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민 인문학강좌

 

[2013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3]한국아동문학과 인천

한국아동문학사에 김중미 작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인천을 주요 배경으로 한 아동문학 작품은 드물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2000)'로 등단한 김중미의 작품들을 통해 인천의 빈민촌 풍경이 '현실주의 아동문학'의 주요 배경으로 떠올랐다.지난 16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2013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상반기 3번째 강좌에서는 염희경 아동문학평론가가 '한국아동문학과 인천'이란 주제로 강연했다.염 평론가는 김중미에 대해 "인천의 빈민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독자에게 지역의 구체성과 현장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며 "김중미는 이를 통해 체험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삶의 보편성과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빈민 지역인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말에 사는 주민들의 삶과 일상을 그렸다.만석동은 개항 뒤 외국인들에게 살자리를 빼앗긴 철거민, 한국전쟁 직후 이북에서 온 피란민, 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 농촌을 떠나 도시 노동자가 된 이농민 등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온 곳이다.염 평론가는 원종찬 인하대 교수의 표현을 인용해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못나고 아픈 것들이 흘러와 쌓인 퇴적층 같은 곳이 만석동이다"고 말했다.괭이부리말에 사는 아이들은 가난하지만,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꿋꿋하고 진솔하게 살아간다. 반면 어른들은 외로움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된다. 염 평론가는 이 작품에서 어른들이 아이들과 서로 관계를 맺어 가면서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상처를 치유해 가거나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고 설명했다.또 이 작품에서는 '밥'과 '집'의 중요성도 부각된다. 염 평론가는 "유난히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이 많고, 온기 있는 집에 모여있는 풍경이 자주 묘사된다. 식구라는 말도 많이 나온다"며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밥'과 '집'을 함께 나누며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가족, 즉 새로운 공동체 형성을 통해 희망을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김중미는 '꽃섬고개 아이들(2008)'에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장했다. 꽃섬고개는 동구 화수동 골목 꼭대기 산동네인 '화도(花島)'를 일컫는다. 이 작품은 빈민촌인 꽃섬고개에 사는 여자 주인공 선경과 남자 주인공 한길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20대 중반까지의 성장과정과 가족사를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김중미는 이 작품에서 베트남전 참전 이후 알코올중독자가 된 한길의 아버지를 통해 가정폭력,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선경의 학교친구를 통해 학교폭력과 동성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한길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 편견, 폭력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염 평론가는 "이 작품은 주인공들을 폭력에 멋지게 맞서는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다"며 "김중미는 가난한 이들 사이의 우정과 연대, 즉 힘없는 개인의 작은 선택이 모이면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다음 네 번째 강좌는 오는 30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김윤식 전 인천문인협회 회장이 '인천 문단의 지형과 인천 문학의 특징'이란 주제로 강연한다./박경호기자

2013-04-17 박경호

[2013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2] 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인천

강경애 '인간문제' 日 동양방적 인천 공장 작품 모델현덕 '남생이' 주인공 소년의 해안가마을 '고단한 삶'오정희 '중국인 거리' 한국전쟁 직후 거리 풍물 그려노동의 도시, 해안가 빈민촌, 다문화 도시 등 한국 근대소설 속에 비친 인천의 '얼굴'은 단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지난 2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2013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상반기 2번째 강좌에서는 이경재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인천'이란 주제로 강연했다.이 교수는 강경애의 '인간문제(1934)', 현덕의 '남생이(1938)',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1979)' 등 세 작품을 통해 인천의 세 가지 얼굴을 소개했다.이 교수는 지난 강연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강경애의 '인간문제'가 노동의 도시 인천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이 소설의 주요한 배경인 '대동방적' 공장은 일본 동양방적 인천공장을 모델로 했다. 만석정 매립지(현 동구 만석동)에 있던 이 공장은 주로 군복, 군수품, 관수용품을 만들기 위한 저급 면직물을 대량 생산했다.동양방적은 훗날 1978년 노조 탄압을 둘러싼 여공들의 투쟁으로 유명한 동일방직 인천공장으로 바뀐다.현덕의 '남생이'는 소년 주인공 '노마'의 시선으로 본 해안가 빈민촌의 삶이다. 이 교수는 1930년대의 칠통마당(현 인천중부경찰서 뒤쪽에 있던 부두)을 묘사한 소설의 시작부분 첫 단락을 주목했다.'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미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 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중략) 개미집 같은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잿더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노마의 식구는 황해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일자리를 찾아 이 항구로 왔다. 노마의 아버지는 항구에서 하역일을 하다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있다. 그후 노마의 어머니는 항구에서 들병장수(병에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를 하면서, 털보아저씨와 바람나 가정을 내팽개친다.이 교수는 "온갖 비루한 욕망과 애욕이 들끓는 타락한 세상인 해안가 빈민촌에서 살아가는 맑은 영혼의 소년 노마가 흘리는 눈물은 인천만의 눈물은 아닐 것이다"며 "맑은 영혼과 무겁게 가라앉은 시대의 어둠이 만나 맺혀진 눈물은 보편의 눈물이다"고 평가했다.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는 제분공장, (자유)공원, 장군(맥아더)의 동상, 중국인 상점, 화차, 저탄장, 항만 등 인천의 거리와 풍물을 상세히 묘사했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직후 중국인 거리에서 유년기를 보낸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소녀의 가족은 가난한 피란민이다.소녀가 사는 중국인 거리는 중국인들뿐 아니라 미군, 양공주, 피란민들이 뒤섞여 사는 빈민촌이다. 동거하던 흑인 병사에게 끝내 살해되는 양공주 매기언니, 매기언니를 동경하는 친구 치옥이, 자신에게 야릇한 눈길을 보내는 중국인 남자 등 다양한 인간군상과 중국인 거리의 풍경이 어우러지며, 이 거리가 지닌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짚어낸다.이 교수는 "오정희는 그 어떤 소설보다 인천과 관련한 디테일의 정확성을 확보했다"며 "하지만 중국인을 너무 타자화해 '이상하고 매혹적인' 존재로 그려낸 점은 다문화시대에 들어선 한국사회에서 과연 올바른 시각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박경호기자

2013-04-04 박경호

[2013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1]근대도시 인천과 근대문학

강화조약 후 7년뒤 개항서울 포함 전국에 영향신소설속 '관문'으로 등장1930년대 군수공장 육성2013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상반기 과정이 시작됐다. 상반기 과정의 주제는 '문학속의 인천, 인천의 문학'이다. 인천은 한국의 역사적 근대가 성립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문학의 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시다. 독자들은 이번 강좌를 통해 한국문학과 인천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났는지, 현재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편집자주첫번째 강좌는 이현식 한국근대문학관장이 '근대도시 인천과 인천의 근대문학'이란 주제로 진행했다. 이 관장은 근대도시 인천을 이해하는 핵심코드를 바탕으로, 근대문학 속의 인천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강연했다.강연은 지난 19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서 열렸다.이 관장은 근대도시 인천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코드를 '관문도시', '산업도시'로 정의했다.인천은 1883년 개항과 더불어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인천의 개항만은 늦추고자 했다. 하지만 인천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맺은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규(강화조약)'체결로부터 7년 뒤에야 개항했다.이 관장은 "인천의 개항은 곧 서울로 가는 길목을 여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조선의 개항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며 "인천이 개항됨으로써 개항의 파급력은 수도인 서울을 포함해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이해조가 쓴 신소설 '봉선화(1913)'에는 '경현이가 인력거에서 내려 기차를 한번 타매 인천 항구에 와 벌써 내렸고, 하관에서 다시 기차를 타매 동경에 와 벌써 내렸더라'는 대목이 나온다.근대 초창기 한국 소설에서는 서울에서 일본으로 가는 최단코스, 즉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와서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는 여정의 '관문'으로서 인천이 자주 등장한다. 신문물인 '기차'와 '화륜선'을 타고 '일본'이란 근대문명을 향하는 통로인 관문도시 인천은 오늘날 인천공항을 통해 이어진다.여성작가 강경애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노동소설 '인간문제'에서는 수도권 주변부 도시와 초기 산업도시로서의 인천을 묘사했다. 이 소설은 동네 지주에게 시달리던 가난한 '선비'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고향을 떠나 상경하고, 인천으로 일터를 옮겨 노동운동을 하는 과정을 그렸다.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선비의 연인이자 함께 노동운동을 한 신철의 입을 빌려 '인천의 이 새벽만은 노동자의 인천 같다! 각반을 치고 목에 타월을 건 노동자들이 제각기 일터를 찾아가느라 분주하였다. 그리고 타월을 귀밑까지 눌러쓴 부인들은 벤또를 들고 전등불 아래로 희미하게 꼬리를 물고 나타나고 또 나타난다'고 인천을 묘사했다.이 관장은 "인천은 1930년대 초부터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서울과 인천을 주요한 공업지대로 정하고 특히 인천을 군수산업이 집중되는 대공장 지역으로 육성했다.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져 오는 노동운동의 계보는 인천을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다"고 마무리했다.다음 두 번째 강의는 다음달 2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경재 숭실대 국문학과 교수가 나와 '한국 근대 소설 속에 나타난 인천'이란 주제로 강연한다./박경호기자

2013-03-21 박경호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8]일제강점기 '장소의 정치'

일제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주먹 영화'에서 '혼마찌(本町)'라는 지명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중심가를 일컫는 혼마찌가 여전히 우리의 지명 속에 녹아 있다. '중앙동'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또한 인천의 경우 '계양'과 '부평'이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원래 계양산 부근이 부평의 핵심 지역이었고, 현재 부평의 중심지인 '부평역' 부근은 일제가 새로 군수기지로 개발한 '신 부평'이라는 점도, 우리에게 남은 일본식 지명과 관련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지난 4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8번째 마지막 강좌에서는 전종한 경인교대 교수가 나와 '일제강점기 일본식 지명의 생산과 장소의 정치-原仁川 지역의 사례'란 주제로 강연했다.전종한 교수는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일본인이 유입되면서 일본식 지명이 자리잡게 됐고, 일본 조계지 내에서의 일본식 지명은 '거류민회'에 의해 자유롭게 명명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또한 일본식 지명의 부여 과정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특히 일본인들은 조선인 고유 지명을 해체하고 재구성해 원래 의미를 퇴색케 하기도 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이를 '장소의 정치'라고 했다.전 교수는 또 일본인들의 지명 생산 방식을 ▲일본식 지명 부여 시스템의 적용 ▲제국주의적 기념비의 각인 ▲일본풍 유흥 문화의 이식 ▲전통 지명의 식민지적 해체를 통한 재구성 등 4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전 교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일본 해군 군함 명칭인 '松島(마츠시마)'에 주목했다. 송도는 일본인들이 연수구 옥련동 일대를 '송도정(松島町)'으로 정했는데, 일본인들의 전승 기념물인 '송도'라는 이름이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옥련동으로 환원되었다가 오늘날 '송도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경인철도역에 '부평역' 명명전통적 중심지 위치 잊게해일본인 전승기념물인 '송도'오늘날 신도시 이름 재등장또한 전 교수는 '조선인의 전통적인 장소 기억을 해체한 사례'도 예로 들었다. '축현'이란 지명이다. '싸리재'라고도 불리던 '축현'이 경인선 개통 당시 철도역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일제는 1907년에 현재의 동인천역으로 축현역을 옮기고, 원래의 축현 자리에 다른 일본식 이름을 붙이고, 옮긴 축현역은 1926년에 상인천역으로 개칭했다고 한다.'전통 지명 → 지명과 장소의 분리 → 일본식 지명으로의 대체'라는 수순을 통해 일제는 식민지적 해체와 재구성을 시도했다는 것이 전 교수의 해석이다.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 교수는 또 '부평'을 꼽았다. 부평의 전통적 중심으로부터 남쪽으로 수㎞떨어진 경인선 철도역에 '부평역'이라는 지명을 부여함으로써 수 백년을 이어온 부평의 전통적 중심지를 망각케 하고 새로운 부평을 '진짜' 부평으로 각인함으로써 권력 관계와 지역 구조의 식민지적 재편에 일조했다는 것이 전 교수의 시각이다.전 교수는 "일제시기 지명에는 식민지 경영의 효율화와 고착화를 직접 의도한 지명들도 있었고,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와 다른 문화 집단으로서의 일본식 문화의 단순 이식과 관련된 지명들도 있다"면서 "일본식 지명의 생산방식과 그 속에 담긴 일제의 실천과 장소의 정치에 대해 다각적으로 조명할 때 우리는 일본식 지명의 본질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을 둘러싼 지명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본질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정진오기자

2012-12-06 정진오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7]개항기 인천의 화교

짜장면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짜장면은 우리의 '국민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은 그 짜장면의 한반도 최초 상륙지점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華僑)에 의해서라고 한다. 20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진행된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7번째 강좌에서는 김태웅 서울대 교수가 나와 '개항기 인천의 화교'란 주제로 강연했다.거상들, 소상으로 몰락철도개통에 타지역 이주공화춘 건물 아직도 건재짜장면 1905년 탄생추정김 교수는 "현재 인천에는 화교와 관련된 문화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짜장면과 북성동 공화춘은 한국 화교의 기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문화와 음식점이다. 그만큼 화교는 한국 근대 인천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다"는 말로 이날 강연을 시작했다.화교의 이주 과정과 역사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화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 임오군란 이후 청국의 조선 내정 간섭이 강화되는 와중에서 조선에 입국했다. 그러면서 동순태를 비롯 인합동, 동화창 같은 화상(華商)들이 운영하는 큰 점포가 현재의 자유공원 한국회관 앞 언덕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2개의 큰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바로 청국조계지다.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작은 점포와 행상, 노동 등에 종사한 반면 화상들은 큰 점포를 가지고 영업을 하였다. 또한 부산이나 원산과 달리 인천은 산둥지역에 가깝기 때문에 무역 규모도 컸다. 1886년의 경우 인천에서 발생한 수출입화물의 가격은 모두 176만원이었는데, 이 중 청상이 취급한 금액은 25% 정도 차지했다.또한 화교 노동자 역시 개항장 인천에 외국인 도시편의시설의 건축 붐에 힘입어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벽돌공, 토목건축기술자, 인부, 하역 노동자 등이었다. 아울러 이들에게 음식물을 판매하는 요리업자, 채소재배자들도 이주했다. 짜장면의 탄생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김 교수는 1905년 언저리로 추정한다.중국 상인들은 무역 경쟁에서 일본인 상인을 압도했는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지위가 뒤바뀌었다. 청일전쟁 이후 화교들의 위세가 약화되었고, 청국조계지도 쇠잔해 갔다.화교 상인들이 인천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경부철도가 개통되면서는 인천 화상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하지만 영국 영사관이 청국 정부를 대신해 조선 거류 화교들에게 통행증을 증명하는 문서를 발급함으로써 화교들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일제하에서도 인천 화교는 여전히 건재하였다. 그러나 남북분단 등 냉전질서의 고착화는 화교사회를 난국으로 밀어넣었다. 김 교수는 "화교의 근간은 여전히 건재하여 다시 도약하면서 우리에게 화교 자본으로 다가오고 있다"면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해 보자고 했다.하반기 종강이 될 다음 여덟 번째 강좌는 12월 4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날은 전종한 경인교대 교수가 나와 '개항 이후 일본식 지명의 생성과 확산'이란 주제로 강연한다./정진오기자 경인일보·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 공동주최

2012-11-22 정진오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6]개항기 경인로의 변천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전국적 유명 '길'이 뜨면서 인천에도 강화, 문학산, 인천대공원, 월미공원 일대 등 수십 개의 '길'이 생겼다. 인천의 옛길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6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진행된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6번째 강좌에서는 김종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개항기 경인로의 변천'이란 주제로 강연했다.김 교수는 인천을 대표하는 옛길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로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6대가 있었다. 제1로 의주로(개성~평양~의주), 제2로 경흥로(원산~함흥~경흥 서수라), 제3로 평해로(원주~강릉~평해), 제4로 동래로(충주~상주~동래), 제5로 제주로(수원~공주~전주~해남~제주), 제6로 강화로(양천~김포~강화) 등 6개 코스를 말한다. 철도·증기선·자동차 도입경인지역 발전으로 이어져전국최초 근대화 추진교통史 상징적 의미도경인로는 강화로에서 갈라져 나온 길이다. 서울에서 양천을 가기 전에 철곶포에서 나뉘어 제물진까지, 또 영종포진까지 이어진 것이 경인로의 원형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인천의 지역적 위상은 경인로의 위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항 이래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입국로로 가장 많이 선택된 곳이 인천이었고, 이들이 서울까지 이용한 루트는 바로 경인로였다. 조선시대 국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노선은 중국과 통하는 '의주로'였고, 그 다음이 일본과 통하는 '동래로'였는데, 19세기 말엽부터 경인로가 부각됐다. 개항기의 조선 제1로는 바로 경인로였다는 것이 김 교수의 얘기다. 이 경인로는 고음월리(서울 신월동)~성곡(부천 오정구 여월동)~당아리고개~조종리(조마루, 부천 원미1동)~부천역 서쪽 1㎞지점(46번 국도)~송내촌(솔안말)~중앙병원~성현(옛 인천과 부평의 행정경계)~관교동~제물포 등으로 이어진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이 경인로는 개항 이후 몇 차례 경로 변경이 있었다. 인천의 정치적 상징 장소가 남구 관교동(인천도호부청사)에서 중구 내동(인천시청)으로 변경되면서 경인로도 변화를 맞았고, 일제시기에 석바위 쪽 코스가 잡히면서 또 다시 경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인신작로인데, 지금의 46번 국도와 맞아떨어진다.이처럼 제물포와 영등포를 연결하는 경인로의 경로 변화는 서울~인천 간 지역구조 형성의 전개과정을 논의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견해다. 또한 개항 이후 경인로 외에 경인철도와 증기선, 그리고 자동차의 도입은 서울~인천 간 공간 소통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이는 경인지역의 근대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는 또 '탈지역성'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김 교수는 "개항 이후 다른 어떤 도로보다 먼저 근대화가 추진된 점에서 경인로는 한국 교통사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다음 일곱 번째 강좌는 오는 20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날은 김태웅 서울대 교수가 나와 '개항~일제강점기의 화교'란 주제로 강연한다./정진오기자 경인일보·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 공동주최

2012-11-08 정진오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5]개항기 서양 지식인들의 인천 인식

서양인들이 본격적으로 한국땅을 밟기 시작한 19세기 말, 인천은 외부 세계와 한국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창이었다. 서양인, 그들의 눈에는 인천이 어떻게 비쳤을까? 23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진행된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5번째 강좌에서는 김백영 광운대 교수가 '개항기 서양 지식인들의 인천 인식'이란 주제로 강연했다.이날 강좌는,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 여행가들의 체험담을 통해 그들이 인천과 한국인, 한국사회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다. 김 교수는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언더우드 박사와 독일 저널리스트 겐테, 미국인 천문학자 로웰, 영국인 여행가 비숍 등 14명의 한국 방문기를 소개했다.개항기 한국을 방문한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수도 서울을 향하는 관문인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들은 대개 제물포항에서 배에서 내려 말(나귀)이나 가마를 타고 서울까지 이르는 육로를 거쳐갔다.김 교수가 소개한 로웰의 기록을 토대로 하면, "이 나라 고유의 교통수단인 가마로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리는데, 제물포와 서울 간의 길 풍경은 한국의 다른 어느 곳에 지지 않을 만큼 황량하고, 한마디로 말해 흥미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혹평한다. 항구도시 인천과 서울 사이에 아무런 볼거리가 없었다는 얘기다.한국인의 모습을 직접 본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나아 보인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키가 크고 체격도 좋은 편이라는 것이다. 또 한국인을 '얼굴이 잘 생긴 종족'으로 바라보기도 한다.김 교수는 당시 서양인들 중 비숍과 일부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저해요인으로 비생산적·기생적 계급인 양반을 지목하고 있다면서, 이는 계급적·신분제적 사회질서가 한국사회를 뒤처지게 한 원인으로 본 것이라고 말했다.김 교수는 "오늘날 우리에게 개항기 서양인들이 그려준 과거 우리 자신의 초상화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면서 "지금 우리는 불과 15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버린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서 강의를 마무리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과제라는 것이다.다음 여섯 번째 강좌는 11월 6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날은 김종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나와 '개항기 가로(街路)의 변화'란 주제로 강연한다./정진오기자 경인일보·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 공동개최

2012-10-25 정진오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4]'병인양요·신미양요 현장' 강화도 답사

인천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서만 진행하던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가 모처럼 '역사의 현장'으로 나섰다. 지난 20일 하반기 4번째 강좌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인 강화도 일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이날 현장답사에는 5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며, 이영호 교수를 비롯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관계자들이 일정을 진행했다.美해병대에 대패 '손돌목돈대'프랑스군 첫 격퇴한 '연미정'시민 50여명 격전지일대 밟아'강화도에서 찾은 근대제국과의 충돌'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현장답사는 오전 9시 인하대 정문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됐다. 오전 10시 30분께 초지진에 도착했다. 이어 덕진진, 남장포대, 광성보,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등지를 오전에 살폈다. 오후에는 월곶진, 연미정, 전등사 삼랑성, 양헌수 장군 승전비 등을 둘러봤다. 오전에는 주로 김포와 강화 사이를 흐르는 염하(鹽河)를 따라 죽 이어진 150여 년 전의 방어진지들이 대상이었다. 오전 코스의 대부분은 1871년 있었던 신미양요의 현장이었다. 미국 해병대원들이 140여 년 전에 한반도 침략의 첫 번째 장소로 택했던 강화도 상륙작전을 벌인 역사적 현장들이었다. 손돌목돈대 전투에서 조선군은 탄약이 떨어지거나 시간이 촉박해 돌팔매질하거나 모래를 뿌리면서까지 항전을 했다고 한다. 무기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조선군은 243명이 전사했고, 미군은 고작 3명이 죽었다.전등사나 삼랑성, 양헌수 장군 승전비 등지는 모두가 1866년의 병인양요의 현장이다. 연미정에서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 격퇴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김포 문수산성도 내다보인다. 또한 북한 땅도 눈앞에 바로 보인다. 남북분단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서 답사에 나선 시민들은 150여 년 전의 한반도 상황과 현재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실감했다.다음 5번째 강좌는 23일 인천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서 열린다. 이날은 김백영 광운대 교수가 나와 '개항기 서양 지식인들의 인천 인식'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정진오기자 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 공동주최

2012-10-21 정진오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3]뜻밖의 봉변, 雲揚號사건

우리나라에서는 '운요호 사건'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강화도 사건'이라고 한다. 이 운요호 사건의 최대 피해지역은 영종도였다. 1875년 9월에 있었다.朝 개방 목적 아닌 일본단합 위해 침략최대 피해지역 '영종도' 사망자 35명9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진행된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3번째 강좌에서는 김흥수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뜻밖의 봉변, 雲揚號 사건'이란 주제로 강연했다.김흥수 교수가 '뜻밖의 봉변'이라고 표현했듯이 운요호 사건은 영종 주민과 군인들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토대로 한 김 교수의 얘기에 따르면, 1875년 9월 22일 오전 7시43분 일본군 28명이 보트 2척에 나눠 타고 영종 해안으로 접근했으며, 조선군이 발포했지만 일본군은 영종성을 함락시켰다. 이 전투로 35명이 죽고, 16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일본군은 '암상산봉' 정상에 국기(일본기)를 꽂고 점심을 먹었다. 일본군은 영종성을 불태우고 대포 36문 등 무기류를 노획하고 11명을 생포해 운요호까지 노획한 물건들을 나르게 했다. 이날 저녁, 운요호에서는 램프로 휘황찬란한 조명을 꾸미고 주연(酒宴)을 열고, 승리를 축하했다. 영종도에서 노획한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축하연'은 계속됐다.당시 일본군의 영종도 공격은 강화도 침략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운요호 사건은 쇄국정책을 취한 조선의 대외 개방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일본의 1차적 목적이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김 교수의 얘기다. 운요호가 조선 영해를 무단 측량하고 무단 침입해 조선의 포격을 유도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이 운요호 사건은 결국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로 이어졌다.운요호 사건은 1875년 초부터 일본 국내 정치권에서 벌어진 정부 변혁운동의 국면을 타개할 대외적 위기 조성용으로 기획되었다는 게 김 교수 등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바로 이 점이 운요호 사건의 제1차적 목적이었다고 한다.일본은 특히 외교문서까지 조작해 운요호 사건에서 발생하는 국제법적 문제를 가리려고 시도했다.1875년 9월 19일 영종도가 바라보이는 월미도 연안에 운요호가 닻을 내렸다.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30분 월미도를 출발해 영종도 부속도서인 매도(鷹島)를 북서쪽을 바라보면서 닻을 내리고 오후부터는 함장 이하 20명이 측량을 하고 보트를 타고 강화도로 향해 나아갔다. 오후 4시22분 초지진 포대 앞에 도착했다. 오후 4시30분, 초지진에서 크고 작은 포를 발포했고, 일본군은 응사하면서 본함으로 되돌아갔다. 운요호는 21일 오전 8시 돛대에 국기를 게양하고 전쟁 준비를 했다. 전날 초지진에서 일본군을 향해 포를 쏜 '죄'를 치죄한다는 이유였다. 이날 낮 12시40분까지 1시간 50분 동안 일본군은 포탄 27발을 초지진을 향해 쐈다. 진지 2개소를 파괴했다. 당시 조선군도 응사했는데, 한 발도 일본군 측에 명중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앞에서 이야기한 영종도 공격을 가했다.일본 측은 영종도 공격을 일종의 정당방위로 조작했다. 또 운요호 사건은 일본 내에서 정한론(征韓論) 확산으로 이어진다. 조선측의 폭거로 역선전해 정한론을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1876년 2월 27일 군함을 대동해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강요했다.다음 네 번째 강좌는 오는 20일 강화도 일대 현장답사로 진행된다. 현장답사는 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의 인솔로 이뤄진다./정진오기자 경인일보·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 공동주최

2012-10-10 정진오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2]인하대 이영호 교수/서양함대 침공으로 본 점령자와 주민들

프랑스의 한반도 침략인 1866년 병인양요와 미국의 한반도 공격인 1871년 신미양요의 전장(戰場)은 인천 강화도였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서양인의 침략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또 침략자들은 인천과 강화에 대해 어떠한 눈길을 보냈을까. 25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진행된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두 번째 강좌에서는 이영호 인하대 교수의 '점령자의 시선과 주민의 반응-19세기 후반 서양함대의 침공을 중심으로'란 주제의 강연이 펼쳐졌다.이영호 교수는 "서양함대의 침공이 지역 주민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남겨진 기록은 지배자 또는 점령자의 것이 대부분이다"고 전제한 뒤 당시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와 미국 병사들의 기록을 소개했다. 프랑스군 장교 후보 쥐베르(Henri ZUber, 1844~1909)의 체험기와 그림, 미국 해병 대위 틸톤(McLane Tilton, 1836~1914)의 편지와 당시 종군기자의 사진기록 등을 토대로 설명했다.이영호 교수가 설명한 틸톤의 손돌목돈대 점령 당시의 상황 보고를 보면, 조선군이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輓歌)를 부르고, 탄약이 떨어지거나 시간이 촉박하자 돌팔매질을 하면서 최후의 항전을 했다고 한다. 또 조선군은 모래를 뿌리는 등 미군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총에 맞고 강물에 빠지고 자살했다. 조선군은 이때 243명이 전사했고,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예술가의 감수성을 지닌 프랑스의 쥐베르는 긴박한 군사적 점령의 공간을 초월해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했고, '즐거운 소풍'으로 추억하기도 했다. 그의 강화도 침략 당시 그림은 대단히 목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쥐베르는 실제로 해군에서 제대한 뒤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어 풍경화가가 되었다. 쥐베르는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비판하기까지 했다.군인의 삶으로 시종했던 틸톤과 예술가의 길을 걸은 쥐베르의 상반된 시선을 통해 프랑스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외교노선 속에 종속된 조선 침공의 공식 기록 이면에 숨겨진 시선의 다양성,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이영호 교수의 해석이었다.이영호 교수는 또 나룻배나 범선으로 힘겹게 강을 건너던 조선인의 눈에 증기기관으로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함대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감탄과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인들의 서양인에 대한 시선이 어린이와 같은 낙천적 호기심이었다고 본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의 기록을 토대로 부연하기도 했다. 그들의 기록에는 또 '조선인은 온순한 성품을 지니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날렵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다'는 점도 보인다.이영호 교수는 또 이 자리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전투 당시 조선 관·민의 연대 상황과 신미양요 때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부대 상징 깃발(수자기)과 병인양요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반환 문제 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다음 세 번째 강의는 오는 10월 9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날은 김흥수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나와 '뜻밖의 봉변, 운양호 사건'을 주제로 강연한다./정진오기자 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 공동주최

2012-09-26 정진오

[2012 하반기 시민 인문학강좌·1]열강과 충돌 그린 '인천의 자화상'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과정이 시작됐다. 하반기 과정의 기본 콘셉트는 '인천학'으로 정했으며, 그 총괄 주제는 '근대제국과 만난 인천:충돌과 변화'로 잡았다. 독자들은 이번 하반기 인문학 강좌를 통해 19세기 후반, 근대 제국과 부딪치는 최전선 역할을 감내해야 했던 인천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첫 번째 강좌는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이 나와 '인천 군관의 기록을 통해 본 신미양요-'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다. 배성수 과장은 이 자리에서 신미양요와 관련한 희귀자료를 소개했다. 강의는 지난 11일 오후 2시 시립박물관에서 있었다.1871년 강화도 등 인천을 중심으로 가해진 신미양요는 미국 해병대의 첫 한반도 상륙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미양요를 기록한 몇몇 자료가 있지만, 전투가 이뤄진 인천의 입장에서 쓰인 것은 없었다. 배성수 과장은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성진중일지'를 통해 신미양요를 새롭게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배성수 과장에 따르면, '소성진중일지'는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이었던 구연상(具然相)이 1871년 5월 24일(음력 4월 6일)부터 7월 10일(음력 5월 23일)까지 48일 동안 인천에 머물면서 기록한 일지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구연상이 일지를 기록한 48일간은 신미양요가 발발했던 기간이다.'소성진중일지'에는 신미양요와 관련해 인천지역에서 있었던 주민들에 대한 흥미로운 대목도 눈에 띈다. 당시 몇몇 천주교 신도들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미군 측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던 사실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제물포에서 적선과 접촉을 시도하던 천주교도 이균학과 공모하였던 형 이연귀를 함께 체포하여 군사와 백성이 모인 자리에서 효시하였다는 것인데, 이런 극단적 조치는 군영 내의 군기를 엄정하게 하고, 주민들을 단속하기 위함이었다.특히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870년에는 인천 주민들이 '예비군'에 편성돼 훈련을 했다는 점도 드러났다. 인천부(府)에서 주민들 중 무예에 능한 300명을 선발하여 삼초(三哨)의 군대를 편성하고 무예를 익히게 하는 한편, 아전들에게도 총쏘는 법을 배우게 하여 그 기술에 따라 차등을 주어 배치하였다는 것이다. 또 아홉 개 면의 주민들로 각각 100명씩 총포를 다루는 기술을 익히게 하는 등 1천여명의 가용병력을 확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전시 준비태세 강화는 1866년에 겪어야 했던 병인양요의 '학습 효과'라고 할 수 있다.배성수 과장은 '소성진중일지'에 대해 ▲신미양요를 연구하는 데 있어 보충자료로서의 가치가 크고 ▲개항 이후에 집중되어 있는 인천 지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자료이고 ▲유사시 지방군의 운용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다음 두 번째 강의는 오는 25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영호 인하대 교수가 나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중심으로 '점령자의 시선과 주민의 반응'이란 주제로 강연한다./정진오기자 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 공동주최

2012-09-20 정진오

[2012 시민 인문학강좌·8]노관범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미디어와 자강

지난 19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는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2012년 상반기 여덟 번째이면서 종강하는 강좌가 마련됐다. 마무리 강좌는 노관범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이 나와 '미디어와 자강(自强)'이란 주제로 강연했다.노 위원은 "한국사에서 자강(自强)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연구 주제인가? 한국 근대사상사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주제인가? 우리나라의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유익한 교훈을 주는 주제인가?"라는 물음으로 강의를 시작했다.노 위원은 "자강사상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면서 크게 발산되었지만 자강사상 그 자체는 '애국계몽운동'에 관계없이 대한제국기에 통시기적으로 존재하였다"면서 "자강사상을 대한제국의 통시기적인 사상으로 보고 오히려 그 역사적인 전개 과정에 주목하여 각 국면의 사상적 특징과 국면간 상호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자강사상의 역사적 이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그러면서 '황성신문'에 나타난 신년사 비교를 통해 대한제국기 자강사상이 사회적으로 대두한 시기의 역사적 감각을 고찰하고, 이어서 대한제국기 자강사상의 대표 주자인 장지연(1864~1922)과 박은식(1859~1925)에 대해 살폈으며, 끝으로 대한제국기 자강사상이 지향한 미래의식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소개하며 강의를 끝맺었다. 이 자료는 대한제국기에 발간된 영문 월간지 'The Korea Review' 1906년 4월호에 John Mikson이 기고한 'A Visit to Seoul in 1975'라는 글이다. 1906년에 1975년의 서울을 상상한 환상적인 미래 소설이다.특히 '황제 만세, 황태자 천세, 그리고 이천만 형제가 문명을 향해 함께 진보'(1900년 1월 5일자) '대한제국 자주독립, 황제 만세, 황태자 천세'(1905년 1월 5일자) '대한제국 독립만세, 황제 만세, 전국 동포 만세'(1907년 1월 5일자) 등으로 변화하는 '황성신문'의 신년사 축하 메시지 흐름을 보여주기도 했다. 노 위원은 "황제 만세는 변함이 없는데 정치적 상황에 따라 '문명 진보'가 '제국 독립 축원'으로 변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 '황태자 천세'가 사라지고 그 대신 전국 동포 만세로 대체되기도 했다"며 "사실 대한독립만세는 1919년 삼일운동을 상징하는 만세 소리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1907년 황성신문의 신년사에 울려 퍼져, 지면으로 전개된 삼일운동의 예고편으로 본다"고 설명했다.노 위원은 또 자강사상은 대한제국기의 시대사상이었다면서 자강사상은 대한제국의 수립을 배경으로 형성되었고, 영일동맹(1902년)에서 러일전쟁(1904년)에 이르는 시기에 고조되었으며, 을사늑약(1905년) 이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되는 사회운동의 중심사상으로 폭발하였고, 고종 황제가 퇴위한 후 담론적인 발산이 억압되는 가운데도 인격수양을 위한 중요한 정신으로 강조됐다고 덧붙였다.노 위원은 대한제국기의 중요한 언론인인 장지연은 자강사상을 정립했으며, 역시 동시대 핵심적 언론인인 박은식은 자강사상을 재정립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이날 강연에서 노 위원은 대한제국기의 자강사상이 한국근대의 표상세계에서 심층의식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맥락에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줬다.노 위원은 "대한제국기 당대인의 국가의식, 사회의식, 진보의식, 역사의식, 미래의식 등 다양한 의식세계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던 자강사상은 한국 근대사상사의 거대한 현장"이라면서 "그 역사적 현장을 종관하고 통찰하는 이론과 상상력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강조했다./정진오기자 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 공동주최

2012-06-21 정진오

[2012 시민 인문학강좌·7]인하대 한성우 교수/서울말과 경기도말 그리고 현대문학

'서울말'과 '표준말'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울말'에도 사투리는 있을까. '인천말'과 '경기도말'의 특징은 무엇인가.사투리하면 흔히 전라도나 경상도, 충청도를 연상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끄는 강좌가 지난 5일에 마련됐다. 이날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2012년 상반기 일곱 번째 강좌에서는 '서울말과 경기도말, 그리고 현대문학'이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이날 강좌는 한성우 인하대 교수가 맡았다.한성우 교수는 서울 사투리가 존재한다는 점과 '서울말을 한다'는 것과 '표준말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강조했다.서울말은 실재 존재하는 언어이지만, 표준말은 일종의 '가공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교수는 몇 가지 단어를 정의했다. 방언(方言)은 한 언어에서, 사용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이고,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이라고 했다.또 시골말은 시골 사람이 쓰는 말이고, 지역어(地域語)는 어떤 한 지역의 말로, 주로 방언 구획과는 관계없이 부분적인 어떤 지역의 말을 조사할 때에 그 지역의 말을 이른다고 했다.한성우 교수는 '경인 지역의 말'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우선 서울말과 경기도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지(無知)'와 '무시(無視)'라는 개념으로 이야기 했다. 서울말에 사투리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이고, 서울말과 경기도말에 차이가 있고 그 경기도말을 사투리라고 여기지 않는 것은 '무시'라는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게 한 교수의 시각이다. 두 번째로는 '오만'과 '편견'이란 단어로 설명했다. 대다수 문학작품에 보면 주인공은 표준어를 구사하고, 그 주변인물인 식모라든지 하인 등은 어김없이 사투리를 쓴다는 점을 지적했다. 바로 이게 오만이자 편견이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표준어와 사투리의 개념이라고 했다.세 번째는 경인지역 작가들에게 초점을 맞춰, 작가들이 작품에 쓰는 언어의 차이를 '본류'와 '아류'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서울말을 본류로 보는 작가가 있는데, 경기도말은 사투리로 보지 않고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는 것을 아류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출신 작가들의 경우에도 '자기 언어'를 작품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열등의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고 했다. '본류 작가'의 대표 격으로는 소설가 김훈씨를 들었다.한성우 교수는 인천출신 노인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내놓으면서, '인천 방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인천의 원도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 문학동 출신, 해안가인 월미도 출신, 강화 교동 출신 노인들의 말을 들어봤지만 인천 언어의 특징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인천 방언은 정체성이 없는 것이 정체성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상반기 마지막 강좌가 될 다음 여덟 번째 강의는 오는 19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노관범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이 나와 '미디어와 한국학'이란 주제로 강연한다./정진오기자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 공동주최

2012-06-07 정진오

[2012 시민 인문학강좌·6]양보경 성신여대교수/한국의 옛 지도

지난 22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2012년 상반기 여섯 번째 강좌에서는 '한국의 옛 지도'란 주제가 다뤄졌다. 이날 강좌는 양보경 성신여대 지리학과 교수가 맡았다.양보경 교수는 '지도'를 설명하면서, '꿈'부터 이야기했다. 지도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옛 지도일수록 사람들의 꿈이 담겨 있었고,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진 세계의 표상이라고 양 교수는 설명했다.양 교수에 따르면, 지도는 인간 내부의 정신적 세계와 외부의 물리적 세계의 매개체이며, 다양한 규모에서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이해하는 중요하고 근본적인 수단이다. 또한 문자언어나 숫자보다도 앞선 인간의 의사소통의 오랜 형태이다.지도는 또한 과학, 기술, 미술, 사상 등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다. 지도는 문화적·사회적 산물이다. 지도가 제작되기까지는 지도를 필요로 했던 사회·문화적 요청이 있다. 지도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 속에서 탄생한다. 지도 속에는 역사와 과학이 있고 지리와 환경이 있으며, 역사와 문화를 이룩한 조상들의 숨결이 스며 있다."지도와 마주하게 되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첫째 단계는 지도 '보기'예요. 지도의 채색, 형태의 옳고 그름, 방향, 거리 등을 눈으로 보고, 지도가 정확한지, 내가 원하는 내용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단계는 지도 '읽기'입니다. 지도의 초점이 무엇인가, 어떤 내용은 왜 그렇게 크게 그려져 있는가, 왜 잘못 그려져 있는가 등을 머리로, 지식으로 파악하는 일이고요. 다음은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지도에 침잠하기 즉 감상하기입니다. 지도와 하나가 되어 지도를 즐기면서 지도에 몰입하는 경지로서, 가슴으로 지도를 이해하는 단계입니다."양 교수는 우리나라 고지도의 특징은 회화식지도 즉 그림지도가 많은 점이라고 했다. 우리 선조들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지도를 제작하면서도, 예술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족자나 병풍으로 만들어 감상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회화식지도의 가치가 발휘된 지도는 군현지도나 궁궐도·관아도 같은 특수도였다. 이날 양보경 교수의 강의 속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 깨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는 어느 나라에서 제작했을까. 바로 1402년 조선 건국 10여 년 뒤에 그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고 한다.이 지도는 일본으로부터 유럽·아프리카까지 당시의 전세계를 종합적으로 나타낸,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로 꼽힌다. 이 지도를 통해 고려 및 조선 초의 지도 제작 수준과 지도 제작에 대한 국가의 관심의 지대함, 동서문화 교류의 궤적, 당시 세계에 대한 인식 등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김정호 시대 이전에 이미, 10리(약 4㎞) 단위보다 훨씬 세밀한 1리(약 400m) 단위의 지도가 그려졌다고 한다."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것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영·정조 시대 등을 거치면서 켜켜이 쌓인 지리학적 성과의 발현인 것입니다. 지도는 문화적 현장이자, 문화적 축적의 결과이기도 합니다."다음 일곱 번째 강의는 오는 6월5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한성우 인하대 교수가 나와 '서울말과 경기도말, 그리고 현대문학'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정진오기자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 공동주최

2012-05-24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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