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는 '성 노동자'입니다 ①]용주골에 남은 종사자들 파주시, 성매매 집결지 폐쇄 절차 2년간 매달 자활생계비 지원키로'생존권 사수 투쟁'에 나선 85명부당 처우 반발·피해자 취급 거부합의 없는 지자체 일방 발표 지적 무수한 사연을 품은 여자들이 파주시 용주골로 흘러들어왔다. 이 여자들에게 부여된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한때는 달러벌이를 하는 '애국자'이자 '양공주', 보편적으로는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창녀', 근래에는 여성 인권을 후퇴하는 데 일조하는 '미친 여자'….현재 용주골은 파주시의 '성매매 집결지 완전 폐쇄' 정책에 따라 철거 등 행정대집행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곳 85명의 여성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 남아 있기를 고집하는 여성들과 이들을 지지해주는 시민들의 또렷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노동' 밥벌이가 갖는 무게는 이곳에서 유독 무거워진다. 누군가는 부모의 병원비를 마련하려, 또 누군가는 가장으로서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누구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파주 용주골의 여성들은 한겨울임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 받기 쉬운 일을 직업으로 택한 이 여자들은 자신의 기구한 삶을 불쌍해 하며 눈물 흘려주기보단, 부당한 상황에 귀 기울이고 함께 싸워주기를 호소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을 호명한다. 나는, 우리는 '성 노동자'라고. 이들은 여성으로서의,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로서의 '권리' 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재개발 계획 같은 것도 명확하게 나온 게 없으면서 '불법'이니깐 무작정 당장 떠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자활 지원도 여기 '성 노동자' 여성들과 이야기하고 진행한 게 아니라 일방적인 발표예요." 지난 4일 용주골에서 만난 성매매 종사 여성 A(40대 초반)씨의 목소리 너머에는 단순한 볼멘소리 이상의 복합적인 구조적 문제가 담겨 있었다. 흔히 지자체에서 성매매 집결지를 폐쇄할 경우 이곳 종사자들에게 생활비를 1년여 동안 지급한다. 당연히 파주시에서도 매달 자활 생계비로 백만원 가량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더욱이 기간은 2년으로, 이는 다른 지자체보다 1년을 늘린 조건이지만 이곳 여성들은 지원받기를 거부한다.근본적인 문제는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성매매 '피해자' 가 아닌 '성 노동자' 로 정체화하고 있다는 데서 시작한다. 자신들의 싸움은 '피해자다움'을 거부하고 생존권을 사수하려는 투쟁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자활 지원에 초점을 맞춘 지자체와 성매매 종사 여성들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원인이자, 자활 지원 금액과 기간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 아닌 이유다. 우리는 (보편적인 여성들과) 출발선이 다르다. 일반적인 삶을 사는 여자는 여기에 오지 않는다. 미디어가 발달한 세상에서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여기서 나는 노동을 하고 있다. 포주에게 세뇌당해 이 일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관점은) 오히려 우리를 무시하는 것 어이없다는 듯 웃어보인 A씨 성매매 종사 여성을 향한 시혜적인 관점은 되레 갈등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된다. 특히 지난해 자활 지원 여성단체 '쉬고'에서 11차례 '여행길(여성과 시민이 행복한 길)' 걷기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이곳 여성들과의 간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여행길은 현재 영업 중인 용주골 일대를 시민들과 함께 거니는 프로그램이다.지난해 5월 이곳에서 만난 성매매 종사 여성 B(46)씨는 "여기가 무슨 동물원도 아니고 뭐하는 건가 싶었다"라고 했고, A씨는 "아가씨들은 의자에 앉아 있고, 시민들은 보라색 풍선을 들고 거니는데 불편하기도 하고 인간적인 모멸감이 느껴졌다"고 허탈해 했다. →2편에서 계속 (페미니즘과 노동권 '회색지대'… '성 노동자' 자활 지원 엇박자 이유는?")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용주골 강제철거 중단하라" 파주시가 성매매 집결지인 용주골에 대해 철거 등 행정대집행에 나선 가운데 이를 거부하는 종사자들의 반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지난 17일 오후 용주골의 한 성매매업소 앞에 강체 철거 중단 등을 요구하는 문구들이 게시돼 있다. 2024.2.17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현재 파주시의 성매매 집결지 완전 폐쇄 정책이 추진 중인 연풍3길의 용주골.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지난해부터 파주시의 성매매 집결지 완전 폐쇄 정책이 추진 중인 가운데, 이곳에 종사하는 85명의 여성들이 행정대집행에 맞서 농성 등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성매매 집결지 내 현금 인출기 모습.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지난해 5월 16일 파주시 연풍5길에서 파주시의 성매매 집결지 폐쇄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곳 종사자 여성이 “성매매 집결지 탄압을 멈춰 달라”고 외치며 입장문을 낭독하고 있다. 2023.5.1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지난해 5월 16일 파주시 연풍5길에서 파주시의 성매매 집결지 폐쇄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당시 이곳 종사자 여성과 연대해주는 시민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문을 낭독한 동시에, ‘여행길’ 걷기 캠페인에 대해 항의했다. 2023.5.1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나는, 우리는 '성 노동자'입니다 ②]인권 공통 분모 '여성'과 '연대' 엄연한 '불법' 단체들 손길 못내밀어 강압 vs 착취 접근에 거부감 엇박자묵묵한 투쟁 자그마한 힘 보태기도"다양한 목소리 더 많이 들려져야" 이곳 여성들이 성매매 산업에 발을 디디는 과정과 결과에는 다양한 맥락이 담겨있다. 성매매 집결지 밖의 보편적인 사회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안정감과 소속감은 이들이 쉬이 용주골을 떠날 수 없는 요인이다.‘삼촌(포주이자 성매매 영업을 하는 남성)’, ‘이모(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의 방을 치우고 식사를 제공하는 등 숙식을 돕는 노년 여성)’, ‘언니(동료 성매매 종사 여성)’로 이뤄진 ‘불법’에서 파생된 경제 공동체이자 마을은 그간 한국 사회가 미처 보듬지 못한 복지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터전을 형성했다.“싱글맘인 사람, 공황장애랑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자가 당연하게 생활하는 곳이 용주골이에요. 아가씨들이 힘들어하면 이런 상황을 바로 이해해준다니까요. 어디 일반 회사에 가서 ‘저 공황장애가 왔는데 잠깐 쉬었다 일하겠습니다’고 말하면 납득을 해주겠어요?” 이곳에서 6년째 일하고 있는 A씨는 용주골 ‘성 노동자’들이 마냥 떼를 쓰는 게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여기서 오래도록 살겠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 논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 점이 빠졌다”며 “우리는 용주골에 더는 신입 ‘성 노동자’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고 귀띔했다.결국 ‘성 노동자’임을 공표한 이곳 여성들이 ‘진정으로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게 맞느냐’, 혹은 ‘본인이 선택해서 성매매를 한 건데 왜 지원을 해줘야 하느냐’의 시비는 부차적인 논쟁이다. 명백한 사실은 숙의 과정 없이 진행된 퇴거 조치에 이곳 여성들은 당장 올해 겨우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연히 ‘불법’인 성매매의 특성, 그리고 포주에게 붙잡혀 억지로 성매매를 하는 게 아닌 스스로 ‘성 노동’을 한다는 이곳 여성들의 확고한 신념에 여성단체나 노동단체에서는 선뜻 연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실정이다.그나마 지자체와 연계해 자활 지원을 돕는 여성단체도 당사자들과 엇박자를 내고 있다. 특히 자활 지원 단체에서 고수하는 고전적인 ‘강압적인 포주 대 착취당하는 집결지 여성’ 구도는 성매매 종사 여성들이 꼽은 거부감을 갖게 하는 접근 방식이다.여행길을 진행했던 ‘쉬고’ 말고는 용주골 상황에 관여하는 여성단체는 없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알리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을 모르겠다. 우리도 여성이자, 노동자다 용주골에서 6년째 일하는 A씨 굵직한 시민단체에서조차 나서기 꺼리는 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 이곳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투쟁에 힘을 보태는 자그마한 연대의 불빛이 커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에는 시민들과 함께 강제 철거에 맞서는 농성장이 들어섰다.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요’, ‘용주골 사람들도 여성과 시민이다’, ‘우리를 내쫓지 마세요’. 지난 6일 저녁 7시께 찾은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중간에 자리한 농성장에는 시위 현장에서 흔히 봤던 항의 피켓과 현수막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현재 시민 20여 명이 이곳에서 숙식하며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용역에 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항의 피켓을 만들거나, 이곳 성매매 종사 여성들과 같이 ‘강구바이 카티아와디: 마피아 퀸(2022)’ 등 ‘성 노동권’을 다룬 영화를 감상하면서 일종의 스터디 모임 활동까지 진행했다. 농성장 활동에 불씨를 지핀 건 지난달 30일 파주시에서 용주골 초입에 자리한 전봇대 위에 감시 목적의 CCTV를 설치하려 하면서부터다. 당시 이를 저지하려 이곳 종사자 여성이 고압전선이 흐르는 아파트 3층 높이의 전봇대 위에 올라가 시위했다. 시민들까지 항의에 가세하면서 CCTV 설치는 이뤄지지 않았다.이곳 시민들의 특징은 성매매 종사 여성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인천에서 왔다는 은성(활동명·20대 초반)씨는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국가 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 일터에서 쫓겨나는 걸 보고 ‘이건 잘못됐다’고 느껴 여기로 오게 됐다”고 했다.그는 “성 노동자 여성은 보편적인 여성에서 배제되는 문제가 많다. 누구의 인권은 챙기고, 누구는 외면하고 이렇게 선 긋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정상적인 여성의 범주를 만드는 것 같다. 전형적인 피해자 프레임 안에만 넣으려 하면 이곳의 여성은 존중받지 못한다”고 설명했다.서울에서 온 현마(활동명·20대 초반)씨는 “성 노동자가 여기 있다. 당신 곁에 살아있다. 성 노동자는 우리의 이웃이다. 친구이자 형제이고 페미니즘이 호명하는 자매들이다”라는 시위 현장에서 본 문구를 읊으며 연대 이유에 대한 답변을 갈음했다.일주일에 두 번 농성장을 찾아와 연대해주는 준태(활동명·33) 목사는 “우리 사회 다양한 목소리가 더 많이 들려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일단 이곳의 목소리를 듣는 게 우선이다.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나서 판단을 내려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이곳으로 동료 시민들을 불러모아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건 여름(활동명·20대 후반)씨다. 그는 ‘주홍빛 연대 차차’라는 단체를 지난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주홍글씨’로 낙인찍히기 쉬운 성매매 종사 여성을 위한 권리를 고민하며,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여름씨는 “‘성 노동자’들이 왜 이런 상황을 겪는지 생각해보면 사회에서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혐오’라는 대우를 받으면서 그냥 살던 곳에서 쫓겨난다”며 “이 여성들이 사라지면 그다음은 누가 될까. 그건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이 될 것이다. 어떤 권리도 주장 못 하고 터전과 일자리를 잃는다. 결국 권력에 맞서 인권을 지켜야 하고, (이런 투쟁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이야기했다.→3편에서 계속 (여성인권 구실로 짓밟힌 '성 노동자의 인권'… 내쫓기 쉬운 '혐오'에 좌표)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파주시의 성매매 집결지 완전 폐쇄 정책이 추진 중인 연풍3길의 용주골. 2024.2.4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의 싸움에도 연대의 불빛이 켜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 유리방 한가운데 들어선 농성장에는 시민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연대 이유를 들려줬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의 싸움에도 연대의 불빛이 켜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 유리방 한가운데 들어선 농성장에는 시민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연대 이유를 들려줬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지난달 30일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초입에 감시 CCTV를 설치하러 온 공무수행 관계자에 맞서 한 여성이 고압전선이 휘감고 있는 전봇대에 올라갔다. 대치 끝에 CCTV(노란색 바)는 철거됐다. /A씨 제공 영상 캡처지난달 30일 파주시에서 성매매 집결지 초입 전봇대에 감시 목적의 CCTV를 설치하러 왔다. 당시 이를 저지하려 이곳 종사자 여성이 고압전선이 흐르는 아파트 3층 높이의 전봇대 위에 올라가 시위했다. 해당 전봇대의 모습.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지난달 29일부터 이곳에 들어선 농성장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이 묵는 곳.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종사 여성들이 일할 때 쓰는 장소를 빌려 임시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페미니즘과 노동권의 회색지대에 머문 용주골 여성들의 싸움에도 연대의 불빛이 켜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이곳에 들어선 농성장에는 시민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목사 준태(활동명·33)씨가 이곳에 와 함께 싸우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2024.2.6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알려지지 않은 10일, 신뢰에 금이 갔다 ① 장애아동을 자녀로 둔 부모와 장애아동을 제자로 둔 특수교사 '사이'는 일반의 사제(師弟)의 정과는 조금 다르다.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한 특수교육 현장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절실하게 적용되는 곳이다. 말 그대로, 특수함을 지닌 아동을 온전하게 키우기 위해 부모와 교사가 '원팀'이 된다. 아니, 돼야 한다. 서로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게 특수교육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를 설명할 때 '신뢰'는 관계를 공고히 하는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다. 이른바 '주호민 사건'으로 불리는 용인 특수아동·특수교사 간 정서적 학대 공방이 치열해질 때마다 강한 의문이 들었다. 신뢰를 기반으로, 그간 원팀이었을 부모와 교사. 이들이 치르는 지금의 여론전은 실상을 안다면 잔혹한 '내전(內戰)'이다. 우리는 이들의 내전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이들은 왜 스승의 은혜를 배신한 부모와 제자에게 모진 말을 뱉은 매정한 스승이 돼버렸을까. 이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이들을 취재했고, 이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교사와 부모의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2022년 9월 5일. 용인 A 초등학교에 학교폭력 사안이 접수됐다. 발달장애를 지닌 민수(가명)가 통합반 친구(비장애아동) 앞에서 바지를 내렸다는 내용. 때마침 통합반 담임교사는 병가로 부재중이었다. 피해아동 학부모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학교는 곧장 혜정(가명)씨를 불렀다. 혜정씨는 A 학교의 유일한 특수교사다. 특수반과 통합반을 오가며 수업을 듣는 민수를 잘 알고 있는 교사라는 게 불려온 이유다. 그렇게 혜정씨는 피해아동 학부모를 면담하는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피해 아동의 학부모는 민수가 벌인 일을 말했다. 통합반에서 생활할 때 일어난 일이라 혜정씨가 알 길이 없었다. 통합반에서 벌어진 사건을 책임지는 것은 혜정씨의 몫이 아니다. 하지만 혜정씨는 일단 민수를 보호해야 했다. 피해아동 학부모에게 민수가 발달장애 아동이며 장애로 인한 행동특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특수교사인 혜정씨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하는 역할이라 여겼다. 간곡하게 설명했지만, 피해아동 학부모의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학교폭력 범주에 해당된다. 피해아동 역시 불안 증세를 보이는 등 피해를 호소했다. 피해아동 학부모는 확실한 분리조치를 요구하며 분리가 안될 시 강제전학까지도 요구했다. 혜정씨는 민수의 특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거듭 피해아동 학부모를 설득했고 면담은 긴 시간 이어졌다. 그리고 민수의 통합반 수업시간을 최대한 조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장애를 겪는 제자를 돕기위해 참석한 줄 알았던 피해아동 학부모 면담을 시작으로, 혜정씨는 어느새 이 사건의 주책임자가 됐다. 이번엔 민수 부모에게 학교폭력 신고가 접수된 것 부터, 피해아동 학부모와의 면담 내용 등을 설명해야 했다. 특히 학교폭력 사안으로 신고된 만큼 당분간 통합반이 아닌 특수반에서 수업을 받는, '분리조치'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민수 부모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피해아동 학부모와의 면담도 계속됐다. 사과하고 또 화해하길 권했지만 그조차 쉽지는 않았다. 신고가 접수된 9월 5일부터 9월 14일까지, 장장 열흘간 양쪽 학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또 서로에게 전달하는 일을 계속했다. 지난한 줄다리기 끝에 학교폭력심의위원회를 여는 대신, 9월 15일 개별화교육협의회를 열기로 했다. 이 결정엔 여러 조건들이 전제됐다. A학교관리자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모여 학교폭력으로 신고된 민수에 대한 조치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열흘간 혜정씨의 고군분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고군분투. 사전적 뜻으로 하면 '아군과 따로 떨어져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군사가 많은 수의 적군과 용감하게 잘 싸웠다'는 의미다. 혜정씨는 교장·교감과 같은 학교 관리자, 동료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열흘간 양쪽 학부모 사이를 중재하고 이를 학교에 보고했다. 특수교사로서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최선책을 만들기 위한 모든 과정이 고군분투였다. 하지만 취재진이 만난 대다수 특수교사들은 이 '고군분투'가 문제의 시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당시 혜정씨가 담당했던 A초 특수반에는 총 8명 학생이 있었다. 법정인원 6명을 훌쩍 넘겨 혜정씨 혼자 장애아동 8명을 가르치고 돌봐야 했다. 특히 통합반과 특수반을 오가며 수업을 듣는 민수같은 장애아동은 가르치고 돌보는 정성이 배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교장과 교감, 통합반 담임교사와 관계를 잘 맺는 것부터 큰 과제죠. 특수교사는 교무실에 자리도 없고 학사일정도 제때 공지를 못 받기까지 하는데, 교내 상황 파악을 못했다가는 자칫 아이 문제상황을 키울 수도 있고 결국 특수교사 책임으로 돌아오니까요." “일반교사들이 장애감수성이 떨어져 상황을 방치하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요. 물론 수업이 없을 땐 잠시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이의 적응을 생각하면 수시로 시간을 쪼개 직접 알아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 경기지역 10년차 특수교사 A씨(40대·여) 특수교사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업무 자체가 과중한 상황에서 피해자든, 가해자든 장애아동이 학교폭력사건에 휘말리면 특수교사가 받는 업무 하중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이런 사례가 비단 혜정씨만이 겪은 일이 아니라 '비일비재'하다. “제가 맡았던 장애아동이 통합반에서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어요. 장애아동 부모가 제게 찾아와 아이가 입원을 했다며, 경찰에 학교폭력으로 신고했고 교장과 가해자 학부모를 만나게 해달라며 하루종일 특수반에 있으며 요구했습니다. 통합반 상황은 담당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했던 터라 교장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내가 꼭 만나야 하나? 실수할 것 같은데' 라며 거절했고 민원이 들어오는 내내 교장은 단 한번도 장애부모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요구는 계속됐지만 교감과 학교폭력전담교사는 '학폭위까지 가선 안된다. 특수반 아동이니 특수교사가 알아서 잘 해결하라'고 요구해 언성까지 높였습니다. 할수 없이 제가 통합반 담임과 가해 학생도 만나고 가해학생의 부모님까지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설득해야 했는데 출근하기 전인 새벽 6시부터 퇴근하고 나서 저녁 8시까지 계속 전화기가 울렸습니다. 겨우 양쪽 부모간 간담회 자리가 마련됐는데 학교에선 이 간담회 마저 저더러 참석해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이 과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평소 앓고있는 지병이 악화돼 결국 병가를 내야 했습니다." -경기지역 9년차 특수교사 B씨(30대·여) 그래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특수교사 상당수는 “학교폭력은 일단 사안 자체가 대부분 중하다. 비장애학생들끼리 벌어져도 각자 이해관계가 다른데, 장애아동은 더욱 특수한 상황이라 조율하고 합의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이미 기본업무만으로도 벅찬 상태에서 혜정씨가 혼자 그 과정을 처리하는 과정이 굉장히 버겁고 지쳤을 것"이라고 공감했다. 인터뷰에 응한 특수교사들과 장애아동 부모들 모두 초기에 학교 관리자의 개입이 없었다는 점을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수원시장애인부모회에서 활동 중인 허모씨는 30대 자폐성 장애 아들을 둔 엄마다. 경험을 비추어 허씨는 “지금은 (장애아동 관련된 학교폭력 사건) 매뉴얼이 마련됐는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없었던 게 현실이다. 통합반에서 장애아동의 문제상황이 발생하면 장애아동 부모들은 일단 비장애부모나 통합반 교사에게 무조건 사과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최근엔 발달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조금 나아지면서 민수 부모처럼 대응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분위기 탓에 학교폭력 중재 및 해결의 주체인 학교 관리자들은 사건 초기부터 '쏙' 빠져버리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허씨는 “교장·교감 같은 학교 관리자가 초기부터 의지를 갖고 중재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통상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적 성향과 역량에 따라 대응방식과 정도가 크게 좌지우지된다"며 “관리자가 역할을 못한다 해도 통합반 교사와 특수교사 사이의 상황 공유가 원활하면 그 선에서 적절하게 해결되지만, 통합반 교사가 장애학생의 이해도가 떨어지거나 민원에 대한 부담이 커 문제 자체를 특수교사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학교폭력사안 발생시 컨트롤타워는 '학교장'이다. 학교폭력 전담기구를 구성해 초기대응부터 조사, 결과도출까지 총체적 책임을 학교장이 맡아야 한다. 동시에 장애학생 개개인에 대한 개별화교육 총책임자도 학교장이다. 혜정씨의 경우도 신고 초기부터 학폭사안의 조사와 중재를 학교관리자가 맡았다면, 특수교사에게 과도한 책임이 쏠리지 않도록 권한과 책임을 학교장이 충실히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 추정했다. 현실은 달랐다. 당시 혜정씨가 겪은 상황을 잘 아는 경기지역 특수교육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혜정씨가 학교에 교권보호위원회 개최를 요청했지만 학교 측은 '학부모 권리'라는 이유로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팀은 당시 상황에 대한 학교관리자 입장을 듣기 위해 직접 A 초 학교 관리자를 접촉했지만 '출장으로 자리에 없다', '취재 요청 사실을 전달하겠다'는 회신을 전달받은 채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 A초 관계자는 “직접 알진 못하지만 교권보호위원회 개최를 거절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학교폭력사건을 특수교사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등떠밀며 특수교사가 비장애아동 부모와 장애아동 부모 사이의 '중재'에만 책임이 부여된 것은 향후 벌어질 비극의 단초가 됐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특수교사가 온전히 장애아동의 편에 설수 없는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신고가 접수된 초기부터 학교 관리자와 통합반 교사가 주축이 돼 중재에 나서고, 특수교사는 장애가 있는 민수를 대변하고 설득하는 데에만 역할이 부여됐다면 최소한 혜정씨가 고군분투하던 열흘 중인 9월 13일에 민수 부모가 민수 가방에 녹음기를 몰래 넣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 특수교사를 향한 신뢰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공지영·김산·이영선기자 jyg@kyeongin.com
복지부 심사 상위권 성적 통과 '의료수준 레벨 UP' 제5기 47곳 지정 '전국 9위' 이름 올려중증 질환 치료 엄격한 요구기준 충족1967년 의대병원 개원 주민과 함께 성장작년 일반병동 한곳 중환자실 전면 교체의료질 평가 3년 연속 전부문 1등급 석권기관 적정성 전부문 1등급 '최상의 평가'경기 남부에 5번째 상급종합병원이 탄생했다.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은 보건복지부의 엄격한 기준을 상위권의 성적으로 통과해 지역 의료체계를 개편, 경기 남부의 의료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보건복지부는 최근 2024년부터 2026년까지 3년간 적용되는 제5기 상급종합병원 지정 평가에서 47개 기관을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했다. 전국 54개 의료기관이 지정 신청을 냈으나, 7개 병원은 지정되지 못했다. 이 가운데 1개 병원은 기존 제4기 상급종합병원이었으나, 이번 평가에서는 포함되지 못했다.경기 남부는 대학병원 등 규모가 큰 병원이 많고, 서울과의 접근성도 좋은 편이어서 여느 지역보다 높은 기준을 요구받지만, 성빈센트병원은 기준을 충족하고 전국 9위의 높은 순위로 경기 남부 5번째 상급종합병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경기 남부 5번째 상급종합병원이 가지는 의미상급종합병원에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된다. 상급종합병원은 곧 중증 질환 치료 기관을 뜻하는 말인 만큼 중증 환자들을 주로 살펴 상급종합병원에 기대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이를 위해 병원은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높은 수준의 의료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뜻이지만, 경기 남부 지역주민 입장에서는 중증 질환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서울이나 다른 지역의 큰 병원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충분히 필요한 진료를, 필요한 때에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상급종합병원은 상급종합병원에 기대되는 역할을 하고 준종합병원 또는 종합병원은 그에 맞는 역할에 맞춰 지역 의료 체계가 재편돼야 보다 편리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성빈센트병원은 979개 병원과 협력 의료 체계를 구축해 전국 어디서든 환자에게 맞는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협력 병원이 아니더라도 성빈센트병원의 협력을 받을 수 있다.아울러 올해부터는 정부정책에 따라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 진료과목에 상시 입원환자 진료체계를 갖춰야 한다. 정부의 필수의료 혁신전략 등 여러 정책과 유기적으로 연계돼야 하는 만큼 소외되지 않는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급종합병원으로서의 자격1967년 경기 남부 지역 최초의 의과대학병원으로 개원한 성빈센트병원은 경기 남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성장해온 병원이다. 개원 당시 10여명의 의료진이 하루 80여명의 외래 환자와 80여명의 입원 환자를 진료했으나, 연간 100만여 명의 외래 환자와 25만 여명의 입원환자를 진료하는 규모로 성장했다.지난 2019년 암병원 개원, 지난해 심뇌혈관병원 개원 등으로 중증·급성 질환 치료에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과 환경을 갖추는데 노력해왔다.특히 지난해 기존 일반 병동 한 곳을 중환자실로 전면 탈바꿈하면서 중환자 병상을 추가 확대하고 양질의 중환자 집중 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또 지역 협력 병의원과 진료의뢰·회송 시스템을 활성화해 지역 사회 내 의료기관의 의료전달체계를 공고히 하는데 주력했다.그 결과 의료질 평가 3년 연속 전 부문 1등급 석권, 의료기관 적정성 평가 전 부문 1등급 획득 등 의료기관의 치료 역량과 수준을 객관적으로 입증받을 수 있는 각종 평가에서 최상의 평가를 받았다는 설명이다.상급종합병원 지정에 맞춰 지역 심뇌혈관센터 및 조혈모세포이식(BMT) 병동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스마트 케어 시스템 도입으로 의료서비스 확대와 업무 효율성도 한 단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사회적 가치 창출 및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ESG 위원회를 발족하고 ESG경영 관련 비전과 목표를 수립하는 것과 더불어 병원 설립 이념에 더욱 충실하도록 사회공헌활동 확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인터뷰] 정진영 성빈센트병원 기획조정실장·정형외과 교수 "최상의 진료와 보살핌, 치유의 믿음으로"심뇌혈관 병원·협진체계 구축 등 노력보다 필요한 진료 신속하게 받도록 개편"최상의 진료와 보살핌, 치유의 믿음으로 상급종합병원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정진영 성빈센트병원 기획조정실장·정형외과 교수는 "우리 병원은 경기 남부 지역 최초의 의과대학병원으로 시작했다. 당시엔 병원도 많지 않아 지역 의료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최근에는 주변에 큰 병원에서부터 여러 병의원이 생기면서 의료 전달 체계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달라졌다"고 상급종합병원 지정의 의미를 설명했다. 아울러 "상급종합병원 지정에 도전하는 과정에는 중증 의료서비스 제공 비율 등 여러 과제들이 있었지만, 의사들도 보다 큰 자부심을 갖고 진료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정진영 실장은 그간 경기 남부 지역 최초로 암병원을 건립하고 지난해 심뇌혈관 병원을 개설한 점, 진료 협력 센터를 통한 환자 협진 체계 구축 등을 상급종합병원 지정을 향한 노력으로 꼽았다.상급종합병원 지정으로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예를 들어 응급센터도 모든 환자들이 중증이 아닌데도 응급센터에서 치료받길 원하니까 실제로 시간을 다투는 중요한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데 제약이 생기는 사례가 있다"며 "상급종합병원 지정으로 인해 의료서비스 전달 체계를 개편하면서 보다 필요한 진료를 신속하게 필요한 만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아울러 "병원마다 특징이 있겠지만, 우리는 종교병원으로 상대적으로 경영에 자유로운 측면이 있다"며 "환자를 치료할 때 단순히 질환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치료한다는 마음으로 보다 양심적으로 환자를 대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정진영 실장은 "3년 뒤면 개원 60주년을 맡는다"며 "저희는 종교병원이기 때문에 최상의 진료뿐 아니라 환자의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항상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전경. /성빈센트병원 제공
"세계로 뻗어가는 K-아동극" 기획부터 제작·사업화 모든 과정 망라… 30여개국 80여개 도시 호응관객들에 즐거움·감동주는 포인트 고심… 전용관 지어 차별화 시도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 선정… 오산문예회관 상주하며 '윈윈' 성과"라스베이거스의 '태양의 서커스'처럼 공연 산업은 한 지역의 굉장한 수입원이자 자생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깃발을 꽂고 싶었어요."호기심 많은 두 주인공이 떠난 바닷속 여행이 마커 하나로 시작해 라이브 연주와 무대 장치들이 한데 어우러져 상상력을 자극한다. 스크린에 그린 낙서 하나로 무한한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공연 '두들팝'을 시작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관객들마저 사로잡은 공연예술단체 '브러쉬 씨어터(유)'. 기획부터 제작과 사업화까지 모든 과정을 아우르며 어느덧 K-아동극의 중심에 서게 된 이들의 저력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브러쉬 씨어터는 연극배우였던 지금의 이길준 대표가 어려운 예술현장의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연 환경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기로 했다. 대부분의 산업이 디지털 매체로 가는 시대이지만, 오프라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과 그것이 주는 행복감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또 어렵거나 난해했던 공연보다 쉽고 직관적이면서 편한 공연을 좋아했던 이 대표의 성향도 아동극을 만들게 된 이유가 됐다.현재 브러쉬 씨어터는 세 가지 분야의 공연을 만들고 있다. 두들팝과 폴리팝(두들팝 ver.2)으로 대표되는 팝 시리즈, 일반 가족 뮤지컬, 이머시브 공연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팝 시리즈'이다. 이 대표는 "팝 시리즈의 특징은 상상력이 많이 담겨있다. 무대 세트가 간결하고, 아이디어가 집약적이며 언어도 필요가 없다"며 "상상력과 이미지만으로 하는 공연으로 서울과 부산에 전용관이 있으며, 폴리팝은 현재 월드투어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30여개국에 80여개의 도시. 공연은 해외에서 더욱 빛이 났다. 브러쉬 씨어터는 시작부터 글로벌을 겨냥했다. 비어 있는 객석과 무시 등이 이어진 실패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 대표는 이를 통해 '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란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이 대표는 "공연·소설·드라마·영화 등 수 많은 콘텐츠들이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스토리를 잘 만드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색다른 스타일도 필요하다"면서 "그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스타일이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기술력에서 찾았다"고 밝혔다.공연에 기술을 접목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도전에 가까웠다. 기초적인 기술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려 나간 브러쉬 씨어터는 디자이너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실제 무대 세트와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연기나 스토리와 함께 꽃필 수 있도록 했다. 이 대표는 "기술이 어떤 스토리와 매칭이 돼서 어느 순간에 관객들이 즐거움을 느끼고 감동을 받는지를 찾아내는 것 또한 기술"이라며 "문화예술에는 그러한 센스와 같은 기술력도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전했다.그 결과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아시아 베스트 코미디상', '가디언지 선정 베스트 쇼' 등을 수상하는 성과를 얻었고, 이후 해외 공연 유통사들로부터 연락을 받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보통 한국에서는 '이 공연이 잘 만들어졌으니 해외화를 해볼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반면 우리는 에든버러에 있는 극장에 공연을 올리기 위해 처음부터 해외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 차별화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해외 극장에 올릴 생각으로 극을 만들면 시야와 콘텐츠 자체가 달라진다"며 "이럴 경우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부산과 서울에 브러쉬 씨어터 전용관을 만든 이유도 이러한 이 대표의 공연 철학과 맞닿아 있다. 전용관은 해외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뿐 아니라 직접 만든 공연들을 고도화시키고, 해외 진출을 위한 적절한 수준까지 도달하게 하는 역할도 포함한다. 이와 함께 각각의 카페가 저마다 다른 분위기와 서비스를 제공하듯, 브러쉬 씨어터의 공연 역시 콘텐츠를 담고 있는 그릇까지 다르게 만들어 해외에 선보이겠다는 포부도 담고 있다.그렇다면 이 대표가 생각하는 브러쉬 씨어터의 경쟁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작품을 직접 창작·제작하는 것으로, 이는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해외시장에 대한 문턱을 낮췄다는 것에 있다. 수많은 나라에서 공연을 진행하며 해외를 넘나드는 데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세 번째는 기술력이다. 언어와 연기력보다 시각적·청각적인 기술 요소들을 강하게 보여주는 극의 특성상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이 좋아하는 지점들을 찾아 나갈 수 있다. 결국 브러쉬 씨어터의 경쟁력은 공연예술계가 어려움을 겪었던 팬데믹때 과감한 도전으로 수익을 올리고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됐다. 이 대표는 회사의 규모를 줄이기보다 전투적으로 공연 알리기에 나섰고, 비어 있는 극장이 있다면 위험성을 안고서라도 공연을 진행했다. 이는 팬데믹이 끝나가자 극장에 대한 진입을 한층 더 수월하게 만들었고, 티켓 수익을 늘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도 브러쉬 씨어터의 가장 큰 수익은 '티켓'이다. 공연을 본 사람들이 다시 브러쉬 씨어터의 공연을 찾게 되는 구조로 연결된 셈이다.브러쉬 씨어터는 경기도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경기문화재단 공연장상주단체 지원사업으로 선정돼 오산문화예술회관과 함께하고 있는 것. 이 지원사업은 공공 공연장과 협약을 맺고 공연장에 상주하면서 안정적인 창작 활동 공간을 확보하며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 또 상주단체를 유치한 공연장은 공연 레퍼토리를 확대할 수 있고 우수한 공공 예술 프로그램으로 공연장을 활성화할 수 있는 일종의 윈윈사업이다. 이 대표는 "오산에는 소극장과 대극장이 있는데 이곳을 활용해 공연을 만들어 올려볼 수 있다"며 "두들팝과 폴리팝은 물론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두들팝3도 초연을 모두 오산에서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외에도 그런 상주 단체의 개념들이 있는데, 뭔가를 본격적으로 올리기 전에 지역 사람들과 먼저 만나고 피드백도 받는다"며 "상주단체 관련 예산은 점점 줄고 있긴 하지만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역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브러쉬 씨어터는 실험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팬층이 있기 때문에 수익성과 함께 객석 점유율과 공연장 가동률을 높이는 데도 힘을 보태고 있다"고 덧붙였다.브러쉬 씨어터는 '판'을 바꾸고 싶다. 브러쉬 씨어터만이 할 수 있는 공연으로 말이다. "이제는 예술이냐 상업이냐의 이분법적 논리는 끝이 났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독특하게 가져가며 세계적으로 승부가 가능한 콘텐츠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러한 인식과 산업에 대한 비전을 통해 또 다른 후배 기업들이 나오길 바라고 있습니다."글/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 사진/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이길준 대표는?▲2015년~ 현 브러쉬 씨어터 유한책임회사 대표 ▲2018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ASIAN ARTS AWARD -BEST COMEDY ▲2018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가디언지 선정 베스트쇼 ▲201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 ThreeWeeks Editors' Awards ▲2019년 KOCCA 한국 콘텐츠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2020년 USA IPAY SHOWCASE 2020 OFFICIAL SELECTION ▲2023년 예술경영대상 :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상 ▲2023년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연극제 : 최고 작품상 수상 외 다수'브러쉬 씨어터(유)'는 두들팝과 폴리팝 등 기술력을 접목시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색다른 무대로 국내 뿐 아니라 해외 관객들까지 사로잡은 K-아동극으로 성장했다. 브러쉬 씨어터 이길준 대표가 서울에 위치한 사무실 앞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두들팝 공연 장면. /브러쉬 씨어터(유) 제공두들팝 공연 장면. /브러쉬 씨어터(유) 제공폴리팝 공연 장면. /브러쉬 씨어터(유) 제공
"애타게 기다리는 어르신 뵈면 먹먹" 매달 2회씩 반찬·생필품 직접 배달응급 방문 요청땐 일 멈추고 달려가중학생들 이끌고 동네 환경정화도"앞을 못보는 어르신이 문을 열어놓고 자원봉사자를 애타게 기다리다 눈물로 맞이해 주실 때는 가슴이 먹먹합니다."시흥시 신현동자원봉사센터 차량봉사방문대장을 맡고 있는 정미순(49)씨는 봉사자들 사이에 '정 장군'으로 불린다. 키가 상대적으로 크기도 하지만 배달봉사를 하면서 남성 이상으로 억척스럽게 솔선수범해서 붙여진 애칭이다.정씨는 2009년 이사하면서 시흥과 인연을 맺었다. 처음에는 큰 아들이 다니던 포동초등학교 학부모회에서 이런저런 봉사를 하다 2015년 시흥시자원봉사회 신현동 센터장인 한승재 회장의 권유로 지역사회 봉사에 뛰어들었다.신현동은 미산동·포동·방산동 등 3개 법정동으로 구성돼 시흥지역내 다른 동과 달리 구역이 넓은 곳이다. 정씨는 신현동자원봉사센터의 차량봉사단장을 맡고 있다. 매년 4월 중순에 센터 주관으로 여는 바자회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지역내 65세 이상 독거노인과 취약계층 노인 및 돌봄아동가정 등에 매월 첫째·셋째주 금요일 2회씩 반찬과 생필품 등을 준비해 직접 배달봉사를 책임지고 있다. 총 15명이 6개조로 나눠 직접 대상 가정을 방문해 정성껏 준비한 물품들을 전달하고 사람이 그리운 어르신들과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며 건강상태와 민원들을 챙긴다.현재 60여 명의 어르신들과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 이따금씩 두부나 계란 등 후원물품이 들어오면 별도로 방문해 챙겨주고 심지어 화장실 변기가 막히거나 거동이 불편해 쓰레기 처리를 못해 응급 방문 봉사를 요청할 때는 직장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가기도 한다.정씨는 또한 매월 둘째·넷째주 화요일에 지역내 미용 재능기부자들이 마련한 이·미용 봉사에 100명이 넘는 어르신들을 일일이 차량으로 모셔오고 있고, 이마저도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미용봉사자들과 함께 직접 가정 방문해 머리손질을 해드리고 있다. 매년 11월 중순 신현동 지역 민간단체들이 합동으로 김장을 담그면 정씨가 이끄는 차량봉사방문대(차방대) 대원들이 10㎏ 한 박스씩 100가정이 넘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일일이 배달해주고 있다.정씨의 봉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신현동 학생봉사단장을 자원해 매월 둘째주 토요일에 중학생들을 이끌고 동네 쓰레기 청소를 한다. 또 친환경 흙공을 만들어 하천정화에 나서는가 하면 학생들이 만든 케이크를 경로당에 전달하고, 친환경 시설들을 견학시키는 등 봉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있다.정씨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로서 저에게 주어진 소명이라 생각한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봉사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시흥/김성규기자 seongkyu@kyeongin.com
[인터뷰…공감] '향상된 동물복지' 진심 다하는 허주형 대한수의사회장 60년간 동물 보호문화 확산에도 관련 법안은 사실상 '입법 지체'질병들 초기 진압할 진료권 확보·농장 주치의 등 제도 도입 절실업계 목소리 반영에 힘쓸것… 제대로 된 인식변화·정착에 최선을"동네에 전염병이 돌더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시름시름 앓더라고요. 급하게 자전거에 태워 읍내 가축병원에 갔더니 원장님이 다급하게 말해요. 빨리 가서 죽기 전에 잡아먹으라고. 그때는 그랬어요."인천시수의사회장을 거쳐 2만3천여명의 수의사를 대표하는 허주형(58) 대한수의사회장은 처음 수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유년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허주형 회장은 대한수의사회 설립 72년 만인 2020년 첫 직선제 회장으로 선출된 뒤 지난해 재선 임기를 시작했다. 허주형 회장이 어릴 적에는 아픈 동물을 데려가는 곳은 '동물(動物) 병원'이 아닌 '가축(家畜) 병원'이었다. 가축병원은 주로 농가에서 키우는 소, 돼지, 닭 등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곳이었다. 지금처럼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집안에서 기르는 동물을 치료하는 동물병원과는 그 역할과 기능이 조금 달랐다.1970~1990년대 시골 마을에는 개 전염병이 수시로 돌았다. 개 전염병은 2000년대 들어서 병원 예방접종이 보편화하고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만연했었다. 그때마다 집에서 키우던 개들은 제대로 된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개를 치료하기 위해 돈을 내고 약을 받거나 주사를 놓는다는 인식이 없었으니 가축병원에서도 "잡아먹으라"는 처방이 최선이었다. "집에 데려온 강아지에게 이것저것 줬더니 다른 건 못 먹어도 우유는 곧잘 먹더라고요. 밤낮을 들여다보면서 보살피니 기력을 찾았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적부터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총 18년간 함께했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웠던 경험은 수의사의 길을 걷는 데 많은 영향을줬습니다." 동물에 대한 관심이 유독 컸던 배경에는 시대를 앞서간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카투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평소 미군들이 강아지를 친구, 가족으로 여기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미군은 한국 개 식용 문화에 놀라워하면서 한국인 직원들에게 "개는 먹는 게 아니라 친구, 가족"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개고기로 만든 보신탕은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명절, 동네 행사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허주형 회장네는 예외였다. 반세기 전에도 개고기 소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온도차가 있었으니 개 식용이 법적으로 금지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허주형 회장은 정부의 개 식용 금지 방침 통과를 두고 "문화에 비해 제도가 다소 늦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국회는 지난 9일 본회의에서 식용을 목적으로 개를 사육·증식하거나 도살하는 행위, 개나 개를 원료로 조리·가공한 식품을 유통·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특별법 제정안을 통과시켰다. 아시아권 국가에 만연했던 개 식용 문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 대만 등 곳곳에서 사라졌다.그에 비해 한국은 반려동물, 동물보호 문화가 빠르게 확산됐으나 관련 법안은 마련되지 않아 사실상 '입법 지체'에 놓였던 셈이다."시대적으로도 개 식용을 금지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히 갖춰졌습니다. 오히려 법 제정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시민문화가 성숙하면서 우리 사회는 법 제정에 앞서 일찍 개 식용을 멀리하게 됐습니다. 의식이 법을 앞서간 것이죠."이처럼 동물복지·동물권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돼야 할 사항이 많다는 게 허주형 회장 설명이다. 동물·가축 전염병 관리체계에서 수의사의 공적 역할을 제한하면서 대규모 '재난형 전염병'이 반복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근에도 전국 농가에 럼피스킨(LSD),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조류독감(AI) 등 동물전염병이 발생했다. 일본·대만 등 인접 국가에서 더 이상 구제역과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는 모습과 대조된다. 현재 동물 전염병은 농장주가 신고하고, 수의사가 진단해 정부에 전염병을 신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전염병 확산 차단을 위한 백신 접종은 사육 동물이 일정 규모 이상되면 농장주가 맡는다.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 정부는 효율적 방역이라는 이유로 한꺼번에 많은 동물을 살처분한다. 허주형 회장은 수의사 등 전문 인력이 지역 대규모 전염병을 초기에 차단할 수 있도록 '수의사 진료권 확보' '농장주치의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전 세계적으로 한 국가에서 이렇게 많은 재난형 전염병이 퍼지는 곳은 한국이 유일합니다. 전염병 관리의 핵심은 차단과 방역에 있습니다. 수의사는 동물을 볼 때 '어디가 아플까' 유심히 보지만, 농장주는 '잘 크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니 질병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 진단과 검사, 치료 권한이 수의사에게 있어야 합니다." 허주형 회장은 동물감염병 대응 등 공공분야에서 수의사들이 충분히 유입되도록 전담업무 전문성 강화, 처우 개선 등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지방자치단체는 물론이고 질병관리청 등 동물감염병 대응이나 관련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현장에서도 좀처럼 수의사를 찾기 힘들다. 허주형 회장은 수의사 구인난이 열악한 처우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있다. 허주형 회장은 "시·도에 수의사들이 7급으로 들어가는데, 소수 직렬이다 보니 승진 자리가 없어서 30년 근무하고도 6급으로 나온다"며 "공공에 많은 수의사가 자리 잡고 있어야 축산 등 여러 분야 정책 발굴은 물론, 감염병 대응에도 발 빠르게 대처하는데 처우가 열악하니 다들 기피한다"고 설명했다.현재 2만3천여명의 수의사 중 현장에서 활동하는 수의사는 1만5천명 정도다. 이 중 6천여명이 동물병원에서 임상수의사로 근무하고 나머지는 민간기업에서 의약품·백신·바이오·유전공학 연구·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질병관리청, 지자체 등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인력은 일부에 불과하다.허주형 회장은 남은 임기 정부 입법에 수의사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힘쓰는 것은 물론 동물복지를 한층 더 끌어올리기 위해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동물복지가 이뤄진 국가에서 사람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허주형 회장은 인천시수의사회장 재임 시절 계양구에 유기동물 보호소를 설립하면서 버려진 동물 입양 활성화 인식을 개선하는 일에 힘쓰기도 했다. 당시 보호소에 있었던 유기견 모모·몽실이·준이와는 10년 넘게 가족으로 함께하고 있다."동물을 어떻게 보호하고 키울지, 동물과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동물을 바라보는 이 같은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를 위해 수의사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겠습니다."글/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허주형 대한수의사회장은?▲1966년 경상남도 사천 출생 ▲1991년 경상대학교 수의학과 학사 졸업 ▲1991~1993 경상대 대학원 석사 ▲2002~2011 경상대 대학원 박사 ▲2004~2014 인천시수의사회장 ▲2008 제25대 대한수의사회 부회장 ▲2014~2017 세계수의사회 아시아 오세아니아 집행이사 ▲2014 한국동물병원협회 회장 ▲2020.3~ 제26·27대 대한수의사회장허주형 대한수의사회장이 지난달 29일 경기 성남에 있는 대한수의사회 사무실에 앉아 인터뷰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통장·바리스타·제빵사·노인회장… 오산 '팔방미인' 후배들과 모교 삼미초교 벽화그리기매년 경로행사 공연 소외이웃에 희망"주변 함께할 사람많아 소중한 행복"경기도청에서 존경받는 공무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퇴직 공무원이 고향에서 왕성한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공동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화제의 주인공은 구리시 부시장으로 공직을 마친 김태한(70) 전 경제과학진흥원 경영관리본부장이다. 재임 중엔 소각장, 환경, 한강 물관리 등의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이에 후배 공직자들과 당시 김문수 도지사의 신임이 두터웠다.현재 김 전 부시장의 공식 직함은 오산시 세마동 통장이자 바리스타, 제과제빵사, 노인회장, 영농회장 등이다.공직을 마친 김 전 부시장은 고향인 오산시 세마동으로 귀향했다. 처음엔 고향 사람들을 몰라 지역 어르신들의 권유로 이장을 맡아 주민들의 심부름꾼으로 봉사활동을 펼쳤다. 화성시 팔탄에 '초록농부농장'을 만들어 도시농업을 통한 전원생활도 시작했다. 이후 통장 겸 노인회 총무를 거쳐 현재는 외삼미동 노인회장과 영농회장으로 노인복지에 기여하고 있다.주민화합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벽화사업을 추진하며 애향심을 키우고 환경개선에도 기여하고 있다. 재능을 살려 모교인 삼미초교 담장 벽화그리기에 나서 어린이와 노인 등 44명이 참여하는 대작을 만들었다. 경로당 개념도 바꿨다. 음주나 화투놀이가 아닌 삼미청춘학당으로 개편해 그림그리기, 실로폰연주회, 가구공방, 뜨개질 등을 통해 마을 공동체 형성에 이바지하고 있다. 우쿨렐레 모임인 '세마렐레' 연주단과 '올드보이화이어'라는 합창단을 창단해 매년 경로행사와 연계한 공연 등 깊이 있는 봉사도 펼쳐 지역사회의 외롭고 소외된 이웃에게 희망을 밝히고 있다.매주 2~3일간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오산 시니어클럽에도 출격해 제과제빵 및 바리스타로서 활동하고 있다. 커피를 만들고 빵을 구워내 손님을 대접하며 생기는 수익금을 다시 노인복지에 쓰고 있다. 이제 주변의 어르신들은 노인회장인 김 전 부시장의 의견에는 무조건 따를 정도로 신뢰가 높다.김 전 부시장은 오늘도 시니어클럽인 '손수' 매장에서 커피와 빵을 준비한다. 매장에서는 청년이 되고 젊은 노인회장의 역할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한다. 배려와 이웃 존중정신이 몸에 밴 그는 "나이들면 건강이 우선이고 주변에 함께할 사람이 많은 이가 행복하다"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고 남을 위하는 긍정의 생각과 현장활동, 몸을 쓰는 하루하루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말했다.공직에서 모범생이었던 김 전 부시장은 퇴직 이후에도 그 성품과 공직경험을 살려서 고령화를 걷는 지역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장년으로서의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후배 공직자들이 많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어 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면서 "공무원은 기본적으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자신이 속한 시·군, 경기도, 그리고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라는 자긍심을 바탕으로 일해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오산/김학석기자 marskim@kyeongin.com김태한 전 구리시 부시장이 오산 시니어클럽 '손수'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2024.2.5 오산/김학석기자 marskim@kyeongin.com
市, 인허가 '규제'를 '상생'으로 허가과 신설, 개발·농지·산지전용 한번에실무심의, 대면→온라인 14일서 5일 내외로관련 부서간 협업회의로 업무 내용 '공유'제출서류, 한 부서 접수·통보로 효율성 UP도시계획심의 月 1→2회 등 처리 5일여 단축상담공간 '웰컴 스테이지'로 민원인 배려관내 측량업체 수시로 찾아가는 간담회도규제개혁 행정서비스 차별화로 성과 기대규제개혁은 이제 모든 정부의 핵심과제로 자리 잡았다. 규제를 '전봇대'나 '손톱 밑 가시', '신발 속 돌멩이'로 규정해 뽑아내야 할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말 규제혁신 성과를 발표하면서 "출범 후 1천600여 건 규제개혁 법령 개정이 완료돼 101조원의 경제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인허가도 규제다. 농지, 산지에 농가주택을 지으려면 전용허가와 건축허가를 받아야 하고, 공장을 세우려면 공장 등록을 해야 한다. 그러나 관공서의 민원 창구에서 인허가를 신청하고 승인을 받는 과정은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여주시는 그 이유를 인허가 행정의 편의성과 신속성에서 찾았다. 인허가가 주민의 생활뿐만 아니라 지역경제와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인식한 여주시는 절차 간소화, 부서 간 협업, 인허가 품질 평가, 친절교육 등 다양한 개선책을 마련해 인허가 행정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다.#사례1: 국내 최초로 PE 재질의 무독성 랩을 개발한 주방용품 전문 제조업체인 (주)크린랲은 사업 확장을 위해 여주 흥천면의 가축사육 부지에 새 공장과 창고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환경문제와 진입로 등 여러 가지 걸림돌이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공장 설립에 필요한 인허가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여주시청 허가과를 방문한 크린랲 담당자는 직원들의 환대에 깜짝 놀랐다. 시는 기업의 입장에서 공장 설립뿐만 아니라 개발행위허가, 환경배출시설 등 관련된 민원 사무까지 담당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러 부서를 방문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수고와 불편을 던 것이다. 시의 빠른 행정 서비스로 크린랲은 공장 부지 탐색을 위한 외부 컨설팅 비용까지 절감할 수 있었다. 2023년 2월 시는 크린랲 본사 이전 및 공장, 창고 조성을 위한 산업유통형 지구단위계획(면적 4만6천509㎡) 개발계획 결정고시를 완료했고, 크린랲은 지난해 4월 여주시와 2026년까지 500억원을 투자해 생산공장 및 물류시설 건립 추진을 위한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크린랲 관계자는 "이번 여주시와의 협력을 통해 생산 및 물류시설을 확장해 생산과 물류거점을 확대하고 나아가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쁘다"며 "앞으로 지역사회의 환경을 개선하는 신산업단지 조성으로 기업과 지역사회가 상호 협력 가능한 새로운 상생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사례2: "예전에는 집 하나 지으려고 허가받는 데만 6개월 이상 걸렸어요. 뭐가 안 된다, 또 이게 문제라며 민원인의 신청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허가 부서의 일반적인 태도였어요. 지금은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게다가 절차나 기능으로 업무를 구분해 처리하는 방식에서 지역 담당제로 바뀐 덕에 담당자들이 상담부터 허가까지 책임감 있게 하나하나 다 챙겨줍니다. 진행과정도 문자나 전화로 수시로 알려 주고요." 오랫동안 지역에서 건축사업을 해온 A씨는 지난해 7월 강천면에 전원주택을 지으면서 인허가 부서의 전과 다른 태도에 달라진 행정서비스를 실감했다. 지난해 개발행위허가가 신청에서 보완기간까지 포함해 2주일 만에 나온 데다, 건축신고도 신청에서 허가까지 일주일에 끝났기 때문이다. 모든 개발행위에서 건축허가까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저희 같은 업자들에게는 시간이 곧 돈입니다. 건축주도 계획보다 빨리 입주하게 돼 이사 걱정을 덜었다고 고마워하더라고요."■ 대면에서 온라인 접수, 온라인 사전심의로시는 지난해 1월 개발행위허가, 농지전용허가, 산지전용허가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3개 팀으로 구성된 허가과를 신설했다. 인허가 같은 복합 민원의 경우 일일이 여러 해당 부서를 방문해야 했던 불편을 덜고 민원인의 입장에서 한 곳에서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먼저 인허가를 위한 민원 실무심의 절차를 기존에 대면 방식에서 온라인 방식으로 전격 전환했다. 평균 2주가 걸리던 심의 기간이 평균 5일 내외로 줄었다. 또한 올해부터는 개발행위허가를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통합인허가지원서비스(IPSS)를 시행한다. 민원인이 시청을 방문해 인허가를 신청했던 이전과 달리 개발행위허가 신청에서 사전심의를 통한 인허가 가능성 여부까지 온라인에서 가능해진다. 관련 정보의 이력 관리 및 문자발송 서비스를 통해 진행과정도 신속하게 제공받아 투명성도 기할 수 있다. → 그래프 참조■ 부서 간 협업으로 효율과 신속성 높여인허가 업무는 특성상 법적으로 검토할 사항이 많다. 당연히 거쳐야 하는 관련 부서도 많다. 따라서 이들 부서를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은 물론 부서 간 공문을 주고받는 절차가 있어 신속행정의 걸림돌이 돼 왔다. 때로는 부서 간 민원 떠넘기기로 비쳐 민원인과 시비가 되기도 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여주시는 건축, 도로, 교통, 환경 등 관련 부서 간 협업회의를 통해 업무 내용을 공유하고 추진방향을 수립해 인허가 업무의 효율과 신속성을 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소관이 불분명한 업무의 처리 부서를 신속하게 지정하는 등 운영의 유연성도 높였다. 또 개발행위의 경우 도로점용과 교통성 검토 등 여러 부서에 중복으로 제출되는 서류가 많아 민원인의 불만이 컸다. 시는 이를 한 부서에서 접수하고 관련 부서에 통보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꾸었다. 14일이 걸리는 개발행위 인허가 준공과 건축물 준공검사는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기준 마련과 도시계획심의는 월 1회에서 2회로 늘렸고, 자료제출 기한도 20일 전에서 14일 전까지로 단축했다. 이런 노력 끝에 실무심의 및 서류보완 등을 포함하여 법정 개발행위허가 처리 기한이 15일에서 10일 안팎으로 줄었다.■ 민원인 중심의 업무 환경 개선행정효율을 높이려는 노력과 병행해 민원인의 부담을 덜어주는 조치도 눈에 띈다. 시는 허가과를 방문하는 민원인을 편안하게 응대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 위해 출입구에 '웰컴 스테이지'라는 상담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테이블에는 상담 전용 대형 컴퓨터도 설치하고 인허가 민원의 절차와 필요한 서류를 안내하는 리플릿도 제작 비치했다. 민원인의 이해와 편의를 돕기 위한 배려였다. 관내 측량업체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간담회도 수시로 가졌다. 민원대행업체 및 민원인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한편 여기서 취합된 의견은 내부 검토를 거쳐 자료 간소화 및 수리계산 기준 완화 요청의 근거가 돼 도시계획심의위원회의 심의에 상정된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만족도 평가를 추진한다. 중앙정부는 물론 많은 지자체가 심의나 허가 등 행정 절차 간소화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여주시의 규제개혁 사례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행정서비스인가라는 질문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규제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바라는 곳을 지향할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여주시가 어떤 성과를 거둘지 다음 변화가 기대된다. 여주/양동민기자 coa007@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지난해 4월6일 이충우 시장과 이준혁 (주)크린랲 부사장이 투자협약을 체결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여주시 제공지난해 8월 이충우 여주시장과 원상연 (주)성우모터스 대표이사는 약 1천500억원 규모의 투자의향서를 체결했다. /여주시 제공여주시는 허가과를 방문하는 민원인을 편안하게 응대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 위해 출입구에 '웰컴 스테이지'라는 상담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다. 웰컴스테이지에 자리한 허가과 직원들. 2024.2.2 여주/양동민기자 coa007@kyeongin.com
영혼까지도 갉아먹는 아픔… 법, 마지막호소에 응답하라 대기업부터 복지시설까지 어디서든 발생관련법 시행 5년 되어가지만 피해는 여전노동부 접수 2만6955건중 검찰송치 475건'보복성 부당대우' 인정돼야 징역·벌금형'객관적 기준' 추가 조항 등 법개정 필요"고인께선 생전 직장 내 괴롭힘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한마디도 안 하셨습니다."지난해 10월 4일 인천에서 장애인 인권운동에 힘써온 김경현 사회복지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연수구 한 장애인지원기관에 입사한 지 불과 11개월만의 일이었다. 김씨가 1년 가까이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그녀가 스마트폰에 남긴 유서가 발견되고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유서엔 해당 기관 대표이사와 부대표가 김씨의 업무 미흡을 입증한다는 명분으로 동의 없이 불법 녹취와 촬영을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통화는 5분 내로 하라고 명령하는 등 업무상 부당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김씨가 회사를 비방해 징계를 주겠다는 협박성 발언과 함께 지속적으로 퇴사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씨는 누구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지난달 24일엔 삼성바이오로직스(이하 삼바)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다는 사실이 고용노동부 근로감독 결과 드러났다. 노동부는 삼바 내 폭언·욕설·성희롱, 연장근로 한도 초과 등 노동관계법 위반사항을 입증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동부 설문조사에선 응답자 751명 중 417명(55.5%)이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 등을 직접 당하거나 동료가 당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직장 내 괴롭힘은 대기업부터 복지시설까지 규모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직장 내 괴롭힘은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은 가해자의 문제행위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면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업무 능력이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 업무와 상관없는 비난과 조롱, 다른 사람들 앞이나 온라인상에서 모욕감을 주는 언행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노동부는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시행했다. 당시 직장 내 괴롭힘이 연이어 발생해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시기였다. 2014년 대한항공 오너 일가가 이륙 준비 중인 비행기를 땅콩 서비스 문제로 회항시킨 사건, 2017년 한림대성신병원 간호사들이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병원 장기자랑에 동원돼 선정적인 춤을 추도록 강요받은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관련법이 시행된 지 5년이 되어가지만 직장 내 괴롭힘 피해는 여전하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을 돕는 민간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9월 전국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난 1년 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36%에 달했다. 괴롭힘 유형은 ▲모욕·명예훼손(22.2%) ▲부당지시(20.8%) ▲폭행·폭언(17.2%) 순이었다.직장 내 괴롭힘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전문가들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노동부가 근로기준법 개정 이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접수한 사건은 지난해 4월 기준 2만6천955건이다. 이 중 근로감독관의 실제 조사·수사를 통한 개선 지도, 과태료 부과 등으로 이어진 사건은 3천120건(11.6%)에 불과하다.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검찰 송치는 475건(1.8%)에 그쳤다.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직장 내 괴롭힘 혐의가 검찰 송치까지 이어지기 힘든 이유는 근로기준법상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신고자에 대해 '보복성 부당대우'를 했을 때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보복성 부당대우가 인정될 경우 가해자는 3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 벌금을 선고받을 수 있다. 그 외에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직접적인 협박과 모욕, 폭행을 당하면 근로기준법이 아닌 형법에 따라 경찰에 고소해야만 형사처벌이 가능하다.김기홍 노무법인 돌꽃 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어겨도 가해자가 받는 처벌은 과태료 부과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가해자들 입장에선 처벌 자체가 약하다 보니 두려움 없이 괴롭힘을 행하는 것"이라며 "결국 직장 내 괴롭힘을 해결하려면 일차적으로 징벌 정도를 높여야 하고, 직장 내 괴롭힘도 다른 범죄와 같이 형사처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전문가들은 법적인 제도 정비뿐만 아니라 사회·조직문화 개선의 필요성도 강조했다.이승길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관련법이 있음에도 발생 건수가 줄어들지 않는 건 사람들이 괴롭힘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희롱 예방교육처럼 의무적으로 괴롭힘 예방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며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도 필요하지만,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추가 조항 등 관련법 개정도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정혜선 가톨릭대학교 보건의료경영대학원 교수는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 안에서 이뤄지는 데다, 관련법이 있어도 불이익 등을 우려해 피해 사례가 밖으로 노출되기 힘든 구조"라며 "현재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근로기준법에, 관련 교육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돼 있다. 이원화된 법을 개선하고, 피해 예방을 위한 예산·인력·시설 등을 갖추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조항도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 그래프 참조 /이상우기자 beewoo@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직장 내 괴롭힘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김경현씨의 유족이 업체 진상규명 처벌 촉구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