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193)

내일을 향해 쏴라① 박준호가 런던 생활을 청산하고 혼자 귀국했을 때 한태훈의 아버지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한태훈의 아버지는 월북 같은 건 시도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른 역시 특출하지 못한 보통 군인에 불과할 따름이다. 출세와는 거리가 먼 시쳇말로 들러리 장교다. 수많은 경쟁자를 누르고, 장군으로 올라서는 몇몇 정치 군인을 위해 존재하는 소모용 장교…. 이른바 만년 대령이다. 그렇긴 해도 박준호에게 있어서 한태훈 아버지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따지고 말 것도 없이 한태훈의 아버지가 그때까지 현역에 복무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군복을 벗었더라면 박준호의 이력서에 ROTC 장교 부분은 아예 없었을 터다. 그러니까 현역 대령의 추천장과 신원보증서가 박준호의 ROTC 입교를 가능하게 한 셈이다. 그때 그 어른이 서류에 인감도장을 찍으며 한 말을 박준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웬만하면 포기하는 게 좋겠다. 너같은 아이가 군대에서 적응한다는 게 용의하지 않거든.” “하지만, 저는 꼭 입교해야 합니다.” 그때 박준호는 단호하다. “꼭 입교해야 한다구?”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왕 군 복무를 할 바엔 사병보다 장교가 수월하다 그 말이냐?”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는 대한민국 육군에 이 한 몸 바치고 싶습니다.” “군대에 아예 말뚝을 박겠다구?” 박준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호기있게 말한다. “꼭 말뚝을 박겠다는 것은 아니구요. 여건이 허락된다면 그 일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구나 싶은 겁니다. 만약 그런 여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저는 기어코 제 뜻을 펼치고 말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거라구요.” 박준호가 움켜쥔 주먹을 흔들며 계속한다. “제가 이런 각오를 하게 된 것은 아버님과 작은아버지, 그리고 할아버님의 불명예를 씻어 드리기 위해섭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면 억울한 누명은 벗을 것이고, 저 역시 다른 그 무엇보다 큰 보람을 찾을 것이고….” 더 호기있게 포부를 밝히면 밝힐수록 한태훈의 아버지는 더욱 측은한 눈빛으로 박준호를 어루만지듯 바라볼 따름이다. “아서.” 한태훈 아버지가 말한다. “그건 꿈이다.” “꿈이라구요?” “그래, 대한민국 군대는 네가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적인 곳이 아니란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도록 푸욱 썩어 버렸거든.” 물론 한태훈 아버지의 심각한 소견 때문이랄 수는 없었지만, 막상 대학 졸업과 함께 장교 복무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서 박준호는 갈등을 느낀다. 처음 시작은 여건이 허락된다면 군 장교로서도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코 앞에 닥치자 오히려 그 반대 입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투자는 아깝지만, 과감하게 ROTC를 포기, 일반 사병으로 일찍 복무를 마치고 다른 분야에 투신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리라는 계산이 그것이다. 실제로 그 무렵 박준호는 그때까지 고스란히 살아있는 17만달러와 ‘호이농장’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적절히 활용하는 사업에 착수할 계획에 골똘해있던 참이다. 한데 그 원대한 계획을 순간적으로 접어버리고 ROTC 입교 쪽으로 급선회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그 하나가 매사에 지나친 김분이의 간섭 탓이고, 두번째가 런던 나토 본부에서 미국 국방성으로 옮겨간 대니 라일러 장군의 부인이며, 박준호의 생모인 어머니 때문이다.

2006-10-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2)

뒤집힌 연못 ⑪ 게다가 서승돈 제놈이 어디 그럴 입장인가. 버젓이 아내가 눈 뜨고 대기하는 이른바 유부남 아니던가. 물론 최근 부인과의 불화설이 나돌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바야흐로 별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지만…. 그럴수록 사내답게 사태를 관망하며 느긋이 자제하는 게 옳지, 엉뚱하게 남의 귀한 집 과부를 함부로 꼬여 내다니! 이런 고약한 경우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이거야말로 김상도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고, 아울러 영림그룹에 대해서도 일종의 반역 행위나 진배없는 것이다. ‘밉다니까 양주 처먹고 서방질한다더니, 서승돈이 꼭 그짝 아닌가.’ 김상도는 어금니가 시큰하게끔 한 번 더 씹는다. ‘병신 같은 자식!’ 벌써 벽시계가 자정을 알리고 있다. 이튿날 이른 아침, 김상도가 출근하기 위해 거실을 나서는데, 죽은 아우의 아들이며, 조카인 일규 녀석이 쪼르르 달려 나온다. “큰 아버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다. “그래, 일찍 일어났구나. 너도 오늘 공부 잘해라.” “네, 큰아버님.” 자식, 기특하기는…. 김상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일규 녀석만 봐도 기분이 좋다. 그래서 잠도 성북동에서 재운다. 녀석도 제 에미가 사는 아파트보다 성북동 집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김상도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한 탓이다. 기실 일규 녀석을 성북동에 묶어놓기 위해, 직접 와서 가르키는 과외 선생도 셋씩이나 배치했고, 맹꽁이처럼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땀 흘리는 운동도 열심히 하게시리 일규 녀석 전용 미니 실내축구장도 만들었던 김상도다. 그래서일까. 녀석은 제 에미보다 김상도를 더 좋아하고 따르는 편이다. 김상도도 일규 녀석이 그렇게 마음에 쏙 들 수가 없다. 하는 짓거리마다 영특하고 어른스럽다. 한마디로 녀석은 똑똑하다. 하나를 배우면 열의 이치를 깨우친다고나 할까. 공부도 일등을 놓치지 않지만, 운동신경 역시 여간 예민하지 않다. 모습도 마찬가지다. 귀티가 좔좔 흐른다. 홍주리의 모습을 그대로 빼박은 듯 벌써 윤곽이 서양 아이들처럼 또렷하고 야무지다. 다만 억지로 흠을 잡는다면, 녀석의 얼굴에서 우락부락했던 아우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우의 모습이라면 오히려 누이인 은경이가 더 가깝다. 아니, 영락없는 아우다. 때로 생긴 모습으로 보아 일규와 은경이 바뀌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하는 생각도 해보지 않는 바 아니다. 하나 청개구리처럼 제 에미도, 큰 어머니도, 심지어 김상도 본인 말도 들어먹지 않는, 그래서 눈에 띄기만 해도 울화통부터 먼저 치미는 은경이를 볼라치면, 아무렴, 미움도 고움도 다 제 몸에서 난다는데, 차라리 잘 됐지 뭐. 지레 체념하기 다반사다. 정말 은경이 처럼 고집불통으로 일관된 계집아이는 만난적이 없다. 제 동생 일규는 부르지 않아도 제 발로 성북동을 찾아와 안녕하세요, 큰 아버님. 저 학교에서 일등 했어요. 성적표를 내 보이며 자랑하곤 하는데, 은경이는 한마디 하려고 직접 호출령을 내려도 좀체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제 어미가 팔을 붙들고 억지로 끌고 와도 마찬가지다. 단 한번도 조근조근 입을 열어 제 의사를 표현한 적이 없다. 뭐가 그리 불편한 자리라고 어떻게 하면 해방되어 도망갈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하는 것 같다. 김상도가 승용차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본다. 일규 녀셕이 그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다.

2006-09-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1)

뒤집힌 연못 ⑩기업의 최우선 목적이 성장이고, 이익이라면 일단 서승돈은 그 두 가지 조건을 백 퍼센트 충족시켜 준 셈이다. 이른바 최고 경영인으로서, 그 자질을 충분히 확인시킴과 동시에 김상도가 기대했던 대로 역시 ‘큰 재목’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특히 전자의 경우 하도 경쟁이 치열해서 기존 순위를 뒤바꾸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정평이다.한데 서승돈이 그런 장애물을 겁도 없이 한순간에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기실 그의 군단이 입성하기 전만 해도 영림전자의 업계 순위는 고작 3위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말이 3위지 재벌급이 아닌 중소기업에 불과한 A사에 거의 따라잡히다시피 해서 실제로는 4위 수준이라 해야 옳았다.따지고 보면 전무급의 서승돈을 전격적으로 부사장에 진급시키면서, 대표이사직의 대임을 맡겼던 것도 전임 사장의 경영 부실 때문에 취해진 일종의 극약처방이었다. 그만큼 영림전자는 불치의 질환이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병에 허덕이고 있던 터였다.한데 서승돈이란 젊은 의사에 의해 그것이 거의 완치에 가깝게 치료되어 버린 것이다. 흔히들 그런 혁신을 두고,“어어, 왜 저래? 저러다가 어떻게 감당하려구?”오금이 저려 죽겠다는 식으로 힐책하기 일쑤지만 웬걸 서승돈은 남이야 망건 쓰고 오줌 누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과감하게 예리한 칼을 들어 환부 깊숙이 꽂아 넣는 것이었다.그래서 영림전자의 막혔던 혈관에 왕성한 피돌림을 새롭게 불어 넣은 것이다. 회사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잘했어. 아주 잘했어!”그때마다 김상도는 서승돈을 불러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사안에 따라 계열사 사장이 다 모이는, 이른바 어전회의 같은 데서 서승돈의 빈틈 없는 경영 혁신과 그 업적을 널리 치하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다 보니 서승돈의 명성이 자꾸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룹 차원의 공식 기구가 만들어질 때마다 그러하다. 그 핵심 역할을 서승돈이 맡아 놓고 차지하는 것이다. 자연히 김상도와 독대하는 시간이 잦아진다.이번 케이스가 특히 그러하다. 다름 아닌 영림해양개발 프로젝트다. 김상도는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기는 해도 서승돈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라는 철두철미한 기대와 신뢰를 앞세워 덜컹 영림해양개발 위원회에 서승돈을 가담시킨 것이다.생각해 보라. 서승돈만큼 영림해양개발과 밀착된 인물이 또 어디 있는가. 영림그룹 사장단 중에서 김상도의 총애를 받는 다섯사람을 선발, 해양개발운영위원으로 임명했고, 그중 가장 똑똑하다고 인정되어 서승돈을 운영위원회 간사로 발탁하지 않았던가.그래서 관련 간부들을 불러 놓고 함께 다그치고, 함께 격려하고, 함께 머리를 짜내어 정상 가동 묘안을 찾곤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누구보다 서승돈이 해양개발의 제반 문제와 그 해결 방안까지 줄줄 꿰고 있다 해야 옳다. 물론 해양 개발에 관한 주요 스케줄도 마찬가지다. 윌리엄 피셔 2세의 비서 책임자 죠지 마샬의 방한도 잘 알고 있고, 그를 만나기 위해 주한 미 대사까지 동원하며 고군분투했던 것도, 어쩌면 그 자리에 홍주리를 배석시키기 위해 김상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서승돈은 익히 알고 남을 터다.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서승돈이 하필 그 시간에 홍주리를 가로챌 수 있는가 말이다.홍주리가 누군가. 비록 지금은 죽고 없지만 막내아우 김상수의 부인 아니던가. 서승돈을 천거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은인이 김상수일진대, 어찌 그 부인을 넘볼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006-09-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90)

뒤집힌 연못 ⑨하지만 그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게 한 근본 동기는, 서승돈의 능력을 일찍 간파한 김상도의 판단력만이 아니다. 또 있다. 죽은 아우 김상수다. 서승돈은 김상수와 고등학교 동창 관계다. 막내아우는 영국 지사장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면서,“회장님, 저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만, 제 동기 한 명이 영림전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은근히 청탁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공군 사관학교를 수석 입학한 수재라는 추천사보다 성격이 차분하고 고분고분해서 아우들 중 가장 신뢰가 두터웠던 동생의 말인 터라, 김상도가 서슴없이 관심을 보였던가.“공군 사관학교라면 비행기 조종사 되는 코스 아니냐?”“그렇습니다.”“그런데 왜 비행기 조종은 하지 않고 우리 회사에 입사한 거야?”“그럴 수밖에 없는 사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그렇지만 그 친구 숙부되는 분이 이번에 예편한 조근상 장군 아닙니까?”“조근상 장군? 육군 참모총장 지낸 사람 말이냐?”“맞습니다.”“그렇다면 꽤나 괜찮은 집안 출신이구만.”“공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퇴역하고 사법고시 공부를 하다가…생각하는 바 있어 입사했다는 겁니다. 참, 그 친구 고등학교 다닐 때 총 학생회장도 지냈고, 그래서 집에도 몇 번 놀러 왔다가…회장님께 인사도 드렸습니다.”“학생회장? 그런 감투나 좋아했으니 사법고시에 낙방할 수밖에.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공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그거 하나 패스 못했겠냐? 아예 그런 녀석하고는 상종하지 마라.”“아닙니다. 회장님. 그 녀석은 잘 다듬기만 하면 분명 크게 쓸 재목감입니다. 한 번 눈여겨 봐 주십시오.”“알았다. 네가 그렇게 자신 있게 천거한다면…눈여겨 볼 수밖에.”“감사합니다, 회장님.”처음이고 마지막인 막내 아우의 부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사람을 천거할 수 없게끔 대서양에서 산화해 버린 막내아우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일까. 정말 죽은 김상수가 그리워질 때마다 김상도는 서승돈을 불렀고, 그 서승돈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막내 아우의 여린 실루엣을 찾아내곤 했던 것이다.그처럼 완전히 발가벗고 키워 내다시피한 서승돈이 과연 어떻게 나왔는가. 제놈 잘 나서 출세한 것으로 착각하다 못해, 영림전자 대표이사로 올라앉자마자 모든 임원이며 기술 개발, 자재 구매, 인사총무 따위 소위 말하는 황금어장 자리 책임자를 서승돈 직계 라인으로 온통 개조해 버린 것이다.단 한 사람도 다른쪽 라인은 운신을 못하게시리 족쇄를 지르거나, 아예 도태시켜 버린 것이다. 하다못해 김상도가 직접 심어 놓은 사람까지 새마을 담당관이니, 기숙사 관리책임자니 하는 별 볼일 없는 직책을 달아 간신히 연명만 시킬 정도인 것이다.그래도 처음에는 뭔가 혁신적인 경영 방향을 잡기 위한 새 포석이려니 하고 조였던 고삐를 다소 늦추곤 했는데, 웬걸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영림전자가 온통 서승돈 사병만으로 득실거릴 뿐 아니라, 큰 일에서 작은 일까지 서승돈의 지시, 서승돈의 사인이 아니고는 도무지 통용될 기미가 없는 것이다.심지어는 그룹 총수인 김상도가 지시를 내리는데도 열중쉬어 자세로, ‘서승돈 사장님의 오더를 받는 즉시 실시하겠습니다’ 식으로 요지부동이니 더 이상 거론해 무엇하랴.하나, 그것 역시 꼬투리 잡아 닦달할 명분이 없다. 왜냐면 영림전자가 서승돈 체제로 바뀌고 나서 부쩍 신장률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2006-09-2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9)

뒤집힌 연못 ⑧“그래, 잘했구먼. 그런데 무슨 얘길 하던가?”“너무 가까이는 갈 수 없어서…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얼핏 들으니까 주로 음악 얘길 많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곡가가 윤이상이니, 파바로티니 뭐…, 그런 이름이 언뜻언뜻 들렸습니다.”“그것뿐이야?”“그 이상은 없었습니다.”“둘이 걸으면서 손은 잡지 않았어?”“아, 잡았습니다. 여자 쪽에서 먼저 잡으니까, 남자가 머뭇머뭇 주변을 살폈습니다.”“그밖에 보고할 만한 건 없나?”“별다른 상황은 없습니다. 생각보다 조용한 데이트를 즐기고 헤어졌으니까요.”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다.“수고했어. 낼 봐.”김상도가 수화기를 죽이고 벌떡 일어나 선다. 이 번거로운 전화를 비서진에게 일임하지 못하고 직접 원수창을 상대하는 자신이 퍽 피곤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이같이 사적인 일일수록 완벽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 위안받곤 하는 김상도다.지금쯤 홍주리는 집에 돌아와 있을 시간이다. 김상도는 관리인에게 전화를 넣도록 지시할까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념한다.‘아서!’설사 통화가 된다고 해도 무슨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말마따나, 그것이 프라이버시라면 더욱이나 함부로 관여할 상황이 아닐 터다. 하나, ‘아서!’라고 고개를 저으면 저을수록 더 괘씸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서승돈이다. 감히 서승돈 따위가 홍주리에게 접근하다니! 아니, 자신의 간곡한 부탁을 일시에 매정하게 거절하게 만든 그 주인공이 서승돈이라니.서승돈-.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제놈이 언제적 서승돈인가. 선머슴이나 진배없는 놈을 데려다가 누가 가르치고, 누가 대패질하고, 누가 니스칠해서 오늘날 대영림그룹의 노른자위인 전자 대표 이사 자리에 올려놨는가.생각해 보자. 신입사원 출신의 서승돈을 최고 경영자 반석 위에 올려 놓느라 얼마나 많은 홍역을 치렀는가.너무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시기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풀에 중도하차하지 않았던가.“왜 서승돈만 감싸시고, 서승돈만 편애하십니까?”“이건 분명 인사 규정에 없는 조첩니다.”“전 부장대우 진급하고 5년짼데도 아직 꼬리를 못 뗐는데, 서승돈은 왜 1년만에 이삽니까?”“아무리 서승돈이지만, 아직 애송입니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내 수하에 부리던 부하 직원이었는데, 어떻게 나보다 높은 본부장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까?”“우리보고 모두 보따리 싸서 나가라는 말씀 같은데, 좋습니다.…하지만 두고 보십쇼. 서승돈에게 크게 다치실 날이 있을 테니까요.…회장님, 제 말씀 들으십쇼. 서승돈, 그자야말로 등 뒤에 칼을 찌르는 가증스런 놈입니다.”서승돈의 벼락 출세 때문에 갈갈이 찢겨 마침내 옷 벗고 나갔던 영림그룹 초창기 동지들이 이구동성으로 읍소하고 저주했던 대목들이다.하나 그 많은 읍소와 저주를 깡그리 묵살하고 오로지 제놈 하나만을 높이 높이 올려 최정상인 대표이사 자리에까지 기어코 안착시키지 않았던가. 물론 서승돈의 재빠른 판단력과 누구보다 앞서가는 강력한 추진력과 결코 물러설 줄 모르는 끈질긴 집착력, 그리고 의외로 담담한 친화력 등이 김상도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던 터다.

2006-09-2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8)

 뒤집힌 연못⑦ 이번에는 김상도가 입을 열지 못한다. 그녀가 말한다. “대신 26일 출국 준비는 단단히 할게요. 죄송해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이처럼 깐깐한 성격 때문에 김상도가 오늘까지 전전긍긍하는 것일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노’ 할 줄 아는 여자. 영림그룹 최고 경영자, 아니 하늘처럼 높은 시아주버님의 명령과 지시를 감히 거절해 버리는 여자, 도무지 아첨을 모르는 여자,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여자…. “빌어먹을!” 일단 그 대목에서부터 심기가 불편하기 시작한 김상도다. 그 프라이버시가 과연 무엇인가. 어떤 내용의 중요한 약속인가. 누구를 만나는 건가. 그 상대가 도대체 어떤 위인이기에 이처럼 막급한 비즈니스를 망치게 한단 말인가. 자꾸 울화가 치민다. 견딜 수가 없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그 의문을 풀어 버리고 싶다. 김상도가 그 궁금증에서 해갈된 것은 저녁 9시경이다. 김상도의 수행 비서 중의 한 명인 조 비서가 거의 파장이 되어 가는 만찬 좌석에 메모지를 조심스럽게 내민다. “뭔가?” “전화 왔습니다.” “어디서 왔어?” “원 비섭니다.” 원 비서라는 말에 김상도는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일어선다. 비록 핸드폰 수화기이긴 해도 손님들이 있는 자리에서 통화하는 것은 실례다. 옆방 대기실에 혼자 앉아 전화를 받는다. “나야!” “아, 회장님. 저….” 들어보나마나 원수창 목소리다. 이름하여 성북동 비서다. 집안 일을 전담으로 하는, 그야말로 개인 몸종이나 진배없는 일꾼이다. 벌써 비서로 활약한 지 6년이 넘는다. 아마 비서진 중에 가장 목숨이 긴 사람일 터다. 비서의 수명은 아무리 길어야 3년이 고작이다. 뭐랄까, 비서진의 정년이라고나 할까. 너무 오래 근무시켰다가 회장실 내막을 샅샅이 꿰게 되면 언감생심 딴전을 피울지 모른다는 우려감 때문이다. 하나, 원수창은 예외다. 되레 너무 많이 알아서 함부로 내보낼 수 없는 케이스다. “그래, 어떻게 됐나?” 김상도가 흥분한 음성으로 묻는다. “알아냈습니다, 회장님.” “누구야? 누굴 만나던가?” “말씀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회장님 수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글쎄, 그게 누구였느냐니까?” “영림전자 사장이었습니다.” “뭐, 서승돈?” 김상도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어 덧붙인다. “그게 사실이야?” “틀림없습니다, 회장님.” “그래, 어디서 어떻게 만나던가?” “국립극장 앞에서 만났습니다.” “국립극장?” “처음부터 음악회를 관람하기로 약속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영 시원치 않은 것 같았습니다. 장 페랑디스의 ‘두 대의 플루트를 위한 협주곡’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손님이 별반 없었습니다.” “아주 한가했겠구먼.” “그렇습니다, 회장님.” “음악회 끝나고 다른 일은 없었어?”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남산 순환도로를 두 바퀸가 세 바퀸가를 돌고, 그리고 어두운 숲길을 산책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두 사람이 몇 번 와 본 코스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들을 계속 미행했단 말이지?”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2006-09-2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7)

뒤집힌 연못 ⑥“윌리엄 피셔 2세 비서 중 한 분이 한국을 방문했어. 이름이 죠지 마샬이라고 아주 실력있는 사람이라는구먼. 미국 대사관을 통해서 아주 어렵게 컨폼했어. 그것도 오늘 오후에 말이야.”홍주리가 대답이 없자, 김상도가 달래듯 입을 연다.“이것 봐.”“말씀하세요. 회장님.”“아주 인상적이고 화사한 의상을 선택했으면 좋겠어.”홍주리는 그 부분에서 침을 꿀꺽 삼켜 넣는다. 그리고 당당히 말한다. 머뭇머뭇하다가는 되레 기습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회장님. 오늘은 안 되겠어요.”“안 된다구? 은경이 때문인가?”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일어난 자살소동 때문에 안 그래도 어젯밤 집안이 한바탕 뒤집혔던 터다. 그래서 그 문제에 관한 한 그녀도 김상도도 피차 피곤한 상태다.“은경이도 그렇지만….”그녀가 입을 열기 바쁘게 김상도가 잽싸게 가로챈다.“그건 내가 말했잖아. 잘못 사귄 친구들 농간 때문이라고, 내 담임 선생님을 불러 철저하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처해 놨으니까 이제 아무 문제 없을 거야.”“회장님, 그 애가 컴퓨터 대화방을 통해 남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거 아세요?”“컴퓨터 뭘 통한다구?”“인터넷 대화방 말이에요.”“대화방?”“인터넷으로 대화하는 거 있잖아요? 요즘 아이들 다 하는 거.”“채팅 말이야?”“네, 맞아요. 채팅.”“그래서 남자들을 만난다구?”“네, 회장님. 엘레시온이라는 이름으로 대화방을 열어 가지구….”“엘레시온은 또 뭐야?”“어렸을 때 제 아빠가 지어서 불렀던 아명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컴퓨터에 올렸더라구요. 회장님 저, 지금도 가슴이 떨리고 무서운거 있죠.”“알았어, 알았어! 내가 인터넷 전문가를 불러서 해결하도록 할 테니까, 일단은 잊어버리고 나오라구.”“하지만….”“글쎄, 은경이 문제라면 인터넷이고, 엘레시온이고, 다아 나한테 맡기라니까. 빨리 옷이나 챙겨 입어.”홍주리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한데도 그녀는 기세 좋게,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입을 연다.“실은 은경이 때문이 아녜요, 회장님.”“뭐라구?”“오늘 저녁에 피치 못할 약속이 있거든요.”“약속이 있다구?”“네.”“무슨 약속이야?”홍주리가 머뭇거린다.“왜 말 못하나?”“이건 제 프라이버시거든요.”“프라이버시? 좋아. 내가 그걸 다 사지. 비싼 돈으로.”“죄송합니다만, 그건 돈으로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거예요, 회장님.”

2006-09-2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6)

뒤집힌 연못 ⑤그 매이저의 승낙을 받지 않고서는 원유 도입 계약 체결도, 현찰 구입도 모두가 불가능하다. 그 같은 실력자 윌리엄 피셔 2세가 새로운 석유 광구권을 따내기 일보 직전에 있는데, 거기가 베트남 북부 통킹만 해역이다. 수심이 70m에서 깊은 곳은 400m에 이르는 대륙붕 지역이라는 것이다.그러니까 해저 석유 탐사용 대형 파일이 무려 일흔일곱 군데나 새로 박히는 셈이다. 그 절반은 수심 70m에다 수면 위와 해저 지층 아래까지 계산하면 무려 100m짜리 파일이 필요하다. 나머지는 수심만 400m니까, 최소한 500m가 넘는 거대한 파일이다. 아니, 비단 파일뿐 아니다. 파일을 박아 넣기 위해서 또 대형 재킷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 역시 최하 100m에서 최고 500m짜리가 넘는 재킷이다. 그것도 모두 70개가 넘는 수량이다.가히 해양 설비 공사 사상 초유의 공사비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손가락으로 어림 짐작만 해도 20억 달러에 가깝다. 물론 어느 해양 설비 전문 회사든 그것을 한꺼번에 맡아 시공할 수는 없다. 예컨대 파일, 재킷, 제작, 시공, 플랜트 등 대충 종목별로 분류한다 해도 건당 최하 10억 달러가 넘는다.영림해양건설 역시 그 세기적인 공사를 일괄 시공한다는 과도한 계획은 갖고 있지 않다. 영림해양건설의 총생산 여력으로 보아 재킷 분야가 그중 적절하다고 판단, 그쪽에 관한 철저한 정보를 분석한 끝에 현실적인 가격을 산정한 입찰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입찰서와 은행 보증서를 윌리엄 피셔 2세의 대행사인 텍사코에 접수시킨 것이 지난달 하순이다.한데, 일이 잘될 조짐인지 윌리엄 피셔 2세 생일 파티에 영림해양 대표인 김상도 회장 부부를 초청한다는 공식 초대장이 날아든 것이다. 만약 영림해양이 접수한 제반 조건이 그들의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면, 생일 파티 초청장이 날아들 리 만무하다고 판단한 김상도는 연일 회의를 소집, 윌리엄 피셔 2세에게 브리핑 할 각종 자료, 서류 등의 작성을 진두 지휘했던 것이다. 그 세기적인 부부 동반 생일 파티에는 당연히 성북동 사모님이 동행해야겠지만, 언감생심 그녀는 감히 입 밖에도 꺼내 볼 수가 없다. 아니, 그 초대장이 도착했는지 조차 모른다고 해야 옳다.김상도는 적절한 파트너를 선정하는 데 심사숙고한 척했지만, 실은 초대장을 받아 든 순간 벌써 홍주리로 내정해 버린 터다. 유조선과도 바꾸지 않았던 전력으로 보아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처사인지도 모른다.그래서 홍주리에게 그것을 전하는 방법도 그처럼 단도직입적이었을까. 요즘 갑자기 몸이 나빠진 남강정유 홍영호 회장 병간호에 여념이 없는 그녀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건다.“26일 오후 4시 비행기로 베트남에 갈 일이 생겼어. 텍사코사의 윌리엄 피셔 2세 있지? 거 석유 재벌 말이야. 그 사람 생일 파틴데, 아주 중요한 비즈니스야. 윌리엄 피셔 2세에 대해 각별한 연구 좀 해 줘.”일방적으로 수화기를 내려 버린다. 이쪽의 사정이나 스케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배려도 질문도 없다. 하나 그것까지는 본래 김상도의 성격이므로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제아무리 중대한 비즈니스라 해도 출국 날짜를 사흘 앞두고 또 갑자기 전화를 걸어, “이것 봐. 준비하고 지금 곧 마리어트 호텔로 나와.” 일방적으로 명령할 수 있는가 말이다.“지금이라고 말씀하셨어요?”“그래, 지금.”“지금이 저녁 7시인데요.”“그렇지, 맞아. 그러니까 8시까지만 도착하면 될 거야.”“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2006-09-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5)

뒤집힌 연못 ④하나 그날 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몇몇 격의 없는 사장들끼리 모일라치면 은밀히 만들어진 노랫말을 흥얼흥얼 읊조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즈음 인사말이었다.유조선, 유조선 제아무리 부가가치 높다 해도나는 그대와 절대로 바꾸지 않겠네.유조선 유조선….물론 김상도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김상도의 인간적인 면모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노래라고 해야 옳다.어쨌거나 홍주리에 대한 김상도의 애틋한 감정은 그날 이후로 널리 공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12년 넘게 아직 혼자 사는 홍주리의 속사정 역시 김상도의 그 애틋한 감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시쳇말로 김상도가 그녀의 혼삿길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냥 막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 요원을 일선에 배치하여 공작 차원의 혼인 훼방 작전을 진두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구체적인 방해 공작 사례가 표면에 드러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풍문에 불과하다는 확실한 물증도 없는 터다. 하나 그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김상도가 그녀의 혼인을 결단코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다.따지고 보면 비단 혼인뿐 아니다. 일반적인 남자 관계도 그러하다. 막말로 상대가 유조선을 두 척이나 주문한 중동의 석유 벼락부자든, 모모한 대학 교수든, 미국에서 경영 수업을 마치고 귀국한 집안 사촌오빠 친구들, 혹은 함께 동문수학했던 명성깨나 떨치는 각계 박사급 인사건, 어느 누구도 그녀 주변을 얼씬거리며 수작부리는 꼴을 김상도는 기어코 방관하지 못하는 것이다.오늘 밤 김상도의 심기가 불편했던 원인도 기실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니다.한마디로 원인 제공은 홍주리다. 홍주리는 오늘 밤 김상도를 갈갈이 찢어 놓은 것이다. 이유인즉슨 이러하다. 영림그룹 차원으로 추진해 왔던 해양 개발 사업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향후 엄청난 수요를 예측하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 고액의 장비를 도입했지만 웬걸, 당초 시장 조사와는 달리 사업은 계속 지지부진이다. 아무리 중역진을 불러 마라톤 회의를 주재, 전직원의 정신 개조 운동 운운하며 매일매일 무섭게 닦달해도 사업 실적은 매양 그 모양 그 꼴이다. 파리만 윙윙 날리고 있는 터다.하지만 김상도의 직감에 의해 계열사 사장단의 적극 만류를 무릅쓰고 거의 즉흥적이다 싶게 무모하게 추진한 프로젝트여서 누구에게 뒤집어씌우거나, 단칼로 목을 댕강댕강 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위기일발 일패도지(一敗塗地) 상황이다. 애꿎은 담당 사장만 날마다 들들 볶일 따름이다.그 모든 것이 다 해양 개발 사업이 지지부진한 탓이다. 회사 설립 후 아직 한 건의 수주도 올리지 못했다면 굳이 변명할 여지조차 없다. 한데, 그 일에 약간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미국 석유 재벌 회사 텍사코가 그 대상이다. 아니, 텍사코는 표면적인 이름이고 실은 그 배후에서 모든 프로젝트를 좌지우지하는 거물이 한 사람 도사리고 있다. 윌리엄 피셔 2세가 바로 그 사람이다.중동 석유의 3분의 1을 독식하다시피하는, 소위 말하는 오일 메이저다. 그는 원유를 현물로 사 오는 따위 잡상인 수준이 아니다. 그는 석유를 얻기 위해 중동 산유국의 국왕이나 혁명 지도자와 담판, 석유 광구권을 취득한 다음 배사(背斜) 구조, 그리고 기름을 파 내는 시설까지 완공시켜 생산되는 기름을 반타작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돈 놓고 돈 먹기다.

2006-09-2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184)

뒤집힌 연못 ③“한데, 왜 후자이씨 한테는 파트너를 안 넣었나?”“넣었습니다, 회장님.”“시원찮은 걸 넣었구먼.”“아닙니다. 특별히 후자이 씨에게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청운각 새끼 최 마담을 배치했으니까요.”청운각 새끼 최 마담이라면 장안이 다 아는 미인이다. 실제 내막이야 어떻든 모 방송국 탤런트실 출신인 데다 영어도 기본은 할 줄 알아서 웬만한 VIP가 아니면 함부로 상대도 하지 않으려는, 이른바 그 분야의 선두주자인 것이다. 오죽하면 하버드 신사 키신저가 미국에 돌아가 감사 편지를 다 보내올 정도일까.“그래서 그자가 새끼 마담을 거절했단 말인가?”“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말 없다가 홍주리 여사를 발견하고 나서부터….”“홍주리는 지금 어딨나?”“후자이 씨와 춤을 추고 있습니다. 벌써 다섯 곡째입니다.”“아니, 다섯 곡씩이나 계속 춤을 춰?”“그분께서 놔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이것 봐!”“네, 회장님.”“새끼 마담에게 당부하란 말이야. 제 파트너 하나 관리 못하고 무슨 화대를 받겠다구. 새끼 마담보고 해결하라고 그래!”“실은 새끼 마담이 지금 여기 없습니다.”“그게 무슨 소리야.”“제가 단단히 일러서 여러 차례 후자이 씨를 닦달했지만 되레 새끼 마담이 뺨을 얻어 맞고 쓰러졌습니다.”“쓰러졌다고?”“이빨이 세 대나 나가 버렸으니까요.”김상도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어떻게 할까요. 회장님?”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김상도가 일갈한다.“서승돈 사장 불러 와!”서승돈은 영림전자 사장이다. 아랍 토호국 왕세자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 관련 계열사 사장단이 총출동했지만, 그래도 그중 담력이 세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 바로 서승돈이다.서승돈이 불려 나오자 김상도가 다짜고짜 묻는다.“이것 봐, 서 사장. 후자이란 작자 잘 알지?”“잘 안다기보다 아랍 토호국 출장중에 한 번 만났을 뿐입니다.”“그 사람이 그렇게 부잔가?”“개인 소유 유전이 다섯 군데나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참, 이번에 석유 운송회사까지 인수했지 않습니까?”“아무리 부자고, 아무리 영향력이 있고, 그리고 아무리 우리 배를 두척이나 주문했다고 해도…도무지 예의가 없는 놈이야.”김상도는 마치 최후의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처럼 신중하게 명령을 하달한다.“당신이 가서 정중하게 충고를 하고…만약에 그 충고도 듣지 않고 기어이 홍주리를 놔 주지 않으면, 당신이 한방 먹여도 상관없어. 그런 작자에겐 굳이 배를 팔고 싶지 않으니까!”다행히 그날 밤 주먹다짐이 오가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서승돈이 어떻게 후자이를 구워삶았는지 홍주리도 위기에서 구하고 두척의 유조선도 잃지 않는 최선의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너무나 일이 잘 풀린 것이다. 기분이 썩 좋아진 김상도가 유흥 시간에 노래를 불렀는데, 곡목은 예외 없이 그의 십팔번 ‘목화밭’이었다.그는 술에 만취한 후자이 씨를 불러내어 어깨동무를 하고 덩실덩실 춤추며 ‘목화밭’을 열창하는 것이었다.목화밭 목화밭, 우리 처음 만난 곳은 목화밭이라네.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목화밭 목화밭….

2006-09-1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3)

뒤집힌 연못 ②그날 모신 귀빈은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아랍 토호국의 압둘라 왕자를 비롯, 주로 중동에 진출한 구미 대기업의 간부급 거물들이었다. 그 중에는 석유 벼락부자가 된 산유국의 족장들도 몇몇 끼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랍식으로 정장한 차림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러니까 정부 초청으로 방한한 압둘라 왕자 수행원과 그 일행인 셈이다. 꽉 짜여진 방한 스케줄 중의 하나로 영림그룹 생산 현장을 견학하는 순서가 들어 있었는데, 바로 그날이 영림공단 방문을 마치고 막 귀경했을 때다.일종의 경제 사절단이라고 할까. 그들은 닥치는 대로 주문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장기 수입 계약을 체결하곤 한다. 석유 벼락부자가 된 아랍 토호국 지방 족장 후자이의 경우는 좀 지나칠 정도다. 영림공단을 돌아보다 말고, 그는 완성 단계에 있는 배를 가리키며 ‘저 유조선은 얼만가?’라고 물었고, 안내를 맡은 직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계약 단가를 설명하자 ‘별로 비싸지 않구먼. 나도 저거하고 똑같은 형으로 두 척만 만들어 줘’하는 식이다.“하지만 정식 계약서에 서명을 하셔야….”“지금 당장 하면 될 거 아냐?”“물론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지불 방법이라든가, 은행 보증이라든가 그리고 계약금도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만….”“계약금?”“그렇습니다.”“계약금은 얼마야?”“관례상 전체 금액의 20퍼센트 정도는….”“20퍼센트? 200만 달러? 그 정도는 바로 끊어 줄 수 있어.”007가방을 들고 따라오는 흑인 수행원을 불러 당장 수표를 끊을 것처럼 서둘러 대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식을 초월하는 즉흥적인 호기(豪氣)가 아닐 수 없다. 역시 석유 벼락부자답다.아랍식 정장을 갖춘 후자이의 객기는 성북동 게스트 하우스에 와서도 좀체 꺾일 줄 모른다. 물론 중요한 손님이고 중요한 상담들이 산재했으므로, 어쩌면 영림그룹의 감초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홍주리가 동원되지 않을 수 없다.그러잖아도 볼륨 있는 몸매에 날아갈 듯한 한복을 입어서 더욱 날렵하게 보이는 그녀다. 의상뿐 아니다.‘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는 여배우처럼 동백 기름을 바른 정돈된 쪽머리 역시 참석자들의 관심을 끄는데 하등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유창한 영어와 불어를 구사하며, 머금은 듯 만 듯한 미소까지 아낌없이 전달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다.한국식 술판이 시작되고 바야흐로 풍악이 울리는 찰나다. 김상도는 점잖은 압둘라 왕자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환담중인데, 옆방의 무도회 쪽 진행을 맡았던 영림종합상사 총무부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고하는 것이었다.“회장님, 난처한 일이 생겨서 보고 드립니다.”“뭔데 그래?”“홍주리 여사가….”“홍주리가 왜?”“손님 중의 한 분이 지나친 행위를 요구해서….”“지나친 행위라니?”“술이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만….”“묻는 말에나 대답해! 지나친 행위라니?”“…같이…침실에 들자는….”“뭐 동침을?”“홍주리 여사를 붙들고 막무가내로 놔 주지 않는데요.”“누구야, 그 작자?”“후자이씨 입니다.”“후자이?”“우리 유조선을 두 척이나 주문했던….”당장 용단을 내릴 것처럼 붉으락푸르락 했던 김상도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앙다문다.“이봐!”“네, 회장님.”“이쁜 아이들 많이 불러오지 않았나?”“불러왔습니다.”

2006-09-1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2)

뒤집힌 연못 ①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쉰다. 정말 희한한 안도감이다. 잘 됐어. 아이를 출산하려면 앞으로 1년여 걸릴 것이고…아이를 낳은 뒤에도 또 그만큼 후딱 가 버리겠지. 암, 그동안은 절대로 재혼 얘기는 나오지 않을 거야. 아주 잘 됐어.갑자기 목이 마르다. 가벼운 갈증이다. 그가 박옥주를 향해 언제 포효했었느냐는 듯이 부드럽게 말한다.“이봐, 나 차가운 맥주 한 병 갖다 줘.”올해 은경이가 중학교 3학년이니까, 홍주리가 혼자된 지도 어언 12년째인 셈이다.따지고 보면 그 12년은 절대로 쉬운 세월이 아니다. 그때 그때마다 영림건설 대주주의 포기다 뭐다 또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에 들어선 조카딸 은경이를 앞세워 그녀의 재혼에 제동을 걸긴 했지만 어쩌면 김상도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홍주리 쪽도 재혼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는데다 딱, 이 사람이다 하는 이상적인 상대도 나타나지 않아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도 견디어 온 터다.며칠 전만 해도 그렇다. 성북동 사모님이 시숙이 제수의 혼삿길 막고 있다고 은연중에 빈정거렸지만, 그리고 그 빈정거림 속에는 그녀에게 흑심을 갖고 있지 않느냐는 여지가 숨어 있는 터이지만, 말 그대로 천만의 말씀이다.설사 술에 취해 이성을 잃었을 때는 몰라도 맨정신으로 그녀에게 흑심을 품어 본 적은 결단코 없다.하나, 문제는 마시기 전이 아니라 마시고 난 다음이다. 잘 먹으면 약주요, 못 먹으면 망주라고 하지 않던가. 다시 말해 술 핑계를 대고 그녀를 은근히 심중에 둔다고나 할까.실은 이런 일도 있었다. 홍주리는 영어와 불어에 능통하다. 뛰어난 미모에다, 흡사 연잎 위를 구르는 영롱한 아침 이슬인 양 맑은 목소리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웬만한 상대는 음성 하나만으로도 제압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김상도로서는 그것이 여간 큰 자랑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으레 ‘홍주리한테 도움을 청해! 아냐. 지금 당장 불러 와’ 식이다. 중요한 외국 손님을 접대할 때는 더욱이나 그러하다. 특히 김상도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십중팔구 홍주리가 동행한다고 해야 옳다.물론 그녀는 통역 담당이다. 하나 실제로는 통역뿐 아니다. 그때 그때 상황 진전에 맞춰 김상도의 즉흥적인 판단을 돕는 데도 일익을 담당하곤 한다. 지내 놓고 보면 그녀의 활약이 대단한 결과를 가져왔구나 경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비단 영림건설뿐 아니다. 영림전자, 영림항공, 영림중공업 등 세계 유수 고객들이며, 자본 및 기술 합작사들이며, 협상 테이블에 앉아 밀고 당겨야 할 상대는 너무 많다.한 번은 외국 손님들을 초청한 파티를 개최했다. 게스트 하우스라고 칭하는 성북동 저택에서다. 그의 본가 근처 집 세 챈가 네 챈가를 구입, 담을 헐어 내고 지은 영림그룹 전용 연회장이다. 호텔에 묵기를 꺼리는 VIP들은 아예 게스트 하우스에 모시기도 한다.예컨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키신저가 영림그룹 특별 고문역을 맡아 맹활약했을 때도 항시 성북동 게스트 하우스만을 이용했고, 매스컴을 피해 몰래 입국했던 세기의 무비스타 오마 샤리프도 영림그룹 게스트 하우스 단골 손님 중의 하나다.방은 많지 않았지만 시설은 일류 호텔을 뺨치는 곳이다. 넓은 풀장에 최신형 사우나, 각종 시설이 완비된 헬스클럽, 테니스장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널따란 홀, 완벽한 사운드의 음향장치를 부설한, 흡사 중세 소왕국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무도회장, 일본식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노래방, 잘 손질된 정원,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3층 테라스 등등 여러 모로 조용하고 쾌적한 장소다.

2006-09-1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1)

지독한 사랑 ⑨ 김상도가 어느새 암산을 시작하고 있다. 그래, 2월16일이라면 비행기 사고 난 날이 아무 날이니까 그래, 상수 아이가 틀림없구먼. 암, 그러면 그렇지, 설마…드디어 결론을 내린다. 그가 입을 연다. “그 날짜 틀림없는 거지?” 하지만, 많이 가라앉은 목소리다. “틀림없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한다. “산모나, 아이는 어때?” “아주 건강합니다.” “그런데 왜 유산시킬려구 했어!” 상대가 대답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계속 공격이다. “당신이 유산시켜도 된다고 했어?” “아, 아닙니다. 전 절대로!” “그럼, 왜 그 말이 나온 거야?” “환자가….” “환자가 직접 유산해 달랬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의견을 타진해 왔었습니다.” “그게 언제야?” “어젭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재고해 보라고 제 의견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 봐!” “네, 회장님.” “당신, 그 아이 수술했다 하면 그날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 “아, 네…절대루.” “설사 당신이 수술하지 않았다 해도…그건 당신 책임이야. 알겠어?” “…그건….” “강요한이라고 했나?” “네, 회장님.” “어디서 박사 받았어?” “미국서 받았습니다.” “미국? 그래, 공부 많이 했구만. 강 박사.” “네, 회장님.” “당신이 책임져.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때까지! 알겠어?” 이번에도 김상도 회장이 서둘러 말을 잇는다. “내 신세진 사람한테는 절대루 서운하게 안 해!” 영림병원 산부인과 과장을 내보내자마자 김상도는 비서를 시켜 홍주리를 전화로 불러 낸다. 박옥주가 말리고 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없다. “나야.” “어머, 회장님. 웬일이세요?” “제수씨 임신했다면서?” “어멋! 누가 그래요?” “누가 그랬는가는 하나도 중요할 거 없구.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제수씨가 가진 우리 상수 아기야. 절대로 유산은 안 돼! 유산은 우리 집 사전에 없어. 만약 이상한 얘기가 들려오는 날에…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그래도 응대가 없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요.” “딴 생각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 해!” “하지만….” 홍주리가 우물거리며 입을 연다.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그게….” 그녀는 뭔가 말하고 싶어 하고 있다. 음성이 착 가라앉아 있다. 하나, 김상도는 더 이상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아주 강력하게 또 다른 족쇄를 지른다.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아! 아기는 낳는 거야! 이유 없어!” 소리 높여 말한 다음, 조금은 부드럽게, “내 말 알아들었어?” 다시 한 번 타이른다. 의외로 아주 고분고분하다. 홍주리의 바로 그것이 마음에 드는 대목이다. 역시 내가 잘 찍었어. 김상도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휴우-.”

2006-09-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80)

지독한 사랑 ⑧천부당 만부당이다. 그녀는 손바닥까지 휘저어 마지않는다.“아녜요!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그리고 은경이 엄마 그 일로 만난 적도 없다구요.”그녀가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다음, 편안하게 입을 연다.“정기 검진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얘기를 들었을 뿐이에요.”병원이란 다름 아닌 동서울 영림병원이다. 이름하여 영림그룹 계열 종합병원이다. 다행스럽게 홍주리가 그쪽을 이용한 모양이다. 하긴 ‘로열 패밀리’는 무조건 우대하는 것이 병원의 기본 방침이다. 아니, 복잡하게 영림그룹 계열 종합 병원 의료재단을 왜 세웠던가. 김상도 자신은 물론이고 직계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게 하고, 더불어 보다 안락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만든 것이 영림종합병원 아니던가. 김상도가 묻는다.“병원 누구한테 그 얘기 들었어?”“산부인과에 김 간호사라고 있어요. 그 아이가….”김상도가 아무 소리 없이 휭, 방을 나간다. 서재 쪽이다. 수화기를 거칠게 집어든다.“누구 없어?”대기중이던 성북동 파견 비서다.“이것 봐. 병원에 전화 걸어서 산부인과 책임자 바꿔. 지금 바로 급해!”얼마나 설쳐 댔는지 벼락같이 찌르릉 수화기가 울린다.“회장님, 저 산부인과 과장입니다.”“당신 이름이 뭐야?”“강요한입니다.”“강요한? 그래, 우리 병원에 온 지 얼마 됐어?”“일 년 조금 넘었습니다.”“일 년 조금 넘었다구?”“네.”“그럼 대강 우리 회사 분위기 알겠구만.”“… 네, 회장님.”“내가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해!”“알겠습니다.”“당신, 최근에 진찰한 환자 중에 홍주리라고 기억하나?”“기억하구 말굽쇼.”“좋아, 그럼 당장 이리루 와!”“네!”“우리 집 잘 모르면 병원장한테 물어봐!”“알겠습니다.”“몸만 덜렁 오지 말고 환자 진료카드 싹 쓸어 가지구 와! 아냐, 앰뷸런스 타구 와. 아주 날아오란 말이야. 알겠어!”정말, 앰뷸런스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는지 득달같이 대령한다.강요한이라는 의사가 의자에 미처 앉을 겨를도 없다.“임신이 확실해!”“확실합니다.”“날짜는 어떻게 되는 거야?”“날짜라뇨. 회장님?”“정확한 날짜가 어떻게 되냔 말이야!”“아, 네… 3개월입니다.”“3개월인지 누가 몰라! 출산날이 언제냐 그말이야!”그동안 갈팡질팡하던 산부인과 과장이 그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이 진료카드를 꺼내 든다.“출산 예정일은… 내년 2월 중순쯤입니다.”“2월 중순?”“네, 회장님.”“정확한 날짜는 안 나오는 거야?”“체질에 따라 삼사 일 차이가 있습니다만, 이 환자의 경우는 대략 2월16일쯤이면 출산할 것 같습니다.”

2006-09-1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9)

지독한 사랑 ⑦어쩌면 말이 그럴싸해서 주식 양도지, 실제로는 휴지 쪽지와 진배없는 형식적인 재산 증서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재산 증서라기보다 혼인 방지를 위한 일종의 족쇄라고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어쨌거나 그 다음 다음 날이던가. 남강정유 외동딸 홍주리가 남편의 사망과 함께 일약 영림건설 대주주로 떠올랐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써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한데, 또 일이 생긴다. 영림건설 대주주 취임으로 한참 떠들썩했던 장안의 화제가 거의 가라앉을 무렵, 그러니까 김상수의 장례를 치르고 두 달인가, 석 달인가 지난 어느 날이다.성북동 사모님인 박옥주가 김상도가 귀가하기 바쁘게 “당신, 비밀 지킬 수 있겠어요?”라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묻는다.“비밀이라니?”“나, 혼자만 알기로 한 일이라서….”“혼자 알기로 한 비밀이라면 끝까지 지켜야지, 왜 발설하려구 그래?”“당신이 너무 애지중지하는 제수씨 일이라서요”“제수씨?”“은경이 엄마 말이에요.”“은경이 엄마한테 무슨 일 있어?”갑자기 목소리가 달라진다.“무슨 일이냐구!”벌써 닦달이다.“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관두겠어요. 혼자 알기로 한 비밀, 잘 간직하라믄서요?”박옥주가 돌아앉는 시늉을 한다.“무슨 얘긴지 어서 입 열지 못해!”숫제 불호령이다.“이 여편네가 누굴 놀리는 거야!”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엉!”눈을 호랑이처럼 부릅뜨고 있다. 금세 날벼락이 떨어질 기세다.“…알았어요.”“은경이 엄마가 왜!”“임신했대요.”“임신?”“네.”“물론, 우리 상수 아이겠지?”“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요?”박옥주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눈을 흘긴 다음, 말을 잇는다.“도련님이 사고난, 바로 그 즈음에 생긴 아이라구요.”김상도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그녀가 말한다.“도련님이…그냥 가지 않고…또 흔적을 남기고…그래서 죽은 사람만 불쌍한 거 아녜요?”그녀가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찍는다.“어쨌든, 그건 잘된 일이야!”김상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다. 마치 자기 아이라도 되는 듯이 표정이 시나브로 풀리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안면 신경이 빳빳해지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연다.“한데, 그게 왜 비밀이야?”“장본인이…아이를 떼고 싶어 하는 모양이더라구요.”“뭐라구!”“그야,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녜요? 재혼이라도 할 요량이라면…더구나 유복자인데다….”“그걸 말이라고 하구 있어! 소갈머리 없는 여편네 같으니!”천둥 벼락 소리가 이토록 요란스러울 수 있을까. 흡사 귀청이 터지는 것 같다.그 엄청난 포효 앞에 박옥주의 기세는 영락없는 고양이 앞의 생쥐 꼴이다.“뭐? 아이를 떼고 싶다구? 그래, 당신이 떼라고 권한 거지?”“권하긴요?”

2006-09-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8)

지독한 사랑 ⑥ 그런데 갑자기 홍영호가 정색한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앉으며 입을 연다. “김 회장이 이렇게 나오시는데 나라고 가만 있을 수가 없군요.” “가만 있을 수 없다니요?” “나도 딸아이한테 뭔가를 주고 싶습니다. 아, 요즘은 민법도 바뀌었잖습니까. 꼭 아들한테만 재산을 물려 주던 시대는 지나갔으니까.” 홍영호가 말을 잇는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우리 딸이 아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 주리 녀석 정말 능력 있는 아입니다.…여자로 태어나서 그렇지 만약 남자였다면 벌써….” “알고 있습니다. 암, 알고 있고말고요. 그래서 제가 우리 영림건설 주식을 양도한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맞아요. 김 회장이 그렇게 엄청난 액수의 주식을 양도하는 마당에 나라고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우리 남강정유 주식 중의 일부를 딸아이한테 물려줄까 합니다.” “꼭 내가 한 일 때문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으실 텐데요.” “천만의 말씀요. 안 그래도 우리 주식 중 30퍼센트를 기술 제휴 몫으로 미국의 오리온 오일이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몫을 찾아 나가겠다는 겁니다. 기왕 주식을 내놔야 할 형편이어서, 그 10분의 1을 딸애를 주고 나머지만….” “오리온 오일이 왜 손 털고 나간다는 겁니까?” “글쎄요. 자기들끼리 무슨 사정이 있겠지요. 하지만 내 보기엔 이번에 경영진이 바뀌면서 방만했던 조직을 축소 정예화한다는 발표를 하더니만 결국 그 여파가 아닌가 싶군요.” “그동안 오리온 오일이 30퍼센트나 갖고 있었던가요?” “정유 설비 기술 용역비에다, 시설 장비 구입조로….” “그래서 나머지 20퍼센트를 시장에 내놓으신다구요?” “당연히 내놔야죠. 몫을 찾아간다는데.” “그렇다면 제가 제의를 하나 하고 싶은데요.” “무슨 제의를?” “기왕 내놔야 할 거 남에게 주시는 것보다 모두 따님 몫으로 남기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하지만 그쪽에서 액면가대로 현찰을 요구하는 마당에….” “그야 양해만 해 주신다면 제가 변통을 해 드리겠습니다. 막말로 우리 영림건설 10퍼센트 중에서 3퍼센트만 할애해도….” “옳거니!” 홍영호가 무릎을 친다. 김상도로서는 얼얼한 취기와 아우를 잃고 난 낭패감 그리고 홍주리에 대한 미묘한 책임감 등이 발단이 되어 아주 순수한 기분으로 꺼낸 의견 제시였고, 홍영호 회장 역시 금상첨화란 표현을 써서 그것을 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의기 투합은 흡사 하늘을 찌를 듯했다. 시신도 없이 아우의 장례를 치른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하나 그 같은 어깨동무 의기 투합에도 불구하고 한껏 생색을 냈던 예의 영림건설 10퍼센트 주식 양도는 말 그대로 완벽하지 못했다. 영림그룹 고문 변호사단에 의해 작성된 양도증서 내용을 보면 법적 수혜자는 분명 홍주리이지만, 고인이 된 김상수의 네 살짜리 딸 은경이가 법적 성인이 될 때까지 큰아버지 김상도의 동의 없이 주식을 함부로 매매하거나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수혜자가 법적으로 재혼하는 경우 또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2006-09-1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7)

지독한 사랑 ⑤스코틀랜드 스카이섬에서 런던으로 향하던 경비행기였던가. 그것도 김상도의 긴급 호출령 때문에 잠자다 일어나 부랴부랴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물론 훈련삼아 동생을 호출한 것은 아니다. 제다 담수 플랜트 공사 입찰을 앞두고 영국계 설계 회사와 조인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갑자기 벌어진 터다. 그러니까 런던 지사장 긴급 호출은 너무도 당연한 조치였던 셈이다.한데 상수는 런던 지사 사무실에도, 아파트에도 없었다.“지사장 어디 갔어!”죄 없는 당직 직원을 닦달한다.“휴가 떠나셨습니다.”“휴가를 떠나? 어디로 떠났어?”“스코틀랜드, 스카이 섬으로 가셨습니다.”“스코틀랜드, 스카이 섬? 먼 곳이야?”“영국 북쪽 맨 끝입니다.”“이런 제기랄! 하필 이런 때 왜 북쪽 끄트머리에 가 있느냔 말이야!”고래고래 호령이다.“연락이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지사장님 가족이 묵고 있는 호텔 전화번호는 알고 있습니다.”“이런 병신 같은 놈! 진작 번호부터 알려 줄 일이지.…몇 번이야?곧바로 전화번호를 돌렸는데, 요행히 상수와 직통으로 연결이 된다. 그때 잠자다 일어난 목소리로 엉거주춤만 하지 않았어도 김상도가 그처럼 갑자기 진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야, 바로 옷 주워 입고 이쪽으로 날아 와!”“지금 말입니까?”“그래, 지금 당장!”“하지만…일기가 최악의 상태라 비행기가 결항인데요.”이른바 회사 최고 경영자가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날아와 밤이 낮인지 낮이 밤인지 분골쇄신하는 판에, 제까짓 런던 지사장 따위가 뭐 비행기 타령이나 하고 있어? 그래서 더 분통을 터뜨리지 않았을까.“이것 봐, 여긴 얼마나 급하게 돌아가는 줄 알아? 자그마치 4억5천만달러 짜리가 우리 손 안에 들어오느냐 날아가느냐가 결판나게 돼 있단 말이야!”김상도가 고함을 지른다.“이것 봐!”“네, 회장님.”“전세기라도 끌어 내서 타고 날아 와! 낼 아침까지 그 서류가 없으면 우린 낙동강 오리알 신세니까. 알겠어?”김상수는 말이 없다. 너무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알았냐고 묻잖아?”“알겠습니다.”한데 그 전세 경비행기가 스코틀랜드도 넘지 못하고 기어코 곤두박질치고 만 것이다. 동생 김상수 이사는 그렇게 산화해 버린 것이다. 막말로 시체도 찾지 못한 것이다.아우의 죽음이 자신의 긴급 호출중에 일어났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을까. 김상도는 미망인이 된 홍주리에게 영림건설 주식 10퍼센트를 전격 양도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그렇지 않아도 아우에게 건설을 맡길 요량이었으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10퍼센트면 적은 돈이 아닐 텐데요?”김상도의 사돈인 홍영호의 위로 문안차 의례적으로 성북동을 방문한 자리에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연다.“액면가로 치면 100억이 조금 넘지요. 하지만 어디 돈이 문젭니까?”“정말,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웬걸요. 아까운 놈을 잃어서 서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탄만 한다고 인재가 되살아나리란 법도 없고…솔직히 이젠 죽은 아우보다 더 신경 쓰이는 쪽은 살아 있는 어린 미망인하고 조카딸 은경입니다.”

2006-09-0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6)

지독한 사랑 ④그 무렵 어느 술좌석이었던가.“따님, 어디 혼처 자리가 났습니까?”김상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홍영호에게 묻는다.“아직 짝을 못 찾고 있습니다. 어디 좋은 자리가 있으면 중신 한 번 서시지요. 한턱 단단히 쓰겠습니다.”“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뭐, 못 하실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서 하시지요.”“실은 제 아우가 하나 있습니다만….”“아, 그러십니까? 올해 몇인데요?”“정미년 양띠니까, 꼭 스물일곱입니다. 기어코 박사 학위까지 하고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그만 노총각이 돼 버린 겁니다.”“노총각이긴요? 남자 나이 스물일곱이면 요새 한참 적령기 아닙니까? 한데, 외국에서 공부를 한 모양이지요?”“영국에서 학위를 땄답니다. 아시다시피 제 선친이 일찍 작고하셔서 아우들이 저를 아버지 보듯 하고 자랐지요. 형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판국에 보호자 역할까지 하려니까…. 이번 막내아우가 그래서 더 애지중지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 끝이니까요.”“여부 있겠습니까? 김 회장님 댁 가풍에 대해서는 저도 진작 풍문으로 듣고 있었습니다만…이렇게 감동적인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귀감으로 삼겠습니다.”“원 별 말씀을….”“그래, 아우 분은 뭘 전공했습니까?”“아, 우리 상수 녀석 말씀이군요. 그래도 싹수는 있었는지 영국에서는 좀체 따기 힘들다는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아 왔습니다. 녀석은 대학 교수를 원했지만 제가 반대했습니다. 아, 우리끼리니까 얘기지만 대학 교수들이 뭐 별겁니까? 이론만 잔뜩 앞세워 가지고, 꼭 잘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홍 회장님?”“글쎄, 듣고 보니….”“그래서 아우놈도 우리 영림건설 현장에서 뛰게 했습니다. 기계공학 박사니까 건설하고는 안성맞춤인데다 진취적으로 잘 해 나가면, 아예 걔 앞으로 떼어 줄 요량으로 있습니다.”김상도 회장의 적극적인 대시 덕분일까, 아니면 영림건설 상속 운운이 주효한 탓일까, 어쨌든 그 혼사만큼 일취월장으로 진전된 경우도 없다.막내동생 상수에게 첫 대면 시키기 하루 전 김상도는 홍주리를 불러 남산 데이트를 했다. 아마도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케이블카 안이 아니었나 싶다.“신랑될 사람을 보이지도 않고 결혼 날짜를 먼저 잡아서 미안해. 하필 그 녀석이 해외 출장중이라서…. 어쨌거나 어른들 욕 많이 했지?”“웬걸요.”“정말 안 했어?”그녀가 김상도 회장의 팔에 손을 끼어 넣으며 아주 애교있게 대답한다.“대신, 시아주버님은 여러 번 뵈었잖아요. 그리고 동생분이 형님을 그대로 빼박았다는데요.”“그래, 형제 중에 젤 닮은 꼴이야. 맏이와 막낸데도. 참, 그러고 보니 나도 마음에 들었다는 얘길세.”“그러믄요. 마음에 든 정도가 아녜요.”“기분 좋구먼.”“앞으로 잘 봐 주세요.…시아주버님.”다행히 상수도 상대를 거부하지 않았으므로 예정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김상도의 생각으로는 집 가까운 데 데리고 살며 아침 저녁으로 귀여움 떠는 그녀의 재롱을 한껏 즐기고 싶었지만, 본인들이 원하기도 했고, 회사 형편으로도 해외 지사가 요긴할 때여서 김상수 이사를 영림건설 런던 지사장으로 과감히 파견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때 해외 지사로 내보내지만 않았어도 상수가 그같이 참혹한 최후를 맞았을 리 만무하다.

2006-09-0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5)

지독한 사랑 ③원유 도입선, 정유 시설, 판매 조직 등등 업자의 능력 역시 까다롭게 체크하지 않을 수 없고, 설사 그 모든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수급량이 원활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통과될 수 없고, 또 요행히 그것까지 다 해결되었다 해도, 기존 업자들의 모임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 그 순간으로 또 한 번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그러니까 정유업계 신규 진출을 두고 낙타가 바늘귀 지나기만큼 어렵다는 얘기도 그런 배경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해야 옳은 터다. 다시 말해 정유업 인허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기실 홍영호도 해방 전부터 그 업종에 투신, 30년 가까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력투구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남강정유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 물론 처음에야 드럼통 싣고 다니며 전기 없는 두메산골 가가호호까지 방문, 이름 그대로 병 석유 파는 일부터 시작한 터지만, 그 소매업이 발판이 되어 흡사 굼벵이 재주 넘듯 한 계단 두 계단 시나브로 발전하여 오늘날 정유업계의 숨은 실력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또 있다. 대체로 한 업종에서 성공을 거두면 문어 다리 늘어뜨리듯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타업종에 투자하기 일쑤인데도 홍영호 회장은 옆 눈길 한 번 주는 법 없이 오로지 정유업에만 심혈을 다 바쳐 온 터다.어디 그뿐인가. 해방과 6·25와 그리고 군사 정권을 거쳐 오면서 얼마나 많은 한량들이 정치권 거물이며, 군부 실력자며, 직업 브로커를 앞세워 아무 연고 없이 사업체 인허가를 독식하곤 했던가.특히 석유 에너지 사업이 더 그러하다. 이른바 정경 유착이라고 하던가. 군사 정권 최고 권력자의 개인 금고에 막대한 금액을 일시불로 헌납하고, 석유의 석 자도 모르던 사람이 정부 인허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에너지 개발 육성 자금까지 독식, 하루 아침에 정유업계의 기린아로 등장한 얌체성 재계 인사가 몇 명이던가.하나 홍영호의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정치권 가까이 접근해 본 적 없고, 스스로 정치 자금을 들고 최고 권력자 집무실을 제 발로 걸어들어간 역사가 없다. 좋은 의미로 해석해서 심지가 대쪽처럼 곧은 사람이고, 그 반대 개념으로 말하자면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숙맥 기업가인 것이다.어찌 보면 영림그룹의 김상도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홍영호인지도 모른다. 계산상 홍영호가 김상도보다 두서너 배 앞선 업계의 선배인데도 홍영호는 오로지 남강정유 하나뿐이지만, 김상도의 경우는 전자, 자동차, 중공업, 건설, 식품 등등 무려 40개 가까운 계열사를 거느린 대그룹 총수로 군림한 터다.어쨌거나 남강정유는 한 번도 권력층의 비호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순수 민간 기업의 선두주자이며 유일하게 석유의 맥을 이어 온, 이른바 가장 오래된 전통의 정유 회사인 것이다. 김상도도 그런 빛나는 전통을 누구보다 앞서 인정하는 터고, 그래서 가능하면 남강정유 제품을 선별 애용하는 편이다.아니, 그런 면에서 헤아리건대 오히려 홍영호가 김상도 쪽에 오랫동안 베풀어 왔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왜냐하면 한때 석유 제품이 달려 현찰을 주고도 살 수 없을 때 김상도의 영림그룹에 우선 배정했던 사람도 홍영호고 그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초창기 사업 자금이 달렸을 때 선뜻 영림그룹 계좌로 거액을 주선, 입금시켰던 사람 역시 홍영호인 것이다.내력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영림그룹에 있어서 남강정유는 뗄려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은사를 입히고 입은 우정의 관계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비교적 잦은 개인적인 교유를 갖는지도 모른다.

2006-09-0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4)

지독한 사랑 ②“당신이 정말 그랬구려.”김상도는 어물거리지 않는다. 특히 그의 부인 박옥주 앞에서는 더더구나 그러하다.“그건 그래. 상대가 영 맘에 안 들어서 내가 싫다고 했지.”“당신이 남자를 데리고 살 거예요?”“무슨 소릴 그렇게 하는 거야?”“직업이 대학 교수면 됐지 그 이상 뭘 바래요?”“대학 교수라도 교수 나름이지, 은경이 엄마 쫓아다니는 그 작자는 백 퍼센트 날라리더라구. 아직 정식 교수도 아니고, 게다가 전공과목이라는 것도 시원찮아. 미국까지 가서 공부해 왔다는데 왜 하필 연극 무대 미술이냔 말이야. 내 보기엔 제 앞가림도 못 하게 생긴 놈이었어. 그런 날라리한테 우리 은경이하고, 일규를 맡겨? 더구나 우리 일규가 보통놈이야? 잘만 가꾸면 큰 인물될 놈이란 말이야. 난 그놈을 진짜 큰 물건으로 만들고 싶어. 지 애비가 못다 꾼 꿈을 우리 일규 놈이 대신 이루게시리…. 그런 아이를 그래, 날라리 같은 놈에게 맡겨?”갑자기 일규 핑계다. 아주 그럴 듯한 논리다. 김상도가 목에 힘을 주며 계속한다.“당신 의붓애비 잘못 만나 딴 길로 샌 아이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어림도 없지! 암 어림 없구말구.”입술을 나발통처럼 내밀고 있으면서도 쉬 말문을 열지 못하는 그녀에게 김상도는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더 큰 소리로 못을 박는다.“은경이 엄마 신랑감은 내가 직접 찾아 줄 거야. 진취적이고, 건강하고, 장래성 든든하고… 그리고 우리 일규를 사자처럼 튼튼하게 키울 수 있는 담대한 남자는 얼마든지 많아.”실제로 홍주리를 그의 죽은 동생에게 결혼시킨 장본인도 김상도다. 남강정유 홍영호 회장이 초대한 파티였던가. 재계 원로급들이 거진 다 참석한 자리였는데 김상도가 홍주리를 처음 만난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아마도 필동 홍영호 자택이었을 터다.이제 막 깎아 냈는지 잔디밭이 가지런하다. 연둣빛이다. 잔디 속살 냄새가 뭉클 쏜다. 그 풀 냄새 진동하는 잔디밭 정원을 홍영호 회장과 한 바퀴 돌아보았던가. 저쪽에서, 흡사 정숙한 공작새인 양 걷는 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김상도는 그만 발길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두색 잔디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흰 드레스 때문이었을까.“저 아가씬 누굽니까?”김상도가 얼떨결에 옆에 동행하는 집주인에게 물었다.“누구 말입니까?”“저기, 머리 묶은 처녀….”“아, 제 여식이올시다.”“아, 그래요? 홍 회장님 따님이세요?”“혼자 뿐이라서 너무 오냐오냐 길렀더니 통 버릇이 없습니다.”하나, 그녀는 버릇이 없는 아가씨가 아니다. 그렇게 정중하고 교양이 넘칠 수가 없다. 상냥하고 쾌활하다. 더구나 그녀가 졸업반으로 있는 대학도 소위 말하는 일류급인데다 학교 개교 기념일에 뽑는 ‘올해의 미인’ 월계관까지 차지한, 그야말로 재주와 용모를 고루고루 갖춘 아가씨였다.어디 그뿐이던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남강정유 하면 그 무렵 가장 건실했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눈독 들여 마지않던 우량기업 아니던가. 언필칭 석유 에너지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나 진배없는, 그래서 방귀 깨나 뀌는 사람이면 너도나도 손대고 싶은 가장 매력적인 업종 아니던가.그러나 석유 에너지는 아무나 손대고 싶다고 해서 척척 잡혀지는 업종이 아니다. 말 그대로 정부의 인허가 없이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입장도 만만찮다. 요식업 허가증 발부하듯 적당히 눈치껏 꽝꽝 도장 찍어서 되는 업종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그도 그럴 것이 국가 기간 산업 중에서도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09-05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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