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6)·끝·부끄럽지 않은 백년의 준비]무관심·법에 묶인 지역연구… '묻힌 독립운동가' 되찾아야

日, 제암리교회학살 은폐 증거학계·언론 활용 미흡 '아쉬움'정보법 강화로 제적부 못봐다양한 투쟁 미서훈 선열들행적조사·기록찾기 '어려움''학살, 방화는 부인하고, 오직 진압의 수단 방법이 적절치 못했던 것으로 하여 중근신에 처함'.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은 세계 근현대사를 통틀어 인류의 잔혹한 만행 중에서도 손꼽히는 비극이다. 3·1만세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일본군이 가장 저항이 거셌던 화성, 그 중에서도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몰아넣고 방화, 살인을 저질렀다.이와 관련해 일본군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은폐가 있었다는 증거가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조선 군사령관이던 일본 육군 중장 우쯔노미야 타로가 쓴 '일기'가 2007년 '우쯔노미야관계자료연구회'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이 자료는 당시 현장 상황과 일본군이 파악한 피해규모는 물론, 사건이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등에 의해 외부세계로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사건 은폐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저항하는 자를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과 '전적으로 부인하면 오히려 불리해지니 일부의 과실만 인정하고 행정처분을 내리는 것이 득책'이라는 회의 내용이 적혔다.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언론에서는 크게 다뤄진 바 없다. 지난해 발간된 '수원야사'에서 이를 언급한 저자 이창식씨는 "이같이 중요한 사료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여길 정도"라며 "일본이 피해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기 꺼리는 상황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 자료를 연구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이는 서울 아닌 지역의 독립운동이 주류 역사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히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지역 내에 독립운동을 연구하고 조사할 행정, 학문적 토대가 부족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도 "식민지배가 36년간 길게 이어져 독립운동의 형태도 다양하고, 참여한 이들도 방대하다. 특히 중앙정부에 기록되지 않은 지역의 활동가들이 상당히 많다"며 "홍면옥의 경우도 보훈처가 파악하고 있을 만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만, 선생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히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되면서 직계가 아니면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연구하는 기초자료인 제적부조차 열람할 수 없다. 이정일 화성시 학예연구사도 "2016년에 서훈된 독립운동가 후손은 첫 통화에서 서럽게 울었다. 혼자 선대의 기록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던 찰나에 우리의 연락을 받아서다"라며 "지자체가 제적부만 열람할 수 있었어도 후손들이 서럽게 우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법무부는 사례가 없다며 거절하고, 국가기록원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전부 지우고 보낸다. 지자체가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무슨 수로 이를 찾겠는가"라고 반문했다.'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를 통해 우리는 이 땅의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를 만났다. 독립운동은 가족은 물론,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일이었다. 전 생애를 바쳐 자신을 버려야 가능했다. 삼일절 100주년을 앞두고 경기도는 물론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 과연 100년의 숫자에 취할 만큼, 우리는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인가.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전국으로 확산하는 3·1 만세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일본군이 자행한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은 인류의 잔혹한 만행 중 하나로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화성시 제암리3·1운동 순국기념탑.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제암리 학살 사건 당시 사건 처리를 주도하고 이를 일기로 기록한 조선 군사령관 우쯔노미야 타로. /이창식씨 제공

2018-02-28 공지영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5)수원의 만세운동]기생도 소작농도 '대한독립'을 외치다

1919년 방화수류정서 지식인·학생중심 시작상인들 가게 문 닫고 생계 위협속에서 '동참'기생 33명도 日경찰 총칼에 굴하지않고 시위연령·성별·직업 상관없이 전 계층서 적극 저항경기 남부 주요도시로 '전국 투쟁' 동기 부여매서운 추위가 가시면,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은 시민들이 두런두런 둘러앉아 고즈넉한 호수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변신한다. 이곳을 건설한 선조들도 우리가 그곳을 그리 아름답게 기억하길 원했을 테다. 하지만 1919년의 방화수류정은 우리의 기억과 다른 모습으로 기록됐다.당시 수원은 서울 못지않게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지역이다. 현재 화성, 오산, 의왕 등 경기 남부 주요 도시가 '수원군'에 포함될 만큼 방대한 땅이었지만, 연령·성별·직업에 상관없이 전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해 전국 독립투쟁의 동기를 부여했다. 그중에서도 방화수류정은 수원의 만세운동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였다. 1919년 3월 1일 화홍문 방화수류정 부근에서 지역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가 일어났고 이 시위는 일제 식민지배 하에 웅크리고 있던 민중의 마음속 독립의 방아쇠를 당겼다. 수원 전 지역에 걸쳐 상인, 소작농, 기생 등 다양한 계층이 들불처럼 일어나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3월 16일 수원면 장날을 이용해 지식인과 학생이 모인 만세시위가 다시 일어나자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연무대에도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고 순식간에 수원군 중심 시가지였던 종로까지 시위대가 몰렸다. 일본경찰과 헌병이 이들을 강제 해산하면서 시위의 주동자들이 체포됐는데,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이번엔 '상인'들이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가게 문을 닫고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이었지만, 일본인에게 상권을 침탈당했던 상인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다.3월 23일은 수원역 부근의 서호에서 7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번 시위의 주역은 '소작농'이었다. 일본이 운영하는 농장이 많았던 이곳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소작농들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서호 인근에서 보란듯이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수원 만세운동의 정점은 '기생'의 활약이다. 조선의 기생은 가무는 물론, 기예, 행의, 시, 서화 등에 능한 종합 예술인의 성격이 짙었지만 일제의 지배 하에 기생은 풍속교화를 이유로 통제받는 한편, 예술이 아닌 상업적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특히 수원기생은 '수원기예조합'이라는 틀 안에 갇혀 통제를 받았는데, 이 조합에 가입된 33명의 기생들은 1919년 3월 29일, 화성행궁 봉수당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은 수원 기생들이 자혜의원에 위생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당황한 일제 경찰이 총칼을 들이대며 위협했지만,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의 시위로 주동자였던 기생 김향화는 2개월의 감금과 고문 끝에 징역 6개월 형에 처해지기도 했다.수원 기생의 '의리'는 기습적 만세운동 전에 이미 역사의 한 장면으로 포착된 바 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덕수궁 내전은 물론, 대한문 밖까지 매일 수백 명이 엎드려 통곡했는데, 1월 27일, 20여 명의 수원 기생들이 깃당목의 소복에 나무 비녀를 꽂고, 짚신을 신은 채 대한문 앞 바닥에 엎드려 '망곡례'를 행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천하다 여겼던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민중에게 큰 자극이었다. 4월 15일, 화성 제암리 교회에서 일제의 만행이 벌어지기 전까지 수원 전역의 만세운동으로 번지는 동력이 됐다. /공지영·배재흥기자 jyg@kyeongin.com일제가 작성한 조선미인보감 속에 수록된 수원기예조합의 기생들. 조합에 기록된 33명의 기생들은 1919년 3월 29일 화성행궁 봉수대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원박물관 제공

2018-02-27 공지영·배재흥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4)시흥 '연성음사']굳은 기개 詩모임 '만세운동 정신' 잇다

시흥 수암리서 2천여명 독립만세수원·군자면 등 확산 '도화선'돼일제 탄압 심화속 변절자 늘어나지역 지식인 모여 '연성음사' 결성비통한 심정 토해내는 '창구역할'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경기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25개 지역에서 도내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집회 횟수는 303회, 참가인원도 6만8천100명으로 기록됐다. 거칠고 저항적이었던 시위의 양상만큼 일제의 탄압도 잔혹해 사망자가 1천469명, 부상자는 2천677명으로 집계된다. 당시 체포됐던 사람의 수만 4천 220여 명에 이른다 하니, 경기도 민중의 독립의지가 얼마만큼 뜨거웠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경기도의 3·1만세운동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 더 현실이기도 하다. 다행히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도내 기초자치단체에서 지역의 만세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에 경인일보는 화성시 미서훈 독립운동가에 이어 지역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3·1운동의 발자취를 기록한다. ■시흥의 '연성음사''3월30일 수암리 비립동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그 곳에 모이라.' 독립운동을 알리는 격문이 시흥군 수암면 집집마다 은밀하게 돌았다. 마치 격문을 보지 못한 척 마을은 조용했지만, 민중의 마음은 요동쳤다. 30일 오전 10시, 수암리는 시흥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모인 2천여 명의 군중으로 가득했다. 당황한 일본 경찰이 해산을 명령했지만 한번 불붙은 독립의 열망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30일에 진행됐던 만세운동은 31일 수원군 반월면에서 이어졌고 4월 4일 군자면 거모리 등으로 퍼져나갔다. 시흥의 만세운동은 '비밀통고'라는 격문을 통해 민중의 독립의지를 촉발했고 지역의 지식인들이 만세 행렬의 선두 역할을 해냈기에 가능했다. 수암리 만세운동에는 윤병소 선생이 태극기를 공수해 만세 행렬의 선두에 섰으며 학교,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영향력이 큰 장소에서 더 적극적인 만세운동을 펼쳤다. 홍순칠 선생은 국유지 소작인을 대상으로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되니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라는 격문의 내용을 알리며 소작인을 선동하기도 했다. 또 조선인 일제 순사에게 만세운동을 권한 윤동욱 선생은 수암면사무소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기개를 보였다.그럼에도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의 탄압은 치밀하고 간악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변절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두고 볼 수만 없었다. 1920년 음력 5월 16일, 시흥의 지식인들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연성음사'를 결성했다. 연성음사의 서문에는 비통한 심정과 굳건한 결의가 담겨있다. '갑오년 경쟁 이후 세상의 도리가 변천하고 과거가 모두 없어졌으며, 선비의 기개가 점차 쇠약해지고 세상을 가르치는 교화함이 약해졌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 특히 비열한 세상 속 빛나는 재능을 숨겨야 했던 선비에게 연성음사는 억울함을 토해내는 창구였다. '시대의 운수가 고르지 않아 사람의 일이 어그러지니 어찌 지력으로 능히 그것을 구하겠는가?....지역에 사는 세상을 개탄하는 뜻을 지닌 선비들이 글을 숭상하는 풍습을 돕고 다시 일으키고자 시모임을 만들었다'연성음사는 1920년부터 1929년까지 시흥 뿐 아니라 전국적 규모의 한시대회로까지 발전했고 1929년 '연성음사 제일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영래·공지영·박연신기자 jyg@kyeongin.com연성음사 시첩 속표지에 기록된 내용(좌)과 군자면 독립운동 유적비(우). /시흥시 제공수암면 비석거리. /시흥시 제공

2018-02-26 김영래·공지영·박연신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3)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변기재' 선생]사회주의 이력 '주홍글씨' 연좌제 굴레 후손들 쉬쉬

수원청년동맹·농민조합 등 활동일제때 고문·투옥·감시 견뎌내순용씨, 부친 흔적 찾아 삼만리"지금의 잣대로 평가절하 안돼"올해 일흔 다섯인 변순용씨는 7살 무렵의 기억 한 조각을 지금껏 잊지 못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수원군청에서 별안간 연락이 왔다. "인민군이 군청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차렸던 것 같아.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찾는다고 연락이 온 거야. (북으로) 데려가려던 것 같은데, 어머니가 반대했지. '열심히 잘 커라. 건강하게' 이 한마디 하셨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네." 변씨는 평생 아버지 '변기재'를 지우고 살았다. 딱 한번 만난 아버지가 사회주의자로, 월북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버지가 궁금했지만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게 그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오산에 살았는데 전쟁 중에 호적이 불타 버렸어. 당시 어머니가 고아원을 했는데 연좌제가 무서워 나를 변 아무개가 버린 고아로 만들었어. 호적에 변기재 아들이면 평생 그 굴레에 갇히니까. 부모가 있는데 고아로 살았어." 해방과 한국전쟁이 지나간 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력은 주홍글씨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취직을 하려는데, 아무 곳에서도 오라고 하질 않아. 형사들이 회사마다 찾아가 뒷조사를 하니까. 내가 '요대상인물' 이래. 한번은 아버지 둘째 형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는데, 문전박대를 당했어. 빨갱이가 어디를 오냐고."그래서 원망이 컸다. 변씨는 자녀에게도 아버지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곳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친구 집에서 우연히 '수원문화사연구'라는 책을 봤는데 아버지 이름이 있었어. 책 속의 아버지는 굉장히 훌륭한 분이셨어. 평생을 원망했던 사회주의라는 것도 당시 지식인이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고." 아버지는 수원청년동맹, 수진농민조합, 오산노동야학원 등 치열한 활동을 했고 일제의 고문과 투옥, 감시를 견딘 독립운동가였다. 변씨는 아버지를 복원하고 싶었다. 어렵사리 변기재의 아들로 호적도 다시 만들었다. 아버지 흔적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나도 늙어서 아버지를 복원하려니 힘에 부쳐. 서훈도 신청했는데, 월북자는 힘들대. 평생 원망만 한 것이 죄송해. 우리 아이들이라도 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기억하면 바랄 게 없어."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친일경찰에 고통받으며 생계조차 이어갈 수 없어 쉬쉬하며 살았기 때문에 선대가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른다"며 "식민지 지식인들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다양한 이념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목표는 '해방' 하나 뿐이었다. 지금의 잣대로 그들의 독립운동까지 평가절하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학석·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변기재 선생의 일제 감시대상자 카드 전면과 후면. /화성시 제공

2018-02-25 김학석·공지영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2)화성 송산 독립운동의 대부 '홍면옥' 선생]"선생님, 모시러 왔습니다" 日 순사들도 공손

독립만세 외치다 총상입고 끌려가일본의사 치료 거부 강직함 '유명'김구등과 교류 건국준비위서 활동월북설등 '행방 묘연' 서훈 못받아후손들은 우익단체에 고통 겪기도일본 순사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면, 아들은 후다닥 방 안으로 뛰어들어와 아버지의 수첩부터 챙겨 마당 나무로 달려가 황급히 숨겼다. 아버지는 순사들이 오는데도 태연했다. "내가 수첩을 숨기면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셔. 잘했다, 못했다 얘기도 안 하고.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 홍진후 씨 기억 속의 아버지 홍면옥은 기개가 대단했다. 화성지역에 무슨 일이 났다 하면, 순사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뒤지고 홍면옥을 잡아갔다.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고 홍씨는 그 날의 감정을 떠올렸다. "순사들이 나중에는 '선생님, 모시러 왔습니다'하고 정중하게 모셔갔어. 반말이라도 하면 '이 자식들이 어디다 대고 반말을 하느냐'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거든. 끌려가시면서도 말이야."홍면옥은 송산독립운동의 대부다. 화성 송산, 서신 일대에서 명망 있는 어른이자, 불의를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화성지역 중 송산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는 선두에 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제의 총탄에 쓰러졌다. 홍면옥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은 독립의 열망에 불씨를 당기며 만세운동을 거세게 촉발했다. 끌려가서도 그는 강직했다. 일본 의사의 치료를 거부했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는 일화는 마을에서 전설과 같다. "(총상 입은 곳에) 구더기가 났는데도 일본 의사 치료는 안 받겠다는 거야. 아버지 말이 '너희가 쏘고 어디다가 손을 대냐'고 말씀하셨대. 순사가 꼬챙이로 쑤시면서 이래도 안 받느냐 했는데도. 그래서 수원까지 와 조선 한의사한테 치료를 받았어. 그게 아버지의 '정의'였어."홍면옥은 출옥 이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대교서당'을 설립했다. 대교서당에 모인 학생들은 태극기를 그리고 한글을 배웠다. "학생들 나이가 천차만별이었어. 그중에서 형들만 따로 데려다 태극기를 가르치고, 이게 국기라고 알려줬어. 아버지는 한글, 한문에도 능통해 한학에 조예가 깊었어. 그걸 아이들한테 가르치고 그랬지."해방 이후 김구, 박헌영 등 민족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던 홍면옥은 "강원도 누이네 가서 약 먹고 오마"라는 말만 남긴 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서당이 있던 그 동산에서 노는 척하며 계속 기다렸다고. 순사한테 잡혀가도 기다리면 늘 오셨으니까. 한참 뒤에 사람들이 홍면옥이 월북했다고 말했지. 이후의 삶은 말도 못해. 이렇게 늙어 죽을 때가 됐는데도 아버지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 한이 맺혀 있으니까." 사회주의 활동과 더불어 해방 이후 행적을 확인할 수 없는 홍면옥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후손들은 홍면옥이 아버지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이혜영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선임연구원은 "홍면옥의 자식 중엔 경찰이나 우익청년단체 등에 본보기로 끌려가 매를 맞고 어깨가 골절돼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는 이가 있다. 후손들은 긴 세월 침묵하며 독립운동 서훈조차 엄두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원망이 많았는데, 지금은 집이라도 팔아 비라도 하나 세워드리고 싶어. 근데 어디에 묻혀 있는 줄도 모르니…" 이제 그것이 한이라던 홍진후씨는 지난 2015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 홍면옥은 여전히 미서훈 독립운동가다(이 글은 홍진후씨의 2013년 구술조사를 바탕으로 인터뷰를 재구성했다). /김학석·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왼쪽부터 수형자카드에 붙어있는 홍면옥 선생 사진과 홍면옥 선생이 출옥후 운영한 대교서당 모습. /화성시 제공

2018-02-22 김학석·공지영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1)미서훈 독립운동가]백년을 잃어버린 '이름 없는 영웅들'

광복 73주년 공로 인정 1만명뿐유공자 발굴 기관도 변변치 않아후손이 직접 취재·증명해야할판지자체가 나서도 신원확인 한계올해로 '3·1 만세운동'이 99주년을 맞는다. 1919년 3월 1일 대한의 백성들이 광장에서 목숨을 걸고 쏟아낸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을 기리기 위해 3·1절이 국경일로 제정됐지만 100주년을 한 해 앞둔 지금, 현실은 어떤가. 광복 73주년이 지나도록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은 이가 1만여 명에 불과하다. 매년 광복절에 '건국절' 논란이 반복되며 해묵은 이념전쟁이 벌어지고 위안부, 강제징용 등 일제의 직접적 피해자들은 일본의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있다.문재인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여러 차례 독립운동가 예우를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고 숨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조사기관조차 변변치 않은 게 현실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직접 옛 문헌을 취재하고 증명해야 예우받는 상황인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사망 직전에 이른 독립운동가는 판결문이나 수형자 카드 같은 문헌기록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해 독립운동을 증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서울을 벗어난 지역의 경우라면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적 무대였던 경기도와 인천도 예외는 아니다. 전국적인 만세운동이었던 만큼 지역마다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에 참여하거나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당하지만 발굴은 쉽지 않다. 기초자치단체에서 지속적인 예산과 인력 투입이 어렵고, 막상 시도한다 해도 제한적인 정보공개와 개인정보보호법 등 실정법에 가로막혀 신원 확인조차 불가능하다.그럼에도 화성시가 2013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손잡고 지역 내 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을 조사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4명의 독립운동가가 독립유공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 정도만 알려진 화성은 전국에서 가장 격동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일본 순사를 처단한 차경규 선생과 만세운동 선두에 서 일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홍면옥 선생, 문맹 퇴치를 위해 교육에 헌신한 변기재 선생 등이 지역의 노력으로 발굴됐지만, 아직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 '미서훈 독립운동가'로 남았다.부끄럽지 않은 100주년을 맞기 위해, 경인일보는 역사 속에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집중 조명한다. 아울러 경인지역에서 뜨겁게 펼쳐졌던 3·1 운동의 흔적을 찾아 보도한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2018-02-20 공지영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1)미서훈 독립운동가 '차경규']전국 최초 日 순사 처단… 무력저항 선봉에 서다

화성 시골청년 면사무소 파괴등 앞장서일제에 체포 고문 후유증에도 후학양성독립운동 문서 어린시절 이름으로 적혀동일인물 증명할 족보없어 인정 못받아"아버지 갈비를 만지면 이렇게 부러진 게 나타나. 뼈가 툭툭 튀어나온 거지. 그렇게 몸이 안 좋으니 농사일도 거의 못하셨어. 가난하게 살았다고."아버지를 떠올리면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쥐고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독립운동가 차경규의 막내아들 차진모씨는 아버지를 그리 회상했다. "아버지는 자기 자랑을 안하셨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거야. 정작 본인은 만세 부르고 고문 당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 생전에도 차경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대했다. "나라 잃은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것이 자랑할 일인가." 평생 고문 후유증과 가난을 이고 살았지만 차경규는 결코 비굴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1919년 4월 3·1운동이 전국에 퍼지던 때, 화성의 시골청년 차경규는 당시 차희식, 차병혁, 차병한, 윤영선과 함께 화성 석포리 인근 주민을 이끌고 무봉산에 올라 횃불시위를 벌였다. 그의 나이 22세때다. 차진모씨는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분연히 일어난 거야. 시골청년이지만, 학식이 뛰어났고 의식이 있었어. 똑똑한 청년이니까 동네 청년을 규합해 만세를 부르자고 모은 거지"라고 증언했다. 차경규는 주민들과 함께 일제에 협력하는 장안면사무소로 달려갔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에 당시 장안면장이었던 김현묵은 '차봉구(차경규의 아명)가 들어와 옆구리 배를 쿡쿡 찌르고 험악한 얼굴로 가겠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서 협박을 했다…나를 전후좌우에서 에워싸고 면사무소를 파괴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한 것이 담겼다. 이어 우정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까지 파괴하고 일본순사 가와바다를 타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그 선두에 차경규가 있었다. 이정일 화성시 학예연구사는 "전국 최초로 일본 순사를 처단한 것인데, 이것이 시발점이 돼 전국 곳곳의 시위 양상이 바뀌었다. 겁을 먹은 일제가 화성지역 곳곳에 제암리교회사건 같은 대규모 학살을 벌였다"며 "일제의 탄압에 민중 스스로 무력저항한 최초의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이후 차경규는 아내의 오빠가 사는 남양 신남리로 은신처를 옮겼다. 하지만 마을사람의 밀고로 같은 해 7월 체포돼 죽기 직전이 돼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겨우 살아났지만 고문 후유증과 일제의 감시로 농사일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차진모씨는"아버지가 서당을 차리셨어. 후학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근데 동네 사람들이 곱게 보질 않아. 아버지가 요시찰 인물이었으니. 마을에 친일파들도 많았는데,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아버지를 질시했다고. 그래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르치고 그랬어"라고 말했다.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숨겨진 독립운동가다. 독립운동을 증명해 줄 문서에 '차봉구'라 적혀 있어서다. 동네 주민 모두 차봉구가 차경규의 아명(어린 시절 이름)이라는 것을 알지만, 동일인물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족보와 같은 문서로만 가능하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의 심문조서에 "차봉구가 주도해서 나갔다"는 진술이 수두룩하지만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게 차경규의 장남은 아버지의 활동이 재평가되길 애쓰다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막내아들 차진모씨는 올해 일흔아홉이다. /김학석·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독립운동가 차경규 선생과 차경규 선생의 시회활동을 보여주는 시집. /화성시청 제공

2018-02-20 김학석·공지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