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대공분실 보안관리소장' 맡은 고문피해자 유동우씨

국가폭력의 상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배우는 학습장으로 바뀌고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운영할 예정인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 경비초소에는 특별한 사람이 일하고 있다.군사정권 때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고문 피해자 유동우(70) 씨. 그가 38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민주인권기념관)의 보안관리소장으로 돌아왔다.1970년대 인천 부평수출산업단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그는 노동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비참한 공장 노동자의 삶을 고발하고,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린 이 책은 동시대를 살았던 민주화운동 활동가의 필독서이기도 했다.유동우씨는 전두환 정권의 대표 공안조작사건인 '학림사건'에 휘말려 1981년 8월 2일부터 37일 동안 이곳에 감금돼 고문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데 선봉에 섰지만, 정작 본인은 고문 트라우마와 환청에 시달리며 민주화의 봄을 한껏 누리지 못했다.그런 그가 30여 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돌아온 것은 대단한 결심이었다. 고문 피해자가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기념관 측의 제안을 수락, 지난해 12월부터 보안관리소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시민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있다.남영동을 잊기 위해 민주화 운동 경력마저 지우려 했던 그의 삶을 되찾아 준 게 남영동이라니 대공분실은 그에게 아이러니한 존재다.유동우씨는 "극한의 인권유린을 당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주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인권의 문지기가 되겠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4-16 김민재

[인터뷰… 공감]'민주인권기념관' 탈바꿈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서 보안관리소장 된 유동우씨

#민노련 결성 주도등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는데'우리는 가난해서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 말에 충격노조 결성 후 해고당해… 전국 누비며 재야노동운동#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떤 곳이었나예비군 훈련 중 연행, 신체검사 후 속옷 한 장 걸쳐5층 조사실서 무차별 폭행·협박… 기절땐 물끼얹어38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경찰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 때만 해도 오늘 같은 날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70~80년대 인천에서 민주화 운동에 매진한 유동우(70)씨는 매일 아침 남영동 대공분실로 출근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국가폭력의 상징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의 손을 떠나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재탄생을 앞둔 가운데 유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을 지키는 보안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조작사건에 휘말려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법 구금돼 모진 고문을 당했던 그가 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을 되새기는 기념관의 '문지기'이자 역사의 산증인으로 시민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유동우 씨는 "우리 역사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람되게 일하고 있다"며 "백범 김구 선생도 일제에 짓밟혔던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정부의 문지기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지난 12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만난 유씨는 1981년 8월 2일 오전 이곳에 끌려온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33살의 그는 예비군훈련에 소집돼 안양의 한 부대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찾아와 군복 명찰을 확인하더니 양옆으로 팔짱을 끼고 '나가서 얘기 좀 하자'며 데려갔다. 그들은 부대 울타리를 벗어나자마자 경찰이 권총을 옆구리에 들이대며 대기 중인 승용차에 그를 태우고는 눈에 검은 천을 씌웠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유씨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장면은 벽과 바닥이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돼 있는 4평 남짓의 조사실, 그리고 4명의 수사관이었다."그때는 남영동에 대공분실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옷을 모두 벗고 굴욕적인 신체검사를 마친 뒤 속옷 한 장을 겨우 다시 걸쳤을 때 첫 질문과 함께 주먹이 날라왔죠. '너, 공산주의자지?'"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그는 1973년 인천 부평 수출공단의 일본인 투자기업 삼원섬유에 입사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일을 하느라 교회도 못 가고, 가난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어느 여공의 말에 충격을 받아 노동 관련법을 독학하고 노조 결성을 이끌어냈다. 1975년 사측의 노조 파괴 공작으로 부당 해고를 당한 뒤로는 전국을 다니며 재야 노동운동을 벌였다. 이때 유씨가 월간지 '대화'에 연재했다가 단행본으로 발간한 노동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1970년대 공장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문학작품으로 문단과 노동계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유신체제 붕괴 이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더욱 불타오르던 1980년 5월, 유씨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민노련) 결성을 주도해 노동자를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작업을 준비했다. 한 편에서는 대학생 중심의 전국민주학생연맹(민학련)이 결성돼 '노-학' 연대가 만들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여름 두 조직의 연대를 "공산주의·사회주의로 의식화된 좌경 분자들이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 한 사건"으로 조작하고 관련자를 영장도 없이 체포해 남영동으로 끌고 갔다. 이른바 '학림(學林)사건'이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답했더니 '그럼 너 사회주의자구나?'라고 묻는 거에요. 뜸을 들이다 다시 어떤 '주의자'도 아니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무차별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데 숨이 콱 막혀와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유씨가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다. 기절한 그를 깨우려고 물을 뿌린 거였다. 온갖 매질과 고문, 협박이 이어졌다. 경찰병원에 3번이나 실려갔다.유씨는 자신이 고문을 받았던 5층 조사실로 안내했다. 우리나라 대표 건축가 김수근이 1976년 만든 이 건물은 원래 5층 건물이었는데 전두환 정부가 7층으로 증축했다. 뒷문으로 들어가면 5층으로만 연결된 나선형의 철제 계단이 있다. 눈을 가린 불법 구금자들이 몇 층으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방향감각을 잃게 하기 위해서다. 복도 양 옆에 있는 15개의 조사실은 끌려온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할 수 없도록 사선으로 배치했다.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고정돼 있다. 매를 맞다가 뒤로 넘어가거나 자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 건물은 철저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그때 경찰이 이곳을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죠. 죽여서 휴전선 근처에 갖다버리고 월북자를 총으로 쐈다고 하면 끝이라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두려웠지만 거짓 진술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4번의 진술서 작성 끝에 그에게 정식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계엄법 위반 혐의(이적 표현물 소지, 집회·시위 금지 위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함께 재판받은 이가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민병두·민주평화당 최경환 의원 등이다. 유씨는 구속 수감자 24명 중 유일하게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됐다. 불법 구금 당시부터 결핵을 앓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재판을 받는 법정에서 소변을 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다.학림사건은 2009년 6월 15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장기간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얻어낸 허위진술로 조작한 사건으로 규정했고, 이후 재심에서 유씨를 비롯한 24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유 씨가 37일 동안 불법 구금됐다고 판단했다. 아쉽게도 그의 수사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유동우씨는 출소 후 생계를 위해 수도권 일대 공장을 전전했지만 늘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녔고, 노조 활동 이력으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취직 자체도 어려웠다. 그러다 1984년 노동 운동을 하다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한국노동자복지협회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에 앞장섰다.그는 이후 한국기독교노동자총연맹을 조직해 대중운동을 표방하며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이끌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고, 6·29 민주화 선언 이후에는 김영삼·김대중 당시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했다.꿈에 그리던 민주화 시대가 찾아왔지만, 그는 종적을 감췄다. 대중 노동운동을 강조했던 그는 소위 언더그라운드의 전위조직 혁명가를 자처하는 급진 세력과 부딪혔고 단일화 실패 이후 절망감을 느껴 운동권을 떠났다."양김 단일화에 실패하고 노태우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순간 군사 정권이 연장됐다는 생각에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가 갑자기 심해졌어요. 민주화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버텨왔는데 후보 단일화를 둘러싸고 민주화 세력이 분열되는 모습에 싫증이 났죠."#석방 후 민주화 시대 찾아왔지만 힘들어했는데고문 후유증 악화… 민주화 세력 분열 보고 염증느껴20여년 악몽같은 세월 보내 던 중 '관리자' 제안 받아#다시 찾은 건물,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고문 받은 방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먹먹해지지만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방문객들 맞이 "자랑스럽다"이때부터 2010년까지 20여 년은 그에게 악몽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방안에 홀로 있으면 감옥에 갇힌 듯한 착각이 들어 툭하면 집을 나가 노숙을 했다. 부인과 딸에 이끌려 집으로 와도 가출을 반복했다. 1990년대 인천 연수구 아파트 단지 공사 현장을 다니며 '노가다'도 했고, 송도유원지 러브호텔 청소부로도 일했다. 구청 노상 주차관리도 했다."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할 정도였어요.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맥을 철저히 차단하고 끊어버렸죠. 혹시 나타나도 독한 마음으로 모른 채 했어요."2010년 들어 학림사건이 무죄로 확정됐고, 그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국가폭력 피해자를 치유하는 상담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 정신과 치료도 받으며 그동안 잃어버렸던 세월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설 민주인권기념관의 문지기 역할을 제안받았다. 앞서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경찰의 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운영하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지난해 12월부터 매일 아침 기념관의 문을 열고 보안상태를 확인하고, 때로는 방문객을 위한 해설사 역할을 하고 있다.유씨는 38년 전 한 달 이상 갇혀 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김근태 전 의원이 민청련 사건으로 남영동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1985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망언을 남긴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1987년)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 그는 뒤늦게라도 인권유린 상징에서 민주·인권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게 될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지기가 된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백범일지에 나온 '나의 소원'을 보면 선생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된다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며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보안관리소장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했는데 백범의 글이 내 마음을 움직였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인권유린을 당했던 이곳에서 내가 문지기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 아니겠습니까."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에서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매진한 유동우씨가 지난 12일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옛 대공분실)에서 "백범일지에 나온 '나의 소원'을 보면 선생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된다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며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보안관리소장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했는데 백범의 글이 내 마음을 움직였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인권유린을 당했던 이곳에서 내가 문지기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 아니겠습니까"라고 밝히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16 김민재

[인터뷰… 공감]道·전국 지역신용보증재단 '첫 직원 출신' 이민우 경기신보 이사장

직업군인 꿈꾸던 체육학도, 대학 졸업 전 경안상호신용금고 입사10년차 사표내고 개인 사업… 녹록지 않자 지금의 경기신보 '인연'무슨 기관인지 설명했었던 시절, 전단지 붙이고 상인회 찾아다녀직원 출신 수장 매너리즘 빠질 수 있는 우려 '새로움' 좇으며 불식보증료 면제 '다드림론' 등 준비… 中企·소상공인들 곁에 있을 것'샐러리맨의 신화'. 지난해 11월 이민우 당시 경기신용보증재단(이하 경기신보) 영업부문 상근이사가 이사장 후보로 낙점됐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됐던 말이다. 다만 신화는 저절로 쓰이지 않았다. 늘 새로운 길을 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할 때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신생 기관에 입사했을 때도, 갖은 풍파 속 임·직원이 18명에 불과했던 작은 조합을 경기도 최대 산하기관으로 성장시키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도 그랬다. 경기도·전국 지역신용보증재단 첫 직원 출신 이사장이 그인 이유일 터다.9일, 그가 이사장에 취임한 지 꼭 100일이 됐다. 100일간의 걸음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가보지 않은 길을 열었고, 맨 앞에는 이 이사장이 서 있었다. 지난 4일 이 이사장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걸어온 길을 되짚을 때보다 닦지 않은 길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더 힘이 실려있었다.# 문견이정직업군인을 꿈꾸던 체육학도였다. 금융기관에 발을 들인 것은 차라리 우연에 가까웠다.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첫 직장인 경안상호신용금고에 입사했다. 낮에는 상호신용금고 대리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20대 후반을 보냈다. 30대 중반, 가장 왕성하게 직장 생활을 할 10년차에 문득 사표를 냈다. 정치든, 사업이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작은 개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살면 안 되냐"는 가족들의 애원이 들릴 무렵, 지인이 이력서를 함께 내보자고 했다. 당시엔 '조합'이었던 지금의 경기신보였다. 전국에서 제일 먼저 생긴 지역신보인 만큼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는 기업인·상공인은 손에 꼽았다. 이사장, 감사, 팀장, 대리를 합해도 18명밖에 되지 않았던 작은 기관의 불이 365일 꺼지지 못했던 까닭이기도 했다."맨 처음 생겼을 때는 뭐하는 기관인지 다들 잘 모르니까, 전단지도 붙이고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인회를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이런 기관이 생겼고,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야 했다. 법조차 제대로 정비되지 않는 등 아무 것도 없으니 발로 뛸 수밖에 없었던 때"라고 경기신보 창립 당시의 모습을 언급한 그는 "경기북부 전체를 담당했었는데 '지점'이 없을 때라 차 한 대로 그 넓은 북부를 다녀야 했다. 펜 하나조차 사기 힘들었던 시기라 출장비도 1만원 정도였는데 톨게이트 비용으로만 6천원을 냈었다. 한 번은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파주까지 갔다가 업체에서 보증서류를 반송시켜서 뙤약볕 아래 걷고 또 걸은 기억도 있다. 초창기 멤버들이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고 애틋함을 드러냈다.이후 경기신보의 첫 지점 격인 의정부사무소를 입사 1년 만에 도맡았고, 5년 만에 서부지점(현 부천지점)을 총괄하게 됐다. 아무 것도 없는 땅에 처음 길을 낼 때의 막막함은 그 후로도 숱하게 되풀이됐지만, 번번이 현장에서 답을 찾아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 "대리부터 이사장이 된 지금까지,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문견이정(聞見而定·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들은 이후 싸울 방책을 정한다)'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고 회고했다.# 다시, 새 길직원 출신 수장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조직을 잘 안다는 점이다. 빠르게 조직을 장악하며 수장 교체에 따른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반면, 익숙한 방식만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을 터. 적어도 100일간의 행보에서 이 이사장은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을 좇기 위해 애썼다.현재 준비 중인 '다드림(多-dream)론'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약자, 저신용등급 소상공인 등에 보증료를 100% 면제해주는 상품으로, 취임 직후부터 출시를 적극 검토해 왔던 것이다. 보증기관이 보증료를 받지 않는, 전국 보증기관 최초의 시도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일반 금융기관의 문은 두드릴 수 없는 금융 소외계층들이 불법 대부업에 손을 대 더욱 수렁에 빠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이재명 도지사의 생각과도 맞닿아있는 행보이기도 하다. 이 이사장은 "많은 돈은 아니더라도 당장 자금이 필요한데 보증지원을 받기가 어렵고, 보증을 받더라도 보증료와 대출 금리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저신용자, 사회적 약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더 큰 어려움에 빠지거나 경제 활동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진 이유를 설명했다. '재도전 희망특례 보증'을 통해 사업에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자금 50억 원 규모를 지원하고, 금융 취약계층들을 위한 서민금융복지지원센터를 기존 7개에서 12개로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또 중소기업·소상공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안성·하남에 영업점을 신설하는 한편, 중부지역본부를 개설할 예정이다. 특례시가 될 수원·고양·용인 등 100만 명 이상 도시에는 지점을 1개씩 추가 조성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그야말로 광폭 행보다. 이 이사장은 "이사장이자 선배로서, 후배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결국 경기신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재단을 찾아주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라며 "경기신보가 짧은 기간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전국 최대 광역단체인 경기도에 많은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이 있고, 이들이 우리를 필요로 해서다. 그런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기관을 만드는 게 제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일 것"이라고 설명했다.인터뷰 말미 명패에 적힌 이름의 한자가 눈에 띄어 물었다. 백성 민(民), 비 우(雨).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라는 뜻에서 지어주셨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뭄 끝 단 비처럼, 어려움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경기신보 본연의 역할과 절묘하게 맞닿아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금융인으로서 33년, 경기신보에서 23년. 메마른 땅을 적셔 처음 길을 내왔던 그가 앞으로의 100일, 그리고 또 다른 100일 뒤 서 있을 곳 역시 함께 궁금해졌다.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이민우 이사장은?▲ 1960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79년 유신고등학교 졸업, 2001년 숭실대학교 경영학 석사 취득▲ 1985~1995년 경안상호신용금고 근무▲ 1996년 경기신용보증재단 입사▲ 2001~2005년 경기신용보증재단 부천지점장 / 총무팀 부장▲ 2006~2010년 경기신용보증재단 안양지점장 / 기획부 실장▲ 2010~2014년 경기신용보증재단 기획관리본부장 / 성남지점장▲ 2014~2015년 경기신용보증재단 남부지역본부장▲ 2015~2018년 경기신용보증재단 영업부문 상근이사▲ 2018년 12월 ~ 경기신용보증재단 제14대 이사장이민우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이 지난 4일 경기신보 집무실에서 가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기관을 만드는 게 제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일 것"이라고 설명하며 경기신보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이민우 경기신보 이사장은 창립부터 23주년을 맞은 현재까지 경기신보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20일 지역 중소기업 육성 공로로 표창을 받은 이민우 당시 경기신보 총무팀장을 보도한 경인일보 지면. /경인일보 DB

2019-04-09 강기정

[인터뷰… 공감]류은규 사진작가, 조선족의 잊혀진 흔적 "더 많이 알려졌으면…"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삶을 담아낸 사진전 '잊혀진 흔적' 전이 최근 막을 내렸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유명한 류은규(57) 옌볜대 교수가 26년 동안 현지에서 찍은 사진과 입수한 자료들로 꾸민 '잊혀진 흔적' 전은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에서 개최됐다.1개월간 진행된 전시회엔 2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아 성황을 이뤘다. 사료적 가치도 높은 류 교수의 사진과 자료들에 관람객들도 큰 호응을 보낸 것이다.류 교수와 그의 아내이자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도다 이쿠코 인천 관동갤러리 관장은 "전시회 초창기에는 역사적 관심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전시회를 찾는다는 느낌이었는데, 전시회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재차 전시회장을 찾는 분들이 생기고,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가족 단위 관람객들도 많이 오셨다"고 말했다. 전시 막판에는 관람객이 줄기 마련인데, 마지막 주말이었던 지난달 30일에만 200여명의 관람객이 전시회를 보고 돌아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만주일대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사진전이 한 달로 막을 내린다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도 있었다. 류 교수는 "전시회를 보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라는 관람객의 말을 들었을 때 열심히 해야겠다고 한 번 더 다짐했다"면서 "인천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이외 지역으로도 퍼져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2019-04-02 김영준

[인터뷰… 공감]3·1운동 100주년 기념전 개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

#'잊혀진 흔적' 展 많은 관심 끌었는데中서 항일운동 흔적 수집·조선족 살펴중립지키고 검증 신경써서 전시회 구성#조선족을 26년간 찍고 있는 이유는하얼빈서 우리역사 왜곡되는 것 목도만주지역 이주사 '객관적 기록' 결심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57) 옌볜대 사진학과 교수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전 '잊혀진 흔적'이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인천 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과 윈도우갤러리에서 개최됐다.'잊혀진 흔적'전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기획됐다. 1990년대 초부터 26년 동안 중국에서 항일운동의 흔적을 수집하고 독립운동가 후손과 재중동포의 모습을 찍어온 류 교수는 이번 전시회에 작품 70여점과 아카이브 250여점을 출품했다. 전시회는 '역사의 증언자들', '그리운 만남', '80년 전 수학여행', '삶의 터전', '또 하나의 문화' 등 5부로 구성됐다. 전시회는 2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류 교수의 시선과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 것이었다.류 교수에게 작품 활동과 이번 전시회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 계획 등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 1일 오전 인천 아트플랫폼 전시장을 찾았다. 류 교수는 아내인 도다 이쿠코 인천 관동갤러리 관장과 함께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인터뷰 후 부부가 함께 전시 작품들을 떼어낼 예정이었다. 전시회 개막을 앞두고 부문 별로 나누고 작품들을 걸고, 전시회장을 꾸미는 데 1주일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지만, 떼어내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할 거란다.류 교수는 "학생들에게도 강조하는 부분인데 '역사 관련 전시회는 가장 중립적으로 올바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면서 한 쪽 편에 서서 찍을 순 있겠지만, 찍고 나선 중립을 지켜서 전시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서 "검증도 매우 중요하다. 중국 현지 교수와 국내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고, 한·중·일 역사를 공부한 일본 사람인 아내의 도움도 크게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류 교수는 26년 동안 조선족을 찍고, 관련 자료를 모으는 건 사진으로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류 교수의 이 같은 바람과 희망은 이번 전시회에 고스란히 투영됐다."국경, 시대, 사람과 사람 사이 등 세상에는 늘 경계가 존재합니다. 한국과 중국, 한국인과 조선족 뿐만 아니라 조선족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나 지역 차이로 인한 경계가 존재하죠. 경계로 인해 갈등이 조장됩니다. 한국전쟁의 경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했지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룰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죠. 그런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사진가는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장의 사진을 풀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100년 전 간도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을 상기할 수 있었으며, 우리와 단절된 채 살아왔던 조선족의 발자취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류 교수가 조선족의 삶을 기록하고 자료 발굴을 시작한 건 1993년이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등의 기내지에 게재되는 사진을 찍으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을 때 하얼빈을 사진에 담게 됐다."한국 사람으로서 안중근 의사, 731부대(일본의 세균전 부대) 등을 떠올리며 하얼빈에 갔습니다. 한데, 제가 알던 역사적 사실들이 일본은 물론 중국 내에서도 공산당과 국민당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이 처한 시선에 맞춰 역사를 설명하고 있던 것이었죠. 이후 만주지역의 이주사를 객관적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사진으로 기록하고 항일 운동 하신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모았습니다."류 교수는 1995년 옌볜대 민족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위촉됐고, 2000년에 옌볜대에 사진학과가 만들어지면서 교수가 됐다. "아내와 겨우 6개월 된 아이를 둘러업고 옌볜대로 간 건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이주사와 만주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어요. 오랜 호흡으로 동일한 주제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계속 찍으려면 현장에 거주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올해까지 26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류 교수는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옌볜은 중국과 조선 문화가 부딪히는 완충지대입니다. 이런 요인들을 통해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고요. 현재 200만 조선족 중 한국에 83만명이 가 있고, 베이징 등 대도시에 40만명이 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시골처럼 젊은이들은 얼마 안 남고 다수의 노인들이 옌볜에 있습니다. 중국 당국의 동북공정과도 어우러지면서 변화하고 없어지는 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제가 기록한 사진들은 현재 없어지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자료입니다. 그러면서 느낍니다. 제 사진이 사료적 가치도 갖는다는 사실을요."#청학동 사진도 37년째 찍고 있는데우리나라 발전상 고스란히 녹아있어외국에서 '유토피아'로 소개 큰 반응#언제까지 활동을 이어갈 계획인가조선족·청학동 사진촬영은 계속 진행두 작업, 내가 카메라 놓는 날 끝날 것이주 조선인과 후손의 삶을 좇고 있는 류 교수는 37년 동안 지리산 청학동 사진을 담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1년께 일간신문 토픽란에 실린 작은 기사(등산객 한 명이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는 내용)를 본 류 교수는 이듬해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진주를 거쳐 하동에서 시골 버스를 타고 내린 후에도 5㎞ 산길을 걸어서 청학동(당시 이름이 생기기 이전)에 갔다.매번 하동에서 쌀 2말을 사 짊어지고 지리산 골짜기까지 찾아드는 그를 청학동 사람들은 의아해 하다가 지금은 형제처럼 가까워져서 대소사를 알리고, 언제 오는지 기다릴 지경이 됐다고 한다."1982년 처음 청학동에 갔을 때 만난 10살 어린이가 현재 장가가서 슬하에 고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어요. 현재 우리나라의 발전상이 청학동에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여겨집니다. 자급자족하던 청학동에 전기, 전화, TV가 들어오고 공권력과 자본도 따라 들어오죠. 가게가 생기고, 민박, 식당도요. 자급자족할 땐 주민 간 갈등이 없었는데, 현재 갈등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특히 청학동 사진을 좋아합니다. 서양엔 '유토피아'로, 중국에는 '이상세계'로 소개하는데, 유토피아나 이상세계는 실체가 아닌데, 제 사진을 통해 볼 수 있으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청학동 전시는 지난해까지 외국에서만 연간 4~5차례 진행했습니다. 조선족 작업과 청학동 작업은 제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계혹할 것입니다. 두 작업은 제가 카메라 놓는 날 끝날 것입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류은규 교수는?서울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신구대 사진과와 상명대 예술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 순수사진 과정(석사)을 졸업했다. 1988년 교도소를 주제로 광주학생회관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한 이후 지난달 '잊혀진 흔적'전까지 국내외에서 20여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15차례 단체전에 참여했다. 이번 '잊혀진 흔적'전의 3부에 구성됐던 '80년 전의 수학여행'을 최근 책으로 펴내는 등 8권의 사진 관련 서적을 내놓았다. 현재 인천 관동갤러리와 도서출판 토향의 대표로 있으면서 중국 옌볜대와 하얼빈대,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사진예술과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류은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전시회가 열렸던 아트플랫폼 전시장에서 포츠를 취하고 있다.

2019-04-02 김영준

[인터뷰… 공감]'수원 야구 붐' 꿈꾸는 이숭용 KT 단장

■수원과 인연이 깊은데현대 시절 한국시리즈 정상 올라KT 만원관중서 흥행 가능성 확신■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아버지 따라 축구를 시작했지만유니폼 멋있어서 야구부에 가입추억의 팀 태평양과 현대를 아는 프로야구 팬들은 수원 KT 이숭용 단장은 꾸준함과 리더십이 뛰어났던 선수로 떠올린다. 이단장은 1994년 신인선수드래프트에서 2차1라운드(전체 1번)에서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후 현대를 거쳐 넥센에서 은퇴를 했다.재정적으로 어려웠던 태평양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고, 현대 왕조의 전성기와 신생팀으로 뛰어든 히어로즈선수단에서는 주장으로서 선수단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단장에게 프로야구팬들은 캡틴, 미스터 쾌남, 마지막 황태자라는 애칭을 붙여줬다.신생팀 KT의 창단 코칭스태프로 수원으로 돌아온 이번 시즌부터 단장으로서 수원 야구의 붐을 확신하고 있다. 이 단장의 야구인으로서의 철학과 단장으로 꿈꾸는 야구를 들어 봤다.# 전율을 느꼈던 그 순간, 수원 야구의 가능성을 봤다.서울에서 태어난 이 단장은 스스럼 없이 수원을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한다. 인천을 연고로 했던 태평양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현대 유니폼을 입고 수원에서 현대 왕조의 우승 순간을 함께했다. 이 단장은 "아직도 2015년 3월28일 창단 후 첫 1군 홈 개막전이 열리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kt위즈파크에 수원 야구 팬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때 발바닥부터 전율이 시작돼 온 몸으로 퍼졌다. 그 모습에 수원 야구의 가능성을 봤고 KT와 함께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그는 "현대가 목동으로 가기전 수원야구장을 홈경기장으로 사용했지만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열기였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던 순간에도 수원야구장은 비어 있었다. 그랬던 수원야구장에 KT라는 신생팀의 첫번째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온, 가득찬 수원 야구팬들의 모습에 감동했었다. 현대 왕조에서 느끼지 못했던 전율을 느꼈고 수원 야구는 분명히 꽃을 피울 것이라고 믿게 됐다"고 했다.이어 이 단장은 "당시 창단한지 얼마 안된 상황이기에 선수단 자체는 미흡했고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선수단의 실력은 만들어가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역의 열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프로스포츠 선수들은 팬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성장한다. 수원의 열기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재능을 폭발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팀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과 함께하고 싶었고, 완성된 모습을 본다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창단 후 첫 홈개막전 경기를 회상했다.# 유니폼이 멋있어서 시작한 야구선수, 나는 평범한 선수였다.이 단장의 프로 선수 생활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90년대 야구가 투고타저였던 점도 있지만 야구선수로서 이상적인 신체 조건에도 이 단장은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했던 18시즌 동안 162개의 홈런만 기록했다. 통산 2천1경기 출전해 이부문 역대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통산 타율 0.281, 통산 안타 1천727개를 기록했다.자신의 야구에 점수를 매겨 달라고 묻자 "고교때까지는 그저그런 평범한 선수였다. 대학교때부터 야구에 대해 눈을 뜬거 같다. 현대에는 워낙 슈퍼스타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 명함을 내밀 수 없었다. 슈퍼스타는 아니었지만 선수로서 나에게 점수를 주라면 B+를 주고 싶다"고 밝혔다.이 단장은 "사실 아버지께서 축구선수 생활을 하셨기에 저도 축구로 스포츠에 입문했다. 근데 축구부가 없어지고 야구부가 창단 됐는데, 유니폼이 너무 멋있었다. 유니폼이 멋있어서 야구부에 가입했고, 야구를 하다 보니 야구가 재미 있어서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온거 같다. 그냥 공을 던지고 치고, 수비하는게 좋았다. 유니폼을 입고 있었을때 가장 행복했었다"고 전했다.캡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리더십의 상징이 된 이유에 대해 이 단장은 "주연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 제 실력이 그정도까지는 안됐다. 주연보다 조연 역할을 했는데, 그 조연 중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고민을 했다. 야구는 야구대로 하면서 내가 이렇게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에서 주장을 맡으며 그라운드 안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지는 못하지만 동료들과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야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선수단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구단에서도 이숭용이라는 선수에 대해 많은 것을 준거 같다"고 말했다. ■내 야구에 점수를 준다면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최선슈퍼스타 아니었지만 'B+' 정도■코치로도 활동했는데선수와 소통하기 위해 많은 노력오랜기간 주장했던 경험, 큰 도움# 선수출신 단장, 그에게 주어진 고민들.이 단장은 "선수 시절에 부끄럽지 않은 야구를 하자는 게 목표였었다면 코치로 KT의 창단코칭스태프로 합류할때는 '소통하는 야구'를 생각했다. 코치로 선수들과 처음 만났을때 선수들에게 '함께 동행하자'고 말했다. 제 나름의 야구 철학 중 하나는 '코치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약이라는게 있기 때문에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 코치가 갖고 있는 타격 이론과 야구 이론이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만 옳다고 말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코치는 선수가 본인의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동행하자'고 말했다"고 말했다."그러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수들에게 다가가고 그 선수를 이해하기 위해 성격과 성향도 파악하고, 가족관계까지 알려고 했다. 서로간에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서로간에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건 신뢰가 쌓이는 것을 의미한다. 선수시절 오랜기간 주장을 했던 점이 코치로서 생활할때 많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단장이라는 자리를 꿈꿔 보지 않았기에 지금 이 단장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감독과 단장으로 성공신화를 쓴 염경엽 현 SK감독을 비롯해 다른 팀 단장들에게도 많은 조언을 구하고 있다.이 단장은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있을때 몰랐던 부분을 많이 보고 배우고 있다. 코치만 했다면 프런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을 것 같다. 프런트라는 자리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현장에 있을때는 제가 직접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장은 감독님과 코칭스태프에 믿고 맡겨야 한다. 관리 보다는 관심을 갖고 무엇을 해야 현장에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도움이 될지에 대해 고민한다"고 전했다.그는 "시즌 중에는 프런트와 현장에서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럴때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갈지 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연승을 할때, 연패를 할때, 선수들 또는 코칭스태프가 힘든 상황일때 단장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현장 출신이기에 현장에 부담을 주지 않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어떤 야구를 보여주고 싶나KT 선수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팬 위해 한발 더 뛰는 모습 보일것# 초보 단장 이숭용 단장이 꿈꾸는 야구, 그리고 약속.이 단장은 "감독님과 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화를 나누면서 공감대를 갖는 건 우리 팀, KT가 미래가 밝다는 거다. 코치 시절에는 타격코치라 타자들만 바라 봤지만 단장으로서 구단을 넓게 바라보니 투수쪽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엄상백과 정성곤, 김재윤이 필승조로 자리잡아주고, 선발에서는 김민과 이대은, 외국인선수들이 자리잡아 준다면 2~3년 안에 안정된 전력으로 완성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이어 이 단장은 "유망주들을 육성해 내는 2군은 많은 부분을 바꿨다. 코칭스태프와 시간 날때마다 회의를 했고, KT만의 색깔이 뭔지 같이 고민하자고 했다.코칭스태프와 육성팀이 같이 고민해서 만들어가자고 했다. 하나 하나 만들어 가다보면 KT만의 색깔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봤다. 현대 출신 선수들이 현대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갖듯 KT 선수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환경을 만들자고 했다.신인드래프트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이 KT에 지명 받았을때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명문 구단이 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파트별로 육성쪽에서는 다양하게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체계화가 돼서 기본기, 팀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끔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그는 "KT는 1군 데뷔 5년차인 팀이다. 신생팀이라는 색깔을 가지면 안된다. 상대팀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한다. 그 힘을 극대화 시켜서 성적이라는 것으로 팬들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마지막으로 이 단장은 "수원 팬들은 열정적이다. 한발 더 뛰는 야구로 팬들이 원하는 성적과 야구를 보여주고 싶다. 팬들의 기대치를 저희가 높여 드려야 한다. 수원야구의 봄이 시작될 수 있도록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 팬들께서도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많은 격려와 박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이숭용 단장은?▲ 학력 : 서울 용암초 - 중앙중 - 중앙고 - 경희대▲ 프로입단 : 1994년 2차 1라운드 지명(전체 1번, 태평양)▲ 통산 성적 : 2천1경기 출장(역대 7위), 타율 0.281, 안타 1천727개, 홈런 162개▲ 소속팀 : 태평양(1994~1995)-현대 (1996~2007)-우리(2008)-히어로즈(2009)-넥센(2010~2011)▲ 지도자 경력 : 수원 KT 타격코치 (2014~2018) ▲ 프런트 경력 : 수원 KT 단장 (2019~)제2의 고향을 수원이라고 말하는 프로야구 수원 KT의 이숭용 단장이 자신이 꿈꾸는 KT야구단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03-26 김종화

[인터뷰… 공감]인천시민이 좋아하는 쌀막걸리 '소성주' 키워낸 정규성 인천탁주 대표

#막걸리협회 신임 회장직을 맡았는데회원사들 한목소리 낼 수 있도록 노력업계 간 기술교류 없는 문제 개선할것#시민 사랑 받도록 성장시킨 비결은?장기간 주주배당 않고 품질개선에 투자기본 충실하려고 했던 노력, 결실 맺어"비결 같은 건 없어요. 돌아보면 그저 못살게 될까봐 두렵고 겁났습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은수저'쯤 쥐고 태어났는데, 그래서 주변에 늘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데 그 부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폐지를 주워야 할 정도로 무너지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어요. 그게 두려웠습니다. 살아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했습니다."인천 사람들이 사랑하는 쌀막걸리 소성주를 만드는 인천탁주제조 제1공장(이하 인천탁주)의 정규성(62) 대표의 이야기다.정규성 대표는 한때 맥주에 밀려 '아무도 찾지 않던 술'로 전락했던 지역 막걸리를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지금의 '소성주'로 키워낸 주인공이다.그는 1996년부터 인천탁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인천탁주는 11명의 주주가 운영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회사로, 인천지역 11개 탁주 양조장이 연합해 1974년 설립됐다.정규성 대표는 최근 전국의 크고 작은 100여개 막걸리 제조 기업이 모인 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게 됐다. 인천의 소성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막걸리를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술로 키워내는 역할까지 해야 해 어깨가 무겁다. 지난 10일 청천동에 있는 공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신임 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아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어떠한 계획을 갖고 있나."대형 막걸리 회사인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데, 크고 작은 막걸리 회원사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취임사에서 말했습니다. 또 업계 간의 기술교류가 거의 없는데, 이 부분도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막걸리 업계가 전문가 그룹이 두텁지 않고 학문적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업계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IMF 직전인 1996년부터 인천탁주 대표를 맡아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나."대표를 맡은 직후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 회사를 파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공장 연매출이 20억원 정도로 큰 슈퍼마켓 매출에 불과할 정도로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인천 막걸리가 아닌 타지역 막걸리가 70%이상 판매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계양구에 농사짓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분들조차 막걸리가 아닌 맥주를 마시던 상황으로 참 힘들었습니다. 그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IMF가 찾아온 이후에는 막걸리가 서민주인 탓에 반짝 매출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2000년도 막걸리의 타지역 판매가 자율화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막걸리로 성장시킨 비결을 듣고 싶다."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사실 주류 시장이 특별한 비결이 필요한 시장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거래처를 갖고 태어나는 물건은 술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막걸리만 제대로 만들면 다 받아 줄 텐데, 막걸리 사업을 망하면 아무 사업도 못할 거라고 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려고 했던 노력이 지금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1996년 대표를 하면서부터 10년 가까이 주주 배당을 하지 않고 품질 개선에 투자했습니다. 맛없으면 할머니가 해준 떡도 안 먹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편없던 종업원 월급도 다른 공장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했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주들도 많이 희생했습니다."-2000년대 초반 막걸리의 지역 경계가 없어지면서 위기를 맞은 이후 어떻게 극복했나."지역 판매가 자율화하면서 여러모로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포천의 막걸리가 전국을 주름잡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탁주는 그때부터 그동안 간섭하지 않던 유통 부문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막걸리를 판매하시는 분들이 중구에 기반을 갖고 계신 분들이 부평지역에 납품하고, 부평에 기반이 있는 분들이 중구에 납품하고 서로 경계가 없었는데 이것부터 정리했습니다. 사실 거래처라는 게 별것도 아닌데, 영업비밀이라며 정보를 공유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판매하는 분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었지만, 결국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설득하며 추진했습니다." #막걸리 세계화 가장 먼저 시도했는데반짝인기였을뿐 큰 의미 두고 싶지 않아한국인이 즐기는 술, 그 자체가 더 중요#인천탁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월급 많지 않지만 직원들 행복했으면사랑받는 만큼 보답… 기부활동 희망-인천탁주는 막걸리의 세계화를 위한 시도를 가장 먼저하고 결실도 얻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막걸리의 세계화는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천탁주는 1992년 막걸리를 장기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테트라팩'에 담은 멸균탁주 '농주(農酒)'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일본 등에 수출하기도 했는데, 막걸리 정식 수출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미국 LA와 시카고에서 열리는 국제식품쇼에 출품하기도 했고 1994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음료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속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술이 된 줄 알았죠. 하지만 당시 그것은 인천 막걸리의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화 추세 속에 인천의 막걸리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는데 마케팅 능력도 없었습니다. 반짝 인기를 끌었을 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남을 의식하지 말고 우리끼리 즐기는 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베트남이나 일본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술이 있다고 합니다. 막걸리를 모든 한국사람들이 즐기는 술이라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거지 막걸리가 세계화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소성주가 어떤 술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나."막걸리를 서민들의 술이라고 합니다. 소성주도 계속 서민들의 곁을 지켜주는 서민주로 오래도록 사랑을 받으며 이어갔으면 합니다. 막걸리 고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싸게 즐기는 서민들의 술로 오래도록 그들의 삶과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라지는 한국문화유산이 많아 슬픕니다. 막걸리가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세계 사람들에게 내세우는 한국의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가 됐으면 합니다. 소성주를 비롯한 막걸리를 즐겨 찾아주는 국민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천탁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 어떤 것인가."가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직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월급을 많이 주진 못하지만 직원들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공부 잘하고 뛰어난 능력이 필요한 직원들이 많아야 하는 곳은 아닙니다. 우리 공장에는 외국인노동자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일자리가 얻기 힘든데 외국인에게까지 일자리를 뺏기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또 민속주를 외국인이 만들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장은 평범한 분들이 일하는 곳이죠. 이 공장 안에서 그 분들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월급 받고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합니다. 또 소원이 있다면 막걸리를 즐겨 마셔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말고. 기부 활동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사랑받는 만큼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정규성 인천탁주 대표는?▲ 1957년 인천 출생▲ 축현초등학교, 상인천중학교, 송도고등학교, 제주대학교 식품공학과▲ 1989년 대화주조 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1996년 인천탁주제조 제1공장 대표 취임▲ 2017년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 회장▲ 2019년 사단법인 한국막걸리협회 회장-주요 수상내역▲ 2013년 대한적십자상(기부분야)▲ 2014 사랑의 열매 대상(기부분야)▲ 보건복지부 2015년 제1회 행복나눔상 ▲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표창정규성 인천탁주 대표가 회사 경영이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말하며 웃고 있다. 정 대표는 그저 못살게 될까봐 두렵고 겁이나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2019-03-19 김성호

[인터뷰… 공감]양평에 '소아암 어린이 공원묘원' 만든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

소아암으로 세상 등진 아이, 장례 제대로 안치르기도사후에도 그들을 기억할 공간 만들기 위해 묘원 마련아이와 부모 위해 장례·안장 무료… 화초장으로 진행# 소아암으로 세상 떠난 어린이들,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공원묘역국내 최초로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한 공원묘원을 찾아가는 길. 양평 두물머리(양수리)에서 공원묘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양평군 서종면 도장리까지 가는 길 왼편은 맑은 북한강이 전날 내린 눈으로 한 폭의 수채화로 차창 밖으로 흐르고 오른편은 흰 눈에 덮여있는 야트막한 산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20여분 남짓 승용차로 달려 도착한 하이패밀리 진입로. 입간판 안내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 깎아지른 듯한 시멘트 포장길 300여m를 오르니 큼지막한 흰색 건물과 계란 모형의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하이패밀리 동산. 이곳에는 더블유 스토리 건물과 청란교회 등이 있다. 교회 이름처럼 푸른 모양을 한 예배당이 있어 가족단위로 명상과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밖에서 보면 좁아 보이지만 들어가면 꽤 공간이 넓고 천장이 아파트 2층보다 높다.개신교 가정사역 단체인 하이패밀리(Hi Family)가 지난 2016년부터 서종면 도장리 매곡산 자락 중턱 9만9천여㎡ 부지에 건립하기 시작한 가족테마파크 '하이패밀리 동산'이다. 복합문화공간이자 가족 생태계복원을 위한 '힐링필드'인 이곳에 지난 2월 15일 문을 연 어린이 전문 화초장지(葬地) '안데르센 공원묘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백혈병 등 몹쓸 병으로 어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은 또한 안타깝게 떠난 아이를 제대로 장사 지낼 마땅한 곳이 없어 강물이나 산야에 재를 뿌리고 훗날 아이를 찾아갈 기억의 공간이 없음에 또다시 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직원 안내를 받아 사무실을 찾아가 만난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62) 목사가 안타까운 현실을 속으로 삭이듯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송 목사는 "부모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자식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경우도 많고, 사후에도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어린이 묘원을 만들게 됐다"고 덧붙여 설명했다.'더블유 스토리' 건물 앞 산자락 남동쪽방향에 자리를 잡은 안데르센 공원묘원은 익숙하지 않은 조형물과 시설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가장 먼저 빨간색 '하늘나라 우체통'이 반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에게 부모나 가족·친지들이 보내는 편지를 넣는 곳이란다. 또 철제 난간 펜스에는 하늘을 나는 듯한 흰색 나비와 'TALITHA CNMI'(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라고 쓰여진 문구가 붙어 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곰 캐릭터로 된 비석도 조만간 세울 예정으로 제작주문을 마친 상태란다. 또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화초장으로 묻은 흔적이 없어지기에 앞쪽 벽면에 아이들이 잠든 곳을 알 수 있게 표식을 붙일 수 있도록 했다.아이들이 잠드는 공간인 안데르센 공원묘원은 1천155㎡ 규모로, 잔디와 나무수국이 곳곳에 심어졌다. 아이들 묘원답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 등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한 추모석도 군데군데 놓여있고 묘원 중앙부위에는 송 목사가 지은 헌사 '오래된 묘비'도 목판에 새겨 세워져 있다.'나무수국은 우유 빛이다. 갓 태어난 아이의 뽀얀 피부를 닮았다…(중략)수국화에는 새 생명으로 피어날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새겨져 있음을 알았다…(중략)내 아이를 보았으니 얼른 가서 아이가 먹고 배부를 밥을 지어야겠다'.송 목사의 이곳에 묻힌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망, 그리고 아이들 부모들을 위한 위로와 치유의 간절함이 구절마다 묻어나오는 듯 느껴졌다.이곳 장례 절차는 화장을 한 아이 유골을 나무수국이나 잔디 밑에 종이관(한지)이나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친환경적인 관에 담아 묻는 '화초장' 방식이다. 송 목사는 "안데르센 동화 중 한 주인공이 장미가 시들자 땅에 묻으면서 부활을 기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기인했다"고 장례방식을 설명했다.소아암을 앓다가 엄마·아빠와 이별한 아이들에게 장례와 안장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하고 관리비도 없다. 그래서 세계 소아암의 날인 지난 2월 15일에 개장한 이유라고 그는 설명했다.# 아이를 먼저 떠난 보낸 가정의 회복과 힐링을 위해송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목회자의 길이 아닌 가정사역 연구소를 설립, 새로운 선교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아이를 묻은 가족 등을 위한 애도·치유프로그램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는 까닭이다.단순히 아이들 장례를 치르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은 부모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송 목사는 지난 1992년 하이패밀리를 설립, 지금까지 10만건의 가정치유 상담을 진행했다. 그는 "남은 가족이 아픔을 딛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애도 프로그램을 나누고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송 목사는 "우리나라 소아암 환자는 연간 1만4천여명, 이중 2천400여명이 끝내 사망한다"며 "암 진단 후 최장 3년을 살지만 대부분 가정이 아이 치료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끝내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적인 이유로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부모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들 엄마·아빠를 위한 치유 애도프로그램에 정성을 쏟는 것은 사역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의 트라우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아프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부모들은 아이가 암에 걸리고 부모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탓을 서로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느 부부는 서로의 가족병력까지 들먹이며 상대방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는 경우도 보았다"며 가정 애도 치유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그는 "아이들이 태어나 부모에게 줬던 웃음과 행복·감사함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저 세상에서 아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엄마 아빠를 본다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아이의 엄마·아빠로서 겪은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감싸 안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라 한다"고 치유의 첫걸음을 귀띔해 줬다. 남은 가족들 치유 돕는 것, 사역자로서 마땅히 할 일양평에 각별한 애정… "가장 큰 힘 돼준 사람은 아내" # '가족생태학자' 송 목사의 양평사랑과 관심, 그리고…."6·25전쟁 후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 중에 양평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양평'표기가 예전 일기 방식으로 읽으면 '평양'으로 읽혀 양평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됐습니다. 그 후 그들이 추석·설 명절때 모여 고향을 그리워하며 북한음식을 만들어 먹게 된 것이 지금의 옥천 냉면거리의 시작입니다"라고 양평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그는 새벽마다 하이패밀리 동산이 자리 잡은 뒷산에 만들어 놓은 '주기도문 산책로'를 따라 정상에 올라 양평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이곳에 하이패밀리 동산을 세우고 소아암 어린이 공원묘원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 지역주민 안녕과 건강을 위해 한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했다.송 목사에게 뒤늦게 '하이패밀리' 뜻을 물었다. 그의 답은 "하이(Hi)는 '안녕'이 아닌 '행복혁신(happy innovation)'이며, '패밀리(Family)'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물론 갖고 있지만 숨은 뜻은 따로 있단다. 'fam'은 'father(아버지) and mother(어머니)'의 뜻이고 'ily'는 'I love you'의 약자란다. 그가 처음으로 의미를 붙여 만들었다는 답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수시로 강연회나 특강에 나가는데 그때마다 참석자들에게 '하이패밀리'의 의미를 설명하고 큰소리로 외치게 한 후 강연을 시작한다고 했다.그에게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한순간 망설임도 없이 답을 했다."아내지요. 무엇보다 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아줄 사람도 아내일 테니 더욱 고맙고 감사한 사람이지요." 글·사진=양평/오경택기자 0719oh@kyeongin.com■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는?'가족생태학자' 송길원 목사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지만 교사인 부친의 잦은 전근으로 인해 부산에 사는 외할머니 손에서 성장했다. 그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됐고, 대학도 고신대학교 신학과에 진학 후 고려신학대학원, 고려대학대학원, 미국 RTS를 졸업했다.고신대 의대 교목(校牧)으로 재직(1984~1990) 후 가정해체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치유하며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부산서 '가정사역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97년 고양 일산, 2002년 서울 양재동을 거쳐 지난 2016년 양평군 서종면으로 옮겨와 현재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에 이르렀다. 또한 하이패밀리 내에 세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교회' 정란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으며, 인생의 반려자이자 사역의 동역자인 아내 김향숙(하이패밀리 공동대표)씨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둘째 아들이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다 뒤늦게 신학으로 바꿔 목회자의 길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국민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비움과 채움', '손으로 쓰는 기도', '행복한 죽음', '죽음이 있는 곳이 성지다', 해피엔딩 스쿨 교재 등 다수가 있으며, 일간지·잡지 등에 많은 연재물을 집필했다.송길원 목사가 하이패밀리와 소아암어린이 공원묘원에 대해 설명을 하며 "아이들의 부모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은 목회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사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공원묘원 벽면에 붙어있는 안데르센 공원묘원 표기.송길원 목사가 '하늘나라 우체통'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2019-03-12 오경택

[인터뷰… 공감]'국토정보 플랫폼 사업' 이끌고 있는 현남위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

인공 지능(AI), 사물 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에 점차 융합되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플랫폼 구축이 갈수록 중요시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지식정보기술을 매개체로 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중계자가 아직까지 부족한 상황이다.또한 지능정보기술이 인간의 신경망처럼 도시 구석구석까지 깔리기 위해서는 생산과 제조에 앞서 공간정보 구축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한 사업은 아직 초창기나 다름없다.그나마 한국국토정보공사(LX)가 가상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디지털 혁명 기반의 기술융합 시대를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공간구축의 필요성은?건물·도로등 도시 인프라 효율적 관리'공공데이터' 활용해 새로운 가치 창출LX는 지난 2004년부터 공간정보를 신규사업으로 정해 기술발전을 대비해 왔고, 지난 2015년에는 사명까지 바꾸며 지적사업에서 국토정보사업으로 업무영역을 확대, 4차 산업혁명의 중간자 역할과 기초자 역할을 하고 있다.그 중심에는 현남위(58)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이 있다. 1985년 공사에 입사해 30여년간 지적 사업과 더불어 국토정보 사업을 최일선에서 이끌어 왔다.지난해부터는 지역본부 전체 국토정보사업분야 회장을 맡아 스마트사회를 선도하는 국토정보 플랫폼 사업의 나아갈 방향을 안내하고 있다.이를 위해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공간과 정보를 아우르는 여정'으로 정한 뒤 국가공간정보체계 구축 지원과 공간정보·지적제도 연구개발 및 지적측량 수행 등을 통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현 처장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크지만 바로 이런 거대한 두려움 속에 거대한 기회가 숨어있다"면서 공간구축의 힘든 여정을 단편적으로 토로했다.하지만 그는 공간 구축의 어려움보다는 성과가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지난해 판교 자율주행 공간정보플랫폼 구축, 정부 및 지자체와 협업을 통한 3차원 지하공간통합지도 작성 등을 추진한 현 처장은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 험난한 가시밭 길이라는 법은 없고, 남들이 열어보지 않은 문이라고 해서 꼭 잠겨 있으리라는 법도 없다"고 강조했다.그는 "건물, 도로, 철도, 항만, 지하 등 도시의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공공데이터를 수집 활용함으로써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조언한 뒤 "'디지털 트윈' 전담기관으로 국가 '스마트시티' 분야의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트지털 트윈'은 컴퓨터에 현실 속 사물의 쌍둥이를 만들고,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기술이다. 디지털 트윈은 제조업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특히 현 처장은 그동안 아날로그 방식으로 구축된 국토 정보를 디지털 방식으로 변환하는 데 힘쓰고 있다.그는 "자율자동차 등 첨단 기술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수록 보다 정밀한 측량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미래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변하는 정보까지도 공간정보에 담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그러면서 그는 지난해 정밀측량을 통한 공간정보구축 사업을 소개했다.현 처장은 "지난해 정밀측량을 통한 품질관리사업으로 최신 3D기술을 적용한 의정부 경전철 안전성 검증사업과 수원시 3차원 지하공간통합지도 제작 등을 실시했다"고 밝히면서 "현재 LX 경기지역본부는 단순 수치화됐던 정보를 위치기반과 입체화하는 정밀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는 "지적기반의 철도 연결용지도면 작성과 한국철도시설공단 용지매입을 위한 용지도면 작성 및 시스템고도화 작업, 국가지점번호 검증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중 국가지점번호 검증사업은 산, 들, 바다 등 건물이 없는 지역의 위치를 쉽게 표시·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적으로 통일된 위치표시 개념으로 특정 지점마다 고유번호가 부여된다. 전 국토와 인접 해양 지역의 위치안내 및 표기방식이 통일되면 각종 재난 재해 등 긴급상황 발생 시 신속한 대응 및 대국민 생활위치 안내서비스 등이 제공될 수 있게 된다.#3기 신도시 정보도 준비하고 있나토지보상업무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공간정보구축' 나설 계획 세우고 있어현 처장은 정부의 3기 신도시 발표 지역의 공간정보도 준비하고 있다.그는 "각종 도시개발사업에서 토지보상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선 개발지구 내 편입되는 토지, 건축물, 지상공작물 등의 조사와 지구관리를 위한 지적기반의 중첩 제작 업무가 중요하다"며 "따라서 3기 신도시 역시 효율적인 토지보상업무지원을 위해 공간정보구축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문화재 조사 및 복원에도 앞장서고 있는 그는 "문화재가 있던 지역의 공간을 옛 문헌 등에 게재된 모습을 구현해 공간을 구축하다 보면 그동안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때가 있다"면서 "또한 문화재를 공간화(입체화) 해 놓으면 향후 소실 시에도 원모습을 복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문화재 조사도 앞장서고 있는데작년, 화성 융건릉·수원화성등 '공간화'향후 소실시에도 원모습으로 복구 도움지난해 LX 경기지역본부가 공간을 구축한 문화재는 화성 융건릉과 수원화성, 남양주 홍유릉 등이다.현 처장은 그동안 공간구축 사업을 이끌어오면서 인력양성 문제에 대한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꼈다고 토로했다.그는 "우리나라 국토에 대한 정보가 갈수록 지적에서 공간정보로 바뀌고 있는데 기술 개발에 맞춰 변화를 이끌어갈 만한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이에 LX 자체에서도 국토정보 및 공간정보전문가 양성을 전략 목표 및 과제로 정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또 급변하는 기술에 맞춰 직원 교육의 중요성도 피력했다. 현 처장은 "LX 경기지역본부에는 현재 '공간정보누리단'이란 직원 소통 공간이 존재한다"며 "매 분기마다 직원 대상으로 국토정보업무 및 마케팅 수행 관련 자문 활동과 자율주행자동차 등 최신 트렌드 공유, 공간정보 사업 전략적 공유를 통한 미래전략 콘텐츠 등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공간정보와 관련한 해외 공무원 등에 대한 기술도 공유하고 있다. 지난해 LX 경기지역본부에 다녀간 국가 공무원은 키르기스스탄공화국 국가등록청 산하 지적공무원과 튀니지 지적공무원, 탄자니아 토지주택개발부 대표단 등이다. 이들은 경기지역본부를 방문해 한국의 토지행정 시스템 운영 프로세스와 구축현황 등을 직접 확인하고 국내 다양한 공간정보기술을 배워갔다.그는 "일부 다른 나라의 경우 공간 정보뿐만 아니라 기본이 되는 지적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구축돼 있지 않다"며 "이에 LX는 이들 국가에 측량제도, 측량장비, 공간정보 분야 기술 및 시스템 활용 등에 대한 기술을 집중적으로 교육해주면서 한 단계 빠른 지역별 맞춤 공간 구축에 돌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마지막으로 그는 "용감하게 손을 내밀어 눈앞의 문을 열어젖힌다면 세상의 많은 문이 잠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려 있음을 알게 된다"고 조언하며 새로운 도전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공간구축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글/김종찬기자 chani@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현남위 LX경기지역본부 처장은?▲ 1961년 8월 출생 ▲ 1980년 대구 대건고등학교 졸업 ▲ 1985년 대한지적공사 입사▲ 1987년 명지실업전문대학교 졸업 ▲ 2015년 한국국토정보공사 경기지역본부 사업단장▲ 2016년 2월 경기대학교 행정·사회 대학원 졸업 ▲ 2016년 2월 한국국토정보공사 경기지역본부 공간정보사업처장▲ 2019년 1월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처장▲ 2010년 안양시장(표창장)▲ 2012년 국토부장관상(표창장)▲ 2017년 LX사장장(우수장)현남위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디지털 공간정보구축의 중요성과 맞물린 LX의 역할과 비전을 강조하고 있다.현남위 LX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처장(가운데)이 3D측량 작업 현장을 찾아 직원들과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LX경기지역본부 제공현남위 LX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처장(가운데)이 지난해 열린 판교자율주행모터쇼에 참석한 모습. /LX경기지역본부 제공

2019-03-05 김종찬

[인터뷰… 공감]문화발전 기여 장관상 받은 손동혁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

"인천민예총은 여러 예술 장르의 진보적 예술가 연합체로 내년이면 30주년이 된다. 예술가들이 태생적으로 얽매이기 싫어하는 데다 시인, 소설가에, 화가, 풍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독특한 인물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다 보니 그리 쉽지 않은 조직이다. 인천민예총도 초기엔 부침이 심했는데,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동가숙서가식 하던 차에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있었으니, 노래패 출신의 손동혁이다. 그가 사무처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경직되지 않은 조직력과 탁월한 기획력을 발휘하여 민예총의 노둣돌을 놓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인천문화재단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척박한 인천 문화를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 손동혁이 던지는 문화정책에 대한 혜안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부단한 공부와 발로 뛰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항상 미덥다."인천 부평여고 미술교사로 있는 김정렬 작가가 이달 중순 마련한 개인전 '인천인물 열전(列傳)'에서 손동혁(50)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경력 사항을 담은 프로필만 A4용지 3장에 달하는데, 김정렬 선생은 손동혁 팀장의 이력을 짧은 글에 잘도 담아냈다. 198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노동자 노래패에 몸을 담았으며 인천민예총, 주안영상미디어센터 등에서 실무를 총괄한 그는 지금 인천문화재단에서 시민들을 위한 다채로운 문화·예술 교육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손동혁 팀장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민간자문 프로젝트팀 '새문화정책준비단' 19명의 총괄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해 '문화비전 2030'을 수립하기도 했다. 손 팀장은 문화예술 정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문체부장관상을 받았다. 인천문화재단이 기관으로나 개인으로 문체부장관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손 팀장은 "이번 '문화비전 2030'은 정부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을 딛고, 민간 중심 준비단을 구성해 이들이 만든 계획안을 장관이 수용하고 발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기존에는 관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계획을 짰다고 하면, 이번에는 분과별 민간 위원들이 현장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수렴해 그때그때 반영하며 계획을 짜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정부 '새문화정책준비단' 참여했는데분과별 민간 위원들과 매주 치열한 논의10~20년 후 내다 본 문화예술 정책 세워새문화정책준비단은 지난 1년여간 매주 한 차례 저녁 시간 서울역 근처에서 만나 치열하게 논의했다. 당장 시행할 정책보다는 우리나라 문화 예술 정책의 10~20년 후를 내다본 호흡이 긴 계획을 세우는 과정이었다.인천의 입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9개 의제 중 8번째인 '미래와 평화를 위한 문화협력 확대' 안의 '한반도 평화를 여는 문화의 섬, 문화로드 프로젝트'다. 이 중 백령도를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는 것이 첫 번째 추진 과제로 꼽혔다. 방공호나 갱도 같은 백령도의 안보기반시설을 국제예술가의 레지던스 시설로 전환하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백령도에서 국제 축제를 열도록 하자는 구상이다. 한·중·일의 '평화 자본'을 유치해 관광객의 발길을 끌도록 하자는 방안도 제시됐다. 새문화정책준비단 위원들이 전국 각 지역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손 팀장은 백령도를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는 것은 인천,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손동혁 팀장은 "문화 비전을 수립하고 있는 사이에 4·27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됐는데 남북 공동어장, 서해 평화수역 지정과 같은 급진적인 논의들이 오가며 오히려 문화 비전이 한발 늦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며 "물 위로 NLL과 맞닿아 있는 백령도에서 문화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인천문화재단이 벌인 백령도 평화예술 프로젝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에서 국내외 작가들이 머물며 창작 활동을 벌였다. 2014년부터 4년간 중단됐다가 지난해 다시 재개됐다. 그는 "인천은 연평도 포격사건을 계기로 눈앞으로 날아 들어오는 포탄, 실질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북이 왜 긴장을 늦추고 화해와 협력을 해야 하고 인천이 남북 교류에 앞장서야 하는지를 자각했다"고 덧붙였다. 인천에서는 평화가 결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손동혁 팀장은 1987년 인하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인천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망한 '공학도'였지만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노래패를 하며 문화 예술 분야에 눈을 떴다. 교실 바깥 현실에 매달리느라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1995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기획국장을 맡아 본격적인 문화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00년 소위 대우자동차 사태 때 노동자 조직에 깊숙이 관여했다가 경찰에 긴급체포되는 곤경을 겪기도 했다. #'문화의 섬…' 의제가 눈에 띈다백령도, 평화의 섬으로 조성하는게 핵심레지던스 시설 만들어 국제적 축제 열것 인천의 문화 예술계에 그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002년 인천민예총 사무처장을 맡으면서다.손동혁 팀장은 "선배들의 제안을 받아 민예총 사무처장을 맡게 됐는데, 예술가들의 활동 모임이라고 해서 와 봤더니 10평 남짓한 허름한 사무실에 전에 있던 미용실 간판조차 떼지 않고 있어 사람들이 '미용실 하냐'고 물어올 정도였다"며 "그럴듯한 간판을 만들고,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을 만들었고, 그림도 팔고, 인천시에는 단체에 필요한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닌 문화 정책 자문 역할을 하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인천문화재단 설립 필요성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공공기관의 심사·집행·자문 위원으로 활동한 이력만 수십 가지에 달한다. 2007년에는 '시민들이 미디어 읽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안영상미디어센터 초대 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예술·미디어 분야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며 더 많은 예술인들이 맘껏 활동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민들이 예술을 더 가깝게 느끼고 참여할 수 있도록 고민하겠다고 했다.인하대에서 문화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손동혁 팀장은 "인천은 세계적인 도시와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천은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국제도시였다. 지금도 우리가 중앙이라고 말하는 서울을 등지고 서면 다른 나라가 보인다. 다른 나라와 경쟁해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며 "특히 인천이 가진 문화적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해 동아시아의 다른 도시들과도 협력할 수 있어야 하며 남북교류 문화 사업 역시 접경 지역인 강원도, 경기도와 서로 연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손동혁 팀장은?▲ 강원도 철원 출생▲ 1987년 3월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 입학▲ 1995년 11월~1996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기획국장▲ 1997년~2001년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 대표▲ 2002년 1월~2006년 1월 인천민예총 사무처장▲ 2007년 4월~2011년 12월 주안영상미디어센터 초대 소장▲ 2010년 5월~2011년 12월 한국영상미디어센터협의회 초대 대표▲ 2012년 2월~현재 인천문화재단 근무▲ 2010년~현재 인천알리앙스 프랑세즈-인천프랑스문화원 운영위원회 위원손동혁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천은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국제도시였다. 지금도 우리가 중앙이라고 말하는 서울을 등지고 서면 다른 나라가 보인다. 다른 나라와 경쟁해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9-02-26 윤설아

[인터뷰… 공감]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 김명욱 사무국장

시의원 시절부터 노동문제·지역 일자리 남다른 관심… 2016년 취임올해 사업 방향·목표, 붓글씨로 적어 사무실 벽에 붙여놓는등 '열정''수원형 일자리' 2025년까지 1만개 만드는 중장기적 개발 전략세워최저임금 인상등 노동환경 어려워진 곳 찾아가 '분쟁 방지' 지원도"경제가 어려울수록 노사민정이 책임감을 갖고 대화와 협력에 나서야 한다."올해로 9년 차를 맞은 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는 노동자와 기업인, 수원시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 등 지역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경제적 난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는 고용노동부가 주관하는 노사민정 협력 사업 평가에서 2010년과 2012∼2014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2016년에 이어 2017년에도 기초지자체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지역 노사민정협의회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그 중심에는 김명욱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 사무국장이 있다. 지난 2016년부터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김 사무국장은 올해 사업 방향과 목표를 붓글씨로 손수 적어 사무실에 붙여놓는 등 일에 대한 열정도 과시하고 있다. 수원시의회 재선 의원이기도 했던 김 사무국장은 시의원 시절부터 노동문제와 지역 경제 일자리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김 사무국장은 현재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와 기업인, 시민과 자치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먼저 청년 실업 등 일자리 문제에 대해 그는 노·사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국장은 "중소기업들은 인재를 얻지 못해 힘들어 하지만 청년들은 일할 만한 기업이 없어 하소연하고 있다"며 "노사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해결책 중 하나는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금 조건과 근로 복지를 높여 기업의 일자리 수준을 높여야 한다"며 "동시에 청년들도 중소기업 취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사무국장은 "주거, 임금, 복지가 보장되면 중소기업에 취직하려는 청년들이 늘어날 것"이라며 "현재 중소기업 임금이 대기업의 절반 수준임을 고려할 때 기업들도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는 실제 지난해 수원형 일자리 창출 연구 사업을 진행해 2025년까지 1만 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중장기적 개발 전략을 세웠다. 산업단지 내 650개 중소기업을 조사, 기존 일자리 질을 높이고 근무환경 등을 개선해 근로자가 만족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든다는 복안이다.그는 "중앙정부나 자치단체가 공적 영역에서 근로자의 교통비나 통신비를 지원하고 산업단지 근교에 청년임대주택을 조성하는 방법도 필요하다"며 "이렇게 된다면 중소기업 취직에 대한 유인 효과는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김 사무국장은 노동 시장에서 발생하는 양극화 문제도 언급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노동 강도는 크지 않지만 임금 격차가 상당하다는 것이 김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그는 "정규직 노조가 있는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100'이라면 노조가 없는 비정규직들의 임금은 '30'밖에는 되지 않는다"며 "고용 불안과 임금 체불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소비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이어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노동복지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며 빈곤의 대물림, 위험의 외주화 등 양극화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많다"며 "노조가 있든 없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고용안정, 차별 없는 임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노동 양극화 해소와 청년 일자리 문제 해소 등에 힘을 쏟을 방침이다. 김 사무국장은 "올해 비정규직을 포함한 취약계층 지원 사업을 중점적으로 해나가면서 건설임금 노동자를 비롯한 특수노동자, 각종 비정규직들의 노동권익 보호를 위한 지원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며 "노사 상생형 일자리 창출을 위해 청년 고용을 많이 한 기업에 대한 우수 시상식도 개최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아울러 근로시간 단축이나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노동 환경이 더 어려워진 업종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고 예방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모든 것들이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신뢰와 책임 속에서 사회적 대화를 잘 이끌어야 한다"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노사민정협의회의 올해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특히 청년 일자리가 넘치는 수원의 원년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그는 "수원시는 평균 연령이 낮고 인구도 빠르게 늘어나면서 젊은 인재가 굉장히 많은 곳"이라며 "지역주도형 청년 일자리 창출의 모범 사례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그동안 노사민정협의회를 이끌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로 '수원시 산·학·정 공동선언문' 발표를 꼽았다. 지난 5월 발표된 이 선언문은 산업단지, 아주대, 경희대, 수원여대, 수원시 등이 청년 고용 네트워크를 구성해 양질의 청년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수원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각 영역에서 협력이 잘 이뤄지고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며 "이런 이유로 최우수기관 6회 선정이라는 금자탑도 쌓게 됐다"고 밝혔다.노동자와 기업인, 자치단체 등을 하나의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김 사무국장은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는 입장이다. 김 사무국장은 "이제는 투쟁과 싸움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더 큰 사회적 성공을 위해 대승적인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글/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김명욱 사무국장은?▲ 1968년 강원도 고성 출생▲ 1996년 아주대 기계공학과 졸업▲ 2010년 아주대 공학대학원 졸업▲ 2004년 5월∼2006년 4월 수원환경운동센터 사무국장▲ 2008년 7월∼2009년 6월 8대 수원시의회 경제환경위원회 간사 ▲ 2012년 7월~ 2014년 6월 9대 수원시의회 도시환경위원회 위원장▲ 2016년 2월~ 수원하천유역네트워크 운영위원장▲ 2016년 4월~ 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 사무국장김명욱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 사무국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역 일자리 문제에 대한 협의회의 역할과 계획을 밝히고 있다.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2019-02-19 이원근

[인터뷰… 공감]'학교발전 봉사 각오' 최용규 인천대학교 신임 이사장

#처음 제의 거절, 결국 수락한 이유는지금까지 총장·박사들이 맡았던 자리지역사회서 역할해달라 요청에 결심#현재 학교의 문제와 역점사업 구상은모든 구성원이 노력하지만 방향성 없어평생학습원·추가 캠·역사연구소 등 추진 '인천대학교'는 인천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까. 10대~30대라면 '집 가까운 국립대', 40대 이상이라면 최초 설립자인 '선인학원'이 먼저 다가올 터이다. 고등학생이라면 가장 경쟁률이 센 인천대 대표 특성화 학과인 '동북아국제통상학부'가 생각날 수도 있다.최용규(63) 인천대학교 신임 이사장은 지난 8일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북대, 전남대, 부산대는 그 지역 주민들의 자랑으로 여겨지는데 인천대는 아직 '국립대'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사장 재임 기간 인천대학교를 인천 시민들이 자랑할 수 있는 '자부심'이 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인천대학교는 1994년 시립대학교로 전환돼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 올해로 16년 차를 맞았다. 시민의 열망을 모아 지역 각계 인사들이 한목소리로 시립화를 이끈 후 2013년에는 그 뜻을 다시 모아 국립대학법인 대학교로 전환시켰다. 2009년 신축 이전한 송도 캠퍼스 인근으로는 최근 몇 년 사이 세계적 수준의 바이오 업계가 들어서면서 바이오 연구 분야를 특성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맞기도 했다.지난 1일 이사장으로 취임한 최용규 인천대학교 이사장은 "처음 이사장 제의를 받았을 때 그간 총장, 박사들이 이사장을 해왔기 때문에 거절했다"며 "그러나 지역 사회로부터 지금 인천대학교의 발전, 나아가 인천의 발전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이사장직을 맡아 봉사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최용규 이사장이 짚고 있는 인천대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방향성'이 없다는 점. 최용규 이사장은 "모든 구성원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은 사공이 없어 돛도 닻도 없는 상태와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총장, 이사장, 학생은 언젠가 학교를 떠나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그만둔다고 해서 대학의 큰 기조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며 "이사장, 총장 등 누구 한 명이 정하는 것이 아닌, 구성원이 함께 추구하는 방향과 가치관을 정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최용규 이사장은 인천대학교 발전을 위해 대학 구성원들과 함께하고자 구상하는 3가지 역점 사업을 제시했다.첫 번째는 인천 시민을 위한 '평생학습원'을 인천 전역에 만드는 것이다. 옹진군 백령도, 덕적도는 물론 강화도 교동에도 설치해 다양한 원격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인천대학교가 인천 시민과 떨어져선 안 된다'는 최용규 이사장의 오랜 생각 때문이다. 최용규 이사장은 1991년 초대 시의원을 지내며 인천대학교 시립화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최 이사장은 "인천대는 시민이 만든 대학이기 때문에 결코 인천 시민들과 동떨어져 성장해선 안 된다"며 "인천인들의 자부심이 되기 위해 지역에 녹아들고, 지역과 선순환을 할 수 있는 대학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두 번째는 부평과 서구 지역에 각각 '예술 캠퍼스'와 '환경 캠퍼스'를 설립하는 것이다. 인천대학교 예술학부는 연극학과를 선두로 매년 경쟁률이 높아지는 등 입지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이점을 더 살리기 위해 한국 대중문화의 근간이었던 부평 미군기지 터에 인천대 예술 캠퍼스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이다.최 이사장은 "인천지역에서 대학 설립은 수도권정비계획법으로 아예 불가능하다"며 "예술 전문 캠퍼스가 부평 문화공원에 자리 잡으면 학생들은 맘껏 길거리 공연을 펼칠 수 있고 시민들은 그곳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서구와 환경부, 인천대학교가 협력해 서구에 산학집적센터를 조성하는 것도 조만간 가시화될 전망이다. 수도권매립지가 있는 인천의 특성을 살려 이곳에서 학생들이 연구, 실험, 과제 수행을 할 수 있게 해 환경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환경공학학과를 동북아통상학과처럼 인천대학교의 대표 학과로 만들고 싶다는 게 최 이사장의 구상이다.세 번째는 '역사연구소' 설립이다. 해방 공간에서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대한민국 광복과정에서의 통합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최 이사장은 16·17대 국회에서도 친일파 재산 환수, 독립유공자 발굴 문제 등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그는 최근 411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서훈 신청을 한 이태룡 박사와 같은 저명한 인사를 초청해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은 "그간 국가와 지역에서 독립운동가 발굴과 서훈에 너무 소홀했다"며 "통일 시대에 대비한 통합 역사 교육, 강화를 중심으로 한 고려사 연구와 함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우리나라 대표 연구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바이오 학과' 특성화 육성 계획은집중할 점 고민… 총장에 전적으로 위임송도 11공구 고집 안해… 구성원과 논의#인천시와 기금 놓고 줄다리기 중인데지방대학 특성화 기금 회수, 명분 없어지역인재 키우는데 퍼주기라 할수 있나최 이사장은 현재 인천대가 집중해서 추진하고 있는 바이오 관련 학과 육성에 대해서는 "현재 대학이 중점 추진 중인 바이오 학과 특성화와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총장에게 맡기겠다"면서도 "집중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봐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인천시로부터 부지를 받기로 한 송도 11공구 바이오 부지 역시 받으면 좋지만 꼭 고집해 받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물론 최 이사장은 이러한 모든 구상이 구성원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문제라고 분명히 했다. 그는 이달 중 교수, 학생, 교직원 등 대학 구성원들과 '끝장 토론'을 벌여 다양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기로 했다.최용규 이사장은 지난해 신임 이사로 선임될 때부터 인천시와의 협력 관계를 이끌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로 꼽혔다. 인천시와 인천대학교는 최근까지 2013년도 국립대 법인화 당시 맺은 차입금 이자 부담 관련 MOU 해석을 놓고 최근 행정협의조정위원회 조정까지 갈 정도로 갈등을 빚었다. 지금도 인천시가 인천대 시립대학교 시절 주기로 한 기금을 두고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최 이사장은 "인천시가 시립대학발전기금을 주면서 지방대학 특성화 사업 기금을 회수하려고 하는데 이는 명분도 없으며 명확하게 모두 인천시가 대학에 줘야 한다"며 "인천대학교에 퍼준다는 인식을 많이 하는데 인천시가 아무리 퍼준다고 해도 인천대는 인천의 것이고 인천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역대 시장들의 약속과 계약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인천시는 인천대와 절대적으로 '상생'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도 했다.최용규 이사장은 이번 이사장 취임을 계기로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2007년 10월 국회의원 불출마 선언 이후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최 이사장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연해주에) 개척한 독립운동기지이자 농장 약 320만 평의 경작권을 갖고 있는데 이를 한국, 중국, 러시아 대학의 학술교류 장으로 활용하도록 공동 연구 터전을 제공하는 것이 지금 현재 목표"라며 "인천의 발전을 위한 아름다운 봉사를 하겠다"고 말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최용규 이사장은?▲ 1982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1985년 제27회 사법고시 합격▲ 1991년~1995년 초대 인천시의회 의원▲ 1995년~1998년 민선 1기 부평구청장▲ 2000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인천본부 고문변호사▲ 2000년~2008년 제16·17대 국회의원▲ 2019년 인천대학교 이사장 취임최용규 인천대학교 신임 이사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사장 재임 기간 인천대학교를 인천 시민들의 자부심이 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2-12 윤설아

[인터뷰… 공감]'전국 지방자치단체 1호 정식 임명' 김준재 경기도 역학조사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처음으로 '정식' 역학조사관이라는 명함을 갖게 된 김준재(59) 조사관을 인터뷰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지난달 안양지역에서 발생한 홍역이 이달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안산·시흥지역에서 집중 유행한 탓이었다. 올해 들어 도내에 발생한 홍역 환자는 13명. 다행히 더 이상 환자가 늘지 않은 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최일선에 있는 김 조사관은 환자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들과 접촉한 1천600여명을 살피느라 한 달 가까이 밤낮을 잊은 모습이었다. 25년가량 일반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지내왔던 그가 50대 후반, 일반인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역학조사관'의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잠시 허락된 시간. 지방자치단체 1호 역학조사관인 그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어봤다.# 베테랑 소아과 의사의 '새 길'역학조사는 감염병의 발생 원인과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전문가가 역학조사관이다. 질병의 원인을 수사하듯 다방면으로 찾아 감염병을 예방하고 실제 발생 시 확산을 막는 게 주된 업무다 보니 '질병 수사관'으로도 불린다.과거에도 역학조사관이 있었지만 그 중요도에 비해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적었다. 많지 않은 역학조사관들의 헌신에 기대 이뤄지는 게 보통이었다. 같은 의사들 조차 역학조사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때였다. 지자체의 역학조사관들의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한 조사관의 근무기간이 1~2년 정도에 그치다보니 지자체에 감염병 관리 노하우가 축적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전국을 강타했다. 시·도 단위에도 전담 역학조사관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이뤄졌다. 제도가 정비됐고 교육과정도 강화됐다.김 조사관이 '역학조사관'이 된 것은 메르스 사태 이후인 2016년이다. 서울에서 일반 병원을 개업해 25년가량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는 점에 대한 저서에 참여하기도 했다. 보람된 일이었지만, 의사로서 더욱 새롭고 의미 깊은 일을 하고 싶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고민하던 차에 경기도의 역학조사관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마침 공중보건의사로서 역학조사관으로 일했던 대학 후배가 큰 도움이 됐다. 김 조사관은 "소아과 전공의 시절 감염학에 관심이 있어 감염 관련 일을 같이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에는 개업의사로서만 일했다. 보람됐지만 의사로서의 전문성,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렇게 '수습' 역학조사관이 됐다.정식 역학조사관이 되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2년간의 수습기간 수차례의 교육을 받아야 했고 유행역학조사보고서·감염병 감시분석보고서도 각각 2편 이상씩을 써야 했다. 논문도 1차례 작성해 게재해야 했다. 그러면서 매일 경기도 곳곳을 다니며 각종 감염병 발생 가능성을 살피고 이를 사전에 차단하는 데 매진했다. 회의·학회·세미나도 수없이 다녔고, 보건소·기관 교육 역시 그의 업무였다. 그렇게 올해 1월 9일 전국 지자체에선 처음으로 정식 역학조사관이 됐다.# 24시간이 모자라…"홍역, 예방접종으로 조절 가능해"그의 하루 일과는 작은 틈 하나 없이 가득 차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각 지역 보건소에서 올라온 감염병 보고 상황을 꼼꼼히 살피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당장 처리해야할 일, 직접 현장에 가서 살펴야할 일 등으로 내용을 분류한 후 해당 지역 보건소에 상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오전 시간이 모두 지나간다. 오후에는 현장으로 향한다. 병원·보건소, 기타 시설 등에서 환자의 증상, 일련의 행보 등을 살펴 감염병의 유입·확산 경로 등을 파악한다. 이후 현장 조사 보고서를 정리한다. 이번 홍역 사례처럼 감염병이 번지기라도 하면 일은 갑절로 늘어난다. 24시간 내내 긴급사항을 각 지역 보건소에서 유선으로 보고받고 상황을 판단해 적절한 지시를 내린다."요즘처럼 감염병이 확산되면 정말 정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김 조사관은 자칫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던 감염병을 조기에 차단한 일들을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감염병 발생 소식에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갔다가 '음성' 판정을 받아들고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들을 그는 회고했다. 김 조사관은 "의료기관에서 발생하는 감염병을 막기 위해 병원 감염병관리팀, 관련 의사들을 수도 없이 설득했던 일, 아파트·사우나 시설에서 레지오넬라증(박테리아의 일종인 레지오넬라균에 감염돼 나타나는 폐렴 등의 증상)이 발생했던 일, 친구들끼리 백일해(보르데텔라 백일해균에 감염돼 발생하는 호흡기 질환)에 감염돼 대처했던 일 등이 떠오른다"며 "한번은 쥐가 옮기는 질병의 유행이 의심된다는 이야기에 헐레벌떡 현장에 가서 살폈는데 다행히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긴장이 풀리면서 안심이 됐다"고 말했다.최근 안산지역 등에서 확산됐던 홍역에 대해선 이른 예방접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홍역은 1세 이후에 접종을 2번 하면 97% 이상 항체가 생긴다. 예방접종으로 조절 가능한 질환"이라며 "질병관리본부의 안내에 따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인터뷰 내내 그는 "제가 지방자치단체에선 메르스 사태 이후 강화된 규정에 따라 처음으로 수습을 뗀 역학조사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유일무이한 조사관은 결코 아니다"라고 거듭 설명했다. "이전에도 많은 역학조사관들이 감염병 예방, 확산 방지를 위해 애써왔다. 도청에만 저 포함 6명의 조사관이 있는데 다들 일선 현장에서 홍역 등의 확산을 막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도와 시·군, 각 보건소 등에서도 함께 노력하는 중"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사진을 찍는 찰나의 순간에도 그의 휴대전화가 연거푸 울렸다. 홍역 확산 상황을 묻는 내용이었다. 짧은 만남을 서둘러 끝낸 그가 말했다. "곧 또 현장에 가봐야할 것 같아요."경기도 '1호' 정식 조사관인 그의 뒷모습이 자못 비장했다.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김준재 경기도 역학조사관은?▲1960년 서울 출생▲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1984년 의사면허 취득▲1991년 서울대학교병원 소아과 전공의 과정 수료·전문의 자격 취득▲1991년 3월~1992년 1월 동부제일병원 소아과 과장▲1992년 1월~ 소아과 개원병원 의사▲2016년 9월~ 경기도 역학조사관# 저서: '프로엄마, 건강한 아이' (참육아 연구회·공저자, 2002)메르스 사태 이후 강화된 규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1호 정식 역학조사관이 된 김준재 경기도 조사관이 최근 안산지역 등에서 확산됐던 홍역 등 감염병에 대한 예방접종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9-01-29 강기정

[인터뷰… 공감]'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 위원장' 김신일 前 교육부총리

김상호 시장이 위원회 의견 존중하겠다는 분명한 의지 밝혀 참여 결심집단지성 발현 통해 갈등 최소화, 위원회 논의 품질 끌어올리는게 핵심3기 신도시 선정 교산지구, 먼저 주민 마음 이해하고 목소리 대변할 것하남시는 김상호 하남시장 취임 이후 중요 정책과 현안 사업을 소수 정책결정자의 판단이 아닌 민간의 자문과 제안을 바탕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민간의 자문과 제안을 할 기구가 바로 '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다.대학교수·기업인·시민·시의원·공무원 등 지난해 말 공모를 거쳐 선발된 50여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백년도시위원회는 시 중요정책과 현안사업에 대한 자문 및 제안에 대한 역할을 수행하며 숙의 민주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합의적 의사결정을 통해 운영될 예정이다.김신일 전(前) 교육부총리를 위원장으로, 일자리경제위원회(10명), 복지문화위원회(10명), 안전도시위원회(10명), 교통환경위원회(10명), 자치행정위원회(10명) 등 5개 분과로 나눠 운영될 백년도시위원회는 하남시 미래발전에 대한 목표 및 방향성 설정, 공약사항 이행 평가, 중요정책의 자문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해 민선 7기 시장의 개혁 의지를 실천할 방침이다.백년도시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김 위원장과 인터뷰를 통해 백년도시위원회의 의미와 역할을 알아봤다.김 위원장은 백년도시위원회에 대해 "지방자치단체는 단체자치(지방분권)와 주민자치(주민참여)라는 두 가지 부문으로 구성되는데 지난 1987년 지방자치단체가 부활한 이후 30년 동안 단체자치 부문은 상대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으나, 주민자치 부문은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다"며 "문재인 정부도 단체자치보다 주민자치를 강조하고 있고 백년도시위원회 역시 주민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 중의 하나"라고 소개했다.백년도시위원회는 5개 분과 위원회를 운용해 전문성을 높이고 위원회 자체적 판단에 의한 자문활동과 공론화를 포함한 다양한 자문 방법의 활용 등이 보장돼 있어 '강화된 형태의 자문위원회'로 평가된다. 위원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주민참여를 위한 훌륭한 가교역할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중앙정부에는 각종 위원회가 있고 그 위원회를 통해 국민과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국정을 운영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지방자치단체도 시장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자기 주변 소수의 얘기만 들으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해 왔다"고 지적하며 "김 시장이 위원회를 제대로 운영하고 위원회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혀 위원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백년도시위원회가 출범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점도 있지만, 명확히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지적에 대해 김 위원장은 "기본적으로 위원회는 시장이 부의한 시정 사항을 자문하는 기구이지만, 제3기 신도시 교산지구와 관련한 긴급 현안회의를 진행했던 것처럼 위원회 자체적으로 활동계획을 세워 심의 및 자문할 수 있다"고 말했다.또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들이 참고할 수 있는 100년을 내다보고 하남의 밑그림을 그려보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라며 "워크숍 등을 통해 역량을 키워 올 하반기부터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 6호기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면서 널리 알려진 숙의 민주주의를 기초자치단체에서는 최초로 백년도시위원회가 도입해 기대와 함께 우려도 있다는 것에 대해 김 위원장은 "신고리 5, 6호기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숙의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지만, 한 단계 높은 의사결정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또 "집단지성의 발현 과정을 통해 갈등을 최소화하자는 것이 숙의 민주주의의 기본목표"라며 "하남시는 원도심과 신도시, 그리고 새로운 인구 유입으로 인한 갈등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데 숙의 민주주의 활용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평가했다.그는 "위원회를 통한 심의는 그 자체로 숙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는데 위원회의 논의 품질을 어떻게 끌어 올릴 수 있느냐가 핵심으로, 정확한 정보 제공,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의견 개진, 안건에 가장 적합한 논의 방법이 관건"이라며 "숙의 민주주의가 정착된다면 행정은 결정자에서 조력자로, 시민사회는 행정의 대상으로부터 정책과정의 참여자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제3기 신도시로 하남 교산지구가 선정된 것과 관련, 찬성과 반대 목소리가 공존하면서 이 문제를 백년도시위원회가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데 대해 김 위원장은 "먼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50여 년 동안 재산권을 제한받았는데 또다시 신도시로 지정된 주민들은 억울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서 "먼저 주민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지난번 자문회의에서 시장에게 교산지구 대책을 제안했는데 중앙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지정했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것과 중장기적으로 대응할 것을 구별하고 하남시의 여러 구성원과 함께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며 "신도시에 시민들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원회의 역할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개발결과와 관련해서는 시민이 원하는 신도시의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위원회도 주어진 상황에서 개발과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개발의 결과가 최대한 미래지향적인 것이 되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글·사진/문성호기자 moon23@kyeongin.com■김신일 백년도시위원장은▲학력-청주고 졸-서울대 사범대 교육심리학과 졸-서울대 대학원 교육학과 졸-교육학박사(미국 피츠버그대) ▲경력-1993~2003년 교육개혁과교육자를위한시민회의 공동대표-1994~1998년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1998년 대통령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2000년 동아시아사회교육포럼 회장-2006년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현)-2006~2008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2010~2012년 UNESCO 국제교육상심사위원-2010~2015년 백석대 대학원 석좌교수-2011~2012년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 ▲상훈-홍조근정훈장(2006)-청조근정훈장(2009)김신일 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 위원장은 백년도시위원회를 통해 숙의 민주주의로 하남의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강조했다.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가 첫 워크숍을 열고 첫발을 내딛었다.하남 백년도시위원회 위원들이 제3기신도시로 지정된 교산지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하남시 제공

2019-01-22 문성호

[인터뷰… 공감]초등 교과서속 '까만나라 노란추장' 주인공, 농학자 한상기 박사

■영국행 포기하고 아프리카 간 계기는1971년 당시 내전으로 피폐 기근 심각'식량안전으로 국위선양' 서울대 휴직■23년간 현지서 연구생활 성과는카사바·얌 등 품종개량 73개국에 보급석박사 수십명 배출 '고기잡는 법' 교육그의 삶을 거슬러 얘기하면 한편의 위인전이 된다. 실제로 그의 얘기는 1980년대 초등학교 교재 '생활의 길잡이'(3학년 2학기)에, 최근에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읽기'에도 소개됐다. 한 출판사가 2001년도에 펴낸 '까만나라 노란추장'이란 책은 그의 얘기를 동화로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아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으며 47쇄나 발행되기도 했다. 외국 특히 나이지리아에선 '추장(농민의 왕)'으로까지 추대되며 신문 1면을 여러 번 장식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상까지 수차례 받아 세계적인 학자로 두루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바로 농학자 한상기(87) 박사다.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의료활동으로 사람들을 구원했다면, 한상기 박사는 식물유전육종학으로 이들을 구해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이들로 나도 모르게 가슴 뿌듯해지고, 절로 자부심이 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베트남의 영웅이 된 축구감독 박항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전 세계적 팬덤을 형성한 BTS(방탄소년단)가 현재를 대표한다면, 한 박사는 1970~80년대 아프리카에서 식량난을 이겨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 추앙받는다. '한국에서 온 아프리카 성자'라고까지 불렸다.# '일왕불퇴' 각오로 아프리카 광야에 서다1933년 충청남도(청양군 청남면 인량리) 칠갑산 자락에서 한상기 박사는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정산향교의 전교(典校, 교장격 관리자)를 지낸 유학자인 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불공을 드리며 헌신하는 어머님 밑에서 그는 엄하게 자랐다. 어릴 때부터 농업에 관심이 많아 식물유전 육종학자가 되고자 서울대 농대에 입학(1953년)했고, 미국 미시간주립대를 유학해 유전육종학 박사학위를 딴 후 1961년부터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했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열린 것이다. 누가 봐도 명예롭고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교수직."그때(교수직 역임 당시) 나에게 두 갈래 길이 주어졌다. 하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초청을 받아 식물유전 육종학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 안전을 위해 나이지리아 이바단에 창설된 국제열대농학연구소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망설임 끝에 케임브리지행을 포기했다. 가난하고 굶주리는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작물개량을 위한 연구의 길을 택한 것이다. 서울대 교수생활 10년만인 1971년,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해 5월 그는 아이들 셋만 데리고(큰 딸은 학교문제로 한국에 남음) 아내와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직항이 없어 비행기를 2번이나 경유하고 거의 닷새 만에 도착한 곳. 그 당시 나이지리아는 2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1967~1970년)이 끝난 직후라 더없이 피폐하고 농토까지 황폐해져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50여만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1971년부터 1994년까지 23년을 나이지리아에서 '일왕불퇴(一往不退, 서산대사가 한 말로 '한번 갔으면 되돌리지 말라'는 뜻)'의 각오로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하면서 살았다. 데리고 온 아이 셋은 결국 교육문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우리 부부만 나이지리아 연구소 사택에 살면서 외롭고 쓸쓸하고 솔직히 어렵게 지냈다. 일종의 수도생활과도 같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한 박사는 그곳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주로 먹는 카사바와 얌, 고구마, 바나나 등을 연구해 기존 품종보다 병충해에 강하고 아프리카 땅에서 잘 자라는 품종으로 개량했다. 오랜 연구 끝에 수확량도 세배나 늘었고 기존보다 크기도 훨씬 커졌다. 그곳 사람들도 서서히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만들어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73개국(토고, 가나, 카메룬 등) 농민들에게 대대적으로 보급했다.그가 서울대를 떠날 때 총장에게 제출한 휴직계에 써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 안전에 기여하고 국위 선양을 위해 휴직코자 한다'는 당찬 꿈이 이뤄진 것이다. 1983년에는 나이지리아의 대표 부족 가운데 하나인 요루바족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헌신한 한 박사를 기려 이키레읍 '추장'으로 추대했고, 대관식까지 치른 이야기는 널리 회자됐다. 추장은 이곳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던 것이다.■아프리카 경험중 유명해진 일화는나이지리아 한 부족 '추장' 추대해줘헌신 감사 대관식까지… 최고의 예우■반세기만에 귀국, 수원 정착 했는데대학시절 보낸 곳, 고생한 아내 간병마음 달래려 시·서예 '문학상' 받기도# '고기잡는 법' 현지 후학 배출… 그리고 귀국그는 품종개량을 통한 기근 구제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재육성도 함께 해 나갔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순박한 마음으로 서로를 도우면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들에게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를 열어 달라."그는 국제농업기구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속한 열대농학연구소에서는 아프리카 각국의 농학자 700여명을 훈련시켜 보냈다. 그중 40여명이 석박사들이고, 그중 절반은 한 박사가 직접 지도한 제자들이었다. 1994년 1월 한 박사는 23년간의 생활을 마감하고 아프리카를 떠났다. 이들 스스로 농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 그는 아내와 함께 그동안 떨어져 지냈던 세 아이들과 가까이 살고자 미국 클리블랜드에 정착해 21년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15년 40여년의 길고 긴 타국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해 큰딸이 살고 있는 경기 수원에 자리 잡았다. 수원은 대학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사실 치매에 걸려 근 10년간 허덕이는 집사람을 데리고 한국에 묻히려고 반세기 만에 귀국했다. 수십년을 아프리카 낯선 땅에서 나를 위해 무진 고생하다 아내가 병든 것이다. 내가 보살펴 줘야 한다"는 그는 매일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그는 무겁고 복잡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기도와 시, 서예로 달랜다. 그러다 보니 시는 작품(제66회 한국문인 신인문학상 수상)이 됐고 서예는 수준급 실력이다. 기도는 '무아경(無我境, 정신이 한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에 들었을 때 적은 것이 공책 170권 분량에 달한다. 최근에는 그중 내용을 정리해 '나는 나이고 싶다(학자원 펴냄)'란 5권짜리 책을 펴내기도 했다.한국생활 5년차. 44년 전 고국을 떠나던 당시와 비교하면 한국은 천지개벽 수준의 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청년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든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물질적, 향락적 사치에 너무 치우치는 것 같다. 남을 너무 의식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본질, 더 나아가 오늘을 있게 만들어준 전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한다. 그는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게나'란 스승 류달영 박사의 좌우명을 빌려 젊은이들이 좀 더 자신을 돌아보고 패기를 가졌으면 한다"고 전했다.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한상기 박사는?▲ 1933년 8월 충남 청양군 출생▲ 1950~1953년 대전고▲ 1953~1957년 서울대 농과대 ▲ 1957~1959년 서울대 농학석사, 국내 최초 '잡초학' 연구▲ 1965~196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식물유전육종학 박사▲ 1971~1994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 구 근작물개량연구원▲ 198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영국 기네스과학공로상 수 상, 나이지리아 이키레읍 추장(농민의 왕)▲ 1984년 국제 구근작물학회 우수봉사상 수상(영국 세계농업 명사록에도 실림)▲ 1989~1994년 미국 코넬대학교 명예교수▲ 1991~1997년 국제 구근작물학회 회장 ▲ 1996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개교 50주년 ▲ 2006년 브라질 환경장관 공로상▲ 2009년 영국 생물학회 펠로상 수상▲ 1998~2010년 미국 조지아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과학도를 위한 통계학(1968, 집현사)' '신비의 땅 아프리카(1990, 교육과학사)' '아프리카 아프리카(1999, 생활성서)' 'Africa 아프리카 사람 아프리카 격언(2010, 풀과 별)' '아프리카, 광야에서(2014, 따뜻한손)' '500년간 잊혔던 뿌리와 정신 찾다(2016, 학자원)' '나는 나이고 싶다. 5권 시리즈(2018, 학자원)'가난하고 굶주린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작물 개량을 위해 연구의 길을 선택한 한상기(87)박사가 23년간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아프리카인들과 어울리는 한상기 박사. /한상기 박사 제공

2019-01-15 이윤희

[인터뷰… 공감]'마당발 시민기자' 약산초 문경숙 돌봄교사

#인천 방과후 보육교사협회 창립 주도퇴직금 회피 꼼수계약·일방해고 만연2009년 첫 회장직 맡아 처우개선 노력#20년 한곳 근무, 아이들 교육 자세는가르치는 게 아닌 함께 살아간다 생각제자 찾아와 "선생님과 같은 길" 뿌듯문경숙(54)씨가 경인일보 지면에 처음 소개된 건 인천 초등방과후보육교사협회 회장을 맡았던 2010년 2월 22일자였다. 당시 신문에는 협회 창립 1주년을 맞아서 길지 않은 인터뷰를 통해 초등학교 방과후 보육교사의 처우 개선과 복지향상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문씨의 이야기가 담겼다.이후에도 문화면과 사람들면을 통해 다양한 문씨의 활동이 단편적으로 소개됐다. 경찰인권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했다는 내용부터 지난해에는 인천의 섬들을 찾아 사진과 영상으로 담고 있는 '섬 사랑꾼'으로서의 활동과 지역의 오래된 건물과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활동 등이 지면에 담겼다.문씨의 명함 앞면에는 방송통신위원회 시청자미디어재단 인천센터 시청자 제작단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5개의 직함이 더 있으며, 뒷면에는 22개의 다른 직함이 적혀 있다.다양하게 전개한 활동에 대한 소회와 새해를 맞아 세운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지난 7일 인천 약산초등학교 방과후 돌봄 교실을 찾았다. 겨울 방학 기간 돌봄 교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오후 5시 이후였다.문씨는 약산초등학교 돌봄 교사로 20년째 근무하고 있다. 1999년 우리나라에 돌봄 교사 제도가 시작된 이후부터 쭉이다. 돌봄 교사라는 명칭도 수차례 바뀌었고, 최초 일당제에서 월급제, 연봉제까지 급여 체계도 변하였고, 처우도 파견직에서 1년 계약직, 무기 계약직으로 변화한 모든 과정을 몸소 겪었다. "2005년만 해도 1년 계약 직제였을 때였어요. 당시 1년을 채우면 퇴직금이 발생하기 때문에 3월 2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계약하는 등 꼼수가 만연할 때였죠. 1년 계약이다 보니 계약 후 일방적으로 해고되는 경우도 있었고요. 때문에, 5년 정도 준비해서 2009년 인천 초등방과후보육교사협회를 창립했습니다. 저는 2년 임기의 회장을 역임한 후 다른 분들이 이어서 협회를 운영해 주고 계시죠. 현재 전국 단위로 구성돼 인천지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닌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는 문씨는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한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수년 전 대학교에 갈 나이가 된 제자가 찾아와서 선생님과 같은 길을 가고 싶어서 사회복지학과에 간다고 했을 때 커다란 행복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돌봄 교사 외의 일들로 화제를 옮겼다. 문씨는 어떤 활동이든 기본 10년은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단다. 또한, 새롭게 시작하는 일로 인해 기존의 다른 일을 제대로 처리 못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해 왔다고 했다."주위의 우리 세대분들을 봤을 때, 인터넷을 빨리 접한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반대의 경우는 활동 반경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2004년 인천시에서 인터넷 신문을 시작할 때 시민기자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1년 후 최우수 활동가로 선정되어서 일본으로 연수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인천을 비롯해 수도권 지역의 지자체와 기관 등의 인터넷 매체와 블로그 기자단이 더욱 많아졌죠. 시작하는 매체들에선 기존에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제게 연락해왔고 새롭게 꾸려질 단원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활동 반경이 넓어졌습니다."#수 많은 취재활동 기억에 남는 일은요절 음악가 권혁주 마지막 공연 촬영영상 본 어머니가 '고맙다' 댓글 울컥#작업한 자료의 양과 활용 계획은영상 1천여개… 사진은 수십만장 찍어좋아서 한 일, 공적사용 대가없이 제공문씨는 KBS와 MBC, SBS의 시민 리포터도 거쳤다. 특히 SBS의 U포터로 활동할 때 국내에 서서히 동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단다. 2008년 문씨는 작은 디지털 카메라로 첫 동영상을 제작했다. "2008년 5월 말 바다의 날 행사 때 인천에서 독도함 공개 행사가 있었어요. 당시 신문에 나온 독도함 관련 기사를 통째로 외워서 1분30초 동안 배 주위를 돌면서 리포팅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지역의 문제점들을 찍어서 U포터에 올리는 작업을 했고, 그 중 전문 방송기자가 취재해 기사화된 것들도 다수 있습니다."문씨는 이같이 취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지금도 재미있다고 했다. "새로운 분들을 만나는 게 재미있어요. 저와 관계도 없는 남동산단에 가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고, 그들을 도와주는 분들을 알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졌어요. 아마도 이 교실에만 있었으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없었을 거예요. 또한 인천 초등방과후교사협회도 만들 생각을 못 했을 겁니다."문씨는 인천의 박물관 자원봉사를 하면서 매주 토요일 서울에선 궁궐 지킴이 활동을 펼쳤다. 이같은 활동을 하다가 2012년 인천시민 섬 조사단에 지원한 이후 섬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4년 8월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가 개관하면서 혼자 깨우쳤던 영상 기법을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센터에 편집실도 있고 해서 더욱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작업한 영상과 사진 작업들을 수치로 개량화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영상을 저장하는 홈페이지가 있는데, 어제 확인하니 1천37건이었어요. 사진은 섬에 한 번(1박2일) 들어갈 때마다 600컷 정도는 찍으니 수십만장은 될 거예요."기억에 남는 기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요절한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의 인천 공연(2016년 8월 부평아트센터)을 우연한 기회로 촬영하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 2개월도 안돼서 부산에서 공연을 앞두고 숨을 거두죠. 제 영상이 마지막 공연 영상으로 여겨졌어요. 의미 있을 이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연주자의 어머니께서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이렇게라도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요. 글을 보는 순간 울컥했죠. 그리고 송암 박두성 선생의 장녀 수채화가 박정희의 인터뷰도 영상에 담았는데 얼마 후 돌아가셨어요. 문갑도에서 뵈었던 마지막 남자 만신이었던 김현기 만신의 생전 마지막 모습도 담을 수 있었습니다."이러한 활동을 통해 문씨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기록이지만, 나중에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자료들은 유튜브에 올린 것도 있고 외장 저장소에 있는 것도 있다. 방송에서 공적으로 사용 요청하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문씨의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돌봄 교사로서의 활동은 정년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섬의 변화 모습과 주민의 삶을 기록하면서 섬에 사람들이 많이 찾게 하고 그와 함께 섬 환경과 문화의 보존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이야기할 것이고요,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도 평생 해 나갈 계획입니다."문씨에게 인천은 어떤 곳이냐고 물으니 "제주도는 태어난 곳이라면 인천은 저에게 굉장한 기회를 주고 키워준 곳"이라고 했다. 몰랐던 재능을 깨우쳐주고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이어서 "제주도에 있었어도 글 쓰는걸 좋아해 시민기자 활동은 했겠지만, 주변에 대한 소중함을 알려주고 관심을 갖게 해준 곳은 인천이다. 개항의 역사도 있고, 이와 같은 역사의 흔적을 고민 없이 새 것으로 대체하는 건 아쉽다" 고 덧붙였다.자비를 들여서 영상과 사진을 제작하고 사진과 글로 구성된 책자까지 만드는 작업을 10년 넘게 펼쳐나가고 있는 문씨와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학교를 나서니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나와서 운동장을 가로 질러 오는데 "사람의 감성은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삶도 본래의 사람 본성으로 돌아가죠. 디지털화되고 AI(인공지능)가 나오더라도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게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걸 알리기 위해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망을 통해 올려 누군가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고 한 문씨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문경숙 선생님은?제주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해 서울의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결혼 후 인천으로 이주해 초등학교 돌봄교사로 20년째 일하고 있다. SBS U포터, 궁궐지킴이, 경인방송 라디오의 시민리포터 등의 활동을 했다. 현재 '9회말 투아웃'을 쓴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학산문화원 문화PD, (사)황해섬네트워크 섬해설사, 해반문화사랑회 문화재지킴이 지도교사,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의 제작단 단장과 미디어스카우트봉사단 단장을 맡고 있으며, 못다한 공부를 위해 방송통신대에 재학 중(현재 휴학)이다.2019년 새해 벽두에 만난 문경숙씨는 "섬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줄어들고, 풍경들도 점점 바뀌고 있는 안타까움에 섬을 기록하는 작업을 7년째 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할 계획"이라면서 "인천의 오래된 건물이나 시민의 삶 등을 기록하는 작업들이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기록이자 역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1-08 김영준

[인터뷰… 공감]'32회 기독교문화대상 수상' 고된 민중 어루만지는 정세훈 시인

가난에 고교진학 포기, 30대까지 공장 근로자 생활 '직업병' 앓기도검정고시 준비중 '글쓰기 꿈' 되살려… 주변 이야기 닥치는대로 써거대조직 대기업 노조, 비정규직·일용직 등 소외된 이들 대변 안해공단마을 아이들 동시집 준비… 열악한 삶 공감하며 더불어 살아야'아프지 말라.'정세훈(63) 시인이 시를 쓴 지 30년을 맞아 지난달 2~15일 인천민예총 문화공간 해시에서 연 시화전의 제목이다. 그는 민예총 기부를 위한 기금 마련 차원에서 서울과 충남 홍성을 거쳐 인천에서 시화전을 개최했다. 사전작업으로 올 9월 발간한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에 쓴 시인의 말 첫 문장도 '아프지 말라'. 시인이자 노동자였던 그의 작품세계를 함축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정세훈 시인이 2016년 쓴 시집 '몸의 중심'의 표제작인 '몸의 중심' 전문이다.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정세훈 시인은 최근 이 작품으로 기독교계가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제32회 기독교문화대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내년 2월 28일 서울 대학로 한국기독교성령센터 황희자홀에서 열린다. 기독교문화대상 심사위원회는 심사평에서 "정세훈 시인은 시 '몸의 중심'에서 삶의 현장 속, 끝 모를 깊은 고통의 심연을 노동시어로 지상으로 퍼올렸다. 정세훈의 시는 가난하고 병든 노동민중을 문학세계로 환원해 예수 구원의 절대성을 추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왜 '아프지 말라'고 끊임없이 외칠까. 지난 24일 인천문화예술회관 근처 카페에서 만난 정세훈 시인은 답변에 앞서 최근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가 안타깝다는 말부터 꺼냈다. 정 시인은 "김용균 씨가 일하던 공간이 내가 청년 시절 일했던 공장의 공간과 닮았다"며 "노동문학은 2000년대 들어서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는데, 공단마을 같은 곳을 가보면 노동자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용균 씨를 보면 아픈 민중들에게 아프지 말라고 시를 통해 계속 보듬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온다"고 했다. 그는 시를 쓰기 시작한 30대 초반까지 온전히 노동자로 살았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에서 광부로 강제노역을 했던 아버지는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도 광부로 일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정세훈 시인의 두 형을 잃고 오랫동안 마음의 병을 앓았다. 아버지는 월급 대부분을 아내의 약으로 쓴 아편을 사는 데 썼다.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는 16살인 1972년부터 서울, 부산 등지를 돌며 조리보조, 옷가게 점원 등을 했다. 이후 정세훈 시인은 서울 중랑천에 있는 '에나멜 동선'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에 취직했다. 동선에 열처리를 해 도료로 피복을 입히는 작업이었는데, 고열을 유지하기 위해 썼던 보온재가 석면포와 석면가루였다는 것을 몸이 아프고 나서야 뒤늦게 알았다.30대 초반 인천 부평 청천동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인근 공단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정세훈 시인의 아내도 부평4공단에서 일한 여공이었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몸에서 진물이 나고 피부가 벗겨지는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무렵 교회에 나가면서 성경책을 접했다"며 "결정적으로는 32살 때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육사의 '광야'를 읽고, 잊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그때부터 노동자, 공단마을 같은 주변 이야기를 닥치는 대로 시로 썼다"고 말했다. 공장에서는 포장지에다 틈틈이 썼고, 퇴근해서는 늦은 밤까지 원고지에 써내려 갔다. 1988년에 비문학 잡지에 시가 실리기도 했고, 1989년에는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이 발표되기도 했다.그해 정세훈 시인은 주변의 도움으로 첫 시집인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을 냈다. 이듬해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두 번째 시집 '맑은 하늘을 보면'을 출간했다.노동자 시인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그에게 2000년대 초반 '직업병'이 엄습했다. 정세훈 시인은 "진폐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는데, 공장에서 썼던 석면이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2006년에는 합병증이 와서 흉부외과와 신경외과가 동원되는 대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이때 유고시집처럼 낸 것이 여섯 번째 시집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이다."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무리로 뿌려지지 말고/ 뿌려지어 뿌려지어/ 외롭지 않은/ 이 산천에 뿌려지거라// 내 주검이 이 산천에 뿌려지어/ 곰삭은 흙이 되면/ 이름 모를 초목들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달려오고/ 때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쓴 입맛을 다시며 고단하게도 하겠지"('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中, 2006)오랜 투병생활을 마친 시인은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참여활동을 펼쳤다. 계속해서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다독이고 있다. 그는 여덟 번째 시집 '몸의 중심'의 시인의 말에서 대기업 노조에 대해서도 "거대한 조직의 힘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는 자본 못지 않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심화되어가고 있는 중소기업, 하청, 비정규직, 특수고용, 일용직 등의 중·하류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않는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관련, 정세훈 시인은 "내가 영세한 공장에서만 일해봐서 비정규직처럼 소외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힘주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정세훈 시인은 내년에 공단마을 아이들을 소재로 한 동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제목 또한 '공단마을 아이들'로 지었고, 동명의 시도 수록될 예정이다. 정세훈 시인은 "산업화 때 공단마을에 살았던 아이들은 지금쯤 40대를 넘어 50대가 되었을 것이고, 4차 산업으로 이행돼 가는 지금도 공단마을에서 극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다"며 "소수의 공단마을 어린이들 정서를 담은 동시집이 한 권도 출간되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주변에서는 대다수 어린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며 동시집을 내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그는 "문학은 반드시 선제적으로 다수의 공감만을 덕목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며 "많은 어린이들이 동시집을 통해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소수의 또래들 삶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정세훈 시인은?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20여 년간 소규모 공장을 전전하며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1989년 '노동해방문학', 1990년 '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1989), '맑은 하늘을 보면'(1990), '저별을 버리지 말아야지'(1992),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1994),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1998),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2006), '부평 4공단 여공'(2012), '몸의 중심'(2016) 등이 있다. 또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2018),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2000), 포엠에세이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향기'(2002) 등을 간행했다. 인천작가회의 회장, 박영근시인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대표), 한국작가회의 이사, 제주 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한국민예총 이사장 대행, 소년희망센터건립추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인천민예총 이사장, 인천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공동준비위원장,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소년희망센터 운영위원, 위기청소년의좋은친구어게인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기독교계가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기독교문화대상 문학부문을 수상한 정세훈 시인이 지난 24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동시집을 통해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소수의 또래들 삶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2018-12-25 박경호

[인터뷰… 공감]'아트플랫폼 인천서점' 설계한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

#'인천서점' 구조가 참 독특한데사하라인들의 전통 주거지 모티브오롯이 책에 집중 안락한 흙집으로#고쳐쓰는 '재생건축' 결심 계기는유년 보낸 잠실동네 전면철거 상실감성급히 없애고 또 지으면 기억 잃는 듯인천 관련 책만을 모아 놓은 '인천 서점'이 인천시 중구 신포동 '인천아트플랫폼'에 둥지를 틀었다. 인천을 소재로 한, 인천 사람이 주인공인, 그야말로 '인천 책'의 집합소다. 서점의 테마도 특별하지만 서점 안 구조가 참 독특하다. 도톰한 흙집이 유리 방 안에 떡하니 자리 잡은 모양새다. 서점 벽면이 유리로 돼 있는 터라 바깥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마치 요새처럼 생긴 황토색 서가(書架) 안으로 쏙 들어가면 안락하기 그지없다. 흙과 나무 냄새, 책 냄새가 무뎌질 때쯤이면 어느새 서점의 분위기와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서점은 모로코의 아틀라스(Atlas) 지방에 사는 사하라인들의 전통 주거지 '아이트 벤 하두(Ait-Ben-Haddou)'의 크사르(Ksar·요새)를 모티브로 꾸며졌다. 아이트 벤 하두는 건조한 사막 위에 있는 주거지로, 마을 전체가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다.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이의중(39·사진) 건축재생공방 대표는 "서점의 4곳 벽면이 유리로 돼 있어 따가운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여름엔 사막처럼 더운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직사광선을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했다"고 했다. 그는 또 "햇빛이 서가 사이로 난 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빛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인지할 수 있는 것도 이곳만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이 대표는 이어 "책이 인테리어 장식용으로 쓰이는 북 카페 같은 모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며 "인천 서점이라는 특징을 살려 오롯이 서적과 콘텐츠에 집중해 안락한 흙집에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흙벽 사이로 뻗은 서가는 작은 골목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느 곳으로 들어와도 한데 만날 수 있는 작은 마을 같기도 하다. 이의중 대표는 '인천 책'만을 위한 첫 서점인 만큼 인천을 닮은 서점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서가 골목 사이사이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고 그러다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앉아서 독서 모임도 꾸릴 수 있도록 설계했다"며 "밖에서 보면 배타적인 것처럼 보여도 다양한 사람이 만나 섞여 사는 모습이 꼭 인천을 닮았다"고 말했다.이의중 대표는 오래된 건축물에 '숨'과 '이야기'를 불어넣는 명실공히 '건축 재생 전문가'다.오래된 건축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건축물에 가치를 부여해 살만한 곳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지나간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를 덧대는 것은 덤이다. 이의중 대표가 있는 아카이브 카페 '빙고(氷庫)'는 그의 건축철학이 담긴 첫 작품이다. 1920년에 지어진 얼음 창고를 리모델링해 1층은 카페, 2층은 건축공방 사무실로 꾸려 2015년 말 오픈했다. 카페 빙고는 최근 국책연구기관 AURI(건축도시공간연구소)로부터 '건축자산 활용 우수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이밖에 1965년에 지어진 산업시대 쪽방형 여관을 개조해 만든 '인천여관X루비살롱', 1930년대 일본식 벽돌창고를 재생한 인천영상위원회 커뮤니티 공간 역시 그의 작품이다.이 대표는 "근대 건축 양식은 아직 '이렇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애경사처럼 필요 없다고 없애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건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며 "빙고 카페 역시 최근 문을 닫고 다시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지역의 작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말했다.이 대표가 이렇게 '고쳐 쓰는 건축'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유년 시절부터였다. 그는 서울 잠실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살던 잠실 주공 저층 아파트는 전면 철거되면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재건축이 되면서 부동산 가치가 10배 이상 올라 부모님 세대야 좋았을지 몰라도, 그에겐 큰 '상실감'을 느낀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친구들과 유년시절을 보낸 놀이터, 떡볶이집, 마을 공동체 모두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려 마치 기억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안정적 직장 버리고 인천 온 이유오래된 자산 많고 역사적 배경 풍부군집 아닌 중·동구 퍼져 분포 매력적#바람직한 '원도심 재생정책'이란관주도 진행, 형식적 시민 소통 그쳐기한없이 세대 이어가며 가치부여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의중 대표는 '재생 건축'이라는 화두를 잡고 2004년 서울의 한 디자인 사무실에 입사했다. 그러나 그는 건축물의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가 확실해야 했던 당시 분위기에 절망하고 결국 1년 만에 사무실을 나와 2006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그는 일본 유학 시절 도시재생의 대표 도시인 오카야마 현 쿠라시키(Kurashiki)에서 일본의 재생공방들과 함께 일했다. 도시 미관지구와 전통보전지구의 200~300년 된 건축물을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대표는 "1천 년 이상 된 건축물이 모여있는 일본의 오래된 마을을 답사하며, 건축물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쓰지 않는다면 '박제된 마을'에 그쳐 숨이 끊긴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건축물은 잘 쓰는 게 잘 지키는 것"이라는 철학을 안고 2012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2012년은 한국이 '도시재생'이라는 정책을 막 도입했을 시기였다. 그 덕에 이 대표도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국토부 도시활력증진지역 개발사업 담당 연구원과 AURI(건축도시공간연구소) 국토부 도시재생 선도사업 담당 연구원으로 2년 남짓 일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재생 정책은 여전히 재개발 쪽에 치중할 때였다.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와 연구원 시절 답사했던 현장 중 가장 흥미로웠던 도시인 '인천'에 뿌리를 박기로 했다. 2015년 카페 '빙고'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이 대표는 "인천은 오래된 건축 자산이 많고 역사적 이야기가 많은데도 가치가 저평가돼 있다"며 "다른 지역의 경우 오래된 건축물이 한데 군집해 있는 것에 반해 인천은 중·동구 지역으로 분포돼 있단 점도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그는 재생건축을 하는 건축가로서 최근 인천시에서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원도심 도시재생' 정책에 대한 소신도 이야기했다.이 대표는 "내항재개발, 개항창조도시 사업을 앞두고 최근 에코누리호를 타고 시민들과 내항을 둘러봤는데 물고기가 살만큼 물이 깨끗하다"며 "인천 시민들이 드디어 바다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의중 대표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의미 있는 사업이 너무 관 주도로 진행되고 시민과의 소통이 형식에 그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다"며 "시민들이 직접 들어가서 걸어보고 상상하고 제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개항창조도시의 거점 사업인 '상상플랫폼'을 대기업이 운영하게 되는 방식이나 제물포구락부에서 술을 파는 것 역시 충분히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먼저 아이디어를 일방적으로 내세운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이 대표는 '도시재생' 사업의 기한을 정해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세대가 가치를 부여하면 그다음 세대가 고민해 다시 만들어나가는 것이 '도시'라는 게 그의 철학이다.이의중 대표는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가치를 후대에 억압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보전할 수 있는 부분은 잘 갖춰놓고 다음 세대가 또 이야기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야 한다"며 "앞으로도 인천에서 다양한 건축공방을 하는 사람과 후배들이 모여 따로, 또는 같이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이의중 대표의 경력과 대표작품▲ 2007~ 2009 일본(시라가와코)/중국(왕가대원) UNESCO세계문화유산 조사단(문부과학성)▲ 2009~ 2012 쿠라시키 건축공방 나라무라 설계실(건축문화재 복원 및 건축재생)▲ 2012~ 2013 LH 한국토지주택공사(국토부 도시활력증진지역 개발사업 담당 연구원)▲ 2013~ 2014 AURI 건축도시공간연구소(국토부 도시재생 선도사업 담당 연구원)▲ 2015~ 현 건축재생공방 대표(건축자산을 활용한 건축재생)- 인천 아카이브 카페 빙고(근대 얼음창고 1920년), 2015년- 인천 송학동 일본주택(마치야형태의 목조건물 1936년), 2016년- 인천여관x루비살롱(산업시대 쪽방형 여관 1965년), 2017년- 인천시 영상위원회 커뮤니티공간(일본식 근대벽돌창고 1930년대), 2017년- 공유공간 52치(서울시 청년허브, 구 질병관리본부 공간활용 1960년대), 2017년- BE IN HOUSE(서울시 금천문화재단 빈집프로젝트 1호 1980년대), 2017년-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협회 회의청 설계(청나라 목조건물 사무동 1887년), 2018년- 인천서점(인천아트플랫폼), 2018년- 인천 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구 미츠이물산 인천출장소 1920년대), 2018년공사 후 얼음창고에서 카페 '빙고'로 다시 태어난 건물 내외부 모습. (왼쪽부터 공사전, 공사후)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 제공공사 후 얼음창고에서 카페 '빙고'로 다시 태어난 건물 내외부 모습. (왼쪽부터 공사전, 공사후)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 제공

2018-12-18 윤설아

[인터뷰… 공감]'화교 출신 父子 한의사' 중화한의원 아들 강서원씨

'수원사람' 외치는 부친 뜻 이어 지역사회 역할·해외 의료봉사까지 팔걷어도수체조시연 등 강의도 남달라… 피부미용 시술·추나요법 더해 '治本' 추구진찰실서 틈틈이 운동·미술활동… 환자에 자유로움·건강함 전해지길 바라4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키며 지역 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 화교 출신 한의사가 있다. 그의 아들도 옆방에서 환자들을 기다리며 아버지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수원 북수동에서 중화한의원을 운영하는 부자(父子) 한의사 강학천(64)씨와 강서원(36)씨가 그 주인공이다. 한의원에서 만난 서원씨는 한의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노란색 한의사 가운에 패션 감각을 숨겼지만, 청셔츠에 청타이를 더한 파격적인 조합에 허리 벨트는 자메이카 레게 영웅 밥 말리의 녹·황·적색 줄무늬였다.서원씨는 "아버지와 함께 채워주고 비워주고, 다시 메워주면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전통 한의학과 젊은 한의학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지역민들의 아픈 곳뿐 아니라 치인치심(治人治心)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이방인 한의사로 살아가기강씨 부자는 모두 대만 국적을 지닌 화교다.학천씨의 아버지 강여천(87)옹의 고향은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다. 강옹은 10대 시절인 1940년대 부산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경북 대구와 전남 광주를 거쳐 강옹은 수원에 터를 잡았다. 강씨 3대가 수원 시민으로 살아온 세월만 어언 70년이다.강옹은 현재 강씨 부자의 한의원 자리에서 '동화원'이라는 중식당을 운영하다 미국으로 역이민을 떠났다. 당시 한국과 중국 수교가 이뤄지지 않아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가족들과 떨어져 수원에 남은 학천씨는 원광대 한의대를 졸업한 직후인 1980년 5월 지금의 자리에서 한의원을 개원했다. 30년 뒤 아들 서원씨도 대구한의대를 졸업하고 아버지 옆 진찰실을 꿰찼다.'피터팬 증후군'(어른아이)이 의심되는 서원씨가 아버지의 한의원에 더해졌지만, 21세기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중화한의원은 홈페이지 하나 없다. 마음과 몸이 아파 찾아온 환자들에게 시간을 쏟고 진심을 다하면 그만이라는 부자의 신념 때문이다. 서원씨는 "토요일 진료 때는 환자 세 분이 오셨는데, 3시간 동안 같이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다"며 "아버지께서 40년 가까이 일궈오신 한의원에서 진실과 진심을 팔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버지의 수원, 아들의 수원수원은 강씨 부자의 고향이다. 수원에서 나고 자란 데다 한 곳에서 38년째 한의원을 운영하다 보니 애착이 남다르다는 것.학천씨는 "한의원 개원 초기만 해도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았지만,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나는 '수원 사람'"이라며 "수원화교중정소학교장을 맡았던 것도 다 내 고향 수원을 위한 봉사였다"고 말했다.한의원 자리에서 태어난 서원씨도 '수원 사랑'을 강조했다. 최근에는 지역의 자발적 민간 봉사단체인 소나무회에 가입해 지역민들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지역 사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일들을 찾아다닌다.서원씨는 "화교 출신은 학연과 지연이 사실상 없어 어려움이 많아 한국 학교로 가는 친구들도 많지만, 내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초·중·고교 모두 화교 학교를 나왔다"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역민들에게 재능기부 형태로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고 있다"고 귀띔했다.#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얻은 인생은 '덤'강씨 부자의 한의원은 수원 구도심 한 편을 올곧게 지켰다. 덕분에 단골 손님들도 많아지고 구안와사(얼굴마비) 치료를 받으러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찾고 있다.학천씨는 '수원 사람'으로 살아가며 받은 인생의 덤을 지역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수원시 한의사협회 회장과 경기도한의사협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수원경실련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아버지와 함께 한의원을 지키는 서원씨는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봉사에도 적용했다. 수원 팔달구보건소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한의학 강의를 하며 직접 도수체조를 시연하고, 보건소 신고 하에 침술 치료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한의사들이 보건소 강의 봉사를 나와 화면을 띄워놓고 일방 강의를 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후문이다.# 국내외를 막론한 '덤' 나누기아버지 한의사가 한의원을 지키는 동안 아들 한의사는 최근 두 차례 해외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서원씨는 지난달 3일부터 닷새간 캄보디아 시엠립주 '수원마을'에서 현지 주민들을 돌봤다. 의료 봉사는 개발도상국 개발을 돕고자 추진한 ODA(공적개발원조)사업의 일환으로 수원시가 캄보디아에 건립한 수원중·고교 개교 기념일 행사와 맞물려 진행됐다.당시 행사에는 염태영 수원시장, 조명자 수원시의회 의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고, 서원씨는 수원시한의사협회 팔달구 수석반장 자격으로 침구와 뜸, 부항 등 장비를 챙겨 함께 했다.캄보디아 봉사보다 앞선 지난 7월 중순에는 필리핀 클락에서 경기도청 주관 5개 의약단체(치과·의사·간호사·한의사·약사협회) 소속으로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서원씨는 "아버지와 제 고향 수원, 한국에서 얻은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덤"이라며 "지역민들뿐 아니라 동남아 등 해외 오지의 현지 아이들과 어르신들에게 내가 가진 기술을 사용해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전통 한의학과 젊은 한의학의 콜라보아버지의 전통 한의학에 '젊은' 한의학을 더해 한의원을 찾는 이들의 질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치본'(治本)이 서원씨의 목표다.전통 한의학은 침, 뜸, 부항, 약으로 지칭할 수 있는데, 서원씨는 여기에 더해 약침과 매선(녹는 실로 처진 살을 끌어올리는 시술) 등 피부미용 시술과 추나요법을 더해 30대 한의사의 젊음을 더하겠다는 것.삭발 수준의 심히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독특한 외모로 비쳐 '어르신' 환자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지만, 건강한 기운을 전달해드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서원씨의 진찰실에는 보통 한의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턱걸이 철봉과 미술 도구도 있다. 환자들이 뜸한 오후 5시 30분부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턱걸이와 팔굽혀펴기를 각 100~150개씩 하거나 그림을 그리다 환자를 맞이하곤 한다.서원씨는 "운동을 하다가 진찰을 하더라도 자유로움과 건강한 느낌을 몸이 불편한 환자분들께 그대로 전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나이를 먹더라도 지금처럼 언제나 자유롭게 내가 받은 것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전했다.글/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한의사 강서원씨는?▲ 1982년 수원 출생▲ 2007년 대구한의대 한의학과 졸업▲ 2007년 천진중의약대학제일부속의원 침구과 보통 내과 수료▲ 2011년 경희대 한의학석사 취득▲ 2014년 경희대 한의학박사 취득▲ 2014년~ 현재 수원시한의사협회 팔달구 수석반장▲ 2014년~ 현재 경기도한의사협회 국제이사▲ 2014년~ 현재 대한한의사협회 중앙대의원수원 북수동에서 중화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 강서원(36)씨는 "아버지께서 40년 가까이 일궈오신 한의원에서 진실과 진심을 팔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8-12-04 손성배

[인터뷰… 공감]'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 국제대회' 지휘한 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

경기도가 이재명 도지사 체제인 민선 7기에 들어서면서 급부상한 인물이 있다. 이화영 도 평화부지사다. 민선 7기가 시작된지 이제 4개월여. 짧은 기간 여러 국면에서 그는 이슈의 중심에 섰다. 이 지사가 취임 후 자신의 파트너로 일할 인사를 처음 지명했을 때, '탈당론'까지 대두될 정도로 당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던 이 지사가 이해찬 당 대표 체제에 돌입하며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았을 때, 4·27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과의 교류 협력에 대한 물꼬가 다시금 트였을 때 번번이 그가 조명됐다. 남북 문제에 정통한, '이재명의 파트너'가 된 '이해찬의 측근'. 그를 가리킬 수 있는 수식어는 이것 뿐일까.지난 26일 오후 이 부지사를 도청 집무실에서 만났다. 지방정부에서 주최한 행사에 처음으로 북측 인사들이 찾아 이목을 집중시켰던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가 끝난지 막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지사에게 각종 악재가 집중돼 도 안팎이 혼란스러웠던 때이기도 했다. 30분 남짓 길지 않은 인터뷰를 통해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 역시 속도감 있게 막힘 없이 답했다.# 노동 운동 매진하던 청년, 남북 평화 선두에 서다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던 80년대, 성균관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그에게 1988년은 생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국회에 노동위원회가 설치됐는데 보좌진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당시 노동위에는 노무현·이해찬·이상수 의원이 있었다. 훗날 대통령으로, 국무총리로, 노동부 장관으로 일했던 이들 틈새에서 20대 청년은 노동관계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정치적 행보를 함께해 온 이해찬 대표와도 이때 연이 닿았다. "당시 노무현 의원실에선 이호철 전 수석, 이해찬 의원실에선 유시민 전 장관, 이상수 의원실에선 제가 역할을 나눠서 공동 보좌진처럼 일을 했다"고 회고한 그는 2004년 서울중랑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남북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여의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면서 그는 스스로의 역할을 고민했다. "대한민국의 여러 정치·사회적 현안은 보수 대 진보 구도에서 빚어지는데 그 가운데 분단으로 벌어진 모순이 끼어있는 게 본질적 문제라고 봤다. 결국 우리나라가 더 좋은 나라가 되려면 남과 북이 서로 화해, 협력해서 최소한 왕래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만 이런 문제들도 해소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 그는 국회의원 당선 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했다.북한 땅도 이때 처음 밟았다. 2005년 남북청년정당인 대회를 통해서였다. 여야의 젊은 정치인들이 북측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소속 청년 정치인들을 만났다. 당시 남측대표단 수석단장을 이 부지사가 맡았었다.그가 지금 남북 평화 협력의 선두에 서게 된 것도 이 때의 만남이 단초가 된 것이다. 특히 2006년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을 당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단독으로 방북, 노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북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듬해인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당시 북측 인사들과의 교류는 10년이 지난 현재 새로운 남북관계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이해찬의 측근, 이재명의 파트너그에게 이해찬 당 대표의 측근인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측근이라는 표현도 맞을 것"이라고 답했다."1988년에 처음 뵙고 30년 동안 어려운 시기, 이 대표가 국회의원을 하지 않았던 원외 시절에도 함께 일했으니까. 말하자면 '보좌'진, 측근이라면 측근일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이재명 지사의 당내 입지가 이해찬 대표 체제 들어 한결 안정된 데 그의 역할이 있었다는 세간의 시선에는 선을 그었다. 이 부지사는 "그건 아주 우연"이라며 "오히려 제가 선거기간 이 지사 캠프에서 일을 도왔을 때는 이해찬 대표가 당 대표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을 못했었을 때다. 이 대표 역시 제가 캠프에서 일을 도왔던 것을 몰랐다. 이 대표가 저를 이재명 지사 쪽에 보냈다. 이런건 정말 아니다.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밝혔다.이재명 지사와는 과거 노동·사회운동으로 간접적인 연을 맺었다. "저도 성남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사회운동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인권변호사였다.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던 건 아니지만 지난해 대선 경선에 도전했을 때 남북협력 분야에서 조언을 해드린 적이 있다"고 이 지사와의 연을 설명한 그는 "판단이 신속, 정확하고 명쾌한 분"이라고 이 지사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저는 국회의원을 했고 오랫동안 정당 생활을 했다보니 소위 '여의도 정치'에 네트워크가 있다고 한다면 이 지사는 지역 운동, 행정에 주력했고 여의도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제가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며 "이 지사가 남북 교류협력 방안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해줘서 편하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경기도 남북교류협력 '희망'그가 주도한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는 지난 7월 민선 7기 경기도가 시작된 이래 가장 큰 이벤트였다. 이를 진두지휘했던 이 부지사는 "북측 대표단이 방남한 것 자체가 큰 성과"라고 평했다. "한편에선 아태 지역에서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던 지역들이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고 배상을 받아내자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는 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고 설명한 그는 "내년에는 평양에서, 그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에서 대회를 개최하려고 한다. DMZ 평화포럼도 준비 중인데 한국의 다보스포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부분 정부의 통제 속 엇박자를 냈던 점은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이 부지사는 "북측 인사들과는 '남한에 가면 치맥을 실컷 하자'는 얘기까지 서슴없이 나왔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과잉 통제가 이뤄지다 보니까,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춰서 개선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북측과 협력을 약속한 부분을 착실히 준비해 성과를 내는 게 그의 내년 목표다. 남북교류 협력 방안을 묻자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DMZ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관광·문화·생태 콘텐츠도 그 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철도 연결도 합의가 됐는데 아주 큰 의미를 갖는다. 황해도 시범농장 사업 등도 우리 기업 진출에 유리한 교두보가 될 것이고, 한강하구 공동조사도 내년 4월부터 시행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31개 시·군과 함께 하겠다는 점도 덧붙였다.인터뷰 말미 그는 '희망'을 말했다. "사실 전에 북에 다녀와서 발표했을 때도 많은 분들이 '설마'라고 했습니다. 최악에는 안 될 수도 있지만 희망을 가지면 일이 됩니다. 한 번에 다 완성하려고 하기 전에, 작은 규모라도 뭔가 먼저 시작해보는 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의 '희망'에는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기차로 서울에서 베를린을 가는, 평화로운 대한민국이 있다.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화영 평화부지사는?▲1963년 강원 동해 출생▲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서울중랑갑)▲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전략 담당)▲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민주당 남북교류협력특별위원장, 동북아평화위원장▲19대 대선 문재인 대통령 선거대책위 국정자문단 공동단장, 동북아평화경제위 공동위원장▲(사)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 동북아평화연대 기획위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소장·노무현) 연구위원▲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가 "내년에는 평양에서, 그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에서 대회를 개최하려 한다며 DMZ 평화포럼도 준비 중인데 한국의 다보스포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8-11-27 강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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