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

 

숨쉬지 마세요<9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점심 무렵 이형수의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세수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어젯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는데도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거울 속에서 반짝이는 두 눈을 한참동안 마주 보았다. 내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내 표정은 늘 자신이 없어 보여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우울한 얼굴에는 사색을 하는 듯한 냄새가 풍기게 마련이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약해 보이는 나를 볼 때면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어 때때로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었다. 나는 거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변해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푸릇푸릇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울에 비치는 나는 분명히 어제, 그제 그리고 그 전 시간의 나였다. 나를 보는 내 눈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내 모습이 진짜로 바뀐 것일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낯설게 보이는 내가 싫지 않았다. 집을 나선 후,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미서의 집이 있는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글을 쓸 때 미서는 아예 전화를 꺼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소설을 쓰고 있다면 미서를 방해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결혼 한 이후, 전혀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미서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분명 기쁜 일이었다. 문 밖에서 인터폰으로 확인만 하고 돌아서도 상관없었다. 친구라면 최소한 미서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서에게 심리적 부담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어떤 일에 부딪쳐도 무감각했다. 가슴이 사막처럼 메말라 버석거렸다. 그래서 미서에 대해서 갖게 되는 감정은 억압이 아니라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는 감정이 회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식의 경계가 넓어진 것 같았고, 그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영혼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버스에서 내려 고급 주택가가 늘어서 있는 동네 어귀로 접어들었다. 낮은 담장이 둘러쳐진 울타리가 주홍색 꽃으로 덮여 있었다. 허리 높이의 나무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정원수 사이로 보이는 집의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점심때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미서가 집에 있다면 창문을 열어 젖혔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대문을 몇 번 밀어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허리높이까지 올린, 형식적으로 흉내만 낸 문이었다. 타넘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대문 곁에 붙어있는 우편함 뚜껑을 열어보았다. 우편물이 없는 것을 보면 미서가 집을 완전히 비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우편물을 따로 보관해주는 것 같았다. 부질없이 나는 벨을 몇 번 더 눌러보았다. 평소 같으면 무심한 것 같으니, 이렇게 오래도록 연락을 않다니,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서를 믿는 것인지, 미서가 나를 신뢰하고 있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연락을 않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였다. 기다려줄게. 미서, 네가 내게 연락할 마음이 들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주마. 그 정도도 못해 준다면 어떻게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니. 우편함의 뚜껑을 도로 제 자리로 밀어두고 돌아섰다. 동네에서 공동으로 고용한 정원사가 손질을 한다는 소나무가 정갈한 모습으로 마당에 서 있었다. 미서는 정원사가 나무에 가위를 댈 때마다 자신의 머리칼이나 손톱이 지나치게 잘려나가는 것 같아 온 몸에 쥐가 날 것 같다고 했다.그럼 정원에 손대지 말고 두지 그러니, 라고 말하니 미서는, 한 집이라도 정원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나무가 병이 나면 온 동네의 나무가 죄다 병이 들기 때문에 우리 집만 빠지거나 그럴 수가 없어. 그래서 공동으로 정원사를 고용했는데 자기 마음대로 나무를 깎거나 손질을 해버려? 라고 말했다.

2007-09-0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9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면 사는 일은 한결 명쾌할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러났다. 책을 덮고 전등을 끄고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은 백 와트의 백열등을 켜놓은 것처럼 뜨겁게 빛났다. 왼쪽으로 누웠다가 오른 쪽으로 뒤척였다. 의식은 마치 날을 세운 듯 점점 명징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불을 걷었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거실에서 서성거렸다. 예리한 면도날이 두뇌를 지나간 것처럼 무언가 머릿속에 금을 그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발이 늪에 빠진 것처럼 의식이 어딘가로 끌려들었다. 나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생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속에서 무언가 마구 들끓었다. 결승점에 들어오기 직전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얼어붙은 땅 위로 싹이 올라오기 전 식물처럼, 막 벌어지려는 순간의 꽃봉오리처럼, 머릿속은 한껏 응축되어있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처럼 산산조각 터져버리고 싶었다. 거실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죽은 듯이 앉았다. 얼마나 웅크리고 앉아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베란다 유리문을 통해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유령처럼 부스스 일어났다.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서는 간밤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확인을 하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악몽에서 벗어난 듯 몸도 마음도 홀가분했다. 안방 문을 가만히 열고 들여다보았다. 남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도로 문을 닫고 나왔다. 남편이 출근을 한 후, 이형수에게 전화를 했다. "여기는 해가 하늘 높이 떴어요. 작업실, 아직도 어두워요?" "전시회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창문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모델은 생각 좀 해봤어요?"이형수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제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나 해서요."이형수는 숨을 멈추는 것 같았다. 이형수가 쓸데없이 기대를 가질까봐 재빨리 덧붙였다. "괜찮다면 저도 이번 전시에 작품을 내고 싶어요.""작품의 의도나 주제를 알면 훨씬 효과적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나는 잠시 망설였다. 간밤에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영감을 잡아채긴 했지만 작품을 만들어 제출할지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모델로 사진을 찍히는 게 어떤지 우선 경험해 보고 싶었다. 이형수의 작품에 사용할 사진 모델에 대한 제의를 완전히 잘라버린 것은 아니었다. 머리 한 편은 까짓 누드 사진 모델쯤 어때? 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 때도 있었고, 미쳤군, 미쳤어 라는 마음이 움틀 때도 있었다. 문틈에 옷자락을 끼워 둔 것은 전병헌과 함께 모델을 한다는 데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전병헌이 새로운 경험, 우리 한 번 해 보자. 이러고 내 등을 떠민다면 못이기는 체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전병헌은 어떤 몸짓도 하지 않았다. 등을 떠밀지도 손을 내밀지도 심지어 함께나 같이, 라는 말조차 아꼈다. 내 의사를 존중한다는 태도였고, 어디까지나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라는 자세였다. 마음 한 구석은 그가 강력히 권유하지 않아 섭섭한 반면, 그래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형수는 지금 당장 작업실로 나와 사진 작업에 들어가자고 했다. 거센 물살에 뛰어든 느낌이었다.

2007-08-3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9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늦은 시간이었는데 남편은 거실에 앉아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미서씨는 어때? 어디가 안 좋아서 응급실까지 간 거야?"남편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응, 그게…"기습을 당한 병사처럼 나는 당황했다. 이 시각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했어. 결과는 나중에 나온대." 우물우물 얼버무리며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변기에 걸터앉았다.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뿌연 수증기가 화장실에 들어찼다. 축구경기가 끝나 남편이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으면 싶었다. 늦었지만 미서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꼼꼼히 지웠다. 샤워를 마친 후, 나는 남편의 옆에 앉아 건성으로 텔레비전을 보았다. 플로베르가 묘사한 것처럼 눈길로 텔레비전을 망가뜨리거나 남편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축구경기는 끝났다. 미서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기를 놓았다가 다시 번호를 눌렀다. 텅 빈 미서의 방에 혼자 울리고 있을 전화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미서는 정말 어디가 좋지 않아 병원에라도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일어나 며칠 전에 보다 덮어 둔 책을 펼쳤다. 활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헤어질 때 하던 이형수의 말이 먼저 떠올랐다."일단 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전병헌의 앞에서 벗을 수 있는 옷을 나는 과연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벗어던질 수 있을 까. 옷을 벗는 의도가 확연히 달랐다. 나는 행위의 결과만을 두고 생각했다. 옷을 벗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옷을 벗을 수 있는 의식의 기반이 문제였다.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가?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였다. 남편이 안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술을 위한 행위라 해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과는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아무리 작은 갈등이라도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마음을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처럼 만들었다가는 며칠 못가 기진맥진하게 된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분위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소리 내어 책을 덮었다. 그런데 왜 이형수의 제안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나 모를 일이다. 전병헌의 사무실을 찾아가 옷을 벗어던진 것처럼 이형수의 앞에서도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밀려왔다. 미서도 이런 심정으로 공연을 결정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후에 무엇이 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내 속에서 무언가 깨져 나갈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문득 전병헌이 언젠가 내게 물었던 말이 머리를 스쳐갔다. 소리에 한을 싣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비. 딸은 아비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까? 혹시 알았더라면 아비가 주는 약을 삼키지 않았을까. 눈이 먼 대신 한이 실린 소리를 얻는 것과 눈을 뜨고 살면서 소리를 얻지 못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 나는 예술이라고 이름을 붙일 만큼 거창한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사례에 빗대 내 처지를 생각해봐도 좋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이 못마땅했다. 사는 일, 내가 나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2007-08-2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9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전병헌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모델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우연히 나온 것이 분명했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그리고 모델 건은 농담이었어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형수에게 말했다. 절반쯤 호기심이 발동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형수가 절실히 나를 필요로 한다면 모델 쯤 한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닐 것이다. 누드로 사진 좀 찍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문제는 용기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밀실에서 비밀이 보장되는 행위라면 상관없었다. 그러나 공개된 장소에서 나를 드러내는 것은 무리였다. 내게 그런 용기는 없었다. 비록 언더에서 활동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의 축제라 해도 공개는 공개였다. 광장에 서기에는 여전히 나는 내공이 형편없었다. 그것은 결국 남이 생각하는 자리에 내 자신을 세우는 거였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지금껏 만들어온 이미지가 깨지지나 않을까. 남이 나를 아름답고 완벽하고 순수한 존재로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속에 있었다. 미서가 늘 내게 말하듯 남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을까? 그건 지금까지의 내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내가 살아 온 날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것,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 이형수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면 모델을 설 수도 있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병헌이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기에 그를 안는다고 하는 논리를 세우기 위한 궤변이었다. 전병헌을 절실히 원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내 몸이 먼저 전병헌을 원했다. 무기력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바꿔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금기를 넘어서면 의식이 확장될까? 그래서 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출세나 돈을 위해 옛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이런 내가 나도 싫었다. 나는 전병헌에게 이런 마음을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역시 문제는 용기였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나를 경멸해버리지나 않을지 두려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것, 그가 그리운 것, 그의 전화가 기다려지는 것, 그를 만지고 싶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은 것,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게 사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병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위선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했다가 그를 잃는 것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게 더 쉬웠다.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생각 좀 해 보세요."이형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부족한 끈질긴 근성을 가진 그가 좋았다. 프로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나는 하마터면 생각해 볼게요 라고 대답 할 뻔했다. 시간이 지나면 보나마나 거절하느라고 쩔쩔맬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미서가 어디 가 있나 알아볼게요."오늘의 내 임무가 미서의 행방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의자를 밀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이형수는 수첩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미서가 하려고 한 게 뭐죠? 혹시 아까 본 '컷 피스'였나요?"전병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미서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나와는 달리 미서는 솔직했고, 충분히 강했다. 전병헌은 무심히 테라스 너머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에서 우수를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가 내게로 얼굴을 돌려주기를 기대하며 가능한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2007-08-2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9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제목은 '청량리 588' 입니다."전병헌은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모델되어 줄까?" 이형수는 입이 뒤에 걸리도록 웃음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두 말 하기 없습니다.""조건이 있어." "뭡니까?" 이형수는 의자를 끌어 당겨 몸을 테이블 앞으로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타고 넘어 전병헌에게 뛰어들듯한 포즈였다. "김선생이 함께 선다면 말이야."순간 이형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형수는 반쯤 테이블에 걸쳐있던 허리를 뒤로 뺐다. 이형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오므려 물고기 입처럼 만들고는 이형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형수만 보면 장난기가 발동하려는 내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 이형수는 소리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오케이? 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듭해 몇 번을 좌우로 재빨리 흔들었다. 이형수는 낙담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전병헌은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내 그럴 줄 알았어요. 어째 형이 순순히 모델을 서 준다고 하더라니."불만에 가득 찬 아이처럼 전병헌에게 투정부리는 이형수를 보는 순간 "서 줄게요 모델"이라는 승낙의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질 줄은 나도 예측하지 못했다. 전병헌과 이형수가 동시에 내게로 두 눈을 고정시켰다. 나는 서양사람처럼 어깨를 한 번 으쓱 들어올렸다. 그게 뭐 대수냐, 그런 투로. 나는 내 속에 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모델이 되겠다는 결정이 마치 딱지치기에서 온 동네 아이들 딱지란 딱지는 모조리 딴 것처럼 의기양양한 마음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이형수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통쾌하고 시원한, 그리고 바람 한 점 걸릴 것 없이 자유로운 웃음이었다. 이형수는 문득 웃음을 그치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딴 말 하기 없습니다. 이 시간 이후부터 나는 모델에 대해 신경을 끕니다. 두 분이 안 서주면 이전 전시할 내 작품은 끝장난다고 생각해 주십시오.""계약서라도 쓰랴? 모델료는 받아야지.""형은 모델료 못드리지만 선영씨는 달라는대로 드려야죠. 정말입니다." "돈도 안될텐데 모델료는 뭐로 지불해?""선 인세 받으면 돼요. 강 선배가 여행기 쓰자고 했거든요.""여행은 언제 가는데?""이번 전시 끝나면 곧 가야죠."강민기의 말이 나오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선배를 향하던 마음이 다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건 잘못이었을까. 나는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커피가 한 모금 힘겹게 목을 넘어갔다. 안개처럼 몽롱한 빛이 세 사람 사이를 떠돌았다.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남자들 사이에서 나는 어디를 방황하는걸까. 물끄러미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병을 쳐다보았다. 나는 눈을 들어 카페의 창유리를 통해 보이는 진열장 안의 독주를 쳐다보았다. 나를 놓아버리고 싶었다. 한 번쯤 공중으로 흩어지는 물처럼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싶었다. 나는 왜 끝까지 현재의 상황 속에 나를 푹 담그지 못하는 것일까? 왜 내일이나 모래, 어제나 그제 같은 과거나 미래에 마음이 가있는 것일까?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머무르면 좋을텐데 말이다.

2007-08-2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9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공터 앞을 지날 때 전병헌은 걸음을 멈추었다. 잡초가 무성한 빈터는 어둠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전병헌은 내 등 뒤로 손을 넣어 나를 안았다. 그가 내 입술 위로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입술은 약간 뜨거웠고 그의 몸은 다소 열에 들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두 팔을 올려 그의 목을 안았다. 가슴이 따뜻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인생에서 오래 지속되어야 할 시간이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나 자신을 부드럽게 포옹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감싸 안는 것과 흡사했다. 가는 것과 오는 것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서로 뒤섞여 구분이 안 되는 것일까? 나를 안고 있는 그의 몸과 내 몸이 만나는 경계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을 두고 말하는 모양이었다. 키 낮은 우윳빛 등이 켜져 있는 찻집으로 갔다. 올라갈 때 혼자 앉아서 차를 마시던 남자는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테라스의 바깥쪽 테이블에 앉아 작은 병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무성한 잎을 단 등나무 줄기가 지붕대신 테라스를 뒤덮고 있었다. 손톱만한 크기의 빨강색 꽃이 핀 네모난 화분이 테라스 난간을 장식하고 있어 그림엽서에나 등장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전병헌은 길이 보이는 쪽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전병헌은 맥주를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더 이상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금 나는 미서를 돌보기 위해 병원에 온 것으로 되어있었다. 장마가 끝난 후, 열대야가 연일 이어지는 날씨였는데 카페는 시원했다.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올라갈 때 문을 열어 두었던 가게는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동네로 들어가는 넓지 않은 길은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빛만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도시는 어디나 소음과 혼잡과 더위로 소용돌이치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말끔히 사라지는 곳이었다. 이런 장소에 작업실을 마련한 이형수의 안목이 다시 보였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 전에 이형수가 나타났다. 전병헌과 나 사이에 머물렀던 잔잔하던 공기가 출렁, 흔들렸다. 기분 좋은 활기에 찬 움직임이었다. "작품 구상 끝났어?"전병헌이 이형수에게 물었다. "모델 구해 사진만 찍으면 돼요."이형수는 병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나와 전병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델?" 이형수는 카메라 가방을 뒤적이더니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이형수는 수첩을 펼치더니 빠르게 볼펜으로 슥슥 선을 그었다. 위아래가 기다란 직사각형 두 개를 그렸고, 직사각형과 직사각형 사이에 글자를 빠르게 써내려갔다.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놓은 후, 놓인 사진 사이에 문장을 써넣은 형태가 되었다. 마구 휘갈겨 쓴 글자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이형수는 직사각형 안에 한쪽에는 여자를 다른 한쪽에는 남자를 각각 그려 넣었다. 겨우 눈에 들어온 문장은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꽃이 되었다'는 문장이었다. "혹시 이거 김춘수의 시 아닌가요?"수첩에 써진 글자를 자세히 보면서 내가 물었다."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이형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진에는 남자와 여자의 몸이 찍힐 겁니다. 벌거벗은 몸,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적나라한 몸?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이형수를 바라보았다.

2007-08-2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9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예술을 너무 숭고하게 보고 있었다. 백남준의 이벤트를 보고 깨달았다. 60년대 중반에 이미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제기된 물음이었다. 나의 짧은 안목과 게으름에 가슴을 치고 싶었다. 꾸준히 공부를 했다면 모를 리 없는 작품들이었다. 전병헌의 손은 마우스를 잡고 있었다. 반라의 여자가 화면을 가득 채운 채 앉아 있었다. 사진의 아래에 '컷 피스 Cut Pieces, 삼십대의 오노 요코' 라고 씌어있었다. "그녀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던지고 싶어 했어요.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몸짓 이었지요." 나는 오노 요코를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논의 아내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예술세계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전병헌에게 물었다."그녀는 무엇에서 해방되고 싶어 했나요?""다른 예술가들과 똑 같았죠. 누구든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을 하나씩은 지니고 태어나니까요. 그녀는 당시에 부여된 남녀의 역할과 사회적 편견에 저항했고, 어린 시절 겪었던 전쟁의 공포, 부모의 억압, 미국에서도 조국인 일본에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전병헌은 마우스를 클릭 해 화면을 바꾸었다. 날카로운 가위의 양날이 번쩍거렸다. 남자가 가위를 집어 들고 무대의 중앙에 앉아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가위로 잘려나가는 여자의 옷, 객석에서 관람객들 중 무작위로 나와 가위를 집어 들고 여자의 옷을 잘라냈다.이런 과정을 통해 그녀의 옷은 몽땅 잘려 나갔다. 한 쪽 팔로 가슴을 가린 채 무심한 얼굴로 오노 요코는 앞을 바라보고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전병헌이 화면을 바꾸자 다시 간략한 문장이 나타났다. 전병헌은 글자를 키워 보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그곳에 관객이라고는 나와 이형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형수와 전병헌은 이미 다 본 작품인 듯싶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본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글자가 키워진 문장을 읽었다.'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나 자신을 존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는 늘 참여 작가에겐 생활보다 예술이 우선이라고 확신해 왔지요'. 그것은 삼십대의 그녀의 말이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전병헌은 컴퓨터를 껐다. "다른 작가들의 것도 아직 많이 있어요. 오늘은 우선 이것만 보도록 해요. 시간도 늦었으니 나갈까요?"이형수가 일어나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스위치가 따로 되어 있는지 이형수는 여러 번 스위치를 눌렀다. 마지막 전등을 남기고 이형수가 말했다. "먼저 나가요. 전등 마저 끄고 곧 따라 나갈게요."전병헌과 나는 문을 나섰다. 자동 센서가 달린 외등이 계단을 밝혔다. 전병헌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오노 요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오천년도 훨씬 전에 수메르 신화에 나타나는 여신 인안나도 남자의 몸을 요구할 때는 옷을 벗어던졌다. 새로운 생산을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것에는 아무런 충격을 받지 못하다가 왜 컷 피스 같은 퍼포먼스에는 충격을 받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현재의 일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대중 앞에서 옷을 벗는 행위란 옛날과 달리 지금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담과 이브가 나체를 수치스러워 한 이래 옷이란 문명을 상징하게 되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것이 문명이었다. 인간임을 벗어나면 수치를 무시하거나 수치를 모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신의 경지에 오르거나 짐승이 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신도 짐승도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옷을 벗었다. 자신의 해방을 위해 껍질을 깬 것이다. 나도 모르게 무거운 한 숨이 흘러나왔다.

2007-08-2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연주회장에서 첼로를 연주하면 안 잡아가는데,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면 왜 잡아가는지 모르겠다고 백남준은 푸념했다고 한다. 무슨 죄목이었을까. 미풍양속을 저해한 죄였을까? 풍기를 문란하게 만든 죄였을까? 환한 대낮 뉴욕 번화가 한복판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여자의 알몸을 안고 첼로를 연주한다고 등에다 활을 문질러댔다니 할 말이 없다.지금도 그 정도면 경범죄에 해당한다. 백남준은 그의 행위에서 무엇을 노렸을까? 첼로란 원래 여자의 몸을 본 따 만든 악기라고 했다. 소리를 내는 여자의 몸, 누구라도 외설스러운 상상을 할 만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알지 못할 통쾌함이 느껴졌다. 정장을 하고 연주회장에서 엄숙하게 앉아 등이 못 견디게 가려워도 긁지도 못한 채 음악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허위의식이나 권위를 풍자한 것일까? 여자의 몸에서 끊임없이 새나오는 신음소리를 엄숙하게 듣고 앉아있는 현상의 본질을 비튼 것일까?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움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전병헌은 마우스를 눌러 여러 번 화면을 바꾸었다. 폭풍우 몰아치는 여름 밤 하늘의 번개처럼 푸른빛이 전병헌의 얼굴을 비추면서 지나갔다. 사방 벽의 창문은 공연과 전시를 위해 설치할 작품 때문에 모두 막혀 있었다. 빛이 새나오지 않아 빈 건물인가 싶어서 돌아갈까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눈앞에 목적지를 두고서 알아보지 못하고 돌아선 적이 도대체 얼마나 많았을까를 생각했다. 벽을 치우면 즉시 나타나는 것들 앞에서 벽인 줄 모르고 포기하고 돌아선 많은 일들. 벽을 알아볼 수 있는 직감이나 능력은 어떻게 해야 길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 여러 명이 지나가 만들어진 길 같은 것은 창작을 하려는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미서 역시 그런 곳에서 막힌 것이 아닐까. 돌아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길 앞에서 막막하게 서 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미서가 보고 싶었다. 미서가 먼저 연락을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연락도 않고 지내던 일이 후회되었다. 내가 급할 때는 이것저것 요구하고 도움을 받고서는 정작 미서가 저녁 한 번 먹자고 청해도 일찍 들어가야 된다고 거절했던 일이 미안했다. 그런 내게 자신의 상황을 의논하기는커녕 드러내기조차 힘들었을 게 뻔했다. 미서는 이 모임에서 무얼 하려고 시도했던 것일까?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무력감을 타파하려고 생각했을까? 비로소 내가 얼마나 무감각한 인간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라고는 차 한 숟갈의 분량만큼도 없었다. 내 심장에서 과연 뜨겁고 붉은 피가 흐르는지 의심스러웠다. 전병헌이 띄운 파일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화면 가득 흐릿한 글자로 구성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입 속으로 눈 앞에 나타난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그 글에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의문을 가지고 있던 것을 정확히 표현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욕구, 내 이름의 책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의 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이 바로 눈앞에 떠있었다. 글을 쓰고 싶은 내 욕망이 세속적인 허위의식에서 나온 게 아닐까 늘 불안했다. 그런 생각은 글을 쓰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부끄럽고 주눅 들게 만들었다. 무엇을 남기기 위해 글을 쓰고 싶은 것이 내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하찮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2007-08-2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초청장 돌리고 언론에 홍보자료를 보내야 하는데 박선생이 행방불명이에요."나는 전병헌과 이형수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명색이 친구라고 하면서 행방을 모르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미서는 나보다 강하다고 여겼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미서는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걱정도 하지 않았다. 결혼 후 적응하느라 글을 못쓸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예전의 미서로 돌아갈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나였지 미서가 아니었다. 늘 내 말만 늘어놓았고, 불평을 했고, 조언을 구할 생각만 했다.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행방불명은 아닐 것이다. 단지 연락이 닿지 못할 뿐 미서는 어딘가에서 활기차게 지낼지 모른다. 전병헌과 이형수는 나를 보았다. 미서의 행방은 나도 모른다. 사고를 칠 애는 아니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서의 행방을 알기 위해 나를 불렀단 말인가? 전화로 물어봐도 충분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이형수가 빈 접시를 챙겨 들었다. 아래층으로 빈 그릇을 들고 내려가는 것을 봐서는 씻어서 정리를 하려는 것 같았다. 함께 내려가서 도와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형수는 혼자서 알아 하겠다며 나를 도로 앉혔다. "치우는 동안 우리는 오노 요코나 좀 봅시다."나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 채 엉거주춤 전병헌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벽에 걸린 스크린위에 설치 미술품을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 화면이 비춰지고 있었다. 전병헌은 벽 앞쪽에 있는 책상 위의 컴퓨터를 만졌다. 전병헌이 마우스를 누를 때마다 스크린의 화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전병헌은 원하던 파일을 찾아 화면을 띄웠다. 나는 객석처럼 만들어 놓은 의자 중 한 개를 끌어 당겨 앉았다.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번화한 도심지 거리의 광장인 듯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카메라는 커다란 물통을 잡았다. 어른 한 명이 들어갈 정도로 큰 물통에 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눈에 익은 남자, 누굴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안타까웠다. 서양인과 동양인, 여자와 남자들이 뒤섞여서, 얼굴이 익은 동양인 남자의 주변을 빙 둘러서 있었다. 흥미진진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고, 즐거워보였다. 남자의 손에 첼로의 활이 들려있었다. 첼로가 없는 것을 보아서는 거리의 악사는 아니었다. 곁에 서 있던 여자 중 한 명이 걸치고 있던 기다란 겉옷을 벗어던진 것 같았다. 여자의 알몸과 길을 걷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카메라는 잡고 있었다. 여자가 물통에 들어가는 장면, 동양인 남자가 물에 흠뻑 젖은 여자의 몸을 물통에서 꺼내는 장면들이 규칙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순간 이름이 떠올랐다.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진 젊은 날의 백남준이었다. 그를 기억해 낸 기쁨은 잠시였다. 나는 그들의 이벤트를 정지시킨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백남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여자의 알몸을 마치 첼로처럼 앞으로 안았다. 여자의 등에 첼로의 활을 갖다 대고 첼로의 현을 켤 때처럼 문지르는 커다란 동작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전병헌은 그 장면을 띄워 정지시켰다. "백남준은 그 일로 체포되어 경찰에 끌려갔어요. 60년대 중반 뉴욕. 권위와 억압과 전통이 새로운 시대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막강한 힘을 휘두를 때였어요.""그때 백남준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정리를 마친 이형수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이형수의 목소리는 어두운 구석에 부딪쳐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다지 밝지 않은 전등에 비친 이형수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백남준이 경찰에 끌려가며 뭐라고 말했을까? 몹시 궁금했다.

2007-08-2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이형수가 아래층으로 내려 간 후, 전병헌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전병헌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형수를 발견했을 때 잠시 스쳤던 당혹감과 일말의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었다. 전병헌과 둘이서 시간을 보낼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형수도 관련되어 있는 어떤 일에 대한 것인 모양이었다. 둘만의 은밀한 시간 뿐 아니라 전병헌은 자신과 관련된 다른 시간과 공간에 나를 초대한 것이다. 나에 대한 전병헌의 신뢰가 기뻤다. 물론 신뢰인지 단순한 초대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라도 행복한 게 좋았으므로 나는 멋대로 생각했다.전병헌은 테이블 위로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통해 나를 만나 기뻐하고 있는 그를 느꼈다.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전병헌이 어린 영혼처럼 생각되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이형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전병헌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이형수의 양 손에는 와인이 한 병씩 들려있었다. "선영씨 때문에 이과두주 대신 이걸 갖고 왔어요.""잘했어."전병헌이 짧게 대꾸했다. 이형수가 잔을 채웠다. 중국요리에 화이트 와인이라니. 격식에 맞지 않을 것 같았지만 예상외로 와인과 요리는 잘 어울렸다. "얼마 후에 이곳에서 전시회 겸 정기 공연이 있어요."전병헌은 앞 뒤 설명 없이 공연이 있다고 말했다. 명목은 정기 공연이라고 했다. 미서와 전병헌과 이형수가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모임이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누군가 공연하자고 하면 바로 준비에 들어가는 체재. 미술, 음악, 작가, 영화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섞여 있어요. 회원은 이 십 여명 남짓인데 실제로 활동을 하는 사람은 열 명 안팎이죠."이형수의 말을 들어보니 건물 주인인 중국집 주인도 회원이었다. 중국집 주인이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무얼 하는 것일까? 비주류에다 돈도 안 되는 작업을 하는 예술인들의 후원자로서 만족하는 것인가?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형수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이형수는 부지런히 음식을 먹으면서 말했다. "자기 일을 하다가 슬럼프가 올 때 말하자면, 서비스 정신이 사라진다거나 음식을 만들 때 적당히 재료를 써서 눈가림을 하고 싶다거나 아니면 지금 하는 일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못할 때 공연을 하자고 제의하는 거죠. 다른 사람도 마찬 가지죠. 슬럼프를 극복하거나 의식을 확장하거나 하는 계기로 삼는 거죠. 그런 목적으로 모인 모임이에요." 나는 손에 유리잔을 들고 와인을 천천히 흔들었다. 잔의 안 쪽 면을 따라 연 노란색 와인이 빙빙 돌았다. 공연에서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나? 전시회 겸 공연이라 해도 글을 쓰는 나로서는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병헌처럼 만화를 그려 전시할 수도 없고, 이형수처럼 사진을 찍어 내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건물 주인은 공연 때 무얼 하나요?""조리사라해서 반드시 음식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본인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거죠. 뭔가 만들어내는 과정 중에 깨닫기도 하고 애는 쓰지만 실제로 공연이 끝난 후 아무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죠. 공연 전까지 모임을 거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발표를 해요.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죠.""이번 공연은 박 선생이 요청 한 거였어요."이형수가 말했다. 미서는 결혼을 한 후 전혀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봐도 미서는 글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2007-08-2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언제까지 어두운 건물 앞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외벽에 노출된 계단이라니. 비가 내리면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도대체 언제 지어진 건물일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첫 번째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조심하지 않으면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발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몸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자 갑자기 계단 전체가 환하게 드러났다. 고개를 꺾고 올려다보니 계단의 위쪽과 아래 쪽 양 끝에 전등이 달려있었다. 자동 센서가 부착된 전등인 모양이었다. 건물은 생각과 달리 그다지 오래 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외벽을 살펴보았다.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을 봐서는 모던 스타일의 건축물인 것 같았다. 중국집이라는 선입견에 낡고 오래 된 건물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을 정확히 관찰할 수 없게 만드는 데는 어둠도 한 몫을 했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벽을 한 번 쓸어 주고 싶었다.계단을 오르자 출입문이 나타났다. 손잡이를 비틀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조도가 낮은 전등이 켜져 있는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정방형의 넓은 공간이 기다란 운동장처럼 보였다. 출입문 반대 편 안쪽 벽에 누군가 영사기를 틀어놓은 듯 화면이 흘러가고 있었다. 크지 않은 화면이라 무엇인지 자세히 구별할 수 없었다. 누가 있나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벽을 따라 설치물이 있었고, 공간 중앙에는 객석처럼 의자를 갖다 두었다. 그냥 들어가도 좋을지 몰라서 망설였다. 그때 벽에서 튀어나온 듯 팔 하나가 내 쪽을 향해 움직였다. 전병헌이 벽을 밀고 나온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나는 전병헌이 손짓을 하는 데로 걸어갔다. 벽을 밀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벽처럼 칸막이가 서 있는 뒤쪽의 작은 공간이었다. 몇 가지 음식이 놓여있는 테이블이 있었고 누군가 앉아 있다가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이형수였다."에이. 형, 선영씨가 온다고 말해 주지. 이게 뭐야. 수염도 안 깎았는데." 이형수를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멋있어요." 진심이었다. 작업복을 걸치고 헝클어진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북북 문지르는 이형수를 보자 유쾌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미치지 않은 구석진 곳에서 미서나 강민기나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했다. 생각해보니 장마가 시작된 후 못 만나고 있었다. 장마가 끝났으니까 한 달이 넘었다."우선 밥이나 먹고 이야기하기로 하죠. 자 앉아요." 이형수의 말투로 미루어 봐서는 전병헌은 나를 이곳으로 불러놓고 이형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으나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여기가 제 작업 공간이에요." 이형수가 자신의 곁에 의자를 갖다 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 넓은 공간이었다. 연극 한 편은 상연해도 좋을 만큼의 소극장 규모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건물 주인이 그냥 사용하라고 내 준거죠." 이형수는 접시를 싸놓은 비닐 랩을 벗기며 말했다. 탕수육이었다. 또 다른 접시에는 각종 해산물을 넣어 걸쭉한 전분으로 버무린 이름을 알 수 없는 요리가 담겨 있었다. 아래층 중국집은 분명히 문이 닫혀있었는데 싶었다. 이상한 나라에 온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접시의 비닐 랩을 모두 벗긴 후 이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달린 문을 밀었다. 놀랍게도 벽 뒤쪽에 작은 공간이 있었고 구석에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좁은 계단은 비밀 통로처럼 중국집 주방에 연결되어 있었다.

2007-08-1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전병헌이 알려준 장소를 찾아갔다. 그의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계단처럼 조성된 터에 집이 들어서 있었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십 여분 남짓 걸었다. 규모가 큰 미술관과 테라스에 의자를 내 놓은 유럽풍의 카페가 있었고, 담쟁이덩굴이 아치모양으로 출입문을 타고 올라간 작은 찻집도 보였다. 붉은 색깔의 파라솔 아래에 놓여있는 하얀 의자에서 한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허리높이의 기둥 위쪽 끝부분에 우윳빛의 둥근 전등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마치 안개 속에 떠있는 듯 했다. 도심에서 비껴난 산자락에 이렇게 아름다운 골목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여름밤은 기울었고, 산 근처의 공기는 달았다. 가슴 가득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해보니 밤마다 터지던 기침이 멎어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기침이 시작될 때면 전조처럼 나타나던 미열이 오르던 증상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산의 둥근 실루엣이 작고 아담한 동네를 싸안고 있는 형국이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진열장 안에 형형색색의 인형이 전시되어 있는 가게가 나왔다. 조그마한 마을버스가 좁은 길을 헤치고 올라갔다. 길을 따라 양 옆에 숨어있는 작은 가게는 마치 동화 속 나라를 옮겨놓은 듯 환상적이었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지구본 하나가 달랑 진열장에 놓여있는 상점을 지나자 마치 길이 끊어진 듯 불빛이 뚝 끊겼다. 무엇을 팔고 있는 곳인지 알 수 없는 지구본 가게가 골목의 마지막 상점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내가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비스듬히 경사진 내리막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구부러져 있었다. 길 건너 쪽은 미술관이나 화랑 고서를 취급하는 서점, 오래 묵은 듯 보이는 골동품 가게들이 들어 있었다. 가게가 끝나는 곳의 위쪽은 주택단지였다. 산의 경사면에 지어진 집들은 돌이나 목재 등의 자연 소재로 마감되어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깨끗한 피부에 희고 기다란 손가락을 가진 사람들이 살 것 같은 느낌.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소리 내지 않고 식사를 하는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 같은 동네였다. 전병헌이 오라고 알려준 중국집은 이 동네에는 맞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골목 입구에서 헷갈렸을까? 산기슭이라 한 번 들어서면 위로 올라올수록 서로 멀어지게 되어 있었다. 분명히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중국집 이층이라고 했다. 건너편의 미술관을 바라보았다. 오래 된 성처럼 미술관 벽은 화강암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미술관은 뱀 허리처럼 골목을 따라 휘어져 있었다. 휘어진 미술관의 돌 벽은 내가 서있는 곳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구본이 있는 가게 옆으로는 공터였다. 잡초가 무성했고 헤져 너덜대는 비닐 끈을 달고 있는 팻말이 꽂혀있었다. 가게의 진열장에서 흘러나오는 조명과 길가에 서 있는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드리워졌다. 미술관 벽이 끝나는 곳에 서니,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낡은 건물이 보였다. 이층 건물은 곡선으로 된 골목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지어졌기 때문에 길 아래쪽에서는 약간 돌아 선 건물의 뒤쪽면만 보였다. 일층의 중국집은 문이 닫혀있었다. 골목을 올라오면서 보았던 가게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어둠 때문에 빛을 잃은 금박 칠을 한 간판이 무거운 용을 이고 있었다. 구룡반점. 아홉 마리의 용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분명히 구룡반점 이었다.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귀한 이들의 처소나 고급여관에 붙이는 원이나 그 흔한 장자도 붙이지 않은 중국집은 오랜만이었다. 이층 건물에서는 빛 한줄기 새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잘못 들어선 것일까? 휴대폰도 없는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전병헌이 어둠속에서 튀어나오길 바라며 나는 망연히 건물 앞에 서있었다. 산 밑 어둠 속에 웅크린 집의 창에서 새나온 불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2007-08-1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병헌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며칠 뒤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사흘이란 갈등이 해소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었다. 내게는 그 시간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았다. 만약 전병헌이 조그만 더 늦게 연락을 해왔다면 아마도 나는 심연의 바닥에 추락하여 산산조각이 났을지 모른다. 전화벨 소리에 구르듯 달려가 번개처럼 수화기를 낚아챈 다음 나는 숨을 멈췄다. 수화기 저편에서 전병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마구 고개를 쳐드는 기쁨을 누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전병헌의 말에 필사적인 노력으로 나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의 전화 한 통이 거미줄처럼 엉키던 시간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해 주었다. 혼란스러웠던 사흘, 내가 그를 알고자 했던 이유가 명료해졌다. 간단했다. 그가 내게 연락을 할 것인지 않을 것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의 이면을 알고자 하는 것들은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알고자 함이었다. 그러자면 그의 심리를 알아야했고, 그의 마음을 파악하려면 환경이나 주변의 인물, 생각 등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헛수고였다. 마음이란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놈이다. 주변을 안다고 해서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술적 행위란 원래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거였다. 본질에 대한 설명이나 해결이 불가능할 때 의존하는 방법. 빤한 답을 변경하고 싶을 때 행하는 부질없는 노력이나 시도였다. 답은 전병헌이 연락을 하거나 하지 않는데 달려있었다. 내가 연락을 한다면 모든 것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내가 전화를 하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것만큼 이나 어려웠다. 내가 먼저 전화를 할 정도로 전병헌과의 일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책임을 따진다면 혼인서약을 한 결혼에 대한 책임이 훨씬 무거웠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의 이면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내가 막연히 책임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나 영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 또한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최소한 내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이해하기가 조금 수월해 질 것인가? 내가 시작한 일이었다. 최소한 전병헌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싶었다. 세속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마음에 들지도 않는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날아온 에로스의 화살에 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가로 세로 수많은 율법으로 그려진 바둑 판위에 내 던져진 존재일 따름이었다. 금지와 도덕이라는 게 비 오는 날 머리위에 펼친 찢어진 우산이라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 모든 것 또한 나를 변명하는 현란한 수사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완전히 들떠버렸다. 그의 전화 한 통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해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만만한 게 미서였다. 미서 말고는 전화를 해서 저녁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은 남편이 더 잘 알았다. "미서가 아프대. 응급실에 갔다는데 나 보고 좀 와 달래."다소 급하게 조금 애처로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왔다. 베란다 유리문 바깥세상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중이었다. 가벼운 뭉게구름이 옅은 보라색 띠를 두르고 주황빛 서쪽 하늘에 머물고 있었다. 세상은 어쩌면 이렇게도 신비한 걸까. 잎이 무성한 정원의 나무들이 대낮의 열기에서 벗어나 기운을 찾고 있었다. 녹색의 물감으로 한 장씩 찍어놓은 것 같은 수많은 나뭇잎이 땅을 가리고 있었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녹색의 나무들은 마지막 햇빛에 반사되어 덧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2007-08-1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화기를 귀에 바싹 갖다 댔다.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듯한 신호음이 들렸다. 고장은 아니었다. 전화기를 몸체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미서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보았다. 신호음이 떨어졌고 한참 후, 휴대폰을 꺼두었다는 기계음이 들렸다. 전화가 연결되어도 오래 통화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꺼두었다는 말을 듣자 버림을 받은듯 조금 외로워졌다. 거실을 서성거렸다. 누군가 마음속을 막대기로 휘젓는 것 같았다. 막대기의 방향에 따라 마음의 물길이 뒤엉켰다. 가슴 속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머릿속은 깊은 물이 소용돌이쳤다. 이럴 땐 미서와 수다라도 떠는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나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집 안을 서성거렸다. 책을 펼치고 음악을 틀고, 샤워도 해보았지만 한 번 헝클어진 생각은 수습이 어려웠다. 아침부터 들락날락하던 컴퓨터 앞에 다시 가 앉았다. 주소창을 치고 들어가 인명 검색에 들어가 전병헌을 입력시켰다. 전병헌이 그동안 펴낸 책들이 주르르 떴다. 만화책이 주종이었고, 미술에 대해 수필 형식으로 쓴 책이 한 권 있었다. 전병헌에 대한 좀더 자세한 사항을 알기 위해 클릭을 했더니 천원을 결제하라는 창이 떴다. 핸드폰이 없어 집 전화번호를 넣었다. 결제가 확인된 후 곧바로 전병헌에 대한 정보가 컴퓨터 창에 나타났다. 생년월일과 출신 학교, 그리고 그가 쓴 책이 전부였다. 그의 가족,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내와 가족관계가 궁금했었다. 천원의 가치는 전병헌에 국한되는 모양이었다. 전병헌의 천원어치의 정보가 떠있는 컴퓨터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으로 내가 볼 수 있는 전병헌이 아닌 그의 내밀한 풍경이 궁금했다. 어릴 적의 그, 청소년기의 모습, 선배와 나와 미서가 청춘을 함께 보낸 대학시절의 그, 그의 여자들, 그의 아내와 아이.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 전병헌의 과거와 연결된 현재, 가능하다면 그의 미래까지 내 머리 속에 정리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무슨 까닭인지는 나도 알 길이 없었다. 전병헌이 왜 궁금한지, 이토록 알고 싶은지 나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다른 주소창을 치고 들어가 전병헌에 대한 검색을 해보았지만 천원어치 정보 이상의 사실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전병헌의 만화책 몇 권과 그림 감상 책을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안정되었다. 며칠 후, 책이 도착해 읽는다면 그에 대해 좀더 많이 알 수 있을 터이다. 그가 쓴 책을 읽는 것만으로 그가 어떤 생각과 사유방식을 가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나는 그가 쓴 책보다 더 가까운 시간에 그를 보았고, 그와 이야기했고 그의 곁에 있었다. 그것이 전병헌이었다. 산을 걷고,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사무실 바닥에서 그는 내 몸을 안았다. 그 외 다른 사람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찾는 전병헌은 누구일까. 혹시 그것은 내가 바라는 전병헌이 아닐까.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가 만든 이상형. 내가 생각하는 곳에 가 서있어야 하는 전병헌. 미서가 내게 늘 하는 말. 너는 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곳에 가 서 있는거야? 라고 하는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걸까?나를 전병헌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가장 위험한 방법으로 나는 전병헌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게는 스스로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볼 능력이 없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생기자 갑자기 위축되었다. 자신 없음. 그런 기미가 감지될 때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신호였다. 그가 이렇게 많은 책을 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를 자세히 알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다. 존경이나 경이로움은 사랑과는 다른 차원의 감정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007-08-1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매미가 소란스럽다. 비가 그치자 기다렸다는 듯 울어댄다. 장마 때 매미는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비를 피해 모두 나뭇가지의 아랫부분, 아니면 잠시 땅굴을 파고 피신하는 것일까? 작은 방의 창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아무리 시끄럽다 해도 우리 동네서는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매미를 퇴치해 달라고 도시 한복판에 사는 주민들이 구청에 진정을 하는 것을 보면 도심의 매미소리는심각한 모양이었다. 매미는 7년을 땅속에서 기다리다가 허물을 벗고 땅위로 올라온다. 나무에서 열흘 가량 사는 동안 짝짓기를 해서 개체를 퍼뜨려야 한다. 상대방을 유혹하는 수단은 소리다. 나 여기 있어. 이리로 와. 내게로 와 라고 열심히 외친다. 구애의 소리는 자동차의 소음에 묻혀버린다. 날짜는 지나가고 모래시계에서 생명의 모래는 점점 줄어든다. 매미는 점점 더, 도심의 소음보다 더욱 큰 소리를 내야한다. 나 여기 있어. 여기 있다고. 매미는 오토바이의 폭음과 앰뷸런스의 숨 가쁜 소리,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과 세상의 온갖 소리에 맞서야 한다. 악을 쓰면서 자신을 알려야 한다. 귀청이 찢어질 듯 시끄러운 소리는 매미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한가하게 느린 소리로 이따금 울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아마 오래지 않아 내 방 창 아래의 나무에 붙어 우는 매미들도 점점 목청이 커질지도 모르겠다. 길 건너 강변 쪽에 새로 생기는 도시 고속화 도로가 완성되어 자동차가 쉴 새 없이 오고가면 말이다. 시내로 오가는 시간이 지금보다 반쯤은 단축될 거라고 주민들은 도로공사를 반기는 분위기다. 공사가 끝나면 지금의 한적한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다. 나는 도로 공사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 매미소리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시내를 오가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은 게 아니라 빨리 도로가 완성되었으면 싶었다. 매미가 악을 쓸 테고, 새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때문에 조용하던 동네가 들썩거릴게 뻔했다. 그런데도 시내를 오가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내게 분명 희망적이었다.목표가 있을 때 사람들은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달리게 되는 모양이었다. 선배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에는 느림의 미덕 같은 종류도 있었다. 세상이 빨라지는 것에 대한 방증인 모양이었다. 나는 세상에 속해 함께 흘러가는 유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세상의 흐름에 섞여들어 간 것일까. 새로 생기는 도로를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만으로 소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그게 그리 쉬울까. 창 아래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책을 뒤적거렸다. 몇 번째 같은 페이지를 넘겼다 다시 돌아오는 중이다. 내용이 파악되지 않아서다. 내 신경은 온통 거실로 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실에 놓여있는 전화기에 집중되어있다. 전화벨 소리가 힘차게 울리기를, 나 여기 있어. 라고 외치기를 기다리는 중 이었다. 아무리 작은 소리일지라도 울리기만 한다면 나는 단번에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나는 세 차례나 주방을 들락거렸다. 모두 석 잔의 커피를 타 마셨다. 주방에 붙어있는 작은 방에서 나와 싱크대 위에 놓인 전기 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올리고 물을 끓였다. 두 스푼의 커피가루를 병에서 덜어 잔에 넣고 물을 붓는 동안 내 귀는 줄곧 거실로 열려있었다. 두 발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잔을 올린 받침접시를 들고 다시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세 번 같은 방식으로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 마셨다. 정오의 해가 다시 비스듬히 이울 때까지 부동산투자를 권유하는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헛되이 이메일의 편지함을 뒤지다가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와 거실 한 귀퉁이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2007-08-1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현관문을 열기 전에 손이 움찔거렸다. 섬광처럼 머릿속으로 탄식이 스쳐갔다. 후회와 뒤섞인 탄식은 순식간이었고,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문이 열렸고 그림자처럼 나는 거실로 들어섰다. 변명거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아둔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존재를 알리는 텔레비전 소리가 실내를 떠다녔다. "저녁은?"일단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먼저 질문을 했다. "늦으면 전화라도 해야지. 어딜 갔던 거야?"남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미서와 이야기 좀 하느라고. 요즘 힘든 가 봐."이럴 때 보면 나는 마치 연극배우 같았다. 아니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거짓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람이 없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거짓말을 할 정도의 상황에 몰리면 숫제 입을 다물어버리는 편이었다. 거짓말을 한 후, 께름칙한 마음으로 불편한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고지식해서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라도 움켜잡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지 모른다. "김이사는 일 년에 절반은 해외출장이고, 결혼한 이후엔 글도 전혀 못쓰고 있대."주방 쪽의 식탁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순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열개의 문장으로 말을 했다면 그중 아홉 개는 진짜고 나머지 한 개만이 거짓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은 몽땅 거짓말이다. 나머지 아홉 개보다 힘이 센 사실 하나가 다른 것들의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서와 함께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보다는 미서의 형편과 미서가 처한 상황과 마음상태에 대한 나머지 아홉 개를 설명했다. 필요이상 자세한 내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테일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구체성을 부여해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쉽게 믿도록 한다. 이것은 글을 쓸 때도 적용되는 기법중의 하나다. "얼굴이 반쪽이 됐어. 미서네 집 근처 리틀 타이란 태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온 음식을 반도 못 먹더라고. 쇠고기를 볶아서 샐러드처럼 만든 것, 이름이 뭐더라, 까먹었네. 카레도 나왔어. 맨 먼저 딤섬을 주더라. 딤섬은 동남아 쪽의 공통 요리인가 봐."언젠가 미서와 함께 먹은 저녁식사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몸에 딱 붙는 태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서빙을 하던 종업원도 기억났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던 실내의 중앙을 지나는 기다란 직사각형의 작은 분수에서 흐르던 물소리와 삼 십 센티 쯤 공중으로 뿜어져 올라와 원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던 물줄기도 생각났다. 후식으로 나왔던 밤톨만한 다디단 열대과일과 이국적인 무늬로 만들어진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품이 붙어 있던 벽도 생각났다. 반년도 훨씬 더 넘은 저편의 장면이었다. 말을 할수록 미서와 함께 먹었던 상황이 상세하게 그려졌다. 접시를 들고 와 어느 쪽에 먼저 놓을까 망설이던 종업원의 머뭇거림, 입에 넣기 차마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딤섬의 작은 주름들, 나박썰기 비슷한 모양으로 썰어 넣은 카레속의 감자까지 모든 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밤새도록이라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지루한 듯 어느 새 졸고 있었다. "그 집 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좋더라. 언제 한 번 가 볼까?"나는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의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방비 상태의 인간에게는 연민이 느껴지는 것 일까. 근육이 긴장을 풀어버린 얼굴은 남편이라고 말할만한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남편이 낯설게 느껴졌다.

2007-08-1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병헌은 내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손을 잡고 걸었다. 거리의 빌딩 끝에 여름 해가 기우뚱 걸렸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흘러들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장을 두드렸다. 몸 속에서 피는 다시 돌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분노는 사라졌다. 나의 유치함에 스스로도 약간 놀랐다. 누가 이런 나를 들여다 볼까봐 창피했다. 남을 돌봐주는 것이 내게는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손을 내미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누군가 먼저 내 손을 잡아 준 기억같은 건 없었다. 있다해도 아득히 먼 저쪽이어서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누군가의 커다란 손에 내 손을 맡기는 게 어색했다. 손을 빼내려고 꼼지락거렸다. 그 때마다 전병헌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연립주택들이 나타났다. 낮은 지붕이 어깨를 댄 주택단지가 이어졌다. 세련되지 못한 건축 마감재를 사용한 동네는 푸근했다. 어느 새 내 손이 전병헌의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람은 빨리 변할 수도 있다. 적응? 아니면 깨달음일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잠을 자고 나면 나이에 상관없이 유치해지는 모양이었다. 이 기이한 관계. 인간은 결국 상대의 육체를 소리쳐 부르고, 끌어당긴 후,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순간이지만 서로 이질적인 육체를 간절히 원할 때가 삶의 정점이 아닐까 싶었다. 긴 골목 끝에 작고 정갈한 식당이 나타났다.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점심을 거른터라 종업원이 음식을 날라오자 맹렬히 식욕이 솟았다. 속이 빈 것에 비해 밥은 많이 먹히지 않았다. 내 앞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에게서 느끼고 있는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무작정 편한 것은 아니지만 상관없이 그와 오래도록 있고 싶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그의 냄새를 맡으며 곁에 있고 싶었다. 엇나가는 청소년처럼, 금지하면 더욱 맹렬히 불타오르는 욕망처럼,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간절한 것인지 모른다.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놀랄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식사를 끝내고 동네를 잠시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고나니 어둑해졌다. 나는 돌아가야 할 집 같은 건 없다는듯 행동했지만 마침내 더이상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가야할 의무같은 건 없었으면 싶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자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자유라기 보다는 방종에 가까웠겠지만 어쨌든 심하게 나를 옥죄는 집이나 남편같은 건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유치해지거나 순수해지거나 방종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였다. 전병헌과 함께 서서 버스를 기다릴 때 나는 순수했고, 버스를 타며 슬픈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흔들 때는 유치했다. 정류장에 혼자 남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생각했다. 남편은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것이다. 방종한 아내가 돌아와 차리는 늦은 저녁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버스가 네거리를 건너고 신호등을 따라 한참을 달린 후에 나는 서서히 불안에 휩싸였다. 대체 오늘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거야? 그것은 죄의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절벽 앞에서 얼쩡대다가 실수로 굴러 떨어진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상황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저지른, 발로 차버린 금기의 팻말을 쳐다보았다. 운명에 내던져진 이라거나 부조리한 현실이라거나 또는 정신의 승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내게는 또 다른 현실이 있었다.사람을 그물처럼 엮어주는 관계가 있었다. 남편에게, 아니 남편에게 깃들어있는 한 인간에게 진정으로 미안했다. 가슴이 아파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2007-08-0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내 몸 위에 놓인 전병헌의 긴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이 든 그의 얼굴이 코 앞에 있었다. 그가 깨어날까봐 나는 꼼짝 못하고 누워있었다. 하늘에 걸린 태양이 그와 나의 발치에 산란하는 연어가 수정란을 쏟아내듯 빛을 쏟았다. 전병헌은 산란을 끝낸 연어처럼 죽어버린 것 같았다. 그 말은 한 편 옳았다. 내 몸에 들어왔던 그의 몸의 일부가 죽었으니까. 무방비의 상태로 잠에 빠진 그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 문득 사랑이란 추억이나 환영이 아니라 여기 놓여있는 육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병헌과 비밀을 만들었다는 은밀한 흥분, 손만 내밀면 금방 만질 수 있는 그의 피부. 정신이 아니라 육체가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좀처럼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꼼짝 않고 누워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내 가슴에 얹힌 그의 팔을 떼어냈다. 소리 없이 일어나 발끝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캔 맥주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냈다. 내가 맥주 하나를 다 비우는 동안 그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다시 발끝으로 걸어 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원피스를 집어 올렸다. 옷을 입고 손가락을 벌려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가 깰까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사납게 어깨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갔고 또 지나갔다.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꺾였다. 나는 소리없이 일어나 가방을 집어 들었다. 화가 났고 울고 싶었다. 버려진 아이처럼 고립감이 온 몸을 고통스럽게 짓눌렀다. 나는 물끄러미 전병헌을 바라보다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기 위해 디지털 키를 누르자 삐익하는 전자음이 울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고리가 풀렸다. 그 소리에 깬 전병헌이 눈을 뜨고 현관에 서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는 몸을 일으켰다. 늦은 오후의 낮잠에서 깨어나, 그 때가 아침인줄 알고 허둥지둥 등교 준비를 하는 아이처럼 낭패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가식에 가득 찬 미소까지 지었다. "가봐야 해요. 좀 더 주무세요."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열어젖혔고, 복도로 나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누구를 향해 날릴 수도 없는 화살. 허공에 대고 활시위를 겨누어 봤자 아무 것도 맞힐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동시에 전병헌의 사무실이 문이 열렸고 그가 윗옷에 팔을 꿰면서 복도로 뛰어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냉정하게 내려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화났다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기 싫었다. 그것은 순전히 허세였다. 나는 그렇게 속 넓은 인간은 못되었다. 그에게 쿨하게 보이고 싶은 면도 있었지만 정작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화내고 투정을 부리는 것은 부모 형제와 같이 극히 가까운 사이에서나 통하는 태도였다. 내가 전병헌에게 분노를 표출한다면 그는 어리둥절해 할지 모른다. 그는 많은 여자와 만나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지는 사람이었다. 진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 눈에 비친 전병헌은 그랬다. 반대편 방향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왜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고 따진다면 우스운 사람 취급을 받지 않겠는가.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에게 종주먹질 하듯 나를 들이댄다면 전병헌은, 도망가 버릴지도 몰랐다. 생애 처음으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내가 실망할 때까지 그는 내 옆에 있어야 했다. 고독했으므로 그가 필요했다.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2007-08-0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병헌은 관찰하듯 유심히 내 몸을 쳐다보았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양 손에 든 머그컵을 작은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전병헌은 햇빛이 눈에 부신 듯 약간 찡그리더니 몸을 움직여 이리 저리 위치를 바꾸었다. "팔을 내려 봐요."그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가슴을 가리고 있던 두 팔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전병헌은 나를 중심으로 느리게 한 바퀴 돌았다.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 번 보세요."고개를 약간 숙여 허물어져 가는 가슴을, 볼록한 아랫배와 금방이라도 꼬리로 변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운 다리를 보았다. 그다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노화가 진행되는 서른 중반이 넘은 몸이다. 내 벗은 몸을 보고 그가 실망이나 하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스쳐갈 뿐이었다. 전병헌이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거나, 천둥치듯 서로의 감정이 얽힌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실망이랄 것도 없을 터였다. 그의 앞에서 나를 벗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열정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서적 충격을 수용하는 기관이 광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나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대체 눈부신 햇빛아래 서서 한 남자에게 나를 송두리째 드러내게 만든 욕망의 정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벗은 여자를 앞에 세워놓고 서두르지 않는 전병헌의 태도에서 남자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았다. 전병헌은 내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벗겨냈다. "자신을 순수한 물체로 생각해 봐요."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수한 물체라니, 분홍빛 살을 가진 이 몸뚱이를 물체로 생각하라고? 수치심을 느낄까봐 하는 말인가? 그림을 그리니 나를 누드 모델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어느 새 이렇게 뻔뻔스러운 나이에 도달한 것일까. 그는 내 어깨를 소중한 물건 다루듯 어루만졌다. 그가 양 팔을 내 등 뒤로 넣어 마치 쇠사슬처럼 단단하게 나를 휘감았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비로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맨 몸뚱이가 어둠 속에서는 수치심을 느꼈다. 기이하게도 그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남편이 아니라 강민기였다. 선배를 향해 기울던 오랜 그리움이 서서히 사라졌다. 떠오르는 태양에 몸을 비키는 그림자처럼 선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흐릿해졌다. 이렇게 급속하게 어이없이 사라지다니, 그것은 그리움이나 사랑으로 위장된 허위의식이나 가치체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만적인 사랑을 빙자한 도피의식, 사랑이 영원해야한다고 믿는 중심에 대한 열망. 바닥에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전병헌의 팔이 내 가슴위에 사선으로 얹혔다. 얼핏 몸을 순수한 물체로 생각하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순수한 물체란, 순전히 육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까. 욕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닐까? 살을 가진 순수한 물체라면 동물이었다. 나를 동물로 생각하라고? 그것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빠진 육체의 합일이란 모순처럼 느껴졌다. 깨닫지 못하지만 혹시 나는 전병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끝내 전병헌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모든 행위가 끝났을 때 전병헌은 여전히 내게 타인이었다. 나는 간절히 우리 둘은 하나다. 라는 감정이 생겨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약간 친밀해진 타인으로 남아있었다.

2007-08-0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열에 들뜬듯 나는 버스를 탔다. 외벽이 온통 하얀 색인 병원 건물이 보였지만 그냥 지나쳤다. 버스에서 내린 후, 전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은 어둠 속 터널을 빠른 속도로 달렸다. 지하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무작정 걸었다. 몸이 이끄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중지했다. 발길이 멈춘 곳은 전병헌의 사무실이 들어있는 빌딩 앞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건물을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십 오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고, 로봇처럼 복도로 발을 내밀고, 뚜벅뚜벅 걸어가 벨을 눌렀다. 불과 몇 시간동안 이 모든 일을 해치웠다. 숨도 쉬지않고 단숨에 벨을 눌렀다. 내 몸뚱이에서 나는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진하게 화장한 두 눈과 청금색 목걸이를 건 목만을 남겼다. 자기 최면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적어도 전병헌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전병헌을 보자 나는 그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 주변에 귀와 입과 머리가 생겼고, 목을 중심으로 가슴과 배와 팔 다리가 순식간에 붙어버렸다. 나는 문 앞에 서서 허둥댔다."부근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어요. 작업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지……."내 입을 쥐어박고 싶었다. 이런 판에 박힌 빤한 이유를 대다니, 좀더 그럴듯하게 전병헌이 속아 넘어갈 깔끔한 핑계를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증오스러웠다.전병헌은 문에서 조금 비켜섰다.나는 엉거주춤 전병헌이 내 준 공간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거실에는 기다란 책상이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열 평 남짓되는 공간이었다. 컴퓨터와 만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 정리되어있는 책장 비슷한 가구가 있었다. 작은 주방이 거실 한 구석에 박혀 있었고, 문이 닫힌 방이 하나 있었다. 침실인 모양이었다. 전병헌은 작은 테이블 앞에 의자를 끌어다 주고는 앉으라고 했다. 손님 접대용 소파는 없는 걸로 보아 이곳에 나 같은 불청객은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 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벽을 마주보며 의자에 앉았다. 무성한 숲이 손에 잡힐듯 가까웠다. 은종이로 만들어 매달아 놓은 것 같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물거품처럼 반짝거렸다. 유리로 된 벽이 바깥 세상의 모든 소음을 차단했다. 사무실은 너무나 고요해 마치 물속 같았다. 초록빛 산을 한참 보고 있으려니, 내가 물고기가 된듯 했다. 허리 아래로 뻗은 두 다리가 유선형의 꼬리로 변하는 것처럼 스멀거렸다. 나도 모르게 종아리를 쓸어내렸다.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아가미가 생길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 유리벽으로 다가갔다. "점심, 했어요?"전병헌이 바퀴 달린 의자를 맞은 편으로 끌어오면서 물었다. 나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커피, 차?"전병헌은 주방으로 가면서 간단히 물었다. 커피 물을 올리고 작은 냉장고에서 전병헌은 부스럭대며 무언가 꺼내기 시작했다.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나는 유리벽을 마주 보고 섰다. 투명한 유리때문에 마치 사무실이 그대로 바깥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 감각이 느껴졌다. 물 속에서 움직이듯 나는 천천히 원피스의 단추에 손끝을 갖다 댔다. 맨 위의 단추를 풀어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전병헌이 양 손에 머그 컵을 하나씩 들고 내게 왔을 때 나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몸으로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전병헌의 얼굴에 햇빛이 쏟아졌다. 양 팔을 올려 가슴을 가리며 나는 전병헌의 눈을 쳐다보았다.

2007-08-06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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