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울음이 터진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던 남편은 아내가 쓴 편지를 책상 위에 집어던지고 서로 묻어버린 꿈은 두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뜻하지 않은 임신과 결혼, 출산에 딸려온 '책임'이라는 두 음절은 무겁기 그지없다. 설상가상 시어머니에게 찾아온 갱년기와 시할머니와의 고부갈등은 집안분위기를 더욱 냉랭하게 만들었다. 친정의 분위기와는 다른 시집의 법도와 생활방식도 어렵기만 하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 동네아줌마라는 역할을 담은 이름표가 누더기처럼 매달린다. 문득 질문이 다가온다. 나는 왜 이러고 살지?김수빈 감독의 다큐멘터리 '소꿉놀이'는 감독 자신의 육아일기이자 결혼생활 적응기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해 대학에서 영상을 전공하는 동시에 뮤지컬 조연출과 통·번역 일을 겸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던 23세의 감독이 느닷없이 임신을 하면서 겪게 되는 임신과 출산, 육아와 시집살이의 일상을 여과 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준비 없이 갖게 된 아이는 '나'라는 개인 대신 엄마, 며느리, 아줌마라는 꼬리표를 덧붙이고, '꿈'이라는 소중한 단어 대신 책임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얹어준다. 결국 남편은 뮤지컬 배우의 꿈을 접고 요리사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르고, 남겨진 아내는 가장이라는 이름표 하나를 덧붙인다.자신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던 감독은 "분명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맞는데 사실 감독이 누군지는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한 개의 샷, 한 테이크로 죽을 때까지 찍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누군지도, 다음 씬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지만 단지 그 속에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낼 뿐이다. 카메라가 돌 듯,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결국 감독은 인생이 소꿉놀이일 뿐인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린다. 임신과 출산의 어려움도, 남편의 부재도, 시어머니와의 갈등도 돌이켜보면 소소한 일상 속에 녹아든 역할극 같은 것이다.짐짓 무거울 법한 이야기임에도 '소꿉놀이'는 시종 경쾌하고 발칙하다. 간간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과 거기에 노래가 곁들여진 뮤지컬 같은 연출은 작품의 분위기를 발랄하게 끌어올린다. 페미니즘이라는 무거운 옷을 벗고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여성 감독의 일상이 친근하면서도 새로운 공감으로 다가온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6-03-24 경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