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41]'삼국지'의 이모저모

'삼국지연의'는 무엇이며, 어떤 작품인가. 후한 영제 원년(184)부터 진 무제 원년(280)까지 97년간의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다룬 방대한 대하소설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가정 임오년(1522)에 간행된 나관중의 '삼국지'(가정본)이다. 현재 우리가 '삼국지'의 원본으로 알고 있는 120회 장회소설 '삼국지통속연의'는 순치 원년(1644)에 출판된 것으로 청대 출판업자인 모종강이 김성탄의 비평문을 첨부하고 성탄외서(聖嘆外書)라 이름붙인 판본이다.한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판본은 명종 치세인 1552∼1560년 사이에 간행된 병자자(丙子字) '삼국지'다. 중국의 가정본(1522)이 세계에서 최고(最古)의 목판본이라면, 한국의 '병자자 삼국지'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다. 한국에서 '삼국지'는 조선 중기인 선조 때부터 크게 성행했는데, 이를 우려하는 글들은 기대승의 상소문 '상계'(선조 2년, 1569)를 비롯하여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 이식의 '택당집', 김만중의 '서포만필', 홍만종의 '순오지' 등이다.인물중심의 영웅서사인 '삼국지'에서 무력만 놓고 보면 여포를 첫 손에 꼽을 수 있겠으나 무력과 리더십에 인간의 품격 등을 종합하면 관우가 가장 으뜸이다. 천재 전략가로는 제갈공명을 필두로 방통과 사마의가 거론되나 혹자는 조조의 책사였던 가후를 첫손에 꼽기도 한다.'삼국지'에는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여포의 상징인 '방천화극'은 초승달 모양의 창이며, 장비의 '장팔사모'는 뱀 모양의 무기(창)다. 관우의 상징인 80근 '청룡언월도'를 지금 기준인 1근 600g 곧 48kg으로 생각하는데, 후한 당시의 1근은 222.73g이니 실제 무게는 18kg이 웃도는 정도이다. 그래도 20kg에 가까운 육중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어깨와 관절 등 몸에 많은 무리를 주며, 스피드와 정확성이 핵심인 백병전에서 이 같은 무기는 그다지 실전적이지 못하다. 청룡언월도는 실전에서 사용하는 무기라기보다는 관우의 무용과 지휘권을 표상하는 상징물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마니아급 만화 삼국지로는 '고우영 삼국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전략 삼국지', 차이즈종(蔡志忠)의 '삼국지', '이희재 삼국지', 변카와나베 류(川優)의 '폭풍 삼국지'와 이학인의 '창천항로(蒼天航路)', '박봉성 삼국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젊어서는 '수호지'를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중국의 격언도 있는데, 과연 '삼국지'는 온갖 책략과 술수의 보고이기도 하다. 연환계 · 공성계 · 차도살인계 · 고육계에 '강한 상대를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와 불난 집에서 물건 훔치기처럼 '상대의 곤경을 틈타 타격을 입히는' 진화타각지계(진火打却之計) 같은 계책도 있다. 읽어보면 반드시 뭔가 얻어가는 고전적 명작이 바로 '삼국지'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11-08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40]일본의 삼국지

'삼국지'는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애독돼왔다. 일본 최초의 주자학자로 알려진 하야시 라잔(1583~1657)의 문집 독서목록에 '삼국지통속연의'가 기록돼 있는 것이다.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의 바쿠후 정권의 정치고문이자 이데올로그였다.일본 최고(最古)의 삼국지 판본은 에도시대인 겐로쿠 5년(1692)에 일본어 가나로 번역된 '통속삼국지'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3년 앞서 고난분잔이 '삼국지'를 번역했다는 연구도 나와 있다.만화의 나라답게 고난분잔의 '삼국지' 이후인 덴포 7년(1836) 400여점의 그림과 삽화가 들어간 '회본통속삼국지'가 출판되었으며, 우키요조시의 '풍류삼국지'(1708)와 키뵤우시 곧 일종의 그림책소설이라 할 수 있는 '통속삼국지' 등도 큰 인기를 끌었다. 또 중국의 경극처럼 '삼국지' 일부를 가부키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근대에는 기쿠치 간(1888~1948)·나오키 샨주고(1891~1943) 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대중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1892~1962)가 쓴 '삼국지'(1939)가 특히 유명하다.요시카와 에이지는 중일전쟁 당시 마이니치신문의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일본 해군의 전사(戰史)를 집필하기도 한 체제 내적 인물이었다. 그는 '미야모토 무사시'(1935) 등 사무라이를 다룬 소설로 유명세를 얻었다.그의 '삼국지'는 전시 체제 하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국운이 달린 전쟁에서 전쟁 자체는 물론 전쟁을 위한 명분과 이념을 만들어내는 것과 국민들을 설득하는 일 모두 중요하다. 전쟁과 국가의 흥망을 다룬 '삼국지'를 통해서 요시카와는 동아시아를 무력으로 통일하여 대동아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주의를 역사적으로 늘 반복되어온 불가피한 일로 정당화한 것, 요컨대 추악한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데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요시카와 '삼국지'는 '추카이쇼교신포'에 1939년 8월 26일부터 1943년 9월 5일까지 4년 동안 연재됐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에 일주일의 시차를 두고 연재된 바 있다. 그의 '삼국지'는 '모종강 삼국지'와 달리 유비가 황하의 포구에서 차를 구입하는 장면에서 시작되며 로맨스와 등장인물의 내면 묘사를 가미하는 등 근대소설의 면모를 보여준다.요시카와의 '삼국지'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한국전쟁기인 1952년 서인국에 의해서였다.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에 의해 '전략삼국지(1974)'란 이름으로 만화화되기도 했다.요코야마 미츠테루는 SF만화 '바벨 2세'(1971)로 명성을 얻은 작가이며, 패전을 겪은 일본인들의 힐링 만화였던 '철완 아톰'(1952)의 작가 데스카 오사무(手塚治蟲)의 제자였다. 이후, 일본에서 '삼국지가 전략시뮬레이션게임으로 개발되었다. 일본은 '삼국지'의 나라였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11-01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9]삼국지, 게임이 되다

세 종류의 '삼국지'가 있다. '읽는 삼국지'와 '보는 삼국지'와 '실행하는 삼국지'가 그러하다. '읽는 삼국지'는 소설 · 만화 · 실용서를, '보는 삼국지'는 영화와 드라마를, '실행하는 삼국지'는 게임을 가리킨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현대 독자들은 이제 '읽는자'이기를 멈추고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상황에 따라 그들은 적토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관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필마단기로 조조의 진영 속에 뛰어들어 주군의 혈육을 구해오는 조자룡이 되거나 백우선을 들고 대군을 지휘하는 공명 같은 전략가가 된다. 영상문화와 멀티미디어가 일상화한 지금 '삼국지'는 점점 읽지 않고 참여하여 즐기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1989년 코에이社에서 출시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 1'은 게임 삼국지의 향전(響箭)으로 2016년 현재 '삼국지 13'까지 나와 있는 상태다. '삼국지'에 바탕을 둔 게임은 전략 시뮬레이션 · RPG(역할놀이게임) · 아케이드 · 콘솔 · 모바일 등으로 다양하며, 최근에는 스마트폰 게임으로 나아가 소셜 네트워크 게임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삼국지 게임들이 바로 '실행하는 삼국지'이다. 개발자들이 원작(back story)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게임을 텍스트톤(texton) 그리고 게이머(혹은 유저)가 게임을 실행하여 개인의 내면에 쌓고 축적된 이야기나 게임의 결과로 새롭게 생성된 텍스트를 스크립톤(scripton)이라 한다.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위', 유비의 '촉', 손권의 '오'가 각축을 벌이다 사마염이 '진'을 건국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게임의 세계에서는 딱히 결말이 정해져 있지 않다. 배경과 시점도 다르고 서사의 단순화와 변조도 일어난다. 유저의 능력에 따라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유비가 될 수도 있고, 마초나 여포가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게임 속에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금수저나 흙수저도 없다. '게임 앞의 평등'이라는 이 놀라운 사태는 게임개발사와 문화자본이 만든 신기루요 상품의 세계가 구축한 환영에 불과한 것이겠으나 게이머들에게 실제 역사와 현실이 아닌 새로운 역사와 다른 현실을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문학도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수용자에 따라 맥락이 달라지는데, 유학자에서 강담사 · 위정자 · 작가 · 게임개발자 · 출판업자 · 혁명가 · 게이머 · 독자에 이르기까지 '삼국지'는 항상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온 영원한 페이지 터너(page turner, 흥미로운 책)였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10-25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8]관우, 신이 되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신이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되는 소설 같은 일이 가능할까. 이런 일이 진짜 일어났다. '삼국지'가 낳은 스타 관우(160~219) 얘기다. 그는 후한 환제 3년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산서성 해주. '춘추좌씨전'을 즐겨 읽었다. 무력과 용력은 여포에, 지략은 책사들에 못지않았다. 자는 운장. 80근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적토마를 타고 전장을 누볐다.동탁이 자랑하는 용장 화웅, 원소의 맹장 안량과 문추, 관문을 지키던 조조의 다섯 장수들, 위의 무장 방덕 모두 그의 압도적 무력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화용도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조조에게 인정을 베풀었으며, 바둑을 두며 태연하게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하는 수술을 받았다. 영웅적 삶으로 일관하던 도중 형주에서 조조-손권 연합군에 패해 맥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여몽의 계략에 빠져 아들 관평과 함께 참수됐다. 사후, 옥천사 보정 스님에게 나타나는 신성(神性)을 보여줬으며, 오나라 장수 반장은 그의 혼령에 우왕좌왕하다 관흥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런 대인배의 풍모로 그는 관공(關公) 또는 관왕(關王)으로 칭송되더니 기어코 관제(關帝)로 등극 곧바로 만인의 경배를 받는 신이 됐다.그런데 관우는 엉뚱하게도 군신(軍神)이 아닌 재신(財神)―재물의 신으로 숭배됐다. 이 특이한 현상을 놓고 여러 해석들이 분분하나 "관우가 신이 된 것은 아무래도 그의 생애나 성격과는 관계가 없고, 그가 태어난 고향 때문"일 것이라는 김문경 교수의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의 고향 해주는 소금 산지로 경제적·정치적 막후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온갖 정변과 막대한 군비를 해주 소금상인들이 담당했던 것이다. 해주 소금 상인들은 자신의 자랑거리인 관우의 신상을 깎아 가지고 다녔고, 이때부터 그가 재신으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관우에 대한 신성화, 성역화 사업도 계속 이어졌다. '육조단경'의 주인공인 육조 혜능선사는 관우를 옥천사 수호신으로 모셨고, 명 신종 황제는 그를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대제(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聖大帝)'로 추존했다. 청의 누르하치도 중국인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관우 숭배를 장려했다. 순치제 때 관우는 '충의신위관성대제'로 격상됐고, 함풍제는 관우의 조상들에게까지 왕(王)의 봉작을 내렸다. 당시 북경에 관우사당만 116곳이 넘게 있었다 한다.임진란 와중에 한국에 들어온 관우신앙은 점차 확산되어 갔다. 개혁군주 정조도 동묘에 '사조어제무안왕묘비'를 세우고 관왕묘 제사를 중사(中祀·국가에서 모시는 제사)로 격상시켰다. 관우가 신으로 추앙받게 된 데에는 나관중도 크게 한몫했다. 나관중은 관우와 같은 산서성 출신이었다. 아직까지도 관제묘가 국내 방방곳곳 남아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10-18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7]촉한정통론과 '삼국지' 정치학

유비-조조의 대립은 '삼국지' 최고의 흥행카드다. 그런데 이를 대립으로 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통상 대립은 견해나 처지 등이 어느 정도 대등한 상태에서 서로 반대되거나 길항하는 관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조조는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중원의 패자이나 유비는 모든 면에서 조조에 미치지 못한다.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비는 조조와 대등하게 묘사되며, 작품의 주인공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심지어 조조의 야심은 비난받지만, 유비의 야심은 옹호되거나 지지를 받는다. 이런 서술태도를 유비-조조 담론을 옹유반조(擁劉反曹) 또는 존유억조(尊劉抑曹)라 한다.옹유반조론의 다른 이름은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다. 촉한정통론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촉'을, '한'을 계승한 유일한 나라로 보는 관점이다. 촉한정통론을 주창하며 이를 정설화한 이가 바로 주희이다. 주희는 '자치통감강목'을 통해서 '위'와 '오'를 참국(僭國)으로, '진'을 윤국(閏國)으로 규정하고 있다. 주희에 앞서 촉의 유비를 한 왕실의 정통 계승자라 주장한 이는 '한진춘추'를 쓴 습작치였다. 반면, 진수와 구양수 그리고 '자치통감'을 남긴 사마광은 조조의 '위'를 정통으로 보고 있다.유비를 정통으로 보고 유비 삼형제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민중적 독자들이었다. 역사적 패배자에 대한 동정 심리와 유비 삼형제의 인간미에 대한 공감 그리고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한미한 출신의 유비 삼형제가 입신양명한 것을 보고 큰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군중심리를 이해한 동진(東晋)의 습작치는 진이 북방의 호족들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남도(南渡)한 정치적 상황과 촉이 중원을 내주고 변방으로 간 것을 동일하게 생각했고, 주자 역시 요를 패퇴시키고 중원을 장악한 금에 밀려 남쪽으로 천도한 남송(南宋)의 국가적 위기가 촉과 '유비관계'에 있다고 보았다.그렇다면 촉한정통론은 보수파의 논리요, 중국판 민족주의의 변종인 중화주의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조조를 중심에 놓고 보는 보수파들의 입장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촉한정통론을 주장한 중국의 맑스주의 문예이론가 주여창은 황건적의 난을 농민혁명으로 해석하며, 유비 삼형제의 입신과 애민사상을 높이 평가한다. 유비 삼형제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열광적 지지 뒤에는 가혹한 신분제 사회에 대한 '흙수저'들의 항의와 분노가 깔려 있으며, 동시에 유비의 봉건적 애민주의와 이를 수렴하는 촉한정통론은 전근대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진보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는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동시에 매우 정치적인 독물(讀物)인 셈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10-11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6] 삼국지를 뒤흔든 5대 전투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전쟁론'은 다시 봐도 명저다. 전쟁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나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란 그의 명언은 '삼국지' 해석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삼국지'의 크고 작은 전쟁들과 신출귀몰한 전략 그리고 영웅들의 활약상은 우리가 밤을 새워가며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구도를 바꾼 5대 전쟁이 있다. 첫째는 호뢰관 싸움이다.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고 국정을 장악하자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에서 제후들이 떨쳐 일어난다. 원소를 좌장으로 세우고 스스로 근왕군이라 자처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입신양명과 함께 권력을 움켜쥐려는 잠재적 대권주자들의 경연장에 불과했다. 이 전투에서 동탁은 화웅을 잃고, 낙양에서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다. 사실상 한나라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둘째는 관도대전이다. 조조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화북지역의 실력자인 원소가 조조의 근거지인 허도 정벌에 나선다. 조조가 기병 5천으로 '오소'에 감춰져 있는 원소군의 군량미와 전쟁 물자를 모두 불태워 버리면서 전쟁은 싱겁게 끝난다. 조조가 중원을 장악,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원소는 몰락한다. 셋째는 삼국시대를 성립시킨 적벽대전이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가 완성된다. 오나라의 손권은 강남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며, 정치식객으로 천하를 떠돌던 노마드 유비가 형주라는 근거지를 얻게 된다. 온갖 전략과 전술이 충돌하는 '삼국지'의 클라이맥스다. 넷째는 유비의 '유비스러움'을 보여준 이릉대전이다. 관우에 대한 복수와 의형제에 대한 의리 실천 외에는 아무것도 건질 것 없는 실익 없는 전쟁임에도 모든 것을 내던지는 유비의 인간적 매력과 답답함을 잘 보여준다. '의리'는 유비를 지탱케 하는 명분이었으며, 동시에 그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은 야누스였다. 다섯째는 육출기산(六出祁山)이라고 하여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감행하는 제갈공명의 여섯 차례의 중원 원정이다. 빈사 상태의 촉이 회복하기 어려운 손실을 입는 계기가 됐다. 가정싸움에 패한 마속을 참수하는 '읍참마속'의 고사와 오장원 싸움이 압권이다. '삼국지 5대 전투'는 읽는 재미도 그만이지만, 전쟁이 단순한 물리력의 사용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행위이며 냉혹한 국제관계와 정치역학 그리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 할 수 있다. 북핵문제와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이 대한제국의 말기를 연상케 하는 지금, '삼국지'에서 평화와 상생의 해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를 천 번, 만 번이라도 읽겠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10-04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5] 삼국지의 명품들

'삼국지'는 누가 썼을까. 삼국지 판본사에서 큰 획을 그은 이탁오·나관중·모종강도 실제로는 단순한 필자 혹은 편찬자에 가깝다. 진수나 배송지는 창작자가 아닌 역사서 집필자들이다. 기실 '삼국지'는 오늘날 같은 작가의 개념을 전제로 만들어진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필자들과 독자들이 함께 만든 공동창작물이자 적층문학(積層文學)이며, 작가들의 도전의지를 자극하는 경연장이었다.'삼국지'는 1천8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끝없는 변용과 숙성을 거쳐 탄생한 진행형의 작품이다. 수많은 판본들의 존재와 끝없는 다시 쓰기(rewriting), 그리고 다양한 장르로의 몸 바꾸기(remaking)가 그 증거다. 일례로 1904년 부터 2004년 까지 한국에서 백년간 간행된 '삼국지'만 해도 400종이 넘는다. 해마다 40종 이상의 '삼국지'가 쏟아져 나온 셈이다.수많은 삼국지들 속에서 어떤 작품을 읽어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패션뿐만 아니라 '삼국지들' 가운데서도 우뚝한 명품, 명작이 있는 것이다.'이문열 삼국지'는 단순한 번역물이 아니라 날카로운 해설을 담은 평역으로 유려한 문체가 돋보인다. 문장을 읽는 맛도 그만이다. 그의 '삼국지'에 이르러 마침내 한국 삼국지는 하나의 정점에 이르게 됐다.'박태원 삼국지'는 현대 삼국지의 조종이다. 해방 이후 현대 한국 삼국지는 '박태원 삼국지'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월북으로 박태원 삼국지는 출판인이자 동화작가인 최영해에 의해 완역되거니와 세칭 '최영해 삼국지'는 실제로는 '박태원 삼국지'였던 것이다. 최영해는 누구인가. 그는 한국 출판의 역사이자 동화작가였다. 또한 그는 한글학자 최현배의 아들이면서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후손이기도 하다.'박종화 삼국지'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역사소설을 읽는 것처럼 구수한 매력을 지닌 것이 최대의 장점이다. '이문열 삼국지'가 나오기 전까지 '최영해 삼국지'와 함께 한동안 한국판 삼국지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다.'김구용 삼국지'는 '모종강 삼국지'의 가장 충실한 완역으로 인해 그 원본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황석영 삼국지'는 박태원 삼국지를 계승한 모종강 계열의 삼국지로 21세기 독자들을 고려한 가독성 높은 정통 텍스트로 평가할 수 있다.끝으로 '고우영 삼국지'는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들의 창조, 재치 만점의 입담과 날카로운 풍자, 그리고 풍부한 인생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독창적인 재해석으로 인해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던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9-27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4] '삼국지'의 진실과 거짓

'삼국지(연의)'를 읽다보면 궁금한 게 많아진다. 문득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궁금해지는 진리시험에 빠지는 것이다.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을 다룬 역사소설이 흔하게 직면하는 문제는 바로 역사적 사실의 간섭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이 겪는 숙명 같은 것으로 '삼국지'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삼국지'를 칠실삼허(七實三虛)라고 하여 7할의 진실과 3할의 허구로 이루어진 작품이라 한다. 그러나 전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삼국지'는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허구'가 공존하고 있는 서사체다. '삼국지'의 대표적 허구는 다음과 같다. 우선 유비 삼형제의 도원결의는 없었으며, 호뢰관 전투에서 화웅을 죽인 장수는 관우가 아닌 손견이다. 적벽대전에서 초선(草船)을 이용해 조조의 화살 10만개를 소비시킨 이는 제갈공명이 아닌 손권이다. 유비가 안위현의 현령으로 있을 때 황제의 칙사 독우를 때린 장본인은 장비가 아니라 유비이며,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살려주는 이야기 또한 꾸며낸 것이다. 삼국정립(三國鼎立) 곧 천하 삼분지계를 이루는 계기가 된 적벽대전에서 화공 전술은 주유의 계책이었고, 조조군의 패인의 하나는 설사와 같은 풍토병이었다. 번성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은 관우를 당대의 명의 화타가 치료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는 서기 219년의 일로 화타는 서기 208년경에 이미 죽고 세상에 없었다. 반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요 정치적 사건들과 삼국분할 및 등장인물은 대부분 사실이며, 조조가 유비와 함께 청매정(靑梅亭)에서 천하의 영웅에 대해서 논의하고 유비가 천둥소리에 놀란 척한 것은 사실이다. 소설에서 조조의 윤리적 위치는 아예 천하의 간웅(奸雄)으로 설정돼 있으나 역사서에서 조조는 빼어난 정치인 · 군사전략가 · 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수는 그를 "비범한 사람이요 세상에서 으뜸가는 인걸(非常之人 超世之傑)"로 평하고 있으며, 조조는 악부시(樂府詩) 등에서 특출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준 시인이기도 했다. '위무제집(魏武帝集)' 30권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은 150편의 산문과 30여 편의 시가 전해진다. 역사소설 장르에서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미적 허구 사이의 갈등은 유서 깊은 논란의 하나다. '삼국지'도 이런 운명에서 시종 자유롭지 못했다. 대단히 유연한 사고를 했을 법한 실학자 이덕무도 '사소절(士小節)'이란 글에서, "연의나 소설은 음란한 말을 기록한 것이니 보아서는 안 된다. (중략) '삼국지연의'는 진수의 정사와 혼동하기 쉬운 것이니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이래저래 '삼국지'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흥미만점의 스테디셀러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9-20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3] '삼국지'들의 역사

'삼국지'는 살면서 꼭 읽어야 할 고전으로 통한다. 지혜의 보고이며 인생살이의 교과서요, 동양의 정치철학이 담긴 가독성 높은 전쟁-영웅-역사소설이기 때문이다. 천년의 베스트셀러·사대기서·제일재자서(第一才子書) 등 '삼국지'에 덧붙은 수사들도 화려하다.그러면 '삼국지'는 누구에 의해서, 또 어떤 경로를 거쳐 '삼국지'가 되었는가. '삼국지'에는 진수(233~297)의 역사서 '삼국지'와 나관중(?~1400)의 소설 '삼국지' 두 종류가 있다. 위·촉·오를 다룬 진수의 '삼국지'는 모두 65권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곧잘 인용되는 '동이전'은 위지 30권에 포함된 일부분이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魏)에서 진(晋)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중시했다. 호사가들은 촉의 장수였던 아버지 진식이 제갈공명에 의해 참수되는 아픔을 겪었고 후일 진수가 위나라의 관리(著作郞)가 되었기 때문에 위 중심의 역사서를 남겼다고 말하지만, 그의 사서는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저술로 평가받는다.우리가 아는 소설 '삼국지'의 정식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다. 연의란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문학작품을 말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를 '삼국지'로 중국과 북한에서는 '삼국연의'로 지칭한다. 오늘날의 '삼국지'는 진수의 '삼국지'에서 배송지의 '삼국지주'와 민간설화들을 집대성한 원대(元代) '전상평화삼국지', 그리고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를 거쳐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로 집대성된다. 그리고 청대(淸代) 출판업자였던 모종강(毛宗崗) 부자(父子)의 '삼국지'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삼국지'의 구조와 원형이 완성된다. 이 점에서 '삼국지'는 단일한 저자의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누가적(累加的) 텍스트로 지금도 끝없이 다시 쓰이고 또한 변용과 갱신을 거듭하고 있는 진행형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현존하는 '삼국지' 최고 판본은 가정(嘉靖) 임오년(1522)에 간행된 '삼국지통속연의'이다. 지난 1990년 중국 학계에서는 나관중의 '가정본(1522)'보다 20년 이상 앞서 나온 황정보(黃正甫)의 '신각고정안감통속연의전상삼국지전(新刻考訂按鑒通俗演義全像三國志傳)'의 존재를 확인하고, '삼국지'의 저자를 나관중으로 보는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처럼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는 물론 '삼국지' 이후의 '삼국지'들이 계속 발견되고 또 출현하고 있어 '삼국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서사의 제국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9-13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2] 공포의 사회학

장르도 계절 궁합이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에는 호러나 미스터리가 제 격이다. 호러(horror)는 '머리털이 곤두서는'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호레레(horrere)에서 나왔다. 호러는 대단히 예민한 사회학적 장르다. 호러의 중시조격인 고딕소설은 계몽주의 시대 억압된 존재들의 반란이면서 동시에 근대의 중세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반영하는 양면성을 가진다. 한국 공포영화의 대명사는 '월하의 공동묘지'(1967)이며, 한국 최초의 호러영화는 1924년에 제작된 '장화와 홍련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호러의 특징은 대개 여성 원귀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원령설화(怨靈說話)인 '아랑 전설'과 계모형소설 '장화와 홍련전' 등을 한국형 대표호러로 꼽을 수 있다. 엄혹한 신분제와 가부장제사회에서 하소연할 길 없는 여성들의 한과 고통이 투영된 것이다. '월하의 공포묘지'는 원귀와 원령설화의 전통을 잇는 영화인데, 흥미롭게도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일제 강점기다. 월향(강미애 분)에게는 독립운동가인 친오빠(황해 분)가 있다. 오빠는 친구(박노식 분)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고 투옥되고, 월향은 오빠의 친구와 결혼한다. 찬모의 꼬임에 빠져 자살한 월향이 원귀가 되어 복수를 하며, 뒤늦게 사건의 전모를 안 남편이 깊이 참회하는 권선징악형 호러다. 호러도 판타지나 SF처럼 초자연적이고 기괴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기에 스토리의 리얼리티와 신뢰성 문제에 대한 압력을 받는다. 독자·관객의 너그러운 수용 태도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상식과 현실인식을 유보하고 이야기를 봐주는 수용자의 태도를 가리켜 '불신의 자발적 중지'라고 한다. 그러나 마냥 '불신의 자발적 중지'에 기댈 수만 없는 노릇이어서 최근에는 괴물이나 귀신같은 초자연적인 내용보다는 사이코패스 등 정신병적 내면심리를 다루는 현실적 작품들이 많아졌다. '한국공포문학 단편선', '흉가', '어느 날 갑자기'를 비롯해서 슬립스트림에 해당하는 문단문학들―이를테면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2000)이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2013), 장유정의 '종의 기원'(2016) 등 공포의 리얼리즘들을 주목해볼만하다. 호러는 외부 자극과 실체가 분명한 공포(fear)와 달리 막연한 잠재의식적 불안 심리를 자극하여 '고통-쾌락'을 준다. 절단된 신체와 끔찍한 상황과 묘사, 그리고 등장인물보다 관객(독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발생하는 서스펜스 등 다양한 기법과 플롯을 동원하여 현실과 일상을 교란시키는 장르가 바로 호러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9-06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1] 즐거운 공포, 호러

공포와 매운 맛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바로 스스로 즐기는 고통이라는 점이다. 단언컨대 고통을 즐기는 존재는 아마 인간뿐 일 것이다. 매운 맛은 맛이 아니고 고통이며, 감각기관에 주는 강한 자극을 매운 맛이라 착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매운 맛에도 등급이 있다. 이를 스코빌(Scoville Heat Unit) 또는 슈(SHU)라 약칭한다. 공포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고통과 곤경에 빠뜨리고 이를 헤쳐 나오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루두스(ludus)라고 하며, 매운 맛과 공포물은 루두스의 한 극단적 형태다. 장르문학이나 할리우드 영화도 똑같다. 관객/독자들에게 스트레스를 잔뜩 안겨준 다음, 결말에 가서 이를 통쾌하게 해결하여 줌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 것이다.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 인지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기쁨 · 슬픔 · 수용 · 혐오 · 기대 · 놀람 · 공포 · 분노 등 여덟 개의 정서(감정)가 기축이 되며, 이 기본 정서들이 조합되어 복합감정들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흔히 공포와 불안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막연하고 모호한 위험에 대한 반응이 불안이라면, 공포는 눈앞에 직면한 실제적인 위협(험)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 호러(물)는 음습(울)한 상황과 분위기로 우리 안에 내재된 근원적 정서인 불안 심리와 공포심을 자극하여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요동치게 만든다. 그런데 이 공포물은 실제가 아니라 영화나 소설처럼 꾸며진 가공의 이야기로 독자나 관객은 이와는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공간(위치)에서 보거나 감상하고 있다는 대전제와 사실의 확인으로 인해 안도하게 되며 이때 비로소 공포를 엔터테인먼트로 즐기게 되는 것이다. 공포의 이야기 전통은 매우 유구한바, '요재지이' 같은 지괴소설(志怪小說)이나 전기소설(傳奇小說)을 비롯하여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등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공포와 신비감으로 가득한 이야기와 분위기로 유럽에서 번성했던 고딕소설을 대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현대에는 컬트소설로 유명한 러브 크래프트와 '호러 킹'이란 별칭으로 유명한 스티븐 킹을 비롯해서 스즈키 코지의 '링', 유일한의 '어느 날 갑자기', 김종호의 '손톱', 이종호의 '귀신전' 등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섯살 배기 꼬마 한스의 공포증 연구' 등 신경증과 공포 연구 분야의 선편을 잡은 S.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공포(감)는 낯익은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존재가 되어 나타날 때 최고조에 이른다고 한다. 꾸며진 상상의 세계보다 대규모 실업사태와 금융위기 그리고 질병과 노년의 은퇴 등 신자유주의 시대의 항상적 위협이 더 두렵고 끔찍한 동시대의 독자들이 생명과 생존이 보장된 안정된 편안한 상태에서 공포물을 마음껏 즐기는 대동세계(大同世界)가 빨리 오기를 고대해본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8-30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30] 여심 저격 연애소설의 하위장르들

문학은 인쇄산업의 적장자다. 인쇄술이 보편화하기 전 문학은 '낭송'하고 '듣는' 예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보고' '읽는' 문학은 19세기를 전후하여 자리 잡았다.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표준어·철자법·띄어쓰기·사전 편찬 등이 근대국민국가의 핵심과제로 부상했고, 근대적 문학 개념과 제도가 정비되자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열렸다.PC와 인터넷 그리고 SNS의 등장으로 문학은 또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이제 글을 '쓰지'않고 '치며', '읽지' 않고 '보게'된 것이다. 모뎀을 이용한 통신문학 시대를 거쳐 등장한 인터넷소설은 종이책과 대여점 로맨스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나갔다. 십대 취향의 경쾌한 스토리에, 구어체 문장, 외계어와 이모티콘 등으로 중무장한 신종 장르 출현에 기성문단은 경악했고 착잡했으며, 당혹스러웠다. 외계어와 이모티콘은 시각화한 언어(문자는 기본적으로 음성의 시각화이다), 곧 영상언어로서 말하며 보여주는 디지털 시대의 특징을 잘 반영하는 현상이다. 디지털 기술과 SNS가 보편화할수록 구어적 표현이 더욱 촉진되는 퇴행 현상을 보여준다. '그 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옥탑방 고양이', '내 사랑 싸가지' 등 이 때 등장한 인터넷소설의 대다수는 십대 소녀들을 위한 연애스토리들이었다.지금은 인터넷 등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장르소설들은 웹소설로 분류된다. 웹소설은 정식 문학어가 아니라 연재매체와 플랫폼을 기준으로 한 편의상의 용어로 현재 카카오페이지·조아라·북팔·네이버 등 주요 포탈에 연재되거나 공모에 참여한 작품들을 가리키는 시사용어에 가깝다.연애소설의 총아인 하이틴 로맨스는 1952년에 창간된 '학원'의 연재소설들을 필두로 발전해왔으며, '할리퀸 로맨스'는 1979년부터 삼중당에서 집중적으로 번역, 출판됐다. 로맨스는 소녀, 여성들의 감수성과 완벽한 남자에 대한 환상을 다룬 젠더적 장르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컨템퍼러리 로맨스와 19세기 유럽풍의 역사로맨스인 리젠시 로맨스, 그리고 SF·판타지·미스터리스릴러 등의 혼합된 패러노멀 로맨스가 주요 장르들이다. MMORPG(다중접속온라인역할놀이게임)의 원천콘텐츠인 신일숙의 순정만화 '리니지'는 판타지가 가미된 로맨스며, 영화로 만들어진 김혜린의 순정만화 '비천무'는 무협 로맨스고, TV 드라마가 된 조주희의 '밤을 걷는 선비'는 흡혈귀 이야기와 로맨스를 결합한 한국식 패러노멀 장르다.로맨스가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이용하는 것인지 매체와 장르들이 로맨스를 이용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이들이야말로 강렬한 세대성과 젠더적 정체성으로 여심을 저격하는 여성형 장르문학의 대표주자들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8-23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9] 연애소설의 명과 암

연애는 어째서 중요한가. 그것은 인생을 뒤흔들만한 심장이 뛰는 사건이요, 근대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고 해독(decoding)하기 위한 탐색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염정(艶情)과 상열지사(相悅之事)는 동서고금의 다반사요,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근대의 연애는 그 사소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의미망을 이루고 있다.연애란 말은 조중환의 번안소설 '쌍옥루'(1912)에서 처음 등장했다. 본디 그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 정치적 이해로 얽힌 정략결혼이나 육욕적인 사랑과 구별되는 고결한 감정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백인 귀족 남성들이 개발한 신개념이었다.근대계몽기 자유연애는 근대적 주체 형성의 인큐베이터였다. 요컨대 그것은 사회적 구습과 금제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감정의 해방운동이면서 동시에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 개조하며 사회를 변혁하려는 근대적 개인들의 고투를 상징하는 문명화의 기표(記標)였다.반면 장르문학으로서의 연애는 이 같은 역사성과 문화정치적 의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사회적 기반이 다른 두 남녀가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사랑을 완성한다는 본연의 공식에 충실할 뿐이다.영화 '로마의 휴일'처럼 세상물정 모르는 상류계급의 여성과 강직하고 능력이 뛰어난 중산층 출신의 알파남의 '밀당'과 사랑을 다루거나, 부와 지위를 지닌 상류사회 남성과 평범녀의 사랑이라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반복적으로 재현한다.연애소설은 또한 예민한 사회학적 장르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근대사회 초기 여성들에게 결혼 이외에는 경제와 생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거의 없었기에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환상적인 결혼 곧 '신데델라의 이야기'가 여성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여권신장과 함께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가능해진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의 감정과 선택에 따라 사랑을 실현하는 알파걸들의 이야기라든지 짐승남을 내 뜻대로 길들이면서 완고한 사회관습과 대결을 펼치는 로맨틱 드라마들이 여성독자의 공감을 얻는다.전자의 연애소설은 여성으로 하여금 묵묵히 고통을 견디고 자신을 구원해줄 남성을 기다리며, 근사한 남성과의 결혼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도록 한다는 점에서, 즉 여성을 주체가 아닌 수동적인 타자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반여성주의적인 장르다. 후자의 연애소설 또한 여성이 마치 삶을 결정권을 지닌 주체적 존재로 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즉 여성독자들을 여전히 남성에게 삶의 결정권을 부여하는 가부장적 여성(patriarchal woman)으로 주체화한다는 점에서 반여성주의적이다./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8-16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8] 연애소설 다르게 읽어보기

트로트와 문학의 공통점은? 사랑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기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과 예술의 8할은 사랑이야기요, 연사(love affair)다. 한국문학의 정전(canon)으로 꼽히는 '춘향전'과 황순원의 '소나기'도 핵심은 사랑이다. '춘향전'의 사랑은 다의적(polysemous)이다. 백성들은 신분을 초월하는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얻었고, 사대부들은 이를 '충효'와 '정절' 같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널리 선양하는 국민교재로 생각했다. 반면, 누군가에게 그것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정열적인 사랑과 성적 판타지를 채우는 대리보충(supplement)이었을 것이다. '소나기'는 어떤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왕성할 청소년들에게 남녀 간의 사랑은 성적 결합에 있지 않고, 오직 맑고 순결한 감정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교육부 당국과 편수관의 심모원려가 국민소설로 만든 작품이다. 국정교과서 소설 알퐁스 도데의 '별'도 이 범주에 드는 단편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소나기'는 사랑이야말로 여름철의 소나기처럼 인생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짧고 강렬한 '사건'임을 보여준다. 인생에서 이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랑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와 아픈 기억만을 남기고 속절없이 사라져버리는, 또는 간절히 갈구하나 충족되지 않는 잔인한 축복이다. 저 유명한 할리퀸 로맨스(Harlequin Romance)와 멜로드라마들, 순정만화와 칙릿(chick-lit), 인터넷소설은 현실에서 채우고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에로스에 대한 보상심리가 만든 환상물이다. 할리퀸 시리즈 · 인터넷소설 · 순정만화가 로맨스라면, 칙릿과 멜로드라마는 멜로에 해당한다. 로맨스는 십대와 미혼여성이 우여곡절을 거쳐 결혼에 이르는 것으로 사랑이 완성되며, 멜로는 결혼 이후의 사랑과 갈등을 다룬다. 제니스 래드웨이(Janice Radway)는 연애소설 읽기는 일종의 환상충족으로 경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본다. 즉 연애소설은 감정적 구원을 제공하는 장르로 여성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보호, 어머니 같은 보살핌, 그리고 정열적인 어른의 사랑"이라는 삼중의 만족감을 제공해주는 사회적 장르요 위안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연애소설이 많이 읽힌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결핍이요, 연애소설의 정체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8-09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7] 한국문학에 외설을 허하라

영국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있다면, 한국에는 '반노'가 있었다. 염재만(1934~1995)의 장편소설 '반노'는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성적 표현의 자유를 두고 법과 문학이 충돌한 사례다. '반노'는 1969년 7월 30일 기소되어 1975년 12월 6일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을 때까지 무려 6년 5개월 동안 외설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지루하고 긴 법정 공방을 거쳤다.염재만은 충북 음성 출신으로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1911~1977)의 제자였다. 그는 수원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에로틱한 장편소설 '반노'를 발표한다. 그러나 작품 발표 직후, 그는 삼선개헌 문제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정국 속에서 음란물 제조 혐의로 전격 기소된다. '반노'는 윤진두와 홍아라는 두 남녀가 만나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며 다투고 화해하고 정사를 반복하는 이야기를 다룬 지루하고 밋밋한 작품이다.'반노 재판'은 개헌 문제로 정국이 요동치고 국민저항이 집단화할 조짐을 보이자 차제에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주기 위한 극장국가(劇場國家)의 정치 퍼포먼스였다.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다 해도 예술성이 크면 음란성이 상쇄된다는 이교량설(利較量說)과 작품이 다소 선정적이어도 선정성이 작품의 전체 맥락 속에 필요한 요소이거나 작가주의의 자장 속에 놓여 있다면 음란성은 전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승화설(昇華說)을 근거로 내세운 변호인단의 호소 전략이 통한 것이었다.그러나 최종적으로 승리한 자는 명백히 극장국가였다.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에 성적 표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등 충분한 '감옥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푸코(M. Foucault)의 말대로 '감옥효과'란 감옥에 갇힌 수인들에 대한 통제와 함께 감옥에 갇히지 않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국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간다는 사실을 항시적으로 일깨워주는 권력의 작동방식을 말한다.'반노 재판' 과정을 거쳐 1975년에 형성된 한국문학의 성적 가이드라인에 대한 도전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친 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1992)와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에 의해 시도된다. 외설과 성-담론을 둘러싼 인간의 천부적 본능과 도덕률 그리고 국가권력 간의 갈등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며, 이 삼자갈등은 담론의 수면 아래 잠복해 있을 뿐 언제든 다시 발화할 가능성이 크다. '반노'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아득한 과거지사가 됐으나 '반노 재판'은 국민은 물론 작가들 자신이 자기를 감시하게 만드는 원형의 감옥 곧 판옵티콘(panopticon)으로 작동하고 있다./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8-02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6]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재판·외설 논란

예술/외설의 정의는 아직도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뜨거운 미스터리다. 우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다 예술적 외설과 외설적 예술 사이를 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예술과 외설의 정의는 제각기 관점과 입장을 달리하는 간주관적인(intersubjective)인 것이기에 이 논란은 한참 더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외설(obscenity)은 특정 범주의 어휘들, 특히 성행위나 해부학적 부분의 이름들과 관련이 있으면서 정치성과 역사성을 갖는 문화현상이라는 게 뤼시엔느 프라피에-마쥐르의 주장이다. 문화로서의 외설은 프랑스 대혁명기 귀족들을 공격하고 희화화하기 위해 부르주아지들이 창안해낸 정치풍자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국가권력은 질서유지와 윤리를 무기로 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성-상품들 혹은 전위적 성-예술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관리해왔다. '사드'의 '소돔 120일',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염재만의 '반노',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의 해봐' 등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작품들이다.'채털리 부인'은 외설-예술 논쟁의 대표 사례일 뿐 더러 문학의 탈신화화와 모더니티의 허구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채털리 부인'은 1928년 최종본이 나온 이래 부침을 겪다 1959년을 기점으로 국가와 예술인들이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진보성향의 정치인 로이 젠킨스(Roy Jenkins)가 음란물 출판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팽귄 출판사가 '채털리 부인' 무삭제판을 전격 출판한다. 성불구자가 된 귀족 출신의 상이군인(클리퍼드)이 아내(코니)와 사냥터지기(맬러스)에게 농락(?)당하는 이야기에 분노한 영국보수주의자들은 작품을 외설 혐의로 기소했고, 예술가들이 반발하며 판이 커졌다.쟁점은 '채털리 부인'이 과연 외설인가, 예술인가였다. 즉 외설물이라면 무엇이 외설이고, 예술이라면 무엇이 예술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사법부로서는 '채털리 부인'을 음란물로 의법조치하기 위해서 음란물이란 무엇이며 문학과 외설물은 어떻게 다른가를 밝혀야 했고, 문화이론가들과 영문학자들 역시 외설 논란을 초월하는 문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제시해야 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으나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어느덧 재판은 본말이 전도되어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고 묻는 문학에 대한 정의를 둘러싼 문학논쟁으로 변질(?)돼 버렸다.'채털리 부인'은 성(담론)의 해방, 성을 매개로 펼쳐지는 계급갈등, 문학적 표현의 한계 등 동시대 영국사회의 과제와 사회적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유의미한 지표이자 문학의 위상과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게 한 일대의 사건이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7-27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5] 김광주의 '정협지'

전설을 전설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세월의 마모를 견뎌내는 지구력과 마성적(魔性的) 재미이다. 또 통시간적(通時間的) 생명력을 갖는 풍부한 이야기성에 대중들의 높은 충성도도 뒷받침돼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춘 한국무협의 전설이 있다. 김광주의 '정협지'다. '정협지'는 웨이츠윈의 '검해고홍'을 번역한 작품으로 '경향신문'에 1961년 6월 15일부터 1963년 11월 24일까지 81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정협지'는 협객들의 이야기(俠)와 사랑의 이야기(情)가 결합된 작품이다. 난리 통에 부모를 잃고 강호를 떠돌던 무림의 두 고수인 노영탄과 악중악의 형제대결이라는 씨줄에 숭양표국의 무남독녀 외동딸 감욱형, 회양파 방주의 딸 연자심과 두 고수와의 애정갈등이라는 날줄이 교직되면서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 '정협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정음사, 을유문화사 등과 함께 출판업계의 빅 스리로 통했던 신태양사에서 한창 연재 중이던 1962년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하드커버에 2단 세로쓰기로 편집됐고, 운보 김기창(1913~2001)과 삽화가 이순재가 각각 표지 그림과 삽화를 맡아 더 눈길을 끌었다. 신태양사에서만 다섯 차례나 출판됐고, 2002년까지 무려 여섯 곳의 출판사에서 판과 쇄를 달리하여 나왔다. '정협지'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진짜 '불'도 났다.대중들의 뜨거운 열광 때문이었는지 한창 연재 중이던 1962년 4월 김광주의 전셋집이 화재를 입고 장서 1천권과 원본인 '검해고홍'도 함께 전소되고 말았다. 난리가 났다. 당시 '검해고홍'은 국내에 딱 두 부만 있었던 비상상황! 소식을 접한 '화한일보'의 유국화(劉國華)가 국내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딱 하나 남은 유일본을 찾아 작가에게 전달함으로써 '정협지'가 차질 없이 연재될 수 있었다. '정협지'는 이래저래 뜨거운 작품이었다. 대중들이 '정협지'에 열광한 것은 전대미문의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에 매혹됐기도 하지만, 주인공 노영탄과 악중악 간에 벌어지는 골육상쟁의 형제대결이 치열한 남북한 대치와 민주당 신파/구파 분열의 은유로 읽혔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백 달러도 안 되는 지독한 가난에 더해 되풀이되는 정쟁과 군사정변 속에서 마음의 정처를 잃은 대중들에게 '정협지'는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인공의 낙원이었다. '정협지'는 현실정치에 지친 국민들의 정신적 피난처였던 것이다. '정협지'는 이렇게 해서 전설이 됐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7-20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4] 무협장르의 이모저모

리샤오룽(李小龍·1940~1973), 청룽(成龍·1954~)은 무협영화 곧 베이징 오페라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그러면 무협영화는 어떤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 '불타는 홍련사'(1928) 이후 무협영화의 신기원을 이룬 두 감독의 공이 매우 크다. 바로 후진취앤(胡金銓·1931~1967)과 장처(張徹·1923~2002)다. 후진취앤은 경극을 무협영화와 결합시켜 무협영화의 미학을 완성해내는데, '대취협'(1966)과 '용문객잔'(1967)이 대표작이다. 장처는 쿠앤틴 타란티노 영화의 원조격으로 선혈이 낭자한 시퀀스들을 도입하여 폭력의 미학을 완성해낸다. '외팔이 시리즈'로 유명한 '독비도(獨臂刀·1967)'와 '돌아온 외팔이(獨臂刀王·1969)'로 무협영화의 새 역사를 썼다. 이때 스타덤에 오른 배우가 왕위(王羽·1943~)다. '영웅본색', '미션 임파서블2' 등을 만든 우위썬(吳宇森·1946~) 감독이 장처의 제자였다. 왕위 이후 꺼져가던 홍콩 무협영화를 세계적인 콘텐츠로 끌어올린 스타가 리샤오룽 곧 이소룡이다. 이소룡의 대표작인 '정무문'을 보면, 곽원갑이 그의 스승으로 그려지고 있다. 곽원갑은 실존인물로 '부청멸양'을 기치로 내걸고 실제로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던 의화단의 총수를 혈혈단신으로 잠입, 참수하여 '대협'의 칭호를 얻은 무술인이다. 이소룡은 배우이자 절권도의 창안자이기도 했는데, 예원(葉問)의 문하에서 영춘권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가하면 무협장르를 대중적 엔터테인먼트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린 작가도 있다. 신필 진융(金庸·1924~)이다. '영웅문'의 무협을 넘어 중국현대문학의 정전(正典·canon)으로 통한다. '영웅문'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등 세 작품을 통칭하는 조어다. 진융은 '서검은구록'(1955)을 시작으로 '녹정기'(1972)까지 모두 15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월녀검'을 제외한 나머지 14편의 작품 제목이 마치 칠언절구의 대련(對聯)처럼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14편 작품 제목의 이니셜을 합하면 '비설연천사백록(飛雪連天射白鹿) 소서신협의벽원(笑書神俠倚碧鴛)'이라는 근사한 대련이 만들어진다. 당대(唐代) 소설로 유명한 두광정(杜光庭)의 '규염객전( 髥客傳)'은 무협장르들의 조종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학자요, 독립투사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규염객전'의 주인공인 규염객(구렛나루 난 손님)이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을 편바 있다. 이런 걸 보면 1990년대 들어 한국산 무협소설이 중국으로 역수출되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듯싶다. 이제 장르문학 비평과 인문학연구에서 동아시아적 관점의 도입은 필수다. 현실이 말해주듯 우리는 명백히 동아시아의 일원이 아니던가.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7-12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3] 이재학의 무협만화

중국에 김용과 와룡생이 있다면, 한국에는 김광주와 이재학(1939~1996)이 있었다. 이재학은 누구인가? 그는 한국무협만화의 전설이었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만화를 보고자 할 때 독자들의 선택장애를 원천적으로 막아준 보증수표 만화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재학 화백의 무협만화들이었던 것이다. 이재학 화백은 1961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65년 '소년조선일보'에 '휴전선의 왕꼬마'를 발표하면서 만화계에 입문했다. 이재학은 1980년 전후 무협만화로 일약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1996년 숙환으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그는 무협만화와 함께했다. 이재학의 무협만화는 크게 2기로 나뉜다. 제1기는 무룡(武龍)이란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기의 작품들이다. 무룡은 무술의 고수이면서도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서민적인 캐릭터였다. 주로 기격무협(技擊武俠) 장르의 만화들이었고, 쿵푸와 같이 맨몸으로 무공을 펼치는 무협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제2기는 추공(秋空)―'텅 빈 가을'이란 시적 이름을 가진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시대이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홀로 강호를 떠도는 추공은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비애와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추공이 등장하는 만화는 비검법술(飛劍法術)과 현공변화(玄功變化) 같은 신비의 무공이 펼쳐지는 신마검협(神魔劍俠) 장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의 세계와 갈등하거나 아버지와의 화해가 작품의 중핵(kernel)을 이루는 아비 부재의 서사 곧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협이 제2기 이재학 만화의 핵심이다. 가혹한 운명과 절대고독 앞에 굴하지 않는 추공의 냉철한 태도와 감정의 절제는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가 세파와 맞서는 외로운 현대 남성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이재학의 만화는 일본과 대만 등 해외까지 진출한 원조 무협 한류였는바, 1997년 그의 신마검협 '용음봉명'이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고단샤(講談社)의 잡지 '애프터눈'에 절찬리에 연재되기도 하였다. 이재학 무협은 온갖 불의와 부조리 같은 사회적 갈등의 만화적 해결이고 권선징악은 드라마트루기에 지나지 않지만, 여성들 못지않게 남성들의 삶도 팍팍하고 불만족스럽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위안의 서사였다. 삶을 버텨내는 방법으로 술과 담배만 있는 게 아니다. 무협소설이 있고, 이재학의 무협만화가 있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7-05 경인일보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2] 무협소설의 관습과 유형

무협소설은 관습적인 장르다. 이야기 구조와 패턴, 배경과 인물 등 모두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 현대장르문학인 무협소설을 전근대 고소설로 오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무협소설의 관습은 어디에서 오는가? 익숙한 이야기 구조와 플롯 그리고 배경의 도저한 보수성 때문이다. 정영강(丁泳强)이 정리한 무협서사의 패턴은 이러하다. 원수의 도발로 문파나 가문이 무너진다(1). 가까스로 도피(2)한 주인공이 스승(3)을 만나 무공을 수련한다(4). 복수를 위해 강호로 나가(5) 우연히 위기에 빠진 절세의 미인을 만나 구해주거나 인연을 맺고(6), 실패 혹은 좌절(7)을 겪는다. 새로운 스승과 비급을 만나거나 얻지만(8), 애정전선에 갈등이 생긴다(9). 치명적인 부상을 입으나(10), 곧 회복하고(11) 진귀한 보물을 얻는다(12).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13), 성공을 거둔 다음(14), 강호를 떠난다(15). 작품마다 가감과 다소의 변용은 있으나 대개 이 패턴이며, 신무협은 누벨바그 영화처럼 이런 도식을 거부하거나 해체한다.중국 무협소설의 크로노토프(chronotope)는 시간적으로는 송(宋)에서 청말(淸末), 공간적으로는 강호라는 특수한 공간이다. 크로노토프(chronotope)란 작품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맺는 내적 연관 관계 즉 시공을 의미하는 말로 현대소설의 기원을 민속과 민중에서 찾은 러시아 문예이론가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이 개발한 신조어다.강호는 본래 중국의 삼강오호(三江五湖)를 가리키는 지리명사였으나 후대로 가면서 관부(官府)의 지배와 실정법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무협의 세계를 표상하는 말로 변모했다. 예컨대 강호는 치열한 무공대결과 함께 살인과 싸움을 소재로 한 폭력의 서사가 될 수밖에 없기에 윤리적 지탄과 범법을 피하기 위해 만든 허구의 세계요, 치외법권 지대이다.무협의 대표적 플롯으로는 진귀한 보석이나 무림비급을 둘러싸고 벌이는 보물쟁탈형(寶物爭奪型), 이민족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의 영웅을 그린 민족투쟁형(民族鬪爭型), 추리와 무협을 결합시킨 탐안형(探案型), 세상을 떠돌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행협형(行俠型)과 유랑자형(流浪者型), 수련을 통해 무림의 고수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학예형(學藝型), 혼사장애를 다룬 애정갈등형(愛情葛藤型) 등이 있다. 한동안 대학도서관에서 대출순위 1위로 각광받은 전동조의 '묵향'은 무협과 장르판타지가 결합된 퓨전 장르, 곧 '판협지'다. 이 같은 몇 개의 플롯과 이야기 패턴이 다양하게 조합, 변주되면서 무협의 화엄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조성면 문학평론가

2016-06-28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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