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213)

내일을 향해 쏴라 (21)“아닙니다. 죽 한국에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군대도 갔다오구요.”“그으래?”“ROTC 소대장 근무했습니다.”“그랬구나! 난 군대간 줄도 모르고, 괜히 궁금해 했었지.”서승돈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계속한다.“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군대라도 휴가는 나왔을 테고…. 왜 날 찾아오지 않았나?”“특별히 찾아뵐 일이 없었습니다.”박준호가 대답한다.“하긴, 자네 부친을 봐서라도 내가 자넬 찾았어야 될 일인데, 괜히 회사 일에 매어서….”“아닙니다.”고개까지 저어대며,“그건 아니구요. 한데, 이 결혼 주례를 서셨더군요?”박준호가 묻는다. 그제야 서승돈이 박준호의 손을 놓으며,“참, 어느 쪽에 왔나? 신랑이야, 신부야?”“신붑니다.”“신부하곤 어떻게 아는 사이야?”“후배 아이의 사촌누납니다.”“사촌누나? 그렇다면… 고수길이 얘긴가?”“맞습니다. 고수길도 아시는군요.”“알다마다. 여러 번 식사도 같이 하고… 똑똑한 친구지…. 그런데, 왜 나를 몰랐지? 물론 고수길의 사촌누나가 내 비서라는 사실도 몰랐겠구만.”“몰랐습니다.”“저런… 안타깝기 짝이 없군. 그래. 엎드리면 코 닿는 지척에서 서로 모르고 지냈다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진즉부터 선생님이 정치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왜 그 어른은 찾아가지 않았지? 찾아갔었다면 금세 날 만났을 텐데 말이야.”서승돈이 얘기하는 그 어른은 런던에서 만날 뻔했던 야당 전 총재다. 박준호는 이번에도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한다.“그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하긴, 그래. 그 점은 나도 이해할 수 있어. 옛날에 박 대령님도 그랬으니까… 참, 작은아버지 별세하셨을 때, 내가 외국 출장 중이라서 문상도 못했어. 나중에 찾아가니까. 주인이 바뀌었더라구. 박상길 투사마저 가 버리니까, 대령님 추모회도 흐지부지 없어져 버리고 말이야….”바로 그때다. 박준호 뒤쪽에서 귀 익은 청아한 목소리가 들린다.“서 사장님. 저 먼저 갈게요.”목소리 자체만으로 중추신경을 건드리는 것처럼 싸아한 느낌이 전해 온다.“아, 아뇨.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서승돈이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모른다.“다섯 시 정각에, 기다리고 계시거든요.”그녀가 말한다.“누가 말씀입니까?”“회장님요.”“회장님, 경영대학원 강연 가신 걸로 아는데….”“방금, 전화 주셨어요. 다섯 시까지 일규 데려다 주기로.”박준호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도 목소리 주인공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어코 몸을 돌려 그녀를 본다.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어떻게 이 자리에 스카이 홍이 우뚝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박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빈다.그렇다. 숫제 눈이 부시다고 해야 옳다. 스카이 섬에서, 아니 벤네비스 산장에서 만났던 모습 그대로다. 그날 헤어지고 나서 어언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버렸는데, 어쩌면 저처럼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거기다 그녀는 아주 참하게 생긴 사내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다. 초등학교 6학년쯤 될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여자처럼 갸름한데다 피부가 유난히 희다. 눈이 도려 놓은 듯 또렷하다. 눈길이 맵다. 녀석도 박준호를 끌어당기듯이 본다. 하나 박준호는 녀석과 오래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그 옆에 서 있는, 너무나 화려한, 마치 유월달 찬란한 햇빛을 흠뻑 받은 장미꽃 더미처럼 눈부시게 서 있는 스카이 홍 때문이다. 박준호는 모든 기능이 마비된 환자처럼 그냥 황망히, 눈부심 그 자체인 스카이 홍을 바라볼 뿐이다.

2006-11-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12)

내일을 향해 쏴라 (20)그 두 가지 거사는 모두 일주일 안에 해결된다. 거사 프로젝트 명칭이 ‘쓰레기 수거 엑스 작전’이다. 작전 비용은 1건에 1천만 원씩 모두 2천만 원이다. 많다면 많은 돈이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어쨌든 단돈 2천만 원으로 법치국가도 처리하지 못하는 냄새 나는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 버린 것이다.주조갑까지 저승으로 보내 버린 날 박준호는 작은아버지 위패 앞에서 명상을 한다. 이제 편히 쉬세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음도 없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생명, 그 자체로 쉬세요. 숙모님도, 준희도 걱정하지 마세요. 마포 태껸 도장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작은아버지가 그처럼 심혈을 기울인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도….그런 식으로 주모자 김철구와 주조갑이 제거되자 그 하부 조직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다. 몇 십 명 남은 조무라기들만 ‘구길사’의 밥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그날 마포 도장에서 구 대 일로 벌였던 대결은 한마디로 파죽지세 바로 그것이었다. 박준호를 아홉 명의 전사들이 에워싸고 한꺼번에 공격했는데도, 다섯 명을 제외한 네 명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될 정도로, 거의 일방적인 싸움이 되고 만다.그날 손바닥을 털고 도장 문을 나서는 박준호를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피 터지는 싸움을 막 끝냈다기보다 데이트를 위해 잘 꾸미고 집안을 나서는 청년 같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싱겁게 승부가 났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통방통한 것이 인간사인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일이 그러하다.일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흡사 비 갠 한낮의 찬란한 햇살 같은 순간이 없다면, 그래서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의 연속이라면 어찌 인생을 희로애락의 앙상블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만, 어쨌거나 그런 찬란한 순간이 있다는 그 자체가 삶의 또 다른 기쁨이고 감흥일 터다.예측은 커녕 미처 상상조차 못했던 수십 년 숙원이 한순간에 풀리는 기적 같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역시 삶의 이변이고, 삶의 환희가 아닌가 싶다.고수길의 사촌누나 고숙자와의 인연이 바로 그 케이스다. 그러니까 박준호가 박상길이 소유하고 있었던 마포 태껸 도장 건물을 넘어갈 때의 값으로 재구입, 깨끗이 수리를 끝내고 새 단장했던 바로 그날, 고숙자의 결혼식이 열린다.물론 청첩장이 박준호 앞으로 배달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수길이 지나가는 말로 제 사촌누나의 결혼식을 들먹였기 망정이지, 만약 그런 말도 꺼내지 않았더라면 박준호에게 그런 행운이 따랐을 리 만무하다. 아니, 설사 그런 얘기를 들었다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면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다.그러니까 인생에 있어서 때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다가 갑자기 하늘이 벗겨져 찬란한 햇빛이 대지를 내리쪼이고, 아스라한 언덕으로 화려하게 쌍무지개가 뜰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건이 바로 고수길 사촌누나의 결혼식이었던 셈이다. 그 결혼식에서 박준호를 놀라게 한 대상은 주례를 맡은 중년 신사다. 키가 훌쩍 큰 사내. 다름 아닌 서승돈이다. 런던에서 그리고 할아버지 서울 장례식에서 다시 만났던 죽은 아버지의 공군 사관학교 후배 조종사. 식을 끝내고 흰 장갑을 벗고 있는 서승돈에게 박준호가 다가가 우뚝 서자,“아니, 이게 누구야?”한눈에 알아보고,“박준호 군 아닌가?”두 손을 잡는다. 두 손을 붙잡은 것도 모자라 하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꽉찬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박준호를 와락 끌어안아 버리는 행동도 불사해 마지않는다. “반갑구먼, 반가워!”숨이 막힐 지경이다.“저도 그렇습니다.”박준호가 말한다.“그래, 그동안 어디 있었는데, 그렇게 연락이 두절된 거지?”“여기저기 있었습니다.”“여기저기라니? 영국, 한국 그렇게 번갈아 있었단 말인가?”

2006-10-3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11)

내일을 향해 쏴라 (19)  그러나 ‘구길사’의 대표는 박준호가 아니다. 고수길이다. 사업 아이디어 자체가 고수길의 머릿속에서 구상되었으므로 경영도 몽땅 그에게 맡겨 버린 터다. 법원에서 공매하는 부동산을 입찰로 따내 되파는 일과, 작은 상가를 분양받아 사고 파는 일과, 정부 공채를 사고 파는 일 등, 이른바 돈 되는 것이라면 업종을 불문하고 뛰어드는 일종의 잡화상 같은 사업이다. 또 있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 속이라서 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일테면 법으로 해결 안 되는 제반 업무를 주먹으로 해결하는 식의 사업이 그것이다. 개발 대상 지역 부동산을 구입, 끝까지 깔고 앉았다가 다섯 배, 열 배로 튀기는 ‘알까기’라든가, ‘노름빚받기’라든가, ‘은행 잔고 증명용 거금 빌려 주기’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고수길은 그 방면으로 귀재다. 그는 무엇보다 정보에 민감하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언제 어떻게 바뀌고, 어느 지역 토지 규제를 언제 풀어 대단위 아파트를 건설할 것이며, 어떤 아파트의 어떤 상가가 얼마에 언제 나오고 등등 고수길에게 접수되는 정보는 말 그대로 무궁무진하다. 어디서 그런 잡다한 정보가 들어오는지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다. 정보 분석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보 분석을 거쳐 `이거 이거는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박준호에게 보고를 끝내면 고수길은 금세 신들린 사냥꾼으로 변신한다. 눈에 쌍불을 켠다. 포획물의 길을 앞질러 매복을 한다. 그리고 포획물을 정확히 겨냥한다. ‘아무거나 물지 않지만 일단 물었다 하면 절대로 놓지 않는다’가 고수길의 경영 철학이다. 물론 덥석 물기까지의 과정도 예삿일이 아니다. 설사 박준호의 결재를 득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관련 정보와 법규를 면밀히 검토, 일단 승산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과감히 포기해 버리는 결단도 파격에 가깝다. 그래서 고수길에겐 지지부진이 없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된다. 안 되는 일을 질질 끌어가며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고수길의 그런 근성 덕분에 박준호는 불과 3개월만에 마포 태껸 도장을 놈들로부터 반환 받는다. 그동안 극렬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수길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법적 절차와 고수길의 상상을 초월한 기습 공격에 놈들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고수길은 작은아버지 박상길을 살해한 주모자 김철구와 주조갑을 3개월 간 24시간 밀착 미행을 시킨다. 물론 똘똘한 전문가를 뽑았으므로 100% 실수는 없다. 이제 큰 물에서 놀게 된 김철구와 주조갑이 매주 골프를 다닌다는 사실도, 3일이 멀다고 정치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는 사실도, 술집 출신 젊은 여자 아파트를 일주일에 한두 차례 드나들며 잠을 잔다는 사실도 그 미행에서 밝혀낸다. 김철구와 주조갑이 3일 간격으로 세상을 하직했던 그 새벽, 박준호는 예외 없이 땀을 비 오듯 흘린다. 아침 운동 때문이다. 양발지르기와 공중돌리기와, 이중회전날기를 열 번만 반복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고수길의 전화는 하필 그때 걸려 온다. “형님, 김철구 승용차가 지금 막 출발했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골프장 행인가?” “그렇습니다.” “준비는 뭘로 했어?” “골재 트럭입니다.” “운전수는 믿을만 해?” “그건 걱정 마십쇼. 형님이나 저나 전혀 무관하게 처리했으니까요.” “좋아. 그대로 밀고 나가.” “알았습니다.” 벤츠 승용차가 과속으로 달리다가 마주오는 골재 트럭과 정면 충돌, 벤츠 승용차에 탔던 운전사를 비롯한 2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식의 사고기사 한 줄 신문에 나지 않고 김철구는 마흔일곱 살로 세상을 마감한다. 주조갑도 마찬가지다. 부인 몰래 정해 놓은 젊은 여자 아파트에서 새벽에 나오다가 역시 과속으로 달리던 컨테이너 트럭과 정면 충돌, 그 자리에 숨지고 만다.

2006-10-2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10)

내일을 향해 쏴라 (18)“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형님께서 아직 결정은 내릴 수 없지만, 마음에는 든다든지, 마음에 있다든지, 그렇게 태도를 밝혀 주시면 누님을 3개월, 아니 1년이라도 붙잡아 둘 자신이 있거든요.”“아서.”박준호가 고개를 절절 흔든다.“아서라뇨?”“누나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면 쫓아다니는 그 남자에게 그냥 보내 드려.”“고생을 왜 시킵니까?”“글쎄, 난 자신이 없거든.”“제가 보기엔 누님한테도, 형님한테도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 같거든요. 웬만하면 붙잡으십시오. 절대 후회는 안 하실 테니까요.”“이런 말 처음하는 얘긴데….”박준호가 고수길의 반응을 살핀 다음 말을 계속한다.“나한테 정해진 여자가 따로 있어.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알겠어?”마치 목구멍에 걸린 이물질을 토해 내듯 박준호가 말한다. 그리고 너무 개운하단 듯이 험험 기침까지 뽑는다.“정해진 여자가 있다구요?”“그렇다니까.”“한데 왜 면회 한 번, 편지 한 번 안 왔죠?”고수길이 눈을 반짝이며 연거푸 묻는다.“그리고 왜 한 번도 여자 얘기 꺼내지 않으셨죠?”“왜 꺼내지 않았냐구? 이봐, 모름지기 중요한 것일수록 가슴속 깊이 숨기고 사는 족속이 남자야. 너 그거 모르니?”고수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빤히 바라볼 뿐이다.“너 정말 모르는 거야?”박준호가 다시 반복한다.“…대충… 알겠네요.”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마지못해 고수길이 대꾸한다.물론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 놓은 대상은 스카이 홍이다. 그날 벤네비스 고원에서 헤어지고 아직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어찌 보면 당연히 기억에서 조용히 퇴색되었어야 옳을 존재다. 한데도 아직 살아서 꿈틀거린다.그렇다. 사랑의 고뇌는 아무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아픔으로 살아 숨쉰다고 하지 않던가.박준호가 고개를 숙인 고수길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는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고수길은 한 번도 고숙자 이름을 들먹인 적이 없다. 비단 고숙자뿐 아니다. 여자 이야기만 나와도 일절 함구로 일관해 버린다. 역시 심지가 깊은 친구다.그 무렵 박준호와 고수길은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박준호가 드디어 서울에 뿌리내리기로 작심한 탓이다.흡사 기초를 든든히 하기 위해 대형 파일을 박듯 내 것이 박히느냐, 네 것이 뽑히느냐, 내가 사느냐, 네가 죽느냐, 판가름 내는 일종의 생존 투쟁이다. 다행히 박준호에게는 자금이 준비되어 있다.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의 여동생 리타 라일러에게서 갈취해 온 17만 달러가 그것이다. 물론 어머니가 진즉 변제했거나 지금도 변제하느라 고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어머니와의 연락이 그때 이후로 완전히 두절되어 버린 것도 기실은 그 17만 달러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박준호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그 돈에는 일절 손대지 않았고, ROTC 훈련을 받으면서 아예 서울 변두리 땅에 묻어 버렸으므로 계산상 17만 달러가 송두리째 남아 있는 셈이다.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산상일 뿐 실제는 다르다. 한참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할 때여서, 불과 5년 사이에 17만 달러가 90만 달러로 불어나 버린 것이었다. 이름하여 대박이다.박준호는 그 돈으로 사무실을 낸다. 회사 이름이 ‘구길사’다. 아버지 이름 끝 자와 작은아버지 이름 끝 자를 따낸 상호다.

2006-10-2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9)

내일을 향해 쏴라 (17)한사코 뒤로 물러서는 고수길 호주머니에 억지로 찔러 넣었던가.한데, 그 사진 주인공이 찾아오다니.이름이 고숙자다. 그날 저녁 셋이 어울려 저녁 먹고, 맥주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하고…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수길이 빠져 달아난 사실을 확인한다.뻔할 뻔자다. 두 사람이 어찌어찌 잘 해 보라는 수작이다. 박준호는 피식 웃는다. 시계를 본다. 어느새 자정에 가깝다.“싱거운 친구네요.”박준호가 말한다.“그러게요.”고숙자도 동조한다.“집이 어디시죠?”“흑석동이에요.”“모셔다 드리죠.”기실 그녀는 박준호의 기호에 맞는 여자가 아니다. 아무리 백 번 감안한다 해도 고수길이 생각하는 식으로 그렇게 어찌어찌 맺어질 수 있는 유형의 여자가 아닌 것이다.고숙자를 바래다 주고 돌아오는 택시 속에서 박준호는 휴대하고 다녔던 리시버를 귀에 꽂는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듣기 위해서다.쇤베르크의 음악은 듣고 있으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스카이 홍의 이미지를 한 곳에 불러 모아 들이는 것 같다.그래도 스카이 홍의 완벽한 모습은 재생되지 않는다. 그냥 이미지뿐이다. 그녀의 이미지만 음악의 선율에 실려 흡사 구름에 달 가듯 박준호의 가슴을 후벼 놓곤 한다.왜 일까, 왜 벤네비스 고원지대 숲 속 산막에서 가졌던 그 환상적인 교접은 지금까지 뇌리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일까. 왜 지금도 탁탁 소리내며 타 오르던 참나무 향내가 코를 진동시키는 것일까.박준호는 혼자 고개를 절절 흔든다.다음 날이든가, 고수길이 헐레벌떡 찾아와서 다짜고짜 따져 마지않는다.“어때요? 잘 되셨습니까?”“잘 되다니?”“우리 누님 말이에요.”“어떻게 돼야 잘 되는 건데?”“…그런 거 있잖습니까.”“그런 거라니?”“뭐, 다 아시면서….”고수길이 쑥스럽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입 주변을 막으며, 말을 잇는다.“진짜 좋은 만남은 첫 눈에 이뤄진다고 하지 않습니까.”“이 봐, 고수길.”“네, 형님.”“나, 어젯밤 흑석동까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모셔다 드린 사람이야.…그런 쓸데없는 상상은 나에게 부담스러워.”“부담스럽다구요?”“그래, 가능하면 누님과의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했으면 좋겠어.”“왜, 맘에 안 드세요?”“마음에 들고 안 들고 차원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야. 난 아직 계획이 없거든. 특히 결혼 같은 것은.”고수길이 예상이 빗나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 다음,“그러니까,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군요.”시큰둥하게 내뱉는다.“글쎄, 그런 차원이 아니라니까.”박준호도 시답잖게 대답한다. 고수길이 작심한 얼굴로 말한다.“실은 누님 쪽이 쫓기는 입장이거든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란 말입니다.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는데 너무 적극적이어서 이제 예스냐 노냐 답을 줘야 할…그런 시점인데…그래서 당장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 해도, 형님께서 당분간 사귀고 싶다는 의사 표시만 해 주셔도 누님은 그쪽에 노라고 말해 버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고수길이 국민체조하듯 목을 한 바퀴 돌린 다음 다시 말을 잇는다.

2006-10-2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8)

내일을 향해 쏴라 (16)박준호가 천천히 뒷걸음을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헌병 대령 쪽을 향해 꾸벅 절을 한다. 그 오른쪽 구석 귀퉁이에 고수길 병장도 구경꾼처럼 서 있다. 고수길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흔들기 시작한다. 누군가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모두가 박수를 치고 있다.“브라보, 소위!”박준호 소위는 ‘꽃밭’ 동네를 빠져나오며, 함성 소리와 박수 소리를 등 뒤로 오래오래 듣는다. 펑펑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박준호 소위가 군복을 벗기 석 달 전에 먼저 제대를 한 고수길이 사복차림으로 부대를 나서는 박준호를 막아 선다.“형님, 접니다. 고수길이 인사 드립니다.”“아니, 어떻게 알고 왔어?”“어떻게 알다뇨? 형님 일이 바로 제 일 아닙니까? 아무튼 축하 드립니다.”“축하는 무슨…. 군대에 말뚝 박으려고 들어왔다가 쫓겨 가는 마당에….”“그건 애당초 형님 생각이 잘못된 겁니다. 형님이 알다시피 대한민국 군대가 어디 말뚝 박을 만큼 비전이 넘치는 곳입니까? 나의 신념, 나의 꿈을 담아 줄 만큼 넓고 깊고 그리고 숭고한 곳입니까? …형님이 아시다시피 아니잖아요…. 그러믄요 잘 나오셨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빠진 것은 아주 잘 하신 결단이구 말구요. …암요. 마땅히 축하 받으실 만한 일을 하신 겁니다.”평소와 달리 고수길은 말이 많다. 박준호도 그러는 고수길이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그토록 정감이 넘칠 수 없다.“암튼, 고마워….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 잔 쏘지.”“오늘 쏘는 건 접니다. 저한테 맡겨 주십쇼.”“좋아. 어쨌건 나가자구.”박준호가 그의 등을 밀자 주춤거리며 고수길이 입을 연다.“기왕 축하 드리는 마당에… 한 사람 더 데리고 왔습니다.”“한 사람이라니?”“제, 사촌누나요.”“뭐라구?”안 그래도 제대하기 한 달 전 마지막 휴가를 다녀 온 고수길이 박준호에게 불쑥 명함판 사진을 내밀며 말했던가.“이거, 어때요?”물론 참한 처녀 사진이다. 옆으로 살짝 비껴, 만면에 미소를 그윽히 머금은 얼굴. 아마도 그 방향이 그중 잘 어울리는 프로필 같다.“이쁘네, 누구야?”“사촌누님이요.”“앳되어 보이는데, 누님이야? …대학은 졸업했겠고….”“지금 회사에 다녀요, 영림전자 아세요?”“영림전자를 왜 몰라? 영림그룹 계열이잖아?”“바로 거기예요. 거기 사장 비서실에 근무하는데… 비서직 아무나 픽업되는 거 아니잖아요? 십 대 일 경쟁을 뚫고 들어갔을 때는 해외 영업부에서 일했는데…빌어먹을 그 인물 때문에… 세상은 미인을 가만두지 않더라구요. 영문학과 출신이라 영어 잘 하겠다, 성격 좋겠다, 팔등신으로 좍 빠졌겠다… 본인은 싫다고 버티는데 억지로 비서실로 모셔 간 거 있죠?”“그런 누님 사진을 왜 나한테 보여?”“소대장님도 미혼이시잖아요?”“그래서?”“우리 누님도 미혼이시거든요. 세상일은 아무도 몰라요. 혹시 인연이 되어 잘 풀릴 줄 누가 알아요?”“싱겁긴.”“사진은 소대장님 가지셔도 좋습니다.”“사진은 내가 왜 갖나?”“이틀만 갖고 계십쇼…, 그래도 눈에 익으시려면 몇 번 봐 두셔야죠.”“지금 농담하는 거야?”“농담 아닙니다. 소대장님.”“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2006-10-2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7)

내일을 향해 쏴라 ⑮박준호 소위는 마 중사의 두 다리 사이를 노려본다. 이름하여 마의 물건이다. 과부댁을 걸레로 만들고, 술 취한 해병대 병사 다섯을 새끼줄처럼 묶었다는 바로 그 부위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불룩하다. 볼륨으로 보나 높이로 보나 다시 없는 표적이다.“흐흐흐!”녀석이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물러서다 말고 뒤를 본다. 마당 끝에 걸어 놓은 큰 가마솥이다. 뭔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장작불이 탁탁 소리를 튀기며 활활 불붙고 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마 중사도 이제는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흐흐흐!”또 한 차례 기분 나쁜 웃음을 웃는다.‘그래, 저놈한테 잡히면 죽는다. 저 소대가리에게 잡혔다 하면 그 순간으로 절단나는 것이다.’박준호 소위는 요리조리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사내의 요부를 노리고 있는데, 마침내 그 거물이 솥뚜껑 같은 손을 쳐든다. 아마도 통째로 덮칠 요량인 모양이다.‘기회는 이때다.’ 박준호 소위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두발걸이 점프를 번개처럼 날린다.“억!”거물의 불알을 정통으로 명중시킨 것이다. 하나, 소대가리는 별반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엉금엉금, 파리 잡는 두꺼비처럼 다가오는 것이다.“어랏차!”두 번째 3단 옆차기가 들어간다. 역시 요부다. 하나 이번에는 요부만 가격한 게 아니다. 녀석의 턱 밑 급소까지 정확하게 명중한다.“억!”두 번째 녀석의 비명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도 소대가리는 여전히 우뚝 서 있다. 아뿔싸. 녀석의 커다란 손이 박준호 소위의 팔을 덥석 붙잡아 버린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린다.“네놈을 펄펄 끓는 물에 팍, 데쳐삐리끼다!”마 중사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박준호 소위를 가마솥으로 엉금엉금 옮기는 것이었다. ‘안 돼, 안 돼!’ 박준호는 젖 먹던 힘을 다 한다. 아니, 그 자신의 요부에 힘을 준다. 바로 용패 반지를 끼고 있는 요부다. 그 중심부에서 회오리인 양 강풍이 일기 시작한다.“이-얍!”박준호 소위가 강풍의 기류에 몸을 맡긴다. 흡사 산짐승 낚아채는 독수리의 비상 같다. 몸이 거꾸로 휘익 돈다. 뭐랄까, 연장전 1분여를 남기고 골을 성공시키는 오버 헤드 킥이라고나 할까. 핑글 몸을 돌리면서 뒤쪽에 있는 소대가리의 턱뼈를, 그것도 더블 킥으로 두 번 연속 ‘탁! 탁!’ 내지른 것이다.“억!”이번에는 마 중사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지 비틀비틀 뒷걸음친다.“얍!”박준호 소위의 몸이 또 한차례 허공을 가른다. 녀석의 가슴 타격이다. 황소보다 더 거대한 마 중사가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은 마당 한가운데에 그대로 쓰러진다. 썩은 기둥 넘어지듯 원터치로 벌렁 나자빠진다. 사람은 서 있을 때보다 누워 있을 때가 더 커 보이는 것인가. 과연 거물은 거물이다. 그 넓은 마당을 놈이 다 차지해 버린 것 같다.바로 그때다. 구경만 하고 있던 장 소령이 권총을 빼들며 소리친다.“야, 새꺄, 손들엇!”박준호 소위는 손을 들지 않는다.“손들엇!”장 소령이 방아쇠를 당길 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재차 소리를 지른다.“죽여 버릴 테다, 이 새끼!”하나, 앞쪽 마루에서 대령 계급장을 단 헌병 장교가 “소령, 쏘지 마라!” 큰 소리로 명령한다. 그제야 감사단 사령부 장교들도 제정신이 아닌 장 소령의 팔을 붙잡는다.“총을 뺏어!”“소령이 술 취했구먼. 이긴 사람을 쏘려는 거 보니.”“야, 소위놈 정말 대단한데?”

2006-10-2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6)

내일을 향해 쏴라⑭“이상입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아무도 가타부타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박준호 소위는 천천히 그리고 유유히 그 방을 나온다.“야, 밖에 마 중사 있어?”누군가 꽥 소리를 지른다. 보나마나 주인공 장 소령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덩치가 박준호 소위 앞을 가로막는다. 아마 박 소위 체구의 두 배쯤 되는 거인이다.“누구냐!”박준호가 호기 있게 소리쳐 본다.“마 중사다! 이 새꺄!”목소리도 그렇게 우람할 수가 없다. 술집 지붕이 목소리의 옥타브에 따라 들썩거리는 것 같다. 이미 문산 일원 병촌에선 마 중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죽하면 마 중사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다 생겼을까.병촌의 꽃밭인 술집을 자주 들락거리는 병사들에겐 더더구나 그러하다. 부대 근처의 색시집 치고 마 중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명성이 높다. 엄청난 체구도 체구지만, 녀석이 달고 다니는 물건이 너무나 장대한 탓이다.아무래도 많이 과장된 얘기겠지만, 말 좋아하는 실없는 병사 왈, ‘마중사 물건이 얼마나 길었던지 어젯밤 해병대 아덜 다섯 놈을 좆으로 묶었다’는 것이다.어디 그뿐인가. 개성집에 식모로 새로 들어온 서른두 살짜리 과부가 마 중사와 눈이 맞았는데, 당장 그 길로 병원에 실려가 열세 바늘을 꿰맸다는 것이다. 물론 마 중사의 물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얼마나 비대하고 우람했으면 과부댁의 그것을 걸레처럼 갈갈이 찢어 놓는 것일까. 어쨌거나 문산 일원에서는 마 중사를 상대할 만한 색시가 없다는 소문은 그런대로 신빙성이 있는 얘기 같다. 병사들은 술집에 들어설 때마다, 아니 새로 온 색시가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으레 ‘마 중사 거쳐 간 물건 아녀?’ 식으로 큼큼 냄새를 맡으며 강짜를 부리기 일쑤다.“마 중사는 아직 옆에 오지도 않았네, 이 사람아. 이건 신품이야. 오리지널 신품.”술집 여자 주인의 보충 설명이다. 그러니까 마 중사만 거치지 않으면 삐까번쩍한 신품이고, 일단 그 녀석이 거쳐 갔다 하면 그날 밤으로 중고품으로 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실제로 중고품을 상대한 병사 왈, “말도 마, 완전히 늪이더라구. 거치는 것 없이 빠져 들어가는 늪 속의 성냥개비였다니까.”그래서일까. 과연 큰 놈이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런 마 중사가 엉금엉금 다가온다. 삽날보다 더 커 보이는 손바닥을 휘휘 저으며 온다. 후려치는 손바닥에 한 번만 맞아도 그대로 기절할 판이다. 거인이 조여 오고, 박준호 소위는 자꾸 뒤로 물러선다.‘햐! 정말 센 놈을 만났구나. 이놈을 어떻게 요리하지?’ 덜컥 겁부터 난다. 도무지 상대가 될 것 같지 않다. 권총을 뽑을까 하다가, ‘아서!’ 하고 고개를 절절 흔든다. 힐끔 방 쪽을 본다. 4과장 장 소령도, 사령부의 감사관들도 백인 장교도, ‘꽃밭’에 술 마시러 온 여타 부대 장교들도 모두 마루에 나와 한판 승부를 관람하고 있는 중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다.‘그래, 정면 대결로 끝내 주자. 당당하게 맞서 보는 거야. 겁먹을 것 없어.’박준호 소위는 눈을 똑똑히 뜬다.‘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거야. 그래, 저놈은 둔한 녀석이야. 그냥 소대가리 같은 놈이야. 문제는 약점이야. 약점을 빨리 찾아야 돼. 약점. 옳지, 바로 저기구나.’

2006-10-2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5)

내일을 향해 쏴라 ⑬“브라보!”“국가와 민족을 위해!”“우리 육군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영원한 우방, 미국의 번영을 위해!”그러면서도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치마 속의 음습한 곳을 더듬고 있다.바로 그 순간이다. 군화를 신은 채 방문을 걷어차고 박준호 소위가 뛰어든 것이다. 하나, 혼자 몸이 아니다. 곱상하게 생긴 상병을 데리고 있다. 상병의 두 팔이 뒤로 묶여 있다. 수건으로 눈 부위도 가려져 있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박준호 소위가 권총으로 겨냥하며 쿡쿡 찌르고 있다. 그러면서 또 한 손으로 경례를 붙이며 큰 소리로 복창한다.“신고합니다. 18병기 6중대 3소대 박준호 소윕니다!”“뭐야? 이게 무슨 짓이야?”4과장인 소령이 호통을 친다.“소령님은 제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리고 감사관님께서도 조용히 경청해 주십시오.”여차하면 권총을 발사하겠다는 듯이 총구멍을 여러 곳으로 이동시킨다.“야, 이 새꺄!”4과장이 분에 못이겨 벌떡 일어섰다가 다른 감사관의 저지로 그냥 주저앉는다.“죄송합니다! 여기 제가 체포해 온 놈은 병참본부 행정병입니다. 야, 아까 한 얘기 그대로 읊어!”행정병이 추춤거린다.“어서!”박준호의 총구가 행정병의 뒤통수를 찌른다.그래도 입을 열지 않는다.“기름을 어디다 팔았어?”또 총구가 찌른다. 행정병의 목이 앞으로 쿡 넘어진다.“대답해!”“…유류업자한테….”“유류업자 누구야?”뭐라고 머뭇머뭇 하려다가 또 입을 닫는다. 박준호가 묻는다.“문산 읍내 세일석유 맞아?”“맞습니다.”“얼마나 팔았어?”“…많이 팔았습니다.”“몇 차나 판 거야?”“…셀 수 없습니다.”“누구 명령받고 팔았나?”그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젓는다.“누구 명령 받았냔 말이야!”박준호가 다시 으르렁거린다.“이 새끼 죽고 싶어?”“탕!”박준호의 총이 발사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물론 총알이 행정병의 뒤통수를 관통한 것은 아니다. 총알이 뚫고 나간 곳은 색시집 천장 지붕이다. 행정병이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고 있다. 박준호 소위가 다시 한 번 천천히 묻는다.“누구 명령받았어?”“4과장님께서….”“4과장이라니, 이름하고 계급을 대 봐!”“장 소령님….”“이름을 대라고 했잖아!”추상같이 명령한다.“장병섭 소령님….”“소리가 안들려. 더 큰 소리로 복창!”녀석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술집 안팎이 다 들리게끔 힘있는 소리로 이름을 부른다.“장병섭 소령니임!”박준호 소위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수고했어. 김 상병, 당신의 증언은 아주 훌륭했어. 아마도 대한민국 육군 발전에 큰 공을 세울 거야.”그리고 좌중을 향해 돌아선다. 경례를 한다. 큰 소리로 우렁차게 보고한다.

2006-10-2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4)

내일을 향해 쏴라 ⑫원인은 병참 중대본부 유류 저장 탱크 대폭발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름 보급이 가물에 콩 나듯 지지부진이어서 병사들이 몇 주째 혹독한 추위에 대책없이 벌벌 떨고 지냈던 터다.“당분간 기름 보급은 없답니다.”빈 트럭으로 돌아온 수송부 하사가 중대장에게 보고한다. 마침 그 자리에 동상 걸린 병사들의 후송 문제를 보고중이던 박준호 소위가 벌떡 일어 선다. 박준호가 또박또박 말한다.“병참 중대본부 4과장이 기름을 너무 빼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폭발도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조작극일 겁니다.”“이봐, 박 소위! 당신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책임질 수 있습니다.”“만약 사실이 아닌 경우, 당신은 허위 사실 유포죄에다 명예훼손죄까지 추가되어 영창에 들어가는데도?”“자신 있습니다, 중대장님!”중대장이 막강한 파워의 병참 4과장의 수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송부 하사 눈치를 보며 묻는다. 박준호가 대답한다.“증거가 있습니다.”“그래, 그 증거가 뭔지 얘기해 보란 말이야.”“우린 소대원 네 명이 동상에 걸렸고 나머지 모두가 감기 환자가 됐습니다. 왜 그렇게 된 줄 아십니까? 기름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 소대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건 분명….”“이것 보라구. 그게 어떻게 증거일 수 있나?”“제가 알기로는 낼모레 사령부에서 정기 감사가 내려오게 돼 있습니다. 지난번 불시 감사에서도 기름 대신 물을 채워 위기를 모면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래서 전 감사에 맞춰 그런 사고를 냈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박 소위!”중대장이 큰 소리로 호명한다.“네, 중대장님.”“당신은 이제 방금 뱉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돼. 책임을 질 수 있어?”“있습니다.”“만에 하나, 나중에 일구이언했다간 내가 당신을 영창에 집어넣겠어.”“알겠습니다. 꼭 증거를 찾아내 제 말에 대한 책임을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부대로 돌아온 박준호가 처음부터 문제를 제기한 장본인 고수길과 마주 앉는다.“결정적인 증거를 찾아오라는데 어떻게 하지?”박준호의 목소리는 밝지 않다. 한데도 고수길은 태연하다.“그렇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중대장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직책으로도 4과장한테 밟히는 판인데….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뾰족한 수가 있어?”“있구말구요. 아주 좋은 수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수.”그 다음 다음 날인가. 박준호 소위는 제2병기 보급 창고 중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른바 ‘꽃밭’으로 통하는 신흥마을에서 문제의 4과장을 만난다. 현찰을 007 가방에 가득 채우고 다닌다는 4과장은 여느 때처럼 색시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사령부에서 내려온 감사관들을 접대하는 자리다.감사관들뿐 아니다. 이웃 부대에 자리잡고 있는 미사일 미군 장교까지 자리하고 있다. 4과장과 기회만 있으면 술자리를 함께 하는 백인 장교다. 주로 4과장이 술값을 내는 편이다. 안 그래도 한국 여자 킬러라는 별명 때문에 인근이 시끄러운 인물이다.벌겋게 취기들이 올라 있다. 저마다 색시들을 끼고 앉아 있다. 아니, 한 손은 치마 속에 깊이 찔러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술잔을 치켜들고 있다.

2006-10-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3)

내일을 향해 쏴라 ⑪“돌아가신 네 아버님 말씀처럼 썩은 건 대한민국 군대뿐이 아니야. 군사 정권의 정통성만 인정하면 정의나 도덕 같은 것은 깡그리 묵살하는 범법자들이 도리어 활개치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도록 비호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란 말이야.”“설마….”“넌 믿지 않겠지만, 그건 사실이야.”“그렇다면….”“우리 작은아버지를 죽인 조폭들을 가만둘 수 없지. 법을 집행하는 국가가 직무유기한다면 당사자인 나라도 나서야지, 안 그러니?”“야, 그건….”“태훈이 네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겠는데, 사실은 그게 아냐. 반정부 인사를 처단하는 데는 법도 정의도 없어. 정권 연장에 장애가 되는 자를 없애는 건 살인이 아니라 되레 국가 안보차원의 정당방위고 애국애족이라는 거야. 그게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얼굴이라구.”“글쎄, …그거야 그렇다고 치고…. 그들이 국가 공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다면… 쉽게 태껸 도장을 내놓겠어? 안 그래?”박준호가 친구들 앞에서 선서하는 초등학생처럼 지그시 눈 감고 입을 연다.“그래서… 그 도장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 집안의 원수를 갚느냐, 갚지 못하느냐가 결판나게 되어 있어.”아주 비장한 목소리다.“원수라고 했니?”“그래, 원수라고 했어.”“그러고 보니까 일본 사무라이 영화 한 장면 같다야.”한태훈이 억지 너털웃음을 웃는다.“안 그러냐? 하핫!”그러나 박준호는 웃지 않는다. 비장한 얼굴 그대로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사무라이 영화라도 좋고, 현대판 조폭 영화라도 좋아. 난 반드시 그 일을 해내고 말 테니까.”박준호에게는 군대에서 얻은 믿을 만한 동지가 있다. 이름이 고수길이다. 박준호가 소대장 시절 병장을 달았던 친구다.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다. 물론 대학 제적생이다. 위장취업을 전전하며 잘도 숨어 지내다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군대에 끌려 온, 이른바 문제 사병이다. 그래서 일까. 누구도 고수길 병장은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제대 말년이라 더 그렇다. 전임 소대장도 고수길 때문에 애를 먹었으므로 “저 자식 군기만 잡으면 만사가 평온할 거요”라고 인수인계를 했던 터다.한데, 박준호에게는 처음부터 고분고분하다. 뭐가 통했는지, 전혀 삐딱한 구석이 없다.박준호보다 나이는 세 살 아래인데도, 얼굴 모습은 오히려 세 살 위라고 해도 항의할 사람이 없다. 박준호가 원래 앳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고수길이 반 대머리에 가깝기 때문일 터다.그래도 머리는 좋다. 비단 공부 머리뿐 아니다. 잔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르고, 사람 심리도 잘 읽는다. 공부 잘하는 수재형이 눈치가 없어 봉변을 당한다거나, 잔머리 굴리는 데는 이골이 났지만 공부 머리가 안트여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기 십상인데, 고수길의 경우는 두 가지 세 가지를 고루고루 겸비하고 있다.이름하여 전천후 두뇌다. 아주 특별한 친구다. 오죽하면 별명이 면도날일까.박준호와 고수길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동기는 그해 겨울의 추위다. 실제로 수은주가 중강진 수준으로 뚝 떨어져 모든 사물이 꽁꽁 얼어붙기도 했지만, 기실은 당연히 보급받아야 할 난방용 기름이 며칠째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2006-10-1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2)

내일을 향해 쏴라 ⑩“준호 넌 다 좋은데, 바로 그 점이 문제야. 편향된 그 사고 말이야. 도무지 마음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그 고정관념.”“따지고 보면 태훈이 너도 마찬가지야. 왜 선생님이라면 이유도 없이 싫어하냐? 그건 편견이 아니고 편향이냐?”“짜식,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는….”“말꼬리가 아냐. 이건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차대한 문제란 말이야.”“야, 중차대한 일이 없어서 하필 그런 일로….”안그래도 그 일에 대해서 만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식이 박준호다. 그렇게 대차게 밀고 들어올 수가 없다. 한태훈이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꿔 입을 연다.“그래, 사법고시도 준비하지 않고, 뭘 할 거니?”“할 일은 많지.”박준호가 말을 잇는다.“우선 선생님을 찾아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선거 운동을 해 드릴 생각이야.”“뭐라구? 정치판에 뛰어든다구?”“그렇다고 내가 정치를 하겠다는 건 아냐. …다만, 세상을 바꿔 놓고 싶을 뿐이야. 돈을 벌어서 말이야, 선생님 선거 자금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멋지게 기증하고 싶어.”“너답지 않게… 이건 진짜 점입가경이다야.”한태훈이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한다.“농담하지 말고 진짜 뭘 할 건지 얘기 해 봐. 궁금하잖니.”“나, 농담 아니야, 태훈아.”“농담 아니라구?”“그렇다니까.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우선 숙부님이 운영하셨던 태껸 도장부터 복원할 생각이야.”“도장을 복원해?”“그래.”“그럼, 작은아버지처럼 준호 네가 관장을 맡겠다는 거야?”“그렇지, 바로 그거야.”“글쎄… 그건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 같지 않아서… 솔직히 별로다야.”“너희들한테는 별로같지만, 나한테 무엇보다 중요하거든.”“뭐가 그렇게 중요한데?”박준호가 앙다문 입술로 말한다.“우리 집안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거든.”“집안의 자존심?”“너, 우리 할아버지 잘 알지?”“알고말고. 우리 초등학교 때까지 상투를 틀고 계셨잖아?”“그래, 그만큼 자존심 하나로 살았던 분이셨어.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숙부님도 마찬가지였어. 너도 기억하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말이야. 우리 어렸을 때, 이불 덮어 쓰고 얘기 많이 했잖니? 미국은 좋은 나라, 북괴는 나쁜 나라, …어쨌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그 지고한 호령 박씨 집헌궁파 자존심 때문에 저승의 강을 먼저 건너 가신 거야. 문제는 나야. 나라고 비겁하게 비껴 가고 싶지 않아. 나도 아버지처럼, 아니 숙부님처럼 그분들이 걸었던 길을 당당히 걸어갈 작정이야. 나에게 타협은 없어.”하도 신중한 음성으로 말하는 터라 한태훈도 숨을 죽이고 있다. 박준호가 계속한다.“문제는 놈들이야. 그놈들이 지금 마포 태껸 도장을 차지하고 있거든. 정말 어이없는 일은 놈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무혐의로 입건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그 이유가 뭔줄 아니? 그 배후 때문이야. 배후가 누구냐?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군사 정권의 핵심 멤버들이라구.”“아무렴… 그럴 리가?”

2006-10-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1)

내일을 향해 쏴라 ⑨“한데도 난 군대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혔어. 나같은 사람은 조직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거야. 나는 정상인일 수 없었어. 아마 나만큼 별명이 많은 소대장도 전무후무일거야. 시골 보안관, 전도사, 돈키호테, 살모사, 로보캅, 칠뜨기 등등…. 그들에게 비쳐진 나는 한 치의 융통성도 없는 원칙주의자일 뿐이었어. 어떤 부류들은 나사가 많이 빠져서 삐그덕 삐그덕 소리나는 소대장이라고도 했고, 또 한 장교는 어느 행성에서 온 우주인이라고도 했어. 어쨌거나 그들은 모두 나를 두려워했어.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다가도 내가 들어서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거야. 나는 외톨박이었어. 내가 생각했던 길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어.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위해 대한민국에 사는 대다수 백성들을 위해 신나는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어렵게 들어선 길인데 대한민국을 이미 차지한 기득권 세력들이 나를 꼭지 덜 떨어진 이상주의자로 치부하고 아예 받아 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야. 그들은 말했어.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제 몸을 썩혀야 하는 거다,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 고로 사람은 누구나 적당히 부패해야 한다고 했어. 그래, 맞아. 나도 조직 사회와 더불어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푹 소리나게 썩어야 하고, 냄새나게 작당하고, 야합하고, 그 대가로 술 마시고, 계집질하고…, 대위로, 대령으로 금세금세 진급하고, 그러다가 별 달고, 사령관 지휘봉까지 휘두르다가, 마침내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3선, 4선… 어느새 거물이 되어 그보다 더 높고 큰 자리까지 넘보는, 이른바 사나이 대장부라면 누구나 가져 볼 수 있는 대망을 나도 이뤄 볼 수 있으리라. 그래서 대한민국 육군장교를 지원했는데. 하나, 나는 끝내 그것을 감당해 내지 못했어. 게다가 연좌제란 그물이 나를 겨냥하고 있었어. 그래서 쫓겨난 거야. 난 결심했어. 어떤 유혹이 와도 다시는 대한민국 조직사회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고 말이야.”박준호가 한태훈을 본다. 한태훈이 경이의 눈으로 박준호의 시선을 맞는다. 핑글, 불꽃이 튄다. 그가 말을 잇는다.“얘기가 길어졌다만, 그런 이유 때문에 난 사법고시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고, 매력도 갖지 않아. 알겠냐? 생각해 봐. 설사 시험에 패스한다 해도 그 무서운 연좌제가 나를 가만두겠니? 사상이 의심스러운 법관, 검사, 변호사… 아니, 아예 합격 그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몰라. 물론 세상이 바뀐다면 모르지만.”“세상이 바뀐다니?”“야당 총재님 있잖니? 내가 런던에서 만날 뻔했다는 그 선생님.”“그러니까 그 사람이 또 대선에 출마해서 승리하면, 대한민국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그 얘기냐?”“적어도 연좌제는 없어지겠지. 아니, 바꿔져도 많이 바꿔질 거야.”“야!”한태훈이 노골적인 말투로 꾸짖듯 계속한다.“그게 그거야, 크게 달라질 것 없어. 대한민국 정치인들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다 비슷비슷 하다니까. 그 양반 역시 돈 앞에서는 기개도, 정치철학도, 의리도 무용지물이었잖아? 너도 대서 특필한 기사 읽었다며?”“읽었지.”“그럼, 다 알겠구만 뭐.”“문제는 바로 거기 있어.”박준호가 자조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풀며 말을 잇는다.“그건 말이야, 기득권 세력들이 선생님을 모함하기 위해 공작 차원에서 조작한 기사거든.”“조작이라구?”“그래, 조작이구 말구.”

2006-10-1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200)

내일을 향해 쏴라 ⑧“야, 너의 집 경매로 나오면 내가 사면 안 되겠니? 그리고 넌 공짜로 사는 거야. 그래서 태훈이 네가 판검사된 다음에 그 돈 갚고 다시 찾아가. 은행 이자만 받고 되돌려 줄 테니까.”박준호가 눈을 번득인다. 기막힌 착상 아니냐는 듯이 재삼 묻는다.“어때, 내 아이디어? 아주 참신하지?”평소 성격으로 보아 임기응변식의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태훈이 더 잘 안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능히 하고도 남을 친구다. 그래서 더욱 적당히 얼버무릴 수 없는 것이다. 한태훈이 말한다.“그게 말처럼 어디 쉬운 일이냐?”“어려울 것도 없어. 다행히 난 동생도 없고, 부양할 가족도 없으니까.”박준호는 자신만만하다.“하지만 준호 너라고 법관 되고 싶은 욕심이 없겠어?”“욕심?”“너도 법학을 전공했었잖아! 그것도 어디 보통 대학이야, 수재들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내는 옥스퍼드 대학 예비 법대생이었잖니?”“그건 어머니 성화에 못이겨 억지로 떠밀려 들어간 거야.”“…기왕 말이 났으니…묻고 싶은데, 왜 그 좋은 대학을 포기하고 혼자 귀국한 거니?”“내가 여러 번 설명 안 했어? 대한민국 군장교로 입대하기 위해서 귀국했다구.”“하지만….”“하지만 뭐야?”“나도 그렇지만, 우리 친구들도 다 그래.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가는 점이라고 말이야. 남들은 옥스퍼드에 못 가서 안달인데, 넌 거꾸로….”“나는 나의 길을 걷고 싶었을 뿐이야.”“애당초 넌 군대하고는 안 맞았어.”“그건 사실이야.”“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뭐가?”“사법시험 말이야. 준호 네가 하려고 맘만 먹으면 기어코 해낼거야.”“미친자식!”박준호가 잔뜩 힘주어 나무란 다음 다시 나지막하면서도 진지하게 입을 연다.“이미 얘기했잖니? 내가 대한민국 육군 장교를 지원했다가 왜 중도 하차했는지 말이야. 생각하면 돌아가신 태훈이 너네 아버님 말씀이 백 번 옳았어. 정말 지당하신 말씀이었어. 한데 그때는 그것의 진의를 몰랐어. 그래서 내 포부대로 그냥 밀고 나간거야. 어쨌거나 난 군대에서 쫓겨났어. 그것도 아버지가 북으로 기수를 돌렸다고 우기는 조직 때문에 쫓겨난 거야. 그뿐 아니야. 작은아버지가 목숨 걸고 투쟁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규명 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아. 다시 말해, 사상적으로 삐딱한 가계가 바로 우리 집안이야. 수구 세력의 눈으로 보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저주받은 집안이지. 태훈이 너도 알잖아 연좌제도 말이야. 아무리 우수한 두뇌와 성실한 복무 경력을 갖추고 있어도, 연좌제도란 올가미에만 씌워지면, 그 순간으로 만사는 끝이야. 내가 그랬어.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었어. 그렇다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없었어. 어쩌면 북으로 기수를 돌렸을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유령처럼 나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해도 나는 틀림없이 중도하차 했을지도 몰라. 그만큼 나는 절망적이었어. 최악의 상황까지 밀려난 거야. 정말이야. 2년 8개월 소위 계급장 달고 복무하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어. 결코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았어.”

2006-10-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9)

내일을 향해 쏴라 ⑦“처남이 귀국하기 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우리 부부가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부부관계를 가졌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딱 끊어버린 거야. 물론 와이프지. 와이프가 단호하게 나를 멀리 하더라고. 그리고 와이프 혼자 쓰는 방을 몰래 들어가 보면, 온통 처남 사진 뿐이야. 벽에도 처남 사진이고, 화장대에도 처남 사진이고…. 우리 와이프 본래 와일드해서 보스형 기질은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한테 깊이 빠져 사진을 덕지덕지 붙이는 소심한 성격이 아니거덩. 그런데 요즘 우리 와이프는 아니야. 완전히 맛이 변해버렸어. 마치 틴에이저 같이 맹목적으로 인기인 좋아하듯 그렇게 들 떠 있는 거야. 처남!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 어, 처남….”최범성은 다시 울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아예 땅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어댄다.대학 졸업을 맞아 긴가민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던 박준호가 벼락치듯 ROTC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바로 거기 있었다. 기실 최범성이 술에 취해 박준호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그 길로 방향을 틀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박준호가 일선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도중하차 당하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 ROTC 추천장과 신원보증을 서주었던 한태훈의 아버지 한 대령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간암인가 뭔가로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탓이다.박준호가 한태훈을 찾아갔던 어느 토요일 오후가 바로 그 즈음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한창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다. 코가 석 자나 빠져 있는 한태훈에게 박준호가 묻는다.“왜 그래?”“아무래도 시험도 포기해야 될까 봐.”한태훈은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진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또 한편으론 사법고시를 소리 소문 없이 준비하던 중이다.“뭐라구? 시험도 포기하고, 대학원도 그만두겠다구?”“집안 형편 때문에…. 아버지가 사업하신다고 너무 많은 일을 벌여 놓으셨어.”“참, 은행에서 융자한 사업 자금 때문에 그렇구나.”“은행 융자는 아무것도 아냐. 사채가 더 많아. 이제 집도 압류당하고…. 내일모레 경매에 넘어간대. 우린 완전히 파산했어. 알거지야.”“장례식 때 육군 참모총장도 다녀갔었다며?”“육군 참모총장? 그 사람 조의금 얼마 놓고 간 줄 아니? 삼만 원이야. 그냥 삼만 원. 다 그런 식이야. 아버지 육사 동기들이 떼거리로 다녀갔지만….”“하긴, 속 빈 강정들이지 뭐.”“그게, 내가 사법고시를 포기하는 이유다. 생각해 봐. 동생들이 학교를 휴학하겠다는데 혼자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겠니?”태훈이가 대기업 입사 시험 서류를 박준호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을 계속한다.“아무래도 취직을 해야 할까 봐.”“미친놈!”박준호가 노기 띤 음성으로 벌컥 화를 낸다. 그리고 근엄하게 말을 잇는다.“넌 어렸을 때부터 법관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 한데, 목표 지점에 거진 다 와서 맥없이 주저앉아?”“할 수 없잖니?”그새 나약해진 태훈이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입을 연다.“사정이 그렇게 된 걸…, 운명이려니 하고 순응해야지.”

2006-10-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8)

내일을 향해 쏴라 ⑥그러나 박준호는 너무도 냉철하고 차갑다. 그리고 단호하다. 어차피 스카이 홍이 아니라면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여자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철저한 각오. 박준호는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핑크무드를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뜨거운 프라이팬의 콩처럼 화장실로 튕기듯이 뛰어든다.다른 여자 같으면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시도해도 결국 뚫리지 않았다면 지레 포기하고 말았을 터다. 한데 김분이는 다르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담대해지고 집요해지기 시작한다. 어떤 때는 새벽에 바람같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 와서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그때마다 고통스러운 쪽은 김분이가 아니라, 여하간 그 유혹을 방어하고 견제하느냐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박준호다. 그 방안의 하나가 아예 접촉을 미리미리 피하는 일이었다. 가령 그녀가 원룸에 와서 성심껏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전갈을 보냈을 때 박준호는 서슴지 않고 귀가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었다.김분이의 남편 최범성이 박준호를 찾아 온 것은 김분이의 황당한 대시를 표시한 그라프의 상승 곡선이 꼭짓점을 이루던 시기다. 원래 말수가 적어 주변머리없어 보였던 김분이 남편은, 의도적으로 마신 듯 취기의 강도가 얼얼할 지경으로 높다. 혀가 반쯤 구부러져 있다.원래 체격이 왜소해서 그런지 악수라도 하면 손바닥이 종잇장 같아서 꼭 쥐기라도 하면 으깨질 성 싶은데 웬걸, 그 쪽에서 되레 힘을 주어 박준호의 손을 아프게 한다.그러나 박준호는 페티로 불러 줄 것을 강요했던 톰 라더 부인을 가운데 두고, 그녀 남편을 마주쳤을 때처럼 가슴이 통통 튀거나, 숨이 차거나, 얼굴이 붉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당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합의에 의한 표시로 행한 느끼한 포옹 역시 단행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어쨌거나 최범성은 단 한번도 박준호를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다. 늘 우물우물 정확한 호칭없이 본론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그날은 다르다. 아마 술기운 탓이리라. 그는 정확하게 처남이라고 발음한다.“처남, 내가 어떻게 처남 사는 집을 알게 된 줄 알아? 창피하지만 와이프를 세 번씩이나 미행했어. 하도 왕래가 잦아서…. 정말 이틀거리로 서울을 올라 가는데, 일단 집을 떠났다 하면 휴대폰도 꺼버리고…. 도무지 연락이 안 되는 거야.…처남, 나 남자답지 못하지? 비겁하지? 암, 비겁하고 말고. 내가 와이프 못 믿어 미행하고 그리고 와이프 모르게 이처럼 처남 찾아와 만났다는 사실 알면, 아마 날 죽이려고 들거야. 하지만 어떻게 해? 나 그 여자 사랑하거든. 나 그 여자 잃고 싶지 않아. 처남은 같은 남자니까, 이 마음 이해할 수 있을까?”그리고 뭔가 복받치기라도 한 듯 느닷없이 흑흑 흐느끼기 시작한다. 눈물을 흘리는 것 같지 않는데, 옷 소매로 눈 두덩을 북북 닦은 다음, 그가 말한다.“처남! 내가 이렇게 처남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처남은 우리 와이프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잖아. 그래서 와이프가 처남을 남자로 보기 시작한 것 같어. 솔직히 고백하자면, 요즘 우리 각 방 쓴다구. 와이프가 한사코 한 방 쓰기를 싫어하니, 어쩔 수 없잖어. 더 정확히 말해서 처남이 영국에서 귀국하고 한 두달 지나고 나서부터였어. 우리 부부관계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최범성은 부끄러운 것이 없다. 아니, 내 뱉아야 할 말, 삼켜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해야 옳다.“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그가 말을 잇는다.

2006-10-1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7)

내일을 향해 쏴라 ⑤아무리 용패를 빼내어 원래 있던 함에 담아 버렸다 해도 어디까지나 박준호는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이다. 그 당당함과 강건함이 감춰질리 만무하다. 말 그대로 분기탱탱이다. 덮고 있던 시트가 그 부분에서 텐트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우람하고 아찔한 2층짜리 텐트다.새벽도둑인양 은밀하게 침투한 김분이 눈에 그 광경이 크로스업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쩌면 분기탱탱한 그 결정적인 상황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일부러 아침시간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박준호는 비록 시트 밖이긴 하지만 김분이의 두 손 안에 가득 쥐어진 분기탱탱함의 야리한 느낌 때문에 비몽사몽간을 헤매지 않으면 안된다. 박준호는 실로 오랜만에 번네비스 깊은 숲속 통나무 오두막에 있다. 밖에는 세찬 늦가을 비가 뿌리고 있지만, 오두막 안은 더없이 훈훈하다. 페치카 덕이다. 탁탁 소리와 함께 잘도 타 오르는 참나무 불길. 화기는 이쪽 구석까지 핫핫하게 무리져 온다.박준호는 측백 향기가 물씬 풍기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고, 그 앞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네가 무릎을 꿇고 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오지게 움켜쥐고 있는 것은 어이없게시리 박준호의 심벌이다.용패가 그대로 착용되어 있는지, 아니면 원래 있던 함 속에 간직되어 있는지 분간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박준호의 그 거대한 심벌을 두 손아귀로 움켜쥐고, 마치 삼일 굶은 랑구르 원숭이 바나나 먹듯 허겁지겁 핥고 또 핥는 것이었다.볼이 부어터지게 물었다가 일렁이는 페치카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번지르르한 타액 흔적을 다시 뱉어내곤 했는데, 그 간헐적인 동작으로 하여 풀어헤쳐진 머리칼이 한꺼번에 흘러내리는 것이었다.그때마다 그녀는 그것을 끌어 올려 오른쪽 귀에 걸어놓곤 한다. 바로 그 순간, 박준호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그녀는 톰 라더 부인도 아니고, 시루코 여사도 아니고, 그토록 애절하게 찾아 헤매던 스카이 홍 아닌가.아니, 어쩌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행운이, 이처럼 갑자기 도래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세상을 통틀어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야릇하고, 짜릿하고, 아련한 쾌감이, 흡사 해일 앞둔 부두처럼 무섭게 무섭게 파도칠 수 있단 말인가.아니, 그 보다 처음부터 매사가 허겁지겁 형인 톰 라더 부인이라면 몰라도, 전혀 그런쪽에는 관심이 없는 새침떼기 같으면서도 일단 작업에 들어갔다하면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리는 시루코 여사라면 또 몰라도, 박준호가 그처럼 애걸복걸 정성을 쏟았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스카이 홍이, 흡사 한마리 랑구르 원숭이처럼 애교있게, 그리고 야리야리 핥을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박준호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 속에 열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그리고 더 깊이 그녀 입안에 박힐 수 있도록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으으으,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온다.그러니까 박준호가 눈을 번쩍 뜬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리고 하마터면 시트에 감긴 분기탱탱을 움켜쥐고 있는 김분이를 두 다리로 휘감아 침대로 눕힐 뻔한 상황이 전개 될 뻔한다. 실제로 눈에 보였던 것은 김분이였지만, 내면 깊숙이 인각되어 있는 스카이 홍의 아름다운 모습이 흡사 오버랩으로 지워지고 선명한 다른 장면이 겹쳐지는 스크린 화면처럼 박준호를 일시에 혼란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새벽 침대 곁을 지킨 김분이는 뇌쇄적이다.브라이튼 세미티 터치드 하우스 별장에서 첫 교접에 임했던 시루코 여사를 연상 시키는 샤넬 넘버 파이브의 자극적인 향수가 진동을 한다.생각해 보라. 비몽사몽이긴 했지만, 시트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패 뭉치는 더 이상 분기탱탱일 수 없고, 정신을 혼미시키는 향수 냄새는 코를 찌르고, 아침이지만 아직 어슴푸레한 어둠 속이고…. 박준호 스스로 시트만 벗겨내면 김분이 역시 비몽사몽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 스카이 홍처럼 한마리 랑구르 원숭이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고….

2006-10-1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6)

내일을 향해 쏴라④ 오히려 그 반대다. 남 보기엔 영락없는 친 누님 행세다. 미리미리 호들갑을 떨어마지 않는다. 박준호가 혼자 뭘 어떻게 해 먹고 있는지, 잘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는지,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는지, 술이라도 많이 마신 이튿날 아침 속풀이는 어떻게 하는지, 그러다가 위장이라도 상하지 않는지, 김분이는 박준호가 불쌍해 죽겠다는 듯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호들갑을 떨어마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박준호를 찾아 올 때마다 김분이의 두손에는 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 마련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소고기 장조림이며, 다시마 튀김이며 멸치볶음이며, 지리산 고랭지 배추로 담근 김치 따위 먹거리 들이다. 아니, 먹거리 뿐 아니다. 그녀는 박준호의 속옷도 자주 사들고오곤 한다. 그것도 보통 속옷이 아니다. 특별히 제조된 고급 제품이 아니면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거래되는 외제 명품들이다. “아니, 이런 건 왜 샀어요?” 박준호가 퉁명스럽게 항의하기라도 하면, “왜, 사다니? 귀한 남자 일수록 속옷은 더 귀하게 입어야 하는거야. 준호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줄 알어?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런 곳에 혼자 살게 뒀다고 날 가만 두지 않았을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되레 훈계조다. 어이가 없어 대응할 말을 잃을 정도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아침 생선 찌개면 찌개지, 그 재료를 굳이 생산지에서까지 공수해올게 뭔가 말이다. 거짓말 좀 보태면 싱싱하다 못해 퍼덕퍼덕 뛸 지경인, 얼핏 셈해도 웬만큼 비싸 보이지 않는 고급재료를, 그것도 그녀가 손수 손질하여 보글보글 끓여놓고 아침 잠에 깊이 빠진 박찬호를 흔들어 깨우곤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일방적이다. 어느것 하나 박준호와 상의하거나 박준호의 의견을 물어 결정한 케이스가 없다. 김분이 혼자 알아서 시도 때도 없이 척척 진행해버린다. 또 이런적도 있다. 어느 가을 아침이든가. 박준호는 비몽사몽간에 부드러운 강아지풀을 본다. 아니, 강아지 풀이라기보다 공작 가슴깃털 같은 물체라고 해야 옳다. 그것이 박준호의 얼굴을 간지럽힌다.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이다. 얼마나 짜릿하면 뜨겁기까지 할까. 그것을 피해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문득 눈을 뜬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가 박준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금방 입술과 입술이 접촉 될 듯한 아슬아슬한 간격이다. 그 순간 박준호가 고개를 돌려 피했으니 망정이지 어물어물 미적거렸더라면 농익은 입술 뿐 아니라, 그 안속 즙액까지 한꺼번에 박준호를 한껏 적실 뻔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을 두고 흔히 꿩 놓친 매 격이라고 하던가. 다 잡아놓은 꿩이 갑자기 날아올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을 때의 그 황당함, 낭패감, 자책감…먹이 놓친 매의 위상은 어디서나 초라할 수밖에 없다. 김분이는 확실히 꽁지 빠진 매 꼴이다.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쉽게 체념해버린 탓일까. 위신도 자존심도 없는 것 같다. 그녀가 박준호의 얼굴을 감싸 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잠자코 잡혀주고 있을 박준호도 아니다. 후다닥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로, “오늘 날씨 좋겠죠? 그렇죠?” 능청을 떨었고, 덩달아 “나 커피 한잔 끓여줄래요?”라고 그녀 얼굴에 가득 그려져 있는 낭패감을 짐짓 못 본 척 설레발을 쳤던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헤이스팅스 저택에 몸담기 훨씬 전부터 그렇게 된 일이지만, 원래 박준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곤한다. 그러니까 그때는 톰라더 부인의 의붓 딸인 다이아나가 철부지 상대역을 맡았다면, 이번에는 그 악역을 김분이가 담당한 것이었다.

2006-10-0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5)

내일을 향해 쏴라 ③그 활달한 나이에 칠순 노인처럼 여자 보기를 길바닥에 구르는 돌 같이 여긴다면 뭔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경우다. 그점이 김분이를 작심하게 만든 동기다. 팔 동동 걷고, 박준호에게 불쑥 던지는 김분이의 질문은 거의 고정적이다.“아직도 여자 못 사귀었어?”“못 사귀는게 아니라, 안 사귀어요.”박준호 답변 역시 싱겁기 그지 없다.“내가 한명 소개해 줄까? 참한 얘가 있거든.”“아서요.”박준호가 고개를 절절 흔든다.“아서라니?”“나 아직 그 쪽에 신경 쓰고 싶지 않거든요.”“누가 신경 쓰랬어? 남들처럼 그냥 즐기면서 살라는 얘기지.”“즐기다뇨?”박준호가 반문하자, 김분이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연다.“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도 되지?”“물으세요, 얼마든지.”“그게 뭐냐하면…”김분이가 불쑥 꺼내기 어색스럽다는 듯이 더듬더듬 입을 연다.“여자하고 즐기는 일말이야…그러니까 여자랑 자는 거…그런 거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어?”박준호는 대답 대신 그냥 피식 웃기만 한다. 그거요? 저 진즉 졸업했습니다. 박준호가 미소 같지 않는 야릇하고 싱거운 미소를 머금으며 계속한다. 정말이에요. 톰라더 부인, 아니 패티하고도 지겹게 지겹게 즐겼구요, 하네코의 엄마 시루코 여사하고도…그리고 스카이 홍…박준호는 스카이 홍이라는 이름에 혹여 이물질이라도 묻힐까봐 황급히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암튼 싫습니다.”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왜 싫은 거지?”김분이도 만만찮다.“글쎄요….”박준호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린 다음 머뭇머뭇 계속한다.“설명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 설명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안될 것 없지. 김분이도 입을 여는 대신 오묘한 미소를 씹는듯 마는듯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얼마나 큰 상처였으면 설명도 못 하겠니? 쯧쯧, 얼마나 아팠으면 네 눈에 여자가 다 안 보일 정도니? 그래, 그 상처 내가 아프지 않게 꿰매줄게. 암, 내가 감쪽같이 꿰매주고 말겠어.김분이는 그렇게 다짐해마지 않는다. 기다려라. 내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김분이의 의지는 분기탱탱이다. 내가 누구냐? 이름 없는 녹차밭을 일궈 오늘의 세계적인 명품인 ‘호이’를 만든 장본인 아니냐. 만리타국 런던에 갔다가 병들어 돌아온 아름다운 청년을 어찌 매양 골방에만 갇혀 지내게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의 치료사가 되리라. 내가 너를 세상에서 가장 씩씩하고 용맹스러운 으뜸 전사로 만들리라 굳이 이름 붙이자면 사랑의 치료사다.김분이의 부지런함은 소싯적부터 익히 아는 바다.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어제 지리산 농장에서 전화를 걸었던가 싶었는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박준호의 원룸을 노크하고 들어올 정도다. 아니, 박준호가 없는데도 그녀는 불쑥불쑥 잘도 들어온다. 일방적으로 자물쇠를 바꿔도 소용이 없다.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구워삶는지, 열쇠쟁이를 동원하여 문을 따고 들어와 버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머니나 친누이 같은 가까운 친족이 아니면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일종의 사생활 침해다. 한데도 김분이는 너무 태연하다. 하나도 어색해하거나 부자연스러워하지 않는다.

2006-10-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4)

내일을 향해 쏴라 ②기실 어머니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아직 박준호의 실체를 찾지 못한터라 피부에 닿을만큼 민감하고 다급한 상태는 아니다. 문제의 17만달러의 행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초창기 초침 돌아가듯 급박하게 진행되던 추적 작업도 이젠 제법 느슨해진 느낌이다. 아무래도 17만달러의 미련을 버렸거나, 포기한 상황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와중에 대니 라일러의 혈육인 여자아이를 출산했으니, 금이야 옥이야, 오죽이나 그 극진한 사랑을 한몸에 받았겠는가. 어쩌면 계집아이 기르는 재미에 17만달러는 물론이고, 갑자기 사라진 아들에 대한 궁금증이나 걱정도 많이 희석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요람에 누워있던 계집아이가 어느새 일어나 서고, 아장아장 걷고, 말하고, 노래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이제 뒤로 미루고 미뤄왔던 박준호 찾기 작업에 열중하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소식은 대체로 김분이에게서 듣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머니가 수시로 전화를 거는데, 그 상대가 늘 김분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분이는 박준호의 약조를 철저히 지켜주는 편이다. 하지만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해를 바꿔가며 연이어 거짓 증언을 해야 하는 고충에 대해 김분이 자신도 얼핏얼핏 회의감이 느껴지는지,“동서양을 불문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내편은 어머니 아니야? 그처럼 애타게 찾는데, 왜 아들은 어머니를 소 닭 보듯 해?”언젠가 김분이가 내 뱉은 말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박준호는 어머니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대니 라일러 장군이 아버지 김상구 대령을 제거한 장본인이라는 다소 황당한 사실을 구구절절 토로할 수가 없다. 어머니 탓이다. 설사 초창기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 원흉과 함께, 그것도 아이까지 낳아가며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배신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박준호는 차마 그 얘기를 입에 담을 수가 없다.어머니가 대니 라일러와 살을 섞고 있는 한, 아들로서, 혹은 어머니가 낳은 혼혈아 딸의 나이 많은 오빠 입장으로 그녀앞에 서지 않겠다는 어쩌면 일방적일지도 모르는 그 특별한 각오에 대해서도 박준호는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항시 박준호의 답변이 궁색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에게서가 아니라, 대니 라일러 여동생에게서 갈취한 17만달러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할 말이 없는 편이다. 처음에 했던 그대로 우물우울 넘기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러다보니, 김분이한테는 늘 당당하지 못하다. 그녀가 고삐를 쥐고 있는 느낌이고, 박준호는 흡사 뒷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는 당나귀처럼 매양 어칠어칠 끌려가는 행색이다.따지고 보면 김분이가 박준호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은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 내성적이라기 보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은, 어찌보면 솔직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받은 결정적인 상처 때문에 스스로 유리벽을 쌓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누가 들어오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 이른바 폐쇄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고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었다. 특히 대인 관계가 그러하다. 박준호는 한태훈을 제외하고 특별히 사귀는 친구가 없다. 어쩌다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술 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늘 혼자다. 혼자 강의실에서 도서관으로, 그리고 집으로 매일 다람쥐 쳇 바퀴 돌듯한다. 남자친구가 그런식이니, 여자는 더더구나 있을 턱이 없다. 눈을 씻고 봐도 박준호가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만나는 여자는 없는 것 같다. 스물두살은 남자 일생에 있어서 황금기 중의 황금기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 없이 일단 부딪치는 여자마다 불끈불끈 연정이 느껴지는 나이다. 물론 돌아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매일매일 충동적인 사랑과 정욕과 열정이, 흡사 여름 소나기처럼 왁자하게 내려 꽂혔다가 눈부신 햇빛과 함께 말끔하게 개었다가 다시 먹구름이 몰려 왔다가를 반복하는 때가 바로 그 무렵인 것이다.

2006-10-03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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