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

 

숨쉬지 마세요<1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내가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미서는 나를 현실로 끌어내리는데 명수였다. 내가 써야하는 것은 만화 콘티였고 미서는 소설가였다. 자료를 읽고 정리하여 줄 수는 있지만, 컷을 분할하고 대사와 간단한 밑그림을 넣는 일을 미서가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무슨 이유로 미서에게 기대고 있었던 것일까. 실제로 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인데 말이다. 아침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보는 심정 같은 것일까. 오늘은 남쪽에서 귀인이 나타나 어려운 일을 해결해 준다. 이런 글을 보고나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조차 미뤄두고는 하루 해가 저물도록 나타날 귀인이 마냥 기다려진다. 그렇기는 해도 또 한 편으로는 오늘의 운세 같은 것을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절실하게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인지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기한에 맞출 수 없는 마지노선을 넘기면서도 여행을 다녀와서 밤을 새서 작업을 한다면, 이라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진정 글을 쓰고 싶기는 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환한 햇살이 퍼지는 창 밖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울고 싶었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길 중간에 서있는데 정작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연분홍 꽃잎들이 비처럼 흩날리는 봄날, 내 삶은 잿빛구름이 드리운 하늘같았다. 귓가에 미서의 목소리가 뛰어들었다. "저녁 사주면 도와줄게."미서의 말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응답했다."싫어."단호한 내 반응에 미서는 쿡쿡대며 웃었다. "너, 나한테는 아주 정직하게 반응하는 거 아니?"미서에게 조금 미안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거 아니까 그래.""내가 널 좋아한다고 한 마디도 안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나는 미서를 향해 눈을 흘겼다."내가 널 좋아하니 너도 당연히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러니까 내 생각 같은 건 전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네 마음이다.""그런가?""다른 사람들에게는 왜 정직하게 네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니?""할 말 다하고 어떻게 사니? 알면서도 넘어가고 모르고도 지나치는 거 아냐?""왜 할 말을 못하고 살아?""네 이론에 의하면 내가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니까,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그런다는 말, 그 말 하고 싶은 거니?""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어.""나 복잡하게 만들지 마. 안 그래도 어지러워. 어쨌든 저녁은 못 사줘. 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이럴 때 보면 똑 부러지는 데, 어떨 때 보면 바보 같단 말이야.""바보는 이제 들어갈 시간이야."나는 사전이 든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슈퍼에 들를 생각이었는데 사전이 무거워서 그냥 집으로 가야했다. 미서가 집까지 태워준다고 시장까지 보라고 했다. "그냥 갈래. 몇 발짝만 걸으면 집인데 뭘. 장은 나중에 봐도 돼."미서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차창을 내리고 얼굴을 내밀었다."그림 누가 그리는지 아니?"나는 멀뚱히 미서를 쳐다보았다. "전병헌씨가 그린대."그 말을 남기고 미서는 주차장을 빠져 나가 차도로 진입했다. 처음 만난 날, 명함을 내밀지 않아 편하게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오늘의 운세에 느닷없이 등장한 사람. 그가 남쪽에서 나타난 귀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집을 향해 걸음을 떼놓았다.

2007-05-1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다른 사람이 즐겁잖아.""다른 사람? 누구?""주변 사람들. 남편, 시누이, 친척들.""너는? 네 자신은 어떤데?"미서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꿀꺽 삼켰다. 목구멍에서 식도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명치 부근이 쓰라렸다. 날카로운 바늘로 후벼파는 것 같은 통증이 가슴 전체로 느리게 퍼져나갔다. 나, 내가 어떠냐고? 그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 내 몸이 텅 비어서 바람이 지나가는구나. 그런 기분은 들었다. 사는 게 왜 마른 검불을 손아귀에 잡는 것 같지. 그래서 슬프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그 기분이나 느낌의 주체로 나를 세워본 적은 없었다. 슬픈 것은 늘 나를 가두고 있는 공간이나 날씨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다."시어머니 간호를 하면서 못 견디게 괴롭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냥 내게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 언젠가는 끝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어.""다른 사람이 원하는 곳에 네가 가서 서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미서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다."내가 필요한 곳에 가는 거야. 누구든 뇌졸중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간호해야 했어. 가족이니까 모르는 척 할 수 없잖아.""너의 마음이 어떤지를 묻는 거야. 꼬박 4년, 햇수로는 오년이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분이 어땠어?""안심이 되었어. 돌아가셔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뭐랄까. 슬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었어. 그냥 덤덤했어. 사람이 죽는데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는 내가 좀 섬뜩하기는 했어. 내 신경이 갑각류의 껍질처럼 변해버린 건가 싶었으니까." 나는 가능하면 정확하게 내 마음을 설명하려고 기억을 더듬었다. 결혼 후, 일 년쯤 지났을 때 시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남편은 사형제 중 막내였다. 줄곧 어머니와 함께 살던 남편의 집에 내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 있을 때였다. 내가 가기 싫다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남에게 떠밀려서 갈 정도로 나는 아둔하지 않았다. 포기와 체념은 때로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때때로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화장할 때도 있었다. 그 차이는 미묘해서 자신조차도 깜박 속을 때가 있었다. 결과는 어느 쪽이나 같았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원고 때문에 여행 못 가겠다고 말해 봤어.""아니, 여행 다녀와서 일주일 동안 꼬박 밤 세우며 쓰면 안 될까.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 있어.""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오월 중에 다섯 권 시리즈 내놓을 계획이래. 스토리가 나와야 그림 들어간다고 말이야. 못 쓰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 이번 일이 내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아서. 사실은 울고 싶은 게 지금 심정이야.""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여행을 가." 나는 미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뭘 믿고 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원칙을 정해 놓은 것은 어떻게든 이번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기적을 바라는 걸까. "내가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는 거 아니지?"나는 화들짝 놀랐다. 미서의 직관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염치불구하고 무릎을 꿇는 게 상수였다. 자존심이나 염치가 이미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게 우리 사이였다.

2007-05-1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빠져버린 고리,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30개의 꼭지중에 너덧 개만 넣으면 되는 이야기다. 당장 두 권 분량의 원고를 써야했다. 60개의 꼭지를 만들어 그것을 배치하는 순서와 틀을 짜야하는 것이다. 정신병은 아마도 이럴 때 생기는게 아닐까 싶었다. 남편과 시누이를 바라보는 내 눈 뒤쪽에는 아르카스가 어미에게 겨눈 창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리 창을 겨눈들 소용없었다. 단 한 개의 창도 목표물을 향해 대기를 가르고 날아가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은 회사에 휴가를 신청해둔 상태였다. 누이와 함께, 나까지 포함해서 여행을 갈 계획을 세웠다. 남쪽 바닷가에 있는 고향마을, 어머니가 누워있는 선산과 부근의 친척들, 어릴 적 뛰놀던 들판, 햇빛에 반사되어 뒤척이는 바다. 살갗을 간질이는 오월의 바람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하지만 나는 향긋한 미풍에 날리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을 뿐이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게임 끝이다. 여행도 끝나고, 시누이도 돌아가고, 다시 평온한 생활로 복귀하겠지만 그것으로 일도 끝이다. 선배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나를 위해 애써준 선배를 무슨 낯으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건 대체 어떤 상황을 말하는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둘러봐도 구멍은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시누이의 선한 눈빛 뿐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만큼 나는 모질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외풍이 불면 바람을 막는 문 앞에 앉게 되었다. 이주만 견디면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내 시간 앞에는 사막이 펼쳐질 것이다. 나는 무거운 짐을 메고 건조한 바람부는 사막을 끝없이 걸어가는 낙타가 될지도 모른다.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정적인 돌파구가 필요했다. 미서에게 전화를 했다. "사전이 필요해. 우리 집 앞에 있는 찻집까지 좀 와줘."미서는 두말않고 20㎝ 두께는 족히 되는 우리말대사전 두 권을 쇼핑백에 넣어서 가져왔다. "원고는 다 되어가니?"나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한심한데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는 오죽하겠는가. "사실은 하나도 못썼어."나는 가능하면 대수롭지 않게 보이려고 심드렁한 태도를 취했다. "손님은 언제 가?""내일 여행가. 남편이랑 셋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곧 갈거야.""여행, 너도 가니? 원고 하나도 안 썼다며.""함께 가자고 간곡히 권하는데 안갈 수 없잖아."미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좌로 약간 갸우뚱했다."사실은 여행 안가고 싶지? 원고때문에 미칠 지경이지?"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서의 말이 도화선이 되어 심드렁함과 태연은 폭탄처럼 터져 산산이 흩어졌다. "일이냐. 남편이냐. 그것이 문제구나.""남편은 아냐. 시누이때문이라니까.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원비 대고 나 힘들다고 간병비에 용돈도 따로 보내주었어.""널 보고 있으면 내가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그거 아니?"나는 고개를 저었다. 널 보고 있으면 내가 하찮은 사람같아 보여.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미서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무엇때문에 남이 널 착한 사람으로 봐주길 바라니?"나는 미서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07-05-0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일주일은 번개처럼 지나갔고, 그 다음 일주일은 말처럼 달려갔다. 나는 그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 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시누이는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었다. 서른 평형대의 아파트를 계약하기까지, 그러니까 대략 잡아 열흘 남짓되는 시간에 서울의 요지를 죄다 훑었다.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대기모드에 스위치를 고정시켜 두었다. 신호가 떨어지면 나는 즉시 야전 참모장인 시누이를 차에 태우고 현장으로 달렸다. 미래의 보금자리를 점령하기 위해서. 그러나 작전은 변경되기 마련이었다. 목적은 승리였다. 우리는 드디어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시누이는 고층아파트의 창가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았다. 발치에 한강이 유유히 흘렀고 멀리 빌딩들이 점령지의 백성처럼 조아리고 있었다. 계약금을 치르고 본부로 돌아오자 전쟁의 후유증이 불거졌다.원고 마감일까지는 불과 이주의 여유밖에 없었다. 스토리를 짜기는 커녕, 독자들에게 전달해야할 지식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점에서 사온 책과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자료는 구식 노트북과 함께 책상 위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학습 만화스토리는 극 만화스토리를 쓰는 것보다는 쉬운 편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객관적인 지식이 소재이기 때문이다. 극 만화스토리를 쓸때와는 달리 소분규가 대분규를 만들어내고 대분규에서 파생되는 위기와 절정에 이르는 클라이맥스, 그곳에서 모든 사건이 일단 해결되고 감동에 이르는 '험난한 창조'의 길로 가는 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좋았다. 험난한 길이 아닌 것이지, 학습만화라고 쉬운 것만은 아니다. 소재가 주어져있다 뿐이지 엄연한 창조행위다.이런 너절한 설명이 무슨 소용이 닿는가. 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 주 만에 몸과 우주에 관한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몸에 관한 것은 그렇다치고 우주에 관한 책은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다.150억년이나 180억년 전쯤에 빅뱅에서 시작된 우주,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큰 폭발로 태어난 우주가 수 억년동안 점점 식어가면서 별이나 은하가 생기기 시작했다. 별이 제 몸을 태우며 타오르고, 제 몸을 다 태우고 나면 다시 폭발하여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 그것들이 다시 모이고 뭉쳐져서 또다른 별로 태어나고, 이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아이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지 머리를 짜내야 하는 것이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전달은 커녕 내 자신조차도 우주에 관한 비밀은 채 정리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게다가 아이들이 흥미있어 하는 부분은, 우주에 관한 과학적 지식보다는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같은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삼천포로 빠져 자신이 학창시절에 저지른 비행이나 가출같은 것을 반은 뻥을 쳐가며 들려줄 때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귀 기울이는 것과 같다. 그러니 요령껏 이야기를 버무리는 묘기도 부려야 했다.큰곰자리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칼리스토는 아들 아르카스를 낳았는데 이는 제우스신의 자식이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남편이 바람피워서 낳은 아르카스와 남편의 여자인 칼리스토를 저주했다. 여자라면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게다가 헤라는 가정의 수호신이다. 헤라의 저주로 칼리스토는 곰이 되었다. 사냥꾼이 된 아르카스가 어느 날 숲에서 곰이 된 자신의 엄마를 창으로 찔러 죽이려 했다. 하늘에서 이를 본 제우스가 당황하여 두 모자를 하늘로 올려 엄마는 큰 곰으로 아들은 작은곰자리로 만들었다.초등학생용 만화니까 이런 경우 조심해야할 점이 있다. 제우스와 칼리스토의 불륜, 이것을 사랑으로 설득하기는 무리다. 책의 성격상,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럴 경우 헤라가 왜 화가 났는지, 제우스가 왜 특별히 이 두 모자를 구해주었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사라진다. 이런 부분에서 비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싹이 돋는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어쨌든 초등학생용 책에 불륜을 그려낼 수는 없다는게 어른들의 입장이다. 이런 식으로 고리가 빠져버린 신화나 이야기나 사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듣고 난 다음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가 갸우뚱 거리는 것들은 앞뒤, 전후, 고금을 연결하는 고리가 빠진 것이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2007-05-08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내일 몇 시에 도착하신다고 했지?"나는 남편이 현관을 들어서는 것을 보며 물었다. "리무진 버스 타고 온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남편이 안방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원고 마감일이 한 달 후인데 바쁘게 생겼네."나는 남편의 양복 윗도리를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물론 평소에는 하지 않던 짓이었다. 남편은 유치원애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옷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었다. 순전히 대화의 기술이었다. 단순히 옷을 받아 옷장 속에 넣어주는 것만으로도 남편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돌봐야 하는 애도 아닌데 뭘. 집 사는 것만 도와주고 시간 내서 원고 써."남편은 흔쾌히 말했다. 하기는 그랬다. 애도 아닌 어른을 한 달 내내 붙어서 돌봐야 할 것은 없을 터였다. 시누이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지 이십년째였다. 애들이 공부를 마치면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작은 조카가 작년에 취직을 했다. 조카 둘 모두 독립을 하고보니 이제 고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해도 되겠다 싶은 모양이었다. 다음 날 오후, 시누이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여행용가방을 끌고 도착했다. 오십 줄에 막 들어선 시누이는 다소 지쳐보였다. 비행기를 타고 시차를 넘어 온 탓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애들 다 키워놓으니 이제 편한가봐. 좋아 보이네.""그러니? 속은 타는데 겉만 멀쩡해 보이나 보다."남편은 자신의 누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가방을 풀 때는 방 문 앞에 앉아 있었고, 시누이가 샤워를 할 때는 화장실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자신의 피붙이를 기다렸다. 이해가 안가는 바도 아니었다. 남편보다 열 살이나 위인 시누이는 막내인 남편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 남편이 미국으로 전화를 하면 "얘 요금 많이 나와. 내가 전화 하마 끊어라" 그러고는 금방 전화를 넣었다. 둘이서 한밤중에 소곤소곤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치 엄마와 아들인 듯 연인들끼리의 대화인 듯 애정이 넘쳤다. 게다가 시누이는 막내 동생이 병든 어머니의 노후를 지켰다는데 대해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있었다. 맏이로서 하지 못한 의무에 대해 죄책감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애들 공부시키고 먹고살기 바빠서 내가 사람 노릇을 못하는구나."그렇게 말하고는 울먹였다. 참으로 선량한 분이구나. 시누이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도리에 대해 회의를 품고, 사람에 대해서는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루시퍼의 사촌쯤 되는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약하기까지 했다. 나보다 우월한 것과 비교되는 느낌, 강요되는 죄의식 같은 것, 나는 왜 착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좋아할 수 없는 걸까? 내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에게서 때로 이질감을 느꼈다. "요즘 불경기라 장사가 잘 안 돼."시누이는 몇 년 전, 경기가 좋을 때 한 곳이던 가게를 두개로 늘렸다. "가게 하나는 정리하려고 내 놨어."시누이의 얘기를 들어보면 미국이라는 곳은 신용상태가 좋으면 무엇이든 대출금으로 해결하는 것 같았다. 집을 지을 때도 집값의 거의 80%에 육박하는 돈을 대출받아 다달이 이자와 원금을 상환한다는 거였다. 말하자면 월부인생이었다. 미리 쓰고 벌어서 갚는 구조. 모든 인생이 할부로 산 집과 물건들의 비용을 갚는데 소모되는 사회. 끊임없이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사라고 부추기는 곳. 수입원이 없으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곳이라 했다.

2007-05-07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안방과 거실, 건넌방과 코딱지만한 작은방 창에 걸려있던 커튼까지 몽땅 벗겼다. 커튼의 미세한 올 사이에는 겨울동안 소리없이 내려앉은 먼지가 촘촘히 박혀있었다.보통 때 같으면 세탁기에 가루세제와 함께 넣고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간단히 처리될 일이었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커튼을 주물럭댔다. 크고 작은 동그란 비누 거품이 맨 살의 팔뚝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터지곤 했다.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커튼을 빨고 나니 손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커튼을 세면기에 걸쳐두고 찬물을 받아 손을 집어넣었다. 손이 아리고 가려웠다. 생각해보니 글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그랬다. 언제까지 얼마만큼의 글을 써야 한다는 게 정해지면 책상에 앉기 전에 자동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영화를 보러간다든지,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든지, 하다못해 미용실에 가서 머리라도 손질을 했다. 마감일에 대한 압박감이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라 와야 비로소 책상에 앉게 되었다. 그게 지금은 세탁이나 청소나 밑반찬 만드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난번 원고를 쓸 때는 온 집안을 들어내고 대청소를 했었다. 소파와 장롱아래는 물론, 신발장을 뒤져 오래 묵은 냄새와 먼지를 일거에 추방했다. 신기한 것은 평소에 그런 식으로 일을 하고 나면 몸살을 앓든지, 힘이 들어 며칠은 쉬어야 했는데 그런 후유증이 없었다. 그러다 보면 글을 쓰는 스위치가 자동으로 올라가 전기가 흘렀다. 마치 강을 건너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는 과정 같았다. 강기슭에 대놓은 배에 오르기 전에 먼 길이라면 식량과 물을 싣고, 가까운 거리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어느 쪽이라도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받게 되는 긴장감이 원인이 되는 모양이었다.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손으로 김칫거리를 다듬으며 나는 풋웃음을 날렸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이름도 없는 작가 주제에 유난을 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작업에 임한다는 묘한 기대가 온몸에 스멀거리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일을 한다는 것, 내가 하는 일에 어떤 평가가 내려진다는 것, 그런 기대는 일상에 파묻혀 방향도 없이 떠내려가는 생활에 활기를 부여했다. 이른 봄, 마른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연둣빛 순처럼, 투명한 빛이 몸속에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기대하는 만큼의 크기로 그 반대쪽에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그것은 붙어있었다. 세상의 어떤 일인들 그렇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내 삶이 혼돈의 어둠속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빛 속으로 걸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공자는 삼십에 뜻을 세웠다지 않는가. 역시 성인의 보편의식은 탁월했다. 불혹의 마흔이 되기 전에 내게 이런 기회가 온 것이 다행스러웠다. 뜻을 조금 더 일찍 세웠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비관하지 않기로 했다. 미서와 그리고 내게 자극을 주었던 명함들, 특히 마음 한 귀퉁이가 허물어 내리기 전에 벽을 쳐준 선배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좀 더 일찍 웅크리고 있던 동굴 속에서 빛 속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도 생겼다. 무기력하게 보낸 세월이 아까웠다. 양념을 버무린 김치를 통에 넣고 냉장고에 넣었다. 이것으로 통과의례는 끝이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발동이 걸리면 만사형통이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이었다. 깊은 병에서 회복된 사람처럼 약간의 피로감을 동반한 의욕이 창작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들 듯 온 몸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저녁 무렵, 퇴근한 남편이 현관을 들어섰을 때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내일 공항에 나가야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국에서 남편의 누이, 그러니까 내게는 손위 시누이가 도착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우리 집에서 머물기로 되어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정해진 일이었다.

2007-05-0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0>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우리는 중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다. 결혼 한 이후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이십년이 넘는 세월은 만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뭔가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연애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인생이 심심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게다.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으로 째려보며 신문을 하면 입에서 거미줄이 줄줄 쏟아질 것을 알았지만 나는 캐묻지 않았다. 나의 억측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미서가 스스로 말을 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는 게 심심해. 그 말은 서른과 마흔 사이에 서 있는 우리에게 보편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독특한 것 같지만 공통적인 요소도 많았다. 나이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열정이란 어떤 것에 반쯤은 미쳐야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이 아니던가. 공포영화를 볼 때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잔혹한 장면을 기어코 훔쳐보는 것과 같은 심정. 말할 수 없이 두렵지만 괴물과 맞붙어 보고 싶은 열망. 언젠가 본 영화가 떠올랐다. 일상에서 벗어난 두 여자. 자신들의 생명의 원천이 자유에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 델마와 루이스는 일상으로 복귀하길 거부했다. 그들이 차를 몰고 돌진하는 곳은 천길 절벽,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허공을 나는 자동차는 무엇을 말하려했을까. 그것이 끝이 죽음이라고 한다면 그만인 스토리였다. 안전과 행복이 보장된 가정을 버리고 뛰쳐나온 여자에 대한 응징. 그것뿐일까? 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두 여자의 눈에서 순간과 오버 랩되는 영원을 느꼈다면 비약인 걸까. 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사건들. 일상이 없다면 생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비교할 곳이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감동을 받았지만 낭떠러지로 돌진하고 싶지는 않았다. 순간순간 충실히 살고 싶지만, 인생을 산산이 부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생의 절반을 지나 왔지 않은가. 미서라면 혹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표지를 얻는 것, 내 존재가 최소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하는 것. 명성이나 권력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허기진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이 필요하듯이 내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관심이었다. 미서라면 이런 나를 속물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자기 확신이 없는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오늘은 검은 안경으로 영혼의 창을 가리고 나왔지만 미서는 영혼이 자유롭다고 하는 축에 속했다. 학창시절에는 자유와 신념, 이상과 영혼의 세계를 넘나들며 경계선 밖의 인간이 되고자 기를 썼다. 금 안에 편입되는 것에 모욕까지 느꼈던 치기만발 했던 생의 어느 시기를 떠올리자 가슴 한 편에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되면서 거리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달콤한 공기로 가득 찬 봄, 길 위에 늘어선 수많은 차의 꼬리에 붙어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지 못했다. 미서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차의 방향을 바꾸었다.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미서가 나를 지하철 역 부근에 내려줄 때까지 나는 전화속의 남자가 누구냐고 묻지 못했다. 누군데 가장 친한 친구와의 저녁식사를 재활용 페트병처럼 내팽개치고 달려가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2007-05-0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9>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언젠가 서점에 왔던 때가 아득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먼발치에서 첫사랑의 소년을 본 것처럼 몸속의 피가 급하게 돌기 시작했다. 예전과 달리,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참고서 같은 수험서들이 터를 잡고 있었지만, 천장까지 들어찬 책을 보는 것만으로 두뇌에 포만감이 느껴졌다.대형 서점에는 속물근성이 깔려있는 게 아닐까. 이곳에서 어슬렁거리는 당신과 똑같이 나도 지적인 부류에 속한다. 이성이 창출한 지식을 인정하는 것, 그런 활동과 결과물에 흥미를 느끼는 것, 타인에게 무관심을 가장한 사람들의 눈빛, 애써 옆 사람을 무시하는 과장된 몸짓, 이런 사소한 것들이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인체생리, 이거면 될까? 다른 사람이 쓴 만화도 참고하는 게 좋겠지?""우선 한 번 훑어보고 감 잡은 다음에 다른 책이나 자료를 보는 게 좋아.""소설코너에 가볼까?"내 말에 미서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너 눈 빼면 시첸데 왜 가리고 다녀? 쌍꺼풀은 있으니 수술한 것도 아닐테고."나는 책을 들고 계산대에 서 있는 줄 뒤에 붙었다. 두세 사람밖에 없어 계산은 금방 끝났다. 우리는 계단을 통해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결혼하고는 왜 소설 안 써?""너무 편해도 글이 안 써져.""핑계야. 글은 편해야 써지는 거야. 날 보면서 그런 말이 나와."자동차는 지하의 입구를 통과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혼은 또 뭐야?""소설이 안 써져서.""미친년. 저녁 먹어주고, 김 이사가 날 버렸네 어쩌네 팔자타령 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냥 들어가야겠다."도로는 올 때보다 더 혼잡해져 있었다. 이런 길을 뚫고 시내 한 복판까지 책을 사러 나온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인 것 같았다. "혹시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사보는 게 교통 체증과 관계있지 않을까?"미서가 쿡 웃음을 터뜨렸다. "인터넷도 있고 전화로 주문하는 서점도 있어. 말도 안 돼." "겨우 웃었네. 벌써 폐경기야? 무슨 문제 있어?""사는 게 심심해."미서는 감정에 충실했다. 솔직한 게 미서의 좋은 점이었다. 나는 솔직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쑥스러워서, 털어놓기 창피해서, 상대방이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서 나를 감출 때가 있었다. 그런 내가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서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미서와 나를 가르는 재능의 차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솔직함에 대한 용기가 아닐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결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니까 말이다.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벌거벗은 나를, 미서처럼 밝고 투명하게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무릎 위에 놓여있는 책이 든 종이봉투를 힘껏 움켜잡았다. 자동차가 마치 느릿느릿 벼랑 끝으로 달리는 것 같았다.

2007-05-02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8>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저녁 먹고 들어갈래?"커피숍을 나오면서 미서가 말했다. 나는 선글라스로 반쯤이나 가려진 미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오후세 시를 넘었을 뿐이다. "김 이사 또 해외출장이야?"미서는 내 말에 대꾸도 않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저녁은 곤란한데." "아직도 꼬박꼬박 정시 퇴근이야?"미서가 자동차 리모컨을 누르자 철컥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워낙 모범생이잖아. 김 이사하고 그이하고 반씩 섞어도 좋을 텐데."나는 안전벨트를 당겨 고정시켰다. 차 안의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미서는 차 유리문을 내렸다. "서점으로 갈까?"내가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미서는 좌측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었다. 미서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나온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눈을 보호해야할 정도로 태양이 강렬해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이제 겨우 봄의 초입일 뿐이었다. "어떤 책 봐야 해?""몸과 우주에 대해서야.""땅과 하늘이라. 거창하구나. 남편은 뭐래?""누군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내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봐. 열심히 해보래. 그래서 미서 너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래.""유능한이 아니라, 유명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로 나가는 거리는 복잡했다. 꼬리를 무는 차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팔차선의 넓은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미서와 나는 도심 한 복판에 앉아있는 꼴이었다. 미서는 내렸던 유리창을 다시 올렸다. 짙은 색으로 선팅을 한 유리를 통해 보이는 바깥은 어둡고 밀도 높은 공기로 가득 차 버리는 것 같았다. "든든한 우군이네. 하긴 그동안 네가 한 일에 비하면 널 업고 다녀도 돼.""우군?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내가 숨 막히는 걸 거야.""남편만 보고 있니?""내가 애니? 그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야." "자기 아내가 자신만 쳐다본다고 생각한다. 이쪽은 아닌데? 그럼 남편이 널 보고 있는 거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가 저녁 먹자고 해도 거절한다."미서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러시아워가 아닌데도 차가 많이 밀리네. 이 시간에 다들 어딜 가는 거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 차선에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머리를 드밀었다. 미서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내 몸이 휘청 앞으로 쏠렸다. 놀랐는지 미서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경음기를 내리쳤다. 짧게 비명을 지르듯 경적이 울렸다. "나 이혼할까 봐"나도 모르게 고개가 미서 쪽으로 돌아갔다. 여자 문제? 아니야? 왜? 라고 튀어나오는 말을 나는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2007-05-01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7>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정신희가? 왜?" "지난번에 원고 보낸 적 있었잖아. 별 쓸모가 없었는지 가타부타 말도 없더라고.""기획의도에 안 맞았겠지."미서의 말은 위안이 되었지만 그것은 오랜 친구로서의 편들기였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작은 출판사에 들어갔다. 출판사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하는 일은 대부분 사보 편집대행이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3년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시기였다. 공모에서 번번이 미끄러졌지만 언젠가 하는 희망이 있었다. 최종심까지 올라가서 막판에 떨어지곤 했기 때문에 내년에는 기필코 라는 자신도 있던 때였다. 틈틈이 써낸 만화스토리는 곧잘 팔렸다. 내가 쓴 만화스토리는 주로 유명 만화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등단하지 않은 무명이라 원고료가 등단 작가의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희망이라는 단어 위에 전개되었다. 언젠가는 정식으로 등단해서 내 이름이 붙은 책이 나온다는 기대는 삶의 커다란 활력이었다. 어쩌면 그런 낙관이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내 농담에 즐거워한다고 내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 착각하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모든 일에 관대했다. 봄이 오면 여름이,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삶에는 골짝과 언덕이 이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늘 여름처럼 푸른 청춘이 이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선배가 내게 일을 주라고 했나 봐. 좀 찜찜하네."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 일 시작할 생각이잖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서는 커피를 마시는 대신 잔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응석부려 얻어낸 일거리 같아 떳떳하지가 않아. 지금 생각해보니 정신희가 나를 대하던 태도도 걸리고 말이야.""학습만화라 어차피 무명작가에게 맡길 텐데 뭘. "미서와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함께 다닌 터라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었다. 그런데 새삼 아무런 의미도 담기지 않은 무명작가란 말이 가시처럼 걸렸다. 십년의 세월이 우정을 갈라놓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게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나 정체성의 혼란인가? 나는 대체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사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아니면 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제기랄, 나는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미서는 대학생 때 문예지에 소설로 등단했다. 졸업도 하기 전에 등단한 터라 많은 사람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미서의 이름에 사람들은 주목했고, 행동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물론 미서의 재능은 출중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미서의 재능을 더 빛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사람은 누군가 보여주는 사랑에 고무되어 더욱 번창하는 것 같았다. 평론가들은 미서의 이름을 들먹여주고, 소설이 던지는 것들에 귀 기울여주고, 감동적이라거나 문제작이라고 써댔다. 미서는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결혼하기 전까지 미서의 이름이 인쇄된 소설집이 다섯 권이 출판되었다. 미서는 흔히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부를 때 말하는 것처럼 '이름 있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미서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부러운 마음 밑바닥에는 나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데 하는 낭패감이 녹아 있었다. 그뿐이었다.

2007-04-30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6>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오월의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부드러운 바람 속에 장미향이 섞인 듯 향기롭다. 어제 저녁에는 심술궂게 바람이 불었고 비까지 내렸다. 그래서 우울한 하늘처럼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새로운 해가 떠오르니 바람도 기분을 바꾼 모양이다.콘크리트와 유리 그리고 철골로 된 도심지에 살아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연에 속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씨에 따라 기분이 오락가락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건물 앞 손바닥만한 작은 공간에 키 낮은 나무가 있었다. 유심히 보니 새끼 손톱크기의 빨간색 꽃망울들이 앙증맞게 달렸다. 금방이라도 통통한 꽃봉오리가 속을 열어젖힐 것 같았다.네모난 플라스틱 패찰에 꽃사과라고 쓰여 있다. 이름표를 달고 있는 꽃나무. 자신의 이름을 보여줌으로써 존재를 인정받는 나무. 찻집의 유리문을 밀며 내 가슴팍에도 이름표를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한 현재의 삶, 지리멸렬한 일상, 열정이나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사물. 이 모든 것에 대한 원인은 너무 오래 이름 없이 살아온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서는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파스텔 조의 풀색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 "일찍 나왔네.""날씨가 좋지."미서는 창 쪽으로 향했던 몸을 돌려 정면으로 앉았다. "선배는 출장 갔더라.""무슨 일 맡았어?"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와서 탁자에 놓았다. 찻집의 통유리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빛과 부드러운 커피 향이 어우러졌다. "학습만화 스토리 써 달래. 초등학생용으로 5권 낼 예정이래."나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미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기분 좋게 술 마신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중간이 통째로 필름이 끊어졌어. 다음 날 아침에 눈 떠보니 집이고, 지갑에는 카드로 지불한 술값 영수증이 들었고. 집에 온 기억은 통 없고 말이야."미서는 쿡쿡 웃었다. "너 그날 선배 붙잡고 운 것 기억 안 나?"나도 모르게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가 꿀꺽 목구멍을 넘어갔다. 내가? 선배를 잡고. 울어? 입 밖에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말보다 희미한 영상이 먼저 떠올랐다. 조명이 흐릿한 화장실 앞 복도. 누군가 내 등을 토닥이는 촉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처럼 징징거리는 나이 든 여자. 그래 통째로 기억이 미끄러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창피해서 군데군데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에 불과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고, 지금 내가 아무리 부끄러워한들 아무런 일도 바뀌지 않는다. 은행창구의 번호표처럼 땡땡 소리를 내며 차례로 기억이 얼굴을 디밀었다. "선배가 나 때문에 이번 일을 기획한 것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좋겠는데.""벌써 전부터 스토리작가를 물색하고 있었어. 5권 다 쓰기로 했어?""두 권만 해 달래. 나머지는 검증된 작가에게 맡겼나 봐. 정신희는 별로 날 신뢰하는 눈치가 아닌 것 같더라."

2007-04-29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5>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선배가 이형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이형수는 툴툴거리며 선배가 내미는 술잔을 받았다. "형 때문에 내가 여지껏 총각신세를 못 면하는 거야. 나 선영씨 행복하게 해줄 자신있어."농담인줄 알면서도 듣기 좋았다. "선영이 결혼 십년 차야. 이혼할 계획이나 전망도 없고."미서가 발로 차듯 내뱉었다. 이형수는 약간 놀라 나와 미서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독신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미서가 애인 만들기 운운해서 이형수의 추측에 도장을 찍은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결혼한 것을 후회할 뻔 했다. 이형수는 재차 전의를 불태웠다."골키퍼 있다고 공 안 들어가?"하긴 그랬다. 문제는 결혼과 축구가 얼마만큼 공통점이 있는지에 달렸다. 선배가 내 잔에 술을 따라줄 때 나는 축구와 결혼에 대해서 생각했다. 공격수는 골대에 공을 차 넣으려고 전속력으로 공을 몰고 달리고, 수비수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이리저리 공을 돌리는 와중에 몸싸움도 벌어지고 태클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어쨌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다. 그러나 정작 선수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는다. 그래서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고 경기는 끝난다. 승자만 남는 경기.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과는 관계가 없다. 승자만 남는다면 결혼제도가 지금껏 존속해 왔을 리가 없다. 힘으로 치자면 남자가 우위니까 승자는 늘 남자 쪽이다. 결과가 뻔한 그런 결혼을 누가 하려하겠는가. 내가 모르는 게임의 법칙이 있는지 모르겠다. 스포츠라면 워낙 젬병이다. 결혼은 승자와 패자가 없는 스포츠와 가까울 것 같았다. 열심히 생각해 보았지만 결혼과 비교할 만한 경기는 생각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물안개가 낀 것 같다. 갑작스럽게 취기가 돌았다. 내가 처한 상황이 우습다. 늦은 밤, 술자리라니. 뭔가 억제할 수 없는 유쾌함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난 또 형이 숨겨 논 여잔 줄 알았지. 이런 미인을 이제야 등장 시키다니."김상우가 안주를 집으며 말했다. 이렇게 예의바르고 인간성 좋은 모임에 이제야 등장한 나도 억울했다. 이런 게 밤의 세계인가. 아니면 휴식의 시간. 뭔가 독을 뿌려놓은 공기가 떠도는 것 같았다. 많이 들이마시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매력적이라 거절할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독.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시큼한 냄새가 사정없이 코를 밀고 들이 닥쳤다. 울컥 속엣것이 올라왔다. 숨을 멈추고 속을 가라앉혔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약간 일그러져 보였다. 돌을 던진 호수 표면처럼 벽과 천장이 일렁였다. 나는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걸어 나왔다. 멀리 화장실 표시가 보였는데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잠시 벽을 집고 서서 눈을 크게 끔벅였다. 누군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괜찮니? "선배였다. "그럼요. 아무 문제없어요."선배는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선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마음속으로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정확하게 발을 내디뎠다. 머리도 몸도 마음도 휘청거렸다. 아무래도 누군가 술에 독을 푼 모양이었다. 선배는 나를 화장실 앞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여기서 기다릴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의 손을 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걸터앉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오줌을 누면서 울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몰라서 울었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울었다.

2007-04-26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4>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전병헌입니다."듣기 좋은 바리톤이었다."만화가야."선배가 덧붙였다. 전병헌이 식탁 위로 손을 뻗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두툼했지만 섬세했다. 예술가의 손이라고 생각했다. "만화가는 무슨. 되는대로 다 합니다. 먹고 살아야죠."전병헌은 잠깐 나를 빤히 쳐다보았는데 눈빛이 강렬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개의 물체 같은, 뭐랄까 야생의 느낌과는 다른 분위기,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부족한 표현력에 잠시 절망했다. 그러나 그가 명함 나부랭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잠깐 절망하게 만든 전병헌이 싫지 않았다.김상우는 자신을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도는 보따리장수라고 소개했다."뭘 팔아요?"저절로 웃음이 나왔다."아주 오래 전에 죽은 신들을 진열해놓죠.""죽은 신들은 어디서 사 와요?"김상우는 들고 있던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내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올라가며 눈을 치켜떴더니 김상우는 다시 집게손가락을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하늘, 그리고 땅?""오케이. 에이 플러스."김은 박사논문을 쓰는 중이라고 말했다. "근동 신화전공이죠. 지금은 수메르신화인 길가메쉬 서사시를 강의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번역서를 낼 예정입니다. 선영씨의 계획은?"김상우가 근엄한 선생처럼 내게 물었다. 미서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선영이 과제는 애인 만들기야." 미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미서의 말은 핵심을 찌른 것처럼 부정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미서는 가끔 너의 욕망은 바로 이것 하고 나의 무의식을 들춰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카로움이 미서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좀 심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더구나 선배가 있지 않은가. "저는 어떻습니까? 다정다감한 성격에다 연하남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까."자신이 호적상 완벽한 노총각이라고 한 이형수가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움찔했지만 매몰차게 손을 뺄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형수의 돌발 행동은 익살스러웠고 유쾌했다. 테이블 위로 이형수에게 손을 내 맡긴 채 나는 엉거주춤 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고. 이런 모습 처음이야. 또 다른 내가 말했다. 얼굴의 피부 한 꺼풀 아래층이 빨간 능금처럼 달아올랐다. "우리 둘이 나갈까요?"이형수는 당장이라도 나를 데리고 나갈 것처럼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 거렸다.

2007-04-25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3>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선배의 뒤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식당이었다. 나는 아이처럼 선배의 곁에 바싹 붙어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곳이 서툴렀다. 믿기 어렵겠지만 결혼을 한 이후, 식당이나 찻집에 간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퇴화하기 마련이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인간은 워낙 사회적 동물이라지 않는가. 처음 이 말을 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정치적 동물이라 했다고 한다. 그것을 후세에 누군가 정치를, 사회로 번역을 해서 지금 우리 모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선배가 알려준 것이다. 사회적인 능력과 달리 나의 기억력은 아직 건재한 것 같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내 원고에 대한 선배의 의견이나 계획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외출을 한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두달 전, 미서가 전화를 해서 선배가 원고를 찾고 있다는 소스를 주었다. "선배네 출판사에서 만화 팀을 새로 만든대"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미서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어디 아프니?"전기 주전자에 스위치를 올리며 물었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서가 대답했다."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셨더니 그래. 원고 안 써볼래?""결혼한 후는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는걸."미서에게 느려터진 목소리로 쓴다고도 그렇다고 안 쓰겠다는 것도 아닌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먼지 뒤집어 쓴 노트북을 꺼내 놓고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만화 스토리를 쓰는 게 아니었다. 폭발하듯 나는 내 속의 무언가를 자판 위에 토해 놓았다. 똑같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 무기력하게 가라앉은 삶이 떠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게 없는 인생. 한 번도 빛난 적이 없었던 날들. 도대체 나는 무엇때문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이 자판위에 머무는 동안 생각은 흘러간 시간을 헤엄쳐 다녔다. 오래 전에 보았던, 기억이 희미해진 영화처럼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토록 허망하게 느껴지는 날들을 별 생각없이 살아온 게 신기했다. 남편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을 즈음 원고가 끝났다. 원고를 보낸 날, 남편이 내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원고때문에 한 달 동안 나를 내팽개치다니. 용서 못해."선배의 출판사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신들린듯 원고를 써댔을까. 선배의 이메일로 원고를 넣을 때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적은 연애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원고에 대해서 선배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서운했다. 그리고 의기소침해지려고 했다. 원고가 좋았다면, 그래서 출판할만한 물건이었다면 아마도 만나자마자 말했을 것이다.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바랄만큼 치기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결혼 후, 그러니까 거의 십년 만에 쓴 글이었다. 혹평이라도 좋았다.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조금 쓸쓸했다.

2007-04-24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2>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야, 이게 몇 년 만이야. 여전하구나." 선배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선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순식간에 20대로 날아갔다. 갑자기 얼굴에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쳤고, 귀가 빨갛게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잽싸게 과거로 날아가는 내 발목을 잡아챘다. "선배도 하나도 안 변했어요. 그동안 소식은 듣고 있었어요."평정을 찾은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이 못 말리는 이중성. 예전의 나였다면 어림도 없을 말이 술술 잘도 흘러나왔다.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은 아줌마였다. 세월은 어떤 것은 사라지게도 하지만 주는 것도 있었다. 예전보다 선배를 대하는 게 편해졌다. 얼굴이 두꺼워진 것인지, 몸이 둥그스름하게 변한 선배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 중요한 회의라서 일찍 마칠 수가 없었어.""저녁 사주세요. 배고파요."선배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당근. 오랜만인데 술 한 잔 해야지." 선배는 옆 사무실의 문을 열고 서서 누군가를 향해 손짓을 했다. 좀 전에 내게 커피를 갖다 준 여자가 가방을 들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선배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여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김선영. 내 대학후배야."나를 쳐다보는 여자의 눈에 희미한 빛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 그 원고 보내신 분? 저는 정신희예요."여자가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에디터, 정신희, 여자의 사회적 위치, 선배와의 관계, 대략적인 지적, 경제 수준, 모든 게 축약되어 들어있는 상징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줄 게 없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의 세계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누구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를 상당히 위축시켰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여자를 고용하고 있는 사장의 대학후배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너무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혹스러웠다. 선배가 중간에 없었더라도 여자와 나를 비교했을까. 나는 의식적으로 어깨를 펴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미서도 나올 거야." 선배의 말에 나도 모르게 선배를 쳐다보았다. 아침에 통화를 할 때도 미서는 내게 저녁에 선배와 약속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으로 불안이 검은 리본처럼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어른이다. 무늬만 성인이었던 대학 시절과는 달랐다. "통화했어요?"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와 단둘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던 기대가 무참히 깨져버렸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는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남몰래 기다린 은밀한 시간은 내게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정신희, 그리고 미서까지 나타난다니. 역시 낭만이란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처럼 환영일 뿐이었다. 유부녀가 잠시 불순한 마음을 품은 죄였다. 나는 죄의 대가를 달게 받아들였다. 다다를 수 없는 욕망은 빨리 접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갈등을 수월하게 정리하는 내가 대견스러웠다. 그것이 포기라 하더라도 어쨌든 성숙한 태도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2007-04-23 경인일보

숨쉬지 마세요<1>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창밖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본다. 세련된 외관을 가진 현대적인 고층이 즐비하다. 시내 중심가라 역시 다르다. 삼십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니 어쩐지 우쭐한 느낌이 든다. 내가 갑자기 중요한 존재가 된 듯하다. 나는 공중에 떠있는 이곳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터무니없었다. 잠시 내 처지를 잊고 몸이 서 있는 곳에서 착각에 빠진데 불과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 보는 것은 어쨌든 기분이 좋은 일이다. 사물이 실제보다 작게 느껴지면 한결 자신감이 솟는다. 자신의 인생을 오른 손에 틀어쥔 사람은 모를 것이다. 코끼리가 개미를 이해할 수 없듯이. 여직원이 갖다 준 커피가 다 식었다. 나는 지금 선배를 기다리는 중이다. 약속은 미리 되어있었다. 오후 5시 무렵이 좋겠다고 한 건 선배였다. 약속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도착한 나는 예의를 지키느라 선배의 출판사가 있는 건물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의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공원에서 어정거린 시간까지 합하면 한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실제 내가 기다린 시간은 한 시간이 넘는 셈이다. 한 시간이라니, 선배에게 원고를 보낸 후, 한 달 내내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그러니까 내가 기다린 시간은 모두 합쳐 한 달하고도 한 시간이 넘는다. 그런데 여전히 선배는 회의 중이다. 탁자위에 놓인 신문도 뒤적이고 요즘 유행하는 비타민, 상큼한 음료처럼, 이런 식의 제목이 붙은 자기계발서류의 책을 훑어보았다. 이상도 희미해지고 신도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엇이건 믿고 의지할 거리를 찾는 모양이었다. 문득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대가 행복했다. 십년도 훨씬 더 넘은 시간의 저쪽. 대학에 갓 들어온 풋내기였던 내게 동아리 회장의 말은 보석이었다. 나는 교주의 말씀이 땅에 떨어질세라 치마폭에 받아 백향목으로 짠 나무 궤에 보관하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미서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 책에 다 있어. 선배의 말이 아니야."어쨌거나 상관없었다. 선배의 음성으로 내 귀에 들어온 말은 선배의 생각과 다름없었다. 선배가 술 마시다 사레가 들어 캑캑거리는 모습도 황홀하게 보일 정도였다. 남의 말을 옮기는 게 무슨 대순가. 내게는 변심한 애인이 마지막으로 해주는 키스처럼 감동적인 것을. 하늘의 별 대신 선배는 지금 무엇을 좇는 것일까? 선배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 제목처럼 성공과 욕망을 하늘에 매달아 둔 것일까? 나는 뒤적거리던 책을 주섬주섬 모아 책꽂이에 도로 꽂아두었다. 고층 건물 뒤로 드리워진 하늘이 어두워졌다. 멀리 남산 타워의 불빛이 영롱해지기 시작했다. 짧은 해가 어느새 도심의 건물 사이로 가라앉고 있었다. 미서 결혼식에서 선배를 보았으니까 사년 전이었다. 미서의 옆 자리에 선배가 아닌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결혼식장에서 얼핏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기다릴 것을. 선배는 그때도 독신이었고, 지금도 혼자였다. 인생이란 참고 기다리고 기회를 노리는 사람에게나 무언가를 주었다. 미서가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선배는 어느 새 사라진 후였다. 선배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다. 시계가 여섯시를 가리켰고, 어둠이 내리는 창밖의 무게와는 달리 내 마음은 가벼워졌다. 선배가 무대에 등장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백조처럼 하얀 발레복을 입고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흑마를 탄 왕자가 총알처럼 날아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2007-04-2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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