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코로나19 자문활동'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교수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18일 "코로나19의 지역사회 유행 가능성을 정부가 예상해 온 만큼, 이제는 이런 지역사회 유행을 효과적으로 막을 체제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 자문특보단에 참여하고 있는 엄중식 교수는 "검역이라는 과정으로 코로나19를 걸러내는 건 한계가 있는 만큼, 세컨 웨이브(2차 유행)가 올 것이라는 걸 정부가 예상하고 있었고, 대응방안을 고민하는 상황이었다"며 이같이 말했다.우리나라에선 이날 현재 감염원이 파악되지 않은 3명의 확진 환자(29·30·31번)가 나온 상태다. 이들은 해외 여행력이 없고 확진자 접촉력도 드러나지 않아 지역사회 감염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엄 교수는 "(이들이) 감염자와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최종적으로 확인이 되면 지역사회 유행이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면서도 "다만 이런 역학조사 과정이 훨씬 복잡한 만큼, 확인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지역사회 유행 징조가 생긴 만큼, 이르면 3월 말 정도 진정될 것으로 예상되던 코로나19 상황이 조금 더 길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코로나19에 따른 지나친 사회활동 위축은 경계했다. 엄 교수는 "지역사회 유행 가능성이 지난주보다 커진 건 맞지만,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다"며 "통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개인위생 등에 신경을 쓰고 정부가 발표하는 코로나19 관련 내용에 관심을 가져주는 정도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2020-02-18 이현준

[인터뷰… 공감]'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 자문특보단'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교수

신종플루 당시 스승과 참여 '시작' 메르스 대응 대통령 표창 받기도기존 병원업무에 정책 보조·국민 정보 제공 하루 2~3시간밖에 못 자초기 적절한 진단·치료로 '관리 가능'… 고위험군 감염 차단에 '신경'질본 '승격' 권역별병원 방역 운용 효율… '유사시 손실' 예산 확충 강조"감염병 관리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 자문특보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엄중식(53)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신종 감염병 관련 업무는 뭔지 모르는 적과 싸워야 하는 일인 만큼, 더욱 체계를 갖춰 유사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엄중식 교수는 "미국은 신종 감염병이 발생하면 국가 안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개념으로 준비를 한다"며 "우리도 그런 전문적이고 특별한 조직은 물론, 인구와 경제규모에 맞는 관련 예산을 확보해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신종플루·메르스의 경험이 코로나19 대응 토대엄중식 교수는 코로나19 발생 직후부터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 등의 감염병 관련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발생 초기엔 청와대를 찾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직접 하기도 했다고 한다.엄 교수는 "기존 병원에서의 업무가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각종 자문 활동 등을 하느라 하루 2~3시간 정도밖에 못 자는 경우가 많았다"며 "정책 자문과 동시에 감염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일도 맡게 돼 두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다.엄 교수는 지난 2009년 신종플루 유행 상황 당시, 스승인 김우주 고려대 교수와 함께 정부 대응 업무에 참여한 걸 계기로 감염병 유행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 자문 등 역할을 하고 있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 상황이 끝난 뒤엔 '메르스 대응 유공 정부포상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엄중식 교수는 '메르스'가 감염병 대응을 위한 기본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엄 교수는 "인천시가 운영하고 있는 감염병 관리지원단 등 지자체 차원의 감염병 조직이 만들어지고 민간의료기관에 음압병실이 추가로 구축되는 등 메르스가 감염병 대응 인프라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된 건 사실"이라고 했다. 또 그때의 경험이 이번 코로나19 대응의 주요 토대가 됐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중국이 원인불명의 폐렴 발생을 발표하자 질병관리본부는 위기대응총괄과를 중심으로 국내 영향 분석을 시작했고, 검역 강화, 환자 발견, 접촉자 확인 등 초기 대응을 했다. 확진자가 일정하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역사회 감염 유행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내리고 선별진료소와 국가지정관리병상 등을 운용하도록 했다. 이런 체계적 대응의 출발점에 역설적으로 '메르스'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중국 근로자·유학생 입국 많은 시기… 잘 관리해야엄중식 교수는 중국 춘제가 끝나고 중국 근로자와 유학생의 입국이 집중되는 2월말을 전후해 국내 확진자 수가 늘어날 수 있는 만큼, 모니터링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최근 일본 사례처럼 지역사회 유행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은 상황에서 장기전 태세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엄중식 교수는 코로나19가 초기엔 중국 우한지역을 중심으로 감염 위험이 높고 사망률이 높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생각이 됐지만, 우한이 아닌 지역에선 사망률이 낮게 나타나는 등 다방면으로 검토했을 때 바이러스 자체에 의한 사망은 아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했다.감염 초기 적절한 진단과 치료가 있다면 어느 정도 관리가 가능한 감염병이라는 설명이다. 엄 교수는 "진단과 치료가 적절히 이뤄지고, 영유아나 노인, 만성질환자, 암환자, 장기이식환자 등 면역력이 떨어지는 고위험군이 감염되지 않도록 한다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했다.엄 교수는 단 "이번 코로나19가 사라질 병인지, 토착화할 병인지, 매년 주기적으로 유행할 병인지에 대해선 아직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내 방역체계 보완 필요엄중식 교수는 메르스 이후 우리나라의 방역 보건 대책이 많이 개선됐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다고 했다.엄 교수는 우선 질병관리본부를 전문가로 구성되는 '질병관리청'으로 승격시켜 국가 방역과 보건 분야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이렇게 되면 수년째 추진되지 않고 있는 중앙 감염병 전문병원을 비롯해 권역별 감염병 전문병원을 만들기도 수월해지고, 국가방역체계는 물론 민간 의료기관들이 갖춰야 할 감염병 대응체계 등을 더욱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된다고 엄 교수는 강조했다. 감염병 환자들을 보낼 곳이 없어서 민간 의료기관에 보내야 하는 상황도 예방할 수 있다.엄 교수는 신종 감염병 대응을 위한 예산도 더욱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인구규모와 경제수준을 고려한 예산 책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대응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엄 교수는 "전쟁이 꼭 일어나기 때문에 안보·국방 예산을 그렇게 많이 확보해 두는 게 아닌 것처럼 감염병 분야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감염병 분야도 미리 투자를 해놓지 않으면 유사시 엄청난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만큼, 적절한 대비가 필요하다"며 "국가 방역체계와 의료체계를 계속해서 보완하지 않으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감염병이 발생했을 때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기침예절·손 위생 챙겨야지난 1월 코로나19 첫 확진자 확인 이후 마스크 대란이 발생하고 각종 행사나 모임이 취소되는 상황이 지속됐다. 엄중식 교수는 코로나19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지나칠 만큼 걱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엄 교수는 "지역사회 유행이 의심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동조치 등이 제한되는 중국의 우한처럼 일상이 파괴될 정도인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감염에 주의하면서 통상적으로 생활하면 된다"고 했다. 이어 "코로나19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쌓이고, (당국이) 대응책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며 "평상시대로 생활하면서, 기침 예절과 손 위생에 신경을 쓰고 정부가 발표하는 코로나19 관련 정보에 귀 기울이는 정도의 관심을 유지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엄중식 교수는?▲학력고려대 의학박사▲약력현 가천대 길병원 기획조정실장현 대한내과학회 수련이사현 대한의료관련감염관리학회 정책이사현 대한의사협회 국민건강보호위원회 감염분과 위원장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비상근위원현 식품의약품안전처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위원전 가천대 길병원 교육수련부장전 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분과장전 강동성심병원 기획조정실장▲수상 메르스 대응 유공 정부포상 대통령 표창보령의료봉사상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 자문특보단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감염병 관련 업무는 국가 안보만큼 중요한 일"이라며 "유사시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만큼, 감염병 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한 조직을 갖추고 인구·경제규모와 맞는 예산을 확보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020-02-18 이현준

[인터뷰… 공감]필리핀 '프랜차이즈 골든 바보이' 성공시킨 정원석 공동대표

배낭여행 인연… 현지 강사 일대일 메신저 수업 '외국어교육 사업' 발들여전통요리 '리엠뽀' 친숙한 재료 통하는 맛… 15년 인력관리 노하우 '양념'생채소 곁들인 한국음식 고급 건강식 '공감대' 분기별로 무료급식 봉사도직원·손님 함께 'K-POP 춤판' 놀이방 문화… 페이스북 팔로어 10만 육박"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는 한국입니다."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저녁이 되자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내 중심가의 한 상가 2층 식당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밀려든다. 식당 안은 벌써 손님들이 빼곡하다. '치익~치익~' 한국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달궈진 불판에 먹음직한 삼겹살이 막 올라간 순간이다. 왁자지껄한 사이로 소주잔이 오간다. 안주는 주먹만한 삼겹살 쌈이다. 벽면의 커다란 TV에서는 한국 드라마와 뮤직비디오가 나온다. 요즘 마닐라 사람들에게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무한리필 삼겹살 프랜차이즈 '골든 바보이' 매장이다."필리핀에 쌈밥과 삼겹살 프랜차이즈가 등장한 것은 몇 년 됐습니다. 우리는 작년 3월에 1호점을 열었으니 조금 늦은 셈이죠. 늦었으니 남들과 달라야 했는데, 현지에서 15년간 외국어 교육을 하며 얻은 노하우가 큰 힘이 됐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상권 분석과 과감한 투자로 최대한 빠르게 고객을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골든 바보이를 운영하는 GBF CORPORATION의 정원석 대표는 사실 외식업이 아닌 '외국어 교육'에서 잔뼈가 굵었다. 지난 2006년 수원에 (주)유에듀케이션을 설립해 전화·화상을 활용한 외국어 교육 사업을 시작해 15년째 외국어 교육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필리핀과는 배낭여행으로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됐어요. 2006년부터 필리핀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는데, 현지인 강사를 고용해서 한국 학생에게 MSN 메신저로 일대일 수업하는 형식이었죠. 처음에 강사 다섯명이 일하는 사무실로 작게 출발했던 사업이 200여명으로 규모가 커졌고, 대기업을 대상으로 사내교육도 진행하게 됐습니다."그동안 경험이 없었던 외식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이유에 대해 정 대표는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한국의 문화나 아이템이 없을까 항상 고민해 온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무엇으로 시작할까를 놓고 처음에 고민이 많았죠. 외국인들이 좋아한다는 비빔밥의 경우 실제로는 해외 현지에서 호불호가 갈립니다. 반면에 숯불에 구운 고기는 세계 어디에서도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힙니다. 특히 삼겹살의 경우 필리핀 현지 전통요리 중에도 리엠뽀라는 삼겹살 요리가 있을만큼 친숙한 재료여서 '통하는 맛'이 될 것 같았어요. 만약 앞으로 일본의 스시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가 생긴다면 삼겹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렇게 선택한 삼겹살 프랜차이즈 '골든 바보이'가 짧은 시간에 큰 인기를 얻은 데는 정 대표가 현지에서 15년간 쌓아온 사업 노하우가 자리해 있다. "영어에 능통한 직원이 많아 소통이 잘되는 것이 운영 비결 중 하나입니다. 종업원 교육이 서비스의 수준을 좌우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본사에서 직접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효과적인 교육 노하우 뿐 아니라 15년 동안 쌓아온 인력관리 노하우까지 접목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정 대표는 교육, 화장품, 인터넷 카페 프랜차이즈 사업체도 겸업해 비즈니스 인맥이 넓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의 '커뮤니티 문화'를 이해하고 사업에 접목하는 수완도 좋다. "음식점은 당연히 맛이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맛만큼 중요한게 있어요. 바로 '분위기'와 '비주얼'이죠."정 대표는 골든 바보이에서 커뮤니티 매니저 역할을 하는 현지 직원들을 다수 고용했다. 직원들은 손님이 매장 사진을 찍고 SNS 계정에 올리기 편한 환경을 조성한다. 이를테면 '사진 맛집'을 만든 셈이다.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얻은 특별한 경험을 친구들과 공유하면서 더 기분좋은 체험을 하도록 배려했다. "필리핀은 청년층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젊은 나라입니다. 특히 1980~2000년대 초반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IT에 능통하고, 삶의 질을 중시하죠. 우리가 여행을 가서 먹는 것을 SNS에 인증하듯이, 마닐라의 청년들도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삼겹살과 소주를 먹고 쌈을 싸먹는 식문화 체험을 SNS에 인증하는 것을 최대한 비즈니스에 활용했습니다."마닐라의 청년들에게 한국 식문화 체험을 '제대로' 하도록 정 대표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한국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매장의 테이블과 의자 등 인테리어 자재는 모두 한국에서 들여왔습니다. 연기를 빼는 덕트와 고기를 굽는 불판, 그릇과 젓가락까지 모두 한국산입니다. 한국식 서비스 정신도 한국을 경험하는 기분을 내게 하는 요인 중 하나여서 친절한 서비스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그래서 SNS 리뷰에 꼭 등장하는 문구가 '직원들이 너무 친절했다'는 말입니다. 현지 가게들은 친절요인을 한국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차별화된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이 같은 SNS 전략이 주효하면서 골든 바보이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goldenbaboyph)는 팔로어가 1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1호점 문을 연지 1년도 안된 것을 감안하면 폭발적인 인기다. 골든 바보이의 또 다른 차별화 전략은 매장 내에서 K-pop 춤을 추는 공연을 여는 것이었다. 모든 매장에서 오후 7시께 사람이 가장 많을 때 직원들이 나서 손님들과 K-POP 춤판을 벌인다. 한국 사람들처럼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딱 맞춰 만든 전략이다. 어른들이 음식과 춤과 노래에 빠져있을때 아이들은 한국식 '놀이방'에서 뛰논다. 식당 놀이방은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현지에는 원래 없던 문화다. 놀이방에 대한 부모들의 호응도 뜨겁다. "사실 필리핀은 생채소를 거의 안먹고 조리해서 먹는 문화입니다. 많은 손님들이 고기를 쌈에 싸먹는 것을 신기해하는데, 기름을 많이 쓰는 필리핀식 요리보다 생채소를 곁들인 삼겹살 쌈밥이 몸에 좋고 맛도 좋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음식은 건강한 음식'이라는 공감대가 생겼고, 삼겹살을 '고급 음식'으로 인식하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하지만 삼겹살이 고급 음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돈 없는 서민들이 삼겹살을 사 먹기란 쉽지 않았다. 정 대표는 그래서 밥차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분기별로 가난한 지역을 찾아가 수백명의 아이들에게 삼겹살 무료급식 봉사를 했다. 아이들이 삼겹살이 구워지는 밥차를 보며 즐거워하는 영상은 페이스북에서 수십만 명이 조회했다. 정 대표는 예비창업자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기존 한식당은 교민 대상으로 영업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교민들도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분이 많기 때문에 투자에 소극적이어서 테이블 대여섯개의 소규모 식당이 많고, 고급식당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330㎡정도 규모로 좋은 시설을 갖추는 것이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됩니다."정 대표는 우리 정부가 코트라와 한식진흥원을 통해서 마닐라의 주요 상권을 시장 분석한 통계를 제공해 예비창업자를 돕고 있다고 귀띔하면서 "필리핀은 성장 가능성이 크고 새로운 기회가 많이 남아있는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은 인구가 감소 추세인 반면, 동남아 국가는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성장률도 좋습니다. 특히 필리핀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신속하게 파병한 나라입니다. 필리핀 사람도 한국사람을 좋아하고 국가 호감도가 높습니다. 광역시권 '메트로 마닐라'에는 2천500만명이 살지만 면적이 서울보다 좁아 인구밀도가 훨씬 높은데, 기회가 그만큼 많다고 보면 됩니다. 마닐라는 소득 수준이 높은 편이고 소비층이 두터워서 한국의 음식이나 문화 등을 잘 마케팅 하면 충분히 성장 가능성 있는 시장입니다."정 대표는 마지막으로 "올해는 골든 바보이를 확장할 것"이라며 "현재 운영하는 9개 매장 외에도 5개 매장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연내 40호점까지 개장할 계획"이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글/강보한기자 kbh@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정원석 공동대표는?▲ 2019년 필리핀법인 GBF CORPORATION 공동대표 (공동대표 권신) ▲ 2017년 필리핀법인 U-KB ELITE PRODUCTS INC. 설립▲ 2006년 필리핀법인 MEGA ENGLISH ONLINE 설립 ▲ 2006년 (주)유에듀케이션 설립(경기도 수원) ▲ 2004년 성균관대학교 공학박사필리핀에서 무한리필 삼겹살 프랜차이즈 '골든 바보이' 매장을 운영하는 정원석 대표가 "한국 음식은 건강한 음식이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삼겹살을 고급 음식으로 인식하게 하는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밝히고 있다.삼겹살 프랜차이즈 '골든 바보이' 페이스북에 게시된 사진들. /정원석 대표 제공삼겹살 프랜차이즈 '골든 바보이' 페이스북에 게시된 사진들. /정원석 대표 제공삼겹살 프랜차이즈 '골든 바보이' 페이스북에 게시된 사진들. /정원석 대표 제공

2020-02-11 강보한

[인터뷰… 공감]'모래판 르네상스 이끄는 민속씨름 짐승돌' 수원시청 이승호·임태혁

비인기 종목 설움 딛고 '25년째 샅바'… 몸집 키우기 부단한 노력개인별 3~4개 주특기, 상대 움직임 따라 자신도 모르게 여러 기술 사용"이승호, 대기할때 눈 안 마주치더니 3초만에 넘겨" 맞대결 뒷얘기위험운동 이유 학교공간 사라져 아쉬움… 日스모처럼 우리도 계승을'씨름'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여전히 천하장사 이만기다.이만기는 모래판 위의 짜릿한 승부사였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만인의 스타였다.언제부턴가 모래판의 영웅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씨름은 명절날 KBS 1TV에 잠깐 비출 뿐 명맥만 유지됐다.하나 이제 다시 씨름이다. 박진감 넘치고 멋진 승부를 다룬 씨름이 유튜브를 통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특히 경량급과 중량급을 가르는 금강장사들의 활약에 국민들의 눈이 쏠렸다.버티다 먼저 지치는 선수가 지는 '황소 씨름'이 아니다. 금강급 씨름은 눈을 뗄 수 없다. 순간 승패가 판가름난다.씨름 르네상스 중심에 수원시청 씨름단 '10초 승부사' 이승호(34), '기술씨름의 황태자' 임태혁(31) 선수가 있다.이승호는 지난달 24일 열린 '위더스제약 2020 홍성설날장사씨름대회' 금강장사 결정전에서도 꽃가마를 탔다.이날 금강장사를 포함해 8차례 금강장사, 1차례 통합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설날 대회의 결승 상대는 임태혁이었다. 임태혁은 통산 14차례 금강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실력자로 둘은 10차례 가량 맞붙어 5대 5로 박빙을 보였다고 한다.같은 씨름단 소속이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평소 온몸으로 연마한 기술을 한껏 뽐냈다.서로 훈련하며 부대낀 팀 동료 간의 맞대결은 설날 장사 씨름대회의 백미로 꼽혔다.임태혁이 먼저 1점을 가져왔다. 이승호가 내리 2점을 따내 마지막 1점이 남았다. 마지막 승부처에서 임태혁의 선제 공격을 이승호가 되받아쳐 3대 1로 승리했다.이승호는 "씨름 기술이 교본상 100개가 넘을 것"이라며 "보통 선수 개개인별로 3~4개의 주특기가 있는데, 순간순간 상대 움직임에 따라 대응하는 식이라 나도 모르게 여러 기술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둘의 기술은 예술적 경지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튜브 씨름 채널에서도 인기다.임태혁의 주기술은 밭다리, 잡채기, 배지기다. 이승호는 밭다리, 잡채기, 들배지기를 주로 쓴다.경기가 시작되면 빠른 움직임으로 모래판 승부를 겨루고 씨름을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쾌감을 안긴다.임태혁은 "임기응변으로 몇 가지 기술을 순간적으로 해보면서 중심을 무너뜨리는 연습을 한다"며 "시합 때는 상황이 되면 어떤 기술을 써야지 하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했다.맞대결 뒷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임태혁은 "이승호 선수는 10초 승부사라고 불리는데, 사실은 3초면 다 끝낸다. 대기할 때부터 눈도 안 마주치고 불편해 하더니 3초에 넘기더라"며 웃었다.이승호와 임태혁 모두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장 한쪽 구석 모래판에서 꿈을 키웠다.임태혁은 친형을 따라 5학년 때 시작했다. 빵을 주니까 멋 모르고 들어갔다가 하다 보니 재미가 있었고 희열도 있었다고 했다.문제는 체격이었다. 초등학교 선수의 경우 40㎏급이 최경량급인데 샅바를 처음 둘러맨 5학년 당시 30㎏ 밖에 몸무게가 나가지 않고 키도 작아 잘 못했다.몸을 키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끝에 고교시절 85㎏까지 체중이 불어 처음으로 1등을 해봤다. 씨름 마이너리거의 메이저리그 정복기인 셈이다.이승호는 방과후 축구도 하고 간식도 준다기에 씨름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임태혁과 달리 키는 컸지만, 너무 마른 것이 문제였다. 고교까지 70kg급 선수로 뛰다 몸을 키워 90㎏ 금강급에서 정상에 섰다.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딛고 '모래판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나란히 자리를 잡은 두 장사는 25년째 샅바를 잡고 있다.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씨름이란임태혁은 씨름을 "넘어지면 지고 넘기면 이기는 재미있고 매력적인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복잡하지 않은 규칙을 토대로 누구나 편하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는 것이다.이승호는 씨름을 정의하기 어려워하면서도 국기(國技) 지정을 호소했다.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씨름이라는 스포츠가 한국에 존재했다. 일본의 인기 스포츠 스모처럼 국기로 지정해 민속성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어 "태권도를 한국 대표 스포츠로 배우듯이 활성화해서 체력을 연마하기 정말 좋은 운동이 씨름"이라며 "IMF 이후 기업이 힘들어지면서 인기가 사그라지고 학교에 설치했던 씨름판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없어져 아쉬웠다"고 덧붙였다.두 선수 모두 씨름이 국기가 될 때까지 모래판에서 땀을 흘리겠다는 결기를 보였다.씨름은 지난 2017년 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다.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된 민속놀이가 바로 씨름이다. ■씨름의 역사가장 오래된 씨름의 자취는 '치우희'라는 명칭이다. 치우희는 역사서에 나오는 전설적인 무신 '치우천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후한서와 우리나라의 조선상고사에도 씨름 관련 '각저희'와 '씰흠'으로 기록이 남아있다.민속씨름(프로씨름)은 1982년 4월 민속씨름위원회 발족을 원년으로 한다.1983년 출범을 알린 민속씨름은 같은해 4월14일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했다.출범 당시 태백급, 금강급, 한라급, 백두급 4체급으로 시작했지만, 1987년 12월 태백급을 없앤 3체급으로 운영하다 1991년 5월에는 금강급까지 없애 백두급(100kg 이상), 한라급(100kg 이하)만 운영하고 단체전을 신설했다.민속씨름 탄생 이후 씨름이 점차 인기를 더해가면서 일양약품, 보해양조, 럭키증권, 현대, 삼익가구, 부산조흥금고, 인천 등 팀이 창단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아 잇단 팀의 해체로 인해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마지막 남은 현대 팀이 한국씨름연맹에서 탈퇴해 실업팀으로 전향하면서 민속씨름을 관장하던 한국씨름연맹은 씨름단(회원단체)없이 단체만을 유지했다.2016년 3월 전국씨름연합회와 대한씨름협회가 통합해 각종 위원회를 설치하고 씨름 중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5년 4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해 2018년 남북공동 등재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씨름의 세계화도 꿈꾸고 있다.글/김영래·손성배기자 yrk@kyeongin.com 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이승호는▲ 1986년 1월17일생. 만 34세▲ 키 185㎝ 몸무게 90㎏▲ 대구 영신고등학교▲ 인하대학교▲ 2020 설날대회 등 8회 금강장사, 1회 통합장사■임태혁은▲ 1989년 1월14일생. 만 31세▲ 키 183㎝ 몸무게 93㎏▲ 공주생명과학고▲ 경기대학교▲ 2019 용인대회 등 13회 금강장사, 1회 통합장사수원시청 씨름단 소속 이승호(왼쪽), 임태혁 선수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 같은 체급인 두 선수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씨름의 부흥을 이끌겠다고 다짐했다.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2020-02-04 김영래·손성배

[인터뷰… 공감]잊힌 독립투사 평전으로 되살린 소설가 이원규

분량이 조금만 길어도 읽히지 않는 'SNS식 글쓰기'가 범람하는 시대 속에서 호흡이 긴 글이 살아남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도 점점 줄고 있다.14년 전 쓴 항일투사 약산 김원봉(1898~1958)의 평전을 200자 원고지 700매 분량이나 늘리고 고쳐서 지난해 11월 '민족 혁명가 김원봉'(한길사)으로 다시 펴낸 이원규(73) 작가의 글쓰기는 그래서 더욱 간절하다. 글을 줄여야 읽히는 판에 그는 오히려 글을 대대적으로 늘렸다.소설가인 이원규 작가는 평전만 5권을 냈다. 이원규 작가의 평전이 인기가 좋다 보니 평전을 써 달라는 출판사도 덩달아 많아졌다고 한다. 이원규 작가는 소설과 평전, 르포를 쓰기 위해 199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도 중국 등 해외 곳곳의 독립운동 현장을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대학에서 전혀 다른 장르인 '소설'과 '논픽션'을 함께 강의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글쓰기 특성 때문이다. 이원규 작가는 "문장을 잘 쓰는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기자처럼 현장감이 있고 학자처럼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그런지 내 평전이 많이 읽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의 작가인생 전반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글쓰기란 무엇인지, 그러한 글쓰기가 왜 중요한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원규 작가는 "SNS에서는 200자 원고지 5매가 넘어가면 읽지 않는 시대"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으로 적셔서 독자를 스토리 라인에 몰입시키는 호흡이 긴 글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20-01-28 박경호

[인터뷰… 공감]'평전 쓰는 소설가' 인천 이원규 작가

출판사 독립운동 관련작품 요청에 中만주등 해외 20여차례 답사·취재'분단'으로 지워진 김원봉·김산·조봉암·김경천 '항일투사들' 재조명좋은 문장에 현장감·학문적 접근 '성공적 평전'… 많이 팔리고 반향 커향토사연구 아버지이어 '항구도시' 지역 근현대사 배경으로 한 글 쓸것약산 김원봉(1898~1958), '아리랑'의 김산(1905~1938), 죽산 조봉암(1899~1959), '백마 탄 김 장군의 전설' 김경천(1888~1942). 이들 항일투사 4명은 이제는 대중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다. 그러나 분단의 모순 때문에 남에서도 북에서도 오랫동안 그 이름이 지워졌던 비운의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천 출신 이원규(73) 작가가 '평전'을 써서 되살려 낸 이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원규 작가의 평전들은 잘 팔렸다. 그래서 반향도 컸다. 북한에서 장관인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내 남한에서는 '금기'였던 김원봉은 이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도 멋들어진 의열단장으로 묘사된다. 간첩 누명을 쓰고 '사법살인'을 당했다가 복권된 인천 출신 거물 정치인 조봉암의 재조명 열풍이 분다. 이원규 작가는 2005년 출간한 평전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을 대대적으로 손질해 14년 만인 지난해 11월 '민족혁명가 김원봉'(한길사)으로 다시 펴냈다. 기존 '약산 김원봉'보다 200자 원고지 700매 분량이나 늘린 원고지 2천500매의 방대한 분량이다. 지난해 말 인천문화재단이 주최한 '민족혁명가 김원봉' 북콘서트에서 이원규 작가는 "평전은 다 썼다. 인천 근현대사 배경 소설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평전은 김원봉으로 시작해 김원봉으로 마침표를 찍은 것일까. 지난 20일 인천 남동구 소래포구 근처 자택에서 만난 이원규 작가에게 자세히 물어봤다."평전 전문 작가처럼 되어버려서 다음 평전을 써 달라는 출판사들이 있어요. 그러나 이제 늙어 곧 절필할 때가 올 것이니 마지막 책은 소설이어야 하지요. 본업은 소설가지만,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서 억울한 사람들의 평전을 쓰다 보니 책으로는 5권에 4명을 썼습니다. 사실 평전으로 딴짓하는 게 2013년 쓴 '조봉암 평전'(한길사)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봉암이 인천사람이라서. 그런데 1995년 카자흐스탄 답사 때부터 근래까지 계속 자료가 나오고, 유족까지 찾아와 자료를 건네준 김경천은 안 쓸 수가 없었어요. 김원봉도 첫 평전을 쓴 이후 계속 새로운 자료가 나오는데 고치지 않을 수 없었죠. 이제 억울한 사람은 다 쓴 것 같아요."이원규 작가는 1992년부터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등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지역이라면 어디라도 찾았다. 홀로 떠나거나 출판사, 방송국, 신문사를 이끌고 해외를 답사한 것만 20여 차례다. 특히 조선의용군의 항일 전투지역인 타이항산(太行山) 유적은 처음으로 발굴했다. 지금도 독립운동 연구자들이 타이항산을 찾을 땐 이원규 작가를 '나침반'으로 삼는다고 한다. 치열한 해외 취재는 이원규 작가의 소설과 평전의 뼈대를 이뤘다. 그다음 각종 문헌과 자료를 이 잡듯 찾아 채워 넣었다. '민족혁명가 김원봉'의 경우 책에 붙인 주석만 300여개다."평전은 3가지입니다. 기자가 쓰는 것, 연구자와 교수가 쓰는 것, 작가가 쓰는 것인데 모두 일장일단이 있어요. 기자들이 쓰는 평전은 현장감이 좋아요. 기자들은 현장이 아니면 증거가 아니니까요. 학자들은 근거가 매우 확실하지만, 재미는 없지요. 작가는 문장이 좋습니다. 저는 소설가이니 문장은 좋고, 현장을 많이 다녔으니 기자처럼 현장감은 자신 있었어요. 학자처럼 공부만 하면 3가지 평전 작가의 장점은 다 갖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내 평전이 많이 팔리는 평전인데, 작가의 문장에 기자처럼 현장감 있게 학자처럼 학문적으로 접근한 게 적중한 것 같습니다."동국대학교 국문과 출신인 이원규 작가는 인천 대건고등학교와 인항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등단해 인천의 분단 현실을 다룬 소설을 주로 썼다. 단편소설 '포구의 황혼'(1987년)과 '침묵의 섬'(1988년), 장편소설 '황해'(1989년) 등이 그의 대표적인 분단소설이다. 신구미디어라는 출판사가 3년 동안 교사 월급만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독립운동사 소설을 써 달라고 제안했을 때 학교를 그만두고 해외 독립운동 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렇게 1995년 9권짜리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신구미디어)를 출간했다. 이어 1996년 르포 '독립전쟁이 사라진다'(자작나무)도 펴냈다. 전업 작가로 나선 후에도 동국대와 인하대에서 강의하면서 문학상 수상자와 등단작가 20여명을 키워내기도 했다."동국대 국문과 동문인 조정래 형이랑 친하게 지냈는데, 그 형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아버지가 일제 때 관리를 해서 내가 분단 얘기를 못 쓴다'고 했어요. 베트남전쟁 참전 경험을 담은 소설 '훈장과 굴레'가 1986년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 공모에 당선되면서 문단에서 주목받은 이후였죠. 나는 조정래 형에게 '우리 아버지가 친일한 관리가 아니다'라고 맞받아치면서 소래포구를 배경으로 실향민의 아픔을 다룬 단편 '포구의 황혼'을 썼는데, 그게 형을 매료시켰나 봅니다. 그때는 조정래 형의 '태백산맥'이 연재될 때라 문단의 흐름이 분단소설이 아니면 인정해주지 않았던 시대였어요. 그러나 당시 분단소설은 전부 다 '산'이었지 '바다'를 가지고 쓴 분단소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천하고 바다를 배경으로 분단소설을 썼습니다. 조정래 형이 '태백산맥'을 연재하던 '한국문학'에 단편 '침묵의 섬'을 발표하고 장편 '황해'를 계속 연재했어요. 조정래 형이 저에게 불을 지른 셈이죠. 베트남전 참전 경험은 결국 외세에 대한 민족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평전으로 가게 한 것 같고요."평전에서 다시 소설로 간다는 이원규 작가의 다음 작품은 무엇을 다룰까. 다음 집필 구상에 대해서는 이원규 작가의 부친이자 인천 향토사연구 1세대인 서계당 이훈익(1916~2002) 선생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훈익 선생은 1983년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를 열고 타계할 때까지 향토사 수집·발굴을 이어가며 8권의 향토사료집을 출간한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다."소설은 인천 이야기를 좀 써야 할 것 같아요. 전북 군산의 미두(米豆·곡물거래소)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1939년)가 일제강점기 때 어떻게 사람이 적응해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명작이라고 하는데, 일제 때 항구도시 인천은 군산보다 더 컸어요. 미두도 더 크고요. 그런 쪽으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전은 그냥 써서 자료가 다 들어가면 끝인데, 소설은 끊임없이 문장을 고쳐야 하니 훨씬 힘들어요. 아버지의 대표 저술인 '인천지지', '인천지명고', '인천 성씨인물고'를 증보 출판하고 싶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향토사를 60세에 시작했는데, 생전에 '나는 근대 이전을 할 테니 너는 근대 이후를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근대 이후를 추가해 증보한다면 '이훈익·이원규 공저'로 할 수도 있고요. 건강이 예전만 못해서 지속적인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죽을 때까지 써야죠."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이원규 작가는?1947년 인천 서구 연희동 연안이씨 집성촌에서 300년을 산 토박이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인천고와 동국대 국문학과를 나와 젊은 시절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겨울무지개'가, 1986년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장편 공모에 '훈장과 굴레'가 당선됐다. 이후 창작집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 장편소설 '훈장과 굴레', '황해', '마지막 무관생도들' 등을 출간했다.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1~9', 르포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1~2' 등이 있다. 평전으로는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조봉암 평전', '김경천 평전', '민족혁명가 김원봉' 등이 있으며, 약전 '애국인가 친일인가'를 펴냈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박영준문학상, 동국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동국대 겸임교수로서 10여년간 소설과 논픽션을 강의했다.지난 20일 인천 남동구 논현동 자택 서재에서 만난 이원규 작가. 그는 1987년 발표한 단편소설 '포구의 황혼'의 배경인 소래포구 인근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2020-01-28 박경호

[인터뷰… 공감]경기도 최초 '31개 시·군 정책간담회' 마친 송한준 도의회 의장

■간담회통해 발견된 경기도 숨은 사정들남부권 속하면서도 상대적 열악한 안성낮은 도비 보조 복지사업 문제등 드러나■지역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작년 22건 322억 특별교부금 편성 이뤄내교량 보수등 해법 마련… 필요한 곳 지원役■이후 의정활동 계획소중한 의견들 '백서' 제작 참고자료 활용수도권내륙선 건설·북부경제 발전등 주력흔히 경기도를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대도시에서부터 농촌지역까지, 또 위로는 남북 접경지역이, 서(西)로는 해안지역, 동(東)으로 상수원보호구역 등까지 다양한 모습을 한 31개 시군이 경기도라는 하나의 단위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경기도의회는 저마다 여건이 다른 지역이 품고 있는 여러 고민을 처방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경기도의회 송한준 의장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대표적인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도의회 의장으로는 최초로 도내 31개 모든 시군을 찾아가 정책간담회를 가졌다.그는 지난 2018년 10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정책간담회를 위해 145시간을 들여 회의하고 2천660㎞를 이동했다. 특히 31개 시군마다 품고 있는 고민을 공유하고 또 4천194건에 달하는 도의원들이 제시한 공약의 시행 가능성을 일일이 살피면서 그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들였다.송 의장은 "142명의 의원들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내걸은 공약은 각자의 비전과 철학을 담고 있는 만큼, 또 무엇보다 주민들과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지역의 현안을 파악하고 의원들의 공약 실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시군 정책간담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시군정책간담회의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시군정책간담회가 발견한 경기도의 숨은 사정다양한 모습을 한 경기도에 하나의 처방을 낼 수는 없기 때문에 그간 각종 정책은 비슷한 환경을 공유하고 있는 권역별로 설계되는 경향이 있었다. 송 의장은 시군 정책간담회를 통해 권역 속에 숨은 시군의 사정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역설했다. 송 의장은 "안성에서 가졌던 첫 번째 정책간담회부터 상당한 충격이었다"며 "경기도 내륙에도 섬이 있었다. 경기 남부라고 하면 북부지역에 비해 여러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고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지만, 안성은 남부권에 속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고 말했다.안성시에는 도시가스 보급률이 낮아 늘어나는 수요는 물론, 기존의 수요도 충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 도내에서 유일하게 철도망이 없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이같은 문제 인식을 토대로 도의회는 화성동탄에서 안성, 청주국제공항을 잇는 '수도권내륙선' 국가철도망 건설 계획 반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또 '용두사미식'으로 진행되는 복지사업에 지친 시군을 위한 논의도 시작했다. 복지 사업에 대한 도비 보조율이 낮아지거나 일몰되는 경우 모든 부담은 시군이 지고 있는 구조라는 지적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대응에 들어간 것이다. 아동복지시설 운영 도비 보조율은 올해 15%로 상향키로 하고 다른 복지사업에 대해서도 논의를 확대한다. 방송통신중고등학교 재학생에게 급식을 제공하기로 하면서 고등학생들에 실질적인 지원이 돌아갈 수 있게 한 것도 성과로 꼽힌다.이밖에 양평군에서는 통행량이 많지만 노후화가 심각한 양근교 교량 보수, 이천시 남천상가 공영주차장 조성, 동두천시 생연초 현충탑 부지 반환 등도 시군정책협의회를 통해 발굴돼 해결책을 마련했다.특히 시군 차원에서 대응이 어려운 포천시 지하철 7호선 연장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촉구, 파주시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 자유로 IC설치 등에 도의회가 적극 나서기로 하면서 새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시군정책간담회가 지역에 남긴 것시군정책간담회가 지역의 현안은 시장·군수만 해결한다는 인식을 뛰어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송 의장은 "시군과 지역 도의원이 함께 한다면 지역 현안은 백지장 보다 가벼워질 수 있다"며 "시군 관계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주로 특별조정교부금 지원 신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도의회가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현안 해결이 앞당겨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실제 지난해 22건, 322억원에 달하는 예산이 특별조정교부금으로 편성됐고 아직 반영되지 않은 21건의 사업에도 관련 예산이 편성될 수 있도록 올해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계획이다.송 의장은 "광역의원들이 연 40조원 이상의 예산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비해 각 지역에서의 도의회에 대한 인식은 미비한 수준에 그치고 있어 아쉬웠다"며 "이번 시군 정책간담회가 지역에서 도의원들의 존재를 분명히 하는데 일정 수준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자치분권 시대를 대비해 도의회의 역할을 알리고, 각 지역의 의원들이 충실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데 집중하겠다. 지역 도의원과 시군이 상호 소통·협력해 지원이 필요한 곳에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교량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시군정책간담회는 도의회에도 중요한 경험과 자산이 됐다"며 "지역마다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풀어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조정하면서 상충하는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을 강화하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이벤트를 넘어 도의회의 아이덴티티로시군정책간담회를 통해 얻은 지역의 소중한 의견은 10대 도의회의 숙제이자, 자산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도의회는 시군정책간담회의 내용을 백서로 제작해 향후에 의정활동에 참고자료로 활용할 계획이기 때문이다.송 의장은 "시군정책간담회를 통해 이해하게 된 지역의 현안과 목소리를 정책으로 풀어내기 위해 도 산하 공공기관과 교육지원청을 방문할 계획"이라며 "소통을 강화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제를 공유하고 실질적인 해법을 마련하겠다. 또 도의회 내부에서 간담회를 갖고 문제를 공유하고 해법을 함께 모색할 것"이라고 계획을 소개했다.송 의장은 또 올해 도의회가 풀어내야 할 과제를 꼽고 '도민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의회'를 실현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그는 "수도권내륙선이 국가철도망 건설계획에 포함되도록 나서는 것은 물론, 그간 도의회 차원에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군사 지역에 대한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이밖에도 주한미군의 평택 이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두천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내놔 의정부에서 양주, 포천 등으로 연결되는 북부지역의 경제 벨트를 완성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송 의장은 "동두천이 침체되면 인근 의정부나 양주, 포천 등은 물론, 일산에서 파주까지 이어지는 경기 북부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며 "미리 준비해야 한다. 어떠한 도시형태를 만들어갈 것인지 지역과 함께 고민하면서 북부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겠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송 의장은 "처음 의장으로 출마할 때 의원들과 약속했던 공약을 실천하는 의회를 만들기 위해 아직도 차 안에는 142명 모든 의원들의 공약집을 가지고 다닌다"며 "의회다운 의회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글/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경기도의회 송한준(민·안산1) 의장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5개월여간 진행해온 도의회-시군정책협의회의 성과와 남은 과제에 대해 설명했다.

2020-01-21 김성주

[인터뷰… 공감]11년 만에 돌아온 '마지막 해고자' 김득중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장

'10년내 해결' 공감대 일괄아닌 순차 복직 선택버텨온 46명에 10여일전 '무기 연기' 통보 상식밖일각 '추가 정부지원·복수노조 우려'탓 이해안돼구속된후 아내가 일해 가족들에게 가장 '빈자리'당시 勞 대화해결 노력… 정부 반노동정책 희생양기업 위기땐 노사 머리 맞대고 정부 역할 찾아야지난 7일 쌍용자동차 마지막 복직자들이 공장 정문으로 들어섰다. 돌아오기까지 10년7개월이 걸렸다. 46명의 해고 복직자는 사원증은 받지 못하고 사번만 부여받았다. 복직은 됐으나 생산라인에는 투입할 수 없다는 게 쌍용차의 입장이다. 복직 출근 5일째인 13일 평택에서 김득중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을 만났다.- 세어보니 2014년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 당시, 2018년 이낙연 총리가 공장을 방문했을 때, 지난해 한 번 이렇게 3차례 공장에 들어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방문이 아니라 복직자로 공장에 돌아가게 된 건 햇수로 11년 만입니다."예전엔 해결이 안 된 상태였잖아요. 한 발 건너서 바라봤죠. 반가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2014년에도 정문 앞에서 인사를 했는데(2009년 파업부터)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낯설거나 다가가기 어렵지 않았어요. 그때와 차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복직자로, 쌍용차 직원으로 신분을 회복한 상태입니다. 동료들이 제가 쌍용차 직원이 됐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죠. 생산 라인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나가다가 혹은 식당에서 동료들을 만나면 반갑게 맞아 주기도 하고, 이 상황을 잘 모르는 분들은 '저 사람이 왜 여기 들어왔지' 이러기도 합니다."- 복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나온 2018년 9월 21일부터 오늘(13일)이 꼬박 480일째 되는 날이더군요."당시 이 문제를 만 10년은 넘기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어서 사측과 노조가 한 발씩 양보해서 합의했죠(노조는 전원 일괄 복직 대신 순차 복직을 택했고, 46명은 마지막 순서로 복직이 예정된 해고자들이다). 우선 71명이 복직을 해야했기 때문에 2018년에는 우선 복직자를 정했고, 10년 동안 자기 일처럼 도와줬던 시민사회 각계각층에 복직 이후에도 연대·나눔을 하자고 논의하며 하반기를 보냈습니다. 2019년에 넘어와서는 쌍용차 노·노·사(쌍용차지부·기업노조·회사측)가 같이 종교 지도자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각계 단체 행사가 있으면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죠. 쌍용차 정상화에 힘을 모아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했습니다. 손해배상청구 소송 때문에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죠."- 완전한 복직, 부서 배치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손배소일 겁니다. 2009년 파업에 따른 손해로 배상액을 청구한 게 경찰 20억원·회사 80억원, 합쳐서 100억원이 넘습니다."대법원에 의견 같은 건 다 보냈습니다. 앞으로 정치권 의견도 받아서 보내려고 합니다. 경찰 인권침해사건조사위원회가 지난해에 소송 철회를 권고했습니다. 인권침해사건조사위 보고서의 내용이 나오기 전에 1·2심이 끝났거든요. 보고서에 기초해서 대법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는 상황입니다."- 회사가 복직은 결정해 놓고 생산 라인 배치를 미루는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요. 회사가 아무리 노사 관계를 모른다고 해도 지난 10년7개월을 46명이 어떻게 생활해 왔고 버텨왔는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죠. 이분들에게 공장 부서 배치가 어떻게 다가가는지, 너무 작게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에요. 불과 복직 10여 일도 남겨 놓지않고 12월 24일에 부서 배치를 할 수 없다고 무기한 복직 연기를 통보했단 말이에요. 부서 배치 앞두고 다른 직장에 사표도 내고 이사까지 한 사람들한테 열흘도 남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통보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이유는 상당히 많기는 하겠지만 하나하나 말씀드리긴 좀…."- 이유가 뭘까요."굳이 말씀드리자면,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 게 있잖아요(지난 11일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쌍용차 복직대기자 4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 중 11분이 '쌍용차 지원금을 더 받아내기 위해서' 복직을 연기했다고 대답했거든요. 우리를 볼모로 해서 정부 지원을 받아내려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거죠. 현장에선 복수노조 탄생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고 해요(쌍용차에는 2009년 파업을 이끈 민주노총 쌍용차지부 외에 기업노조가 있다). 회사가 어렵다고도 합니다. 지난해 내내 노사가 회사 어려움에 대해 얘기했어요. 저도 주변에 쌍용차를 사달라는 얘기를 해왔어요. 한상균 전 지부장은 교도소에서 쌍용차 50대를 팔았다고 해요. 정말 위기라면 노·노·사가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노조가 마힌드라 대주주와의 관계에 강점이 있다면 그대로 살리고 쌍용차지부가 소수지만 사회적 힘이 있다면 이것도 쌍용차 정상화에 최대한 장점을 살려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이게 복수노조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고, 충분히 공감했다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를 해왔기 때문에 그것(추가 정부지원·복수노조 우려)때문에 복직을 연기했다고는 이해할 수 없어요."- 올 초에 트위터에서 누이들과 나눈 얘기를 올리신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막내야 괜찮니?","언니, 막내도 이제 쉰둘이야.","그래도 막내야"라고 누이들이 대화를 나눴다는 짤막한 글이었습니다."저는 5남4녀의 막내입니다. 그 SNS는 집에 있다가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누이들을 만나서 나눈 얘기를 올린 거예요. 각자 생활터전이 달라서 연락도 취하지 않고 어머니 뵈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2009년부터 투쟁해오다 보니 집안 반대가 심했을 것 같습니다. 해고 이후에 사모님이 생계를 꾸려나가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누이와 형님들은 제가 하는 활동으로 아내나 자녀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셨죠. 2009년도 사태로 구속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때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아내가 일을 가졌고, 11년째 생계활동을 하고 있어요. 큰 아이는 이제 대학 3학년 올라갑니다. 작은 아이는 중학교 2학년 올라가요. 터울이 있죠. 2009년 공장 점거 파업할 때도 아이들이랑 아내가 현장에 왔었어요. 작은 아이가 4살 때였습니다. 제가 조직쟁의실장이어서 집회 사회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때는 아내도 '당연히 노동자 간부니까'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파업 과정을 보고, 제가 파업 이후에 1년3일을 구속돼 있었고 그 기간에 모든 것들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집중됐죠. 혼자 극복해 나가려고 하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려고 해도 지역의 시선·사회적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힘들어서 저한테 하소연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안했으면 좋겠다. 당신 할 만큼 했다' 이런 정도로만 얘기했지, '당신 계속하면 갈라설거야' 이런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10년 많은 명절과 연휴, 연말 연초 이런 시간을 대부분 바깥에서 보냈습니다. 아이들하고 같이 있지 못했어요. 제 빈자리가 컸죠." - 10년7개월의 시간을 견뎌오셨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지금이 2009년이라면,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저희들은 그런 선택을 계획하지 않았어요. 작년 조사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정부가 반노동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한 수단이 있어야 했고, 그게 법정 관리에 놓여 있던 쌍용차였죠. 상하이차가 먹튀하고 기술 유출해 빼가고 회계조작해서 던져놓은 건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거잖아요. 노동조합은 대화로 풀려하고 방법을 찾자고 해서 퇴직금 담보로 1천억원 대출해서 신차 개발에 넣자, 일을 절반으로 줄여서 잡셰어링으로 임금을 적게 받더라고 함께 살자, 비정규직 계약해지 막기 위해서 노동조합 조합비로 비정규직 인건비를 출연하겠다. 정말 노동진영에서 보면 '저것들 미쳤나'하는 소리를 들을만한 일이지만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내려놓자고 했죠. 그런 게 참 우리만의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가 2009년 3월 말~4월 초거든요. 노조는 미련하게 계속 교섭을 얘기했고, 결국 한 달 반이 지나도 태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해고 통지가 5월 8일 어버이날 2천640명에게 왔죠. 그런 상황에서 어느 노동조합이 수용하겠습니까."- 선택에 내몰리신 거군요."기업에 위기가 올 수 있어요. 그러면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정부는 할 수 있는 역할 찾아야 합니다. 노사 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으면 정부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쌍용차 문제도 결국 정리해고 문제잖아요. 정부의 희생양이었다는 생각을 문득 문득합니다. 아까 예전에 공장에 들어갔을 때와 지금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공장 밖에서 동료를 만나는 것과 공장 안에서 만나는 것은 사뭇 달라요. 포근합니다. 손을 잡아도 더 따뜻합니다. 예전에는 바깥에서 고생하는 저희를 보는 측은지심이나 위로를 담은 악수였고 마음이었다고 하면 요즘 공장 안에서 손을 잡아보면 '우리 함께 하자', '함께 이 상황을 극복하자'는 그런 마음이 느껴져요."누군가에겐 매스컴 속 트러블메이커로 누군가에겐 거리의 투사로 비치는, 한때 노동자 정치인을 꿈꿨던 사람 김득중은 네 명의 누이와 네 명의 형님을 둔 막둥이 동생,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무엇보다 다시 생활인을 꿈꾸는 가장이었다.글/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김득중 지부장은?▲ 1969년 평택시 청북면 출생 ▲ 1993년 쌍용자동차 입사▲ 2008년 민주노총 쌍용차지부 조직쟁의실장▲ 2014년 평택을 국회의원 재선거 노동자 후보▲ 2013년~현재 민주노총 쌍용차지부장11년만에 복직한 김득중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장이 지난 13일 오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평택 쌍용차 정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득중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장이 지난 13일 오후 평택 쌍용차 정문에서 퇴근하는 동료들과 인사하고 있다.

2020-01-14 신지영

[인터뷰… 공감]이달 정식 개장 인천 독서·문화·가구융합공간 '베리굿타임' 황찬희 대표

베스트리빙과 민간서 드물게 염전로 인근에 조성공연·전시 개최… 공장지대 물류창고 화려한 변신수백명 모임가능 북콘서트·독서동아리 '특화장소'곳곳 책 놓인 '가구 판매장' 소파등 마음껏 이용을'꿈의 우체통' 사연 받아서 '실현' 1년간 지원 계획인천 미추홀구 염전로 인천산업용품유통센터 인근엔 공장들이 줄지어 있다. 그중 형형색색으로 외관을 꾸민 건물이 있다. 복합문화 공간이자 가구 판매장인 '베리굿타임'이다. 가구를 보관했던 물류창고를 1년6개월 동안 새롭게 단장했다. 지난달 베리굿타임의 본격적인 개장을 앞두고 '베리 굿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열었는데, 수천 명이 다녀가는 등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베리굿타임은 이달 중 정식 개장한다.베리굿타임은 주변에 있는 건물과 다를 바 없는 창고였다. 가구 판매·제조기업인 (주)베스트리빙이 가구를 보관하는 용도로 썼다. 베스트리빙과 디자인기업인 '시오데코' 황찬희 대표가 뜻을 모아 베리굿타임을 탄생시켰다. 베스트리빙은 공간을 제공하고, 시오데코 황찬희 대표가 공간 활용 등에 대한 기획을 총괄했다. 베리굿타임은 민간에서 만든 독서·문화공간이며 이처럼 대규모로 복합문화공간을 민간에서 조성한 사례는 흔치 않다. 특히 가구와 독서·문화를 융합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른 문화공간과 차별성을 지닌다. 베리굿타임 황찬희 대표는 "베리굿타임은 '시간을 파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는 "베리굿타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가구를 판매하기도 한다"며 "많은 분이 이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공간을 마련했고, 그러한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베리굿타임은 크게 1층 커피숍 '사랑해', 2층 'VGT존'과 '베북존'으로 구성됐다. VGT존은 가구 제품의 전시장 역할을 하면서 공간 곳곳에 '책'이 스며 있다. 벽면에 책이 꽂혀 있는가 하면, 전시된 가구에 책이 놓여 있기도 했다. 가구를 사지 않더라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건물 가장자리에는 모두가 앉을 수 있는 소파를 마련했다.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황 대표는 매달 8차례 공연을 개최하는 등 VGT존을 다양한 복합문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베북존은 책을 의미하는 'BOOK'을 조합해 이름을 지었다. 페이스북을 줄인 '페북'과 유사한 발음에 착안했다. 이곳은 '독서인'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진다. 베리굿타임은 독서 프로그램 '베리리1'과 '베리리2'를 운영할 예정이다. 베리리1은 각자가 준비한 책을 정해진 시간 동안 읽는 방식이며, 베리리2는 정해진 책을 읽고 참여자가 토론하는 프로그램이다.황 대표는 "우리가 주최하는 독서 프로그램 외에도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독서 모임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고 했다.독서 동아리 대부분은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커피숍을 빌려서 하는 경우가 많다. 베리굿타임은 독서 모임에 특화된 공간이다. 원하는 인원에 맞춰 테이블과 의자 등을 배치할 수 있다.카페 '사랑해'는 공장이 많은 지역 특성을 고려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업무상 미팅 등으로 이 카페를 찾게 됐을 때 이름인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 자체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다. 황 대표는 "'사랑해'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베리굿타임은 건물 연면적이 3천㎡에 이른다. 이 중 절반가량을 가구 전시와 공연 등을 진행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나머지는 전시회, 독서 모임, 독서 프로그램 운영 등을 위한 공간이다. 또 유튜버를 위한 작은 스튜디오도 마련했다.베리굿타임은 한꺼번에 수백 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이를 활용해 대형 회의, 파티, 미술품 전시, 북 콘서트, 출판기념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 계획이다.황 대표는 디자인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브랜드 컨설팅 등의 업무를 맡아 공간을 꾸미는 일을 해오고 있다. 그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가족 모두 각각 서재가 있을 정도로 온 가족이 독서를 즐긴다고 한다. 황 대표는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이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으로 믿는다"며 "직원들을 채용할 때도 '독서'는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라고 했다.황 대표는 베리굿타임에 대해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찾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누군가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설치한 것이 베리굿타임 한쪽에 있는 우체통이다. 이름은 '꿈의 우체통'이다. 그는 "누구든 이 우체통에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을 적어 넣을 수 있다"며 "베리굿타임은 이 사연 중 한 명을 선정해 1년 동안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컨설팅 등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베리굿타임 공간 하나하나에는 황 대표의 손길이 스며 있다. 화장실, 수유실, 직원 휴게실 등 모든 공간에 디자인을 입혀 보기 좋을 뿐 아니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그는 "이곳은 침대와 소파 등 모든 가구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데이트 비용이 부족한 연인이나 가족이 편하게 와서 가구를 이용하고, 책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매일은 아니지만 지속해서 열리는 공연과 전시 등의 행사가 방문객의 만족도를 높일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는 "베리굿타임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더 많은 분이 책을 쉽게 접하는 것"이라며 "공간 운영을 위한 비용은 가구 판매 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또 "베리굿타임이라는 공간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면서 "책을 좋아하거나 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만족하는 공간으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는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꼽았다. 그는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만나는 분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며 "많은 분이 베리굿타임에서 좋은 책을 많이 만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황찬희 베리굿타임 대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사회가 조금은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베리굿타임을 통해 책과 가까워지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베리굿타임 내부. 수유실과 화장실 등 모든 공간에 디자인을 입히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베리굿타임 내부.베리굿타임 내부.꿈의 우체통-우체통에 자신의 꿈과 사연을 넣으면 이 중 1명에게 베리굿타임이 꿈을 이뤄줄 수 있도록 지원한다.

2020-01-07 정운

[인터뷰… 공감]경기도 출신 첫 농협중앙회장 꿈꾸며… '두번째 도전' 나선 이성희 前낙생농협조합장

#24대 선거 주요 공약·대표 계획은농가 안정적 소득제도 '월급제'등 주력유통 개선·4차 혁명맞춰 농업 디지털화#현재 농촌 상황·경제 진단개도국 지위 포기따른 경쟁력 강화책과잉생산 조절·예측시스템 구축 필요#앞으로 농협중앙회의 역할은인력·농경지 감소에 공동체 유지 '과제'농축협 이익 증진·발전 '기본'에 충실"현재 우리 농업·농촌이 처한 국내외 환경은 미·중 무역분쟁, 농업 개도국 지위 포기, 가축 질병, 고령화 등으로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45년 넘게 농협에 몸담아 온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농협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제24대 농협중앙회장 예비후보자로 등록한 이성희 전 낙생농협조합장이 제23대 농협중앙회장선거에 이어 두 번째 위대한 도전에 나섰다. 직전 선거에서는 아쉽게 떨어졌지만, 그는 농협과 농민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모으기로 했다.■ 농협중앙회장 두 번째 위대한 도전인데지난 23일 성남에서 만난 이 후보자는 밝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중앙회장 선거에 대해선 전문인답게 명확한 답변을 했다.그는 농협중앙회장에 다시 도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기존에 상상하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변화가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며 "향후 10년의 농업환경도 과거 100년간의 변화보다 더 클 것으로 전망되는데, 준비가 없다면 도태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우리 농업 발전에 힘을 보태기로 다시 마음을 먹었다"고 출사표를 던졌다.이어 "그동안 농협 발전에 크게 기여해온 경기도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타지방에 비해 비싼 땅값 등 환경적 요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며 "경기도 최초로 농협중앙회장에 당선된다면 경기 농민은 물론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밝혔다.그는 농촌농협에서 30년, 도시농협에서 8년, 중앙회에서 7년 등 총 45년간 농협에 몸담아 온 대표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농업과 농촌, 농협에 대해 풍부한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지난 2016년 제23대 회장 선거에서는 결선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이 후보자는 포기하기는커녕 성찰의 시간을 통해 4년 동안 일선 현장에서 농업인 조합원들의 다양한 의견과 조합장들의 고견을 바탕으로 농업·농촌·농협의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해 고민하고 답을 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농촌과 농협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시동을 걸었다.■ 주요 공약과 선출될 시 추진할 대표적인 계획은이 후보자가 그리는 농협의 비전은 '함께하는 농협'이다. 우선 안정된 농가 기본소득 체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정부·지자체·농협·농업인이 함께 참여해 '농민 월급제' 등 농업인의 안정적인 소득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정적인 수입원을 통해 소득이 안정된다면 농가경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두 번째 추진 목표는 농축산물 유통의 대규모 변화다. 사전에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병폐가 많은 기존의 복잡한 유통구조를 개선해 중간에서 빠져나가는 손실을 막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이 후보자는 "농축산물유통의 대변화를 위해 유통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이를 통해 적정한 생산과 투명한 유통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세 번째 목표는 농업과 농협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4차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농협 구축이다.고령화와 생산력 절감, 소농구조에 적합한 '인공지능 비닐하우스', '스마트팜', '농사용 드론·로봇 장비 보급 및 지원' 등을 추진할 생각이다. 아울러 각각의 특성을 반영하고 금융과 유통의 시너지를 구축한 '디지털농협'을 만들고 우리 농업과 농협의 미래를 위해 상당한 재원도 투자할 계획이다.■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로 농민들의 피해가 예상되는데정부는 지난 10월 25일 1995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적용받았던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WTO 농업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가 회원국 간 이견으로 무려 20년째 진전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당장 영향은 없다고는 하지만 향후 협상이 진전돼 타결 시에는 큰 피해는 불가피하다.이 후보자는 농업부문에 대한 선제적 투자와 지원대책 마련이 절실하며,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농업부문 전반에 대한 산업재편 방안이 조속히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장이 되면 농업예산 확대, 공익형 직불제 도입, 농업의 공익적 가치 보상방안, 고향사랑 기부제 등 정책도입을 위해 정부와 국회에 적극적인 농정활동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농업경쟁력 강화 4개년 추진방안(가칭)'을 만들어 농업인이 잘사는 나라, 농업인이 사랑하는 농협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최근 양파·감자 등 '풍년의 역설' 등으로 과잉생산이 큰 문제인데이 후보자는 "과잉생산이 될 때마다 소비촉진운동을 전개하고 긴급하게 산지폐기 등을 하고는 있지만 가격하락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그는 "생산 단계에서부터 계획적인 생산이 될 수 있도록 세밀하고 정확한 '수급예측 정보시스템'을 구축해 적정 생산량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유통단계도 기존 유통구조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어 "제도적 측면에서 여·야·정 합의를 바탕으로 2017년에 도입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활성화해 자금지원을 마련하고, 미국의 가격손실보상제도(PLC)와 같이 농산물의 가격 리스크를 완충하는 '가격변동대응직불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우리 농촌 경제 진단은그는 "위기라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아직 기회가 많다"고 단언했다. 소득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민월급제', '농민수당' 등 기본적으로 일정수준의 소득이 유지될 수 있는 공적 부문의 제도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어 "농업이라는 직업은 직업으로서의 불안정성이 존재하다 보니 '공익형직불제' 등 국내농산물 보호를 위한 정부의 정책도 수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인력과 도시 개발로 줄어드는 농경지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정부 차원의 특례제도 법제화 등이 시급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그는 "'지역 소멸'이 거론되는 현재 농협도 생산자 단체의 역할 강화라는 그동안의 노력에 더해 지역공동체의 유지·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깊이 인식하고 명실상부한 지역 종합센터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농협중앙회의 역할은?항상 농협법 제1조(농협의 목적)와 113조(농협중앙회의 목적)를 떠올린다는 그는 "농축협을 바탕으로 농업인의 지위 향상, 농업의 경쟁력 강화, 농업인의 삶의 질 제고, 국민경제 이바지 등 중앙회는 이런 농축협의 공동이익 증진과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이어 이 후보자는 "농업·농촌의 현실이 무척이나 어렵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농협중앙회장 선거에 나서게 됐다"며 "중책이 맡겨진다면 임기 4년간 사즉생의 각오로 농업인의 주름이 없어지고 농업인이 활짝 웃는 농촌을 만들겠다"고 피력했다. 끝으로 "국민, 농업인, 조합장, 임직원과 '함께하는 농협!'을 만들어 농업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더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열어 가겠다. 4년의 시간이 지나고 퇴임할 때 모두로부터 박수받으면서 떠나는 회장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대담/신창윤부장 shincy21@kyeongin.com글/황준성기자 yayajoon@kyeongin.com ■이성희 前낙생농협조합장은?▲ 1949년 성남 출생▲ 장안대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고위자연자원정책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최고감사인과정 수료▲ 1971~1997년 성남 낙생농협 입사 및 상무·전무 역임▲ 1998~2008년 성남 낙생농협 조합장(3선)▲ 2003~2010년 농협중앙회 이사▲ 2008~2015년 농협중앙회 감사위원장▲ 2004 산업포장▲ 2006 법무부장관 표창▲ 2008 농식품부장관 표창농협중앙회 회장선거에 나서는 이성희 전 낙생농협 조합장은 '함께하는 농협'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그는 45년간 농협에 몸담아 온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 농민은 물론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2019-12-24 황준성

[인터뷰… 공감]모범사례 꼽히는 '국내 최대 스포츠클럽' PEC스포츠아카데미 백성욱 대표

정부 '생활체육 활성' 좋지만 日정책 유사 우리문화 융합돼야승패 없앤 화합방식에 지원 더하면 엘리트 스포츠 발전할 것아동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종목 투자·육성 '공로' 표창 다수'수평적 관계·동기 부여'로 직원들과 협업 매출 성장 일궈내"우리나라의 체육정책은 공급자·행정 중심이 아닌 아이와 부모가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수요자 중심으로 변해야 합니다."수원과 용인, 화성 동탄 등 경기 남부권을 중심으로 한 국내 최대의 스포츠클럽인 백성욱(45) PEC스포츠아카데미 대표가 화제다. 비록 개인이 설립해 운영하는 클럽이지만, 생활체육에서 엘리트(전문)체육 육성에 이르기까지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정부 주도의 공공 스포츠클럽과 경기도교육청의 G-스포츠클럽 등 관련 정책의 모범사례로 꼽힐 수 있기 때문이다. 1만명의 회원이 다니고 있는 PEC스포츠아카데미는 수원·용인 일대에 8개의 본점과 지점을, 5천명의 회원을 보유한 아이풀 역시 권선·동탄·죽전·수지·영통·일산에서 가동 중인 가운데 유소년 회원만 1만4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축구를 비롯해 야구·농구·인라인 등 다양한 종목의 클럽을 육성하고 있다.백 대표는 국내에서 추진 중인 스포츠클럽에 대해 "정부와 경기도교육청에서 관심을 갖고 생활체육 지원·육성에 힘을 싣는 것은 좋다"면서 "경우에 따라 운동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체육을 잘 이해할 줄 알고, 존중과 사랑이 있는 인물이 정책을 주도해야 한다"고 운을 뗐다.그러면서도 "현재 한국에 도입해 운영 중인 스포츠클럽은 일본의 정책과 매우 유사하다.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다른데, 별도의 연구나 한국화를 거치지 않은 체육정책을 거의 그대로 도입한 것과 같다. 또는 지역 스포츠 클럽의 연계를 통해 추진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쳤어야 했다"며 "지난해 경기도체육회의 '생활체육 혁신모델'을 바탕으로 한 스포츠클럽이 인성 교육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만족도를 보였다. 우리의 문화와 정책을 융합하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급작스러운 변화는 결국 엘리트체육을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경희대 체육학과 출신인 그는 지난 1999년부터 스포츠가 교육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담은 PEC(Physical Education Central)스포츠아카데미와 2012년부터 친환경 인공 해수풀인 아이풀(IPOOL) 등에서 축구·수영·야구·농구·인라인 등의 종목에 참여한 유소년들에게 연령별·수준별 교육을 해 오고 있다.이 같은 노력에 2014년부터 현재까지 국무총리 표창, 대한민국 스포츠산업대상 우수상(문화체육부장관상)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표창, K-스포노믹스대상 한국스포츠경제 사장상 등 매년 정부와 도내 각 기관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왔다.이와 함께 백 대표가 가동 중인 축구 유소년 클럽인 수원 PEC UNITED도 올해 좋은 활약상을 보였다. 학년별로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는 등 고른 성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6학년 팀은 화랑대기 전국유소년축구대회에서 전승으로 E그룹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전국 주말리그 초등 축구대회 '경기 9권역' 1위에 올랐다. 아울러 PEC에서 배출한 9명의 학생 선수들은 수원 매탄고와 수원FC, 성남FC, FC서울, 서울E, 용인FC 등의 유스팀으로 입단시켰다.백 대표는 "스포츠 페스티벌을 진행하면서 우리 아이가 뛴다는 마음으로 승패를 거의 없애고 화합하는 방식, 즐기는 방식으로 변화를 줬다. 이 부분에 많은 수요자들(학부형)로부터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며 "이런 페스티벌이 반복되고 좋은 지원이 이뤄진다면 엘리트 스포츠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우리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체육을 어우러지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체육을 무조건적인 적폐로 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제시했다.처음부터 백 대표가 체육 교육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인 교육과 공부를 병행해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축적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는 후문이다.그는 "처음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체 발달을 병행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며 "그러나 일을 처음하게 된 20여년 전에는 체육교육 분야에 얕은 지식만 있었다. 회사 운영이 바쁘더라도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외국 출장길에 올라 해외 스포츠클럽 운영 방식에 대한 공부에도 신경 썼다"고 소개했다.이어 "최근 15년 이상 장기 근무자를 포함해 직원들과 함께 PEC스포츠아카데미 창립 20주년을 기념할 겸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평적인 관계로 대하며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회사 발전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가급적 체계를 지키면서도 대표라고 해서 무조건 윗사람 대우는 받지 않으려고 한다. 직원들이 가장 중요한 고객이지 않겠냐"며 미소 지었다.실제 스포츠아일랜드의 매출은 지난해의 경우 지난 2017년 대비 20%의 매출이 올랐으며, 올해는 지난해 대비 30%의 매출 상승효과를 이뤘다는 보고다. 월평균 입장객 또한 5천명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는 등 대표와 직원의 협업을 통해 이뤄낸 실적으로 보여진다. PEC스포츠아카데미와 아이풀, 스포츠아일랜드 등 직원 230명이 정규직인데, 내년 초에는 나머지 계약직을 재차 전환해 250명으로 정규직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수익 창출에 우선하지 않고 더 나은 서비스를 통해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조처라는 판단이다. 이를 통해 고객에게 존중받으며 지속적인 발전을 이뤄나가겠다는 의지다.여기에 수원 우만동 지역 주민 대상으로 설맞이 이웃사랑 쌀 및 김장 나눔 행사를 비롯해 뇌성마비장애인 축구대회 봉사활동, 경기도 대학생 장학금 지원 사업, 무료 야외 어린이 수영장 운영, 2019 작은 음악회 실시 등 사회공헌활동도 빼놓지 않았다.백 대표는 "더 나은 가치를 목표로 직원들과의 화합을 통해 회사 가치를 충분히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신도 있다"며 "젊은 CEO로서, 최신 경영 트렌드에 맞추며 체육 분야에서 일궈낼 수 있는 자산들이 제게는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백 대표는 이에 모범적인 체육기업 구축을 목표로 하면서 동시에 한국 최고의 체육기업을 이루겠다는 포부도 피력했다. 백 대표는 "스포츠아일랜드를 보다 발전시켜 국내를 대표하는 선도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게 제 1차 목표"라며 "이후에는 중국 등 해외로 무대를 넓히려고 모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끝으로 "서비스를 단순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많은 사람을 운용하기 때문에 리스크는 있을 수 있지만,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요소가 있다고 여기기에 충분한 고려를 통해 적극적으로 세계 무대에 진입하려 한다. 스포츠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글/송수은기자 sueun2@kyeongin.com■백성욱 대표는?▲ 1974년 전남 영광 출생▲ 2001년 2월 경희대 체육학과 졸▲ 2011년 2월 경희대 체육대학원 스포츠산업경영전공 석사▲ 2017년 8월 경희대 체육대학원 스포츠산업경영전공 박사▲ 1999년~현재 PEC스포츠아카데미 대표▲ 2012년~현재 아이풀 대표▲ 지난해~현재 스포츠아일랜드 대표▲ 2009년~현재 (사)한국유소년스포츠클럽협회장▲ 스포츠아일랜드 관련, 청소년수련활동 정부 인증 획득·KPGA 인증 골프연습장 협약·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기업부설연구소 인증백성욱 PEC스포츠아카데미 대표는 "우리들의 서비스를 통해 국내 무대를 벗어나 이제부터 적극 세계 무대에 진입하려 한다. 스포츠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스포츠아일랜드 제공

2019-12-17 송수은

[인터뷰… 공감]20여년간 향토역사 발굴 '외길' 강덕우 인천 개항장연구소 대표

인천서 옥살이 청년 김창수에서 '김구' 변화 계기 의미심장한 곳싸리재길·우각로… 탈출로·모친 눈물 스민 옥바라지길등 남아문화관광자원 활용 '위대한 인물 잉태' 신포동일대 널리 알려야타 지역과 항구도시등 함께 연구 '내용·외형적 범위' 확장할 것백범 김구가 인천을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청년 김창수에서 독립운동의 주역 김구로 다시 태어난 계기가 됐던 곳이기 때문이다. 백범은 인천에서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인천에서의 담금질로 그의 삶은 더 단단해졌고,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인천의 역사학계도 백범 김구의 인천 행적과 발자국을 쫓아 의미를 알리는 일에 나섰다. 20년 가까이 인천시 역사자료관에서 인천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헌신했던 강덕우(63) 개항장연구소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백범 김구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에 비해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구 선생 일생 전체를 살폈을 때 그가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치하포 사건과 그로 인한 인천 옥살이입니다."강덕우 대표는 지난 8일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천이 백범 김구를 기억하고 조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강덕우 대표는 올해 인천 중구와 함께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인천의 독립운동 역사 문화 콘텐츠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강 대표가 언급한 치하포사건은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해주부에 체포됐다가 외국인 사건을 담당하던 인천감리서로 이송돼 옥살이했다. 김구는 여기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강덕우 대표는 "해주에서 체포된 백범이 인천으로 온 것은 인천감리서 개항장재판소에서는 일본이 정치적 압력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인천과 백범 김구의 역사적인 만남은 일본에 의해 이뤄진 셈"이라고 설명했다.1883년 개항된 인천에는 그해 8월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감리서가 설치됐고, 1886년 개항장재판소가 별도로 세워졌다. 지금의 중구 신포동 스카이타워 아파트 자리다. 당시 행정사법제도상 백범은 인천과 필연적 인연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강 대표의 설명이다.강덕우 대표는 백범 김구가 단순히 인천에서 옥살이한 것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인천감리서 주변 인천사람들이 보낸 백범 김구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옥바라지가 어쩌면 지금의 백범을 있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강 대표는 "비록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김구의 진술이 인천지역에 전해지면서 일본에 맞선 '의로운 청년'으로 떠올랐다"며 "인천항 객주와 지사들이 구명에 나섰고, 결국 고종황제가 사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곽낙원 여사는 인천항 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매일같이 아들이 있는 감옥으로 밥을 지어 날랐다. 황해도 출신의 곽 여사는 생면부지 인천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옥바라지를 할 수 있었다.강덕우 대표는 "인천은 옥바라지 하던 어머니의 눈물 어린 고행이 얽힌 곳이다"며 "백범이 해방 후 처음 순시한 지역이 인천이었고,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한 이유도 그의 옥중 생활과 모친의 고생을 추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백범이 고종으로부터 사면을 받은 것은 무죄가 아니라 사형 집행을 피한 것뿐이었다. 1898년 기약 없는 옥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탈출을 감행한다. 강덕우 대표는 당시 지도 등 옛 문헌과 백범일지 등을 토대로 백범의 탈출로를 재구성했다. 1박 2일에 걸친 그의 도피 여정을 최대한 사실과 가깝게 복원하려 했다. 애석하게도 고증이 불가능한 탈출로도 있었다.강 대표는 백범의 탈출 이야기에 아버지 김순영도 빼놓아선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인천 객주 집에 더부살이하며 인천 감옥에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을 넣어 김구가 옥중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김구는 아버지의 도움 덕에 인천감옥을 '학교'로 만들 정도로 수감 동료에 대한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강 대표는 "김구가 탈옥할 때 사용한 모서리가 3개인 '삼릉창'을 만들어 전달해 준 이도 아버지 김순영"이라며 "김순영은 아들 대신 인천의 감옥에서 1년 동안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김구가 인천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된 때는 그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을 언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14년 인천으로 이감되면서다. 백범은 지금의 인천 축항 공사 노역에 동원됐다. 지금의 내항 일대다. 인천항에도 그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강 대표는 "인천에서 매일 쇠사슬로 허리를 묶인 채 강제로 인천 축항공사 현장에서 노역을 해야만 했다"며 "김구가 동원된 노역 장소는 지금의 인천항 1번 게이트로 추정되는데 아마 매립된 신포동 해안길을 통해 공사장을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백범 김구는 1915년 8월 가석방돼 인천감옥을 나오게 됐다. 그 뒤의 행적은 너무나도 잘 알려졌다. 강덕우 대표는 인천과 백범 김구의 이 같은 역사적 인연이 인천만이 가진 역사문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백범 탈출길 ▲옥바라지길 ▲축항 노역길 등 백범의 길을 복원해 어떤 식으로든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강 대표는 "백범이 탈출했던 예상 경로를 따라서 가다 보면 도시화 과정 속에서도 싸리재길이나 우각로 등 120년 전 옛길이 아직도 다수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이런 길에 백범 김구라는 스토리를 얹혀 탐방로를 만들면 하나의 문화 관광 코스가 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또 곽낙원 여사가 아들을 위해 밥을 실어 날랐던 옥바라지길과 백범이 축항으로 노역을 하러 오갔던 길을 복원하면 신포동 개항장 일대가 단순한 옛 동네가 아니라 백범 김구라는 위대한 인물을 잉태했던 곳이라는 점을 알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강덕우 대표는 "독립운동하면 임시정부를 떠올리고, 임시정부 하면 백범이 떠오르는데 백범 하면 인천이 떠오르지는 않는다"며 "앞으로 인천과 백범의 이야기를 복원해 알리는 게 독립운동 100년을 맞이한 우리 인천지역 사회의 숙제"라고 말했다.인천 역사학계의 '큰형' 역할을 하는 강덕우 대표는 2000년부터 인천시 역사자료관에서 인천시사편찬 업무와 역사총서발간, 향토사 강연 등에 매진했다. 2018년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인천의 역사학계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사단법인 개항장연구소 대표로서 지역 역사문화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강덕우 대표는 인천의 역사문화 연구가 당장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더라도 훗날 인천이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백범 김구가 오직 한없이 갖고 싶어 했던 것이 무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바로 '문화의 힘'이었다.강덕우 대표는 "지금 군·구에서도 역사편찬위원회가 생기고 있고 외연이 확장되는 추세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며 "앞으로는 인천 역사만을 연구했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인천과 비슷했던 항구도시, 당시의 국제 정세 등을 함께 연구해 내용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연구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숙제"라고 했다. 강 대표는 또 "역사 연구는 당장 표가 나는 것은 아니고 더디게 진행되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행정에서 하지 못하는 방향제시를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덕우 대표는?195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사학과 조교, 강사 등을 거쳐 2000년 6월부터 2018년 5월까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봉직했다. '인천역사 칼럼', '문답으로 엮은 인천역사' 등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현재 중구 인천개항장 문화지구 발전위원, (사)인천학회 편집위원, 미구홀구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강덕우 인천 개항장연구소 대표가 중구 옛 인천감리서 터(신포스카이타워아파트)에서 백범 김구의 탈출로를 설명하고 있다.강덕우 대표가 인천 중구 신포동 사무실에서 인천 개항장 지도를 배경으로 백범 김구의 탈출로와 옥바라지 길, 축항 노역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12-10 김민재

[인터뷰… 공감]정장선 평택시장 평택항 출입국 지연 발빠른 대처 '눈길'

정원 1500명 페리 취항후 '최대 7시간' 정체 현상국회의원·CIQ등 관계기관 불러모아 해결책 모색자동심사대 설치 휴게공간 확대 인력 충원등 나서입국 수속에 최대 7시간이 걸리는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출입국 지연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정장선 평택시장은 관계 기관 회의 개최 등 발 빠른 대응에 들어갔다. 평택시는 법무부 인력 확충 요청을 비롯해 입국심사확인증 발급기 설치 운영, 자동출입국심사대 설치를 위한 본예산 편성 등 승객들의 터미널 이용 불편을 최소화 하기 위한 대책들을 발표했고 CIQ(세관, 출입국사무소, 검역본부) 등 관계 기관들의 협조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개선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정 시장을 통해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시설 확충을 위한 평택시를 비롯한 관계 기관들의 노력과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이 앞으로 나가야 할 청사진을 들어봤다.3일 평택시청에서 만난 정 시장은 입국 심사에서 최대 7시간까지 지연되는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고 되돌아봤다.정 시장은 "A선사가 지난 9월 신규 항로를 개설했고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여객터미널로 들어오면서 입출국 정체 현상이 벌어졌다"며 "승객들이 늘어나게 되면 반겨야 하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입국 지연 등 불편 사항으로 이어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실제 지난 10월 A선사가 정원 1천500명을 실을 수 있는 신규 페리를 취항하면서 휴게소 수용 인원 부족, 출입국 사무소 인력 부족 등으로 입국 심사 지연 사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의 10월 한 달 이용객은 전월에 비해 49% 가량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문제가 불거지자 평택시는 지난달 13일 조찬간담회를 개최하고 평택시, 바른미래당 유의동 국회의원, CIQ 등 관계 기관들과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의 애로사항을 논의하고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평택시는 자동출입국심사대 설치(4억5천만원), 출국장 시설 개선(1억원) 등을 위해 관련 예산을 확보하기로 했으며, 여객터미널 이용객을 위한 휴게 공간 확보 차원으로 평택항 마린 센터 1, 2층을 임대(예비비 4억3천500만원)해 시설 공사에 돌입했다.이밖에 출입국관리소는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출입국 인력을 기존 8명에서 10명으로 늘렸고 오는 2020년까지 12명의 인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평택세관과 국립인천검역소 평택지소, 농림수산검역소 평택사무소 등도 근무 인력 조정 및 증원 작업에 돌입했다. '사드갈등 해소 모드' 중국 산둥성 교류 확대 노력신여객터미널 설계 재개·관광자원 상품화등 추진항만에 친수시설 평택호 연계 '국제 무역항' 도약정 시장은 "평택항의 발전을 위해 오는 10일 경기도, 평택시, 관계 기관들이 종합 대책 회의를 하려고 했는데 회의에 앞서 이런 문제들이 나오게 된 것"이라며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과 금태섭 의원에게도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문제 해결을 위해 협조 요청을 했고 해결 방안 마련에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정 시장은 현재 발생하고 있는 출입국 지연 문제와 더불어 한·중간 사드 갈등 해소로 내년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올해보다 더욱 늘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새로운 국제여객터미널 준공 이전에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는 것이다.그는 "경기 남부 지역은 중국 산둥성과 가깝지만 그동안 인적 교류는 많이 없었던 터라 인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용인, 화성 등 경기 남부권과 평택의 관광 자원을 패키지 상품화하는 관광 코스 개발 작업을 경기관광공사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중국과 인적 교류를 늘려야 하는데 현재 여객터미널 규모로는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며 "신여객터미널 준공 이전까지는 이와 같은 방향으로 확장 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덧붙였다.아울러 신국제여객터미널의 신속한 착공도 강조했다. 신국제여객터미널은 평택지방해양수산청 주관으로 설계 발주 됐지만 이용객 증가에 따른 예산 증가 등 이유로 현재 설계 단계에서 멈춰 있는 상태다. 당초 올해까지 설계를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기획재정부가 설계 적정성 재검토에 나서면서 설계 완료 예상 시점이 내년으로 늦춰졌다.정 시장은 "이번 문제 제기로 신국제여객터미널 건설을 서두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기재부 등 정부에 국제여객터미널 공사가 조속하게 진행될 수 있게끔 요청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이밖에 정 시장은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이 중국과 평택을 오가는 새로운 관문으로 떠오르자 시민 친화적인 항만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평택시는 신국제여객터미널 준공 이후 국제여객터미널 배후부지에 친수 시설을 조성하는 방법을 평택해양지방수산청과 추진 중이다. 친수공간이 조성되면 평택항 동부두 배후 도로와 항만 배수로 정비 사업 부지, 평택호가 연결되는 녹지축이 조성된다.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과 평택호 관광 단지 이용객 방문으로 평택항은 당당히 국제 무역항으로서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정 시장은 "이와 별도로 가칭 '평택항 종합발전계획 수립 용역'을 재정사업으로 추진해 줄 것을 중앙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며 "평택항과 황해경제자유구역 평택 포승지구(BIX), 평택호 관광단지 등과 연계 개발로 평택항이 동북아 무역 물류 중심 항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글/김종호·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정장선 시장은?▲ 1958년 평택 출생▲ 성균관대학교 행정학 학사 ▲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2000년∼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2004년∼2008년 제17대 국회의원▲ 2008년∼2012년 제18대 국회의원▲ 2016년 더불어민주당 총선기획단장, 총무본부장▲ 2018년∼ 평택시장정장선 평택시장이 3일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평택시 제공평택항 항만배후단지와 국제여객터미널. /경인일보DB

2019-12-03 김종호·이원근

[인터뷰… 공감]'제1회 이용악 문학상' 수상한 인천 김영승 시인

번민 많이해… 문인 이름 내건 상에 '권위'가 부여되길 바라북방정서 함축 평가 수상작 '저항', 나름의 '인간 선언' 담아20~70대 다양한 연령 꾸준한 발걸음에 25년째 문화원 강의주자의 시경 수업·발표작등 하나하나 정리해 책 내놓을 것인천의 김영승(61) 시인이 이달 초 '제1회 이용악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작은 지난해 여름에 발표한 시 '저항'이었다.올해로 창간 10주년을 맞은 계간 '문학청춘'은 통일시대를 염원하면서 민족시인 이용악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용악 문학상'을 제정했으며, 그 첫 수상자로 김영승 시인을 선정해 시상했다. 심사위원회는 '저항'에 대해 "세심한 언어 선택에 고심하면서 주제를 내면화하려는 응축의 미학을 겨냥한 흔적을 보여준다"며 "시인이 축적해온 시적 성취의 연장선에서 공동체적인 연민과 연대 의식을 함축하면서 북방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손색없다"고 평했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이용악(1914~1971)은 1930년대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북방시인으로 불린 이용악의 시는 주로 강한 의지력, 침통한 정조,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성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용악 문학상' 수상 후 2주 정도 지난 22일 김영승 시인을 만났다. 인천 미추홀구 석암초교 인근의 카페 '안단테 에스프레시보'에서였다. 시 모임 카페로도 잘 알려진 이 곳은 지난달 김 시인의 '시경(詩經) 낭송회'가 펼쳐지기도 했다. 수상 소감을 묻자 김 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이용악은 백석만큼 작품이 많진 않지만, 시의 톤이 굵고 북방적 정서가 짙죠. 많이 꾸미려 들지도 않았어요. 월북작가이다 보니 다소 희소성도 있기 때문에 문학상의 형태로 접근했다고 보고요. 시상의 주체를 떠나서 저 김영승이 제1회 수상자로서 이 상에 권위가 부여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수상 수락까지 번민을 하다가, 강하게 의미 부여하기로 하고 수락했죠. 21세기 복잡다단하고 분단된 우리 현실에서 이용악이 재생·복원되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김영승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시상식장을 찾았던 소설가 박정규 전 서울과기대 문창과 교수는 행사 후 개인 SNS에 "큰 족적을 남긴 문인을 기리기 위해 문인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을 제정했다면 최소한 제1회 시상식에서만이라도 문학상 제정의 의의와 그 이름을 건 문인의 문학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한 간단한 세미나라도 가져야 이름을 내건 문인이나 그 문학상의 수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라고 남겼다. 첫회 시상식에 걸맞은 다채로운 부대행사가 따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마음이 여리디여린 것으로 소문이 난 김영승 시인의 입장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주최측의 문제일 뿐, 행사의 부족함이 이용악이나 김영승 시인의 작품세계를 폄훼할 수는 없을 터.이용악과 김영승 시인을 연결해 준 '저항'을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지난해 발표된 시예요. 많이 잊혀졌는데, 구 소련 체제에서 핵 발전소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접했어요. 재미 한국인으로서 모스크바 대학에 연구하러 간 학자가 희생자에 관한 기록을 찾은 거였죠. '저항'은 정치적이거나 피압박자들의 저항은 아니에요. 거기서 머물렀다면 모든 시의 패턴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더 나가서 나의 삶이 약간 투영됐어요. 알베르 까뮈 식의 '반항'으로 볼 수 있죠. 저항을 한다는 것은 약자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인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프건 슬프건 억울하건 행복하건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고 통찰하는 삶이 저항이며, 시를 통해 저 나름의 인간 선언을 한 것이었습니다."대화는 자연스레 시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1천302편의 연작시 '반성'으로 이어졌다. '반성'은 올해로 출간 32주년을 맞았다."1천302편('반성·序'를 더할 경우 1천303편)의 연작시 '반성'은 그 자체로 시인의 '지금 여기(Now and Here)'이며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의 문학입니다. 주로 내가 처했던 가난에 관한 구체적 육화의 소산이며, 고도의 비유문학이에요. 정통적인 예쁜 서정시라고도 할 수 있어요. '반성'이 먼저 알려져서 그렇지, 이전에 쓴 서정시가 많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고 슬프더라도 서정시를 쓸 때 나는 건강하다고 느낍니다. 연작시로는 '반성'을 비롯해 각각 2천 편이 넘는 '권태'와 '희망'이 있고요. '반성'의 내용이 파격적이다 보니 문단과 언론에서 조명이 많이 됐는데, '반성'에서 추구한 것은 쉬운 시였어요. 아주 쉬운 언어로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게 좋은 시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정서법을 구사했으며, 문법 일탈도 없습니다. 요즘에야 젊은 비평가들이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요새 젊은 독자들은 한자어라면 질색을 하곤 한다. 김영승 시인의 이번 수상작 '저항'에서도 그렇지만 그동안 써 온 '반성' 등 여러 작품에 한자어가 많다.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출판사에서도 자주 연락이 와요. '한자를 한글로 바꾸거나 한글과 병기하면 안 되냐'고요. 제 대답은 '안 된다' 입니다. 지식 자랑하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한자 자체의 미학이 있어요. 시각적인 것도 좀 다르고요. 그리고 시를 썼을 때 초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걸어가면서 쓰기도 하고, 식당에서 전단지 뒷면에 쓰고, 신문의 여백에도 쓰는데, 쓸 당시의 시어를 한글로 썼으면 한글로, 한자로 썼으면 한자로 그대로 발표하고 있습니다."김영승 시인에게 인천은 어떤 공간일까."인천은 태어나 살고 있는 '삶의 세계(Lebenswelt)'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지금 여기(Now and Here)'이며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기도 하고요. 소재주의에 빠져서 인천항, 소래포구, 맥아더 동상이 드러나야 인천이 아니라, 나의 움직임인 동선 전부가 인천입니다. 인천에서 좌절하고 상처받고, 절망하기도 하고, 꿈도 꾸고 감사함도 느꼈습니다. 인천에서의 성장과 나의 삶은 내 수만 편의 시에서 나타납니다."김영승 시인은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강의는 중단하고, 인천의 연수문화원과 부평문화원에서 각각 두 개 강좌씩 만을 맡고 있다. 두 문화원 설립 이후 꾸준히 강의를 이어오고 있는데 올해로 벌써 25년째가 되었다."당시 65세 할머니 한 분을 대상으로 시작한 강의가 소문을 타면서 지금까지 진행됐습니다. 현재 연수문화원에선 '문예창작특강'과 '해설과 함께하는 한국현대시 100년의 명시 감상'을, 부평문화원에선 '시창작교실'과 '동양고전강독-주자의 시경집전을 저본으로 한 김영승 주해·번역 시경' 강의를 하고 있어요. 수강자들의 연령대도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합니다. 제가 이곳을 못 떠나는 이유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꾸준히 수강해 주시는 분들 때문입니다. 장애를 안고 있는 분들도 계신데,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서 '이런 분들 앞에서 내가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한번 하면 오래 이어가는 제 습성도 한몫했을 겁니다. 지금은 제 생활 리듬을 문화원 강의와 창작에 맞추면서 더욱 건강해진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시경 강의는 책으로도 출판할 예정이에요. '시경'을 그동안 철학의 한 분야로 다뤘는데, 방대한 번역과 주해만큼이나 오류도 많아요. 시경은 시적 언어이기 때문에 첫 행에 있는 말이 마지막 행에 걸리기도 하죠. 또한, 자리를 바꿔서 의미가 통하는 것들도 있고요. 그런 언어 감각이 기존 시경을 번역한 학자들에게선 부족했어요. 수강생들과 어려운 시경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강의용 노트에 풀어 쓴 내용이 더해져서 방대한 책으로 묶일 것 같습니다."김영승 시인은 그동안 출판사와 약속은 했지만, 이행치 못해 발간되지 못한 수십 권의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내놓을 예정이다. "발표된 (책으로 엮이지 못한) 시만 해도 10여 권 분량은 될 정도입니다. 모든 시에 동등한 비중을 두다 보니 시를 편집하고 추리는 부분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움을 겪었어요. 때문에 출판사엔 시를 보내준다고 해놓고 못 지킨 적이 있었고요. 소설 출판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차근차근 이행할 것입니다."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영승 시인은 2014년 형평문학상과 함께 올해 이용악문학상 제정 후 첫 번째 상을 받았다. 인천 주안의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수상의 의미와 자신의 작품 세계, 고향 인천에 관해 2시간 가량 이야기했다.

2019-11-26 김영준

[인터뷰… 공감]'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정책 브레인·30년 지기' 이한주 경기연구원 원장

그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때로는 한 발짝 뒤에 서 있었고, 때로는 몇 발짝 앞에서 그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비교적 베일에 싸여있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정책 브레인'으로 불리는 이한주 경기연구원 원장 이야기다.이 원장과 이 지사는 30년 지기다. 실용주의·공정이 핵심인 이 지사의 정책 철학을 마련해준 멘토였고 성남시장일 때도, 도지사에 당선됐을 때도 시·도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 설계 총책임자였다. 곁에 머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치열하게 달렸다. 경제학자로서 이론을 현실에 접목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쏟았고,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번듯한 학교를 만들기 위한 각종 학내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상대적으로 이 지사의 멘토, 정책 브레인으로만 조명됐던 이 원장의 이야기를 19일 오전 그의 집무실에서 좀 더 자세히 들어봤다. 법정 다툼 속 기로에 서 있는 이 지사, 그리고 그가 총괄하는 경기연구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李지사·성남과 인연은 어떻게배무기 은사 권유로 경원대서 교수직'철거민' 모습 경제학도에 자못 '충격'"실질적 도움주자" 시민운동서 알게돼# 호헌철폐 교수 성명 1호, 중심에 서 있던 젊은 교수6·10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에서부터 불붙었다. 직선제로의 개헌이 좌초될 위기 속 전국 대학교수들은 일제히 시국 성명을 발표했다. 첫 번째 성명은 설립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성남시의 작은 대학에서 나왔다. 중심에는 당시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던 젊은 교수가 있었다. 이 원장이었다.나무 냄새가 좋아 목수를 하고 싶던 소년은 서울대학교에 진학 후 경제학도가 됐다. 지금의 가천대와 연을 맺은 것도 당시 은사였던 배무기 전 울산대학교 총장 때문이었다. 이 원장은 "제게는 아버지 같은 분인데, 그분 밑에서 오래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이 경원대에 가서 강연을 하고 오라더라. 어딘지도 모르는데, 아버지 같은 분이 말씀하시니까 무턱대고 갔다"며 "당시는 학원 자주화 운동이 굉장히 세게 일어났을 때였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나. 선배들이 별로 없었던 학교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학생들과 부딪히면서 다양한 내용을 강연했다. 그러다 교수협의회를 만들었고 부정입학 등 학내 문제에 맞섰다. 사표를 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반평생을 가천대에 몸담은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함께 했으니 학교에 대한 애정이 깊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말한 이 원장은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르게 크는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퇴직할 때는 '그래도 웬만큼 알아주는' 대학에서 퇴직하고 싶다"고 웃었다.가천대에 가면서 성남을 처음 알게 됐다. 가천대 뒷산에 선 그의 눈에 비친 성남은 마치 거대한 인삼밭 같았다. 아스팔트루핑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철거민들의 집. 이론 속에 있던 경제학도에겐 자못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다. "관념·이념에 머무를 게 아닌, 실질적인 삶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던 그는 기독교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을 토대로 당시 이해학 목사가 중심이 됐던 시민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막 변호사가 된 청년 이재명과 본격적으로 연을 맺은 것도 그 무렵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그의 제자들이 연행될 때쯤, 이 지사는 전속 변호사처럼 관심을 기울여줬다. 열악한 성남을 그래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시민운동도 함께 이어갔다.■1년 2개월째 맡아온 경기연구원적응 좀 됐지만 갈수록 책임감 무거워져'한국 축소판' 저출산·규제등 과제 많아민주주의 발전·도민 삶의질 향상 고민도# 이재명, 그리고 경기연구원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며 함께 걸어온 이 지사와 이 원장 모두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성남시장에 취임하자마자 시행한 모라토리움 선언, '이재명표' 3대 무상복지로 일컬어지는 무상교복·청년배당·산후조리 지원 등이 이 원장의 손을 거쳤다. 이 지사가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후에도 공동 인수위원장을 맡아 도정 청사진을 그렸고, 아예 도 싱크탱크인 경기연구원 원장을 맡았다.지난해 9월부터 1년하고도 2개월째 연구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1년간의 소회를 묻자 "지금은 적응이 좀 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감이 무거워진다"고 답했다. "선거 기간 중에 공약도 만들고 실제로 경기도를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가면 갈수록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구조 자체가 31개 지역의 부족 연맹체인데, 저출산 문제도 심하고 규제·난개발 문제도 그대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도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가야 하는 과제도 있다. 기관 내부적으로는 인력도 충원해야 하고 노사 관계도 풀어야 한다. 할 일이 많다"고 토로(?)했다.수장인 이 지사의 운명과 맞물린 도정이 올해 안에 정상화됐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쳤다. 이 원장은 "이 지사가 두 번째로 시장을 할 때는 오랜 기간 근무한 공무원들이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일선에서 오랜 기간 시민들과 호흡해온 공무원들이 내놓는 정책들은 정말 실현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책은 일종의 예술이라, 방향이 맞다고만 해서 좋은 정책이 아니다. 결국 좋은 정책은 실현되는 정책"이라며 "도는 이 지사가 송사에 자꾸 흔들리니까 공무원들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 공무원들의 오랜 경험이 담긴 정책들이 생각만큼은 많지 않다. 빨리 정상화돼야 하는데, 올해 안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날 인터뷰 직전 14명의 시·도지사들이 이 지사의 무죄를 탄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날에는 변호사들이 2심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했고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도 탄원에 동참했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사실 정치인에 대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꾸려진 것은 한명숙 전 총리 이후 처음"이라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탄원에 참여했다. 물론 엄벌에 처해 달라는 진정도 많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 전반에서 포용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고 평했다.그러면서 "결국 총선이든, 대선이든 다 떠나서 경기도에서 실적을 못 쌓으면 무슨 소용이겠나. 아마 이 지사는 도에서 실적을 못 내면 스스로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곧 그의 이야기이기도 할 터다.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이한주 원장은?▲ 1956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경제학 박사▲ 가천대학교 글로벌경제학과 교수▲ 2017 ~ 2018년 가천대학교 특임부총장▲ 2018년 ~ 경기연구원 원장▲ 2018년 새로운경기위원회 공동위원장▲ 2017년 대통령직속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경제1분과 위원장▲ 2017 ~ 2018년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경제분과위원장▲ 2019년 ~ 예금보험위원회 위원※ 다니엘 라벤토스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번역19일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정책 브레인'으로 잘 알려진 이한주 경기연구원 원장이 집무실에서 이 지사와의 인연과 경기도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11-19 강기정

[인터뷰… 공감]인천 출신 첫 '전국항운노조연맹' 수장 선출된 최두영 인천항운노조 위원장

#'부산' 제치고 당선 9월 취임했는데IMF때도 물동량 늘었는데 최근 '정체'영광스럽지만 어려운 상황 어깨 무거워#인천항 물동량 감소 심각… 대안은일자리 창출 효과 큰 벌크화물 유치 필요중고차 수출 '남항 클러스터' 조성 시급#'내항 재개발 사업' 속도 조절론'성공모델' 獨 하펜시티 항만 운영 '공존'1·8부두엔 주거시설 2~7부두 기능 유지를우리나라 노동운동은 항만에서 처음 시작됐다. 1898년 함흥 성진부두 노동조합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항만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3월 항운노동조합의 모태인 대한노총 전국항만자유노동조합연맹이 출범했다. 이후 7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명칭은 전국항운노동조합연맹으로 바뀌었고, 항만뿐만 아니라 철도·연안·농수산시장·정기화물·창고 등 국내 물류산업 종사자 2만5천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 노조가 됐다. 노조의 모습은 크게 변화했으나, 지난 70년 동안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은 부산 지역에서 도맡아 왔다. 전체 연맹 조합원 중 부산항운노동조합 조합원이 3분의 1에 달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에 도전하기도 어려웠다.올해 9월 열린 전국항운노조연맹 대의원대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인천 출신이 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인천항운노동조합 최두영(55) 위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최 위원장은 "인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전국연맹 위원장에 오른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물류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취임했기 때문에 어깨가 매우 무겁다"고 했다. 이어 "선발투수가 아닌 구원투수로 투입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노조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했다.최 위원장은 "우리나라 항만이 역사상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하며 현재 상황을 진단했다. 올 들어 3분기까지 국내 전체 항만 물동량은 12억1천525만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 중 벌크 화물 물동량은 7억8천770만t으로, 전년 동기 대비 0.4% 감소했다. 그는 "IMF 경제 위기 시절에도 항만 물동량은 꾸준히 늘었는데, 최근에는 거의 정체돼 있다"며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수출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면 항만이 맨 처음 직격탄을 맞는다"고 설명했다.최 위원장은 해양수산부와 항만공사 등이 컨테이너뿐만 아니라 벌크 화물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벌크 화물은 하역 과정이나 재가공 과정에서 여러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국내 산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매우 크다"며 "그럼에도 인천항만공사를 포함한 여러 항만 관리 기관에서는 컨테이너 화물을 더 중요시하고, 벌크는 등한시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전 세계적으로 벌크에서 컨테이너로 화물 운반 형태가 바뀌고 있지만, 벌크 화물 유지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인천항의 물동량 감소세는 심각한 수준이다. 올 1~9월 인천항 물동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1억2천122만t)보다 5.5% 줄어든 1억1천464만t으로 집계됐다. 2014년 1~9월 1억1천581만t을 처리한 이후 5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올 들어 인천항 물동량이 많이 줄어든 이유는 벌크 물동량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9.8%나 감소했기 때문이다. 벌크 물동량이 줄면서 항운노조원의 일자리가 감소하거나 임금이 큰 폭으로 줄었다고 최 위원장은 설명했다.최 위원장은 "벌크 물동량 감소를 막으려면 인천 남항 '중고 자동차 물류 클러스터'를 이른 시일 안에 조성하고, 인천 '내항 재개발' 사업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자기 생각을 밝혔다.중고차는 인천항의 주요 벌크 화물이다. 인천항에서 수출되는 중고 자동차는 전국 중고차 물동량의 80%에 달한다.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인천항의 중고차 수출 물량을 유지하기 위해 2025년까지 인천 남항 인근에 중고차 물류 클러스터를 만들 계획이다. 옛 송도유원지 일대에 자리 잡은 중고차 수출 업체들을 이곳(중고차 물류 클러스터)으로 이전시키겠다는 게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의 생각이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최 위원장은 "중고차 물류 단지는 공해를 유발하는 혐오 시설이 아니다.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깨끗하게 운영될 수 있다"며 "인천시 등은 이러한 점을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인천의 중고차 물류 클러스터 조성이 지연되는 사이 전북 군산과 경기도 평택, 울산 등에서는 중고차 수출단지 조성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최 위원장은 "자동차 운반선은 중고차와 신차를 함께 싣기 위해 인천항에 기항하는 것"이라며 "중고차 수출 물량을 다른 지역에 빼앗기면 인천항의 신차 물동량도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내항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선, 주민과 개방을 합의한 내항 1·8부두는 재개발을 진행하더라도 항만 기능이 유지되는 2~7부두는 계속 운영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해수부와 인천시는 내항 8개 부두를 5개 구역으로 나눠 재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인천 항만업계에선 내항 재개발로 항만 기능이 사라지면 인천지역 산업계에도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항·북항·신항 등이 잇달아 개장하면서 내항의 물동량이 감소했지만, 곡물·사료 부원료·원당·자동차 등의 화물은 내항을 통해 하역되고 있다. 대체 부두 마련 없이 내항에서의 화물 하역이 중단되면, 이들 화물을 활용하는 공장들이 인천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다.최 위원장은 "최근 항만 재개발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독일 하펜시티를 방문해 보니 재개발과 항만 운영이 공존하는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며 "내항 1·8부두에 아파트 등 주거시설을 짓더라도 하펜시티를 참고해 항만 관련 민원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쓰고 입주시키는 등 공존 방안을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최 위원장은 1990년부터 인천항운노동조합에서 일했다. 그는 "솔직히 당시 대졸 노동자 임금보다 항운노조원의 월급이 2~3배 정도 높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항운노조에 들어왔다. 그때는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물동량이 감소하는 데다, 항만 자동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어 항운노조원이 그 여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항운노조를 대표한다는 책임감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최두영 위원장은?▲ 1964년 인천 출생▲ 1981년 인천고 졸업, 1991년 중앙대 경제학과 졸업▲ 1990년 인천항운노동조합 가입▲ 1999년 전국항운노조연맹 쟁의부장▲ 2013년 인천항운노조 부위원장▲ 2019년 5월 인천항운노조 위원장 당선▲ 2019년 9월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 취임전국항운노조연맹 최두영 위원장은 "위기에 빠진 물류산업의 구원투수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19-11-12 김주엽

[인터뷰… 공감]어우러짐&나눔 실천하는 남양주 천년고찰 '봉선사 새 주지' 초격 스님

20대 사미승으로 머물러 추억서려… 30여년만에 고향온 듯 감회 새로워지난달 취임법회때 화환 대신 '지역 쌀' 받아 소외이웃에 전달 '상생'청소년쉼터등 운영 '함께 행복한 세상' 꿈꿔… 교회찾아 '화합' 행보도스님들 '청빈·봉사 삶' 펼칠 수 있게 노후대책등 수행환경 보장하고파가을이 깊어가는 봉선사에는 스님들의 빗자루에 모여진 낙엽들이 연신 바스락 소리를 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소실돼 여러 차례 중건되기는 했지만, 광릉숲에서 이어지는 고즈넉한 풍광과 잘 어우러진 절의 분위기는 천년고찰(969년 창건)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남양주와 포천 등 경기북부 지역에 84개 말사를 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조선 시대 승과시가 치러졌던 곳. 전국의 승려와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학 진흥의 중추기관 역할을 해온 교종본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돼 지난달 25일 취임법회를 연 초격스님은 1987년 바로 이 곳에서 사미계를 받을 만큼 봉선사와 인연이 깊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듯 부처님의 인연에 따라 되돌아 온 것일까, 파릇파릇하던 20대 사미승은 30여 년만에 명실상부 '큰스님'으로 돌아왔다. 휴대전화 컬러링에 가수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 흘러 나오는 사람, 천일기도에 묵언까지 병행하면서 성탄절에는 교회와 성당을 찾아 축하인사를 하는 승려, 삼성을 상대로 문화재 반환을 이끌어내며 '문화재 제자리 찾기'운동의 첫 불을 지폈던 행동가 초격스님을 봉선사 경내에서 만났다. "봉선사는 젊은 나이에 뛰놀던 곳입니다. 청년의 나이로 큰스님을 시봉했죠. 연꽃이 피고 지는 연못과 그 곳의 자라 한 마리까지 곳곳에 추억이 서려 있습니다. 속세로 치자면,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가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온 셈인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30여년만에 돌아온 절은 놀랍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사찰 곳곳이 잘 정비되고 신도와 관광객도 크게 늘었지만,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일주문처럼 봉선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에게 여전히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절에 문화재가 즐비하지만 입장료는 물론, 그 흔한 주차비도 받지 않는다. 신도든 비신도든 점심때 절을 찾은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절밥을 먹을 수 있다. "누구든지 편하게 찾아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힐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 아닐까요."이런 열린 마음은 스님이 각별히 강조하는 '종교간 화합'으로 이어진다. 초격 스님은 관내 기관장과 정치인들을 만날때면 그가 비록 불심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특정 종교를 내세우지 마라'고 엄중하게 당부한다. 지도자가 내 종교만 두둔하고 남의 종교를 멀리하면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스님이 성탄절에 교회와 성당을 찾아 축하하고, 목사와 신부가 부처님 오신날에 절에 와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야 신도들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사회 화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조계종 제25 교구장으로서의 여러 포부도 '화합'과 맥을 같이 한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스님들에게 기본적인 노후대책을 보장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종교인의 복지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수행 환경이 보장돼 있지 않는데 어떻게 청빈한 마음으로 사회와 신도들에게 봉사할 수 있겠어요. 열심히 수행해 그 결과를 이웃에게 베풀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건물을 세울지, 어떤 문화 축제를 기획할지도 중요하지만, 선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과 학림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복지기금과 장학금·노후 생활비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스님은 지난달 25일 열린 주지 진산식에서 축하 화환 대신 '자비의 쌀'을 모아 20㎏ 들이 1천 포대를 남양주시에 전달했다. 행사 때 쌀을 기부받아 나누는 것이 이젠 그리 드문 풍경도 아니지만, 스님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 '기왕이면 북부지역 쌀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작지만 지역 사회와의 상생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배려도 포함됐다. 남양주시를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된 쌀에는 '증 봉선사' 대신 기부자 개개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입장료도 주차 요금도 받지 않고 무료 점심 공양까지 시행한다는 얘기에, 문득 큰 절의 '살림살이'가 팍팍하지 않겠느냐 물었더니 스님은 "마음으로 나누면 마음으로 모아진다"는 답을 내놓았다. 나눔에 대한 '복(福)'은 나눔을 실천한 사람의 몫이고, 누군가 그 복을 가로채지 않는다는 게 일반화 돼야 기부와 나눔이 선순환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평등공양 차등보시'란 말을 보탰다. 밥은 공평하게 나눠먹고, 베푸는 것은 능력에 따라 차등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기의 나눔이 투명하게 쓰인다는 믿음이 있으면 나눔은 샘솟듯 계속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초격스님은 현등사 주지이던 지난 2006년 삼성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현등사 사리구'에 대한 반환운동 과정에서 조계종 실행위원장을 맡았다. 조계종이 법원에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한 터였지만 스님은 '낮에는 협박, 밤에는 읍소'를 이어가며 결국 삼성의 대승적 결단을 이끌어냈다. 사리를 '문화재'로 본 삼성과 '성보'라 믿은 스님과의 줄다리기는 힘겨운 노력끝에 삼성이 사리를 영구기증하는 형식으로 매듭지어졌다.스님에게 휴대전화를 걸면 익숙한 대중가요 '그대 사랑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때 잊혀진대도~' 노래가 흘러 나온다. "스님이 남들이 갖는 것을 갖지 못하고, 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고관대작이라고 한들 집을 몇 십 채 씩 갖고 있겠어요. 하지만 스님들은 전국 명산 곳곳의 절이 다 내 집이고, 나물 반찬 한 개만 있어도 진수성찬이니 진정한 자유인이고, 모든 걸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그런 이유에서 일까. 스님은 봉선사를 '가고 싶은 곳', '가면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절'로 만드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봉선사가 남양주 노인복지관을 포함해 어린이집, 청소년쉼터, 가정폭력을 겪는 아이들을 위한 보호소 등을 운영하는 것도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스님의 소망과 무관치 않다. 절에 기도를 하러 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불주사' 맞은 통증도 잊을 만큼 한달음에 산을 올랐다가 불심에 이끌려 아예 절집 생활을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어린 아이. 이제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주지가 된 초격 스님은 절의 문턱을 낮추고 국민들과 종교가 함께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불가에서의 또다른 소명으로 여기는 듯 했다. 글/강보한기자 kbh@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초격 스님은?▲ 1987년 운경스님 계사로 사미계▲ 1994년 중앙승가대학 졸업▲ 1998년 청하 스님 계사로 구족계▲ 1998~1999년 불교방송 '살며 생각하며' 생방송 진행▲ 2012년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수료▲ 2002년~현재 제 13~17대 중앙종회의원▲ 현등사 주지, 보광사 주지, 한국문화연수원장, 사단법인 해피월드 이사장, 아산 윤정사 회주, 불교신문 사장, 총무원장, 종책특보단장, 중앙종회 수석부의장 역임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2019-11-05 강보한

[인터뷰… 공감]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대 이사장 지선 스님

#한국 민주사 100년 소회는'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 섣부른 자부심 경계과거엔 이데올로기 미래엔 종교가 '방해 요소'#진보 서초동-보수 광화문 '대립 상황'헤게모니 쟁탈전 불과 둘다 민주화에 도움안돼욕망 버려야… 헌신하지 않는 사회 장래 어두워#교단 반대 무릅쓰고 헌신수행 목적은 나만 깨닫는 것이 아닌 세속 구제가르침은 '현실적인 모순' 극복하기 위해 필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지선 스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사를 아우르는'민주·인권·평화 박람회'를 29일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개최했다. 한 달 동안 열리는 이번 박람회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시, 포럼 등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사를 조망한다.박람회 개최를 앞두고 지난 26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6대 이사장 지선스님이 방장으로 있는 백양사를 찾았다.단풍을 기다려온 상추객들이 벌써부터 산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고 여유롭게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눈에 담고, 지선 스님에게 한국 민주사 100년을 맞이하는 감회를 들었다.지선 스님은 1980~9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종교계 인사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공동대표를 맡은 그는 성공회 서울대성당 종탑에 올라 민주화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같은 해 구속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초를 당했다. 30여년이 지난 지난해 비민주, 비인권의 상징물인 대공분실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했다. 2022년 정식 개관을 목표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지선스님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 돼 이런 변화를 지켜봤다. # "민주화 운동은 인류가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입니다."100년의 민주주의 역사를 아우르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때, 지선 스님은 민주화를 달성했다는 섣부른 자부심을 경계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건 사·오십 년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란 말은 대한제국이 생길 때부터 나왔고, 북한의 나라 이름에도 민주주의란 말이 들어간다. 수백 년 전에 민주주의가 시작됐다는 서구사회에서도 비민주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민주화 운동은 인류가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임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역사와 사회의식에 각성해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민주화를 방해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반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그는 말했다. 민주화를 방해하는 요소로는 이데올로기와 종교를 지목했다. 지선스님은 "과거에는 이데올로기가 민주화의 걸림돌이 됐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극화해 민주주의를 묵살했다. 지금은 다극화를 거쳐서 다시 양극화로 가려는 것이 미국이나 중국의 생각이라고 본다. 그들은 양극화의 주의주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또 미래에 이보다 더 문제가 될 것은 종교다. 미래에는 종교가 더욱 끈질기게 민주화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광화문 집회에서 헌금을 모금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은 과거 파시스트 정권 때는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만약 지금 부당한 계엄령이 발포된다면 그들이 광화문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민주화의 형식을 흉내 내며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시민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정치권력과 종교세력은 계속해서 부딪힐 것"이라며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각성한 시민들의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지선스님은 민주화란 '남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민주화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고 완성도 없다. 진보세력은 서초동에서, 보수세력은 광화문에서 대립하는 상황을 두고 지선스님은 "주의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한 어느 쪽도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의 공통점은 애국애민"이라며 "우리나라는 독립운동할 때까지는 보수가 있었지만, 이승만 이후로 보수가 사라졌다"고 비판했다. "이승만 집권 당시 상당수의 일본 잔재 세력이 살아남았다. 애국애민과 정반대의 행보였다"고 말했다. 또한 "진보 역시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해 민주주의와 멀어지고 있다. 그들은 결국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평했다.촛불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한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성숙했다고 평가하거나 혹은 '완성'을 거론하지만 지선스님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면 우선 나쁜 습관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내가 더 갖고 싶은 욕망, 내가 더 잘 되고 싶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확장했는데, 그 수혜자들이 중산층이 되고 돈이 생기니 정치에 관심을 갖고 권력에 욕심을 부린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다. 가진 자와 아는 자가 헌신하지 않는 사회는 장래가 어둡다. 한편으로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존논리가 강하니 각성이 힘들다. 그래서 민주화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꾸준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현실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지선스님이 민주화운동에 자신을 내던진 유신독재 시절, 천주교와 개신교가 반유신투쟁에 나설 때 불교는 침묵하고 있었다. 16살에 출가해 나와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고 자기 구제를 위한 수행에 정진하던 지선스님은 교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외롭고 고달픈 시간이었다. 함께하는 사람들 덕분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승려로서 그는 개인 수행과 중생구제가 동시에 가능할 수가 있는가, 개인 구원과 사회구원을 한 사람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해야 했다. 그는 "답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한용운 스님이나 계시면 찾아가서 물어봤을 텐데, 아무도 없으니 외로웠다. 다행스럽게도 승가대와 동국대 젊은 스님들이 열심히 함께 해줘서 외로움을 이겨내고 답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구한 답은 자비에 있었다. 지선 스님은 "수행의 목적은 세속을 구제하는 데 있다. 나만 깨닫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 아니다. 수행자는 결국 현실 참여를 해야 한다. 초월적인 논리나 가르침은 현실적인 모순, 업보와 정면으로 맞닥뜨려서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회피하는 것은 초월이 아니다. 모든 것은 현실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현실참여를 하지 않고 수행만 하면 종교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지선스님은 어느덧 민주화 100년의 역사를 헤아리고, 촛불 혁명을 이루어낸 우리 사회가 앞으로 '모든 것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의미를 깨닫고 추구해 나가기를 희망했다. 그는 "달라진 사회 현실에 따라 민주화운동도 변화하며 계속돼야 한다"며 "올해를 기념하고자 한다면 비본질적인 것,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착각하고 나만을 위한 주장을 고집하는 행동을 멈추고, 모든 생명이 나와 똑같이 공존공생하며 아름답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시작점으로 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지선 스님은?▲ 백양사 승가대학교 졸업(1970년)▲ 전남 영광 불갑사 주지(1972년)▲ 제주 관음사 주지(1976년)▲ 대학생 불교연합회 결성(1980년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6·10국민대회' 주도하다 구속(1987년)▲ 전남 장성 고불총림 백양사 주지(1994년)▲ (사)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제2대 이사장(2007~2010년)▲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2014년~)1980~9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종교계 인사인 지선 스님은 "민주화 운동은 인류가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며 "민주화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고 완성도 없다. 남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민주화다"라고 강조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2019-10-29 민정주

[인터뷰… 공감]옛 추억 상기시킨 '신포동 포크음악축제' 주역 인천 출신 디스크자키 김유철씨

일하다 건강 나빠져 요양 음악다방 매일 찾으니 DJ 제의받아 '유명세'1980년대 디스코텍에 밀리며 음반기획사行… 대박·손해 '우여곡절'인천 돌아와 '비틀즈' 운영 신청곡 들려주며 가슴 따뜻한 여행 이어가가을 저녁 인천 중구 신포동에 포크 음악 바람이 일었다. 1960~1980년대 젊은 세대에 큰 영향을 끼친 포크 음악을 주제로 한 '제1회 신포동 포크 음악축제'가 지난 12일과 13일 저녁 신포시장 인근 문화의 거리에서 펼쳐진 것이다. 인천 출신 가수 백영규씨가 기획과 연출을 맡은 이 축제는 거리를 가득 메워준 지역 주민과 음악팬들의 큰 호응 속에 막을 내렸다. 성공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980년대 '음악다방'을 무대에 소환한 점이 성공의 요소 중 하나였다. '음악다방'이 관객들의 옛 추억을 상기시켰고, 그만큼 호응도 컸던 것이다.그 중심에는 1970~1980년대 인천을 주름잡던 디스크자키(DJ) 김유철(62)씨가 있었다. 축제의 오프닝을 맡은 김유철씨는 무대에 재현된 DJ 박스 속에서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멘트와 가수 소개로 관객들을 미소짓게 했다. 특히 옛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도끼빗 DJ(준이 오빠)로 출연했던 인천 출신 배우 윤철형씨가 김씨의 후배 DJ로 출연해 무대 위 DJ 박스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옛 DJ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어 팝페라그룹 엘루체의 리더가 김씨를 찾아와 새로 나온 음반을 건네며 꼭 좀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는 모습도 수십년 전 모습이었다. 이에 김씨는 축제 무대에서 엘루체가 부를 'Perhaps Love'를 멋들어지게 소개하면서 관객들을 음악의 세계로 안내했다.김씨에게 30여년 전 우리 대중 문화에 영향을 끼친 DJ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지난 21일 오후 김씨가 운영하는 인천문화예술회관 인근 뮤직카페 '비틀즈'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4년째 '비틀즈'를 운영하고 있는 김씨는 벽을 가득 메운 9천여장의 LP판들 앞에서 옛 DJ 방식으로 그날의 날씨를 언급하고, 곡 해설을 하면서 손님들의 신청곡을 들려주고 있다.그는 "아날로그 감성을 원하는 분들에겐 LP판으로, 깨끗한 음질을 원하는 분들에겐 컴퓨터 파일화 되어 있는 곡을 틀어주고 있다"면서 "멘트는 그날그날 옛 뮤지션들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는지를 챙기고, 당일 날씨 등을 토대로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연평도에서 태어난 김씨는 인천기계공고에 입학하면서 뭍으로 올라와 생활했다. 고3 때 울산현대조선소로 취업 나갔다가 용접 때 발생한 가스를 많이 마신 관계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인천으로 돌아왔다."당시 회사에서 취업 중 장기요양으로 처리를 해준 덕분에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선배들과 어울려 동인천의 음악다방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어요. 하루 종일 음악만 들었던 거죠. 그런 모습을 눈여겨본 석다방의 DJ 선배들이 제의를 해왔고, 그렇게 새끼DJ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마이크는 잡아볼 수 없었고, 6개월 동안 LP판만 정리하고 음악실 청소만 했어요. 그러다가 차츰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죠."이후 꽤 잘나가는 DJ가 된 그는 돈도 많이 벌었다. 유림다방, 석화다방, 2001음악다방, 혜성음악다방, 심지음악감상실, 대동분식 등은 그가 DJ로 활동했던 곳이다. "일했던 다방에 손님들이 몰리면서 단박에 유명세를 탔죠. 여성팬들의 열광적인 선물 공세가 이어졌고요. 노래 한 곡을 신청하기 위해, 정성껏 그리고 오려 붙인 신청엽서들이 날마다 쏟아졌죠. 유명 가수들조차 새 음반이 나오면 제일 먼저 전국의 유명 음악다방을 돌며 직접 곡을 선보이곤 했어요. 음악다방에서 먼저 입소문을 타야 방송순위진입이 가능했을 정도였죠. 당시에는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통로가 음악다방이 거의 유일했거든요. 물정 모르던 젊은 혈기에 기고만장하기도 했었죠."1983년 심지음악감상실을 직접 인수한 김씨는 에피소드 음악감상실로 간판을 바꿔달고 경영했는데, 1년 만에 후배에게 넘기고 말았다. 1980년대 들어서 디스코텍이 생겨나면서 음악다방은 하나둘 카페로 바뀌었다. DJ들도 디스코텍으로 자리를 옮기던 상황이었다. 김씨는 여의도에 있는 음반기획사로 자리를 옮겼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박식함은 음반제작자로 인정 받기에도 충분했다. 1985년 인천 출신 그룹 '솔개 트리오'의 앨범 제작을 시작으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지정곡인 윤항기의 '웰컴 투 코리아', 1987년 도시의 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를 제작했다."'달빛 창가에서'는 대박 났죠. 인천 출신 작곡가 김창남이 박일서 형과 함께 '도시의 아이들'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대박을 친 거죠. 덩달아 저 역시 잘 나갔어요. 하지만, 세상일은 한치 앞도 모르는 거더군요. 1989년 PD들이 유흥업소에서 접대 받은 게 기사화되면서 인기 기획사를 대상으로 수사에 들어갔고,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죠. 1990년 솔개트리오를 재결성해 3집 앨범을 제작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어요."이후 김 사장은 영화에 지분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으며, 2000년이 지나고 인천으로 돌아와 학익동에 규모가 제법 큰 음악카페를 냈다가 다시 손해를 봤다. 2016년 3월 '비틀즈'를 열었다."이 공간은 음악 좋아하는 제가 혼자 운영할 수 있는 규모에요. 요리 부분은 아내가 도와주고 있고요. 단골들이 꽤 되기 때문에 좋은 음악과 함께 즐겁게 비틀즈를 운영하고 있죠.""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은 변했지만, 처음 나를 품어줬던 음악들은 지금도 그대로"라는 김씨의 바람은 음악에 재능이 있고, 즐기는 사람들의 무대를 만들어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이 공간 한 편에 작은 무대가 있는데, 밴드가 공연하기에는 다소 좁아요. 밴드가 설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 곳보다 조금 더 큰 곳에서 가슴 따뜻한 음악여행을 이어갔으면 합니다."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DJ 김유철은?부모님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해도 연백에서 피란와 정착한 연평도에서 태어났으며, 인천기계공고에 입학해 뭍 생활을 시작했다. 고교 졸업한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DJ 생활을 시작, 당시 동인천 지역의 유림다방, 석화다방, 2001음악다방, 혜성음악다방, 심지음악감상실, 대동분식 등에서 DJ로 활동했다. 1984년 음반 제작자로 변신해 이듬해 '솔개 트리오'의 앨범제작을 시작으로 1986년 윤항기의 '웰컴 투 코리아', 1987년 도시의 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 앨범을 제작했다. 1998년 한국포크송연합회 상근 홍보이사를 2년 동안 했으며, 2016년부터 음악카페 비틀즈를 운영하고 있다.1970~1980년대 음악다방 최전성기 시절에 DJ로 활동했던 김유철씨는 LP판처럼 돌고 도는 인생 속에 인천으로 복귀해 음악카페 '비틀즈'를 운영하면서 DJ로 활동하고 있다. 외부 활동도 하고 있는데, 오는 26일 청라 호수공원 플라워 아일랜드 일대에서 열리는 '정서진 원 아일랜드 뮤직 피크닉'에서도 DJ로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만난다.

2019-10-22 김영준

[인터뷰… 공감]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산실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최연봉씨

국내 최초 女지부장 선출된 곳… 입사후 근기법 배우며 노조 알게돼출퇴근 시간 지키기·식사시간 30분 확보등 근로조건 개선위해 투쟁사측 똥물 투척등 탄압에 맞서 알몸시위·단식농성 항의 124명 쫓겨나40년이 지났어도 '노조활동 방해 책임' 국가배상소송 여전히 싸움중인천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해 온 인천여성노동자회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인천여성노동자회는 1970~80년대 활발하게 펼쳐졌던 인천 여성노동운동을 주춧돌 삼아 창립했다.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다룰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이 있다.바로 1970년대 동일방직 인천공장의 여성노동자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사측의 노조 무력화 시도와 기관의 탄압에 맞섰다. 이들이 있어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산실이라고 불렸다.동일방직 해고노동자인 최연봉(64)씨가 인천여성노동자회 30주년을 맞아 지난 14일 열린 여성노동자 토크콘서트에서 1970년대 대표로 나와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치열한 삶을 이야기했다. 14일 부평아트센터에서 최연봉씨를 만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봤다.최연봉씨는 1970년대 동일방직 인천공장에서 일하며 사측의 노조 탄압에 맞서 싸우던 여성노동자 중 한 명이다. 당시 동일방직 노조에서 총무차장으로도 활동하며 여성노동자의 권익 증진을 위해 앞장섰다. 전북 김제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연봉씨는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형편 등 문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배움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그는 일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큰언니가 살고 있던 인천으로 올라왔다. 화수동의 솜공장에서 2년간 일하던 최연봉씨는 1975년 언니 지인의 소개로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당시 동일방직은 1972년 우리나라 최초로 노조 여성지부장이 선출된 이후 노조의 요구로 여성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등이 이뤄지고 있었다. 최연봉씨는 입사 후 3개월이 지나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근로기준법 공부를 하게 되면서 노조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고향 친구가 산업선교회에서 한문, 영어, 꽃꽂이 등 이것저것 가르쳐준다고 해서 바로 따라갔다"며 "입사하면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최연봉씨는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누려야 하는 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최연봉씨는 직포과에서 천을 짜는 일을 했는데, 그의 부서에는 식사시간이 거의 없었다. 조장이 5분 안에 밥을 먹고 오라고 하고 늦게 오면 눈치 주는 식이었다. 자신이 맡은 기계를 청소하기 위해 항상 1시간 일찍 출근해야 했고, 일이 끝나도 실이 끊어져 있으면 다시 이어놓고 나와야 했다. 그는 출퇴근 시간 지키기, 식사시간 30분 확보를 위해 투쟁했다. 노동조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사측은 근로조건 개선의 목소리를 높이는 노조를 와해하기 시작했다. 1976년 이영숙 노조지부장이 경찰에 연행된 틈을 타 회사 측 방침에 따르는 대의원만 모여 대의원대회를 열고, 기숙사 문을 잠그는 등 여성노동자들의 출입을 막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사무실 앞 잔디에서 농성을 진행했고, 농성을 해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에 저항하기 위해 '알몸시위'를 벌였다. 최연봉씨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연봉씨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방패를 들고 서 있는 경찰들이 다가올 때마다 들렸던 군화발 소리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면서도 "노조가 없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간부들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있었는데 동료 중 누군가 '옷을 벗으면 경찰이 못 건드린다더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여성 노동자들은 수치심을 느낄 생각도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연봉씨도 옷을 벗으려던 순간 직포과 담임이 그를 현장에서 데리고 나갔다. 이를 뿌리치고 농성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연행되지 않은 최연봉씨와 조합원들은 농성장에 남아있는 옷가지를 들고 동부경찰서로 곧장 달려가 동료들을 내보내라고 항의했다. 그 날 저녁 연행된 동료들이 풀려놨는데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했다.'알몸시위' 이후 조직을 추스르고 있을 때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났다. 새로운 노조 집행부가 구성된 후 대의원선거가 열린 1978년 2월 당시 선거관리위원이었던 최연봉씨는 선거 준비를 마치고 노조 사무실에서 조합원에게 투표용지를 나눠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투표가 시작되는 오전 6시가 다 될 무렵 남성노동자 3명이 고무장갑을 낀 손에 양동이를 들고 노조 사무실로 들어왔다. 남성노동자들은 양동이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사무실 책상과 바닥 곳곳에 뿌리기 시작했다. 이물질이 머리와 옷에도 튀었다. 뒤늦게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를 맡고 나서야 이물질이 분뇨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동일방직 노동조합 똥물투척사건'이었다.'동일방직 노동조합 똥물투척사건' 이후에도 사측의 탄압은 계속됐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여성 조합원들은 그해 3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한 노동절 행사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로 했다. 최연봉씨도 준비한 플래카드를 들고 동료들과 장충체육관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가려던 순간 한 남성이 그를 붙잡더니 "어디서 왔느냐"며 기다리라고 했다. 잘못하면 붙잡혀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남성이 방심한 틈을 타 행사장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놀란 가슴은 진정될 틈 없이 두근두근 뛰었다. 행사가 시작하고 최연봉씨와 여성 조합원들은 플래카드를 꺼내고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똥을 먹고 살 수 없다"고 외쳤다. 이 외침은 이후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 만든 희곡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에서도 재현돼 이를 지켜본 모두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장충체육관 항의시위 이후 명동성당에 들어가 단식 시위 등 농성을 진행하던 중 사측은 여성노동자 124명을 해고했다. 최연봉씨도 이 중 한 명이었다. 최연봉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은 산업선교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해고·복직 투쟁을 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최연봉씨 등은 동일방직 노조 활동 방해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등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최연봉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가 떠난 자리에는 여전히 그들이 사용하던 기숙사 등 건축물이 남아있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의 가동이 멈추면서 기숙사 건물 등은 현재 방치돼 있다. 최연봉씨는 동일방직 기숙사 등 건축물이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활용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는 노조가 필요하니까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 노동운동이 됐다"며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공간이 노동사 도서관·박물관 등으로 재탄생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최연봉씨는 "해고를 당했어도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어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20대 초반 봄날에 해고돼 시간이 흘러 60이 넘은 나이에도 동일방직 해고자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며 "동일방직에 복직해 단 하루라도 일하고 떳떳하게 사표를 내고 떠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했다.글/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최연봉씨는?▲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1975년 동일방직 입사 (前 동일방직 노동조합 총무차장)▲ 1978년 동일방직 해고 (해고·복직투쟁 전개)▲ 1987년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운영위원장▲ 1999년~2005년 녹색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 2010년 인천미추홀자원봉사센터 소장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최연봉씨가 "동일방직에 복직해 단 하루라도 일하고 떳떳하게 사표를 내고 떠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9-10-15 김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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