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5]대한유화-4 발전과 후퇴

크링커·레미콘 공장 잇단 완공PVC·선박회사 설립 승승장구 사채 부담 대한양회 매각 '충격'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개풍그룹은 서울은행 경영권까지 포기해야 했다.5·16쿠데타 이후 정부가 은행의 대주주 사금고화 및 전횡을 방지하고자 부정축재 환수 처리의 일환으로 부정축재자가 소유하는 일반은행의 주식을 전부 환수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정부와 재벌간의 정경유착의 공식적인 고리가 형성됐다. 또한 재벌기업들이 자기들만의 이익을 대변해줄 단체결성의 돌파구도 마련됐다.1962년 5·16 후 실업인 13명이 회동하여 경제재건촉진위원회를 발족했는데 이정림이 회장에 취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탄생 배경이다.이정림은 1963년 한국경제인연합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8월 3·1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삼성의 이병철과 함께 전경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공로자가 바로 이정림이었다. 한편, 대한양회는 1963년 7월 시멘트 대량소비지인 서울을 겨냥해 용산구 서빙고동 한강변에 연간 생산량 20만t 규모의 크링커 처리시설을 완공했다. 시멘트 완제품의 저장기한은 6개월인 반면에 90% 정도 완성된 자갈형 고체 시멘트인 크링커는 무기한 저장이 가능해 비수요기에 장기간 저장해 두었다가 성수기에 매각하기 위한 시설이었다.대한양회는 이후 레미콘 공장까지 세우고 레미콘 운반트럭으로 서울 일원에 생(生)콘크리트를 공급함으로써 또다시 히트를 쳤다.1967년에는 대한양회의 생산실적은 36만6천t으로 국내 시멘트생산량의 15%를 차지했는데, 그해에 생산시설 10만t을 늘려 연간 생산량을 48만t으로 확대하고 서울 서빙고의 크링커 분쇄공장도 시설을 배가했다.1965년에는 국내 최초의 PVC 공장인 공영화학공업(주)를 설립했으나 상당기간 동안 수익은 별로였다.1967년에는 국내 최대의 무역업체인 천우사의 전택보(全澤珤)와 대농그룹 창업자 박용학(朴龍學) 등과 공동 출자해서 자본금 1억5천만원의 대한선박(주)를 설립하고 해외차관자금으로 선박 등을 도입했다. 대한양회는 대한선박의 지분 3분의 1을 확보하고 국내 최대의 선박왕 꿈을 키웠다.그러나 그 와중에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1968년 상반기에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으로부터 7억원을 융자받으면서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된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한 상술로 시멘트업계에서 독주하던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는 데 대해 말들이 많았다. 폭리로 비난을 사던 시멘트업체들이 사채를 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느 회사든 타인자본의 절반은 사채로 충당한다는 것인데 잘 나가던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를 받은 때문에 말들이 더 많았다.특히 대한양회는 개풍그룹의 중심기업이자 이정림이 특히 아끼는 터여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항간에 대한양회는 생산규모가 업계 최소일 뿐 아니라 기계시설도 낡았으며 석회석도 좋은 것은 이미 다 파먹어 이참에 빚이나 잔뜩 내서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려 한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또한 개성상인들은 절대로 손해 보는 사업은 붙잡고 있지 않는다며 대한양회 매각설을 부채질 했다.대한양회는 1971년 8월 12일 원풍산업(이상순)으로 매각되면서 그간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원풍산업이 대한양회 자산 34억4천만원에서 은행부채 등 28억4천만원(외화 170만 달러 포함)을 차감한 6억원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조건이었다.이상순은 원풍산업 외에 천일곡산과 평화유지 대표이며 대한농산의 대주주로 이북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러나 대한양회는 1975년 1월에 쌍용양회에 재매각되어 쌍용양회 문경공장으로 재발족됐다. 대한양회의 연간 생산능력은 약 50만t이나 양회제조방식이 구식인 습식공정으로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생산비 급증을 못 견딘 때문으로 추정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0년대 승승장구하던 대한양회는 매각설이 나온 후 결국 1971년 원풍산업으로 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후 쌍용양회에 재매각돼 쌍용양회 문경공장이 된다. /경상북도 제공

2017-11-2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4]대한유화-3 부정축재자로 몰리다

'은행 민영화' 재벌판도에 영향단죄중 5·16 발발… 정부이관 처벌대신 석방 '산업역군 둔갑'대한양회는 6·25전쟁 후 복구사업으로 시멘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단시일 내에 경영이 정상화됐다. 이후 대한양회는 1960년대초 한일시멘트와 쌍용양회 등이 출현할 때까지 삼척시멘트의 후신인 동양시멘트와 국내 시멘트시장을 양분하며 초과이윤을 누렸다. 전후 부흥 및 경제개발사업에 따라 시멘트수요는 갈수록 크게 늘어났음에도 공급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1961년 말 우리나라의 시멘트 총생산능력은 72만t에 이르러 어느 정도 공급부족이 해소됐으나 여전히 시멘트는 웃돈을 주고도 못사는 인기상품이었다. 대한양회는 이양구가 경영하던 동양시멘트와 함께 국내 시멘트시장을 분할지배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국내유수의 재벌로 부상했다.한편 이정림은 산업자본의 금융자본화를 추진하게 되는데, 계기는 1959년 서울은행(현 하나은행)의 창립이었다. 서울은행은 지방은행으로 인가를 얻었는데 당시 대한양회공업이 이 은행의 주식 74%를 확보해서 오너경영인이 된 것이다. 삼성, 삼호, 동아상사(이한원) 등이 귀속은행주 민간불하에 편승해 금융자본화 했던 반면, 개풍그룹은 은행 신설에 편승해 목표했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일반은행의 민영화는 재계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던 신생기업들이 은행 민영화를 계기로 국내 정상의 재벌로 급부상한 것이다. 당시 은행을 불하받았던 재벌들은 모두 권력과 유착돼 있었다. 자유당독재 하에서 정경유착이 빚은 결과물이었다.개풍그룹 또한 금융재벌로 변신한 이래 활발한 다각화 사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9년 현재 개풍그룹은 모기업인 개풍상사를 비롯해 대한양회, 호양산업, 배아산업, 대한탄광, 삼화제철, 동방화재, 대한철강 등을 거느려 삼성, 삼호에 이어 재계 랭킹 3위의 대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높다 했던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개풍그룹은 시련의 계절을 맞는다. 과도정부는 자유당 정권하에서 권력을 배경 삼아 부당하게 치부한 자들에 대한 단죄작업에 착수했다. 정부는 7월말에 기업가 23명을 부정축재 기업인으로 지목했다. 삼성(이병철) 삼호(정재호) 개풍(이정림) 대한(설경동) 럭키(구인회) 동양(이양구) 극동(남궁련) 등 195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한 재벌기업의 총수들이 전부 포함됐다. 정부가 8월 31일에 기업가 24명, 46개 기업들에 대해 벌금과 추징금을 합산한 총 196억 환을 해당 기업들에 통고하고 일주일 이내에 납부하도록 하자 해당기업들이 반발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4월 10일에 정부는 '부정축재자처리법'을 마련하는 한편 5월 17일까지 2주간을 자수기간으로 설정하고 내부적으로 이들에 대한 처벌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자수기간 종료 하루전인 5월 16일에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이 작업은 군사정부에 이관됐다. 1961년 5월 28일 혁명군 특별수사대가 탈세혐의가 있는 기업인들을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연행했다. 이때 연행된 기업인은 정재호, 이정림, 설경동, 남궁련, 이용범, 조성철, 함창희, 최태섭, 박흥식 등이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 백남일, 이양구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5월 30일에는 이한원과 김지태가 구속됐다. 각 지방에서도 지방의 유력 기업인들에 대한 검거작업을 진행, 금호그룹 창업자 박인천도 구속됐으나 우여곡절 끝에 벌금형으로 변경했다. 불법으로 정권을 찬탈했던 군사정부는 국민적 지지 확보를 위해 과거청산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의 이주일(李周一) 위원장은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며 석방을 발표했다. 범법자들이 산업역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로써 1960년 4·19혁명이후 1년여 동안 지루하게 끌어오던 부정축재자 처리문제는 일단 종결됐다. 추징금은 30개 기업에 총 83억환이 고지됐는데 이중 이병철 24억환, 정재호 10억환, 이정림 5억5천만환, 이한원 4억환, 설경동 3억3천만환이었다. 그러나 12월 30일에 발표된 부정축재 환수액은 부정축재 위원회에서 최초로 발표한 부정축재액 726억 환의 5.8%에 불과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1-1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3]대한유화-2 재벌로 성장

이정림, 1953년 호양산업 설립年 30만달러 어치 '얼음' 판매국내최대 시멘트공장 불하받아6·25전쟁 이후 군납사업은 국내 사업가들에 노다지 광맥으로 통했다. 식품, 타이어, 피혁, 페인트, 비누, 면내의, 모포, 양말 등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군납사업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고 이들 산업은 군납과 관련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최성모(세기상사, 신동아그룹의 모체), 심상준(한금장유), 전중윤(삼양식품, 삼양라면의 모체) 등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으며 한국타이어와 흥아타이어, 진양화학, 대한잉크페인트도 군납혜택을 누렸다. 군납업이 새로운 이권사업으로 부상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집권당인 자유당의 정치인과 고위공무원, 고급장교 등에 경쟁적으로 연줄을 대느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인단비누와 지구유지가 연루된 탈모비누사건은 수뢰사건으로 번져 한동안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일부 기업가들은 주한미군 상대 비즈니스에 눈길을 돌렸는데 한진그룹 창업자인 조중훈의 일화는 유명하다. 6·25전쟁 전부터 트럭 한 대로 화물을 운반하던 조중훈은 1955년 여름 서울-인천간 국도 운행 중 부평근처에서 고장난 고급세단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국내 최대의 수송재벌이 됐다. 고장 난 차에 미군 고위층의 부인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그는 미국인 장교와의 교분을 넓히는데 주력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동생 조중건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형을 도왔는데 당시 조중훈이 집으로 초대한 미군은 연인원으로 5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현대건설(정주영)과 삼환기업(최종환) 등은 가장 먼저 미8군 토건업에 뛰어들어 재벌의 터전을 닦았다. 병영건설 물량도 많았지만 환차익은 더욱 매력이었다. "미군공사는 달러로 계약되는데 기성분을 받을 때쯤이면 환율이 엄청나게 올라있는 실정이었다. 공정환율의 변동추세를 보면 1950년 1천800원 대 1달러였던 것이 1951년에는 2천500원 대 1달러로, 1952년에는 6천원 대 1달러로 뛰었다."('현대건설35년사', 1982) 주한미군 납품사업은 비록 소액일지라도 국내 비즈니스보다 훨씬 매력 있는 사업 이었다. 이정림의 본격적인 기업가활동은 1953년 휴전 이후부터였는데 첫 신호는 1953년 환도 후 서울에서 호양산업(好洋産業)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비견되던 주한미군 사업이었다. 이정림은 미국 뉴욕에서 일본산 100톤짜리 제빙기계를 도입해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제빙공장을 세우고 미군 위생관의 물 검사를 거쳐 주한미군에 납품사업을 개시했다. 그 결과 호양산업은 연간 25만 달러 내지 30만 달러 어치의 얼음을 판매하는 등 호황을 누렸다. 이정림은 개풍상사와 호양산업을 경영하면서 재벌화의 길을 도모했다. 1955년에는 대한탄광(大韓炭鑛)을 설립하고 광업에 진출했고, 1956년 10월에 대한양회(大韓洋灰)를 설립했다. 대한양회 설립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한국전쟁 후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충주비료, 한국유리, 문경시멘트 등 3대 기간산업의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시멘트 생산은 국영인 삼척시멘트공사(동양시멘트 전신)가 유일했으나 그나마도 시설 노후로 생산성이 형편없었다. 1955년 국내 시멘트 소비는 18만9천t이나 생산량은 5만6천t으로 70%를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다. 정부는 운크라와 협의해서 판유리에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로 문경에 시멘트공장을 추진했다. 건설업체로는 덴마크의 스미스사가 선정됐고 1955년 11월에 850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경북 문경군 점촌읍 신기리에 퀼른 2기의 연산 24만t 공사를 착공 했는데 준공 직전인 1957년 9월에 대한양회에 불하됐다. 이정림은 이동준, 이회림(OCI그룹 창업자)과 친동생인 이정호(李庭鎬)등과 함께 문경시멘트를 1천300만 달러에 구입해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개풍그룹이 국내 최대의 시멘트공장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7년 대한양회에 불하된 문경시멘트는 당시 국내 최대의 시멘트 공장이었다. 현재는 대한양회를 인수한 쌍용양회의 문경공장이 됐으며, 근대문화유산 지정이 추진 중이다. /경상북도 제공

2017-11-06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2]대한유화-1 개풍상사 설립

창업자 이정림, 5년여 점원 생활21세때 도매상 성공해 사업토대광복후 고무신 총대리점권 확보국내 개성상인의 대표이자 개풍그룹의 창업자인 이정림(李庭林, 1913∼1990)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호는 송정(松汀)이다. 경기도 개성군 남본정(南本町) 뫼주골에서 이윤신(李允新)의 11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21년 송도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6세 때인 1929년에는 밀가루, 설탕, 고무신 등을 취급하는 도매상점인 송래상회(松來商會) 점원으로 일을 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이정림은 송래상회에서 5년 여 동안 점원 생활을 하는 동안 무차입 경영과 대신불약(大信不約)의 신뢰경영, 한 우물 경영 등으로 상징되는 '개성상인정신'과 접할 수 있었다. 개성상인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한반도의 상업을 주름잡았던 상인집단이다. 그들은 독특한 조직체계인 송방(松房)과 차인제(差人制), 그리고 서양의 복식부기보다 앞선 회계시스템인 사개치부법(四介置簿法)을 남겼다. 이정림은 송래상회 점원생활을 통해 개성상인의 후예로서 철저한 상도(商道)를 터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림은 21세 무렵인 1933년에 개성에서 '개성서(西)고무제품직물도매상'을 차려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1940년에는 경기도고무조합 이사로 재직하면서 주단포목 도매업도 겸했다. 당시 그는 고무신 장사를 하며 중앙상공의 지배인이던 김용완 경방 명예회장과도 친교를 맺었다. 이정림은 도매상 운영으로 큰 이익을 얻었는데 이것이 사업자금이 되었다고 회고했다.이정림은 1945년 광복 후에는 천일고무 이리공장에서 고무신 제조에 주력하였다. 그는 국내 최대의 고무신 메이커로 전남 여수에 위치한 천일(天一)고무의 김영준(金英俊, 1900~1948) 사장과 협상을 벌여 이 회사의 경기, 황해, 강원도 일대의 총대리점권을 확보했다. 김영준은 15세에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출발해 고무배합기술을 익혀 1926년에 부산에서 천일고무공장을 세워 고무신을 생산했는데 품질이 우수해 단기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선발업체이던 환대고무(丸大護謨)의 상표 도용 시비로 도산하고 말았다. 일본 신호(神戶)시 송야통(松野通) 2정목6의 환대고무가 한국에서 고무신의 생산판매를 목적으로 1926년 4월 1일에 부산부(釜山府) 대창정(大倉町) 10번지(현 부산 중구 중앙동 옛 부산역 인근)에서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한 한국 굴지의 고무신 메이커였다. 김영준은 1935년에 전남 여수에서 천일고무를 재설립해서 불과 3년 만에 전국을 석권하는 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이정림은 김영준 사장과의 각별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영준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반란 주체인 좌익계 군인들에 의해 부르주아 기업인으로 지목돼 처형 되면서 관계가 막을 내린다.이정림은 1946년에 서울에서 무역업체인 이합상회(二合商會)를 개업했다. 1949년에는 고향 후배이자 OCI그룹의 창업자인 이회림(李會林, 1917~2007)을 영입해 이합상회를 개풍상사(開豊商社)로 변경하고 정식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1950년 6·25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해 텅스텐의 일종인 창연(蒼鉛)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활필수품을 수입해 부를 축적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3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1]삼호방직(완)-6 몰락

조선방직·제일화재 처분 '쇠락'1972년 8·3조치 '사채' 악재로정재호 업무상배임 구속 '쐐기'삼호는 1960년대 이후에도 착실하게 다각화작업을 전개한다. 1966년 4월에는 의양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해서 부수사업으로 독립신문기념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경북염색가공(주)를, 1971년에는 제주축산(주), 삼양흥업(주) 등을 각각 설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호그룹은 하향길로 접어드는데 결정적 신호는 1967년 조선방직 매각과 1968년 제일화재의 처분이었다.1968년 4월에 조선방직은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직할시에 인수됐다. 화학섬유의 등장에다 방만한 경영, 기계의 노후화 등이 겹치면서 1969년 7월 부산직할시가 법인 청산 절차를 밟아 조선방직을 해산시켰다. 제일화재해상보험은 1968년 9월에 한화그룹에 넘겨졌다. 1967년에 정재호는 33세의 장남 규진(奎鎭)을 기획부장에 임명해 경영난을 수습하려 했다. 규진은 삼호그룹의 재기를 위해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8년 5월에는 대전방직과 삼호방직의 소유권문제로 법적 소송사건이 불거졌다. 정재호의 친동생이자 창업동지이기도 했던 정재찬(鄭載璨)이 정재호를 상대로 대구지방법원에 삼호방직의 주권인도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69년 초에는 정재호의 동업자이자 오른팔이기도 했던 정상희(鄭相熙) 삼호무역 회장이 부하들과 함께 경쟁업체인 삼성으로 이직했다. 제3대(1954~58)와 5대(1960~61)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정상희는 현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의 친할아버지다. 삼호는 경기불황이 겹치고 업종전환에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1960년대 말에 쇠락했다. 삼호 몰락의 결정적 계기는 1972년 8월 3일 0시를 기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소위 '8·3조치')이었다. '8·3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기업들은 8월 9일까지 전 사채를 신고하고 신고된 사채는 월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의 채권, 채무관계로 조정한다. 2천억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기업의 단기대출금 중 30%를 대환(代煥)한다. 신용보증제도를 확충한다. 기업의 투자를 위해 투자세액을 공제한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법정교부금을 폐지한다.'마감일인 9일까지 총 3천456억 원의 사채가 신고됐다. 3만9천676개 업체가 월평균이자 3.84%로 이 같은 사채를 지고 있었다. 또한 신고결과 1973년 현재 81개 업체, 73명의 기업인들이 기업자금을 빼돌려 사채놀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기업주들이 자기 기업에 사채놀이를 하는 이른바 '위장사채'만도 총 신고금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137억 원에 달했다. 이 중에는 사채로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아우성치던 유명 기업인들도 있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주는 기업의 오너경영인들까지 위장사채업자에 포함된 것을 보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급기야 1973년 4월, 81개 업체 73명의 반사회적 기업인 명단이 발표됐다. 삼호방직 정재호, 동해실업 강숙현, 성광무역 김정만, 한국철강 신영술, 대성산업 조영일, 동양고무 현수창 등이었다. 이들에게는 향후 5년 간 금융지원 중단, 당사자와 연대보증인들에 대한 세무조사 및 검찰 조사가 진행됐다. 은행들은 20개 기업 14명의 기업인을 횡령, 배임, 수표부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삼호방직 정재호, 연세개발 박용운, 광성공업 고정훈, 동해실업 강숙현, 한국알미늄 장영봉 등이었다. 강숙현, 정규성, 장인섭 등은 업무상횡령으로, 장영봉은 배임과 사문서위조로, 최경남은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나머지는 수배됐다. 철퇴를 맞은 부실기업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삼호그룹의 정재호였다. 1974년 8월 1일 서울지검 경제부의 이한동 검사는 반사회기업인으로 기소된 삼호의 정재호에 업무상 배임횡령죄를 적용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1970년 8월부터 그해 10월 사이에 삼호방직에서 1억원을 인출, 주식으로 값어치가 전혀 없는 삼호공업의 주식을 사들임으로써 삼호방직에 1억원 상당의 손해를 입혔으며 삼호방직의 회사공금 1천300만원을 임의로 인출해서 사생활에 사용한 혐의였다. 정재호는 1973년 8월 8일에 검찰에 구속되었다가 10월 12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60년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던 왕년의 최고재벌 정재호에게 반사회적 기업인이라는 낙인은 최후의 사망선고였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2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0]삼호방직-5 도약, 그리고 위기

은행간 '상호출자' 줄줄이 행운동화통신 설립, 업계 리더 성장군사정부가 부정축재자로 지목정재호가 제일은행을 소유할 당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은행 상호 간 주식을 보유한 '상호출자'였다. 은행들끼리 서로 지분을 소유한 상호주(相互株)는 신탁은행 64.4%, 저축은행 56.5%, 조흥은행 41.0%, 상업은행 35.4%, 상호은행 24.8%, 조선은행 20.3%, 식산은행 14.1%에 달했으며, 특히 환금은행은 자본금 전액이 상호주였다. 일제하의 한국인 지분을 이어받은 민간소유주는 조흥은행 53.7%, 상업은행 35.6% 등으로, 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은행들의 지분 중 상호출자가 아닌 경우는 전체 주식의 10%도 안됐다. 따라서 시중은행 하나를 불하받을 경우 상호출자로 연결된 여타 은행들까지 줄줄이 낚을 수 있는 행운이 따랐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이런 매카니즘을 이용해 최대의 금융자본으로 변신했던 것이다.한편 언론에도 뜻이 있었던 정재호는 1954년 12월에 동화통신(주)를 설립하고 1956년 9월 1일에 창간호를 발행해 보도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4월 미국 AP통신과 수신계약을 맺은 것을 비롯해서 프랑스의 AFP(1956년 9월), 영국 로이터(1960년 6월) 등 세계 유수의 통신사와도 계약을 맺었다. 1957년 2월부터는 영문경제판(英文經濟版)을, 1959년 2월에는 월간화보 '동화(同和)그라프'를 각각 발간했다. 동화통신은 이후 합동통신, 동양통신과 함께 국내 통신업계의 리더기업으로 부상했다.정재호는 또한 제일화재, 삼양(三洋)흥업, 유창(裕昌)물산, 원양수산 등을 잇따라 설립해서 1950년대말에는 모기업인 삼호방직을 비롯해 제일은행, 대전방직, 삼호무역, 조선방직, 동화통신, 삼호공업, 경북메리야스염색가공, 삼양흥업, 제일화재보험, 원양수산, 대한가스 등을 거느리게 됐다. 이로써 삼성그룹에 이에 재계순위 2위의 금융자본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이처럼 대부분의 재벌들이 6·25전쟁으로 인해 파산당하는 비운을 겪은 것과 달리, 삼호는 전쟁 때문에 최대 재벌로 도약하는 행운을 얻었다. 삼호그룹은 결국 한국전쟁이 만들어준 재벌이었던 것이다. 삼호가 짧은 기간 내에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당시 급부상한 재벌집단처럼 정재호 또한 집권당인 자유당과 유착한 것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과 더불어 혜성처럼 등장해 1950년대 말 삼성그룹과 함께 국내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던 삼호그룹은 1960년에 접어들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정재호가 1960년 4·19혁명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것이다. 당시 그가 신고한 정치자금 제공액은 85억환(현재 가치 약 860억여원)으로 부정축재자들 중 1위를 기록했다. 이 금액은 삼호그룹이 은행권으로부터 대출받은 융자총액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엄청났다. 당시 정치자금은 정치권으로부터의 비호 내지 정부 제공의 각종 경제적 이권 수수에 대한 반대급부이기도 했다. 삼호는 국내 최정상의 기업집단을 형성한 만큼 이승만 정권과의 유착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군사정부는 1961년 6월 14일 부정축재에 대한 행정상, 형사상 특별처리를 목적으로 한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한다. 휴전직후인 1953년 7월 1일부터 쿠데타 직전인 1961년 5월 15일까지의 부정행위를 대상으로 했다. 국가 공직 또는 정당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거나 거짓 혹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부정축재자를 부정공무원, 부정이득자, 학원부정축재자로 구분하였다.8월 2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이병철 240억환, 정재호 100억환 등 총 831억2천400만환 등 기업주 58명의 부정축재 환수액을 통고했다. 8월 13일에 위원회는 최종으로 부정축재 기업인 27명에게 환수액 477억1천만환으로 처벌대상과 환수금액을 대폭 줄여주었다. 당시 정재호는 36억환을 환수 당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6년 당시 삼호방직 광고 /'방협20년지' 수록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16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9]삼호방직-4 최대의 금융콘체른 완성

日 소유 은행 정부수립후 국고로민간불하 시도 6차례 공매 유찰1957년 계좌수 제한철폐후 낙찰정재호는 1957년 정부가 시중은행 주식을 민간에 불하할 때에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의 불하에 응찰해 제일은행의 소유주가 되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남북분단으로 이북에 있던 각 은행의 지점과 자산들은 소련 군정하에서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에 통합됐다. 남한에는 일본계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식산은행, 저축은행, 신탁회사, 무진회사, 금융조합연합회 등과 민족계 은행인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금융기관들은 과거 수많은 일본인 기업체들에 빌려줬던 막대한 규모의 대출금 전액이 회수 불가의 부실채권화 됐을 뿐 아니라 일본인 소유업체들이 발행한 회사채와 주식 또한 휴지 조각이 돼 빈껍데기 그 자체였다.1946년 미군정청은 특수은행인 저축은행을 일반은행으로 전환하고, 신탁회사를 신탁은행으로, 무진회사를 상호은행으로 각각 상호를 변경했다. 1947년에는 은행지점 총수 222곳의 30%와 금융조합 401곳의 60%를 적자경영을 이유로 폐쇄했다.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각 은행 주식은 전부 미군정에 환수되었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국고(國庫)로 귀속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귀속주(歸屬株)다.이승만 대통령은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체제의 우수성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휴전 이후 일련의 경제정책은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전쟁의 상처도 회복되고 전후 부흥정책에 힘입어 순탄한 경제성장을 지속하자 1950년 벽두부터 정부 보유의 은행주(銀行株) 민간불하를 단행했다. 시중은행들의 내부사정 때문이기도 했는데, 시중은행들은 해방 전 일본기업체들에 제공한 대출금 25억환(현재 가치 약 22억원)이 전부 부실채권화한 것이다. 또한 해방으로 인해 약 291억환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및 주식 보유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수입마저 끊어진 터에 해방 후 저축률 둔화와 악성 인플레이션 등까지 겹쳐 은행들이 파국상황이었던 것이다.1950년 5월 5일 정부는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을 제정해서 금융자율화와 조흥은행, 상업은행, 상공은행, 저축은행, 신탁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의 정부귀속주 민간불하를 결정했다. 예금자보호는 물론 은행의 자주화 및 건전화란 신은행법의 기본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귀속주식의 처분에 따르는 기술상의 애로와 증자, 자산재평가문제 등으로 은행법은 공포 즉시 시행되지 못했다. 더구나 시중은행을 민간에 불하할 경우 정부의 국민경제 장악력 약화 및 재벌들의 금융지배 우려 때문에 시중은행 불하건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1954년 6월 이중재(李重宰)와 김영찬(金永燦)이 각각 재무부장관과 차관이 되면서 지지부진했던 시중은행 민간 불하 사업이 본격화됐다. 민영화 작업 추진과정에서 정부는 자본 및 경영상태가 가장 취약한 신탁은행과 상공은행을 합병해서 1954년 10월 1일부로 흥업은행(한일은행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로써 당시의 시중은행은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등 4개로 축소되었다. 정부는 재무부와 관재청,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은행주불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54년 10월 14일에 은행 귀속주 불하 요강을 확정했는데 주요 내용은 △연고 및 우선권을 배제하기 위한 공매방식에 의한 처리 △독과점방지를 위해 불하 단위주 수를 일정 계좌 수로 분할하여 응찰 △불하 대금의 일시지급 △낙찰액은 정부 사정가격 이상으로 한다 △2년간 명의서환(名義書換)을 금지한다 등이었다. 1954년부터 추진된 귀속주의 공매입찰은 무려 여섯 차례나 유찰되었다. 시중은행 운영의 민주화를 목적으로 1인당 입찰 계좌 수 및 양도를 제한함에 따른 대자본들의 참여가 원천 봉쇄된 때문이었다. 이후 정부는 귀속주 불하 작업을 조속히 매듭짓고자 소수지배가 되더라도 입찰 계좌 수 제한을 철폐하기로 방침을 변경해 1957년 8월에 제7차 공매에 들었다. 삼성, 삼호, 개풍, 조선제분 등이 불하 경쟁에 참여했다. 정재호는 제일은행의 귀속주식을 불하받아 실질소유주로 등장하면서 은행융자 규모 면에서 약 84억7천만환을 기록하는 등 국내재벌 중 단연 1위를 기록했다. 시중은행 중 정치권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정치재벌 정재호가 지배하는 제일은행이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10-09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8]삼호방직-3 삼호그룹으로 도약

귀속재산인 면방직 민간 불하때정재호 사장은 '대전방직' 받아최대 규모 조선방직까지 '인수'한국전쟁 무렵에 귀속재산인 면방직업체들의 민간 불하가 단행됐다. 1951년에는 전남방직(광주공장), 대전방직, 동양방직(인천 학익공장) 등이, 1952년에는 동양방직(인천공장)과 전주견모(絹毛)방직이, 1953년에는 제일방직과 대아방직이, 1955년에는 동양방적(인천공장)과 조선방직(부산, 대구공장) 등이 각각 민간에 불하됐다. 이 업체들은 당시 국내 굴지의 방직업체들로써 이들 중 한 업체라도 불하를 받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정재호는 대전시 유천동 10번지에 있는 대전방직공사(풍한방직의 전신)를 불하받았다. 1942년 12월에 조선오우(朝鮮吳羽)방직㈜로 설립된 것을 1946년에 미군정이 귀속기업으로 접수해서 1949년에 조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1950년 7월 6·25전쟁으로 방기 전부와 건물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된 채 1951년 10월에 12억 5천만 원에 매각처분됐다. 1953년 3월에 자본금 500만환의 대전방직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정재호가 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운크라(UNKRA) 원조자금 94만 1천967 달러로 방기 1만 8천480 추를 배정받았다.1954년 12월에 방기 2만 3천856 추를 설치 완료하고 조업을 개시했다. 1956년 7월에는 자가발전기 3대를 설치해 전력부족으로 인한 조업중단에 대비했으며, 1957년 1월에는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직기 600대를 설치했다. 생산능력이 방기 2만 9천456추와 직기 600대로 늘고 여공(女工)수만 2천여 명에 이르는 전국 굴지의 메이커로 부상했다. 대전방직은 1960년대에는 국내 3대 방적기업의 하나로 성장했다.정재호는 6·25전쟁특수로 확보한 자금으로 1956년에는 최대 규모의 면방업체인 조선방직 부산공장까지 불하받아 국내 최대의 면방직 기업집단을 완성했다. 조선방직은 1917년 11월 10일 부산시 동구 범일동 700번지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된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면방직업체로 1922년부터 조업을 개시했다. 1935년 8월에는 부산공장에 인견(人絹) 직기 319대를 갖춘 인견공장 건설에 착수해 인견포(人絹布)까지 생산했으며 또한 같은 해에 조선 최초의 기계제 염색공장을 건설했다.해방 이후 귀속재산 가운데 최대의 기업이었던 조선방직은 방적기 4만720추, 연사기 6천760추, 면직기 1천232대, 인견 직기 319대, 모포 직기 25대 등의 설비와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한 조면공장과 대구 메리야스공장도 보유했다. 방적, 염색, 나염, 피복에 이르는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종업원 3천200여명을 거느린 부산 최대의 공장이었다.조선방직은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화해서 1946년 5월에 한일실업공사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47년 12월에는 북한의 단전조치에 대비한 자가발전시설 복구공사를 완료하고 주야 2교대 근무체제로 전환했다. 1949년 2월에는 상공부 지시로 대구메리야스공장을 분리하고 그해 11월에 대구방적공사(구 군시(郡是)방적회사)를 통합했다.1955년 2월에는 부산공장을 정부로부터 임대계약해 그해 8월에 조선방직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알려진 강일매(姜一邁)가 사장에 취임했다. 10월에는 조선방직 부산공장을 정부로부터 35억 환에 불하받았다. 1957년 1월 기준 방기 5만304추, 직기 1천693대로 국내 최대 규모의 섬유메이커였다.당초 조선방직은 부산지역의 대표 기업인이자 한국생사그룹의 창업자인 김지태(金智泰)가 오래전부터 점을 찍어두었었다. 김지태는 일제말에 혜성처럼 등장한 청년실업가로 해방과 함께 미군정 관재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정치와 사업을 겸했던 부산지역의 유력인사였다. 그는 1948년부터 조선방직 이사직을 겸하고 있어 1951년 3월의 조선방직 민간불하에서 최고 유력자였다. 그런데 불하 3일을 앞둔 3월 16일에 '조방낙면 사건'으로 조선방직과의 인연이 끝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역사가 뒤바뀐 것이다. 강일매는 1955년 10월 29일에 조선방직을 35억환(약 550억원)에 불하받았다. 연고권자에 우선 불하한다는 귀속재산처리법도 반공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959년 10월 강일매가 사망하면서 조선방직은 삼호방직(정재호)에 인수됐다. 정재호는 손수 창업한 삼호방직 외에 적산인 조선방직과 대전방직까지 확보해 국내 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로 도약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0년대 조선방직 부산공장. /부산박물관 제공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9-1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7]삼호방직-2 본격적인 도약

해방 후 면직물 국내수요 급증공업사·무역 설립 사업 다각화6·25때 대구 위치 덕 전시특수지방의 영세기업에 불과했던 삼호가 본격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다. 해방과 함께 면직물의 국내수요가 급증한 덕택이었다. 의식주를 철저히 통제한 일제말 전시(戰時) 통제경제에서 풀려난 데다 해외 동포들의 국내 귀환 숫자가 대폭 증가했으나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해방에 따른 혼란과 기술 및 원료부족, 북한의 단전(斷電)에 따른 에너지난 등으로 생산활동이 크게 차질을 빚는 등 공급애로 때문에 면직공업은 당시 제조업 중에서 가장 호황업종이었다.1947년부터는 미국산 원면이 본격적으로 수입됐고 서울 당인리와 부산 화력발전소 건설에 따른 전력난 해소 등에 힘입어 1949년 후반부터는 면직물 생산이 호조를 보였다. 설비도 1945년의 25만3천848추에서 1950년 5월에는 31만6천572추로 증가했고, 직기수도 해방이전 수준인 9천75대로 늘었다. 해방 직전 일본의 제조 대기업들이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피할 목적으로 값나가는 기계들을 앞다퉈 한국으로 이전했는데, 해방과 함께 미군정에서 이들을 전부 귀속재산화 했다가 각 공장에 재할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정재호의 기업가 활동도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그는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이 1948년 9월 자본금 1억원(圓·현재 가치 16억여원)의 금성방직(주)를 설립할 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재호는 김성곤과 같은 경북 출신에다 나이도 동갑일 뿐 아니라 나란히 대구에서 사업활동을 영위해온 터에 김성곤이 새로 방직업에 진출하면서 관련 전문가들의 조력이 필요했던 때문으로 추정된다.또한 정재호는 1946년에 철공장과 제재공장을 병설해 삼호공업사로 재발족함은 물론 그해에 삼호무역(주)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업을 다각화 했다. 1948년 3월에는 대구 원대동 1070번지에 자본금 3억원의 삼호방직(三頀紡織)을 설립했다. 그해 11월에 방기(紡機) 2천800추를 설치하고 조업을 개시했으며, 1950년 12월에는 방기 3천200추를 설치해서 생산능력이 총 6천추로 확대됐다. 1951년 12월에는 자본금을 10억원으로 증자하고 삼호방직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52년 3월에는 방기 1천200추를 증설해서 점차 전국 규모의 섬유업체로 부상했다. 당시 삼호방직의 면사생산량은 1950년의 19만6천797근에서 1954년에는 515만8천518근으로 5년만에 무려 26배로 급신장했다. 설립 이듬해에 발발한 6·25전쟁이 무명의 삼호방직을 전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운 것이다.해방 당시 38선 이북에는 소규모의 면방직 업체들만 있었을 뿐 대부분은 남한에 소재했는데 경성방직을 제외한 공장들은 전부 귀속업체들이었다. 또한 전쟁에 따른 포격과 징발, 약탈 등의 영향도 컸다. "면방직 공업 시설이 입은 피해는 실로 컸으니 당시의 영남지역 소재 조선방직의 부산·대구공장과 삼호방직의 대구공장 등 3개 공장을 제외하고는 경중의 차이는 있었으나 전 면방직공장들이 피해를 면치 못했다. 이들의 피해는 전 면방직 시설의 70%에 달했다."(조선방직협회 '방협십년지', 1957년)가장 대중성이 높은 면직물인 광목 1필(疋)의 가격은 1950년 12월 기준 6만3천원에서 다음해 12월에는 17만5천원으로 뛰었다. 극심한 생산 차질에 천정부지의 물가앙등이 가세한 결과였다. 전국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전쟁으로 초토화됐음에도 삼호방직은 대구에 위치한 덕에 전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삼호는 전쟁에 따른 전국적인 생산차질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삼호방직이 전시특수를 누릴 수밖에 없었던 구조였다.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UN한국재건단(UNKRA)이 복구작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UNKRA는 1960년까지 총 1억2천2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쏟아 부었다. 정부는 장기부흥계획에 의거, 방직시설 확충을 위해 1953년까지 총 591만647달러의 원조불을 14개 방직기업들에 대부해주었는데 당시 삼호는 47만1천 달러의 특혜 대부와 UNKRA 등의 지원을 받아 시설확충에 사용했다. 삼호방직은 1957년에는 직기 300대와 방기 3만1천600추의 대규모의 섬유업체로 거듭 났다. 당시 삼호방직에서는 '태백산' 상표의 광목과 '종표' 타래실, '무궁화표' 고급면사 등을 생산했다. 경영진으로는 사장 정재호, 부사장은 정재호의 친동생인 정재찬(鄭載瓚)과 창업 동지 정상희(鄭商熙) 등이 맡았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60년대 삼호방직 공장 전경과 사장 정재호. /'방협20년지' 수록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9-1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6]삼호방직-1 삼호막대소 운영

양말행상 3년 절약 동생과 창업원료인 '섬유 비즈니스화' 주목25세때 일본행 공업학교 유학도삼호그룹 창업자 정재호(鄭載頀, 1913~2006)는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속칭 삼강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학교 졸업 후 16세에 돈을 벌 목적으로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 모진 고생 후 양말장사로 겨우 연명하면서 번 돈을 쓰지 않고 절약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3년여의 양말 행상으로 모은 돈으로 친동생인 정재찬과 함께 1932년 6월 서문시장 모퉁이인 대명동 149에서 양말직조기 1대와 양말목 제조기 1대로 소규모의 양말공장인 삼호막대소를 설립했다. 삼호그룹의 모체가 탄생한 것이다.한국에 처음으로 내의, 장갑, 타올, 양말 등 메리야스 제품이 들어온 것은 1780년대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한복생활문화 때문에 수요가 부진했다. 1906년에 포목상인 김기호(金基浩)가 평양 계리에서 일본으로부터 직기 4대를 수입해 생산을 개시했다. 국내 최초의 양말제조 공장이었다. 자수성가형 기업가 손창윤(孫昌潤,1891~?)은 평양 기독교계의 거물 실업인 박치록이 경영난으로 1907년에 폐업한 양말공장을 인수해서 1909년에 삼공(三公)양말공장으로 재발족했다. 사업이 번성하면서 내의까지 생산함은 물론 양말기계 제작을 목적으로 삼공철공소도 설립했다. 1920년에는 삼공상회를 설립하는 등 수직적 다각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1922년 4월에 공신합명회사(共新合名會社), 대동(大同) 등 평양의 11개 양말공장을 규합해서 양말생산조합을 결성하고 자신은 초대 조합장이 되었다. 삼공양말공장은 1935년에 양말직조 자동직기 110대, 수동직기 500대와 내의, 장갑, 타올, 목도리를 짜는 기계설비에다 850여 남녀 직공들이 근무했는데 삼공양말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기가 높은 탓에 만주에까지 수출할 정도였다.서울에도 1909년 이후부터 양말공장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1909년 9월의 '황성신문'에는 서울 아현동의 양말제조판매소 주인 서상팔 명의의 '우리나라에서 제조하는 양말'과 '좋은 재료로 싼값에 파니 동포들은 속히 구매하라'는 내용의 광고가 등장한다. 그해 10월에는 중곡염직공작소 주인 김덕창이 '업무 대확장'이란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고 '삼합사(三合)양말을 10전에, 모자는 40~50전에 판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주문을 하면 소포로 부쳐준다고 했다. 김덕창은 양대호 등과 함께 일제하의 서울 염직업계의 리더 기업가였다. 1920년대부터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다수의 양말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양말산업은 내의 생산 공업, 고무신 공업과 함께 일제하의 대표적인 민족산업으로 부상했다. 최봉인(崔奉因)은 대구에서 최초로 자동양말기계를 도입한 경북 메리야스공업 선구자였으며 1930년대 말에는 대구의 농진상회가 50여명의 직공을 거느린 전국유수의 양말공장으로 성장했다.양말을 짜는 데는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지 않았다. 미숙련자가 며칠 동안만 수련 받으면 기계조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적은 자본으로 직기 한두 대만 갖추면 얼마든지 창업도 가능했다. 초창기 절대다수의 양말공장 경영자들은 상점의 사환 출신으로 이들은 근검절약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직기 한두 대를 갖춘 생계형 오너경영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상리(商利)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신의를 지키고 계산에도 밝았다. 정재호도 초창기 국내 양말산업을 이끌었던 선구자들을 롤 모델로 해서 소규모 양말공장을 창업했던 것이다.삼호막대소공장은 메리야스, 양말 등을 생산하면서 품질향상에 주력한 덕분에 성장했다. 그 와중에서 정재호는 양말의 원료인 섬유의 비즈니스화에 주목했다. 섬유가 생필품으로서 시장개척이 어느 업종보다 용이할 뿐 아니라 잘만 하면 국내최고의 기업가로 성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섬유공업에 충실하고자 25세에 일본에 건너가 무장야(武藏野)공업학교에서 섬유공업에 대해 공부했다. 장차 정재호가 국내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로 도약하기위한 준비과정이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9-0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5]태창그룹(완)-3 과유불급

공장 헐값불하·홍삼 독점판매등이승만 비호에 국내 최초 재벌로4·19이후 군사정부 환수로 파산백사장 내외는 이승만 대통령이 좋아하는 약밥을 해가지고 들어와 경무대에서 오찬을 접대 받았다. 식사가 끝난 후 이 대통령은 그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백사장, 그동안 도와주어 고마워. 내가 돈이 있으면 갚아야겠으나 나에게 먹고살라고 준 것이 아니고 국가일 하라고 준 것이니 고맙게 받겠어. 백사장도 국리민복을 위해 일하면 도와주겠어." 백씨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다. 후에 달러라면 그렇게도 벌벌 떨던 이 대통령이 일본 기계를 들여와 태창방직을 확장하도록 허가해 준 것은 이 인연 때문이었다. (윤석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경무대4계 2', 중앙일보사, 1973)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은 74세 고령으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무대에 입주했다. 윤석오는 191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해 1931년부터 중국의 상해(上海) 등지에서 유학하다 귀국해 해방 후 정부수립 때까지 이승만의 개인비서로 근무했다.이후 이 대통령은 국내 최대의 면방직공장이던 고려방직 영등포공장을 백낙승이 헐값에 불하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공장의 모체는 일본 굴지의 방적업체인 종연(鍾淵)공업주식회사가 1935년 7월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00에 세운 경성공장이다. 방기 4만9천720추, 직기 1천525대를 갖추고 1936년 10월부터 조업에 착수했는데 1945년 10월에 미 군정에 귀속재산으로 접수되어 조선실업공사 서울공장으로 운영되다 1947년 7월에 광주, 전주, 춘천, 대전, 영등포 등 5개 공장을 묶어 고려방직공사 영등포공장(후에 방림방적이 됨)으로 전환했다. 백낙승은 해방 직후에 친일기업인으로 지목되어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내 석방됐다. 이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비호 때문으로 추정된다.1953년 5월에 태창방직은 정부 보유불 500만 달러를 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일본에서 최신의 기계를 도입해서 시설을 확장했다. 1955년에는 고려방직을 임대경영 하기로 정부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1956년 1월에는 고려방직을 1억7천만환에 불하받았다. 정부는 국가전매사업의 하나인 홍삼판매독점권을 태창그룹 계열사인 대한문화선전사(大韓文化宣傳社)에 넘겼으며 귀속재산인 (주)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 관리권까지 백낙승에 제공했다. 1937년 6월 4일에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는 인천 만석동 일대의 갯벌을 매립해 세운 대규모 공장이었는데 1941년 당시 자본금 600만원(375만원 불입)에 5천여 명이 근무했다. 설립 초기에는 민수용 광산기계에서 육군 포탄강(砲彈鋼)과 시추기, 해군용 선박엔진 등을 생산하다 1943년에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잠수함 건조 명령을 받아 조선소로 전환했다.태창방직은 1950년 현재 태창공업, 태창직물, 태창무역, 해전직물(海田織物), 대한문화선전사, 조선기계 등의 계열기업군을 거느림으로써 '국내최초의 재벌'이라 불렸다. 재벌이란 기업가들이 뇌물수수를 전제로 권력층 혹은 관료 등과 유착해서 독과점이윤 확보 내지 재정금융상의 혜택을 누리는 정상배(政商輩)들을 지칭했다. 백낙승은 전형적인 정경유착형 기업가였다."백낙승은 정치적인 바람을 너무나 거세게 일으켰다. 6·25전쟁 이후 파괴된 공장을 복구할 때 지나친 특혜가 말썽이 되었고, 그 후에도 삼백파동, 연계자금사건 등 말썽이 있을 때마다 단골손님으로 등장했다"(박병윤 '재벌과 정치')1956년에 백낙승이 사망하면서 태창그룹의 경영권은 장남인 백남일에 넘겨졌으나 이후 경영난으로 고전하다 1961년 4·19혁명 이후에 태창재벌은 파산했다. 1950년대 후반 경제불황에 따른 내수위축에다 신제품인 합성섬유의 등장으로 기존의 자연섬유 업계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정국은 설상가상이었을 것이다.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해 12억여 원의 환수액을 통고받자 백씨 일가는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일본으로 귀화했다. 부정축재조사단이 결정한 국고 환수액은 125억4천771만5천133환으로 백남일 보유자산의 7배에 달했다. 국내 최고(最古)의 기업이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태창그룹은 출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정부와의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다. 창업자 백윤수는 조선조의 어용상인인 시전(市廛)상인으로 창업의 터전을 닦았고, 2세 경영인 백낙승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한 인텔리 기업가로서 일제하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와 밀월 관계를 통해 치부했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는 이승만정부에 유착해 초과이윤을 누렸다. 시장경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할 경우 대부분의 경제적 이권이 권력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어 정경유착을 통한 이윤추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태창의 경우는 국민들이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전형적인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사례였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2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4]태창그룹-2 학습효과가 만든 태창재벌

권력층 접근 부 축적 '친일기업'조선총독부, 자본·리스크 뒷배해방후 이승만 줄대 치부 모색1943년 당시 백낙승 명의의 재산은 경기도 고양군을 비롯한 전국에 부동산 112만4천원과 만주직물공장을 비롯한 투자자금 480만원, 일본무연탄과 제철은행을 비롯한 대부금 160만원, 예금과 현금 30만원 등 총자산이 1천141만4천원에 달했다. 부채는 한성은행 차입금 124만원에 불과해, 순자산은 1천17만4천원으로 국내 굴지의 대자산가로 성장했다.(고승제 '한국경영사연구', 한국능률협회, 1973)일본무연탄제철(주)가 일등공신이었다. 일본무연탄제철 경성공장의 자산가치는 1944년 10월말 현재 266만3천621원이었는데 조선총독부는 1945년 4월에 경성공장 증설용 자금 350만원 융자건을 승인해주었다. 이에 힘입어 해방직후 경성공장의 실제 자산가치는 고정자산 266만여원과 증설자금 350만원에 유동자산 등을 합쳐 800만여 원으로 불어났던 것이다.태평양전쟁(1941~1945) 동안 일본무연탄제철은 자본조달은 물론 경영 리스크까지 총독부가 전부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백낙승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땅 짚고 헤엄치기'의 군수 비즈니스였다. 백낙승이 아무리 조선굴지의 자본가 후예라고는 하나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 가업가가 일본 군국주의의 이해와 밀접한 국책사업을 영위한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 없이는 언감생심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백낙승은 대표적인 친일기업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경유착형 비즈니스 경험은 해방 이후 백낙승의 기업가활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애국(정경유착)하면 흥할 수도 있다'는 비즈니스 마인드였다. (정안기, '해방 전후 백낙승의 기업가활동과 일본무연탄제철(주)-고창김씨가의 기업가활동과 비교시점에서-', 2010)한편, 태평양전쟁 말기에 태창직물은 만주지역에 대한 직물 수출을 독점하고 있었다. 1935년 4월 20일에 설립된 태창직물은 1941년 당시에는 경성부 휘경정(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189번지에 본사를 두고 직물의 제조 및 판매업을 영위했는데 공칭자본 100만원에 75만원을 불입한 상태로 백낙승이 취체역 사장이었다. 당시 백낙승은 일본 관동군사령부 헌병대에 접근하여 이들의 비호 하에서 직물수출 독점권을 확보했다. 태창직물은 자사 제품은 물론 일본의 마루베니(丸紅), 이토추(伊藤忠)상사 등의 제품을 수입, 만주에 공급함으로써 부(富)를 축적하였다. 일본의 메이커들이 태창직물에 포목을 공급하면 태창직물에서는 이 포목에 태창의 상표(벚꽃 속에 태(泰)자를 써넣은 것)를 찍어 재수출 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태창직물은 관동군사령부의 비호 하에서 포목 밀수출도 병행했다. 태창에서 만주에 수송하는 화물차량을 관동군 헌병들이 호송하는 방법으로 세관의 검문을 피했던 것이다. 당시 백낙승은 포목 밀수 등을 통해 축적한 자금으로 일본 최대 동양면화(東洋棉花)의 주식을 절반 가량 구입하기도 하였다. 그의 밀수행위는 1945년 종전(終戰) 몇 달 전 당국에 적발돼 밀수품이 법원에 압류되기도 했다.(박병윤, '재벌과 정치', 한국일보사, 1982) 당시 태창의 상표가 찍힌 포목이 서울역 앞 광장에 있던 조일창고(朝日倉庫) 3개 동에 가득 쌓인 채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재판 진행 중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직후 법원에 의하여 압류되었던 포목들은 미군정 법무관의 해제 명령으로 전부 태창에 인계됐다. 물자가 크게 부족했던 시절 태창은 이 포목들을 처분하여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또한 백낙승은 '정크무역'에 참여해서 대무역상으로 부상했다. 해방과 함께 일본과의 경제거래가 경색된 틈을 이용해 중국의 수많은 소형 상선(정크선)들이 각종 물건을 싣고 국내로 들어와 우리 상인들과 직거래했던 것이다.일제하에서 권력층에 접근하여 부를 축적했던 백낙승은 해방 후에도 이러한 방식에 의한 치부를 모색했다. 광산경영으로 떼돈을 벌었던 최창학(崔昌學)은 김구(金九)와, 경성방직은 한민당의 송진우와, 대동광업(大同鑛業)의 이종만(李鎭萬)은 여운형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박흥식, 방의석(方義錫) 등도 각각 정치권의 실력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7년 8월경 정치자금 확보에 곤란을 겪던 이승만에게 백낙승은 70만원(圓)의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그 후에도 생활비로 매달 50만원씩 바쳤다.(이종재 '재벌이력서', 한국일보, 1993)/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2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3]태창그룹-1 육의전 상인 출신

백윤수, 1916년 가족회사 '첫발'1924년 대창직물 기업체 재발족장남사후 막내 낙승 경영권 승계태창그룹의 역사는 19세기 말의 백윤수상점(白潤洙商店)으로부터 출발했다. 본관이 수원인 백윤수(1855~1921)는 조선 말기 이래 서울 종로에서 대대로 포목상을 경영해온 시전상인으로, 청나라에서 수입한 견직물을 판매했다. 조선 면포 업계의 원조로 불리던 그는 1916년 5월 4일 경성부 공평동 87번지에서 자본금 50만원(圓)의 대창무역(주)를 설립했다. 대창무역은 당시 조선인들이 소유·경영하는 무역업체들 중에서 자본금 규모가 가장 컸으나 백윤수와 아들들이 경영하는 전형적인 가족 회사였다. 대창무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따른 전시(戰時) 호황에 힘입어 1919년까지 매년 평균 30%의 고율 배당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등이 설립한 공익사(共益社)와 함께 13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전시이득세(戰時利得稅)를 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백윤수가 상업자본가에서 산업자본가로 전환한 배경이었는데, 1920년에는 대창무역 내에 직물가공부를 두고 생산을 개시하는 등 제조업으로 지평을 넓혔다. 1924년 9월에는 경성부 냉동(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7번지에 견직물 제조를 목적으로 자본금 25만원의 대창직물(주)를 설립했다. 백윤수의 사망 후 가업을 계승한 장남 백낙원이 대창무역의 직물제조부문을 분리해서 별도의 기업체로 재발족한 것이다. 백윤수는 슬하에 낙원, 낙중, 낙삼, 낙승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아들인 백낙승(白樂承)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의 부친이다. 백낙승은 일본 명치대 법학과와 일본대학 상학과를 졸업하고 1924년에 가업인 대창무역의 취체역으로 입사했다. 그는 1935년에 삼화(三和)제약(주)를 설립했으며 1930년대 말에는 큰형 낙원의 사망으로 대창직물의 경영권을 승계했다. 이 무렵 대창은 조선인 실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함은 물론 점차 대기업집단으로 도약하기 위한 제반준비를 완료했다. 백낙승은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에 방직업체인 대전흥아(大田興亞)직포공장을 설립하고 강원조선철공(주)의 사장에 취임했다. 1942년 6월에는 일본인 소유의 특수회사인 조선도변주공(朝鮮渡邊鑄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해 경영권까지 장악했다. 특수회사란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한 특수 목적을 수행하는 독과점기업이다. 조선도변주공은 고철상을 경영하던 일본인 야마타(山田勘一)가 일본 내 철강 기근에 따른 고철수집 붐에 편승해서 1938년 2월에 설립한 재생 선철(銑鐵)업체인 고양주공소(高揚鑄工所)가 모체다. 1939년 11월 고양주공소는 일본 요코하마의 중견철공소인 와타나베주조(渡邊鑄造)주식회사와 합쳐 조선도변주공(주)로 재발족했다. 1940년 1월 경성부 고양군 독도(현재의 뚝섬)에 경성공장을 설치하고 양은·고철 등을 재생산해 일본에 수출하기로 했는데, 5개월 후 조선총독부가 재생 선철업 정리명령을 발하면서 생산을 중단했다.그 대신 총독부는 조선도변주공을 무연탄제철 시험조업 공장으로 지정했는데, 1941년 8월에 무연탄을 연료로 선철(銑鐵)을 생산하는 시험조업에 성공해 일본 군부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는 철광석은 물론 무연탄 매장량이 풍부해 무연탄을 에너지원으로 제선(製銑)이 가능하다면 일본군 전쟁 수행에 엄청난 순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이 문제였다. 무연탄 선철의 생산원가가 톤당 190원인데다 감가상각비와 영업이익까지 포함하면 톤당 230원으로 당시 선철 가격 보다 2배 이상이었다. 장기간의 무연탄제철 실험조업으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음에도 와타나베 사장은 적자를 자비로 충당하면서까지 운영을 계속했는데 1942년 6월에 백낙승이 사장에 취임했다. 자금부족으로 백낙승의 융자에 의존하다 경영권을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 8월 당시 경성공장은 소형용광로 10톤과 15톤 용광로 각 1기씩에다 주물공장 250평, 확장 중인 주물공장 652평, 부속건물 2천평, 부지 6천평에 공원 수가 150명에 이르는 등 총자산이 147만7천원이었다. 1942년 10월에는 일본정부가 기획한 소형용광로 제철계획 담당업체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소형용광로제철의 조선지역 사업권까지 획득했다. 1943년 2월에는 일본무연탄제철(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자본금을 19만5천원에서 13배 이상인 259만7천500원으로 증자했다. 백낙승은 발행주식 10만주 중 3만9천주를 확보해 경영권을 장악했다. 일본무연탄제철은 조선의 주요 국책회사로 탈바꿈했으며 1944년에는 조선비행기(주)와 함께 제1차 조선군수회사로 지정됐다. 그는 박흥식, 김연수, 방의석 등과 함께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을 설립하고 경영에 참여했으며 항공기를 비롯한 거액의 국방비를 헌납하기도 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1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2]화신그룹(완)-10日강점기 재벌형성

한국인 고객층 기반 자리매김총독부와 협조관계 형성 주력만주·북중국 진출 그룹 발판도화신그룹은 경방삼양그룹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재벌을 완성한 기업집단이었다. 경방삼양그룹의 김성수·김연수 형제가 선대에 축적된 농업자본을 근대적인 산업자본으로 전환해서 제조업 중심의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한 대표적인 '지주출신형 산업자본가'였다면, 화신그룹의 박흥식은 유통업에 특화해서 자수성가한 '서민출신형 상업자본가'였다. 이들은 일제 치하라는 특수한 기업환경 속에서 각자 서로 다른 분야에서 기업집단을 형성한 대표적인 토착 기업가들로 꼽힌다.이들이 일제하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경영 감각 내지는 선진 경영기법 및 기술의 적극 도입 등 나름대로 발군의 기업가정신을 발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이들의 주요 고객이 한국인이었다는 점이다. 경성방직이나 중앙상공 등은 후발업체로서 기존에 일본자본 등이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남한지역 대신 북한지방 공략에 주력하였다. 1920년대 경성방직은 생산을 개시했으나 제품의 질이 떨어져 경영난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때마침 전국적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에 힘입어 도산위기를 넘기고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화신그룹의 근거지도 일본 자본의 침투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종로상권으로, 백화점의 주요 고객은 한국인 소비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같은 성공의 맥락을 갖고 있다. 일제하에서 민족의식에 고취된 사회분위기가 토착기업들의 성장의 활력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경방삼양과 화신은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만주 및 북중국 지역에 진출하면서 그룹으로 도약할 기회를 얻었다. 경성방직은 중일전쟁이후 만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생산규모 확대 및 일관 생산 체제를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양사 또한 중국에 다수의 농장경영을 확대해서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하였다. 화신그룹도 중일전쟁 이후 '만주 특수'에 편승하여 무역업에 진출했고, 이를 계기로 화신그룹 또한 최대의 상업자본으로 성장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외연적 확대가 경방삼양과 화신의 대기업 집단화에 크게 공헌한 셈이다. 세번째 성공 원인은 일제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하에서 민족계 기업들은 일본계 기업들에 비하여 대체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일제의 식민정책 내지는 자본력, 기술력, 경영능력 등의 열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필요한 협조자를 포섭하는 차원에서 조선인 지주 및 기업가 등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토착기업인들은 이와 같은 여건을 활용하기 위해 총독부와의 연결고리 형성에 주력하였고, 이를 통해 식민지적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연수는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 경성주재 만주국총영사, 총동원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 박흥식도 총동원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등을 각각 역임한 것이 상징적인 사례였다. 또한 박흥식과 김연수는 함께 1944년 10월에 설립된 조선비행기공업의 초대 이사진에 참여하기도 했다.(이한구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 청사, 1989, 214~225면) 결국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동화된 예속 기업가들이었던 것이다. 삼양과 화신그룹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본의 정치집단과 한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이용, 외줄타기식의 사업을 전개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일제하라는 특수한 조건과 환경을 기업경영에 적절히 활용했던 것이다. 경방삼양그룹과 화신그룹은 국내 재벌의 효시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국내 재벌 형성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박흥식이 인수하기 전 화신상회의 초기 모습(위)과 화재 후 현대식 대형 건물로 완공된 화신백화점 모습(아래). 화신 그룹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화신 50년사' 수록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0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1]화신그룹-9 화신, 역사속으로

흥한화섬 경영난 소유권 넘겨1차 석유파동 치명타 한계상황구제금융 좌절 회생노력 물거품1962년 5월 15일에 자본금 30억 환의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경기도 남양주 도농에 16만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했다. 박흥식은 미국 아메리칸 트레이딩(American Trading Co.) 등을 차관선으로 외자 1천60만 달러와 내자 40억 원을 들여 일산 15t 규모의 비스코스 인견사공장, 일산 20t 규모의 황산공장, 일산 3.6t 규모의 가성소다공장, 일산 6t 규모의 이산화탄소공장 건설작업에 착수했다.그 와중에서 인견사 시설규모를 20만t에서 15만 t으로 축소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20t 규모의 신(新) 시설 도입가격이 미국에서는 1천750만 달러, 이태리에서 2천750만 달러인 반면에 일본 동양레이온에서 몇 년 동안 사용했던 15만t 시설의 경우는 550만 달러에 도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성능에서 신품에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수명도 10년간은 보장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공장건설에 필요한 내자 8억4천만 원 중 3억 원은 자신이 조달하고 나머지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용자 받아 해결하기로 했다. 정부는 1962년 6월 10일에 화폐개혁을 단행에서 화폐단위를 종래의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교환비율은 10:1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안정계획 때문에 산업은행 융자가 여의치 못해 건설초기부터 자금난을 겪었다. 당초 10t 규모의 비스코스인견사공장이 설계과정에서 15t으로 늘어난 것도 자금부담을 가중시켰다. 내자조달이 원활치 못한 상황에서 건설공사가 지지부진하던 1964년 2월부터 차관선으로부터 원리금상환을 독촉 받기 시작하였다. 박흥식은 신신백화점 부근의 금싸라기 땅과 화신산업의 건물을 처분해서 1966년 12월 15일에 외자 1천50만 달러, 내자 40여억 원을 들여 동양최대의 공장을 완공했다. 이날 기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등이 참석하여 2천여 종업원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이후부터 흥한화섬은 본격가동에 돌입하였으나 인견사의 내수 및 수출이 의도한 대로 확대되지 않아 경영상 어려움이 많았다. 1968년 10월 15일에 박흥식은 흥한화섬 주식 50.003%를 산업은행에 넘겼으며 1969년 10월 15일에는 화신산업과 박흥식이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주식(29만9천730주)까지 산업은행에 넘겨 흥한화섬의 소유권은 산업은행으로 이전됐다.흥한화섬의 설립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힘을 소진했던 화신산업은 1971년 5월 21일에 본사를 종로2가 YMCA빌딩에서 중구 초동의 자동차보험빌딩으로 이전한 후 그룹회생에 매진해서 1972년 3월 14일에 화신전기를 설립했다.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2만여 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하고 총 15억 원을 투입해 1974년 9월 15일에 완공했다. 이 회사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지도를 받아 냉방기생산에 착수했다. 1973년 11월 13일에는 화신산업과 일본 (주)레나운, (주)쿠라레 등과 60:30:10의 비율로 합자하여 자본금 10억 원의 화신레나운을 설립했다. 니트 셔츠, 신사복 상의 등 봉제품 가공 및 판매를 위해서였는데 본사는 인천시 남구 학익동 430번지에 뒀다. 또한 1973년 9월 1일에는 일본 소니와 51:49의 비율로 합자해서 자본금 10억원의 화신쏘니를 설립했다. 당시 금성사, 삼성전자, 대한전선 등이 일본의 하다치, 도시바, NEC등과 합자하여 국내 가전시장을 분할지배하고 있었다. 기존의 가전업체들이 긴장한 가운데 화신쏘니는 1974년 5월에 부천시 도당동에 제1 공장을 준공하고 제품생산에 착수했다.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으로 화신쏘니 등은 시작부터 심각한 자금난에 직면하였다. 화신쏘니의 경영이 초반부터 경영난에 직면하자 일본측 파트너인 소니사가 화신쏘니의 자본을 회수했다. 화신그룹의 경영이 한계상황에 직면, 박흥식은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이 1980년 10월 23일에 화신그룹 계열사들을 최종부도 처리했다. 당시 화신산업, 화신전자, 화신전기 등 3사의 부채는 323억 원이었다.박흥식은 화신레나운, 화신타이거리싱 등을 매각하여 60억 원을 상환하고 신신백화점을 제일은행에 매각하는 등 화신그룹 사수를 위해 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기업역사상 최초의 재벌이자 60여년 역사의 화신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3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0]화신그룹-8 사업의 재개

고철 수출하다가 흥한방직 설립신신百 개점 이어 화신百 재개장5·16때 박흥식 수감 3번째 시련군사정권 수입대체 산업에 도전박흥식은 1950년 12월 3일 일본에서 귀국해 사업을 구상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에 또다시 부산으로 피난했다. 화신산업은 부산에서 고철을 수출하다가 1952년부터는 무연탄과 고령토, 형석, 규석, 해태 등을 수출했다.1953년 2월 11일에는 인천시 학익동 430에 자본금 5천만 환(원)의 흥한방직(주)를 설립했다. 이곳은 원래 일제 때 제국제마(帝國製麻)주식회사 인천공장으로 방적기 1만추(錘), 직포기 200대 규모였다. 이 공장은 해방을 계기로 이종현(李宗鉉)이 경영했으나 6.25전쟁으로 부진을 겪다 화신에 인수된 것이다. 박흥식은 이를 흥한방직으로 재발족하고 이종현에게 경영을 맡겼다. 이종현은 박흥식과 동년배의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농림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년여의 복구작업을 거쳐 1954년부터 생산을 개시해 당기순이익 500여만환을 기록했으며, 1955년에는 면방기 1천368추, 직기 220대에 종업원 수가 500여 명에 달했다. 이 회사는 1974년에 화신산업에 합병됐다.화신산업은 화신백화점 복구를 뒤로 미루고 1955년 11월 15일 서울 종로1가 49의 구 동화백화점 자리에 대지 1천678평, 건평 1천463평의 2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신축해서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면적이 넓은 1층은 연쇄점으로, 2층은 백화점으로 꾸며 임대전용으로 했다. 화신백화점은 1956년 10월 15일에 재개장하면서 과거와 같은 직영제가 아닌 임대제로 전환했다.박흥식은 자유당정부와의 관계개선에 힘을 기울여 1955년 11월 26일에는 신축한 신신백화점에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하는 등 정치적 기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박흥식은 친일기업인으로 각인됐지만 이승만과는 같은 이북출신이어서 관계 설정이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새로 탄생한 민주당정부에도 접근했다. 박흥식은 장면정권이 들어선 후 몇 달 동안은 정부의 경제문제에 관한 자문에 응할 정도로 밀착했다. 당시 한 언론은 '정치는 장 총리가 하고, 경제 문제는 박모가 좌우하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화신은 해방 이래 3번째 시련에 직면했다. 쿠데타 1주 후인 5월 23일에 박흥식이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박흥식이 장면 총리체제하에서 막대한 이권과 융자를 받는 대가로 민주당정부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을 것이란 루머 때문이었다. 박흥식은 43일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다수의 부정축재 혐의 기업인들과 경제개발사업에 참여했다.군사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인견사 10만t 규모의 2개 공장과 아세테이트 10t 규모의 1개 공장 건설사업을 국영사업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곧 방침을 바꿔 민영화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희망업체를 공모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인견사 수요가 증가했으나, 국내에는 생산시설이 전무해 연간 500만 달러 가량의 인견사를 수입했기 때문이었다.정부는 인견사를 국내에서 직접 제조함으로써 외화절약은 물론 일자리 확대에도 순기능을 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정부는 사업에 필요한 외자 2천만 달러의 차관을 지불보증해 주고 내자 84억 환의 절반을 융자해 주는 조건으로 희망업체를 공모했다. 총 10개 업체가 신청했는데 그 중에서 화신산업과 조선견직(朝鮮絹織)이 적격업체로 선정됐다. 정부는 화신산업과 조선견직에 각각 10t 규모의 공장을 1개씩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생산능력을 20만t 규모로 확대하면 건설비에서 30%, 생산비에서 10%씩 절감이 가능하다며 박흥식의 주도로 화신과 조선견직이 합자회사를 설립해서 공장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조선견직은 합작조건 등의 문제를 들어 참여를 포기함으로써 정부가 공사비의 1/2을 융자해준다는 조건으로 화신산업이 단독으로 추진하게 됐다.일제시대에는 주로 백화점과 연쇄점업을 근간으로 해서 성장해온 화신이 8.15해방 후에는 무역업으로 기반을 다지다가 또다시 수입대체산업에 도전한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5년 문을 연 신신백화점 전경. /'화신50년사' 수록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2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9]화신그룹-7 최대의 시련

반민특위 구속 대법정서 '무죄'화신무역 흡수 '화신산업' 변경6·25전쟁으로 화신백화점 불타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뻐하는 만세 소리가 천하를 진동했다. 박흥식은 당황했으나 곧 기지를 발휘하여 화신백화점의 6층 처마에 'ELCOME ALLIED FORCES!(연합군을 환영합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면죄부를 찾을 궁리를 했다. 그러나 박흥식의 매국행각에 울분을 참아왔던 애국지사들과 좌익 청년들은 화신백화점 쇼윈도와 벽에 극렬한 벽보를 붙였다. '노동자의 착취자 박흥식을 처단하라' '반민족자요 전범인 박흥식을 인민의 이름으로 단죄한다'청년들은 중역들을 감금하고 사장실로 몰려가 박흥식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며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일단의 청년들과 농민들은 원한의 상징이었던 군수산업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안양공장을 습격했다. 그들은 당시 값으로 6억원(圓)에 달하는 기계시설과 자재들을 부수고 그 일부를 뜯어갔다. ('재벌 25시' 기록 인용)1946년 2월에는 박흥식과 그의 조카 박병교(朴炳敎) 전무가 화신백화점의 매점매석과 조선비행기(주)의 경리부정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가 56차례의 공판을 거쳐 76일 만에 무죄 석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화신무역이 돌파구를 찾았다. 패망한 일본과의 교역이 난관에 봉착하자 마카오, 홍콩, 천진, 청도 등과의 무역에 주목한 것이다. 화신무역은 1948년에 조선우선(朝鮮郵船, 대한해운공사)로부터 화물선 앵도환(櫻桃丸)을 빌려 홍콩으로 해산물과 홍삼 등을 수출했다. 조선우선은 1912년에 조선총독부의 보조를 받아 자본금 300만원(圓)으로 설립된 반관반민의 특수회사였다. 국내 연안항로를 거의 독점했으나, 해방직후인 1949년에 교통부산하의 대한해운공사로 재발족했다. 1968년에 민영화되어 1980년에 대한선주로 상호가 변경되었다가 1988년 12월에 한진해운에 합병되었다.화신을 선두로 삼흥실업, 동아상사, 대한산업, 대한물산, 삼호무역, 천우사 등이 무역업에 뛰어들어 무역업이 점차 활성화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앵도환이 북한에 억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북한측이 남한에 전기공급을 중단했다. 한국정부는 맞대응 대신 북한측과 비공식 접촉을 통해 물자교환을 추진해 화신무역의 앵도환이 물자를 싣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출발했다. 앵도환이 원산항에 정박 중이던 1948년 9월 12일에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박흥식의 체포를 계기로 북한이 앵도환을 억류하였는데, 이유는 "박흥식은 친일파로 처단 받게 되었으니 이 같은 반동분자의 재산은 인민의 이름으로 압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박흥식은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에 의해 제1호로 구속된 인사였다. 죄목은 반민법 제4조 7항의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책임 경영한 자'에 해당됐는데, 10년 이상의 징역 혹은 15년 이하의 공민권 정지 및 재산 압수를 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하지만 박흥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 103일 만인 4월 21일에 100만 원(圓)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가치로는 대략 1천700만 원에 해당한다. 약 5개월 후인 1949년 9월 26일, 대법정에서 박흥식은 끝내 무죄판결을 받았다.반민법의 족쇄에서 벗어난 박흥식은 화신그룹의 분위기 반전차원에서 1950년 1월 1일을 기해 화신무역을 (주)화신에 흡수시켜 화신산업(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5개월 뒤에 발발한 6.25전쟁은 화신에 또 다른 시련으로 작용했다. 유엔군의 9.28서울수복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으로 퇴각하면서 화신백화점에 불을 질러 전소되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부터 3개월 동안 당시 시가 1억2천여만 원(圓)의 백화점 재고상품을 약탈하기도 했다. 박흥식은 북한군의 서울점령 직전인 6월 27일에 인천에서 배로 일본으로 빠져나가 겨우 화를 면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1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8]화신그룹-6 계열사 정리

日강점기 경제통제로 축소경영불황 대비 지물·연쇄점 등 합병국내 첫 항공기공장 시도 좌절도박흥식이 1939년 4월 설립한 화신무역이 수출한 품목들은 수산물(통조림, 건어물, 생선기름 등), 광산물(흑연, 형석, 석탄 등), 공산물(방적기계 부품, 공예품, 인견, 마포, 신문용지 등), 농림산물(밤, 콩, 인삼, 돼지털, 베니어판, 코르크 등) 및 양품(洋品) 등이었다. 전국의 연쇄점을 통해 물품을 손쉽게 조달받은 탓에 화신무역은 남방무역을 거의 독점했을 뿐 아니라 천진 일대에서는 동화산업(東華産業)과 경쟁하며 성장했다. 화신무역은 설립 5개월 만에 남아프리카에 양은식기 등을, 미국에는 명태를, 이듬해에는 태국에 운동화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태국 수출을 계기로 국내 굴지의 무역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태국에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피분 수상이 집권하면서 신문화운동 제창과 함께 모든 국민은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태국 정부는 특히 전차를 타려면 반드시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을 만들고 위반자에겐 우리 돈으로 4원(圓) 가량의 벌금을 물렸다. 당시 태국인 1인당 한 달 생활비가 8원 정도였다. 박흥식은 벌금이 두려워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었던 태국인들에게 운동화를 수출해서 대박을 터뜨렸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 역시 전시경제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무역업계에 불황이 닥쳤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무역상들을 규제하기 위해 수출업을 쿼터제로 전환, 무역창구를 실적순위에 따라 화신무역과 동화산업 양사 체제로 제한함으로써 화신무역은 불황 중에도 호황을 구가했다.1940년 7월 7일 이른바 '77금지령(禁止令)'을 필두로 일제는 경제통제를 개시했다. 이에 따라 수 많은 기업체들이 도산하거나 축소경영을 해야했다. 화신그룹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중에서도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은 공급난으로 부진했다. 1941년 9월에 선일지물과 화신연쇄점(주)를 화신무역에 흡수 합병시켜 자본금을 500만 원으로 늘리는 한편 내실화를 도모했다. 대동흥업은 (주)화신에 흡수 합병해서 자본금 300만 원의 화신상사(和信商事)로 상호를 변경하고 대외무역에 주력했다. 1944년 3월에는 화신상사를 화신산업주식회사로 개명하였고, 같은해 11월에는 이를 (주)화신에 흡수(자본 800만원)하는 등 계열사 축소와 함께 자본규모의 대형화를 도모했다. 이로써 화신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주)화신에 통합됐고, (주)화신은 미국 스타일의 복합기업으로 모양새를 바꿨다. 불황시대에 대비한 계열사 정리를 단행한 후 박흥식은 더 이상의 사업 확장은 도모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10월에 그는 당시 유력 기업가들을 규합해서 공동으로 조선비행기공업(朝鮮飛行機工業)을 설립했다. 공칭자본 5천만원(圓)에 본사는 종로2가 5번지에 두었다. 생산공장은 경기도 안양에 건설하기로 하고 초대 이사진으로는 박흥식, 방규환(方奎煥), 방의석(方義錫), 장직상(張稷相), 김연수(金秊洙), 박춘금(朴春琴), 이기연(李基衍), 민규식(閔奎植), 김정호(金正浩) 등 한국인 실업계를 대표하는 간판급 기업인들과 조선총독부, 일본정부 내 항공부, 각 은행 대표, 화신그룹의 계열사 등이 포함됐다. 이 회사는 국내 최초의 민간항공기 제작회사였는데 당시 총독부에서 한국에 민간항공기 제조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미군기들의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빈번해졌다. 당시 미군기들의 공습대상은 주로 군수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들이었는데 빈번한 폭격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일본정부는 일본 육군 및 해군의 항공기 제조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서둘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항공기가 설립된 것이다. 이 회사는 1944년 12월에 군수공장으로 지정되는 한편 공장건설을 서두르고 자본 확충과 사원확보를 위해 주력하던 중 1945년 해방으로 비행기를 한 대도 생산하지 못한 체 폐업했다.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던 박흥식의 야망은 이렇게 일본 패망으로 좌절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1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7]화신그룹-5 화신그룹의 형성

국내 최초 사업 350개 모집 결실지물·상회 등 잇단 경영 대성공길주군에 레이온펄프 공장 건설박흥식은 1934년 2월 (주)화신상회를 (주)화신으로 변경하고 6월에는 화신연쇄점(和信連鎖店)을 설립하여 국내 최초로 연쇄점사업(chain store system)을 개시했다. 이 회사는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복잡한 유통구조를 단순화해서 높은 유통 이윤을 얻어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사업 개시와 함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동원해서 연쇄점 설치계획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상품을 공급해주는 조건을 내걸고 연쇄점 모집을 진행한 결과, 1차 모집 마감일인 그해 7월 15일까지 전국에 총 350개의 연쇄점을 지정하는 성공을 거둬냈다.박흥식은 연쇄점 신청자들로부터 거둬들인 부동산 문서를 담보로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서 3천만원(圓)의 거액을 융통받아 일본의 대(大) 메이커들과 접촉, 상품의 안정적 루트를 확보했다. 쌀값으로 환산하면, 박흥식이 융통받은 3천만원의 현재 가치는 약 3천700억원에 해당한다. 박흥식은 연쇄점 사업을 통해 단기간에 조선 굴지의 상업자본가로 성장했던 것이다.그러나 박흥식이 연쇄점 사업을 벌인지 2개월 만인 1935년 1월 27일 밤에 화신백화점에 화재가 발생해 건물 대부분과 상품을 태워 50만원 가량의 손해가 발생했다. 이때 박흥식은 재난을 기회로 전환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경황 중이던 직원들을 독려해서 화재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는 점과 1주일 이내로 영업을 재개하겠다는 내용으로 일간신문에 광고를 했다. 그리고 우원일성(宇垣一成) 조선총독의 협조를 얻어 옛 종로경찰서 건물을 빌려 2월 8일에 화신상회를 다시 개점해 시민들을 또다시 놀라게 했다. 화재로 폐허가 된 곳에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콘크리트 빌딩을 지어 1937년 11월에 완공했다. 1935년 12월 1일에는 화신 평양지점을, 1938년 6월 1일에는 화신 진남포지점을 각각 오픈하며 사업을 확장해 갔다.박흥식은 선일지물과 화신상회, 화신연쇄점 경영에서 연이은 대성공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차제에 그는 관계 및 재계 인사 등과 교류의 폭을 넓혀 1935년 초에 일본 제지업계의 으뜸인 왕자제지가 공칭자본 2천만원으로 설립한 북선제지(北鮮製紙)화학공업주식회사에 발기인 및 취체역으로 참여했다. 일본 내의 레이온 펄프 수요 급증에 따른 심각한 원료부족을 배경으로 함경북도 길주군에 연생산량 3만7천t의 레이온 펄프 공장을 건설한 것이다. 이곳에 공장을 건설한 것은 길주 일대의 울창한 낙엽송, 삼송(杉松), 활엽수 등을 원료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한편, 선일지물은 갈수록 증가하는 지물(紙物) 수요를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어 1935년에 삼화제지(三和製紙)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함경북도 청진에 제지기 3대를 갖추고 연간 2만t의 생산능력을 갖춰 선일지물에 납품하는 것이었다.1935년 9월에는 부동산 경영 및 금융, 농업 경영을 목적으로 대동흥업주식회사(大同興業)를 설립했다. 공칭자본 200만원을 들여 종로 2가 2번지 일대에 설립한 대동흥업주식회사는 태평양전쟁 중인 1940년 경제통제령에 따라 산업계가 마비되면서 1941년 9월 25일에 (주)화신에 흡수되었다.1937년 6월에는 농사, 목축, 부동산 경영 및 금융업을 목적으로 하준석·조준호와 공동으로 출자해서 제주도 한라산 일대 420여만 평의 농장부지를 구입해서 자본금 50만원의 제주도흥산(濟州道興産)을 설립하였다. 제주도흥산은 1941년에 박흥식이 주식 100%를 인수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종로2가 5번지에서 자본금 275만원의 화신무역(和信貿易)을 설립, 무역업에도 진출하였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과 만주, 북중국 일대와의 교역이 급격히 확대되는 등 소위 천진무역(天津貿易)이 박흥식의 구미를 당겼던 것이다. 전쟁 중인 만주, 북중국 일대는 각종 생활필수품과 잡화류가 대량으로 소요되어 화신무역은 설립 이래 최대성수기를 맞이하게 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화신50년사'에 수록된 화신연쇄점 본사 전경.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0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6]화신그룹-4 동아백화점과의 혈전

인수 4개월째 동아百 덜컥 오픈미인계 유인에 박리다매 '맞불'상품권 사은행사 대히트 마무리박흥식은 화신상회를 인수와 함께 법인화하고 조직을 개편, 취체역 회장에 전 소유주인 신태화를 추대해 화신의 전통을 계승하도록 했다. 인재도 끌어모아 서무과장에 은행 지점장 출신의 이종건(李鍾建)을, 매입과장에는 방관책(方觀策)을, 영업과장에는 전매국 광양만염전 구매관 출신이며 선일지물 2대 지배인이었던 이기연(李基衍)을 기용해서 새 출발의 기틀을 마련했다. 노후된 목조 2층 건물을 3층 콘크리트건물로 증축하고 1층 도로변에 한국 초유의 최신식 쇼윈도를 설치했으며, 소비자의 기호와 수요를 고려한 상품별로 부서를 확장해 백화점의 모양새를 갖췄다. 회사의 상징인 로고도 현대감각에 부합하도록 새로 만들었다. '화(和)'자가 삽입된 원(圓) 주변에 4개의 꽃잎을 두른 것으로 '화'는 '화신'의 머리글자이면서 동시에 임직원들의 화목을, 둘레의 동그라미는 태양을 상징한다. 원(圓) 주위의 4개 꽃잎은 사방을 뜻하는 것으로 세계적으로 무한한 발전을 염원한 것이다. 이 상표는 화신그룹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 사용했다.그러나 직원들의 시간관념이 희박해 영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고심 끝에 출근부를 비치했다. 당시 웬만한 상점에는 출근부가 없고, 설혹 출근부가 있어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아무리 출근부 날인을 지시해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후일 경찰 출신을 별도로 채용해서 점원 감독을 전담케 하는 등 우격다짐으로 겨우 기강을 잡았다. 점포의 영업시간도 문제였다. 한국인 중심의 종로상가는 예전부터 일정한 개·폐점 시간이 없었다. 날이 밝기 무섭게 문을 열고 야간에는 행인들의 발길이 끊어진 자정을 지나서야 문을 닫았다. (주)화신상회도 초창기에는 개·폐점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잠이 부족한 점원들이 근무 중 졸기가 비일비재했고 심한 경우 가구부의 양복장에 숨어 도둑잠을 자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영업시간을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로 정했다. 또한 백화점 고객들은 일반시장 고객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대학졸업자를 직원으로 채용해서 매장에 배치하는 등 서비스 제고에 주력했다.그 와중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화신상회 인수 4개월째인 1932년 1월 화신상회 동쪽 맞은편에 동아백화점이 문을 연 것이다. 일찍부터 현 파고다 아케이드 자리에서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를 운영해오던 최남(崔楠)이 민규식 소유의 4층 건물 2층을 임대해서 화신상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동아부인상회는 1919년 종로 2가 31번지에 자본금 5만원(圓)으로 설립돼 양품 잡화, 귀금속과 시계, 안경, 부녀자용 수예품 등을 취급했다. 최남은 서울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추전광산(秋田鑛山)전문학교를 수료한 후 조선은행 행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퇴직과 함께 덕원(德元)상회를 경영하다 동아부인상회를 설립했다. 그는 1920년에 종로구 관수동 20번지에 유흥음식점인 국일관(國一館)도 설립하는 등 종로 상인들 간에 사업수완이 뛰어난 사업가로 평가됐다.동아백화점은 미녀 여사원을 대대적으로 모집해서 매장에 배치하는 등 미인계로 고객들을 유인했다. 화신은 선일지물에서 선보인 박리다매로 맞불을 놨다. 품질이 극히 우수한 상품을 가장 낮은 가격에 구입해 최저의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1932년 1월 일본 오사카 서구 인남통 3정목 소재 지하 1층 지상 3층 빌딩을 임대해서 대판사입부(大阪仕入部)를 신설하고, 각종 상품 메이커들로부터 공장도가격으로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매출액을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경리부서에 레지스터 계산기도 설치했다.6개월여의 치열한 경쟁에서 동아백화점이 백기를 들었다. 채용했던 미녀 점원 여러 명을 감독사원이 농락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다, 화신이 1932년 7월 10일부터 17일까지 전대미문의 현금교환이 가능한 답례용 상품권 증정 사은 대매출 행사가 히트를 친 것이다. 동아는 화신과 경쟁하느라 출혈이 심해 버티기 어렵기도 했다.7월 16일 최남은 박흥식에게 동아백화점 일체를 양도하기로 결정함으로써 6개월간의 대혈전이 마무리 됐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와 동아백화점 건물 사이에 국내 초유의 육교를 가설해서 고객들이 양 건물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화신상회는 한국인이 설립한 유일의 현대식 백화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화신50년사'에 수록된 화신백화점 전경. /'화신50년사' 수록 사진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26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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