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전문 경영인 나명석(58·사진) 자담치킨 회장은 1965년 인천 숭의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동 건설 현장을 다녀온 외삼촌이 선물한 카메라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인생이었다. 꿋꿋이 이겨냈다. 나 회장이 이끄는 자담치킨은 2011년 처음 시작해 현재 전국 720여개 매장을 거느린 국내에서 손꼽히는 치킨 브랜드로 성장했다.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의 요구를 공략해 동물복지인증 닭, 히말라야 소금, 견과류가 들어간 파우더 등 '착한 이미지'를 내세운 전략이 먹혔다. 프랜차이즈 자담치킨 전문경영인"세상 깨우치게한 고향이 고맙다"그는 효열초등학교·선인중·선인고에서 공부했다. 어린 시절 꿈은 사진가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사진기를 마치 분신처럼 끼고 살았다. 선인고 재학시절에는 교내 독수리 사진반에서 활동했다. 동아리에서 좋은 선배들을 만났고 더 깊이 있게 사진을 공부할 수 있었다. 사진기를 들고 다니던 10대의 나명석은 인천의 골목골목을 누구보다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래서 또래보다 일찍 세상에 눈을 떴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좋아했던 그는 '사라지는 것'을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 카메라를 들었다.대학에 진학해서도 사진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스승의 권유로 시사 주간지 '시사저널'에 창간 멤버로 입사해 10년 가까이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10년 가까이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굵직한 특종도 몇 차례 남겼다. 외환위기 시절인 1998년 구조조정의 한파를 겪으며 스스로 회사를 나와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전문 월간지를 만들었고 돈가스, 칼국수, 삼겹살 등 분야 프랜차이즈 브랜드도 직접 운영했다. 실패를 거듭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의 결과였다. 캐나다로 건너가 "닥치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 팔아 어렵게 재기했다. 이런 경험이 지금의 자담치킨을 일궈냈다.나명석 회장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사람을 얻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며 "세상을 일찍 깨우치게 해 준 인천이 고맙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11면([아임 프롬 인천·(13)] 위기의 순간 만난 기회, 700개 매장 브랜드 성장기)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꼭 고향 덕을 봐야 하나요. 주는 게 없어도 언제나 소중한 고향 아니겠습니까."사라질 풍경 담아내기 좋아해공설운동장·극장·시장에 포커스선인고 독수리 사진반서 실력 두각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은 평소 고향 '인천' 이야기를 자주 하느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고 싶다"면서 "인천을 말하지도 않지만 피하지도 않는다. 고향 인천 덕을 본 것도 없지만, 손해를 본 것도 없다. 고향에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중요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에는 고향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이도 많다. 주는 게 없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소중한 고향이 인천"이라고 덧붙였다. 나명석 회장은 그러면서도 "학창시절 인천 곳곳의 풍경과 사람을 필름에 담아내곤 했는데, 일찍 세상을 깨우쳐 준 도시가 인천"이라고 강조했다.유명 프랜차이즈 치킨 브랜드를 이끄는 경영인이 갑자기 '사진'을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 회장은 경영인이 되기 전 사진기자로 10년간 활동한 이력이 있다.나명석 회장은 1965년 인천 숭의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의상실을 하는 어머니와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4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그가 기억하는 어릴 적 인천 풍경을 들으면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려진다."어릴 때 숭의동 하면 지금은 사라진 공설운동장이 먼저 떠오르네요. 공설운동장 앞에는 도원극장이 있었고 그 앞에 숭의시장, 전도관 등이 있었어요. 가슴에 좌판을 걸고 '요깡'을 파는 이들도 있었고요. 데이트하는 어른들 손을 붙잡고 아는 척하며 공짜 영화 관람을 하기도 했고요."나 회장의 기억 속 풍경 가운데 공교롭게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공설운동장, 극장, 시장, 전도관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나 회장은 사진을 좋아했다. 사라질 것 같은 것들을 필름에 담아내는 일이 특히 좋았다고 한다. 나 회장이 사진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9년이다. 외삼촌이 선물로 '야시카35'라는 일제 카메라를 선물로 줬다. 1970년대 한국에는 '중동 붐'이 일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등 중동 국가들은 건설 프로젝트를 발주했고 한국 기업에는 큰 기회였다. 건설사들이 중동에 진출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필름을 끼우고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인화하면 사진으로 나오고,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 없었어요. 카메라를 거의 매일 붙들고 살았죠."사진 취미는 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뺑뺑이'로 입학한 선인고에 독수리 사진반이 있었다."'이 동아리는 나하고 딱 맞는구나'.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사진반에 들어갔어요. 24시간 카메라를 몸에서 떼어 놓지 못했어요. 책은 안 가지고 다녀도 카메라는 꼭 가방에 넣어 다녔으니까요. 그때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독수리 사진반은 유명하다. 최광호, 정주하 등 유명 사진작가들이 바로 이 독수리 사진반 출신이며 언론사 사진기자들도 배출했다. 최광호 작가가 처음으로 동아리를 만든 1기 선배였는데 후배들은 최광호 작가의 작업실을 동아리방처럼 들락거렸다고 한다.독수리 사진반 시절 나명석 회장은 각종 사진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상도 참 많이 받았다고 했다. 중앙일보 사진콘테스트나 서울예전 대회, 인천시 시민의 날 사진대회 등 상을 휩쓸었다.빠르게 변하던 시절… 담아내고 싶었죠"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시는 사라지는 것이 너무 많았죠.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을 많이 찍었습니다."당시 국내 사진교육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형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전문 서적을 감상했다.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에 많이 끌렸다. 졸업하고도 학교를 찾아오는 독수리 사진반 선배들과 함께 미국문화원, 독일문화원을 가서 '원서'를 보고 전문 서점을 찾아가 작품집을 구경했다. 당시 인천에는 사진 전문 서적을 갖고 있는 곳도 파는 곳도 없었다고 기억했다.다큐멘터리 사진 쫓던 고3 시절사진과 진학했지만 기대 같지 않아조선일보 기자 출신 강운구 교수 제안에시사저널 창간멤버로 일 시작나 회장은 다큐멘터리 장르 사진을 좋아했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가들이 활동한 '매그넘 포토스' 그룹 작가들의 사진에 크게 매력을 느꼈다. 20세기 사진사(史)에 이름을 남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 로버트 카파(1913~1954), 데이비드 시무어(1911~1956), 조지 로저(1908~1995) 등이 설립한 단체다.사진을 좋아하니 대학도 중앙대 사진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진학은 누구보다 수월했다. 여느 평범한 학생들처럼 고3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공부는 썩 잘했고요. 사진과는 실기 비중이 높았는데 사진반 활동하는 1·2학년 동안 상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어요. 정규 수업만 마치고 나면 동아리 방에서 지냈어요. 면접 때 수상작 위주로 구성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갔는데, 중앙대 교수 한 분이 사진을 보며 심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사진과에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이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사진 지식과 실력만큼은 앞서 있다고 자부한 그에게 동아리 수준의 대학 수업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보사 사진기자로 잠깐 활동하며 학교에 정을 붙일 수 있었는데 1년만 다니고 입대했다. 제대 후 휴학 연장을 고민했는데, 형들의 만류로 복학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광고사진 전문가 김영수 교수, 조선일보·동아일보 사진기자 출신 강운구 교수 등의 수업이 만족스러웠다. 대학 시절은 강운구 교수의 조수처럼 시간을 보냈다.어느 날 강운구 교수가 "한국에도 미국의 타임, 뉴스위크 같은 시사주간지가 생기는데 사진기자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나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찾아가 면접에 임했다. 사진기자 채용 면접이 2주 전에 끝난 상태였지만 결국 합격해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일을 시작했다. 시사저널은 그에게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된다.주간지 사진은 슬라이드 필름 써야노출 다루는 고도의 기술 요하는 작업출장 중에 1995년 대구지하철 폭발전국 모든 일간지·방송에 사진 제공흑백 사진을 쓰는 신문사와 달리 고급 시사주간지에 쓸 사진을 만드는 일은 부담이 컸다. 신문 사진은 흑백이어서 기술적으로 모자라도 순발력만 있으면 좋은 사진을 만들 수 있었는데, 주간지 사진은 컬러에 '슬라이드' 필름을 사용해야 했다. 일반 네거티브 필름과 달리 슬라이드 필름은 노출이 조금만 과하거나 부족해도 사진이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기술력과 순발력을 모두 갖춰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운이 좋게도 특종을 참 많이 했다"고 말했다.대표적 특종이 1995년 대구지하철 공사현장 폭발 사고였다. 사망자 100여 명, 부상자 200여 명에 이르는 초대형 참사였다. 도시가스가 누출되며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복공판과 공사 자재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시민들과 자동차가 건물 3~4층 높이만큼 튀어 오른 후 한꺼번에 떨어진 비극적 사고였다."대구 출장 중이었어요.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2명 사망'이라는 자막이 TV에 뜨는 겁니다. 동행한 운전기사 형님이 폭발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죠."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끔찍한 현장이었다. 사망자 시신이 공사 자재와 뒤엉켜 있었고 신음하는 이도 많았다. 자상, 관통상 등 처참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주간지여서 당장 지면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편집국장이 다른 언론사에 사진을 제공하기로 결정하면서 전국 모든 일간지와 방송이 모두 나명석 기자의 바이라인과 함께 사진을 썼다.사이비 종교 현장 잠입해 필름 포착전국민 공분 '전두환 부부 호화 휴가'호텔 직원들이 동선 알려준 에피소드"1992년 10월28일 휴거가 일어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 사이비 종교 다미선교회에 신도로 1주일 넘게 잠입해 생생한 현장을 필름에 포착했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내려와 제주도에서 '호화 휴가'를 즐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환한 얼굴과 웃는 모습을 포착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사진도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특종 가운데 하나다."그때도 때마침 제주도에 있었네요. 국장이 올라오지 말고 있으라고 하는 겁니다. 돈이 없으니 신라호텔에 숙박은 못 하고 며칠을 주변을 어슬렁거렸어요. 나중에는 호텔 직원들이 전두환 부부의 동선을 알려주더라고요.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표지에 쓸 사진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또 청와대 경호를 받으니 사진기자의 접근도 힘들었고요. 호텔을 빠져나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각하' 하고 외쳤죠. 그렇게 만든 사진입니다. 참 재미있게 했네요."IMF 위기로 9년여 기자생활 마무리경험·인맥 살려 삼겹살·돈가스 창업영역 넓혀봤지만 신통치 않았다수억원 빚 지고 캐나다 떠나이른바 'IMF'로 회사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시기였는데,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 다니는 선배들 대신 자녀가 아직 어린 자신이 그만두겠다고 말하며 1998년 회사를 떠난다. 그것으로 짧고 굵은 9년여의 사진기자 생활을 마무리한다.퇴사 이후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광고사진 일이 끊이지 않았다. 퇴사 후 6~7개월이 지나니 일거리가 많아져 전문 스튜디오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기업 사보와 홈쇼핑 책자까지 매달 수천만원의 수익이 생겼다. 수익이 제법 된다는 월간지 대표의 말을 듣고 '프랜차이즈 전문 매체'를 직접 만든다. 잡지사를 운영한 지식과 경험, 인맥을 활용해 직접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삼겹살, 돈가스, 칼국수 등으로 영역도 넓혀갔지만 신통치 않았다.나 회장은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제 나는 여기까지구나 하고 생각하며 2005년 '기브업' 했다"고 말했다.건강하고 착한치킨 콘셉트 몰두고양운동장 스탠드 밑에서 회의그렇게 수억원의 빚을 지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서 그는 작은 성공을 거뒀다. 캐나다 토론토의 좋지 않은 상권에 있는 허름한 가게를 인수했다. 15년 동안 10명이 파산하고 떠난 상점이었다. 그런데 그가 인수해 5개월 만에 일평균 매출 300만원을 넘기는 가게로 만들었다. 사업 아이템은 한국 사람을 위한 반찬가게였다. 배추김치, 깍두기, 뉴욕 지역 '블루 크랩'을 이용한 간장게장, LA갈비 등을 만들어 팔았다. 장사가 잘 될 때는 하루 매출이 1만 달러를 넘기기도 했다. 나 회장은 "장갑을 낄 겨를이 없이 닥치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고생했다"며 "나중에는 손에 박힌 굳은살 때문에 상처가 나 손으로 세수를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값진 경험이었다"고 기억했다.나 회장은 그렇게 모든 빚을 정리하고 2005년 귀국길에 올라 기회를 엿보다 2011년 '자담치킨' 브랜드를 출시했다. 프랜차이즈 업계의 꽃이 한국에서는 치킨 업종이다. 그동안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며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래 할 수 있는 딱 한 가지에 집중하겠다"며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이 치킨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때여서 브랜드 콘셉트를 '건강' '착한치킨'으로 잡았다.캐나다에서 큰돈을 벌었지만 빚을 갚느라 그의 수중에는 여유가 없었다. 1호점 개업과 브랜드 출시까지 사무실도 없이 운동장에서 지인과 회의를 했을 정도로 힘겨웠다.실패 딛고 일어선 이유는 '사람'망하던 순간 연결된 사람에 도움"일단 사업 시작하면 죽기살기로""고양운동장에 가면 그늘진 스탠드가 있어요. 신문지 깔고 소주를 마시며 회의했어요. 힘들면 누워서 쉬기도 하고요." 돈은 없었지만 그를 돕는 이가 주변에 많았다. 그동안 실패의 경험에서 쌓은 인맥이었다.자담치킨은 현재 700여 개 매장을 갖춘 브랜드로 성장했다. 100호점을 내기까지 대부분 시간을 고속도로에서 보냈다. 연락이 오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가야 했다. 1주일에 2천㎞ 이상 운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이 질려 3~4가지 메뉴를 한꺼번에 시켜놓고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나명석 회장은 자담치킨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착한 이미지의 콘셉트를 꼽는다. 동물복지인증을 받은 가장 좋은 닭, 히말라야에서 공수한 가장 좋은 소금, 견과류가 들어간 가장 좋은 튀김 파우더, 화학 식초를 쓰지 않은 '치킨 무' 등이다.재료의 진정성뿐 아니라 30억원을 투입해 유명 영화배우를 활용한 과감한 TV 광고 전략도 유효했다. 2021년에는 한 달동안 48개 매장을 오픈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유행 이전 180개 정도였던 매장이 현재 700개를 넘었다.결국 사업도 사람관계, 신뢰가 가장 중요합니다.나명석 회장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를 '사람'에서 찾았다."제가 망하던 순간 연결됐던 분들이 다시 저를 도왔죠. 결국 사업도 사람 관계이니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조언을 물었다. 나명석 회장은 "웬만하면 사업을 시작하지 말아 달라"며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포기할 수 없는 만큼 반드시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인천공설운동장.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LH(인천토지주택공사)가 4차례 유찰 끝에 '인천 청라시티타워' 공사비 산정을 위한 용역사를 선정, 내달부터 타워 공사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나선다. LH는 사업비 문제 등으로 장기간 표류해온 청라시티타워 사업 정상화를 위해 지난 5월 민간사업자와 계약을 해지하고 직접 타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29일 LH에 따르면 지난 17일 4번째 공고한 청라시티타워 공사비 산정을 위한 용역이 유찰돼 내달 초 수의계약으로 업체를 선정, 관련 용역을 추진하기로 했다. LH는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4억8천만원 규모의 청라시티타워 공사비 산정을 위한 용역 입찰을 진행했으나 모두 유찰됐다. 4번째 입찰에서는 1개 업체만 참여해 최종 유찰됐다. 업체 수의계약… 2025년 착공계획LH, 작년 기준 5600억원대 추산비용 급증땐 자금조달 난항 예상"소송 여부 관계없이 속히 추진"LH는 수의계약 요건이 성립됨에 따라 4번째 입찰에 참여했던 1개 업체와 계약을 맺고 용역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번 용역은 지난해 기준 5천600억원대로 추산된 청라시티타워 사업비를 물가 인상분 등을 고려해 재산정하기 위해 추진됐다.LH는 내년까지 공사비 산정 용역을 진행하고 이후 LH 경영투자심의, 시공사 선정, 설계, 건축허가 심의 등을 거쳐 2025년 타워를 착공한다는 계획이다. 완공은 2030년이나 2031년이 돼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하지만 관련업계에서는 용역 결과 공사비가 크게 늘어날 경우 현재 LH의 재정상태와 내부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국내에서 초고층 타워를 건립할 수 있는 시공 업체는 몇개 되지 않아 이들 업체가 LH가 제시한 가격에 공사를 할 수 있을 지도 불투명한 상태다. 청라시티타워 건립 사업은 2007년 청라국제도시에 입주한 주민들이 낸 분양대금 3천32억원으로 LH가 시작한 프로젝트다. 4차례나 민간사업자 선정에 실패하는 등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다가 2016년 보성산업 등이 주도하는 청라시티타워(주)가 최종 사업자로 선정되면서 2019년 착공식을 했다. 하지만 사업비 증액 문제로 LH와 청라시티타워(주)가 대립하면서 사업 자체가 중단됐다.LH는 사업 중단에 따른 주민 반발이 거세지자 지난 5월 청라시티타워(주)에 사업협약 해지를 통보했다. 6월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청라시티타워 건설사업 추진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그동안 민간사업자가 추진하던 청라시티타워 건립사업은 LH가 직접 시공사를 선정해 건설하고, 완공 후에는 인천경제청이 타워 운영을 맡는 것으로 합의했다.청라시티타워(주)는 이에 반발해 지난 8월 LH를 상대로 청라시티타워 사업협약 계약자 지위 확인 소송을 청구한 상태다.LH 관계자는 "소송 여부와 상관 없이 계획대로 청라시티타워 건립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며 "공사비 산정 용역을 최대할 빨리 끝내고 후속 절차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LH가 4차례 유찰 끝에 '인천 청라시티타워' 공사비 산정을 위한 용역사를 선정, 내달부터 타워 공사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나선다. 사진은 청라시티타워 건립 부지 전경. /경인일보 DB
김윤경(53·사진)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는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된 단편 애니메이션 '벌레아이'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애니메이터다. 디즈니, 픽사 등 세계적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제자들을 배출한 애니메이션 교육자이기도 하다.지금은 인천 구도심의 상징처럼 돼 버렸지만, 1990년대까지 지역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였던 동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김 교수가 살았던 1970~80년대 동인천은 생기가 넘쳤다.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영감을 얻는 그 시절 그 공간이다. 김 교수는 고향의 모습이 예전과 크게 변하지 않아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만화 그리기 좋아해한국애니 국제무대 설 기회 올것김윤경 교수의 아버지는 동인천에서 50년 넘게 양복점을 운영했다. 황해도 출신 아버지는 인천에서 자수성가한 실향민 1세대다.김 교수는 인천 축현초, 가좌여중, 신명여고를 나와 홍익대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여느 미대생과 다르게 전공 분야나 순수미술보다 애니메이션이 더 좋았다. 대학생 때는 혼자서 셀룰로이드지(셀지)를 오려 붙이는 수작업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며 스파이더맨, 슈퍼맨 같은 해외 작품 제작에 참여했다.2004년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스쿨 교수로 임용돼 20년 가까이 해외에서도 활약하는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을 길러내고 있다. 웹툰을 중심으로 한류 콘텐츠 산업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김 교수는 애니메이션 산업의 성장을 기대하고도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조만간 한국 애니메이션도 국제 무대에 설 기회가 올 것"이라고 했다. 또 "상업용 프로젝트 외에도 연출가로서 몇 개 작품을 기획하고 있다"며 "관객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 관련기사 11면([아임 프롬 인천·(12)] 한땀 한땀 수놓은 유년, 그림 너머로 추억 비친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인천의 풍경은 창작자에겐 상당한 자극이 됩니다."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가 자신이 나고 자란 동인천역 주변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높은 빌딩보단 작은 집들이 오목조목하게 놓여있던 따뜻한 곳, 좀처럼 변하지 않아 언제든 찾아도 어릴 적 기억을 간직한 곳. 인천 출신 '애니메이터' 김윤경이 품은 상상력의 원천이다.김윤경 교수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의 아버지 김진성(87) 씨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김진성 씨는 황해도 옹진군 출신 실향민 1세대이자 1960~70년대 동인천 양복점 거리 전성기의 산증인이다. 김윤경 교수는 "아버지의 손재주와 미술적 감각을 물려받았다"고 늘 강조한다.1969년 동인천에 '도성라사' 연 아버지직원 20명 데리고 끊임없이 주문 받아당시 살던 인현동 집에서 내려다보면시계탑 선 광장 저녁마다 애국가 퍼져사람들 멈춰서서 가슴에 손얹던 풍경김진성 씨는 한국전쟁 때 '동키부대'라 불린 켈로(KLO·Korea Liaison Office) 부대 11연대 소속으로 황해도 옹진군 어화도에서 복무했다. 켈로 부대는 미군이 이북 출신 한국인들로 꾸린 비정규군이었다. 주로 38선 인근 서해 섬과 해안 지역 첩보작전에 투입됐다. 김진성 씨가 복무한 어화도는 위도상 백령도(현 인천시 옹진군)보다 더 남쪽에 있는데, 한국전쟁 전까진 남한이었다. 1951년 1·4후퇴로 전남 나주까지 남하해 이북에 있는 가족들과 생이별했다. 그의 나이 15세 때다. 김진성 씨는 나주의 한 과수원에서 먹고 자며 일하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 사람들이 많다는 인천을 무작정 찾았다. 먼 친척 소개로 동인천 중앙시장에서 컸던 유창양복점에 취직해 어깨너머로 양복 재단을 배웠다. 혈혈단신에 주경야독으로 죽도록 고생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나와 1962년 정치대학(건국대학교 전신) 행정학과를 졸업했다.이후 김진성 씨는 인천 동구 만석동 한국기계공업(현 HD현대인프라코어)에서 일하며 가정을 꾸렸다. 양복 만드는 꿈을 이루고자 1969년 중구 용동 동인천 길병원 자리에 양복점 '도성라사'(현 도성양복점)를 열었다. 1972년 전국 신사복 경진대회에서 허리선을 강조한 당시 최신 유행 '콘티넨탈(Continental) 스타일' 양복으로 대상을 받았고,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도 번창했다. 애관극장에서 패션쇼도 열었다고 한다. 지난 19일 인천 남동구 자택에서 만난 김진성 씨는 "1970년대는 도성라사 직원이 20명에 달할 정도로 끊임없이 주문이 밀려오던 시절"이라며 "당시 동인천은 양복점만 수십 곳이 있는 유행 1번지였는데 신라, 서울, 자유와 함께 도성라사가 큰 양복점에 속했다"고 말했다.김진성 씨는 지난해 제자에게 도성양복점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지금도 단골에게 양복 맞춤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기성복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서 인천 중구 경동 싸리재 일대 양복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도성양복점을 비롯한 네댓 곳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김진성 씨는 "넷째 딸(김윤경 교수)은 어려서부터 만화를 무척 잘 그렸다"며 "양복점이 호시절을 만나 1남4녀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다시 김윤경 교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의 어린 시절 풍경 또한 동인천역 일대와 아버지의 가게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김 교수 가족은 동인천역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인현동의 건물 5층에 살았다. 그때 동인천역 광장은 지금처럼 15년 가까이 흉물로 방치된 거대한 민자역사 건물이 꽉 막고 있지 않았다. 큰 시계탑이 선 광장에는 매일 저녁 무렵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국기 하강식을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북적이던 광장에서 사람들이 한순간 멈춰 가슴에 손을 올리고 태극기를 바라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겨울을 앞두곤 양복점 직원들이 다 같이 김장김치를 200포기씩 담그고 나누며 가족처럼 지냈다"고 회상했다.유동현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쓴 '동인천 잊다 있다'(2015·인천시)는 1960~70년대 동인천역 광장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역전 광장답게 커다란 시계탑이 우뚝 서 있었다. 기차를 타고 함께 어딜 가든 아니면 기차를 타고 와서 만나든 동인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약속 포인트로는 그만이었다. (중략) 광장은 약장수들의 마케팅 장소로도 그만이었다. 뜨내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허접한 물건을 팔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시선을 끌기 위해 차력 쑈나 마술 그리고 약식 서커스를 하곤 했다.'김윤경 교수는 동구 송림동으로 이사해 집 근처 인천축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깨달은 시기다."아버지가 재단할 때 쓰고 남은 갱지에 그림을 그리길 좋아했어요. 신문지의 빈 공간이나 하얀 달력 뒷장도 매일 낙서와 스케치로 채웠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이 줄을 서서 미키마우스나 도날드덕을 그려달라고 부탁해 쉬는 시간이 없을 정도였죠. 당시 TV(동양방송)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디즈니 만화동산'이란 만화영화 프로그램을 방영에서 디즈니 캐릭터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을 로봇을, 여자아이들은 예쁜 여자를 그려달라기도 했고요."아버지 재단하고 남은 갱지에 그림중학생 소묘 솜씨에 선배들 놀라기도제물포역 앞 학원가 핵심상권 활기김 교수는 가좌여자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졸라 화실에 다녔다. 그림을 전혀 배우지 않았던 중학생 후배의 석고 데셍(소묘) 솜씨에 고등학생 선배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신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입시를 위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제물포역 앞에 있던 '전위미술학원'인데, 김 교수가 다닌 1980년대 인천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히는 규모였다. 김 교수는 전위미술학원 홍대반(홍익대 미술대학 입시 준비반)에서 실력을 다졌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화가·문화기획자 오진동 씨는 대학생 때 전위미술학원 강사로 있으면서 김윤경 교수를 만났다. 오진동 씨는 "(김 교수는) 예의 바르고 다재다능하면서도 노력파였다"며 "만화적 표현이 좋은 학생이었다"고 떠올렸다.이때 제물포역 앞은 미술학원뿐 아니라 각종 입시학원, 예체능학원이 몰린 학원가이자 제물포지하도상가를 중심으로 핵심 상권이었다. 인근엔 옛 선인재단 산하 중·고등학교 10곳,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이 있어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로 활기가 넘쳤다."미술학원에 같이 다닌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랑 제물포역 앞 경양식집을 가거나 신포동, 인현동 쪽으로 놀러 간 기억이 많이 나요. 1980년대 중후반 신포동, 인현동은 왁자지껄했어요. 카페, 떡볶이집, 닭강정집, 고등학생들이 많이 찾는 '바덴바덴' 같은 나이트클럽도 있었어요. 저는 가보진 않았지만, 소위 말하는 날라리 언니 오빠들이 나이트클럽을 갔죠. 날라리라고 해서 지금 일진처럼 막 친구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놀기 좋아하는 의리있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바덴바덴'·카페·떡볶이집 즐겨찾던 청춘1999년 인현동 호프집 화재 57명 숨져"맥주 마셨다는 이유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김금희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남은 대목1980년대 신포동에서 동인천 일대는 젊음이 가득 찼다. 10~20대 시절을 인천에서 보낸 사람들은 '쌍쌍' '바덴바덴' 같은 나이트클럽의 추억을 가졌다. 학생들의 동인천 전성시대는 1990년대까지 이어지다 1999년 10월30일 57명(청소년 56명, 성인 1명)의 생명을 앗아간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를 기점으로 급속히 쇠락했다. 이들 지역엔 옛 분위기를 풍기는 몇몇 경양식집이 남아있다. 소설가 김금희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2018·창비)은 이 사건을 겪은 경애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다음은 '경애의 마음' 한 대목이다.'경애는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말들을 곱씹어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이유가 어떻게 죽음을 덮고 그것이 지니는 슬픔을 하찮게 만들 수 있는가.'김윤경 교수는 '89학번'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섬유미술과에 진학했다. 홍대 미대 섬유미술과 입학생 26명 대다수가 서울사람이었고 지방 출신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섬유미술은 직물, 종이 등을 재료로 하는 분야로 패션 쪽과도 연계돼 있다. 대학 신입생 김윤경은 친구들과 우연히 찾은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표현된 다양한 기법들을 보고 충격받았다. "내가 갈 길이 이거구나"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고 한다.홍익대 섬유미술과 89학번 진학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제서 받은 충격밴드 아하 뮤직비디오에 실험적 기법"동아리 만들어 샛길로 빠지기 시작""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히트했던 노르웨이 밴드 아하(A-ha)의 'Take On Me' 뮤직비디오가 로토스코핑(Rotoscoping·실사 이미지 필름에 그림을 그려 합성하는 기법)으로 제작됐는데, 그때부터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MTV(미국 뮤직비디오 전문 방송) 시대가 도래하기도 했고요. 대학 1학년 때 영화제에서 본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스톱 모션(Stop motion·정지된 물체의 위치를 움직여 촬영하는 기법) 같은 굉장히 실험적인 기법을 썼는데, 솔직히 전공보다도 더 흥미로웠습니다. 곧장 학교에서 애니메이션 창작 동아리를 만들어 샛길로 빠지기 시작했어요."인터넷 검색도 없던 시절, 김 교수는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서울 충무로에서 8㎜ 카메라를 빌렸다. 애니메이션의 원리대로 도화지에 배경을 그리고, 투명한 셀룰로이드지(셀지) 위에 그리고 색칠한 캐릭터를 오려 붙이고 한 장 한 장 촬영했다. 김 교수가 대학 시절 매진한 또 다른 활동 '홍익방송국'에 있던 지금은 쓰이지 않는 '베타 테이프 편집기'로 촬영한 애니메이션 필름을 편집했다. 그렇게 정지한 그림을 처음으로 움직이게 했다.1994년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션 작가로 나서고자 줄거리, 캐릭터, 연출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듬해 현장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갔다. 당시 애니메이터 대다수가 프리랜서였다. 199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 분야는 자체 제작이 많지 않았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해외 애니메이션 하청(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을 맡는 국내 회사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스파이더맨, 슈퍼맨 등 미국의 상업용 '슈퍼 히어로' 애니메이션 작업에 주로 참여했다.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이 직접 그리는 아날로그에서 컴퓨터를 이용하는 디지털로 점차 전환하던 시기이기도 했다.베타테이프 편집기로 애니메이션 편집정지한 그림 처음으로 움직이게 한 경험해외 애니메이션 하청 맡은 국내회사슈퍼히어로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 국내에서 기획한 작품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내에선 해외 제작물 하청 시장이 상당히 컸는데, 제작 단가가 높아 돈을 꽤 번 회사도 있었어요. 해외에서 휴가를 많이 떠나는 여름철은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가 성수기지만, 겨울철은 쫄쫄 굶어야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에서 하청 전문 회사는 많이 줄었고, 그 시장이 중국과 인도로 넘어갔습니다. 대신 웹툰 등을 기반으로 콘텐츠 시장이 확장하면서 애니메이션 산업도 커졌습니다."애니메이션 산업이 점점 성장하면서 대학에서도 관련 학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윤경 교수는 1999년부터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2004년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 모집 공고가 눈에 들었다. 상업 애니메이션이 아닌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프리랜서가 아닌 안정적 바탕에서 그 꿈을 이루고 싶어 교수직에 도전해 합격했다.스타워즈 등 걸출한 제자 다수 배출제자들과 협업해 EBS 교육용 프로 제작유튜브 채널 구독자 145만명 성과도교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스타워즈 애니메이션 시리즈 감독, 카카오 애니메이션 시리즈 감독 등이 김윤경 교수의 손을 거친 애니메이터들이다. 제자들과 협업해 EBS 미술교육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김 교수 주도로 개설한 청강대 애니메이션스쿨 유튜브 채널은 총 구독자가 145만명에 달한다. 그는 청강대 출신이 없는 애니메이션 회사가 없을 정도로 제자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무엇보다도 김 교수가 작가로서 작품을 낼 여건이 생겼다. 김윤경 교수가 2015년 연출한 단편 '벌레아이'는 이듬해 '이집트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Ismail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벌레아이'는 친모로부터 버려진 아이가 입양된 후에도 또 버려질 것이란 두려움에 침잠하다 그 감정이 폭주해 벌레로 변해 엄마를 먹는다는 환상에 휩싸인 다소 어두운 상상력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벌레아이'는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는 성과가 있었다. 김 교수는 또 다른 작품을 구상 중이다."너를 탐색하고 뚝심을 가지라는 말,맞든 틀리든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마음의 근육 단단히 해 내 것 찾겠다"동인천 풍경 닮은 김윤경 교수의 말"이집트 국제 영화제 시상식에 참가하려 했는데, 그해 이집트에서 항공기 추락 사고가 나는 바람에 주변에서 말려서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주한 이집트대사관을 통해 파라오를 본뜬 무거운 상패를 받았습니다. 저는 너무 실험적이거나 추상화 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서도 눈과 귀를 간지럽히는 대중적인 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방향을 추구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상상하는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있는 아주 멋진 매체라고 생각합니다."김윤경 교수가 늘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그를 여러 차례 만나며 새겨진 인상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김 교수는 "너를 찾아라. 너를 탐색하고 뚝심을 가져라"는 말을 항상 제자들에게 전한다. 김 교수는 "뚝심은 내가 택한 길이 맞든, 틀리든,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내 마음의 근육을 더 단단히 해서 뚝심으로 내 것을 찾는 삶을 그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곳, 옛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의연한 동인천 풍경이 떠올랐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메인사진 - 동인천에서 나고 자란 인천 출신 애니메이터 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 /김용국 기자 yong@kyeongin.com도성라사.인천도시역사관이 2017년 촬영한 도성라사(현 도성양복점) 작업실 모습. /인천도시역사관 제공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스쿨 교수의 아버지 김진성 씨. 동인천에서 50년 넘게 양복점 '도성라사'(현 도성양복점)를 운영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어린 시절 가족과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나들이간 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아버지 김진성 씨가 촬영했다. /김윤경 교수 제공2016년 '이집트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Ismail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김윤경 교수 연출의 단편 애니메이션 '벌레아이'. /김윤경 교수 제공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가 어린 시절 동인천역 풍경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김용국 기자 yong@kyeongin.com
우리나라 '1호 경제자유구역'인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올해 지정 20주년을 맞았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2003년 8월 1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정됐고 같은 해 10월 15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출범했다. 올해로 20년을 맞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그간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하며 인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전국 9개 경제자유구역 FDI(외국인직접투자)의 70% 이상을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를 넘어 세계 바이오산업을 주도하는 전진기지로서 자리매김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지난 20년간 글로벌 비즈니스와 첨단·서비스산업 허브 도약을 목표로 인천을 넘어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으로 도약하고 있다. 누적 FDI 147억5600만 달러 규모외투 206개 등 총 3481개 기업 둥지세계최대 88만ℓ 바이오 생산설비녹색기후기금·UNESCAP 등 입주투자심사면제 등 규제개혁은 과제 ■ 갯벌 매립해 탄생한 인천의 성장 동력인천경제자유구역은 1994년 물막이 공사를 시작해 조성한 송도신도시(현 송도국제도시)를 기반으로 시작됐다. 당시 갯벌을 메워 조성한 17.6㎢의 알토란 같은 땅을 밑천으로 성장했다. 현재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총면적은 122.42㎢ 규모로, 송도(53.36㎢), 영종(51.26㎢), 청라(17.80㎢) 등 3개 지구로 확대됐다.송도국제도시는 국제비즈니스와 글로벌 바이오산업, 영종국제도시는 항공·물류, 관광·레저, 청라국제도시의 경우 금융·첨단산업·유통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난 7월 말 기준으로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누적 FDI는 총 147억5천600만 달러 규모다. 전국 9개 경제자유구역 FDI의 70%에 달하는 수치로, 개청 당시 3개였던 외국인 투자 사업체는 현재 206개로 늘었고, 국내 사업체 3천275개 등 모두 3천481개 기업이 인천경제자유구역에 둥지를 틀었다.기업 유치로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인천경제자유구역 인구도 빠르게 증가했다. 경제자유구역 지정 첫해인 2003년 2만5천여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2006년 5만명, 2011년에는 10만명을 돌파했다. 올해 8월 기준 43만명이 인천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개발이 모두 끝나는 2030년에는 54만6천여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성장의 핵심 바이오산업바이오산업은 인천경제자유구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단일 도시 기준 세계 최대인 88만ℓ규모의 생산 설비가 송도국제도시에 집적화돼 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17배에 달하는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를 비롯해 셀트리온, SK바이오사이언스, 롯데바이오로직스, 싸토리우스, 머크, 생고뱅 등 총 82개 국내외 바이오 관련 기업이 입주해 있거나 입주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 의약품 수출의 43%를 차지하고 있으며 1만여명의 관련 업종 종사자가 일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바이오 기업 지원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도 총력을 쏟고 있다. 바이오 분야 인력 양성·연구개발 등을 위한 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와 제약바이오실용화센터가 내년 준공 예정이다. 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에는 GMP(우수 의약품 제조·품질관리 기준) 수준의 바이오 공정 실습장이 구축돼 한해 약 2천명의 전문 인력을 배출하게 된다. 제약바이오실용화센터는 바이오 공정 개발 연구 수행을 위한 공정 시설과 장비를 지원하는 기관으로, 바이오 연구·기업육성 등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급성장한 국내 바이오산업은 인천을 발판 삼아 세계의 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김진용 인천경제청장은 "송도 바이오클러스터의 의약품 생산 역량은 현재 88만ℓ 규모로 단일 도시 기준 세계 최대"라며 "최근 착공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5공장이 완공되면 130만ℓ의 생산 능력을 갖춘 도시가 된다. 송도 바이오클러스터를 세계적인 글로벌 바이오 허브로 성장시켜 인천경제자유구역과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해외대학·국제기구 유치 등으로 국제도시 위상 높여인천 송도국제도시에는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유엔 아·태경제사회위원회(UNESCAP) 동북아사무소 등 15개 국제기구와 5개 해외 대학(인천글로벌캠퍼스)이 입주해 있다. 이들 국제기구와 해외 대학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세계에 알리는 효과와 함께 경제자유구역이 진정한 국제도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인천글로벌캠퍼스는 인천경제자유구역에 외국 주요 대학을 유치, 글로벌 교육 허브를 조성하겠다는 비전으로 인천시와 정부가 2012년 설립했으며 지난해 10년을 맞았다. 현재 1단계 사업이 완료된 인천글로벌캠퍼스에는 한국뉴욕주립대의 스토니브룩대(SBU)와 패션기술대(FIT)를 비롯해 조지메이슨대, 겐트대, 유타대 등 5개 학교가 들어서 있고 3천500여 명의 국내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인천글로벌캠퍼스는 교육 모델의 선도적 우수사례로 손꼽히는 교육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제기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GCF는 개도국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대응을 지원하는 국제기금으로 2013년 출범했다. 녹색기후기금은 1차 재원보충 등을 통해 203억 달러를 조성했으며 우리 정부도 이중 총 3억 달러의 재원을 보충하기로 공약하고 이를 이행 중이다.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핵심 국제기구로 자리잡은 GCF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이 경제 분야뿐 아니라 세계 환경도시로 각인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제자유구역 더 큰 도약 위한 과제도 산적경제자유구역이 국내를 넘어 세계 여러 도시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규제개혁이 절실하다. 우선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의 신규 사업에 적용되는 타당성 조사와 투자심사를 면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경제자유구역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주도하는 것으로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등 중앙부처 협의와 경제자유구역위원회 심의를 거쳐 추진되는 사업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전 검증 절차가 있는 만큼 타당성조사와 투자심사를 면제해 보다 신속히 사업이 진행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경제자유구역의 개발 이익 재투자 대상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경제자유구역 관련 법에는 개발이익에 따른 재투자 대상을 기반시설이나 시설 설치비용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인천의 경우 경제자유구역 개발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재투자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인천경제청의 설명이다.김진용 인천경제청장은 "경제자유구역 관련 제도를 개선해 새로운 성장 돌파구를 만들고, 다양한 투자 전략으로 세계 주요 도시들과 경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올해로 20년을 맞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그간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하며 인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은 인천 송도국제도시 전경. /인천경제청 제공인천 송도에 위치한 스타트업 육성 기관인 인천스타트업파크 전경.2003년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개청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과 안상수 인천시장 등 주요 인사.바이오산업은 인천경제자유구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사진은 송도국제도시 바이오클러스터에 위치해 있는 바이오 산업단지.
세중해운그룹 한명수(57·사진) 대표는 인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세종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력 탓에 취업이 쉽지 않았고 작은 무역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무역회사와 물류기업을 거치면서 해외영업을 많이 했고, 물류기업이 국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한 대표는 다니던 회사를 나와 2002년 직원 4명 규모의 세중해운을 인수했고 20여 년 국내외를 누비면서 활동했다. 그 결과 세중해운은 20여 년 만에 직원 350여명, 매출 2천500억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중해운 대표가 된 뒤 14년을 해외에서 생활했다. 직접 현장에서 해외지사 설립을 주도했다. 그 결과 7개국에 지사가 설립돼 활동하고 있다. 기업의 성장은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엔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20년간 직원 120명·매출 1500억 성장아암2 공동물류센터 진두지휘 계획 온도와 습도, 산소와 이산화탄소 등 대기환경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진 'CA컨테이너'를 개발하고 활용해 신선화물 물류를 선진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업영역 확장도 지속해 이뤄지고 있다. 올해 5월엔 바이오 물류에 특화한 'CXL 바이오 GSC(Global Supply Chain) 센터'를 충북 오송에 개장했다. GSC 센터에서는 바이오 물류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현장에 적용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국내엔 최초로 도입되는 기술이 적용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일정 수준 성과를 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이에 지난해부터 인하대학교 물류전문대학원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다. 그는 인천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한 1985년 이후 37년만에 다시 인천에서 배움을 쌓고 있다. 인천에서의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인천항 배후단지인 아암물류2단지에 공동물류센터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이 센터가 운영을 시작하면 직접 대표이사를 맡아 사업을 진두지휘할 계획이다.한 대표가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성장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인천에서의 유년시절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인천에서의 생활은 바다에 떠 있는 원목의 껍질을 벗겨서 땔감으로 쓰는 등 가난한 생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변화하면서 '희망'을 보여줬다고 했다.한 대표는 "인천이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체감하면서 '나도 변화할 수 있구나'라고 느끼게 해줬다"며 "이제 인천은 명실상부 동북아 중심 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저도 제가 맡은 분야를 토대로 인천이 한 걸음 더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다. → 관련기사 11면([아임 프롬 인천·(11)] 떠나는 법 가르쳐준 물류도시, 글로벌 기업 성장 토대로)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세중해운그룹을 이끌고 있는 한명수 대표는 인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나무껍질을 벗겨 땔감으로 써야 하는 환경에서 살았다. 빈곤한 유년시절을 지내면서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긍정적인 가치관을 갖게 됐고, 이는 대학을 거쳐 사회생활까지 이어졌다. 인천에서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명수 대표는 세계 7개국에 23개 지사를 갖고 전 세계를 무대로 해상, 항공, 육상 화물의 운송, 통합 유통 등 물류 전반을 다루는 국내 대표 물류기업을 이끌고 있다. 인천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인천과 지금은 크게 다르다고 했다. 국내 물류 거점일 뿐 아니라 빠르게 성장하는 동북아 중심 도시로 보고 있다. 그는 성장한 인천에서 진행할 사업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서울을 거점으로 한 물류 기업을 이끌고 있는 이가 바로 한명수 대표다. 그는 "우리나라는 수출입이 비중이 큰 나라이지만, 물류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다"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세중그룹을 알 수 있는 글로벌 물류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가 수십 여년 간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인천에서의 생활과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한명수 대표를 이해하는 데 '물류도시' 인천의 역사를 되짚어 볼 만하다. 인천항은 1883년 개항해 140여 년 동안 국내 대표 수출입 항만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국제화물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2위를 자랑한다. 한국 수출입 항공화물 중 99%는 인천공항을 거친다. 물류기업 한진의 모태가 인천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CJ와 합병한 대한통운의 전신인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도 서울에서 설립됐지만 첫 지점을 인천항에 열었다. 대한통운 80년사는 '항만 사정이 가장 좋은 인천에서 최초의 지점인 인천지점을 설립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낯선 길 만나면 무작정 들어가 길 잃고파출소 찾아가 짜장면 얻어먹은 기억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에 두려움 없어물건 팔았던 어머니 따라 두루 다니기도한 대표 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괴산이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에 일자리를 찾아 인천에 정착했다. 한 대표 아버지는 중구에 있는 공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행상을 다녔다. 한 대표가 태어난 곳은 인천 중구 북성동 2가다. 인천역과 송월동 동화마을 사이로, 현재는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다. 유년시절 어머니는 인천역과 자유공원 등을 돌며 물건을 팔았고, 그런 어머니를 자주 따라다녔다. 그는 "그 영향인지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두려움이 없고, 이러한 태도가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한 대표 집은 북성동에서 숭의동 수도국산 인근으로, 또 주안동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초등학생 한명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새길을 보면 무작정 들어가 길을 잃었다. 그는 "어렸을 때 축구공을 가지고 많이 놀았다"며 "친구들이 멀리 차낸 공을 찾아 처음 가 보는 언덕 아랫길을 헤맸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길을 잃으면 물어물어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에서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중에야 어머니가 찾으러 오셨다"고 회상했다.겨울 나기 위해 원목 벗겨다 집에 날라1970년대 연탄값 1장당 50원 안팎매월 수천원 지출에 부담스러운 가격바닷가 원목 껍질 벗겨 땔감으로 써한 대표가 살았던 북성동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나왔다. 그가 살던 집은 단층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바다에 떠 있는 원목의 껍질을 벗겨다 집으로 날랐다. 1970년대에는 정부가 연탄값을 고시해 가격을 관리할 정도로 연탄은 서민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인천의 연탄값은 1장당 50원 안팎이었다. 취사와 보일러(아궁이) 용으로 쓰자면 매월 수천원을 연탄값으로 지출해야 했다. 간부 공무원 월급이 5만원 안팎하던 시절이었으니 연탄을 구입하기에 가계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한 대표는 "원목이 바다에 떠 있었는데, 겨울철 땔감으로 쓰려고 바다에서 껍질을 벗겨 와 집에서 말려 사용했다"며 "나무껍질을 벗겨오면 어머니가 과자를 사주셨다"고 기억했다.한 대표가 살았던 북성동 인근 인천항은 당시 대표적인 목재 수입 부두였다. 2008년 인천항 북항 목재부두가 개장하기 전까지는 원목 수입 부두였다. 선박에 실려 온 원목은 육지와 가까운 바닷가에 떠나가지 못하도록 경계선을 설치해 보관했다. 인천항운노조는 이를 '아바작업'으로 불렀다.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자 4명이 원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옮겼다. 바닷가 인근 주민은 썰물에 갯벌에 얹혀 있는 원목 껍질을 벗겨 땔감으로 썼다.당시 인천항은 대표적 목재 수입 부두바닷가 경계선 지어 보관 '아바작업'1960~1970년대 사람이 직접 옮겨가공목 들여오며 이제는 사라진 풍경인천은 여전히 전국에서 목재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항만이다. 전국 목재 수입량의 70%를 인천항 북항에서 처리한다. 이 지역 일대에 목재 관련 기업이 밀집해 있다. 1960~1970년대엔 원목이 주를 이뤘다면 현재는 원목을 가공한 형태로 많이 들어온다. 동남아 등지에서 원목을 가공해 들여오는 것이 더욱 저렴하기 때문이다. 바다에 원목을 가둬두는 아바작업은 사라진 풍경이 돼 버렸다. 그가 대건고 재학 시절 문학산 인근에서 한 봉사활동 경험은 현재까지도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문학동에서 교회를 개척한 친척의 요청으로 나선 선교활동이었다. 문학산 기슭에 판자촌이 형성돼 있었다. 한 대표는 "추운 겨울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문학산에서 먹을 물을 길어오곤 했는데, 같이 물을 나르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했다. 그는 "저도 가난했지만, 저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계기였다.그는 1986년에 세종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이듬해인 1987년에는 6월 항쟁과 7월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 그는 "대학에 가니 이전에 제가 알던 사회와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고, 부조리가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됐다"며 "내 활동이 사회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고 했다. 그는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그는 총학생회를 이끌며 학원 자주화 운동에 나섰다. 정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을 폭로했는데 거기에 한명수 대표의 이름도 올라와 있다. 한 대표의 학생 운동 이력은 취업에 걸림돌이 됐다. 한 대표는 "학점이 좋은 편이었고, 학과도 취업하기에 나쁘지 않은 경제학과였지만 대부분 (신원조회를 진행한 뒤)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외국계 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봉사활동·학생 운동 경험한 청년시절"내 활동이 사회에 도움되길 바랐다"그는 1992년 한 외국계 무역회사의 한국지사에 입사했고, 그해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물류·무역 분야의 경험을 쌓았는데, 그 기업이 중국 기업에 매각됐다. 그는 중국계 해운·물류기업으로 이직했다. 한 대표는 "바다와 연관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이는 분명히 일을 할 때 장점이 됐다"고 했다.그는 10년 가까운 경험을 토대로 설립된 지 3년 된, 직원 4명이던 작은 기업인 세중해운을 인수했다. 첫 직장 입사 후 딱 10년이 되는 2002년이었다. 이후 세중해운은 빠르게 성장했고 직원은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가 세중해운을 맡은 지 20년이 지났다. 이 중 14년은 외국에서 생활했다. 특히 중국, 홍콩 등 해외지사가 설립된 지역에서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중국뿐 아니라 베트남, 홍콩, 태국, 브라질 등 전 세계를 누볐다. 글로벌 물류 기업의 선진 시스템을 몸소 경험하고, 미국 워싱턴 세인트루이스 대학교(Washington Univ. In ST.Louis)에서 경영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실무와 이론을 겸비하면서 기업인으로 성장 가능성을 본 동기 부여의 시기였다. 그는 "각 나라마다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경험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그 폭은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직장10년차 규모 작았던 세중해운 인수대표 20년 중에 14년은 여러 나라 경험"각 나라 차이는 있지만 폭 크지 않아"장기간 외국 생활이 크게 어렵지 않았던 데에는 어릴 적 인천에서의 삶이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생길 수 있는 두려움을 없애준, 저에게 담금질 역할을 한 것이 '인천'이었다"고 했다. 그는 "자주 바닷가에서 나무껍질을 벗기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며 "모르는 길이라도 주저 않고 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것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장소가 외국이어도, 대상이 외국인이어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세중해운은 본사가 서울이다. 인천, 부산, 오송 등에 지사를 두고 있다. 사업 영역은 해운부터 항공 등 물류 전체를 망라한다. 이 때문에 인천을 거점으로 하는 활동이 활발하다. 인천은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이 운영되고 있다. 인천항은 국내 2위 컨테이너 항만이면서 지리적으로 대 중국 교역에 유리하다. 인천공항은 국내 수출입 항공화물의 대부분을 처리한다. 인천공항을 빼놓고 항공 물류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인천, 중국과 가깝고 수도권 위치 강점중국 전자상거래 발맞춰 거점 역할 자신"한 대표는 인천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가 송도국제도시에 조성하고 있는 아암물류2단지 전자상거래 특화구역에 들어설 스마트 공동물류센터 사업이다. 세중해운이 주간사로 인천 하역기업 등과 컨소시엄을 이뤘다. 그는 "인천은 중국과 가까이 있고 수도권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인천만이 가지는 강점이 있다"며 "특히 중국 전자상거래 규모는 앞으로 더욱 커질 가능성이 큰데 현재 추진하는 공동물류센터는 인천항이 전자상거래 거점으로서 위상을 강화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그는 새로 설립되는 운영법인의 대표이사로 역할을 하며 인천 프로젝트에 집중하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인천을 40여 년 만에 다시 찾게 되는 셈이다. 한 대표는 "전 세계에서 보면 인천항은 주요 항만이 되기 힘든 지리적 단점이 있지만, 중국과 가깝다는 점은 또 큰 장점"이라며 "무엇보다 단점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도시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한 대표는 유년 시절의 인천과 현재의 인천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특히 그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환경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험하고 거칠었다. 또 서울의 위성도시 느낌이 강했던 것 같다"며 "지금은 전혀 다르다. 서울과 가까이 있지만 독립된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목표 중 하나는 '나누는 삶'뒤지지 않는 물류 환경 만들고파시스템 만들어 다음세대 도움 될 것이러한 인천의 모습이 그에게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렸을 때에는 서울에 사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티비를 보면 항상 서울 사람들의 잘사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는 항상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았다"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특히 '열심히 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도시가 인천이었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 모습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글로벌화'를 목표로 했다. 또 하나의 목표는 '나누는 삶'이다. 고교 시절 문학산 봉사활동에서 생긴 마음가짐이다. 이 두 가지 가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대표는 "앞으로 5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물류 환경을 만들고 싶다"며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 정착시켜 놓으면 다음 세대들이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물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 회사 직원은 누구나 원할 때까지는 일할 수 있다"며 "업무와 처우 등은 조금 바뀔 수 있지만 누군가의 가족인 직원들이 타의로 회사를 떠나는 일은 최소화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했다.한 대표의 삶 전체로 봤을 때 인천에서 산 기간은 3분의1 남짓이지만 인천에서의 유년기는 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저의 가장 큰 장점은 진취적이고, 새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점입니다. 돌이켜 보면 이를 만들어준 곳이 인천이었습니다. 제가 더 단단해지도록 담금질 역할을 한 곳이 인천입니다."/정운기자 jw33@kyeongin.com한명수 세중해운그룹 대표.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유년시절 어머니는 인천역과 자유공원 등을 돌며 물건을 팔았고, 그런 어머니를 자주 따라다녔다. 그는 "그 영향인지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두려움이 없고, 이러한 태도가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에서 태어난 세중해운그룹 한명수 대표는 세계 7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국내 대표적인 물류기업을 이끌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살았던 인천은 가난했고 부족한 도시였다"며 "지금의 인천은 많이 다르다. 서울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력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도시가 인천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1960년대 항운노동자들은 4명이 한 조가 돼 '목도'방식으로 원목을 나르기도 했다. /인천항운노조 제공옛 인천항 아바작업장.대건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한명수 대표(사진 오른쪽). 한 대표는 고등학교 때 봉사활동을 하면서 겪은 경험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한명수 제공세종대학교 재학 때 한명수 대표(사진 윗줄에서 두번째). 한 대표는 대학 때 총학생회장을 맡았고, 이로 인해 정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는 취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됐다. /한명수 제공"자주 바닷가에서 나무껍질을 벗기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며 "모르는 길이라도 주저 않고 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것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장소가 외국이어도, 대상이 외국인이어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한명수 대표가 이끄는 세중해운(주)는 지난해 물류의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명수 대표가 행사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중해운 제공세중해운의 바이오물류 브랜드 'CXL BIO'는 지난 5월 충북 오송에 국내 최초로 바이오 물류를 연구하고 취급하는 GSC(Global Supply Chain)센터를 오픈했다. 오픈 행사에서 한명수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세중해운 제공
서양화가 오원배(70·사진) 동국대 명예교수는 실존과 인간 소외, 시스템 등 세상이 겪은 여러 문제에 천착해온 작품으로 잘 알려진 인천 출신 작가다.1953년 인천 중구 유동에서 태어난 오원배는 유년기 인천의 부둣가와 갯벌을 뛰어놀며 몸으로 인천을 체득했다.송도중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로 이름을 날리던 미술교사 황추를 만나고 미술반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미술반으로 활동한 송도중·고 6년의 시간 동안 방과 후 중국인 거리(현 차이나타운)를 매일 찾아가 수채화를 그렸다. 인천 구석구석을 꼼꼼히 관찰하고 또 다르게 바라보는 훈련을 했다. 학창시절 작가로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게 해준 곳이 인천이다.오원배를 작가로 길러낸 것은 인천이라고 하면 무리가 있을까. 오원배는 '올해의 젊은 작가상'(1992년), '이중섭 미술상'(1997년)을 수상했다. 고향 인천이 주는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2023년)로 최근 선정됐다. 상이 만들어지고 첫 수상자가 됐다. 오원배는 이번 자신을 길러낸 고향 인천이 주는 상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험해야 하는 것이 오원배가 생각하는 예술가적 태도다. 고향 인천은 그걸 가능하게 만든 호기심을 일깨워줬다. 오원배는 "고향 인천은 나에게 무궁무진한 상상의 원천"이라며 "인천의 미술계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11면([아임 프롬 인천·(10)] 화폭 가득히 푸르른 순수… 일렁이는 지난날)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예술가를 예술가답게 만드는 대표적 기질 가운데 중요한 하나를 꼽자면 호기심이 아닐까. 새롭고 신기한 것이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야말로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가능하게끔 하는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I'm from 인천> 10번째 주인공 서양화가 오원배 동국대 명예교수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원배 명예교수는 "단 한순간도 실험적 작업을 해야 한다는 태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며 "호기심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호기심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이 70의 그를 '청년'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노년과 청년을 구분하는 기준이 꼭 나이는 아니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나이 '청년 오원배'는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호기심에 이끌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거대한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묘비석 뒹구는 화장터·물 빠진 갯벌·기차 다니던 철길…그 모든 것이 매력적인 놀이터 같았죠.꼭 70년 전 인천에서 태어나 자란 꼬마 오원배 역시 지금처럼 호기심이 충만했다. 그에게 도시 인천은 꼬마 오원배의 호기심을 채워줄 것들로 가득한 테마파크나 다름없었다. 묘비석이 나뒹구는 화장터, 물 빠진 갯벌, 바다에 띄워 놓은 원목, 기차가 다니던 철길이 그에게는 모두 하나같이 매력적인 놀이기구였다.오원배는 195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평양 출신 오응호(1911~1985)씨와 충남 홍성 출신 김정여(1921~2006년)씨 사이에 태어난 4남매 가운데 셋째였다. 당시 인천고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던 현재 인천정보과학고등학교 인근 중구 유동에 있는 집에서 가족이 함께 살았다.1883년 개항 이후 외국인묘지 많던 풍경바닷가서 놀던 어린시절, 귓가엔 소금자국기차 올때 맞춰 철로에 못 올려놓는 놀이'나비 날개 만지기' 하고싶으면 하던 아이"동네 형들을 쫓아다니며 놀았죠. 집 근처 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 인근에 화장터가 있었어요. 여기저기 묘비석이 나뒹구는 곳이었는데, 뛰어놀기에 참 좋았어요."1883년 개항 이후 빈번하게 외국인이 드나들었고 머물렀던 도시 인천에 외국인묘지가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들도 숨지면 장례를 치르고 결국 땅에 묻혀야 했다. 일본인과 청국인, 서양인의 묘지가 각지에 있었다. 오원배가 살던 동네 인근 율목동에는 일본인 묘지와 화장터가 있었다. 일본인 묘지는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유지됐다. 일본인 묘지 철거된 이후 그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됐고, 1970년대에는 '풀장'이 들어선다. 1990년대 풀장 폐쇄 이후에는 다시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유골은 19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남은 묘비는 인천가족공원 일본인 묘역으로 이전됐고, 이후 다시 가족공원 내 외국인 특화 묘역으로 옮겨졌다."당시 최고의 놀이터는 아무래도 바닷가였던 것 같아요. 집에서 30여 분 걸어가면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낙섬이 나오는데 둑방(제방) 왼쪽으로 염전이, 오른쪽은 바다였어요. 둑방 돌 틈에 웃옷을 벗어 끼워놓고 갯벌의 긴 고랑에서 허기질 때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죠."오원배의 기억에도 당시 갯벌에서 어린이가 익사하는 일이 흔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 한 반에서 책상 한두 자리는 비어있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옛날 신문을 뒤져보면 어린 소년이 바다에서 조수에 휩쓸려 익사했다는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원배의 모친은 "바닷가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며 신신당부했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 어머니의 경고가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실컷 놀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바닷가에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7살 때였을까 아마 제 생애 최초의 거짓말이 아니었나 합니다. 귀에는 바닷물 염분 때문에 하얗게 소금 자국이 앉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웃음)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는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갯골에 빠져 허우적대다 중학생 형이 건져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몸소 체험했다. 오원배는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지난 6월부터 10월15일까지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열리는 기획전시 '이미지로 건너오는 시들'에 허위(생몰연도 미상)의 시(詩) '무정(無情)하다 인천(仁川) 바다'(청년, 1923년 1월) 옆에 나란히 걸려있다.가장 짜릿했던 놀이는 바닷물에 띄워 놓아 출렁거리는 원목을 발로 굴리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당시 만석포구, 북성포구에는 목재회사의 저목장(貯木場)이 있었다. 오원배는 대성목재라는 회사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목재 회사들은 나무를 육상뿐 아니라 바다 위에도 저장했다. 온통 나무로 뒤덮여있으니 잘 살피지 않으면 땅인지 바다인지 구분조차 어려웠다. 바다 위 나무가 움직이지 않도록 철사로 고정해 두기도 했지만 나무가 물 위에 떠올랐다 잠겼다 반복하면서 끊어지는 경우도 많아 벌어진 원목 틈 사이로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나비 날개 만지고 눈 비비면 장님 된다니,하지말라는 건 직접 해봐야 했죠."물에 둥둥 떠 있는 원목을 밟으면 돌아가는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어요. 그걸 해보겠다고 그 멀리까지 찾아갔으니 말이죠. 돈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바닷가에서 노는 게 최고였죠."집 주변 기찻길도 좋은 놀이터였다. 철로에 귀를 대고 있다가 기차가 오는 소리가 나면 철로에 못을 올려놓는 놀이도 했다. 기차 바퀴가 밟고 지나가 납작해진 못은 자석으로 변했다."호기심이 무척 많은 아이였죠. 나비 날개를 만지고 눈을 비비면 장님이 된다는 얘기가 있잖습니까. 하지 말라는 건 직접 해봐야 했어요.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잘 컸죠."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구 답동에 있는 송도중학교에 입학한 오원배는 당시 미술교사였던 서양화가 황추(1924~1994)에 눈에 띄며 미술부에 들어간다.서양화가 황추는 전후 인천미술을 견인한 작가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황추는 해주 제2고등보통학교와 해주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인천에 정착해 1953년부터 송도중·송도고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며 화가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무엇보다 서예를 제외하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에서 이렇다 할 성과가 없던 인천 화단에서 남다른 성과를 보였다. 당시 국전은 작가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황추는 1958년 제7회 국전에서 처음 입선하더니 이후 15차례 연속 입선하고, 1966~1967년에는 2년 연속 특선을 차지하는 등 이름값을 높였다. 인천 화단 특히 서양화 분야에서는 없던 일이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24년간 교사로 일했다.서양화가 황추 눈에 띄어 송도중 미술반 활동"베레모에 파이프 물고 작업하시던 모습 생각"차이나타운 찾아가 매일 수채화 그리기 과제비 오는 날엔 중화루 1층에 다같이 모여 습작오원배는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송도중·송도고에서 미술반으로 활동했다. 미술반 활동을 시작하고 경기도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했는데 특선을 차지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오원배는 그때 화가의 꿈을 갖게 됐다. 황추는 주로 학교에서 개인 작업을 했는데, 오원배는 "베레모에 파이프를 물고 작업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고 기억했다.송도중·송도고 미술반에서의 활동은 그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소중한 경험이 됐다. 미술반 학생들은 방과 후 학교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이국적 풍경의 청관(현 차이나타운) 일대 모습을 매일 1점씩 수채화로 그리는 것이 과제였다. 미술반 활동 내내 매일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차이나타운은 물론 인천항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이 자연스레 일과가 됐다."당시 청관에는 중국인이 많이 살았고 화교 학교의 학생도 많았어요. 어쩌다 비를 만나게 되는 날이면 청관의 상징 같은 중화루 1층에 모여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오원배는 중화루 건물 외벽의 색깔이 고색창연했다고 기억했다. 1970년대 초반 중화루 외벽에 붉은색 페인트가 덮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됐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중화루는 1883년 인천 개항장에서 영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문을 닫고 들어선 중식당이다. 1970년대 말 폐업하고 건물이 철거됐다.미술반 시절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오원배는 지금도 어디를 가든지 스케치를 하려 노력한다. 이때 경험을 소중하게 여겨 그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제자를 가르치면서 모든 학생에게 매 학기 수백장의 스케치를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줬는데, 제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회자된다고 한다.고등학교를 마친 오원배는 1년 재수 생활 끝에 1972년 동국대 미술학과에 입학한다. 오원배의 대학 시절인 1970년대는 명과 암이 뚜렷한 두 얼굴을 가진 모습이었다.1970년대 통기타 등장한 대중문화 전성기언로 막아버린 독재 시작… 명암의 두 얼굴황석영 '객지' 읽으며 예술가의 역할 고민"1970년대 초는 비상시국이라는 미명하에 긴급조치가 발동되고 언로(言路)가 통제됐던 독재 시기였죠. 한편으로는 청바지와 통기타,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등장한 대중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하고요. 독재정권 치하의 두 얼굴이자 산업화 시대의 명암이라고 할까요. 저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었고, 현실 도피용 술자리는 늘 희망 없는 탄식과 함께였어요."오원배는 황석영의 중편 '객지(客地)'나 이문구의 '장한몽( 長恨夢)' 등을 읽으며 예술가로서 그가 감내해야 할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오원배는 1977년 군대를 전역하고 1979년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은 한국사회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프로파간다가 횡행하고 언로가 차단되었던 시기였다"고 오원배는 말했다.자아성찰 위해 프랑스 파리 유학길 올라외부인 포용하는 문화 덕에 성원 얻어과 대표땐 루브르 박물관 벽화 그리기도벽 한쪽 귀퉁이에 한글메시지 새겼던 추억 이 시기 오원배는 대학 초반 관심을 기울였던 민중의 삶, 애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조형적 시도를 한다. 세상이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은 어둡고 우울했다. 어딘가 부족함을 느꼈다. 미국문화원을 들락거려 화집을 빌려보며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주의 인상파 화풍이나 '미니멀리즘'이 대세인 우리나라 분위기는 자신과 맞지 않았다. 당시 서구 미술은 국내와 달리 다양한 '포스트모던' 형상 작업이 주도하고 있었다. 오원배는 "사회적 발언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하더라도 조형적으로, 미학적으로 완성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로 했다.그의 유학 시기는 "진지하게 자아를 성찰하고, 독자적 조형세계를 갖추려 온몸으로 부딪힌" 시기였다.파리국립미술학교 실기실에 틀어박혀 작업만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일 그린 그림을 지워버리고 재주 없음을 한탄하며 풀죽어 집에 돌아오고, 또 다음날이면 다시 실낱같은 기대감을 갖고 학교로 향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파리국립미술학교 재학생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시립미술관, 퐁피두센터에 갔다. 또 학교 앞 화랑가에 전시된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자신의 작업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 됐다.이름 모를 아시아 변방의 학생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잠시 편견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찾으려는 오원배의 노력을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프랑스 사람들은 문화적 자긍심이 강하죠. 그런 자신들의 문화를 배우러 온 외부인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당시 얀켈(Jacques Yankel·1920~2020) 지도교수가 그런 저를 성원해 줬고요. 운이 좋게 파리국립미술학교 1등상을 받았고 프랑스예술원 회화 3등상도 받았어요. 과 대표도 맡게 됐죠."과 대표를 맡은 어느 날 그는 친구들을 이끌고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밍 페이가 설계한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공사 현장의 가림막에 벽화를 그리고 벽 한쪽 귀퉁이에 한글로 '야음을 틈타 불란서 졸개들을 데리고 와서 그리다'라는 메시지를 남겨 놓기도 했다. 그의 유학 생활은 아버님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1985년 귀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귀국 이후 1986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마음껏 작품을 선보이며 매번 전시 때마다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다. 인간의 폭력성과 야수성을 상징한 반인반수 이미지, 인습이나 제도에 억압받는 인간을 표현한 어둠에 잠긴 구조물 사이의 투명인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청년들의 절망, 집단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인체 등 디스토피아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존재를 탐구한다.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올해의 젊은 작가상'(1992), '제9회 이중섭 미술상'(1997) 등을 받는다. 오원배의 이중섭 미술상 최연소 수상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오원배는 최근 인천문화재단이 선정하는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에 처음으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미술계에서 영광스럽게 여길만한 큰 상을 이미 여러 차례 받은 그이지만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언젠가 고향인 인천의 미술계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주어져서 그 어느 수상보다도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아요.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되어 관심과 주목이 뒤따르는 만큼 그에 걸맞은 작품 활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는 12월에 개최될 전시는 앞으로의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의 성격을 가늠하는 전시인 만큼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이중섭 미술상 최연소 수상기록"언젠가 고향인 인천 미술계 기여하고파"끊임없는 변화 중요… 치열한 자기극복 다짐오원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덕목은 끊임없는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형식의 차용이 아닌 치열한 자기극복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항상 호기심을 유지하며 늙지 않는 이유다.작가 오원배에게 도시 인천은 어떤 의미이며 또 인천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어린 시절 태어나서 자란 고향 인천은 저의 무궁한 상상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 특유의 비린내와 수묵화의 선을 닮은 갯벌의 긴 고랑은 작가 오원배에게 있어서 기억의 실마리입니다. 기억의 그 장소는 흔적도 찾을 수 없이 매립되어 높은 건물로 가득 들어찼지만 그사이 인천은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독자적 문화가 갖추어 있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서울과 가깝다는 지정학적 얘기를 합니다.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가 인천문화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관이 문화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이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 대목입니다. 문화도시 인천을 상상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아임프롬인천 오원배아임프롬인천 오원배아임프롬인천 오원배아임프롬인천 오원배황추 선생님과 송도중 미술반 앞줄 왼쪽이 1학년 오원배다./오원배 제공옛 중화루.청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오원배/오원배 제공대학재학 시절 미술반 후배들과 함께한 여름 캠핑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오원배. /오원배 제공오원배(왼쪽)의 군복무 시절/오원배 제공파리국립미술학교 교정의 오원배/오원배 제공얀켈 지도교수에게서 드로잉에 대한 비평을 듣고 있는 오원배/오원배 제공파리국립미술학교 재학시절 학과 교우들과 함께 있는 오원배. /오원배 제공오원배의 파리 유학시절 오원배. 오른쪽이 얀켈 지도교수다./오원배 제공아임프롬인천 오원배아임프롬인천 오원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