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30·끝]희생번트

실패땐 비난 축구 PK 부담감과 비슷선구안·타구 방향·힘 조절에 신경희생번트라는 것을 두고 야구라는 경기의 깊이와 멋을 논하는 이들이 있다. 이 세상에서 '희생'이라는 요소가 존재하는 스포츠는 야구뿐이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 생각에 그건 지나친 의미부여다. 야구경기에서 희생번트란 거의 모두 감독의 작전지시에 따라 이뤄지며, 그 지시를 달가워하는 선수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발적이지도 않고 흔쾌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하는 행동에 어쩌다보니 희생이라는 이름은 붙였다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야구를 지배하는 숭고한 정신' 운운하는 것은 너무 낯간지러운 짓이 아니냐 싶은 것이 내 생각이다. 어쨌든 지시를 받은 타자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 희생번트다. 물론 성공해서 선행주자를 진루시킨다면 자신이 아웃을 당하더라도 '타수'로 계산되지 않기에 타율을 손해 보지는 않는다. 또한 연말 연봉협상에 반영되는 '고과산정'에 다소나마 반영되기에 보람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번트는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어서 종종 실패함으로써 실제로 타율을 까먹기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시한 감독이나 지켜보는 팬들은 어지간한 연습과 집중력만 따라준다면 결코 실패할 리가 없는 쉬운 임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실패하면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마치 누구나 이미 한 골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페널티킥을 차는 축구선수가 극심한 부담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어쨌든 희생번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공을 배트에 정확히 맞히되 너무 강하게 튀어나가지도, 너무 투수나 내야수 정면으로 굴러가지도, 너무 힘이 죽어 포수 앞에 뚝 떨어지지도 않도록 신경 쓰고 조절해야 한다. 또 좋지 않은 공에 무리하게 손을 대다가 파울을 만들게 되면 쓰리번트아웃(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댄 번트타구가 파울이 되면 자동으로 삼진아웃으로 처리되는 룰)을 당하거나 쓰리번트 아웃을 피하기 위해 번트 사인이 철회될 수 있기 때문에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공만을 정확히 골라서 공략하는 선구안도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자신이 생각하는 스트라이크존의 가장 높은 지점에 배트를 내민 채 기다리다가 공이 그 위로 날아오면 배트를 빼고 그 밑으로 내려오면 공략하는 요령을 기억하고 준비해야 한다.그런 복잡한 과업을 무난히 성공시키기 위해 평소에 꾸준히 연습하며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공을 후려쳐 날리는 타격훈련에 비해 번트연습은 재미도 없고 큰 보람도 느껴지지 않는 고역이다. 번트의 달인이 된다 한들, 그것이 선수로서의 명성을 얼마나 높여줄 것이고 연봉은 또 얼마나 보태줄 수 있을 것인가?물론 미국에서야 투수들이 타석에 서는 경우를 제외하면 희생번트를 구경할 일 자체가 별로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희생번트를 자주 지시하는 감독은 점점 환영받지 못한다. 번트란 아무래도 역동적인 장면을 만들지도 못하고 대량득점을 가능하게 해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타력을 갖춘 타자들이 늘어나면서 아등바등 짜낸 한두 점을 무색하게 만드는 홈런들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반대로 번트 성공률이 높은 팀은 분명히 강한 팀이다. 왜냐하면 희생번트란 성공한다고 해도 큰 빛이 나지 않는 영역이고, 그래서 흔히 의외의 빈틈이 나타나기 쉬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후미진 영역에서조차 선수들이 철저히 준비하는 어떤 유인이나 문화가 있는 팀이라면 공격과 수비 전반에서 더 많은 준비가 되어 있는 팀일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10-30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9]테이블세터와 클린업트리오

2번 번트 능력 겸비 좌타자 많아강타자 4번보다 3번에 배치 경향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그리고 가끔 통계적인 근거를 대며 출루율이 높은 선수부터 순서대로 타선에 늘어세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식의 도전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오늘날에도 '타순 짜기'의 기본은 테이블세터(tablesetter)와 클린업트리오(cleanup trio)의 배치로 인식되고 있다. 테이블세터란 말 그대로 '상을 차리는', 즉 누상에 나가서 투수와 수비진을 흔들어대다가 홈으로 들어와 득점을 올리는 것을 임무로 하는 선수들을 말한다. 그리고 클린업트리오란 '차려진 밥상을 싹 쓸어 담아' 타점을 올리는 역할을 맡는 선수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1, 2번 혹은 9번 타순에 타율이 높지 않더라도 출루율이 높고 발이 빠르며 작전 수행과 주루플레이에 능한 선수들을 배치하게 되며, 3, 4, 5번에는 안타를 때려 누상의 주자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들을 배치한다. 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보면 같은 테이블세터라고 해도 1번과 2번의 역할이 조금씩 다르고, 같은 클린업트리오라고 해도 3, 4, 5번의 역할이 또 조금씩 다르다. 1번 타자는 무조건 많이 출루해서 도루를 하거나, 혹은 상대 배터리와 수비진에 도루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줌으로써 수비망에 균열을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선구안과 빠른 발, 주루센스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게 된다. 반면 2번 타자는 먼저 출루한 1번 타자를 진루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내기 번트나 치고 달리기 같은 작전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세밀한 기술과 침착함을 가진 선수들이 선호된다. 특히 2번 타자가 왼손잡이일 경우에는 포수의 시야로부터 1루 주자의 움직임을 가릴 수 있어 1루 주자의 행동반경을 더 넓게 확보해줄 뿐만 아니라 번트를 대거나 치고 달리기 같은 작전을 시도할 때 1루까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어 병살의 위험을 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따라서 2번 타순은 '타격이 정확하고 발이 빠르며 번트에도 능한 왼손 타자'의 자리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3, 4, 5번 타자는 그렇게 득점권으로 진출한 1번 혹은 2번 타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먼저 나서게 되는 3번 타자가 우선 점수를 내면서 찬스를 뒤로 잇는 역할을 요구받는 반면 4번과 5번은 1, 2, 3번 타자가 만든 성과들을 확장하면서 기회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3번에는 타율이 높은 타자를, 4번과 5번에는 홈런을 비롯한 장타를 때리는 데 능한 파괴력 있는 타자를 배치하는 경향이 많다(최근에는 강타자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타석에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이 고려되면서, 보다 강한 타자를 3번에 배치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테이블세터와 클린업트리오를 지나면 6, 7, 8번 타선이 흔히 말하는 '하위타선'이 된다. 그들은 공격보다는 수비 측면에서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하는 선수들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포수, 유격수, 2루수, 중견수, 혹은 지명타자제도가 없는 미국 내셔널리그의 경우에는 투수가 주로 이 타순에 배치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강팀과 약팀의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은 오히려 중심타선보다도 하위타선인 경우가 많다. 약팀 중에도 내로라할 만한 중심타선을 가진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지만, 생산적인 하위타선을 가지고도 약팀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위타선에서도 기회를 만들거나 타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팀은 공격의 리듬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몰아치면서 상대팀을 지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팀은 선수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되어 선수들 간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점이 반증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10-23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8]패전처리 투수

주전투수 보호용 마무리 보직깔끔한 승부·제구력도 갖춰야2004년에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이 개봉된 이후 널리 알려진 단어다.'슈퍼스타 감사용'은 원래 패전처리 전문투수인 주인공 감사용이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박철순(당시 OB)과 맞서 아무도 기대하거나 원하거나 응원하지도 않는 1승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우는 한 경기를 묘사한 영화다.하지만 프로원년 꼴찌팀 삼미에서 뛰었던 실제 인물 감사용은 '내내 패배만 당했던 투수'이긴 했지만 '패전처리 투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패전처리를 통해 보호해야 할 필승조가 따로 없었던 프로 원년의 삼미 같은 팀에는 당연히 패전처리 투수란 존재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점수를 내준, 이길 희망이 없는 경기에 등판해 남은 이닝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는 투수를 패전처리 투수라고 부른다.프로야구에만 존재하는 보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프로야구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특징 때문이다. 우선, 아마추어 무대와 달리 프로야구에는 어지간히 점수차가 벌어졌다고 해도 콜드게임을 선언하고 경기를 중단하는 제도가 없다.또한 프로야구는 시즌 중 매주 여섯 경기씩 치러지기 때문에 프로야구팀은 오늘 져도 내일, 모레 계속 경기를 치러야만 한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점수차가 나더라도 경기는 9회 말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투수들의 투구수는 계속 불어나게 되고, 그렇게 무리를 감수한 투수들을 이어진 경기에 계속 투입하게 되면 팀이 연패에 빠지는 것은 물론 투수들의 선수생명도 단축시키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프로야구팀의 감독들은 이미 이길 희망을 접은 경기에 내세워 뒤처리를 맡김으로써 다음 경기에 투입해야 하는 주력투수들의 어깨를 아끼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말하자면 팀의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투수들의 휴식시간을 벌어주는 임무를 띠고, 이미 포기한 경기의 무의미한 시간들을 메워내는 역할을 맡는 투수가 패전처리 투수이다. 하지만 패전처리 투수가 그 말이 주는 어감만큼 비참하고 서글픈 역할은 아니다. 패전처리 투수 역시 우리나라의 10개 구단이 각각 26명씩 밖에 보유하지 못하는 1군 엔트리 명단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말하자면 패전처리로서나마 프로야구 1군 무대에 선다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야구를 잘 하는 260여 명 안에는 들어간다는 증거다.그의 자리나마 목표로 삼고 땀 흘리는 2군 선수들, 신고선수들, 혹은 해마다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하고 내년을 기약하고 있는 수많은 재수생들보다는 훨씬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패전처리 투수에게도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은 있다.점수를 더 내주느냐 마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과감하고 깔끔하게 승부함으로써 최대한 빨리 경기를 마무리해 동료 야수들 역시 최대한 빨리 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따라서 구위나 코너워크는 둘째 치더라도 의미 없는 4사구와 폭투를 남발하지 않을 정도의 제구력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불필요한 공명심 따위에 휘둘려 타자와의 승부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의 상황인식과 헌신성도 갖추어야 한다.더구나 1군 엔트리 진입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최근에는 '패전처리 전담투수'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가뜩이나 부족한 엔트리의 한 자리를 그렇게 허비하기보다는, 신인급 투수들이 부담 없이 실전경험을 쌓을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말하자면 최근에 말하는 패전처리 투수란, 이미 '경쟁에서 뒤처져 선수로서의 가치를 대부분 상실한 퇴물'이 아니라, '아직 필승조에 합류할 만큼은 아니지만 미래를 위해 실전경험을 쌓고 있는 유망주'를 의미하는 것에 더 가깝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10-16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7]키스톤 콤비네이션

유기적 협력 플레이 중요한 포지션강기웅-유중일, 韓 야구 최고 콤비건물을 지을 때 제일 중심이 되는 지점, 예컨대 여러 개의 벽돌들을 둥그렇게 짜 맞춘 돔이나 아치형의 구조물을 지을 때 그 돌들이 고정될 수 있도록 정수리 부분에 꽂아 넣는 돌을 키스톤(keystone), 우리말로는 '쐐기돌'이라고 한다. 수많은 구성물들이 모여서 하나의 구조를 이룰 때 그 짜임의 핵심이 되는 지점이 되기에 '열쇠'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야구장에서는 그것이 2루 베이스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홈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볼 때 부채꼴로 펼쳐진 그라운드의 딱 중간에 박혀 있는 2루 베이스가 꼭 하얀 쐐기돌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인 말이다. 이 '키스톤'을 사이에 놓고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눈빛을 주고받으며 손발을 맞추는 것이 2루수와 유격수다. 2루수와 유격수는 야구장에서 가장 많은 타구를, 그리고 가장 강한 타구들을 처리하는 가장 바쁜 수비수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장 탄탄한 기본기 외에도 빠른 판단력과 순발력, 송구능력을 가진 선수들이 맡는 포지션이다. 하지만 그 두 명의 수비수에게 빠져서는 안 될 능력이 또한 2루 베이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파트너와의 유기적인 협조 플레이 능력이다. 그 두 명의 수비수가 2루에 주자가 있을 때 투수가 던지는 견제구는 누가 받을 것이고 도루를 잡기 위해 날리는 포수의 송구는 누가 받을 것인지, 혹은 병살을 처리할 때는 어떤 호흡 어떤 리듬으로 어느 공간쯤에 토스를 할 것인지 서로 정확히 가늠하고 분담하지 못하면 수비망은 일순간 뒤엉켜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수비가 좋은 팀'이란 호흡이 잘 맞는 2루수와 유격수를 보유한 팀을 말하며, '수비가 엉성한 팀'이란 그렇지 못한 팀을 가리킨다고 보면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다. 그 두 명의 수비수가 2루 베이스를 가운데 놓은 채 손발을 맞춰 벌이는 수비동작들을 키스톤 콤비네이션(Keystone Combination)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2루수와 유격수를 묶어서 '키스톤콤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미국에서는 쓰지 않는 '콩글리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를 뽑는다면, 후보로 오를 만한 조합들이 몇 있다. 1980년대 초중반 MBC청룡에서 활약했던 김인식(2루수)-김재박(유격수)과 1980년대 후반 삼성 라이온즈의 강기웅(2루수)-유중일(유격수), 그리고 1990년대 중반 해태 타이거즈의 김종국(2루수)-이종범(유격수)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를 주름잡았던 현대 유니콘스의 박종호(2루수)-박진만(유격수) 등이 그 안에 들어갈만 하다. 오늘날 현역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중에는 기아 타이거즈의 안치홍(2루수)과 김선빈(유격수)의 호흡이 준수하다.최고의 2루수와 최고의 유격수를 따로 꼽아보는 것 못지않게 '최고의 키스톤 콤비'를 꼽게 되는 것은 그만큼 각자의 능력치에 더한 협조 플레이의 묘미가 큰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호흡이 잘 맞는 2루수와 유격수 사이의 키스톤 콤비플레이는 마치 배구의 절묘한 속공이나 시간차 공격, 혹은 농구의 화려한 앨리웁 어시스트와 덩크를 보는 듯한 리드미컬한 쾌감을 준다. 그런 점에서 앞에 거론한 후보들 사이에서 감히 최고를 가려본다면 강기웅-유중일 콤비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강기웅과 유중일 모두 최고의 2루수와 최고의 유격수 부문에서 1위에 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대개 다른 조합이 '압도적으로 화려하고 적극적인 유격수와 그것을 보좌하는 2루수'의 형태였던 것과 달리 그들은 가장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양 날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동시에 무릎을 구부리고 타석을 노려보기 시작하면, 타자들은 내야 한복판에 팽팽하고 촘촘한 그물이 양 끝으로 펼쳐진 것 같은 막막함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7-10-09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6]매직넘버

'이변 없는 한' 샴페인 터뜨릴 준비1위팀 방심하다 2위에 혼쭐나기도해마다 시즌 막바지에 이르면 신문의 프로야구 관련 기사 제목에 '매직넘버(magic number)'라는 단어가 등장하곤 한다. 매직넘버는 일정한 기간 동안 여러 번의 경기들을 치르며 거둔 최종성적을 집계해 우승팀을 가리는 프로스포츠에서 시즌이 끝나기 전 1위를 달리고 있는 팀이 우승 확정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숫자이며, 그 시즌 경쟁에 마침표를 찍기 위한 카운트다운의 과정이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매직넘버란 '2위 팀이 남은 경기를 모두 이긴다고 가정할 때, 1위 팀이 2위 팀에게 추월당하지 않고 자력으로 우승을 확정시키기 위해 이겨야만 하는 경기의 수'를 의미한다. 그래서 1위 팀이 1승을 추가할 때마다, 그리고 2위 팀이 1패를 추가할 때마다 매직넘버는 1씩 줄어들게 되며, 매직넘버가 0이 되는 순간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 짓는 샴페인을 터뜨리게 된다. 물론 1위 팀이 2위 팀을 상대로 승리한다거나 해서 1위 팀의 1승과 2위 팀의 1패가 동시에 늘어나면 매직넘버는 한꺼번에 2가 줄어들게 된다.보통 매직넘버는 한자리 수로 줄어들게 됐을 때, 그리고 1위 팀이 남은 경기의 절반 정도만 이겨도 2위 팀의 성적과 무관하게 자력으로 우승을 확정 지을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세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시점이란 예컨대 한 해 144경기를 치르는 한국 프로야구리그에서는 대략 120경기 이상을 소화한 무렵부터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최소한 한국의 경우, 기자들이 언론지면에서 '매직넘버'를 세기 시작한 팀이 우승에 실패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공개적으로 매직넘버를 세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우승 확정은 시간문제'라는 인식을 담은 것이며, 기자 나름의 분석력과 예측력을 동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한 번 매직넘버 카운트가 미처 0에 도달하지 못한 채 중단될 뻔 한 적이 있었다. 2009년 9월 2일, 2위 SK와의 승차를 6경기까지 벌리며 매직넘버 9를 찍기 시작한 기아가 무려 열흘 가까이를 흘려보낸 9월 11일에야 매직넘버를 하나 줄인 데 이어 다시 보름 가까이 지난 뒤 정규시즌 종료를 단 한 경기 남겨둔 25일에서야 한 경기 차로 우승을 확정했던 것이다. 시즌 후반기가 시작된 이래 내내 선두를 달리던 기아는 갑작스레 5연패에 빠지는 등 부진을 거듭한 반면 2위 SK가 시즌 마지막 19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맹추격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매직넘버를 띄운 뒤에는 팀의 페이스가 무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이 추격하는 팀에게는 '한 경기라도 지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일깨우는 숫자인 동시에 앞서가는 팀에게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우승이 확정됐다'는 여유를 주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1위 팀 선수들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우승을 확정 짓고 싶다는 마음에 몸보다 마음이 앞서게 만드는 '아홉수'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래서 실제로 해마다 시즌 막판이 되면 진작부터 앞서가던 팀이 기세를 타고 더욱 분발해 연승행진을 벌이며 단숨에 매직넘버를 지워나가는 경우보다는, '설마' 혹은 '혹시나' 하는 걱정과 호기심을 자극해가며 찔끔찔끔 줄어드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그런 스릴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매직넘버 세기 놀이'의 진짜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은 어쩌면 이미 넉넉한 차이로 도전자들을 누르고 우승을 향해 달려가는 선두팀이, 2위 팀 뿐만 아니라 시간과 운이라는 도전자를 상대로는 얼마나 강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를 살펴보려는 팬들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관전 포인트인지도 모르겠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9-25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5]콜드게임

지연 작전·속도전에 경기력 엉망6이닝 던지고 노히트노런 행운도막 장마가 시작되던 2008년 6월 4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홈팀 기아는 2회 말에 터진 장성호의 만루홈런에 힘입어 원정팀 한화를 상대로 6-1의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시작 전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3회 쯤부터 심상치 않게 굵어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사상 초유의 희극이 야구장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화 투수들은 와인드업 동작도 거의 없이 기아 타자들을 향해 밋밋한 배팅볼을 던지기 시작했고, 수비수들 역시 멋쩍은 몸짓으로 타구들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5회 초를 마치기 전에 빗줄기가 더 굵어져서 경기 종료가 선언되면 승패를 비롯한 모든 기록들도 백지화된다는 점을 노린 의도적인 지연작전이었다. 물론 기아 쪽 입장은 달랐다. 어떻게든 5회 초 수비까지 끝낸 뒤 경기종료가 선언되면 일단 그날의 경기는 정식경기로 인정받게 되고, 1승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5회 초까지는 공격과 수비 모두 최대한 빨리 끝내야만 했다. 4회 말, 당대 최고의 준족으로 꼽히던 기아의 이용규는 일부러 배트를 어설프게 휘둘러 평범한 땅볼을 굴려놓고 1루까지 느릿느릿 걸어 나감으로써 일부러 아웃 당했다. 그러자 한화 수비진은 이종범의 뜬공과 장성호의 투수땅볼을 일부러 놓쳐 살려줌으로써 응수했고, 다시 기아는 이재주와 김원섭이 공과 1미터쯤 떨어진 허공으로 세 번 헛스윙 하는 '자살삼진'으로 맞받아쳤다. 그 뒤로도 두 팀 선수들은 서로가 아닌, 시간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한화 타자들은 거듭 연습스윙을 하고 물을 마시고 배트를 고르며 시간을 죽였고, 기아의 타자들은 혹시 실수로라도 공을 맞힐까봐 하늘로 땅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며 공 세 개로 스스로를 죽였다. 하지만 한화의 간절한 소망과는 달리 7회 말까지 이어진 끝에서야 종료선언이 떨어졌고, 경기는 성립됐다. 최종점수는 그대로 6-1, 기아의 승리였다. 비록 역사적인 추태의 한 장면이긴 했지만, 야구에서 콜드게임이라는 규칙이 승부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야구는 9회(대회 규정에 따라서는 7회나 5회)까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며 얻은 점수를 대조해 승패를 가르지만, 때로는 심판의 선언에 의해 경기가 끝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를 콜드게임(called game), 즉 선언에 의해 종료된 게임이라고 한다. 아마추어 야구에서 가장 흔한 콜드게임은 점수차에 의한 것이다. 청소년이나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점수차가 벌어진 경우(대개 5회까지 10점, 7회까지 7점) 심판의 선언을 통해 경기를 중단한다. 승패와 기록 이전에 선수들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보호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아마추어 야구의 취지에 따라 무의미한 체력소모나 정신적 모욕감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점수차에 의한 경기중단 규정이 없는 프로야구에서는 날씨에 의한 콜드게임이 가장 흔한데, 갑자기 비나 눈이 쏟아지거나 하는 천재지변으로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선언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주심의 선언이 내려지기까지 경기가 진행된 정도에 따라 처분과 기록이 달라진다. 앞의 사례처럼 홈팀이 앞선 상황이라면 5회 초가 마무리된 시점이 경기의 취소와 성립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즉, 5회 초가 끝나기 전에 주심의 선언에 의해 종료된 경기는 취소가 되지만 5회 초가 끝난 뒤에 종료된 경기는 그대로 정식경기가 된다. 반면 홈팀이 뒤진 상황이라면 5회 말의 종료가 그 기준이 되는데, 그것은 '양 팀에게 똑같은 공격기회가 보장된 상태에서만 점수의 비교를 통해 승패를 가른다'는 야구경기의 대전제 때문이다. 경기가 취소될 경우에는 승패는 물론이고 그날 작성된 선수들의 개인기록들도 모두 무효가 되며, 성립될 경우에는 반대로 승패와 개인기록 모두가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 예를 들어 1993년 5월 13일 롯데 자이언츠와 쌍방울 레이더스의 부산경기는 비 때문에 6회에 종료되었는데, 그때까지 볼넷 1개만 내주며 무실점으로 버티고 있던 롯데의 투수 박동희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노히트노런의 영예가 주어지기도 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9-18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4]커브

느리고 떨어지며 곡선 '직구 반대'정민태 슬로 커브등 한 시대 풍미이름 그대로 '휘는 공'이다. 물론 모든 변화구가 휘는 궤적을 그리지만, 야구 역사에서 제일 먼저 발명되고 발견된 변화구가 바로 커브이기 때문에 '휜다'는 일반명사를 당당히 고유명사처럼 쓰게 됐다.커브볼은 직구와 정 반대의 방식으로 날아간다. 직구를 던질 때 투수는 끝까지 공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림으로써 최대한 많은 회전을 걸려고 노력한다. 공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강하게 회전하면(back spin) 바람의 저항을 그만큼 많이 흘려보낼 수 있게 되고, 또 그만큼 지면 쪽으로 처지지 않고 똑바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브는 그 반대로 손가락을 공 위에 걸고 던지며 앞쪽으로 깎아내림으로써 공이 위에서 아래쪽으로 회전하도록(top spin) 하기 때문에 공은 더 많은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지면 쪽으로 떨어지는 궤적을 그리게 된다. 따라서 커브는 모든 면에서 직구와 반대의 특성을 가진다. 느리고, 떨어지며, 곡선으로 움직인다. 물론 완전한 직선이 아닌 팔의 궤적에 따라 어느 정도 옆으로도 휘는 궤적을 그리기도 한다. 제일 먼저 커브볼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1872년 뉴욕 뮤추얼스에서 데뷔한 뒤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하트포드, 신시네티 등에서 6년간 선수생활을 했던 투수 캔디 커밍스(Candy Cummings)라고 전해진다. 그는 키가 165㎝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왜소했지만, 고향의 강가에서 조개를 던지며 놀다가 우연히 터득한 커브 하나로 통산 145승(94패, 평균자책점 2.49)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성적을 토대로 193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으며, 초대 마이너리그 커미셔너(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그가 커브를 던지기 전까지는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것 외에는 휘는 공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투수들도 저마다 좀 더 빠른 공을 던지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캔디 커밍스가 NA(National Association ; 내셔널리그의 전신)에서 1872년부터 1875년까지 4년 동안 무려 199경기에 등판해 194경기를 완투하며 124승을 거두는 괴력을 선보이자 상황은 달라졌다. 그의 공을 향해 속절없이 헛스윙을 하고 돌아 나온 타자들이 입을 모아 '공이 휘어지며 날아 온다'고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그것을 타자들의 단순한 착시로 치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캔디 커밍스가 포수와의 사이에 막대 두 개를 세워두고 투수 쪽 막대의 오른 쪽 밖으로 휘어져나갔다가 포수 쪽 막대의 왼 쪽 밖으로 들어오게끔 공을 던져 보임으로써 커브의 존재는 실증됐다. 커브는 궤적이 크고(크게 휘고), 느리며, 떨어진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궤적이 크면 타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고, 느리면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으며, 떨어지면 타자가 배트로 맞힐 수 있는 기회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커브에도 다양한 변종들이 생겨났는데, 그저 느리게 휘며 떨어지는 전통적인 슬로 커브 외에도 빠르게 꺾이며 떨어지는 파워커브나 슬러브(슬라이더와 커브의 혼합형), 보통의 커브보다 더 크게 떨어지는 너클커브 등이 그 예다. 미국에서는 오클랜드의 배리 지토가 느리고 큰 각도의 전통적인 슬로 커브의 대명사라면, 마이크 무시나, 페드로 마르티네스, 혹은 LA 다저스 시절의 박찬호 등이 횡으로 휘는 빠른 커브를 잘 던진 투수들로 꼽힌다.한국에서는 현대 시절의 정민태와 SK 시절의 이승호가 직구와 시속 40㎞ 가까운 차이를 보이며 타자들을 '얼려버리는' 슬로 커브로 유명했으며, 김상엽, 김원형 등은 직구와 별 구속차가 없는 시속 130㎞ 후반대의 '파워커브'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9-11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3]완투와 완봉

투구수 관리로 보기 힘들어진 기록선동열-최동원, 15이닝 완투 '전설'선발투수가 한 경기를 혼자 힘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완투라고 하며, 완투하는 동안 한 점도 내주지 않는 경우에는 완봉이라고 한다. 굳이 풀어보자면 상대 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했다'는 뜻이 된다. 일반적으로 한 경기가 9이닝까지 진행되기 때문에 완투도 '9이닝 투구'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연장전으로 이어질 경우에는 더 긴 이닝을 던지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간혹 선발투수가 단 한 개의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한 채 내려간 상황에서 구원투수가 27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선발투수가 아니기 때문에 '완투'로 기록하지는 않으며, 단지 기자들과 팬들에 의해 '실질적' 완투라는 위로를 받게 되곤 한다. 최근에는 투수의 건강과 선수생명 관리 차원에서 선발투수의 한 경기 투구수를 100개 안팎으로 제한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회에 15개 안팎의 공을 던지면 이상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미 준수한 페이스로 7회까지만 소화해도 105개의 공을 던지게 된다. 따라서 꽤 효율적인 투구수 관리가 이루어지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선발투수가 7회 이상을 던지는 경우는 오늘날 흔히 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완투나 완봉은 더더욱 보기 어려운 진귀한 기록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완투기록이 선발투수의 능력을 재는 척도 중 하나였으며, 에이스라 불리는 투수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었다. 전설적인 완투 승부로는 1987년 5월 16일, 당대 최고의 명투수 선동열과 최동원이 사직구장에서 벌인 15이닝 완투 맞대결을 들 수 있다. 그날 이전까지 두 차례의 맞대결에서 각각 1승 1패를 기록한 두 투수는 마치 결승전 같은 의미가 부여된 그 세 번째 맞대결 경기에 당대 최고 투수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버텼고 결국 무승부로 경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단 두 점씩만을 내준 채 15회까지의 공방전을 혼자 힘으로 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선동열은 232개의 공을, 최동원은 209개의 공을 던져야 했다.투수들의 명성은 떨어지지만, 그 못지않은 역사적인 완투 승부가 벌어진 적도 있었다. 선동열과 최동원의 완투 맞대결이 벌어지기 한 해 전인 1986년 7월 27일이었는데, 주인공은 청보의 재일교포 투수 김신부와 해태의 차동철이었다. 두 투수는 인천 도원야구장에서 벌어진 그 경기에서 각각 15회를 완투하면서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는데, 차동철은 10피안타 6삼진을 기록했고 김신부는 8피안타 10삼진을 기록했다. 두 명의 투수가 동시에 완봉을 하고도 승리를 얻지 못한 것은 차동철과 김신부가 맞대결한 그날이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유일하다. 반면 팀 사정 때문에 수많은 안타와 실점을 허용하면서도 끝까지 경기를 혼자 힘으로 맡아야 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그러면서도 승리를 거둔 특이한 경우도 가끔 나오게 된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최다실점 완투승 기록은 1984년 5월 1일 해태를 상대로 9점을 내주면서도 끝까지 경기를 마무리하며 승리투수가 된 오영일(당시 MBC)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가장 많은 점수를 내주면서도 완투한 기록은 1999년 삼성에게 14점을 내주며 완투한 OB의 김유봉이 가지고 있다. 한 경기의 승패 못지 않게 다음 경기와 시즌 운영도 생각해야만 하는 프로야구에서 간혹 투수들에게 주어지는 잔혹한 임무의 결과이기도 하다.통산 최다 완투 기록은 무려 100번의 경기에서 완투한 롯데의 윤학길이 가지고 있다. 그 중 무려 20번은 완봉승이기도했다. 그리고 한 시즌 최다완투 기록은 무려 36번 완투하며 16번 완투승을 거둔 1983년 삼미의 장명부가 가지고 있다. 그 중 완봉승은 5번이었다. 모두 빛나는 기록들인 동시에 앞으로는 점점 보기 힘들어지게 된 기록들이기도 하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9-04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2]시프트

김성근 감독 "더세게 때려서 넘겨"폼 바꾸다가 슬럼프에 빠질 수도1946년 7월 15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 나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수비수들은 타석에 테드 윌리엄스가 들어서자 일제히 그라운드 우측으로 이동했다. 3루수는 2루 베이스 뒤로, 유격수와 2루수는 1루와 2루 사이로, 1루수는 1루 베이스 뒤로, 그리고 중견수는 우익수 쪽으로, 우익수는 우측 파울라인 쪽으로. 그라운드 좌측에 남은 것은 좌익수 하나 뿐인 셈이었는데, 극단적으로 당겨치기만을 고집하던 전설적인 왼손 타자 테드 윌리엄스의 타구를 잡아내기 위해 클리블랜드의 젊은 감독 루 부드로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수비 포메이션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드로 시프트(Shift)'라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모든 팀의 수비수들이 테드 윌리엄스를 상대로 같은 방식을 쓰게 되면서 '윌리엄스 시프트'로 바꾸어 부르게 됐다. 그 뒤로도 배리본즈, 이승엽, 김재현 같이 일관되게 잡아당기는 타자들을 상대하는 팀들이 비슷한 방식을 썼고, 그 때마다 '배리본즈 시프트', '이승엽 시프트', '김재현 시프트' 같은 이름들이 등장했다. 타자의 습성은 쉽게 바뀌기 어려운 것이며, 아무리 정확히 때려낸 타구라 하더라도 수비수가 잡아내면 아웃시킬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수비전략이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가장 약한 곳을 노리는 대신 가장 강한 곳에 놓는 덫이 시프트다.이렇게 극단적으로 몰려 있던 수비수에게 정확한 안타성 타구 한두 개가 잡히기 시작하면 타자들도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2009년 LG에서 뛰던 베네수엘라 출신의 페타지니가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시즌 개막 후 두 달 여 동안 4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던 타자 페타지니는 시즌 중반 이후 상대팀들이 펼친 극단적인 시프트 수비에 걸려 대여섯 개의 안타를 잃어버리자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3루수 쪽으로 기습번트를 대보기도 하고 조금씩 밀어치기도 했지만, 너무 느린 발과 오랜 세월동안 굳어져버린 관성 탓에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히려 타격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타율도 0.332까지 떨어지게 됐다. 시프트에 대처하는 타자의 해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시프트 수비를 경험했던 테드 윌리엄스의 해법은 이런 것이었다."980그램짜리의 약간 무거운 배트를 1.5~2㎝쯤 짧게 쥐고 때리자 여러 방향으로 날카로운 타구들을 날릴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 팀들이 극단적인 수비 시프트를 하느라 휑하니 뚫려있던 좌익수 방향으로 많은 안타를 때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테드 윌리엄스도 이젠 늙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잡아당기는 타격을 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다른 팀 수비수들이 시프트를 풀고 정상수비로 돌아갔을 무렵, 나는 다시 가벼운 배트를 들고 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그 해 여름쯤에는 우익수 방면으로 마음껏 공을 잡아당겨서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테드 윌리엄스, 《타격의 과학》) 그리고 2002년, 역시 시프트 수비 때문에 고전하던 김재현이 김성근 당시 LG 감독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자, 김성근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더 세게 때려서 넘겨야지."조금 다른 점은 있지만, 테드 윌리엄스와 김성근감독의 해법은 모두 타격 폼과 타격 리듬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핵심에서 같다. 타자로서 최악의 상황은, 그 수비망을 피해가기 위해 무의식중에 조금씩 타격 폼을 바꾸다가 리듬을 잃고 슬럼프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8-28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1]승리투수와 패전투수

8회까지 무실점으로 던져도 '빈손'1회 못버틴 구원투수가 챙기기도한화의 에이스 문동환이 시즌 개막 한 달 만에 6승째(1패 1세이브)를 올리는 놀라운 페이스로 다승부문 선두로 치고나가던 2006년 5월 초, 롯데의 팬들은 '문동환의 경쟁상대는 김롯데 뿐'이라고 자조했다. 롯데의 팀 승수가 문동환이라는 한 명의 투수가 거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8승(18패)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야구는 두 팀이 겨루어 각자 승리와 패배를 나누어 가지는 경기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승리와 패배를 개인 기록으로 새기는 선수들이 있다. 바로 투수들이다. 선발투수가 최소한 5회 이상을 던지는 동안 팀이 리드를 잡았고, 그 리드가 유지되어 팀이 승리했을 때 그 투수를 승리투수로 기록한다. 하지만 선발투수가 던지는 동안이든, 강판한 다음이든 간에 팀이 역전을 당하거나 동점을 허용하게 되면 승리투수 자격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선발투수가 5회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거나, 역전과 재역전의 과정을 거치며 선발투수가 승리투수의 자격을 잃은 상태에서 팀이 이겼을 경우에는 그 승리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투구를 했다고 기록원이 판단한 투수에게 승리투수의 지위가 주어진다. (관행적으로 팀이 다시 리드를 잡는 시점에서 던지고 있었던 투수가 승리투수로 인정받지만, 엄밀히 따져서 기록원이 다른 투수가 더 효과적인 투구를 했다고 인정하면 승리투수는 바뀔 수 있다.) 물론 반대로 리드를 빼앗기는 점수나 주자를 내준 투수는 패전투수로 기록된다. 이렇게 여러 포지션 중 투수에게만 승리와 패배라는 기록을 남겨 기록하기 시작한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속설처럼, 팀의 승리와 패배에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투수라는 점 때문에 오늘날에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한 선발투수들의 능력치를 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고려되어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단 1점을 내주고 완투하더라도, 심지어 그 1점이 야수들의 실책 따위로 인해 만들어진 '비자책점'이라 하더라도 자기 팀 타자들이 2점을 뽑아내지 못하면 패전투수의 멍에를 쓸 수밖에 없는 반면, 10점을 내주더라도 동료들이 11점을 만들어주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투수에게 주어지는 승리와 패전의 기록은 상대적이며 상황적이다. 그리고 8회를 무실점으로 던진 선발투수가 아니라 1회도 채 버티지 못하고 실점을 허용한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의 영예가 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공평하며 역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상대적이고 불공평하며 역설적인 상황들을 겪어온 이백여 년의 야구역사 끝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흔히 '10승 투수가 되는 법'을 논하고 '15승 투수'를 에이스와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것은 투수에게 주어지는 승리와 패배가 가지는 상대성, 상황성, 불공정성 그리고 역설들이 야구 자체가 가지는 불가사의함의 진폭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야구는 스포츠이지만 게임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은 육체의 능력을 측정하는 측면이 있기에 '스포츠'임에 분명하지만 순간순간 돌발하고 굴절되는 의외성이 있어 '게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한 투수가 승리투수가 되는 데는 강한 어깨와 다양한 기술, 지략들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동료 타자들에게 자신감과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고 동기를 부여하며 때로는 흥분하도록, 때로는 냉철해지도록 하는 관계의 능력도 필요하다. 한 경기를 통해 한 팀이 가질 수 있는 승리, 패배와 똑같은 기록상의 승리, 패배가 양 팀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이유에는 그런 점들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8-21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20]스토브리그와 스프링캠프

연봉협상 벌이거나 노쇠선수 방출오키나와·괌 등 전지 훈련지 '인기'축구에 비하면, 야구는 환경의 제약을 많이 받는 운동이다. 축구가 '달리고, 차는' 대근육 중심의 단순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야구는 손가락, 손목, 팔꿈치, 어깨, 무릎, 허리, 목 같은 미세한 부분들의 관절과 근육들을 주로 활용하는 데다 단단한 공과 배트라는 위험한 장비까지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에너지 소모가 많은 축구의 경우 야구처럼 매일 경기를 치르는 것은 무리가 되지만 반대로 온도나 날씨 때문에 경기 진행 자체에 제약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야구는 1주일에 여섯 경기를 꼬박꼬박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의 소모는 많지 않지만 미세한 근육과 신경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추운 날씨, 혹은 눈이나 비 같은 기상상황에서는 경기나 훈련을 진행할 수 없다.따라서 프로야구는 이른 봄부터 시작해 늦은 가을까지 계속되지만, 겨울 동안 만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 겨울 동안 야구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난롯가에 모여 각자의 처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거나 협상을 벌이는 것'과 '날씨가 따뜻한 곳을 찾아가서 훈련을 하는 것'이다. 전자를 스토브리그, 후자를 스프링캠프라고 부른다. 오늘날 스토브리그란 흔히 구단이 다음 시즌에 대비해 전력을 보강하고 선수단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기간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즉, 선수들과 연봉협상을 벌이거나 신인선수를 영입하고 노쇠한 선수들을 방출하는 기간인 것이다. 프로야구에서 선수들을 분발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은 '돈'이라는 점에서 성공적인 연봉협상과 논공행상은 다음 시즌의 성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스토브리그의 실패 때문에 전력의 급격한 저하를 경험한 대표적인 팀으로 1983년 한국시리즈의 파트너였던 MBC와 해태가 꼽힌다. 1983년 MBC는 후기리그에서 우승했지만 구단이 미리 약속했던 성과급을 한국시리즈 이후로 미루면서 선수단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려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1무 4패로 패퇴했고 이듬해에도 하위권으로 처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MBC에 4승 1무로 일축하며 창단 후 첫 우승을 이루어냈던 해태 역시 구단의 선수단 처우개선과 훈련시설 확충 약속이 무산되자 선수들이 구단주가 베푼 회식에서 불고기를 한 점도 손 대지 않고 태워버리는 '불고기 화형식'으로 저항하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 이듬해 5위로 수직 추락했다. 스프링캠프는 1870년 겨울, 미국 프로야구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현 화이트삭스)와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현 신시내티 레즈)가 뉴올리언스나 플로리다 같은 따뜻한 지역에서 훈련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다른 팀들도 비슷한 지역으로 내려와 겨울훈련을 시작했는데, 겨우내 그곳에서 훈련을 하던 팀들은 봄이 오고 날씨가 풀려가는 시기에 발맞추어 조금씩 기차를 타고 북상하며 연습경기를 치렀고, 4월이 되면 다시 뉴욕이나 LA 같은 본거지로 올라와 정규시즌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스프링캠프는 '봄 날씨인 곳을 찾아가서 차리는 훈련장'을 의미한다.미국과 달리 지역별 기후의 차가 크지 않은 한국에서는 스프링캠프란 곧 '해외전지훈련'을 의미하는 말로 통한다. 1, 2월의 혹한기에 야구훈련이 가능한 날씨는 적어도 일본의 오키나와나 멀리는 괌, 사이판 같은 남태평양 지역으로 건너가야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구단은 미국의 투싼이나 플로리다까지 이동하기도 한다. 물론 과거에는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1989년 시즌을 앞두고 맨발행군과 얼음물 목욕을 포함한 오대산 극기훈련을 단행했던 태평양의 경우처럼 '이열치열식' 역발상을 보여준 경우도 있었으며, 그 태평양이 꼴찌에서 3위까지 수직 상승하는 성공사례를 만들자 1990년대 초반의 몇 해 동안은 모든 구단이 '얼음계곡 입수'와 '해병대입소' 같은 격한 프로그램으로 스프링캠프를 꾸렸던 적도 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8-15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9]스위치히터와 스위치피처

상황따라 '왼쪽·오른쪽' 타석 선택최근 완성도 높은 '우투좌타' 선호스위치히터(switch hitter)란 필요에 따라 왼손과 오른손 타석에 모두 들어설 수 있는 타자를 말한다. 그런 타자가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른손 투수의 공은 왼손 타자가, 왼손 투수의 공은 오른손 타자가 유리하다'는 상식 때문이다. 공을 던지는 투수의 팔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휘둘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팔꿈치를 반대로 틀어서 던지는 역회전공 같은 특이한 변화구를 제외하면 모든 공은 투수의 팔 쪽에서 몸통 쪽으로 휘는 궤적을 갖게 된다. 따라서 오른손 투수가 던지는 공은 왼손 타자에게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 오른손 타자에게는 조금씩 멀어져가는 느낌이 된다. 그리고 '같은 손 투수'가 사이드암 유형의 투구 폼으로 각도가 큰 슬라이더를 던지기라도 한다면 타자의 등 뒤쪽에서부터 휘면서 스트라이크존 반대 쪽 끝을 스치고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끔찍한 공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감독들은 불펜에 왼손, 오른손 투수들을 여러 명 준비시키면서 경기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왼손, 오른손 타자에 맞는 족집게식 처방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명의 타자가 상황에 따라 왼손 타석과 오른손 타석에 모두 들어설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수비 팀이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어떤 투수를 내보내더라도 앞서 설명한 '유형에 따른 주도권'은 타자가 쥐게 되기 때문이다. '양손잡이'라고 해도 사람은 대부분 더 강한 힘을 가진 팔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대부분 스위치히터란 오른손 타자가 왼손 타석에서도 공을 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서 도달하는 하나의 경지다. 왼손 타석은 오른손 타석에 비해 1루와의 거리가 한걸음 반쯤 더 가깝기 때문에 내야안타의 가능성도 더 높아지며, 1루 주자를 향한 포수의 시야를 가릴 수 있어 작전 수행에도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면 원래 왼손잡이였던 선수라면 굳이 오른손 타석에까지 서기 위해 노력할 요인이 비교적 적다.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스위치히터로는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했던 미키 맨틀이 꼽힌다. 미키 맨틀은 통산 타율이 0.298일 만큼의 정교함과 통산 536개의 홈런을 기록했을 만큼의 파워, 그리고 월드시리즈에서만 18개의 홈런을 날렸을 만큼의 결정력을 두루 갖춘 최고의 타자였는데, 좌우타석에서 모두 170m 안팎에 달하는 엄청난 비거리의 홈런을 여러 차례 기록하기도 했다.한국에서는 장원진(두산)과 박종호(LG, 현대, 삼성)가 좌우 양쪽에서 모두 정교한 타격과 파워를 선보인, 가장 완성도 높은 스위치히터였다고 평가받는 가운데 외국인 선수인 펠릭스 호세(롯데)가 언제라도 좌우 양쪽 타석에서 번갈아 홈런을 터뜨릴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스위치히터의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위치히터 보다는 '우투좌타'를 만나기가 조금 더 쉽다. '우투좌타'란 말 그대로 '타격은 왼손으로만, 수비는 오른손으로만' 하는 것으로서, 상황 대처능력보다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이다. 2008년 타격왕에 오른 바 있는 한국의 김현수, 그리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꼽히는 조 마우어 등이 대표적인 '우투좌타'들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스위치히터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스위치피처'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뉴욕 양키스와 시애틀 매리너스를 거쳐 필라델피아 필리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뛰고 있있는 팻 벤디트가 주인공이다. 팻 벤디트는 2008년 싱글A 경기에서 랄프 헨리케스라는 스위치타자와 맞상대하며 서로 무수히 글러브를 낀 손과 타석을 바꾸며 신경전을 벌이며 화제를 모았다. 투수가 왼손에 글러브를 끼고 오른손으로 던질 준비를 하면 타자는 왼손 타석으로 옮겼고, 그러면 반대로 투수가 글러브를 바꾸어 끼고, 또 그러면 타자가 오른손 타석으로 옮겨 서는 식이었다. 어쨌든 그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스위치피처와 스위치히터가 만났을 경우, 투수가 먼저 어느 손으로 던질 것인지 정해서 표시해야 하고, 투수와 타자 모두 그 타석에 한해서는 손을 바꾸어 쓸 수 없다'는 새로운 규정이 정해지기도 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8-07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8]세이브와 블론세이브

김용수·정명원등 마무리투수 계보끝판왕 오승환 '277' 최다 세이브선발투수의 영광이 '승리투수'로 보상 받는다면, 마무리투수의 목표는 '세이브 투수', 즉 승리를 지켜낸 투수가 되는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 규정집에는 '자기 팀이 3점 이하의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1회 이상을 던지거나, 점수차에 상관없이 3회 이상을 던지면서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승리를 지켜내는 투수. 혹은 루상에 나가 있는 주자와 상대하는 타자, 그리고 그 다음 타자까지 득점하면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등판해 승리를 지켜내는 투수에게 세이브 기록이 주어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기고 있는 경기를 맡아서 끝까지 지켜낸다'는 대전제 외에도 '너무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경기를 지켜내는 것은 별 칭찬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한 제한사항들이다. 반대로 세이브 요건이 충족되는 상황에 나와서 동점, 혹은 역전을 허용하며 세이브 기회를 날리는 것은 '블론 세이브(blown save)'라고 한다. 말 그대로 세이브를 '날려버린다'는 뜻이다.대략 150년이 넘는 야구의 역사에 비추어본다면 세이브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1969년, 일본은 1974년, 한국은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부터 세이브를 공식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경험이 축적되면서 구원투수들의 능력과 기여도는 승-패로 측정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발투수가 무조건 한 경기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과, 능력 있는 투수가 자신의 경기를 완투한 다음에도 동료가 난타당하며 고생하는 경기에 끼어들어 '한 손 돕는' 것이 자연스럽던 시절을 지나, 한 팀의 투수들 사이에 일정한 역할분담을 함으로써 더 확고한 승리를 도모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시기가 대략 그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점점 더 경기 후반 마무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고, 따라서 마무리투수의 몸값도 오르는 동시에 마무리투수의 몸에 대한 관리의 필요성도 더 높이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승기를 잡았다 싶은 순간부터 몇 회든 경기의 후반부를 책임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마무리투수의 역할 또한 '1회 이내'로 한정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의 기준으로 보자면 1983년 OB에서 단 두 번만 선발등판을 하고 나머지 37경기를 구원으로 등판해 32번 경기를 끝내며 14세이브를 올린 황태환 투수가 최초의 마무리투수라고 볼 수 있으며, '세이브 상황에만 등판하는' 현대적인 개념의 마무리투수로는 이듬해인 1984년 같은 팀에서 활약하며 25세이브를 올린 윤석환 투수와 1985년 삼성에서 26세이브를 올린 권영호 투수를 시초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마무리투수의 위상을 선발투수와 나란히 놓을 정도로까지 올려놓은 인물은 1986년부터 1999년까지 MBC와 LG에서 붙박이 마무리로 활약하며 통산 227세이브를 올린 김용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빠른 공과 정교한 제구력, 그리고 침착한 성격을 겸비해 마무리투수의 교과서적인 상을 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김용수 이후 한국 마무리투수의 계보는 정명원(태평양-현대), 진필중(두산), 이상훈(LG), 임창용(삼성-야쿠르트), 정대현(SK), 오승환(삼성)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명원, 진필중, 이상훈, 오승환 등이 그랬던 것처럼, 1이닝 정도는 빠른 직구로 압도할 수 있는 투수들이 마무리투수로 선택받는 경향이 많았지만 정대현과 정우람처럼 공은 느리지만 정교한 제구력과 완숙한 변화구, 그리고 노련한 두뇌플레이로 타선의 예봉을 무력화시키는 유형의 마무리투수들도 없지는 않다. 현재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은 삼성에서 277번의 승리를 지켜낸 뒤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오승환이 가지고 있으며, 역시 해태와 삼성에서 전성기를 보낸 뒤 일본과 미국을 거쳐 다시 삼성과 기아 유니폼을 입은 임창용이 20여 개의 격차로 뒤쫓고 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7-31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7]사이클링히트

한경기서 단타·2루타·3루타·홈런기록 집착하다 '팀워크 방해' 우려한 명의 타자가 한 경기에서 단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모두 쳐내는 것을 말한다. 물론 한 경기에 홈런 서너 방을 때려내는 것보다 더 대단한 업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는 기록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사이클링 히트'라고 표현하지만 미국에서는 '히트 포 더 사이클(Hit For The Cycle)'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올마이티 히트(Almighty Hit)' 또는 '해트 트릭(Hat Trick)'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6월 12일 삼미와의 경기에서 삼성의 오대석이 처음으로 달성한 이래 2017년 6월 7일 삼성전에서 두산의 정진호가 만들어낸 것까지 모두 23번 기록됐다. 양준혁은 1998년 8월 23일에 이어 2003년 4월 15일에도 기록해 생애 2회 기록을 가진 최초의 선수가 됐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상대팀은 자신의 소속팀 삼성의 숙적이었던 현대였다. 그리고 2015년에는 NC 소속의 외국인 타자 에릭 테임즈가 4월 9일 기아전과 8월 11일 넥센전에서 각각 기록해 '한 시즌 2개의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기도 했다.가장 아깝게 사이클링히트를 놓친 경우로는 3루타가 필요한 상황에서 홈런을 날린 1995년 LG의 조현, 2010년 넥센의 유한준, 혹은 3루타까지 쳐놓고도 2루타 한 개가 부족해 놓친 2010년 두산의 최준석 등이 있다. 물론 가장 어렵다는 3루타까지 완수해 놓은 상태에서 2루타나 단타 하나가 모자라 기록 달성에 실패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하지만 최준석의 경우 특별히 아쉽게 생각되는 이유는, 최소한 130㎏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체구 덕분에 상대 외야수의 보이지 않는 실책이 결부된다고 해도 3루타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선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7년까지 그가 치러온 15시즌을 통틀어 3루타는 딱 5개 밖에 기록하지 못했는데, 그 중의 한 개를 기록한 데 이어 홈런과 단타까지 곁들였던 바로 그 날(2010년 5월 14일 SK전) 평소에는 비교적 흔하던 2루타 한 개를 채우지 못해 역대 사이클링히트 달성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8년 10월 25일에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프로행을 미룬 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뛰던 강기웅이 제일은행과의 경기에서 사이클링히트에 3루타 하나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홈런을 때리고도 고의적으로 홈 베이스를 밟지 않는 '고의적인 누의공과'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홈런을 치더라도 홈 베이스를 밟지 않으면 아웃이 되며, 그 전에 정상적으로 밟은 마지막 루인 3루까지의 진루만 기록으로 인정된다는 규정의 허점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부가 기울어 있는 상태에서 상대 간판타자의 괘씸한 기록 만들기까지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한 제일은행 코칭스태프는 누의공과를 항의하지 않았고, 심판 역시 모른 체해버림으로써 강기웅은 원치 않는 홈런기록만 하나 추가한 채 사이클링히트 기록 만들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이클링 히트는 업적으로서의 의미보다는 '기념품'으로서의 의미가 더 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장타력과 정확성과 스피드까지 겸비한 타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훈장이긴 하지만, 동시에 실력보다도 더 큰 운이 따라야만 완성될 수 있는 간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이클링 히트 기록 만들기 위해 너무 집착하는 모습은 종종 팀워크를 해치는 이기적인 행위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상 강기웅의 '고의 누의공과' 같은 두드러진 사례들 말고도 지금까지 달성된 사이클링히트 기록 중 몇몇은 '3루타 치고 2루에서 멈추기'나 '2루타성 타구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3루까지 질주하기' 같은 소소한 노력의 에피소드들을 품고 있다. 사이클링 히트라는 기록이 가진 묘한 구석이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7-24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6]보크

타자 스윙과 주자 주루에 큰 영향이중동작 등 심판의 '절대적 판단'동네축구에서 가장 흔하게 입씨름의 빌미가 되는 판정이 '오프사이드(off-side)'라면 동네야구에서는 보크가 비슷한 몫을 한다. 하지만 오프사이드가 전문화된 주심과 선심이 활동하는 프로무대에서는 거의 시빗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과 달리 보크는 프로야구 경기에서도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세이프-아웃'처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행위의 결과에 관한 판정이 아니라, '동작'에 관한 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디오판정의 대상이 점점 확대돼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심판의 절대적인 판단에 맡겨져 있는 애매한 영역이기도 하다. 원래 보크(Balk)라는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방해하다'라는 뜻이 나온다. 하지만 야구장에서는 '위투(僞投)', 즉 투구동작에서 속임수를 쓰는 행위를 가리킨다. 심판에 의해 투수에 대한 보크가 선언되면 주자들에게는 각각 한 베이스씩의 안전진루권이 주어지며, 타자에게는 한 개의 볼이 카운트된다. 야구경기의 모든 플레이는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그 출발점이 되는 투수의 투구동작에 대해서는 특별히 세밀한 규정의 간섭이 이루어진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투수의 투구를 신호로 개시되는 타자의 스윙과 주자의 주루에 관한 모든 동작이 잘못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컨대 투수가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던지지 않는다거나, 혹은 갑자기 동작을 바꾸어 누상의 주자에게 견제구를 던진다면 타자와 주자는 제대로 타이밍을 잡아 타격과 주루를 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심할 경우에는 근육, 신경 계통의 부상을 입을 우려도 생기게 된다. 투수의 보크행위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투수판이다. 투수판은 투수가 투구동작을 시작할 때 반드시 밟고 있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수판을 밟지 않은 채 투구동작을 하거나, 투수판을 밟은 상태에서 투구가 아닌 다른 동작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으로 보크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행위들이 투수판과 관련해서 보크 판정을 받는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투수가 투수판에 중심 발을 디딘 채 투구동작을 시작한 다음 그 투구를 중지할 때, 투수판을 디딘 채 1루에 송구하는 흉내만 내고 실제로는 하지 않을 때, 투수판에 발을 디딘 투수가 루에 송구하기 전에 발을 그 루의 방향으로 똑바로 내딛지 않을 때, 투수판에 발을 디딘 투수가 주자가 없는 루에 송구하거나 송구하는 흉내를 낼 때 등. 하지만 그 밖에도 보크판정을 받는 경우는 다양하다. 타자가 타석에서 아직 충분한 자세를 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투구하거나 일단 멈춤으로써 투구동작의 정확한 시작을 알리지 않는 경우. 혹은 투구동작 중에 멈추었다가 다시 진행하는 식으로 타자를 현혹하는 경우에도 보크가 선언된다.한국 프로야구에서 벌어진 가장 특이한 보크는 1986년 7월 26일 잠실 경기에서 빙그레 이글스 소속이던 장명부가 저지른 '고의보크'였다. 그날 경기 6회 말에 6대 5로 앞선 경기를 지키기 위해 구원등판한 장명부는 8회 말에 동점을 허용한 데 이어 9회 말에도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맞아 역전주자를 내보냈고, 이어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 상황에서 공을 가지지 않은 채 투구와 유사한 동작으로 몸을 풀다가 보크를 선언 당했다. 하지만 그 판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장명부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연속으로 두 개의 고의사구를 던져 만루를 만들어놓은 다음 투구 자세에서 곧바로 3루에 견제구를 던지는 '고의보크'를 저질러 결승점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 보크 선언을 통해 3루에서 안전진루권을 얻은 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결승점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유일한 '끝내기 고의보크'로 기록되기도 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7-17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5]빈볼

'거친 투수' 이미지로 마운드 군림'의도적' 판단되면 즉각 퇴장 조치빈(Bean), 즉 '콩'은 미국에서 사람의 머리를 가리키는 은어로 쓰인다. 그리고 빈볼(Bean Ball)이란 투수가 타자의 머리를 향해 의도적으로 던지는 공을 말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꼭 머리가 아니더라도 고의적으로 타자의 몸을 맞히기 위해 던지는 공을 두루 가리키기도 한다.'악동'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1980년대 NBA 피닉스 선즈의 간판스타 찰스 바클리는 거친 몸싸움을 즐기는 플레이스타일 만큼이나 사생활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술집에서 벌인 난동으로 경찰서를 오가며 벌금을 물었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노출된 것만 해도 꽤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가 선수생활을 마친 뒤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 대부분의 난동들은 '성질을 죽이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다소 의도적으로 '성질을 쥐어 짜내가며' 벌인 일들이었다고 한다. 그런 거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 농구장에서의 플레이를 한결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몸으로써 몸을 막아내야만 하는 농구경기의 수비수가 자신의 앞으로 달려드는 상대 선수의 험한 인상과 뒷소문을 떠올리며 움찔하는 한순간, 공격수는 쉽사리 한두 걸음을 더 내달리며 골대 가까이 돌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투수 로저 클레멘스나 1950년대의 명투수 샐 매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저 클레멘스는 자기 팀 선수들과의 청백전 연습 경기 중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공을 때려 홈런을 날린 타자에게는 종종 빈볼을 던져 화풀이를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샐 매글리는 '내 할머니라고 해도 타석에 바짝 붙어 선다면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이 세상의 어떤 타자라도 자신의 공에 함부로 손을 댄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독한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그들의 공을 상대하며 '어떻게 때려낼 것인가' 하는 고민에 더해 '때려내도 괜찮을까'라는 고민까지 하느라 주춤대는 순간 이미 그들의 강속구는 포수의 미트에 박히곤 했던 것이다. 야구는 몸과 몸이 부대끼는 것을 넘어 공과 몽둥이라는 '연장'까지 개입하는 살벌한 투쟁의 현장이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몸으로 마주하는 대결을 지배하는 만고불변의 승부처는 역시 '악'이며 '깡'이다. 그래서 빈볼은 온갖 스포츠정신이니 매너니 하는 허울로 덧칠을 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탈색시켜버릴 수 없는 '악과 깡의 맞짱'이라는 본질을 가장 생생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순간이다. 투수들 중 아주 예외적으로 '깡'이 센 몇몇 투수들만이 상대 타자의 머리를 향해 작정하고 강속구를 던질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예외적으로 '악'이 있는 몇몇 타자들만이 공이 귓가를 스쳐간 뒤에도 조금도 물러서거나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그다음 공을 노리며 더욱 집중해서 기어이 안타를 때리고 펄쩍펄쩍 뛰며 투수를 비웃을 줄 안다. 그런 위대한 타자들의 대표격인 테드 윌리엄스는 그래서 감독이 된 뒤 자기 팀 투수들에게 이렇게 충고를 하기도 했다. "혹시 타이 콥이나 조 디마지오 같은 수준의 타자들을 만난다면 절대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지 마라. 그래봐야 공 한 개만 손해를 볼 뿐이고 괜히 타자의 승부욕에 불을 질러 더 공에 집중하게끔 만들 뿐이니까 말이다."빈볼은 아주 흉악한 짓이다. 그래서 의도적인 것으로 판단될 경우 즉시 주심에 의해 퇴장 명령이 내려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출장정지나 벌금 같은 처분이 내려지게 된다. 물론 처분과 무관하게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사악한 짓이다. 하지만 어떤 제재수단을 마련하고 어떤 신사협정이 맺어진다 하더라도 아마 야구장에서 빈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야구, 아니 스포츠를 발생시키고 이어져 내려오게 만드는 어떤 본능에 뿌리를 박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7-10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4]벤치클리어링

의례적 과시 행위로 '싸움 말리기'메이저리그 안 나가면 벌금 물려벤치클리어링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양 팀 소속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몰려나와 뒤엉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말 그대로 벤치가 깨끗이 비워지게(clearing) 되기 때문이다. 흔히 벤치클리어링(Bench-clearing brawl)은 '패싸움'과 같은 말로 이해되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대개의 벤치클리어링은 반대로 '싸움 말리기'의 성격을 가진다. 야구는 공이나 배트, 혹은 스파이크 등을 통해 다른 선수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선수들은 늘 그라운드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긴장된 상황 속에서 빈볼이나 위협구, 혹은 위험한 슬라이딩이나 자극적인 욕설 같은 사건이 돌출하면 종종 선수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경우 소속팀 동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팀 선수가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동시에 경기에서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아주 세심한 방식으로 그 갈등 상황에서 자기 팀 선수에 대한 지지의 뜻을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그라운드로 달려나가 여러 사람의 몸으로 갈등 상황을 무마하는 동시에 자기 팀의 위세와 단합을 과시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이 벌어질 때 함께 달려나가지 않는 선수는 이기적인 선수로 찍히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그런 이기적인 선수들에게 벌금을 물리기까지 하는 것은 벤치클리어링이 '동료를 보호하고, 팀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행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하지만 때로는 벤치클리어링이 의례적인 과시 행위 정도가 아니라 정말 '패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평소 두 팀 사이에 집단적인 대결의식이나 분노가 고조되어 있는 경우, 혹은 미처 말리고 보호할 틈도 없이 치명적인 공격이 감행되어 버린 경우에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 1990년 6월 5일 잠실구장에서 OB와 삼성 선수들이 충돌했던 사건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벤치클리어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날 7회 초 OB 투수 김진규가 타석의 강기웅에게 빈볼성 초구를 던진 데 이어 기어이 2구로 몸을 맞히자 강기웅이 손에 배트를 쥔 채 김진규에게 달려들면서 벤치클리어링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라운드로 쏟아져나온 동료 선수들은 강기웅과 김진규 사이의 몸싸움을 말리는 대신 주먹과 발길질을 보태기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집단 난투극이 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80년대 내내 관통해온 두 팀 삼성과 OB의 라이벌 의식, 그리고 강기웅이 자신의 영남대 2년 후배인 김진규가 의식적으로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는 배신감 때문에 스파이크 날을 세운 채 옆구리를 강타하는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날 몸싸움의 격렬함은 무려 22분간이나 이어졌으며, 그 난투극을 말리려고 고군분투하던 주심 김동앙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맞아 갈비뼈 골절상을 입을 정도였다. 그 결과 두 당사자인 강기웅과 김진규 외에도 OB의 조범현, 김태형, 삼성의 박정환, 김종갑 등 모두 여섯 명의 선수가 퇴장당하고 다시 삼성의 강기웅과 이복근은 경찰서에 형사입건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 대개의 벤치클리어링은 격렬한 패싸움으로까지 비화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야구판이 좁은 바닥이기 때문'이다. 50개 남짓한 고등학교, 그 중에서도 명문으로 불리는 십여 개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이제 많이 늘었다고 해봐야 10개 밖에 안 되는 프로구단을 거치면서 서로 촘촘한 선후배 관계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팀에서 한솥밥을 먹게 될지 모르는 한국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서로를 향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7-03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3]병살타와 삼중살

잘 맞은 타구에서 발생하는 '역설'이만수·양준혁 등 강타자들 단골무사 주자 1, 2루, 볼카운트는 2-3. 투수는 반드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며 주자는 투수가 투구동작에 들어가자마자 달리기 시작하는 상황. 공격팀 주루코치가 슬슬 어깨를 풀기 시작하고 수비팀 감독이 숨을 죽이는 순간. 긴장해 몸이 굳은 투수의 공은 한가운데를 향해 밋밋하게 날아가고, 한껏 노리고 있던 타자의 배트에 정확히 맞아 총알같이 투수 곁을 스쳐 날아간다. 모든 일이 공격팀의 기대와 수비팀의 우려대로 흘러가는, 어쩌면 한 경기의 승부 자체가 성큼 움직이는 순간.하지만 1루 주자의 움직임을 따라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2루수는 정확히 2루 베이스 위에서 타구를 잡아내고 한쪽 다리를 뻗어 2루 베이스를 밟은 다음, 다시 몸을 돌려 이미 2루 베이스 앞까지 달려와 있던 1루 주자의 몸을 태그한다. 직선타를 잡는 순간 타자를, 2루 베이스를 밟는 순간 이미 3루를 향한 2루 주자를, 다시 달려오던 관성을 이기지 못한 채 2루수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1루 주자의 몸을 태그하는 순간 1루 주자를 잡아낸 세 개의 아웃카운트. 공격팀 더그아웃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리고, 굳어있던 수비팀 더그아웃에 슬며시 웃음기가 흐른다. 2007년 6월 13일, 삼성 라이온즈 3, 4번 양준혁과 심정수를 2루와 1루에 놓고 5번 박진만의 정확한 타구를 잡아내 분위기를 극적으로 뒤집어낸 기아 2루수 손지환의 '무보살 삼중살' 상황이다.축구장에 '골대 세 번 맞히고 이기는 경기 없다'는 속설이 있듯 야구장엔 '병살타 세 개 치고 이기는 경기 없다'는 말이 있다. 병살타는 말 그대로 공격팀의 재앙이며 수비팀의 환상이다. 하지만 병살타는 모호하고 역설적인 구석이 있다. 병살타란 대개 좋은 기회와 좋은 타구가 만나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다. 어지간히 잘 맞지 않은 타구는 두 명의 주자를 잡을 만한 시간을 벌어주지 못하며, 주자가 없거나 2사를 당한 뒤처럼 '기회'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병살타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병살타를 줄이기 위한 타격훈련'을 할 수도 없다. 병살타란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피해가려다 보면 오히려 좋은 타구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통산 병살타 부문 맨 위쪽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는 것은 안경현, 마해영, 양준혁, 이만수, 김한수 같은 전설적인 강타자들이다. 그리고 해마다 팀 병살타 상위권을 채우는 팀들 역시 가을야구 단골팀들이다. 그래서 병살타라는 사건을 놓고 강자와 약자를 가려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터져 나온 다음의 상황이다. 두세 번쯤 적시타가 아닌 병살타로 누상이 깨끗이 청소된 다음 순간마다 타자들이 '어차피 나간다고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홈런 스윙으로 일관하는 팀과 지독한 불운을 상대로 '네가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보자'는 집념으로 또다시 집요하게 공을 고르고 안타를 쳐서 한 발 한 발 치밀하게 1루를 노리는 팀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경기를 하다 보면 아무리 잘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돌발변수가 병살타라면 그것에 마음 휘둘리지 않고 차근차근 그 다음 기회를 만들어가는 단단한 의지야말로 진정한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사실 흔한 말과 다르게 땀과 노력은 종종 사람을 배신한다. 스포츠가 도박과 달라봤자 '기칠운삼(技七運三)'이냐 '운칠기삼(運七技三)'이냐의 문제라는 말에도 진실이 있고, '기(技)'라는 것 또한 노력만이 아니라 '재능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운'으로도 이루어진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불운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결국 승부를 가르는 것은 노력의 절대적 양이라는 점에 야구의 매력이 있고 인생의 공정함이 있다.야구의 여러 요소가 삶의 여러 구석을 은유한다면, 병살타는 행운과 성공 사이사이에 매복하고 있는 불운을 상징한다. 그리고 병살타 직후의 타석에서도 공 한 개를 골라내는 데 전념하는 타자의 승부는 집요한 불운 속에서도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한 근거가 된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6-26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2]백투백홈런

9회말 역전 두방 삼성 'KS 첫우승'日선 5명 타자 연속으로 담장 넘겨두 명의 타자가 연달아 날리는 홈런을 일컬어 흔히 '연속홈런' 혹은 '랑데부홈런'이라고 부르곤 한다. '랑데부홈런'이 일본식 명칭인 반면 미국에서는 '백투백홈런(back to back home run)'이라고 부른다. 세 명의 타자가 연속으로 홈런을 때려내는 경우에는 '백투백투백홈런(back to back to back home run)'이라고 한다. 그것을 그대로 우리 식으로 번역한다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홈런'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네 명의 타자가 연속홈런을 날린다면 '백투백투백투백', 다섯 명의 타자가 때린다면 '백투백투백투백투백' 홈런이 된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백투백투백투백' 홈런이 한 번 나온 적이 있었다. 2001년 8월 17일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한화의 경기에서 삼성은 3회 말 이승엽, 마르티네스, 바에르가, 마해영이 연달아 홈런을 날리며 순식간에 1-0의 점수차를 5-0으로 벌려놓았다. 그 날 한화의 선발투수는 한용덕이었다. 미국에서도 4연타석홈런이 최다기록인데, 모두 여덟 차례 작성이 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2007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라미레스, J. D. 드루, 마이크 로웰, 제이슨 베리텍이 연달아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양키스에게 3-0으로 끌려가던 승부를 단숨에 4-3으로 뒤집은 장면이었다.하지만 프로야구 세계기록은 일본이 가지고 있다. 1971년 5월 3일 도에이 플라이어즈는 롯데 마린즈를 상대로 연장 10회 초 무려 다섯 명의 타자가 연속홈런을 기록했던 것이다. 굳이 말장난 같은 '백투백투백투백투백 홈런'을 야구용어사전에 넣게 만든 전설적인 사건이었다.'연속타자홈런'과는 다르지만 현대 유니콘스는 '5연타수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2000년 4월 5일, 대전경기에서 현대는 7회 초 박종호, 박재홍, 윌리엄스가 연달아 홈런을 날린 데 이어 심재학이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한 다음 또다시 퀸란과 이숭용이 연속 홈런을 날렸다. 그 날도 상대는 한화 이글스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단 두 명의 타자가 합작한 단순한 '백투백홈런'이었다. 2002년 11월 10일 대구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6으로 끌려가던 삼성은 9회 말 이승엽의 동점 스리런 홈런에 이어 숨 돌릴 틈도 없이 터져 나온 마해영의 역전 솔로홈런으로 경기를 끝내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터져나온 것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시리즈에 일곱 번이나 진출하고도 일곱 번의 준우승에만 머물러야 했던 삼성이라는 전통의 강팀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겨준 두 방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달랐다. 그것은 3승1패에서 3승2패를 허용하고, 다시 3승3패의 동률을 허용한다면 7차전은 오히려 수세적인 입장에서 치러야 할 위기에서 만들어낸 기적적인 대역전극이었던 것이다.메이저리그에서도 '백투백투백투백보다 인상적인 백투백' 홈런이 있었다. 1990년 10월 14일, LA 에인절스와의 경기에 나선 시애틀 매리너스의 2번 타자 켄 그리피 시니어와 3번 타자 켄 그리피 주니어가 나란히 홈런을 날렸는데, 둘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였다. 아버지의 나이는 40세, 아들은 20세였다. 전세계를 통틀어 '부자 백투백홈런'은 그것이 유일했는데, 야구 선수 아들을 가진 모든 야구선수들, 아니 어쩌면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들의 꿈을 상징하는 장면일 것이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6-19 경인일보

[김은식의 야구란 무엇인가·11]방출

평생 야구만 한 사내들의 절망감1982년 '꼴찌' 삼미 11명 정리해고삼성 라이온즈에서 데뷔해 다섯 팀의 유니폼을 입었던 동봉철은 '팀으로부터 처음으로 버림받은 느낌'을 이렇게 기억했다. "친정 팀과 처음으로 만나서 타석에 섰는데… 떨렸어요. 그냥 떨린 게 아니고, 방망이를 제대로 쥐지 못할 만큼 후들후들 떨렸어요. 그래서 안타를 치겠다거나 공을 골라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옆에 앉아 있는 포수가 내가 떨고 있는 걸 보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 밖에 안 들더군요. 열이 받아서도 아니고, 얼어서도 아니고,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게 엄청 떨었던 기억 밖에 없네요." 주체할 수 없는 떨림. 그의 말대로 그것이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버린 팀에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과열된 오기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평생을 야구장에서 살아온 한 사내가 새삼 발견한 냉랭한 현실 앞에서 조그만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그대로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싸늘한 긴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그렇게 함부로 버려질 만큼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한다는, 천금 같은 삶의 무게와의 살 떨리는 대결이었을 것이다. 조직에서 버려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받아왔던 따뜻한 대접들이 사실은 자신이 아닌 자신의 사소한 능력 따위를 향한 것이었을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평생 야구만을 잡고 살아온 이들에게 그것은 좀 더 현실적인 절망이기도 하다. 대개 초등학생 시절 야구에 입문한 이래 중·고등학교와 혹은 대학을 거치며 내내 수업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던지는 일에만 전념해온 이들에게 야구 말고 할 줄 아는 일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중 지도자 자리를 얻거나, 새로운 팀을 만나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행운을 잡는 몇몇을 제외하면 하필 가장 많은 돈이 필요한 삼십 줄 안팎에서 퇴직금 한 푼 없이 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그래서 막상 구단 숙소를 나서는 순간 그들이 대면하는 현실은 '박수 받으며 내려오고 싶다'는 한가한 명예나 자존심 타령이 아니라 당장 기저귀 값 잡아먹고 학원비 잡아먹으며 쑥쑥 커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나오는 한숨들이다.0.01초 차이로 세이프와 아웃이, 그리고 승리와 패배가 갈리는 야구장에서 몇 년의 세월은 짧지 않다. 그리고 해마다 새로운 선수를 뽑고 키워야 하는 야구팀에서 늙고 병들고 지친 선수들을 무작정 끌어안고 있을 수도 없다. 떠나고 헤어지는 일들이 다 그렇듯,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중 하나가 야구장에서는 방출이다. 하지만 2009년, 경기의 승패가 완전히 기울어지기 전에는 내보낼 수도 없었던 부실한 투수 이대진의 이름을 한국시리즈 출전선수 명단에서 발견한 타이거즈 팬들이 열광하고 2008년 1할 타자 마해영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 자이언츠 팬들이 흐뭇해하는 것도 또한 야구다. 야구장의 묘미는 멋진 플레이와 놀라운 기록들을 함께 하는 것에도 있지만,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들의 소박하지만 비로소 진지해진 싸움들을 지켜보며 내 일처럼 눈물겨워하고 내 일처럼 응원하는 것에도 있다. 방출의 아픔과 절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이가 있다. 1982년 전설적인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는 시즌이 끝나자마자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선수단의 3분의 1이 넘는 무려 11명의 방출. 그 중 김동철이라는 투수가 있었는데, 그 해 그는 팀의 80경기 중 32경기에 나서 93이닝을 던졌고 1승 9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은 7.06으로 지금까지도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중 최악으로 남아 있는 기록이다. 비록 빼어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선발, 중간, 마무리 구분 없이 '마당쇠'노릇을 한 셈이었고, 대학 4학년을 중퇴하고 입단해 단 한 해를 뛰었을 뿐인 스물 네 살의 젊은이였다. 하지만 여지없이 '해고' 통지를 받은 그는 좌절했고, 결국 철길에 몸을 던져 야구와 함께 삶을 마감했다. /김은식 야구작가김은식 야구작가

2017-06-1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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