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25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④홍주리에 대한 김상도 회장의 은밀한, 그러나 공공연한 연모(戀慕)가 그런 지혜와 분별력과 식견과 배짱과 무관하지 않다면 너무 상투적인 표현일까.어쨌거나, 지금 그녀는 샤워중이다. 아니, 진작 욕실을 나와 지금쯤 화장을 고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곧 그녀는 더욱 세련되고 참신한 차림을 하고 사뿐사뿐, 마치 한 마리 부전나비처럼 부드럽게 걸어 나올 것이다.아니, 그녀가 지금 한 실내 공간에 있다는 사실부터가 김상도 회장의 가슴을 아까부터 설레게 하는 요인이다. 어쩌면 저녁 노을이 이처럼 웅장하고 찬란해 보이는 것도, 이처럼 라운지 체어가 편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는 것도 모두 그녀가 손 벌리면 닿는 곳에서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더구나 주변이 얼마나 홀가분한가. 결재 서류 앞세워 죽자사자 기다리는 계열사 중역들도, 강아지처럼 쫄쫄 따라다니는 비서들도, 어느 누구의 눈도 지금은 의식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아무리 외국 땅이라 해도 호텔 같은 공공장소라면 예기치 못한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만, 윌리엄 피셔 2세의 돈나이 목장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백 프로 안심해도 좋은 최적의 장소 아닌가.아니 최적의 장소일 뿐 아니라, 결정적인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언제 홍주리와 이처럼 단출하고 홀가분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향유한 적이 있었던가. 이런 경우를 두고 완벽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장받은, 이른바 절호의 찬스는 아마도 다시 맞기 힘들 터다.이제 주어진 상황을 여하히 활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소기의 목적이라니? 김상도 회장 스스로 움찔 놀라 마지않는다. 그래, 기어코 홍주리를 그러그러하게 만들고 말겠다는 속셈 아닌가.아니, 그러그러하게 만들고 싶다 해서 과연 그러그러하게 만들어 질 수 있는 일인가. 김상도 회장은 꼭 까까머리 소년처럼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안는다. 이를테면 얼음 찜질 같은 효과다.그는 생각한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혼자 연모해 왔고, 그래서 그녀의 재혼을 음으로 양으로 저지시켜 왔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기회를 엿봐 왔다고 하지만, 과연 홍주리를 그러그러하게 만드는, 이른바 경우에 따라 최악의 사태까지 몰고 올지도 모르는, 그 과감한 용단을 기필코 단행할수 있을 것인가, 김상도 회장은 스스로 자문자답해 마지않는 것이다.하지만 왜 그녀를 사랑할 수 없으며, 이 절절한 사랑이 끝내 맺어질 수 없단 말인가. 이른바, 그녀가 낳은 딸 은경이와 일규가 김상도에게 친조카뻘이 된다 하더라도, 아니 설사 세상이 뒤바뀌어도 그것만은 어쩔 수 없는 천륜(天倫)이라 하더라도, 꼭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 간절함과 절절함에 기어코 종지부를 찍어야 옳단 말인가. 생각해 보라, 이 경우가 어디 천륜 이후에 꽃 피웠던 음습한 사랑인가. 말 그대로 천만의 말씀이다. 적어도 홍주리만은 그렇게 은밀히 그리고 비열하게 뒤엉킨 관계가 아니다.기억해 보라,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언제인가. 잔디색이 한껏 푸르렀던 어느 여름 아니던가. 아마도 그녀 집 정원에서 열린 가든 파티장이었을 터다. 하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마치 한 마리 학인 양 사뿐사뿐 걸어왔던 그 날렵한 자태…….그래, 그녀의 존재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녀를 보는 순간 흡사 전율처럼 짜릿한 느낌이 솟구쳐 올라왔을 때, 홍주리는 천륜의 계수(季嫂)가 아니라, 자유 분방한 대학생에 불과하지 않았던가.다시 말해 그녀는 아우에게 시집 오기 이전부터 이미 김상도의 마음 한구석을, 그것도 운동장처럼 드넓게 차지해 버린 필연적인 상대라고 해야 옳다.

2006-12-2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5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③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피셔 2세 목장은 반드시 헬리콥터를 이용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어차피 김상도 회장도 원하던 바였으므로 귀찮기만 한 수행원을 억지로 데려갈 생각도 없다. 심지어 텍사코 프로젝트를 핸드링해서 오늘에 이르도록 고군분투한 일등공신 직원조차도 개인적인 초청을 빌미삼아 휴스턴 사무실을 지키게 할 정도다. 그는 통역 담당 역시 공식적인 파트너인 홍주리로 국한시키고 1박 2일 일정으로 헬기에 올라 앉았던 것이다.윌리엄 피셔 2세가 직접 초대한 손님은 가장 전망 좋은 본부 별장 옆에 따로 지어진 별채를 사용하는 게 목장주가 정해 놓은 규칙이다. 두 사람만 사용하기에는 너무 넓은 집이다.우선 공간이 많다. 위층, 아래층, 모두 다섯 개의 방이 딸려 있다. 관리인이 삼나무 목재로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고원지대라 저녁이 되면 제법 싸늘해서인지 벽난로 앞에 놓인 라운지 체어가 너무나 편하게 보인다. 발걸이가 따로 붙어 있어서 다리를 뻗고 휴식을 취하기에는 여간 안성맞춤이 아니다. 부드럽게 무두질한 가죽을 씌운 안쪽에 물새 깃털이 채워져 있어, 마치 둥실 떴다가 가라앉은 것처럼 쾌적하다.그런 라운지 체어가 두 개다. 아마도 함께 묵는 부부용으로 비치한 모양이다. 아니면 윌리엄 피셔 2세와의 요담을 더욱 안락하게 하기 위한 특수 가구인지도 모른다.어쨌거나 초청자인 목장주보다 세 시간쯤 먼저 도착했으므로, 김상도 회장은 라운지 체어에 편히 앉아, 넓은 창 유리를 통해 후련하게 펼쳐진 돈나이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남지나해에서 보는 석양은 유별나게 붉고 거칠다.라스베이거스 쇼를 위해 엄선한 무희들의 다리처럼 쭉쭉 뻗어 올라간 야자나무와 투명한 인공 초원을 보유한 거대한 돔과 석양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크고 작은 연못과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선회하는 인도차이나 독수리 서너 마리……."정말 볼 만한 풍경이야."김상도 회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목장 안내인이 두 시간 뒤에 모시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내려갔으므로 별채에는 김상도와 홍주리뿐이다. 윌리엄 피셔 2세의 특별 지시를 받은 목장 지배인이 별채 중 가장 너른 방을 손수 정해 주었는데, 공교롭게 침대가 한 개뿐이다.물론 더블이다. 그러나 홍주리는 지레 질겁하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아주 침착하게 방을 둘러 본 다음, 안내인을 통해 엑스트라 침대를 하나 더 들여 놔 달라고 태연스럽게 부탁한다.그러고 보니, 실내 구조가 방 한 개짜리 호텔 개념이 아니다. 뭐랄까, 아파트 형식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침실, 거실, 응접실, 욕실 등이 한꺼번에 붙어 있는 가족용 주거 시설인 셈이다.한마디로 홍주리는 영특하다. 느닷없이 각기 다른 방을 요구하여 윌리엄 피셔 2세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일이 결코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그녀는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아무리 튼튼하게 다져 놓은 비즈니스라 하더라도, 아직 완벽하게 계약서를 주고받지 않은 이상, 그런 하찮은 일로 삐걱, 잘못될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또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 순간으로 피차 낙동강 오리알인 양 허망한 신세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홍주리는 너무나 확연히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 어느 방이건 침대 하나만 따로 놔 버리면, 실제로 각기 다른 방을 쓴 셈이 되고 조금 어쭙잖긴 하지만, 그렇게 하룻밤만 잘 견디면 만사가 형통해지지 않겠는가.그 얼마나 폭넓은 판단인가. 여자 식견 높아야 제 치마 둘러 쓰는 격이라고 하지만, 홍주리는 다르다. 말 그대로 그녀는 웬만한 남자 대여섯 몫은 실히 해내고도 남을 정도의 지혜도 있고, 제법 배짱도 넉넉한 편이다.

2006-12-2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5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 ②다름 아닌 윌리엄 피셔 2세의 텍사스 목장 종마장에서 태어나, 광활한 시설을 한껏 즐기며 성장한,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말이다. 전 미국을 통틀어 윌리엄 피셔 2세가 소유한 테디리치보다 더 빨리 달리는 말은 없다.1천200를 불과 1분26초에 주파한다면, 아마 어떤 경마 전문가도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을 터다. 공식적인 경기, 요컨대 세계 대회나 진배없는 오클라호마 여름 경마라든가, 돈나이 목장에서 배급한 홍콩 경마에서 무려 5년간 단 한 차례의 우승도 양보한 적이 없을 정도다.테디리치는 주인인 윌리엄 피셔 2세를 그대로 빼닮은 모습이다. 우선 몸집이 크다. 서 있을 때 165라면, 네 개의 다리가 얼마나 늘씬하게 잘 빠졌는지 금세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실제로 그 늠름한 테디리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미국 휴스턴에 위치한 텍사코 본사 현관 입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지사 출입문 앞에, 그리고 윌리엄 피셔 2세 집무실에 걸려 있다. 사진에서만 봐도 길고 튼튼한 다리가 윤기 있는 적갈색 털 때문에 더욱 미끈해 보인다.그러나 테디리치의 특색은 뭐니뭐니해도 이마의 흰 별 무늬다. 멀리 다른 종마들과 섞여 있어도 금세 구별이 되는 그 별 무늬는 그래서 흔히 챔피언의 상징으로 통하곤 한다. 그러니까 그가 보통 비범한 경주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별 무늬 한 점만으로도 증명한다고나 할까. 굳이 테디리치의 값어치를 환산한다면 마리당 500만달러라고 하던가.어쨌거나 윌리엄 피셔 2세에게 있어서 테디리치는 자랑거리 중의 자랑이고, 테디리치가 그곳에 살고 있는 한, 윌리엄 피셔 2세의 돈나이 목장 역시 명소 중의 명소로 손꼽히는 것이다.한마디로 너무 평화롭고 너무 한가롭다. 목가적 풍경 그대로다. 질주하는 말, 유유히 걷는 말, 우뚝 서 있는 말, 땅을 헤집는 말, 고개를 쳐들고 갈기를 흔드는 말, 히힝잉 우는 말, 저만큼 혼자 고독을 즐기는 말, 망아지를 거느리며 천천히 뭔가를 일러 주는 말…….그러나 김상도 회장의 더 많은 관심을 끄는 곳은 목장을 방문하는 VIP 손님용 구경거리인 특수 동물원이다. 공작, 황새, 야생 염소, 원숭이, 베트남이 원산지인 물소 그리고 형형색색의 이국적인 새들이 노니는 그야말로 드넓은 인공 초원이다.어쩌면 월드 시리즈가 열리는 뉴욕 양키즈 스타디움을 대여섯 개 합쳐 놓은 것 같은 엄청난 넓이의 거대한 돔이다. 돔 전체에 가느다란 철망이 씌워져 있다.그러니까 철망 안 자체가 숲이고, 연못이고, 화원이고, 초원이다. 군데군데 쳐 있는 막사를 한 개씩 차지하고 앉은 얼룩말, 치타, 코끼리, 사자 등 열대동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윌리엄 피셔 2세가 이번 생일 잔치를 텍사스 목장이 아닌 돈나이에서 갖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베트남 통킹 만에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는 해저 유전 때문이다. 어쩌면 사우디아라비아 대표 유전에 버금가는 매장량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컴퓨터에 입력된 자료만 본다면 세계 최대 유전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통킹 만 해저 배사 구조인 것이다.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각국의 석유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한 윌리엄 피셔 2세가 황금알을 낳을 통킹 만 유전을 포기할 리 없다. 포기는커녕 기어코 텍사코가 개발권을 따내야 한다는 야심으로 요 근래는 아예 본사를 돈나이 목장으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돈나이 목장에 와서 살다시피 한다.

2006-12-2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4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인도차이나의 석양①윌리엄 피셔 2세의 메콩 델타 끝자락에 위치한 돈나이 별장은 호치민에서 헬기로 30분 걸리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프랑스 령(領)이었던 1백 년 전 파리의 대부호가 20년에 걸쳐 이뤄 놓은 농장을 윌리엄 피셔 1세가 막대한 자금을 풀어 구입한 뒤, 그 엄청난 규모의 농지를 별장 개념으로 고쳐 놓은, 이른바 윌리엄 피셔 2세의 경기마(競技馬) 농장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물론 미국의 패전 철수와 함께 베트남 정부에 반환되었다가 언제 어떻게 원상복귀됐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항간에는 윌리엄 피셔 2세가 직접 혁명 정부를 찾아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임대 허가를 받았다는 설도 있고, 원래 그곳 관리를 맡았던 베트남 인이 수완을 발휘, 윌리엄 피셔 2세 일행의 비공식 입국 허가증을 발부받았다는 설도 있다.어쨌든 메콩 델타는 하도 광대한 땅이라 지형이 똑같지 않다. 곳곳에 야자 등 열대 수목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가 했는데, 갑자기 대형 비닐을 깔아 놓은 듯 부연 운하망이 종횡으로 달리는 경작지가 나타나고, 운하망인가 싶었는데, 갈대가 흐드러진 구릉지대가 거짓말처럼 펼쳐지곤 하는 것이다.그런 구릉지대를 두 번째 거쳐야 비로소 윌리엄 피셔 2세의 웅장한 목장을 만날 수 있다. 그 넓이만 70에이커라고 하던가.우리나라 땅에 비하면 거의 김포시 넓이에 가깝다. 말이 쉬워 김포평야 넓이지, 한 개인 목장으로서는 사실 엄청난 규모다.돈나이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점차 고도가 높아져서 마침내 표고가 1천 미터에 달하는 고원지대가 나오는데, 고도 9백 피트 헬기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끝없는 고원지대가 모두 윌리엄 피셔 2세의 목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메콩강 지류인 돈나이 강 상류의 맑은 물줄기가 가파른 계곡으로, 혹은 크고 작은 폭포를 이뤄 콸콸 쏟아지는 풍차 말고도 이름 모를, 그야말로 맑고 작은 시냇물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주변은 온통 키가 5미터 이상인 짙푸른 야자나무 숲이다.마치 라스베이거스 쇼 출연을 위해 엄선된 미희의 다리 같다. 쭉쭉 뻗어 허공을 찌르고 있다.크고 작은 인공 호수, 장미 정원, 운동장마냥 넓은 수영장, 홀의 골프장, 마구간 그리고 주방에 공급되는 야채밭…. 그 너머 30에이커의 초원이 윌리엄 피셔 2세가 자랑하는 말(馬) 목장이다. 말이 목장이지, 실제로는 무슨 소도시 풍물 같다.그도 그럴 것이 바닥에 모직 담요를 깐 여러 개의 종마장, 말 전용 병원, 수의사들이 거주하는 주택, 망아지를 운동시키는 훈련장, 끝없는 목초지, 군데군데 선 창고, 도서관, 식당 등등 수많은 시설이 7에이커에 걸쳐 아스라히 펼쳐져 있는 판이니, 거대한 소도시로 보지 않을 까닭이 없다.물론 윌리엄 피셔 2세의 말 목장이 돈나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오리지널 대형 목장은 텍사스에 있고 대륙 별로 서너 개가 더 운영되고 있는데, 그중 아시아 쪽 목장이 돈나이인 것이다.그러니까 말 사육 규모로 보면 4위나 5위쯤 된다고나 할까.어쨌거나 윌리엄 피셔 2세의 목장엔 보이는 것이 말천지다. 온통 말밖에 없다.푸른 초원의 풀을 뜯고 있는 사슴 색깔의 기품 있는 아랍종이며, 동작이 경쾌한 영국산 서러브레드 종이며, 윤기 있는 밤색을 자랑하는 미국 원산 아메리칸 트로터 종이며, ……흡사 말 백화점을 차려 놓은 것 같다.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윌리엄 피셔 2세와 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현재도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경주마 테디리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006-12-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48)

엘리시온 22"첨부터 와 공장을 뿌사삘끼라코 말허지 않았소?"원 과장이 노골적으로 대답을 회피한다."와 안 했냐코 묻는다 카이.""노 코멘트 하겠소.""아, 그래?"그냥 돌아서다 말고 갑자기 휙 돌아서며 조봉삼이 놈의 안면에 곰 발바닥 같은 주먹 한 방을 꽂는다. 철푸덕, 흡사 호박 으깨어지는 소리 같다.'야 이 자식아, 그거는 펀치도 아닌기라. 쓰으팔, 와 우리가 비행기로 줄행랑을 쳐야 허노? 아파트 장사 헐끼라고 귀띔만 했어도…… 우리가 와 거기다 묻었겠노?'그리고 몸을 날린다.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비상계단이다.웃옷을 벗어 수갑을 뚤뚤 감아 감추고 구르듯이 10층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린다.아니, 러브하우스 간판이 붙어 있는 4층쯤에서 조봉삼은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창문을 뜯는다. 문짝을 뜯어내지 않고서는 통과할 수 가 없다. 그만큼 문이 작다. 그래도 간신히 몸을 뺀다.4층이라도 꽤나 높다. 바로 아래가 골목이다. 간판을 고정시키고 있는 쇠붙이를 발판삼아 몇 발 내려온 뒤, 그대로 몸을 날린다.물론 1미터 90에 육박한 큰 키에다 1백 킬로 몸무게면 웬만한 씨름 선수 체격이다. 씨름 선수라도 이건 백두급을 석권한 천하장사다. 하나 천하를 호령하는 장사라 하더라도 제몸을 나비처럼 가볍게 띄울 수는 없다.이름하여 낙법(落法)이다. 태껸에서 솟구쳐차기 동작의 연이음이다. 흡사 가랑잎 나풀나풀 춤추듯 큰 무리없이 사뿐 내려올 수가 있다.다행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후유─."조봉삼이 괜히 옷매무새를 고친다. 모텔 정문 쪽에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수사관이 무전기를 들고 은신해 있을 터다. 그의 눈에 띄었다 하면 만사가 끝이다.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시계를 본다. 아직도 20분쯤 여유가 있다. 엘리시온처럼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모텔 정문 반대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한다. 괜히 달음박질하다간 의심받기 십상이다.일이 잘 되려고 빈 택시가 지나간다."택시!"조봉삼의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우렁차다."공항으로 가입시더. 국제공항!"시간은 충분하다. 그래도 박준호는 시계를 보고 있을 터다. 여전히 춘란분을 손수 안고 있을 터다. "야, 이 자식 2번 출구를 못 찾는거 아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형님. 생긴 건 소대가리 같애도 잽싸기는 여우 뺨 치 잖아요."고수길이다. 고수길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안심이 안 된다는 듯 박준호는 고개를 연방 휘두른다. 조봉삼이 말한다."보소, ……행님 내가 누군교? 봉삼이 절대 행님 배신 안 헐끼요. 마지막 그 순간까지 행님 곁에 붙어서 행님을 지킬끼요."조봉삼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충성 맹세가 가슴 뿌듯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헤죽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누가 들을세라 은밀히 중얼거린다."귀공자……."결국 귀공자는 이렇게 쫓겨가는구나. 뭐, 귀티도 안 나고 공부도 못 하면서 자지만 엄청 큰 아저씨?'씹헐년!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별 개폼 잡는 소리를 다해, 썩을 꺼…….'어느새, 버럭버럭 화를 내기 시작하는 아랫도리를 조봉삼이 서둘러 수갑 찬 손으로 가린다. /글·백시종 그림·박성현

2006-12-2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4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엘리시온 20속사정을 알고 보니, 영림그룹은 처음부터 공장에 눈독을 들인 게 아니다. 안 그래도 노조니, 파업이니 해서 골치 아픈 판에, 공장을 가동하여 원 주인이 염원하는 신일이란 상표로 제품을 생산할 생각은 애당초 가져 본 적이 없다. 죽은 공장을 살려 가공한다는 조건으로 그처럼 싸게, 그리고 묘안까지 짜 내어, 은행 융자도, 전기세도, 세금도, 밀린 노조원 임금도 깡그리 공제받았는데, 웬걸 영림으로 등기가 넘어오자 마자 공장 건물을 허물기 위해 포클레인 장비를 들이댔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최고급 복합 주거 아파트, 이른바 타워 팰리스 유형을 짓기 위해서다. "보소."조봉삼이 원 과장을 향해 말한다."부탁 하나 있는데, 들어 줄끼요?"그가 고개를 끄덕인다."고맙소."소리를 죽여 조봉삼이 말을 잇는다."내는 지금 도망칠라카요. 내랑 행동 같이 허것능교?"원 과장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연다."……난 포기하겠소. 이미 신원이 밝혀졌기 때문에…….""그러모, 나 좀 도와주소.""뭘 어떻게요?""문 밖 형사를 불러 들이서…… 잠시 기절을 시킬 작정 아닝교…… 그 자가 열쇠를 갖고 있을 텐데, 그걸로 수갑 좀 풀어 주쇼."원 과장이 고개를 절절 흔든다."못하겠습니다."단호하다."와 못해?""불법이니까요.""불법?""수갑을 풀어 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경찰 말고 또 누가 있겠소?"조봉삼이 말을 빼앗는다."열쇠만 손에 쥐어 주면, 헐 수 있능 거 아닝교?"그래도 그가 고개를 절절 흔든다."난 법을 어기기 싫다구요."어이가 없다.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탈탈 털어 대니 어찌 하겠는가. 조봉삼이 말한다."그럼 나 혼자 도망 칠 때까지만 못 본 체 해 줄 수는 있는기요?"젊은이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저 사람들이 동요를 보이모, 우짜요?"조봉삼이 흰머리와 배불뚝이를 가리킨다.그는 그냥 씩 웃기만 한다. 두 사람 다 제 코가 석 자라서 남의 일에 참견할 여유가 없지 않겠냐는 웃음이다.'옳거니…….'일단 승낙을 받은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조봉삼이 밖에서 잠근 문을 두들긴다. 반대머리가, "무슨 일이야?"하며 빗장 풀고 문을 연다. 바로 그 순간 조봉삼이 수갑찬 두 팔로 반대머리의 목을 감아쥐어 버린다."억!"아주 간단하다. 조봉삼의 억센 범아귀로 반대머리 경부 뒤쪽 급소를 단 한 번 가격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꼭 태껸이나 태권도가 아니라도 급소 부위와 타격의 경강(輕强)을 잘 아는 조봉삼이다."10분이면 깨어 날끼요. 그리모 또 만납시더. 이런데 말고, 더 존 자리서." 조봉삼이 젊은이에게 작별을 고한 뒤, 한 발 내딛다가 다시 돌아선다."보소!"그는 또 무슨 수작이냐 는 듯 아주 못마땅한 얼굴이다."한 가지만 물어봅시다."조봉삼이 계속한다.

2006-12-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4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엘리시온 19 예컨대 모 기업이 요즘 유행하는 대규모 복합 아파트를 짓기 위해 방배동 한복판의 주택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발 빠르게 한 주택 주인을 설득, 가령 시가 7억원짜리 집을 9억원에 이면 계약, 부동산 등기를 일단 고수길 앞으로 넘기는 일부터 잽싸게 처리한다.그리고 마지막까지 매도를 거부, 아파트 건설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영등포 일번지파 똘똘한 행동대원 5명만 풀어 놔도, 그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다. 거의 완벽에 가깝다.여차하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몸으로 밀어붙이는 똘마니들의 행동력은 너무 충성스럽고 막강해서 가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지경이다.결국 공사가 반년이고 1년이고 지연되는 것보다 시가에 두 배쯤 더 주고 매수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므로 기업체는 영등포 일번지파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이름하여 '알까기'다. 그런 식의 '알까기'가 순순히 잘 풀릴 경우, 원래 집 주인 몫에 2억원을 더 얹어 주고도, 5억원이라는 거액이 떨어지게 되는데, 보통 4개월에 한 건 정도니까, 수입은 월 1억3천만원 꼴이다.하긴 행동대원 14명에다, 부두목 2명에 박준호가 운영하는 체육관에다, 일번지 장학회에다, 그리고 무슨 무슨 후원금에다, 원래 씀씀이가 큰 각종 경비까지 계산하면 그리 여유있는 수입도 아니다.한데, 한꺼번에 13억원이 생기는 프로젝트가 터진다. 바로 일원동 신일 특수강 공장 건이다.물론 시가 2백억원 대 공장을 땅 값도 안 되는 단돈 50억원에 꿀꺽 하기 위해 기상천외의 묘안을 짜낸 영림그룹이 그 파트너를 찾던 중, 방배동 아파트 현장에서 악연으로 만난 영등포 일번지파와 은밀한 야합을 공모하기에 이른 것이다.그러니까 원조교제의 유혹에 빠져, 만사작파하고 사타구니에 쇠 소리 휘휘 내며 달려왔다가 함정에 들어앉은 원 과장은 그런 인연으로 조봉삼과 10층 옥상에서 마주치게 된 셈이다.그날 고수길과 함께 수금차 모처에 갔을 때, 영림 쪽에서 나온 사람은 원 과장뿐이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얼굴을 더 이상 팔리지 않겠다는 작전 같다.그는 여행용 가방을 탁상 위에 올려 놓고 "이거 네갭니다"라고 말한다."네개라니?""4억원이요. 물론 만원권 현찰입니다."그들은 수표 거래를 결단코 사양한다. 만약의 경우 추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과장이 말을 잇는다."세 개는 먼저 수령하셨고, 나머지 아홉 개는 따로 연락하시겠다는 이성룡 전무님의 전언입니다.""이성룡 전무님과 직접 얘기하고 싶은데……."고수길이 말한다. 원 과장이 서슴없이 휴대폰으로 상대를 연결하여 고수길에게 건넨다.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고수길은 만족한 얼굴이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라고 시원시원 끝내 버린다. 두 말 없이 4억원이든 여행가방을 들고 나온다.그리고 일주일 후던가. 바로 그제 아침이다. 고수길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영림그룹이다."아니, 뭐라구요!"고수길이 기겁한 목소리로 반문한다."시체가 발견됐소. 시체의 신원도 밝혀지고……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죠? 피살된 시기로 보아,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됐소."그날 술주정하다가 조봉삼의 뺨 한 대로 절명한 노조 어느 간부의 썩은 시체 이야기다. 분명 신일 특수강 자재실 바닥을 파내어 감쪽같이 암매장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리 쉽게 발견될 수 있었단 말인가.

2006-12-1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46)

엘리시온 18그러다가, "어!"조봉삼이 놀라 마지않는다. 젊은이도 조봉삼을 본다. 조봉삼이 묻는다."보소, 나 모르겠능교?"젊은이는 그제야 감이 오기 시작했다는 듯 매우 당황한 표정이다."영림 비서실……."조봉삼이 입을 열기 바쁘게 그가 잽싸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스톱 사인을 보낸다. 그리고 주변을 살핀다. 알 만한 수작이다. 제발 그 얘긴 덮어 달라는 부탁이다.'그래, 그기 챙피헌 일이모 입 닫아 줄끼다. 하모, 영림 소리는 입 밖에 안 낼끼다.'조봉삼이 대신 손을 내민다. 그리고 말한다."악수나 하입시더."마지못해 젊은이가 조봉삼의 손을 잡는다."증말 반갑소. 증말…… 형씨는 안 그렁교?"젊은이가 한사코 입을 닫고 있는데도 조봉삼이 반갑다는 말을 반복해서 내뱉는다. 그리고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느냐고 스스로 놀라고, 또 개탄한다.'아무리 인연이 더럽다캐도, 해필 이런 데서 요렇게 만날 게 머꼬? 히힛.'조봉삼이 실제로 소리내어 웃는다. 눈빛은 개탄하면서도 입술만 낄낄 웃는다. '야, 니가 아무리 내허고 다른 종자라코 우기 봤자, 결국 니캉 내캉 한 구멍 동선기라. 하모, 우리는 똑같은 파렴치범이라 그 말이라. 안 그러나?'조봉삼이 원 과장으로 통하는 젊은이를 만난 것은 고수길과 함께 수금차 모처를 찾아갔을 때다. 신일 특수강 공장 건이다.3개월에 걸쳐 공장을 법원 집달리로부터 지켜 주고, 망한 회사의 강성 노조원을 쫓아내고, 다시 진입하려는 그들을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물리친 대가를 받기 위해서다.그러니까 신일 특수강을 영림그룹이 더 싼 값에 인수하기 위해 공장을 팔아 치운 전 주인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각종 세금도 포탈하고, 밀린 전기세도, 통신비도 떼 먹고 미지급 인건비도 은근슬쩍, 그리고 쓱싹 뭉개 버리기 위해 가상의 주인을 만든 것이다.영등포 일번지파의 고수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언필칭 고수길 이름이 정식 등기에 오른 것이다.고수길이란 이름은 얼마든지 무법자 역할을 해도 가능하므로, 경찰이건, 검찰이건, 법원이건, 어느 누가 공무로 나와도 안면몰수, 접근 자체를 원천 봉쇄한 터다. 쇠파이프면 쇠파이프, 가스총이면 가스총, 돌멩이면 돌멩이, 흡사 왜군으로부터 남한산성을 지켜내 듯 3개월을 꿋꿋이 방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결국 노조도 포기하고, 금융기관의 융자 회수를 위한 경매도 포기하고, 그래서 공장의 표준 가격이 땅에 떨어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이미 정해진 주인이 슬그머니 나와 공장을 인수하는 척하는 것이다.비공식적인 얘기지만, 내막인즉슨 이러하다. 신일 특수강 원 주인은 비록 경영을 잘못해서 회사가 망하게 됐지만, 선친이 피와 땀으로 일군 공장이므로, 오래 가동되기를 염원하여, 그런 의지와 사명감을 갖고 있는 기업을 찾던 중, 재계 굴지의 기업 영림을 만났고, 영림 또한 자금력에 맞춘다는 전략으로 그 따위 야바위 묘안을 짜 내게 되었다는 게 그들 나름대로의 구차스런 설명이다.기왕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영등포 일번지파와 영림그룹의 경우도 보통 인연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이건 필연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다.애초 고수길이 박준호를 설득하여 벌인 것이 주택 재개발 사업이다. 물론 영등포 일번지파가 자금을 투자하는 직접 개발이 아니다.

2006-12-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45)

엘리시온 17조봉삼이 혼자 헤죽거린다.'저것들이 다 엘리시온 허고 그 짓거리를 했단 말이제. 히히힛 우습다. 우찌 했을꼬?'그 작고 좁은 구멍에, 거웃도 제대로 다 자라지 않은 둔덕에, 그 비릿한 곳에, 반듯이 누우면 경사면이 없어져 버리는 그 밋밋한 젖가슴에, 코와 입술을 박고 끙끙댔단 말이지.조봉삼이 그들에게 한 걸음 두 걸음 거리를 좁힌다."안녕들 하쇼."엉거주춤 인사를 한다. 하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웬 떨거지가 지랄이냐 식이다."내는 조봉삼임더."외면 당하건 말건 조봉삼은 지방자치의원 후보 정견 발표하듯 또박또박 계속한다."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안캄니꺼. 이렇게 만난기 오디 보통 인연잉교? 우리 통성명이나 하입시더."그래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일어나거나 가까이 다가서서, 나 아무개요 하고 나서지 않는다. 나서기는커녕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별 거지 같은 놈 다 보겠네, 에잇 재수 없어.'휙휙 돌아앉아 버린다.조봉삼이 맨 먼저 다가간 쪽이 40대 배불뚝이다."인사 나눕시더. 누구신교?""왜, 그러슈!""……담배 한 대 얻어 핍시더.""다 떨어졌수다!"배불뚝이가 빈 갑을 사정없이 찌그러트려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친다."그러모, 내 거 피우소."조봉삼이 담뱃갑을 내민다. 그가 조봉삼과 두 팔목에 채워진 수갑을 번갈아 올려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와 안 피우요?""생각 없소.""에끼, 쫀쫀헌 자석, 남의 호의를 무시허다니? 와, 수갑 찼다꼬? 무섭나?"이번에는 흰머리 50대 쪽으로 다가간다."한 대 태우소."그 역시 대응조차 불결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려 버린다."교수님인기요?"고개를 젓는다."그러모, 공무원 맞는교?""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뭐 이런 개 뼈다귀가 있어?"눈알을 허옇게 흘기고 있다.'빌어묵을, 덩치 형사 말대로 너나 나나 한 구멍 동서 아니가. 그것도 여고 1년생 동서. 그래서 청소년 성매매범으로 현장에서 체포된 처지 아니가. 니나 내나 같은 처지에 귀한 몸, 천한 몸, 차별이 오디 있노? 씹헐, 수갑 찬 놈허고는 상대도 허기 싫다, 이기제? 아나 좆 겉은 놈, 이기나 쳐 묵어라!'조봉삼이 수갑 찬 손목으로 감자를 까 먹인다.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생각할수록 덩치 형사놈 말이 백 번 옳다. 저 작자가 최고학부 학생을 가르치는 사회 으뜸 지도층 인사란 말인가.'그래 학생들 앞에서도 그렇겠지만, 귀가 늦은 딸 운운 하며 여편네를 닦달, 자식 교육 어떻게 시키냐고 큰 소리로 근엄하게 나무랐을 테지. 험험험, 넥타이 고쳐 매며 온갖 위엄을 다 떨어댔겠지. 아마도 그래서 조봉삼을 불결하다는 식으로 외면했겠지. 나야 재수 더러워 어쩌다 이렇게 내몰렸지만 너 같은 부류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가까이 오지마. 제발 한 발자국도 떼지 마!'흰머리 50대는 분명히 그런 눈빛이다.'에라이 썩을 노무 자석, 퉤퉤퉤.'실제로 조봉삼은 카악 가래를 끓어 올려 시멘트 바닥에 타악, 소리나게 뱉어 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젊은이에게 접근한다."안녕하쇼."

2006-12-1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44>

엘리시온 "이 자는 내가 맡을 테니까, 올라 오는 놈은 혼자 처리해.""혼자는 안 돼! 인수인계하고 바로 내려오라구.""알았어."조봉삼을 덩치가 끌고 비상계단을 오른다. 10층 옥상이다. 옥상이라고 해서 훤히 트인 곳이 아니다.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조립식 창고 건물이 거지반 차지하고, 옥상 특유의 공간은 손바닥만하다. 그 허드레 창고 안이 청소년 성매매범을 임시 수용하는 대기소다.또 한 명의 형사가 대기소 앞을 지키고 있다. 사람 좋게 생긴 반 대머리 형사다."이 사람, 감시 잘해. 요주의 인물이야!"덩치가 조봉삼을 반 대머리에게 인계한 뒤, "씹헐 새끼들…… 또 왔어.""또 한 사람 왔다구?""전화받고 번개같이 찾아온 거야. ……앞으로 몇 놈이 더 올지 몰라. 전화만 받으면 페니스 움켜쥐고 내달리는 거야.""히힛.""담배 있어?""끊기로 하고 또 태워?""구토증이 나서 그래.""구토증이라니?"덩치가 담배연기를 휴─ 소리나게 내뱉으며, "열여섯 살짜리 여고 1년생 한 구멍 동서가 왜 이리 많아? 대학교수가 없나, 공무원 고급간부가 없나, 대기업 사원이 없나, ……이번에는 조폭까지…….""그게 세탠 걸 어떻게 해.""세태라니? 나 역시 그렇지만…… 집에 들어가 봐 그만한 딸년 안 키우는 애비 있나? 제 딸은 금이야 옥이야 손 탈까 봐, 눈이 버얼거면서 남의 집 딸은 그저 어떻게 요리해서 먹어 보나 침을 질질 흘리는 판이니, 이거야말로 개판 오 분 전 아니냐구.""오 분 전이 아니라 그냥 개판이지 뭐.""에잇 빌어먹을!""그나저나 순찰차는 언제 와?""순찰차 기다릴 거 없어. 이렇게 많은데, 아예 버스 대절하지 뭐.""그거 괜찮은 생각이네."한마디로 형사들은 즐겁다. 말하자면 즐거운 비명이다. 보나마나 일계급 특진 아니면, 적어도 특별포상은 따논 당상일 터다. 덩치가 반 대머리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짝, 소리나게 마주치고 옥상을 내려간다. 조봉삼이 보는 앞에서 차마 '파이팅'이라고 외치기엔 뭔가 멋쩍은 모양이다.창고 안에는 벌써 세 사람이 잡혀 와 있다. 머리가 허연 50대도 있고, 40대로 보이는 배불뚝이도 있다. 조봉삼 또래도 있다. 아니, 더 젊어 보인다. 뒷모습이 그렇다. 하나 아무도 수갑 찬 사람은 없다.조봉삼은 새삼스럽게 시계를 본다. 정확히 25분이다.엘리시온을 껴안고, 형사들이 도깨비인 양 욕실에서 튀어나오고, 한바탕 몸 싸움을 벌이고, 옥상으로 압송되고…….예측불허의 일들이 마치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 영화의 화면처럼 줄줄이 닥쳐왔지만, 그래서 긴 시간이 소요된 것 같지만, 실은 순식간에 그리고 한꺼번에 스쳐갔을 뿐이다.'그래, 시간은 아직 많아.'조봉삼은 마음을 다잡고 창고 속을 휘 훑는다. 잡혀 온 세 남자는 따로 따로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앉거나 서거나 하고 있다. 50대 흰 머리는 폐기처분한, 그래서 삐꺽삐꺽 소리나는 의자에 앉아 있고, 젊은 남자는 창문 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고, 배불뚝이 40대는 입구 가까운 시멘트 바닥에 질펀히 앉아 애꿎은 담배만 태워 없애고 있다. 담배 꽁초가 바닥에 하얗게 깔린 걸 보면 연거푸 한 갑 가까이 작살을 낸 것 같다.

2006-12-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43)

엘리시온 ⑮"아이고, 아이고오─행님!"조봉삼이 죽을 상을 지으며 뒤로 물러선다."왜 이래, 이치!"덩치 형사가 조봉삼의 어깨를 툭 친다.조봉삼이 또 한차례 소대가리 같은 머리를 번쩍 든다."내 말이요."조봉삼이 목에 힘을 잔뜩 준다."보소, 행사나리. 내가 누군지 아능교?""당신이 누군데?"덩치가 가소롭다는 듯이 묻는다."우리 행님이…….""형님이 누군데? 왜 말 못해?""우리 행님으로 말 헐꺼 가트모, ……야당 총재 감옥살이 헐 때 그 옆 감방에 있었다 카이. 보소, 행사나리. 국가 내란 음모라코 아능교? ……우리 행님이 바로 그 일로 감옥살이 헌기라. ……그래서 출감 헐 때, 난초 화분도 받았다 카이. 붉은 댕기 리본에 머라코 쓴 줄 아능교? 애국지사 아무개…… 그리 쓴기라.""그래서?"덩치가 따지듯 묻는다."그래서 어쨌단 말이야!""와, 나를 잡는기요?""잡다니?""와, 죄도 없는 사람한테 수갑을 채우고 지랄이냐 그기야!""그래서, 야당 총재한테 일러바치겠다, 그 말씀이신가?""씹헐, ……우리 행님이 알았다 카모…… 보소, 형사나리. 당신이 현장을 봤소? 내가 이 가수나 허고 허능 거 봤냐고!"엘리시온을 가리킨다."이 파렴치한 새끼가 누굴 가지고 노는 거야?" "노는 것이 아니라…… 내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이 가수나 허고 헌 적이 없다카이…… 내는 말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라모, 아닌기요!""이 새끼 또라이 아냐?""이 가수나 한테 물어보소. 내가 가수나 음부에 집어 넣었는지? 절대로 그런 일 없다 안 카요!"그러나 엘리시온이 없다.방금까지 선글라스 끼고 방 안 구석에 장식품인 듯 웅크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잽싸게 방을 나갔는지, 욕실로 숨어 들었는지 둘 중에 하나 일터다."빌어 묵을 가수나!"조봉삼이 한 번 더 목청을 높인다."진짜요! 내는 그 가수나 허고 성적 교섭을 안 했다 그 말이라!"실은 조봉삼이 생각해도 이건 생떼고 억지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그냥 미련한 소, 도축장에 끌려가듯 묵묵히 당할 수 만도 없지 않는가.이렇게 어이없이 붙잡힌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하기 때문이다.사내들이 조봉삼을 막 엘리베이터 앞으로 끌고 나왔을 때다.무전기가 터지고, 덩치 큰 사내가 그것을 받는다."뭐라구? 1층? 알았어."덩치가 동료에게 말한다."또 한 놈 도착했다는군.""또 한 놈? 햐, 정말 전광석화구먼. 전화건 지가 한 20분됐나?""영계라면 미치고 환장한 놈들이야.""암튼, 잘됐어. 아예 일망타진해 버리자구. ……한데, 어쩌지? 놈들이 너무 빨리 들이닥치는 통에 순찰차가…….""김 형사, 연락 없어? 도대체 뭘하는 거지?""길이 막혀, 옴짝달싹 못한대.""아무리 길이 막혀도 그렇지. 범인을 잡아 놓고도 압송을 못하다니!""할 수 없지 뭐."덩치가 턱으로 옥상 쪽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2006-12-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42)

엘리시온 ⑭"차라리 팔뚝을 하나 분지르든지, 다리 하나를 꺾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자의 생명인 그것에 손을 대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놈덜!"어느 날 새벽 조봉삼은 무심결에 옆에 누워 자는 박준호의 사타구니를 더듬어 본다.한데 이게 웬일인가. 당연히 없어졌거나, 있더라도 죽은 여름 해삼처럼 바닥에 눌러러붙어 있어야 할 그것이 망부석 같이 튼튼한 뿌리가 그것도 성질을 바락바락 내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햐, 형씨 살았씸더!"조봉삼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안 죽은 기라요!"귀청이 멍멍할 정도로 소리쳤으므로 박준호도 덩달아 일어나 앉는다."형씨, 고자가 아니라카이."조봉삼이 박준호를 껴안을 자세다. 박준호가 뒤로 물러나며 묻는다."고자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몹쓸 놈덜이…… 전기로다가 좆 끝을 푸지직 지졌다 캐서, 우리는 형씨가 고잔 줄 알았다 안 캅니꺼."어이가 없는지 박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조봉삼은 모두 잠든 신새벽에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벌떡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잡범 수감자들을 휘 훑으며, 선거 유세 강사처럼 또록또록 말한다."불행중 다행인 기라요. 남자가 남자 구실을 몬헌다는 거슨, 죽은 시체나 다름 없다 안 카요. 헌데 형씨는 살았씸더. 증말 축하합니더!"녀석은 손뼉까지 짝짝 친다. 그러나 아무도 조봉삼을 따라 박수치는 사람이 없다.비록 들추면 온통 곰팡이투성이긴 해도 한 매트리스에서 3개월을 살았다는 것도 대단한 인연이다.아니, 그 신새벽의 해프닝으로 하여, 박준호와 조봉삼은 마음과 마음이 벌써 동했다고 해야 옳다. 박준호가 한 살 위였으므로 형님이 되고, 조봉삼은 스스로 동생을 자처한다.물론 조봉삼이 먼저 출감했고, 출감 뒤엔 박준호를 지성으로 면회하고 영치금도 심심찮게 넣어 주곤 한다.일 년 가까운 재판 끝에 기소 유예로 박준호가 풀려나게 된 것은 순전히 광화문에서, 서울역에서 열호했던 정치인의 간곡한 배려 덕분이다.박준호가 출감하는 날, 조봉삼도 생두부를 사 들고 찾아갔지만 한 순간도 박준호를 차지할 수가 없다.교수들로 불리는 몇몇 신사들이다. 똑같이 도수 높은 안경을 낀 그들은 박준호를 껴안으며 애국지사라고 치켜세운다.어떤 청년이 은박지로 싼 난초화분을 박준호에게 안기며 말한다."출소 기념으로 총재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그날 불고깃집에서 몇몇 신사들과 저녁을 먹은 뒤 2차로 생맥주집을 거쳐, 마지막 포장마차 나무의자에 앉았을 때는 단 두 사람뿐이다. 박준호와 조봉삼이다. "넌, 어디로 가니?"박준호가 묻는다."갈 데 없씹니더.""갈 데가 없다구?""네, 행님.""그럼, 날 따라와."은박지로 싼 난초 화분을 젖먹이 아이 안듯 가슴에 품고 박준호가 앞장선다. 조봉삼이 말한다."고맙씸더.""야, 새꺄."박준호가 말한다. "결국 또 계집질이냐? 넌 어쩔 수 없는 놈이야. 이 사회와 격리되어야 하는 파렴치범이야. 아직 비린내도 안 가신 순진한 여학생을 꼬여 내 그짓을 해? 너 오늘 잘 걸렸어. 아예, 다시 좆 뿌리 못 놀리게 전기로다가 푸지직 지져 버려야겠어!" 박준호가 전기 울타리로 쉐에 쉐에 흐르는 고압 전기 코드를 들고 조봉삼의 사타구니를 겨냥한다.

2006-12-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41)

엘리시온 ⑬대한민국에도 봄은 왔다느니, 너희가 민주화를 아느냐느니, 한창 축제 분위기로 몰아가다가, 어느 날 아침, 흡사 푸근했던 만추의 가을을 된서리로 짓이겨 놓듯, 가증스런 철퇴가 내리쳤던 그 황당했던 봄날 아침.민주화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의 인파 대신 육중한 탱크가 마치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군데군데 놓이고, 최루탄에 항의하여 돌멩이, 벽돌 조각을 날려 보내며 내지르던 아우성 대신, 둔중하고 질서정연한 군홧발 소리가 시청 앞 광장을 완전 장악해 버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웅성웅성, 시끌벅적하던 서울은 하룻밤 사이에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하고 고요하다.박준호는 그런 황당한 늦은 봄날 어느 저녁에 조봉삼이 갇힌 2사 9방으로 던져지 듯 수감된다. 새로 들어올 사람에 대한 정보는 같은 방 수감자들이 더 잘 안다.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시시콜콜 모르는 대목이 없다. 박준호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남영동에서 특별조사를 받았기 때문일까. 물 고문에다, 전기 고문에다, 그 밖에 고문까지 받아 이미 생식 능력을 잃게 되었노라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린다.그만큼 모진 고문을 당할 정도의 거물급은 으레 독방으로 가기 일쑤인데, 웬일인지 박준호는 잡범 숙사로 송치된다. 하지만 죄목을 보면 또 아니다. 폭력치사나 사기횡령이 아니라 국가 내란 음모다.그래서 선배 잡범들 어느 누구도 박준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저 사람 왜 독방 안 가고 여기 왔대?""조폭이라서 그렇잖아.""조폭?""영등포 일번지파래요.""영등포 일번지파?""주먹으로 영등포, 마포, 신촌을 평정했다는 거 아뇨.""주먹이 그리 쎈가?""무도인이니까.""무도인?""태권도, 합기도, 유도, 검도 합계가 십구 단이래.""햐, 대단하구만… 하긴 몸이 잘 빠진 거 보면…….""체육관을 운영하다가 유혹에 넘어가 조폭이 됐다누먼.""생긴 것은 깡패 같지 않은데…… 알 수가 없구만.""알 수 없는 건 그뿐 아녀, 조폭 주제에 무슨 민주화 운동이라고 야당 총재를 따라 댕겼대요.""아, 그래서 국가 내란 음모로 잡혀 왔구먼.""그래도 다 자백했는데, 저 사람만 끝까지 불지 않아서 고문관들이 생식기를 전기로다가 지지직…….""아이고머니!"듣던 사람들이 똑같이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감싸안으며 비탄스런 목소리로 말한다."오죽하면 고자가 됐겠어?"그래서 그런지 박준호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그는 잠만 자는 게 아니다. 새근새근 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몸을 뻣뻣하게 비비 꼬며,"야이 새꺄! 배후가 어딨어! 배후는 나야, 새꺄!"잠꼬대 같은 비명을 내지르곤 했는데, 제 비명 소리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가…… 다시 스르르 눈이 감기고, 마치 죽음으로 빠져들 듯 의식을 놓곤 하는 것이다.하필 그는 같은 매트리스를 쓰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조봉삼이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조봉삼은 다른 것보다 생식기에 이상이 생겨 불구가 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남자의 상징인 생식기를 다 못쓰게 만들었단 말인가.괜히 조봉삼이 자기 일처럼 분개해 마지않는다.

2006-12-1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40)

엘리시온 ⑫바로 그때다. 욕실문이 와당탕 열리고 웬 남자 둘이 튀어나온다. 이거야말로 혼비백산이다. 바지를 내리다 말고, 조봉삼이“당신덜 머야?”대련 자세를 취한다.“꼼짝 마!”뭔가 번쩍 쇠붙이를 꺼내며 다른 사내가 일갈한다.“서울시경에서 나왔어!”“서울시경?”‘이런 빌어묵을! 함정이었구나, 함정! 이 요망스런 계집! …아무렴 형사놈들이 펴 놓은 그물에 이렇게 쉽게 걸려들 수가 있나. 후배놈이 조심하라고 경고했을 때, 그만 발을 뺐어야 했는데….’하나 엘리시온만 원망할 때가 아니다. 조봉삼은 일초의 틈새도 주지 않고 허공중으로 몸을 솟구친다.하나 천장이 너무 낮았고, 방 안 역시 협소해서 자유자재로 몸을 날려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운신할 공간이 없다.합기도 2단에다 태권도 5단, 유도 2단. 도합 9단의 고단자(高段者) 조봉삼도 이런 상황에서는 무술 그 자체가 무용지물이다.어디 그뿐인가. 허리띠도 풀어 헤친 몹시 불안정한 상태가 아닌가. 그래도 한 사내는 옆발 차기로 쓰러뜨렸지만, 다른 한 사내가 조봉삼을 뒤에서 완강히 껴안았으며, 쓰러졌던 사내가 부지불식간에 벌떡 일어나 조봉삼의 손목에 철컥, 수갑을 채워 버린다.수갑뿐 아니다. 무기류 휴대를 염려한 탓인지 몸 수색을 한다. 우선 핸드폰과 지갑이 압수된다.‘햐, 여권하고 비행기표 안 가져오길 천만다행이야. 역시 박준호 형님은 선견지명이 있어.’“청소년 성 매매 범으로 체포한다.”형사가 일갈한다.“청소년 성 매매라니?”조봉삼이 트집을 잡고 늘어진다.“이 사람이 말이 많아?”“아닌 밤중의 홍두깨 아닝교!”“아닌 밤중의 홍두깨? 이거 정말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하는 놈이구만.”“놈이라코?”조봉삼이 훅, 머리를 쳐든다.“에이, 씹헐새끼!”둘 중 덩치가 좋은 편인 사내가 조봉삼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피스톤처럼 날린다.“헉!”“남대문 열고 좆 망태까지 꺼내 놓은 새끼가 어디다 아가리를 놀려!”이번에는 신경질적으로 생긴 사내가 아직도 빵빵하고 벙벙한 조봉삼의 사타구니를 향해 냅다 발 공격을 한다.“아이쿠!”급소를 정통으로 맞았으면 그대로 황천길이다. 하나 조봉삼이 살짝 몸을 비켰으므로 대퇴부 타격이 고작이다. 그래도 급소를 맞은 척해야 한다. 그래야 조봉삼의 옆 발길질에 대한 분풀이가 될 테니까.“새꺄! 넌 현장범이야 알았어?”사내가 일침을 박는다. 그제야 퍼런 불 튀던 눈에 살기가 좀 빠진 것 같다.사내가 손바닥을 턴다. 그리고 한 번 더 일갈한다.“청소년 성매매범은 무조건 구속 수사야! 알겠어?”미치고 환장할 일이다.조봉삼은 눈을 감는다. 먼저 박준호의 얼굴이 떠오른다. 조봉삼이 박준호를 처음 만난 것은 구치소 안이다.조봉삼이 폭력과 여자 문제로 두 번째 잡혀 들어 갔었으니까 한참 유행하던 민주화 운동이 막바지 오름세로 치솟을 때다. 서울역이며, 광화문이며, 수만 명씩 몰려 나와, 민주화의 대명사인 정치인 이름을 환호하며, 서울 골목골목을 온통 들썩들썩하게 했던, 그 해 따라 유난히 찬란했던 봄.

2006-12-0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39)

엘리시온 ⑪죄명은 부녀자 강간뿐 아니다. 여인이 반항한다고 해서 쥐어박은 주먹 한 방에 그녀는 전치 3주의 상처를 입었으며, 억지로 감행한 폭력 역시 그녀의 하체를 대여섯 바늘 꿰매지 않으면 안 되게 했다. 그래서 붙은 혐의는 부녀자 강간에다 상해치사 폭력범이다.뭐랄까. 표준을 훨씬 능가한 황당한 치수 때문이다. 조봉삼은 자제한다. 아무리 십 몇 만원의 사례비를 건네고 만나는 합의된 관계라 하더라도 상대는 젖비린내 나는 고등학교 1학년짜리다.게다가 원조교제 단속 운운 하는 신문기사가 심심찮게 보도되는 마당에 혹시 잘못 노략질했다가 핏줄이라도 터져 흐르게 하여, 병원에 싣고 가는 불상사가 생기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서, 어금니 깨물고 참는게 능사여. 하모, 순간의 잘못 선택이 평생 신세를 조지능기라.’그래도 서너 차례 더 주변을 노략질해 보다가 불쑥 위쪽으로 들어 올린다. 조봉삼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억제하는 데도 에너지가 발산되는 모양이다.그녀는 생각 외로 능난하고 능숙하다. 그녀가 마치 남의 말하듯 입을 연다.“아저씬 귀공자야.”“머라코?”“귀공자라구요.”“귀공자라니?”“…귀엽지도 않고, 공부도 못하면서, 자지만 엄청 크니까.”조봉삼은 지금 콜택시에 앉아 혼자 푸하하 웃는다. ‘암, 내가 진짜 귀공자야, 어렸을 때부터 귀엽다는 소리 한 번 들은 적 없고, 공부 역시 지지리 못했어. 한데 이렇게….’조봉삼이 택시 바닥을 자랑스럽게 내려다 본다.택시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신호등 때문이다. 제기럴, 시간을 본다. 벌써 십분이 후딱 지나가 버리고 없다. 두 시간이면 잠깐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박준호와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이 그 약속이다. 비행기는 정확히 뜬다. 기다려 주지 않는다.“다른 샛길은 없는교?”“합정동은 이 길이 젤 빠릅니다.”어련히 알아서 갈까만 조봉삼은 초조하고 조급하다. 그래도 이리저리 차선을 바꿔 곡예 운전을 한 덕분에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모텔을 제시간에 찾아 들어간다. `707호실이라 했제?’그래도 못 미더워 카운터의 중년 여인에게 묻는다.“707호 사람 들었십니까?”“몇 호실이라구요?”가는 귀먹을 나이도 아닌데 묻긴 멀 또 묻노? 조봉삼이 중년 여인을 빤히 보면서, “707호실이라 안 카요.” 괜히 큰 소리로 반복한다.“아, …네.”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석연찮다. 미성년자에게 열쇠를 맡긴 방이라서 그럴까.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그리고 방 앞에서 벨을 누른다. 문이 열린다. 엘리시온이다. 알몸이거나, 속옷차림인 줄 알았는데 옷을 다 입고 있다. 그래도 요염하다. 조금 더 발육을 한 탓일 터다.방문 자물쇠를 철컹 채우며 조봉삼이 그녀를 와락 껴안는다.“오래, 기다릿나?”그녀는 대답이 없다.“와, 화난기가?”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손톱 소재는 다 헌기가?”또 고개를 끄덕인다. 발랑 까진 평소의 엘리시온 같지가 않다.“와, 오디 아푸나?”조봉삼은 옷을 벗기 시작한다. 우물쭈물 지체할 시간이 없다.“니도 벗거라! 와 그리 서 있노?”“아저씨….”“와? 또 담배 주까!”“아녜요. 미안해요.”“짜아식, 미안허긴, 우리끼리!”

2006-12-0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38)

엘리시온 ⑩“아먼, 니는 이 조봉삼 박사의 수제자 깜이라 그마.”“무슨 박산데요?”“그야, 파라다이스 섹스학 박사지.”“…미안하지만요. 전 그런데 관심없는데요.”“어허, 어른이 말허모, 못 이긴 척 듣는기야!”“….”“그러모, 니 관심은 머꼬?”“내 관심은요…꼭 그걸 말해야 돼요?”엘리시온이 자발자발 놀리는 입술이 그럴 수 없이 귀엽다. 조봉삼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한다.“하모, 얘기 해 삐라. 서로 관심사가 먼지 아는 기 유리헌기라. 그래야 기쁨이 배가 되는 기라.”“기쁨이요?”“니, 운우지정이란 말 아나?”엘리시온이 고개를 흔든다.“운우지정의 뜻이 모냐카모….”갑자기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조봉삼의 가방 끈으로는 알아듣기 쉬운 설명이 용이하지 않다. 그가 말한다.“그마, 말로 헐꺼 읍다. 니 관심사가 뭔지 내가 알모, 우리가 운우지정 경지에 들어가는데 지장이 읍다 안 카나?…어서 말해 보그라.”드디어 엘리시온이 입을 연다.“나는요…속 썩여 주는 게 관심이에요.”“속썩여 주는 거?”“그래요.”“누구 속을 썩인단 말이고?”“그냥 있어요. 그냥…더 이상 물어도 절대 대답 안 해요.”그녀가 작은 입술을 깨문다.“으이그, 요 귀여운 거!”조봉삼이 또 한차례 진저리를 친다.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알았다, 그마.”라고 말하고 손가락 다섯 개의 헐거운 빗으로 군데군데 노란 염색기가 섞여 있는 머리를 빗어 올린다. 머리카락이 허공에 솟았다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린다. 비록 두꺼비처럼 뭉툭하긴 해도 그의 손은 날렵하고 가볍다.요염하리라고 상상했는데 웬걸 그렇게 엉성하고 설익을 수가 없다. 흡사 완공이 덜된 실내장식 같다.특히 골격이 그러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엉덩이 부분의 관골과 장골의 마디라든가, 가슴 부분의 늑연골 파임의 뚜렷함은, 아직도 발육 중임이 확인되는 모습이다.또 있다. 젖가슴이다. 분홍빛 봉오리가 튀어나온 게 아니라 안으로 접혀 있다. 원형의 동산도 반드시 누우면 경사면이 아예 없어져 버린다. 밋밋하다.한마디로 비릿하다. 하나 이런 비릿함을 선호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비릿함 그 자체를 싱싱함으로, 혹은 팔팔함으로, 혹은 맑음으로, 부드러움으로, 차별화해서, 어떤 위험 부담을 각오하고서라도 기어코 비릿한 것만을 취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조봉삼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뭐랄까. 아직 때가 타지 않은, 아니 포장도 채 벗기지 않은, 더 천박한 말로 아무 손에도 거친 적 없는 아다라시를 조봉삼이 바야흐로 시식할 찰나다.그 얼마나 야릇하고 짜릿하고 뿌듯한 경험인가. 조봉삼 역시 그런 감흥에 몸서리를 친다. 실제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다.조봉삼의 어깨에 첫 번째 별 계급장을 달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야릇하고 짜릿하고, 뿌듯한 이른바 몸서리쳐지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감흥 탓이다.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던가. 패싸움에 쫓겨 골목 안으로 뛰어 들었다가 문득 발견한 어느 여인의 잠자리. 모기장 속인데도 붉은 전등을 켜 놓았으므로, 게다가 벌거벗다시피 한 몸이어서, 도무지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조봉삼은 더위를 못 참아 분수로 뛰어들 듯 그곳을 첨벙 뛰어든다. 한데 재수에 옴이 오른 듯 하필 그 시간에 여인의 남편과 시동생들이 귀가했으므로, 조봉삼은 용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됐다.

2006-12-0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37)

엘리시온 ⑨ 어느 누가 그런 그녀를 여고 1년생이라고 하겠는가. “강이 보이는 호텔이 좋겠어요.” 그녀의 첫 마디다. ‘어쭈, 호텔씩이나?’ 조봉삼이 입을 연다. “강이 보이는 데라? …그래, 생각났다. 커튼 열면 강물이 한 눈에 팍, 오는기라… 근데 빌어묵을 장급 아니가? 그래도 괜찮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모, 요즘은 장급이 오래된 호텔보다 백 번 낫다 안 카나.”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합정동이다. 아무리 뻣뻣한 병사라도 총알이 날아다니는 격전지에 내려놓으면 일순에 기가 꺾이듯 그녀도 침대와 텔레비전과 비디오와 냉장고, 화장대가 빽빽이 배치되어 있는 방에 들어서자 금세 꼬리를 내려 버린다. 게다가 나이를 위장하기 위한 잡다한 치장, 이른바 선글라스, 모자 등을 벗어 버리자, 마치 이제 막 차기 시작한 양배추의 속살처럼 비릿한 그녀가 톡 불거진다. 역시 여고 1년생이다. 뻔뻔하게, 작은 궁둥이를 요리조리 뒤틀며 엘리베이터에서 방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활활 옷을 벗어 던질 기세였지만 막상 조봉삼이 자물쇠를 철컹 채우고, 그녀 곁에 가까이 다가서자, 친친 감은 쇠사슬인 양 팔짱을 꼭 낀 채 꼼짝않고 서 있기만 한다. 그녀는 이제 금방, 무자비하게 짓이겨 놓은, 말 그대로 치열한 전투 흔적이 너무나 적나라한 잔주름을 억지로 펴 놓은 침대 시트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그래, 네 눈이라고 뭐가 안 보이것나?’ 조봉삼이 회심의 미소를 날린다. 그리고 그녀처럼 아직도 땀자국이 마르지 않은 시트를 본다. “다리 안 아푸나? 앉그라.” 조봉삼이 장식용인 듯 형식적으로 놓여 있는 두 개의 의자를 가리킨다. 그래도 그녀는 반응이 없다. “앉으라캐도.” “아저씨.” “오, 그래. 머 도와주까?” “담배 한 대 주세요.” “담배도 피우나?” “줄 거예요. 안 줄 거예요?” “하모 주고말고. 자아-.” 조봉삼이 먼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 길게 내뱉고 나서, 아니 필터에 자신의 타액을 듬뿍 묻인 다음, 그것도 그녀의 손에 들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녀린, 그러나 촉촉이 젖어 있는 입술에 억지로 후벼박듯 거칠게 물려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다기보다 그냥 가득 머금었다가 시나브로 풀풀 빠져나가게 한다. 그러다 보니 기침이 콩콩 뒤따른다. 불량소녀처럼 멋지게 폼을 잡아 보지만 아직은 생짜가 분명하다. 조봉삼이 제법 준엄하게 말한다. “그만, 이제 공부나 허자 그마.” “공부라뇨?” 엘리시온이 의외라는 듯 조봉삼을 본다. “사람 공부… 인간 몸 구조가 우찌 형성되어 있는가… 생식 기능은 또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녀가 피식 웃는다. 조봉삼은 웃지 않는다. “다른 공부는 못해도 통과 통과 그냥 지나 안 가나? 허지만 이 공부 제대로 몬허모 인생 낙오자에다 패배자에다 평생 불행허게 산다 아니가? 내 말 무신 뜻인지 알 것나? …와 대답이 없노? 대답허기 싫으모 고개라도 끄덕끄덕 해 삐라 그마… 니, 나 같은 인생 선배 잘 만난기라. 이 조봉삼 교수가 니랑 수업 헐 과목은 생명과학과 철학을 생각허는 파라다이스 아니가?”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아저씬 생긴 거 보다 더 재미있네요.” “그렇제? 니는 참말로 아이큐가 조타.” “아이큐가 좋다구요?”

2006-12-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36)

엘리시온 ⑧말 그대로 오버액션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봉삼은 너무 확연하다. 큰 체구에다 우락부락함에다가 필요없이 큰 목소리에다, 아무리 위장을 해도 그 본색이 대번 튀어나와 버린다. 누가 봐도 야, 저건 아니구나, 싶은데 조봉삼 머리 위에 앉은 박준호는 어떻겠는가. 그가 조용히 입을 연다.“너, 어머님 아니고 유순자지?”예상대로다. 조봉삼이 펄쩍 뛴다.“행님!…날 멀로 보는교? 아닙니더!”조봉삼이 억울하다는 듯 소대가리 같은 머리를 절절 흔들며 말을 잇는다.“이 중차대한 시점에서 우찌 유순자를 가지고….”유순자는 죽고 못 사는 조봉삼의 애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분당에 복덕방 사무소를 차린 부동산 소개업자의 부인이다.박준호가 입을 연다.“중차대한 줄은 아는구만.”“아이고오, 행님도 내가 누군교? 조봉삼이는 절대로 행님 배신 안 헙니더.”“배신은 왜 갑자기 나와! 이봐.”핸들 잡은 고수길이 “네, 형님” 대답한다.“봉삼이 차 세워 줘. 대신 다음 비행긴 안 돼. 네 시에 뜨니까. 이번 것은 아직 두 시간 반 여유 있어.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지 않아?”“네, 행님. 두 시간이모 충분히 끝낼 낍니더.”“여권하고 비행기 표는 어딨어?”“내가 갖고 있씹니더. 와요?”“나한테 맡겨.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승용차가 도로변에 ‘끼익’ 소리를 내며 선다.“공항으로 바로 나와. 2번 게이트로. 짐은 미리 부쳐 놓을 테니까. 그리고 조심해. 괜히 객기 부리다가 비행기 놓치고, 잡히면…너 혼자 다 뒤집어 쓴다고. 알았어?”“행님!”조봉삼이 문을 닫다 말고 차 밖에 우뚝 선다.“행님, 나 말입니더, 행님 지시대로 유순자허고 쫑 했십니더. 참말임더!”“알았어.…그거 진작 얘기했잖아?”“그래도 행님은 조봉삼을 의심허능 거 아닙니꺼.”“글쎄, 알았다니까!”승용차가 금세 저만큼 달아났다.“아싸라 비아!”조봉삼은 쾌재를 부른다. 손바닥에 팩, 침을 뱉는 시늉을 한 뒤 그것을 불이 나게 비빈다. 기분이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지나가는 콜택시를 잡고 올라앉는다.“합정동으로 갑시더.”시간이 없다. 촌음도 아껴 써야 한다.“햐, 살다 보면 요행도 다 만나는구만.”기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에도 조봉삼은 그러했다. 되도록 편하게 그리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녀와의 긴 채팅 끝에 결국 도킹을 끌어 낸 태권도 후배 녀석 왈,“선배님. 걘 보통 아녜요. 웹사이트에서 여럿 만났지만 이런 앤 첨예요. 까져두요 너무 발랑 까졌다니까요. 조심하세요, 선배님.” 했지만, 조봉삼은 “내는 보통 아닌 가수나를 더 선호허는 기라”라고 후배 녀석의 충고를 일축했던 것이다.만나는 장소도 이색적이다. 압구정동 성당 앞이다.물론 그녀 쪽에서 정한 곳이다. 그래도 조봉삼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제가 통통 튀어 봐야 여고 1년생 아닌가. 아먼, 나이가 어디 가겠어?’조봉삼은 생각한다. 눈부신 세일러복에, 무거운 책가방에, 단발머리에 검정색 단화(短靴)에, 흰 양말에, 수줍은 듯 입을 막고 돌아서서 웃는 천진스런 아이….한데, 그게 아니다. 그렇게 뻔뻔하고 당당할 수가 없다. 가방 대신 어깨에 걸친 배낭도 그러하고, 머리에 눌러 쓴 샤넬모자하며, 알루미늄 색으로 죽어가는 저녁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 하며…

2006-12-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35)

엘리시온 ⑦“뭐야!”박준호가 번쩍 눈을 뜬다.“행님!”“왜 그러냐구?”“나, 여그 내리 주이소!”“뭐? 내려 달라구?”“예, 바쁜 일이 생겼습니더, 차 세워 주이소.”“차를 세우다니? 너 미쳤어?”“안 미쳤씸더.”“그런데 왜 차를 세워?”“내는 다음 비행기로 가모 안 되겄능교?”“뭐라구?”“바쁜 일이 생겼다 안 캅니꺼.”“이 자식, 이거 완전히 갔구만. 야, 조봉삼!”“네, 행님.”“우리가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거야?”“비행장 가는 깁니더.”“비행장은 왜 가느냐구?”“도망가는 거 아닙니꺼.”“아이구, 이 황소 같은 놈!”박준호가 조봉삼의 머리를 쥐어박고 나서 계속한다.“이것 봐, 우리는 도망가는 게 아니라 쫓겨 가고 있어. 그것도 시간 싸움으로. 어쩌면 우리 이름이 출국 금지 명단에 올라 있을지도 몰라. 아니, 우리를 잡으려고 공항에 형사들이 쫙 깔렸는지도 모른다 그 말이야. 다시 말해서 다음 비행기는 타고 싶어도 탈 수가 없는 쪽 팔리는 신세가 된다 그거야! 알겠어?”사실이다. 지금 이 시간 이렇게 평화롭게 승용차를 몰고 공항으로 내달릴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영림그룹의 큰 손이 검찰 수뇌부와 은밀한 고리가 잘 꿰어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영림이 나몰라라 돌아 앉아 버렸으면, 어느 새벽에 수갑 들고 들이닥친 형사 특공대의 역습에 철컥 철컥, 저 영광의 팔찌를 차지 않으면 안 되었을 터다.더구나 조봉삼 같은 경우는 어느새 별이 넷이다.그러니까 네 번씩이나 교도소 콩밥 맛을 봤다는 얘기다. 다섯 번째 별은 별이 아니고 무쇠 철퇴다.도무지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대책 없는 범죄자만 수용하는 청송 감호소 행이 분명하다. 법정에서 네 번째 선고를 받으며, 또 잡혀 올 경우 종신형 판결을 내리겠다는 판사의 협박이 공갈 같지가 않다.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쩌면 이렇게 자유의 몸으로 훨훨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꿈꾸는 것 같다.그것을 모르는 조봉삼이 아니다. 누구보다 절실히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봉삼은 박준호의 준엄한 꾸짖음에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행님, 이건 내 개인 문젭니더. 들어 주이소. 이 조봉삼, 바보 천치 아닌기라요.”너무 당당히 나서자 박준호도 주춤한다.“그래, 그 개인 문제가 뭐야?”“어무이가 상경했다 안 캅니꺼.”“어머니? 이번 여름에 뵙고 왔잖아?”“어무이들은 다 그런기라요. 하나밖에 읍는 아들이 외국 나간다코….”“뭐? 외국? 그 얘기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잖아? 한데 시골로 전화를 했단 말이야?”“아, 아닙니더.”“아니긴 뭐가 아냐?”“그마, 어무이가 올라 왔씸더.”“얼렁뚱땅 넘길려고 하지 마.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핸드폰도, 시외전화도 일절 사용하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는 이미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피의자들이란 말이야. 백 프로 도청당하고 있다니까! 그래도 내 말 못 알아듣겠어?”“전화 안 했다 안 캅니꺼!”조봉삼이 되레 목소리를 높인다. 황소 눈깔도 치껴 뜨고 있다.

2006-12-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34)

엘리시온 ⑥조봉삼은 또 한 번 뒷좌석을 돌아본다. 박준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조봉삼이 휴대폰 소리가 안 들리도록 몸을 돌려 속삭이듯 말한다.“니 진짜 엘리시온, 맞제?”“진짜 엘리시온이라뇨? 엘리시온이 나 말고 또 있어요?”그녀는 애교투성이다. 보지 않아도 귀엽게 흘기는, 너무도 선명한 눈동자가 조봉삼을 압도시킨다.‘콱, 쎄리삘끼다, 이쁜 거!’조봉삼은 진저리를 친다. 벌써 작고 미끈하고 하얗고 향기롭고, 마치 6월달 아침 분홍장미 같은 엘리시온의 볼기짝을 쓰다듬는 기분이다.“그기 아니고,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아니가? 니가 나한테 전화를 다 때리고!”“바쁘세요?”“지금 내 차 속에 앉아있는기라.”“어머, 운전중이세요?”“나 운전 거튼 거 안 헌다 안 카더나? 전용 운전수가 따로 있는데 와, 운전을 허노?”조봉삼이 핸들을 잡고 있는 고수길을 힐끔 본다. 본인을 옆에 두고 전용 운전수라고 허풍을 떤 사실이 멋쩍다. 고수길 역시 ‘운전수라니?’ 하는 떨떠름한 표정이다. 그렇다. 고수길은 조봉삼보다 한 계급 더 높다.정확하게 영등포 일번지 아니, ‘구길사’의 부두목이다. 싸움판에서 주먹의 위력은 없지만 대신 그는 머리가 비상하다. 감히 삼국지에 비견할 수 있을까만, 어쨌든 제갈량 같은 역할이라고 해야 옳다.그가 일감을 물어 온다. 그것도 돈이 되는 일감이다. 박준호는 고수길이 가지고 들어오는 일감 중에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을 선택해 부하들을 몰고 현장 출장을 떠난다. 물론 돈의 수금도 고수길이 하고, 돈 관리 역시 고수길이 맡아 운영한다. 그러니까 고수길은 영등포 일번지파 자금담당 부사장인 셈이다. 그래서 그의 명함은 복잡하다.영등포 일번지 체육관 명예 관장에다, 일번지 기획의 부사장에다, 일번지 장학회 부회장, 태극권 연맹 부총재에다, …직함이 너무 많아 명함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다. 물론 영등포 일번지파 실제 서열도 고수길이 둘째고, 조봉삼이 셋째다. 그래도 동갑에다, 생일이 두어 달 늦은 터라, 고수길이 조봉삼을 함부로 서열 운운하지 못한다. 그냥 야자 하는 사이다. 조봉삼이 고수길에게, ‘야, 한 번 봐 주라’ 식으로 윙크를 한다.“미친 자식!”고수길이 가소롭다는 듯 한마디 더 보탠다.“육갑, 그만 떨어라!”“아이고, 수길이 동지, 통과 통과해 삐라 그마!”숫제 애원조다. 조봉삼이 상대가 듣지 못하도록 휴대폰을 막고 있는 중이다.“그럼은요.”이쪽 상황을 알 리 없는 그녀가 말을 잇고 있다.“운전수한테 말하세요. 방향을 합정동으로 돌리라구요.”“합정동?”“러브 모텔 알죠? 그날 아저씨랑 함께 있었던….”“뭐라코? 지금 니 거기 있는기가?”“그날 그 방이에요. 707호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방.”“니 혼자가?”“그러믄요. 샤워 다 하구요. …지금 손톱 손질 하구 있어요.”“알았다!”“삼십 분 안에 올 수 있죠?”“알았다 안 카나!”휴대폰을 끄자마자 다시 뒷자리로 고개를 돌린다. 아니, 고개가 아니라 채웠던 안전벨트까지 풀어 버리고 아예 박준호를 향해 몸을 돌려 앉는다. 그리고 기압이라도 넣듯, “행님요!” 꽥 고함을 지른다.

2006-11-30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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