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52]삼성-4 트로이카체제 구축

미군복 염색해 양복 짓던 시절이승만과 부친 '인연' 친분 나눠정부, 소모방공업 아낌없는 지원이병철은 모방직업에도 진출했다. 6·25 이후 정부와 해외 원조국들의 적극 지원에 힘입어 섬유산업이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이는 주로 면방직공업 위주여서 모방산업은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모직업의 경우 일제시대의 구식기계를 수리한 것이 고작인데 다 거의 수공업 수준이었다. 품질 또한 말이 모직물이지 군용모포나 다름없을 정도로 더욱 형편없었다. 당시 국내에는 미군 진주와 모직제품에 대한 인기가 상당해 밀수가 성행했다. 최고의 명품으로 치부되던 수입산 '마카오복지'는 양복 한 벌 가격이 웬만한 월급쟁이의 봉급 3개월 치에 달할 정도여서 대용품으로 미군복을 염색, 재가공한 양복이 인기였다.이병철은 강성태 상공부장관으로부터 "국내적으로 모방은 불모지로 모직공장은 국가적으로 시급하다. 정부가 적극 후원하겠다"('호암자전' 73면)는 답변을 얻어냈다. 당시 자유당정부는 제당, 제분, 방직, 시멘트, 비료, 판유리 등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정하고 참여업체들에 한해 정부 보유 달러화 및 원자재 우선 배정, 해외의 설비공급선 및 차관 알선, 장기저리의 거액 융자 및 세금 감면 등의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기업가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여서 경쟁적으로 정부에 접근했다.이병철과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도 주목된다. 이병철의 부친 이찬우(李纘雨, 1874~1957)는 청년시절 서울에서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등을 출입하며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과 이찬우는 동갑이었다. 이병철은 1946년에 이승만을 대구에서 처음 만났다. 민족지도자로 부상한 이승만이 '10월 폭동' 진압 직후에 대구를 방문했을 때 대구지방의 유력자 30여명이 환영위원회를 꾸려 그를 영접했는데 이병철은 조선양조장 대표로 환영단에 끼었다. 이승만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유력한 정치지도자이기도 했으니 기업가들에게 특히 매력적인 인물인 것이다.환영위원회는 왜관까지 가서 영접했다. 이승만은 위원 한사람씩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는데 그 자리에서 이병철은 자신을 이찬우의 아들이라 소개해서 이승만의 주목을 받았다. 얼마 후 이병철은 대구신탁은행 중역이던 오위영과 함께 서울의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이병철은 사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미의 '사업보국'관을 굳혔다고 언급했다.1954년 9월 15일에 자본금 1억환의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대구 침산동 105 23만1천㎡(약 7만평)를 공장 부지로 확보했다. 산업은행에서 대충자금(무상 원조물자를 정부가 국내에서 매각해 확보한 자금) 5천830만환을 융자받아 일관기계설비(총 1만추)를 정부권고로 서독 스핀바우(Spinbau)사에 발주했다. 당시 정부는 낙후된 국내 모직공업을 진작시킬 목적으로 최신설비의 정부직영 모직공장을 건설하기로 확정하고 스핀바우사에 모방 5천주를 발주해 둔 상태였는데 이병철이 제일모직을 설립하자 정부가 스핀바우사를 추천했던 것이다.이병철은 1955년 1월 4일부터 소모(梳毛), 모방, 직포, 염색, 가공 등의 일관 공장 건설을 서둘러 1년여 만인 1956년 3월 15일에 완공했다. 1956년 5월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는데 원료인 울탑(wool top)은 영국과 호주에서 수입하고, 자금은 주로 정부의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원조자금을 사용했다. 생산 첫해에는 소모사(털실) 46만7천파운드, 방모사 3만6천파운드, 복지 8만8천 야드 등을 생산했다. 그러나 품질이 열악해 소비자들이 외면한 탓에 생산을 거듭할수록 적자가 누적됐다.정부는 소모방공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는 무리수를 둬가며 제일모직에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1958년에는 소모사를 제외한 모직물 전반에 대한 수입을 금지했다. 이후 제일모직의 경영상태가 점차 개선돼 1960년에는 자본금을 30억원으로 증가하는 등 승승장구했다.제일모직 또한 제일제당과 마찬가지로 불모지인 이 땅에 '공업입국'의 가능성을 확인해주었다. 제일모직 설립 2년 만에 이병철은 거부(巨富)의 반열에 올랐다.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였다. 그 결과 삼성물산은 제일모직, 제일제당과 함께 트로이카체제를 구축했다. 정부의 극단적인 공업보호정책의 산물이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1980년대의 제일모직 대구공장. /'삼성50년사' 수록

2018-03-2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51]삼성-3 제일제당 설립

정부의 수입 대체 공업화 기회부산 설탕공장 설립후 급성장제분겸영 '삼백산업' 호황 누려이병철은 새로운 사업구상에 몰두했는데 동기는 광복 이후 극심한 물자부족과 막대한 원조물자 때문이었다. 정부는 해외에서 제공된 원조불과 원조물자를 민생안정과 전재복구에 우선 배정함으로써 수입 대체 공업화의 기폭제가 됐는데 이를 계기로 기업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그 와중에 정경유착 관행도 자리 잡았다. 정부가 경제적 자원의 선택적 배분과 관련해 자유당 정치인 및 관료 등과 기업가들 간에 블랙커넥션이 형성된 것이다.이병철은 원당이 원조물자로 국내에 대량 공급되고 있던 점을 착안해 설탕 제조에 착수했다. 설탕이란 액체인 원당을 적당히 가공하면 생산이 가능해 기술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설탕은 대중적인 소비에 힘입어 수요는 날로 증가했으나 국내생산은 전무했다.공장설립에 필요한 외화 18만 달러를 정부협조로 특별대부 받고 2천만환은 상공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다. 부산 전포동의 고무공장 부지 3천305㎡(1천평)를 확보하고 제당설비 일체는 일본에 발주, 1953년 6월 자본금 2천만환의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연건평 1천41㎡(315평)의 제당 공장은 하루 25t의 설탕을 생산하도록 설계됐는데 그해 11월부터 설탕을 생산했다. 국내 최초의 설탕 공장은 이렇게 탄생했는데 제일제당의 설립은 수입 대체 공업화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해준 쾌거이기도 했다.이 무렵 수입산 설탕 가격이 근당 300환인 반면 제일제당 제품은 100환이었다. 비록 품질 면에선 외제에 못 미친다 해도 가격이 매우 저렴한데다 수요가 격증하는 추세여서 제일제당은 생산개시 6개월 만에 생산시설을 확대했다. 제일제당은 국내 설탕 소비량의 33.3%를 공급할 정도로 급성장,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시현했으며 1955년에는 자본금을 20억환으로 증가하는 등 삼성의 주력 기업으로 부상했다.제일제당이 단기간에 성공하자 이에 자극받은 다수 기업이 제당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1954년 8월에는 동양 제당과 한국 제당이, 1955년에는 삼양사가 제당 공장을 각각 지었으며 1956년에는 금성 제당, 해태제과, 대동 제당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그 결과 국내 설탕 시장은 1955년부터 공급과잉상태에 직면했다. 제당 업체 간에 덤핑 등 치열한 이전투구 끝인 1958년의 국내시장은 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대동제당의 후신) 등의 과점체제를 형성했다. 이후부터 제당 업체 간에 담합 혹은 정경유착 의혹들이 불거졌다. 정부는 수입 대체 공업화를 명분으로 제일제당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93년까지 40년 동안 일관되게 설탕을 수입제한품목으로 지정해 설탕 수입을 금지했는데 이를 근거로 제당 업체들은 초과이윤을 누렸다.1950년대 중반에는 제당, 제분, 면방직 등의 소위 '삼백'산업이 국내 경제를 선도하는 소위 '삼백경기'가 도래했다. 제일제당은 식품 중심의 다변화에 착수해 1956년 4월에는 동성물산(주)의 소유인 포항 구룡포의 통조림공장(펭귄표)을 인수했다. 또한 1957년 10월에는 제분공장을 건설하고 제분업도 겸영했는데 이 사업 역시 호황을 구가했다. 삼성은 이중 제당과 제분에 뛰어들어 그룹의 기반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제일제당 부산공장. /'삼성50년사' 수록

2018-03-1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50]삼성-2 서울로 진출

허가제 양조시장 뛰어들어 호황1949년 첫 지급인도거래 '대박'정부융통 힘입어 수입품 다양화이병철은 1939년 삼성상회의 흑자경영을 통해 발생한 이익금으로 조선양조장을 인수했다. 대구에는 총 8곳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4곳은 일본인 소유이고 나머지 4곳은 한국인 것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청주를 일본 양조업자들만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계 양조장에는 막걸리와 약주 생산만 허용했는데 일본인 소유의 조선양조가 경영진 내분으로 매물로 나온 것이다. 조선양조는 소주, 탁주, 청주(월계관) 등 연간 생산능력 7천석으로 대구 최대의 양조장이었다.그는 조선양조를 10만원에 인수했는데 당시 양조업이 허가제임을 감안할 때 헐값에 사들인 것이다. 이병철은 인수 1년 만에 생산능력 1만석으로 사세를 키웠다. 중일전쟁이 점차 확대돼 전반적으로 경기가 침체했음에도 양조업은 호황을 누렸다. 특별한 판매전략 없이도 주어진 할당량만 생산하면 저절로 팔려 나갔다. 삼성상회 설립 후 최초의 사업 다각화였다.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흑자에 힘입은 이병철은 사업지를 서울로 옮겨 1948년 11월 종로2가 부근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조홍제(1906~1984, 효성그룹 창업자)를 부사장으로 영입해 무역업을 개시했다. 경남 함안 출신의 조 부사장은 이병철보다 4세 연상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서울의 중동학교 초등과와 협성실업학교를 수료하고, 19세 때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인 1926년 6·10만세 사건에 연루돼 퇴학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호세이대 경제학부에 진학해 1935년에 졸업했다. 귀국 후 1942년에 군북산업조합을 인수, 군북산업(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정미소를 운영하다 1947년에 상경, 1948년 삼성물산공사 설립과 함께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삼성 측에선 조 부사장이 삼성물산공사의 전무이사로 근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삼성물산은 처음부터 자주무역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 국내 무역은 중국 상인들이 홍콩과 마카오에서 무역품을 배로 실어와 인천과 부산 등지에서 국내 상인들과 물물교환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소극적 무역방식은 가격조건 불리 및 수입물자의 적기조달 곤란, 수입상품의 선택제한 등 문제가 많았다. 차제에 국내 무역업체들은 해외로 가서 직접 상품을 구입하는 자주무역방식으로 전환하던 중이었다. 1949년 11월 조 부사장이 마른오징어 3만근을 배에 싣고 부산을 출발해 8일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조 부사장은 국내 굴지의 무역상들과 거래하던 홍콩의 찬넬양행을 찾았으나 현지 오징어시세가 너무 낮아 교포 무역상인 이창복에게 판매를 위탁하는 한편 찬넬양행에 위탁한 오징어를 담보로 면사 50곤(梱)을 외상매입해 귀국했다. 국내 무역업사상 최초로 성립된 D/P(Document against Payment base, 지급인도조건) 거래였다.당시 국내에는 무역전문가 부족으로 다수 무역업체가 어려움을 겪었는데 조 부사장은 삼성 직원들 간에 '무역백과사전'으로 불릴 정도로 보배였다. 삼성물산은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 오징어와 한천 등 수산물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했는데 수입품은 국내에서 수입가액의 10배 정도로 거래됐다. 1945년 8.15 해방에 따른 생산 차질로 국민들은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홍콩무역으로 자신을 얻은 삼성물산은 이후 철판 등의 시설재와 재봉틀, 실, 바늘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물품을 수입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일체의 사업을 접어야 했고 이병철은 빈손으로 서울을 떠나야했다.이병철은 1950년 12월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란 간판을 걸고 사업을 재개했다. 전쟁이란 특수한 환경이 초래한 물자부족문제를 손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무역업이었다. 수입물품 대금결제용 달러화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정부가 무역업자들에 할당해 주는 달러화 액수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역업자들은 대안으로 시중의 암달러를 고가로 매입하는 한편 외화벌이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수출했다. 또한 이 무렵엔 밀수가 기승을 부렸는데 한국에서 일본에 밀수출한 고철 더미 속에서 대포, 탱크, 소형선박 등 멀쩡한 군수품들까지 확인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삼성은 국내에서 고철 등을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고 대신 홍콩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삼성이 수입한 설탕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던 이양구(1916~1989, 동양그룹 창업자)에게 넘겼다. 함경도 함흥 출신의 이양구는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월남해서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에서 밀가루와 설탕 등 식품유통에 뛰어들어 굴지의 대상인으로 성장했는데 당시 이양구는 삼성에서 수입한 설탕의 국내 시판을 독점하다시피 했다.삼성은 무역업을 통해 획득한 이익금과 정부자금을 융통해서 수입물량 확대 내지는 수입품목 다변화에 전념했다. 1950년 6월 24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선 수입품의 선적서류를 담보로 수입자금을 연리 5.4~5.1%로 융통해주었다.민생안정을 목적으로 생산재 수입업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마련됐는데 특히 이 자금은 이자율이 매우 낮아 자금을 융통받는 것 자체가 특혜였다. 삼성의 외화대부 한도액도 종래 3만 달러에서 점차 10만 달러로 확대됐다. 삼성은 소비재 수입에 치중해서 국내 무역업계의 기린아로 급성장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3-1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9]삼성-1 사업과의 인연

1천석 지기 집안 막내 이병철중일전쟁 당시 만주서 무역업'별표 국수' 인기 24시간 생산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은 일본의 한국강점 6개월 전인 1910년 2월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1천석 지기 이찬우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이병철의 16대 조부가 이곳에 터전을 잡은 후 대대로 뿌리를 내린 곳이다. 유학자인 조부 이홍석은 문산정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당대에 재산을 1천여석으로 불리는 등 이재에도 밝았다. 이병철은 5세 때부터 문산정에서 한학을 연마한 후 1922년부터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와 서울 수송보통학교를 거쳐 중동중학 속성과를 수료했다. 1921년 개교한 지수보통학교는 이병철 및 구인회(LG 창업자), 허준구(GS그룹) 등을 배출한 곳으로 교정에는 이병철과 구인회가 심었다는 수령 90년의 노송 2그루가 버티고 있다.이병철은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진학했으나 각기병을 앓아 2학년 가을에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와 중동학교로 이어지는 네 번째 중퇴로 나에게는 졸업증서라는 것이 한 장도 없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릴 때부터 출중하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산수과목은 늘 학급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자신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회고했다.이병철은 1936년 경남 마산에서 동업자 정현용, 박정원 등과 각 1만원을 출자해 자본금 3만원의 협동정미소를 설립했다. 이병철은 부친으로부터 쌀 300석(5만원)을 받아 창업자금으로 활용했다. 당시는 제2차 산미증식계획기로 일본에 대한 국내산 쌀의 수출 절정기였다. 김해평야를 배후지로 둔 마산은 호남평야 최대의 수출항인 군산, 목포와 함께 미곡의 일본수출 전진기지로 도정물량이 풍부했다. 또한 일본인 소유의 마산일출자동차(주)를 인수, 트럭 20대 규모의 화물운송도 겸했는데 경영은 성공적이었다.이병철은 정미소 경영으로 벌어들인 이익금과 저리의 식산은행 대출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시작, 김해지역의 논과 밭 등을 싼값으로 매입한 뒤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거금을 모았다. 특히 저리의 은행자금을 동원해 부동산거래를 통해 경남 일대의 경작지 200만평을 확보한 대지주가 됐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쌀값 폭락에다 식산은행 대출중단에 따른 자금난으로 부동산 투기를 청산했다. 이병철의 사업가 경력에서 최초의 사업실패였다.1938년에는 대구에서 상권이 가장 큰 서문시장 부근 견정(堅町, 인교동) 61-1의 연건평 250평의 4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을 2만원에 구입해 살림집 겸 사무실을 마련하고 자본금 3만원의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자본금 3만원은 요즘 가치로 2억여원에 해당한다. 삼성의 '삼(三)'은 큰 것·많은 것·강한 것을, '성(星)'은 밝고 높으며 영원히 빛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의문이 있다. 1941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738면에 '삼성합자회사(三星合資會社)'가 등장하는데 이 자료는 동아경제시보사가 해마다 조선의 경제실태를 파악하고자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각종 산업조합, 수리조합, 공업조합 등의 유관기관들이 제공한 자료들을 정리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위의 기록에 따르면 삼성합자회사는 이길생이 1938년 5월9일 대구시 견정 61번지에서 식료품관계 물품 도소매를 목적으로 설립했는데 자본금이 1941년 당시 1만원이다. 상호는 물론 회사의 주소지와 설립연도가 같음은 물론 사업내용까지 동일해 삼성합자회사는 이병철이 1938년 설립한 자본금 3만원의 삼성상회로 짐작된다. 이길생은 이병철의 또 다른 이름이거나 혹은 창씨 개명의 일환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이병철은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만주지역에 대한 무역업을 개시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동문수학했던 경남 합천 출신의 이순근을 지배인으로 영입해 내부관리를 맡기고 자신은 은행융자와 상담업무를 담당했다.직원수가 40여명에 달할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창업초기부터 사과 등 청과물취급과 함께 국수도 제조 판매했는데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는 인기가 높아 24시간 쉬지 않고 제면기를 가동했다. 주 고객은 안동, 봉화 등지에서 온 도매상들로 삼성상회의 하루 국수생산량은 100상자 이상이었다. 한 상자는 국수 60다발씩 포장됐는데 한 다발의 가격은 10전이었고 한 달 매출액은 2천원 내외로 현재 가치로 1천100만여원이었다.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친은 삼성상회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전 전 대통령의 가족은 삼성상회 앞 개천 너머 빈민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삼성상회에서 품팔이를 했던 것이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이런 인연으로 비슷한 또래의 전두환과 어울렸다고 술회했다. 이맹희는 수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의 경북중학교에 진학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 김복동, 정호용, 김윤환, 유수호 전 의원과 감상조 전 경북도지사 등이 이맹희의 경북중학교 동기동창들이었다. ('묻어둔 이야기')/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이병철 생가삼성 최초 국수 /'삼성50년사' 수록

2018-03-0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8]한국생사-6 역사속으로 사라지다

다각화 없이 실크 산업만 고수1977년 1억5천만달러 수출 훈장김지태 타계 이후 모기업 부도5·16과 함께 부정축재환수금 완납, 언론기관 국가헌납 등의 시련에도 김지태는 실크재벌 외길을 고수했다. 합섬섬유의 보급과 실크수요가 둔화하는 등 견직산업이 점차 사양화했으나 김지태는 나일론은 주로 서민용일 뿐 중류층 이상에서는 천연섬유인 실크가 여전히 유망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한국의 비단은 품질이 뛰어나 해외수요가 상당하다는데 주목, 수출에 주력한 결과 1966년에는 실크수출 500만달러를 기록했다. 김지태는 한국생사와 조선견직, 삼화고무를 3대 기간사업으로 하는 실크재벌로 회자됐는데 3개 업체의 종업원은 8천여명에 연 매출액은 당시 20억원대(약 660억원)를 기록했다.당시 국내 신흥재벌들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으로부터의 해외차관 붐에 편승해 다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김지태의 주변에서도 사업 다각화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지태는 "일인일업(一人一業)이 나의 모토다. 나도 젊었을 때는 여러 분야에 손을 뻗쳐봤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일인일업이더라."('김지태사장창업35년사', 155면)한국생사그룹은 1960~1970년대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편승해 고속질주했다. 1970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20여명의 수출 유공 기업인들에게 산업훈장을 수여했는데, 김지태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대망의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한 1977년말 수출의 날 행사에서 김지태는 1억5천만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한편 이 무렵부터 2세 경영이 개시됐다. 김지태는 슬하에 총 6남3녀를 뒀는데 1972년부터 아들들을 각 계열사의 대표로 임명했다. 연세대 상대를 졸업한 장남 영구에겐 조선견직을,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차남 영우에겐 한국생사를 그리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삼남 영주에겐 (주)삼화를 맡기면서 김지태는 경영일선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그런데 이 무렵부터 한국생사그룹의 경영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주)삼화는 신발 수출이 활기를 띤 덕분에 1977년에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됐으나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해 1979년에 은행관리를 받았다. 한국생사와 조선견직도 사정이 비슷했다. 김지태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 세 회사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이들 3사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채 갚지 못한 상태에서 1982년 4월에 김지태가 타계했다.세무서와 유족들간 상속세액을 놓고 1984년부터 3년여 동안 지루한 소송전을 전개한 결과 1986년 12월 대법원은 최종 유족들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1992년에 모기업인 한국생사가 부도를 맞았다. 조선견직도 점차 죽어갔다. 1966년 말부터 나일론과 테트론 등 화학 섬유가 보급되고 인조 양단이 등장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견직은 1985년에 부산 연제구 거제동의 공장을 매각하는 등 하청 생산 위주로 운영됐고, 1995년에는 중국 이전을 시도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한국생사그룹이 언론에 다시 주목받은 것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였다. 노 대통령은 김지태의 부산상고 후배였다. 참여정부는 과거 정권의 비인륜적 사건을 조사하겠다며 2005년 5월 국회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제정하고, 그해 연말 4년 한시(限時)기구로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가정보원은 따로 '과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유족들의 청구에 따라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지태 창업주의 재산 헌납 과정에 대해 조사했으나 박정희 정부가 재산을 강탈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오히려 김지태가 재산 헌납으로 처벌을 면하려 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2007년 5월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부일장학회가 박정희 정권에 강제 헌납된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재산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라고 정부에 권고했다.한국생사그룹은 귀속기업 불하를 통해 재벌화를 도모한 전형이었다. 또한 정치와 사업의 병행을 통해 재벌로 성장한 특이한 사례다. 그러나 1950년대에 사업의 기틀은 완비했던 대부분의 재벌들이 1960년대 이후 시류에 편승해 외형을 불린 결과 계속 기업화 내지 확대재생산에 성공한 반면 한국생사는 그렇지 못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와의 소원한 관계 탓에 정부주도의 수입대체 공업화와 수출드라이브 등에 편승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한국생사는 해외 수요가 높을 것으로 예상한 실크수출에 주력했지만 2세 경영을 시작하고 김지태 사장이 타계하면서 경영난을 겪었고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사진은 당시 생산한 각종제품들. /'김지태사장창업35년사' 수록

2018-02-2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7]한국생사-5 언론사업에서 손을 떼다

부산 부정축재자 1호 민심 격발5·16 군사정권, 환수·구속 단죄신문·방송 헌납 직후 공소 취하한국생사그룹은 1960년대 이후 사세가 크게 위축되는데 계기는 1960년 4·19혁명이었다. 당시 김지태는 부산지역의 부정축재자 명단 1호로 거론됐다. 부산 학생들은 김지태의 집으로 몰려가 '악질친일 재벌을 처단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지태가 1950년대 자유당 시절에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13여만 평의 농지를 편법으로 구입했는데, 이것이 부산 지역 민심을 격발시킨 것이다. 1961년 5·16군사정변과 함께 그는 단죄대상이 됐다. 군사정부가 김지태에게 탈세와 부정축재혐의로 9억2천27만환(현재 약 75억원)의 환수금을 통보했다. 이후 여러 차례 재심을 거쳐 최종 통고액은 5천457만원(현재 약 45억여원)으로 축소됐다. 김지태는 현금 4천930만원과 은행주 526만3천원으로 부정축재 환수금을 완납했다.그럼에도 김지태의 시련은 계속됐다. 그가 부정축재처리법 위반 및 국내 재산 해외도피 등의 혐의로 1962년 3월27일에 구속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의 고발에 따르면 김지태가 첫째 한국생사, 조선견직 등의 수출입업무를 이용해 일본 트레이딩 오사카지점과 공모해서 미화 1만2천달러 상당의 리베이트를, 둘째 1960년 해외여행 중에는 미화 1만여 달러를 각각 빼돌렸다는 것이다. 셋째 부산시내의 농토 13만1천200평을 공문서를 위조해 부당하게 매수했으며, 넷째 1957년 조선고무의 토지와 건물을 국방부에 매각했을 때 매각대금을 시가 대비 무려 10배에 넘김으로써 국고손실을 입혔다는 것 등이다. 또 며칠 후에는 김지태의 부인도 1961년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6천500달러 상당의 백색 다이아몬드 7캐럿 반지 1개와 100달러짜리 독일제 카메라 1대를 세관에 신고 않고 반입해 왔다는 죄목으로 구속되는 등 김지태 부부가 함께 구속됐다. 당시 정부는 달러화 낭비를 제한하고자 장·차관급 인사들이 해외에서 하루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15달러로 제한했었다.약 2개월 후 경남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검찰은 김지태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김지태의 측근들은 한국생사그룹 계열의 언론사를 군사정부 측에 넘기자는 제안을 했다. 결백을 주장하며 끝까지 버틸 경우 나머지 사업들의 안위마저 걱정됐기 때문이다.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을 5·16재단에 넘기기로 최종결정한 직후 경남고등군재는 김지태에 대한 공소를 취하했다. 1962년 5월25일에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은 5·16재단으로 넘어가 이를 기본재산으로 한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가 1962년 7월14일에 새로 발족됐다. 5·16재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을 기념하기 위해 직접 설립한 재단법인이었다.또한 김지태는 사재를 출연해 운영하던 부일(釜日)장학회의 기본재산인 부산 시내 토지 10만평(당시 시가 8억원, 현재 600여억원)을 군대에 헌납했다. 1958년 11월에 설립된 부일장학회는 1959년부터 1962년 5·16재단에 넘어갈 때까지 부산 시내 초중고 및 대학생 1만2천364명에 총 1억7천703만여원(현재 약 140여억원)을 지급했다. 한편 김지태는 부일장학회와는 별도로 1961년부터 모교인 부산상고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김지태장학금과 백양장학금을 지급했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상고 재학시절에 백양장학생이었다.MBC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70%의 지분이 KBS로 넘어가게 된다. 1988년 사회민주화 과정에서 KBS에 인계된 MBC 주식지분 70%로 방송문화진흥회를 새로 발족하고 나머지 MBC 주식 30%는 정수장학회가 보유하도록 했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를 조합해 만든 것으로 당초 김지태가 국가(군대)에 헌납한 부일장학회를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사유화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김지태는 5·16이후 단죄된 재벌기업가 중에서 유일하게 이중 처벌된 불운한 기업가였다. 김지태가 여타 부정축재자들에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은 것은 1960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산 군수기지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재직할 때 김지태가 밉보였기 때문이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당시 김지태 단죄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두지휘했던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 대령이 1964년에 김지태에 보낸 편지에 "당시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들에 휩쓸린 나머지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다"는 참회의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김지태사장창업35년사', 149면)/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

2018-02-1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6]한국생사-4 한국생사그룹 형성

정치인 8년 청산 부산방송 인수서울 인사동에 MBC 사옥 차려인수·합병 반복 실크재벌 성장김지태 의원은 조방낙면사건 이후 철저한 야당정치인으로 거듭나면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정부 여당의 탄압수위가 높아지자 사업운영에도 지장을 받았다. 김지태는 한국과 같은 정치풍토 하에서 기업가가 정치활동을 병행하는 데 한계점이 있음을 절감했다. 그는 1954년 3월10일 집권당인 자유당에 입당해 5·20총선에서 부산 갑구에서 제3대 국회의원으로 재선됐다. 그러나 총선 직후인 1954년 11월29일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제명처분을 받았다. 이승만을 종신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획책한 소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작업에 반대한 것이 이유였다. 이후 김지태는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유당 공천에서 배제되자 부산진구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하면서 정치와의 인연을 끊었다.김지태가 1958년에 8년여의 정치인 생활을 청산하고 사업에 전념하면서 한국생사그룹은 국내 최대의 실크재벌로 성장했으며 정계 은퇴 무렵 그가 새롭게 착수한 사업은 부산문화방송의 인수였다. 해방 이후 부산의 실업계 대표로 또한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언론의 위력을 실감했던 것이다. 그는 침체상태에 있는 부산일보의 중흥에 열정을 쏟는 한편 1957년 김상용으로부터 부산문화방송 주식회사를 인수했다. 김지태는 부산문화방송을 전국적인 네트워크체제로 전환한다는 목표로 1958년 4월 서울에 한국문화방송(MBC)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종로구 인사동 네거리 동일가구빌딩에 위치했다. 이로써 김지태는 신문과 방송을 거느려 종합매스컴 그룹의 전환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김지태는 한국수출산업의 사세확장에도 주력했다. 1954년 11월 춘천의 뽕나무밭(桑田)을 경영하는 동방생사를 인수해 계열기업으로 편입했다. 동방제사는 1937년 일본인 암촌장시(岩村長市)가 춘천시 우두동에 설립한 암촌제사소(岩村製絲所)가 모체이다. 암촌제사소는 이외에도 우두동 일대의 광활한 뽕나무밭을 겸영했으나 이후 군수용 제사공장으로 명맥을 유지한 뒤 해방 후 동방제사소로 개칭됐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수출산업이 불하했던 것이다. 이로써 한국수출산업은 산하에 경남합동제사, 원주제사, 대한생사, 동방제사를 갖추게 됐고 경남북 및 강원도 일대의 생사공급권을 장악한 국내 최대의 제사메이커로 부상했다. 1955년에 한국수출산업은 한국생사(韓國生絲)로 개칭됐다.1958년 5월에는 적산인 삼화(三和)고무를 인수했는데 이 회사는 1934년 7월18일 부산 범일정(凡一町) 1290에서 고무신, 범포화(帆布靴) 등 신발과 타이어, 고무벨트, 기타 고무제품 제조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동사는 부산에 있는 13개의 영세 고무공장을 흡수 통합해서 설립한 만큼 자본금 76만5천원(약 80억원)을 전액 출자해 설립했다. 경영진으로는 사장 미창청삼랑(米倉淸三郞), 전무 조야좌시(島野佐市), 이사 신정항부(新井恒夫), 북촌충좌위문(北村忠左衛門), 감사 미창청태랑(米倉淸太郞) 등인데 미창청삼랑과 미창청태랑은 1926년에 부산 대창정(大倉町) 10에서 설립된 자본금 50만원의 환대호모(丸大護謨)공업의 설립자들이기도 하다.동사는 국내에 고무원료를 독점공급하던 삼정(三井)물산의 자본을 지원받아 타이어부터 고무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생산을 획책했는데 1935년 10월에는 5만5천원을 증자했다가 1937년 9월에 다시 9만원을 감자했다.(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1941, 145면) 이때까지 수입에 의존했던 자동차 타이어의 국내생산이란 신지평이 열린 것이다. 삼화고무는 1937년까지 민수용 고무제품을 생산했으나 이후부터 해방 때까지 군수공장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1950년 7월에 육군용 군포화제조(軍布靴製造)공장으로 지정됐다. 1951년 7월에 김예준(金禮俊)에 불하됐다가 1958년 5월에 한국생사그룹에 인수돼 포화(布靴), 장화(長靴), 고무신, 타이어, 고무벨트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면서 착실히 성장했다.(김지태사장창업35년사, 2235면) 한국생사그룹은 모기업인 조선견직을 비롯해 한국생사, 동방제사, 원주제사, 대한제사, 경남합동제사, 삼화고무,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 다양한 기업군을 거느려 1950년대 후반에는 국내 최대의 실크재벌로 거듭났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

2018-02-1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5]한국생사-3 정치인으로 변신

부산일보 인수 언론사업 진출민우회 리더 활동 정권 미운털'조방사건' 연루 불구속 입건도김지태는 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언론사업에도 진출했다. 진출의 계기는 1946년 4월 부산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된 것이었다. 향토발전을 위하여 부산직할시 승격운동을 벌이면서 향토민 계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언론계는 해방과 함께 일제 앞잡이 매일신보가 폐간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복간됐다. 서울신문, 한성일보, 독립신문, 중외일보, 국제신문, 태양신문, 자유신문, 극우계의 대동신문 등 일간신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좌익계인 인민보와 해방일보가 활개 쳤으나 대부분 경영난에 시달렸다. 김지태는 경쟁이 심한 중앙지 대신 지방신문을 운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부산에는 좌익계인 인민해방보와 대중신문, 극우계인 부산정보와 신한일보 외에 자유민보, 부산매일신문 등이 있었으며 일제의 기관지역할을 해오던 부산일보가 종업원 자주관리로 운영 중이었다. 귀속재산인 부산일보는 박수형이 관리인이 되어 운영했는데 시설은 양호했음에도 재정난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김지태는 1948년 3월에 부산일보를 인수하면서 역시 경영난의 대중신문까지 매입해서 부산일보에 통합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종업원들의 임금 인상과 노후시설 교체는 물론 서울에서 원로언론인 백대진(白大鎭)을 편집국장으로 스카웃하는 등 신문의 품질 제고에 진력해 부산일보의 기초를 닦았다. 김지태는 기업가 활동으로 분주했음에도 하루 한번 씩 부산일보에 들러 제반업무를 챙겼다.김지태는 정치인으로도 변신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갑구에 입후보한 것이다. 서면이 중심인 부산 갑구는 김지태의 잔뼈가 굵은 고장으로 사업의 근거지이기도 했는데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에서 그 자신도 미국의 정치가들처럼 사업과 정치의 양립을 결심한 것이다.제헌의회 의장을 역임한 신익희 등 유력 정치인들로부터의 권유도 한몫 거들었다. 부산 갑구에는 총 11명의 후보들이 난립했는데 39세의 장년 김지태는 근소한 표차로 당선됐다.그러나 2대 국회의 개원식을 치른지 불과 6일만에 6·25전쟁이 발발해 김지태는 피난과 천도, 정치파동 등으로 고난의 시기를 보냈다. 김지태는 이충환, 윤길중, 권중돈 등 소장파 의원 36명을 규합해서 원내교섭단체인 민우회를 조직하고 리더가 되었다.그는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한 몇몇 국회 간부들의 생활비를 거의 도맡아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민우회가 정부의 독주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면서 김지태 의원은 이승만정권의 탄압대상 제1호로 지목됐다. 자유당정권에 미운 털이 박혔던 김지태는 당시 국내 최대의 조선방직과 관련한 소위 '조방낙면사건'에 연루돼 조방에 대한 우선 불하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1951년 3월 19일에 불하일자를 앞두고 제반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3월 16일에 당시 조방의 임직원 10명이 이적(利敵)죄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 구속된 것이다.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창용 특무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했고, 죄목은 부당이득 취득을 목적으로 광목에 재생면(再生綿) 5%를 혼합해서 군납 복지(服地)의 품질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그러나 당시 재생면을 사용한 광목은 군납용이 아닌 민수용이었을 뿐 아니라 광목에 재생면 5%를 사용하는 것은 방직기술상의 상식이었다. 김지태는 현직 국회의원이어서 불체포특권 때문에 불구속 입건되었으나 나머지 구속된 조방의 간부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강일매(姜一邁)가 1951년 9월 5일에 조방의 관리인에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강일매는 1955년 10월 29일에 조방을 35억환(약 550억원)에 불하받았다. 연고권자에 우선 불하한다는 귀속재산처리법도 반공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김지태가 언론사업에 진출해 인수한 부산일보 사옥 전경. /'김지태사장 창업35년사' 수록

2018-02-0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4]한국생사-2 조선견직 인수

건준 참여·미군정 고문 추대불하받은 공장 그룹모체 키워경남·강원 생사 대부분 인수해방은 김지태를 지방기업가에서 국내 굴지의 기업가 내지는 정치가로 변신시켰는데, 계기는 그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45년 8월 18일 건준 부산지부가 발족되면서 김지태는 건준의 재정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건준의 운영자금으로 10만원을 희사했다. 그가 어떠한 동기로 건준에 참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해방직후 김지태의 정치·사회활동은 건준의 참여로부터 시작됐다.또한 김지태는 1945년 10월 31일 부산상공회의소의 매니저로 임명됨과 동시에 미군정 재산관리처 부산지역 고문에 추대됐다. 그는 일제하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부산상공회의소 감사를 역임한 바 있었는데 이러한 경력과 건준의 활동 등이 감안된 결과로 추정된다. 1946년 4월에 부산상공회의소 재건과 함께 초대회두로 선임됨으로써 대한상공회의소 부회두를 겸했다. 김지태는 1946년 3월에 귀속업체인 욱견직(旭絹織)의 관리인으로 임명됐다. 1937년 경남 동래군에 설립됐으며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주로 군수용 피복류를 가공한 섬유제조업체였다. 김지태가 관리인으로 임명되던 당시 근로자수는 300여명 규모였다. 욱견직 또한 국가에 귀속된 여타 적산업체들처럼 해방과 함께 종업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식의 자주관리(自主管理)체제로 운영됐으나, 관리미숙에다 노노(勞勞)간의 대립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1946년 3월에 설립된 대한노총이 반공을 기치로 좌익계의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와 대립각을 세움에 따라 전국의 사업장에서 이데올로기 분규가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욱견직도 노노 갈등으로 공장이 폐쇄되면서 생계가 막연했던 종업원들이 스스로 관리인 희망자를 물색했으나 선뜻 나서는 기업가들이 없었다. 전평의 극성스런 자본가 타도 분위기 탓에 적산기업을 맡으려는 자본주들이 나서지 않은 탓이었다. 욱견직의 자치기구 간부들은 전체 종업원 대상의 투표를 통해 다득표자인 김지태에게 회사의 운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김지태는 사재 20만원(현 시가로 약 800만원)을 투자해 건물을 보수하고 일본에서 직기를 새로 도입하는 등 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회사의 이름도 조선견직(朝鮮絹織)주식회사로 바꿨는데 1951년 3월에 김지태에 정식으로 불하됐다. 김지태가 관리인으로 임명된 이후 5년만에 조선견직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이 공로를 감안한 것이었다. 8시간 근로와 임금인상, 복지확충 등의 모범적 경영이 생산성 제고로 연결된 결과였다. 김지태는 운영난으로 빈사지경인 경남일대의 제사공장들을 전부 사들여 조선견직에 통합해 제사-견직의 수직계열화로 경쟁력을 제고 하는 등의 창의성도 발휘했다. 밀양의 동양제사, 진해의 고려제사, 진주의 해동제사 등을 몽땅 사들여 1949년 6월에 경남합동제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후일 경남합동제사는 한국생사그룹의 모체인 한국생사로 거듭났다. 김지태는 1946년 9월에는 부산진구 범일동에 대동산업(大同産業)을 설립했다. 경남합동제사가 생산하는 생사의 대부분은 욱견직의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대동산업을 통해 수출되었다. 이후부터 김지태는 국내 실크업계의 왕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동산업은 증가하는 업무량과 수출사업 활성화를 위해 1949년 12월 22일에 본사를 서울 중구 소공동 21번지로 이전하고 상호를 이화상사(二和商事)주식회사로 바꿨으며 경남합동제사도 인수했다. 1951년 3월에 조선견직을 불하하면서 생사의 수출제고 및 조선견직에의 안정공급을 위해 동년 6월에 원주제사(原州製絲)를 설립해서 이화상사 산하에 두었다. 이로써 이화상사는 경남지역의 생사는 물론 강원도에서 생산되는 생사의 대부분도 장악할 수 있었다.1952년 3월에는 대구의 대한생사(大韓生絲)를 인수했다. 당시 대한생사는 대구와 경북 영주에 각각 제사공장을 거느린 제사메이커로 1919년에 설립된 조선생사(朝鮮生絲)의 후신이었는데, 1951년 9월 관리인 이종완과 구재구에 7억3천만원에 불하됐던 것을 김지태가 인수한 것이다. 김지태는 이화상사의 자본금을 증액하고 상호도 한국수출산업(韓國輸出産業)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조선견직은 생사 생산에서 완제품의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생산시스템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이화상사도 굴지의 생사무역 기업으로 성장하게 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조선견직 사무동 전경. /'김지태사장창업35년사' 수록

2018-01-2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3]한국생사-1 사업과의 인연

창업자 김지태, 토호 집안 출생동척 입사 5년만에 폐결핵 사직농장·지물·주철·부동산등 번창한국생사그룹의 창업자 김지태(金智泰)는 1908년 6월 14일 부산 좌천동에서 김경중(金京仲)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지태의 조부 김채곤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이 지방 굴지의 부호로써 현 부산진초등학교의 전신인 '육영제(育英齊)'라는 청소년 교육기관 운영에 헌신해 인근 주민들로부터 '金사일 영감님'으로 칭송을 받았다. 부친인 김경중은 일본에 유학한 인텔리였으나 당시 망국(亡國)의 한과 시름을 술로 달래던 지식인들처럼 주유천하하며 1년에 한두 번 정도 집에 들르는 등 가정에는 소홀한 가장이었다.김지태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외가가 있는 동래군 서면 초읍리로 이사했는데 좌천동에서 10여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후부터 김지태는 외가 부근에서 생활했는데 그의 외조부 또한 대대로 부자소리를 들어온 지역토호이자 유학자(儒學者)였고, 외삼촌 이인우(李仁雨)는 독립군 간부로 만주에서 활동하다 분사한 항일투사였다.유년시절 한학을 배우며 성장한 김지태는 이따금 외가를 방문하는 외삼촌 이인우로부터 나라사랑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인우는 독립군 군수품 부장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다 군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잠깐씩 고향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후 김지태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해 산수,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접했는데 그는 특히 산수에 소질을 보였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김지태는 보통학교 5학년 때인 1922년 4월에 영주동에 있는 3년제의 부산진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에 입학했다. 1927년 3월에는 일제의 한국농촌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했다. 동척은 일제가 한국농촌 장악과 식량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회사이자 식민지 전위기구였지만, 당시 청년들이 선망하던 '신의 직장'이기도 했다.김지태는 동척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았으나 폐결핵으로 입사 5년만인 1932년에 사직했다. 대신 투병생활과 생계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위해 동척 부산지점의 배려로 울산교외에 있는 동척소유의 농장을 경영하게 됐다. 동척에 상환할 연부금을 제외하고도 연 100석을 얻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의 농장이었다. 더구나 동척은 10년간의 연부상환을 종료할 경우 김지태에게 소유권을 넘겨주기로 약정했다. 10여명의 인부들과 함께 2만여 평의 농장을 운영한 결과 2년여 만에 생산량을 배가시켰다. 당시만 해도 국내의 농촌은 금비(金肥, 화학비료)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비료공급량이 부족해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김지태는 친지인 울산 이규정(李圭正)의 정미소로부터 쌀겨와 퇴비를 제공받아 농사를 지어 생산량을 늘렸다. 농장경영으로 재미를 본 김지태는 1934년에 부산 범일동의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했다. 종업원 70명이 역직기(力織機) 40대로 인견직물을 생산하는 소규모 공장이었으나 김지태는 경영미숙과 자본부족 등으로 인수 1년반 만에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사업은 열과 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직물공장 경영에 실패한 김지태는 1935년 9월에 부산 범일동에서 지물류 생산을 목적으로 한 조선지기(朝鮮紙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부산의 지물도매상 추야상점의 후원하에 사업자금은 울산농장을 담보로 부산 제2금융조합으로부터 융자받아 충당했다. 중일전쟁 직후 전쟁특수로 인해 지물류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사업에 자신을 얻은 김지태는 사업 확장을 시도했으나 자금이 충분치 못해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평소 바둑을 통해 친교를 쌓은 식산은행 부산지점장 일본인 백석(白石)과 접촉해서 자금난을 타개했다. 백석은 평소에 김지태의 인품을 잘 알던 터여서 선뜻 거액의 신용대부를 제공했다. 신용대부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한 김지태는 조선지기의 생산능력을 확충하는 한편 조선주철합자회사(朝鮮鑄鐵合資會社)를 인수했다. 당시는 중일전쟁으로 군수공업붐이 조성되던 때여서 조선주철도 번창했다. 조선지기는 일본 최대의 왕자제지와 거래할 정도로 성장했다. 김지태는 부동산 투자사업까지 겸영해서 약관 30세에 부산실업계의 유망한 기업가로 떠올랐고, 해방 직전에는 5천석 지기의 부자반열에 올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1-2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2]대한그룹-6 대한방직과 대한제당

전주·대구 직포공장 등 성장세中 진출 1997년 의류사업 확장방직·제당만 창업 가문 소유로대한방직은 1953년 8월 설경동 등이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섬유업체다. 1954년 10월 수원공장에 방기(紡機) 1만 추 등 시설을 갖춰 조업을 시작했다. 이듬해 8월에는 대구에도 공장을 완성해 방기와 직기(織機) 등을 갖추고 조업을 개시했다. 설원식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뒤 1955년부터 중앙대 문과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다 1960년 대한방직과 대한전선 사장직에 갑자기 취임했다. 이후 3년간 부친과 재산다툼을 벌인 끝에 결국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대한그룹으로부터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1973년 12월에는 대한방직의 주식을 상장해 기업을 공개했다. 1975년 8월 전주에 공장을 세워 생산증대를 도모하였고, 1975년 전주공장(방직) 조업을 시작한 데 이어 1977년에는 대구 월배공장(염색, 가공)의 조업에 착수했다.대한방직은 1986년 5월 전주에 직포공장을 신축하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87년 4월 수원공장에 정방기를 증설하고, 6월에는 대한종합개발(주)를 흡수·합병했으며, 7월에는 월배나염기 2라인을 증설하고, 전주 방적2공장을 신축했다. 1989년 9월 대구직포 3B공장의 시설을 최신설비로 교체하고, 전주공장에도 11대를 증설했다. 1990년 4월에는 월배 제2열 광폭 최신설비로 증설하였으며, 11월에는 대구공장에 연사기 9대를 증설했다. 1993년 7월에는 여의도 본사사옥을 준공했으며, 1994년 4월에는 중국 칭다오에 제10직포창과 합작계약을 하였고, 1995년 5월 아세아파이낸스를 설립했다. 1994년 중국 칭다오에 대원방직유한공사를 설립했고, 1997년 의류사업부를 신설하고 의류 사업에 진출했다. 설원식은 1998년에 대한방직의 경영권을 장남인 설범에게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대한제당은 1956년 7월 대동제당으로 설립됐다. 사세확장을 고민하던 설경동이 식품사업에 눈을 돌렸는데 대상이 설탕이었다. 국내 설탕 수요가 1953년 2만1천201톤에서 1956년에는 6만6천938톤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당시 선발기업인 제일제당(CJ)은 자기자본 대비 무려 8배 이상의 이익을 실현하는 등 초호황을 누렸다. 1950년대 중반부터 제당업에 참여하는 업체들이 속출했는데 1953년에 최초로 제일제당이 설립됐고, 1954년 8월에는 동양제당,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제당이 각각 설립됐다. 삼양사는 1955년 12월에 경남 울산에 제당공장을 건설했다. 제당업 신규진출은 1956년에도 계속돼 2월에는 금성제당, 3월에는 해태제과 제당부문, 7월에는 대동제당이 막차로 경기도 시흥에 제당공장 건설작업을 서두른 것이다. 설경동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 독일에서 기계를 발주하는 등 신규 사업에 진출했는데 이로써 국내 제당산업은 경쟁체제로 전환했다. 7개 제당업체의 연 생산능력은 15만 톤이 되어 당시 국내수요량 5만 톤 보다 3배 이상 과잉생산을 초래했다. 정부와 제당업계는 1956년 3월에 사단법인 대한제당협회를 설립해서 카르텔을 형성해 과당경쟁으로 인한 공멸을 막았다. 1968년 12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고 1969년 8월에 대한제당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9년 5월 인천사료공장을 준공하며 사료사업에도 진출했다. 1988년 7월 울산사료공장에 이어 이듬해 10월 인천특수 사료공장을 준공했다. 이 회사는 동년에 설경동의 4남 설원봉이 대한전선그룹에서 분리해 독립했다.한국경제를 장악한 30대 재벌은 1950년대 전후부흥기를 배경으로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그 와중에서 태창, 삼성, 삼호, 개풍, 삼화, 대한그룹 등이 특히 두각을 나타냈으나 1960년대 들어 4·19혁명과 5·16정변 등 급격한 변혁기를 맞아 재벌지형에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후 태창과 삼호그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개풍과 대한그룹 등은 사세가 크게 위축됐다. 정치권력과의 유착 정도가 심할수록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대한그룹은 창업 3대에 들어 대한방직과 대한제당만 창업자 가문의 소유로 남았다. 오늘날 대한그룹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1-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1]대한그룹-5 대한전선의 독립

무리한 사업확대 눈덩이 차입금충남 당진서 세계최대 공장 운영대한전선은 2000년대 들어 사업 다각화를 통해 사세를 확장해 갔다. 그러나 그 와중인 2004년 3월 18일 설원량 회장이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대한전선의 재벌화 작업에 차질을 빚었다. 설원량의 급작스런 사망과 함께 임종욱 전문경영인에 경영을 맡겼는데 그 와중에서 무리한 사업확장 등으로 대한전선은 점차 한계상황으로 몰렸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는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해 현금흐름은 더욱 나빠졌다. 2009년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고 이후 3년간 2조 2천억 원 규모의 자산을 매각하며 구조조정에 나섰다. 무리한 사업 확대에 따른 눈덩이 차입금이 결정적 원인이었는데 3년간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매각할 자산도 거의 남지 않았다. 채권단은 대한전선 부채의 절반 수준인 7천억 원을 출자 전환하는 과정에서 오너 일가의 지분이 1%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설윤석 사장은 2013년 10월에 경영권을 포기했다. 설 사장은 고 설원량 회장의 장남으로 2010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경영권을 넘겨받았었다. 한편 대한전선은 증권선물위원회로부터 회계기준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2011, 2012년에 대한시스템즈 등에 대한 2천700억원 규모의 매출채권에 대해 대손충당금을 과소계상함으로서 연결재무재표 상의 당기순이익과 자기자본을 과대 작성했다는 것이다. 대한시스템즈는 설윤석이 53.77%, 모친과 설윤석의 동생이 각각 9.26%와 36.97%의 주식을 소유한 개인기업으로 이전부터 대한전선과의 내부거래가 지나치게 높아 빈축을 샀었는데 이번에는 대한전선의 재무상황을 과대포장(?) 하려다가 적발 되었던 것이다. 이후 채권단이 매각작업을 서둘러 대한전선은 2015년 9월 사모펀드인 IMM PE에 인수되었으며 2016년 1월에는 통신케이블 제조전문 계열사인 (주)티이씨앤코까지 흡수합병했다. 대한전선은 환갑의 나이에 설씨 가문으로부터 영원히 이탈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전선 메이커인 대한전선은 전력선, 통신선, 전선용 소재를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다. 매출의 60% 이상을 해외시장에서 거두고 있으며, 국내 전선시장에서는 LS전선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주력 생산제품으로 초고압케이블, 전력케이블, 절연전선, 원자력케이블, 소방용 케이블, 전차선, 제어용 케이블, 저독성 난연케이블, 계장용/신호용 케이블 등이 있고, 통신분야의 광케이블, 통신케이블, 데이터케이블, 무선통신용 케이블 등이 있다. 소재 분야에서는 구리나 알루미늄을 1차 가공한 Copper Rod(구리 나선)을 생산한다. 2018년 현재 대한전선은 충남 당진에 전선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최대 규모의 생산기지를 거느리는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등에 현지법인이 있다. 대한전선그룹은 총 11개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상장기업은 대한전선(주)가 유일하다. 비상장회사는 10개사로 티이씨파트너스, (주)동안디앤아이, 대한케이블비나, 대한글로벌홀딩스 등이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1-0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0]대한그룹-4 대한전선의 성장

도시바와 제휴 가전사업 확장신군부하 매각 '대우신화 모체'전선 신장 꺾이자 사업 다각화대한그룹의 실질적인 경영후계자였던 설원량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거쳐 미국 텍사스주립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대한전선에 입사한 설원량은 입사 8년만인 1972년 대한전선 사장으로 승진해 경영 일선에 나섰고, 1978년 대한전선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부친의 사망과 함께 주력기업인 대한전선을 물려받았던 것이다.대한전선(주)는 1955년 2월에 설립됐으며, 1957년 플라스틱 전력 케이블 생산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는 PVC 피복전선 등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1959년 국내 최초로 용동압연기를 설치했으며, 1961년 연피통신케이블 생산도 개시했다. 1964년 동남아 지역에 전선 수출을 시작했으며 1966년에는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선 제조에 성공하며 성장의 기틀을 다졌다. 1969년에는 33KV 절연케이블 등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1968년 12월에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경제의 축이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면서 전선공업도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되자 회사는 더욱 성장하였다. 대한전선은 1960년대 후반 일본 도시바와 제휴해서 가전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고도성장에 따라 국민들의 냉장고, TV, 세탁기 등 내구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점증하면서 국내가전시장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의 등장과 함께 국내에 컬러TV 방영시대가 개시되면서 대한전선은 금성사와 삼성전자, 화신전기와 함께 국내 가전시장을 분할지배하는 과점기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대한전선은 1983년 2월 잘 나가던 가전사업을 대우그룹에 매각해야만 했다. 1980년대초 신군부 하에서 추진된 구조조정의 일환이었다. 1974년 1월에 설립된 대우전자는 83년 3월 대한전선의 가전사업을 인수하면서 '대우신화'의 모체가 됐다. 반면에 대한전선은 가전사업부문 상실로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한차례 고비를 넘겼는데 또다시 크게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전선사업 외길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대한전선은 1980년에 SCR공장을 준공하고 생산에 돌입하였으며, 1983년에는 초고압케이블공장을 준공했다. 1984년 154KV XLPE 케이블을, 1992년에는 345KV OF케이블과 원자력 케이블 개발에 성공했으며, 해외시장 진출 확대로 1997년 11월 무역의 날에 '5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는 수직계열화작업의 일환으로 스테인리스스틸 압연사업에 진출하는 한편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 아프리카 등지에서 해외투자에 착수했다. 1995년 알루미늄사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에는 세계 최대 알루미늄 압연 제품 생산기업인 노벨리스와 합작해서 '알칸대한'으로 출발했다. 2011년 대한전선이 지분 전량을 노벨리스 본사에 매각하면서 합작관계가 청산됐다. 경북 영주와 경남 울산에 각각 생산공장을 두고 있다.대한전선은 1960년대에 케이블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이후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중견기업이다. 돈 되는 곳에는 과감하게 투자하고 그렇지 못하면 미련 없이 손을 뗐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전선사업의 신장세가 꺾이면서 2000년대에 들어 새로운 캐시카우의 확보를 위해 M&A 방식을 통한 사업 다각화를 모색했다. 2002년에는 (주)쌍방울로부터 (주)무주리조트와 전북 고창의 선운산레이크밸리 골프장 등을 인수해서 레저·관광사업에 뛰어들었고, 2003년 (주)진로의 채권을 대량 매입하였으며, 2004년 의류업체 (주)쌍방울을 인수했다. 2007년 명지건설(TEC건설)과 2008년 남광토건을 각각 인수해서 건설 분야로 다각화했으며, 2008년 (주)온세텔레콤을 인수하며 정보통신사업을 시작했다. 태양광발전, 부동산개발, 광섬유제조, 호텔운영, 신약개발, 컨설팅 등에도 진출했는데, 2000년에는 남아공의 전선업체 M-TEC를 인수해 국내 전선회사 최초로 아프리카시장에 진출하였으며, 2005년 베트남 현지법인 TSC를 설립했다. 2006년 매출 2조 원을 넘어섰으며, 2007년 충남 당진에 대규모 전력기기 공장을 준공하고 '10억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2-25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9]대한그룹-3 시련을 넘어

5·16 軍정부 3억3천만환 부과기간산업 건설, 대한전선 기회정치격변·가정불화 '이른 승계'설경동의 오랜 사업경험과 사업가로서의 남다른 감각을 기반으로 정치권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다지며 승승장구하던 대한그룹은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사세가 급격하게 위축되는 시련을 겪는다. 1960년 4·19혁명과 함께 과거 이승만 독재 하에서 권력을 배경 삼아 부당하게 치부한 자들에 대한 단죄작업이 도화선이었다. 1960년 5월 과도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1955년 1월 이후 5년 동안의 탈세를 80%이상을 정직하게 신고할 경우 벌금을 면제해준다'는 조건으로 자진신고 하도록 하였다.6월 20일까지 신고한 기업인들은 이병철(삼성그룹, 탈세기업 5개 업체, 탈세액 21억 4천만 환), 정재호(삼호그룹, 탈세기업 4개 업체, 탈세액 5억 6천만 환), 김상홍(삼양그룹, 탈세기업 1개 업체, 탈세액 1억 9천만 환), 설경동(대한그룹, 탈세기업 대한제당 1개, 탈세액 1억 2천만 환), 송영수(전주방직, 탈세액 2억 9천만 환), 백남일(태창방직, 탈세액 3억 1천만 환), 구인회(럭키화학, 탈세액 3천만환), 이정림(대한양회, 탈세액 600만환), 조성철(중앙산업, 탈세액 500만환)등 9명으로 탈세액은 총 33억 1천100만 환에 달했다.자진 신고를 하기는 했지만 이들에게는 국민적 비난이 쏟아졌다. 검찰에서도 이 재벌들 중 최소한 6개 재벌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7월말에 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 23명(기업 68개 업체)을 최종 확정했는데 설경동의 대한그룹은 5개 계열사가 포함됐다. 부정축재자 처벌작업은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에 승계됐다. 1961년 7월 21일에 부정축재 환수금이 최종 결정되었는데 이병철 24억 환, 정재호 10억 환, 이정림 5억 5천만 환, 이한원 4억 환, 설경동 3억 3천만 환 등이었다. 한 차례 시련을 겪었지만, 이후 설경동은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이를 통해 대한전선의 시설 확충에 주력한 결과, 대한전선은 국내 전선산업의 리더기업으로 거듭났다. 또한 텔레비전, 냉장고, 선풍기등 전자제품 생산을 해 당시 가전제품 판매율 2위까지 올라서면서, 대한그룹은 또다시 재계 전면에 화려하게 부상했다. 탈세의 시련이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경동은 70세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면서 지병이 생기고 말았다. 결국 사업 일체를 3남인 설원량을 비롯한 2세들에게 물려주었다. 설경동은 결국 1974년 1월 20일에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설경동은 사망에 앞서 대한그룹을 2세들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따른 계열사 분리 작업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950년대 말 재계서열 5위 이내에 랭크되었던 대한그룹의 주력은 대한방직, 대한산업, 대한전선, 대한제당 등이었다. 창업주 설경동은 1960년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장남 설원식에게, 1972년 대한전선과 대한제당을 3남 설원량(薛元亮)에게 각각 물려주었다. 1988년에 4남 설원봉이 대한제당을 가지고 독립했다.설경동의 기업 분가 작업은 여느 재벌가와는 달리 일찍 시작되었다. 창업주의 사망시점을 전후해서 2, 3세들에게 그룹을 분리하는 것이 통례인데 설경동은 경영자로서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나이 50대 후반부터 분할상속작업을 서둔 것이다. 1960년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데다 가정불화까지 겹치면서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서둘러 장남 설원식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설경동은 두 번 결혼해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원식과 원철 2남을 두었으며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3남 원량과 4남 원봉 등 2남2여를 두었다. 그는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부동산도 몰수당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대한그룹의 주력 계열사 중 하나였던 대한전선의 발전에 힘입어 대한그룹은 시련을 딛고 화려하게 떠오를 수 있었다. 사진은 1960년대 대한전선 시흥공장 모습. /대한전선 홈페이지 역사관

2017-12-1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8]대한그룹-2 재벌로 성장

해방·한국전 딛고 대한방직 설립유통→제조업 주력 전환 디딤돌1950년대말 전선·제당·증권 진출설경동은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 재산을 잃었으나, 전쟁 전에 소림광업(小林鑛業)으로부터 결제자금 대신 억지로 떠맡았던 대량의 중석을 기반으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소림광업은 1934년 일본인이 설립해 1940년 무렵에서는 강원도 홍천광산, 경기도 가평의 대금산광산, 함남 영원의 낭림광산, 경북 달성광산, 평남의 성천광산과 양덕광산 등을 거느린 자본금 2천500만원의 국내 최대 광산업체 중 하나였다.6·25전쟁으로 중석 수요는 급증했으나 생산이 부진해 중석 가격은 전쟁 전의 톤당 400달러에서 무려 10배 이상 증가한 4천 달러로 거래됐던 것이다. 더구나 전쟁 중 환율 또한 극히 불안해서 수출업자들은 엄청난 환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중석을 처분해서 만든 거금으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설경동은 중석을 매각해서 확보한 자금으로 1953년에 원조불 35만 달러를 대부받아 자본금 1억환의 대한방직을 설립하고 1954년부터 수원 세류동 36번지에서 방기 1만추로 조업을 개시했다. 1955년 8월에는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직기 300대를 배정받는 한편 대구 칠성동 20번지 군시공업(群是工業) 대구공장(조선방직 대구공장)을 7억 환에 불하받았다. 또한 같은 해에 또다시 운크라로부터 55만 달러를 배정받아 혼타면기(混打綿機)를 확충하는 한편 동아방직으로부터 방기 1만1천800추를 인수했다. 그 결과 대한산업은 1957년 현재 수원공장(방기 1만추), 대구공장(방기 3만2천576추, 직기 516대)의 대규모 섬유기업으로 부상했다. 기업경영 반세기만에 사업의 주력을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한 것이다.설경동은 이로써 국내 정상의 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당시 섬유산업은 정부가 최우선으로 육성하는 정책산업으로 장기저리의 정책자금 알선 및 세제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전형적인 '규모의 경제'산업으로 이 분야에서 발군의 성과를 낸 기업들이 최대 재벌로 급부상했다. 태창, 삼호, 삼성그룹 등이 상징적인 사례였다.설경동은 1955년 2월에는 적산기업인 조선전선(朝鮮電線) 시흥공장을 인수해서 자본금 300만 환의 대한전선을 설립하고 1957년부터 플라스틱 전력케이블을 생산했다. 대한전선은 해방 후에 최초로 설립된 종합전선업체였다. 한국의 전자통신 산업의 효시는 1885년 서울-인천 사이에 가설된 유선전화였다. 일제 통치기 이후부터는 산업근대화 추세에 따라 통신은 물론 전력선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면서 전선에 대한 수요가 점증했다.1956년에는 대동(大東)제당(대한제당의 전신)을 설립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사세확장을 고민하던 설경동은 설탕사업에 눈을 돌렸다. 1940년대 덴마크,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1인당 설탕 소비량이 100파운드를 넘어섰지만 50년대 중반 국내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1.97파운드에 불과했다. 설경동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 독일에서 기계를 발주하는 등 신규 사업에 진출했다. 설경동은 같은해 대동증권(大同證券)을 인수함으로써 1950년대 말에는 모기업인 대한산업 외에 대한전선, 원동흥업, 대한방직, 대한제당, 대동증권 등을 거느린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해 재계 서열 4위로 부상했다. 이 무렵에 재벌화했던 여타 기업가들처럼 적산기업 불하와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에 편승해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했던 것이다.해방과 한국전쟁 등 외부환경의 변화로 두 번의 좌절을 경험했던 설경동이 사업기반이 전혀 없었던 남한에서 짧은 기간에 정상의 재벌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오랜 사업경험과 사업가로서의 남다른 감각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해방 이후 제공된 귀속기업의 불하 내지는 막대한 원조물자의 사업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정치권에 유착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지근(至近)거리에 있어야만 했는데 그가 한창 재벌화를 도모하던 1954년부터 집권당인 자유당의 돈줄인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0년대 대한방직 수원공장 전경. /'방직협회 20년지' 수록

2017-12-1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7]대한그룹-1 사업과의 인연

적수공권서 함경도 굴지 미곡상동양수산 정어리사업으로 성장수원 성냥공장 남한 일대 석권1950~70년대에 재벌 서열 4위에 올랐던 대한그룹의 창업자 설경동(薛卿東·1901~1972)은 평안북도 철산에서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설흥업과 어머니 조성녀 사이에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설경동은 10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사해 무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일본의 오쿠라고등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학비조달의 어려움 등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설경동은 귀국 후 부령군청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어머니와 신의주에서 쌀장사를 시작해 10여년 만에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는 굴지의 미곡상으로 성장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일본인을 동업자로 끌어들여 삼광운송점과 삼광상회를 세워 운송업과 곡물, 해산물 위탁판매를 해서 부를 축적했다. 이후 설경동은 청진을 사업 근거지를 삼고 만주와 중국 등을 돌며 곡물류와 수산물 등을 수출했다. 어느 정도 사업자금을 확보한 후 설경동은 1936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어선 3척의 동양수산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일제는 부족한 유류(油類)를 대체하고자 동해안에서 엄청나게 잡히는 정어리의 지방(脂肪)을 추출해서 등유(燈油)로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동해안에는 정어리 잡이가 성행했던 것이다. 당시 동해안의 정어리시장 규모는 1천만원(현재가치 1조원)에 달했다. 동양수산은 정어리 잡이 및 가공사업으로 번성해서 해방 무렵에는 어선 70척에 비행기로 어군(魚群)을 탐지 할 정도의 대선단으로 성장했다.1945년 8·15해방 직후 북한에 공산당정부가 수립되면서 설경동은 친일파로 몰려 동양수산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제하에서 적수공권으로 사업을 시작해 약관의 나이에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는 대(大) 미곡상으로 성장했으나, 지주와 자본가 등을 용인하지 않는 북한에서의 사업을 계속하기가 더 이상 곤란했다. 더구나 친일파 실업인으로 몰리는 터여서 설경동은 재산을 처분하고 어선 여러 척을 끌고 월남하였다.월남 후 그는 어선과 부동산 등을 처분하여 확보한 자금으로 해산물 수출 회사인 '대한산업(大韓産業)'을 설립했다. 해방 전 그는 이미 중국과 만주 등을 돌며 무역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손쉽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적산가옥 및 토지 등을 헐값에 확보했다가 시세차익을 남기고 되파는 사업을 하는 원동흥업을 설립해서 부(富)를 축적했다."해방이 되자 세상은 나라를 되찾은 기쁨과 식민지체제가 무너지는 대혼란이 왔다. 특히 일본인이 버리고 간 재산은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였다. 이른바 적산(敵産)으로 불리던 토지는 말뚝만 박으면 임자요 집은 문패만 바꿔 달면 주인이었다." (이종재, '재벌이력서', 36면)약간의 여유자금에다 이재(理財)에 어느 정도 감만 있으면 '적산 비즈니스'는 단기간에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대박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설경동은 경기도 수원에 성냥공장을 설립해 남한 일대를 석권하는 성냥공장으로 발전시켰는데, 이 성냥공장도 적산기업으로 추정된다. 적수공권으로 월남했던 설경동은 특유의 이재 능력을 발휘해서 단기간에 남한에서도 손꼽히는 거부(巨富) 반열에 올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0년대 재벌 서열 4위에 올랐던 대한그룹의 창업자는 평안북도 철산 출신의 설경동이다. 사진은 1955년 대한전선 출범을 알리는 설경동. /대한전선 홈페이지

2017-12-0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6]대한유화(완)-5 대한유화로 슬림화

창업주 후손들 상속세로 '타격'정부 지분 처분 오너경영 강화HDPE 국내생산 24% 업계1위이정림은 1970년 6월에 일본 마루베니와 합작해서 울산공단 내에 세폴리프로필렌, 에틸렌 등을 생산하는 공장을 갖추고 석유화학제품 제조업체인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75년 국가기간산업체로 선정됐고, 1991년 온산공업단지에 원료 자급을 위한 나프타분해 공장을 준공했다. 하지만 유화업계 경쟁 격화로 1994년 법정관리를 신청한 이후 10여 년간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노출됐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90년 이정림이 사망하자 그의 후손들은 상속세 명목으로 현금 대신 대한유화 지분 32.7%를 정부에 제공하면서 공동창업자 이정호가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정부는 보유한 대한유화공업 지분 32.7%의 매각을 여러 번 추진했다. 대한유화 오너가의 지분이 40% 수준이어서 타 업체가 정부 지분을 인수하고 우호지분을 확보하면 단숨에 경영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동부와 효성이 대한유화 지분을 대거 사들이며 적대적 M&A설에 불을 지핀 것도 이런 배경이었다. 대한유화가 1994년에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도 오너일가 경영권 유지에 악재로 작용했다. 한 유화업계 관계자는 "1990년대 유화업계는 규모의 경제를 외치며 증설과 인수합병을 놓고 고민을 했다. 대한유화공업은 규모는 작지만 알짜 회사로 대기업들이 M&A 먹잇감으로 주로 노렸던 기업"이라고 밝혔다. 정부로부터 대한유화공사 지분을 넘겨받아 관리하던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는 2007년 국민연금H&Q 사모펀드에 지분 21%를 매각했다. 2대 주주로 등극한 국민연금H&Q가 우호주주로 이정호 명예회장 체제에 힘을 실어주면서 적대적 M&A도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2010년 국민연금H&Q가 투자금 회수를 위해 대한유화 지분매각을 추진하자 또다시 경영권 문제가 불거졌다. 롯데케미칼을 비롯해 다양한 업체가 국민연금H&Q의 지분 인수를 추진하며 경영권을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대한유화공업은 국민연금H&Q의 자사주 일부를 매입해 소각하면서 투자금 회수를 도왔다. 국민연금H&Q는 블록딜과 대한유화 자사주 매입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경영권을 오랜 기간 위협했던 정부 측 지분이 처리되자 오너가의 경영체제도 강화됐다. 유니펩과 KPIC코퍼레이션은 경영권 강화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경영권 트라우마'가 뇌리에 깊게 박힌 오너일가는 2000년대 이후 경영권을 다지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 결과 이정림 명예회장의 조카이며 대한유화공업 오너인 이순규 대한유화공업 회장이 경영권을 확실히 장악했다. 이순규의 개인회사인 KPIC코퍼레이션과 유니펩은 그 토대가 됐다. 대한유화는 2010년 9월 기준 온산공장의 에틸렌 생산능력이 47만t으로 국내 총 생산 능력의 6%를 차지하고 있다. 프로필렌 생산능력은 35만t으로, 국내 총 생산 능력의 6%를 차지하고 있다. 고밀도폴리에틸렌(HDPE)의 생산능력은 2010년 6월 기준 53만t으로, 국내 총 생산의 24%로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계열사로는 유니펩(주), (주)케이피아이씨코퍼레이션, (주)코리아에어텍, ATMAN PTE.LTD. 등이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대한유화의 주력 사업장인 울산광역시 온산공장 전경. /대한유화 홈페이지 제공

2017-11-2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5]대한유화-4 발전과 후퇴

크링커·레미콘 공장 잇단 완공PVC·선박회사 설립 승승장구 사채 부담 대한양회 매각 '충격'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개풍그룹은 서울은행 경영권까지 포기해야 했다.5·16쿠데타 이후 정부가 은행의 대주주 사금고화 및 전횡을 방지하고자 부정축재 환수 처리의 일환으로 부정축재자가 소유하는 일반은행의 주식을 전부 환수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정부와 재벌간의 정경유착의 공식적인 고리가 형성됐다. 또한 재벌기업들이 자기들만의 이익을 대변해줄 단체결성의 돌파구도 마련됐다.1962년 5·16 후 실업인 13명이 회동하여 경제재건촉진위원회를 발족했는데 이정림이 회장에 취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탄생 배경이다.이정림은 1963년 한국경제인연합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8월 3·1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삼성의 이병철과 함께 전경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공로자가 바로 이정림이었다. 한편, 대한양회는 1963년 7월 시멘트 대량소비지인 서울을 겨냥해 용산구 서빙고동 한강변에 연간 생산량 20만t 규모의 크링커 처리시설을 완공했다. 시멘트 완제품의 저장기한은 6개월인 반면에 90% 정도 완성된 자갈형 고체 시멘트인 크링커는 무기한 저장이 가능해 비수요기에 장기간 저장해 두었다가 성수기에 매각하기 위한 시설이었다.대한양회는 이후 레미콘 공장까지 세우고 레미콘 운반트럭으로 서울 일원에 생(生)콘크리트를 공급함으로써 또다시 히트를 쳤다.1967년에는 대한양회의 생산실적은 36만6천t으로 국내 시멘트생산량의 15%를 차지했는데, 그해에 생산시설 10만t을 늘려 연간 생산량을 48만t으로 확대하고 서울 서빙고의 크링커 분쇄공장도 시설을 배가했다.1965년에는 국내 최초의 PVC 공장인 공영화학공업(주)를 설립했으나 상당기간 동안 수익은 별로였다.1967년에는 국내 최대의 무역업체인 천우사의 전택보(全澤珤)와 대농그룹 창업자 박용학(朴龍學) 등과 공동 출자해서 자본금 1억5천만원의 대한선박(주)를 설립하고 해외차관자금으로 선박 등을 도입했다. 대한양회는 대한선박의 지분 3분의 1을 확보하고 국내 최대의 선박왕 꿈을 키웠다.그러나 그 와중에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1968년 상반기에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으로부터 7억원을 융자받으면서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된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한 상술로 시멘트업계에서 독주하던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는 데 대해 말들이 많았다. 폭리로 비난을 사던 시멘트업체들이 사채를 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느 회사든 타인자본의 절반은 사채로 충당한다는 것인데 잘 나가던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를 받은 때문에 말들이 더 많았다.특히 대한양회는 개풍그룹의 중심기업이자 이정림이 특히 아끼는 터여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항간에 대한양회는 생산규모가 업계 최소일 뿐 아니라 기계시설도 낡았으며 석회석도 좋은 것은 이미 다 파먹어 이참에 빚이나 잔뜩 내서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려 한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또한 개성상인들은 절대로 손해 보는 사업은 붙잡고 있지 않는다며 대한양회 매각설을 부채질 했다.대한양회는 1971년 8월 12일 원풍산업(이상순)으로 매각되면서 그간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원풍산업이 대한양회 자산 34억4천만원에서 은행부채 등 28억4천만원(외화 170만 달러 포함)을 차감한 6억원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조건이었다.이상순은 원풍산업 외에 천일곡산과 평화유지 대표이며 대한농산의 대주주로 이북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러나 대한양회는 1975년 1월에 쌍용양회에 재매각되어 쌍용양회 문경공장으로 재발족됐다. 대한양회의 연간 생산능력은 약 50만t이나 양회제조방식이 구식인 습식공정으로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생산비 급증을 못 견딘 때문으로 추정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0년대 승승장구하던 대한양회는 매각설이 나온 후 결국 1971년 원풍산업으로 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후 쌍용양회에 재매각돼 쌍용양회 문경공장이 된다. /경상북도 제공

2017-11-2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4]대한유화-3 부정축재자로 몰리다

'은행 민영화' 재벌판도에 영향단죄중 5·16 발발… 정부이관 처벌대신 석방 '산업역군 둔갑'대한양회는 6·25전쟁 후 복구사업으로 시멘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단시일 내에 경영이 정상화됐다. 이후 대한양회는 1960년대초 한일시멘트와 쌍용양회 등이 출현할 때까지 삼척시멘트의 후신인 동양시멘트와 국내 시멘트시장을 양분하며 초과이윤을 누렸다. 전후 부흥 및 경제개발사업에 따라 시멘트수요는 갈수록 크게 늘어났음에도 공급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1961년 말 우리나라의 시멘트 총생산능력은 72만t에 이르러 어느 정도 공급부족이 해소됐으나 여전히 시멘트는 웃돈을 주고도 못사는 인기상품이었다. 대한양회는 이양구가 경영하던 동양시멘트와 함께 국내 시멘트시장을 분할지배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국내유수의 재벌로 부상했다.한편 이정림은 산업자본의 금융자본화를 추진하게 되는데, 계기는 1959년 서울은행(현 하나은행)의 창립이었다. 서울은행은 지방은행으로 인가를 얻었는데 당시 대한양회공업이 이 은행의 주식 74%를 확보해서 오너경영인이 된 것이다. 삼성, 삼호, 동아상사(이한원) 등이 귀속은행주 민간불하에 편승해 금융자본화 했던 반면, 개풍그룹은 은행 신설에 편승해 목표했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일반은행의 민영화는 재계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던 신생기업들이 은행 민영화를 계기로 국내 정상의 재벌로 급부상한 것이다. 당시 은행을 불하받았던 재벌들은 모두 권력과 유착돼 있었다. 자유당독재 하에서 정경유착이 빚은 결과물이었다.개풍그룹 또한 금융재벌로 변신한 이래 활발한 다각화 사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9년 현재 개풍그룹은 모기업인 개풍상사를 비롯해 대한양회, 호양산업, 배아산업, 대한탄광, 삼화제철, 동방화재, 대한철강 등을 거느려 삼성, 삼호에 이어 재계 랭킹 3위의 대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높다 했던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개풍그룹은 시련의 계절을 맞는다. 과도정부는 자유당 정권하에서 권력을 배경 삼아 부당하게 치부한 자들에 대한 단죄작업에 착수했다. 정부는 7월말에 기업가 23명을 부정축재 기업인으로 지목했다. 삼성(이병철) 삼호(정재호) 개풍(이정림) 대한(설경동) 럭키(구인회) 동양(이양구) 극동(남궁련) 등 195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한 재벌기업의 총수들이 전부 포함됐다. 정부가 8월 31일에 기업가 24명, 46개 기업들에 대해 벌금과 추징금을 합산한 총 196억 환을 해당 기업들에 통고하고 일주일 이내에 납부하도록 하자 해당기업들이 반발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4월 10일에 정부는 '부정축재자처리법'을 마련하는 한편 5월 17일까지 2주간을 자수기간으로 설정하고 내부적으로 이들에 대한 처벌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자수기간 종료 하루전인 5월 16일에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이 작업은 군사정부에 이관됐다. 1961년 5월 28일 혁명군 특별수사대가 탈세혐의가 있는 기업인들을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연행했다. 이때 연행된 기업인은 정재호, 이정림, 설경동, 남궁련, 이용범, 조성철, 함창희, 최태섭, 박흥식 등이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 백남일, 이양구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5월 30일에는 이한원과 김지태가 구속됐다. 각 지방에서도 지방의 유력 기업인들에 대한 검거작업을 진행, 금호그룹 창업자 박인천도 구속됐으나 우여곡절 끝에 벌금형으로 변경했다. 불법으로 정권을 찬탈했던 군사정부는 국민적 지지 확보를 위해 과거청산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의 이주일(李周一) 위원장은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며 석방을 발표했다. 범법자들이 산업역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로써 1960년 4·19혁명이후 1년여 동안 지루하게 끌어오던 부정축재자 처리문제는 일단 종결됐다. 추징금은 30개 기업에 총 83억환이 고지됐는데 이중 이병철 24억환, 정재호 10억환, 이정림 5억5천만환, 이한원 4억환, 설경동 3억3천만환이었다. 그러나 12월 30일에 발표된 부정축재 환수액은 부정축재 위원회에서 최초로 발표한 부정축재액 726억 환의 5.8%에 불과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1-1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3]대한유화-2 재벌로 성장

이정림, 1953년 호양산업 설립年 30만달러 어치 '얼음' 판매국내최대 시멘트공장 불하받아6·25전쟁 이후 군납사업은 국내 사업가들에 노다지 광맥으로 통했다. 식품, 타이어, 피혁, 페인트, 비누, 면내의, 모포, 양말 등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군납사업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고 이들 산업은 군납과 관련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최성모(세기상사, 신동아그룹의 모체), 심상준(한금장유), 전중윤(삼양식품, 삼양라면의 모체) 등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으며 한국타이어와 흥아타이어, 진양화학, 대한잉크페인트도 군납혜택을 누렸다. 군납업이 새로운 이권사업으로 부상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집권당인 자유당의 정치인과 고위공무원, 고급장교 등에 경쟁적으로 연줄을 대느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인단비누와 지구유지가 연루된 탈모비누사건은 수뢰사건으로 번져 한동안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일부 기업가들은 주한미군 상대 비즈니스에 눈길을 돌렸는데 한진그룹 창업자인 조중훈의 일화는 유명하다. 6·25전쟁 전부터 트럭 한 대로 화물을 운반하던 조중훈은 1955년 여름 서울-인천간 국도 운행 중 부평근처에서 고장난 고급세단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국내 최대의 수송재벌이 됐다. 고장 난 차에 미군 고위층의 부인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그는 미국인 장교와의 교분을 넓히는데 주력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동생 조중건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형을 도왔는데 당시 조중훈이 집으로 초대한 미군은 연인원으로 5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현대건설(정주영)과 삼환기업(최종환) 등은 가장 먼저 미8군 토건업에 뛰어들어 재벌의 터전을 닦았다. 병영건설 물량도 많았지만 환차익은 더욱 매력이었다. "미군공사는 달러로 계약되는데 기성분을 받을 때쯤이면 환율이 엄청나게 올라있는 실정이었다. 공정환율의 변동추세를 보면 1950년 1천800원 대 1달러였던 것이 1951년에는 2천500원 대 1달러로, 1952년에는 6천원 대 1달러로 뛰었다."('현대건설35년사', 1982) 주한미군 납품사업은 비록 소액일지라도 국내 비즈니스보다 훨씬 매력 있는 사업 이었다. 이정림의 본격적인 기업가활동은 1953년 휴전 이후부터였는데 첫 신호는 1953년 환도 후 서울에서 호양산업(好洋産業)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비견되던 주한미군 사업이었다. 이정림은 미국 뉴욕에서 일본산 100톤짜리 제빙기계를 도입해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제빙공장을 세우고 미군 위생관의 물 검사를 거쳐 주한미군에 납품사업을 개시했다. 그 결과 호양산업은 연간 25만 달러 내지 30만 달러 어치의 얼음을 판매하는 등 호황을 누렸다. 이정림은 개풍상사와 호양산업을 경영하면서 재벌화의 길을 도모했다. 1955년에는 대한탄광(大韓炭鑛)을 설립하고 광업에 진출했고, 1956년 10월에 대한양회(大韓洋灰)를 설립했다. 대한양회 설립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한국전쟁 후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충주비료, 한국유리, 문경시멘트 등 3대 기간산업의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시멘트 생산은 국영인 삼척시멘트공사(동양시멘트 전신)가 유일했으나 그나마도 시설 노후로 생산성이 형편없었다. 1955년 국내 시멘트 소비는 18만9천t이나 생산량은 5만6천t으로 70%를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다. 정부는 운크라와 협의해서 판유리에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로 문경에 시멘트공장을 추진했다. 건설업체로는 덴마크의 스미스사가 선정됐고 1955년 11월에 850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경북 문경군 점촌읍 신기리에 퀼른 2기의 연산 24만t 공사를 착공 했는데 준공 직전인 1957년 9월에 대한양회에 불하됐다. 이정림은 이동준, 이회림(OCI그룹 창업자)과 친동생인 이정호(李庭鎬)등과 함께 문경시멘트를 1천300만 달러에 구입해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개풍그룹이 국내 최대의 시멘트공장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7년 대한양회에 불하된 문경시멘트는 당시 국내 최대의 시멘트 공장이었다. 현재는 대한양회를 인수한 쌍용양회의 문경공장이 됐으며, 근대문화유산 지정이 추진 중이다. /경상북도 제공

2017-11-06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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