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133)

야곱의 사다리⑪우선 기온의 격차만 해도 그러하다. 무려 20도나 차이가 난다면 이건 과히 극과 극이다. 막말로 여름과 겨울이다. 지금 박준호는 여름에서 겨울로 올라가고 있다.얼마나 높이 올라왔을까. 커브 오름 길이다.“어라, 저게 뭐지? 그래, 확실히 뭔가 있었어.”산발한 여인네처럼 전신을 마구 흔들어 대는 나무 숲 때문에 힐끗 지나치긴 했지만…분명 자동차 같은 게….”박준호는 끼익, 오토바이를 세운다. 명색이 4차선 고속도로인데도 반대 방향으로 차를 되돌리는 일 때문에 방해받을 상황은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도로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후미진 길섶으로 다가선다. 그렇다. 뭔가 있다. 자동차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자동차…, 오, 하느님! 빨간색이구나. 딱정벌레로 불리는 폭스바겐이구나. 한데, 아무 기척이 없다. 자동차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습윤이 하얗게 끼여 있다. 유리창에 떨어진 빗물도 마찬가지다. 틀림없다. 그녀의 차다. 문을 열어 본다. 안으로 잠겨 있다.“안에 누구 없어요!”탕탕 두들긴다. 그제야 기척이 있다. 유리문이 조금씩 열린다. 사위가 어둑어둑 했지만 겁먹은 두 눈은 확실히 구분할 수가 있다. 그녀다.“어머!”순간, 자동차 문이 열린다. 그녀가 소리친다.“이게 누구야!”그러나 막상 놀란 쪽은 그녀가 아니다. 박준호다.그녀의 입술 탓이다. 마치 장미꽃잎인 양 붉었던 입술이 온통 시퍼렇다. 그리고 그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다. 옷도 모두 젖어 있다.“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박준호가 묻는다.“그보다…학생은 웬일이야?”그녀가 더 궁금하다는 듯이 반문한다.“저야…그냥 지나가다가….”“그럼, 학생도 스카이 섬에서 마지막 페리호를 탔단 말이야?”박준호가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준다.“그랬구나.”“그건 그렇구, 왜 이러고 있죠?”그제야 박준호가 자동차 안을 들여다본다. 예상대로 그녀 남편은 없다. 네 살짜리 딸아이만 담요에 싸여 뒷좌석에 웅크리고 누워 있다. 아마도 칭얼거리다가 잠에 빠진 모양이다.“자동차가 고장인가요?”박준호가 시선을 그녀 쪽으로 옮긴다.“하필 이런 데서 고장이 날 게 뭐야? 인적도 없구, 자동차도 없구….”“그래서 혼자 떨고 있었군요. 참, 애기 아빤?”“…먼저 떠났어. 급한 볼일이 생겨서….”“경비행길 타셨다면서요? 호텔 프런트 지배인이 그랬어요. 노련한 조종사를 소개해 줬다구.…한데 왜 이런 빗속을 혼자 달리셨어요?”그녀는 스카이 섬 호텔에서처럼 미소를 머금었다 지우는 일도 귀찮다는 듯이 하지 않는다. 박준호가 입을 연다.“비를 흠뻑 맞으셨네요.”흩뿌리는 비가 그녀에게 들이치지 않게끔 몸으로 막으며 주저앉는다. 그리고 그녀의 찬 손을 잡는다. 그녀가 움찔한다. 그러나 손을 빼거나 뿌리치지 않는다. 그럴 기력도 없다는 듯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가 뜬다.“감기 아니세요? 추워 보여요. 그렇죠?”그녀가 또 고개를 끄덕인다.“왜 비를…이렇게 다 맞았죠?”“자동차를 세우느라구. 도로변에서 손을 흔들었지만….”“다들 그냥 쌩쌩 지나가 버리죠? 아마 빗속이라 잘 안 보였을 겁니다.”“…아무튼 영국 사람들 젠틀맨은 아니야.”

2006-07-1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2)

야곱의 사다리⑩완만한 구릉이다. 깊은 골짜기도, 경사 높은 고갯길도 없다. 그래서 더 지루하다. 비는 계속 퍼붓는다. 다행히 살인적인 태풍은 아직 불어오지 않는다. 대신 태풍을 예고하는 강한 맞바람이 빗줄기와 함께 얼굴을 때린다.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시계를 본다. 어느새 오후 5시다. 두 시간 가깝게 정신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돌려댔다는 얘기다. 그동안 빨간색 폭스바겐을 찾기 위해 얼마나 눈동자를 좌우로 돌렸는지 양미간이 뜨악할 지경이다.비단 양미간뿐 아니다. 배도 고프다. 너무 다급하게 설친 탓이다. 그래도 아침은 그들 부부를 기다리며 커피 두 잔에 토스트 한 조각으로 때웠지만 점심은 아예 구경도 못하고 지나친 셈이다.그래서일까. 으스스 춥다. 비옷을 갑옷처럼 입긴 했지만 빗물이 새어 들어와 속살을 흥건히 적신다. 말이 나왔으니까 얘기지만 이런 날 오토바이 운행은 확실히 무리다. 네 발 달린 승용차도 삼가고 있는 판에 하물며 오토바이로, 그것도 전 속력을 다해 질주하다니……. 정말 최악의 조건이다.만약,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뭐라고 할까.“그건 자살 행위야. 자살을 그렇게 하고 싶니? 난 그런 건 네 아버지 한 사람으로 족하다. 나한테 또다시 그런 상처를 주고 싶니? 이 에미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어 그런 짓을 시도했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돌팔매질이다. 꼭 날 향해 돌을 던져야 네 맘이 편해진다 하더라도 제발 준호야, 정신 차려라, 정신 차리라니까.”“설사 자살 행위라 하더라도 전 어쩔 수 없어요, 어머니. 난 그녀를 만나야 돼요. 만나서 작별 인사만 교환하고 금세 헤어진다고 해도, 난 그녀를 꼭 봐야 한다구요.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실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겠어요.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단 한 가지, 지금 내가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이에요. 행복, 그건 경이로움이에요. 어머니, 당신에게만 고백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난 톰 라더 부인에게서도, 마거릿에게서도, 시루코에게서도 감지하지 못했던, 정말 어찌 할 수 없는, 흡사 자연법칙 같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마치 유성 같았어요. 지상으로 내려오고 싶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산화하고 마는 별똥별, 그리고 비단실 꽁지의 그 찬란한 빛깔……. 맞아. 그녀 남편…… 일본 유도선수 같은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가 그녀 옆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다만 그녀를 발견했다는 사실, 그녀가 지금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를 뒤쫓아 달리고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 지금 전 분별과 냉정을 찾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고 있어요. 아니, 벌써 냉철해요. 그녀는 나의 사랑, 글쎄 사랑이란 말이 조금은 어색하고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사랑보다 더 적절한 어휘가 지금은 생각나지 않아요. 어쨌거나 그녀는 나의 관심과 나의 사랑과 나의 연민을 독점할 가치가 있는 여자예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그녀를 뒤쫓고 있는 거예요. 할 수만 있다면, 시속 150㎞가 아닌 마하 속력으로 달리고 싶지만…….”갑자기 고갯길이 시작된다. 팻말이 보인다. 벤네비스 산악 지역이다. 포트월리엄 시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거쳐야 하는 지역이다.벤네비스 산은 영국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명성을 떨친다. 높이가 1천344m던가. 에계, 1천300 고지라니 별거 아니구만. 하나 그렇지 않다. 거의가 구릉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레이트 브리튼에서 가장 이질적인 곳이 벤네비스 산악 지역이다.

2006-07-0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1)

야곱의 사다리⑨ 박준호는 다짜고짜 페리호 부두 하역을 관리하는 흰 수염 노인에게 다가선다.“빨간색 폭스바겐 못 봤습니까?”“빨간색?”“네, 70년형 폭스바겐이요.”“가만 있자. ……그래, 동양 여자가 운전하는 차라면 본 적이 있지.”“바로 그 찹니다. 어디로 갔습니까?”“포트월리엄으로 가는 지름길을 묻기에 가르쳐줬어.”“그게 언젭니까?”“이전에 도착한 배니까, 반 시간쯤 됐나?”살았다 싶다. 하지만 자전거로는 역부족이다. 페달을 밟으며 그녀를 추격하기란 한마디로 난센스다. 포트월리엄 쪽으로 가는 승용차에 편승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방도도 없겠지만 그 역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물론 편승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예 포트월리엄 쪽으로 향하는 자동차 왕래 자체가 없다. 박준호는 자전거를 버리기로 마음 먹는다. 30분 먼저 달려간 폭스바겐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만큼 빠른 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기서 그녀를 놓쳐 버리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 아니, 꼭 만나야 할 사람이다. 그래서 그 자신의 비밀스런 사생활까지 모두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녀를 따라 잡아야 한다. 붙잡아야 한다. 하다못해 따뜻한 차라도 함께 마셔야 한다.맞아. 박준호는 용단을 내렸다. 당초 계획으로는 스카이 섬을 거쳐 네스호수가 있는 인버네스 그리고 그레이트 브리튼 섬의 머리 부분인 스크레브스터 항구까지 자전거로 주파할 작정이었지만 박준호는 그 방대한 계획을 포기해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경비의 거의 전부를 렌터카 회사에 지불해 버렸기 때문이다.그래도 전혀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홀가분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뜨겁다. 뿌듯하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박준호가 살아 온 세월을 통틀어 그날 내린 것만큼 멋진 결단도 없다고 믿을 정도다. 실제로 박준호는 그 날의 결단을 후회한 적이 없다. 후회는 커녕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마치 최고 권위의 훈장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어쨌거나 그날 박준호는 십자군에 지원한 원탁의 기사처럼 미끈한 준마 위에 위풍도 당당하게 올라앉는다.준마는 영국제 그라비아 260㏄ 오토바이다. 그리고 투구인 양 헬멧을 쓴다. 갑옷이나 진배없는 우비는 진작 착용한터다. 렌트한 오토바이에 딸려 온 노란색 일색의 비옷과 헬멧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부릉, 부릉-.”박준호의 손바닥에 클러치 레버의 감도가 전해진다.“그래, 맘껏 달리는거야. 그래서 그녀를 따라잡는 거야.”“자, 출발이다!”“부릉, 부릉!”오토바이가 기우뚱하며 앞으로 전진한다. 난생 처음 만나는 그라비아 오토바이인데도 기계의 미세한 떨림이 박준호의 세포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카일오보로할쉬로 가는 표지판대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런 라이트 한다. 앞 타이어에서 튀긴 빗물이 박준호의 얼굴을 덮는다. 물이 많다. 도로 전체가 물바다다.마치 물살을 가르며 경쾌하게 달리는 모터보트 같다. 자동차의 왕래는 많지가 않다. 특히 승용차는 더 그렇다.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 대개가 컨테이너 등 대형 트럭들이다. 아직 해가 지려면 네다섯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하는데도 자동차들은 한결같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다. 태풍전야 특유의 검은 구름이 내리누를듯 잔뜩 껴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시야는 어두운 편이다. 멀리 볼 수가 없다. 계속 쏟아지는 빗줄기와 물안개와 바람에 떨어져 마구잡이로 날리는 가로수 나뭇잎과 허연 물보라가 시야를 불편하게 하고 옹색하게 한다.

2006-07-0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30)

야곱의 사다리⑧ “그래요, 부인이랑 아이랑은 반 시간 전에 체크아웃했으니까.”“부인은 어디로 갔습니까?”“글쎄… 부두로 가지 않았겠어요.”“지금 페리호가 운항 중인가요?”“오전 8시까지 마지막 배를 띄운다고 했는데 모르겠어요.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박준호는 선택할 여지가 없다. 짐을 대충 챙겨 들고 부산하게 호텔을 나선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자동차는커녕 우산 쓴 행인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람이 너무 거세다. 맞바람 때문에 자전거 속력이 나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도 페달을 북북 소리 나게 밟는다. 다행히 부두 쪽으로는 내리막길이다. 몇 번씩 미끄러져 물 속에 처박혔다 일어서며 부두에 당도했지만 스카이 홍의 폭스바겐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벌써 페리호에 실렸겠지.”정말, 페리호가 막 떠나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배다. 일기가 순조로운 날은 20분에 한 대씩 출발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예외다. 불과 30분 거리인데도 배는 발이 묶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지금 떠나는 페리호는 사람을 싣고 있지 않다. 사람과 자동차 대신 소가 잔뜩 실려 있다. 어제 그들 부부를 만났을 때 길을 막았던 바로 그 얼룩소들 같다. 아마도 대도시 도살장으로 옮겨 가는 모양이다.“음머, 음머~.”“음머어~.”여기 저기서 소가 울어 댄다. 밧줄을 풀고 있는 사내를 붙든다. 다행히 육지 항구 카일오브로할쉬가 목적지란다.“야, 이거야말로 신이 돕고 있구나.”박준호가 쾌재의 탄성을 지른다. 망설이지 않는다. 주춤거리지도 않는다. 막무가내로 돌진한다.“스톱! 스톱!”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친다. 영문 모르는 배가 슬슬 뒷걸음을 치려다가 주춤한다.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냅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진다.“휴우~.”박준호는 정말 간발의 차이로 페리호에 몸을 싣는다. 소를 가둬 놓은 우리가 성냥갑처럼 차곡차곡 들어차 있다. 혹시나 해서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박준호가 찾는 폭스바겐은 없다. 페리호 선원을 붙들고 물었지만 빨간색 폭스바겐은 본 적이 없단다.“혹시 앞서 간 배에 실리지 않았을까요?”“글쎄, 앞서 간 배야 모르죠. 난 그 배 선원이 아니니까.”만약 먼저 간 페리호에도 타지 않았다면…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다른 호텔로 거처를 옮겨 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무슨 까닭으로 새벽같이 호텔을 옮긴단 말인가. 그리고 남편은 왜 혼자 떠났을까. 이 태풍 속을, 그것도 비행기를 전세 내서 서둘러 떠나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박준호는 괜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페리호가 빨리 육지에 당도하기만을 학수고대할 따름이다. 배가 심하게 로링한다. 바다가 뒤집어지고 있다. 아무리 안전한 항해라지만 조금은 무리한 것 같다. 선원들까지 선실에 틀어박혀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박준호가 혼자 갑판의 손잡이를 붙들고 북해의 찬비를 맞으며 우뚝 서 있다. 배의 속력은 느리다. 산더미 같은 파도를 정상적으로 타고 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 통에 30분 거리가 한 시간도 더 넘게 걸린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카일오브로할쉬라고 해서 태풍 권에서 벗어난 곳이 아니다. 어쩌면 카일오브로할쉬 쪽이 오히려 태풍의 중심권역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스카이 섬보다 더 을씨년스럽다.페리호에서 내리는 것을 제외하면 시내를 왕복하는 자동차 대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지레 겁을 먹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근 모양이다. 그러나 박준호는 그런 을씨년스러운 시내 분위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의 관심의 표적은 오로지 폭스바겐뿐이다.

2006-07-0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9)

야곱의 사다리⑦ “어머닌 재혼하셨어요.”“어머, 그렇구나.”“유감스럽게도 아버진 한국말을 못하세요.”“한국말을 못한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외국 남자거든요.”그녀의 큰 눈이 더 동그래진다. 박준호가 말한다.“의붓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궁금해요. 몹시.”“그분은 미 육군 제너럴이에요.”“제너럴?”“별 하나짜리 장군…, 나토군 사령부 정보 담당 책임자래요.”마침 그때 일본 유도 선수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 역시 샤워를 끝낸 말끔한 모습이다.“여, 사이클 보이도, 이 호텔에 들었구먼.…한데 무슨 얘길 그렇게 심각하게 주고받는 거지?”스카이 홍이 재빨리 대답한다.“아, 아무것도 아녜요. 스카이 섬에 관한 것들, 건 그렇고 왜 이리 늦었어요?”“전화가 좀 길어진데다가 바람에 창문들이 죄 열려서 그걸 닫고 내려오느라구…. 밖이 심상치 않는데….”“심상치 않다뇨?”“아무래도 폭풍이 한차례 시작할 조짐이야.”“일기예보에 비가 많이 내릴 거라고 했습니다.”박준호가 끼어든다.“그렇지? 어쨌든 하늘이 땅으로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야.”일본 유도 선수 같은 남자의 예측은 백발백중이다. 물론 밤부터 태풍이 기승을 부린 것은 아니지만, 아침 식사 후 어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비단 비공식 투어뿐 아니다. 개인적인 외출 역시 모두 금지되었다고 해야 옳다.그래도 박준호는 새벽에 일어나 비를 맞으며 스카이 섬 이곳저곳을 한 바퀴 돈다. 북해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 닥치는 언덕길은 자전거와 사람을 낭떠러지로 한꺼번에 날려보낼 것처럼 세차다.그러나 오전 7시까지만 해도 바람이 그처럼 우악스럽게 불지 않았고 빗줄기도 거세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아침 운동하기에 알맞은 날씨였다.박준호는 땀투성이 몸을 뜨거운 샤워로 깡그리 씻어 내고 스카이 홍 부부를 만나기 위해 레스토랑을 지킨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쉽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벌써 아침을 끝냈을까. 그래서 커피와 음료를 마시는 살롱으로 가 본다. 없다. 당구장도 마찬가지다. 볼링장에도 없다. 하는 수 없다. 그들이 묵고 있는 3층 방으로 전화를 건다. 벨이 수십 번 울리는 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설마…. 박준호가 그제야 호텔 문을 뛰어나와 주차장으로 내달린다.역시, 빨간색 폭스바겐이 없다. 그 차가 있던 자리에 단체 손님을 싣고 온 리무진 버스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새벽엔 분명 이곳에 있었는데….박준호는 바람처럼 내달린다. 프런트다. 30대 초반 여자 지배인이다. 친절하게, 그러나 어디까지나 직업에 충실할 뿐이라는 태도로 흥분 상태의 박준호를 맞는다.“아, 그 부인? 30분 전에 체크 아웃했어요.”“체크 아웃하다니, 호텔을 떠났단 말인가요?”“떠났지요. 하지만 남자가 먼저 나갔어요. 이른 새벽인데 비행장을 묻더군요.”“비행장? 스카이 섬에도 비행장이 있습니까?”“경비행기용이죠. 아마, 그 남잔 훈련용 비행길 탔을 거예요. 내가 베테랑 조종사를 소개해 주었으니까.”“어딜 가는 비행긴데요?”“포트월리엄까지겠죠, 뭐. 이 날씨에 경비행긴 멀리 날지 못하잖아요.”“남자 혼자 비행길 탔습니까?”

2006-07-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128)

야곱의 사다리⑥ 그녀가 두 손으로 턱을 고인 채 고개를 끄덕인다.“전, 관광학이나, 수리학, 아니면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어머닌 꼭 법학 쪽을 택하라는 거예요.”“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인데?”“글쎄요. 어머니가 워낙 완강한 분이라서….”박준호가 괜히 주변을 휘둘러 본 다음 나지막하게 말을 잇는다.“…이런 얘기 막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무슨 얘긴지…해요, 어서.”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재촉한다.“비밀인데두요?”“비밀?”“네, 비밀을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실래요?”“좋아요.”그녀도 약간은 긴장된다는 듯이 몸을 고쳐 앉는다.“실은…아니, 왜 제가 첨 뵙는 분에게 제 비밀을 털어놓으려 하는지 제 자신도 잘 모르겠거든요. 솔직히 이건,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아무에게나 비밀을 누설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전….”“그렇군요. 어쨌든 말을 꺼냈으니까 해 보세요. 비밀은 지킬 테니까.”“지금 전화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는 분에게도 적용되는 일이에요, 이건.”“어머, 제 남편에게도?”“물론이죠. 그래도 약속하실 겁니까?”“좋아요.”그녀는 쾌히 승낙한다.“실은, 제가 자전거 여행을 계획한 것도 어머니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은 일념 때문이거든요.”“도망?”“네.”“어머니가 영국에 함께 살아요?”“그럼은요.”“한데, 왜 도망쳐요?”“어머닌 제가 기필코 법대를 선택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머니 뜻에 순종해야 한다면 전 지금 헤이스팅스에 있어야 합니다.”그녀가 박준호의 말허리를 끊으며,“헤이스팅스에 살아요?”“네, 헤이스팅스에 삽니다. 그쪽 잘 아세요?”“아직, 가 보진 못했구요, 얘기만 많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랑 헤이스팅스에 사는군요?”“맞습니다. 우리 어머니 고집이 세신데다가 지금이 옥스퍼드 법정대학 면접 기간이거든요. 하지만 전 용기를 냈습니다. 어머니에게 메모 한 장 달랑 써 놓고 도망쳤습니다. 혼자 자유로워 졌습니다.…앞으로도 전 계속 자유로워 질 겁니다.”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데도 눈빛은 시원하지 않다. 호기심이 그윽하다.“그런데 왜 법 공부를 싫어하는 거죠?”“…어떻게 보면 가족 사정으로 법을 공부해야 될 이유도 없진 않아요.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그러나 전 법 그 자체를 굴레라고 생각하거든요.”“굴레?”“전, 날아다니는 새처럼 살고 싶어요. 제 얘기 이해 못하시겠습니까?”“글쎄, 아버진 언제 돌아가셨죠?”“저희 아버진 제가 어렸을 때….”“그럼, 영국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요?”“아녜요. 아버지하고 셋이.”“아버지하구?”

2006-07-0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7)

야곱의 사다리⑤“아놀드 쇤베르크라고 했습니까?”박준호가 리시버를 뽑아 그녀에게 건네며 말을 잇는다.“너무너무 좋은데요.”“좋으면 가져요.”“네?”“테이프 여분은 많으니까.”“고맙습니다.”박준호가 거침없이 그녀가 뽑아 주는 테이프를 받아 주머니에 넣는다. 촛대를 만지던 딸아이가 의자에서 내려와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박준호가 아이를 끌어내어 다시 의자에 앉힌다.“너무 예쁘네요. 이름이 뭐죠?”박준호가 묻는다.“엘리시온.”그녀가 대답한다.“엘리시온이라구요?”“아, 참 엘리시온은 쟤 아빠가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는 은경이에요. 김은경.”“김은경. 이름 예쁘네요.”박준호가 딸아이 머리를 새삼 쓰다듬고 나서 말을 계속한다.“한데, 어디 가셨습니까?”“애기 아빠? 전화 중이에요. 회사에 연락처를 남겨야 하거든요.”“한국에 있는 회사 말인가요?”“한국회사? 아녜요. 런던에 있는… 물론 한국 회산 맞아요.”“그러니까 런던 지사에 근무하시는군요.”“그래요. 런던 지사.”그녀가 씨익 웃는다. 싱그럽다. 살짝 파인 볼우물이 더욱 신선해 보인다.어쩌면 이렇게 편안할까. 방금 만난 쇤베르크 음악 같을까.태풍이 끝난 뒤의 정적 같을까. 비로소 소파에 등을 맡기는 밤 10시의 평정 같을까. 박준호는 어이없지만 순식간에 달궈지는 불덩이를 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연다.“전요, …이름이 박준호거든요. 저, …은경이 엄마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나요?”“네.”“이름은 뭘… 그냥 미세스 홍이에요.”그녀가 입 언저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지운다. 약간 멋쩍은 분위기다. 이번에는 그녀가 묻는다.“뭐 전공하는 학생이죠?”“전 아직 전공이 없어요. 예비 학교 졸업반이니까요.”“그럼, 아직 대학생도 아니네?”“하지만 석 달만 더 있으면 대학생이죠.”“대학 시험은 자신있어요?”“입학 허가를 받았는걸요.”“어느 대학?”“저희 집에서 옥스퍼드가 가깝거든요….”“옥스퍼드 대학?”“네.”“어머, 머리 좋은 학생이구나.”기실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벌써 친오누이 같은 분위기다.그만큼 그녀가 포근하고 편안하다는 뜻이다. 천성적으로 상냥하고, 사교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박준호와 똑같은 호기심으로 꽉 찬, 저 빛나는 눈동자 때문이다.박준호는 톰 라더 부인이나 마거릿이나 시루코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참으로 신선하고 야릇한 불덩어리 때문에 가슴이 뜨겁다. 아니, 두근거린다.“그래, 바로 이 여자야. 이 여자 같은 여자가 또 있다면… 이 여자를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면….”박준호는 태연을 가장하며 입을 연다.“참, 뭘 전공하느냐고 물으셨죠?”

2006-07-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6)

야곱의 사다리④박준호가 병원을 탈출하여, 자전거 페달을 마구잡이로 밟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다. 그렇다. 그녀와 그렇게 쉽사리 그리고 허망하게 헤어질 수는 없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다.스카이 섬 읍내에는 호텔이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바다가 보이고, 언덕이 있고, 나무가 울창한 경관을 갖춘 호텔은 통틀어 서너 군데가 고작이다. 박준호는 그 서너 군데를 차례차례 돌다가 마지막 한 곳에 자전거를 세운다. 그녀가 타고 온 빨간색 폭스바겐이 호텔 마당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힐 게이트 호텔이다. 박준호는 샤워를 끝내고 새 셔츠를 갈아입는 등 한껏 멋을 내고 호텔 레스토랑 문을 연다.예상대로 그녀가 그곳에 있다. 틴에이저처럼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다. 어찌 보면 레스토랑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다. 하나, 그녀는 다르다. 오히려 정장보다 훨씬 우아하다. 희다 못해 투명한 목덜미 때문일까. 다행히 일본 유도 선수 같은 남자는 없다. 대신 네 살쯤 되어 보이는 깔끔하게 생긴 딸이 그녀 곁에 있다. 딸애는 식탁 위에 놓인 촛대를 만지고 있고, 그녀는 아까 읽던 여행 책자를 아직까지 들고 있다. 아니, 여행 책자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귀에다 리시버도 꽂고 있다. 리시버 줄이 워크맨에 연결되어 있는 걸 보면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박준호가 가까이 다가가도 그녀는 책에서 눈을 뗄 줄 모른다.“안녕하세요?”그녀가 얼굴을 든다. 리시버도 한쪽만 뽑는다.“어머!”화들짝 놀란 표정이다.“학생도 이 호텔에 들었네.”“그렇다고 우연히 그렇게 된 건 아닙니다. 섬이 워낙 빤해서 어디선가 마주치게 돼 있으니까요.”“그래, 몸은 어때요?”“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합니다.”“설마, 도망쳐 나온 건 아니죠?”“도망치다니요?”“의사선생님이 한 사흘은 입원해야 된다고 했거든요.”“본래, 의사들 과장도 심하고 엄살도 많잖습니까.”박준호가 능청스런 어른처럼 말하자,“아무튼 여기, 앉아요. 우리랑 같이 저녁해요.”그녀가 말한다. 하나 그것은 빈말이 아니다. 인사로 적당히 때우려는 수작과는 거리가 멀다. 하긴 스카이 섬에서 한국 사람을 더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도 그녀의 호의는 그런 맥락에서 비롯되었으리라.“그래도 괜찮겠습니까?”“괜찮구 말구.”박준호가 마지못해 앉는 척하며 묻는다.“한데, 지금 뭘 들으시죠?”“아, 이거?”그녀가 한쪽 귀에 남아 있는 리시버를 뽑아 들며, “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 알아요?”“모릅니다.”“한번 들어 볼래요?”리시버를 내민다. 그것을 귀에 꽂자마자 들이닥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람이다. 바람이 밀물처럼 불어오고 있다. 쿵쾅 창문들이 열렸다 닫히고, 커튼이 펄럭인다. 페키니아산 백양나무 숲이 흡사 유령처럼 울고, 부두에 매 놓은 보트들도 질척질척 심하게 흐느낀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곤충의 미세한 더듬이 소리도 들린다.어느새 바람이 잔다. 강력한 바람 소리 대신 잔잔한 물가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떠내려가고 있다. 개미 한 마리가 나뭇잎에 붙어 있다. 더듬이를 움직이고 있다. 그 위로 곤충만큼 작은 동박새가 날고 있다. 포르르륵 날갯짓과 긴 부리로 쪼아 대는 초롱꽃 봉오리 속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세계…. 노란색 꽃가루가 만들어지는 소리, 곤충을 불러들이는 소리….

2006-06-3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5)

야곱의 사다리③“아하, 바로 저거구나.”박준호는 감탄한다. 여자란 웃을 때를 지켜봐야 한다. 웃는 얼굴이 아름다워야 그게 진짜 좋은 여자다. 맨 얼굴이 아무리 미인형으로 생겼다 해도 웃을 때 잇몸이 드러난다거나, 웃을 때 턱이 비틀어진다거나, 웃을 때 필요 이상으로 주름이 많이 잡힌다거나 하면 그건 진정한 미인이 아니다.할아버님의 당부 말씀이다. 박준호는 그 당부의 말을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바로 저 여자야. 할아버님은 바로 저 여자를 두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거야. 박준호는 폭스바겐 속에 앉아 여행 지도책을 뒤적이고 있는 그녀에게서 쉽게 시선을 걷지 못한다. 그야말로 황홀경이다. 도취 상태다.“이것 봐, 그만 가야겠어!”그녀 남편이 말한다.“빵빵!”“띠띠!”마구잡이로 경적이 울린다. 소 떼의 횡단이 어느새 끝나가고 있다. 뒤를 돌아본다. 언제 저처럼 많이 밀렸을까. 차들은 계속 경적을 울려 댄다. 바로 그 순간이다. 끝 무리에 속해 있던 소들중에 정신 착란을 일으킨 놈이 한 마리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박준호가 입고 있었던 빨간색 조끼가 문제였으리라. 아무리 그렇다 해도 똑같은 폭스바겐은 방기 한 채 왜 박준호의 조끼만 공격했을까. 다행히 얼룩소의 뿔에 정통으로 걸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양한 도구를 수납할 수 있는 20여개의 포켓이 달려 있는데다. 방충제며 온도계며, 휴대용 라이트 따위가 가득가득 들어 있었으므로 녀석의 돌연한 공격에도 결정적인 사고는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박준호는 2미터 쯤 허공중을 날아올랐다가, 근처 갈대밭으로 철푸덕 추락했는데, 순간적으로 기절을 했던 모양이다. 박준호가 눈을 떴을 때 크레졸 냄새가 진동을 한다. 시골 병원임이 분명하다. 눈을 뜬다. 한데 웬 일인가. 바로 그녀가 걱정스런 얼굴로 박준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박준호가 앉을 요량으로 허리를 일으키는데,“어멋, 살았구나!”그녀가 반가워하다 못해 손뼉까지 짝짝 친다. 아니, 일어나 앉으려는 박준호를 가슴으로 와락 끌어안았다가 다시 눕히며 말한다.“아서요!”향수 냄새가 아닌 은은한 체취가 뭉클, 코를 찌른다. 그녀가 말한다.“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꼼짝하지 않아야 된다구.”“하지만…전 괜찮은데요.”박준호가 목을 휘둘러 보이고, 허리도 들썩이고, 다리도 들고 팔도 흔들어 보인다. 그녀는 옥수수처럼 가지런한 흰 이를 보이며 보기 좋은 미소를 짓는다.“그래도 의사 선생님 지시에 따라야 돼요.”그녀는 강경하다. 실내를 휘둘러본다. 방안에는 박준호와 그녀뿐이다. 박준호가 묻는다.“제가 기절했었나요?”“그래요. 기절 했었어요.”손목시계를 보며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박준호는 그녀의 깊은 눈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입을 연다.“얼마나 기절 한거죠?”“자동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해서 지금까지…한 20분?”“20분씩이나 저 때문에 잡혀 있었군요.”“이제 가야죠. 남편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래도 정신이 든 모습을 보게 돼서 다행이네요. 그럼 몸 조리 잘 해요.”때마침 간호사와 대머리 늙은 의사가 병실을 들어섰으므로, 아쉽지만 잘 가라는 손인사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06-06-2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4)

야곱의 사다리②“맞아.”“그래도 스카이 섬까지 오실 생각을 하시다니 프로급이시네요.”“우리보다 학생이 한 수 윈 거 같은데? 자전거로 스코틀랜드를 횡단하다니.”그는 아직도 느릿느릿 횡단하는 소 떼에게 시선을 꽂다말고 아예 차에서 내려선다. 그리고 허리 굽히기 맨손 체조를 몇 번 시도한다.“그래, 어디서부터 자전거로 출발했지? 에든버러?”그가 묻는다.“아녜요. 기차로 리버풀까지 와서 시작했어요.”“리버풀에서? 햐, 굉장한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구만. 그래, 며칠 걸렸어?”“이제, 열흘째예요.”“열흘씩이나, 혼자서?”박준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힐끔 차 안을 들여다본다. 여자가 앉아 있다. 머리를 묶어 올린 모습이 그토록 우아할 수 없다. 특히 우윳빛 목덜미가 더욱 그러하다. 그녀는 여행안내 지도를 펼쳐들고 있다.그녀가 고개를 든다. 박준호를 본다. 눈이 마주친다. 순간, 뭔가 번쩍한다. 전류다. 짜릿하다. 그것도 시냇물처럼 조용조용 흐르는 게 아니다. 목표물에 명중한 총알처럼 요란하게 관통한다.왜일까, 왜 짜릿한 것일까. 그래, 저건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해왔던 여인상이야. 마치 흐릿한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췄을 때 드러난 그림처럼, 마냥 뿌옇다가 마침내 선명하게 잡히는 영상. 그래, 바로 저 얼굴이야. 지금까지 저 얼굴을 찾기 위해 방황했는지도 몰라. 톰라더 부인도, 시루코도, 마거릿도, 어머니도 아닌, 전혀 다른 이미지의 신선한 얼굴.“안녕하세요.”얼떨결에 박준호가 입을 열었지만 이상하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대신 고개만 끄덕했을 뿐이다. 그녀도 끄덕 답례한다.“여보.”그녀가 남편을 부른다.“왜, 그래?”“이거, 말이에요.”그녀가 여행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스카이 스펠링 말이에요. 미스프린트겠죠? 이런 단어는 본 적이 없는데.”아하, 그녀도 호기심이 많구나. 예민하구나. 그냥 지나치지 않는구나. 그녀의 남편이 “맞아. 미스프린트일 거야. 대영제국이라고 실수 없으란 법 있어?” 우물우물 넘기는데, 방조하지 않고 불쑥 나선 것도, 그녀의 남다른 호기심에 야릇한 동질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다.“미스프린트가 아니구요. 케리크 어하고, 아일랜드 어하고 합성된 단어던데요.”자신도 똑같은 호기심을 가졌었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며 박준호가 계속한다.“더블유 아이 엔 지, 윙 있죠? 스카이 섬이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스카이에 이를 하나 더 첨가시켰다는 겁니다.”그녀가 놀란 눈을 하고 이쪽을 본다. 경이롭다는 표정이다.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싶은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언제, 그런 공부까지 했어?” 감탄해 마지않는다.“공부는요,…본래 궁금한 걸 못 참는 성미라서 시골 도서관을 뒤졌을 뿐이에요.”“도서관을 뒤졌다구요?”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영국엔 도서관이 많거든요.”박준호가 양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린다.“케리크 어 잘 알아요?”그녀가 묻는다.“잘 알기보다 그냥 더듬더듬 읽을 수 있을 정도죠.”“그게 켈트 어라는 건가요?”“맞아요. 영어가 나오기 전에…일종의 고대어죠.”그녀가 재삼 놀랐다는 표정이다.“도서관을 뒤질만하네요.”그리고 씨익 미소를 짓는다.

2006-06-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3)

야곱의 사다리①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는 항상 푸르른 초원과 훤히 뚫린 이차선 국도와 그리고 그 길을 가로지르는 소 떼로부터 시작된다.뭐랄까. 영상의 혁명, 70밀리 화면 같다고나 할까. 거칠데 없이 펼쳐지는 웅대한 풍경, 선명한 시야,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늘 똑같이 시작되곤 하는 장엄한 가을의 판타지.'야곱의 사다리' 디스크는 베를린 필하모니 판이다. 물론 카라얀 지휘다. 뉴욕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그것보다 훨씬 박진감이 있다.“그래, 번스타인도 위대하지만, 역시 곡을 빨았다가 뱉어 내는 특유의 호흡법은 카라얀을 흉내 내지 못한다구.”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함께 들었던 홍 아무개 여인이 한 말이다. 정말 성밖에 모르는 여자다. 그러나 박준호는 그녀를 스카이(skye) 홍이라고 부른다. 설명하고 말 것도 없이 혼자 명명한 이름이다. 명명 연유는 간단하다.스카이 섬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영국이라기보다 스코틀랜드라고 불리는 곳이다. 잉글랜드의 북쪽 끝 돌기를 머리라고 한다면 스카이 섬은 뒷목 부분쯤 된다고나 할까. 어휘 그대로 하늘 섬이라는 뜻이다.하나 하늘이라는 단어 스펠링은 sky인데 스카이 섬의 스카이에는 e가 혹처럼 하나 더 붙어 있다. 원래 호기심이 많은 성미라서 지도를 읽다말고 사전을 찾아봤는데, 고(古) 아일랜드 어와 고 케리크 어의 날개(wing)를 나타내는 단어가 합성되어 생긴 형용사형의 원형이라고 적혀 있다.다시 말해 스카이 섬의 모양이 날개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생긴 고유명사인 것이다. 그때 박준호가 사이클링을 중단하고 브로드퍼드의 작은 도서관을 찾지 않았다면 과연 스카이 홍과 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함께 즐길 만큼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그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일행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다. 그녀의 남편과 작은 딸이다. 그러니까 한 가족이 자동차 여행을 즐기고 있었던 터다. 작은 폭스바겐이다. 빨간색이다. 허름한 중고차로 보아 렌터카는 아닌 것 같다.박준호가 그들을 만나게 된 것은 예의 그 소 떼 때문이다. 인근 목장의 얼룩 소 떼가 길을 횡단하기 시작했으므로 마치 기차 건널목처럼 잠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교롭게 길이 막힌 일행은 박준호의 자전거와 문제의 폭스바겐뿐이다.“하이.”“하이!”그냥 인사만 대충 나누고 서 있다. 한데도 소 떼의 행렬은 쉽게 끝나지 않을 조짐이다. 만약 금세 길이 틔었다면 예사로 지나치고 말았을 터이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하기도 하고, 게다가 같은 동양인이라는 동질감 때문에 박준호가 먼저 말문을 튼다.“일본인이신가요?”“아니요.”핸들을 잡고 있는 남자가 영어로 대답한다. 일본 유도 선수 같은 건장한 체격이다.“그럼, 중국?”박준호가 재차 묻는다.“한국이요.”“저도 한국인데요.”“한국이라구? 반갑구만.”대번 말투가 달라진다. 말투뿐 아니다.“학생인가 부지.”그가 숫제 한국말로 묻는다. 하긴, 그때만 해도 박준호는 고등학생이다.“네, 학생이에요.”“혼자 여행 중인가?”“…네.”박준호는 건성으로 응대한다.“서울서 언제 출발했지?”“전 영국에서 살고 있어요.”“오라, 유학생이구먼.”“아저씬, 한국에서 오셨어요?”“아니야, 나 역시 영국에…있어.”“아, 휴가를 즐기시는군요.”

2006-06-2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2)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했는가(17)박준호가 채근했지만 그녀는 벌써 숨이 막혀 속력을 내지 못한다. 아무래도 톰 라더 부인을 데리고 뛴 것이 화근이다.“놈을 놓치면 안돼!”“개울 쪽이야! 붙잡아!”놈들이 벌떼처럼 쫓아오고 있다. 언제 손전등을 찾아들었는지 작은 불기둥이 미친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다. 아니, 불빛이 바로 등 뒤에 와 있다.박준호는 톰 라더 부인의 손을 놓는다.“어서 가요! 저쪽 농장으로, 어서!”그녀 등을 떠밀고 헉헉대며 달려오는 두 녀석을 향해 마주 선다. 기실 서너 명쯤은 식은 죽 먹기다. 태껸의 기본자세인 빗장다리딴죽이나, 두루치기 등으로 간단히 해치울 수가 있다. 하나 서둘러서는 안 된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놈들은 저마다 무기를 휴대하고 있다. 칼을 쥔 놈도 있고, 쇠파이프를 든 놈도 있고, 체인줄을 손바닥에 칭칭 감고있는 놈도 있다.그 중에 두 놈은 발따귀와 질러차기로 간단히 거꾸러뜨렸지만 마지막 한 녀석은 미처 대응하지 못한다. 녀석도 그 호기를 놓치지 않는다. 칼을 휘두르는 놈이다.마구잡이로 흔들어대는 플래시 불빛에 반사한 놈의 칼날이 번쩍한다. 그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가 박준호의 다리 아래를 공격한다. 아랫도리가 섬뜩하다. 허벅지다. 허벅지에 칼이 꽂힌 것 같다. 박준호가 휙 허공을 날아오른다. 그리고 놈의 면상을 얼레치기로 내지른다. 억하고 쓰러졌다 싶은데, 어느새 또 한 녀석이 마치 골문 앞에 센터링된 볼을 노린 센터포드처럼 쏜살같이 달려든다. 순간 박준호가 휘청한다. 놈의 대시에 균형을 잃은 것이다. 놈이 괴성을 지른다.“잡았다! 잡았어! 내가 찔렀어!”얼레치기로 엎어졌던 놈도 어기적어기적 일어난다. 놈이 큰소리로 말한다.“쓰러트려!”“아니, 죽여버려!”“죽이진 말랬잖아!”“하지만 죽이지 않고, 어떻게 페니스를 잘라내냐구?”“꼭, 그걸 잘라가야 되는거야?”“말하면 잔소리지.”머리끝이 오싹 곤두서는 것 같다. 벌써 박준호를 에워싼 놈들이 셋으로 늘어났다. 모두가 칼을 들고 있다. 박준호도 옴짝하지 않는다. 여차하면 반격할 자세다.“얍!”“엇!”“헉!”두 번째 놈이 박준호의 가격으로 쿵 소리와 함께 넘어진다. 그러나 또 다른 육중한 놈이 박준호를 뒤쪽에서 껴안아 버린다.“야, 어서 잘라!”발버둥쳐 보지만 점점 힘을 쓸 수가 없다. 머리가 혼미해지는 것 같다.“탕탕, 타앙-.”바로 그 때 총소리가 사위를 찢어 발긴다. 일이 잘 되려고 이쪽으로 다가서는 목장 주인과 톰 라더 부인이 마주친 것이다. 때 마침 들개와 여우를 쫓아내기 위해 총을 들고 있던 목장 주인이 톰 라더 부인의 살려달라는 비명을 저버리지 않고 이 쪽을 향해 냅다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총을 쏜다.“탕탕, 타앙-.”

2006-06-2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21)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16)박준호는 마포 태껸 도장 시절, 그곳 싸움꾼들에게 들은 얘기를 기억해 내고 있다. 최악의 사태에 직면했을 때 쓰는 호신술로 동전 던지기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내용이다.예컨대 칼과 총으로 위협당했을 때, 지금처럼 십 대 일, 이십 대 일의 도무지 승산 없는 싸움에 직면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동전을 무기로 삼을 수밖에 없다.“그래, 어쩔 수 없어.”박준호는 혼자 이를 앙다문다. 여차하면 톰 라더 부인은 포기할 수밖에. 그녀까지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설마 톰 라더 부인에게까지 칼을 들이대지는 않겠지.”흡사 폭풍전야 같은 폭력의 배후가 시루코 남편인 오카모토 카스미라면 더욱이나 톰 라더 부인에게 원한이 있을 턱이 없다. 기껏해야 칼끝으로 겁주는 것이 고작일 터다.박준호가 태연자약하게 말한다.“니들, 얼마 받고 이런 짓 하는 거야?”잠자코 숨죽이고 있던 톰 라더 부인도 동조한다.“이건, …천벌 받을 일이야. 말도 안 돼!”처음에는 경고 형식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격해진다.“페니스를 자르다니! 세상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절대로! 알겠어? 경찰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숫제 발악이다. 오죽했으면 “이런 씹헐! 저 계집 아가리부터 본드로 붙여 버려!”라고 명령할 정도일까. 얼핏 그쪽을 본다. 동양 청년이다. 뒤편에 서 있다. 일본어 투가 섞인 발음이다. 그가 재차 반복한다.“저 여자를 잡으라니까!”명령이 떨어지자 두 녀석이 동시에 움직인다. 톰 라더 부인을 덮치려는 바로 그 순간이다. 박준호 손 안에 들어 있던 50펜스짜리 7각형 동전이 허공에 힘차게 뿌려진 것은.“억!”“욱!”“악!”세 명이다. 다섯 개의 동전 중 세 개가 명중한 모양이다. 세 명이 동시에 주저앉아 땅바닥을 뒹굴기 시작한다.잭나이프를 들고 위협하던 놈도, 데이브 멩글이란 놈도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묶여 가는 돼지처럼 비명을 꽥꽥 내지르고 있다. 모르긴 해도 7각형 동전이 면상 어딘가에 깊이 박혔으리라.“뭐야?”“왜 이래!”놈들은 우왕좌왕이다. 느닷없는 일격에 혼비백산이다. 생각 외로 빨리 무너지는 느낌이다. 박준호가 이 같은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 없다. 톰 라더 부인의 손을 끌어 잡고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녀도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던지는 모양이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린다.박준호는 걸어왔던 둑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샘프튼 개울 쪽이다. 둑 밑으로 냅다 곤두박질한다. 키를 덮을 정도인 갈대밭을 헤치고 장딴지까지 오는 물살을 철벅철벅 거슬러 오른다. 방향은 불빛이 유난히 밝게 보이는 건너편 목장이다. 목장까지만 가면 살길이 있을 것 같다.“달려요! 어서요.”박준호가 채근했지만 그녀는 벌써 숨이 막혀 속력을 내지 못한다. 아무래도 톰 라더 부인을 데리고 뛴 것이 화근이다.“놈을 놓치면 안 돼!”“개울 쪽이야! 붙잡아!”놈들이 벌 떼처럼 쫓아오고 있다. 언제 손전등을 찾아 들었는지 작은 불기둥이 미친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다. 아니, 불빛이 바로 등 뒤에 와 있다.

2006-06-2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120)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⑮“맞아요, 날 당연히 모를 수밖에.…어쨌든 인사나 합시다.”사내가 손을 내밀며 말한다.“나, 데이브 멩글이요.”“데이브 멩글?”그때 같은 지프에서 내린 그만그만한 청년들이 무슨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박준호를 향해 다가선다. 데이브 멩글과 함께 타고 온 청년들 뿐 아니다. 뒤차도 문이 벌컥벌컥 열리고 한 떼거리 집시 차림의 젊은이들이 꾸역꾸역 내리고 있다. “텅텅” 폭죽 터지는 소리를 내던 오토바이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차를 버리고 박준호와 톰 라더 부인에게로 다가서고 있다. 대충 어림짐작으로도 열 명이 넘는 숫자다.어둠 속이라 그럴까. 어쩐지 기분이 섬뜩하다. 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들이 박준호와 톰 라더 부인을 어떻게 하리라고는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래, 설명해 주시오. 왜 날 만나러 왔는지?”박준호가 톰 라더 부인을 등으로 보호하며 말한다. 한데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느새 박준호와 톰 라더 부인을 둥글게 에워싸기 시작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포위망이다. 한 걸음 한 걸음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 박준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들도 그만큼 다가선다. 심상찮다. 소름이 오싹 돋는다. 주먹에 힘을 불끈 준다.“데이브 멩글 씨.”박준호가 마주 선 사내에게 의연한 목소리로 계속한다.“설명해 달라고 했잖소!”그래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이거 보쇼!”박준호가 재삼 재촉한다. 그 순간이다.“야이, 새꺄! 아구지 다물어!”분명 데이브 멩글이다. 그가 느닷없이 상소리를 내뱉는다.“요 생쥐 같은 놈! 우리는 네놈 버릇을 고치러 온 슈퍼맨들이야!”그리고 뭔가 번쩍한다. 라이터 불이다. 누군가 여송연에 불을 붙이고 있다. 라이터 불이 꺼지기 전에 뭔가 또 찰칵 한다. 잭나이프다. 시퍼런 칼날이 번쩍 라이터 불을 반사시킨다.“버릇이라니?”이제 본색을 드러냈으므로 박준호도 의도적으로 의연한 척할 이유가 없다.“누구야? 너희를 보낸 놈이!”“새꺄! 넌 아무것도 알 필요읍서. 우린 그냥 네놈 페니스만 잘라 가면 그만이니까!”“뭐라구? 페니스를 잘라 간다구?”박준호는 황당하다 못해 오금이 저릴 정도다.“페니스를 자른다” 왜 하필 페니스란 말인가. 아, 시루코의 남편 오카모토 카스미구나. 그가 하네코의 엉뚱한 하소연을 듣고 유치한 복수의 칼을 들었구나. 시루코를 반 강제로 귀국시키자마자 살인 청부도 불사하는 마약 집시 조직을 동원, 기어코 무서운 사건을 만들고 마는구나.어쨌거나 상대는 너무 많다. 말 그대로 십 대 일이다. 아니, 톰 라더 부인까지 돌보자면 이십 대 일쯤 되는 상황이다. 제 아무리 태권도에다 태껸까지 마스터할 정도의 무예를 소유하고 있다 해도 이십 대 일 대결에서의 승부는 기약할 수 없다.따지고 보면 승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싸움이다. 이쯤 되면 조건 없이 무릎 꿇고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하나, 절대로 그럴 계제가 아니다. 놈들은 잭나이프를 펴들고 있다. 시퍼런 날이 번득이고 있다. 칼을 휘두르는 폼으로 보아서는 정말 페니스를 잘라낼 기세다.박준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생각대로 동전이 손에 잡힌다. 50펜스짜리 묵직한 동전이다. 50펜스짜리 영국 동전은 7각형이다. 오히려 손에 쥐기가 안성맞춤이다. 대충 다섯 개쯤 되는 것 같다.

2006-06-2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19)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⑭“실망스럽게도 여자가 아니었어. 동양인 남자 같았는데 준호 널 꼭 만나야겠다는 거야. 급한 일이라구.”“동양인 남자? 무슨 급한 일이래요?”“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숨넘어가는 소리를 해서….”“제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셨군요.”“그래, 샘프튼 둑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구 했어.…그래서…그걸 알려주려구 이렇게 뒤따라왔는데,…준호 널 보니까 너랑 함께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야. 괜찮지?”박준호가 미쳐 승낙하고 말고도 없다. 톰 라더 부인은 흡사 밧줄을 던져 송아지 목에 올가미를 매는 카우보이처럼 박준호의 팔에 그녀의 팔을 재빨리 끼어 버린다. 하는 수 없다. 샘프튼 둑길로 올라선다.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다시피한 길이다. 샛강 생김새대로 꾸불꾸불 둑길이 뻗어 있다. 라벤더 향수 냄새가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진동을 한다.“참 좋다, 그치?”그녀가 말한다.“좋네요.”“새들도 많고…갈대도 많고…풀밭도 많고…우리 부드러운 풀밭에서 쉬었다 갈까?…저기 저 버드나무 밑에….”공교롭게도 일주일 전 마거릿과 나란히 앉았던 자리를 톰 라더 부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박준호가 고개를 흔든다.“지금은 그냥 걷고 싶은데요.”“좋아,…걷는 것도,…그래, 걷자 뭐…많이많이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톰 라더 부인이 마음을 바꾼다. 그녀 말대로 둑길을 천천히 걷는다. 물론 그녀는 박준호의 팔짱을 끼고 있다. 몸을 밀착시키고 있다.바로 그때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부릉부릉 들린다. 분명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 같은데도 불빛이 없다. 그렇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려오고 있다. 지프다. 부드러운 승용차 엔진 소리와는 음질이 다르다. 폭발음이 강한 디젤이다.소리로 봐선 한 대가 아닌 것 같다.차량 통행금지 구역 푯말이 세워져 있는데도 자동차가 두 대씩이나 둑길에 올라와 있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도 들린다. 쾅쾅 폭죽을 터뜨리는 듯한 굉음이다. 물론 오토바이도 한두 대가 아니다. 적어도 대여섯 대쯤 무리를 지어 달려오는 것 같다.지프 소리와 오토바이의 강력한 엔진 소리가 조용하다 못해 고즈넉한 샘프튼의 여름 둑 주변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갈대밭의 후투티도, 괭이갈매기도, 물총새도, 도요새도 얼마나 놀랐는지, 한꺼번에, 그리고 삽시에 날개를 치느라 흡사 광풍이 불어 닥치는 광경을 연상케 한다.“뭐 하는 차 들이지?”박준호가 길옆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혼자 중얼거린다.“집시들 같애.” 톰 라더 부인도 한마디 한다. 한데 그게 아니다. 분명 광풍을 일으키고 먼지를 날리며 휙휙 지나쳐 갈 줄 알았는데, 웬걸 박준호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끼익” 선다.선두 지프다. 죽은 알루미늄빛 초저녁인데도 선글라스를 낀 이십대 남자다. 여자처럼 긴 금발머리를 뒤로 묶고 있다. 수염조차 금발이다.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백인 청년이다. 팔찌에다, 목걸이에다, 반지에다 심지어 귀고리까지 치렁치렁 걸고 있다. 그가 박준호를 향해 말한다. 정중한 영어다.“혹시 형씨가 미스터 박 아니요.”“왜 그러시는데요?”박준호도 정중히 대응한다.“아, 박준호 씨? 맞구먼. 틀림없지요?”그가 아예 차에서 내려서고 있다.“아까, 집으로 전화를 건 사람들인가요?”이번에는 박준호가 묻는다.“그렇소만.”“어디서…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는지? 난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2006-06-2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18)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⑬“뭘?”“우치에씨는 원래 우리 아빠 여비서였어. 엄마는 그 사실은 감쪽같이 몰랐기 때문에 대사관에 은밀히 사람을 부탁했고, 우리 아빠 역시 당신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우치에씨를 소개해줬던 거야… 실은 나도 그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지만.”그렇구나. 그렇게 된 일이구나. 그래, 그날 우치에는 뭔가 심상찮았어. 학생이냐, 어느 학교냐, 몇 살이냐, 계속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의 정체를 꿰뚫었어야 했는데… 아니, 우치에의 태도가 미심쩍고 수상쩍다는 박준호의 주의를 시루코가 일방적으로 묵살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처럼 비비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박준호가 불쑥 입을 연다.“그러니까 우치에는 감시역으로 파견했던 거구나?”“그런 셈이지.”하네코가 묻지도 않은 말을 청산유수로 토해놓기 시작한다.“우리 엄만, 유명한 바람둥이거든. 시노야마 기신 말고도 파리대학 생물과 교수하고도 섬싱이 있었고… 그 때마다 현장에서 덜미가 잡혀 혼비백산했었는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아빠랑 약속하고 제법 조신했었는데, 이번에는… 글쎄… 세상에 아무리 울 엄마지만… 이번에는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거 있지?”박준호가 자전거로 샘프튼 둑길 산책을 나선 것은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다. 황혼이 붉게 물들고 있었고 산들바람도 분다.영국의 여름 오후는 가을에 가깝다. 더구나 해가 빨리 지지 않아, 밤 9시가 되어야 비로소 네온사인이 켜질 정도다.물론 런던이 그러하다. 박준호가 사는 전원 마을 오거스트는 9시가 가까울 때까지 하늘색은 보랏빛이었다가 서서히 알루미늄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박준호는 저녁 한 때를 혼자 보내고 싶다. 혼자서 산책을 즐기고 싶다. 톰 라더 부인도, 마거릿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산책길에 동행하자는 요청을 하고 싶지 않다.박준호는 천천히 자전거를 탄다. 샘프튼 둑길은 왕복 20킬로에 가깝다. 자동차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고 자전거만 가능하다. 오거스트 집에서 둑길까지는 도보로 반 시간 거리니까 자전거로는 빠르면 10분이 고작이다.박준호가 샘프튼 둑길에 이르렀을 때 뒤쪽에서 빵빵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다. 길을 피해 페달을 밟는데도 자동차는 여전히 클랙슨을 눌러 댄다.“누군데, 그래?”박준호가 뒤를 돌아본다. 어라, 톰 라더 부인이다. 그녀는 전용차인 오스틴 모리스 미니카의 유리문으로 고개를 빼고 큰 소리로 말한다.“옆에 세워.”“알았어요.”반 년 전 비바람이 몰아쳤을 때처럼 미니카를 옆에 바짝 붙여 세운다. 톰 라더 부인은 거의 파이다시피 한 원 라운드 티셔츠에 짧은, 그러나 아주 헐렁한 자주색 스커트를 입고 있다. 살랑 바람이 불어 그녀 치마를 들썩거리게 한다.그녀가 치맛자락을 두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박준호에게 다가선다.“웬일이세요?”박준호가 묻는다.“너랑 산책하고 싶어서….”박준호가 대답 대신 죽은 보랏빛 서쪽 하늘을 본다.“왜 싫으니?”“싫은 건 아니지만….”“사실은 네가 나간 뒤에 전화가 왔었어.”“전화요?”박준호의 눈이 번쩍한다. 그가 계속한다.“시루코 여사라고 하지 않았어요?”“시루코 여사?”“네, 친구 엄마거든요.”

2006-06-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17)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⑫이튿날도 마찬가지다. 박준호가 의도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포기하고 온 종일 집에 처박혀 있었는데도 가타부타 전화 한 통화 없다. 왜 일하러 오지 않느냐는 성화도, 별일 없느냐는 걱정도 일절 없다.또 전화 수화기를 든다. 역시 시루코의 전용번호다. 벨이 두 번도 안 울렸는데, 발 빠르게 전화를 받는다. 물론 시루코는 아니다. 시루코를 찾았지만, “여사님은 지금 안 계신데요”라고 말한다.굴러가는 듯한 영어 발음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다. 브라이튼 별장에서 만난 우치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박준호는 “외출 중이신가요?”라고 먼저 묻는다.“아뇨.”그녀가 전화 속에서 한 텀 늦춘 다음 천천히 대답한다.“귀국하셨어요.”“귀국이라뇨?”“일본에 가셨어요.”“일본에 가셨다구요? 하지만 어제까지도 그런 계획이 없으셨는데, …언제 가셨습니까?”“오늘 떠나셨어요.”“혼자 가셨나요?”“그래요, 혼자 가셨어요.”“그럼 언제 오실 건가요?”박준호가 묻는다.“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왜 그러시죠?”“왜 그러냐구요?”박준호가 되레 반문한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금방 실마리를 찾아낸다. 아니, 실제로 중요한 용건이다. 박준호가 말한다.“제 물건을 갖고 계시거든요.”“물건?”“뭐… 큰 건 아니구, 목걸이요.”“목걸이라구요?”“혹시 시루코 여사님이 맡겨 두진 않았을까요?”“글쎄… 오카모토 씨가 집에 계시는데, 바꿔 드려요?”“아녜요, 아녜요!”박준호는 필요 이상으로 아니라는 말을 황망히 강조해 마지않는다. 대신 연이어 두서없는 질문을 내뱉는다.“하네코는 집에 있나요? 하네코 바꿔주세요.”바꿔주겠다, 바꿔줄 수 없다, 일언반구도 없이 수화기를 탁상 같은 곳에 내려놓는 것 같다. 그리고 하네코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냐고 묻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한데도 전화는 금방 받지 않는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여보세요?”하네코 목소리다.“나야, 나. 박준호.”“준호 네가 웬일이니?”뜨악한 음성이다. 그녀가 계속한다.“울 엄마 집에 없다고 했잖니? 그런데, 왜 날 찾아?”염장을 지르는 악센트다.“야, 그러지 말고… 니네 엄마 왜 갑자기 일본에 가신거니? 그럴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그게 그리 궁금하니?”“그래, 궁금해.”“그럼 전화 바꿔줄게. 우리 아빠가 그 사정을 젤 잘 아시니까.”또 수화기를 탁상에 내려놓을 기세다.“야, 하네코. 아니야, 아니야!”전화 속에서 하네코는 말이 없다. 완전히 수세에 몰린 박준호가 매달리듯 계속한다.“좋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좋아. …대신 하나만 묻자. 방금 전화 받았던 사람 말이야. 브라이튼 별장의 우치에 맞지?”“그래, 맞아.”하네코가 서슴없이 대답한다.“왜, 우치에가 니네 엄마 전용전화를 받니?”“몰라서 묻니?”

2006-06-2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16)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⑪“가시는 길에 절 집에까지 태워다 주실래요?”당연히 “아, 그래, 그게 좋겠다” 할 줄 알았는데 웬걸 고개부터 젓기 시작한다.“안 돼, 방향이 달라서 안 돼. 그리고 넌, 아르바이트 중이잖니?”어이가 없다. 방향이 다르다느니, 아르바이트 중이라느니 하는 말을 어떻게 함부로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박준호는 생각한다.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던 하네코의 기습 공격에 대해 시루코는 박준호와 단둘이, 진지하게 의논할 의무가 있다. 우찌에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이제 그녀 남편인 오카모토씨가 돌아왔으므로 앞으로의 스케줄을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해서 역시 시급하게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어쩌면 그 같은 은밀한 만남은 시루코 쪽이 더 절실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한데 마치 자살골 넣는 수비수인 양, 그것도 시루코 자신이 “안 돼!”라고 말하다니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일 같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박준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말한다.“아르바이트요?…오늘은 일할 기분이 아녜요. 그만 쉬고 싶어요.”사실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루코가 없는 집에, 더구나 하네코와 마주 앉아 있고 싶지 않다.하네코는 지금 박준호를 노골적으로 적대시하고 있다. 숫제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다. 하긴 제 엄마를 동네 축구공인 양 사정없이 다그치는 판에 박준호 정도야 하네코의 눈에 보일 턱이 없다.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박준호를 제대로 쳐다본 적도, 말을 건넨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어제 브라이튼 세미티 터치트 하우스 별장을 혼자 찾아간 일 때문일 것이다.모르긴 해도 브라이튼 별장 관리를 맡고 있는 우찌에가 시시콜콜 다 일러바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시노야마 기신이 애용했던 목욕 가운을 박준호가 입었다는 사실을 어찌 하네코가 알 수 있단 말인가.어쨌거나 하네코는 뇌관으로 불이 붙어 가는 폭탄 같다. 여차하면 요란한 굉음과 함께 꽈앙, 터질 판이다. 괜히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봉변당할 이유가 없다. 가능하면 재빨리 그곳에서 도망치는 일이 상책이다.박준호가 혼자 하네코의 집을 나와 자전거 페달을 어느 때보다 힘껏 밟았던 것은 시루코의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살골' 때문이다.머리칼 속에서 흘러나온 땀이 눈썹에 맺혔다가 턱으로 뚝뚝 떨어질 때까지 박준호는 계속 밟는다. 이를 악물고 밟는다. 물론 톰 라더 부인은 웬 떡이냐 식으로 철부지 소녀인 양 마냥 좋아했지만, 박준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제 방에 틀어박혀 오전 내내 옴짝 하지 않는다.박준호가 시루코에게 직접 전화를 건 것은 오후 2시 반쯤이다. 그녀 남편 오카모토가 스코틀랜드 여행 때문에 집을 비운, 열 이틀간 거의 매일 오후 2시는 박준호가 마치 작은 어항 속의 한 마리 금붕어처럼 시루코의 몸속으로 잠수하던 시간이다. 사람의 습관은 참으로 이상하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불과한 경험인데도 어항 속이 그토록 절실할 수가 없다. 속된 말로 그리움이다. 아니, 그리움이라기보다 당연히 그 은밀한 어항 속을 잠수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왜 혼자 방 안에 처박혀 있는가라는 어이없는 소외감이 흡사 초겨울 밤의 한기처럼 으스스 엄습하는 것이었다.박준호가 전화라도 걸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황당한 기분에 빠진 것도 기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전화는 시루코의 전용선이다. 한데 젊은 여자가 받는다. 물론 영어다.“시루코 여사님 전화 아닌가요?”박준호가 묻는다.“맞는데요.”“여사님 좀 바꿔 주세요.”

2006-06-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115)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⑩“엄마…나 어제 브라이튼에 갔었어. 우찌에 언니두 만나구….”“그래서?”“그래서?”라고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얼굴은 흙빛이다.하네코는 한술 더 뜬다.“아니, 엄마한테 말고…준호에게 묻고 싶어.”하네코가 비로소 박준호를 본다.“너, 엄마랑 브라이튼에 몇 번 갔니?”박준호가 시루코에게 도움을 청한다. 시루코는 아무런 눈짓도 하지 않는다. 박준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식이다.“브라이튼에 몇 번 갔었느냐고 묻잖니?”“…두 번 갔어.”“그래서 바다 구경만 했니?”박준호가 대답한다.“그래, 바다 구경만 했어.”“그런데 왜 나한테 그곳에 갔었다고 말하지 않았니?”“네가 묻지 않았으니까.”“좋아, 그럼 지금 물어볼게. 네가 입은 목욕 가운, 그거 누가 사용한 건지 알고나 있니?”“아서!”라고 드디어 시루코가 나선다.“너 왜 이러니? 엄마가 말했잖아. 속상했다구?”목소리가 심상찮다. 얼굴 표정도 그러하다. 아주 굳어 있다. 시루코의 기세에 눌린 탓일까. 금방이라도 또 다른 폭로 전을 전개할 것처럼 씩씩대던 하네코가 “나두…엄마 속상한 줄은 알아. 하지만….”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다.“제발, 그만둘 수 없겠니? 정녕 내 말 못 알아듣겠어?”시루코가 정색을 하고 하네코를 윽박지른다.하네코가 말한다.“알아들어.”그녀도 마침내 꼬리를 내린 셈이다. 대신 시루코가 아직 그대로인 음식 접시를 들고 벌떡 일어선다. 그 통에 식탁 밑의 은밀한 공략이 일시에 중단되고 만다. 하마터면 그녀의 허벅지에 올려놓았던 박준호의 발이 바닥에 철푸덕 떨어질 뻔한다.시루코는 접시에 그대로 남아 있던 파스타 요리를 거침없이 쓰레기통에 쓸어 넣어 버린다. 어쩌면 그녀가 그 시점에서 식사를 포기한 것도 하네코와의 위험 수위에 가까운 신경전 때문만이 아니라 박준호의 은밀한 공략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인지도 모른다.“나, 외출한다.”시루코가 말한다.“어디 가는데?”하네코가 묻는다.“엄마, 외출하는데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다니니?” “하지만….”“하지만 뭐니?”“아빠가 오신댔어.”“뭐라구?”“아빠가 집에 오신댔다구.”“아빠가 지금 어디 있는데 집에 온다는 거니?”“스코틀랜드에서 오늘 런던에 도착한대.”“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아빠가 전화하셨으니까.”“왜, 아빠 전화를 너 혼자 받았니?”“엄만, 늘 집에 없었잖아. 준호랑 별장에 가 버리구.”“그런데 왜 이제 얘기하는 거니?”“엄마두 묻지 않았잖아.”시루코가 한참 딸을 노려보다가 어쩌는 수 없다는 듯이 어깨춤을 들었다가 풀썩 내려놓으며 말한다.“…일찍 돌아올 거다. 다섯 시 전에….”대충 외출 준비를 끝낸 그녀가 집을 나설 때를 기다려 박준호가 입을 연다.

2006-06-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114)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⑨“그래,…하지만 난 아무리 이렇게 둘둘 말아 먹었어두…한번도 행운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또 시루코 쪽을 힐끔 본다. 하네코가 말한다.“엄만, 어때? 행운을 만난 적 있어?”“글쎄다. 행운을 만났는지, 비껴갔는지 기억엔 없다만…내 생각엔….”“엄마 생각엔 뭐야?”시루코가 하네코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연다.“엄마는 그렇다 치고,…하네코 너 말이야,…네가 설령 파스타를 시계방향으로 감아먹는다 하더라도, …준호 앞에서 엄마 지난 과거를 폭로하는 딸한테도 행운이 맞닥뜨려 줄까?”“엄마, 아까 그 말에 속상했구나.”“그럼, 속상했지.”“하지만, 준호도 알건 알아야지. 안 그러니?”이번에는 박준호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접시만 비우고 있는 박준호에게 그녀가 또 한 번 족쇄를 지른다.“야, 너도 알 권리가 있잖아? 안 그래?”박준호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글쎄….”“옛날에 엄마가 그랬잖아? 파스타를 시계 방향으로 둘둘 감아 먹었더니, 아빨 만나게 됐다구.”“그랬었니?”“엄만… 정말 그걸 잊고 있었던 거야?”“그래, 잊고 있었나보다.”“마치 아빠를 만난 게 행운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네, 엄만.”하네코는 시루코의 대답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벼르고 있었다는 듯이 쏘아붙이기 시작한다.“엄만, 요즘 이상해?”그때까지만 해도 시루코는 하네코의 속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반격 아닌 반격이랍시고 시도한 것이 “이상한 건 내가 아니고 너야”가 고작이다.“내가 이상하다구?”그 순간 하네코의 눈이 갑자기 반짝, 마치 밤고양이의 그것처럼 빛을 발한다. 아마도 시루코는 그 빛을 보지 못한 것 같다.“그래,…준호 앞에서 지난 과거를 빌미로 엄마를 깎아내리다니…. 그런 너를 어떻게 이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니?”“하지만, 그건 사실이잖아? 시노야마 기신 씨하고 엄마가 연애했던 것도,…그리고 그 사실은 준호도 알아야 되잖아? 안 그래?”“뭐라구?”그제야 시루코도 사태의 심각성을 읽어 낸 것 같다. 그리고 언뜻언뜻 되살아나곤 하는 하네코의 그 강력한 눈빛을 마주 본다. 하네코는 기회를 잡았다는 식이다. 하네코가 말한다.“준호 데리고 브라이튼 별장엔 왜 갔는데?”하네코는 포크로 냉동새우의 머리를 쿡 소리 나게 찌르고 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루코도 박준호도 보지 않는다. 포크에 찍힌 냉동새우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그 순간 시루코가 시도한 것은 하네코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아직도 문을 열어라, 열 수 없다, 승강이 중인 식탁 밑의 집요한 공략을 과감하게 뿌리치는 일이다. 하네코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힘으로 박준호의 맨발 피부를 꼬집어 비트는 것이었다.누가 뭐래도 박준호의 공략은 그 시점에서 포기되었어야 옳다. 그렇게 했다면 시루코가 그처럼 코너에 몰릴 턱이 없다.한데, 왜 그랬을까. 왜 우직하게시리 고집을 부려 마지않았을까.“엄마, 내 말 안 들려?”성냥을 그어 대면 확 소리를 내며 불이 붙을 것 같은 눈빛으로 하네코가 제 엄마를 본다.“그건….”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루코는 박준호에게 또다시 경고 사인을 보낸다. 공략을 멈춰 달라는 신호다. 박준호는 그 경고마저 무시해 버린다.시루코가 말한다.“그건,…준호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 주기 위해서였어. 왜, 뭐가 잘못 됐니?”“정말 구경만 한 거야?”“그래, 구경만 했다.”하네코가 씨익 웃는다. 냉소다. 그녀가 천천히 말한다.

2006-06-16 경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