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3]1984년 '마무리 투수' 도입한 OB

年 200이닝 이상 소화 선발 희생 커김성근 감독 투수 능력 끌어 올리려윤석환에 후방 맡겨 로테이션 완성1984년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각 팀의 에이스들이 가장 처절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해였다. 팀당 100경기가 치러지던 그 해 무려 여섯 명의 투수들이 각 팀의 운명을 짊어지고 200이닝 이상을 던져야 했기 때문이다.물론 200이닝 투구라는 것이 투수 혹사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다. 오히려 200이닝을 소화한다는 것은 내구력과 안정성을 겸비한 완성형 선발투수, 즉 진정한 에이스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단면으로 인정되기도 한다.하지만 최소한 2000년대 이후의 200이닝이란 온전히 선발투수로서 일정한 등판간격과 투구수 관리를 받으며 만들어내는 기록들이라는 점, 그리고 경기수가 130경기 안팎으로 늘어난 환경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30여 년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1984년, 200이닝을 넘겼던 여섯 명의 투수들은 선발등판경기의 절반 이상을 완투했음에도, 대개 선발로서 등판했던 경기의 수는 전체 출장경기수의 절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길어야 사나흘에 한 번씩 마운드에 올라 별일 없으면 완투를 해야 했고, 쉬는 날에도 경기 흐름이 묘하다 싶으면 구원 등판해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이 에이스의 역할이라는 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이런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단적인 투수운용을 했던 팀이 있었다. 바로 OB다. 그해 라이벌 팀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1984년 OB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는 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였다.두 해 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박철순의 허리부상은 쉽게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박철순 급'의 에이스란 훈련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OB는 원년 멤버 계형철, 박상열과 신예 장호연, 최일언, 김진욱 등 좋은 재목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박철순의 대역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김성근 감독은 결국 여러 명의 투수들이 각자 가장 강력한 순간만을 마운드 위에 설 수 있도록 치밀한 분업 체계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선발로 나서지 않으면서 전천후로 후방지원을 하는 투수'인 윤석환이었다.선린상고 3학년이던 197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의 윤학길과 맞대결해 15-1로 이겨 우승을 이끌며 주목을 끌었던 윤석환은 성균관대를 거쳐 그 해 처음 프로무대로 들어섰다. 좌투수로서 빠른 공과 안정된 제구력도 겸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낙천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선수였다. 신인으로서 연투의 경험이 적다는 것이 약점이었지만, 짧은 이닝만 던지게 한다면 장점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김성근 감독의 판단이었다.그렇게 강속구 투수 계형철과 김진욱,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포크볼을 던지던 최일언 그리고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박상열과 장호연이 돌아가며 선발 마운드에 오르는 '로테이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누구든 경기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상부상조하며 서로를 갉아먹는 대신 늘 대기하고 있던 윤석환에게 공을 넘기는 분업체계도 자리를 잡았다.한국야구가 마무리투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에이스들의 어깨를 아껴주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몇 해가 지난 뒤부터였다. 1980년대 후반의 김용수는 약체팀을 최약체로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고, 90년대 초반의 송진우와 선동열은 강팀을 최강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또한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만약, 1984년에 OB가 조금 더 전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두 해라도 일찍 마무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한두 해라도 먼저 투수들을 '아낀다'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면,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숱한 영웅들의 이름 앞에서 적지 않은 '비운'의 딱지들이 지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에 말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4-16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상대 혼 빼앗는 MBC 청룡의 발야구

김재박·이해창 등 도루 10걸 5명내야수플라이만으로 홈 파고들어기동력 활용 전후기 통합승률 1위 1983년 MBC 청룡은 1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타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을 뿐 아니라,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 선수조차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루 10걸 안에 무려 다섯 명의 선수들(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이종도, 김인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청룡이 기댈 수 있는 득점루트는 그들의 다리 뿐이었다.특히 발야구를 이끌었던 김재박과 이해창의 위력은 단지 도루의 개수만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둘은 숱한 단타를 2루타로, 또 2루타를 3루타로 바꾸어냈고, 조금 깊숙한 내야수 플라이만으로도 3루에서 홈으로 파고드는 명장면을 연출하곤 하는 송곳 같은 선수들이었다. 9월 14일 경기에서의 대역전극도 그 해 팀의 1,2번으로 나란히 출격해 상대 팀의 넋을 빼놓았던 숱한 명장면들의 한 단면이었다.그리고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조직력이 엉성했던 그 시절 대포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는 송곳이었다. 타구를 쫓아가기에도 급급했던 수비수들에게 주자들의 발놀림까지 묶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고,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도루나 리터치를 허용한 수비수들은 제풀에 무너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차원 높은 기동력을 활용해 상대팀 수비진의 빈틈을 집요하게 후벼 파는 움직임으로 청룡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전후기 통합승률 1위로 기록될 수 있었다.물론 그해의 청룡은 끝이 좋지 않았다. 단지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무 4패로 철저히 무너지며 준우승에 머물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1차전과 2차전에 김동엽 감독은 끊임없이 교체신호를 보내는 선발투수 오영일과 유종겸을 7점과 8점을 내주도록 방치한 채 완투시키는 심술을 부렸다. 선수들도 태업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승리에 대한 집념을 포기해버리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악의 졸전을 벌였기 때문이다.뒷날 밝혀진 것은 후기리그 막바지에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내걸었던 우승보너스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시작된 갈등 탓에 이미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도 전에 MBC의 선수와 감독과 구단이 산산이 쪼개져 버렸더라는 것이었다. 그 해의 준우승을 끝으로 청룡은 다시는 포스트시즌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팀이 돼 버리고 만다. 한국시리즈에서 노출되었던 불화 탓에 김동엽 감독이 다시 반 년 만에 옷을 벗었고, 선수들 내부에서도 팀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으며 가지고 있던 역량을 흐트러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청룡은 한국야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던 팀이었지만, 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자기혁신을 이룰 여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빠른 팀이긴 했지만, 가장 빠르지도 못하면서 파괴력도 가지지 못한 애매한 팀컬러로 하위권을 전전했고, 결국 1989년을 끝으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만년 꼴찌 팀 삼미 슈퍼스타즈와 비교해보더라도, 요즘 MBC 청룡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차라리 인상적인 꼴찌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LG가 청룡을 인수해 트윈스로 새출발하던 첫해 우승을 이루어내며 청룡 팬들의 아쉬움마저 흡수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를 더 꼽는다면, 청룡이 정말 청룡다운 모습을 보였던 유일한 해였던 1983년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며 기억 속에서마저 '철인 장명부'와 '해태왕조의 개막'에 밀려버렸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오늘날 '강함보다는 세밀함', 그래서 '한 베이스 더 가고 30㎝를 더 빠르게 선점하는 야구'를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한 한국야구의 한 뿌리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한 번 쯤 되새겨볼 만하다. 1983년은 장명부가 427.1이닝을 던져 30승을 거둔 해였고,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에 성공하며 왕조시대의 첫걸음을 시작한 해다. 하지만 또 하나 그 해의 프로야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해에 MBC 청룡이 '야구에서 점수를 내는 것은 빠른 공과 강한 방망이가 아니라 지능적이고 역동적인 인간의 발'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4-09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꼴찌 상징' 삼미의 특별했던 열정

朴 연승 기록 여러차례 중단 위기"정말 무시무시한 팀이었다" 회상이듬해 전력보강, 11명 방출 아픔지난 1982년 첫 발을 내디딘 한국프로야구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야구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연재했던 김은식 작가가 이번에는 30여년의 세월 동안 야구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또는 눈물을 흘리게 했던 한국 야구의 명장면을 소개한다.1982년, 22연승을 하며 단일시즌 세계최다경기 연승기록을 세운 박철순이 여러 차례 삼미 슈퍼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힐 뻔 했던 것은 사실이다. 박철순은 당시를 회상하며 "제일 애를 먹인 건 삼미였어. 그 녀석들은 왜 그렇게 홈런을 잘 때렸는지…. 삼미 때문에 연승 기록이 몇번이나 끊어질뻔 했어. 삼미는 누군지도 모르는 타자들이었는데, 정말 무시무시한 팀이었어"라고 평가했다.그해 5월 26일에도 8회에 구원등판해 2실점하며 패전위기에 빠졌다가 연장 10회 말에 터진 양세종의 끝내기안타로 10연승 관문을 통과했다. 6월 2일에도 6회에 등판했다가 동점을 허용하며 연장 14회까지 끌려간 끝에 이홍범의 끝내기 희생플라이 덕에 12연승 째를 기록하기도 했다. 15연승 째였던 6월 16일 경기 역시 김우열의 3점 홈런에 힘입은 역전승이었다. 하지만 늘 마지막 승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슈퍼스타즈에게 남은 것은 16전 16패의 참담한 성적표뿐이었다.이듬해, 삼미 슈퍼스타즈는 국가대표 배터리 임호균과 김진우, 그리고 삼미를 16전 16승으로 짓밟았던 OB가 양보한 서울 출신의 이선웅과 대전 출신의 정구선을 영입하며 한 명도 없던 국가대표 출신을 4명이나 보유하게 된다. 게다가 일본프로야구 통산 91승의 거물 장명부와 일본프로야구 10년 경력의 유격수 이영구를 영입하며 이름 그대로 '슈퍼스타들의 팀'으로 거듭나게 된다.하지만 지우고 싶었던 전년도의 참극은 고스란히 못난 선수들의 탓으로 전가되었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며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뛰고 굴렀던 11명의 선수들에게 한꺼번에 정리해고통보가 전해졌다. 그 열 한 명 중에는 1982년 봄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에 뛰어들어 15번의 선발등판을 비롯해 32번이나 출전해 93이닝을 던졌던, 하지만 그 해 겨울 방출 통보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투수 김동철도 있었다.패배자의 삶은 그런 점에서 고달프다. 이기고 졌다는 것이 그대로 노력과 열정의 있고 없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기억되다보니, 패배자란 그저 진 사람이 아니라 게으르고 열정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곤 하는 것이다.그래서 꼴찌의 상징이 되어버린 삼미가 정말 땀도 열정도 없었던 쓰레기였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증언을 남겨야 한다.정부의 '방침'이 떨어지고부터 단 1개월 만에 6개 구단을 창단하고 다시 석 달 만에 개막전을 치러야 했던 세월 속에서 그들을 프로무대에 올려놓은 '졸속한' 과정은 시대적인 희극이었다고 하는 게 맞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도전에 나서 있는 모든 것을 던져 한 순간 타오른 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던 삼미 선수들의 무모한 열정에야 박수를 보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김은식 야구작가

2018-04-0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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