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5]화신그룹-3 화신상회 인수

대공황 여파 물자 중요성 간파파산 직전 귀금속 전문점 인수日 진출막은 종로상인 덕 성장선일지물이 순조롭게 성장하자 박흥식은 사업 다각화에 착수했다. 그 첫 사업으로 만주사변 발발 3일전인 1931년 9월 15일에 서울 종로 2가 3번지에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 화신상회(和信商會, 현 제일은행 본점 자리)를 설립했다. 신태화(申泰和)가 귀금속 전문점인 화신상회를 설립해서 운영해오던 것을 36만원(현재가치 약 57억여원)에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재발족한 것이다. 일제가 1930년 금본위제로 화폐제도를 전환함에 따라 화신상회의 귀금속 판로가 막히면서 파산에 직면했던 때문이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난이 가중되는 터에 전쟁위기까지 감돌 때는 물자를 매점매석할 수 있는 백화점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박흥식이 간파했던 것이다.신태화는 1877년에 서울에서 출생해 어린 나이에 유통업에 투신해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는 "전쟁에 나서는 군인은 무기를 가져야 하듯이 상인은 신용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상인은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흐리터분한 생각과 행동은 상계에선 금물이다"란 경영철학의 소유자로서 명석한 청년사업가인 박흥식에 매료되어 흔쾌히 화신상회를 넘긴 것이다. 화신상회를 넘겨받을 당시 박흥식의 나이는 29세였다. 박흥식이 인수하기 전부터 화신상회의 금은세공품 등은 수차례 우수상과 포상을 받을 정도로 품질이나 기술이 탁월해 대표적인 한국공예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런 평가는 후일 화신백화점 귀금속부의 귀금속이 전국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밑거름이 되었다. 1922년에는 화신상회 내에 양복부를 신설했으며, 1923년에는 잡화부까지 추가해 백화점 형태를 갖췄다('화신오십년사' 103~105면).이 무렵 서울의 명동 부근에는 일본 백화점들인 삼월(三越,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삼중정(三中井), 정자옥(丁子屋, 현 롯데영프라자), 평전(平田)상회 등이 진출하여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 중에서 제대로 된 백화점은 본정통(本町通, 충무로2가)의 삼월(三越) 경성지점인데, 당시에는 1층 점포 안에 다다미를 깔아놓아 고객들은 신발을 벗거나 덧신을 신어야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백화점들은 성업 중이었다.반면 종로에는 백화점이 전무했던 탓에 화신상회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광화문에서 종로3가에 이르는 지역은 전통적인 육의전(六矣廛)거리였다. 육의전이란 왕실과 육조거리에 있는 관청에 물품을 대는 6개의 어용상점들로 조선시대 전국 상업의 중심역할을 하던 시전(市廛)의 대표적 존재들이었다. 조선 태종 때 정부가 직접 상가건물들을 축조해서 상인들에게 분양해주었는데 개항(1876년) 무렵의 육의전 위치는 다음과 같다고 기록돼 있다.종각역에서 광화문 방향 종로대로 좌측에는 면포전(綿布廛, 무명)과 면주전(綿紬廛, 명주)이, 우측에는 선전(線廛, 비단)과 저포전(苧布廛, 모시)이 각각 위치했으며, 종각역에서 동대문 쪽으로는 좌우양편에 선전(線廛)과 좌측 낙원동 일대에는 어물전(魚物廛, 생선)이 있었다. 종각역에서 광교에 이르는 도로의 좌측에는 저포전, 우측에는 면포전에 이어 지전(紙廛, 종이)이 줄지어 있었다. 광화문에서 종로3가까지, 그리고 광교 일대는 육의전 상가였고 육의전 조합인 도가(都家)는 서린동에 위치했다(조기준,'한국자본주의성립사론', 1973년, 247면).이 지역의 상인들을 '종로상인'이라 일컬었는데, 이들은 비록 천민 대접을 받더라도 왕실에 어용품을 조달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을 뿐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는 민족의식도 강했다. 개항 이후 일본상인들이 종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종로상인들은 단결해서 자기들의 상권을 굳건히 지켰다. 자기들끼리는 치열하게 경쟁하더라도 점포만은 절대 일본 상인들에 매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종로상인들 덕분에 종로에 자리를 잡은 토착기업인 화신상회는 무사히 성장할 수 있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박흥식 인수 당시 화신백화점 모습. /'화신50년사' 수록 사진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19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4]화신그룹-2 1926년 문 연 선일지물

일본 3대 제지 신문시장 장악'스웨덴 용지' 박리다매 성공금강산 유람등 홍보· 판로확장청년 사업가로 성장한 박흥식은 궁벽한 시골구석보다 경성(서울)에서 웅지를 펴겠다고 결심하고 2, 3개월에 한 차례씩 서울을 왕래하며 제반 사항들을 주도면밀하게 점검했다. 서울이전 계획을 접한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이 박흥식의 서울행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10여 대(代) 동안 뿌리를 내린 고향을 떠나는 것도 문제인데다 연고가 전혀 없는 서울에서 약관의 청년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 때문이었지만, 박흥식의 결심은 꺾지 못했다.그는 24세 때인 1926년 봄에 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리고 그해 6월 1일 서울의 중심지인 황금정(을지로) 2정목 180번지에서 자본금 25만원(圓)의 선일지물(鮮一紙物)주식회사를 차리고 지물 도매 및 부대사업을 시작했다. 상호 '선일'은 '조선에서 제일'이 되겠다는 박흥식의 야심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한달 하숙비가 10원 내외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1920년대는 소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로 불리던 때여서 일제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문화정책을 표방해 신문잡지와 각종 서적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인쇄용지의 수요량이 날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박흥식은 서울에서 뿌리를 내릴 여지가 없었다. 당시 국내의 신문용지 시장은 일본의 3대 제지 메이커인 왕자제지(王子製紙), 북월제지(北越製紙), 화태공업(樺太工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박흥식은 당초 왕자제지로부터 신문용지를 수입하려 했다. 당시 왕자제지, 북월제지, 화태공업은 서로 과당경쟁을 피하기 위해 공동판매기구(카르텔)를 결성한 뒤 그곳에서 지명한 특약점에 한해 지물류를 공급하고 있었다. 일본인 지물상들은 국내의 관공서와 일본인 소유 민간기업, 일본계 신문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문용지까지 독점 공급해 엄청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일본인 지물상들은 무명의 시골청년이 철옹성을 자랑하는 서울의 지물업계에 뛰어든 것을 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식으로 코웃음을 쳤다. 동포 상인들도 혜성처럼 등장한 선일지물에 경이와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박흥식은 공동판매기구와의 접촉에서 실패한 후 1927년 초가을에 일본에 건너가서 새로운 수입처를 물색하다 궁리 끝에 스웨덴을 떠올렸다. 학생 시절에 스웨덴은 전 국토의 59%가 산림지대로 제재, 펄프, 제지업이 발달했다는 점을 교육 받았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스웨덴의 일본대사관을 찾아 상무관과의 면담을 통해 실마리를 풀었다. 반신반의로 추진한 상담은 성공이었다. 상담 후 얼마 안돼 상무관이 약속한 견본(샘플)과 가격표가 도착했는데 용지의 질도 일본산보다 훨씬 좋았을 뿐 아니라 가격 또한 일본산에 비해 파격적으로 저렴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산 신문용지는 1연(連) 당 4원 50전인 반면에 스웨덴산은 2원 42전 5리에 불과했다. 무역선 더글러스호는 스웨덴의 신문용지를 가득 싣고 인천항에 입항했다. 선일지물은 일본제품들보다 재질이 우수하고 가격도 절반인 신문용지를 스웨덴으로부터 직수입해서 연(連)당 3원75전에 박리다매했다. 화지(和紙, 일본 종이)의 경우 중간상을 배제하고 직접 주산지인 일본 인주(因洲), 이예(伊豫), 토좌(土佐) 등지의 생산업체들과 하청계약을 맺어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경쟁업체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했다. 이후 선일지물의 사시(社是)는 "싸게 사서 싸게 판다"로 굳어졌다.또한 특별봉사 판매방식을 채택하여 카본지 500타 이상을 일정 기간 내에 구입하는 고객들에게는 회사부담으로 금강산 유람에 초대하고, 화지(和紙) 50환(丸) 이상을 구입하는 고객에게는 일본관광에 초대하는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마케팅전략을 구사했다.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국내의 여러 신문사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맞아들였다. 지류 수입선도 캐나다의 바우리 리바 제지회사를 추가했다. 그 결과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신문사에 신문용지를 독점 공급했을 뿐 아니라 멀리 만주와 중국 등지로 판로를 확장했다. 선일지물은 서울 진출 6년만인 1932년에 신문용지, 화지·양지 등의 연간 판매고 300만원(현재가치 약 400억원)을 기록해 국내 제일의 지물회사로 성장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12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화신그룹-1 사업의 시작과 선광인쇄

창업자 박흥식, 2천석 부농 둘째16세때 쌀장사 시작 무역상 성장18세때 세운 인쇄소 주식회사로재벌문제연구소에서 1985년에 발간한 '재벌25시'에는 화신그룹 창업자에 대해 '영욕의 격랑을 헤쳐온 파도타기의 명수'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화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떨친 기업인으로서 일제에 발 벗고 충성한 장본인"이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반민특위 해체로 기사회생했다. 언제나 힘이 강한 쪽에 편승하여 재산을 늘린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박흥식(朴興植)은 1903년 8월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에서 2천석 지기의 부농 박제현(朴濟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결혼과 함께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수리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는 16세 때인 1918년에 진남포의 객주와 연결해서 쌀장사를 시작했다. 식민지 백성들로서는 돈을 버는 것이 최고임을 각성했던 것이다. 또한 10년 연상인 형 박창식(朴昌植)이 1910년에, 부친은 1916년에 각각 사망함으로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박흥식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성품이 올곧았던 창식은 도산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다니면서 우국충정을 키웠는데,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한 달 만에 초죽음이 되어 풀려난 후 그해 12월 1일 1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부친은 장남을 잃은 후 아픈 마음을 달래려 술로 세월을 보내다 1916년 8월 6일에 39세로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제1차 세계대전(1914~1918) 기간 동안 일본에는 식량난이 심각해 1918년 8월에는 급기야 '쌀 소동'이 벌어졌다. 1918년 여름 일본 민중들이 쌀 도매상들의 가격 담합에 집단 항의한 사건인데, 그 여파로 테라우치(寺內正毅) 내각이 총사퇴 하기도 했다. 근대 일본이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 대중투쟁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곡물가격이 급등세를 보여 농산물유통업이 호황이었다. 평남 서해 끝단의 곡창지대인 용강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박흥식은 사업개시 1년 만에 제법 큰 미곡무역상이 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시황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등 상리(商理)에 밝았던 것이다. 18세 때인 1920년에는 한국인에게 불모지와 같았던 인쇄와 종이류 판매를 겸하는 자본금 5만원(圓)의 선광인쇄소(鮮光印刷所)를 용강 읍내에 세웠다. 5만원은 요즘 가치로 대략 1억여 원으로 18세 소년사업가에겐 매우 큰 돈이었으나 어머니의 배려로 가능했다. 명함, 청첩장, 부고장 같은 것을 찍기 시작해 점차 군청과 면사무소의 각종 공문을 맡아 찍었으며 진남포와 강서지방의 인쇄물까지 수주할 정도였다.국내에 근대인쇄업이 최초로 개시된 것은 1881년 부산에서 일본인에 의해 신식의 연활자(鉛活字)가 보급되면서부터였다. 금속활자는 재료에 따라 동(銅)활자, 철(鐵)활자, 연활자 등으로 구분하는데 활자의 재료가 납이면 납활자 혹은 연활자라 칭했다. 1883년에는 정부가 박문국을 설치해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했으며, 1884년에는 사설인쇄업체인 광인사(廣印社)가 배재학당과 기독교단체 등의 출판물을 인쇄했다. 이후부터 점차 인쇄출판 및 인쇄용지 시장규모가 커졌으나 서울 등 대도시에 국한되었을 뿐, 지방 소도시는 여전한 불모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한편 박흥식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통신판매제를 도입했다. 먼 지방의 고객들에게 상품목록이나 가격표 등을 표시한 카탈로그를 발송해 주문을 권유하고 우편 등을 이용해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187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해 선진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달했으나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업태였다. 박흥식은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회사 일에 매달렸다. '화신오십년사'에는 그가 야근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인쇄소는 날로 번창했다. 1924년에는 자본금 10만원(圓)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재발족하는 등 박흥식은 어엿한 청년사업가로 성장해 있었다. 선광인쇄는 박흥식이 시도한 최초의 본격적인 사업으로 장차 화신그룹 형성의 발판이 되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6-05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경방삼양그룹(완)-11 타임스퀘어로 변신

1990년대 '방직업 하향세' 대처백화점·홈쇼핑 등 '사업다각화'영등포에 신개념 유통단지 방점경성방직은 1962년부터 해외시장으로 눈길을 돌려 그해 10월에 창립 이후 최초로 미국에 면직물 2만8천250달러를 수출했다. 이후 수출액은 1966년 100만 달러로 늘었다. 1968년에는 미국의 듀퐁과 특약을 맺고 데크론섬유를 독점 수입했다. 1965년에는 이토추 미국법인과 교섭을 벌여 연리 6%의 미화 118만1천95달러의 장기차관자금으로 방기 1만추와 직기 206대를 도입했다. 김용완은 관행이던 정부 혹은 은행의 지불보증을 배제하고 자체신용만으로 이토추와의 차관도입 거래를 성사시켰다.1967년에는 영국의 PLATT BROS LIMITED와 장기차관도입 계약을 성사시켜 1969년 최신 방기 6천300추를 확보했다. 1968년 11월에는 부산 동래구 재송동 310일대에 공장부지 3만2천평을 매입했다. 1970년에는 경성방직의 상호를 주식회사 경방으로 바꾸고 국내의 대표적인 섬유수출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1975년에 김용완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김각중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김각중은 김용완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1944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이과를 졸업하고 1964년 미국 유타대학에서 이론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고려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5년에 부친의 뒤를 이어 경방 회장에 취임했다.1977년에는 경방기계의 전신인 (주)새한패시픽을 인수했으며, 1981년 6월 일본 오사카(大阪) 지점을 현지법인 케이보재팬으로 승격해 설립했다. 1980년대까지 용인, 반월, 광주에 대규모 공장을 준공해서 1987년에는 1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1990년대 들어 방직업이 하향세로 접어들자 제품의 고부가가치화에 주력함과 동시에 유통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서둘렀다. 1990년 (주)경방어패럴을 설립했고, 1992년에는 (주)경방프라자쇼핑센타를 설립한 뒤 이듬해 경방유통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4년에는 경방 영등포공장 인근에 경방필백화점을 개점했다. 2001년에는 우리홈쇼핑을 개국해 2006년에 롯데그룹에 매각했다. 2009년 9월 서울 영등포구 옛 경방공장 터에 연면적 37만㎡, 매장면적 12만㎡의 초대형 복합쇼핑몰 '타임스퀘어'를 준공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신개념 복합유통단지로 쇼핑몰, 영화관, 백화점, 서점, 호텔 등 상업·업무·문화·레저가 어우러진 새로운 도시형 엔터테인먼트 공간이다. 2010년 4월 2세 경영자인 김각중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장남 김준 부사장이 신임 대표이사 사장에 오르면서 경방은 3세 경영 체제로 전환됐다. 김각중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김준은 장남, 김담은 차남으로 모두 경방 경영에 관여하고 있었다. 경방삼양그룹의 역사는 2017년 정확히 창업 1세기를 맞이했다. 김성수가 1917년에 인수한 경성직뉴를 모체로 점차 사업을 확장해서 굴지의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일제 말기에는 재벌에 준하는 그룹을 형성했고, 해방 후 국내의 여타 재벌들과 같은 성장패턴으로 몸집을 불렸다. 삼양그룹의 성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삼성, 현대, LG, SK 등에 비해 외형이 빈약할 뿐 아니라 다각화 내용도 단순하다. 이런 더딘 성장은 일제하에선 토착기업이란 핸디캡 탓에, 해방 이후에는 야당계 기업 혹은 일제하에서 부일한 기업가 등으로 각인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7-05-29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경방삼양그룹-10 소유·경영구조 정비

선장 김연수 1945년 방직 손떼창업자 형제 간 사이좋게 분할2011년 삼양홀딩스로 상호 변경삼양의 사업 다각화는 해외진출로도 이어졌다. 2004년 5월에 중국 상해시 청포공업원구에 삼양공정소료유한공사를 설립한다. 2010년 2월에는 유럽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헝가리 야스베레니시에 삼양EP헝가리를 설립했다. 중국 하북성 진황도 경제기술개발구의 진황도삼양사식품유한공사는 삼양제넥스가 100% 출자해서 설립한 법인이다.국내외로 사업이 다각화 되면서 모기업인 삼양사는 2011년 11월에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주)삼양홀딩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2015년 12월 현재 삼양홀딩스의 대주주로는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5.4%), 국민연금관리공당(13.19%), 양영재단(5.22%) 등이다. 김윤 회장은 창업자 김연수의 3남인 김상홍(2010년 타계)의 장남이다. 삼양그룹도 창업3세 경영시대를 맞은 것이다.한편, 경성방직은 해방 이후 남북분단으로 북한지역에 있는 조면공장을 잃었다. 그 결과 영등포, 의정부, 양평동, 쌍림동 공장만 거느려 규모가 상당히 축소됐다. 게다가 6·25전란 중 포격으로 의정부공장과 시흥염색공장이 완전히 파괴됐다. 영등포공장도 전란의 피해를 입었는데, 방적공장이 전소되면서 방기 3만200추 중 2만5천600추가 소실되고 직기 1천129대 중 12대가 망가졌다. 하지만 서울 탈환 직후인 1951년 4월부터 생산을 재개하고 1953년에는 방기 1만2천600추와 직기 448대 규모로 확장됐다. 당시 가장 어려운 것은 원면의 확보였다. 원조면이 남아돌아도 방직협회에서는 경성방직에 원면을 배정해주지 않았는데, 자유당 정부가 야당계 기업으로 지목해 배척했던 탓이다. 김용완 사장이 무쵸 주한미국대사에 호소해서 원면을 겨우 배정받을 수 있었다. 1959년 경성방직의 시설은 정방기 4만600추, 직기 1천68대로 전쟁 이전 수준으로 복귀했다.한편, 1956년 국내에 처음으로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됐다. 경성방직은 그해 3월 3일 주식시장 오픈과 함께 증권거래소에 상장해서 기업을 공개하고 자본금을 1억환으로 늘렸다. 증시 개장 당시 총 12개 종목이 상장됐는데 경성방직은 그 가운데 회원번호 001번을 받았다. 주목되는 것은 경성방직 설립직후인 1922년 4월부터 선장 노릇을 하던 김연수가 경성방직의 소유 및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이다. 김연수는 1945년 12월에 경성방직 대표취체역에서 물러난 후 1958년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경성방직의 주식(총주식수의 30%)을 전량 처분했다. 이후부터 김연수는 오로지 삼양그룹 형성에 매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경성방직은 매제인 김용완이 경영을 전담했다.김용완은 '기업의 미래는 인재에 달려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업가였다. 1939년 만주에 남만주방적 설립과 함께 회사 내에 중등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만들어 근로자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산업체 부설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창업자 김성수는 훨씬 이른 시기에 경성방직을 떠났다. 1928년 경성방직의 취체역을 사임하면서 기업가로서의 활동을 접었던 것이다. 사회계몽운동 내지는 교육활동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이후 김성수가(家)는 고려중앙학원(고려대, 중앙중고)과 동아일보를, 김연수가는 삼양그룹을, 김용완가는 경성방직을 분할 지배하는 식으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경성방직이란 싹을 틔어 잘 배양해서 창업자 형제간 사이좋게 나눈 것이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22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경방삼양그룹-9 문어발식 다각화

1972년 선일포도당 공동인수후삼화배합사료·이천중기·양돈…2011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굴지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삼양은 1970년대부터 문어발식 다각화에 착수했다. 1972년 8월에는 삼양·제일제당·대한제당 3사가 적자상태의 선일포도당주식회사(현 주식회사 삼양제넥스)를 공동으로 인수했다. 1976년 인천에 새 공장을 준공한 후 1984년 12월에 삼양이 제일제당과 대한제당의 소유지분을 넘겨받아 계열사로 편입했다. 1987년 6월에는 기업을 공개하고 1991년에는 울산공장과 열병합발전소를 각각 준공했다. 삼양제넥스의 생산제품은 식품, 제지, 제약 등의 주·부원료다.1975년 12월 목포공업단지내 삼화(三和)배합사료주식회사를 인수해서 1976년 1월에 삼양사 목포공장 분공장으로 재발족했는데, 여러 차례의 증설과 1982년 시설현대화 공사를 마무리해 대량생산설비를 갖췄다. 정밀화학분야의 이온교환수지 생산은 일본의 미쓰비시와 기술제휴해서 1976년 12월 울산제당공장 옆에 양(陽)이온교환수지 후처리 공장을 건설하고 이듬해 4월부터 SK-1B와 PK-212L의 제품생산에 착수했다. 1981년 이온교환수지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74.7%다. 1976년 4월에는 부천 소재 기계 메이커 이천중기의 발행주식 43.5%를 매입해서 경영에 참여한 후, 1977년 8월에 주식지분을 56.7%로 늘려서 경영권을 넘겨받아 1979년 2월에 삼양중기주식회사(현 주식회사 삼양엔텍)로 변경했다. 각종 주물과 산업기계를 생산해 국내 대기업 납품은 물론 자사 생산설비의 개체 및 수리를 담당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기계부품을 수출해 1991년 5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1978년 5월에는 전남 영광에 대규모 양돈단지를 조성코자 26만평의 영광농장을 세웠다. 1989년 3월에는 첨단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수지를 생산 판매할 목적으로 미쓰비시와 50%씩 합작투자로 자본금 30억원의 삼양화성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전주시 팔복동 전주 제2공단에 연생산량 1만5천t의 공장을 세워 1991년 5월부터 생산에 착수했다. 1988년에는 신한제분주식회사를 계열사로 편입했다. 부산과 인천 부평에 각각 제분공장과 전분공장을 거느린 신한제분은 1956년 창업 이후 경영난을 겪다 삼양의 식구가 된다. 현재의 상호는 (주)삼양밀맥스다.1994년 9월에는 삼양종합금융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전신은 1979년 12월 설립된 전북투자금융으로, 1992년 4월에 삼양이 주식지분 22.8%로 경영권을 확보했다.1992년 4월에는 의료기기의 수입판매를 목적으로 주식회사 삼양메디케어를 설립했다. 장기적으로 종합의료기기 제작·판매는 물론 신약개발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1995년에는 삼양텍스(주)와 삼양데이타시스템을 각각 설립하고 1996년에는 삼양테크힐 인수와 삼양텔레콤을 설립했다. 2006년 1월에는 (주)삼양EMS를 인수해 친환경 레스토랑 세븐스프링스와 카페 세븐스프링스를 운영하는 삼양F&B를 설립했다. 2009년에는 연간 15만t 이상의 BPA(비스페놀-A)를 생산하는 삼양이노켐을 설립하고 전북 군산시 오식도동에 생산거점을 마련했다. 2011년 삼양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는 의약바이오사업 부문을 분할해서 삼양바이오팜을 설립했다. 2014년 11월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PET병 생산부문을 삼양사로부터 분리해서 삼양패키징을 설립했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15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경방삼양그룹-8 화섬산업 새 지평

전주방직 인수 '삼양모방'으로전주시 요청에 1970년 공장설립폴리에스테르 생산… 고속 성장삼양사는 1963년 2월에는 자금난에 빠져 있는 전주방직을 인수해서 삼양모방주식회사로 재발족 했다. 전주방직은 일제 말기에 조선마방(朝鮮麻紡)주식회사 전주공장으로 출발했는데, 공장 건축과 기계설비 등이 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민간에 불하되어 고려방직으로 상호를 바꾸는 한편 마방(麻紡)에서 견방(絹紡)으로, 견방에서 모방으로 변경해 군납용 복지를 생산하다 6·25전쟁으로 재기불능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 학교법인 중앙학원(현 고려중앙학원)이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전주방직회사라는 상호를 달고 운크라(UNKRA)로부터 30만 달러를 원조 받아 시설을 보완했다. 1954년부터는 견방 일부와 소모방 생산에 착수했으나, 극심한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면서 결국 6천만원(현재 가치 21억여 원)에 삼양사에 넘겨진 것이다. 1963년 2월 전주방직을 인수한 삼양사는 전주방직의 상호를 삼양모방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인수 첫해인 1963년에 소모방 10만㎏과 위탁가공품 6만㎏을 생산했지만, 이후 적자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삼양사가 화섬공업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은 폴리에스테르 사업에 진출하면서 부터다. 삼양이 화섬에 뜻을 굳히고 준비에 착수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삼양모방은 1977년 6월에 삼양사에 합병되었다.삼양사는 1966년 7월에 일본의 미쓰비시 상사(三稜商事)와 789만 달러의 차관도입에 합의했다.하루 생산량을 스테이플 파이버(Staple fiber) 12톤(M/T)과 필라멘트(Filament) 13톤으로 확정하고 소요 자금인 내자 11억 478만원과 외자 789만 달러 등에 대해 1966년 10월 5일 정부허가를 받아냈다. 공장 설립을 위해서 삼양사는 울산 공장 옆의 8만여평 유휴지에 이미 4천만원을 들여 공장 부지를 조성했다. 그런데 당시 전주시는 새로 공업단지로 지정된 팔복동 일원에 공장 부지를 조성하면서 삼양의 폴리에스테르 공장 유치를 강력히 희망하고 나섰다. 삼양은 즉시 팔복동 2가 339에 있는 단지 내 부지 9만7천292평을 전주시로부터 평당 344원에 매입했다. 이곳에 1968년부터 공장 설립 공사에 착수, 1969년 12월에 폴리에스테르 스테이플 파이버와 필라멘트 방사(紡絲) 및 연신(延伸) 시설을 세웠으며, 1970년에는 국내 최초로 중합시설을 준공했다. 삼양의 폴리에스텔 '트리론'이 탄생된 배경이다. 전주공장은 이후 지속적인 설비확장과 품종 다양화를 통해 1984년에는 폴리에스테르 하루 생산량 164.5t의 생산능력을 보유하는 세계 굴지의 대단위 공장으로 성장했다. 삼양사는 1988년 1월에는 한국의 호남정유, 일본의 미쓰비시(三稜化成)와 3사 합작으로 자본금 30억원 삼남석유화학(三南石油化學)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삼양사 -제품구입, 미쓰비시-기술제공, 호남정유-원료공급 등이 사업내용으로, 투자비율은 삼양사 40%, 미쓰비시 40%, 호남정유 20% 였다. 1990년 4월에는 전남 여수시 적양동의 3만2천418평 부지에 폴리에스테르 섬유의 주원료인 TPA(Telephthalic Acid)를 생산하는 연산 28만톤의 공장을 세웠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08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경방삼양그룹-7 제당업 진출

1956년 '삼양설탕' 생산 개시제일·대동제당과 '과점 체제'日 600t, 국내 최대공장 성장삼양사는 해방 이후 첫 사업으로 1946년 6월 12일 전매 제2호로 전북 고창 해리농장에 대한 제염업 허가를 얻었다. 해리농장은 1936년 일본인 소유의 해원(海元)농사주식회사가 간척공사권을 따내고도 5년여 방치한 것이었다. 1947년부터 해리농장의 미간척지에 대한 염전축조에 착수해 1949년에 1차로 52.7정보의 염전을 완성하고 천일염 8천998가마를 생산했다. 민영염전의 효시가 된 해리염전은 삼양사의 자금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1954년 말에 해리염전은 총면적 300여 정보에 식염을 연간 2만5천톤 생산하는 대염전업체로 성장했고, 삼양사는 1956년 6월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로 분사했다. 삼양사는 이와 별도로 1953년 3월 17일에는 삼양통상 발족과 함께 전남 목포에 서남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장차 수산업 진출에 대비했다.6·26전쟁 때 김연수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규사업으로 제당과 과학한천(우뭇가사리) 생산에 도전했다. 해방과 함께 설탕 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했으나 수입만으로는 설탕의 국내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시절이어서 설탕 수입에 따른 막대한 규모의 달러화 유출도 주목됐다. 우뭇가사리는 홍조류에 속하는 해초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해초를 삶아 끈끈한 액체를 추출해 얼려 굳힌 다음 말려서 우무묵과 우무채, 우무장아찌 등을 만들었고 부녀자들의 머리장식으로도 사용했다. 수요가 많지만 지형, 토양, 하천수 등의 까다로운 입지조건과 한겨울에만 생산이 가능하다는 한계점이 있어 인공적으로 대량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전세계 총수요량은 연 3천톤 이상이었으나 90%가 일본제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제당 및 과학한천의 제조에는 해안이 최적지였다. 제당공장 가동에는 풍부한 냉각수가 필요할 뿐 아니라 원료입하 및 제품수송의 편리성도 고려해야 하는데 부산에는 공장을 세울만한 공지가 전혀 없었다. 김연수는 주위의 반대에도 습지와 갈대밭으로 우거진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앞바다를 매립하기로 하고 1954년 3월 10일에 23만1천㎡의 매립허가를 얻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당시 김연수의 수중에는 6·25전쟁 전에 농지개혁으로 모든 농장을 정부에 넘기고 받은 지가증권 뿐이었다. 그는 지가증권을 전부 처분했는데 액면가의 70% 내지 심지어 30~40%에 처분했다. 과거 함평과 해리 간척공사로 옥답(沃畓)과 염전을 조성했던 경험을 살려 1954년 6월 1차로 부지 4만3천560㎡의 매립공사와 함께 7천134㎡의 공장과 창고, 기관실 등을 준공했다. 제당공장 설계 및 과학한천의 생산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1955년 12월에는 서독 BMA사에서 도입한 하루생산량 50톤의 기계를 설치하고 1956년 1월 3일에 쿠바산 사탕수수를 원료로 한 '삼양설탕' 생산을 개시했다. 이후 제당업체의 난립에 따른 과당경쟁으로 동양제당, 금성제당, 한국제당, 해태제과 제당부가 차례로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제당업은 제일제당과 삼양사, 대동제당 등 3사의 과점체제로 정리됐다. 삼양사 공장은 1971년에는 하루 생산량 600톤의 증설공사를 통해 국내 최대의 단일공장으로 발돋움 했으며, 1973년에는 59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1964년에는 삼양사 여수공장을 건설해 사업을 넓혔는데, 자회사인 삼양수산을 흡수합병해서 마련한 수산물 냉동냉장 및 제빙공장이었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5-01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경방삼양그룹-6 최대의 위기

국내사업장 자주관리운동 확산'반민족행위자' 처벌 요구 커져김연수, 2달 감금 '시련의 계절'1945년 8·15 해방으로 경성방직그룹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북한에서 1948년 9월 9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탄생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을 장악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중국대륙 전체가 붉게 물들고 말았던 것이다.경성방직그룹은 평양, 남천, 은률 등지의 조면공장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하게 됐다. 중국에는 더 많은 시설들이 있는 것이 문제였다. 종업원 1천여명의 남만주방적을 비롯해 삼척기업, 오리엔탈비어 등이 생산활동 중이었다. 또한 삼양사 소속의 영구 천일농장, 매하농장과 봉천의 교하농장, 반석농장, 길림의 구대농장 등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들만 겨우 남한으로 이송시켰을 뿐 대부분의 재산이 부동산이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국내의 사업장에도 해방 후 광풍이 몰아쳤다. 일본인 소유 공장에서 한국인 종업원들이 자치관리위원회를 결성해 경영하는 자주관리운동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경방 근로자들도 재고품의 분배를 요구하면서 파업을 선동하는 등 경성방직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정치적, 사상적 색채를 띤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경성방직을 통째로 종업원들에게 넘기라는 요구였다. 삼양사의 여러 농장에서도 몇몇 직원들이 소작인들을 선동해서 오너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 3월부터 실시된 농지개혁은 설상가상이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하에서 정부가 지주들에게서 강제로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농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넘겨주는 내용이었다. 고율 소작료로 신음하는 소작농들에게 경작지를 되돌려준다는 취지였다. 삼양사 소유의 장성농장, 줄포농장, 고창농장, 영광농장, 법성농장, 손불농장 등 총 수확 15만석 규모의 농경지가 한꺼번에 정부에 넘어갔다. 농사기업이었던 탓에 삼양사의 자산은 사실상 8·15 해방과 6·25 전란으로 거의 없어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김연수는 개인적으로도 인생최대의 고비를 맞이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요구가 비등했다. 제헌헌법 제101조에는 '국회는 단기4278(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정부는 특별법인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1948년 9월 22일에 법률 제 3호로 공포했다. 이어 1949년 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는데, 김연수는 1월 21일에 연행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죄목은 단기4266년 4월말에 경기도 관선도평의원에 피선, 4272년에 만주국 명예영사에 피선, 4273년에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참의에 피임, 4273년 일제의 전쟁완수에 적극협력을 목적으로 결성한 임전보국단 간부에 피선, 4275년 초에는 조선인을 총동원하자는 취지의 국민총력동맹 후생부장 역임 등이었다. 당시 경성방직의 상무이자 김성수·연수 형제의 매제였던 김용완은 김연수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 와중에서 큰 처남인 김성수를 찾았으나 주변 인사들이 면회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김연수는 엄동설한을 감방에서 보내는 동안 발에 동상이 걸렸고 그로 인해 발톱이 몽땅 빠졌다. 구금 2달여 만인 3월 28일 제3부 공판에서 구속취소 판결을 받아 무죄로 방면됐지만, 김연수는 해방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4-24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경방삼양그룹-5대그룹으로 발돋움

수직계열화 집중 경쟁력 확보민족계기업 조선 민중과 밀접지주 → 산업자본 대표적 사례경성방직이 중국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하며 빠르게 성장해갈 무렵, 중앙상공도 안정된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중앙상공은 서울 쌍림동 공장을 피복공장으로 전환해 경성방직에서 조달받은 광목으로 학생복을 생산했는데, 여기서 만든 학생복이 중앙고보의 교복으로 사용됐다. 고무신 공장은 서울 양평동에 새로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해 건평 1천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했다. 이로써 중앙상공은 고무신, 운동화, 방한화, 고무호스 등을 생산하는 종업원 500명의 국내 최대 고무공장으로 부상했다. 태평양전쟁 중에 쌍림동 공장은 일본 육군용 군복생산공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1945년 1월에는 동광생사주식회사(납입자본 200만원, 의정부 소재, 생사 및 견직물 생산)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중앙상공은 자본금 1천300만원의 우리나라의 중추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이무렵 삼양사도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1938년에 해동은행의 후신인 자본금 200만원의 해동금융주식회사를 인수해 새로 금융업에 진출했다. 해동은행은 1920년에 민철훈, 윤덕영, 심상익 등 귀족들이 자본 200만원(50만원 불입)으로 설립했으나 내부 알력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1927년에 김연수가 전무로 경영에 참여했으나 규모가 영세함을 면치 못하자, 1938년에 은행업무를 한성은행에 양도하고 상호를 해동금융주식회사로 개명하면서 삼양그룹이 인수했던 것이다. 또한 삼양사는 1941년에 삼양상사주식회사를, 1943년에는 합자회사 삼양상회를 각각 자회사로 설립함으로써 점차 지주회사로 발전해 갔다. 경성방직 역시 다각화를 추진했다. 1941년에는 자본금 19만원의 삼성면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44년에는 시흥에 별도로 표백·염색공장을 증설했다. 경성방직은 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수직계열화에 주력하면서 해방 직전에 국내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관계사로 삼양사, 남만주방적, 중앙상공, 해동금융, 동아일보, 고려중앙학원 등을 거느리는 등 일제치하의 민족계 기업들 중 가장 먼저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했다. 경성방직은 민족계 기업으로는 매우 드물게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경성방직그룹이 일제의 각별한 비호를 받았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 민중과의 유착이 훨씬 두드러진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조선 민중은 핍박했어도 조선인 대지주와 대표적 기업가,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식민통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제하에서 활동한 절대다수의 한국인 엘리트들이 해방 이후 친일파로 매도되어 수모를 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김성수는 호남의 대지주 출신에다 한국민에 영향력이 큰 명망가여서 일제 입장에선 특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경방삼양그룹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업성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특수은행의 융자나 총독부의 정책자금 수혜 등이 그것이다. 식민지 치하에서 토착기업들은 식민지정책에 철저히 동조하는 예속성 내지는 민족성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존재였던 것이다. 한국기업 역사상 경성방직은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최초이자 대표적 사례였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4-1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5]경방삼양그룹-④생산정비와 중국진출

시흥 방적공장 자동직기 설치길림·봉천 등 잇단 농장 개설1939년 남만주 방적회사 설립경성방직은 1927년 4월에 조선총독부 보조금 2만7천원(현재가치로 2억여 원)을 받아 직기 104대를 증설했다.하지만 장기안정경영을 위해서는 일관생산체제 구축이 시급했다. 당시 조선방직 등 일본계 방직업체들은 산하에 방적시설까지 갖추는 등 생산비를 절감하고 있었다. 방적시설이 없었던 경성방직은 생산비 측면에서 불리했다.경성방직은 1931년 스위스 슐쳐(Sulzer)사로부터 발전기를 도입했고, 1933년에는 조선은행에서 50만원을 차입해 최신식 자동직기 224대를 증설했다. 1934년에는 방적공장 부지로 경기도 시흥에 15만평을 구입했다. 1935년 3월 김연수가 경성방직 2대 사장에 취임하면서 자본금을 200만원(현재가치로 약 190억원)으로 증자했다. 1936년 2월에는 시흥에 방적공장을 착공하고 여기에 토요타식 직기 224대와 방기(紡機) 2만1천600추를 설치해 그해 가을부터 가동을 개시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일제가 1933년에 면화증산 및 공판제를 실시하면서 원면(原綿) 조달에 차질이 빚어졌다. 일제는 지역별로 면화 수매권을 특정 업자에게 독점시켰는데, 조선방직이 면화 생산량이 가장 높은 전라·경기·황해도 일대의 면화를 거의 독점했다. 경성방직은 1937년 12월에야 황해도 일부를 배정받아 남천에 조면공장을 지어 연간 500만근의 실면(實綿)을 생산했다. 1938년에는 황해도 은율에도 조면공장을 설치해서 연간 300만근의 실면을 생산했고, 1943년에는 삼성면업을 인수해 실면 연산 350만근의 평양조면공장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경성방직은 면사, 면포 등 생산을 다변화해 일본 업체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됐다. 삼양그룹의 성장은 중일전쟁(1937년)과 궤를 같이한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중국대륙에 진출했는데 삼양그룹도 이에 편승했다. 김연수는 1921년에 만주시찰단 일원으로 참여해 사전답사를 마친 상태였다. 1936년 몇 차례의 만주 현지답사를 마친 후 1937년 12월에 만주 길림에 반석농장을 개설하고 700여 정보의 황무지 개간사업에 착수했다. 같은 해에 만주 서쪽 영구(營口)에 천일농장을 개설했는데, 이 농장은 1941년에 총면적 1천782정보에 소작농 600여 호를 거느리는 대규모 농장으로 발전했다. 1938년에는 반석농장 인근의 중국·일본인 땅 380정보를 매입해서 매하농장을 개설했고, 이어 봉천의 교하농장, 길림의 구대농장 등을 연이어 개설해 만주일대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경성방직은 1920년대 후반 심각한 경영부진으로 고전하다 1931년 만주국 성립과 신흥 면사포시장 출현으로 또 한번 기사회생 한다. 경성방직의 '불로초'표 면포가 만주인들의 기호에 맞아떨어진 때문이다. 그 결과 경성방직의 매출액은 1934년 44만9천원, 순이익 4만7천원이었으나 1935년 매출액 53만7천원, 순이익 13만2천원으로 늘어난다. 일본군이 북경에서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로 급속히 진격하면서 북중국의 방적공업은 생산중단상태에 직면했고 경성방직의 판매시장은 광대한 중국대륙으로 넓혀졌다.일본이 만주와 중국 지역 수출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자 경성방직은 1939년에 만주 봉천 근교의 교통요지인 소가둔(蘇家屯)에 공칭자본 1천만원, 납입자본 500만원(현재가치 약 400억원)의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설립, 1942년부터 생산을 개시한다./수원대 명예교수수원대 명예교수

2017-04-1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4]경방삼양그룹-③삼양사와 중앙상공

미곡수출 활발 영농사업 호황경성직뉴, 사명개명·영업 확대위기돌파·정착 '기업집단' 변모경성방직이 잇따른 경영위기를 넘기고 안착할 무렵 김연수는 독자적인 사업에 눈을 돌린다. 고향 일대에 산재한 대단위 농토에 주목해 농장기업의 설립을 도모한 것이다. 한국산 쌀의 일본수출이 본격화한 것은 개항(1876년) 이후부터였는데,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면서부터 한국 내에서 식량 증산을 서둘렀다. 식량이 부족했던 일본이 19세기말부터 공업화하면서 식량부족이 더욱 심해진 탓이었다. 일제는 한국 내에서 8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소유권자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공유지·사유지는 물론 황실 및 정부기관의 부동산까지 조선총독부에 귀속시켰다. 총독부가 일거에 국내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총독부로부터 출연 받은 일부 토지를 일본인들에 헐값으로 불하해 한국농촌을 장악했다. 일제는 한국을 그들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다. 급속한 일본공업화에 따른 부족한 식량을 한국에서 식량증산을 통해 조달받으려는 전형적인 식민지정책이었다. 일본의 고리대자본들이 한국농촌에 대거 침투해서 대규모 농업경영을 서둘렀다. 농장을 기업형태로 경영하였는데, 주요 종목으로는 미곡 생산과 판매, 창고업, 고리대금업 등이었다. 일본으로 미곡수출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의 영농사업은 호황을 구가했다. 김연수는 1924년 10월 1일에 농사기업인 삼수사(三水社, 삼양사의 전신)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김연수 집안은 전라도 곳곳에 논 900여 정보와 밭 380여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전남의 장성농장(長城農場)을 개설했다. 1926년부터 수확을 개시한 장성농장은 1934년에는 1만석을 추수할 수 있는 약 410정보(122만5천866평)의 대규모 농장으로 성장했다.1925년에는 줄포농장(158정보)과 줄포정미소를, 1926년에는 신태인농장(연산 5천석), 명고농장(연산 1천500석), 고창농장(270정보)을 개설했다. 고창군 줄포면 우포리와 흥덕면 신덕리에 공사 중이던 간척지를 인수하고 공사비 5만3천여원(현재가치 약 4억여 원)을 들여 방조제를 쌓아 7만5천여 평의 논을 조성했다. 1927년 10월에는 영광군 법성포 근처에 법성농장(논 56정보)을, 1931년에는 영광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122정보의 농토를 묶어 영광농장을 개설하는 등 곡창지대인 호남지방 곳곳에 농장을 증설했다.한편, 1926년에 경성직뉴에서 개명한 중앙상공은 영업종목에 고무신 생산 외에 무역업과 창고업, 광산업을 추가했다. 경성방직에서 생산한 광목과 삼수사에서 생산한 곡물 판매도 병행했는데 고무신사업이 호황이었다. 삼수사는 1928년에 줄포 간척지공사를 준공하는 등 미곡생산과 농지확장에 주력하다가 1931년에 삼양사(三養社)로 개칭하고 농장경영과 간척사업을 통해 굴지의 농장기업으로 정착해 갔다.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중앙상공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김연수는 매제 김용완(金容完)을 투입했다. 김용완은 별표 고무신을 들고 시장을 누비며 '6개월 보증판매제'를 실시, 당시 고무신업계를 석권했던 대륙고무를 능가하는 매출을 올린다. 중앙상공은 국산장려운동에 고무된 지방상인들의 적극적인 구매로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했다. 이로써 경성방직의 관계사는 경성직뉴와 삼양사, 동아일보 등으로 불어나 기업집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4-03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경방삼양그룹-2경성방직 설립과 위기, 기사회생

경성직뉴 경영경험 살려 설립'1인 1株 민족기업' 주주 모집경쟁약한 북한지역 개척 성공김성수는 경성직뉴를 경영한 경험을 근거로 1919년 10월 5일에 경성방직(京城紡織)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납입자본은 25만원(현재 화폐가치 약 15억원)이었다. 당시 방직업은 최첨단 산업이었고, 경성방직은 한국인이 설립한 민간기업 중 가장 컸다. 김성수는 '1인 1주(株)의 한국민족기업'을 내걸고 전국을 돌며 주주 모집에 나섰다. 경성방직은 초대사장에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인 박영효를, 전무취체역에는 마포 물산객주 출신인 박용희를, 취체역 겸 지배인에는 이강현을 각각 임명했다. 본사는 포목상 집결지인 남대문통 5정목에 두고, 공장은 영등포(현 타임스퀘어 일대)에 5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경성방직은 조업 시작도 못하고 위기에 직면한다. 이강현이 일본 삼품(三品, 면화·면사·면포) 선물거래에 손을 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쟁특수로 '삼품투기'가 횡행했는데, 1920년 봄부터 시세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경성방직은 13만2천550원의 손실을 입고 파탄지경에 이른다. 김성수는 위기 타개를 위해 고향 줄포로 내려가 양부(養父)와 실부(實父)에게 재산 투입을 간청했다가 거절 당한다. 하지만 단식이라는 초강수 끝에 3일 만에 토지 담보를 승낙받아 조선식산은행에서 8만원을 융자받아 위기를 넘겼다. 경성방직은 1922년 6월에는 조선총독부에 지원금을 요청해 연말에 허가를 받아낸다. 1931년까지 일본정부의 보조금은 총 21만9천원에 달했는데, 경영진의 적극적인 대정부 활동의 결과였다. 기사회생한 경방은 1923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조업을 개시, 일본산 면사를 원료로 '삼각산' 브랜드의 광목을 월 5천필(疋)씩 생산했다. 김성수는 가문의 땅을 일부 매각해 1920년 4월 동아일보사를 창간했다. 그는 기업활동보다 정치·사회운동에 열심이었던 탓에, 1921년에 경도제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아우 김연수(27세)가 경성직뉴 전무와 경성방직 상무가 되어 사업 일체를 전담한다. 김연수는 취임과 함께 경성직뉴를 고무신공장으로 전환해 '별표'고무신을 생산했다. 당시 국내 신발시장은 민족계인 대륙고무와 일본인 소유의 제등고무가 석권했는데, 경성직뉴의 후신인 중앙상공은 1920년대 중반부터 국내 유수의 고무신 메이커로 자리매김한다.김연수는 주력기업인 경성방직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고심했으나 동양방적과 조선방직 등 일본기업들이 장악한 남한지역 시장은 개척이 쉽지 않았다. 이에따라 1924년부터 경쟁이 덜한 북한지역을 공략해 재고품과 생산분 대부분을 판매하는 성공을 거둔다.경성방직은 1925년에 창업 이래 두번째 위기에 직면한다. 을축년 대홍수가 경성방직의 영등포공장을 강타한 것이다. 300여 직원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17일 아침 기계는 물론 원사와 제품·반제품 1만4천필이 완전히 침수됐다. 7월 20일부터 해가 나자, 전 직원이 흙탕물로 범벅이 된 광목 세탁에 매달렸다. 이때 공장 주변은 물론 여의도까지 광목으로 하얗게 덮였다고 한다. 침수된 기계설비 수리에만 대략 2개월이 걸렸다.김연수가 설립 초기 판매부진으로 인한 경영위기를 극복한 것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덕으로 추정된다. 3·1운동 직후부터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1923년 초 전국으로 확대됐다. 경성방직은 민족계 기업 중 규모가 가장 컸고, 당시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경영하고 있어 경쟁업체들보다 유리했을 것이다./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3-27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2]경방삼양그룹 - 1 경성직뉴 인수

호남 최대 지주 아들 김성수경영난 겪는 방직업체 인수日 제품과 품질 경쟁서 밀려경방삼양그룹은 올해로 꼭 100년을 맞았다. 창업자 김성수가 1917년에 인수한 경성직뉴를 모체로 1세기만에 굴지의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경방삼양그룹은 이미 일제시대 말기에 재벌에 준하는 규모로 성장, 국내 기업들 중 자산규모가 가장 컸을 뿐 아니라 영위하는 사업내용도 화신그룹과 함께 가장 다채로웠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대기업집단을 형성했던 것이다.■ 경성직뉴 인수국내 기업들 중에서 형제들이 공동으로 노력해서 재벌로 성장한 사례들이 종종 확인된다. 형은 창업의 씨앗을, 동생은 이를 키워 대기업집단으로 발전시키는데 대표적인 예가 경성방직과 SK, 진로그룹 등이다. 경방삼양그룹은 형인 김성수(金性洙, 1891~1955)는 창업을, 동생인 김연수(金秊洙, 1896~1979)는 경영인으로서 재벌을 완성했다.6·25전쟁 와중인 1951년에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에 취임했던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창에서 김경중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차남 김연수는 1896년에 태어났다. 부친 김경중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유학자 김인후의 12대 손으로, 막대한 토지자본을 축적해 호남 최대지주가 됐다. 김성수는 큰아버지 김기중 슬하에 아들이 없었던 탓에 양자로 입적, 김연수가 김경중의 대를 잇게 된다. 김성수는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 1915년에 운영난에 직면한 중앙학교(현 서울 중앙중·고)를 인수했다. 1917년에는 친구인 이강현의 권고로 한국 최초의 민족계 면방기업인 경성직뉴(京城織紐)를 인수, 산업활동과 인연을 맺는다. 이강현은 일본의 동경공고 방직과를 다닌 엘리트 섬유기술자로 동경유학시절에 김성수를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에서 수학과 물리 등을 가르쳤는데 경성직뉴가 경영난에 직면했음을 알고 김성수에게 인수를 권했던 것이다. 이후 이강현은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에 깊숙이 관여한다.경성직뉴는 방직 관련 수공업자들 중 이정규, 박윤근 등이 1911년에 자본금 10만원(현재가치로 약 16억원)을 공동으로 출자해 설립한 국내최초의 근대적 방직업체다. 병목정(현 중구 쌍림동)의 공장에 발동기 1대와 직뉴기(織紐機) 67대를 구비하고 면사, 마사, 견사를 원료로 댕기, 분합, 허리띠, 주머니끈, 대님 등을 직조했다. 초대사장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 였다.경성직뉴가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고도 설립 이래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은 서양 생활문화 유입으로 전통 한복문화가 급속히 퇴조했던 때문이다. 김성수가 경성직뉴 인수에 관심을 둔 것은 당시에 연간 2천700만원의 광목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돼, 이를 국내산으로 대체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경성직뉴 사장에 취임한 김성수는 댕기, 염낭끈 등의 생산을 중지하는 대신 일본 풍전직기(豊田織機, 토요타자동차의 전신)로부터 역직기 40대를 수입해 옷감을 생산하는 방직공장으로 전환했다. "한국인의 옷은 한국인의 손으로 짜서 입자"는 마케팅전략도 확정했다. 혼합사직인 '와사단'과 추동복용 '한양목', 모시 대용품인 '한양사' 등을 생산해서 '삼성(三星)'이란 상표를 붙였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못했다. 일본의 고품질 광목과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근대방직공장의 효시가 됐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3-20 경인일보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프롤로그

'한국은 잘 몰라도 삼성은 안다'1950년대 중반 재벌 단어 등장형성 시기 빨랐던 곳부터 게재2010년에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은 기업인 등으로부터 '최고의 평가와 찬사를 받은(admired)' 세계적 기업 50곳을 선정했다. 1위에 랭크된 미국 애플사를 비롯한 구글, 버크셔헤서웨이, 존슨&존슨, 아마존닷컴, BMW, 소니, 스타벅스 등이 뽑혔는데 한국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삼성전자가 42위에 올랐다. 그해에 삼성전자는 세계최대의 전자업체로 등극했다. 세계인들이 '한국'은 잘 몰라도 '삼성'은 안다는 말이 실감된다. 상당수의 해외 소비자들은 아직도 '삼성'을 최선진국의 브랜드로 알고 있단다.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와 기업의 발전에 대한 자신감이 자취를 감추었다. 장기불황 때문에 재벌들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는 탓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파문은 설상가상이었다. 삼성전자의 나라가 세계적인 부패공화국으로 비쳐진 것이다.재벌이란 일본고유의 문화유산인 '자이바츠(財閥)'에서 비롯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경제를 지배했던 대기업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사례가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후루카와(古河) 등이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정부의 비호 하에서 급성장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위기구이기도 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군국주의화 과정에서 일본군부와 일체화되어 한국, 대만, 중국 등 주변지역 침략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 결과 자이바츠들은 1945년 일본패전 후 연합군 측에 의해 전범(戰犯)처리 차원에서 해체되었다. 우리나라에 재벌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특징짓는 과도기에 귀속재산 불하와 원조물자 배정, 정부발주사업을 정경유착 등 비정상적 방법으로 수주받아 단기간에 막대한 이익을 챙겨 졸부가 된 기업가 내지 그런 유형의 대기업집단을 지칭했던 것이다.특히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압축성장 과정에서 재벌들이 양산됐다. 정부주도의 공업화로 국민소득이 크게 신장하고 실업률이 대폭 축소되는 등 엄청난 성과를 냈다. 정부가 연출한 드라마에 기업가와 노동자들이 배우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낸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대마불사 신화에 도취된 기업들은 차입경영을 통해 외형을 부풀렸고 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소위 30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로 고착되었다. 그 결과 몇몇 재벌들의 경영실패가 한국경제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는데 1997년 12월에 초래된 외환위기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외환위기는 한국자본주의로 하여금 종래 정부주도의 양적 성장에서 질적 고도화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분수령이었다. 재벌 또한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 스탠더드 위주의 체질개선을 강요받았다. 그 와중에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LG전자, SK에너지 등은 글로벌 리더기업으로 급부상했으며 여타 재벌계 대기업들의 약진도 두드러지는 등 재벌위주의 경제력집중은 한층 심화되었다. 반면에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 투자부진 등으로 양극화도 확대되었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재벌자본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한국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재벌들의 성장과정이 궁금했다. 매주 재벌들의 성장과정을 연재하는데, 창업 시점이 아닌 재벌형성 시기가 빨랐던 대기업집단부터 순서대로 게재한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017-03-13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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