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이율기 인천시컬링경기연맹·장애인컬링협회 회장

돈 없는 市 대신 후원기업 직접 발굴최초 민·관 장애인체육 실업팀 창단선인중 동계체전 金 획득 밑거름 역할선수 경력 아들 덕에 빙상종목과 인연장애인 컬링 베이징선 인천도 노려볼만인천엔 고교팀 없어 제도 뒷받침 절실#인천시장애인체육회 휠체어컬링팀이 2016년 11월 25일 인천교통공사 대회의실에서 창단식을 갖고 출범을 알렸다. 전국 최초로 민·관이 함께 만든 장애인체육 실업팀이었다. 2015년 대한장애인체육회는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에 맞춰 관련 종목 실업팀 창단 지원안을 발표했다. 지자체와 향후 3년 동안 실업팀 운영 예산을 1대1로 매칭 지원한다는 제안이었다.2014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지어진 선학국제빙상경기장으로 인해 동계 종목 발전의 주춧돌이 놓인 상황이었지만,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인천시 입장에서는 이 제안을 수용하지 못했다.이때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가 나서서 후원 기업 4곳을 찾았고, 이를 통해 전국 최초로 민간이 지원한 장애인체육 실업팀을 창단할 수 있었다.#인천 선인중 컬링팀은 2017년 1월 25일 이천훈련원 컬링경기장에서 열린 제98회 전국 동계체육대회 컬링 남중부 결승에서 서울 신구중을 11-3으로 완파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천 컬링 사상 처음으로 동계체전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선인중 컬링이 당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며 의미를 더했다. 정규 수업을 마치고 방과 후를 활용한 훈련을 통해 동계체전 금메달을 획득한 데에는 인천시컬링경기연맹의 지원과 지도자들의 헌신적 지도가 크게 작용했다고 지역 체육계는 분석했다.인천 컬링사(史)를 새로 쓴 사건들이 몇 년 사이에 벌어졌다. 그 중심에는 이율기(58)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 겸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 회장이 있었다.컬링 여자 국가대표팀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어느 때보다 국내에서 컬링에 대한 인기가 치솟고 있는 가운데, 이율기 회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 26일 오후 선학국제빙상경기장 지하에 위치한 컬링경기장을 찾았다.코멕스전자(주) 대표이기도 한 이 회장은 이날 오후 6시께 컬링장을 찾아 훈련 중인 지역 선수들을 챙기고, 경기장을 꼼꼼히 살폈다.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컬링 지원단장도 맡고 있는 터라 다음 달 9일 개막하는 평창 동계패럴림픽을 앞두고 방한해 선학컬링장에서 훈련할 캐나다와 영국 등 해외 선수들을 위해 시장애인컬링협회 임원들과 경기장을 살핀 것이다. 문제가 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관계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야 인터뷰를 위해 이 회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이 회장은 "동계패럴림픽에 출전하는 캐나다 컬링 대표 선수들이 3월 3일 이 곳을 찾을 예정인데, 올 겨울 추위에 수도관이 동파하면서 거기서 샌 물 일부가 경기장으로 흘러든 것 같다"면서 "일반 빙상장 보다 컬링장은 빙판의 수평도가 중요하다. 머리카락 하나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물이 샌 부분에 대해 조치가 필요한 상태"라고 설명했다.이내 전날 막을 내린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화제를 옮겼다."지난 14일에 열린 우리 여자 선수들과 중국의 예선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봤습니다. 당시 경기에서 우리가 대승을 거뒀죠. 그리고 우리 승리에 환호하는 관중의 모습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이 회장은 우리 컬링 선수단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온 국민이 컬링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단다."2003년부터 한국초등학교 빙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았어요. 제가 연맹 회장으로 있을 당시 국내 초교 빙상 무대에 김연아, 이상화, 모태범을 비롯해 쇼트트랙의 곽윤기 등이 있었어요. 이 선수들이 성장해서 출전한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세계 최초로 빙상 그랜드슬램(피겨,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등 빙상 전 종목에서 금메달 획득)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당시 박용성 대한체육회장과 김연아를 전담했던 브라이언 오서 코치 등과 기분 좋게 축하주를 나눴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가운데, 컬링이 이번 올림픽을 통해 전 국민의 스포츠로 부상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제가 맡으면 잘 된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웃음)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으며, 기업가인 이 회장이 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배경이 궁금했다.이 회장은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빙상 종목 선수로 활동했다"면서 "동계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지만, 중학교 진학하면서 운동은 그만뒀고 그 인연으로 1997년에 인천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을 맡았다"고 설명했다.이어서 한국초등학교 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2011년 인천시컬링경기연맹에 이어 2015년부터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컬링 지원단장도 맡고 있는 이 회장은 최근 대표 선수들이 훈련하고 있는 이천 훈련원을 찾아 개당 50만원에 달하는 욕창 방지 방석 5개를 선수들에게 전달하며 격려했다. 동계패럴림픽까지 끝나면 지역 선수들에 지원을 집중할 예정이다. 그는 "국내 컬링 역사가 짧기 때문에 컬링을 경험한 사람들이 드물고, 그만큼 좋은 지도자가 많지 않다"면서 "현재 좋은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올림픽과 패럴림픽에 투입된 상황이기 때문에 대회 후 좋은 지도자를 찾아서 선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이 회장은 인천의 비장애인 선수가 태극마크 달기까진 시간이 필요하며, 장애인 컬링은 2022년 베이징 패릴림픽을 노려볼 만 하다고 분석했다."컬링은 네 선수의 고른 실력과 호흡이 중요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은 의성여중 재학 때부터 고교, 실업팀까지 12년 넘게 호흡을 맞춘 선수들입니다. 현재 선인중(남)과 석정중(여) 선수들이 훈련 중인데, 지역 고교에 컬링팀이 없기 때문에 이 선수들이 고교 진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선수단 지원은 연맹에서 할 수 있는데, 교육 관계 기관의 제도적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의성 마늘 소녀'가 나오긴 힘든 상황입니다. 장애인 팀의 경우는 좋은 지도자를 영입해 지역 실업팀 위주로 훈련을 한다면 다가올 올림픽에 나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이 회장이 보는 컬링의 매력은 근력과 지구력 등 힘을 앞세운 여타 운동과 달리 전략 종목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서양에선 컬링을 '빙판 위 체스'로 칭하기도 한다."바둑, 당구, 볼링 등이 합쳐진 컬링은 한국 사람들에게 딱 맞는 종목이라고 생각됩니다. 힘을 쓰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노인과 장애인 등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소통하며 즐길 수 있는 종목도 컬링 뿐이지요.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컬링을 했지 몸으로 하는 컬링을 한 것은 아닙니다. 북유럽 현지에서 보면 선수들처럼 딜리버리 하지 않고 편하게 공 굴리듯이 딜리버리 합니다. 쉽게 접근하면 매우 쉬운 경기입니다. 앞으로 지역의 컬링 동호인 수를 늘려서 컬링의 저변을 넓히는데 더욱 힘을 쏟을 것입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율기 회장은?경북 청도 태생인 그는 대구 달성고와 건국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코리아 메카트로닉스를 설립했으며 2007년 코멕스전자(주)로 법인 전환 후 대표로 재임 중이다. 스포츠계에는 1997년 인천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에 부임하면서 첫 발을 디뎠다. 2003년에는 대한빙상경기연맹 산하 한국초등학교 빙상경기연맹 회장으로 부임했다. 12년 동안 연맹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2011년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과 2015년에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 회장으로 취임해 인천지역 양대 컬링 단체를 이끌고 있다.인천 컬링사(史)를 새로 쓰는데 중심에 섰던 이율기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 겸 시장애인컬링협회장은 지난 26일 인천 선학컬링장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경기에 대한 소회와 함께 "지역 컬링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율기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 겸 시장애인컬링협회장은 지난 26일 오후 인천 선학컬링장에서 훈련 중인 석정중학교 선수들에게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처럼 열심히 연습한다면 우리도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말하며 응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2-27 김영준

[인터뷰… 공감]8번째 지방선거 앞둔 우근학 경기도선관위 상임위원

1987 개헌 투표 시작으로 30여년 외길관리만 하던 예전엔 불법 심했지만…선관위 권한 강화·사전투표로 진일보무탈했던 '조기 대선' 등 기억에 남아안정적 시스템 입증 자부심 가질만해경기도 투표율 높지않아 어깨 무거워'처음'이란 누구에게나 설레고 잊지 못할 순간이다. 상인에겐 첫 손님, 배우에겐 첫 무대, 기자에겐 첫 기사의 기억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직원들에게는 처음으로 관리한 '첫 선거(투표)'가 그렇다. 일평생 선관위에서 일한 우근학(58) 경기도선관위 상임위원에게도 첫 선거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귀중한 조각이다.1986년 입사한 그의 첫 선거(투표)는 대통령 직선제를 결정한 1987년 10월 27일 9차 개헌 국민투표였다(투표는 찬성·반대 의사 표시를 묻는 것, 선거는 투표를 통해 공직자를 결정하는 절차로 사전적 의미가 다르다). 두달 뒤인 12월 16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대통령을 뽑은 13대 대통령 선거는 그가 관리한 두 번째 선거였다. 7번의 대통령 선거와 8번의 국회의원 총선거, 7번의 지방선거, 40여차례의 재보궐선거. 선관위 막내 직원이었던 그가 1급 상임위원이 될 때까지 30년 넘게 치러온 수많은 선거는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이기도 했다.2018년 6월 13일 우 상임위원은 경기도선관위에서 8번째 지방선거를 치르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가 이뤄지면 31년 만에 2번째 국민투표를 지켜보게 된다. 특히 올해는 대한민국에서 선거가 실시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방선거를 4개월여 앞둔 지난 8일 경기도선관위에서 우 상임위원을 만난 이유다.# '1987'에서 '2018'까지"격세지감이죠." 대한민국 선거의 산 증인으로 꼽히는 우 상임위원에게 30년 전과 지금의 선거를 비교해보면 어떻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 상임위원의 첫 선거는 혼란스러웠다. 9차 개헌 국민투표에 이어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는 16년 만에 부활된 대통령 직선제였다. 선거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만큼 과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는 오프라인 선거 운동만 있었으니까 후보들 간 청중들을 동원하는 형태의 '세 대결'이 어마어마했다. 몸싸움도 벌어지고 버스가 전복되기까지 했다. 유권자들도 (불법 선거 등에 대해) 죄의식을 덜 느꼈다"고 첫 선거 분위기를 회상한 우 상임위원은 "그때는 지금처럼 선관위에 감시·단속 권한이 없었다. 정말 선거를 '단순 관리'하는 일만 했었다. 제재가 미약하다보니 후보자도, 유권자들의 긴장도도 덜했다"고 말했다.선거를 치르면 치를수록 선관위의 권한은 강화됐고 선거판에서도 금품과 청중 동원 등이 서서히 사라졌다. 1989년 선관위에서 선거범죄에 대한 단속 업무를 처음 실시하게 됐고, 1997년에서야 실질적인 단속 권한이 주어졌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든 사전에 투표를 해도 엄정하게 관리될 정도로 선거 분위기와 시스템이 진일보했다는 게 '선거 관리 외길'을 걸어온 우 상임위원의 자부심이다.수십 차례 관리했던 선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거를 질문하니 2014년 지방선거와 지난해 조기대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 상임위원은 "2014년 지방선거는 사전투표가 전국 단위로는 처음 실시됐던 선거다. 수원시민이 부산에 가서 수원시장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이런 시스템은 없다. 도입 전에는 제대로 관리가 될 지 의문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당연히 관리자 입장에선 긴장도, 걱정도 많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 때는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날까 직원들과 확인하고, 또 수없이 점검하며 고생을 정말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고 털어놨다.역사상 처음 실시된 조기 대선은 선거 전문가인 그 역시 처음 경험해보는 선거였다. 탄핵 후 사회가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던 와중에도 '장미 대선'은 많은 유권자의 관심을 받으며 무탈하게 치러졌다. 민주화의 봄이 오며 혼란스러운 첫 선거를 치렀던 만큼 촛불혁명 후 무리없이 이뤄진 조기 대선이 인상에 깊이 남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우리나라는 3권 분립 국가잖아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의결했고, 사법부의 한 축인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을 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역시 헌법 기관인 선관위 관리 하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갖고 있는 국가가 몇이나 될까요? 그야말로 시스템으로 빠르게 안정됐습니다. 상당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6월 13일'그는 이제 또 하나의 선거를 준비 중이다. 전국에서 가장 유권자도 많고, 후보자도 많은데다 지역 특색도 다양해 경기도는 가장 관리하기 까다로운 지역으로 꼽힌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며 예측하기 쉽지 않은, 위법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선거 범죄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도의 투표율은 결코 높은 편이 아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둔 우 상임위원의 어깨는 가볍지 않다.우 상임위원은 "다른 건 몰라도 지연, 혈연, 학연에 얽매이는 선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방선거의 투표용지는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비례대표 광역의원, 비례대표 기초의원까지 모두 7장이다. 6·13 지방선거와 더불어 국민 개헌투표까지 동시에 실시하는 게 확정되면 투표용지만 무려 8장이 된다. 투표용지가 많을수록 후보와 공약을 꼼꼼히 살피지 않고 한 정당에만 몰아주는, 이른바 '줄투표'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게 그가 우려하는 점이다. 우 상임위원은 "지방선거는 도선관위 입장에서 가장 관리하기 어려운 선거지만 주민들 입장에선 우리 동네를 바꿀, 내 일상을 바꿀 풀뿌리 일꾼을 뽑는 가장 중요한 선거"라며 "주민이 주인이 되는 '동네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유권자들도 후보와 공약을 세세하게 살펴 한 표를 던져야 한다. 선관위도 유권자들의 선거 편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6월 13일에는 그 역시 한 명의 유권자로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어떤 후보를 뽑겠냐는 물음에 "정책과 공약을 꼼꼼하게 본 다음 결정하겠다"며 빙긋 웃었다. "선거 당일에는 선관위가 아무래도 바쁘고 긴장돼서요. 저도 사전투표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바쁘고 시간 없으셔도 어디서든 사전투표, 아시죠?"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우근학 상임위원은?▲1959년 용인시 출생▲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도시 및 지방행정학 석사▲1978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 생활 시작, 1986년 선거관리위원회 입사▲2013~2014년 중앙선관위 기획국장▲2015년 경기도선관위 사무처장▲2016~2017년 충청남도선관위 상임위원▲2018년 1월 ~ 경기도선관위 상임위원▲2010년 근정포장우근학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후보와 공약을 꼼꼼히 살펴 주민이 주인이 되는 '동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소중한 한표를 행사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8-02-20 강기정

[인터뷰… 공감]'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 운영' 남인천중·고 윤국진 교장

배움에 한 맺힌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인천에는 '만학도(晩學徒)'들을 위한 학교는 없었을 것이다. 신포동에서 '메리야스' 장사를 하던 청년은 그 옛날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던 '공순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를 지키고 있다.인천 유일의 학력인증 평생학습 기관 '남인천중·고등학교' 윤국진(73) 교장은 "단 1명의 만학도가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 최초 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을 개설해 배움에 목말랐던 만학도의 꿈을 이뤄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월 31일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국민훈장에 준하는 국민포장은 각계각층에서 묵묵히 국민을 위해 헌신한 유공자에 수여하는 포상으로 대통령표창보다 한 단계 높다.윤 교장은 해방을 한 해 앞둔 1945년 충북 괴산의 농촌에서 10마지기의 논과 2천 평의 밭을 가진 부농의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남부러울 것 없던 그의 유년기는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산산조각 났다. 제대하고 돌아온 형은 집과 땅을 몰래 팔아치웠고 윤 교장은 어머니, 누나와 함께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학교는 다녔는데 점심을 싸가지 못하니까 물로 배를 채우고, 결국에는 수업료를 내지도 못해 국민학교 졸업장도 따지 못했어요. 누나와 산에 가서 땔감용 솔방울을 따다가 8㎞ 떨어진 증평에 팔면서 끼니를 때웠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도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리셔서 '왜 어린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나' 하늘을 원망했어요."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먹고 사는 게 우선이었다. 보리쌀과 풀죽을 쑤어먹으며 살았던 그는 어머니를 시집간 누나의 집에 맡기고 13살의 나이에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 인천에 먼저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는 동네 형이 고향에 내려와서는 "인천에 오면 취직도 시켜주고 먹고 살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함께 인천에 가자고 했던 형은 연락을 끊고 사라졌고, 먼 친척에게서 150환을 얻어 인천으로 떠났다."기차표를 사려니까 돈이 부족해 영등포행 표를 산 뒤 인천까지 무임승차로 가다가 역무원에게 걸렸어요. 이를 딱하게 여긴 동인천역 역무원이 하루를 재워주고 역전에서 신문보급소를 하는 지인을 소개해줘 그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지요."그 뒤로 윤 교장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과자공장, 구두닦이, 도넛가게 점원,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돈 되는 일은 다 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배움을 잊고 살던 그에게 지나던 대학생이 건넨 말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돈 벌어서 한다는 놈치고 공부하는 놈을 못 봤다"는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 윤 교장은 대학생 형이 소개해준 독학 교과서인 '서울강의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넛가게에서 손님으로 만난 고학생을 따라 경동사거리의 한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고아가 된 학생, 섬에서 온 학생,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꿈을 키우는 소년들이었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윤 교장을 우연히 본 당시 영화중고등학교(현 대건고등학교) 교사가 야간학부로 오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이어가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하니 23살이 됐고 군 입대를 하게 됐다.제대 후 아내를 만나 결혼한 그는 가난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불우청소년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다."직장을 다니기는 했는데 월급으로는 턱도 없으니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70년 당시 코오롱에서 나오던 '메리야스'인 '88나이롱'을 구로동에서 가져다 신포시장에서 팔았죠. 백화점 물건과 차이는 없는데 가격이 싸니 잘 팔렸었죠." 10년 뒤 그는 '현대의류백화점'이라는 번듯한 의류판매업소를 열어 제법 큰 돈을 벌었다.윤 교장은 1984년 7월 중구 선린동 인천역 앞에 있는 2층 규모 연립주택을 학교로 개조해 '남인천새마을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오랜 꿈을 이룬 순간이다. 새마을금고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인수해 '공순이'라고 불리던 근로 청소년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4개의 교실과 기숙사를 만들고 10명의 교사를 채용했다. 사재를 털어 타자기와 실습기자재를 사들였고 은행 대출을 받아 학교를 운영했다.문제는 근로 청소년들의 졸업장이었다. 이들은 학교를 수료해도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해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중·고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당시 정권 실세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종로 사무실을 막무가내로 찾아갔어요. 비슷한 처지인 부산부경보건고교 권성태 교장과 함께 우리 같은 사회교육시설도 학력을 인정 해달라고 요청했죠. 결국, 대통령 공약사항에 포함됐고 1986년부터는 검정고시 없이도 학력인정을 받는 학교로 탈바꿈 할 수 있었어요."학생 수가 점차 늘어나 선린동 연립주택으로는 800여 명의 학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용현동의 쇼핑센터를 빌려 학교로 사용하다가 1990년 남구 학익동 지금의 학교 부지(6천890㎡)로 이전하게 됐다.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한 뒤 국유지를 매입해 복지관과 학교 건물을 지었다. 복지법인 전 재산은 사회에 환원했다. 이어 문교부로부터 전 과목 학력인정을 받아 교명을 남인여자상업고등학교 개명했다. 학교가 점차 자리 잡자 그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장년층에게도 졸업장을 딸 기회를 주고자 했다. 여자라서 또는 막내라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무학(無學)의 한을 풀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만학도의 꿈을 이룰 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은 1999년 개설됐다. 인천 최초의 성인 대상 학력인증 학교였다."1950~60년대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못 배운 사람이 많은데 부끄러워서 이를 밝히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내 또래 어른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자는 생각에 성인반을 개설하게 됐죠."1년 3학기제의 단기 코스로 교육청 인가를 받아 2년 과정의 중·고교반을 개설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5천700명의 성인 학생을 배출해 이들이 제2의 인생을 살도록 도왔다. 특히, 올해부터는 인천대학교 평생교육원과의 업무협약 체결로 남인천중고등학교 졸업생이 인천대에서 전문학사 취득과 학사과정 편입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윤 교장은 건강을 유독 챙긴다. 자신이 없으면 학교가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인 학교의 인가를 윤 교장 개인 명의로 받았고, 이는 승계가 되지 않기 때문에 윤 교장이 곧 학교를 의미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5번이나 완주할 정도로 운동광인 그는 관교동 집에서 학익동까지 매일 걸어서 출퇴근한다."인천에 중·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는 학교를 운영해야 합니다. 이번에 받은 국민포장은 저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배움의 한을 풀어준 우리 학교, 학교 구성원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록수' 정신으로 더 정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죠."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윤국진 교장은?-약력▲1945년 충북 괴산 출생▲1957년 인천으로 이주▲1970년 신포시장에서 내의가게 운영▲1980~2010년 현대의류백화점 운영▲1984년 남인천새마을실업학교 설립(교장 취임)▲1988년 사회복지법인 백암한마음봉사회 설립(대표이사 취임)▲1991년 인천종합사회복지관 초대관장▲1991년 백암어린이집 초대원장▲2000년~ 남인천중고등학교 교장-상훈▲1988년 인천시민상(사회봉사부문) 수상▲1990년 인천교육대상 수상▲2018년 대한민국 국민포장 수상인천 유일의 학력인정 평생학습 기관인 '남인천중·고등학교' 윤국진 교장이 인천시 남구 학익동 학교 현관에서 "단 1명의 만학도가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며 학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1984년 7월 20일 윤국진 교장이 부인 이혜숙 여사와 함께 인천 중구 선린동 남인천새마을실업고등학교 현판을 달고 있다. /윤국진 교장 제공인천 중구 선린동 연립주택을 개조해 설립한 학교 전경. /윤국진 교장 제공

2018-02-13 김민재

[인터뷰… 공감]야구 인프라 전략 발표 류준열 SK 와이번스 대표이사

프로야구 SK 와이번스는 2018년 새해 들어서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을 발표했다.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SK 구단이 가진 자산 및 역량에 연고지인 인천 지역의 기업과 관공서, 각종 단체들의 참여를 결합해 지역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사회·경제적 가치 창출을 하려는 것이다.2007년 당시 막내 구단이었던 SK는 '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로 바람을 일으켰다.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인 '스포테인먼트'는 구단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당시 타 구단들이 무형의 홍보 효과에만 의존하던 상황에서 SK는 팬 중심(Fan first) 사고를 기반으로 혁신에 나섰다. SK의 스포테인먼트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의 제공에서 출발했다. SK는 그해 창단 첫 우승도 달성했다. 이후 스포테인먼트는 관객들의 관람시설 개선, 경기장의 체험 및 스토리 기반의 복합 여가 공간 구축, 프로 구단의 사회적 책임 이행에 이르기까지 진화해왔다올해 구단 마케팅 중심에도 기업사회공헌(CSR) 활동을 두었다. 기존 CSR 활동에 연고 지역을 결합시켜 공익과 함께 보다 인천과 팬들에게 다가서겠다는 의지를 내세웠다.'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과 진화하는 구단 마케팅,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류준열(54) SK 와이번스 대표이사를 최근 집무실에서 만났다. 류 대표이사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 전문가이기도 하다.류 대표이사는 새 구단 점퍼를 입고 취재진을 맞았다. 아직 공식 발표 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 점퍼가 첫 화제로 올랐다. 류 대표이사는 "선수들이 입고 싶은 옷이 아닌 팬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디자이너를 위촉해 새롭게 디자인했다"며 "야구장에서만 입는 옷이 아닌 생활 속에서도 즐겨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빨간색을 줄였다"고 설명했다.이내 화제를 바꿔서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에 대한 류 대표이사의 설명을 청했다."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구단에서 진행한 20회에 달하는 CSR 활동들 중 인천 서구 지역 발달 장애 아동들 15~20명을 대상으로 20차례에 걸쳐 야구 교실을 진행한 바 있는데, 구단에선 코치를 파견했습니다. 지역에선 발달 장애 아동들을 추천해줬고, 서구 지역에 기반을 둔 SK 석유화학은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펀딩)을 보태면서 3자가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소외계층 대상의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이처럼 구단이 가진 야구 인프라(선수와 지도자, 야구 경기장, 응원단 등)를 지역 사회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는 것이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의 핵심입니다. 이전 CSR 활동이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추진된 프로젝트였다면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지역 기업과 행정기관, 사회복지 관련 기관 등에 항시 열어놓고 활용할 의향을 얘기해 달라는 것입니다."류 대표이사는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의 아이디어를 미국에서 얻었단다."지난해 미국 구단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워싱턴 내셔널스의 CSR 총괄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커뮤니티 플랫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죠. 워싱턴 DC는 미국 내에서 노숙인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이 담당자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을 플랫폼화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단편적으로 진행되는 CSR 활동 보다는 개방해서 플랫폼화 하면 많은 아이디어와 함께 여러 주체들의 참여도 이끌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시너지 효과도 클 것이라는 확신도 있습니다."'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야구장을 찾는 팬과 인천시민에게 행복한 기억과 스토리를 만들어주자는 측면에서 스포테인먼트와도 맞닿아 있었다. 류 대표이사는 "지금까지 진행한 CSR 활동도 그렇고, 야구장을 찾은 고객에게 즐거운 추억과 스토리를 전해 주려는 지향점은 같다"면서 "하지만, 스포테인먼트가 우리가 기획해서 보여주고 팬들이나 시민은 그저 즐기는 이분법적 관계였다면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함께 체험하는 형태여서 스토리의 강도는 훨씬 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올해로 부임 3년 차를 맞는 류 대표이사가 꼽는 부임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구단의 CSR 활동 중 하나였던 '희망 더하기 이벤트'이다."2016년 처음 시작했을 때 실종(10년 이상)된 자식을 마음에 품은 부모 5분을 찾아 뵈었고, 그 분들의 마음을 영상으로 담아서 홈 경기 당일 빅보드를 통해 보여줬습니다. 당시 관중과 선수 모두 부모님들의 염원을 느끼면서 뭉클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프로 야구단이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했던 때인데,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겠구나'하는 결심을 하게 만든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벤트를 하면 선수들이 귀찮아하진 않을까'하는 우려도 했었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2017년에는 실종아동에 머물지 않고 입양아동으로 확대했고, 몇몇 구단도 동참해줬습니다. 여타 종목의 스포츠 스타들도 뜻을 같이했고요. 대상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올해도 '희망 더하기'는 이어집니다."프로구단으로서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구단의 성적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류 대표이사도 공감을 표시했다."성적이 좋으면 관중이 늘죠. 하지만 성적만 좋다고 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는 통쾌함과 함께 4시간 정도 야구장에 있으면서 보고, 먹고, 상품을 사고, 체험하는 모든 것들이 누적되어서 스토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적과 관중, 두 부분 모두 고민하고 있습니다. 트레이 힐만 감독과 염경엽 단장이 올해 두 번째 시즌을 맞게 되는데, 두 분 모두 지난해 보다는 나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고민 많이 하실 겁니다. 지난해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올해에는 홈에서 포스트시즌을 치르자는 목표를 세워놓았습니다. 우승 목표는 앞으로 2~3년 내로 잡았습니다."우승을 하고, 좋은 성적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SK가 택한 부분은 '우수한 코치'이다. SK는 코치 육성 시스템을 두고 있다.류 대표이사는 "우수한 선수가 나오기 위해선 코치가 유능해야 한다"면서 "지난해부터 코치들은 미국 등 외부에서 진행되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접하게 하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염경엽 단장이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끝으로 류 대표이사는 시즌 개막을 기다리고 있는 야구팬들과 시민에게 자신감 넘치고 희망에 찬 메시지를 전했다. "올해도 홈런 군단의 이미지를 가져갈 것입니다. 여기에 김광현 등 좋은 투수들도 가세하기 때문에 지난해보다 더욱 강한 팀이 될 것이고, 그만큼 경기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수와 팬이 함께 만드는 이벤트들도 많이 만들고, 팬들이 주체가 되는 야구장을 만들어서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릴 것입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류준열 대표이사는?전북 전주 태생인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 학사,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SK 텔레콤 입사 후 2010년 전략기획그룹장, 2011년 미국 플랫폼 사업본부장, 2012년 서비스탑 대표이사, 2015년 성장전략실 실장을 역임했으며 2016년 1월 SK 와이번스 대표이사로 부임했다.류준열 대표이사는 야구팬과 시민들에게 "야구장에 많이 오셔서 즐겨주시면 좋겠다"면서 "관중이 주체가 되는 야구장을 만들어서 경기장을 찾은 모든 분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리겠다"고 다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류준열 SK 와이번스 대표이사가 올 시즌을 앞두고 새롭게 선보인 구단 점퍼를 입고 인터뷰를 했다. 류 대표이사는 "프로야구단은 연고 지역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구단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것이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생각했다.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에 대한 각계각층의 참여를 통해 함께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1-30 김영준

[인터뷰… 공감]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윤수천 작가

대부분 '영감' 버스에서 얻어매일 눈 뜨는 게 너무 신나시간 많은 노인에겐 최고의 놀잇감내가 글 쓰는 사람인 건 행운할아버지는 바람이 매섭게 부는 한겨울에도 버스 타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버스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떠오르는 공상을 수집하는 일이,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은 '창작여행'이라 즐겁기만 하단다. 그것이 평생 80여 권의 가슴 따뜻한 동화를 아이들에게 선물한 거장의 숨겨둔 비결이리라.한국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어린이들의 친구인 윤수천 작가는 인터뷰가 약속된 날(지난 17일)도 버스를 탔다. 추운 날씨에 건강을 걱정했더니 "나는 버스 타는 일이 정말 즐거워요. 아무 일이 없어도 버스를 타고 세상 한바퀴를 돌기도 해요. 혼자 가만히 앉아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 버스만큼 좋은 게 없지요. 내 동화의 영감은 대부분 버스에서 나왔어요"라며 맑게 웃었다.윤수천 작가는 올해로 76세다.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윤 작가에게 나이는 정말 숫자일 뿐이다. 쉼없는 작품 활동이 이를 방증한다. 그는 지금도 매일 글을 쓴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너무 신이 납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무슨 글을 쓸까 고민하는 일이 설레거든요. 나같이 시간 많은 노인은 놀잇감이 필요해요. 혼자서도 잘 놀수 있는 일 중에 글 만한 것이 없어요. 나는 내가 글쓰는 사람인 것이 몹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사실 윤 작가의 삶은 '글' 쓰는 것이 좋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님이 나를 너무 귀여워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어요. 심지어 물가가 위험하다며 가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지금도 수영을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너무 귀하게만 키우셔서 오히려 모험에 대한 갈증이 강했던 것 같아요. 행동으로 옮기질 못하니,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그걸 글로 표현하는 게 즐거웠어요. 문학은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윤 작가에게 글은 가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케 해주는 친구가 됐고, 나이가 들수록 재능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중학교 작문시간에 내가 쓴 작품을 가지고 선생님이 한 시간 동안 수업을 한 적도 있어요. 고등학교 때는 전국문예대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구요. 그때부터 평생 글쓰는 일은 놓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 같아요. 비록 밥벌이로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글 쓰는 일을 놓아본 적은 없습니다."당시 체신국(지금의 우정청)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국방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으로 일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모두 글과 연결돼 있다. "다른 공무원은 승진이 중요한 가치였지만, 나는 승진을 바라지 않았어요. 글쓰는 데 시간을 할애하기에도 바빴으니까요. 국방부 정훈국에 간 것도 내가 흠모하던 소설가 선우휘씨가 정훈장교 출신이어서 막연히 정훈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렇게 10여 년 국방부 본부에서 근무를 했고, 승진하기 싫어서 국방일보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곳에선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한평생 글을 써도 대표작 하나 내기 힘든데,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여섯 작품이 실렸을 만큼 대표작이 많다. 올해에도 그가 2011년에 쓴 '할아버지와 보청기'가 초등학교 4학년 국어활동 교과서에 실린다. 그의 작품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나는 삶이 소설 같지 않았어요. 사납게 살지를 못했어요. 젊었을 때야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워낙에 정을 많이 받고 자라 삶이 동화 같아요. 동화를 써야 하는 게 내 그릇이죠. 나는 아동문학의 궁극적 목표가 희망과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절망이 있어도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희망의 씨앗을 보여줍니다." 그의 동화는 어른이 보아도 가슴 한 구석에 '쿵'하는 울림이 전해진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를 주인공 삼아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잊고 있었던 '속사정'을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할아버지와 보청기만 해도 '소통불가'로 치부해버린 노인의 세계를 아이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로당 앞에서 보청기를 슬그머니 빼 주머니에 넣은 할아버지를 의아해 하던 손자에게 뻥튀기 할아버지가 넌지시 속사정을 말해준다. '할아버지들이 너희처럼 귀가 밝아서 남이 한 말을 제때제때 알아들으면 하루해가 얼마나 길겠니.'그가 애착을 갖는 작품도 그런 유다. 2008년 작 '나쁜 엄마'는 뺑소니로 아버지를 잃고 하루아침에 두 딸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생선장수 엄마를 미워하던 딸 난희가 거친 엄마의 손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며 마음 속의 응어리를 푼다. "동화라는 것이 대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가급적 소외된 아이들을 밖으로 꺼내 따뜻하게 감싸주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편부모 가정에서 어렵게 사는 난희도 그렇고, 뇌성마비 아이가 상상 속에서 고래를 그리는 희망을 노래한 '고래를 그리는 아이'나 몸집이 크고 행동이 굼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고릴라와 세희의 우정을 그린 '내 짝꿍은 고릴라'도 사회의 그늘 속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 그 아이들의 진짜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줬죠."그는 동화의 효용을 어린이에 국한하지 않았다. "어린이가 늘 어린 상태로 있지 않아요. 동화의 주 독자가 어린이지만, 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동화는 어른이 읽어도 유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의 마음 속에도 어린이가 있어요. 동화만이 갖는 전파력이 어른에게도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반영하는데 주저하지 않아요." 살다보면 다 큰 어른도 위로받고 싶다. 작가는 '행복한 지게'를 통해 어리숙한 아들이 나이 든 아버지를 업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는 모습이 우습지만, 아버지가 즐겁고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이 시대 어른들을 다독인다. 오는 3월에 내놓을 신작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봇 가사 도우미가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있는 엄마를 깨우는 '로봇 은희'와 치매 걸린 노모를 등에 업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곧잘 해주던 기차놀이를 하는 아들(가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이 등장하는데 현실에 지친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그의 동화는 가슴 따뜻하게 독자를 안아준다."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동화의 궁극적 목표지만, 시대가 달라지면 꿈을 표현하는 동화의 방식도 달라져야 해요. 옛날의 효와 오늘날의 효가 전혀 다르고, 아이들이 겪는 문제와 그 세계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이웃이라 말하더라도 이제는 전세계가 이웃인 세상이에요. 동화도 시대에 맞게 아이들이 꿈을 찾아갈 수 있는 방향타가 돼줘야 합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넓혀주고 다양한 시각을 많이 보여줘야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관찰해서 그에 맞게 동화를 쓸 생각이에요."동화를 쓰는 일 말고도 그는 글쓰기에 관련된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원 중앙도서관에서 13년째 하고 있는 '행복한 글쓰기'는 물론 기업, 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쓰기 강의 요청이 있으면 나선다. "요즘 시대 사람들이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그만큼 마음 속에 쌓인 것들이 많은 거겠죠. 그 욕구를 표현하는 데 글 만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늘 강의에 나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글을 곁에 두고 있어 행복함을 느낀다고. 글쓰기 위해 사색하고 생각을 다듬는 일이 즐겁다고요.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겠죠." 문득 윤수천 작가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우리 곁에 남아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도 기댈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한 법이다.■윤수천 작가는?-주요 약력- ▲1942년 7월 29일(음력) 충북 영동 출생 ▲1954년 11살 되던 해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 ▲1960년 19세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주최 전국 고교생 한글시 백일장에서 장원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항아리'로 당선 ▲1981년 첫 동화집 '예뻐지는 병원' 출간 ▲199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심사위원 -주요 작품- ▲별에서 온 은실이 ▲행복한 지게 ▲꺼벙이 억수 ▲엄마와 딸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 ▲고래를 그리는 아이 등 동화와 동시 80여 편-수상 내역- ▲소년중앙문학상 '산마을아이' '아침' 우수작 ▲경기도문화상 ▲한국아동문학상 '꽃가게 손님' ▲방정환문학상 '돈키호테 소방관' 등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찬 바람이 매섭게 불던 지난 17일, 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윤수천 동화 작가를 경인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그는 "매일 아침 오늘 무얼 쓸까 고민하는 것이 즐겁고 설렌다"며 소년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2018-01-23 공지영

[인터뷰… 공감]제2여객터미널 개장 앞둔 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제2터미널 개장으로 인천공항은 연간 7천200만명의 여객과 500만t의 화물 처리 능력을 갖추게 돼 명실상부한 동북아 지역 대표 공항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인천공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제2터미널을 포함한 3단계 사업(사업비 4조9천300억 원)을 마치자마자 4단계 사업을 추진한다. 제2터미널을 확장하고, 제4활주로를 조성해 연간 여객 처리 능력을 1억명 수준까지 확대한다. 인천공항은 셀프·자동화 서비스 확대, 첨단 ICT(정보통신기술), AI(인공지능) 등을 공항 곳곳에 적용해 '스마트 리딩(leading) 공항'으로도 거듭나고 있다. 세계공항서비스평가 12연패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보유한 인천공항은 더 높이 비상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인천국제공항공사 정일영 사장은 막바지 제2터미널 개장 준비 상황 점검을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2터미널 현장으로 출근해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며 성공적인 개장을 위해 전력하고 있다. 15일 오후 제2터미널 점검회의를 마치고 나온 정일영 사장을 만나 개장 준비 상황에 대해 들었다. 제2터미널 개장 준비로 바쁜 정 사장을 고려해 미리 질문지를 보내놓고 서면으로도 답변을 들었다. 그는 화장실 다녀올 시간도 없었던지 인터뷰용 사진 촬영 중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뜨기도 했다. 정 사장은 "개항을 위한 준비를 다 마쳤고, 이제는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에 대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제2터미널에 올 때도 일부러 공항철도를 이용했다. 공항 이용객의 입장에서 불편한 부분이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인천공항공사는 지난 2015년 12월 제2터미널 오픈과 관련한 전담조직을 구성하고, 운영·오픈 준비와 관련한 통합관리를 시작했다. 25개 분야 3천 개 세부 추진과제를 도출해 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실제 운영 상황을 가정한 시험운영도 벌여왔다. 그동안 투입된 가상여객만 2만2천 명에 달한다. 가상수하물 7만7천 개, 항공기 7대 등도 시험 운영에 동원됐다. 1만2천여 명에 달하는 운영인력이 새로운 시설과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 관숙화, 이전 준비 등의 작업도 했다. 정 사장은 "마지막까지 고객 혼선 예방 취약 분야, 미비 분야 중심으로 반복훈련과 개선을 지속해서 진행 중"이라며 "오픈 당일부터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제2터미널 개장을 준비하면서 정 사장은 여객 편의 향상을 강조해왔다. 제2터미널은 설계 단계부터 여객을 중심에 두고 시설을 배치했다는 평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가야 하는 교통센터와 여객터미널 간 거리는 59m로, 제1터미널(223m)보다 크게 단축됐다. 제2터미널은 입·출국장을 통합해 대기시간은 줄이고, 대기공간은 3배 가까이 확대했다. 출국 층 중앙에는 셀프체크인(여객이 스스로 탑승권 발급), 셀프백드롭(여객이 직접 수하물 위탁) 기기를 집중 배치한 '출국수속자동화구역'과 여객이 편리하게 민원 처리를 할 수 있도록 '정부기관 통합민원센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환승 관련 시설을 인접 배치한 환승 집적화와 차별화된 환승 편의지역 조성으로 허브공항에 걸맞은 환승 인프라도 구축했다. 양방향 정보안내 시스템, 안내로봇 운영, 최신형 원형보안검색기 설치 등 스마트기술을 도입한 제2터미널은 스마트공항으로 거듭났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외에 상업시설 중앙 집중 배치, 상설문화공간 조성, 국내외 대표적 미술품 배치, 전망대·홍보관 운영 등으로 여객이 편리하고 즐겁게 공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제2터미널 개장 준비에 전력해 온 정일영 사장은 세세한 부분까지 꿰고 있었다. 이날도 기자에게 제2터미널에 입점한 '쉑쉑버거'를 맛보고 가라고 했다. 제2터미널과 교통센터에는 미국 프리미엄 버거인 '쉑쉑버거(쉐이크쉑·SHAKE SHACK)'뿐만 아니라 한국 팔도의 맛집으로 구성된 푸드코트 '한식미담길' 등이 조성됐다. 그는 제2터미널 앞에 심어진 장송(長松) 등을 언급하며 "터미널 자체가 오고 싶은 곳이 될 것이다. 봄이 되면 터미널 앞길이 데이트코스로도 큰 인기가 있을 것 같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실제로 제2터미널이 정식 개장하기 전인 이날도 터미널을 구경하기 위해 온 시민이 많았다.제2터미널은 해외로 떠나거나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환승객 등이 잠시 거쳐 가는 장소를 넘어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공항공사는 제2터미널을 차별화된 문화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 '아트포트(Art Port)'로 조성했다.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 프랑스), 율리어스 포프(Julius Popp, 독일), 김병주, 지니 서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예술작품 16종 33개를 배치하기도 했다. 정 사장은 "연간 6천 회가 넘는 문화공연을 실시해 인천공항에 머무르는 모든 시간이 즐거움과 감동으로 가득하도록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특히 터미널 내 국내외 대표작가가 한국의 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을 배치해 국내외 여객에게 품격 있고 아름다운 한국의 이미지를 각인하고 우리 국민의 문화적 향유기회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천공항이지만,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복수(2개) 터미널 운영에 따라 여객이 혼선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은 걱정되는 부분이다. 정 사장도 터미널을 착각하는 '오도착' 승객이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제2터미널로 이전하는 대한항공, 델타, 에어프랑스, KLM 등 4개 항공사와 함께 예방책 마련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항공사와 함께 문자메시지, 이티켓(e-ticket)을 통해 여객에게 이용 터미널을 알리는 사전 안내문을 발송한다. 고속도로와 공항 안내표지 체계 정비, 외국인 여객을 위한 해외 온라인 홍보, 대중교통 이용 안내 등도 진행하고 있다. 정 사장은 특히 탑승권 판매 항공사와 실제 항공기 운항 항공사가 다른 '공동운항(코드셰어)'의 경우 여객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정 사장은 "여객 오도착을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체계적으로 홍보와 안내를 하는 등 다각적인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객들의 인식이다. 인천공항 이용객은 출발 전에 반드시 본인이 가야 할 터미널을 확인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인천공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승객과 화물을 집결하고 분산시키는 '항공네트워크 중심 공항'으로서 허브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도 하고 있다. 항공네트워크를 동북아시아 공항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고, 복합리조트와 골프장 등 새로운 여객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공항복합도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항공정비(MRO) 특화단지 유치, 해외공항 사업 확대 등 신성장 동력 발굴에도 매진하고 있다. 정 사장은 "중국, 일본 등 경쟁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인구나 경제 규모가 제한돼 직항수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허브 경쟁력 확보를 통해서 공항의 성장이 가능하다"며 "주변국의 공항 투자 확대 등 허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다양한 노선'과 '고품질 서비스 제공' 등 차별화 전략으로 동북아와 제3국 간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는 허브공항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정 사장은 2023년까지 4단계 건설사업을 마무리해 '글로벌 메가 허브'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정 사장은 2020년까지 110개 이상 취항 항공사 유치, 1천만 명 이상 환승객 유치, 300만t 수준으로 물동량 확대, 인프라 확충 등을 통해 인천공항을 동북아 항공·물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정 사장은 "앞으로 공항 그 이상의 가치를 국민들께 되돌려주겠다. 더욱 활기차게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이 실현되는 인천공항이 되도록 하겠다"면서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되고 설렘이 감동이 되도록 공항가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정일영 사장은?▲1957년 충남 보령 출생▲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 영국 옥스포드대 발전경제학 석사, 영국 리즈대 경제학 박사▲1979년 행정고시 23회▲2000년 6월∼2001년 11월 건설교통부 국제항공협력관▲2001년 11월~2004년 11월 UN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2007년 1월~2008년 3월 건설교통부 항공기획관▲2008년 3월~2009년 1월 국토해양부 항공·철도국장▲2009년 1~5월 국토해양부 항공안전본부장▲2009년 5월~2010년 9월 국토해양부 항공정책실장▲2010년 9월∼2011년 7월 국토해양부 교통정책실장▲2011년 8월∼2014년 10월 교통안전공단 이사장▲2014년 11월∼2016년 1월 한국항공대학교 항공경영대학원 초빙교수▲2016년 2월~현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2016년 3월∼현재 국제공항협의회 이사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지난 15일 오후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4층 중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 사장은 18일 제2터미널 성공적 개장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면서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해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 12일 열린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그랜드 오프닝' 행사에서 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2여객터미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출국 층 중앙에 위치한 셀프체크인(여객이 스스로 탑승권 발급) 기기.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1-16 홍현기

[인터뷰… 공감]사재 털어 '세터상' 만드는 프로배구 신영철 한국전력 前 감독

수원 한국전력 신영철 전 감독은 배구팬들에게 80년대 한국 남자배구 최고의 세터로 평가 받는다.지도자로서도 인천 대한항공의 2010~2011 V리그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어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대한항공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건 2010~2011시즌이 처음이다. 또 만년 하위권팀으로 인식 되어 있는 한국전력도 4시즌 동안 사령탑을 맡아 정규리그 3위 2번 KOVO컵 정상 1번 등을 일궈내며 신흥 강호 대열로 이끌었다. 모교인 경기대에서 배구 트레이닝에 관한 박사 학위를 받으며 공부하는 지도자로도 알려져 있다. 명세터, 명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신 감독에게 별명이 하나 더 추가될 것 같다. #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는 선배가 되고 싶은 신영철신 전 감독은 2018년 시작과 함께 한국 배구계와 스포츠계에 화두를 던졌다. 그가 배구계와 스포츠계에 던진 화두는 '나눔'과 '관심'이다.그는 지난해 세터상을 만들기 위해 사재를 내놓기로 결심하고 대한배구협회 산하 단체인 한국중고배구연맹(이하 중고연맹)과 협의를 마쳤다. 신 전 감독은 "이름을 알리기 위해 그런건 아닌데, 관심을 가져 주시니 너무 감사하다"며 손사래를 쳤다.사실 신 전 감독이 세터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건 대한항공의 사령탑을 맡고 정규리그 정상에 오른 2011년 봄이다.당시 여러가지 상황상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고, 이후 한국전력 감독 시절에도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다.그리고 지난해 한국전력 감독에서 물러난 후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로 했다.신 전 감독은 "배구 선배로서 유망주들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프로선수를 꿈꾸는 유망주들에게 동기 부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중고연맹과 논의를 거쳐 올해 대통령배 대회부터 세터상을 만들게 됐다. 상금은 중고연맹과 협의해 금액을 정하려 한다"고 전했다.이어 신 전 감독은 "제가 만든 세터상은 남고생들에게 주는 상이다. 제가 이 상을 운영하다 보면 다른분들도 여고생들을 위한 상을 만들어 주실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아마추어 유망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에 나서 주실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배구인이 사재를 털어서 상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종목을 봐도 흔치 않은 일이다.신 전 감독은 "제가 선수로서 받았던 팬들의 사랑, 그리고 지도자로서 받았던 관심과 사랑을 후배들에게 돌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 세터상을 만들게 됐다. 열악해져 가는 아마추어 배구계에 작지만 힘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이어 신 전 감독은 "가족들 모두 세터상을 만든거에 대해 기뻐해 주고 있다. 아이들 제가 죽으면 자기들이 상을 이어가겠다는 말을 한다"고 귀띔했다.# 굴곡 많은 선수시절과 지도자 시절신 전 감독이 배구를 시작한 건 고향인 울진에서다. 울진 후포동부초등학교 재학시절 남들보다 키가 커 배구를 시작하게 됐고 각종 지역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대구 수성초등학교로 스카우트돼 전학가게 됐다.배구를 위해 대구 유학을 시작한 신 전 감독은 각종 전국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독식하며 경기대에 입학했다.순탄할거 같던 신 전감독의 배구 인생은 대학 진학부터 삐끄덕됐다. 신 전 감독은 "경북사대부고에서 함께 운동하던 동기들과 함께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특히 동기인 노진수 전 LG화재(현 KB손해보험) 감독과 함께 운동하기로 하고 성균관대 진학을 원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경기대에 가게 됐다"고 전했다.경기대에서도 신 전 감독은 한국 배구를 이끌 세터 자원으로 인정 받았다.이로인해 경기대 4학년 시절 금성과 현대자동차 등 4개팀이 스카우트전에 뛰어들었다.신 전 감독의 몸값이 폭등하자 이들 4개팀이 영입을 하지 않기로 합의해 배구선수로서의 삶을 위해 한국전력 유니폼을 입었다.그는 "일부팀에서는 강남에 아파트 3~4채 살 수 있는 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돈 보다는 함께 뛰고 싶은 선수와 함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며 "이런 문제들이 내 발목을 잡은거 같다.그러나 한전에 입단해서도 좋은 기회가 많았다"고 전했다.비록 약체 한전 유니폼을 입었지만 세터로서의 기량은 줄지 않았고 국가대표로 발탁돼 활약했다.또 1996년에는 신치용 감독을 따라 삼성화재로 옮겨 플레잉 코치로 활약한 후 은퇴했다.대한항공과 한전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신 전 감독은 감독으로 처음 맡았던 구미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에서는 선수 폭행으로 6개월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신 전 감독은 "사실이다. 당시 선수단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제가 감독으로 가면서 영입한 선수 2명에게 각각 엉덩이 1대씩 때렸다. 때린건 사실이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이어 신 전 감독은 "구단과의 마찰이 있어서 더 크게 부각됐던거 같다"며 "선수들에게 열정적인 플레이를 요구한다. 프로선수들이고, 성인이기에 자신의 플레이에 책임을 지게 한다"고 덧붙였다.# 생각하는 지도자, 팬의 사랑을 잊지 않는 선수신 전 감독은 "중고교 시절 선수 치고는 작은 키로 고민을 했다. 하지만 '하면 된다'라는 문구를 써 놓고 계속 노력했다. 안되면 될때까지 노력했다. 경기에서 안좋은 상황이 나오면 동료들에게 책임을 넘기기 보다는 나 스스로를 돌아 보고 개선해 나가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는 '열정', '신뢰', '책임감', '역지사지'를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생활하고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고, 선수들과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코트에서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열정적인 경기를 보여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배구를 위해 초등학생 시절부터 객지 생활을 했던 신 전 감독에게 운동 외에 또다른 관심은 책이었다.특히 신 전 감독은 중학교 재학시절 우연히 읽게 된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책을 보며 "나한테 철마는 다리다. 남들 보다 잘하려면 열심히 러닝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됐고 선수 시절 단체 운동을 시작하기 전 개인 훈련으로 러닝을 꾸준히 했다.신 전 감독은 "배구를 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가 중요하다. 자기계발에도 게을러서는 안된다"며 "선수나 지도자나 운동을 하면서 자기계발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내가 왜 이 운동을 하는지, 나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그는 "팬이 없는 스포츠는 의미가 없다. 코트 안에서 멋진 경기를 보여줄때 팬들이 박수를 보낸다"며 "항상 발전하는 배구, 팬들과 함께하는 배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신영철 감독은?▲경북 울진 출생(1964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경기대학교(박사) ▲1988~1996 한국전력 선수 ▲1996~1999 삼성화재 선수 ▲1999~2004 삼성화재 코치 ▲2004.02 ~ 2007.03 구미 LIG 손해보험 그레이터스 감독 ▲2009.12 ~ 2010.02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감독대행 ▲2010.02 ~ 2013.01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감독 ▲2013.04 ~ 2017.3 수원 한국전력 감독'명세터·명감독' 출신인 신영철 전 수원 한국전력 감독이 굴곡진 40여년의 배구 인생을 담아 세터상을 만들었다. 신 전 감독은 '발전하는 배구, 팬들과 함께하는 배구'를 위한 첫 걸음이며 2018년 시작과 함께 배구계에 '나눔'과 '관심'으로 후배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2018-01-09 김종화

[인터뷰… 공감]'인천시 산업평화대상'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김성태 위원장

도로위 4800여 조합원에 수상 영광 돌려1975년 고속지부 조직부 노동운동 첫발1980년 강제해산 재설립까지 8년 '공백'취임 초기 계약직 전환·임금체불 '심각'준공영제 도입 정규직 비율 80%로 올려근로조건 개선으로 서비스 질 향상 뿌듯동네 방방곡곡에 실핏줄처럼 퍼져 시민의 발이 되어주고 있는 시내버스는 그 어떤 사업장보다도 노사관계가 중요하다. 버스 노동자와 사용자 간 관계가 어긋난다면 매일 버스를 타는 시민들이 정상적인 일상을 누리기 어려워질 수 있다. 특히 2009년 인천시가 인천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도입한 이후 버스운송사업의 공공성은 더욱 커졌다. 인천시는 건전한 노사관계로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단체의 공로를 기리는 취지로 매년 '인천시 산업평화대상'을 수여하고 있다. 2017년 제27회 수상자로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이 선정됐다. 운수분야 노동단체가 개인이 아닌 단체자격으로 인천시 산업평화대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는 총 29개 지부(시내버스 23개, 시외버스 5개, 화물 1개)를 뒀고, 조합원은 4천800명에 달한다. 인천 버스노동자의 95%가 조합원이라서 교섭대표권을 가진 노조다.김성태(70)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 위원장은 "시내버스 준공영제 시행 이후 대중교통문화 정착과 인천지역 경제발전을 위해 더욱 전력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산업평화대상 수상의 영광은 열악한 근로여건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도로 위에서 고생하는 4천800여 조합원에게 돌린다"고 소감을 밝혔다.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는 1988년 9월 설립돼 올해로 꼭 30년째를 맞았다. 당시 9개 회사의 노동조합에 조합원 1천300여 명으로 출범해 지금의 규모로 확대됐다. 하지만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의 역사는 30년에 그치지 않는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는 전두환 정권 초기에 단행한 '노동조합 정화지침' 중 '지역지부 폐지' 명령에 따라 1980년 해산된 바 있다. 김성태 위원장은 1975년 3월 전국자동차노련 고속지부 조직부에 입사해 지역지부 폐지 조치 당시 인천노조에서 일하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전국자동차노련 고속지부 차장으로 인천에서 노동운동의 첫걸음을 뗐습니다. 새벽 5시에 시내버스 노선에 나가 조합원인 운전기사들에게 자동차노보를 나눠주면서 조합원들의 고충을 실감할 수 있었어요. 새벽 4시에 출근해 자정까지 운전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운수노동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고군분투하겠다고 결심한 게 40년 넘게 노동운동에 투신한 원동력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정화 조치로 인천노조가 강제 해산됐을 땐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좌절하지 않고 전국자동차노련 인천연락협의위원회(인천지역협의위원회)를 구성해 사무국장을 맡았어요."노조를 재설립하기까지 8년간의 공백기는 인천지역 운수종사자들의 암흑기나 마찬가지였다. 군사정권 속 인천연락협의위원회는 조합비를 걷을 수조차 없어 형편이 어려웠지만, 운수종사자들의 저임금 문제와 열악한 근무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1983년부터 소비조합을 열어 조합원에게 생필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을 저렴하게 공급해 간접적으로나마 임금인상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화물운전기사 조합원이 교통사고로 숨졌는데, 장례비가 없어 유가족이 어려움을 겪자 김성태 위원장이 직접 염(殮·시신을 수의로 갈아입혀 베로 싸는 의식)을 한 적도 있다."그때만 해도 운수분야가 차종별로 특수성이 있어서 버스는 동료가 죽으면 가지만, 화물은 잘 안 갔어요. 다들 어렵게 살 때니까. 조합원이 죽고 나서 염을 몇 번이나 하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김성태 위원장은 1985년 쌍마교통을 시작으로 인천지역 택시업계 노동조합 설립에 적극 나섰다. 현재 택시노조는 전국자동차노련에서 분리됐지만, 1988년까지 인천에는 43개 택시회사에서 노조가 탄생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1987년 택시노동운동에 뛰어든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국회의원과도 이때 인연을 맺었다. 김성태 위원장은 "송영길 국회의원, 한국노총 출신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해 노동운동하다 만난 노동계 출신 정치인들과는 여야 가릴 것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라고 했다. 김성태 위원장은 전국자동차노련 간사장을 거쳐 2000년 5월 인천노조 위원장에 당선돼 현재까지 연임하고 있다. 위원장을 맡자마자 인천지역 버스회사들이 소속 운전기사들을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임금 체불 문제도 심각했다. 김성태 위원장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2001년 6월 버스운송사업조합 사무실에서 점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다음 날인 2001년 6월 29일 밀린 임금을 지급하기로 사업주들과 극적으로 합의해 점거농성은 일단락됐다. "위원장을 맡아 10일 동안 사측인 버스운송사업조합을 점거하면서 강력하게 투쟁했고, 한국노총 중앙협의회도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사무실에서 개최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사업주와 인천시를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확산하는 것을 막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2002년 임단협 체결 때 인천지역 시내버스 경영악화로 인천에서 가장 큰 제물포버스 등 일부 회사의 부도위기로 조합원 상여금을 2년간 반납한 적도 있었고요. 조합원 모두가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이 있었지만, 회사가 부도나면 조합원이 일자리를 잃기 때문에 버스회사를 회생하는 데에 앞장서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부도위기 속 기사회생해 지금까지 노사분규 없이 건전한 노사관계로 발전했습니다."김성태 위원장은 시내버스 민영제에서 일어난 '경영악화~체불임금~서비스 저하'라는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댄 시내버스 준공영제 도입을 소중한 성과로 꼽았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가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요구한 것은 2004년 임단협 교섭부터다. 사측과 노조, 인천시 간 협상과 연구를 이어오다가 2009년 도입했다. 버스 준공영제 시행으로 75%가 비정규직이던 시내버스 운전기사의 정규직 비율은 80%까지 올랐다. "이미 8년 전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시작해 문재인 정부보다 한발 앞선 정책의 결실이었다"고 김성태 위원장은 강조했다. 근무여건도 격일제에서 1일 2교대로 바꿔 근무시간을 단축했다. 버스 1대당 운전기사 수는 평균 1.9명에서 2.35명으로 늘었다. 인천 시내버스 교통사고율은 19% 줄어 운전기사 처우 개선과 시내버스 서비스 향상에 모두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2016년에는 임단협을 통해 월 24일 근무에서 임금을 보존한 월 23일 근무로 전국 최초로 근무일을 1일 줄였다. "버스 준공영제의 핵심은 그동안 부실경영에 찌든 버스업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경영 효율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버스 운전기사 등 내부 구성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대(對) 시민 서비스 질의 향상으로 나타납니다. 대중교통정책은 복지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2016년 7월 말 인천도시철도 2호선 개통에 맞춰 시내버스 노선이 전면 개편됐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노선 개편으로 현재 시내버스 수입금이 200억원 이상 줄었습니다. 자연스레 준공영제 재정지원액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준공영제의 제도가 잘못돼 재정지원이 증가한다고들 하지만, 오해가 있습니다."김성태 위원장은 시내버스 운행은 '대중교통복지'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시내버스 준공영제는 사업주가 이윤추구에 몰두해서도, 인천시가 수익성만 따져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김성태 위원장은 "시내버스 준공영제가 인천시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만큼 법률에 근거한 행정관리로 사용자에 대한 지원 예산은 정확한 용역을 통해 해야 한다"며 "철저한 관리·감독으로 세금이 헛되이 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운수종사자들은 인천시민이 불편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에 역점을 두겠다"고 다짐했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사무실은 인천 남구 수봉공원 쪽에 있다. 1980년에 지어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노조위원장실 안에 있는 소파부터 메모함까지 사무실 건물과 나이가 같다. 김성태 위원장은 "조합원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노조를 운영하기 때문에 메모함 하나라도 쉽게 바꾸지 않으려 한다"며 "앞으로도 지속해서 장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하고, 운전자의 충분한 휴식시간이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성태 위원장은?▲1948년 충남 서산 출생▲인천 송도고 졸업,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 수료▲1975년 전국자동차노련 고속지부 조직부 입사(사진)▲1980년 전국자동차노련 인천지역협의위원회 사무국장▲1987년 전국자동차노련 간사장▲2000년~현재 전국자동차노련 인천지역노조 위원장▲2000년~현재 한국노총 인천본부 부의장·지도위원▲2001년~현재 전국자동차노련 부위원장▲2002~2017년 인천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2012년~현재 인천시 수입금공동관리위원회 위원▲1990년~현재 새얼문화재단 운영위원김성태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 위원장이 "시내버스 준공영제 시행 이후 대중교통문화 정착과 인천지역 경제발전을 위해 더욱 전력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산업평화대상 수상의 영광은 열악한 근로여건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도로 위에서 고생하는 4천800여 조합원에게 돌린다"고 소감을 밝히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성태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 위원장(가운데)이 2001년 인천시 버스운송사업조합 사무실 점거농성 당시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제공

2018-01-03 박경호

[인터뷰… 공감]42년 공직생활 마감 앞둔 홍승표 경기관광공사 사장

문학소년, 가정형편 어려워 대학진학 대신 택한 길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이후 비서실로 자리옮겨열심히 산 덕에 선·후배 신망 높아… 명퇴 후 비서실장 복귀흑자 전환 등 성과로 화답… 이제 글 많이 쓰고 싶어평생 글쟁이로 살고 싶었다. 절절한 시구처럼, 시를 위해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꿈처럼 살 수만은 없었다. 그 시대는 다 그랬다. 전쟁이 막 끝난 1956년, 경기도 광주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홍승표는 하고 싶은 공부를 다할 수 없었다. 특히 시를 사랑하는, 심성 착한 문학소년은 내 욕심만 부릴 수 없었다. 홍승표 경기관광공사 사장은 오는 29일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다. 글쟁이로 살고 싶었던 문학소년이 생계를 위해 공직에 입문한 지, 42년 5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반세기에 가까운,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첫머리로 그는 문학소년이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연세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등학생 문예콩쿠르가 있었어요. 난 시조를 써 냈는데 장원을 했지. 그 문예콩쿠르는 국문학과 장학 특전도 있어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형은 군대에 가 있고, 밑으로 딸린 동생들이 수두룩해 집안 형편상 차마 대학 가겠단 말을 못하겠더라고. 학교 선생님들이 학비를 지원해준다 했지만, 광주 시골에서 서울까지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때마침 광주시 공무원 채용공고가 났는데, 그는 혹시 하는 생각에 가볍게 시험을 봤단다. 그리고 덜컥 합격을 하면서 공직에 들어섰다. "대학은 나중에라도 갈 수 있으니, 일단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미안하셨는지, 공무원을 반대하시더라고.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공직생활이지만, 글 짓는 재주 덕에 공보실로 발령받아 보도자료 쓰는 일을 했다. "공직생활을 돌아보면 홍보와 인연이 깊어요. 처음 공보실로 발령받고 보도자료를 썼는데, 그래도 잘 썼는지 내가 쓴 대로 신문에 나는 적도 많았어요. 전입시험을 봐 도청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공보실에서 일했는데 그때도 계속 보도자료를 썼어요. 공무원 되고 내리 3년은 보도자료만 작성한 것 같아요." 업무에서도 계속 재주를 써먹은 덕일까. 198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새벽, 숲길에서'로 당선됐다. 공무원 홍승표 이름 뒤에,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글 잘쓰는 공무원으로 소문이 난 덕에 그의 공무원 인생에 변화가 일었다. 비서실 근무가 계기다. 당시는 임명제인 관선 도지사 시절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각 과에서 도지사의 기념사를 준비했는데 그 수준이 형편없었단다. '글 잘 쓰는 놈'을 골라오라는 도지사의 엄포에, 마침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서실로 끌려갔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도지사를 수행하는 비서실 근무를 연이어 했다. 관선시절 임사빈 지사를 시작으로 이재창, 윤세달, 심재홍, 임경호 지사의 비서실에서 일한 데 이어 민선 도지사인 임창열 지사와 남경필 지사까지 총 7명의 도지사를 보좌했다. 경기도를 이끄는 수장의 곁을 지키는 일은 보람되지만, 고달픈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문화정책, 관광, 총무, 자치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고 과천시·파주시 부시장, 자치행정국장, 도의회 사무처장, 용인시 부시장 등을 역임하며 동료, 선후배들의 신망을 쌓았다. "당시 인사계에 와서 인사기록카드를 보니 광주시와 달리 도는 대학 나온 사람도 많고 행정고시 출신도 많았어요. 뒷배도 없고, 학력도 짧은 시골 촌놈 입장에선 황당하더라구요. 큰일 났다 싶어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매일 제일 먼저 새벽 출근해서 가장 늦게까지 일했어요. 성실함을 좋게 봐준 덕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특히 그는 동료와 후배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공무원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7급 봉급이 봉지쌀로 6개, 연탄 20장 살 돈 밖에 안되는 월급이었어요. 내가 힘들었던 만큼, 주사보 이하 후배들은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간부가 돼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래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 밥은 무조건 제가 사줬어요. 지갑을 못 열게 했죠. 또 총무과장을 할 때, 도지사를 설득해 도청 공무원 건강검진에 암 검진을 항목에 넣었어요. 그때 실제로 10명 가량의 직원들에게서 암이 발견됐고 치료를 받았어요." '경기도를 빛낸 영웅' 선정, '다산대상 청렴봉사 대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지만, 도청 공무원들이 직접 선정한 '함께 근무하고 싶은 베스트 간부 공무원'에 4년 연속 선정된 것이 가장 보람차다. 그 마음 때문일까. 그는 2013년 용인시 부시장을 끝으로 명예퇴직을 했지만, 세간의 시선을 무릅쓰고 남경필 지사와 후배 공무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비서실장을 했다. 1급 관리로 퇴직한 그가 4급으로 돌아왔고, 연금도 전부 중지되고 퇴직금도 반납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서는 30년을 몸담은 도청 식구들과 새 도지사가 화합해 도민을 위한 도정을 꾸리는 데 도움이 돼야겠다는 한가지 마음 뿐이었다.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일했던 지난 2년의 시간도 그는 허투루 쓴 적이 없다. 비싼 관용차 타고 '사장' 역할만 하지 않았다. 경기도 산하기관장이 직접 도내 31개 시군을 돌아다니며 공동 관광 마케팅과 상품개발 협력을 위해 뛰었다. 덕분에 31개 시군과 관광마케팅을 진행하고, 연천군과 연강 갤러리·그리팅 맨 설치사업을, 수원시와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협업을 해냈다. 또 민간업계와 적극적인 스킨십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다양한 프로모션을 추진했다. 임기 마지막 달인 12월에도 그의 일정은 일거리로 빠듯했다. 아시아나와 협력해 대만 관광 프로모션을 성대하게 진행해 타지역 관광공사들로부터 시샘을 받았다."산하기관장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이 많아요. 공무원 시절엔 사실 비행기 탈 기회도 없는데, 기관장이 되니 비행기 탈 기회도 많구요. 하지만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직원들을 보냈어요. 비즈니스 좌석을 바꿔 이코노미로 타고 줄인 비용으로 직원을 더 데리고 갔죠. 생각해보세요. 나는 임기가 끝나면, 갈 사람이지만 직원들은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관광공사를 책임지고 사장까지 해야 돼요. 그 토대를 마련해주려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매일 적자였던 공사는 홍 사장의 취임 후 15억 흑자 기관으로 바뀌었고, 다양한 사업을 통해 경상비용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전국 공공기관 내부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그간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천생 공무원이다. 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선배다. "공무원은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국민이 위임한 일을 심부름하는 역할입니다. 일부 선후배 공무원들이 그것을 권력이라 착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은퇴 후에 결코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어요. 공무원은 내가 맡은 이 업무가 국민의 불편을 덜게 하는데 쓰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후배 공무원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며 그가 후배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간결하지만, 정확하다.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묻는 질문에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무조건 쉴 것'이라고 답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해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법하다. "이제 두달 간은 아무 생각없이 쉬어보려고 합니다. 그 후의 일은 또 연이 닿는 만큼 해봐야죠. 적십자나 공동모금회 같은 봉사단체에서도 일하고 싶고, 무엇보다 글을 많이 쓰고 싶어요." 쉬겠다면서도 그는 또 꿈을 꾼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반짝이게 하는 원동력이리라.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홍승표 사장은 누구?▲1956년 경기 광주 출생▲광주상업고-국제사이버대학 법률행정학사-경기대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석사▲1975년 경기 광주 공보실에서 공직생활 시작▲과천시부시장-파주시 부시장-경기도 자치행정국장-경기도의회사무처장-용인시 부시장▲2014년 7월~12월 경기도 비서실장▲2015년 1월~ 경기관광공사 사장 - 수상경력▲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1988)▲정부 모범 공무원(1986)▲국무총리 표창(2003)▲다산대상 청렴봉사부문 대상(2010)홍승표 경기관광공사 사장은 반세기에 가까운 공직생활을 회상하며 "공무원은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며 국민이 위임한 일을 심부름하는 역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7-12-26 공지영

[인터뷰… 공감]'모던 인천 시리즈 1' 펴낸 일본인 건축가 도미이 마사노리 교수

1930년대 조감도·사진첩 토대 지역별로 기록… 세밀함에 놀라관동갤러리 리모델링 작업 참여… 부평 영단주택 주제로 강연도학생들 열정에 반해 한국 정착… 월미도·인천항·강화도에 관심일본식 건축구조에 온돌 접목 등 독특한 특성 연구에 힘보탤 것인천은 일제 시대 지어진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1883년 개항이 이뤄지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살았고, 이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건축물을 지어 생활했다. 이 건축물들은 하역사 사무소, 주택 등으로 활용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식 건축물은 잇따라 지어졌고 이러한 흔적은 인천 중구, 부평구 등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인천 곳곳에 스며 있다. 도미이 마사노리(富井 正憲·69) 한양대 객원교수(건축학과)는 이러한 인천의 매력에 빠진 일본인 건축가다.그는 지난 8월 1930년대 인천의 모습을 담은 책 '모던 인천 시리즈 1'을 펴냈다. 김용하 전 인천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인천에 사는 일본인 작가 도다 이쿠코 등이 공저자다. 1930년대 조선신문사가 발행한 조감도 '대경성부대관'과 사진첩 '대경성도시대관'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책은 당시 인천을 소개하고 있다. 조감도와 사진첩의 '인천부' 부분을 바탕으로 인천 중구 관동, 사동, 율목동, 북성동, 해안동 등 각 지역별로 1930년대 인천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사진첩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인천의 명승지나 사찰, 관공서, 학교, 병원, 민간회사, 상점, 공장 등을 망라해 간단한 설명을 붙였다. 이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 용도와 상호 등을 넣어 현재와 과거 인천을 비교할 수 있도록 도왔다.그는 "사진첩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조감도인 대경성부대관은 오랫동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며 "처음으로 조감도 존재를 안 시기는 2011년이며, 그 세밀함과 아름다움에 놀랐다"고 했다.이어 "인천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거주했던 지역과 한국인이 살았던 지역이 확연하게 구분되며, 조감도에 이러한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며 "또한 개항장 뿐 아니라 부평 등 근대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이 곳곳에 있다. 이러한 건축물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역사이기도 한만큼 가능하면 남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도미이 교수는 2015년 인천 중구 개항장에 있는 근대건축물 '관동갤러리'의 리모델링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개항장 뿐 아니라 부평 영단주택 등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도 한국과 대만, 중국의 영단주택을 비교·분석한 내용이 주제다. 최근 부평지역 시민들을 대상으로 '부평 산곡동 영단주택의 건축학적 조명'을 주제로 강연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그는 "당시 백마장이라고 불렸던 산곡동 영단주택은 다른 나라의 영단주택과는 달리 한국인을 위한 구조로 설계됐다는 특징이 있다"며 "이는 당시 한국인이 설계와 감리를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이 지역은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지만, 일부라도 현재 자리에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어 "산곡동 영단주택은 당시엔 드물게 700호에 이르는 공동주택일 뿐 아니라, 일본식 건축구조에 온돌이 접목되는 등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그는 또한 한국의 근대건축과 관련한 자료이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일본에 많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인천에 살다가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포스터, 그림, 엽서, 지도, 사진, 도면, 스케치 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도미이 교수는 "한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고, 그들은 당시 한국의 모습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 아들이나 손자 등은 그 자료에 대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소중한 자료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는 인천시와 인천 지역 연구자들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그가 김용하 박사와 펴낸 '모던 인천시리즈 1'과 같은 책은 지역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천시나 중구, 인천지역에 있는 대학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며 "인천은 많은 역사 자산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앞으로 인천을 조명하는 작업이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할 것이며, 그 주체는 지역의 연구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한국과 처음 연을 맺은 것은 1983년이다. 이후 논문을 집필하기 위해서 3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연구를 했다. 이후 한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2004년부터. 한양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지내면서 한국에 살게 됐다. 이후 같은 학교에서 전임교수를 거쳐 객원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도미이 교수는 한국에 정착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일본학생과는 다른 한국 학생들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학생들이 유학을 하지 않고도 일본의 건축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서 13년간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다. 당시 일본에 남아 있으라는 주변의 이야기를 뿌리치고 한국 정착을 결심했다.그는 "제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인천의 젊은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최근에는 대한건축사회 인천시건축사회와 요코하마건축사협회가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고 생각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아직 그 시기가 언제 올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도미이 교수는 최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은 월미도, 인천항, 강화도라고 했다.월미도는 좁은 공간에 유원지시설과 군사시설이 모여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가장 상반되는 시설이 한 공간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인천항에 대한 관심은 인천 바다의 조차와 관련돼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9m에 이르는 바다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인천에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갑문이라는 구조물이 생기기도 했다. 도미이 교수는 인천바다의 조차로 인해서 생긴 건축물과 생활양식 등이 흥미로운 연구주제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강화도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역사자산을 품고 있는 곳이다. 도미이 교수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고려시대 자산과 강화성공회교회와 같은 근대 건축물 등이다. 도미이 교수는 "인천은 다양한 역사자산과 상반되는 특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라며 "제가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연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천의 젊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부분 등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그는 건축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최근 경상북도 경주와 경기도 용인시 등의 주택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에 지은 주택에 대해서는 마당의 쓰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며 "건축하는 모든 부지는 생활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당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느냐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근대건축물에 대한 책을 펴냈지만, 건축가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조망하고 대비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며 "저의 연구와 건축·설계 등 작업이 미래 세대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도미이 마사노리 교수는?▲일본 도쿄 출생 (1948년)▲1973~2008년 가나가와대학 재직▲ 1986~1987년 서울대학교 연구원▲1996년 도쿄대학 박사학위▲1997~2009년 동경대학 생활기술연구소 연구원▲2004~ 현재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도미이 마사노리 교수가 2015년 리모델링 작업에 참여한 인천 중구 근대건축물 '관동갤러리'. 이 건물은 여러 세대가 지붕과 벽체를 공유하는 전형적인 '나가야(町屋)' 형식의 일제시대 서민 주택이다. 왼쪽은 관장 부부가 사는 살림집으로, 오른쪽은 갤러리로 쓰이고 있다. 사진은 건물 전경과 도면. /경인일보DB1930년대 인천의 모습을 담은 책 '모던 인천 시리즈 1'을 펴낸 도미이 마사노리(富井 正憲·69) 한양대 객원교수는 "인천은 다양한 역사자산과 상반되는 특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라며 "인천의 젊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부분 등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다면 자신이 도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7-12-19 정운

[인터뷰… 공감]에버트 인권상 대표 수상 수원 동남보건대 응급구조학과 장애진씨

안도의 손길 내민 응급구조사에 고마움 느껴보육교사에서 사람 살리는 쪽으로 진로 바꿔아직도 친자매 같던 친구들 떠올라 괴롭지만용기 북돋아 준 아버지 있어 세상밖으로 나와실습중 배운 대로 했더니 심정지 환자 살아나기억하기 싫은 역사도 반복 막기위해 상기해야앳된 얼굴의 스무살 소녀가 대한민국 1천700만 촛불 시민을 대표해 연단에 섰다.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수여하는 '에버트 인권상' 대표 수상자, 장애진(20)씨다.세월호 생존자로도 잘 알려진 장씨는 현재 수원 동남보건대학교 응급구조학과에 재학 중인 '예비 응급구조사'다.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꿈을 꾸는 장씨를 지난 11일 동남보건대 사담기념관에서 만났다.장씨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며 응급구조학과에 진학했다. 아이들을 좋아해 보육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지금은 응급구조사를 꿈꾸고 있으니, 세월호가 장씨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참사 당시 장씨는 SP-1(세월호 다인실 격실) 구역에서 같은 반 친구 7명과 함께 구명조끼를 입고 해경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점점 더 기울고 급기야 칸막이 대용으로 설치된 캐비닛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벽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출입문은 천장으로 올라갔다.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극적으로 몇몇 친구들과 함께 탈출했지만 해경 보트를 타고 큰 배로 옮겨타는 순간의 기억은 희미하다. 서거차도에 발을 딛고 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장씨 곁을 지켜준 고마운 이가 급파된 119 응급구조사였다. 당시 따뜻한 담요와 말 한마디로 자신을 위로하며 안도의 손길을 내밀었던 응급구조사처럼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장씨의 꿈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고 지켜낸 소중한 삶을 이제는 다른 이를 돕는 데 쓰고 싶다는 것이다.아직도 해가 지고 나면 중학교 때부터 친자매처럼 지냈던 민정이와 민지 생각에 괴롭다. 단짝 2명을 비롯해 한순간에 반 친구 18명과 담임 선생님을 잃었고, 세월호가 인양된 뒤에야 돌아온 친구도 있다. 견뎌내기 힘든 아픔이자 영영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그곳에 있었던 누군가는 증언해야 했다.공개적인 장소에서 한 발언은 지난 1월 세월호 참사 1천일이 되는 날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가 처음이었다. 장씨는 "저희는 구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탈출했다"며 "저희만 살아나온 것이 유족 분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참사 이후 생존자와 유족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정치꾼'들의 발언도 장씨를 세상에 나서게 한 동기가 됐다. 참사 당시 트라우마에 더해 당사자들을 배제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장씨의 친구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시도까지 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그는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못 나온 것 같다거나 단순 해상 교통사고에 정치색을 입히지 말라는 말들에 화가 났다"며 "앞으로 친구들을 데려간 참사 진상규명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가족들도 장씨의 든든한 지원군이다.안산 원시동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장동원씨는 참사 이후 선박 운전 면허를 취득해 유족들과 함께 현장을 누볐고 세월호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 팀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공교롭게 민주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에 태어난 장씨는 아버지 손을 붙잡고 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집회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용기를 북돋아 준 아버지가 있었기에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세월호 생존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김순덕씨도 단원고 유가족과 함께 '그녀들의 옷장'이라는 치유연극에 출연해 아픔을 씻어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에버트 인권상 대표 수상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23차에 걸쳐 진행된 촛불집회에 참석한 횟수가 4번뿐이라서 겸손히 고사했지만 촛불 비상국민행동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로 장씨를 대표 수상자로 추천했다. 장씨는 "대한민국 국민 대표로 에버트 인권상을 받게 돼 영광"이라며 "촛불을 든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최근 인천국제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실습을 한 장씨는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선배 응급구조사들과 함께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에게 새 삶을 선물한 것이다.그는 "60대 남성 환자가 심정지 상태로 다른 병원에서 이송돼왔는데 소생 직후 재차 심장이 안 뛰어서 심폐소생술과 제세동기 가동을 번갈아 가며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더니 기적처럼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고 말했다.실습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장씨는 의학용어 암기와 심전도 실습에 매진하고 있다. 현장에서 가장 먼저 위급한 환자를 만나 즉각 대처할 수 있는 119 구급대원이 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특유의 명랑함으로 남은 대학 생활을 보내고 응급구조사 국가고시에도 도전할 계획이다.고봉연 동남보건대 응급구조학과장은 "단원고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이 있다고 들었지만 애진이가 정말 밝고 명랑해 아픔이 있는 줄 면담 전까진 몰랐다"며 "참사를 겪으면서 응급구조사로 일을 해야만 하는 확실한 동기가 생긴 만큼 최고의 응급구조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세월호 생존자들은 개인적인 꿈을 위해서 삶을 살아내면서도 사라지는 아픔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 발 앞에 선 장씨는 "제가 받은 도움을 나눠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며 "당장 도움이 필요한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도 반복을 막기 위해선 곁에 두고 계속 상기해야 한다"며 "그간 기억교실은 물론이고 시민안전공원 건립에도 걸림돌이 생기면서 잊혀지는 것이 슬프다"고 덧붙였다.■에버트 인권상은?독일 민간 비영리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세계 각지에서 인권 증진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할 목적으로 지난 1994년 제정한 인권상으로 시상식은 매년 12월 5일 베를린에서 진행되며 상패와 함께 2만 유로의 상금이 수여된다.에버트 재단은 대한민국의 평화적 집회와 장기간 지속된 비폭력 시위에 참여하고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신생 민주주의 대한민국 법치국가의 실현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촛불시민에게 에버트 인권상을 수여했다.다수 국민이 에버트 인권상을 받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단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집회가 민주주의의 필수적 구성요소인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를 생동하게 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글/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11일 오후 수원 정자동 동남보건대학교 사담기념관에서 세월호 단원고 생존자 장애진(20)씨가 대한민국 촛불시민을 대표해 '2017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 수상 소감을 밝히며 미소 짓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11일 오후 수원 정자동 동남보건대학교 응급구조학과 실습실에서 세월호 단원고 생존자 장애진(20)씨가 응급구조 실습 모형을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씨는 참사 직후 서거차도에서 만난 119 구급대원에게 받은 도움을 갚기 위해 응급구조사가 되려는 꿈을 꾸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5일 오후 7시(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 세월호 단원고 생존자인 장애진(20)씨와 박석운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 공동대표가 쿠르트 벡 에버트 재단 대표에게 '2017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2017-12-12 손성배

[인터뷰… 공감]생애 첫 수필집 '뜨거운 빙수' 펴낸 이영옥 수필가

평범했던 삶 '문학 소녀의 꿈을 이루세요' 공모전 문구에 마음 움직여입상 후 일기 대신 습작… 매달 2~3편씩 300여편 노트 20여권에 담아이혼하고 싶은 마음·경제적인 고통도 펜으로 풀어… 일터와 집이 글감창피한 내용이지만 글쓰기는 삶의 일부… 정년도 없어 평생하고 싶어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매일 작업하지 않고 피아노나 노래를 배울 수 있습니까.어쩌다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리베카 솔닛학창시절 수많은 문학소년·소녀들이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그렇게 꿈을 꾸는 이들이 오래도록 그것을 간직하고 실제 이루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서, 먹고 산다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대개는 그 꿈을 포기하고 글쓰기와 담을 쌓은 채 산다.글을 쓰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글을 쓰지 않고 살아도 평범한 삶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그 흔하디흔한 문학 소년·소녀들이 그렇게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인천에서 30년 가까이 산 이영옥(56)씨도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다고 했다. 그는 "적어도 환갑이 될 즈음이면, 내 글로 채워진 책 한 권쯤을 세상에 내놓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었다고 한다.그는 그 꿈을 잊지 않았고 계속 글을 썼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첫 수필집을 세상에 내놓으며 그 꿈을 이뤘다.20여년을 '커피 아줌마'로, 최근에는 인천대공원에서 기간제 청소 노동자로 일해온 주부 이씨가 펴낸 수필집 '뜨거운 빙수'(에세이문학출판부 刊)는 평범한 이들이 잊고 사는 꿈을 이뤄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해 보인다.지난 3일 오후 불과 며칠 전 까지 자신이 일했다는 인천대공원에서 그를 만났다.첫 에세이집을 펴낸 소감을 묻자 이씨는 "어쭙잖은 글들이 활자화되니 가슴 벅차기도 하고 떨리기도 한데, 삶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써 놓고 보니 발가벗은 듯해 부끄럽기도 하다"며 "글을 읽고 한두 명이라도 공감할 독자가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지금의 솔직한 바람"이라고 말했다.그는 "누구에게나 글을 쓰는 이유가 있고 저마다 그 이유는 다르겠지만, 특히 나에게 글쓰기는 숨구멍이자 삶의 위로였고, 힘들 때 다시 일어서게 한 이유가 됐다"며 "숨어서 울 곳을 찾다가 글을 만났고, 사는 것이 힘들어 앞날이 아득해지고 캄캄할 때 펜을 들고 노트를 펼치곤 했던 것이 작품집이라는 결실로 이어져 기쁘고 설렌다"고 말했다.1961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3~4년 직장일을 하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전담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은 1994년 동서커피문학상(현 동서문학상)에 입상하면서였다. 이전까지 그의 글쓰기는 일기 쓰기가 전부였다고 한다.인천에 있는 동서식품에 다니던 때였는데, 전업주부이던 그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1992년부터 그곳에서 20여년 넘게 '커피 아줌마'로 일했다. 대형 마트나 소매점에서 판촉 행사를 하는 일이었다."어느날 커피문학상 공모 포스터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여고 시절 문학 소녀의 꿈을 이루려면 도전하라는 내용이었죠. 여고 시절 책을 써야겠다는 꿈이 생각났고, 바로 시아버님께 아침마다 커피를 타고 마시며 나눈 이야기들을 글로 써 며칠을 고쳐 '아버님과 커피'라는 작품을 보냈죠."결과는 입상이었고 입상하고 나자, 매일 쓰던 일기 대신 본격적인 습작이 시작됐다. 같은 해 인천노동자예술제에 보낸 수필이 상을 받기도 하며 그는 방송통신대학교에도 진학해 꿈을 키워갔다.힘든 직장생활과 남편의 방황에도, 힘든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글로 쓰고 나면 마음이 정리되고, 그러고 나면 고통도 이겨낼 만한 일들이 됐다고 한다.사업에 실패하고 무력한 삶을 이어가는 남편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이혼을 결심하던 때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남에게 말 못할 이야기를 나에게 글로 쓰면 이내 풀렸다."하루는 이혼을 작심하고 차분히 글로 남편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해 봤어요. 결국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 단점도 결국엔 장점이더라고요."피아노를 갖고 싶어 하던 딸 아이가 디지털 피아노를 사려고 모은 용돈을 고등학교 수업료로 내야 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글쓰기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그는 그렇게 매달 2~3편의 에세이를 완성하려고 노력했고 모두 노트에 남겼다. 그렇게 쓴 300여편의 작품이 20여권의 노트에 남아있는데 이젠 그만의 보물이 됐다."물론 다시 돌아보면 작품이라고 하기에 창피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글 쓰기는 제 삶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그에게는 언제나 일터와 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주로 글감이 된다.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커피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른 새벽 공원의 숲 속 향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출퇴근길 도로 위의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가 나기도 한다. 물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픔도 드러난다. 그렇게 쓴 47편의 작품이 이번 수필집에 담겼다.그는 자신의 첫 수필집을 두고 "발가벗은 듯 부끄럽다"고 했지만,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딸은 엄마의 첫 시집에 한 컷 한 컷 삽화를 그려 넣으며 용기를 줬다.첫 작품집을 펴낸 그의 바람은 딱 한가지다. 평생 글을 쓰는 것."다른 일에는 정년이 있지만, 글을 쓰는 일에는 정년이 없다고 생각해요. 글쓰기가 일이 아니고 삶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요."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영옥 수필가는?▲충청남도 보령 출생(1961년) ▲황교초등학교·웅천중학교·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1994년 동서커피문학상 입상▲2006년 <에세이문학>겨울호 '갑골 무늬를 찾아서'로 등단▲에세이문학작가회·동서문학회 회원으로 활동▲첫 수필집 '뜨거운 빙수' 펴냄생애 첫 수필집을 펴낸 이영옥 수필가가 불과 며칠 전까지 기간제 청소 노동자로 일해온 인천대공원 메타세쿼이아길을 걷고 있다. 그는 "삶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써 놓고 보니 발가벗은 듯해 부끄럽기도 하다"며 "글을 읽고 한 두 명이라도 공감할 독자가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지금의 솔직한 바람"이라고 밝혔다.

2017-12-05 김성호

[인터뷰… 공감]박해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

■신보 이사장 연임 어떻게 가능했나처우 개선하니 사기 오르고 실적 따라와자연스레 신뢰 얻고 행감서도 칭찬 받아■함께 일한 3명의 도지사 차이점은孫 준비된 지도자형… 金 청렴한 일꾼南 미래 내다보는 눈 남다르고 개혁적■경과원 조직 내부 갈등 묘책 있나나 포함 모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쪼개진 노조부터 하나돼야 변화 가능■경기도는 어떤 의미인가군사력·중소기업·핵심기술 등 집중돼한국 동력이자 미래, 위기의식 가져야박해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은 경기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자 공공기관의 신화로 불린다. 농협중앙회 경기지역본부장, 농협중앙회 금융대표 부회장, 농협대학교 총장,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 민주평통 경기지역회의 부의장 등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항상 신기록과 기관의 한 단계 도약이 있었다.특히 경기도지사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경기신보 이사장을 4번이나 연임한 것은 박 이사장에 대한 도민들의 신뢰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런 공로로 산업포장,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기도 했다. 그런 박 이사장이 최근 통합을 통해 초대형 공공기관이 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이하 경과원)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다시 한번 화제의 인물이 됐다.그의 경험과 노하우가 신생 통합기관에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서다.박 이사장을 만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2012년 경기신보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5년 만에 다시 공공기관에 복귀했다. 소감은 어떤가."공직 생활 45년 정도했고, 그 중 30여 년을 경기도에서 했다. 농협 경기본부장을 비롯해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을 4번 연임했다. 5번째도 나한테 하라고 하는 걸 사양했다. 당시 손학규 도지사를 통해 발탁됐고 김문수 지사의 신뢰를 받아 연임했다. 임기가 끝나고 민주평통 경기도 부의장이 됐다. 대통령이 의장이고 각 광역단체마다 부의장이 있는데, 전국 부의장회 회장도 맡았다. 민주평통은 대통령 자문 헌법기관으로 청와대 회의에 들어가면 모두 발언을 했다. 사실은 부의장만 한 게 아니고 전체 평통을 이끌다시피 했다. 민주평통이 7월로 끝났다. 그래서 이제는 자유로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경과원 이사장 제의를 받았다. 사양을 하려 했지만, 상근직이 아니고 명예직인데다 마지막 봉사를 해야 하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 수락을 했다. 사실 마음이 무겁다. 아이디어나 비전이나 방향 제시를 통해 기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경기신보 이사장을 4번이나 연임한 경기도 공공기관의 신화이자 입지적 인물이다. 비결은 무엇인가."과대 평가를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기도를 잘 아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사실 경기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건 틀림 없다. 경기도의 농업 부문부터 IMF 시절에는 농협 은행장을 하며 중소기업을 살폈다. 경기신보 이사장 당시 그때 경험을 많이 써먹었다. 정부에서 5천700억원, 경기도에 1천700억원 정도를 지원받아 노점상과 포장마차 등 어려운 사람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일했다. 또 하나의 비결은 직원들과 소통이다. 상사와 직원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아직 경과원 직원들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경기신보 직원들은 나를 편하게 생각했다. 떠난 뒤에 직원들에게 평가를 들어보면 만족할만 했다. 리더가 가장 중요한게 소통이다. 직원들이 나를 따르게 하는 기술, 직원들과의 마음의 벽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신뢰하고 믿고 귀중하게 생각했다. 제 경영철학이 '인건비 아끼지 말자'다. 한 해에 20% 이상 급여를 올렸다. 당시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보다 직원들의 처우가 좋아졌다. 그러자 280억 원 적자 나던 게 60억 원으로 줄었고, 그 다음 해에 흑자로 전환됐다. 보증기관이 흑자를 냈다. 그러니, 자연스레 연임 부탁이 왔다. 매년 경기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칭찬만 받았다.직원 처우를 그렇게 올려주고도 직원들이 450% 성과금을 받았다. 평균 3천만원 씩 성과금을 받았다. 처우를 개선하고 경영을 하니 사기가 오르고 실적이 나더라.박해진 개인이 잘한 게 아니다. 직원들이 잘해줘서 박해진이 있는거다. 1월1일 남들은 시무식 할때, 우리는 오전 8시 야외에서 새해 목소리를 냈다. (웃으며)경인일보 1면에도 나고 그랬다. 지금도 경기신보는 처우가 좋고 복지도 최고다."-3번째 도지사와 함께 일하게 됐다. 손학규·김문수·남경필 지사는 어떻게 다른가."손학규 전 지사는 대한민국 지도자 중 가장 준비가 많이 됐다. 학력, 민주화 운동 등 이 양반은 보수 생각이면서도 개혁에 대한 면도 강하다. 옥스포드에서 공부하고 와서 운동권에서 벗어 났다. 지도자가 가져야 할 훌륭한 자질과 결단력을 다 갖췄다. 제대로 된 평가를 못받았다. 지금도 그 만한 사람 없다. 김문수 전 지사는 지도자 중 서민의 아픔을 안다. 제일 어렵게 산 사람, 밥을 굶고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니까. 이 사람처럼 서민의 아픔을 안 사람은 없다. 민주화 운동도 감옥을 4번 갔다오고 누구보다 서민의 아픔을 알고 가장 청렴한 사람이 김문수 지사다. 도지사 재선 시 후원금 29억원이 들어왔는데 국고에다 20억원을 반납한 사람이다. 결단력이 있다. 10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는다. 안보의식도 투철하다.남경필 지사는 두 양반 만큼 어려움을 겪진 않은 것 같다. 젊다. 그러나 남에게 없는 미래에 대한 통찰이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지도자들이 근시안적인데 내다보는 눈이 누가 얘기하면 대충 듣지 않고 자기걸로 소화한다. '나한테도 지혜를 주십시오'하며 거기서도 새로운 걸 얻는 스타일이다. 여과없이 경험한 거 이런거 막 얘기한다.아울러 혁신적인 사고가 있다. 정치인들이 말로는 혁신하지만 남 지사는 혁신을 현실에 이행한다. 개혁적인 보수이며 차세대 지도자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경과원은 기관 통합 후 조직 내부의 갈등을 빚고 있다. 이사장으로서 묘책은 있나."경과원은 두뇌와 현장을 모두 알아야 한다.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도록 잘 조합하면 상승효과를 가질 수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직원들이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나부터도 마찬가지지만 원장부터 본부장 직원들까지 모두 노력을 해야 한다. 말로만 하나가 되자 통합되자 이걸론 안된다. 프로그램을 물리적 통합만 했지 화학적 통합은 안됐다.진짜 같이 하려면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합동으로 바깥 행사를 하는 프로그램, 지금까지 그런 노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나. 많이 부족했다. 우선 노조가 하나 돼야 한다.(현재 경과원은 복수 노조). 노조가 다른 모습을 보여야 처우가 개선된다. 이사장으로서 너무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다. 우선 아이디어만 주고 싶다."-경기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경기도는 어떤 의미인가."경기도에서 30년 넘게 일했다. 경기도는 대한민국 안보의 중심이다. 군사력의 75%가 있다. 장성의 80%도 경기도에 있다. 경제적으로는 중소기업 소상공인 30%가 경기도에 있다.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 핵심 기술의 80%가 경기도에 있다고 본다. 판교테크노밸리는 미래의 경기도다. 지방으로 가면 기술인력들이 이동하지 않는다. 경기도는 그런 특수성이 있다. 경기도가 대한민국의 동력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공직자도 다른 지역과 달라야 한다. 경기도가 잘못되면 대체 방법이 없다. 중국이 한국 기술을 뛰어넘고 있는데 이 위기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지리적으로도 발전성도 있지만 현재도 중요한 위치고 앞으로 미래도 경기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글/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박해진 이사장은?▲경기도 이천 출생(1945년)▲용산고·고려대 법학과·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과정 수료▲농협중앙회 경기지역본부장▲농협중앙회 신용사업담당 부회장▲농협대학 학장▲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박해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시장은 경제발전 등의 공로를 통해 30년 가까이 각 기관의 수장 역할을 하며 경기도의 입지적 인물이자, 신화가 된 인물이다. 최근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으로 다시 공공기관에 컴백하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경인일보DB

2017-11-28 김태성·신지영

[인터뷰… 공감]김교흥 국회 사무총장

■신뢰받는 국회 만들기 구상은불체포 남용 방지 등 특권 내려놓기민원 적극 검토 국민입법 실현 초점■개헌 방향성과 공감대 형성은국민기본권 강화 지방분권도 담아야100회 이상 전문가와 의견 청취 수렴■'수도권 족쇄' 규제 완화 입장은경제자유구역 국내 대기업 유치 절실법개정 등 엉킨 것 풀고 끊긴 곳 이어야제17대 국회의원(인천 서구 강화 갑)을 시작으로 민주당 수석사무부총장, 인천시 정무부시장, 국회의장 비서실장 등 인천과 중앙 정치권을 넘나들며 활동 무대를 넓혀온 김교흥 전 의원이 최근 장관급인 국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국회사무처는 국회의원의 법제 업무를 지원하고 의원 외교, 의정 연수 등 국회 내 모든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곳으로 의원 보좌진을 포함해 4천여 명의 직원이 상주하는 입법부의 중심 기구다. 지난 16일 오전 국회 본관 3층 사무총장실에서 만난 그는 취임 이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여의도를 누비고 있다고 했다. 지난 1일 취임 이후 사무처 업무보고를 시작으로 국정감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준비하는데 온통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회에서 심사 중인 내년 정부 예산안도 원만히 통과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역량을 모으고 있다고도 했다.24시간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의 마음과 머리는 항상 인천을 향하고 있다. 김교흥 사무총장은 인천과 경기도 등 수도권 지역 발전의 족쇄로 지적받고 있는 수도권정비계획법을 포함한 많은 규제를 손봐야 한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게 인천 송도를 비롯한 경제자유구역에 국내 대기업이 들어올 수 있도록 관련 법규가 개정돼야 하는 거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국회 내 가장 큰 현안 중 하나인 개헌 문제와 관련해서는 개헌의 추동력은 오직 국민이라며 여야 정치권을 떠나 국민의 공감대를 힘으로 개헌이 이뤄질 수 있도록 총력을 쏟겠다고 강조했다.특히 여권 내 인천시장 출마 후보군에 늘 이름을 올리고 있는 그는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내가 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분위기와 명분이 돼야 뜻을 이룰 수 있다"며 "우선 사무총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에 인천 시민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그때 가서 고민해 보겠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중요한 시기에 국회 사무총장을 맡게 된 소감은부족한 것이 많은데 입법부 사무처를 책임지는 중책을 맡게 됐다. 무엇보다 그동안 인천시민들이 많은 힘과 지혜를 모아줘 막중한 소임을 맡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국민에게 신뢰받고 힘이 되는 국회가 될 수 있도록 맡은 소임을 다하겠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구상은국회 사무총장으로서 불체포 특권 남용 방지를 비롯해 친인척 보좌진 채용 제한, 묻지 마 증인채택 제한 등 국회의 특권 내려놓기 작업에 힘을 쏟겠다. 국회 사무처는 정세균 의장을 중심으로 여야 국회의원들과 모두 함께 '신뢰받는 국회', '힘이 되는 국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와 함께 국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반영하기 위해 소통창구는 더 크게 만들고 문턱은 낮추겠다. 현재 '국회 민원 지원센터'와 '온라인 민원창구'를 통해 접수되고 있는 의견은 국회 사무처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각 상임위에 배분해 국민의 요구와 제안으로 만들어지는 국민입법을 실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국회 사무총장으로서 개헌에 대한 견해·방향성은내년 지방선거 기간은 민주적 개헌을 위한 최적기다. 정세균 의장은 '포괄적 개헌'을 주창하고 있다. 이는 권력구조 개편은 물론 국민 기본권을 강화하고 지방분권이라는 시대 정신도 담아내야 한다는 개념이다. 지방 분권형 개헌은 현재 총론에서 큰 이견은 없는 듯하지만 자치입법권과 자치재정권, 조직권 등 각론으로 들어가면 의견 차이가 난다.국회는 개헌이라는 국민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30년 만에 개헌특위를 구성, 국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왔다. 특히 이달 중 개헌특위 자문위가 제출한 개헌안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조문 작업에 착수할 방침이다. 국회의 개헌 로드맵은 올해 헌법 개정을 위한 기초 소위를 구성하고 내년 2월까지 개헌안을 완성시킬 방침이다. 3월엔 국회 개헌안이 발의되고 5월에는 국회 표결을 거쳐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이다.-개헌은 국민 공감대가 우선돼야 한다. 이를 위한 국회의 노력은그렇다. 개헌은 국민의 공감대가 가장 중요하다. 국회는 개헌특위를 만들어 지난 1월부터 가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25차례 회의를 했으며 각계 전문가와 관심 있는 국민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도 꾸려 100회 이상 의견을 모으는 과정을 거쳤다. 국회 개헌특위가 주최하는 국민토론회 또한 지난 8월 부산을 시작으로 11개 지역에서 진행했다.이제는 개헌과 관련한 주요 쟁점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를 이뤄가야 할 시점이다. 이런 합의는 내년 2월까지 늦어도 3월까지는 마무리돼야 한다. 국민에 의한, 국민의 삶을 바꾸는 개헌이 돼야 할 것이며 개헌의 추진 동력은 오직 국민이라고 생각한다.-인천과 경기도 등 수도권 발전의 족쇄로 지적받고 있는 각종 규제 완화 입장은수도권 역차별 현상이 심각한 지역 중 한 곳이 인천이다. 인천이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추는데 선행돼야 할 것이 규제개혁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경우 수도권정비계획법을 비롯한 강력한 수도권 규제에 묶인 탓에 국내 기업의 입주가 어렵고 이는 결국 외국 투자 유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대기업도 없는 곳에 외국 기업이 무엇을 보고 들어오겠는가.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수도권정비계획법상 성장관리권역으로 지정돼 있어 대기업 공장의 신·증설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연면적 500㎡ 이상 공장의 신·증설도 공장총량제의 적용을 받는다. 국내 대기업의 경제자유구역 입주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할 열쇠라면 충분히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엉킨 것은 풀고, 끊긴 곳은 이어야 한다.-내년 인천시장 선거 출마 의향은나는 인천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인천에서 학교를 나왔고 인천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인천지역 국회의원, 인천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하면서 인천의 현안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고, 인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미래비전을 그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국회 사무총장이라는 중책을 잘 수행해 국회가 국민에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도록 만드는 것에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기라고 본다. 국회 사무총장으로서 역할과 소임을 다한 다음 인천시민들의 엄중한 평가를 받겠다. 그때 가서 인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인천, 경기 시민들을 포함한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제가 인천에서 정치를 하면서 인천시민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시민들의 사랑으로 국회의원, 인천시 정무부시장이 됐고 그 덕에 입법부의 중책인 국회사무총장까지 맡게 됐다.시민들께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겠다.국회 사무총장으로서 신뢰받는 국회상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소통을 바탕에 둔 협치로 국회에 대한 국민 신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소통은 만남에서, 마주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신뢰받는 국회가 되기 위해서 여야가 마음과 뜻은 다르더라도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사무총장으로서 필요하다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찾아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마당쇠' 같은 사무총장이 되겠다.글/김순기·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교흥 사무총장은?▲경기도 여주 출생(1960년) ▲인천대, 인천대 대학원 졸업 ▲前 중소기업연구원장 ▲前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제17대 국회의원 ▲前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 ▲前 국회의장 비서실장김교흥 국회 사무총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인천시민들이 많은 힘과 지혜를 모아줘 막중한 소임을 맡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국회 사무총장으로서 신뢰받는 국회상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1-21 김순기·김명호

[인터뷰… 공감]'포천 군사시설 피해대책 마련 촉구' 이길연 범대위 위원장

야간 사격만이라도 줄여달라 했지만 개선 안돼사격 안할때 포함한 소음측정 평균치 어이없어재발방지 약속에도 목숨 위협 도비탄 사고 계속외부단체 참여 차단 불구 왜곡·호도 분통 터져보상 앞서 주민 목소리 귀기울이는 진정성 필요우르르 쾅! 펑! 펑! 펑!아직 시계는 정오도 가리키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사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에 위치한 미군사격훈련장인 '로드리게스 사격훈련장(Rodriguez Live Fire Complex·이하 영평사격장) 정문 앞에 거주하는 주민 대다수의 스마트폰에는 소음측정용 애플리케이션이 설치돼 있다.영평리 마을회관 옥상에도 소음측정기가 설치돼 상시 소음을 측정한다. 한 주민이 스마트폰을 꺼내 포 사격 순간 소음 측정치를 보여줬다. 결과는 75㏈.도심 도로변 아파트 실내에서 들리는 주간 소음 최대 기준치가 65㏈인 점을 고려하면 시내서 동떨어진 산골짜기 소음치고는 꽤나 큰 편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영중면 영평리 주민들에게 낮에 들리는 이런 사격 소음은 일상이 된지 오래다.지난 2014년 영평사격장 등 군사시설 피해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조직된 '포천시 사격장 등 군 관련 시설 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이길연(61) 위원장은 "만약 도시에서 이런 소음이 1년 365일, 24시간 들린다면 어느 누가 참을 수 있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그나마 낮 시간에 들리는 사격 소음은 참을 만하다. 주민들이 직접 측정한 야간사격 소음은 거의 매일 100㏈을 넘긴다.기차 철로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소음이 약 90㏈이고 건설공사 현장 반경 10m에서 나는 소음이 약 100㏈ 수준이다. 사실상 사격장 일대 주민들의 일상은 소음으로 시작해 소음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위원장은 "이곳 주민들은 평생을 사격 소음 속에 살면서도 한·미동맹과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왔지만 야간사격만이라도 조금만 줄여달라고 요구한 지가 언 10년이 넘었다"며 "국방부와 주한미군이 나서서 주민들과 MOU까지 체결했지만 전혀 개선된 점이 없어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피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주민 항의가 갈수록 거세지자 국방부 차관도 현장을 직접 찾는 등 정부의 관심이 쏠리긴 했지만 좀처럼 주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이 위원장은 "올해 초 차관을 비롯한 국방부 관계자들이 몇 차례 영평사격장을 직접 찾으면서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국방부가 진행 중인 피해 대책 마련을 위한 용역 역시 날림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포 사격 순간 소음이 100㏈을 넘나드는데 이를 무시한 채 사격이 없는 시간의 소음까지 측정해 평균치를 결과물로 보여준다"며 "이런 결과물이 정부와 청와대에 전달되면 우리 주민들을 생떼나 쓰는 어린애 취급할 것이 아니냐"고 격분했다.주민들의 피해는 소음만이 아니다. 영평사격장 일대 창수면 운산리와 오가리를 비롯한 영중면 영평·성동리, 영북면 야미리 등 사격장 인접 주민들은 잊을 만 하면 날아드는 주먹 만한 탄환에 목숨까지 위협받는 실정이다.아파치 헬기와 각종 중화기에서 쏟아내는 탄환이 사격장 내 탄착지에 맞고 튕겨 나가는 도비탄이 날아드는 것이다.도비탄은 지붕을 뚫고 거실로 떨어지고 축사에 날아들고, 주민들이 일하는 밭에 꽂히곤 한다. 이런 도비탄 사고도 10차례가 훌쩍 넘어섰고 정부와 미군은 그때마다 재발 방지와 시설 개선을 약속했지만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주민들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60년이 넘도록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이런 상황을 견뎌왔다.그러나 최근 이곳 주민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올해로 4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범대위를 반미세력으로 호도하는 일부 그릇된 인식 때문이다.이 위원장은 "주민들을 제외한 외부 단체나 조직이 범대위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데다 주민들은 항상 정부와 미군, 주민들의 상생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곳 주민 여럿이 공산당이 싫어 북한 떠난 실향민인 데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최대한 불편도 감수하면서 살고 있는데 우리를 두고 반미세력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아주 큰 실수"라고 주장했다.실제 이곳 주민들은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계기로 반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던 지난 2003년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영평사격장을 난입한 사건이 있을 때도 학생들을 뜯어말리는 입장이었다.더욱이 범대위를 이끌고 있는 이 위원장은 '전농'으로 불리는 대표적 진보성향 시민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 경기지역 부의장을 맡고 있어 언제든 대형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이 위원장은 "주민들이 나서 범대위를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전농 대표단은 물론 여러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아 피해를 공감하고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며 "순전히 주민 힘으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우리를 순해 빠진 시골 촌놈으로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를 반미세력으로까지 몰고 가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이런 섭섭함을 표한 이 위원장은 최근 사드(THAAD)문제가 불거진 경상북도 성주군의 사례를 들었다.그는 "성주 사드문제가 전국적으로 불거지자 정부는 이를 감싸주기 위해 수조원에 달하는 지원안을 속속 내놓고 있는데 정작 미군에 의한 피해를 수십년이 넘도록 참아온 영평사격장 주민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며 "내년도 미군공여지 주변지역 지원사업에서도 영평사격장 피해 주민들을 위한 대책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범대위는 애초 야간사격으로 잠을 설쳐야 하는 상황을 개선해 주고, 도비탄 사고에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할 뿐이었다.그러나 이런 주민 요구에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자 이들은 '영평사격장 폐쇄'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영평사격장 주변 주민들의 이런 목소리가 정부에 전달되기만을 바라면서 시작한 영평사격장 앞 1인 시위가 오늘로 764일째를 맞는다.2년이 훌쩍 넘는 기간이다.이 위원장은 "주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희생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며 "정부가 주민들의 순수한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부터 영평사격장 폐쇄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이렇게 참다못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왜곡돼 반미세력으로까지 비쳐지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강력히 밝히고 나섰다.이 위원장은 "어차피 반미세력으로 낙인 찍힌 마당에 정부까지 주민들의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진짜 반미세력이 뭔지 보여줘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라며 "영평사격장 주변이 반미의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곳으로 변해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이어 이 위원장은 "정부가 다짜고짜 보상안만을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주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글=포천/최재훈·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 사진=포천/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지난 13일 이길연 위원장이 1인 시위가 762일째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지난 4월 1일 영중면 성동리의 한 농가에 영평사격장에서 날아든 길이 10cm에 달하는 중화기 탄두가 떨어졌다. /범대위 제공지난 3월 21일 영평사격장 입구 1인시위 현장을 찾은 황인무 전 국방부 차관을 향해 한 여성이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지난 3월 28일 영중면 영평리 영평사격장 입구에서 진행된 사격장 피해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에서 주민들이 상여를 들고 사격장 입구를 돌아나오고 있다.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지난 3월 28일 영중면 영평리 영평사격장 입구에서 진행된 사격장 피해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 당시 모습.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포천시 영중면 영평리에 위치한 미군 사격훈련장인 영평사격장 정문 앞 1인시위 현장 위로 미군의 헬리콥터가 유유히 저공 비행해 날아가고 있다.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

2017-11-14 최재훈·정재훈

[인터뷰… 공감]영화 '대장 김창수' 연출 이원태 감독

■개항기 인천에 대한 접근과 주요 장면 고증은?서양과 동양·봉건시대와 근대 등 충돌하는 공간 표현건축물 옆 판잣집처럼 부조화 이미지도 꼼꼼히 묘사백범일지 셀 수 없이 읽고 수차례 답사 디테일 살려■사실 아닌 '경인선 부설공사 노역' 다룬 이유는?곡식·광물 이어 위안부·노동자까지 실어나른 '만행'일제수탈의 현장 국민들에 알리기 위해 역사 재구성소설 아편전쟁 등 개항장 소재 이야깃거리 더 있어인천은 청년 '김창수(金昌洙)'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 '백범(白凡) 김구(金九)'로 다시 태어나는 전환점을 맞은 공간이다. 김구는 인천에서 2차례의 감옥살이를 했다. 국모 시해(을미사변)를 보복한다며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인천감리서에 투옥된 게 첫 번째 옥살이다. 당시 21살이던 김창수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얼마 후 인천 감옥에서 탈출했다. 이름을 고친 김구는 독립운동을 위한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 움직임과 관련된 '안악 사건'으로 1911년 서울에서 또다시 옥살이하다가 39세 때인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된다. 두 번째 인천 옥살이에서 백범은 인천항 축항 공사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김구는 이때 옥중에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백범'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떠나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을 때까지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지난달 19일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는 백범의 일대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이나 '해방 후 남북 분단의 격동기'를 다루지 않았다.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백범의 인천에서의 감옥살이를 이야기했다. 영화 '대장 김창수'가 백범의 20대 초반 청년 시절, 그중에서도 인천감리서에 사형수로 투옥된 시기를 스크린에 투영한 이유는 뭘까. 지난 2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압구정 CGV에서 '대장 김창수'를 연출한 이원태(49) 감독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다. 이원태 감독은 이날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오후 9시 30분부터 진행한 '관객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프로그램 연출자 출신인 이원태 감독은 지난 10여 년 동안 다수의 영화와 소설을 기획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인천 개항장을 배경으로 쓴 '아편전쟁'(2016)은 소설가 김탁환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영화 '대장 김창수'의 소설 버전도 김탁환 작가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왜 백범 김구의 인천 감옥살이를 영화화했나."2012년 겨울 상하이 여행 때 임시정부를 들렀다. 너무 작고 초라한 상하이 임시정부를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반면 다른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전시회 관람하듯 쓱 지나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백범 김구 선생을 잘 몰라서 느낌이 없다고 생각해서 백범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백범 선생의 인생을 일제강점기 직전, 상하이 독립운동, 해방 후로 크게 3개 지점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첫 지점이 인천이다. 김창수는 사형수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다가 살아 돌아왔다. 이후 민족의 지도자가 됐다.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죽음을 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내던질 용기가 생긴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가 있듯 '김구 비긴즈'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적으로도 을미사변 직후의 들끓는 민심 속에서 대형사고를 친 사람이니 드라마틱한 면이 있고, 감옥 또는 탈옥을 그린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김창수의 옥살이에는 휴머니즘이 있다."-영화 속 개항기 인천을 우리나라 사람과 서양인, 중국인, 일본인이 공존하는 국제도시로 그렸다. 그러면서도 서양식 근대건축물과 전통한옥인 인천감리서, 서양식 복장의 감리서 간수와 전통복장의 죄수 간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영화를 준비하면서 공부한 인천 개항장이란 공간에 매료됐다. 백범이 인천감리서 감옥에 갇힌 시기 인천은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로 충돌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공간이었다고 본다. 서양과 동양이 부딪치고, 봉건시대와 근대가 부딪치고, 문명과 문명이 부딪치고, 시대와 시대가 부딪치는 속에서 인천사람들이 살았던 것이다. 당시 인천 개항장 거리의 풍경이 영화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지만, 그 충돌의 이미지를 꼼꼼히 묘사하려고 애썼다. 또 개항기 인천에서는 부조화의 이미지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근대가 밀려 들어왔다. 억지로 밀려 들어오니까 조화롭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 속에는 당시 인천의 모습처럼 서양식 근대건축물 바로 옆에 누추한 판잣집 가게가 붙어있고, 양복을 입은 서양인과 누더기 한복을 입은 인천사람들이 섞여 있다. 간수들과 죄수들의 복장도 마주 서면 동시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차이를 뒀다. 미술감독, 촬영감독과 영화 콘셉트를 짤 때 개항기 인천이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었다는 걸 강조했다."-개항장 거리, 인천감리서 감옥, 경인선 부설공사 현장 같은 영화의 줄거리를 이끄는 주요 장면은 어떻게 고증했나.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읽었고, 인천 중구의 옛 개항장과 감리서 터 일대 답사도 여러 차례 했다. 답사는 고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 김구 선생의 심경을 현장에서 직접 느껴보자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인천감리서 터가 표지판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점은 무척 안타까웠다. 인천 개항장이나 김구 선생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찾아낼 수 있는 '디테일'도 영화 속에 많이 숨어있다. 영화 속 김창수가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기 전 간수들이 옥에서 압수한 책 가운데는 실제로 그에게 신문물을 일깨워준 '태서신사(泰西新史)'를 넣었다. 경인선 부설공사 현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중국인이 짜장면을 나눠주는 장면도 '디테일'을 살리자는 차원에서 재현했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놈들 등쌀에 못 살겠네'라는 가사의 '인천아리랑'를 경인선 부설공사 장면에서 노동요로 쓰기 위해 고증에 공들였다." -백범의 강제노역에 동원된 것은 두 번째 옥살이 때고, 실제로는 인천항 축항 공사현장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첫 번째 옥살이'로 '경인선 부설공사 노역'으로 바꾼 이유는."경인선 철도 부설은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역사라고 생각해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인천과 서울을 이은 이유는 인천이 개항장이었기 때문이다. 수탈의 심장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철도라는 혈관을 뚫어야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때부터 우리나라를 완전히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도 나오지만, 우리나라 백성들이 다치고 죽고 하면서 만든 경인선 철도로 우리나라의 곡식, 광물,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노동자까지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백범이 실제로 노역에 동원된 인천항 축항 공사도 의미가 크지만, 경인선이 주는 역사적 상징이 더 크다는 판단이었다."-소설가 김탁환과 함께 '대장 김창수'를 포함해 인천 개항장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기획하거나 공동 집필했다. '대장 김창수' 외 다른 작품도 영화화할 계획이 있나."김탁환 작가와는 창작집단 '원탁'을 만들어 공동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소설·영화 '대장 김창수'에 앞서 김탁환 작가와 공동작업으로 지난해 출간한 소설 '아편전쟁'은 작품 속 배경의 99%가 인천 개항장이다. 실제 작품 기획은 '대장 김창수'가 앞섰는데, 영화 제작기간이 4년이나 되다 보니까 중간에 '아편전쟁'이라는 개항장 배경의 범죄소설을 기획했다. 그 시기 중국은 아편으로 무너지고 있었는데, 중국과 가장 가까우면서 왕래가 활발한 인천도 아편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당시 인천에만 유일하게 청나라 조계가 형성돼 있었고, 청나라 상인과 노동자들이 인천에 들어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편전쟁'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의 출발점이다. '아편전쟁'은 이미 영화화가 추진되고 있는데, 직접 참여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인천 개항장을 소재로 한 이야깃거리 몇 가지가 머릿속에 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 2일 서울 압구정 CGV에서 만난 영화 '대장 김창수'의 이원태 감독. 이날 '관객과의 대화(GV)' 행사에 참석한 이원태 감독은 "관객들이 잘 몰랐던 백범 김구 선생의 청년시절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알게 됐다며 고맙다는 반응이 많다"고 말했다.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일본인 살해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서 재판받고 있는 청년시절의 김구 선생. /딜라이트 제공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인천감리서 감옥소장 역할을 맡은 배우 송승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원태 감독. /딜라이트 제공

2017-11-07 박경호

[인터뷰… 공감]'전국체전 경기도선수단 총감독' 최규진 道체육회 사무처장

■체육인·정치인으로서 걸어온 길집안 형편 탓 야구 대신 중·고교 시절 태권도 선수 활약수원시체조협회장 역임 후 도의원으로 소관 상임위 활동산악연맹회장땐 도지사 설득해 히말라야 원정대 파견도■도체육회 사무처장의 고민18연패 새목표 지금 성적 만족하지 않고 발전방안 모색통합 성공 체육회 흔들림 없는 단체로 거듭나는 게 과제"16연패에 대한 기쁨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경기도는 제9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종합우승을 달성하며 대회 종합우승 최다연속 기록인 16연패를 달성했다. 도선수단 총감독을 맡았던 최규진 도체육회 사무처장은 "16연패를 달성했다는 것은 기쁘지만 생각해 볼게 많아졌다"고 말한다.최 사무처장은 종합점수와 메달수가 전년도 보다 낮아진 것을 고민하는게 아니었다. 인구 1천300만명의 한국 최대 광역단체인 도의 규모와 위상에 맞는 성적을 냈는지, 그리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다. 16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최 사무처장이 경기체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그도 체육인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첫번째 인연, 야구를 하고 싶었던 어린이 태권도 선수 되다"경기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체육인인가요?"처음 최 사무처장을 만나는 사람은 그의 범상치 않은 체격으로 인해 이런 생각을 갖고는 한다.3선 도의원 출신이라 정치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있는 최 사무처장이기에 혹자들은 그를 체육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하지만 최 사무처장은 중·고교 시절 태권도 선수로 활약했었다.그는 "청소년시절 태권도를 했었다. 소년체전이나 전국체전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지역대회에서는 입상한 적도 있었다"고 밝혔다.수원북중에 재학 당시 서울에 있는 모고교 태권도부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최 사무처장은 "어렸을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지동초등학교에 입학했을때 막 야구부가 생겨서 가입해서 훈련도 했었지만 당시 집안 형편이 여유가 없어서 못했다"며 "가끔은 내가 그때 계속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고 전했다.이어 최 사무처장은 "야구는 못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태권도를 하게 됐고 중학교때는 지역 대회에서 1등을 한적도 있다"며 "또 서울지역의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지만 하숙을 하며 운동을 하는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서 수원에서 운동을 했다"고 말했다.#두번째 인연, 도의원으로 다시 만난 경기 체육고등학교까지 선수 생활을 했던 최 사무처장은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생활체육으로 여러 종목을 즐겼다.그러다 2000년 고교 선배들의 제안으로 수원시체조협회장을 맡으며 지역 체육계에 잠시 인연을 맺었고 그 무렵 제5대 도의회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활동을 했다.2002년에는 제6대 도의회 전반기 문화여성공보위원회 위원장과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 이사도 맡았다.2007년에는 지인들의 추천으로 도산악연맹회장도 맡아서 활동했다.최 사무처장은 "제 모교인 수원농고에 체조부가 있는데, 그렇다 보니 체조계에 선배들이 많다. 그분들이 제안해 체조협회장을 맡아 활동 했었다"며 "도산악연맹은 두번째 가맹경기단체장 활동이다 보니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그는 "당시 다른 지역의 경우 지역을 홍보하기 위해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경기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이 문제는 지역 산악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경기도의 자존심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해결해 보고 싶었다"고 전했다.이어 최 사무처장은 "어떻게 됐냐고요? 인연이 있던 김문수 도지사에게 달려가 '도가 한국체육의 중심이라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해내는 것을 왜 우리가 못 하냐'며 부탁했고 2차례에 걸쳐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위한 원정대를 파견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세번째 인연, 함께 고민하는 사무처장이 되다최 사무처장이 다시 지역 체육계와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건 바로 도체육회 사무처장을 맡고 나서다.그는 "선수 출신이라고 해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제가 도체육회 사무처장을 맡게 된건 제 개인적으로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체육인을 비롯해 도체육회 직원들과 소통하는 사무처장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이어 최 사무처장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이 성적을 내는 선수들, 그들이 기량을 펼 수 있도록 묵묵히 뒤에서 역할을 하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며 "이번 16연패도 그런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뤄낸 결과였다"고 전했다.최 사무처장은 "전국체전 기간 동안 선수와 지도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경기장을 다니며 현장에서 도가 한국체육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며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발굴해 낸다는 점에서는 뿌듯했지만 우리 지역 선수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지역을 떠나서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또 최 사무처장은 "100회 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개최도시 이점 등을 생각한다면 18연패 달성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꼭 18연패를 이뤄내기 위해서가 아닌 경기 체육의 성장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성적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그는 "다른 시도체육회 사무처장들은 경기도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활체육회와 체육회의 통합을 성공적으로 마친데 대해 부러움을 보내고는 한다"며 "통합체육회가 발족했지만 흔들림 없는 하나의 단체로 성숙된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인거 같다"고 덧붙였다.마지막으로 최 사무처장은 "이런 고민을 혼자 하는게 아닌 도체육회 임직원, 그리고 체육인들과 함께 해 방안을 모색해 나가려고 한다"며 "오늘이 아닌 내일이 밝은 도체육회와 경기체육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최규진 사무처장은?-학력▲ 1978년 수원 북중학교 졸업▲ 1981년 수원농립고등학교 졸업▲ 1989년 경희대학교 환경학과 졸업-경력▲ 2000년 6월~2008년1월 제5,6,7대 경기도의원▲ 2002년 7월~2004년 6월 제6대 경기도의회 전반기 문화여성공보위원회 위원장▲ 2007년 1월~2008년 1월 제7대 경기도산악연맹회장▲ 2009년 7월~2010년 3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원시협의회장▲ 2010년 7월~2011년 7월 한나라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2012년 2월~2014년 1월 한국환경공단 환경시설본부장▲ 2015년 1월~현재 경기도체육회 사무처장지난 30일 경기도생활체육대축전이 열린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만난 최규진 경기도체육회 사무처장이 인터뷰를 끝낸 후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2017-10-31 김종화

[인터뷰… 공감]붓으로 한글지도 그리는 '세계평화작가' 한한국 작가

20대때 이름 걸맞은 정체성 찾던 중 세종대왕 메시지 꿈 꿔 기획·제작20여년간 1㎝ 200만자 38개 작품 완성… UN본부 22개국·북한서 전시팔·무릎 피범벅 고통 속 자음·모음 화합의 원리처럼 한반도 통일 염원이산가족 아픔 담아 8년간 만든 '우리는 하나' 北도 예의 갖춰 가져가"본명이세요?"그를 만나면 많은 이들이 물어보는 말이다. 그의 이름은 '한한국(50)'. 본명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름에 나라가 3개(나라 한(韓), 나라 한(韓), 나라 국(國))나 들어가 있고, 전남 화순의 필봉산(筆峰山) 자락에서 태어나 한석봉의 후예(33대손)로 그 기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붓 하나로 한국을 전파하고 세계평화를 얘기하는 '세계평화작가'라는 타이틀이 억지스럽다거나 어색하지 않고, 그의 운명인 양 자연스럽기만 하다. # 내 이름은 '한국', 정체성 찾다 한글지도 제작의 길로… 그가 하는 일은 한글로 세계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한지를 수차례 배접하여 만든 대형한지 위에 세계평화의 염원이 담긴 글을 한글로 한자한자 빼곡히 담아낸다. 그의 작품은 각 나라의 지도에 마치 점처럼 한글을 채워넣는 것이 특징이다. 채색 대신 한글을 넣는 것이다. 한글 내용은 그 나라의 역사나 특징, 때론 문학작품이 들어가기도 한다. 글자는 1㎝의 작은 붓글씨로 채워가게 되는데 한번 오탈자가 나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글씨를 잘쓰는 것은 기본이고, 글자체와 형태 글씨의 강약과 전체적인 줄이 0.1㎜도 틀리지 않게 써야 한다. 어지간한 집중력과 체력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짧게는 5개월, 길게는 수년의 작업시간이 든다. 그 시간을 온전히 쭈그린 자세로 집중해야 하니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수련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연장이 남다른 것도 아니다. 작품활동을 할 때 사용하는 붓은 '대형 붓'을 제외하곤 세필붓(1㎝ 그릴때 쓰는 붓) 등은 모두 주변에서 쉽게 구입할수 있다.그와 붓과의 인연은 어릴적 부터 시작됐다. "8살에 붓을 잡고 한학을 공부했다. 군대에서도 모필병(毛筆兵, 상장·표창·각종 차트 등 글씨쓰는 일 담당)을 맡아 붓과 떼려야 뗄수 없는 생활을 했다"는 그는 1993년의 어느 날 문득 계시와도 같은 꿈을 꾼 뒤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당시 1993년은 세계화 붐이 막 일기 시작했던 때였다. 20대 청년이었던 내게 불현듯 든 생각이 '내 이름이 '한국'인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정체성 찾기에 나섰고 전국의 교회, 사찰 등을 돌며 일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세종대왕님이 나오셨다. 한글로 지도를 만들어라. 평화지도로 해라. 이러한 메시지를 준 꿈이었는데 꿈이 너무 선명해 그 길로 도서관을 찾았다." 그날 이후 그는 그 어디에서도 본적 없고, 시도되지도 않았던 '한글지도' 제작에 들어갔다.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하겠다 하자 주변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했고, 그의 깊은 뜻을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다. 기본 1m에서 10m를 아우르는 한지 위에 한글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고되고 또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깊었다."자음과 모음이 만나 글자를 이루는 것이 한글이다. 북한에서도 한글을 쓰고 있고, 남한에서도 한글을 쓰고 있다. 이 한글로써 우리는 하나가 된다. 자음과 모음이 통일되고 화합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화합의 원리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한글의 원리처럼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마음으로 평화지도를 제작하고 있다."그의 이러한 작품세계는 그가 하나둘 대작을 선보이면서 시선이 달라졌다. 한지 위에 한땀한땀 피땀서린 한글로 만들어진 세계 여러나라의 지도가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내자 의구심은 어느 순간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 피와 땀으로 점철된 작품세계, 북측도 예의 다해"눈을 가리고 쓰는 훈련을 한다. 마치 한석봉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에서나 하던 포복훈련도 한다. 대형 한지 위에서 작업하다보면 몇날몇일을 쭈그려 작업하는 날이 많다. 그러다보면 다리와 양팔의 통증이 심해진다. 종이 위를 기다보면 양팔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배어나오는 일도 예사로 벌어진다."이렇게 고된 고통과 피, 땀으로 완성된 지도가 38개 작품이다. 20여년간 작품에 쓰인 한글이 무려 200만자가 넘는다. 그의 작품은 UN본부 22개 대표국가(2008년)에도 가있고, 북한 묘향산에도 그의 작품('우리는 하나')이 전시돼 있다. 그가 팔과 무릎이 피범벅이 되어도 작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글과 한국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그의 마음가짐에 있다. "지구상 어느 국가에선가는 이런 평화의 지도를 그리고 염원해야 한다. 어렵고 힘든 작업이지만 내가 하고 있다는데 자부심도 느껴지고 영광스럽다."많은 작품중에서도 그가 특히 애착을 갖는 작품은 2000년대 초 제작한 '우리는 하나'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두점을 제작했는데 한글이 12만자가 들어갔다. 무려 8년의 제작과정이 걸렸으며, 남북한 대표시인들의 작품과 이산가족들의 수기가 한글로 만들어졌다. 이중 하나의 원본이 지난 2008년 통일부의 승인하에 북한에 전달돼 전시 중이다."현재 북한 묘향산에 있는 '우리는 하나'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 제작과정이 힘들었다. 한반도를 그린 이 작품은 이산가족수기와 평화염원이 담겨 있다. 지도상 3·8선을 그릴때 특히 힘들었다. 그런데 그 지점의 한글문구가 '어머니, 살아는 계십니까. 살아 생전 밥한번 해드리는게 소원입니다'라는 어느 이산가족의 수기였다. 이 문구를 쓰면서 3·8선을 넘었다. 그 글을 보면서 멈출수가 없었다. 양팔, 다리가 멍들고 붉게 물들었지만 지체할수가 없었다."이 작품은 한 작가 본인에게도 의미있는 것이지만 북한측에도 의미가 남달랐던 것 같다. 북한은 작품을 받으며 조건을 얘기하라했고, 한 작가는 "조건이 없는게 조건이다. 남북평화통일을 위해서"라고 일축했다. 이에 북측은 감사장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자칫 국가보안법에 위반될 소지가 있어 북한 문화성 직인이 찍힌 '인수증'과 함께 '기본합의서'라는 것을 만들어 북측은 한 작가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했다.한 작가는 북측에 작품을 제공하기 전 한가지 제안을 하기도 했다. 작품을 우리의 한이 서려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평화기원제를 지낸 뒤 전달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민족 염원의 넋을 담아 보내고픈게 한 작가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북측은 다른 곳을 찾으라했고, 그렇게 해서 5·18국립묘지에서 평화기원제를 한 뒤 북으로 보내졌다. 북측은 작품을 가져가면서도 예의를 다했다. 접촉장소인 중국에 고려항공기 특별기를 띄워 안전하게 가져간 것이다. 한달간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도 이뤄졌다.# 통일을 말하다! "평화는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적도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정서상 지금 통일을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북한의 계속되는 핵 위협과 국제 정세의 불안상황. 그럼에도 한 작가는 통일을 얘기한다. 한발 더 나아가 평양전시를 꿈꾼다."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언제든 전시회를 할수 있다. 하지만 관계가 안좋을 때 진정한 통일의 염원을 담아 진행하는 것에 의미가 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한에서 갖고 있는 '통일'이라는 작품도 빨리 전시가 돼서 많은 이들이 '통일'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남북평화통일을 염원하고 기원했으면 좋겠다"는 그는 "작품을 보며 좀더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통일에 대해 생각해볼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한한국 작가 제공■한한국 작가는?-약력▲ 세계평화사랑연맹 이사장▲ 중국 연변대학(예술대학) 객좌교수▲ (사)한국기록진흥원 원장▲ 8천만서명운동본부 이사장▲ 국제언론인클럽 상임고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역임)▲ 조선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역임)-수상내역▲ 2017 경기도를 빛낸 자랑스런 도민▲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물 대상(2회 선정)▲ 제5회 대한민국신창조인대상 ▲ 2017글로벌평화공헌대상▲ 2017국제평화대상▲ 2017한국을 빛낸 사람들 대상(미술부문) 등 다수 -작품세계▲ 2004~2009 '중국평화지도' 및 '희망대한민국' 대작 완성▲ 2002~2007 세계에서 가장 큰 '한반도평화지도' 대작 완성▲ 2002~2005 'UN헌장평화지도' 완성▲ 1995~1998 '한글십자가' 완성▲ 1994~2013 세계 34개국 한글세계평화지도 완성▲ 1996~2002 대한민국 9개도 '대한민국 평화·화합의 지도' 완성붓 하나로 세계평화를 전하는 한한국 작가. 그는 한글로 세계평화지도를 제작해 한글의 우수성은 물론 남북평화통일, 더 나아가 세계평화 염원의 뜻을 전하고 있다. 대형 한지 위에 1㎝ 간격의 한글을 채워넣는 작업은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다. 그의 작품은 UN대표국가를 비롯 북한에 까지 전시되며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평화작가'로 그 이름을 더 공고히 하고 있다.

2017-10-24 이윤희

[인터뷰… 공감]마지막 가곡집 7권 발간 강화 출신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600여곡 작곡 슈베르트만큼 쓰겠다던 목표 이뤄… 도움 준 많은 분들께 감사초교때 처음 들은 노래 단번에 외우는 등 인천서 작곡가로서의 숙명과 만나인천중학교 밴드부서 실력발휘 다양한 악기 섭렵… 고 2때 작품 발표회 가져식민시절 아픔도 생생하지만 인생의 '노른자위' 고향서 기악곡 정리 바람도인천 강화 출신의 작곡가 최영섭(88)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수식어는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다. 같은 강화 태생의 시인 한상억(1915~1992)의 시에 최영섭 작곡가가 곡을 붙여 만든 이 가곡은 한국 음악 역사에서 가장 자주 애창되는 가곡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누구도 이견이 없다.인천의 작곡가 최영섭이 1947년부터 70년 동안 작곡한 665곡의 가곡이 마지막 143곡을 수록한 가곡집 7권(아브라함 음악사) 발간으로 모두 책에 정리됐다. 그의 작곡인생 꼭 70주년이자, 지난 2010년부터 정리 작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인 올해 마무리된 작업이다.가곡 정리작업은 2010년 210곡을 담은 1~3권을 시작으로, 2012년 70곡과 111곡을 각각 정리한 4·5권, 2015년 131곡을 실은 6권에 이어 올해 143곡을 담은 7권으로 마무리됐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가까이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그를 만났다.최영섭 작곡가는 "가곡을 600여곡 작곡했다는 슈베르트만큼 곡을 남기겠다며 다짐한 중학교 시절의 바람이 이제 이뤄졌다고 생각하니 흐뭇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며 "남은 여생은 관현악곡과 칸타타, 오페라, 합창곡 등을 정리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또 "작곡하는 사람은 세상에 남겨 놔야 한다는 소명 때문에 시작한 일인데, 건강이나 생각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보살펴 준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이뤄내지 못했을 일"이라며 "어쩌면 마지막 가곡집이 될 지 모를 작업에 관심을 가져주고 도움을 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이번 작곡집에는 좀 더 쉽게 부를 수 있게 고친 '그리운 금강산 개정판'의 악보와 고은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광교 적설' 등 가곡과 성가곡, 찬송가 등이 수록됐다. 그가 손으로 쓴 자필 악보도 30여편이 실렸다.한 곡 만들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70여년 동안 665곡을 남기며 오로지 음악을 위해 작품혼을 불태운 그의 노력을 제대로 살피고 평가하는 것은 이제 후대의 몫으로 남겨졌다.작곡가 최영섭은 고향 인천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그의 말을 빌리자면 1929년 태어나 1963년 인천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30여년을 보낸 인천에서의 삶이 자신의 인생의 '노른자위'였다고 했다.돌이켜보면 그는 인천에서 작곡가로서의 숙명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어릴적 그는 하모니카와 피리에 재주가 많았는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악보 한 번 보지 못한 초등학생이 반달, 고향의 봄, 오빠 생각 등의 동요를 연주할 정도였다고 한다.그는 "선율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곤 했는데, 어머님이 사내놈이 눈물을 흘리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셨다"고 했다.창영초 재학시절에는 처음 들은 노래를 단번에 외워버려 학교를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일본 육군 대장이 창영초를 갑자기 방문할 일이 생겼는데, 그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학교 대표로 뽑혔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다가 교실로 불려간 그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지정곡을 단 두 번 연주를 듣고 '다 외웠다'고 대답해 학교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그는 자신이 음악가로 평생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시절 밴드부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했다."인천중학교에 입학 후 밴드부에 지원했어요. 저는 플루트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는데, 5학년 선배가 경쟁률이 높으니 한번 불어보라고 했죠. 저는 처음 만져본 플루트를 그럴듯하게 연주했고, 당연히 합격했죠. 당연히 선배는 어디서 배워본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고,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어요."행진곡 위주인 중학교 밴드부 레퍼토리를 익히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는 클라리넷, 오보에, 트럼펫, 트롬본 등 다른 악기를 혼자 연습하며 섭렵했다.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재미에 그는 제일 늦게 하교했다.또 학교 강당에 있던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를 혼자 독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아무도 손대지 않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강당의 피아노를 집에서 기름 걸레를 가져와 깨끗이 닦아놨는데, 이를 기특하게 본 선생님이 피아노 열쇠를 내어줘 마음껏 연습했다고 한다.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 경복중학교로 전학해 인천에서 통학하며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이론을 배웠고, 고교 2학년 때인 1947년 자신이 작곡한 곡으로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노른자위 같은 인천에서의 과정은 좋은 추억도 많았지만 일본 식민시절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도 생생하게 남아있다.지금도 일본 NHK의 뉴스가 더 듣기 편하다는 그는 특히 인천중학교재학시절 혹독하기 그지없던 교련 수업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교련 수업 시간에 비행기 조종간 모형을 쥐고 비행기 조종술을 배운 기억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가미카제가 되는 거냐며 우울해했다고 한다.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어야 했던 교련 수업시간도 생생하다고 했다."하루는 일부러 도시락을 운동장에 내팽개치며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시 조선 학생은 물론 일본 학생들도 우물쭈물 댔지만 결국 다 주워 먹었죠."그는 자신의 인생이 길어야 1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며 두 가지 바람을 전했다."그리운 금강산이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가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었죠. 금세 통일이 될 것으로 알았지만 벌써 40년이 더 지났습니다. 하루 빨리 평화 통일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또 인생의 노른자위를 보낸 인천에서 남은 여생 못다 정리한 기악곡 정리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은 바람도 있습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최영섭 작곡가는?▲ 1929년 11월 인천시 화도면 사기리 77번지 출생▲ 창영초·인천중·경복고·서울대 음대·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1961년 그리운 금강산 작곡▲ 1995년 광복50주년 기념 칸타타 '오! 사랑하는 나의조국' 24장 발표▲ 2000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건립▲ 인천여중고, 인천여자상업고, 이화여자고, 한양대 음대, 상명여대 음악과, 세종대 음악과 등에서 교직 생활▲ 상훈-인천시문화상(1959년)-경기도 문화상(1961년)-세종문화상 대통령상(1998년)-서울시 문화상(2001년)-이승휴 문화상(2015년)국민 가곡으로 불리는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인천 강화 태생의 최영섭(88) 작곡가가 평생 작곡한 665곡의 가곡을 정리한 악보집 발간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인천에서 성장하며 보낸 시간이 내 인생의 노른자위였다"며 "작곡가로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를 준 고향 인천에서 남은 작업을 진행하며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7-10-17 김성호

[인터뷰… 공감]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 경기지부 회장

'안보에 좌·우 없다' 취임 후 혁신 발걸음, 많은 회원들 공감·동행사재 털어서라도 회령진성에 국제자원봉사센터·힐링센터 세울것세월호 분향소 지킴이 자처, 안산 정부 합동 분향소 유일하게 지켜3차례 부도 위기 딛고 일어선 뚝심 "봉사 힘으로 지역 발전 돕겠다""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1597년) 승리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장흥 회령진성을 안보와 자원봉사의 메카로 만드는 게 소망입니다."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이하 자총) 경기지부 회장(54)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이순신과 12척의 배'를 화두로 꺼냈다. 화두라기엔 구상이 구체적이다. "이충무공의 유적이 있는 전남 고금도에 안보와 자원봉사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국제자원봉사센터와 힐링센터를 세우겠다"며 "사재를 헐어서라도 회령진성에 12척의 배를 복원해 역사관광 명소를 만든 뒤 안보·자원봉사재단을 설립해 나라를 위한 참다운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밝혔다.이유가 의미심장하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망가진 배 12척을 300여 명의 목수를 동원해 수리한 뒤 왜군의 침략으로 위기에 내몰린 민족과 나라를 구했듯이, 장흥 회령진성에서 안보정신으로 무장한 자원봉사자를 육성해 북핵과 외세 등으로 전쟁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을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왜침에 대비한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떠올랐다.최근 홍 회장의 행보는 자총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탄핵정국을 통해 '태극기 부대'로 낙인찍힌 낡고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참다운 안보단체로서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행보다. 지난해 자총 안산시지회장 시절엔 일부 회원들이 촛불집회에 맞서 서울 태극기 집회에 나가자고 주장하자 "자유총연맹은 순수 안보단체이지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단체가 아니다"라고 반대했다. 내부의 눈총과 외부의 신선한 평가가 엇갈렸다.자총 경기지부 회장 취임 이후에도 홍 회장의 자총 혁신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 8월 한국자유총연맹 경기도지부 제11대 회장 취임식에서 김구 선생의 "독립된 내 나라의 문지기가 되겠다"는 어록을 인용해 나라 지키는 일이 이념에 앞선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9월 체육대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위기가 오거든 목숨을 바쳐라"는 문구를 소개해 안보단체인 자총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보수 이념의 선봉임을 자임하던 회원들에게 나라를 위한 헌신을 강조했다. 정권 안보가 아닌 순수한 국가안보 수호가 자총이 나아갈 길임을 제시한 것이다.'안보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소신과 행보는 주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혹자는 '안보단체의 수장이 맞느냐'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그러나 홍 회장의 나라와 민족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오랜 세월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뜨거운 열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하자' '도와 달라'는 말에 함께 봉사현장을 누비거나 쌈지 돈을 털어 동행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는 "보수는 부모와 같고 진보는 자식"이라며 국가 안보를 위해선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홍 회장의 남다른 행보는 국가재난인 세월호 사태 때도 역력히 드러났다. 지난 2012년부터 올해 7월까지 6년여간 자총 안산시지회장을 역임한 홍 회장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한 그 날 저녁부터 '세월호 분향소 지킴이'를 자처해 왔다. 자총 안산시지회 회원들이 1천 일이 넘는 현재까지 안산 화랑유원지 내 정부 합동 세월호 분향소를 유일하게 지키는 것도 홍 회장의 뚝심 덕분이다.'자총이 세월호 분향소를 지킬 이유가 있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그는 "그럼 정부 합동분향소란 간판을 떼고, 정부가 파견한 서기관을 철수시키라"라고 되받았다. 이어 "국가 위기 상황에서 안보를 위해 활동하는 자총이 아니면 누가 합동분향소를 지키느냐"고 설득, 정부 유관기관의 지원을 이끌어 낸 일은 여전히 회자되는 일화로 남았다. "세월호 미수습자 귀환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합동 영결식을 마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총 안산시지회와 함께 분향소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공인의 삶'을 살며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이전, 홍 회장은 스스로 전기 노동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전기회사 CEO에서 부동산디벨로퍼로, 문화사업가로, 지금은 사회공헌 봉사가로 성장하기까지, 그 역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1963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홍 회장은 16살 때 광주특별시에 소재한 기술직업학교(전기)로 공부하러 갔다가 5·18 광주 사태 때 직업학교 부도로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의 한 전기공장에서 노동자로 지내던 그는 1985년 안산 반월시화산단의 전기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중 회사가 부도로 실업자가 됐다.이후 전기 엔지니어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홍 회장은 1988년 (주)장흥전력을 창업한다. 맨몸으로 창업한 홍 회장과 공동 창업자인 부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1995년 거래하던 건설업체의 부도로 1차 경영위기에 빠져 3년여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홍 회장은 곧 이어 닥친 IMF경제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는 투지를 보였다. 1999년 안양의 한 공원조성 사업에서 3억8천여 만원 규모의 공사를 가까스로 따낸 뒤 회생의 길을 걸으며 승승장구했다.장흥전력은 지난 2006년 반월공단 내 아파트형 공장(5만여㎡)에 투자했다가 은행으로부터 중도금 대출을 받지 못해 헐값에 부동산을 팔아야만 했다. 자금 유동성이 경색되면서 2차 경영위기로 회사까지 부도날 뻔 했다. 하지만 2008년 리먼 사태로 국제경제가 곤두박질 칠 때 홍 회장은 안산 고잔 신도시 내 영화관 건물과 맞은 편 웨딩 부지를 경매를 통해 인수하는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하지만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서 3차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관행처럼 운영해 왔던 회사의 비정상적인 경영에 세무당국이 메스를 댄 것이다. 자칫 모든 것을 날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홍 회장의 대응은 정공법이었다. 그동안 사업을 통해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세무조사를 무마하거나 세금을 깎으려 들기보다는 '자신의 경영이 뭐가 잘못됐는지'를 반성했다. 눈물을 머금고 젊은 부부의 애정이 담긴 회사의 이름을 (주)거룡전력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 선택을 홍 회장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금전적으론 수백억 원을 손해 봤지만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좋기 기회가 된 시점이었다"고 회상한다.홍 회장은 2010년 3월부터 (주)희성엔터테이먼트를 설립, 극장 등 문화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동시에 지역사회 발전에 밑거름이 될 자원봉사가로 사회공헌사업에 뛰어들었다. 올해 4월 안산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으로 선출된 홍 회장의 자원봉사 활동은 명성이 자자하다. 자총 안산시지회장을 역임하면서 안산시민을 위한 안보 캠페인 및 독거노인 후원활동,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사업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지역 자원봉사단체와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시민의 힘으로 안산이 변화할 수 있도록 봉사단체들의 플랫폼 임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했다. 안산시는 최근 '2017 제31회 안산시 문화상'(지역사회개발)을 그에게 안겼다.그는 정이 많은 리더이다. 홍 회장은 지난 6월 발생한 산불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강릉과 삼척 피해 지역 이재민 지원에 써달라며 성금 1천만 원을 쾌척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태는 것이 자원봉사"라며 "산불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분들께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일상생활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라는 맘에 강원도를 찾게 된 것"이라고 그는 애써 좋은 웃음을 지었다."지금의 나는 모두 가족과 주변 지인들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홍 회장은 "굳건한 안보로 이 민족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원봉사의 힘으로 지역사회를 발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미력한 역할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주)거룡전력 대표인 그는 안산시 생활체육협의회 해양레포츠연합회장(2010), 안산25시광장 연합회장(2011), 통합 안산시 유도회장(2017~현재) 등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지난 1987년 결혼한 (주)장흥전력 공동창업자인 부인(52) 사이에 3형제를 두고 있다. 글/전상천기자 junsch@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 경기지부 회장은 정권 안보가 아닌 순수한 국가안보 수호가 자총이 나아갈 길임을 제시하며 "자원봉사의 힘으로 지역사회를 발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미력한 역할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17-10-10 전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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