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 (173)

지독한 사랑① 영림그룹 김상도 회장은 언제나처럼 깊은 사색에 빠져 있다. 기실 말이 사색이지 일종의 공상이라고 해야 옳다.지금 김상도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회사의 제반 문제점, 일테면 노조의 춘투라든가, 수출 목표 차질이라든가, 하다못해 지난달에 수술받은 전립선 재발 우려도, 어젯밤을 함께 보내며 지겹도록 경험한 모 탤런트의 교태도 아니다.참으로 엉뚱한 대상이다. 다름 아닌 홍주리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김상도 회장의 제수다. 올해 나이 서른셋인데도 외모는 이십대 초반 같다. 잘 가꾼 몸매도 몸매지만, 타고난 피부가 우윳빛인양 투명하고 맑아서, 언제 어디서 봐도 신선한 느낌을 주는 여자다.김상도는 성북동 본가에서 가족 모임을 가질 때마다 늘 말한다.“여자는 모름지기 우리 은경이 엄마 같아야지. 여보, 당신 우리 은경이 엄마 화장 지운 얼굴 봤어? 정말 피부가 어린아이 같잖아? 괜히 화장품 덕지덕지 발라서 얼굴만 다 썩게 만들다니….”은경이는 김상도의 조카딸 이름이다. 홍주리가 낳은 두 아이 중에 맏이가 은경이다. 둘째며 막내인 일규는 죽은 아우 김상수보다 제 엄마 피색을 닮아 계집애처럼 가냘프고 깔끔한데 비해 은경이는 다르다. 여자답지 않게 우락부락하고 뻣뻣하다. 영락없는 아빠 쪽이다.“당신 은경이 엄마만 일방적으로 칭찬하지 마세요. 다른 동서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성북동 사모님인 박옥주 여사가 은연중에 참견하고 나선다.“뭘?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인데!”“그래도 혼자된 제수 함부로 칭찬하는 법 아니래요.”“누가 그래?”“누가 그러긴요. 우리 조상님들이 남긴 지혜의 말씀이죠.”“원, 별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 다 듣겠구먼.”“아니, 조상님들이 남긴 지혜의 말씀을 귀신 씨나락….”“당신 말하는 품새가 그렇다는 거요.”“내 품새가 어때서요?”“볼썽사나워.”“볼썽사납다뇨?”“마치 당신 하는 말투가 은경이 엄말 두고 투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는 소리야.”“어머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뿐이야.”“아무렴, 혹시 자신도 모르게 당신 마음 드러내 보인 거 아니예요?”“무슨 쓸데없는 소릴!”“하긴, 그러니까 시아주버님이 혼삿길을 막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그건 또 무슨 소리야?”“시아주버님 때문에 시집 못 가고 있다는 말 못 들었어요?”“누가 그딴 소릴 해?”“저라고 뭐 귀가 없는 줄 아세요? 이번에도 당신이 보이콧 했다던데요?”“누가 그러더냐고 묻잖아?”“본인한테 직접 들었어요.”“은경이 엄마?”“네, 은경이 엄마요.”“아무렴, 홍주리가 직접 그런 얘길 해?”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박옥주 여사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다그친다.

2006-09-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2)

조용한 귀국 (30)서울로 귀국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 주고 죽은 작은 아버지와, 김분이의 능청스런 허위 증언이 뒷받침되어 박준호는 귀국이 아니라 17만달러를 손에 쥐고 미국으로 잠입, 뭔가 일을 벌리고 있다는 확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혼돈을 가중시키는 교란 작전이라고나 할까.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기어코 이승과 저승을 달리 한 것은 그해 봄, 만발한 벚꽃이 함박눈처럼 풀풀 날리던 토요일 오후다.노근리 사건은 미군이 한국 양민을 죄 없이 살해한 희대의 노략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할아버지. 노근리에서 비명에 간 할머니와 어린 아들 딸과의 만남을 위해 할아버지는 그처럼 홀연히 이승을 떠났다. 아니, 노근리의 억울함을 풀지 않고서는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던 할아버지가 기어코 맥을 놓고만 것이었다.박준호는 통곡한다. 괜히 눈물이 흐르고 쏟아진다. 벚꽃 잎의 낙화인 양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두 어른의 억울한 죽음의 슬픔이, 아니 그때까지도 스카이 홍의 그림자도 찾지 못한 답답함이, 어딘가 막혀 있다가 그제야 터져 나온 것처럼 박준호는 엉엉 통곡해 마지 않는다.단짝 친구인 한태훈도, 김분이도, 그녀 남편인 유범성도 같이 흐느껴 울어준다. 그뿐 아니다.런던에서 접선하고, 처음 만나는 영림그룹 서승돈이, 할아버지 부고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 너무도 애통하다는 듯이 눈시울을 오래오래 붉게 물들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승돈이 박준호의 손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었다.“그래, 여기서 만나는구만. 할아버지 위독하다는 소리 듣고 나왔겠지. 그래, 잘 나왔어. 아무렴 준호도 없는 장례식은 생각도 할 수 없지. 혹시 어머니도 같이 나오셨나?”박준호가 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어머닌 모르세요.”“뭘, 몰라?”“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말입니다.”“그렇다면….”“괜찮아요. 어머닌 어차피 시집을 가버리셨으니까요.”“그렇긴 하지만….”“그리고, 전 아예 귀국했습니다.”“아니,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했지 않았나?”“한국에서 다니고 있습니다.”“한국에서 다닌다구?”서승돈이 의외라는 듯 더 목소리를 높인다. 박준호는 더 차분하게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돌아가신 작은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말리셨지만, 제 뜻은 그 반대라서…. 결국 제가 알아서 결정했습니다.”“하긴 이제 두 어른 다 가버리셨구만.”서승돈이 할아버지 영정을 힐끔 본 다음, 마주 잡는 손아귀에 더 큰 힘을 부여한다. 손이 깨어지는 것 같다. 그가 말한다.“그래, 어쩌면 준호의 결정이 옳은지도 몰라. 여기서도 할 일이 많으니까. 암, 할 일이 많구말구. 우리나라도 이제부터 시작이거든. 새롭게 민주화 된 대한민국 말이야. 그래, 굳이 양아버지 영향력 밑에서 눈치나 슬슬 보며 그 아류가 될 필요는 없는 거야!”

2006-09-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1)

조용한 귀국 (29)그리고 무턱대고 박준호와 한태훈 옆에 한 명씩 끼어 앉는다. 특히 박준호 옆에 끼어든 40대 마담이 더 많이 취했는지,“야, 너. 배우같이 잘 생겼다만… 얼굴만 매끈하고, 아래는 바람 빠진 고무풍선아냐?”라며혀 꼬부라진 소리로 질탕하게 내뱉고 나서, 불쑥 박준호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고, 그것을 주물럭거리는 것이었다.“이러지 마쇼.”박준호가 이만큼 물러나는 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손아귀에 가득 잡힌 그것을 휙 소리 나게 비틀어버리는 것이었다.“아!”하는 사이, 몸집 좋은 사내가 술집을 불쑥 들어서는가 싶더니,“야, 너희들 뭐하는 거야?”꽥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얼핏 느낌에 40대 마담의 기둥서방쯤 되는 사내 같다. 그래서 그런지 다짜고짜 박준호의 멱살부터 치켜든다. 그 때까지만 해도 마담의 손은 박준호 사타구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이런 씹헐! 아직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구!”술 냄새가 확 끼얹는다. 금세 주먹이 날아들 기세다.“여보세요, 똑똑히 보세요. 나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잡니다.”박준호가 또박또박 설명을 했는데도 놈은 막무가내다. 드디어 그 억센 주먹이 날아든다.박준호가 주먹을 피하면서 공중 뒷발차기로 몸집 좋은 사내를 강타한다.사내가 악 소리를 냈고, 피가 벽으로 휙 소리 나게 뿌려지는 것이었다. 박준호와 한태훈이 `다리야, 날 살려라' 술값 계산도 없이 술집을 박차고 나와 버린다. 순시 중인 경찰들이 바쁘게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가 골목 끝에서 끝으로 메아리친다.박준호는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가능하면 외출을 삼간다. 박준호는 서울에 은신처를 마련한다. 한적한 변두리 작은 원룸이다. 김분이에게도 알리지 않은 거처다.김분이 뿐 아니다. 한태훈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박준호의 원룸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는 가능한 조용한 시간을 향유하기를 원한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한태훈처럼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책에 파묻혀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그렇다고 박준호도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특정 목표 없이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그리고 어느날 박준호는 편지를 쓴다.사랑하는 어머니저 준호예요. 깜짝 놀랐죠? 17만달러이나 갖고 잠적했으니 얼마나 황당하셨겠어요? 하지만 돈은 꼭 갚을게요. 왜 그런 엉뚱한 짓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당장 할 말이 없지만….언젠가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어요.제가 어머니 앞에 스스로 나타날 때까지 절 찾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네요. 사랑하는 어머니, 부디 건강하세요.-아이오와 메이슨 시티에서 박준호 씀박준호가 아이오와 메이슨 시티에서 라고 편지 끝에 첨삭한 것은 태훈이의 친구가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다. 때마침 귀국했다가 미국 아이오와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황급히 몇자 적어 밀봉한 다음 편지를 부탁한 것이었다.그러니까 박준호의 편지는 미국 아이오와 메디슨 시티 우체국 소인이 찍혀 영국 헤이스팅스의 어머니에게 배달될 터다.

2006-08-3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70)

조용한 귀국 (28)다시 말해 스카이 홍을 만나기 전까지 반지는 박준호의 음낭에 끼워져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알면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이 순간 이후는 음낭에서 빠져나와 원래 있던 패물함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보디발 장군 부인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감옥행을 선택한 요셉처럼 박준호 역시 정신만이 아니라 실제 몸으로도 단단히 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술을 빙자해서 밤 열한시에 전화를 건 김분이의 의도가 꼭 그 일이 아닐 수도 있고, 박준호 또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기절한다는 격으로 톰 라더 부인이나 시루코에게 당한 모종의 썸싱 때문에 김분이의 순수한 호의를 터무니없이 의뭉하게, 그리고 음탕하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하나 설사 김분이의 그것이 착각이었다 할지라도 그 착각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입장이 된다 하더라도, 아니 꼭 김분이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많은 여자들로부터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같은 단안을 단호하게 결행해야 한다고 단단히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준호는 그 일을 실천에 옮긴다. 그것이 달무리의 번짐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그날 밤에 이뤄진 일이다. 물론 장소는 지리산 ‘호이’ 농장이다. 애초 할아버지가 건네주었던 패물함에 음낭표피에서 빼어 낸 반지를 소중히 간직한다.어쨌거나 어머니와 대니 라일러가 있는 런던을 그렇게 하듯 박준호는 스카이 홍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여자로부터 과감히 결별을 선언하며, 패물함 뚜껑을 조심스럽게 닫는다. 그리고 중학교 때 단짝 친구 한태훈이 다니는 대학교에 무시험 입학한다. 헤이스팅스 고교 졸업 학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그리고 고시촌에 박혀 사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한태훈을 불러서 술을 마신다. 맥주 캔 두 개를 갖고, 공원 벤치에 앉아 홀짝거렸던 때가 중학교 2학년 무렵이던가. 박준호를 영국으로 떠나보내며 한태훈이 마련한 조촐한 이별 파티다. 그리고 정식 술자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한태훈 고시촌 근처 변두리 단란주점이다. 한태훈은 할아버지가 노근리 학살사건과 연관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국에 있는 어머니와도 친하다. 어머니를 알기 때문에 박준호의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 장군도 잘 안다.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머니의 결혼식에도 직접 참석한 산 증인이다. 그러나 박준호는 한태훈에게 대니 라일러가 아버지 박대령을 제거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뭐랄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밑바닥 자존심이랄까. 실제로 속시원하게 토해놓고 싶은 사연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마시는 술이라 더욱 취기가 거칠다. 한태훈은 그 때까지도 박준호가 옥스포드를 포기한 사실에 대해 여간 불평해마지 않는다. 남들은 모두가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선택된 행운을 왜 제 발로 걷어 차버리느냐고 술기가 불콰해지면 질수록 더 큰 소리로 힐난해 마지않는다. 그런 식으로 늦은 밤에서 이른 새벽까지 겁도 없이 술을 마신다. 얼마나 많이 탐닉했는지 정신을 잃을 정도다.그날 그 일이 생긴 것도 순전히 술 때문이다. 늦은 밤은 으레 술집 종업원들도 만취상태에 이르기 십상이다. 그날 밤, 단란주점 여자 종업원들도 예외가 아니다.“이것 봐, 학생들. 우리 그만 쫑하고 싶은데….”40대 마담인지, 여종업원인지 한참 술맛이 나기 시작하는 박준호를 다그친다.“우리, 한 시간만 더 마실 수 없을까요?”한태훈이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자 그녀가 말한다.“한 시간? 좋아. 대신 호모들처럼 소곤소곤 둘만 마시지 말고 동석하자구. 실은 오늘 우리 재수 더럽거든. 새벽이 다됐는데두 일당도 못 건졌어. 학생들이 화끈하게 화대 좀 쏴 주면 안 되겠어?”“화대라면?”“화대도 몰라? 여자랑 노는 값 말이야.”

2006-08-3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9)

조용한 귀국 (27)“막 일이 끝났거든. 이제 더 이상 준비 할 것 없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다 처리해 버렸어. 그랬더니, 갑자기 우리 농장 주인하고 술 한잔 하고 싶네. 내가 아끼는 포도주가 한 병 있는데, 그게 뭔 줄 알아? 사토오브리옹이야. 불란서 최고 명품. 작년에 선물 받은 거야. 지금 갈게.”아무래도 김분이는 전작이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시간에 그것도 술병 들고, 별채 개념이 아닌 거의 100m나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 올 리 만무하지 않는가.“잠깐!”박준호가 수화기를 놓으려는 김분이를 다잡는다.“왜?”“유 선생은 지금 뭘 하세요?”“유 선생 이라니?”“유범성씨요.”“아, 우리 남편? 심부름 보냈어. 서울에 급한 볼일이 생겨서 아까 올려보냈다구. 그러니까, 그 사람 신경 쓸 거 없어. 아무리 빨리 와두 낼 오전이니까.”박준호는 생각한다. 혹시 김분이도 톰 라더 부인이나 시루코 여사처럼 음흉한 교태를 부린다면…아서. 박준호가 머리를 흔든다. 그리고 정중한 목소리로 피리어드 찍듯 말한다.“그렇다면, 더욱 안 되겠어요.”“안되다니?”“난 지금 술 먹을 기분이 아니거든요.”“술이 싫어?”“네, 싫어요.”“술은 버리고 몸만 갈게.”“그것도 싫어요.”“왜?”“그냥…정말이야. 우리 낼 아침에 만나요.”“이것 봐, 왜 그래?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대?”박준호는 아직도 번짐이 진행 중인 원형의 달을 마치 보디발 장군 부인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처럼,“어쨌든, 와도 문은 열어주지 않을 겁니다.”거절의 뜻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전화를 끊는다. 삐꺽삐꺽 흔들의자를 더 많이 흔들며, 계속 달을 본다. 만약 김분이가 기어코 쳐들어 왔다면 톰 라더 부인처럼 허겁지겁 박준호의 몸을 더듬기 시작할까. 아무렴, 그럴 리가 없어. 머리를 좌우로 흔들다가 아니야, 아까도 그랬어. 톰 라더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김분이도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설사 어린 시절 뻐꾸기 울던 봄날이 떠올라 무심결에 그랬다 해도, 이제 어엿한 청년, 성인 남자의 얼굴이므로 당연히 어색해하고 민망한 표정은 보였어야 옳다.한데 김분이는 너무도 태연하다. 얼굴쯤이야 어때? 식이다. 그러다 보면 아무 부위나 덥석 덥석 만지고 주무르고, 쓰담고, 그러다가 무엇이든 손에 잡히기만 하면 입부터 먼저 들어가는 젖먹이 아이인양 야릇한 행동을 태연히 실천할 게 뻔하다. 헤이스팅스에서 톰 라더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박준호는 벌떡 일어선다. 그래, 조치를 취해야겠어. 그만 빼두어야겠어. 문제는 김분이나 톰 라더 부인 같은 여자들이 아니라 그 은밀한 유혹으로부터 과감히 선을 긋고 결별을 선언하지 못하는 박준호 자신이다. 처음은 아닌 척 하다가 은근슬쩍 빠져드는 교활함. 아니, 일단 한 발짝만 집어넣었다 하면, 언제 그랬느냐 식으로 톰 라더 부인보다 더 허겁지겁 탐닉했던 박준호 자신의 게걸스런 욕망이 더 문제라면 문제다.그리고 그 원흉은 할아버지가 호령 박씨 집헌궁파 장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채워주었던 그 반지다. 늘 그 반지가 기승을 부려 사건을 만들거나 키우지 않았던가. 시루코가 그러하고, 그리고…스카이 홍이 그렇지 않은가. 이제 그 반지의 주인공으로 스카이 홍을 지명했음으로 반지는 반드시 스카이 홍에게만 써야 한다.

2006-08-2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8)

조용한 귀국(26)또 급한 전화가 왔다고 김분이가 불려간다. 그녀가 수화기와 씨름을 하는 동안 박준호는 혼자 농장 주변을 배회한다. 일본 오키나와 극동 사령부에 근무하던 어머니가 2년 만엔가, 1년 반만엔가 귀국하여 지리산 농장을 찾아 왔을 때 몇날 며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과수원 언덕 상수리나무 아래에도 앉아보고,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도리어 도망쳤던 냇가에도 우뚝 서 보고, 아무 곳에나 싸질러 놓은 토종 닭알을 찾기 위해 바구니 들고 누볐던 집 뒤 언덕 경사에도 누워보고, 누가 찾아오는지 창문 밖 황톳길을 내려다보기 위해 늘 앉아 있곤 했던 할아버지의 때 낀 흔들의자에도 앉아보고…하지만 농장은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니다.우선 할아버지의 젊은 날 소일거리였던 과수원의 과목들이 깡그리 그 자취를 감추고 없다. 박준호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만해도 야생 녹차 나무는 나무대로, 사과, 배, 복숭아, 포도 따위 과목은 과목대로 따로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웬걸 과수 밭이 깡그리 사라지고 대신 야생 차 나무들이 빽빽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차나무는 키가 크지 않으므로 꼭 녹색 뭉게 구름이 땅바닥에 몽울몽울 무리져 누워있는 것 같다.물론 할아버지가 일찍이 뜻을 두고 어머니의 예금통장을 털게 하여 일궈낸 야생차 농장이지만,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꽃을 피운 사람은 할아버지 당신이 아니라 엉뚱하게 김분이다. 김분이가 누군가. 할아버지 밑에서 오래오래 머슴을 살았던 김씨의 외동딸 아닌가. 어려서 부터 영특함을 보였던 터라 김씨 대신 할아버지가 학자금을 주어 전문대학까지 졸업 시키긴 했지만, 그런 그녀가 어떻게 녹차의 달인이 되고, 녹차 뿐 아니라 상류사회 사람들까지도 적절히 다룰줄 아는 새로운 사교계의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단 말인가.이른바 농장의 변화는, 이제 할아버지 시대가 가고, 김분이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확연히 구분시켜 주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김분이 시대에 있어서의 박준호는 주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연에 불과하다. 박준호는 그것을 안다. 물론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김분이가 특별히 꾸며 놓은 박준호 전용 2층 별실에 유숙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가 선택한 곳은 할아버지의 손 때와 체온이 그대로 배어 있는 과수원 옛 집이다. 오래된 연유도 있지만, 그보다 할아버지가 서울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는 아무도 유하지 않아 더욱 괴괴한 분위기다. 그래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김분이가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펄쩍 펄쩍 뛰었지만 박준호는 어느 집 개가 짖느냐 식이다.사람들은 병석에 누워 오늘 내일 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좋은 숙소를 마다하고 냄새 쾨쾨한 옛집에서 잠을 자겠다고 저처럼 고집을 부리는구나, 지레 짐작하겠지만, 기실은 그것이 아니다. 번잡함이 없는 호젓한 곳에서 홀로 누군가를 추억하고 싶다면 정상을 벗어난 생각일까. 물론 그 누군가는 스카이 홍이다. 본가는 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감나무, 호두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너도밤나무 등등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에 집이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다.어찌 보면 그레이트 브리튼의 벤네비스 산악지대 깊은 숲속에서 만났던 통나무 집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늦은 밤, 박준호는 불을 끄고 할아버지가 즐겨 애용하곤 하던 흔들의자에 앉는다. 달을 올려다 본다. 원형에 가까운 따뜻한 달무리가 저 있다. 흡사 젖어있는 화선지 위에 물감을 떨어뜨린듯 화사한 번짐이 일어난 달이다. 꼭 스카이 홍의 음성같은 번짐이다. 갑자기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린다. 시계를 본다. 열한시다. 산사의 열한시는 심야에 해당된다.“여보세요? 자는 거야?”김분이다.“네, 자고 있어요.”박준호가 대답한다.“나, 준호랑 술 한잔 하고 싶은데?”“술이라뇨?”

2006-08-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7)

조용한 귀국 (25)정말 아담하고 품위 있는 건물이다. 시골집들이 다 그렇듯 설계 없이 주먹구구로 지은 것이 아니다. 그것도 시골 인근 설계사가 아니라 서울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힌다는 유명한 설계사무소에서 여러 차례 현지답사 끝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그런데도 설계비가 한 푼 들지 않았단다. 원래 김분이의 손에서 빚어지는 야생 녹차를 단골로 대어 먹는 고객인데, 세계적인 ‘호이’ 녹차를 탄생시킨 그 열정에 탄복하여 무료 설계를 맡아 주었다는 것이다.외부도 그렇지만, 내부가 더 아름답다. 호이차를 사러 온 손님들이 하룻밤 휴식을 취할 방들이며 황토, 다시마, 미역, 우뭇가사리, 쑥, 생솔 따위가 가득 들어 찬 찜질방이며, 공동 목욕탕이며, 어찌 보면 호텔의 그것보다 훨씬 세련된 시설들이다. 김분이는 그 중에서도 브이아이피용으로 꾸며진 2층 방으로 박준호를 안내한다. 다른 곳보다 두배 이상 넓고 아늑하다.“여긴 손님 받는 방이 아냐.”김분이가 커튼을 열어 훤히 올려다 보이는 지리산에 시선을 꽂은 채 계속한다.“이 방은 준호 방이야. 준호 혼자 전용으로 쓰는 방.”“내 방이라구요?.”박준호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묻는다.“그래, 준호를 생각하고 특별하게 꾸몄어. 작지만 서재도 따로 넣고, 음악실 칸막이도 넣고…왜냐하면, 준호는 우리 농장의 주인이니까.”“하지만, 난 여기 살지도 않는데요?”“일년에 단 한 번 써도 주인 방은 주인방이니까.”김분이가 갑자기 돌아서서 준호의 볼을 한 손으로 쓰담고 나서,“나는 무엇보다 이 방이 준호한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야.”미처 대꾸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혼자 내뱉고 방을 나선다. 김분이는 실제로 바쁘다. 여기저기서 그녀를 찾고 있다. 물론 내일 있을 행사 때문이다. 숫제 전화통을 잡고 있다. 소위 말하는 내일 참석할 단골들의 문의 전화다. 그것도 예사 손님들이 아니다. 이름만 들어도 ‘아, 이사람’ 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내일 아침이 준공식인데, 벌써 도착되어 펼쳐지곤 하는 화환이 바로 그러하다. 국회의원이며, 기업체 대표며, 유명 탤런트며, 대학교수며, 예술인이며, 일일이 그 이름을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다. 박준호가 도열해 있는 축하화환들을 돌아보다말고, 깜짝 놀라마지 않았는데, 그것은 서승돈이라는 이름 때문이다.아니, 서승돈이 어떻게 여기 있지? 박준호는 부리나케 김분이가 일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아, 그 양반? 영림 그룹 이사야. 영림그룹 알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기업 말이야. 한데, 준호가 어떻게 서승돈 이사를 알아?”“영국에서 만났거든요. 작은 아버지 친구래요. 작은 아버지 부탁 받고 날 찾아 왔었어요.”“아니, 영국 까지?”“회사 출장 나온 김에 들렀다고 했어요.”“아, 그렇구나. 그 양반 꺼떡하면 해외 출장 잘 나가더라…맞아, 박상길 관장님 하고도 절친하게 지낸다고 했어. 아니 돌아가신…박 대령님 하구두….”김분이가 박준호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말끝을 얼버무린다.“아버지 후배라고 하더라구요. 공군사관학교.”박준호가 아버지 때문에 상처 받을 까닭이 없다는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해 버린다.“그래, 여러모로 아주 유능한 사람인가 봐. 공군 조종사 하다가 대기업 중역자리에 까지 올라간걸 보면.”“내일 서승돈씨도 와요?”“글쎄, 초대장은 보냈으니까.”

2006-08-2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6)

조용한 귀국 (24)칼침을 맞기 전 박상길의 한달도 견디기 어려울 거라는 예측을 완전히 비껴간 결과다.뭐 그리 애착이 많길래 명줄을 쉽게 놓지 못하는 것일까. 할아버지가 그토록 노심초사했던 노근리 탓인가. 미군이 쏜 기총소사에 어이없이 학살된 할머니와 고모와 작은 아버지의 억울한 혼령 때문에 저처럼 명줄을 놓지 않고 생과 사를 아슬아슬 넘나들고 있는 것인가. 박준호는 희노애락이 믹스된 듯, 뭐라고 설명 수 없는 표정으로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다 말고 창틀에 기대선다. 대신 온갖 간섭을 다하고 병실로 들어선 김분이가 할아버지 머리 맡에 앉는다. 그녀가 할아버지의 많지 않은 머리칼을 다섯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질하며 또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시선은 할아버지가 아닌 박준호에게 박아놓고 있다.“저요, 준호씨하고 잠깐 나갔다 올게요. 아시죠? 왜 제가 부랴부랴 찾아왔는지…내일이 바로 그 날이에요. 준호씨 대리고 나갈게요. 심심해도 참으세요. 아셨죠?”이번에는 간병인을 보며 김분이가 말을 잇는다.“할아버지, 우리 없을 때 간병인이 잘못하면 고함을 치세요. 그러면 의사가 달려올 거예요. 다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 아니, 그럴 거 없어요. 누구든 할아버지한테 나쁘게 할 사람은 없어요. 다 잘해주기로 단단히 약조했거든요.”그리고 박준호에게 눈짓을 한다. 그만 나가자는 신호다.웬일인지 싫다는 얘기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네 살 무렵 열 살짜리 김분이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에 주눅이 든 탓일까. 아니 이건 주눅이 아니라 숫제 주술(呪術) 수준인지도 모른다. 김분이가 지리산에서부터 몰고 온 은색 지프에 몸을 싣는다. 실내가 유별나게 깔끔하다. 먼지 한 톨 없다. 오디오도 자동차에 원래 부착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한 수준 높은 주문형이다. 그래서인가. 준비된 시디가 여러 장이다.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가 신선한 ‘투 더 문 앤 백’도 있고, 특유의 상큼한 발라드 곡인 인디밴드 크라잉 넛의 ‘퀵 서비스 맨’도 있다.`이런 음악 들으시는지 몰랐네요'라고 입을 열고 싶었지만, 박준호는 꾹 참는다.병원을 빠져나온 차가 곧바로 고속도로 진입로를 들어선다. 그래도 박준호는 행선지가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는가 싶어서다. 한데 가까운 시골 인터체인지로 들어서는 게 아니라, 금세 수원을 지나 대전으로 치닫는 것이었다.“아니, 어딜 가는 거죠?”박준호가 몸을 고쳐 앉는다.“농장.”그녀가 태연하게 대답한다.“농장이라뇨? 지리산 말인가요?”“그럼, 지리산 ‘호이’농장.”“아니, 할아버지 상태가 위태로운데, 거기까지 갔다가 언제 돌아오죠?”“그런 걱정 마. 담당의사하고 의논했으니까.”김분이가 속력을 내어 앞선 차를 추월한 뒤에 다시 계속한다.“그 어른 산소호흡기를 떼내지 않는 한 쉽게 돌아가시지 않는다고 했어.”“그래도 그렇죠…. 난….”박준호의 말을 그녀가 가로챈다.그녀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 음향을 저음으로 줄이고 나서 계속한다.“내일이 우리 호이농장 영빈관 개관식 하는 날이거든. 물론 큰 건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이 일곱 개나 되는 2층 건물이야. 그냥 방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전통 찜질방이랑, 온천시설이랑 그리고 우리 호이녹차와 만나는 다도실(茶道室)도 아주 품위 있게 꾸몄어. 그러다보니 돈이 많이 들었는데, 할아버지 하고 나하고 50대 50으로 투자해서 완공했거든. 누구보다 할아버지가 준공식을 손꼽아 기다리셨어. 준공식에 초대할 손님 명단도 할아버지가 손수 작성하셨는데… 말씀은 못하시지만, 준호가 대신 참석하기를 간곡히 원하고 계실거야. 그래서 내가 올라온 거야.”

2006-08-2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5)

조용한 귀국 (23)“그냥, 옛날처럼 준호라고 불러요.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아시겠어요?”“하긴…그것도 그렇지만…사실은 할아버지가 부탁하셨어요. 나이가 아래라도, 어디까지나 박씨 문중의 장손이니까 절대로 하대하지 말라구.”“할아버지가 그러셨다구요?”“그렇다니까요. 그 어른이 얼마나 준호씨를 하늘처럼 생각하는 줄 알아요?”박준호가 뜸을 두었다가 다시 계속한다.“그건 어디까지나 할아버지 말씀이고, 우리끼리는 어릴 때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자구요.”“나도 그러고 싶은데….”“그럼 됐어요. 이제부터 준호예요. 준호씨가 아니고….”박준호가 다시 강조한다.“아시겠어요?”“알았어.”김분이가 마지못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하고, 씩 웃는다. 물론 그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순전히 박준호의 강요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목소리다. 그러면서도 토를 단다.“준호가 장가들면, 씨자 붙일게.”“좋아요. 분이 누님.”“분이 누님, 듣기 좋다.”“그렇죠?”“옥스퍼드 대학생에다 우리 농장 주인한테서 들으니까 더욱 좋은 걸.”“옥스퍼드는 아직 아니라니까요.”“그건 그렇고,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할아버지 병원비를 혼자 내겠다고 그래!”“저 가난하지 않아요. 미 육군장군 부인이 우리 어머니잖아요.”“그야 어머니가 부자지….”박준호가 괜히 호기를 부려 말한다.“어머니가 부자면 자식도 부잔 거예요. 어머니가 안 주면 전 훔쳐서라도 쓰거든요.”박준호는 깜짝 놀란다. 훔친다는 어휘가 목줄에 딱 걸린 느낌이다. 아무리 허드렛 말속에 진실이 숨어있기 마련이라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 삼은 적 없는 17만 달러에 대해 그것도 스스로 거론해마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마음에 켕긴 탓이었다.어쨌거나 할아버지에게 김분이는 마치 막내딸 같다. 그렇게 스스럼이 없다. 간병인이 오줌 똥 다 받아내고 하루에 두 차례씩 피부를 닦아내는 데도 김분이는 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깨끗한 향수 수건으로 할아버지 얼굴을 마사지 하며,“저 왔어요. 저 보고 싶었죠? 그렇죠? 그럼, 고개라도 끄덕여 주세요.…고집이 차암, 나 아니면 누가 그 성미 받아줘요?”젖은 수건이 아닌 맨손가락으로 할아버지 뺨과 머리를 쓰담으며 혼자 지껄여 마지않는다.“쯧쯧,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손자가 옆에 있는데도 한마디 반갑다는 말도 안 해주시고…그래도 속마음은 안 그러시죠! 속으로는 재밌어 죽겠죠? 옥스퍼드 대학생 손자가 옆에서 밤샘해 주니까, 가슴 뿌듯하시죠? 자꾸 웃음이 나오시죠! 세상에 부러운 거 없으시죠?”꼭 할아버지와 대화를 주고받은 것처럼, 높낮이가 명확한 어조를 구사해마지 않는다. 김분이는 담당의사도, 간병인도, 간호원도 특별 관리한다.올 때마다 작지만 선물 공세를 하여, 가능한 할아버지를 성심껏 모시도록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병세는 날로 위기로 치닫는다. 아예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곡기를 끊은 지도 오래다. 링거와 산소호흡기로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버티고 말 것도 없다.호흡을 유지하기에도 힘들기 때문이다. 김분이 말대로 이제 박준호도 알아보지 못한다.박준호 뿐 아니다. 의사도, 간호원도, 심지어 김분이도 식별하지 못한다. 그래도 끈덕지다.

2006-08-2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4)

조용한 귀국 (22)그래서 톰 라더 부인도, 시루코 여사도, 마거릿도, 어느 누구도 스카이 홍을 대신하지 못한다. 아니, 스카이 홍을 발견한 그 순간으로 박준호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여자들의 이미지를 모두 씻어 버렸다고 해야 옳다.오로지 스카이 홍 뿐이다. 그녀만이 박준호의 존재를 확신시키고 소생시키는 유일한 불씨인 셈이다. 소위 말하는 사랑이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깨끗하고 맑은 사랑.박준호에게 있어서 스카이 홍에 대한 사랑은 병이다.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깊어지는 병, 주면 줄수록 풍요해지고, 나누면 나눌수록 쌓이며, 멀면 멀수록 가까워지고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또렷해지며, 아무리 받아도 항상 비어 있는 상태….그러나 일본 유도 선수처럼 건장한 남편과 딸이 그녀 곁을 지키고 있으므로, 어차피 이뤄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므로 더욱 절실한 사랑.박준호는 이미 혼자 각오하고 있다. 그리고 다짐하고 있다.스카이 홍과의 사랑은 계산하지 말자. 후회도 하지 말자. 되돌려 받으려 하지 말자. 조건을 달지 말자, 다짐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의심하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남기지 말자, 그리고 운명에 맡기자.박준호가 서울을 선택하기로 작정한 이유 중의 하나가 스카이 홍과의 그런 사랑 때문이라면, 설사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작은 소망 때문이라면, …커피라도 마시며, 리시버 하나로 아놀드 쇤베르크의 ‘야곱의 사다리’를 들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면, …과연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박준호는 생각한다. 식물인간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당부했던 말.“호령박씨 집헌궁파 장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라. 이 반지를 착용했으면서도 손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수신제가가 안 된 이유이므로 조상에게 큰 죄를 짓는 결과를 가져오느니라.”그래, 당분간 반지를 빼 두어야겠어. 박준호가 혼자 다짐한다. 톰 라더 부인을, 시루코 여사를 그처럼 열망하게 했던 것도 어쩌면 반지 때문일지도 몰라. 맞아. 스카이 홍을 다시 만나는 그 순간까지는 반지 착용을 자제하는 게 순리야. 할아버지가 말하는 수신제가도 그런 뜻일 테니까. 아니,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아니겠어.”무엇보다 그녀를 감히 사랑함으로써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니까.박준호는 결심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엉뚱하게 지리산 김분이다. 김분이는 3일이 멀다고 할아버지 병실을 찾아온다. 그것도 서울이 아니라 천리가 넘는, 자동차로 다섯시간이 더 걸리는 지리산 농장에서 출발한 병문안이다. 그러니까 밤새 달려서 새벽에 도착하곤 한다. 기실 마포 작은 아버지 집에 모셨던 할아버지를 다시 병원으로 옮긴 장본인도 김분이다.“병원비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호이’녹차가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배당금이 꽤나 나올 것 같은데, 우리 거기서 50퍼센트씩 부담하자구요.”김분이가 활짝활짝 웃으며 말했고,“병원비는 제가 지불합니다.”박준호가 강경하게 주장했던가. 그리고 박준호가 불쑥 입을 연다.“어색한데요.”“뭐가요?”그녀가 반문한다.“어렸을 땐 누님 동생 했었는데….”박준호가 혼자 결정해도 되는 문제라는 듯이 쉽게 결론을 내린다.

2006-08-2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3)

조용한 귀국 (21) “그럼, 준호 씨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되죠?”“한참 동생인데, 씨자는 왜 붙여요?”“그래도, 어엿한 옥스퍼드 대학생이라는데… 어떻게.”“아녜요, 아직은….”“그건 그렇고, 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영국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아, 그거요?”박준호가 뜸을 두었다가, 다시 큰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한다.“미안하지만, 우리 어머니한테는 내가 한국에 오지 않은 걸로 해 주세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요….”“알았어요. 안 그래도 박상길 관장님하고 막 통화했으니까.”그 일도 그렇게 수월히 넘어 간 셈이다. 박상길에 이어서 김분이까지 박준호의 귀국 사실을 감쪽같이 숨겨 준 덕분에 영국에서는 더 이상 박준호를 찾기 위해 이 쪽에 손 쓰는 기색은 없다.그렇긴 하지만 박상길의 신상에 변화가 생긴 비보까지 알리지 못할 이유가 뭐냐고 김분이가 박준호에게 항의하듯 물었을 때,“어머닌 지금 임신 중이세요. 좋은 소식이건, 나쁜 소식이건 어머니에겐 일단 쇼크일 뿐 이에요. 산모 나이가 턱없이 많거든요.”식으로 적절히 얼버무렸던 터다. 물론 그 때만해도 작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자마자 곧장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리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박준호다.한데 그것이 완전히 뒤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돌연한 사고에 의해 어쩌는 수 없이 침해 당한 일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박준호 자신의 내부 갈등이 이유였고 원인이었다.일테면 양아버지인 대니 라일러의 음모에 의해 친아버지가 제거되었다는 새로운 사실만해도 그러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공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일종의 ‘설’수준이지만, 그래도 박준호에게는 숨이 막힐만큼 엄청난 충격이다. 생각해 보라.친아버지를 제거한 혐의자로 지목받는 자와 어떻게 같은 식탁에 앉아 빳빳하게 다림질 된 냅킨을 두르고 숨 죽여가며 아침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단순히 그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정적인 결론이 나온 셈이다.어디 그 뿐인가.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도 실제적인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헤이스팅스의 어머니와 입학이 결정된 옥스퍼드와 톰 라더 부인과, 마거릿과, 푸른 눈이 한없이 아름다운 리타 라일러와, 그리고 여름 수은주와 비례하여 한때 정상까지 올랐다가 급추락한 시루코 여사까지 깡그리 포기하거나 아예 북북 지워 버리고 서울에 눌러 앉기로 작정한 것이 아닌 것이다.솔직하게 피력하자면 하다못해 단짝 친구인 한태훈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곳의 은밀한 세계, 이른바 스카이 홍이 자리잡고 있는 만큼의 넓이로 박준호를 지배하고 있는, 뜨거운 열망과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스카이 섬 중앙도로 건널목에서 만나 비 쏟아지는 벤네비스 고원 숲 속에서 황홀한 결합을 이룬 스카이 홍. 요컨대 난생처음 박준호 스스로 목숨 걸고 얻게 된 유일한 첫 여자가 스카이 홍이다. 지금까지의 경우 하나같이 박준호가 원했다기보다 상대방의 강력한 욕구에 의해 어쩌는 수 없이 맺어진, 이른바 유혹의 소산이 대부분이다.톰 라더 부인이 그렇고, 시루코가 그러하다. 한데 스카이 홍은 다르다. 상대방이 아니라 순전히 박준호 몫이다. 박준호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갈망하고 원했던 것이다.

2006-08-2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2)

조용한 귀국 (20)그녀와는 달리 그녀 남편은 말이 없는 남자다. 편지에 썼던 그대로다. 이름이 최범성이라던가. 키에 비해 왜소한 체구가 흠이라면 흠이지만, 깡마른 남자들이 흔히 갖고 있는 까닭없는 적의감을 보이지 않아서 좋다. 본래 공무원이었는데, 건강문제 때문에 작파하고 아내의 야생녹차사업에 일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그런 이유 탓인지 번번이 김분이 눈치 보기에 바쁘다. 그녀가 왜 인상을 쓰는지, 왜 저처럼 깔깔대고 웃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이 홀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박상길씨 장례식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문상객을 맞아들이고, 모자란 음식을 주문하는 따위 비교적 단순한 일도 꼭 김분이와 눈짓을 나눈 다음에 실행한다. 아니 뻔한 것인데도 굳이 김분이에게 재삼 확인한 뒤에 비로소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가령 김분이가 건넨 전화번호 돌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개 아무개는 전화를 안 받는다느니, 아무개는 오기로 했다느니, 아무개는 못 오겠다느니 일일이 보고를 한 다음 다시 수화기를 잡는 것이었다. 그러는 최범성에게 김분이가 나무라듯 말한다.“박명환씨 상가라고 말했어? 박상길씨 하면 모른단 말이야, 알았어?”박명환은 할아버지 함자다. 하긴 할아버지와 그동안 인연을 맺어 온 인사들에게 망인 이름인 박상길을 들먹여서는 혼동하기 십상이다. 그러고 보니, 김분이는 할아버지의 분신인 것 같다. 오랫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노하우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김분이만큼 할아버지의 활동 범위를 샅샅이 꿰뚫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호령 박씨 집헌궁 파 장손 대를 잇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직계손이라고해도 지금 박준호가 김분이만큼 할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결국 다른 방도가 없다. 김분이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수밖에. 김분이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서슴없이 일을 처리해준다. 생각해 보라. 지리산 양지골에서 상경한 김분이 부부가 서울서 치르는, 그것도 할아버지도 없는 장례식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그녀의 행동반경이 얼마나 넓으며, 수완 또한 남보다 뛰어날지 능히 짐작되고도 남는다.물론 장례뿐 아니다. 척하면 삼천리다. 일테면 영국 일이 그러하다. 아무리 어머니가 대니 라일러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해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닌 17만 달러를 흐지부지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터다. 아마도 헤이스팅스가 벌컥 뒤집어졌을 것이고,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가 여기저기 전화통을 돌렸을 게 뻔하다.죽은 작은 아버지야 박준호가 미리 입을 맞춰 놓았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다치고, 어렸을 때 어머니를 무척 따랐던 김분이는 다르다. 물론 지리산 할아버지 농장으로 전화를 걸면 김분이가 받게되어 있고, 설사 할아버지가 안 계시더라도 어머니 성격에 당연히 김분이를 찾아 꼬치꼬치 묻게되어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 일 조차도 박준호에게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않고 넘어가게 만든 것이었다.그러니까 작은 아버지가 누군가의 칼에 맞고 운명을 달리했던 바로 그 전날이다. 느닷없이 박준호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박준호씨 맞아요?”“네, 그렇습니다.”“나, 김분이. 지리산 녹차 농장….”“아, 네. 안녕하세요.”박준호는 반갑다못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잇는다.“보내주신 편지도 받았구요, 녹차두 받았거든요.”그러나 김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소리처럼 말한다.“도련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아님 그냥 박준호씨라고 불러야 되나?”“편하실대로요. 전 뭐라 불러도 상관없으니까요.”

2006-08-1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1)

조용한 귀국 (19)그런 식이니, 박준호 집안 일가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망인의 형이며, 박준호의 아버지인 박상길 공군 대령의 처참한 장례식을 경험했던 터라, 국가의 공권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국가 권력에 대항한 괘씸죄가 얼마나 준엄했으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명단까지 따로 작성할 수 있는가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에 아예 얼씬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괜히 집안전통 찾고, 핏줄 찾고, 이웃 정리 찾다가 무슨 봉변당할지 모르므로 뻔히 알면서도 장례식을 피해 지방출장가고, 등산가고, 병원 가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런 삼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 장례절차를 솔선수범 관리하는 사람도 있다. 할아버지가 남겨준 지리산 양지골 야생녹차 농장을 계약 재배하는 김분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박준호의 ‘호’자와 김분이의 ‘이’자를 따 ‘호이야생녹차’상표를 만들기도 한, 보기만해도 적극적이고 활기에 찬 여자다.박준호가 그녀를 관심있게 보기 시작한 것은 솔직히 이번이 처음이다. 어렸을 때 너무 황망히 당하기만해서 의도적으로 기피한 경우라고나 할까. 아니, 의도적이라기보다 무의식적이라고 해야 더 옳은 설명이다. 뇌리 속 깊은 곳에 늘 그녀 존재가 살아 있었지만,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김분이라는 여자를 멀리 밀어냈다고 해야 옳은 것이었다.그녀가 헤이스팅스로 보낸 편지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할아버지와 야생차 밭을 산책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고.그렇다. 만약 관심이 지대했었다면, 그 때 분이누나와 작별의 인사같은 좀 유별난 해프닝이라도 벌였겠지만, 웬걸 박준호는 어떤 식의 인사도 나눴던 기억이 없다. 이번에 헤이스팅스로 ‘호이’ 야생녹차 샘플과 함께 편지를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박준호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일상적인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을 터다.한데 그것이 바뀐 것이다. 뭐랄까. ‘호’자와 ‘이’자를 결합시켰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녀가 또박또박 쓴 편지로 전해 들었을 때의 감흥이 예사롭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 박준호의 고추를 씁씁 따먹다말고, 에이, 망칙해! 갑자기 발기된 박준호의 예민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토옥, 튕겼던 그 짜르르한 아픔….박준호는 결코 그 야리한 감촉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지만, 어쩌면 그 화인(火印)자국 같은 것 때문에 그녀의 존재가 더 또렷해지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때는 너무 높아서 정복할 수 없는 산처럼 보였지만, 기실은 박준호가 네 살때 그녀가 열 살 이 쪽 저 쪽이었으므로, 기껏해야 6년차다. 6년이면 시루코보다 4살이나 적고, 톰라더 부인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다. 굳이 비교하자면 박준호의 가슴 속에 속절없이 자리 잡아버린 스카이 홍과 한 두 살 차이의 동년배라고나 할까. 그래서일까. 김분이는 박준호와 열정적으로 교접을 나눴던 여인네들과 비교해도 결코 처지지 않는 탱탱한 피부를 가진 여자다. 그만큼 젊다는 얘기다. 물론 미모는 특출나게 내세울만큼 반듯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빠지는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통통해서 볼륨있는 몸매가 평범한 미모를 상쇄시킨다고나 할까.그녀는 활달하다. 목소리도 까랑까랑하다. 그리고 잘 웃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목소리로만 하지 않고, 두 손과 눈동자와 목놀림까지 동원한다. 과히 입체적이다. 그래서 더 사교적인 것 같다. 아는 사람이 많다. 하다못해 수사기관원 일색인 장례식장에서도 호들갑스럽게 수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여럿일 정도다.

2006-08-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60)

조용한 귀국 (18)물론 헤이스팅스 어머니에게서 박준호의 행방을 묻는 전화가 걸려왔었고, 그 때만 해도 박상길이 사고를 당하기 전인데다가 더불어 박준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국에 입국한 적이 없다는 거짓말을 해주었으므로, 일단은 그쪽에 관심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대니 라일러를 비롯한 어머니까지 뇌리에서 싹싹 소리 나게 지워버릴 수 있었던 박준호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바로 박준호의 모든 것을 바꿔 놓는 계기다. 향후 계획이나 설계는 물론이고, 시간 공간을 비롯한 방향과 진로까지 완전 무결하게 뒤 바꿔놓게 만든 전환점.우선 병석에 누운 할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박준호가 헤이스팅스의 어머니를 포기하고 서울에 주저앉게 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물론 숙모님도 살아 있고, 그의 딸, 그러니까 박준호의 사촌 여동생도 있었지만, 듣는 기능과 보는 기능을 상실한 장애인으로 태어난 까닭에 일찌감치 재활원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다.어찌 보면 할아버지가 박준호에게, 호령박씨 집헌궁파니,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방이니, 용 반지니, 그처럼 신경을 곤두세워 장손 교육을 시켰던 이유도 박준호가 아니었으면 사실상 손이 끊길 뻔한 집안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실제로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를 붙들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숙모님의 양해와 관계 없이 어디선가 아들 하나쯤 더 만들어 오기를 갈망했지만, 그때마다 “아버님.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장손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전 집사람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요.” 한마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버리고 만다.말 그대로 천부당만부당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병석에 누운 할아버지를 재활원만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해도 하루 해가 짧은 숙모님에게 내던져 놓고 런던으로 날아가 버릴 수 있단 말인가.어쨌거나 박상길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초라하다. 박상길의 황당한 죽음을 애도하는 손님보다 경찰과 검찰의 관계자 수가 더 많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인 범죄 수사에 차출된 수사 인원은 막상 몇 명 안 되는데, 웬 사복 입은 요원들이 그리 많은지 발길에 차일 지경이다. 아니, 경찰 검찰 뿐 아니다. 방첩대니, 안기부니, 대한민국 온갖 수사기관은 모조리 출동한 것 같다.한결같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귀에도 레시버를 꽂고 있다. 저마다 특수임무를 띠고 있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관제 장례식이다. 식장 근처 주차장이 온통 검정색 관용차로 꽉 들어차 발 디딜 틈새가 없다.모르긴 해도 어떤 주요 인사가 참석하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누구와 어울리는지, 분야별로 직종별로 분류해가며 감쪽같이 체크하는 낌새다. 오죽했으면 고인과 교류가 많았던 서승돈까지 얼굴을 비치지 못했을까.물론 서승돈을 비롯한 반체제 인사들이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전 야당 총수는 아직 영국에서 귀국하지 못했으므로 거론할 여지도 없었지만, 평소 박상길과 가깝게 지냈던 비 정치권 지우들조차 쉬쉬하며 발길을 끊은 것은 야박한 세태를 탓하기 전에 당국의 탄압이 그만큼 극악에 달했다고 해야 옳다.어디 지우들 뿐인가. 소위 말하는 운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는 태껸이며, 태권도 유단자 선후배 들 조차 이름 깨나 날리는 지도자급은 눈을 씻고 봐도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2006-08-1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9)

조용한 귀국 (17)경찰이고 안기부 요원이고, 눈이 벌겋게 달아 으름장을 놓곤 했는데, 그래도 체포가 가능하지 않자, 마포 도장 사정에 능통한 문제의 김철구와 주조갑이 색출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래도 스승과 제자였으므로 박상길이 놈들을 관장실에 불러 훈장 선생 회초리 치듯 뺨 몇 대 때렸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앙심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놈들이 한밤중에 스승을 유인하여 골목에 숨었다가 칼침을 놓은 것이었다. 그러고도 놈들은 잡히지 않는다. 증거도, 현장을 목격한 증인도 없다는 이유다.실제로 아무개 아무개가 스승을 손봤다는 소문이 흉흉한데도 경찰은 도무지 손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선 경찰이 그처럼 손을 놓을 정도니 검찰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놈들이 소위 말하는 정치깡패 그룹에 속해 있는데다 설상가상으로 박상길 역시 군사 정권 말기의 그 삼엄한 공포 통치를 은근히 비판하고 야유하는 반정부 인사들과 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말하자면 서승돈을 비롯한 런던을 방문한 야당 총수 같은 부류가 그러하다. 따지고 보면 박준호의 아버지인 박상구가 야당 총재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가 제거되었듯 작은아버지 박상길 역시 반체재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그 활동을 돕다가 칼침을 맞고 비명에 횡사해 버린 것이다. 아니, 또 있다. 구체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지는 않았지만 문제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이 그것이다.실제로 박상길은 미국 AP통신과 CNN방송 기자와 공동 인터뷰를 약속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인터뷰 약속 날짜가 하필이면 박상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 이튿날이라는 사실이다.물론 노근리 양민 학살 진실 규명 때문에 어떤 거대한 조직에 의해, 박상길이 제거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김만상 말대로 다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심증만 굳힐 따름이다. 물론 직접적인 가해자는 박상길의 수제자들이지만 천문학적인 자금을 풀어 놈들을 사주한 쪽은 아버지 경우와 유사한 군사 정권의 몇몇 실력자 그룹 중의 하나다.병석에 누워 오늘내일 하던 할아버지는 지푸라기 불 같은 소생과 쇄진을 반복하며 끈질긴 명을 이어 가는데, 엉뚱하게, 그토록 당당하고 사려 깊고 건강했던 작은아버지가 한순간에 시체로 변하다니, 누가 그것을 예상이나 했겠으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겠는가.하나, 대한민국 태껸의 최고단자며, 한국 전통 무술의 달인이며 이론가인 박상길은 그렇게 해서 멀고 먼 피안으로의 여행을 앞당겨 떠난 것이다. 안개처럼 사라진 것이다.박준호에게 있어서 작은아버지의 죽음은 마치 추를 잃은 저울처럼 그 기능이 마비된 듯한 공백 상태를 몰고 온다.우선 박준호의 런던 출국을 채근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긴 잠에 빠져있으므로 할아버지 역할까지 겸해서 박준호를 조종하고, 나무라고 호통 칠 유일한 어른이 박상일이었는데, 아니 옥스퍼드 법과대학 입학이 호령박씨 집헌궁파 가문의 앞날을 위해서는 할아버지 타계보다 더 중차대하다는 점을 늘 암묵적으로 암시하곤 했던 그가, 이제 물리적으로 입을 꼭 닫고, 아무런 말도 아무런 간섭도, 하다못해 싫다 좋다 표시하던 눈짓까지 접어버리다니, 박준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인 것이었다.

2006-08-1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8)

조용한 귀국 (16)“자네 작은아버지하고 나는 월남 파병 동기야. 물론 작은아버지는 소대장이고 나는 사병이었지만,…월남에서 목숨 걸고 같이 싸운 전우였단 말이야. 자네 전우가 뭔지 아나?”김만상이 묻는다.“네, 압니다.”박준호가 대답한다.“그래, 똑똑한 영국 유학생이 모를 리 없지. 그래서 우리는 형제나 다름없어. 아니, 친형제보다 더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네. 고로 자네는 나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야. 이것 봐, 박준호!”큰 소리로 호명한다.“네, 선생님.”그만큼 큰 소리로 대답한다.“이제부터 자네도 작은아버지 대하듯 날 대해 주는 거야. 알겠나?”“알겠습니다.”그가 박준호의 손을 잡고 흔든다.김만상은 작은아버지보다 한 살 아래인데다 태껸 운동 역시 이삼 년 후배지만 그 무렵 그러니까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 해 세계 군인 무술대회를 석권한 최강자였단다. 물론 박상길은 군인 무술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었다.“베트남 호치민 정부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김 관장이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와 함께 한 우리 정부가 아직 베트남 문턱도 못 넘는 마당에 김 관장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한 한국인으로 체육관 운영은 물론이고, 무역업까지 허가받은 유일한 외국인이란다. 나를 베트남에 초청하겠다고 저렇게 성화지만 네가 알다시피 할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계시는 마당에 어떻게 집을 떠날 수 있겠느냐.”작은아버지 말이다. 솔직히 작은아버지는 매사가 넉넉지 못하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태껸 도장 운영과 전국 전통무술인 협회장 업무에 전력투구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게다가 돈벌이는 커녕 되레 돈을 써야 하는 민주화 투쟁 인사들과 어울려 긴급조치 위반 동지들의 옥바라지를 솔선수범 했으니, 집안 사정이 그야말로 쌀독에 거미줄 치기 일보 직전이다.그러는 터에 베트남 국방성이 정식 인허가한 대규모 태껸 도장을 맡아 달라고 통사정이니, 작은아버지도 은근히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그런 박상길에게 예상 못한 참으로 엉뚱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다. 이미 김만상이 술상을 앞에 두고 우려하고 경고했던 바다. 박준호도 현장에 있었지만 너무도 가당찮은 경고라서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일이다. 한데, 그 일이 기어코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아무리 세상일이 범람한 강물에 휩쓸린 가축의 외마디처럼 맥 빠짐의 연속이라고 해도, 어쩌면 그런 일이, 그것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인지 박준호 입장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름 아닌 병석에 누운 할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아들인 박상길의 죽음이다.마포 태껸 도장을 운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낸 한국 전통무술계의 실제 황제로 군림했던 박상길 관장이 어느 날 새벽 싸늘한 시체로 집 마당에 내던져진 것이다. 그것도 칼 구멍이 열세 군데나 뚫린, 너무 참혹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뒤틀린 모습이다.내용인 즉 그날 하노이 김만상과의 만남에서 거론되었던 김철구와 주조갑이 그 주역들이다. 물론 둘 다 작은아버지의 수제자들이다. 하필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평소 박상길과 막역하게 지내는 사람의 부탁으로 대학생 한 명을 도장에 숨겨 두었는데, 그 학생이 하필 긴급조치 위반 수배자였던 것이다.

2006-08-1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7)

조용한 귀국 ⑮“제가 귀국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귀동냥해 보니까 선배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더라구요.”“그 얘기라면 나도 알아.”“아시면서 왜 그런 실현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고군분투하시는 겁니까?”“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레 포기할 일이 아니더라구. 사실은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우리 부친께서 그 일에 전념해 달라고 당부하셨을 때도 나는 사양했거든. 실현 가능성 없는 일이라고 한마디로 일축했었다구. 한데, 그게 아니야. 당신도 내가 지난봄에 미국 다녀 온 사실 알지? 난 정말 깜짝 놀랐어. 당시 양민 학살 현장에 있었던 제7 기갑연대 2대대 소속 로날드 컨스 대위를 만났어. 그는 이제 노인네가 되어 있었지만 기억력은 젊은이 못지않았어. 난 로날드 컨스와 2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고 그 증언을 녹음해 왔어. 아마, 최초의 노근리 양민 학살 가해자의 양심선언 일거야.…그가 말하더군. 이것은 학살입니다. 그것도 명령 계통에 의해 이뤄진 조직적인 학살입니다. 실수나 우발적인 판단 착오로 일어난 사고가 아닙니다. 상부의 공식적인 명령을 받아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그때 그 작전명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기작전'이었습니다. 로날드 컨스 대위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이런 얘기도 했어. 정말 ‘모기작전’ 때문에 최근까지도 잠을 설칠 때가 있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혼령들이 늘 나를 괴롭혔으니까요. 이렇게 진실을 얘기하고 나니까 조금은 후련해지는군요. 아니, 여생 편히 보낼 수 있도록 아예 모두를 다 털어내 버리고 싶습니다. 어때, 김관장 내 얘기? 이해가 돼?”박상길이 묻는다. 그러나 김만상은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뭔가 심드렁한 표정이다. 아무리 장본인이 직접 나서 양심선언을 했다한들 그 강경한 원칙이 변하겠느냐, 결국 큰 바위에 계란던지기 아니겠는가, 식이다. 한데도 박상길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충천해 있다. 그 어느 누구도 그처럼 충천한 의지를 꺾기는 힘들 것 같다. 김만상이 입을 연다.“선배님이 옳습니다. 이건 분명 미국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크고 강대한지…선배님도 아시잖습니까? 일단 한 번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겁니다. 콩을 팥이라고 하면 팥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오죽하면 베트남에서 패전하고 양키 고 홈 했던 그들이 어느 사이에 물밀고 들어와서 베트남을 좌지우지하겠다고 저렇게 날뛰고 있겠습니까. 선배님이 끝까지 이 일을 접지 않고 외신 기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을 계속한다면 신상이 이롭지 못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신상이 이롭지 못하다니? 제놈들이 날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바로 그겁니다. 선배님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수도 있다 그 말입니다.”“쓸데없는 소리!”작은아버지 박상길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모션을 취하며 말을 잇는다.“옛날부터 당신은 술만 들어갔다 하면 쓸데없는 소리를 자주하더구만.”박상길이 휘청휘청 자리를 뜨자 김만상은 뚫어져라 박준호를 본다. 그가 말한다.“그래, 그래. 이제 알겠구만 그러니까 중학생 태권도 대회에서 전국 우승을 휩쓸었다는 주인공이 바로 자네란 말이지?…그래, 지금도 운동 계속 하나?”“네, 혼자…가끔….”박준호가 대답한다.“혼자 하는 운동은 진전이 없는 법인데…어쨌든 체격은 아주 잘 생겼구만. 베트남에 한 번 놀러 와. 내 국빈으로 모셔 줄 테니까.”그때 화장실에서 돌아온 작은아버지가 말한다.“김만상씨는 베트남 하노이에 태권도와 태껸 도장을 크게 차리셨다. 할아버지만 아프시지 않으셨다면 나도 지금쯤 하노이에 있을 뻔했다만….”“그래, 이름이 박준호라고 했나?”또 화살을 이쪽으로 돌린다.“네, 선생님.”

2006-08-1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6)

조용한 귀국 ⑭박상길이 자리를 가리킨다. 박준호가 자리에 앉자마자 “김 관장, 아까 말했던 내 장조카야.” 손님께 소개한 다음,“인사 드려라. 작은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신 분이시다.”할아버지에게 하는 식의 인사를 원하는 눈치다. 박준호는 거실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한다.“어, 그럴 거 없는데… 그래, 그래. 반갑구만… 자, 앉아. 내 술 한잔 받지.”김 관장이란 사람이 급하게 비운 술잔을 내민다.“저 술 못합니다.”“괜찮아. 한 잔쯤은 괜찮아.”억지로 술잔을 들이민다. 박준호가 박상길을 본다.“주시는데, 한 잔 받아라.”작은아버지가 말한다. 박준호가 잔을 받아 고개를 돌려 입술에만 적시고 돌아앉자,“박 선배님, 선배님께 무술 배운 사람들 중에 운동신경이 젤 뛰어난 제자가 바로 이 조카란 말씀이죠?”박상길이 아무리 조카지만 장본인의 면전이라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건 사실이야.”라고 대답한다.“하지만, 이 친구는 프로가 아니잖습니까?”“나는 프로 무술인을 키우는 게 아니야. 자기 수양을 목적으로 땀 흘리는 건전한 스포츠맨을 기르고 싶을 따름이지.”“그래도 최강자급 무술인을 제자로 길러야죠.”“최강자? 김 관장도 알고 있겠지만 내 제자 중에 문제의 두 놈 있잖아? 운동으로 이름깨나 했던 놈들…. 김철구하고 주조갑이 말이야. 주먹하나 믿고 이상한 곳의 앞잡이 노릇하는 자식들. 그렇다고 순수한 주먹도 아니고, 깡패도 아니고… 흡사 일제시대 주재소 밀대 노릇 하는 조선인처럼 나쁜 짓을 밥 먹듯 하는 놈들 말이야.”“선배님이 한번 불러다 알아듣게끔 훈계를 하시지요.”“놈들은 훈계를 들어먹을 녀석들이 아냐. 한마디로 스승도 없고 선배도 없어. 정신 수양이 안 돼 있어서 그래. 자기 수양 이전에 주먹 힘만 기른 후유증이지. 난 그런 유형의 놈들을 또다시 마포 도장에서 기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선배님의 그 고귀한 뜻을 과연 몇이나 알고 있을까요?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이 마포 도장이 제 자리 걸음을 못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국대회 우승자를 이 마포 도장에서 매년 팍팍 배출시켜야 수강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건데….”“술이나 들지.”작은아버지가 특유의 카랑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한데도 김 관장은 술잔을 잡지 않는다.“선배님, 주제 넘는 얘기지만 제가 충고하나 해도 될까요?” 그리고 박상길을 저으기 바라본다.“충고?”“네, 꼭 드리고 싶었던 얘기라서….”김만상이 준비라도 하는 듯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입을 연다.“다름이 아니라, 그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 말입니다. 그거 그만 손을 떼시면 안 되겠습니까?”“그게 무슨 소리야?”

2006-08-1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5)

조용한 귀국 ⑬ 작은아버지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지리산 야생차 농장을 깡그리 넘겨버릴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장손이 6년 만에 귀국하여 쪼그라든 손을 잡고 앉았는데도 당신은 이게 누구야? 우리 준호 아니냐!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간병인이 이제 막 잠들었다고 할아버지를 깨우지 못하게 한다. 작은아버지 박상길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작은아버지는 박준호가 반갑지 않은 것 같다. 작은아버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사실뿐이다. 전화로 몇 번이고 강조해 마지않았던 옥스퍼드 법과대학 입학이 할아버지의 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듯이, 이제 할아버지 얼굴을 봤으니 내일 당장 떠나거라, 라고 오히려 엄하게 다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준호는 서승돈에게 들었던 놀라운 사실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아니, 서승돈을 만났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서승돈이 거론한 대니 라일러라는 이름은 더더구나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 아무 준비 없이 감정만 앞세워 복수의 칼이라고 섣불리 뽑아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약 칼을 들어야 한다면 대니 라일러의 음모, 그 자체를 오래오래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을 때, 얍! 소리와 함께 힘차게 뽑아들고 싶은 것이었다. 어쩌면 박상길의 입장도 피장파장인지도 모른다. 서승돈에게 준호를 찾아봐 달라는 부탁까지 했던 그가 왜 서승돈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고 런던으로 빨리 돌려보낼 궁리만 하는 것일까. “낼 오후 네시 비행기가 있더구나. 그걸 타도록 해라.” 일방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박준호도 순순히 물러서고 싶지 않다. “작은아버지,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아직도 한 달씩이나 여유가 있거든요.” “한 달 여유라니?” “옥스퍼드에 인터뷰를 하고 왔으니까요. 그리고 발표는 항시 한 달 뒤에 하거든요.” 박준호는 거짓말을 예사로 한다.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첨삭한다. “혹시,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와도 제가 한국에 왔다는 얘기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 아시잖아요. 뭔가 뒤틀렸다하면 못 견디는 성격 말예요. 어머닌 제가 스코틀랜드 여행 중인 걸로 알거든요.” “꼭 그래야 한다면 그건 네 말대로 해주마. 대신 조건이 있다. 한 달은 절대로 안 된다. 이번 주 안에 떠나도록 해라. 만약 날짜를 어기면 내가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어서 준호 네가 부탁한 거짓말까지 그대로 고해바칠 테니까.” “알았습니다, 작은아버지.” 박준호는 새삼 박상길에게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서울에 도착하고 이틀만인가, 깊이 잠든 할아버지 병상을 한나절 내내 지킨 박준호가 안방을 나온다. 거실에서 작은아버지가 웬 낯선 남자와 술상을 받고 있다. 대낮부터 술 마시는 일은 좀체 없었던 일이므로 박준호가 그 앞을 주춤거린다. “오, 그래. 준호냐?” “네 작은아버지.” “할아버진 뵈었니?” “네, 뵈었습니다.” “계속 주무시고 계시지?” “깊이 잠 드셨네요. “저녁 일곱 시까지 그렇게 주무셨다가, 그리고 밤새도록 뜬눈으로 새우신다.…일단 이리 와 앉거라.”

2006-08-0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154)

조용한 귀국 ⑫그러니까 박준호가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앉았을 바로 그 시간, 민주 투사의 대명사인 위대한 어른이 박준호를 만나기 위해 런던 모처에 막 도착할 즈음이었던 것이다.말할 것도 없이 서승돈 작품이다. 서승돈이 박준호에게 몇 번씩 다짐해 마지않았던 터다.“선생님이 옥스퍼드 대학 강연 준비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도서관에 들리실 스케줄이 있거든 그때 선생님 뵙는 게 어떠니?”박준호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좋아. 그럼, 내일모레 아침 아홉 시다. 아홉 시 정각에 도서관 정문에서 만나는 거다.”서승돈이 그렇게 결정하며 재삼 다짐한다.“시간, 장소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네, 아저씨.”“늦으면 안 된다. 선생님은 시간을 칼처럼 지키시는 분이니까.”한데 박준호는 그 시간에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임종이 내일모레로 당도한 할아버지의 병문안이 비행기를 타게 한 첫째 이유지만, 가령 스카이 홍이 어린 딸을 데리고 보름 전에 서울행 티켓을 구입했다는 정보를 듣지 않았어도 박준호가 그처럼 사생결단하듯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말았을까.어차피 런던 거리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박준호였으므로, 그리고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그것도 홍주리로 본명이 밝혀진 그녀가 서울행 비행기 표를 구입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박준호는 넋을 잃고 영국 땅에 그린 듯이 앉아 있을 입장이 아닌 것이다.그러니까 스카이 홍을 찾아 헤매던 중에 만났던 서승돈으로 하여금 아버지 소식과 아버지 죽음과 그 배후 인물을 알게 되는 충격을 맛보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카이 홍을 갈망하는 그 뜨거운 열병에서 탈탈 털고 일어 날 정도는 아니다. 어쩌면 더 깊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것이 박준호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가장 큰 이유다.그렇긴 해도 박준호는 애당초 런던과 영원히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대니 라일러에 대한 실망감과 분통함과 억울함과 그리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황망함 때문에, 그의 누이동생으로부터 겁도 없이 17만 달러를 끌어내긴 했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그처럼 쉽게 런던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또 그만큼 쉽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중에 넣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문제의 17만 달러를 단돈 1달러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 물론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다.처음부터 계획적이라기보다 우발에 가까운 비신사적인 행동. 법률적인 용어로 사기 협잡에 의한 갈취라고 하던가.어린 소견에 아버지를 죽인 대니 라일러를 어떤 식으로든 곤경에 빠뜨리고 싶은 욕구를 그런 쪽으로 발산했었지만 금세 경솔한 방법이었다고 후회했던 박준호다.어쨌거나 사람의 일이란 항시 변하기 마련이다. 잠시 빗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방향을 달리하는 이변도 생길 수 있는 것이 인생사 이치인 것이다.기실, 할아버지 살아생전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아니 다정하면서도 엄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부랴부랴 귀국했던 박준호지만 “아마도, 보름 넘기기 힘들 것 같구나”라고 국제전화로 박준호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작은아버지의 우려와는 달리 할아버지는 너무나 평안한 자세로, 그리고 깊이 잠들어 있다.

2006-08-08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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