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톡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놀라움 없는 마술 ‘조선마술사’

손을 쥐었다 펴면 새가 날아간다. 여인이 그림이 되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가 하면, 위험한 칼날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나타난다. 마술의 세계는 놀라움의 세계다. 마술이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즐거운 까닭은 속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치밀한 설득력 때문이다. 마술의 진실은 눈속임의 방법에 있지 않으며 경이와 탄성, 그리고 즐거움에 있다. 조선시대 의주의 화려한 유곽 물랑루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조선마술사’는 화려하면서도 아찔한 마술을 소재로 하고 있다.그러나 배경은 참담하다. 조선사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인 병자호란 직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민중들이 살해되거나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기아로 죽어간다. 운좋게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라 천대받고 조선의 공주는 첩으로 팔려간다. 관리들은 여전히 암투와 벼슬놀이에 여념이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마술은 단순한 오락이나 도피라기보다는 간절히 원하는 기적이며 희망일 것이다. 그러니 마술처럼 아름답고 절박한 사랑 이야기 하나쯤 피어날 법도 하다. 그것이 김대승 감독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번지점프를 하다’(2000), ‘혈의 누’(2005), ‘가을로’(2007), ‘후궁:제왕의 첩’(2012) 등 김대승 감독의 필모는 화려하다. 게다가 원작은 소설가 김탁환과 기획자 이원태가 의기투합해 만든 창작집단 원탁의 동명 소설이다. 이쯤 되면 기대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재와 배경은 괴리되어 있고 연출은 힘이 없다. 이야기는 느슨하고 에피소드는 파편화되어 있는데다가 인물들은 기능적으로 소모된다. 감정선은 따라가기 어렵다. 곽도원과 이경영의 카리스마도 맥락이 없어 빛을 발하지 못한다. 귀몰(곽도원)의 분노는 과도하고, 안동휘(이경영)의 애정은 순진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물랑루의 화려한 세트만 눈에 남는다.마술이 무대 위와 뒤편의 잘 짜여진 협업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영화의 서사는 인물들 상호 간 긴밀함과 각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유기성으로 이뤄진다. 노련한 김대승 감독이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잠시 길을 잃은 것인지도. 그렇기에 더욱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2-31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한국형 산악영화: ‘히말라야’

등정의 쾌감과 스릴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연의 웅대함이나 등반 과정에 대한 사실적 묘사도 아니다. 극단적 상황에 놓인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묘파는 더더욱 아니다. 등반의 목적이 다르기에 영화의 성격도 다르다. 그들은 정상에 이르기 위해 올라가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오지 못한 동료를 찾으러 간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찾기 위해 산을 오른다. 그러므로 그들의 등반은 올라감 보다는 내려옴에 목적이 있다. 상승이 아니라 하강에, 모험이 아니라 귀환에 그 초점이 맞춰진다.이석훈 감독의 ‘히말라야’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휴먼 원정대’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등반이 정상 정복이라는 과정 속에서 자연과의 대결, 혹은 합일을 통해 인간의 강인함에 대해 말하는 반면 ‘휴먼 원정대’는 내려옴의 과정을 통해 인간 상호 간의 유대와 관계의 회복에 대해 역설한다. 무택(정우)의 죽음을 두고 “산에 올랐고 산이 되었다”고 말하는 동규(조성하)에게 “올라갔으면 내려와야지”라는 홍길(황정민)의 말은 등반 역시 사람의 일임을 일깨운다. 어쩌면 등반의 목적이 오름이 아니라 내려옴에, 모험의 여정이 아니라 일상으로의 귀환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시신을 끌고 내려오지 않는다. 돌무덤을 만들어 망자를 떠나보낸다. 결국 휴먼 원정대의 목적은 장례와 애도이다. 돌무덤은 산이 아니라 원정대의 마음속에 쌓인다. 등반이라는 산의 이야기를 애도라는 인간의 이야기로 끌고 내려오는 것이다.이석훈 감독은 자연의 위용과 등반의 혹독함을 보여주는 전반부와 홍길을 위시한 등반대가 무택(정우)의 시신을 찾으러 가는 휴먼 원정대를 그린 후반부로 나뉘는 영화의 이원적 구성이 갖는 위험을 영리하게 돌파하며 관객을 원정대의 감정에 이입시킨다. 황정민과 정우를 비롯해 배우들의 연기는 단단하다. 실화에 바탕한 영화들이 그렇듯이 영화의 사실성이 전달하는 감동은 진하다. 그러나 실화의 감동이 곧 영화의 감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적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한 작위적 장치들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 감동이라는 당위가 신파를 용인하는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한국형 산악영화를 기대했던 ‘히말라야’에 아쉬움이 남는 까닭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2-24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땅의 파괴사: ‘대호’

깊이 가라앉고 높이 솟구친다. 흙과 바위의 격랑이 산을 이룬다. 골과 골 사이에 생명이 깃들고 봉과 봉 사이에 시간이 숨쉰다. 그 속에서 호랑이가 포효하고 포수가 불을 댕긴다. 범이 포수의 살을 찢고 포수가 범의 가죽을 벗겨도 산은 관여하지 않는다. 단지 모든 것을 기억하고 품을 뿐이다. 그것이 산의 존재방식이며 땅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대호’는 호랑이와 포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산에 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신세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박훈정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 ‘대호’가 개봉됐다. ‘신세계’가 경찰과 폭력조직(혹은 기업)이라는 두 거대 조직 간의 대결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보여줬다면, ‘대호’는 근대와 전근대라는 두 시간 사이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소멸해 가는가를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포수와 맹수라는 대립구조, 그리고 호랑이라는 민족적 상징에 매몰되지 않고 영리하게 조금씩 비껴나가면서 시간의 단층을 드러낸다. 영화속 일본군과 포수대가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를 쫓는 이유는 가죽을 얻기 위함이다. 가죽이란 형체는 있으나 생명이 사라진 껍질일 뿐이다. 산주, 혹은 산군이라 불리는 대호는 좁게는 민족혼의 상징이며 넓게는 산으로 표상되는 땅의 생명과 순리이거나 전통적 삶일 것이다. 제국주의 또는 근대의 폭력 앞에서 저항해 보지만 점차 힘을 잃어가는 대호와 포수 만덕은 가죽이 되어 남기를 거부한다.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델마와 루이스’(1991)의 비약을 떠올리게도 하며 ‘취화선’(2002)의 초월과 닮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일은 산에서 이루어진다. 순응할 수도, 더 이상 저항할 수도 없는 이들의 탈주는 흰 눈과 시간 속에 삼투된다.번번이 대호 사냥을 실패하자 일본군이 동원한 방식은 폭약이다. 엄청난 양의 폭약이 터지는 스펙터클은 산이 파괴되는 현장이다. 흙이 튀고 아름드리나무가 꺾인다. 산짐승들은 영문도 모른채 무차별적으로 학살된다. 땅의 질서와 생명의 가치가 훼손되는 참혹함 앞에서 드는 한 가지 질문은, ‘우리 인간의 스펙터클은 왜 항상 폭력적인가?’ 하는 것이다. ‘대호’의 애잔함이 통렬한 이유이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2-17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새로운 컬트의 탄생: ‘무서운 집’

어색하다. 여주인공이 호러퀸의 면모를과시하며 비명을 내지를 때도 섬뜩하고 공포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당혹스럽다. 무한정 밥을 먹고 김치를 담그는가 하면 뜬금없이 책을 읽기도 한다. 마네킹 모습을 한 귀신은 어설프기 그지 없다. 이야기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새집을 사 이사온 주부가 남편이 출장을 떠난 후 나타난 귀신을 물리친다.무엇보다 봐야 할 장면은 예고편에서 다 봤다. 도대체 이 영화의 정체는 무엇일까?양병간 감독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1993)이라는 기묘한 제목을 기억하는 영화팬들은 있을 것이다.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준 에로영화로 제목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온 그의 신작 ‘무서운 집’이 하제다. 비난과 조롱에서 전복적이라는 호평까지 평단과 관객, 네티즌의 호불호는 극단적이다. 인터넷 포털의 평점은 9점 대에 육박한다. 병맛 영화를 다루는 한 팟캐스트에서는 이 영화를 극찬하기도 했다. 2015년 한국의 컬트는 단연코 ‘무서운 집’인 듯하다. 이전에도 유사한 현상을 보인 영화가 있었다. ‘클레멘타인’(2004)의 경우 네티즌들에 의해 포털사이트 영화평점이 9점을 훨씬 상회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악동의 놀이에 가까웠으며 망작에 대한 조롱과 야유의 성격이 더 강했다. 해석이 아닌 전설 만들기 놀이였던 셈이다. 그런데 ‘무서운 집’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잇다. 1인영화에 대한 격려에서부터 기법적인 전복성에 대한 찬사까지 각양각색이다. 그건 아마도 대자본에 의한 급박한 산업화와 한국영화의 매너리즘에 대한 질책일 것이다.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영화를 보다 보면 의도적인 어설픈 연출과 연기에 키득거리다가도 정체 모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새로 이사온 집의 휑뎅그렁함과 일상적이지만 그 행동들을 바라볼 때의 비일상적 기괴함,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에 잠재하고 있는 귀신의 존재는 현재 우리 삶의 위기를 보여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마치 엄청난 융자를 끌어안고 산 집 같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무서운 집’에 대한 열광적 관심은 단지 신기한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점점 막장드라마 같은 황당함과 코미디로 치달아가는 정치·경제적 환경으로 인해 우리 삶에 깃드는 공포를 반영한 것은 아닐까.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2-10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자기성찰적 반성문: ‘해에게서 소년에게’

피씨방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곳은 중세적인 공간이다. 포스터에는 천사와 악마가 그려져 있고 게임 속에서 기사와 영주는 세력을 규합한다. 마법이 불을 뿜고 장검이 피를 토한다. 누구나 그런 마법 쯤은 쓰지 않느냐는 듯, 누구나 칼 한 자루 쯤은 품고 있지 않느냐는 듯.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흘러드는 햇살로 가득한 고딕성당처럼 신의 은총으로 충만할 것만 같다. 그곳에서 성직자와 힐러와 엘프를 만난다. 온라인 게임 속 작은 공동체인 파티처럼 말이다. 전주국제영화제 넷팩상과 제7회 전주프로젝트마켓 배급지원상을 받은 안슬기 감독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그러나 대안적 공동체의 희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교사 출신의 감독이라는 꼬리표에서 기대하는, 혹은 이전 몇몇 단편에서 보아왔던 따뜻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영상마저도 어둡고 투박하다.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 없다.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냉정한 자기반성적 성찰이다. 어른으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책감과 책임감이다. 때문에 결말부 소년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감독 자신이다. 그리고 관객 역시도 그 냉엄한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칼끝의 좁은 모서리가 대상을 확대시킨다. 영화 속에서 시완은 민희의 부탁으로 처마에 숨긴 담뱃갑을 꺼내준다. 몇 번인가를 힘껏 뛰어서야 간신히 손 끝에 닿은 담뱃갑을 잽싸게 낚아채 꺼낸다. 그런데 알 수가 없다. 자신보다 작은 민희가 어떻게 이 높은 곳에 담뱃갑을 숨길 수 잇었을까? 민희가 답한다. “미스터리지. 사는 게 다 미스터리야.”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권한다. 담배는 맵기만 할 뿐 억눌린 감정을 달래주지 못한다. 다급하게 기침을 토해낸다. 익숙한 듯 시범을 보이던 민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승영과 함께 기도하는 민희는 마치 그 미스터리 하나를 푼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깨달았다기보다는 외면한 것처럼 보인다. 담배를 피워보지 않았기에 피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2-03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대종상이라는 오래된 과제

대종상의 파행 이후 관련 평론들을 되짚어보니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올해 발표된 글이 아니다. 2012년 11월의 글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총 22개 부문 중 15개의 부문을 수상한 직후였다. 대종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오래도록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글을 쓴 젊은 평론가는 단순한 짜증이나 비난을 피하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했다.그랬기에 그는 선정위원들의 개인적·도덕적 자질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영화계 원로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선정위원의 연령에서 오는 편향성과 그들의 과거 경력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보수적 성향을 우려했다. 또한 예심과 본심으로 이루어지는 선정 과정이 형식적으로는 투명해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라는 사실을 지적했다.그러나 이번 대종상 파행은 새롭게 두 가지 문제가 더 추가되었다. 이전에도 의혹은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는 사람만 아는’문제로 치부되었던 문제들, 즉 돈과 운영진의 자질 문제이다. 주최측의 임원이 계약 과정에서 리베이트를 받고 수억 원대의 돈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상자들의 참석 논란과 이를 부추긴 ‘배우들의 자질’ 운운한 발언은 배우들이 아니라 오히려 주최측의 인사들의 자질을 의심케 한다. 그런가 하면 ‘국제시장’ 몰아주기와 방송중계 시청률이 동시간대 최저라는 사실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이다. 양상은 다르지만 한 작품의 독식은 이미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경험한 바 있다. 이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옹호가 아니냐는 비판을 듣기에 충분하다. ‘국제시장’의 만듦새와 흥행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암살’과 ‘베테랑’ 등 여타 작품들을 배제한 채 10개 부문이나 수상할 만했느냐에 대해서는 의혹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종상 중계방송의 저조한 시청률은 미흡한 진행뿐 아니라 미디어의 다각화 현상과 대종상의 내적 충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깊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대종상의 파행은 어떤 오해 혹은 착각에서 기인한 듯하다. 반세기라는 역사와 전통이 권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적 가치와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1-26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개와 돼지의 시간 ‘내부자들’

무릎을 꿇는다. 정·재계, 언론계 거물의 유착과 비리만 밝히면 줄도 빽도 없는 자신에게도 빛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일개 검사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오히려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 부장검사를 향해 다급하고 간곡하게 빈다. 제발 살려달라고. 부장은 짜증스럽고 안타깝다.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그러게 잘 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태어나든가.”‘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연재했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내부자들’은 한국사회 권력층을 향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유력 대통령 후보 장필우(이경영)와 그의 스폰서인 대기업 오너(김홍파 분), 그리고 여론을 움직이는 거대 언론사의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는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범죄와 뒷거래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내부자들이며, 그 카르텔 안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타자이다. 타자로서의 대중은 이강희의 말대로 “개·돼지”이다.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존재들이다. 언론인에게는 독자이고 정치인에게는 유권자이며, 기업인에게는 고객이겠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학연·지연·혈연으로, 또는 권력의 카르텔로 자신들의 ‘내부’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냥 ‘개·돼지’인 것이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영화는 이들 ‘내부자들‘의 탐욕과 범죄를 노골적으로 그려낸다. 그것은 ’베테랑‘의 통쾌함보다는 공포에 더 가깝다. 개와 돼지라 불린 대중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극적인 장면들과 노골적인 폭로에도 불구하고 다소 느슨한 이야기 전개는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반전이라기에는 상투적인 후반도 몰입을 방해한다. 안상구 역의 이병헌과 우장훈 역의 조승우의 연기는 기대와 달리 아슬아슬하다. 사회적인 쟁점을 제기하고 고발하는 소셜 프로블럼 필름(social problem film)의 당위성은 명확하다. 그러나 단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면 영화로서의 미학에 좀더 충실할 필요가 잇다. 그런 면에서 ‘내부자들’은 어떤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많은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1-19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신발을 찾아 되돌아가는 길: ‘검은 사제들’

골목을 응시한다. 검은 구멍처럼 어둡고 음습하다. 청년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를 압도한다. 도망칠 것인가? 질문 앞을 막아서는 것은 소년이다. 화려한 불빛과 인파 너머로 보이는 골목 입구에서 소년이 울고 있다. 청년은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다. 돌아갈 것인가? 팔뚝에 난 검은 반점들을 본다. 미치도록 무섭다. 주저하는 시선이 소년의 발을 향한다. 한쪽 신발이 벗겨져 있다. 자신의 발을 본다. 한쪽 신발이 벗겨져 있다. 청년은 소년의 한쪽 신발이 어디 있는지 안다. 그리고 자신의 신발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되돌아갈 것인가?신예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이 이례적인 속도로 관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엑소시즘이라는 소재적 특이성과 김윤석과 강동원의 조합, 거기에 박소담이라는 여배우의 신선한 연기가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겠지만 영화 내의 이원적 세계가 만들어내는 딜레마가 선택지로서 관객들에게 제시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과 악, 이성과 초월적 신비, 공포와 용기, 삶과 죽음 등 명확할 것 같은 가치들이 다른 가치들과 맞물릴 때 그 경계가 흐려지면서 힘든 선택을 요구한다. 도망친다면 절뚝이며 한쪽 신발만으로 걸어야 하고, 나머지 신발을 찾기 위해서는 되돌아가야 한다. 어느 쪽도 흡족하지 않은 선택지다.왜 돌아왔냐고 묻는 김신부(김윤석)에게 최부제(강동원)가 답한다. 신발을 두고 갔다고. 그 신발을 찾기 위해서는 김신부의 경고대로, 악몽에 시달리고 술 없이는 잠도 못 잘 것이다. 아무도 몰라주고 보상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행하는 구마 의식의 끝에 완벽한 선과 희망이 자리잡고 잇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더 큰 절망과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질문은 다시 되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돌아갈 것인가?‘검은 사제들’은 성급하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전반부를 지나 섬뜩한 구마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질문은 옭죄듯이 다가온다. 그리고 마침내 엔딩 크레딧과 함께 불이 켜지면 양발을 내려다보게 된다. 내 신발은 어디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두고 온 신발 하나쯤은 있게 마련인 법이니까./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1-12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합리주의에 대한 신경증적 비판: ‘그놈이다’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재개발을 앞둔 경남 포구의 어촌마을에는 삶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 예정이다. 동네 주민들이 알박기라고 비난을 해도 상관 없다.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서 약속했다. 집과 여동생은 지키겠다고. 지킬 게 둘 밖에 없으니 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는 결국 둘 모두를 잃었다. 집은 도박판에서, 여동생은 살인자에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근거를 알 수 없는 믿음뿐이다. 그 믿음은 광기를 닮았다.‘그놈이다’라는 제목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용의자를 발견하고 외치는 고함소리 같다. 탐문이나 추리의 과정은 이미 필요치 않다. 다만 있는 힘껏 뒤쫓아야 한다. 그 때문인지 영화는 치밀한 추리를 보여주기보다는 ‘믿음’을 실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무속신앙과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죽음을 엿보는 음침한 소녀다. 비이성적이며 전근대적인 믿음이 확인되지 않은 용의자를 향해 범인이라고, 그를 잡으라고, 외치는 것이다.그런데 장우(주원)가 집을 잃고 동생을 잃은 곳은 재개발을 앞둔 마을이다. 폐교와 즐비한 폐가를 허물고 들어설 것은 아마도 현대적인 아파트일 것이다. 재개발 과정에서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곳곳에서 꿈틀대는 그곳에서 그는 삶의 터전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동생에 뒤이어 살해된 여자 역시 폐가에서 숨졌다. 수사의 합리성을 주장하던 경찰도 범인(민약국)의 손에 죽는다. ‘현대’, 혹은 근대와 이성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무용하다.‘그놈이다’는 언뜻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를 닮은 듯이 보인다. 경찰과 무속인, 피해자의 오빠와 예지력이 있는 소녀라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극비수사’가 당시의 제도적 허술함을 풍자하고 보편적 휴머니즘에 기대고 있다면 ‘그놈이다’는 현대적 물질문명과 근대적 합리주의를 향해 날선 경고를 보낸다. 그렇기에 시은(이우영)이 예지하는 죽음은 이성의 몰락으로 읽히기도 한다. 게다가 여성혐오 혐의까지 받고 있다. 비판과 비난이 다른 것처럼 감성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 또한 다르다. 비판은 무디고 감성은 히스테리컬해 보인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1-05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사실과 거짓 사이의 진실: 특종-량첸 살인기

연극을 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한다. 사실 잘못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기자로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되는 일이 없다. 광고주의 뒤를 파헤쳤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는가 하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와는 별거 중이다. 모든 걸 만회할 수 있는 기회였다. 우연찮게 받은 제보를 통해 쓴 기사로 그는 복직 됐고, 일약 스타가 됐다. 잘만 하면 아내의 마음도 돌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오보였다니. 이제 그는 선택해야 한다. 돌이킬 것인가, 질주할 것인가. 전작 ‘연애의 온도’에서 개성 있는 로맨스를 선보였던 노덕 감독이 신작 ‘특종: 량첸 살인기’에서는 한국의 언론을 꼬집는다. 그러나 진지하고 심각한 일갈이라기보다는 베실베실 웃으며 던지는 조롱 섞인 농담에 가깝다. 연쇄살인사건의 수사와 오보의 수습이라는 두 사건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블랙코미디는 사실과 거짓, 혹은 허구 사이에 숨어있는 진실에 대해 질문한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진실은 그 사건 속에 응축된 의미심장한 인생의 긴 시간이며 의미이다. 반면 거짓은 그것에 대한 부정확하고 부도덕한 진술이다. 허무혁이 낸 오보는 부정확한 진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덮으려는 순간 부도덕함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또는 사실과 다르지만 보다 진실된 진술로서의 허구인 영화가 허무혁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좌충우돌을 포착한다. 진실과 사실, 거짓과 허구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은 이미숙, 김의석, 배성우 등 조역들의 탁월한 연기가 더해져 흥미롭게 전개된다. 영화의 결말부 허무혁은 중요한 서류를 확인하지 않은 채 불태운다. 백국장(이미숙)으로부터 “뉴스란 게 그렇잖아. 그들이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실인 거야.”라는말을 들은 직후이다. 사실과 거짓 사이를 떠돌던 진실은 소망과 욕망, 무관심의 표현인 믿음으로 비약되며 이 영화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회해 버린다. 그 순간 허구로서의 영화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포기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허구란 진실에 대한 집요함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집요함에 대한 체념으로 읽힌다. 극의 후반부 이야기가 매끄럽지 못한 것도 이러한 체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0-29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수원 대표적 문화공간, 중앙극장을 기억하며

이준익 감독의 최근 흥행작 ‘사도’의 엔딩 씬은 논란이 많다. 영화 전개에 있어 불필요한 장면이라는 비판과 멋진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나름대로 쾌감이 있다는 반응이 엇갈린다. 평가야 어쨌든 당시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가 열린 곳이 수원 행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그런가 하면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수원 행궁과 그 일대 문화거리를 배경으로 한다. 사실 수원은 생각보다 영화와 관계가 깊다. “아저씨, 달걀 좋아하세요?” 라는 옥희의 대사와 말투로 유명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78)의 촬영지는 수원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와서는 ‘클래식’(2003)과 ‘7급 공무원’(2009)의 촬영지도 수원이다. 수원과 영화의 관계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중앙극장’이다. 1951년 수원 한복판인 팔달문 옆에 문을 연 중앙극장은 1, 2층에 모두 1천172석의 좌석을 학보하고 수원의 대표적 개봉관으로 자리매김하며 그동안 2천500여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간만이 아니라 만남의 장소가 되면서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자 수원의 상징적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경영난 악화로 말미암아 2004년 폐관되어 지금은 다른 상업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때 중앙극장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상징적 문화공간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아쉬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완전한 복원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소규모로나마 지역 시네마테크를 운영함으로써 그 상징성을 이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스크린 독과점의 심화로 독립·예술영화 등을 상영하는 곳이 적어졌다. 특히 지방일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소규모 시네마테크는 수원 및 인근지역 주민의 문화 향유의 기회를 확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의 도시라는 자부심은 세심한 정책적 고려가 뒤따를 때 더욱 빛날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0-22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영리한 법정 활극 ‘성난 변호사’

그는 지금껏 자신의 두뇌를 믿고 살아왔다. 법정에서는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신념으로 승소했다. 그런 그가 결박돼 있다. 말조차 할 수 없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를 앞에 두고 태연히 식사를 하는 사람은 재벌 회장이다.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 식사를 마친 회장이 그에게 묻는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것이 뭐냐고.영화 ‘카운트다운’을 연출했던 허종호 감독의 ‘성난 변호사’를 보다 보면 최근의 여러 영화들이 떠오른다. 법정드라마인 ‘소수의견’이 떠오르는가 하면, 호쾌하게 재벌을 응징한 ‘베테랑’이 떠오르기도 한다. 부분적이기는 하나 잘 나가던 변호사가 갑작스럽게 주부로 변신하는 ‘미스와이프’와 이선균의 전작 ‘끝까지 간다’도 물론 떠오른다. ‘성난 변호사’는 그만큼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장르 간 하이브리드 현상이 많은 요즘이지만, ‘성난 변호사’를 위해서라면 코믹 법정 추리 스릴러라는 장황한 명칭이 필요할지 모른다.그 잡종 같은 장르 혼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변호성 역의 배우 이선균이다. 그가 지금껏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어딘가 2프로 부족한 못난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성장해 가는 그의 모습은 그 모자람을 떠안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의 삶과 닮아있었기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성난 변호사’는 ‘이기는 게 정의’라는 신념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대립이다. 똑똑해야 이기는 것이고, 그것이 곧 정의니까.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기는 게 정의’라는 신념은 ‘정의가 이긴다’는 영화적 현실로 은근슬쩍 치환된다. 정의란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너무 익숙한 판타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난 변호사’는 어쩌면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지닌 모자람의 현실성과 정의라는 판타지가 충돌하는 영화인지 모른다.법정·추리를 지향하는 영화의 전반과 액션 활극 중심 후반의 결이 다른 이원적 구성과 지나치게 이선균이라는 배우 한 사람에 집중돼 김고은, 임원희 같은 배우들의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가능한 반전에 대해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싶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0-15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유쾌한 추리 스릴러 ‘탐정: 더 비기닝’

그는 전설이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일 뿐, 좌천돼 후배에게 승진이 밀렸다. 살인사건을 쫓지만 암중모색, 오리무중이다. 틈만 나면 사건 현장에 얼쩡거리는 대만은 귀찮기만 하다. 만화가게 주인이자 프로파일링 동호회의 회장이며 자칭 파워블로거인 대만은 ‘똥파리’ 같은 존재다. 그런데 친구 준수가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면서 비분강개한 똥파리가 사건에 달려든다. 게다가 중요한 단서를 소각시켜 버린다. 자신만 보고 말이다. 상사인 후배와의 갈등은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가고 이제 방법이 없다. 똥파리와 손을 잡는 수밖에.‘쩨쩨한 로맨스’를 연출한 정훈 감독이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은 ‘탐정: 더비기닝’은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작품인 만큼 독특한 캐릭터와 탄탄한 구성이 돋보인다. 한국의 셜록 홈즈를 꿈꾸는 만화방 주인 강대만(권상우)과 광역수사대 레전드 에이스 노태수(성동일)의 비공식 합동수사작전은 코믹과 스릴러 사이를 오가며 묘한 극적 긴장감을 준다.마냥 티격태격하던 노태수와 강대만이 교감하게 되는 지점은 역시 가족이다. 두 인물 모두 아내에게 쩔쩔매며 가족을 위해 살아가면서도 일과 가족, 꿈과 현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철없는’ 아버지와 남편들이기 때문이다. 그 철없음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애잔하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성동일의 아내로 호흡을 맞췄던 이일화가 출연해 실제 부부 같은 케미를 보여주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원수’에서 ‘콤비’로 재탄생한다.‘탐정: 더 비기닝’은 코믹과 스릴러라는 두 장르가 착종되면서 극적 쾌감을 만들어 내지만 동시에 약점도 노출한다. 추리 서사의 미덕은 정보를 통한 관객과의 두뇌게임이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전반부에서 밀려 있던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느라 갑작스레 많은 정보들이 쏟아진다. 관객을 배제한 채 영화가 혼자 동떨어져 가는 느낌이 들어 다소 소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믹한 캐릭터와 잔혹한 연쇄살인사건의 결합은 유쾌한 스릴러라는 독특한 영화적 재미를 만들어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0-08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왕이었던 아버지, 아들이고 싶었던 세자 ‘사도’

아들은 그와 다르다. 학문과 예법보다는 무예와 예술을 좋아한다. 기쁨은 실망이 되고 이내 분노로, 다시 증오로 변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가 무겁고, 모진 말들이 야속하다. 아들의 좌절 또한 분노와 증오로 치닫는다. 광기에 휩싸인 그는 칼을 들고 칼끝을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물론 살부라는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이 왕과 세자만 아니었다면 유난스러운 부자 갈등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부자는 촘촘한 정치적 관계망 속에 놓인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아버지에게 칼을 겨눈 것은 단순한 패륜이 아니라 역모였다. 아들이 대역죄인이면 아버지 또한 대역죄인이다. 왕이자 동시에 대역죄인이 되는 험악한 꼴은 당할 수 없었다. 왕은 세자에게 사약을 내리는 대신 뒤주에 가둬 죽인다. 그는 아들의 시호에 생각할 사, 슬플 도를 붙여 사도(思悼)라 부른다. 영화 ‘사도’가 빠른 속도로 200만 관객을 찍었다. 이준익 감독은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와 유아인이라는 젊고 패기 넘치는 배우를 캐스팅해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부자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참화를 정치가 아닌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영화는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사약이 아니고, 왜 참수가 아니고 뒤주인가? 왜 좁은 뒤주 안에 아들을 가둬 고통스럽게 죽여야만 했는가? 질문은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만든다. 끝까지 왕이어야 했던 영조와 한 순간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사도세자는 심지어 성정마저 다르다. 아버지 영조는 학문과 예법을 중히 여기는 반면, 아들 세자는 자유분방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하다. 이들 부자는 더 이상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한 채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든다. ‘사도’는 특별한 사건도 볼거리도 없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특히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세자를 향한 9분여에 달하는 영조의 독백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왕이어야 했기에 끝내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한 인물의 내면을 절절하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걸출함을 새삼 확인시킨다. 하지만 당쟁이 심화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부자 갈등만으로 단순화시킨 점은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10-01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헬(hell=지옥)조선을 향한 영화적 시선

‘암살’과 ‘베테랑’이 나란히 천만관객을 넘으면서 소위 ‘천만영화’라 불리는 작품들의 조건에 대한 얘기들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메시지의 무게감이다. ‘명량’이 전쟁의 한 가운데에 던져진 외로운 개인 이순신의 인간적 실존을 다뤘다면, ‘암살’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런가 하면 ‘베테랑’은 호쾌한 액션과 더불어 금권을 갖고 갑질하는 현재 우리 사회 내부의 모순을 꼬집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영화들이 있다. ‘치외법권’과 ‘미쓰와이프’다. ‘치외법권’은 만듬새가 다소 허술하고 투박하지만 메시지를 던지는 직설적 화법이 눈길을 끈다. 돈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절대악을 물리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두 형사 중 한 명인 정진(임창정)은 범죄자들에 대한 과도한 폭력으로 물의를 일으킨다. 그런데 “정의도 없고, 힘도 없고…”로 시작해 “그래서 나는 그냥 나쁜 놈들 잡으면 일단 패! 왜? 지금 벌주지 않으면, 자꾸 나와. 벌 받지 않고 그냥 나와”라며 이어지는 철창 속 그의 절규는 폐부를 찌른다. 마지막 순간 꼬리를 무는 악당들의 배신은 다소 유치하지만 실소를 머금게 한다. 정계 혹은 법조계로 얼굴을 바꾼 우리 사회의 ‘갑’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미쓰와이프’는 가족멜로임에도 불구하고 인물과 스토리를 이 사회가 지닌 모순의 내부에 배치했다. 잘 나가던 변호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 명계의 실수로 한 달 동안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순간, 그녀는 갑의 위치에서 을로 자리를 이동한다. 자신이 성공과 돈을 위해 했던 일들이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참담한 현실로 다가오는가를 피부로 느끼면서 점차 삶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 요즘 ‘헬 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젊은이들과 네티즌들이 대한민국을 자조하는 말이다. 지옥을 뜻하는 ‘헬(hell)’이라는 말도 끔찍하지만 ‘조선’이라는말은 더 끔찍하다. 근대화에 실패하고 국호를 닫은 봉건국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근대적 모순을 꼬집은 듯하다. 영화는 사회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치외법권’과 ‘미쓰와이프’의 시선이 단지 영화적 재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만은 아닌 듯하기에 마음이 쓰리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9-17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사무실에 대한 장르적 보고서 : ‘오피스’

그는 칼을 쥐고 있다. 얼마 전 자살한 영업대리점 점주가 보낸 칼이다. 언젠가부터 그 칼을 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착실하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탓에 회사 생활에서 과도한 심리적 하중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는, 아끼는 인턴이 자신과 비슷한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턴에게도 칼을 권한다. 묵주를 잡은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얼마 뒤 그는 가족을 살해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 어딘가에 그가 숨어 있다. ‘추격자’(2008)와 ‘황해’(2010)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홍원찬 작가가 메가폰을 잡았다. 일가족을 몰살한 과장이 회사로 돌아온다는 독특한 설정의 영화 ‘오피스’는 드라마 ‘미생’(2014)의 스릴러판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한국사회 직장인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숨이 턱 막히는 사무실의 삭막함과 과열된 경쟁,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공포는 스릴러가 아니라 해도 이미 현실이기 때문이다. 짜증과 욕설을 달고 사는 김부장이나 능력 있지만 까칠하고 개인주의적인 홍대리, 아첨에 능한 과장 승진 1순위 정대리, 적당히 분위기 보며 일보다는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은 염하영 등은 어느 사무실에나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만큼 정형화 된 캐릭터들이기도 하다. 캐릭터에 깊이를 부여해 입체감을 살림으로써 그러한 정형성을 극복해야 했다. 몇 마디 말과 에피소드로 인물들의 특징을 짚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간단한 캐리커처 같은 인물 묘사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노출된다. 그런가 하면 후반 사무실의 비밀이 밝혀지고 난 뒤의 사건들은 비약으로 인해 긴장감이 헐렁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탁월하다. 특히 인턴 이미래 역을 맡은 고아성의 광기와 김병국 과장 역의 배성우가 보여주는 처연하면서도 섬뜩한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뿐만 아니라 누적된 긴장감 속에서 이어지는 화장실 씬의 현실적인 공포는 압권이다. 어쩌면 ‘오피스’는 제목 그대로 친숙한 일터인 사무실 그 자체가 주인공인지 모른다. 그곳은 자본주의적 삶의 황폐함을 드러내주는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피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전장에 대한 장르적 보고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9-10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독특하고 예쁜 로맨스 - ‘뷰티 인사이드’

그는 매일 모습이 변한다. 멋진 청년이었다가 노인이 되기도 한다. 중년의 사내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외국인이나 여자, 혹은 아이가 되기도 한다. 그는 매일의 낯선 모습과 삶에 익숙하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 자체가, 그 변화 자체가 그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는 관계는 그의 모습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가 가구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변하지 않고 고정된 모습으로 살고 싶은 소망인지 모른다. 백종열 감독의 ‘뷰티 인사이드’가 입소문을 타고 조용히 손익분기점인 180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매일 모습이 바뀌는 남자와의 사랑이라는 소재는 참신하고 신선하다. 이렇게 많은 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한 적이 있었던가. 매일 모습이 변하는 남자 우진 역에 김대명·도지한·배성우·박신혜·이범수·박서준·김상호·천우희·우에노 주리·이재준·김민재·이현우·조달환·이진욱·홍다미·서강준·김희원·이동욱·고아성·김주혁·유연석이 출연했고, 그를 사랑하는 여자 이수 역은 한효주 혼자서 열연을 펼쳤다. 우진은 매일 얼굴이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는 우진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습이 어떻건 간에 우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그의 외형이 변하더라도 그것은 표면일 뿐, 동일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그는 우진이라는 것이다. 매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우진은 언제나 낯설다. 누가 우진이 되어 나타날지 모르고, 그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질 여유도 없이 우진은 또 다른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영화 속에서 이수는 이 때문에 신경증을 앓는다. 표면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채 내면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진에게 있어서 분명한 것은 변화 그 자체뿐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내적 동일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운 배우들의 외모 뿐이다. ‘뷰티 아웃사이드’라는 빈축을 살만하다. ‘뷰티 인사이드’는 예쁘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고 내적동일성에 집착하면서도, 배우들의 수려한 외모를 전시함으로써 참신하고 독특한 소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좋은 멜로 영화를 기대했던 마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9-03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생계형 괴물의 탄생,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명함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른다. 그녀는 마치 무예의 고수 같다. 명함이 벽 틈새에 정확히 꽂힌다. 신문은 유연한 포물선을 그린다. 2층이든 3층이든, 혹은 옥탑방이라도 상관없다. 비좁은 골목 양편에 늘어선 다세대주택 어디든 구독자가 있다면 신문은 정확히 현관 앞에 떨어진다. 그녀의 기술은 애초에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 기술들이 위협적인 것이 되면서 그녀는 괴물이 된다. 그녀가 괴물이 되었기 때문에 기술들이 위험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괴물이거나.‘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웃기다. 그리고 잔혹하다. 희극적 유쾌함과 비극적 참혹함 사이 어디쯤 우리네 삶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안해요. 그러니까 이해해 주세요”라며 테이블에 칼을 꽂는 수남(이정현)은 재미 삼아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함과도 닮았고 사냥한 짐승에게 감사와 사죄의 기도를 올리는 인디언 전사와도 닮았다. 그러나 아이들의 일도 아니고 수 세기 전 북미의 일도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일이다.수남의 행동이 분명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와 함께 그녀가 들려주는 삶의 궤적들을 좇다 보면, 희망을 잃고 먹고 살기 위해 성실함을 버리고 괴물이 되어야 했던 절박함과 마주치게 된다. 생계형 괴물의 탄생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강요에 가깝다.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모와 물질중심주의가 토끼의 꼬리처럼 그녀를 이상한 괴물들의 나라로 끌어들인 것이다. 재개발이 가져다줄 이익 앞에서 난무하는 권모와 술수, 광기는 적나라하게 발가벗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중 누가 괴물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우스꽝스러움에 비실비실 웃다 보면 뒤늦게 그 속에 들어있는 날 선 칼끝이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안국진 감독의 신인답지 않은 연출력과 탄탄한 시나리오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 수상작이라는 이력이 허투루가 아님을 증명한다. 특히 수남 역의 이정현은 독특한 인물 해석으로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독립영화의 영역 안에서 드물게 B급의 정서를 지닌 활달한 작품의 탄생이 반갑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8-27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피 튀기는 재난영화 ‘연평해전’

피가 튄다. 다급한 고함과 고통에 찬 비명이 난무한다. 포탄이 선체를 때리고 총탄이 살을 찢는다. 카메라가 바쁘게 움직이며 클로즈업한다. 그 시선에 붙잡힌 것은 찢긴 살과 흐르는 피의 처참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훼손된 몸의 이미지를 착취당하고 있을 뿐이다.‘연평해전’이 6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두 달에 가까운 상영 기간 탓에 ‘꼬리 끌기’라는 비아냥거림이 있지만, 메르스 여파 등 악재와 블록버스터들의 틈바구니에서 관객 수 600만이라는 성과를 올린 것은 어쨌건 쉬운 일은 아니다. 흥행 전략인 ‘애국마케팅’의 효과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꼬리 끌기나 애국마케팅, 이념 논쟁 등과 관련된 논란 말고도 연평해전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하나 남은 것 같다.영화는 ‘제2연평교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니 그것까지도 포함해 재난영화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화가 보는 시선에서 연평해전은 전쟁이 아니라 재난이다. 재난영화는 공포영화와 맥을 같이 한다. 표면적으로 공포영화의 희생자는 개인인데 반해 재난 영화의 희생자는 대개 집단이라는 사실이 눈에 띄는 차이일 것이다. 재난이 무서운 것은 감당하기 어려우며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납득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며 절대적인 힘을 지닌 어떤 것이다.재난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일상-재난의 조짐-재난 발생-재난의 극복’이라는 기본 구조를 지닌다. 그런데 연평해전에는 공포의 해소를 위한 ‘극복’의 단계가 배제돼 있다. 유족의 슬픔과 정부의 무능이 후일담처럼 그 자리를 메운다. 결국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관객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 영화를 둘러싼 현실적 조건이나 애국, 반공 등의 이념은 접어두고라도 ‘무엇’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영화는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까?영화의 몇 장면에서는 실제 기록영상이 삽입됐다. 붉은 물결로 뒤덮인 월드컵 거리응원 장면과 장례식 장면,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오는 쿠키 영상 등이다. 모든 것이 사실이고, 실존했던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실존인물들의, 괴기스러울 정도로 처참하고 노골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8-20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성룡에게 바치는 오마주 ‘베테랑’

유난히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특별히 사명감이 투철한 것도 아니다. 그저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돈도 빽도 없고 겁도 나지만 죄짓는 놈이 싫다. 그게 철없는 재벌 2세라면 더욱 그렇다. ‘돈이 없는 것이지 가오가 없냐’며 호기를 부릴 때, 그가 말하는 ‘가오’는 그럴듯하게 폼 잡는 것이 아니다. 도리나 염치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어떤 것이다. 결국, 돈이 있어도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와 염치가 없는 이들에 대한 질책인 것이다.액션 감독 류승완이 ‘베를린(2012)’이후 3년 만에 호쾌한 액션·오락영화를 들고 돌아왔다. 벌써부터 류승완 액션의 완성이라는 찬사가 들려온다. ‘부당거래(2010)’의 무거움은 버리고 스토리는 심플해졌다. 액션은 더욱 세련 돼 졌다. 데뷔 당시 한 인터뷰에서 류승완 감독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 성룡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폴리스 스토리’를 최고작으로 꼽았다. 그는 15년 만에 자신만의 ‘폴리스 스토리’를 만든 셈이다.그런데 ‘베테랑’의 호쾌함 뒤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류승완은 성룡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를 데뷔작으로 들고 나왔을 때부터, 그는 성룡이 만들어내는 한없는 낙천성을 지닌 평면적 영웅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액션에는 냉소가 도사리고 통쾌함 뒤에는 연민 어린 응시가 있다. 일방적이기만 한 절대 악은 없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소산물이다. 그러나 ‘베테랑’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단순화되면서 고민도 내적 갈등도 없이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망나니 재벌 2세 조태오(유아인)는 그냥 나쁜 놈이며, 형사 서도철(황정민)은 그냥 정의롭다. 최상무(유해진)는 응어리와 욕망으로 이글거리지만 끝내 표출되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자리에 모범적으로 놓여 있다. 그렇게 영웅이 만들어지고 정의구현이라는 환상이 완성된다. 조태오라는 절대 악의 설정은 돈을 매개로 한 부도덕한 관계의 구조적 모순을 건드릴 여지를 남기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 버린다.‘베테랑’은 분명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오락영화다. 그러나 류승완 표라는 딱지를 붙이기에는 뒷맛이 개운치 않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8-06 이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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