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

 

숨쉬지 마세요<3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그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감일에 맞춰 원고를 넘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정수리에 못을 박는 것 같은 통증과 가슴을 통째 들어내는 것 같은 격렬한 기침이 반복되었다. 세상의 모든 병이 그렇듯 감기 또한 앓을 만큼 앓아야했다.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픔을 느끼는 감각신경을 기절시켜야 했다. 감기약을 먹으면 두통이나 기침의 진원지인 머리와 가슴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을 포함한 몸뚱이가 죄다 마비되었다. 정상적인한 몸은 팔 다리가, 몸의 각 부분이 따로 놀지 않았다. 마감일을 넘기자 정신희가 전화를 했다. "인체에 대한 원고는 상당히 좋았어요. 감수를 본 선생님께서도 손 볼 것이 전혀 없다고 하셨구요.""늦어서 미안해요. 우주는 마무리하는 대로 곧 보낼게요.""출간 예정일이 워낙 빠듯해요. 몸도 아프신데 독촉하려니 죄송스럽네요."지난 번 원고는 벌써 감수까지 끝난 모양이었다. 내가 쓰는 우주에 관한 원고만 남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전병헌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친다면 오월말 출간 예정이던 책은 유월 중순이나 되어야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벌었지만 다급해졌다. 내일은 시누이가 떠나는 날이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웠지만 남편은 몹시 서운한 모양이었다. 공항까지 배웅을 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관에서 시누이를 배웅했으면 싶었다. 시누이의 짐은 올 때보다 배로 늘었다. 시누이로서는 다른 곳에서 지내면서 나를 최대한 배려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란 낙인을 찍힐 수는 없지 않은가. 나로서는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밤을 새며 미친듯이 원고를 썼다. 그런 것이 남의 눈에는 견딜만한 상태로 보일 것이다. 최소한 배웅을 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기를 쓰며 하는 일이라도 사람들은 다 할만하니까 하는 것 아니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노트북의 자판에서 손을 떼면 그대로 고꾸라졌다. 삼십분이나 한 시간 쯤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죽은 듯 누워있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통증과 기침이 몰려오면 약봉지를 찢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진통제와 해열제를 집어 물과 함께 삼켰다. 기침을 멎게하는 약은 잠이 해일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골라냈다. 밤새도록 골방에서 열에 들떠, 쿨럭대며 원고에 매달렸다. 방문을 닫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남편은 나의 몸부림을 알지 못했다. 심한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공항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든가, 배웅을 마치고 무사히 귀가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시누이는 내게 약간의 돈을 남기고 떠났다. 시누이가 남겨놓은 돈 봉투를 쥐고 나는 잠시 망연했다. 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오누이를 잠시나마 갈라놓은 장본인,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것조차 못마땅해 하는 소인배. 이따위 돈 봉투 같은 건 남기지 말고 떠났으면 좋았을 것을. 작은 봉투가 나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뭐야, 너의 푸대접을 모르는 척하고 나는 너에게 감사를 보낸다. 부디 양심의 가책을 받길 바란다. 네가 얼마나 옹졸한 인간인지 반성하고 또 반성해라. 너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깊은 인간성을 가진 내가 준 돈의 액수만큼이라도. 물론 시누이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옹졸한 내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남의 호의를 순수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내가 징그러웠다. 이 세상에 감사치레 같은 건 없어지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던가.

2007-06-1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3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걱정이 되어 하는 말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긴 창이 심장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약봉지를 찢어 알약을 꺼내주었다. 순간 울컥 눈물이 솟았다. 물과 함께 약을 삼키다 사레가 들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했다. 눈물과 콧물이 쉴 새 없이 나왔고, 휴지로 눈물을 닦고, 소리 내어 코를 풀었다.인간의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하늘과 맞닿은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산악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간은 내던져진 상황에 적응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누웠다가 책상에 앉았다가 또 어떤 때는 벽에 기대어서 원고를 써나갔다. 깨질 것처럼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죽은 듯 방바닥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감기약을 먹으면 잠이 쏟아졌기 때문에 진통제만 삼켰다. 마약성분이 들어있는지 진통제를 삼키면 두 시간 정도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눈알이 튀어 나올 것 같았지만 감아버릴 수는 없었다. 너무 힘들어 차라리 포기해 버릴까도 생각했다. 나는 몇 번이나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못쓰겠어요. 도저히. 죽을 만큼 아프거든요.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신희? 선배? 그리고 전병헌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나는 전화기 곁에 두 팔과 다리를 벌린 채 드러누워 버렸다. 내 쉬는 숨결이 언 손이라도 녹일 만큼 뜨겁다. 인생은 시련이다. 지금 포기해버린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영영 오지 않을지 모른다. 모든 불운이 내게로 몰려든 것 같다. 눈을 감았다. 다른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보들레르가 말했던가? 지금이 아닌 다른 어떤 무엇. 확연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처럼 살 수 있는가? 단연코 아니었다. 전병헌의 말처럼 소중한 게 빠져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 인생. 그걸 알고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숨을 쉬고, 남편과 섹스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직업이나 결혼, 심지어 사랑까지도. 번번이 내게 다른 선택, 말하자면 후회하고 싶은 길로 나를 들어서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이었다. 힘들면 주저앉아버렸다. 두려우면 눈을 감고 외면했고, 도망을 가거나 피해갔다. 내게 닥친 상황에 정면으로 맞부딪쳐 싸운 적이 없었다. 싸우게 되면 다른 사람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잃는 게 나았다. 하지만 지금 도망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다.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에게 신뢰를 잃을 것이고, 또 길을 잃을지 모른다. 몸을 일으켰다. 진통제가 든 약봉지를 열었다. 죽기밖에 더 할까. 용기에 들어간 발효식품처럼 죽었다 깨나면 익어있을 것이다. 지금 내 몸, 소금에 절여 그릇에 눌러 담아두었다고 생각하자. 좋은 향기를 내는 균이 번식할 때까지 죽었다 깨어나자고 결심했다. 무엇보다 내게 큰 힘이 된 것은 비오는 새벽,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키스였다. 전병헌은 나를 바꾸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어쨌든 그는 내게 눈길을 주었고, 비로소 나는 내가 된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의 수많은 관계 속에 내가 극히 작은 일부분을 차지해도 상관없었다. 첫눈에 반하는 나이는 지나버렸다. 그를 통해 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랑 못지않은 일이다. 한 번의 입맞춤으로 끝나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내게 엄청난 에너지를 주었던 것이다. 끝나도 좋다는 생각은 반대로 무엇을 욕망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무의식의 세계를 내가 어떻게 알 것인가.

2007-06-0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3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남편에 대해 떳떳하지 못한 것은 죄의식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믿고 있는 남편의 믿음을 깨고 싶지 않은 때문이었다. 두려움도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불신과 고통과 절망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변화란 어쨌든 불편한 것이다. 계약을 파기한 자 재앙이 있으리. 일부일처제의 교훈이다. 가장 큰 재앙은 남편과 나 사이에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함께 사는 한 사랑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공기와도 같아 느끼지 못하는게 정상이다. 그런 사랑이 진실하다는 미신까지 갖고 있다. 그것이 미신임을 안다 해도 혼자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 안방으로 가 남편 곁에 나란히 누울 용기는 차마 없었다. 얇은 담요를 들고 건넌방으로 갔다. 한쪽 자락을 깔고 나머지 한 자락으로 몸을 덮고 누웠다. 몸이 지구 중심을 향해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간밤에 내게 일어난 일들이 한 바탕 꿈속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비로소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 같았다.꿈속에서 가파르게 경사진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나는 겁에 질린채 그 길로 들어섰다. 가지 않으려고 두 발로 버텼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은 내리막을 향해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발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길을 갔다. '꿈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꿈을 꾸었다.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편은 운동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정오가 가까웠다. 몸을 일으키자 몹시 어지러웠다. 열이 나서 목이 말랐고 손도 뜨거웠다. 도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원고를 써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단거리 경주의 스타트 라인에 선 것처럼 초조해졌다. 조금만 누워있으면 열이 내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자 머리는 더욱 지끈거렸다. 일어나 타이레놀을 찾아 두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누워서 눈을 감자 눈물이 양 쪽 눈 꼬리로 흘러 내렸다. 감정과는 상관이 없는 순전히 생리적으로 나오는 눈물이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자 갑자기 슬퍼졌다. 슬퍼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눈물이 흐르자 슬퍼졌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감정은 몸에 대한 반응으로 생기는건가. 감정이 몸의 상태를 이끄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정말 슬퍼서 눈물이 나지 않을까.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눈에 티가 들어가, 양파를 썰다가, 뭐 그런 식으로 눈물을 흘린 적은 있었다. 그러나 슬퍼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슬퍼서 눈물이 난다는 표현을 수도 없이 하며 살았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다고 착각을 했던 것일까.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눈물이 흐르니 정말 조금 슬퍼졌다.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감기 몸살 증세였다. 편도선이 먼저 부어오르고, 그 다음은 기관지와 좀 더 내버려 두면 폐로 염증이 퍼지는 순서였다. 기관지와 폐에 염증이 생기면 지독한 기침이 나를 망가트릴 게 뻔했다. 폐를 앓은 적이 있는 내게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이마에 물수건이 놓여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고개를 움직였다.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뼈 대신 고무나 지렁이 같은 것으로 바꿔 끼워놓은 것 같았다. 몸은 젤라틴처럼 바닥에 퍼져 눌어붙은 기분이었다. 남편이 물 컵과 약봉지를 들고 왔다. "어젯밤에 뭘 했기에 이 모양이야?"

2007-06-0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3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잠시 동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칼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열쇠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물이 흐르는 구두를 벗고 쳐다보니 남편이 거실에 앉아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남편은 소파에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베란다를 통해 새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남편의 형체를 간신히 드러내주었다. 현관 앞에 멈춰 서서 훅, 숨을 들이켰다. 미동도 않고 앉아있는 남편의 모습에 놀란 것만은 아니었다. 어젯밤부터 바로 이 시각까지 남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완벽하게 혼자서 존재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나 자신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올랐고, 누군가 나를 향해 돌팔매질을 시작한 것처럼 두려워졌다. 잔인하다고 소문이 무성한 적에게 사로잡힌 포로처럼 두 다리가 떨렸다. 비를 맞은 탓만은 아니었다. 남편이 벌떡 일어나 거실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렸다. 베이지색 인조 가죽 소파와 29인치 구형 텔레비전과 소형 오디오세트, 벽에 걸어놓은 클림트의 황금빛 가득한 그림, 키스의 복사판 액자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양심의 빛 속으로 걸어들어온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깨에 가방을 멘 채 엉거주춤 서서 남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 몸이 비에 흠뻑 젖지 않았더라면 선배를 향해 누웠던 지난 밤, 새벽의 입맞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 표정을 가려주었다. 어색한 몸짓은 젖은 남방과 청바지가 막아주었다. 떨고 있는 다리는 비를 맞은 탓으로 생각할 만큼 완벽했다. 사는 것은 연극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소품과 장치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나는 어설프나마 연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어젯밤 미서의 집에서 묵은 게 사실이 되어버렸다. 미서와 함께 보낸 시간은 당당하게 펼쳐졌다. 내 연기는 차츰 자신감을 찾았고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는 짐짓 여유까지 생겼다. "밤새 기다렸어? 미안해. 미서가 하도 붙잡아서 그냥 올 수 없었어."나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다지 감동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누나는 제주도에서 머물겠대. 미국에 갈 때까지 거기 있을 거래."남편의 목소리는 매끄러운 쇳조각처럼 차가웠다. 표정 또한 단단히 닫혀 있었다. 냉정한 관객과 서툰 배우사이에 존재하는 어색한 기류가 남편과 나를 에워쌌다. 남편은 예정보다 일찍, 혼자서 돌아온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전혀 감정 이입이 되지 않은 연극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관객 같았다. 무대의 불이 꺼졌고, 연기는 거기까지였다.나는 등 뒤로 조용히 화장실 문을 닫았다. 옷도 벗지 않고 샤워기부터 틀었다. 세찬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욕실 바닥을 때렸다. 머리꼭대기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죄를 씻어 내리듯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쏟아진 찬물을 뒤집어쓴 몸이 부르르 떨었다. 쇠창살로 된 네모난 우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쇠 우리의 사방에는 커다란 글자가 매달려 있었다. 욕망, 죄, 불안, 그리고 추방. 나는 샴푸용기를 눌러 짜낸 샴푸 액을 머리에 대고 문질렀다. 삶에서 과연 죄나 악이 있기나 한가? 만약 있다면 누가 그것을 심판하는지 알 수 있는가. 문지르는 손가락 사이로 거품이 일어났다. 나 말고 누가 나를 판단하고 벌 줄 수 있는가. 남편이? 쏟아지는 물줄기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거품이 섞인 비눗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하수구 구멍으로 쓸려 들어갔다.

2007-06-0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3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비오는 거리를 두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땅속으로 내려가기는 싫었다. 버스는 주황색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달렸다. 왼쪽으로 강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비를 받으며 흘렀다. 갑자기 전병헌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그가 입은 옷을, 그가 한 말들을, 그의 음성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아무것도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안개비처럼 흐릿하고 막연한 형체만 떠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그에게 닿았던 입술의 감촉만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가만히 입술을 만져보았다. 그곳에서 감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온기나 젤리나 아이스크림을 핥듯 부드럽게 움직이던 느낌은 사라진 후였다. 등을 버스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의 시간이 십년이나 지난 것 같았다. 하루를 십년처럼 산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일까. 버스 창을 통해 떨어지는 빗줄기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커튼처럼 보였다.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가는 차를 보면서 움찔 놀랐다.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전병헌을 생각하느라 선배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가슴 한 구석에 아릿한 통증이 피어났다. 선배와는 늘 이렇게 엇갈리고 마는 것 같았다. 어젯밤 잠든 척하고 선배의 팔뚝이라도 쓰다듬어 볼 것을, 느닷없이 키스도 하는데, 까짓 가슴이나 배에 손 좀 얹는다고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내가 정말 바라고 원하는 것은 언제나 나를 지나갔다. 용기가 없어서, 혹은 상황이 틀어져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체념하는 것은 일종의 피해의식이었다. 내게 닥친 상황에 나는 너무 쉽게 순응했다. 거절하는 것보다 차라리 수용하는 편이 편했다. 전병헌만 해도 그랬다. 나는 그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약간만 고개를 틀었다면 아마도 그는 내 의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쩌면 선택의 기회를 내게 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목에서 머리꼭대기까지 막대기로 고정해 놓은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유의지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게는 자유가 아니 의지가 있기는 한가, 의심스럽다. 선배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처럼 따끔거린다. 그러자 선배의 모습이 선명하게 버스 유리창에 새겨진다. 눈 속에 무언가 가득 차오른다. 눈 뒤쪽이 뜨거워진다. 눈을 끔벅거렸다.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이게 뭐지 도대체.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 대체 무엇 때문이지. 다시는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붉은 장미도, 시원스레 솟아 춤추듯 떨어져 내리는 분수도, 막 잎이 돋는 연둣빛 나뭇잎도 볼 수 없고, 거울처럼 잔잔한 연못가에 다시는 앉아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심정이 이랬을까. 가슴이 짓눌려 고통스러웠을까.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를 가로질러 걸었다. 머리위로 어깨위로 비가 떨어져 내렸다. 제법 굵은 빗줄기라 머리칼과 남방을 입은 어깨가 금방 젖었다. 손등으로 이마의 물기를 문질렀다. 샤워를 하고 우선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밤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무언가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전병헌이 손을 잡을 때 뿌리치지 않은 것은 내 콘티에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의식한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파트 입구에서 우뚝 서 버렸다. 그때 내 의식에 그런 계산이 깔려 있었는지 돌이켜보았다. 그를 거절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그가 내게 키스를 한 것은 무어란 말인가. 내가 그렇듯 그도 나의 본질이나 알갱이 때문이 아니라 외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한 시간도 더 흐른 후, 비로소 전병헌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명석하게 정리되지 않는 수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2007-06-0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3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이것은 입맞춤이라 이름 붙은 키스구나. 그런데 왜 이 사람과 키스를 하는 거지? 내 머릿속을 지나간 것은 의문부호였다. 그의 손을 뿌리치거나 얼굴을 거칠게 돌려버릴 수 없었다. 전병헌의 키스는 잠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의례적으로 치르는 것과는 달랐다. 아침인사처럼 산뜻하고 자연스러웠다. 어색한 몸짓으로 거부한다면 내게 다른 욕망이나 있지 않나하고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 바로 앞에는 전병헌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을 감으려 시도해보았지만 누군가 눈꺼풀에 핀을 꽂아 이마에 고정해놓은 것 같았다. 태어나 생전 처음 남자와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아, 이런 식의 입맞춤도 있구나. 보송보송한 양말을 신은 것 같은 느낌. 육체적 접촉에는 수많은 느낌이 파생할 수도 있겠구나. 음식의 맛처럼 사람은 제각기 자신의 신체적 특징과 개성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사물은 제각각 내 뿜는 아우라가 다르다. 같은 나무라도 계절에 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추종하는 관습과 도덕이 깃발처럼 마음속에서 펄럭거리기 때문일까. 남편과의 입맞춤은 늘 축축했다. 질퍽한 땅에 발이 빠진 것 같았다. 그런 무신경한 입맞춤조차도 잠자리에 들기 전 아주 잠깐 건성으로 끝내는 게 전부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는 예의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제도를 등에 업은 안정된 결혼 생활은 차츰 그런 예의조차도 무시하게 만들었다. 키스는 유쾌하거나 감미롭지 않았다. 낭만적인 키스는 클림트의 그림이나 영화 속에나 존재했다. 현실은 늘 너무 건조하거나 축축했다. 낭만과 사랑은 연출이나 연극이었고, 실제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런 생각들이 내 눈을 감지 못하게 했다. 내 시선은 전병헌의 얼굴을 비껴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로 향했다. 자세히 보니 비는 가는 끈처럼 이어진 게 아니었다. 방울방울 점으로 되어있었다. 허공에는 수많은 물방울이 어지러이 낙하하는데, 땅으로 내리 꽂힐 때는 기다란 바늘 같았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입을 여는 순간 밤새 내 입속에서 번식했을 세균과 박테리아가 기승을 떨게 분명했다. 이를 닦을 것을, 하고 후회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는 늘 이렇게 한 박자 늦었다. 세수를 했더라면 전병헌의 인사를, 관심을, 좀 더 정중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동도 트지 않은 비 내리는 새벽, 키스쯤 한다고 그런 걸 죄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면 이건 뭘까? 운명이라고도 낭만이라고도 이름 붙이기 어색한 상황은 대체 뭘까. 눈을 감지 못하고, 입은 열 수 없는 키스는 엘리베이터가 바닥에 닿는 것과 동시에 끝났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나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빈 택시가 몇 대 서 있었다. 전병헌은 내 손을 힘을 주어 꽉 잡더니 놓았다. "인생에 소중한 게 뭔지 알아요?"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고해성사하듯 중얼거린 후, 성큼 걸어가 빈 택시에 몸을 실었다. 나는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멍청하게 서 있었다. 소중한 것? 그게 뭐란 말인가. 그런 것을 왜 내게 말하는 거지? 이 꼭두새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마치 독백하듯 혼자 툭 내뱉는 말을 고해성사라 생각하는 내 정신 상태가 더 큰 문제지만. 그런데 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가슴이 뛰거나 정신이 아뜩해지거나, 하다못해 죄책감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아직도 술이 덜 깬 걸까. 나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몇 차례 두들겼다.

2007-06-0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3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마음만큼 무거운 몸을 끌고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여탕에서 간단히 샤워를 하는 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비탈을 구르는 눈사람처럼, 위축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실체도 잡히지 않는 죄의식을 부풀렸다. 미서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칼을 쓸어올려 빗은 후, 찜질 방을 나섰다. 복도에 엘리베이터가 서있었다.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의 벽면을 통해 시가지가 내려다보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엘리베이터 유리벽을 주룩주룩 흘렀다. 이른 새벽 거리를 달려가는 자동차에는 미등이 켜져 있었다.아아, 집에 들어가기 싫다. 바닷가나, 관목이 우거진 숲으로 난 작은 길을 걷고 싶었다. 지난밤이 꿈같이 떠올랐다. 술을 마시고, 허튼 소리를 한 기억밖에 없었지만 그 시간이 충만하게 생각되었다. 무언가 몸을 꽉 채운 느낌, 배부른 영혼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바깥세상이 덧없고 무의미하게 생각되었고, 지금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비가 오는 탓인지도 몰랐다. 빗속에서 피어나는 안개가 도심지의 모든 건물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모퉁이로 사라지는 길과 신호등, 인도의 설치물과 가로수와 비를 떨어뜨리는 하늘조차 비현실적일 만치 윤곽이 모호했다. 나는 지난밤의 달콤씁쓸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것이 내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황량한 대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흘낏 본 사람이 상념에 잠긴 것처럼 지난 시간을 곱씹었다. 지난밤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이렇게도 다르게 느껴지는 게 놀라웠다. 머릿속에 용암이 부글부글 끓었고 그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무엇이 만들어지든 상관없이 나는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광기와도 흡사했다. 내 속에서 똬리 틀고 있는 태풍의 전조.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세찬 바람이 불 것 같은 예감이었다.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망상을 털어버리기 위해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몇 층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상관이랴. 나는 비 내리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비를 뿌리는 먹장구름 뒤에는 찬란한 태양이 떠 있을 터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누군가 들어왔고 내 등 뒤에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유리벽에 이마를 댄 채 꼼짝 않고 서있었다. 봄비치고는 빗줄기가 굵다. 그런 생각을 했다."비가 많이 내리네요."전병헌이 내 곁에 서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간단히 샤워라도 하고 내려올 것을 하며 후회했다. 가능하면 얼굴을 마주보지 않으려고 바깥을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눈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전병헌이 나의 손을 잡았다. 그의 몸짓은 아침 인사라도 하듯 자연스러웠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을 준 것도 아니고 끌어당겨 잡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손에 가볍게 마주 댄 것 같았다고 할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머지 한 손을 마저 잡았다. 무심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동작과는 반대로 나는 당황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손을 잡은 것은? 아침인사? 친밀감의 표시? 그 어느 쪽에 표를 던지기가 애매했다. 나는 눈곱이 붙어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머리는 내 머리통 하나만큼이나 높은 곳에 있었다. 순식간도 아니고 찰나도 아니었다. 그가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가볍게 갖다 댄 것은.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을 만큼의 속도였다. 그는 내 양손을 마주잡은 채였고, 입술에 가하는 힘도 얼굴을 뒤로 약간만 움직이면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포옹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접촉하고 있는 곳은 양 손과 입술뿐이었다.

2007-05-3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초저녁부터 마신 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든 이쪽이다 말이 떨어지면 지친 기색으로 저항이나 의문 없이 우르르 몰려갔다. 도심에는 무엇이건 공중에 떠있었다. 찜질방은 지하에 있다고 막연히 생각한 것과 달리 우리가 들어간 찜질방은 고층 빌딩의 상층부에 있었고, 금요일이라 발 디딜 틈도 없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복잡했다. 실내의 후끈한 열기가 폐로 들어오는 순간 마신 술이 한꺼번에 올랐다. 찜질복으로 갈아입으면서 나는 비틀거렸다.미서나 정신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려고 할 의지마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유령처럼 어른거리며 내 앞과 뒤, 옆으로 그림자처럼 스쳐가는 사람들 속에서 선배를 찾았다. 비틀대는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선배의 곁으로 갔다. 선배 또한 맑은 정신은 아니었다. 선배는 시체처럼 널브러져 누워있는 사람들 곁의 작은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갔고 나는 껌처럼 붙어 선배를 따라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틈을 발견한 선배가 목침을 베고 벌렁 드러누웠다. 나는 새우처럼 구부려 선배를 향해 몸을 눕혔다. 공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슴 앞으로 모은 내 두 손은 선배의 가슴팍에 닿을 듯 가까웠다. 자는 척 시침떼고 선배의 배 위에 내 팔을 올려놓아도 자연스러울 터였다. 하지만 나는 두 팔에 잔뜩 힘을 주고 양 손을 기도하듯 마주잡았다. 선배의 곁에서 잠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랜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숨 막힐듯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딱딱한 마룻바닥도 이리저리 머리에 와 부딪치는 목침이나 코고는 소리, 수선거리는 소음이 선배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누워있는 내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텔레비전에 가끔 비치는 먼 나라의 난민 수용소같은 공간에 선배와 나 둘만 누워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까무룩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깨어있고 싶다는 의지는 무력했다. 오랜만에 나는 편안하고 행복하게 잠 속으로 미끄러졌다. 쏟아지는 잠이 내게는 평화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누군가 어깨를 흔들었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선영아,"퍼뜩 눈을 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깨에 손을 올려 나를 흔드는 손을 잡았다. 미서였다. "아침이야. 나가자."선배가 눈앞에 누워있었고, 전쟁포로처럼 사람들이 줄을 지어 빼곡히 누워있었다. 밤새 선배와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미서는 벌써 누워있는 사람을 피해 저만치 나가는 중이었다. 그제야 내가 어제 외박을 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거운 돌덩이가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것 같았다. 둔중한 무기로 가슴을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고, 뒤이어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처럼 현기증이 느껴졌다.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미서를 따라갔다. 두려움의 정체는 막연했다. 무엇때문에 두려운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고, 너무 늦은 시각이라 돌아가지 못한 것 뿐이었다. 객관적인 상황은 그것이 다였다. 누구에게 비난받을 일도 딱히 잘못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움츠러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림자처럼 집으로 들어가 시침을 떼면 아무 일도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고, 어제 밤 그토록 용감하게 뛰어 넘었던 경계가 아침이 되자 올려보지 못할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았다. 처음에는 부모가 정해준 통금시간이 있었고, 이후에는 남편에 의해 정해진 통금이 있었던 것일까. 누구도 입 밖으로 소리내어 귀가시간을 정한 적은 없었다. 딱히 정하지 않은 것은 알게 모르게 통념에 따르자는 약속이었을까. 처음에는 어머니의 성화로 시작한 이닦기가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스스로 이를 닦지 않으면 찜찜해 잠을 잘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2007-05-3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소외란 조직이나 어떤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는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적절히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내 삶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해질 무렵이 되면 우울증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도 남편의 2년간의 해외연수가 끝난 뒤 일본에서 귀국한 후부터일 것이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2년간 한꺼번에 밀어닥친 일들이 어쩌면 내게 죽음이나, 상실감, 죄나 슬픔 같은 우울증을 불러일으킬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이다. 어쩌면 사람도 김춘수 시의 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이름을 불러줄 때야 비로소 존재하는 게 아닌지. 누군가 자신을 봐준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받는 일일 것이다. 신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처럼, 어머니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는 아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절대자가 필요한 걸까.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한 후, 오년간의 병간호에도 못 견딜 정도로 힘들거나 어려운 구덩이에 빠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린 후 우울증에 빠졌다. 남편을 따라간 일본에서의 생활은 이불 밑으로 아니면 어릴 때 숨어들던 장롱 속으로 사라지고 싶던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누구의 관심도 눈길도 받지 못했던, 완벽하게 내가 사라졌던 2년이었다.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면 견디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공중에 떠 있는 유리성에 앉아 나는 과거를 회상한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벌써 3년도 더 지났다. 그런데도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끔찍한 기억일수록 빨리 잊혀진다는 이론은 엉터리인가. 아니면 별로 심각하지도 아프지도 않은 기억을 과장되게 엄살을 부리는 것일까. 둘 다 아니라면 나는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삭막한 심장, 메마른 삶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말이다. 더 이상 술이 취하지 않는다. 돌아보니 모두 조금씩 허물어져 있다. 금속판 위에 쪼개놓은 시간이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알코올은 온 몸에 골고루 엷게 퍼져있다. 술에 취하려면 머리나 가슴에 알코올이 집중적으로 고여야 했다. 취한다는 것은 양이 아니라 농도의 문제였다. 새벽 세시, 문을 닫을 시간이라는 종업원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뺨에 와 닿는 거리의 바람이 시원했다. 간간이 택시가 빠르게 달려갔다. 문을 닫은 가게 앞에 쓰레기봉투가 쌓여 있다.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거리는 비어있다. 시청 청소차가 돌아다녔다. 주홍색 야광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청소차의 꽁무니에 달려가다가 뛰어 내려 거리에 뒹구는 쓰레기봉투를 청소차에 던져 넣었다. 차도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심의 거리는 휑하다. 길은 사람이 아니고 무생물인데도 외로워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김상우와 이형수, 그리고 나는 분당 남양주 일산 등 시 외곽에 집이 있었다. 전철도 버스도 다 끊어졌고 택시를 타면 최소한 삼사만원은 줘야 했다. 미서가 선배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선영이 혼자 어떻게 택시 태워 보내요? 아침에 전철 다닐 때까지 찜질 방에서 눈 좀 붙이는 게 어때요?" 생각 같아서는 밤새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다니고 싶었다. 정신이 점점 초롱초롱해졌다. 잠을 잘 시간을 넘기면 그런 현상이 생겼다. 배가 고플 때와 마찬가지였다. 극한 상태를 넘으면 비정상적일 만치 몸이 가벼워졌다. 일종의 환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럴 때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경계에 발이 머무는 시간, 그 짧은 동안 나는 초능력을 발휘하는지도 모르겠다.

2007-05-2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본격적인 여행기라기보다는 인문학적인 쪽으로 접근해 줘요." 정신희는 그 와중에도 똑 부러지게 책의 성격을 요구했다. "일 얘기는 나중에 하지. 자 우선 한 잔 받고."선배는 정신희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자줏빛 와인이 천장에 매달린 조명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고 하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실 때는 왁자하니 연기처럼 공중으로 풀풀 피어나던 열기가 와인 잔을 들고보니 차분히 가라앉았다. 대화는 요즘 붐을 타고 있는 와인에 대해서 이어졌다. 얼마전만 해도 예약까지 하며 사던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에서는 정작 그다지 비싼 술은 아니었는데 일본에서 와인 붐이 일며 값을 두 배 세 배로 올려놓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와인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이 있다는 이형수의 체험담까지 튀어나왔다.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와인 바의 사장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말이죠."이형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이미 취해서 오는 손님이 엄청 비싼 포도주를 주문하는 거예요.""비싼 것 주문하면 좋아할 것 같은데?"김상우가 말을 받았다. "한 병도 아니고 두 병 세 병 거푸 주문하는 거죠. 와인을 막걸리 마시듯 벌컥벌컥 마셔댄 후에는 술이 떡이 되어서 비틀대며 술값을 치르는 사람. 사장은 그런 사람을 경멸하는 눈으로 보더라고요.""흐흠, 와인은 술이 아니라 음식이다. 취하는 게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다. 뭐 그런 거 아닌가요?"미서가 이형수의 말을 받았다."기다림과 만남이 와인 속에 존재한다고 하더라고요. 땅과 바람의 힘. 그리고 인간의 손을 빌려 경작되고 술이 익고, 마시는 사람의 손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 이런 것을 상상한다면 빨리 마시고 취하는 다른 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와인만의 즐거움과 매력이 있다는 거죠.""한 가지에 집착하는 것. 그런 것도 일종의 속물근성이 아닐까."전병헌의 툭 던지듯 하는 말에 안개 낀듯 혼미하던 머릿속이 장마 뒤 하늘처럼 툭 트였다. 처음의 작은 시작으로 전체가 쓰러지는 도미노게임처럼 지금껏 들끓던 잡념들이 일시에 정리되는 분이었다. 그것은 작은 깨달음과 같았다. 일상을 스치는 사건의 이면을 명쾌하게 통찰하는 눈. 나는 잠시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한 달간 여행을 가려면 체력을 길러야하는 거 아닌가?"그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던졌다는듯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요즘 등산 인구가 너무 많아서 공휴일은 복잡할테니 시간 나는 사람들끼리 만나 평일에 산에 오릅시다." 김상우가 말을 받았다. 산행, 세계로 나가는 여행, 술자리, 늦은 밤, 가끔 뒤통수를 치듯 깨달음을 주는 대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게는 낯설었지만 신선했다. 고여 있던 물이 뒤집어지며 산소가 공급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란 일을 할 때나 촘촘히 따지는 것이었다. 이익을 산출하지 않는 휴식의 때, 시간은 무용지물이었다. 느리거나 빠르거나, 흘러가거나 고여 있거나 시간에 신경을 쓸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은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면 그다지 커다란 의미는 없었다. 원고 청탁을 받고, 갈등과 칩거의 시간. 거실 벽에 붙어있는 둥근 시계에 나누어진 눈금을 보며 피를 말리듯 자판을 두드리고 책장을 넘기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흥미로운 장소였다. 나는 그런 세상에서 소외된 줄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

2007-05-2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편집인 워크숍에 참석했던 정신희가 늦은 시간 우리와 합류하고 싶다는 전화를 해 왔다. 선배는 정신희에게 도심 한 복판에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오라고 했다. 삼차로 자리를 옮긴 것이 정신희의 등장 탓만은 아니었다. 금요일이었고, 술자리는 지금부터다, 라는 식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식사를 하면서 곁들인 술 때문에 생겨난 들뜬 기운 탓이었을까. 어쩌면 오늘은 술을 마시자 라는 각오로 모인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었다.스카이라운지는 하늘에 떠있는 공중 정원 같았다. 발아래 보석처럼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꽃처럼 활짝 피어있었다. 멀리 강변도로에는 자동차의 불빛이 줄에 꿴 보석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 늦은 밤, 어둠은 몸 둘 곳이 없고, 하늘에는 별조차 없었다. 검은 밤은 인간이 만든 인공의 불빛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몽롱한 눈으로 유리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도심의 밤 풍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로 눈을 두어도 사방이 보였다. 유리로 만든 성 탑에 앉아 있는 느낌, 앉아있는 둥근 의자가 허공에 붕 떠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현실과 유리되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투명한 유리벽은 세속적인 바깥 세계와 환상의 세계인 스카이라운지를 가르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서있는 장승이나, 성소의 솟대처럼 유리벽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 서 있었다. 발로 찬다면 저 유리벽은 조각조각 깨져서 와르르 무너져 내릴까. 그럴 리 없을 거다. 그렇게 쉽게 깨져 내릴 정도로 허술하게 건축을 할 리 없었다. 대체 얼마만큼의 힘을 가하면 유리벽이 깨져서 사방으로 흩어져 내릴까. 어쩌면 사람의 힘으로는 부서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진이나 화재나 천재지변이 아니고서는 파괴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를 지닌 강화유리임에 틀림없다. 발로 차보고 싶다는 것은 어이없는 발상이었다. 그저 투명한 유리를 통해 찬란한 도심의 밤을 감상하는 게 최선이다. 사파이어, 에메랄드, 다이아몬드와 토파즈, 인간이 만든 보석과도 같은 불빛, 별보다 더 아름답고 영롱하다. 더 이상 바랄게 뭐가 있는가.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마음 한 구석에 정체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정신희가 나타난 것은 포도주 두 병이 비어갈 때쯤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술이 좀 더 마시고 싶어서 왔어요." 정신희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볼이 발그레했고 이미 조금 취한 상태였다. "여행 이야기 하던 참이었어요. 여름에 형수씨와 김 선생, 우리 모두 함께 안 갈래요?"미서가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못가요."정신희는 아쉬운 듯 대답했다. "선영아, 넌?"미서가 내게 물었다. "얼마 동안?" "한 달.""무리야."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희가 기획을 한 프로젝트였는데 김상우의 전공인 근동 지방의 여행기를 쓰고 이형수가 사진을 찍는 거였다. 여행사에서 가는 패키지여행보다 좀 더 전문적이고 알찬 여행이 될 수 있다고 미서는 함께 가자고 했다. 전병헌은 일이 밀려서 가기 힘들다고 말했고, 나 역시 미지수였다. 한달이란 기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행기간은 내가 갈 수 있는 만큼만 잡아서 그들보다 일찍 돌아오면 문제가 없을 터이다. 결혼 후 지금껏 혼자서 여행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뜬금없이 "나 이란으로 여행 갈래"이러고 나오면 남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게다가 여행경비는 남편의 결재가 떨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2007-05-2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우리는 장소를 옮겼다. 이차는 독일식 맥주를 직접 만들어파는 가게였다. 전병헌과 마주 앉았다. 오늘 콘티를 보냈으니 어쩌면 아직 검토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원고 받으셨어요?""네, 오전에."전병헌은 간단히 대답했다. "작업은 내일 들어갈 겁니다. 나머지도 김선생이 쓰신다구요."아줌마나, 이보세요, 혹은 선영아라 불리지 않고 선생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름이 아무 것도 아닌 줄은 알고 있다. 전병헌이 나를 무어라 부를 것인가. 선영씨라고 하지 않아서 약간은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부류에 속한다는 기분이었다. 어떤 테두리 안에 속한다는 것은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처음보다 자신감이 생긴 것은 술을 많이 마신 탓만은 아니었다.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나는 가방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면서 전병헌에게 물었다. 그는 핸드폰은 없다며 작업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요즘 핸드폰 없는 사람은 없던데 특이하네요."남의 취향을 평가해놓고 보니, 내가 취하긴 취했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실은 저도 없어요.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칠 정도로 급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구요."이런! 말도 많아졌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전병헌과 나는 비슷할지도 몰랐다. 관심이 없는 것에는 백치처럼 머리가 비었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욕심낼 일도 없었다. 그래서 가끔 한없이 관대하거나 너그럽다고 오해받기도 했다. 내가 이해심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에는 말할 수 없이 쪼잔하게 굴었다. 극과 극의 교차라고나 할까. 내게서 한 면만 보는 사람은 내가 아주 낙천적이거나 극히 속 좁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둘 모두 내 속에 있었다. 상황에 따라 한 면은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전병헌은 내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조금 서운했다. 형식적이나 인사치레라도 물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는 같은 팀이랄 수 있었다. 내 콘티에 그가 그림을 입히는 사이인 것이다. 하긴 예전에도 내 콘티에 누가 그림을 그렸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나중에 책이 나온 후에 아, 이 사람이 그렸구나하고 놀란 적도 있었으니까.전병헌에 대한 서운한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안주로 나온 과일을 먹기 좋게 내 앞으로 놓아 주었다. 마른 안주는 잘게 찢거나 껍질을 까서 손만 내밀면 입에 들어가는 위치에 놓아두었다. 너무 자연스럽고 무심해보여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다. 방긋 웃기만 해도 무조건 끌어안아 뺨을 문질러대던 육친의 관대한 사랑. 그의 말없는 몸짓은 그런 사랑을 기억나게 했고 다시 한번 그때로 가고 싶은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나는 선배를 쳐다보았다. 선배는 미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블라우스와 같은 색의 푸른색의 둥근 귀고리가 미서가 말을 할 때마다 찰랑거렸다. 술집의 밝은 조명이 미서에게 온통 쏟아지고 있었다. 조명 아래서 미서는 보석처럼 빛났다. 나이를 먹어가는 미서를 특별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 내게는 없는 것을 가진 미서가 부러웠다. 손을 뻗어 투명한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심연과 같은 검은 색의 맥주가 반쯤 차 있었다. 내가 잔을 들어 올린 것과 동시에 전병헌도 자신의 잔을 들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나는 느릿느릿 숨도 쉬지 않고 맥주를 모두 마셨다. 전병헌이 손을 들어 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그때 나는 경고 팻말을 무시하고 금지된 선을 향했다. 내 발이, 몸이 저쪽 어딘가, 금지된 영역으로 훌쩍 뛰어넘으려 했다.

2007-05-2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이성에 억눌려있던 감성이 술의 힘을 빌려 고개를 쳐드는 시간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는 선배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하루는 친구 놈이 하숙방으로 책을 세 권 들고 왔더라구. 평소에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던 놈이라 좀 이상했지. 보니까 니체 전집이야. 반값에 그 책을 사래. 돈이 없다고 했더니 생기면 달라고 하고는 던지다시피 책을 두고 가는거야. 자기는 다 읽어서 필요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저런 바람둥이도 읽는 니체를 안 읽은게 부끄러웠지. 그래서 니체를 읽게 되었고 전공을 법학에서 철학으로 바꾸었어.""친구가 형 앞길을 망쳤군요."김상우가 히죽대며 대꾸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알고보니 그 놈이 니체 전집을 읽었다고 한건 순전히 공갈이었어.""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데요?" "어느 날, 저녁에 술에 취해 비틀대며 걷는데 길가 헌책방 진열대에 그 책이 놓여있더래. 그게 글쎄 나체전집으로 보였다는 거야. 얼씨구나 하고 주머니를 죄다 털어 책을 사서 소중히 싸안고 집에 왔는데 다음 날 아침 술이 깨서 보니 나체전집이 아니고 니체전집이더라는 거야.""그걸 선배한테 판거군요.""혼자서 몰래 보려던 책이 나체가 아니라 니체였으니 얼마나 실망이었겠어. 돈이 아까워서 읽으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가 안가더래. 책을 팔려고 자기는 다 읽었다고 사기를 친 거지.""니체가 여러 사람 실망시켰네요."우리는 킬킬대며 웃었다. "운명은 그렇게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발목을 잡기도하지.""선배에게 니체를 팔다니 대단하네요.""나중에 생각해보니 수업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놈이 나보다 한 수 위더라고. 친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 책을 살줄 알았던걸 보면 말이야.""손금 보듯 선배를 훤하게 읽고 있었군요.""내가 치기 만발한 허영쟁이란걸 알아 본거지.""친했어요?""니체를 다 읽은 후에 친해졌지. 그 놈이 바로 니체와 닮았더라고."선배는 얼굴은 다른 쪽으로 향하고 검지 손가락을 들어 전병헌을 가리켰다. 김상우와 미서는 손바닥으로 술상을 두드리며 웃어댔다. 나는 무슨 뜻 인줄 몰라 멀뚱히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나체전집. 그 주인공?"이형수가 전병헌을 바라보며 비죽비죽 터지는 웃음을 깨물었다. 선배가 법대에서 인문대 철학과로 전과를 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 해 봄, 미서와 함께 문학동아리에 가입했을 때 선배는 까마득한 복학생 선배였었다. 그렇기는 해도 오랜 세월 알아왔으니까 선배에 대해 모르는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나는 선배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일까.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안다고 하는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웃음이 거두어졌다. 미서와 김상우와 이형수, 그리고 전병헌까지 통쾌하게 웃고 있는데 나는 유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웃을 수 없어 나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단숨에 마셔버리고 빈 잔을 내려놓자 전병헌이 술병을 집어 들었다. 내 잔에 천천히 소주를 채워주는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선배의 오랜 친구라는 사실 하나로 그가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졌다.

2007-05-2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스터디가 끝나고 삼십층의 선배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동안 나는 몹시 의기소침해졌다. 내 속의 알갱이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오므라들었다. 일행은 저녁을 먹기 위해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나는 식당 앞에서 미서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난 일찍 들어갈게."내 말을 들었는지 선배가 뒤 돌아보며 말했다."밥 먹고 가."미서가 내 손목을 잡고 거침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듣지 못한 사람 같았다. 미서가 움켜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을 통해 미서의 마음이 전해져왔다. 별것 아닌 일에 기죽지 마. 세상의 바보들만이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거야. 미서가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그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래 밥 먹고 힘내자. 지쳐서 그런지도 모르는 거잖아. 맹렬하게 식욕이 솟았다. 상 위에 빈 술병이 늘어갔다. 나는 술잔에 입술만 갖다 대고 내려놓곤 했다. 술에 취한 후 실수를 할까봐 겁이 났다. 기억이 지워진 검은 필름. 끊어진 그 시간에 내 모습이 어떻게 찍혔는지 알 수 없는 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 기분 좋게 취해갔다. 한순간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고 싶은 유혹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선배를 쳐다보았다.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풀어짐과 절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잡고 버티는 것은 꽤 스릴이 있었다. 순식간에 나를 방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슴 한편에 아련한 슬픔을 고이게 했다. 존재의 비극에 대해 근거도 없이 과장된 감정을 갖는 것에는 낭만이 있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선배에 대한 연모. 이따위 불확실한 감정은 알코올에 의해서 확실한 사실로 굳어졌다. 나는 비련의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감정을 감추고 선배의 옆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식탁 위에 너저분하게 생선뼈가 흩어지고 김치 국물이 튀고, 술잔과 안주가 두서없이 널려있어도 상관없었다. 그런 것쯤은 보이지도 않았다.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삼겹살은 우아한 이국적인 요리로 바뀌고, 거듭 비고 채워지는 소주잔은 자줏빛 와인으로 변했다. 원 샷,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외쳤다. 화들짝 공상 속에서 쫓겨났다. "마셔요." 이형수가 소주병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잔이 비면 따라줄 기세였다. 나는 재빨리 변신했다. 축제의 시간에는 철저히 축제를 즐길 만큼 내 영혼은 자유롭다. 나는 내가 그런 모습으로 보여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허영이었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유로운 영혼과 현실에 구속된 자유롭지 않은 영혼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일상에서 벗어난 인간이어야 했다. 남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평범한 사람의 생각을 구태여 찾아 읽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현실을 딛고 날아가는 힘,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죽는 사람, 끊임없이 흐르고 매 순간 생성하는 인간이라야 감동을 주지 않겠는가. 술과 감동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시간에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평범한 인간으로 비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거창한 포부가 아니더라도 함께 앉아있는 사람들과 동질성은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분위기를 주도할 수는 없지만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분위기를 망치는 인물은 되고 싶지 않았다. 술이 반쯤 고여 있는 잔을 비웠다. 이형수가 얼른 술을 채웠다. 공중에 걸린 외줄 위에서 나는 땅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선배가 서있는 건너편 언덕까지 무사히 건너고 싶었다.

2007-05-2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김상우가 번역하고 있다는 길가메시 서사시였다. 인류가 추구해온 모든 가치와 규범, 신화와 종교, 역사와 언어, 법률, 예술 등 모든 것이 총망라된 문명의 기원이 수메르에 있었다.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했던 호메로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노래, 오디세이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 그보다 2000년이나 앞서 영웅 길가메시가 메소포타미아 남쪽 수메르의 우루크에 살았습니다."길가메시는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루크 제1왕조의 5번째 왕이었다. 4700년 전에 이미 길가메시를 포함해 28명이나 되는 왕이 왔다가 사라졌다. 길가메시는 히브리 족의 조상이며 최초의 족장이라는 아브람보다 690년 전에 이미 왕위에 올랐다. 나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람이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우르에서 성장해 하란으로 떠났다는 사실은 다만 기록된 문자로 내게 다가올 뿐이었다. 아브람이 살던 그 때도 영웅 길가메시에 대한 신화는 널리 퍼져있었다. 그 뒤로 1500년이나 더 세월이 흐른 뒤에야 태초의 서사시라고 이름 붙은, 가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히브리족의 작가가 길가메시 서사시의 오랜 전승을 참고하여 를 썼을 것이라는 추측은 당연한 일이랄 수 있다고 김상우는 설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성서가 길가메시 서사시에 기대어 기록되었다는 말이었다. 신의 모습을 담은 인간창조, 여자의 유혹과 성,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불로초를 강탈한 뱀, 대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신들의 계획,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의 건설,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로 부른 기록 등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게 김상우는 자신이 번역한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어 내려갔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온 기독교 신자들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를 내용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무식의 소치일지도 몰랐다. 믿음이 전제된 신앙이란 성서가 사람의 손으로 쓰였든 성령의 감도하심에 따라 쓰였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했다. 그것의 영향은 인류최초의 문명이라거나 최초로 기록된 문자라거나 당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아니었다. 4700년 전의 기록이 내게 가한 충격은 부끄러움이었다. 수치심과 함께 나를 엄습해오는 좌절감이었다. 그것은 신께 향하는 숭고한 정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질투와 부러움과, 대상이 없는 원망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극히 냉정한 시선이 내 속에서 솟아났다. 이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알량한 지식으로 글을 쓰겠다고 덤벼든 내가 부끄러웠다. 진지함을 가장한 내 시선은 김상우의 연구결과물에 시선을 박고 있었지만 내용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을 쓴다고 커튼도 걷지 않고, 전화코드를 뽑고 모든 통로를 차단한 채 웅크려 있던 지난 며칠이 치기 만발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어설픈 색깔로 그려진 설익은 과일, 풋내를 풍기는 땡감이 내 얼굴 위로 겹쳐졌다. 전병헌에게 넘어간 원고가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하니 벌레처럼 몸을 말고 구멍 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다. 내가 고치 속에 웅크려 잠든 사이, 바깥세상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얇은 막 한 겹뿐이었는데 나는 왜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을까. 내 앞을 가로막았던 휘장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안주하고 싶을 정도로 현실이 만족스러웠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처해있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욕망이 더 컸다. 나는 밖으로 나오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눈을 뜨면 길을 볼 수 있었는데 눈을 감았던 것일까. 그래서 넘어진 것일까. 내가 주저앉아 있는 사이 미서와 선배가 지나갔고, 김상우와 이형수 그리고 전병헌과 정신희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2007-05-2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세수하듯 꼼꼼히 문지른 후에 따뜻한 물로 헹궜다. 오 분도 채 안 되는 손놀림에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기름을 먹은 피부위로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졌다.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털면서 잠이 부족한 피부는 화장이 잘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화장수를 바르고 로션 병뚜껑을 열었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다. 문득 화장을 하면서 이렇게 신경을 쓰는 자신이 낯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남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을 걱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럴 여유가 전혀 없을 상황이지 않은가. 우주의 생명, 별자리, 별들의 폭발과 블랙홀,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으로 가득 찬 머릿속 한 귀퉁이에 전혀 다른 생각이 자리잡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또 한 편에는 선배를 볼 수 있다는 설렘이 가슴을 열고 들어왔다. 인간의 작은 머리통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찰 수 있는지 신기했다. 머리칼을 말리는 동안 거울 속에, 감금된 죄수처럼 바깥공기를 몹시 그리워하는 여자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청바지와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숄더백을 들었다.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과 노트와 에이 포 용지들이 눈에 들어왔고, 부엌 싱크대에 빈 그릇들이 무질서하게 포개져있었다. 잠시 마음이 찜찜했다. 다녀와서 치우지 뭐. 남편과 시누이는 아직 이틀은 더 있어야 올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며 미서와 집을 나섰다.스터디 장소는 선배의 출판사 사무실이었다. 아마도 늘 그래왔던 모양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공중에 높이 떠있는 사무실, 눈 아래 보이는 수많은 빌딩을 쳐다보며 약간 우울했던 기분. 오늘 역시 그때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그들 사이에서 내가 서 있을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정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는 풍선처럼 간신히 천장에 붙어있는 느낌. 역시 괜히 왔나? 아니야. 이런 상황은 곧 끝나겠지. 아마도 적응이 될 거야. 끝없이 서성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이형수가 늦은 것을 사과하면서 들어섰다.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있었다. 어딘가 출사를 갔다가 바로 오는 모습이었다. 이형수가 자리에 앉자 김상우가 프린트물을 나누어주었다. 이형수는 김상우가 내민 자료를 받아들면서 재빨리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처음 이형수를 본 날, 금방이라도 끌어안을 것처럼 내 손을 끌어당기던 것이 생각났다.이형수를 기다리면서 미서는 전병헌과, 선배는 김상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대화를 주고받을 공통의 화제가 없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낡은 보따리처럼 앉아있었다. 나는 의자에 붙은 엉덩이를 끊임없이 이리저리 꼼지락대며 움직였다. 어색했고 서걱거렸다. 사람을 만날 때 나도 모르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눈이 진지하면 나는 금방 마음이 열렸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다가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상대가 눈길을 피하거나 건성으로 인사를 하는 눈치가 느껴지면 바람이 새는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좌우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차에 이형수의 등장과 그가 내게 보여 준 관심은 풍선에 불어넣는 헬륨이나 다름없었다. 미소나 칭찬에 취약한 정신, 다른 사람의 애정에 흔들리는 나의 한심한 영혼이 서글펐다. 어떻게 하면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자료를 집어 들었다. "수메르는 인간이 이룩한 최초의 성숙한 문명이었습니다. 북으로는 터키, 남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동으로는 이란, 서쪽은 시리아와 요르단이 접하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이 늘어서 있었죠."

2007-05-2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급할수록 돌아가거나, 아니 쉬어가라였나? 어쨌든 그런 말이 뱅뱅 돌수록 손은 더 빨리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면서 작업을 하는 사이사이에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식으로 바삐 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다음 완벽하게 구상을 끝내고, 집을 짓듯, 기초를 다지고 천천히 벽돌을 쌓아올려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야지 하고 결심했다. 물론 그것은 허술한 작업에 대한 반성이자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위안이었다. 스스로도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었다. 작가정신의 부재, 이러고도 내가 글을 쓴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글을 쓰는 내내 마음 한 쪽 구석에 똬리를 튼 그놈 때문에 편치 않았다. 하지만 부실공사 덕에 예상대로 이틀 후 나는 원고를 보낼 수 있었다. 탈고하는 순간 그림을 그릴 전병헌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한 번 원고를 읽어보았다. 사물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법이었다.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아. 내가 이미 내려놓은 결론과 함께 원고를 떠나보냈다.누군가 벨을 눌렀다. 미동도 않던 공기가 파동을 그리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책상 위에 가로로 세로로 펼쳐둔 책 속에 활자가 가물대던 참이었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림자처럼 현관으로 미끄러지듯 걸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맨발로 현관 바닥을 밟고 문에 얼굴을 갖다 댔다. 신문구독을 권유하거나 우유나 야쿠르트를 배달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죄로 십분 이상은 문을 열고 그들의 말을 들어줄 게 뻔했다. 그런데도 어안렌즈에 소리 없이 눈을 갖다 댄 것은 작업을 하는 동안 단절되었던 세상과 사람이 그리워서였다. 문은 열어주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움직임이나 최소한 살아있는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숨을 죽이고 문 앞에 어른거리는 물체를 확인했다. 문 밖에서 어른거리는 물체가 손을 뻗어 다시 벨을 눌렀다. 뒤로 펄쩍 물러섰다. 예상치 못한 벨 소리에 조금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미서가 흰 바지 위에 청색 블라우스를 입고 서 있었다. "나가자. 준비 해."미서는 현관을 들어서며 말했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빗어올렸다. "시간 없어.""선배가 너 꼭 데려오랬어. 전 선생도 너 보고싶단다.""왜? 뭐 잘못됐대?"도둑 제발 저리듯 급하게 써 보낸 원고가 못내 걸렸다. "매달 세 번째 금요일 모임이야. 너 지난번에 신고식 치렀으니 정식 멤버잖아.""그뿐이야?"미서는 거실을 가로질러 성큼 걸어가더니 커튼을 젖혔다. 기운을 잃은 오후의 햇살이 창 밖에 머물러 있었다. 미서 몰래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 나가면 하루 공치는 건데. 안가면 안될까?""지금쯤 머리 식히는 것도 좋잖아. 책상에 오래 앉았다고 줄곧 글이 나와 주는 것도 아니고.""샤워할 동안 기다려." 미서가 책을 들고 소파에 앉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을 씻어낸 샴푸의 거품이 어깨와 가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문질렀다. 푸석해 보이는 얼굴 주변에 물에 젖은 미역처럼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다. 탄력을 잃어버린 피부는 노화가 시작된 지 오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평소에 마사지라도 좀 해둘 것을 하고 후회가 되었다. 나는 수납장 문을 열고 오일을 꺼냈다. 사둔 지 오래된 베이비오일이다. 언젠가 화장을 지울 때 클렌징 크림 대신 사용해도 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사서는 몇 번 사용한 후에는 잊고 있었다. 뚜껑을 열고 손바닥을 오므려 가득 부었다. 오일을 부드럽게 얼굴에 펴 발랐다. 거울을 보며 이마와 양 볼, 턱 주변을 문질렀다.

2007-05-1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뭘 넣으면 흥미를 끌까? 수없이 복제된 악당, 예를 들면, 히틀러같은 독재자, 또 다른 악당은 없을까? 가능하면 가까운 시대부터 살피는게 좋다. 너무 먼 옛날의 예를 들면 그만큼 실감이 떨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들이 악당이다고 단번에 알만한 예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히틀러만 예로 들까. 아니야, 너무 약해. 여기서 글의 맛이 사느냐 죽느냐가 갈라진다. 어떻게든 쥐어짜야 한다. 잠들기 전에, 아, 이대로 잠들어 버리면 안돼. 나는 안간힘을 쓰면서 버텨본다. 머릿속에 매달려있던 희미한 알전구가 점점 빛을 잃는다. 악당이 나타나길 애타게 기다리면서 나는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설핏 잠에서 빠져나왔다. 눈은 감겨있고 의식마저 혼몽하다. 심장이 갑자기 쥐어짜듯 조였다. 심장에서 피돌기가 멈춘 것 같았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몸을 돌아다니는 핏줄이 수축된 것 같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온몸을 뒤덮는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없이 오래 잠을 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눈을 떴다. 퍼뜩 머리를 스쳐간 것은 원고 마감일이 지나버린게 아닌가하는 거였다. 그 순간 절망과 낭패감이 번개처럼 머리를 관통했다. 번개가 번쩍이고 7초 후에 천둥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몸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몽롱했던 의식에 안개가 걷혔다. 나는 소파위에서 새우처럼 다리를 구부려 두 팔로 안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다가 중심을 잡지 못해 소파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악,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부딪친 어깨가 아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워 한 바퀴 몸을 굴렸다. 드리워진 커튼을 통해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아침이었다. 후다닥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오랫동안 잠들었다고 생각한 시간은 겨우 세 시간 남짓이었다. 마감일을 넘긴 게 아니었다. 나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시 잠을 잔 사이 하루가 지나가 버렸지만 꿈속에서 느꼈던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새로운 삶을 얻은 것 같았다. 마감일이 지나가버리지 않아서, 아직 원고를 쓸 날들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소리내어 말했다.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전기 주전자에 커피 물을 올려놓고 화장실로 갔다. 세면기에 찬물을 받아 그대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오월의 새벽이라 차가운 물에 머리통을 맡기기에는 아직은 무리였다. 목과 가슴을 지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황급히 더운 물을 틀기 위해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두터운 타월로 감싸고 책상 앞에 앉았다. 8개의 꼭지까지 써져 있었다. 서른 개의 꼭지를 채우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대략의 아우트라인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꼬박 작업을 한다면 내일까지 초고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넉넉잡아 이삼일 후에는 몸에 관한 원고 하나는 건네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 관한 원고는 자료정리부터 만만치 않겠지만 어쨌든 절반이 끝난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었다. 우주를 미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앞에 떨어진 일부터 처리한 후에 생각해야 했다. 우주가 머릿속에 머물면 눈앞에 떨어진 작업이 지장을 받을게 뻔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작업에 완전히 몰두해서 푹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사를 쓰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손이 서둔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고를 넘기기 전에 다시한번 더 꼼꼼히 보도록 하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마지막 꼭지를 향해 허둥지둥 달렸다.

2007-05-1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그런 줄도 모르고 산으로 바다로 가자고 했구나. 염려 마. 둘이서 다녀올게."시누이는 흔쾌히 대답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산 사람이 백번 낫다는 말이 실감났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화내고 가방까지 집어차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잘못한 일에 합당한 벌을 받은 것처럼 후련했기 때문이다. 만약 미서가 이런 나를 본다면 설교를 하려고 들었을게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세상에 정답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정해진 답이 있다면 화를 내거나 미안해하거나 놀라는 일 같은 건 없을테니.아침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창에 드리워진 커튼은 사흘째 미동도 않고 있다. 세수도 제대로 않고 머리를 감은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커피포트 주변에 컵이란 컵은 모조리 나와서 열을 서있다. 끼니는 라면이나 맨 밥에 김치, 수프나 인스턴트식품이나 레토르트 식이다. 전화코드는 남편과 시누이가 집을 나서는 순간 빼놓았다. 휴대폰은 물론이고 텔레비전이나 오디오의 코드 역시 벽에서 빠져있다. 내게 주어진 시간동안 두 개 중 하나는 완성해야 한다. 자료를 정리하고 머릿속에 입력하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물론 수박 겉핥기다. 빠르게 감는 비디오 화면처럼 인체에 대한 지식이 두서없이 감긴다. 맨 처음에는 인체의 기둥인 뼈에 대해서, 두 번째는 피부, 세 번째는 머리 부분에 몰려있는 눈, 코, 입, 목, 그리고 가슴, 배와 생식기, 이렇게 사람의 몸을 그린 다음에는 몸속으로 들어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내장과 기관들. 눈에 보이는 것처럼 명료하게 설명해 내야한다. 아이들에게 쉽게 전달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안 해보면 모른다. 처음에는 나도 아이들 책이라는 생각에서 안이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네, 그렇게 바뀌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이 쏟아진다. 사흘 동안 몇 시간 눈을 붙이지 않았으니 잠이 오는 게 당연하다. 잠시 눈을 붙여야 다시 작업을 할 수 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문질렀다. 마른 손바닥에 얼굴이 까칠하게 느껴진다. 머리꼭대기부터 검은 먹물이 서서히 부어지는 것 같다. 비틀거리며 거실로 가서 소파에 허물어졌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우니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머릿속 어딘가 불 켜진 작은 전구가 영 꺼지지 않는다. 8번째 꼭지에 배치할 소제목을 떠올렸다.현실에서는 복제인간이 아직 없지만 영화나 만화, 공상 소설 같은 데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소재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이나 영상매체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첨단의 생명과학에 대한 정보 또한 이해하기 쉽게 제공해야 했다.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지면을 나누고, 복제소를 중심으로 8번째 꼭지의 짧은 스토리를 얽었다.컷 1, 육우의 수정란을 꺼내 둘로 쪼갠다. 분할 된 수정란을 젖소의 일종인 홀스타인에게 이식시킨다. 이 컷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얼룩소와 꺼낸 수정란과 쪼개진 수정란을 배치한다.컷 2, 보통 육우는 일생에 송아지를 10마리 정도 밖에 못 낳지만 이 방법으로는 1년에 8~10마리의 송아지를 낳을 수 있다. 이 장면에서는 어미 소와 10마리의 송아지, 그리고 말풍선 안에 설명을 넣는다. 컷 3, '굉장한 발전이다. 식량난도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느낌의 희망적인 그림과 대사가 들어간다. 지면이 끝난다. 다음 페이지로 넘긴다.다음 페이지를 넘겨 말풍선을 그린다. 말풍선 안의 대사 "클론이 잘못 쓰이면 어떻게 되죠?"라는 질문으로 과학발전에 대한 부작용도 짚어준다. 그렇다고 너무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애들 눈높이에 맞게 에피소드를 넣어야 한다.

2007-05-1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여행 가방을 꾸리다 말고 나는 손을 멈추었다. 양말과 속옷, 화장품과 세면도구 등을 담고 있는 가방을 물끄러미 보았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고, 간간이 남편과 시누이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코미디 프로를 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안방 문을 열고 얼굴만 거실로 내밀었다. 남편이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눈짓으로 남편을 불렀다. 방으로 들어오면서 남편은 왜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이번 여행 안가면 안될까? 원고마감일이 너무 빠듯해서."남편의 얼굴에 불쾌한 그늘이 드리워지는 게 눈에 보였다. 순간 가슴 속에 무언가 철렁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깟 원고료 얼마 받는다고 그래.""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약속을 했으니까 써야지.""글 쓸 사람이 그렇게 없대?""뭐라고?"갑자기 앞이 꽉 막힌 터널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이럴 때 흥분하면 얼마나 손해를 볼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최대한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말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못쓰겠다고 말할 수는 없어. 이건 일이야. 그냥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고.""모르니? 널 위해서 가는 여행이라는 걸. 누나는 너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날 위하는 건 여행이 아니라 그냥 내게 시간을 주는 거야. 나는 빼고 둘이서 다녀와." "무슨 사람이 그래."남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만약 좋은 얼굴로 남편이 좀 더 나를 설득했더라면 나는 여행을 따라나섰을 것이다. 나는 두 번 세 번 거듭 부탁을 하면 대부분 거절하지 못했다. 가능하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싫어서 거절을 하더라도 오래도록 그 부담이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에 불편했다. 그냥 미안하면 될 일이 죄의식으로 변해버렸다. 힘들더라도 상대의 요구에 응해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편했다. 웬만하면 내 앞에 떨어지는 일을 받아들였다. 거절해서 받게 되는 마음의 부담이나 부탁한 일을 해주면서 받는 부담이나 그게 그거인 바에는 요구에 응하는 편이 나았다. 남편의 얼굴에 불이라도 옮겨붙은 것 같았다. 나는 멀뚱히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나는 내 입장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내가 설명을 하면 할수록 남편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들을 말이 없다는 몸짓으로 남편은 획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흥분한 탓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남편은 바닥에 놓인 가방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것이 가방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냅다 걷어찼다. 가방이 뒤집어지면서 옷가지와 화장품 등이 튀어나와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황당해서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시누이가 놀란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왜 이러니?"남편은 방을 나가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세 살배기 애도 아니고 이렇게밖에 일을 만들 수 없는 건가.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시누이가 바닥에 흩어져 있는 물건을 바라보면서 거듭 물었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인지도 몰랐다. 만약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얼버무린다면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둘이서 여행을 다녀오시면 안 되겠어요?"다가오는 원고마감일,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원고지. 초조한 마음에 대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2007-05-14 경인일보
1 2 3 4 5 6 7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