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

 

숨쉬지 마세요<17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멍하니 남편을 올려보았다. "출판기념회에 가면 우리는 그것으로 끝이야."남편의 말은 단호했다. 불끈 치밀어 오르는 주먹과도 같은 덩어리를 나는 가라 앉혔다. 더 이상 참지 말자. 이 정도면 됐어. 할 만큼 했다고, 또 다른 내가 나를 향해 속삭였다. "아니, 갈 거야. 내게는 중요한 일이거든."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편을 향해 말했다. 저녁상을 차려 놓고 나는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곧 봄이라 추위는 한풀 꺾였지만 밤 기온은 여전히 낮았다. 안방에 놓인 장롱처럼 움직이지 않던 남편이 거실로 나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내 말 잊은 건 아니지?"나는 목에 두르던 머플러를 다시 풀어 손에 들었다. "나를 믿어줘. 나는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거야.""그렇다면 내가 경고한 말을 생각 해."남편은 냉정한 표정을 지은 후,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게 선택하라는 의미일까. 일과 남편, 그런 게 선택의 문제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건 억지였다. 의자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을 거칠게 낚아채 나와 버렸다.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귀청을 흔들었다. 택시를 기다렸다. 겨울 그림자가 길게 기울어가는 늦은 오후. 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모직 머플러가 바람에 펄럭였다. 택시는 강변도로를 달렸다. 강 표면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였다. 겨울이 지나면 숨통이 트일까? 느닷없이 지하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생각났다. 겨울동안 지하에서 남편과 한철을 보내고 페르세포네는 봄에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다. 지상에서 보내는 세 계절 동안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한다. 겨울이 없으면 봄·여름·가을이 좋은 것이, 죽음이 없다면 생명이 귀한 것을 우리는 알기나 알까. 일상이 없으면 일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처럼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숨이 턱에 차올라 얼굴이 벌겋게 변할 때까지 숨을 멈췄다. 나는 운전사에게 차를 돌려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고. 내가 돌아가는 것은 상처 입은 작은 아이를 껴안아주기 위해서다. 외롭고 두려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던 작은 애였을 때 나는 누군가 위로해주기를 얼마나 바랐던지를 생각했다.세상에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선택하고 저것을 버려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앞에 놓여있는 가장 약한 것, 가장 부서지기 쉬운 것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잘못 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떠오르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내일, 모레, 먼 훗날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상처입고 신음하고 있는 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 손이 어떤 역할을 할지 나도 알 수 없다. 내가 쏜 화살의 독이라도 제거되기를 바랄 뿐이다. 상처 입은 짐승이 무모하게 덤비는 것은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을 거라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쓰러질지 어느 한 쪽만 살아남을 지.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것이다. 지금은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택시는 느리게 집으로 가는 길을 거슬러 달렸다. 서쪽 하늘에 짙은 보랏빛 구름이 천천히 흩어졌다.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2007-12-2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남편은 어디로 가지도 않았고 나를 피하지도 않았다. 기묘한 동거가 이어졌다. 남편은 내가 연기나 그림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나 밖에 나가 밥을 사먹고 돌아 온 후, 안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작은 방은 내 영역으로 인정하는지 주방과 작은 방 근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거르지 않고 식탁을 차렸다. 밥을 하고 찌개나 국을 끓였고,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평소와 같이 아침을 차리고 점심과 저녁상을 보았다.남편과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남편도 나도 약점 투성이의 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힘들고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심정이었다. 언뜻 생의 한 자락을 스쳐보았고, 삶의 골짝에 비밀을 엿본 것 같았다. 남편의 상처를 혀끝으로 핥아주고 싶었다. 예전에는 눈살이 찌푸리던 약점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이제야 남편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원한다면 나는 어제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남편이 상처를, 그렇게 말하면 너무 뻔뻔스러운가, 내가 쏜 독이 묻은 화살 때문에 입은 상처를 치유할 때까지 나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나는 이토록 담담한데 남편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남편에게 미안했다. 세상에는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스스로 극복하고 일어서지 않으면 남편과 나의 미래도 없었다.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남편이 바닥을 딛고 일어서기를 바랐다. 시간이 걸려도 참겠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똑같아 보여도 어제와 같은 오늘, 조금 전과 같은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었다. 남편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작정이었다. 얼어붙은 땅도 봄이 오면 풀리게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 이치였다. 전병헌이 그리고 내가 쓴 만화가 모두 완성되었다. 정신희가 10권의 책을 집으로 보내주었다. 전병헌은 내가 쓴 스토리를 거의 건드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오히려 이런 부분은 조금 손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전병헌의 작업에서 그가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전병헌에게 감사하다고 전화를 하고 싶었다. 전병헌이 보고 싶었다. 전병헌에게는 자신의 실수나 결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내공이 있었다. 아픔을 극복하는 순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 날마다 변하는 다른 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칩거하고 있는 안방을 바라보았다. 남편도 언젠가는 빠져나올 것이다. 시간이 걸릴 뿐, 전병헌에게 전화를 하려고 들었던 수화기를 도로 놓았다. 전화를 하지 않아도 전병헌은 느낄 것이다. 그의 그림으로 그를 추정하듯, 내가 쓴 스토리로 그는 나의 상태를 느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을 깨달았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처럼 마음이 평화스러웠다. 남편이 볼 수 있도록 식탁 위에 내 책을 올려두었다. 겨울이 지나갈 무렵, 출판기념회가 있다고 정신희가 전화를 했다. 나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편은 암체어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출판기념회에 같이 가자.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바람도 좀 쐬고."남편은 내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늘 그런 지라 화도 나지 않았다. "내 책도 좀 읽어 봐. 잘 팔리니까 아마 당신이 읽어도 재밌을 거야."벽에다 대고 중얼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받아야할 대가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근처에 흩어진 신문을 정리하려고 남편의 발 아래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출판기념회에 그 사람도 와?"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얼굴에 날카로운 긴장이 서려있었다.

2007-12-2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남편은 탁자 위로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움켜잡았다. 빈 캔과 잔이 식탁에서 떨어졌다. 유리잔이 깨졌고 맥주 캔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순식간이었으므로 저항할 새도 없이 나는 남편의 손에 목을 내맡겼다. 깊은 물 속에 잠긴 듯 숨이 가빠왔다. 온 몸의 피가 얼굴로 쏠렸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 남편은 양 팔에 자신의 전 체중을 실었다. 어느 순간, 눈이 앞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에서 폭이 넓은 허연 광목천이 펄럭거렸다. 작은 불티가 사방으로 튀어 올라 하얀 천에 옮겨 확 불이 붙었다. 나도 모르게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 깜짝 놀란 남편이 내 목을 놓았을 때 기침이 튀어나왔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져 오래 기침을 했다. 남편은 늘어진 내 몸을 들어올려 흔들며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복수하는 거야?"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힘겹게 손을 들어 내저었다. 남편의 얼굴이 내 코앞에 있었다. 남편의 눈 속에서 겁에 질린 작은 소년을 본 것 같았다. 상처입고 버림받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 약한 아이.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남편을 안아주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내가 저지른 일이 살해당한 짐승의 내장처럼 시뻘건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은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불 맞은 짐승처럼 작은 방으로 뛰어들었다. 책장에서 책이 쏟아지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났고 무언가 퍽퍽 깨져나갔다. 눈을 감고 바닥에 널브러져 내가 한 행동의 결과를 듣고 있었다. 죄다 부수고 깨고 짓이겨도 좋으니 제발 당신 자신을 다치게 하지는 마. 나는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을 부수지는 마. 베란다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려오는 눈 사이로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지독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침묵했더라면, 차라리 내가 괴롭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뚱이가 수은처럼 바닥에 스며들어 가라앉았다. 손바닥에 유리조각이 만져졌다. 손을 치울 기운도 없었다. 가는 실눈을 뜨고 바닥에 몸을 맡긴 채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까무룩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하얀 빛이 거실 가득 차있었다. 아침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과 빈 캔이 굴러다니는 혼돈 속에 누워있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역시 꿈이었구나 하고 다시 깨어날 것을 바랐다. 잠은 오지 않았다. 몸살이 난 것처럼 온 몸뚱이가 결리고 아팠다. 작은 방의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책과 노트, 연필꽂이에서 쏟아져 나온 필기구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책무더기에 걸린 문을 억지로 밀고 방으로 들어갔다. 찢어지고 펼쳐진 책 더미 사이에 뚜껑이 떨어진 노트북이 묻혀있었다. 망가진 노트북을 들어올렸더니 그리스에서 사온 음반이 꺾여 있었다. 미서에게 빌렸던 두꺼운 국어사전은 뽑혀나간 머리칼처럼 뭉텅 찢겨 속이 반은 비어있었다. 망가진 음반과 국어사전을 집어 들었다. 분노로 손이 떨렸다. 남편의 분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어디에도 없는 남편을 향해 외쳤다.'도망 가. 도망가란 말이야. 활을 든 것은 나야. 당신은 맨 몸이야. 덤비면 쏠 수밖에 없어. 무기도 안 든 당신을 쏴야 한다고. 다치거나 죽을 지도 몰라. 어디로든 피해.'

2007-12-2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남편은 빈 캔을 손아귀에 넣고 움켜잡았다. 남편은 쓰레기통에 찌그러진 맥주 캔을 던져 넣었다. 나는 캔 맥주와 조미된 오징어를 샀다. 종업원이 건네주는 비닐봉지를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길을 걷는 동안 남편의 침묵이 바위처럼 나를 눌렀다.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는 눈길을 거슬러 걸어 집으로 갔다. 나는 슬그머니 남편의 외투 주머니에 내 손을 집어넣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납으로 만든 추가 가슴 한 복판에 무겁게 드리워졌다. 남편은 내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는 남편의 손은 나무토막 같았다. 남편이 내 손을 뿌리쳐주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나는 신발의 눈을 터는 척하며 남편의 외투 주머니에서 슬며시 손을 빼냈다. 꽉 막혔던 숨통이 터지는 듯 나는 천천히 숨을 내 쉬었다.유리잔을 꺼내고 조미된 오징어를 사기 접시위에 가지런히 찢어 놓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남편은 석고로 만든 가면이라도 쓴 것 같았다. 두 개째의 캔을 비울 때까지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찍게 된 동기와 정황을 설명했다. 길지 않은 내 말이 끝났을 때 남편이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듯 내게 물었다."작업실을 빌려주고 그리스에 함께 갔고 작품 사진을 찍은 것이 모두 이형수?"이형수와는 그냥 일을 함께 한 사이일 뿐이라고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남편의 눈에는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고통이 담겨있었다. 남편은 허공을 보았다. 남편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왜 변명도 하지 않지?"남편은 거칠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게 말하려고 나는 안간힘을 썼다. 몇 번이나 입술을 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일본에 있을 때 나는 절망에 빠졌던 적이 있었어."남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할 때, 나는 금방 알 수 있었어. 당신이 그때처럼 생기에 차고 건강해 보인 적이 없었거든. 그 여자를 만나고부터 당신은 바다에서 펄떡이며 뛰어오르는 생선 같았어."금속처럼 차갑게 빛나던 남편의 눈빛이 한 순간 꺾여 안개가 낀 듯 흐려졌다."그때 나는……. 나는 말이야……."남편은 더듬으며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을 죽이고 그 여자도 죽여 버리고 싶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어떻게 해야 당신들을 죽일 수 있는지를 몰랐거든. 그래서 나를 죽였어. 그게 당신들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쉬웠거든."몹시 목이 말랐다. 잔을 들어 가득 차 있는 맥주를 끝까지 다 마셨다. "내 속에는 상처입고 버림받아 망신창이가 된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작은 애가 이제 성인이 되었어. 당신을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아니,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어." 남편은 의혹에 찬 눈으로 다그치듯 쏘아보았다. 단숨에 마셔버리고, 탁자 위에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는 것처럼 한 순간 나 자신을 내려놓았다. 텅 빈 잔처럼 잠시 시간이 멈췄다.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야."남편은 벼락에라도 맞은 듯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이 형수. 그 사람은 아니야."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남편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2007-12-2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내 작품 사진이 어떻게 해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컴퓨터에 대한 내 능력은 파일을 첨부해서 메일을 보내는 수준이다. 그런 실력으로 사진의 출처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행인 것은 나의 누드 사진이 단순한 흥밋거리인 것만은 아닌 거였다. 선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의견들 옆에는 근원에 대한 탐구와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평가도 함께 있었다. 해설에 곁들인 사족과도 같은 언급에는 미서와의 우정, 미서의 여행기, 신화 속의 여신과 사랑의 스토리를 쓴 과정을 소개하고 있었다. 미서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그리스 여행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마우스를 움켜잡고 나는 컴퓨터를 노려보았다. 독자의 반응이 좋은 책을 광고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은 재판에 들어갈 때다. 운이 좋으면 마른 잎에 불이 일듯 독자가 따라붙는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출판사측을 비난할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미서와 어릴 적부터 친구인 내가 여행기를 정리했고, 친구의 자취를 따라 여행을 하면서 만화 스토리를 썼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책이 많이 팔리면 출판사 뿐 아니라 작가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쁨보다 분노가 먼저 일어났다.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공개된 장소에 전시된 작품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전시가 끝난 후, 내 작품을 회수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작품을 회수했더라도 이런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전시회 날, 내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던 송기자가 떠올랐다. 최소한 선배는 미서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신희일지도 모르겠다.허깨비처럼 오래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마음이 조금 가라 앉았다. 문득 이용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왜 이용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의아했다. 남편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도 출판사가 나와 미서를 이용했다고 생각했을까. 아닐 것 같았다. 남편이 모르고, 책이 잘 팔리면 그런 단어를 생각할 리가 없을 것이다. 누드 사진 뿐이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남편을 설득했을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남편은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냥 작품일 뿐이다. 단순히 사진을 찍었을 뿐이라고 남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나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안개 자욱한 들판에 함께 가던 일행을 놓치고 홀로 서있는 것 같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남편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남편의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왔다. 발밑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가로등 불빛이 떨어지는 길 근처는 은가루를 뿌린듯 반짝거렸다. 부는 바람에 흩날린 눈가루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은빛 입자가 눈썹 끝에 내려앉아 작은 이슬이 되었다. 남편의 외투를 움켜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에 홀로 걸어 간 발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 갔다. 슬리퍼 속의 맨 발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발자국은 주차장을 지나 편의점 쪽으로 가고 있었다. 밤새도록 문을 여는 편의점이 어두운 밖을 향해 자신의 내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불을 밝힌 편의점은 어두운 들판에서 쳐다보는 기차 같았다. 네모난 창마다 창백한 얼굴을 담고 있는 기차처럼 남편은 편의점의 유리문에 박혀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낯익은 종업원이 계산대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컵라면이나 커피를 끓여먹는 조리대 앞에 서서 어두운 밖을 향해 서 있었다. 남편의 어깨 위에 가져간 외투를 올려주었다. 남편의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2007-12-2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아침부터 굵은 눈송이가 쏟아지던 날, 강민기가 전화를 했다. "재판 들어갔다. 선영아, 축하한다."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 끝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탈진한 듯 몇 날 며칠 잠을 자고 난 후처럼 멍해 있던 날들이었다. 수화기를 들고 나는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전화기 저편의 강민기는 벌써 사라졌는데 나는 여전히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남편은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다. 친구의 회사에 나가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진행중이 될지도 몰랐다. 남편은 거의 외출도 않고 종일 인터넷에 매달려 있었다. 남편도 비워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평생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지탱해주기 위해 애쓴 날들이었다. 자발적이라 해도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화기를 놓고 남편에게 갔다. "책이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재판 들어갔대. 당신 매니저로 고용해도 되겠어."나는 남편의 뒤쪽에서 어깨를 팔로 안았다. 남편은 말없이 한 손을 올려 내 손을 잠깐 잡아주었다. 그 손길은 '방해하지 말아 줘'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남편의 어깨에서 손을 풀어내고 방을 나왔다. 등 뒤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조그마한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강민기는 출판사로 오라고 말했다. 나는 눈 내리는 정원을 내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전병헌이 아직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봄에는 전량을 서점에 내기 위해서 잠시도 쉴 틈이 없을 것이다. 전병헌이 작업을 끝내면 함께 보도록 해요. 내 말에 강민기는 좋아, 유쾌하게 대답했다.고속도로가 두절됐고, 산간의 도로가 끊겼다. 텔레비전의 뉴스는 온통 눈에 대한 것 뿐이었다. 미끄러져 앞차와 부딪쳐 찌그러진 승용차와 고속도로에서 뒤집힌 대형트럭 뒤로 줄줄이 일어 난 추돌사고, 죽은 사람들과 다친 사람들.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위에 피로 얼룩진 대형 사고들이 화면을 채우고 또 채웠다. 남편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않고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말도 없었고 저녁 식사도 거른 채였다.뉴스가 끝나고 밤이 늦었는데 남편은 꼼짝도 않았다. 책을 읽다가 시계를 올려보았다. 자정이 가까워졌다. 눈 쌓인 풍경이 좋아서 커튼을 걷었다. 하얀 눈이 반사한 빛 때문에 밖은 백야처럼 훤했다. 나무와 건물 지붕이 부드러운 선으로 변했다. 남편의 마음에도 수북이 눈이 내렸으면 싶었다. 남편을 방해하지 말고 안방으로 들어갈까 망설였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는 내버려두는 것도 필요했다. 하지만 한 공간에서 무심한 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남편이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일어나 몇 번 목청을 가다듬었다. 방문을 열고 문턱에 서서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척을 냈는데도 남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나는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편의 어깨 너머로 컴퓨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화면을 보고 놀란 것과 동시에 남편은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남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조금 사이를 두고 현관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문이 부서지는 것처럼 큰 소리가 났고, 아파트 벽체가 부르르 떨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리 속이 헝클어진 전선뭉치가 되어 정지해 버렸다.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나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몸을 내렸다. 화면에는 가을 전시에 출품했던 내 작품이 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었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 이었던가? 지금은 제목도 얼른 기억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2007-12-2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완성된 스토리를 밀어내면서 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본 산천의 풍경과 유적,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물품과 의복같은 것들이 상상력을 끌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작업실에는 전화나 인터넷이 되지 않아서 강민기나 정신희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믿고 나는 내 방식대로 스토리를 써나갔다. 만화 스토리의 전체 분량 중 이미 절반가량을 넘기고 있었다. 중국집 창을 통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다가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아침에 집을 나와 밤늦게 돌아가면 나는 주방에 붙어 서서 몇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피곤하고 바빠도 반찬을 만들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을 플라스틱 그릇에 넣어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이어주는 최소한의 끈이었다. 남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스토리는 다 짜여있어. 쓰기만 하면 돼. 길면 한 달, 빨리 쓰면 그 전에라도 끝나."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시간은 바람처럼 왔다가 재차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뒤섞이는가 하면 어느 순간 도로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작업실에서 내가 만든 인물들과 놀 생각을 하면 온 몸이 근질거렸다. 현실을 떠나있는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현실 같았다. 언 손을 가끔 엉덩이 아래에 넣고 어깨에 걸친 두꺼운 모직 숄의 온기를 턱으로 문질렀다. 해가 좋은 날은 중국집의 넓은 창을 통해 옅은 황금색 볕이 폭포수처럼 책상위로 쏟아졌다. 빛의 입자는 방의 구석구석을 채우며 온기를 피워 올렸다. 가끔은 창을 조금 열어 환기를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한 때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 앉아 식사를 했을 둥근 탁자를 두고 집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는 것은 몹시 서운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탁자를 쓰다듬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정인을 보내는 것처럼 손끝에는 슬픔이 고였다. 남편의 곁에 누워 눈을 감으면 중국집에 두고 온 신화가 어른거렸다. 내 영혼은 중국집에 두고 허물 벗은 매미처럼 빈 껍질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여사제가 된 나는 신탁을 받기위해 몽롱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신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집으로 스며들었다가 소리없이 빠져나왔다. 작업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끝나기를 원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두려웠다. 남편과 이룬 십년의 세월이 내가 발을 빼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온전할까. 그렇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발을 빼고 싶은 강열한 유혹이 엄습해 왔다. 그럴 때 나는 꽁꽁 언 손으로 양 볼을 감쌌다. 얼굴을 통해 전해지는 냉기가 두개골을 자극하면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작업이 얼른 끝나기를, 따뜻한 아파트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내가 만든 세상이 책 속에서 완성되는 날, 환상이 사그라질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밀려왔다 가버리는 파도처럼 글을 쓰는 일은 때로 열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간도 필요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스토리를 붙들고 미적거렸다. 대단원의 결말을 보내지 않고 하루동안 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진눈깨비가 비처럼 쏟아지던 저녁이었다. 앞의 책들은 이미 인쇄에 들어간 상태라고 정신희가 이메일로 전해주었다. 봄에는 10권 모두가 서점에 깔릴 예정이었다. 반응이 어떨 것 같으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글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반응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겨울동안 나는 처음 내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2007-12-1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일본에서 살 때의 경험을 떠올렸다. 탁자 주변에 커튼처럼 천을 늘어뜨린 후, 백열등 스탠드를 켜 두었다. 책상 아래는 마치 천막을 친 것처럼 커튼으로 드리워진 공간이 생기고 백열등에서 나온 열이 그 속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더워진 공기는 빠져나가지 않고 탁자 아래에 머물러 엉덩이 아래 부분은 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따뜻했다. 그것은 온돌이 없는 일본에서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사용하는 고타츠 같은 것이었다.손이 시리면 천을 들추고 백열등으로 따뜻해진 탁자 아래쪽으로 드밀었다. 그러나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다보면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손이 꽁꽁 얼곤 했다. 노트북 속에는 스토리가 쌓여갔고, 이야기는 가닥을 잡아 갈등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린 손을 허벅지에 갖다 대고 녹일 때면 잠시 슈바빙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전혜린이 떠올랐다. 물론 전혜린이 쓴 수필집에서 읽은 장면이었다. 난로도 피우지 못하는 추운 집에서 옷이란 옷을 죄다 껴입고 책을 보고 있는 유학생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은 그런대로 낭만적이었다. 나는 가끔 다리미에 식빵을 굽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것은 모두 추위와 연관된 에피소드들이었다. 겨울은 인간을 비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짬짬이 얼어붙은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과거의 강으로 미끄러져 간 동화, 한 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떠올리며 겨울을 찬양했다. 그러나 깊어가는 겨울 추위는 혹독했다. 특히 진눈깨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탁자 아래의 백열등이 혹시 꺼져버렸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형수의 허락도 없이 그의 전기스토브와 이동식 난방기를 꺼내 와 사용했다. 추위때문에 작업을 못하는 것보다는 매너가 없다는 말을 듣는 게 나았다. 설마 이 추위에 난방기기를 좀 사용했다고 나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더이상 나를 태우기 위해 작업실에 오지 않았다. 작업실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데리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이 오는 시간이 가까워지면 그때부터 더 이상 글이 써지질 않아. 심하면 두 시간이나 세 시간 전부터 말이야. 내가 알아서 갈게." 그 말을 했을 때 남편은 의아한 눈빛을 서서히 내 쪽으로 돌려 나를 보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 무언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남편의 그런 눈을 보았을 때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당신을 생각하면 내 자유로운 사고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려. 더이상 이야기를 만드는 상상력이 생기지 않아. 당신이 정해준 그 시간을 생각하면 창의력 같은 것은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단 말이야.'차마 이런 식으로 고백할 수는 없었다. 너그러운 남편이 늦은 밤 나를 데리러 와주는 것에 감사를 해도 부족한 지경에 말이다. 그때 남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남편은 이해한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이 좋을대로 해. 너무 춥거나 날씨가 나빠서 불편하면 전화를 해." 남편은 흔쾌히 말했다. 반면 내 가슴은 죄책감에 오그라들었다. 남편은 나를 속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데리러 좀 일찍 도착한 날은 추운 날씨에 차 안에서 시동을 끈채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린 날도 있었다. 남편이 왜 나를 구속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창의력과 상상력이 남편때문에 제한된다고 여겼을까. 나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남편이 도착할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에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자료가 클릭 한 번으로 단숨에 날아가듯 오솔길처럼 수없이 갈라지던 많은 이야기들이 빛이 들어간 필름처럼 깡그리 지워지는 것이었다.

2007-12-1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온 몸에 한기가 들었다. 두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제야 이곳에 난방이 전혀 안된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외투를 걸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관절 마디에 석고를 부어놓은 것처럼 삐걱댔다. 주방으로 가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가스 불을 켰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은 급속도로 냉각되는 모양이었다. 의자를 끌어 당겨 불 곁에 앉아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이곳에서 계속 작업을 하려면 난방 기구정도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형수는 이곳에서 어떻게 겨울을 날까? 물이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겨울 동안 이형수가 지방으로 혹은 밖으로 오랫동안 출사를 나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끓는 물을 컵에 부어 홍차 티백을 우려냈다. 남편이 데리러 온다는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작업에 몰두했던 시간이 잠깐이었던 것 같았다. 뜨거운 차를 넘기니 몸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 와 커튼을 쳐 한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두터운 커튼이 넓은 유리창에 드리워지자 기분이나마 한결 나았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책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 실내를 서성대며 걸어 다녔다. 스토리에 살을 붙이는 작업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이곳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트북과 책을 정리해 탁자 위에 올려두고 손가방만 집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래 위 턱이 마주쳐 소리가 났다.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동태가 되어버릴 지도 몰랐다. 카페에서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지금 여기서 출발하려고 해. 너무 추워서 기다릴 수가 없어."남편은 다 왔으니 카페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빠른 시간이라 나는 어리둥절했다. 전화기를 놓고 카페에 앉아 십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나타났다. "집에 있으려니 심심하고 할 일도 없고 해서 일찍 나왔어.""이렇게 일찍? 일이 안 끝났으면 어떡하려고?""차 안에서 기다릴 작정을 했어. 작업은 잘 돼?""낯선 공간이라 잘 적응이 안돼."그 말은 절반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한 후, 십여 년 동안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했던 적이 없었다고 하면 이해할까. 내 시간을 가졌던 시간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 남편이 무어라 반응할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뭘 할 것인지 사실 나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자신? 그리고 자유? 어떤 자유? 뭘 위한 것들? 만화스토리의 주인공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점처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현실로 돌아오면 내가 빈 껍질처럼 느껴져.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충실한 보호자처럼 나를 운전석 옆자리에 앉히고 히터를 넣었다. 발아래 쪽에서 더운 공기가 뿜어져 나와 딱딱하게 얼었던 종아리와 허벅지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추위에 갇힌 밤거리는 냉정하게 빛을 반사했다. 차가운 공기는 투명한 법이어서 멀리서 다가오는 건물과 길, 그리고 다른 차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말이야. 혼자 있는 그곳에서 자유로웠어. 완벽하게 나를 잊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어. 아아, 이젠 집에서 작업을 할 수 없을 지도 몰라. 말하자면 자유의 맛을 본 노예가 뻔히 잡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도망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랄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와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기위해 직장을 잡으려고 애쓰는 남편. 그런 남편도 자신의 존재이유가 직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이다.

2007-12-1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중국집의 빈 방에서 처음 한 일은 책상을 만드는 거였다. 중앙 홀과 다른 방을 뒤져 책상으로 쓸 적당한 테이블을 찾아냈다. 노트북을 얹고 참고로 볼 책이나 다른 자료를 둘 만큼 넉넉한 크기였다. 탁자를 내 방으로 옮겼다. 다리가 상하거나 부러지지 않게 조금씩 탁자를 바닥에 끌어 당겼다. 창 곁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노트북을 올렸다. 가지고 온 책을 꺼내 한 쪽 구석에 쌓았다. 먼지를 닦아내고 대걸레로 바닥을 밀었다. 자줏빛 우단으로 된 커튼만 아니라면 그럴듯한 작업실로 보였다.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 와 창을 마주 보고 앉았다. 창을 통해 길게 들어오는 겨울 햇살, 미술관의 돌담과 가는 붓으로 터치를 한 듯 수없이 중첩되어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들, 기하학적으로 어긋난 직선을 연상하게 하는 미술관의 지붕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연두 빛 마을버스가 느리게 지나갔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친밀감이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며 나는 햇살이 사선으로 떨어지는 탁자 위에 손을 내밀었다. 햇살은 조금씩 길어지면서 창에서 물러났다. 잔에 남은 커피를 마시다 조금 놀랐다. 어느 새 커피가 싸늘하게 식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노트북의 전원도 넣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시간이 지나간 것이었다.아주 잠깐, 나는 자유의 꼬리를 슬쩍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이 당황스러웠다. 집에서도 혼자되어 글을 쓸 때가 있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나면 오롯이 나 혼자만 남았다. 하지만 중국집 창가에 앉아 있는 지금의 느낌은 그것과는 달랐다. 온통 나 자신의 것, 완벽하게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진 것 같았다. 조금은 고독했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기이한 감정에 다소 얼떨떨했다. 무어랄까, 남편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섹스를 하는 내가 마치 빈 껍질처럼 여겨졌다. 이곳에 앉아 차츰 기울어지는 햇살 때문에 추위를 느끼는 내가 진짜 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진짜인 나는 언제까지나 여기 이렇게 있고 가짜인 내가 집으로 돌아가 청소를 하고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일을 처리하고, 남편과 함께 앉아 일상을 나눌 것 같았다.나는 당혹스러웠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얼른 노트북을 켰다. 그동안 짜놓았던 이야기의 얼개를 화면에 띄웠다. 남편과 공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게 여겨지는 죄의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노트북에 코를 박았다. 빈 종이에 스토리를 그려 넣었다. 주제로 이르는 무수히 많은 길이 그어졌고, 길 위에서 나그네를 방해하는 괴물과 갈등 요소가 검은 사인펜으로 그려졌다. 주인공이 도달해야 하는 높은 곳, 혹은 한없이 낮은 곳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것만 명쾌하게 알 수 있다면 내 글은 최소한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검정 사인펜으로 제 2갈등이 끝나는 지점에 두 번째 갈등이 나타나고 그 갈등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갈등이 등장하는 스토리를 스케치했다. 만화스토리는 최소한의 얼개와 등장인물과 각 인물들의 목표정도는 그려놓고 시작을 해야 중간에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빠지지 않는다.에이포 용지에 대강의 스토리가 드러났다. 나는 스카치테이프로 열장에 이르는 종이를 나란히 중국집 유리창에 붙였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고치고 재구성을 해야 한다. 스토리가 변하면 그때마다 거기에 해당되는 종이는 떼어 내고 새로운 이야기로 짠 개요를 대신 붙이면 된다. 중국집 유리창에는 하얀 종이가 아래 위 두 줄로 나란히 붙었다. 그제야 나는 사방이 깜깜해진 것을 깨달았다.이곳에서의 내 첫 작업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 것이다.

2007-12-1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자동차가 천천히 언덕을 올라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자동차 뒤로 밀려나는 카페를 바라보았다. 마치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장소를 눈에 넣어두려는듯 카페를 바라보았다.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남편의 말에 후다닥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아니야. 키 작은 나무에 감아놓은 전구들 말이야. 밤이 되면 불을 켤테고, 그러면 저 나무들이 괴롭지 않을까 해서.""나무가 뭘 알겠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거지.""톱으로 썰려고 하면 나무가 두려워 소리친대.""여기야?" 남편은 중국집 앞에 차를 세웠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새 주인을 찾지도 않고, 건물 옆 공터에는 회색빛으로 변한 잡초 무더기만 누워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올라가서 문을 열게."나는 이형수에게서 받은 열쇠를 들고 건물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자 어두운 건물 내부의 냉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이층은 말끔히 정리 되어 있었다.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올리고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내가 벌거벗고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사진은 누가 챙겨두었을까? 미서가 죽은 후, 나는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 한 번도 이곳에 오지 않았다. 빈 공간을 둘러보며 이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갔다. 미서와 전병헌이 어두운 구석 어딘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몇 번이나 텅 빈 공간을 뒤돌아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은 커튼을 내려놓아 어둑했을 뿐, 사물을 분간할 만큼 빛이 있었다. 중앙 통로를 가로질렀다. 안쪽에 걸린 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밝은 빛을 등지고 누군가 문 앞에 우뚝 서있었다. 전병헌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반가워 소리지를 뻔했다. 그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뎌 문을 들어서 중국집 안으로 들어섰다. 남편이었다. 등 뒤에서 비추던 빛이 사라지고 어둑한 내부에서 전병헌이 마술을 부려 남편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무엇이었을까. 그런 마음은. 무의식이었을까.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생각이 환영을 보게 만든 것이었을까. 남편은 가만히 서서 중국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많은 문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 있고, 오래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모든 것들에 옅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전병헌으로 착각한 것이 미안했다.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의도적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의 마음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전병헌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방문을 열었다. "여기야."남편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우물거렸다. 남편은 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 바퀴 둘러보았다. "춥지 않을까? 책상은?""난로 피우면 돼. 홀에 있는 탁자 아무거나 갖다 쓰면 되고."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나는 몸을 돌려 남편을 바라보았다. "당신 좀 안아도 돼?"나는 머뭇거리며 물어보았다. 남편은 말없이 내 등 뒤로 팔을 둘러 안아 주었다.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왜? 심란해서?"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이 찔끔 솟았다. 남편의 어깨에 눈을 갖다대고 눌렀다. 눈에서 삐져나온 눈물이 남편의 점퍼에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당신이 고마워서." 나는 눈을 감은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2007-12-1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남편은 순순히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시내는 좀 멀지 않아? 어떻게 다니려고.""한 달 가량인데 뭐. 대신 저녁에 좀 늦게 올게."점심을 먹고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돌아오기로 했다. 일이 너무 쉽게 해결되어서 약간 어이없었다. 남편에게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의 겸손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시련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마련일까? 다음 날, 남편은 작업실까지 나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노트북과 우선 봐야 할 책들을 챙겼다. 그리스에서 사온 시디를 가방에 넣을까말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다. 오디오는 이형수의 스튜디오에 놓여있었다. 미서의 여행기의 사진을 넘긴 이형수는 지방으로 출사를 떠났다. 언제 오냐고 물었을 때 이형수는 오고 싶을 때 온다고 대답했다. 이형수다운 말이었다. 그가 없을 때 그의 물건을 멋대로 사용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물론 이형수라면 그런 일에 그다지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당장 음악을 못 듣는다고 별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의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묶었다. "실업자 되니까 좋은 점도 있네.""영원히 이렇게 살까? 당신 운전사 노릇이나 하면서 말이야.""내가 돈 잘 버는 작가가 된다면 그것도 괜찮지. 매니저가 되어 계약도하고 판권 관리도 하고 말이야."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 한 번 해봐. 당신 덕에 놀면서 살아보게.""당신이 밀어서 잘나가는 작가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 글이란 놈은 어디로 튈지, 어디로 사라져버릴지 모르니 문제지."나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작가를 보면 그의 빛나는 재능이, 재능을 놓치지 않고 한 손에 틀어쥐는 능력이 부럽기는 했다. 내게는 먼 나라의 일이었다. 내 앞에 놓인 일을 하기에도 나는 숨이 차다. 글이 끝난 후는 늘 조마조마하다. 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강민기가 이번 책은 내 이름으로 출판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신인 공모전에 출품을 해서 객관적으로 평가를 받을 기회마저 사라졌다. 출판시장에서 잘 팔리느냐 아니냐에 글의 생명이 달렸다. 어찌 보면 공모전이나 시장이나 결국에는 마찬가지이지만 시장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은 좀 더 가혹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씩이나 공모전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바로 시장으로 진입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고. 내 일이 다른 사람의 일보다 더 힘들고 어렵고, 남의 손에 든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남편은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에 돌로 벽을 두른 미술관 이름을 입력했다.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오면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곳이 삼십분도 채 안 걸렸다. 남편은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길을 올랐다. 길옆에 가로수는 잎이 다 떨어졌거나 바싹 마른 잎을 빈 가지에 몇 개 달고 있었다. 전병헌과 앉아 맥주를 마시곤 하던 카페는 외부 테라스 쪽에 유리처럼 비닐을 둘러놓았다. 안개등이 서 있는 작은 정원에 키 낮은 나뭇가지에는 작은 전구 알을 감싸놓았다. 밤이 되면 수많은 전구들이 명멸할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카페는 순식간에 동화의 나라로 변신할 것이다. 나무에 휘감긴 빛이 없는 알전구들을 바라보았다. 날 위해 빛나던 많은 별들이 일제히 빛을 거둔 것 같았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전병헌을 떠올렸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07-12-1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여행이 끝나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미서의 여행기는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었다. 나는 강민기의 권유대로 만화스토리를 쓰기로 했다. 미서가 남긴 엽서와 메모와 자료를 들춰보면서 스토리를 어떻게 짤 것인지를 궁리했다. 책장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다 미서에게 빌렸던 사전을 발견했다. 손끝으로 가만히 사전을 문질러보았다. 누구에게 돌려줘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그리스에서 산 두장의 시디를 사전 옆에 같이 꽂아두었다. 누구에게 어떻게 돌려 줄 것인지는 일을 끝내고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책상에 앉아 빈 종이에 스토리의 얼개를 대강 그려보았다. 등장인물과 주인공의 목표를 정하면 반은 쓴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백지위에 그림을 그렸고 글자를 끼적거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머리 속에는 주인공 외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백지 위에는 뜻을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글자만 씌어 있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온 신경이 스토리를 위해 모여들어 전력투구를 해야 하는데 산산이 흩어져 허공을 부유했다. 정오가 지났으니 점심을 준비해야 했다. 남편은 친구 회사에 간다고도 가지 않겠다고도 확답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따금 시내에 면접을 보거나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냈다. 남편이 결정하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생각했다. 쓸데없는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다. 보던 책과 자료를 덮어두고 방을 나갔다. 토스트와 계란과 커피로 간단히 먹은 아침을 보충하기 위해서 점심을 준비하는 시간은 다소 길었고 번거로웠다. 도마 위에서 단칼에 잘라지는 두부나 양파처럼 겨우 가는 실처럼 이어놓은 스토리 라인이 가차 없이 잘려나갔다. 찌개가 끓는 동안 주인공과 인물들을 둘러싼 사건이 형체도 불분명하게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글을 쓰는 시간은 짬짬이 건너뛰는 자투리 시간이 아무리 많아야 소용없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조용히 발효되는 술처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남편에게 텔레비전을 켜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소리를 아무리 죽인다 해도 신경이란 놈은 묘하게도 전자파의 충격을 감지했다. 공중을 퍼져나가는 전자파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건 교란시켰다.나는 서서히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 방해꾼은 남편이었다. 작업공간에 나와 다른 주파수를 가진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남편의 움직임을 주시했고 지극히 작은 소음도 포착했다.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양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이러다가는 남편을 묶어 쓰레기 수거함에 집어 던질지도 모른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남편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남편이 식탁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물었다. "커피 줄까?"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로 가 아침에 다 본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질끈 눈을 감는 심정으로 말했다. "집에 있으니 일이 잘 안돼. 작업실 빌려서 그곳에서 일했으면 해."남편은 신문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난 번 전시회하던 장소 말이야. 늘 비어있으니 아무 때나 필요하면 사용해도 좋다고 그랬어.""어디라 그랬어?""아. 당신은 전시회에 오지 않았지? 시내야. 산 아래, 미술관이 있는 동네야." 그곳에 이형수의 작업실도 함께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길어야 한 달 남짓 사용할 터였다. 쓸데없는 오해는 사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2007-12-1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죽음이란 다른 것으로 태어나기 위한 시작의 단계일 수도 있었다. 꽃으로 나무로 흙으로, 다른 인간의 살로 머리칼로 그러니 애통해 할 것도 없었다. 어째서 살붙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픈지 알 수 없다. 인연이 다해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일까. 곁에 있을 때 미워하고 사랑했던 기억때문인가. 연탄불에서 간간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이 매워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면장갑으로 얼른 두 눈을 문질렀다. 남편이 화로의 바람구멍을 조금 줄였다. "운전은 내가 할게."나는 남편의 앞에 놓인 잔에 가득 소주를 채웠다. 남편은 조금 망설이다가 술잔을 들었다. 달게 넘어가는 술이 수척해진 남편의 목울대를 움직였다. 남편의 드문드문 드러나는 흰머리칼과 여윈 뺨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과 코, 입과 전체적인 모습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했다. 이마에서 쭉 내려온 남편의 코가 생각보다 날카로웠고, 잔에 맞닿는 입술과 쌍꺼풀 없이 큰 두 눈도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남편이라고 생각한, 내가 파인더에 밀어 넣어 찍은 사진을 보았던 것일까 생각했다. 남편의 기다란 손가락과 시들어가는 피부를 쓸어보고 싶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감정이 잔잔한 물처럼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따스하게 가슴을 적시며 흐르는 감정 속에 사랑이라고 뭉뚱그려지는 애정, 연민, 배려, 관용 등과 같은 것들이 들어있는 것일까."나도 한 잔 하면 안 될까? 딱 한 잔만."애절한 목소리를 내면서 남편의 얼굴 앞에 빈 소주잔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남편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못본 척 외면했다.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나는 올려든 빈 잔을 조금 흔들었다. 남편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기가 퍼졌다. 저렇게 남편의 웃는 모습이 얼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소주 두 잔 정도는 음주 측정에 무사통과라는데." 내 말에 남편은 못이기는 척 술을 따라주며 중얼거렸다. "못 가면 여기서 자고 가자.""그럼 되겠네. 당신은 역시 머리가 좋아."내가 너스레를 떨자 남편은 소리내어 웃었다.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남편은 친구의 회사에 나갈까하고 말했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이 여의도에 있는 한 자산회사의 대표이사로 있다고 했다. "재취업하기 힘들잖아. 오라고 할때 나가. 당신 능력 출중하겠다 뭐가 걱정이야.""다른 것도 좀 알아볼까 해서.""동창이 사장이라 자존심 상해서 그래?"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떠밀려 나온 충격이 채 정리가 안되었을 수도 있었다.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은 어쨌든 스트레스다. 게다가 남편은 형제 중 막내라 미국에 있는 누이가 그리울 수도 있었다. 미국의 누이는 남편에게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니 여러가지 가능성 중에 미국행이 들어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직장이 생긴다면 마지막 보루는 마지막으로 밀려날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모든 것이 명쾌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이 여행의 효과일까. 나는 이미 음주운전의 수준을 지나버린 양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바닷가 식당의 유리창 너머로 수평선에 걸린 겨울해가 보였다. 주홍색으로 물든 구름이 넓은 하늘 이곳저곳 퍼져 있었다. "그동안 비 오고 날씨가 흐렸는데 당신이 오는 날 맑게 개였어.""내가 돌아와 기쁘다고 왜 직접 말 못해?"술 취한척 던진 내 말에 남편은 빙긋 웃었다. 술때문에 달아오른 웃는 얼굴이 석양빛을 받아 더욱 붉었다.

2007-12-1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여행이 어땠느냐고 남편이 물었을 때 나는 최대한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냥 그랬어" 라고 대답했다. 한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었고, 또 한편은 사실이었다. 정신없이 이동을 한 탓에 여행의 의미와 즐거움을 음미하기는 어려웠다. 미서의 여행기를 미리 읽어보지 않았더라면 지명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별로 깊이 생각지도 않고 여행을 따라 나선 것은 미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미서를 이해할 수도, 삶에 대한 성찰마저도 할 수 없었다. 내게 희미하게 남은 것은 이국적인 식도락에 대한 호기심과 역사의 현장을 확인해 본다는 세속적인 지적 만족감이었다. 또 하나는 익명의 존재로 낯선 곳을 부유하는 약간의 해방감과 지독할 정도로 치열한 이형수의 작업태도에 대한 감탄이었다. 그러느라 이따금 미서를 완벽하게 망각하기도 했다. 나는 죄책감에 떨면서 삭막한 가슴에 진저리쳤다. 내게는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정서가 결핍된 것이나 아닌지 두려웠다. 만화 스토리를 쓰는 내게 그것은 치명적인 결함일 것이다. 이형수처럼 치열하게 일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은 정서의 최대치인 열정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었다. 일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전병헌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강민기가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을 때 나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선배의 권유가 목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강민기의 말을 들었을 때 최소한 마음은 움직여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시야를 가득 채우며 다가오는 푸른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밖에서 밥 먹고 들어갈까?"남편이 핸들을 꺾어 방향을 틀면서 말했다. 밥을 먹고 가자는 말에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실미도가 빤히 바라보이는 바닷가 식당에 들어가 조개구이를 시켰다. 연탄불 위에 석쇠를 얹고 여러 종류의 조개들이 놓여졌다. 식당 주인은 면장갑과 집게와 가위 등을 주었다. 남편은 장갑을 끼고 살아 꿈틀대는 조개를 뒤적거렸다."오라고 하는 곳이 있을 것 같아."남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응, 뭐라고?" 남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는 장갑을 끼고 집게로 익은 조갯살을 빼내는 남편의 손을 바라보았다. "회사?"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섬광같이 지나갔다.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남편의 일도 잊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회사에 취직한단 말이야? 잘 됐네."나는 큰 목소리로 과장되게 기쁨을 나타냈다. 죄의식을 탕감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지만 달리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혹시 내 얼굴 어딘가에 속마음이 드러날까 봐 불안했다. 나는 남편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아 들고 익지도 않은 조개를 뒤집었다. 익어가는 조갯살에서 스며 나온 액체가 석쇠사이로 흘러 연탄 불 위로 떨어졌다. 마술사의 손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수증기는 피어오르다 잠깐사이에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연약한 생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남편의 접시에 조갯살을 올리고 가위로 잘라주었다. 금속의 가위 날로 생명을 난도질하는 느낌이었다. 불 위에 올라가기 전 조개는 살아 꿈틀거렸다. 가위로 그런 조개 속살을 자르고 초장이나 겨자를 찍어 입에 넣었다.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고 살다가 죽으면 자신을 자연에 내준다. 흙으로 물로 불로 바람으로 또 다른 생명체에게 주는 것이다.

2007-12-0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공항 면세점은 우리 동네에 있는 할인 마트보다 작았다. 우조와 갓 수확한 올리브로 만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집어들었다. 음반 코너로 갔는데 그리스어를 읽을 수 없어 무엇을 사야할 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영어가 써있나 살펴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스 여가수 아그니 발차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를 사고 싶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의 무덤이 발견된 베르기나로 가던 중 카테리니라는 도시를 지났다. 그곳이 바로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의 도시라고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카테리니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이 음악의 여신들인 무사이가 태어났다는 피에리아 산이라고 했다. 구불구불한 시골 국도를 달리면서 미서가 아그니 발차를 좋아했다는 생각이 났다. 옆에 서서 음반을 보고 있는 초로의 신사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영어라 해야 '익스큐즈 미'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수준일 뿐이었다. 나는 음반을 가리키며 천천히 '아그니 발차' 라고 발음했다. 남자의 머리칼은 은발이 섞여 희끗했고, 높이 솟아 곧게 뻗은 코와 검은 눈썹 때문에 아폴론 신상을 연상케 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도 남자는 미소를 띤 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아그니 발차, 카테리니."나는 그 두 단어를 되풀이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 남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발음할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를 그리스 말로 가이드에게 적어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천천히 말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약간씩 억양이나 악센트를 바꾸어 보았지만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발의 남자는 극동에서 온 작은 여자의 소원을 들어 줄 의무라도 짊어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친절한 그리스 남자를 실망시키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아그니 발차 노래의 첫 소절을 허밍으로 조그맣게 불렀다. 남자는 조용히 내게 귀를 갖다댔다. 면세점 안은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부산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주고받는 말소리, 몸이 부딪치고 스치면서 모든 것이 출렁거렸다.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문득 그리스에서 8시에 떠난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 관공서와 가게가 문을 닫고 거리의 불빛도 잦아들고 도심은 텅 빈다. 여간해서 식을 것 같지 않던 대지가 차가워지고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시간이다. 가족이 있는 도시로 떠나는 기차. 아쉬움과 그리움이 서늘한 공기 속을 떠돌고, 뱀처럼 휘어진 철로를 따라 점점 작아지는 기차를 바라보는 쓸쓸한 여자. 그런 장면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남자는 가득 꽂혀있는 진열대에서 음반 하나를 뽑아들었다. 아그니 발차였다. '에프하리스또', 친절한 남자가 못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다시 한 번 '에프하리스또'라고 말했다. 남자는 마치 프라이팬에서 팝콘이 튀는 것 같은 억양으로 무슨 말을 했고 나는 영문을 모르는 채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손끝으로 음반을 훑어가다가 머리 위쪽의 높은 진열대에서 음반을 하나 빼냈다. 읽을 수도 뜻을 파악할 수도 없는 그리스어 일색이었다. 면세가로 18유로라는 것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전부였다. 태양신 아폴론을 상징하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민속음악이나 그리스적 색깔이 짙은 음악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내민 음반을 받아들었다. 남자는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여행이길 바란다. 그리스는 어땠느냐? 이 음반을 들으며 그리스에서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려라. 뭐 그런 말이 아니었을까. 계산을 마치고 돌아보았더니 은발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2007-12-0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이형수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직화에 구워 낸 양고기는 약간 짠듯했지만 맛있었다. 시골 분위기가 나는 식당은 구운 양고기로 유명한 집이라고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이곳 사람들 저녁 식사는 보통 9시가 넘어야 시작돼요. 잠자리에 들 시간이기 때문에 가볍게 먹지만 손님을 초대할 경우는 음식을 엄청 많이 준비해요."가이드는 양고기를 집어 먹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그리스에 와서 저녁 초대를 받았어요. 저녁 9시쯤 오라는 말을 듣고 한국식으로 저녁을 먹고 갔어요. 그런데 식사가 나왔고, 계속해서 기름진 음식이 나오는 거예요. 예의상 안 먹을 수도 없고 억지로 음식을 다 먹느라 엄청 고생 했어요.""왜 그렇게 저녁이 늦어요?""기후 때문인 것 같아요.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일하고 해 질 때까지 휴식을 취해요. 여름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고 햇볕은 강렬해 모든 것을 녹일 듯한 기세죠. 어떤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아요. 특히 오후 2시에서 5시 사이의 태양이 가장 뜨겁죠. 이때 잠깐 낮잠을 자고 해가 진저녁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거죠. 가게는 수요일와 토요일을 제외한 평일 저녁 5시부터 8시까지 다시 문을 열어요. 관공서와 은행도 요일을 정해 이 시간에 근무해요. 그러니 저녁시간이 늦어질 수밖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수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접시에 양고기는 거의 사라졌다. 가이드는 또 한 접시의 양고기를 주문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10시 가까운 시각이었다. 모닝콜을 부탁해놓고 우리는 방으로 올라갔다. 여행 내내 나는 싱글 룸을 이형수는 가이드와 같은 방을 썼다. 샤워를 한 후, 나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어버릴 정도로 여행은 강행군이었다. 오늘 오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출생지인 펠라와 베르기나를 마지막으로 여행은 무사히 끝나간다. 내일은 오전 중에 에게 해의 진주라 불리는 테살로니키를 둘러보고 로마로 떠난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로마 공항에서 4시간 기다린 후,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바쁘게 다니느라 선물을 사거나 기념품 같은 것을 살 여유가 없었다. 선배에게는 뭔가 작은 물건이라도 사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기념이 될만한 선물을 하나 사다주고 싶었다. 공항에서 냉정하게 가버린 남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가이드와 운전사까지 함께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이드를 동반한 여행을 한 적이 없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았더라면 남편에게 불쾌한 기분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강민기가 가이드와 운전사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왜 이형수와 단둘이 여행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소 비굴한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잠이 들 때까지 사 가져갈 만한 선물이 떠올랐으면 싶었다. 내일 아침에 가이드에게 그리스의 특산품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침대 머리 장에 놓여있는 스탠드의 전등을 껐다. 커튼을 친 방 안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쉬 잠이 오지 않았다. 해가 뜨기도 전에 호텔에서 나가 저녁 늦은 시각에 들어오는 나날들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잠깐씩 졸았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메모를 하고 유적을 둘러보고 필요한 장면과 상황을 찍거나 머릿속에 넣어야 했다. 시간은 늘 모자랐고 이형수의 작업이 끝나면 무조건 이동했다. 여행에 열중한 시간 속에서 미서를 오래 된 과거처럼 잊었던 적이 더 많았다. 미서야, 나직이 이름을 불러놓고 보니 가슴이 아팠다.

2007-12-0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6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하늘에 떠있던 구름의 두께가 조금씩 두터워지더니 후드득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다. 안개비다. 가이드는 우리를 호텔 근처의 식당으로 데려갔다. 저녁으로 어린 양고기를 주문하고 이형수는 우조를 시켰다. 40도가 넘는 독한 술은 물을 타면 마치 우유처럼 뽀얀 빛깔이 된다. 나는 이형수가 건네 준 우조를 마시면서 비 오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40대로 보이는 가이드는 그리스에 온지 10년째라 했다."이곳은 일년 강우량이 우리나라의 3분의 1도 되지 않아요. 가을과 겨울에 집중적으로 내리지요. 하수도 시설이 빈약해서 어쩌다 시간 당 10밀리가 넘는 비라도 내리면 거리 곳곳이 빗물로 넘쳐흘러요. 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수난을 당하지요. 장마나 홍수도 없는 나라에 비 때문에 이재민이 생기는 때가 이 계절이죠."지난 며칠 동안 가이드는 식사를 할 때 곁들이는 맥주 한 병 외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형수가 따라주는 우조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일할 때는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아요. 내일은 오전에 박물관을 둘러본 후 바로 로마행 비행기를 타면 돼요. 오전 중에 일정이 끝나니까 한잔 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덕분에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우리는 유리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리스 시인, 엘리티스는 '비 한 방울에 여름은 죽고…' 라고 읊었어요. 9월까지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어 한낮은 푹푹 찌듯이 뜨거워요. 그런데 10월에 들어서면 날씨가 갑자기 바뀌지요. 비와 함께 대지의 생명이 되돌아오듯, 누렇게 말랐던 풀숲 사이로 파릇한 새싹이 돋고 오렌지 나무에 열매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레몬 향기가 공중으로 은은히 퍼지죠."가이드는 유창한 말솜씨로 그리스의 가을을 알려준다.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에게 그리스의 가을에 대해 이야기 했을까. 미서의 여행은 여름이었는데 지금은 겨울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형수는 아마 그런 것을 감안한 후에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빠르게 지나가 버린 일주일이 마치 한달도 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매 순간을 밟아서 다져넣듯 보낸 시간 탓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그냥 흘러 보낸 시간은 지루하지만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지만 밀도가 높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아요. 기온이 늘 영상 10도 주변에서 오르내리죠. 하지만 음습해요. 습기를 머금은 추위가 소매 밑으로 기분 나쁘게 스며들죠. 좀 춥게 잠을 잔 날은 몸을 녹일 곳이 없어 움츠러드는 사지를 추스르기가 만만치 않아요. 감기라도 들면 낭패죠. 그럴 땐 고향의 온돌방이 정말 그리워져요."가이드는 훌쩍 우조를 마셔버린다. 이형수는 가이드의 잔을 채워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에 먹구름이 겹겹이 흘러간다. 가이드는 을씨년스러운 날씨라고 말하고 있다. "단풍은 들지 않아요. 가을도 아주 짧고요."종업원이 커다란 접시에 구운 양고기를 내왔다. 소금만 뿌려 구웠다는 어린 양고기는 부드러웠다. 고기를 먹다말고 이형수는 카메라를 꺼내들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무엇을 찍어오려나? 너울대는 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는 고기, 혀끝에 감도는 맛을 찍을 수 있을까?음식 맛이 느껴지게 사진을 찍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수련을 거쳐야 가능할까. 이형수라면 맛이건 냄새건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형수는 프로 사진사가 아니라 작가였다. 예술가였다. 일주일 동안 이형수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치열하지도 진지하지도 못한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2007-12-0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여행은 몹시 빡빡한 일정이었다. 우리는 미서가 다녀온 곳을 죄다 돌지 못했다. 건너뛴 곳도 있었고 바로 곁에서 그냥 지나친 곳도 있었다. 코코루의 돌다리가 보고 싶다는 내 청을 가이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곳에 가면 하루 일정은 접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출국일은 내일이었다. 미서가 보낸 엽서 속에는 자고리아 산맥의 계곡사이에 걸린 아치형 돌다리가 있었다. 다리 아래는 산에서 흘려보내는 차가운 물이 흐르고 몇 백 년 전에, 포개진 책처럼 생긴 돌로 만들어진 다리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했다. 깊은 산속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 그리스 전역에서 유명한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다리는 거의 완성되어 이제 중심을 지탱하는 돌 하나만 끼워 넣으면 된다. 그러나 마지막 돌을 끼워 넣자 다리는 번번이 무너져 내린다. 다리를 만드는 장인들은 각자 고향에 편지를 띄운다. 다리가 거의 완성되었으니 한 번 다녀가구려. 갈아입을 옷과 고향의 음식도 몹시 그립소. 내용은 대개 그런 거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고향에서 누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는가.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먼 길 마다않고 단숨에 험준한 골짝으로 뛰어오는 여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하는 아내를 남편은 슬픈 눈으로 맞이한다. 아내가 들고 온 고향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고 밤은 깊어진다. 오래 떨어져 있던 부부는 애틋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한다. 남편은 옷을 챙겨 입은 후, 아내에게 그대로 자라고 이르고 방을 나간다. 남편을 기다리고 있던 아내는 창을 막고 문을 막으며 점점 높아지는 돌 벽을 본다.여보, 왜 그래요? 남편은 말이 없고 돌이 사방을 가로막아 외부 세계를 차단한다. 남편을 부르던 아내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마무리 돌을 끼워 넣는다. 다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드디어 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기 위한, 힘든 공사일수록 완성은 어렵다. 그럴 때는 다리를 만드는 장인들 중 누군가의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다리에 바치면 완성된다고 한다. 제일 먼저 도착한 여자가 남편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우리나라의 봉덕사 신종을 만들 때 종이 자꾸 깨지자 어린아이를 쇳물에 넣어 종을 완성했다는 전설과 비슷하다. 소중한 것을 만들 때는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은 동과 서가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발칸반도의 숨겨진 보물이라는 자고리아 산맥을 빠져나오며 나는 뒤돌아보았다. 깊은 골짝의 절벽 사이에 걸려있는 아치형 돌다리 속에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러 왔던 여자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에밀레 에밀레 하며 우는 종소리처럼 말이다.나는 내 소중한 것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해야 할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것조차 알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안다면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려나.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쓰여있던 델포이 신전. 신탁을 받던 그곳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을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도 되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신의 말은 그가 누구인지 알 때만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몰락한 자가 오이디푸스뿐이던가.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삶이 얼마나 명쾌해지겠는가. 머릿속에 어렴풋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세계, 어두운 구름 속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세상. 무거운 무게로 어깨를 짓누르는 어두움. 절망의 검은 옷자락이 망막을 힐끗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2007-12-0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이형수는 카메라를 메고 대형 트럭과 차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에 뛰어들었다. 레오니다스 왕의 청동상이 서 있는 반대편, 그러니까 고속도로 건너편이 전투가 벌어졌던 테르모필레 협곡이었다. 나는 이형수가 좌우를 살피다 달려오는 차들이 뜸한 틈을 타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보았다. 건널목 같은 건 없었고, 차들이 속력을 줄일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구간이었다. 관목 숲으로 싸여있는 낮은 동산이 깎아지른 절벽처럼 우뚝 솟아있는 산 아래 쪽으로 펼쳐져 있는 지형이었다. 고대의 치열한 전투를 떠올릴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형수가 무사히 도로를 건너오기를 기다렸다. 길 건너편 낮은 동산 사이에서 이형수가 보였다. 건너갈 때와 마찬가지로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차를 피해 그는 길을 건너왔다. 보고 있는 내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났다. "별 것 없어요. 그냥 작은 길목이에요."도로를 건너 온 이형수는 목에 건 카메라를 잡은 채 말했다. "그래도 사진으로 보면 근사하죠. 세계적인 관광지 사진을 보고 현장을 답사하면 실망하듯이."이형수는 차에 오르며 말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자동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했고 서서히 속력을 높였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세계를 직사각형의 파인더 속에 밀어 넣으며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를 알게 모르게 정하게 돼요. 셔터를 끊는 그 순간에 눈에 들어 온 세상을 자신의 사유의 틀 속에 가두게 되고, 그게 사진의 숙명이죠.""글도 그래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같지만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주제나 표현방법,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요.""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인을 모두 흑인으로 등장시켰더라고요.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남아프리카의 줄루족 추장 의상을 입은 거인으로 둔갑시켰고요.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페르시아를 아프리카 오지의 야만족으로 폄하했어요."이형수의 말투는 내용과 달리 담담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인도 아리안으로 서구인이잖아요. 할리우드가 심하게 왜곡을 했군요. 이란에서 상영 금지된 게 당연하네요." "누가 우리민족을 흑인으로, 우리문화와 전혀 상관없는 의상을 입은 민족으로 그린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나는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작품의 재미를 위해 약간의 왜곡을 하는 것은 나도 가끔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역사물은 늘 창작과 사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마련인 장르였다."역사 깔고 뭉개기의 의도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영화 300에서 결사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용감한 미 해병대를 연상케 되어서 사실 좀 불쾌했어요."이형수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영화가 독특하고 재미있었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게 문제죠.""역사적 사실을 배제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사실을 정확히 인식한다는 게 그래서 중요한가 봐요."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이형수의 입장을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한국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리는 제 3국의 국민이기에 말이다. 만약 미국인이나 힘의 논리에 익숙한 서구인의 시각에서라면 영화 300이 매우 흥미롭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밟고 서 있는 장소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옮길 수 없는 무거운 발. 운명이란 그런 게 아닐까?

2007-12-0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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