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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촉발된 노인 무임수송 논란… 경기·인천도 남일 아냐
檢, 김성태 '대북송금 의혹' 집중추궁
작년比 32.3% 오른 난방비… IMF 이후 '전기·가스' 최다폭
'우울, 고독, 생활고'.하수명씨의 쉰 아홉 인생을 압축하면 온갖 부정의 단어들로 얼룩진다. 수명씨에겐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고,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5년'이 있다. 11살에 부산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전원돼 13살에 안산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그 5년이다. 5년은 59년 삶을 우울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평생 외톨이로 고독하게 했으며, 생활고를 겪게 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선감학원으로…유년기 5년간 붙잡혀가 수용 생활탈출후 수십년간 고통스러운 기억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감된 기억들에서 좀 벗어나야 하는데, 그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요. 그때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니 밝은 생각을 하기 힘들고요. 거기에서부터 내 인생 모든 게 이렇게 (잘못)됐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수명씨는 그저 '남에게 민폐 안 끼치고 깨끗이 죽는 것'이 남은 인생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곳에서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매 순간 그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오랜 시간 기억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이제는 헤어나오기 힘들 수준의 우울증을 겪고 있다. 가족도 없고, 왕래하는 친구도 없이 홀로 살아온 수명씨는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일감을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전부다. "선감학원 탈출하고 3일 동안 동인천역에서 먹을 거 하나 없이 노숙했어요. 일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다 한 식당에서 절 받아줬고 20년 동안 그 식당에서 일했죠. 식당에서 더 일할 수 없게 되자 기술이나 교육이 필요 없는 일거리를 찾아 서울, 성남, 충청남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어요. 그렇게 막노동만 5년정도 하다 지금은 구두닦이로 20년째 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민증도 못 만들어 생활고국가·지자체 도움 없이 심신 지쳐 수명씨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있으면서 제대로 배우고 성장하지 못했다. 선감학원을 탈출한 후에도 교육을 받지 못했고 국가, 지자체의 보살핌을 받지도 못했다. 수명씨는 주민등록증도 만들지 못한 채 쉰살이 넘도록 살았다. 취업을 하고 싶어 주민등록증을 만들려 행정기관을 찾아도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평생 국가는 수명씨를 외면했다. 그는 '유령'으로 살아야만 했다."일을 하고 싶어도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아무도 절 받아주지 않았어요. 몇 번을 (행정) 기관에 가서 만들어 달라 해도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서류가 부족하다면서 무시당했죠. 그러다 보니 누굴 만나도 자신이 없고 결혼도 못하고 가족도 만들지 못했죠. 주민등록증 하나만 있었으면 했어요."겨우 5년 전에야 충남 아산시청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 기초생활수급비도 받을 수 있게 됐다. 국가가 망가트린 인생, 조금만 더 일찍 손을 내밀었다면. 내년이면 벌써 예순이다. 지금 그에게 남겨진 건 혹독했던 지난 인생으로 지칠 대로 지치고 악화된 심신뿐이다. 이유 없이 사람 잡아간 책임자들은 꼭 대가 치르게 해야 하수명(59)씨가 기억하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두 부랑아 수용시설은 어떤 곳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죽을 때까지 맞는 곳'이라 표현했다. 죽을 때까지 맞아야 했던 그 곳에서 수명씨 나이는 고작 10~14살 무렵. 선감학원서 나온 지 50년 가까이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 처참한 기억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또렷하다. "죽을 때까지 맞아야 되는 곳" 기억공장 할당량 맞추지 못할 때 '매질'"부산 형제복지원에서는 정말로 죽다 살아났어요. 매일 낚시공장에 투입됐는데, 30분마다 직원이 작업량을 확인하러 다녔어요. 30분간 10개를 만들라 했는데, 10개를 못 채우면 못 채운 숫자대로 손바닥을 맞았어요. 제가 작업량을 계속 못 채우니까 직원이 손바닥을 있는 힘껏 때리는데, 본능적으로 손을 피했어요. 그러니까 몽둥이로 머리랑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어요. 몸이 조그마하니까 이쪽으로 던지고 저쪽으로 던지고 그랬죠. 계속 맞다가 '그냥 날 죽이라고' 생각이 들 때쯤 기절했고 그제야 매질이 끝났어요. 일하다 쉴 때도 하루에 수십 대씩 맞았어요. 지옥 그 자체였죠."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2년은 지옥이었다. 그러던 중 시설 수용 인원이 가득 차 수명씨는 전원이 결정됐는데, 그렇게 간 곳이 선감학원이었다. 선감학원도 폭력으로 얼룩지긴 마찬가지였다. 끼니 꽁보리밥·반찬 재배 강제노역멀쩡히 부모 있어도 수집에 끌려와그의 말대로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만 먹고 자란'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선감학원에선 직원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순응해야만 죽지 않는다는 걸 저절로 깨달은 셈이다. "선감학원은 기강 잡는 직원들이 있어요. 말을 잘 안 듣는 얘들은 걸리면 죽도록 맞는 거예요. 그래도 형제복지원처럼 밤낮 안 가리고 때리진 않았고 규칙이 있었어요. 저는 규칙에 따라 행동했어요. 근데 어느 날 '꼴통' 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맞았어요. 머리채를 잡고 '가만히 있어'라 하는데, 너무 아파서 '아아' 소리를 냈더니 바리캉으로 '꽝' 소리 나게 찍으며 때렸어요. 지금도 맞은 상처 부위는 머리털이 안 나요. 그래도 선감학원은 천국이라 생각했죠. 아무리 때리고 힘들어도 삼시 세끼는 주고 재워주니까." 삼시세끼라 해도 원생들이 주식으로 먹던 꽁보리밥과 반찬은 모두 선감학원 일대에서 원생들이 직접 재배해야 했고, 매일 강제노역에 동원됐다."삼시 세끼 준다고 좋아했지만, 먹는 음식은 우리가 직접 길러서 먹었어요. 하루 3시간씩 밭일을 했거든요. 김치, 양배추 같은 걸 주로 재배해 먹었어요. 일부 원생들은 소랑 돼지를 기르는 축사에 끌려가 일을 했는데, 정작 고기가 반찬으로 올라온 적은 거의 없었어요. 가끔 대통령 하사품으로 과자와 사탕이 내려와 그때 특별하게 단 걸 먹을 수 있어서 좋았죠." 그는 '자유'를 찾아 선감학원을 탈출했다. 형제복지원보단 낫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폭력과 통제는 같았다. 매일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명씨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맞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먼저 탈출한 원생이 다시 돌아와 도와줄 테니 같이 나가자 해서 인천으로 나가는 배에 몰래 들어가 탈출했어요. 그런데 (나와 보니) 막상 아는 사람, 도와줄 사람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이후의 삶도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어둡게만 살아갔죠." 도와줄 사람·신분증도 없어이후의 삶도 '지옥이었다'45년 전 선감도 벗어났지만마음은 여전히 그때 기억 속에 수명씨가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용된 이유도 '부랑아' 같아 보여서였다. 정작 그는 부랑아가 아니었다. 멀쩡히 부모가 있었고 집도 유복한 편이었다. 새어머니의 구박에 집을 나와있던 시간이 많았고 그러던 찰나 부산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부랑아 수집에 잡혀들어온 것이다. 그의 몸은 45년 전 선감도를 탈출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 얽매여 자유를 찾지 못했다. 수명씨는 이유 없이 자신을 가두었고, 인권을 짓밟은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 그리고 국가가 책임지고 사과하며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생애 마지막 소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보상 받아봐야 얼마나 받겠나요.책임자들은 꼭 대가를 치르게 해줬으면그래야 우리의 한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보상을 받아봐야 제가 얼마나 받겠나 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러나 나 말고도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간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담당자들, 책임자들은 꼭 대가를 치르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의 한이 좀 풀리지 않겠습니까."/특별취재팀※특별취재팀정치부 공지영 차장, 신현정·고건 기자, 사회교육부 배재흥·김동한 기자, 디지털콘텐츠팀 김동현 기자 ■사람을 찾습니다▲1956~1982년까지 선감학원에서 일했던 교사 및 직원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1974~1976년, 선감학원 내 양호실에 근무하며 구타당해 머리를 다친 수명씨를 치료해준 간호사를 찾습니다.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길거리에서 부랑아들을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형제복지원에 잡혀들어온 하수명(59)씨는 이후 선감학원으로 이송된 뒤에도 갖은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했다. 21일 오후 혼자 식사 준비를 하는 하수명 씨. 2022.11.2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길거리에서 부랑아들을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형제복지원에 잡혀들어온 하수명(59)씨는 이후 선감학원으로 이송된 뒤에도 갖은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했다. 사진은 구타로 머리에 새겨진 흉터. 2022.11.2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의 손.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선감학원을 탈출했지만, 제대로된 교육과 국가 행정의 도움을 받지 못해 식당일 20년, 구두닦이 20년, 막노동 5년 등 생활고에 시달려 단 하루도 쉬지 못한채 갖은 노동을 겪으며 손이 멍들고 퉁퉁 부어있었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 시설에 수용된 당시를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고 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의 냉장고. 인권유린 시설 입소로 삶이 망가지고, 혼자 살다 보니 그의 냉장고는 갖은 반찬 없이 비어있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가 살고 있는 충청남도 아산의 3평 남짓한 원룸. 인권유린 시설을 탈출해 평범한 삶을 꿈꿨지만, 낮아진 자존감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가족 없이 홀로 지내고 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
"문어발처럼 의왕지역의 모든 봉사활동현장에서 활동하는 인물은 오문경 상임대표밖에 없습니다."의왕지역의 대표 자원봉사단체인 '미소나눔'은 2010년부터 '의왕연대'란 이름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무렵부터 현재의 단체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약 80명의 등록회원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매월 한 차례 집수리 봉사, 매주 복지관 자원봉사, 불우이웃 수도 및 전기 문제 해결, 방충망 수리·설치 등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의왕지역에서 봉사활동을 이야기하면서 미소나눔의 오문경(59) 상임대표와 유아미(54·여) 운영위원장을 빼놓을 수는 없다. 오 대표는 4년여간 미소나눔을 이끌고 있고 유 운영위원장은 현장에서 애로사항을 청취한 뒤 활동 여부를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회원들 매달 집수리·불우이웃 도와오대표 "사각지대 찾아 꾸준히 봉사"유위원장 "오대표 '노' 하는법 없어" 한국지엠 의왕서비스센터 대표이기도 한 오 대표가 봉사활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은 수년 전 고천동장이 찾아와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을 부탁한 게 출발점이었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주민자치위원으로서 봉사활동에 나섰고 지역 내 참된 일꾼이란 입소문이 나면서 미소나눔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리고 오 대표는 평회원과 임원을 거쳐 상임대표까지 맡게 됐다.오 대표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생활적인 여유가 있는 편이라 회사를 경영하면서 힘이 닿는 데까지 봉사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유 위원장은 오 대표에 대해 "오 대표는 꾸준히 미소나눔의 봉사활동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오면 어느새 현장에 가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매월 한 차례씩 하던 청소·도배 봉사와 복지관 배식봉사가 1년 6개월가량 중단되면서 미소나눔의 봉사활동도 많이 위축된 상태다. 그럼에도 회원 6~10명 정도는 꾸준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그리고 지난 여름 집중호우로 피해를 입은 가정을 찾아 직접 도배와 장판 교체, 곰팡이 제거, 싱크대 수리 등의 봉사활동에 나서면서 미소나눔은 다시 날갯짓을 하고 있다.유 위원장은 "매월 십시일반으로 모으는 60만원 중 고천동 사무실 임대료를 뺀 30만원 정도를 갖고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며 "항상 돈이 부족한데 오 대표가 부족한 재료비 등을 충당해 주고 있다"고 오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오 대표가 운영하는 센터 직원들이 제발 회사에 있어 달라고 붙잡고 있지만 오 대표는 봉사에 있어서만은 '노'하는 법이 없기에 어느새 봉사현장에 가 장갑을 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의왕/송수은기자 sueun2@kyeongin.com의왕의 대표 자원봉사단체인 '미소나눔'의 오문경 상임대표(왼쪽)와 유아미 운영위원장. 2022.11.21 의왕/송수은기자 sueun2@kyeongin.com
라거(Lager), 에일(Ale), 필스너(Pilsner), 바이젠(Weizen), 아이 피 에이(IPA, India Pale Ale) 등은 수제 맥주의 이름이다. 이를 보듯 수제 맥주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성이다.맥주는 세계적으로 대중화된 주류 중 하나로 호불호가 적은 편이다. 맥주는 보리를 가공한 맥아(Malt)를 발효시키고 이를 주재료로 향신료인 홉(hop)을 첨가해 맛을 낸 술이다. 종류로는 상면발효 맥주(10~25℃ 사이의 상온 발효)와 하면발효 맥주(10℃ 이하 저온 발효) 등으로 나뉘며 각각 에일과 라거가 대표적이다. 특히 대기업이 아닌 개인을 포함한 소규모 양조업자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만드는 수제 맥주(크래프트 맥주)는 양조장마다 다양성과 독립성이 특징으로, 영국, 독일, 미국, 일본 등은 물론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인기몰이가 한창이다.이런 가운데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가평군 소재 수제 맥주 양조장 '크래머리 브루어리'(공동대표·이원기, 이지공, 이하 크래머리)가 주목을 받고 있다.독일 유학 출신 공동대표 의기투합양조시설 갖춰… 월 7만8천ℓ 생산 크래머리는 가평군 상면 덕현리에 브루어리(맥주양조장), 펍 등을 갖춘 브루펍(브루어리와 펍의 합성어)으로 수제 맥주 제조·유통, 브루어리 투어 등을 운영하고 있다.독일 양조기술과 유럽에서 직수입한 원재료를 사용하는 유럽스타일 맥주를 지향하는 크래머리의 출발점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학과 취업 등으로 독일에 머물던 두 공동대표의 만남을 시작으로 크래머리의 미래가 그려졌다고 한다. 이후 독일에서 귀국한 두 공동대표는 2015년 안산에서 맥주 양조장 크래머리를 설립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이어 2019년 가평으로 생산 시설을 확충하며 가평시대를 열었다.현재 크래머리는 양조장 시설로 발효 및 숙성 탱크 18개(2천ℓ 3개, 4천ℓ 12개, 8천ℓ 3개), 원심분리기, 저온 냉각기, 오크통 15개, 케그 세척기, 병 입기, 캔 입기, 라벨기 등을 갖추고 20여 명의 직원이 월 약 7만8천ℓ를 생산하고 있다.■ 취향따라 골라 마시는 맥주크래머리는 라거와 에일을 기반으로 다양한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대부분 ABV(Alcohol by volume, 알코올 도수)는 4.5~7%이다.우선 라거 맥주로는 맥아의 진한 풍미와 쌉쌀하면서도 아로마 향이 특징인 청량감을 선사하는 크래머리 필스너(Pilsner)가 독일 대사관 만찬용 술로 유명하며, 보리의 구수한 풍미와 부드러운 목 넘김이 특징인 크래머리 라거(Lager)가 있다.에일 맥주는 좀 더 여러가지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긴 숙성기간으로 부드러운 맥아의 농도가 높은 크래머리 바이젠복(Weizen bock)은 크래머리를 대표하는 복(Bock) 맥주로 다수의 언론에서 호평한 수제 맥주다.크래머리 바이젠(Weizen)은 과일 향이 풍부한 독일 바이에른 스타일 맥주로 첫 잔으로 추천하기에 좋은 밀맥주이며, 크래머리 아이피에이(IPA, India Pale Ale)는 맥아와 홉이 잘 조화된 유럽식 IPA로 입문자 등에게 사랑받는 맥주다.또한 초콜릿과 커피 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흑맥주 크래머리 스타우트(Stout), 쓴맛을 줄이고 다양한 감귤류(시트러스) 홉을 배합해 수제 맥주를 처음 접하는 입문자에게 추천하기 좋은 크래머리 페일에일(Pale ale)도 추천한다. 獨대사관 만찬용 '크래머리 필스너'오트밀 IPA '가평 물안개' 등 런칭 감귤류, 꽃 등의 홉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오트밀의 부드러움이 쓴맛을 감싸주는 맥주로 2020년 중소벤처기업부가 주최한 '로컬 크리에이터' 최우수에 선정된 가평물안개도 눈에 띈다. 내일 바이젠(See you Weizen)은 이탈리아 최고의 브루마스터 다리오(Dario)와 컬래버를 통해 만든 밀 맥주로 부드러운 목 넘김과 감귤류 향이 감돈다. 이와 함께 고도수의 임페리얼 스타우트와 아이스 복 등이 시즌 제품으로 라인업에 올라있다.크래머리는 케그(20ℓ)와 캔(500㎖) 맥주 등을 중심으로 독일 대사관 행사 및 전국 100여 곳에 납품하고 있다.■ 브루펍크래머리는 지역자원과 연계한 투어 프로그램 등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맥주 생산 등 지역 로컬리즘을 지향하고 있다. 생산 공장과 시그니처 비어가든을 가평에 둔 이유이기도 하다.비어가든에 들어서면 눈이 시원하다. 높은 천장과 통유리로 창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실내외에서 생산 시설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곳에서는 다양한 맥주는 물론 전문 셰프가 선사하는 바비큐 플래티, 피자, 스파게티, 햄버거, 소시지 등의 음식과 커피·음료 등을 맛볼 수 있다. 브루펍에서는 티셔츠, 모자, 엽서, 도기 잔, 맥주캔 패키징 박스 등의 로컬리즘 상품 개발 및 판매 등이 이뤄지고 있다.또한 양조과정 및 양조시설 관람, 셰프와 함께하는 푸드 페어링 등 다채로운 행사도 진행되고 있다. 브루어리 투어를 통한 크래머리 생산시설과 연계한 브루펍에서 진행하는 비어&푸드페어링, 맥주런칭파티 등 휴식과 힐링 콘셉트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회사 워크숍, 직장인·대학생 동아리 모임 및 MT 등의 맞춤형 프로그램 등을 통한 브루어리 투어도 상시 운영된다.■ 로컬, 소통, 쉼 공간의 크래머리크래머리는 2019년 지역 특성(안개)을 반영한 오트밀 IPA 가평 물안개(GAPYEONG hazy fog oatmeal IPA)를 런칭 판매하는 등 지역자원, 지역명, 지역 특성을 고려한 맥주 개발 및 네이밍 등을 지속해서 추진할 계획이다.또한 크래머리가 제공하는 소통과 쉼 공간 등을 통한 지역 음식 문화의 소소한 변화로 일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크래머리 로컬니즘을 강조하고 있다.지역만의 특성 제품화에 지속 반영양조장·펍 '브루어리 투어' 연계도 이지공 공동대표는 "가평이라는 소통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공간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생각과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서 만든 공간이 크래머리"라며 "우리는 하루의 삶 속에서 휴식과 힘을 얻기 위해 맥주와 음식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크래머리의 가평 정착 배경을 설명했다.이어 "크래머리 맥주와 음식 그리고, 제조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공간을 통해 이곳은 '쉴 수 있는 공간', '힘을 얻어 가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내년에는 크래머리의 규모를 더 확대할 계획으로 '가평'하면 크래머리가 생각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크래머리 브루어리 전경.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크래머리 브루어리의 배럴.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크래머리 브루어리 직원들이 발효조 시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크래머리 브루어리 실내.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크래머리 브루어리 이지공 공동대표.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하수명(59)씨가 기억하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두 부랑아 수용시설은 어떤 곳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죽을 때까지 맞는 곳'이라 표현했다. 죽을 때까지 맞아야 했던 그 곳에서 수명씨 나이는 고작 10~14살 무렵. 선감학원서 나온 지 50년 가까이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 처참한 기억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또렷하다.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는 정말로 죽다 살아났어요. 매일 낚시공장에 투입됐는데, 30분마다 직원이 작업량을 확인하러 다녔어요. 30분간 10개를 만들라 했는데, 10개를 못 채우면 못 채운 숫자대로 손바닥을 맞았어요. 제가 작업량을 계속 못 채우니까 직원이 손바닥을 있는 힘껏 때리는데, 본능적으로 손을 피했어요. 그러니까 몽둥이로 머리랑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어요. 몸이 조그마하니까 이쪽으로 던지고 저쪽으로 던지고 그랬죠. 계속 맞다가 '그냥 날 죽이라고' 생각이 들 때쯤 기절했고 그제야 매질이 끝났어요. 일하다 쉴 때도 하루에 수십 대씩 맞았어요. 지옥 그 자체였죠." "죽을 때까지 맞아야 되는 곳" 기억공장 할당량 맞추지 못할 때 '매질'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2년은 지옥이었다. 그러던 중 시설 수용 인원이 가득 차 수명씨는 전원이 결정됐는데, 그렇게 간 곳이 선감학원이었다. 선감학원도 폭력으로 얼룩지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대로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만 먹고 자란'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선감학원에선 직원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순응해야만 죽지 않는다는 걸 저절로 깨달은 셈이다. "선감학원은 기강 잡는 직원들이 있어요. 말을 잘 안 듣는 얘들은 걸리면 죽도록 맞는 거예요. 그래도 형제복지원처럼 밤낮 안 가리고 때리진 않았고 규칙이 있었어요. 저는 규칙에 따라 행동했어요. 근데 어느 날 '꼴통' 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맞았어요. 머리채를 잡고 '가만히 있어'라 하는데, 너무 아파서 '아아' 소리를 냈더니 바리캉으로 '꽝' 소리 나게 찍으며 때렸어요. 지금도 맞은 상처 부위는 머리털이 안 나요. 그래도 선감학원은 천국이라 생각했죠. 아무리 때리고 힘들어도 삼시 세끼는 주고 재워주니까."삼시세끼라 해도 원생들이 주식으로 먹던 꽁보리밥과 반찬은 모두 선감학원 일대에서 원생들이 직접 재배해야 했고, 매일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삼시 세끼 준다고 좋아했지만, 먹는 음식은 우리가 직접 길러서 먹었어요. 하루 3시간씩 밭일을 했거든요. 김치, 양배추 같은 걸 주로 재배해 먹었어요. 일부 원생들은 소랑 돼지를 기르는 축사에 끌려가 일을 했는데, 정작 고기가 반찬으로 올라온 적은 거의 없었어요. 가끔 대통령 하사품으로 과자와 사탕이 내려와 그때 특별하게 단 걸 먹을 수 있어서 좋았죠."끼니 꽁보리밥·반찬 재배 강제노역멀쩡히 부모 있어도 수집에 끌려와 그는 '자유'를 찾아 선감학원을 탈출했다. 형제복지원보단 낫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폭력과 통제는 같았다. 매일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명씨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맞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먼저 탈출한 원생이 다시 돌아와 도와줄 테니 같이 나가자 해서 인천으로 나가는 배에 몰래 들어가 탈출했어요. 그런데 (나와 보니) 막상 아는 사람, 도와줄 사람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이후의 삶도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어둡게만 살아갔죠."수명씨가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용된 이유도 '부랑아' 같아 보여서였다. 정작 그는 부랑아가 아니었다. 멀쩡히 부모가 있었고 집도 유복한 편이었다. 새어머니의 구박에 집을 나와있던 시간이 많았고 그러던 찰나 부산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부랑아 수집에 잡혀들어온 것이다.그의 몸은 45년 전 선감도를 탈출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 얽매여 자유를 찾지 못했다. 수명씨는 이유 없이 자신을 가두었고, 인권을 짓밟은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 그리고 국가가 책임지고 사과하며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생애 마지막 소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보상을 받아봐야 제가 얼마나 받겠나 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러나 나 말고도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간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담당자들, 책임자들은 꼭 대가를 치르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의 한이 좀 풀리지 않겠습니까."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 정치부 공지영 차장, 신현정·고건 기자, 사회교육부 배재흥·김동한 기자, 디지털콘텐츠팀 김동현 기자 ■사람을 찾습니다▲1956~1982년까지 선감학원에서 일했던 교사 및 직원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1974~1976년, 선감학원 내 양호실에 근무하며 구타당해 머리를 다친 수명씨를 치료해준 간호사를 찾습니다.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 시설에 수용된 당시를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고 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하수명(59)씨가 선감학원에서 '말을 잘 듣지 않게 생겼다'는 이유로 학원 직원에게 머리를 잡힌 채 바리캉으로 맞아 생긴 흉터. 그는 선감학원에서 폭력을 당한 지 40여년 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머리에는 흉터가 선명했고, 그 날을 평생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의 냉장고. 인권유린 시설 입소로 삶이 망가지고, 혼자 살다 보니 그의 냉장고는 갖은 반찬 없이 비어있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의 손.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선감학원을 탈출했지만, 제대로된 교육과 국가 행정의 도움을 받지 못해 식당일 20년, 구두닦이 20년, 막노동 5년 등 생활고에 시달려 단 하루도 쉬지 못한채 갖은 노동을 겪으며 손이 멍들고 퉁퉁 부어있었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
'우울, 고독, 생활고'.하수명씨의 쉰 아홉 인생을 압축하면 온갖 부정의 단어들로 얼룩진다. 수명씨에겐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고,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5년'이 있다. 11살에 부산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전원돼 13살에 안산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그 5년이다. 5년은 59년 삶을 우울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평생 외톨이로 고독하게 했으며, 생활고를 겪게 했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감된 기억들에서 좀 벗어나야 하는데, 그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요. 그때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니 밝은 생각을 하기 힘들고요. 거기에서부터 내 인생 모든 게 이렇게 (잘못)됐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붙잡혀가 유년기 5년간 수용 생활탈출후 수십년간 고통스러운 기억 수명씨는 그저 '남에게 민폐 안 끼치고 깨끗이 죽는 것'이 남은 인생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곳에서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매 순간 그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랜 시간 기억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이제는 헤어나오기 힘들 수준의 우울증을 겪고 있다. 가족도 없고, 왕래하는 친구도 없이 홀로 살아온 수명씨는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일감을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전부다. "선감학원 탈출하고 3일 동안 동인천역에서 먹을 거 하나 없이 노숙했어요. 일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다 한 식당에서 절 받아줬고 20년 동안 그 식당에서 일했죠. 식당에서 더 일할 수 없게 되자 기술이나 교육이 필요 없는 일거리를 찾아 서울, 성남, 충청남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어요. 그렇게 막노동만 5년정도 하다 지금은 구두닦이로 20년째 하고 있습니다."최근까지 민증도 못 만들어 생활고국가·지자체 도움 없이 심신 지쳐 수명씨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있으면서 제대로 배우고 성장하지 못했다. 선감학원을 탈출한 후에도 교육을 받지 못했고 국가, 지자체의 보살핌을 받지도 못했다. 수명씨는 주민등록증도 만들지 못한 채 쉰살이 넘도록 살았다. 취업을 하고 싶어 주민등록증을 만들려 행정기관을 찾아도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평생 국가는 수명씨를 외면했다. 그는 '유령'으로 살아야만 했다."일을 하고 싶어도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아무도 절 받아주지 않았어요. 몇 번을 (행정) 기관에 가서 만들어 달라 해도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서류가 부족하다면서 무시당했죠. 그러다 보니 누굴 만나도 자신이 없고 결혼도 못하고 가족도 만들지 못했죠. 주민등록증 하나만 있었으면 했어요."겨우 5년 전에야 충남 아산시청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 기초생활수급비도 받을 수 있게 됐다. 국가가 망가트린 인생, 조금만 더 일찍 손을 내밀었다면. 내년이면 벌써 예순이다. 지금 그에게 남겨진 건 혹독했던 지난 인생으로 지칠 대로 지치고 악화된 심신뿐이다. → 관련기사 3면([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2)] "이유 없이 사람 잡아간 책임자들은 꼭 대가 치르게 해야")/특별취재팀※특별취재팀정치부 공지영 차장, 신현정·고건 기자, 사회교육부 배재흥·김동한 기자, 디지털콘텐츠팀 김동현 기자 ■사람을 찾습니다▲1956~1982년까지 선감학원에서 일했던 교사 및 직원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1974~1976년, 선감학원 내 양호실에 근무하며 구타당해 머리를 다친 수명씨를 치료해준 간호사를 찾습니다.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길거리에서 부랑아들을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형제복지원에 잡혀들어온 하수명(59)씨는 이후 선감학원으로 이송된 뒤에도 갖은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했다. 사진은 21일 오후 혼자 식사 준비를 하는 하수명 씨. 2022.11.2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길거리에서 부랑아들을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형제복지원에 잡혀들어온 하수명(59)씨는 이후 선감학원으로 이송된 뒤에도 갖은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했다. 사진은 구타로 머리에 새겨진 흉터. 2022.11.2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길거리에서 부랑아들을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형제복지원에 잡혀들어온 하수명(59)씨는 이후 선감학원으로 이송된 뒤에도 갖은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했다. 사진은 막노동·구두닦이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던 그의 거친 손 모습. 2022.11.2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우리는 확인하고 싶었다. 선감도에 소년을 가두고, 선감학원을 운영하며 소년의 인권을 유린한 주체가 누구인지. 경기도가 보유한 선감학원의 기록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우리는 그것이 경기도, 나아가 국가가 자행한 일임을 두 눈으로 명확히 확인했다.우리는 들어야 했다. 지옥도라 불린, 그 섬에 갇혀 유년을 보내야 했던 소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온전하지 못한 삶의 원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중년이 된 소년들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지옥도'에서 유년 보낸 사람들중년·노년이 되어도 불안·공포 선감학원 두번째 이야기, '나는 부랑아가 아닙니다'는 그렇게 기획됐다. 소년들은 말한다. 나는 부랑아가 아니었다고. 가난했지만 함께 온기를 나누는 가족이 있었고 나이에 맞게 성장하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다. 선감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들과 같았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소년들의 유년을 송두리째 흔든 선감학원의 기억은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들을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하게 했다. 부랑아가 아니었지만, 부랑아가 되었고 지금도 부랑아로,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가는 그들은 '선감학원 피해자'들이다.우리가 만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국가가 나를 부랑아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랑아가 됐고, 부랑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특히 피해자들은 지옥과 같던 그 날들을 입 밖에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들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경기도가 공식적인 사과에 나서면서 그간 억눌러왔던 마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道 사과후 억눌러왔던 감정 토로두 형제, 숨겨 온 이야기 들려줘 그렇게 진성·진동(가명) 형제를 만났다. 세간의 눈초리가 무서워 숨어 살아야 했던 형과, 다 잊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야 했던 동생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묻고 싶다.부랑아의 기준이 무엇이고 부랑아임을 확신했던 그 이유를. '공적' 임무를 띤 공무원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돈을 벌고, 집 앞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오랜만에 시내로 놀러 나온 형제를 무작위로 잡아가야 했던 이유를 알고 싶다. → 관련기사 2·3면([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1)] 부랑으로 떠밀린 형제… 고통의 불은 아직 환하다) /특별취재팀■특별취재팀 정치부 공지영 차장, 신현정·고건 기자, 사회교육부 배재흥·김동한 기자, 디지털콘텐츠팀 김동현 기자 ※사람을 찾습니다▲1956년~1982년까지 경기도, 인천시, 도내 시군 지자체에서 아동복리지도원으로 활동했던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1974~1976년 사이, 선감학원 축산부에서 일하며 당시 15살 진성씨를 살리고 선감학원에서 퇴원시킨 직원을 찾습니다.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영문도 모르고 선감도에 끌려가 강제노역과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까까머리 원생들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머리가 희끗한 나이가 돼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1970년대 선감학원 원생들이 실내에 모여 경직된 표정으로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 /선감역사박물관 제공영문도 모르고 선감도에 끌려가 강제노역과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까까머리 원생들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머리가 희끗한 나이가 돼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지난 2018년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14명이 선감도에서 숨진 원생들의 묘역을 정리하다 남긴 기념사진. /고(故)이대준씨 유족 제공
짧게 자른 머리에 깔끔히 정리한 눈썹과 수염,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한 뿔테 안경까지. 선감학원 피해자 진동(60·가명)씨의 첫인상에서 지난날 고통의 흔적은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정돈된 외형만큼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지난 5일 안성 소재 자택을 방문한 취재진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어주던 그의 모습은 사뭇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부엌 식탁에 마주 앉은 진동씨의 호흡은 곧 가빠졌다. 여덟 살 나이에 선감도로 끌려갔던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달라고 질문한 직후였다. 고요했던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연신 눈물을 훔치던 진동씨의 두껍고 거친 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모진 역랑 앞에 늘 쫓기듯이 살았을 그의 삶이 그려졌다.진동씨는 선감학원과 관련한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다. 그는 기억의 공간 한편에 크고 단단한 벽을 둘렀다. 선감학원에서의 참혹했던 기억은 그 안에 전부 담았다. 스스로 잊고 살면 자신이 선감학원 출신이란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라 여겼다. 국가가 찍은 부랑아란 낙인을 숨길 그만의 방법이었다.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선감학원이란 존재를 애써 잊고 살던 진동씨에게 2년 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처는 선감학원사건 피해자 신고센터. 과거에 당한 피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떼 센터에 접수하라는 안내전화였다. 기억의 벽이 일순간 허물어진 순간이었다."센터 전화를 회사에서 받았는데, 하도 눈물이 나서 사무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그날은 주차장 한편에 앉아 울다가 그냥 퇴근했어요. 그 이후로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앉아 있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우는 거예요.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 그런 기분이었어요."참혹했던 기억 잊고 40년 넘는 세월 보내보호자·집 있어도 수원역서 잡혀 끌려가부실한 끼니 참고 황토 먹으며 5년 버텨 두 살 터울 형인 진성(62·가명)씨와 1970년 선감학원에 강제 입소하게 된 진동씨는 분명 부랑아가 아니었다. 삼형제는 당시 화성군 봉담면 내리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가정사 문제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지만, 형제의 신원을 보장할 보호자와 되돌아갈 집이 존재했다. 형제는 그러나 큰형이 돈벌이를 하던 수원역에 놀러갔다가 제복을 입은 경찰들에게 길거리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수집당했다. 5년간의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마산포에서 배를 타고 선감도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줬어요. 반찬은 단무지랑 새우젓이었는데, 단무지는 손으로 누르면 푹 들어갈 정도로 삭은 상태였고,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새우젓에 든 새우 머리를 뜯어 보면 조그만 구더기들이 있었어요."한창 먹고 클 나이였음에도 식사는 언제나 부실했다. 진동씨는 변비로 고생할 것을 알면서도 흙을 퍼먹었다. 그만큼 굶주렸다. 황토의 반질반질한 부분은 흙이 아닌, 단맛만 나지 않는 초콜릿같은 느낌이라 원생들이 자주 먹었다고 한다. 진동씨는 오전에 학교를 갔다가 오후에 돌아와 밭과 염전 등을 오가며 강제노역을 했다. 밤이 되면 매질이 이어졌다. 원생 중 한 명이 잘못을 하면 원생 전원이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봐주는 경우는 없었다. "기숙사에는 방장들이 있었는데, 걔네들한테 엄청나게 맞았어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 되면 누구 한 명이 잘못했다는 이유로 단체로 맞고 기합을 받는 거예요. 곡괭이 자루 같은 걸로 때리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게 한 다음에 잡고 돌리는 식으로 고문을 해요. 이거 엄청나게 아픈데, 그 어린 나이에 별의별 기합은 다 받아 봤어요."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가 됐을 무렵, 진동씨는 형과 함께 선감도를 빠져나왔다. 형제는 당시 선감학원에서 부천의 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집으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형제는 노역과 매질이 없는 고아원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다. "선감학원에서 갑자기 육지로 나가라는 거예요. 그 당시 저는 어렸기 때문에 '갑자기 왜 우리를 내보내주는 거지'라는 그런 생각만 했어요. 선감도에서 나올 수 있던 이유도 최근에 알게 됐어요. 축산부에서 일하던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나 봐요. 그 모습을 본 축산부 선생이 우리 형제 만큼은 책임지고 내보내 줄테니 나쁜 생각하지 말라고 형한테 이야기 했었대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열 몇 살 밖에 안 된 형이 죽으려고 그랬겠어요."고아원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진동씨는 스웨덴의 한 가정으로 입양될 예정이었고, 이 소식을 접한 진성씨가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갔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동생이 입양을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과 떨어져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진동씨도 고아원을 몰래 도망나왔다.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주변에 도움울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진동씨는 고아원에 찾아와 봉사활동을 했던 대학생 형·누나들을 떠올리며 인천의 한 대학교로 향했다. 학교 근처에서 이틀밤을 지낸 진동씨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형과 재회했다.그때부터 형제는 진짜 부랑아가 됐다. 남의 집에 찾아가 밥을 빌어먹고, 청과물 시장 상인들이 버린 썩은 과일도 주워먹었다. 구두를 닦고, 껌을 팔며 돈을 벌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도리가 없었다."저는 선감도에 갔다 오고 부랑아가 됐지, 그 전에 부랑아는 아니었어요. 갔다 오고 나서도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부랑아였지만, 저는 그 어린 나이에 살아 보겠다고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것 빼놓고는 정말 별의별 일은 다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도 없었고요."초등 6학년 나이에 빠져나와 고아원 이동"국가의 낙인 부랑아 꼬리표 떼려 살아와설령 부랑아여도 때리고 일 시킨건 잘못" 30대로 접어든 1990년대가 돼서야 진동씨는 인천시에 정착해 예전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부랑아'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한 여정이었다. 남들에게 책 잡히지 않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게끔 살아가려고 부단히 애썼다. 아내에게 선감학원에서 겪은 일을 속시원히 털어놓은 시점도 불과 7개월 전쯤이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믿지도 않아요. 우리 집사람도 안 믿어요.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살아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저한테 '고생 하나도 안 하고 산 사람 같이 보인다'고 말해요. 근데 제가 그렇게 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쳤던 것 같아요. 정말 처절하게 살았거든요. 외적으로는 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속은 썩어 문드러진 거죠."진동씨는 원래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계속 우는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얘기라도 하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조금이라도 치유되지 않을까 싶었다."우리가 사회로부터 격리될 대상이 아니라 국가가 저지른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물론 당시 선감학원에 수용된 원생 중에 진짜 부랑아가 있을 수 있어요. 혹여 부랑아라 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을 강제로 일 시키고, 때린 건 잘못된 거잖아요. 거기 있었던 시간만큼은 모두가 피해자죠."진동씨는 선감학원에 대한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 그곳에서의 기억을 다른 사람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기업체 대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회장님 차량을 운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올해가 정년이지만, 제가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일을 하라며 배려해준 분이에요. 그분께 거짓말을 했어요. 선감학원을 나와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를 통과한 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요. 책 잡히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지만 살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 중에 하나예요. 언젠가는 제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날도 오겠죠." /특별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안산시 단원구 경기창작센터 내 선감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선감도의 과거 모습.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지난 5일 안성 소재 자택에서 만난 진동씨가 선감학원과 관련한 자신의 서류를 보고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선감학원 입소 당시 진동씨 원아대장. 기본적인 생년월일도 잘못 적혀 있다. /진동씨 제공지난 10월 선감학원 희생자 유해시굴 작업 후 묘역에 국화꽃이 놓여있다.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불안해서 잘 수가 없어요.진성(62·가명)씨는 살면서 잠을 제대로 이룬 날이 없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날 중에는 편안히 잠을 자 본적이 없다."견디다 못해 도망을 갔다가 붙잡혀서 창문도 없는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 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깜빡 잠이 들어도 자꾸 깨고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꾸고.. "그는 온 방을 환하게 불을 켜야만 하고, 누가 등 뒤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결혼을 하고서도 집사람이 제 등 뒤에서 잠을 못 자요. 불도 환하게 켜 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거실에 나와서 불을 켜놓고 잡니다. 그래도 늘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해서.. 가족들이 너무 힘들죠."그래서 그는 약의 기운을 빌려야만 한다. 아주 오랫동안 신경안정제, 수면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저녁마다 약을 먹어요. 그래야 그나마 토막잠이라도 자니까.. 약 기운이 떨어지면 힘이 드니까 몸을 계속 괴롭혀요.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때까지 뭐라도 계속 해요. 그래서 피곤하면 그때 약을 먹고 잡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견딜 수가 없어요.."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이 몹시 서럽다. 흡사 50년 전 그 날의 어린아이 같았다. 하루도 그 날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직장생활이 무척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두고 수군대는 것 같고.. 그런 기분이 계속 들어 견디질 못했어요. 제일 길게 직장생활을 한 게 6~7개월 정도. 도저히 직장은 못다닐 것 같아 조경을 배워 조경사로 일했는데 나이가 들고 힘이 들어 그만둔 후로는 대부분 운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로 화물트럭이나 심야버스 같이 밤에 운전하는 일이요. 어차피 밤에 잠을 잘 못 자니까 그게 차라리 나았어요. 혼자서 조용히 일할 수 있고.. 그나마도 지금은 코로나로 일거리가 끊겼지만.."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아직장생활 길게 한게 6~7개월어차피 못자니까 밤에 운전해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지만, 그는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반평생을 살았다. 선감학원에서 겪은 충격으로 그 이전의 기억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적어도 진성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형제들과 도란도란 지내며, 초등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아이였다."그때가 방학이었던 것 같아요. 외할머니댁에서 동생이랑 있었는데, 할머니가 (수원) 남문시장에 농사지은 오이, 호박을 팔러 나간다고 해 따라갔어요. 우리가 심심해하니까 할머니는 수원역에서 일하고 있던 형에게 잠시 놀러 다녀오라고 했어요. 할머니가 버스를 태워줬고, 수원역에 내려 형을 만나 조금 놀다가 형이 잠깐 일하러 간 사이에 대합실에서 동생이랑 깜빡 잠이 들었나봐요. 눈을 떠보니 나랑 동생이 공중에 들려서 어디론가 잡혀가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기다린다, 형이 여기서 일한다고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울지도 못하게 발로 차고 때리고.. 그렇게 역전 앞 부녀보호소에 끌려가 보니 먼저 잡혀 온 얘들이 스무명 쯤 있었어요. 그때 우리 형이 우리를 찾아서 왔고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경찰 복장을 한 사람이 형을 데리고 나가서 이야기하고 오더니, 먹여도 주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하고는 형더러 가라고 했어요. 형이 그렇게 가고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가는데, 오목천을 지나가대요. 할머니 집이 오목천이고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잘 알았거든요. 동생이랑 울부짖으면서 할머니 집이 저기라고, 주소까지 정확하게 말했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내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맞았어요. 그때 제가 10살, 동생이 8살이었습니다."초등학교 다니던 평범한 아이선감학원 충격 느끼며 반평생할머니 따라 나온 수원역에서잠든 사이 부녀보호소 끌려가오목천이라고 주소 말해도10살, 8살 풀어주지 않고 때려진성씨는 마음 한편에 맺힌 가족을 향한 응어리를 말했다. 지금도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번은 따져 물었다. "네가 우리를 보낸 것 아니냐고,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고. 할머니,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찾을 때 네가 말 한마디 했으면 됐지 않았냐"고 원망을 쏟아냈다. 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어린 아이였고, 그저 경찰이 무서웠다고, 일도 못하게 하고 잘못을 끄집어 내 트집잡을 지 몰라 두려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니 지금도 엄마를 원망합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 '송혜희를 찾아주세요' 그 현수막을 운전하는 몇 십년째 보고 있는데, 다른 집은 새끼가 없어지면 그렇게 찾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는 끝까지 찾지 않았냐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마음을 풀지 못했어요. 내 인생이 너무 힘들 때마다 엄마한테 왜 찾지 않았냐 원망하며 살았습니다."선감학원에 끌려간 다음날부터 지옥은 시작됐다. 그가 당했던 끔찍한 일을, 그는 '그런 일'이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손을 떨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선감학원에 들어오고 다음날부터 (성)폭행을 당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저는 화장실에 잘 못 가요. 그때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견디다 못해 (선감학원) 직원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는데, 방만 옮겨주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걸 참으면 동생은 책임지고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동생은 학교도 보내주고 그런 일 없게끔 해주겠다고.. 그래서 참았어요."끌려온 다음날부터 성폭행 당해기억에 아직도 화장실 잘 못가동생만은 지켜준다 약속에 참아학교 못가고 하루종일 밭일할당량 못 채우면 '방장'에 구타겨울엔 벗겨서 밖에 서있게해정작 동생은 함께 지내지도 못했다. 아니, 절대 만나면 안됐다. 그게 그곳의 법이었다. 그래도 동생이 걱정되고 보고파, 동생이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목에 숨어 몰래 얼굴을 보곤 했는데, 동생은 학교에서 간식으로 나눠준 건빵을 남겨와 형에게 건넸고, 형은 일하다 잡은 개구리나 쥐를 구워 동생에게 먹이곤 했다. 그게 서로를 지키는 최선이었다. 진성씨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하루종일 일만 했다. "밭일, 논농사, 닭도 키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계속 일만 했어요. 양잠하는 시기에는 밤에 잠도 못 자고 일해야 해요. 누에는 밤에도 뽕잎을 줘야 하거든요. 잠깐 자다 알람소리 울리면 일어나 한 시간 이상 뽕잎 주고 그러면 잠이 다 깨고 다시 잠 들만 하면 일어나 뽕잎 주고.. 비가 오는 날엔 뽕잎을 다 닦아서 누에를 줘야 해요. 매일 할당량이 있어서 그만큼 일을 다 못하면 '방장'이라는 사람한테 맞아야 하고 괴롭힘을 당해요. 직원들이 우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같은 원생 중에 나이 먹은 사람들, 직원들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을 숙소마다 '사장'으로 부르는 대장을 만들었고 각 방 마다는 방장을 만들었어요. 직원들이 윽박지르고 화내는 날이면 어김없이 매타작을 당해요. 곡괭이 자루 끌고 다니면서.. 겨울엔 옷을 홀딱 벗겨서 밖에 세워놔요. 그때 귀가 얼어 동상에 걸렸습니다."견디지 못하고 갯벌로 나갔다차오르는 물에 다시 빠져나와물때 기다리고 있다가 만난 소년'너희집 연락해주마' 적어가더니죽은채 바다서 떠밀려와 묻어줘 고작 10살의 나이에 시작된 폭행과 강제노역. 견디지 못하고 그는 갯벌로 뛰어 나갔다. 살기 위해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갯벌을 걸어서 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물이 많아 허벅지까지 빠졌다. 아직 저 섬까지 걸어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갯골에 거품처럼 물이 차올랐다. "'아, 잘못 계산했구나' 싶어 다시 힘들게 빠져나왔어요. 일단 창고에 숨어 다음 물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잡혔습니다. 창문도 없는 창고에 갇혀 물도 먹지 못했어요. 그 뒤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친해진 친구가 내가 매일 밤 폭행을 당하는 걸 알았어요. 어느 날 뜬금없이 그 친구가 '네 집 주소가 뭐냐'고 묻길래 알려줬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연필을 가져와 집 주소를 적더니 1년쯤 지난 뒤 '내가 나가서 너희 집에 연락해주마, 너희 엄마 데리고 오마'라고 말하곤 바다로 나갔어요. 얼마 안 지나 (바다에서) 누가 떠밀려왔다고 나가봤더니 그 아이가 죽어 있었어요. 얼굴이랑 팔에 소라가 잔뜩 붙어있는 채로.. 내가 이쪽 어디에 그 아이를 묻어주었는데 위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요. 내가 여기 올 때마다 꼭 묘역에 들러 그 아이를 찾는데 찾질 못합니다. 그 아이는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너무 미안해서.."진성씨가 선감학원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죽음의 문턱에서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프다고 말해 얻은 약을 무조건 모았다.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목매려는 순간 축산부 직원 발견"책임지고 보내줄게" 이후서야 탈출 "아무 약이나 먹으면 무조건 죽는 줄 알았어요. 축산부에 건초를 저장하는 장소가 있거든요. 거기에서 약을 먹고 목을 매려고 하는데, 축산부 직원에게 발각됐죠. 약을 다 뺏겼어요. 축산부 직원이 나를 보더니 '내가 책임지고 너희 둘 내보내 줄게. 나이도 어린데, 죽지 마라. 동생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사니' 그러고 정말 얼마 안 있다 여기서 나갔던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그는 계속 울었다. 흐느낌 속에서도 또렷한 말로 "나는 부랑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시 민주공화당원이었고 수원 사무총장도 한 사람이에요. (선감학원 가서도) 계속 우리 집 주소를 말했고 집에 연락해달라고 애원했어요"를 반복했다.부랑아가 아니었지만 선감학원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정말 부랑아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평생을 선감학원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숨어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삶은 결국 부랑아가 돼 있었다.50년 넘도록 현재진행형으로 아픈데잘못했다는 소리를 온전하게 하지 않아요.수천명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고…"이제와 생각하니 내가 선감학원에 왔다는 그 자체가 지금도 말 못할 일인가 싶어요.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일단 여기 출신이라고 하면 온전한 눈으로 보지 않아요. 저는 부랑아가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거죠. 50년이 넘도록 나는 이렇게 현재진행형으로 아픈데, 이 일을 했던 사람들은 잘못했다는 소리를 온전하게 하지 않아요. 수천명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 사람들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요."/특별취재팀▶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선감학원 피해자 진성씨가 지난 8일 선감역사박물관에서 경인일보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선감학원 입소 당시 진성씨 원아대장.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6살, 4살 무렵의 진성·진동 형제가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진동씨 제공1950년대 최헌길 경기도지사와 한미재단 관계자가 선감학원에 방문했을 당시 원생들. /선감역사박물관 제공
#지난 9월 30일 오전 4시, 미처 동이 트지 않은 새벽 미명에 수원시 권선구 탑동 한국노총 경기본부 사무실에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나타났다. 이날 오전 4시는 경기도버스노동조합 협의회(버스노조)가 파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힌 그 시각이다. 전날 오후부터 사용자 단체인 경기도버스운송사업조합과 임금인상을 두고 마라톤 협상을 벌였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이날 자정께 노조는 파업을 선언한 상태였다.교섭장에 나타난 김 지사는 임기 내 전 노선에 버스 준공영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버스회사에 재정을 지원하는 준공영제가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에 적용되고 있는데 이를 시내버스를 포함한 타 노선까지 확장하겠다고 밝힌 것이다.#지난해 12월 13일 인천시는 관내 버스회사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우리 시에서 실시하고 있는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통해 회사의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해짐에 따라 개별 기업의 가치가 상승하게 된 바, 기존 운수사업자의 영업 양도 및 주주의 지분 매각 등이 최근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에 운수사업 경영 능력 및 대중교통 서비스의 의지가 검증되지 않고, 표준운송원가를 통한 경영 수익만 추구하는 주체가 시내버스 준공영제에 진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얽히고 설킨 사모펀드와 버스업계두 장면은 경기도·인천의 버스업계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래를 짐작케하는 단초다. 우선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려면 '준공영제' 제도부터 이해해야 한다. 온전히 민간 버스회사가 버스 영업을 책임지는 민영제의 반대로 공공이 노선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공영제가 있다. 준공영제는 공영제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회사 소유는 민간으로 하되 영업 손실을 공공이 보전하는 방식을 뜻한다. 준공영제는 '표준운송원가'를 산정해 손실을 보전하는데, 표준운송원가에는 인건비·연료비·정비비·보험료·차량 감가상각비·차고지 임차료 등 버스를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제반 비용이 계산된다.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표준운송원가는 재산정되며 이를 기준으로 공공재원을 버스회사에 투입해 손실을 보전하는 게 바로 '준공영제'다. 인천은 2009년부터 이미 시내버스에 준공영제를 도입했고, 경기도는 광역버스에 한정해 준공영제를 시행하고 있다.시내버스 준공영제 내년부터 도입 시작기존 업자들 회사지배권 획득 '재구조화'경기 서·남부권 버스영업권 모두 넘어가김 지사가 버스노조에 전 노선 준공영제 도입을 약속해 내년부터 부분적으로 시내버스에도 준공영제가 도입될 전망이다. 다음은 인천시가 버스회사에 내린 공문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이미 준공영제를 도입한 인천 버스업계는 참으로 자본주의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바로 버스업계에 사모펀드가 대거 진출한 것이다. 투자자 비공개로 운영되는 사모펀드는 고수익을 목표로 기업을 사고 파는 금융자본이다. 자본시장에서 저평가된 회사를 사들여 체질을 개선하고 수익성을 높여 되팔아 차익을 실현한다. '차파트너스'는 인천 시내 8개 버스회사를 소유한 사모투자 전문회사다.유명 투자사 '맥쿼리' 출신이 2019년 6월 설립한 차파트너스는 자산운용규모가 1천400억원(2020년 12월 기준)에 달하고 운용부문 헤지펀드, 경영참여형 사모펀드 등을 운영한다. 인천에 350여대, 서울 내 390여대 버스를 보유하고 있고 서울공항 리무진, 한국BRT, 동아운수 등을 포함해 인천, 서울, 대전 등에서 900여대의 버스를 굴린다.설립 4년 차의 짧은 연혁을 가진 사모펀드가 버스업계의 '큰 손'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시 공문에서 보듯 사모펀드의 공격적 투자 이면에는 준공영제가 있다. 버스회사가 표준운송원가를 통해 손해를 보지 않는 사업장이 되면서 기존 운수사업자가 회사를 파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인수 이후 버스회사가 보유한 부동산 자산을 매각하면 쉽게 수익성이 개선되고 특히 전기버스로 전환하면 재정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버스업은 사모펀드에 좋은 투자처였다.시내버스는 준공영제 대상이 아닌 경기도 버스업계에도 2018년 처음 사모펀드가 접촉해 왔다. 사모펀드 스트라이커캐피탈매니지먼트 자회사인 에스씨엠제일차가 수원여객 대주주로 오르면서다. 수원여객은 한 해에 700억~800억원 매출을 올리는 대형 업체다. 직전까지 이익 잉여금이 200억원에 달한 수원여객은 이후 재정 상태가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지난해 또 다른 사모펀드에 경영권을 넘기게 된다.사모펀드 버스그룹 'K1' 그들은 누구인가수능일 경기 남부권 버스에는 일제히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었다. '수능 수험생 시험 당일 버스요금 무료. 11월 17일 목요일. 수원여객, 용남고속, 제부여객, 남양여객, 화성운수 시내버스 일반버스 승차에 한함. K1'수원여객을 인수한 사모펀드 MC파트너스는 지난해 수원여객, 용남고속, 경진여객, 제부여객, 남양여객 5개사의 지분 100%를 1천300여억원에 인수하며 지역 버스업계를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낯선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새로운 버스그룹 'K1'이다.사모펀드가 대주주라는 공통점을 가진 회사들의 집합체 K1 그룹의 경영진 면면도 흥미롭다. 수원여객·용남고속·경진여객·제부여객·남양여객·화성운수의 대표자는 모두 K씨다. 버스노조에 따르면 경기지역 버스업계를 장악한 MC파트너스의 지분을 소유한 인물이다.인수 전엔 소신여객과 화성운수 대표이사를 맡고 있었고, 사모펀드 인수 이후에는 수원여객·용남고속·경진여객·제부여객·남양여객·화성운수·소신여객까지 모두 7개사의 경영을 맡았다. 경진여객은 전 수원여객 전무였던 C씨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결국 기존에 지역에서 활동하던 버스업자들이 사모펀드를 통해 지역 버스업계를 재구조화한 것이다. K1 그룹으로 지칭하는 버스회사(수원여객·용남고속·제부여객·남양여객·화성운수)들의 지난해 매출액은 1천500억원이 넘는다. 여기에 지난해 460억원대 매출을 올린 소신여객까지 합치면 사실상 동일한 지배구조를 가진 버스회사들이 매년 2천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버스업계에선 이미 경기 서·남부권 버스 영업권은 대체로 사모펀드로 넘어간 것으로 본다.인수후 처우 개선·전기버스 전환 '기대'가족회사 불투명한 경영은 벗어났지만과도한 이윤 추구 피해 막을 대책 필요 인천은 사모펀드가 버스회사를 사들인 후 경영자를 내세우는 방식을 취했지만 경기도는 기존 사업자들이 적극적으로 사모펀드에 투자해 다시 회사 지배권을 획득했다는 게 차이점이다.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이미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시행한 인천처럼 경기도도 시내버스를 포함한 전 노선버스에 대한 준공영제 도입이 다가온다. 다시 인천시 공문으로 돌아가면 눈에 띄는 문장이 있다. '표준운송원가를 통한 경영 수익만 추구하는 주체가 시내버스 준공영제에 진입하고 있는 실정'.사모펀드의 버스회사 인수 이후 종사자 처우가 개선되고 전기버스로 전환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는 전언도 나온다. 가족회사로 운영하며 친인척이 회사에 취업하는 등의 불투명한 경영에서 이제 회사다운 회사, 사익이 아니라 수익을 중심에 둔 경영이 가능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사모펀드 버스회사 진출에 따른 흑과 백이 있을 것이나 더 중요한 것은 수익을 좇는 금융자본이 공공재 성격을 지닌 버스회사를 통해 지나친 이윤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다. 지난해 10월 국토교통부가 '버스 준공영제 도입 및 개선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시행하면서 버스회사 영업 양도 및 인수 합병, 회사 최대 주주변경(특정 주주가 20% 이상 지분 신규 취득)을 할 때 관할 지자체에 사전협의·신고토록 의무를 부여했다.이제 새로운 금융자본의 버스업계 진출을 확인할 길은 생긴 것이다. 다음은 금융자본의 '먹튀'를 막을 대안이다. 피해는 가시화되지 않았고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년부터 경기도 시내버스에 준공영제가 도입되기 시작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버스는 출발했다. 대책을 모색해야 할 시기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경기 지역의 버스업체를 사모펀드가 인수하면서 공공성 보장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경기도내 한 버스차고지의 모습. /경인일보DB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만나는 정동제일감리교회 신관(1978년)을 비롯해 대전 이응노미술관(2007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2007년)를 설계한 원로 건축가 백문기. 그는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김수근(1931~1986), 김중업(1922~1988)이 작고한 이후 공백 상태가 된 한국 건축계의 새로운 파도를 일으킨 '4.3그룹'의 회원 14명 중 한 명이다. 1990년 결성된 4.3그룹은 한국 건축의 질적 향상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학습한 건축운동으로 승효상, 김인철, 인천 동구 괭이부리마을 '기찻길 옆 공부방'을 설계한 이일훈(1954~2021) 같은 걸출한 건축가들이 속했다.백문기 선생을 비롯한 4.3그룹 건축가들은 1990년대 초 개발 바람이 불었던 서울 종로구 가회동 북촌 한옥마을 '가꾸기 운동'을 펼치며 북촌의 가치에 대해 서울시를 설득하고 헐리기 직전이던 한옥들을 지켜냈다. 백 선생은 북촌 한옥마을을 보존하는 집마다 1억원을 지원하는 파격 조건을 서울시에 제안했고, 서울시는 그 정책을 받아들였다. 북촌 한옥마을은 초입만 조금 헐리고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며 이른바 'K-문화'를 대표하는 명소가 됐다. 그는 현재 서울 종로구의 공공건축가로 활동하면서 종로구가 짓는 공공건축물의 타당성, 품질과 기술, 문화적 가치를 자문하고 있다.인천의 지역 언론이 서울에서 주로 활동한 중량급 원로 건축가의 이력을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인천의 건축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 선생은 10여년 전부터 두세 달에 한 번씩 인천을 찾아 골목을 탐색하고 아무도 몰랐던 건축물의 가치를 발굴했다. 인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2018년 무렵부터 준설토 투기장으로 매립된 중구 '북성포구 살리기'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전문가로서 인천시 등 행정기관에 포구 재생화 등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북성포구는 끝내 매립됐다.배다리·괭이부리 마을·애관극장… 정작 내부에선 가치를 몰라자꾸만 도시를 닮아가려 하면 지역특색 사라지고 무표정해질 뿐북촌 한옥마을처럼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서 보존하고 지원해야건축은 종합예술… 인천서 발견하지 못한 건물 계속 찾아나설것 지난 14일 오후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만난 백문기 선생에게 왜 인천의 가치를 강조하는지 물었다."조선왕조의 건축 역사 문화가 남아있는 공간은 서울 종로구뿐입니다. 조선왕조 다음 시대로 가면 근대 건축 문화의 총집합이 바로 인천입니다. 인천의 건축은 근대 노동문화가 집합돼 있습니다. 저는 인천 구도심을 거닐다 보면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납니다. 성냥공장, 비누공장(2017년 철거된 1930년대 애경사 건물)처럼 한국의 모든 공산품이 만들어졌던 지역이며 배다리, 싸리재, 괭이부리마을, 애관극장 등 근대 생활문화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의 가치를 오히려 인천시 등 지역 내부에서 모르고 있습니다."백 선생은 배다리나 개항장 같은 인천 구도심을 북촌 한옥마을처럼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서 보존하고, 보존을 위해선 집주인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에서 서울 종로 다음 가는 문화 콘텐츠가 집약된 곳이 인천이라고 했다. 북성포구를 예로 들었다."북성포구는 오래된 프런트 데스크(Front Desk)입니다. 송도 신도시에 새로운 프런트 데스크(인천 신항)가 조성되고 있는데, 과거의 프런트 데스크를 굳이 메워 없애야 했을까요. 인천은 해양도시입니다. 과거엔 골짜기 곳곳으로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왔고 그 곁에서 사람이 살았습니다. 지금은 산업화로 그 바다를 메우고 내륙도시처럼 됐지만, 인천의 지역성이 해양도시인 것은 지금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신도시는 신도시 나름으로 개발하되 구도심은 있는 그대로 정돈을 하면서 오히려 옛 모습을 되찾도록 메운 땅을 뜯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이 자꾸만 도시(서울)를 닮아가려 하면 할수록 무표정해질 뿐입니다."백 선생은 건축물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이나 기후에 맞는 '언어'로 표상돼야 한다고 했다. 서울 강남은 그 지역에 맞는 건축 특징이 있어야 하고 인천은 해양도시에 걸맞은 건축 언어가 표현돼야 하는데, 아파트처럼 모두 똑같은 모양의 건축물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천의 건축 언어를 보여주는 근대건축물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북촌 한옥마을 지키기 운동을 하면서 여러 한옥을 봤지만, 동구 배다리에 있는 굴뚝이 6~7개씩 달린 한옥(여인숙 건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옛날 여관이나 하숙방으로 쓰였을 역사적 문맥에서 가치 있는 건축물이 인천에서 너무 쉽게 철거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일한 한국인 노동자들이 머물던 주택들도 인천에 많지만, 너무 쉽게 사라졌습니다. 공공기관에서는 건축적 가치가 떨어져 보존 가치가 없다고 하는데, 과연 저 같은 전문가에게 물어본 게 맞는지 의문입니다. 건축적 가치는 전문가들이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공기관은 이미 답을 정해놓은 후에야 전문가한테 묻곤 합니다. 서울시가 전문가 의견을 받아들여 북촌 한옥마을을 남겼듯 인천시도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건축의 인문학적 가치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정림건축 등 굴지의 건축사사무소 사장까지 지낸 백 선생은 교회 건축을 주로 설계했다. 그는 다작한 건축가가 아니다. 50여년 동안 30개의 작품을 남길 정도로 오랜 시간 공들여 신중하게 작품을 만들어 냈다. 백 선생이 30년 전 설계한 서울 강남의 디자인회사 사옥은 건축주가 30년이 지나 건물 설계자에게 리모델링을 맡기는 건축계에서 전례 없는 일도 있었다. 백 선생은 현재 건축 문화가 다른 예술처럼 대중에게 친숙해지도록 돕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김영경 한양여대 교수와 함께 북촌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건축 세미나 프로그램 '북촌의 약속'을 진행하며 강의하고 있습니다. 선화예술중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박해영 선생님과 '그림비'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학생들에게도 건축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인천을 자주 찾을 겁니다. 앞서 얘기했듯 인천은 그 지역에서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가치가 뛰어납니다. 건축은 종합예술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인천에서 발견하지 못한 건축물을 계속 발견하고 싶습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백문기 건축가는?▲1948년 서울 출생▲1973년 한양대 건축공학과 졸업▲1979년 한국건축가협회 정회원▲1998~2005년 정림건축 수석부사장▲2007~2008년 정림건축 디자인담당 사장▲2008~2011년 공간 스페이스그룹 사장▲1999~2000년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겸임교수▲2003~2005년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주요 작품- 1978년 정동제일감리교회- 1995년 만종감리교회- 2002년 원당성당- 2006년 과천수돗물연구센터- 2007년 이응노미술관- 2007년 김대중컨벤션센터- 2009년 김포고촌교회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백문기 건축가가 종로 다음으로 건축적 가치가 큰 지역이 인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