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2]대한그룹-6 대한방직과 대한제당

전주·대구 직포공장 등 성장세中 진출 1997년 의류사업 확장방직·제당만 창업 가문 소유로대한방직은 1953년 8월 설경동 등이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섬유업체다. 1954년 10월 수원공장에 방기(紡機) 1만 추 등 시설을 갖춰 조업을 시작했다. 이듬해 8월에는 대구에도 공장을 완성해 방기와 직기(織機) 등을 갖추고 조업을 개시했다. 설원식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뒤 1955년부터 중앙대 문과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다 1960년 대한방직과 대한전선 사장직에 갑자기 취임했다. 이후 3년간 부친과 재산다툼을 벌인 끝에 결국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대한그룹으로부터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1973년 12월에는 대한방직의 주식을 상장해 기업을 공개했다. 1975년 8월 전주에 공장을 세워 생산증대를 도모하였고, 1975년 전주공장(방직) 조업을 시작한 데 이어 1977년에는 대구 월배공장(염색, 가공)의 조업에 착수했다.대한방직은 1986년 5월 전주에 직포공장을 신축하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87년 4월 수원공장에 정방기를 증설하고, 6월에는 대한종합개발(주)를 흡수·합병했으며, 7월에는 월배나염기 2라인을 증설하고, 전주 방적2공장을 신축했다. 1989년 9월 대구직포 3B공장의 시설을 최신설비로 교체하고, 전주공장에도 11대를 증설했다. 1990년 4월에는 월배 제2열 광폭 최신설비로 증설하였으며, 11월에는 대구공장에 연사기 9대를 증설했다. 1993년 7월에는 여의도 본사사옥을 준공했으며, 1994년 4월에는 중국 칭다오에 제10직포창과 합작계약을 하였고, 1995년 5월 아세아파이낸스를 설립했다. 1994년 중국 칭다오에 대원방직유한공사를 설립했고, 1997년 의류사업부를 신설하고 의류 사업에 진출했다. 설원식은 1998년에 대한방직의 경영권을 장남인 설범에게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대한제당은 1956년 7월 대동제당으로 설립됐다. 사세확장을 고민하던 설경동이 식품사업에 눈을 돌렸는데 대상이 설탕이었다. 국내 설탕 수요가 1953년 2만1천201톤에서 1956년에는 6만6천938톤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당시 선발기업인 제일제당(CJ)은 자기자본 대비 무려 8배 이상의 이익을 실현하는 등 초호황을 누렸다. 1950년대 중반부터 제당업에 참여하는 업체들이 속출했는데 1953년에 최초로 제일제당이 설립됐고, 1954년 8월에는 동양제당,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제당이 각각 설립됐다. 삼양사는 1955년 12월에 경남 울산에 제당공장을 건설했다. 제당업 신규진출은 1956년에도 계속돼 2월에는 금성제당, 3월에는 해태제과 제당부문, 7월에는 대동제당이 막차로 경기도 시흥에 제당공장 건설작업을 서두른 것이다. 설경동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 독일에서 기계를 발주하는 등 신규 사업에 진출했는데 이로써 국내 제당산업은 경쟁체제로 전환했다. 7개 제당업체의 연 생산능력은 15만 톤이 되어 당시 국내수요량 5만 톤 보다 3배 이상 과잉생산을 초래했다. 정부와 제당업계는 1956년 3월에 사단법인 대한제당협회를 설립해서 카르텔을 형성해 과당경쟁으로 인한 공멸을 막았다. 1968년 12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고 1969년 8월에 대한제당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9년 5월 인천사료공장을 준공하며 사료사업에도 진출했다. 1988년 7월 울산사료공장에 이어 이듬해 10월 인천특수 사료공장을 준공했다. 이 회사는 동년에 설경동의 4남 설원봉이 대한전선그룹에서 분리해 독립했다.한국경제를 장악한 30대 재벌은 1950년대 전후부흥기를 배경으로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그 와중에서 태창, 삼성, 삼호, 개풍, 삼화, 대한그룹 등이 특히 두각을 나타냈으나 1960년대 들어 4·19혁명과 5·16정변 등 급격한 변혁기를 맞아 재벌지형에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후 태창과 삼호그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개풍과 대한그룹 등은 사세가 크게 위축됐다. 정치권력과의 유착 정도가 심할수록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대한그룹은 창업 3대에 들어 대한방직과 대한제당만 창업자 가문의 소유로 남았다. 오늘날 대한그룹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1-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1]대한그룹-5 대한전선의 독립

무리한 사업확대 눈덩이 차입금충남 당진서 세계최대 공장 운영대한전선은 2000년대 들어 사업 다각화를 통해 사세를 확장해 갔다. 그러나 그 와중인 2004년 3월 18일 설원량 회장이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대한전선의 재벌화 작업에 차질을 빚었다. 설원량의 급작스런 사망과 함께 임종욱 전문경영인에 경영을 맡겼는데 그 와중에서 무리한 사업확장 등으로 대한전선은 점차 한계상황으로 몰렸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는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해 현금흐름은 더욱 나빠졌다. 2009년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고 이후 3년간 2조 2천억 원 규모의 자산을 매각하며 구조조정에 나섰다. 무리한 사업 확대에 따른 눈덩이 차입금이 결정적 원인이었는데 3년간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매각할 자산도 거의 남지 않았다. 채권단은 대한전선 부채의 절반 수준인 7천억 원을 출자 전환하는 과정에서 오너 일가의 지분이 1%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설윤석 사장은 2013년 10월에 경영권을 포기했다. 설 사장은 고 설원량 회장의 장남으로 2010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경영권을 넘겨받았었다. 한편 대한전선은 증권선물위원회로부터 회계기준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2011, 2012년에 대한시스템즈 등에 대한 2천700억원 규모의 매출채권에 대해 대손충당금을 과소계상함으로서 연결재무재표 상의 당기순이익과 자기자본을 과대 작성했다는 것이다. 대한시스템즈는 설윤석이 53.77%, 모친과 설윤석의 동생이 각각 9.26%와 36.97%의 주식을 소유한 개인기업으로 이전부터 대한전선과의 내부거래가 지나치게 높아 빈축을 샀었는데 이번에는 대한전선의 재무상황을 과대포장(?) 하려다가 적발 되었던 것이다. 이후 채권단이 매각작업을 서둘러 대한전선은 2015년 9월 사모펀드인 IMM PE에 인수되었으며 2016년 1월에는 통신케이블 제조전문 계열사인 (주)티이씨앤코까지 흡수합병했다. 대한전선은 환갑의 나이에 설씨 가문으로부터 영원히 이탈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전선 메이커인 대한전선은 전력선, 통신선, 전선용 소재를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다. 매출의 60% 이상을 해외시장에서 거두고 있으며, 국내 전선시장에서는 LS전선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주력 생산제품으로 초고압케이블, 전력케이블, 절연전선, 원자력케이블, 소방용 케이블, 전차선, 제어용 케이블, 저독성 난연케이블, 계장용/신호용 케이블 등이 있고, 통신분야의 광케이블, 통신케이블, 데이터케이블, 무선통신용 케이블 등이 있다. 소재 분야에서는 구리나 알루미늄을 1차 가공한 Copper Rod(구리 나선)을 생산한다. 2018년 현재 대한전선은 충남 당진에 전선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최대 규모의 생산기지를 거느리는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등에 현지법인이 있다. 대한전선그룹은 총 11개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상장기업은 대한전선(주)가 유일하다. 비상장회사는 10개사로 티이씨파트너스, (주)동안디앤아이, 대한케이블비나, 대한글로벌홀딩스 등이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1-0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0]대한그룹-4 대한전선의 성장

도시바와 제휴 가전사업 확장신군부하 매각 '대우신화 모체'전선 신장 꺾이자 사업 다각화대한그룹의 실질적인 경영후계자였던 설원량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거쳐 미국 텍사스주립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대한전선에 입사한 설원량은 입사 8년만인 1972년 대한전선 사장으로 승진해 경영 일선에 나섰고, 1978년 대한전선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부친의 사망과 함께 주력기업인 대한전선을 물려받았던 것이다.대한전선(주)는 1955년 2월에 설립됐으며, 1957년 플라스틱 전력 케이블 생산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는 PVC 피복전선 등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1959년 국내 최초로 용동압연기를 설치했으며, 1961년 연피통신케이블 생산도 개시했다. 1964년 동남아 지역에 전선 수출을 시작했으며 1966년에는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선 제조에 성공하며 성장의 기틀을 다졌다. 1969년에는 33KV 절연케이블 등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1968년 12월에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경제의 축이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면서 전선공업도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되자 회사는 더욱 성장하였다. 대한전선은 1960년대 후반 일본 도시바와 제휴해서 가전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고도성장에 따라 국민들의 냉장고, TV, 세탁기 등 내구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점증하면서 국내가전시장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의 등장과 함께 국내에 컬러TV 방영시대가 개시되면서 대한전선은 금성사와 삼성전자, 화신전기와 함께 국내 가전시장을 분할지배하는 과점기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대한전선은 1983년 2월 잘 나가던 가전사업을 대우그룹에 매각해야만 했다. 1980년대초 신군부 하에서 추진된 구조조정의 일환이었다. 1974년 1월에 설립된 대우전자는 83년 3월 대한전선의 가전사업을 인수하면서 '대우신화'의 모체가 됐다. 반면에 대한전선은 가전사업부문 상실로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한차례 고비를 넘겼는데 또다시 크게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전선사업 외길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대한전선은 1980년에 SCR공장을 준공하고 생산에 돌입하였으며, 1983년에는 초고압케이블공장을 준공했다. 1984년 154KV XLPE 케이블을, 1992년에는 345KV OF케이블과 원자력 케이블 개발에 성공했으며, 해외시장 진출 확대로 1997년 11월 무역의 날에 '5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는 수직계열화작업의 일환으로 스테인리스스틸 압연사업에 진출하는 한편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 아프리카 등지에서 해외투자에 착수했다. 1995년 알루미늄사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에는 세계 최대 알루미늄 압연 제품 생산기업인 노벨리스와 합작해서 '알칸대한'으로 출발했다. 2011년 대한전선이 지분 전량을 노벨리스 본사에 매각하면서 합작관계가 청산됐다. 경북 영주와 경남 울산에 각각 생산공장을 두고 있다.대한전선은 1960년대에 케이블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이후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중견기업이다. 돈 되는 곳에는 과감하게 투자하고 그렇지 못하면 미련 없이 손을 뗐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전선사업의 신장세가 꺾이면서 2000년대에 들어 새로운 캐시카우의 확보를 위해 M&A 방식을 통한 사업 다각화를 모색했다. 2002년에는 (주)쌍방울로부터 (주)무주리조트와 전북 고창의 선운산레이크밸리 골프장 등을 인수해서 레저·관광사업에 뛰어들었고, 2003년 (주)진로의 채권을 대량 매입하였으며, 2004년 의류업체 (주)쌍방울을 인수했다. 2007년 명지건설(TEC건설)과 2008년 남광토건을 각각 인수해서 건설 분야로 다각화했으며, 2008년 (주)온세텔레콤을 인수하며 정보통신사업을 시작했다. 태양광발전, 부동산개발, 광섬유제조, 호텔운영, 신약개발, 컨설팅 등에도 진출했는데, 2000년에는 남아공의 전선업체 M-TEC를 인수해 국내 전선회사 최초로 아프리카시장에 진출하였으며, 2005년 베트남 현지법인 TSC를 설립했다. 2006년 매출 2조 원을 넘어섰으며, 2007년 충남 당진에 대규모 전력기기 공장을 준공하고 '10억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2-25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9]대한그룹-3 시련을 넘어

5·16 軍정부 3억3천만환 부과기간산업 건설, 대한전선 기회정치격변·가정불화 '이른 승계'설경동의 오랜 사업경험과 사업가로서의 남다른 감각을 기반으로 정치권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다지며 승승장구하던 대한그룹은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사세가 급격하게 위축되는 시련을 겪는다. 1960년 4·19혁명과 함께 과거 이승만 독재 하에서 권력을 배경 삼아 부당하게 치부한 자들에 대한 단죄작업이 도화선이었다. 1960년 5월 과도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1955년 1월 이후 5년 동안의 탈세를 80%이상을 정직하게 신고할 경우 벌금을 면제해준다'는 조건으로 자진신고 하도록 하였다.6월 20일까지 신고한 기업인들은 이병철(삼성그룹, 탈세기업 5개 업체, 탈세액 21억 4천만 환), 정재호(삼호그룹, 탈세기업 4개 업체, 탈세액 5억 6천만 환), 김상홍(삼양그룹, 탈세기업 1개 업체, 탈세액 1억 9천만 환), 설경동(대한그룹, 탈세기업 대한제당 1개, 탈세액 1억 2천만 환), 송영수(전주방직, 탈세액 2억 9천만 환), 백남일(태창방직, 탈세액 3억 1천만 환), 구인회(럭키화학, 탈세액 3천만환), 이정림(대한양회, 탈세액 600만환), 조성철(중앙산업, 탈세액 500만환)등 9명으로 탈세액은 총 33억 1천100만 환에 달했다.자진 신고를 하기는 했지만 이들에게는 국민적 비난이 쏟아졌다. 검찰에서도 이 재벌들 중 최소한 6개 재벌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7월말에 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 23명(기업 68개 업체)을 최종 확정했는데 설경동의 대한그룹은 5개 계열사가 포함됐다. 부정축재자 처벌작업은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에 승계됐다. 1961년 7월 21일에 부정축재 환수금이 최종 결정되었는데 이병철 24억 환, 정재호 10억 환, 이정림 5억 5천만 환, 이한원 4억 환, 설경동 3억 3천만 환 등이었다. 한 차례 시련을 겪었지만, 이후 설경동은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이를 통해 대한전선의 시설 확충에 주력한 결과, 대한전선은 국내 전선산업의 리더기업으로 거듭났다. 또한 텔레비전, 냉장고, 선풍기등 전자제품 생산을 해 당시 가전제품 판매율 2위까지 올라서면서, 대한그룹은 또다시 재계 전면에 화려하게 부상했다. 탈세의 시련이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경동은 70세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면서 지병이 생기고 말았다. 결국 사업 일체를 3남인 설원량을 비롯한 2세들에게 물려주었다. 설경동은 결국 1974년 1월 20일에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설경동은 사망에 앞서 대한그룹을 2세들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따른 계열사 분리 작업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950년대 말 재계서열 5위 이내에 랭크되었던 대한그룹의 주력은 대한방직, 대한산업, 대한전선, 대한제당 등이었다. 창업주 설경동은 1960년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장남 설원식에게, 1972년 대한전선과 대한제당을 3남 설원량(薛元亮)에게 각각 물려주었다. 1988년에 4남 설원봉이 대한제당을 가지고 독립했다.설경동의 기업 분가 작업은 여느 재벌가와는 달리 일찍 시작되었다. 창업주의 사망시점을 전후해서 2, 3세들에게 그룹을 분리하는 것이 통례인데 설경동은 경영자로서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나이 50대 후반부터 분할상속작업을 서둔 것이다. 1960년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데다 가정불화까지 겹치면서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서둘러 장남 설원식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설경동은 두 번 결혼해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원식과 원철 2남을 두었으며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3남 원량과 4남 원봉 등 2남2여를 두었다. 그는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부동산도 몰수당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대한그룹의 주력 계열사 중 하나였던 대한전선의 발전에 힘입어 대한그룹은 시련을 딛고 화려하게 떠오를 수 있었다. 사진은 1960년대 대한전선 시흥공장 모습. /대한전선 홈페이지 역사관

2017-12-1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8]대한그룹-2 재벌로 성장

해방·한국전 딛고 대한방직 설립유통→제조업 주력 전환 디딤돌1950년대말 전선·제당·증권 진출설경동은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 재산을 잃었으나, 전쟁 전에 소림광업(小林鑛業)으로부터 결제자금 대신 억지로 떠맡았던 대량의 중석을 기반으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소림광업은 1934년 일본인이 설립해 1940년 무렵에서는 강원도 홍천광산, 경기도 가평의 대금산광산, 함남 영원의 낭림광산, 경북 달성광산, 평남의 성천광산과 양덕광산 등을 거느린 자본금 2천500만원의 국내 최대 광산업체 중 하나였다.6·25전쟁으로 중석 수요는 급증했으나 생산이 부진해 중석 가격은 전쟁 전의 톤당 400달러에서 무려 10배 이상 증가한 4천 달러로 거래됐던 것이다. 더구나 전쟁 중 환율 또한 극히 불안해서 수출업자들은 엄청난 환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중석을 처분해서 만든 거금으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설경동은 중석을 매각해서 확보한 자금으로 1953년에 원조불 35만 달러를 대부받아 자본금 1억환의 대한방직을 설립하고 1954년부터 수원 세류동 36번지에서 방기 1만추로 조업을 개시했다. 1955년 8월에는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직기 300대를 배정받는 한편 대구 칠성동 20번지 군시공업(群是工業) 대구공장(조선방직 대구공장)을 7억 환에 불하받았다. 또한 같은 해에 또다시 운크라로부터 55만 달러를 배정받아 혼타면기(混打綿機)를 확충하는 한편 동아방직으로부터 방기 1만1천800추를 인수했다. 그 결과 대한산업은 1957년 현재 수원공장(방기 1만추), 대구공장(방기 3만2천576추, 직기 516대)의 대규모 섬유기업으로 부상했다. 기업경영 반세기만에 사업의 주력을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한 것이다.설경동은 이로써 국내 정상의 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당시 섬유산업은 정부가 최우선으로 육성하는 정책산업으로 장기저리의 정책자금 알선 및 세제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전형적인 '규모의 경제'산업으로 이 분야에서 발군의 성과를 낸 기업들이 최대 재벌로 급부상했다. 태창, 삼호, 삼성그룹 등이 상징적인 사례였다.설경동은 1955년 2월에는 적산기업인 조선전선(朝鮮電線) 시흥공장을 인수해서 자본금 300만 환의 대한전선을 설립하고 1957년부터 플라스틱 전력케이블을 생산했다. 대한전선은 해방 후에 최초로 설립된 종합전선업체였다. 한국의 전자통신 산업의 효시는 1885년 서울-인천 사이에 가설된 유선전화였다. 일제 통치기 이후부터는 산업근대화 추세에 따라 통신은 물론 전력선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면서 전선에 대한 수요가 점증했다.1956년에는 대동(大東)제당(대한제당의 전신)을 설립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사세확장을 고민하던 설경동은 설탕사업에 눈을 돌렸다. 1940년대 덴마크,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1인당 설탕 소비량이 100파운드를 넘어섰지만 50년대 중반 국내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1.97파운드에 불과했다. 설경동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 독일에서 기계를 발주하는 등 신규 사업에 진출했다. 설경동은 같은해 대동증권(大同證券)을 인수함으로써 1950년대 말에는 모기업인 대한산업 외에 대한전선, 원동흥업, 대한방직, 대한제당, 대동증권 등을 거느린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해 재계 서열 4위로 부상했다. 이 무렵에 재벌화했던 여타 기업가들처럼 적산기업 불하와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에 편승해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했던 것이다.해방과 한국전쟁 등 외부환경의 변화로 두 번의 좌절을 경험했던 설경동이 사업기반이 전혀 없었던 남한에서 짧은 기간에 정상의 재벌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오랜 사업경험과 사업가로서의 남다른 감각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해방 이후 제공된 귀속기업의 불하 내지는 막대한 원조물자의 사업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정치권에 유착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지근(至近)거리에 있어야만 했는데 그가 한창 재벌화를 도모하던 1954년부터 집권당인 자유당의 돈줄인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0년대 대한방직 수원공장 전경. /'방직협회 20년지' 수록

2017-12-1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7]대한그룹-1 사업과의 인연

적수공권서 함경도 굴지 미곡상동양수산 정어리사업으로 성장수원 성냥공장 남한 일대 석권1950~70년대에 재벌 서열 4위에 올랐던 대한그룹의 창업자 설경동(薛卿東·1901~1972)은 평안북도 철산에서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설흥업과 어머니 조성녀 사이에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설경동은 10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사해 무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일본의 오쿠라고등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학비조달의 어려움 등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설경동은 귀국 후 부령군청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어머니와 신의주에서 쌀장사를 시작해 10여년 만에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는 굴지의 미곡상으로 성장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일본인을 동업자로 끌어들여 삼광운송점과 삼광상회를 세워 운송업과 곡물, 해산물 위탁판매를 해서 부를 축적했다. 이후 설경동은 청진을 사업 근거지를 삼고 만주와 중국 등을 돌며 곡물류와 수산물 등을 수출했다. 어느 정도 사업자금을 확보한 후 설경동은 1936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어선 3척의 동양수산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일제는 부족한 유류(油類)를 대체하고자 동해안에서 엄청나게 잡히는 정어리의 지방(脂肪)을 추출해서 등유(燈油)로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동해안에는 정어리 잡이가 성행했던 것이다. 당시 동해안의 정어리시장 규모는 1천만원(현재가치 1조원)에 달했다. 동양수산은 정어리 잡이 및 가공사업으로 번성해서 해방 무렵에는 어선 70척에 비행기로 어군(魚群)을 탐지 할 정도의 대선단으로 성장했다.1945년 8·15해방 직후 북한에 공산당정부가 수립되면서 설경동은 친일파로 몰려 동양수산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제하에서 적수공권으로 사업을 시작해 약관의 나이에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는 대(大) 미곡상으로 성장했으나, 지주와 자본가 등을 용인하지 않는 북한에서의 사업을 계속하기가 더 이상 곤란했다. 더구나 친일파 실업인으로 몰리는 터여서 설경동은 재산을 처분하고 어선 여러 척을 끌고 월남하였다.월남 후 그는 어선과 부동산 등을 처분하여 확보한 자금으로 해산물 수출 회사인 '대한산업(大韓産業)'을 설립했다. 해방 전 그는 이미 중국과 만주 등을 돌며 무역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손쉽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적산가옥 및 토지 등을 헐값에 확보했다가 시세차익을 남기고 되파는 사업을 하는 원동흥업을 설립해서 부(富)를 축적했다."해방이 되자 세상은 나라를 되찾은 기쁨과 식민지체제가 무너지는 대혼란이 왔다. 특히 일본인이 버리고 간 재산은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였다. 이른바 적산(敵産)으로 불리던 토지는 말뚝만 박으면 임자요 집은 문패만 바꿔 달면 주인이었다." (이종재, '재벌이력서', 36면)약간의 여유자금에다 이재(理財)에 어느 정도 감만 있으면 '적산 비즈니스'는 단기간에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대박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설경동은 경기도 수원에 성냥공장을 설립해 남한 일대를 석권하는 성냥공장으로 발전시켰는데, 이 성냥공장도 적산기업으로 추정된다. 적수공권으로 월남했던 설경동은 특유의 이재 능력을 발휘해서 단기간에 남한에서도 손꼽히는 거부(巨富) 반열에 올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0년대 재벌 서열 4위에 올랐던 대한그룹의 창업자는 평안북도 철산 출신의 설경동이다. 사진은 1955년 대한전선 출범을 알리는 설경동. /대한전선 홈페이지

2017-12-0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6]대한유화(완)-5 대한유화로 슬림화

창업주 후손들 상속세로 '타격'정부 지분 처분 오너경영 강화HDPE 국내생산 24% 업계1위이정림은 1970년 6월에 일본 마루베니와 합작해서 울산공단 내에 세폴리프로필렌, 에틸렌 등을 생산하는 공장을 갖추고 석유화학제품 제조업체인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75년 국가기간산업체로 선정됐고, 1991년 온산공업단지에 원료 자급을 위한 나프타분해 공장을 준공했다. 하지만 유화업계 경쟁 격화로 1994년 법정관리를 신청한 이후 10여 년간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노출됐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90년 이정림이 사망하자 그의 후손들은 상속세 명목으로 현금 대신 대한유화 지분 32.7%를 정부에 제공하면서 공동창업자 이정호가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정부는 보유한 대한유화공업 지분 32.7%의 매각을 여러 번 추진했다. 대한유화 오너가의 지분이 40% 수준이어서 타 업체가 정부 지분을 인수하고 우호지분을 확보하면 단숨에 경영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동부와 효성이 대한유화 지분을 대거 사들이며 적대적 M&A설에 불을 지핀 것도 이런 배경이었다. 대한유화가 1994년에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도 오너일가 경영권 유지에 악재로 작용했다. 한 유화업계 관계자는 "1990년대 유화업계는 규모의 경제를 외치며 증설과 인수합병을 놓고 고민을 했다. 대한유화공업은 규모는 작지만 알짜 회사로 대기업들이 M&A 먹잇감으로 주로 노렸던 기업"이라고 밝혔다. 정부로부터 대한유화공사 지분을 넘겨받아 관리하던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는 2007년 국민연금H&Q 사모펀드에 지분 21%를 매각했다. 2대 주주로 등극한 국민연금H&Q가 우호주주로 이정호 명예회장 체제에 힘을 실어주면서 적대적 M&A도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2010년 국민연금H&Q가 투자금 회수를 위해 대한유화 지분매각을 추진하자 또다시 경영권 문제가 불거졌다. 롯데케미칼을 비롯해 다양한 업체가 국민연금H&Q의 지분 인수를 추진하며 경영권을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대한유화공업은 국민연금H&Q의 자사주 일부를 매입해 소각하면서 투자금 회수를 도왔다. 국민연금H&Q는 블록딜과 대한유화 자사주 매입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경영권을 오랜 기간 위협했던 정부 측 지분이 처리되자 오너가의 경영체제도 강화됐다. 유니펩과 KPIC코퍼레이션은 경영권 강화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경영권 트라우마'가 뇌리에 깊게 박힌 오너일가는 2000년대 이후 경영권을 다지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 결과 이정림 명예회장의 조카이며 대한유화공업 오너인 이순규 대한유화공업 회장이 경영권을 확실히 장악했다. 이순규의 개인회사인 KPIC코퍼레이션과 유니펩은 그 토대가 됐다. 대한유화는 2010년 9월 기준 온산공장의 에틸렌 생산능력이 47만t으로 국내 총 생산 능력의 6%를 차지하고 있다. 프로필렌 생산능력은 35만t으로, 국내 총 생산 능력의 6%를 차지하고 있다. 고밀도폴리에틸렌(HDPE)의 생산능력은 2010년 6월 기준 53만t으로, 국내 총 생산의 24%로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계열사로는 유니펩(주), (주)케이피아이씨코퍼레이션, (주)코리아에어텍, ATMAN PTE.LTD. 등이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대한유화의 주력 사업장인 울산광역시 온산공장 전경. /대한유화 홈페이지 제공

2017-11-2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5]대한유화-4 발전과 후퇴

크링커·레미콘 공장 잇단 완공PVC·선박회사 설립 승승장구 사채 부담 대한양회 매각 '충격'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개풍그룹은 서울은행 경영권까지 포기해야 했다.5·16쿠데타 이후 정부가 은행의 대주주 사금고화 및 전횡을 방지하고자 부정축재 환수 처리의 일환으로 부정축재자가 소유하는 일반은행의 주식을 전부 환수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정부와 재벌간의 정경유착의 공식적인 고리가 형성됐다. 또한 재벌기업들이 자기들만의 이익을 대변해줄 단체결성의 돌파구도 마련됐다.1962년 5·16 후 실업인 13명이 회동하여 경제재건촉진위원회를 발족했는데 이정림이 회장에 취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탄생 배경이다.이정림은 1963년 한국경제인연합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8월 3·1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삼성의 이병철과 함께 전경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공로자가 바로 이정림이었다. 한편, 대한양회는 1963년 7월 시멘트 대량소비지인 서울을 겨냥해 용산구 서빙고동 한강변에 연간 생산량 20만t 규모의 크링커 처리시설을 완공했다. 시멘트 완제품의 저장기한은 6개월인 반면에 90% 정도 완성된 자갈형 고체 시멘트인 크링커는 무기한 저장이 가능해 비수요기에 장기간 저장해 두었다가 성수기에 매각하기 위한 시설이었다.대한양회는 이후 레미콘 공장까지 세우고 레미콘 운반트럭으로 서울 일원에 생(生)콘크리트를 공급함으로써 또다시 히트를 쳤다.1967년에는 대한양회의 생산실적은 36만6천t으로 국내 시멘트생산량의 15%를 차지했는데, 그해에 생산시설 10만t을 늘려 연간 생산량을 48만t으로 확대하고 서울 서빙고의 크링커 분쇄공장도 시설을 배가했다.1965년에는 국내 최초의 PVC 공장인 공영화학공업(주)를 설립했으나 상당기간 동안 수익은 별로였다.1967년에는 국내 최대의 무역업체인 천우사의 전택보(全澤珤)와 대농그룹 창업자 박용학(朴龍學) 등과 공동 출자해서 자본금 1억5천만원의 대한선박(주)를 설립하고 해외차관자금으로 선박 등을 도입했다. 대한양회는 대한선박의 지분 3분의 1을 확보하고 국내 최대의 선박왕 꿈을 키웠다.그러나 그 와중에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1968년 상반기에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으로부터 7억원을 융자받으면서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된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한 상술로 시멘트업계에서 독주하던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는 데 대해 말들이 많았다. 폭리로 비난을 사던 시멘트업체들이 사채를 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느 회사든 타인자본의 절반은 사채로 충당한다는 것인데 잘 나가던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를 받은 때문에 말들이 더 많았다.특히 대한양회는 개풍그룹의 중심기업이자 이정림이 특히 아끼는 터여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항간에 대한양회는 생산규모가 업계 최소일 뿐 아니라 기계시설도 낡았으며 석회석도 좋은 것은 이미 다 파먹어 이참에 빚이나 잔뜩 내서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려 한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또한 개성상인들은 절대로 손해 보는 사업은 붙잡고 있지 않는다며 대한양회 매각설을 부채질 했다.대한양회는 1971년 8월 12일 원풍산업(이상순)으로 매각되면서 그간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원풍산업이 대한양회 자산 34억4천만원에서 은행부채 등 28억4천만원(외화 170만 달러 포함)을 차감한 6억원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조건이었다.이상순은 원풍산업 외에 천일곡산과 평화유지 대표이며 대한농산의 대주주로 이북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러나 대한양회는 1975년 1월에 쌍용양회에 재매각되어 쌍용양회 문경공장으로 재발족됐다. 대한양회의 연간 생산능력은 약 50만t이나 양회제조방식이 구식인 습식공정으로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생산비 급증을 못 견딘 때문으로 추정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0년대 승승장구하던 대한양회는 매각설이 나온 후 결국 1971년 원풍산업으로 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후 쌍용양회에 재매각돼 쌍용양회 문경공장이 된다. /경상북도 제공

2017-11-2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4]대한유화-3 부정축재자로 몰리다

'은행 민영화' 재벌판도에 영향단죄중 5·16 발발… 정부이관 처벌대신 석방 '산업역군 둔갑'대한양회는 6·25전쟁 후 복구사업으로 시멘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단시일 내에 경영이 정상화됐다. 이후 대한양회는 1960년대초 한일시멘트와 쌍용양회 등이 출현할 때까지 삼척시멘트의 후신인 동양시멘트와 국내 시멘트시장을 양분하며 초과이윤을 누렸다. 전후 부흥 및 경제개발사업에 따라 시멘트수요는 갈수록 크게 늘어났음에도 공급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1961년 말 우리나라의 시멘트 총생산능력은 72만t에 이르러 어느 정도 공급부족이 해소됐으나 여전히 시멘트는 웃돈을 주고도 못사는 인기상품이었다. 대한양회는 이양구가 경영하던 동양시멘트와 함께 국내 시멘트시장을 분할지배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국내유수의 재벌로 부상했다.한편 이정림은 산업자본의 금융자본화를 추진하게 되는데, 계기는 1959년 서울은행(현 하나은행)의 창립이었다. 서울은행은 지방은행으로 인가를 얻었는데 당시 대한양회공업이 이 은행의 주식 74%를 확보해서 오너경영인이 된 것이다. 삼성, 삼호, 동아상사(이한원) 등이 귀속은행주 민간불하에 편승해 금융자본화 했던 반면, 개풍그룹은 은행 신설에 편승해 목표했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일반은행의 민영화는 재계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던 신생기업들이 은행 민영화를 계기로 국내 정상의 재벌로 급부상한 것이다. 당시 은행을 불하받았던 재벌들은 모두 권력과 유착돼 있었다. 자유당독재 하에서 정경유착이 빚은 결과물이었다.개풍그룹 또한 금융재벌로 변신한 이래 활발한 다각화 사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9년 현재 개풍그룹은 모기업인 개풍상사를 비롯해 대한양회, 호양산업, 배아산업, 대한탄광, 삼화제철, 동방화재, 대한철강 등을 거느려 삼성, 삼호에 이어 재계 랭킹 3위의 대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높다 했던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개풍그룹은 시련의 계절을 맞는다. 과도정부는 자유당 정권하에서 권력을 배경 삼아 부당하게 치부한 자들에 대한 단죄작업에 착수했다. 정부는 7월말에 기업가 23명을 부정축재 기업인으로 지목했다. 삼성(이병철) 삼호(정재호) 개풍(이정림) 대한(설경동) 럭키(구인회) 동양(이양구) 극동(남궁련) 등 195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한 재벌기업의 총수들이 전부 포함됐다. 정부가 8월 31일에 기업가 24명, 46개 기업들에 대해 벌금과 추징금을 합산한 총 196억 환을 해당 기업들에 통고하고 일주일 이내에 납부하도록 하자 해당기업들이 반발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4월 10일에 정부는 '부정축재자처리법'을 마련하는 한편 5월 17일까지 2주간을 자수기간으로 설정하고 내부적으로 이들에 대한 처벌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자수기간 종료 하루전인 5월 16일에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이 작업은 군사정부에 이관됐다. 1961년 5월 28일 혁명군 특별수사대가 탈세혐의가 있는 기업인들을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연행했다. 이때 연행된 기업인은 정재호, 이정림, 설경동, 남궁련, 이용범, 조성철, 함창희, 최태섭, 박흥식 등이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 백남일, 이양구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5월 30일에는 이한원과 김지태가 구속됐다. 각 지방에서도 지방의 유력 기업인들에 대한 검거작업을 진행, 금호그룹 창업자 박인천도 구속됐으나 우여곡절 끝에 벌금형으로 변경했다. 불법으로 정권을 찬탈했던 군사정부는 국민적 지지 확보를 위해 과거청산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의 이주일(李周一) 위원장은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며 석방을 발표했다. 범법자들이 산업역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로써 1960년 4·19혁명이후 1년여 동안 지루하게 끌어오던 부정축재자 처리문제는 일단 종결됐다. 추징금은 30개 기업에 총 83억환이 고지됐는데 이중 이병철 24억환, 정재호 10억환, 이정림 5억5천만환, 이한원 4억환, 설경동 3억3천만환이었다. 그러나 12월 30일에 발표된 부정축재 환수액은 부정축재 위원회에서 최초로 발표한 부정축재액 726억 환의 5.8%에 불과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1-1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3]대한유화-2 재벌로 성장

이정림, 1953년 호양산업 설립年 30만달러 어치 '얼음' 판매국내최대 시멘트공장 불하받아6·25전쟁 이후 군납사업은 국내 사업가들에 노다지 광맥으로 통했다. 식품, 타이어, 피혁, 페인트, 비누, 면내의, 모포, 양말 등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군납사업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고 이들 산업은 군납과 관련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최성모(세기상사, 신동아그룹의 모체), 심상준(한금장유), 전중윤(삼양식품, 삼양라면의 모체) 등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으며 한국타이어와 흥아타이어, 진양화학, 대한잉크페인트도 군납혜택을 누렸다. 군납업이 새로운 이권사업으로 부상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집권당인 자유당의 정치인과 고위공무원, 고급장교 등에 경쟁적으로 연줄을 대느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인단비누와 지구유지가 연루된 탈모비누사건은 수뢰사건으로 번져 한동안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일부 기업가들은 주한미군 상대 비즈니스에 눈길을 돌렸는데 한진그룹 창업자인 조중훈의 일화는 유명하다. 6·25전쟁 전부터 트럭 한 대로 화물을 운반하던 조중훈은 1955년 여름 서울-인천간 국도 운행 중 부평근처에서 고장난 고급세단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국내 최대의 수송재벌이 됐다. 고장 난 차에 미군 고위층의 부인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그는 미국인 장교와의 교분을 넓히는데 주력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동생 조중건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형을 도왔는데 당시 조중훈이 집으로 초대한 미군은 연인원으로 5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현대건설(정주영)과 삼환기업(최종환) 등은 가장 먼저 미8군 토건업에 뛰어들어 재벌의 터전을 닦았다. 병영건설 물량도 많았지만 환차익은 더욱 매력이었다. "미군공사는 달러로 계약되는데 기성분을 받을 때쯤이면 환율이 엄청나게 올라있는 실정이었다. 공정환율의 변동추세를 보면 1950년 1천800원 대 1달러였던 것이 1951년에는 2천500원 대 1달러로, 1952년에는 6천원 대 1달러로 뛰었다."('현대건설35년사', 1982) 주한미군 납품사업은 비록 소액일지라도 국내 비즈니스보다 훨씬 매력 있는 사업 이었다. 이정림의 본격적인 기업가활동은 1953년 휴전 이후부터였는데 첫 신호는 1953년 환도 후 서울에서 호양산업(好洋産業)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비견되던 주한미군 사업이었다. 이정림은 미국 뉴욕에서 일본산 100톤짜리 제빙기계를 도입해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제빙공장을 세우고 미군 위생관의 물 검사를 거쳐 주한미군에 납품사업을 개시했다. 그 결과 호양산업은 연간 25만 달러 내지 30만 달러 어치의 얼음을 판매하는 등 호황을 누렸다. 이정림은 개풍상사와 호양산업을 경영하면서 재벌화의 길을 도모했다. 1955년에는 대한탄광(大韓炭鑛)을 설립하고 광업에 진출했고, 1956년 10월에 대한양회(大韓洋灰)를 설립했다. 대한양회 설립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한국전쟁 후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충주비료, 한국유리, 문경시멘트 등 3대 기간산업의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시멘트 생산은 국영인 삼척시멘트공사(동양시멘트 전신)가 유일했으나 그나마도 시설 노후로 생산성이 형편없었다. 1955년 국내 시멘트 소비는 18만9천t이나 생산량은 5만6천t으로 70%를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다. 정부는 운크라와 협의해서 판유리에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로 문경에 시멘트공장을 추진했다. 건설업체로는 덴마크의 스미스사가 선정됐고 1955년 11월에 850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경북 문경군 점촌읍 신기리에 퀼른 2기의 연산 24만t 공사를 착공 했는데 준공 직전인 1957년 9월에 대한양회에 불하됐다. 이정림은 이동준, 이회림(OCI그룹 창업자)과 친동생인 이정호(李庭鎬)등과 함께 문경시멘트를 1천300만 달러에 구입해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개풍그룹이 국내 최대의 시멘트공장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7년 대한양회에 불하된 문경시멘트는 당시 국내 최대의 시멘트 공장이었다. 현재는 대한양회를 인수한 쌍용양회의 문경공장이 됐으며, 근대문화유산 지정이 추진 중이다. /경상북도 제공

2017-11-06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2]대한유화-1 개풍상사 설립

창업자 이정림, 5년여 점원 생활21세때 도매상 성공해 사업토대광복후 고무신 총대리점권 확보국내 개성상인의 대표이자 개풍그룹의 창업자인 이정림(李庭林, 1913∼1990)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호는 송정(松汀)이다. 경기도 개성군 남본정(南本町) 뫼주골에서 이윤신(李允新)의 11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21년 송도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6세 때인 1929년에는 밀가루, 설탕, 고무신 등을 취급하는 도매상점인 송래상회(松來商會) 점원으로 일을 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이정림은 송래상회에서 5년 여 동안 점원 생활을 하는 동안 무차입 경영과 대신불약(大信不約)의 신뢰경영, 한 우물 경영 등으로 상징되는 '개성상인정신'과 접할 수 있었다. 개성상인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한반도의 상업을 주름잡았던 상인집단이다. 그들은 독특한 조직체계인 송방(松房)과 차인제(差人制), 그리고 서양의 복식부기보다 앞선 회계시스템인 사개치부법(四介置簿法)을 남겼다. 이정림은 송래상회 점원생활을 통해 개성상인의 후예로서 철저한 상도(商道)를 터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림은 21세 무렵인 1933년에 개성에서 '개성서(西)고무제품직물도매상'을 차려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1940년에는 경기도고무조합 이사로 재직하면서 주단포목 도매업도 겸했다. 당시 그는 고무신 장사를 하며 중앙상공의 지배인이던 김용완 경방 명예회장과도 친교를 맺었다. 이정림은 도매상 운영으로 큰 이익을 얻었는데 이것이 사업자금이 되었다고 회고했다.이정림은 1945년 광복 후에는 천일고무 이리공장에서 고무신 제조에 주력하였다. 그는 국내 최대의 고무신 메이커로 전남 여수에 위치한 천일(天一)고무의 김영준(金英俊, 1900~1948) 사장과 협상을 벌여 이 회사의 경기, 황해, 강원도 일대의 총대리점권을 확보했다. 김영준은 15세에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출발해 고무배합기술을 익혀 1926년에 부산에서 천일고무공장을 세워 고무신을 생산했는데 품질이 우수해 단기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선발업체이던 환대고무(丸大護謨)의 상표 도용 시비로 도산하고 말았다. 일본 신호(神戶)시 송야통(松野通) 2정목6의 환대고무가 한국에서 고무신의 생산판매를 목적으로 1926년 4월 1일에 부산부(釜山府) 대창정(大倉町) 10번지(현 부산 중구 중앙동 옛 부산역 인근)에서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한 한국 굴지의 고무신 메이커였다. 김영준은 1935년에 전남 여수에서 천일고무를 재설립해서 불과 3년 만에 전국을 석권하는 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이정림은 김영준 사장과의 각별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영준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반란 주체인 좌익계 군인들에 의해 부르주아 기업인으로 지목돼 처형 되면서 관계가 막을 내린다.이정림은 1946년에 서울에서 무역업체인 이합상회(二合商會)를 개업했다. 1949년에는 고향 후배이자 OCI그룹의 창업자인 이회림(李會林, 1917~2007)을 영입해 이합상회를 개풍상사(開豊商社)로 변경하고 정식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1950년 6·25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해 텅스텐의 일종인 창연(蒼鉛)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활필수품을 수입해 부를 축적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3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1]삼호방직(완)-6 몰락

조선방직·제일화재 처분 '쇠락'1972년 8·3조치 '사채' 악재로정재호 업무상배임 구속 '쐐기'삼호는 1960년대 이후에도 착실하게 다각화작업을 전개한다. 1966년 4월에는 의양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해서 부수사업으로 독립신문기념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경북염색가공(주)를, 1971년에는 제주축산(주), 삼양흥업(주) 등을 각각 설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호그룹은 하향길로 접어드는데 결정적 신호는 1967년 조선방직 매각과 1968년 제일화재의 처분이었다.1968년 4월에 조선방직은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직할시에 인수됐다. 화학섬유의 등장에다 방만한 경영, 기계의 노후화 등이 겹치면서 1969년 7월 부산직할시가 법인 청산 절차를 밟아 조선방직을 해산시켰다. 제일화재해상보험은 1968년 9월에 한화그룹에 넘겨졌다. 1967년에 정재호는 33세의 장남 규진(奎鎭)을 기획부장에 임명해 경영난을 수습하려 했다. 규진은 삼호그룹의 재기를 위해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8년 5월에는 대전방직과 삼호방직의 소유권문제로 법적 소송사건이 불거졌다. 정재호의 친동생이자 창업동지이기도 했던 정재찬(鄭載璨)이 정재호를 상대로 대구지방법원에 삼호방직의 주권인도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69년 초에는 정재호의 동업자이자 오른팔이기도 했던 정상희(鄭相熙) 삼호무역 회장이 부하들과 함께 경쟁업체인 삼성으로 이직했다. 제3대(1954~58)와 5대(1960~61)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정상희는 현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의 친할아버지다. 삼호는 경기불황이 겹치고 업종전환에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1960년대 말에 쇠락했다. 삼호 몰락의 결정적 계기는 1972년 8월 3일 0시를 기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소위 '8·3조치')이었다. '8·3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기업들은 8월 9일까지 전 사채를 신고하고 신고된 사채는 월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의 채권, 채무관계로 조정한다. 2천억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기업의 단기대출금 중 30%를 대환(代煥)한다. 신용보증제도를 확충한다. 기업의 투자를 위해 투자세액을 공제한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법정교부금을 폐지한다.'마감일인 9일까지 총 3천456억 원의 사채가 신고됐다. 3만9천676개 업체가 월평균이자 3.84%로 이 같은 사채를 지고 있었다. 또한 신고결과 1973년 현재 81개 업체, 73명의 기업인들이 기업자금을 빼돌려 사채놀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기업주들이 자기 기업에 사채놀이를 하는 이른바 '위장사채'만도 총 신고금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137억 원에 달했다. 이 중에는 사채로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아우성치던 유명 기업인들도 있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주는 기업의 오너경영인들까지 위장사채업자에 포함된 것을 보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급기야 1973년 4월, 81개 업체 73명의 반사회적 기업인 명단이 발표됐다. 삼호방직 정재호, 동해실업 강숙현, 성광무역 김정만, 한국철강 신영술, 대성산업 조영일, 동양고무 현수창 등이었다. 이들에게는 향후 5년 간 금융지원 중단, 당사자와 연대보증인들에 대한 세무조사 및 검찰 조사가 진행됐다. 은행들은 20개 기업 14명의 기업인을 횡령, 배임, 수표부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삼호방직 정재호, 연세개발 박용운, 광성공업 고정훈, 동해실업 강숙현, 한국알미늄 장영봉 등이었다. 강숙현, 정규성, 장인섭 등은 업무상횡령으로, 장영봉은 배임과 사문서위조로, 최경남은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나머지는 수배됐다. 철퇴를 맞은 부실기업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삼호그룹의 정재호였다. 1974년 8월 1일 서울지검 경제부의 이한동 검사는 반사회기업인으로 기소된 삼호의 정재호에 업무상 배임횡령죄를 적용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1970년 8월부터 그해 10월 사이에 삼호방직에서 1억원을 인출, 주식으로 값어치가 전혀 없는 삼호공업의 주식을 사들임으로써 삼호방직에 1억원 상당의 손해를 입혔으며 삼호방직의 회사공금 1천300만원을 임의로 인출해서 사생활에 사용한 혐의였다. 정재호는 1973년 8월 8일에 검찰에 구속되었다가 10월 12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60년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던 왕년의 최고재벌 정재호에게 반사회적 기업인이라는 낙인은 최후의 사망선고였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2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0]삼호방직-5 도약, 그리고 위기

은행간 '상호출자' 줄줄이 행운동화통신 설립, 업계 리더 성장군사정부가 부정축재자로 지목정재호가 제일은행을 소유할 당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은행 상호 간 주식을 보유한 '상호출자'였다. 은행들끼리 서로 지분을 소유한 상호주(相互株)는 신탁은행 64.4%, 저축은행 56.5%, 조흥은행 41.0%, 상업은행 35.4%, 상호은행 24.8%, 조선은행 20.3%, 식산은행 14.1%에 달했으며, 특히 환금은행은 자본금 전액이 상호주였다. 일제하의 한국인 지분을 이어받은 민간소유주는 조흥은행 53.7%, 상업은행 35.6% 등으로, 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은행들의 지분 중 상호출자가 아닌 경우는 전체 주식의 10%도 안됐다. 따라서 시중은행 하나를 불하받을 경우 상호출자로 연결된 여타 은행들까지 줄줄이 낚을 수 있는 행운이 따랐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이런 매카니즘을 이용해 최대의 금융자본으로 변신했던 것이다.한편 언론에도 뜻이 있었던 정재호는 1954년 12월에 동화통신(주)를 설립하고 1956년 9월 1일에 창간호를 발행해 보도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4월 미국 AP통신과 수신계약을 맺은 것을 비롯해서 프랑스의 AFP(1956년 9월), 영국 로이터(1960년 6월) 등 세계 유수의 통신사와도 계약을 맺었다. 1957년 2월부터는 영문경제판(英文經濟版)을, 1959년 2월에는 월간화보 '동화(同和)그라프'를 각각 발간했다. 동화통신은 이후 합동통신, 동양통신과 함께 국내 통신업계의 리더기업으로 부상했다.정재호는 또한 제일화재, 삼양(三洋)흥업, 유창(裕昌)물산, 원양수산 등을 잇따라 설립해서 1950년대말에는 모기업인 삼호방직을 비롯해 제일은행, 대전방직, 삼호무역, 조선방직, 동화통신, 삼호공업, 경북메리야스염색가공, 삼양흥업, 제일화재보험, 원양수산, 대한가스 등을 거느리게 됐다. 이로써 삼성그룹에 이에 재계순위 2위의 금융자본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이처럼 대부분의 재벌들이 6·25전쟁으로 인해 파산당하는 비운을 겪은 것과 달리, 삼호는 전쟁 때문에 최대 재벌로 도약하는 행운을 얻었다. 삼호그룹은 결국 한국전쟁이 만들어준 재벌이었던 것이다. 삼호가 짧은 기간 내에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당시 급부상한 재벌집단처럼 정재호 또한 집권당인 자유당과 유착한 것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과 더불어 혜성처럼 등장해 1950년대 말 삼성그룹과 함께 국내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던 삼호그룹은 1960년에 접어들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정재호가 1960년 4·19혁명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것이다. 당시 그가 신고한 정치자금 제공액은 85억환(현재 가치 약 860억여원)으로 부정축재자들 중 1위를 기록했다. 이 금액은 삼호그룹이 은행권으로부터 대출받은 융자총액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엄청났다. 당시 정치자금은 정치권으로부터의 비호 내지 정부 제공의 각종 경제적 이권 수수에 대한 반대급부이기도 했다. 삼호는 국내 최정상의 기업집단을 형성한 만큼 이승만 정권과의 유착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군사정부는 1961년 6월 14일 부정축재에 대한 행정상, 형사상 특별처리를 목적으로 한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한다. 휴전직후인 1953년 7월 1일부터 쿠데타 직전인 1961년 5월 15일까지의 부정행위를 대상으로 했다. 국가 공직 또는 정당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거나 거짓 혹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부정축재자를 부정공무원, 부정이득자, 학원부정축재자로 구분하였다.8월 2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이병철 240억환, 정재호 100억환 등 총 831억2천400만환 등 기업주 58명의 부정축재 환수액을 통고했다. 8월 13일에 위원회는 최종으로 부정축재 기업인 27명에게 환수액 477억1천만환으로 처벌대상과 환수금액을 대폭 줄여주었다. 당시 정재호는 36억환을 환수 당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6년 당시 삼호방직 광고 /'방협20년지' 수록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16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9]삼호방직-4 최대의 금융콘체른 완성

日 소유 은행 정부수립후 국고로민간불하 시도 6차례 공매 유찰1957년 계좌수 제한철폐후 낙찰정재호는 1957년 정부가 시중은행 주식을 민간에 불하할 때에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의 불하에 응찰해 제일은행의 소유주가 되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남북분단으로 이북에 있던 각 은행의 지점과 자산들은 소련 군정하에서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에 통합됐다. 남한에는 일본계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식산은행, 저축은행, 신탁회사, 무진회사, 금융조합연합회 등과 민족계 은행인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금융기관들은 과거 수많은 일본인 기업체들에 빌려줬던 막대한 규모의 대출금 전액이 회수 불가의 부실채권화 됐을 뿐 아니라 일본인 소유업체들이 발행한 회사채와 주식 또한 휴지 조각이 돼 빈껍데기 그 자체였다.1946년 미군정청은 특수은행인 저축은행을 일반은행으로 전환하고, 신탁회사를 신탁은행으로, 무진회사를 상호은행으로 각각 상호를 변경했다. 1947년에는 은행지점 총수 222곳의 30%와 금융조합 401곳의 60%를 적자경영을 이유로 폐쇄했다.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각 은행 주식은 전부 미군정에 환수되었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국고(國庫)로 귀속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귀속주(歸屬株)다.이승만 대통령은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체제의 우수성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휴전 이후 일련의 경제정책은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전쟁의 상처도 회복되고 전후 부흥정책에 힘입어 순탄한 경제성장을 지속하자 1950년 벽두부터 정부 보유의 은행주(銀行株) 민간불하를 단행했다. 시중은행들의 내부사정 때문이기도 했는데, 시중은행들은 해방 전 일본기업체들에 제공한 대출금 25억환(현재 가치 약 22억원)이 전부 부실채권화한 것이다. 또한 해방으로 인해 약 291억환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및 주식 보유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수입마저 끊어진 터에 해방 후 저축률 둔화와 악성 인플레이션 등까지 겹쳐 은행들이 파국상황이었던 것이다.1950년 5월 5일 정부는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을 제정해서 금융자율화와 조흥은행, 상업은행, 상공은행, 저축은행, 신탁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의 정부귀속주 민간불하를 결정했다. 예금자보호는 물론 은행의 자주화 및 건전화란 신은행법의 기본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귀속주식의 처분에 따르는 기술상의 애로와 증자, 자산재평가문제 등으로 은행법은 공포 즉시 시행되지 못했다. 더구나 시중은행을 민간에 불하할 경우 정부의 국민경제 장악력 약화 및 재벌들의 금융지배 우려 때문에 시중은행 불하건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1954년 6월 이중재(李重宰)와 김영찬(金永燦)이 각각 재무부장관과 차관이 되면서 지지부진했던 시중은행 민간 불하 사업이 본격화됐다. 민영화 작업 추진과정에서 정부는 자본 및 경영상태가 가장 취약한 신탁은행과 상공은행을 합병해서 1954년 10월 1일부로 흥업은행(한일은행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로써 당시의 시중은행은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등 4개로 축소되었다. 정부는 재무부와 관재청,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은행주불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54년 10월 14일에 은행 귀속주 불하 요강을 확정했는데 주요 내용은 △연고 및 우선권을 배제하기 위한 공매방식에 의한 처리 △독과점방지를 위해 불하 단위주 수를 일정 계좌 수로 분할하여 응찰 △불하 대금의 일시지급 △낙찰액은 정부 사정가격 이상으로 한다 △2년간 명의서환(名義書換)을 금지한다 등이었다. 1954년부터 추진된 귀속주의 공매입찰은 무려 여섯 차례나 유찰되었다. 시중은행 운영의 민주화를 목적으로 1인당 입찰 계좌 수 및 양도를 제한함에 따른 대자본들의 참여가 원천 봉쇄된 때문이었다. 이후 정부는 귀속주 불하 작업을 조속히 매듭짓고자 소수지배가 되더라도 입찰 계좌 수 제한을 철폐하기로 방침을 변경해 1957년 8월에 제7차 공매에 들었다. 삼성, 삼호, 개풍, 조선제분 등이 불하 경쟁에 참여했다. 정재호는 제일은행의 귀속주식을 불하받아 실질소유주로 등장하면서 은행융자 규모 면에서 약 84억7천만환을 기록하는 등 국내재벌 중 단연 1위를 기록했다. 시중은행 중 정치권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정치재벌 정재호가 지배하는 제일은행이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09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8]삼호방직-3 삼호그룹으로 도약

귀속재산인 면방직 민간 불하때정재호 사장은 '대전방직' 받아최대 규모 조선방직까지 '인수'한국전쟁 무렵에 귀속재산인 면방직업체들의 민간 불하가 단행됐다. 1951년에는 전남방직(광주공장), 대전방직, 동양방직(인천 학익공장) 등이, 1952년에는 동양방직(인천공장)과 전주견모(絹毛)방직이, 1953년에는 제일방직과 대아방직이, 1955년에는 동양방적(인천공장)과 조선방직(부산, 대구공장) 등이 각각 민간에 불하됐다. 이 업체들은 당시 국내 굴지의 방직업체들로써 이들 중 한 업체라도 불하를 받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정재호는 대전시 유천동 10번지에 있는 대전방직공사(풍한방직의 전신)를 불하받았다. 1942년 12월에 조선오우(朝鮮吳羽)방직㈜로 설립된 것을 1946년에 미군정이 귀속기업으로 접수해서 1949년에 조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1950년 7월 6·25전쟁으로 방기 전부와 건물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된 채 1951년 10월에 12억 5천만 원에 매각처분됐다. 1953년 3월에 자본금 500만환의 대전방직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정재호가 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운크라(UNKRA) 원조자금 94만 1천967 달러로 방기 1만 8천480 추를 배정받았다.1954년 12월에 방기 2만 3천856 추를 설치 완료하고 조업을 개시했다. 1956년 7월에는 자가발전기 3대를 설치해 전력부족으로 인한 조업중단에 대비했으며, 1957년 1월에는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직기 600대를 설치했다. 생산능력이 방기 2만 9천456추와 직기 600대로 늘고 여공(女工)수만 2천여 명에 이르는 전국 굴지의 메이커로 부상했다. 대전방직은 1960년대에는 국내 3대 방적기업의 하나로 성장했다.정재호는 6·25전쟁특수로 확보한 자금으로 1956년에는 최대 규모의 면방업체인 조선방직 부산공장까지 불하받아 국내 최대의 면방직 기업집단을 완성했다. 조선방직은 1917년 11월 10일 부산시 동구 범일동 700번지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된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면방직업체로 1922년부터 조업을 개시했다. 1935년 8월에는 부산공장에 인견(人絹) 직기 319대를 갖춘 인견공장 건설에 착수해 인견포(人絹布)까지 생산했으며 또한 같은 해에 조선 최초의 기계제 염색공장을 건설했다.해방 이후 귀속재산 가운데 최대의 기업이었던 조선방직은 방적기 4만720추, 연사기 6천760추, 면직기 1천232대, 인견 직기 319대, 모포 직기 25대 등의 설비와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한 조면공장과 대구 메리야스공장도 보유했다. 방적, 염색, 나염, 피복에 이르는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종업원 3천200여명을 거느린 부산 최대의 공장이었다.조선방직은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화해서 1946년 5월에 한일실업공사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47년 12월에는 북한의 단전조치에 대비한 자가발전시설 복구공사를 완료하고 주야 2교대 근무체제로 전환했다. 1949년 2월에는 상공부 지시로 대구메리야스공장을 분리하고 그해 11월에 대구방적공사(구 군시(郡是)방적회사)를 통합했다.1955년 2월에는 부산공장을 정부로부터 임대계약해 그해 8월에 조선방직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알려진 강일매(姜一邁)가 사장에 취임했다. 10월에는 조선방직 부산공장을 정부로부터 35억 환에 불하받았다. 1957년 1월 기준 방기 5만304추, 직기 1천693대로 국내 최대 규모의 섬유메이커였다.당초 조선방직은 부산지역의 대표 기업인이자 한국생사그룹의 창업자인 김지태(金智泰)가 오래전부터 점을 찍어두었었다. 김지태는 일제말에 혜성처럼 등장한 청년실업가로 해방과 함께 미군정 관재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정치와 사업을 겸했던 부산지역의 유력인사였다. 그는 1948년부터 조선방직 이사직을 겸하고 있어 1951년 3월의 조선방직 민간불하에서 최고 유력자였다. 그런데 불하 3일을 앞둔 3월 16일에 '조방낙면 사건'으로 조선방직과의 인연이 끝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역사가 뒤바뀐 것이다. 강일매는 1955년 10월 29일에 조선방직을 35억환(약 550억원)에 불하받았다. 연고권자에 우선 불하한다는 귀속재산처리법도 반공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959년 10월 강일매가 사망하면서 조선방직은 삼호방직(정재호)에 인수됐다. 정재호는 손수 창업한 삼호방직 외에 적산인 조선방직과 대전방직까지 확보해 국내 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로 도약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0년대 조선방직 부산공장. /부산박물관 제공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9-1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7]삼호방직-2 본격적인 도약

해방 후 면직물 국내수요 급증공업사·무역 설립 사업 다각화6·25때 대구 위치 덕 전시특수지방의 영세기업에 불과했던 삼호가 본격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다. 해방과 함께 면직물의 국내수요가 급증한 덕택이었다. 의식주를 철저히 통제한 일제말 전시(戰時) 통제경제에서 풀려난 데다 해외 동포들의 국내 귀환 숫자가 대폭 증가했으나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해방에 따른 혼란과 기술 및 원료부족, 북한의 단전(斷電)에 따른 에너지난 등으로 생산활동이 크게 차질을 빚는 등 공급애로 때문에 면직공업은 당시 제조업 중에서 가장 호황업종이었다.1947년부터는 미국산 원면이 본격적으로 수입됐고 서울 당인리와 부산 화력발전소 건설에 따른 전력난 해소 등에 힘입어 1949년 후반부터는 면직물 생산이 호조를 보였다. 설비도 1945년의 25만3천848추에서 1950년 5월에는 31만6천572추로 증가했고, 직기수도 해방이전 수준인 9천75대로 늘었다. 해방 직전 일본의 제조 대기업들이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피할 목적으로 값나가는 기계들을 앞다퉈 한국으로 이전했는데, 해방과 함께 미군정에서 이들을 전부 귀속재산화 했다가 각 공장에 재할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정재호의 기업가 활동도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그는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이 1948년 9월 자본금 1억원(圓·현재 가치 16억여원)의 금성방직(주)를 설립할 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재호는 김성곤과 같은 경북 출신에다 나이도 동갑일 뿐 아니라 나란히 대구에서 사업활동을 영위해온 터에 김성곤이 새로 방직업에 진출하면서 관련 전문가들의 조력이 필요했던 때문으로 추정된다.또한 정재호는 1946년에 철공장과 제재공장을 병설해 삼호공업사로 재발족함은 물론 그해에 삼호무역(주)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업을 다각화 했다. 1948년 3월에는 대구 원대동 1070번지에 자본금 3억원의 삼호방직(三頀紡織)을 설립했다. 그해 11월에 방기(紡機) 2천800추를 설치하고 조업을 개시했으며, 1950년 12월에는 방기 3천200추를 설치해서 생산능력이 총 6천추로 확대됐다. 1951년 12월에는 자본금을 10억원으로 증자하고 삼호방직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52년 3월에는 방기 1천200추를 증설해서 점차 전국 규모의 섬유업체로 부상했다. 당시 삼호방직의 면사생산량은 1950년의 19만6천797근에서 1954년에는 515만8천518근으로 5년만에 무려 26배로 급신장했다. 설립 이듬해에 발발한 6·25전쟁이 무명의 삼호방직을 전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운 것이다.해방 당시 38선 이북에는 소규모의 면방직 업체들만 있었을 뿐 대부분은 남한에 소재했는데 경성방직을 제외한 공장들은 전부 귀속업체들이었다. 또한 전쟁에 따른 포격과 징발, 약탈 등의 영향도 컸다. "면방직 공업 시설이 입은 피해는 실로 컸으니 당시의 영남지역 소재 조선방직의 부산·대구공장과 삼호방직의 대구공장 등 3개 공장을 제외하고는 경중의 차이는 있었으나 전 면방직공장들이 피해를 면치 못했다. 이들의 피해는 전 면방직 시설의 70%에 달했다."(조선방직협회 '방협십년지', 1957년)가장 대중성이 높은 면직물인 광목 1필(疋)의 가격은 1950년 12월 기준 6만3천원에서 다음해 12월에는 17만5천원으로 뛰었다. 극심한 생산 차질에 천정부지의 물가앙등이 가세한 결과였다. 전국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전쟁으로 초토화됐음에도 삼호방직은 대구에 위치한 덕에 전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삼호는 전쟁에 따른 전국적인 생산차질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삼호방직이 전시특수를 누릴 수밖에 없었던 구조였다.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UN한국재건단(UNKRA)이 복구작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UNKRA는 1960년까지 총 1억2천2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쏟아 부었다. 정부는 장기부흥계획에 의거, 방직시설 확충을 위해 1953년까지 총 591만647달러의 원조불을 14개 방직기업들에 대부해주었는데 당시 삼호는 47만1천 달러의 특혜 대부와 UNKRA 등의 지원을 받아 시설확충에 사용했다. 삼호방직은 1957년에는 직기 300대와 방기 3만1천600추의 대규모의 섬유업체로 거듭 났다. 당시 삼호방직에서는 '태백산' 상표의 광목과 '종표' 타래실, '무궁화표' 고급면사 등을 생산했다. 경영진으로는 사장 정재호, 부사장은 정재호의 친동생인 정재찬(鄭載瓚)과 창업 동지 정상희(鄭商熙) 등이 맡았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0년대 삼호방직 공장 전경과 사장 정재호. /'방협20년지' 수록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9-1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6]삼호방직-1 삼호막대소 운영

양말행상 3년 절약 동생과 창업원료인 '섬유 비즈니스화' 주목25세때 일본행 공업학교 유학도삼호그룹 창업자 정재호(鄭載頀, 1913~2006)는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속칭 삼강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학교 졸업 후 16세에 돈을 벌 목적으로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 모진 고생 후 양말장사로 겨우 연명하면서 번 돈을 쓰지 않고 절약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3년여의 양말 행상으로 모은 돈으로 친동생인 정재찬과 함께 1932년 6월 서문시장 모퉁이인 대명동 149에서 양말직조기 1대와 양말목 제조기 1대로 소규모의 양말공장인 삼호막대소를 설립했다. 삼호그룹의 모체가 탄생한 것이다.한국에 처음으로 내의, 장갑, 타올, 양말 등 메리야스 제품이 들어온 것은 1780년대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한복생활문화 때문에 수요가 부진했다. 1906년에 포목상인 김기호(金基浩)가 평양 계리에서 일본으로부터 직기 4대를 수입해 생산을 개시했다. 국내 최초의 양말제조 공장이었다. 자수성가형 기업가 손창윤(孫昌潤,1891~?)은 평양 기독교계의 거물 실업인 박치록이 경영난으로 1907년에 폐업한 양말공장을 인수해서 1909년에 삼공(三公)양말공장으로 재발족했다. 사업이 번성하면서 내의까지 생산함은 물론 양말기계 제작을 목적으로 삼공철공소도 설립했다. 1920년에는 삼공상회를 설립하는 등 수직적 다각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1922년 4월에 공신합명회사(共新合名會社), 대동(大同) 등 평양의 11개 양말공장을 규합해서 양말생산조합을 결성하고 자신은 초대 조합장이 되었다. 삼공양말공장은 1935년에 양말직조 자동직기 110대, 수동직기 500대와 내의, 장갑, 타올, 목도리를 짜는 기계설비에다 850여 남녀 직공들이 근무했는데 삼공양말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기가 높은 탓에 만주에까지 수출할 정도였다.서울에도 1909년 이후부터 양말공장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1909년 9월의 '황성신문'에는 서울 아현동의 양말제조판매소 주인 서상팔 명의의 '우리나라에서 제조하는 양말'과 '좋은 재료로 싼값에 파니 동포들은 속히 구매하라'는 내용의 광고가 등장한다. 그해 10월에는 중곡염직공작소 주인 김덕창이 '업무 대확장'이란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고 '삼합사(三合)양말을 10전에, 모자는 40~50전에 판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주문을 하면 소포로 부쳐준다고 했다. 김덕창은 양대호 등과 함께 일제하의 서울 염직업계의 리더 기업가였다. 1920년대부터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다수의 양말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양말산업은 내의 생산 공업, 고무신 공업과 함께 일제하의 대표적인 민족산업으로 부상했다. 최봉인(崔奉因)은 대구에서 최초로 자동양말기계를 도입한 경북 메리야스공업 선구자였으며 1930년대 말에는 대구의 농진상회가 50여명의 직공을 거느린 전국유수의 양말공장으로 성장했다.양말을 짜는 데는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지 않았다. 미숙련자가 며칠 동안만 수련 받으면 기계조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적은 자본으로 직기 한두 대만 갖추면 얼마든지 창업도 가능했다. 초창기 절대다수의 양말공장 경영자들은 상점의 사환 출신으로 이들은 근검절약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직기 한두 대를 갖춘 생계형 오너경영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상리(商利)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신의를 지키고 계산에도 밝았다. 정재호도 초창기 국내 양말산업을 이끌었던 선구자들을 롤 모델로 해서 소규모 양말공장을 창업했던 것이다.삼호막대소공장은 메리야스, 양말 등을 생산하면서 품질향상에 주력한 덕분에 성장했다. 그 와중에서 정재호는 양말의 원료인 섬유의 비즈니스화에 주목했다. 섬유가 생필품으로서 시장개척이 어느 업종보다 용이할 뿐 아니라 잘만 하면 국내최고의 기업가로 성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섬유공업에 충실하고자 25세에 일본에 건너가 무장야(武藏野)공업학교에서 섬유공업에 대해 공부했다. 장차 정재호가 국내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로 도약하기위한 준비과정이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9-0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5]태창그룹(완)-3 과유불급

공장 헐값불하·홍삼 독점판매등이승만 비호에 국내 최초 재벌로4·19이후 군사정부 환수로 파산백사장 내외는 이승만 대통령이 좋아하는 약밥을 해가지고 들어와 경무대에서 오찬을 접대 받았다. 식사가 끝난 후 이 대통령은 그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백사장, 그동안 도와주어 고마워. 내가 돈이 있으면 갚아야겠으나 나에게 먹고살라고 준 것이 아니고 국가일 하라고 준 것이니 고맙게 받겠어. 백사장도 국리민복을 위해 일하면 도와주겠어." 백씨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다. 후에 달러라면 그렇게도 벌벌 떨던 이 대통령이 일본 기계를 들여와 태창방직을 확장하도록 허가해 준 것은 이 인연 때문이었다. (윤석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경무대4계 2', 중앙일보사, 1973)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은 74세 고령으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무대에 입주했다. 윤석오는 191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해 1931년부터 중국의 상해(上海) 등지에서 유학하다 귀국해 해방 후 정부수립 때까지 이승만의 개인비서로 근무했다.이후 이 대통령은 국내 최대의 면방직공장이던 고려방직 영등포공장을 백낙승이 헐값에 불하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공장의 모체는 일본 굴지의 방적업체인 종연(鍾淵)공업주식회사가 1935년 7월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00에 세운 경성공장이다. 방기 4만9천720추, 직기 1천525대를 갖추고 1936년 10월부터 조업에 착수했는데 1945년 10월에 미 군정에 귀속재산으로 접수되어 조선실업공사 서울공장으로 운영되다 1947년 7월에 광주, 전주, 춘천, 대전, 영등포 등 5개 공장을 묶어 고려방직공사 영등포공장(후에 방림방적이 됨)으로 전환했다. 백낙승은 해방 직후에 친일기업인으로 지목되어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내 석방됐다. 이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비호 때문으로 추정된다.1953년 5월에 태창방직은 정부 보유불 500만 달러를 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일본에서 최신의 기계를 도입해서 시설을 확장했다. 1955년에는 고려방직을 임대경영 하기로 정부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1956년 1월에는 고려방직을 1억7천만환에 불하받았다. 정부는 국가전매사업의 하나인 홍삼판매독점권을 태창그룹 계열사인 대한문화선전사(大韓文化宣傳社)에 넘겼으며 귀속재산인 (주)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 관리권까지 백낙승에 제공했다. 1937년 6월 4일에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는 인천 만석동 일대의 갯벌을 매립해 세운 대규모 공장이었는데 1941년 당시 자본금 600만원(375만원 불입)에 5천여 명이 근무했다. 설립 초기에는 민수용 광산기계에서 육군 포탄강(砲彈鋼)과 시추기, 해군용 선박엔진 등을 생산하다 1943년에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잠수함 건조 명령을 받아 조선소로 전환했다.태창방직은 1950년 현재 태창공업, 태창직물, 태창무역, 해전직물(海田織物), 대한문화선전사, 조선기계 등의 계열기업군을 거느림으로써 '국내최초의 재벌'이라 불렸다. 재벌이란 기업가들이 뇌물수수를 전제로 권력층 혹은 관료 등과 유착해서 독과점이윤 확보 내지 재정금융상의 혜택을 누리는 정상배(政商輩)들을 지칭했다. 백낙승은 전형적인 정경유착형 기업가였다."백낙승은 정치적인 바람을 너무나 거세게 일으켰다. 6·25전쟁 이후 파괴된 공장을 복구할 때 지나친 특혜가 말썽이 되었고, 그 후에도 삼백파동, 연계자금사건 등 말썽이 있을 때마다 단골손님으로 등장했다"(박병윤 '재벌과 정치')1956년에 백낙승이 사망하면서 태창그룹의 경영권은 장남인 백남일에 넘겨졌으나 이후 경영난으로 고전하다 1961년 4·19혁명 이후에 태창재벌은 파산했다. 1950년대 후반 경제불황에 따른 내수위축에다 신제품인 합성섬유의 등장으로 기존의 자연섬유 업계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정국은 설상가상이었을 것이다.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해 12억여 원의 환수액을 통고받자 백씨 일가는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일본으로 귀화했다. 부정축재조사단이 결정한 국고 환수액은 125억4천771만5천133환으로 백남일 보유자산의 7배에 달했다. 국내 최고(最古)의 기업이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태창그룹은 출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정부와의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다. 창업자 백윤수는 조선조의 어용상인인 시전(市廛)상인으로 창업의 터전을 닦았고, 2세 경영인 백낙승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한 인텔리 기업가로서 일제하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와 밀월 관계를 통해 치부했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는 이승만정부에 유착해 초과이윤을 누렸다. 시장경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할 경우 대부분의 경제적 이권이 권력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어 정경유착을 통한 이윤추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태창의 경우는 국민들이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전형적인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사례였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2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4]태창그룹-2 학습효과가 만든 태창재벌

권력층 접근 부 축적 '친일기업'조선총독부, 자본·리스크 뒷배해방후 이승만 줄대 치부 모색1943년 당시 백낙승 명의의 재산은 경기도 고양군을 비롯한 전국에 부동산 112만4천원과 만주직물공장을 비롯한 투자자금 480만원, 일본무연탄과 제철은행을 비롯한 대부금 160만원, 예금과 현금 30만원 등 총자산이 1천141만4천원에 달했다. 부채는 한성은행 차입금 124만원에 불과해, 순자산은 1천17만4천원으로 국내 굴지의 대자산가로 성장했다.(고승제 '한국경영사연구', 한국능률협회, 1973)일본무연탄제철(주)가 일등공신이었다. 일본무연탄제철 경성공장의 자산가치는 1944년 10월말 현재 266만3천621원이었는데 조선총독부는 1945년 4월에 경성공장 증설용 자금 350만원 융자건을 승인해주었다. 이에 힘입어 해방직후 경성공장의 실제 자산가치는 고정자산 266만여원과 증설자금 350만원에 유동자산 등을 합쳐 800만여 원으로 불어났던 것이다.태평양전쟁(1941~1945) 동안 일본무연탄제철은 자본조달은 물론 경영 리스크까지 총독부가 전부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백낙승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땅 짚고 헤엄치기'의 군수 비즈니스였다. 백낙승이 아무리 조선굴지의 자본가 후예라고는 하나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 가업가가 일본 군국주의의 이해와 밀접한 국책사업을 영위한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 없이는 언감생심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백낙승은 대표적인 친일기업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경유착형 비즈니스 경험은 해방 이후 백낙승의 기업가활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애국(정경유착)하면 흥할 수도 있다'는 비즈니스 마인드였다. (정안기, '해방 전후 백낙승의 기업가활동과 일본무연탄제철(주)-고창김씨가의 기업가활동과 비교시점에서-', 2010)한편, 태평양전쟁 말기에 태창직물은 만주지역에 대한 직물 수출을 독점하고 있었다. 1935년 4월 20일에 설립된 태창직물은 1941년 당시에는 경성부 휘경정(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189번지에 본사를 두고 직물의 제조 및 판매업을 영위했는데 공칭자본 100만원에 75만원을 불입한 상태로 백낙승이 취체역 사장이었다. 당시 백낙승은 일본 관동군사령부 헌병대에 접근하여 이들의 비호 하에서 직물수출 독점권을 확보했다. 태창직물은 자사 제품은 물론 일본의 마루베니(丸紅), 이토추(伊藤忠)상사 등의 제품을 수입, 만주에 공급함으로써 부(富)를 축적하였다. 일본의 메이커들이 태창직물에 포목을 공급하면 태창직물에서는 이 포목에 태창의 상표(벚꽃 속에 태(泰)자를 써넣은 것)를 찍어 재수출 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태창직물은 관동군사령부의 비호 하에서 포목 밀수출도 병행했다. 태창에서 만주에 수송하는 화물차량을 관동군 헌병들이 호송하는 방법으로 세관의 검문을 피했던 것이다. 당시 백낙승은 포목 밀수 등을 통해 축적한 자금으로 일본 최대 동양면화(東洋棉花)의 주식을 절반 가량 구입하기도 하였다. 그의 밀수행위는 1945년 종전(終戰) 몇 달 전 당국에 적발돼 밀수품이 법원에 압류되기도 했다.(박병윤, '재벌과 정치', 한국일보사, 1982) 당시 태창의 상표가 찍힌 포목이 서울역 앞 광장에 있던 조일창고(朝日倉庫) 3개 동에 가득 쌓인 채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재판 진행 중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직후 법원에 의하여 압류되었던 포목들은 미군정 법무관의 해제 명령으로 전부 태창에 인계됐다. 물자가 크게 부족했던 시절 태창은 이 포목들을 처분하여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또한 백낙승은 '정크무역'에 참여해서 대무역상으로 부상했다. 해방과 함께 일본과의 경제거래가 경색된 틈을 이용해 중국의 수많은 소형 상선(정크선)들이 각종 물건을 싣고 국내로 들어와 우리 상인들과 직거래했던 것이다.일제하에서 권력층에 접근하여 부를 축적했던 백낙승은 해방 후에도 이러한 방식에 의한 치부를 모색했다. 광산경영으로 떼돈을 벌었던 최창학(崔昌學)은 김구(金九)와, 경성방직은 한민당의 송진우와, 대동광업(大同鑛業)의 이종만(李鎭萬)은 여운형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박흥식, 방의석(方義錫) 등도 각각 정치권의 실력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7년 8월경 정치자금 확보에 곤란을 겪던 이승만에게 백낙승은 70만원(圓)의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그 후에도 생활비로 매달 50만원씩 바쳤다.(이종재 '재벌이력서', 한국일보, 1993)/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2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3]태창그룹-1 육의전 상인 출신

백윤수, 1916년 가족회사 '첫발'1924년 대창직물 기업체 재발족장남사후 막내 낙승 경영권 승계태창그룹의 역사는 19세기 말의 백윤수상점(白潤洙商店)으로부터 출발했다. 본관이 수원인 백윤수(1855~1921)는 조선 말기 이래 서울 종로에서 대대로 포목상을 경영해온 시전상인으로, 청나라에서 수입한 견직물을 판매했다. 조선 면포 업계의 원조로 불리던 그는 1916년 5월 4일 경성부 공평동 87번지에서 자본금 50만원(圓)의 대창무역(주)를 설립했다. 대창무역은 당시 조선인들이 소유·경영하는 무역업체들 중에서 자본금 규모가 가장 컸으나 백윤수와 아들들이 경영하는 전형적인 가족 회사였다. 대창무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따른 전시(戰時) 호황에 힘입어 1919년까지 매년 평균 30%의 고율 배당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등이 설립한 공익사(共益社)와 함께 13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전시이득세(戰時利得稅)를 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백윤수가 상업자본가에서 산업자본가로 전환한 배경이었는데, 1920년에는 대창무역 내에 직물가공부를 두고 생산을 개시하는 등 제조업으로 지평을 넓혔다. 1924년 9월에는 경성부 냉동(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7번지에 견직물 제조를 목적으로 자본금 25만원의 대창직물(주)를 설립했다. 백윤수의 사망 후 가업을 계승한 장남 백낙원이 대창무역의 직물제조부문을 분리해서 별도의 기업체로 재발족한 것이다. 백윤수는 슬하에 낙원, 낙중, 낙삼, 낙승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아들인 백낙승(白樂承)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의 부친이다. 백낙승은 일본 명치대 법학과와 일본대학 상학과를 졸업하고 1924년에 가업인 대창무역의 취체역으로 입사했다. 그는 1935년에 삼화(三和)제약(주)를 설립했으며 1930년대 말에는 큰형 낙원의 사망으로 대창직물의 경영권을 승계했다. 이 무렵 대창은 조선인 실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함은 물론 점차 대기업집단으로 도약하기 위한 제반준비를 완료했다. 백낙승은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에 방직업체인 대전흥아(大田興亞)직포공장을 설립하고 강원조선철공(주)의 사장에 취임했다. 1942년 6월에는 일본인 소유의 특수회사인 조선도변주공(朝鮮渡邊鑄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해 경영권까지 장악했다. 특수회사란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한 특수 목적을 수행하는 독과점기업이다. 조선도변주공은 고철상을 경영하던 일본인 야마타(山田勘一)가 일본 내 철강 기근에 따른 고철수집 붐에 편승해서 1938년 2월에 설립한 재생 선철(銑鐵)업체인 고양주공소(高揚鑄工所)가 모체다. 1939년 11월 고양주공소는 일본 요코하마의 중견철공소인 와타나베주조(渡邊鑄造)주식회사와 합쳐 조선도변주공(주)로 재발족했다. 1940년 1월 경성부 고양군 독도(현재의 뚝섬)에 경성공장을 설치하고 양은·고철 등을 재생산해 일본에 수출하기로 했는데, 5개월 후 조선총독부가 재생 선철업 정리명령을 발하면서 생산을 중단했다.그 대신 총독부는 조선도변주공을 무연탄제철 시험조업 공장으로 지정했는데, 1941년 8월에 무연탄을 연료로 선철(銑鐵)을 생산하는 시험조업에 성공해 일본 군부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는 철광석은 물론 무연탄 매장량이 풍부해 무연탄을 에너지원으로 제선(製銑)이 가능하다면 일본군 전쟁 수행에 엄청난 순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이 문제였다. 무연탄 선철의 생산원가가 톤당 190원인데다 감가상각비와 영업이익까지 포함하면 톤당 230원으로 당시 선철 가격 보다 2배 이상이었다. 장기간의 무연탄제철 실험조업으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음에도 와타나베 사장은 적자를 자비로 충당하면서까지 운영을 계속했는데 1942년 6월에 백낙승이 사장에 취임했다. 자금부족으로 백낙승의 융자에 의존하다 경영권을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 8월 당시 경성공장은 소형용광로 10톤과 15톤 용광로 각 1기씩에다 주물공장 250평, 확장 중인 주물공장 652평, 부속건물 2천평, 부지 6천평에 공원 수가 150명에 이르는 등 총자산이 147만7천원이었다. 1942년 10월에는 일본정부가 기획한 소형용광로 제철계획 담당업체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소형용광로제철의 조선지역 사업권까지 획득했다. 1943년 2월에는 일본무연탄제철(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자본금을 19만5천원에서 13배 이상인 259만7천500원으로 증자했다. 백낙승은 발행주식 10만주 중 3만9천주를 확보해 경영권을 장악했다. 일본무연탄제철은 조선의 주요 국책회사로 탈바꿈했으며 1944년에는 조선비행기(주)와 함께 제1차 조선군수회사로 지정됐다. 그는 박흥식, 김연수, 방의석 등과 함께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을 설립하고 경영에 참여했으며 항공기를 비롯한 거액의 국방비를 헌납하기도 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14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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