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233)

엘리시온 ⑤이번에는 짝코가 면상을 날린다. 금방 뒤뚱 넘어 갈 것 같은데도 곡예사인 양 놈은 위태위태 잘도 견딘다.“야이, 개새끼들아. 씹헐 놈들아!”영락없는 돼지 멱따는 소리다. 흡사 링 위에 오른 선수라도 되는 양 허공에 두 주먹을 허우적허우적 휘젓기까지 한다.“에레기 뱅신 같은 놈!”보다 못해, 정말 보다 못해, 조봉삼이 놈의 뺨을 한 대 후려친다. 그제야 썩은 나무둥치 무너지 듯 놈이 땅바닥에 핑그르르 쓰러진다. 아니, 쓰러지기만 하지 않는다. 온통 피투성이인 얼굴을 든다. 그리고 무릎을 세운다. 구경꾼처럼 둘러선 조봉삼과 경표와 짝코를 휘둘러 본다. 이빨 틈새로 피가 줄줄 흐른다. 그가 저주를 퍼붓는다.“이 비열한 놈들, 더러운 놈들!”“뭐 이런 게 다 있어.”경표가 가당찮다는 듯 발끝으로 놈의 무릎을 걷어찬다. 놈이 또 한 번 앞으로 푹 거꾸러진다. 그뿐이다. 그리고 놈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죽을 만큼 심하게 얻어맞지 않았으므로, 곧 일어나겠지 예사로 생각하고, 의무실 침상에 눕혀 놓았는데 웬걸, 이 일 저 일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다시 봤더니, 말 그대로 팔 다리가 동태처럼 빳빳이 굳은 채 눈깔을 허옇게 부릅뜨고 죽어 있는 것이었다.경표가 먼저 놈의 죽음을 발견하고 조봉삼과 박준호가 있는 공장장실로 뛰어 들어온다.“형님, 큰 일 났습니다.”“큰 일이라니?”“아까, 술 처먹고 땡깡 부리던 놈 있잖습니까.”“그래, 노조 간부라는 놈? 그놈이 왜?”“봉삼이 형님 주먹 한 방에…그만 갔습니다.”“가다니, 그기 무신 소리고?”조봉삼이 용수철처럼 반응한다.“죽었다니까요.”경표가 대답한다.“죽어?”“네, 형님.”“아무리….”천하의 조봉삼이도 기가 막히는지 경표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니, 거짓말이제? 그렇게 썽썽 허던 노미 죽기는 와 죽노?”“형님 펀치 한 방에 갔다니까요.”“그기 정말이가?”“정말입니다, 형님.”조봉삼이 뒤로 주춤 물러선다. 그리고 박준호를 힐끔 보고 나서 말한다.“아무렴…내는 뺨 한 대밖에 때린 거 읍따.”“하지만….”“하지만 머꼬?”“형님 펀치 맞고 쓰러져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걸랑요.”“이 자석이! 쌩 사람 잡을라카네. 입이 삐트러져도 말은 바로 허라고 안 허드나?…오디. 내 주먹만 있었나? 경표 니도 한 펀치 앵겼고, 짝코 그놈도….”“그만!”잠자코 듣고만 있던 박준호가 꽥 고함을 지른다. 그가 말한다.“그놈 죽었다는 사실, 누구 누구 아니?”“아직 모릅니다.”“모른다구?”“네, 형님.”“그럼, 일단 우리 셋만 아는구만.”박준호가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잇는다.“그 녀석, 빨리 치워. 어디 창고 같은데, 숨기란 말이야. 내 말 알겠어?”“네, 형님.”“어서 가 봐. 봉삼이 너도.”전기 철조망이 긴급 설치된 이유가 바로 그러하다.

2006-11-2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32)

엘리시온 ④다시 말해 정정당당 주먹으로 천하를 통일한 박준호가 자존심 상하게 전기 철조망 따위를 동원할 게 뭐냐 하는 얘기다.한데, 일이 잘못 풀리는 바람에 거꾸로 박준호가 앞장 서 의뢰처인 영림쪽 관계자에게 은밀히 청을 넣어 전기 철조망부터 부랴부랴 설치한 터다.다름 아닌, 마지막까지 공장에 남아 있던 노조 중간 간부 녀석 탓이다. 놈은 술에 취해 잠을 잤던 모양으로 동료들이 공장에서 쫓겨난 줄도 모르고 일어나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다.“네놈들이 누구야? 누구냐구!”버럭버럭 고함을 내질러서,“이 자식이 어디서 큰 소리야? 아구지를 돌리기 전에 입 다물어!”라고 겁을 줬는데도,“오라, 네 놈들이 경찰이구나. 맞지? 사복경찰이지?”마구잡이로 씨부렁댄다.“경찰이라니? 네 눈에 우리가 경찰로 보여?”짝코가 재미있다는 듯이 히힛 웃으며 대응하자,“내 눈은 못 속여! 새끼들아. 더러운 경찰놈들, …네놈들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 누구 좆 빠는 놈들이냐구!”“이것 봐, 노조원 나리. 우리는 경찰이 아니야. 이 공장을 인수한 새로운 주인이란 말이야. 알았어?”그래도 경표가 점잖게 타이른다.“뭐라구? 공장을 인수했다구? ”놈이 주위를 휘 훑은 다음, 고개를 주억거리며, 추상 같은 어조로 내 뱉는다.“오라, 그래. 사장놈이 가짜로 깡패놈들에게 명의 이전을 한다는 정보가 나돌더니, …결국 그렇게 된 거로구나! 그래, 네놈들이 그놈들이냐?”“저거, 제법이네? 빨리 내쫓아!”보다 못해 박준호가 한마디 한다. 그리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뭐, 내쫓으라구? 야, 누가 누굴 쫓아낸다는 거야? 이 새끼들아. 그래, 얼마 처먹고 이런 더러운 짓 하는 거야? 여기는 내가 주인이야! 아니 우리들 모두가 주인이라구. 비록 배때기 부른 사장놈 농간에 속고 속아 이 지경, 이 신세됐지만, 여기는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우리의 보금자리, 일터란 말이야!”추상 같은 말투와는 달리, 놈은 몸조차 가누지 못해 계속 휘휘 풀린 다리를 위태위태하게 떼놓곤 한다.“큰 행님이 쌔기 처치해 삐라 안카나?”조봉삼이 귀를 막으며 경표에게 이른다.“알겠습니다. 형님.”경표가 놈의 멱살을 단숨에 치켜 든 채 정중히 일갈한다.“노조원 나리, 그만 댁으로 퇴근하시지요.”“퇴근하라구?”당최 놈은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계속 게거품을 물고 주접을 떨어마지 않는다.“안 그래도 퇴근하고 싶어 미치겠다. 마누라 궁둥이도 두들기고 싶고, 아이놈들 볼에 뽀뽀도 하고 싶고, …한데도 집에 못 간 지가 어언 석달열흘이다. 이 씹헐놈들아!”“그렇다면 더더구나 빨리 나가시라구, 어서!”“못 나가! 못 나간다구!”“왜, 못 나가?”“우리들 목숨 바쳐 이곳을 사수하기로 맹세했으니까!”“죄 도망쳤는데, 누가 어디를 사수해?”“도망쳤다구?”“그래, 이 새꺄!”경표가 갑자기 돌변하여 놈의 아랫배에 펀치를 집어넣는다.“헉!”숨이 막히는지, 풀썩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나 용수철처럼 놈이 다시 일어서며, 대한독립만세 외치듯,“이 도둑놈들아! 이 모리배 앞잡이들아!”꽥꽥 고함을 지른다.“어이, 재수없는 새끼!”

2006-11-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31)

 엘리시온 ③ “야, 새꺄.” 박준호가 조용히, 그러나 이빨로 까는 소리를 낸다. “네, 행님.”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알겠씸더.” 어쩌는 수 없다. 평소 성격이 그러하다. 일단 지시를 내렸다 하면 세상 없는 일이 있어도 번복한 경우가 없다.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괜히 찍자를 붙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조봉삼이 일어나 선다. 주욱 둘러선 대원들을 향해 중간 보스로서의 적절한 어투로 입을 연다. “느그덜 큰 행님 야그 들었나?” “들었습니다.” “그라모, 빨리 움직이라. 외부인을 공장에 한 발짝이라도 드릿다카모 모가지 빼삐끼다. 알겄나!” “네엣, 형님!” 아이들이 복창하고 우르르 몰려 나간다. 조봉삼이 몰려 나가는 대원중의 한 녀석을 찍는다. “야, 짝코!” “네, 형님.” “경표 왔나?” “왔습니다. 전기 기술자 하고, 발동기 수리하고 있습니다.” “그래, 아직 못 고친기가?” “베아링이 나갔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와 해필 요럴 때 고장이 난단 말이고! 야 짝코!” “네, 형님.” “경표한테 가 봐라. 그리고 수리 끝나는 대로 쌔기 오라 캐라.” “알겠습니다.” “빌어묵을 노무 자석덜!” 조봉삼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혼자 투덜댄다. 기실 공장은 공장이 아니다. 생산가동을 멈춘 지가 벌써 6개월째다. 이미 전기도, 전화도 끊겼고, 수도마저 나오지 않는다. 너무 오래 요금을 내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검찰과 법원이 의도적으로 선을 자르고 파이프를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한데도 공장에는 전기가 꼭 필요하다. 우선 시급한 것이 공장 사위에 쳐 놓은 철조망에 대한 전기 보급이다. 그뿐 아니다. 허구한날 촛불로 견딜 수 없으므로 전등을 켜야 하고, 14명의 행동대원이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냉장고도 가동시켜야 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알아야 하므로 TV 뉴스 시청 역시 필수다. 그래서 긴급 입수한 발동기를 기름으로 돌리는데, 그것이 꺼떡 하면 고장을 일으키곤 한다. 14명의 행동대원 중에 전기나 기계에 손재주가 있는 놈이 경표다. 발동기가 섰다 하면 우선 경표부터 찾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박준호가 강조하는 것이 전기 철조망이다. 박준호는 전기 철조망이 24시간 내내 효력을 발휘하여, 아무도 공장 주변을 근접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기회가 있는 대로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쉐에 쉐에’ 소리만 들어도 금세 사달을 낼 것처럼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전기 철조망. 물론 전기 철조망은 애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실 영등포 일번지파가 신일 강철 공장을 접수하고 나서 첫 작업으로 시도한 것이 바로 전기 철조망이다. 외부의 접근을 막기 위한 조처다. 아니, 영등포 일번지파의 가공할 전투력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쫓겨난 신일 철강 노조 강경파들이 다시는 공장을 점거하지 못하게 쐐기를 박은 완전봉쇄 작전이다. 하나 시작은 그것이 아니다. 가공할 화력을 보유한 영등포 일번지파의 그것을 감히 누가 넘보며, 함부로 시비를 붙겠느냐가 박준호의 생각이다.

2006-11-2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9)

엘리시온 ①승용차가 구기터널을 막 빠져나오기 바쁘게 휴대폰이 삐리 삐리 울린다. 조봉삼이 뒷자리의 박준호를 본다. 그는 은박지로 싼 춘란을 안고 있다. 요 며칠 새 꽃집에 보내 영양제를 놓아서인지 제법 잎사귀에 윤이 돈다. 그래도 정상적인 난초가 되려면 감감세월이다. 박준호는 춘란의 향이라도 들이마시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언제나처럼 귀에 리시버를 꽂고 있다. 모르긴 해도 느릿느릿 땅벌 날아가는 소리의 연속인 바이올린 소리에 취해 있을 터다.박준호는 늘 그 테이프만 듣는다. 아니, 음악만 듣는 게 아니라 음악에 도취한 채로 명상에 잠긴다.박준호 특유의 습관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단전호흡에 열중해 있는 상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코로 내뱉는 것이 아니라 항문으로 공기를 내보내는 호흡이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항문을 크게 수축시켰다가 풀고, 풀었다가 다시 수축하는 호흡….조봉삼은 박준호의 명상에 방해가 안 될 정도로 조심스럽게 삐리 삐리 우는 휴대폰을 연다.“조봉삼임더.”“어머, 아저씨세요?”아주 가녀린 여자 목소리다.“누군교?”“저예요, 아저씨… 합정동에서 만났던….”“합정동?”“어머, 벌써 잊으셨나 봐. 합정동 러브하우스….”“아, 그래! 그래!”조봉삼이 생각해도 목소리 톤이 높은 것 같다. 스스로 입을 틀어막는다. 어쩌면… 그 아이가, 그것도 백주에 전화를 다 하다니….갑자기 발끝이 짜릿해진다. 아니 발끝에서 시작하여 전신으로 찌르르 올라온다. 말초신경이다. 얼굴이 떠오른다. 달걀형의 작은 얼굴이다. 피부도 곱고, 귀엽고 깜찍해서 한 입에 털어 넣어도 시원찮을 성싶다. 이름이 엘리시온이던가. 물론 사이버 채팅에서 통하는 이름이다. 조봉삼이 왜 엘리시온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의 사타구니 밑에 있었다.“그건요….”그녀도 말을 계속하기가 불편하다. 그녀 입 주변을 다름 아닌 조봉삼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흡사 깔려 압사할 것처럼 그녀는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기회를 포착했다 싶으면 간헐적으로 입을 연다.“엘리시온은 고대 그리스의 선경이에요. …선경이 뭐냐면요, 낙원 아세요? 안락불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곳, …어머! 그러지 마세요. 너무 힘들어요! …토할 거 같애….”“안락불사 낙원이라고?”조봉삼이 시치미를 떼고 그녀의 숱 많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또 묻는다.“시원한 미풍이 끊이지 않는 온화한… 그게, 어디 있느냐면요. 세계의 서쪽 오케아노스 옆에….”그러나 그 뒷얘기는 들을 수가 없다. 바로 그 순간 조봉삼이 아름다운 죽음 속으로 깊이 자맥질했기 때문이다.“푸야 푸야-.”조봉삼의 잠수는 시끄럽고 수선스럽다.“프프프 푸아야-.”프랑스 사람들이 그랬던가. 오르가슴에 이르는 쾌감, 그 자체가 짧은 죽음이라고. 엘리시온은 조봉삼이 영등포 태권도 도장(道場) 아이들을 통해 만난 아이다. 하지만 조봉삼은 컴맹이다. 컴퓨터 자판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도 원조교제야말로 이 시대가 주는 최고 특혜라는 소문을 익히 들은 터라,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 낄낄대곤 하는 태권도 후배 놈에게,“야 이 쓰으팔노마, 니만 재미 보지 말고, 이 행님한테도 진상 올리거라!”“선배님, 이건 진상이 아니구요, 그냥 피시방에 들어가서요, 이렇게 클릭만 하면 되는 일이에요.”“야이 자식아, 클릭이고 크리닝이고 니 갖고 놀던 가수나 하나 넘기라 안카나!”

2006-11-2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30)

엘리시온 ② “갖고 놀던 가시나요?” “씨블노무 자석, 니 눈에는 내가 홍어 좆으로밖에 안 보이는 갑다. 야이 자석아. 내도 다 안다. 쎄라복 입은 가수나덜 십 몇 만 원 주모 하룻밤 짱 아니가?” 말하자면 대화방 채팅 하나 주선해 달라는 주문이다. 박준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물론 단전호흡 중이다. 세상사 모든 고뇌나 음욕에서 초탈한 듯, 흡사 부처님 얼굴 흉내를 내고 있다. 이름하여 명상이다. 박준호는 시간 여유만 있으면 늘 저 표정이다. 아니, 시간 여유만이 아니다. 본인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져도 매한가지다. 한 달여 전인가. 소위 공정관리위원회에서 현장 조사를 나왔을 때도 박준호는 저처럼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있었던 터다. 더 정확하게 일원동에 자리잡고 있는 주식회사 신일 특수강 공장장실이다. 예외없이 은박지로 싼 난초 화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박준호가 거처를 옮길 때마다 들고 다니는, 이른바 박준호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춘란 분이다. 너무 오래 된데다가, 관리가 시원찮아 꽃은커녕, 이파리 조차 몇 잎 남지 않았다. 그래도 박준호가 명상하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자리하곤 한다. 박준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긴 했지만, 한 겹만 벗기면 그냥 시멘트인 땅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그것도 양발을 꼰 요가 자세로, 두 손바닥을 펴 무릎에 얹고 있다. 영락없는 선사(禪師)의 그것이다. 내려 깔고 있는 두 눈이 특히 더 그러하다. 어찌 보면 숨도 쉬지 않는 것 같다. 바야흐로 무아지경의 경계를 넘어간 표정이다. 조봉삼이 그런 박준호에게 숨가쁜 소리로 말한다. “행님, 드디어 오고 있씸더.” 한데도 얼굴은 그대로다. 미세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행님, 오고 있다 안카요!” 조봉삼이 꽥 소리를 질렀을 때야, 파충류의 그것처럼 마지못해 눈꺼풀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리시버를 뺀다. 좌중을 휘 훑는다. 대원들이 차렷 자세를 하고 주욱 둘러 서 있다. “우찌 헐끼요! 지시를 내리 주이소!” 조봉삼이 다시 한 번 채근한다. “어디쯤 왔니?” 박준호의 음성은 부드럽다. 한 때 마포 신촌을 평정하고 동대문까지 진출했던, 영등포 일번지파의 거물 두목 같지 않다. 오히려 건장한 체구나, 무겁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보면 조봉삼이 두목이고 박준호는 그 하수인 같은 느낌이다. “지금 수위실에 와 있씰끼요.” 조봉삼이 대답한다. “고수길 어딨어?” “고수길이 아직 소식 없씸다.” “전화 연락도 없어?” “없씸다.” 그리고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조봉삼이 투정부리 듯 목소리를 높인다. “행님! 우찌헐끼요? 우찌 헐낀지 지시를 해 주이소!” “수위실에 있다고 했나?” “네, 행님!” “모두 몇 명이야?” “승용차 두 대 아닝교.” “승용차 두 대?” 박준호가 말을 잇는다. “문, 잠가 버려.” “문을 잠가요?” “그래, 한 놈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하지만,…공무원 아닝교? 공정관리위원회…잘못했다가….” 조봉삼이 박준호의 판단이 옳지 않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한 번 더 반복한다. “행님, 공정관리위원회 사람덜은…영림그룹에서 보냈는지도 모르는 기라요.”

2006-11-2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8)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⑮“그랬었구만.”시노야마 기신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한다.“그 정도면 됐소.…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변호사 양반, 서명 받을 서류가 어딨소?”변호사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넨다.“그래, 여기다 사인하시오. 20만 달러를 수령했다는 영수증이요.”20만 달러라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얼만가? 2억원이 넘는 거액 아닌가. 박준호가 머뭇머뭇 말문을 연다.“잠깐만요.…아무리 생각해도 전 그 돈을 받을 만한 입장이 아닌데요.…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시노야마 기신이 뭔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연다.“참, 시루코는 당신에게 돌려 줘야 할 물건이 있다고 늘 말했소.”그래, 비취 메달 목걸이, 브라이튼 여름 별장에서 첫 결합이 있던 날 밤, 강탈하다시피 가져간 목걸이다. 그녀는 볼모용으로 잠시 보관하겠다고 말했지만, 끝내 돌려받지 못하고 헤어져 버리게 된 것이었다.“그래요. 시루코 여사가 보관하고 있었던 목걸이가 있습니다. 비취 메달이라서 값으로 치면 별거 아니지만. 제 집안에서는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시노야마 기신이 박준호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연다.“이 20만 달러가 그 물건값이라고 생각하쇼.”“물건값이라뇨?”“시루코는 그 목걸이를 자신의 시신과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물건과 함께 영원히 묻히고 싶어 한 거요.”이튿날, 박준호는 전화를 건다. 영림전자 서승돈이다.“사장님, 저 준홉니다.”“그래, 일취월장 한다면서? 영등포에 건물도 짓고…참, 준공식을 거창하게 가졌다던데….”“네, 사장님은 외국 출장 중이라서 초대장도 띄우지 않았습니다.”“그래, 그래. 그랬었지. 대신 중소기업 이사장이 참석했다더군.”“다 사장님이 밀어 주신 덕분이죠.”“덕분은 무슨 덕분이야? 고수길 놈 아이디어 덕분이지. 그건 그렇고, 웬일이야?”“다른 게 아니구, 선생님 말입니다.”“선생님이라니?”“이번에 당 총재로 다시 복귀하신….”“아, 그래, 총재님은 왜?”“후원금을 조금 전달할까 해서요.”“후원금, 좋지. 그래, 얼마나?”“20만 달러입니다.”“뭐? 20만 달러?”“네, 20만 달러 현찰입니다.”“미화로 20만 달러란 말인가?”“그렇습니다. 정확히 20만 달럽니다.”“그렇게 많은 돈을….”박준호가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대신 조건이 있습니다.”“조건이 뭔가?”“이 돈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규명에 써 달라는 조건입니다.”“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규명이라면…자네 숙부께서….”“맞습니다. 제 작은아버님의 필생의 숙원사업이었습니다.”“알았어. 안 그래도 총재님을 뵈러 갈 일이 있었는데, 잘됐구만. 그래, 돈은 어떻게 전달할 텐가?”“고수길 편에 사장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아니, 왜 준호 자네가 직접 총재님께 드리지 않구?”“아닙니다. 제 뜻만 정확히 전달되면 그만입니다. 사장님께서 수고 좀 해 주십시오.”

2006-11-2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27)

누가 스무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⑭박준호가 엉겁결에 엉덩이를 들었다가 놓으며 말을 잇는다. “시루코 여사가 죽었다구요?” “작년 겨울에 죽었소.”시노야마 기신은 그 어떤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은 메마른 목소리로 “크리스마스 이브에”라고 말끝을 맺는다.“아니, 왜 죽었습니까?”“암으로 고생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스스로 끊었다구요?”“원래가 깔끔한 여자여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요. 게다가 시루코만큼 자유를 갈망한 허무주의자도 찾기 힘들 정도니까.…어쨌든 그녀가 유서를 남겼는데… 실은 그 유서 때문에 찾아왔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시루코가 당신한테 유산을 남겼소. 미화로 20만달러요. 당신을 직접 만나 전해 줘야 한다고 몇 번씩 당부했기 때문에… 하지만, 당신을 찾기는 쉽지 않았소. 꼭 9개월 걸렸소.”“저는 뭐가 뭔지…믿어지지가 않습니다.”“나 역시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지만…그녀는 어딘가에 영원히 살아있고 싶어했소. 그곳이 어딘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박준호가 재빨리 입을 연다.“제가 알기에는 선생님 작품을 365일 전시할 공간을 갖고 싶어하셨거든요.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아마 그 미술관에 영원히 살아있을지 모르겠군요.”“그런 얘길 했었구만.”“네, 여러 번 하셨습니다.”“하지만, 그건 이뤄지지 않았소.”“아니, 왜요? 그 가족들이 반대했나요?”“가족들에 대해 잘 아쇼?”그가 묻는다.“글쎄요.…그 무렵 상무관으로 일하던 오카모토 가스미씨는 아시죠?”“시루코 남편 말이요?”“맞습니다.”“한 번 만난 적은 있지.”“저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패거리를 보내 보복을 겸한 벌을 주려고 무진 애를 썼던 사람이죠.”“벌을 주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뭐, 그런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있었습니다.…어쨌든 미수로 그쳤으니 망정이지, 잘못됐으면 그때 저도 죽을 뻔했었습니다.”“그랬었구만.”“하네코는 아시죠? 시루코 여사님 딸. 그녀는 저와 학교를 같이 다닌 동급생이라서…실제로 헤이스팅스 고등학교에 동양인은 저와 하네코뿐이었거든요.”“그럼, 둘이 친하게 지냈겠구만.”“친하게 지냈습니다.”“혹시 그 아이가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 들은 적 있소?”“선생님에 대해서요?”박준호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 잠시 침묵을 택한다. 있구말구. 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인다.파스타를 먹었던 오후, 브라이튼 여름 별장에서의 일을 앞세워 누드 사진만 찍는 시노야마 기신이 엄마의 정부이며, 그가 입었던 가운을 박준호가 입었노라고 하네코가 얼마나 독설을 퍼부어 마지않았던가.“선생님에 관해 얘기하는 거 들은 적이 있습니다.”박준호가 말한다. 시노야마 기신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어떤 얘길 들었는지 기억할 수 있겠소?”“주로 악담에 가까운 얘길 많이 한 것 같습니다.”“악담?”“네, 내가 듣기에 그건 악담이었습니다.…가정 파괴범이라든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예술가라든가,……등등 거기에다가 시루코 여사가 선생님 작품을 컬렉션하는 것도 싫어했구요. 많은 돈을 들여 전용 전시장을 유럽 땅에 건립하는 계획에 대해서도 하네코는 늘 회의적이었고, 비판적이었습니다.”

2006-11-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6)

누가 스무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⑬영등포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17층 사무실에 마주 앉는다.“반갑구려.”시노야마 기신이 말한다.“저도 마찬가집니다.”“시루코가 입버릇처럼 얘기한 그대로구만.”“제가 말입니까?”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박준호도 가만 있을 수가 없다.“저도 늘 선생님 얘기를 들었는데,…선생님 역시 듣던 그대로 이십니다.”마실 음료가 나왔으므로, 박준호가 먼저 잔을 들며, “드시지요”라고 시노야마 기신에게 권한다. 한데 그는 고개를 좌우로 휘휘 젓는다. 마시지 않겠다는 표시다.“양해해 준다면, 나는 다른 음료를 마시겠소.”“다른 음료라뇨?”박준호가 둥글레 찻잔 속에 무슨 이물질이라도 빠졌나 내려다본 뒤,“그럼, 뭘 드시겠습니까? 녹차 좋아하십니까? 지리산 야생 작설차가 있는데.”그래도 시노야마 기신은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난 습관이 되어서 말이요. 포도주가 아니면 다른 아무것도 마실 수가 없소.”“아, 그러시군요. 포도주도 있을 겁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죠.”“아, 아니요. 그럴 필요 없소.”그가 손사래를 친 다음 들고 온 원형 큰 가죽가방을 연다. 시노야마 기신이 가방 속에서 꺼내 든 것은 엉뚱하게 포도주 병이다. 이름도 유명한 샤토무통 로칠드다. 프랑스 보르도산 명물이다.얼핏 봤는데도 1970년 표시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그 무렵에 생산된 샤토무통은 병당 가격이 100만 원이 넘는다.그때까지만 해도 박준호는 그것이 의례적인 선물용이거니 했는데, 웬걸 시노야마 기신은 병을 꺼내 들자마자 코르크 병마개를 펑 소리나게 뽑아 버린다.그것은 새 병이 아니다. 이미 뚜껑을 열어 절반도 더 마신 포도주다. 더욱이나 더 기이한 것은 크리스탈 유리잔까지 가방에 넣고 다닌다는 사실이다.천연의 캐시미어 정장 차림, 그것도 최고의 명품인 바렌티노 가리바리 수트를 입은 신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하나, 그는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혼자 크리스탈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운 다음, 박준호에게 권하는 법도 없이 잔을 돌려 가며, 킁킁 냄새를 맡아 가며, 야금야금 다 마셔 버리는 것이었다.그리고 나서 휴지를 뽑아 쓱쓱 닦는 것이 아니라 귀부인 이마에 땀 찍어 내 듯 입술에 묻은 술기를 조심스럽게 찍고 또 찍는다.휴지로 입술만 찍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탈 유리잔도 아주 깨끗하게 닦아 낸다. 더구나 유리 표면은 허공에 비춰, 물기나 더러운 자국이 있나 없나를 검사해 가며, 마지막 흔적까지 말끔히 닦아 없애는 것이다.그리고 시노야마 기신이 박준호를 본다. 그쯤 해서 인사치레를 끝내자는 눈짓 같다. 옆에 대기하고 있는 변호사에게 그가 말한다.“그거 가져왔소?”“네, 가져왔습니다.”변호사가 대답한다.“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변호사가 서류를 꺼내기 시작한다. 시노야마 기신이 박준호에게 말한다. 전혀 다른 엄격한 목소리다. 이제 비로소 바렌티노 가리바리 신사로 되돌아온 것 같다.“시루코 소식은 들었소?”“시루코 소식이라뇨?”박준호가 반문한다. 그는 품격 높은 귀족처럼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아니, 시루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못 들었단 말이요?”되레 놀란 듯이 묻는다.“뭐라구요?”

2006-11-2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25)

누가 스무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⑫시노야마 기신이 의뢰한 변호사로부터 처음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박준호는 끝까지 우길 뻔했다. 도대체 일본에서 박준호에게 전화가 걸려 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시노야마 기신 씨를 모르신다 그 말씀입니까?”변호사가 재삼 확인한다.“시노야마 기신 씨가 뭐하는 사람이죠?”“사진작가랍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누드 사진작가, 그래도 정말 모르시겠습니까?”“사진작가? 글쎄요….”박준호가 기억의 실타래를 더듬기만 하자, 변호사가 퀴즈 게임 사회자처럼 힌트를 던진다.“영국에 사신 일이 있으시죠?”“영국?”“헤이스팅스 말입니다.”그제야,“아, 아”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박준호가 말한다.“아, 누드 사진작가 시노야마 기신 씨 말이군요. 알죠. 알다마다.”“그분께서 박준호씨를 방문하고 싶어 하시는데, 언제쯤 시간이 나시죠.”“아니, 그분이 왜 나를 만나 보고 싶어 하죠?”“글쎄요. 그건 만나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군요.”“그래도 대충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글쎄…뭐라고 해야 하나?…아무튼 다음 다음 주 월요일 오후 3시가 어떻습니까?”“좋아요.”박준호는 스케줄 표도 확인하지 않고 쾌히 승낙한다. 그리고 그때야 생각났다는 듯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묻는다.“잠깐, 잠깐만요. 그날 시노야마 기신 씨만 오는 건가요?”“그렇습니다.”“여자분은요?”“여자분이라뇨?”변호사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다.“아, 됐어요.”그런 시노야마 기신을 박준호가 만난 것은 비 갠 오후 3시다. 그는 정시에 변호사를 대동하고 박준호의 사무실을 노크한다.‘시노야마 기신 씨의 전용 전시관을 지을 계획이란다. 그분 작품만 365일 전시하는 미술관, 파리도 좋고, 뉴욕도 좋고, 런던도 좋고, 리스본도 좋고…, 세계인들에게 기신의 위대한 작품 세계를 각인시켜 주고 싶거든.’시루코가 처음 그의 작품 슬라이드 자료를 꺼내 놓으며 했던 얘기다. 시루코는 과연 무엇을 지향했을까. 시노야마 기신의 작품 세계인가. 아니면 시노야마 기신 그 자체인가.어쨌거나 시루코는 그의 체취와 흔적을 지우지 않고 브라이튼 세미티 터치트 하우스에 원형 그대로 전시해 놓지 않았던가.박준호는 그해 여름, 그 방 안에서 맡았던 특유의 냄새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 냄새가 시노야마 기신의 몸에서 다시 재생되기 시작함을 박준호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브라이튼의 선착장과 푸른 파도가 시네마스코프 화면처럼 선명히 내려다보이던 대형 유리창, 실제로 흰 페인트 통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흰 갈매기가 두서 개의 작은 깃털을 남기며 힘차게 치솟아 오르고 있다. 박준호는 브라이튼의 강렬한 햇빛 때문이라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시노야마 기신을 본다.중년이라기보다 초로(初老)에 접어든 모습인데도 건강하고 정갈해 보인다. 차림새도 예술가의 티를 낸 흔적이 없다.말 그대로 정장이다. 그것도 화학 섬유가 아닌 천연의 캐시미어 정장이다. 이름하여 바렌티노 가리바니다.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에다, 흰 포켓 치프를 꽂아 더욱 세련미를 더하게 한다. 그뿐 아니다. 청색 와이셔츠에, 역시 청색 계통의 넥타이에 그리고 잿빛 중절모가 그럴 수 없이 조화를 이룬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귀티가 난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일본 황실 파티에 나타난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 같다.

2006-11-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4)

누가 스무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⑪시루코의 딸 하네코의 방해만 없었어도 그해 여름 내내, 그 작업에 매달렸을 터다. 박준호는 세세히 기억하고 있다. 시루코의 저택을 들어설 때마다 사람의 넋을 빼 놓곤 하던 흑백 누드 사진. 작품 제목이 ‘쌍둥이 자매, 나호요와 아사요’였던가.물론 시노야마 기신 작이다. 알몸의 여자 두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활처럼 등을 휘어지게 굽히고 앉은 한 명은 오른팔과 등, 오른쪽 허벅지만 보이고, 앞의 여자 역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으며, 시선도 똑같이 허공을 보고 있다.두 여자의 실루엣 라인은 익어 터진, 그러나 약간 기형의 복숭아 모습이다. 얼핏 든 느낌은 시루코의 이미지와 너무 유사하다는 점이다.한마디로 꼬집을 수 없지만, 시루코에게서 문득 문득 맡아지던 허무의 냄새….뭐라고 할까. 마치 오래된 강물 밑바닥 진흙 속에 발을 집어넣었을 때의 간지러움 같은 위태위태한 바람기라고나 할까. 퇴폐적인 분위기인데도 너무나 정갈해서 감히 똑바로 볼 수 없는, 그러면서도 늘 촉촉히 젖어 있는 눈. 뭔가 잠복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바로 그런 시루코의 이미지가 시노야마 기신의 사진 작품 속의 기형적인 나르시즘과 너무나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그러나 박준호에게는 그 이미지처럼 혼란스러운 것도 없다. 일순 첨벙 빠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렵고 가증스런 이질감.마치 대니 라일러와 어머니의 대낮 정사를 훔쳐봤을 때의 그 황당함이라고나 할까.물론 시루코의 내면에 잠복하여 있는 그 정체가 어머니의 그것인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의문 탓만도 아니다.아니 어머니와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녀와의 불장난 상대가 대니 라일러가 아니라, 대니 라일러가 죽게 만든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가상의 판타지아.어쨌거나 박준호가 확연히 기억하는 것은 12년 전 그 상황에서 내려다본 그녀의 얼굴 모습이다. 그때 그녀는 너무 선명한 어머니의 가면을 쓰고 있었고, 박준호는 시루코가 아닌 어머니를 뭉툭한 둔기로 퍽퍽, 마구잡이로 찌르고 또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분명, 그 순간 박준호는 아버지 박상구였고, 박상구로서 시루코에게 열띤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그래, 당신이 최고야. 당신이… 최고야!”오죽했으면, 하네코와 함께 파스타 점심을 먹으며 식탁 밑으로 음흉한 발장난을 했을까.하네코가 말했던가.“준호야, 네가 별장에서 입었던 거 말이야. 그게 바로 시노야마 기신이 쓰던 가운이었어. 시노야마 기신, 알지 너도? 사진작가면서 엄마의 정부, 간통 현장을 아빠한테 들켜 머리칼이 잘린 까까머리, 엄마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던 남자… 그 남자가 입었던 가운을 준호 네가 또 입었던 거야. 내 말 알겠니?”“그 말이 맞아?”박준호가 눈으로 물었지만, 시루코는 그냥 파스타만 먹고 있을 뿐이었어.“하네코가 한 말이 맞느냐구?”박준호는 또 한 번 눈으로 취조하듯 말하며, 발가락으로 그녀 사타구니를 마구 유린하지 않았던가.어디 그뿐인가. 브라이튼 세미티 터치트 하우스 여름 별장의 그 신혼부부용 침대도 마찬가지다. 시노야마 기신과 시루코가 사용했던 그 침대를 박준호도 격렬하게 꿀렁거리게 하지 않았던가.어찌보면 시노야마 기신과 박준호는 그때까지 대면한 적은 없지만, 시루코의 몇 마디 코멘트로 미루어 인품이나 개성이 충분히 유추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보통 인연이 아니다. 시중 잡배들이 흔히 하는 상말로 ‘한 구멍 동서’일 수도 있고, 그의 작품을 정리하여 목록을 만든 최초의 한국인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체격이 그토록 똑같을 수 있을까. 감탄해 마지않던 호기심 많은 청년일 수도 있는 그런 특별한 인연이다.

2006-11-1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3)

누가 수무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⑩고수길은 박준호가 큰 활동 없이도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의 두목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물론 일자리는 싸움판의 주먹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쳇말로 정교하게 짜여진 책략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박자가 맞아야 한다.소위 얘기하는 삼 박자다.일을 주는 사업체와 그 사업체를 비호하는 권력과 그 일을 받아서 소화시킬 만한 조직의 파워다.그러니까 정부기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지방행정기관에서, 심지어 청와대까지 언론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부가가치 높은 일자리들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고수길의 일자리 주 단골 고객은 사촌누나를 통해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영림그룹이다. 영림그룹에 관계된 건설, 부동산, 아파트, 빌딩 건축, 운송, 해운 등 각종 특수사업에 고수길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은 일자리가 없을 정도다. 영등포 중심가 빌딩 지하 1층 400평을 통째로 취득, 종합 체육관을 개장하게 된 배경도 고수길의 왕성한 일자리 창출과 무관하지 않다.영등포 역전 사거리는 황금 알을 낳는 요지로 일찍이 그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한데 유독 그 근처만 주유소가 3군데나 겹쳐 있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왔던 터다.그중에서도 가장 요지에 자리잡은 주유소가 무려 500평, 평당 2천만 원을 호가하면서도 제값을 못하고 있는 땅에 고수길이 눈독을 들인 것이다.그러나 땅 주인은 한 사람이 아니라 무려 일곱 명이다. 그리고 생각이 다 다르다. 팔 수 있다는 사람, 팔 수 없다는 사람, 평당 3천만 원 이상 받아야 한다는 사람, 2천만 원이라도 현찰만 준다면 넘기겠다는 사람.고수길은 끈질기게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최대 공약수를 만들어 합의를 끌어 낸다. 일곱 사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다.이름하여 빌딩 신축사업이다. 일곱 사람의 지주들이 동시에 인감도장을 팡팡 찍을 수 있었던 것은 고수길의 언변이나, 영등포 주먹 시장을 완전 제압한 박준호의 실력이나, 코스닥에도 나스닥에도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구길사’의 신용 때문이 아니다.그 열쇠는 다름 아닌 영림건설이다. 고수길이 끌어들인 영림건설을 파트너로 삼아 17층 상가 빌딩을 올리고, 그 분양 이익금을 3자가 나누는 계산법이다.그러니까 땅 주인과 영림건설과 중간에 다리를 놓은 구길사가 역할 분담에 대한 퍼센트로 배당금을 나누는 것이다.물론 땅 주인들은 평당 3천만 원이 아니라 1억 원 가까운 수익금을 찾아갔고, 영림은 건설에 투자한 금액의 3배가 넘는 배당을 받았으며, 구길사는 구길사대로 지하 1층 전체를 수중에 넣는 것과 함께 전망 좋은 17층에 50평짜리 사무실을 거저 얻게 되는, 이른바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의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이제 박준호는 대그룹 회장들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정도의 호화로운 집무실을 소유한, 주먹 조직의 선두주자가 된 것이다.전망 좋은 17층 단독 사무실은 물론이고, 400 평 넓이의 지하 1층 종합체육관에도 회의실과 사우나 실내 휴게실이 딸린 초호화 집무실이 따로 마련되었는데, 그곳으로 첫 손님이 찾아온 것은 박준호가 스카이 홍을 만난 다음 다음 날이다.아니, 아무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이 아니다. 한 달 전부터 예약된 손님이다.다름 아닌 시루코의 법적 대리인인 사진작가 시노야마 기신이다. 박준호가 헤이스팅스에 거주했을 때가 열일곱 살이었으니까, 꼭 12년 만이다.그때 박준호는 로크브륀 언덕에 자리잡은 하네코 집에 출근하여 시노야마 기신의 누드 사진을 조목조목 정리, 확인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2006-11-1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2)

누가 스무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⑨강변에서 흔히 만나는 전형적인 모텔이다. 그렇다고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경의 전망도, 숲이 무성한 산정도 아닌, 논바닥 가운데 볼품없이 우뚝 선 3층 건물.상호가 ‘낮과 밤’이다. 언필칭 서승돈이나 스카이 홍이 드나들 수준의 장소가 아니다. 모텔 위치나, 상호나, 건축 양식이나, 건물에 칠한 페인트 색감이나, 여러 모로 품위하고는 담을 쌓은 천박하기 이를데 없는 밀회 장소다.두 사람의 옷 차림새와 자동차가 그러하듯 모텔 역시 위장술의 한 맥락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도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끈질기게 감시하는지도 모른다.뭐랄까. 그 촘촘한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두 사람의 노력이 가상스럽다고나 할까. 어쨌든 스카이 홍과 서승돈이 타고 온 작은 승용차가 치렁치렁한 은폐용 플라스틱 차일을 뚫고 모텔 차고로 사라져 버린다. 박준호는 한참을 차 속에 앉아, ‘낮과 밤’의 은폐용 플라스틱 차일 벽을 바라보고 있다.지금쯤 두 사람은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살피며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설 것이다. 물론 실내의 어둠 속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을 것이다. 서승돈이 먼저 방 키를 받아 들고 올라갈 것이고, 그녀가 서너 걸음 뒤쯤 주춤주춤 따를 것이고, 마침내 방 문을 닫고 빗장을 걸자마자, 오랫동안 너무나 절제했다는 듯 와락 끌어안을 것이었다.박준호는 고개를 절절 흔든다. 그리고 몰래 카메라 화면 같은 두 사람의 선정적인 모습을 억지로 지워 없앤다.“빌어먹을!”괜히 먹장 하늘을 본다.“웬 비는 이렇게 퍼붓는 거야!”박준호가 신경질을 내뱉는다. 자동차의 엔진을 거칠게 건다. 왔던 방향이다. 잠시 틈을 두었던 비가 다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고, 윈드 브러시의 작동도 그만큼 빨라진다.고수길의 간곡한 청에 의해 ‘구길사’는 마포 태껸 도장 외에 영등포 체육관을 추가로 개관하기로 한다. 이제 태껸만이 아니라 태권도, 유도, 쿵푸, 킥복싱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이른바 종합 체육관이다.늘 골치 아프게 깐죽거리곤 하는 영등포 패거리들을 ‘구길사’로 취합하기 위한 쐐기 작전이다. 영등포를 평정하면 서울의 절반을 수중에 넣는 거나 진배없다. 고수길은 그런 지배 구조를 꿰뚫고 있다.비단 패거리들의 장악뿐 아니라 패거리들을 수중에 넣는 비법도 고수길은 알고 있다.아마도 ‘구길사’를 운영하고 경영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일거리가 무궁무진해야 한다는 원리를 고수길만큼 철저히 고수하는 사람도 없을 터다.그것도 비공식적인 일거리는 금물이다. 아무리 눈 먼 돈을 갈퀴로 긁어들인다 해도, 예컨대 마약이나 폭력에 관련된 제반 사업은 당국의 추적이 뒤따르므로 결국 꼬리가 잡혀 조직이 와해되고 만다는 철칙 역시 고수길은 철저히 신봉하는 편이다.어쨌거나 고수길은 부가가치 높은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창출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인다.물론 속내용은 몰라도 적어도 겉보기에는 정정당당한 사업이다. 말 그대로 합법적이다.자고로 수하에 똘똘한 어깨를 많이 거느릴수록 힘있는 조직체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똘마니들을 유인할 만한 매개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일자리다.똘마니들은 일자리 많은 조직을 선호한다.똘마니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조직, 그 조직원이 되기 위해 몸 담았던 조직을 버리게 하는 조직, 그들이 제발로 찾아 들어와 무릎 꿇고 충성을 약속하는 조직, 예컨대 그 조직의 우두머리야말로 가장 힘있는 리더다.

2006-11-1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1)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⑧ 난타를 연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동시에 배추 애벌레처럼 허리를 한껏 굽힐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축축한 입술이 그녀의 젖무덤을 쉽사리 공략할 수 있게 된다. 아주 이상적인 만남이다. 통쾌한 만남이다. 박준호는 만남의 의미를 흐지부지 넘기지 않는다. 기회가 주어진 이상 최선을 다할 뿐이다. 스카이 홍의 젖무덤은 박준호의 묘기 앞에서 철저히 분해된다. 다름 아닌 입술의 묘기다. 묘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무 빨판인 양 갑자기 흡인했다가 느슨하게 풀어 주는 묘기가 그렇고, 알사탕인 양 굴리는 묘기가 그랬으며, 잔 솜털 일으키듯 혓바닥으로 핥아 올리는 묘기가 또한 그러하다. 이윽고 마지막 단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난타 묘기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아래쪽에서도 난타가 계속되고 위쪽에서도 난타가 이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더욱 강렬하고 뜨거운 난타다. 그야말로 태풍이다. 태풍은 대체로 난타와 함께 오기 마련이다. 그런 태풍에는 또 허연 물보라가 따르기 십상이다. 물보라가 많으면, 물보라 위에 무지개가 선다던가. 오색 무지개가 허연 물보라 위에 걸리고, 그 무지개를 오선지 삼아 주렁주렁 매달린 여러 모양의 음계, 음절, 높은 음자리표, 낮은 음자리표…. 그녀가 음악성 높은 소프라노처럼 기묘한 음정을 내기 시작한다. “엄마야-.” 어떤 음악이 스카이 홍의 목소리만큼 자연스러울까. 그 자연스러운 옥타브를 누가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녀가 소리친다. “그만, 그만!” 스카이 홍은 이제 더 이상 분해시킬 여력도 재료도 없다는 식이다. 그녀가 비음조로 말한다. “그만, 제발 그만!” 박준호는 그녀의 애원을 듣고 있었지만 결코 그것을 중단할 기세가 아니다. 중단은커녕 이제야 비로소 몸이 풀리기 시작했으므로 본격적인 스파트는 지금부터라고 되레 면박을 줄 정도다. 그는 술에 만취된 취객처럼 흐느적거리는 스카이 홍을 댕궁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힌다. 물론 그도 앉은 자세다. 그러니까. 물건과 벤네비스 숲이 정통으로 마주 본 셈이다. 박준호가 자부해 마지않는 것처럼 물건은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처럼 용맹스러울 수 없고 팽팽할 수 없고, 여유작작할 수가 없다. 또다시 엄청난 힘으로 그것이 벤네비스 숲을 교란시킨다. 하나 박준호의 무릎 위에 앉은 그녀의 자세는 만족스러운 정도로 자연스럽다. 대신 그녀는 앉은 자세로 방아를 찧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가 제풀에 못이겨 행위 자체가 뜸해지기라도 하면, ‘힘내, 힘내라구!’ 박준호가 숨가쁘게 응원을 보낸다. 아니, 그녀가 다시 격렬해지도록 더 강하게 요동치도록 유도하고 채근한다. 그리고 입으로 땀투성이 젖무덤을 애무한다. 두 손으로 한 짝씩 움켜쥐고 하나하나 꼭지를 물어 뜯는다. 두 개를 한 개로 만들어 동시에 입 안에 집어 넣는다. 고무 빨판인 양 갑자기 흡인했다가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하고, 알사탕인 양 돌돌 굴리기도 하고, 잔 솜털 일으키듯 혀끝으로 핥아 올리기도 하고…. 스카이 홍한테는 이제 ‘꺽꺽’ 하는 소리 외에는 나올 것이 없다. 다른 소리를 낼 여력도 겨를도 없다. 마침내 그녀가 박준호에게 매달렸던 두 팔과 두 다리와 땀으로 범벅이 된 가슴과 잘룩한 허리와 풍만한 아랫배를 깡그리 내던지며, 흡사 유언하듯 숨넘어 가는 소리를 남긴다. “나, 숨 막혀, 숨 막혀서 죽을거 같아….” 스카이 홍이 운전하는 화이트 이글스가 운행을 멈춘 곳은 예상했던대로 남한강 북한강이 합류하여 1km쯤 흘러내려 온 능내역 부근이다.

2006-11-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20)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⑦ “나, 안 되겠어.” “뭐가 안 돼!” “버거워. 너무….” “아니야, 괜찮아.” “정말이야.” “참으라구, 참아” “어머, 어멋!” 드디어 성공이다. 기어코 출입구를 돌파한다. 생각보다 저항이 없다. 윤활유 때문이다. 덕지덕지 발라져 있다. 오히려 미끈거릴 지경이다. 흡사 수면으로 내려앉은 거대한 잠수함처럼 물건은 깊이깊이 잠입한다. 물건의 잠입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잡념을 평정시키는 가장 적절한 처방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를 상징하는 크고 작은 돌기들이 물건의 저돌적인 기세에, 마치 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를 돌멩이 한 개로 삽시간에 잠재우듯 일순에 함락시켜 버린다. 참으로 아름다운 함락이다. 편안한 함락이다. 자랑스러운 함락이다. 하나 외형적인 함락은 진정한 함락이 아니다. 완벽한 함락은 도리어 그 다음이다. 박준호는 그녀의 탄력 있는 엉덩이 두 짝을 두 손바닥으로 움켜쥔다. 아니, 숫제 끌어안는다고 하는 편이 더 걸맞다. 그는 끌어안았다가 놓고, 다시 놓았다가 끌어안는 동작을 반복한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느릿 계속한다. 아니, 끌어당기기만 하지 않는다. 좌우 옆으로 휘휘 돌리기도 한다. 물건이 깊은 속에서 요동친다. 그녀는 벌써 자지러지고 있다. 눈동자가 허옇게 돌아가고 있다. 고함을 지르고 있다.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다. 우선 머리칼에서부터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기실, 땀은 박준호가 쏟아 놓아야 한다. 한데 박준호는 멀쩡하다. 스카이 홍만 소낙비 내리듯 땀을 흩뿌린다. 그녀가 간헐적으로 대여섯 번 큰 경련을 일으킨다. 그리고 박준호의 목을 휘감았던 그녀의 두 팔이 갑자기 느슨해진다. 전력질주했으므로 이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는 표시다. 박준호도 더 이상 그녀를 자신의 다리에 걸어 놓지 않는다. 그대로 들어다가 로몬드 호수가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창틀에 기대어 놓는다. 아니, 창틀을 두 손으로 붙잡고 반쯤 엎드리도록 한다. 두 개의 엉덩이가 보기 좋게 벌어져 있다. 제 위력에 못이겨 꺼떡거리는 시뻘건 물건이 벌어진 골짜기를 향해 천천히 진격하기 시작한다. “어때, 괜찮아?” “모르겠어,…어지러운 것 같애.” “나도 그래. 그러니깐 꼭 붙잡아.” “어머멋!” 이번에도 일방적인 공격이다. 뭐랄까. 집중포격이라고나 할까. 말 그대로 네이팜 탄이다. 무서운 기세로 폭발한다. 계속 폭발한다. 그녀의 팔이 또 스르르 풀어진다. 기진맥진이다. 그래도 박준호는 스카이 홍을 놓아 주지 않는다. 이번에는 타잔처럼 그녀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특수 가공 처리된 양털이 깔린 침대 위에 그녀를 옮겨 놓는다. 그녀는 반듯하게 누워 있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가물 가물, 왔다갔다하고 있다. 한데도 아직 건재한 물건이 한밤의 도둑인 양 노크도 없이 불쑥 쳐들어가자, 흡사 전기 충격 요법 환자처럼 화들짝 되살아나서 또다시 그의 목을 두 팔로 옥죄기 시작한다. 일방적인 공격은 이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태풍에 흔들거리는 양철 지붕처럼 다소 덜그럭거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백발백중에 가까운 난타다. 더구나 지금까지 그의 자세는 허리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없었으나 양털침대에서의 그것은 다르다.

2006-11-0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19)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⑥아, 그리고 그 밑에 끼어 있는 투명한 담록색 링. 눈이 번쩍한다. 짜릿한 눈빛이다. 그녀가 그 앞에 주저앉는다. 한 손으로 물건을 움켜쥐었지만 어림도 없다. 두 손을 다 동원해야 한다.그녀는 부드럽게 그것을 쓰다듬는다. 연보랏빛 머리 부분의 표피를 특히 반복해서 터치한다. 박준호도 그냥 서 있을 수 없다. 사타구니 쪽에 박혀 있는 스카이 홍의 부드러운 머리결을 움켜쥔다.머리칼이 가늘다. 그리고 숱이 너무 많다. 처음에는 가볍게 쓸어 내리기만 했지만, 그녀의 터치에서 오는 짜릿함 때문에 손아귀에 잡히는 머리칼을 움켜쥐지 않으면 안 된다.‘으으으’ 괴성도 마찬가지다. 폭포수처럼 저절로 터져 나온다. 그녀는 이제 손바닥이 아니다. 점액질로 가득한 혓바닥으로 연분홍 표피를 핥고 있다. 아니, 핥는 것으로 끝낼 조짐이 아니다. 그녀는 물건이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어 한다.‘아, 그렇구나. 그래서 저렇게 입술을 들썩거리는구나.’ 하지만, 입 안에 다 밀어 넣기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입구를 늘린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웬걸, 그게 아니다.뭐랄까. 제 몸보다 훨씬 커다란 먹이를 기어코 삼켜 넣는 보아뱀 같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이제 물건의 머리 부분은 없다. 삽시에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이다.아니, 그것은 부드러운 늪 속 같은 그녀의 입 안에서만 존재한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안식이다. 하나 행복하기는 그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가득 덮고 있는 그녀의 입술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그녀도 으으으, 소리를 내뱉기 시작한 게 아닌가.두 쪽에서 똑같이 터지는 소리는 흡사 음악이다. 어쩌면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 어느 대목에 얼핏 숨어 있었던 음률인지도 모른다.“그만, 그만.” 마침내 박준호가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입을 연다. “그만 자리를 바꿔야겠어.”그녀가 물건에서 해방되자마자 서둘러 말한다. “나도 그래. 그렇게 해 줄래?”박준호가 강조한다.“깊이 들어가고 싶어, 깊이.”“그래, 그래. 세상에서 가장 깊이.”“알았어. 알았어.”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물건이 간헐적으로 발산한 즙액 때문에 더욱 윤기가 좔좔 흐르는 그녀 입술을 박준호의 입술이 덮는다. 혀와 혀가 얽힌다.두 개의 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별개의 조직같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흡인하여 끌어당기는 법이 없다. 부딪히기만 할 뿐 오히려 밀어내는 편이다. 마치 허공중에서 만난 여왕벌과 수벌의 교미처럼.“안 되겠어. 이제 그만 들어가야 할까 봐.”박준호가 서커스 묘기를 함께 한 오랜 파트너처럼 그녀의 알몸을 가볍게 들어올린다. 그리고 두 다리를 벌리게 해서 우뚝 선 자신의 두 다리에 걸어 놓는다.드디어, 그녀의 숲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벤네비스의 삼나무 같은 울창한 숲.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 그 가운데 은밀히 뚫려 있는 아름다운 장밋빛의 터널 입구도 보인다. 마치 너무 익어 슬쩍 삐져 나온 복숭아 과즙 같은 액체가 번쩍 음실을 돌린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액체다.박준호는 물건을 그 숲으로 보낸다. 아니, 장밋빛 터널 입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게 한다. 미처 문이 열리지 않아 난색을 표명하거나 말거나, 그대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게 한다.“어머, 어머….”어차피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것의 맹위가 워낙 거센 터라, 숲의 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일제히 날아오르는 따위의 소란스러움이 한동안 계속된다.“가만 있어. 가만.”“나, 말이야….”“왜, 그래?”

2006-11-0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18)

누가 스무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⑤어쩌면 그날 저녁, 힐케이트 호텔 커피숍에서의 그녀와 박준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리시버를 통해 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빌어먹을!”박준호 역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카 오디오 버튼을 눌러 야곱의 사다리 테이프가 작동되도록 한다. 음악이 터진다.너무 많이 들어서 멜로디와 리듬과 화음까지 달달 외울 수 있는 특유의 바이올린 현이 춤추듯 박준호의 뇌리에 꽂힌다.흡사 바람과 마주선 달팽이의 움직임 같다. 갈댓잎에 간신히 매달린 달팽이. 바람은 계속 불어 댄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지만, 힘에 겨운지 더듬이와 즙액 가득 묻은 알몸이 부끄럽게 갑옷 밖으로 삐져나오고 있다. 늘어지고 있다.금세 ‘휘릭’ 소리와 함께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데도 달팽이는 용케도 잘 견디어 내고 있다.한데 이상하다. 달팽이의 그런 안간힘을 박준호만 보는 게 아니다. 누군가 또 옆에 앉아 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보고 있다.어느새 잿빛 어둠은 사라지고 눈부신 햇빛이 쏟아진다. 햇빛 때문일까. 바람만, 그것도 훈풍처럼 하늘하늘 불고 있을 뿐 달팽이는 없다.장소는 통나무집 산장이다. 산장은 아주 높다. 흡사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다. 아니 실제로 벤네비스의 울창한 삼나무 숲이 산장 아래 운무처럼 유유히 서 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산장의 문을 열고 테라스에 서면, 곧바로 시퍼런 로몬드 호수가 내려다 보인다. 일그러진 초승달 모형의 로몬드는 스카이 섬에 위치한 호수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 포트 윌리엄으로 가는 길목인 벤네비스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단 말인가.‘이상하지 않아요?’박준호가 스카이 홍을 돌아보며 묻는다. 거실에서 꽃을 꽂다 말고 그녀가 힐끔 이쪽을 본다. 시뻘건 양귀비꽃 더미를 코발트 유리병에 가득가득 꽂고 있다.그녀는 양귀비꽃보다 더 현란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탓일까. 정말 홑 이파리 양귀비보다 훨씬 눈부시다. 투명한 우윳빛 피부도 마찬가지다.“뭐라고 했어요?”그녀가 묻는다.“저 로몬드 호수 말이에요.”“호수가 어때서요?”“왜 이 산장 밑에 옮겨 와 있는가, 그게 궁금해서 묻는 거요.”“호수가 옮겨 와 있다구요?”“그래요. 로몬드 호수는 원래….”잠깐, 그녀가 박준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 계속한다. “호수야 어디 있든 무슨 상관이에요.”스카이 홍이 배시시 웃는다.“상관할 건 없지만….”박준호도 같이 웃는다. 그녀가 말한다.“호수보다 더 중요한 게 그대로 있는데, 뭘.”“그게 뭔데요?”“그거 말이에요.”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킨다. 박준호의 시선이 그녀의 턱짓을 따라간다.어럽쇼. 스카이 홍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바로 박준호의 물건이다. 물론 그것은 그지없이 탱탱하다. 꼭 타석에 선 4번 타자가 손바닥에 송진가루를 묻히기 위해 배트를 다리 사이에 끼어 넣은 것 같은 행색이다.그만큼 크고 우람하다. 너무 비대해서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다.연보랏빛으로 빛나는 표피와 형광등색을 머금은, 흡사 깎아 놓은 대리석 같은 정교한 기둥….

2006-11-0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17)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④그러니까 박준호는 지금 그녀를 미행하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다.왜 스카이 홍을 두서 없이 뒤쫓기만 해야 하는가. 왜 그녀는 마냥 달아나고, 박준호는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가.12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하지 않았던가.박준호는 진저리친다. 그날 폭풍우 속을 뚫고 폭스바겐을 뒤쫓아 200㎞로 달리던 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벤네비스 고원지대였던가. 비는 점점 더 거세어져 가고, 바람은 그칠줄 모르고, 날은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하고….그러나 그때는 달아나는 그녀의 자태를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달리고 있다.스카이 홍은 모자를 쓰고 있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그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서승돈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서승돈은 납작모자까지 쓰고 있다. 불과 3시간 전만 해도 고숙자 결혼식 주례를 서느라고 깔끔한 정장이었는데, 어느새 스포티한 점퍼 스타일로 바꿔 입고 있다. 얼핏 보면 평소의 서승돈 모습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다. 흡사 야외 훈련 나온 병사들의 위장술을 방불케 하는 옷차림이다. 어찌 보면 그들이 타고 있는 승용차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화이트 이글스는 영림에서 생산되는 차종 중 가장 소형이다.서승돈은 명색이 영림전자 사장이다. 사장 신분에 어울리는 차종이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위장용이 틀림없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옷으로 변장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납작모자를 눌러 쓴 전혀 다른 모습….또 있다. 시간이다. 솔직히 홍주리나 서승돈이 화이트 이글스에 앉아 교통 체증에 몸을 맡기고 있을 시간이 아니다. 당연히 서승돈은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리는 야당 총수 후원의 밤 행사에 참석하든가, 아니면 김상도 회장이 소집한 영림그룹 사장단 회의석을 지키고 있든가 해야 옳다.한데 그는 두 곳 다 한꺼번에 불참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두 곳 다 참석한다는 전제 아래 회사를 나왔을지도 모른다.그러니까 사장단 회의는 후원회 행사 때문에, 후원회 행사는 사장단 회의 때문에 부득불 참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시키고 있을 터다. 정말 대단한 머리 굴림이다. 자동차는 반포대교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박준호도 왼쪽으로 핸들을 꺾는다.비 쏟아지는 한강은 한마디로 한 폭의 동양화다. 비 안개에 가려 시야가 희붐한 광경은 과감히 수묵 처리한 화폭같다.강 건너가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 물결이 물을 튀기며 끊임없이 이어지는데도 깊은 정적에 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맑은 날 같으면 햇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시간인데도 시야는 온통 잿빛으로 내리 누르고 있다. 스카이 홍이 운전하는 화이트 이글스가 그러하다. 반포대교를 건너자마자 또 좌회전이다. 올림픽대로를 타기 위해서다. 남한강변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 같다. 팔당대교 가까운 카페촌 신호등 앞이다. 스카이 홍이 갑자기 서는 바람에 박준호도 급 브레이크를 밟는다.그녀가 급히 유리문을 내리고 팔을 내밀어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물론 박준호의 존재를 의식한 행동이 아니다. 일종의 운전 매너라고나 할까.어쨌거나 그런 와중에 얼핏 본 스카이 홍은 스카이 섬에서 처럼 리시버를 꽂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옆자리의 서승돈 역시 같은 리시버를 꽂고 있는 것이었다.

2006-11-0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16)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③ “한데, 왜 갑자기 짜증을 내고 그러십니까? 제가 뭐 잘못 말했습니까, 형님?” 고수길이 따지듯 계속한다. “그 아이하고 형님하고 너무 닮았다는 얘길 드렸을 뿐인데…….”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알았습니다.” 차 안이 조용하다. 찬물을 끼얹어 놓은 것 같다. 박준호가 다시 눈을 감는다. 아무래도 억울하다는듯이 고수길이 입을 연다. “형님, 그 얘기 때문에 정말 기분 상하신 겁니까?” 박준호가 다시 눈을 뜬다. 그리고 남의 얘기처럼 예사로 내뱉는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 우연의 일치.” “우연치고는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말 닮아도 너무 닮았더라구요.” “야, 저 앞에 차 세워!” 박준호가 고수길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명령한다. 자동차가 끽 도로 옆에 선다. 박준호가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말한다. “너희 둘이 다녀와.” “형님은요?” “난 일 좀 보고 들어갈테니까.” “참, 저녁행사는 어떻게 할 건가요?” “저녁행사?” “메리어트 호텔에서…….” “아, 그래.” 대선에 실패하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번에 다시 야당 총수로 복귀한 선생님의 후원회 모임 행사다. “서승돈 사장님은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고수길도 자동차에서 내려서며 말한다. “왜, 무슨 일 있대?” “영림 김 회장이 하필 그 시간에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는데요.” “알았어.” “그럼, 준비할까요.” “준비라니?” “후원회비 말입니다.” “그래, 만약 내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고수길이 너라도 가서 내 이름으로 후원금 내고 와.” “아니, 왜 형님은…….” “글쎄, 시키는대로 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가 봐.” “참, 형님.” “또 뭐야?” “후원금은 얼마나 하실거죠?” “한 장만 해.” “한 장이면?” “천만원.” 굵은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하늘이 내려 앉을듯이 우중충했던 터다. 이날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비가 내린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뒤숭숭하다. “우르릉 쾅!” “번쩍!” 천둥도 치고 번개도 친다. 어두컴컴한 시야가 번개때문에 대낮처럼 밝다. 그리고 금세 침침한 잿빛으로 뒤덮인다. 그 어둠 위로 비가 줄기차게 쏟아진다. 바람까지 동반한 비다. 바람은 한쪽으로만 불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불규칙하게 불었다가 자고, 잤다가 다시 불어제친다. 그래서 자동차 유리를 함부로 내릴 수 없다. 속이 답답하다. 꽉 막힌 동굴 속 같다. 숨이 막힌다. 유리창을 활짝 열어 환기라도 시키면 숨통이 트일는지, 박준호는 와이셔츠 단추를 푼다. 가슴을 헤친다. 그래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물론 스카이 홍 때문이다. 지금 스카이 홍은 박준호와 불과 5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바로 앞차다.

2006-11-0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215)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② “어떻게 알아?” “서승돈 사장 연인이잖습니까.” “뭐라구?” 만약에 서 있는 자세였다면 휘청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도 남았을 터다. 그만큼 충격적이다. 박준호가 일갈한다. “아니, 서승돈 사장은 부인이 있잖아!” “별거중이거든요.” “별거?” “부인이 아이들하고 미국에 들어가고, 서승돈 사장 혼자 살고 있다구요. 벌써 3년째랍니다.” 따지고 보면 서승돈이 별거를 하건, 이혼을 하건, 상처를 하건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그 상대가 홍주리라는 사실 때문에 이처럼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수리가 욱씬거리고, 눈앞이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구요, 형님, 홍주리 여사님 하고 우리 고숙자 누나하고 대학 선후배 사이라는 사실 모르셨죠? 사실은… 지난달 영림건설 상가 분양 건도 홍 여사님이 다리를 놔 주어서 수월하게 해결 본 겁니다.” “그러니까, 로열 패밀리 중에 우리 ‘구길사’를 돕는다는 사람이….” “맞습니다, 형님. 제가 말씀드린 그 사람이 바로 홍주리 여삽니다.” 아뿔싸. 갈수록 태산이다. 머릿속이 온통 세숫대야에 떨어뜨린 잉크 방울 같다. 기기 묘묘한 형상으로 휘휘 풀리고 있다. 그냥 멍한 상태가 아니다. 흡사 특수 톱으로 화강석을 자르는 것 같은 굉음이 연방 터져 나오고 있다. 이쪽의 혼돈 상태를 알 리 없는 고수길이 계속 진부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다. “서승돈 사장과 홍주리 여사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고숙자 누나 때문이죠. 누나의 역할이 컸으니까요. 사실 그런 사연이 있었으니까 홍주리 여사가 결혼식장까지 아들을 데리고 와 준 거 아닙니까. 홍 여사님 함부로 외출하지 않는 분이거든요. 실은 저도 반 년 전에 잠시 인사 드리고, 오늘이 두 번쨉니다.” 아무렴, 세상이 삼장법사 손바닥이라 해도 이런 거짓말 같은 인연이 어찌 얼기설기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아득해서, 손에 잡히지 않았던, 아니 숫제 오리무중이라고 해야 옳았던 그녀가 이처럼 가까운 곳에 어찌 아무렇지 않게 숨 쉬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왜 그처럼 두리번거리고 찾아 헤맸을 때는 자취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이처럼 돌연히, 그것도 등잔 밑에서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박준호는 도무지 믿고 싶지 않다. 왜 하필 서승돈이란 말인가. 왜 서승돈이 그녀의 연인으로 선택되었단 말인가. “한데, 형님.” 고수길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그 아이 말입니다. 홍 여사님 아들이요. 걔가 왜 형님을 그렇게 많이 닮았죠?” 백미러를 통해 박준호를 새삼스럽게 그윽이 들여다본 다음 고수길이 말한다. “형님을 빼 박았더라구요. 눈도 그렇고, 코도 그렇고, 하다못해 귀하며, 고수머리까지, 영락없이 형님 모습 그대로더라구요.” “니, 그거 정말이가?” 또 조봉삼이다. 조봉삼이 숫제 몸을 돌려 박준호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연다. “진짜로 우리 행님을 그대로 빼 박았다 그 말이가?” 고수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라모. 백 프로 행님 아들 아니것나? 행님이 씨를 뿌린기라. 하모, 씨도 안 뿌리는데 싹이 날리 읍다. 안 그렇나! 콩 심는 데 콩 나고, 팥 심는 데 팥 난다코 안 허드나?” “야, 시꺼!” 박준호가 뻑 고함을 지른다. “행님.” “시끄럽다고 했잖아!”

2006-11-0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14)

누가 스무 살을 아름답다 하는가 ①고수길의 사촌누이 결혼식장에서 나오자마자 박준호 일행은 급하게 자동차에 오른다.우면동 ‘알까기’ 프로젝트 때문이다. 사업 시행 전에 실시하는 현장 답사다. 물론 고수길이 제반 조사를 끝낸 상태여서 따로 문제 삼을 것은 없지만, 마지막 단계로 최고 책임자인 박준호의 확인 도장을 받는 일종의 요식 절차인 셈이다.고수길이 핸들을 잡고 있다. 조봉삼이 조수석에 앉고, 박준호가 뒷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준호는 언제나처럼 쉔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꽂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며칠 전부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현장 답사에 나서기로 스케줄이 짜여져 있었으므로 고수길이 재촉하는 대로 무심코 자동차에 올랐지만, 솔직히 박준호는 제정신이 아니다.어디로, 왜 가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휑하다. 오로지 스카이 홍뿐이다. 그녀 생각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흡사 비눗방울처럼 미세한 움직임에도, 그녀의 눈빛이, 미소가, 목소리가 오색 무지개로 살아 떠오르는 것이었다.“형님.”고수길이 입을 연다.“이번 것은 지난번 방배동 것보다 훨씬 메리트가 큽니다. 얼추 열 장에 가까우니까요. 시일도 3개월이면 쫑나게 됐구요.”평소 같으면 의뢰인에 대해서, 총액에 대해서, 그리고 관련 은행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지고 들 박준호인데도 오늘은 일절 대꾸가 없다.“형님.”고수길이 목소리 톤을 높인다. 그래도 박준호는 눈을 뜨지 않는다.“행님, 잠든기라.”조봉삼이 끼어든다.“잠든 거 아냐.”고수길이 말한다.“눈 깜고 있는 거, 니 안 보이나?”“명상하고 있다니까.”“명상이나, 잠이나 고부고부 아니가?”“무식하게 명상 하고, 잠 하고 어떻게 같니? 모르면 자크 꽉 닫고 있어, 임마.”“고가 니는 입만 열었다카모 이 조봉삼을 무시허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때문에 니 한번 크게 혼날끼다!”안 그래도 작은 눈이 더 길게 찢어지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다.“가방끈 갖고 폼재는 놈덜, 정말 눈꼴시러 못살것다, 시펄! 확 아구지 한 번 돌리 삐야….”고수길이 어이없다는 듯 희죽 웃고 만다. 앞뒤 없이 욱하는 조봉삼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웃기는 와 웃노?”조봉삼은 여전히 신경질이다.“알았어, 임마. 하지만, 너도 문제 있어. 까딱하면 겁주고 협박하는 그 버릇 고치는 게 좋을 거야.”“진짜 고가 니는 협박이 먼줄 모르는 기라!”그제야 박준호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뜬다.“왜 이리 시끄러워?”고수길이 구세주라도 만났다는 듯이 반갑게, “형님” 한다.“왜, 그래?”“아까 결혼식장에서….”“아까 결혼식장에서 왜?”“그 아이 말입니다.”“그 아이라니?”“홍주리 여사 아들 말입니다.”박준호의 정수리로 전율 같은 열기가 찌르르 흘러 들어온다. 박준호가 귀에 꽂았던 리시버를 빼내며,“홍주리를 네가 알아?”되레 질문을 던진다.“알다마다요.”

2006-11-02 경인일보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