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

 

숨쉬지 마세요<7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고열과 밤새 그치지 않는 기침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다. 남편은 말없이 약을 사다 날랐고, 한밤중에 건너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있는 머리칼을 떼어주었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몽롱한 속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나는 눈을 감은채 팔을 올려 머리를 쓸어주는 손을 힘없이 잡았다. 계곡의 물속에서 나를 끌어당기던 손이었다. 콘크리트 벽에서 대못을 빼듯 나를 끌어당기던 힘이 느껴졌다. 내 손은 뜨거웠는데 나를 잡고 있는 손은 서늘했다. 문득 알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면서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열어놓은 문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있는 검은 실루엣이 어둠 속에 떠 있었다. "좀 괜찮아?"남편의 묵직한 말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섬광처럼 날아오던 기쁨의 불꽃이 피시식 소리를 내며 꺼져버렸다. 나는 잡고 있던 남편의 손을 힘없이 놓았다. 남편은 한동안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가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일어섰다. 남편은 등 뒤에서 소리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환청이 들릴 정도로 밤은 고요했다. 몸에서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결이 입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꺼져가는 전조 같았다. 약 기운때문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혼자서 어둠 속을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쓸쓸하고 견딜 수 없이 고독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평선에서 솟는 해처럼 아침이 느닷없이 다가왔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조금 창백했지만 몸은 가뿐했다. 오랜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탓인지 약간 설레기까지 했다. 장마가 끝나고 커다란 해가 얼굴을 내민 탓인지도 몰랐다. 그동안 덮어 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책갈피에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치자 옷을 벗은 여신의 사진이 나타났다. 수메르의 여신 인안나, 어디까지 보았는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 짙은 눈 화장을 하고 청금색 목걸이를 하고 남자에게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손짓하는 여신. 자신이 주관해야 하는 곡식과 생명들. 하늘과 땅으로 상징되는 여자와 남자의 교합. 생산의 원동력인 성적인 욕망. 나는 그동안 정리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인안나만으로는 줄거리가 엮어지지 않았다. 단편적인 이야기는 어느 것과도 결합되지 않고 혼자서 맴돌았다. 이집트와 그리스 여신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성녀의 스토리를 함께 공부하지 않으면 충실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무심히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순간 아무 관련도 없는 페이지를 뒤적이는 나를 발견했다. 시간을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리둥절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앞에 컴퓨터가 놓여있었고, 나는 책상에 앉아있었다. 책을 덮고 방을 나왔다.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눈부신 햇빛이 아파트 마당의 나무 위에 쏟아졌고, 주차장의 자동차가 이제 곧 폭염으로 변할 공기를 이고 있었다. 까닭없이 거실을 서성거렸다.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머리 위로 치솟아 오르는 태양이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것인가? 서성대며 생각했다. 밤마다 터져 나오는 기침 탓인지도 모른다. 날이 밝으면 멀쩡한 것 같지만 역시 밤새 쿨룩대느라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가슴 X-레이 사진을 찍은 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달력을 보니 예약 날짜가 훌쩍 지나있었다. 허둥지둥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앉았다. 평소에는 번거로워 눈 화장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나는 푸른색으로 눈두덩 주변을 발랐다. 몇 번이나 덧칠했다. 화장대에서 일어서기 전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 목에는 커다란 청금색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2007-08-0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택시 요금이 기본요금을 넘지 않은 거리에서 내렸다. 사무실은 산자락에 서 있는 빌딩에 들어있었다. 빌딩 뒤쪽으로 어두운 숲이 이어졌고 도심의 불빛이 날아가 비추는 산봉우리가 어두운 하늘에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전병헌은 사무실이 들어있는 빌딩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 맥주와 비닐로 포장된 안주를 샀다. 나는 전병헌의 뒤를 강아지처럼 붙어 다녔다. 엘리베이터를 탔고 전병헌의 사무실이 있는 십 오층으로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고 있었다. 전병헌은 맥주와 안주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나는 전병헌과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는 느릿느릿 위로 치솟았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군가 숫자만 눌러놓고 사라졌는지 엘리베이터가 중간에서 멈춰섰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는데 아무도 타지 않았다. 문이 닫힐 때까지 우리는 둘 다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스르르 문이 닫히자 밀폐된 공간 안에 숨 막힐 듯 정적이 돌았다. 엘리베이터가 십 오층에 멈춰 섰을 때는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이 느껴졌다. 전병헌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늦은 시간, 전병헌의 사무실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확연했다. 나는 성인이었다.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불을 보듯 뻔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려고 했다. 나는 냉큼 한발을 내디뎌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긴 복도가 놓여있었고, 전병헌은 뚜벅 뚜벅 복도를 걸었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정리가 되지 않은 책상서랍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몇 발짝 뒤에서 허둥지둥 전병헌을 따라갔다. 이게 아닌데, 그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뭐가 아닌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마음은 건물 밖을 벗어나고 있는데 몸은 자석처럼 그를 따라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복도 맨 끝에 있는 사무실 문 앞에서 전병헌은 엉거주춤 걷고 있는 나를 기다렸다. 전병헌이 문에 부착된 디지털 키의 번호를 눌렀다. 삐삐 전자음이 작게 들렸고 철컥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전병헌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겼다. 어두운 사무실이 동굴처럼 입을 벌렸다. 나는 급히 전병헌을 불러 세웠다. "너무 늦었어요. 그 술은 다른 날 마시도록 하죠."전병헌이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나는 몸을 돌려 뛰다시피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는 그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급히 문을 열고 올라탄 후, 닫힘 단추와 일이란 숫자를 차례대로 눌렀다. 뛰다시피 건물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적한 곳이라 택시가 얼른 오지 않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누군가 건물에서 허겁지겁 나오고 있었다. 가로등빛 속으로 택시 한대가 달려왔다. 나는 차도에 뛰어 들어가 마구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멈춰 섰고, 나는 얼른 몸을 구겨 넣었다. 전병헌이 건물 앞에 서서 두리번거렸다. 택시는 전병헌의 앞을 지나쳤다. 나는 유리창을 내리고 손을 들어보였다. 전병헌의 눈이 내 눈에 와 잠시 머물렀다. 어쩐지 슬퍼보였다.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등받이에 기댔다. 슬프거나 외로워 보이는 것은 전병헌이 아니라 나인지도 몰랐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전병헌이 사무실에 가자고 할 때 이미 내가 흔들린 것을. 택시를 타고 '나 당신하고 잠 안자요'라고 큰소리칠 때 사실은 그에게 안기고 싶어졌다는 것을. 나는 내게 생긴 욕망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으니까, 이후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내 책임은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모두 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것들의 잘못이다. 그래서 혹시 저지를지도 모르는 죄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려는 술책이었다. 나는 분명히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게 돌을 던지면 안 된다, 그런 심정. 많은 안전장치를 했어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2007-08-0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욕망과 그것을 선별하는 문제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었다. 밤을 새며 토론하고 의식을 확장시키고 싶었다. 그런 게 진정한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병헌은 내 글의 문제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전병헌이 구체적으로 내게 지적해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전병헌은 더 이상 글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해 줄 말은 다 했다는 태도였다. 나는 의존형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의 대화는 시시한 일상의 일로 넘어갔다. 나는 모르고 전병헌만 알고 있는 만화가, 출판계의 뒷이야기, 그가 한때 사랑했던, 그런데 어쩐지 전병헌의 말을 듣고 있자면 그는 단 한 번도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알고 지냈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화가나 작가도 있었고, 방송계나 연예가의 사람도 있었다. 전병헌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는 사람의 이름을 감추지도 않고, 한때 자신의 여인이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가만히 들어보면 과시나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소주를 두 병이나 비웠으나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실은 많이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떠벌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음이 점차 전병헌의 과거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병헌이 혼자서 떠들었고 언젠가부터 나는 듣기만 하고 있었다. "나갈까요?" 내 말에 전병헌은 순순히 일어났다.음식점이 몰려있는 길을 벗어나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에 나와 택시를 잡았다. 비는 그쳐 있었다. 비에 씻긴 어두운 거리는 말끔해 보였다. 택시에 몸을 파묻자 머리 위로 취기가 급속히 올랐다. 앉아있는데도 몸이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나는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상점과 가로등과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도심지에서 벗어난 곳이라 거리는 다소 한적한 느낌이었다. 시야에 들어왔다가 뒤로 물러나는 것들이 가슴에 파고들 듯 아련하게 느껴졌다. 밤거리는 아름다웠고, 옆에 앉은 전병헌이 분신이나 된 듯 친밀하게 느껴졌다.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렇게 마음이 넓고 깊어지면 사는 게 즐거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에 가서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요."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지금 들어간다 해도 어차피 남편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연락도 하지 않고 이 시각까지 들어가지 않았으니 아마도 단단히 화가 나 있거나 걱정을 하고 있을 터였다. 자정이 넘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걱정이 아니라 화가 나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남편의 심경 같은 것은 조금도 염려되지 않았다. 삶이 사슬에서 풀려나 다소 숨통이 터진 것 같았다. 단 하루의 외출을 허락받은 무기수가 황금빛 햇살을 온몸 가득 받으며 길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감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을 단 일 초도 허비하고 싶지 않은 게 무기수의 심정일 것이다. 나 역시 몇 분이라도 더 햇살 아래 머물고 싶었다. "선생님하고 자지는 않을 거예요."나는 택시 운전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선언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 것일까. 좁은 차 안에 전병헌과 나, 기사 이렇게 세 명이 있었다. 당신과 자지 않겠다고 큰소리로 말하다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전병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미리 경고했을 뿐이야.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2007-08-0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작업이 끝나면 허탈해요. 내 속에서 무언가 쑥 빠져버린 느낌이 들어요. 미숙해서 그럴까요? 사실은 자신 있게 나는 프로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요."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글을 쓸 때는 의식되지 않았지만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는 늘 미진했다. 밤을 새고, 수없이 많은 자료를 뒤지고, 머리를 쥐어짜지만 뭔가 빠진 것 같았다. 나를 송두리째 쏟아 붓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영혼이나 열정, 광기 같은 것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감자탕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냈다.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작은 유리잔을 들고 불빛에 비춰보았다. 맑은 물 같은 액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참으로 신비했다. 그러나 단순히 알코올의 탓이기만 할까. 의식은 마치 사각의 방처럼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한 곳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말, 하고자 하는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인지되었다. 다만 평소보다 솔직해진 것이 다른 점이었다. 지금껏 몸과 마음으로 익힌 가치관과 관습을 발밑에 밟고 우뚝 서 있는 기분. 그런 느낌이 좋았다. 전병헌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고, 멜랑코리한 분위기에 무방비로 몸을 던져 넣은 것 같은 감정의 허술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무작정 나를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이제 막 낯선 장소로 한 발을 들여놓는 자의 조심성이 어두운 구석 한 쪽에 숨어있었다. 나 자신을 상황에 올인 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술을 마시다가 문득 남편이 떠올랐고, 한 동안 떠들다 보면 문득 아, 지금쯤은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허둥댔다. 나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벼랑 끝으로 조금씩 내몰아갔다. 아득한 절벽. 내려다보기에도 아찔한 낭떠러지 끝에 나를 세워보았다. "작가는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되죠."그 말에 나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온다는 것, 죽어야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요. 문예창작 시간에 귀가 닿도록 들은 말이죠. 그런데 눈을 감는다고 절벽에서 무작정 뛰어내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삶은 거미줄 같고, 거미줄을 벗어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요?"내 생애 가장 건방지다고 생각되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딴죽을 거는 것,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질문, 본질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문제를 언급하는 것.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의 유치함이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알코올이 이성을 날려 보내도 나는 여전히 자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 유치한 것과 고상한 것의 경계를 만드는지, 무엇이 나를 이토록 집요하게 묶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알을 깨면 넓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위해 누군가 밖에서 부리로 껍질을 쪼아준다면 쉽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 텐데,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사심을 버리면 의외로 모든 것이 간단해져요.""사심? 이기심 말인가요?""집착이나, 명예, 개인적인 욕심, 뭐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거죠."전병헌의 말이 바늘처럼 심장을 꼭 찔렀다. 내가 글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전병헌의 논리에 따르면 순전히 사심이었다. 명예,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이러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무리에 끼워다오, 사랑해다오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런 욕망을 빼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욕망은 일정부분 삶의 원동력이지 않은가.

2007-07-3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감자탕과 소주를 마신 후, 밥을 먹기 전에 나는 얼핏 벽을 쳐다봤다. 오래된 벽시계는 사은품으로 받아 걸어놓은 거였다. 둥근 숫자판 아래쪽에 식별할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나쁘지 않은 내 눈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오래 되어서 퇴색했거나, 주량을 넘게 마셔버린 술 탓이었다. 시계 바늘은 여섯 시를 지나 일곱 시를 향하고 있었다. 시계가 정확하다면 일어설 시각이었다. 별일이 없으면 남편은 여덟 시 전에 집에 도착했다.지금 출발한다 해도 남편이 집에 도착할 시간에 대어 가자면 빠듯했다. 버스로 전철역까지 간후, 전철을 타고 내려서, 집까지 십 여분 남짓 걸어야 했다. 기다란 초침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들리지 않던 초침 도는 소리가 천둥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남편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없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반갑게 맞아주지 않아도, 말다툼을 한 후 입을 한자나 내밀고 있어도 내가 현관문을 열어주기를 바랐다.나는 잠시 망설였다. 일어날까? 지금 출발해야 남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벽시계를 올려보았다.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일어나는 대신 나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일곱 시가 지나 있었다. 고물인 시계가 혹여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주인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시계 맞아요?"주인 여자는 주방에서 소리 질렀다."한 이십분 늦게 가요."주인 여자의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경계선에 서서 넘을까말까 고민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일어설 마음이 없었는지 모른다. 일상으로 들어가는 성 앞에서 성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는 심정. 금을 넘어버리면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다. 비에 조금 젖었을 때는 온통 몸이 꿉꿉하고 불쾌하지만 물에 빠져 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집은 일상이 되어버려 지루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 산 아래의 낡은 술집은 새로운 장소였다. 집보다 허름했고 삐걱거렸고 불편했지만 신선했고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곳에서 나는 틀에 박힌 내가 아닌 다른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내가 해보지 못한 역할, 무의식에 눌려있던 또 다른 배역을 연기할 수 있었다. 아내가 아닌, 한 집안의 딸이나 며느리가 아닌 나, 막 사랑에 빠지려는 여자, 한 남자의 열정을 끌어내 판타지를 만들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닌 여자. 작은 주막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등장인물이라야 모두 해서 둘밖에 없으니 말이다. 주인 여자는 스스로 배경을 자처했다. 그러니 저요 저요 하며 손을 힘껏 치올리지 않아도 좋았다. 내 속에서 뱀처럼 머리를 쳐드는 존재에 나는 거의 경이로울 지경이었다."음악가는 연주가 끝나면 완강하고 분명한 침묵 속에 빠진대요. 그것은 울고 싶은 욕구의 극치라고 파스칼 키냐르가 말했어요. 선생님도 작품이 끝나면 그런 기분이 드나요?" 전병헌은 대답을 하는 대신 도로 물었다."선영씨는?" 다른 때 같았으면 나는 애매한 웃음으로 얼버무릴 질문이었다. 미서를 제외하면 나를 드러내 보여주고 싶은 상대는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내성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소통의 문제였다. 특별히 마음을 터놓고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남에게 문을 닫아버린 것이. 결혼. 바둑판처럼 정확하게 그려진 제도 속에 나를 밀어 넣은 후? 왜 다른 사람이 모두 잘 해내는 삶이 내게는 이렇게 힘에 부치는 것일까. 남편을 특별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남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나의 삶을, 생존의 조건을 남편에게 깊이 기대고 있는 것이다.

2007-07-3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산을 벗어나자 포장된 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에 음식점이 나란히 있었다. 막걸리와 부침개 도토리묵이나 다양한 두부요리가 있다고 삐뚤삐뚤한 글씨가 써진 간판이 비에 젖어 있었다. 전병헌은 파전이나 닭도리탕 집을 지나쳐 허름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간판도 붙어있지 않은 식당은 비어있었다.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문가에 섰다. 주인이 안보이니 아마도 다른 집을 찾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병헌은 서너 개의 탁자가 놓인 홀로 들어가, 네다섯 명이 앉으면 꽉 차버릴 만큼 작은 방 앞에 섰다. 방이랄 것도 없었다. 문도 없었고, 홀보다 바닥만 약간 높여 비닐 장판을 깔아놓은 곳이었다. 전병헌은 등에서 배낭을 내려 홀 바닥에 놓은 후 문지방도 없는 방에 걸터앉아 등산화를 벗었다. "오랜만이네." 누군가 뒤에서 반갑게 말을 걸었다. 중년의 여자가 내 등을 밀었다. "들어가요. 아이구 흠뻑 젖었네. 이 비를 맞고 산에 갔나보다."전병헌은 주인 여자를 보고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주인여자에게 밀려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물기도 좀 닦고 한 잔 하고 갑시다."전병헌은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말했다. 그제야 나는 온몸에서 물이 배나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신발을 벗어 바닥에 엎어놓았다. 방바닥에 비닐 장판이 깔려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전병헌과 마주 앉았는데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앉은 자리 주변에 물이 고였다. 나는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줄줄 흐르는 물을 닦아냈지만 별 소용없었다. 수건이라 해봤자 땀이 나면 닦으려고 가져간 손수건 보다 약간 큰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속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은 터라 바지의 물기를 제거하는 것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주인여자가 키가 낮은 넓은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블루스타위에 가져온 냄비를 얹고 불을 켰다. 주인여자는 냄비를 감싸고 온 수건을 나와 전병헌에게 건네주었다. 행주가 아니라 커다란 수건인 것을 보아 뜨거운 냄비를 감싸려고 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에게 갖다 주려고 들고 온 모양이었다. "그 동안 왜 그렇게 안 왔어? 요즘은 통 산에 안다니나 보네." "예에, 집에 좀 내려가 있었어요.""왜 요즘은 일이 통 없어?""뭐, 그런 건 아니고, 왔다 갔다 해요."전병헌과 주인여자는 오래 전부터 알아 온 모양이었다. 그들의 말로 미루어 전병헌은 서울에 있는 사무실과 지방 어딘가에 있는 집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주인여자는 주방과 방을 오가며 소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챙겨 내왔다. 블루스타 위에서 감자탕이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올라왔다. 냄비뚜껑을 열자 굵직한 감자알사이로 토막 난 돼지 뼈가 익고 있었다. 한기가 느껴졌고 끊임없이 몸이 떨렸다. 젖어있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체온이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불 앞에 앉아있어서인지 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온기가 퍼지자 종일 비를 맞아 지친 몸이 확연히 느껴졌다. 어쨌거나 죽을 뻔했던 것이다.경황이 없어 깨닫지 못한 스트레스가 몸 구석구석에 잠복해 있었다. 술잔을 집으며 손등을 보았더니 푸릇푸릇했다. 얼굴도 손등의 색깔과 비슷했나 보았다. 전병헌이 내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뜨거운 국물과 함께 쭉 들이켜요. 지치고 체온이 내려갔을 땐 술이 도움이 돼요."

2007-07-2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절벽을 오를 때 바위틈에 손을 집어넣고 주먹을 쥔 것처럼 나는 주먹을 움켜잡았다. 손을 펴버리면 금방 줄은 벗겨질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전병헌을 쳐다보았다. 그를 에워싸고 도는 물살이 높았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잠시 후면 어찌해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덮칠 것이다. 황톳물이 소용돌이쳤다. 전병헌이 희망을 걸고 있는 나무는, 너무 멀었다. 물길은, 가늠할 수 없었다. 선택해야했다. 몸을 던질 것인지, 손을 펴버릴 것인지 결정해야했다. 전병헌의 우의가 부풀어 풍선처럼 물 위로 떠올랐다. 밧줄을 손에서 놔버리면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까. 짧은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거친 탁류가 소용돌이치는 어지러운 물길, 위태롭게 떠있던 비닐 우의 자락. 물 밖으로 걸어 나가, 용케 살아간다면 많은 날들을 나는 무엇을 떠올리며 지낼까? 물 위로 내리꽂히는 비와 전병헌의 얼굴,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할지 모른다. 물 밖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 내 삶은 엉망이 될 것이다.계곡을 메우며 소용돌이치던 물소리가 일순 침묵했다. 비를 맞으며 떨고 있던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밧줄을 놓아버리고 싶은 것은 단지 공포 때문이었다. 직시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허깨비 같은 감정. 나는 주먹을 굳게 쥐고 물속으로 한발 들어섰다. 두려움으로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물속에 서 있는 먼 나무를 향해 몸을 던졌다. 순간 온 몸이 불꽃으로 타오르는 듯 했다. 내 몸뚱이는 빠르게 물살에 떠내려갔다. 그것은 인생을 관통하는 시간만큼이나 쏜살같았다.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무를 그러잡았고 전병헌은 줄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몇 번이나 물에 휩쓸리고, 물속으로 나동그라졌다. 나무를 부둥켜안고 그가 물과 싸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물가에 다다랐을 때 전병헌은 몹시 지친 듯 했다. 개울가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잡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물 속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숨을 죽인 채 나는 전병헌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바라보았다. 몸을 추스른 전병헌이 줄을 당겼다. 나는 몇 번이나 물속으로 나뒹굴었고 그때마다 숨이 막혀 캑캑거렸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어 머릿속이 하얗게 비곤 했다. 물먹은 배낭과 무릎을 덮고 있는 우의가 물귀신처럼 나를 잡고 늘어졌다. 마침내 전병헌은 내 손목을 틀어잡았다. 빠지지 않는 대못을 잡아 빼기라도 하듯 안간힘을 쓰며 나를 끌어올렸다. 물을 잔뜩 머금은 몸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써서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자마자 전병헌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나도 그의 옆에 풀썩 쓰러졌다. 하늘을 쳐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입으로 코로 비가 들어왔다. 바닥을 더듬어 전병헌의 손을 찾았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잡은 손이 조금 따뜻해졌을 때 우리는 동시에 몸을 세웠다. 전병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끌어안았다. 전병헌의 입술이 내 입술에 뺨에 코에 머리칼에 와 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입맞춤을 하다가 낄낄거리며 웃다가 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내 본 적도 없는 맑고 순수한 웃음소리가 먼 곳에서 날아오는 듯 했다. 전병헌과 함께 공유한 경험, 완벽한 동질감. 살아있어서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전병헌의 뺨을 감쌌다. 그의 얼굴 위로 내 얼굴을 포갰다. 마주 댄 차가운 뺨 위로 뜨거운 한 줄기 빗물이 지나갔다. 나는 어디서 길을 잃은 것일까? 그도 나처럼 어디에선가 길을 잃은 것인가? 나는 전병헌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때 나는 끊어진 길 앞에서 헛되이 서성거리고 있는 나의 환영을 보았다. 전병헌이 내 등 뒤로 손을 넣어 배낭을 내려주었다.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산을 가리고 있던 비구름이 바람에 천천히 밀려나고 있었다.

2007-07-2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병헌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자 입을 벌린 배낭 속으로 빗줄기가 들어갔다. 전병헌이 배낭을 뒤지는 동안 나는 우산을 펼쳐 들었다. 배낭에서 꺼낸 것은 밧줄이었다. 빠듯하게 건너편 물가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밧줄의 한 쪽 끝을 개울가에 서 있는 큰 나무 허리에 묶었다. 전병헌은 나머지 한 쪽 끝으로 자신의 허리를 묶었다. 그가 우의를 벗고 물에 들어갔으면 싶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비닐우의가 물이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는데 방해가 될게 분명했다. 압력 때문에 움직이기가 몇 배나 힘들 것이다. 우의를 벗으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장대같은 비를 맞으며 길을 뚫으라 하기가 미안했다. 허리에 줄을 매고 있으니 별 일은 없을 터이다. 전병헌은 천천히 물속을 더듬으며 걸어갔다. 중간쯤에서 물살이 세졌지만 밧줄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밧줄이 조금 짧은 듯했다. 세찬 물살은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며 반대편 가장자리의 흙을 깎고 있었다. 그곳은 갑자기 깊어지면서 물살도 거칠었다. 전병헌은 머리 위쪽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로 팔을 뻗었다. 나뭇가지에 철봉처럼 매달려 건너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줄이 짧아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순간적으로 위로 솟구쳐 나무 가지를 움켜잡았을 때 나는 나무허리에 맨 밧줄의 매듭을 풀었다. 전병헌은 가지를 움켜잡고 물을 박차며 몸을 앞으로 굴렸다. 나는 재빨리 밧줄을 내 오른쪽 손목에 묶고 그가 앞으로 갈 수 있게 물속으로 한 발 들어갔다. 나뭇가지가 무게에 못 이겨 아래로 휘어지자 전병헌의 몸이 급류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는 재차 위로 솟구치려고 반동을 시도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못했다. 예상대로 우의 때문에 물의 압력이 컸고 휘어진 나뭇가지는 물살에 떠밀리는 몸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나뭇가지가 우두둑 부러지고 있었다. 전병헌이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당겨." 나는 줄을 당겼다. 밧줄은 꿈쩍도 않았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손목에 묶은 줄을 잡아당겼다. 나를 쳐다보던 전병헌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밧줄이 나무에서 풀려 내 손목에 묶인 것을 본 것이었다. 그와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전병헌의 눈빛이 마치 내 정수리를 내리치는 칼날 같았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두발로 버티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나뭇가지가 완전히 부러지자 전병헌은 물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매복해있던 게릴라처럼,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처럼, 급류는 가장 폭이 좁은 계곡의 가장자리의 흙을 파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다. 물은 전병헌을 내놓지 않았다.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가 떨어지고 그가 급류에 휩쓸렸다. 두 발로 버티고 있던 나는 맥없이 물속으로 끌려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당황해할 여유도 없었다. 머리부터 물속에 처박혀 몇 바퀴 돌았다. 물속은 수면과 또 다른 물길이 있었다. 등과 엉덩이가 얼얼했다. 목과 코 속으로 물이 넘어와, 숨이 막혔고, 미간에 정을 박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몰려왔다. 손에 걸리는 물체를 정신없이 움켜잡았다. 머리를 들고 보니 전병헌은 훨씬 아래쪽에 있었다. 그도 나도 물속에 숨어있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몸이 걸려있었다. 전병헌은 개울 중간에서 급류를 안고 있는데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손목에 힘이 느껴졌다. 그가 급류에 떠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몇 분, 아니 몇 초가 될지도 몰랐다. 물에 쓸리면 순식간이니까. 전병헌은 물속에 엎드려 고개만 내민 채 손을 들어올렸다. 전병헌이 가리킨 곳에 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다. 몸을 날려 나무에 밧줄이 걸리도록 하라는 신호 같았다. 내 손목과 그의 허리를 연결하고 있는 밧줄이 나무에 걸린다면 물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몸을 던져 밧줄을 걸기에 나무는 너무 바깥쪽에 있었다. 물살에 휩쓸려 중간으로 떠밀려 갈 수도 있었다. 나무의 위치로 봐서는 밧줄이 걸리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손목에서 줄을 풀어버리면 지금이라도 나는 나갈 수 있었다.

2007-07-2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등에 멘 배낭이 완충작용을 한 것 같았다. 넘어질 때 땅에 부딪친 팔꿈치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 했다. "지금은 괜찮지만 내일은 퍽 아플 겁니다."전병헌은 약국에 들러 차가운 파스를 사서 아픈 곳에 붙이라고 알려주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이나 샤워를 하지 말고, 반드시 차가운 물로 샤워하라고 당부했다.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 보니 계곡이 싯누런 물로 넘실댔다. 전병헌과 나는 우뚝 서 버렸다. 물을 건너야 산을 벗어날수 있었다. 불어난 개울은 폭이 4~5는 족히 넘어 보였고, 거센 물살이 보기에도 아찔했다. 물가에는 허리까지 잠긴 나무들이 급류에 휘둘리고 있었다. 밑동이 뽑힌 나무가 느리게 계곡 아래쪽으로 떠밀려가나 싶더니 세찬 물살에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산 흙을 씻어 흘러내린 탁한 계곡 물은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이 없을 때의 계곡바닥은 크고 작은 바위투성이 였을 것이다. 전병헌은 기다란 나무 가지를 주워왔다. 나무를 지팡이 삼아 물속에 찔러 넣은 후 살얼음 밟듯 조심스럽게 자신의 발을 옮겼다. 천천히 두 발짝을 뗄 때까지 물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그만 들어가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다. 전병헌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넘어져서 중심을 잃으면 그대로 물에 쓸려 버릴 것이다. 전병헌은 질린 얼굴로 돌아섰다. 물살은 제각각이었다. 바깥쪽은 흐름이 느리지만 바위가 모여 있는 중간은 장정 하나쯤은 지푸라기같이 가볍게 실어가 버릴 정도로 세찼다. 물속으로 내동댕이쳐지면 바위에 부딪쳐 팔이나 다리 또는 허리를 다칠 정도였다. 계곡에서 급류에 쓸려 사고를 당하는 것은 대부분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먼저 정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전병헌의 팔을 움켜잡았다. "돌아가요. 차라리, 오던 길로 도로 가요."전병헌은 계곡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누런 물은 비스듬히 산언저리를 감고 돌았다. "조금 내려가면 다리가 있어요. 그 쪽도 건널 수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너무 염려마세요. 해병대에서 생환훈련을 받을 때는 이보다 더 극한 상황도 해냈어요."전병헌과 나는 물가를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하류는 점점 폭이 넓어졌고 계곡언저리를 따라 나있는 길까지 물이 차 있었다. 다리가 있다는 하류 쪽도 물에 잠겼다. 계곡은 동쪽 부분의 산 전체를 휘감고 흐르기 때문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끝나는 곳으로 되돌아 왔다. 그나마 이곳이 폭이 좁은 편이었다. 전병헌과 나는 말없이 급류를 바라보았다. 우당탕거리며 달려가는 거친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가득했지만 아직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늦여름 네 시 무렵이다. 전병헌과 나는 둘 다 휴대전화가 없었다. 구조대에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난감했다. 돌아간다면 절벽을 거꾸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전병헌은 고개를 저었다. 올라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젖은 바위를 내려가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특히 초보자인 내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숨넘어갈 듯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불어난 개울은 커다란 강처럼 감당할 수 없이 넓거나, 깊지는 않았다. 잘하면 둘이 힘을 합쳐 건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병헌은 돌을 던져보고 기다란 나무지팡이를 넣어보고, 얕아 보이는 곳에 들어가서 물살을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서 너 발짝 이상 안쪽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가 또 다시 물속에서 휘청거렸다. 나는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제발 나와요. 그러다 큰일 나겠어요."

2007-07-2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숲길로 들어섰다. 나무를 상대로 검술 연습이라도 한 듯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이 어지러웠다. 굵은 나무 가지가 부러져 길 위에 나뒹구는 것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전병헌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길 밖으로 툭툭 차내면서 걸었다."새가 둥지를 튼 나무는 강풍에도 안전하다죠. 본능적으로 바람에 견디는 나무를 안답니다." 그 여자를 생각하며 나는 무슨 꽃일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꽃은 무슨,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둥지를 틀어도 괜찮은지를 알 수 있다면 최소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은 없겠네요." "사람이 떠나는 이유도 그런 것일까요?" 전병헌에게서 나온 말은 다소 의외였다. 그에게 인생은 이미 속내를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그에게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일까. 비는 끈질기게 내렸다. 머리 위 공중의 대기가 죄다 빗소리로 바뀐 것 같았다. 산소나 질소 같은 공기 대신 소리로 가득 찬 공간. 바람과 미세한 물방울이 몰려다녔고, 산골짜기에서는 여전히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아내는 돌아 올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그의 아내는 몇 해 전,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고 했다."둥지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나 봐요." 그는 아내를 만나기 전에 수많은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하룻밤으로 끝난 여자, 몇 년을 지루하게 끌어 온 여자, 아내와 결혼을 하고서도 이따금 만나던 여자도 있었다고 했다. 전병헌에 관한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툭툭 던지는 말로 짐작하던 터였다. 전병헌은 자신의 신상에 관해 숨기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든 농담처럼 희화화 시켰고, 그의 이야기는 마치 소설이나 책에 발표된 수기의 한 부분처럼 들렸다. 개인의 특별한 사생활이 전병헌의 입을 통하면 보편적인 사실로 들렸다. 사소한 일화의 의미와 성격이 심리학의 이론처럼 논리 정연하게 정리되었다. 전병헌의 과거를 띄엄띄엄 들으면 결핍, 혹은 컴플렉스란 단어가 떠올랐다. 방황과 일탈은 그가 해결하지 못한 사소한 부분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현재 전병헌은 어떤 단계일까? 아내와 불화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갈등의 국면에 처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 해보면 풀지 못할 갈등이나 고뇌는 없어보였다. 생각하고 있는 것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일까. 곁에서 본 전병헌은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했고, 무서울 정도로 깊었다. 측량할 수 없는 양 극단이 전병헌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았다.다리가 풀린 탓인지 발밑에 뭔가를 밟았다고 느끼는 찰나, 나는 길 위에 사정없이 나가 떨어졌다. 몸의 중심이 바닥 전체로 흩어졌다. 나는 힘을 빼고 누워버렸다. 얼굴과 목덜미와 손과 팔위로 비가 떨어졌다. 긴장했던 근육들이 풀려나갔다. 넘어지면 일어설 수 없는 지점에서 쓰러진 마라톤 선수처럼 몸이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병헌이 놀라 얼른 나를 끌어안았다. 눈을 뜰 기운도 없었다. 나는 전병헌에게 몸을 맡긴 채 한 잠 자고 싶었다. 지쳐있는 지금은 누구의 품이라도 상관없었다. 사람의 몸보다 더 오묘한 게 세상에는 없을 것 같았다. 내 어깨를 받치고 있는 그의 두 팔, 적당한 압력으로 전해지는 가슴의 온도와 몸의 촉감, 인간에게서만 느껴지는 탄력과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사람은 이런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전병헌은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양팔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나무 뿌리를 조심하라는 말을 못했네요. 얼음보다 더 미끄럽거든요. 어디 다친 곳 없어요?"나는 눈을 뜨기 싫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렇게 넘어지는 거라면 뭐 얼마든지 괜찮아요."

2007-07-2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어느 겨울 날.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떠서 시계를 보았더니 한 시였어요. 그걸 새벽이라 해야 할지 한밤중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 여자였어요. 남편을 깨워 전화를 바꿔주었지요. 잠에 취해 수화기를 거꾸로 받아들었던 남편의 목소리가 갑자기 바뀐 것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작업이었다. 여직 나는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 털어 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미서에게조차 농담처럼 지나가는 투로 몇 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전병헌에게 나는 당시에 일어난 사건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일어난 일이 내 감정이나 정서에 미친 파장을 말해주고 있었다.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사태만을 진술하는 일, 거리두기, 이런 것들이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나는 전혀 객관적이지도 거리를 유지하지도 못했다. 강을 건너고 한나절도 더 걸어왔는데 업은 여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으니 부부가 함께 나오라는 거였어요. 그러니 전혀 의심할 게 없었죠. 그 여자가 일본에 온지 5년째인데 함박눈이 무릎까지 오는 일은 처음이라는 거예요."나는 일어나 덧창을 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마련해 준 외국인 전용 기숙사 겸 아파트 삼층에 살았다. 아파트 주변에 에워싼 오래 된 삼나무 숲 뒤쪽으로, 멀리 대학 건물들의 지붕이 눈을 인 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평소에는 어둠 속에 울창한 숲의 윤곽만 보일뿐이었다. 인구 5만 정도의 작은 도시는 시내 중심가를 빼고는 밤이 되면 먹물을 엎은 듯 깜깜해졌다. 산촌에 해가 지면 금방 어둠이 내리듯, 대학 근처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 같았다. 그런데 창밖을 내다보는 내 눈에 비친 풍경은 보름달이 비치는 들판 같았다. 아파트 마당 한쪽 곁에 자전거를 세워놓는 주륜장이 있었다. 주륜장 옆에 공중전화 부스가 놓여있었는데 여자는 전화 부스 앞에서 이쪽을 올려보며 서 있었다. 희끄무레 반사되는 눈 속에 서 있던 여자가 창에 나타난 나를 보자 양 팔을 치켜들고 우승한 마라톤 선수처럼 흔들었다. 여자는 눈밭에 서 있는 한 마리 야생의 짐승 같았다.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은 탄력이 넘쳤다. 다만 두 팔을 흔들 뿐이었는데 말이다. "여자의 집은 자전거를 타고 십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어요. 그 눈 속에 걸어서 그곳까지 왔더라고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얼마나 걸어왔을까요? 한밤중에. 무엇 때문에? 누구를 보려고요?"남편이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면서 나는 도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잠도 오고 몸이 피곤하니 그냥 자겠다고 말했다. 잠시 후, 이불을 뒤집어 쓴 내 귀에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모로 누워 새우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허벅지를 가슴에 껴안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여자의 활기 찬 몸짓과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여자와 남편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꼬투리는 없었다. 오랜 이국생활로 외로워진 여자는 나를 언니처럼 따랐다.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나를 위해 외곽에 있는 신사까지 걸어가 주기도 했다. 신사에 들어가면 두 손을 모으고 손뼉을 두 번 짝짝 치고, 허리를 반쯤 구부려 절을 하며 소원을 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국제 교류관에서 외국인을 위한 어학 강좌가 있는 것을 알려준 것도 그 여자였다. 바닷가 마을, 가마쿠라에 동양최대의 철불 상을 본 것도, 요코하마의 인형 박물관에 간 것도 모두 여자와 함께였다. 여자는 웃는 모습이 미서와 흡사했다. 언젠가 나는 그런 글을 쓴 엽서를 미서에게 보냈다. 이렇게 먼 곳에서 마치 너와 함께 지내는 것 같다. 미서 네가 연둣빛 잎사귀라면 그 여자는 빨간 색 꽃이야. 이슬을 송송 매달고 막 벌어지는 아침 꽃봉오리.

2007-07-2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암자를 나섰다. 그 사이 하늘은 더욱 낮게 내려와 있었다. 동굴처럼 아늑한 암자에서 쉬는 동안 바깥쪽 능선에는 바람이 심하게 분 것 같았다. 길에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떨어진 나뭇잎 투성이었다. 주등산로가 아니라면 길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바람에 떠밀린 비가 얼굴을 후려쳤고, 우의는 펄럭 소리를 내며 가랑이에 달라붙었다. 두 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옛날 절터에 도착할 수 있다고 전병헌이 말했다."산악부였어요?"바람 때문에 나는 약간 큰 소리로 물었다. "오래 전에 암벽에서 친구를 잃은 적이 있어요.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한 동안 산 근처에도 안 갔어요. 아니, 못 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군."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려 비옷에 달린 모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전병헌의 말투는 평온했다. 아픔이나 슬픔이 곰삭아 투명하게 마음이 비쳤다. 고통이 승화되어 한으로 바뀐다면 저런 어투가 될까?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바닥에 깔린 슬픔의 깊이가 느껴졌다. "친한 친구였나 봐요.""결혼을 앞두고 있었어요. 좋은 녀석이었어요." 나는 얼른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옛날이야기 입니다. 전설이죠."전병헌은 전혀 심각하지 않게 말을 돌렸다. 의외였다. 한 사람의 인생에 들어있는 고통의 깊이를 안다는 것은. 지금도 그 일이 전병헌에게는 아픔으로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시간이 쓸어가 버리지 않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사랑하던 사람의 형상은 희미해지고 살아남은 사람은 또 다른 세상에 편입되어 살아가게 마련이다. 남편과 보낸 일본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일종의 자기기만이었을까. 전병헌의 오래 전 이야기를 듣자 대뜸 회의가 생겼다. 숨도 쉴 수 없게 고통스럽던 일이 한 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겨지다니. 그렇게도 무겁던 일이 이렇게 쉽게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니. 역시 모든 존재는 한없이 가벼운 것일까? 남편이 회사의 지원으로 입학한 대학은 일본의 오래된 작은 도시에 있었다. 작은 마을의 한 복판에 있는 학교는 백년도 넘은 역사를 갖고 있었고, 주변의 모든 것, 나무와 집, 상점과 길거리 돌 하나까지 모두 그만큼의 시간을 견뎌온 것들이었다. 그 속에 그 여자가 들어있었다. "남편은 그때 마치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같았어요. 마흔을 바라보는 남편에게 그 시절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가슴으로 받은 것 같았을 거예요."나는 아직도 그때의 남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서비스 업종에 근무하는 사람이 그렇듯, 남편은 넥타이를 매고, 양복 색깔과 같은 구두와 양말을 착용했다. 아침 일 곱 시에 집을 나서 여의도의 증권가에 있는 회사까지의 출근이 십년 동안 이어졌다. 강변도로를 달려갔다가, 같은 길을 거슬러 오는 일의 반복. 좌우로 움직이는 진자추처럼 남편은 일정한 속도로 한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끊임없이 오갔다. "비행기를 타고 이륙할 때는, 우주선을 타고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광활한 우주를 날아가는 심정이었어요. 다른 별에서 새 인생을 살아간다는 기대로 부풀었죠. 결혼 한 후 처음 남편에게 유대감을 느꼈어요. 일종의 동지애 같았어요." 석사과정에 들어 간 남편은 뒤늦게 알게 된 학문의 즐거움에 푹 빠져버렸다. 학문의 즐거움이란 말을 나는 다소 냉소적인 투로 발음했다. 석사 과정에 들어간 남편에게 대학은 연구실을 배정해 주었다. 연구실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구조였다. 그 여자의 연구실과 남편의 연구실은 문만 열면 상대를 빤히 볼 수 있는 위치였다.

2007-07-1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글은 사는 만큼 나오는 거니까요."전병헌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대학 때 한 선생님은 그것을 문상(文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쓴 글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만약 자신의 글이 보인다면 이미 그 글을 쓰기 전보다 한 단계 올라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 글이 현재의 내게 보일 리 없다.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은 항상 미래였다. 작가들이 다른 사람의 분석이나 작품 평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을 터이다.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것, 그것은 예술을 하는 사람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내 글이 어떤 모양인지 궁금하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된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귀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현재시간,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순간의 삶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거나 알 수 없다. 깨달음은 늘 한 템포 뒤에,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궁금하거나 깨달아야 할 일이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그뿐이다. 내 삶에 생성되는 것은 없었다. 비눗방울 터지듯 뭔가가 터뜨려지는 일이 없었다. 글을 쓰고자 애쓰는 것은 무력하게 주저 앉아버린 삶을 위장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내게는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생겨나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눈으로 사물을 건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전병헌의 눈에 그것이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절묘하게 위장한 내가 아슬아슬하게 남을 속이며 넘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을까. 나 자신 조차 때로는 깜박 속아 넘어가는 나날.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일,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전병헌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 지를.삶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한이 생기겠는가?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과 미움은 붙어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 무미한 사람은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미움은 다른 형태의 사랑인 것이다. 나는 한이 생길 만큼 사는 일에 열정을 쏟은 적이 없었다. 밤새워 원고를 쓰고, 일을 마무리하려고 애를 쓴 것은 가짜인 나를 위해 한 일이었다. 생명력이 없는 가짜 김선영, 남이 만들어 놓은 그림 속에 들어가 서 있는 나, 네 기분은 어떠냐고, 다른 사람의 기분이 아니라 바로 나의 마음은 어떠하냐고 늘 묻던 미서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제 글이 뭔가 부족하지요? 중요한 게 몇 % 쯤 빠진 것 같죠?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병헌은 글을 쓰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고 여길 것 같았다. 제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고 말할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을 공중으로 내밀었다. 처마 끝에서 낙숫물이 손바닥위로 떨어졌다. 둥글게 모은 손바닥에 금방 가득 빗물이 고여 넘쳤다. 내 삶에도 이렇게 가득 고여 흘러넘칠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건, 열정이건, 광기든 무엇이든 관계없었다. 나를 춤추게 만들고, 울리고, 진정으로 나 자신을 위해 분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내 삶은 돌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몸 어느 부분을 가로막은 마개를 뽑고 싶었다. 탄산수처럼 생명력이 벌어진 틈으로 부글대며 용암처럼 끓어올랐으면 했다. "출발할까요?"전병헌이 일어났다. 나는 열린 문틈으로 암자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의 산신 곁에 호랑이가 누워있다. 암자를 나서기 전에 나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깊이 고개 숙여 허리를 굽혔다. 사랑하게 해주세요.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2007-07-1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규칙적으로 풍경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마치 어린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뒤척이는 몸짓같이 느껴졌다. 커피까지 다 마시자 더이상 할 일이 없었다. 빈 암자의 처마 아래 나란히 앉아 비 오는 산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 정도로 암자는 고요했다. "암벽 전문가라고요?"내 말에 전병헌이 겸연쩍은듯 웃음을 흘렸다. "전문가까지는 아니고, 너무 겁낼까봐 안심시키느라 큰 소리 좀 쳤어요.""거의 스파이더맨 수준이던걸요."전병헌은 싫지않은 표정으로 소리 내 웃었다. "대학 다닐때 산악부에 들어가 미친듯이 바위에 매달려 살았어요. 다 옛날 얘기죠. 요즘은 한 달 내내 산에 못갈 때도 있어요." "일 때문에요?"나는 자연스럽게 일로 화제를 돌렸다.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다. 객관적으로 내 글을 진단받고 싶었다. 미서나 이형수나 김상우, 강민기나 정신희까지 모두 왔더라면 더 좋았을테지만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여러 명이 모이면 서로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는 회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내게는 전병헌이 일당백이나 다름 없었다. 내 글은 만화로 그려지기 위해 쓰는 거였다. 만화가 되지 않으면 내 글의 존재이유는 없었다.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라디오 방송의 대본처럼 나는 만화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 콘티, 작업하기에 힘들지 않았어요?"에둘러 콘티에 대해 언급했다. 전병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비 쏟아지는 소리 때문에 혹시 내 말을 못들었나 생각했다. 두 번 언급하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물어본 사실을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없었다. 나도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서편제 봤어요?"뜬금없이 서편제라니. 무엇을 말하고 싶은건지 알 수 없었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니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서편제라면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 때마다 돌리는 영화다. 소리꾼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이복 남매, 남동생은 집을 뛰쳐나가 대처로 가고, 누이는 아버지 밑에서 소리를 배운다.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는 죽고, 눈이 먼 누이는 소리를 하며 이리저리 떠돈다. 그런 누이를 수소문하던 동생은 시골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누이를 만난다. 서로 누군지 밝히지 않고 동생은 밤새도록 북으로 장단을 치고, 누이는 소리를 한다. 새벽이 오고 날이 밝자 동생은 떠나고 얼마 후, 동생이 누이를 다시 찾았을 때 누이는 떠나고 없다. 몇 번이나 본 영화라 줄거리를 꿰고 있다. "목소리에 한이 없다며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하는 거 기억나요?""한약에 부자를 넣어 달여서 서서히 딸의 눈이 안보이게 되죠.""목소리에 한을 실으려고 눈을 안보이게 하는 걸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네요."나는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술을 위해 삶을 부수는 것,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겨우 이십 대 중반이었던 것이다. 삶은 빛나는 보석 같은 것이고, 부술게 아니라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 전병헌이 내게 묻는다. 아마도 예술에 드리우는 그늘 같은 걸 말하려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늘이나 한이 없는 예술이 공감을 얻기란 어렵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문학 이론에 관한 이론서를 한 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게 그것을 왜 물어보는 것일까?

2007-07-1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능선을 따라 십 여분을 걸었다. 산 귀퉁이 우묵한 곳에서 갑자기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아낙이 빗속에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치성을 드리러 암자를 찾은 모양이었다. 지긋한 나이에 비를 뚫고 치성을 드리러 올만큼 절박한 사연이 궁금했다. 아낙에게는 비에 젖은 등산객 한 쌍이 오히려 처량해 보이는 눈치였다. 낡은 우산을 들고 암자를 나선 아낙은 마치 길이 그곳에서 끊긴 듯 갑자기 사라졌다. 암자는 물이나 구름 위에 떠있는 조각배 같았다. 제방이 터진 듯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발아래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바위에 부딪치고, 합쳐지면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물이 폭포처럼 세찬 소리를 내며 급하게 흘렀다. 비죽이 열린 문틈으로 치성단 위에 덩그러니 얹혀있는 쌀 봉지가 보였다.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비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요란한데 암자 주변은 되레 조용했다. 작은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끝에 위태롭게 얹혀있었다.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세상의 온갖 소란 속에서도 이 곳 만큼은 물속처럼 조용한 것을 알고 있었나 보았다. 험준한 산 속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한 점. 불현듯 두 손을 마주 잡고 깊이 고개 숙이고 싶었다. 간절한 맘으로 바라면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내가 바라고,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일을 갖는 것, 남에게 인정받는 것, 내 세계를 확보하는 것.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미진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행복해지는 것? 너무 막연했다. 손에 확실히 잡히는 무엇,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비가 들이치지 않는 처마 밑에 자리 잡으며 전병헌이 말했다. 나는 우의를 벗어 양손으로 잡고 물기를 털었다. 점령군처럼 밀고 들어 온 생각을 몰아내듯 세차게 흔들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제대로 쉬지도 않고 걸은 탓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보온병을 꺼내 밥에다 뜨거운 물을 부었다. 후식으로 한입 크기로 썰어 온 과일까지 먹고 나자 몸이 떨렸다. 마른 수건을 꺼내 젖은 바지를 닦아냈다. 온몸이 젖어 있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바지의 물기를 닦아내는 것만으로 다소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빗물이 스며 든 등산화가 질벅거렸다. 신발 끈을 풀어 젖은 양말을 벗고 수건으로 발가락 사이를 꼼꼼히 닦았다. 전병헌은 내가 벗어놓은 양말을 주워들더니 비틀어 짰다. 양말에서 주르르 물이 떨어졌다. "어차피 또 젖을 텐데요."나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바위에 오르기 전에 그가 등산화의 끈을 묶어 준 게 생각났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호의를 받아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가 힘껏 짜준 젖은 양말을 받아들었다. 그의 손톱이 짧게 잘라져 있었고, 속눈썹이 검고 길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와 한 발짝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아 있는 그의 몸에서는 오래 된 나무 냄새가 맡아졌다. "산에서 커피를 탈 때는 봉지의 찢어진 한 쪽 끝으로 저으면 돼요."나는 보온병에 남은 물을 컵에 붓고 커피믹스봉지로 물을 저었다. 과연 막대형 커피믹스 봉지가 물속에서 구부러지지 않고 빳빳해졌다. 찢어진 봉지 틈으로 물이 들어가면서 공기를 밀어 올렸다. 밀려 올라가 압축된 공기가 커피믹스 봉지를 단단하게 고정시켜 휘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전병헌은 절반을 마신 커피를 내게 건네주었다. 전병헌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입술을 대고 남은 커피를 넘겼다. 밥을 먹고 따뜻한 커피까지 들어가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비에 이리저리 떠밀려 맑은 소리를 냈다. 산짐승이나 뱀 같은 것들이 접근하지 말라고 풍경을 단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인간의 귀에는 청량하게 들리는 소리가 산에 사는 생명들에게는 위험 혹은 금기의 소리인 모양이다.

2007-07-1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갈라진 바위틈에 손을 밀어 넣은 다음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먹을 쥔 손이 좁은 바위틈에 걸려 빠져나오지 않았다. 손등에 바위가 맞물려도 아프지 않았다. 손이 빠져버리면 바위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전병헌은 나를 그곳에서 잠시 버티고 있으라고 한 후, 거미처럼 손과 발을 움직여 바위를 타고 올랐다. 머리 바로 위가 바위의 끝이었다. 두어 발짝만 더 오르면 되는 곳이었는데 아래쪽에 비해 경사가 급했다. 전병헌은 잠깐 사이에 바위에 올라섰다. 잠시 후 전병헌은 끝에 둥근 매듭을 만든 줄을 내려주었다. "손목을 밧줄 매듭에 넣고 당겨요."그가 시키는 대로 왼손을 넣고 줄을 당겼다. 밧줄은 손목을 조이며 감겼다. "당길 테니 바위에서 손을 뺀 후, 올라와요."그가 시키는 대로 나는 손목에 잠긴 줄을 잡고 바위틈에 넣고 몸을 지탱하던 손을 뺀 후, 반동을 이용해 몸을 위로 올렸다. 순간 몸이 아래로 주룩 미끄러졌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가 재빨리 내 손목을 낚아채 끌어올렸다. 밭에서 무 뽑히듯 내 몸이 공중으로 쑤욱 올라갔다. 허리가 바위 정상에 걸렸다. 안간힘을 써 바위 위로 올랐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편편한 곳까지 나는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 사이 전병헌은 밧줄을 풀어 감더니 배낭에 집어넣었다. 온몸에 진이 다 빠진 듯 맥이 풀렸다. 나는 잠시 땅바닥에 뺨을 대고 엎어져 눈을 감았다. 몸뚱이가 마치 쏟아진 묽은 죽처럼 바닥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사지를 헤매다 안전한 곳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검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있고, 어둠에 둘러싸인 구름위에 몸이 떠 있는 것 같았다. 중력이 없는 진공 속 같았다. 긴장의 끈이 스르르 풀려나갔다.땅에 붙이고 있는 귓가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자잘한 물방울이 수없이 튀어 올랐다. 눈을 떴다. 전병헌은 바위에 앉아 멀리 아래를 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켰다. 비안개와 구름 때문에 먼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올라온 절벽 아래는 볼 수 있었다. 이 절벽을 기어올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몸을 추슬러 절벽 끝으로 조금 다가갔다. 올라올 때 느꼈던 극심한 공포에 비하면 그다지 위험하게 보이지 않았다. 안전한 장소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탓인지 몰랐다."어때요. 올라 온 바위를 보니 뿌듯하죠."전병헌의 말을 듣자 머릿속에서 작은 전구가 켜져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해냈다는 기분, 난생처음 무언가 극복했다는 느낌. 바닥에서 한 단계 올라선 것 같은 성취감. 내게 앞으로 어려움이 닥친다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병헌의 말에 금방 맞장구치기 싫었다. 무언가 고양된 느낌과 함께 공포에 질려 두려워하던 내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겁에 질려 바닥을 드러낸 나를 전병헌은 보았다. 적나라한 나의 본질, 나약하고 겁에 질린 나를 날 것으로 보여준 것이 창피했다. 비명을 지르고, 울먹이고, 소리 질러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공황에 빠져버린 내 자신. 화가 났다. 침착하지 못한 내가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이 정도 바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처음이니까 무섭지, 아마 다음에 한 번 더 오면 우습게 보일 겁니다."전병헌은 빙긋 웃었다. 아직도 내가 겁에 질려있는 줄 알고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 같았다. 전병헌의 표정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경험이 없는 나는 혼비백산했지만 전병헌은 처음부터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무엇에 대해서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미리 경험을 해 본 사람과 경험이 없는 사람, 프로와 아마추어,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7-07-1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그는 내 신발을 내려 보더니 무릎을 꿇었다. 말릴 사이도 없이 내 등산화에 손을 댔다. 백화점에서 구두를 살 때, 남자 점원이 구두를 신겨주듯 그는 내 신발 끈을 야무지게 졸라매주었다. 그 순간 와글거리며 아우성치던 그에 대한 서운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도저히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단 한순간에 마음이 이렇게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뒤따라가면서 봐 줄 테니 겁내지 말고 올라요. 암벽전문가니까 나를 믿어요."나는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내 몸은 내가 지켜야한다고 시퍼렇게 불타던 전의는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꺼져버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바위가 살아있어서 그다지 미끄럽지 않아요. 내려가는 건 위험하지만 올라가는 거니까 할 수 있어요."나는 절벽의 약간 튀어나온 부분을 손으로 움켜잡으며 발을 바위에 붙였다. 울퉁불퉁한 바위는 모두가 손잡이였고 발판이었다. 일단 바위에 붙고 보니 길이 있었다. 바위를 움켜잡은 팔과 다리가 경련이라도 일 듯 저려왔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이었다. 머리를 뒤로 젖혀 위쪽에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이 있나 우선 살펴야 했다. 땅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높이까지는 그다지 떨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굴러 떨어져도 엉덩이나 좀 깨지고 말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중간지점을 지나 몸이 점점 바닥에서 멀어지자 높이에 비례하여 공포가 머릿속을 점령해왔다. 위쪽으로 고개를 들어 왼손이 잡을 만한 돌출된 곳이 있나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바위를 잡고 있는 손이, 밤톨만큼 튀어나온 바위를 발끝으로 밟으며 버티고 있는 발이 와들와들 떨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으로 입으로 비가 마구 떨어져 내렸다. 꼭대기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 보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나는 파랗게 질린 채 절벽 중간에 매미처럼 붙어있었다. 두려움 때문에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왼 손을 위로 올려. 왼손."내 바로 아래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왼 손? 나는 멍하니 내 손을 올려보았다. 어느 쪽이 왼 손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 그가 뭐라고 또 소리 질렀다. 나는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알 수 없는 한 손을 일단 위로 올렸다. 프로그램이 내장 된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인 손안에 무언가 잡혔다. 그는 내 왼쪽 발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또 기계처럼 바위표면을 긁으며 발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어느 지점인가에서 바위의 거친 결들이 물결처럼 겹쳐져 포개진 부분에 발끝이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빗물이 눈으로 입으로 마구 흘러들었다. 나는 오른 손을 더듬어 다시 위로 올리는 중이었다. 손가락 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빗물 때문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바위를 더듬어도 잡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손으로 잡는 대신 발로 밟고 몸을 올리려고 나는 딛고 있는 바위에서 오른쪽 발을 떼고 발끝의 감각으로 바위를 더듬었다. 전병헌이 허둥대는 오른발을 잡아 안전한 곳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버럭 소리 질렀다."몸의 세 곳은 항상 바위에 붙어있어야 해. 반드시 지탱할 곳을 확보한 후 움직이라고."그는 숫제 반말이었다. 듣는 나도 아무런 저항감이 들지 않았다. 만약 내가 바위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바로 내 뒤에서 바싹 따라오는 전병헌도 무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둘이 세트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려 깨지거나 부러질 것이다. 전병헌은 한 순간은 발밑에서 발을 받쳐주었고, 또 다른 순간은 내 곁에 따라오면서 손을 끌어 당겨 바위를 잡을 수 있게 도왔다. 손에 잡히는 게 없는 곳에서는 갈라진 바위틈으로 손을 펴고 밀어 넣게 했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움켜잡으라고 명령했다. 숫제 명령이었다.

2007-07-1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5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정상까지 가는 길은 가팔랐다. 몸처럼 마음도 식어버린 탓이었는지 처음보다 힘이 덜 들었다. 심장은 몇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감정들이 차지했다. 자기 연민과 씁쓸한 고통과 허무한 낙담 같은 게 바닥에 자리 잡았다. 그보다 좀 위쪽에는 날 선 오기와 갑옷처럼 단단하게 무장한 자기보호 장치 같은 게 버티고 있었다.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빗길을 걷게 만든 원동력은 아마도 오기였을 것이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전병헌의 뒤를 따라갔다. 물론 거친 숨을 수도 없이 몰아쉬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주저 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나를 쥐어박았다.어리광부리지 마라. 그는 너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다. 손톱만치도 그에게 기대려는 마음을 내지 마라. 우스꽝스러워질 게다. 사람의 행동 밑에 존재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내 나이가 되면 누구나 알게 된다. 인간은 늘 배신을 당하고 배신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게 인간이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먼저 김칫국을 마신 것이 너무 창피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위안을 할 필요가 있었다. 가파르게 오르기만 하던 길이 서서히 무뎌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산 정상에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만약 이형수였다면 나는 어쩌면 웃으면서 말했을지 모른다. "도저히 못가. 업고 가든지, 목에 줄을 매고 끌고 가든지 맘대로 해."어쩌면 그의 팔을 잡고 스스로 부축당하면서 걸었을지도 모른다. 왜 전병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일까. 이형수 앞에 있을 때나 전병헌의 앞에 설 때나 모두 똑같이 내 자신인데. 힘의 역학관계 같은 것일까. 전병헌에게서 나는 어떤 힘을 느끼기에 이런 식의 행동을 하는 것인가.걷기에 힘이 부칠 때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고, 걸을만 하니 곧 바로 머릿속이 벌집 쑤신 것처럼 변했다. 결론도 나지 않는 의문들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산행이 끝났으면 하고 바랐다. 바람이 부는 것을 보니 정상에 가까운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두텁게 낀 안개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산 봉우리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라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않았겠지만 초보자가 아니더라도 길을 잃을 정도였다. 도리 없이 전병헌의 뒤를 바싹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잠시 쉬었다가 갑시다."전병헌이 멈춘 곳은 절벽 아래였다. 동굴처럼 뚫린 바위 밑에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배낭을 끌렀다. 겨우 초콜릿 하나를 먹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전병헌은 일어났다. 그가 웬만한 건물 높이의 바위 앞으로 내 등을 밀어 몰아붙였을 때 나는 어이가 없었다."여기? 이리로 오른다고요?"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이 바위를 끼고 돌아가서 산중턱으로 내려갔다가 도로 올라와야 해요. 비가 와서 중간에 길이 무너졌을지도 모르고요."나는 절벽을 칩떠보았다. 맙소사 이게 무슨 짓이야. 온통 비에 젖은 바위를 오른다고. 지금 이사람, 제정신인가? 나는 처음으로 전병헌의 눈을 똑바로 보고 유심히 살폈다. "높아 보여도 오르면 금방이에요. 바위가 살아있어서 거칠고, 올라가는 거니까 조금만 조심하면 크게 무리는 안돼요.""돌아가면 안 될까요? 한 번도 바위를 타본 적이 없거든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대한 모든 믿음을 다 버린 후였기 때문에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2007-07-1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5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나는 길가에 버티고 서 있는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대고 섰다. 느린 동작으로 배낭을 등에서 벗겼다. 배낭에 달린 옆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 천천히 마개를 돌리고 슬로비디오가 돌아가는 템포로 물을 마셨다. 사실 그다지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마치 땅이 꺼지듯 마음속에서 무언가 쑥 가라앉아 버렸다.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었다. 잘 돌아가던 시계바늘이 어긋난 톱니바퀴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사고 작용이 중단되었다. 쓸데없는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느꼈지만 생각뿐이었다. 길을 걷다가 넘어졌는데 엄마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지 않는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세살 때 뒤뚱거리며 뜀박질을 시작한 아이에게 혼자 힘으로 일어나라고 요구 받았을 때처럼 슬펐다. 힘들지 않나요? 천천히 걸을까요? 그에게서 그런 말을 기대했다. 단지 힘들거나 천천히 걷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전병헌이 내게 기울이고 있는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새벽의 키스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으면 싶었다. 말하기가 쑥스러우면 비틀거릴 때 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전병헌은 서 너 발짝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수많은 나뭇잎들 위로 잘디잔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안개와 무성한 나무들로 뒤덮인 산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했다. 바람이 한꺼번에 불어오는 것 같기도 했고, 파도가 떠밀려 해안으로 줄달음질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마치 소리로 만들어진 커튼이 온 산에 드리워진 것 같았다. 이따금 잎이 무성한 나무가 머금고 있던 빗물을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발아래서 연기처럼 실안개가 피어올랐다. 나무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늘에 잿빛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명랑한 척 하고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도로 마개를 닫은 물병을 꺼낼 때보다 더 느린 동작으로 배낭 옆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전병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글을 보고 정나미가 떨어졌을까. 정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사업하는 사람은 돈을 버는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가수의 노래를 들어보고 평가하듯이, 그는 내 글을 보고 나를 규정했는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전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내 글을 보고 나를 평가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코 글이 아니다. 그러니 설혹 내가 작품을 좀 못쓰더라도 그런 식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진흙구덩이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막 빠져 나왔을 때 나를 본 사람이 넌 왜 이렇게 지저분한 인간이냐고 단정하고 가버리는 것과 같았다. 머릿속으로 근거도 없는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지나갔다. 전병헌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키스는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여자를 업고 강을 건네 준 고승에게, 나는 강을 건너고 한 나절이나 더 걸어간 다음에, 어째 스님의 몸으로 여자를 업어 강을 건네줄 수가 있단 말이오? 라고 묻는 새파란 어린 중 같았다. 전병헌에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버려진 아기처럼 원초적인 고통이 밀려와 갑자기 모든 것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내가 뭘 어쨌기에, 하는 생각이 들었다."자, 출발합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약간 어이없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전병헌의 무심한 태도에 의기소침해진 건 사실이었다. 이어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까지 미쳤다가 급기야는 그런 내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으니까. 나는 말없이 배낭을 추슬러 메고 전병헌의 뒤를 따랐다.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편집증적인 증세 같기도 했으니까. 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전병헌에게 반감이 생겼다. 너 도대체 뭐냐?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은 뾰족한 오기로 변해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피할 사이도 없이 나는 화살을 맞고 말았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2007-07-1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5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비닐 우의를 입은 등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데다 습도까지 높아 흐르는 땀이 증발할 곳이 없었다. 게다가 비옷의 목 부분으로 비가 스며들어 비인지 땀인지 분간을 못할 지경이다. 주변을 둘러 볼 여유나 비가 내리는 낭만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비에 젖은 바짓 자락이 다리에 휘감겼다. 전병헌은 마치 날아가는 듯 보였다. 전문 산악인인가 싶을 정도로 날렵하게 걸었다. 나는 전병헌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천천히 가요. 너무 빨라요."그제야 전병헌은 멈춰 서서 뒤돌아보더니 산길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잠시 쉬어가요."전병헌이 발걸음을 뗄까봐 나는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천지가 비에 젖어 흥건했다. 머리 위에 드리운 나뭇가지에 달린 잎들은 빗물을 머금고 축 늘어졌다. 앉아서 쉴만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발아래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안개를 뚫고 들려왔다. 무슨 상 받을 일이 있다고 전력으로 산길을 질주한단 말인가. 천천히 걸으면서 이야기도 주고받고, 산 속에 핀 야생화도 살펴보고, 산허리를 감고 도는 구름도 쳐다보면서 걸으면 얼마나 좋은가. 스며든 물기에 온몸이 소리 없이 젖어 들었다. 이쯤에서 그만 내려갔으면 싶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호젓하게 산길을 걷겠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전병헌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조금만 가면 암자가 있으니 그곳에서 점심도 먹고 잠시 쉬어갑시다.""얼마나 가야하는데요?"돌아가자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만 올라가면 돼요. 거기가 정상이고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이라 별로 힘들지 않아요."한 시간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혼자서라도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나는 전병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전병헌의 목 언저리, 얼굴을 비껴 지나 뒤쪽에 비를 맞고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 다 젖어버린 그의 등산화. 이 사람이 비 오는 새벽 내게 키스를 하던 사람이 맞나 의심이 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다지 말짱한 표정일수가 있는지 의아했다. 그가 나타났을 나는 내 안에서 뭔가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었다. 중력에서 약간 벗어난 듯 마음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걱정이 되어 부랴부랴 뛰어온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전신에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기뻤다. 그런데 빗속을 걷는 한 시간 동안 그는 뒤돌아보거나 힘들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군대를 인솔하는 장교처럼 거침없이 전진만 했다. 그가 내게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되던 마음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 뭐야. 아침 인사로 키스 한 것에 내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건가. 어이없었다. 유학파인 김상우라면 몰라도 전병헌이 서구에서 살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아침인사로 진한 키스를 했단 말인가. 전병헌에게 내가 김춘수의 꽃처럼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고 착각했던 것이 화가 났다. 깊은 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 전병헌을 떠올리면, 그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마치 영혼과 영혼이 연결되어있는 것 같아 근사했다. 다른 세계로 날아간 것처럼 신선하기도 했다. 전병헌과 나는 서로 닮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친밀감은 아마도 터무니없는 상상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모든 게 망상이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2007-07-09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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