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민 인문학강좌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8·끝]섬의 생태적 정체성

새로운 종 도입·개발로인해고유종 소멸하는 경우 있어섬은 '고립성'과 '소통성'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바다로 둘러싸인 독립된 공간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목적과 원인에 의해 왕래가 이뤄진다.홍선기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교수는 지난 9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섬의 생태적 정체성'이란 주제로 강의하면서 "생물은 고립된 섬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유전적 특성을 발휘하며 진화한다"고 말했다.갈라파고스나 하와이, 이스터섬 같이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경우 그 섬에만 서식하는 고유종의 점유율이 90%를 넘는다. 하지만 인간이 섬에 정주하면서 곡류나 채소, 가축 등 새로운 생물종을 도입하고 개발한 결과, 고유종이 외래종에 의해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섬의 이중적 성격은 땅과 육지라는 두가지 속성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여기에 갯벌이라는 대규모 이질적인 환경을 결합하면 '고립'과 '소통' 사이 또다른 경계가 만들어진다.홍 교수는 "인간에게 해양은 대륙과 대륙을 구분하는 경계이지만, 철새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뛰어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경계이다"라며 "갯벌은 대륙과 대륙을 오가는 철새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절박한 공간이 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갯벌은 철새들에 의해 소통되고 또한 교류된다.갯벌은 바다와 섬 사이의 경계성을 형성하는 고립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갯벌 속의 생물을 채취해 온 전통문화를 통해 섬과 섬 경계를 넘는 소통의 공간이다. 이는 갯벌섬에서 생활하는 섬 주민들에 의해 이미 개념화 되었다.또 찰스 다윈은 그의 저서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에서 육역과 해역의 경계를 부분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자연을 조각처럼 구분해 바라보는 시각을 극복하고자 했다. 시·공간이 명확한 기존의 섬 이론을 탈경계의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얘기다.홍 교수는 "기술과 과학의 발달에 의한 물리적 경계의 극복에 따라서 고립과 소통이라는 섬에 대한 인식론적 경계론이나 그에 상응하는 탈경계에 대한 논의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며 "물리적 경계는 존재하지만 생활에서의 경계인식이 상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했다.이어 "우리나라 대표적 섬 지역인 서·남해 다도해가 보유하고 있는 고유한 생물자원과 문화자원을 보전하고 활용해 섬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그 생태적 가치를 세계인과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바다와 섬의 인문학, 지구(地球)에서 해구(海球)로의 인식 전환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진행된 2014년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는 이번 8강을 끝으로 마무리 됐다. /김민재기자▲ 홍선기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교수가 지난 9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 강사로 나와 '섬의 생태적 정체성'이란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제공

2014-12-14 김민재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7]인천 바다를 소재로 한 시

바다는 인천의 문학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다. 조우성(사진)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위원은 지난 25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 강사로 나와 '인천 바다를 소재로 한 시'를 소개했다.놀 저물 때마다 멀어지네 내 집은/한 달에 보름은 바다에서 사는 몸이라/엄마야 아빠야 그리워지네//진주야 산호를 한 바구니에 캐서/이고서 올 날은 언제이던가//보면 볼 수록 멀어지는 네집은/엄마야 아빠야 큰애기라 부르지 마소/목이 메어 배따라기조차 안 나오우김동환의 시 '월미도 해녀요'는 1927년 동인지 습작시대를 통해 발표됐다. 시적 화자인 '해녀'는 한 달이면 보름을 차가운 바다 속에서 물질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오고 있다. 당시 월미도 앞바다에 해녀나 진주, 산호가 있을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의 세계라 읽어도 무방하다.1976년 '인천문학'에 발표된 랑승만의 시 '월미 부두'는 한 폭의 즉물적 풍경화 같다. '노스텔쟈의 깃발', '고래처럼 잠들지 못하는 외국 상선', '지느러미처럼 흐느적거리는 밤' 같은 현란한 이미지의 잔치는 자아의 초점이 이국적 낭만의 물결에 휩싸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더불어 '월미 부두'에는 부두의 주인인 인천 사람과 그 삶의 자취가 말끔히 지워져 있다. 대신 그 자리에는 '키 작은 쏘오냐'를 그리워하는 외항선 선원과 항구를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시적 자아의 소망만이 그려져 있다.작자 미상의 민요 '인천 아리랑'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 몰려든 전국팔도 사람들과 이들을 받아준 인천사람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노래다. 조 위원은 이밖에 노자영의 '미지의 나라에', 최경섭의 '종소리를 들으며', 김구연의 '강화 전등사에서' 등 인천과 바다를 주제로 한 시를 소개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이날 강연에서 풀어냈다.마지막 강좌인 8강은 다음달 9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홍선기 목포대 교수가 '섬의 생태적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2014-11-27 김민재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6]한민족의 해양활동과 해륙국가론

선사때부터 활발 교류 불구중요성 간과 해양활동 금지日강제개항·식민지배 초래동아시아의 역사를 육지 위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각 지역간에 일어났던 교류는 거의 해양을 통해 이뤄졌다.윤명철 동국대 교수(해양문화연구소장)는 지난 11일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에서 '한민족의 해양활동과 해륙국가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윤 교수는 "한·중·일 관계에서 해양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특히 3지역 사이 이루어진 사람들의 이동과 물자의 교류, 온갖 갈등과 환희들은 해양이 아니면 불가능했다"고 강조했다.동아시아는 선사시대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했다. 부산 근처나 울산, 대마도 등에서는 이미 6천~7천년 전 부터 한·일간 교섭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견됐다. 고조선은 황해북부 해안을 끼고 발달했는데, 특히 요동반도와 서한만, 대동강 하구지역을 중심으로 해양문화가 발달했다.삼국시대 고구려는 초기에 만주지역 송화강, 압록강 등 큰 강을 이용한 내륙수군 활동이 있었으며, 이후 황해를 무대로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활발한 교섭을 했다.백제는 해양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을 장악하면서 경기지방을 배후지로 삼고 바다로 진출했다. 서해남부지역도 완전히 장악해 제주도를 영향권 아래에 넣었으며, 일본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일본에서 고대국가가 성립하고, 불교 등 문화가 발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고립돼 해양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경주를 해항도시로 삼고, 포항·감포·울산을 외항으로 삼으면서 해양활동을 전개했다.고려는 북방의 요나라를 피해 송나라와 바다로 교역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는 강화도 등에서 바다를 근거지로 항전했다. 삼별초정부는 진도, 제주도 등에 세운 일종의 해양왕국으로서 4년간 고려정부와 몽골을 대상으로 항쟁했다.조선시대에 이르러 해양문화는 천시되고 수군활동도 미미해졌으며 민간인의 대외해양활동을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바다를 막고 중국과의 교섭만을 추진했다. 그 결과 중국의 주변부로 전락했다.근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해양의 중요성과 역할이 거론됐다. 병인양요 등을 겪으면서 해양의 중요성을 깨달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강제적인 개항, 청일전쟁, 러일전쟁, 일본의 식민지배는 해양력 및 해양질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윤 교수는 "한·중·일은 바다를 매개로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으로 인해 내부적이건, 대외관계에서건 역사가 발전하는 데에 해양적인 역할이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며 "이 지역에서 명멸했던 모든 종족들과 국가들은 이 해양의 영향을 어떠한 형태로든 받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다음 7강은 오는 25일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이 '노래와 문학작품 속에 그려진 바다와 섬'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2014-11-12 김민재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5]비교사적 관점에서 본 해양교류

한중상인 활발한 바닷길 교류조공무역보다 민간 역사영향역사는 영웅이나 하나의 사건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저변에 깔린 소소한 역사들이 모여 발전하는 것이다.윤승준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달 28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비교사적 관점에서 본 해양 교류'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윤 교수는 '아날학파'를 창시한 역사학자 브로델(Fernand Braudel·1902~85)을 소개했다.브로델은 저서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를 통해 지중해 역사를 소상히 밝혔다. 그는 지중해를 둘러싼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아니라 풀·열매·날씨 등 어찌보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부분들을 다뤘다. 스페인 야산의 올리브, 매일같이 노새와 낙타를 타는 베르베르 유목민, 봄·가을의 강우 등 자연환경이 차곡차곡 쌓여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지중해 역사도 마찬가지다. 작은 배들과 바다 사람들이 모여 연결망을 구축했고 그것이 역사가 됐다. 브로델은 "인간의 지중해는 이들 인간의 창의력과 노동과 노고가 계속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고 강조했다.교통로는 곧 도시가 된다. 교통로는 잘 짜인 역사의 하부구조다. 그러나 교통로는 육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흔히들 중국과 우리나라는 '조공무역'을 통해 교류했다고 알려졌지만, 이미 바다를 통해 상인들이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육지 중심의 '사건'이 역사를 주도하는 게 아니라 바닷길을 통해 차곡차곡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를 주도하는 것이다.다음 6강은 오는 11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윤명철 동국대 교수가 강사로 나와 '한민족의 해양활동과 21세기 해륙국가론'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2014-11-06 김민재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4]언어 특징으로 본 인천 섬사람들

강화선 '송두리째' 단어 보존교동엔 평안도 말 섞이기도체취 배어있는 말 영원할 것사투리 혹은 시골말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방언은 서울말(표준어)이 아닌 말로 생각하기 쉬우나 학문적으로는 한국어를 이루는 하위의 모든 말을 뜻한다. 어느 지역에서 사용되든, 어떤 집단에서 사용되든 그것이 한국어라면 방언이 되는 것이다. 서울에 인접한 인천에서 쓰는 말, 커다란 섬 강화에서 쓰는 말, 그리고 인천에 속한 50여 개의 유인도에서 쓰이는 모든 말이 방언이고 그 방언에는 고유의 특성이 배어 있다.방언학자 한성우 인하대 교수는 지난 14일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에서 '언어 특징으로 본 인천 섬사람들'이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한 교수는 "이 땅의 모든 말이 방언이다"라고 강조했다.'고립'의 상징인 섬은 언어 면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나타난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특성상 일단 언어적 특성이 형성되면 다른 언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인 변화의 길을 걷는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강화지역에 남아있는 '송두리'란 단어이다. '송두리'는 사전에 '있는 것의 전부'라고 풀이되지만 '송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강화에서는 그것이 대나 싸리로 짠 바구니를 지칭하는 것으로 남아있어 '송두리째'의 의미를 명확히 알려준다. 비록 다른 지역에서는 이 단어가 사라졌을지라도 고립된 섬에서는 그 단어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언어 면에서 섬은 고립뿐 아니라 '도약'의 특성도 보여준다. 육지에서의 방언 전파는 동심원이 퍼져 나가듯 지역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바다가 가로막힌 섬에서는 물길을 따라서 이뤄진다. 그 결과 물리적인 거리와는 관계없이 방언의 전파 양상이 나타난다. 교동 말에 나타나는 '어드렇게 왓어'는 전형적인 평안도 말이다. 허수아비를 뜻하는 영흥도 말 '쩡애'는 북부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말이다. 이러한 말들은 바닷길을 따라서 도약해 온 것이다.언어의 고립과 도약은 궁극적으로는 '융합'으로 이어진다. 섬이 개척되기 시작하면 출신지역이 다른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각자의 말이 섞여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말이 형성된다. 덕적도의 말이 그러하다. 지도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가 가깝고 말에서도 이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전형적인 황해도의 말이 관찰된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배를 부리던 황해도 사람들이 대거 남쪽 방향으로 내려와 덕적도에 자리를 잡은 까닭이다. 그 결과 덕적도의 말에 황해도의 말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고 있다.한 교수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할수록 섬은 고립의 특성을 잃어가고 언어 또한 마찬가지이다"면서 "그러나 '이 땅의 모든 말'이 방언인 이상 인천의 여러 섬에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체취가 배어 있는 말들이 지금도 쓰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다음 5강은 10월 28일 오후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윤승준 인하대 교수가 '문명이 교차하는 바다 지중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한성우 인하대 교수는 지난 14일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에서 "이 땅의 모든 말이 방언이다"라고 강조했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14-10-15 김민재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3]해양인식의 확대와 해양사

세계의 바다는 하나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사학과 교수·사진)은 지난달 30일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에서 '해양인식의 확대와 해양사'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강 원장은 고대 지중해의 시대부터 현대 태평양 시대에 이르기까지 바다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고대 해양사의 중심은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로 둘러싸여 있는 남유럽의 바다 '지중해'다. 남유럽 여러 세력들은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투를 벌였다.기원전 13세기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그랬고,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맞붙은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도 지중해를 배경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 밖에 펠레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 포에니전쟁(기원전 3세기)이 지중해의 주요 패권 전쟁이다. 이 같은 전쟁을 거치면서 지중해 패권은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로마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고 선언했다. 중세 시대에 접어들어 바다는 '海(바다해·Sea)'에서 '洋(큰바다양·Ocean)'으로 바뀌었다. 7세기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개창한 이후 8세기 북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고, 아라비아해를 통해 인도양으로 넘어갔다. 이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이 이슬람국가로 자리잡은 계기가 됐다.근세·근대는 '대항해 시대'라고 불린다. 동방(인도)에 대한 동경으로 에스파니아 이사벨 여왕은 해양탐험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포르투갈은 엔리케왕자의 후원으로 아프리카 연안항로를 개척했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바하마제도, 쿠바, 히스파니올라(아이티) 제도에 도달했고,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497년 콜롬비아, 1499년 브라질에 도착하는 등 대서양 항로가 개척됐다.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1497년 포르투갈 리스본 근교 벨렝에서 출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을 횡단해 인도 남서부의 도시 캘리컷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태생의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은 1520년 태평양에 도달해 필리핀 세부섬까지 진출했다.17세기 에스파니아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해운업으로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1651년 '어떤 나라도 자신의 국가 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을 영국에 반입할 수 없다'는 영국의 항해조령으로 네덜란드 해운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어 영국의 시대가 찾아왔다. 영국의 항해가 제임스 쿡은 1768년 태평양, 뉴질랜드, 호주, 남극양, 북서항로 항해를 통해 '세계의 바다는 하나'임을 입증했다. 18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은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20세기는 미국의 시대다. 1차 세계대전(1914~18)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미국은 2차 세계대전(1939~45)을 통해 태평양을 접수했다. 미국·소련의 이념 대립과 일본의 급성장, 소련의 해체는 21세기를 대서양의 시대에서 태평양의 시대로 바꾸었다. 중국의 급성장과 유럽 경제의 위기는 앞으로 해양사의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4강은 오는 14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인하대 한성우 교수가 '언어 특징으로 본 인천사람들'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2014-10-08 김민재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2]왕과 왕실가족 유배지 인천의 섬

연산·광해군·안평대군…한양과 가까운 강화·교동行고위직 한해 '정책적 예외'조선시대 형벌 중 유형(流刑)은 중죄를 범한 자를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특히 조선시대엔 정치의 주도권을 둘러싼 당쟁이 낳은 정치범들 중 사형을 면한 정치범들이 유형으로 처벌됐다.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난 16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왕과 왕실 가족의 유배지 인천의 섬'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조선의 도읍 한양과 가까웠던 강화, 교동 등 인천의 섬은 왕족이나 왕실 가족의 유배지 역할을 했다.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김종서를 척살하고 안평대군을 붙잡아 강화에 안치(安置)했다. 안치는 하급 관리나 서민은 해당되지 않고 왕족이나 고위관리 등에게만 적용한 유배형이며, 유배지에서도 거주지를 강제로 제한했기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도 했다. 안평대군은 이후 교동현으로 옮겨졌다.남 소장은 "안평대군을 거제도, 진도 등 거리가 먼 곳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국왕이었다가 폐군이 되었거나 국왕의 혈육으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에 한해서는 정책적으로 예외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며 "즉, 이들의 동태를 쉽사리 파악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은 사대부나 일반 관료와는 신분이 다른 인물들이기에 예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연산군은 1506년 9월 2일 반정에 의해 폐위돼 교동으로 유배됐다. 연산군을 교동으로 옮길 때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만이 따라갔고, 당상관 1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했다. 연산군은 그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다 31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과 폐비는 강화에 안치됐다가 교동으로 옮겨졌다. 광해군이 교동으로 간 시기는 병자호란으로 강화가 위험에 처했을 때였는데, 광해군이 청에 의해 복위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결국 병자호란 뒤 제주도로 옮겨진다.이 밖에 1613년 영창대군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강화에 안치됐고, 1651년 인조의 다섯째 아들 승선군도 역모사건에 연좌돼 강화도에 안치됐다. 사도세자의 손자인 상계군은 1779년(정조3년) 당시 권력자인 홍국영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됐다.다음 3강은 9월 30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강봉룡 목포대 교수가 나와 '해양인식의 확대와 해양사'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난 16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조선의 도읍 한양과 가까웠던 강화, 교동 등 인천의 섬은 왕족이나 왕실 가족의 유배지 역할을 했다고 강연했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14-09-17 김민재

[2014 하반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1]해양문화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가 공동주최하는 2014년도 하반기 인천시민인문학강좌는 <바다와 섬의 인문학 '지구(地球)'에서 '해구(海球)'로의 인식 전환을 위하여>를 주제로 정했다. 인문학의 주요 학문영역에서 바다와 섬은 어떻게 인식됐으며 그 곳이 지닌 인문적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바다와 섬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미래향(未來鄕)인지 등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바다는 인류문명사와 늘 함께 했다. 그리스문명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에게해 문명', 이집트 문명은 '지중해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 중국 당(唐)과 로마의 동서교류는 인도양을 매개로 한 '해양 실크로드'였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지난 2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강좌에서 '해양문화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주제로 강의하면서 이같이 강조했다.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육지보다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이 더 많다. 이런 점에서 '지구(地球)'가 아닌 '해구(海球)'로 불러야 한다는 역발상은 나름 설득력을 지닌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한반도(韓半島)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3면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경영 방침에 바다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절대적 과제를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바다의 사정에 어둡다. 미국의 해양전략사가 알프레드 사이어 머핸(1840~1914)은 이를 두고 "그들은 바다의 영향에 관해 특별히 관심이나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해상력이 여러 중요한 문제에 대해 결정적이고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 넘겨왔다"고 분석했다.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백제와 고려는 해상강국이었지만, 조선은 바다를 무시한 그릇된 정책을 폈다. 해양력 쇠퇴와 수산정책의 부재로 어민은 왜구로부터 수탈을 당했고, 해양주권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주 교수는 "변방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오늘날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독도는 동해 변방 중의 변방이다. 그러나 그 변방은 한·일 외교전쟁의 중심에 있다. 제국과 식민이 교차하는 변방 바닷가로 가장 선진적인 사상·종교·과학기술, 심지어 전염병까지 들어왔으니 함부로 중앙과 변방을 분리할 일이 못 된다. 베이징에서 해금정책으로 강력하게 바다를 통제하는 동안, 중국 남부 바닷가에서는 해적이 번성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배가 밀어닥친 곳도 두말할 것 없이 바닷가였다. 홍콩·마카오, 심지어 한반도의 부산 왜관과 진해, 인천은 외국 문물과 제국의 침략이 들어오는 최전선이기도 했다. 그는 "변방은 문명과 문명이 교차하는 열린 광장이었고, 바닷길은 당대의 '하이웨이'였다"고 설명했다.앞서 밝혔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다. 지구생태계는 생명부양시스템(Life support system)으로 움직이는데 바다는 강우, 기후, 영양염 순환, 오염물질분해, 생물생산, 서식지제공, 식량, 원자재, 문화적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그러나 산업화가 가져온 대량생산·대량소비는 인간을 부양하는 지구생태계 자체의 위기를 초래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저탄소 녹색성장 모델 등과 더불어 해양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이유다.항구도시는 인류의 문명과 함께 시작됐다. 이제 해양도시는 워터프런트로 대변되는 인프라·문화적 재생을 토대로 새로운 도시로의 면모를 꿈꿔야 할 때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인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필요한 시기다. /김민재기자▲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가 지난 2일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에서 해양문화의 법고창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제공

2014-09-03 김민재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8·끝]센카쿠제도 둘러싼 중·일 갈등과 동북아

2010년 日 국유화 결정 '판단유보' 암묵적 합의 파기'중화부흥-반중' 이익 아닌 국가 체면 문제로 번져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외교적 갈등은 단순한 영토분쟁이나 상호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명예가 걸린 문제가 됐다.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지난 24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문학강좌에 강사로 나와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일간 갈등과 동북아'란 주제로 강연했다. 이 연구위원은 강연에서 센카쿠제도를 둘러싸고 험악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일간 갈등의 원인을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으로 정리하고, 분쟁의 쟁점에 대해 설명했다.센카쿠제도에 대한 갈등은 먼저 일본의 실수에서 출발, 확대됐다. 2010년 9월 간 나오토 정부는 센카쿠제도 주변 해역에서 조업하던 중국어선 선장을 체포해 국내법으로 엄정히 징벌하고자 했다. 당시 중·일간 유지돼 오던 '판단유보'의 암묵적 합의를 깨트린 것이다.이 연구위원은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1978년 평화우호조약 체결 당시 센카쿠 영유권 문제는 다음 세대로 넘기자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는데 일본이 '판단보류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라며 "그 결과 중·일간 무력충돌이 가능한 시대로 진입하게 됐다"고 했다. 일본 민주당 정부가 작은 사건을 큰 갈등으로 번지게 하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센카쿠 국유화에 결사반대 의향을 전한 직후 일본 정부가 국유화를 결정한 것은 후진타오 주석의 체면을 구기게 했고, 중국의 강경대응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센카쿠제도 문제를 본질적으로 어렵게 하는 것은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와 일본이 주장하는 '선점의 법리'간 비대칭 대립이다. 이 논점에서 핵심은 센카쿠제도가 역사적으로 무인도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오랜 문헌에 영유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기술이 있었지만, 실제 무인도에 사람을 파견시키진 않았다.2010년 9월 중·일간 충돌이 확대된 배경에는 당시 국토교통성 장관이었던 마에하라 세이지의 개인적인 친미반중적 성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미국을 배제하고자 한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미일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이에 위기의식을 가졌던 마에하라 등 친미세력이 '중국위협론'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 센카쿠제도 사건이라는 얘기다.이 연구위원은 "결론적으로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일간 분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국인에게 내재된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중화부흥'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출발의 의미라 하겠다"라며 "중·일간 센카쿠제도 문제는 더이상 사실의 문제나 상호 이익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명예에 관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민재기자▲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지난 24일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일간 갈등과 동북아'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중·일간 갈등의 원인을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으로 정리하고, 분쟁의 쟁점에 대해 설명했다. /인하대한국학연구소 제공

2014-06-25 김민재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7]아베와 극우주의

패전후 '반성의 길' 독일EU에서 주도적 역할 가능장기불황 우파득세한 일본잘못된 과거 미화 갈등키워일본의 극우·국수주의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까닭은 역사적 망각에 있다.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난 10일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 강좌에서 '아베와 극우주의'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아베 정부는 극우·국수주의 시도를 중단하고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에 공헌해야 한다"고 말했다.일본의 아베 정부는 '장기 불황후 우경화'라는 역사적 공식을 따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역대 어느 정부도 대놓고 하지 못했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하는 등 극우화가 극에 달한 상황이다. 아베 총리는 장기 불황속에서 희망을 상실한 일본 국민에게 대외적으로 국가적 자존심을 자극함으로써 극우·국수주의를 선동하고 있다.강 연구위원은 "극우·국수주의는 인접 국가와는 영토 갈등을 유발하고 침략을 호도하는 방향으로 간다"며 "일본이 틈만 나면 극우화로 가려는 것은 과거사 정리가 여전히 불충분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1945년 일본 패전 당시 동북아 세력 균형은 무중력 상태였다. 중국은 내전에서 회복하지 못했으며, 한국은 이제 막 독립한 상태였다. 오직 미국만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고, 부분적으로 소련이 후순위 지분을 다투었다. 이같은 구조는 '전범국' 일본에게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독일과 비교했을 때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이다.독일은 같은 패전국이었지만 미국·소련·영국·프랑스의 공동지배를 받았고, 특히 소련으로부터 가혹한 보복을 당했다. 반면 일본은 실질적으로 미국의 단독 지배를 받았다. 최대의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은 당시 조건에서 일본의 점령에 참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강 연구위원은 "독일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범재판 이후 철저한 반성의 길을 걸어 결국 유럽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다"며 "반면 일본은 과거 잘못을 미화하거나 부정하는 정책으로 일관해 인접국의 반발을 자초했다"고 말했다.30년간 이어진 일본의 장기 불황은 냉전 종식 이후 우파정치인의 득세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일본의 투표자는 극우 정치인의 국수주의적 장밋빛 청사진에 동원되기 쉽다. 1930년대 근대화에 최초로 성공했던 일본은 당시 근대화에 실패했던 한국 등 동아시아 인접국가를 손쉽게 침탈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베가 향수를 동원하는 1930년대 아시아가 아니다.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국제 질서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반도 역시 구한말의 조선이 아니다.강 연구위원은 "역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교훈을 얻을 수 없고 결국에는 불행을 반복한다"며 "일본이 다시금 과거와 같은 재앙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일본은 독일이 과거 반성과 뉘우침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유럽의 중심으로 복귀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오는 24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리는 8번째(마지막) 강좌엔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강사로 나와 '조어도(釣魚島·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와 중일 영토분쟁'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지난 10일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에서 '아베와 극우주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있다. /인하대한국학연구소 제공

2014-06-11 김민재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6]독립국가에서 자치구된 티베트

외부적 침략 막아주는 대신내정 참여 합법적 권한 획득달라이라마 저항에도 역부족티베트가 독립된 나라에서 중국의 일개 자치구로 전락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준갑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티베트 사회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결탁해 내부적으로 절대 소수(지배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체제로 고착됐다"며 "이와 더불어 티베트의 지배층이 장기간에 걸친 청조의 지원을 공짜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티베트가 중국에 종속됐다"고 말했다.이 교수는 27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티베트와 청조의 동상이몽'이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말했다.중국정부는 1959년 ▲농노주가 독점하는 토지제도 폐지 ▲정교합일제도 철폐 ▲주민주체 정권설립 등 3가지 명분을 내세워 '민주개혁'이란 이름의 티베트 점령·통치를 단행한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민주개혁 이전의 티베트 사회는 인구의 95%에 달하는 농노·노예가 5%에 불과한 농노주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사는 부정과 불의에 가득찬 사회였다.티베트의 농노제는 10~13세기 무렵부터 보편화됐으며, 봉건정부와 귀족, 사원(상류층 승려)이 지배하는 구조였다. 여기에 한 사람이 정치와 종교(불교)를 통치하는 나라였고, 법률은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했다.청조(1644~1911) 당시 '조공관계'로 대변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티베트와 청은 독특한 국제관계를 유지했다. 승려와 시주 사이에 형성되는 '공시(供施)관계'가 국가 사이에 형성됐는데, 티베트불교가 청 황실의 복을 빌어주거나 평안을 기원하는 대신 청은 달라이라마에게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고 외침을 방어해줬다.티베트에 대한 청의 내정간섭은 바로 이 공시관계에서 비롯됐다. 청은 1717년 준가르부의 티베트 침략을 막아주고, 1727년 내분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주장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한다. 1750년 주장대신이 티베트의 유력자와 갈등을 빚으면서 피살됐고, 이듬해 청은 서장선후장정(西藏善後章程) 13조를 강요하며 군사를 거느리고 티베트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획득했다.청은 건륭 53년(1788), 건륭 56년(1791) 2차례에 걸친 네팔의 티베트 침공에 대한 전쟁비용으로 한 해 세수 4분의1에 달하는 금 1천52만냥을 사용했다. 이를 계기로 주장대신의 입지도 약해졌다. 이에 건륭 58년(1793) 청은 '티베트 고위관료를 임명할 때는 달라이라마와 주장대신이 협의할 것', '대외업무는 주장대신의 비준을 받아서 처리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된 장내선후장정(藏內善後章程) 29조를 만들어 티베트의 정치적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 교수는 "티베트와 청조의 공시관계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차원으로 변질됐다"며 "달라이라마는 청조의 정치적·군사적 개입에 저항했지만, 현실적인 역학관계가 지극히 열세였기 때문에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청조와 티베트는 공시관계라는 '같은 침상'에 있었지만, 청조는 시주의 대가로서 티베트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차근차근 시행했고, 티베트는 청조의 시주가 아무런 대가가 없는 공짜라고 착하는 서로 다른 생각, 즉 '동상이몽'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다음 7강은 다음달 10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강사로 나와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북아 영토문제'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이준갑 인하대 사학과 교수가 27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티베트와 청조의 동상이몽'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인하대한국학연구소 제공

2014-05-28 김민재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5]국제사법재판소 동향 및 대응방안

독도문제 대응논리 개발위해식민주의 문제 계속 제기필요한일 양국간 도덕적 책임 강조간도문제 국제법리 연구해야영토분쟁과 관련된 현대 국제사법기관의 판결은 당시 분쟁지역을 지배했던 제국주의 국가의 판단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들간의 영토분쟁에 있어서는 당시 지역을 식민지배했던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분쟁 영토에 대한 처분 및 입장이 절대적인 증거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이석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3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영토분쟁 관련 국제판례 동향과 동아시아 영토분쟁(한국에 주는 의미)'에 대해 강연하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국제 판례 동향을 짚어보면서 독도, 간도, 이어도, 북방한계선(NLL)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영토문제의 해결 방향을 제시했다.이 교수는 "우리나라 1세대 독도연구는 학문적 접근이었고, 2세대는 국제법과 역사학의 분리, 각론적 연구시도였다"며 "3세대는 연합국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등 연구주제의 외연확대를 시도하면서 국제사법기관의 판결 동향 및 대응방안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다"라고 설명했다.이 교수는 "독도문제 대응논리 개발 및 정책수립을 위해선 국제사법재판소의 최근 기능주의적인 판결동향을 극복하고, 식민주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이어 "국문·영문 변론서를 작성, 한·일 양국간의 역사적인 관계 강조 및 일제 식민주의에 대한 법적·도덕적 책임 강조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간도 영유권 주장을 위해 현대 국제법의 법리연구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간도 영유권 주장의 선결과제는 간도의 정확한 지리적 범위의 확정 없이 영유권 주장이 가능한지와 간도협약의 무효와 관련된 현재 우리나라 주장이 현행 국제법의 인식과 양립할 수 있는지 여부 등을 살펴보는 것"이라며 "오늘날 간도지역에 설치된 이른바 '옌볜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에 대한 자결권 이론의 적용가능성 여부 등을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이 밖에 NLL에 대해선 "전시국제법(정전협정)과 평시국제법(UN해양법협약)의 균형있는 적용을 통한 대응논리를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며 "안보문제와 영토문제에 대한 상호보완적 성격 이해와 홍보가 필요하고, 양자간 상호대립적 성격 역시 전략적으로 이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다음 6번째 강좌는 오는 27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이준합 인하대 사학과 교수가 '티베트와 청(淸)의 동상이몽'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2014-05-15 김민재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4]동북아 정세 변화와 안보

해양충돌 막기 위한 NLL, 영해·분계선인지 혼란연평도 포격사건은 전쟁할줄 모르는 나라의 비극향후 교전땐 치명적 결과 '불안한 평화시대' 개막인천 앞바다의 화약고 NLL(Nothern Limit Line·북방한계선). 1953년 8월 30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남북 해양충돌을 막기 위해 설정한 NLL은 남북한 갈등의 요인이자 국내 정치의 쟁점 사안이다. NLL은 영해선인지, 해상군사분계선인지, 불가침선인지 모호한 성격 탓에 혼란이 지속돼오고 있다.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은 지난 29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동북아 정세 변화와 인천의 안보'란 주제로 NLL 논란과 천안함·연평도포격 사건 등에 대해 강연했다.김 편집장은 먼저 1999년 6월15일, 2002년 6월29일에 각각 발생한 1·2차 연평해전을 예로 들면서 서해 평화가 파괴된 이유를 설명했다. 김 편집장은 "육군 출신이 주도한 NLL수호 개념과 잘못된 군사지침이 위기를 악화시켰고, 바다 위의 무엇을, 어떻게 지킨다는 것인지가 모호하다"며 "남북 모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핵심지역이라 서북해역을 양보할 수 없었다"고 했다.김 편집장은 이어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북한이 왜 수중도발을 했는지 여러 가설을 내놨다. 그는 2009년 2월 남측의 새로운 NLL 대비계획에 대한 서해 전력증강 필요,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에 대한 복수 등 서해의 핵심이익 보호를 위해서라고 했다. 또 새로운 전면전을 준비했거나 동아시아에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고조시켜 중국을 동맹으로 결속하기 위해서라는 가설도 내놨다. 또 우리나라는 사건 원인에 대한 판단미숙과 서북해역 군사정세 정보 착오 등으로 제대로 응징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같은해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해선 '전쟁할 줄 모르는 나라의 비극'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포격도발을 감행한 이유에 대해선 ▲우리 사격훈련에 대한 단순대응 ▲서해 주도권 확보를 위한 의도적 도발이라는 두가지 가설을 제시했다.그는 지금이 결전의 시대라고 내다봤다. 향후 서북해역의 군사정세는 제한전에서 전면전으로 대치구도가 변하고 있고, 일단 교전이 벌어지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불안한 평화의 시대'가 개막했다는 얘기다.그는 "서해는 분쟁의 바다인가, 평화의 바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위기관리가 어려운 해양의 복잡한 환경을 감안해 공존과 협력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다음 5번째 강좌는 오는 13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이석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국제법으로 본 영토분쟁의 이모저모'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지난 29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이 '동북아 정세 변화와 인천의 안보'란 주제로 NLL논란에 대해 강연했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제공

2014-04-30 김민재

인천국제교류재단 '글로벌 시민강좌'큰 호응

지난해 3630여명 참여… 2011년 개설이후 최대 규모예술작품 통해 문화 등 배워 국제화 의식 수준 높여인천국제교류재단이 추진하는 '글로벌 시민강좌'가 시민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인천국제교류재단은 지난해 시민의 국제화 의식 수준을 높이기 위한 '글로벌 시민강좌'에 3천630여명의 시민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17일 밝혔다. 강좌가 시작된 2011년 이후 최대 규모라고 교류재단은 설명했다. 일반 시민부터 고등학생, 인천에 사는 러시아 출신 고려인까지 강좌를 들었다.교류재단은 '글로벌 시민강좌'를 통해 러시아, 유럽, 아랍 등 세계 곳곳의 역사와 문화, 예술 등을 시민들에게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강좌는 강의의 주제가 되는 국가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오페라, 뮤지컬, 문학 등 유명 예술작품을 수강생들이 직접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대학교수 등 전문가가 해당 국가의 문화와 역사, 인문학적 배경 등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교류재단은 비교적 친숙한 예술작품을 소재로 해당 국가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수강생들이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지역의 국가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에게 강의를 맡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등 수준 높은 강의 질을 담보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교류재단 관계자는 "여행가나 현지 사업가가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내용으로 강의를 하는 게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문화, 역사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해 수강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일부 강좌의 경우 200명이 넘게 몰리는 경우도 있다"며 "지금은 남동구나 서구 등 일부 지역에서 강좌가 열리는데, 강좌 개설 지역을 넓힐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교류재단은 올해 브라질, 페루,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문화강좌'와 인도와 방글라데시, 부탄, 네팔 등 '남아시아 문화강좌' 등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28일까진 신세계백화점 인천점 문화홀에서 동유럽 영화강좌 '영화로 만나는 동유럽'을 진행한다. /이현준기자▲ 인천국제교류재단이 추진하는 '글로벌 시민강좌'가 시민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글로벌 시민강좌엔 지난해 3천63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돼 2011년 강좌 시작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사진은 시민들이 강좌를 듣는 모습. /인천국제교류재단 제공

2014-04-17 이현준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3]中동북공정 논란 간도

일본, 청나라 소유 인정하고논란중인 영토관할문제 정리한국, "불법조약" 정당성 부정간도문제는 땅과 사람의 문제, 곧 영토문제와 주민문제다. 영토문제는 국가간 국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고, 주민문제는 거주 조선인을 누가 어떻게 관할할 것인가의 문제였다.은정태(사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15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2014 상반기 인문학강좌에서 '땅 문제이자 사람 문제인 간도문제'란 주제로 강연했다.간도문제는 19세기 유민문제에서 출발했다. 중국 만주 지린성 동남부지역에 위치한 간도는 현재 중국현지에서 연길도라고 불리는 곳이다. 조선 후기 조선과 청은 간도지역을 봉금(封禁)하고 이곳으로 이주하는 이주민을 처벌해 왔다. 그러나 고종 초기인 1869~70년 함경도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 이주하기 시작했고, 청은 1860년 국경 방어를 위해 한인(漢人)들의 이주를 허락했다.청은 간도의 조선인을 청국에 편입시키겠다고 조선정부에 알렸고, 조선정부는 그럴 바에는 이들을 귀환시키고자 했다. 그런 와중에 간도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간도지방이 조선영토임을 주장했다. 서북경력사 어윤중은 이를 받아들여 정부에 간도문제를 공식 제기할 것을 요구했다.조선과 청은 1885년, 1887년 간도의 땅문제를 두고 두 차례 논쟁을 벌였지만, 합의하지 못했다. 청은 그러나 1890년 경계문제가 마무리됐다며 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통해 일방적으로 조선 유민들을 청국적에 포함시키고 세금을 받았다.청일전쟁(1894)과 대한제국 출범(1897) 이후 간도문제는 다시 요동쳤다. 자주, 독립의식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언론과 함경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영토문제와 주민문제를 제기했다. 1899년 양국이 협상을 벌였으나 청은 영토문제를 논의하길 거절했고 주민들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한다고 합의하는 데 그쳤다.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1907년 이곳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대한제국 대신 청과 협상에 나섰다. 일본은 1909년 영토문제는 청국의 요구대로 하고 주민문제는 이곳에 설치될 일본 영사관이 관할하기로 한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간도문제는 일단락됐다.은 연구원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영토에 대한 견해는 다양했지만, 주민문제에 대한 이견은 부각된 적이 없었다"며 "그것은 영토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레 정리될 수 있는 사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간도협약은 을사조약 체결에 따라 한국이 외교권을 상실한 채 청국과 일본간에 맺어진 조약이다.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연관돼 그 정당성이 한국인들에게 부정돼 왔다. 특히 최근엔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그 어느 때보다 간도 영토문제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주민문제, 즉 옌볜조선족에 대한 이해는 뚜렷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간도문제는 한국과 중국 문제가 아닌, 북한과 중국 사이의 문제다. 통일 한국이 북한의 제반 국제조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통일과정과 연계돼 있을 것이다.은 연구원은 "오늘날 한국인들의 간도문제에 대한 관심에는 민족주의적 열망과 대륙을 향한 열망이 담겨있다"며 "이 열망이 과연 오늘날 평화와 연대를 지향하는 국제관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고 했다.다음 네 번째 강좌는 오는 29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이 나와 'NLL(북방한계선)의 진실'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2014-04-16 김민재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2]일본 영유권주장의 허구성

1905년 군사적 목적 강제편입바위섬을 竹島로 명칭 '모순'한국 법률적 근원 모두 부정독도(獨島)는 우리나라 고유영토다. 이는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공식문서에 의해 증명되고 있으며, 일본 스스로도 수차례에 걸쳐 독도가 일본의 소유가 아님을 인정한 역사적 선례가 있다. 일본은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근거없는 영유권 주장을 계속해오고 있다.곽진오(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 1일 열린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허구'라는 주제로 강의하면서 이같이 강조했다.독도는 우리 역사에서 우산도(于山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중 우산도가 가장 흔히 사용됐고, 19세기 후반들어 석도와 독도가 광범위하게 쓰이기 시작했다.일본은 1905년에야 독도를 '다케시마'(죽도·竹島)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주목할 점은 일본은 20세기 이전 역사서 등에는 독도를 마쓰시마(송도·松島)로, 울릉도를 다케시마로 호칭해오다 20세기 초부터 갑자기 두 섬의 이름을 바꿔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곽 연구위원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한 어떤 일본측 자료도 바위투성이 섬 '독도'가 왜 '대나무 섬(죽도)'으로 불리게 됐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일본이 독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시기는 1904년 러일전쟁부터다. 일본은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러시아 군함의 동해 항해를 감시했다. 이 과정에서 독도가 장차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이라는 것을 인식했고,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자국 영토 편입을 선언하는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시행한다. 이 고시에서 독도의 명칭을 마쓰시마(송도)에서 다케시마(죽도)로 개칭한다.곽 연구위원은 "전쟁 이후 일본은 이 고시를 근거로 '무주지 선점론'(無主地 先占論)에 따른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권원(權原·법률적 근거)을 부정하고 있다"고 말했다.일본의 이같은 '무주지 선점론'은 1950년대 '고유영토설'이 등장하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1953년 7월13일자와 1954년 2월10일자 일본 외무성은 우리나라에 보내온 문서를 통해 "독도는 일본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라고 했다. 주인 없는 땅이라 점거했다면서 원래 자신의 땅이었다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논리를 억지로 결합시킨 것이다.1905년 독도는 결코 무주지가 아니었다. 일본의 독도 편입도 유효한 법률적 행위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증거도 있다. 일본외무성은 2008년 2월부터 독도 관련 홈페이지를 통해 "지금이라도 독도문헌이 발견되면 한국영토로 인정할 것"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대한제국은 앞서 1900년 칙령 41호를 통해 '울릉군'의 행정단위 안에는 울릉도 뿐 아니라 죽도(울릉도 연안의 작은 섬), 석도(지금의 독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정했다. 이 칙령은 관보에도 게재된 만큼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일본의 주장은 전혀 합리성이 없다. 당시 독도는 사람이 없는 섬이었을지는 몰라도 주인 없는 섬은 아니었다.곽 연구위원은 "일본의 무주지 선점논리에 의한 독도영유권 주장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자기소모적 논쟁으로 이웃나라와의 마찰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라며 "우리도 일본이 독도와 관련해 그릇된 논리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다음 강좌는 은정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이 강사로 나와 '땅문제이자 사람문제인 간도, 간도협약'을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2014-04-02 김민재

[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1]이어도 해역갈등

우리나라 실질지배 불구 中·日 방공식별구역 선정3국 분쟁 가능성…동아시아 평화유지 방법 찾아야2014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상반기 과정이 시작됐다. 이번 상반기 과정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영토분쟁 어제와 오늘, 그리고…'이다. 오늘날 세계는 민족·종교·이념 등의 이유로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특히 한·중·일 및 러시아,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인문학강좌는 동아시아 지역 영토분쟁의 과거사를 살펴봄으로써 현재적 의미와 향후의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편집자주제주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149㎞ 떨어져 있는 외딴 섬, 이어도. 사실 이어도는 국제법상 영토의 개념이 되는 섬이 아니라 파도가 심하게 치면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 암초다. 이 작은 암초가 지난해 말 동아시아 국제사회 갈등의 중심에 섰다.지난 18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첫번째 강좌에서 김동전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동아시아 방공식별구역과 이어도 해역 갈등'에 대해 강의했다.이어도는 1900년 영국상선 스코트라(Socotra)호가 항해하던 중 발견한 바닷속 암초로 처음엔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 '스코르타 암초'라 부르게 됐다. 이 암초는 이후 1984년 제주대학교 탐사팀에 의해 공식 확인됐고, 제주도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여긴 전설의 섬 '이어도'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2001년 국립지리원이 '이어도'로 공식 이름지었다. 우리나라는 이어도가 영토는 아니지만,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대상이라 2003년 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하는 등 실질적으로 지배해왔다.그런데 지난해 11월 23일 중국이 서산다오에서 247㎞ 떨어진 이어도를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키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방공식별구역이란 군사·안보상 항공기를 식별해 무력대응할 목적으로 설정한 공중구역이다. 영공은 아니지만, 허가없이 이 구역을 비행하는 항공기에 대해선 무력대응이 가능하다. 여기에 중국은 일본과 해양영유권 분쟁이 있는 센카쿠열도까지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켜 아시아 지역의 갈등을 넘어 세계분쟁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김 교수는 "방공식별구역은 영토·영공과는 무관하지만, 경제적·해양과학적·군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한·중·일 3국의 주된 관심사다"라며 "앞서 1969년 일본이 먼저 자국 영토에서 279㎞ 떨어진 이어도를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켰지만, 우리나라는 이어도가 국제법상 영토도 아닌데다 독도 문제로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을 우려해 쟁점화시키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마저 이어도를 포함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자, 우리나라도 지난해 12월 8일 이어도를 포함한 새 방공식별구역을 발표한다. 이어도가 한·중·일 3국의 방공식별구역에 모두 포함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어도는 동아시아 국제사회 갈등의 한 요인이 됐다. 김 교수는 "지금 상황에서는 동아시아의 갈등을 예견만 할게 아니라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궁극적으로 싸우고 갈등하자는 게 아니라 한·중·일이 평화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할 때다"라고 말했다.다음달 1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2번째 강좌에서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 강의한다. /김민재기자▲ 김동전 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2014상반기 인천시민인문학강좌 첫번째 강연에서 이어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방공식별구역 갈등에 대해 강의했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제공

2014-03-23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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