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톡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생명을 향한 연대 ‘마돈나’

소녀는 힘껏 뛰었지만, 뜀틀을 넘지 못했다. 아이들이 웃는다. 새로운 일도 아니다. 소녀는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다. 운동도 못 하고 집도 가난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기에 뜀틀 정도는 넘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비가 내린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뜀틀에서 내려오는 소녀의 머리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린다. 잉크로 염색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요전 날 염색을 했다는 이유로 손바닥을 맞았다. 본래 갈색 머리지만 선생은 인정하지 않았다. 염색약을 살 돈 따위는 없었다. 얼굴과 옷이 검게 젖는다. 마치 그녀의 인생을 예고하듯 손바닥 위에 검은 물이 떨어진다.‘가족 시네마: 순환선’으로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카날플러스상을 수상한 신수원 감독의 신작 ‘마돈나’는 순진무구했던 한 소녀가 어떻게 사창가로 향했는지, 종국에는 부유한 회장에게 장기이식을 위해 심장을 내줘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는지를 또 다른 여인의 시선으로 찬찬히 그려냈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자본, 그리고 남성에 의한 폭력과 착취 뿐이었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영혼에 난 커다란 구멍 뿐이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존재의 공백인 것이다.‘마돈나(Madonna)’는 성모마리아를 지칭하거나 그녀의 형상을 일컫는다. 그만큼 구원·모성·생명을 상징한다. 끊임없이 추락하는 삶을 살아온 ‘미나’의 별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마돈나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한 가지다. 가슴이 크기 때문이다. 성적 의미로서의 마돈나는 동명의 여가수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녀의 삶은 가수 마돈나의 저항적 퍼포먼스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던 그녀의 삶을 텅 빈 구멍만이 대변해주는 것이다.영화는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미나와 혜림이라는 두 여인의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진다. 그녀들을 이어준 것 역시 존재에 난 구멍이다. 구멍은 마치 고리처럼 두 여인을 강하게 결속시킨다. 영혼에 구멍을 지닌 자들의 연대. 그녀들의 연대는 젊은 의사에게로 확대된다. 그리고 마침내 한 생명을 탄생시킨다. 클로즈업된 신생아의 얼굴, 웃는 듯 꿈꾸는 듯한 그 얼굴이야말로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마돈나’는 지난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상영되며 호평을 받았다. ‘마돈나’의 설정은 자극적이며 표현 또한 거칠다. 정형화된 플롯과 고전적 전개는 다소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과 한국의 관객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생명을 향한 연대의 미덕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를 견뎌낼 수 있는 대안일지도 모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7-30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애국유감, ‘암살’

그는 방금 재판에서 승소했다. 아니, 아예 공소가 취하됐다. 증거는 불충분했고 재판장에서의 그의 호소는 효과적이었다. 재판장 앞에는 그를 반기듯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를 해체하라는 시위가 열성적이다. 느긋하게 거리를 걷고 싶었다. 해방 조국이라는 좋은 세상이었다. 삶의 열기로 가득한 시장 골목을 지나자 옛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묻는다. 왜 동지들을 배신했느냐고. 그의 항변은 명쾌하다. 몰랐다고. 해방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고.최동훈 감독의 암살이 개봉 첫날 47만 관객을 기록했다. 천만 관객을 달성한 ‘도둑들’의 첫날 관객 수가 43만이었으니 흥행감독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기록이다. 그만큼 ‘암살’에 들인 공도 만만치 않다. 9년이라는 시나리오 집필기간과 순제작비 180억원, 전작 도둑들에 이어 톱 배우들의 출연은 이 작품에 들인 공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장르적 시선으로 탁월하게 묘파해 온 감독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친일파의 암살을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을 두 시간 넘게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다.독립운동을 소재로 하는 만큼 ‘암살’의 밑바닥에는 ‘애국’이라는 정서가 깔렸다. 여전히 상영 중인 ‘연평해전’이 국가주의에 기반을 둔 애국을 강조하고 있다면 ‘암살’은 민족주의적 애국에 기반을 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우리는 애국이라는 키워드에 시선이 붙잡혀야 하는 걸까? 그 애국은 어느 지점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암살’은 당대의 시대적 모순이 장르화라는 과정에서 단순한 개인적 일탈로 변화되면서 역사와 현실에서 동떨어진 애국 판타지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김원봉이라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탁월한 독립운동 지도자의 등장이라든가 반민특위의 해체에 대한 시위 등으로 시대적 아이러니를 잡아내려고 한 노력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대중성과 오락성이라는 대전제와의 타협은 주제의 확장과 심화에 방해된다.영화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면 흥행에 실패한다는 징크스가 있다. ‘암살’이 그러한 통설을 깨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7-23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공포보다는 슬픔과 부끄러움 ‘손님’

사내가 마을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는 이미 손가락을 잃었다. 그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진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한다. 촌장이 종이 한 장을 허공에 대고 흔든다. 종이에는 영어로 무언가 적혀 있다. 사내는 그것이 아들을 병에서 고쳐줄 의사의 주소라고 믿는다. 촌장은 그것이 간첩들끼리 주고받는 암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그것은 저급한 음담패설이며 조롱일 뿐이다. 사람들이 동요한다. 그들의 동요는 분노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며, 그의 무죄를 알고도 외면해야 하는 죄책감이다.김광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손님’은 우화다. 우화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한 상징을 차용해 서사를 만들어낸다. ‘손님’은 서구의 민담인 ‘피리 부는 사나이’를 6·25 직후의 산골 마을로 끌어들여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배신과 인과응보의 코드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민담 ‘해와 달이 된 오누이’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것은 끝없는 탐욕에 대한 인과응보의 코드다. 이와 같은 동서양의 민담과 단순한 상징과 은유들이 만들어내는 알레고리가 지시하는 것은 한국의 야만적 현대사이며,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무한탐욕의 경제사이며, 정통성을 상실한 허위의 종교사이다.영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와 자신들이 배척했던 이들에게 받아주기를 간청하며 아기들을 내세운다. 자신들의 죄를 아이들로 덮으려 한다. 미래를 담보로 잡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대가 없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의 인물들은 모두 죄인이다. 누군가는 배신과 탐욕의 죄를, 누군가는 무지의 죄를, 누군가는 순진함의 죄를 안고 있다. 판타지 호러를 표방한 ‘손님’이 무섭기보다는 슬픈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이 영화의 알레고리가 가리키는 것이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판타지 호러가 아니라 새드 호러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손님’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극 중반부터 이야기 흐름이 약해진다든가, 미숙(천우희)과 우룡(류승룡)의 캐릭터가 다소 단면적이라든가 하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촌장 역의 이성민을 비롯한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미장센은 영화 ‘손님’을 훌륭한 볼거리로 만든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7-16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신선한 법정드라마 ‘소수의견’

두 사내가 벤치에 앉아있다. 그들은 변호사다. 초조함 뒤에 홀가분함이 묻어 있다. 얼마 뒤면 배심원들의 평결이 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이 재판에 많은 것을 걸었다. 특별히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한 사람은 많은 수임료를 받고 범죄자를 무죄로 만들어주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한때 학생운동에 열성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에 안주한 386세대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기자는 특종을 욕심내고 시민단체의 사무국장은 스스럼없이 거짓증언을 자처한다. 피고는 소송을 포기하고 국회의원은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이들이 하나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움직인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정의’라는 추상적 가치가 최소화된 법정신의 실현이자 진실의 발견이다.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은 법정드라마다. 불의한 검사와 그 불의에 맞서는 변호사가 나오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오가는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 이러한 패턴은 정의라는 현실화되지 못한 가치에 대한 환상을 제공한다. 이 영화의 결론은 할리우드의 일반적 법정 드라마처럼 완벽한 승리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피고에 대한 배심원의 무죄 평결과는 다르게 판사는 유죄를 선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판타지임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그것보다 더 시궁창이기 때문이다.김성제 감독을 비롯한 ‘소수의견’ 관계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영화가 특정한 사건, 사실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영화 초반에 자막으로 제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영화는 기본적으로 픽션이다. 허구인 영화에 대해 허구임을 강조할 때 이러한 강조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지시한다. 다섯 명의 농성자가 죽고 한 명의 경찰특공대대원이 희생된 용산 참사 말이다. 현실에서 국민참여재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00여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은 사라졌다. 증거수집영상은 삭제됐다.영화의 서사는 법정드라마라는 정형화된 테두리 안으로 파고들려 하고 영화의 외피는 사회정의라는 포괄적 주제를 향해 뻗어 나가려는 묘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소수의견’은 대중성을 의식한 나머지 정형화된 인물을 내세워 법정 드라마의 공식에 집착하는 우를 범했다. 그러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때로는 어떤 미흡함이 더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7-09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친구 되기에 대한 요청, ‘야간비행’

자전거 두 대가 달린다. 길은 곧고 갈대는 빛난다. 소년들의 표정은 밝다. 마치 기억의 한 조각인 듯도 하고 꿈꾸는 미래의 상상 같기도 하다. 푸른 하늘과 길이 맞붙은 소실점으로부터 달려나 온 소년들은 또 그만큼의 길을 가야 한다. 노란 중앙선이 마치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거나 나침반처럼 한 곳을 가리킨다. 이송희열 감독의 ‘야간비행’(2014)은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동성애와 왕따, 학교폭력, 노동문제까지 한국사회의 억압되고 모순된 구조적 문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학교라는 공간은 한 사회의 구조와 모순이 응축된 공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부터 ‘말죽거리 잔혹사’(2004), 그리고 최근의 ‘파수꾼’(2010)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독이 비슷한 이야기와 소재로 제작했다. 그러나 성공적이라 할만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야간비행’은 여기에 퀴어코드를 삽입하면서 독특한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지난달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결혼금지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미국 전 지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 지난 한 주간 SNS에는 이를 기념하는 무지개색이 넘실거렸다. 무지개색은 성 소수자의 상징이다. 미 대법원의 판결 이틀 뒤인 28일에는 서울에서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LGBT(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등 성 소수자를 포괄적으로 지시하는 퀴어(Queer)는 본래 ‘이상한’ ‘색다른’이라는 뜻이다. 즉 다름과 차이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판단이다. 그러나 인권에서 다름과 차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그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고 천명하고 있다. ‘야간비행’에서 주인공 용주는 한때 친했으나 지금은 자신을 외면하고 기택을 괴롭히는 일진이 되어있는 기웅을 향해 “우린 친구잖아”라고 항변한다. 그것은 동성애자나 왕따, 계급과 인종을 넘어 서로 포옹할 수 있는 인간애에 대한 요청일 것이다. 끝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말을 곱씹어보고자 한다. “누가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고 누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어느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7-02 이대연

[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탁월한 이야기꾼의 귀환 ‘극비수사’

소녀가 납치된다. 유괴범은 연락해 오지 않는다. 소녀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이 순간 소녀의 가족이 간절히 기대하는 것은 소녀가 살아있다는 희망, 절박한 믿음이다. 그들이 도사 김중산(유해진)의 말을 신뢰하고 수사에 기동대 소속 공길용(김윤석)을 투입하도록 요청한 것은 그런 이유다. 합리적이지 않은 믿음이다. 유괴범이 전화를 해오고 마침내 범인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범인의 체포가 아니라 소녀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다.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이다. 인간애라는 것은 애초에 합리나 효율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 모른다. 곽경택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인 ‘극비수사’는 재미있다. 10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이 ‘재미’는 스토리의 정교함이나 메시지의 깊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전개는 조밀하게 서사의 층을 이뤄가기보다는 덩어리진다. 단조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단조로움에 사운드와 카메라워크, 편집 등의 효과가 첨가됨으로써 이야기는 흥미로워진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이야기를 단순하면서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한 이야기를 효과에 의존해 풀어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건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그런 면에서 곽경택 감독은 이야기꾼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메시지는 부재하거나 무의미할 정도로 일반적이다. 멀지 않은 과거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실화에 바탕을 둔 ‘극비수사’는 미담에 가까운 소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시대적 절망이나 상처는 휴머니즘이라는 막연하지만 따뜻한 메시지 속에 녹아버린다. 승진에 눈이 먼 경찰들은 분노를 끌어내지만, 그것은 개인과 시대에 대한 표피적인 비판에 지나지 않으며, 에필로그에서 극적으로 승진하는 공길용의 모습은 고전적인 사필귀정이라는 교훈을 넘지 못한다. 실화에 바탕으로 한 많은 이야기가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가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주제가 없다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혹시 메시지의 부재를 휴머니즘이라는 모호한 가치의 외피로 덮으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연한 의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6-25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감기’ 바이러스의 공포와 경계 짓기

영화계가 비상이다. 주말 관객 수는 20% 가까이 떨어졌고 이달 11일 개봉 예정이었던 ‘연평해전’은 24일로 개봉일을 연기했다. 애초 10일로 예정되었던 ‘암살’의 제작보고회가 21일로 연기되는가 하면 각종 마케팅 행사들도 취소 내지는 연기되고 있다. 메르스 때문이다. 메르스 감염 공포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이 모일 수 밖에 없는 극장가에 난데없는 한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이런 가운데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2013년 개봉했던 영화 ‘감기’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심지어 주요 포털 사이트의 평점이 뒤늦게 올라가는 기현상까지 보였다. 감기는 개봉 당시 3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지만 100억원을 웃도는 제작비에 비하면 그리 좋은 흥행성적은 아니었다. 감기는 감염속도가 초당 3.4명에 이르는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에 발병하면서 벌어지는 극단적 사태를 그리고 있다.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의 진원지는 내부에 있다. 우리 신체 내부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잠복하고 있지나 않을까, 우리 중 누군가가 감염되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 불안감을 유발한다. 자기규정 또는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바이러스는 밀입국한 외국인으로부터 전염된다. 감염된 외국인이 분당으로 들어오면서 지역감염으로 확산하고 정부는 도시폐쇄를 감행한다. 안과 밖의 경계 짓기를 통해 우리 내부의 도시는 외부가 된다. 타자화인 셈이다. 내부의 혼란이 외부에 대한 공포로 치환되는 것이다.영화는 분당으로 설정된 지역감염 도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절정을 이룬다. 그들이 타자화될 때 그들에게 정부 또한 타자화된다.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기만할 때 그것은 스스로를 경계 짓고 타자화시키는 행위이다. 폭동에 참여한 시민들의 분노는 정부를 향하고 정부는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다. 과장되고 극단적이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싶다. ‘감기’에 대한 갑작스러운 인기는 아마도 메르스 감염 자체의 유사성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정부가 그간 보여준 경계 짓기와 타자화의 과정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6-18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삶에 대한 단단한 응시 ‘산다’

아무도 없다.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벤다. 메마른 나뭇가지는 가시덩굴처럼 날카롭고 무성하다. 눈바닥 위로 베어낸 나무를 끌고 돌을 굴린다. 돌은 마음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부서지지도 않는다. 눈바닥 위에 몸을 던져 돌을 굴려보려 한다. 돌은 무쇠처럼 단단하고 인생만큼이나 무겁다. 하얀 입김이 비명처럼 쏟아져 나온다. 산사태로 폐허가 된 집터에서 그의 몸부림은 절박하다. 집은 삶의 터전이기에, 무너진 것은 집뿐만이 아니다. 그의 삶 전체인지 모른다.박정범 감독의 신작 ‘산다’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살다’도 ‘살자’도 아니다. 살다가 지닌 삶의 본질적 의미를 탐색하는 것도 아니고, ‘살자’가 품고 있는 저항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선동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이고 현상적인 우리 삶의 단면을 조명한다. 산다의 영어 제목 ‘alive’는 아직 생존해 있는 상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생존은 죽음이나 소멸, 침묵과 고요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산다는 꿈틀대고 몸부림치는 역동적 세계이다. 몸부림과 몸부림이 부딪칠 때 갈등과 모순을 빚는다. 욕망이 욕망을 부르고 분노가 분노를 낳는다. 절망과 좌절은 절벽처럼 높고 두텁다. 박정범 감독의 전작 ‘무산일기’가 그 갈등과 모순의 한가운데에서 외친 절규였다면 산다는 끈기있는 응시에 가깝다. 응시란 대면이고 마주함이다. 영화의 초반 임금을 떼어먹고 달아난 팀장 집의 문을 떼는 것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휑한 집에 관객을 몰아넣음으로써 자신의 응시에 동참하기를 요구한다. 세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은 그러한 응시의 시간이다.영화의 말미에서 주인공 정철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돌아올지 모를 누나를 위해 조카와 함께 가로등을 단다. 높은 나무 끝에 매달려 등을 매달기 위해 애쓰는 그를 향해 조카가 좀 더 높이 달기를 요구한다. 그러자 정철은 ‘여기가 끝’이라고 답한다. 더 이상 올라갈 수는 없지만,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의 끝에 불을 밝힌다.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모두 별빛’이라는 명훈의 말처럼 그가 매단 것은 구차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밝힌 별빛인지 모른다. 영화는 관객에게 아부하기 급급한 영화들의 급류 속에서 영화의 삶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영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6-11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무산을 떠나온 무산자의 일지 ‘무산일기’

그는 북에서 왔다. 오직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다. 당장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고향을 떠나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는 ‘탈북자’, 혹은 ‘새터민’, 혹은 ‘이탈주민’등 생경한 단어들이 그를 규정한다. 그리고 125로 끝나는 주민등록번호.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계임에도 그에게 주어진 몫은 없다.박정범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산다’가 개봉하면서 전작인 ‘무산일기’(2010)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세계 유수 영화제 수상과 초청이라는 작품 외적인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무산일기’는 한 출중한 작가로서 신예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값싼 연민도 넘쳐나는 분노도 아닌 담담한 시선으로 카메라가 ‘승철’이라는 탈북자의 일상을 쫓아갈 때 영화는 남과 북, 선과 악, 타락과 구원, 가난과 부의 이원적 구조를 통해, 그리고 계급과 종교의 문제를 착종시킴으로써 한 이방인 혹은 경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한없이 순수하지만,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안고 있는 승철이 동네 건달들에게 얻어맞다가 문을 열고 나섰을 때 그가 마주친 것이 절벽이라는 사실은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온 그가 겪어야 했던 절망과 무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노래방 도우미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은 성(聖)과 속(俗)을 넘나드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것은 노래 자체의 문제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결정되며, 우리 사회의 세속적 질서와 위선적 태도를 통렬하게 보여준다.무산은 중국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북한 함경북도 무산이기도 하면서 우리 사회의 무산자를 상징한다. 무산을 떠나온 무산자 승철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사회의 천박함이다. 후반부 승철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며 붙였던 벽보를 찢는다. 그토록 붙이고 싶었지만 붙지 않았던 그것들이다.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이 이 땅에 붙기 시작한다. 체념하고 분노하는 순간부터, 그가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는 순간부터 그의 변모가 시작된다. 그것이 구원이든 타락이든 그것은 관계없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개가 죽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죽은 개를 한없이 바라보며 승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우리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6-04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익숙함·낯섦 사이에 놓인 떨림 ‘무뢰한’

공터는 어둡고 황량하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내가 무덤덤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면 살인사건 현장이 나타난다.주검 옆에 한 여자가 있다. 살해된 남자의 애인이다. 발끝에 걸리는 대로 끌고 나온 듯한 슬리퍼가 눈에 띈다.여자는 서럽게 운다. 마치 그녀가 살인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무뢰한’의 오프닝은 사건의 발단이 되기도 하지만 결론 같아 보이기도 한다.애초에 살인자를 잡는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보다는 그녀가 왜 슬리퍼 차림으로 그곳에서 서럽게 울고 있느냐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듯하다.범죄의 단선적인 강렬함이 아니라 발끝에 걸쳐진 슬리퍼, 혹은 감정의 미묘하고도 다층적인 떨림을 포착하는 데 주력한다.오승욱 감독의 무뢰한은 불편하다. 화면은 시종 어둡고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은 무겁다.시궁창처럼 질퍽 이는 현실의 삶 속에서 너무 오래 뒹굴었기 때문일까.언젠가 한 번쯤은 화려하게 사랑을 꽃피워봤을 이들은 마치 사랑하는 법을 잊은 사람들처럼 어리석고 서툴다.그런 까닭에 범인을 잡기 위해 그의 애인 곁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형사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단순해지지 않는다. 스토리 라인이 단순한 만큼 무뢰한은 감정의 복잡한 이면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에 기대는 부분이 크다.특히 살인자의 애인이자 술집 마담인 김혜경을 연기하는 전도연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수배 중인 애인을 불안감과 만남이 설렘, 더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인생의 가장자리에서 만난 재곤(김남길)에 대한 끌림 등을 특유의 감정연기로 소화해 낸다.무뢰한은 짜임새가 부족해 보이는 이야기 전개와 나르시즘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인물에 대해 다소 과장된 묘사가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그러나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 어딘가에 놓인 감성을 끄집어내 관객에게 내민다. 인물들의 감정을 쫓아가다 만나게 되는 엔딩은 특히 인상 깊다.오프닝의 무덤덤한 걸음과 달리 비틀거리며 힘겹게 어디론가 향하는 재곤의 롱 테이크는 긴 여운을 남긴다. /이대연 평론가

2015-05-28 경인일보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평범하고 선량한 惡의 이면 ‘악의 연대기’

그들은 모두 선량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소중히 여겼고 아들은 아버지를 따랐다. 동성애적 성향의 사내아이는 친구를 사랑했고, 엘리트 경찰들에게 자신들의 우애는 가치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상납을 받거나 그 대가로 처벌을 가볍게 해주기도 하지만, 그건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거나 도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모두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문제가 있다면 단지 여건이 좀 안 좋았다. 그들은 선택했을 뿐이다.백운학 감독의 ‘악의 연대기’가 개봉 일주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본의 아니게 살인을 하게 된 형사가 범죄를 숨기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진짜 범인이 나타난다는 설정이 지난해 개봉했던 ‘끝까지 간다’와 유사한 데다가 마케팅 포인트가 ‘배우 손현주와 끝까지 간다 제작팀의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몰입도가 관객들을 불러모으는 듯하다. 그러나 끝까지 간다가 절대 악과 다음 악의 싸움이었던데 반해, 악의 연대기에는 절대 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어쩌다 보니 범죄를 저지르게 된 인물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악인보다는 더욱 중립적인 의미의 범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로 이 영화의 제목은 ‘범죄의 연대기’로 하는 편이 더 옳은지 모른다.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행위를 합리화시켜주는 역할을 할지 모른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것처럼 범죄는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그녀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범죄에 부역한 아이히만이 의외로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관료주의적 태생과 인습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악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내부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악의 연대기는 반전의 강박에 사로잡혀 극 후반의 흐름이 다소 아쉽지만, 손현주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로 이러한 흠을 상쇄해 놀랍도록 몰입도를 유지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5-21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시장논리와 문화 다양성의 충돌 ‘어벤저스2’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저스2: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한국 관객 수가 천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역대 외화 중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만큼 볼거리가 많으니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마포대교와 강남 일대를 배경으로 촬영하는 서비스까지 보여줬으니 한국 관객의 호감이 남다를 만하다. 전체 관객수가 2억명을 넘고 전체 매출 2조원이 넘는 규모로 성장한 한국 영화시장에 대한 할리우드의 예우이기도 했을 것이다.그런데 이 경이적인 기록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스크린 수 약 1천800여개로 역대 개봉영화 중 최다 스크린 점유라는 것이다. 한국의 전체 스크린 수가 2천500여개인 것을 감안하면 70%를 넘는 수준이다. 10개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7개 스크린이 어벤저스2를 상영하고 있는 셈이다. 스크린 독과점 논쟁의 불씨가 되었던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이 점유한 스크린 수가 700여개였으니 10년 동안 단일 영화의 스크린 점유율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상승했는지 알 수 있다.당연히 관객의 영화선택권은 제한받는다. 시장 자율성과 영화 다양성의 논리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이유이다. 한국영화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만큼 보호와 규제보다는 시장 자율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주장과 관객의 선택권과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봉 스크린 수를 제한하는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중도적인 주장도 있다. 스크린 독과점 현상을 단일한 규제로 제한하기보다는 자율적 개선에 맡기되 다양성 영화를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CGV의 ‘아트하우스’와 롯데시네마의 ‘아르떼’와 같은 대기업의 독립예술영화 전용관과 정부지원 다양성 영화 전용관이 조금씩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미약한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IPTV나 VOD등 영화 제작·배급사의 수익 다각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기도 한다.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만큼 영화의 산업적 성격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창의성과 창조적 정신에 기반한 예술이며 문화이다. 다양한 문화적 상징코드가 결합할 때 창의성이 발현된다는 미하일 칙센트미하이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5-14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반짝이는 박수소리’ 따뜻한 시선의 깊이

고요하다. 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밥을 먹는 소리, 커피를 내리는 소리, 집안을 서성이는 소리가 있다. 때로는 김치를 담그기도 하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기도 한다. 움직일 때마다 서걱이고 버석댄다. 의미로 이어지지 못한 소리들은 쉽게 바스러지고 맥없이 지워진다.그렇기에 이 고요는 침묵이다. 침묵을 깨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손이다. 손이 바쁘게 움직이면 표정이 변한다.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의 대화는 세상에 소리를 보태지 않는다. 금세 흩어지는 말보다 이들의 손짓은 마음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반짝이는 박수소리’는 청각장애를 지닌 부부가 지나온 삶과 그들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낸다.이길보라 감독의 실제 부모이기도 한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시종 따뜻하지만, 연민이나 동정과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두 세계의 부딪침, 소란스러운 말의 세계와 고요의 세계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지점에서 출발하여 가족의 의미를 질문한다. 부모의 표정을 보며 수화로 옹알이했다는 감독은 두 세계 모두에 속해 있었지만, 그중 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떠돌고 부유하는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감독 자신의 자기 해명서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이 세상의 모든 장애인은 착해야 하는 것처럼 나와 동생도 착하게, 그리고 빨리 자라야만 했다’는 진술처럼 감독의 자기 해명은 청각장애인 부모와 별개일 수 없다.그것은 특수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자기인식이다. 생명의 연속선에서 부모와 자식은 서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다. 청각장애인 부모를 향한 카메라의 시선은 그 연속성에 대한 확인이자 부모의 삶에 대해 조용한 갈채다. 침묵과 말이라는 두 세계를 넘어 가족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고자 하는 힘겨운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손을 앞뒤로 흔들어 반짝임을 표시하는 손짓이 수화에서는 박수를 뜻한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반짝거리는 것들에 대한 찬사인지 모른다. ‘타짜’에서 전문도박꾼 고니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때로 손은 입술보다 진실하기도 하다. 서로에게 손을 반짝여주는 이 가족이 따뜻하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5-07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괴물같은 모성의 여성느와르 ‘차이나타운’

여자가 앞서고 소녀가 뒤따른다. 골목은 아직 어둡다. 중년의 여인이 내뿜은 담배 연기가 스산하게 어둠 속을 떠돈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오던 소녀가 문득 멈춰 선다. 여인이 되돌아온다. 소녀가 바라보는 곳에 개가 있다. 모로 누워 헐떡이는 개의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여인은 고민하지 않는다. 삽을 주워들고 주저 없이 개를 내려친다. 짐승의 외마디 비명이 유리조각처럼 날카롭다. 놀란 소녀에게 여자가 말한다. “왜 도와주지는 않고 보고만 있니?”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덧붙인다. “쓸모 없어지면 너도 죽일 거야.”‘차이나타운’은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다. 차이나타운이 극의 맥락 속에서 배경으로 큰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내에 존재하는 이방인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실제의 차이나타운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의 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거주지다. 그들의 윤리는 제도적 장치의 보호 속에 있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윤리와 다르다. 자비가 아니라 냉정함이, 가족이 아니라 기능이 그들의 윤리인 것이다. ‘그래도 식구인데 이렇게까지 해야겠냐’는 곤의 말에 ‘너는 식구냐?’고 되묻는 엄마의 말은 고통에 힘겨워하는 개를 내려치는 그녀의 자비와 맞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엄마’라는 인물을 통해 모성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적 냉혹함에서 비켜서려 하고 있다.어떤 면에서 ‘엄마’(김혜수)와 ‘일영’(김고은)이라는 두 인물의 애증은 ‘달콤한 인생’(2005) 강 사장과 선우, ‘신세계’(2012)의 정청과 이자성을 연상시킨다. 기존 남성 느와르의 관습적 코드 속에 인물을 여성으로만 바꿔놓은 셈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묘하게 뒤틀린다. 결말 부에서 보이는 엄마와 일영의 모습은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야기(달콤한 인생)와도 다르며, 브라더십으로 모든 것을 감싸는 이야기(신세계)와도 다르다. 자식들 각자의 욕망을 끌어안은 괴물 같은 모성을 그려냄으로써 그간 한국 갱스터 느와르가 보여줬던 ‘가족-거짓가족’이라는 이원적 대립각의 강박을 벗어나려 시도하고 있다.차이나타운은 느슨한 구성이나 다소 거친 편집 등에서 아쉬운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 장르코드를 비틀며 새롭게 변모하는 한국 갱스터 느와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시도임이 분명하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4-30 유은총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노장의 시선

풍경은 황량하다. 모래바람 속에 상여소리가 울리고 가파른 언덕 위로 상여 행렬이 지난다. 꽃상여에 누운 망자의 얼굴이 곱다. 사내는 행렬에 섞여 갈팡질팡한다. 휘청이는 걸음으로는 상여를 쫓으면서도 시선은 뒤를 향한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삶이란 이처럼 이율배반적인지 모른다. 죽음과 생의 욕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도 끝내는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 곱게 단장을 하고 분칠을 한 망자의 모습 또한 이승의 욕망을 간직하고 있다. 80대 노장은 그러한 망자의 몸마저 벗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인트로와 달리 영화 ‘화장’은 시끌벅적한 의례도 꽃상여도 없는 죽음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이면서 동시에 전작 ‘축제’의 후속작 같은 느낌을 준다. 1996년 작 ‘축제’에서 감독은 장례라는 인간의 마지막 통과제의를 꼼꼼히 잡아내며 화해와 축제의 장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며, 죽음을 사회적인 것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에 대한 영화였다. 그에 비해 ‘화장’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보다 냉철하고 직선적이다. 토장에서 화장으로 변하는 순간 죽음은 문화적인 것에서 실존적인 사건으로 변모한다.‘화장’이라는 제목은 얼굴을 치장하는 화장(化粧)과 죽은 몸을 태우는 화장(火葬)을 중의적으로 담고 있다. 화장(化粧)은 덮고 꾸미는 것이다. 추한 것을 숨기거나 실제보다 더욱 아름답게 포장하는 행위이다. 은폐와 강조의 욕망인 것이다. 전립선 비대증으로 병원에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배뇨하는 주인공 오상무의 부풀어 오른 오줌보는 배출되지 못한 채 누적된 우리 욕망이 지닌 팽팽한 긴장감과 다름없다.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눈에 띄지 않게 발목에 찬 작은 주머니에 조금씩 오줌을 흘려보내고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욕망을 처리하는 방법이자 은폐하는 방식이다.‘화장’이 거장의 신작에 대한 기대에 비해 다소 실망스럽다는 비판도 있다. 원작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 몸과 욕망, 윤리와 죄의식에 대한 노감독의 겉치레 없이 순전한 시선은 우리 영화사에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4-23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청춘 잉여의 코미디와 노년의 로맨스

강제규 감독이 돌아왔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로 한국영화사의 흥행기록을 다시 쓴 그가 가지고 온 영화는 노년의 슬픔을 다룬 최루성 영화 ‘장수상회’다. 그런가 하면 이병헌도 돌아왔다. 배우 이병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힘내세요, 병헌씨’로 독특한 잉여적 유머감각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던 젊은 감독 이병헌이다. 그의 첫 상업영화 데뷔작은 하릴없는 청춘 잉여들의 섹스코미디 ‘스물’이다. 중견 흥행감독과 젊은 신인감독의 작품이 한 시기에 나란히 스크린에 걸린 것이다.장수상회는 노년의 로맨스와 비애를 장르적인 연출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스물은 막 스물이 된 세 친구의 좌충우돌 연애담이다. 몸은 성인이 되었으나 아직 섹스와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젊은 남자들이 사랑과 꿈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장수상회가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노년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면, 스물은 앞날이 창창한 청년의 섹스코미디를 담고 있다.상반된 두 작품이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면 다소 과장되고 비약적인 주장일지 모른다. 완성도에 대한 평가나 취향의 호불호에 대한 의견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재개발’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어, 두 영화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각 세대의 어떤 시각을 대변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장수상회는 본의 아니게 재개발을 방해하던 노인이 마지막 순간 재개발이 가능하도록 돕는다는 큰 이야기 속에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미담을 집어넣었다. 반면 스물에서 세 친구의 놀이터인 ‘소소반점’은 떡하니 재개발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연애에 집착하던 청년들이 친구인 소민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소소반점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본의 아니게 싸움에 휘말린다. 본의 아니게 분란을 일으키다가 개과천선(?)하는 인물과 본의 아니게 관심 없던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 인물 설정은 영화가 현실을 바라보는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재개발의 옳고 그름을 쉽게 단정 짓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부모로 부터 물려받을 게 있는 사람과 물려받을 게 없는 사람이 재개발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대하는 마음도 다를 것이다. 익숙한 것을 지켜나갈 것 같던 노인은 재개발을 찬성하고 재개발에 찬성할 것 같은 젊은이들이 오히려 반대한다. 아마 이것이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4-16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희망의 끝에서 만난 현실: ‘파울볼’

스포츠 영화라고 하면 현실적 장애를 극복하고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선수들의 땀과 애환을 통해 감동을 전달하는 게 정석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경우 감동의 폭은 한층 상승한다.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감동이 더욱 짙은 것은 이러한 사실성 때문이다.이렇게 보면 ‘파울볼’은 언뜻 전형적인 휴먼 다큐멘터리 같다. 프로야구팀에 가지 못했거나 팀에서 방출된 선수들이 ‘야구의 신’이라 불리고 있는 김성근 감독을 중심으로 모여 피땀 어린 노력으로 재기를 꿈꾼다는 이야기이니 그럴 법도 하다. 애초에 영화의 기획의도 역시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이 없는 승자독식의 한국사회에서 경쟁의 도태자들에게 돌아갈 기회는 없다. 선뜻 ‘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기회를 주는 팀과 지켜보는 스승이 생겼다며 만면에 웃음 가득한 한 선수의 소회가 울림이 큰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고양 원더스라는 독립구단은 어쩌면 이 사회의 열망이 응집된 상징적 희망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이야기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프로 진출 실패와 방출이라는 장애를 딛고 뛰어난 지도자와 함께 고된 훈련 끝에 재기한다. 스포츠 영화로서 갖춰야 할 것들은 다 있다. 진한 휴머니티가 주는 감동은 고된 삶을 이어가는 관객들에게 ‘희망’이란 것을 선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에 담긴 현실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감독과 선수들의 꿈이 담긴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가 느닷없이 해체되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은 명확한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구단 해체라는 사실만이 엄정한 현실이다.그런데 구단 해체 발표 후에도 선수들은 연습한다. 더는 자신들이 꿈꾸던 낭만적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묵묵히 공을 던지고, 쳐내고, 받는다. 희망의 끝에서 그들이 택한 것은 희망이나 절망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근육의 팽팽한 긴장과 셀 수 없이 반복되는 같은 몸놀림, 그리고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이라는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이었다.어쩌면 희망이라는 것은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허약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영화는 희망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무작정 버텨내기만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조롱이며 냉혹한 현실에 대해 추상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현실로 싸워나가라고 충고하는 조언이자 응원가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4-09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독립영화의 잠재력 보여준 ‘소셜포비아’

‘소셜포비아’가 독립영화로서는 드물게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한공주’가 세운 기록인 22만을 단기간에 훌쩍 뛰어넘으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걸핏하면 240만 관객도 넘는데 24만이 무슨 대수냐고 하겠지만, 투자를 받기 쉽지 않은 독립영화가 거대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소셜포비아란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껴 이를 회피하게 되는 정신과적 증상이다. 영화 소셜포비아는 사이버상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을 소재로 현대 SNS 문화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반성과 성찰이 부재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마녀사냥은 서양 중세의 편협한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많은 경우 혼자 사는 여성의 재산을 노린 것이거나 심술궂은 노파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현실적 욕망과 갈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가 불안한 시기에 성행하였다 하니, 사이버 마녀사냥은 SNS를 통과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현실적 욕망과 불안한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2013년 말 개봉해 관객과 평단 모두에 좋은 평을 들었던 영화 ‘잉투기’ 역시 온라인상의 감정다툼을 현실로 끌어내는 ‘현피’를 소재로 젊은 세대의 좌절과 울분을 그려낸 바 있다. 그런데 이 두 영화 모두 젊은 세대를 통해 우리사회의 모순을 표출하고 있다. 지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한공주나 ‘거인’도 마찬가지이다.이에 반해 거대 제작사들의 상업영화들은 사극과 복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해’ 이후로 급속하게 퍼진 사극 신드롬이나 ‘국제시장’ 류의 복고 열풍은 소재발굴과 그간 소외되었던 중장년, 노년층의 감성을 자극하고 풍요롭게 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과거의 재현이 역사의 재해석이나 현실의 모순을 묘파하는 알레고리로 기능하지 못하고 단지 상업적 욕망과 향수를 충족시키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세대의 고뇌와 갈등을 통해 현실을 지적하고 충실하게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면서 고유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는 독립영화계의 성장은 눈 여겨 볼만하다. 소셜포비아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독립영화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 임에 틀림없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영화 ‘소셜포피아’포스터/올댓시네마 제공▲ 이대연 영화평론가

2015-04-02 이대연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세시봉’과 검열의 시대

영화 ‘세시봉’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한 편이다. 아마도 음악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테고, 60·70년대의 향수에 목말라했던 관객들은 이원적 시대구성이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교동 음악감상실 ‘세시봉’을 배경으로 오근태와 민자영이라는 가공의 인물들과 세시봉 멤버들을 통해 당대 젊은이들의 낭만과 상처를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언뜻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통금이라든가 여성들의 치마 길이나 장발을 단속하는 경찰의 등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영을 바래다준 근태는 곧잘 통금시간을 어겨 유치장 신세를 지는가 하면 자영을 위해 자신의 바지를 내주고 짧은 치맛바람으로 뛰쳐나와 단속하던 경찰들에게는 경악을, 관객들에게는 웃음을 선사한다. 그런가 하면 바보들의 행진의 주인공 병태가 장발 단속하는 경찰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이때 울려퍼지는 노래 ‘왜불러’를 공교롭게도 세시봉의 멤버였던 송창식이 불렀다는 점도 두 영화를 나란히 생각하게 만드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시의 억압적 분위기를 풍자한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에 의해 30여분 가량의 필름이 잘려야 하는 불행을 겪었다. 비단 영화만의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왜불러’는 금지곡이 되었다. 장발 단속으로 신체를 검열하고 통금으로 시간을 검열하던 당시의 지배 권력에게 예술의 검열이란 너무도 자연스러운 정책이었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가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의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으면서 검열 논란이 일었다. 제한상영관이 없는 마당에 제한상영 판정은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맥락은 다르지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다큐멘터리 ‘다이빙 벨’에 대해 서병수 부산시장이 상영금지를 요청해 반발을 샀다. 부산영화제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영진위의 움직임이 영화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 영진위가 올 2월초 영화제 상영작 등급분류면제추천 규정과 예술영화전용관 지원사업의 개정안을 내놓은 것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영화등급 심의를 자동 면제 받던 영화제 출품작들이 심의를 받아야 하고 예술영화상영관은 영진위가 지정한 영화를 의무상영해야 한다.이에 대해 영화계는 실질적인 검열이 아니냐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세시봉이 아름다운 건 그 억압적 시간을 뜨겁게 통과해온 사람들 때문이지 검열의 시대 자체가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다.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에 의해 난도질 당했지만 영화사에 남아 여전히 당대의 권력을 조롱한다. 세시봉의 시대는 스크린에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대연 영화평론가※오늘부터 매주 금요일 영화칼럼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을 연재합니다. 이대연 작가=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경인일보 2014년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15-03-26 이대연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