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2]화신그룹(완)-10日강점기 재벌형성

한국인 고객층 기반 자리매김총독부와 협조관계 형성 주력만주·북중국 진출 그룹 발판도화신그룹은 경방삼양그룹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재벌을 완성한 기업집단이었다. 경방삼양그룹의 김성수·김연수 형제가 선대에 축적된 농업자본을 근대적인 산업자본으로 전환해서 제조업 중심의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한 대표적인 '지주출신형 산업자본가'였다면, 화신그룹의 박흥식은 유통업에 특화해서 자수성가한 '서민출신형 상업자본가'였다. 이들은 일제 치하라는 특수한 기업환경 속에서 각자 서로 다른 분야에서 기업집단을 형성한 대표적인 토착 기업가들로 꼽힌다.이들이 일제하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경영 감각 내지는 선진 경영기법 및 기술의 적극 도입 등 나름대로 발군의 기업가정신을 발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이들의 주요 고객이 한국인이었다는 점이다. 경성방직이나 중앙상공 등은 후발업체로서 기존에 일본자본 등이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남한지역 대신 북한지방 공략에 주력하였다. 1920년대 경성방직은 생산을 개시했으나 제품의 질이 떨어져 경영난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때마침 전국적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에 힘입어 도산위기를 넘기고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화신그룹의 근거지도 일본 자본의 침투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종로상권으로, 백화점의 주요 고객은 한국인 소비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같은 성공의 맥락을 갖고 있다. 일제하에서 민족의식에 고취된 사회분위기가 토착기업들의 성장의 활력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경방삼양과 화신은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만주 및 북중국 지역에 진출하면서 그룹으로 도약할 기회를 얻었다. 경성방직은 중일전쟁이후 만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생산규모 확대 및 일관 생산 체제를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양사 또한 중국에 다수의 농장경영을 확대해서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하였다. 화신그룹도 중일전쟁 이후 '만주 특수'에 편승하여 무역업에 진출했고, 이를 계기로 화신그룹 또한 최대의 상업자본으로 성장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외연적 확대가 경방삼양과 화신의 대기업 집단화에 크게 공헌한 셈이다. 세번째 성공 원인은 일제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하에서 민족계 기업들은 일본계 기업들에 비하여 대체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일제의 식민정책 내지는 자본력, 기술력, 경영능력 등의 열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필요한 협조자를 포섭하는 차원에서 조선인 지주 및 기업가 등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토착기업인들은 이와 같은 여건을 활용하기 위해 총독부와의 연결고리 형성에 주력하였고, 이를 통해 식민지적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연수는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 경성주재 만주국총영사, 총동원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 박흥식도 총동원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등을 각각 역임한 것이 상징적인 사례였다. 또한 박흥식과 김연수는 함께 1944년 10월에 설립된 조선비행기공업의 초대 이사진에 참여하기도 했다.(이한구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 청사, 1989, 214~225면) 결국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동화된 예속 기업가들이었던 것이다. 삼양과 화신그룹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본의 정치집단과 한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이용, 외줄타기식의 사업을 전개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일제하라는 특수한 조건과 환경을 기업경영에 적절히 활용했던 것이다. 경방삼양그룹과 화신그룹은 국내 재벌의 효시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국내 재벌 형성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박흥식이 인수하기 전 화신상회의 초기 모습(위)과 화재 후 현대식 대형 건물로 완공된 화신백화점 모습(아래). 화신 그룹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화신 50년사' 수록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8-0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1]화신그룹-9 화신, 역사속으로

흥한화섬 경영난 소유권 넘겨1차 석유파동 치명타 한계상황구제금융 좌절 회생노력 물거품1962년 5월 15일에 자본금 30억 환의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경기도 남양주 도농에 16만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했다. 박흥식은 미국 아메리칸 트레이딩(American Trading Co.) 등을 차관선으로 외자 1천60만 달러와 내자 40억 원을 들여 일산 15t 규모의 비스코스 인견사공장, 일산 20t 규모의 황산공장, 일산 3.6t 규모의 가성소다공장, 일산 6t 규모의 이산화탄소공장 건설작업에 착수했다.그 와중에서 인견사 시설규모를 20만t에서 15만 t으로 축소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20t 규모의 신(新) 시설 도입가격이 미국에서는 1천750만 달러, 이태리에서 2천750만 달러인 반면에 일본 동양레이온에서 몇 년 동안 사용했던 15만t 시설의 경우는 550만 달러에 도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성능에서 신품에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수명도 10년간은 보장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공장건설에 필요한 내자 8억4천만 원 중 3억 원은 자신이 조달하고 나머지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용자 받아 해결하기로 했다. 정부는 1962년 6월 10일에 화폐개혁을 단행에서 화폐단위를 종래의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교환비율은 10:1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안정계획 때문에 산업은행 융자가 여의치 못해 건설초기부터 자금난을 겪었다. 당초 10t 규모의 비스코스인견사공장이 설계과정에서 15t으로 늘어난 것도 자금부담을 가중시켰다. 내자조달이 원활치 못한 상황에서 건설공사가 지지부진하던 1964년 2월부터 차관선으로부터 원리금상환을 독촉 받기 시작하였다. 박흥식은 신신백화점 부근의 금싸라기 땅과 화신산업의 건물을 처분해서 1966년 12월 15일에 외자 1천50만 달러, 내자 40여억 원을 들여 동양최대의 공장을 완공했다. 이날 기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등이 참석하여 2천여 종업원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이후부터 흥한화섬은 본격가동에 돌입하였으나 인견사의 내수 및 수출이 의도한 대로 확대되지 않아 경영상 어려움이 많았다. 1968년 10월 15일에 박흥식은 흥한화섬 주식 50.003%를 산업은행에 넘겼으며 1969년 10월 15일에는 화신산업과 박흥식이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주식(29만9천730주)까지 산업은행에 넘겨 흥한화섬의 소유권은 산업은행으로 이전됐다.흥한화섬의 설립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힘을 소진했던 화신산업은 1971년 5월 21일에 본사를 종로2가 YMCA빌딩에서 중구 초동의 자동차보험빌딩으로 이전한 후 그룹회생에 매진해서 1972년 3월 14일에 화신전기를 설립했다.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2만여 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하고 총 15억 원을 투입해 1974년 9월 15일에 완공했다. 이 회사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지도를 받아 냉방기생산에 착수했다. 1973년 11월 13일에는 화신산업과 일본 (주)레나운, (주)쿠라레 등과 60:30:10의 비율로 합자하여 자본금 10억 원의 화신레나운을 설립했다. 니트 셔츠, 신사복 상의 등 봉제품 가공 및 판매를 위해서였는데 본사는 인천시 남구 학익동 430번지에 뒀다. 또한 1973년 9월 1일에는 일본 소니와 51:49의 비율로 합자해서 자본금 10억원의 화신쏘니를 설립했다. 당시 금성사, 삼성전자, 대한전선 등이 일본의 하다치, 도시바, NEC등과 합자하여 국내 가전시장을 분할지배하고 있었다. 기존의 가전업체들이 긴장한 가운데 화신쏘니는 1974년 5월에 부천시 도당동에 제1 공장을 준공하고 제품생산에 착수했다.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으로 화신쏘니 등은 시작부터 심각한 자금난에 직면하였다. 화신쏘니의 경영이 초반부터 경영난에 직면하자 일본측 파트너인 소니사가 화신쏘니의 자본을 회수했다. 화신그룹의 경영이 한계상황에 직면, 박흥식은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이 1980년 10월 23일에 화신그룹 계열사들을 최종부도 처리했다. 당시 화신산업, 화신전자, 화신전기 등 3사의 부채는 323억 원이었다.박흥식은 화신레나운, 화신타이거리싱 등을 매각하여 60억 원을 상환하고 신신백화점을 제일은행에 매각하는 등 화신그룹 사수를 위해 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기업역사상 최초의 재벌이자 60여년 역사의 화신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3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0]화신그룹-8 사업의 재개

고철 수출하다가 흥한방직 설립신신百 개점 이어 화신百 재개장5·16때 박흥식 수감 3번째 시련군사정권 수입대체 산업에 도전박흥식은 1950년 12월 3일 일본에서 귀국해 사업을 구상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에 또다시 부산으로 피난했다. 화신산업은 부산에서 고철을 수출하다가 1952년부터는 무연탄과 고령토, 형석, 규석, 해태 등을 수출했다.1953년 2월 11일에는 인천시 학익동 430에 자본금 5천만 환(원)의 흥한방직(주)를 설립했다. 이곳은 원래 일제 때 제국제마(帝國製麻)주식회사 인천공장으로 방적기 1만추(錘), 직포기 200대 규모였다. 이 공장은 해방을 계기로 이종현(李宗鉉)이 경영했으나 6.25전쟁으로 부진을 겪다 화신에 인수된 것이다. 박흥식은 이를 흥한방직으로 재발족하고 이종현에게 경영을 맡겼다. 이종현은 박흥식과 동년배의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농림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년여의 복구작업을 거쳐 1954년부터 생산을 개시해 당기순이익 500여만환을 기록했으며, 1955년에는 면방기 1천368추, 직기 220대에 종업원 수가 500여 명에 달했다. 이 회사는 1974년에 화신산업에 합병됐다.화신산업은 화신백화점 복구를 뒤로 미루고 1955년 11월 15일 서울 종로1가 49의 구 동화백화점 자리에 대지 1천678평, 건평 1천463평의 2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신축해서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면적이 넓은 1층은 연쇄점으로, 2층은 백화점으로 꾸며 임대전용으로 했다. 화신백화점은 1956년 10월 15일에 재개장하면서 과거와 같은 직영제가 아닌 임대제로 전환했다.박흥식은 자유당정부와의 관계개선에 힘을 기울여 1955년 11월 26일에는 신축한 신신백화점에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하는 등 정치적 기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박흥식은 친일기업인으로 각인됐지만 이승만과는 같은 이북출신이어서 관계 설정이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새로 탄생한 민주당정부에도 접근했다. 박흥식은 장면정권이 들어선 후 몇 달 동안은 정부의 경제문제에 관한 자문에 응할 정도로 밀착했다. 당시 한 언론은 '정치는 장 총리가 하고, 경제 문제는 박모가 좌우하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화신은 해방 이래 3번째 시련에 직면했다. 쿠데타 1주 후인 5월 23일에 박흥식이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박흥식이 장면 총리체제하에서 막대한 이권과 융자를 받는 대가로 민주당정부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을 것이란 루머 때문이었다. 박흥식은 43일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다수의 부정축재 혐의 기업인들과 경제개발사업에 참여했다.군사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인견사 10만t 규모의 2개 공장과 아세테이트 10t 규모의 1개 공장 건설사업을 국영사업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곧 방침을 바꿔 민영화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희망업체를 공모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인견사 수요가 증가했으나, 국내에는 생산시설이 전무해 연간 500만 달러 가량의 인견사를 수입했기 때문이었다.정부는 인견사를 국내에서 직접 제조함으로써 외화절약은 물론 일자리 확대에도 순기능을 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정부는 사업에 필요한 외자 2천만 달러의 차관을 지불보증해 주고 내자 84억 환의 절반을 융자해 주는 조건으로 희망업체를 공모했다. 총 10개 업체가 신청했는데 그 중에서 화신산업과 조선견직(朝鮮絹織)이 적격업체로 선정됐다. 정부는 화신산업과 조선견직에 각각 10t 규모의 공장을 1개씩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생산능력을 20만t 규모로 확대하면 건설비에서 30%, 생산비에서 10%씩 절감이 가능하다며 박흥식의 주도로 화신과 조선견직이 합자회사를 설립해서 공장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조선견직은 합작조건 등의 문제를 들어 참여를 포기함으로써 정부가 공사비의 1/2을 융자해준다는 조건으로 화신산업이 단독으로 추진하게 됐다.일제시대에는 주로 백화점과 연쇄점업을 근간으로 해서 성장해온 화신이 8.15해방 후에는 무역업으로 기반을 다지다가 또다시 수입대체산업에 도전한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5년 문을 연 신신백화점 전경. /'화신50년사' 수록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2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9]화신그룹-7 최대의 시련

반민특위 구속 대법정서 '무죄'화신무역 흡수 '화신산업' 변경6·25전쟁으로 화신백화점 불타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뻐하는 만세 소리가 천하를 진동했다. 박흥식은 당황했으나 곧 기지를 발휘하여 화신백화점의 6층 처마에 'ELCOME ALLIED FORCES!(연합군을 환영합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면죄부를 찾을 궁리를 했다. 그러나 박흥식의 매국행각에 울분을 참아왔던 애국지사들과 좌익 청년들은 화신백화점 쇼윈도와 벽에 극렬한 벽보를 붙였다. '노동자의 착취자 박흥식을 처단하라' '반민족자요 전범인 박흥식을 인민의 이름으로 단죄한다'청년들은 중역들을 감금하고 사장실로 몰려가 박흥식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며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일단의 청년들과 농민들은 원한의 상징이었던 군수산업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안양공장을 습격했다. 그들은 당시 값으로 6억원(圓)에 달하는 기계시설과 자재들을 부수고 그 일부를 뜯어갔다. ('재벌 25시' 기록 인용)1946년 2월에는 박흥식과 그의 조카 박병교(朴炳敎) 전무가 화신백화점의 매점매석과 조선비행기(주)의 경리부정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가 56차례의 공판을 거쳐 76일 만에 무죄 석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화신무역이 돌파구를 찾았다. 패망한 일본과의 교역이 난관에 봉착하자 마카오, 홍콩, 천진, 청도 등과의 무역에 주목한 것이다. 화신무역은 1948년에 조선우선(朝鮮郵船, 대한해운공사)로부터 화물선 앵도환(櫻桃丸)을 빌려 홍콩으로 해산물과 홍삼 등을 수출했다. 조선우선은 1912년에 조선총독부의 보조를 받아 자본금 300만원(圓)으로 설립된 반관반민의 특수회사였다. 국내 연안항로를 거의 독점했으나, 해방직후인 1949년에 교통부산하의 대한해운공사로 재발족했다. 1968년에 민영화되어 1980년에 대한선주로 상호가 변경되었다가 1988년 12월에 한진해운에 합병되었다.화신을 선두로 삼흥실업, 동아상사, 대한산업, 대한물산, 삼호무역, 천우사 등이 무역업에 뛰어들어 무역업이 점차 활성화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앵도환이 북한에 억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북한측이 남한에 전기공급을 중단했다. 한국정부는 맞대응 대신 북한측과 비공식 접촉을 통해 물자교환을 추진해 화신무역의 앵도환이 물자를 싣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출발했다. 앵도환이 원산항에 정박 중이던 1948년 9월 12일에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박흥식의 체포를 계기로 북한이 앵도환을 억류하였는데, 이유는 "박흥식은 친일파로 처단 받게 되었으니 이 같은 반동분자의 재산은 인민의 이름으로 압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박흥식은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에 의해 제1호로 구속된 인사였다. 죄목은 반민법 제4조 7항의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책임 경영한 자'에 해당됐는데, 10년 이상의 징역 혹은 15년 이하의 공민권 정지 및 재산 압수를 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하지만 박흥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 103일 만인 4월 21일에 100만 원(圓)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가치로는 대략 1천700만 원에 해당한다. 약 5개월 후인 1949년 9월 26일, 대법정에서 박흥식은 끝내 무죄판결을 받았다.반민법의 족쇄에서 벗어난 박흥식은 화신그룹의 분위기 반전차원에서 1950년 1월 1일을 기해 화신무역을 (주)화신에 흡수시켜 화신산업(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5개월 뒤에 발발한 6.25전쟁은 화신에 또 다른 시련으로 작용했다. 유엔군의 9.28서울수복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으로 퇴각하면서 화신백화점에 불을 질러 전소되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부터 3개월 동안 당시 시가 1억2천여만 원(圓)의 백화점 재고상품을 약탈하기도 했다. 박흥식은 북한군의 서울점령 직전인 6월 27일에 인천에서 배로 일본으로 빠져나가 겨우 화를 면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1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8]화신그룹-6 계열사 정리

日강점기 경제통제로 축소경영불황 대비 지물·연쇄점 등 합병국내 첫 항공기공장 시도 좌절도박흥식이 1939년 4월 설립한 화신무역이 수출한 품목들은 수산물(통조림, 건어물, 생선기름 등), 광산물(흑연, 형석, 석탄 등), 공산물(방적기계 부품, 공예품, 인견, 마포, 신문용지 등), 농림산물(밤, 콩, 인삼, 돼지털, 베니어판, 코르크 등) 및 양품(洋品) 등이었다. 전국의 연쇄점을 통해 물품을 손쉽게 조달받은 탓에 화신무역은 남방무역을 거의 독점했을 뿐 아니라 천진 일대에서는 동화산업(東華産業)과 경쟁하며 성장했다. 화신무역은 설립 5개월 만에 남아프리카에 양은식기 등을, 미국에는 명태를, 이듬해에는 태국에 운동화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태국 수출을 계기로 국내 굴지의 무역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태국에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피분 수상이 집권하면서 신문화운동 제창과 함께 모든 국민은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태국 정부는 특히 전차를 타려면 반드시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을 만들고 위반자에겐 우리 돈으로 4원(圓) 가량의 벌금을 물렸다. 당시 태국인 1인당 한 달 생활비가 8원 정도였다. 박흥식은 벌금이 두려워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었던 태국인들에게 운동화를 수출해서 대박을 터뜨렸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 역시 전시경제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무역업계에 불황이 닥쳤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무역상들을 규제하기 위해 수출업을 쿼터제로 전환, 무역창구를 실적순위에 따라 화신무역과 동화산업 양사 체제로 제한함으로써 화신무역은 불황 중에도 호황을 구가했다.1940년 7월 7일 이른바 '77금지령(禁止令)'을 필두로 일제는 경제통제를 개시했다. 이에 따라 수 많은 기업체들이 도산하거나 축소경영을 해야했다. 화신그룹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중에서도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은 공급난으로 부진했다. 1941년 9월에 선일지물과 화신연쇄점(주)를 화신무역에 흡수 합병시켜 자본금을 500만 원으로 늘리는 한편 내실화를 도모했다. 대동흥업은 (주)화신에 흡수 합병해서 자본금 300만 원의 화신상사(和信商事)로 상호를 변경하고 대외무역에 주력했다. 1944년 3월에는 화신상사를 화신산업주식회사로 개명하였고, 같은해 11월에는 이를 (주)화신에 흡수(자본 800만원)하는 등 계열사 축소와 함께 자본규모의 대형화를 도모했다. 이로써 화신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주)화신에 통합됐고, (주)화신은 미국 스타일의 복합기업으로 모양새를 바꿨다. 불황시대에 대비한 계열사 정리를 단행한 후 박흥식은 더 이상의 사업 확장은 도모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10월에 그는 당시 유력 기업가들을 규합해서 공동으로 조선비행기공업(朝鮮飛行機工業)을 설립했다. 공칭자본 5천만원(圓)에 본사는 종로2가 5번지에 두었다. 생산공장은 경기도 안양에 건설하기로 하고 초대 이사진으로는 박흥식, 방규환(方奎煥), 방의석(方義錫), 장직상(張稷相), 김연수(金秊洙), 박춘금(朴春琴), 이기연(李基衍), 민규식(閔奎植), 김정호(金正浩) 등 한국인 실업계를 대표하는 간판급 기업인들과 조선총독부, 일본정부 내 항공부, 각 은행 대표, 화신그룹의 계열사 등이 포함됐다. 이 회사는 국내 최초의 민간항공기 제작회사였는데 당시 총독부에서 한국에 민간항공기 제조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미군기들의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빈번해졌다. 당시 미군기들의 공습대상은 주로 군수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들이었는데 빈번한 폭격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일본정부는 일본 육군 및 해군의 항공기 제조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서둘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항공기가 설립된 것이다. 이 회사는 1944년 12월에 군수공장으로 지정되는 한편 공장건설을 서두르고 자본 확충과 사원확보를 위해 주력하던 중 1945년 해방으로 비행기를 한 대도 생산하지 못한 체 폐업했다.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던 박흥식의 야망은 이렇게 일본 패망으로 좌절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1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7]화신그룹-5 화신그룹의 형성

국내 최초 사업 350개 모집 결실지물·상회 등 잇단 경영 대성공길주군에 레이온펄프 공장 건설박흥식은 1934년 2월 (주)화신상회를 (주)화신으로 변경하고 6월에는 화신연쇄점(和信連鎖店)을 설립하여 국내 최초로 연쇄점사업(chain store system)을 개시했다. 이 회사는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복잡한 유통구조를 단순화해서 높은 유통 이윤을 얻어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사업 개시와 함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동원해서 연쇄점 설치계획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상품을 공급해주는 조건을 내걸고 연쇄점 모집을 진행한 결과, 1차 모집 마감일인 그해 7월 15일까지 전국에 총 350개의 연쇄점을 지정하는 성공을 거둬냈다.박흥식은 연쇄점 신청자들로부터 거둬들인 부동산 문서를 담보로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서 3천만원(圓)의 거액을 융통받아 일본의 대(大) 메이커들과 접촉, 상품의 안정적 루트를 확보했다. 쌀값으로 환산하면, 박흥식이 융통받은 3천만원의 현재 가치는 약 3천700억원에 해당한다. 박흥식은 연쇄점 사업을 통해 단기간에 조선 굴지의 상업자본가로 성장했던 것이다.그러나 박흥식이 연쇄점 사업을 벌인지 2개월 만인 1935년 1월 27일 밤에 화신백화점에 화재가 발생해 건물 대부분과 상품을 태워 50만원 가량의 손해가 발생했다. 이때 박흥식은 재난을 기회로 전환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경황 중이던 직원들을 독려해서 화재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는 점과 1주일 이내로 영업을 재개하겠다는 내용으로 일간신문에 광고를 했다. 그리고 우원일성(宇垣一成) 조선총독의 협조를 얻어 옛 종로경찰서 건물을 빌려 2월 8일에 화신상회를 다시 개점해 시민들을 또다시 놀라게 했다. 화재로 폐허가 된 곳에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콘크리트 빌딩을 지어 1937년 11월에 완공했다. 1935년 12월 1일에는 화신 평양지점을, 1938년 6월 1일에는 화신 진남포지점을 각각 오픈하며 사업을 확장해 갔다.박흥식은 선일지물과 화신상회, 화신연쇄점 경영에서 연이은 대성공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차제에 그는 관계 및 재계 인사 등과 교류의 폭을 넓혀 1935년 초에 일본 제지업계의 으뜸인 왕자제지가 공칭자본 2천만원으로 설립한 북선제지(北鮮製紙)화학공업주식회사에 발기인 및 취체역으로 참여했다. 일본 내의 레이온 펄프 수요 급증에 따른 심각한 원료부족을 배경으로 함경북도 길주군에 연생산량 3만7천t의 레이온 펄프 공장을 건설한 것이다. 이곳에 공장을 건설한 것은 길주 일대의 울창한 낙엽송, 삼송(杉松), 활엽수 등을 원료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한편, 선일지물은 갈수록 증가하는 지물(紙物) 수요를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어 1935년에 삼화제지(三和製紙)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함경북도 청진에 제지기 3대를 갖추고 연간 2만t의 생산능력을 갖춰 선일지물에 납품하는 것이었다.1935년 9월에는 부동산 경영 및 금융, 농업 경영을 목적으로 대동흥업주식회사(大同興業)를 설립했다. 공칭자본 200만원을 들여 종로 2가 2번지 일대에 설립한 대동흥업주식회사는 태평양전쟁 중인 1940년 경제통제령에 따라 산업계가 마비되면서 1941년 9월 25일에 (주)화신에 흡수되었다.1937년 6월에는 농사, 목축, 부동산 경영 및 금융업을 목적으로 하준석·조준호와 공동으로 출자해서 제주도 한라산 일대 420여만 평의 농장부지를 구입해서 자본금 50만원의 제주도흥산(濟州道興産)을 설립하였다. 제주도흥산은 1941년에 박흥식이 주식 100%를 인수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종로2가 5번지에서 자본금 275만원의 화신무역(和信貿易)을 설립, 무역업에도 진출하였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과 만주, 북중국 일대와의 교역이 급격히 확대되는 등 소위 천진무역(天津貿易)이 박흥식의 구미를 당겼던 것이다. 전쟁 중인 만주, 북중국 일대는 각종 생활필수품과 잡화류가 대량으로 소요되어 화신무역은 설립 이래 최대성수기를 맞이하게 된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화신50년사'에 수록된 화신연쇄점 본사 전경.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7-0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6]화신그룹-4 동아백화점과의 혈전

인수 4개월째 동아百 덜컥 오픈미인계 유인에 박리다매 '맞불'상품권 사은행사 대히트 마무리박흥식은 화신상회를 인수와 함께 법인화하고 조직을 개편, 취체역 회장에 전 소유주인 신태화를 추대해 화신의 전통을 계승하도록 했다. 인재도 끌어모아 서무과장에 은행 지점장 출신의 이종건(李鍾建)을, 매입과장에는 방관책(方觀策)을, 영업과장에는 전매국 광양만염전 구매관 출신이며 선일지물 2대 지배인이었던 이기연(李基衍)을 기용해서 새 출발의 기틀을 마련했다. 노후된 목조 2층 건물을 3층 콘크리트건물로 증축하고 1층 도로변에 한국 초유의 최신식 쇼윈도를 설치했으며, 소비자의 기호와 수요를 고려한 상품별로 부서를 확장해 백화점의 모양새를 갖췄다. 회사의 상징인 로고도 현대감각에 부합하도록 새로 만들었다. '화(和)'자가 삽입된 원(圓) 주변에 4개의 꽃잎을 두른 것으로 '화'는 '화신'의 머리글자이면서 동시에 임직원들의 화목을, 둘레의 동그라미는 태양을 상징한다. 원(圓) 주위의 4개 꽃잎은 사방을 뜻하는 것으로 세계적으로 무한한 발전을 염원한 것이다. 이 상표는 화신그룹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 사용했다.그러나 직원들의 시간관념이 희박해 영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고심 끝에 출근부를 비치했다. 당시 웬만한 상점에는 출근부가 없고, 설혹 출근부가 있어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아무리 출근부 날인을 지시해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후일 경찰 출신을 별도로 채용해서 점원 감독을 전담케 하는 등 우격다짐으로 겨우 기강을 잡았다. 점포의 영업시간도 문제였다. 한국인 중심의 종로상가는 예전부터 일정한 개·폐점 시간이 없었다. 날이 밝기 무섭게 문을 열고 야간에는 행인들의 발길이 끊어진 자정을 지나서야 문을 닫았다. (주)화신상회도 초창기에는 개·폐점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잠이 부족한 점원들이 근무 중 졸기가 비일비재했고 심한 경우 가구부의 양복장에 숨어 도둑잠을 자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영업시간을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로 정했다. 또한 백화점 고객들은 일반시장 고객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대학졸업자를 직원으로 채용해서 매장에 배치하는 등 서비스 제고에 주력했다.그 와중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화신상회 인수 4개월째인 1932년 1월 화신상회 동쪽 맞은편에 동아백화점이 문을 연 것이다. 일찍부터 현 파고다 아케이드 자리에서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를 운영해오던 최남(崔楠)이 민규식 소유의 4층 건물 2층을 임대해서 화신상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동아부인상회는 1919년 종로 2가 31번지에 자본금 5만원(圓)으로 설립돼 양품 잡화, 귀금속과 시계, 안경, 부녀자용 수예품 등을 취급했다. 최남은 서울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추전광산(秋田鑛山)전문학교를 수료한 후 조선은행 행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퇴직과 함께 덕원(德元)상회를 경영하다 동아부인상회를 설립했다. 그는 1920년에 종로구 관수동 20번지에 유흥음식점인 국일관(國一館)도 설립하는 등 종로 상인들 간에 사업수완이 뛰어난 사업가로 평가됐다.동아백화점은 미녀 여사원을 대대적으로 모집해서 매장에 배치하는 등 미인계로 고객들을 유인했다. 화신은 선일지물에서 선보인 박리다매로 맞불을 놨다. 품질이 극히 우수한 상품을 가장 낮은 가격에 구입해 최저의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1932년 1월 일본 오사카 서구 인남통 3정목 소재 지하 1층 지상 3층 빌딩을 임대해서 대판사입부(大阪仕入部)를 신설하고, 각종 상품 메이커들로부터 공장도가격으로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매출액을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경리부서에 레지스터 계산기도 설치했다.6개월여의 치열한 경쟁에서 동아백화점이 백기를 들었다. 채용했던 미녀 점원 여러 명을 감독사원이 농락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다, 화신이 1932년 7월 10일부터 17일까지 전대미문의 현금교환이 가능한 답례용 상품권 증정 사은 대매출 행사가 히트를 친 것이다. 동아는 화신과 경쟁하느라 출혈이 심해 버티기 어렵기도 했다.7월 16일 최남은 박흥식에게 동아백화점 일체를 양도하기로 결정함으로써 6개월간의 대혈전이 마무리 됐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와 동아백화점 건물 사이에 국내 초유의 육교를 가설해서 고객들이 양 건물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화신상회는 한국인이 설립한 유일의 현대식 백화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화신50년사'에 수록된 화신백화점 전경. /'화신50년사' 수록 사진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26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5]화신그룹-3 화신상회 인수

대공황 여파 물자 중요성 간파파산 직전 귀금속 전문점 인수日 진출막은 종로상인 덕 성장선일지물이 순조롭게 성장하자 박흥식은 사업 다각화에 착수했다. 그 첫 사업으로 만주사변 발발 3일전인 1931년 9월 15일에 서울 종로 2가 3번지에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 화신상회(和信商會, 현 제일은행 본점 자리)를 설립했다. 신태화(申泰和)가 귀금속 전문점인 화신상회를 설립해서 운영해오던 것을 36만원(현재가치 약 57억여원)에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재발족한 것이다. 일제가 1930년 금본위제로 화폐제도를 전환함에 따라 화신상회의 귀금속 판로가 막히면서 파산에 직면했던 때문이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난이 가중되는 터에 전쟁위기까지 감돌 때는 물자를 매점매석할 수 있는 백화점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박흥식이 간파했던 것이다.신태화는 1877년에 서울에서 출생해 어린 나이에 유통업에 투신해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는 "전쟁에 나서는 군인은 무기를 가져야 하듯이 상인은 신용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상인은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흐리터분한 생각과 행동은 상계에선 금물이다"란 경영철학의 소유자로서 명석한 청년사업가인 박흥식에 매료되어 흔쾌히 화신상회를 넘긴 것이다. 화신상회를 넘겨받을 당시 박흥식의 나이는 29세였다. 박흥식이 인수하기 전부터 화신상회의 금은세공품 등은 수차례 우수상과 포상을 받을 정도로 품질이나 기술이 탁월해 대표적인 한국공예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런 평가는 후일 화신백화점 귀금속부의 귀금속이 전국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밑거름이 되었다. 1922년에는 화신상회 내에 양복부를 신설했으며, 1923년에는 잡화부까지 추가해 백화점 형태를 갖췄다('화신오십년사' 103~105면).이 무렵 서울의 명동 부근에는 일본 백화점들인 삼월(三越,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삼중정(三中井), 정자옥(丁子屋, 현 롯데영프라자), 평전(平田)상회 등이 진출하여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 중에서 제대로 된 백화점은 본정통(本町通, 충무로2가)의 삼월(三越) 경성지점인데, 당시에는 1층 점포 안에 다다미를 깔아놓아 고객들은 신발을 벗거나 덧신을 신어야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백화점들은 성업 중이었다.반면 종로에는 백화점이 전무했던 탓에 화신상회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광화문에서 종로3가에 이르는 지역은 전통적인 육의전(六矣廛)거리였다. 육의전이란 왕실과 육조거리에 있는 관청에 물품을 대는 6개의 어용상점들로 조선시대 전국 상업의 중심역할을 하던 시전(市廛)의 대표적 존재들이었다. 조선 태종 때 정부가 직접 상가건물들을 축조해서 상인들에게 분양해주었는데 개항(1876년) 무렵의 육의전 위치는 다음과 같다고 기록돼 있다.종각역에서 광화문 방향 종로대로 좌측에는 면포전(綿布廛, 무명)과 면주전(綿紬廛, 명주)이, 우측에는 선전(線廛, 비단)과 저포전(苧布廛, 모시)이 각각 위치했으며, 종각역에서 동대문 쪽으로는 좌우양편에 선전(線廛)과 좌측 낙원동 일대에는 어물전(魚物廛, 생선)이 있었다. 종각역에서 광교에 이르는 도로의 좌측에는 저포전, 우측에는 면포전에 이어 지전(紙廛, 종이)이 줄지어 있었다. 광화문에서 종로3가까지, 그리고 광교 일대는 육의전 상가였고 육의전 조합인 도가(都家)는 서린동에 위치했다(조기준,'한국자본주의성립사론', 1973년, 247면).이 지역의 상인들을 '종로상인'이라 일컬었는데, 이들은 비록 천민 대접을 받더라도 왕실에 어용품을 조달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을 뿐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는 민족의식도 강했다. 개항 이후 일본상인들이 종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종로상인들은 단결해서 자기들의 상권을 굳건히 지켰다. 자기들끼리는 치열하게 경쟁하더라도 점포만은 절대 일본 상인들에 매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종로상인들 덕분에 종로에 자리를 잡은 토착기업인 화신상회는 무사히 성장할 수 있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박흥식 인수 당시 화신백화점 모습. /'화신50년사' 수록 사진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19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4]화신그룹-2 1926년 문 연 선일지물

일본 3대 제지 신문시장 장악'스웨덴 용지' 박리다매 성공금강산 유람등 홍보· 판로확장청년 사업가로 성장한 박흥식은 궁벽한 시골구석보다 경성(서울)에서 웅지를 펴겠다고 결심하고 2, 3개월에 한 차례씩 서울을 왕래하며 제반 사항들을 주도면밀하게 점검했다. 서울이전 계획을 접한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이 박흥식의 서울행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10여 대(代) 동안 뿌리를 내린 고향을 떠나는 것도 문제인데다 연고가 전혀 없는 서울에서 약관의 청년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 때문이었지만, 박흥식의 결심은 꺾지 못했다.그는 24세 때인 1926년 봄에 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리고 그해 6월 1일 서울의 중심지인 황금정(을지로) 2정목 180번지에서 자본금 25만원(圓)의 선일지물(鮮一紙物)주식회사를 차리고 지물 도매 및 부대사업을 시작했다. 상호 '선일'은 '조선에서 제일'이 되겠다는 박흥식의 야심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한달 하숙비가 10원 내외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1920년대는 소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로 불리던 때여서 일제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문화정책을 표방해 신문잡지와 각종 서적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인쇄용지의 수요량이 날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박흥식은 서울에서 뿌리를 내릴 여지가 없었다. 당시 국내의 신문용지 시장은 일본의 3대 제지 메이커인 왕자제지(王子製紙), 북월제지(北越製紙), 화태공업(樺太工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박흥식은 당초 왕자제지로부터 신문용지를 수입하려 했다. 당시 왕자제지, 북월제지, 화태공업은 서로 과당경쟁을 피하기 위해 공동판매기구(카르텔)를 결성한 뒤 그곳에서 지명한 특약점에 한해 지물류를 공급하고 있었다. 일본인 지물상들은 국내의 관공서와 일본인 소유 민간기업, 일본계 신문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문용지까지 독점 공급해 엄청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일본인 지물상들은 무명의 시골청년이 철옹성을 자랑하는 서울의 지물업계에 뛰어든 것을 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식으로 코웃음을 쳤다. 동포 상인들도 혜성처럼 등장한 선일지물에 경이와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박흥식은 공동판매기구와의 접촉에서 실패한 후 1927년 초가을에 일본에 건너가서 새로운 수입처를 물색하다 궁리 끝에 스웨덴을 떠올렸다. 학생 시절에 스웨덴은 전 국토의 59%가 산림지대로 제재, 펄프, 제지업이 발달했다는 점을 교육 받았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스웨덴의 일본대사관을 찾아 상무관과의 면담을 통해 실마리를 풀었다. 반신반의로 추진한 상담은 성공이었다. 상담 후 얼마 안돼 상무관이 약속한 견본(샘플)과 가격표가 도착했는데 용지의 질도 일본산보다 훨씬 좋았을 뿐 아니라 가격 또한 일본산에 비해 파격적으로 저렴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산 신문용지는 1연(連) 당 4원 50전인 반면에 스웨덴산은 2원 42전 5리에 불과했다. 무역선 더글러스호는 스웨덴의 신문용지를 가득 싣고 인천항에 입항했다. 선일지물은 일본제품들보다 재질이 우수하고 가격도 절반인 신문용지를 스웨덴으로부터 직수입해서 연(連)당 3원75전에 박리다매했다. 화지(和紙, 일본 종이)의 경우 중간상을 배제하고 직접 주산지인 일본 인주(因洲), 이예(伊豫), 토좌(土佐) 등지의 생산업체들과 하청계약을 맺어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경쟁업체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했다. 이후 선일지물의 사시(社是)는 "싸게 사서 싸게 판다"로 굳어졌다.또한 특별봉사 판매방식을 채택하여 카본지 500타 이상을 일정 기간 내에 구입하는 고객들에게는 회사부담으로 금강산 유람에 초대하고, 화지(和紙) 50환(丸) 이상을 구입하는 고객에게는 일본관광에 초대하는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마케팅전략을 구사했다.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국내의 여러 신문사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맞아들였다. 지류 수입선도 캐나다의 바우리 리바 제지회사를 추가했다. 그 결과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신문사에 신문용지를 독점 공급했을 뿐 아니라 멀리 만주와 중국 등지로 판로를 확장했다. 선일지물은 서울 진출 6년만인 1932년에 신문용지, 화지·양지 등의 연간 판매고 300만원(현재가치 약 400억원)을 기록해 국내 제일의 지물회사로 성장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12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화신그룹-1 사업의 시작과 선광인쇄

창업자 박흥식, 2천석 부농 둘째16세때 쌀장사 시작 무역상 성장18세때 세운 인쇄소 주식회사로재벌문제연구소에서 1985년에 발간한 '재벌25시'에는 화신그룹 창업자에 대해 '영욕의 격랑을 헤쳐온 파도타기의 명수'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화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떨친 기업인으로서 일제에 발 벗고 충성한 장본인"이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반민특위 해체로 기사회생했다. 언제나 힘이 강한 쪽에 편승하여 재산을 늘린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박흥식(朴興植)은 1903년 8월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에서 2천석 지기의 부농 박제현(朴濟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결혼과 함께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수리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는 16세 때인 1918년에 진남포의 객주와 연결해서 쌀장사를 시작했다. 식민지 백성들로서는 돈을 버는 것이 최고임을 각성했던 것이다. 또한 10년 연상인 형 박창식(朴昌植)이 1910년에, 부친은 1916년에 각각 사망함으로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박흥식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성품이 올곧았던 창식은 도산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다니면서 우국충정을 키웠는데,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한 달 만에 초죽음이 되어 풀려난 후 그해 12월 1일 1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부친은 장남을 잃은 후 아픈 마음을 달래려 술로 세월을 보내다 1916년 8월 6일에 39세로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제1차 세계대전(1914~1918) 기간 동안 일본에는 식량난이 심각해 1918년 8월에는 급기야 '쌀 소동'이 벌어졌다. 1918년 여름 일본 민중들이 쌀 도매상들의 가격 담합에 집단 항의한 사건인데, 그 여파로 테라우치(寺內正毅) 내각이 총사퇴 하기도 했다. 근대 일본이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 대중투쟁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곡물가격이 급등세를 보여 농산물유통업이 호황이었다. 평남 서해 끝단의 곡창지대인 용강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박흥식은 사업개시 1년 만에 제법 큰 미곡무역상이 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시황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등 상리(商理)에 밝았던 것이다. 18세 때인 1920년에는 한국인에게 불모지와 같았던 인쇄와 종이류 판매를 겸하는 자본금 5만원(圓)의 선광인쇄소(鮮光印刷所)를 용강 읍내에 세웠다. 5만원은 요즘 가치로 대략 1억여 원으로 18세 소년사업가에겐 매우 큰 돈이었으나 어머니의 배려로 가능했다. 명함, 청첩장, 부고장 같은 것을 찍기 시작해 점차 군청과 면사무소의 각종 공문을 맡아 찍었으며 진남포와 강서지방의 인쇄물까지 수주할 정도였다.국내에 근대인쇄업이 최초로 개시된 것은 1881년 부산에서 일본인에 의해 신식의 연활자(鉛活字)가 보급되면서부터였다. 금속활자는 재료에 따라 동(銅)활자, 철(鐵)활자, 연활자 등으로 구분하는데 활자의 재료가 납이면 납활자 혹은 연활자라 칭했다. 1883년에는 정부가 박문국을 설치해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했으며, 1884년에는 사설인쇄업체인 광인사(廣印社)가 배재학당과 기독교단체 등의 출판물을 인쇄했다. 이후부터 점차 인쇄출판 및 인쇄용지 시장규모가 커졌으나 서울 등 대도시에 국한되었을 뿐, 지방 소도시는 여전한 불모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한편 박흥식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통신판매제를 도입했다. 먼 지방의 고객들에게 상품목록이나 가격표 등을 표시한 카탈로그를 발송해 주문을 권유하고 우편 등을 이용해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187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해 선진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달했으나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업태였다. 박흥식은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회사 일에 매달렸다. '화신오십년사'에는 그가 야근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인쇄소는 날로 번창했다. 1924년에는 자본금 10만원(圓)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재발족하는 등 박흥식은 어엿한 청년사업가로 성장해 있었다. 선광인쇄는 박흥식이 시도한 최초의 본격적인 사업으로 장차 화신그룹 형성의 발판이 되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05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경방삼양그룹(완)-11 타임스퀘어로 변신

1990년대 '방직업 하향세' 대처백화점·홈쇼핑 등 '사업다각화'영등포에 신개념 유통단지 방점경성방직은 1962년부터 해외시장으로 눈길을 돌려 그해 10월에 창립 이후 최초로 미국에 면직물 2만8천250달러를 수출했다. 이후 수출액은 1966년 100만 달러로 늘었다. 1968년에는 미국의 듀퐁과 특약을 맺고 데크론섬유를 독점 수입했다. 1965년에는 이토추 미국법인과 교섭을 벌여 연리 6%의 미화 118만1천95달러의 장기차관자금으로 방기 1만추와 직기 206대를 도입했다. 김용완은 관행이던 정부 혹은 은행의 지불보증을 배제하고 자체신용만으로 이토추와의 차관도입 거래를 성사시켰다.1967년에는 영국의 PLATT BROS LIMITED와 장기차관도입 계약을 성사시켜 1969년 최신 방기 6천300추를 확보했다. 1968년 11월에는 부산 동래구 재송동 310일대에 공장부지 3만2천평을 매입했다. 1970년에는 경성방직의 상호를 주식회사 경방으로 바꾸고 국내의 대표적인 섬유수출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1975년에 김용완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김각중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김각중은 김용완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1944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이과를 졸업하고 1964년 미국 유타대학에서 이론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고려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5년에 부친의 뒤를 이어 경방 회장에 취임했다.1977년에는 경방기계의 전신인 (주)새한패시픽을 인수했으며, 1981년 6월 일본 오사카(大阪) 지점을 현지법인 케이보재팬으로 승격해 설립했다. 1980년대까지 용인, 반월, 광주에 대규모 공장을 준공해서 1987년에는 1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1990년대 들어 방직업이 하향세로 접어들자 제품의 고부가가치화에 주력함과 동시에 유통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서둘렀다. 1990년 (주)경방어패럴을 설립했고, 1992년에는 (주)경방프라자쇼핑센타를 설립한 뒤 이듬해 경방유통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4년에는 경방 영등포공장 인근에 경방필백화점을 개점했다. 2001년에는 우리홈쇼핑을 개국해 2006년에 롯데그룹에 매각했다. 2009년 9월 서울 영등포구 옛 경방공장 터에 연면적 37만㎡, 매장면적 12만㎡의 초대형 복합쇼핑몰 '타임스퀘어'를 준공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신개념 복합유통단지로 쇼핑몰, 영화관, 백화점, 서점, 호텔 등 상업·업무·문화·레저가 어우러진 새로운 도시형 엔터테인먼트 공간이다. 2010년 4월 2세 경영자인 김각중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장남 김준 부사장이 신임 대표이사 사장에 오르면서 경방은 3세 경영 체제로 전환됐다. 김각중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김준은 장남, 김담은 차남으로 모두 경방 경영에 관여하고 있었다. 경방삼양그룹의 역사는 2017년 정확히 창업 1세기를 맞이했다. 김성수가 1917년에 인수한 경성직뉴를 모체로 점차 사업을 확장해서 굴지의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일제 말기에는 재벌에 준하는 그룹을 형성했고, 해방 후 국내의 여타 재벌들과 같은 성장패턴으로 몸집을 불렸다. 삼양그룹의 성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삼성, 현대, LG, SK 등에 비해 외형이 빈약할 뿐 아니라 다각화 내용도 단순하다. 이런 더딘 성장은 일제하에선 토착기업이란 핸디캡 탓에, 해방 이후에는 야당계 기업 혹은 일제하에서 부일한 기업가 등으로 각인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5-29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경방삼양그룹-10 소유·경영구조 정비

선장 김연수 1945년 방직 손떼창업자 형제 간 사이좋게 분할2011년 삼양홀딩스로 상호 변경삼양의 사업 다각화는 해외진출로도 이어졌다. 2004년 5월에 중국 상해시 청포공업원구에 삼양공정소료유한공사를 설립한다. 2010년 2월에는 유럽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헝가리 야스베레니시에 삼양EP헝가리를 설립했다. 중국 하북성 진황도 경제기술개발구의 진황도삼양사식품유한공사는 삼양제넥스가 100% 출자해서 설립한 법인이다.국내외로 사업이 다각화 되면서 모기업인 삼양사는 2011년 11월에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주)삼양홀딩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2015년 12월 현재 삼양홀딩스의 대주주로는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5.4%), 국민연금관리공당(13.19%), 양영재단(5.22%) 등이다. 김윤 회장은 창업자 김연수의 3남인 김상홍(2010년 타계)의 장남이다. 삼양그룹도 창업3세 경영시대를 맞은 것이다.한편, 경성방직은 해방 이후 남북분단으로 북한지역에 있는 조면공장을 잃었다. 그 결과 영등포, 의정부, 양평동, 쌍림동 공장만 거느려 규모가 상당히 축소됐다. 게다가 6·25전란 중 포격으로 의정부공장과 시흥염색공장이 완전히 파괴됐다. 영등포공장도 전란의 피해를 입었는데, 방적공장이 전소되면서 방기 3만200추 중 2만5천600추가 소실되고 직기 1천129대 중 12대가 망가졌다. 하지만 서울 탈환 직후인 1951년 4월부터 생산을 재개하고 1953년에는 방기 1만2천600추와 직기 448대 규모로 확장됐다. 당시 가장 어려운 것은 원면의 확보였다. 원조면이 남아돌아도 방직협회에서는 경성방직에 원면을 배정해주지 않았는데, 자유당 정부가 야당계 기업으로 지목해 배척했던 탓이다. 김용완 사장이 무쵸 주한미국대사에 호소해서 원면을 겨우 배정받을 수 있었다. 1959년 경성방직의 시설은 정방기 4만600추, 직기 1천68대로 전쟁 이전 수준으로 복귀했다.한편, 1956년 국내에 처음으로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됐다. 경성방직은 그해 3월 3일 주식시장 오픈과 함께 증권거래소에 상장해서 기업을 공개하고 자본금을 1억환으로 늘렸다. 증시 개장 당시 총 12개 종목이 상장됐는데 경성방직은 그 가운데 회원번호 001번을 받았다. 주목되는 것은 경성방직 설립직후인 1922년 4월부터 선장 노릇을 하던 김연수가 경성방직의 소유 및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이다. 김연수는 1945년 12월에 경성방직 대표취체역에서 물러난 후 1958년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경성방직의 주식(총주식수의 30%)을 전량 처분했다. 이후부터 김연수는 오로지 삼양그룹 형성에 매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경성방직은 매제인 김용완이 경영을 전담했다.김용완은 '기업의 미래는 인재에 달려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업가였다. 1939년 만주에 남만주방적 설립과 함께 회사 내에 중등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만들어 근로자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산업체 부설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창업자 김성수는 훨씬 이른 시기에 경성방직을 떠났다. 1928년 경성방직의 취체역을 사임하면서 기업가로서의 활동을 접었던 것이다. 사회계몽운동 내지는 교육활동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이후 김성수가(家)는 고려중앙학원(고려대, 중앙중고)과 동아일보를, 김연수가는 삼양그룹을, 김용완가는 경성방직을 분할 지배하는 식으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경성방직이란 싹을 틔어 잘 배양해서 창업자 형제간 사이좋게 나눈 것이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22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경방삼양그룹-9 문어발식 다각화

1972년 선일포도당 공동인수후삼화배합사료·이천중기·양돈…2011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굴지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삼양은 1970년대부터 문어발식 다각화에 착수했다. 1972년 8월에는 삼양·제일제당·대한제당 3사가 적자상태의 선일포도당주식회사(현 주식회사 삼양제넥스)를 공동으로 인수했다. 1976년 인천에 새 공장을 준공한 후 1984년 12월에 삼양이 제일제당과 대한제당의 소유지분을 넘겨받아 계열사로 편입했다. 1987년 6월에는 기업을 공개하고 1991년에는 울산공장과 열병합발전소를 각각 준공했다. 삼양제넥스의 생산제품은 식품, 제지, 제약 등의 주·부원료다.1975년 12월 목포공업단지내 삼화(三和)배합사료주식회사를 인수해서 1976년 1월에 삼양사 목포공장 분공장으로 재발족했는데, 여러 차례의 증설과 1982년 시설현대화 공사를 마무리해 대량생산설비를 갖췄다. 정밀화학분야의 이온교환수지 생산은 일본의 미쓰비시와 기술제휴해서 1976년 12월 울산제당공장 옆에 양(陽)이온교환수지 후처리 공장을 건설하고 이듬해 4월부터 SK-1B와 PK-212L의 제품생산에 착수했다. 1981년 이온교환수지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74.7%다. 1976년 4월에는 부천 소재 기계 메이커 이천중기의 발행주식 43.5%를 매입해서 경영에 참여한 후, 1977년 8월에 주식지분을 56.7%로 늘려서 경영권을 넘겨받아 1979년 2월에 삼양중기주식회사(현 주식회사 삼양엔텍)로 변경했다. 각종 주물과 산업기계를 생산해 국내 대기업 납품은 물론 자사 생산설비의 개체 및 수리를 담당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기계부품을 수출해 1991년 5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1978년 5월에는 전남 영광에 대규모 양돈단지를 조성코자 26만평의 영광농장을 세웠다. 1989년 3월에는 첨단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수지를 생산 판매할 목적으로 미쓰비시와 50%씩 합작투자로 자본금 30억원의 삼양화성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전주시 팔복동 전주 제2공단에 연생산량 1만5천t의 공장을 세워 1991년 5월부터 생산에 착수했다. 1988년에는 신한제분주식회사를 계열사로 편입했다. 부산과 인천 부평에 각각 제분공장과 전분공장을 거느린 신한제분은 1956년 창업 이후 경영난을 겪다 삼양의 식구가 된다. 현재의 상호는 (주)삼양밀맥스다.1994년 9월에는 삼양종합금융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전신은 1979년 12월 설립된 전북투자금융으로, 1992년 4월에 삼양이 주식지분 22.8%로 경영권을 확보했다.1992년 4월에는 의료기기의 수입판매를 목적으로 주식회사 삼양메디케어를 설립했다. 장기적으로 종합의료기기 제작·판매는 물론 신약개발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1995년에는 삼양텍스(주)와 삼양데이타시스템을 각각 설립하고 1996년에는 삼양테크힐 인수와 삼양텔레콤을 설립했다. 2006년 1월에는 (주)삼양EMS를 인수해 친환경 레스토랑 세븐스프링스와 카페 세븐스프링스를 운영하는 삼양F&B를 설립했다. 2009년에는 연간 15만t 이상의 BPA(비스페놀-A)를 생산하는 삼양이노켐을 설립하고 전북 군산시 오식도동에 생산거점을 마련했다. 2011년 삼양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는 의약바이오사업 부문을 분할해서 삼양바이오팜을 설립했다. 2014년 11월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PET병 생산부문을 삼양사로부터 분리해서 삼양패키징을 설립했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15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경방삼양그룹-8 화섬산업 새 지평

전주방직 인수 '삼양모방'으로전주시 요청에 1970년 공장설립폴리에스테르 생산… 고속 성장삼양사는 1963년 2월에는 자금난에 빠져 있는 전주방직을 인수해서 삼양모방주식회사로 재발족 했다. 전주방직은 일제 말기에 조선마방(朝鮮麻紡)주식회사 전주공장으로 출발했는데, 공장 건축과 기계설비 등이 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민간에 불하되어 고려방직으로 상호를 바꾸는 한편 마방(麻紡)에서 견방(絹紡)으로, 견방에서 모방으로 변경해 군납용 복지를 생산하다 6·25전쟁으로 재기불능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 학교법인 중앙학원(현 고려중앙학원)이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전주방직회사라는 상호를 달고 운크라(UNKRA)로부터 30만 달러를 원조 받아 시설을 보완했다. 1954년부터는 견방 일부와 소모방 생산에 착수했으나, 극심한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면서 결국 6천만원(현재 가치 21억여 원)에 삼양사에 넘겨진 것이다. 1963년 2월 전주방직을 인수한 삼양사는 전주방직의 상호를 삼양모방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인수 첫해인 1963년에 소모방 10만㎏과 위탁가공품 6만㎏을 생산했지만, 이후 적자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삼양사가 화섬공업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은 폴리에스테르 사업에 진출하면서 부터다. 삼양이 화섬에 뜻을 굳히고 준비에 착수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삼양모방은 1977년 6월에 삼양사에 합병되었다.삼양사는 1966년 7월에 일본의 미쓰비시 상사(三稜商事)와 789만 달러의 차관도입에 합의했다.하루 생산량을 스테이플 파이버(Staple fiber) 12톤(M/T)과 필라멘트(Filament) 13톤으로 확정하고 소요 자금인 내자 11억 478만원과 외자 789만 달러 등에 대해 1966년 10월 5일 정부허가를 받아냈다. 공장 설립을 위해서 삼양사는 울산 공장 옆의 8만여평 유휴지에 이미 4천만원을 들여 공장 부지를 조성했다. 그런데 당시 전주시는 새로 공업단지로 지정된 팔복동 일원에 공장 부지를 조성하면서 삼양의 폴리에스테르 공장 유치를 강력히 희망하고 나섰다. 삼양은 즉시 팔복동 2가 339에 있는 단지 내 부지 9만7천292평을 전주시로부터 평당 344원에 매입했다. 이곳에 1968년부터 공장 설립 공사에 착수, 1969년 12월에 폴리에스테르 스테이플 파이버와 필라멘트 방사(紡絲) 및 연신(延伸) 시설을 세웠으며, 1970년에는 국내 최초로 중합시설을 준공했다. 삼양의 폴리에스텔 '트리론'이 탄생된 배경이다. 전주공장은 이후 지속적인 설비확장과 품종 다양화를 통해 1984년에는 폴리에스테르 하루 생산량 164.5t의 생산능력을 보유하는 세계 굴지의 대단위 공장으로 성장했다. 삼양사는 1988년 1월에는 한국의 호남정유, 일본의 미쓰비시(三稜化成)와 3사 합작으로 자본금 30억원 삼남석유화학(三南石油化學)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삼양사 -제품구입, 미쓰비시-기술제공, 호남정유-원료공급 등이 사업내용으로, 투자비율은 삼양사 40%, 미쓰비시 40%, 호남정유 20% 였다. 1990년 4월에는 전남 여수시 적양동의 3만2천418평 부지에 폴리에스테르 섬유의 주원료인 TPA(Telephthalic Acid)를 생산하는 연산 28만톤의 공장을 세웠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0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경방삼양그룹-7 제당업 진출

1956년 '삼양설탕' 생산 개시제일·대동제당과 '과점 체제'日 600t, 국내 최대공장 성장삼양사는 해방 이후 첫 사업으로 1946년 6월 12일 전매 제2호로 전북 고창 해리농장에 대한 제염업 허가를 얻었다. 해리농장은 1936년 일본인 소유의 해원(海元)농사주식회사가 간척공사권을 따내고도 5년여 방치한 것이었다. 1947년부터 해리농장의 미간척지에 대한 염전축조에 착수해 1949년에 1차로 52.7정보의 염전을 완성하고 천일염 8천998가마를 생산했다. 민영염전의 효시가 된 해리염전은 삼양사의 자금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1954년 말에 해리염전은 총면적 300여 정보에 식염을 연간 2만5천톤 생산하는 대염전업체로 성장했고, 삼양사는 1956년 6월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로 분사했다. 삼양사는 이와 별도로 1953년 3월 17일에는 삼양통상 발족과 함께 전남 목포에 서남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장차 수산업 진출에 대비했다.6·26전쟁 때 김연수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규사업으로 제당과 과학한천(우뭇가사리) 생산에 도전했다. 해방과 함께 설탕 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했으나 수입만으로는 설탕의 국내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시절이어서 설탕 수입에 따른 막대한 규모의 달러화 유출도 주목됐다. 우뭇가사리는 홍조류에 속하는 해초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해초를 삶아 끈끈한 액체를 추출해 얼려 굳힌 다음 말려서 우무묵과 우무채, 우무장아찌 등을 만들었고 부녀자들의 머리장식으로도 사용했다. 수요가 많지만 지형, 토양, 하천수 등의 까다로운 입지조건과 한겨울에만 생산이 가능하다는 한계점이 있어 인공적으로 대량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전세계 총수요량은 연 3천톤 이상이었으나 90%가 일본제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제당 및 과학한천의 제조에는 해안이 최적지였다. 제당공장 가동에는 풍부한 냉각수가 필요할 뿐 아니라 원료입하 및 제품수송의 편리성도 고려해야 하는데 부산에는 공장을 세울만한 공지가 전혀 없었다. 김연수는 주위의 반대에도 습지와 갈대밭으로 우거진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앞바다를 매립하기로 하고 1954년 3월 10일에 23만1천㎡의 매립허가를 얻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당시 김연수의 수중에는 6·25전쟁 전에 농지개혁으로 모든 농장을 정부에 넘기고 받은 지가증권 뿐이었다. 그는 지가증권을 전부 처분했는데 액면가의 70% 내지 심지어 30~40%에 처분했다. 과거 함평과 해리 간척공사로 옥답(沃畓)과 염전을 조성했던 경험을 살려 1954년 6월 1차로 부지 4만3천560㎡의 매립공사와 함께 7천134㎡의 공장과 창고, 기관실 등을 준공했다. 제당공장 설계 및 과학한천의 생산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1955년 12월에는 서독 BMA사에서 도입한 하루생산량 50톤의 기계를 설치하고 1956년 1월 3일에 쿠바산 사탕수수를 원료로 한 '삼양설탕' 생산을 개시했다. 이후 제당업체의 난립에 따른 과당경쟁으로 동양제당, 금성제당, 한국제당, 해태제과 제당부가 차례로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제당업은 제일제당과 삼양사, 대동제당 등 3사의 과점체제로 정리됐다. 삼양사 공장은 1971년에는 하루 생산량 600톤의 증설공사를 통해 국내 최대의 단일공장으로 발돋움 했으며, 1973년에는 59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1964년에는 삼양사 여수공장을 건설해 사업을 넓혔는데, 자회사인 삼양수산을 흡수합병해서 마련한 수산물 냉동냉장 및 제빙공장이었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0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경방삼양그룹-6 최대의 위기

국내사업장 자주관리운동 확산'반민족행위자' 처벌 요구 커져김연수, 2달 감금 '시련의 계절'1945년 8·15 해방으로 경성방직그룹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북한에서 1948년 9월 9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탄생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을 장악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중국대륙 전체가 붉게 물들고 말았던 것이다.경성방직그룹은 평양, 남천, 은률 등지의 조면공장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하게 됐다. 중국에는 더 많은 시설들이 있는 것이 문제였다. 종업원 1천여명의 남만주방적을 비롯해 삼척기업, 오리엔탈비어 등이 생산활동 중이었다. 또한 삼양사 소속의 영구 천일농장, 매하농장과 봉천의 교하농장, 반석농장, 길림의 구대농장 등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들만 겨우 남한으로 이송시켰을 뿐 대부분의 재산이 부동산이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국내의 사업장에도 해방 후 광풍이 몰아쳤다. 일본인 소유 공장에서 한국인 종업원들이 자치관리위원회를 결성해 경영하는 자주관리운동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경방 근로자들도 재고품의 분배를 요구하면서 파업을 선동하는 등 경성방직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정치적, 사상적 색채를 띤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경성방직을 통째로 종업원들에게 넘기라는 요구였다. 삼양사의 여러 농장에서도 몇몇 직원들이 소작인들을 선동해서 오너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 3월부터 실시된 농지개혁은 설상가상이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하에서 정부가 지주들에게서 강제로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농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넘겨주는 내용이었다. 고율 소작료로 신음하는 소작농들에게 경작지를 되돌려준다는 취지였다. 삼양사 소유의 장성농장, 줄포농장, 고창농장, 영광농장, 법성농장, 손불농장 등 총 수확 15만석 규모의 농경지가 한꺼번에 정부에 넘어갔다. 농사기업이었던 탓에 삼양사의 자산은 사실상 8·15 해방과 6·25 전란으로 거의 없어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김연수는 개인적으로도 인생최대의 고비를 맞이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요구가 비등했다. 제헌헌법 제101조에는 '국회는 단기4278(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정부는 특별법인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1948년 9월 22일에 법률 제 3호로 공포했다. 이어 1949년 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는데, 김연수는 1월 21일에 연행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죄목은 단기4266년 4월말에 경기도 관선도평의원에 피선, 4272년에 만주국 명예영사에 피선, 4273년에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참의에 피임, 4273년 일제의 전쟁완수에 적극협력을 목적으로 결성한 임전보국단 간부에 피선, 4275년 초에는 조선인을 총동원하자는 취지의 국민총력동맹 후생부장 역임 등이었다. 당시 경성방직의 상무이자 김성수·연수 형제의 매제였던 김용완은 김연수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 와중에서 큰 처남인 김성수를 찾았으나 주변 인사들이 면회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김연수는 엄동설한을 감방에서 보내는 동안 발에 동상이 걸렸고 그로 인해 발톱이 몽땅 빠졌다. 구금 2달여 만인 3월 28일 제3부 공판에서 구속취소 판결을 받아 무죄로 방면됐지만, 김연수는 해방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4-2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경방삼양그룹-5대그룹으로 발돋움

수직계열화 집중 경쟁력 확보민족계기업 조선 민중과 밀접지주 → 산업자본 대표적 사례경성방직이 중국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하며 빠르게 성장해갈 무렵, 중앙상공도 안정된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중앙상공은 서울 쌍림동 공장을 피복공장으로 전환해 경성방직에서 조달받은 광목으로 학생복을 생산했는데, 여기서 만든 학생복이 중앙고보의 교복으로 사용됐다. 고무신 공장은 서울 양평동에 새로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해 건평 1천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했다. 이로써 중앙상공은 고무신, 운동화, 방한화, 고무호스 등을 생산하는 종업원 500명의 국내 최대 고무공장으로 부상했다. 태평양전쟁 중에 쌍림동 공장은 일본 육군용 군복생산공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1945년 1월에는 동광생사주식회사(납입자본 200만원, 의정부 소재, 생사 및 견직물 생산)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중앙상공은 자본금 1천300만원의 우리나라의 중추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이무렵 삼양사도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1938년에 해동은행의 후신인 자본금 200만원의 해동금융주식회사를 인수해 새로 금융업에 진출했다. 해동은행은 1920년에 민철훈, 윤덕영, 심상익 등 귀족들이 자본 200만원(50만원 불입)으로 설립했으나 내부 알력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1927년에 김연수가 전무로 경영에 참여했으나 규모가 영세함을 면치 못하자, 1938년에 은행업무를 한성은행에 양도하고 상호를 해동금융주식회사로 개명하면서 삼양그룹이 인수했던 것이다. 또한 삼양사는 1941년에 삼양상사주식회사를, 1943년에는 합자회사 삼양상회를 각각 자회사로 설립함으로써 점차 지주회사로 발전해 갔다. 경성방직 역시 다각화를 추진했다. 1941년에는 자본금 19만원의 삼성면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44년에는 시흥에 별도로 표백·염색공장을 증설했다. 경성방직은 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수직계열화에 주력하면서 해방 직전에 국내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관계사로 삼양사, 남만주방적, 중앙상공, 해동금융, 동아일보, 고려중앙학원 등을 거느리는 등 일제치하의 민족계 기업들 중 가장 먼저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했다. 경성방직은 민족계 기업으로는 매우 드물게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경성방직그룹이 일제의 각별한 비호를 받았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 민중과의 유착이 훨씬 두드러진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조선 민중은 핍박했어도 조선인 대지주와 대표적 기업가,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식민통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제하에서 활동한 절대다수의 한국인 엘리트들이 해방 이후 친일파로 매도되어 수모를 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김성수는 호남의 대지주 출신에다 한국민에 영향력이 큰 명망가여서 일제 입장에선 특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경방삼양그룹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업성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특수은행의 융자나 총독부의 정책자금 수혜 등이 그것이다. 식민지 치하에서 토착기업들은 식민지정책에 철저히 동조하는 예속성 내지는 민족성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존재였던 것이다. 한국기업 역사상 경성방직은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최초이자 대표적 사례였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4-1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5]경방삼양그룹-④생산정비와 중국진출

시흥 방적공장 자동직기 설치길림·봉천 등 잇단 농장 개설1939년 남만주 방적회사 설립경성방직은 1927년 4월에 조선총독부 보조금 2만7천원(현재가치로 2억여 원)을 받아 직기 104대를 증설했다.하지만 장기안정경영을 위해서는 일관생산체제 구축이 시급했다. 당시 조선방직 등 일본계 방직업체들은 산하에 방적시설까지 갖추는 등 생산비를 절감하고 있었다. 방적시설이 없었던 경성방직은 생산비 측면에서 불리했다.경성방직은 1931년 스위스 슐쳐(Sulzer)사로부터 발전기를 도입했고, 1933년에는 조선은행에서 50만원을 차입해 최신식 자동직기 224대를 증설했다. 1934년에는 방적공장 부지로 경기도 시흥에 15만평을 구입했다. 1935년 3월 김연수가 경성방직 2대 사장에 취임하면서 자본금을 200만원(현재가치로 약 190억원)으로 증자했다. 1936년 2월에는 시흥에 방적공장을 착공하고 여기에 토요타식 직기 224대와 방기(紡機) 2만1천600추를 설치해 그해 가을부터 가동을 개시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일제가 1933년에 면화증산 및 공판제를 실시하면서 원면(原綿) 조달에 차질이 빚어졌다. 일제는 지역별로 면화 수매권을 특정 업자에게 독점시켰는데, 조선방직이 면화 생산량이 가장 높은 전라·경기·황해도 일대의 면화를 거의 독점했다. 경성방직은 1937년 12월에야 황해도 일부를 배정받아 남천에 조면공장을 지어 연간 500만근의 실면(實綿)을 생산했다. 1938년에는 황해도 은율에도 조면공장을 설치해서 연간 300만근의 실면을 생산했고, 1943년에는 삼성면업을 인수해 실면 연산 350만근의 평양조면공장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경성방직은 면사, 면포 등 생산을 다변화해 일본 업체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됐다. 삼양그룹의 성장은 중일전쟁(1937년)과 궤를 같이한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중국대륙에 진출했는데 삼양그룹도 이에 편승했다. 김연수는 1921년에 만주시찰단 일원으로 참여해 사전답사를 마친 상태였다. 1936년 몇 차례의 만주 현지답사를 마친 후 1937년 12월에 만주 길림에 반석농장을 개설하고 700여 정보의 황무지 개간사업에 착수했다. 같은 해에 만주 서쪽 영구(營口)에 천일농장을 개설했는데, 이 농장은 1941년에 총면적 1천782정보에 소작농 600여 호를 거느리는 대규모 농장으로 발전했다. 1938년에는 반석농장 인근의 중국·일본인 땅 380정보를 매입해서 매하농장을 개설했고, 이어 봉천의 교하농장, 길림의 구대농장 등을 연이어 개설해 만주일대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경성방직은 1920년대 후반 심각한 경영부진으로 고전하다 1931년 만주국 성립과 신흥 면사포시장 출현으로 또 한번 기사회생 한다. 경성방직의 '불로초'표 면포가 만주인들의 기호에 맞아떨어진 때문이다. 그 결과 경성방직의 매출액은 1934년 44만9천원, 순이익 4만7천원이었으나 1935년 매출액 53만7천원, 순이익 13만2천원으로 늘어난다. 일본군이 북경에서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로 급속히 진격하면서 북중국의 방적공업은 생산중단상태에 직면했고 경성방직의 판매시장은 광대한 중국대륙으로 넓혀졌다.일본이 만주와 중국 지역 수출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자 경성방직은 1939년에 만주 봉천 근교의 교통요지인 소가둔(蘇家屯)에 공칭자본 1천만원, 납입자본 500만원(현재가치 약 400억원)의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설립, 1942년부터 생산을 개시한다./수원대 명예교수수원대 명예교수

2017-04-1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경방삼양그룹-③삼양사와 중앙상공

미곡수출 활발 영농사업 호황경성직뉴, 사명개명·영업 확대위기돌파·정착 '기업집단' 변모경성방직이 잇따른 경영위기를 넘기고 안착할 무렵 김연수는 독자적인 사업에 눈을 돌린다. 고향 일대에 산재한 대단위 농토에 주목해 농장기업의 설립을 도모한 것이다. 한국산 쌀의 일본수출이 본격화한 것은 개항(1876년) 이후부터였는데,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면서부터 한국 내에서 식량 증산을 서둘렀다. 식량이 부족했던 일본이 19세기말부터 공업화하면서 식량부족이 더욱 심해진 탓이었다. 일제는 한국 내에서 8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소유권자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공유지·사유지는 물론 황실 및 정부기관의 부동산까지 조선총독부에 귀속시켰다. 총독부가 일거에 국내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총독부로부터 출연 받은 일부 토지를 일본인들에 헐값으로 불하해 한국농촌을 장악했다. 일제는 한국을 그들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다. 급속한 일본공업화에 따른 부족한 식량을 한국에서 식량증산을 통해 조달받으려는 전형적인 식민지정책이었다. 일본의 고리대자본들이 한국농촌에 대거 침투해서 대규모 농업경영을 서둘렀다. 농장을 기업형태로 경영하였는데, 주요 종목으로는 미곡 생산과 판매, 창고업, 고리대금업 등이었다. 일본으로 미곡수출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의 영농사업은 호황을 구가했다. 김연수는 1924년 10월 1일에 농사기업인 삼수사(三水社, 삼양사의 전신)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김연수 집안은 전라도 곳곳에 논 900여 정보와 밭 380여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전남의 장성농장(長城農場)을 개설했다. 1926년부터 수확을 개시한 장성농장은 1934년에는 1만석을 추수할 수 있는 약 410정보(122만5천866평)의 대규모 농장으로 성장했다.1925년에는 줄포농장(158정보)과 줄포정미소를, 1926년에는 신태인농장(연산 5천석), 명고농장(연산 1천500석), 고창농장(270정보)을 개설했다. 고창군 줄포면 우포리와 흥덕면 신덕리에 공사 중이던 간척지를 인수하고 공사비 5만3천여원(현재가치 약 4억여 원)을 들여 방조제를 쌓아 7만5천여 평의 논을 조성했다. 1927년 10월에는 영광군 법성포 근처에 법성농장(논 56정보)을, 1931년에는 영광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122정보의 농토를 묶어 영광농장을 개설하는 등 곡창지대인 호남지방 곳곳에 농장을 증설했다.한편, 1926년에 경성직뉴에서 개명한 중앙상공은 영업종목에 고무신 생산 외에 무역업과 창고업, 광산업을 추가했다. 경성방직에서 생산한 광목과 삼수사에서 생산한 곡물 판매도 병행했는데 고무신사업이 호황이었다. 삼수사는 1928년에 줄포 간척지공사를 준공하는 등 미곡생산과 농지확장에 주력하다가 1931년에 삼양사(三養社)로 개칭하고 농장경영과 간척사업을 통해 굴지의 농장기업으로 정착해 갔다.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중앙상공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김연수는 매제 김용완(金容完)을 투입했다. 김용완은 별표 고무신을 들고 시장을 누비며 '6개월 보증판매제'를 실시, 당시 고무신업계를 석권했던 대륙고무를 능가하는 매출을 올린다. 중앙상공은 국산장려운동에 고무된 지방상인들의 적극적인 구매로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했다. 이로써 경성방직의 관계사는 경성직뉴와 삼양사, 동아일보 등으로 불어나 기업집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4-0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경방삼양그룹-2경성방직 설립과 위기, 기사회생

경성직뉴 경영경험 살려 설립'1인 1株 민족기업' 주주 모집경쟁약한 북한지역 개척 성공김성수는 경성직뉴를 경영한 경험을 근거로 1919년 10월 5일에 경성방직(京城紡織)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납입자본은 25만원(현재 화폐가치 약 15억원)이었다. 당시 방직업은 최첨단 산업이었고, 경성방직은 한국인이 설립한 민간기업 중 가장 컸다. 김성수는 '1인 1주(株)의 한국민족기업'을 내걸고 전국을 돌며 주주 모집에 나섰다. 경성방직은 초대사장에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인 박영효를, 전무취체역에는 마포 물산객주 출신인 박용희를, 취체역 겸 지배인에는 이강현을 각각 임명했다. 본사는 포목상 집결지인 남대문통 5정목에 두고, 공장은 영등포(현 타임스퀘어 일대)에 5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경성방직은 조업 시작도 못하고 위기에 직면한다. 이강현이 일본 삼품(三品, 면화·면사·면포) 선물거래에 손을 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쟁특수로 '삼품투기'가 횡행했는데, 1920년 봄부터 시세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경성방직은 13만2천550원의 손실을 입고 파탄지경에 이른다. 김성수는 위기 타개를 위해 고향 줄포로 내려가 양부(養父)와 실부(實父)에게 재산 투입을 간청했다가 거절 당한다. 하지만 단식이라는 초강수 끝에 3일 만에 토지 담보를 승낙받아 조선식산은행에서 8만원을 융자받아 위기를 넘겼다. 경성방직은 1922년 6월에는 조선총독부에 지원금을 요청해 연말에 허가를 받아낸다. 1931년까지 일본정부의 보조금은 총 21만9천원에 달했는데, 경영진의 적극적인 대정부 활동의 결과였다. 기사회생한 경방은 1923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조업을 개시, 일본산 면사를 원료로 '삼각산' 브랜드의 광목을 월 5천필(疋)씩 생산했다. 김성수는 가문의 땅을 일부 매각해 1920년 4월 동아일보사를 창간했다. 그는 기업활동보다 정치·사회운동에 열심이었던 탓에, 1921년에 경도제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아우 김연수(27세)가 경성직뉴 전무와 경성방직 상무가 되어 사업 일체를 전담한다. 김연수는 취임과 함께 경성직뉴를 고무신공장으로 전환해 '별표'고무신을 생산했다. 당시 국내 신발시장은 민족계인 대륙고무와 일본인 소유의 제등고무가 석권했는데, 경성직뉴의 후신인 중앙상공은 1920년대 중반부터 국내 유수의 고무신 메이커로 자리매김한다.김연수는 주력기업인 경성방직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고심했으나 동양방적과 조선방직 등 일본기업들이 장악한 남한지역 시장은 개척이 쉽지 않았다. 이에따라 1924년부터 경쟁이 덜한 북한지역을 공략해 재고품과 생산분 대부분을 판매하는 성공을 거둔다.경성방직은 1925년에 창업 이래 두번째 위기에 직면한다. 을축년 대홍수가 경성방직의 영등포공장을 강타한 것이다. 300여 직원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17일 아침 기계는 물론 원사와 제품·반제품 1만4천필이 완전히 침수됐다. 7월 20일부터 해가 나자, 전 직원이 흙탕물로 범벅이 된 광목 세탁에 매달렸다. 이때 공장 주변은 물론 여의도까지 광목으로 하얗게 덮였다고 한다. 침수된 기계설비 수리에만 대략 2개월이 걸렸다.김연수가 설립 초기 판매부진으로 인한 경영위기를 극복한 것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덕으로 추정된다. 3·1운동 직후부터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1923년 초 전국으로 확대됐다. 경성방직은 민족계 기업 중 규모가 가장 컸고, 당시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경영하고 있어 경쟁업체들보다 유리했을 것이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3-27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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