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사서 고생하는 사서(司書)' 박현주 인천시교육청 화도진도서관 독서문화과장

개관 준비때부터 참여 1999년 정부 공모서 '전국 유일 당선' 큰 역할고문서·사진등 꾸준히 '수집' 각종 연구·전시·출판등에 제공 '뿌듯'34년여 공직생활 '마침표'…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 주권운동 펼칠것박현주(58) 인천시교육청 화도진도서관 독서문화과장에게는 '사서 고생하는 사서(司書)'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에 고생을 사서 한다니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박현주 과장은 이 별명이 싫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든다며 웃는다.박 과장에게 이런 애칭을 붙여 준 것은 다름 아닌 지역 사회였다. 그가 만약 귀를 닫고 도서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고,발 벗고 나서지도 않았더라면 이런 '바보'같은 별명이 붙지 않았을 것이다.박 과장이 34년 8개월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곧 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4일 화도진도서관을 찾아가 그를 만났다.박 과장은 인천시교육청 소속 사서직 공무원이다. 1984년 10월 인천중앙도서관에 사서 9급과 '수서담당자'로 발령을 받아 사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는데, 부평·화도진·서구·주안·연수·계양 등 교육청 소속 7개 도서관에서 순환 근무했다.그 가운데 화도진도서관은 개관 준비부터 참여해 4차례나 근무했는데, 재직기간의 3분의 1을 화도진도서관에 보냈다.화도진도서관은 개항기 향토 역사자료를 갖춘 '향토개항문화자료관'과 상설 전시실인 '향토개항문화전시관'을 갖춘 특화도서관으로 유명하다. 화도진도서관이 특화도서관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자리를 잡기까지에는 박 과장의 역할이 컸다.박 과장은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고 지역 문화계, 역사학계, 시민사회단체 등 지역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라고 자신의 노력을 애써 축소하지만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화도진도서관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화도진도서관은 1999년 문화관광부의 특화도서관 지정 사업 공모에 선정된 것이 지금의 모습을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공모에 당선되는 데는 박 과장의 노력이 주효했다. 그는 공모 기획서에 개항자료 특화 도서관으로서의 비전과 당위성을 잘 설명해 전국 1곳만 선정하는 특화도서관에 선정되는 성과를 얻어냈다.박 과장은 "특화도서관 추진 배경에는 화도진이라는 지명이 가지는 역사성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당시 시민사회의 공감과 도움이 컸다"고 했다. 이어 "향토자료 수집의 필요성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도서관이 해야 할 의무라 여기고 관심을 기울이던 경험이 기획서 작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공모에 선정되면서, 당시에는 큰 액수인 1억원의 자료구입비를 지원받아 이를 종잣돈으로 자료를 꾸준히 확보해 현재는 고문서·지도·사진·엽서·마이크로 필름 등 비도서 1천600여점과 도서자료 9천500여권을 소장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매년 500~1천만원은 향토자료 확보에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는 단순히 자료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곳에 활용되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와 저술, 각종 출판, 전시와 각종 행사, 문화 콘텐츠 제작 등에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료수집 범위를 개항기에서 벗어나 한국전쟁, 조선시대 등으로 점차 확대하고 있다.수집된 자료 가운데에는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이 소장한 '조선신보'의 마이크로필름을 입수해 제작한 영인본과 향토역사가 최성연의 '개항과 양관역정'의 원본, 문화재로 등록된 '해관문서', 1904년으로 추정되는 인천항파노라마 등이 있다. 그가 자부심을 갖는 자료들이다.박 과장은 "인천의 각 군·구 기초자치단체가 발행하는 군·구사(史)나, 각종 전시, 박물관 전시 등에 대부분 화도진도서관이 제공한 자료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 도시의 기억은 기록으로 유지되고 완성되는데, 기억도 때로는 왜곡될 수 있기에 기록과 자료의 보존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이러한 활동이 공공도서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박 과장은 퇴임 이후 도서관 주권운동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는 시민과 사서, 도서관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인천시공공도서관 연구회'라는 이름의 공공도서관 연구 모임을 준비 중이다. 모임을 통해 도서관 정책과 도서관 환경, 도서관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도서관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가 모임을 주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모임을 통해서 다 같이 고민하고 함께 공부하며 독서운동도 하는 등 지역의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는 시민을 위한 도서관 주권 운동을 펴고 싶다는 뜻에서다.박 과장은 "아직도 도서관 정책이 공급자 위주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데, 도서관 이용자인 시민이 참여할 창구가 없어 아쉽다"며 "문제를 지적하고 싸우는 대립적 관계가 아닌 협력적 관계로 도서관 정책을 제안하고 지원하는 시민 연구모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유튜브에 영상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 시대이지만, 결국은 사람을 더 사람답게 만들 수 있는 사유의 계기는 독서를 통해 마련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며 "독서의 가치를 찾고 책을 읽는 환경을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다.책 집필도 준비 중이다. 공공도서관의 사서로서 도서관 이용자와 교감한 경험과 생각, 또 우리나라 도서관이 지나온 역사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아내려고 책 얼개를 구상 중이다.34년 8개월의 공공도서관 사서로서의 생에 종지부를 찍는 박현주 과장. 그의 대학교 후배인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그 사람 덕분에 인천의 문화가 더 풍성할 수 있었음을, 그 사람 덕분에 인천의 도서관이 좀 더 윤기를 낼 수 있었음을, 비록 그것을 이용하고, 누리는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리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바로 그 사람 덕분에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누렸음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퇴임을 앞둔 '누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임을 진심으로 믿는다. 누나의 시작을 축하하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박현주 과장은?▲ 1984년 인천중앙도서관 사서로 첫 발령▲ 2010년 인천개항자료전시관 설치▲ 2010년 최성연 선생 기증자료 도록 '1960년대 인천풍경' 편찬▲ 2011년 제5회 다산대상 청렴봉사상 수상▲ 2017년 화도진도서관 향토개항 소장 도록 편찬▲ 2018년 10월 화도진도서관 개관 30주년 '자료로 본 인천의 근현대' 전시▲ 2019년 1월 한국도서관상 개인상 수상박현주(58) 화도진도서관 독서문화과장이 26일 퇴임식을 끝으로 34년 8개월의 사서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다. 박 과장은 퇴임 이후에도 도서관 주권운동에 몸담을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도서관 2층 향토·개항 문화자료관에서 만난 박현주 과장.화도진도서관 1층에는 도서관이 수집·보존해 온 소장자료를 상설전시하는 향토개항문화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2019-06-25 김성호

[인터뷰… 공감]'대한민국 김치명인·명장 1호' 김순자 한성식품 대표이사

집에서 담근 맛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 '중국산' 맛에 익숙해질까봐 걱정'손쉽게 만드는' 방법 알려달란 부탁 거절… 하루 이틀만에 만들 수 없어10년 전 미국 전시서 냄새난다고 괄시… 지금은 '한국 김치' 해외서 환영우리 스스로가 김치 귀하게 여기고 정부·언론등 '세계화' 발벗고 나서야"주인에게 사랑받는 강아지는 가정부에게도 사랑받고 집에 온 손님에게도 사랑받습니다. 반면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강아지는 모두에게 천대받습니다. 김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조상님들이 귀하게 여긴 김치를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순간 외국인들도 김치를 무시하게 되고 세계화도 불가능해집니다."(주)한성식품을 설립한 김순자 대표이사는 김치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자부심을 아낌없이 뿜어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김치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심지어 철물점을 지나치다가도 김치를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공정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대한민국 1호 김치 명인이자 명장의 자부심이 드러났다.김 대표는 한국인의 김치를 세계인의 김치로 만들기 위해 지난 30년 인생을 김치에 바친 명실상부한 김치 장인이다.1986년 직원 1명과 (주)한성식품을 설립한 김 대표는 김치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 그리고 손맛으로 금세 회사를 굴지의 식품회사로 키워냈다.이 과정에서 그는 2007년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대한민국 김치명인 1호로 선정 받은 뒤 2012년에는 김치명장 1호의 영예까지 안았다. 또 2012년부터 대한민국김치협회 회장을 6년간 맡아 '김치 세계화'에 이바지했다.요즘은 김치를 담가 먹는 집들도 줄고 김치를 담가도 그 양이 확실히 줄었다. 이에 김 대표는 국민들이 점점 전통김치의 맛을 잊어버리진 않을까 걱정했다. 집에서 담근 김치 맛을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가 혹여 중국산 김치 맛에 익숙해져 김치 종주국이란 말이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그는 "각 지방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김치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김치 배우는 사람도 없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김치를 사 먹는다"고 아쉬워하며 "'전통 한국 김치를 어떻게 뿌리 내리느냐, 어떻게 전수하느냐' 고민이 많다"고 하소연했다.젓갈·풀·육수·배즙·양파즙·무즙·조청·벌꿀·새우 가루·표고 가루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만큼의 재료와 정성이 들어간 김치는 계속 전수돼야 한다는 것이 김 대표의 철학이다.김 대표는 젊은 세대에게 "어렸을 때 시골에 가면 할머니가 해주던 김치 맛이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김치는 항암작용이 뛰어난 건강식품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김치가 짠 음식의 대명사가 됐다. 이에 김 대표는 "우리가 먹는 국의 염도가 평균적으로 2.3%에서 2.6% 수준이지만 시중에서 판매하는 김치 염도는 1.6%에서 1.8% 수준"이라고 말했다. 즉 김치가 짠 음식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한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김 대표의 반응이다. 저염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애꿎은 김치가 표적이 됐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김 대표는 시중에서 파는 김치들은 과거에 비해 점점 싱거워지고 있는데도 여전히 나트륨 함량이 높은 음식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그는 "10여년전 시중에서 판매한 김치 염도가 2.2% 정도였고 일반 가정집에서 담근 김치 염도는 서울이 2.8%, 부산이 3.6% 수준이었다"면서 "현재 시중에 판매 중인 김치 염도는 1.6%에서 1.8%인데 조금만 짜게 먹는 사람들은 바로 싱겁게 느낄 정도"라고 말했다.이어 김 대표는 김치가 함유한 성분을 강조하며 김치는 여전히 건강식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치에 풍부하게 담긴 칼륨이 몸에 축적된 나트륨을 배출시킨다는 것이다.그는 "김치에 들어가는 미나리, 파, 무, 배추 등은 칼륨이 풍부해 몸을 정화한다"며 "김치에 들어있는 수십·수백 종의 좋은 유산균들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김치를 무작정 깎아 내리기보다는 그냥 짜기만 한 음식과 건강한 발효식품과의 차이를 가려내고 연구해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확고한 신념이다.김 대표는 최근 쉽고 간단하게 김치를 담그는 것에 대해 "이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며 "시간과 과정을 무시하고 만드는 김치는 내가 생각하는 전통김치와 거리가 멀다"고 답했다.실제 김 대표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김치를 만드는 시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작진으로부터 주부들이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김치 만들기를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김 대표는 과정을 건너뛸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에게 시간과 과정을 생략한 김치란 없었다.김 대표는 "원재료가 되는 재료를 소금에 절여 수분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섬유질 관에까지 간이 밴 것을 저온에서 천천히 숙성시켜 유산균들이 나온 게 한 것이 바로 김치"라고 정의 내리면서 "1~2일 자고 난 뒤 완성되는 김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어 "전통방법을 고집하면 공정이 많아지고 인건비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때로는 내가 무식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요즘 맛을 내기 위해 김치에 넣는 화학조미료나 설탕량을 보면 가슴이 떨려서 넣을 수 없다"고 말했다.조미료가 들어간 김치를 만들 바에야 차라리 김치를 팔지 않겠다는 김 대표의 당당함, 내가 먹을 수 없는 김치는 만들지도 팔지도 않겠다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국내 김치 산업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김 대표는 감사하게도 외국에서 김치 붐이 일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그러면서 김 대표는 10년 전 미국에서 김치 전시를 할 때만 해도 냄새가 심하게 난다며 괄시받던 시절이 있던 적을 회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김치'가 왔다며 환영한다는 해외 분위기를 전했다.김 대표는 해외에선 김치가 '건강에 좋다', '미용에 좋다', '다이어트 식품'이라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그는 "중동 아부다비에 있는 여학교에서 김치 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다"면서 "우리 김치가 입점해 있는 백화점에서 최고 VIP 30명을 대상으로 김치 체험을 시켜줬는데 반응이 뜨거웠다"고 설명했다.점점 세계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김치가 유독 한국 사람에게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김 대표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김 대표는 정부가 앞장서 김치의 존재 가치를 키우고 세계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와 언론매체 등 범국민적인 차원에서 김치의 위상을 올린다면 제빵학과가 생기듯 김치 학과의 신설도 환상은 아니라고 단언했다.김 대표는 "김치는 한식의 중심인데 우리가 스스로 김치를 귀히 여겨야 세계인들도 중국산·일본산 김치 대신 한국 김치를 선택할 것"이라며 "온갖 재료들이 다 들어가 있는 건강식품인 김치다. 이런 강점을 언론매체와 정부에서 홍보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대담/신창윤부장 shincy21@kyeongin.com 글·사진/박보근기자 muscle@kyeongin.com■김순자 대표이사는?▲ 1954년 출생 ▲ 1986년 (주) 한성식품 설립▲ 2000년 국무총리 표창 ▲ 2007년 김치명인1호▲ 2011년 농림축산식품부 식품산업진흥심의 위원 ▲ 2012년 김치명장1호▲ 2012년~2018년 대한민국김치협회 회장▲ 2012년 고용노동부 국가기술자격 정책심의 위원▲ 2012년 김순자 명인 김치 테마파크 원장 (김치교육훈련기관 1호)▲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 농산물 수급조절 위원▲ 2017년 금탑산업훈장 수훈김순자 (주)한성식품 대표이사가 "한식의 중심인 전통 김치를 우리 스스로 지켜 나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김순자 (주)한성식품 대표이사가 전통 김치 담그기를 시연해 보이고 있다.

2019-06-18 박보근

[인터뷰… 공감]'우생순 신화 주역' 굳건히 골대 지키고 있는 오영란

마흔여덟, 조카뻘 후배들과 함께 선수생활 할 수 있는 비결은 '타고난 건강'경기할 땐 '센 언니'로 통하지만 코트 밖에서는 엄마처럼 다정다감한 선배아테네 올림픽, 1등 같은 2등… 메달 받을 땐 울지말자던 감독님 말 생각나'그 나이까지 하느냐' 댓글도 보지만… 버티게 해준 조한준 선생님께 감사"딸아이가 '엄마, 오십 살까지 뛰어 주면 안될까? 내가 기네스북도 찾아볼게'라고 하네요. '얘, 엄마 골병든다'고 했죠." (웃음)'72년생 쥐띠', 우리 나이로 마흔여덟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실제 주인공이 아직도 코트를 누비고 있다. 여자 핸드볼 실업팀 인천시청의 '맏언니'인 골키퍼 오영란이다.지난 10일 오전 문학경기장 체력단련장. 스무 살 넘게 차이가 나는 조카뻘 후배들을 이끌고 훈련 중이던 오영란에게 오랜 선수 생활의 비결부터 물었다. "타고난 건강이 아닐까요"라며 웃음 짓던 오영란은 "운동하는 사람들은 내 나이쯤 되면 연골 통증이 있고 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다"며 "그 흔한 부상도 거의 없었고, 당연히 수술이란 것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요즘은 나이가 들어 몸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한다"고 말했다.오영란은 경기장에 들어서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으면 팀 후배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거침없이 욕설도 날린다. 상대 팀 선수들도 인천시청 골문을 막아선 대선배 오영란 앞에서 주눅이 들 만하다. '센 언니'로 통하는 오영란은 알고 보면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경기장에선 누구도 봐줄 수가 없죠. 왕년에는 내가 생각해도 좀 무서운 언니였어요.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선 어린 선수들을 더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후배가 잘못해 혼을 내고 나면 혼자서 마음 아파하다가 결국 카톡을 보내서 위로를 해줘요. 혼낼 때는 확실히 혼내야 하는데…."오영란은 '플레잉 코치'로 뛰며 조한준 감독을 도와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그는 "누구 하나 이유 없이 대들거나 삐뚤어진 적이 없는 착한 선수들"이라며 후배들에게 고마워했다. 그에게 '오엄마'라는 애칭을 붙여준 인천시청 '주장' 신은주는 "엄마처럼 밥 먹는 것 하나까지도 후배들을 꼼꼼히 챙겨주는 선배"라고 한다.인천시청은 얼마 전 막을 내린 2018~2019 SK핸드볼 코리아리그에서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리그 초반만 해도 하위권을 맴돌며 부진했다. 두텁지 않은 선수층에 그나마 주축으로 뛰어야 할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한 탓이다. 전열을 가다듬은 인천시청은 선두를 달리던 부산시설공단에 시즌 첫 패배를 안기는 등 강팀들을 연거푸 제압하며 리그 판도를 뒤흔들 복병으로 떠올랐다. 정규리그 막바지에는 매 경기 극적인 명승부로 여자부 최다인 9연승 기록을 세우며 최종 3라운드를 전승으로 마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오랜 맞수인 삼척시청과의 준플레이오프 단판 대결에서 20-23으로 분패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오영란은 "삼척시청 홈 관중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힘도 못 써보고 아쉽게 졌다"며 "우리 후배들이 여자 핸드볼 명문인 인천시청 소속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대범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오산 성호초등학교 4학년 때 핸드볼을 시작한 오영란은 "원래 초등학교 때 배구를 했다"면서 "어느 날 선배 언니가 나를 때리는 모습을 본 원재옥 핸드볼 감독 선생님이 '너 핸드볼 한번 해볼래?'라고 하길래, 그 언니 앞에서 보란 듯이 '그러겠다'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골키퍼가 하기 싫어서 울기도 많이 울고 일부러 치마를 입고 오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오영란은 이번 시즌에 2011년 리그 출범 이후 통산 1천200회 세이브를 달성했다. 30대 초반인 삼척시청 골키퍼 박미라에 이어 두 번째다. 인천시체육회는 오영란이 리그가 출범하기 한참 전인 1991년부터 실업팀 선수 생활을 시작해 당시부터 쌓아온 세이브가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다면, 한국 남녀 핸드볼 선수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대기록이 쓰여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영란은 "역대 두 번째 1천200회 세이브 달성이라고 하길래, 우스갯소리로 '내 잃어버린 20년(세이브)은 누가 보상해 주느냐'고 했다"며 멋쩍어했다.한국 여자핸드볼의 산실 인천은 몇 해 전만 해도 여자 핸드볼 리그를 주름잡던 '챔피언'이었다. 1974년 국내 최초의 여자 핸드볼 실업팀으로 창단한 인천시청은 1990년 2월까지 운영된 뒤 진주햄(1990.3 ~ 1997.7), 제일생명 알리안츠(1997.8 ~ 2004.8), 효명건설(2004.9 ~ 2007.9) 등으로 인천 연고 팀의 명맥을 이어왔다. 효명건설 부도로 해체 위기에 놓인 팀을 인천시체육회가 2007년 잠시 맡았다가 이듬해인 2008년 3월 벽산건설이 이어받았는데, 회사 경영 사정으로 인천시체육회가 2010년 9월부터 다시 팀을 운영했다. 그러다 2014년 1월 인천시청팀이 재창단했다. 최근 유럽 무대로 진출한 국가대표 '에이스' 류은희(전 부산시설공단)를 비롯해 SK슈가글라이더즈의 김온아·김선화 자매 등이 인천시청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우승컵을 독식한 바 있다. 오영란은 "후배들이 팀을 떠났을 때에는 서운한 마음이 컸다"면서도 "그 팀에서 없어선 안 되는 선수로 잘 성장해 기특하다. 그동안에는 서먹서먹했는데, 이번 시즌에는 만나면 등도 두드려주고 격려를 많이 해줬다"고 했다.영화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으로 오영란을 기억해 주는 이들이 많다. 그는 "아테네 올림픽 때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며 "1등 같은 2등이었다. 당시 대표팀을 이끈 임영철 감독님(현 하남시청 감독)이 우리를 다독이면서 '(은)메달을 받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말자'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고 했다. 오영란이 속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세계 최강인 덴마크와 연장전을 2번 뛰고 승부 던지기까지 이어진 128분 혈투를 펼치며 큰 감동을 선사했다.오영란에게 다음 시즌에도 코트에서 만나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며 핸드볼을 시작한 큰 딸(강서희·인화여중1)의 응원에 더욱 용기를 얻게 됐다고 한다."힘든 길이라는 걸 잘 알아서 핸드볼을 시키지 않으려 했어요. 하지만 재능이 있는 아이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너희 엄마가 오영란 선수냐'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저께 '엄마, 오십 살까지 뛰어 주면 안 되느냐'고 묻더군요. 둘째(강동희·정각초3)도 핸드볼에 흥미를 보이고요. 간혹 '후배를 안 키우고 그 나이까지 너만 하느냐'는 인터넷 댓글도 보게 되는데, 딸아이 덕분에 힘을 내게 돼요."오영란은 끝으로 "(조한준) 감독 선생님의 배려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뛰어 보겠다. 많은 격려 부탁한다"고 각오를 밝혔다.글/임승재기자 is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오영란은?오영란은 오산 성호초등학교 4학년 때 핸드볼을 시작했다. 오산여중과 송원여중, 신갈고를 나온 그는 1991년 부산 대선주조 실업팀에 입단했다. 이어 온양 종근당과 광주시청을 거쳐 아테네 올림픽이 열린 2004년 인천에 연고를 둔 효명건설에 합류했다. 오영란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을 소재로 한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실제 인물이다.그의 배우자인 강일구씨도 남자 핸드볼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약했다. 강씨는 남자 실업핸드볼 인천도시공사 감독을 역임하는 등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2004년 아테네 올림픽 한국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실제 주인공인 인천시청 여자 핸드볼 실업팀의 골키퍼 오영란 선수가 지난 10일 인천 문학경기장 체력단련장에서 바벨을 들어 올리며 근력 강화 운동을 하고 있다.여자 핸드볼 실업팀 인천시청 맏언니인 골키퍼 오영란. /대한핸드볼협회 제공

2019-06-11 임승재

[인터뷰… 공감]광복회 '변화의 바람' 중심에 선 김원웅 신임 회장

광복회가 심상치 않다. 한때 관변단체 정도로 평가받던 광복회가 최근 회장 선거를 기점으로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단순 보훈 단체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주역을 자처하겠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3선 국회의원인 김원웅 제21대 광복회장이 있다. '잠자는 광복회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겠다'는 구호를 걸고 광복회장에 당선된 김 회장을,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강원도 인제 허준약초학교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개정, 친일찬양 금지법 제정, 광복회의 혁신기획실 신설 등 다양한 독립유공자 관련 정책 추진을 예고했다. # 국민에게 존경받는 원로단체로 거듭나겠다."광복회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조직입니다. 국가 정통성의 중심에서 국민에게 존경받는 원로단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혁신을 이뤄내겠습니다."오는 7일 취임식을 앞둔 김원웅(75) 제21대 광복회장의 일성이다.14·16·17대에 걸쳐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 신임 회장은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은 '행동하는 민족주의자'다. 부친 김근수 선생은 조선의열단 출신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모친 전월선 선생은 여성광복군 출신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8천600명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모인 조직이 친일 미화 교과서에 침묵하고, 일제의 조선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는데 눈치만 보고 있던 때가 있었다"며 "앞으로는 광복회가 국가 방향을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민의 정신적 가치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김 회장의 취임식은 백범기념관에서 열린다. 보훈 단체 위주로 치러졌던 과거 광복회장 취임식과 달리 김 신임회장의 취임식에는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대구항쟁, 4·19, 6월 항쟁, 촛불 항쟁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진영과 시민단체 관계자가 대거 초청됐다. 보훈 단체를 넘어선 새로운 조직을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가 담긴 시도다.그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는 광복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회원들의 생각이 선거 결과로 표출된 것 같다"며 "이젠 변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광복회장직에 임하려 한다"고 말했다.# 친일 청산 제대로 못해 분열·갈등중김 회장은 인터뷰 내내 대한민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다만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선 앞으로 광복회가 앞장서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김 회장은 "분단 이후 친일 세력이 집권한 대한민국이 국민에게 진정한 애국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항상 고민해왔다"며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 동족을 괴롭히고, 외세에 빌붙어 잘 지낸 사람을 집권세력으로 두고 애국을 말하는 것이 일제 때 '내선일체'와 뭐가 다르냐"고 반문했다.그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애국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국가 민족의 정통성을 담보한, 8천600명 독립운동가 후손이 모인 광복회가 역할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현재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도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데 있다고 진단했다.김 회장은 "제주 4·3, 여순항쟁, 부마사태, 4·19, 5·18 등 역사적 항쟁들은 모두 청산하지 않은 친일세력에 대한 저항사로 해석할 수 있다"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친일세력들이 민중이나 민초들의 정당한 요구를 탄압하기 위해 빨갱이나 좌파로 몰아간 일들로 점철돼있다"고 지적했다.이어 "이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며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민족주의 세력을 잡기 위해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을 바꿔 만든 것이 지금의 국가보안법"이라고 비판했다.그는 "통합의 절대조건은 친일 청산이고, 친일 청산 없이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어렵다"며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온 기득권 세력의 논리로는 국민을 통합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김 회장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세계 패권이 넘어가는 과도기인 지금이 대한민국 변화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중미 간 무역경쟁은 세계 패권을 두고 벌어진 마지막 힘겨루기라고 봐야 한다"며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체제와 세력이 집권하는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처우 대폭 개선해야김 회장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현재 독립유공자의 처우를 대폭 개선하고, 예산과 정책에 있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현재 국가보훈처가 맡은 독립유공자 관련 사무를 국무총리 산하 별도의 조직에서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김 회장은 "현재 국가유공자 안에는 재향군인, 월남전 참전용사, 6·25부상자 등이 모두 포함된다"며 "그러나 독립유공자는 근본부터 다른 국가유공자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은 누가 시켜 민족을 위해 나선 게 아니었다"며 "민족이 처한 위기 앞에서 자발적으로 자기 재산을 팔고, 저항에 나선 독립운동가들을 국방의 의무로 참전한 사람들과 같은 기준에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같은 독립운동가와 남북전쟁의 희생자는 격을 다르게 본다"며 "대한민국은 국가유공자라는 큰 틀 안에 독립유공자를 포함해놨는데, 이것도 친일 적폐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김 회장은 이를 위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또 유신정권 때 독립유공자에게 불리하게 개정된 연금 지급 관련법을 원상회복하고, 애국지사와 광복회원의 연금 인상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독립운동가를 폄훼하거나 친일 미화를 하면 처벌하는 '친일찬양 금지법' 제정과 민족교육을 위한 연수원 설립 필요성도 강조했다.김 회장은 "독립유공자의 대우 문제는 국가의 기강과 정체성과도 연관된다"면서 "친일파들이 만든 프레임에서 벗어나 국가의 근본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글/이종우·김도란기자 doran@kyeongin.com 사진/김도란기자 doran@kyeongin.com김원웅 광복회장은 "현재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도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데 있다"고 진단하고 "광복회가 국가 정통성의 중심에서 국민에게 존경받는 원로단체로 거듭나겠다"고 각오를 밝히고 있다.김원웅 광복회장이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강원도 인제 허준약초학교에서 수강생을 상대로 강의하고 있다.

2019-06-04 김도란·이종우

[인터뷰… 공감]인천시사편찬위원회 20년째 몸담고 있는 강옥엽 전문위원

#인천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역사학자 활동 중 구인 공고 보고 지원2000년 강덕우 前전문위원과 함께 시작#인천상식문답등 많은 사랑 받았는데각 기관 골든벨, 교재와 같은 역할 담당'한국 최초… 100선' 도 남다른 감정 느껴인천 중구 자유공원 인근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멋스러운 한옥이 자리해 있다.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일본식 호화 별장터에 1966년 지어진 이 한옥은 인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인천시역사자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식 정원과 한옥이 어우러져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정취를 발산하는 인천시역사자료관은 개항장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이 간직한 역사가 축적되는 이곳에는 관련 서적·자료들을 비롯해 인천시사(市史)편찬위원회 위원들의 집무실이 갖춰져 있다. 올해로 20년째 인천시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 강옥엽(58) 전문위원을 지난 27일 이곳에서 만났다. 부산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역사학자로 활동했던 강 전문위원은 2000년 6월 5년 기간의 전문직 계약 공무원으로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강 전문위원은 "인천으로 오기 전 대학교 시간 강사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 외무성의 옛 문서를 해제하는 일을 했었다"면서 "인천에서 시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가 떴길래 연이 없는 곳이었지만, 어느 곳에서든 역사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오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원서 접수를 위해 한달음에 인천에 온 그가 첫 번째 응모자였다고 한다. 당시 채용에선 지난해 정년 퇴임한 강덕우 전 전문위원과 함께 2명이 합격했으며, 두 사람이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고 강 전문위원은 돌아봤다."시사편찬위원회는 1965년 구성됐습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향토사가 1973년 나왔죠. 시사는 10년 단위로 발간하는데, 이후 2013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편찬됐습니다. 2000년대 나오는 시사들에 제가 관여했죠. 1995년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바뀌고 10개 군·구로 재편되면서 그만큼 들여다볼 게 많아졌습니다. 2002년 시사 편찬 작업을 마무리하고 강덕우 박사님과 함께 조선시대의 한문 자료와 일제시기의 일문 자료, 선교사들의 영문 자료까지 축적했으며, 인천역사문화총서와 기획자료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인천의 산, 지명, 하천 등 테마를 잡아서 낸 인천역사문화총서 시리즈는 현재까지 85종에 달합니다. 2003년 첫 역사 총서를 내고 나니 인천문화재단과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에서도 총서를 내는 등 지역 문화와 향토사 연구가 보다 깊고도 넓게 이어졌죠."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2013년 펴낸 인천시사는 사진으로 보는 시사 2권을 포함한 5권으로 꾸며졌으며, 이듬해부터 매해 주제를 정해서 시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인천아시안게임이 열린 2014은 인천 체육의 발자취로, 2015년에는 인천의 지명과 지지·지도로 이어졌다. 인천의 건축, 역사문화유산, 문화사적과 역사 터는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각각 간행됐다.강 전문위원은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을 본떠 만든 '인천상식문답'과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등 시민들이 좋아하는 책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다고 했다. '인천상식문답'은 인천 역사에 대해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인천 정명(定名) 600년이던 2013년 각 기관과 단체들은 '인천 역사 골든벨'을 개최했는데, 당시 '인천상식문답'은 교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또한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셔서 책도 거의 다 나간 것으로 알고 있고요."'시민 공감, 역사의 대중화'는 강 전문위원의 모토와 같은 것이다."강덕우 박사님과 함께 일한 초기부터 '역사의 대중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대학에 있는 연구자처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로 인해 1년에 6회씩 개최하는 시민 대상 향토사강좌도 16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한, 시민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기 위해 역사자료관 복도를 활용해서 역사 사진 전시회를 열고 일제 강점기 광고로 보는 인천이야기, 사라진 건축물, 10개 군·구 문화유산 소개 등도 했고요. '시민이 공감하지 않는 역사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좋아해 주셨던 총서 시리즈도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3대 도시' 인천·대구 논쟁 의견은인천 역사, 개항 이후 강조되는 일 많아'개국·왕도의 고장' 알려야겠다고 생각#임기 마친 후 계획은아직 발굴하고 해나가야 할 것들 많아지역에 자긍심 갖도록 연구 계속할 것강 전문위원은 인천이 300만 인구 시대에 들어선 2년 전 즈음에 인터넷 공간에서 인천과 대구 중 어디가 3대 도시인가를 두고 주고받은 네티즌들의 댓글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인구수에서 앞선 인천이 3대 도시가 아니냐는 주장에 대구 사람으로 여겨지는 네티즌이 천년 고도 경주를 인근에 끼고 있는 대구가 3대 도시가 맞다는 견해를 폈고, 논쟁은 거기서 흐지부지 끝났단다."당시 여러 생각을 했죠. 대구 사람으로 보이는 분이 역사로 편 반론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었겠죠. 인천의 역사는 개항 이후 130여년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인천의 개항 이전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외부 강의에선 항상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인천의 옛 역사를 이야기하죠. 가령 삼국사기에 미추홀의 시작은 BC 18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다수 학자들이 그렇게 여기죠. 인천은 20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시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국조 단군의 유향이 서려 있는 강화도는 고려시대의 왕릉이 온전히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개국과 왕도의 고장'으로서 인천의 정체성이 찾아지는 것이죠."강 전문위원의 계약기간은 오는 6월 9일까지이다. 시사편찬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서의 임기는 만료되지만, 인천 향토 사학자로서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할 예정이다."아직도 인천 역사를 발굴하고 해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인천이 어떤 도시이고 왜 중요하며, 이를 통해 시민들이 자긍심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알릴 것입니다. 최근 들어 시민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이 커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연구하는 우리나 후학 모두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같은 소재의 글을 쓰더라도 최소한 한두 개의 새로운 사실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도 갖게 만듭니다. 이처럼 깨어있는 시민들께서 자제분들에게도 그러한 의식을 심어줬으면 합니다. '역사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독도 문제와 동북 공정 등 무슨 일이 생겨야 중요성을 말합니다. 임기는 끝나더라도 역사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과 인천 역사를 위한 행보는 이어갈 것입니다."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강옥엽 전문위원은 ?부산에서 태어나 고교시절까지 보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문학박사, 한국사 전공)를 졸업했다.2000년 인천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부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6년부터 인천시 인재개발원(공무원교육원) 인천 역사 강의를 하고 있으며, 부평구와 미추홀구 지명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인천광역시사를 비롯해 '문답으로 엮은 인천 역사'(강덕우 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은 지난 2000년 접한 인천의 첫 인상에 대해 "전철을 타면 한 시간 만에 서울에 닿는 곳이지만,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의 느낌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이어서 "시골과도 같은 향토적 특성이 있었는데, 그 향토사를 만들어 온 지역의 여러 연구 자료들을 토대로 지금의 인천역사자료관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2019-05-28 김영준

[인터뷰… 공감]수원연극축제 총연출 임수택 감독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늘 우려의 시선이 따른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극복하고 늘 대성황이라는 반전을 안기는 이가 있다. 바로 연출가 임수택의 이야기다. 국내에 처음으로 '거리예술' 장르를 도입한 임 감독은 지난 2003~2014년 12년간 '과천한마당축제' 예술감독을 지내면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연출가로 이름을 알렸다. 축제 연출을 처음 맡았을 당시 유럽을 방문했던 그는 거리에서 자유롭게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를 마당극으로 이뤄지던 '과천한마당축제'에 도입해 장르를 거리극으로 확장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성공적인 축제를 만들었다.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람객이 방문했고, 반응이 좋자 안산·고양·서울 등지에 거리예술을 표방하는 축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무대를 옮긴 이유는?수원화성도 좋지만 너무 넓어 적절치 않아'경기상상캠퍼스' 아늑하면서 다양한 공간#수준 높은 콘텐츠가 많다고 했는데'생기있는 축제' 만들기 위해 꼬박 1년 고심공간과 작품의 조화·완성도 등 고려해 선별지난해부터는 수원연극축제 총감독을 맡게 된 그는 다시 한 번 '거리예술'의 마법을 시도했다. 사실 기존 수원화성에서 펼쳐지던 행사는 정체성을 찾지 못해 한때 존폐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장소와 장르 변경은 관람객의 발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도 도심을 떠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장르를 전진 배치한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지만, 대 반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축제에는 지난 2017년보다 3~4배 많은 이들이 찾았고, 풍성한 볼거리에 관람객의 반응도 뜨거웠다.그는 "수원연극축제의 이전 무대는 수원화성 행궁광장이었다. 수원의 상징적인 공간인 수원화성은 좋은 무대이긴 하지만, 너무 넓어서 공연예술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며 "반면 경기상상캠퍼스는 아늑하면서도 다양한 공간이 있어 프로그램을 짜기 수월했다"고 전했다. 임 감독은 올해도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에 선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화려함을 끌고 와 오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화려한 축제의 장을 만든다. 자연 그대로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축제는 말 그대로 '숲속의 파티'다. 지난해에 이어 이곳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축제는 겉은 화려하고 속은 꽉 찬 콘텐츠들로 관람객을 맞는다. 거리에서 펼쳐지는 예술 공연이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임 감독은 식상한 반복이 아닌 생기있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지난 1년을 꼬박 내달렸다. 딱 일주일 전 경기상상캠퍼스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공간과 콘텐츠를 소개하는 그의 모습은 지난밤 꿈을 설명하는 아이처럼 생기가 넘쳤다.그는 "지난해 축제는 선임되고 시간이 많지 않아 공연팀을 섭외하는 과정에 오류가 있었다"며 "하지만 올해 축제는 지난해 축제가 끝난 시점부터 꾸준히 준비를 해 왔기 때문에 콘텐츠 면에서는 지난 축제보다 더 풍성하게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올해에는 국내 신작 공연과 이동형 공연을 늘렸다"면서 "행사장을 방문하면 절대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고 강조했다.임 감독의 말처럼 공연 안에 콘텐츠들은 수준이 꽤 높은 편이다. 거리예술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공간'과 작품의 조화뿐만 아니라 배우의 연기, 무대 연출 등 높은 기술적 완성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회적 이슈 반영,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전통의 현대화 등을 고루 갖춤 작품을 선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간에 맞는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였다. 경기상상캠퍼스는 아늑한 공간이다. 여기에 맞는 콘텐츠를 선별했고, 마치 공간을 위한 작품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짰다"며 "또 사회적 이슈를 반영한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작품 속 예술행위를 통해 관람객에게 일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콘텐츠는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고 설명했다. #일하면서 어렵거나 아쉬웠던 점은?외국은 한 예술감독이 20~25년 연출 맡기도韓, 예산으로 운영하다보니 너무 빨리 바꿔#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극장에서 보는 일반적인 연극에서 벗어나실험적인 '비관습적' 작품 선보이고 싶어좋은 축제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있지만, 가끔 외로운 시간도 찾아온다. 특히 적은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지자체 축제를 오랜 시간 꾸려왔기에 어려운 점도 분명 있었다. 그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축제 운영이 가능하다는 시선과 장기적으로 축제를 바라보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임 감독은 "외국의 경우에는 축제 예술감독의 임기가 보통 5년 정도 되는데, 별다른 문제 없으면 계속 연임을 시킨다. 그러다 보면 한 감독이 축제 연출을 20~25년 맡기도 한다. 축제가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은 반대다. 뭐든 짧은 시간에 바꾼다. 그래서 축제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또, 예산으로 운영하다 보니 무조건 빠른 성과를 보려고 한다. 정착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이 가장 아쉽고 답답하다"고 토로했다.3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그는 아직도 하고 싶은 새로운 일이 많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는 "지금까지는 거리 예술에 집중을 해왔는데, 비관습적 연극을 선보이고 싶어요. 관습적 연극은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일반적인 연극이라고 보면 되죠. 비관습적의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관습적인 것을 탈피하고 실험정신을 발휘하는 연극을 말한다"면서 "국내에서는 '다원예술'이라는 말로 비관습적 연극을 선보이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실험적인 작품을 관객에게 많이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글/강효선기자 khs77@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임수택 연출가는?▲ 1956년 전라남도 광주 출생▲ 1975년 경복고등학교 졸업▲ 1983년 2월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교육과 졸업▲ 1999~2004 소극장 일과핵 극장장▲ 2003~2015 과천한마당축제 예술감독▲ 2011~2014 한국거리예술협회 대표▲ 2015~2016 서울문화의 밤 총감독▲ 2016 춘천인형극제 예술감독▲ 2017 ACC광주프린지인터내셔널 총감독▲ 2018~ 수원연극축제 예술감독연출가 임수택 감독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수원연극축제가 시민들에게 선사할 다양하고 수준 높은 콘텐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오는 24일부터 26일까지 '수원연극축제'가 열리는 수원 서둔동에 위치한 경기상상캠퍼스에서 임수택 예술감독이 공간과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원문화재단 제공

2019-05-21 강효선

[인터뷰… 공감]연임 성공한 김종식 인천항만물류협회장

내항 부두운영사들 다양한 의견 귀기울여… 항운노조 설득 끝에 국내 첫 '통합' 성사어려움 겪고 있는 인천항 '수입 화물 종류 다양화·배후단지 기능 강화' 가 해결 열쇠'항만 구역 개방' 관련 시민 요구 증가… 앞으로 진행될 남북 경제협력에도 대비해야인천항은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1883년 1월 부산항과 원산항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한 인천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국가 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하는 인천항은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인천항 화물은 벌크(무더기 짐)에서 컨테이너로 바뀌었으며, 화물의 중심지는 2015년 문을 연 신항으로 옮겨가고 있다. 벌크 화물을 주로 다루는 내항은 항만재개발을 위한 절차를 본격적으로 밟고 있다.인천항 33개 하역업체로 구성된 인천항만물류협회 김종식(59) 회장은 최근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경인일보 인터뷰에서 "인천항 기능을 재배치하는 작업이 일정 부분 마무리되고 있다"며 "새로운 인천항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2016년 8월부터 인천항만물류협회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김종식 회장이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인천 내항의 10개 부두운영사(TOC)를 하나로 합치는 일이었다. 1974년 개장한 내항은 모두 8개 부두로 구성돼 있다. 1997년부터 부두별로 시설 운영권 계약을 맺은 10개의 TOC가 운영됐으나, 벌크 화물 감소로 일감이 급격히 줄면서 이들 TOC는 연간 60억~7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영 여건이 나빠졌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인천항 벌크 물동량은 큰 폭으로 줄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항이 개장하면서 벌크 화물을 하역하는 시설은 오히려 늘어났다"며 "내항은 10년 전보다 물동량이 절반 수준으로 감소하는 등 위기를 맞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해양수산부는 2014년부터 인천 내항 TOC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자사 소유의 사업장을 포기해야 하는 TOC,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항운노조 등 관계 기업·단체와의 입장 차가 커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김종식 회장은 "TOC를 통합하지 않으면 (각 TOC의 경영 악화로) 고용 불안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며 항운노조를 설득했다. 또 TOC들의 다양한 의견을 하나의 목소리로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노력 끝에 2017년 9월 노사정은 내항 TOC 통합에 합의했고, 이듬해 7월 '인천내항부두운영(주)'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특정 항만의 TOC가 단일 운영사로 합쳐진 국내 첫 사례다. 인천내항부두운영(주) 대표도 맡고 있는 김종식 회장은 "노사정이 서로 조금씩 자신들의 입장을 양보해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며 "(통합) 초기에는 하역 생산성이 하락하는 등 일부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제는 물동량도 예전 수준을 회복하는 등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했다.인천항은 현재 큰 변화의 시기에 직면해 있다. 신항 개장 이후 컨테이너 물동량은 매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으나, 벌크 화물은 몇 년째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해 컨테이너 물동량은 전년과 비교해 2.4% 늘어난 312만1천367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기록했다. 반면, 벌크 물동량은 2017년(1억1천940만7천303t)보다 6.4% 감소한 1억1천181만6천459t으로 집계됐다. 벌크 화물 감소로 인천항 전체 물동량은 2017년보다 1.2% 줄었다. 인천항은 전국 항만 중 유일하게 전년 대비 물동량이 감소한 항만이 됐다. 특히 원유와 석탄, 천연가스 등 전용부두에서 처리되는 화물을 제외한 물동량은 수년째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게 김종식 회장 얘기다.그는 "수도권에 자리 잡고 있던 공장이 지방으로 이전한 데다, 국내 경기 침체로 수도권 산업단지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인천항의) 물동량이 줄었다"며 "위기를 극복하려면 여러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김종식 회장은 인천항으로 수입하는 화물의 종류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인천항은 2천만명이 거주하는 수도권을 배후에 두고 있어서 소비재 화물 수입에 최적화된 항만으로 꼽힌다. 지난해 인천항의 수입 물동량은 1억735만1천130t으로, 전체 화물의 65.7%를 차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오렌지나 냉동 감자를 들여오는 등 수입 화물을 다양화하면 항로도 늘어날 것"이라며 "항로가 많아지면 이들 국가로 화물을 수출하는 화주들이 인천항을 많이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항만 배후단지 기능을 강화하는 것도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다. 항만 배후단지에는 화물 보관, 집배송, 조립, 가공 관련 시설은 물론 업무·상업시설 등 항만 활성화에 필수적인 시설이 들어선다. 인천은 남항 배후단지(아암물류1단지)와 북항 배후단지가 있으며, 신항 배후단지와 아암물류2단지 공급도 앞두고 있다. 김종식 회장은 "배후단지가 예전처럼 화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하거나 소포장해 다시 항만 구역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닌, 원자재를 가공해 수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냉동·냉장 컨테이너와 전자상거래 화물 등 고부가가치 물동량을 유치하는 시설이 많이 입주해야 한다"고 했다.김종식 회장은 "인천항 하역업체들도 이제 새 시대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올해 1월 해수부가 '인천 내항 재개발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면서 항만 구역 개방에 대한 시민 요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진행될 남북 경제협력에도 대비해야 한다. 인천항은 과거 남북 경협이 진행될 때 북한과의 교역량이 가장 많은 항만이었다.김종식 회장은 "인천항 하역업체들도 인천의 구성원으로서 지역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인천항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시민들도 응원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종식 회장은?▲ 1960년 경북 경주 출생▲ 1978년 경주고등학교 졸업, 1982년 한국해양대학교 항해과 졸업▲ 1982~2001년 조양상선 근무▲ 2001년 (주)동부익스프레스 입사▲ 2003~2005년 (주)동부익스프레스 전남지사 지사장▲ 2005~2007년 (주)동부익스프레스 컨테이너터미널 영업 팀장▲ 2007~2011년 (주)동부익스프레스 부산지사 지사장▲ 2010~2018년 (주)동부익스프레스 인천지사장▲ 2015~2018년 동부인천항만(주) 대표이사▲ 2016년 8월~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 2018년 7월~ 인천내항부두운영(주) 초대 대표이사최근 연임에 성공한 김종식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이 "인천항 하역업체들도 인천의 구성원으로서 지역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인천항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시민들도 응원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2019-05-14 김주엽

[인터뷰… 공감]태영호 前 영국주재 북한공사

남북, 정치·사회·경제등 심각한 격차,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이 한국 이해하기 힘들 것北 해외 노동자 10만명 달해… 거짓선동으로 주민 자극한다면 신뢰 무너지는 것 한순간제재 심할수록 북한 장마당 활성화… 美, 北 핵기술 이란 이전등 막고자 협상장 나올 것그렇게 애절 할 수 있을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동포를 생각하는 그의 절규가 녹아 있었다. 태영호(57)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의 최근 행적을 두고 나오는 말이다.태 전 공사는 북송 위기에 처한 10살 여자 어린이를 포함한 탈북자 7명이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하자 "여자 어린이를 살려달라. 몸부림이라도 쳐보자"며 중국 당국에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인 '태영호의 남북동행포럼'에서 북송 위기에 처한 상황을 전하면서 이렇게 안타까워 했다.그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약 2년 전 탈북해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아이의 부모가 딸을 포함한 탈북자 7명의 북송 위기 소식이 전해진 직후 자신을 찾아와 딸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고 말했다. 태 전 공사는 "만일 내 아들이 이 순간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 위기에 처해 있다면 나는 미쳤을 것이다. 10살짜리 딸을 데리고 있는 이 나라의 모든 어머니들이여! 딸을 제발 부모의 품으로 보내달라고 함께 (중국 공안을 향해) 몸부림이라도 쳐보자. 기적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느냐"고 호소했다그는 그들의 목소리가 밤새 귀에 쟁쟁히 울려와 잠을 잘 수가 없다고도 말했다."2016년 여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 태영호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블로그에는 "제가 한국에 와서 보니 북한에 대해 많은 분야가 잘못 알려져 있고 저 역시 한국에 대해서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됐다"고 첫 구절을 적었다.이어 "저는 우리의 통일은 남북한의 현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블로그는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북과 남 사이의 소통의 가교가 되고 싶습니다"며 "저는 이 블로그에서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 하려고 하며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의 기탄 없는 의견을 통해 즉시 수정해 나가겠습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우리 모두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함께 가자는 의미에서 저의 블로그 이름도 남북동행포럼, We go together Forum이라고 지었습니다. 우리 모두 통일을 향해 함께 갑시다 !"고 전했다. 그의 현재 남한의 생활과 북한 주민을 위하는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태 전 공사는 최근 활발한 강연회를 통해 북한의 실상과 현실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북핵 핵 폐기 전략 등에 대한 실상도 공개하면서 국내외 시민단체의 활발한 활동과 관심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며 남한 국민들의 행동을 독려하고 있다.지난 4월18일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경인일보를 찾아 '미래사회포럼' 제7기 입학식에서 강연을 했다. '북한의 핵 외교와 하노이 정상회담 후 상황전개와 향후 우리의 대응'이란 주제로 한 것인데 잠시 그를 만나 깊은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첫 느낌은태 전 공사는 한국에 대한 첫 느낌에 대해 "북한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한국이 너무 발전한 것 같다"며 소감을 말했다. 그는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뤄내 북한과 정치시스템, 사회문화, 경제적 수준에서 매우 심하게 격차가 벌어져 있다"며 "다시 말하자면 남한 사람들에 비해 아주 평범한 북한사람들은 통일이 된다면 한국의 여러 방면들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 까 싶다"고 전망했다.그는 또 남북한 간의 다양한 격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우선 북한이 한국처럼 주민들을 국가 설립에 최우선 문제로 생각한다면 모든 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한국과 북한이 이제는 서로 너무나 다른 정치 구조적인 문제로 상당히 힘들고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태 전 공사는 "한국은 민주주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민 복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한다면 정권 자체 존립이 힘들게 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정권 존립과 주민 복리는 별개의 문제다"고 진단했다.남한에서의 언어적인 문제도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북한에서는 쓰지 않는 단어라든가 언어 소통은 되는데 분단기간이 길다 보니 이해가 잘 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토로했다. 태 전 공사는 "한국에서 TV를 보면 가장 먼저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 주요 뉴스다. 매일 같이 새로운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정치권내 좌우 갈등도 뉴스로 나오는데 이런 측면도 북한에서 처음 내려 왔을 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며 길바닥에 자유롭고 편안하게 돌아다니는 모습 조차도 놀라웠다고 전했다.남한에서는 일반적이고 개성과 권리를 많이 주장하는 것과 성소수자, 환경문제 등도 북한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뉴스지만 한국에서 크게 보도되는 것도 신기하다고도 했다.# 미국과 30년 핵게임 패한 적 없던 북한, 처음 실패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 회담을 통해 예견치 않게 북한이 뒤통수를 맞았다고 태 전 공사는 말했다. 지난 30년간 6자회담을 비롯한 미국과의 핵 게임에서 단 한 번도 패한적이 없던 북한이 처음으로 실패 했다는 것이다. 회담 당시 북한은 시종 일관 대북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구했고, 미국은 이것이야 말로 실질적으로 효과를 보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는 것이다.태 전공사는 대북 제재 효과를 직접 실감한 미 트럼프 대통령이 앞으로도 제재효과를 더 볼 것으로도 내다봤다. 태 전공사는 "당시 북한의 내부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3월에는 대단한 합의를 마련할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협상 결렬 이후 한 주 동안 어떻게 할 지 고민하던 북한은 태 전 공사의 표현대로 '이실직고'를 했다"며 "북한은 지금은 주민들에게 '거짓말' 자체가 불가능 하다"고 했다.그 이유로 북한의 해외 노동자수가 거의 10만에 달하는 것을 꼽았다. 그들은 해외에서 매일 스마트폰을 통해 한국 뉴스를 접하게 되는데 거짓 선동으로 북한 주민들을 자극 한다면 신뢰가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라고 태 전공사는 판단했다.# 더욱 활발해진 북한 장마당. 한국상품 밀수해 공공연히 팔려태 전 공사에 따르면 얼마전 까지만 해도 북한 장마당 바닥에서 몰래 유통되던 한국산 물건들이 지금은 버젓이 팔리고 있다고 한다. 지방 행정단위 공안과 규찰대 모두 동원 돼 통제를 하고 있지만 이미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이들 단속 인원들은 장사꾼을 끼고 돈벌이를 하고 있고 미국의 대북 제재가 심할 수 록 장마당이 더욱 활성화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밀수는 필수이며 이 과정은 더 심해지고 있다. 태 전공사는 현재 북한은 자본주의 경제를 위한 시장경제 뿌리내리는 과정이라고 진단했다. 현재까지 군수산업에 있던 인원들도 민수쪽으로도 돌아있다고도 전했다. 북한에서 군수 작업을 총괄했던 간부를 민수공업 담당 간부로 앉히고 있는 상황이라고도 했다. 배급 등이 잘 이뤄졌던 군수공장에서 더 이상 업을 할 수 없다는 판단에 민수공업으로 돌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태 전 공사는 말했다.# 한반도 비핵화에 별 관심 없는 미국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태 전 공사는 밝혔다. 핵으로 미국을 움직여서 한국을 움직이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미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도 잘라 말했다. 북한의 핵 무기가 미국을 위협하지 않고 현 기술수준에서 진전이 안된다면 미국은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유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는 중동에 더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이 태 전 공사의 판단이다. 특히, 북한이 핵기술을 이란과 같은 나라에 넘겨주게 된다면 미국에게는 더 큰 위협으로 미국은 이걸 막고자 협상장에 나올 것으로 전망했다. 태 전 공사는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대해 입장이 분명하게 엇갈려 있다. 북한은 단계적 합의인 스몰딜을, 미국은 일괄타결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이행은 단계적으로 하지만 포괄적 합의를 내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태 전 공사는 "하노이 회담시 북한은 영변 핵 시설을 가지고 반대 급부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누구도 말을 안 한 것이 있는데 바로 영변 외의 핵 시설"이라며 "바로 이것을 가지고 앞으로 북한은 협상 카드로 나올 것이다. 금강산과 개성공업지구 재개와 각종 제재 해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고 예측했다.글/조영상·배재흥기자 donald@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태영호 前 공사는?1962년 북한 평양시 출생1974년 평양외국어학원(중등교육) 영어과 입학1976년 중국 유학1980년 베이징외국어대학 부속중학교 영어과 졸업1984년 평양국제관계대학 졸업1988년 베이징외국어대학 영문학부 졸업1988년 10월~1996년 북한 외무성 유럽국 지도원1996~1998년 덴마크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1998~2000년 스웨덴 주재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2000~2004년 외무성 유럽국 영국 및 북유럽 담당과 과장2004~2008년 영국주재북한대사관 참사2008~2013년 외무성 유럽국 부국장2013년 4월~2016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2016년 여름 대한민국으로 망명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북한은 핵으로 미국을 움직여서 한국을 움직이려 한다" 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2019-05-07 조영상·배재흥

[인터뷰… 공감]14년간 서해 5도 누빈 원지영 사진작가

옹진군청 공무원으로 해마다 20회 넘게 출장… 사진전도 두 번 열어박사 학위 취득 과정서 인연 닿았는데, 어느덧 1만3천장 발자취 쌓여2010년 연평도 포격때 가장 먼저 현장 도착 '사진기자협회 특별상'도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 후 사진도 변화… 작품 소재 더 많아지길 소망인천 옹진군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는 이른바 '서해 5도'라고 불린다. 이들 섬은 위도상으로 한반도의 허리쯤에 있지만, 1953년 정전협정 직후 설정한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을 기준으로 하면 남한의 서해 최북단에 있다. 두 차례의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을 겪으며 국민들에게는 '한반도의 화약고'로 각인됐다.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서해 5도에서 무력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하면서 평화의 기운이 감도는 듯도 싶지만, 섬은 여전히 각종 군사시설에 둘러싸여 수천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서해 5도는 '국가지질공원' 지정이 추진될 정도로 독특한 자연풍경을 갖고 있는 동시에 군사적 긴장이 공존한다. 수많은 사진작가가 매료될 만한 피사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진가로서 서해 5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백령도는 4시간 가까이 여객선을 타야 하고, 적은 배편 때문에 무조건 1박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날씨 탓에 여객선 결항이 잦아 섬에 들어가거나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같은 접경지역이지만, 서해 5도보다 접근성이 좋은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를 소재로 한 작품사진이 더 많은 이유라는 게 사진작가들 설명이다.원지영(46) 사진작가는 서해 5도를 가장 많이 찾아 작품을 남기고 있는 작가로 꼽힌다. 2005년부터 인천 옹진군청 미래협력과 공보팀에 근무하면서 사진 촬영 업무를 맡아온 직업적 특성이 서해 5도 전문작가로 만들었다. 그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도로만 매년 20차례 이상씩 출장을 다니고 있다. 14년 동안 드나든 인천 섬의 모습이 이제는 눈 감고도 훤하다고 한다. 원지영 작가는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NLLⅡ' 사진전을 가졌다. 이번 사진전에서는 2013년부터 최근까지 서해 5도에서 찍은 사진 31점을 전시했다. 원 작가의 서해 5도 사진전은 2013년 2월 부평아트센터에서 진행한 'NLL'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원지영 작가는 "2013년부터 작품을 목적으로 촬영한 사진 3천장 중 서해 5도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 사진을 골랐다"며 "공무원으로서 공적인 사진을 촬영하고 있지만, 작가로서도 수시로 섬에 출장을 가는 이점을 살려 예술적인 시각으로 서해 5도를 조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고 전시회를 개최한 취지를 설명했다.원 작가는 노을이 질 무렵 서해 5도의 풍경을 담은 작품을 많이 선보였다. 작품명 'NLL#5425'는 백령도 해변으로 해가 떨어지면서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고, 기암괴석은 그림자처럼 검게 형태만 남았다. 그런데 여느 해변의 노을 지는 모습과 다른 점이 있다. 용의 이빨 같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군사 방호시설 '용치'(龍齒)가 금빛 물결을 뚫고 솟아 있고, 해병대 장병들이 무장을 한 채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사막처럼 드넓게 펼쳐진 대청도 해안사구를 담은 작품명 'NLL#6951'에서도 사진 끄트머리에도 '벙커'가 조그맣게 보인다. 카메라는 아름다운 풍경을 촘촘한 철조망을 거쳐서 봐야 하는 서해 5도의 현실(작품명 NLL#5357)을 숨기지 않았다. 원 작가는 "천혜의 풍경에 군사시설이나 군인이 끼지 않을 수 없는 공간이 서해 5도"라며 "평화로운 자연과 남북 분단의 긴장감이 공존하는 아이러니가 지난 전시회들의 공통된 주제"라고 말했다.원 작가는 'NLL#'에 번호를 매기는 방식으로 작품명을 정했다. 언제 어디서 사진을 찍었는지 작품의 이름만 가지곤 알 수 없다. 보안상 이유로 군부대 측 요청이 있어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찍히지 말아야 할 시설'이 찍힌 사진은 전시회와 도록에 올리지 못하는 제약도 있었다. 민간인이 살지 않고 군인만 주둔해 있는 사실상 '무인도'인 우도 사진은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없었다.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출장 중 업무시간 외에 별도로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새벽이나 저녁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원 작가는 "오후 4시쯤 연평도 조기역사관 인근에 있는 땅굴을 통해 해변으로 내려가 1시간이 조금 넘게 촬영을 했는데 그새 철조망 입구가 닫혀 꼼짝없이 갇힌 적이 있다"며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지역이라 간신히 면사무소에 연락했고, 군부대 측이 문을 열어줘 빠져나왔다"고 했다.원지영 작가는 공무원 신분으로 한국사진기자협회가 주최한 2011년 한국보도사진전 '특별상'을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 때 현장에 가장 먼저 들어간 사진가가 바로 원지영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포격 다음날 새벽 송영길 인천시장 등과 연평도로 들어갔다. 국내외 언론에는 포격사건 이틀이 지나서야 연평도 현지가 공개됐다. 그전까지 국내외 언론은 연평도 현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원 작가의 카메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원 작가는 "연평도 포격 이후 언제 갑자기 섬에 들어갈지 몰라서 옷가지, 세면도구 등을 담은 장기 출장용 가방을 항상 군청 사무실에 두고 다닐 정도로 긴장상태였다"며 "4·27 남북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서해 5도 현지 분위기도 긴장이 많이 누그러들었고, 나도 마음이 많이 놓였다"고 말했다.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원지영 작가의 사진도 조금은 바뀌었다. 2013년 전시회 때 북쪽을 향해 열려있던 백령도의 한 포대 속 포문은 올해 전시회에 출품한 사진 속에선 그물망으로 폐쇄돼 있었다. 이번 전시회 출품작은 지난해 가을에 촬영했다. 남북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서해 5도에서 작품 소재가 더욱 많아질 것 같다는 게 원 작가의 전망이자 바람이다.원지영 작가가 옹진군청에 근무하기 전까지는 인천 섬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그는 2003년부터 2년여간 경기도 수원에서 지역신문 사진기자로 일했다. 옹진군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2년 동안은 작품활동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원 작가는 "2007년께 사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진학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DMZ를 다루는 작가는 많지만, 서해 5도를 촬영하는 작가는 별로 없으니 업무의 특수성을 살려 서해 5도에서 작품활동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며 "그때부터 찍다 보니 어느덧 1만3천장에 달하는 서해 5도 사진이 쌓였다"고 했다.다음 작품 구상에 대해선 "다른 사람이 베낄 것 같다"며 말을 아꼈지만, 조금의 힌트를 줬다. 원지영 작가는 "서해 5도에는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 직업을 대대로 이어오는 주민들이 많다"며 "앞으로는 서해 5도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전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원 작가는 "피사체를 보면 항상 이게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하는 마음가짐으로 촬영한다"며 "제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서해 5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실제로 많이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원지영 사진작가는?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10살 때부터 인천에서 살기 시작해 인천신흥초등학교, 인천남중학교, 인항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진이 취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창시절 인천의 한 스튜디오 강의를 통해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1998년 백제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하고,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거쳐 인천대학교 대학원에서 뉴미디어전공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인천·경기 지역신문 사진기자로 활동하다가 2005년부터 현재까지 옹진군청에 근무하고 있다. 2011년 제47회 한국보도사진전 특별상을 수상했고, 2013년과 2019년에 각각 'NLL'과 'NLLⅡ'라는 이름으로 사진전을 열었다.14년간 서해 5도를 촬영한 원지영 사진작가가 전시회를 연 인천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G타워 갤러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9-04-30 박경호

[인터뷰… 공감]경제적 재기 돕는 이계문 서민금융진흥원장 겸 신용회복위원장

■진흥원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신용등급 6등급 이하등 1470만명 추산저리금융상품 공급하고 상담 서비스도■효율적 지원을 위한 노력은?글 쓰기 서툰 고객 위해 '종이없는 창구'디지털 시스템 구축 통해 상담시간 늘려"불이 나면 '119'에 전화하듯이 재무적으로 어려울 때는 '1397'을 눌러주세요."이계문(58) 제2대 서민금융진흥원장 겸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은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제때 치료를 받아야 낫듯이 재무적 어려움이 있을 때 빨리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를 찾아 상담받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서민금융진흥원은 2016년 3월 '서민의 금융생활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 따라 서민금융 총괄기구로 출범하고 채무에 어려움을 겪는 서민, 취약계층의 채무 부담 완화를 위해 전국에 47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햇살론, 바꿔드림론, 미소금융 등 서민대출상품을 취급, 금융분야 사회안전망 역할을 맡고 있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이 원장은 '소통하는 서민금융 전문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는 취임 후 6개월 동안 전국에 설치된 47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중 15곳을 방문했으며 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 콜센터 소속 모든 직원들과 유관 단체 관계자들과의 간담회는 물론이고 전문적인 업무처리 능력 향상을 위한 연수과정을 실시함으로써 수요자 중심의 서민금융 지원기관으로 발전을 이끌고 있다. # 서민금융진흥원의 역할과 지원 현황서민금융진흥원은 제도권 금융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저신용·저소득 서민들을 위해 저리의 정책서민금융상품을 공급하고 종합상담·맞춤대출·컨설팅·금융교육 등 자활·상담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자립과 자활을 높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와 함께 신용회복위원회는 개인워크아웃, 프리워크아웃 등 채무조정 지원제도를 통해 채무를 상환 능력에 맞게 조정하고 분할해 상환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과중한 채무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신용회복 및 경제적 재기를 돕고 있다.현재 서민금융 지원대상인 신용등급 6등급 이하 또는 연소득 3천500만원 이하의 저신용·저소득층은 지난해 말 기준 1천47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하지만 지난 한해 연간 정책자금을 통한 서민금융 지원실적은 33만1천명에 3조5천억원, 은행권 자체자금으로 공급하는 새희망홀씨 실적(25만3천명, 3조7천원)을 합산하더라도 58만4천명에 7조2천억원 수준에 불과하다.특히 263만명에 이르는 신용등급 8등급 이하자는 금융권 연체율이 72%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부실 우려가 높아 저축은행과 같은 2금융권에서조차 대출기피 대상으로 낙인찍혀 있다.최근에는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로 인해 안정적 소득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불법 대출 등에 따른 피해에 노출돼 있어 금융안전망 운영이 더욱 시급하다.이와 관련 이 원장은 "시중 은행권에서 대출이 배제되는 저신용 취약계층은 그대로 방치 시 고금리 대출 또는 불법사금융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각별한 관심과 함께 적절한 처방이 이뤄져야 한다"며 "고액자산가들이 자산관리를 받는 것처럼 서민들도 재무관리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홍보 활동도 중요할 것 같은데제도 몰라서 도움 받지 못하는 일 없게지자체등 손잡고 '금융교육' 강화할 것■앞으로 계획과 지향점은?안정적 운영 위해 재정지원 확대 절실서민들이 믿고 의지하도록 동행 할 것#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서민금융 추진이 원장은 "서민금융진흥원의 발전방향, 개선할 점은 수요자 중심에서 바라보면 답이 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 상담을 해보니 서민금융지원제도와 센터를 몰라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 안타까움이 매우 컸다"며 "고금리 대출로 몰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막막한 현실을 접해보니 서민금융진흥원의 역할에 대해 더욱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해 200만 명 이상이 20%대 이상 고금리 대출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특히 점포가 없고 소득증빙이 어려운 노점상이나 푸드트럭 등 영세 자영업자들은 일수대출 등 불법사금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원장은 통합지원센터에서 직접 상담한 결과를 토대로 수요자들이 쉽고 빠르게 지원받을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고객들의 실질적인 상담 시간을 늘리기 위해 디지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글을 읽고 쓰는 데 서툰 고객도 있기 때문에 기재항목을 고객이 말하면 센터직원이 전산화된 시스템에 입력하는 '종이없는 창구'를 운영하고 있다. 정부와 협의를 통해 안정적 재원확보와 신용회복 지원제도 개선 등 서민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을 마련, 이를 올해 역점사업으로 추진중이다. 특히 '서민금융PB' 구축은 지원대상자별 맞춤형 지원과 신용상담, 일자리 컨설팅 등 사후관리까지 받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금융 지식이 없어서, 제도를 몰라서 도움을 못 받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인 지원활동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사전 금융교육을 강화해 서민들이 재무적 어려움에 이르지 않도록 예방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라면서 "주기적이고 전문적인 컨설팅 등을 통해 사후관리도 강화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이를 위해 사전 금융교육은 지자체, 시민단체와 협력하고 대학교 교양과목 금융강좌 개설, 평생교육진흥원 학점은행 과목 인정 추진 등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서민, 취약계층이 통합지원센터에서 지원을 받는 만큼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직무 연수과정을 신설해 전문상담에 주력하고 있다.# 서민금융진흥원의 지향점, '동행(同行)'서민금융지원 대상자는 1천5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연간 공급되는 정책자금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진흥원의 재원구조는 한시적·불안정적으로, 현재의 정책서민금융 지원 수준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복권기금 출연은 2020년 종료되고 미소금융 기부금 추가유입이나 금융회사들의 출연금도 감소되고 있다.결국 사회적 책임분담 측면에서 현재의 정책서민금융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나아가 도움이 절실한 취약계층 지원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재정지원 확대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 이 원장은 "정부와 금융권, 시민단체 등 외부에 정책금융의 필요성을 직접 찾아가며 적극 알리면서 협조를 당부하는 동시에 업무 협력·연계를 통한 지원네트워크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는 "서민금융 콜센터 번호인 '1397'은 전화번호 키패드 구석에 있는 번호로 서민금융을 구석구석까지 다 알도록 한다는 의미"라며 "상담사들이 개개인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종합상담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 원장은 "앞으로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는 취약계층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고민해 실행해나갈 것이고 이를 통해 어려울 때 든든하게 감싸주는 울타리이자 동반자로서 서민들과 동행하고자 한다"며 "서민금융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이 편리함은 물론 언제나 믿고 의지하며 따스한 온기를 느끼는 것, 그것이 서민금융지원의 지향점이다"고 강조했다.글/이성철기자 lee@kyeongin.com■이계문 원장은?▲ 1960년 경기 가평 출생 ▲ 1984년 동국대학교 산업공학과 졸업▲ 1994년 서울대학교 정책학 석사▲ 2005년 아시아공과대학 경영학 석사▲ 1990년 행정고시 합격(34회) ▲ 1991년 경제기획원 예산실 사무관 ▲ 2001년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 기획재정담당관실 서기관▲ 2006년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 서비스경제과장▲ 2011년 기획재정부 기획재정담당관▲ 2013년 주미대사관 공사참사관▲ 2016년 기획재정부 기획조정실 정책기획관▲ 2017년 기획재정부 대변인▲ 2018년 10월 서민금융진흥원 원장이계문 원장은 "재무적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을 든든하게 감싸주는 울타리이자 동반자가 될 것"이라며 "서민금융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이 언제나 믿고 의지하며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서민금융진흥원 제공

2019-04-23 이성철

[인터뷰… 공감]'대공분실 보안관리소장' 맡은 고문피해자 유동우씨

국가폭력의 상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배우는 학습장으로 바뀌고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운영할 예정인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 경비초소에는 특별한 사람이 일하고 있다.군사정권 때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고문 피해자 유동우(70) 씨. 그가 38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민주인권기념관)의 보안관리소장으로 돌아왔다.1970년대 인천 부평수출산업단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그는 노동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비참한 공장 노동자의 삶을 고발하고,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린 이 책은 동시대를 살았던 민주화운동 활동가의 필독서이기도 했다.유동우씨는 전두환 정권의 대표 공안조작사건인 '학림사건'에 휘말려 1981년 8월 2일부터 37일 동안 이곳에 감금돼 고문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데 선봉에 섰지만, 정작 본인은 고문 트라우마와 환청에 시달리며 민주화의 봄을 한껏 누리지 못했다.그런 그가 30여 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돌아온 것은 대단한 결심이었다. 고문 피해자가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기념관 측의 제안을 수락, 지난해 12월부터 보안관리소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시민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있다.남영동을 잊기 위해 민주화 운동 경력마저 지우려 했던 그의 삶을 되찾아 준 게 남영동이라니 대공분실은 그에게 아이러니한 존재다.유동우씨는 "극한의 인권유린을 당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주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인권의 문지기가 되겠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4-16 김민재

[인터뷰… 공감]'민주인권기념관' 탈바꿈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서 보안관리소장 된 유동우씨

#민노련 결성 주도등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는데'우리는 가난해서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 말에 충격노조 결성 후 해고당해… 전국 누비며 재야노동운동#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떤 곳이었나예비군 훈련 중 연행, 신체검사 후 속옷 한 장 걸쳐5층 조사실서 무차별 폭행·협박… 기절땐 물끼얹어38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경찰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 때만 해도 오늘 같은 날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70~80년대 인천에서 민주화 운동에 매진한 유동우(70)씨는 매일 아침 남영동 대공분실로 출근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국가폭력의 상징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의 손을 떠나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재탄생을 앞둔 가운데 유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을 지키는 보안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조작사건에 휘말려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법 구금돼 모진 고문을 당했던 그가 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을 되새기는 기념관의 '문지기'이자 역사의 산증인으로 시민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유동우 씨는 "우리 역사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람되게 일하고 있다"며 "백범 김구 선생도 일제에 짓밟혔던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정부의 문지기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지난 12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만난 유씨는 1981년 8월 2일 오전 이곳에 끌려온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33살의 그는 예비군훈련에 소집돼 안양의 한 부대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찾아와 군복 명찰을 확인하더니 양옆으로 팔짱을 끼고 '나가서 얘기 좀 하자'며 데려갔다. 그들은 부대 울타리를 벗어나자마자 경찰이 권총을 옆구리에 들이대며 대기 중인 승용차에 그를 태우고는 눈에 검은 천을 씌웠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유씨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장면은 벽과 바닥이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돼 있는 4평 남짓의 조사실, 그리고 4명의 수사관이었다."그때는 남영동에 대공분실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옷을 모두 벗고 굴욕적인 신체검사를 마친 뒤 속옷 한 장을 겨우 다시 걸쳤을 때 첫 질문과 함께 주먹이 날라왔죠. '너, 공산주의자지?'"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그는 1973년 인천 부평 수출공단의 일본인 투자기업 삼원섬유에 입사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일을 하느라 교회도 못 가고, 가난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어느 여공의 말에 충격을 받아 노동 관련법을 독학하고 노조 결성을 이끌어냈다. 1975년 사측의 노조 파괴 공작으로 부당 해고를 당한 뒤로는 전국을 다니며 재야 노동운동을 벌였다. 이때 유씨가 월간지 '대화'에 연재했다가 단행본으로 발간한 노동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1970년대 공장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문학작품으로 문단과 노동계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유신체제 붕괴 이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더욱 불타오르던 1980년 5월, 유씨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민노련) 결성을 주도해 노동자를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작업을 준비했다. 한 편에서는 대학생 중심의 전국민주학생연맹(민학련)이 결성돼 '노-학' 연대가 만들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여름 두 조직의 연대를 "공산주의·사회주의로 의식화된 좌경 분자들이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 한 사건"으로 조작하고 관련자를 영장도 없이 체포해 남영동으로 끌고 갔다. 이른바 '학림(學林)사건'이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답했더니 '그럼 너 사회주의자구나?'라고 묻는 거에요. 뜸을 들이다 다시 어떤 '주의자'도 아니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무차별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데 숨이 콱 막혀와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유씨가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다. 기절한 그를 깨우려고 물을 뿌린 거였다. 온갖 매질과 고문, 협박이 이어졌다. 경찰병원에 3번이나 실려갔다.유씨는 자신이 고문을 받았던 5층 조사실로 안내했다. 우리나라 대표 건축가 김수근이 1976년 만든 이 건물은 원래 5층 건물이었는데 전두환 정부가 7층으로 증축했다. 뒷문으로 들어가면 5층으로만 연결된 나선형의 철제 계단이 있다. 눈을 가린 불법 구금자들이 몇 층으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방향감각을 잃게 하기 위해서다. 복도 양 옆에 있는 15개의 조사실은 끌려온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할 수 없도록 사선으로 배치했다.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고정돼 있다. 매를 맞다가 뒤로 넘어가거나 자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 건물은 철저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그때 경찰이 이곳을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죠. 죽여서 휴전선 근처에 갖다버리고 월북자를 총으로 쐈다고 하면 끝이라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두려웠지만 거짓 진술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4번의 진술서 작성 끝에 그에게 정식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계엄법 위반 혐의(이적 표현물 소지, 집회·시위 금지 위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함께 재판받은 이가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민병두·민주평화당 최경환 의원 등이다. 유씨는 구속 수감자 24명 중 유일하게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됐다. 불법 구금 당시부터 결핵을 앓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재판을 받는 법정에서 소변을 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다.학림사건은 2009년 6월 15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장기간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얻어낸 허위진술로 조작한 사건으로 규정했고, 이후 재심에서 유씨를 비롯한 24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유 씨가 37일 동안 불법 구금됐다고 판단했다. 아쉽게도 그의 수사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유동우씨는 출소 후 생계를 위해 수도권 일대 공장을 전전했지만 늘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녔고, 노조 활동 이력으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취직 자체도 어려웠다. 그러다 1984년 노동 운동을 하다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한국노동자복지협회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에 앞장섰다.그는 이후 한국기독교노동자총연맹을 조직해 대중운동을 표방하며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이끌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고, 6·29 민주화 선언 이후에는 김영삼·김대중 당시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했다.꿈에 그리던 민주화 시대가 찾아왔지만, 그는 종적을 감췄다. 대중 노동운동을 강조했던 그는 소위 언더그라운드의 전위조직 혁명가를 자처하는 급진 세력과 부딪혔고 단일화 실패 이후 절망감을 느껴 운동권을 떠났다."양김 단일화에 실패하고 노태우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순간 군사 정권이 연장됐다는 생각에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가 갑자기 심해졌어요. 민주화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버텨왔는데 후보 단일화를 둘러싸고 민주화 세력이 분열되는 모습에 싫증이 났죠."#석방 후 민주화 시대 찾아왔지만 힘들어했는데고문 후유증 악화… 민주화 세력 분열 보고 염증느껴20여년 악몽같은 세월 보내 던 중 '관리자' 제안 받아#다시 찾은 건물,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고문 받은 방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먹먹해지지만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방문객들 맞이 "자랑스럽다"이때부터 2010년까지 20여 년은 그에게 악몽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방안에 홀로 있으면 감옥에 갇힌 듯한 착각이 들어 툭하면 집을 나가 노숙을 했다. 부인과 딸에 이끌려 집으로 와도 가출을 반복했다. 1990년대 인천 연수구 아파트 단지 공사 현장을 다니며 '노가다'도 했고, 송도유원지 러브호텔 청소부로도 일했다. 구청 노상 주차관리도 했다."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할 정도였어요.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맥을 철저히 차단하고 끊어버렸죠. 혹시 나타나도 독한 마음으로 모른 채 했어요."2010년 들어 학림사건이 무죄로 확정됐고, 그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국가폭력 피해자를 치유하는 상담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 정신과 치료도 받으며 그동안 잃어버렸던 세월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설 민주인권기념관의 문지기 역할을 제안받았다. 앞서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경찰의 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운영하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지난해 12월부터 매일 아침 기념관의 문을 열고 보안상태를 확인하고, 때로는 방문객을 위한 해설사 역할을 하고 있다.유씨는 38년 전 한 달 이상 갇혀 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김근태 전 의원이 민청련 사건으로 남영동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1985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망언을 남긴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1987년)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 그는 뒤늦게라도 인권유린 상징에서 민주·인권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게 될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지기가 된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백범일지에 나온 '나의 소원'을 보면 선생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된다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며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보안관리소장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했는데 백범의 글이 내 마음을 움직였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인권유린을 당했던 이곳에서 내가 문지기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 아니겠습니까."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에서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매진한 유동우씨가 지난 12일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옛 대공분실)에서 "백범일지에 나온 '나의 소원'을 보면 선생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된다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며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보안관리소장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했는데 백범의 글이 내 마음을 움직였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인권유린을 당했던 이곳에서 내가 문지기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 아니겠습니까"라고 밝히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16 김민재

[인터뷰… 공감]道·전국 지역신용보증재단 '첫 직원 출신' 이민우 경기신보 이사장

직업군인 꿈꾸던 체육학도, 대학 졸업 전 경안상호신용금고 입사10년차 사표내고 개인 사업… 녹록지 않자 지금의 경기신보 '인연'무슨 기관인지 설명했었던 시절, 전단지 붙이고 상인회 찾아다녀직원 출신 수장 매너리즘 빠질 수 있는 우려 '새로움' 좇으며 불식보증료 면제 '다드림론' 등 준비… 中企·소상공인들 곁에 있을 것'샐러리맨의 신화'. 지난해 11월 이민우 당시 경기신용보증재단(이하 경기신보) 영업부문 상근이사가 이사장 후보로 낙점됐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됐던 말이다. 다만 신화는 저절로 쓰이지 않았다. 늘 새로운 길을 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할 때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신생 기관에 입사했을 때도, 갖은 풍파 속 임·직원이 18명에 불과했던 작은 조합을 경기도 최대 산하기관으로 성장시키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도 그랬다. 경기도·전국 지역신용보증재단 첫 직원 출신 이사장이 그인 이유일 터다.9일, 그가 이사장에 취임한 지 꼭 100일이 됐다. 100일간의 걸음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가보지 않은 길을 열었고, 맨 앞에는 이 이사장이 서 있었다. 지난 4일 이 이사장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걸어온 길을 되짚을 때보다 닦지 않은 길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더 힘이 실려있었다.# 문견이정직업군인을 꿈꾸던 체육학도였다. 금융기관에 발을 들인 것은 차라리 우연에 가까웠다.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첫 직장인 경안상호신용금고에 입사했다. 낮에는 상호신용금고 대리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20대 후반을 보냈다. 30대 중반, 가장 왕성하게 직장 생활을 할 10년차에 문득 사표를 냈다. 정치든, 사업이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작은 개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살면 안 되냐"는 가족들의 애원이 들릴 무렵, 지인이 이력서를 함께 내보자고 했다. 당시엔 '조합'이었던 지금의 경기신보였다. 전국에서 제일 먼저 생긴 지역신보인 만큼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는 기업인·상공인은 손에 꼽았다. 이사장, 감사, 팀장, 대리를 합해도 18명밖에 되지 않았던 작은 기관의 불이 365일 꺼지지 못했던 까닭이기도 했다."맨 처음 생겼을 때는 뭐하는 기관인지 다들 잘 모르니까, 전단지도 붙이고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인회를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이런 기관이 생겼고,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야 했다. 법조차 제대로 정비되지 않는 등 아무 것도 없으니 발로 뛸 수밖에 없었던 때"라고 경기신보 창립 당시의 모습을 언급한 그는 "경기북부 전체를 담당했었는데 '지점'이 없을 때라 차 한 대로 그 넓은 북부를 다녀야 했다. 펜 하나조차 사기 힘들었던 시기라 출장비도 1만원 정도였는데 톨게이트 비용으로만 6천원을 냈었다. 한 번은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파주까지 갔다가 업체에서 보증서류를 반송시켜서 뙤약볕 아래 걷고 또 걸은 기억도 있다. 초창기 멤버들이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고 애틋함을 드러냈다.이후 경기신보의 첫 지점 격인 의정부사무소를 입사 1년 만에 도맡았고, 5년 만에 서부지점(현 부천지점)을 총괄하게 됐다. 아무 것도 없는 땅에 처음 길을 낼 때의 막막함은 그 후로도 숱하게 되풀이됐지만, 번번이 현장에서 답을 찾아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 "대리부터 이사장이 된 지금까지,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문견이정(聞見而定·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들은 이후 싸울 방책을 정한다)'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고 회고했다.# 다시, 새 길직원 출신 수장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조직을 잘 안다는 점이다. 빠르게 조직을 장악하며 수장 교체에 따른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반면, 익숙한 방식만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을 터. 적어도 100일간의 행보에서 이 이사장은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을 좇기 위해 애썼다.현재 준비 중인 '다드림(多-dream)론'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약자, 저신용등급 소상공인 등에 보증료를 100% 면제해주는 상품으로, 취임 직후부터 출시를 적극 검토해 왔던 것이다. 보증기관이 보증료를 받지 않는, 전국 보증기관 최초의 시도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일반 금융기관의 문은 두드릴 수 없는 금융 소외계층들이 불법 대부업에 손을 대 더욱 수렁에 빠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이재명 도지사의 생각과도 맞닿아있는 행보이기도 하다. 이 이사장은 "많은 돈은 아니더라도 당장 자금이 필요한데 보증지원을 받기가 어렵고, 보증을 받더라도 보증료와 대출 금리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저신용자, 사회적 약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더 큰 어려움에 빠지거나 경제 활동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진 이유를 설명했다. '재도전 희망특례 보증'을 통해 사업에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자금 50억 원 규모를 지원하고, 금융 취약계층들을 위한 서민금융복지지원센터를 기존 7개에서 12개로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또 중소기업·소상공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안성·하남에 영업점을 신설하는 한편, 중부지역본부를 개설할 예정이다. 특례시가 될 수원·고양·용인 등 100만 명 이상 도시에는 지점을 1개씩 추가 조성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그야말로 광폭 행보다. 이 이사장은 "이사장이자 선배로서, 후배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결국 경기신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재단을 찾아주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라며 "경기신보가 짧은 기간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전국 최대 광역단체인 경기도에 많은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이 있고, 이들이 우리를 필요로 해서다. 그런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기관을 만드는 게 제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일 것"이라고 설명했다.인터뷰 말미 명패에 적힌 이름의 한자가 눈에 띄어 물었다. 백성 민(民), 비 우(雨).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라는 뜻에서 지어주셨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뭄 끝 단 비처럼, 어려움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경기신보 본연의 역할과 절묘하게 맞닿아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금융인으로서 33년, 경기신보에서 23년. 메마른 땅을 적셔 처음 길을 내왔던 그가 앞으로의 100일, 그리고 또 다른 100일 뒤 서 있을 곳 역시 함께 궁금해졌다.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이민우 이사장은?▲ 1960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79년 유신고등학교 졸업, 2001년 숭실대학교 경영학 석사 취득▲ 1985~1995년 경안상호신용금고 근무▲ 1996년 경기신용보증재단 입사▲ 2001~2005년 경기신용보증재단 부천지점장 / 총무팀 부장▲ 2006~2010년 경기신용보증재단 안양지점장 / 기획부 실장▲ 2010~2014년 경기신용보증재단 기획관리본부장 / 성남지점장▲ 2014~2015년 경기신용보증재단 남부지역본부장▲ 2015~2018년 경기신용보증재단 영업부문 상근이사▲ 2018년 12월 ~ 경기신용보증재단 제14대 이사장이민우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이 지난 4일 경기신보 집무실에서 가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기관을 만드는 게 제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일 것"이라고 설명하며 경기신보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이민우 경기신보 이사장은 창립부터 23주년을 맞은 현재까지 경기신보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20일 지역 중소기업 육성 공로로 표창을 받은 이민우 당시 경기신보 총무팀장을 보도한 경인일보 지면. /경인일보 DB

2019-04-09 강기정

[인터뷰… 공감]류은규 사진작가, 조선족의 잊혀진 흔적 "더 많이 알려졌으면…"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삶을 담아낸 사진전 '잊혀진 흔적' 전이 최근 막을 내렸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유명한 류은규(57) 옌볜대 교수가 26년 동안 현지에서 찍은 사진과 입수한 자료들로 꾸민 '잊혀진 흔적' 전은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에서 개최됐다.1개월간 진행된 전시회엔 2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아 성황을 이뤘다. 사료적 가치도 높은 류 교수의 사진과 자료들에 관람객들도 큰 호응을 보낸 것이다.류 교수와 그의 아내이자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도다 이쿠코 인천 관동갤러리 관장은 "전시회 초창기에는 역사적 관심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전시회를 찾는다는 느낌이었는데, 전시회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재차 전시회장을 찾는 분들이 생기고,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가족 단위 관람객들도 많이 오셨다"고 말했다. 전시 막판에는 관람객이 줄기 마련인데, 마지막 주말이었던 지난달 30일에만 200여명의 관람객이 전시회를 보고 돌아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만주일대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사진전이 한 달로 막을 내린다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도 있었다. 류 교수는 "전시회를 보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라는 관람객의 말을 들었을 때 열심히 해야겠다고 한 번 더 다짐했다"면서 "인천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이외 지역으로도 퍼져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2019-04-02 김영준

[인터뷰… 공감]3·1운동 100주년 기념전 개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

#'잊혀진 흔적' 展 많은 관심 끌었는데中서 항일운동 흔적 수집·조선족 살펴중립지키고 검증 신경써서 전시회 구성#조선족을 26년간 찍고 있는 이유는하얼빈서 우리역사 왜곡되는 것 목도만주지역 이주사 '객관적 기록' 결심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57) 옌볜대 사진학과 교수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전 '잊혀진 흔적'이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인천 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과 윈도우갤러리에서 개최됐다.'잊혀진 흔적'전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기획됐다. 1990년대 초부터 26년 동안 중국에서 항일운동의 흔적을 수집하고 독립운동가 후손과 재중동포의 모습을 찍어온 류 교수는 이번 전시회에 작품 70여점과 아카이브 250여점을 출품했다. 전시회는 '역사의 증언자들', '그리운 만남', '80년 전 수학여행', '삶의 터전', '또 하나의 문화' 등 5부로 구성됐다. 전시회는 2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류 교수의 시선과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 것이었다.류 교수에게 작품 활동과 이번 전시회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 계획 등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 1일 오전 인천 아트플랫폼 전시장을 찾았다. 류 교수는 아내인 도다 이쿠코 인천 관동갤러리 관장과 함께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인터뷰 후 부부가 함께 전시 작품들을 떼어낼 예정이었다. 전시회 개막을 앞두고 부문 별로 나누고 작품들을 걸고, 전시회장을 꾸미는 데 1주일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지만, 떼어내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할 거란다.류 교수는 "학생들에게도 강조하는 부분인데 '역사 관련 전시회는 가장 중립적으로 올바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면서 한 쪽 편에 서서 찍을 순 있겠지만, 찍고 나선 중립을 지켜서 전시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서 "검증도 매우 중요하다. 중국 현지 교수와 국내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고, 한·중·일 역사를 공부한 일본 사람인 아내의 도움도 크게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류 교수는 26년 동안 조선족을 찍고, 관련 자료를 모으는 건 사진으로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류 교수의 이 같은 바람과 희망은 이번 전시회에 고스란히 투영됐다."국경, 시대, 사람과 사람 사이 등 세상에는 늘 경계가 존재합니다. 한국과 중국, 한국인과 조선족 뿐만 아니라 조선족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나 지역 차이로 인한 경계가 존재하죠. 경계로 인해 갈등이 조장됩니다. 한국전쟁의 경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했지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룰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죠. 그런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사진가는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장의 사진을 풀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100년 전 간도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을 상기할 수 있었으며, 우리와 단절된 채 살아왔던 조선족의 발자취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류 교수가 조선족의 삶을 기록하고 자료 발굴을 시작한 건 1993년이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등의 기내지에 게재되는 사진을 찍으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을 때 하얼빈을 사진에 담게 됐다."한국 사람으로서 안중근 의사, 731부대(일본의 세균전 부대) 등을 떠올리며 하얼빈에 갔습니다. 한데, 제가 알던 역사적 사실들이 일본은 물론 중국 내에서도 공산당과 국민당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이 처한 시선에 맞춰 역사를 설명하고 있던 것이었죠. 이후 만주지역의 이주사를 객관적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사진으로 기록하고 항일 운동 하신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모았습니다."류 교수는 1995년 옌볜대 민족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위촉됐고, 2000년에 옌볜대에 사진학과가 만들어지면서 교수가 됐다. "아내와 겨우 6개월 된 아이를 둘러업고 옌볜대로 간 건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이주사와 만주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어요. 오랜 호흡으로 동일한 주제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계속 찍으려면 현장에 거주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올해까지 26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류 교수는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옌볜은 중국과 조선 문화가 부딪히는 완충지대입니다. 이런 요인들을 통해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고요. 현재 200만 조선족 중 한국에 83만명이 가 있고, 베이징 등 대도시에 40만명이 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시골처럼 젊은이들은 얼마 안 남고 다수의 노인들이 옌볜에 있습니다. 중국 당국의 동북공정과도 어우러지면서 변화하고 없어지는 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제가 기록한 사진들은 현재 없어지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자료입니다. 그러면서 느낍니다. 제 사진이 사료적 가치도 갖는다는 사실을요."#청학동 사진도 37년째 찍고 있는데우리나라 발전상 고스란히 녹아있어외국에서 '유토피아'로 소개 큰 반응#언제까지 활동을 이어갈 계획인가조선족·청학동 사진촬영은 계속 진행두 작업, 내가 카메라 놓는 날 끝날 것이주 조선인과 후손의 삶을 좇고 있는 류 교수는 37년 동안 지리산 청학동 사진을 담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1년께 일간신문 토픽란에 실린 작은 기사(등산객 한 명이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는 내용)를 본 류 교수는 이듬해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진주를 거쳐 하동에서 시골 버스를 타고 내린 후에도 5㎞ 산길을 걸어서 청학동(당시 이름이 생기기 이전)에 갔다.매번 하동에서 쌀 2말을 사 짊어지고 지리산 골짜기까지 찾아드는 그를 청학동 사람들은 의아해 하다가 지금은 형제처럼 가까워져서 대소사를 알리고, 언제 오는지 기다릴 지경이 됐다고 한다."1982년 처음 청학동에 갔을 때 만난 10살 어린이가 현재 장가가서 슬하에 고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어요. 현재 우리나라의 발전상이 청학동에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여겨집니다. 자급자족하던 청학동에 전기, 전화, TV가 들어오고 공권력과 자본도 따라 들어오죠. 가게가 생기고, 민박, 식당도요. 자급자족할 땐 주민 간 갈등이 없었는데, 현재 갈등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특히 청학동 사진을 좋아합니다. 서양엔 '유토피아'로, 중국에는 '이상세계'로 소개하는데, 유토피아나 이상세계는 실체가 아닌데, 제 사진을 통해 볼 수 있으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청학동 전시는 지난해까지 외국에서만 연간 4~5차례 진행했습니다. 조선족 작업과 청학동 작업은 제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계혹할 것입니다. 두 작업은 제가 카메라 놓는 날 끝날 것입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류은규 교수는?서울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신구대 사진과와 상명대 예술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 순수사진 과정(석사)을 졸업했다. 1988년 교도소를 주제로 광주학생회관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한 이후 지난달 '잊혀진 흔적'전까지 국내외에서 20여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15차례 단체전에 참여했다. 이번 '잊혀진 흔적'전의 3부에 구성됐던 '80년 전의 수학여행'을 최근 책으로 펴내는 등 8권의 사진 관련 서적을 내놓았다. 현재 인천 관동갤러리와 도서출판 토향의 대표로 있으면서 중국 옌볜대와 하얼빈대,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사진예술과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류은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전시회가 열렸던 아트플랫폼 전시장에서 포츠를 취하고 있다.

2019-04-02 김영준

[인터뷰… 공감]'수원 야구 붐' 꿈꾸는 이숭용 KT 단장

■수원과 인연이 깊은데현대 시절 한국시리즈 정상 올라KT 만원관중서 흥행 가능성 확신■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아버지 따라 축구를 시작했지만유니폼 멋있어서 야구부에 가입추억의 팀 태평양과 현대를 아는 프로야구 팬들은 수원 KT 이숭용 단장은 꾸준함과 리더십이 뛰어났던 선수로 떠올린다. 이단장은 1994년 신인선수드래프트에서 2차1라운드(전체 1번)에서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후 현대를 거쳐 넥센에서 은퇴를 했다.재정적으로 어려웠던 태평양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고, 현대 왕조의 전성기와 신생팀으로 뛰어든 히어로즈선수단에서는 주장으로서 선수단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단장에게 프로야구팬들은 캡틴, 미스터 쾌남, 마지막 황태자라는 애칭을 붙여줬다.신생팀 KT의 창단 코칭스태프로 수원으로 돌아온 이번 시즌부터 단장으로서 수원 야구의 붐을 확신하고 있다. 이 단장의 야구인으로서의 철학과 단장으로 꿈꾸는 야구를 들어 봤다.# 전율을 느꼈던 그 순간, 수원 야구의 가능성을 봤다.서울에서 태어난 이 단장은 스스럼 없이 수원을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한다. 인천을 연고로 했던 태평양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현대 유니폼을 입고 수원에서 현대 왕조의 우승 순간을 함께했다. 이 단장은 "아직도 2015년 3월28일 창단 후 첫 1군 홈 개막전이 열리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kt위즈파크에 수원 야구 팬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때 발바닥부터 전율이 시작돼 온 몸으로 퍼졌다. 그 모습에 수원 야구의 가능성을 봤고 KT와 함께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그는 "현대가 목동으로 가기전 수원야구장을 홈경기장으로 사용했지만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열기였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던 순간에도 수원야구장은 비어 있었다. 그랬던 수원야구장에 KT라는 신생팀의 첫번째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온, 가득찬 수원 야구팬들의 모습에 감동했었다. 현대 왕조에서 느끼지 못했던 전율을 느꼈고 수원 야구는 분명히 꽃을 피울 것이라고 믿게 됐다"고 했다.이어 이 단장은 "당시 창단한지 얼마 안된 상황이기에 선수단 자체는 미흡했고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선수단의 실력은 만들어가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역의 열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프로스포츠 선수들은 팬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성장한다. 수원의 열기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재능을 폭발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팀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과 함께하고 싶었고, 완성된 모습을 본다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창단 후 첫 홈개막전 경기를 회상했다.# 유니폼이 멋있어서 시작한 야구선수, 나는 평범한 선수였다.이 단장의 프로 선수 생활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90년대 야구가 투고타저였던 점도 있지만 야구선수로서 이상적인 신체 조건에도 이 단장은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했던 18시즌 동안 162개의 홈런만 기록했다. 통산 2천1경기 출전해 이부문 역대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통산 타율 0.281, 통산 안타 1천727개를 기록했다.자신의 야구에 점수를 매겨 달라고 묻자 "고교때까지는 그저그런 평범한 선수였다. 대학교때부터 야구에 대해 눈을 뜬거 같다. 현대에는 워낙 슈퍼스타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 명함을 내밀 수 없었다. 슈퍼스타는 아니었지만 선수로서 나에게 점수를 주라면 B+를 주고 싶다"고 밝혔다.이 단장은 "사실 아버지께서 축구선수 생활을 하셨기에 저도 축구로 스포츠에 입문했다. 근데 축구부가 없어지고 야구부가 창단 됐는데, 유니폼이 너무 멋있었다. 유니폼이 멋있어서 야구부에 가입했고, 야구를 하다 보니 야구가 재미 있어서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온거 같다. 그냥 공을 던지고 치고, 수비하는게 좋았다. 유니폼을 입고 있었을때 가장 행복했었다"고 전했다.캡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리더십의 상징이 된 이유에 대해 이 단장은 "주연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 제 실력이 그정도까지는 안됐다. 주연보다 조연 역할을 했는데, 그 조연 중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고민을 했다. 야구는 야구대로 하면서 내가 이렇게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에서 주장을 맡으며 그라운드 안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지는 못하지만 동료들과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야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선수단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구단에서도 이숭용이라는 선수에 대해 많은 것을 준거 같다"고 말했다. ■내 야구에 점수를 준다면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최선슈퍼스타 아니었지만 'B+' 정도■코치로도 활동했는데선수와 소통하기 위해 많은 노력오랜기간 주장했던 경험, 큰 도움# 선수출신 단장, 그에게 주어진 고민들.이 단장은 "선수 시절에 부끄럽지 않은 야구를 하자는 게 목표였었다면 코치로 KT의 창단코칭스태프로 합류할때는 '소통하는 야구'를 생각했다. 코치로 선수들과 처음 만났을때 선수들에게 '함께 동행하자'고 말했다. 제 나름의 야구 철학 중 하나는 '코치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약이라는게 있기 때문에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 코치가 갖고 있는 타격 이론과 야구 이론이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만 옳다고 말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코치는 선수가 본인의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동행하자'고 말했다"고 말했다."그러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수들에게 다가가고 그 선수를 이해하기 위해 성격과 성향도 파악하고, 가족관계까지 알려고 했다. 서로간에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서로간에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건 신뢰가 쌓이는 것을 의미한다. 선수시절 오랜기간 주장을 했던 점이 코치로서 생활할때 많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단장이라는 자리를 꿈꿔 보지 않았기에 지금 이 단장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감독과 단장으로 성공신화를 쓴 염경엽 현 SK감독을 비롯해 다른 팀 단장들에게도 많은 조언을 구하고 있다.이 단장은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있을때 몰랐던 부분을 많이 보고 배우고 있다. 코치만 했다면 프런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을 것 같다. 프런트라는 자리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현장에 있을때는 제가 직접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장은 감독님과 코칭스태프에 믿고 맡겨야 한다. 관리 보다는 관심을 갖고 무엇을 해야 현장에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도움이 될지에 대해 고민한다"고 전했다.그는 "시즌 중에는 프런트와 현장에서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럴때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갈지 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연승을 할때, 연패를 할때, 선수들 또는 코칭스태프가 힘든 상황일때 단장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현장 출신이기에 현장에 부담을 주지 않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어떤 야구를 보여주고 싶나KT 선수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팬 위해 한발 더 뛰는 모습 보일것# 초보 단장 이숭용 단장이 꿈꾸는 야구, 그리고 약속.이 단장은 "감독님과 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화를 나누면서 공감대를 갖는 건 우리 팀, KT가 미래가 밝다는 거다. 코치 시절에는 타격코치라 타자들만 바라 봤지만 단장으로서 구단을 넓게 바라보니 투수쪽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엄상백과 정성곤, 김재윤이 필승조로 자리잡아주고, 선발에서는 김민과 이대은, 외국인선수들이 자리잡아 준다면 2~3년 안에 안정된 전력으로 완성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이어 이 단장은 "유망주들을 육성해 내는 2군은 많은 부분을 바꿨다. 코칭스태프와 시간 날때마다 회의를 했고, KT만의 색깔이 뭔지 같이 고민하자고 했다.코칭스태프와 육성팀이 같이 고민해서 만들어가자고 했다. 하나 하나 만들어 가다보면 KT만의 색깔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봤다. 현대 출신 선수들이 현대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갖듯 KT 선수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환경을 만들자고 했다.신인드래프트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이 KT에 지명 받았을때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명문 구단이 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파트별로 육성쪽에서는 다양하게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체계화가 돼서 기본기, 팀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끔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그는 "KT는 1군 데뷔 5년차인 팀이다. 신생팀이라는 색깔을 가지면 안된다. 상대팀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한다. 그 힘을 극대화 시켜서 성적이라는 것으로 팬들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마지막으로 이 단장은 "수원 팬들은 열정적이다. 한발 더 뛰는 야구로 팬들이 원하는 성적과 야구를 보여주고 싶다. 팬들의 기대치를 저희가 높여 드려야 한다. 수원야구의 봄이 시작될 수 있도록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 팬들께서도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많은 격려와 박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이숭용 단장은?▲ 학력 : 서울 용암초 - 중앙중 - 중앙고 - 경희대▲ 프로입단 : 1994년 2차 1라운드 지명(전체 1번, 태평양)▲ 통산 성적 : 2천1경기 출장(역대 7위), 타율 0.281, 안타 1천727개, 홈런 162개▲ 소속팀 : 태평양(1994~1995)-현대 (1996~2007)-우리(2008)-히어로즈(2009)-넥센(2010~2011)▲ 지도자 경력 : 수원 KT 타격코치 (2014~2018) ▲ 프런트 경력 : 수원 KT 단장 (2019~)제2의 고향을 수원이라고 말하는 프로야구 수원 KT의 이숭용 단장이 자신이 꿈꾸는 KT야구단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03-26 김종화

[인터뷰… 공감]인천시민이 좋아하는 쌀막걸리 '소성주' 키워낸 정규성 인천탁주 대표

#막걸리협회 신임 회장직을 맡았는데회원사들 한목소리 낼 수 있도록 노력업계 간 기술교류 없는 문제 개선할것#시민 사랑 받도록 성장시킨 비결은?장기간 주주배당 않고 품질개선에 투자기본 충실하려고 했던 노력, 결실 맺어"비결 같은 건 없어요. 돌아보면 그저 못살게 될까봐 두렵고 겁났습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은수저'쯤 쥐고 태어났는데, 그래서 주변에 늘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데 그 부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폐지를 주워야 할 정도로 무너지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어요. 그게 두려웠습니다. 살아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했습니다."인천 사람들이 사랑하는 쌀막걸리 소성주를 만드는 인천탁주제조 제1공장(이하 인천탁주)의 정규성(62) 대표의 이야기다.정규성 대표는 한때 맥주에 밀려 '아무도 찾지 않던 술'로 전락했던 지역 막걸리를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지금의 '소성주'로 키워낸 주인공이다.그는 1996년부터 인천탁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인천탁주는 11명의 주주가 운영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회사로, 인천지역 11개 탁주 양조장이 연합해 1974년 설립됐다.정규성 대표는 최근 전국의 크고 작은 100여개 막걸리 제조 기업이 모인 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게 됐다. 인천의 소성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막걸리를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술로 키워내는 역할까지 해야 해 어깨가 무겁다. 지난 10일 청천동에 있는 공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신임 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아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어떠한 계획을 갖고 있나."대형 막걸리 회사인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데, 크고 작은 막걸리 회원사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취임사에서 말했습니다. 또 업계 간의 기술교류가 거의 없는데, 이 부분도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막걸리 업계가 전문가 그룹이 두텁지 않고 학문적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업계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IMF 직전인 1996년부터 인천탁주 대표를 맡아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나."대표를 맡은 직후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 회사를 파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공장 연매출이 20억원 정도로 큰 슈퍼마켓 매출에 불과할 정도로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인천 막걸리가 아닌 타지역 막걸리가 70%이상 판매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계양구에 농사짓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분들조차 막걸리가 아닌 맥주를 마시던 상황으로 참 힘들었습니다. 그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IMF가 찾아온 이후에는 막걸리가 서민주인 탓에 반짝 매출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2000년도 막걸리의 타지역 판매가 자율화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막걸리로 성장시킨 비결을 듣고 싶다."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사실 주류 시장이 특별한 비결이 필요한 시장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거래처를 갖고 태어나는 물건은 술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막걸리만 제대로 만들면 다 받아 줄 텐데, 막걸리 사업을 망하면 아무 사업도 못할 거라고 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려고 했던 노력이 지금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1996년 대표를 하면서부터 10년 가까이 주주 배당을 하지 않고 품질 개선에 투자했습니다. 맛없으면 할머니가 해준 떡도 안 먹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편없던 종업원 월급도 다른 공장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했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주들도 많이 희생했습니다."-2000년대 초반 막걸리의 지역 경계가 없어지면서 위기를 맞은 이후 어떻게 극복했나."지역 판매가 자율화하면서 여러모로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포천의 막걸리가 전국을 주름잡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탁주는 그때부터 그동안 간섭하지 않던 유통 부문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막걸리를 판매하시는 분들이 중구에 기반을 갖고 계신 분들이 부평지역에 납품하고, 부평에 기반이 있는 분들이 중구에 납품하고 서로 경계가 없었는데 이것부터 정리했습니다. 사실 거래처라는 게 별것도 아닌데, 영업비밀이라며 정보를 공유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판매하는 분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었지만, 결국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설득하며 추진했습니다." #막걸리 세계화 가장 먼저 시도했는데반짝인기였을뿐 큰 의미 두고 싶지 않아한국인이 즐기는 술, 그 자체가 더 중요#인천탁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월급 많지 않지만 직원들 행복했으면사랑받는 만큼 보답… 기부활동 희망-인천탁주는 막걸리의 세계화를 위한 시도를 가장 먼저하고 결실도 얻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막걸리의 세계화는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천탁주는 1992년 막걸리를 장기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테트라팩'에 담은 멸균탁주 '농주(農酒)'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일본 등에 수출하기도 했는데, 막걸리 정식 수출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미국 LA와 시카고에서 열리는 국제식품쇼에 출품하기도 했고 1994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음료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속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술이 된 줄 알았죠. 하지만 당시 그것은 인천 막걸리의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화 추세 속에 인천의 막걸리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는데 마케팅 능력도 없었습니다. 반짝 인기를 끌었을 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남을 의식하지 말고 우리끼리 즐기는 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베트남이나 일본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술이 있다고 합니다. 막걸리를 모든 한국사람들이 즐기는 술이라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거지 막걸리가 세계화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소성주가 어떤 술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나."막걸리를 서민들의 술이라고 합니다. 소성주도 계속 서민들의 곁을 지켜주는 서민주로 오래도록 사랑을 받으며 이어갔으면 합니다. 막걸리 고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싸게 즐기는 서민들의 술로 오래도록 그들의 삶과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라지는 한국문화유산이 많아 슬픕니다. 막걸리가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세계 사람들에게 내세우는 한국의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가 됐으면 합니다. 소성주를 비롯한 막걸리를 즐겨 찾아주는 국민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천탁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 어떤 것인가."가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직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월급을 많이 주진 못하지만 직원들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공부 잘하고 뛰어난 능력이 필요한 직원들이 많아야 하는 곳은 아닙니다. 우리 공장에는 외국인노동자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일자리가 얻기 힘든데 외국인에게까지 일자리를 뺏기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또 민속주를 외국인이 만들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장은 평범한 분들이 일하는 곳이죠. 이 공장 안에서 그 분들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월급 받고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합니다. 또 소원이 있다면 막걸리를 즐겨 마셔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말고. 기부 활동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사랑받는 만큼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정규성 인천탁주 대표는?▲ 1957년 인천 출생▲ 축현초등학교, 상인천중학교, 송도고등학교, 제주대학교 식품공학과▲ 1989년 대화주조 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1996년 인천탁주제조 제1공장 대표 취임▲ 2017년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 회장▲ 2019년 사단법인 한국막걸리협회 회장-주요 수상내역▲ 2013년 대한적십자상(기부분야)▲ 2014 사랑의 열매 대상(기부분야)▲ 보건복지부 2015년 제1회 행복나눔상 ▲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표창정규성 인천탁주 대표가 회사 경영이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말하며 웃고 있다. 정 대표는 그저 못살게 될까봐 두렵고 겁이나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2019-03-19 김성호

[인터뷰… 공감]양평에 '소아암 어린이 공원묘원' 만든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

소아암으로 세상 등진 아이, 장례 제대로 안치르기도사후에도 그들을 기억할 공간 만들기 위해 묘원 마련아이와 부모 위해 장례·안장 무료… 화초장으로 진행# 소아암으로 세상 떠난 어린이들,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공원묘역국내 최초로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한 공원묘원을 찾아가는 길. 양평 두물머리(양수리)에서 공원묘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양평군 서종면 도장리까지 가는 길 왼편은 맑은 북한강이 전날 내린 눈으로 한 폭의 수채화로 차창 밖으로 흐르고 오른편은 흰 눈에 덮여있는 야트막한 산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20여분 남짓 승용차로 달려 도착한 하이패밀리 진입로. 입간판 안내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 깎아지른 듯한 시멘트 포장길 300여m를 오르니 큼지막한 흰색 건물과 계란 모형의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하이패밀리 동산. 이곳에는 더블유 스토리 건물과 청란교회 등이 있다. 교회 이름처럼 푸른 모양을 한 예배당이 있어 가족단위로 명상과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밖에서 보면 좁아 보이지만 들어가면 꽤 공간이 넓고 천장이 아파트 2층보다 높다.개신교 가정사역 단체인 하이패밀리(Hi Family)가 지난 2016년부터 서종면 도장리 매곡산 자락 중턱 9만9천여㎡ 부지에 건립하기 시작한 가족테마파크 '하이패밀리 동산'이다. 복합문화공간이자 가족 생태계복원을 위한 '힐링필드'인 이곳에 지난 2월 15일 문을 연 어린이 전문 화초장지(葬地) '안데르센 공원묘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백혈병 등 몹쓸 병으로 어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은 또한 안타깝게 떠난 아이를 제대로 장사 지낼 마땅한 곳이 없어 강물이나 산야에 재를 뿌리고 훗날 아이를 찾아갈 기억의 공간이 없음에 또다시 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직원 안내를 받아 사무실을 찾아가 만난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62) 목사가 안타까운 현실을 속으로 삭이듯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송 목사는 "부모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자식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경우도 많고, 사후에도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어린이 묘원을 만들게 됐다"고 덧붙여 설명했다.'더블유 스토리' 건물 앞 산자락 남동쪽방향에 자리를 잡은 안데르센 공원묘원은 익숙하지 않은 조형물과 시설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가장 먼저 빨간색 '하늘나라 우체통'이 반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에게 부모나 가족·친지들이 보내는 편지를 넣는 곳이란다. 또 철제 난간 펜스에는 하늘을 나는 듯한 흰색 나비와 'TALITHA CNMI'(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라고 쓰여진 문구가 붙어 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곰 캐릭터로 된 비석도 조만간 세울 예정으로 제작주문을 마친 상태란다. 또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화초장으로 묻은 흔적이 없어지기에 앞쪽 벽면에 아이들이 잠든 곳을 알 수 있게 표식을 붙일 수 있도록 했다.아이들이 잠드는 공간인 안데르센 공원묘원은 1천155㎡ 규모로, 잔디와 나무수국이 곳곳에 심어졌다. 아이들 묘원답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 등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한 추모석도 군데군데 놓여있고 묘원 중앙부위에는 송 목사가 지은 헌사 '오래된 묘비'도 목판에 새겨 세워져 있다.'나무수국은 우유 빛이다. 갓 태어난 아이의 뽀얀 피부를 닮았다…(중략)수국화에는 새 생명으로 피어날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새겨져 있음을 알았다…(중략)내 아이를 보았으니 얼른 가서 아이가 먹고 배부를 밥을 지어야겠다'.송 목사의 이곳에 묻힌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망, 그리고 아이들 부모들을 위한 위로와 치유의 간절함이 구절마다 묻어나오는 듯 느껴졌다.이곳 장례 절차는 화장을 한 아이 유골을 나무수국이나 잔디 밑에 종이관(한지)이나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친환경적인 관에 담아 묻는 '화초장' 방식이다. 송 목사는 "안데르센 동화 중 한 주인공이 장미가 시들자 땅에 묻으면서 부활을 기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기인했다"고 장례방식을 설명했다.소아암을 앓다가 엄마·아빠와 이별한 아이들에게 장례와 안장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하고 관리비도 없다. 그래서 세계 소아암의 날인 지난 2월 15일에 개장한 이유라고 그는 설명했다.# 아이를 먼저 떠난 보낸 가정의 회복과 힐링을 위해송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목회자의 길이 아닌 가정사역 연구소를 설립, 새로운 선교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아이를 묻은 가족 등을 위한 애도·치유프로그램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는 까닭이다.단순히 아이들 장례를 치르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은 부모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송 목사는 지난 1992년 하이패밀리를 설립, 지금까지 10만건의 가정치유 상담을 진행했다. 그는 "남은 가족이 아픔을 딛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애도 프로그램을 나누고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송 목사는 "우리나라 소아암 환자는 연간 1만4천여명, 이중 2천400여명이 끝내 사망한다"며 "암 진단 후 최장 3년을 살지만 대부분 가정이 아이 치료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끝내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적인 이유로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부모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들 엄마·아빠를 위한 치유 애도프로그램에 정성을 쏟는 것은 사역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의 트라우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아프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부모들은 아이가 암에 걸리고 부모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탓을 서로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느 부부는 서로의 가족병력까지 들먹이며 상대방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는 경우도 보았다"며 가정 애도 치유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그는 "아이들이 태어나 부모에게 줬던 웃음과 행복·감사함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저 세상에서 아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엄마 아빠를 본다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아이의 엄마·아빠로서 겪은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감싸 안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라 한다"고 치유의 첫걸음을 귀띔해 줬다. 남은 가족들 치유 돕는 것, 사역자로서 마땅히 할 일양평에 각별한 애정… "가장 큰 힘 돼준 사람은 아내" # '가족생태학자' 송 목사의 양평사랑과 관심, 그리고…."6·25전쟁 후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 중에 양평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양평'표기가 예전 일기 방식으로 읽으면 '평양'으로 읽혀 양평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됐습니다. 그 후 그들이 추석·설 명절때 모여 고향을 그리워하며 북한음식을 만들어 먹게 된 것이 지금의 옥천 냉면거리의 시작입니다"라고 양평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그는 새벽마다 하이패밀리 동산이 자리 잡은 뒷산에 만들어 놓은 '주기도문 산책로'를 따라 정상에 올라 양평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이곳에 하이패밀리 동산을 세우고 소아암 어린이 공원묘원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 지역주민 안녕과 건강을 위해 한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했다.송 목사에게 뒤늦게 '하이패밀리' 뜻을 물었다. 그의 답은 "하이(Hi)는 '안녕'이 아닌 '행복혁신(happy innovation)'이며, '패밀리(Family)'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물론 갖고 있지만 숨은 뜻은 따로 있단다. 'fam'은 'father(아버지) and mother(어머니)'의 뜻이고 'ily'는 'I love you'의 약자란다. 그가 처음으로 의미를 붙여 만들었다는 답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수시로 강연회나 특강에 나가는데 그때마다 참석자들에게 '하이패밀리'의 의미를 설명하고 큰소리로 외치게 한 후 강연을 시작한다고 했다.그에게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한순간 망설임도 없이 답을 했다."아내지요. 무엇보다 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아줄 사람도 아내일 테니 더욱 고맙고 감사한 사람이지요." 글·사진=양평/오경택기자 0719oh@kyeongin.com■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는?'가족생태학자' 송길원 목사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지만 교사인 부친의 잦은 전근으로 인해 부산에 사는 외할머니 손에서 성장했다. 그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됐고, 대학도 고신대학교 신학과에 진학 후 고려신학대학원, 고려대학대학원, 미국 RTS를 졸업했다.고신대 의대 교목(校牧)으로 재직(1984~1990) 후 가정해체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치유하며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부산서 '가정사역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97년 고양 일산, 2002년 서울 양재동을 거쳐 지난 2016년 양평군 서종면으로 옮겨와 현재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에 이르렀다. 또한 하이패밀리 내에 세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교회' 정란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으며, 인생의 반려자이자 사역의 동역자인 아내 김향숙(하이패밀리 공동대표)씨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둘째 아들이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다 뒤늦게 신학으로 바꿔 목회자의 길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국민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비움과 채움', '손으로 쓰는 기도', '행복한 죽음', '죽음이 있는 곳이 성지다', 해피엔딩 스쿨 교재 등 다수가 있으며, 일간지·잡지 등에 많은 연재물을 집필했다.송길원 목사가 하이패밀리와 소아암어린이 공원묘원에 대해 설명을 하며 "아이들의 부모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은 목회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사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공원묘원 벽면에 붙어있는 안데르센 공원묘원 표기.송길원 목사가 '하늘나라 우체통'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2019-03-12 오경택

[인터뷰… 공감]'국토정보 플랫폼 사업' 이끌고 있는 현남위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

인공 지능(AI), 사물 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에 점차 융합되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플랫폼 구축이 갈수록 중요시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지식정보기술을 매개체로 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중계자가 아직까지 부족한 상황이다.또한 지능정보기술이 인간의 신경망처럼 도시 구석구석까지 깔리기 위해서는 생산과 제조에 앞서 공간정보 구축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한 사업은 아직 초창기나 다름없다.그나마 한국국토정보공사(LX)가 가상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디지털 혁명 기반의 기술융합 시대를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공간구축의 필요성은?건물·도로등 도시 인프라 효율적 관리'공공데이터' 활용해 새로운 가치 창출LX는 지난 2004년부터 공간정보를 신규사업으로 정해 기술발전을 대비해 왔고, 지난 2015년에는 사명까지 바꾸며 지적사업에서 국토정보사업으로 업무영역을 확대, 4차 산업혁명의 중간자 역할과 기초자 역할을 하고 있다.그 중심에는 현남위(58)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이 있다. 1985년 공사에 입사해 30여년간 지적 사업과 더불어 국토정보 사업을 최일선에서 이끌어 왔다.지난해부터는 지역본부 전체 국토정보사업분야 회장을 맡아 스마트사회를 선도하는 국토정보 플랫폼 사업의 나아갈 방향을 안내하고 있다.이를 위해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공간과 정보를 아우르는 여정'으로 정한 뒤 국가공간정보체계 구축 지원과 공간정보·지적제도 연구개발 및 지적측량 수행 등을 통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현 처장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크지만 바로 이런 거대한 두려움 속에 거대한 기회가 숨어있다"면서 공간구축의 힘든 여정을 단편적으로 토로했다.하지만 그는 공간 구축의 어려움보다는 성과가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지난해 판교 자율주행 공간정보플랫폼 구축, 정부 및 지자체와 협업을 통한 3차원 지하공간통합지도 작성 등을 추진한 현 처장은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 험난한 가시밭 길이라는 법은 없고, 남들이 열어보지 않은 문이라고 해서 꼭 잠겨 있으리라는 법도 없다"고 강조했다.그는 "건물, 도로, 철도, 항만, 지하 등 도시의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공공데이터를 수집 활용함으로써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조언한 뒤 "'디지털 트윈' 전담기관으로 국가 '스마트시티' 분야의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트지털 트윈'은 컴퓨터에 현실 속 사물의 쌍둥이를 만들고,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기술이다. 디지털 트윈은 제조업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특히 현 처장은 그동안 아날로그 방식으로 구축된 국토 정보를 디지털 방식으로 변환하는 데 힘쓰고 있다.그는 "자율자동차 등 첨단 기술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수록 보다 정밀한 측량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미래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변하는 정보까지도 공간정보에 담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그러면서 그는 지난해 정밀측량을 통한 공간정보구축 사업을 소개했다.현 처장은 "지난해 정밀측량을 통한 품질관리사업으로 최신 3D기술을 적용한 의정부 경전철 안전성 검증사업과 수원시 3차원 지하공간통합지도 제작 등을 실시했다"고 밝히면서 "현재 LX 경기지역본부는 단순 수치화됐던 정보를 위치기반과 입체화하는 정밀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는 "지적기반의 철도 연결용지도면 작성과 한국철도시설공단 용지매입을 위한 용지도면 작성 및 시스템고도화 작업, 국가지점번호 검증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중 국가지점번호 검증사업은 산, 들, 바다 등 건물이 없는 지역의 위치를 쉽게 표시·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적으로 통일된 위치표시 개념으로 특정 지점마다 고유번호가 부여된다. 전 국토와 인접 해양 지역의 위치안내 및 표기방식이 통일되면 각종 재난 재해 등 긴급상황 발생 시 신속한 대응 및 대국민 생활위치 안내서비스 등이 제공될 수 있게 된다.#3기 신도시 정보도 준비하고 있나토지보상업무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공간정보구축' 나설 계획 세우고 있어현 처장은 정부의 3기 신도시 발표 지역의 공간정보도 준비하고 있다.그는 "각종 도시개발사업에서 토지보상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선 개발지구 내 편입되는 토지, 건축물, 지상공작물 등의 조사와 지구관리를 위한 지적기반의 중첩 제작 업무가 중요하다"며 "따라서 3기 신도시 역시 효율적인 토지보상업무지원을 위해 공간정보구축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문화재 조사 및 복원에도 앞장서고 있는 그는 "문화재가 있던 지역의 공간을 옛 문헌 등에 게재된 모습을 구현해 공간을 구축하다 보면 그동안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때가 있다"면서 "또한 문화재를 공간화(입체화) 해 놓으면 향후 소실 시에도 원모습을 복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문화재 조사도 앞장서고 있는데작년, 화성 융건릉·수원화성등 '공간화'향후 소실시에도 원모습으로 복구 도움지난해 LX 경기지역본부가 공간을 구축한 문화재는 화성 융건릉과 수원화성, 남양주 홍유릉 등이다.현 처장은 그동안 공간구축 사업을 이끌어오면서 인력양성 문제에 대한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꼈다고 토로했다.그는 "우리나라 국토에 대한 정보가 갈수록 지적에서 공간정보로 바뀌고 있는데 기술 개발에 맞춰 변화를 이끌어갈 만한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이에 LX 자체에서도 국토정보 및 공간정보전문가 양성을 전략 목표 및 과제로 정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또 급변하는 기술에 맞춰 직원 교육의 중요성도 피력했다. 현 처장은 "LX 경기지역본부에는 현재 '공간정보누리단'이란 직원 소통 공간이 존재한다"며 "매 분기마다 직원 대상으로 국토정보업무 및 마케팅 수행 관련 자문 활동과 자율주행자동차 등 최신 트렌드 공유, 공간정보 사업 전략적 공유를 통한 미래전략 콘텐츠 등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공간정보와 관련한 해외 공무원 등에 대한 기술도 공유하고 있다. 지난해 LX 경기지역본부에 다녀간 국가 공무원은 키르기스스탄공화국 국가등록청 산하 지적공무원과 튀니지 지적공무원, 탄자니아 토지주택개발부 대표단 등이다. 이들은 경기지역본부를 방문해 한국의 토지행정 시스템 운영 프로세스와 구축현황 등을 직접 확인하고 국내 다양한 공간정보기술을 배워갔다.그는 "일부 다른 나라의 경우 공간 정보뿐만 아니라 기본이 되는 지적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구축돼 있지 않다"며 "이에 LX는 이들 국가에 측량제도, 측량장비, 공간정보 분야 기술 및 시스템 활용 등에 대한 기술을 집중적으로 교육해주면서 한 단계 빠른 지역별 맞춤 공간 구축에 돌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마지막으로 그는 "용감하게 손을 내밀어 눈앞의 문을 열어젖힌다면 세상의 많은 문이 잠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려 있음을 알게 된다"고 조언하며 새로운 도전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공간구축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글/김종찬기자 chani@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현남위 LX경기지역본부 처장은?▲ 1961년 8월 출생 ▲ 1980년 대구 대건고등학교 졸업 ▲ 1985년 대한지적공사 입사▲ 1987년 명지실업전문대학교 졸업 ▲ 2015년 한국국토정보공사 경기지역본부 사업단장▲ 2016년 2월 경기대학교 행정·사회 대학원 졸업 ▲ 2016년 2월 한국국토정보공사 경기지역본부 공간정보사업처장▲ 2019년 1월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처장▲ 2010년 안양시장(표창장)▲ 2012년 국토부장관상(표창장)▲ 2017년 LX사장장(우수장)현남위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디지털 공간정보구축의 중요성과 맞물린 LX의 역할과 비전을 강조하고 있다.현남위 LX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처장(가운데)이 3D측량 작업 현장을 찾아 직원들과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LX경기지역본부 제공현남위 LX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처장(가운데)이 지난해 열린 판교자율주행모터쇼에 참석한 모습. /LX경기지역본부 제공

2019-03-05 김종찬

[인터뷰… 공감]문화발전 기여 장관상 받은 손동혁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

"인천민예총은 여러 예술 장르의 진보적 예술가 연합체로 내년이면 30주년이 된다. 예술가들이 태생적으로 얽매이기 싫어하는 데다 시인, 소설가에, 화가, 풍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독특한 인물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다 보니 그리 쉽지 않은 조직이다. 인천민예총도 초기엔 부침이 심했는데,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동가숙서가식 하던 차에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있었으니, 노래패 출신의 손동혁이다. 그가 사무처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경직되지 않은 조직력과 탁월한 기획력을 발휘하여 민예총의 노둣돌을 놓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인천문화재단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척박한 인천 문화를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 손동혁이 던지는 문화정책에 대한 혜안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부단한 공부와 발로 뛰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항상 미덥다."인천 부평여고 미술교사로 있는 김정렬 작가가 이달 중순 마련한 개인전 '인천인물 열전(列傳)'에서 손동혁(50)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경력 사항을 담은 프로필만 A4용지 3장에 달하는데, 김정렬 선생은 손동혁 팀장의 이력을 짧은 글에 잘도 담아냈다. 198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노동자 노래패에 몸을 담았으며 인천민예총, 주안영상미디어센터 등에서 실무를 총괄한 그는 지금 인천문화재단에서 시민들을 위한 다채로운 문화·예술 교육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손동혁 팀장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민간자문 프로젝트팀 '새문화정책준비단' 19명의 총괄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해 '문화비전 2030'을 수립하기도 했다. 손 팀장은 문화예술 정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문체부장관상을 받았다. 인천문화재단이 기관으로나 개인으로 문체부장관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손 팀장은 "이번 '문화비전 2030'은 정부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을 딛고, 민간 중심 준비단을 구성해 이들이 만든 계획안을 장관이 수용하고 발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기존에는 관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계획을 짰다고 하면, 이번에는 분과별 민간 위원들이 현장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수렴해 그때그때 반영하며 계획을 짜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정부 '새문화정책준비단' 참여했는데분과별 민간 위원들과 매주 치열한 논의10~20년 후 내다 본 문화예술 정책 세워새문화정책준비단은 지난 1년여간 매주 한 차례 저녁 시간 서울역 근처에서 만나 치열하게 논의했다. 당장 시행할 정책보다는 우리나라 문화 예술 정책의 10~20년 후를 내다본 호흡이 긴 계획을 세우는 과정이었다.인천의 입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9개 의제 중 8번째인 '미래와 평화를 위한 문화협력 확대' 안의 '한반도 평화를 여는 문화의 섬, 문화로드 프로젝트'다. 이 중 백령도를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는 것이 첫 번째 추진 과제로 꼽혔다. 방공호나 갱도 같은 백령도의 안보기반시설을 국제예술가의 레지던스 시설로 전환하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백령도에서 국제 축제를 열도록 하자는 구상이다. 한·중·일의 '평화 자본'을 유치해 관광객의 발길을 끌도록 하자는 방안도 제시됐다. 새문화정책준비단 위원들이 전국 각 지역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손 팀장은 백령도를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는 것은 인천,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손동혁 팀장은 "문화 비전을 수립하고 있는 사이에 4·27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됐는데 남북 공동어장, 서해 평화수역 지정과 같은 급진적인 논의들이 오가며 오히려 문화 비전이 한발 늦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며 "물 위로 NLL과 맞닿아 있는 백령도에서 문화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인천문화재단이 벌인 백령도 평화예술 프로젝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에서 국내외 작가들이 머물며 창작 활동을 벌였다. 2014년부터 4년간 중단됐다가 지난해 다시 재개됐다. 그는 "인천은 연평도 포격사건을 계기로 눈앞으로 날아 들어오는 포탄, 실질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북이 왜 긴장을 늦추고 화해와 협력을 해야 하고 인천이 남북 교류에 앞장서야 하는지를 자각했다"고 덧붙였다. 인천에서는 평화가 결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손동혁 팀장은 1987년 인하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인천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망한 '공학도'였지만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노래패를 하며 문화 예술 분야에 눈을 떴다. 교실 바깥 현실에 매달리느라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1995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기획국장을 맡아 본격적인 문화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00년 소위 대우자동차 사태 때 노동자 조직에 깊숙이 관여했다가 경찰에 긴급체포되는 곤경을 겪기도 했다. #'문화의 섬…' 의제가 눈에 띈다백령도,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는게 핵심레지던스 시설 만들어 국제적 축제 열것 인천의 문화 예술계에 그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002년 인천민예총 사무처장을 맡으면서다.손동혁 팀장은 "선배들의 제안을 받아 민예총 사무처장을 맡게 됐는데, 예술가들의 활동 모임이라고 해서 와 봤더니 10평 남짓한 허름한 사무실에 전에 있던 미용실 간판조차 떼지 않고 있어 사람들이 '미용실 하냐'고 물어올 정도였다"며 "그럴듯한 간판을 만들고,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을 만들었고, 그림도 팔고, 인천시에는 단체에 필요한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닌 문화 정책 자문 역할을 하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인천문화재단 설립 필요성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공공기관의 심사·집행·자문 위원으로 활동한 이력만 수십 가지에 달한다. 2007년에는 '시민들이 미디어 읽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안영상미디어센터 초대 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예술·미디어 분야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며 더 많은 예술인들이 맘껏 활동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민들이 예술을 더 가깝게 느끼고 참여할 수 있도록 고민하겠다고 했다.인하대에서 문화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손동혁 팀장은 "인천은 세계적인 도시와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천은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국제도시였다. 지금도 우리가 중앙이라고 말하는 서울을 등지고 서면 다른 나라가 보인다. 다른 나라와 경쟁해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며 "특히 인천이 가진 문화적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해 동아시아의 다른 도시들과도 협력할 수 있어야 하며 남북교류 문화 사업 역시 접경 지역인 강원도, 경기도와 서로 연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손동혁 팀장은?▲ 강원도 철원 출생▲ 1987년 3월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 입학▲ 1995년 11월~1996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기획국장▲ 1997년~2001년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 대표▲ 2002년 1월~2006년 1월 인천민예총 사무처장▲ 2007년 4월~2011년 12월 주안영상미디어센터 초대 소장▲ 2010년 5월~2011년 12월 한국영상미디어센터협의회 초대 대표▲ 2012년 2월~현재 인천문화재단 근무▲ 2010년~현재 인천알리앙스 프랑세즈-인천프랑스문화원 운영위원회 위원손동혁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천은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국제도시였다. 지금도 우리가 중앙이라고 말하는 서울을 등지고 서면 다른 나라가 보인다. 다른 나라와 경쟁해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9-02-26 윤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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