "이 인구는 투표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숫자"라고 말했다. 이어 "집 문제는 '의식주'의 문제이고, 이런 의식주의 차이는 인간에게 큰 고통을 안긴다. 단순한 사기 사건이 아닌 '인권문제'이자 '사회문제'라는 뜻"이라며 "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가 모두 책임져야 하는 사안"이라고 덧붙였다.오 전 판사는 이 사건을 지켜본 국민들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고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으로 안 되는 것"이라며 "함께 사는 세상에서 존중받을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고 강조했다.또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와 언론에도 책임감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오 전 판사는 "피해자들은 호화롭게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평온하게 살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할 뿐"이라며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자신의 '집'에서 평온히 살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했다.이 재판이 끝난 후 법정을 모두 빠져나갔을 때, 한 청년이 홀로 남아 오 전 판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청년의 "감사하다"는 인사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그러면서 오 전 판사는 벼랑 끝에 몰려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텨가는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큰 위로가 돼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도 위로가 됐다고 하니 참 감사합니다. 마음 굳건히 잡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신념을 버리지 말고 자책 없이 믿음대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오 전 판사는 이 판결을 끝으로 지난 2월 30년 넘게 입은 판사복을 벗었다. 지금은 수원 광교에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그는 끝으로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면서도 "지난 세월을 국민들의 세금으로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이를 보듬는 사람이 되겠다"고 미소를 지었다.글/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 사진/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오기두 前 부장판사는?▲1986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원 법학과 등 수학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 합격 ▲전주지법·서울고법 판사, 수원지법·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 역임▲2024년 2월19일 정년퇴임오기두 변호사가 26일 오후 수원시 영통구에 위치한 자신의 법률사무소에서 경인일보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2024.2.26/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봉사로 지역사회 문제해결… 징검다리 역할 맡을 것" 郡 인구의 30%·2만여명 센터 등록마라톤·김장 봉사 등 매년 구슬땀"남녀노소 누구나 가능, 참여 중요""봉사는 빈부와 지위를 떠나서 모두가 참여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참여가 시작입니다."39년간 공직생활을 마치고 봉사자로 새로운 삶을 사는 임대원 가평군자원봉사센터장은 "지역 자원봉사는 개인·단체별 특성에 맞는 봉사를 찾아 이뤄져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때로는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센터가 봉사자와 수요자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봉사 수요처는 늘고 있으나 지역 인구 감소로 봉사자는 부족한 실정"이라며 "앞으로 센터는 자율성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지역주민과 단체 회원들의 특성에 맞는 봉사활동 등을 발굴, 다양한 수요처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사회복지사와 행정사 자격을 갖춘 임 센터장은 공직 당시 사회복지 등 센터 관련 업무를 여러 차례 맡으면서 봉사자의 꿈을 키웠고 2022년 마침내 센터장으로 봉사대열에 합류했다.1998년 '센터 설립' 이후 2013년 '사단법인 가평군자원봉사센터'로 명명된 센터에는 현재 군 전체 인구의 약 30%인 2만여 명(139개 단체)이 등록돼 있다.봉사자들은 매년 자라섬 꽃 심기 행사, 청소년 문화의집 동아리 축제, 그란폰도 자전거대회, 재난대응 훈련, 자라섬 꽃 축제 교통봉사, 전국마라톤대회교통봉사, 동절기 단체별 김장봉사 등에 참여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특히 연 인원 500여 명이 참여하는 센터 가족봉사단은 홀몸노인 카네이션 달아드리기 및 주거환경 개선, 노인·복지시설 등 방문 및 환경정화 실시, 명절음식 나누기행사, 사랑의 월병 만들기, 만두 만들어 나누기 행사 등의 활동을 펼치며 지역사회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여기에 센터가 재료비를 지원해 추진하는 20여 개 우수 봉사단체의 불우이웃 반찬 봉사, 자연정화 활동, 교통정리 봉사, 집수리 봉사, 빵으로 이웃사랑의 마음 전하기, 페이스 페인팅 등의 봉사활동도 지역사회에서 칭찬이 자자하다.이러한 봉사활동에 발맞춰 센터는 매년 자원봉사단체 육성 및 우수프로그램 지원, 자원봉사 활성화 프로그램 운영과 자원봉사 사기진작 및 능동적 참여 유도를 위한 활동 지원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임 센터장은 설명했다. 임 센터장은 "앞으로 센터는 봉사단체와 회원들에 지역과 나라에 필요한 봉사가 되도록 각종 봉사자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봉사는 남녀노소와 상관없이 참여가 중요하다. 많은 봉사자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참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양평군 캐릭터 '양춘이' 스타탄생 관광과 직원들, 직접 디자인·기획엉뚱·발랄 콘셉트… 홍보영상 히트지역명소·각종행사 알리기 활약탄생 9개월만에 郡 마스코트 부상스탬프 미션 통해 부채·키링 등 상품스타벅스와 컬래버 한정판 출시도활성화 위해 캐릭터 무료개방 승인"양평에 자주 놀러와 추억 쌓기를"양 한 마리가 수경을 쓰고 수영레인에서 평영을 한다. 이윽고 양은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양 평영 1등'이란 문구가 나오고 이어 양평 양떼목장 등 '양평형 1등 여행정책'이 노출된다. 이외에도 양이 탈을 벗고 보니 개였다는 다소 연관성 없는 키워드로 양평의 명소 '벗고개'를 홍보하며 운전을 하다 차가 고장 나 양이 수리를 맡겼다는 에피소드로 '양수리'를 알린다.위 이야기는 지난해 6월 데뷔한 양평군 캐릭터(마스코트) '양춘이'의 관광 홍보영상 내용이다. 언뜻 보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엉뚱한 말로 양평군의 관광명소를 각인시키다 점점 군의 각종 행사 때마다 얼굴을 비추더니 이젠 인구가 약 12만명인 지자체에서 5만명에 육박하는 유튜브 콘텐츠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큰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됐다.■ 지자체 캐릭터 시대 '저비용 고효율' 잡아라지방자치단체가 캐릭터를 통해 자체 행사, 대외 홍보 등을 시행한 역사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 서울올림픽 이후 마스코트인 호돌이가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여러 지자체들이 1990년대 초 마스코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초창기 캐릭터는 주로 새, 꽃 등 지자체의 상징이나 특산물, 해, 산 등의 자연이나 미래를 지향하는 요소를 의인화해 만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일본 구마모토현의 쿠마몬처럼 지자체의 명운을 뒤바꾼 사례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캐릭터는 대외적으로 크게 각인되지 못했다. 그러다 2018년 이후 EBS의 펭수 등 영향력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국내 지자체들은 귀여운 외모와 친숙함을 무기로 다채로운 콘텐츠 경험과 각인효과를 줄 수 있는 캐릭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개발에 뛰어들었다.양평군도 처음에는 앞서 말한 지자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광 활성화를 위해 디자인 전문가들에게 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캐릭터들을 활용해 왔으나 지역을 대표하는 캐릭터로서의 지속성이나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군은 양평과 연관된 이미지와 스토리가 있는 관광 캐릭터에 목말라갔다.■ 개발비용 '0원'… 활용 가능성 무한대 '양춘이 탄생'그러던 지난해 4월 군 관광과에선 작은 움직임이 시작됐다. 외주를 통한 관광 마스코트 효용의 한계가 드러나자 디자인, 음악, 영상촬영, 편집 등에 관심이 있는 직원들이 업무시간 외 주말마다 모였다. 배정된 예산도 없는 상태에서 캐릭터 성격·개성·디자인·명칭 등을 기획하고 엉뚱함과 발랄함을 좋아하는 30대 이하를 타깃으로 마스코트를 만들었다.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양평의 '양'이란 글자를 따오고 양떼목장이 있어서 양을 캐릭터화하기로 정해졌으며, 춘삼월에 용문 양떼목장에서 태어나 봄 '춘(春)'자를 쓰는 양춘이로 이름을 지었다. 무표정에 무탈하게 사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는 무던한 성격까지 부여됐으며 이는 모두 양평군을 대표할 관광영상을 제작하는 콘셉트에 맞게 기획됐다.이후 양춘이의 6월 데뷔 무대는 이전까지 사용되던 지자체 캐릭터와는 남달랐다. 관광홍보영상을 제작하기 위한 캐릭터로 만들어졌기에 이미지와 실물, 콘텐츠의 이질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첫 영상부터 2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양춘이가 수영하는 영상엔 '귀엽다', '뜬금없지만 재밌다' 등 긍정적인 반응이 줄을 이었고 '양평에 양떼목장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반응도 나오며 영상의 목적이었던 관광지 홍보에도 성공했다.이후 양춘이는 한 달에 한 번씩 군내 관광명소를 기발한 방법으로 홍보하기 시작했고 양춘이가 등장한 동영상은 업로드할 때마다 양평군 유튜브인 '양평톡톡' 인기동영상의 절반을 차지했다.폭발적인 캐릭터 반응에 군의 각 부서도 양춘이를 정책홍보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청년의날, 고향사랑기부제, 군내 각종 체육대회, 양평군 여권케이스, 카카오톡 이모티콘, 명절인사, 군 청소차량 래핑, 미술관 등 양춘이는 탄생한 지 불과 9개월 만에 군의 '얼굴'이 됐다.■ 마스코트를 넘어 '지역 살림꾼'으로, 굿즈제작까지현재 양평군은 풍성하게 들어오는 물때에 맞춰 힘껏 노를 젓는 중이다. 군 관광과에서 캐릭터를 직접 제작했기에 관리와 응용이 편리하고 예산의 추가 투입 없이 사용처에 맞는 포인트를 강조할 수 있다는 강점은 확장성을 더욱 높인다.군은 이미 양동 벗고개, 용문양떼목장 등 양춘이가 등장했던 장소엔 양춘이 영상홍보 현수막을 설치하고 양춘이가 촬영한 소품을 촬영장소에 설치해 방문객에게 즐길거리를 더하고 있다. 이미 방문객들은 유튜브 장면에서 등장한 촬영장면을 재현하며 SNS상에 캐릭터를 통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으며 관광지 스탬프 미션을 통해 양춘이 부채, 키링, 그립톡, 풍선, 인형 등의 굿즈를 얻을 수 있기에 그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 군은 스타벅스 더양평DTR과의 컬래버로 한정판 양춘이 텀블러를 출시하며 외연 확장의 큰 가능성을 열었다. 이외에도 양춘이는 군에서 개발 중인 카카오톡 기반 통합 행정 앱 서비스에 춘식이와 함께 협업을 준비 중이다.군은 군내 사업자들의 관광활성화를 위해 지난달 29일 양춘이를 활용한 캐릭터 무료개방사업 또한 승인했다. 앞으로 군내 양떼목장, 과자제품, 각종 카페 등에서 양춘이를 더욱더 자주 볼 수 있을 전망이다.군 관광과 관계자는 "전문가들이 만든 완성도가 높으나 지역과 연관없는 캐릭터보단 아마추어지만 군을 이해하고 있는 담당 직원들이 직접 캐릭터 디자인부터 콘셉트, 활용방법들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서 양춘이가 탄생했다"며 "지금의 관광객들은 영상정보에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에 영상을 중심으로 캐릭터를 활용했다. 우리와 친근하고 진정성 있는 개인 유튜버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겨냥했는데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양평에 자주 놀러오셔서 많은 분들이 양춘이와 함께 많은 추억을 쌓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양평/장태복기자 jkb@kyeongin.com양평군 캐릭터 양춘이. /양평군 제공양평군수배 인라인스케이트대회에서 아이들이 양평군 캐릭터 '양춘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양평군 제공양평군 용문 양떼목장에서 양떼와 양평 홍보영상을 촬영하고 있는 '양춘이'. /양평군 제공수영장에서 평영을 하는 '양춘이'. /양평군 제공지난해 12월 출시된 스타벅스 더양평DTR과 양평관광 캐릭터 양춘이의 컬래버 제품. /양평군 제공
우리는 유독 평범하게 사는 일, 보통 사람으로 사는 일에 인색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할 것 같고 특별한 장소를 가야 할 것 같으며 특별한 사람과 함께 해야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나의 SNS에 그 특별함을 게시하고, 남의 SNS에 게시된 특별함을 소비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죠. 물론 평범한 건, 지루할지도 모릅니다만,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들이 쌓여야 특별하다고 느낀 '하루'가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평범함들이 모여 특별한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평범이 없다면, 특별도 없는 셈이죠. 세간을 뒤흔드는 사건과 경기도·인천의 특별한 이슈의 '과거'를 찾아 떠났던 레트로K가 시즌2 '보통의 역사'로 다시 시작합니다. 79년 경기도·인천 대표 정론지 경인일보의 기록 속에 숨겨 둔 '보통의 일상'을 공개합니다. 우리의 기록과 함께 경인일보 독자들이 간직해 온 보통의 추억도 공유합니다. 평범한 일상이 깃든 공간도 좋고 소중한 추억 속 만남의 장소도 좋습니다.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이 살았던 일상의 이야기도 환영합니다. 레트로K 기사의 댓글로 참여해도 좋고 경인일보 페이스북·인스타그램·네이버포스트 레트로K 게시물, 카카오톡 제보를 통해 여러분의 추억을 제보해 주세요. 자, 지금부터 '보통 사람' '평범한 일상' '소중한 추억'을 찾아 출발합니다. “어디서 볼까" “일단, 남문 중앙극장 앞에서 보자" 수원에 살았거나 화성, 오산 등 경기 남부 도시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누군가 만나야 한다면 두말 않고 외치던 그곳. 전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대문이 있는 도시, 그중에서도 팔달문을 중심으로 경기남부 최고의 상권이 형성됐던 수원 '남문상권' 한가운데, 중앙극장이 있었습니다. 수원 중앙극장은 수원에선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핫'했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1952년에 수원남문 상권 중심부에 가건물을 지어 시작한 수원 중앙극장은 1960년대 조금씩 위상이 높아졌고 1970년대, 8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2009년 폐업까지 수원 대표극장의 명맥을 지켜왔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에 설립된 수원 중앙극장은 초기엔 수원 최초의 극장이었던 '수원극장'에 밀려 삼류 극장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수원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 관장은 당시 수원의 극장을 두고 'TV가 없던 시절, 보통 사람들의 유일한 문화여가생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중앙극장은 영화를 보는 곳이기도 하지만 수원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어요. 삼성전자 월급날이 되면 중앙극장 앞은 사람이 밀어터질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뿐인가요. 특히 명보관 같이 서울 주요 극장들보다 수원 중앙극장이나 수원극장 영화 티켓이 훨씬 쌌어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했습니다. 서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 인근 딸기밭에서 놀다가 버스 타고 남문 중앙극장에 와서 영화 보고 남문 시장 먹거리를 즐기는 게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였죠." 당시 수원에는 중앙극장보다 앞서 1920년대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극장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수원극장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죠. 지금의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수원상업강습소 학생들의 학비마련을 돕기 위해 수원 기생들이 수원극장에서 자선공연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고, 일제의 수원헌병분대와 수원수비대가 해산을 앞두고 수원극장을 빌려 송별연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후 1930년대 지금의 수원 교동사거리로 자리를 옮긴 수원극장은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 연면적 160평 규모의 적벽돌 조적조 건물을 새로 지어 수원의 극장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영화 상영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열렸지만 해방 후에는 이념으로 두 쪽 난 한반도의 역사처럼 각종 정치행사들로 점철되기도 했죠. 하지만 1952년 팔달문 인근(팔달로2가 126번지), 영동시장 등 남문 상권의 중심에 중앙극장이 등장하며 독점적 인기를 누리던 수원극장의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중앙극장이 수원극장을 제치고 전성기를 맞이한 데는 교통이 편리한 '입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원 전역과 화성·오산 등 인근 도시를 잇는 이른바 황금노선 버스들이 팔달문 로터리 정류장을 지나는 지점에 중앙극장이 자리했기 때문이죠. 특히 1973년에 삼성전자가 수원 영통지역에 본사를 이전하면서 중앙극장, 그리고 남문상권의 '활황'이 본격화됐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의 월급날이 되면 중앙극장 앞에 '만남' '회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렸고 남문상권은 밀려오는 손님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합니다. 더구나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면서는 밤새 술 먹고 놀 수있는 자유를 만끽하려는 젊은이들로 남문상권은 말 그대로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최고의 시절을 누렸죠. 1975년에 남문에 문을 연 한일레코드 사장님은 당시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저는 그 당시엔 남문 다른 가게에서 일을 해서 잘 기억해요. 정말 남문상권의 황금시대였습니다. (월급날이면) 삼성전자 사원들이 봉투를 들고 찾아왔어요. 그때는 남문 길거리에서 노점상만 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할 정도였죠. 실제로 노점상이 150~200개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도매시장에 가서 수원 남문에서 왔다고 하면 큰 손님 왔다고 대접할 정도로 전국 1등 상권 중 하나였어요. 예전에는 변진섭같이 인기 많은 가수들 신보가 나왔다 하면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몇 십 m씩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주변 상인들이 장사에 방해된다고 항의할 정도였어요.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진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됐죠." 지금도 수원영동시장에서 타월 가게를 운영하는 이봉우 사장님은 당시 남문상권을 두고 지금의 서울 동대문 상권과 같은 곳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의류직물 도매시장의 메카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특히 포목점 같은 곳들이 활성화됐죠. 당시 주택 가격이 280~380만원 할 때인데, 하루에 100만원씩 벌기도 했으니까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총알택시를 타고 배달할 정도로 거래가 활성화됐던 곳이었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수원깍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남문상권에도, 그리고 잘나가던 중앙극장에도 내리막이 시작됐습니다. 바로 '동수원 개발'이 시발점이었죠. 논밭만 있던 허허벌판 동수원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남문상권 주변에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살며 수원에서 돈 있는 부자들의 자녀들이 하나둘씩 동수원에 개발되는 아파트로 옮겨가고, 큰 회사들이 자리를 옮겨 고층건물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돈이 동수원에 몰려드니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죠. 중앙극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수원 개발로 남문에 사람이 몰리지 않은 탓도 크지만 중앙극장을 비롯해 오래된 남문 상권엔 '주차장'이 있는 건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황금노선이 지나가는 대중교통의 요충지였지만 '마이카' 시대엔 무용지물이었죠. 한동민 관장은 대규모 자본의 유입, 시대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패착이 중앙극장, 남문상권의 도태를 야기했다고 말합니다. “남문은 일단 땅값이 높고 공간도 부족해서 주차장을 만들지 못해요. 특히 이 점은 동수원이 개발되는 시점엔 큰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대형 자본이 동수원 쪽 지대가 싼 곳에 대형 쇼핑몰을 세우죠. 이때 상당수 가정에 자가용이 있는, 마이카 시대까지 도래하는데 남문에 가도 주차할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동수원에 있는 대형 쇼핑몰로 가서 편하게 밥도 먹고 소비도 하죠. 여기에 극장도 대규모 자본이 세운 멀티플렉스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이같은 현상은 한때 '화춘옥' '삼부자갈비' 등 남문상권을 주름잡던 갈빗집들이 땅값이 싼 동수원으로 옮겨 너른 땅에 큰 전원주택 같은 대형 갈빗집으로 변신하는, 이른바 '가든형 갈빗집'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알려집니다. 이렇게 수원 중앙극장의 흥망성쇠는 가깝게는 수원남문상권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고 멀리 보면 수원 개발의 역사와도 연결돼 있습니다. 중앙극장은 2009년에 문을 닫은 이후 건물은 그대로 남았지만 병원, 미용실 등 다른 업종들이 영업 중입니다. 곳곳에 공실도 눈에 띄고요. 수원극장은 1999년에 폐업한 이후 그 건물에 한복점이 들어섰지만 현재는 이마저도 그만둔 채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내부는 바뀌었지만 건물의 뼈대는 1930년대 지어진 그대로라, 건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도 합니다. 중앙극장, 그리고 남문상권은 수원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공간입니다. 오랫동안 수원에 뿌리내린 경인일보도 한때는 남문에 본사를 두고 왕성한 취재활동을 해왔죠. 그래서 경인일보에는 수원에서 나고 자란 기자들도 많습니다. 남문상권을 활발히 오가던 그들의 젊은 시절 추억을 전해드립니다. 1970년대~1990년대까지 수원 남문은 수원사람들에겐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만능'이었어요. 그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으로 정말 추억이 많죠. 친구들과 주로 코끼리만두, 남문백화점 지하1층에 있던 분식집에 자주 갔었고, 가족들과 레스토랑 '가무'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어요. 남문은 2층건물이 많은데 2층에 있던 커피숍을 많이 다닌 기억이 나네요. 전화기도 공짜로 쓸 수 있어서 좋았고 당시엔 파르페가 유행이었거든요. 특히 고등학교 연합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남문 카페에서 일일카페를 많이 했는데 쿠폰을 나눠주기도 했어요. 일단 중앙극장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 바빌론이라는 유명한 옷가게에 가서 쇼핑하고 근처 코끼리만두에서 분식을 먹는 게 코스였죠. 남문은 왠지 잘나가는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란 인식도 있었어요. 우리땐 DDR,펌프 같은 오락이 유행이었는데, 동네 오락실에서 마스터를 한 뒤 남문 오락실에 진출했어요. 수원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과 무작정 남문 근처를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있네요. 지금은 쇠퇴해 아쉽지만 늘 지날때마다 추억이 떠오르네요. 2000년대 초반까지 남문은 여전히 젊은이들에겐 만남의 장소였어요. 제가 거의 '끝물'이긴 하지만 시험 끝나면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꼭 왔죠. 당시에 '반윤희' 패션이 인기였는데 행궁동 공방거리에 구제상점들이 많아 자주 가곤 했습니다. 이후에 백화점들이 많아졌지만, 전 수직적인 백화점보다 수평적인 시장이 좋았어요. 지금까지 수원 중앙극장과 남문에 얽힌 이야기, 잘 읽어보셨나요. 이제 이들 장소에 간직한 여러분의 추억도 들려주세요. 기사의 댓글도 좋고 경인일보 SNS(페이스북·인스타그램·네이버포스트)에도 좋습니다. 소중한 추억을 담아 좋은 콘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공지영·김대훈기자 jyg@kyeongin.com
착실한 인재·건실한 중소기업 '수원 랑데부' "내~일을 Job았죠" 민은미씨, 18년 경력단절 여성 새로운 마음가짐… 당당한 일원 될것정선임씨, 아이 키우느라 일자리 막막… 일단 부딪혔는데 기회 감사이정헌씨, 공무원 준비중 취업 노크… 긴장한 제 말 천천히 들어주셔황혜영씨, 백화점 판매직 7년만에 도전… 집 근처 즐겁게 근무하고파최지혜씨, 졸업 후 알바중 구직… 첫회사로 사회생활 익히기 큰 기대수원시는 지난해 10월 수원컨벤션센터에서 50개 기업이 참여한 '2023 수원시 맞춤형 일자리 박람회'를 개최했다. 경기지방중소벤처기업청, 수원일자리센터 등 관내 일자리 유관기관과 함께 청년, 중장년, 여성, 어르신까지 계층별 맞춤형 취업지원을 위해 마련된 박람회에서는 312명이 채용됐다. 당시 업계에선 높은 취업률로 일자리 네트워크 활성화에 이바지했으며, 무엇보다 맞춤형 채용 지원으로 취업실적 제고 및 참여자 만족도를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원 일자리 박람회에 참여해 5명의 인재를 채용한 건실한 지역 기업이 있다.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 있는 (주)뉴원은 시설 투자를 계획해 인력 투입이 절실한 상황에서도 구인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가 일자리 박람회에 참여해 인재를 채용하는데 성공하며 기업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지난 23일 오후 (주)뉴원에서 만난 조청오(55) 대표는 물류 창고에 가득 쌓인 납품 자재들을 보며 자부심에 찬 듯한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현장 구석구석을 빠짐 없이 점검하는 노련한 눈빛이 보였다. 2005년 화성시 향남읍의 작은 전기 자재 유통회사에서 시작한 (주)뉴원은 당시 초대 사장이었던 이율범(현 (주)뉴원 대표이사)씨가 설립해, 지난 2013년 수원으로 이전한 뒤로 확장과 채용을 반복하며 2022년 기준 연 매출 176억원대의 전기, 통신, 소방, 관련 기자재 유통 기업이 됐다.이율범 사장의 뒤를 이어 (주)뉴원의 키를 쥐게 된 조 대표의 가장 큰 고민은 언제나 '사람'이다.지난해 대비 매출이 10% 가까이 오른 (주)뉴원은 유통업을 넘어 제조업 분야까지 사업부문 확장을 계획했지만 막상 이를 실행에 옮길 직원들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급한대로 유명 인터넷 구인 사이트에 채용 공고를 올려봤지만 마땅한 지원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조 대표는 회사가 얼마나 건전하고 직원들에게 친화적인 기업인지 설명하기에 온라인은 부족함이 많아 답답했다고 한다.그러던 중 조 대표는 우연히 수원시 일자리 박람회 공고를 보게 됐다. 그는 "우리 회사가 수원에 위치한 만큼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서는 수원 내 구직자들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박람회를 통해 직접 사람들과 대면하며 회사의 우수성을 알리면 그만큼 좋은 인재를 데려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조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박람회 현장에서 (주)뉴원은 많은 구직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수십 명의 구직자들이 부스에 방문하고, 이 중 25명이 면접에 참여했다. 조 대표는 사전에 박람회에 참여하며 한두 명 정도를 채용할 계획이었지만 열정이 넘치는 수 많은 지원자들은 단 한 사람도 놓치기 아까웠다. 결국 박람회 이후 눈여겨 본 지원자들 중 일부를 추려 최종 면접을 거친 후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5명을 채용했다. 그는 "성별과 기혼 여부 등은 채용 과정에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며 "의지를 가지고 회사와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많은 가산점을 주었다"고 말했다.패기가 넘치는 5명의 새로운 얼굴들이 오자 한동안 경직됐던 회사 분위기에도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주)뉴원에서 오래 일해 온 기존 직원들도 파릇파릇한 의지와 집중력을 지닌 신입 사원이 들어오자 '올해는 다같이 더 잘 해보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조 대표는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올해 매출 신장 목표액을 전년 대비 4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최근 조 대표의 머리 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환경과 사회를 생각하는 'ESG 경영'이다. 특히 조 대표는 지역 사회와 상생하는 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5명의 신입사원을 모두 수원시민으로 뽑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방침이 가시화되자 (주)뉴원은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선정한 '2023년 중소기업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우수기업 사례집'에 소개되기도 했다. 조 대표는 "기술 투자만큼 중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투자"라며 "앞으로도 수원시 일자리 박람회 등 여러 방면으로 지역 인재 채용에 힘쓰겠다"고 계획을 밝혔다.이날 조청오 대표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이어 입사 세달 차가 된 (주)뉴원의 신입사원 5명을 만났다. 아직은 신입 티를 벗지 않은 바짝 긴장한 기색이 표정에 드러났지만 눈빛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뉴원의 가족으로서 향후 10년 그 이상을 책임질 인재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신입사원 5인 민은미(46·여), 정선임(43·여), 이정헌(30), 황혜영(29·여), 최지혜(26·여) 와의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옮긴다.- 입사를 축하드립니다. 구직하는 동안 어려움이 많았나요.은미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18년 동안 경력이 단절됐습니다. 입사 지원을 해도 번번이 서류심사에서 탈락해 면접 기회도 얻기 힘들었습니다."선임 "저 역시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며 경력이 단절된 터라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가 막막했습니다."정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 취업에 뜻이 생겨 알아보게 됐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면접 때마다 긴장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혜영 "백화점에서 7년 가까이 화장품 판매를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사무직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큰 결심을 했습니다."지혜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쉬는 날마다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거리가 먼 서울 쪽은 부담이 돼 고민이 많았습니다."- 수원 일자리 박람회는 어떤 계기로 알게 되셨나요.은미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고용보험공단에 들렀다가 현장에서 상담사 분이 소개해주셨어요."선임 "지역 맘카페에서 수원 여성인력지원센터가 올린 공고를 보게 됐어요. 막연하던 찰나에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습니다."정헌 "인터넷에 여러 일자리 박람회를 검색해보던 중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주관하는 박람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혜영, 지혜 "저희는 고용노동부에서 제공하는 국민취업지원제도를 통해 상담사분께 안내를 받고 알게 됐습니다."-수원 일자리 박람회를 통해 (주)뉴원에 입사하게 됐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은미 "회사에서 다루는 자재에 문외한이라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시절과 비교해보면 업무 분위기도 수평적이고 업무에 사용되는 프로그램도 많이 달라졌는데 재밌게 배우고 있습니다."선임 "함께하는 사장님과 동료 직원들의 인성이 좋아서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주)뉴원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정헌 "면접에서 긴장한 저에게 기다려줄 테니 천천히 할 말을 다 하라며 들어주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첫 직장이 (주)뉴원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혜영 "전에 다니던 회사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넘게 다녔는데 (주)뉴원은 집 근처라 멀지 않아서 좋고 업무도 재밌어 즐겁게 근무하고 있습니다."지혜 "첫 회사라 많이 떨렸는데 다양한 연령대의 직장 동료들과 함께 근무하며 여러 관점과 시선을 배우고 사회생활도 더불어 익혀나가니 좋습니다."앞으로의 포부 한 마디를 부탁드린다는 마지막 질문엔 신입사원 5인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입을 모았다. 이들은 모두 하루 빨리 업무 능력이 더 성장해 (주)뉴원의 당당한 일원으로 한 몫을 제대로 해내겠다고 다짐했다. 회사가 발전하는 만큼 이번 신입 사원들도 함께 성장해 앞으로 들어올 또 다른 (주)뉴원의 가족들에게 의지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국민이 신뢰하는 주식회사 뉴원이 된다'는 사훈 아래 지난해에는 중소벤처기업부 CRS(기업의 사회적 책임) 우수기업에 선정된 (주)뉴원 조청오 대표와 신입사원 5명은 최근 이재준 수원시장을 만나 감사의 뜻을 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이 자리에서 조청오 대표는 "올해 일자리 박람회에서도 10명의 지역 인재를 채용하겠다"고 말했고, 이재준 시장은 "청년 인재를 채용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어 이 시장은 "수원의 인재들과 수원의 기업에서 멋지게 커가면 시로서는 그만한 보람이 없다"며 "앞으로 (주)뉴원과 같은 지역 기업을 더 지원할 수 있는 건 없는지 잘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또한 신입사원 5명에게 "세상에 백프로 만족스러운 직장은 어디에도 없다"며 "내가 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다보면 회사도 잘되지만 내가 잘된다"고 격려했다.한편 수원시는 올해도 일자리 박람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오는 5월23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수원컨벤션센터 전시홀에서 50개 기업이 참여해 300여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현장에는 채용면접관 및 유관기관 취업정보관을 운영하며 채용트렌드, 이미지메이킹 등 취업특강도 진행한다.글/이상훈·김지원기자 sh2018@kyeongin.com, 사진/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지난 23일 수원시청 시장실에서 조청오 (주)뉴원 대표를 비롯한 임직원들과 이재준 수원시장이 간담회 이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지난해 열린 수원시 맞춤형 일자리 박람회에서 (주)뉴원에 채용된 사원들이 포부를 밝히고 있다. (왼쪽부터) 민은미씨, 정선임씨, 이정헌씨, 황혜영씨, 최지혜씨.(주)뉴원 조청오 대표.
사회복지사 행복한 터전 만드는 '따뜻한 리더' '소통·끈끈함' 재단 차별화·장점외부에 흔들리지 않게 울타리 돼야나눔·미래 지속가능한 법인될 것"우리 법인과 함께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복지사가 행복해야 서비스를 제공받으시고 시설을 이용하는 모든 분들이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서울의 한 외국인 근로자 복지시설에서 출발해 이제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 있는 (사)나눔고용복지재단은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젊은 법인이다. 2015년 재단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법인에 뛰어든 현명진 대표는 특유의 따뜻한 인간미를 바탕으로 점차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현 대표는 올해 재단 창립 20주년을 맞아 구성원들과 더욱 많이 소통하고 내실을 키워나가겠다는 구상이다.현 대표는 "최근 20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는데, 행사의 시작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드는 퍼포먼스로 했더니 내빈과 참석자분들로부터 인상 깊다는 후기를 많이 들었다"며 "여타 법인과 다르게 스스럼 없이 소통하고 끈끈하다는 게 우리 재단의 차별점이자 큰 장점"이라고 소개했다.그는 "어떤 외부적 요인에도 사회복지사들이 흔들리지 않고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재단이 든든한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소신이 있다"고 말했다.(사)나눔고용복지재단은 고용노동부 소속 법인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사회복지 및 근로복지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고양시와 의정부시로부터 고산종합사회복지관 등 6개 시설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고, 수원과 대전 등 5개 지역에도 분사무소를 보유했다.현 대표는 "혹자는 수탁시설이 많으면 좋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작정 사업 확장만 하는 것은 우리 재단과 제가 추구하는 기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대표가 구성원들의 이름을 모두 외울 수 있을 정도까지만 넓히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고 설명했다.(사)나눔고용복지재단은 본래의 사회복지사업 외에도 의미있는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것으로도 지역사회에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이나 지역단체로부터 후원받은 물품들을 국내 어려운 이웃들이나 다른 복지기관에 지원하거나,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에 지원해주는 사업이 대표적이다.현 대표는 "나눔과 공헌, 존중 속에서 지역사회 발전과 미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복지 전문법인이 될 것"이라면서 "생애주기별 사회복지사업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이를 통하여 어려운 이웃과 지역사회가 행복해지고 지역의 사회적 자본을 공유하면서 체계적인 나눔의 선순환을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의정부/김도란기자 dora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