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

 

숨쉬지 마세요<15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테바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이드는 오늘 날, 테바이를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며 작은 마을을 그냥 지나친다. 지진 때문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와 그리스 최대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태어났다는 신화의 고향을 자동차로 스쳐갔다. 이형수는 아쉬운 듯 차창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몇 번 셔터를 눌렀다. 흘러가는 풍경이나마 담아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테바이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 지점에 고속도로가 지난다. 테살로니키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평탄한 도로를 30분 쯤 달려가자 길옆에 완전 무장을 한 그리스 전사의 동상이 보였다. 기원전 480년에 결사대 300명을 이끌고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이곳, 테르모필라이를 지키다 최후를 맞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동상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이란 제목으로 상영된 영화라 어쩐지 잘 아는 역사의 한 장면과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테르모필레에 도착한 것은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 이 시기는 아폴론을 모시는 스파르타의 축제기간이었는데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은 전쟁을 위한 파병이 일체 금지되었다. 10년 전에도 축제 때문에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군이 쳐들어 왔는데도 파병할 수 없었다. 아테네는 홀로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를 맞아 싸웠는데 이 때문에 아테네는 그리스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고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이라는 명성에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스파르타는 국가의 공식 파병이 아닌 레오니다스 왕 자신의 근위대 300명을 개인적으로 이끌고 테르모필레 방어전에 나섰다. 여기에는 그리스 최강인 스파르타의 참전에 용기를 얻은 다른 도시 국가들도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설 것이라는 고도의 전략적 계산도 숨어있었다.그해는 범 그리스적 평화 축제인 올림픽이 있는 해였기 때문에 스파르타가 자신들의 종교축제를 이유로 참전하지 않으면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올림픽 축제를 이유로 전쟁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레오니다스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는 자들 중 300명을 뽑았다. 이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는 치열했고 돈에 눈이 어두운 배반자가 테르모필레로 향하는 샛길을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에게 알려주었다. 중과부족이었지만 스파르타 군이 용맹하게 싸워 전투가 쉽사리 끝나지 않자 페르시아 군은 화살을 소낙비처럼 쏟아 부었다. 스파르타 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다 쓰러졌고 이것을 다룬 영화가 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전쟁에 나간 전사가 돌아오는 것은 오직 두 가지 길 밖에 없었다. 승리해서 두발로 걸어오거나 여신과 함께 오는 것이었다. 전사했을 경우 스파르타 군은 시체를 방패 위에 눕혀서 메고 왔다. 방패에는 아테나 여신이 새겨져 있었다. 스파르타 용사들에게 그 외의 귀환은 없었다.

2007-11-2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로마 공항에서 아테네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형수와 나는 미서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공항 카페에서 그리스 맥주, 미토스를 주문해 마셨고 통로를 어슬렁거리며 양쪽에 늘어 서 있는 가게를 돌아보았다. "여행기를 미리 읽은 덕에 마음 편하게 사진에 몰두할 수 있어 좋습니다."좋은 사진은 일반인이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치밀한 구성이 있게 마련이라고 이형수는 알려주었다.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출판사나 잡지사 등에서 의뢰를 받는 경우에는 미리 대상에 대한 정보를 찾고 완벽하게 소화를 해서 머리 속에 그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현장에 도착해 우왕좌왕하다가 마감일이 다가오면 급한 마음에 우선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그럴 땐 돈이나 명예 혹은 사진을 위한 사진을 찍는 것과 무관한 아마추어가 좀 더 행복하겠네요.""돈이 되지 않으면 프로는 밥을 굶어야하지만, 아마추어는 즐거움을 위해 밥을 굶어가며 사진을 찍죠."이형수는 어느 쪽일까 생각했다. 그는 최소한 돈 때문에 사진을 찍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매체에 발표하거나 유명해지기 위해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형수는 사진을 찍었다. 최소한의 생계와 삶 외에는 모든 것을 사진에 투자하는 것 같았다. 집과 가족 대신에 사진에 필요한 장비와 열정이 있었다. 사람사이의 관계,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대화로서 사진을 찍는다는 그에게 붙일 적합한 이름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형수는 여행에서 묻어나는 사람들의 자취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는 아침 여섯 시 이전에 호텔을 나왔고, 일몰이 훨씬 지난 늦은 밤까지 밖에서 머물렀다. 생각보다 사진을 찍는 것은 힘든 작업이었다."사진은 빛 그리고 그림자의 예술이죠. 정오에 찍은 사진은 가장 정확하게 색채를 표현하지만 딱딱한 느낌을 줘요.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진하게 마련이죠. 빛이 강할 때 찍은 사진은 강렬한 느낌을 주지만 부자연스럽고 정감이 없어요."이형수는 중노동과도 같은 사진 작업에 나를 몰아대는 것이 미안한지 사진을 찍는 사이에 혹은 찍고 난 후에, 사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이형수는 한 컷의 장면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강한 햇빛은 고도가 낮아지면서 점차 에너지를 잃어가요. 그림자가 길어지고 사물은 생기 있게 자신의 표정을 드러내죠. 인간의 눈은 순응성이 있어 색온도 차에 의한 색채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하지만 필름이나 CCD는 빛에 포함 된 색 성분을 그대로 기록하죠."이형수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빛과 그림자를 좇으며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을 때의 이형수는 딴 사람 같았다. 유쾌하고 장난스러워 동생처럼 여겨지던 때의 이형수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숨을 멈춘 채 기다리는 이형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 저러다 숨 막혀 죽을지도 몰라 하고 온 몸의 세포들이 조마조마해서 움츠러들면 그제야 찰깍, 하는 소리를 내며 이형수는 셔터를 끊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색온도가 뭐죠?""빛에 포함된 색의 성분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백열등은 따뜻하게 형광등 빛은 창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들이 각각 고유한 파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색온도가 높아질수록 청색, 낮아질수록 붉은 색을 띠죠. 풍부하고 따스한 색감의 사진을 원할 때는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사진을 찍고 반대로 정확한 색채 재현이 필요하면 한낮의 태양광 아래서 작업을 하면 돼요."

2007-11-2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인생을 성실하게 살아 온 남편은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 걸 실패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삶이 끝날 때까지는 누구도 그런 단어를 쓸 수는 없어."상위 20%안에 들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남편에게 내 말이 설득력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어 놓고 좁은 꼭짓점을 향해 기어 올라가도록 해 놓은 것이 지금의 사회구조가 아닌가.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꼭짓점에 도달하기 전에 굴러 떨어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출발선에서 피라미드 구조를 미처 인지하지 못할 뿐인 것이다. 남편이 의기소침해 보여서 나는 그런 말을 했다. 내게는 사회를 통찰하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남편은 내 말에 그다지 위로받는 눈치가 아니었다. 단 한번의 설득으로 바뀐다면 그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문득 뒤늦은 깨달음이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남편을 동반해도 그다지 무리가 없는 여행이었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미서가 지나다닌 곳을 확인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회사를 떠난 남편에게 여행은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왜 늘 이렇게 뒤늦게 좀 더 나은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당신도 함께 갈 걸 그랬어."남편은 앞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혼자서 생각할 일도 있고, 이곳 저곳 일자리도 알아보고, 뭐 그 다음에 가도 늦지 않아."남편은 좀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공항 청사 앞에서 차를 세웠다.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냈다. "당신은 그냥 집으로 가.""바쁜 일도 없는데 뭘.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올게."남편은 차선을 바꿔 주차장 쪽으로 들어갔다. 이형수와 만나기로 한 3층 출국장 D카운터로 갔다. 공항은 여행객들로 만원이었다. 어디에나 긴 줄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가방과 짐을 실은 수레를 끌고 윤이 날 정도로 반들거리는 공항 바닥을 지나다녔다. 사람들을 헤치며 약속 장소로 가자 이형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티켓팅을 하기 위해 기역 자로 혹은 디귿 자로 굽은 줄 뒤쪽에 붙어 섰다. 예상보다 빨리 줄이 줄어들었다. 맨 꼴찌이던 순서가 중간쯤이 되었을 때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 내가 있는 위치를 알렸다. 남편은 푸른 끈으로 칸이 쳐진 줄 밖에서 나를 발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수와 함께 가방을 부치고 비행기 표를 받아들었다. 줄에서 벗어나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갔다. 나는 이형수에게 남편을 소개시켰다. 남편은 이형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남편은 지갑 안에서 명함을 꺼내 정중하게 건네주곤 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이름과 자신의 직책을 알려주면서 말이다. 그럴 때 남편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남편은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기준으로 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수준을 정한다고 했다.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어. 그 사람의 지위와 성과는 그가 속한 조직의 경제적인 성공에 의존하니까 말이야' 라고 말했다. 이형수와 남편은 명함을 주고받지 않았다. 남편은 이제 명함을 더 이상 갖고 다니지 않았다. 이형수와 마주 서있는 남편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2007-11-2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지난밤에 첫눈이 내렸다. 차도는 눈이 내린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늘 진 인도의 모퉁이나 정원의 나무 아래에는 베일처럼 하얗게 쌓인 눈이 남아있었다. 처음이라는 감정은 근거도 없이 마음을 들뜨거나 진지하게 만들었다. 여행용 가방을 승용차의 트렁크에 밀어 넣다가 나는 자동차 지붕 위에 쌓인 눈을 손바닥으로 한 줌 쥐어보았다. 눈은 뭉쳐지지 않고 손 안에서 조금씩 녹아내렸다. 나무 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한 느낌이었다. 어떤 목적이든 여행이란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차체가 부르르 떨었다. 남편이 시동키를 돌린 모양이다. 나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자 남편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발 합니다. 작가 선생."나는 쑥스러워 남편의 눈을 외면한 채 쿡쿡 웃었다. 미서의 책 때문에 그리스에 일주일간 가야한다고 남편에게 알릴 때 사실 나는 약간 주눅이 들어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책이 아니라 미서의 유고집이었다. 게다가 여행의 목적은 유고집에 들어 갈 사진을 찍는 거였다.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순서를 정했기 때문에 이형수 혼자 가서 사진을 찍어 와도 무리가 없었다. 강민기는 내가 쓸 글을 염두에 두고 투자를 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파격적인 배려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남편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일 때문에 필요한 과정이라는 투로 말했다. 남편은 더 이상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전반부 인생이 마침표를 찍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나의 변화를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양 쪽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자동차는 공항 고속도로를 달렸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달리는 것 같았다. 물이 빠진 갯벌에는 붉은 바다풀이 마치 물감을 뿌려놓은 듯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저만치 물러나 있는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햇빛이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바다 표면은 물고기의 등처럼 반짝거렸다. 바다위에 놓인 긴 다리를 달리자 자동차가 휘청거렸다. 남편은 속도를 줄였다. 자동차의 유리를 할퀴며 바닷바람이 아우성쳤다. "바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데 차가 휘청대.""다리가 높아서 그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다는 늘 바람이 불어."남편은 운전대를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우리 인생 같구나."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남편은 그런 셈이지 라고 대꾸했다. 남편은 당분간 좀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남편의 일터가 생길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회사를 퇴직한 후 대뜸 미국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 것만도 내게는 다행이었다. 남편이 다시 일을 하려면 누군가 남편을 고용해야 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남편은 피고용자가 되어야 자신의 남은 생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고 이런 현상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1968년에 자동현금 인출기가 개발 된 이래, 미국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은행 업무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절반 정도가 일자리를 잃었다. ATM 기계 한대가 무려 37명의 은행 출납계원 일을 한다. 게다가 기계는 병이 들지도 않는다. 기계의 발명은 모르긴 해도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빠르게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서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뺏길 것이다. 기계와 경쟁을 해서 이길 승산은 거의 없었다. "기계가 못하는 일, 경쟁에 승리할 필요 없는 일이 뭔지 생각해 봐야겠어."남편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매우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2007-11-2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엽서를 뒤집어 보았다. 눈을 인 희끗한 산봉우리가 첩첩이 겹쳐지며 뻗어가는 산 아래에 빨간 지붕에 벽이 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보일 듯 말 듯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탑처럼 하늘을 향해 서 있고 올리브 숲이 테라스 달린 이층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미서를 태운 버스가 달려갔을 도로가 집 앞으로 곧게 뻗어가고 있었다. 유명한 여행지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까지를 치면 미서가 다닌 곳은 엽서의 수만큼이나 많았다. 함께 간 사람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혼자서 간 곳이 더 많았다. 미서의 글을 워드로 치는 동안 나는 미서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환상에 빠져버렸다. 미서를 태우고 달리던 버스 기사의 이름은 테오도시였고, 애인을 집으로 끌어들인 아내와 최근에 이혼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안녕하세요가 그리스 말로 야사스라는 것을 배웠고, 레스토랑에서 종업원들에게 서비스를 받으며 에프하리스또 라고 감사의 표시를 할 줄도 알게 되었다. 미서와 나는 엽서를 몇 장 골라들고 뽀소 까니? 얼마입니까 라고 말했고, 가게를 나오다 부딪친 멋진 그리스 남자에게 얼굴을 붉히며 시그노미 라고 사과했다. 저녁에는 꼬챙이에 넙적한 고기를 겹겹이 포개놓고 세로로 세워 천천히 돌리면서 불에 구워, 익은 부위를 잘라 양파와 함께 밀전병에 싸 먹는 수블라키를 주문했다. 또 물과 1:1의 비율로 섞으면 우유처럼 뿌옇게 변하는 독한 술, 우조를 곁들였다. 밥에 다진 고기와 잘게 썬 야채를 넣고 포도 잎에 싸서 찐 돌마데스는 얼마나 맛있었는가. 나는 미서와 함께 전통적인 그리스 식 음식점 타베르나의 서민적인 분위기를 미치도록 좋아했다. 태양이 이글대는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는 시에스타였다. 낮잠시간 동안 문을 닫은 가게는 시에스타가 끝나면 다시 문을 열었다.이 모든 것들이 엽서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글은 싱싱하게 꿈틀거리는데 미서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기를 정리하는 동안은 행복했다. 마치 생의 마지막 축제를 즐기는 듯 미서는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채웠다. 죽음과 삶의 긴장이 교차되면서 글은 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희부옇게 동이 트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고, 어느 날 새벽 여명이 창틀에 걸렸을 때 정리가 끝났다. 여행기를 저장하고 컴퓨터를 끈 순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한 무엇이 글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서와 함께 보고 듣고 먹고 즐기느라 간과한 무엇, 미서의 가슴 밑바닥 깊숙이 가라앉아있는 앙금 같은 것들을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다시 컴퓨터를 켜려고 파워스위치를 누르려다가 멈추었다. 시간이 지난 후,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잠시 원고를 덮고 잊고 있으면 글이 객관적으로 보일 때가 왕왕 있었다. 나는 이불을 깔고 쓰러지듯 누웠다. 미서와 함께 다닌 한 달간의 여행에서 얻은 피로가 나를 바닥이 없는 늪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혔다.

2007-11-2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엘리베이터는 빠르게 공중으로 치솟았다. 복도를 지나 강민기의 출판사로 들어갔다. 삼십층에 있는 사무실의 창가에 서자 도심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지난 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설렜던가. 선배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득히 눈길이 떨어지는 도심을 바라보며 마치 뭐라도 된 듯 우쭐한 느낌마저 들었던 기억이 났다.생각해보니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 무슨 일들이 일어난 걸까. 복도에서 정신희가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들며 나도 정신희처럼 번듯한 명함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했던 게 겨우 몇 달 전이었다. 명함은커녕 몸도 마음도 누더기가 된 채 지금 여기 서 있다.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분신처럼 생각해오던 미서의 유고집을 의논하려고 이곳에 들렀다니. 심장에 창이라도 박힌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선배를 기다리고 있지만 예전처럼 가슴이 설레지도 뛰지도 않았다. 명함 같은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뜨고 있었지만 망막에 맺히는 상이 아무것도 없었다.어깨에 강민기의 손이 닿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봄에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겨우 그 정도였다. 내 몸에 와 닿는 선배의 손길을 알아챌 수 있다는 것.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강민기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선배는 내 손에 들려있던 종이 가방을 받으려는 듯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움찔 놀라며 엽서가 든 종이 가방을 움켜잡았다. 선배의 손을 피하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열리지도 않는 유리창이 단단하게 붙어있는 벽이 등을 밀었다. 내 태도에 선배는 당황해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종이 가방을 강민기에게 건네주었다.강민기는 테이블 위에 엽서를 꺼내놓았다. 의외로 분량이 많아 놀라는 것 같았다. 강민기는 내가 날짜별로 묶어놓은 엽서를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나는 강민기가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엽서를 다 읽어 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종이컵에 든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강민기는 첫 번째 묶음에서 한 장을 빼내어 읽어보더니 도로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원고지 몇 매나 될 것 같아?""삼 사 백매는 될 거예요.""김상우는 책에 실을 만한 수준의 사진은 없다고 그러더라. 이형수에게 사진을 찍어오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좋다고 했어."나는 다 마셔버린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선영이 네가 글을 정리해. 원하면 이형수와 함께 갔다 와." 나는 강민기를 바라보았다. "둘이요?"강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었다. 미서가 죽기 전에 머물렀던 곳을 가서 보고 싶었다. 혹시 미서의 흔적이, 적어도 마지막으로 미서의 마음속에 깃들었던 고뇌나 감정의 편린이라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가요?""빠를수록 좋아. 사진만 찍어오면 책은 금방이라도 낼 수 있겠지?""여행기를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엽서를 쓴 것 같아요."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스에서 미서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언제면 끝나겠니? 비행기 예약하게 여권 사본 보내라." 일주일이면 되겠어? 강민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단숨에 나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2007-11-2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화기 저쪽에 강민기의 목소리가 들렸다."선배, 일, 할게요.""잘 생각했다. 뭐든 써 봐.""여행기를 내고 싶어요."전화가 끊긴 것처럼 강민기가 침묵을 지켰다."그리스 여행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미서가 엽서를 보냈어요. 사진만 있으면 그대로 출판해도 돼요."강민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상우씨와 함께 갔으니 어쩌면 그쪽에 사진이 있을지 몰라요."나는 강민기의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일단 좀 보자.""엽서를요?"강민기는 잠시 망설이는 듯 말을 끊었다. "유고집을 내는 것도 좋지만 말이야."강민기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출판사로 나올래? 아니면 내가 집 근처로 갈까?""제가 나갈게요."나는 단숨에 말해버렸다. 소금 친 배추처럼 지금 이 마음이 시들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나는 전화를 끊고 뛰다시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흩어진 엽서를 주워 모았다. 엽서를 종이 가방에 챙겨 넣었다. 유서도 남기지 않았으니 이 엽서들이 미서의 마지막 글이자 유서나 마찬가지였다. 기형도 시인이 종로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후, 평론가들은 그가 죽기 전에 발표한 시, 빈집을 주목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는 살아있을 때 이미 그의 죽음을 예감한 것 같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이 말했다. 미서의 엽서에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있지나 않을까. 미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죽음을 내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을까. 전병헌에게 마음을 쏟느라 미서의 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닐까? 책이 나온다면 그 분야에 눈 밝은 평론가가 미서의 마지막 심정을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내가 홀가분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미서의 책을 낸 후에야 나는 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렁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선배의 말이 옳았다. 강민기는 전병헌을 위해서 내게 일을 시작하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서였다. 어렴풋이 강민기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엘리베이터는 빠르게 공중으로 치솟았다. 복도를 지나 강민기의 출판사로 들어갔다. 삼십층에 있는 사무실의 창가에 서자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지난 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설렜던가. 선배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득히 눈길이 떨어지는 도심을 바라보며 마치 뭐라도 된 듯 우쭐한 느낌마저 들었던 기억이 났다.생각해 보니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 무슨 일들이 일어난 걸까. 복도에서 정신희가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들며 나도 정신희처럼 번듯한 명함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했던 게 겨우 몇 달 전이었다.

2007-11-1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차가웠다. 지난 밤에 내린 비로 기온이 성큼 내려갔다. 맨발에 와 닿는 거실 마루의 감촉이 따뜻했다. 새벽에 들어 온 난방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발바닥을 마룻바닥에 붙인 채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세상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생을 화려하게 펼치던 단풍이 지난 밤에 내린 비로 거의 떨어져 내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닥에 떨어진 동료를 내려다보는 잎들도 조만간 제 운명을 걸을 것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멍하니 서서 길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았다. 머리도 몸도 텅 비어 잎맥이 훤히 비치는 마른 낙엽이 된 것 같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주방에 서 있었다. 무얼 하려고 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로 거실로 갔고 베란다 밖으로 하릴없이 눈길을 준 채 시간을 보냈다.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집 안을 서성댔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둔 주전자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커피 물을 언제 올려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스 불을 끄고 행주로 포트를 감싸 쥐고 싱크대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포트에 수돗물을 틀어 끼얹었더니 치익 소리를 내며 수증기가 피어올라 얼굴을 에워쌌다. 까맣게 타버린 포트 바닥을 바라보다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서랍을 열고 봉투를 꺼내 거꾸로 뒤집었다. 봉투 속에 들어있던 엽서가 책상 위로 와르르 쏟아져 방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엽서를 한 장 집어 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한 글이었다.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써내려간 여행지의 감상이었다. 미서는 여름에 보는 그리스의 산이 고독해 보인다 했다. 지중해의 열풍에 말랐던 초목이 4월에 내리는 한 방울의 비를 시작으로 살아난다고 한다. 천지에 초목과 야생화가 피어나면 또 느낌이 달라지는 산과 들. 자연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쓸쓸하다거나 황량하게 보는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닐까. 무엇이 미서로 하여금 그리스의 산과 들을 고독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을까. 나는 미서의 글씨가 빼곡히 적힌 엽서를 주워들고 게임을 하듯 바닥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늘어놓았던 엽서를 다시 주워들었다. 손아귀에 가득 차면 또 바닥에 놓았다. 몇 무더기의 엽서가 나란히 놓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또 다시 열을 지어 놓이곤 했다. 무심한 손놀림 속에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미서를 떨쳐내지 못하면 나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지난 밤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의식은 몸집을 불려갈 것이다. 바람을 불어넣는 풍선이 점점 커지다 어느 순간 터져버리는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파멸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쌓아올린 엽서 무더기들을 손으로 와락 쓸어버렸다. 엽서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미서의 뺨을 때린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무엇이든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미서도 잊고 나도 잊고 전병헌도 생각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작은 방의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거실 한 쪽 구석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2007-11-1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도대체 언제까지 그럴거야."남편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뭘, 어쨌는데. 뭘 잘못했어? 어떡해야 하는데."나도 바락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을 향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게 죄의식을 불어넣은 사람을 향해서였다. 특히 미서 나쁜 계집애.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모두 생략되었고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남편을 향한 비난이 되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나는 이유를 나도 알지 못했다. 울 상황은 아니었고, 더구나 울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내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자 남편은 허둥거렸다. 어쩌면 우울증 때문에 줄줄이 자살한 연예인들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휴지를 뽑아 건네주었다. 휴지를 받아들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울컥 밀려들었다. 아이처럼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악을 쓰며 울었으면 싶었다. 그러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나는 휴지로 코를 세차게 풀고 눈물을 닦았다.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몸 안의 모든 기가 쑥 빠져 나가버린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말없이 몸을 돌려 버렸다. 내가 작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남편은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바닥에 몸을 눕혔다. 네모난 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귓속으로 들어간 눈물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냈다. 잠결에 누군가 이마를 쓰다듬었다. 머리칼을 날리는 미풍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였다. 눈두덩 위로 햇살이 비치는지 감은 눈 속이 환했다. 남편이 눈물에 젖어 서로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쓰다듬어 넘겨주었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이 한 바탕 꿈이었으면 싶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내게 기대고자 하는 남편을 매몰차게 밀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어제 밤에는 미안했어. 내가 미쳤었나 봐 어쩌고저쩌고 할 면목이 없었다.남편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정작 비밀은 감춘 채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들추어 사과할 수 있는 배짱은 없었다. 내가 만든 비밀이 지난 밤 남편이 건네 준 휴지만큼의 무게도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깨지 않은 척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남편의 손길은 부드럽고 조용했다. 하지만 남편의 손길 아래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치는 내 머릿속은 아수라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혼란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제 밤처럼 느닷없이 남편에게 전병헌과 선배와의 일을 털어놓을지 모른다. 이대로 눈을 뜨지 말고 조용히 사라졌으면 싶었다. 어디로든 좋았다. 미서처럼 세상을 아예 떠난다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이렇게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도망을 가거나 숨거나 사라지고 싶은 절박함이 나를 짓눌렀다. 숨을 멈추었다. 베개에 코를 박고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숨이 차서 머리 속에서 작은 불빛이 하나 둘 나타날 때 즈음 나는 머리를 들고 하아, 가쁜 숨을 내 쉬었다. 영원히 숨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푹 빠져 다른 생각은 나지 않을 무엇, 그것이 도피든 잠적이든 상관없었다. 미서가 여행지에서 보낸 엽서와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낸 노트가 든 봉투를 떠올렸다. 미서가 보낸 엽서와 글은 내가 쓰고자 했던 주제와 닿아있었다. 미서가 남긴 봉투 속의 모든 것들이 신화속의 여신과 사랑이야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양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2007-11-1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화장실 문 앞에서 나는 천천히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갔으면 싶었지만 그는 꼼짝도 않았다. 나는 체념하는 심정으로 몇 발짝 걸었다. 그것은 그냥 난감한 내 처지를 드러내는 몸짓일 뿐이었다. 작은 방이나 안방, 거실이나 부엌이 전부인 공간에 내가 걸어 갈 만한 곳은 없었다. 나는 만만한 부엌으로 갔다. 식탁 위에 지갑이 나와 있었고,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이 그 곁에 나뒹굴었다. 나는 쓸데없이 타월로 머리를 문지르며 지갑에서 내장처럼 삐져나온 카드와 영수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젠 둘러대거나 변명할 기회도 사라졌다.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카드와 영수증을 아무렇게나 지갑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 밤중에 누구 전화를 받고 나간거야?""전화 받고 나간 거 아냐. 그냥 혼자 나갔어."남편은 전화기를 가리키다가 손을 내렸다. 이미 발신자 표시가 저장되어있는 전화번호를 살펴보았을 거다. 코드가 빠져 있는 것도 보았을 테고. "잠이 안 와서 밖에 나갔다가 택시가 있어서 아는 술집에 간 것 뿐이야. 밤새 문을 여는 곳이 그곳뿐이라서 말이야.""당신이 단골 술집까지 있단 말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단골은 아니고 그냥 아는 집이야."남편의 말에 일일이 대꾸를 하고 있자니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밤중에 잠시 나갔다 온 게 그렇게 큰일이야."남편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당신은 힘들 때 평소와 다른 행동 안 해? 고민 있을 때 그거 풀려고 몸부림치지 않아?"조금 미안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뾰족한 독기가 머리를 내밀었다. "미서가 그렇게 된 후, 당신이 몹시 우울한 거 알아.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리고 당신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절반이라도 내게 쏟아 봐."남편은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울분을 터뜨리는 듯 마구 쏟아냈다. "글 쓴다고, 전시회 준비한다고 밖으로만 나돌았지. 남편의 고민이 뭔지 형편이 어떤지 관심이나 있었냐고?""당신 고민은 당신이 풀어야 해. 당신 인생이고, 당신 삶이야. 아무도 대신 해결해 주지 못해." 남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드러나자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어렵고 힘든 처지에 빠진 남편에게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 미안했다. 게다가 남편의 말은 내게 죄의식을 느끼게 했다. 죄라니, 터무니 없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그것을 죄로 느껴야한다니. 그래서 미안하던 마음을 헌신짝처럼 차버렸다. 힘이 약한 성이 방어를 튼튼히 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허름한 성의 둘레를 가시철망으로 둘러쳐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큰 소리를 질러버렸다. 평소와 다른 내 태도에 남편은 혼란스러워 했다. 남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이잖아. 식구끼리 서로 돌보지 않으면 누가 봐주니?"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기 싫었다. "내가 힘들 때 가족들 아무도 내게 힘이 되어주지 않았어."나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힘은커녕 가족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힘든 일은 죄다 내게 미루었다. 나는 결코 시어머님 병구완에 지쳤던 지난 일을 들추어 낼 생각은 아니었다. 과거의 일을 돌이켜 볼만큼 원한에 사무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내 말은 빗나갔다.

2007-11-1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귀에 익은 노래가 몇 곡 계속되었다. 블랙러시안을 세 잔 마셨고, 전병헌에게 전화를 하려고 두 번 쯤 술집 안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었지만 번호를 누르지 못했다. 전병헌은 나를 기다리는 게 아닐 것이다. 술집을 나왔을 때는 새벽이었다. 버스가 사람들을 태우고 움직이고 있었다. 보드카의 취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시간이 언젠가는 나를 고통에서 건져낼 것이고, 이 새벽은 과거의 시간 속에 편입될 것이다. 숨죽이고 있으면 모든 것은 지나간다. 높은 하늘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모든 것은 소멸될 것이다. 전병헌의 오피스텔을 바라보며 술집에 앉아 있던 내가 우습게 여겨졌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는 시내로 나왔던 길을 거슬러 달렸다. 혼자서 술집에 앉아 술을 마셨고, 하마터면 전병헌에게 전화를 할 뻔 했다.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고 상처만 줄게 뻔했다. 누구를 위로한다거나 도와준다거나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타인의 위로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짓이다. 고통스러운 일일수록 혼자 견뎌야 했다. 달리는 택시 유리창 앞으로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와다닥 비가 쏟아져 내렸다. 와이퍼가 소리를 내며 차의 전면 유리에 부서지는 빗줄기를 닦아냈다. 떨어지는 낙엽이 물기에 젖어 길에 붙어버렸다. 비가 그치면 겨울. 동면하는 짐승처럼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술이 깨려는지 한기가 들었다. 디지털 키의 번호를 누르는데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불도 켜지 않고 남편은 현관에 서 있었다. 나는 남편의 시선을 외면한 채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어딜 갔다 와?"할 말이 없었다. 밤새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는 남자의 집을 쳐다보며 혼자 술집에 앉아 있었다고 대답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남편이 집요하게 물었다면 어쩌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남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말없이 서서 내 행동을 낱낱이 바라보고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갑자기 팔과 다리가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시선이 오 분만 더 지속된다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나는 바바리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척 물만 틀어놓고 변기에 걸터앉았다. 화장실 바닥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세차게 내리는 비 소리처럼 들렸다. 더운 물에서 올라오는 뿌연 수증기 때문에 화장실은 가스실처럼 변했다. 세면기 위에 붙은 거울에 샤워기로 물을 뿌렸다. 물줄기가 거울표면을 씻어내자 안개 속에 검은 두 눈이 나타났다. 화장기 없이 부석한 얼굴이 마치 돌로 아무렇게나 쪼아 만든 거친 석상 같았다. 수증기는 금방 여윈 얼굴을 가렸다. 샤워기로 거울 표면을 뿌리는 대신 나는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세면기에 머리를 박고 샤워기를 들이댔다. 비누질도 않고 손으로 문지르지도 않았다. 물만 뒤집어 쓴 후 나는 머리에 타월을 둘둘 감고 화장실을 나왔다. 남편은 그때까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남편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당신 그러지 않아도 돼. 나 당신을 떠날 마음 조금도 없어.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불현듯 자신이 없어졌다. 지난 밤, 남편이 날 버리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 갑자기 의심스러웠다. 나란 인간은 다른 사람의 상징,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상이나 바람이 빚어낸 껍질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2007-11-1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수화기를 집어 올리려고 손을 뻗다가 나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새벽 두시였다. 발신자 표시번호가 네모난 액정판에 오롯이 떠올랐다. 나는 수화기를 들어올리는 대신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전화는 어둠을 흔들었다. 전화를 받는 대신 나는 전화코드를 뽑았다.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코드를 뽑아놓고 전화를 기다리는 불합리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소파 위에 모로 누워 팔을 베고 눈을 감았다.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방 장롱에서 바바리를 꺼내 걸쳐 입고 집을 나왔다. 뺨에 와 닿는 밤공기에 몸의 세포가 놀라 깨어났다. 가로등이 반도 넘게 잎을 떨어뜨린 가로수를 비추고 서 있었다. 편의점의 환한 불빛이 아스팔트로 덮인 검은 도로에 드리웠다. 아파트 단지는 텅 비어 있었다. 한 남자가 택시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단지 안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지나가자 간밤에 마신 술 냄새가 공기 중에 남겨졌다. 나는 남자가 내린 택시를 잡아탔다. 나는 전병헌의 오피스텔이 들어있는 빌딩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겨울로 가는 길목의 바람이 바바리 깃을 파고들었다. 불이 꺼진 빌딩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잠든 공룡처럼 보였다. 밤새 문을 열어놓는 칵테일 바에 들어가 블랙러시안을 주문했다. 검은 술을 담은 칵테일 잔이 술집의 어두운 조명을 받아 마름모 꼴의 빛을 사방으로 튕겨내었다. 달콤한 술을 한 모금 넘기자 깔루아의 독특한 향이 입에 감돌았다. 술집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오피스텔이 있는 건물은 바로 길 건너에 있었다. 왜, 여기 앉아있는거지. 나는 검은 빛깔의 칵테일을 마시며 생각했다. 오피스텔 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보지않아도 그는 술병을 끼고 앉아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밤중에 내 집으로 전화를 할 리 없었다. 전병헌이 무엇때문에 전화를 한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 것 같다. 내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시각에 전화를 한 것은 그가 제대로 상황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는 증거다. 그가 전화를 걸어 대화를 하고 싶은 나는 내가 아닌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전병헌이 원하는 사람. 존재하지 않아 더욱 그리운 사람.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는 마지막 술을 넘기고 거칠게 테이블 위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유리로 된 테이블에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컸던지 종업원이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 앞에 말없이 검지를 세워 술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빈 잔을 가지러 다가왔을 때 나는 "보드카를 좀 많이 넣어줘요"라고 말했다. 종업원이 술잔을 내 앞에 내려놓을 때 탱고가 흘러나왔다. 나이가 많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그룹의 노래였다. 남미 특유의 정열과 높고 푸른 하늘을 가르는 고독한 바람이 느껴지는 리듬. 스타카토처럼 탁탁 끊어지는 탱고의 선율 사이로 미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노래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면서 탱고를 춰야할 것 같아.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음악에 맞춰 끊어질듯 끝없이 이어지는 춤. 밤새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춤추는 여자의 눈에서 검은 마스카라가 흘러서 얼굴 가득 번지고. 나는 울면서 춤을 추는 여자의 빈 등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반쯤 옷을 벗은 등을 보이다가 문득 멈춰 서서 음악에 맞춰 반대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는 무희의 얼굴에 검은 눈물이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2007-11-1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왜 그래. 나쁜 꿈을 꾼 거야?"귓가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얼룩졌고 귓가로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많이 울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내가 꿈을 꾸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꿈 안 꿨어."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머리맡에 앉아 나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나는 머리 위로 팔을 뻗어 올려 남편의 얼굴을 만졌다. "아직 안 자고 뭐해? 술 마셨어?" "잠이 안 와." 나는 이불을 걷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 둥근 머리와 처진 어깨의 윤곽만 희미하게 떠있었다. "너무 걱정 마. 회사 관둔다고 세상 끝나는 거 아니잖아." 어둠 속을 더듬어 남편의 손을 잡아주었다. 남편은 말없이 내 곁에 누웠다. 나는 남편의 머리 밑으로 베개를 밀어넣어주고 남편의 곁에 누웠다. "사표 낼까? 우리 그냥 떠나버릴까?"반듯이 누워 남편은 허공을 향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일 얘기해. 그만 자."눈을 감았다. 가고 싶지도 그렇다고 예전처럼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게 가장 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떤 일도 흥미가 당기거나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떠나도 남아도 상관없었다. 남편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고 중얼거렸다. "날 버리지 마라."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해졌다. 한 번도 남편을 버린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아니, 버리고 어쩌고 그런 단어를 떠올린 적도 없었다. 나는 남편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숨을 죽였다. 남편은 가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내게 한 자락 남은 잠의 끝을 잘라버리고 남편은 잠에 빠졌다. 나는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남편의 팔 속에 갇혀 있었다.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남편이 잠에서 깨날 것 같았다. 자신을 버릴지도 모르는 아내를 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는 것은 몹시 불편했다. 몸을 뒤척이지도 숨을 크게 쉬지도 못하고 나는 누워 있었다. 몸이 저려왔다. 얼른 잠이 들었으면 좋으련만 불편한 자세로는 잠이 들기는커녕 정신이 또렷해지기만 했다.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뱀처럼 몸을 비틀었다. 남편의 팔을 풀고 곁에서 조금 떨어져 나왔다. 그 순간 느껴지는 편안함이 몹시 미안했다. 남편과의 사이에 난 작은 간격에서 이토록 커다란 해방감을 느끼다니 어이없었다. 나는 모로 누워 남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라 눈, 코, 입에서 만들어지는 표정은 보이지 않고 어두운 공간과 경계선을 그리는 얼굴의 실루엣만 보였다. 나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 꿈, 남편이 깨울 정도로 서럽게 울었던 꿈의 내용이 궁금했다. 얼굴을 쓸었다. 눈물이 말라 까칠해진 얼굴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핏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 소리가 났다. 너무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라 옆집이려니 생각했다. 몸을 뒤척이다가 점점 크게 울리는 전화 소리에 눈을 떴다. 전화는 거실에서 울리고 있었다. 금방 잠이 들었는데 벌써 날이 샌 건가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방은 여전히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갇혀 있었다. 거실 한 구석에서 빨간 불이 반짝거렸다. 전화기의 붙은 램프였다. 나는 비틀대며 빨간 불을 향해 걸었다. 전화기 곁에 놓인 전등 스탠드의 줄을 잡아 당겼다. 백열등이 켜졌고 거실 한 구석이 살구색 전등갓을 투과해 나오는 빛으로 물들었다.

2007-11-1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강민기의 자동차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자동차는 이내 차량들 속으로 섞여들었다. 밤바람은 차가웠다. 곧 겨울이다. 속이 비어서인지 한기가 들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집을 향해 걸었다.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보았더니 남편이었다. 바로 뒤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단지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서 집까지 오는 길은 몸을 가릴 만한 숲도 건물도 없었다. 아파트 마당에 세워둔 자동차 사이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어디서 나타난 거야?""계속 뒤따라 왔는데 모르더라. 무슨 생각에 빠졌기에.""출판사 선배가 왔었어. 저녁 먹고 방금 헤어졌어.""기분은 좀 나아졌어?"남편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글 써 달래.""일부러 찾아와서 부탁할 정도야? 당신 다시 봐야겠네."남편의 말에 어쩐지 가시가 박혀있는 것 같았다. 나는 힐끔 남편을 쳐다보았다. 선배와 포옹을 하고 있는 것을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각하게 여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한 가벼운 포옹이었다. 누가 본대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회사일은 어떻게 되어 가?""협상을 끌어냈으니 아마 잘 될 거야."남편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옷 갈아입고 또 나가?""이제 끝났어. 대표단이 얼마나 협상을 잘 해주느냐에 달렸어.""고생 많았어."진심이었다. 남편에게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회사를 인수하는 측과 잘 타협이 되어서 남편이 그냥 직장을 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남편의 요구대로 합병을 하는 회사 측에서 기존의 모든 직원을 그대로 고용하면 일은 간단할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에 문외한인 내가 생각해도 전원고용이란 요구는 불가능해 보였다. 만약 두 번째 요구안인 합병 전 남편의 회사에서 자체 조정에 의해 절반 정도의 직원을 정리한 후에 합병에 임한다면 남편은 어떻게 될까. 금융계에서의 마흔은 곧 환갑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있다고 했다. 마흔이 훌쩍 지나간 남편의 직장 생활은 내게 예측불가였다. 남편의 일은 늘 대화의 바깥에 있었다. 나는 남편의 승진이나 출장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외 귀가시간에 의해 알려지는 직원의 경조사정도가 기껏 내가 아는 회사의 동향이었다. 남편의 뒤를 따라 계단을 걸어 올랐다. 남편도 나에 대해 아는 것이 기껏 그 정도일까. 미서 외에는 친구도 없고, 아, 이제는 친구도 없구나, 그리고,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까?"어떻게 될 것 같아?"나는 옷을 갈아입는 남편에게 물었다. "될 대로 되겠지."남편은 마지못한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동안 힘들었으니 대답하기도 귀찮을지 모른다. 나는 남편이 벗어 던진 옷을 뭉쳐들고 방을 나왔다. 사실은 나도 얼른 자리를 펴고 눕고 싶었다. 어지러웠고 한기가 들었다. 옷가지를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침대에 누우면 남편이 목욕을 하고 닦고 자리에 누울 때까지는 쉬이 잠이 들지 못할 게 뻔했다. "먼저 잘게." 목욕탕 문을 조금 열고 말한 후 도로 문을 닫아주었다.작은 방에 이불을 깔았다. 불을 끄고 몸을 눕히자 몸이 땅 속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에 중앙집중식 난방 시스템을 가진 아파트는 제대로 난방을 하지 않는다. 집은 이맘 때가 가장 추웠다.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가슴까지 끌어당긴 두 다리를 안고 얼핏 잠이 들었다. 누군가 거칠게 나를 흔들었다. 풍랑을 만난 배처럼 몸은 흔들리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서 좀처럼 눈을 뜰 수 없었다.

2007-11-0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편의점 안으로 뛰어들었다. 편의점 주인은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냉장 쇼케이스 옆에 붙어있는 문을 밀었다. 그 안에 화장실이 있었다. 내 얼굴을 알고있는 주인은 말없이 계산기를 향해 눈을 돌렸다.화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나는 변기를 안고 주저앉았다. 내장이 쏟아지듯 속엣 것이 변기로 떨어져 내렸다. 변기 속에 게워낸 음식물은 붉은 선혈처럼 보였다. 물을 내리고 다시 토하고, 또다시 물을 내렸다. 더이상 내 놓을 것이 없는 위장은 더 아래쪽 내장 깊숙이 고여 있던 소화액까지 끌어냈다. 목구멍이 쓰라리다 못해 진저리가 쳐졌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덮였다. 눈을 감고 끌어안은 변기 속으로 고개를 쳐박았다. 목구멍에서 간헐적으로 짐승 울음같은 소리가 터졌다.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나는 머리 위로 힘겹게 팔을 올려 물을 내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변기 속으로 물이 소용돌이치며 빠져나갔다. 강민기가 내 이름을 부르며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나는 변기를 잡고 가까스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세면기에 물을 틀어놓고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었다. 뜨거운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화장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무심한 화장실에는 흐린 전등이 켜져 있었다. 세면기 위에 붙은 거울을 쳐다보았다. 백년도 더 살아버린 여자가 충혈된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가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맨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쳐냈다. 물 묻은 두 손을 가볍게 터는 시늉을 하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잠기지도 않은 문을 열 생각도 못하고 선배는 문 앞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 "속이 좀 안좋아서요.""급히 먹더니 체한 모양이다."나는 편의점 주인에게 눈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강민기는 내 등을 가볍게 문질러주며 말했다."약국에 가서 약 사서 들어가.""약 먹을 만큼 심하지 않아요."나는 강민기의 차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강민기는 얼른 차에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신이 사 준 밥을 먹고 탈이 난 내가 못내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등을 밀지 않으면 강민기는 내가 없어질 때까지 자신의 차에 올라타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과장되게 팔을 벌려 장난스레 강민기를 껴안았다. 내 두 팔은 강민기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갔다. 선배는 내 몸을 조심스레 안았다. 선배는 내 머리칼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프지 마라."그 말을 듣는 순간 선배를 이렇게 영원히 안고 있었으면 싶었다. 선배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배의 어깨 너머로 편의점과 그 뒤로 높이 올라간 고층 아파트가 기하학적인 구도를 만들며 이어지고 있었다. 수도 없이 반복되는 네모난 공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비슷한지 또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할까? 지금 나를 안고 있는 강민기는 내게서 다른 어떤 것을 구하는 것일까? 이미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미서가 지상에 있을 때는 단 한번도 내게 손을 뻗치지 않았던 강민기가 지금 내게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보는 게 잠깐이었지만 몹시 고통스러웠다. 이 시간들이 지나가면 또 다시 예전처럼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삶에 흠집을 내는 것은 모두 지나가게 마련이고 상처는 아물게 되어있었다. 숨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면 또, 다른, 시간이 내게 다가오듯이.

2007-11-0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강민기는 공기에 밥을 덜어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잘 먹는 것을 보니 좋구나."나는 양 볼이 불룩하도록 입에 밥을 문 채 양 쪽 입술을 귀 쪽으로 당겨 올렸다. "연락도 안 되고 해서 걱정했다."강민기는 젓가락을 들고 시늉만 낼뿐 거의 먹지 않았다. 이 왕성한 식욕을 나도 제어할 수 없었다. 나는 제대로 씹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밥을 넘겼다. 강민기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게 인생이거든." 강민기의 말은 가시로 변해 내 목구멍에 박혔다. 애써 삼킨 밥이 가슴 한복판에 쇠사슬처럼 걸렸다. 칼끝으로 후비는 듯한 통증이 명치끝에서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솟았다. 나는 맨 발로 땅을 다지듯 통증을 눌렀다. 통증은 미미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냅킨을 뽑아 이마에 밴 땀을 닦았다."선영아."강민기는 내 이름을 불러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무심한 눈길로 선배를 보았다. 이제는 무슨 말을 들어도 감정이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달관이나 초월의 경지는 아니었다. 허무나 공허의 느낌만도 아니었다. 내 감정을 무어라 규정할 수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 흐느적거리며 떠도는 독기 빠진 유령 같다고나 할까. "써 봐. 무엇이건 좋아.""보다시피 아무 일도 없어요. 글은 때가 되면 쓸 거예요."나는 밝게 보인다고 생각되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쓴 글이라면 병헌이가 작업을 시작할지도 몰라서 말이야."강민기 몰래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그 녀석, 첫 번째 여자를 사고로 보냈어. 상처에서 겨우 빠져나왔나 싶었는데….""미서가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나요?"강민기는 잘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아 보였어.""미서는 한때 선배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지나간 이야기지."강민기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나는 선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나간 이야기라고 모두 망각되는 것은 아니었다. 선배는 정말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나를 안고 미서의 이름을 부른 것을 말이다. 나는 강민기처럼 오지랖이 넓지 못했다. 나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은 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지 모르겠다. 모든 감정은 죄다 순간의 진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집에 가 봐야겠어요. 할 일이 있었는데 깜박했어요."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민기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그동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고 느꼈던 마음은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배를 통해 전병헌의 근황을 듣자 바람에 이는 파도처럼 마음이 출렁거렸다. 강민기는 편의점 앞에서 차를 세웠다. 나는 자동차의 문고리에 손을 갖다댔다. 선배는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엉거주춤 선배에게 손이 잡힌 채 고개를 돌려 선배를 보았다."꼭 써라. 다른 글 몇 개 줘봤는데 쳐다보지도 않더라. 네 글이라면 혹시 모르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위가 아파왔다. 속에 것이 식도를 역류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선배의 손을 뿌리쳤다. 차에서 내려 구르다시피 편의점으로 내달렸다. 선영아, 강민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등 뒤를 따라왔다.

2007-11-0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뭐 먹고 싶어?"강민기가 내게 메뉴판을 펼쳐 보이며 물었다."아주 매운 게 먹고 싶어요."강민기는 맵게 해줘요 라는 말과 함께 종업원에게 해물찜을 주문했다. "요즘 쓰는 거 있어?"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나 써봐. 책 한 권 만들자.""쓸거리가 없는 걸요."나는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했다. 선배가 내게 말하고자 한게 이거였구나 라는 감이 왔다. "지난번에 구상한다는 거 있었잖아.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과 사랑이라고 했지?"나는 고개를 떨어뜨려 물 컵에 시선을 박았다. 애써 눌렀던 가슴 속에서 막 바람이 일어나려고 했다. 하얀 사기 컵에 냉수를 부어 들이켰다. 가슴을 치받고 솟아오르던 덩어리가 약간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놈을 내리 눌렀다. 컵을 잡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움켜잡고 있던 컵을 가만히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생각뿐이었어요. 아무 것도 해 놓은 게 없어요."강민기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쉬는 것도 좋아. 하지만 너무 오래 손을 놓으면 다시 시작할 때 힘들어.""지난 번 책은 아직도 잘 나가요?""꾸준해. 특히 너하고 병헌이가 쓴 게 인기가 있어.""다행이네요."나는 그쯤에서 화제를 바꿨으면 싶었다. 전병헌의 이름이 나오자 온갖 종류의 일들이 감자를 캐내듯 땅 위로 주렁주렁 달려 나왔다. "전시는 잘 끝났죠?"미서의 장례식을 끝낸 후, 나는 전시가 열리는 중국집에 가지 않았다. 집과 동네 슈퍼마켓만 겨우 오갔다. 내 기억은 미서의 장례식에서 멈췄다. 장례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호했다.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한 주가 지나가버리고, 두 주일이 후딱 사라진 것에 놀라곤 했다. "송 기자가 네 작품에 흥미를 가지더라. 널 인터뷰 시켜달라고 몇날 며칠 졸라댔다."남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나는 멍한 눈길로 선배를 쳐다보았다. 종업원이 커다란 접시에서 더운 김을 올리는 해물찜을 들고 왔다. "맥주 한 잔 할래?"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춧가루와 고추장으로 붉게 양념한 해물찜에 젓가락을 꽂았다. 매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콩나물과 미나리, 조개와 낙지와 굴 등의 해산물을 젓가락으로 건져 올렸다. 헤진 혓바닥과 입 안쪽 점막에 매운 양념이 닿자 불에 댄 듯 쓰라렸다. 나는 잘 씹지도 않고 오징어를 삼키고 새우를 껍질 째 목구멍으로 넘겼다. 먹어도 배가 부르기는커녕 허기가 졌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나는 붉은 양념으로 버무린 해물찜에 머리를 박고 빠르게 먹어댔다. 선배가 내 컵에 물을 부어 주었다. 나는 왼 손으로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선배의 말에 나는 접시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나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종일 굶었어요.""빈속에 갑자기 매운 것 들어가면 속 아프다. 밥 시켜 먹자." 나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커다란 접시는 반 이상이 비어버렸다.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는 조금도 불러오지 않았다. 종업원이 밥을 들고 왔을 때 나는 젓가락을 놓고 숟갈을 집어 들었다.

2007-11-0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강민기가 전화를 한 것은 저녁 시간 무렵이었다. 근처 출판단지에서 열린 행사에 왔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바쁘지 않으면 저녁이나 같이 할까?" 아침에 눈을 떠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하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앉았거나, 바깥을 내다보며 또 낙엽이 지는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집 밖으로 나간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남편은 사나흘에 한 번 정도 집에 들어왔다. 목욕을 하고 잠시 눈을 붙인 뒤, 옷을 갈아입고 나가곤 했다. 남편의 뒷모습은 쓸쓸하고 힘겨워 보였다. 나는 남편의 어깨에 양 손을 얹은 후, 안마하듯 손아귀에 몇 번 힘을 주면서 말했다. "힘들면 그만 둬. 너무 애쓰지 마. 우리는 비빌 언덕이 있잖아."남편은 웃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버렸다. 그런 시간이 계속되는 날들이었다. 나는 조금도 바쁘지 않았다.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민기의 승용차에 올라탔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후, 나는 강민기를 향해 조금 웃었다. "얼굴이 그게 뭐야. 매일 굶는 사람처럼."강민기가 마치 큰 오빠처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먹어요. 심플한 목소리로 대답하려고 했다.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차창을 통해 전방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느닷없이 물이 차올라 넘치는 둑처럼 눈앞 가득이 안개가 밀려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양 한 마리 , 양 두 마리, 가만 이건 잠이 안 올 때 세는 거잖아. 이번에는 담벼락에 붙어 세찬 바람을 견디는 담쟁이덩굴의 잎을 떠올렸다. 일곱 장이 남았네, 아, 또 떨어졌구나. 여섯 장, 다섯 장, 이젠 마지막으로 한 장이 남았군. 저 잎마저 떨어지면 나는……. 가만 이것도 아니구나.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머리 속에서 안개가 사라졌다. 눈을 떴다. 노란 은행잎이 도로에 누워 뒹굴다가 자동차가 달려가는 서슬에 놀라 일제히 나비처럼 공중으로 날았다. 은행잎은 차도와 인도의 경계석 부근에 후르르 내려앉아 쌓였다. 은행나무의 높은 쪽의 가지는 잎이 거의 다 떨어졌고, 아래쪽 가지만 잎을 달고 있었다. 가로수중에 가장 오래 녹색을 지니는 것은 플라타너스였다. 누렇게 혹은 병든 것 같은 갈색의 넓은 이파리는 다른 종류, 벚나무나 회화나무 같은 것 들이 죄다 잎을 떨군 뒤에도 가지에 붙어 추위에 떨었다. 도심지를 에워싸고 외곽을 달리는 도로의 한 구간에는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평소에는 그 구간의 미관이 가장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강민기는 플라타너스 길을 향해 달렸다. 그 너머 골짝이 음식점이 몰려있는 동네였다. 키 큰 나무가 방류하는 댐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서 있었다. 가로수 사이에 나트륨등이 달처럼 떠 있었다. 나무와 가로등 사이로 얼핏 드러나는 하늘은 청보랏빛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강민기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오른 쪽 손을 떼더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선배에게 한 손을 잡힌 채 가만히 있었다. 선배의 손으로 무언가 내게로 전해져왔다. 그것이 무얼까? 선배가 말을 하지 않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용기? 위로? 사죄? 그것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사랑이라는 낱말은 떠올리지 않는 것일까?선배는 한 손으로 핸들을 조작했다. 선배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힘으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자동차가 플라타너스 길을 빠져나왔다. 음식점의 불빛이 저녁 하늘에 처음 나타나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불빛을 받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2007-11-0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미서는 한 줌 가루가 되었다. 믿을 수 없었다. 가을볕을 닮은 웃음소리, 사랑스럽던 몸짓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미서가 담긴 작은 항아리를 공원묘지에 안장하던 날, 미서의 늙은 어머니는 자신의 가슴을 쳤다. 세월의 침식에 갉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난날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늙은 여자의 몸에 머물지 않았다. 미서의 어머니는 주름진 얼굴로 울었다."선영아. 내가 미서를 죽였구나. 늙은 내가."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떼면 "아니에요. 제가 범인이에요. 아주머니가 아니라 저 예요."그렇게 소리칠 것 같았다. 미서의 어머니는 미서가 강민기를 몹시 따르는 것을 못 마땅해 했다. 애지중지 키운 무남독녀를 장래도 불투명한 영세 출판사를 꾸리는 강민기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거다. 강민기 때문에 미서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조건의 김 이사가 나타나자 우격다짐으로 딸을 내쫓다시피 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부모로서의 자책일 뿐이었다. 김 이사를 만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김 이사에게 마음이 기운다고 미서가 말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보았던 것과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는 곳에 속하는 사람이야. 매력 있어. 나름대로."그러니까 그것은 순전히 미서의 선택이었다. 결혼을 결정할 무렵 미서는 서른이 넘은 성인이었다. 누가 떠민다고 길을 갈 나이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어미에게는 여전히 어린 자식이었다. 늦가을의 공원묘지에는 들국화처럼 노란 햇볕이 가득했다. 전병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강민기와 나란히 서서 미서의 이름을 새겨놓은 묘비를 쳐다보았다. 하늘은 솜털을 뜯어 흩뿌린 듯한 하얀 구름 몇 점을 제외하고는 눈이 시리도록 높고 푸르렀다. 김 이사는 재빨리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는 척하며 눈가를 훔쳤다. 미서가 보낸 엽서에 박혀있는 그리스의 신, 아폴론처럼 콧날이 우뚝했다. 잘 자란 사람답게 반듯한 이마 아래의 얼굴이 미술 시간에 데생을 하던 아그리파처럼 균형 잡혀있었다. 장례절차가 끝나고 김 이사는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세련된 매너가 몸에 붙어 허물어진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 이사는 담담하게 아내를 떠나보냈다. 미서의 어머니는 내게 한 쪽 어깨를 기댄 채 말했다. "김 서방은 자기가 미서를 죽였다고 밤마다 통곡한단다. 몹쓸 년, 불쌍한 년."미서의 어머니는 목구멍으로 울음을 삼켰다. 죽음이란 이렇게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것 인줄 알지 못했다. 온 몸의 기는 모조리 빠져나가 껍질만 남은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장례식 때는 엉엉 울다가 그릇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며 국수를 삼키기도 했다. 그때는 이렇게 기운이 빠지지는 않았다. 울지 않을 때는 오히려 문상을 온 사람들과 간혹 농을 주고받을 정도의 여유도 있었다. 약간은 축제 같은 분위기도 느껴졌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해치우는 기분도 있었다. 미서의 죽음은 그렇지 않았다. 해치워야하기는커녕 숙제를 한 아름 안은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해결해야할 커다란 짐을 가득 머리에 인 것 같았다. 가슴 깊숙이 알지 못할 무엇이 가득 쌓여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분노가 불쑥 치솟는가 하면 허망한 마음이 해일처럼 밀려와 의식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미서는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자신을 변명하거나 남을 위로하는 단 한 줄의 문장도 남겨놓지 않았다. 눈을 드니 먼 산에 단풍이 불타고 있다. 그렇게 깊어가는 가을에, 미서는 땅으로 돌아갔다.

2007-11-01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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