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81]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와 ‘별들의 고향’

'별들의 고향'은 1970년대 문화의 아이콘이며,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1972년 9월 5일부터 1973년 9월 9일까지 총 314회 '조선일보'에 절찬리에 연재됐다. 연재 직후 예문관에서 두 권 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기록적인 판매 부수를 보여줬으며, 또 흥행영화로 명성을 날렸다. '별들의 고향'은 호스티스 소설이자 연애소설이었고,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산업화 시대 대중문화의 총아로서 동시대의 풍속과 세태를 반영하는 풍속소설(novel of manners)이었다. 작품은 비정한 대도시 공간에서 여주인공 '오경아'의 수난과 추락을 그린 멜로 서사다. 경아는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다 버림받고 죽음에 이르는 어이없는 희생자다. 경아의 이 같은 삶은 선택했다기 보다는 선택된 것이며 또 조금은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경아의 첫 번째 남자 영석에게 그녀는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이고, 두 번째 남자 만준에게도 그녀는 전처의 분신이자 대체자에 불과했다. 세 번째 남자 동혁마저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룬다. 남주인공 '문오' 역시 경아와 동거하며 삶의 위로를 받고 그녀의 몸을 소유함으로써 미술학도로서의 정체성도 되찾게 되지만, 고작 전화 한 통으로 간단하게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파렴치한 남자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별들의 고향'은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작품이 서있는 맥락과 그 이전의 신문연재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문체의 미학과 도시적 감수성 그리고 동시대 문화의 대변자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고도성장에 기본적인 인권마저 제한되고 유린되는 유례없는 정치적 억압에 처해 있던 당대의 청년들은 청바지·통기타·생맥주·장발 같은 청년문화를 통해서 사회적 울분과 답답함을 해소하고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부르고, 생맥주를 마시는 것 같은 하찮고 사소한 행위들이 반문화이자 저항문화의 의미를 띠게 되는 유신시대가 '별들의 고향'의 시대였다. 국가의 폭력이 횡행하고 물질주의가 팽배한 울분과 환멸이 교차하는 시대, 출구를 잃은 대중들과 청춘들은 '별들의 고향'에서 위로를 얻었다. 갈피를 잃은 정치적 무의식의 기형적 표출이며, 사회적 억압에 대한 대중소설적 대응이었던 것이다. '별들의 고향'은 현대의 거대도시 속에서 겪었던 경아의 수난과 그런 경아의 희생을 토대로 겨우 삶을 추스르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남성들의 입사식(initiation)이었고,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1945~2013)의 문학적 통과의례였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8-15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80]집으로 돌아간 노라, '자유부인'

정비석(1911~1991)의 '자유부인'은 뜨거운 소설이었다. 1954년 1월 1일부터 그해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총215회에 걸쳐 연재되는 동안 독자대중들은 열광했고, 당대 지식인들은 분노했다. 또 때 아닌 '자유부인 논쟁'으로 사회가 후끈 달아올랐다. 황산덕 교수는 '자유부인'은 "야비한 인기욕에만 사로잡히어 저속 유치한 에로작문을 희롱하는 문화의 적이요, 문화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며 맹공을 가했다. 여기에 변호사 홍순화, 평론가 백철, 작가 정비석 등이 가세하여 한 달 내내 지면을 달궜다.기혼여성의 일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부인'은 멜로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정과 미군을 통해 흘러들어온 미국문화가 대중의 욕망을 일깨우며, 재래의 가치와 격렬하게 부딪치던 즈음이었다. '자유부인'은 그런 시대풍조를 일탈의 기제로 활용하면서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 갇혀있던 여성의 '외출'을 다룸으로써 사회가 술렁거렸고, 엘리트 지식인들은 분개했다. 주인공 오선영은 대학 동창 모임인 '화교회'에 참석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새삼 잊고 있던 자신의 매력과 욕망을 발견한다. 그녀는 신춘호 · 백광진 · 한태석 등 남성인물들과 댄스홀에서 교제해가면서 사업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간다. 한글학자이자 국문과 교수인 남편 장태연도 미군부대(!)의 타이피스트인 박은미에게 잠시 매혹되지만, 이내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고 남편이자 가장으로 복귀한다. 식민지와 전쟁 등 국가적 고비를 넘긴 신생 공화국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를 자각하고 사회진출을 시도한 팜므 파탈의 매력과 개성을 감당하지 못한 채 민족과 부도(婦道) 같은 기존의 가치와 도덕률을 앞세워 오선영의 발걸음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세우는 완고한 젠더의 정치학을 보여준다. 폴리아모리(poly-amory)라는 다자연애가 일상의 토픽으로 등장하고 온갖 막장드라마가 전파를 타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부인'이라는 우스꽝스런 제목을 지닌 이 낡은 노벨은 지루하고 순진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집을 뛰쳐나온 '인형의 집'의 노라는 충격적인 문학적 주제였으나 큰 뉘우침과 함께 가정으로 돌아가는 '자유부인' 오선영의 '외출'은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막을 내린 멜로가 됐다. 그러나 '자유부인'은 미국문화가 동반한 새로운 가치와 전통윤리 사이의 갈등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동시대 우리 사회의 통념과 인식을 탁월하게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외출마저 탈주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물거품 같은 욕망을 자극하는 물신주의사회에 커다란 축복이 있을진저!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8-08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9]소설공장 공장장 방인근

방인근(1899~1975)은 소설공장 공장장이었다. 1923년 시 '하늘과 바다'를 시작으로 '마도의 향불'(1932) · '방랑의 가인'(1933) · '국보와 괴적'(1948) 등 무려 90권이 넘는 작품을 출간했다. 문인치고 사업수완도 좋아 1924년 민족주의 계열의 순문예지 '조선문단'을 창간했고, 해방 후에는 영화사 '춘해 프로덕션'의 사장을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방인근의 문학 활동은 크게 모리스 르블랑의 '813의 비밀'(1941)을 비롯하여 에밀 가보리오의 '르루주 사건'(1953)과 R. L. 스티븐슨의 '보물섬'(1954) 등의 탐정(모험)소설 번역, '마도의 향불'로 대변되는 애정소설, '국보와 괴적'(1948) · '원한의 복수'(1949) 등의 탐정소설 창작으로 분류된다. '마도의 향불'은 방인근의 출세작이다. 김애희와 윤영철의 사랑이 서사의 중핵을 이루며, 애희의 계모 숙희의 재산을 노린 방화와 살인, 이달의 애희 겁탈 같은 살인과 치정의 스토리가 얽히고설킨다. 소설은 난관을 이겨낸 애희와 영철 커플의 재결합과 숙희 처벌 그리고 두 커플의 사회사업 투신이라는 대중문학의 장르규칙과 문법을 충실하게 따른다. 통속성 · 치정 · 도덕적 결말 등 통속소설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것이다. 마굴로 묘사되는 식민지 대도시 경성의 악마성과 도시의 일상 그리고 빈민구제 같은 사회사업에 투신하는 남녀 주인공의 이타적 사랑등 같은 통속적 소재를 잘 그려냈다. 마도는 대도시 경성의 악마성을, 향불은 두 남녀의 도덕적 사랑(philia)을 가리킨다. '국보와 괴적'은 해방 후의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서와 테마를 배경으로 한 탐정소설이다. 조선인으로 위장한 하마구치와 그의 사위 피달수가 조선의 국보(신라 금관)을 훔치려다 협력을 거부한 금 세공업자 김선국을 살해한다. 사건 수사를 맡은 탐정 장비호는 민족적 어려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댄스 파티 같은 향락에 탐닉하는 친일파와 미군 및 한인고관 등의 권력층에 분노하며, 국가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민족주의자이며 당대의 민중적 정서의 대변자로 등장한다. 장비호는 사색과 추리를 중시하는 고전파 탐정이 아니라 행동파 탐정으로 애정문제로 고민하는 순정파 영웅이다. 방인근의 탐정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사의 동력은 정교한 플롯과 논리가 아니라 '애욕'과 '치정'이다. 추리는 없고, 애욕과 통속이라는 공감 주술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지독한 생활고로 신들린 듯 소설을 썼던 그는 스토리 머신―인간 소설공장이었으며, 한국 문학의 몸집을 풍성하게 불려준 공로자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8-01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8]박종화와 역사소설

을유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 역사소설은 박종화(1901~1981) 천하였다. 이광수·이태준·한설야·박태원 등 주요 작가들이 대거 납·월북하고 현진건과 김동인마저 타개한 작가 부재의 상황에서 오는 역사소설의 공동화를 막아냈다. 이광수 '단종애사'(1928), 김동인 '젊은 그들'(1930)과 '운현궁의 봄'(1933), 박종화 '금삼의 피'(1936)와 '여인천하'(1959) 등 한국 역사소설의 주류는 궁중 비화요, 왕조사극들이었다. 역사를 소재로 하는 역사소설의 최대 난관은 사실과 허구의 충돌―바로 역사적 사실의 간섭이다. 특히 신문연재 역사소설들의 독자 및 대중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궁중여인의 쟁총(爭寵), 군왕의 성적 편력, 개인에 과도한 영웅화, 정절과 충효절의 같은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는 보수주의, 왕조사극 임에도 정치는 없고 신파성만 과도하게 강조되는 역작용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가 실종되고 허구가 사실을 압도하는 주객전도 현상을 낳았다. 이처럼 장르문학으로서의 역사소설은 사료적 사실과 허구 사이의 길항이라는 항상적 갈등을 내장하고 있다. 월탄 박종화는 연산군을 다룬 '금삼의 피',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대춘부'(1937),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을 그린 '다정불심'(1940),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양요(洋擾)의 퇴치를 형상화한 '전야'(1940), 대원군의 집권·경술국치·삼일운동 등 민족의 수난과 저항을 그린 '민족'(1945), 중종시대 궁중의 암투를 배경으로 한 '여인천하' 등 일련의 작품으로 한국 역사소설의 대표작가가 됐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백조의 동인'이나 '신경향파'에서의 활동이 아니라 이런 역사소설들 때문이었다. 월탄의 출세작은 단연 '금삼의 피'인데, 폭군 연산군의 심리적 파탄 과정을 그렸다.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의 전모를 파악하고 난 이후 갑자사화라는 피의 복수극을 벌이는 이야기라든지 후궁들 간의 암투와 음모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식민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월탄의 역사소설은 김동인처럼 왕실의 부정적인 모습을 흥미위주로 그려냄으로써 일제의 식민지문화통치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그래도 극도의 억압적인 상황에서 민족의 역사와 민족정신을 환기하는 공적이 있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선다. 월탄은 중인(中人)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반가와 중인의 세계를 탁월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또 한국문화재 수호자 간송 전형필(1906~1962)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친구 빙허 현진건이 타계하자 그의 외동딸을 거두어 며느리로 삼는 등 각별한 우정을 보여주었으며 매우 훌륭한 인품을 가진 큰 작가였다. 그의 품안에서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도 함께 공존하고 행복한 조화를 이룰 수가 있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7-25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7]한국 통속소설의 전형 '찔레꽃'

한국의 통속멜로를 논함에 거쳐야 할 관문들이 있다. '추월색'(1912), '장한몽'(1913), '찔레꽃'(1937), '순애보'(1938),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1964), '별들의 고향'(1972), '겨울여자'(1975), '레테의 연가'(1983),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 등의 소설들이 대략 이 범주에 들어온다. 이 가운데서도 김말봉(1901~1961)의 '찔레꽃'(1937)은 뚜렷한 선악 이분법, 도덕적 지상명령, 삼각관계, 매력적 신여성의 헌신,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 등 통속멜로가 요구하는 장르의 관습과 클리셰를 완성한 연애소설의 전형이다. '찔레꽃'은 "보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피어,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향기를 보내주는" 평범하고 고결한 꽃―바로 여주인공 안정순의 알레고리다. '찔레꽃'은 안정순과 애인 이민수 그리고 조경애 · 조경구 · 윤영환 등 다양한 인물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오해의 중층적 삼각관계를 다룬다. 방학기의 동명 역사만화를 원작으로 한 TV드라마 '다모'(2003)처럼 갈등구도의 중층성과 참신성이 돋보인다. 예컨대 '다모'의 대중성은 황보윤-채윤 커플 사이의 신분적 갈등, 채윤-장성백 커플 사이의 인륜적 갈등(후일 이 둘은 오누이였음이 밝혀진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녹림(綠林)의 수괴 정성백과 사회질서를 지키려는 포도청 종사관 황보윤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만들어낸 성과다. '찔레꽃'에도 단선적 삼각관계가 아니라 정순-민수-경애, 경애-민수-영환, 민수-정순-조만호, 정순-조만호-조만호 처 등 여러 겹의 삼각관계가 다채롭게 얽혀 전개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질환(정신병)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은행의 두취(은행장)인 조만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정순과 몰락한 반가의 후예인 민수의 고난에 덧붙여 금력을 앞세운 윤영환과 조만호의 공세가 가세하면서 소설은 '장한몽'에서 발화한 '돈이냐 사랑이냐'하는 통속드라마의 관습을 반복한다. 정순과 민수의 결렬된 안타까운 사랑은 오해의 해소에도 끝내 복원되지 못하지만 경애와 민수를 위해 자신의 사랑을 양보하는 정순의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작품의 모럴을 확보하며 안정순과 조경구의 결합 가능성을 암시함으로써 통속소설 특유의 행복한 끝내기마저 완수해낸다. '찔레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보편화로 더 이상 '춘향전' 같은 전통서사가 불가능해졌음을 알려주는 지표이자 잠시나마 식민지라는 우울한 현실을 잊게 하는 환각성과 함께 상류 소비사회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동경을 자극하고 만족시켜준 한국의 신문소설이며 통속소설의 장르규범을 완성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획기성을 갖는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7-18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6]'無情'에 대하여

한국문학의 금자탑인가, 계몽을 가장한 연애소설인가.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춘원 이광수(1892~1950)의 '무정'(1917)은 변함없이 우뚝하다. 임화는 '조선신문학사론서설'(1935)에서 '무정'을 행동이냐 순응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표출된 토착 부르주아지의 옹색한 낭만적 이상주의요, "왜곡된 자유의 표현"이라 비판했다. 그럼에도 '무정'은 근대계몽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최찬식의 '추월색'(1912)과 조중환의 '장한몽'(1913) 등 신파소설 시대를 넘어 근대소설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무정'은 경성학교 영어교사이자 신문학을 공부한 이형식, 개화 선각자를 자처하는 김장로와 그의 딸 선형, 전통적 여인상을 대표하는 박영채, 지사형 선비의 품격을 지닌 박진사, 신문기자 선우선, 박영채의 멘토이자 후원자인 김병욱 등의 인물을 통해 구질서의 붕괴와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화두를 다룬다. 개화사상과 근대의식을 전파하겠다는 목적론적 글쓰기를 앞세웠으나 '무정'은 애정과 애증의 삼각관계가 서사의 중핵을 이루는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 '무정'은 이른바 '과잉의 양식(mode of excess)'과 도덕률의 작동이라는 통속소설의 문법에 의외로 충실하며, 이를 통해서 대중들의 감수성을 적절하게 자극하고 또 위무한다. 파란곡절 많은 영채의 삶을 통해 구현되는 감정의 과잉, 극적인 사건과 운명의 엇갈림 같은 '과잉의 양식'에 권선징악 · 자유연애 · 문명개화 · 근대의식 같은 도덕적 요소를 배치하고 작동시킴으로써 서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중적 설득력을 높이는 기제로 활용하는 기민함을 보여준다. '무정' 한 편으로 당시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광수는 단숨에 조선 문단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열한 살 때 콜레라로 양친을 잃고 이집 저집을 떠돌다 일진회(동학의 일파) 일본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육당 최남선 · 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조선의 삼대 천재, 곧 동경삼재(東京三才)로 이름을 날리던 약관의 대학생이 일약 조선을 대표하는 문사로 등극한 것이다. 한일병탄, 톨스토이의 죽음, 2 · 8독립선언서 집필과 독립운동의 좌절, 수양동우회의 좌절 등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견고한 역사적 현실 앞에서 야심만만한 식민지 지식청년 이광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학을 하는 일, 그리고 대중들의 환호를 받는 명사가 되는 길이었다. '무정'은 지사이자 문사가 되고 싶었던 대학생 이광수의 열망이 투영된 작품이면서 문학 속에 내재한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개의 충동을 모두 만족시킨 근대문학 혹은 대중문학이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7-11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5]최초의 베스트셀러 소설 '장한몽'

대중문학의 큰 특징은 '보고 또 본다'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 전개와 반전 그리고 인물과 상황만 바뀔 뿐 매번 그 내용에 그 이야기다. '장한몽'('매일신보', 1913. 5. 13~10. 1.)의 등장은 고소설 시대의 종언과 '보고 또 보는' 신파문학, 한국 근대 노벨의 출현을 알리는 개막선언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신'만큼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의 대동강가 부벽루 신' 그리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로 표상되는 그 이야기, 그 연극, 그 영화가 바로 '장한몽'이다.무려 한 세기 이상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한몽'의 원본은 '요미우리신문'에 절찬리 연재됐던 오자키 코요(1867~1903)의 '금색야차(金色夜叉, 1897)'다. '곤지키야샤'? 우리말로 풀이하면 돈이라는 저승사자(두억시니)란 뜻이다. 애정의 삼각관계를 다룬 순정소설이되, 전례 없이 남녀의 연애사에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개입시킨 근대적 작품이다. 그런데 '금색야차' 또한 오자키 코요의 순수 창작이 아니라 영국의 여류소설가 샬롯 메리 브레임(1836~1884)의 '여자보다 더 약한(Weaker Than a Woman)'의 번안소설이었으니 조중환(1884~1947)의 '장한몽'은 번안의 번안인 셈이다. 조실부모한 이수일은 아버지 친구 심택에 의해 양육되며, 그의 딸 심순애와 약혼한다. 심순애는 김소사의 집에서 우연히 동경 유학생 김중배를 만나게 되고 그의 물질공세에 그만 이수일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김중배와 결혼한다. 상심한 이수일은 고리대금업자가 되고, 죄책감과 불행한 결혼생활로 심순애는 자살을 기도한다. 대동강에 투신자살을 하려던 그녀는 이수일의 친구 백낙관의 도움으로 구출되고, 그의 중재로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한다.스토리는 잘 알려진 대로 또 누구나 아는 바 그대로다. 그러나 '장한몽'은 전래의 한국 고소설들과 달리 '사랑이냐 돈이냐'하는 통속적인 물음에 여성의 선택을 도덕적 심문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으며, 문체의 근대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노벨로서의 성격이 분명하다. '장한몽'은 소설사적 획기성뿐 아니라 한국근대문학 최초의 베스트셀러로서 그 문화적 파급력이 상당했다. 고복수 · 황금심 콤비의 대중가요 '장한몽가'를 비롯해서 이기세 · 신상옥 등 여러 감독들에 의해 일곱 차례나 영화화됐고, 만담과 연극(신파극)은 물론 유랑극단의 단골메뉴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이 장한몽'들'은 여전히 한국인의 감수성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문학, 통속애정소설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대중소설은 근대문학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7-04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4]고우영의 '삼국지'

고우영(1938~2005)의 '삼국지'(1978)를 보노라면 뜬금없이 켄 키시의 소설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1962)가 떠오른다. 소설은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은 영화(1975)로 인해 더 알려졌다. 인간을 길들이려는 정신병원의 음모와 억압에 맞서던 나이롱환자 맥 머피가 환우들 위에서 군림하던 수간호사 랫 치드의 상의를 잡아당겨 적나라하게 젖가슴이 드러나도록 한 대목이 유명하다. 권위에 대한 도전과 조롱, 그리고 꺾이지 않는 자유의지를 표현했다. '고우영 삼국지'는 '삼국지'의 권위를 해체하고 대중적 고전을 더 대중화한 만화다. 1978년 1월 1일부터 1980년 7월 31일까지 790회에 걸쳐 '일간스포츠'에 연재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신군부의 등장 같은 역사적 격랑으로 인한 불안과 분노 등 정치적 피로에 시달리던 대중들에게 큰 위안과 웃음을 안겨줬다.'삼국지'는 시간에 대한 내구성이 매우 강한 영웅서사요, 전쟁서사다. 고우영은 이 전쟁 · 영웅서사를 해학과 풍자 서사로 진화(?)시켰다. 한 텍스트를 다른 장르의 텍스트로 바꾸는 것―특히 문자텍스트를 이미지텍스트로 전환하는 작업을 각색(adaptation)이라 하는데, '고우영 삼국지'는 '모종강 삼국지'에 대한 비판적 각색에 해당한다. 비판적 각색은 원작의 틀을 유지하되, 작품을 재해석하고 다소의 허구적 창작을 가미하는 것을 말한다. 원작 그대로의 각색은 말 그대로 원작의 명성에 의존한 채 원작의 재현에 치중하는 것을, 자유각색은 원작을 아예 새로운 텍스트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가리킨다.고우영은 질펀한 입담과 코믹한 화풍으로 유비의 인(仁), 관우의 의(義), 공명의 충(忠)처럼 추상적 관념성과 유교계몽주의로 가득한 '삼국지'를 해학이 넘치는 라블레적 서사로 만들어냈다. 유비를 인의(仁義)의 뒤에 숨어 권력의 의지를 불태우는 내숭 떠는 쪼다로, 제갈량을 유비에게 황제 자리를 주는 대신 자신은 역사적 명성을 얻으려는 야심가로 묘사하고 있으며, 여기에 관우-제갈량의 라이벌 의식과 심리적 갈등을 새롭게 가미했다. 작가 자신의 캐리커처를 유비의 모습으로 삼은 것이라든지, 스토리 중간에 불쑥 끼어들어 서사에 참견하고 토를 다는 주석적 시점(註釋的 視點)이라든지, 포복절도케 하는 거친 입담과 다양한 성적 모티브의 활용은 '고우영 삼국지'를 가장 개성 넘치는 텍스트로 만들어낸 비결이다. '고우영 삼국지'는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전략삼국지'(1974)와 차이즈종의 '삼국지'(1991) 등과 함께 한중(대만)일 각국을 대표하는 삼국지 만화다. 한중일 삼국지 만화를 비교해 가며 읽는 것도 재미있고, 이 만화삼국지들이 보여줄 쟁패의 결과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6-27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3]정전과 장르문학

독서의 가장 큰 장벽은 '읽는다'는 것 자체의 괴로움과 읽어야 하는데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는 선택의 난감함 그리고 지침의 부재이다. 이럴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손쉬운 해결책이 바로 양서목록이나 세계명작 같은 앤솔로지를 고르거나 전문가의 서평 그리고 미디어나 세간의 평판에 의지하는 일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선택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이것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요구하는 독서의 욕망을 채워주는 맞춤형 지침이 되기 어렵고, 이 같은 양서 목록들이 과연 정당한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양서들의 모음을 가리켜 정전(canon)이라 칭한다. 정전을 뜻하는 영어 '캐논'은 그리스어 카논―χανων, 영어식으로 표기하면 kanon―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로는 '칸나(canna)'라고도 한다. 그리스어 캐논의 원뜻은 '갈대', '긴 나무막대기'였다. 지금처럼 도량형(度量衡)이 통일되지 않았던 시대에 물건의 길이를 재는데 갈대를 사용했고, 여기에서 '자(ruler)'와 '척도'라는 의미가 파생된다. 예나 지금이나 '자'가 갖는 상징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캐논이란 말은 '갈대'나 '척도'의 의미에서 벗어나 삶의 인생의 지침이나 기준을 '규범' 나아가 성경 같은 종교 경전의 정경(正經)으로, 르네상스 이후에는 성경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모범적인 책과 아름다운 문학작품(belle lettre)을 지칭하는 단어로 외연의 확장을 거듭한다. 그리고 마침내 정전은 근대국민국가의 시대에 이르러 국가의 이념과 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언어사용의 모범이 되는 가치 있는 작품,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고등교육기관에서 연구대상으로 삼을만한 작품들을 일컫는 문학용어로 등극한다. 20세기말 미국문학 담론은 정전 논쟁으로 뜨거웠다. 논점은 흑인과 여성과 소수자들을 배제한 백인남성 중심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즉 비문학적 기준이 개입된 정전 체계가 과연 정당한가하는 것이었다. 정전은 엄정한 학술적 검증을 거쳐 구축된 것이 아니고 사회문화적 · 정치경제적 요인들이 작용하여 형성된 임의의 관습 체계다. 우리의 경우는 정전의 억압도 문제지만 정전을 형성하는 것이 더 문제였으며, 문학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여기에 대한 충분한 성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장르문학을 배제하는 정전의 배타성과 엘리트주의는 지양, 극복되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장르문학 진영도 정전의 한 자리를 꿰찰 수 있는 위대한 성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정전을 비판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비판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르문학을 우리문학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성원하는 성숙한 문화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 많이 읽어야 한다. 무시독서(無時讀書) 무처독서(無處讀書) 문화가 절실하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6-20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2]추리소설의 숨은 걸작

'아버지를 죽여라.'인류의 문명과 법과 예술은 부친살해(patricide)에서 시작됐다. 이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1913)의 대전제요, 라캉의 상징계 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또 20세기 독일 표현주의운동의 모토였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질서와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것은 언제나 후대 문명과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다. 해리 케멜먼(1908~1996)의 '9마일은 너무 멀다'(1947)는 앞선 추리소설의 아버지들을 죽임으로써 다시 고전파 추리소설을 되살려낸 단편 추리소설의 걸작이다. 작가 본인이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대학교수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주인공 닉 웰트가 영문과 교수로 설정돼 있다. 또 '사다리 위의 카메라맨'(1967)에서 보듯 지식인(교수) 사회의 모습을 잘 재현해낼 수 있었다. '랍비 시리즈'(1964~1996)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단숨에 그를 유망작가의 반열에 올려준 '9마일은 멀다'는 착상에서 작품화까지 무려 14년이 걸렸다. '9마일은 멀다'는 화자인 검사 '나'와 주인공 닉 웰트의 대화 형식으로 이어지는 추론의 연쇄가 압권이다. 섣부른 추론을 전개하다 난처한 상황을 겪은 내게 닉 웰트는 10마디 안팎의 문장을 제시하면 여기에서 추론을 끌어내보겠노라고 제안한다. 화자는 무심코 "9마일은 멀다. 그리고 빗속이라면 더욱 힘들다"는 문장을 제시한다. 그러자 웰트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넌더리를 내고 있다, 비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9마일은 먼 거리가 아니기에 말하는 사람이 운동선수는 아닐 것이다, 그가 걸었던 시간대는 자정에서 오전 5시 사이일 것이다,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전 5시 30분까지 중요한 약속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급수 중인 급행열차 워싱턴 플레이어를 타야 했다, 이어 오늘 발견된 타살된 시체의 사망추정시간으로 미루어 보니 허들리역에서 멈춘 것과 일치한다, 당신의 말은 무심결에 누군가에 들은 말일 것이다, 9마일을 걸었으니 배가 고팠을 것이다, 우리가 방금 전에 나온 카페에 들렀다 마주친 2인조 남성이 범인일 것이라는 엉뚱하지만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연한 대화를 통해서 합리적 추론을 끌어내고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을 해결하게 되는 기막힌 추론과 용의주도한 논리적 구성으로 인해 '9마일은 멀다'는 단숨에 명작의 반열에 등극한다. 주어진 단 두 개의 문장에서 다양한 논리적 가능성을 끌어내는 날카로운 합리성과 군더더기 없이 전개되는 경제적 구성 그리고 추론을 뒷받침하는 서사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깔끔한 솜씨는 케멜먼 추리소설의 특장이다. '9마일은 멀다'는 논리의 아름다움과 재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나아가 잠자는 뇌세포들을 깨우는 역대급 추리소설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6-13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1]'장자'와 보르헤스, '아바타'와 '인셉션'

보르헤스 문학은 언제나 난해함과 경이와 독창성으로 번득인다. '원형의 폐허들(Las ruinas circulares, 1944)'은 그러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문학의 특장이 살아있는 단편소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꿈이며 물거품 같다는 '금강경' 일구와 '장자' '제물편'에 등장하는 호접지몽의 고사를 소설로 옮겨놓았다. 작품의 주인공은 마법사다. 그는 오래 전 불에 타 폐허로 변한 신전에서 인간에 대한 꿈을 꾸고 싶어 한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마침내 그는 꿈속에서 완벽하게 한 소년을 만들어내고 그 소년에 대한 꿈을 꾸어낸다. 그런데 불길 속에서도 죽지 않는 자신을 지켜보면서 자신 역시 다른 이에 의해 꿈꾸어진 꿈이요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은 나비가 되어 노니는 꿈을 꾸었는데 종국에는 자신이 나비인지 나비가 자신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고사 그대로다. 현실과 허구가 교차하고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는 몽환성과 애매모호함, 또 꿈속의 꿈을 설정하는 이 치밀한 유희는 '원형의 폐허들'의 가장 빛나는 부분일 것이다. 우리네 인생과 존재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라 설파하는 '금강경'과 '장자'의 가르침, 그리고 이를 문학적으로 차용하여 자아의 비실재성을 극적으로 드러낸 보르헤스 문학은 장르문학과 블록버스터 영화로 이어진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2010)은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이 만들어낸 꿈이다. '인셉션'의 주요 이미지들과 영상언어는 보르헤스에 더해 안과 밖, 위와 아래, 시작과 끝 같은 구분이 해체되고 원근법마저 와해돼버린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의 '상대성'(1953), '손을 그리는 손'(1948) 같은 초현실적 그림들을 연상케 한다. '아바타'는 자원을 약탈하려는 지구인들과 이에 맞선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 간의 대립과 전쟁을 그린 영화다.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딛고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영웅으로 거듭난 제이크는 나비족의 편에 서서 전설의 신수(神獸) 토루크 막토(그레이트 리오놉테릭스)를 타고 전장을 누비며 판도라 행성을 지켜낸다. 장자와 보르헤스와 SF영화로 이어지는 상호텍스트성의 흥미로운 연쇄도 그러하고, 이들 작품을 통해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영인지 모호해진 '매트릭스'와 시뮬라시옹 상황 속의 현대사회와 우리의 삶을 문득 돌아보게 된다. 인생이란 꿈속에서 꿈을 꾸는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그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6-06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0]기술과 미래사회에 대한 질문

인간과 기술,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은 가능한가? 윌리엄 깁슨(1948~)의 '뉴로맨서'(1984)는 인공지능과 트랜스휴먼이 보편화한 미래사회의 윤리와 문제점에 대해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사이버펑크 미래학이다. 알파고-이세돌의 세기의 바둑대결 이후, 인공지능(AI)은 이제 문학적 상상력이 아닌 현실의 당면 과제로 부상했다. '뉴로맨서'는 매우 '핫'한 화제작이다. 휴고상 · 네뷸러상 · 필립 K. 딕상 등을 모두 석권했으며, 근미래에 닥칠 재앙적 미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당시까지 생소했던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신조어를 널리 퍼뜨리는 기점이 됐으며, '공각기동대' · '코드명 J' · '매트릭스' 등 SF만화 및 영화의 원본이 됐다. 사이버스페이스란 인간의 두뇌와 신체의 각 부분이 컴퓨터 통신망과 연결됨으로써 형성되는 가상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뉴로맨서'는 신경망(neuro)이란 단어와 조정자 · 마법과 연관성을 지닌 의미의 접미사(-mancer)를 결합한 신조어로 신경체계를 조작하여 정보를 캐내는 정보사냥꾼, 컴퓨터 카우보이, 해커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인공 케이스는 정보네트워크에서 정보를 해킹하는 컴퓨터 카우보이다. 고용주의 데이터를 훔치다가 신경망이 손상된 채 일본 치바의 어두운 뒷골목을 배회한다. 약물에 취해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아미티지라는 정체불명의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사이보그인 몰리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 의뢰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윈터뮤트라는 인공지능. 윈터뮤트는 새로운 정신적 인격체가 되기 위해 다른 인공지능인 뉴로맨서와의 통합을 꿈꾸며 이를 위해 케이스를 고용한 것이다. 케이스와 몰리가 활약하는 사이버스페이스는 다국적 기업이 구축한 정보네트워크로 1983년 윌리엄 깁슨의 초기단편들을 모은 작품집 '불타는 크롬'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을 맡았던 '코드명 J'의 원작인 '조니 니모닉'도 이 앤솔로지에 수록돼 있다.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라는 양방향의 이야기를 등장시킨 '뉴로맨서'는 저급한 펑크문학이자 뉴웨이브의 실험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라는 등의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으나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에 동반한 윤리적 문제와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재앙적 미래세계를 다룬 문제작임에는 틀림없다. 덧붙여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고도화한 첨단정보네트워크시대를 그린 이 작품이 지독한 '컴맹'인 윌리엄 깁슨이 타자기를 사용하여 썼다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5-30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9]필립 K. 딕의 퓨처 리포트

인간은 누구이며, 누가 인간인가?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같은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은 데카르트 이후 흔들림 없이 굳건했던 인간에 대한 정의마저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다. 생각하는 존재(cogito)로서의 인간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제1명제의 지위를 내주어야 하며,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은 생명공학의 발전과 유전자합성인간(android)의 등장으로 인간의 인간다움의 지표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리들리 스콧(1937~)의 영화 '블래이드 러너'(1982)의 원작이기도 한 필립 K. 딕(1928~1982)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1968)는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을 구별 짓고, 진짜 인간이 가짜인간들을 제거하는 끔찍한 얘기다. 지옥의 묵시록이 전경화한 이곳은 세계대전 이후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멸종의 위기에 내몰린 샌프란시스코이다. 닉 데커드는 유전자합성인간인 안드로이드 전문사냥꾼으로 전기 양(electric sheep)아닌 진짜 자연산 양을 기르고 싶어 한다. 아침마다 그는 기분전환기 펜피드의 자동 알람을 이용하여 기상하며, 하루의 일정에 따라 기분전환기의 채널을 조정한다. 닉이 안드로이드와 진짜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은 보이그트-감프 테스트 곧 감정이입의 반응 속도를 통한 시험이다. 기억은 얼마든지 주입될 수 있기에 과거의 추억이나 인간의 유전적 특질이나 생각하는 능력 따위는 이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정의로서 효용성이 없다. 반면 지능이 너무 떨어져 오염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한 이지도르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는 안드로이드들을 도와주는 인간다운 인간이다. 모자라는 인간 이지도르는 권력화한 기업집단 로젠 연합이 공장에서 만든 유전자 합성인간도 사랑과 외로움과 공포를 느끼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휴머니티와 공존의 윤리를 보여준다. 필립 K. 딕은 평생 공항장애와 모진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암울한 묵시록적 전망과 획기적 상상력으로 세계 SF팬들을 사로잡는 다수의 걸작을 남겼다. 스토리의 초점이 흔들리고 어수선해 보이지만 이는 2019년 이후 지구라는 미친 행성의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대단히 효과적이다. 사이버펑크 장르 특유의 스토리와 분위기를 통해 그는 고차원 첨단과학과 저차원의 삶이라는 미래사회의 참상과 갈수록 모호해져가는 시뮬라시옹의 상황―즉 진짜와 가짜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생명마저 상품화하는 섬뜩한 자본의 논리, 정신문명이 뒷받침되지 않는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의 폭주에 대한 경고, 나아가 인간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포스트휴머니즘 시대 인간의 정체성 문제 등을 담아낸 충격적 퓨처 리포트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5-23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8]SF 페미니즘 '어둠의 왼손'

어슐러 르귄(1929~)의 '어둠의 왼손'(1969)은 SF문학사, 나아가 세계문학사상 가장 이채로운 존재다.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도 그러하거니와, 작품 속에 녹여낸 독특한 사회학적 사고실험은 '휴고상'과 '네뷸러상' 동반 수상이라는 양수겸장의 영광을 누릴만하다. '어둠의 왼손'은 지구인 겐리 아이가 게센 행성을 은하계의 정치연합체인 에큐멘에 가입시키기 위한 행성 외교사절로 방문하면서 겪게 되는 고초와 세계관의 변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의 국가 카하이드를 거쳐 카하이드와 경쟁관계에 있는 오거레인을 방문했다 스파이 혐의를 쓰고 풀레펜 농장으로 강제 수용된다. 절망의 순간, 카하이드의 재상이었다가 정치적 망명자 신세가 된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농장을 탈출하여 긴 빙하지대를 거쳐 카하이드로 돌아온다. 게센은 지구와 달리 양성인(androgyny)이 사는 행성이다. 지구인(terran)들처럼 남녀의 구별이 뚜렷한 것이 아니라 양성성을 갖는 인간들의 세계인 것이다. 게센인들은 평소에는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지 않는 소머기(期)라는 잠복기 속에 지내다가 발정기라 할 수 있는 케머기를 맞이하게 된다. 케머기에 이르면, 호르몬의 분비에 따라 누구든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하게 되며 이때는 상대자에게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된다. '이성사회(bisexual society)'의 관습 속에서 살던 겐리 아이는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오거레인을 탈출하여 빙하지대를 통과하던 중 케머 성태에 접어든 에스트라벤을 보고 처음에는 강한 혐오감을 느끼나 점차 게센인들의 양성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이 양성사회 행성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슐러 르귄은 성적 차이가 성적 차별로 이어지는 '이성사회'의 억압과 불합리를 질타한다. 표면상 작품은 겐리 아이라는 지구인의 관점에서 외계인인 게센인들의 삶과 사회를 재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게센이라는 양성인 사회의 관점에서 지구라는 이성사회의 문제점이 그대로 재현되고 타자화된다. 당연하게도 게센 행성에서는 남성대명사(he)나 여성대명사(she) 같은 대명사는 존재할 수 없다. 어제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아가씨가 내일의 오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센이라는 양성사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르귄은 인간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널리 통용되어 왔던 사회적 성-정체성인 젠더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를 문제화한다. 작품 제목 '어둠의 왼손'은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 연인처럼/ 함께 누워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이라는 '트로메 노래'에서 나왔다. 남녀와 좌우는 대립이 아닌 상보적 관계임을 일깨워주는 SF페미니즘, SF휴머니즘이 바로 '어둠의 왼손'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5-16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7]진화 의미와 미래에 대한 성찰 '유년기의 끝'

진화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진보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또 사회적 · 국제적 갈등을 모두 일소하고 지구를 떠나 우주로 이주하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같은 문명론의 과제와 우주적 비전을 함께 다룬 SF가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 로버트 하인라인(1907~1988) 등과 함께 현대 영미SF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아서 C. 클라크(1917~2008)의 '유년기의 끝'(1953)은 외계문명과의 접촉 및 진화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문제작이다. '유년기의 끝'은 인류(사회)의 유년기의 종언과 신인류, 신문명 출현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같은 인류의 진화와 사회적 진보는 인간에 의해 주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버로드'라고 하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문명)에 의해 달성된다. 이 놀라운 진화를 주도하는 존재는 '캐렐런'이라는 오버로드의 대표자이다. 오버로드 캐렐런의 의지는 유엔사무총장인 스톰 그랜을 통해 전달되며, 단기간에 지구와 인류(사회)는 놀라운 성취를 이룩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됐고, 모든 공공 서비스를 무료로 공급받을 수 있는 유토피아 사회가 열린다. 그러나 인류가 그토록 갈망해마지 않았던 평화와 과학적 발전의 대가는 혹독했다. 모든 것을 오버로드에 의지하다보니 독자적인 진보의 능력과 인간적 정체성마저 상실하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오버로드들의 행성에 갔다가 80년 만에 되돌아온 잰 로드릭스는 진화를 거듭한 인류가 더 이상 인류라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진화하게 된 상황을 목격하는 마지막 인간이 되며, 제프와 제니퍼 앤은 이전의 인류와 다른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성을 지닌 최초의 인간이 된다. 이와 같이 인류사회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문제들이 앞선 외계문명의 힘으로 완전히 해결되자 돌연 인류사회는 목표와 꿈을 상실하고 정작 자신의 정체성마저 위기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 진화와 발전이 아니라 자기 삶과 운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즉 대립과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근거를 형성해가는 헤겔적 주체성이다. '유년기의 끝'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정신적 · 육체적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지적 문화운동인 트랜스휴머니즘(또는 포스트휴머니즘)적 문제의식에, 진화 · 사회 · 인간의 정체성 · 지구문명의 미래 등의 굵직한 주제를 드라마화한 작품이다. 나아가 인류사회와 지구문명의 미래와 인간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고심을 담은 사회적 담론이기도 하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5-09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6]근대 여행서사의 탄생 '80일간의 세계일주'

여행은 현실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우리가 꿀 수 있는 최고의 로망이다. 산문적 일상과 나를 둘러싼 책임과 의무들로부터 벗어나 단숨에 마술적 자유와 즐거운 휴식을 주기 때문이다. 기차 같은 근대적 교통수단의 등장은 인류에게 여행할 권리를 크게 신장시켜주었으며, 어느새 그것은 자아의 성장과 낭만과 휴식과 모험의 동의어로서 근대인들의 꿈이 됐다. 특히 식민지 세계 경영이 보편화하고 거대한 근대적 교통·물류 체계가 완비된 제국주의 시대 우리 안의 자유와 탈주의 갈망은 더욱 촉진됐고, 이를 소설화한 여행의 서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계SF의 선편을 쥔 쥘 베른(1828~1905)의 '80일간의 세계일주'(1873)는 신비와 미지와 자연적 속박에 갇혀 있던 지구 전체가 이제 여행과 모험을 위한 공간으로 최적화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천로역정' '신밧드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등처럼 종교적 열정으로 충만하거나 초자연적 신비가 작동하는 前근대서사와 결별하고, 여행도 철저하게 계산과 시간 예측 같은 합리주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크로노미터처럼 정확히 일정한 시간에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하고 '면도를 위해 화씨 84도의 물'만을 사용하는 기계적 인간, 곧 19세기 근대의 메타포이다. 포그는 영국의 상류계급 남성들의 사교모임인 '개혁클럽'에서 80일 만에 세계일주가 가능한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 거액이 걸린 내기에 휘말려든다. 그는 하인 파스파르투(만능열쇠, '무엇이든 다하는'의 뜻을 지닌 불어)와 함께 기차·증기선·기구·코끼리 등 현존하는 모든 이동수단을 총동원하며, 도중에 위기에 빠진 인도 왕족 출신의 과부 아우다를 구해주고 결혼을 언약한다.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런던-수에즈-봄베이-캘커타-홍콩-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뉴욕-런던으로 이어지는 포그 일행의 여정이다. 주어진 기간 내에 여행을 완수해야 하는 포그에게 이 공간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야할 경로로 묘사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80일이라는 기간, 오직 시간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포그의 이동경로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여행지는 영국의 식민지이거나 그 영향 아래 있는 국가들이었던 것이다. 곧 포그의 여정은 자본의 식민지 순례 여행의 성격을 가진다. 비록 작품에서 인물과 국적이 영국으로 설정돼 있으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철저하게 프랑스적이다. 이 모험소설이 프랑스가 식민지 세계경영에 주력하면서 파리를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올려놓은 제2공화국(1848~1852)의 정치상황과 이념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평론가 피에르 마슈레(1938~)의 지적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5-02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5]하루키의 '1Q84'와 일본소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문학의 본질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1905~1980)의 명제는 흔들림 없이 굳건하였다. 근대문학의 사망을 선언한 가라타니 고진(1941~)이나 새로운 감각과 스토리로 두터운 팬덤을 구축한 무라카미 하루키(1949~) 열풍은 종래의 문학의 핵심이 미적 가치보다는 이념에 있으며, 사회변혁의 완수라는 역사적 텔로스에 두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루키의 '1Q84'는 새로운 문학의 세기가 개막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소설의 핵심은 시공간이 뒤틀려버린 1Q84년 헬스 트레이너이자 전문 킬러인 아오마메 마사미와 수학강사이자 대필작가인 가나와 덴고라는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1Q84는 1984년이 아닌 또 다른 1984년을 가리키는 조어로 여기서 'Q'는 '9'의 대체어이자 'qestion'의 약어이다. 상처받은 여성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노부인(오가타 시즈에)의 살인청부를 받고 여성을 학대한 남성을 은밀하게 처리하는 아오마메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통해 불쑥 시공이 뒤틀린 1Q84의 세계로 진입한다. 초등학교 시절 아오마메와 짧지만 강렬했던 인연을 간직한 채 수학강사로 살아가던 덴고는 후카에리의 대필작가로 '공기의 번데기'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체불명의 유사종교 집단인 선구(先驅)의 추적을 받으며 현재의 세계와 병행하여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패럴렐 월드(parallel world) 속으로 말려든다. 소설은 아오마메의 이야기와 덴고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전공투 학생운동 실패 후 고도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전망을 잃고 애니메이션과 대중소설에 빠져 지내는 후일담 세대의 삶과 내면을 반영한다. 가령 덴고/후카에리의 '공기의 번데기'를 기획한 편집자 고마쓰는 도쿄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60년대 안보투쟁을 전담하던 학생조직의 간부였고, 유사종교단체 선구는 전공투 실패 이후 자급자족형 농업공동체인 코뮌에서 발전한 비밀결사조직이며,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는 리틀 피플은 "일하고 일하다 의미도 없이 죽"어가는 일본인의 상징이다. 아울러 끔찍한 성실성과 집단적 통일성으로 무장한 채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리들 피플이야말로 개인을 발명하는데 실패한 일본의 답답한 모더니티의 은유일 것이다. 하루키 소설의 문제성은 용의주도한 소설적 구성과 강렬한 흡인력을 지닌 스토리텔링 그리고 언어의 감촉이 다른 새로운 문체와 신화적 상상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외에는 더 이상 이념도 종교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그와 같은 주장이 갖는 설득력이다. 단 한 번도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일본적 현상이 바로 하루키 팬덤의 원인이며, '1Q84'의 세계다./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4-25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4]트릭의 비밀은 '사회모순'

임화(1908~1953)는 한국근대문학사가 낳은 최고의 평론가다. 임화가 빠진 한국근대문학비평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평론가일 뿐 아니라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무려 842쪽에 이르는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를 비롯해서 '현해탄'(1938) · '찬가'(1947) · '회상시집'(1947) 등의 시집을 펴낸 전위적 서정 시인이었으며, '상록수'(1935)의 심훈(1901~1936)과 함께 당대 최고의 '얼짱' 문인으로 유명했다. 인물이 너무 출중하여 '혼가' · '유랑'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주연을 맡기도 했고, 독일 표현주의 영화로 유명한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 대한 영화평론도 썼다. 또 1935~1940년에 걸쳐 '신문학사'를 집필한 문학사가였고, 카프(KAPF)의 서기장을 역임했으며, 해방공간에서는 '조선문학가동맹' 출범을 주도했다. 1947년 남노당계 인사들과 함께 월북했으나 1953년 8월 6일 미국과 내통한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남북한 문단에서 배척받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그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조선의 신문학은 서양문학이라는 이른바 그의 이식문학론은 아직도 한국문학연구의 쟁점으로 남아있다. 임화의 이식문학론을 한국근대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속류사회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가 투영된 방법론적 사유로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화려한 문학 활동과 비극적인 그의 삶은 일본 추리소설의 소재가 된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사회적 차별을 딛고 일본 최고의 사회파 추리소설가가 된 마츠모토 세이쵸(1909~1992)의 '북의 시인'(1974)이 바로 그것이다. 마츠모토 세이쵸는 추리소설가면서도 '어떤 고쿠라 일기전'(1951)으로 제28회 아쿠다가와상(賞)을 수상했다. 그는 트릭과 반전 같은 상투화한 추리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사회 현상의 이면을 탐색하면서 범죄의 동기를 찾아내는 '와이더니트(whydunit)'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북의 시인'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87년으로 '북의 시인 임화'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작품은 1953년 8월 3일 북한 최고재판소의 특별군사법정의 판결문에 의거, 임화가 미군정 스파이였다는 가설을 다루고 있다. 미군정 방첩대(CIC)가 폐결핵으로 고생하는 임화에게 신약(페니실린)을 미끼로 접근하여 남노당과 조선공산당 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어낸다는 내용이다. '북의 시인 임화'(1987)는 광주의 벽돌공장 노동자로 숨어 지내던 박헌영, 고향에서 헌책을 하던 한설야의 이야기가 언급되는 등 디테일도 풍부한 작품이다. 또 추리소설 같은 장르문학조차 한국문학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정론성과 근대성의 문제에서 비켜갈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4-18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3]탐정소설과 가추법

탐정소설의 묘미는 추리에 있다. 실타래처럼 얽힌 난해한 사건과 견고한 트릭의 미세한 틈새를 파고드는 탐정의 추리야말로 탐정소설의 압권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복잡한 스토리 속에서 어떻게 헤매지 않고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며, 탐정들은 어떤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탐정소설을 쓰는 방법은 거꾸로 쓰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해결 방법과 트릭 등을 고안한 다음, 작품을 순서대로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탐정들은 어떤 방법을 쓰는가. 바로 가정적 추론(hypothetical inference), 이른바 가추법(abduction)이다. 가추법은 무엇인가. 추론의 과정을 삼단논법(syllogism)으로 압축하여 설명하는 형식논리학에 따르면, 그 절차는 법칙 · 사례 · 결과의 조합에 따라 연역법 · 귀납법 · 가추법으로 나뉜다. 연역법은 법칙(대전제)과 사례(소전제)를 통해 결과(결론)를, 귀납법은 사례(소전제)와 결과(결론)를 토대로 법칙(대전제)을 찾아내는 반면, 가추법은 법칙(대전제)과 결과(결론)를 이용하여 사례(소전제)를 만들어낸다. 사례는 얼마든지 가정하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기호학 등 극소수의 분야를 빼고 치밀한 논증을 요구하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탐정소설의 주인공들 가운데서 가추법을 가장 잘 활용하는 인물은 단연 셜록 홈즈다. 그는 고도의 추론과 가정을 통해 매번 자신의 조수이자 친구인 왓슨과 의뢰인들을 놀라게 한다. 그에 비해 조르주 시므농(1903~1989)의 주인공 메그레 경감은 가정이 아닌 인물들의 심리변화를 꿰뚫는 관찰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현대적 탐정이다. 한국 추리소설에서 가추법을 활용한 사례로 김내성의 '타원형의 거울'(1935)을 들 수 있다. 소설가 모현철 부부와 두 명의 하녀 그리고 젊은 신진 시인 유시영이 하숙하고 있는 밀폐된 2층집에서 소설가 모현철의 아내(김나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범인은 누구인가. 피해자가 타살된 것이 분명하기에 범인은 둘 중 하나다. 외부의 침입자이거나 내부인물 4명중 1명이다. 주인공 유시영은 가능성 없는 전제(가정)들을 하나씩 소거하여 범인이 남편 모현철이며, 아울러 이를 현상응모 문제로 출제한 잡지의 편집자 백상몽이 자살로 위장된 모현철임을 밝혀낸다. 구체적인 사례(명제)들을 모아 일반법칙으로 나가는 귀납법과 큰 법칙에서 구체적인 명제(판단)로 이행해나가는 연역법이 주어진 정보와 명제를 활용하는 추론의 방법이라면, 가추법은 현상과 법칙을 토대로 창의적 가설을 설정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는 사유방법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4-11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2]베스트셀러와 장르문학

베스트셀러(bestseller)의 사전적 정의는 '가장 많이 팔린 책(물건)'이다. 그런데 사람이나 직업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어미 '-er' 또는 '-or'을 붙여놓고 '가장 많이 파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라함은 어인 일인가. 그저 영어식 관행이려니 하고 무심코 지나쳐왔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베스트셀러는 1897년 미국의 월간 문예비평지 '북맨(bookman)'이 잘 팔리는 책을 조사하고 목록화하면서 사용됐던 말이다. '베스트 셀링 북스(best selling books)'라는 긴 표현 대신 이를 축약한 베스트셀러란 편의상의 용어가 보편화하면서 1920년 무렵부터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공용어가 됐다. 우리는 1945년 을유해방 이후부터 이 개념이 도입됐다. 현재 베스트셀러는 출판동향 파악과 도서 선택에 도움을 주는 문화정보라기보다는 대중의 읽기 욕망과 자본의 부가가치 창출 열망을 자극하고 재생산하는 상품적 기표로 작동한다. 대중의 욕망에 성공적으로 호소한 장르문학은 심심치 않게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얻는다. 이 때문에 장르문학은 심오한 성찰과 언어의 예술성보다 오락과 위안에 우위를 두고 현실의 원칙보다 쾌락의 원칙을 따르며 타락한 현실에 저항하기보다는 타락한 대응으로 일관하는 쉬운 문학, 상업적 성공이란 물신을 좇는 문학이라는 연역적 전제와 끈질긴 오해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예측 가능한 스토리(구조)와 인간의 욕망을 투사하는 특유의 디오니소스적 언술 행위는 장르문학의 특장이자 명백한 한계일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정비석(1911~1991)의 '자유부인'(1954)이 공전의 빅히트를 치자 이를 두고 "문화파괴자로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적군"이라 신랄하게 비판해마지 않았던 당시 황산덕(1917~1989) 서울대 법대 교수의 발언은 장르문학(대중문학)에 대한 문화엘리트들의 일반적 이해를 대변한다. 문학성과 대중성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상생하고 만나야할 동반자요, 조력자다. 당연히 베스트셀러는 상업적 · 대중적 성공의 결과이지 장르문학과 반드시 등가관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 강렬한 카타르시스, 권선징악, 억압과 금기에 대한 도전, 새로운 세계와 모험에 대한 꿈으로서의 대중성은 미학적 탐색과 개선의 문제이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베스트셀러와 대중적 성공을 거둔 장르문학은 시대의 거울로서 동시대의 사회적 관심사와 흐름을 읽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시장의 논리가 만들어낸 거짓 욕망이기도 하다. 이 역설과 양가성을 잘 이해해야 여기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주도적 독서가 가능해진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2017-04-04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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