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톡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이방인이 꾸는 꿈: '춘몽'

그들의 소요는 한가롭고 한심하다. 허름한 동네 뒷골목을 걸으며 실없이 낄낄대거나 일찌감치 낮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파편적이다. 사건에 맥락 같은 것은 없다. 다짜고짜 행인을 뒤쫓아가 때리거나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이 없어지는 일도 가능하고 전신마비였던 사람이 뜬금없이 말을 던지는 일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소요는 꿈을 닮았다. 아름답지만 쉽게 부서지고, 평온하지만 애잔하다. 장률 감독의 '춘몽'은 허깨비 같다. 흑백의 영상에 줄거리는 쉽사리 요약되지 않는다. 마치 잠에서 깨어 꿈을 떠올릴 때처럼 뿌옇고 막연하다. 때로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고 때로는 처연하지만 돌아보면 꿈처럼 희미하다. 장률 감독은 '풍경'이나 '경주'에서 꿈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이방인이 꾸는 꿈, 혹은 이방인으로서의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꿈들은 회귀에 대한 욕망과 닿아있다. 시간적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이어서 그 꿈들의 끝에는 마음의 뿌리로서의 고향이 있다. 그리고 '춘몽'의 청년들이 동네를 배회하다 돌아오는 곳은 '고향주막'이다. 생각해보면 꿈이란 삶의 가장자리에 있다. 그것은 허상과 현실을 가로질러 우리의 일상에 끼어들지 못한다. 꿈이 닫혀야 일상이 시작되고 현실이 닫힐 때 비로소 꿈이 열린다. 전신마비로 온종일 휠체어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예리부는 꿈과 현실을 동시에 사는 사람이다. '고향주막' 주변을 서성이는 세 청년들은 각기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 출연한 충무로의 젊은 감독들이다. 장률 감독은그 캐릭터들을 그대로 가져온다. '똥파리'의 양익준, '무산일기'의 박정범, '용서받지 못한자'의 윤종빈이 그들이다. 영화란 빛과 그림자의 허상이며 카메라가 꾸는 꿈이다. 그러나 세 감독들은 실재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다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허상만은 아니다. 그들은 실재와 허상이 겹쳐진 인물들이다. 꿈을 닫지 못한 채 현실을 살고 현실을 끝내지 못한 채 꿈을 꾼다. 마치 예리부처럼 말이다. 꿈속에서 나와 다시 꿈속으로 들어간 그들은 질문하는 듯하다. 내가 꾸는 꿈을 보았느냐고.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10-19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이념과 체제라는 그물 : '그물'

임진강변이 그의 터전이다. 작은 보트와 그물에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갈 수는 없지만, 경계만 넘지 않으면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다. 배가 고장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물이 스크루에 엉키는 바람에 모터가 고장났다. 동력을 잃은 배가 북에서 남으로 흘러왔다. 단지 민간인이었으므로, 단지 사고였으므로 금세 북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허술했던 그의 그물과는 달리 이념의 그물은 촘촘하고 질기다. 눈이 찔리고 아가미가 찢겨도 그가 빠져나갈 구멍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이쪽 그물 아니면 저쪽 그물일 뿐. 김기덕 감독의 '그물'은 피곤하다. 그러고 보면 김기덕 영화가 피곤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거친 논법과 강렬한 이미지의 낯섦은 미학적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관객을 힘겹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물'에서 느끼는 피곤함은 질감이 다르다.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던 그의 시선이 분단이라는 사회적 현실로 향하는 순간 우화적인 그의 이야기가 현실과 밀착되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이전에 '풍산개'(2011)와 '붉은가족'(2013)의 각본을 통해 분단의 문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두 작품 모두 분단이라는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전자는 사랑이, 후자는 가족이 전면에 부각됐다. 그에 비해 '그물'은 보다 적극적으로 국가주의와 이념의 그물에 걸린 나약한 개인을 보여준다. 이념과 가족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영역의 가치를 한데 올려놓고 저울질하기를 강요하는 국정원의 폭력성과 입으로는 이념을 외치면서 손으로는 달러를 세는 보위부의 이중성은 서로 데칼코마니처럼 겹치면서 체제와 이데올로기라는 그물의 맹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물'의 이야기와 영상은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덜 극단적이고 덜 충격적이다. 그렇다고 덜 강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김기덕이라는 뛰어난 감독과 걸출한 배우 류승범의 만남이 빚어낸 시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펄떡임을 연상시키는 류승범의 연기에서는 비릿한 날것의 냄새까지 풍기는 듯하다. 그 비린내는 어쩌면 분단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몸에서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10-12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마천루를 예비하는 사람들 : '아수라'

조화(弔花)와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방금 전까지 펄펄 살아 칼과 총을 휘두르던 그들이 장례식장의 흰 타일에 피를 묻히며 쓰러져 있다. 주검들을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꽃과 향이 있으므로. 그 위로 푸념처럼 애잔한 조곡이 흐른다. Satan, your kingdom must come dowm.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는 기시감의 아수라장이다. 이중첩자가 된 경찰의 처절한 몸부림('신세계') 같기도 하고 검찰 조직과의 치열한 격돌('부당거래') 같기도 하다. '똥개'나 '범죄와의 전쟁'이 떠오르기도 한다. 배우와 캐릭터의 배치가 그렇다. 유약한 딸바보 검찰수사관(정만식)은 마초가 되어 돌아왔고 경찰 앞에서 바지를 내리던 광수대 팀장과 껄렁껄렁한 조폭 보스(황정민)는 깡패 같은 시장이 됐다. 정의와 '줄'을 양손에 쥐고 있던 검사(곽도원)는 여전히 정의로워 보이고 경찰 아버지에 반항하던 꼴통(정우성)은 자신이 경찰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브라더십은 기대할 수 없고, 정의를 외치던 검사는 폭력 앞에서 속절없이 나약하다. '아수라'는 오히려 '킬리만자로'의 비정한 세계인식을 닮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도 승자는 없고 단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승패가 아니라 죽음이므로. 승패를 가르는 일조차 죽음 앞에서는 사치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이미 장례식장이다. '아수라'의 난장판 한가운데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배우이고 캐릭터일 뿐이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재개발'이라는 욕망의 덩어리이다.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강남1970')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배우에 불과하다. 안산과 성남을 조합한 듯한 배경 안남시는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재개발 지역에 들어설 마천루는 메시아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아를 예비하는 이 시대의 선지자들이다. 물 대신 총과 칼로 세례를 주는 세례 요한이다. '아수라'가 보여주는 캐릭터의 변용은 천국을 준비하지만 장례식장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10-05 경인일보

[텔미시네] 아수라

스크린속 인물들 하나같이 강렬·혐오사회 구성 경쟁 매커니즘 '악의' 항변일체의 반전없이 현실과 접점 풀어내■감독 : 김성수■출연 : 정우성,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정만식■개봉일 : 9월 28일■범죄, 액션/132분/19세 이상 관람가선의(善意)의 경쟁. 무한경쟁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존중받는 가치이다. 정해진 룰에 따라 동등한 체급을 가진 경쟁자가 벌이는 순수한 열정은 선의의 경쟁을 성립시키기 위한 필수조건이고, 이것이 이뤄졌을 때 대중들은 승자와 패자를 떠나 경쟁 자체의 과정만을 존중하며 찬사를 보낸다.그렇다면 정반대의 개념, 악의(惡意)의 경쟁도 성립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앞서 거론된 선제조건인 룰과 체급은 당연히 무시돼야 할 터이다. 상대보다 앞서기 위한 비열함과 저열함은 물론 여차하면 상대방을 제거해 경쟁이라는 구도 자체를 깨 버리는 비정함도 겸비해야 한다.영화 아수라는 이런 악의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다. 악인들의 지옥 같은 삶을 영화화 해보고 싶었다는 김성수 감독의 바람답게, 스크린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렬하고 혐오스럽다. 안남시장 '박성배'와 검사 '김차인'은 각자의 손익계산에 따라 형사 '한도경'을 찢어발기고, 짐짓 희생자로 보이는 '한도경'은 후배 '문선모'를 판으로 끌어들인 뒤 이쪽 저쪽에 들러 붙으며 제 살길을 찾는다. 검찰 수사관 '도창학'은 특별수사팀 소속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수사 명목의 납치, 감금, 폭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며 공권력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문선모' 역시 타의에 의해 들어간 지옥도에 점차 물들어가며 그의 본질 역시 악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이젠 영화 속 캐릭터 메이킹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양면성 역시 아수라 속 캐릭터들에겐 찾아볼 수 없다. 선과 악을 넘나드는 모호함조차 남기지 않은 순수한 악은 강렬하지만 짐짓 전형적이기도 하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아수라장'이 펼쳐질 것을 예상하고 객석에 앉을 것이고, 스크린 속 화면은 그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엔딩 크래딧으로 이어진다.하지만 감독은 일체의 반전 없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극을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풀어낸다. 영화 속 가상의 공간이자 주 무대인 '안남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느 신도시 개발현장의 모습과 똑 닮았다. 시장, 검사, 수사관, 경찰 등 강약이 뚜렷한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는 주인공들의 아귀다툼 역시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을 연상케 한다.감독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경쟁의 매커니즘이 선의보다는 악의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주인공들이 그토록 답 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한 원인이 되는 신도시 개발 역시 경쟁의 과정은 일체 사라진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는 단순작업이 빚어낸 정수다. /권준우기자 junwoo@kyeongin.com·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2016-09-28 권준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오지랖의 여왕: '범죄의 여왕'

여자는 방금 사내의 발에 뜨거운 물을 붓고 그의 목에 주사기를 들이댔다. 동네 절친의 남편인 그가 여자가 보는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야메 미용시술을 하는 그녀만이 시전할 수 있는 기술이다. 흥분한 사내도 주사기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맥없이 물러나지는 않는다. 이를 앙다문 채 경고한다. "자꾸 나대면 언제 골로 갈지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는 한국사회에서 부당함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항의는 종종 '나댄다'고 받아들여진다. 정당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튀는 성품, 혹은 행동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모난 돌을 때리는 '정'에 대한 경고로 보답받곤 한다. 그러나 폭력과 인습, 무관심에 길들여진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변화하는 것은 그들의 나댐이 있기 때문이다. '족구왕'으로 주목을 받았던 영화창작집단 광화문시네마의 세 번째 작품 '범죄의 여왕'은 이요섭 감독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개성과 장르의 착종은 한국 영화가 자주 놓치는 미묘한 틈새를 파고든다. 덕구(백수장)와 강하준(허정도), 개태(조복래)와 익수(김대현)는 모두 비루하고 안쓰럽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 캐릭터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특히 촌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이고 괄괄하면서도 따뜻한 미령(박지영)은 다소 어둡고 밋밋할 수 있는 영화에 색채감을 부여한다.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수도세 120만원이라는 충격적이지만 소소한 일상적 사건에서 출발해 범죄를 밝혀 가는 과정은 탐정물의 장르적 관습을 그대로 따른다. 캐릭터의 입체성에 비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평면적 전개는 영화를 다소 지루하게 만든다. 스토리가 캐릭터들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떠받쳐주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모성 신화의 무비판적 재생산이라든가 범인 캐릭터의 단순성이라든가 그를 다루는 태도 등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장점이 고스란히 아쉬움으로 되돌아오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여왕'에는 어떤 사랑스러움이 녹아 있다. 그건 아마도 광화문시네마의 존재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9-28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두 개의 질문 : '밀정'

흔들림이 그의 존재방식인지 모른다. 그를 흔드는 것은 질문이다. 독립은 요원하고 생존과 희망을 묻는 질문 앞에서 신념은 무기력하다. 그는 돌처럼 단단하게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원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자살한 친구의 발가락은 가벼웠다. 그가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인두로 얼굴을 지진 여성의 시신은 너무 작았다. 그 실존의 자리에서 그는 어디에 이름을 올릴지 결정해야 한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기묘하다. 질문은 '암살'을 이어받는 듯하고 설정은 '신세계' 같은 언더커버 잠입물과 유사하다. 그런가 하면 이미지나 음악은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갱스터 느와르를 떠올리게 한다. '독립이 될 줄 몰랐기 때문에 변절했다'는 '암살' 속 염석진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동시에 질문이기도 하다. 그 가느다란 희망 앞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밀정'의 이정출(송강호)이란 인물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영화의 도입부 이정출 역시 묻는다. "너는 조선이 독립할 것 같냐?" 그러나 후반부에 가서 그는 동일한 질문을 하는 친일 부호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내부에서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이미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실패를 딛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도덕군자 같은 말 때문이 아니다. 갑자기 신념을 갖게 되어서도 아니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안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김장옥(박휘순)과 연계순(한지민)의 몸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경성으로의 무기 반입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작전에서 흐르는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곡은 영화를 낯설게 하면서 '대부' 같은 갱스터 느와르를 연상시킨다. 이전까지 '신세계'나 '무간도'처럼 두 진영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제는 두 진영 중 어디에 설 것인지 묻는다. 그러므로 질문은 바뀐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죽을 것인가'로. 질문이 바뀌는 순간 실존의 자리도 바뀐다. 시대가 변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두 질문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생존의 윤리인지, 삶의 윤리인지.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9-21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에로영화의 귀환: '젊은 엄마' 시리즈

남성 권위가 '쩨쩨한 시선의 권력' 소진복고적이고 퇴행적 판타지 비판의 여지'에로 영화'라는 말은 애매하다. 개념도 불명확하고 기준이나 범위도 모호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에로영화를 판별해낼 수 있다. 직관적인 제목 덕분이다. 에로영화에 대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한 번 흥행에 성공한 에로영화는 시리즈로 제작된다. 1980년대의 <애마부인> 시리즈가 그랬고, 1990년대의 <젖소부인 바람났네> 시리즈가 그렇다. 이런 영화들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당대의 사회적 균열과 파열을 포착해 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개 남성의 시선을 전제로 여성의 신체를 전시한다는 한계로 인해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얼마 전 <젊은 엄마: 디 오리지널>이 개봉됐다. '젊은 엄마'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극장에서의 흥행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IPTV나 주문형 케이블 비디오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에로 영화들의 제작이 급증하고 잇다. 1990년대 VHS 비디오가 일반화되면서 에로비디오가 유행했던 것을 기억하면 신기한 일도 아니다. '에로'에 대한 찬반이나 호불호를 떠나서 내러티브와 미장센, 음향 등 영화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저급한 영상물들이 상술에 의해 초저예산으로 제작됐다. 그러니 미디어 환경이 변화된 지금 에로 영화를 비롯한 성인 콘텐츠의 제작이 늘어난 것을 이상히 볼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소비자가 있으면 생산되기 마련이니까.<젊은 엄마1>의 경우 육아의 힘겨움과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한 아내가 가출한 후 부유하면서도 육아에 적극적인 장모와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는 설정은 비윤리적이지만 한국 남성들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부장적 질서를 가능케 했던 경제적 우월성은 상실되었고, 남성의 권위란 이제 에로 영화를 통해 여성의 신체를 감상하는 쩨쩨한 시선의 권력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면서도 육아와 생계를 동시에 책임져 줄 구원자가 필요하다. 복고적이고 퇴행적인 이 남성 판타지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단순히 베드신의 나열과 여성 신체의 진열만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제작자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영화가 아무런 현실도 반영하지 못한다면 봐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dupss@nat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9-07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출구없는 현실서 살아남기:'서울역'

그들은 애초에 노숙인이었다. '애초'라는 말은 옳지 않다. 그들에게도 한때는 집이 있고 가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미하다. 지금 그들의 집은 서울역이고 그들의 가족은 같은 노숙인들 뿐이다. 소녀는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돌아갈 집이 있고, 자신을 찾는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일한 피난처이며 끔찍한 상황에서도 생존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소녀가 끝내 깨달은 것은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돌아갈 집이 없다"고 외치는 노숙인의 한탄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는 출구가 없고, 미래에는 전망이 없다.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부산행'의 프리퀄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전사(前史)를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부산행'에서는 뉴스를 통해 스쳐지나가듯 나왔던 '그날 밤의 폭동'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좀비'로 통칭되는 정체불명의 감염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폭동의 기원에 대한 영화다. 보다 정확히 말해 '왜 폭동으로 불리게 됐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산행'을 통해 이미 짐작하듯이, 폭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폭동으로 규정된 사건이 있었을 뿐.'서울역'은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부산행'에서 연상호 특유의 강한 주제의식과 스타일을 발견하지 못해 아쉬웠던 그의 팬이라면, '서울역'에서는 '연상호 스타일'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더욱이 후반의 반전과 연상호의 작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속도감 넘치는 역동적 작화는 한층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서울역'은 '부산행'의 프리퀄이라기보다는 감독 자신의 자기고백적 진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인 '부산행'과는 결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산행'의 결말부가 구원과 희망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반면, '서울역'은 출구도 없고 전망도 없는 암울한 세계관으로 되돌아온다. 첫 장편 '돼지의 왕'에서 '돼지 되기'에 대해 말했다면, 이번에는 '좀비 되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도망가고 또 도망가는 지난한 과정의 끝에서 질문한다. 죽거나 좀비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8-25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포스트 세월호 재난영화:'터널'

주유소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 실랑이가 있을 건 없지만 그 과정에서 사장이 나오고 시간이 지체됐다. 막 출발하는 그에게 노인이 뒤쫓아오며 서비스 생수를 넣어준다. 받아서 대충 뒷자리에 던져놓는다. 그래도 오늘은 딸의 생일이고 케이크도 샀다. 강아지를 사달라는 딸의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잠시 아내와 통화 중에 고객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거래가 성사된다. 기분 좋은 귀갓길이다. 터널로 진입한다. 터널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므로. 그리고 한국에서 재난은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며 다가온다.김성훈 감독은 '터널'에서 영화 시작한 지 5분 만에 터널을 무너뜨린다. 전작 '끝까지 간다'(2013)에서 보여줬던 1인극에 대한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다. 붕괴된 터널 안에 홀로 고립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터널'은 재난 전 인물들의 전사(前史)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다가 재난이라는 불행을 신파적 코드로 사용하는 재난영화의 패턴을 따라가기보다는 터널 붕괴라는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갇힌 사람과 구조하려는 사람들, 이용하는 사람들과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터널 붕괴라는 사건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준다. 그 속에서 과잉된 정서적 자극이 아니라 '사람'과 '생명'이라는 가치와 연대의 소중함을 보여주려 애쓴다.한국의 재난영화는 점점 현실과 밀착하는 듯하다. 통제 불가능한 자연재해나 사소한 실수로부터 비롯된 개인적 불행을 넘어 사회·구조적 차원의 재난들이 소재가 된다. 내부와 외부의 단절이 뚜렷해지면서 고립된 인물들의 사투와 정부로 표상되는 외부의 무능과 외면이 그려지고, 그 배후에 자본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삼풍백화점 붕괴로부터 세월호까지 누적된 우리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세월호 이후 우리는 할리우드식 영웅적 구원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정부가 구조해주리라는 희망,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 같은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생명의 가치와 인간적 연대만이 가느다란 한줄기 희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포스트 세월호 이후 가능한 재난영화의 서사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8-18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역사의 해변에 서서: '덕혜옹주'

숲길을 내달려 해변에 섰다. 더 이상 달릴 곳은 없다. 백사장의 모래가 사막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잠시 후면 상해로 향하는 배가 도착할 것이다. 십분만 기다리면 금세 뒤따라오겠다던 사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막막함과 초조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서서 막연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대한제국의 황녀로 태어나 한 왕조의 끝에 서있는 그녀의 현실 같다. 과거는 그녀를 놓쳤고 미래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있는 곳은, 그러므로 역사의 해변이다. 허진호 감독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극적 삶을 스크린에 옮겼다. 한 왕조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했던, 아니 마지막 그 자체였던 여인의 삶은 생각만큼 화려한 극적 장치들로 치장되지 않는다. 신파를 만들기 위한 과잉된 연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허진호 식의 건조함과 담백함으로 일관하지도 않는다. 과장된 비장미와 담백함 사이의 미묘한 경계면을 타고 넘는다. 그 균형감은 한 인물의 삶을 비극적으로 과장해 전시하거나 민족주의적 감성에 기댄 신파로 기우는 것을 경계한다. 다만 조선이라는 망국의 상징적 인물로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대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인생유전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반해 큰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인물은 오히려 한택수(윤제문)다. 애초에 영화는 고종을 겁박하는 이완용 일파로부터 시작한다. 그 수하로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라와 민중을 버리고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서 있었던 한택수라는 인물은 영화를 일본과 한국이 아니라 민족과 반민족이라는 구조로 이동시킨다. 물론 악의 화신인 듯한 인물의 정형성이 갈등구조를 단순화시키고 구성을 헐겁게 만들기는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영어로 말을 하며 미군을 뒤쫓는 그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끌어안은 채 가고 잇는 뿌리깊은 '적폐'로서의 친일의 유산을 상기시킨다. '덕혜옹주'는 앵글의 협소함이나 구도의 단순함, 구성의 단조로움과 같이 다소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허진호만의 보다 깊이 있는 응시가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상업영화가 역사를 다룰 때의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8-11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경계를 응시하는 세 감독의 서정: '경계'

편지가 도착한다. '문과 블라디미르에게', '루디와 문에게', 혹은 '블라디미르와 루디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들이다. 한국, 인도네시아, 세르비아 출신의 세 감독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빌어 우리에게 도착한다. 발신지도 제각각이다. 때로는 일본에서, 때로는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에서, 때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유럽에서. 그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 발신지이고, 편지의 내용이 된다. 왜냐 하면 그곳이 어디든 경계를 넘은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경계 밖으로 쫓겨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계 안으로 침입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경계 위를 떠도는 사람 또한 있게 마련이다. '경계'는 큰 소리로 경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거나 냉엄한 시선으로 현실을 포착하지 않는다. 다만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정치·사회적 이유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을 서정적 영상과 내밀한 언어들로 응시한다. 세 감독이 보낸 편지들은 서로 질감이 다르고 에피소드는 나열되는 듯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가 드러나고 기억이 되살아난다. 국경을 넘기 전의 시간에 대한 향수와 경계를 넘게 된 사연, 인도네시아의 갈롱 캠프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디스트릭트6처럼 국경을 넘은 자들이 모여 살던, 그러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기억들. 경계는 공간을 분절하는 마디이자 시간의 마디이기도 하다. 세 감독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는 세르비아 출신이지만 지금은 싱가포르에 거주한다. 그가 베트남 여행 중 촬영한 에피소드는 인상적이다. 어디서 왔냐는 어설픈 영어에 '세르비아'라고 답하지만 조각배이 노를 젓는 여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곳이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배의 흐름에 따라 아름다운 풍경이 스치듯 지나고 몇 번인가 더 질문이 오간 끝에 블라디미르는 체념한 듯 '싱가포르'라고 답한다. 그제야 알아듣는다. 그녀는 싱가포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는 못한다. "서양 사람이 싱가포르에서 왔다고?" 그녀가 되묻는다. 베트남 말이다.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다. 간단한 질문 하나가 그들 사이에 경계를 만든다. 간단한 질문에도 길게 설명해야 하는, 혹은 답할 수 없는 불명료한 삶. 국경을 넘은 사람의 고단함과 피로감이 묻어난다. 아름다운 영상과 신선한 스탈일, 묵직한 주제의식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8-04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청춘들의 초인 되기: '초인'

소년과 소녀가 만났다. 그들의 청춘은 남루하다. 싸움에 대한 처벌로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소년은 도서관에서 40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오던 운동을 그만둘까 고민 중이다. 한때 유명 배우였던 엄마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한다. 소년의 삶에서 행복한 사람은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버지뿐인 듯하다. 소녀는 500권이 넘는 기록이 있는 도서 대출 카드를 가지고 있지만, 학교는 다니지 않는다. 소녀는 지금 그 책들을 처음부터 다시 빌려 읽는다. 우연히 만난 두 청춘이 남루한 삶 속에서 함께 초인을 꿈꾼다.'곡성'과 '시빌워'가 각각 600만명과 8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격돌하고 있을 무렵, 전국 28개 스크린에서 단지 6천여 명의 관객들과 만나고 조용히 막을 내린 영화가 있다. 서은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초인'이다. 대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에 밀려 고작 수십 개의 스크린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한국 독립영화의 현실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닌 1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견디기 힘든 현실을 끌어안고 살아내야 하는 영화 속 소년과 소녀를 닮았다.영화에서 도현의 운동 코치는 말한다. "넌 꿈이 있냐? 없지? 여기 체조부 애들 다 그래. 꿈 같은 거 없어, 인마. 그리고 나도 너희들에게 꿈, 희망, 이런 거 줄 수 없다고. 그냥 하는 거야, 그냥. 생각하면 몸도 아프고 괴로우니까." 아마도 현실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수현은 니체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사람이면 다 초인이래. 그런데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그 고통을 견디고 극복하면 우리 삶은 변화가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게 된대." 이들의 말은 덥석 집어먹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외면하기도 어려운, 뜨거운 감자 같은 삶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삶에 대한 이 척력과 인력이 또한 영화를 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배우들의 연기에서 감독의 섬세한 연출까지 풋풋하고 청량한 기운이 인상적인 영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7-28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좀비 엑소더스: '부산행'

그들은 방금 서울을 탈출했다.예상치 못한 재난이었고, 계획하지 않은 탈출이었다. 아니, 자신들이 탈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 서울역을 출발한 KTX의 목적지는 부산이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점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므로 열차는 하나의 직선이다. 그 직선이 만든 질서 위에서 그들의 탈출은 평온하다. 감염된 소녀가 열차 안으로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들은 모두 무사히 부산에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면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순식간에 승객들이 감염되며 일어난 혼란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점과 점 사이를 어긋나고 가로지르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감염은 직선의 질서로는 감당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공포이다. 평면 위의 얼룩이며, 직선에 일어난 균열인 것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웰메이드 장르영화다.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그의 출신과 경력에 따른 우려와 기대는 모두 옳았다. 간간이 눈에 띄는 만화적 쇼트와 연출이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스토리텔러로서 그의 능력은 유감 없이 발휘됐다. 서열화된 교실 내부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돼지의 왕'이나 수몰 예정 지역에 퍼진 사이비 종교를 다룬 '사이비'에서 보여준 절망적 세계관은 탈색되고, 캐릭터들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었던 인물 각각의 다면적 성격과 내적 서사는 과감히 생략했다. 그 대신 그가 장착한 것은 스펙터클이다. 강화유리를 뚫고 뛰어내리는 좀비 떼나 좀비들로 가득한 열차 칸을 통과하며 펼치는 호쾌한 액션은 장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상호 감독은 사회를 향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감염으로 인한 괴물들의 존재는 정부의 무능을 드러내고 자본의 부도덕성을 폭로한다. 안전을 보장해 주리라 기대했던 군인들이 오히려 좀비가 되어 승객들을 공격해오는 모습은 공권력에 대한 공포를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부산행'은 '탈출기'에 가깝다. 정작 그들이 도망쳐야 하는 것은 좀비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다. 금세 끝날 것 같던 그들의 탈주는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엑소더스처럼, 출발과 도착 사이의 공간을 떠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듯 손에 피를 묻힌 자들은 탈락하고 소녀와 임산부만이 부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과정을 가족 서사로 봉합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7-22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여성인권에 관한, 멀지만 가까운 이야기: 소녀와 여자

소녀의 뒷모습은 당당하지만 어딘가 불안하다. 등뒤로 살짝 보이는 얼굴이 검다. 낯선 피부색 때문에 소녀가 서있는 곳이 더욱 멀게 느껴진다. 그 사실을 짐작이라도 했던 것일까? 소녀가 입은 검은 티셔츠에 프린트 되어 있는 문구는 상대방에게 다가올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여성성기절제에 반대한다. 당신은 어떤가?'누군가는 할례(circumcision)라 부르고 누군가는 여성성기절제(Female Genital Mutilation, FGM)라 부른다. 어떤 소녀들은 순응하여 사회에 귀속되고 어떤 소녀들은 할례반대 캠프로 도피한다. 검은 피부와 흰 모자, 검은 티셔츠와 그 안에 새겨진 하얀 글자들이 대비되어 도드라진다. 그러나 여전히 소녀는 너무 멀리 있다. 아프리카의 전통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김효정 감독은 사하라 사막에서 펼쳐지는 마라톤에 참가했다가 <desert flower>라는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 <소녀와 여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발상 자체가 먼 곳에서 이루어졌다. 이집트와 수단, 소말리아 등지에서는 여성의 80%가 이 문제로 고통 받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용어조차 생소하다. 그러니 상관 없는 이야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독은 그들에게 카메라를 비춘다. 주제의 자극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 담담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는 않지만, 인터뷰가 이어질수록 여성성기절제 반대 입장으로 무게가 쏠린다. '전통'이라는 것 외에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이다.카메라는 때때로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감독의 모습까지도 포착한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있는 그녀는 이질적이다. 그러나 문득 그녀 역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공감과 연대가 피부색과 공간의 거리를 넘어 지금, 여기, 대한민국으로 소급되어 날아온다. 우리는 얼마 전 여성혐오로 인한 강남역 살인사건을 겪었고 저소득층 여성의 원활한 위생용품 수급에 관해 뒤늦은 논의를 했다. <소녀와 여자>가 더 이상 먼 곳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여성인권이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유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7-14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다양한 시선들 사이, 들여다보기: '시선사이'

빈 소주병을 귀에 갖다 댄다. 그녀는 보험을 파는 데 지쳤다. 엄마의 돈타령은 신물이 난다. 언니는 일주일째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피곤하다. 보험을 팔 수 있다는 생각만 아니었으면 소주병을 한 바구니 끌고 가 아이스크림과 바꿔달라는 여자의 부탁 같은 것은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심란한 마음만큼 몸이 무겁다. 벤치에 앉아 무심히 소주병에 귀를 대면 고동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듯, 여자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여자가 소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소주가 여자의 시름과 절망을 마신 듯하다. 최익환, 신연식, 이광국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시선 사이>는 2003년부터 만들어온 인권영화 시리즈의 13번째 작품이다. 떡볶이에 목숨 거는 여고생이 등교 후 교문을 폐쇄해 떡볶이를 먹을 수 없게 되자 학교와 맞서는 '떡볶이를 먹을 권리'(최익환), 조지 오웰의 '1984'처럼 정체불명의 빅 브라더에게 감시당하고 있다고 믿는 (혹은 예민하게도 그런 현실을 깨달은)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블랙코미디로 터치한 '과대망상자(들)'(신연식), 보험판매원인 주인공이 우연히 유령 같은 여성을 만나며 가족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통해 고독사를 환상과 현실을 교차하며 풀어낸 '소주와 아이스크림'(이광묵)은 추상적이고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쉽고 재미있게 보여준다. 시선이란 바라보는 방향이다. 그것은 삶의 방식일 수도 있고 욕망하는 대상일 수도 있다. 다양한 삶의 방식과 욕망의 갈래들이 있기에 시선들은 항상 부딪치고 갈등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가치나 누군가의 사소한 욕망, 혹은 행복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시선사이'는 다양한 욕망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우리 삶 속에서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무수한 시선들의 사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였기에 무심히 지나갔던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어쩌면 인권이란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 우리에게는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것을 일컫는 말인지 모른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가 아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권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인권위와 영화인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7-07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비틀기 혹은 새롭게 하기: '비밀은 없다'

딸이 사라졌다. 수소문을 해보지만 소녀의 엄마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딸과 자신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벽뿐이다. 함부로 상대방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는 벽. 딸이었기에 누구나 그런 벽을 치고 산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녀는 무속인이 된 친구를 찾아가 굿을 하고, 마지막으로 딸을 목격했다는 여학생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최면술사를 찾아간다. 딸을 찾겠다는 집념은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신경증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한 걸음씩 딸을 향해 걸어간다. 그녀가 밟고 가는 것은 이질적인 쇼트틀과 충돌하는 사운드, 불균질한 구성과 같은 것들이다. 장르는 뒤틀리고 이야기는 부조리하다. 누군가의 내면을 향해 들어간다는 것은 매끄러운 길을 걷는일이 아니다. 상대가 딸이라 할지라도.'미쓰 홍당무'에서 독특한 감성을 보여줬던 이경미 감독이 신작 '비밀은 없다'를 가지고 돌아왔다. 8년 만이다. 묘하게 코믹하면서도 애잔한 삽질캐릭터가 남긴 여운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기다림이 무척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8년이라는 긴 시간만큼 뚝심은 더 강해지고 마음은 단단해진 듯하다. 왜냐하면 <비밀은 없다>가 보여주는 장르 혹은 기획영화로부터의 기묘한 이탈은 개성이나 독특한 감성 같은 한두 가지 요소만으로는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비밀은 없다'가 예측 가능하고 뻔하지만 익숙하고 매끄러운 기존의 서사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미묘하게 시간을 뒤섞은 편집이라든가 굿판의 장구와 12음계 현대 음악 같은 사운드의 충돌과 동일한 멜로디의 반복, 진지한 분위기에서의 느닷없는 유머코드 등 다종다양하다. 그리고 자칫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방법들을 이용해 영화는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고통스러움, 황량하고 찢긴 아이들의 내면 풍경과 선의에서 비롯되기에 더욱 치명적인 순진한 악의,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맹목성과 폭력성 등을 드러낸다. 장르가 비틀리기 위한 것이고 의미가 새로워지기 위한 것이라면, 매끄러운 영화적 서사에 홈을 파내 의미를 만들어내는 '비밀은 없다'는 더없이 반가운 작품이다. 연홍이라는 인물에 대한 손예진의 해석도 눈여겨볼만 하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6-30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복잡 미묘한 소녀들의 세계: 우리들

소녀들이 나란히 서있다. 피구에서 아웃되어 운동장에 그어놓은 금 밖으로 쫓겨난 아이들이다. 소녀들은 가장 빛나는 여름을 함께 보내며 비밀을 나누었던 친구다. 그러나 서로 가장 아픈 말을 주고받은 사이이기도 하다.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어쩌면 소녀들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전히 짜증과 미움으로 가득차 있을 수도 있다. 소녀들 앞에 있는 금은 배제와 나눔의 선이지만 지금은 마치 출발선처럼 보인다. 출발선을 넘어 또 어떤 관계를 맺어갈지는 온전히 소녀들의 몫이다. '손님'으로 클레르몽페랑국제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고, '콩나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정곰상을 수상한 윤가은 감독이 또 다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우리들'을 장편 데뷔작으로 내놓았다. 열한 살 외톨이 선과 전학생 지아의 관계를 따라가는 '우리들'은 복잡 미묘한 소녀들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어른의 입장에서 섣부르게 판단하고 규정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감독은 집요한 관찰과 섬세한 시선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을 뒤쫓을 뿐이다. 영화의 후반부 친구가 때리면 너도 때리라고 다그치는 선을 향해 '그럼 언제 노냐'며 되묻는 동생 윤의 반전 같기도 하고 마법 같기도 한 질문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감독이 관객들을 향해 던지는 항변이자 화두이다. '우리들'이 관객들에게 남기는 화사한 감동의 여운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따돌림 받는 아이 선을 연기한 최수인과 전학생 지아 역의 설혜인은 복잡한 감정의 선을 따라가며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다. 맑고 투명한 얼굴에 어리는 감정의 변화는 몇 마디 대사보다 더욱 호소력 있다. 선의 동생 윤을 연기한 강민준 역시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아이들의 연기를 이렇게까지 끌어낼 수 있는 감독의 역량이 놀랍다. '우리들'은 체코에서 개최된 제56회 즐린 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6-23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탈주와 포획 사이: 아가씨

저택은 기괴하다. 절반은 동양의 양식이고 절반은 유럽의 양식이다. 동양의 양식을 따른 왼편은 평면적이고 서양의 양식을 따른 오른편은 수직적이다. 수직과 수평의 이질적인 조화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자리에 서재가 있다. 엄청난 양의 장서들로 웅장한 서양식 서가를 통과하면 아래로 향하는 두세 칸의 계단 너머로 동양식 홀이 펼쳐진다. 계단참에는 사내들이 앉아 있다. 품위 있는 정장 차림의 신사들이다. 그들의 시선은 홀 맞은편의 여인에게로 집중된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엄격한 자세로 책을 낭독한다. 청중은 진지하고 낭독자는 열성적이다. 여인의 음성이 신사들의 담배연기와 함께 허공에 흩어진다. 박찬욱의 미장센은 여전히 개성적이고 이미지는 강렬하다. 그에 반해 이야기는 언뜻 이전 작품들에 비해 헐거워진 듯이 보인다. 케이퍼와 멜로 장르를 살짝 비튼 여성들의 경쾌한 탈주극 정도로 읽힌다. 그런데 나홍진이 스크린을 넘어 현실에 해석놀이라는 판을 깔아줬다면, 박찬욱은 스크린이라는 평면 공간을 관객들에게까지 입체적으로 확대해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아가씨'를 관람하는 일이 낭독회의 확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낭독회는 그 정체를 접어두고서라도 남성의 시선에 포획되어 대상화된 여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아가씨'의 1장이 백작이 승리하는 남성 중심의 수직적 이야기라면, 2장은 동일한 시간을 반복하며 누락된 정보들을 들려줌으로써 여성이 주도하는 수평적 이야기이다. 그리고 3장은 그 교차점에 있다. 백작(하정우)이 코우즈키(조진웅)에게 들려주는 그들만의 폭력적 낭독회를 가질 때 그것은 탈출에 성공한 듯이 보이는 두 여성 숙희(김태리)와 히데코(김민희)의 선상 정사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된다. 그것은 관객을 청중으로 한 히데코와 숙희의 낭독회이며, 히데코 아가씨의 낭독회는 영화 '아가씨'의 낭독회가 된다. 남성 관객은 백작이나 코우즈키가 되고 여성 관객은 조금이라도 아가씨를 꿈꿨다면, 중절모를 쓰고 콧수염을 붙인 숙희가 된다. 관객의 시선에 포획된 그들은 다시 저택의 서재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 차분하게 다시 질문할 일이다. 과연 탈주는 가능한 것일까?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6-16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들: '철원기행'

퇴임식은 초라하고 식사 분위기는 답답하다. 어머니는 짜증을 내고 큰아들은 무심하게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 받는다. 며느리는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막내아들은 철없이 굴다가 형에게 핀잔만 듣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불쑥 이혼을 선언한다. 어머니는 펄쩍 뛰고 자식과 며느리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어서 불편하고 난감한 식사가 끝나 각자 흩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폭설 때문에 버스운행이 중단됐다. 뜻하지 않게 비좁은 관사에서 이박삼일을 지내는 가족은 이전에 모여 산 적이 없는 사람들 같다. 마치 모래알처럼 버석거린다.김대환 감독의 '철원기행'은 '식구(食口)'에 대한 영화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식구는 다정하고 살가운 어감이다. 그렇기에 여러 가족영화에서 식사 장면은 가족 구성원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철원기행'에서 식사는 보는 것만으로도 체할 것 같다. 지나치게 과묵하고 고집 센 아버지, 무뚝뚝한 큰아들, 철없는 둘째 아들, 싹싹하지만 속으로는 서운한 며느리, 불같은 어머니. 그들의 발을 묶어놓은 것은 폭설이 아니라 세월을 두고 눈처럼 차곡차곡 누적된 앙금인 듯하다. 길가에 쌓인 엄청난 양의 눈더미 만큼이나 두텁고 무거운 앙금 하나씩 품고 산다. 그렇기에 철원이라는 공간은 가족들 각자의 마음 속 풍경이다. 고립감과 황량함, 가끔 울리는 포성까지. 눈은 계절에 따라 녹고 또 쌓이겠지만 이들의 앙금이 녹을지는 알 수 없다. 앙금의 눈밭 위에서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복작거린다. 그게 가족이라는 듯이. 자극적인 설정이나 특별한 사건 없이 진행되기에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인물들이 일대일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파열과 긴장은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든다. 잘 조율된 연출과 제몫을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욕심내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담담히 가족들을 관찰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 영화를 가벼운 가족 멜로에서 비껴나게 만든다.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DGC) 졸업작품이지만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연출력을 보여준다.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했으며, 6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6-09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강철처럼 단단한 꽃: '스틸 플라워'

신발을 갈아 신는다. 밑창이 떨어져 길을 걷다가도 수시로 본드 칠을 해줘야 하는 낡은 운동화를 벗고 검정 탭슈즈에 발을 집어넣는다. 소녀는 방금 탭슈즈를 훔쳤다. 우연히 지하 댄스 연습장을 들여다본 이후로 탭슈즈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렵게 구한 일자리의 하루치 임금을 몽땅 신발장에 놓아두었지만 주인이 없었다. 제값을 치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 훔쳤달 수밖에.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 본다. 경쾌한 소리가 난다. 공연히 난간을 건드려 본다. 경쾌한 소리가 난다.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스텝을 밟아본다. 빈 밤거리를 뛰고 달린다. 그 위로 낮게 기타 연주가 깔린다. 그러나 관객을 위한 것은 아니다. 어둠속에 울리는 탭슈즈의 울림에 화답하기 위한 것일 뿐.박석영 감독의 '스틸 플라워'는 가출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감독의 전작 '들꽃'(2014)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듯도 하다. 말하자면 연속과 불연속의 경계 어디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훨씬 간결해졌다. 특별히 이야기라 할 만한 것도 없고 대사도 많지 않다. 카메라는 마치 1인칭 게임처럼 소녀 하담(정하담)을 등뒤에서 쫓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하다. 하담의 걸음걸이와 몸짓은 긴장되고 텅 빈 눈빛은 서늘하다. 배우의 몸짓과 눈빛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듯하다.그러나 영화가 담고 있는 현실은 그리 간결하지 않다. 무슨 이유에선지 제 몸보다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폐가에서 간신히 노숙을 면하는 소녀 하담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하는 말이라곤 서너 마디에 불과하다. "일하고 싶어요." "할 수 있어요." "돈 주세요." 그 외에 몇몇 비명 같은 소리들. 그 다급함과 절박함은 현실을 담고 있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아니다. 그녀의 말은 탭슈즈의 경쾌한 울림에 있다. 어설프지만 격정적이고 절망적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춤. 그렇기에 몰아치는 파도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발을 구르는 엔딩에서 클로즈업된 소녀의 표정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눈빛은 돌멩이만큼이나 옹골차고 미소는 싱싱하다. 꽃의 아름다움이 강철의 단단함과 만나는 순간이며, 꽃이 강철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6-02 경인일보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