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27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⑫"네, 관장님.""손님들 저녁 말이야. 모시고 나가서 하지 그래. 캐피털 가든 호텔 명물 있잖아. 미엔쿠아. 그거 대접해."다시 박준호 일행을 향해 그가 계속한다."미엔쿠아가 뭔지 아나? 게살구이 요리야. 게살을 듬뿍 모아다 메추리알을 으깨어 같이 구워 나오는데…….""아닙니다, 관장님."곽칠범 사범이 말을 잇는다."사모님이 식사를 준비해 두셨답니다.""그래? 그럼 그렇게 해."박준호는 생각한다. 한마디로 어리벙벙하다.저처럼 하느작거리는 남자의 손에 어떻게 야심만만한 그 프로젝트 열쇠가 쥐어져 있단 말인가.그래서 한 번 더 김만상의 자태를 살핀다. 여전히 몽롱하다. 눈빛도 흩어지고, 목소리도 찢어지고 있다. 허나 그는 분명 서승돈이 하늘처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래서 흡사 생명줄인 양 단단히 붙잡고 있는 남자다."김 관장 만나면 정중하게 대해 줘. 만약, 그 양반이 없었다면 우리 프로젝트도 없었을 테니까. 그는 단순한 무술인이 아니야. 그 사람 하는 일이 상식을 벗어날 때도 있지만, 지나 놓고 보면 그게 선견지명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단 말이야."딴은 그렇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 그러니까 김만상 관장이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 그가 했던 행동은 분명 상식을 벗어난, 일종의 범죄 행위일 수밖에 없다.그는 당시 소대장이었던 박상길의 명령을 어기고 생포했던 베트콩에게 먹을 것과 담배를 주었고, 상처 난 곳을 치료했으며, 띄엄띄엄 서투른 베트남말로, 왜 싸워야 하느냐? 왜 죽이고 죽어야 하느냐 따위 부적절한 대화까지 시도했던 터다.그래도 박상길은 김만상을 꾸짖고,"이 자는 내일 처형당할 자야. 괜히 인간적으로 감싸고 하지 마. 알았어?"하나 그게 화근이다. 김만상이 얼마나 퍼마셨는지 한밤중에 베트콩 포로를 풀어줘 버린 것이다. 아무리 취중에 한 일이지만, 상부에서 안다면 그야말로 총살감이다.박상길은 소대장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동지 입장에서 더욱 고민한다.그리고 단안을 내린다. 상부로 보내야 할 보고서를 갈가리 찢어, 이제 막 터 오는 새벽 미명에 날려 버린다. 직무유기다.그리고 20년이 지난다. 김만상이 20년 만에 베트남을 다시 찾았을 때, 사회주의 공화제 체제에서 상공 에너지 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권력자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놀랍게도 그가 바로 치열했던 그날 새벽 밧줄을 풀어 주어 구사일생한 장본인이다.오늘의 베트남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최고의 실력자 보치 콩이다.그 보치 콩과 어깨동무하고 함께 찍은 김만상 사진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관장실 정면에 걸려 있다. 두 사람 다 활짝 웃고 있다. 술이 거나해진 표정이다.사진은 그뿐 아니다. 상공 에너지 장관 명패가 놓인 집무용 책상에 김만상이 의젓하게 앉고, 그 뒤에 우뚝 선 보치 콩의 모습도 있고, 오늘의 베트남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라고 자부하는 몇몇 장관들과 하노이 시장, 경찰 총수 등과 기념 촬영한 단체 사진도 있다.물론 보치 콩의 배려 때문이겠지만 사진 속의 김만상은 항상 중심에 서 있거나 앉아 있다. 그가 베트남 권력 핵심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진들이다.본국에서는 이름 석 자도 알려지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중소기업 수준의 동방실업이 베트남 통킹 만 석유 탐사권과 국립 전자 종합 대단위 공장 건설 정보를 한꺼번에 쥐게 된 연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2007-01-2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7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⑪"나는 집착과 욕망을 거부한다.""나는 집착과 욕망을 거부한다.""심수심법!""심수심법!""위빠사나!""위빠사나!""그만…. 지금부터 마음속으로 그것을 복창한다. 마음속으로. 그것이 명상이다. 심호흡과 함께 위빠사나를 계속 복창한다. 앉아서도, 누워서도, 걸으면서도, 달리면서도 위빠사나, 위빠사나를 복창한다. 나는 집착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자신이 있다, 나는 이길 수 있다. 나를 이길 수 있다."박준호가 사원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불공 세트를 구입한다. 물론 조봉삼과 고수길도 똑같이 한다. 아니, 조봉삼, 고수길뿐 아니다. 잠자코 옆에서 구경만 하던 곽칠복도 윤성식 대리도 핸들을 잡았던 탄차우도 아무 말 없이 박준호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한다.김만상이 관장으로 있는 빅토리 태권도장은 우엔추오 사원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호안키엠 호수 북쪽의 한카이 가(街)다. '한'은 상품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쟁반 따위 그릇을 집중적으로 팔았던 상가 골목이다.물론 하노이가 아닌 그 이전 탄롱시절 때 만들어진 거리 이름일 터다. 빅토리 태권도장을 기점으로 오른쪽은 한바크 거리고, 길 건너는 한차오 거리다. 바크는 은(銀)이고, 차오는 수프, 즉 죽을 뜻한다. 은을 팔았던 거리, 죽 집이 많았던 거리, 그런 식이다.박준호 일행이 빅토리 태권도 도장 김만상 관장을 만난 것은 아직도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간이다. 그는 관장실 소파에 길게 누워 있다. 처음에는 술에 대취해 쓰러져 자는 사람 같았지만, 또릿또릿한 말투나 샛노란 얼굴이 술 취한 사람은 아니다.한데도 곽칠복 사범의 말대로 정상 상태가 아니다. 버얼겋게 서 있는 눈동자의 핏발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마포 도장에서 작은아버지와 술상 받으며 만났던 때보다 얼핏 대여섯 살은 더 들어 보인다."미안해. 나가지 못해서."목소리에도 힘이 없다."천만의 말씀입니다… 한데, 어디 편찮으십니까?""아니야, …괜찮아….""자주, 문안 편지도 못드리고… 죄송합니다."박준호가 정말 민망한 표정으로 말한다."여러 가지로 경황이 없었습니다.""그래, 나도 알아. …그건 그렇고, 자네가 군인 무술 대회에서 챔피언 먹었다며?"그가 똑바로 앉았다가 다시 스르르 옆으로 무너지며 말을 잇는다."그래, 운동을 쉬지 않고 계속한 의지에 탐복했네. 자네 숙부님이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뭐, …그거야.""난, 자네가 자랑스러워. …어쨌든 잘 왔어. 조선 태껸 최고수가 하노이에 왔으니, 나도 이제 발 뻗고 자게 생겼어."김만상은 처음처럼 다시 소파에 길게 누워 버린다. 그러면서도 입을 쉬지 않는다."정말 절묘하게 시기를 맞췄어. 아주 제때에 왔다구… 아예 놈들을 박살내 주게.""놈들이라뇨?"김만상이 핏발선 눈으로 박준호를 본다. 그리고 이를 앙다문다. 그가 말한다."벌써 공항에서부터 놈들한테 당했다면서? 놈들은 비겁하고 비열해. 내가 펄펄 날 때 같았으면 아예 싹 들어 내다 버리는 건데… 이봐 곽 사범."

2007-01-2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7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⑩"네, 행님""알긴 뭘 알아?""압니다. 행님.""좋아, 너 베트남에 왜 왔어? 관광하러 온 거야?""아임니더.""여자가 싼 나라니까 여자 재미 보러 왔어?""아니라 카이.""술 마시고 노래하러 왔어?""……행님, 아니라 안 캅니꺼.""일류 호텔 풀장에서 몸 자랑하고 싶어 왔어?""아이고 죽겠네, 행님─."박준호가 더 준엄한 목소리로 말한다."우리는 지금 중대한 임무를 띠고 왔다. 우리의 임무를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생사에도 관련이 있어.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된다. 난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각오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야, 조봉삼!""네, 행님.""너, 수갑차고 공항에 달려 온 거, 여자 때문이지?"느닷없는 질문이다."행님…… 그건…….""우물거리지 말고 대답부터 해!""……뭐, 그러타쿠모, 그러타고 헐 수도 있것씸다마는…….""이 자식!"박준호가 녀석을 강렬하게 쏘아 본다."야, 형님이 말씀하시잖아!"고수길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임으로 독촉한다. 조봉삼이 어쩌는 수 없다는 듯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대답한다."맞씸더, 행님. 고모가 아니라 여잡니다. 여자 때문에…….""그만!"박준호가 말을 잇는다."봉삼이 너부터 마음을 닦아! 아니, 닦고 비워. 깨끗이! 여자를 여자로 보지 말고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을 훈련시키란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 줄 알아?""알것씸더.""대답만 시원시원 하지 말고 실제로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란 말이야. ……우리가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이겨야 한다. 내 마음부터 완전히 비워야 한다. ……이 봐, 고수길!""네, 형님.""싸움을 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 먹고 물러서는 것도 심신을 단련하지 못한 소치야, 알겠어?"고수길은 아무 응대도 하지 않는다. 비행기 속에서도 거론했던 통킹 만 가스 개발권에 대한 고수길의 주장을 은연중에 꾸짖는 말이기 때문이다."왜 대답이 없어?"박준호가 엄중한 목소리로 계속한다."심수심을 조절할 수 있다면, 위빠사나를 이해하는 일이고, 위빠사나를 이해하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법이야, 이것 봐!""네, 형님.""지금도 두렵고, 무섭나?""아닙니다.""무섭지 않다구?""네, 무섭지 않습니다.""좋아. 자, 지금부터 너희는 나를 따라 행동한다."박준호가 사원의 내부를 향해 두 손을 모은다.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 다음, 조용하게 입을 연다."어느 나라건 그 나라 법도를 먼저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 우리 무도인의 자세다. 알겠는가?""네, 행님.""네, 형님."박준호가 당부하듯 말한다."지금부터 코로 길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은 아랫배 단전으로 한다. 한껏 들이마시고 뱉는 것은 여러 번 잘라 반복한다. 알았나?""네, 알것씸더." "그리고 복창한다. 위빠사나!""위빠사나!"

2007-01-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6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⑨문제는 서로 엇비슷한 단급끼리 붙는 것이 아니라, 무방비 상태에 있는 저급 태권도 수강생을 급습한다는 데 있다. 고도로 훈련된 가라데 특공대가 이제 막 폼을 잡기 시작한 신참 훈련생과 맞선다면 이건 십중팔구가 아니라, 백전백패로 가라데 앞에 태권도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실제로 그런 사건이 하노이 최대 인파가 모이는 부루바로 대로에서 두서너 번 있고 나서 급전직하로 태권도 수강생이 줄기 시작한 것이다.수강생 숫자가 준다고 해서 당장 태권도장 문을 닫는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 유력 인사들, 예컨대 태권도에 관심을 표명하던 군 관계 실력자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 그 사태는 실로 걷잡을 수 없게 된다.이른바 베트남에서 군 생활을 함께 한 박상길 씨와 죽이 착착 맞았던 서승돈 씨를 주요 파트너로 영입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더구나 세기의 프로젝트인 통킹 만 석유 개발 사업을 앞두고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는 것은, 흡사 돼지고기와 새우젓 같은 찰떡 궁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그 은밀한 프로젝트가 시도도 하기 전에 일본의 훼방으로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동안 실추되었던 태권도의 이미지를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태권도로 돌려 놓아야 하고, 은밀히 뒷거래 형식으로 추진중인 그 프로젝트도 과감히 밀어 제껴, 기어코 성사 시켜야 하는 것이다. 또 있다. 비 신사적인 방법으로 태권도를 깔아 뭉갠 가라데 도장에 대한 분풀이도 함께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오늘 그들의 지프차가 미니버스를 들이받은 것도, 공항에서부터 계속 미행을 시도한 것도, 기실 단순한 무예 실력을 겨루기 위한 알력이 아니다. 서로 수강생을 더 많이 확보하겠다는 도장 운영권의 경쟁은 더 더욱 아니다.그 배후를 들춰 보면 너무 확연하다. 바로 그 프로젝트다. 한마디로 일본의 미쓰비시가 냄새를 맡았다는 얘기다. 그 좋은 먹거리를 왜 너희까지 끼어 드느냐 식이다. 그래서 서승돈이 재기의 발판으로 추진했던 야심의 프로젝트에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사전에 절단을 내 놓겠다는 심사다.박준호는 조봉삼과 고수길을 사원 경내에 세워 놓고 조용조용 훈시를 한다."니들 봤지? 가라데 도장 아이들이 우리 무술을 깔보고 도전하는 광경, 우리 차를 미행했다는 건, 너희를 비롯해서 나, 아니 우리 대한민국을 졸로 보고 있다는 증거야.…사실은 그런 걸 염려해서 너희들을 사찰에 데리고 온 거지만 말이야. 야, 조봉삼.""네, 행님.""내가 너한테 권하던 운동이 뭐야?""운동이요? 그기야 …심신 단련…."하다가 아차 생각났다는 듯이,"알겠심더, 기 운동허라 안케씹니꺼.""그래, 기 운동은 곧 단전호흡이다. 단전호흡은 명상으로 하는 기본 단련이고… 내가 늘 얘기 하지만 무술이건 무예건 먼저 선행돼야 하는 것은 심신 수양, 다시 말해 명상이란 말이야. 마음을 잡지 않고 무예에만 능한 것은 상대 앞에 항복을 선언한 행위나 진배없다, 그말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이 사원에 왜 왔느냐?""행님, 내도 압니더. 불공으로 마음을 잡자 아닝교?"조봉삼의 돌발적인 김 빼기 작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준호가 천천히 계속한다."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베트남 사원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빠사나가 있다. 그게 뭐냐면 …우리 말로 '바로 본다'는 뜻이다. 불경을 처음 기록한 팔리 어로 위빠사나인데, 한마디로 깨닫음을 얻는 수행법이라는 거다. 명상으로 마음을 집중시켜서 집착과 욕망을 소멸시키는 수행법… 위빠사나의 명상은 어떻게 하느냐? 단칼로 쳐서 신수심법이다. 신(身)은 몸의 작용이고, 수(受)는 느낌이고, 심(心)은 마음의 움직임, 그리고 법(法)은 깨닫음이다. 야, 조봉삼 알겠어?"

2007-01-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6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⑧서른 개의 탑문으로 둘린 성채가 베트남 고유의 고 시가지라면 호안키엠 호수를 경계로 고색 창연과는 반대 개념의 깨끗한 회색빛을 띤 곳이 신시가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급조된 도시다. 그래서 건물풍이 거지반 프랑스식이다. 국립극장도, 시립극장도, 파리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는, 이른바 오페라 하우스나 그랑팔레를 연상시키는 건물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물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청사며, 하노이 시청이며, 각국의 대사관들도 모두 신시가지에 몰려 있다. 표기 대로라면 후즈밍으로 불려야 옳지만 대체로 호치민으로 통하는 베트남 민족 영웅의 묘지도 신시가지 하노이 바딘 광장에 자리잡고 있다.우엔 추오 사찰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연대로 봐서는 1천년도 훨씬 넘어 보이는 절이다.자리잡고 앉은 건축물보다 경내 공간이 더 넓어 보인다. 보라색 꽃이 만발한 이름 모를 나무들도 많고, 호안키엠에서 끌어들인 물로 만든 작은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무리져 헤엄치고 있다. 경내가 너무 조용해서, 바로 옆으로 떠들썩한 티우칸 재래시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박준호가 조봉삼과 고수길을 데리고 막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곽칠복 사범이 "잠깐만요!" 박준호를 저지시킨다."왜 그러시죠?""문을 닫으세요. 잠시만."자동차 뒤편을 한참 살핀 다음, 그가 말을 잇는다."뒤차 말이요. 저 검정색 도요타 승용차. 탄차우 말이 공항에서부터 주욱 우리를 미행해 왔다는 거요.""우리를 미행했다구요?…도대체, 무슨 일로!"박준호의 눈빛에 섬광이 핑글 돈다."아까는 가라데 도장 아이들이고, 지금은 그 아이들을 조종하는…."곽칠복 사범이 말 꼬리를 끊고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 다음 "일본 상사 끄나풀일 겝니다.""일본 상사가 왜죠?""그야… 차차 아시게 되겠지만,…어쨌든 일본 상사만큼 정보에 혈안이 된 사람들도 없습니다.""그러니까….""맞습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매일매일 체크하는 겁니다. 그리고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알리는 거죠. 코요테들이 제 구역에 오줌을 갈겨 놓는 것처럼.""곽칠복 사범님, 지금 머라케씹니꺼?"조봉삼이 가만히 꼬리를 내리고 있을 리 만무하다."코요테라 케씹니꺼? 저것들이 정녕 멀 잘못 처묵은 기라요. 코요테한테는 타이거가 임자 아닙니꺼. 타이거 박… 아니, 행님허고 이 조봉삼이 버티고 있는 마당에… 안 카나 수길아."옆에 앉은 고수길에게 동조를 구한다. 고수길은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정작 곽칠복은 조봉삼의 비분강개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그가 말한다."여차하면 한바탕 대응할 각오였는데… 오늘은 별 문제 없겠네요. 자동차를 금세 빼고 있는 걸 보니까."동방실업 서승돈이 박준호 일행을 하노이로 초청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한 가지가 김만상 관장의 태권도 도장 운영 지원이다.아니, 말이 그럴 듯해서 운영 지원이지, 실제로는 오만방자할 정도로 확장일로에 있는 일본 가라데의 세(勢)를, 그것도 태껸 무예로 족쇄를 지르는 일이 곧 그것이다.그러니까 하노이 무술 도장 시장을 크게 가라데와 태권도가 양분하고 있는 셈인데, 어느날 가라데가 태권도의 아성을 부시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가라데로 무장한 현지 청년 조직을 만들어 태권도 수강생인 역시 현지 청년들에게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그것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공 장소를 택해, 가라데가 태권도를 단 한 판에 꺾어 버리는 신나는 광경을 선 보인다는 것이다.

2007-01-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6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⑦"뒷범퍼를 겨냥해 받았으니까요.""고의로 박은 거지? 그렇지?""아마도… 그럴 겁니다. …뒤쫓아 가서 잡을까요?""이 고물차로 놈들을 어떻게 잡아? 관둬! 그냥 가."미니버스가 틸틸거리며 천천히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찻속이 찬물 끼얹어 놓은 듯 조용하다. 어색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일신시키겠다는 듯이 "참, 윤 대리." 박준호가 입을 연다."예, 선생님.""혹시 지사 사무실로 나 찾는 전화 안 왔었소?""아, 왔었습니다. 두 시간 전쯤 해서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중동의 무슨 뱅크라고 했습니다.""걸프은행이라고 하지 않던가?"박준호가 말을 잇는다"아부다비의 걸프.""맞습니다…. 걸프은행의 무하마드 씨라고 했습니다.""다른 메시지는 없구요?""아닙니다. 전화 해 달라는 부탁을 남겼습니다.""전화번호는?""죄송합니다. 사무실에 두고 왔군요. 어떻게 하죠?""괜찮소.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그분이 묵고 있는 호텔은 알고 있습니다. 메트로폴입니다. 곧장 그리로 갈까요?""우리 숙소는 어딥니까?"박준호가 묻는다."숙소요?"윤 대리가 곽칠복 사범의 눈치를 힐끔 본 다음, 더듬더듬, "당연히 호텔로 모셔야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이해해 주십시오."윤 대리 말을 곽칠복 사범이 가로챈다."솔직히 말해 아직 지사 사무실도 변변히 마련하지 못한 형편입니다. 관장님 성격에 지사 사무실은 베트남 정부청사가 있는 신시가지 빌딩을 진즉 임대하셨을 테지만… 임시로다가, 태권도장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구 있구요. 숙소 역시 마찬가집니다.""그러모, 우리도 도장에서 자고 묵고 해야 됩니꺼?"조봉삼은 벌써 볼멘소리다."내는……. 도장은 마, 씰미가 나는기라."고수길이 너 자식 왜 이래? 식으로 조봉삼의 옆구리를 찔렀는데도,"행님! 내 말 틀렸능교?"되레 박준호를 향해 항의조로 다그친다. 외국까지 나와서 또 그 지긋지긋한 도장에서 잠자야 되느냐는 하소연이다."곽 사범… 부탁이 있는데요."박준호의 말에 곽칠복 사범이 대답한다."말씀하십시오.""여기 하노이에 절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절이라뇨? 사원 말입니까?""네, 사원… 아무데나 좋습니다. 가까운 곳에 들렀다가 숙소로 갔으면 싶은데요.""절에서 보실 일이라도….""잠시면 됩니다."베트남 청년 탄차우가 운전하는 미니버스는 호안키엠 (還劒)호숫가에 멈춘다. 소규모 사원 앞이다. 이름이 우엔추오다. 그러니까 하노이 중심에 호안키엠 호수가 자리잡고 있는 셈인데 우리나라 여의도 반쯤 되는 크기다.그 오른쪽이 구시가지고, 왼쪽은 신시가지다. 오른쪽 구시가지는 2천 년 역사가 숨쉬는 전형적인 고도다. 그래서 왕궁이 있고, 침략자를 물리친 영웅들의 무덤이 있다.그때 왕도의 이름이 탄롱이던가. 고색 찬란한 작은 건물들과 잡다한 재래식 시장, 거미줄 같은 골목, 다닥다닥 붙은 협소한 서민 주택, 흡사 과일 상자를 줄줄이 늘어 놓은 것 같은 상가, 밟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나는 목재 다리 등 그 어느 때고 북적대는 인파가 끊긴 적이 없는, 그야말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도시다.

2007-01-1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6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⑥박준호가 눈알을 부릅뜨자, 머리를 긁적거리며 능청스럽게 입을 나불거린다."행님, ……그거 인자삐이소, 그마. 여긴 베트남 아닝교.""조봉삼!""네, 행님.""쓸데없이 나서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했씹니더." 박준호가 곽칠복을 돌아보며,"가능한 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소.""걱정 마시소. 우리 관장님이 어떤 분입니까? 베트남에서는 관장님이 나서서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관장님께 말씀 드려서 내일까지는 찾아 놓겠습니다. ……한데, 관장님이 직접 영접을 나오셔야 하는데…… 조금 불편하시거든요.""불편하시다뇨?""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못 나오시는 대신 극진히 모시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서 사장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아, 서승돈 사장님요? 오늘 베트남에 입국하십니다만, 호치민에서 일 보시고 하노이엔 낼 도착하실겁니다.""안 그래도 서승돈 사장님이, 박 선생님 얘기 많이 하셨습니다.""나 역시 곽 사범 얘기 김만상 선생님께 많이 들었지요.""참, 혼자만 너무 떠들었구만요. 이 친구는 동방실업 지사장입니다."옆에 서 있는 삼십대 사내를 가리킨다."윤성식입니다."그가 손을 내밀어, 박준호와 조봉삼과 고수길에게 차례로 악수를 나눈다. 또 곽칠복 사범도 나선다."윤 지사장은 원래 영림그룹 호치민 지사에 근무했는데, 서 사장이 손을 떼자, 스스로 옷을 벗고 하노이로 날아온 의리의 사나이입니다.""아, 그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내 주신 서류, 윤 지사장이 다 수합하셨군요."박준호가 더 반가워 한다."지사장이라뇨? 그냥 윤 대리로 불러 주십시오. 직책이 대리니까요."그렇게 대충 인사를 끝내고 공항청사 밖에 대기시킨 미니버스에 올라 앉는다. 베트남 출신 젊은 청년이 핸들을 잡고 있다."아, 인사 드려."곽칠복 사범이 젊은이에게 말한다. 그가 벌떡 일어나 서서, 머리를 꾸벅 숙인다."안녕하세요, 탄차우입니다."서투른 한국말이다."우리 도장에서 운동 배우는 아이 중에 탄차우를 능가하는 고단자는 아직 없습니다.""아, 그래요? 단급이 어떻게 되죠?""지금은 초단인데, 내일모레 2단으로 승급할 겁니다."차가 막 출발하려는 찰나다. 뒤에서 '퍽!' 소리가 난다. 뭔가 부딪히는 소리다. 차 안의 사람들 머리가 한꺼번에 휘청 휜다. 제법 큰 충격이다."뭐야!"곽칠범 사범이 소리친다. 탄차우가 차를 세우고 비호같이 튀어나간다. 그러나 이미 자동차는 끼익─ 굉음을 내며 뒷걸음질치고 있다. 물론 미니버스를 들이받은 지프다. 한꺼번에 내뿜는 퍼런 연기와 함께 지프는 쏜살같이 튀어나가, 왼편으로 기우뚱 커브를 꺾고 있다."아니, 저건…….""가라데 도장 아이들입니다."탄차우가 자동차에 올라와 앉으며 말한다."뭐라구? 그 자식들이 또! 이 봐, 그 지프에 누가 탔어?""아이들만 얼핏 봤는데요. 지프에 하나 가득이었어요.""스즈키는?""글쎄요. 얼핏 봤으니까요.""빌어먹을…… 우리 차는 괜찮나?"

2007-01-1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6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⑤저녁 일곱 시인데도 아직 대낮 같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느낌이다. 그렇긴 해도 베트남 남부 메콩 델타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우선 땡볕 속의 비닐하우스처럼 얼굴을 익히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비릿한 간장 냄새는 마찬가지다. 공기 속의 습기가 있는 베트남 남부가 특유의 열대 몬순이라면, 하노이가 있는 통킹 델타 지역은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 기후다. 우리나라 늦여름 날씨다. 늦여름 저녁녘이면 더위를 내쫓는 아주 쾌적한 바람이 불 듯, 통킹 만의 훈풍도 늘어졌던 야자수 잎새를 선뜻선뜻 일으켜세우고 있다.박준호는 핸드 캐리어했던 춘란분을 세관에 입수당한 일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공식적인 방역 검사를 받지 않고서는 통관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별한 물건이라고 통 사정해도 관계관은 고개부터 절절 흔들 따름이다. 하긴 기력이 쇠진하다 못해 입사귀가 늘어진 춘란을 베트남이라고 해서 살려 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기왕 죽일 바에야,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되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박준호는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고 허전하다. 3년을 하루같이 금이야 옥이야 동고동락했던 춘란인데….공항 대합실에 이르자 동방실업 하노이 지사에서 영접나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동방실업 이니셜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두 사람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체구가 단단해 보인다. 조봉삼처럼 큰 몸은 아니지만 아주 날렵한 움직임이다."어느 분이 박준호 선생이십니까?"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세 사람을 번갈아 본다."우리 행님,여깃씹니더."조봉삼이 잽싸게 박준호를 가리킨다."아, 박 선생! 영광입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박준호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쥔다. 아귀 힘이 보통이 아니다."날 어떻게….""타이거 박, 모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타이거 박? 그건 옛날….""맞습니다. 세계 무술 대회를 제패하실 때 닉네임이죠. 4년 전인가요?""아니요."박준호가 머리를 흔든 다음 말을 잇는다."그건…, 세계무술대회가 아니고, 세계 군인호신술 대회였소.""어쨌거나 무술로 세계를 제패한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때 첫선을 보인 물구나무 쌍발차기 기술은 지금도 신화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만….""그 경기를 보셨습니까?""아뇨, 얘기만 들었습니다. 후배들한테.""후배라면….""해병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이치걸….""아, 그렇군요. 후암동 수박도회…." "맞아요, 제가 바로….""아, 김만상 선생님 제자 분이시군요.""맞습니다. 이름은 곽칠복이고 하노이 도장 사범을 맡고 있습니다.""어쨌든 반갑네요.""그렇군요. 한데, 부탁이 하나 있소만.""무슨 부탁입니까?""방금 공항에서 물건을 하나 압수당했는데 말이요. 그걸 찾아 줄 수 있겠소?""물건이라뇨?"또 조봉삼이 나선다."물건아닙니더. 그거 춘란 화분이라코, 다 죽어 가는 난초 뿌리 아닝교.""야!"

2007-01-1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6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④"형님도 차암."고수길이 빈정거리 듯 눈까지 흘긴다."왜, 내 말이 말 같지 않아?""너무 순진하셔서요. …형님, 사람 좋은 거 하고 이번 프로젝트 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번 사업은 차원이 다릅니다. 알까기나 타워 팰리스 분양하고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10억 20억이 아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려 700억 불짜리 국제적인 매머드 사업이란 말입니다.""나도 알아."박준호가 덤덤하게 대답한다."아시면서 왜 그러시죠? 왜 서승돈 사장이 바람을 잡는다고 형님까지 휩쓸리느냐, 그 말입니다.""넌 내가 가능성도 없는 일에 계산도 없이 휩쓸리는 사람으로 보이냐?"박준호의 음성도 제법 신중하다."꼭 그러는 건 아니지만…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수사망을 피해 도망친 범죄자란 사실입니다. 실현 가능성 없는 오색 무지개에 급급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경찰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느냐가 관건입니다. 형님.""그래서?"박준호가 빈정거리 듯 묻는다."이번에 형님 친구 분이 고시에 패스해서 검사 자리에 앉으셨다면서요? 그분 통해서 돌아가는 국내 사정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언제 우리가 귀국할 수 있을 것인지 그 시점을 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말입니다."고수길이 끝까지 할 말은 다하고 말겠다는 듯이 입을 앙다물고 있는 박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휴양 차원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심신을 달래다가….""야, 고수길!"박준호가 일갈한다."네, 형님.""난 네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아. 그리고 너 똑똑한 줄 알아. 하지만 이번 판단만은 너무 경솔한 것 같다. 남자는 때로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에도 도전할 줄 알아야 돼. …하지만 난 이번 일을 실현 가능성 없는 무지개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밀고 나가느냐에 따라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너, 이번에는 무조건 내 뜻에 동참하고 따라와. 알겠어?""하지만, …형님!""내 말 들어.""형님!""난 지금 너한테 명령하고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 베트남 정부에 제출할 안건이나 잘 만들어 두란 말이야. 서승돈 사장이 와서 검토하도록.""…알았습니다."고수길이 마지못해 대답한다.비행기는 이미 활주로에 착륙해 탑승구를 향해 바퀴를 굴리고 있다. 고수길이 먼저 일어나 핸드 캐리어용 가방들을 챙기느라 수선을 떤다. 한데도 조봉삼은 여전히 삼매경에 빠져 있다.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고 있다. "야, 일어나!"고수길이 조봉삼을 흔들어 깨운다."…와, 이러노? 내는 귀공자 아니라 카이!"잠꼬대다."귀공자 좋아하네."고수길이 조봉삼의 침 묻은 뺨을 철썩철썩 때린다."안 일어나? 다 왔어."그래도 난공불락이다. 설사 조각잠이라도 기어코 한숨 더 자고 말겠다는 일념이다."야, 놔 둬. 비행기 문 열리려면 5분은 더 기다려야 돼."박준호가 고수길을 말린다."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잠만 잤지 않습니까." 고수길이 투덜거린다."무슨 일인지, 되게 혼쭐이 난 모양이지? 이 자식 사고 친 다음에는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자잖아."

2007-01-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6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③그런 연유 때문에 보내 온 서류들도 두서가 없다. 베트남 독립 동맹 수장인 후즈밍(胡志明)경제 개발 어록도 있고, 중공업 위원회 2차 5개년 계획도 있고, 베트남 경기동향 지수도 있고, 베트남 천연자원 실태 분석도 있고, 기술적 무역 장애에 관한 협정 등등, 잡다한 서류가 도합 100여 쪽에 달한다.게다가 대부분 영어로 작성 된데다가, 경우에 따라 베트남 문자로 표시된 현지 서류도 심심찮아서 웬만한 눈치 작전이 아니고서는 지레 짐작조차 불가능할 지경이다. 그 100쪽 중에 한글로 표기된 부분은 서류 표지에 짧게 붙어 있는 서승돈의 메모뿐이다. 서승돈은 스카이 홍과 박준호와의 관계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너무나 사무적이다.박 군, 여러 가지로 너무 고맙소, 동봉하는 서류, 고수길 동지와 면밀히 검토, 좋은 복안 만들어 주기 바라오. 아직은 하노이 당국도 우리 편이오만, 언제 어떤 돌발사태가 생길지 예측불허요. 그럼, 하노이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만 총총.비행기는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 상공인 듯 싶다. 착륙 허가를 받기 위함인지 몇 번씩이나 상공을 선회하고 있다. 박준호는 비행기 유리창으로 언뜻언뜻 스쳐가는 베트남 특유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서류를 덮는다.눈두덩이 무겁다. 너무 골똘히 씨름을 한 모양이다. 따로 메모를 한 부분만도 5쪽 분량이 넘는다. 소위 말하는 대안을 위한 문제점이다. 서승돈을 만나면 중점 토론할 자료인 셈이다.옆자리의 고수길을 본다.고수길의 눈동자에도 붉은색이 도는 걸 보면, 박준호처럼 서류 검토에 꽤나 신경을 쓴 모양이다."뭐 좀 뽑았어?""뽑긴…… 뽑았지만 너무 방대해서 어디에 기준점을 둬야 할지 막막한데요.""하긴…… 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베트남 정부에 제출할 안건 자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아."박준호의 그 말 한마디에 고수길의 눈이 번쩍한다."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사실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요식 행위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금원입니다. 어디서 그 막대한 개발비를 창출해 낼 것인가…… 막말로 텍사코를 압도할 만한 파트너를 끌어 내는게 관건입니다.""나도 그 일이 중요한 줄 알아. 하지만 가능성이 미미하다고 발 뻗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 지금 서승돈 사장이 열심히 뛰고 있으니까, 그것을 기대하는 수밖에.""믿고 있던 쉘이 난색을 표명했다는 얘기, 형님도 들으셨죠?""하긴, 텍사코 하고 영림그룹 하고 조인트 벤처로 무장하고 출동했다니, 어느 누가 경쟁하겠다고 덤비겠어?""텍사코뿐입니까? 일본의 미스비시까지 떴다는 거 아닙니까.""미스비시는 그래도 괜찮아. 경쟁자가 많을수록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할 수 있으니까."고수길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갑자기 신중해진 목소리로 묻는다."형님은 이 프로젝트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있구말구."박준호가 자신만만하게 말을 잇는다."내가 얘기한 김만상 관장 말이야. 절대로 예사로 넘길 사람이 아니야. 그 어른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데, 이번 일만은 자신이 있다는 거 아냐. 돌아가신 숙부님 친구 분이라서가 아니라, 여러 모로 믿을 만한 분이라구.""사람이 좋다는 겁니까?"고수길이 묻는다."그래, 너도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만……."

2007-01-1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6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②아니 얼굴 마주보며 차라도 한잔 마시지 않고서는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옳다. 꼭 마시는 차가 아니라도 좋다. 그저 눈만 마주치기만 해도 그만이다. 얼마나 당신을 가슴 깊이 품고 있었는가의 애끓는 사연까지는 전달되지 않더라도 십년 넘는 세월이 후딱 지나버렸는데도 아직도 그날 밤의 그 격정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전달되어도 좋다.더 이상은 과욕이다. 마음을 비우자. 어쩌면 기약 없는 이별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설사 스카이 홍을 서승돈에게 완전히 빼앗기는 불상사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녀와 마주앉아 벤 베네스 통나무집의 기억을 되새기고,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황당한 가슴앓이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박준호는 거침없이 아파트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맑은 목소리와 함께 스카이 홍이 문을 열어준다면 그보다 더한 바람이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상황일 뿐, 모니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전혀 엉뚱하다. 아마, 일하는 아주머니 같다."누구세요?""홍 여사님 뵈러 왔습니다.""어디서 오셨는데요?""박준호라고 전해주십쇼.""박준호라구요?""네. 박준홉니다. 우선…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끝까지 문을 열지 않을 요량이다.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은 집에 들이지 않는다는 철칙에 대해 단단히 교육받은 모양이다. 그녀가 말한다."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데요?""이름만 대면 아실 겁니다. 영국에서 만났던 박준호라면….""지금 안 계신데요.""언제 들어오십니까? 급한 일이라서….""외국에 가셨거든요.""외국이라뇨?""모르겠어요. 회장님이 갑자기 부르셔서…. 함께 가셨다는 사실밖에…. 미안합니다."그리고 모니터는 꺼져버리고 만다.비행기가 구름 속을 들어서는지 갑자기 기체가 요동하기 시작하고, 이어 안전벨트를 매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박준호는 머리를 흔든다. 모든 것을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내겠다는 생각은 앞서는데, 좀체 의지대로 행해지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계속 잠이 오지 않는다. 스카이 홍도 홍이지만, 우선 동방실업 베트남 지사가 보내 온 서류 때문이다.기실, 명칭이 그럴싸해서 동방실업 베트남 지사지, 실제로 해외 지사를 설립할 만큼 동방실업의 사세가 일취월장할 형편이 아니다. 일취월장은커녕 존폐 위기에 몰렸다가 도산 직전에 숨을 돌리고 간신히 제자리에 앉았다고 해야 옳다.원래 영림그룹 하청 업체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도 영림자동차와 영림전자가 주고객인 회사다.그러니까 영림그룹이 나몰라라 돌아앉으면 회사가 하루 아침에 절단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실 영림의 총수인 김상도로부터 불시에 파면을 당하고 물러선 서승돈을 사장으로 영입했던 것도, 영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말 그대로 기사회생이다. 서승돈이 동방실업 새 경영인으로 전격 취임함으로써, 막혔던 일부 은행 돈줄도 풀리고, 영림을 제외한 여타 관련 회사들과의 관계 개선도 원활히 재개했던 것이다.절체절명의 순간에 정의의 흑기사처럼 서승돈 사장이 그것도 벼락치기로 뛰어든 것이었다. 어쨌거나 동방실업 베트남 지사를 정식으로 설립했다기보다 서승돈의 옛 친구거나, 공군 조종사 시절의 옛 부하 몇이 모여 서승돈 돕기 운동에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2007-01-0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6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카인의 아침 ①비행기가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여섯 시 반이다. 김포에서 오후 네 시 반에 출발했으니까, 계산상 여섯 시간여 걸린 셈이지만, 시차 두 시간을 가감하면 비행 시간은 정확히 네 시간 반인 셈이다.조봉삼은 네 시간 내내 드르렁 드르렁 잠만 잤지만 박준호나 고수길은 달콤한 졸음 한 번 제대로 즐긴 적이 없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의 암담함 때문이다. 말이 해외 은신이지, 이건 완전한 도망질이다. 흔한 말로 해외 도피다. 그것도 언제 다시 귀국할지 모르는 기약없는 도망질이다. 물론 영등포 일번지파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지 않도록 극단의 조치를 취해놓긴 했지만, 그래도 주요 포스트 3인방이 다 빠졌으므로 예의 그 괴력을 발휘할지는 솔직히 미지수다. 건물 임대 등 여타 고정수입금이 정기적으로 입금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남겨두고 떠나는 부하들 중 고수길 같은 재능있는 인재도, 명령 하나로 죽고 사는 조봉삼 같은 의리파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여 포스트 3인방이 없는 영등포 일번지파는 속빈 강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힘으로 평정한 조직은 또 다른 힘에 의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주먹세계의 법칙이라고 하지 않았는가.이제나 저제나 기회만 엿보던 다른 신생조직이 영등포 일번지파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동안 공들여 쌓았던 탑은 박준호와 고수길과 조봉삼이 비행기 트랩을 오르는 순간, 와해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고 해야 옳다.그 뿐 아니다. 박준호가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워 길을 터놓은 영향력 있는 인맥들과의 유대 역시 마찬가지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대통령 자리에 막 오른 큰 어른과 그 추종자들이 그러하다. 막말로 그동안 고생고생하며 가파른 언덕길의 마루턱에 올랐다가 이제 편안한 내리막길로 막 접어드는 찰나, 청천벽력 같은 불상사가 터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막강한 대통령 백을 등에 업고 이제 사업다운 사업을 막 펼치려는 순간, 난데없는 벼락이 우르릉 쾅!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그러나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게 만든 원인은 꼭 조직의 와해나, 사업의 파탄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솔직히 박준호를 더 암담하게 내리 누른 것은 그런 요인보다 사람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스카이 홍이다. 이제 스카이 홍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황당할 수가 없다. 물론 스카이 홍은 박준호가 은밀히 따로 만난 일이 없고, 만나기로 약조한 일도 없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마주칠 수 있는 공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 수사망을 피해 해외로 도주 행각을 펼치게 되면 그런 가능성조차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기실 스카이 홍의 상대가 서승돈만 아니었어도 박준호가 이처럼 가슴 졸이며 관망 상태를 오래 유지했을 리 만무하다. 아니, 여차하면 서승돈이고 뭐고, 얼굴에 철판 깔고 얼마든지 마구잡이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솔직히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인가, 박준호 자신도 가늠할 수 없다. 흡사 연기만 뭉얼뭉얼 품어 올리는 보르네오 섬의 휴화산이라고나 할까. 얼핏 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지만, 일단 일이 벌어졌다 하면 감당이 불감당인 화산 폭발. 바로 그런 위기일발의 폭발을 눈앞에 두고 해외 도피 사태가 터진 것이다.그렇다. 박준호가 그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녀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손들면 잡히는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끙끙거리며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끝내 발설하지 않았던 박준호의 눈물겨운 극기.베트남 비자와 하노이행 비행기표를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 식으로 긴급 입수한 어제 오후, 박준호는 오랜만에 영등포 사무실을 방문하기로 사전 약속이 된 김분이까지 바람맞히며 찾아간 곳이 스카이 홍이 사는 압구정동 아파트다. 딱히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 없이 무작정 찾아 나선 것이었다. 벤네비스 산악숲속 통나무집에서 있었던 그 격정의 주인공, 박준호가 이렇게 건재하다는 사실을 일단은 입증시키겠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라고나 할까.

2007-01-0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6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⑫"두 장이면…. 2억 말씀입니까?""20억!""네?""기왕 버린 거, 벌린 입 주둥이가 찢어지게 팍 찔러!""하지만, 회장님…. 이번 대통령은 전번하고 달라서 그것이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역으로 치고 나오면….""야, 임마! 장사 일이년 했어! 지금까지 내 돈 앞에서 기지개 켜는 놈 한 놈 못 봤어. 군부 대통령이나 민주 대통령이나, 엎어치나 메치나 그 놈이 그 놈이야.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렇지만, 경제수석이 꼭 회장님과 직접 통화를 하겠다고 안달인데… 언제쯤 통화가 가능하다고 전할까요?""빌어먹을! 내가 해외 나온 줄 알잖아! 경제수석 말이야!""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서실로 전화를 주신 겁니다.""알았어! 지금 샤워 중이니까… 반 시간쯤 뒤에 통화할 수 있게 해 줘.""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장님… 한데….""한데, 또 뭐야?""또 한 가지 보고 말씀 올릴 게 있는데요, 다름이 아니고 홍 여사님 따님 말입니다.""은경이가 왜?"김상도 회장이 홍주리를 힐끔 돌아보며 반문한다."서울 시경 형사들하고… 원조교제했던 남자들을 여관으로 유인해서 말입니다. 일망타진했다는 겁니다.""너 지금 뭐라구 그랬어?""말씀 드린 그대롭니다, 회장님."최대한의 예우를 다해 말하는데, 김상도는 이미 제정신을 잃은 터다. 대번에 욕설이 튀어나온다."이 새끼가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거야, 뭐야! 원조교제가 어떻고, 여관 유인이 어떻다고!""은경 양이 원조교제 20명 남자하고 관계를 맺었다는 겁니다. 그중에 우리 회사 고문 변호사도 들어 있고, 영림 대학교수도 있고, …그리고 원수창 비서도 들어 있습니다.""뭐라구?""경찰이 기자회견을 앞두고 확인 절차를 밟고 있는데, 저희들 힘으로는 불가항력입니다. 원조교제는 청소년 범죄 퇴치 차원에서 국무총리실이 관장하고 있는데, 국무총리 얘기로는 회장님과 통화를 한 다음에 결정하겠다는 입장입니다.""그래서, 나보고 총리한테도 전화를 걸어달라 그 얘기야?""아닙니다. 총리께서 회장님께 전화를 드릴 겁니다. 아무 내용도 모르시고 전화를 받으시면 황당해 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알았어!""그런데….""그런데 또 뭐야?""원수창 비서하고 영림 대학 교수하고, 어떻게 처리할까요? 일단 직위 해제 파면이라도 시켜 놔야 저희 그룹 이름이 빠질 것 같습니다만….""원수창을 파면시키라구?""그렇습니다. 회장님."김상도 회장이 잠시 멈칫하다가 작심한 듯 큰 소리로 말한다."파면 시켜! 잘라 버리라구!""알겠습니다. 회장님.""그리고 말이야… 영림전자 사장 서승돈 말이야. 그 작자도 잘라 버려! 알겠어? 지금 당장 발표하라구, 당장!"

2007-01-07 윤인수

풀밭위의 식사 (25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⑪"네, 회장님! 저 전화받게 해 주세요.""받을 거 없어. 관리인일 테니까. 몇 번 걸다 응대가 없으면 관두겠지."혼자 땀을 시트에 뚝뚝 떨어트리며 그가 말한다."아녜요. 윌리엄 회장님일 거예요. 곧 뒤따라 오신다고 했으니까."김상도는 계속 입을 앙다물고 있다."전화를 안 받으면 실례라구요."그녀가 다시 재촉한다."네, 회장님!"윌리엄 회장한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옥죈 팔을 스르르 풀어 놓는다.아니 더 정확히 말하라면 김상도의 그 탱탱한 것이 흡사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삽시간에 축 늘어져 버린 탓이다. 이제 그것으로, 영광의 골인은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신이 너무 잘 안다. 말 그대로 역부족이다.홍주리가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추스르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수화기를 집어든다."여보세요?"한데, 이게 웬 일인가."아, 홍 여사님이시군요."한국 사람 음성이다. 뜻밖이다."누구세요?""여기, 본사 회장님 비서실 이전뭅니다.""이성룡 전무요?""네, 맞습니다. …… 회장님 어디 계시죠?""……여기 계세요. 바꿔 드려요?""네…… 먼저……."그러나 김상도 회장은 수화기를 들자마자, 먼저 꽥 고함부터 지른다."이것 봐! 어떤 놈이 전화하라구 했어!"아닌 밤중의 홍두깨다. 아마도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뗐다가 다시 붙였으리라. 김상도 회장의 역정은 계속된다."야이, 새꺄! 뭣 때문에 이 시간에 전화하고 야단이냔 말이야!"영문을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이성룡 전무는 침착하다."회장님…… 화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청와대 경제수석이 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어 합니다.""경제수석이 왜!""국도 투자금융 인수권 있잖습니까? 그 문제 같습니다. 대통령 각하가 아마 비토를 놓는 모양……."이성룡 전무가 말을 맺을 겨를도 없다. 그대로 직사포다."아니, 대통령께서 왜 그러신데!""저희도 당황스러워서…."이성룡 전무는 말 끝을 못 맺는다. 잘못 대꾸했다가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것 봐!""네, 회장님.""전번에 그거, 내가 하라는 대로 했지?"그거라면 소위 말하는 뇌물형 촌지다. 쉬운 말로 대통령 통치자금이라고 하던가. 이성룡 전무가 누군가. 그런 방면으로 잔뼈가 굵은 달인 아닌가."네, 회장님. 실수없이 전달했습니다."국제전화지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잽싸다."그런데, 왜 그래? 왜 비토를 놓냐구!""그러게 말입니다.""이봐!""네, 회장님.""두 장쯤 더 준비하겠다고 해."

2007-01-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5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⑩그는 홍주리 곁에 바짝 붙어선다. 그녀가 힐끔 돌아본다. 김상도가 그러는 홍주리의 손을 덥석 쥔다. 멋모르고 잡힌 터라 어리둥절한 순간인데, 아뿔싸. 그 손을 김상도 아랫도리에 가져다 놓지 않는가. 게다가 엉겁결에 그것을 꽉 움켜쥐기까지 했으니…."어머!"질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렴, 이럴 수가! 이렇게 상스러운 일을… 홍주리가 징그러운 파충류인 양 탈탈 털어 버린다. 그리고 이만큼 비켜나 선다. 하나, 김상도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앞뒤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는 행위를 저돌적이라고 하던가.정말 그는 한 마리 멧돼지 같다. 콧김을 씩씩 불며 멋대가리 없이 무작정 파고든다.숫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혹 보이는 게 있다면 불 붙은 제 욕망 한 가지뿐이다.그 거대한 아랫도리를 뿔인 양 쿡쿡 찌르며 사정없이 대시한다."왜 이러세요? 왜 이러느냐구요!"홍주리가 침착한 음성으로 따지듯 애원해도 막무가내다. 어디서 이런 힘이 샘솟는 것일까. 노인네라고 다소 방심했던 게 탈이라면 탈이다. 지금 김상도의 행색은 말 그대로 분별력 없는 유인원(類人猿)의 그것이다. 실로 엄청난 괴력이다. 홍주리를 단숨에 번쩍 들어 올려 버린다.아무리 발버둥치고 요동해도 막막궁산이다. 그녀는 너무 쉽사리 무너진다. 도무지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침실 쪽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침실은 운동장처럼 넓기만 하다. 원형이다. 경기장 매트 같다. 홍주리가 내리 꽂혀진다. 그리고 곧바로 태클이다.뭐랄까. 시범 경기에 임한 그레코로만형 챔피언이라고나 할까. 그는 잽싸다. 금세 태클을 거는가 했는데, 어느새 상대 선수 배 위를 덮친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막말로 편안한 잠옷 차림이라서 굳이 옷을 벗고 말 것도 없다. 옷깃을 대충 열기만 하면 부드러운 스펀지로 껍질을 씌운 듯한 빳빳한 장작개비가 툭, 소리나게 튀어나온다. 홍주리는 그 맹위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그대로 폴승이 선언될 판이다.레슬링 용어로 크라치 홀드다. 그대로 진입되면 끝장이다. 가능하다면 젖 먹던 힘을 다해 백스로라도 시도해 버리면 폴승만은 면할 수 있으련만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오, 하느님, 어쩌다가 이런 막다른 곳까지 오게 하셨습니까?'홍주리가 그만 눈을 감아 버린다. 어느새 그녀의 아랫도리도 다 벗겨져 있다. 그 상황에서 기껏 저항한다는 것이 슛 동작 방해가 고작이다.하나, 상대방이 공격권을 쥐고 있는 한 슛은 불가항력이다. 오, 하느님… 그대로 골인이다. 폴승이다. 그 순간이다."따르릉! 따르릉─."전화벨 소리다. 귀를 째듯 온 방안을 가득 채운다. 그 거대한 뿔을 기어코 골인시키고, 마치 발차하는 증기기관차의 피스톤처럼 칙폭칙폭 작동하기 시작하던 역전의 용장 김상도도 놀란 나머지 스스로 뿌리째 뽑혀 버리고 만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을까. 하나, 상상 외로 그는 침착하지 못하다. 허겁지겁 재접촉을 위한 크라치 홀드를 시도했지만, 워낙 서두르는 바람에 겨냥이 형편없이 빗나간다.따지고 보면 홍주리가 민첩하게, 그러나 아슬아슬 그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의 터무니 없는 공략 탓이다. 그래도 아직 안전한 상태는 아니다. 전신의 반은 그에게 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골포스트 바로 앞쪽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간신히 페널티 라인 쪽으로 약간 벗어났을 뿐이다."이거, 놔 주세요!"그녀가 다시 애원한다.김상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2007-01-0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5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⑨"서승돈이 바람 피우는 상대 여자가 누군줄만 알면 붙잡고 눈물로 하소연하겠는데…… 어찌나 애처로운지, 정말 도와주고 싶더구만."그리고 김상도 회장이 홍주리를 이번에는 시선을 걷지 않고 그윽히 바라본다. 그녀는 그 시선을 뜨겁게 느낄 수가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따갑다 못해 얼굴 피부가 느물느물 가려울 지경이다. 그래도 그녀는 본 체 만 체 더욱 초연한 표정을 연출한다.'아무리 그래 봐라. 그 따위 덫에 걸리나. 어디서 무슨 얘길 주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호락호락 안 될걸.'홍주리가 더 새초롬한 얼굴로 붉은 노을 대신 납빛 어둠이 서서히 깔려 오는 하늘과 보랏빛에서 가지색으로, 그리고 다시 먹물색으로 변해 가는 야자나무 숲을 본다.'정말 보통 여우가 아니야. 그 정도 찌르면 아프고 비명을 지르거나, 어쨌든 두 손을 들게 마련인데, 이건 도대체 옴쭉도 하지 않으니…… 단수가 높은 건지, 영민한 여우라서 그런지…… 하지만 내가 지금 왜 서승돈을 거론하는지, 그 이유는 알겠지.'김상도 회장이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마음 같아서는 서승돈을 전자사장에서 내려앉혀 뉴욕 본부장으로 보내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더라구. 부부가 해후해서…… 원만히 화합하면 오죽 좋아? 애들한테도 좋구……."텍사코 윌리엄 회장 업무 담당 비서가 서울에 왔었던 그날 밤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듯이 김상도 회장은 새삼스럽게 입을 앙다문다.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애틋했으면 그랬을까. 그처럼 바쁜 스케줄을 아니, 그토록 간곡한 부탁마저 깡그리 묵살할 수 있었을까. 뭐라고 그랬었지? 그래, '프라이버시거든요.' 그렇게 말했었지. '좋아, 그게 뭔지 모르지만 내가 다 사지, 아주 비싼 값으로' 김상도가 대꾸했지만 웬걸, '그건요. 돈으로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거예요, 회장님.' 홍주리는 그때 그런 식으로 무참하게 쐐기를 박았어.'한데 그 시간 그녀는 서승돈을 은밀히 만난 거야. 뭐, 음악회를 갔었다구? 회사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 때문에 사장단이 총동원된 마당에, 두 사람은 한가하게 손잡고 앉아 음악을 감상해? 그리고 남산 오솔길을 호젓하게 산책했다구? 빌어먹을 자식!'한데 이상하다. 서승돈이 홍주리를 끼고 어두운 산길을 걸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아니, 그런 짜릿한 광경을 뇌리에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기실 웬만해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아랫도리 아니던가. 오죽하면 그걸 잠에서 깨워 일으킬 때마다 악전분투하겠는가. 하춘지만 해도 입 안에 넣기도 하고, 쪽쪽 빨기도 하고, 쩝쩝 핥기도 하고, 가슴에 문지르기도 하고, 머리칼로 감기도 하고…….그렇게 반 시간 족히 공을 들여야 마지못해 비실비실 일어서서 이윽고 기지개를 켜곤 하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까딱 잘못하면 픽, 쓰러져 다시 깊은 잠에 빠질 우려가 더 많았으므로 행여 선반의 물건인 양 작은 진동에도 떨어지지 않을까. 간신히 끼워 놓은 헐거운 전기 코드처럼 아예 빠져 버리지 않을까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절절히 신경 써 주었던가.한데, 이건 위태위태한 상황이 아니다. 십 년 전 아니 이십 년 전 그 왕성했던 시절의 위력이다. 어떤 외부의 방해와 압력을 받아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거대한 힘을 과시하던 시절, 일단 일어섰다 하면 기어코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던 그 번창일로의 시절…….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두꺼운 문창호지라도 뚫어 버릴 것 같은 그 시절의 힘이 그대로 살아서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뭐랄까. 장작개비 같은 것에 부드러운 스펀지를 발라 놓은 것 같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흡사 한 방에 성벽을 날릴 거대한 대포를 앞세우고 진군하는 혁명아 사파타처럼 보무도 당당히 김상도 회장은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2007-01-0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5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⑧"또 미행을 시키셨군요? 그렇죠?""미행이라니? 난 그런 야비한 짓하지 않아.""그런데 어떻게 장페랑디스를 아시냔 말이에요?""장페랑디스가 뭔데?""정말 몰라요?""몰라. 난 모르는 건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야."김상도가 눈 버젓이 뜨고 오리발을 내민다. 표정도 완벽하다. 어설픈 구석이 없다. 정말 가증스럽다. 나 몰라라 잡아떼는 저 야비한 능청…….어쨌거나 그날 밤 국립국장의 데이트를 훤히 꿰고 있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다. 그러니까 서승돈 사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이야기다.홍주리는 입을 닫고 있다. 외부의 침입자를 알아차린 조개처럼 입을 닫고 있다.기실 갑자기 끊긴 대화만큼 어색한 침묵도 없다. 홍주리는 입을 닫은채 계속 강한 마치엘로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 같은 석양의 잔해를 보고 있다.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생경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더했던 그녀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김상도 쪽도 돌연히 찾아온 침묵이 어색했는지, 아니면 바로 지금이 기회다 싶었는지, 잠자코 있던 두꺼비를 발동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느물느물 기어올라온다. 허벅지 속으로 쓰윽, 소리나게 밀어 넣는다. 안 그래도 구토증 비슷한 거부감이 용솟음치는 판에 그 징그러운 두꺼비까지…….홍주리는 벌떡 일어난다. 아니 김상도와 나란히 누워 있던 라운지 체어를 과감히 버린다. 창 쪽으로 걸어간다. 그곳에 혼자 우뚝 선다. 생각 같아서는 샤워실로 뛰어들어가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을 뿌득뿌득 씻어 버리고 싶지만, 아서…… 그녀는 용케도 참아 낸다.김상도 회장도 어느새 라운지 체어에서 일어난 자세를 하고 있다. 무슨 벌레라도 씹은 표정이다. 문득 그가 입을 연다."서승돈 사장 말이야."그리고 홍주리를 힐끔 살핀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나타난 반응은 그러하다. 하나, 내심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김상도 회장이 계속한다."그 친구 지금 별거중이라지, 아마?""글쎄요."그녀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그 집 사정 잘 모르나?""그건 왜 물으세요?"홍주리가 당돌할 정도로 정색하며 묻는다."아직 정식으로 이혼을 못했을 거야. 아이들 문제 때문에…… 서승돈 그 작자 맘이 약해서 쉽게 결단을 못 내릴걸 아마."홍주리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김상도가 말한다."별거중인 부인이 뉴욕에 혼자 가 있다며?""글쎄요.""그 부인하고 학교 동창 아니야?""동창이에요.""한데, 교류가 없나 부지?""네, 없어요.""한 번 만나고 싶은 생각 없나?""없는데요."그녀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그 부인이 뉴욕에서 나한테 전화를 했어. 하소연할 데가 없어 수화기를 들었다고, ……첨부터 울먹이며 말하더구먼. 남편 마음을 돌려 달라구 자기는 이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거야."또 한 번 홍주리를 훑은 다음 말을 잇는다.

2007-01-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5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⑦일규는 홍주리가 유복자로 낳은 아들이고, 김상도 회장에게는 머리 좋은 조카아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일신시키는데는 공동 관심사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는지, 김상도 회장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잇는다."그녀석, 이번에도 전교 일등했다며?""……그랬나 봐요."의외로 그녀의 반응은 신통찮다."그 자식, 참 나중에 뭐가 되려구 그렇게 극성스럽게 공부만 하는 거지?"김상도가 힐끔 홍주리의 표정을 훑으며 계속한다."일규 학교 교장을 만났는데, 과학고등학교에 보내라고 하더구만…… 한데 어떻게 생각해?""뭘 말이에요?""일규 과학고등학교 건 말이야.""제가 하고싶어 하는대로 해 줘야죠. 전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아이에 대해서는…….""그 아이에 대해서라니? 꼭 남의 아들 얘기하는 것 같구만.""그게 아니구요. 유치원 때부터 일규는 그렇게 컸어요. 누가 시킨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을 열심히 읽고하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요.""하긴, 개한텐 과외 선생도 따로 붙인 적이 없었잖아?""일규는 은경이하곤 많이 달라요.""그래, 될성싶은 아이는 떡잎부터 안다구, 우리 집안에 인물 하나 난거야."또다시 두꺼비같은 손을 홍주리 귀쪽으로 옮기며 김상도가 말한다."물론 씨도 좋았지만 밭이 월등 뛰어나기 때문에 그런 아이가 태어났을테지만, ……나 말이야, 그놈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정말 기분이 좋다는듯이 만면에 미소를 짓는데도 홍주리는 전혀 신바람나는 표정이 아니다. 묵묵히 인도차이나 특유의 석양만 바라보고 있다. 김상도가 계속한다."우리 일규는…… 내가 말이야, 위대한 기업가로 키워 볼 작정이야. ……아니, 우리 영림그룹을 그 놈한테 통째로 맡기고 싶어. 이제 기업은 세습이 아닌, 그야말로 머리로 경영해야 되는 시대가 도래했거든."그래도 마찬가지다.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는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중차대한 시간을 일규 이야기로만 때울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일규 얘기는 역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그렇다. 일규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결국 시아주버님과 제수라는 천륜 관계를 강조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맞아. 그건 금물이야. 지금 이 분위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두야. 얘기를 바꾸자구.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김상도는 험험 헛기침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의자를 본다. 그녀가 깊숙이 누워 있는 의자…… 김상도가 입을 연다."이 의자…… 어디서 파는지 하나 사 가지구 가야겠어."홍주리는 입을 닫고 있다."어디서 파는지 모르나?"다시 한번 입을 열도록 압력을 넣는다."글쎄요. 이 별장 관리인한테 한 번 물어볼게요.""그런 걸 뭘 물어? 본인이 더 잘 알면서?""아녜요. 전 원래 가구 같은 것에 취미가 없거든요.""그럼 뭐가 취민가?""글쎄요. ……취미 없어요.""취미가 없긴? 음악회 감상이 취미 아냐? 특히 국립극장 같은데서 공연하는 연주회 말이야. 뭐라더라? 두 대의 플루트를 위한 협주곡이래나, 뭐래나?"홍주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입을 연다.

2006-12-3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5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⑥'말도 안 돼. 아무렴 이럴 수가…….'집어 넣고 또 넣어도 다시 튀어나오곤 하는 고장난 용수철처럼 대책없이 김상도 회장을 괴롭힌 그 뜨거운 욕망을 어떻게 감당했었던가.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그녀는 샤워중이고, 김상도는 저녁 놀을 보며, 조용한 산장에 앉아 있다.주위에 아무도 없다. 더구나 이제 서로가 알 만한 것은 다 안다.여러 해 그녀를 지켜보고, 감시하고, 간섭하는 동안 김상도 회장도 홍주리에 대해 알 만큼 알고, 홍주리 역시 김상도의 필요 이상의 관심에 대해 색안경을 낄 만큼 적당히 교활해졌다고 봐야 옳다.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침실이라고는 더블 하나밖에 없는 방을 태연히 들어설 수 있으며, 더구나 시아주버님 혼자 있는 실내에서 옷을 훨훨 벗어 부치고 샤워를 할 수 있는가 말이다.'맞아. 주리도 이미 각오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래,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그러기에 두 사람만 헬기에 올랐을 때도 가타부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거라구.'김상도는 절대로 그것이 본인만의 희망 사항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당연한 귀결이고, 당연한 합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그는 물소리가 끊긴 샤워장 쪽을 힐끔 본다. 그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거칠어져 있다. 벌써 그녀를 품에 포옥 껴안은 느낌이다.'맞아, 이거야말로 하늘이 점지해 준 절호의 찬스야.'김상도 회장은 홍주리를 기다린다. 샤워를 끝낸 싱그러운 알몸을 타월로 감싼채 불쑥 나타나 주기를 손꼽아 고대하는 것이다.하나, 홍주리는 타월 차림새도, 알몸도 아니다. 어느새 간편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다. 그래도 한 마리 까투리처럼 날아갈 것같다. 타월로 머리를 싸올렸으므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그렇게 희고 보드라울 수가 없다."뭐 좀 마실래요?"그녀가 문지방쯤 서서 묻는다. 김상도가 대답한다"아냐, 괜찮아. ……이리 와서 좀 쉬지. 의자가 여간 편하지 않아."예의 라운지 체어를 가리킨다. 아니, 팔을 뻗으면 그녀가 손에 잡힐 만큼 의자를 가깝게 끌어당긴다. 성숙한 플로랄 향내를 물씬 풍기며, 그곳에 주저앉는 홍주리가 문득 발견했다는 듯이 유별나게 붉고 거친 인도차이나의 석양을 바라본다."어때?"김상도 회장이 묻는다."아름답네요.""뭐가 아름다워?""황혼이요.""내가 말한 것은…… 의자야. 의자가 좋지 않아?"홍주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다."좋아요.""나처럼 이렇게 드러누워 봐.""전 피곤하지 않은걸요.""얼마나 편한지 누워 보라니까."마지못해 그녀가 상체를 눕힌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두꺼비 같은 손이 슬며시 와서 귓바퀴에서 흘러나온 홍주리의 머리칼을 걷어 올린다. 물기 젖은 머리 올이다.움찔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심하게 사래질 치지 않는다. 다만 그 손이 그녀의 석양 빛깔 도는 볼과 목덜미로 흡사 술 취한 괴한처럼 쑥쑥 내려오는 것을 잽싸게 붙잡아 그의 몫인 라운지 체어에 옮겨다 놓았을 뿐이다.그리고 두 사람 다 말문을 닫고 있다.어색한 침묵이다. 김상도가 험험 기침을 하며 입을 연다."……일규…… 그놈 말이야."

2006-12-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5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⑤지금이니까 말이지만, 만약 홍주리가 남강정유 홍영호 회장의 외동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뒷거래로 어찌어찌 얽어맬 수 있는 여자였다면, 그날 밤으로 진작 요절이 나고 말았을 터다.한데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렇게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의 여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영영 단념할 수도 없다. 생각다 못해 얻은 결론이 바로, 아우의 배필이다. 그런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선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꽁꽁 묶어 가까운 곳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그러나 이제 아우는 죽고 없다.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내일이라도 당장 재혼해 버리면 그 순간으로 남남이 되고 만다.물론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적잖은 영림건설 주식을 그녀와 그녀의 딸 은경이 앞으로 증여(贈與)해 놓는 따위의 쐐기를 단단히 박아 놨지만…….어쨌거나 그런 홍주리와 하룻밤 맺어진다고 해서 어찌 파렴치한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생각해 보라, 그 얼마나 오래 이 찬스를 기다려 왔던가. 아니, 이런 완벽한 찬스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골똘해 왔는가. 기실 텍사코 프로젝트만 해도 그러하다. 일찍이 그녀를 통역으로 점찍어 놓았던 것도 처음부터 이 일에 적극 가담시킨 것도 그것을 빌미삼아 그녀의 거동을 일일이 간섭해 마지않았던 것도 모두 오늘의 이 찬스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그렇다. 상대가 홍주리니까, 이처럼 점잖게 라운지 체어에 앉아 저 광활한 황혼의 변화를 쥐죽은 듯이 바라보고 있지, 만약 지금 욕실에서 운신하는 여자가 탤런트 하춘지만 되어도 용수철인 양 벌써 자리에서 튕겨 일어났을 김상도 회장이다.물론 그 역시 파충류 허물 벗듯 옷을 훨훨 벗어붙인 모습일 터다. 그리고 샤워장이건 화장실이건 거침없이 들어서고 남았을 것이다."이 봐!"마치 긴급한 지시라도 내릴 듯이 상대를 한껏 긴장시킨 다음, 이미 대책없이 공개된 그녀의 요부(要部)를 무턱대고 주무르고, 누르고, 찌르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어머, 어머?"매사가 호들갑스러운 하춘지 같은 여자는 아예 첫 삽부터 비명을 질러 마지않는 스타일이다. 숫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청운각 새끼 최 마담 같은 스타일도 좋아하지만, 손가락으로 하늘 가리기 식으로 뻔할 뻔자 교태를 부리는 하춘지 역시 김상도 회장은 과히 즐겨하는 편이다.한데도 하춘지는 결사적이다. 혹시 상대의 욕망이 죽지 않을까, 혹시 선반의 물건인 양 작은 진동에 떨어지지 않을까. 간신히 끼워 놓은 헐거운 전기 코드처럼 아예 빠져 버리지 않을까, 그토록 절절이 신경을 써 줄 수가 없다.그녀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건 간에 두 손을 가만 두지 않는다. 김상도 회장의 주요 부위를 꽉 움켜쥔다."어머, 어머!"더 기승이다. 뭐랄까, 흡사 노동판에 어우러지는 타령이라고나 할까."어머나, 어머나!""나, 죽어! 나 죽어!"비록 천연덕스럽고, 속되기 짝이 없는 음률이라 해도 아랫도리가 짜릿해지는 풋풋한 흥들을 남김없이 돋워 마지않는 것이다.김상도 회장은 생각한다.그 무렵이 언제던가. 영림그룹 런던 지사장으로 재직중, 알프스 상공에서 산화한 김상수의 일주기(一週忌)를 마친 그 다음 날이던가. 김상도 회장은 소복 차림으로 제를 지내는 홍주리의 말할 수 없이 희고 깨끗한 자태에서 참으로 의뭉스런 욕망을 느끼고 얼마나 혼자 얼굴을 붉혔던가.

2006-12-27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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