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153)

조용한 귀국 ⑪“그러면 안 되지. 하루 상관에 10퍼센트라니…그래, 얼마래? 오늘 지불할 돈 말이야?”“17만 달러요.”“17만 달러?”“네.”“그런 돈을 왜 준비해 놓지 않고 지불 약속을 하셨지? 대니 라일러 장군답지 않구나.”“글쎄요. 전 심부름만 맡았을 뿐이니까요.”“그래라…계좌번호 말해라. 텔레뱅킹으로 보내 줄 테니까.”박준호는 재빨리 그 자신의 통장 번호를 적어 리타 라일러에게 내민다. 그녀가 통장 번호를 들여다보다 말고“이건, 대니 라일러 장군 명의가 아니잖니?”“네, 제 통장 번호예요. 요트를 제 이름으로 계약하셨거든요. 아버지께서는 공인이시라…함부로 이름을 남발 할 수 없잖아요?”“그래, 알았다.”박준호는 대사관저를 나오자마자 텔레뱅킹으로 들어온 17만 달러를 출금하여 다른 은행 통장을 개설하여 입금시킨다. 그리고 여행사로 직행한다. 서울행 티켓을 사기 위해서다. 물론 왕복 티켓이다. 런던으로 돌아 올 표도 오픈하여 끊는다.박준호가 예상하지도 않았던 스카이 홍에 대한 모종의 정보를 얻게 된 것은 바로 그 여행사다. 박준호가 보름 가까이 미친 듯이 스카이 홍을 찾아 한국 식품 전문점이며,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장원이며, 여행사며, 대사관이며, 무차별 방문하고 다니는 모습을 어느 여직원이 눈 여겨 기억하고 있다가 박준호가 나타나자 귀띔부터 하는 것이었다.“딸과 함께 여행하는 젊은 부인을 찾는다고 했죠?”“네, 그런데요?”박준호가 와락 덤비듯이 대답한다.“여자의 성씨가 홍씨라고 했나요?”“그래요!”박준호는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스카이 홍이 데리고 있었던 딸을 거론하기 위해 재빨리 “그 딸 성은요…” 운을 띄우는데, 여행사 젊은 여자가 더 빠르게 “김씨구요”라고 대답해 버린다.“딸이 김씨라구요? 그러면 맞습니다. 거의 틀림없어요.…그 젊은 부인 키가 크고, 하얗구요, 머리는 생머리구요….”허겁지겁 말하는 표정이 더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박준호가 덧붙인다.“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듣느라고 늘 리시버를 귀에 꽂고 있구요.”여직원이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다 맞네요. 그 부인…서울로 가셨는데요.”“서울이요? 언제죠? 언제 서울로 간 거죠?”그녀가 티켓 발부 대장을 대조하며 입을 연다.“지난 달 16일 저녁 비행기니까, 꼭 보름 전이네요.”“지난 달 16일이라구요?”그렇다면 벤네비스 산 중턱 산막에서 밤을 지낸 그 이튿날이 아닌가.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오자마자 비행기를 탄 것이다. 박준호가 서둘러 묻는다.“그 여자 이름이 뭐죠?”“홍주리예요”“홍주리?”“딸은 김은경이구요.”따지고 보면 박준호가 훤히 닦인 고속도로 같은 옥스퍼드와 런던을 버리고 황무지나 진배없는 서울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서승돈과의 만남 탓이다. 물론 원인이야 그렇다 쳐도 런던을 떠날 결심을 한 배경에는 그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원인 제공 이외의 어떤 역할도 서승돈은 하지 못했다.그러니까 런던을 포기하는 일에 대해 그와 의논한 적이 없고, 그의 자문을 받는 일은 더더구나 없다.오죽하면 아버지가 그 어른을 지지하고 나섰다가 군사 정부로부터 제거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주인공 노 정치인의 존재까지 박준호가 과감히 묵살해 버렸겠는가.

2006-08-0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2)

조용한 귀국 ⑩“하긴 그렇겠구나. 그래, 무엇보다 입학이 중요하지. …하는 수 없구나.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부인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축하드린다는 말두요.”“그러지 뭐.”박준호는 비호같이 집을 빠져나온다. 잘못하다가 대니 라일러와 그를 배웅하러 나온 어머니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조급증이 박준호로부터 더욱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게 한다.그러나 무리하게 자전거로 런던까지 갈 생각은 없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박준호는 헤이스팅스 시내로 진입하자마자 지하철역에서 자전거를 과감히 버린다.박준호가 킹즈로드에 위치한 미 대사관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다. 다행히 대니 라일러의 여동생인 리타 라일러 여사가 대사관저를 지키고 있다.언제나처럼 그녀는 외출 준비를 완벽히 끝낸 차림이다. 외교관 부인답게 투피스 정장이다. 연보라색 바탕에 보라색 꽃무늬가 박힌 실크다. 박준호는 맑은 피부에 실크처럼 잘 어울리는 소재도 없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어쨌거나 그녀는 눈부시다. 여전히 박준호를 뇌쇄시키는 샤넬 넘버 파이브 향수의 여적이 은은히 번지고 있었고, 그녀가 미소 지을 때 드러나는 하얀 이와 토마토 색의 건강한 잇몸이 보는 사람의 느낌을 들뜨게 만들곤 한다.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대할 적마다 저 입술에 키스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리타 라일러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말겠어라는 섣부른 객기도 마찬가지다.황홀의 극치 같은 향수의 여적과 혼합된 그녀의 체취도 오늘은 마술이 되지 못한다. 박준호 아랫도리를 기습하여 마비 상태에 이르게 하는 마술. 오늘은 그 마술에 위력이 없다.물론 스카이 홍 때문이다. 흡사 호밀밭을 휩쓰는 광풍과도 같은 그녀의 강력한 이미지가 리타 라일러도, 시루코 여사도, 톰 라더 부인도, 하다못해 마거릿까지 깡그리 지워 버리거나, 거대한 흰 천으로 싸 버린 듯 그 존재를 덮어 버리고 있다.박준호는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얻어먹으며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아버지께서 오늘 워싱턴 회의에 가시면서 심부름을 시키셨거든요.”“그래, 나도 들었어. 워싱턴 회의 가신다는 얘기. 그런데 무슨 심부름이니?”“아버지께서 요트를 계약하셨대요.”“요트를 계약했다구?”“이번 주말에 타신대요. 브라이튼까지….”박준호가 치즈 케이크에 은제 포크를 찌르며 말을 계속한다.“미처 은행 계좌를 트지 못했다고, 돈을 빌려 달라는 말씀을 드리랬어요.”새빨간 거짓말이다. 박준호는 의도적으로 리타 라일러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전화 안 하셨어요? 전화 드린다고 하셨거든요.”박준호가 생각해도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하나 일단 내뱉어져 버린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거짓말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인 속임수를 써야 한다. 그녀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말한다.“전화 없었는데?”“아침 비행기 타시느라 바쁘셨나 봐요.”“그래… 돈을 빌려달라구?”“예, 오늘 입금하지 않으면 10퍼센트 추가 비용을 물어야 한대요.”

2006-08-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1)

조용한 귀국 ⑨실제로 박준호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돌아온 뒤부터는 톰 라더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다. 아니, 쳐다보기가 힘들다. 한데, 지금은 그게 아니다.“야, 너 우리 집에 한 번 안올래?”톰 라더의 말에 “네?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박준호가 반문한다.“우리 집에 널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다.”톰 라더가 더 큰 소리로 말을 잇는다.“다이애너가 널 집에 초대해서 만나게 해 달라고 성환데, 언제쯤 시간 나니?”“요즘은…… 좀 바빠서요.”박준호도 머리를 긁적거린 다음 말을 계속한다.“다이애너 학교 잘 다니죠?”“그으럼.”“부인께서도 잘 계시구요?”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질문인데도 음성이 떨리고 있음을 박준호 스스로 느껴 마지않는다.“잘 있구말구.”톰 라더가 대답한다.휴- 박준호는 비로소 심호흡을 한다. 만약 뭔가 의혹을 갖고 있다면 결코 저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잘 있고말고라고 다정하게 말해 줄 리 없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박준호는 그날 밤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속삭이던 음색에 코드를 맞춘다. 실제로 그것이 소곤소곤, 마치 창 밖의 빗소리처럼 들리는 것 같다. 톰 라더 부인의 목소리다.“괜찮아. 그것은 네 잘못이 아냐. 너 들판에 혼자 서 있을때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젖지 않을 방도가 있니? 대지에 내리는 비처럼 그건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톰 라더에게 미안해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왜냐면 그 역시 기회가 주어지면 비에 젖듯이 자연스럽게 즐기는 사람이니까.”박준호는 문득 톰 라더의 굵직한 팔을 본다. 원숭이처럼 붉은 털이 수북한 팔뚝이다. 손등도 마찬가지다. 저 털복숭이 손이 흡사 한 마리 수달피인양 갑자기 미지의 여자 치마 속으로 쑥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톰 라더가 힐끔 이 쪽을 본다. 박준호는 그 부질없는 미소가 들통이라도 난 것처럼 재빨리 손으로 입 주변을 씻는다.“오늘 어때? 영 안 되겠니?”톰 라더가 묻는다.“오늘이요?”“그래, 난 오후부터 프리하거든.”“왜…… 어디 가세요?”“장군님, 오전 비행기로 워싱턴에 가시잖아.”“워싱턴이라고 했나요?”“그래, 갑자기 긴급회의가 있으신 거 같더라.”“한데, 왜 혼자 가시죠?”“낼 오후에 돌아오실 스케줄이니까.”톰 라더가 기름걸레 솔을 뒷 트렁크에 집어넣으며 말한다.“오늘 오후에 시간낼 수 있으면, 지금 약속하면 어떠니? 내가 널 데리러 갈 테니까. 왜냐면, 오늘이 생일이거든.”“누구 생일이죠?”“우리 집사람.”“아, 그렇군요.”“하지만 집사람보다 다이애너가 더 극성으로 널 데려 오라는거야!”“어쩌죠, 죄송해서?”“왜, 무슨 일 있어?”박준호는 거짓말을 한다.“대학 입학때문에 약속한 인터뷰라 빼먹을 수 없어요.”

2006-08-0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0)

조용한 귀국⑧ “하긴, 제 나라 말도 아닌 남의 나라 말로 공부하려면… 시간이 없겠다만… 참, 옥스퍼드 대학에서 입학 허가받았다며? 그 소식듣고 할아버지도 여간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래, 할아버지가 통화하시고 싶어하니까, 낼 오전 중에 집으로 걸어 줄래?” “네, 작은아버지” “그럼, 몸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 “잠깐만요.” 박준호가 재빨리 입을 연다. “뭐냐?” “저 잠시 짬을 낼 수 있거든요. 할아버지 뵈러 나갈게요.” “뭐라구? 할아버지 뵈러 서울에 오겠다구?” “네 작은아버지.” “어머니가 그리 승낙하시더냐?” “아뇨. 어머닌 필요없어요. 제가 간다면 가는 거예요. …가겠어요. 작은아버지. 낼이나 모레쯤 출발할게요!” “아서!”라고 박상길이 족쇄를 지른다. 그가 계속한다.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내 말이 무슨 얘긴지 알겠니?” “알아요. 작은아버지.” “그렇다면 절대로 함부로 나서지 마라. 네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시기가 곧 오니까… 앞으로 기회는 많아. 일단은 대학부터 입학하는 게 급선무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얼마든지 네 맘대로 해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은 안 돼!…내 말 듣고 있니?” “듣고 있어요. 작은아버지.” “그럼 명심해라! 알겠니?” “알았어요.…작은아버지.”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을 해 놓고서도 박준호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박준호는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어머니와 대니 라일러가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수마트라 침팬지처럼 긴 대니 라일러의 팔이 어머니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어머니의 작은 머리가 그의 어깨에 얹혀있는 듯이 보인다. 두 사람은 막 배달된 우유를 마시고 있다. 이른 아침 늦가을 목장 풍경이 안개에 휩싸여 펼쳐져 있다. “이번 주말 연휴에는 뭘 할까?” 대니 라일러가 말한다. “그냥 집에서 쉬고 싶어요.” 어머니가 대답한다. “요트 타는 거 어때?” “요트요?” “안 그래도 기상 발표를 보니까 이번 주말 바다는 너무나 잔잔하대요. …우리 헤이스팅스에서 브라이튼까지만 왕복하는 거 어때?” “참, 당신 요트 항해가 취미라고 했죠?” “그래, 고등학교 때 아버지랑 많이 탔었어. 아버지가 요트를 두 척이나 갖고 계셨거든.” “한데, 요트는 준비됐어요?”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요트는 얼마든지 많아. 우리 본부 것도 있고… 빌려 주겠다는 사람도 많고… 남의 거 타기 싫으면 한 척 사 줄까? 아기 선물로 말이야.” 박준호는 아침 샤워를 끝내자마자 식탁으로 내려가지 않고 곧 바로 외출을 시도한다. 어머니는 대니 라일러 출근을 돕기 위해 옷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대니 라일러를 태우기 위해 운전사 톰 라더가 벌써 대기 중이다. 자동차의 먼지를 기름걸레로 털어 내고 있다. 박준호가 꾸벅 고개만 숙여 보이고 대문을 나서는데…. “야, 너!” 톰 라더가 불러 세운다. “왜요, 아저씨?”라고 얼떨결에 대답을 했지만, 벌써 바늘로 찌르듯이 가슴이 뜨끔하다. 더위 먹은 소 달만 봐도 허덕거리는 격으로 톰 라더 부인과의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대니 라일러가 타는 자동차만 봐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지경이다.

2006-08-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9)

조용한 귀국 ⑦“누군가? 이 밤중에 전화를 거는 친구는?”역시 귀족 호칭을 받을만큼 품위있고 위엄있는 어투다.“마거릿의 친굽니다. 이름은 박준호구요.”“오라, 우리 농장에 와서 돼지잡던 그 친구로구먼. 한국 학생 맞지?”“그렇습니다.”“한데,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더니, 왜 소식이 없나? 일자리를 만들어두고 기다렸는데.”“죄송하게 됐습니다.”“죄송하긴 뭐가 죄송해?”“저, 갑자기 영국이 싫어졌거든요.”박준호가 생각해도 너무 엉뚱하다.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구사할 수 없는 얘기다. 그래도 길버트 경은 여유롭다.“영국,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래 영국이 싫어서 떠나기라도 할 셈인가?”“네, 전 떠날 겁니다. 모두에게서부터 벗어날 겁니다. 훨훨 벗어버릴 겁니다.”“이것 보게.”“네.”“미안하지만, 마거릿은 바꿔줄 수가 없네. 밤이 늦어서가 아니라 자네가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 마거릿은 그런 유형을 싫어하거든. 자네 점수만 잃겠어. 내일 술 깨고 전화하게나.”“아닙니다. 전 잃을 점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전 제 길을 가야할 것 같거든요.”하나 길버트 경은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미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다. 뚜뚜뚜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박준호는 계속 지껄여댄다.“여기는요, 제가 설 자리가 아닙니다. 끄억-.”엎친데 덮친 격이라던가. 이튿날 피카디리 광장 골목 허름한 호텔에서 혼자 깨어난 박준호가 헤이스팅스 집에 귀가했을 때 가정부가 메모를 전해 준다. 어머니가 외출하면서 남긴 한글 메모다.로얄 엘버트 홀에서 열리는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에 부부 동반 초청을 받고 이제 막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준호야!할아버지 병세가 위독하시다는구나. 너와 통화하기를 원하신다는 전화가 여러 번 왔다. 집에 들어오는대로 전화 걸어 드려라. 너한테는 참 고마운 분이시다.할아버지의 생일 축하 전화를 받은 것이 어제 같은데, 위독하시다니, 말도 안돼. 맞아, 변호사를 만나 유언장을 만들었다고 한 말이 과장이 아니었어. 할아버지 스스로 그처럼 위독하게 될 줄 알고 있었던거야. 박준호는 메모를 움켜쥐고 부랴부랴 버튼을 누른다. 마포 태껸 도장의 박상길 관장이다.“준호냐?”무척 반가운 목소리다.“네, 작은아버지.”“할아버지, 방금 잠 드셨다.”“정말, 위독하신가요?”“글쎄……. 위기는 넘기실 것 같다만…… 그래도 더 사실 것 같지는 않구나.”“어디가 아프신데요?” “병명이야 췌장암이라지만, 오래 사셨으니까 이제 노쇠하신거지 뭐.”“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신가요?”“그래, 낼쯤 퇴원했다가 상황이 안 좋으면 다시 모시고 올 생각이다.”박상길 관장이 말을 잇는다.“넌, 어떠니? 왜 편지 한 번, 전화 한 번 안하니?”“죄송합니다.”

2006-08-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8)

조용한 귀국 ⑥서승돈이 말을 잇지 못했으므로 박준호가,“죽였다는 건가요?”하고 말한다.그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정말 난감하다는 듯이, “그래”하고 고개까지 끄덕인 다음, “죽인 거란다. 다시 말해서 없애 버린 거지. 없애 버린다는 뜻이 바로 제거거든. 제거란 뜻 이제 알겠니?”박준호는 알았노라고 고래를 끄덕이지 않는다. 박준호는 지금 흥분상태다.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궁금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왜, 아버지를 제거했죠? 아니, 누가 그렇게 한 거죠?”“이런 얘길 꼭 해야 되는 건지… 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 아냐. 너도 이제 청년이니까 알 건 알아야지.”그가 박준호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마치 연극 배우 대사 발성하듯 조용조용 말하기 시작한다.“너의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 말이야. 그 무렵 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장교로 부임했었거든. 그자가 일을 꾸민 거야. 거짓 정보를 흘렸어. 박 대령이 북한 당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역시 미군 사령부 정보는 절대적이었거든. 허무맹랑한 정보인줄 알면서도 대한민국 군사정권 핵심인물들은 옳다구나 박수를 친 거란다. 안 그래도 항상 가시처럼 걸렸던 게 너희 아버지란 존재였으니까. 그냥 그대로 방관해버리면 또 다른 장교들이 정권에 항명할 공산도 있고… 그래서 모델케이스로 명령을 내린 거란다.”박준호가 묻는다.“뭐라고 명령을 내렸는데요?”“박상구 대령 그 자식 제거해버려!”서승돈은 생각만해도 그때 그 일이 몸서리쳐지는지 필요 이상의 힘을 가해 여송연의 불을 북북 비벼 끄고 있다.그날, 박준호는 헤이스팅스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난생처음 많은 술을 마신다. 그는 귀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허투루 내 버리고 있다. 박준호를 그처럼 극단적으로 만든 어머니도 그러하지만, 심지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샅샅이 추적하던 스카이 홍의 흔적까지 잠시 잊어버리고 있다.그때 박준호에게 절실한 것은 어이없게도 앙갚음이다. 이름하여 복수다.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는 복수의 열기….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가 제거되도록 음모를 꾸민 장본인이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라니….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한 지붕 밑에서 그것도 매일 아침 식탁에 마주 앉아 침묵의 식사를 하며 수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단 말인가.박준호는 치를 떤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술을 마시며 그 궁리에 골똘한다. 정말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신 것은 난생 처음이다. 술집에서 혼자 들이부은 것도 모자라 슈퍼용 포켓 위스키까지 사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상태다. 박준호는 무심코 공중전화부스에 들어서면서도 병 나발을 분다. 기실은 특별히 누구에게 전화를 걸겠다는 생각도 없다. 딱히 대상이 있다면 어머니겠지만, 지금 기분으로 어머니에게 무슨 항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대니 라일러가요, 우리 아버지를 죽였대요! 설마, 어머닌 모르고 계셨겠죠? 전요, 지금 기분 더러워요. 완전히 바닥이에요. 뭔가 잡히는 대로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으로 몸서리치고 있어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깊은 의식 속의 울분이고, 치욕일 뿐이었다.끄억, 술트림을 하면서 박준호가 기어코 찍은 전화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어머니가 아니라 마거릿이다.“여보세요.”그러나 전화는 마거릿이 받지 않는다. 목소리로 보아 목장 주인인 길버트경 같다. 포츠머스 법원판사를 거쳐 지금은 외무성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는 마거릿의 큰아버지다.“마거릿을 찾는데요.”박준호가 정신을 바짝 차린 음성으로 말한다.

2006-07-3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7)

조용한 귀국 ⑤“여전히 정보 책임자를 맡고 있다더군. 하긴 나토정보를 한 손에 쥐고 있다면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겠지.”그가 다시 태워 문 여송연 연기를 허공에 휴- 내뿜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동생은 몇이야?”하고 묻는다.“동생이라뇨?”박준호가 반사적으로 반문한다. 처음 그가 박준호의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놀라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으스스 돋는 차가운 소름을 전신으로 느껴 마지 않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서승돈이 천연덕스럽게 입을 연다.“어머니가 대니 라일러 장군의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 그 말이야.”어떻게 알았을까. 박준호는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본다. 기실, 어머니에게서 생전에 느껴보지 못한 역겨운 냄새를 맡게 된 것은 요하네스버그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다. 확실히 어머니는 달라졌다. 헤이스팅스를 떠나면서 혼자 남아 있는 박준호를 걱정하다 못해 톰 라더 부인을 집 안에 불러 들였던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느 한순간에 변신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한 명밖에 없는 한국인 아들에게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게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뿐이다. 아니, 양아버지의 극성이 더한지도 모른다. 집 안에 들어오면 도무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두런두런 몇 시간이고 계속 속삭여 마지않는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 같은 변화가 어머니의 임신 탓이라는 사실을 박준호가 알게 된 것도 갑자기 두 사람이나 한꺼번에 들이닥친 가정부 때문이다. 톰 라더 부인도 시간 나는 대로 도와주기로 약조했는데도 양아버지는 튼튼한 젊은 가정부를 급파, 어머니를 감동케 했다. 그중의 한 명이 박준호에게 운을 뗀다.“마님이 아이를 가지셨거든요.”“뭐라구요?”“아이를 가지셨다구요. 마님이 말이에요. 임신 7주래요. 7주.”그녀는 부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기실은 그 나이에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느냐는 빈정거림의 눈웃음을 쳐 마지 않는다. 솔직히 박준호는 또 다른 배신감 때문에 눈물까지 찔끔거리지 않으면 안됐다. 박준호 역시 젊은 가정부처럼 겉으로는 축복을 빌어 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듯한 아픔을 감지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한데, 이 미지의 키 큰 사내가 어떻게 그런 내막을 꿰뚫고 있단 말인가. 박준호는 새삼 으스스 돋는 소름을 털어내듯 고개를 힘차게 젓고 나서,“동생이라뇨? 없습니다. 동생은 아직 없다구요!”숫제 항의조로 대답한다. 너무 급작스러운 반응에다 목소리까지 칼칼했으므로 서승돈이 도리어 놀라는 기색이다. 내친김에 박준호가 계속한다.“근데요.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요. 물어도 되나요?”“그래, 물어! 얼마든지 괜찮아.”“아까, 우리 아버지가 제거되었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아, 그거?”서승돈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는다.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이다.“그게 뭐냐 하면….”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 뭔가 복잡하고 미묘한 사연이 있는 것 같다.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연다.“너의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2006-07-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6)

조용한 귀국 ④“얼마나 계실 건가요?”“글쎄, 강연 일정 잡힌 걸로 봐서는 한 두 달쯤 더 계실 것 같기도 하고….”“그럼, 아저씨도 계속 계시겠네요?”“아니야. 나는 선생님 도착하면 바로 들어갈 작정이야. 회사에 일도 생겼구,…그리고 회사 업무가 아닌 일로 출장 일정을 연장하는 것은 옳지 않거든.”“한 가지 더 물어도 될까요?”“되구말구.”“어떻게 절 아셨어요?”“널 어떻게 알았느냐구?”서승돈이 목을 한 바퀴 돌린 다음 말을 잇는다.“준호 네가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얘기는 마포 도장에서 들었지. 박상길 관장 말이야. 너한텐….”“네, 저희 작은아버님이십니다.”박준호가 정중히 대답한다.“널 한 번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실은 내가 더 널 만나고 싶었단다.…한데 이렇게 쉽게 부딪히게 될 줄은 몰랐다.”서승돈이 식은 홍차로 입 안을 적시고 나서 말을 잇는다.“실은 대사관에 다른 업무가 있어 왔지만 시간이 허용되면 널 한 번 찾아볼 양으로 담당 참사관에게 청을 넣었었지. 그런데 네가 매일 대사관에 출근하다시피 한다는 게야. 그래 이렇게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거지. 이제, 이해가 되냐?”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서승돈이 갑자기 박준호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새삼 감동어린 목소리로 입을 연다.“박 대령님 순직했을 때, 준호 네가 다섯 살인가 네 살인가…그래, 존 에프 케네디가 암살당했을 때, 그 아들 존이 어머니 재키 손을 잡은 채 어리광을 피워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듯이 너도 그때 우리를 얼마나 울렸는지 아니? 아버지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모래흙을 파헤쳐 끼얹곤 했던 너의 모습이 생생한데…어느새 이렇게 청년으로 장성했다니 참으로 세월처럼 무상한 것도 없는 것 같구나.”박준호가 서승돈의 독백을 듣고 나서 천천히 질문을 던진다.“아저씨는…저희 아버지를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나 말이냐? 내가 어떻게 박 대령님과 인연을 맺었는가 하면…너의 아버지가 대령 시절, 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단다. 그러니까 같은 조종사였던 셈이지. 공군 사관학교 직계 선후배에다 같은 F86F 전투기를 탔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친한 사이였지. 그때 박 대령님을 가장 존경하고 믿고 따랐으므로 그분의 강도 높은 권유대로 어떤 서류에 서명을 했는데, 그 때문에 나는 긴급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어. 다행히 군복을 벗는다는 조건으로 감옥행을 면했는데, 그것은 우리 집안에도 짱짱한 장군 출신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란다.…내가 불명예 제대를 했던 바로 그날 대령님이 제거되셨어.”서승돈은 더욱 열렬히, 마치 장작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박준호의 눈을 만질 듯이 들여다보며 말을 잇는다.“너, 올해 스무 살이라며?”“네.”“그래, 이제 그 나이면 알 만한 것은 다 알아야 할 때야. 참 그건 그렇고 어머니는 잘 계시니?”“잘 계십니다.”“헤이스팅스에 산다구?”“네, 헤이스팅스에 살아요.”“양아버지는?”“양아버지두요.”“그 사람 이름이 대니 라일러 맞지?그의 영어 발음은 부드럽다.“네 맞습니다.”“지금, 계급이 장군이던가?”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인다.“나토 사령부 소속이라지?”이번에도 박준호는 고개만 끄덕인다.

2006-07-2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5)

조용한 귀국 ③“물론 이번에는 선생님이 참석해 주신 탓도 있지만 그보다 대령님의 용기와 용단이 요즘 시국에 더 많은 귀감이 되고 있기 때문이야.”박준호가 불타는 눈빛으로 서승돈을 바라보는 일 외에 다른 아무 일도 하지 못하자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라고 묻는다. 박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입을 연다.“저희 아버님 추모식에 참석한 선생님이 누구신데요?”“아, 그래…그분이 누구시냐 하면…생전에 아버님이 가장 존경하셨던 분이야. 아니, 그분 때문에 모함을 받아 누명을 썼고, 그 누명 때문에 운명을 달리 하셨지만…그 선생님 역시 박 대령님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단다.”때 마침 승용차가 연달아 세대씩이나 들이닥쳤으므로 서승돈씨는 여송연을 끄고 “이러지 말고 우리 차 한 잔 마실래?” 사람들을 피해 대사관 안쪽으로 들어간다.작은 휴게실에 마주 앉는다. 서승돈은 박준호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자진해서 일어섰는데도 “괜찮아. 앉아 있어. 내가 가져올게.” 억지로 박준호를 주저앉힌다. 그리고 손수 실론산 홍차를 종이컵에 뽑아 들고 자리에 돌아온다. 그가 말한다.“너도 알다시피 선생님은 대한민국 정부가 영 순위로 기피하는 인물이시잖니? 국제적인 여론과 압력 때문에 어쩌는 수 없이 감옥에서 풀어 주긴 했지만…어쨌든 선생님은 출옥과 함께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추모회부터 참석하셨던 거야.”“그래도 전, 누구신지…그 선생님이 혹시 런던 신문에 난 야당 당수신가요?”박준호가 더듬더듬 묻는다.“그래, 맞아. 너도 신문 봤구나. 신문에 나온 그대로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야당 총재님…물론 지금은 백의종군하고 계시지만서도.”서승돈이 홍차를 야금야금 입 안에 머금으며 말을 잇는다.“넌 아직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겠구나?”“네, 아직은….”“이번에 만나야지. 넌 숙명적으로 그 어른을 알아야 하고, 또 아버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분을 섬겨야 할 입장이니까.”박준호가 홍차 방울 묻은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서승돈이 말한다.“내가 선생님께 직접 널 소개할 생각이란다. 박상구 대령님 외동아들입니다 하면 아마 선생님도 너무 놀라서 뒤로 넘어질지도 몰라.”박준호가 몸을 고쳐 앉으며 입을 연다.“신문 기사대로 선생님이 런던에 오시는 건가요?”“그으럼, 내일모레 오후 다섯 시 비행기야. 뉴욕에서 오는 비행기. 영국은 두 번째 방문이시지. 참 내가 누군지 모르지? 난 선생님을 돕는 자원 지도자란다. 물론 선생님처럼 정계에 입문한 사람도 아니고, 비서도, 경호원도 아니지만…회사 출장 일로 왔다가 선생님 영국 방문이 결정되는 바람에 귀국을 늦추고, 이것저것 준비 중이란다.…잘못하다가 회사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우리나라 정부 당국이 알면 어떤 보복이 따를지 모르지만….”“정부당국이 알면 보복을 한다구요?”“그럼.”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계속한다.“일종의 마지막 발악 아니겠니? 군사정권도 이제 신물 날 정도로 오래됐으니까.…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박준호는 너무 어려운 말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표정으로 일단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영국에 뭐하러 오시는 건데요?”“선생님 말이냐?”“네, 선생님이요.”박준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승돈을 본다. 서승돈이 대답한다.“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각계 인사들을 만나러 오시는 거지…어쩌면 영국 여왕도 알현하실지 모르겠구나.”

2006-07-2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4)

조용한 귀국 ②“15년 전 그날, 5살이던가, 4살이던가….”박준호는 숨을 죽인다.“왜 대꾸가 없어? 내가 잘못 봤나? 자네 이름이….”“네, 박준호 맞습니다.”박준호가 대답한다.“그렇지? 준호가 맞구먼. 박준호!”신사가 새삼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손부터 덥석 잡는다. 손이 따뜻하다. 그가 말한다.“그래, 그때 윤곽이 많이 살아 있어. 대령님 모습 그대로 말이야.”대령님이라구? 박준호가 고개를 번쩍 든다. 이번에는 박준호가 묻는다.“대령님이라면…혹시 저희 아버님….”“그래, 맞아. 박상구 대령님. 일주일 전 우리끼리 15주기 추모회를 가졌었지.…그래, 아버님 제사는 잘 모시고 있는 거지?”박준호는 눈을 내리깔고 만다. 제사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탓이다. 아니,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까지는 지리산에서 상경한 할아버지와 박상길 관장이 극성스럽게 챙겼으므로 박준호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상복을 입고 큰절만 하면 그만이었다.한데, 헤이스팅스로 옮기고 나서부터 아버지의 제사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어머니 탓이다. 한마디로 어머니는 지난 일에 대해 연연해하는 성격이 아니다. 물론 일찍이 이민길에 올라 한국보다 미국 사회에 더 길들여진 탓도 있지만 어떻든 타고난 성품 자체가 매정하고 차갑다. 예컨대 할아버지와 마포 태껸 도장을 운영하는 박상길 같은 시댁 식구들과의 교류만 해도 그러하다. 아버지와 결혼 생활을 할 때는 이 주일이 멀다고 찾아가고, 초대하며, 그처럼 가깝게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발길을 끊어 버린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러는 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까. 박준호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전화 통화를 하는 경우를 보지 못한 터다.그런 판국이니, 왜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고 어머니를 닦달할 계제가 아니다. 박준호도 마찬가지다. 대니 라일러 장군에게 그토록 몰입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박준호는 야릇한 배신감을 느껴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내색할 정도는 아니다. 어쩌다 분량보다 많은 음식물을 입 안에 머금었을 때처럼 뱉지 못하고 대책 없이 꿀꺽 삼켜 버리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헤이스팅스로 옮기고 나서 박준호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제삿날을 맞아 뭔가 기념될 만한 행동을 따로 가져 본 적이 없다.솔직히 박준호가 어머니에게서 야릇한 배신감을 느끼듯이 할아버지 역시 아버지 존재를 망각한 박준호에게 여간 서운한 감정을 느껴 마지않을 터다. 아무리 어머니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아버지의 아들인 박준호는 달랐어야 한다. 설사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에 상응된 행동을 당당히 실천해 보였어야 옳다. 한데도 박준호는 그것을 흐지부지 넘겨 버렸고,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는데도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꺼낸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자식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기피한 일종의 직무유기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귓불이 화끈거리고 뒷목이 뜨겁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버버리 차림의 키 큰 사내, 아니 더 정확하게 서승돈씨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다. 아주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이번 추모 모임에는 모두 100여 명이 넘었으니까, 재작년에 비해 다섯 배로 늘어난 거야. 왜 그런 줄 아니?”“모릅니다.”박준호가 대답한다.

2006-07-2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3)

조용한 귀국①박준호가 서승돈씨를 만난 것은 순전히 스카이 홍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 탓이다. 그것도 한국대사관이 빌미가 된 만남이다. 사실이다. 한국대사관이 아니었으면 서승돈씨와 그렇게 쉽게 해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즈음 박준호는 런던 주재 한국 대사관을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한다. 분명 서울에 본사를 둔 런던 지사에 근무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스카이 섬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새벽같이 떠난, 일본 유도 선수 같은 모습의 그녀 남편.박준호는 그녀 남편을 찾고 있다. 그를 만나면 스카이 홍은 넝쿨에 매달린 구근식물처럼 자연스럽게 딸려 나올 수 있다고 믿고 있다.하지만 박준호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은 그의 성뿐이다. 그것도 딸아이 이름을 물어보았기에 망정이지 그마저 없었더라면 정말 아무것도 모를 뻔했다.성씨가 김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녀 남편이 김씨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무슨 도움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오죽하면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거개가 김씨 아니면 실업자가 맞는다는 말이 다 생겼을까. 대한민국에서도 그렇듯이 런던에 사는 한국사람 거의 절반이 김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씨만 갖고 일본 유도 선수 같은 그녀의 남편을 찾는다는 건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그렇게 보면 유일하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운전하고 왔던 폭스바겐뿐이다. 한데도 애석하게시리 자동차 넘버를 기억할 수 없다. 눈에 쌍불을 켜고 뒤쫓았던 폭스바겐을 만난 게 이미 알루미늄빛으로 물든 저물녘이었기 때문이다.어쩌는 수 없다. 박준호는 한국 대사관에 비치된 자료를 뒤지는 수밖에. 런던 주재 상공인 명단 중 김씨를 찾아 그 가족을 추적하는 방식이다. 김씨 부인이 홍씨며, 그리고 딸아이가 한 명 딸려 있으면 게임은 거의 끝나는 셈이다.한데도 그런 명단이 없다. 종합상사 런던 주재원 속에서도, 기타 주요 기관 요원 속에서도 김씨 성을 가진 일본 유도 선수 같은 그녀의 남편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박준호가 서승돈씨를 상면한 것은 바로 그 와중이다. 일주일쯤 될까. 그러니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아침 박준호는 서승돈이라는 미지의 사내와 운명의 상견례를 갖게 된 것이었다.동양인답지 않게 중절모에 허리띠 달린 요란한 바바리코트에, 선글라스까지 낀, 키가 훌쩍 큰 사나이.“이것 봐 학생.”대사관 정문에서 박준호를 불러 세운다.“저 말입니까?”주변에 몇 사람이 더 있었으므로 박준호가 반문한다.“그래, 자넬 불렀어. 이름이 박준호, 맞지?”박준호는 깜짝 놀라 마지않는다. 어떻게 내 이름을? 중년 사내를 빤히 쳐다본다.“날 모르겠나?”그가 묻는다. 박준호는 고개를 절절 흔든다. 아무리 애를 써도 키 큰 사내를 기억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정말 모르겠어? 내가 자넬 안고 다녔는데….”“절 안고 다니셨다구요?”박준호가 반문한다.“그럼, 자네를 처음 안았을 때 내 가슴에 오줌까지 쌌는걸.”아무렴. 박준호는 또 한번 고개를 절절 흔들며 그를 본다.사내가 바바리코트의 안 주머니에서 여송연을 꺼내 특유의 향내를 씀씀 맡은 다음, 이빨로 질컹 으깨 문다. 그리고 한탄하듯 말한다.“하긴,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 그래, 자네가 날 기억하기는 힘들 거야. 벌써 15년이 지나 버렸으니까.”15년이라니? 키 큰 사내가 다시 한 번 박준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내듯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2006-07-2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2)

야곱의 사다리 (20)이상하다. 그녀는 처음처럼 그렇게 항거하는 기색이 아니다. 그냥 그린 듯이 누워 있다. 뭉클뭉클한 가슴을 더듬고, 바지를 끌어내려도, 스카이 홍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만남은 그처럼 쉽게, 그리고 빠르게 이뤄진다.“아름다워요”라고 박준호가 그녀 위에서 속삭인다. 그것도 일렁이는 주황색 불빛과 야릇한 희열로 점철된 복합적인 얼굴을 내려다보기는 난생처음이다.그리고 박준호는 난생처음 절정에 오른 감동적인 쾌감을 만끽한다. 그것은 한순간의 절정이 아닌, 접속이 시작된 순간부터 해체의 순간까지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연이어 터지는 절정의 쾌감이다.그러니까 접속, 그 자체가 절정의 쾌감인 셈이다. 만약 깊이 잠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의 딸이, 한참 비경을 헤매는 두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듯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한 시간이 아니라 2시간도 넘게 그런 절정의 상태를 유지 했을는지도 모른다. 하나 어이없게도 엘리시온은 가증스럽고 뻔뻔한 인형처럼 빳빳이,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그리고 똑같이 고조된 숨소리를 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은경아!”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을까. 스카이 홍은 정말 한순간에 박준호를 밀어내 버린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결속된 접속을 한순간에 해체해 버린다.음흉하게시리 어둠 속에 앉아 야릇한 광경을 내려다보던 엘리시온이 갑자기 “으앙!”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그래, 그래. 은경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잘못했어.”그녀는 옷매무새를 고칠 생각도 없이 엘리시온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 자신도 울먹이기 시작한다. 박준호는 또 한 번 밖으로 도망쳐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찬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바람도 불고 있다. 참나무, 삼나무들이 원치 않는 춤을 몸부림으로 대신하고 있다.박준호가 다시 산막에 들어 왔을 때 스카이 홍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다. 엘리시온 역시 잠들어 있다.박준호는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아놀드 쉔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듣고 있다. 바람 소리도, 빗소리도 많이 멎어 있다. 아주 고요하고 조용하다. 왕성한 곤충들이 일시에 튀어나오는 듯한 음률이 오두막 안을 빈틈없이 채운다.“음매, 음매.”길을 횡단하는 소의 울음소리도 들린다.빗방울이 잎사귀들을 강타하는 미세한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 하나하나는 가볍고 부드럽고 은은하지만 수천 수만 개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그것은 흡사 유령의 군무처럼 괴기스럽기까지 하다.박준호는 아놀드 쇤베르크의 음악 속에 천천히 그리고 깊이 흡입된다. 그 자신이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곤충이 되고, 음매 음매 우는 소가 되고, 잎사귀가 되고, 강이 되고, 숲이 되고, 바다가 되고, 바람이 되고, 빗방울이 되고,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부웅 부우웅- 고동소리 울리는 하얀 여객선이 되고….이튿날 늦은 아침 박준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도 엘리시온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브리튼의 기후답지 않게 햇빛이 맑고 밝다. 그는 자동차가 서 있는 도로로 내달린다.한데, 자동차가 없다. 흔적조차 없다. 서둘러 오토바이로 포트월리엄까지 한달음에 쫓아갔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행적을 찾을 길이 없다.그리고 박준호는 스카이 홍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비단 스카이 홍뿐 아니다. 스카이 홍보다 뛰어난 미모의 여자도, 아니 그와 동등한 수준의 여자도 박준호는 아직까지 만나 본 적이 없다.

2006-07-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1)

야곱의 사다리 (19)박준호는 벌떡 일어선다. 통나무를 찾아 화덕 가득히 집어넣는다. 그리고 발가벗은 그대로 오두막을 튕겨 나온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다. 전신으로 비를 맞는다. 폭발할 것 같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는 두 팔을 허공으로 치켜올리고 “야호, 얏호!” 굉음을 지른다. 결승전의 연장전에서 천금의 골을 성공시킨 선수처럼 온몸을 하늘로 솟구쳐 올린다. 너무도 흡족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들어온 기분이다. 둥둥 뜨는 것 같다. 박준호는 맨발로 숲길을 냅다 달리기도 하고, 풀더미 위에 그대로 드러눕기도 한다. 그래도 열기는 쉽게 식지 않는다.마치 샤워를 끝내듯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몸을 씻고 그가 다시 오두막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축축한 옷을 다 껴입고 벽난로 앞에 우뚝 서 있다. 박준호가 그녀 가까이 다가간다. 너무 사랑스런 모습이다.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용솟음친다.“……어때요? 이제 추위가 가셨나요?”박준호가 입을 연다.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일렁이는 불꽃만 보고 있다.“밖에는 비가 아직도 줄기차게 내리는데요.”그러면서 그녀 어깨에 슬그머니 손을 얹는다. 바로 그 순간이다.“철썩!”불이 번쩍한다. 박준호의 왼쪽 뺨을 찢어발긴 그녀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고 있다.“썩, 비키지 못해! 한 발자국만 가까이 오면 가만두지 않겠어!”그녀가 경고한다. 한 마리 앙칼스런 승냥이다. 눈에 불을 켜고 있다. 박준호가 슬슬 뒷걸음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주섬주섬 옷을 걸친다. 그리고 도망치듯 오두막을 나선다. 어떻게 자동차까지 내달렸는지 모른다. 자동차 문을 연다. 그녀가 그토록 염려하는 딸아이가 “엄마, 엄마.” 울먹이고 있다. 진작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머리가 비에 젖어있는 걸 보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기까지 한 모양이다.“그래, 그래. 엘리시온, 엘리시온이라고 했지?”박준호가 아이를 안아 올리며 말한다.“그래, 엄마한테 데려다 줄게.”물론 그는 아놀드 쇤베르크의 테이프와 워크맨을 잊지 않고 챙겨 든다.박준호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듣기 위해 누른 것은 두 모녀의 잠자리를 벽난로 앞 풀 담요 위에 만들어 놓은 다음이다. 아니, 두 모녀가 그곳에 누워 휴식을 취한 다음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설명이다. 시간은 새벽 한 시다.기실 그 일은 그것으로 끝을 냈어야 옳았다. 한데 그 비는 그치지 않았고, 바람 역시 계속 불었으며, 간혹 덧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또 다른 적막을 깨뜨렸으므로 박준호는 의외로 쉽게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보다 벽난로의 불이 꺼지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비바람의 영향으로 실내가 여전히 으스스 추웠기 때문이다.박준호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젖은 통나무를 벽난로에 채워 넣는 일에 열중한다. 그러다가 참나무 불꽃에 일렁이는 스카이 홍의 잠자는 얼굴과 매혹적인 둔부를 본 것이었다. 그 옆에 엘리시온도 잠들어 있다.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다. 박준호가 엘리시온이 깊이 잠들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귀를 가까이 들이대고 숨소리를 듣는다. 손을 흔들어 눈동자의 움직임도 감지한다.옳거니, 정말 깊이 잠들어 있다. 누가 떠메고 가도 모를 정도다. 자동차 속에 혼자 남아 공포에 떨었던 기억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피로한 모양이다. 박준호는 안심하고 그녀 옆에 들어가 눕는다. 또 다른 열기가 폭발 직전의 화산 가스인 양 무서운 힘으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박준호는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살포시 그녀를 끌어안는다. 키스를 한다. 이마에, 볼에, 콧등에 그러다가 입술에 혀끝을 가볍게 꽂아 넣는다.

2006-07-2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40)

야곱의 사다리 (18)뭐랄까. 흡사 위대한 작품 앞에선 예술가 특유의 집중력이라고나 할까. 이제 그는 강압적으로 그녀의 사지를 묶지 않는다. 그녀의 자유를 속박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그러나 야금야금 터치하고 있다.물론 그녀가 입술을 열어 박준호의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받아들이기는커녕 풀풀 바람 빠진 풍선인 양 한순간에 죽은 시체가 된 그녀가 더 이상 버둥대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정말 그녀는 그린 듯이 누워 있다. 이 모든 일이 너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느낀 실망감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느냐는 듯이,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흡사 죽은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미동이 갑자기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본능의 불씨가 어찌할 수 없게시리 발화된 것일까.처음 그녀는 박준호를 끌어안는다기보다 반항하기 위한 팔놀림으로 손이 올라올 정도였는데, 어럽쇼, 어느 순간 등을 한껏 끌어당겨 박준호의 숨이 막히게 한다.그리고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신음 소리도 내기 시작한다. 처음은 미미했지만 갈수록 대담해져서 나중에 발악처럼 들리기 시작한다.드디어 그녀는 골대에 골이 꽂힐 때마다 고함을 내지른다. 박준호는 마음 놓고 드리블을 한다. 그리고 강슛을 쏜다. 발리슛도 하고 바이시클 킥도 하도, 백 슛도 구사한다. 거의 일방적인 슛이다. 이건 축구가 아니라 숫제 농구 점수다. 십 대 영, 이십 대 영, 아니 백 대 영이다.한 없이 한 없이 들어간다. 45분 전반이 끝나고 10분 휴식이 주어진 다음 다시 45분 후반으로 들어가는 것이 규칙이고 상례지만, 이번 박준호의 출전에는 휴식이 없다. 그대로 풀타임이다.톰 라더 부인이나, 시루코 여사와의 그것이 오픈 게임이라면 지금의 이 장렬한 결합이 본 게임에 해당된다. 오늘의 이 빅 게임을 위해 그토록 잡다한 게임을 계속 소화했는지도 모른다.얼핏 계산해도 두 시간 가까운 시간이 일순의 바람처럼 스쳐가 버린 것 같다. 어느새 박준호의 이마와 가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그녀 가슴으로 뚝뚝 떨어진다.그래서 일까. 그녀도 땀투성이인 것 같다.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땀이 흡사 올리브유를 바른 터키탕 남녀처럼 번들거린다.마침내 갈기를 털어 대는 수사자처럼 박준호가 머리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머리칼의 땀이 후득후득 떨어진다.“으으-흡!”짐승의 그것처럼 진한 탄성을 내지른다. 바로 그 순간이다. 박준호가 그녀의 야릇한 신음 소리를 들은 것은 아, 그녀의 그 같은 조짐은 진작부터 감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슛 골인이 될 때마다 고개를 좌우로 비낀다든가, 주먹을 불끈 쥔다든가, 발가락에 너무 힘을 주어 안으로 휘어지게 만든다든가 하는 미세한 변화 따위가 바로 그런 조짐이다.하나 그뿐이다.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이를 앙다물고 치솟아 오르는 신음을 안으로 삼킨다. 그리고 다시 죽은 시체가 되어 버린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사위가 깜깜하다. 일렁이던 불 그림자도 없다. 벽난로를 본다. 벌써 불이 죽어 가고 있다. 원둥치 그대로의 통나무가 다 타 버렸다면 실제로 두 시간은 족히 지났으리라.

2006-07-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9)

야곱의 사다리 (17)그렇다. 이 야성의 만남을 위해 살고 싸우며 죽어 갈 용기만 갖고 있다면 그 어떤 힘도 오늘 밤 그녀와의 결합을 방해하지 못하리.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 너무도 하얗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빨 그리고 상큼한 눈빛….드디어 우뚝 일어선다. 바야흐로 행동개시다. 아니, 음낭 표피가 툭 빠져나오게시리 깊숙이 박혀 있는 일흔일곱 마리의 용이 야성의 공격을 더욱 부채질한다. 계속 무서운 힘으로 돌진하게 한다.말 그대로 가공할 만한 공격력이다. 어떤 저항도 수비도 용납하지 않는다. 뭐랄까. 탱크 군단 앞에 맞선 기마 부대격이라고나 할까.“안 돼, 안 돼!”왜소해진 또 다른 박준호가 정중히 다그친다. 그래도 전차 군단은 끄떡하지 않는다. 계속 전진이다.“안 된다니까! 이건,…법도를 어기는 일이야!”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법도라니?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작작해!”실제로 비웃는 눈치다. 그래도 난쟁이 박준호는 계속 목이 찢어져라 소리친다.“스톱! 스톱!”이건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로 비탈길을 내려오는 일에 진배 아니다. 그대로 내리꽂히고 있다. 굉장한 속력이다. 그것은 박준호가 난생처음 시도한 완벽한 폭력이다. 일단 야성 쪽으로 기울어 버린 박준호의 의식은 오로지 정복욕뿐이다. 막무가내다. 처음엔 그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서 “이봐, 학생 갑자기 왜 이래??”라고 점잖게 꾸짖었지만, 웬걸 밀어붙이기만 하는 그의 완력에 압도되어 “어머, 왜 이러냐구! 어머! 어머!” 경악과 실색을 감추지 못했으며 이쪽의 두 팔과 다리로 그녀의 사지를 마치 쇠사슬로 엮듯 단단히 묶어 버렸을 때, 그리고 청바지를 벗겨 내렸을 때, “세상에 이럴 수가! 안 돼! 절대로 안 돼!” 비명을 질러 마지않았으며, 마침내 초강력의 용패가 그녀를 찔러, 내부 깊숙이 진격한 순간, “억!” 소리와 함께 흡사 구멍 뚫린 풍선처럼 피들피들 사지의 힘을 삽시에 잃어버리는 것이었다.그녀가 그 순간 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혼절해 버린 것인지 박준호는 한동안 확실히 분별할 수가 없다.어쨌거나 그녀는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그리고 폭력은 언제 어디서나 잔인하고 잔혹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녀도 막무가내 폭력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단 한차례 기습에 그대로 무너져 버린다.허망한 골인이다. 수비수도 골키퍼도 자기 기량 한 번 발휘해 보지 못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역부족이다.그녀는 박준호의 기습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한 눈치다. 어쩌면 미드필드에서 그대로 쏘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강력했으면 그 터무니없는 중거리 슛이 그대로 꽂힐 수 있단 말인가. 허망하게 네트를 철렁 뒤흔들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그는 딱지 못 뗀 숫총각도, 음양(陰陽) 그 자체를 모르는 숙맥도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다 덮을 듯 기고만장하다가 몇 발자국 못 가 주저앉아 버리는 실속 없는 철부지도 아니다. 예컨대 박준호는 이미 헤이스팅스에서, 톰 라더 부인과 시루코 여사를 통해, 그 방면의 괴력을 검증받은, 말 그대로 타고난 슈퍼맨이며, 테크니션이다.그것이 용패의 힘이든, 일흔일곱 마리 용이 한꺼번에 비상하는 신통한 비방의 결과든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박준호 자신이다. 그는 너무도 그녀에게 열중해 있다. 만약 그 같은 열중이 그 행위 자체에서 비롯되었다면 박준호의 강력함은 스스로 주체할 수도, 절제할 수도 없었으리라.

2006-07-1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8)

야곱의 사다리(16)“혹시 이쪽의 공격 야욕을 이미 간파해 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저처럼 무릎을 잔뜩 꼬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받친, 이른바 의례적인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러나 그녀의 강경한 태도가 이미 작동을 시작한 야성을 다시 잠재우게 할 수는 없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고나 할까.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할 때가 공격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박준호는 입술을 으깨어 문다.어느새 사위의 습기를 죽이고 오두막 안을 훈훈하게 만들어 버린 기세 좋은 불길 탓일까. 그녀는 거지반 제정신을 차린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다.한데, 한편으로는 전혀 다행스럽지 않다. 다름 아닌 일촉즉발의 야성이 그 원흉이다. 예컨대 그녀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의식이 희미한 환자를 관리하는 의사처럼 그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저 완벽한 볼륨의 가슴이며, 우유 빛깔 목덜미며, 아름다운 각선미의 두 허벅지며, 잘록한 허리며,…뜨겁고, 끈적끈적한 야성이 다시 한 번 꿈틀거린다. 용틀임한다. 도무지 주체할 길이 없다. 이미 위험 수위를 넘긴 지 오래다.할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착용한 용패 때문에 더 그렇다. 음낭 표피가 툭 빠져나오게끔 깊숙이 박혀 있는 용패.“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용패를 음낭에서 빼 놓아서는 안 된다. 이건 우리 호령 박씨 집헌궁파 장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알겠느냐? 그러니까 용패는 우리 호령 박씨 집헌궁파 자손을 성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느니라. 만일 이 용패를 착용했으면서도 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신제가가 안 된 이유이므로 조상에게 큰 죄를 짓는 결과를 가져오느니라. 또 한 가지,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를 용패 때문에 그르치는 일은 절대로 삼가야 할 것임을 명심할진저.”할아버님의 엄한 음성이 귓가에서 쟁쟁하게 맴을 돈다.그러나 이 속수무책의 야성이 겁도 없이 함부로 들고 일어선 원인이 순전히 음낭 깊숙이 박힌 용패의 신비한 힘 탓이라고 막말 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은 핑계인지도 모른다.소 떼의 횡단 때문에 차를 멈추고 서 있었던 그 구릉, 새하얀 구름이 스카이 섬을 온통 뒤덮기 시작한 운명의 어제 오후. 그렇다, 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다. 운명은 아무 뜻 없이 그녀를 그 구릉 길 소 떼 앞에 세워 놓았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 운명의 만남이 아니라면 하필 그 순간 한 마리 소를 미치게 하여 박준호를 공격할리 없고, 설사 그랬다 해도 그녀가 박준호를 자동차에 싣고 병원으로 내 달리지 않았더라면, 아니, 박준호가 의식에서 깨어나는 순간 너무 반가워 와락 끌어안는 일만 삼가 주었어도 박준호의 가슴에 이처럼 뜨거운 화살이 숙명처럼 깊이깊이 박히지 않았을 것 아닌가. 맞아. 그녀와 첫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심장이 흡사 태풍의 눈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던 거야. 막말로 그녀를 만났으므로 하여 비로소 야릇한 안식을 얻었다고 하면 너무 일방적인 표현일까. 하나 그녀를 탐하지 않고서는 이 감흥을, 이 열정을, 이 폭발을, 이 뜨거움을 감당해 낼 재간이 없다.오, 그녀가 곁에 있음으로 하여 상큼한 그녀를 느끼노라. 그녀가 곧 평온이고, 안식이고, 뜨거움이므로 평온과 안식과 뜨거움…그 자체가 바로 행운 아니던가.우리 삶에 있어서 운명의 선물은 담벽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삽시에 지나가 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평생 두서너 번 온다는 행운, 만약 그것을 움켜잡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친다면 그보다 더 큰 덧없음도 없으리.“기어코 붙들고 말리라. 탐하고 말리라. 설사 그 후유증 때문에 그녀의 영혼을 이 가슴에 남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설령 그것이 바렌즈 말벌의 반복행위 같은 어리석은 유전자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2006-07-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7)

 야곱의 사다리⑮ 하지만 박준호는 그녀를 맨땅에 눕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오두막 안을 뒤져 마른 풀 더미를 찾아낸다. 풀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박준호는 그녀를 풀 담요 위로 조심스럽게 옮겨 놓는다. 한기에는 뭐니뭐니해도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서 그녀를 가능한 벽난로 가깝게 들이민다. 한데도 냉동새우처럼 구부러진 허리는 금세 펴지지 않는다. 계속 덜덜 떨고 있다. 비에 젖은 옷 때문이다. 소매 긴 청재킷과 청바지는 아예 물이 줄줄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래도 저 겉옷은 벗겨야겠어. 순간, 섬광이 번쩍한다. 번갯불이다. “우르릉 꽝꽝!” 바로 머리 위쪽이다. 오두막이 통째로 내려앉을 것 같다. 엄청난 뇌성이다. 귀가 멍멍하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도 박준호의 목을 두 팔로 감고 있다. 그녀가 말한다. “우리 은경이!” “은경인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천둥 벼락엔 자동차 안이 제일 안전하니까요.” 박준호는 자신이 생각해도 침착하다. 그가 말을 잇는다. “그보다 겉옷을 말려야겠어요. 벗으세요.” 그녀가 박준호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며 고개를 젓는다. 또 한 차례 돌바람이 불어 문짝을 열었다 닫는다. 그녀가 박준호의 팔을 붙잡는다. “어서 벗어요.”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박준호가 계속한다. “젖은 옷을 벗어 버려야 감기를 이길 수 있어요, 어서요. 자아…제가 옆에 있어서 못 벗는 겁니까?”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박준호가 말한다. “자리를 피해 드려요?” “…괜찮아.”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연다. “그럼, 어서 벗어요. 아니, 제가 도와드리죠.” 박준호가 나서서 그녀의 재킷을 벗긴다. 하나 그녀는 박준호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 앉는다. 그래도 불을 쬔 덕분에 한기를 많이 면한 모양이다. 물이 줄줄 흐르는 청재킷이 벗겨진다. 소매가 거의 없는 흰 면티다. 터질 듯한 가슴의 볼륨이 그대로 드러나는 걸로 보아 노브라가 틀림없다. 갑자기 박준호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뭐랄까. 그동안 잘 훈련시켜 다독거려 놓았던 사냥개의 야성이 흡사 용수철처럼 돌연히 튀어 오른다고나 할까. “안 돼, 절대로!” 그는 사냥개를, 아니 야성을 향해 꾸짖는다. 하지만 야성은 이미 작동을 개시한 뒤다. 몇 마디 간곡한 꾸짖음으로 쉽게 평정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숫제 용트림이다. 공격이다. 어떤 강력한 수비가 그의 공격을 저지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박준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그녀가 벗어 놓은 청재킷을 비틀어 물을 짜내며 천연덕스럽게 “이것 봐요. 물에서 막 건진 것 같잖습니까.” 너스레를 떤다. “그 청바지도 벗으세요.” 그녀의 눈이 번쩍한다. 재킷을 탈탈 털어 벽난로에 비스듬히 걸며 박준호가 계속한다. “불이 좋아서 금세 마를 겁니다.” 박준호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은 채 통나무들을 페치카에 툭툭 던져 넣는다. 불길이 거세게 활활 타오른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쪼그리고 앉아 말한다. “괜찮아. 이대로 말려 입을 테니까.” 박준호는 생각한다.

2006-07-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6)

야곱의 사다리⑭ “브라보!”실제로 박준호는 고함을 친다. 두 팔을 하늘에 펼치고 만세를 부른다. 결승전의 연장전에서 골을 넣은 축구 선수처럼 온몸을 하늘로 솟구쳐 올린다. 그 통에 플래시 불빛도 함께 요동을 친다.“맞아. 이래서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끼는 거야. 그래서 살 만한 세상이라고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거야. 살 만한 세상….”박준호는 오두막 문을 열기 위해 골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박준호가 오두막 안에 들어가 실내를 점검하고 있는 순간에도 문은 덜컹덜컹 열렸다 닫히고, 닫혔다가 다시 열리곤 한다. 모두 바람 때문이다.기실 오두막이라기보다 오래되어 버려진 별장이거나, 아니면 도로작업 따위의 공사용으로 지어진 임시 숙소 건물이라고 해야 옳다. 무엇보다 휘어진 채 너덜너덜 매달려 있는 천장의 널빤지들이 그러하다. 물론 마룻바닥도 따로 깔려 있지 않다. 마룻바닥 대신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통나무 조각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 위로 거미줄이 즐비하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풍경이다.박준호가 모기장처럼 겹겹이 둘러쳐진 거미줄을 두 팔로 하나하나 뜯어낸다. 그을음에 의해 검어진 벽면에 촛대가 하나 서 있고 반쯤 타다 남은 붉은 양초가 두 개씩이나 촛대에 꽂혀 있다.그는 촛대에 불을 붙인다. 실내가 희끄무레하게 밝아진다. 아, 이게 뭔가. 페치카다. 페치카가 촛대 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박준호는 더 이상 주변을 살필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통나무 조각을 주워 모은다. 그리고 불을 지핀다. 불쏘시개가 따로 없는데도 금세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나무가 바짝 말라 있기 때문이다.박준호는 다시 빗속으로 나온다. 영락없는 단거리 육상 선수다. 전력 질주를 한다. 자동차 문을 집어 뜯듯 열어젖힌다.“어서, 일어나요! 집을 발견했습니다!”스카이 홍은 눈두덩도 무겁다는 듯이 간신히 눈동자를 보인다.여전히 냉동새우처럼 잔뜩 쪼그리고 있다. 박준호가 거침없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집에다 불을 지폈습니다, 따뜻하게….”박준호가 속삭이듯 말한다. 한데도 그녀는 자꾸 오그라들기만 한다. 이건 정도가 심하다. 보통 한증(寒症)이 아니다. 안 되겠어, 박준호가 우비를 벗어 그녀를 둘둘 만다. 그리고 훌쩍 들어올린다. 그 순간 몸을 뒤채며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연다.“엘리시온…아니, 우리, 은경이….”그제야 박준호가 뒷좌석을 본다. 네 살짜리 딸이 누워 있다. 담요를 둘둘 감고 편안히 누워 있다.“얘야, 얘야!”응답이 없다.“잠들었는걸요.”“….”박준호가 그녀를 안고 빗속을 뒤뚱뒤뚱 달음박질하며 가능하면 그녀 귀 가까이에서 속삭인다.“딸아인 따뜻하게 잠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편안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아주 편하게….”그는 정말 편안히 그녀를 벽난로 앞에 눕힌다. 이미 촛불은 꺼지고 없다. 그래도 통나무 불은 잘도 타고 있다. 불 그림자 때문에 천장과 벽이 한꺼번에 일렁인다. 페치카 앞은 맨땅이었지만 바짝 말라 있다. 이 빗속에 습기가 없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2006-07-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5)

야곱의 사다리⑬조금씩 자동차가 움직일 때마다 타이어 밑에 돌을 끼워 넣으며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한다.배기통의 물이 빠져나올 정도의 각도를 간신히 유지시켰다고 해서 시동이 금세 걸릴 리 만무하다. 더구나 엔진까지 물을 먹었다면 사정은 더욱 암담해진다. 막말로 언제 히터를 켤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도무지 계산이 서지 않는다.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박준호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다. 쉽게 그칠 조짐이 아니다. 어느새 박준호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애매하다. 어디서 그런 괴력이 샘솟았을까.“휴우-.”그는 손뼉을 탁탁 친다. 자동차를 옮겨 놓는데 성공했다는 뿌듯함의 표현이다. 박준호는 의기양양하게 자동차 문을 연다.“이제, 곧 시동이 켜질 겁니다.”그녀는 말이 없다.“저어….”그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새우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시트에 비스듬히 몸을 맡기고 있다. 엄습하는 한기를 어쩌지 못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박준호가 벼락같이 운전석에 들어앉는다.“빌어먹을 자동차!”그는 키를 넣어 시동을 걸다 말고 핸들을 꽝 친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기별조차 전달된 것 같지 않다.무슨 방도가 없을까. 박준호는 어쩔 줄을 모른다. 잘못하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이 흡사 빗줄기처럼 끼얹는다.“맞아.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야 돼. 어쩌면 한기가 아닌지도 몰라. 감기가 아닌…. 그래, 지나가는 차를 세우는 도리밖에 없어.”박준호는 손전등을 켜들고 다시 빗속을 나온다. 그리고 도로 가운데 우뚝 섰지만 말 그대로 어둠 그 자체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 아무리 눈을 들어 사위를 훑어도 멀리서부터 서서히 가까워지는 헤드라이트조차 없다.근처에 인가는 없을까. 박준호는 자동차를 일단 포기하고 침엽수 숲으로 뚫린 오솔길을 따라 몸을 날린다. 플래시 불빛에 드러나는 숲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그래서일까. 숲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것 같다. 대밀림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깊다.비를 먹어 한결같이 검은 색조를 띤 나무 둥치들은 떨떠름한 수지 냄새를 풍긴다. 간단히 보이는 고리버들도 자작나무도 마찬가지다. 비는 계속 숲을 때린다. 빗방울이 잎사귀들을 강타하는 미세한 소리, 그 소리 하나하나는 가볍고 부드럽고 은은하지만 수천 수만 개의 소리가 한데 모아진, 그것은 흡사 유령의 기침 소리처럼 괴기스럽기까지 하다.“쏴아 쏴-.”바람에 숲이 일렁이는 것인지 숲이 일렁이므로 바람이 생기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현란한 숲의 하모니….“그래, 이게 바로 아놀드 쇤베르크의 음악이야.”동시에 박준호가 중얼거린다.“제발 인가라도 하나 나타나라. 아니, 꼭 사람이 살고 있는 인가가 아니라도 좋다. 하다못해 비어 있는 별장이라도, 아니면 버려진 통나무집이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비를 피할 수 있고 불을 지필 수 있는 숲 속의 작은 동굴이라도…. 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한데 이상하다. 때로는 꿈같은 상황이 사진 찍듯 현실 그대로 반영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뭐랄까.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있다고나 할까.정말 오두막이 있다. 자작나무 숲 속이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빽빽한 숲에 부끄러운 듯 살짝 숨어 있는 작은 오두막.

2006-07-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4)

야곱의 사다리⑫그녀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이빨과 이빨이 마주치는 소리도 덜덜 들리는 것 같다.“아니, 이런! 떨고 있잖아요. 히터 안 나옵니까?”“고장이라, …시동도 안 걸려.”“아참, 그렇지.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고쳐드릴 테니까.”이젠 완연한 어둠이다. 알루미늄빛도 잠깐이다. 카일오브로할쉬도 그렇지만 포트월리엄도 북해 영향권이다.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궂은 날씨에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게다가 포트월리엄으로 가는 협곡은 악명 높은 산악 지대다. 특유의 침엽수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우뚝 서 있다. 그렇다. 큰 산이 사위를 막고 있으므로 쉽게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손전등이 필요하다. 손전등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박준호의 그라비아 오토바이 불빛을 폭스바겐 전신에 꽂았어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내부까지 세세히 비출 수가 없다. 이럴 때 손전등은 꼭 있어야 할 물건이다. 그러나 손전등이며, 드라이버 같은 공구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수가 없다. 물을 형편이 아니다.박준호는 스스로 트렁크를 연다. 장님 문고리 잡듯 손으로 하나하나 점검하는 식이다. 그래도 쉽게 손전등을 찾아낸다.따지고 보면 공구함 비치는 렌터카 회사의 필수 의무다. 박준호는 그 점을 잘 안다. 하나, 그가 잘 아는 것은 렌터카의 공구함뿐 아니다. 박준호는 자동차 메커니즘도 탁월할 정도로 꿰고 있는 편이다.예컨대 대니 라일러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볼보차가 그러하다. 아직까지 어머니의 볼보가 고장 때문에 서비스 공장에 보내진 적이 없다. 비단 자동차뿐 아니다.집 안의 가전 제품도 마찬가지고, 대니 라일러가 개인적으로 애용하는 전기톱 따위 공구들도 박준호가 십자 드라이버 하나만 들면 시쳇말로 만사 오케이다.몇 가지 뚝딱거리지 않아서 금세 제 모습으로 바꿔 놓곤 한다. 오죽하면 대니 라일러 왈, “쟨, 영락없는 맥가이버야!”라고 감탄해 마지않았을까. 어쨌거나 박준호가 폭스바겐을 진단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잠깐이다. 여기저기 플래시를 비춰 보고 말 것도 없다. 너무 뻔한 고장이기 때문이다.물이다. 빗물이 강물처럼 범람한 골짜기의 도로를 질주하면서 생긴 후유증이다. 배기통에 물이 찬 것이다. 어쩌면 엔진까지 덩달아 물을 퍼마셨는지도 모른다.박준호는 일단 배기통의 물부터 빼기로 작정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언덕 쪽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 한데 차가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한기가 들어 덜덜 떨고 있는 그녀를 불러낼 수도 없다.가능하면 그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차를 비스듬히 세워야 한다. 그래서 물을 빼고 시동을 걸어야 하고, 히터를 최대한 가동시켜야 한다. 자동차 안을 훈훈한 열기로 가득 채워야 한다.그녀는 지금 전신이 축축이 젖어 있다. 아니, 냉동 창고에 잘못 집어넣었다 꺼낸 애완동물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딱딱 이빨 부딪치는 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어서 힘을 내자. 자동차를 밀어 올리자.”그러나 마음뿐이다. 자동차는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 박준호는 젖 먹던 힘을 다 동원한다.“얍! 얍!” 차력사처럼 기합까지 질러 댄다.

2006-07-11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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