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1)미서훈 독립운동가]백년을 잃어버린 '이름 없는 영웅들'

광복 73주년 공로 인정 1만명뿐유공자 발굴 기관도 변변치 않아후손이 직접 취재·증명해야할판지자체가 나서도 신원확인 한계올해로 '3·1 만세운동'이 99주년을 맞는다. 1919년 3월 1일 대한의 백성들이 광장에서 목숨을 걸고 쏟아낸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을 기리기 위해 3·1절이 국경일로 제정됐지만 100주년을 한 해 앞둔 지금, 현실은 어떤가. 광복 73주년이 지나도록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은 이가 1만여 명에 불과하다. 매년 광복절에 '건국절' 논란이 반복되며 해묵은 이념전쟁이 벌어지고 위안부, 강제징용 등 일제의 직접적 피해자들은 일본의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있다.문재인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여러 차례 독립운동가 예우를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고 숨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조사기관조차 변변치 않은 게 현실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직접 옛 문헌을 취재하고 증명해야 예우받는 상황인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사망 직전에 이른 독립운동가는 판결문이나 수형자 카드 같은 문헌기록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해 독립운동을 증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서울을 벗어난 지역의 경우라면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적 무대였던 경기도와 인천도 예외는 아니다. 전국적인 만세운동이었던 만큼 지역마다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에 참여하거나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당하지만 발굴은 쉽지 않다. 기초자치단체에서 지속적인 예산과 인력 투입이 어렵고, 막상 시도한다 해도 제한적인 정보공개와 개인정보보호법 등 실정법에 가로막혀 신원 확인조차 불가능하다.그럼에도 화성시가 2013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손잡고 지역 내 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을 조사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4명의 독립운동가가 독립유공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 정도만 알려진 화성은 전국에서 가장 격동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일본 순사를 처단한 차경규 선생과 만세운동 선두에 서 일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홍면옥 선생, 문맹 퇴치를 위해 교육에 헌신한 변기재 선생 등이 지역의 노력으로 발굴됐지만, 아직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 '미서훈 독립운동가'로 남았다.부끄럽지 않은 100주년을 맞기 위해, 경인일보는 역사 속에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집중 조명한다. 아울러 경인지역에서 뜨겁게 펼쳐졌던 3·1 운동의 흔적을 찾아 보도한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2018-02-20 공지영

[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1)미서훈 독립운동가 '차경규']전국 최초 日 순사 처단… 무력저항 선봉에 서다

화성 시골청년 면사무소 파괴등 앞장서일제에 체포 고문 후유증에도 후학양성독립운동 문서 어린시절 이름으로 적혀동일인물 증명할 족보없어 인정 못받아"아버지 갈비를 만지면 이렇게 부러진 게 나타나. 뼈가 툭툭 튀어나온 거지. 그렇게 몸이 안 좋으니 농사일도 거의 못하셨어. 가난하게 살았다고."아버지를 떠올리면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쥐고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독립운동가 차경규의 막내아들 차진모씨는 아버지를 그리 회상했다. "아버지는 자기 자랑을 안하셨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거야. 정작 본인은 만세 부르고 고문 당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 생전에도 차경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대했다. "나라 잃은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것이 자랑할 일인가." 평생 고문 후유증과 가난을 이고 살았지만 차경규는 결코 비굴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1919년 4월 3·1운동이 전국에 퍼지던 때, 화성의 시골청년 차경규는 당시 차희식, 차병혁, 차병한, 윤영선과 함께 화성 석포리 인근 주민을 이끌고 무봉산에 올라 횃불시위를 벌였다. 그의 나이 22세때다. 차진모씨는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분연히 일어난 거야. 시골청년이지만, 학식이 뛰어났고 의식이 있었어. 똑똑한 청년이니까 동네 청년을 규합해 만세를 부르자고 모은 거지"라고 증언했다. 차경규는 주민들과 함께 일제에 협력하는 장안면사무소로 달려갔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에 당시 장안면장이었던 김현묵은 '차봉구(차경규의 아명)가 들어와 옆구리 배를 쿡쿡 찌르고 험악한 얼굴로 가겠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서 협박을 했다…나를 전후좌우에서 에워싸고 면사무소를 파괴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한 것이 담겼다. 이어 우정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까지 파괴하고 일본순사 가와바다를 타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그 선두에 차경규가 있었다. 이정일 화성시 학예연구사는 "전국 최초로 일본 순사를 처단한 것인데, 이것이 시발점이 돼 전국 곳곳의 시위 양상이 바뀌었다. 겁을 먹은 일제가 화성지역 곳곳에 제암리교회사건 같은 대규모 학살을 벌였다"며 "일제의 탄압에 민중 스스로 무력저항한 최초의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이후 차경규는 아내의 오빠가 사는 남양 신남리로 은신처를 옮겼다. 하지만 마을사람의 밀고로 같은 해 7월 체포돼 죽기 직전이 돼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겨우 살아났지만 고문 후유증과 일제의 감시로 농사일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차진모씨는"아버지가 서당을 차리셨어. 후학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근데 동네 사람들이 곱게 보질 않아. 아버지가 요시찰 인물이었으니. 마을에 친일파들도 많았는데,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아버지를 질시했다고. 그래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르치고 그랬어"라고 말했다.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숨겨진 독립운동가다. 독립운동을 증명해 줄 문서에 '차봉구'라 적혀 있어서다. 동네 주민 모두 차봉구가 차경규의 아명(어린 시절 이름)이라는 것을 알지만, 동일인물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족보와 같은 문서로만 가능하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의 심문조서에 "차봉구가 주도해서 나갔다"는 진술이 수두룩하지만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게 차경규의 장남은 아버지의 활동이 재평가되길 애쓰다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막내아들 차진모씨는 올해 일흔아홉이다. /김학석·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독립운동가 차경규 선생과 차경규 선생의 시회활동을 보여주는 시집. /화성시청 제공

2018-02-20 김학석·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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