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4]엘지-12 빅딜과 LG디스플레이 설립(하)

반도체 넘기고 'LCD' 고수합작 'LG필립스LCD' 출범세계 첫 HDTV 52인치 개발2008년 사명변경 법인 독립LG전자 '37.9%' 지분 소유빅딜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용만 가중시킨 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작업은 실패로 마무리된 바 있다.LG가 반도체사업을 현대그룹에 넘긴 데 대해 당시 항간에는 현대의 대북사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정부의 강권에 마지못해 승복했던 구본무 회장은 이후부터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2011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할 때까지 거의 10여 년 동안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LG는 반도체를 현대에 넘기는 대신 현대전자의 반도체 이외의 전자부문 인수와 함께 나머지는 현금으로 받아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겼을 뿐 아니라 덤으로 데이콤(LG유플러스)까지 인수했다.>> 결국 실패로 끝난 '빅딜'한편 1998년 구 회장은 정부 주도의 반도체 빅딜 논의로 반도체사업의 유지가 불확실해지자 그동안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추진해오던 'TFT-LCD(초박막 액정표시 장치)' 사업을 따로 분리해 별도의 'LG LCD'를 설립했다. 당시 정부와 현대전자는 LG반도체에서 LCD사업을 분리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구 회장이 "이번 빅딜은 반도체 사업의 빅딜이지 LCD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해 뜻을 관철시켰다.덕분에 반도체는 현대로 넘겼지만 LCD는 지켰고, 분리 직후인 1999년 5월 LG는 필립스로부터 국내 민간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16억달러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3개월 후엔 합작법인 LG필립스LCD를 출범시켰다.LG디스플레이의 모태는 1985년 2월 세워진 금성소프트웨어이다. 1987년 1월 금성사(현 LG전자) 중앙연구소에서 TFT-LCD 개발에 착수해 1993년 9월 LG전자 내 LCD사업부를 설립하고 1995년 9월 구미 LCD 1공장, 1997년 12월 구미 LCD 2공장을 준공했다.1998년 12월에 연간 매출 5억달러를 넘어섰다. 1999년 6월에는 LG전자에 소프트웨어 관련 사업을 양도하고 같은 해 8월 LG필립스LCD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2000년 7월 구미 LCD 3공장, 2002년 3월 구미 LCD 4공장을 각각 준공했다. 2002년 12월에는 세계 최초로 HDTV용 52인치 TFT-LCD를 개발했다. HDTV는 기존의 TV보다 5~6배 이상의 해상도를 갖고 있어 고화질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TV 시스템이다. 2003년 5월 중국 난징에 제1모듈공장, 2004년 제2모듈공장을 준공했다.>> 구미·파주에 공장 준공2004년 7월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한국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같은 해 8월 구미 LCD 6공장을, 2006년 1월 파주 LCD 7공장을 각각 준공했다. 2007년 3월 폴란드 모듈 공장, 2008년 4월 중국 광저우공장을 준공했다. 2006년 3월 세계 최초로 HDTV용 100인치 TFT-LCD를 개발했으며 업계 최초로 차세대 휴대폰용 TFT-LCD를 개발했다. 그러나 2008년 2월 LG필립스LCD의 기술제공사인 네덜란드 필립스가 지분매각에 나서자 같은 해 3월 LG디스플레이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8년 단독법인인 LG디스플레이로 독립한 이후엔 LCD 패널 등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 기업으로 거듭났고 연간 약 25조원의 LG디스플레이는 2013년 현재 경북 구미(6개) 및 파주(2개)에서 총 9개의 LCD 패널 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중국의 난징 및 광저우,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모듈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초로 4세대, 5세대 패널 공장과 세계 최대 6세대, 7세대 패널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2013년 9월 말 기준 LG전자가 37.9%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전자는 2002년 12월 세계 최초로 HDTV용 52인치 TFT-LCD를 개발하는 등 디스플레이 부문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사진은 세계 최초 55인치 TV용 OLED 패널 양산 모습. /LG전자 제공

2019-04-2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3]엘지-11 빅딜과 LG디스플레이 설립(상)

4대재벌 엄청난 '부채비율'그룹간 반발로 '빅딜 난항'정부, 대출중단 내세워 압박가전, 삼성과 갈수록 격차2015년 영업익 '25배 이상'1997년 말 느닷없이 국내에 도래(?)한 외환위기의 국민경제적 충격은 엄청났다. 최정상의 대우그룹을 비롯해 국내 30대 재벌의 3분의 1이 부도로 좌초하거나 공중분해 됐다. 전국적으로 2만2천여개의 기업이 도산했는데 그중 흑자도산 기업 수만 해도 7천여 곳을 헤아린다. 덕분에 250만여명의 근로자들이 실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고전하긴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높은 부채비율이 화근이었다. 4대 재벌의 부채비율은 1998년 말 기준 삼성그룹(275.7%), 현대그룹(449.3%), LG그룹(341%), SK그룹(354.9%) 등이었다. 계열사들 상호 간에 서로 빚보증해서 은행자금 등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수법으로 몸집을 불렸던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충격'당시 초미의 국가적 과제는 기업들의 부채축소로써 김대중 정부는 구조조정작업의 목적으로 재벌들 상호 간에 대형 사업체들을 맞교환하는 식의 빅딜(big deal)작업을 강제로 단행했다.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대기업의 중복투자라고 봤기 때문에 기업 간에 서로 중복되는 투자를 줄이기 위함이었다.빅딜은 1998년 9월 4일 전경련의 발표로 구체화 됐는데 빅딜 대상은 삼성, LG, 대우, 현대, 한진 등 5대 그룹에 국한하고 대상사업으론 반도체(현대전자+LG반도체), 석유화학(삼성종합화학+현대석유화학+외국자본), 발전설비(현대중공업+한국중공업), 항공(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 자동차(기아 유찰시 현대, 대우, 삼성 간에 조정), 철도차량(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 정유(한화에너지+현대정유) 등 7개 업종이었다.그러나 해당 그룹 간의 이해득실에 따른 반발과 대규모 감원문제 등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끝에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LG반도체를,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 정유 부문을 각각 흡수했으며 항공은 삼성, 현대, 대우중공업 등 3사를 통합해서 한국우주항공(KAI)을 설립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1998년 정부는 전경련을 앞세워 구본무 회장에게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길 것을 종용했다. 정부는 빅딜의 기본방향을 재계서열 순위가 빠른 기업이 하위 기업의 사업체를 인수하기로 하고 빅딜에 불응하는 기업에는 대출중단 등을 내세우며 압박했다. >> 반도체사업 이원화LG반도체는 1989년 5월 청주와 경북 구미에 생산시설을 갖춘 금성일렉트론으로 설립돼 1995년에 LG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한 효자 기업이었다. 1995년 한 해 동안에만 순이익이 9천억원을 기록했다. LG가 승복하지 않자 이헌재 금융감독원장의 주선으로 1999년 1월 6일 구본무 회장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아쉽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내놓겠다. 이왕 포기하는 거 100%를 현대에 넘기겠다"고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현대전자에 인수된 LG반도체는 2001년 3월에 (주)하이닉스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하고 8월에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했다. 2012년 2월 SK텔레콤(주)이 최대주주가 된 뒤 3월에 SK하이닉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 결과 반도체 사업은 삼성전자와 현대 하이닉스로 이원화됐으며 가전 부문은 LG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대우일렉트로닉스)로 삼원화됐다.이를 계기로 라이벌인 삼성전자와 LG전자 간에는 갈수록 외형의 격차가 벌어졌다. 2015년 삼성전자의 실적은 매출 200조6천500억원, 영업이익 26조4천100억원인데 비해 LG전자는 매출액이 56조원5천90억원에 영업이익은 1조1천923억원에 불과하다. 매출액은 4배 이상, 영업이익은 25배 이상 차이를 보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97년 외환위기는 국내 기업들의 빅딜을 단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 반도체 중복 투자로 LG반도체는 현대반도체에 지분을 넘겼다. 사진은 1984년 금성반도체가 국내 최초로 8bit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한 모습. /LG그룹 제공

2019-04-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2]엘지-10 이동통신시장 참가

1997년부터 '019'로 서비스데이콤·파워콤 계열사 편입002패밀리·국제팩스 개시2012년 와이파이존 전면무료세계최초 LTE전국망 구축1990년대 국내 이동통신산업은 새로 발돋움하면서 대기업들이 대거 참여했다. 1994년 1월 20세기의 마지막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치부되던 한국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입찰에서 SK텔레콤이 한국통신의 사업파트너로 선정됐다. 항간에는 SK가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기업인 탓에 선정됐다는 부정적 여론도 파다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장녀 노소영과 SK그룹 최종현 회장의 장남 최태원이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다. 1993년 실시한 제2 이동통신 선정작업에는 코오롱과 포스코의 컨소시엄인 신세기통신이 선정됐으며 1996년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선정에선 KT프리텔, 한솔엠닷컴, LG텔레콤이 뽑혔다. PCS방식은 2세대 디지털 이동통신과 유사하지만 높은 대역폭과 주파수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기존 시스템보다는 높은 풀질의 음질을 제공할 수 있고 데이터 전송속도에서도 장점이 있어 화상서비스 등의 부가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었다. >> PCS사업자 첫 선정그러나 높은 주파수 대역으로 인해 많은 기지국을 세워야 하고 고속주행 자동차에서 통화품질이 안 좋다는 단점도 있다. 1997년 국내에서 시작된 PCS방식의 이동통신은 2000년 CDMNA2000을 시작으로 3세대 이동통신이 시작되면서 생명력을 잃고 시장에서 사라졌다.통신업체인 LG유플러스의 전신은 1996년에 설립된 LG텔레콤이다. 1997년 1월 LG텔레콤은 PCS 식별번호로 019를 받아 서비스를 시작했다.2000년 1월 데이콤, 2003년 12월 (주)파워콤이 각각 LG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주)파워콤은 '한국전력공사가 통신사업을 해선 안 된다'는 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전력의 통신사업부문을 분리해 2000년 1월 26일에 설립한 것이다. (주)파워콤은 종합유선방송 전송망 사업자로 지정되고, 2월에는 전기통신 회선설비 임대사업 기간통신사업자 허가를 받았다. 최대주주인 한국전력은 그해 7월 24일 (주)파워콤 민영화 계획으로 보유 주식 10.5%를 경쟁입찰 방식으로 20개사에 매각했다. 포항제철(주), SK텔레콤(주), (주)신세기통신 등이 낙찰받아 주주로 참여했다.2002년 12월 16일에는 (주)데이콤을 인수해 LG계열사로 편입했는데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방송공사, 삼성전자, LG반도체, 오리콤, 대우통신 등 27개 업체가 주주로 참여해 한국데이타통신(주)를 설립했다. 체신부에 의해 정보통신 업무 허가와 공중통신 사업자 및 행정 전산망 전담업체로 지정받고, 1983년 세계 33개국과 연결하는 국제 공중정보통신망을 개통했다. 1984년 국내 공중정보통신망(데이콤 네트)을 개통한 뒤 특정통신회선 업무·화상형 '천리안' 상용 서비스, 신용카드 정보시스템 서비스 등을 개시했다. 1988년 올림픽 종합정보통신망(INS)을 개발해 서울올림픽 때 운영했다.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다중매체 간에 국내외 교신이 가능한 MHS방식의 '데이콤 메일 400'이라는 소프트웨어 자체개발에 성공해 1989년 7월부터 시판하기 시작했다.>> 국제전화 60개국 확대1991년에는 상호를 (주)데이콤으로 바꾸고 1992년에는 국제전화서비스 지역을 60개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국제전화 002패밀리서비스, 국제팩스서비스도 개시했다. 1994년에는 저궤도 위성통신사업에 참여했으며, 1996년에는 시외전화서비스를 개시하고 한솔PCS 컨소시엄에 참여, PCS 사업권을 획득했다. 1997년에는 시내전화 사업권을 획득하고 하나로통신(주)를 설립, 시외전화 사전선택제를 실시했다.2003년 2월에는 (주)LG데이콤이 (주)파워콤의 지분 45.5%를 취득해 파워콤을 LG그룹의 계열로 편입했다. 2005년 개별 가정을 대상으로 초고속 인터넷 엑스피드(XPEED)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단기간에 100만 가입자를 확보했고, 이어 IPTV myLGtv, 인터넷 전화 myLG070을 서비스했다. 2006년 상호를 (주)파워콤에서 (주)LG파워콤으로 변경했고, 2008년 11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다.한편 LG텔레콤의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2004년 600만 명, 2006년 700만 명을 각각 돌파했다. 2008년에는 주식을 코스닥시장에서 증권거래소로 옮겨 상장했으며 2010년 1월 LG텔레콤은 국제전화와 시외전화 서비스업체인 LG데이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LG파워콤을 흡수 합병했다. 통합 법인은 6월 회사 이름을 (주)LG유플러스로 바꿨다.LG유플러스는 2010년 12월에는 LTE 장비공급업체로 선정됐으며 2011년 7월에는 4G LTE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2012년 2월 와이파이존을 전면 무료 개방하고, 3월에는 세계 최초로 LTE 전국망을 구축했다. 2013년 7월 세계 최초로 '100% LTE' 상용화에 성공하고 LTE-A 서비스를 개시했으며 그해 12월에는 모바일 간편결제 페이나우(Paynow)를 출시했다. 2014년 6월 사물인터넷 아이오티(IoT, Internet of Things)기술로 스마트 무인 사물함을 구축하고, 'U+미디어플랫폼'을 출시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통신업체인 LG유플러스의 전신은 1996년 설립된 LG텔레콤이다. 1997년 LG유플러스는 PCS 식별번호로 019를 받아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 2010년 LG전자가 내놓은 '옵티머스 시크(Optimus Chic, 모델명: LG-LU3100)'. /경인일보 DB

2019-04-0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1]엘지-9 3세 경영시대 개막과 그룹명칭 변경

냉전종식등 '脫이데올로기'세계 각국 '무한 경제경쟁'OECD가입등 국제위상 ↑전 계열사명 'LG'로 통일해외시장 고려 'CI 재정비'1990년대 세계는 지난 1세기가량 지속된 냉전체제 종식과 글로벌라이제이션시대 개막으로 특징지어진다. 1989년 11월 통일 독일 탄생 및 그해 12월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동서 간 냉전체제의 종식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탈(脫)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아 세계 각국은 무한의 경제경쟁에 직면했다.>> 국내외 경영환경 '급변'국내적으론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을 계기로 전국에서 '선(先) 성장, 후(後) 분배'의 개발철학에 반발하는 사회운동이 절정을 이루면서 산업 민주화가 정착됐다. 인플레이션의 확대재생산이 초래한 부동산불패 신화까지 기세해 고비용-저효율의 저성장시대가 초래된 것이다.1994년 우루과이라운드(다자간협상)의 타결은 또 다른 변수로 한국 정부는 1996년에는 국내 증권시장과 유통시장을 전면개방하고 그해 9월에는 국제결제은행체제(BIS)에, 10월에는 국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각각 가입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국제적 위상을 업그레이드했다.국내·외적으로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크게 변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계기로 럭키금성그룹은 1995년 1월에 그룹의 명칭을 'LG'로 변경했다. Lucky의 'L'과 Gold Star의 'G'를 조합해 'LG'로 작명한 것이다. 1984년 그룹 계열에 있는 광고회사인 LG애드가 발족하면서 처음으로 'LG'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 LG카드 및 LG 트윈스 등으로 LG라는 명칭은 그룹 내에서 점차 확대됐다.1995년 LG그룹으로의 명칭변경을 계기로 럭키·금성·럭키금성·반도 등이 혼재돼 있던 각 계열사의 명칭을 전부 LG로 통일했다. 수출 지향형 제조기업으로서 해외시장을 고려한 CI 재정비 작업의 일환이었다.>> 구자경 회장 퇴임의사한편 1995년 2월 22일 오전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구자경 당시 LG 회장(현 명예회장)은 "21세기에 LG가 세계 초우량기업이 되려면 젊고 의욕적인 사람이 그룹을 맡아 이끌어야 한다"며 퇴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업자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손이자 구자경 회장의 장남인 고 구본무가 국내 정상의 LG그룹 제3대 회장에 취임한 것이다.1975년 (주)럭키(현 LG화학)의 과장으로 입사한 구 회장은 심사과장·수출관리부장·유지총괄본부장 등을 맡았다. 1981년 금성사(현 LG전자)의 이사로 승진한 구 회장은 일본 주재 상무,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왔다. 입사 15년째인 1989년 그룹 부회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그룹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5년이 더 지난 1995년에 마침내 그룹의 총수가 된 것이다.급변한 국내외 경영환경 변화에 부합하는 조치로 해석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고객 가치 혁신으로 LG를 한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사진 왼쪽)과 LG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어낸 고 구본무 제3대 회장. /LG그룹 제공

2019-04-0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0]엘지-8 국제화·첨단화·금융자본화(하)

美 헌츠빌에 컬러TV 공장獨 VCR 유럽 진출 교두보사우디 PVC레진 세계최대자금조달 쉽게 '금융' 확충프로야구 'LG트윈스' 창단 LG그룹은 해외 진출도 돋보였는데 생산거점 현지화 위주의 국제화 작업은 1981년 9월 미국 헌츠빌에 컬러TV 공장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총 550만 달러를 들여 공장을 완공한 후 1982년 10월부터 컬러TV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시설투자비 6천700만 마르크를 들여 독일 보름스시에 연산 40만대의 VCR과 연 30만대의 컬러TV 생산 시설을 마련해 유럽진출의 교두보로 삼았을 뿐 아니라 1984년 6월에는 미국 첨단연구개발 전진기지인 실리콘밸리에 UMI를 설립했다. 신제품 개발 내지는 기존 제품의 품질향상을 위한 첨단기술 확보가 절실했던 탓이다.>> 생산거점 해외 현지화(주)럭키는 1984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합작(SABIC 85%:럭키 9%:금성사 6%)해 자본금 1억2천600만 달러의 NPC를 사우디아라비아에 설립했다. SABIC은 5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에틸렌 등 화공제품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기업체였다. NPC는 VCM과 PVC의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1986년에 준공한 생산공장은 연산 VCM 30만t과 PVC 레진 20만t의 생산능력을 확보했는데 PVC 레진 공장은 세계최대 규모였다.이 무렵 LG그룹의 현지생산거점 확보는 주로 주력기업인 금성사를 중심으로 추진됐는데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의 수입규제에 대항하고 국내의 재벌규제 강화 등 점차 열악해지는 국내 경영여건을 감안한 글로벌 다각화로 추정된다.금융부문에 대한 확충도 주목됐다. LG그룹은 1980년 6월에 부산투자금융을 인수하고 1983년 11월에 럭키증권이 대보증권을 인수 합병해 규모를 확대했으며 1982년 9월에는 금성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장차 그룹 계열사들의 기업공개를 통한 직접금융 확대와 규제 일변도의 은행 의존적 자금조달방식을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LG그룹 산하에 금융 소그룹이 마련된 것이다.또한 1981년에는 럭키개발이 기업공개를 단행했고 1984년 7월에는 엘지애드를 설립해 그룹의 광고업무를 전담했으며 1983년 11월에는 럭키스포츠를 설립해 스포츠 레저사업에도 진출했다. 1990년 4월에는 안진제약을 인수해 럭키제약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5월에는 럭키화이바그라스(럭키오웬스코닝)를, 6월에는 럭키훽스트(주)를 차례로 설립했다. 럭키훽스트는 1993년 1월 럭키석유화학에 통합됐다. 같은 해 9월에는 럭키에폭시(주)를 설립하고 12월에는 희성산업이 편의점사업에 진출했다. 1991년 1월 희성산업을 LG유통(현 GS유통)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92년 8월에는 'LG25' 100호점을 열었다.>> 스포츠·레저부문 진출1990년에는 프로야구단 'LG트윈스'를 창단했다. 국내 프로야구는 1981년 11월 한국프로야구위원회(KPBC)의 발족으로부터 비롯됐다. MBC 청룡(서울), 롯데 자이언츠(부산), 삼성 라이온즈(대구), 해태 타이거즈(광주), 삼미 슈퍼스타즈(인천), OB 베어스(대전) 등 6개 구단으로 출범, 1982년 3월 27일 서울의 동대문 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KBO 리그가 본격화했다. 프로야구는 갈수록 인기가 커져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들의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그 와중인 1989년에 MBC가 누적되는 적자로 청룡 야구단을 매물로 내놓았다. 프로야구위원회에서는 그해 10월에 삼성과 재계 수위를 다투는 현대그룹에 매각대금 80억원에 인수를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현대 정주영 회장이 매각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이유로 결제를 거부해 매각 작업이 무위로 끝난 것을 럭키금성 측에서 인수의사를 밝혀 1990년 1월에 최종인수계약을 체결해 구단 명칭을 'MBC 청룡'에서 'LG 트윈스'로 변경했다.LG그룹은 1980년대에 수직 및 수평 다각화에 박차를 가해 조만간 맞닥뜨릴 개방화, 금융화, 세계화 시대에 대비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금성사는 1976년 2월 TV생산 100만대를 돌파(사진 왼쪽)한데 이어 1977년 8월에는 19인치 컬러TV 양산을 시작했다. /LG그룹 제공

2019-03-2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9]엘지-7 국제화·첨단화·금융자본화(상)

장항제련소 최대주주 경영권 확보한국종합화학 나주공장 넘겨 받아美합작 건축자재 실리콘공장 건설전자·의료기기·반도체업계 진출 LG그룹의 약진은 재벌규제가 개시된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1981년 9월 서울 여의도에 연건평 4만8천평에 지상 34층의 쌍둥이빌딩을 착공했고 1982년 12월에는 유서 깊은 한국광업제련(장항제련소)의 경영권을 확보했다.장항제련소는 일제 하인 1934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국내에서의 금 생산증가를 획책할 목적하에서 국영기업으로 설립한 조선제련에서 비롯됐다. 1935년부터 충남 장항에 대규모 제련소를 건설하고 금 생산에 착수했으나 해방 이후 상공부 직영업체로 국유화돼 국영기업체로 운영된 뒤 1962년 한국광업제련공사로 재설립됐다.>> 여의도 쌍둥이빌딩 착공이후 소유권이 한국산업은행, 대한전선, 풍산금속 등으로 이전되는 와중에 명칭도 삼성 광업, 한국광업제련 등으로 변경됐다. 1982년 온산동제련소와의 통합을 계기로 50%의 유상증자를 단행했으나 대주주인 대한전선과 풍산금속은 투자 매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 증자에 참여치 않았다. 대신 LG그룹이 증자분 62억1천210원을 부담, 한국광업제련(현 LS니꼬동제련)의 최대주주(53.7%)가 됐다.1984년 3월 한국종합화학의 나주공장을 인수해 (주)럭키의 사업부문을 확충했다. 나주공장은 호남비료의 제2 질소비료공장으로 설립·운영하다가 1982년 5월 한국종합화학의 옥탄올공장으로 전환했지만 경영 부실로 정부는 이 공장을 분리해 (주)럭키에 매각했던 것이다. 당시 (주)럭키는 제품생산에 필요한 옥탄올의 안정적 확보가 절실했으나 새로 공장을 건설할 경우 최소 500억원 이상의 건설비와 공사기간만 2년여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됐다.인수 당시 나주공장은 옥탄올 연 5만5천t, 부탄올 연 1만여t, 이소부탄올 연 7천200t의 최신설비를 갖춘 공장이었다. (주)럭키는 나주공장을 인수함으로써 원료인 옥탄올의 안정적인 공급은 물론 옥탄올, 플라스틱 가소제, 플라스틱 원료, 플라스틱 가공공장을 수직적으로 결합, 국제적 규모의 종합화학 메이커로 도약하게 됐다.(주)럭키는 1984년 9월에 미국 유수의 화공업체인 Dow Corning사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해서 럭키-DC실리콘을 설립하고 청주공장 내에 시설용량 2천700t의 실리콘공장을 건설했다. 건축자재인 실리콘의 국내제조 및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생산기술과 원료는 다우코닝사가 공급하기로 했다. 당시 실리콘은 첨단의 화공제품으로 1970년대 초반 국내에 소개된 이래 수요가 증가일로에 있는 등 유망사업이었다. 더구나 장기적으로 원료인 Polymer 및 Monomer까지 생산할 수 있어 매력이 큰 때문이었다.>> 다양한 사업영역 확대1985년 6월에는 호남정유가 여수에너지와 정우에너지를 인수해 규모를 확대했으며 1986년 7월에는 럭키 소재가 대성 에탄올을 인수했다. 여수에너지와 정우에너지는 국내에 LPG를 독점적으로 수입하는 업체였으며 대성 에탄올은 주정(酒精)인 에틸알코올(에탄올)을 생산하는 업체이다. 한편 전자부문도 확충됐다. 1980년 7월 금성자판기를 설립하고 1983년 10월에는 금성전선이 한국중공업 경기도 군포공장을 인수합병해서 사업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1986년 9월에는 일본 히다찌(日立電機)와 합작해 금성히다찌시스템도 설립했다. 그 와중에서 첨단산업에의 진출도 획책하여 1984년 2월에 금성전선이 금성광통신을 설립했다. 그해 3월에 금성통신은 의료기기 첨단화 및 전자화 시대에 대비해 금성의료기를 설립했다. 금성반도체는 미국 하니웰사와 컴퓨터제조기술 도입계약을 체결, 1984년 5월에 금성하니웰을, 1987년 1월에는 미국 EDS와 합작으로 STM(Systems Technology Management Co.)을 각각 설립한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그룹은 1981년 9월 서울 여의도에 쌍둥이빌딩을 착공하는 등 국제화를 위한 약진을 계속했다. 사진은 럭키금성트윈타워 준공식 모습. /LG그룹 제공

2019-03-1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8]엘지-6 계열사수 2배로 신장

락희화학 '럭키'로 상호변경면 메리야스 국내 최대 생산日 합작 전기·전자부문 진출중동붐 특수 해외건설 설립대형슈퍼등 1400억대 매출1969년 12월 창업주 구인회 사망 당시 LG그룹은 화학, 전기, 전자, 무역, 언론 등 총 11개 기업군을 거느렸다. 삼성·현대그룹에 비해 계열사 수가 극히 적어 초라해 보인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의 업종이 주력인 화학과 전자 등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금성사는 삼영수지(합성수지성형물), 성예사(목제부품류), 성철사(철제부품류), 성아사(정밀부품), 성요사(전자부품), 성주사(제품양산용 주물) 등 9개의 중소부품업체를 설립해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경영했다.구자경이 2대 총수로 등장한 이후 첫 다각화는 1970년 4월 범한화재해상보험을 서정귀와 공동 인수한 것이다. 새로 가동한 호남정유의 원유 수송 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분산이 주된 이유였다. >> '범한화재해상' 첫 인수1972년에 락희화학을 (주)럭키로 상호를 변경하고 울주군 언양면 망양리 338일대 11만평을 매입해서 1979년까지 하이타이, DOP, 솔비톨, 옥당 등 대단위 울산공장을 완성했다. 1974년 7월에는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에 510평의 공장을 확보하고 럭키포장(주)를 설립했다. 편직기 50대를 설치하고 부산 동래공장에서 생산하는 레자(인조가죽) 소재인 면 메리야스를 월 300대씩 임가공했는데 당시 단일공장으론 국내 최대였다. 또 LG그룹은 전남 여천의 제3 석유화학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1978년 3월 자본금 1억원의 럭키석유화학을 설립했다. 그해 11월 럭키석유화학이 나프타분해공장과 저밀도 폴리에틸렌공장 건설 실수요자로 선정돼 1979년 4월 저밀도 폴리에틸렌사업을 전담할 목적으로 럭키폴리케미칼(주)를 설립했다.한편 이 무렵에는 전기 전자 부문에 대한 다각화 작업도 전개했다. 1970년 8월 금성사는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 금성알프스전자를 설립했으며 12월 금성전기를 설립했다. 금성전기는 금성사와 금성통신으로부터 반송통신장치, 무선통신분야의 시설 및 영업권을 인수받아 전문화했다. 1971년 2월 금성전공을 설립해 전력 및 통신용 전선, 케이블판매업을 영위하다가 1975년 2월 희성산업으로 개명하고 사업 종목에 구룡광산 운영을 추가했다. 희성산업은 1978년 4월부터 그룹 내 홍보, 선전을 전담하는 House Agency(광고주의 자본 하에 있어 그 기업의 지배를 받는 광고대행사)로 재출발했다. 1971년 6월 22일에는 금성사의 투자로 설립된 부품공급 전담사인 성음사를 해체하고 대신 일본 포스터전기와 50대50으로 합작해 자본금 1억3천만원의 금성포스터를 설립했다. 라디오 및 TV용 스피커와 부품 등을 생산해 미국, 일본 등지에 수출할 목적으로 생산능력은 연 30만개였다.1974년 6월 일본 후지전기와 합작해 금성계전을 설립했다. 산업용 전기기기사업의 전문화를 위해 금성통신에서 분리·설립한 것이다. 1976년 1월 서울 중구 도동 1가 3에 있는 삼주빌딩을 대우그룹으로부터 매수해 그룹 사옥으로 활용했으며 2월에는 금성정밀을 설립해 정밀기계분야에도 진출했다.1978년 5월에는 에스컬레이터 등 승강기류 및 전동 공구를 생산하던 서통전기를 인수해 신영전기로 개명하고 승강기를 비롯한 중전기기분야에 참여했다. >> 첨단산업시대 대비 시작또 금성사는 서통그룹의 서통전기를 비롯한 서통전자, 서통정밀 등 3사의 주식 316만7천900주를 31억3천500원에 매입했다. 서통전자는 인수 직후 희성전자로 상호 변경해 1년간 운영한 뒤 1980년 7월 4일부로 해산했고 서통정밀은 인수 직후 해체됐다.1978년 6월 2일에는 금전등록기 전문생산업체인 서흥전기의 발행주식 중 45.2%인 14만2천831주를 1억5천639만9천945원에 인수했다. 그러나 금전등록기 사업전망 불투명과 재무구조 악화로 1982년 12월에 해체했다. 1979년 9월에는 금성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첨단산업시대를 대비했다.화학 및 전기 전자 이외의 다각화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71년 6월 한국광업제련(장항제련소)을 대한전선과 공동 인수하고 10월에는 부산문화TV방송을 인수했으며 1973년 6월에는 국제증권을 설립했다. 학교법인 연암학원은 1974년 3월에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는데 1977년 3월에는 연암축산전문학교(현 연암대학)로 승격됐다.한편 중동건설특수가 절정을 이룬 1977년 10월에는 해외 건설 수주를 위해 럭키해외건설을 설립했다. 1978년 2월에는 럭키개발이 세계산업을 인수·합병해 국내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또 1978년 10월 럭키엔지니어링을 설립, 토건 관련 소그룹을 형성했다.이때 LG그룹은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1974년 유통업 근대화 및 대형화를 목표로 한 대통령 지시각서에 의해 대기업들의 참여가 가능해짐에 따라 그해 12월 럭키슈퍼체인(주)를, 1975년 9월에는 럭키체인스토아(주)를 각각 설립해 소매점의 연쇄 점화를 도모했다. 1976년 럭키슈퍼체인과 럭키체인스토아를 통합해 럭키체인(주)로 재발족, 대형 슈퍼마켓과 소형연쇄점을 종합관리했는데 서울과 안양, 의정부 등 총 11개의 대형슈퍼마켓과 체인점 20개소가 매출 1천400억원대를 기록했다.LG그룹은 구자경이 총수로 부상하면서 다각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69년 11개 계열사에서 1979년에는 23개로 증가했다. 1970년대는 LG그룹 창업 이래 가장 활발한 다각화기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그룹은 1970년부터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계열사수를 늘렸다. 사진은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 설립 사진. /LG그룹 제공

2019-03-1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7]엘지-5 최정상 기업집단의 완성 '호남정유 설립'

정부, 정유시설 확충 관심'민간주도 추진' 소문돌자해외기업과 차관도입 계약국제신보 사장 내세워 설득1966년 최종 실수요자 선정 1960년대에는 제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점차 경제 규모가 확대됐다. 이에 따라 전기, 석탄, 석유 등의 에너지 소비도 점증해서 정부는 에너지정책을 종래 석탄 중심에서 열효율이 높은 석유 중심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전환하고 정유시설의 확충에 관심을 기울였다. 국영기업인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를 설립하고 1964년부터 가동했는데 1965년 한 해 동안 20억원의 초과이윤을 누려 관심이 집중됐다. 정유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다. 차제에 정부는 제2 정유공장 건설을 구상했는데 이 공장은 처음부터 민간 주도로 추진하기로 했다. >> '석유중심 정책' 전환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관심을 표명한 기업들은 LG, 롯데, 한국화약 등이었다. LG는 제2 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 받기 위해 1965년 가을에 가칭 한국석유화학공업을 설립하는 한편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계획서에는 정유 사업은 물론 납사 분해, 폴리에틸렌 생산공장을 비롯한 석유화학공장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연 매출 30억원에 불과한 락희화학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였으며 정부에 의하여 거부됐다."('럭키40년사', P.34)LG는 재차 사업권을 얻기 위해 기존 사업계획서를 변경, 정유 사업으로 사업범위를 한정하고 경영능력을 확충하기 위해 1966년 2월에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3천만달러 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별도로 미국 Mobil사와 원유공급 및 운영자금 500만달러의 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1966년 5월 정부는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한 결과 LG그룹의 호남정유를 비롯, 롯데그룹의 동방석유, 판본방직의 삼남석유, 한국화약의 삼양개발, 한양대재단의 한양석유 등 6개 기업이 응모했다.>> 제2 정유공장 신설 지정이 기업들은 공히 '해외 석유메이저들과 연결하여 합작공장을 설립한다'는 안을 제출했는데 한화계열의 삼양개발은 미국 스켈리와 일본 스미토모(住友)를 합작선으로, 롯데의 동방석유는 일본의 이토추와, 판본의 삼남석유는 미국 썬오일 및 컨티넨탈 등과 연계했다. 대한증권의 삼양석유는 일본 일면(日綿)과, 한양대의 한양석유화학은 미국 스텐다드와 각각 연결했다. 호남정유(현 GS 칼텍스)는 LG그룹이 국제신보를 인수하면서 사장으로 영입한 서정귀를 전면에 내세워 정부를 상대로 설득전을 전개했다. 그는 대구 사범과 경성법전을 졸업한 후 4, 5대 민의원을 역임하고 재무부 및 정무차관을 거친 지식인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 사범 동기동창이었다. 그러나 실수요자 선정이 임박할 무렵에 호남정유의 합작 선인 미쓰이물산이 삼성그룹의 한비(韓肥) 밀수사건에 연루돼 국내 여론이 좋지 않자 호남정유는 합작 선을 미국의 칼텍스로 전환했다. 1966년 11월 17일에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로 호남정유가 지정되면서 치열한 각축전도 종료됐다.1967년 5월 15일에 미국 칼텍스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 호남정유를 설립함으로써 LG그룹은 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항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 사범 동창인 서정귀의 활약이 호남정유 실수요자 선정에 결정적이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는 호남정유를 내세워 1966년 5월 정부의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로 선정되면서 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급부상했다. /GS칼텍스 제공

2019-03-0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6]엘지-4 최정상 기업집단을 위한 수직계열화

치약 원료 글리세린 생산카본블랙 수요 증가 예상인천 갈산동에 공장 건설구인회 '부정축재' 자진신고국제신보, 휴전후 LG 인수 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환의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하는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할 목적이었다. 공장건설자금은 1959년도 유지(油脂)부문의 ICA원조자금 34만달러 등으로 충당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로 비누를 만들면 자동으로 글리세린이 생산됐다. 당시 비누의 원료인 우지는 소맥, 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된 탓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누렸으나 글리세린은 애경유지(애경그룹의 주력기업)가 독점 공급하고 있어 원료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천만원의 락희비니루공업을 설립했다. 1960년대초 비닐 장판, 스폰지레저, 건축용 비닐타일 등이 국산화되는 등 향후 비닐제품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판단해 부산 연지 공장의 비닐 부문을 분리, 설립한 것이다. >> 락희유지공업 설립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가 50대50 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하고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락희화학 동래공장으로부터 비닐 시트를 조달받아서 인플레터블(inflatable) 장난감을 생산, 수출하기 위해서였다.1968년 3월 21일에는 미국 컨티넨탈카본사(Continental Carbon Co.)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해 한국 콘티넨탈카본(자본금 2천700만원)을 설립했다. 당시 국내에는 고무제품 보강재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카본블랙은 고무에 탄력과 강도를 더해주는 보강재였기 때문에 고무공업, 특히 타이어제조에는 필수적인 원료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충주비료공장의 연돌(煙突, chimney)에서 채취되는 탄소알갱이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락희화학은 향후 카본블랙에 대한 수요가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공장건설을 고려하던 중에 거래관계에 있던 미국 컨티넨탈카본사가 합작을 제의해서 설립했다. 1968년 10월 15일 인천 갈산동의 1만1천여평의 부지에 공장건설에 착수, 1969년 9월 연산 7천500t 규모의 공장을 완공했다.1962년 5월에는 자본금 10억환의 한국케이블공업(LG전선)을 설립했다. 1960년 4·19혁명과 함께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탈세, 밀수, 정경유착 등으로 부정 축재한 기업가들에 대한 국민들의 처벌요구가 비등했는데 이병철(삼성), 정재호(삼호), 이정림(개풍), 설경동(대한), 이양구(동양), 남궁련(극동), 최태섭(한국유리) 등 유명 기업인 24명이 연루됐다. 구인회도 탈세액 3천만환을 자진 신고했다.부정축재자에 대한 단죄 움직임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구체화 돼 연루기업인들이 줄줄이 투옥되면서 이병철, 정재호, 함창희(동립산업), 이정림, 최태섭, 설경동, 조성철(중앙산업), 남궁련 등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상황이 반전돼 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이 보유한 시중은행 주식을 전부 몰수하는 한편 14명의 대표적 기업가들에겐 별도로 비료, 화학섬유, 전선공장 등 5대 기간사업체를 건설해서 국가에 헌납할 것을 명령했다.>> 1964년 언론사업 진출구인회는 아세테이트공장과 종합전기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1962년 3월에 서독의 Fuhrmeister사와 295만달러의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동년 4월 7일 군사정부는 구인회에게 전선공장을 건설하도록 통보, 같은 해 5월 5일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했다. 그해 10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전선공장을 착공해 4년여 만인 1966년 4월에 완공했다. 그러나 건설과정에서의 자금난에다 영업전망까지 불투명해 그해 9월에 금성사에 흡수합병 됐다가 1969년에 금성전선으로 분리됐다.1964년 5월에는 부산 국제신보를 인수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했다. 1949년 9월 김형두 등에 의해 산업신문으로 설립된 뒤 1950년 8월 국제신보로 개칭됐다. 6·25전쟁 중에는 다소 활성화됐으나 휴전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세가 기울어 LG그룹에 인수됐다. 초대사장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서정귀(徐廷貴)를 임명했다.이로써 LG그룹은 모기업인 락희화학 산하에 금성사와 한국케이블, 반도상사, 락희유지, 락희비니루, 한국미공, 국제신보 등을 두어 대규모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은 주로 화학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그룹은 최정상 기업집단을 위한 수직계열화에 박차를 가했다. 사진은 크림통 뚜껑 개발을 계기로 주력사업을 '플라스틱'으로 바꾸게 된 락희화학. /LG화학 제공

2019-02-2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5]엘지-3 최정상 기업집단의 시작 '금성사'

윤욱현 중심 본격 사업 추진첫 국산라디오 'A-501' 생산'농촌 보내기 운동' 힘입어한해동안 4억3천만원 매출1966년 19인치 수상기 '대박' 락희화학이 국내 정상급의 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던 직접적 계기는 1958년 10월에 부산시 부전동 518에 금성사를 설립한 때문인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1956년에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윤욱현 기획부장은 "평소 전축을 좋아해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컸을 뿐 아니라 전자기기 관련 간행물들을 자주 읽었기 때문에 라디오를 생산해 보도록 구 사장에게 건의했다. 이 무렵 일본 통산성의 백서가 발표됐다. 그런데 그 백서에는 석유화학 또는 전자공업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야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구 사장은 아직 국산라디오가 없는 점에 주목하면서 윤 부장에게 사업성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럭키40년사', P.1789)>> 정상급 재벌 도약 계기윤욱현을 중심으로 1958년 4월에 라디오, 플라스틱 잡화, 전기기기 부품, 유라이트(폴리카보네이트) 등을 생산하는 공장건설계획을 확정하고 기계 및 시설도입비로 8만5천195달러를 책정했다. 9월에는 서독의 라디오기술자인 헨케(H. W. Henke)를 2년 계약으로 고용하고 12월에는 기술요원 확보를 위해 공고 및 공대 졸업자들을 모집하여 생산체제를 갖췄다. 1959년에는 차관 및 은행융자 등 때문에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생산에 착수한 결과 그해 11월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라디오인 A-501을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산라디오에 대한 홍보부족과 외제라디오 때문에 금성사는 출발부터 존폐의 기로에 서야만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도약 계기가 초래됐다.-금성사 고위관계자의 회고"문 닫는 시기를 내달로 정하느냐 그 훗달로 정하느냐로 고민하던 때에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운동'이 벌어졌다. 7월 14일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트랜지스터라디오 3대를 공보부에 기증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물론 금성사의 라디오였다. 이를 시발로 라디오 보내기운동 성금들이 속속 모이고 라디오 주문은 쏟아졌다. 주문받은 것을 소화하느라 밤을 낮 삼아 일하기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이종재, '재벌이력서', P.204)>> 락희화학과 '쌍두마차'1961년에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는 '외제품 배격 운동'을 추진했는데 이를 홍보할 매체로 라디오를 정하고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계기로 금성사는 1962년 한 해 동안에 13만7천대를 팔아 4억3천1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후 전화기, 적산전력계 등의 생산은 물론 1964년 말부터는 동남아, 중남미 등에 수출하는 등 급신장했다.한편 이 무렵부터 금성사는 TV 생산에 착수했는데 배경은 1961년 12월 31일자로 국영 KBS-TV가 국내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한 것이다. 1964년 8월에는 민영의 TBC-TV가 개국됐다. 정부는 1966년 12월에 전자제품 국산화를 통해 전자공업을 장차 수출주력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내용의 전자공업 진흥계획을 발표했다. 금성사는 1963년부터 TV 생산시설을 마련하고 1965년 9월에는 일본 히다찌(日立) 제작소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 1966년 8월에 국내 최초로 19인치 흑백 TV 수상기(모델명 VD-191)를 생산했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빅히트했다. 이때부터 '전자제품은 금성'이란 말이 소비자들 사이에 회자돼 금성사는 락희화학과 함께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하면서 LG그룹은 재계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는 1959년 국내 최초로 국산 라디오 'A-501'을 개발했다.(사진 왼쪽) 또 1966년 8월 흑백 TV 'VD-191'을 최초로 생산했다. /LG전자 제공

2019-02-1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4]엘지-2 락희화학으로 출발(하) 플라스틱성형사업 개시

생활용품·식기등 품종 확대화장품서 '사업 전환' 결심 이 무렵 락희화학은 새로 플라스틱 성형사업을 시작했는데, 동기는 잘 파손되지 않은 화장품 용기의 뚜껑 개발 때문이었다. 당시 국산 화장품 용기의 뚜껑 소재가 유리여서 쉽게 파손됐는데 대용품으로 상대적으로 가볍고 튼튼한 플라스틱 뚜껑을 제조하기로 한 것이다. 제품개발은 주로 구인회의 셋째 아우 태회가 전담했다.화장품판매로 벌어들인 3억환으로 1952년 9월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는 한편 범일동 884번지에 건평 41평의 합성수지공장을 마련했다. 사출기 등을 설치하고 플라스틱제 머리빗과 비누곽, 크림 뚜껑 등을 생산했는데 소비자 반응이 좋아 '럭키' 플라스틱제품은 원가의 20~30배에 팔려나갔다.>> 동양전기화학 설립플라스틱 세면기와 식기생산 등으로 품종을 확대하는 와중에서 사업의 중심을 화장품에서 플라스틱 성형으로 전환하기로 결심, 1953년에 화장품사업을 청산하고 동양전기를 락희화학에 흡수했다. 자동식모기를 도입해 칫솔도 생산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무겁고 불편한 재래품들은 점차 시장에서 밀려났다.1953년 11월에는 국내외 판매 및 원료, 기계설비 등의 수입을 목적으로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1956년 반도상사(LG상사의 전신)로 개명하면서 무역업을 강화했다. 또 락희화학은 1954년 5월 미국 Abbe Engineering Co.로부터 치약배합기 등을 도입해 부산 연지동에 전용공장을 마련하고 치약생산도 개시했다. 당시 국내에는 주로 미군 부대를 통해 유출된 '콜게이트'치약과 국산으로는 동아특수화학에서 생산한 '다까키'치약이 있었으나 '콜게이트'치약은 값이 비싸 부유층에서만 사용됐을 뿐 대다수 국민은 왕소금이나 잿물 등으로 양치질하는 상황이었다.'럭키치약' 또한 출하 직후부터 수요가 급증했는데 1955년부터 군납할 정도로 '럭키치약'의 품질이 일정수준 이상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55년도 '대한경제연감'에는 자본금 기준 국내 10대 기업 중 럭키화학이 4위에 자리매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美배합기 도입 치약 제조도럭키화학, 10대기업중 4위1957년 6개부문 20여종 생산>> 화학제품 메이커 부상이후부터 락희화학은 플라스틱성형사업에 특화해 1956년에는 PVC 파이프를 생산했고 1957년부터는 비닐 장판, 폴리에틸렌 필름을 생산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학제품 메이커로 부상했다. 당시 락희화학이 생산하던 제품종류는 다음과 같다.■ 락희화학 생산품목(1957년 현재)=▲비닐부문: 비닐시트, 필름, 시트합판물, 스펀지 레자 등 5종 ▲사출성형부문: 잡화류, 문방구류, 완구류, 조화류 등 6종 ▲압출성형부문: 포장용 필름, 농업용 필름, 경질판, PVC 파이프, 전선 피복, 진공성형제품 등 7종 ▲수지합성부문: 요소수지 성형재료, 멜라민수지 성형재료, 석탄산수지 등 4종 ▲치약부문: 대형, 중형, 소형 3종 ▲칫솔, 스펀지, 브러시 등.락희화학은 1950년대 후반에 재벌로 도약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완료했다. 설립 10여년만에 기틀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물자부족이 극심했다는 점과 둘째, 대부분 기업이 서울, 인천, 안양 등 수도권에 소재했던 때문에 전쟁의 참화를 입었으나 락희의 생산기반은 부산에 위치한 탓에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는 점, 셋째, 해외원조로 제공된 플라스틱 소재를 원료로 해 값싸고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난 생활필수품을 생산한 때문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락희화학은 1954년 부산 연지동에 전용공장을 마련하고 치약생산도 개시했다. 사진은 국내 최초의 치약인 럭키치약. /LG생활건강 제공

2019-02-1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3]엘지-1 락희화학으로 출발·(상) '럭키'크림 출시

'화장품 성업' 정보 입수후'아마쓰 구리무' 판매 호조처가친척 허준구 경영 참여제품 직접 제조키로 '결심''럭키' 상표로 시작 잘 팔려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 1907~1969)는 대한제국의 국운이 쇠하던 무렵인 1907년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362-2에서 300~400석 지기의 중농인 구재서(具再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구인회가 태어난 진양군은 한반도의 동남향, 영남지방의 서쪽에 위치한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할 때까지 경상도 남부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수면은 진주시의 동북부에 있는데 동쪽에는 방어산(530m)과 괘방산(451m) 줄기가, 북부와 서부 면계를 따라 남강이 흐른다. 남강의 지류들이 곳곳을 곡류하며 이들 하천연안에 평야가 발달했는데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등이었다.구인회의 집안은 양주와 파주에 뿌리를 내린 문인집안이었으나 7대조에 이르러 진주로 낙향해 터를 잡았다. 구인회의 조부는 홍문관 교리와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 구인회 '포목상' 첫 사업구인회는 어릴 때 고향에서 서당교육을 받은 후 서울의 중앙고보에 진학했으나 1926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선배, 동료들과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는다. 어린 시절 일본인이 소규모 '눈깔사탕' 장사로 시작해 점차 사업품목을 확대, 동네상권을 독점하는 것을 보고 사업을 하기로 했다.구인회는 부친에게서 2천원(圓)을 받아 1931년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이란 포목상을 열었다. 구인회의 동생인 철회도 1천800원을 투자해 공동 경영했는데 운수사업도 병행했다. 구인회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물자부족을 예견, 광목 2만필을 한번에 사들여 적당한 시기에 되파는 수법으로 8만원이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940년 6월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어물 및 청과물도 취급했다. 1941년에는 둘째 아우인 정회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3형제 공동경영시대를 맞이한다.1945년 해방과 함께 구인회는 구인회상회를 폐업하고 그해 11월 부산 남포동 부근에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부산에는 숯을 난방 및 취사용 에너지로 사용하는 일본식 주택들이 많았는데 목탄은 일본 대마도에서 생산됐기 때문에 이를 수입해 판매할 목적으로 회사를 만들었다.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과 포목상도 겸했으나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둘째 아우 정회가 화장품 제조업체에 직원으로 근무하는 부산 흥아화학공업사의 김준환을 만났다. 당시 이 회사의 생산직 사원이었던 김준환은 정회에게 화장품사업이 성업 중이란 정보를 제공했다.구인회 형제는 흥아화학에서 생산한 여성용 기초화장품인 아마쓰 구리무(크림) 판매사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 구인회의 처가 친척인 허준구와 셋째 아우 태회도 경영에 참여한다. 허준구는 구인회의 장인과 6촌간인 허만정의 셋째 아들이자 철회의 사위로 당시 24세였다. 허만정은 일제시대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진주여고를 설립한 지수면 승산리의 만석꾼이었다. 허준구는 일본 동경의 관동중학을 졸업하고 1943년에 귀국해 고향에서 면서기를 역임했다.>> 1947년 부산에 공장 설립구인회 등은 흥아화학에서 화장품을 공급받아 서울에서 판매했다. 흥아화학이 부산지역 판권을 장악한 탓이었다. 아마쓰 구리무에 대한 서울 소비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호황을 누렸다. 화장품의 판매마진은 30% 정도였는데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구인회는 화장품을 제조하기로 결심했다.그동안 화장품판매로 비축했던 자금과 고향의 전답을 처분해 3천만환을 마련해 1947년 1월 5일 부산에서 락희(樂喜)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사장은 구인회가, 부사장은 철회가, 허준구는 판매를 그리고 화장품제조 기술자인 김준환을 스카우트해 생산을 전담케 했다. 공장은 서대신동에 있는 구인회의 집에 마련했다. 감화조를 비롯 감화한 원료를 처리하는 방치선반과 압착여과기, 향료혼합조 등을 설치했는데 생산 초기 직공은 20여명 내외였다.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제품에 '럭키(lucky)'라는 상표를 붙여 출시했는데 잘 팔렸다. 당시 전국의 화장품업체는 20여개로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화장품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구인회는 1949년에 장남 자경을 경영에 참여시켰다. 1925년 진양에서 출생한 구자경은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교사생활을 하다 가업에 합류했다.그러나 한국전쟁 기간 일제 화장품이 대거 밀수돼 국내 화장품 메이커들이 고전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가 일본과의 일체 외교관계를 단절함으로써 국내에서 일본과의 모든 경제교류는 불법이었다. 국내 메이커들은 대체수단으로 선호도가 떨어지는 중국산 향료를 수입해 화장품을 제조했다. 락희화학은 중국산 향료보다 50% 정도 저렴한 일제 향료를 수입해서 제조한 결과 '럭키'크림이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의 생산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제공

2019-01-2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2]현대-24(끝) 현대중공업(하-지주회사체제로 전환)

고강도 구조조정 비주력부문 매각3조5천억원 현금 확보 '90% 달성'부채비율, 2017년 90%까지 줄여 2016년은 국내조선업계에 최대의 시련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장기불경기 탓에 세계적으로 해운 물동량이 크게 줄면서 조선업계에 타격을 준 것이다. 중소 조선소들이 줄줄이 폐업하는 가운데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대우중공업도 매출부진에 따른 재무구조 악화로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현대중공업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비주력부문 매각을 통한 부채비율 축소와 함께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3조5천억원 규모의 현금 확보를 목표로 2016년 6월 보유 중인 현대자동차, KCC, 포스코 등의 주식과 유휴 부동산들을 매각했다. >> 글로벌 금융위기 맞아또 현대종합상사, 현대기업금융, 현대기술투자, 현대자원개발을 계열 분리해 총 2조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현대삼호중공업 프리IPO(4천억원), 현대미포조선의 현대로보틱스 지분 매각(3천500억원) 등으로 2017년에만 총 1조원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경주, 울산, 목포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현대호텔의 지분 100%를 2천억원에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에 매각했다. 현대중공업의 금융업 철수 방침에 따라 하이투자증권 매각을 추진하고 현대커민스, 독일 야케법인, 중국 태안법인, 미국 현대아이디얼전기 등 비핵심사업을 정리해 목표인 3조5천억원의 90%가량을 달성했다. 덕분에 부채비율이 2016년 1분기 말 134%에서 2017년 상반기에는 90% 중반까지 줄어 업계 최고의 재무건전성을 확보했다.한편 현대중공업의 인적분할을 통해 조선과 해양플랜트를 담당하는 현대중공업(존속법인)과 전기 전자 시스템사업을 담당하는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 건설장비 사업을 전담하는 현대건설기계와 로봇메이커인 현대로보틱스 등 4사 체제로 쪼개 현대로보틱스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착수했다. 2016년 12월에 분사를 완료한 '현대중공업 그린에너지'와 '현대글로벌서비스'까지 포함하면 총 6개 계열사로 재정비한 것이다. 당시 현대중공업의 지분은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10.15%를, 현대미포조선이 7.98%를 지배했으며 현대중공업은 현대삼호중공업의 지분을 94%, 현대삼호중공업은 현대미포조선의 지분 42.3%를 보유하고 있었다.('한경비즈니스' NO.1126)그 와중에 현대중공업에 대한 '자사주의 마술' 시비가 불거졌다. 2017년 2월 27일에 개최된 회사분할 승인을 위한 임시주주총회에 현대중공업 노조가 분할반대 목청을 높인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분할 목적은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지분율을 높여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3세 세습을 위한 사전준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지분 8.07%)이 분할에 찬성함으로써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 전환작업은 2017년 4월에 완료했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지분 '10.15%'회사분할 '자사주의 마술' 시비도2016년 4월 기준 기업집단 '12위'>> 새로운 의결권 확보지주회사로 전환된 현대로보틱스는 인적분할에 따른 '자사주의 마술'에 의해 현대중공업그룹에 대한 13.4%의 새로운 의결권을 확보했다. 정 이사장은 추가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현대로보틱스의 지분을 25.8%까지 늘렸고 그룹에 대한 지배력은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현대로보틱스가 자사주 13.4%를 보유함은 물론 자회사가 된 현대중공업에 대해서도 같은 지분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CNB저널' VOL. 553)'자사주의 마술'이란 기업이 인적분할을 할 경우 지주회사는 본래 갖고 있던 자사주와 동일한 비율로 신설 회사에 대한 지분을 자동으로 확보하게 되는데, 이 경우 지주회사는 신설회사에 대한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사주 마법'을 빌미로 오너들의 지배력이 편법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자사주 마법'은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의 핵심과제로 부상했다.김종훈 의원(울산 동구)은 2017년 7월 6일 "현대중공업은 자사주 의결권 제도가 갖는 허점을 이용해 회사를 인적 분할함으로써 대주주의 지분율을 크게 높였는데 이는 법의 취지를 거스르는 것이고 정의에도 어긋난다. 공정위가 엄정히 조사해 재벌 일가가 편법, 탈법을 통해 얼마만큼의 이득을 얻었는지를 국민 앞에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이러한 사례를 막으려고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 제윤경 의원 등이 인적분할 전에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거나, 인적분할시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등의 규제 법안을 이미 발의한 상태다. 법이 개정되면 자사주를 활용할 수 없어 지주회사 전환에 훨씬 더 많은 돈이 들 수밖에 없다. 지주회사가 보유해야 할 자회사(손자회사) 지분율(상장사 기준)을 현재 20%에서 30%로 올리고, 부채비율도 현재 200%에서 100%로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은 2001년 정주영 창업주의 사망을 계기로 여러 개의 기업집단으로 분리됐다. 2016년 4월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를 보면 자산총액 기준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은 삼성에 이어 2위, 현대중공업그룹은 12위, 현대백화점그룹 29위, 현대 30위, KCC그룹 39위, 현대산업개발 56위에 각각 랭크돼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중공업은 2017년 지주회사체제로의 전환을 완료하며 지배력을 높였다. 사진은 현대중공업이 콜롬비아에 친환경 엔진 발전소를 완공한 모습. /현대중공업 제공

2019-01-2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1]현대-23 현대중공업 (상-종합중공업체로 성장)

미포만에 50만t급 조선소 준공1974년 '1억달러 수출의 탑' 수상정몽준 사장 취임후 계열사 합병 조선, 해양, 플랜트, 건설장비 등을 주업으로 하는 현대중공업의 모태는 1970년 3월 현대건설 내에 설치된 조선사업부다.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현대그룹에 조선소 설치를 권유한 때문이다. 조선사업부는 같은 해 9월 영국 조선회사였던 A&P 애플도어 및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와 기술 및 판매 협약하고 그해 12월 정부로부터 현대울산조선소 사업계획을 승인받았으며 이듬해인 1971년 2월 그리스 리바노스(Livanos)사에 26만t급 원유운반선 2척을 3천95만달러에 수주하는 등 초스피드로 진행됐는데, 다음과 같은 비화(秘話)가 있다.>> '조선사업부'로 시작1970년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부지를 울산 미포만 백사장으로 확정하고 영국 최대의 버클레이즈은행을 찾아 4천300만달러의 차관을 요청했으나 이 은행은 현대의 기술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정 회장은 버클레이즈은행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정 회장은 지갑에서 500원권 지폐 한 장을 꺼내 그 속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며 끈질기게 롬바톰 회장을 설득해 바클레이즈로부터의 차관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영국 정부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이 통과되어야 차관이 실현되는데 여기서 또다시 제동이 걸린 것이다. ECGD는 정 회장에게 신조선 공급증명을 요구한 것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대외차관사업이 부실해질 경우 영국 정부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었다. 정 회장은 수소문 끝에 생면부지의 인물인 그리스 썬 엔터프라이즈(Sun enterprise)의 조지 리바노스 회장에게 매달려 리바노스(Livanos)사로부터 26만t급 원유운반선 2척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1973년 12월 현대건설 조선사업부를 분리해서 현대조선중공업(주)로 설립하는 한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으로부터 혼성차관 5천14만달러와 내자 74억원을 투입해 1974년 6월 울산 미포만에 최대건조능력 50만t급의 초대형 조선소를 준공하고 11월 '1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가 한 치 앞도 예단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룩한 쾌거여서 더욱 돋보였다. 1975년 4월에는 수리 전문 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소를 설치하고 1976년 2월 정부로부터 엔진사업을 승인받은 뒤 그 해 7월 엔진사업부를 출범시켰다. 1977년 중전기사업부와 기관차사업부를 발족시켰다.1978년 2월 상호를 현대중공업(주)로 변경하고 같은 해 8월 기관차사업부를 현대차량(주)로 분리 독립시켰으며 1979년 2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선을 건조했다. 1980년 4월 한국형 구축함 1호를 진수했으며 1982년 5월 정주영 회장의 6남 정몽준이 제4대 사장에 취임했다. 현대중공업은 1981년 현대특수화학, 1985년 현대해양개발, 1986년 현대종합제철, 1989년 현대엔진공업, 1993년 현대철탑산업, 현대로보트산업,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산업 등을 각각 합병했다.국내 첫 7천t급 '세종대왕함' 진수세계 최대 19만t급 쇄빙선 개발'글로벌 500대기업' 9년연속 선정>> 2002년 현대그룹서 분리2000년 3월에는 정주영 명예회장 아들들 간에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졌는데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면서 각 계열사가 분리 독립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중공업은 2002년 2월 계열사였던 현대미포조선과 함께 현대그룹으로부터 공식 분리돼 현대중공업그룹으로 재출범했다. 최대주주도 현대상선에서 정주영의 6남인 정몽준으로 바뀌었으며 2002년 5월에 현대중공업이 삼호중공업을 인수했다. 2004년 12월 선박 설계와 검사를 전담하는 미포엔지니어링을, 2008년에는 물류 전문기업인 (주)힘스를 각각 세웠다. 2006년에는 잠수함인 '손원일함'과 4천500t급 구축함인 '최영함'을 각각 진수했다. 2007년 5월 한국 최초로 7천t급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함'을 진수했다. 2008년 CJ그룹 계열사였던 CJ투자증권을 인수해 하이투자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했다.2009년 현대종합상사, 2010년 현대오일뱅크 등을 잇따라 인수해 현대중공업그룹의 계열사로 편입했다. 2011년 2월 세계 최초로 선박 1천700척을 인도했고, 8월 세계 최대 19만t급 쇄빙 상선을 개발했다. 2012년 5월 세계 최고 효율의 SE태양전지를 개발하고, 2014년 2월 세계 최초로 '바다 위 LNG 기지' 건조에 성공했으며, 11월에는 건설장비 굴삭기가 영국에서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2015년 5월 누계기준 세계 최초로 선박 2천척을 인도했으며, 같은 해 8월 미국의 경제지 '포춘'지로부터 '글로벌 500대 기업'에 9년 연속으로 선정됐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중공업의 모태는 1970년 3월 현대건설에 설치된 조선사업부로 시작됐다. 현대중공업은 이후 꾸준히 발전하며 한국 조선업을 세계 1위로 이끈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제공

2019-01-1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0]현대-22 현대백화점

울산 현대쇼핑센터 1977년 개설1984년 본사 압구정동으로 이전2011년까지 지방에 잇따라 오픈 사업기반이 하드웨어 중심인 현대그룹이 소매업 중심의 유통산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8년 2월 27일 경일육운(주)의 설립에서 비롯됐다. 경일육운은 건설장비의 수리·임대를 목적으로 현대건설의 자회사로 설립됐다가 1970년 4월에 휴업 중이었으나 1971년 6월 15일 강릉비치호텔, 세운상가, 금강휴게소 등을 운영하기 위해 금강개발산업(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새롭게 출발했다. 1974년 4월 정주영 창업주의 3남 정몽근이 제2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현대건설 보유 주식 30%까지 넘겨받은 금강개발은 현대건설의 자회사에서 벗어나 그룹 계열회사로 지위가 격상됐다. 정몽근은 1987년 2월 대표이사 회장으로 승진했고 1989년 8월 금강개발의 주식이 상장됐다.>> 금강개발, 소매업 진출금강개발이 종합소매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77년 7월 울산에 현대쇼핑센터를 개설하면서였다. 1982년 백화점사업부를 신설했고 1984년에는 본사를 서울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다. 1985년 12월 현대백화점 본점이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단지에서 영업을 개한 이래 1988년 9월에는 서울 무역센터점, 같은 해 12월에는 서울 반포레저타운(반포점)을 각각 오픈했다.이후 세력권을 지방으로 확대해 인천 부평점(1991.2), 부산점(1995.8), 서울 천호점(1997.8), 울산점(1998.3), 광주점(1998.6), 서울 신촌점(1998.7), 울산 동구점(2000.8), 전남 영암의 현대하이퍼렛(2001.4), 서울 미아점(2001.8), 서울 목동점(2002. 8)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2002년 현대백화점이 신설 회사로 출범한 이후에는 부천 중동점(2003.8), 일산 킨텍스점(2010.8), 대구점(2011.8)이 개관됐다. 반면 부평점(2003.7), 반포점(2005.1), 삼호점(2006.8) 등 3곳은 폐쇄됐다.한편 금강개발산업은 1999년 4월 현대그룹에서 독립했으며, 금강개발은 같은 해에 현대리바트를 인수했다. 국내 최대의 가구메이커인 현대리바트는 당초 현대건설의 가구사업부를 분리해 현대종합목재로 설립한 것이다. 리바트가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1999년이다. 2006년(5.15% 지분)부터 꾸준하게 주식을 매입한 퍼시스그룹이 2010년 리바트의 지분율을 14.08%까지 높이자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그린푸드를 통해 11.84%의 지분을 매입했으며, 이듬해 지분율을 23.1%까지 끌어올리면서 최대주주로 올라섰다.2000년 4월에는 (주)현대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정주영 창업주의 직계 중에서 가장 먼저 현대백화점이 계열분리 된 것이다. 2001년 4월 현대백화점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처음 지정받았는데, 집단 순위는 26위, 계열회사는 15개였다.2007년 자산총액 2조원 경영 양호시장점유율 롯데이어 '2위' 차지정지선 '지분율 17.32%' 최대주주>> 호텔·휴게소 '회사분리'2001년 1월에는 호텔 및 휴게소사업이 분리돼 신설회사 (주)호텔현대로 이관됐으며, 2002년 11월 1일 현대백화점이 두 회사로 분할됐다. 즉 백화점사업은 동명의 회사(현대백화점)를 신설해 담당하도록 했으며 여행, 유니폼생산, 임대, 법인사업 등 비(非) 백화점부문은 존속회사가 담당하도록 하되 회사명은 (주)현대백화점H&S(현대H&S)로 변경했다.정몽근은 2000년부터 후계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장남 정지선은 2004년에 현대백화점의 최대주주가 됐으며, 2007년에는 백화점 회장 겸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1974년생인 차남 정교선은 2005년부터 백화점 기획조정본부 임원으로 경영에 참여해 2009년에는 사장으로 승진했다.2000년 이후 현대백화점은 양호한 경영실적을 보이고 있다. 자산총액은 2007년 2조원을 넘어선 후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자본금, 매출액, 영업이익 등도 신설회사 첫해인 2003년 이후 완만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당기순이익의 경우는 증가속도가 매우 빨라 2005년과 2008년에 각각 1천억원과 2천억원을 돌파했다. 2010년 3월 백화점업계의 시장점유율은 롯데 52.7%, 현대 25%, 신세계 22.3% 등이다.2010년 3월 현대백화점의 최대 주주는 정지선(17.32%)이며, 현대H&S(12.41%), 정몽근(3.37%) 등을 포함하는 최대 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은 37.41%이다. 대표이사는 정지선(회장), 경청호(부회장), 하병호(사장) 등 3명이며, 정몽근은 미등기명예회장, 정교선은 기획조정본부 미등기사장이다. 2010년 4월 현대백화점그룹의 계열회사는 29개이며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대규모사기업집단 중 34위이다. 2012년 3월 백화점 수는 모두 13개이며 전체가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백화점은 1968년 경일육운(주)를 모태로 시작됐다. 사진은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현대백화점 제공

2019-01-0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9]현대-21 현대기아차

울산공업단지에 10만평 부지 마련1968년 年 3500대 생산공장 착공국내최초 자체모델 '포니' 만들어 정주영 창업주는 울산공업단지 내에 10만평의 자동차공장 부지를 마련하는 한편 1967년 12월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합작해 자본금 5천만원의 현대자동차(주)를 설립하고 대표이사에 아우 정세영을 임명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신진자동차(대우GM의 전신)는 일본의 토요타자동차와 기술 제휴해 생산한 코로나를 '새나라'란 상표로 국내 승용차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한국의 자동차 전망이 밝은 것으로 판단한 포드는 국내 진출을 결심하고 1966년 4월부터 국내 기업들과 접촉 중이었는데 현대가 참여하면서 손을 잡은 것이다.>>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신생업체인 현대자동차가 자본의 회임 기간이 가장 긴 대형 산업에서 그것도 선발기업들과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갖기 위해선 토요타보다 한발 앞선 자동차 메이커와의 협력은 불문가지였다.1968년 5월부터 울산공단 내에 연산 3천500대 규모의 생산공장을 착공했다. 파트너 포드와의 사이에 부품비율을 국산 대 외국산비율을 21대79로 하는 '자동차 조립기술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1월에 '코티나 1600D'를 생산했다. 이후부터 현대자동차는 신진자동차의 시장을 잠식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정부는 1972년 국내 자동차산업을 현대, 기아, 신진, 아세아 등으로 4원화하는 내용의 자동차산업 '4원화 방침'을 발표해 진입 장벽을 강화했다.1976년에는 국내 최초로 자체 모델인 '포니'를 생산해 한국 자동차역사의 신지평을 열었다. 이후 '포니신화'에 힘입어 1984년에는 포니 생산 대수가 50만대를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캐나다에 수출했다.이후 현대자동차는 1985년 엑셀, 1986년 그랜저, 1988년 소나타, 1990년 스쿠프, 엘란트라 등 상품의 다변화는 물론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현대가 자체개발한 알파엔진을 출시하고 갤로퍼를 생산했다. 1994년 엑센트, 1995년 아반떼, 1996년 다이너스티, 스포츠카 티뷰론을 시판했으며, 전 차종 생산 누계가 1천만대를 돌파했다. 1997년 터키 공장을 준공하고 아토스를 생산했다. 1998년에는 EF쏘나타, 그랜저XG를 생산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좌초한 선발업체 기아자동차를 인수했다. 1998년 10월 '기아자동차 국제 공개입찰'의 제3차 입찰에서 최종 낙찰자로 현대자동차가 확정돼 같은 해 12월 기아자동차 주식 51%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1999년 3월 현대그룹에 편입됐다.1996년 전차종 생산 1천만대 돌파좌초된 기아주식 51% 인수 계약'왕자의 난' 정몽구 자동차로 분가>> 1999년 기아차 그룹 편입기아자동차의 전신은 1944년 12월 세워진 경성정공이다. 경성정공의 설립자는 김철호 회장이다. 김 회장은 1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자전거 기술을 배웠다. 오사카 소재 삼화공장을 인수해 자전거 부품 너트와 볼트를 만들어 성공했다. 1944년 고국으로 돌아와 자전거 부품 제조공장인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에서 국내 최초 국산 자전거인 삼천리호를 출시했다. 1952년 2월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62년 일본 마쓰다자동차와 기술제휴해 배기량 356㏄의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했다. 이 차는 '삼륜차', '딸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1974년 마쓰다자동차의 파밀리아의 차체를 바탕으로 국산 최초의 승용차 브리사를 탄생시켰다. 1976년 10월 아시아자동차공업을 인수했고 1981년 정부로부터 '중소형화물차 및 버스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받았다. 당시 소형승합차 봉고 코치는 '봉고 신화'를 창조하며 기아산업의 주력 차종이 됐다. 이후 승합차 베스타, 소형승용차 프라이드 등을 출시했고, 1990년 3월 현재의 회사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과당경쟁에 따른 적자누적 및 전문경영체제에 따른 도덕적 해이 등으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7년 법정관리를 거쳐 1998년 4월 회사정리절차가 시작됐다.이후 현대자동차는 1999년 트라제XG, 베르나, 에쿠스 등으로의 제품 다변화 및 국내 최초로 자동차용 연료전지를 개발했다. 그러나 2000년 3월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인 소위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주영 창업주의 2남인 정몽구 공동회장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등의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분가했다.2013년 기준 현대자동차는 세계 100대 브랜드 중 하나로, 판매량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다. 국내 3개 공장(울산, 아산, 전주)을 비롯해 미국, 터키, 체코, 러시아, 브라질, 인도, 중국 등에 현지 생산법인을, 세계 18개국에 판매법인을 두고 있으며, 승용차 13종, RV차량 5종, 그 외 택시 및 트럭 13종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연구소로는 미국디자인센터, 미국기술연구소, 유럽기술연구소 및 유럽디자인센터, 인도기술연구소, 일본기술연구소가 있다. 2014년 3월 기준 최대주주는 현대모비스로 20.78%이며, 정몽구 회장은 5.17%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회사는 총 57개사로, 이 중 상장회사는 기아자동차, 현대제철, 현대모비스 등 11개사이며, 비상장회사는 현대파워텍,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엠코 등 46개사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자동차는 1967년 12월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합작해 자동차 회사로 탄생했다. 사진은 국내 최초로 자체 모델로 개발된 '포니'가 수송차에 실려있는 모습. /현대자동차사 제공

2018-12-3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8]현대-20 현대산업개발

1986년 한라·한국도시개발 합병1999년 정세영 장남 몽규 회장 취임같은해 8월 현대그룹서 계열 분리정주영 회장의 형제 중 마지막까지 큰형을 보좌하며 현대그룹을 키운 이가 넷째인 정세영(鄭世永, 1928~2005)이다. 그는 고려대를 졸업한 후 일제 시대에 신문기자로 활동했으며 미군정기(1945~1948)에는 미군의 통역관으로 종사했다.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1965년 태국의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연결하는 42번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동 건설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과 함께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했으며 1976년에는 남미의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포니를 수출하면서 '포니 정'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1987년부터 1995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낸 뒤 1999년에는 종합건설업체인 현대산업개발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다.>> 민간 주택건설 '1위'1976년 3월에 한국도시개발은 현대건설의 주택사업부를 분리해서 설립했다. 한국도시개발은 현대그룹 내에서 주택건설을 전담해 현대아파트를 공급해온 주택전문 건설사다. 설립 초기 서울 강남의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전국에 현대아파트를 주도적으로 건설해 왔으며, 1980년대 초반부터는 민간부문 주택건설실적 1위 기업으로 대한민국 아파트 문화 전파에 앞장서 왔다. 1977년 10월에는 창업주 정주영과 정인영 형제가 공동으로 한라건설을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처음부터 토목공사와 플랜트, 해외사업에 집중하며 국내에서 삼천포 화력발전소 등 다수의 발전소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도로, 간척 및 항만사업 등의 토목사업과 더불어 다양한 건축공사를 수행했다. 해외사업도 활발히 벌여 1977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잔 시멘트 플랜트 공사를 시작으로 중동과 동남아 지역에 진출해 도로, 건축, 플랜트 등 해외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1986년 11월에 한라건설(주)와 한국도시개발(주)를 합병해서 현대산업개발(주)로 재발족했다. 1990년 5월에는 국내 최초로 아파트 입주자 사전 점검제를 실시했고, 1994년에는 ISO9001 품질경영시스템 인증을 획득했다.1996년 10월에 기업을 공개해서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1999년에는 정세영의 장남 정몽규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같은 해 8월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됐다. 이후 현대산업개발그룹으로 성장하는 한편 대한민국 최대 실적을 보유한 주택에서부터 초고층빌딩, 대공간구조물, 도로 및 교량, 항만, 플랜트 등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활발히 사업을 영위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내 최고의 디벨로퍼로서 주택업계의 정상을 고수하며 건축, 토목, 플랜트 등의 분야에서도 활발히 사업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유화사업부를 발족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소재사업에도 진출하는 등 사업영역을 넓혀가며 성장해온 것이다. 2000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현대산업개발이 대규모집단으로 지정됐다.주택분야 최대실적 업계정상 고수사업영역 확대 '대규모집단' 지정2015년 시공실적 3조9천억 '10위'>> 통합브랜드 '아이파크'2000년 2월 (주)대우로부터 대우로얄즈 프로축구단을 인수해 3월 프로축구단 부산아이콘스를 창단했으며 4월에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현대산업개발이 대규모기업집단 소속회사로 지정됐다. 2001년 2월 '2001 디지털 경쟁력 향상대회 건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 10월에는 주거용과 상업용 건축물 브랜드를 '아이파크(I'PARK)'로 통합했으며 2006년에는 영창악기제조(주)를 인수했다.영창악기의 창업자 김재섭(1919~2002)은 일찍이 일본의 피아노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며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1956년 11월 귀국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설립한 악기전문 업체다. 영창이란 상호는 창업주의 두 형인 김재영과 김재창의 이름을 따 작명한 것이다. 2004년 2월 피아노 내수시장 점유율 55%로 1위를 차지했으며 2012년에는 한국능률협회의 고객만족도(KCSI) 피아노 부문 1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펜더 스콰이어(Squier) 전기 기타와 베이스 기타를 제조, OEM 공급했고, '페닉스(Fenix,여우)'라는 브랜드로 어쿠스틱 기타, 전기 기타 및 베이스 기타를 제조한다.현대산업개발은 2015년 3조9천203억원의 실적을 올려 국토교통부가 선정하는 시공능력평가 10위에 선정됐다. 주요 사업은 ①토목, 건축, 포장, 철강재설치, 전기냉난방공사업 ②항만건설업 및 준설업 ③조경공사업 ④전기 및 전기통신공사업 ⑤소방설비공사업 및 정비업 등이다. 현대산업개발그룹의 지배회사이며 계열회사에 현대EP(주), (주)아이콘트롤스, (주)아이서비스(주), 아이앤콘스(주), 아이투자신탁운용(주), 현대아이파크몰(주), 아이파크스포츠(주), (주)아이앤이, 호텔아이파크(주), 남양주아이웨이(주), 영창악기(주), 평택동방아이포트(주), 웰컴에듀서비스(주) 등의 국내 기업과 현대(삼하)공정소료유한공사, 천진영창악기유한공사, 천진영창강금주건유한공사, 영창노스아메리카 등의 해외 현지법인이 있다.(두산백과)/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정세영 회장은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해 전세계에 수출을 하면서 '포니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사진은 현대산업개발이 2008년 5월 개관한 포니정홀의 모습. /현대산업개발 제공

2018-12-2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7]현대-19 위성그룹-'KCC'(하·현대그룹과 다툼·화학발전)

현대상선 2천억 규모 선박 소재경쟁사 대비 10배 외상매출채권대손처리 등 분식회계 의혹 제기 KCC자원개발은 정 회장에게 '조광료' 명목으로 2003년 1억8천819만9천원의 광업권 사용료를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2004년 3억2천379만7천원, 2005년 8억8천246만2천원을 지급했다. 2006년부터는 기타비용으로 처리해 그해 6억340만원, 2007년 5억4천758만2천원, 2008년·2009년 각각 5억4천935만7천원, 2010년 6억1천323만1천원 등 지난 8년 동안 43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업권이 결국 정몽열 사장의 '돈 줄' 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몽열 사장이 헐값에 매입한 가격이기에 훗날의 시세차익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여진다.(http://blog.naver.com/wolyo2253)>> 시숙부-질부 재산싸움KCC자원개발은 2013년 매출 376억원, 영업이익 20억원, 당기순이익은 1억원으로 계열사 간의 일감 몰아주기 시비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KCC자원개발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업으로 꼽혀왔다. 2013년 KCC자원개발의 매출 중 KCC와의 거래 규모가 79%를 차지했으며 2014년에도 82%의 비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2015년 2월부터 본격 시행된 '총수일가 사익 편취 금지 규정'은 ▲연간 내부 거래 규모가 200억원보다 많거나 ▲전체 매출액에서 내부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12% 이상인 대기업집단 계열사를 규제 대상으로 분류한다. 단 대상은 상장사 기준으로 총수일가의 지분율이 30% 이상, 비상장사는 20% 이상인 계열사로 국한했다.지주회사격인 KCC가 2015년 9월 18일 KCC자원개발을 흡수합병했다. KCC는 내부거래 비율을 낮추기 위해 KCC자원개발의 지배주주 일가의 지분율을 3% 이하로 낮추거나 내부거래비중을 30% 이하로 내리는 대신 KCC자원개발을 흡수합병하는 편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KCC의 KCC자원개발 흡수합병은 정몽진 회장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면서도 KCC자원개발이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책이 된 셈이다.(글로벌이코노믹, 2015-12-11)KCC그룹은 '시숙부와 질부 간의 재산권 다툼'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정몽헌 사후 2개월여 만인 2003년 10월 정몽헌의 처인 현정은이 현대그룹의 총수 취임을 계기로 경영권분쟁이 불거졌는데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두고 정몽헌의 장모이자 대주주인 김문희와 정몽헌의 삼촌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회장 간의 다툼이었다. 발단은 정상영이 사모펀드(신한BNP파이라투신운용 등)를 이용, 10월부터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데서부터 비롯됐다. 시숙부인 정상영 KCC회장이 현대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빠르게 늘려가면서 현대그룹을 인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탓이다. 범 현대가의 지원을 받는 정상영 회장의 발 빠른 지분 확대에 현대그룹은 긴장했다. 2004년 3월 15일 KCC측은 현대상선에 대해 2천억원 규모 선박의 불분명한 소재와 강공자산 여부, 경쟁사 대비 10배에 달하는 외상매출채권, 거액의 대손처리 등 공개적으로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다.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KCC가 5% 룰을 위반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문제 삼아 법에 호소했다. 당시 KCC가 현정은 모녀 측보다 지분을 훨씬 많이 확보했으나 상장법인의 경우 5% 이상을 보유한 자는 1% 이상 지분에 변동이 발생했을 때는 5일 이내에 변동내용을 신고토록 했는데 KCC측에서 이를 위반했다며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소한 것이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돼 금감위가 2004년 2월 11일 KCC에 대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전량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종식됐다. 2006년에는 현대그룹이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우호지분 40%를 합하면서 일단 판정승을 거뒀다. KCC는 경영권분쟁 10년만인 2014년에 현대상선의 지분을 전원 매각했다.엘리베이터지분 매각 명령 받아2004년 2월11일 경영권분쟁 종식계열사 7곳 자산 10조4천억 '31위'>> 美 실리콘제조업체 인수KCC는 2018년 9월 13일 미국의 글로벌 실리콘 제조업체 모멘티브 퍼포먼스 메티리얼즈를 30억달러(약 3조5천억원)에 인수계약을 체결했다. 역대 한국기업의 해외 M&A 거래 중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80억달러), 두산인프라코어의 밥켓 인수(49억달러)에 이어 3번째로 큰 거래다.KCC는 모멘티브 인수가 완료되면 글로벌 실리콘시장에서 미국의 다우 듀폰, 독일의 바커 등과 함께 글로벌 메이저 플레이어 기업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함은 물론 실리콘 사업은 향후 KCC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입지를 굳힐 것으로 기대된다.KCC그룹의 주요 사업 분야는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이다. 유기화학 분야에선 도료, 폴리염화비닐(PVC), 실리콘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무기화학 분야에서는 건축자재, 유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울산, 언양, 여천, 여주, 전주, 문막, 아산, 세종, 대산, 김천 등지에 생산시설이 있다. KCC그룹은 (주)케이씨씨건설, (주)금강레저, 케이씨씨자원개발(주), 코리아오토글라스(주) 등 27개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7년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리스트에 의하면 KCC그룹은 계열사 수 7곳에 자산총액은 10조4천660억원으로 31위에 랭크돼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KCC그룹의 주요 사업분야는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으로 도료, 실리콘, 건축자재, 유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은 부산조달청 청사 및 비축창고 옥상 활용 744㎾p급 태양광 발전 설치 모습. /KCC제공

2018-12-1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6]현대-18 위성그룹-'KCC'(상·금강으로의 출발)

1967년 국내 지붕재시장 30% 과점사세확장 힘입어 공장 수원 이전화학·건설·레저부문 사업 진출도정상영, 2000년이후 경영권 넘겨2014년 산업브랜드 '창호재 1위' 석회석 광업권 헐값매각 의심받아 정주영은 1958년에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근대적인 슬레이트공장으로 개조한 것이다. 슬레이트란 시멘트(85%)와 석면(15%) 등을 반죽해서 압착 성형한 후 경화시켜 만든 천연 또는 인조형의 얇은 판으로 지붕재료이다. 정주영의 막내 동생 정상영은 약관인 22세부터 금강스레트의 설립은 물론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맏형 정주영이 막내 동생 몫으로 설립한 만큼 이 회사는 처음부터 정상영이 독자경영을 한 것이다. 정상영은 1959년 5월 18일에는 이사로, 1960년 9월27일에는 대표이사로 등재했다. 정주영이 막내 동생의 경영능력을 믿은 때문이다. 설립초기부터 연평균 80%씩 급신장해 1967년에는 국내 지붕재시장의 30%를 점유하는 과점업체로 성장했다. >>정상영 22세때 금강스레트 설립 관여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과 함께 농촌근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전통적 농가주택인 초기집의 지붕재료를 볏짚 대용으로 슬레이트를 사용한 것이다. 1969년에는 새로운 상품 개발과 사세확장에 힘입어 공장을 수원역 인근으로 옮기고 밤라이트와 나무라이트 등 불연성 건축재와 단열재를 생산하는 종합건자재 생산업체로 성장했다. 이후 암면, 석고보드, 판유리 등 제품다변화를 추구했다. 1970년 새마을운동 시작과 함께 슬레이트 수요가 급증하면서 금강스레트공업의 사업은 더욱 확장되어 1973년에는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정상영은 금강스레트를 착실히 키워 1974년 7월에는 경남 울산에서 도료, 합성수지를 생산하는 고려화학을 설립하고 1976년에는 금강스레트공업의 상호를 (주)금강으로 바꿨다. 1985년에는 고려화학의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으며 1989년 6월에는 (주)금강의 건설사업 부문을 분리해 금강종합건설(KCC건설의 전신)을 세웠다. 또한 같은 해 8월에 금강레저를, 1990년 (주)고려시리카를, 1996년 금강화학(주)을 각각 신설했다. 2000년에는 주력 기업인 금강과 고려화학을 합병해서 상호를 금강고려화학으로, 2005년에는 다시 (주)KCC로 바꿨다. 2001년에는 프로농구단 KCC이지스를 창단했는데 모체는 1977년에 창단된 현대전자 실업농구단이다. 현대전자 실업농구단은 1997년에 프로 농구가 출범하면서 대전을 연구지로 한 현대 다이넷 프로농구단으로 승격됐다. 1999년 대전 현대 걸리버스로 팀 이름이 변경됐으며, 2001년 5월에는 KCC가 대전 현대 걸리버스 농구단을 인수하면서 연고지를 대전에서 전주로, 팀 이름을 전주 KCC 이지스로 변경해서 재창단한 것이다. 2000년 이후 정상영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2세들에게 넘겼다. 장남 정몽진은 2000년 고려화학과 금강이 합병할 때 그룹 회장에 취임했으며 차남 정몽익은 2006년부터 KCC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았다. 3남 정몽열은 2002년 케이씨씨건설 사장에 선임돼 회사를 이끌고 있다. 2002년 3월 코리아오토글라스(주)에 안전유리사업부를 영업양도하고, 중국현지법인 금강화공북경유한공사를 세웠다. 2004년 11월 (주)이케이씨씨를 흡수합병했다. 2006년 9월 터키 현지법인, 9월 인도 현지법인에 이어 2007년 6월 베트남 현지법인을 세웠다. 7월에는 충남 대산에 대죽 2공장을 준공했다. 2008년 5월 폴리실리콘 파일럿공장을 신설했다. 2010년 11월 아르케솔라(주)를 흡수합병했다. 2011년 12월 '7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2012년 12월 선박도료, VI용 세라믹 3개 부문이 세계일류상품에 선정되었다. 2013년 5월 KAM을 자회사로 편입했다. 2014년 4월 '2014 한국 산업 브랜드 파워(K-BPI) 창호재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그룹 편법경영 시비도 그러나 그 와중에서 KCC그룹은 편법경영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KCC자원개발(구 고려시리카)은 강원도 영월군 북면의 석회석 광업권을 1995년 1월 한일석회제조로부터 매입한 뒤 이를 2000년 3월 14일에 정상영 회장의 3남인 정몽열에게 800만원에 매각했다.(2000년 KCC자원개발 감사보고서) 헐값매각 시비의 발단이다. 관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 사장이 취득한 광업권의 매입가격이 석연치 않은 부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20년 전이기는 하지만 800만원에 광업권을 매각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KCC자원개발은 모기업인 KCC가 지분 60%를 확보하고 있으며 나머지 40%는 정몽진 KCC 회장(38.6%), 정상영 KCC 명예회장(1.263%), 정몽익 KCC 사장(1.263%), 정몽열 KCC건설 사장(0.037%) 등의 순으로 오너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 또한 KCC자원개발의 최대주주인 KCC의 지분은 정몽진 회장(17.76%), 정상영 명예회장(10.0%), 정몽익 사장(8.81%), 정몽열 사장(5.29%) 등이 보유하고 있어 KCC자원개발은 사실상 정씨 일가의 지배 하에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주)금강은 1958년 8월 현대건설 제1호 자회사인 금강스레트공업(주)를 설립했다. /KCC제공

2018-12-1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5]현대-17 위성그룹-'성우'

1997년 네 아들에게 경영 물려줘시멘트·레저 두축 꾸준하게 성장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휘청' 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순영(鄭順永, 1922~2005)은 한양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현대자동차공업에 입사했으며, 1950년 현대건설로 자리를 옮겨 전무와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9년 12월 현대건설의 시멘트사업부를 갖고 나와 현대시멘트를 차렸는데 현대시멘트는 70~80년대 도로 및 아파트 등의 건설붐을 타고 급성장했다. 현대시멘트 영월공장은 1994년엔 연산 700만t 규모의 대형 공장으로 거듭났다. 정순영은 현대시멘트를 모기업으로 해서 다각화에 박차, 1975년 9월에는 용접봉, 카바이트, 자동차부품 등을 생산하는 현대종합금속을 설립했다. >> '순영' 별도 그룹 형성1985년 5월 화물운송업체인 현대종합상운을 설립했으며 1987년 5월에는 드럼, 디스크, 허브 등의 자동차 부품용 주물을 생산하는 서한정기를, 1989년 2월에는 미국 벤딕스사와 합작해서 시트벨트, 에어백 등을 생산하는 서한벤딕스를 각각 설립했다. 현대종합상운은 현대그룹의 물류를 담당했으며 서한정기 및 서한벤딕스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부품납품을 통해 대규모 레저타운을 건설하고 이를 경영하기 위해 성우종합레저를 설립함으로써 관광업에도 진출했다.성우그룹은 1990년 당시 매출액 2천38억원의 중견 재벌로 부상했다. 정순영은 현대그룹으로부터 분가한 후 10년 만에 별도의 기업집단을 형성했는데 성우그룹 또한 한라그룹처럼 모체인 현대그룹과의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재벌화한 것으로 추정된다.1995년부터 성우그룹이란 명칭을 사용했는데 정식 명칭은 현대시멘트·성우그룹이다. 정순영 회장은 1997년 그룹 명예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네 아들에게 바통을 넘겼다. 큰아들 몽선이 그룹을, 둘째 몽석은 현대종합금속을, 셋째 몽훈은 성우전자를, 넷째 몽용은 성우오토모티브를 각각 물려받았다. 정몽선이 경영을 총괄하던 성우그룹은 시멘트와 레저를 두 축으로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성장했다.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건설경기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성우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공장에 재고가 쌓이고, 수주도 급격히 감소해 일감이 떨어진 것이다. 자회사 성우종합건설이 시공하려던 서울 양재동 파이시티 프로젝트도 난관에 봉착하며 채무보증을 섰던 약 8천억원도 묶이면서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 모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시멘트와 함께 성우그룹의 또 다른 성장축이었던 661만㎡ 규모의 강원도 횡성 현대성우리조트도 결국 매각했다. 지금은 신안그룹 품으로 넘어가 '웰리힐리파크'로 이름이 바뀌었다.장남 '몽선' 2015년 회장직 내놔차부품 제조업 '현대성우홀딩스'2016년기준 연매출 519억원 기록>> 4남 '몽용' 그룹 맥 이어가부친으로부터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장남 정몽선은 총수가 된 지 20년이 채 못 된 2015년에 현대시멘트 이사에서 해임된 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KEB하나은행이 24.43%로 대주주인 현대시멘트는 현재 사모펀드(PEF)와 일부 대형 시멘트회사들이 인수를 위해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주의 4남인 정몽용 회장이 현재 자동차 부품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현대성우홀딩스로 그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현대성우홀딩스(주)의 전신은 1987년 자동차부품 제조·판매회사로 설립됐던 서한정기(주)다. 1995년 5월 상호를 성우정공(주)로 변경하고, 10월 성우 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정순영 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의 4남인 정몽용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2000년 6월 모그룹인 성우그룹에서 계열 분리를 신청하고, 상호를 성우오토모티브㈜로 변경했다. 이후 타이거넷(주), 성우메탈테크(주), 현대에너셀(주), 성우로지스틱스(주) 등을 연달아 흡수 합병했다. 2013년 5월 현대성우오토모티브코리아㈜로 상호를 바꿨다가 2015년 5월 현대성우홀딩스(주)로 상호를 다시 변경했다.자동차 부품 전문업체로, 주요 제품은 자동차용·산업용 부품, 알로이 휠, 배터리 등이다. 2000년 미국 앨라배마에 성우USA를 설립하고 2008년 중국 룽커우에 연간 200만대 규모의 휠 공장을 완공하면서 글로벌 생산체제를 구축했으며, 중국 베이징과 일본 도쿄에 해외사무소를 두고 있다.2016년 기준 연간 매출액은 519억원, 영업이익은 480억원, 당기순이익은 473억원이다. 최대주주는 10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정몽용 회장이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순영 회장이 세운 성우그룹은 자동차 부품 등을 생산했으며, 외환위기 후 지난 2015년 5월 현대성우홀딩스(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사진은 알로이 휠 공정 모습. /현대성우홀딩스 제공

2018-12-03 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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