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29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⑭빅토리 태권도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는지, 기합소리도, 재잘거리는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다. 호아가 가꾸는 2층 발코니 꽃이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작열하는 오후의 햇살을 먹은 꽃은 더 화려하고 투명하다. 햇빛 머금어 투명한 꽃 중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양귀비다.주황, 분홍, 보라, 노랑, 백색으로 물든 홑꽃잎의 신선함과 신비함과 요염함."뭐든,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요."그녀가 발코니의 나무 벤치를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파파야도 좋고,…냉 커피 아니면,…망고.""괜찮습니다."박준호가 서투른 베트남 말로 대답한다."베트남 말을 배우셨어요?""책에서 조금 읽었을 뿐이라서….""전요, 베트남 말하고 프랑스 말만 좀 하거든요.""아, 프랑스? 저도 조금합니다. 메르씨 뿌르뚜.""어머, 잘하시네요."그녀도 금세 불어로 바꿔 말한다. 발음이 낭랑하고 정확하다. 그녀가 말한다. "집 구경도 하시구요. …암튼 들어오세요. 우리 집 발코니 흔들의자에 앉으면 경치가 아주 좋답니다. 빌딩이 가리긴 했지만, 한 귀퉁이로 호수가 빤히 내려다보이니까요.""호의는 고맙지만, 다음 기회에….""왜요, 제가 너무 지나쳤나요?""아, 그건 아닙니다.""아니라면, 들어오세요."그녀는 박준호를 반억지로 끌어들인다. 물론 완력으로 한다면야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지만, 도리어 뿌리친다는 사실이 어색할 지경으로 그녀는 완강하다.박준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혹여 안 들어간다느니, 들어가자느니 승강이하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고수길이나 조봉삼의 눈에라도 띈다면 그보다 더 쑥스러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좋습니다."박준호가 등을 미는 그녀를 뿌리치고 혼자 걸어 들어간다. 에어컨을 틀어 놓아 실내는 더없이 쾌적하다.그녀가 말한다."꽃들은 너무 더운 걸 싫어 하거든요."정말 꽃이 많다. 집 안 전체가 꽃이다. 빈 곳이 없게끔 화분이 촘촘히 놓여 있다. 하루 중 햇빛이 가장 좋은 한낮이라서 그럴까. 꽃들은 너나 없이 활짝활짝 피어있다. 뭔가를 다투고 있는 것 같다.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꽃도 있고, 악을 쓰는 꽃도 있고, 애걸하는 꽃도 있고, 유혹하는 꽃도 있고, 유혹 당하는 꽃도 있고…….발코니의 흔들의자는 일인용이 아니다. 두 사람이 앉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에 앉았지만, 호안키엠 호수는 보이지 않는다. 비단 호수뿐 아니다. 거리도, 빌딩도 확연하게 볼 수가 없다.열대 넝쿨 때문이다. 패랭이 엇비슷한 보라색 꽃이 만발한 잎사귀 큰 넝쿨이 창 유리를 온통 휘감고 있다.그러니까 보라꽃 넝쿨이라기보다 보라꽃 무늬 커튼이 길게 늘어져 있다고 해야 옳다."신또르 주스 괜찮죠?"그녀가 들고 온 유리컵을 박준호에게 내민다."괜찮구말구요."호아는 다른 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아예 박준호에게만 눈을 맞추고 있다.

2007-02-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⑬"어른이라뇨?"웬 잠꼬대냐 식으로 박준호가 반문하다."우리한테, 어른이 또 있어! 대통령 각하 말고?"여전히 눈을 감고 대꾸하고 있다. 그가 계속한다."내가 대신 전해드린 것만 해도 수억이었잖아?""그거야 뭐… 노근리 학살사건 규명기금으로….""어쨌든 우리도 할만큼 했잖아!""글쎄요… 그런 식으로 말씀한다면, 열심히 한 셈이지요…. 한데, 그게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서승돈이 두 팔을 들어 필요 이상으로 흔들어 제끼며 계속한다."신경 쓸 거 없어. 그냥 문득 생각났을 뿐이니까…. 그보다 우리하고 가라데 체육관하고 대결하는 거 말이야. 그거 빨리 했으면 좋겠어. 돈 드는 파티 대신.""알았습니다.""이번 주말 쯤 어때?"서승돈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알겠습니다."문을 닫으려다 말고 이번에는 박준호가 입을 연다."서 사장님.""왜 그래?""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뭐든 물어도 좋다는 표시로 서승돈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뜬다. 박준호가 말한다."홍주리 여사님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요.… 사장님, 그분을 사랑하십니까?""사랑하느냐구?"너무 어이없는 질문이라는 듯 서승돈이 비스듬히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다."네,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그걸, 왜 자네가 묻지?""그냥 대답만 해 주십시오.""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어.""이유를 밝히라구요?""그래, 당연히 밝혀야지."박준호가 반쯤 열린 문 밖의 눈부신 햇빛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홍주리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되는 절실한 남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아, 그거?"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는, 아니 공개라는 말 자체를 꺼낼 수 없었던 절치부심의 박준호 고백을 서승돈은 그런 식으로 가볍게 받아 넘겨 버린다. 그가 말한다."김상도 회장 얘기구먼."서승돈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와 함께 조용조용 입을 열기 시작한다."그 얘기라면, 이미 끝났어. 천하의 김상도도 그 문제만은 어떻게 할수 없었고, 나 역시 한 발짝도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어. 그래서 영림에서 쫓겨난 거 아닌가. 맞아, 땅이 패이지 않고서는 씨앗을 뿌릴 수 없듯, 사랑도 철저히 파괴되지 않고서는 얻지 못하는 법이야. 왜냐하면 아픔으로 영그는 열매가 진정한 사랑이니까."서승돈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얼굴로 계속 말을 잇는다."은행들은 거부했지만, 이번 미국 출장에서 나는 자유를 얻었어. 내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에 살고 있는 줄 자네도 알지? 그렇게 완강히 버티던 아내가 드디어 합의 이혼서에 도장을 찍어 줬어. 물론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아내에게 양도하는 조건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자유를 얻었고, 이제 당당히 홍주리 앞에 우뚝 서게 됐어!"박준호는 문을 닫는다. 이제 눈부신 햇빛뿐이다. 시계를 본다. 오후 2시다. 하노이의 하루 중 가장 한가할 때다. 모두가 시원한 야자수 그늘에 앉아 신또르 주스를 만들어 마시는 시간이다.파파야, 망고, 아본가도를 으깨 천연 주스화 한 것이 신또르다. 아무리 지친 몸이라도 신또르 한 잔만 마시면 금세 갈증이 가시고 생기가 돈다고 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신또르를 무척이나 즐긴다.

2007-02-2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9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⑫박준호가 천부당 만부당하단 듯이 말한다."아, 아닙니다. 그쪽하고는 인연 끊은 지 오랩니다.""어머니도?""그럼은요.""그럼, 런던에 누구지? 누가 당신하고 지금까지 교류를 하는 거지?""길버트 경이라고 있습니다.""길버트 경?""아랍 에미리트 명예대사를 지낸 분인데, 아랍 통입니다. 마침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공교롭게 동남아 출장 중이라는 군요.""그래, 만나면 무슨 비즈니스를 하려구?""사업 투자에 관한 비즈니스죠.""그럼, 우리 프로젝트하고?""당연하죠. 그 일 때문에……."갑자기 서승돈이 박준호의 손을 두 손으로 끌어 잡는다."박군, 그 양반 나도 만나게 해 줄 수 있겠나?""실은 아까 회의에서도 보고 드릴까 하다가…… 아직은 시작 단계라 자제를 했습니다. 자신 있게 얘기할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걸프은행이라면 일단 김상도의 영향권을 벗어난 곳이니까, 적어도 훼방을 받진 않을 것 같구먼.""그러고 보니까, 그렇군요.""나와의 면담을 주선시켜 주게, 당장.""어렵지 않습니다."박준호가 한숨 돌리고 나서 계속한다. "다만, 오늘은 탐색하는 뜻에서 혼자 만나는 게 여러 모로 유익할 거 같습니다."바로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저예요. 호아예요. 들어가도 될까요?"김만상 관장 부인이다. 서승돈이 또 한차례 심한 기침을 유발한 담배를 비벼 끄고, "들어 오세요" 응답한다. 그녀가 문을 민다. 아오자이 차림이다.허벅지까지 찢어진 트임이 인상적이다. 옷을 입는 사람에게는 통풍 기능이 우선이겠지만, 보는 사람에겐 눈요깃감이 더 먼저다.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올라간 흰 허벅지의 경이로움.특히 호아 뚜이 띠엔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우유를 머금은 듯한 피부 색깔도 그러하고, 긴 다리 하며, 올라갈수록 더 통통해지는 풍만함 하며…….그녀는 쟁반을 들고 있다. 물론 먹기 좋게 손질해 놓은 과일이 가득 담긴 쟁반이다."피로회복에는 서우리엥이 최고예요."그녀가 탁자에 그것을 내려 놓기 위해 박준호 옆에 와 선다. 아오자이의 찢어진 트임이 하필 박준호 팔목을 스친다. 의도적인 행동이랄 수는 없지만,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토록 농염하게 보일 수가 없다. 그녀가 포크로 흰 속살을 찍는다."드세요.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생크림처럼 입 안에서 살살 녹아요.""고맙습니다."그리고 살짝 건들기만 해도 즙액이 터져 흐를 것 같은 참으로 먹음직한 흰 과육을 그녀가 포크에 찍어 박준호에게 내민다."드세요. 서우리엥은 과일의 왕이에요.""감사합니다."그러나 서승돈은 서우리엥으로 불리는 두리안을 한 조각도 먹지 않는다. 가슴 통증이 심한지 가슴을 움켜쥐고 스르르 눈을 감고 있다. 피곤이 통킹 만의 파도처럼 밀려드는 모양이다."그만 쉬십시오."박준호가 먼저 일어선다."그래, 난 잠시 눈을 붙여야 될 거 같애."호아와 나란히 서승돈 방을 막 나오는데,"박 군."서승돈이 부른다."네, 사장님."그가 눈을 감은 채 말한다."자네 말이야… 어른한테 후원헌금 많이 했었지?"

2007-02-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⑪"왜, 뜬구름 잡는 거 같나?""……글쎄요.""뜬구름이 아니야, 절대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구. 이것 봐.""네, 사장님.""당신이 날 도와줘야겠어.""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그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이달 말까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 우리 동방실업은 부도 처리 될 수밖에 없어. 본사가 부도나서 공중분해돼 버리면, 베트남 지사도 없어지는 것이고, 덩달아 우리 프로젝트도 물귀신 신세가 되구 만단 말이야.……어려운 얘기지만, 당신이 어디서 17억쯤 돌려 댈 수 없겠나? 고수길이 나서면 그 정도는 변통할수 있을 거 같은데.""사장님."박준호가 서승돈을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러냐는 듯이 서승돈이 역시 박준호를 본다. 박준호가 말한다."사장님, 고수길을 통해 동방실업 사장님 개인 계좌로 들어간 액수가 7억입니다.""그랬었나?""게다가 우리는 지금 완전히 손발이 잘린 상태 아닙니까. 개점 휴업중이라구요. 어디 그뿐입니까. 아시다 시피 지금 검찰에 쫓기기까지 하고 있습니다.""그것도 알아. 모르는 게 아냐. ……하지만 얘기 들으니까, 영림그룹에서 수금할 돈이 많다고 하더구만. ……나야 김상도에게 찍혀서 미수금이 20억도 넘는데도 단돈 1억도 돌리지 못하지만 '구길사'는 다르잖아? 도리어 영림 쪽에서 머리 숙이고 들어올 입장 아닌가?""걔들이 왜 머릴 숙입니까? 뛰어야 벼룩이라고, 우리야 행동대원밖에 더 됩니까. 칼 자루는 늘 그자들이 쥐고 흔드는 판인데…… 하긴 이제 알까기 재개발사업도 사양길입니다. 검찰이 냄새를 맡고 단속에 들어갈 조짐이니까요.""그래, 그래. 피차 어렵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가 말이야. 더구나 성사 여부에 따라 명암이 바뀌게 되어 있으니, 이 시점에서 주저앉을 수도 없구.""어쨌든,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쇼.""알겠네."박준호가 그만 나가 볼 요량으로 막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서승돈이 입을 연다."박 군, 윤 대리 얘기 들으니까, 걸프은행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면서?""네, 지금 메트로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있습니다.""어떤 사람인데?" "걸프은행의 투자 자문역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투자 자문역이라구요?""그렇습니다. 일종의 컨설턴트라고나 할까요.""어떻게 아는 사이지?""어떻게 아는 사이가 아니구요. 제가 인터넷으로 비즈니스 요청을 했습니다……. 런던에 좀 아는 사람하고 연결도 되고 해서…….""런던에 아는 사람이라면…… 혹시 대니 라일러 장군?"서승돈이 '내 추리가 어때? 틀림없지?' 하는 눈으로 묻는다. 하긴 벼랑 끝에선 서승돈이 지금 잡지 못할 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이 마당에 의붓 아버지 이름이 왜 나오는가 말이다.

2007-02-1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⑩서승돈이 연극배우의 독백처럼 주먹을 쥐고 허공을 가르는 시늉까지 해 보인다."분명히 나를 그렇게 저주하고 있을 거야."박준호가 뭐라고 코멘트할 처지가 아니다. 그냥 창 밖을 보고 있다. 서승돈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방을 뒤진다. 그리고 찌그러진 담뱃갑을 찾아낸다. 불을 붙인다. 평소에 피우지 않던 담배다. 더구나 몸살에다, 감기에다, 가슴 통증까지 겹친터라 더욱 보기 안타깝다. 아니나 다를까 생연기를 머금자마자 기침을 컹컹 한다.그냥 기침이 아니다. 그르렁 그르렁 가슴속에서 기름 끓는 소리가 난다."담배, 그만 태우시죠."박준호가 만류한다."괜찮아, 감기 때문에…….""그래도 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괜찮대두. 나 이래 봬도 건강 하나만은 자신 있는 사람이야."억지로 또 한 번 생 연기를 뱉고 나서 서승돈이 말을 계속한다."김상도 말대로 여기서 좌절해 버리면, 정말 다시 일어설 기회가 없어지는 거야. 대신 이 난관을 돌파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성공할 수만 있다면, 우리 앞에 탄탄대로가 열리는데 말이야."그 대목에서 서승돈이 기력을 되찾는 것 같다.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가 시들다 물 먹은 식물처럼 갑자기 생기를 띤다. 그가 말한다."이것 봐, 이번 대선 말이야. 정말 통쾌하지 않았어? 얼마나 우리가 갈망하던 일이었어? 난 무척 놀랐어. 우리나라도 미국 못지않게 밀도가 높아졌어. 암, 국민 수준이 업그레이드되고말고… 대한민국, 앞으로 비전 있어. 뭔가 크게 달라질 거라구."물론 서승돈의 그것은 위장술이다. 늙은 쥐 독 뚫듯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등을 돌려버린 어른의 세속적인 교활함을 미리 은폐시키기 위한 사전 처방인 줄도 모른다."그래서 얘긴데요.… 저희들 어려운 자금 사정을 말씀 드려서…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도 한 방편 아닐까요?"박준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너무 당연한 의견이다. 김상도가 그런 식으로 야비하게 훼방을 놓는다면, 재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께 읍소해서 일을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공식이다. 한데도"아니야!"서승돈은 일단 소리부터 질러놓고 난 뒤 말을 잇는다."이제 시작하는 어른한테 그런 부담을 주는 건 도리가 아니지. 그런 사소한 지급보증서 일로 어른을 난처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그 말이야. 각하께는 더 완벽한 결과를 가지고 만나 뵈어야… 예컨대, 우리 이번 프로젝트 말이야. 내가 왜 이 프로젝트에 목을 매느냐 하면……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다, 정부 일각에서 이 기획 자체를 부정하고,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야. 만약 우리 생각대로 성공한다면, 그래서 어른께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드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말이야……."서승돈이 또 생담배 연기를 푸, 허공에 내뱉는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지만, 장관 자리 두 개는 우리 몫으로 따 놓은 당상인데 말이야.""장관 자리 두 개요?""그래, 경제 분야 장관 자리, 에너지 분야하고, 산업 부분."박준호는 그냥 입을 봉한다. 뭐라고 대응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2007-02-1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⑨박준호가 목을 짓누른 듯한 답답함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동안 서승돈이 말을 잇는다."일규 녀석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김상도 회장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사기를 당한 거라구. 홍 여사 친정 아버지에게서 받은 남강정유 15퍼센트 주식도 어느 사이에 모두 일규 녀석 소유로 돌려 놓았다는거야. 물론 김상도의 교활한 책략이지. 친아들, 그것도 미성년자 소유로 돌려 놓은 것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 꼼짝 없이 당한 케이스야."서승돈이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지, 안 그래도 말라비틀어진 아랫입술을 으깨어 문다. 한숨도 푹푹 소리나게 쉰다. 그가 말한다."그 주식이 일규한테만 안 갔어도, 아니, 그때 홍 여사 인감을 김상도에게만 맡기지 않았어도,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곤혹을 치르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사실 홍 여사와 이 사업을 기획했을 때만 해도, 은행자금 동원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거든. 홍 여사가 보유한 주식만으로 은행 신용 한도가 충분하다 못해 넘쳤으니까.""그러니까, 홍 여사 쪽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군요."박준호가 결론을 내린다."그래, 그렇게 됐어. 유감스럽지만."서승돈이 생각할수록 주어진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계속한다."그 칼 자루는 일규라는 아이가 쥐게 될지 누가 알았나? 아니, 교활하게끔 일규를 앞세워, 홍 여사의 팔 다리를 그렇게 무참히 끊어 놓으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나? 생각해 봐. 영림건설 주식이야 그렇다 치고, 친정 아버지한테 받은 남강정유 주식 말이야. 주당 17만원에 거래되는 최고 우량주 아냐? 그게 자그마치 15만 주야. 액면가만 250억이라구. 그걸 김상도가 일규를 앞세워 제 아가리에 털어 넣어 버린 거란 말이야.""제 아가리에 털어 넣다뇨?""내용인즉슨, 그래. 남강정유 주식을 볼모로 결국 서서히 남강을 먹고… 그리고 남강보다 두 배 세 배 큰 정유회사를 따로 설립해서 통합시키는 야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거야. 그래서 이번 통킹 만 유전 개발사업에도 저렇게 천방지축 뛰어든 거라구. 무엇보다 텍사코의 환심을 사서, 공동출자 형식의 정유회사를 새로 설립하기 위해서."박준호는 고개를 흔든다. 물론 서승돈의 얘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아프다. 내색할 수 없지만, 영림의 김상도 회장 얘기만 나오면 우선 짜증부터 앞을 가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식을 벗어난 얘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어쨌거나 서승돈이 그토록 강경하게 주장해 마지않으므로 박준호도 더 이상 홍주리 이름을 들먹여 투자 자금 문제와 연결시킬 수 없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잖습니까?" 뿐이다."내 말이 그 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는 뱅크가 거지반 김 회장이 거래했던 곳 아냐…. 막말로 삼장법사 손바닥을 빠져나오기 전에는…."서승돈의 그것은 숫제 하소연이다.박준호가 한마디 한다."영림그룹의 위대한 김 회장께서, 미국에서도 호주에서도 빈 손으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고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겠네요. 하이에나가 제풀에 쓰러지는 물소를 기다리는 것처럼.""그렇겠지. 고소하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겠지."서승돈이 목소리를 바꿔 말을 잇는다."거 봐, 날 배신한 놈 치고 제대로 되는 놈 봤어? 더구나 승돈이 같은 질 나쁜 놈은 수모를 당해도 크게 당해야 돼. 장담하지만, 내 이 업계에 절대로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 테니까!"

2007-02-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⑧"외부에는 영림건설 주식을 15퍼센트씩이나 갖고 있는 대주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빈털터리니까.""실제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가 어떻게 빈털터리일 수 있습니까?"박준호가 묻는다."내막을 알면 기도 안 차. 홍 여사 아들 있잖아? 이제 중학교 1학년짜리. 이름이 일규라든가."'김일규.'정확히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에서 만났던 스카이 홍의 남편 김상수의 아들이다.김상도 회장이 김일규를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것도 일본 유도 선수처럼 건장했던 김상수가 물불 가리지 않는 그 자신의 외고집 때문에 북대서양 상공에서 산화해 버린 탓이다.적어도 외부에는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 터다. 한데, 왜 그 녀석만 떠올리면 명치 끝이 막히듯 가슴이 짜릿해지고 아픈가. 박준호는 소나기라도 맞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리고 입을 연다. "저도 압니다.""아니, 일규를 안단 말인가?"서승돈이 반문한다."네, 일규를 압니다.""당신이 어떻게 알아?""지난번 결혼식 때.""아, 그래. 그날 홍 여사가 데리고 나왔었지.""공부를 잘 한다면서요?""꽤 한다는 얘기 들었어. 하지만, 중학교 때 잘 하는 거 갖고는 몰라. 아이들은 자꾸 변하게 마련이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실력이 진짜 자기 실력이지. 안 그런가?""맞습니다."박준호가 동조한다."나는 그렇게 생각해. 일규라는 아이, 절대로 머리 좋은 케이스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 경우가 아닌가 싶어. 진정으로 머리 좋은 아이라면, 그리고 아무리 철없는 나이라도, 제 놈을 낳아 준 어미를 그렇게 본 척 만 척할 수는 없는 거야.""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일규란 녀석 지금 어디 사는지 알아? 김상도가 끼고 살아. 제 어머니한테는 한 달에 한 번 올까 말까래요. 김상도가 어떻게 사주했는지, 제 어머니를 찾기는커녕 이쪽에서 찾아가도 본 척 만 척한다는 거 아니야."잠시 뜸을 두었다가 서승돈이 계속한다."아무래도 별종은 별종인가 봐.""별종이라뇨?""홍 여사가 어느 날 얘길 하더군. 일규를 가졌을 때, 아예 지우기로 결심했다는 거야. 지워 버리기로 말이야.""지운다는 것은….""그래, 낳지 않으려고 작정한 거지. 정말 주변의 만류가 아니었으면…….""잠깐만요?"박준호가 서승돈의 말을 댕강 소리나게 끊고 나서 말한다."왜 지우려고 했을까요?""……글쎄, 아마도 부군이 죽은 다음에 낳을 생각을 하니까 부담스러웠겠지.""그래도 그렇잖습니까. 어차피 생긴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는 것은…… 뭔가……."박준호는 말을 잇지 못한다. 오히려 서승돈이 뜨악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가 입을 연다."뭔가…… 어떻다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박군이 왜 그쪽에 관심이 많은 거지?""아, 아닙니다."박준호가 손사래까지 쳐 가며 머리를 흔든다. 그리고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목이 콱 막히는 것 같다.

2007-02-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⑦박준호는 김만상을 그윽이 건너다 본다. 여전히 국가평의회 의장 비서실장이 어떻고, 하노이 경찰 총수가 어떻고, 자기 과시에 여념이 없다.회의는 자연히 내용이 없다. 자금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터지지 않는 한 아무리 회의를 계속해도 그 얘기가 그 얘기다. 진전 없이 겉돌기만 한다. 알맹이도 없다. 가슴 통증 때문에 연방 가슴을 움켜쥐곤 하는 서승돈 사장을 일단 쉬게 하자고 김만상 관장이 제안한다.모두가 바라던 바다. 각자 방으로 흩어진다."박군, 나 좀 보자구."서승돈이 기합 소리 쩡쩡 울리는 체육관으로 막 들어서는 박준호를 불러세운다."내 방에서 커피 한 잔 하지."그러나 막상 그의 방 응접세트에 앉자마자 커피는 안중에도 없고 "당신은 이해할 것 같아서… 하소연 좀 하려구 그래." 탄식에 가까운 말부터 꺼낸다."안 그래도, 조용히 뵙고 싶었습니다."사실이다. 박준호도 내밀히 할 말이 많다.서승돈은 아주 쉽게 속마음을 내보인다."실은… 내가 지금 딜레마에 빠졌어.""딜레마라니요?"그래도 서승돈은 문제의 대통령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딜레마라고 전제한 내용은 새로울 것도 없는 영림그룹과의 엇나간 관계다."내가 가는 곳마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는거 있지. 내가 어느 은행을 찾아가 어떤 식으로 자금 부탁을 하고, 보증서를 받아 가리라 세세히 꿰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승돈이 마른 침을 삼킨다. 입맛이 쓴 모양이다. 그가 말한다."그래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순식간에 나꿔채 버리는 거야. … 이걸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어?""보나마나 김상도 회장 얘기군요?"박준호가 칼로 자르듯 지목한다. 서승돈 사장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잘 아는구만.""그처럼 비열한 칼을 서슴없이 휘두를 사람은 김상도뿐이니까요.""하긴, 내가 그 밑에서 자란 사람 아냐. 내 행동 반경을 김상도 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거야.""하지만 서 사장님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많은 사람 앞에서 약조했잖습니까. 김상도가 말입니다.""결과적으로 그걸 액면 그대로 믿었던 내가 어리석은 것 같애… 그래서 이렇게 빈 손으로 돌아왔지만… 예정대로라면 미국 아니면 호주에서 투자 자금을 돌려 은행 보증서와 함께 베트남 정부에 제출했어야 했는데….""한국 은행들은 가망성이 없습니까?""한국이야 영림그룹 김 회장이 꽉 잡고 있잖아. 외국 은행도 사람 덫을 놓아 발목을 잡는 터에 하물며 한국 시중 은행이야….""홍 여사님껜 연락하셨습니까?"서승돈 쪽에서 보면 예사로 던진 화두 같지만, 박준호에겐 엄청난 격정이 담긴 질문이다. 홍주리. 막말로 이름만 들먹여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그러나 박준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아니,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해야 옳다.어떻든 서승돈에게나, 박준호에게나 홍주리라는 존재는 급소에 해당된다. 잘못 대처했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 다 그것을 절제하고 자제하고 있다.서승돈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다."당신이 아는지 모르지만, 홍 여사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야.""피해자라뇨?"

2007-02-1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⑥"아, 그래, 맞아!"서승돈 사장이 탄성과 함께 말을 계속한다."태권도장도 아니고 가라데 도장도 아닌 제3의 체육관을 빌려서, 아예 이벤트 행사로 개최하면 좋겠네. 되도록 많은 고위 인사를 초청해서 말이요. 보치 콩 의장도 모시고, 하노이 시장, 경찰청장…."회의는 김만상 관장의 젊은 부인 호아가 준비한 점심을 끝내고 다시 시작된다. 이번에는 서승돈 사장, 김만상 관장, 박준호, 그렇게 3명뿐 아니라 고수길, 윤성식 대리도 배석시킨다.회의 장소는 김만상 관장실이다."이번 만찬 스케줄은 어떻게 됐소?"서 사장이 김 관장에게 묻는다."낼모레 수요일입니다. 장소는 그전대로 소피텔 호텔이구요.""몇 사람 초대했소?""총 서른일곱 명 정도 예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총리실 비서실장이 주빈입니다만 아직 스케줄이 나오지 않아서… 오늘 오후에 연락 주기로 했습니다.""다행히 초청장은 돌리지 않았구만요.""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관례대로 전화 통발이 가장 효과적이니까요.""그러면… 일단 보류합시다. 우리쪽 가닥이 아직 덜 잡히고 있는데, 그쪽을 먼저 가게 할 수는 없지… 참, 윤 대리!""네, 사장님.""통상부에 간 일은 어떻게 됐어?""서류는 가 접수시켰습니다만….""가 접수라니?""정식으로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그가 서류 대장을 들치며 말을 잇는다."통상부는 상공 에너지 자원부 입김이 잘 안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제는….""그래, 상공에너지자원부 장관 한 명 가지고서는 역부족일 수 있어. 적어도 서너 명의 장관들이 한 통속이 되어 일사천리로 추진해 주면 몰라도… 그러기에는 너무 큰 프로젝트야."서승돈이 회의적인 발언을 기다렸다는 듯이 윤성식 대리가 끼어든다."이럴 때, 보치 콩 의장께서 한 말씀해 주시면 만사형통인데 말입니다.""보치 콩 의장이라니?…""베트남 국가 평의회의장 말입니다."대한민국으로 말하면 대통령 직책이다. 아니, 보치 콩 의장은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행정 뿐 아니라 의회까지 장악하고 있는, 이름하여 가장 막강한 군주 중의 군주다. 그런 최고 권력자가 한 말씀 거들어 준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약효가 어디 있겠는가. 너무 당연한 공식이라서 오히려 좌중 분위기가 썰렁해질 지경이다."우리 뜬구름은 그만 잡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묘안을 찾아봅시다. 역시 주어진 난제는 자금 조달계획서하고, 국제은행 보증서가 문제니까."딴은 그렇다. 아무리 김만상이 보치 콩 의장과 의형제를 맺고, 그 유별난 우정을 빌미로 해서 다리 놓아진 프로젝트라 해도, 처음부터 아무 계산 없이 너무 방대한 사업에 손을 댄 것은 사실인 것 같다.어쩌면 동방실업이 갖고 있는 여력으로 감히 꿈도 꿔 보지 못할 정도의 큰 프로젝트를 앞뒤 계산 없이 잔뜩 끌어안고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뭐니뭐니 해도 막힌 자금줄이 근본 원인이지만, 기본 설계를 담당했던 제안자가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사실도 원인일 수 있다.김만상 관장이 그러하다. 베트남 재계, 관계의 큰손으로 널리 알려진 김만상이 지금은 감쪽같이 위장하고 있지만 기실은 마약 중독자로 자기 제어조차 어려워 갈팡질팡하고 있다. 어쩌면 추춧돌이 뿌리째 흔들리는 격이나 진배없는지도 모른다.

2007-02-0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나온 그림 ⑤"그래, 위빠사나를 마스터한 거야?""본래, 마스터는 없습니다.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죠.""역시 운동한 사람은 달라. 박 군은 뭔가 특별한 거 같애. 안 그래요. 김 관장?""암요. 저희들은 이 친구 때문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스트레스가 싹 가셨다니까요. 아주 적절한 일꾼을 보내 주셨습니다. 가라데 도장 아이들, 이제 우리 앞에 무릎 꿇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하지만 가라데도 얕잡아 볼 무술이 아니던데?""아닙니다. 그까짓 가라데, 내가 한창 날릴 때만 해도 놈들을 싸그리 쓸어 버릴 수 있었는데……."김만상이 오른손 주먹을 왼손 바닥으로 맞비비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그래도 모리야마는 안 될거요. 호치민에서 얘기 들었는데, 중국무술 일인자를 단숨에 꺾었다고 했소."서승돈이 말하자 김만상이 고개를 끄덕인다."하긴…… 모리야마는 내가 봐도 별종이오만…… 사실 모리야마가 하노이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서승돈 사장이 다시 박준호를 본다."어때? 자신 있어? 모리야마라는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겠어?""위빠사나로 맞설 뿐입니다.""위빠사나?""위빠사나가 무슨 무술인가? 타이거 박의 트레이트 마크, 태껸으로 한 방에 날려 버려야지."김만상이 지레 흥분을 한다. 서승돈이 김만상을 저지하며,"그건, 장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오. ……참, 박군하고 함께 온 친구들은 어때? 가라데 고단자들하고 승부할 만한 사람들인가?"박준호가 나선다."어제 인사한 조봉삼이란 아이 말입니다.""아, 거구의 청년?""맞습니다. 우선 체격으로 상대를 압도시키는 데다, 실력도 그 정도면 만만찮습니다. 서너 몫은 실히 해낼 거구요.""그래, 박군이 오죽 생각해서 선발했을까만, 워낙 중차대한 사안이라…….""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고마워. 박군만 믿겠네. ……한데, 가라데 도장 응전할 작전들은 세워져 있나?"서승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그러나 가라데 도장의 대응에 관해서는 아직 한마디도 의논한 적이 없다. 한데도 김만상은 벌써 다 끝내기라도 한듯 잽싼 순발력을 보인다."이번엔 우리가 그쪽으로 쳐들어갈 겁니다. 그 도장의 교습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우리가 급습을 한다?"서승돈이 고개를 갸웃한다."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해 왔으니까.""아니, 그보다 그들이 이쪽을 급습하도록 유인하면 어떻소? 준비만 단단히 해 놓으면 도리어 그것이 함정일테고……, 그리고 우리가 그쪽으로 가는 것은 아무래도 도발 행위에 다름 아니잖소? 만약 문제가 생겨도 도의적인 책임은 도발한 쪽이 짊어져야 할 테니까."서승돈이 박준호를 향해 말을 잇는다."박군 생각은 어때?""저도 사장님 생각에 동감입니다만, 다만…… 상대를 제압하는 것보다 우리 태권도가 가라데에 비해 질적으로 뛰어난 무술이란 사실을 널리 인식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까?""그야 그렇지.""그렇다면 우리가 가라데를 제압하는 현장에 누가 있어야 가장 효과적이겠습니까? 교습생들 가지고는 미약하구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대전이 이뤄져야……."

2007-02-07 경인일보

퓰밭위의 식사<28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④아니, 박준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스카이 홍을 유일하게 좌지우지하는 위대한 남자다. 천하의 김상도에게도 어쩌는 수 없이 파면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게 한 남자, 그래서 김상도를 더욱 비참한 패배자로 만들어 버린 남자.그 위대한 승리자가 저처럼 후줄근히 소파에 몸을 묻고 휘 풀려 있다니…….만약 저 모습을 스카이 홍이 본다면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까. 단 돈 몇 억에 파산할지도 모르는 회사 최고 책임자에다,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에 온몸을 던지고도 아직 꼬투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참으로 불운한 남자, 서승돈.빌어먹을, 박준호는 고개를 절절 흔든다. 그래, 스카이 홍을 위해서도, 여기서 좌절해서는 안 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서승돈이나 스카이 홍뿐 아니라 박준호 자신도, 고수길도, 조봉삼도, 똑같이 도매금으로 파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박준호가 김만상을 본다.어젯밤까지 비실비실하던 김만상은 아주 또렷하다. 언제 그런 모습을 보였느냐는 듯 너무나 태연하고 말끔하다. 필로폰은커녕 알코올 옆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노이바이 공항까지 직접 차를 몰고 나가 서 사장을 영접해 온 김만상이 호치민에서 지어 온 감기 몸살 약을 털어 넣는 서승돈에게 "너무 무리 하신 거 아닙니까?"라고 입을 연다."글쎄 말입니다. ……몸살을 앓게 되면 반갑잖은 가슴 통증까지 동반해서 말입니다."서승돈이 예사로 그렇게 대답했지만, 기실 피곤에 지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감기 증세가 아니라 구 전무와 나눈 통화의 후유증이라고 해야 옳다. 물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어른의 어이없는 배신 때문이다. 정말 어이가 없어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러나 더 황당한 것은 그 같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내색할 수 없는 상황이다.김만상도 그렇지만 한창 활기있게 일을 추진 중인 박준호에게는 더욱 더 그런 낌새를 내보여서는 안 된다. 서승돈이 지금 힘을 받는 것은 영림그룹 사장을 지냈다는 경륜이 아니라 이제 막 자리에 오른 대통령의 최 측근이라는 배경 때문이다. 비록 말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무슨 일이 잘 안 풀리고, 경우에 따라 빌빌 꼬인다 치더라도 마지막 보루, 아니 너무 확실하고 든든한 후견인이 있으므로, 결국 최후의 승자는 우리일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그 어려운 파도를 잘도 타 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한데 만약 대통령 각하가 김상도의 뇌물에 눈이 멀어 서승돈이 구구절절 써 보낸 편지마저 묵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순간으로 동방실업도, 거대 프로젝트도 중심을 잃고 허둥대기 시작할 터다. 아니, 그대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서승돈은 혼자 마른 침을 꿀컥 삼키고 나서 애써 태연한 척 박준호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언제나처럼 정중한 말투다."그래, 여독은 풀렸나?""관장님이 여러 모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 처음부터 여독은 없었습니다."박준호가 김만상을 가리키며 말한다."우리 타이거 박은, 피곤할 새가 없어요. 도착하자마자 사원부터 들러 위빠사나 명상법에 몰입할 정도니까……. 솔직히 난 하노이에 7년여 살았지만 위빠사나가 뭔지조차 몰랐으니까요."김만상이 박준호를 한껏 치켜세운다."위빠사나가 뭔가?"서승돈이 박준호에게 묻는다."일종의 정신 수양이지요. 사물을 바로 본다는 뜻인데, 이쪽 불교의 참선 방법이죠. 목적을 달성하려면 먼저 그 지역의 정신 세계부터 습득하라, 저희 할아버님의 좌우명이었습니다."

2007-02-0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③기억해 보라. 어른이 정계를 은퇴하고, 정처 없이 외유길에 올랐을 때, 누가 비밀루트를 동원하여 도피자금을 마련했던가. 이말 저말 할 것 없이 김상도에게 충성한 척 하다가 은밀히 어른을 돕는 결사대에 가담하는 식의 위기일발의 이중 첩자 역할에 그처럼 목숨 걸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기왕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만, 김상도가 하루아침에 목을 잘랐을 때도 서승돈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던 터다. 왜냐하면 김상도의 변덕이 죽 끓듯 했으므로 머지않아 그런 날벼락이 떨어지리라 미리 예상했던 데다 설사 그런 불상사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제 어른이 대통령 자리에 당당히 올라 있는 마당에 상처를 입으면 얼마나 입겠는가 예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니, 또 있었다. 비록 영림그룹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동안 비정상적이고 반국가적인 김상도의 경영정보를 낱낱이 어른이 속한 조직에 보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김상도가 찌른 칼의 깊이만큼 김상도 역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서승돈의 신분 또한 어른에게 충성한 만큼의 높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터다.서승돈은 이럴수록 더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뭐랄까. 본능적인 방어태세라고나 할까. 서승돈이 전화 수화기를 놓으려는 구 전무에게 하소연하듯 당부해마지 않는다."구 전무.""네, 사장님.""당분간 이 사실은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좋겠소. 괜히 청와대 분위기가 어쩌고 저쩌고… 외부에 알려지면 동요될 공산이 크니 말이오.""알겠습니다.""특히, 사이공 지사 쪽에는 더 함구해 주시오.""그렇게 하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은 정리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억울하고 참담하고, 황당하고, 처참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그것도 폭풍을 동반한 뇌성벽력이 아니라, 청명한 하늘에 예고도 없이 내리꽂히는 날벼락이다. 그래, 어른이 절대로 그럴 수 없어. 어른이 그처럼 교활한 졸장부일 리 만무하다구. 구 전무가 뭔가 착각한 거야. 사촌동생의 말만 듣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어. 비서실 말단에 있는 참새 같은 놈이 어찌 하늘 높은 봉황의 깊은 뜻을 감지해 낼 수 있단 말인가.서승돈은 혼자 콩치고 팥치고를 다한다. 고개를 절절 흔들고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소리나게 치기도 한다. 그래도 솟구치는 억울함과 분통함이 가시지 않는다. 막말로 구 전무가 뭘 잘못 알고 허투루 판단했다 할지라도, 일단 발등의 불은 동방실업의 존패 문제다. 대통령이 서승돈의 편지를 밀어버렸건, 아직 읽지 못한 상태건 간에 우선 급한 것은 자금 마련이다. 구 전무 말대로 당장 17억을 구해 와야 동방실업이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설 수가 있다.기업에 있어서 자금은 혈액이나 진배없다. 제 시간에 수혈이 안 되면 호흡이 막히듯 자금도 제때에 투입되지 않으면 고사하고 만다. 그러니까 자금과 시기를 절체절명의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예컨대 단돈 1억이 모자라 부도가 날 판인데, 설사 수백억의 돈인들 한 달 뒤에 들어온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서승돈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전화를 걸기 전보다 안색이 더 좋지 않다. 정말 기가 많이 빠져 있다. 피부도 꺼칠하고 입술까지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허옇게 부르터 있다.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성냥을 그어 대면 검불처럼 푸스스 일어났다가 얼핏 사그라질 것 같다.기실 기력 없는 남자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영림에서 반도체와 가전제품을 한 손에 주물럭거리며 1만여 직원들을 진두 지휘했던 거물, 서승돈이 저처럼 기력 빠진 검불로 앉아 있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2007-02-0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8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②"사장님 더 이상의 송금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달 말에는 돌아오는 어음도 막아야 합니다.""그게 얼마요?""17억입니다.""17억!""사채시장 할인어음 결제 13억원, 원자재 대금 3억, 그리고….""알았소. 그건 내가 방도를 강구해서 다시 연락할 테니까.""이 달 말이 고빕니다. 앞으로 보름 남았습니다. …사장님은 언제 귀국 하실건지….""이쪽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모든 게 어렵소. 하지만… 힘을 냅시다. 최선을 다해서 한 달만 더 버텨 봅시다. 아니, 분명히 각하에게까지 올라가지 못했을 지도 몰라요. 대통령께서 내 편지를 보시게 되면 상황은 급전될거요. 그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대통령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서승돈의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하다.그러나 상대방은 다르다. 그렇게 서승돈의 기를 맥없이 끊어버릴 수가 없다."사장님, 제가 알기로는… 전번에도 보고 드렸습니다만, 비서실 말단에 제 사촌이 근무하고 있는데요… 사촌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각하께서 사장님의 편지를 다 읽으시고, 아무 말씀 없이 밀어 버렸다는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사장님, 그 쪽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상책인 듯 합니다.""아니, 구 전무!""네, 사장님.""무슨 근거로 그런 막말을 하는 거요!""민망합니다만, 제 사촌이 말단이긴 해도 각하 측근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그 쪽 동태는 아주 민감합니다. 사촌의 귀띔에 의하면, 영림그룹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접견하고 돌아간 뒤부터 갑자기 청와대 기류가 달라졌다는 겁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거액의 통치자금이 기부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서승돈은 그 대목에서 헉, 소리를 내고 만다. 정말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 각하가 그렇게 나올 수는 없지. 우리가 각하에게 얼마나 충성했는데, 아니, 그 어른을 대통령으로 올려 세우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 했는데, 오로지 그분만 대통령에 오를 수 있다면, 소나기 그치고 무지개 서듯 갑자기 세상이 환하게 바뀌리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한데, 까짓 김상도의 뇌물 몇 푼에 대통령의 기개가 그리 쉽게 변질되어 버리다니, 과연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생각해 보라. 어른이 정적(政敵)에 의해 낭떠러지로 떠 밀렸을 때, 김상도가 어느 편에 섰던가. 항상 권력을 쥔 강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던 장본인이 바로 김상도 아니든가. 낭떠러지로 밀어뜨리고, 또 밀어뜨려도 기어코 다시 기어오르곤 하는 불굴의 의지 앞에 기가 찬 군부 권력자들이 어른을 반공법 위반으로 몰아 아예 감옥에 처넣어 버렸을 때도 어깨 띠 매고, 규탄대회에 나와 소리 소리 질렀던 경제계 대표 인물이 누군가. 김상도가 그 규탄대회의 뒷 돈을 대고, 영림그룹 직원들을 동원하고, 언론에 뭉텅이 현찰을 뿌려 어른이 결국 북한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빨갱이였음을 대서특필하도록 사주하지 않았던가. 물론 권력자 앞잡이 노릇은 김상도의 트레이드 마크이므로, 새삼 놀라워 할 일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어른은 그런 야비한 음모에 의해 굴지의 재벌로 키워진 영림그룹부터 분해시켜야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웬걸 상생정치니, 국민 대화합이니 하며 우물우물 거리더니, 종내에는 김상도의 뇌물까지 받아 챙기고 나서 당신을 대통령으로 모시기 위해 목숨 걸고 전력투구한 추종자의 간곡한 청원을 밟아 뭉개다니, 대명천지에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으며, 이처럼 억울한 배신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2007-02-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7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①서승돈 동방실업 사장이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돌아온 것은 점심 무렵이다.그는 서울 김포를 출국할 때 네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다. 시드니에서 모두 귀국시켰다는 것이다. 회사를 대표하는 사장인데도 수행비서 한 명 없이 혼자 가방 하나 달랑들고 노이바이 공항에 내린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서울에서 헤어질 때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다.그러니까 꼭 보름만이다. 당초 서승돈 사장 스케줄대로라면 그동안 시드니로, 휴스턴으로, 싱가포르로, 콸라룸푸르로, 홍콩으로 3대 주를 휘젓고 다녔을 것이다.너무 빡빡한 스케줄이다.그래도 그렇지, 영림그룹에 적을 두었을 때는 더 부산스럽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사람 아니던가. 그까짓 해외 출장 몇 주일 때문에 저처럼 시든 푸성귀꼴이 되다니…….아무래도 체력 탓이 아닐 터다. 뭔가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고 있다는 증거다. 이른바 스트레스다. 그것이 부담으로 쌓이고 쌓여 피곤이 가중되었을 터다.정말 기가 많이 빠져 있다. 피부도 꺼칠하고, 입술까지 부르터 있다.서승돈은 동방실업 베트남 지사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서울 본사로 전화부터 걸어 댄다."이것 봐. 나 사장인데, 전무 좀 바꿔."바짝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며, 거칠게 몰아 댄다."전화 바꾸는데, 무슨 시간이 많이 걸려!""네, 구 전뭅니다.""그래요. 여긴 하노이인데 말이요.""아, 사장님 하노이에 도착 하셨군요.""소식 궁금해서 전화했소.""영림그룹 말입니까?""영림도 그렇고, 청와대도 그렇고.""청와대에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는데도, 그냥 기다리라는 똑같은 메시지만 반복할 뿐입니다."바짝 타들어가는 입안에 억지로 침을 모은 뒤 서승돈이 말한다."영림은 어떻소?""영림 역시 김상도 회장이 계속 면회를 거절하는 바람에…….""거긴 누가 갔었소?""황 상무를 보냈습니다만.""그래, 무슨 명목으로 면회를 거절했다는 거요?""이유가 없었답니다.""담당 중역은 가만 있었대요?""회장 지시로 크레임을 걸었기 때문에 회장이 직접 풀어 주지 않으면 지불이 어렵다는 겁니다.""영림에서 수금할 돈이 얼마죠?""지난달 납품한 것 빼고, 19억입니다.""지난달 것도 크레임을 건거요?""그건 박스도 뜯지 않고 반품되어 돌아왔습니다.""빌어먹을!""황 상무 얘기는…… 공정 관리 위원회에 제소를 하자고 합니다만.""제소?""네, 사장님.""안 되면 그렇게 해야죠. 아니, 아예 정식 고발을 해 버리든지."서승돈이 마른 입술을 물어뜯고 나서 계속한다."그래, 은행에서도, 영림에서도 한 푼 못 건졌단 말이요?""그렇습니다. 사장님.""그럼 이 달치 급료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단 얘기 아뇨?""발등의 불은 그럭저럭 껐습니다. 사채 시장에서 급전을 땡겨서…… 참, 이제 막 5만 달러 송금했습니다. 하노이 윤 대리는 10만 달러를 요청했지만…….""어쨌든 수고 많았소."

2007-02-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7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18"궁극적으로 우리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려면 내부 문제부터 탄탄히 정비해 놔야 하지 않소?""그야…." "말해 주시오. 만약 약점이 있다면 그걸 알고 있는 거 하고, 모르고 있는 건 하늘과 땅 차이요."그래도 윤성식 대리는 입을 열지 못한다. 계속 머뭇거리기만 한다."왜, 말하기가 난처하시오?""실은 그렇습니다. 관장님의 특별한 부탁도 있고…""과실을 덮어 준다는 건 본인을 위해서도 온당치 못한 처사요.""…박 선생님만… 혼자 알고 계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면….""좋소, 약속하겠소.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소.""관장님은… 마약 중독잡니다.""마약?""안 그래도 월남 참전 때 입은 부상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또 교통사고를 당해…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통증을 잊기 위해 조금씩 아편을 사용하다가, 그만 필로폰에 손을 대신 것 같습니다.""그러니까, 어제 오후도….""그렇습니다. 그때가 막 깨어날 무렵입니다.""필로폰 주사를 도장에서 맞는단 말이요?""그야… 마약 중독자들 장소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만, 도장에서 그러는 건 드문 사례구요. …어제 경우는 유 사장님과 박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대충은 이삼 일씩 집을 비울 때가 많은데, 그때….""부인도 그 일을 알고 있소?""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알구 있다구?"놀라 마지않는 박준호의 반문에 외려 윤성식이 뜨악한 표정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는 식이다."얼핏 보기엔 그 부인과는 최근에 만난 것 같아서…."박준호가 말끝을 흐린다."제가 여기 왔을 때도 부인은 관장님 곁에 있었는걸요.""그래요?""베트남 여자들은 생각보다 속이 깊습니다.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고… 그리고 부지런하고…."윤성식이 베트남 여자 예찬론과 더불어 호아 투이 뚜엔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다."베트남 여자 중에서도 관장님 부인은 특별히 더 뛰어난 편입니다. 얼핏 봐도 미인 아닙니까? 얼굴 윤곽도 아름답지만, 몸매는 미스 베트남은 저리 가라 식으로 쪽 빠졌잖습니까?"물론 박준호도 아직 처녀 티를 벗지 않고 있는 청초한 호아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으므로 윤성식 대리의 극찬에 굳이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육감적인 아름다움이나 속 깊은 마음씨에 대해 왈가왈부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한가하기는커녕 통킹만 석유 개발사업이란 너무 엄청난 프로젝트에 여하히 접근하느냐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 연장선상으로 전개되고 있다."잠깐!"박준호가 윤성식의 말을 자른 다음 계속한다."서승돈 사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요? 김 관장 필로폰 말이요.""글쎄요."윤성식 대리가 한참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연다."대강 눈치를 챘는지 몰라도 상세한 건 모르실 겁니다. 지금까지 그런 내용에 대해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요."

2007-01-3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7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17)"투자도 계속하구요?""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해야지.""아니, 형님!"고수길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다.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이 그가 계속한다."지금까지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쓸어 박은 줄 아십니까? 아무 흔적도 없이 그냥 녹아 버린 돈이 무려 7억입니다. 지난번 방배동 알까기에서 수금한 전액이 이곳에…….""알았어."박준호가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한다."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끝내는 게 좋겠어."박준호는 고수길과 헤어지자마자 동방실업 사무실로 직행한다. 윤성식 대리가 벌써 업무를 시작하고 있다. 업무 보조원인 베트남 처녀 한 명과 지사장 겸임의 윤 대리가 동방실업 베트남 지사 직원의 전부다.박준호는 그곳에서 메트로폴 호텔로 전화를 건다. 걸프은행 컨설턴트 무하마드 씨다. 물론 생면부지 인물이다. 오후 3시 면담 약속을 정하고 윤성식과 마주 앉는다."일본 가라데 체육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소만.""체육관 사업은 저보다 곽칠복 사범이 더 자세히……." "글쎄, 그건 알지만, 난 윤 대리 얘길 먼저 듣고 싶어서 말이오. 우리보다 교습생이 3배나 더 많다면서?""그렇습니다. 여기 태권도 학생이 거지반 그쪽으로 옮겨 갔으니까요.""그쪽하고 공식적인 무술을 겨룬 적이 있었소?""겨뤘다기보다, 일본인 가라데 고단자하고, 우리 곽 사범하고 싸운적이 있었는데……."윤 대리가 괜히 말을 꺼냈다는 식으로 머리를 긁으며 당혹스러워 한다."일본 가라데 고단자?""네, 그렇게 들었습니다.""그 고단자 이름이 뭔지 아쇼?""모리야마라고 하던데요?""모리야마?"박준호가 모리야마를 한 번 더 되씹고 나서 묻는다."그래, 모리야마하고 싸운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됐소?""곽 사범이 한방에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전 직접 보지 못하고 아이들 얘기만 들었는데…… 대결은 일 분도 채 안 걸렸다는데요.""그래서, 교습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구만.""그것도 원인이지만, 더 직접적인 것은 가라데 체육관 쪽 운영 방식이 우리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뭐가 어떻게 달라?""김만상 관장님 말씀 들으면 사비를 들여 순전히 맨손으로 세운 곳이 태권도장인데, 가라데는 처음부터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 조직적으로 세워졌다는 겁니다. 지금도 큰 손이 자금 파이프를 무한정 들이대고 있습니다.""배후의 큰 손?""통산성이라는 설도 있고, 일본 대사관이란 설도 있고…… 어제도 보셨다시피 가라데 체육관이 굴리는 자동차만 다섯 대가 넘습니다. 어제 그 지프차도 베트남 가라데 유단자가 끌고 다니는 거구요. ……더구나 교습비 말입니다. 우리와 비교하면 게임이 안 됩니다. 꼭 우리의 절반입니다. 그런 푼돈 받아 가지고서는 운영을 할 수 없는데도, 자동차도 굴리고, 단합대회도 하고, 선물도 주고…….""무슨 얘긴지 알 것 같소."박준호가 한참 뜸을 두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김만상 관장님 말이오. 뭔가 이상하던데…… 곽 사범도 얼버무리고…….""그건, 저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요.""윤 대리.""네, 박 선생님."

2007-01-3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7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16"그렇다면 어제…….""글쎄…… 가라데 체육관이 다리를 어떻게 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복안이 있으니까.""이름이 송꺼우 씨라고 했죠?""영국에서 한때 이름 날렸다니까. 케임브리지 대학 대표 수상스키 선수였어.""수상스키요? ……지금도 계속 합니까?""글쎄…… 수상스키 타는 건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서 사장 특별 엄명이라서, 이번 주말쯤 만찬장으로 끌어낼 생각이야."조깅을 끝낸 박준호는 샤워실에서 나오자마자 조봉삼과 한 방을 쓰는 고수길을 따로 불러내어 마주 앉는다. 소위 말하는 실무회의다. 아니, '구길사' 최고 운영회의다. 고수길과 함께 '구길사'를 창업하고 나서부터 매일 아침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점검했던 회의다.물론 회의 참석자는 박준호와 고수길이 전부다. 설사 조봉삼이 조직의 3위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함부로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는다. 그만큼 기밀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형님, 우선 김만상 관장 근황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고수길이 말한다."그건, 나도 동감이야." "아무래도 정상 같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로서는…….""그래, 일단 내용을 파악해 봐야지.""만약 정상이 아니라면, 작전 방향을 바꾸든지, ……포기하든지…….""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라고 했잖아."박준호가 쐐기를 박는다."하지만, 형님도 오늘 발간된 하노이 타임스를 읽으시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하노이 타임스?"박준호가 반문하자 고수길이 거침없이 하노이에서 발간된 영문판 신문을 꺼내 놓는다. 벌써 붉은 줄이 북북 그어져 있다. 이번 달 초에 베트남 외무상이 미국을 방문하고, 그 다음달 초에 미 국무장관이 베트남을 순방하기로 합의한 기사다.박준호가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고수길이 입을 연다."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벌써 물밑작업이 끝났다는 얘깁니다. 미국이 이처럼 호의적으로 나온 것은 통킹만 가스개발을 손에 넣었다는 신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잠자코 듣고만 있던 박준호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한다."이 신문 기사 해석도 마찬가지야. 너무 성급하다구.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일본을 봐. 일본 대장성 장관이 하노이를 방문하고, 베트남 외무장관이 동경을 지난주에 다녀왔잖아. 이제 방금 호안키엠 호수에서 그 주인공 송꺼우 씨를 만났는데 말이야.""송꺼우 씨라뇨?"고수길이 눈이 동그래져 묻는다."국가 평의회 의장 비서실장이야. 마침 조깅하러 호수에 나왔더라고.""형님이랑 인사를 나눴습니까?""인사를 나눈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대충 분위기로 봐서 베트남 정부의 태도가 백팔십 도로 바뀐 것 같더라, 그 말이야. 폐쇄적인 것에서 개방적인 것으로 활짝 문을 열었다고나 할까. 오늘 영자신문 기사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그 말이야. 내 견해는.""그래서, 형님은 이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건가요?"고수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고개까지 치켜든다."당연하지."

2007-01-2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7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⑮우선 규모가 크고 시설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규모에 비해 학생반, 일반 특수반 모두 합해 70명이라면 다소 적은 숫자이긴 해도 내용면에서는 그게 아니다.김만상 관장이 직접 지도하는 특수반 단원 면면이 그렇다. 관장실 정면 벽면과 체육관 입구에 장식된 사진들이 그러하듯이 그중에는 하노이 출신 현역 국회의원도 있고 육군 장성급도 있으며, 베트남에서 최고 발행부수를 자랑하는'콘안(公安)'신문의 편집국장도 있다.콘안 신문은 베트남 경찰 당국이 발행하는 일간지이므로 콘안의 편집국장은 하노이 경찰 총수를 겸하게 되어 있다.어쨌거나 하노이 경찰 총수에다, 베트남 육군 장성에다, 하노이 국회의원까지 매일 출근하듯 출입시키고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실적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김만상의 활동 영역이 넓다는 얘기다.오늘 새벽만 해도 그러하다. 박준호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서 일어나 상큼한 기분으로 도장에 내려왔는데, 그의 아내 호아가 벌써 기다리고 있다."짜오안."그녀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방긋방긋 미소를 머금으며, 아주 상냥하게 인사를 한다."안녕 하십니까. 아주 좋은 아침입니다."박준호가 몇 마디 익힌 베트남 말로 답례를 하는데,"아침 운동은 조깅이 제일이야. 특히 하노이에선 호안키엠 호반이 아름답거든."어디서 불쑥 나타났는지 김만상이 말한다. 어제 저녁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이다. 전혀 딴판의 얼굴이다. 그는 조깅 차림이다."자, 한 바퀴 뛸까."김만상이 앞섰지만, 계속 같은 속도를 내지 못한다.숨이 차는 모양이다. 박준호가 오히려 속도를 줄여야 할 지경이다. 정말 호수는 아름답다. 그곳 역시 꽃의 전시장 같다. 호숫가에 잔뜩 심어진 복숭아 나무가 그러하고, 계절에 피는 꽃을 가득 실은 수많은 자전거 행렬이 그러하다. 그러나 박준호는 주변 풍경을 충분히 즐길 틈이 없다. 간헐적으로 마주치는 조깅 객들 때문이다. 열 명 중 다섯 명은 김만상과 가까운 사람들이다.큰 소리로 인사하기 바쁘다. 더러는 악수를 하느라 달리기를 멈출 때도 있다. 거지반 다 거물급이다. 약 반 시간 가량의 조깅 중에 만난 사람의 내력만 대충 살펴도 하노이 부시장, 체육부 차관, 하노이 공과 대학장, 하노이 국립 TV 보도국장 등 끝이 없다. 그래도 김만상이 그중 비중을 둔 사람이 송꺼우 씨다."왼쪽 중년 남자 있지? 저 사람이 베트남 최고 실력자 비서실장이야.""국가 평의회 의장?""맞아. 우리나라 대통령 하고 같은 레벨이지. 저 친구는 청와대 비서실장 격이고,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이요. 키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아주 샤프해.""그렇게 보이네요.""우리 프로젝트의 키를 쥐고 있는 몇 사람 중의 하나라구.""관장님하곤 어떻습니까!""……아직은…… 통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 친구라서…… 그래도 한국은 두 번씩이나 다녀왔어.""관장님이 수행했습니까?""전혀…… 우리하곤 관계없이 그것도 일본 방문 끝에 들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친한파가 아니라 친일 쪽인지도 모르지."

2007-01-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7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⑭"어쭈, 고가 니도 형님 흉내낼줄 아네. …그래, 니는 사람이고, 내는 짐승이다. 아니 귀공자다!""귀공자?"조봉삼의 기억의 창이 열리고 합정동 러브하우스와 형사들이 빠르게 재생된다. 아주 불쾌하고 두려운 기억이다. 그가 고개를 절절 흔들고 나서 "치아라 그마. 씹헐 노무 새끼 덜…." 한바탕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나긋나긋하게 말을 잇는다."고가야, 니는 우찌 생각허노?""뭘?""김 관장 말이다. 그 양반 꼭 아편쟁이 안 같드나? 비실비실… 부부 사이라캐도 인자 빠구리도 몬 허는 거 아니가? 여자는 물이 오를대로 올라서 매일매일 캄온 마이다링인데, 날이면 날마다 오 노, 오 노, 허고 헌 날 소파에 자빠져 있는 거 아니가?" "어휴, 저 저질!""그래서 그런지 보기에도 부부가 아니라 부녀 사이 안 같더나? 모르긴 해도 한국에 늙은 본처가 있실끼다, 본처.""그래서?""내 말은 진짜 법적인 싸모님은 아닐끼다 그기라 그마."고수길이 조봉삼의 눈앞까지 자신의 눈을 들이대며 "그래서!" 똑같이 반문한다."야가, 와 이러노?""그래서 니가 어떻게 한 번 해 보겠다 그거야?""…내 말은, 그 여자가 너무 야허게 나온다 그긴데… 안 그렀나? 솔직히 우리 행님한테 그렇게 야허게 행동허먼 안 되는 기다.""야하긴 뭐가 야해?""니 못 봤나? 그 여자 행님한테 눈웃음 치는 거.""그건… 그냥 인사야, 반갑다는 인사.""인사는 머 말라진기 인사고? 손대면 톡 터질 것 같은 엉덩이 삐틀빼틀 돌리면서 윙크 살짝 허면서… 자지라지게 '짜오안' 허는 폼새, 그기 뭐냐카모, 니 나 한 번 묵어 주라 그기라 그마." "나 한 번 묵어 주라?""하모, 니도 그리 생각헌기제? 하모, 척 보모 삼천 리 아니가? 그 여자 우리 행님한테 첫 눈에 반한기라. 그래서 눈으로 말 허는기라, 우리 빠구리 한 번치자….""에잇 자식!"고수길이 조봉삼의 명치에 펀치를 넣는다.그리고 주저앉는 그에게 질타한다. "넌 생각하는 게 맨날 그 모양이니까 형님한테 욕 먹고, 형사들한테 쫓기는 거야, 임마!"그래도 조봉삼은 안하무인이다. 전혀 기별이 안간다. 더 흥을 낸다."김 관장 부인처럼 섹시허게 쪽 빠진 여자…."조봉삼이 두 손으로 코카콜라 병 모양을 그리며 쪼옥이라는 어휘를 한 번 더 강조해 마지않는다.그가 말을 잇는다."섹시허게 쪼옥 빠진 여자를 보고도 좆이 요동치 않으모, 그것도 남자 축에 못 드는기라.""갈수록 태산이네…."고수길이 갑자기 두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가 주술 외듯 중얼거린다."위빠사나.""위빠사나.""집착과 욕망을 소멸하소서, 위빠사나!""위빠사나 좋아허네, 에라이 자석, 좆이나 뽈아라!"꼭 김만상의 부인이 아니라도 빅토리 태권도장은 여러 모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2007-01-2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7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⑬어쨌거나, 빅토리 태권도장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다. 2층이다. 도합 100여평이나 될까, 아래층은 더 넓다. 후원이었던 곳을 가건물로 달아 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대충 눈가늠으로도 150평이 넘어 보인다.박준호 일행의 숙소는 2층이다. 호텔처럼 방이 여럿이다. 호텔같이 아늑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불편하거나 옹색하거나 쾨쾨하지 않다. 그런 방 두 개를 터서 동방전자 베트남 지사 사무실로 쓰고 있다. 동방실업 사무실 옆이 식당이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데도 잘 정돈되어 있고, 청결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인상적인 곳은 김만상 관장의 살림집이다. 2층 베란다쪽 거실이 온통 화분으로 꽉 차 있다. 흡사 식물원 분위기다. 여러 색깔로 조화를 이룬 패랭이꽃, 주머니에 또 주머니가 매달린 것 같은 금낭화, 황금인 양 샛노란 금붓꽃, 우리나라 구절초 모양을 닮은 희디흰 꽃더미……. 어디 그뿐인가. 이름 모를 열대 넝쿨이 길게 뻗어 있고, 줄기줄기마다 피빛인 양 새빨간 꽃이 매달린 모습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우리 집 사람 취미가 꽃 가꾸기라서……."김만상이 막상 자랑하는 것은 집 안의 꽃 장식이 아니라, 그의 아내다. 베트남 여자 특유의 가냘픈 몸매에 미모 또한 따온 반달 격이다. 곽칠복은 그녀를 관장님 사모님으로 부르지만 김만상보다 무려 열다섯이나 적은 스물 한 살이니, 사모님이라기 보다 혼기 앞둔 아릿다운 처녀 모습이다. 이름이 호아 투이 뚜엔이다. 굳이 뜻을 달자면 수선화란 뜻이다. 호아는 꽃이고 투이 뚜엔은 물가에 피는 식물이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모습과 수선화의 이미지가 너무 흡사하다. 나긋나긋하고 청초하고 깔끔하고 향내나는 꽃…… 더구나 수선화의 유래가 나르시스 아니던가. 미청년 나르시스가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해 자살한 곳에서 불쑥 피어난 꽃이 바로 수선화아니던가.호아 투이 뚜엔은 베트남에서 미인이 그 중 많이 태어나기로 유명한 중부 출신이다. 더 정확히 베트남 민족의 영웅 후치밍의 고향인 '응애안'이다. 미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미인이 소수 민족인 무웅족인데 김만상의 젊은 부인이 바로 무웅 족속의 표본이라는 것이다.그녀는 춘사월 수선화처럼 방긋방긋 잘 웃는다. 박준호에게 특히 더 그러하다. 마주치기만 해도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펴며 "짜오안"이라고 파랑새 울듯 낭랑하게 인사를 하곤 한다."행님만 사람이가? 와 우리한테는 눈길 한 번 안주는 기가?"조봉삼의 심통이 벌통이 되기 시작한다."야, 관장님 사모님이야. 사모님이 왜 우리한테 눈길을 주냐?"보다못한 고수길이 한마디한다."사모님은 머 여자 아녀?""어어, 너 형님 말씀 벌써 까먹었어? 여자를 여자로 보지 말고 사람으로 보라고 몇 번 말했어?""치아라 그마. 여자는 다 여잔기다. 여자가 우찌 남자 되노?""여자를 남자로 보라는 것이 아니고, 여자를 너처럼 섹스 상대로 보지마라 그 뜻이라구.""고가 니는 저 여자가 그냥 싸모님으로만 보이나?""그럼, 임마.""야이 자석아. 양심 속이지 말거라."서류와 씨름하는 일이 지겨운지, 고수길은 숫제 열던 자료를 덮어 버리고 연극 배우 연기하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오는 법, 그러나 그것을 눌러 이기느냐 못이기느냐에 따라 사람도 되고 짐승도 되는 법."

2007-01-24 경인일보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