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공

 

[경인신공]이미숙의 독서정담-화자가 바뀌면 더 좋은 이야기

작가 김경윤은 도서관에 불이 나서 한 권의 책만 가지고 나가야 한다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가지고 나가겠다고 한다. 박지원의 모든 것이 '열하일기'에 들어 있으며, 박지원의 정신은 지금에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김경윤 작가는 이 책에서 우리가 아는 '열하일기'의 화자를 바꾼다. 열하로 여행할 당시 박지원의 나이는 44세였다. 첫 해외여행이었지만 박지원은 북학파 홍대용,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과의 교유를 통하여 청나라 문물과 풍속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열하일기'는 당대의 인문적 방대한 지식까지도 더해져 웬만한 성인 독자들도 읽기 힘들다. 그래서 김경윤 작가는 화자를 마부 창대로 바꾼다. 이른바 '창대의 열하일기'다. 왕복 6 천리나 되는 머나먼 길, 박지원이 타고 가는 말고삐를 잡고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간 창대, 6월부터 9월까지 한여름 불볕, 장마, 배고픔, 헐벗음을 이겨낸 10대 청소년 창대가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창대는 천민으로 태어나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다가 말 키우고 다루는 것 하나로 사신 행렬에 마부로 뽑혔다. 거기에 천운을 더해 호방하고 덕망 있으며 사람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박지원을 만난다. 명문세도가의 자식으로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으나 과거시험장에서 백지를 내거나 그림을 그려냈던 큰 양반 박지원을 통해 창대는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새롭게 만난다. 이 책은 창대의 여행길에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해가는 인생이야기이다. 그래서 책 읽는 재미가 있다. 창대의 일신우일신하는 성장이 바로 독자의 삶으로, 특히 청소년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화자를 바꾼다는 것은 천지개벽하는 것과 같은 변화이다. 우리학교는 행복배움학교다. 2015년 지정되어 올해로 3년째가 되는 학교다. 모든 교사가 학생들과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배움 중심으로 수업 방법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인천교육연수원에서 중등교감자격 연수를 진행하고 있는데, 우리학교를 방문하여 수업 변화 노력에 대해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한 시간은 교장으로서 학교변화, 수업변화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시간은 배움의공동체 수업을 실천하시는 어느 선생님께 수업 사례를 부탁했다. 그런데 바로 전날,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이게 최선일까? 학생중심수업인데, 학생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회했다. 학생회장에게 부탁했다. 학생회장은 "먼저 저를 믿고 이 자리에 세워 주신 우리학교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로 시작해서 배움의공동체 수업이 얼마나 학생들을 바꾸었는지를 설명했다. 평가방법에 대해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눠 결정하고,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되고, 존중과 배려, 협력이라는 단어가 학생 입에서 술술 나왔다. 학생회장은 이어 "우리학교에서 중요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학생 자치입니다. 저는 학생회장으로 한 마디 이야기하면서 마치겠습니다. 학교를 학교답게 하는데 학생자치는 아주 중요합니다. 제 임기는 8개월 30일 남아 있습니다. 임기를 마치는 날까지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덧붙였다.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임기를 알고 역할을 수행하는 학생회장! 대단하다고 강의가 끝난 후 여러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다. 더 많은 시간을 주고, 질의응답으로 마무리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했다. 행복배움학교 3년차 학교. 교사나 교장보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학교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학교에서도 화자가 바뀌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흐뭇하다. /인천선학중학교 교장※위 독서정담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6-12 경인일보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간척으로 형성된 평택평야

고려때부터 개간 18·19세기 들어 본격화1974년 방조제·경지정리 '용수문제' 해소농경과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인간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마을을 이뤘습니다. 배산임수지형은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얻기 편한 곳이었으며 밭농사와 땔감을 얻기에도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논농사가 발달하면서 점차 저습한 평야지대도 개간되었습니다.평택시는 저습한 평야지대에 형성된 도시입니다. 그래서 구릉이 매우 적고 전체면적 중 80%가 평야입니다.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평택평야는 대부분 경작이 불가능한 황무지와 간석지였습니다. 하천을 통해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유입되어 식수와 농업용수를 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경작 가능한 토지가 적고 척박한데다 농업용수가 부족하다보니 인구밀도도 매우 낮았습니다. 평택평야를 크게 변모시킨 것은 간척(干拓)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간척이 시작된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고 조선 전기에도 국가나 관청, 권력자들이 경기 연안을 간척하여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평택평야는 대체로 간척기술이 발달한 18·19세기가 지나서야 간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평택평야의 간척이 늦어진 것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했기 때문입니다. 또 설령 간척되었다고 해도 심한 물살에 제언이 무너져 포락(浦落)되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19세기 간척의 주체는 궁실과 관청, 군영, 왕족과 권력자, 빈농층 등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안성천과 진위천 중하류지역을 간척했습니다. 조선정부도 면세혜택을 주며 간척을 권장했습니다. 이 같은 정책으로 평택평야에는 내수사를 비롯하여 여러 궁실들과 어영청, 수어청, 장용영과 같은 군영, 정조 때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용주사의 토지들이 널려 있게 되었습니다.일제강점기에는 식량증산을 위한 대규모 간척이 시도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한국에 건너와 서울이나 개항장에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그동안 개간되지 못했던 황무지나 갯벌을 막아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으로 국공유지가 강탈당한 뒤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지주, 친일지주 소유의 대규모 농장이 조성되었습니다. 일제 말에는 대가뭄으로 전쟁물자 수급이 어려워지자 면적이 넓은 하천의 하류지역까지 간척이 시도되었습니다. 심지어 바닷물이 드나드는 지역의 공유수면매립허가까지 남발하여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평택평야에는 일제 말의 간척으로 팽성읍의 암기원들, 오성면의 평원농장, 임전조선농장, 길본농장, 청북읍의 동척농장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는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강안침식과 제방유실로 경작이 어렵거나 버려졌습니다.평택평야의 간척은 한국전쟁 뒤 난민정착사업에 따른 간척과 1974년 아산만 및 남양만방조제 건설로 종료되었습니다. 제1공화국 정부와 유엔사령부는 월남난민들의 안정적 정착과 전후복구를 목적으로 경기도 화성시나 평택시, 전북 군산, 옥구 일원, 전남 장흥 등 미개간지가 많은 지역에 피난민수용소를 세우고 난민정착사업을 전개했습니다. 평택평야는 이들에 의해 일제가 간척했지만 제언유실 등으로 포락된 지역과 간척에 실패했던 지역, 바닷물이 드나들던 공유수면과 하천부지가 간척되어 경지면적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간척으로 확대된 경지면적의 농업생산력은 매우 낮았습니다. 그것은 수해(水害)와 염해(鹽害)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만성적인 농업용수부족과 가뭄(旱害)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이 같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사건이 1974년 5월의 아산만 및 남양만 방조제 준공과 경지정리사업입니다. 방조제 준공과 경지정리사업으로 평택평야는 가뭄 없는 수리안전답으로 변모하여 전국 최고의 농업생산력과 질 좋은 평택미를 생산하는 곡창지대가 되었습니다. /김해규 한광중 교사※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근대 전후 간척으로 형성된 오성들(왼쪽)과 평택평야를 곡창지대로 변모시킨 아산만방조제 /한광중 제공

2017-06-05 경인일보

[경인신공]이상훈의 독서정담-책과의 첫 만남이 두려운 당신

분야·목적에따라 다양한 독서방법 필요모든 첫 만남은 설렘이다. 만남의 대상이 사람이든 책이든 마찬가지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만남을 잊지 못하듯, 정서적 충격과 지적 희열을 느끼게 해준 책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시인 황지우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기다리는 동안의 심정을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고 표현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듯 읽고 싶은 책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가슴 벅차고 두근거리는 일인가? 두근거리는 첫 만남과 아쉬운 헤어짐이 오랜 기억에 남는 것처럼 책 또한 즐겁고 행복하게 첫 장을 열어야 하며 아쉽고 안타깝게 마지막 장을 덮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특별한 목적을 위해 어쩔수 없이 읽어야 하는 책도 있다.첫눈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 것처럼 사실 일순간에 빠져드는 책을 만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책과 자연스러운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책에 관심을 갖고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그런 후에야 책이 가지고 있는 매력,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쿵쿵" 거리며 찾아올 것이다.당장 눈에 보이는 책 한 권을 손에 잡아보자. 그리고 제목을 천천히 읽어보며 무슨 내용을 담고 있을지 상상해보자. 사람의 얼굴 표정만큼 다양한 표지 그림과 책의 판형, 종이 특유의 질감을 시각과 촉감, 마음으로 느껴보자.이정도면 책과의 첫 남은 꽤 성공적이다. 그다음은 머리말과 차례를 살펴보자. 저자는 대부분 머리말을 맨 마지막에 쓴다. 그러니 머리말에는 저자가 책에서 다루었던 핵심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차례는 건물의 설계도와 같다. 차례를 천천히 훑어보면 책의 전체적인 골격이 보인다. 그러면 저자가 책을 쓴 목적과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태도 그리고 결론까지도 유추할 수 있다.본격적으로 첫 문장을 읽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많은 부분을 먼저 읽어내야 한다. 학문적인 이론을 다룬 책이나 철학 서적의 경우에는 간혹 해설이 붙어 있다.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라면 이 부분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책 읽기라는 긴 여정을 떠나기 전 미리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경로를 알고 시작한다면 저자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 조금 더 즐겁지 않을까?글의 종류에 따라서 책 읽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소설은 시대적 배경과 사회 현실, 작가의 사상과 삶의 가치를 고민하며 읽어야 한다. 하지만 자연과학 분야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필요에 따라 속독과 정독이 필요하다. 빨리 읽으면서 핵심 정보만 파악하거나 필요한 부분만 정독하는 등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다양한 독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또 동화, 문학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읽어야 하지만 다른 분야의 책이라면 일부분만 발췌하여 읽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보고서나 과제해결을 위해 책을 참고할 때는 전체가 아니라 몇 페이지 혹은 몇 줄만 필요한 경우도 있다. 역사와 예술에 관한 책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시대, 관심 있는 음악가,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관한 부분만 골라 읽을 수도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이렇게 목적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소리 내어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가 많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소리 내어 읽어보자. 입으로 문장을 읽으면서 귀로 그 소리를 듣고 의미를 생각하는 입체적 책읽기는 묵독과 다르다. 눈으로 읽는 묵독보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그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를 읽을 때 좋은 방법이다. 내적인 리듬감을 즐길 수 있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소리로도 확인할 수 있다.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 받고 있는 샤를 드골은 "위대해지려고 각오한 자만이 위인이 될 수 있다"며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를 독서법에 적용하면 "오감으로 읽는 자만이 위대한 독자가 될 수 있다" 정도가 되려나?책과 소통하고, 책에 반응하라. 예능 프로그램에만 리액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책 읽기에도 분야별로 다른 리액션이 필요하다. /인천시남부교육지원청 장학사※위 독서정담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6-05 경인일보

[경인신공]놀면서 배우는 창의융합교실-소프트웨어 교육과 코딩

해법 설계·프로그래밍·실행 3단계 과정게임·일상언어등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기술 습득보다 논리 알고리즘 구축 중요요즘 소프트웨어와 코딩교육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2015개정교육과정에서는 초·중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소프트웨어교육을 필수로 배우게 된다. 초등학교 17시간, 중학교 34시간으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볼 수 없으나 모든 학생들이 배운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14년 당시 정부가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로 소프트웨어 중심사회를 선언한 이후 불과 1년만에 정규교과에 편성됐으며 소프트웨어교육을 현장에 정착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교사연수와 다양한 관련 교육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학생들과 교사, 학부모들은 소프트웨어, 코딩교육의 열풍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소프트웨어교육이란 '컴퓨터적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컴퓨터적 사고란 미국 MIT 대학의 Seymour Papert교수가 처음 언급했으며 문제가 주어졌을 때 컴퓨터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생각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이야기한다. 컴퓨터적인 사고는 3단계를 거친다. 문제가 주어진 후 첫 번째 단계는 문제해결을 위한 설계이며 두 번째 단계에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해 코딩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의 코딩이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게 되므로 이것을 현실의 세계로 옮기기 위해서는 컴퓨터, 스마트폰, 로봇 등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즉, 소프트웨어교육이란 우리 아이들이 컴퓨터적 사고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교육이며 코딩교육이란 컴퓨터의 언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에는 컴퓨터 없이도 컴퓨터적 사고를 경험하도록 하는 언플러그드 소프트웨어 교육프로그램으로 시작해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쉽게 코딩과 컴퓨터적 사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가 개발돼 있으므로 이를 이용해 아이들이 소프트웨어교육에 접할 수 있도록 한다.스크래치(Scratch)는 MIT미디어랩에서 개발한 교육도구로 게임의 방식을 이용해 프로그래밍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소리와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며 블록형태의 명령어를 마우스로 옮기고 쌓아가며 원하는 기능을 구현할 수 있다. 엔트리(Entry)는 기본 언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며 명령어 또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을 사용하므로 이해가 쉽다. 스크래치와 같이 블록형태의 코딩방식으로 명령어블록을 쌓아가며 프로그램을 만드는 시각적인 프로그램으로 자신이 만든 미디어아트와 프로그램들을 공유할 수 있다. 아두이노(Arduino)는 하드웨어기기를 조정하는 코딩도구로 프로그래머가 생각하는 명령어들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다양한 용도로 조립해 쓸 수 있는 모듈형 기판이다. 아두이노는 로봇이나 자동차를 만들고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할 수 있다.2018년부터 학교에서 소프트웨어교육을 시작하게 되는데 많은 학생, 교사, 학부모들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 두려움은 소프트웨어교육의 목적을 기술 습득으로 착각해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교육의 목적은 컴퓨터사고의 기본원리를 이해하고 사고력과 논리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며, 정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방법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컴퓨터적 사고와 코딩은 디바이스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수학적, 과학적 소양을 토대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논리와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안달 평택 효덕초 교사※위 창의융합교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6-05 경인일보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안산군 공립소학교'

강화도 조약 체결후 근대화 격랑속에1895년 교사양성 학교법제·법칙 제정1899년에 개교 지역 근대학교로 성장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가면 아주 오래된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안산초등학교인데 1899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역사가 120년이 돼가는 전통있는 학교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본관 건물이 보이는데, 100년이 넘어보이지는 않네요. 옛 건물은 6·25 전쟁 당시 모두 무너졌고 지금 건물은 전쟁 이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안산에서 가장 오래된 이 학교는 일찍 근대 교육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세워졌습니다. 그럼 학교가 세워질 당시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같이 살펴볼까요?지금으로부터 약 140년 전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우리나라는 근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4년 갑오년에는 1월에 고부농민봉기를 시작으로 해서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을 휩쓸었으며, 7월에는 청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계속해서 청나라에 승리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갑오개혁을 발표하고 근대 국가로의 변화를 꾀하던 시기, 고종은 교육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발표합니다. 1895년 2월 2일 교육에 관한 특별조서로 '교육조서(교육입국조서)'라고 합니다. 교육에 의해 새로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근대식 학제를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이 조서를 발표한 후 정부에서는 교육을 통한 국가중흥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895년 4월에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한 <한성사범학교관제>를 공포했으며, 계속해서 <외국어학교관제> <소학교령> 등의 학교법제와 법칙을 제정했습니다.1899년에는 전국 18개 학교에 교원이 배치되는데 모두 한성사범학교 제1기생과 제2기생이었습니다. 이 해 11월 6일 안산군에도 교원이 배치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부임하는 교원이 김광식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어서 배치된 교원으로 최정하, 김건식, 박지양, 박윤형, 김건식, 정원석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1899년까지 학부(현재 교육부)가 교원을 배치한 전국의 공립소학교는 51개 학교로, 한성부 공립소학교, 관찰부 공립소학교 13개교, 개항장 공립소학교 8개교, 3부(강화, 개성, 덕원) 공립소학교 3개교, 각군 공립소학교 26개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899년 세워진 안산군 공립 소학교는 바로 각군 공립소학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1899년 9월에 개교한 안산군 공립 소학교는 안산지역 근대 학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는 안산의 근대교육 역사가 100년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안산이 신공업도시로 성장하기 전 이미 이 땅의 근대교육이 시작되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100여 년 전이나 현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은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당시에도 열강들의 힘겨루기에 우리의 운명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늘 불안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예전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도 새로운 교육체제로 나아가야 하는 열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신대광 원일중 수석교사※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안산초등학교 /원일중 제공

2017-05-29 경인일보

[경인신공]이성희의 독서정담-첫만남 생생했던 그'떨림'의 기억

이상석 '사랑으로…' 교사라는 직분의 소중함 담아1988. 꿈 많던 사범대학 1학년생이었던 나에게 이상석 선생님의'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건네준 선배가 있었다. 교사를 꿈꾸는 사람이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며, 자신이 느꼈던 떨림을 얘기하며 내게 선물로 주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받은 책선물이었다. '선배가 느꼈던 떨림'이란 이름의 감동은 내게 또 다른 울림이 되어 전해졌다. 첫 장을 넘기면서 빠져들었던 이상석 선생님의 교단 일기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긴 여운으로 남았다. 책에는 나의 이야기가, 내 친구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우리 학교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져 있었다. 가출을 일삼고 친구들을 괴롭히던 길청과 정록은 우리 반 꾸러기 친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이들은 탈출구가 없었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면 그 방황이 그리 길지도, 끝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꾸러기 아이들을 사랑과 믿음으로 감싸주시던 이상석 선생님의 모습에서 아이들의 튼실한 언덕이 되어주는 넉넉한 형의 모습을 보았다.1999. 교사가 꿈이었던 열아홉 살의 풋풋했던 그 대학생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또 어떤 업무를 맡게 될지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첫 출근을 했다. 이상석 선생님처럼 '외할매' 이야기로 시작을 해 볼까. 아니면 첫사랑이야기는 어떨까.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떨리기만 하다. 교사들 사이에서 학기 초마다 경전의 문구처럼 위력을 발휘하며 떠도는 말이 있다. 아이들을 초반에 꽉 잡아야 일 년이 편하다는 말이다. 교육학 시간에 배웠던 인간중심의 각종 교육이론은 한 순간의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정글의 법칙이 '현실'이라는 이름의 무게로 교사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 유혹을 이겨내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바로 이상석 선생님이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에서 보여주었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다. 1999년 그해 여름, 우리는 동료 교사로 만났다. 책으로 만난 지 꼭 11년 만이다. 충청도 자락 작은 마을 무너미에서 열린 글쓰기연구회 연수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아이들에 대해서, 교사의 삶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떨림'이 현실이 되어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밤이 너무 짧았다. 나는 행복했다.2017. 그 사이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너그러웠으나 동료들에게는 때론 모났던 나이 서른의 청년교사는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기고 오십을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넉넉해진 중년의 교사가 되었다. 시간은 삶의 곳곳에서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본다. 좋았던 기억보다 좋지 않았던 기억이 더 많았다. 그래서 더욱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때로는 그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찾게 되는 이상석 선생님의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는 나에게 처음마음을 간직하게 해 준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첫 만남의 그 생생했던 '떨림'의 기억은 유통기한이 없다. 교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읽었으면 한다. 나는 지금 29년 전의 그 '떨림'을 얘기하며 후배들에게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건네는 또 한 명의 선배가 되었다. 감동은 전해져야만 하는 운명인가 보다. 그 울림을 전해줄 수 있는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성희 인천시교육청 장학관※위 독서정담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성희 인천시교육청 장학관

2017-05-29 경인일보

[경인신공]놀면서 배우는 창의융합교실-메이커스 운동

3D프린팅 다품종 소량생산… 신개념 직업시대 열려누군가 만들어놓은 진로계획에 따라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고 직업 또한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각자 메이커(Maker)가 돼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야 한다. '메이커'란 대개 무언가 만드는 사람을 말하고 발명가, 공예가, 기술자 등 기존의 제작자 카테고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손쉬워진 기술을 응용해서 폭넓은 만들기 활동을 하는 대중을 지칭한다. 과거의 과학기술산업은 고가의 제작 장비와 지식정보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됐으며 일반 대중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따랐다. 그러나 디지털 제작도구가 보급되고 전자부품의 가격이 낮아짐에 따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개발비용이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상상만 해왔던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오픈소스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했다. 이러한 문화가 확산되면서 그들이 메이커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활동을 메이커스운동(Makers Movement)이라고 말한다.TED의 큐레이터이자 '메이커스(Makers)'의 저자인 크리스 앤더슨은 3D프린팅을 중심으로 한 최근의 이런 현상에 대해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디지털 제조에 힘입어 메이커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앤더슨에 따르면 메이커는 새로운 산업혁명을 주도할 세대로서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이전 세대의 제조자와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 대규모의 자본과 설비를 동원한 대량생산방식의 전통적 제조업은 그 움직임이 둔하며 혁신을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메이커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제품을 공유·연결·제조·배분하며 대형 스토어에서 판매되는 대량생산 상품이 아닌, 다른 관심사를 가진 소비자를 위한 소량의 맞춤형 제품 생산에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시대의 흐름과 소비자의 반응에 빠르게 적응하며 혁신을 이어간다. 또한, 메이커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상품화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며 그것을 배우고 나누는 활동을 통해 즐거운 생산활동을 이어간다. 소품종 대량생산이 아닌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의 진정한 주역이 바로 메이커인 것이다. 과거에는 취미로만 생각되던 것들이 현재는 큰 만족과 수익을 주는 직업으로 재탄생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으며 과거의 창업은 실패 후 재기가 어려웠으나 다품종 소량의 시대에서의 창업은 실패에 대한 위험부담이 적다.미래를 살아가게 될 우리 친구들은 과거와 현재의 진로계획을 벗어나 새로운 진로계획을 세워야 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 스스로 재미로 하는 모든 활동이 미래 직업이 될 수 있는 시대다. 지금 친구들과 하고 있는 놀이, 대화 등도 직업으로 재탄생 될 수 있다. 그러니 '직업은 이런 것이다!'라는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나만의 직업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도전하자. /안달 평택 효덕초 교사※위 창의융합교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5-29 경인일보

[경인신공]이미숙의 독서정담-괴물은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가?

세상에 대한 무관심·감정과잉 아이진심어린 시선, 닫힌 마음 빗장열어새봄을 알리는 봄꽃들이 화르르 떠나고 난 뒤, 5월이 시작될 무렵부터 붉은빛 더한 철쭉같은 꽃들이 군단처럼 학교 곳곳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한겨울 잎새 하나 없는 줄기만 보고도 이름을 척척 맞추지만, 나는 꽃이 피어야만 겨우 존재를 알아본다. 제대로 봐 주지도 못했는데 생의 주기를 마친 꽃들이 아이들처럼 느껴졌다.교문에서 아침맞이하는 두 달 동안 내내 마음이 쓰인 아이가 있다. 교문을 닫아야 할 때 등교하는 아이다. 거의 날마다 그렇다. 뛰는 법도 없다. 하얀 얼굴, 자그마한 키, 가방을 멘 어깨가 위태롭다. 얼마 전 수업공개가 있는 교실에 들어갔더니 그 아이가 있었다. 그날은 여가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어떤 느낌이 드는지,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수업이었다. 그 아이는 집에 돌아가면 게임을 한바탕한다고 했다. 그렇게 보낸 느낌을 모둠 친구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사형수 같은 느낌이야. 사형수를 처형하기 전에 잘해준다잖아. 나는 게임을 마치면 학원에 가야 해."그 아이는 한 시간 내내 한 번도 웃지 않았다.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읽는 내내 그 아이를 생각했다. '아몬드'의 주인공 윤재는 16살이다.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가 작아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이상이 있는 아이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의 이면을 읽어내지 못하고 공포도 분노도 느끼지 못하는 윤재를 위해 엄마는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윤재를 '괴물'로 낙인찍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한 남자가 백주대낮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한 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여섯 명을 죽인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다. 윤재는 처참한 현장을 담담히 바라본다. 피해자 중에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가 들어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혈육이 당한 일임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윤재를 '괴물'이라 불렀다.'아몬드'에는 또 다른 괴물 곤이 나온다. 곤은 성장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아이로, 감정이 없는 윤재와 달리 곤은 감정 과잉이 문제가 된다. 곤은 폭력으로 분노를 표현한 대가로 소년원을 다녀오고 강제전학을 와서 윤재와 같은 반이 되었다. 괴물과 괴물과의 만남. 그들의 부딪침은 심장 졸이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만든다. 극한 갈등을 겪고 난 다음 곤이 말한다. "내가 너를 만나는 이유가 있어. 적어도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날 쉽게 판단하지 않더라고."'아몬드'에서 윤재와 곤을 만난 후 부모나 교사가 감정의 출렁거림이 없는 것이 얼마나 큰 미덕인지 알게 되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아이들은 안정감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교실에서 그 아이를 만난 후 아이를 좀 더 알게 되었다. 한 시간 동안 그 아이가 보낸 사인(sign)은 풍부했다. 과묵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비록 꽃처럼 화사한 웃음은 보이지 않았어도 사형수같다는 정직한 자기 표현 후에는 부시럭거리기도 하고 손장난도 하고 참관하는 교사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 아이는 꽃이 틀림 없었다. 화사한 꽃이 있어야만 꽃이 아니다. 꽃이 진 다음에도 그 꽃의 본질은 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꽃이 피기 전에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며, 꽃을 떨군 다음에도 꽃을 알아볼 수 있는 자세다.학교에는 윤재와 곤의 결합체가 많다. 성장 과정에서 마음을 다쳤으나, 분노나 불편함을 세상을 향해 발산하지 못하고 지쳐가는 아이들이 많다.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아이들은 괴물이 된다. 괴물이라 불렸던 두 아이들은 진심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서로를 제대로 보아 주면서 평범한 아이들로 돌아온다. 다만 그들을 괴물이라 불렀던 많은 사람들은 그대로 괴물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자신들이 괴물이라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인천선학중 교장※위 독서정담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5-22 경인일보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안성유기 '안성맞춤'

양은·스테인리스그릇에 밀려 쇠퇴부패예방 등 장점에 옛 명성 되찾아안성은 인근의 평택이나 용인처럼 인구가 밀집된 지역은 아니지만, '안성'이라는 지명의 인지도만큼은 전국의 어느 시·군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허생전의 주요 무대가 되었을 정도로 물품 거래가 활발했던 '안성장'과 '안성맞춤'으로 유명한 안성유기의 덕을 톡톡히 본 결과일 것입니다. 18세기 초 안성장은 은진, 전주, 황주와 함께 장세(場稅)를 많이 거둔 전국 4대 시장 중 하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전 조선 3대 시장이라고 칭해지기까지 했습니다.'유기'는 보통 놋쇠로 만든 그릇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 이래로 유기가 만들어졌으나, 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상류층의 수요품이나 불교용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8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유기의 사용이 일반인에게까지 확대됩니다. 안성의 유기 생산과 관련돼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72년 안성시 죽산면에서 나온 장명사지 탑지석 내용입니다. 탑지석은 고려 초기인 997년에 제작됐는데, 여기에 유장(鍮匠: 유기장인) '지미지(只未知)'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안성유기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던 조선 후기와는 너무 시기가 멀고,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만든 유기를 안성유기의 시작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1614년 택당 이식(李植)의 '천장잡록'에는 그가 안성의 '유점(鍮店: 유기 수공업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에서 묵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안성유기의 본격적 생산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입니다. 이어 1624년에는 정부에서 유기 명인을 뜻하는 '선수장인(善手匠人)을 불러들이는데, 안성의 윤언복이라는 인물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안성유기 명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한 1744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식을 정리한 의궤, 1857년 순조비 순헌왕후의 장례식을 정리한 의궤에도 안성 유기장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기의 선수장인은 안성에 많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로 유기제작이 필요할 경우 유기로 유명한 안성의 수공업자들이 불려가곤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안성장의 발전과 짝해 유기뿐만 아니라 백동연죽, 가죽신, 종이 등을 만드는 수공업자들이 안성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헌종 때인 1840년경 안성군수를 지낸 정만교(鄭晩敎)는 수공업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안성의 수공업자들이 세운 선정비가 현재까지 안성공원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10여 종의 수공업 점포명이 있어, 이들이 선정비 건립의 주체세력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안성의 유기는 '장내기'와 '맞춤' 두 가지로 생산되었습니다. 장내기는 시장에서 팔기 위해 대량 생산을 했던 반면 맞춤은 서울의 양반가 등 상류층의 주문을 받아 모양과 품질을 좋게 만들었습니다. 안성은 서울과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서울 사대부가의 주문으로 맞춤유기를 많이 생산했습니다. 1900년대 초반에 '안성맞춤'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합니다. 안성유기가 유명하게 되자 그릇에 '안성맞침', '안성맛춤' 등의 글자를 넣기도 했습니다. 안성에서 맞춘 유기를 가리키던 '안성맞춤'은 '요구하거나 생각한 대로 잘 된 물건' 또는 '조건이나 상황이 어떤 일에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는 것'을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됐습니다.고급 용기로 각광받았던 유기가 1900년대 이후 들어온 일본산 도자기에 타격을 입었고, 해방 후에는 양은과 스테인리스 그릇에 점차 밀려났습니다. 급기야 1960년대 들어 연탄 사용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급격히 쇠퇴해 안성에서 단지 한 곳의 유기 공장만 남게 됐습니다. 연탄가스가 닿으면 그릇이 검은 색깔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음식의 부패를 막고 농약 성분을 감지해 내는 등 유기의 장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옛 것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안성유기도 다시 활기를 찾아 최근에는 유기 공장도 세 곳으로 늘었습니다. /장연환 효명고 교사※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첩반상기란 뚜껑이 달린 반찬을 담는 그릇의 수효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12첩을 갖춘 반상기를 말한다. 지체높은 집안일수록 반상기는 최고의 상품을 장만해서 썼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맞춤유기인 것이다. /안성맞춤박물관 제공

2017-05-22 경인일보

[경인신공]놀면서 배우는 창의융합교실-나만의 아이스박스 만들기

열전달 적게 일어나는 부도체 찾기저렴한 스티로폼·은박지 재료이용무더운 날씨에도 오랜 시간동안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만의 아이스박스를 만들어 보자. 성능이 우수한 아이스박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스박스에 숨겨진 과학적 원리인 열이 전달되는 원리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열이 전달되는 방식은 크게 전도, 대류, 복사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전도는 다른 물질을 통해서 열이 전달되는 현상이다. 맛있는 요리에 사용하는 프라이팬의 한쪽만을 가열해도 프라이팬의 전체가 뜨거워지는 현상, 고기를 먹을 때 젓가락 등을 불판 위에 올려놓으면 젓가락도 뜨거워져 사용할 수 없게 되는 현상 등이 열의 전도다. 대류는 기체나 액체 등 유체에서의 열의 이동을 말한다. 예를 들어 물을 넣은 주전자의 바닥만을 가열해도 주전자 안의 물 전체가 데워지는 현상, 보일러를 켜면 방안 전체가 따뜻해지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복사는 열이 물질의 도움 없이 직접 전달되는 현상이다. 햇볕을 쬐면 물건들이 따뜻해지고 전자렌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현상, 난로와 사람사이를 책 등으로 막게 되면 뜨거움이 사라지는 현상 등이다. 그럼 열의 이동현상을 알고 이를 활용해 나만의 아이스박스를 만들어 보자. 성능이 좋은 아이스박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스박스 안쪽의 차가운 공기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아이스박스 밖의 공기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스박스의 제작을 위해 우선 재료를 고민해야 한다. 열을 잘 전달하는 물질을 도체, 반대로 전기나 열을 전달하지 않는 물질을 절연체라고 하며 아이스박스의 재료로 절연체를 사용한다. 하지만 실제 이상적으로 전기나 열을 막을 수 있는 절연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열전도가 아주 적게 일어나는 부도체인 다이아몬드, 에보나이트, 유리, 스티로폼 중 쉽게 구할 수 있는 스티로폼 등을 재료로 하는 것이 좋다.열의 전달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열을 반사시키거나 배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아이스박스와 같은 원리를 사용하는 보온병의 경우 보온병 안쪽에 열을 반사시킬 수 있도록 은도금을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해 은박지 등으로 아이스박스의 안과 밖을 감싸는 것도 열의 이동을 막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마지막으로 따뜻한 공기와 열이 아이스박스의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한다. 아이스박스 외부의 따뜻한 공기와 열이 아이스박스 내부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최고의 방법은 여러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제품 속에 숨겨진 과학적 원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발견한 과학적 원리를 이용해 생활 속 문제를 해결하거나 더욱 효과적이고 편리한 제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생활의 발견은 여러분을 과학자, 발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활동임을 알고 과학자, 발명가의 눈으로 우리 주위를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여러분도 과학자이자 발명가의 길로 한걸음 다가서게 될 것이다. /안달 평택 효덕초 교사※위 창의융합교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5-22 경인일보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고양시 덕양산 행주산성

明 벽제관 전투 대패로 조선군 '나홀로 항전'민초들의 끈질긴 저항… 행주대첩비로 기려425년 전 한강 북쪽에 접해있는 역사 현장으로 찾아갑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열 달이 지난 1593년 3월, 조선의 관군이 왜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던 격전지랍니다. 고양시 덕양산 봉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행주산성이지요. 이곳이 바로 권율 장군의 지휘를 받은 2천300여 명의 조선군이 3만 여 명의 왜군을 격퇴한 행주대첩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행주산성을 오르다보면 삼국시대에 지은 토성의 흔적이 산 둘레에 남아있고 남쪽으로는 한강으로 깎아지르는 절벽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로 활용해왔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답니다.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었던 1593년 3월 14일, 조선군과 왜군 사이의 전투인 행주대첩은 어떻게 일어났던 것일까요?행주대첩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부터 알아볼까요.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북상했던 왜군은 1593년 2월 9일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패한 후 밀리고 밀려 한양과 경기도 일대까지 퇴각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행주대첩 발생 약 보름 전인 2월 27일, 왜군의 사기가 오르도록 한 사건 하나가 발생했답니다. 거침없이 뒤쫓아 남쪽으로 내려오던 명나라 군대를 행주산성으로부터 북쪽으로 10여km 떨어져있는 벽제관 부근 전투에서 막아냈던 것이지요. 방심하고 있던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 부근의 숯돌 고개에서 매복하고 있던 왜군에게 기습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전투 이후 명나라 군대는 남진 계획을 접고 평양성으로 후퇴하고 말았지요. 한편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던 권율 장군의 군대도 승승장구해 한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권율 장군은 1592년 8월, 전라도 전주를 점령해 곡창 지대인 호남 지역으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왜군을 충청도 금산의 이치에서 크게 물리쳤답니다. 이어서 1593년 1월에는'세마대 전설'(2017년 1월 3일자 경인신공)의 재치를 발휘해 왜군으로부터 수원의 독산성까지 지켜낸 후 한양 수복을 꿈꾸며 행주산성으로 올라와 진을 치고 있던 상황이었지요. 이렇게 왜군을 상대로 이긴 경험을 바탕으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아군과 협공해 한양을 되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 이후 권율 장군의 부대는 명나라 군대와의 연합 없이 홀로 왜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권율의 부대는 한강을 등진 배수의 진을 치고서 산성 주변에 설치한 목책과 화력을 보강하며 왜군의 선제 공격에 대비했습니다.예상대로였습니다. 왜군은 명나라 군대와 조선군의 연합을 차단하기 위해 벽제관 전투 이후 3만 여명의 군사를 동원해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을 공격해 왔습니다. 3진으로 편성된 왜군은 하루 종일 지속적으로 공격해옴으로써 조선군의 방어선을 뚫으려 했지요. 그 때마다 성내의 조선군은 화차와 신기전, 여러 신식 화포 등의 무기를 활용해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답니다. 1천 여 명 남짓한 승군도 결사적으로 항전하며 왜군을 막는데 힘을 보탰지요. 하지만 무기는 거의 소진돼 갔고 결국 높이가 비교적 낮았던 산성의 서북쪽의 성벽이 방어선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내에 있던 조선군은 백병전을 치르면서 성내의 백성들과 함께 끈질기게 저항해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행주대첩의 승리는 이후 왜군으로 하여금 한양에서도 퇴각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덕양산 정상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2년과 1970년에 각각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습니다. 그 비석들은 진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지요. 행주대첩비를 등지고 서서 서울 방향으로 펼쳐진 들판과 당시의 조선군이 배수의 진을 쳤던 한강을 바라보노라면 425년 전 치열했던 전투 전후의 상황과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결연한 마음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효중 부흥고 교사※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덕양산 정상의 행주대첩비 /부흥고 제공

2017-05-15 경인일보

[경인신공]놀면서 배우는 창의융합교실-지속가능 발전교육의 장, 우리교실 우리학교

교사들, 학생주도 수업 주제 선정 어려움'Post-2015 SDGs' 17개 영역 참고 도움지구온난화, 기아대책, 인구 문제 등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는 세대와 국가를 초월해 함께 해결해야 할 공통 과제들이 있다. 지속가능발전교육(ESD, 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은 인류의 이런 과제들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지식, 가치, 태도, 역량 등을 함양하는 교육을 말한다. 지속가능발전교육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방향을 추구하며 태동되었기 때문에 초점은 '바람직한 미래'에 맞춰져 있다. 수차례의 교육과정 개정을 거쳐 지속가능발전교육 목표와 가치가 정비되었고 지금도 학교교육의 다양한 부분에서 실천되고 있다. 더불어 교육부와 시도교육청 그리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주도 하에 연구회 지원, 프로그램 개발, 연구학교 지정 등의 노력들이 부단히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교 속 지속가능발전교육은 '지속가능발전교육=환경교육'이라는 인식으로 단편적인 교육이 주를 이루어 왔다. 도입 초기 환경학자와 환경교사가 선도적으로 지속가능발전교육을 받아들인 것은 맞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다소 광범위한 푯대를 위해서는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다뤄야 한다.우선 교실현장에서 선정된 지속가능발전교육의 주제를 정비해야 한다. 많은 교사들은 교육의 트렌드에 따라 교과서 목차대로 하지 않고, 주제 중심의 교육과정을 재구성해 수업을 실천한다. 교육현장의 논의를 거쳐 주제가 탄생하고 적절한 교수학습방법에 따라 학생 중심의 수업을 구성하지만, 지속가능발전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교사라면 중심 주제 선정부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선정할 때 'Post-2015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의 17개 영역을 참고해보자. 빈곤퇴치, 기후변화 대응, 평화로운 사회 증진과 제도 구축 등 기존의 환경과 관련된 영역을 넘어 다양한 영역이 제시돼 있다.주제를 정했다면 실천 중심의 여유 있는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 지속가능발전교육은 단순한 캠페인 위주의 수업으로는 내면화되지 않는다. 학생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지게 해야 한다. 보여주기 식의 몇 차시 수업이 아닌, 비록 한 주제로 진행하더라도 사회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지속가능한 삶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 돼야 한다. 우리교실과 우리학교는 학생들이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또한 지속가능발전교육의 가치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공간이다. 즉, 나 혼자를 넘어 타인과 함께하는 '우리'는 지속가능발전의 중심이며, 교실과 학교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교육의 장이다.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해, 조급해하지 말고 먼저 우리교실 우리학교에서 지속가능발전교육을 시작해보자. /김언중 안산 원일초 교사※위 창의융합교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5-15 경인일보

[경인신공]박혜연의 함께 자라는 부모-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놀이'

시간·공간 함께 나눌 또래친구 존재 필요'놀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놀고 있네'라는 말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뜻으로, 흔히 예전의 학창시절 비행이나 일탈행동을 '놀았다'고 표현한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상태를 '노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논다는 것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것으로 인식된다. '한창 놀아야 할 시기'인 아이들에게조차 노는 것은 마래를 준비하기 위해 양보되어야 할 것으로 돼버렸다. 심지어 '놀면서 공부하는 OO학습' 광고처럼 학습능력을 높이는 방안으로의 놀이를 강조하며 놀이가 또 다른 학습 매뉴얼로 제시되고 이러한 놀이는 반드시 학습결과물로 나와야 한다.지난 1일 발표된 아동 삶의 질 국제 비교 조사(ISCWeB)에서 한국 초등학교 3학년 아동들의 행복감은 조사대상 16개국 중 14위, 그중 노는 시간은 16위 최하위로 나타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다행히도 이러한 현실을 바꾸고자 지난 2015년 5월 전국 시·도교육감이 모여 선포한 '어린이 놀이헌장'을 기점으로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가 놀이에 대한 가치를 존중해 아동의 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천시교육청에서도 올해 학교에서의 놀이교육 실천과 어린이 생태환경 놀이공간 조성, 학부모 놀이교육 진행 등 놀이헌장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과 정책을 펼치고 있다. 사실 돌아보면 부모인 우리의 어린 시절 놀던 놀이터는 동네 골목, 뒷산, 친구 집, 학교 운동장 등 동네 곳곳이었다. 일상이 펼쳐지는 모든 공간이 모두 놀이터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의 삶과 일터가 가정과 분리되면서 아이들이 어른의 일상을 보고 모방할 기회가 없어졌다. 일찍부터 학습과 학원에 시간을 빼앗긴 아이들은 놀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대학생과 청년으로, 어른이 된다. 놀이는 인간 본성에서 드러나는 자연적 행위다. 어른들에게도 여가와 놀이는 매우 중요하며 생활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물며 아이들은 어떻겠는가. '아이들은 놀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책 제목처럼 놀이는 아이들의 당연한 권리다. 놀면서 소통하고, 놀면서 감정을 느끼고, 놀이를 통해 도전하고, 놀이를 통해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것을 몸으로 기억하고 배운다. 놀이를 함께 하는 동생과 친구, 형들과 갈등을 빚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타협하고 양보하며 주장하는 등 사회에서 필요한 관계기술을 익힌다. 이것은 부모나 학원이 결코 가르쳐 줄 수 없고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기본적 관계기술 자체가 결핍되어 의사소통과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기, 배려하기, 공감하는 능력 등이 약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놀이는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해 참여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적 동기에서 진행되어야 재미있다. 정해진 놀잇감을 통한 놀이와 어른들이 만든 규칙에서 노는 것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고 자발적인 놀이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아이들 스스로 규칙과 방법을 만들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놀이터에서도 아이들은 어른이 정해놓은 놀이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놀이기구를 활용하여 논다. 가끔은 놀이터 전체가 바다가 되고, 우주가 되고, 괴물과 싸우는 싸움터가 된다. 바닥에 그려진 선만 있어도 새로운 놀이를 다양하게 만들어 노는 존재가 바로 우리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아이의 놀이가 가사와 학업에 방해받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이가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 함께 놀 친구들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잘 노는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인천시교육청 학부모지원전문가※위 함께 자라는 부모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5-15 경인일보

[경인신공]놀면서 배우는 창의융합교실-제4차 산업혁명 준비하기

중공업·자동화시스템 산업혁명 거쳐사물인터넷·3D 프린팅 등 연계 '협업'기존직업·새로운 직종 세대교체 예고"선생님, 4차 산업혁명이 뭐예요?" 요즘 '4차산업혁명'에 대해 묻는 친구들이 부쩍 많아졌다. 기술의 혁신으로 인해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를 '산업혁명'이라고 한다.인류는 현재까지 세 번의 산업혁명을 맞이했다. 먼저 1784년 영국에서 시작된 석탄과 철을 이용한 증기기관과 기계화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과 1870년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 경공업과 중공업으로 산업이 전환된 것을 2차 산업혁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1969년 컴퓨터의 발달과 인터넷, 자동화 시스템이 산업을 주도하게 된것을 3차 산업혁명으로 분류한다.많은 과학자와 경제학자들이 우리는 3차 산업시대의 끝자락을 살아가고 있으며 벌써 4차 산업혁명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3차 혁명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했던 인물들이 큰 성공과 함께 3차 산업시대를 주도하게 됐던 것처럼 4차 혁명을 미리 준비하는 인물들이 4차 시대를 이끌며 성공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한다.그렇다면 제4차 산업혁명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4차 산업혁명은 2010년 독일의 'High-tech Strategy 2020'의 10대 프로젝트 중 하나인 'Industry 4.0'에서 제조업과 정보통신이 융합되는 단계를 의미하는 용어로 처음 등장했다.이후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모이는 201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의 주제로 선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WEF에서는 4차 산업혁명(인더스트리 4.0)은 3차 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의 경계를 융합하는 기술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WEF의 설명을 쉽게 풀어보자면 '기술과 기술의 융합으로 새로운 창조를 이뤄내는 시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즉 4차 혁명은 기존의 기술들과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3D프린팅,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의 새로운 기술들이 하나로 융합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데이터를 축적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는 시기다.따라서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발굴, 창조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 및 협업을 통해 발전시키는 사람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곧바로 도태되는 시기다. 기술과 인간관계의 융합에 성공하는 사람만이 살아남게 되며 융합에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WEF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까지 710만개의 직업이 사라지고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학생들의 65%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21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5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기술과 인간관계의 융합이 중시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우리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오늘 하루를 즐기며 최선을 다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족, 친구들과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제4차 산업혁명 준비의 첫 단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서 존 키팅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때를 놓치지 마라. 소년들이여, 삶을 비상하도록 만들어라.' /안달 평택 효덕초 교사※위 창의융합교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7-05-08 경인일보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수원의 역사가 깃든 팔달산

신도시 수원중심 사통팔달 교통로 역할日강점기·한국전쟁 견디고 시민 쉼터로전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인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조상들의 산에 대한 믿음은 특별납니다. 고조선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桓雄)도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백두산)으로 내려오고, 단군왕검도 나중에는 산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됐다고 합니다.그리고 반만년 오랜 역사 속에서 적들이 쳐들어와도 평지에서 싸우지 않고 산성으로 피신해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싸웠습니다. 심지어 국가의 흥망성쇠나 가문의 번창까지도 산에 의지했습니다.이른바 풍수지리(風水地理) 사상 말입니다.이에 따르면 크든 작든 마을마다 믿고 의지하는 진산(鎭山)이 있었습니다. 혈장(穴場)이 있는 명당(明堂) 뒤에 위치하기 때문에 후산(後山)이라고도 하지요. 진산은 한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그 고을을 진호(鎭護:난리를 평정하여 나라를 지킴)하는 주산(主山)으로 개성의 송악산, 서울의 북한산이 대표적입니다. 아마도 수원은 광교산이 되겠지요.그런데 수원에는 도심 한가운데에 그리 높지는 않지만 도시의 중심을 잡아주는 산이 있으니 바로 '팔달산(八達山)'입니다. 서울의 남산처럼 말입니다. 둘레 5.7㎞의 화성(華城) 성곽 중에 1.2㎞가 팔달산에 걸쳐있습니다. 화성행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이 산은 처음에는 탑(塔)처럼 생겨서 탑산이라 했고, 이후 팔탄산(八呑山)으로 불리다가 18세기 말부터 팔달산으로 불렀습니다. 높이는 128m의 낮은 구릉으로 남북이 1.2㎞, 동서로는 약 800m 크기입니다.실학자 반계 유형원(1622∼1673)이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산 주변을 보고 큰 도시가 들어설 만하다고 했다지만, 그때는 팔달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냥 '북평(北坪, 북쪽의 넓은 뜰)'이라고 했답니다. 아마도 1796년 화성행궁이 완성된 이후 신도시 수원의 중심으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의 이름값에 맞게 우리나라 교통로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그리고 미루어 보건대 화성을 쌓기 전의 팔달산은 돌산이었을 겁니다. 이 팔달산의 돌을 1만3천900덩어리 캐서 성곽을 쌓았다고 화성축성 보고서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거든요. 전체 축성에 사용된 돌의 약 7% 정도입니다. 이러한 팔달산에는 시대마다 많은 흔적을 남깁니다. 아마도 화성과 화성행궁이 제대로 지켜질 때에는 함부로 팔달산을 훼손하지 못했겠지요. '금산(禁山)'으로 불렀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정조 임금의 흔적이 서린 산이라도 감시와 관리의 행정력이 흐트러진 혼란의 시대에는 일부 성곽이 여기저기 무너지는 것처럼 팔달산의 제 모습은 지켜지기 어려웠지요.먼저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1917년 10월 29일)에 남쪽 산기슭에 수원신사(水原神社)가 세워졌었고, 산 여기저기에 여러 개의 일본 사찰이 세워졌으며, '근대화된 공원'이 되면서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해방 이후에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3·1운동 기념탑, 8·15 독립기념탑, 홍난파의 고향의 봄 노래비, 강감찬 장군 동상 등이 세워졌고,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자동차도로까지 만들어집니다.또 삶이 절박했던 6·25전쟁 직후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됩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었던 수원의 인구였지만 혼란의 시대에는 화성 성곽의 목재들과 함께 팔달산 나무들이 가난한 민초들의 난방 에너지원이었겠지요.그러나 1976년대 화성 복원 공사가 어느 정도 이뤄져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2003년 화성행궁이 완전 복원된 이후에는 수원 시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화성을 지키면서,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쉬게 해주는 고마운 산입니다. /김찬수 동원고 교사※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팔달산에서 내려다 본 화성 장안문 주변과 멀리보이는 광교산 /동원고 제공

2017-05-08 경인일보

[경인신공]이상훈의 독서정담-금서와 블랙리스트 그리고 독자의 권리

특정도서 금서 낙인 현재진행형 '씁쓸''몽실언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기공룡 둘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정답은 금서 또는 검열의 대상이었던 책이라는 점이다. 인민군을 우호적으로 묘사하거나 자살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금서가 되기도 했으며 우리의 귀여운 '둘리'는 어른에게 말대꾸를 자주 해서 책을 읽는 어린이들이 버릇 나빠질 수 있다는 이유로 한때 금서목록에 포함되기도 했다.<논어>나 <성경>도 한동안 금서였다. 법가를 통치 이데올로기 삼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유가를 말살하는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고대 로마제국은 오랜 세월 기독교를 탄압했다. 권력의 '생각' 탄압, '불온한 책'을 금하는 정책은 그만큼 오래전에 시작됐다.'분서'는 단순히 '책을 불태움'을 넘어선다. 그것은 권력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이다. 권력자들에게 분서는 국민을 무지한 상태에 가둬놓기 위한 일종의 통치 행위이다.우리는 권력자들이 검열의 칼날을 얼마나 많이 휘둘렀는지를 통해 당시 사회의 경직성과 보수성을 가늠할 수 있다.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 히틀러의 분서 만행 등 사회질서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전 세계의 수많은 책이 찢기고 불태워졌으며 작가는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하고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권력자들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해가 될 만한 새로운 가치와 사상의 싹을 없애려 했다.이쯤 되면, 21세기 분서갱유라 할 만한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해당 인사에게 불이익을 주고, 예술의 다양성과 활성화를 위해 쓰여야 할 정부지원금을 오히려 예술인을 길들이는 데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퇴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인류는 이런 탄압에 저항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왔다. 돌이켜보면 권력에 대항하고, 강한 것에 맞서 견딘 것들은 엄혹한 시절을 지나와 오래도록 빛이 난다. 금지곡, 금서들이 그렇고, 후에 이름을 남긴 문화예술인들이 그렇다. 금서를 찾아 읽는 건, 사실 고전 읽기이다. 과거에 금서였던 책들이 오늘날 추천도서 목록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에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도 출간 당시 금서였으며 조선시대 <열하일기>도 불온하다 비난받았다.이렇게 시대와 불화했던 책이 고전 반열에 오른 데서 보듯, 지금 금서를 읽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상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금서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아직도 군대와 학교 등에서 특정 도서를 '낙인'찍고, 도서관과 서가에서 치우고 있다. 책을 불태우고 저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만이 금서는 아니다. 사회 특정 세력이 특정 도서를 널리 읽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도 금서이다.국방부는 <나쁜 사마리아인들> <대한민국 史> 등 시중에서 유통되는 책 23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바도 있으며, 한 단체에서 어린이·청소년 추천도서 가운데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 이야기>등을 '좌편향·왜곡도서'로 낙인찍은 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에 관련 내용을 파악하여 보고를 받기도 했으며 학교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서 해당 책들을 실제로 서가에서 없애기도 하였다.금서의 역사는 낡고 병든 사회와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투쟁의 역사이다. 아무리 책을 찢고, 불태우고, 땅속에 묻는다고 해도 그 안에 담긴 사상까지 없앨 수는 없음은 역사가 증명한다.40편이 넘는 저작물이 가톨릭 금서목록에 포함된 작가 에밀 졸라는 "내게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말할 권리가 있고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오늘 우리는 독서활동의 독자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책을 읽을 권리, 읽지 않을 권리,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원하는 책을 골라 읽을 권리,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을 권리, 소리내서 읽을 권리, 토론하며 읽을 권리, 아무 곳에서나 읽을 권리.독서교육, 이러한 권리를 누리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 가르쳐도 반은 성공이다. /이상훈 인천시남부교육지원청 장학사※위 독서정담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상훈 인천시남부교육지원청 장학사

2017-05-08 경인일보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안산 '고향마을'의 어버이날

태평양 전쟁때 日에 동원돼 '탄광부역'박노학씨등 '조선인 귀환' 호소 앞장서구소련·日 무책임 韓 외면에 해결안돼안산시를 관통하는 지하철 4호선 안산선을 타고 상록수역을 지나면 한대앞역이 있습니다. 역에서 나와 사동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광장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고향마을'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아파트 단지는 평범한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지난 2000년 구 소련의 영토였던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사는 곳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두 분의 흉상이 있는데 바로 박노학, 박해동이라는 분입니다.그 중에 '박노학' 이라는 분은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의 전시동원이 극심하던 때에 사할린에 들어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할린의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만 귀국하고 사할린에 있던 조선인들은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사할린에 와있던 일본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소련과 지속적인 협상을 벌여 1958년 자국민 귀환정책의 일환으로 사할린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본토로 데려갔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인과 결혼한 외국인도 포함돼 있어 박노학씨도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사할린에 남겨진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있음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당시 일본에 들어온 사할린 한인들 중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 씨 등이 주축이 돼 '가라후토(사할린의 일본식 표기) 억류 귀환자동맹'(후에 '가라후토 귀환 재일한국인회'로 명칭 변경)을 도쿄에서 결성했습니다. 회장을 맡았던 박노학씨는 1958년 1월 사할린에서 귀국할 때 배 안에서 귀환하는 동포들과 함께 남아 있는 동포들의 귀환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도착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 적십자사, 외무성, 법무성 등을 찾아다니면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호소했고, 한국 정부와 대한적십자사에도 귀환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12월에는 국제적십자사에 탄원서를 보내 일본과 한국 정부의 무책임함, 소련 정부의 가혹함 등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1967년 박노학 회장은 사할린 한인들이 친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받아 한국에 보내는 활동을 하면서 이를 근거로 1천744세대, 6천924명의 귀환희망자 명단을 완성해 한국, 일본, 소련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이 명부는 이후 한국 정부의 귀환협상에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됐습니다.그러나 그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은 잘 해결되지 않았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훗날 사할린 동포들이 일부 영주 귀국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구 소련의 소극적 대응과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 같은 동포이면서도 외면한 한국 정부로 인해 사할린 동포들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패이게 됐습니다. 그나마 박노학 회장 같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많은 사할린 동포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어버이 날을 맞이해 사할린에 두고 온 자식들을 생각하며 고향마을에서 외롭게 사시는 사할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따뜻한 손길이 필요함을 생각해 봅니다. /신대광 원일중 수석교사※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박노학 흉상. /원일중 제공

2017-05-01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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