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식사 <31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19"앗, 내 손 내 손!"갑자기 녀석이 오른 손을 탈탈 털며 펄쩍펄쩍 뛴다. 그러다가 풀썩 주저앉는다."자, 봐라. 나는 상대의 손가락을 향해 발차기를 했다. 상대가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한 것이다."정말이다. 상대 싸움꾼이 주먹을 쥐기 전에, 아니 주먹을 가슴으로 올려 붙이기 전의 그 짧은 순간을 포착, 그대로 강타하는 것이다.손의 위치가 낮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이 높게 올라 갈 필요도 없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아닌 말로 발등으로 쳐도 효과는 백 프로다. 단 한 번 가격인데도 손가락 뼈 쏟아지는 소리가 우두둑 나지 않을 수 없다. 손가락 뼈에 손상이 생긴 다음엔, 그 어떤 용맹스런 전사도 싸울 기력을 잃고 만다. 막말로 총알 없는 총이나 진배 없다. 박준호가 훈련생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한다."너희도 잘 봤지.""넷.""이 두 가지 기술만 갖고도 우리는 가라데 아이들의 사기를 초반에 꺾어 버릴 수 있다. 내 말 뜻 알겠어!""네, 알겠습니다."박준호는 곽칠복 사범에게 비장술에 대한 훈련을 일임하고 급히 무하마드가 입원해 있는 밀리떼르 병원으로 전화를 건다. 박준호의 전화를 간호사가 받아, 입원실을 지키고 있는 조봉삼에게 바꿔 준다."별 일 없어!""네, 행님 별 일 없씹니더.""무하마드 씨는 어때?""아직까지도 잠만 퍼 자고 있습니더.""알았어. 내 곧 갈 테니까. 병원 직원 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서는 안 돼, 아니, 병원복을 입었어도 신분을 확인한 다음에 들여보내. 알았지?""네, 행님, 걱정마이소.""참, 고수길은 어딨어?""현장 지키고 있씸더.""고수길이 바꿔."박준호가 말하자, 조봉삼이 들고 있던 짐을 내려 놓기라도 하듯, "알것씸다, 행님."신이 나서 대답한다."전화 바꿨습니다."고수길이다."그래, 수고 많지.""아닙니다.""그거 있잖아. 영림에서 수금하기로 한 돈 어떻게 됐어?""안 그래도 이성룡 전무하고 전화 통화했는데……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습니다.""문제라니?""우리 담당 비서 있잖습니까, 원수창 비서.""그래, 알지.""그 친구가 구속됐다는 겁니다.""아니, 뭘 어쨌길래 구속이 돼?""그런 거 있죠? 파렴치범. 원조교제 말이에요.""미성년자하고 놀아났다구? ……생긴 거하고 다르구만. 얌전한 인상이던데…… 한데 그 일하고 우리 미수금하고 무슨 상관이야?""그 상대가 김상도 회장님 조카 딸이라는거 아닙니까.""김 회장 조카딸?""아직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고 일짜리랍니다. 그것도 여관방 현장에서 검거되어 가지고…….""그렇다면 회장 조카 딸인 줄 알고 그 짓을 했다는 얘기 아냐?"

2007-03-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1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18지금 박준호에게 필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시간이다. 한마디로 시간이 없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촌음도 아껴쓰지 않으면 안된다.박준호는 그 길로 태권도 도장 아이들을 총 집합시켜, 공식 대결 스케줄 발표와 함께, 그 대책을 하나하나 시범을 보여 가며 설명하기 시작한다. 박준호는 일본 가라데 도장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태권도 훈련생을 휘 훑는다. 물론 똑같이 베트남 아이들이다. 고등학생들이 대다수지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한 근력의 청년들도 제법 섞여 있다. 한마디로 기본 체격들은 탄탄하기 이를 데 없다. 결코 가라데 아이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호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순전히 김만상 관장이 어느 날 필로폰을 상습 복용하고 나서 아이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모든 것이 곽칠복 사범에게 다 맡겨졌지만, 곽 사범이 갖고 있는 기량으로는 역부족이다.아무리 국가 대표급 선수라 해도 호신의 목적으로 기술을 발휘할 때 180도 공중뒤돌려차기가 과연 먹혀들어 갈 수 있을까. 아니, 태권도가 아니라, 합기도의 고수라 하더라도 상대의 날아오는 강한 주먹을 막으면서 상대를 단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을까."너희 중 가라데 도장 아이들과 싸워서 이겨 본 사람 손 들어 봐."서른 명 가까운 훈련생 중에 손을 든 아이는 고작 두 명이다. 나머지 스물여덟 명은 깡그리 놈들의 제물이 되었다는 얘기다."좋아. 그럼, 너희 중 가라데 아이들과 싸워 이기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박준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원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정말, 이기고 싶나!""네.""목소리가 작다. 하노이가 떠나가게 시리 큰 소리로 복창한다. 이기고 싶나!""넷.""좋다. 오늘은 정석이 아닌 비공식 비술을 두 가지 가르쳐 주겠다. 왜냐하면 훈련 시간이 짧아서 공식대로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박준호는 가장 똑똑해 보이는 놈을 끌어내 시범을 보인다. 호구치기다. 합기도 용어다. 상대의 목을 향해 번개처럼 찔러 넣는 비술이다.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으고, 엄지손가락 하나만 약간 동그랗게 벌린다. 상대 목을 겨냥해서 35∼45도 정도의 각도를 만들고, 팔을 최대한 쭉 펴되, 팔꿈치 관절에 약간의 여유를 둔다. 목표를 잘 보고 신속 정확히 체중을 실어 목울대에 꽂으면, 상대가 골리앗이 아니라 천하무적 삼손이라도 단 일격에 앞이나 뒤로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 한 방으로 싸움은 끝이다."와!"태권도 기본 수련에 시간을 다 소진했던 아이들이 저마다 탄성을 질러 마지않는다. 박준호는 내친 김에 더 큰 소리로 일갈한다."물론 운동은 페어 플레이가 기본이다. 하나 싸움은 다르다. 싸움은 기술이고, 찬스 포착이다.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갖고 있어도 찬스를 살리지 못하면 상대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약간 비열한 감은 있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어쩌는 수 없다. 야, 너 이리 나와 봐."박준호가 체격 좋은 또 다른 청년을 훈련생 앞에 세운다."자, 내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잘 봐 둬라."박준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젊은이를 향해 전광석화식의 발차기를 시도한다.

2007-03-20 경인일보

풀밭위의식사<31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17탄차우가 발가락 끝을 세운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그래서 이렇게 걷고 있잖습니까"라고 말한다.서승돈이 곽칠복에게 그런 부탁을 한 모양이다. 박준호도 탄차우처럼 깨금발을 하고 걷기 시작하며 작은 소리로 입을 연다."곽 사범, 강당으로 불러 줘."박준호는 헐레벌떡 달려 온 곽칠복을 붙들고, 서승돈에게 보고할 내용을 점검하듯 하나하나 확인해 나간다."가라데 체육관 도전 말이오. 하루 앞당겨야겠소.""아, 네…그러니까, 다음 목요일이군요.""그래요, 목요일. 서 사장님한테 아직 보고는 못 드렸지만, …관장님도 날짜에 대해서는 의견이 없는 것 같으니까, 우리 두 사람이 목요일로 밀고 나갑시다.""알겠습니다. 한데, 장소는…….""장소는 바딘 광장이 어떻소?""바딘 광장이요?"곽칠복이 제 방귀 소리에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신이 가라데 도장 마사요시에게 일격을 당하고 맥없이 쓰러진 곳이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입을 열지 못하고 뜨악해 있는 곽칠복에게 박준호가 말한다."바딘 광장이 국회의사당 마당 아니요? 항상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라는데.""맞습니다."곽칠복이 벌써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한다."특히나 국회의사당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가 방귀깨나 뀌는 족속들인데, 그 사람들 앞에서 가라데를 박살내어 무릎 꿇게 하면 만사가 편안해지지 않겠소?""그렇습니다."곽칠복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럼, 곽 사범이 지금 바딘 광장 관리 사무소에 사용 허가 신청을 내 주시겠소?""시간은 몇 시로 할까요?""오후 2시가 어떨까?""오후 2시 좋습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이 밀려나올 때니까요.""그럼, 시간과 장소를 가라데 도장에도 통보해 주시겠소? 우리 쪽에서 아예 포스터를 만들면 어떻소? 인쇄는 늦었으니까 아이들이 직접 쓰도록 해서 주요 거리에 붙이도록 해 주시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플래카드도 만들어 바딘 광장 입구에 걸었으면 싶소만…그것도 허가 사항이라면, 나간 김에 승인을 받도록 해 주시겠소?"급하게 나가려는 곽칠복을 박준호가 다시 불러 세운다."참, 서 사장님 언제 만났소?""어젯밤에요. 늦은 시간인데 복도에 나와 앉아 계시다가 말씀하셨습니다. 가능하면 아침 늦게까지 깨우지 말아 달라고."박준호는 무하마드가 알카에다 조직원 혐의를 받아 미 정보국으로부터 추적받고 있다는 사실도, 무하마드가 살해 될 뻔했다는 사실도, 그를 가까스로 구해 내어 지금 밀르떼르 병원에 비밀리에 입원시켰다는 사실도 일체 함구한다.물론 곽칠복이 알았다 해서 기밀이 새어 나가 낭패를 당하는 일은 없을 터다. 하나 아직 확실한 윤곽도 잡히지 않은 마당에 잘못 보고 했다가 괜히 이러쿵 저러쿵 추측성 기대감만 만발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지금 서승돈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금의 '자'자만 봐도 서슴없이 목숨 걸고 덤빌 기세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자금을 얻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고, 반대로 알카에다 운운해서 지레 겁 먹고 탈탈 털었다가 모처럼 찾아온 행운을 제 발로 차 버리는 변괴가 될지도 모르는 판국이다.

2007-03-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16"아버지가 독일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기셨거든.""그럼….""널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말도 안 돼!""왜 말이 안 되니?""지금 경시청에서 수사중인데…나한테 폭력을 휘두른 배후를 찾아내기 위해…."하지만 하네코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다. 교장실 밖에 세워 둔 외교관 넘버의 검정 승용차가 경적을 빵빵 울렸기 때문이다.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다. 그날 이후 어느 누구도 헤이스팅스 고등학교에서 하네코를 본 사람은 없다.어쨌거나 박준호가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던 시루코 여사는 박준호의 페니스에 상처 낸 그해 겨울 협의 이혼했는데, 그 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베트남 정부에서는 한 명도 없다.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그러하다. 문득 박준호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새삼스럽게 시루코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다. 바보같이… 박준호가 푸념처럼 옹알거린다. 그래, 어머니를 너무 빼어 닮았었어. 아니, 그것은 핑계였어.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에게 너무 집착하는 어머니가 서운하고 허전하고 미워서 시루코 여사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갔을 뿐이었어. 때마침 할아버지가 보내준 용패를 차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애끓는 정이랄까, 암튼 그런 미묘함이 솟구쳐 브라이튼 별장의 풋풋한 정사가 화산처럼 분출되기 시작한 거야. 박준호는 그 때의 짜릿한 쾌감을 피부로 느끼듯 가벼운, 그러나 기분 좋은 진저리를 친다.그러면서도 용패와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옥 목걸이를 그녀가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는 사실이 왠지 누군가 꾸며댄 얘기처럼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진다. 하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 하찮은 옥 목걸이 값으로 거금 2억 원을 박준호에게 유산으로 남기지 않았는가. 박준호는 고개를 흔든다. 어쨌거나 박준호가 일본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는 현지인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던 얘기에 의하면 서류상 시루코 여사의 외동 딸 하네코는 미츠비시 종합상사 중견 간부인 일본 남자와 결혼, 현재 미국 휴스턴에 살고 있단다. 한데 벌써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딸려 있는 걸 보면 대학교 2학년쯤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계산이다."오카모토 대사를 경호하고 다니는 사내는 대사관 직원이오?"박준호가 일본대사관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는 현지 요원에게 영어로 묻는다."아닙니다. 모리야마 마사요씹니다. 가라데 최고 권위자죠. 오카모토씨 개인 경호를 오래 전부터 맡아 왔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오래 전부터?""아부다비에서 함께 왔으니까요.""아니, 오카모토가 영국에 있을 때부터가 아니구요?""글쎄요. …그런 내용은 직접 대사님께 여쭤 봐야…."박준호의 예감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날 샘프튼 둑에서 집시 청년들을 진두지휘하던 어둠 속의 일본인 남자…."참, 오카모토 대사님 외손자하고 따님이 하노이에 와 있습니다.""음…. 아버지 대사 취임 축하하러 왔구먼. 사위도 왔겠죠?""사위는 오지 않았습니다.""언제 떠날 예정인가?""여름방학 휴가라서… 다음 주말로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습니다."박준호는 서승돈 사장 침실을 노크한다. 대답이 없다. 문을 열려고 하자, 깨금발로 복도를 지나던 베트남 청년 탄차우가 서투른 한국말로 말한다."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방 주인이 직접 그러셨어?"박준호가 묻자, "아닙니다. 곽 사범께서 주의를 주셨습니다."

2007-03-1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⑮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호아도 밀르떼르 출신이다. 밀르떼르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아하, 그랬었구나.' 박준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프랑스 말을 그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구나.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짜오안"이라고 유럽식 인사를 했었구나.어쨌거나 호아는 병원 구석구석을 잘 안다. 병원 구석구석뿐 아니다. 수녀복을 입은 병원장과 담당 의사와도 아주 절친한 사이다.그녀는 일사천리다. 환자가 들어서자마자 수속도 없이 응급실로 직행, 치료를 끝내고 3층 특실로 안내되도록 조처해 버린다.무하마드는 이튿날 점심 무렵까지 내내 잠만 잔다. 아무리 믿을 만한 안전지대라 해도, 만에 하나 빚어질지 모르는 사태 때문에 박준호는 조봉삼과 고수길을 병실 입구에 배치, 24시간 물샐틈없는 경호를 서게 한다.그리고 박준호는 호아와 곽칠복을 앞세워 베트남 정부의 아그레망을 기다리는 오카모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다행히 하노이 일본 대사관에 적을 둔 베트남인이 곽칠복에게 운동을 배운 절친한 사이여서 쉽게 대면하는 기회를 잡는다.하노이 일본 대사관에 3년째 근무한다는 그의 얘기에 의하면, 박준호가 예측했던 대로 오카모토의 부인은 우찌에가 틀림없다. 정식 이름이 미도리 우찌에다.성토마스 대학에서 조직 신학을 전공하기 위해, 4년간이나 유학한 터라 영어가 유창한 여자다. 박준호가 처음 브라이튼 여름 별장에서 만났을 때는 분명 시루코 여사에게 충직한 전형적인 일본 여자였는데, 어떻게 해서 오카모토의 부인이 되었을까.모르긴 해도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므로 시루코 여사의 개인비서로 채용되었다가 오카모토에게 회유되어 시루코 여사의 비밀스런 사생활을 시시콜콜 유출하는 미묘한 이중첩자 노릇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 와중에는 시루코 여사에 대한 하네코의 배신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터고….말이 났으니 얘기지만, 파스타 요리를 먹었던 그날 오후, 시루코 여사가 박준호의 간곡한 요구도 일거에 뿌리치고, 생면부지 사람처럼 홀연히 집을 나간 것도 기실은 우찌에 때문일 터다.일단 그녀를 만나야 모든 상황을 점검할 수가 있고, 점검이 끝나야 오카모토나 하네코에 대한 처신도 조절할 수 있었을 터다.물론 그해 여름방학이 끝나고 첫 등교했던 날을 제외하고 박준호는 하네코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날도 스쳐가듯 잠시 마주쳤을 뿐이다.교장실 복도다. 아니, 박준호가 교장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옳다."일본에서 언제 왔니?"박준호가 묻는다."일주일 전에 왔어.""엄마두 같이 왔니?""엄마에 대해서는 묻지 마! 넌 그런 예의도 없니?""하네코 네가 뭐라구 해도 좋아. 솔직히 난 그분이 궁금하거든.""미쳤구나!""너희 집에 전화했더니, 우찌에가 받더라. 왜 우찌에가 너희 집에 있니?""그건, 우리 집 사정이니까, 준호 네가 알 거 없고….""네가 괜찮다면, 집에 한 번 방문하고 싶은데, 허락할 수 있니?""우리 벌써 이사했어.""뭐? 이살했다구?"

2007-03-1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⑭"말 그대로 투자요.""알 카에다가, 걸프은행에?""그렇소. 그들에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헌금이 연 수십억 달러씩 답지하고 있소. 돈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요.""어제 뉴스, 저도 봤습니다. 예멘 미 구축함 폭탄 테러 사건 말이에요. 작은 어선에 폭약을 싣고 정박해 있는 구축함으로 질주하던데요. …그러니까 걸프은행이 송금한 이익금으로 자살 특공대를 운영한다고 해도 틀린 얘긴 아니군요.""…글쎄 …그건."무하마드가 말을 더듬으면서도 계속한다."하지만 그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어쨌든 그들은 호텔에서부터 무하마드씨를 노렸습니다. 저기 넘어진 브라운 머리 녀석을 12층 방문 앞에서 봤거든요.""저 자를 봤다구?" "무하마드씨 호텔 방문을 꼬챙이로 열고 있었습니다.""그래요?""그러니까 계속 미행했다는 얘깁니다."무하마드는 또다시 경직되기 시작한다. 그가 말한다."절대로… 아니요. 난 미 해군 테러하고는 관계가 없소. …절대로….""잠깐만요. 박준호가 그의 말을 막는다. 입 안의 출혈이 너무 심한 탓이다. 말을 할 때마다 핏물이 입꼬리로 삐져나와 목덜미까지 줄기 줄기 흘러 내린다.""그만요.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박준호는 모터보트에 비치되어 있는 티슈를 뽑아 내 목덜미와 입 주변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아 주며 말을 잇는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한테 그냥 모든 걸 맡기세요."그가 고개를 끄덕인다."우선은 병원부터 가야 할 테니까."박준호가 피투성이 무하마드를 프랑스계 종합병원인 밀리떼르 오삐딸 특실에 입원시킨 것은 이날 저녁 무렵이다. 물론 관장의 부인 호아의 발 빠른 주선이 없었다면 그처럼 전격적인 입원은 불가능했을 터다.김만상 관장은 또 묘연하다. 서승돈 사장이 도착하여 만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행적을 감춘 것이다. 별수없이 곽칠복 사범이 나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노크한 터다.곽칠복 사범을 비롯 태권도장의 손이 닿지 않는 병원은 일단은 안전지대라고 할 수 없다. 확실한 미 중앙정보부 요원들이라면, 손쉽게 대처할 상대가 아니다. 공식이건 비공식이건 그들의 영향권에 들지 않는 기관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기실 처음에는 베트남 국립 병원을 그중 안전지대로 보고 다리를 놓았고, 다행히 승낙을 받아냈지만, 도리어 호아가 고개를 가로졌는 것이다.따지고 보면 호아처럼 적극성을 띠고 박준호를 도와준 사람도 없다. 그녀는 박준호의 전화를 받자마자 오토바이를 타고 곽칠복 사범보다 한 발 앞서 현장에 도착했고, "밀리떼르 병원이 믿을 만한 곳이에요. 거긴 누구도 함부로 근접하지 못 하니까요. 내가 알잖아요"라고 강력히 주장, 털털거리는 빅토리 태권도장 이니셜도 선명한 미니버스의 방향을 후에 가(街) 쪽으로 급선회했던 것이다.밀리떼르는 프랑스 통치 시절에 건립된 전통 있는 병원이다. 원래 군용 병원이었으므로 이름만 밀리떼르지 실제로는 프랑스 가톨릭 선교회가 의사와 간호사를 파견, 직영하는 일종의 종교 단체에 가까운 병원이다.

2007-03-1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대결 ⑬그러니 그냥 9단이다. 박준호, 아니 무예의 세계에서는 타이거 박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 역시 날고 또 날아도 여전히 9단이다. 이름 그대로 입신의 경지다.따지고 보면 총을 들었을 뿐이지, 입신 경지에 든 무예인에게 3명은 대단한 숫자가 아니다. 한데도 무하마드 씨는 벌린 입을 끝까지 닫지 못한다. 계속 부라보를 외치고 있다."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베트남 경찰을 찾아서 신고를 해야 되겠죠."박준호가 묻는다."경찰서에 신고?"그가 고개를 절절 흔든다. 그리고 서둘러 대답한다."경찰은 안돼. 경찰은……."무하마드 씨의 품위있는 영어 발음이 쏟아진 이빨로 하여 헛바람이 새고 있다."안 되다뇨?"박준호가 계속한다."놈들은 살인자들입니다. 놈들은 고발해야죠.""하지만, 경찰도 한 패거리일 수 있으니까.""한 패거리라구요?""시아이에이처럼 집요한 조직도 없소. 그들이 못하는 일은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는 없을거요.""하지만, 그들이 시아이에이 요원이라는 증거가 어딨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텍사코가 시아이에이 요원으로 위장해서 보낸 건달들이기 십상입니다."박준호가 알아듣게 또박또박 피력했는데도 그는 돌처럼 굳은 얼굴을 쉽게 펴지 못한다. 그가 말한다."일단은…… 그들과 부딪히고 싶지 않소…… 날 도와주시오."그가 가빠진 호흡을 고른 다음 말을 잇는다."박준호 씨? 정말 감사하오. ……만약 당신이 승마 초청을 거절, 끝내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박준호씨, 날 도와주시오.""좋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박준호가 흔쾌히 승낙한 다음, "그렇다면, 일단 승마클럽으로 가겠습니다."박준호가 멀리 호반 기슭에 보이는 승마클럽의 빨간 지붕을 턱으로 가리킨다."승마클럽?"무하마드가 말한다."거기에도 잔당들이 숨어 있지 않겠소?""잔당들이라뇨?""시아이에이 끄나풀들 말이요.""시아이에이가 아니라 텍사코일 겁니다."박준호가 다시 한번 교정을 한다."텍사코든 시아이에이든, 난 그들이 싫소.""무하마드 씨…… 질문 한 가지 해도 괜찮겠습니까?"박준호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질문, ……좋아요.""무례하다고 생각지 마십쇼. 왜냐하면, 난 무하마드 씨를 돕기로 약속한 사람이거든요. ……어떤 결과의 대답을 들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니까요.""무슨 질문인지, 궁금하군요.""그들 말대로, 알 카에다 조직원이신가요.""나 말이요?""네, 무하마드 씨.""아니요!"그가 두 손까지 흔들며 부인한다."그건 뭔가 오해가 생긴거요.""그럼 그들이 말한 송금도 오해로 빚어진 거군요."박준호가 묻는다."아니요, 송금한 건 사실이요. 하지만 그것은 기부금이 아니고 그들 조직이 투자한 이익금의 일부일 뿐이요.""투자라뇨?"

2007-03-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⑫물보라를 일으키며 총신이 물속으로 사라지고, 그 파문이 겹겹이 번져 나간다.박준호는 확인 사살하듯 부스스 일어나는 백인 녀석과 베트남 사내를 차례차례 급소를 가볍게 가격, 정신을 잃게 한다."부라보, 부라보!"순식간에 일어난, 그러나 쉽게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숨죽이고 바라보던 무하마드가 그처럼 환호성을 지른다.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그의 얼굴은 일그러진 상태다. 삶과 죽음의 사잇길을 오간 흔적이라고나 할까.우선 담뱃불에 얼굴 구멍이 뚫리지 않은 것만 해도 천행이다. 박준호는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한다.살아 숨쉬게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에, 환희 때문에, 아등바등하다가 황혼기를 맞는 게 아니라 한 순간으로 생을 마감할 뻔한 실로 가공할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는 충족감 때문에, 그는 지금 입을 벌리고 웃는 듯이 울고 있는 것이다.어쨌거나 무하마드의 입 안이 온통 피범벅이다. "부라보!"그는 손뼉까지 치기 시작하고 있다.박준호도 손바닥을 턴다. '빨리 이곳을 떠나야 돼'.두리번거리며 박준호는 생각한다. '또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까'.타고 왔던 말을 찾는다. 금방 옆에 서서 꼬리를 흔들던 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총소리 때문일 터다. 오발된 총소리에 놀라 줄행랑을 친 게 틀림없다.박준호는 갈대밭에 얹힌, 그들이 타고 왔던 모터 보트를 끌어낸다. 보기보다 쉽게 물 위에 뜬다. 무하마드는 낙마하면서 허리를 다쳤는지, 제대로 기동을 못한다. 생각보다 무거운 체중 때문에 박준호는 끙끙대지 않으면 안 된다. 간신히 보트에 무하마드를 태우고 시동을 건다. 여기저기 널브러졌던 사내들이 몸을 가누고 꿈틀거린다. 한 녀석은 다 일어났다가, 다시 푹 쓰러진다. 보트가 물살을 가르기 시작한다."지금도 믿어지지 않아."무하마드가 박준호에게 시선을 꽂은 채 계속한다."정말이오. 사람 같지 않았소."박준호가 얼핏 미소를 흘린다.기실 태껸 8단이면 좌조(坐照)의 경지에 오른다. 가만히 앉아서도 훤히 내다보는 수준으로 기예의 개념을 넘어선 상태다. 거기다 9단에 이르면 말 그대로 입신(入神)이다.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면 무예의 세계에서는 마지막 단계다. 더 이상 가야할 곳이 없다. 말이 났으니 얘기지만 박준호는 이미 군복무 시절에 9단의 경지를 밟았고 그 이후로도 단 하루 거르는 법 없이 수련에 수련을 꾸준히 쌓아 왔다.그것도 그냥 홀로 체력 단련을 겸한 수련이 아니다. 정식 경기를 통한 수련도 거듭했고, 견주기도 수 백 차례 했으며, 심지어 실제 싸움판 또한 심심찮게 벌여 온 터다.어디 그게 태껸뿐인가. 우리 전통 무예 중 태껸과 쌍벽을 이뤘던 수벽치기가 그러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태껸 도장에서 시작한 태권도가 그랬으며, 나중 군대에서 필수과목으로 배운 합기도와 유도 또한 같은 9단 경지 아니든가.굳이 계산하자면 도합 36단이다. 그렇다. 품단(品段)의 급수가 계속 오를 수 있다면 우스갯소리로 태껸만도 20단도 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나, 무예에서의 입신은 생수인 1, 2, 3, 4, 5의 다섯 숫자 중에서 양수인 1, 3, 5를 합한 9를 성수라고 해서 가장 높은 숫자, 가장 큰 숫자로 숭상한다.

2007-03-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⑪"네놈이 송금한 36만불이 어디에 쓰인 줄 알아? 바로 어제, 세상을 벌컥 뒤집어 놓을 가공할 테러에 사용됐단 말이야. 자살 특공대? 그래, 겁도 없이 폭약을 싣고 구축함을 공격했어. 구축함을 두 동강 내겠다고 배로 들이받은 거야. 그래서 무고한 해군 병사가 몇 명이나 순직한 줄 알아?"녀석은 해군 병사들의 폭사가 순전히 무하마드 탓이라는듯, 아니 그들의 죽음에 대한 분풀이를 무하마드에게 퍼부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듯 으르렁거린다.그는 아예, 무하마드의 머리칼을 무 뽑듯 움켜잡고 있다."무려, 열일곱 명이 죽었어! 네놈 때문에!"그가 계속한다."네놈도 알 카에다지. 그렇지!"무하마드가 고개를 젓는다."아니긴, 뭐가 아냐? 걸프은행 자문위원은 위장이고 실제로는 알 카에다 자금책이잖아? 그렇지!" 그래도 고개를 좌우로 내젓자 녀석은 준비한 여송연 불을 치켜든다. 바야흐로 버얼건 담배 불씨를 무하마드 얼굴에 비벼 끌 찰나다.박준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떤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는 다짐한다. '이대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암, 저처럼 흉악무도하게 노략질을 일삼게 할 수 없는거야.'박준호는 대충 거리를 잰다. 세 녀석을 한꺼번에 전광석화로 해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놈들이 총을 들고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명중률이 떨어지는 단발 권총이 아닌 연발 기관단총이다. 방아쇠만 당기면 드르륵 한꺼번에 일곱 발이 발사된다. 놈들 말대로 벌집이다.그러니까 방아쇠를 당기기 전 영점 육초 안에 모든 상황이 끝나야 한다. 문제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두 명의 백인이다. 총을 들고 있다 해도 키 작은 베트남 사내는 별반 걱정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무하마드에게 흉포한 폭력을 행사한 사람도, 알 카에다 자금 조직책 운운하며 어쩌면 목숨을 살려 둘 것 같지 않게 행동한 쪽 역시 두 명의 백인이다."얍!"순간 박준호가 땅바닥을 차고 뛰어 오른다. 흡사 한 마리 독수리의 비상 같다. 벌써 브라우닝 엠 파이프 기관단총 한 정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고 있다. 물론 베트남 사내가 들었던 총이다. 박준호의 오른쪽 발차기가 예의 기관단총을, 왼쪽 주먹 펀치가 놈의 명치를 가격한 뒤다."탕, 탕!""드르륵 드르륵─."총소리의 굉음이 조용한 호반의 수면을 떨게 하고, 이윽고 그 메아리가 부챗살 모양 천천히 퍼져 나간다. 하지만 그것 역시 놈들이 박준호를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니다.박준호의 솟구쳐차기에 걸려 총을 놓친 두 백인 사내가 얼떨결에 당겼거나, 손에서 빠져나간 총신이 허공으로 맴을 도는 찰나, 저절로 방아쇠가 움직였거나 했을 터다.그러니까 박준호는 세 명의 사내가 들고 있던 총을 단 한번 솟구친 동작으로 모조리 허공에 날려 보낸 셈이다. 그리고 사뿐 땅 위에 발을 딛고 나서 다시 솟구쳤는데, 이번에는 발이 먼저가 아니고, 두 손바닥이 땅을 밟는다. 이름하여 물구나무 서기 동작이다. 대신 두 발이 허공중에서, 유연한 춤을 춘다."억!""으악!"두 백인 사내가 춤추는 발끝 가격으로, 혹은 종지뼈 가격으로 그대로 거꾸러져 쓰러진다. 박준호는 땅에 떨어진 세 정의 기관단총을 재빨리 수거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타이 호수를 향해 힘껏 내던진다."첨벙─.""풍덩─."

2007-03-1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⑩"아악!"무하마드가 얼굴을 감싸 쥔다. 무하마드가 감쌌던 손바닥을 편 것은 한 번 더 복부를 차이고, 그리고 몸을 비비 꼬고 나서다. 그가 펴 보인 손바닥 안이 하얗다. 이빨이 뿌리째 뽑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검붉은 피도 엎지른 물처럼 금세 손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야 이 새까! 너 베트남에 뭐하러 왔어!"금방이라도 또 한 차례 킥할 것처럼 계속 으르렁 거린다."뭐하러 왔느냐고 묻잖아!""건 왜 물으시오?""왜 묻냐구? 정말 몰라서 물어!""모르겠는데….""이 새끼, 능청 떠는 것 좀 봐! 너 어제 에너지성 장관 면회 신청했어, 안 했어?""그야….""이 새끼 아직도 오리발 내미는구만. 너 오늘 죽고 싶어?"금세 발길질이 날아들 조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하마드가 입을 연다."텍사코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면, 대상을 잘못 골랐소. 난 그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오.""어쭈, 이 새끼. 아가리 한 번 제대로 놀리는구만. 야, 임마! 우리는 네놈 본색이 뭔지 다 알구 왔어! 야 새꺄, 너 얼마 송금했어!""송금이라니….""알카에다에게 송금 했잖아!""알카에다….""얼마 송금 했어!""….""36만 달러 맞아!""당신들은 누구요?""대답이나 해 새꺄!""누군지 신원을 밝히지 않는 사람에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겠소.""어쭈! 이게 죽고 싶어 환장했군."한 녀석이 여송연을 지포 라이터로 피워 문다. 두어 모금 깊게 빨아 들이자 불꽃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 불을 무하마드 얼굴 가까이 가져간다."네놈 얼굴에 이걸 비벼 끌 거야. 알겠어!"무하마드가 얼굴을 뒤로 피한다. 이미 공포에 질려 퍼렇게 경직된 얼굴이다. 하긴 폭력 앞에 당당히 맞설 장사는 없다. 그것도 어디 웬만한 폭력인가. 폭력 그 자체가 무법적인 완력이지만, 이건 잔인하고 잔혹하다 못해 감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적당히 겁을 줘서 돌려 보낼 요량이 아니다. 아예 목숨을 빼앗기로 작정된 시나리오 같다. 담배 불꽃을 만들고 있는 사내가 말한다."야, 새꺄! 우리가 누군지 알고 싶어!"무하마드는 대답하지 않는다."알고 싶냐구 물었잖아!" 만신창이가 된 무하마드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인 것은 브랑누 갈기 머리 사내가 이번에는 주먹으로 어금니 부분을 내리 찍듯 가격하고 난 뒤다. 그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사람이다.무자비하고 잔혹한 세 명의 사내를 말로 설득해서 위기를 넘기겠다는 생각을 아예 포기한 상태다. 이젠 고분고분한 태도로 그들의 처사에 맡길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순종과 복종만을 표방한 얼굴이다.사내가 말한다."네 놈이 테러 게릴라 비밀 조직에 헌금하듯 우리도 테러 근절 비밀 특공대를 조직했단 말이야."사내가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빨아들인 다음, 그것을 무하마드 얼굴에 후, 뿜어 내며"자비르 알 할리파 무하마드!"소리를 지른다. 하나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대답해 새꺄! 무하마드!""…녜…."

2007-03-0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⑨"왜, 이래!"고삐를 사정없이 감아 쥐고 달래 보지만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말의 소요를 저지시킬 수가 없다."워· 워·워!"그래도 한사코 매달린다. 역부족이다. 이번에는 말이 길길이 뛰어오른다. 물론 모터보트 때문이다. 모터보트가 바로 무하마드 코앞에 쳐 박히듯 정지한다. 그래도 여전히 굉음을 내지르고 있다. 무하마드 씨가 말에서 떨어져 나가 허공을 한 바퀴 회전하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힌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모터보트 사내들이 뭔가를 움켜쥐고, 성능 좋은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손들엇!"실제로 총을 겨누고 있다.그것도 최신형 기관 단총이다. 브라우닝 엠 파이브라든가. 박준호가 탄 말도 무하마드처럼 요동을 쳤지만 박준호는 고난도 기술을 보유한 서커스 단원인 양 간신히 매달리는데 성공한다. 물론 박준호에게도 총이 겨냥되어 있다."꼼짝 마라! 서툰 짓 했다간 벌집될 줄 알아!"무하마드는 땅바닥에 누운 채로 손을 번쩍 든다. 박준호도 손을 든다."말에서 내려 와!"어쩌는 수 없다. 감아 쥐었던 고삐를 풀고 천천히 말에서 내린다. 하나 그뿐이다. 그들은 박준호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다. 키 작은 동양인이라서 그럴까. 한 녀석이 총구를 박준호 등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녀석조차 눈길은 무하마드에게 주고 있다.'아니, 저 자식은…….'박준호가 한 번 더 확인한다.틀림없다. 세 사람 다 비행기 조종사용 특수안경으로 얼굴은 반쯤 덮었지만, 그중에 한 놈은 메트로폴 호텔 12층에서 만났던, 아니 무하마드가 묵고 있는 스위트 룸의 방문을 열기 위해 날카로운 쇠붙이로 열쇠 구멍을 후비던 바로 그 녀석이다.브라운 머리를 사자 갈기처럼 흩날리고 있다."뭘 원하오?"무하마드가 땅바닥에 누운 채로 말을 잇는다."돈이라면…… 총을 겨눌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승마 클럽 탈의실에 가면 지갑이 있으니까."그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시늉을 한다."내가 갖고 있는 거 몽땅 다 주겠소. ……이제 됐소?"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몸을 탈탈 털고 일어선다."야, 이 새꺄!"그중의 한 녀석이 반쯤 일어선 무하마드의 가슴을 구둣발로 사정없이 내지른다. 퍽, 소리가 날 정도다"억!"그가 다시 나뒹군다."자비르 일 할리파 무하마드 맞아?"구둣발을 내지른 사내가 추상 같은 목소리로 호령한다. 무하마드가 깜짝 놀라는 기색이다."맞느냐고 물었잖아!"그가 총구로 무하마드 입술 주변을 무자비하게 찌른다. 총구에 의해 일그러진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그가 대답한다."아니, 내 이름을 어떻게…….""직업은 걸프은행 투자 자문역!""맞소, 난…….""이 새끼!"이번에는 다른 사내다. 머리가 헝클어진 바로 그 브라운이다. 그가 월드컵 예선전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낸 최전방 공격 선수처럼 정확하게, 그러나 어떤 골키퍼도 잡을 수 없게 강력한 파워킥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435그램의 가벼운 축구공이 아니다. 무하마드의 얼굴이다."퍽─."

2007-03-0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⑧"그렇군요."박준호가 대답한다."인생은 엔조이 하기엔 너무 짧아."왠지, 엔조이란 말이 귀에 거슬린다. 토막 시간도 무료히 버리지 않고 베트남 여자와 대낮 정사를 벌이는 것이 엔조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박준호는 참는다."아등바등하다가 황혼기를 맞아 버린 주변 사람들을 나는 자주 봐 왔소. 그제야 왜 그리 살았나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거요. 내 말 뜻 알겠소?"무하마드는 휘파람도 분다. 월트 휘트먼의 시에 랄프 월리엄스가 곡을 붙인 '밀밭 길 너머'다. 영국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경쾌한 곡이다. 박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가다 말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까, 그 일본 대사 말입니다"라며 말을 꺼낸다."아, 오카모토 씨.""그 사람이 바로 통킹 만 석유 때문에 일본 정부가 특파시킨 장본인입니다.""그래요?"그가 휘파람을 끊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연다."그렇다면 석유 탐사는 일본 쪽으로 넘어갈 공산이 큰 것 같소. 왜냐하면 오카모토, 그 사람 수완가란 명성이 자자하기 때문이오. 아부다비에서도 우리가 당했을 정도였으니까.""아부다비에서 당했다니요?""사우디아라비아 뱅크와 조인트한 일본 기업한테 우리가 물을 먹었다는 거 아뇨. 그것도 우리 집 안방에서. …오카모토 그 사람 한 번 물었다 하면 절대로 놓지 않는 괴물이오.""제가 알기에는 오카모토보다 텍사코의 데시가 더 위력적이라는 정보를 들었습니다만."박준호의 말에 무하마드가 번쩍 고개를 쳐든다. 그가 말한다."형씨도 뭘 알긴 아는 모양이오만… 오카모토도 만만찮을 거요.…그래요, 아주 볼 만한 구경거리가 생긴 거 같구려."커브 길이다. 완만하게 휘도는 커브 길을 돌아 나오자, 시야는 더 넓고 아득해진다. 하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그냥 넓은 호수가 태고의 정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새들이 수면 위로 낮게 날다가 갑자기 물속으로 곤두박질한다. 새를 먹은 수면이 이번에는 반대로 물고기를 토해 낸다. 간헐적으로 허옇게 튀어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 가는 작은 물고기들의 춤사위….그처럼 조용하던 호반을 모터 보트가 사납게 물살을 가르며 허옇게 지나간다. 세 명의 남자가 타고 있다. 소리도 시끄럽다. 이건 정적을 깨는 것이 아니라 호반과 정글을 온통 뒤집어 놓고 있다. 무하마드는 여유롭다. 모터보트에도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 고삐를 바꿔 잡으며 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이랴, 이랴!"일종의 묘기다. 정식 용어로는 '피애프'다. 말의 보폭을 줄인다고 할까. 대신 앞다리가 더 많이 올라간다.사열하는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 다다랐을 때 경의와 존경의 예(禮)로 일사불란하게 행사하는 왕궁 기마대의 묘기다."어떻소? 괜찮소?"무하마드 씨가 자랑스럽게 묻는다."보기 좋은데요."바로 그때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지나쳐 갔던 모터보트가 갑자기 튕겨져 내달아온다. 그것도 호반 가운데가 아니다. 무하마드와 박준호가 걷고 있는 물가 바로 옆이다. 아니, 절반은 물속에, 절반은 갈대 밭 위를, 마치 먹이를 찾는 새의 저공 비행처럼 휘몰아쳐 온다. 말이 동요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2007-03-0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0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⑦"3일 전에?""그러니까 아직 정식 대사는 아닙니다. 베트남 정부에 아그레망을 보냈으니까. 이삼 일쯤 뒤에 답신이 올 테고… 그때 쯤 정식 대사로 부임할 겁니다.""대사로 부임한다구요? 아니, 그럼 승진하셨구만. 2년 전에는 상무관이었는데.""모두가 주변에서 밀어준 덕분이죠.""늦었지만, 축하 드립니다.""웬걸요, …건 그렇고 무하마드 씨야말로 하노이엔 어떻게 오셨습니까?""보다시피 말 타러 왔습니다.""말을 타러 와요?""네, 몽고 말이 있다고 해서….""그때 만찬장에서도 말 얘기만 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승마 클럽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그가 핫핫 소리내어 웃으며 말을 잇는다."실은 나도 손님 접대 때문에 나오긴 했지만, 역시 좋네요. 승마보다 더 좋은 스포츠도 없는 것 같습니다."누군가 박준호를 찌르듯이 보고 있다. 일본 대사의 경호원인 듯 싶은 젊은이다. 동행한 여자와 비슷하게 얼굴이 희고 반듯하다. 박준호도 그를 본다. 눈빛과 눈빛이 튕겨진다. 그쪽이 먼저 고개를 까닥 한다.박준호도 그렇게 한다."어디 묵고 계십니까?"대사가 묻는다."메트로풀인데요.""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만, 저희 대사관에 한 번 방문해 주시죠.""그러지요.""그럼 이만, …마사요시, 우리도 가지."오카모토가 젊은이를 앞세우고 클럽 사무실 쪽으로 사라진다. 박준호는 그들의 대화를 상세히 들었으므로 일부러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무하마드 뒤를 따라 마구간에 들어가 말을 고른다. 생각보다, 사육되는 말의 종류나 수량이 빈약하다.승마술(乘馬術) 시설 따위도 유럽 수준에 비해 너무 보잘것없다. 한데도 무하마드 씨는 만족한 얼굴이다.박준호가 보기에도 몽고 말이나 아랍 말이나 그것이 그것이어서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데도, 짙은 사슴색의 몽고 말을 고른 다음, 녀석의 코와 얼굴을 만지며 뭔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다. 이른바 인마일체를 위한 무언의 약속이다.박준호도 말 위에 올라앉는다. 그는 벌써 상보(常步)를 끝내고 전회(轉回), 후퇴, 정지, 발진 등을 반복하고 있다. 역시 승마에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몸무게로 따지면 박준호보다 20킬로쯤 더 나가는 체구인데도 말이 전혀 힘들어 하지 않고, 그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 같지도 않다.인마가 일심동체를 이룬 경지다.무하마드 씨는 승마술을 위한 마장(馬場)과 장애물 시설을 뒤로 하고 호반길로 나선다. 타이호를 끼고 꾸불꾸불 휘도는 숲길이다. 오른쪽은 호반이고 왼쪽은 숲이다.바나나, 파파야, 코코넛, 복숭아나무 등이 무질서하게 숲을 이룬 일종의 정글이다. 정글 속을 보면 하늘을 덮는 키 큰 나무들 때문에 어둠침침하다. 때로 숲이 낮아지기도 한다. 바나나 군락지이거나, 키 작은 대나무 밭일 경우가 그러하다.그런 정글을 끼고 호반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말을 타고 한 바퀴 도는 데 무려 네 시간이란다. 그것도 상보가 아니라 빠르게 달리는 속보(速步)로 말이다."어때, 잘 나오지 않았소?"무하마드 씨가 큼큼 맑은 공기를 마시며 묻는다.

2007-03-0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⑥박준호는 귀를 의심한다. 오카모토 가스미라니… 박준호에게 20만 불을 남기고 죽은 시루코의 전 남편. 세상에 이럴 수가… 원수는 반드시 외나무 다리에서 다시 만난다더니, 결국 이렇게 마주치는구나.갑자기 허벅지 부근이 찌릿해진다. 10년 전 샘프튼 둑밑에서 칼에 맞았던 상처 자국이다. 페니스를 잘라 가겠노라고 서슬이 퍼렇던 집시 불량배들의 말대로 아슬아슬 칼끝이 그곳을 싹둑 자를 뻔했었다. 공포탄을 탕탕 쏘아 대던 목장 주인이 급히 자동차를 몰고 나왔으니 망정이지, 까닥 잘못 했으면 불귀의 객이 됐을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다. 순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는데, 그것은 칼끝이 동맥을 잘랐기 때문이다. 아니, 동맥뿐 아니다. 말이 씨 된다는 얘기가 어쩌면 그렇게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페니스를 잘라 가겠어!'라고 큰소리치던 그대로 허벅지에 꽂힌 칼 날이 하필이면 박준호의 주요 부위를 스치고 지나 갔는데, 그곳에서 피가 멎지 않고 흘러 나온다. 상처는 별거 아닌 것 같은데도, 피의 양은 다른 곳보다 유별나게 많다. 얼마나 예민한 부위이기에 허벅지 쪽 피보다 더 많고, 더 붉어 보이는 것일까. 기실 자동차 안에서 박준호를 끌어안고 있던 톰 라더 부인도 안절부절못한다. 물론 페니스에서 흐르는 피 때문이다. "이걸 어쩌지! 이걸 어쩌지!"그녀는 지혈이라도 시킬 것처럼 손으로 페니스를 움켜쥐고,"이건 말도 안 돼! 절대로 이럴 순 없어!"계속 안달복달이다. 그녀가 소리친다."빨리 좀 몰아요! 이러다가 병신 만들겠어요!"집시 불량배의 가증스런 폭력에서 구해 준 것도 오감할 판에 자동차 시트를 완전히 버리면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목장주인에게 "신호 같은 건 무시하고 달리라니까요! 그냥 막 달려요!" 되레 신경질이다. 톰라더 부인은 허벅지보다 오로지 그 부위에만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흐르는 피가 그녀 흰 손을 붉게 물들여도 아랑곳없이 "이건 말도 안 돼! 절대로 이럴 순 없어!" 혼자 안달복달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박준호가 오카모토 쪽을 본다. 생각보다는 인상이 부드럽다. 일본 제국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전형적인 국수주의자라고 해서, 그에 걸맞은 터프한 모습이리라 예상했는데 웬걸 그냥 희멀쑥한 보통 신사일 뿐이다. 언뜻보면 여자보다 더 곱상한 모습이다. 하네코의 얼굴과는 딴판이다. 한데 왜 오카모토의 딸인 하네코가 제 아비를 닮지 않았을까. 지금 박준호는 오카모토 얼굴에서 하네코의 인상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전혀 아니야."박준호가 고개를 흔든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하네코는 오카모토 얼굴 속에 없다. 한마디로 오카모토는 박준호가 그동안 생각했던 터프한 유형의 사내가 아니다.'하긴 저처럼 유약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오히려 더 비정하고 매정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오카모토는 오랫동안 무하마드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그렇게 친절하고 적극적일 수가 없다. 외모만으로는 결코 비정한 남자 같지 않다. 더구나 페니스를 잘라 오라는 엽기적인 주문과 관련된 사람 같지 않다. 하나, 그는 분명 그런 지시를 내렸고, 그에 상응한 막대한 현찰을 거침없이 풀었던 터다. 아무렴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처럼 천박하고 무지한, 말 그대로 엽기적인 발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나쁜 자식!'박준호는 입술을 앙다문다."한데, 하노이엔 웬일이십니까?"무하마드가 묻는다."베트남 일본 대사로 부임하기 위해 3일 전에 도착했습니다."

2007-03-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⑤"괜찮다면, 우리 승마나 같이 하지 않겠소? 사실은 오늘 오후 승마 클럽에서 몽고 종마를 타기로 예약이 되어 있거든요."그가 잡지를 펼친 다음 "바로 이 말이오"하며 박준호 코 앞에 책을 바짝 들어 보인다."생긴 건 앵글로 노르만 종 같은데, 갈기가 더 길고 머리가 더 커요. 사슴색 털빛도 진하고… 난 몽고 종마는 처음이오, 꼭 한 번 타 보고 싶었던 말인데…칭기스칸이 타고 중앙 아시아 고원을 호령했던 바로 그 명마의 후예란 말이오. 어때요? 가슴 두근거리지 않소?"그는 지레 흥분 상태다. 아까처럼 다시 말 잡지에만 시선이 가 있다.'제기랄, 승마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의외의 제안이다. 더구나 늘 만나던 사이도 아닌, 말 그대로 초면이다. 게다가 승마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박준호가 잠시 생각한다. 아니, 왜 그가 그런 제의를 하는지 행간에 숨은 뜻을 파악하는 중이라고 해야 옳다. 무하마드는 벌써 시중 드는 베트남 여인에게 승마 준비를 시키는 중이다."잠깐만요."박준호가 한 템포 호흡을 조절한 다음, 계속한다."나에게 승마 기회를 주는 거, 우리 프로젝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라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천만의 말씀이오. 솔직히 말해서 그런 류의 프로젝트를 들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아요. …재미 없는 사업 얘긴 그만 접어 두고 말이나 탑시다."박준호가 단안을 내린다."미안하지만 무하마드씨의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지금 나는 승마를 즐길 정도로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오."박준호는 여차하면 그냥 일어설 기세다. 무하마드가 희죽 웃는다. 그가 말한다."우리 아랍에미리트 속담에 이런 구절이 있소. 일이 막혀 안 풀릴 땐 말을 타고 황야를 달려라!" 몽고 종마를 사육하는 승마 클럽은 하노이 북쪽에 해당하는 타이호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시내 중심의 아름다운 호수 호안키엠의 열 배가 넘는 규모다. 얼핏보면 바다 같다. 호반에는 새 페인트로 치장된 울긋불긋한 유람선들이 떠 있고, 수상스키가 물을 갈랐으며, 도하중인 군 작전용 부교를 길게 늘어 뜨리고, 수상 레스토랑들이 마치 물 위에 던져 놓은 꽃송이처럼 앉아 있다. 한마디로 타이호수는 레포츠의 천국인 셈이다. 한데도 사람이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 천혜의 자연 조건을 이용, 한껏 치장을 했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목을 묶고 있다. 더구나 주말도 아닌 평일이라, 더더욱 사람이 없다. 승마 클럽도 마찬가지다. 호반을 배경으로 꾸며진 클럽 주변은 말 그대로 쾌적하고 아름답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극소수다.그래도 두서너 패거리 손님들이 여기 저기 말들과 씨름을 하고 있다. 대부분 외국인들이다."안녕하쇼. 오랜만입니다."누군가 무하마드씨에게 인사를 한다. 말쑥한 승마복 차림의 동양인들이다. 유난히 얼굴이 흰 젊은 여자도 한 명 끼어 있다. 아니, 더 있다. 키가 훌쩍 큰 미국인 두 명이다. 미국인들을 여자가 도맡고, 중년 신사와 탄탄하게 생긴 젊은이가 이쪽으로 몇 발짝 걸어온다."아, 누구시죠?"무하마드씨가 고개를 갸우뚱한다."아부다비에서 만나지 않았습니까? 일본 대사관 만찬장에서.""아. 그렇군요. 2년 전이죠. 그때가?""맞습니다. 술탄 대통령 일본 방문 기념 만찬장이었으니까요.""그러니까 성함이 …오카모토….""오카모토 가스밉니다."

2007-03-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④"3자 공동? 누구 누구랑 말이요?""베트남, 한국, 그리고….""그러니까 우리에게 들러리를 서라, 그 얘기구려."무하마드가 손바닥을 탈탈 턴다. 여차 하면 일어설 기세다."들러리라뇨?"박준호가 계속한다."우리가 수많은 컨설턴트를 마다하고 무하마드씨에게 집중적으로 콜한 것은 석유 탐사 사업 노하우를 어느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무하마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한다는 표정이다."우리는 아무리 자금줄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아무나 만나지 않습니다. 통킹 만 석유 탐사권 내정, 그 자체가 기밀 사항이니까요.""방금 기밀 사항이라고 말했소?"무하마드가 상체를 박준호 쪽으로 당기며 묻는다."네, 기밀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왜냐면……."박준호가 천천히 계속한다."베트남 당국도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워낙 경쟁이 치열한 프로젝트라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일본이 그 프로젝트를 수중에 쥐게 된다면 무하마드씨나 걸프은행과는 어떤 내용의 교류도 이뤄지지 않을 겁니다. 텍사코도 일본도 자금, 기술, 행정력 모두 다 갖추고 있으니까요.""물론 그렇겠죠. …한데 말이요, 베트남 정부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텍사코나 일본을 마다하고 왜 자금력도 기술력도 없는 한국 기업하고 손을 잡으려는 거죠?"역시 예민한 통찰력이다. 박준호는 망설인다. 이미 서양식 사고에 길들여진 무하마드가 베트남 전쟁 중 총살 직전에 목숨을 구해 준 한국인 생명의 은인과의 교감이 불씨가 되어, 그같이 엄청난 프로젝트가 이제 막 성사 단계에 있다는, 아니 무하마드가 투자를 결정하고, 걸프은행 지급 보증서를 발급하는 그 순간으로 정식 조인이 체결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꼬치꼬치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박준호는 띄엄 띄엄, 그리고 다소 어설프게 입을 연다."그건, …각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미국 텍사코와 일본의 미스비씨를 따 돌리고 저희가 그것을 따냈다는 사실입니다.""하지만, 난 아직 석유에 대해서도, 전자 단지에 대해서도 베트남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들은 적이 없소."박준호가 설명한다."그래서 내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내정?""그렇습니다.""그걸, 어디서 어떻게 확인하죠?""원한다면, 주무 장관과의 미팅을 주선할 수도 있습니다.""주무 장관이라면….""상공 에너지 장관이죠.""아무튼 좋아요."무하마드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탈탈 턴다. 그가 말한다."당신이 제안한 사업 프로젝트 내용보다, 솔직히 나는 진지하게 설명하는 당신의 태도가 더 맘에 들어요."그가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 뒤적이던 잡지를 집어 들며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괜찮다면, 우리 승마나 같이 하지 않겠소? 사실은 오늘 오후 승마 클럽에서 몽고 종마를 타기로 예약이 되어 있거든요."

2007-02-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③"감사합니다."박준호가 의자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표한다."좋습니다."붉은 털이 비비 꼬인 긴 다리를 포개며 무하마드가 계속한다. "영국 신사 길버트 경하고는 어떤 사입니까?""제 학교 은사나 다름 없습니다.""은사?""네."박준호가 무하마드의 표정을 살핀 다음 말을 잇는다."한때 길버트 경은 하이스쿨 명예 이사장도 맡으신 적이 있습니다.""아, 그래요?""저는 운 좋게도 길버트 경 저택과 가까운 이웃에 살았거든요. 그분은 특별히 절 귀여워했습니다.""그럼, 포츠머스 하이스쿨?""아닙니다. 헤이즈팅스입니다.""그럼, 마거릿 여사도 잘 아시겠군요." "물론이죠. 마거릿과는 동급생이었습니다. 지금도 자주 연락하구 있구요.""이번에 승진했다는데?""마거릿이 아니고, 부군인 사어먼 씨가 국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참 그렇지. 마거릿 여사는 작년에 승진했지요. 어쨌든 그 정도면 알만 합니다. …길버트 경은 웬만해선 사람을 추천하는 분이 아니니까."그가 신분 확인이 끝났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연다."그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하노이에 컴퓨터 조립 라인을 깐다구요?""그렇습니다. 사업 계획서는 보내 드렸으니까 배경 설명은 생략하고 골자만 말씀 드리겠습니다."박준호는 그 대목에서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한다."베트남의 인건비는 매우 낮습니다. 동남아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쪽 사람들 수율(手率)은 유럽 수준입니다. 손재주가 뛰어납니다. 게다가 프랑스와 미국을 격퇴시킨 끈기와 용기와 지혜가 있습니다."박준호가 말을 잇는다."그뿐 아닙니다. 사이공, 아니 호치민 지역은 미국의 약탈 문화 영향을 받아 다소 나태합니다만, 하노이는 다릅니다. 아직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부지런합니다. 이곳에 대단위 전자 단지를 건설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한 투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박준호가 일단 말을 끊고 무하마드 씨를 본다. 그가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낸다. 매우 진지한 표정이다. 박준호는 안도의 숨을 쉰다. 경우에 따라 얘기도 끝나기 전에 딴전을 피운다거나, 전화를 거는 따위 야박하고 건방진 컨설턴트들이 얼마나 많은가."우리는 통킹 만 해상 가스 탐사권을 베트남 정부로부터 획득했습니다."박준호가 가스 탐사권이라는 어휘를 더 강조해 마지않는다."통킹 만 가스 탐사?"무하마드가 몸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러면 그렇지. 박준호가 회심의 미소를 띄운다. 그가 말한다."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화하려고 사력을 다했던 배후도 기실은 통킹 만에 묻힌 석유 매장량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주지하신 바와 같습니다.""그래서요?""그래서… 걸프은행이 우리 프로젝트에 자금 투자를 결정해 준다면… 석유 탐사까지도….""그러니까, 전자 종합단지 건설 자금을 투자하면, 석유 탐사권을 우리에게 넘기겠다, 그거요?""아닙니다. …3자 공동으로 탐사하는 겁니다."

2007-02-2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②" 아, 미스터 박?""맞습니다. 박준홉니다."무하마드가 힐끔 고개를 든다. 그러나 어느새 시선은 잡지로 가 박혀 있다. 그가 말한다."혹시 말 좋아하십니까?""타는 말, 말입니까?""그래요, 타는 말.""좋아한다기보다…… 말을 타 본 적은 있습니다.""말을 타 보셨다구요? 그럼, 더 잘 아시겠네. 말은 정말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마침, 몽고 종마를 베트남에서 사육한다고 해서…… 실은 텍사코의 텔타 말 목장이 볼만하다는 소문인데…… 몽고 산 좋은 종마가 수두룩하다고 하던데…… 하지만 그곳은 정식 초청장이 없으면 구경할 수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요.""텍사코의 텔타 목장이 베트남에 있습니까?"박준호가 묻는다."선생은 말에 대한 관심이 덜 하시구만. 그런 정보도 모르는 걸 보면…….""솔직히 잘 모릅니다.""몽고 말은 타 보셨소?""아닙니다.""몽고 말이 왜 우수한가? 그건 말이요. 다른 종마보다 체폭이 넓고, 가슴이 깊고, 몸 길이가 키보다 길고, 골격이 굵기 때문이요."무하마드는 입가에 허연 백태가 끼도록 말 예찬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늘어 놓는다."말도 좋지만…… 무하마드씨 모자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박준호의 모자 이야기에 무하마드씨가 금세 동요를 보인다."정말 잘 어울립니까?" "그럼요, 장군님 같습니다.""어제 국방성 건물 옆을 지나다가 한 개 구입했는데…… 참, 이 모자 베트남 사람들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무하마드가 장난끼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한껏 지으며 질문을 한다."글쎄요…….""국방성 모자랍니다. 국방성 옆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하핫."그가 한바탕 호쾌하게 웃고 나서 "왜 우습지 않습니까?" 동요없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박준호가 되레 기이하다는 듯이 묻는다. "우습군요." "그럼 웃어요, 하핫.""헛헛"박준호도 마지못해 따라 웃는다."이거 말이죠. 종이 골판지로 만들었는데, 미군 철모보다 더 튼튼하답니다. 총알이 뚫지 못할 정도라니까. 그래서 베트남 말로 무쿵인데, 그 뜻은 딱딱한 모자랍니다. 재밌지요?""재밌습니다." "난 말입니다."무하마드씨가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한입 떠 넣고 난 다음 말을 잇는다."이 모자처럼 확실하게 견고한 물건이 아니면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게 내 철학입니다.""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물건의 진가를 알아 주는 사람이 아니면, 처음부터 만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혹시 영국에 사셨습니까?""왜 그건 물으시죠?""영국식 발음이라서.""맞습니다. 한때 영국에서 살았었죠.""난, 말이요. 영국식으로 발음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품위 있는 말투와 그 사람의 성품은 일치하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2007-02-2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①박준호가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보다 반 시간 전이다. 원래 미팅 장소가 12층 비즈니스 홀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묶고 있는 스위트 룸 바로 옆방이다.1층 커피숍에 앉아 반 시간을 기다리기 지루해서 곧바로 12층으로 올라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서너 개의 방을 지나 막 오른쪽으로 꺾는데, 웬 사내 둘이 스위트 룸 문 앞에 바짝 붙어 있다. 아니, 뭔가에 열중하고 있다. 꼬챙이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차 속에 꽂아 놓고 내린 키를 찾기 위해 창틀 사이로 찔러 넣곤 하는 날카로운 꼬챙이. 박준호의 뒷머리가 쭈뼛 선다. 동물적인 감각이다. 고양이가 그렇게 하듯 단 한 걸음으로 바짝 다가 간다. 그들이 설사 무기 같은 걸 꺼내 든다 해도 미처 사용하기 어려운 간격까지 접근한다. 그리고 험험 기척을 보낸다. 두 녀석이 이쪽을 본다. 질겁을 한 얼굴이다."뭐야!"그들이 솟구친다. 물론 박준호를 향한 공격의 솟구침이라기보다 도망치기 위한 행동에 가깝다. 흡사 물 먹던 사슴이 맹수를 발견했을 때 같다. 실제로 놈들은 도망치고 있다. 박준호가 미리 피신할 길을 터 놓았으므로 그들은 아무 장애 없이 다리야 날 살려라 식으로 내달리고 있다. 두 놈 중 한 녀석은 잘 생긴 백인이다. 길게 기른 브라운색 머리가 사자의 갈기인 양 휘날리고 있다."이상한 자식들이군."손바닥을 털고 스위트 룸 문을 살핀다. 문은 어느새 열려 있다. 그러니까 막 빗장을 따는데 성공했던 것 같다.방 안 소리가 들린다. 신음 소리다. 귀를 더 가까이 댄다. 여차 하면 뛰어들 참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심한 상처를 입고 토해 내는 신음이 아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그중 하나는 여자다."어머, 어머, 아으으."자지러지는 소리도 있고, 철부덕 철부덕 둔덕을 때리는 소리도 있고, 휫휫, 침대 스프링이 눌렸다가 풀어지는 소리도 있고."어프, 어프."흡사 수백미터 가파른 계단을 뛰어오르는 듯한 남자의 숨가쁜 호흡 소리도 있다.박준호는 피식 웃어 버린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박준호가 1층 로비에 내려갔다가 시간에 맞춰 다시 올라 왔을 땐, 무하마드씨는 약속대로 비즈니스 홀을 지키고 있다. 방금 전 대낮의 정사를 격렬하게 치른 사람 같지 않다. 상대역인 듯 싶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호아처럼 허벅지가 찢어진 아오자이를 입고 있다. 무하마드씨는 샘족 출신이 다 그렇듯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전형적인 아랍 신사다. 얼굴 또한 온통 푸른 수염자국 투성이다. 대개의 아랍 신사들은 그들의 전통복장을 고수하기 마련인데, 무하마드씨는 좀 별난 사람 같다. 그는 행동도 빠르게 베트남식 관광 복장을 입고 있다. 항불(抗佛) 전쟁은 물론이고, 항미(抗美) 전쟁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인민 군인들이 철모 대신 즐겨 썼던 카키색 사파리 모자에다, 카키색 반바지, 그리고 장식용 견장이 달린 군복 상의를 입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사진 잡지를 뒤적이고 있다. '말'잡지다.미끈한 말들이 달리기도 하고, 한가로이 풀을 뜯기도 하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마굿간에 우뚝 서 있기도 한다. 무하마드씨가 잡지에 얼마나 몰두하는지 박준호가 들어서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다."안녕하십니까?"벌떡 일어서면서도 그는 잡지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누구시죠?""아까 전화했던……."

2007-02-2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⑮"베트남엔 첨이세요."그녀가 묻는다. "예, 첨입니다.""어떠세요?""인상 말입니까?""네, 인상.""좋습니다. 특히 호아씨의 환대가 극진해서 더욱 좋습니다.""전 아무한테나 환대하지 않아요."박준호에게 초점이 모아진 그녀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막 짜 놓은 이집트 양탄자처럼 부드럽고 진하다. 박준호가 한없이 부드럽고 진한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입을 연다."그런 점에서 두 분이 아주 닮은 거 같습니다.""두 분이라뇨?""관장님 말입니다. 똑같이 손님을 환대할 줄 아니까요."박준호의 김만상 끌어들이기 작전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를 화두로 삼음으로써 야릇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일신시키기 위함이다. 한데도 호아는 찬물 끼얹기 식의 박준호 작전에 말려드는 것 같지 않다. 김만상을 상기시킴으로써 당연히 표정이 굳어져야 하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밝고 부드럽고 가벼운 표정으로 "관장님은 외출 중이세요"라고 말한다."이제 방금 나가셨어요." 그녀는 김만상의 외출을 강조한다. 외출 중이므로 아무 걱정 말라는 투다.'제기럴.'박준호는 고개를 흔든다. 이건 호기심이나 야릇함이 아니다. 일종의 낙망이라고나 할까. 그녀에 대한 신선한 기대감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허망함. 만약 지금 그윽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호아가 스카이 홍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박준호는 괜히 호흡을 조절한다. 그리고 이 원색의 열대 꽃이 만발한 쾌적한 실내야말로 스카이 홍 특유의 분위기와 너무 흡사하다고 혼자 고집해마지 않는다. 박준호의 그런 희망사항 감지해 내기라도 하듯 호야가 입을 연다."베트남 전쟁 때 난 여섯 살이었어요."박준호는 그냥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가 계속한다."여섯 살 때 사이공에 살았어요. 아니, 탄손누트 공항 근처예요. 우리 집 부근에 한국군 통신 중대가 주둔했어요. 난 늘 그곳에 가서 놀았고, 그래서 한국 병사들 하고 친했어요. 그중에 어느 아저씨는 날 너무 귀여워했어요. 먹을 것도 주고, 장난감도 주고, ……날 목마 태우기도 하고, 꼬옥 안고 내 귀여운 호아야 하며, 내 볼에 뽀뽀를 퍼붓기도 했어요. 그날은 사이공 대통령 관저에 해방전선 깃발이 올라가는 날이었어요. 해방군이 사이공을, 아니, 탄손누트 공항까지 점령했을 때 나는 아저씨를 만나러 달렸어요. 한데 텅 비어 있었어요. 모두 떠나 버렸으므로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발로 흙을 차며 울었어요. '아저씨, 아저씨, 돌아와요. 돌아와요─'라며".그녀는 신또르 주스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삼키며, 귀익은 국민 성우처럼 감정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난 처음 당신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아니, 내가 그때 그 병사하고 닮았다는 말이오?"박준호가 반문한다."그러믄요. 너무 똑같아서…. 내 볼에 뽀뽀했던 그 아저씨가 베트남으로 돌아온 줄 알았어요. 날 만나기 위해."그리고 그녀는 박준호가 차지하고 있는 발코니 흔들의자로 다가온다. 앉겠다는 양해도 없이 무조건 비집고 들어온다. 박준호가 미처 피할 틈도 없다. 실제로 두 사람이 앉기에는 빡빡한 의자다. 엉덩이가 서로 맞비벼져야 한다.'위빠사나.'박준호는 혼자 중얼거린다. '나에게서 모든 욕망을 가져 가소서. 탐욕이, 음욕이, 색정이, 급습하지 못하게 나를 깡그리 비우게 하소서.'박준호는 눈을 감는다. 맑은 물이 얼음 위를 부드럽게 흐르고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피어 오르는 냉기 때문에 얼음이 호박색으로 변하고, 타이탄 호를 침몰시킨 빙하가 에메랄드빛 바다 수면으로 미끄러지듯 가라앉고, 그 위로 작은 억겹의 포말들이 엘레스톤의 유황기폭처럼, 아니 1월의 폭설처럼 끊임없이 흩날리고….

2007-02-2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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