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

 

숨쉬지 마세요<13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파묻혔다. 강민기는 유리컵과 양주병을 가지고 와 내 앞에 놓았다. "얼음을 가져와야겠다."강민기가 냉장고가 있는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강민기의 손을 잡았다. 강민기는 돌아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강민기를 안았다. 등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낯선 곳을 떠돌다 집에 돌아 온 것 같았다. 강민기는 내게 등을 내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지 알 수없었다. 나는 강민기의 겉옷을 벗겼다. 윗도리가 떨어져 나갔고 강민기는 내게로 몸을 돌렸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단추를 끌렀고 몸에서 옷을 벗겨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은 채 침대가 있는 방까지 걸어갔다. 나는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웠다. 강민기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올려 주었다. 이마에 입술을 갖다대고 머리칼 냄새를 맡기도 했다. 선배의 손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강민기는 등 뒤로 손을 넣어 내 몸을 약간 들어 올려주었다. 선배의 혀가 내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왔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선배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벗은 여자의 몸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게 그 증거지 뭐야."미서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선배는 상처 입은 새끼 강아지의 환부를 핥아 주는 어미처럼 그의 혀로 내 몸 구석구석을 씻어주었다. 선배가 가슴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배꼽 아래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선배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나를 안아 올렸다. 강민기는 나를 마주 안은 채 그의 허벅지 위에 나를 앉혔다. 나는 두 다리로 선배의 허리를 감았다. 선배는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속으로 그의 몸을 밀어 넣었다. 우리는 마주 안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건너편 빌딩의 네모난 창문이 파도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선배의 등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허벅지에 힘이 주어졌다. 머리 속에서 무언가 소리도 없이 퍽퍽 터지는 것 같았다. 선배는 나를 침대 위로 눕혔다. 나는 선배를 통째로 자궁 속으로 빨아들일 듯 두 다리를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선배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내 눈두덩 위로 떨어졌다. 선배는 커다란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몸의 모든 세포가 몸의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긴장과 이완이 교차 순간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선배의 몸과 내 몸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 마치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머리 속에 켜져 있던 수많은 전구가 한꺼번에 깨져버렸다. 세상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어둠 속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서야."선배는 쾌락의 절정에서 미서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나는 선배의 머리를 감싸 안아 주었다. 선배의 뜨거운 눈물이 내 목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선배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선배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선배의 반듯한 이마를 바라보았다. 강민기는 미서를 많이 사랑했구나.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었다. 눈물이 말라 얼룩진 뺨을 두 손으로 쓸어주었다. 강민기는 이것으로 미서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을까?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나갔다. 불은 켜진 채였고 테이블 위에는 마시지 않은 양주가 컵에 그대로 있었다. 눈물을 쏟으며 펑펑 울고 나면 얼음이 언 것처럼 단단한 마음이 풀릴 것도 같았다. 술을 입 속으로 쏟아 붓듯 마셨다. 마치 세정제로 닦은 유리창처럼 머릿속은 더욱 투명해졌다. 나는 빈 잔에 또 술을 부었다. 밤새도록이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2007-10-3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우리는 말없이 동네를 걸어 내려왔다. 큰 길이 나타났을 때 강민기는 나를 보며 말했다. "선영아, 지금 가야 하니? 어디 가서 한 잔 더 하자."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택시가 곁에 와서 멈추었고 이형수가 문을 열었다. 강민기는 나를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뒤이어 택시에 오른 후 문을 잡고 있는 이형수에게 말했다. "선영이하고 둘이서 갈게."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선배는 택시의 문을 닫아 버렸다. 선배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가봤지?"강민기는 내게 물었다. 강민기의 말은 남을 배려하는 선량한 성격에서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투였다. 나는 강민기를 외면한 채 달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가 미서와 나를 데리고 다닐 때가 생각나요. 꽉 막혀있는 우리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만들어주려고 애 많이 썼잖아요. 미술관이나 음악회 또는 학술 세미나와 대 선배들의 술자리에까지 말이에요."강민기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좀 의식이 고양되었어?""나는 전혀 아니었어요."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사실을 말하자면 강민기가 데려가는 곳에서 나는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미술을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학술 세미나에서는 용어조차 생소해 지루했다. 선배들의 술자리는 너무 방탕해보이고 너저분해서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오던 우아하고 격조 높은 생활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왁자하게 떠드는 마치 시장 바닥 같은 그런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금방 졸업한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미서는 무척 재미있어 했어요. 지금껏 악이라고 배웠던 것들을 가리지 않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미서, 완강히 마음을 닫고 있던 나, 그게 우리 둘의 차이였던 것 같아요."자동차는 도심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불이 꺼진 빌딩과 사람이 없는 거리는 우울하고 무력해 보였다. 도시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강민기의 집은 출판사 건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오피스텔이었다. 카드로 인식되는 현관을 들어서자 어두운 조명이 은은하게 퍼지는 로비가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자 조용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혼자서 끊임없이 이어지다 끊어지다 했다. 전병헌의 서민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과는 대조적이었다. 미서가 내게 강민기와 결혼하고 싶다고 속삭였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도 미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동아리에 들어가 회장인 선배를 본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나도 미서와 똑같이 나도 그래 라고 맞장구를 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내 마음을 숨기느라 애썼고 미서는 내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느라 바빴다. 스무 살이던 그때 우리에게 사랑은 결혼과 같은 단어였다.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었지만 나와 미서는 그랬다. 중산층이 모여 사는 아파트에서 적당히 교양이 있는 부모 밑에서 선량한 시민으로 우리는 키워졌던 것이다. 대학에서 만난 선배에게는 우리에게 부재한 무엇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선배 그 자체인 이성이었다. 그때는 다른 세상이, 선배로 인해 알게 된 외면할 수 없이 끌려드는 특별한 세상이 있는 줄 알았다.

2007-10-3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택시는 언덕배기를 힘겹게 올라 중국집 앞에서 멈추었다. 마법의 시간이 끝난 것처럼 중국집은 어둠 속에서 광채를 잃고 있었다. 나는 이마에 승천하는 용 두 마리를 인 문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문 안쪽의 어디선가 희미한 불빛이 비쳐 나왔다. 나는 이마를 유리에 바싹 갖다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빛은 복도를 꺾어 들어가는 방향의 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한 동안 유리문에 이마를 댄 채 서 있었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갔다. 전등이 만드는 그림자가 발밑에 떨어졌다. 그림자는 배회하는 유령처럼 바닥에서 일렁거렸다. 이층 전시실 문을 열자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을 막아섰다. 문 옆의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모든 게 제 자리에 태연하게 놓여있었다. 멀리 보이는 내 작품 곁에는 관객이 찍어 참여한 수많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평소 같으면 기뻤을 터지만 아무 감동이 없었다. 가슴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칸막이 뒤로 나있는 계단을 통해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을 거쳐 복도로 나갔다. 불빛이 새나오는 방을 향해 갔다. 조금 열려있는 문을 당겨 열었다. 이형수와 강민기 그리고 전병헌과 김상우와 정신희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앉아 각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기묘한 배치였다. 전병헌은 혼자 창을 마주 보고 앉아있었고 이형수와 김상우는 나란히 앉아있었다. 정신희는 강민기와 마주 앉아있었지만 각자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기 때문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빈 술병이 테이블 위에 아래에 굴러다녔다. 나는 강민기의 곁으로 갔다. 정신희는 울었던지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눈두덩이 약간 부어있었다. 나를 보고 강민기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장 가슴 아픈 사람에게."강민기는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선배의 말에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뭉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머리꼭대기에서 천천히 얼음물이 부어지는 것처럼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강민기나 전병헌, 혹은 미서와 함께 시간을 공유했던 누구라도 얼굴을 마주 대는 순간 통곡이 터져 나오면 어떡하나 했던 것은 말짱 기우였다. 나는 강민기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시지 않고 그냥 탁자위에 놓았다. "마셔. 이럴 땐 술이 도움이 돼.""선배도 많이 마시지 않았나 봐요.""마셔도 취하지 않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안 마실래요."강민기는 더 이상 내게 술을 주지 않았다. 깊은 물 속 같은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앉아있다가는 석상이 될 것 같았다. 못 견디겠는지 정신희가 비틀대며 가겠다고 일어섰다. 이형수와 김상우가 강민기가 함께 가자며 일어났다. 강민기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대는 전병헌을 내려보았다. "형은 그냥 여기서 재우죠. 제가 쓰던 침낭이 있어요."이형수가 방을 나가더니 에어매트와 침낭을 가지고 돌아왔다. 김상우가 매트를 불어 공기를 넣은 후, 바닥에 깔았고, 이형수는 전병헌에게 침낭을 뒤집어 씌웠다. 침낭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전병헌은 중얼거렸다. "내 탓이야. 내 탓이라고. 미서야. 미서야."나는 전병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꼬대처럼 웅얼대는 전병헌의 말을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미서의 죽음이 전병헌의 탓이라면 그건 바로 나 때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전병헌이 창을 내 가슴팍을 향해 던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날카로운 창을 피하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2007-10-2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구겨 잡은 신문에 머리를 박고 현관에 주저앉았다.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것처럼 몸에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적에게 몸을 파 먹혀 껍질만 남아버린 곤충처럼 누군가 손만 대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상처를 갖고 있는 백치처럼 나는 몸을 구부리고 모로 쓰러졌다. 이마 위 머리의 한 부분이 사막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고 해도 내리 쬐지 않는 불모의 사막, 황량한 모래언덕만 끝없이 이어지는 머릿속 풍경, 얼마나 그러고 누워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잠깐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안아 올렸다. 내 뺨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고 꿈결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웅얼댔다. 괜찮아, 나, 괜찮아. 눈을 뜨는 것이 한 없이 귀찮았다. 이대로 백 년 동안 잠들어 있고 싶었다. 잠이 깨자 뜨거운 눈물이 귓가로 주르르 흘렀다. 봐, 내가 뭐랬어. 그냥 잠들어있게 내버려 두랬잖아. 이제 나 어떡해? 남편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알약을 내 입에 밀어 넣었고 물을 흘려주었다. 눈을 감았지만 이마 위 뇌 속에 마치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중학생이 된 미서와 나는 학교에 가고 있다. 아무리 가도 학교는 나타나지 않는다. 숙제를 오늘까지 꼭 내야하는데 학교 가는 길이 자꾸만 사라져버렸다. 숙제는 어느 틈에 제출해야 할 원고로 변해있었다. 미서와 나는 학교가 대학병원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제출해야 할 원고를 복사하러 복사기가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간다. 줄을 선 사람들의 행렬이 끝이 없었고 차례가 너무 멀어 미서와 나는 초조하기 짝이 없다. 끈질기게 줄을 서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복사해야할 원고가 자꾸만 변하고 헷갈린다. 어느 틈에 긴 행렬은 사라지고 우리는 무사히 원고를 복사했다. 이제 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길을 찾을 수없다. 택시를 타기로 하자 또 택시를 기다리는 줄이 너무나 길다. 택시도 좀처럼 오지 않는다. 길에는 빈 택시가 수도 없이 지나다닌다. 초조해서 발을 동동대지만 소용없다. 우리는 급기야 따로 떨어져서 차를 잡기로 하고 헤어진다. 미서와 헤어지는 순간, 마치 보내서는 안 될 무엇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안타깝고 고통스럽다. 고통이 극한에 이르면 그저 눈을 감고 숨죽이고 있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아무런 말도 어떤 몸짓도 할 수 없어 그저 멍하니 미서가 차도로 뛰어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알이 뻑뻑한 것을 보면 아마도 오래도록 나는 눈을 뜨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남편은 나를 팔로 감싸 안고 잠들어 있었다. 남편의 팔을 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안은 깜깜했다. 나는 장롱을 더듬어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꺼내 걸쳤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신발을 신은 채 나는 다시 마루를 밟고 거실을 거쳐 주방으로 갔다. 커튼을 쳐 놓지 않은 집 안은 밖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주방의 식탁 위에 가방이 놓여있었다. 나는 가방을 거머쥐었다. 몇 시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두우니 밤이 되었을 것이다. 그게 몇시 인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시간이란 그저 인간의 편의에 의해 갈라놓은 것뿐이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편의점 앞에서 택시를 탔다. 거리는 환히 밝혀진 불빛 때문에 마치 보석으로 치장된 정원 같다. 기다랗게 이어진 가로등은 보석 목걸이를 걸어놓은 것처럼 눈부셨고, 창마다 불을 밝힌 고층 건물은 공중에 떠있는 궁전 같다. 자동차는 양 쪽에서 쏟아지는 불빛 속을 빠르게 달렸다. 강변도로에는 강에서 피어올라 도로를 점령한 안개가 자욱했다. 어디로 갈까요? 운전사가 물었을 때 나는 잠깐 생각했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을 것 같았다.

2007-10-2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잠이 깼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없었다. 나를 깨운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전화벨 소리는 일단 중단되었다가 다시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전화는 또 끊어졌다. 나는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남편은 지난밤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창에 드리워진 커튼사이로 황금빛 햇살이 강하게 비치는 걸로 봐서는 해가 뜬지는 이미 오래 된 것 같았다. 나는 반듯이 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어젯밤 기분이 몹시 암울했던 생각이 났다. 나는 익사하지 않고 살아있었다. 욕조에서 기어 나와 침대에 올라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머리도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욕조의 물을 먹고 버둥거린 흔적도 없었다. 지옥으로 떨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갑작스레 전화가 울었을 때 나는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꿈속에서 전화벨 소리를 듣고 깨어났고, 지친 전화소리는 내가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입을 다물었고, 지금 다시 기운을 회복하여 재차 울리는 중이었다. 전화기를 들어올리며 몸체에 부착되어있는 디지털시계를 보았다. 맙소사, 정오가 지난지 이미 오래였다. 오전중이라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커튼이 쳐져 있어서였다. "신문 봤어요?"전병헌이었다. 나는 우리의 전시에 관해 기사가 난 줄 알았다. 전병헌의 목소리가 침통한 걸로 봐서 그다지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라고 짐작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룻밤 새에 백년은 늙어버린 늙은이처럼 심드렁해졌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이었다. "아직 못 봤어요."전병헌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불현듯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병헌이 말을 잇지 못할 정도라면 전시회 정도의 기사는 아니라는 예감이 퍼뜩 머리를 스쳐갔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전병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전병헌은 여전히 전화기를 잡은 채 저 편에 있었다."미서가, 어제, 우리 시간으로 오전 중에……."나는 있는 힘을 다해 수화기를 움켜잡았다.전병헌은 또 다시 침묵을 지켰다."사고?"나는 전화기에다 가장 확률이 낮은 낱말을 갖다댔다. 단순한 사고 정도로 몇 년이나 글을 쓰지 못한 소설가의 소식이 신문에 실릴 리 없었다. "신문에 났다고요?" 나는 수화기를 내던지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침대에서 내려와 보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개의치 않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지난밤을 경계로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엄지손가락 크기로 쪼그라들면서도 죽지 못해 불행한 노파가 되어버렸다. 현관문을 여니 새벽에 던져진 채로 신문은 구겨진 채로 누워있었다. 나는 신문을 주워들고 거칠게 펼쳤다. 신문 갈피에서 낱장 광고가 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활짝 핀 목련처럼 단아한 미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봄 날, 강민기가 갓 등단한 미서를 찍어준 것이다. 그때 선배가 했던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첫 창작집 낼 때 이 사진 써라,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강민기가 말했다. 신문을 움켜잡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온 몸이 떨려 나는 양 팔로 가슴을 감싸 안았다. "자살? 무엇 때문에? 왜?"

2007-10-2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버스로 한 정거장 남짓 되는 거리를 갔을 때 택시가 달려왔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웠다. 뒷좌석에 앉자 온몸이 바닥으로 꺼질 것 같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전철로 바꿔 타지 않고 시 외곽의 아파트 단지까지 가자고 했다. 택시기사는 말없이 강변도로를 따라 달렸다. 검은 강은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는 듯 꿈틀대며 흘러갔다. 자동차의 불빛이 강을 따라 휘어지며 끝없이 이어졌다.집 앞에서 나는 편의점에 들렀다. 냉장케이스의 문을 열어 캔맥주를 집어 들었다. 딱히 취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물먹은 솜처럼 몸과 마음이 무거운 날은 쉬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깊이 잠들고 싶었다. 캔맥주 두개를 계산한 다음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우편함에 두툼한 대봉투가 꽂혀있었다. 봉투가 찢어질까봐 조심해서 꺼냈다. 미서가 보낸 거였다. 봉투는 단단히 봉해져 있어 그냥 열어 볼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 가위를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봉투 겉면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작은 책자나 사진이나 엽서 같은 게 들어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돌아와 있지 않았다. 거실 벽의 스위치를 올렸다. 푸른 형광등 불빛에 익숙한 물건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식탁위에 미서가 보낸 봉투를 올려두고 목욕탕으로 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미서의 봉투를 맨 먼저 뜯어보았겠지만 이상할 만치 마음이 냉담해졌다. 우선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싶었다. 석고를 들이 부은 것 같은 몸 마디마디를 풀어내고 싶었다.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거실의 등을 끄고 부엌의 전등만 켜두었다. 욕조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는 가방에서 캔을 꺼내 단숨에 마셨다. 허기가 졌던 터라 맥주는 물처럼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갔다. 나는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봉투를 외면하고 외출복을 벗어 식탁 의자 위에 걸었다. 남편과 함께 마시려고 했던 캔을 마저 꺼냈다. 탁, 금속성 소리를 내며 핀이 떨어졌다. 속옷만 입은 채 욕조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셨다. 맥주 두개 정도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남편이 마시다 남겨둔 양주를 꺼내 한 잔 가득 부었다. 얼음도 타지 않은 잔을 들고 욕실로 갔다. 세면기 위에 술잔을 두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피부에 얇게 살얼음이 끼었던 것 같은 몸이 뜨거운 물에 녹아내렸다. 곤두섰던 신경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서의 편지 따위는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오래 미서를 외면하고 싶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있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행기를 써 보낼 수 있는 미서에게 화가 났다. 전병헌과 나 그리고 미서 자신에 대해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런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도 보나마나 미서가 다닌 여행지의 감상이나 기록일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미서의 마음을 그리고 전병헌의 마음을 보고,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든 나 자신을 납득시키고 싶었다. 우리 세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한가하게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해서 여자를 사랑한 이야기, 백조로 변해 또 다른 여인과 사랑을 나눈 얘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전병헌이 제우스는 아니었다.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나는 물 속에서 팔을 뻗어 술잔을 집어 들었다. 양주는 단숨에 들이켜지 않으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조금씩 홀짝거리면 너무 독해서 마시기 어려웠다. 나는 한 약 마시듯 두세 번 나누어 양주를 꿀꺽 삼켰다. 건조하던 머릿속에 축축하게 안개가 드리워졌다. 지하세계의 통로로 떨어져 내리듯 몸뚱이가 서서히 물밑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2007-10-2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여름 동안 무섭게 자란 잡초는 겨울이 오면 말라 바스라질 것이다. 나는 잡초 더미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싶었다. 다리에서 통증이 사라졌을 때 공터를 빠져나왔다. 중국집은 조명이란 조명은 죄다 켜놓은 모양이었다. 아래층은 호박석처럼 빛났다. 나는 유리문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벤트가 끝났는지 사람들 손에는 칵테일 잔이 들려있었다. 천장 가까이 열기 섞인 공기가 떠다녔다. 전병헌이 손에 유리잔을 들고 홀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김상우와 정신희, 이형수와 네이비블루도 보였다. 나는 유리문에서 떨어져 나와 차도로 내려섰다. 희미한 가로등이 인적 드문 거리에 서있었고, 한적한 산동네는 마치 산속의 휴양지처럼 고요했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석에 걸터앉았다. 침대 머릿장에 초대장을 올려놓고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늦은 밤 먼지와 체념과 분노로 범벅된 술 냄새를 풍기며 남편은 기다시피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남편이 전시를 보러 오지 않았으면 했다.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반응할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완만하게 경사져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이 떨어지는 길은 마을버스조차 다니지 않았다. 깔고 앉은 경계석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몸이 떨렸다. 중국집에서 새나오는 불빛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몸이 떨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을 때까지 앉아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돌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관절에 석고를 들이 부은 느낌이 들었을 때 문득 깨달았다. 내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둡고 먼 길 저편에서 남편이 나타날 것을 바라고 있었다. 남편이 와주었으면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은 남편이 와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벗은 몸을 찍은 사진을 봐도 좋았다. 사진 때문에 남편이 나를 비난해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곁에 있었으면 했다. 익숙한 남편의 냄새,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눈빛과 표정을 보며 안심하고 싶었다. 오래 의존해왔던 것에 아무런 갈등 없이 등을 대고 싶었다. 남편은 적어도 내 등을 밀치거나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남편도 미서도 오지 않았다. 전시가 끝나가는 시간까지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시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뻣뻣한 다리를 끌며 거리를 걸어 내려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작고 여린 빛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별인가하고 올려다보았는데 늦은 밤 어딘가로 날아가는 비행기였다. 전병헌과 앉아 맥주를 마시곤 하던 카페를 지나쳤고, 마을버스 정류소를 지나갔다. 어두운 길 위로 발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뜨거운 물 속에 머리끝까지 잠겨 잠들고 싶었다. 열에 들떠 힘 드는 줄 모르고 이 길을 오가곤 했다. 작업을 끝내고 밤늦도록 앉아 술을 마실 때도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택시가 오지 않나 둘러보았다. 택시는 보이지 않았고 얇은 옷 속으로 쌀쌀한 바람이 스몄다. 가로수에 매달린 잎 넓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려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물기를 잃으며 시들어가는 잎들은 쏟아지는 빗소리를 내고 있었다.가로수 사이로 노란색 나트륨 등이 서 있었고, 희미한 불빛이 바닥에 둥글게 퍼졌다. 이대로 걸어 집까지 가야할 것 같아서 더럭 겁이 났다. 터무니없는 생각인 줄 알지만 길을 걷는 동안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는 길 위를 밤새 걸어가야 할까봐 두려웠다. 밤새도록 걸어도 집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겁고 암울한 영혼이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것일까.

2007-10-2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김상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불같이 화를 냈고, 망설이지 않고 기쁨을 드러냈다. 모두가 즐거워할 정도로 유쾌한 여행을 했단 말이지. 미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혼란스러운가. 이 모든 게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한없이 가벼운 지푸라기처럼 무게도 질량도 측량할 수 없단 말이지.김상우는 입구에 선 채로 내게 여행 중의 몇 가지 소식을 간단히 전해주었다. 강민기가 김상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상우는 잠시 후 보자며 나를 떠났다. 등 뒤로 주고받는 인사말이 들려왔다. 나는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바깥으로 나가기 전 힐끗 돌아보았더니 네이비블루가 내 작품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야구 모자를 쓴 긴 머리의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면서 나를 스쳐 지나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내려오자 중국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사람들이 서있었다. 자장면을 만들기 위해 기다리는 관객이었다. 양파를 썰면서 흘리는 눈물에서 저들은 어떤 향수를 끌어낼까? 지나간 삶의 냄새, 생의 갈피에 곰팡이처럼 숨어있던 냄새를 오늘 저녁에 발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등의 밝은 불빛이 미치는 곳을 피해 건물 뒤쪽의 공터로 걸어갔다. 창을 죄다 막아서 건물 뒤편은 깜깜했다. 나는 물기가 줄어드는 잡초더미를 헤치고 공터의 중간으로 갔다. 키 큰 잡초가 무성하게 서 있는 곳에 서서 주변을 조심스레 밟았다. 동그란 작은 공간을 만들어 쭈그려 앉았다. 머리위로 키가 올라온 잡초가 성벽처럼 울타리를 만들었다. 어둠을 타고 낮게 웃는 소리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춘장이 불에 타면서 생기는 독특한 향이 날아왔다. 열에 들떠 작품을 만들던 지난 한 달이 어둠 속에 고스란히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를 온전히 밀어 넣었던 시간이었다. 이제껏 그렇게 몰입해서 열중했던 일은 없었다. 즐겁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하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모든 것이 완전히 일체가 되었다. 나는 그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물감과 같았다. 그런데 정작 결과를 펼친 오늘 밤은 왜 이토록 고독한 지 알 길이 없었다. 모든 사물이 내게서 한 발 떨어져 맴돌았다. 어둠도, 불빛도,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조차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원자핵의 주변을 도는 전자 같았다. 공허가 몸속을 도는 혈관을 따라 온 몸을 흘렀다.오래도록 공터의 잡풀 속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바람이 쌀쌀했다. 드러난 목과 가슴언저리에 소름이 돋았다. 모두 웃고 있는데 혼자 심각해 하는 것 같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 한 동안 꼼짝 않고 서있었다. 멈추었던 피가 다시 도느라 허벅지에서 발목까지 마치 드릴로 터널을 뚫듯 둔탁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사랑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 낱말 속에 수많은 감정이 혼재되어있는 사랑. 어쩌면 그것은 허상일지 모른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남자와 여자 혹은 여자와 여자 아니면 남자와 남자들의 육체적 교감만 있을 뿐. 그것뿐일까. 뭔가 더 있지 않을까.결국 오지 않을 거니? 너는 늘 내 앞을 달리는구나. 뜨거운 태양아래서 내게 엽서를 보내고, 매혹적인 비잔틴의 도시인 미스트라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끝에 있는 평화로운 휴양지인 모넴바시아에서, 하늘을 비추는 바다의 해변에서, 너는 비치파라솔의 그늘에 비스듬히 누워 지평선을 보고 있다고. 나는 여기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잡초 무성한 공터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나도 너처럼 눈부시도록 환한 태양아래 서고 싶다. 내가 불안해하는 게 무엇인지 아니? 이 황량한 잡초 밭처럼 내 삶이 그렇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야. 방향을 잃어버릴까 두렵다.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모르겠다.

2007-10-2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시는 음과 양이 자리를 바꾸는 시각에 개막되었다. 늦가을 오후, 사람들이 하나 둘,전시공간으로 들어왔다.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대기는 불투명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동네 주택지가 별처럼 작은 불빛으로 살아났다. 관객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평론가가 불쑥 나타나는가하면, 인터넷 신문에서 나온 풋풋한 젊은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다.아래층 중국집의 '향수와 자장면'은 상당히 흥미를 끌고 있었다. 대부분의 관객이 참여했기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까지 했다. 나는 출입구 부근에 서서 계단을 오르는 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삼십분쯤 온 신경을 모으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출입구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강민기가 미술 평론 잡지 기자와 함께 내게로 다가 왔기 때문이었다. 흰색 면 티 위에 네이비블루의 재킷을 입은 기자는 나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 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작품 앞에서 둘씩 셋씩 둘러서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벽에 걸리거나 바닥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서 있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한 여자가 부스 안에서 찍은 사진을 지하철 노선표의 한 역에 압정으로 막 붙이는 중이었다. 나는 기자를 향해 입술 끝만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전혀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인터뷰 같은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작품에 대해 내가 할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는 모두 관객의 몫인 것이다. "사진은 누가 찍었습니까?"나는 네이비블루의 재킷을 입은 기자를 쳐다보았다. 기자는 내 말을 기다렸다. 마치 자신의 말에 반드시 대답해야할 의무라도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누가 사진을 찍었건 그것이 작품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가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네이비블루는 끈질기게 답변을 기다렸다. 전시까지 한 마당에 인터뷰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민기를 쳐다보았다. 선배가 네이비블루를 창 문 밖으로 던져버렸으면 싶었다. 딱히 기자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것이 우울했다. 작업에 몰두했던 시간들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이 나와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갔다. "이형수가 찍었어."강민기가 대답했다. 선배는 여전히 나를 돌봐야 할 후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강민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김상우가 입구에 나타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네이비블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김상우에게 다가갔다. "미서는? 함께 온 거 아니에요?"나는 김상우의 어깨너머로 경사진 계단을 살폈다. 노란 불빛이 텅 빈 계단에 길게 걸려있었다. "박 작가는 일정이 끝난 후 그대로 남았어요."김상우가 실내로 들어서며 대답했다."그리스에 남았어요? 일정이 언제 끝났어요?""팔월 말이었는데. 이 학기 강의 때문에 바빠 연락도 못해봤어요."팔월 말이라면 두 달이 가까운 시간이다. 지금 날아오는 엽서는 써 두었다가 나중에 보내는 것이란 말인가. 미서는 여전히 여행 중인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핏속에 뭔가 스며들어 몸속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여행은 어땠어요? 미서는, 건강하게 잘 다니던가요?""박 작가 때문에 일행들이 즐거웠죠. 다음에도 함께 여행하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2007-10-2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내게 미서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커다란 범죄행위라도 되는 듯 따져 물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분한 마음이 치솟았다. "미서가 말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자신이 정리를 해 보겠다고 하면서…….""미서와는 언제부터 만났어요?"질문 자체를 후회했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미서가 결혼하고 난 후에요?"전병헌은 심해처럼 깊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병헌과 마주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미서라니,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카페를 나왔다. 몸이 거센 급류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마을버스가 천천히 곁을 지나갔다. 이 모든 게 장난이었으면 싶었다. 어금니를 물었다. 지금은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내리지 말자. 부서지지 않게 내 자신을 조심조심 다루어 집에 까지 가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뛰지도 빨리 걷지도 않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부리를 내려다보며 걸었다. 뒤에서 전병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서서 뒤 돌아 보았더니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환한 햇살이 검은 아스팔트 길 위에 내려앉은 고즈넉한 가을 한낮이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혀가 묵직하게 목에 걸렸다. 허둥거리며 다가오는 전병헌과 마주 서 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나는 차도로 성큼 내려갔다. 때마침 빈 택시가 와서 멈추었다. 나는 문을 열고 택시 속으로 몸을 말아 넣었다. 작고 낮은 공간이 엄마 뱃속처럼 아늑했다.택시는 불순물이 전혀 있지 않을 것 같은 가을 한복판을 달렸다. 나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무릎에 얹은 채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길에 서 있는 가로수에서 낙엽이 몇 장 떨어져 내리면서 바람에 날렸다. 하늘이 너무 푸르러 눈이 부셨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지중해의 바다 빛이 아마도 저런 색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서야, 지금 어디 있니? 하늘을 쳐다보며 이럴 땐 화를 내야 하나? 눈물을 흘려야 하나? 생각했다. 택시 운전사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면 내 입은 아마도 돌처럼 굳어 버렸을 거다. 어째서 미서는 늘 내 앞에서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째서 미서의 뒤만 따라 다니는가도 알지 못했다. 만약 눈앞에 운명이 있다면 두 손으로 부셔버리고 싶었다. 저주의 말을 퍼부어 익사시켜버리고 싶었다. 지하철 역사 앞에서 택시를 내려 전철로 갈아탔다. 집까지 그냥 택시로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어떤 고통이나 아픔이라도 사람을 바닥까지 뒤흔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통 속에 빠진 나를 연기하는지도 몰랐다. 사는 것은 한 바탕 연극이다. 어떤 역할로든 변신할 수 있고 어떤 역이든 내게 주어질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어가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부서지는 것은 피하자. 미서야, 우리 부서져서 가루가 되지는 말자.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너는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전병헌이 밉거나 야속하지도 않아. 질투도 나지 않아. 사랑이란 원래 이런 거잖아. 삼각관계나 사각 혹은 거미줄처럼 뒤엉키는 관계. 그냥 돌아 와. 아무런 생각하지 말고 우선은 내 앞에 나타나 줘. 그래야 내 자신을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아.

2007-10-1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시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한 달 이상을 매달린 터라 탈진한 기분이 들었다. 이형수는 마지막까지 남아 손볼 곳들을 살폈고 전병헌과 나는 중국집을 나왔다.우리는 길옆의 키 낮은 둥근 전등이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긴장한 상태였다. 만들고 배치하고 전시하는 작업에 매몰되어 정작 작품이 관객의 느낌이나 감상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막상 벌거벗은 내 몸뚱이가 벽 한 귀퉁이에 매달리는 것을 보자 온 몸의 세포가 팽팽하게 움츠러들었다. 작품이 주는 아우라나 예술성 같은 것에는, 그런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으나, 애당초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누드사진이었다. 막상 광장에 나서려니 별안간 가슴이 뛰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일방통행 길로 들어온 자동차처럼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미서는 오지 않을 모양이에요."내 속에 똬리 틀고 있는 긴장을 누그러뜨리느라 아무 말이건 해야 했다. "미서가 보내는 엽서는 그대로 책이 돼도 괜찮을 정도예요. 좀 어둡기는 하지만 신화에 나타나는 사랑과 죽음, 그런 제목이라면 썩 괜찮은 책이 될 것 같아요."전병헌은 단숨에 맥주잔을 비웠다. "여행이 끝나면 미서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재능을 썩히는 건 자신에 대해서도 불성실한 태도죠."나는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전병헌의 앞에 앉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전병헌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고, 나는 끊임없이 말을 했다. 화제는 죄다 미서에 관해서였다. 미서와의 학창생활, 작가로서의 미서의 빛나던 시기, 결혼과 여행에 이르기까지 온통 미서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어떤 조짐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런 능력은 내게 없었다. 단지 본능적인 불안감이 내게 말을 시켰고, 예술이나 창작에 대한 열등의식이 미서의 재능을 지껄이도록 만들었을 거다. 말을 하느라 나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말없이 듣기만 하는 전병헌은 꽤 많은 양을 들이킨 후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좀 해 봐요."전병헌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너무 평범해서 할 말이 없어요."무안했다. 하지만 뭐 어떠랴, 흉을 본 것도 아닌데 싶었다. "컷 피스 같은 공연을 통해서 자신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미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전병헌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미서가 왜 여행을 떠나는지 말 안했어요?"나는 멀뚱히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선영씨가 내 작업실에 온 것을 알았어요."헉, 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이해가, 안가요."갑자기 가슴 부근이 아릿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제 얘길 미서에게 했나요?"전병헌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왜 제게는 미서 얘길 안했어요?"

2007-10-1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남편은 더 이상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운동화를 신고 면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출근 후,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남편은 아주 늦게 퇴근을 했고, 이따금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나는 전시할 작품의 마무리를 위해 중국집을 오갔다. 일은 마무리 단계였다. 작업이 끝나면 전병헌과 섹스를 했고, 섹스가 끝나면 우리는 마주 보며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사랑이란 전혀 부끄럽지 않는 섹스일지도 모른다. 그저 세상의 끝에 이를 때까지, 그 끝에 전병헌의 몸의 일부분을,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정액을 감추어 주는 것, 비밀처럼 내 몸속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그의 존재를 감싸고 숨겨주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다 마시면 전병헌의 작업실을 나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늦을 것 같은 날에도 집으로 가는 차를 타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보면 종일 갇혀 있던 공기만이 나를 맞이했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나날이었다. 회사의 사정을 내게 알린 후, 남편은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 예전으로 돌아갔다. 나는 전시회 초청장을 침대 머릿장 위에 올려두었다. 남편이 전시를 보러 온다면 어떤 식으로든 약간의 혼란이 생길 터였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감수할 각오를 했다. 남편도 나도 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연어처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막힌 물길을 뚫고, 댐을 뛰어넘어야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의 끝, 죽음과 산란의 장소인 그곳에 다다라야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전병헌과 남편사이에 걸어 둔 외줄을 탔다. 미서는 코린토스를 거쳐 미케네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미케네에서 써 보낸 엽서 역시 사랑과 죽음에 관해서였다. 트로이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아가멤논이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하는 현장을 둘러보는 중이라고 했다. 삼천년 전, 아가멤논이 붉은 카펫을 밟고 들어오던 길을 걸었다고 했다. 옛 성은 주초와 다 부서진 담벼락이 무심한 세월 속에 놓여 있고, 황량한 야산에 반짝이는 검은 눈을 가진 화사한 뱀이 돌투성이 들판을 날렵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목욕탕에서 남편과 남편의 여자인 카산드라에게 그물을 씌워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한 장면이 섬뜩한 필치로 적혀있었다. 도대체 미서는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이야기를 계속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전시일까지 단 이틀 남았을 뿐이다. 오전에 미서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 여기 있어, 하고 미서가 불쑥 나타날 것 같았다. 미서가 공연을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서라면 굳이 컷 피스 같은 공연을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결혼이 미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미서 역시 생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미서의 엽서를 정리해 봉투 속에 넣었다. 나중에 미서가 여행기를 쓴다면 이 엽서들이 필요할 것이다. 설마 똑같은 내용을 두 장 써서 한 장은 보관하고 나머지 한 장을 내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낸 것들은 그대로 책으로 묶어도 될 정도였다. 미서의 글을 읽고 있으면 평범한 나의 재능에 화가 치밀었다.

2007-10-1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몰라."남편은 힘에 부치는 바위덩어리라도 끄는 것처럼 말했다. 남편은 슬그머니 시선을 비껴 나를 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바로 쳐다보지 않는 남편을 끌어 안아주고 싶었다. 남편에게 직장은 또 다른 자신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공부한 것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밟아온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직장은 남편의 애인이고 인생이었다. 다른 일을 시작하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나이에 남편은 걸려 있었다. "결정된 거야?""거의.""회사끼리 합병해도 문제없다고 그랬잖아."남편의 회사는 외국계 회사에 흡수 합병이 되는 수순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가 넘어가도 인원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그다지 염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합병이라는 뚜껑을 열고서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했다. 합병을 당하는 쪽인 남편의 회사 직원의 대부분이 옷을 벗어야 하는 처지였다.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하느냐, 이 참에 전직을 하느냐가 남편의 앞에 놓인 길이었다. 남편은 과감하거나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권리를 쟁취하기위해 팔 걷어붙이고 싸우는 남편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앞을 가로막은 견고한 벽이 나타나 남편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앞으로 나가기만 하던 삶이었다.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남편은 허둥대는 중이었다. 그것은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직장 일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남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발밑이 단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집은 남편의 수입으로 지탱해왔다. 남편의 실직은 생존의 문제로 연결되었다. 발밑이 불안스럽게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흔들리면서는 무엇인가를 침착하게 응시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옥죄는 것은 남편이었다. 자신의 세계가 와해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이 느낄 고뇌나 삶에 대한 허탈함, 대상에 대한 분노를 내가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너무 걱정하지 마. 뭐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어?"나는 짐짓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남편 또한 굶어 죽을까봐 겁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달리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미국으로 가자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남편의 희망이었다. 자리잡고 있는 누이가 있으니 남편으로서는 믿는 구석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희망이 그곳에 있을 지도 몰랐다. 나는 이곳에서, 바로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막 열리는 중이었다. 지금 발을 빼버리면 그 곳은 영영 문을 닫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까닭모를 분노와 안타까움과 연민이 뒤범벅되었다.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걸쭉한 액체가 머릿속에서 뒤엉켜 흘러내렸다. 나는 남편이 투쟁을 해주었으면 바랐다. 이곳에 그냥 남아있고 싶었다. 내게 속살을 보여주려고 하는 세계와 남자가 있었다. 미국이라니, 그곳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투쟁을 강요할 수 없었다. 만약 내게 이곳에 남아있겠다는 욕망이 없었더라면 쉽게 투쟁을 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욕심이 끼여 있는 한 투쟁을 부추길 수 없었다. 그것은 얄팍한 허위의식일지 모른다. 나는 내가 징그러웠다.

2007-10-1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식탁 위에서 라면이 식어갔다. 남편의 행동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다가 지나쳐버리곤 했다. 오늘도 역시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나는 그냥 작은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하고 망설였다. 남편을 계속 피한다면 우리 부부는 불어터진 라면처럼 폐기처분될지 모를 일이다. 안방 문을 열었다. 남편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면서 물었다."무슨 걱정이라도 있어?"남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늦어서 화가 난거야?"남편은 등을 보이면서 슬며시 돌아누웠다. "전시만 끝나면 늦게 오는 일은 없을거야. 일주일이면 다 끝나. 그때까지만 좀 봐줘."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전병헌을 떠올렸다. 전시가 끝나면 전병헌과의 관계도 끝날 것인가.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내 머리 속은 온통 전병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무리는 없었다. 남편은 제왕처럼 몸을 눕히고 침묵을 지켰다. 약간의 굴욕감이 느껴졌다. 남편은 아무리 늦더라도 결코 내게 이따위 사정같은 건 한 적이 없다. 늦다고 말하거나 전화를 하는 것은 통보였지 미안해한다거나 한 번만 봐줘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의 등을 잡아채 마구 흔들어버리고 싶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좋았다. 알았어. 한마디만 한다면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동도 않고 등을 보이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서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다리가 저려오는 것 같았다. 기묘한 그림이었다. 누워서 등을 보인 남편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아내. 문득 콧등이 시큰거렸다. 남편은 상처를 받은 어린 짐승같았다. 완강하게 돌아누운 남편의 등이 슬퍼보였다. 나는 천천히 침대 한 쪽에 걸터앉았다. 남편의 어깨에 가만히 한 손을 얹었다. 남편이 작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만약 남편을 사랑해야한다는 의무만 배제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남편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세월은 곁에 있는 사람을 익숙한 존재로 만들었고, 보살펴주게끔 시켰다. 강제된 사랑만 뺀다면 부부 사이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이상적인 관계일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이름 붙은 모든 것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우겨넣으면서 모습이 일그러져 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전병헌을 사랑하는 마음과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은 색깔이 달랐다. 그것은 분명히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의 갈래였다. 결혼했다고 해서 인간의 감정이 갑자기 구도를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본성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전병헌과 만난다고 세상에 대고 외칠 수는 없었다. 어느 한 쪽을 포기하지 않으면 나는 시계추처럼 흔들릴 것이다. 사랑은 왜 일인분만 허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인간에게 올인하는 것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여러 명을 비추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떠나자. 가버리자."느닷없이 남편이 말했다. 얼마 전에도 남편은 미국으로 가자고 말했다. 남편의 말투는 심각했지만 어딘가 자신감이 부족했다. 단순히 미국 지사로 파견되어 가는게 아닌 것 같았다."회사에 무슨 일 있어?"남편이 힘겹게 몸을 돌려 나를 올려보았다.

2007-10-1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엽서를 들고 한 동안 서 있었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그리스는 찬란한 햇빛의 나라가 아닌가. 태양이 가장 강렬한 계절을 여행하며 미서가 보낸 내용은 너무 어둡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미서에게서 받은 엽서는 거의 비슷했다. 여행이 즐겁지 않은가?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머지 한 장의 엽서에는 작은 글자가 빼곡히 들어찬 다른 엽서와는 달랐다. 휘갈겨 쓴 몇 줄의 문장뿐이었다. '사랑은 인간적인 격정의 몇 단계를 다양하게 보여준다.처음에는 더 할 수 없이 행복하다.그 다음은 상처나 불행으로 드러난다. 정신을 차려보면 환멸이 가득하다. 곧 이어 산산이 부서지고 파괴되면서 사랑은 완결된다.'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얼른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적어 둔 뜻 모를 단어가 몇 개 나열되어있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엽서를 눈앞에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것들은 지속, 죽음, 비밀, 세 단어였다.미서가 엽서를 쓴 다음, 문득 영감이 떠올라 잊어버리기 전에 급히 써 둔 것인지도 몰랐다. 단어 몇 개가 때로 작품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여행 중에 소설을 쓸 실마리라도 잡은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나는 엽서를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거실은 깜깜했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무대에 일시에 조명이 피어나듯 소파와 거실 벽에 붙은 그림과 장식장 위에 올려둔 작은 소품들이 살아났다. 그 속에 남편도 들어있었다. 남편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얹은 채 반쯤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밝은 빛에 눈꺼풀을 움찔거리는 것을 봐서는 잠이 들어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놀라 남편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어두운데 불도 안 켜고 앉아 있었어?"남편은 마지못해 가늘게 눈을 떴다.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를 해야지."남편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할말이 없었다. 습관이 안 되어서 집에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미안해. 전시회 준비 때문에 작업하다보니 늦었어. 저녁은?""아직 안 먹었어." 나는 가방을 든 채 서서 소파에 앉아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힐끗 벽시계를 보았다. 열시가 넘었다. 아직 저녁을 안 먹었다고 말하는 것은 화가 나서 투정을 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나는 말없이 주방으로 갔다. "뭘 해줄까?" 의외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둔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김치와 오래 된 밑반찬이 냉장고 안에서 말라 가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잡고 한 참 들여다보다가 도로 닫아버렸다. "라면이라도 끓일까?"좀 전에 날을 세웠던 목소리와 달리 남편은 힘없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라면을 끓여 식탁을 차린 후, 돌아보니 남편이 앉았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남편이 늦은 시각에 라면을 먹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사에 합리적인 남편이 이런 식으로 불평을 하는 것은 뭔가 불편한 것이 있다는 표현이었다.

2007-10-1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병헌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 노선표를 두꺼운 골판지 위에 이어 붙였다. 사진을 종류와 크기별로 코팅을 해보기로 했다. 코팅하지 않은 사진과 비교해 본 후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쪽을 선택할 작정이었다. 작업은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어두워지려 했다. 둘 다 일에 열중하고 있던 터라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은 그만해요. 내일 다시 하죠."고맙다는 말 대신 엉뚱한 말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미안해서 전병헌을 향해 그냥 웃어버렸다. "배 안 고파요? 제가 저녁 살게요."조금 큰 소리로 다시 말하자 전병헌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나는 흩어진 골판지 조각과 나무막대와 비닐 조각들을 쓰레기 봉지에 쓸어 담았다. 창문을 닫고 작업실을 정리 한 다음 전병헌과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중국집의 서쪽으로 난 창을 통해 마지막 석양이 탁자 위에 한 줄기 앉아 있었다. 대기는 이미 검정색을 띤 보랏빛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전병헌이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전병헌은 한 줄기 석양이 비치고 있는 탁자 위로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탁자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고, 전병헌은 윗옷을 턱으로 밀어 올려 옷 속으로 그의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의 입김이 양쪽 가슴 사이에 가득 차 무거워졌다. 나는 천천히 탁자 위로 몸을 눕혔다.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석양 한줄기가 얼굴을 가로질렀다. 나는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화려한 빛을 뿌려댔을 현란한 조명이 홀 천장 중앙에 높이 매달려 있었다. 샹들리에는 활짝 핀 커다란 꽃처럼 사방으로 퍼져있었다. 전병헌은 꿀을 빨아먹는 벌처럼 젖꼭지를 입속에 넣었다. 부드러운 혀끝이 꽃에 박아 넣은 벌의 침처럼 점점 날카롭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팔을 올려 전병헌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얼굴에 드리웠던 마지막 석양이 사라졌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창으로 더 이상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유리로 만들어진 장식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빛을 반사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천장에 매달린 유리 전등은 나팔꽃처럼 어둠 속으로 스스로 몸을 숨겼다. 전병헌이 목이 꺾인 수선화처럼 툭 떨어져 내렸다. 눈을 뜨고 어둑한 허공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에서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폭죽처럼 마음이 화려하게 활짝 살아나면 좋으련만 왜 고독한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공중으로 손을 내 뻗었다. 전병헌이 피워 올리는 담배연기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갈 뿐 손가락 사이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중국집을 나와 전병헌은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키 낮은 우윳빛 전등이 켜져 있는 카페에서 맥주를 시켜놓고 마주 앉았다. 부드러운 거품이 이는 맥주를 보며 생각했다. 섹스 후에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은 설거지나 청소기를 돌린 후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불현듯 전병헌을 다시 한 번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인 전병헌의 손등에 내 손을 올렸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투명한 유리잔 속에서 작은 거품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함께 앉아 있으니 당신이 점점 좋아져요. 서늘한 가을 밤, 맥주잔에서 이는 거품 소리, 전해지는 손바닥의 온기, 이 모든 게 더 없이 사랑스러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침묵을 지켰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끌어내 표현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어려웠다.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감정 뒤에 비릿한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2007-10-0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1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이토록 충만한 기분으로 먹어 본 적이 없던 한 끼의 식사가 말을 하는 사이에 조금 시들해졌다. 처음 입에 넣던 쫄깃한 면발과 달콤하면서 고소한 맛과 독특한 향을 지닌 검은 소스가 분리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면을 쪼르르 입 속으로 말아 넣었다. 새콤한 노란 단무지 한 쪽을 입속에 넣고 나는 눈을 감았다. 향이 입속이나 콧속이 아니라 머릿속을 떠도는 느낌이었다. 두 번 다시 이런 냄새를 맡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미묘한 냄새. 인생에 단 한 번만 허용되는 경험 같은 것.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감았던 눈을 뜨고 이면을 바라보았다. 문만 열면 방이 나타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미궁 같은 중국집, 향수를 뿌려 먹는 자장면, 혹시 저 사람 마술가는 아닐까?점심 식사가 끝난 후, 강민기와 정신희는 전시일에 아는 기자를 대동해 오겠다고 약속하고 출판사로 돌아갔다. 이면은 그날 사용할 비품과 집기의 구입과 디자인을 살펴본다며 이형수와 함께 작업실을 나섰다. 나는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남았고 전병헌은 내 작업을 도왔다. 8개 조각으로 복사한 지하철 노선표를 어떤 식으로 붙일 것인지 궁리했다. 노선표의 크기에 따라 사진의 크기를 결정 할 생각이었다. 사진은 다소 큰 사이즈를 전시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컴퓨터에서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사진부터 에이포 용지 사이즈의 사진을 뽑았다. 사진들을 코팅을 해서 압정으로 눌러 벽에 붙여볼까. 아니면 그냥 사진만 달랑 달아 놓을까. 일상적이고 흔한, 무심한 느낌을 주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프린트에서 천천히 밀려나오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미서는 개막일에 맞춰 오겠죠?"나는 프린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전병헌에게 말했다. 전병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동의를 구하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 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컷 피스'는 반응이 대단할거에요."나는 막 끝 부분이 밀려 나오는 사진을 잡아채면서 중얼거렸다. 여행과 공연이 끝나면 미서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미서는 늘 '글은 사는 만큼 나와. 치열하게 살면 치열하게, 열을 살면 열만큼. 더도 덜도 아니야. 딱 사는 만큼이야. 그러니 글을 쓰기 위해 산다거나 살기위해 글을 쓴다는 말은 다 틀렸어. 글이 사는 거고 사는 게 곧 글이 되는 거지'라고 말했다, 미서의 말대로라면 결혼 이후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는 곧 사는 게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미서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미서의 여행은 살기 위한 애처로운 몸짓이 아닌가. 속에서 뭔가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바람처럼 자유로이 해외여행을 한다고 미서를 마냥 부러워했다. 수니온 만에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서 있을 쓸쓸한 미서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기둥만 남은 포세이돈 신전 앞에서 미서는 무엇을 기원할까? 인생이라는 바다에 띄운 배가 무사히 항해 할 수 있도록 손바닥을 마주대고 있을까. 신은 무엇을 원할까? 미서는 무엇을 대가로 삶을 구할 것인가? 나라면 신 앞에 나의 무엇을 바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신 앞에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내 손에 들려있는 벌거벗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제공하고 삶을 얻는다. 죽어야 산다? 그런 의미인가. 죽은 다음에 삶이 무슨 소용인가. 말도 안 된다. 아니, 그게 맞는 말인지 모른다. 땅에 떨어져 썩어야 수확하는 씨앗처럼. 죽은 다음 부활하는 신이나 알을 낳고 죽어가는 연어처럼.

2007-10-0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1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이면의 말을 듣는 순간 한 남자가 떠올랐다. 예술이 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예술은 사기다'라고 대답했다는 백남준. 보이지 않는 강철 같은 선이 이면과 백남준을 잇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미술관이나 플레임 안에 가둬놓으면 예술로 인정받기도 한다. 먹는 행위 역시 그랬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거나 혹은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은 먹는다는 면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음식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향수를 함께 놓아두는 것만으로 먹는 행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예술이란, 대개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닐까? 무언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작업. 일종의 사기.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류의 문명 또한 거대한 사기 행각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것을 대표하는 사상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각종 의례나 행위도 마찬가지 아닌가. 순간 머리 속이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나는 젓가락을 든 채 이면에게 물었다."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다고요. 맛있게 먹기 위해, 라는 것은 의도가 아닌가요?"이면은 양 볼을 불룩하게 자장면을 입에 물고 나를 보았다. 입 속의 음식물 때문에 이면은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우물거렸다. 입가에 검은 소스가 잔뜩 묻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입 속의 면을 우물우물 삼킨 후 이면은 대답했다. "맛있게 먹는 것을 의도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단지 의도된 행위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먹는 것,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죠, 동전의 양 면과 같다고나 할까."이면의 대답은 이해가 갈 듯 했지만 가닥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말하자면 먹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건가요?"정신희가 끼어들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런 생각?"이형수가 말했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게 바로 이런 토론이야.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지. 생각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가 아니야." 이면은 간단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관객은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양파를 썰면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향수를 자장면과 함께 두는 것은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 텐데. 직접 소스를 만드는 대신 이미 만들어진 소스를 둔 것도 분명 어떤 목적이 있을 거야. 뭐 그런 정도는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아무 의도도 없었다고 하면, 황당한 거죠."나는 내 생각을 조심스레 꺼냈다. 아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는 이면의 말이 액면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내게는 이면의 주장이 사기처럼 들렸다. 이면은 나를 진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한 동안 내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아 나는 좀 겸연쩍어졌다.'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라는 표정을 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이면은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올렸다. "사람은 자신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기 마련이에요. 타인이 곧 나라는 말 처럼요."이면이 내게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혹시 당신은 아느냐는 눈으로 나는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전병헌은 무심한 표정으로 열심히 자장면을 입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자장면 한 그릇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요. 맛있게 먹고 아, 잘 먹었다. 기분 좋구나. 그걸 원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거 아냐?"전병헌은 나와 이면을 번갈아 보면서 명쾌하게 말했다.

2007-10-0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1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병헌이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그도 의외였던지 자신의 그릇을 내려놓고 병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몇 가지 향수를 소스 위에 가볍게 뿌렸다. 전병헌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탁자에 올려두었던 접시를 들고 유리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향수, 뿌렸어요?"정신희가 내게 물었다. "조금."강민기가 내 자장면을 넘겨보았다. "맛이 어때?""지금부터 알아 볼 작정이에요."나는 면과 소스를 가볍게 버무렸다. 몇 가지 잘 어울린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정신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 행동을 주시했다. "어때요?"전병헌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모두들 내 반응을 기다리느라 숨도 쉬지 않았다. "괜찮은데요. 인생의 냄새가 나요. 뭐랄까,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이 모두 합쳐서 뿜는 냄새 같은 거요."사실이었다. 내가 뿌린 몇 가지 향수와 자장 소스가 어우러져 지나온 세월의 냄새 같은 것을 풍겼다. 향수냄새 때문에 자장면을 못 먹을지 모른다고 내심 각오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훌륭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많은 일들이 내게 생겼고, 사건들이 만들어 낸 눈물과 기쁨과 그리움과 희망 같은 것이 쌓여 만난 곳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나 물개를 쳐다보듯 나를 쳐다보는 눈들이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았다. 향수를 음식에 좀 뿌려 먹은들 그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인가? 나는 곧 먹는 일에 몰두했다. 먹는 것이 이렇게 진지하고, 행복하고, 흥미로운 일이었다니. 그때 나는 내 앞을 가로 막은 두꺼운 벽을 맹렬한 스피드로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앞에 앉은 전병헌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강민기나 정신희의 눈길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가 희귀한 동물처럼, 치기어린 여자처럼 보이나 보다. 어떤 면이 그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러나 그 답은 그들의 내면에 있지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이형수가 내게 비디오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아, 냄새도 찍히면 끝내줄 텐데. 선영 씨 말로 해봐요. 어떤 냄새인지.""표정으로 잡아 봐요. 바람도 잡는다면서 표정쯤 일도 아니죠."정작 카메라가 눈앞에 있다고 느끼자 조금 어색해졌다. 방금 전까지 생생하게 설명이 가능했던 마음이 향수와 함께 공기 중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일상이 예술로 변한 것 같은가요?"이형수가 물었다. "글쎄요, 먹는다는 행위가 어느 때보다 충만한 느낌이에요.""냄새는? 어떤 향을 뿌렸어요?"이형수가 인터뷰하듯 물었다. "말을 해버리니까 죄다 사라지는 것 같아요. 충만한 느낌 같은 건 아주 잠깐인가 봐요."그때 이면이 자신의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자장면과 향수에서 의도 한 게 뭡니까?"이형수의 질문에 이면은 자장면을 입 속으로 밀어 넣으며 웅얼거렸다. "아무 것도. 단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해 본 것뿐이야."

2007-10-04 경인일보
1 2 3 4 5 6 7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