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톡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4등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4등'

국가인권위 12번째 프로젝트영화부모님의 경쟁 대리자된 아이 조명오프닝 크레딧이 지나면 타이틀이 뜬다. 4등. 도트프린터로 찍은 것처럼 많은 점들이 모여 만든 글자다. 이 사회를 이룬 것이 수많은 4등이라는 듯이. 야무지게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흩어진 점들이 보인다. 4등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같다. 그러나 4등이라는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 조금 비껴났다 해도 여전히 4등을 구성하는 조금 삐딱한 점일 뿐이다.정지우 감독의 '4등'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열두번째 프로젝트이다. 인권영화 프로젝트는 평소에 외면했던 주제에 다양한 메시지를 담아 대중들에게 전달을 시도하며 매년 의미 있는 작업을 이어왔다. '해피엔드'(1999), '사랑니'(2005), '모던보이'(2008), '은교'(2012) 등에서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사회적 통념과 금기를 넘어선 이야기를 밀도 높은 드라마와 섬세한 감정묘사로 그려내며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을 선보였던 정 감독은 '배낭을 멘 소년'으로 옴니버스 영화 '다섯개의 시선'(2006)에 참여한 이후 두 번째로 인권영화프로젝트와 함께 작업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대회에서는 4등만 하는 수영선수 준호(유재상)와 이 소년을 둘러싼 어른들은 무한 경쟁이라는 화두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이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치열한 승부보다는 햇살이 스며든 수면 아래의 아름다운 물빛과 노는 것이 더 좋은 준호에게 국가대표 출신 광수(박해준)은 '집중력'이 부족하다며 체벌한다. 그러나 집중력이라는 말은 몰입보다는 경쟁과 승부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그것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냉정한 경쟁의 논리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하다.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것이 더 무섭다'며 체벌과 경쟁에 지쳐 수영을 그만두려는 준호를 향해 '네가 무슨 권리로 그만두냐'는 준호모의 외침은 어른들 경쟁의 대리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수중촬영과 결말부 대회에 참여한 준호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유영하는 이미지들의 조합은 이야기의 건강함과 더불어 여운을 남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5-26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불온한 미끼의 향연: '곡성'

겹겹이 산봉우리다. 중턱마다 길이 있다. 잘 포장된 도로가 산을 휘감으며 이어진다. 유장한 것은 산줄기가 아니라 매끈한 도로라는 듯이. 하늘에 오르지 못한 이무기가 산자락에 드러누운 듯하다. 이무기의 등줄기를 타고 가면 곡성이 나온다. 그러나 길은 이무기가 아니다. 낚싯바늘에 꿴 지렁이다. 곡성으로 가기 위해 길에 오르는 순간 날카로운 바늘이 입천장을 찢는다. 한 번 삼킨 미끼를 뱉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리가 없다. 끌려 다니는 수밖에.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수상하다. 평론가들의 극찬이 가득하고 열광한 관객들은 헐거운 이야기의 빈 구멍들을 스스로 메우기 위한 해석놀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폭발적인 반응이 어쩐지 개운치 않다. 강력한 몰입도와 참신한 스타일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반부의 코믹하면서도 불온한 분위기와 중반의 대결구도는 압권이다. 앞의 장면이 다음 장면을 끌어당기고 뒤의 장면이 이전 장면을 끌어안는다. 그러나 결말부를 다 보고 났을 때 남는 것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불공정한 게임을 치른 후의 불편한 피로감이다. 예를 들어 살을 날리는 굿판의 교차편집은 정보의 적절한 제공과 은폐를 통해 논리의 허점을 찌른다기보다는 신적 위치를 점유한 연출의 반칙, 혹은 기만에 가깝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곡성'은 기본적으로 미끼로 상징되는 현혹됨에 대한 이야기이다. 합리적 수사를 해야 하는 경찰은 소문에 현혹되고, 믿음을 지켜야 할 사제는 감정과 자기확신에 현혹된다. 그리고 관객은 강렬한 이미지의 충격과 맥거핀에 현혹되어 휘둘린다. 감각은 이미지의 미끼에 낚이고 이성은 맥거핀에 낚인다. 미끼의 연쇄체다. 정보는 축적되지 않는다. 논리는 비틀리고 의미는 미끌어진다. 물고 물리는 미끼들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곡성'은 하나의 거대한 미끼다. 이 순간 영화는 지워지고 영화가 놓인 자리만 남는다. 그리고 '도둑맞은 편지'처럼 감독과 관객과 평론가라는 기표가 미끼를 둘러싼다. '곡성'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곡성으로 가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길에는 갈림길이 없다. 이면도로도 없다. 카메라가 하늘에서 길을 내려다본다. 시선이 셔터를 누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5-19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영화의 본질은 표현의 자유

엄밀히 말해 '다이빙 벨'은 그리 수준 높은 작품이 아니었다. 기술적으로는 미숙하고 정서적으로는 과잉됐으며, 주제는 모호했다. 세월호의 진실을 갈망하는 관객들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2014년 당시 부산영화제(BIFF)에서 '다이빙 벨'을 보고 나온 평론가들은 부산시가, 혹은 서병수 시장이 왜 이 영화의 상영을 반대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다이빙 벨' 상영 강행으로 촉발된 부산시와 BIFF 측의 갈등은 영화제에 대한 감사, 이용관 집행위원장 등에 대한 고발, 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의 영화제 보이콧 선언 등으로 이어지며 20개월 동안 극단으로 치달아 올해 BIFF 개최 여부까지 불투명한 지경에 이르렀다.BIFF와 부산시는 그동안 부산시장이 당연직으로 맡아오던 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민간에 이양하기로 하고 김동호 현 명예집행위원장을 조직위원장으로 위촉하는 데 합의했다. 김동호 위원장은 부산영화제를 만든 당사자이며 15년 동안 이끌어온 명장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5월 중에 정관 개정을 하고 그 밖에 정관의 전면적인 개정은 내년 총회에서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BIFF와 부산시의 갈등이 간신히 봉합됨으로써 불투명했던 올해 BIFF 개최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동안 영화제를 흔들어온 서병수 시장의 진정성 있는 사과나 표현의 자유 및 영화제 독립성 보장 없이 인물만 바꾸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여론도 적지 않다. 지난 7일 폐막한 전주국제영화제는 국정원 간첩조작의 진실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자백'을 비롯해 해직 언론인 17명의 항거를 담은 '7년-그들이 없는 언론' 등을 상영했다. 앞서 김승수 전주영화제 조직위원장은 개막 연설에서 "영화의 본질은 영화를 만드는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표현에 있다"고 언급해 간접적으로 부산영화제 사태를 시사했다. 예술은 정치의 프로파간다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비판적 정신이 거세된 영역도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영화를 비롯해 예술 장르 뿐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권리다. 김동호 위원장의 위촉이 BIFF 개최를 위한 미봉책이 아니라 독립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영화계 전체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5-12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한국형 다크 히어로: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초립 대신 페도라를 썼다. 버버리 코트 안쪽에는 소음기를 단 권총이 꼽혀 있다. 도술은 쓰지 못하지만 명석한 두뇌와 냉정한 성품이 그의 무기이다. 민중의 안위를 걱정하는 선한 미소 따위는 없다. 어둠 속에서 양각되어 음흉하게 빛나는 잔혹하고 비열한 미소가 트레이드마크이다. 호부호형 같은 것은 필요 없다. 각성제와 불면증이 그의 친구이고 가족이다. 정의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죽도록 쫓고 싸울 뿐. 조성희 감독의 '탐정 홍길동: 사라진 사람들'에 우리가 알던 홍길동은 없다. 왜곡되고 비틀린 이미지들이 그려내는 것은 위악적인 반영웅의 모습이다. 악당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만큼 교활하고 약삭빨라야 한다고 믿는 '신암행어사'(2004)의 박문수를 닮았다. 허균이 창조한 민중의 영웅 홍길동이 한국의 1980년대에서 누아르와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적 형식을 만날 때 더 없이 색다른 영웅이 탄생한다. 그가 이끄는 활빈당 역시 불법적이고 비밀스러운, 게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한 탐정 조직이다. 전작 '늑대소년'(2012)에서 늑대소년과 소녀의 사랑을 국적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목가적 풍경을 배경으로 감각적으로 그려낸 조감독은, 이번에는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를 연상시키는 음영 가득한 영상으로 그만의 장끼를 유감없이 펼친다. 새로운 영웅 캐릭터의 창조와 그래픽 노블을 보는 듯한 시각적 쾌감은 관객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캐릭터와 영상미만큼 이야기에도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는 김병덕에 대한 개인적 복수를 위해 찾아간 마을에서 생각지 못한 음모를 꾸미는 광은회라는 조직과 상대하면서 잃어버린 기억들과 마주치는 홍길동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개인적 복수의 이유와 포기의 과정 모두 다소 허망하다. 상투적이거나 작위적 장면이 섬세한 고려 없이 연출된 점도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추리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홍길동은 관객을 끌어들여 추리에 동참시키기보다는 단지 추리 원맨쇼를 보여줄 따름이니까. 그래도 여전히 캐릭터만큼은 매력적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5-05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불안에 대한 보고서: '조난자들'

처음에는 그의 과도한 친절이 불편했고, 전과자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꺼림칙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 조롱과 협박이 뒤섞인 듯한 눈빛이 마음에 거슬린다. 그와 함께 온 밀렵꾼들도 위험해 보인다. 게다가 스키를 타러 왔다는 투숙객들은 무례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성격이 까칠해 보이는 여성 투숙객은 자신을 몰래 훔쳐봤다며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이기까지 한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하지만 불쑥불쑥 끼어드는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려 하는 걸까. 이 모든 상황이 불안하기만 하다.노영석 감독의 '조난자들'은 불편하면서 흥미롭다. 감독의 전작 '낮술'(2008)이 신선한 유머를 장착한 로드무비였던데 반해 '조난자들'은 폭설로 고립된 산장에 동숙한 사람들의 상호 불신과 오해, 편견을 밀실 스릴러의 장르적 관습을 차용해 보여준다. 밀렵과 성추행, 전과, 폭력적인 무례함 등 인물들이 제각기 뒤집어쓰고 있는 범죄의 이력 혹은 혐의는 불온하고 불길한 기운을 한껏 부추긴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이들과 고립된 채 함께 하는 일 자체가 조난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타자를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반사적인 공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조난시키는 것인지 모른다.그러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막연했던 불안감은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뒤바뀐다. 영화 포스터 카피처럼 '상상하지 못한 자들'의 방문은 단순한 오해나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것만 같았던 '조난'의 실체를 점차 드러낸다. 언제나 상정하고 있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존재의 출현이라는, 판타지에 가까운 결말이 모든 오해와 불신을 파괴적으로 해소시킨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하는 절대타자에 대한 공포는 다른 모든 문제들을 사소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우리 존재를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상진의 독백에 대한 대답은 공포와 불안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다소 무리한 결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기저에 깔려 있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노출시키는 뚝심 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학수 역의 오태경은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4-28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욕망이 남긴 우정의 균열: '수색역'

문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갑자기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다. 차비가 없기 때문도 아니다. 방금 전 밀어 넣은 돈다발에서 힘겹게 끄집어낸 지폐에 또박또박 글자를 적는다. 절망감과 취기로 인해 정신은 흐리멍텅하다. 볼펜은 지폐 위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색칠을 하듯 신경질적으로 글자를 덧쓴다. 마침내 지폐 위에 비뚤배뚤한 글자가 가득 찬다.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널 좋아한다."'수색역'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최승연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자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 '우수상', '영화진흥위원회', '경기콘텐츠진흥원', 'SBA서울산업진흥원' 등의 독립영화제작지원을 받은 영화다. 그만큼 탄탄한 시나리오가 뒷받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긋난 우정이라는 주제는 평단의 찬사와 함께 이제훈, 서준영, 박정민 같은 걸출한 신인배우를 배출한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2010) 이후 한국독립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었던 내용이다. 그러니 절친했던 친구들 사이에 생긴 미묘한 균열이 남긴 상처를 다룬 '수색역'이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전체적인 균형감과 조율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동감 있는 캐릭터와 뚝심 있는 연출, 개성 있는 신인들의 연기는 이 영화를 돋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색이라는 변두리의 운명이 네 친구와 결부되면서 영화는 단순한 청춘 심리극을 넘어선다. 재개발 소문만 무성했던 가난한 변두리 동네 수색에 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선다는 기대감으로 부동산업자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네 친구들간의 균열은 이런 들뜬 분위기에서 찾아온다. 우연한 교통사고로 부동산 업자 밑에서 일하게 된 원선과 그를 질투하는 상우의 갈등이 생각지 못한 결과를 낳고, 감정의 골은 설상가상 재개발에 대한 기대가 물거품이 되면서 파국을 맞는다. 막 스무살이 된 네 친구들은 수색이라는 후미진 공간의 기대와 설렘 그리고 실망감과 결을 함께 하면서 그들이 속해 있는 공간의 공기를 반영한다. 그들의 어긋남은 결국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욕망 속에서 발버둥치며 허우적대던 우리 시대의 초상이다. 상우 역의 공명과 더불어 맹세창, 이태환, 이진성 같은 신인들의 연기도 빛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6-04-21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총선이 끝나고 난 뒤, 영화

총선이 끝났다. 날선 목소리와 긴장된 근육으로 가득했던 선거판이 잠잠해졌다. 결과는 정부 여당의 완패다. 야권을 향한 적극적 지지라기보다는 근래 정부 여당이 보여준 패권주의에 대한 실망감의 표출로 보인다. 국민들은 이제 이념이 아니라 정치적 태도와 진정성에 점수를 주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프로스트vs닉슨'(2008)과 '링컨'(2012)은 하나의 시사점을 담고 있다. 전자가 텔레비전 쇼프로 진행자인 프로스트와 워터게이트의 주인공 닉슨의 설전을 다룬다면, 후자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반대자들을 설득해 나가는 링컨의 지난한 협상과정을 보여준다. 말과 말, 논리와 논리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패권이 아니라 설득과 협상이 민주주의의 정수라는 상식적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사실 지금껏 우리가 보아왔던 정치계의 행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여소야대 정국이라 하여 무조건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들에 조심스러우나마 어떤 기대를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계도 마찬가지이다. 영화계만의 노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부산영화제와 부산시의 갈등, 영진위 지원 정책이 영화계를 길들이기 위한 수단 아니냐는 일각의 의심과 혐의, 가속화되는 대자본의 스크린 독과점, '영화 및 비디오물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에 대한 요구 등이 20대 국회에서 어떤 변화를 보일지 주목하게 된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는 암살 위협을 받는 왕을 대신해 가짜 왕 노릇을 하는 '하선'이라는 천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천200만이 넘는 경이적인 관객수는 단지 영화적 짜임새만을 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정성 있는 정치에 대한 갈증이 관객들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모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상영기간 내내 스크린독과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그해 대종상에서 거의 모든 상을 휩쓸면서 '싹쓸이' 논란에 휘말렸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영화적 내용과 그것을 둘러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일종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인 셈이다. 당선자들이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 내걸었던 공약과 제시한 비전을 현실이라는 명분 아래 스스로 배신하는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6-04-14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희망 없는 청춘극: '글로리데이'

청춘극이란 보통 이렇다. 겁 없이 좌충우돌 소동을 벌이거나, 달콤한 사랑에 취해 있다가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하거나, 짐짓 인생의 깊은 고민을 안고 방황하거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회의 모순을 절감하고 반항한다. 모든 것이 아프지만 언젠가 지나갈 성장통이며 통과의례일 뿐이다. 번민은 잠잠해지고 몇가지 자잘한 처세의 테크닉들은 그들을 세련되게 만들 것이다. 혈기왕성하기에 활기차고 발칙하기에 귀엽다. 탁 트인 바다가, 눈부신 아침햇살이, 마음껏 내달릴 수 있는 길이 그들 앞에 있다. 그들은 성장할 것이고, 아직 젊기에 희망은 그들 내부에 있다.신예 최정렬 감독의 '글로리데이'는 청춘극의 이러한 도식을 거부한다. 감독은 관객들을 향해 속지 말라고, 청춘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더 이상 희망적이지 않다고 외치는 듯하다. 군입대를 앞둔 친구를 위해 함께 여행을 떠난 네 친구들의 경쾌한 한판 소동극일 것이라는 지루한 예상은 빗나간다. 사소한 해프닝일 것만 같았던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그들의 청춘과 희망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가를 드러낸다. 소동은 희망을 향하지 않으며 고난은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알 것이다. 소동은 범죄이고 고통은 단지 또 하나의 상처일 뿐이라는 것을. 거기에 고상한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사실 애초부터 그들의 우정은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이었다. 폭행을 당하는 여성을 돕는 정의로움도 결이 얇아 찢어지기 쉬운 종이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청춘이란 성장한 아이들이 아니라 미숙한 어른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희망이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부모들이 개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숙함을 깨닫는 순간 우정은 비열함으로, 정의감은 비겁함으로 쉽게 변질된다. 부모들의 존재감을 깨닫는 순간 차가운 현실의 벽이 그들을 옭죈다. 영화 속에서 네 친구들은 활짝 웃는 얼굴로 환호하며 바다를 향해 뛰어간다. 그 깊이도 냉혹함도 모르는 채. 그들을 기다리는 바다는 살기 위해 허우적대는 어른들의 세계일 뿐이다. 뚝심 있는 감독의 연출에 비해 정형화된 상황과 연기들은 다소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라이징 스타들의 캐스팅에 따른 연기력에 대한 우려는 말끔히 씻어준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6-04-07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무명 '괴남자'에서 '천만요정'이 되기까지

배우는 관객들의 갈채를 먹고 산다. 무명이란 단순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를 향한 갈채가 적은만큼 가난하고 고달프다. 꿈은 배를 불리지도, 옷을 입히지도 못하기에. 20년째 아동극 무대에 오르는 장성필은 파트라슈 분장을 하고 대사 한 줄 없지만 누구보다 열정을 불태운다. 그러나 넉넉지 않은 형편에 꿈만 향해 달려가는 그를 지켜보는 가족들은 지치고 답답하다.그러던 중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 세계적 감독 깐느 박이 '원석 같은 배우'를 찾겠다며 신작에 출연할 배우를 찾는 오디션을 진행한 것이다. 장성필은 자신의 연기를 많은 이들 앞에서 선보이고자 오디션에 참여하지만 실수를 연발한 끝에 결국 비웃음 속에서 퇴장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같은 극단 출신인 국민배우 설강식의 도움으로 영화에 출연한다. 석민우 감독의 '대배우'는 천만요정 오달수를 주연으로 내세웠다. '올드보이'(2003)에서 생니를 뽑히는 감금방의 괴남자. '달콤한 인생'(2005)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기묘한 무기 밀매상으로 관객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 줄곧 흥행작에 출연해 한국영화의 성공사와 함께 해온 오달수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는 연기인 듯 연기가 아닌 듯, 자연스러운 연기로 장성필이라는 인물을 이끌어낸다. 여기에 윤제문이 국민배우 설강식으로, 이경영이 깐느박으로 출연해 안정적인 연기로 어우러지며 자연스레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명민, 김새론, 유지태, 이준익 감독이 까메오로 출연해 보는 재미를 더한다. '대배우'는 천만관객을 동원한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만이 진짜 배우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역설적으로 천만요정 오달수를 통해 되새기게 만든다. '대배우'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연극 무대에서 구슬땀 흘리며 꿈을 포기하지 않는 배우들을 위한 영화다. 더 나아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영화는 '꿈'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꿈만 꾸며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엔딩 크레딧의 쿠키영상에는 출연 배우들의 오디션 장면과 주연 배우들의 연극배우 시절의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는 그들이 모두 대배우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이대연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2016-03-31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여성의 삶'이라는 역할극: '소꿉놀이'

끝내 울음이 터진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던 남편은 아내가 쓴 편지를 책상 위에 집어던지고 서로 묻어버린 꿈은 두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뜻하지 않은 임신과 결혼, 출산에 딸려온 '책임'이라는 두 음절은 무겁기 그지없다. 설상가상 시어머니에게 찾아온 갱년기와 시할머니와의 고부갈등은 집안분위기를 더욱 냉랭하게 만들었다. 친정의 분위기와는 다른 시집의 법도와 생활방식도 어렵기만 하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 동네아줌마라는 역할을 담은 이름표가 누더기처럼 매달린다. 문득 질문이 다가온다. 나는 왜 이러고 살지?김수빈 감독의 다큐멘터리 '소꿉놀이'는 감독 자신의 육아일기이자 결혼생활 적응기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해 대학에서 영상을 전공하는 동시에 뮤지컬 조연출과 통·번역 일을 겸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던 23세의 감독이 느닷없이 임신을 하면서 겪게 되는 임신과 출산, 육아와 시집살이의 일상을 여과 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준비 없이 갖게 된 아이는 '나'라는 개인 대신 엄마, 며느리, 아줌마라는 꼬리표를 덧붙이고, '꿈'이라는 소중한 단어 대신 책임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얹어준다. 결국 남편은 뮤지컬 배우의 꿈을 접고 요리사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르고, 남겨진 아내는 가장이라는 이름표 하나를 덧붙인다.자신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던 감독은 "분명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맞는데 사실 감독이 누군지는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한 개의 샷, 한 테이크로 죽을 때까지 찍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누군지도, 다음 씬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지만 단지 그 속에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낼 뿐이다. 카메라가 돌 듯,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결국 감독은 인생이 소꿉놀이일 뿐인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린다. 임신과 출산의 어려움도, 남편의 부재도, 시어머니와의 갈등도 돌이켜보면 소소한 일상 속에 녹아든 역할극 같은 것이다.짐짓 무거울 법한 이야기임에도 '소꿉놀이'는 시종 경쾌하고 발칙하다. 간간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과 거기에 노래가 곁들여진 뮤지컬 같은 연출은 작품의 분위기를 발랄하게 끌어올린다. 페미니즘이라는 무거운 옷을 벗고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여성 감독의 일상이 친근하면서도 새로운 공감으로 다가온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3-24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공권력의 폐허 위에서 : '널 기다리며'

칼이 날쌔다. 지나간 자리마다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른다. 그 자리로 생명이 새어나간다. 깨달음은 너무 늦다. 칼은 사라지고 뒤늦은 안타까움을 죽음이 덮는다. 이유는 없다. 단지 칼이 있고 그들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일곱 명의 목숨이 그렇게 희생되었다. 그 중에는 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귀가하던 형사도 있다. 그러나 법원은 일곱 건의 혐의 중 한 건에 대해서만 범행을 인정했다. 칼의 주인은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남은 사람들이 힘겹게 버티며 그 시간을 기다린다. 각기 다른 이유로. 모홍진 감독의 '널 기다리며'는 연쇄살인마의 범행에 집중하지 않는다. 잔혹한 범죄는 그가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장치에 불과하다. 그를 잡기 위해 애쓰는 형사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무능하며 정의구현이라는 직업적 소명보다는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있다. 누구보다도 연쇄살인마 기범(김성오)의 출소를 기다려온 사람은 희생자의 가족이다. 그에게 아버지를 잃은 희주(심은경)는 치밀하게 덫을 짜놓고 기범을 기다린다. 자신만의 사적인 복수를 위하여. 그런데 그 복수는 어딘가 이상하다. 그녀가 던지는 복수라는 돌은 기범에게 직격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어딘가를 향해 포물선을 그린다. 그 돌은 무언가를 맞추고 부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시하고 확인시키기 위한 화살표에 가깝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무너진 공권력의 잔해이다.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찰과 범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법을 조롱한다. 그 한 번의 조롱을 위해 그녀는 괴물이 된다. "신이 죽었기에 괴물이 필요하다"는 어설픈 희주의 철학적 표현에서 '신'은 '공권력'으로 바뀌어 읽힌다. '널 기다리며'를 잘 짜여진 스릴러라고 하기는 어렵다. 캐릭터는 모호하고 이야기는 촘촘하지 못하다. 김성오와 오태경의 연기는 훌륭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로도 비어있는 서사의 틈새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권력과 사적인 복수라는, 긴장 관계의 두 축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울리는 진동은 묘한 공명을 일으킨다. 그것은 아마도 '누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 사회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3-17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위로와 공감의 시작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각지에서 영화 '귀향'의 단체관람이 이어졌다.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1만5천여 명의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다. '귀향'은 이미 280만 관객을 넘어섰다. 영화를 단체로 관람한다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하는 질문도 들지만, '귀향'은 더 이상 '단지 한 편의 영화'가 아닌 듯하다. 제국주의와 전쟁, 폭력과 여성 등을 응시하게 해주는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 여성영화라는 관점에서도 그렇다. 남성의 권위가 확고하던 시대에, 시시한 남성들의 야욕 혹은 무능이 초래한 강점과 전쟁이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함은 단지 몇몇 개인의 불행과 비극으로 한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봉했던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은 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을 향했던 폭력과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질곡의 시간을 보여준다. 봉제공장 여공부터 다산 콜센터의 직원, 국내 여성 이주민 노동자까지 다루고 있다. 영화는 '수출의 여인상'의 복원 제막식을 거꾸로 돌리며 풍자적으로 시작한다. 구로공단 여공들의 노력을 기린다는 의미의 동상이다. 그러나 동상은 하나의 요식행위일 뿐이다. 그동안 경제발전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배제되어 있었다. 심지어 노동운동의 역사에서도 여성들은 지워져 있었다. '위로공단'은 숨어 있던 이들의 목소리를 끌어내어 담담히 그 말들을 듣는다. 듣는다는 것은 그 사정과 형편을, 고통과 서러움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기에. '귀향'과 '위로공단'은 과거 여성들의 아픔에 대해 분노하거나 싸움을 촉구하지 않는다. '귀향'은 씻김굿을 통해, '위로공단'은 소통을 통해 그 마음을 토닥여 준다. 어쩌면 그것이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는 지점일 것이다. 여성의 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여성의 지위를 보여준다. 위로란 또 다른 희망을 위한 출발점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위로와 공감의 역사가 이어지기를 기원한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3-10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나비를 위하여: '귀향'

노란 바탕에 드문드문 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좌측 아래에 건물 두 채를 철조망이 둘러싼다. 주변에는 총을 든 병사들이 서있다.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이 잿빛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향한다. 트럭이 향하는 곳에 거대한 구덩이가 있다. 붉은 화염이 수많은 소녀들을 집어삼킨다. 좌측 상단에 두 소녀가 숨어 그 광경을 목격한다. 14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은 당시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귀향'의 모티브가 된 그림이다. 조정래 감독의 세 번째 장편 '귀향'이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개봉 일주일만에 200만에 근접하고 있다. 손익분기점 60만을 훌쩍 넘은 수치다. 그러나 제작비를 클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한 만큼 '귀향'의 성공을 상업적 논리로만 따질 수는 없다. 드라마의 상투성과 전개의 허술함 등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영화적 재미라는 측면보다는 '귀향'이 지닌 역사적·현재적 의미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하다. 더구나 지난해 말 한일 합의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었던 상황에서 '귀향'의 성공은 흥행이 아닌 국민적 관심과 애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품의 선의가 완성도를 대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런 작품이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있는 동력은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귀향'은 위안부 문제를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으로 다루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성폭행 피해자인 은경의 씻김굿이라는 설정은 공감과 치유라는 목적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부 패망한 일본군은 소녀들을 커다란 구덩이에 몰아넣고 처형한다. 두려움과 고통의 눈물이 멈춘 자리에 소녀들의 시신이 즐비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카메라가 죽은 소녀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는다. 그 얼굴들은 역사의 한 시기에 단지 불운했던 어떤 소녀들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자리잡은 상처의 모습이다. 이윽고 죽은 소녀들의 넋이 나비가 되어 아리랑 가락을 타고 날아오른다.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어디론가 향한다. 나비들의 귀향이다. 그러나 나비들이 건넌 것은 산과 들만은 아니다. 시간을 타고 넘어 지금, 우리에게로 온다.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피워올린 위로와 공감의 꽃잎에 나비들이 내려앉을 때 소녀들의 진정한 귀향은 이루어질 것이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3-03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투명한 흑백 시집: '동주'

한 청년이 잠들어 있다. 앉은 채 모로 기댄 불편한 잠이지만 그의 표정은 평온하다. 마치 고단한 사유를 잠시 내려놓은 듯이. 기차의 흔들림도 그의 수면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가 기댄 곳은 옆자리 청년의 어깨이다. 청년은 잠든 친구에게 어깨를 빌려준 채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아마도 시일 것이다. 그의 표정 역시 평온하다. 친구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든 것처럼 그는 시의 어깨에 기대 잠시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른다. 주권과 말과 이름까지 빼앗긴 시대에 각자의 길을 선택한 두 청년의 평온한 한때가 기차의 덜컹거림과 함께 흘러간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윤동주의 시집을 정성스레 베껴 쓴 필사 시집 같다. 영화 속 동주가 어렵게 구한 정지용과 백석의 시를 필사하듯이 이준익 감독은 자신만의 연필로 꾹꾹 눌러 윤동주의 삶과 시를 흑백 영상으로 필사한다. 윤동주 시의 낭송과 함께 펼쳐지는 흑백영상은 오히려 투명해 보인다. 동주를 보러 갔다가 몽규를 보고 왔다는 우스갯말을 할 정도로 박정민의 연기는 단단하고 강하늘의 연기는 처연하다. 적극적인 운동가도 아니고 당대에 이름난 시인도 아니었지만 시대를 아파하고 고뇌했던 청년 동주의 삶은 친구 몽규의 삶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동주가 그렇게 원했던 신춘문예에도 먼저 당선되고 연희전문의 졸업에서 우등상을 탄 것도 몽규였다. 그리고 교토제대에도 몽규는 홀로 합격하였다. 적극성과 단호함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그가 동주에게는 뼈아픈 열패감의 근원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시 속으로 파고들었는지도. 그러나 몽규가 기대 잠든 곳은 동주의 어깨였다. 예술가로 살고자 햇던 동주와 운동가의 삶을 선택한 몽규의 삶은 담쟁이넝쿨처럼 서로 얽히며 서로를 지탱하며 위로 뻗어나가는 듯하다. 영화의 말미에 동주는 조선말로 자신의 시집 제목을 또박또박 발음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그때 화면 밖에서 문소리가 난다. 말이 끊긴다.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그가 다시 입술을 연다. '...시'. 이 한 음절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하늘이라는 부끄러움의 윤리와 시대와 역사의 바람과 이상으로서의 별이 그 속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2-25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먹고 살기의 두려움: '잡식가족의 딜레마'

아기가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그 위로 모빌이 떠다닌다. 얼룩말과 얼룩소 등 동물 인형이 매달려 있다. 엄마가 젖을 먹인다. 양껏 먹은 아기는 다시 잠이 든다. 천진난만한 아기의 얼굴 위로 엄마가 흥얼거리는 자장가가 흐른다. 그리고 곧 잠든 돼지새끼들의 모습이다. 어미의 젖을 빨다가 잠이든 새끼들이 평화롭다. 화면이 바뀌면 다시 잠든 아이의 얼굴이다. 감독의 시선 속에서 새끼돼지와 자신의 아기가 교차된다. 점차 돼지와 사람이 겹쳐진다. 그리고 지금껏 무관심했던 돼지가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동물원의 새끼호랑이를 다룬 '작별'(2001)과 로드킬을 소재로 한 '어느 날 그 길에서'(2006)를 통해 지속적으로 동물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던 황윤감독이 지난해 선보인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돈까스이면서 살아있는 돼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돼지에 대한 최초의 목격은 2010년 구제역 파동 때였다. 그러나 그건 살아있는 돼지라기보다는 거대한 구멍 속에 갇혀 죽어가는 돼지였다. 그리고 대규모로 돼지가 사육되는 공장형 축사에서 그녀가 본 광경은 살풍경하다. 단순한 호기심은 질문으로 바뀐다. 먹어도 좋은가? 아니라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보다는 환경이 좀더 나은 생태적 농장을 찾아가지만 질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설연휴를 맞아 지난해 놓친 영화들을 찾아보다가 마주친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힘주거나 무게를 잡지 않는다. 친근하게 감독 자신의 가정과 자신이 방문한 농장을 담아낸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서 마주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무관심이다. 밥상 위에 잔득 올라온 고기들 앞에서 난처하기 이를데 없었다. 먹는다는 행위가 단순한 미각과 포만의 쾌감 뿐 아니라 삶의 지속이라는 단순하지만 명백한 명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감독처럼 당당히 채식주의를 선언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먹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치환되어 다가온다. 짐승을 사냥하며 감사와 사죄의 기도를 올렸다는 아메리카 인디언 전사들의 일화가 떠오른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2-18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우리 시대의 법조문 외전:검사외전

그는 억울하다. 얼마 전까지 검사였지만 조사 도중 피의자가 사망하면서 살인 누명을 뒤집어썼다. 증언들은 모두 그에게 불리하고 정황은 그를 지목한다. 검찰은 15년 형을 구형했다. 답답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에게 선배이자 상사인 차장검사는 혐의를 인정하라고 권한다. 그런 후 정당방위로 무죄를 받아내자는 것이다. 그는 인정하기 어렵다. 항의하는 그에게 차장검사가 말한다. "나는 지금 진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법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이 순간 법은 진실과 분리되고 검사는 정의라는 신념체계가 제거된 기술자로 전락한다. '외전'은 정식적이고 공식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뜻한다. 그러니 '검사외전'이란 검사에 대한 기존의 신화화된 믿음을 따른다기보다는 그 이면, 혹은 실상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신인 이일형 감독의 데뷔작 '검사외전'은 사기극과 법정드라마를 절묘하게 중첩시킨 버디무비이다. 사기극이든 법정 드라마이든 모두 법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검사는 오만함으로 강압수사를 일삼고 권력을 위해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이들과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 사기꾼 한치원(강동원)이다. 그는 발칙하고 능청스러우며 매력적이다. 그리고 수감되어 있는 변재욱(황정민)을 대신해 진실을 밝혀낸다. 그는 마치 변재욱 검사의 아바타 같다. 수감 중 재소자들을 도와주며 변재욱은 명문화된 조항으로서의 닫힌 체계인 법을 벗어나 단순한 사실로서의 진실을 비껴나 그 이면에 있는 정의에 대해 깨달은 것인지 모른다. 그런 태도가 사기꾼 한치원과 만나면서 한층 자유롭고 경쾌해진다. 그리고 재판을 앞둔 한치원의 국선변호사에게 변재욱은 기만과 이익 사이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조언한다. 어쩌면 이 조언은 법과 제도가 지켜주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를 향한 것인지 모른다. 선의가 기만당하고 정직이 조롱당하며 권위에 대한 믿음과 순응이 배신당하는 세상에서 조금 더 영리하게 살아남으라는 말은 아닐까? "사냥꾼의 올무에서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이 떠오른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이다. 이 구절이 우리 시대의 법조문 '외전'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2-11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차이가 만들어내는 조화 '오빠생각'

오빠가 노래를 하라고 다그친다. 소녀는 거부한다. 또 뭔가를 잃어버릴 것 같아 무섭다. 이미 소녀는 노래 때문에 너무도 큰 것을 잃었다. 국군 앞에서 인민군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인민군 군가를,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 군가를 불러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냉혹한 삶의 이치를 소녀는 알지 못했다. 단지 노래가 좋았을 뿐이다. 인민군 군가를 가르친 아버지는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 다시 노래를 부르면 이번에는 오빠를 잃을까 겁이 난다. 그 모든 것이 노래 때문이 아니라 전쟁 때문이라는 사실을 소녀는 이해하지 못한다.'완득이'(2011)와 '우아한 거짓말'(2013)을 통해 가난과 다문화, 왕따 등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여왔던 이한 감독의 신작 '오빠생각'은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실화를 모티브로 전쟁이라는 살육의 시공간을 단지 참혹함만으로 그리지 않고 음악과 아이들을 통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좌우 이념 갈등이나 남북 간 체제 대립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며 미래를 위해 남겨두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영화 속에서 춘식과 동구는 한 마을에서 살았던 친구지만 서로의 가족을 죽고 죽이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 한쪽은 인민군의 부역자로, 한쪽은 국군의 부역자로. 아이들의 분노는 맹목적이고 증오는 날카롭다. 그들을 향해 한중위는 말한다. 그건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라 어른들이 한 일이라고. 너희들의 싸움은 서로 다른 음을 불러 조화를 이루는 화음이 되어야 한다고. 서로 다른 음이 충돌하여 이루는 화음의 메시지는 차이가 대립과 갈등이 아닌 조화를 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이 영화가 왜 합창을 소재로 하고 있는지 말해준다.그러나 전쟁, 고아, 합창이라는 소재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신파적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한상렬(임시원)과 박주미(고아성)의 평면적 캐릭터와 허술한 구성도 아쉽다. 특히 관객의 눈물을 짜내기 위해 삽입한 몇몇 설정과 에피소드는 영화의 윤리성을 크게 해친다. 그중에서도 작위적 결말부는 이 영화가 신파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이다. 다만 갈고리를 연기한 이희준의 연기는 상당히 흡입력 있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1-28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그날의 분위기' 로코니까 괜찮아?

KTX가 빠르다. 그 안에서 남자가 옆자리 여성에게 작업을 건다. 노골적이고 무례하다. 여자는 불쾌하지만 공교롭게도 비즈니스로 그와 엮이게 된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한 목적으로 '그날'을 보내면서 여자는 점차 그의 매력을 만나게 된다. 마치 KTX가 정해진 노선을 가는 것처럼. '그날의 분위기'는 로코니까.조규장 감독의 '그날의 분위기'는 젊은 남녀의 '원나잇'을 소재로 한 로맨틱코미디영화다.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난 '맹공남'과 '철벽녀'의 공방은 흥미롭다. 김재현 역의 유연석과 배수정 역의 문채원은 달달한 케미를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성을 배제한 '그날'이라는 판타지같은 시간에 기댄 영화는 한여름 밤 꿈처럼 느껴진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일종의 판타지이기는 하다. 두 남녀가 만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랑에 이르는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은 현실에서는 좀체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 판타지를 관객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매력적인 캐릭터와 로코의 장르적 관습이다. 그런데 '그날의 분위기'는 이런 요소들이 매끄럽지 못하다.남녀 캐릭터는 적당히 매력적이고 연기도 어색하지 않다. 그렇지만 원나잇이라는 소재는 묘하게 참신하지 못하다. 더구나 원나잇으로 출발해 사랑으로 가는 이야기 전개는, 과거를 참회하고 진심과 진실로 이행하는 도덕 교과서처럼 진부하다. 게다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로코라는 장르적 관습에 짓눌리는 뻔한 전개는 충실함을 넘어 단지 답습하는 느낌이다. 기능적으로 배치된 조연진도 극의 흐름에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원나잇이라는 소재는 마치 KTX의 속도를 연상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라면 완급이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노선을 따라가는 충실성도 장르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KTX의 속도와 안정감은 정밀함에서 비롯된다. 무리하게 우연에 기대는 황당한 전개를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섬세한 묘사와, 수긍 가능한 이야기 전개가 아쉽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1-21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흩어진 퍼즐의 내면 '나를 잊지말아요'

한 남자가 파출소 안으로 들어온다. 눈빛은 텅 비어 있고 걸음은 똑바르지 못하다. 실내는 소란스럽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경찰에게 다가간다. 그는 지금 실종신고를 위해 이곳에 왔다. 건조하게 실종자의 인상착의를 묻는 질문에 사내는 머뭇거리며 대답한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이번에는 실종자와의 관계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사내가 대답한다. '본인'이다. 가벼운 멜로가 되기에는 무거운 오프닝이다. 이어지는 사내의 독백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러나 자신을 알고 있을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외침이다.신인 이윤정 감독의 '나를 잊지 말아요'는 멜로와 미스터리를 축으로 하여 기억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난해 개봉했던 '뷰티 인사이드'가 수시로 몸이 바뀌지만 동일한 기억을 지닌 남자의 사랑 이야기라면, '나를 잊지 말아요'는 몸은 그대로인데 기억이 사라진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십년 치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갔지만 알고 보니 집이 있고 변호사라는 멀쩡한 직업도 있다. 몇몇 난처한 점을 제외하곤 다행히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그렇게 약간은 불편하지만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석원(정우성)은 우연히 알게 된 진영(김하늘)과 사랑하게 되면서 미스터리한 퍼즐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퍼즐은 조각난 사랑일지도 모르고, 파편화된 기억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석원 자신일지도.'나를 잊지 말아요'는 미장센 영화제에서 상영된 25분짜리 단편을 장편으로 제작한 것이다. 장편과 동일한 오프닝으로 시작하여 기억을 잃은 남자(김정태)의 공허하고 황량한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단편에 없던 진영이라는 인물이 삽입되고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인 외피를 입으면서 영화가 지닌 주제의 무게감은 반감한다.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석원과 진영의 캐릭터도 모호하고 산만하다. 깜짝 반전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면서 이전까지의 구성이 허술하게 직조된 점도 아쉽다.내 기억을 가지고 있는 타인의 존재가 그저 심술 맞은 외장하드로 왜곡되어 읽히는 것은, 기억이 자기 정체성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첨단 정보기술의 시대에 기억상실이 더 이상 멜로의 소재가 될 수 없다는 반증인지, 아니면 단지 만듦새 때문인지 생각해보게 된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1-14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낮지만 큰 울림 '낮은 목소리'

암전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여성 감독의 음성이다. 젊은 변영주 감독은 담담하게 다큐멘터리의 제작 동기를 밝힌다. 기생 관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감독은 요정에서 일하는 한 여성을 알게 됐고, 곧 그녀의 어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녀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요정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속에서 암전이 흐른다. 그 잠깐의 침묵이 감독에게는 오랜 혼돈과 질문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참혹한 성적 착취의 대물림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그 고리는 왜 끊어지지 않는가? 암전 위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간략한 자막이 지나면 1993년 12월 23일의 풍경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백 번째 수요집회가 열린 날이다.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는 호들갑스럽지 않다. 쉬운 분노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값싼 연민의 감성에 젖어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시종 담담하게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생활과 증언을 담아낸다. 선정적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꿈과 그리웠지만 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의 남은 소망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할머니의 주름진 몸을 더듬으며 끝을 맺는다. 그 주름 속에 깃든 것이 단순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가치가 배제된 자연의 시간도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일구고 만들어낸 인간의 시간, 바로 '역사'일 것이다. 그 주름 속에서 개인의 시간은 역사로 흘러든다.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 이듬해인 1992년 8월부터 시작된 수요집회는 24년째 이어져 오고 있으며, 1천 회를 훌쩍 넘긴지도 꽤 됐다. 몇몇 할머니들만이 초라하게 모여 항의하던 그곳에는 지금 소녀상이 서 있다.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소녀에게 추운 날이면 누군가 털모자와 목도리를 걸쳐주기도 한다. 영화의 말미에 한 할머니는 "우리는 피해 배상을 바라는 것이지 위로금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뜻을 밝힌다. 역사가 흘러간 과거 속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열린 미래를 향한 공동체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오래 전의 다큐멘터리를 다시 꺼내 보며 소녀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짚어보게 된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1-07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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