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6·13선거 필승 공약'

"문재인 정부가 '심장'이라면, 지방정부는 '혈관'입니다. 혈관 하나하나 막힘없이 피를 전달할 수 있어야 성공적인 국정운영도 가능합니다."김태년(성남수정)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6월 지방선거 승리의 당위성을 이같이 피력했다. 민주정부 3기의 성공을 뒷받침하려면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지방정부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1년 전 그가 정책위의장을 맡을 당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문재인 정부는 민주당 정부다. 민주당이 책임을 지고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이를 지키기 위한 그의 지난 1년 행보는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불철주야(不撤晝夜)'란 표현이 딱 맞다. 그는 당·정·청의 협력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는데 주력했고, 국민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김 정책위의장의 올 상반기 목표는 더없이 뚜렷하다. 집권여당의 정책 사령관으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불러온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대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6·13 지방선거의 필승 전략을 세워 당과 정부의 성공을 견인하겠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경기도는 물론 전국 '필승 공약'을 만드는데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를 만나 구체적인 전략을 들어봤다.-경기도지사 탈환을 위한 정책 공약은."현실적으로 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교통문제, 도시재생 활성화, 4차산업혁명 클러스터 조성, 상수원 보호 문제 등 모두 중요한 과제다. 서울의 높은 집값으로 서울 인구는 급속히 줄어들고 노령화되는 반면, 경기도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다 보니 주거문제와 교통문제가 도민에게 가장 민감한 정책일 수밖에 없다. 특히 교통의 경우,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 중에 굵직한 수도권 교통정책만 5개에 달한다. 구체적으로는 GTX부터 광역버스 신설, 지하철, 광역교통청 설치까지 다양하다. 교통 SOC 확충은 주민의 접근성과 이동할 권리를 증진 시키는 사회 인프라다. 교통을 토목의 관점이 아닌 복지의 관점에서 살펴보며 교통 공약을 준비하겠다. 더구나 서울과 경기도는 모든 정책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교통만 해도 서울만의 교통정책, 경기도나 인천만의 교통정책으로 완전히 분절시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 역할 조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그런 시각에서 큰 그림의 공약을 내놓고 당에서 견인해 나갈 계획이다."-전국 동시지방선거의 승리를 견인할 정책 공약은."전국 17개 광역단체장을 뽑는 지방선거의 민주당 목표에 대해 많은 분들이 '9+a'를 얘기한다. 당은 그 이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1인당 GDP는 3만 달러 시대를 맞고 있지만, 자살률과 삶의 질 순위는 OECD 국가 중 꼴찌 또는 최하위에 속한다. 경제 규모에 걸맞게 행복지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과감한 복지정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정책이다. 일자리는 비용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이번 지방선거 공약도 '사람에 대한 투자', '일자리 확충을 위한 지방정부 건설'을 목표로 세울 것이다. 단순히 지방정부에서 공무원 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국민 안전이나 건강, 환경, 복지에 긴요한 공공부문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또 규제를 혁신하고 중소기업 체질을 강화해 민간부문의 일자리 창출도 유도할 것이다. 아울러 '지방분권강화'라는 큰 틀에서 중앙정부가 내놓는 사업만 대리해 수행하는 지방정부가 아니라, 예산과 인력의 자율성을 가지고 주민복리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내놓을 것이다."-남북정상회담의 평가와 앞으로의 과제는."지난 27일 하루의 전체를 국민들, 전 세계인이 함께 봤다. 이미 국민들은 마음 속에 평가를 하셨다고 본다. 지난 11년간 멈췄던 남북관계,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이 오히려 50년 전까지 되돌려놨던 평화의 시계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본다.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까지 미국, 중국과 해왔던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5월은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여는 한 달이 될 것이다. 매우 흥분되고 설렌다. 그러나 침착하게 필요한 일들을 잘해 나갈 것이다. 특히 경제협력 분야에 있어서 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기금부터 시작해 법률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경제뿐 아니라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교류협력이 활발하게 진행되려면 범정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남북이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맺었을 때, 법률적인 장치들도 국회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 이제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통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통일이라는 첩첩산중에서 이제 산 하나 넘었을 뿐이다. 회담 이후 북한이 즉각적으로 표준시를 우리와 일치시켰듯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속도를 조절하면서도 미·중·일·러와도 긴밀히 대화하고 협력을 얻어내는 섬세한 외교가 필요하다. 5월로 예정된 북미대화도 북미만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그 사이에 중요한 내용을 조율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협상자가 될 것이다."-평화시대 경기북부 접경지역 발전을 위한 대책과 계획은."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추진할 경제협력 청사진은 이미 제시했다. 이른바 'H'구상으로 서해안 벨트·동해안 벨트·DMZ벨트로 나뉜다. 서해안 벨트는 수도권에서 시작해 개성공단, 평양, 신의주까지 잇는 구상이다. 남한의 첨단기술과 북한의 노동력을 합치면 우리 제조업의 경쟁력은 커질 것이고, 철도노선이 이어진다면 물류 경쟁력도 큰 도약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판문점 선언에도 철도 연결이 담겼다.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되고 가시화될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그 서해안 벨트 중심에 경기북부가 있다. 북한과 경제협력을 하려면 배후지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 물류 흐름이 활발해 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대규모 물류센터나 부품공장들이 접경지역에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남북접경지역을 통일경제특구로 지정해서 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국회도 남북경제협력을 진전시킬 수 있는 특위를 설치하고 적극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글/김연태기자 kyt@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jongtaek@kyeongin.com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한반도의 평화'를 불러온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대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6·13 지방선거의 필승 전략을 세워 당과 정부의 성공을 견인하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있다. 사진/김종택기자jongtaek@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jongtaek@kyeongin.com

2018-05-01 김연태

[인터뷰… 공감]연극 '사랑해요, 당신' 재공연 나서는 62년차 배우 이순재

고령화사회 문제 치매 주제, 어려운 병일수록 배우자 역할 중요 메시지희로애락 담아낼 수 있는 노인테마 소외카드 아냐, 시트콤 만들라 말해이길여 총장 신뢰해 가천대서 연기 지도, 학생들에 발성연습 가장 강조연기력으로 정평 난 배우들이 전국의 관객을 눈물짓게 만든 연극 '사랑해요, 당신'이 재공연에 돌입한다. 지난해 이맘때 서울 동숭동 예그린씨어터 무대에서 첫 선을 보인 '사랑해요, 당신'은 이어서 대구와 안성에서 공연됐으며, 연말 인천 부평아트센터 공연까지 전체 60여회 공연 중 40여회에서 전석 매진되는 등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큰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오는 27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펼쳐진다. 아내이자 엄마로 40년 넘게 살아온 한 여성에게 치매 증상이 찾아오며 변화를 겪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에 대다수 관객은 눈물을 흘리며 공감했다. 이순재와 정영숙, 장용과 오미연의 자연스러우면서도 호소력 짙은 연기와 함께 평범한 가정에 불어닥친 당혹스런 상황이 만들어낸 안타까움에 관객은 공연과 어우러졌다.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711만명 가운데 10%가 넘는 72만명이 치매 환자다. 누구나 치매로 고통받는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연극을 제작한 극단 사조(대표·유승봉)는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천대 길병원 의료진의 자문을 얻어 극적 완성도를 높이기도 했다. 다시 70대 중반의 남편 '한상우'로 분해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무대에 오를 배우 이순재와 최근 서울 강남구의 SG연기아카데미에서 인터뷰했다.이달 초 개봉한 영화 '덕구'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영화의 주연 배우로서 연일 매스컴의 취재 요청을 받고 있는 이순재는 연극 '사랑해요, 당신'과 함께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의 전국 순회공연도 준비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그는 "노인 역할은 아무래도 인생의 끝자락이다. 젊은 시절 화려한 인생을 살았을 노인 중 현재 유복한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인생을 정리하는 과정에 놓인 노인들은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을 가져야 하지만, 홀몸노인 등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못하면서 문제를 안고 있는 부분들이 많다"면서 "영화 '덕구'도 그렇고 이번 연극 '사랑해요, 당신'은 우리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생기는 노인 문제와 함께 노인의 고독감 등 매우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와 같은 작품에 출연하게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자연스레 화제는 연극 '사랑해요, 당신'으로 옮겨갔다."공연을 하다보면 관객의 반응을 읽을 수 있어요. 지난해 공연 후 '관객들이 동의하고 있고 호감과 충족감을 안고 공연장을 나서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품에서 강조하는 게 '나이 들면 부부뿐'이라는 건데, 공연장을 찾은 한 부부의 영감님이 공연장을 나서면서 부인에게 '앞으로 나 잘할게'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실적 주제에 관객이 공감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재공연에 대한 기대와 함께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느꼈습니다."치매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병적 조건이다. 사회적으로 치매에 대한 관심이 높고 당국에서도 많은 연구를 한다. 작품에선 일상화된 병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요건은 가장 가까운 부부임을 강조한다. "작품은 후반부로 갈수록 절절한 사연들이 나타납니다. 비록 친족이지만 아들이라는 제3자가 나오는데, 아들은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자고 주장하죠. 하지만 아버지는 '내 아내를 내가 아니면 누가 책임지나'라고 말하며 아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아버지의 반대는 어려운 병일수록 같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챙길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가천대 길병원과 함께하는 연극'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에서 병원 측은 자문과 함께 제작 후원을 했다.또한 노령의 부부 역을 제외한 젊은이들 역할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학생들이 맡았다. 작품의 연출은 이재성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교수가 했다. 이순재는 2012년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설립 때 석좌교수로 부임했으며 현재 매년 4학년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2008년과 2009년 가천대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님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죠. 2012년 연기예술학과 설립 전에 자문을 구하셨고, 교수직 요청도 있었습니다. 사실 총장님의 경우 이전부터 여·야를 떠나 정치권에서도 욕심을 냈던 분이셨죠. 하지만 선을 확실히 긋고 학교와 병원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분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요청에 응했습니다. 교육은 뒷전이고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여타 학교 재단의 오너들을 본 적이 있는데, 오너의 열정 여부에 따라 학교가 확 달라지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습니다."배우 이순재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화술'이다."제게 주어진 수업시수가 1주일에 4시간인데,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학생들과 만나서 공연 준비를 하고 학기 말에 작품을 무대에 올리죠. 기성 극단원들도 2~3개월은 연습해서 무대에 올리는 형태고 우리 학생들도 그 정도 기간은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화술'입니다. 최근 연기 현장에선 언어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연출자가 언어에 대한 정확한 발성을 지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죠. 소통만 하면 된다는 건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정확한 발성이 이뤄지지 않으면 특히 고전 등 문학성과 철학성이 함유된 원작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습니다. 배우는 가장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자기 나라 표준어를 구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체 모를 언어들이 떠도는데 이런 말들은 조만간 소멸할 것이고 표준어는 도도하게 남을 것입니다. 배우는 어떤 지역이나 계층이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발성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학생 때 다져놓으면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자신감 있게 연기할 수 있는 재산으로 남을 것이고요."대학 시절 연기가 좋아서 연기를 시작한 이순재의 연기 인생은 어느덧 62년 차로 접어들었다. 한 포털의 기준으로 이순재는 영화 129편, TV 프로그램 106편, 공연 59편에 출연했다."오래 연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수단(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죠(웃음). 딴따라로 멸시받는 때였지만, 대학생 때의 맑고 순수한 눈에 연기는 확실한 예술 창작으로 여겨졌습니다. 내부보다는 주로 외국 명인들의 활동과 성과를 봤을 때 확실한 예술이었습니다. 배고프고 멸시를 당해도 해볼 만한 작업이었죠. 예술 창조 작업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좋아서 했고, 당대 인정 못 받아도 후대에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듯이 연기를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건 예술적 완성으로 관객에게 평가받고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방송 관계자들에게 "늙은이들 갖고 시트콤을 만들어봐라"고 제안한다는 이순재는 "젊은이는 다소 단편적이지만, 노인의 경우 극적이고 복합적"이라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얼마든지 담아낼 수 있는 노인 테마는 흥행에 소외된 카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돌아봤을 때 반응도 괜찮았다"고 말했다./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배우 이순재는?193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1954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며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1971년 제1대 연기자협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최우수연기상 수상을 시작으로 10여차례에 걸쳐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현재 ▲가천대학교 예술대학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SG연기아카데미 원장 ▲제3기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촉위원으로 있으면서 연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연기 인생 62년의 대배우 이순재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기를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건 예술적 완성으로 관객에게 평가받고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세웠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연극 '사랑해요, 당신' 공연 모습. /경인일보DB

2018-04-24 김영준

[인터뷰… 공감]4·16 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 장동원 팀장

세월호 참사 당시 선원 구한 해경, 승객은 구조 안해… 생존자 스스로 탈출3개월동안 배몰며 침몰 해역 찾아, 갈때마다 '접근금지' 경고방송 운항 막아직무유기 모자라 국정원·검·경 동원 유족사찰… 책임있는 사람들 죄 물어야친구들 잃은 딸 애진, 구급대원 길 선택… 아내는 가족연극단 참여 순회공연세월호 참사 이후 2년간 가족협의회 회의 석상에서 발언하지 않은 남자가 있다. 어둠의 바다에서 생환한 아이를 뒀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자식을 둔 아버지여서 미안하다는 그에게 먼저 곁을 내준 건, 다름 아닌 자식을 보낸 부모들이었다.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열린 정부 합동 영결·추도식 준비로 한창이던 지난 13일, 안산 화랑유원지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장동원(48) 4·16 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 팀장을 만났다. 장씨는 단원고 생존자 장애진(여·21·당시 2학년 1반)씨의 아버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애진 아빠' 대신, 가족협의회 진상규명팀장으로 소개했다."딸, 구명조끼 꼭 챙겨입고 비상구가 어딨는지 잘 확인해야 해." 장씨의 딸과 친구들이 세월호에 오르기 전날, 장씨는 딸에게 평소 하지 않던 잔소리를 했다. 이 한마디가 부녀의 생이별을 막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장씨는 출근을 했다. 일과시간이 1시간 남짓 지났을까. 울부짖는 딸의 전화를 받은 장씨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빠, 컨테이너가 떠내려가. 우리가 뉴스에 나와. 진도에서 배가 침몰하고 있대. 배에 물이 들어온대. 방송에선 계속 가만히 있으라고만 해."장씨는 인근 공장에 다니는 아내에게 달려가 아내를 차에 태우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진도 팽목항으로 달렸다. 아내는 장씨에게 언론에 전원 구조됐다는 보도가 나왔다고 말했다. 장씨는 믿지 않았다. 곧장 자가용을 몰아 진도 팽목항으로 내달렸다. 안산과 진도를 잇는 고속도로에는 비상등을 켜고 갓길을 내달리는 단원고 학부모들의 승용차 행렬이 이어졌다.애진씨는 SP-1(세월호 다인실 격실)에서 같은 반 친구 7명과 함께 구명조끼를 입고 해경 구조를 기다리다가 격실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차면서 배가 기울어 천장으로 올라간 출입문으로 솟구쳐 나왔다. 난간을 잡고 서 있다가 스스로 바다에 뛰어내린 뒤 건져졌다. 참사 당시 단원고 생존 학생들은 세월호에서 구조된 게 아니라 자력으로 탈출했다고 입을 모은다. 장씨의 딸 애진씨도 마찬가지였다.대통령이 관저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국가안보실(NSC)이 무기력하게 세월호 침몰을 지켜보던 그 시간. 장씨는 무너진 정부 행정 시스템의 민낯을 직시했다. 팽목항에 도착한 장씨 부부는 딸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간이 책상을 펴고 컴퓨터 집기를 설치하는 공무원에게 세월호 탑승객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장씨 부부 앞에 섰던 공무원은 되레 '당신 누구냐'고 되물었다. 화가 난 장씨는 간이 책상을 들어 엎었다.당시 애진씨는 단원고 학생 30여명과 함께 서거차도에 있었다. 장씨는 딸과 동거차도 마을회관 전화로 연락이 닿자마자 함께 있는 친구들 이름을 적어서 불러달라고 했다. 깨진 톱니바퀴 같은 정부 시스템 위에서 세월호 가족들은 서로를 도왔다."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치면 119가 출동합니다. 하지만 그날 대한민국 해경은 승객을 구하지 않았어요. 다 내팽개치고 배의 심장인 기관실 선원을 최우선으로 구조한 게 해경이에요. 직무를 유기한 것에도 모자라 국정원과 검·경은 세월호 가족을 사찰하기까지 했습니다."2014년 4월 16일은 다른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장씨 가족의 삶도 송두리째 바꿨다. 안산 반월공단의 한 공장에 다니던 장씨는 작업복을 벗었다. 그날 '해상 교통사고'의 진상규명이 그의 새 일이다. 과거 민주노총 금속노조원 활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일부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을 찾아간 '전력'은 해경 정보보고에 실렸고, 장씨의 휴대전화 사용 내역은 국정원과 서울종로경찰서, 검찰에 조회됐다. 장씨는 '진실호'를 타고 바다가 삼킨 세월호 주변을 맴돌았다. 희생자 가족과 미수습자 가족 대신 진실규명을 위한 키를 잡은 것. 장씨에게 어장길(뱃길)을 알려준 은인은 동거차도에서 미역 양식을 하는 '옥경이형'이었다."3개월 동안 진실호를 몰았어요. 세월호 침몰 해역 바지선으로 가족들을 모시고 간 거죠. 바지선 위에선 416TV 지성(단원고 2학년 1반 희생자) 아빠와 함께 해경이 건져 올리는 모든 것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갈 때마다 뭘 숨기는지 해경 고무단정은 '접근금지' 경고방송을 하며 운항을 막았습니다."감춰진 세월호의 진실을 찾기 위해 장씨는 연고 없는 진도 해역 뱃길을 익혀 키를 잡았고, 다른 가족들도 해상관제센터(VTS) 항해 기록 독해법을 익혔으며, 해외 해상사고 연구소를 찾아가 세월호 사고 시뮬레이션을 참관해 분석했다.세월호 참사 이후 4년이 지났다. 진실규명은 전 정부의 훼방과 방해로 더뎠다. 사고 당일 청와대는 대통령 보고 및 지시 시각을 조작했고,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을 수정해 책임을 회피했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 참사 당시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 정장에 대한 처벌은 신속했다. 미수습자 수색이 한창이던 2015년 11월 대법원은 침몰하는 배를 뒤로하고 구조된 세월호 이준석 선장에게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확정했고, 김경일 당시 해경 123 정장에겐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검찰 수사 결과에서 드러난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 시간에 죽어간 아이들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최순실의 조언을 듣고 그제야 대통령이 중대본(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찾아간 것만 봐도 나라가 제 모양이 아니었던 거예요. 대통령부터 해경청장, 일선까지 책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물어야 합니다."세월호 가족들에겐 여전히 과제가 남아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에서 밝혀내지 못한 침몰 원인 등을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회적참사 특조위)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아울러 형사재판에서 드러나지 않은 세월호의 진실을 민사재판을 통해 밝혀내고 '목숨값'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장씨와 세월호 가족들의 과제다."항간에선 외력설까지 나오고 있어요. 이런 험한 꼴을 당할 줄 알았다면 안산에 오지 않았겠죠. 살아 돌아온 자식을 둔 것이 미안해 가족협의회 회의 자리에서 2년간 한마디도 못했어요. 그 과정을 버텼더니 다른 가족들이 곁을 내주더라고요."누군가는 쉽게 장씨에게 불행 중 다행으로 세월호에서 자식이 살아 돌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월호는 장씨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깊이 파인 눈물샘으로 남았다.막일하는 아버지와 재봉공장 다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미아역 인근에서 형제자매 없이 홀로 자랐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자식 둘 중 하나를 영원히 잃어버려 남은 자식을 자신처럼 홀로 둘 뻔 했다. 큰딸은 자신이 다니던 단원고의 교복이 예쁘다며 동생 애진씨에게 입학을 권유한 것 때문에 자책하다가 지금은 동생 잃은 친구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장씨 아내는 허리 통증에 보호대를 차고, 진통제를 먹으며 세월호 가족 '엄마의노란연극단'에서 전국 순회 공연을 한다.하늘이 무너지는 아찔한 기억을 딛고 장씨는 살아남은 두 딸과 아내, 먼저 아들딸을 보낸 세월호 가족들을 위해 하루를 살아낸다. "가족들이 전보다 한자리에 모이기 힘들어졌어요. 애진이는 119구급대원 실습 마치고 다시 학교에서 공부하고, 주말엔 세월호를 잊지 않으려는 대학생들과 간담회에도 자주 참석하고 있고요. 세월호 진상규명은 우리 가족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입니다."글/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장동원(48) 4·16 가족협의회 진상규명 팀장이 안산 정부 합동 분향소에서 4년전 세월호 참사 당시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8-04-17 손성배

[인터뷰… 공감]22년째 월요일마다 한센병환자 찾는 박향준 길병원 피부과 교수

외과 기술 배우려다 인연한번 시작하면 뿌리뽑는 성격원대한 뜻 아닌 삶의 한부분일곱 살에 시작한 바이올린이 몸에 꼭 맞았다. 1960년대 '한창 날리던' 정경화처럼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다. 중학교 1학년인 1969년 경향신문 주최 '제18회 전국 남녀 음악 콩쿠르'에 출전해 중학부 1등을 차지했다. "한 번 시작하면 뿌리를 뽑는" 성격이었다. 사춘기에 들어설 무렵 찾아온 무대 공포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누구나 다 경험하는 것'이었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극도의 떨림이 계속됐다. 부모님 권유를 받아들여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학업에 집중했다.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 2등으로 졸업했다. 서울대 최초의 여성 피부과 전공의가 됐다. 우리 나이로 마흔 살이 되던 해 피부외과에 도전했다. 수술 테크닉을 배워야 했다. 당시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 전신)에 있던 안성열 과장을 무작정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피부과, 성형외과 전문의 면허를 취득한 의사로 흉터 부분의 전문가였다. 그 때 안성열 과장의 권유로 경기도 의왕에 있는 한국한센복지협회 부설의원에서 무보수 촉탁의를 1997년 시작했다. 그 때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스케줄은 한센병 진료·수술이었다. 올해로 22년째다. 박향준(62) 가천대 길병원 교수(피부과) 이야기다.- 한센병 진료 봉사를 20년 이상 꾸준히 이어 오고 계십니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지속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요."솔직히 사명감으로 시작한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안성열 원장님 도와드리고, 개인적인 필요로 시작했어요. 안 원장님과 저 두 사람이 나눠서 외래 환자를 보고 수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좀 더 기여하는 바가 확고해지고, 이 곳에서 제 몫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 겁니다. 이제는 매주 월요일 오전 한센복지협회 부설의원에 나가는 것이 제 생활의 일부, 스케줄의 일부가 됐습니다." (안성열 원장은 1989년부터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한센인 재활 성형을 도왔고, 1992년부터 매주 월요일 한국한센인협회 부설의원으로 출근한다. 현재 서울에서 안성열 성형외과·피부과 원장을 맡고 있다)- 한센인 재활 성형, 왜 중요한가요."한센병은 영구적 신경 파괴 질환입니다. 신경은 복구가 안 돼요. 감각이 없어지면, 근육도 마비됩니다. 안면근이 마비되면 눈을 감을 수가 없는데, 눈을 못 감으니까 염증이 생깁니다. 그게 실명(失明)으로 이어지기도 하구요. 입이 안 다물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남 보기에 안 좋을 뿐 아니라 밥도 잘 못 먹습니다. 치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2차, 3차 수많은 후유증을 유발해서 정상 생활을 못하게 합니다. 삶의 질이 말이 아니게 되는 거죠. 신경 손상된 것은 복구하지 못하겠지만, 겉모양이 좋아지면 환자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센균의 특징 중 하나가 연골을 침범해 흡수합니다. 코뼈가 없어져요. 누가 봐도 납작코면 한센병이라고 해요. 그것을 스티그마라고 해요. 그렇게 되니까 환자들의 일반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요. 재활 성형이 반드시 필요하죠. 신경이 없어지면 근육 장애가 오고, 근육을 쓸 수 없으면 위축돼 없어져요. 손등에 푹푹 파인 골이 생겨요. 그것을 사람들이 한센병의 한 사인으로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복부에서 지방을 빼서 채우는 거예요." - 한센병 진료 22년. 힘든 건 무엇인가요."직장 여러 번 옮겼는데, 알력이 많았어요. 의사는 오프 시간대에도 병원에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에요. 그래도 양해해달라고 하면 수용해주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반면 그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제 일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얼마든지 이해를 해주고도 남을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병원장 말을 거부하고 월요일 오전 진료를 이어나갔어요. 그런 저를 두고 '문제가 많은 의사다', '반골이다'라는 평가가 들려왔을 때가 마음 아팠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서울대 의대 여성 1호 피부과 전문의로 기록돼 있습니다. 왜 피부과를 선택하셨나요."여성(의 의료계 진출)이 지금 같지 않았을 때죠. 당시 피부과 인기도 없었고, 여자는 잘 뽑지도 않았어요. 다른 과도 마찬가지였어요. 대학교 5~6년 선배 중 한명은 1등으로 졸업했고 소아과를 지원했는데 거절당해 내과로 갔어요. '임신하고 그러면 전력에 손실이 온다...' 뭐 이런 이유였죠. 예전에 실습할 때 이비인후과에 가니 '여학생 안 뽑으니까 어플라이하지 마!'라고 말하던 분도 계셨고, 뽑아도 큰 인심 쓴 것처럼 생색내는 분도 많았죠. 외과에는 여자가 없었어요.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었죠. 마흔살쯤 피부외과를 시작했어요. 피부외과는 표피, 진피, 피하지방, 근막까지 담당해요. 뼈와 골격은 정형외과 분야고요. 피부외과 전문 인력이 없어요. 어렵기만 하고. 수술도 해야 하고. 수가도 안 받쳐줘요. 수술하면 할 수록 손해니까 병원도 꺼리죠. 많은 선생님들이 수술을 해서 테크닉을 갖추면 미용 쪽으로 전환해요. 그게 수입도 많고. 그래도 피부과 입장에서는 피부외과 전문 인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소녀가 피부과 의사가 됐습니다. 전환점은 무엇이었나요."중학교 2학년 때 무대 공포증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춘기 때문이었는지 극복하기 귀찮았습니다. 제가 경쟁심이 강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국어선생님이 '공부에 재주가 있는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힘이 됐습니다. 제가 음악한다고 정말 돈 많이 들었는데, 그게 미안해서 부모님 희망인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기도 해요." (박향준 교수는 경기여고 63회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영란 전 대법관, 조배숙 전 의원이 동창이다. 박 교수는 남편, 아들, 딸, 며느리 모두 의사다)박향준 교수는 길병원에 부임하면서 바이올린을 다시 잡았다. 개인 레슨도 받는다. 서울대 의대 메디컬 오케스트라 이후 30여 년 만의 일이다. '아마추어도 꾸준히 연습하면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교수는 "사실 (매주 월요일 의료 봉사는) 내 생활의 일부, 스케줄의 일부가 됐을 뿐이지 무슨 원대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 번 시작하면 뿌리를 뽑아야 하고, 무엇을 하다가 중단하면 자책하는 성격의 박 교수. 그렇게 그는 '한센인 환자 월요 봉사'에 나서고 있다.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박향준 교수는?▲1956년 서울 출생▲매동초, 금란여중, 경기여고,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1981년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피부과 레지던트 수료▲1985년 고려대학교병원 전임의▲1995년 일본 토라노몬 병원 피부외과 연수▲1996년 단국대학교병원 조교수, 부교수▲1997년 한국 한센복지협회 부설 의원성형·재건 담당 위촉의사 시작▲2002년 미국 오레곤보건과학대학교피부외과 연수▲2007년 제일병원 피부과▲2009년 중앙보훈병원 피부과▲2015년 장기려의도상 수상▲2018년 보령의료봉사상 수상가천대 길병원 본관 앞에서 만난 박향준 교수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한센인 의료 봉사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의료 봉사를 망설이는 의료인들에게 "타인에도 도움을 주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얻는 점이 훨씬 많다. 시간이 흘러야 이를 깨닫게 되는 점은 있지만 기회가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박향준 교수는 매주 월요일 경기도 의왕의 한국한센복지협회 부설의원에서 외래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을 한다.한국한센복지협회 부설의원 전경. 피부과는 매주 월요일 오전 9시에 시작, 오후 1시까지 진료와 수술이 이어진다. /박향준 교수 제공

2018-04-10 김명래

[인터뷰… 공감]경기도 융합기술원 정밀의학 연구센터장 김성진 박사

# 암 연구와 암 정복에 대한 철학은=그간 암 죽이는데 집중, 세포성장 단백질 조절하면 치료 가능할 것# 美 임상실험 앞둔 신약개발 성과 비결은=장기관점 투자·연구와 경영 이원화, 기술·자본·매니저 있어야 성공# 4차 산업 육성에 꼭 필요한 제언은=넓은 네트워크 가진 인물 중요, 과학자 겸업 막으면 산업화 걸림돌"두 개의 꿈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드는 꿈, 세계적인 약을 만들어 한국 신약개발에 비전을 제시하는 꿈." 30여년간 암 유전체와 암 전이, 암 예방 등을 연구한 김성진 경기도 차세대 융합기술원 정밀의학 연구센터장은 최근 난치성 암인 '삼중음성 유방암'의 주요 원인 물질을 세계 최초로 규명해 세계 의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에게 세계 최초의 수식어는 처음이 아니다. 1994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종신 수석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암 세포에서 'TGF-beta' 수용체 유전자의 결손과 돌연변이를 규정한 것도 김 박사가 최초다. 가천대 의대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지난 200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자신의 유전체 전체를 해독해 화제가 됐다. 미국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전체 해독에 성공한 지 5년만이자 세계에서 5번째였다.지난 2일 융합기술원에서 만난 김 박사는 그간의 연구와 암 정복에 대한 철학을 설명했다. 김 박사는 "지난 수십년 간 세계에 많은 과학자들이 암 정복에 나섰지만 아직 완전한 정복은 이뤄지지 못했다"며 "그간 연구들이 암 세포를 죽이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암 세포가 성장하는 환경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암 연구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암 세포가 성장하는 환경을 조절하는 것은 김 박사가 30여 년간 연구한 'TGF-beta'에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암 정복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다. 암 세포가 만들어내는 'TGF-beta'는 일종의 방패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세포가 성장하고 분열하도록 신호를 보내는 단백질로, 이 신호를 조절하면 세포를 증식, 분열, 사멸하게 만들 수 있는 데 암 세포는 이를 이용해 면역이 공격을 할 수 없게 만들고 혈관을 확장시켜 성장에 최적화된 환경을 만든다.김 박사는 TGF-beta를 처음 발견한 마이클 스폰 박사와 아니타 로버츠 박사의 제자로, 1980년대 TGF-beta 연구 초창기부터 그 가능성에 주목해왔다. 그는 "앞서 암 세포를 죽이는 치료제는 많이 나왔기 때문에 TGF-beta를 조절할 수 있다면 암 정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김 박사는 자신이 가진 독보적인 기술을 활용해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한 제약회사에 부회장이자 기술 자문으로 참여, 신약 개발에 대한 토양이 척박한 대한민국 BT산업을 이끌고 있다.10년 가까이 적자를 보더라도 50억 원씩은 신약 개발에 재투자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결과, 개발한 신약이 미국에서 임상 실험을 앞둔 단계까지 왔다."지난 2007년 이길여 암당뇨연구원 원장을 제안받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세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고, 또 세계적인 신약을 만들어 대한민국 신약개발에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며 "점차 꿈에 근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는 이같은 성공의 비결로 끊임없는 투자와 과학자-CEO의 이원화를 꼽았다. 당장의 적자 때문에 투자를 줄이지 않았고 눈 앞에 성과를 쫓지 않았기에 독보적인 기술을 가질 수 있었고 신약 개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아울러 제약회사의 최대주주로 있으면서도 경영은 전문 CEO에게 맡기고 자신은 과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은 장기적인 투자를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구의 테마가 바뀌면서 한 분야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고 그 결과로 기초과학, 원천기술이 발전을 하지 못하게 됐다"며 "경제성장단계에서는 복제약 개발로 빠르게 따라가면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투자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투자 성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BT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다고 제언했다.또 과학자-CEO가 분리돼야 벤처기업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즉,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식당을 경영하는 경영자는 다르다는 것이다."바이오 벤처기업이 성공을 거두려면 기술이 있어야 하고, 자본이 있어야 하고, 매니저가 있어야 한다"며 "기초과학을 한 사람이 갖지 못한 네트워크, 자본을 끌어올 네트워크나 협력할 회사들의 네트워크 등을 잘 아는 사람이 경영을 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그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 의류 산업 벤처기업으로 성공을 한 CEO가 의약 부문 벤처기업 CEO를 맡아 제약회사를 크게 키우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매니저는 산업 부문을 뛰어넘어 기업을 성공시키는 노하우를 가진 전문 CEO가 맡아야 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 의약 벤처 기업을 위해서도 넓은 네트워크를 가진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4차 산업 육성에 대한 제언도 빼놓지 않았다. 김 박사는 '사람에 대한 투자'가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의 경제환경, 다가올 4차 산업혁명에서 앞서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중국은 해외에서 활약하는 1천명의 전문가를 다시 국내로 부르는 프로젝트를 통해 개개인이 가진 수십 년의 노하우를 모아 단숨에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냈고 일본도 이와 유사한 스타프로젝트로 과학기술을 선도해가고 있다"며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아울러 "한국에서도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해 투자를 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과학자들의 겸업을 막아 우수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산업으로 만드는 데 제약이 된다"며 과학자들이 더욱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마지막으로 그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박차를 가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자신이 센터장으로 있는 융기원 정밀의학 연구센터를 통해 의약 벤처들의 길을 열겠다는 것. 펀드를 운영해 연구를 지원하고 연구 성과의 일부를 회수하는 조건으로 자본력을 키우고 과학자에게 다양한 유인을 제공해 기술개발에 불을 붙이겠다는 계획이다. 경기도의 먹거리를 찾는 투자를 여러 연구와 매칭시키겠다고 자신의 청사진을 설명했다.김성진 박사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국내에서는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세워놓은 원칙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 세계적 신약을 만들겠다는 꿈이 가시화되는 시점에 왔다"면서 "성공사례를 만들어 한국 바이오의 꿈을 키워주고 싶다"고 했다.글/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경기도 융합기술원 정밀의학연구센터장 김성진 박사는 "자신이 30여년간 연구한 TGF-beta를 조절할 수 있다면 암 정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8-04-03 김성주

[인터뷰… 공감]인천 출신 컴퓨터 공학자 안재우 모비언스 대표

스마트폰 보조기기 '리보2'일본 교육업체와 정식 계약 눈앞코이카 파트너사로 선정돼콜럼비아 '점자사전' 개발 진행도인천 출신 컴퓨터공학자 안재우(50) (주)모비언스 대표의 꿈은 '세상의 모든 시각 장애인을 위한 IT 기기 개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해보겠다고 오랜 시간 제품 개발에 매진해왔다. 어떻게 하면 시각 장애인이 지금보다 더 스마트폰을 편리하게 쓸 수 있을까. 점자를 아예 모르는 시각 장애인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점자를 익힐 수 있는 사전을 개발하면 어떨까.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이 창시된 도시, 인천에 기반을 둔 공학자는 지난 7년을 이 일에 매달려왔고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안 대표의 점자 사전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이 사업을 위해 안 대표가 설립한 (주)브레일리스트는 개발도상국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CTS(Creative Technology Solution) 프로그램 파트너사로 선정됐다. 3억원을 지원받아 콜럼비아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사전 개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스마트폰 보조 기기로 기존 제품보다 기능이 보강돼 지난해 나온 리보(RIVO)2의 경우 일본의 한 보조 공학 기기 교육 업체가 100대를 선주문, 정식 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안 대표를 27일과 지난 13일 두 차례 송도국제도시 글로벌 스타트업 캠퍼스에서 만났다. 인터뷰에는 시각 장애인으로 지난해 모비언스, 브레일리스트에 합류한 정유라(39) 이사가 함께 했다. 정 이사는 "대부분 사람은 시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데, 저희는 시각의 정보를 못 받아들이니까 좀더 나은 기기가 있어야 더 많은 정보를 소화할 수 있다"며 "IT 기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안 대표는 "검증을 안 하면, 엔지니어는 오류에 빠진다. 정말 사용자들이 어떻게 쓰는지, 개발자는 그것을 모른다. 그런 노하우를 제게 알려주는 일을 정 이사님이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Q : 현재 콜럼비아 시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코이카 지원을 받아 개발 중인 점자 사전은 어떻게 시작됐고 왜 필요한 일인가요.A : 시각 장애인의 90% 이상이 점자를 모릅니다. 점맹률이 미국 93%, 한국 95%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장애인 문맹률이 10%면 난리 났겠죠.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점자 사전 기기란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점자 학습 익힘 교과서나 규정집이 있지만 누군가가 옆에서 알려줘야 합니다. 점자를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은 혼자서 점자를 익힐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다른 교육자나 기타 도움 없이 혼자 기기만 있으면 집안에서 점자 학습이 가능해야 합니다. 코이카에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사전 개발' 과제를 제안했고, 지난해 11월 선정됐습니다. 콜럼비아 시각 장애인은 120만명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5배가량입니다. 우선 프로토타입(prototype·시제품) 100대를 만들어 콜럼비아 시각 장애인 교사·학생 등을 상대로 적용해보고, 올해 9~10월쯤 제품을 출시할 계획입니다. 스페인어권은 시작입니다. '세상의 모든 점자를 다 넣는다'는 것이 브레일리스트의 목표입니다.* 브레일리스트(Braillist)는 점자 번역자를 뜻한다. 기계적 직역이 아닌 의역이 가능한 숙련가를 브레일리스트로 부른다.Q : 시각 장애인을 위한 스마트폰 보조 기기 리보(RIVO), 왜 특별합니까.A : 2011년 미국 보조공학 전시회인 CSUN(California State University at Northridge)에 다른 제품을 전시하러 간 적이 있어요. 지체 장애인을 위한 키보드를 내놓았는데 정작 그분들은 관심이 없고, 시각 장애인분들만 방문하시더라구요. 배낭에서 키보드를 꺼내 애플 스마트폰 쓰는 방법을 보여주시면서 '불편하다', '편리한 제품을 개발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때부터 시각 장애인 보조 기기 개발을 시작했어요. * 리보는 시각 장애인이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스마트폰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조 기기다. 보이스 오버 탐색 명령이 가능할 뿐 아니라 텔레뱅킹, 문자 입력·편집 등이 가능하다.안 대표는 인천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카이스트 학부 과정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부전공이 컴퓨터공학이었는데 '재미난 수학'으로 생각하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박사 2년차 때 우연히 알게 된 시스템공학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일하면서 개발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외환위기 때 친구와 함께 사업을 시작했지만 '돈 버는 일'에 치여 개발자로서 역량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2003년 모비언스를 창업하면서 공학자로서 도전을 본격화했다. 창업 초기 그의 관심은 '세상의 모든 키보드 표준'을 만드는 데 있었다. 이른바 '모비언스 쿼티(querty·컴퓨터 자판 배열)'라는 원대한 꿈을 꾸며 5~6년간 정보 통신 국제 표준화 기구를 쫓아다녔지만 실패했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식과 기술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제품 개발을 지속했다.안 대표는 정 이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품 개발에 실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리보2에서 음성 기능을 추가한 것도 정 이사의 조언 때문이었다."소리나는 키보드가 세상에 없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시각 장애인에겐 소리가 필요하겠더라구요. 어떤 기능을 하나 넣고 뺄 때 저는 '개발 비용'을 생각했는데, 시각 장애인 입장에서 무조건 소리가 나야 했어요. 엘이디 깜박이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되구요."모비언스는 지난 21~23일 미국에서 열린 CSUN에 리보를 전시했다. 시각 장애인 등 방문객들의 호응이 컸다. 시각 장애인 가수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도 모비언스 부스에 들러 리보를 시연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필요한 IT 기술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나폰수'(나도 폰고수다)는 최근 리보를 다뤘다. 이 방송을 들은 한 맹인 교사는 안 대표에게 문자를 보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기능과 완성도 높은 리보가 개발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정 이사는 "시각 장애인이 원하는 어려움을 모두 간파해 제품에 녹여내고 있다"며 "모든 것을 터치로 해결하는 시대, 시각 장애인을 위한 보조 기기는 장애인뿐 아니라 고령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유용한 기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안 대표는 "시각 장애인 점맹률을 낮추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면서 '온 세상을 위한 점자 기기'를 개발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안재우 대표는?▲1967년 경북 영주 출생▲인천 서화초, 선인중, 선인고 졸업▲카이스트 수학과 졸업, 컴퓨터공학과 석·박사▲1993~1999년 시스템공학연구소(SERI·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원▲2003년 (주)모비언스 대표▲2012년 리보(RIVO)1 개발▲2017년 리보(RIVO)2 개발▲2017년 (주)브레일리스트 설립, 점자 사전 개발 착수▲2018년 리보(RIVO)2,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보조공학기기 등록시각 장애인에게 유용한 스마트폰 보조 기기 리보(RIVO)를 만들었고, 점자 사전을 개발 중인 안재우 대표. 27일 만난 그는 시각 장애인이 쓸만한 IT 기기 개발 사업 분야를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이라고 말했다. 기술 향상 수준에 비해 시각 장애인 수요를 충족할 만한 제품이 아직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스마트폰 보조 기기로 기존 제품보다 기능이 보강돼 지난해 나온 리보(RIVO)2.최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CSUN2018(3월 21~23일) 마지막날 가수 스티비 원더가 모비언스의 '리보2'를 시연하고 있다. /안재우 대표 제공

2018-03-27 김명래

[인터뷰… 공감]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표주자 이성근 화백

재능 있는 줄 몰랐던 괴짜같은 아이매형이 알아 본 덕에 문하생으로…물감 쏟아 엉망이 된 작품서 깨달아헝클어짐 속에서 초월적인 美 발견규칙 없이 본능에 충실… 본질 탐구제목·설명 붙으면 그림에 한계 생겨동서양 조화로운 작품 해외서 더 유명추상은 일종의 '나'에 대한 진실찾기"어렸을 때,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매일 핀잔을 들었어요.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면 선생님이 혼을 내더라고. 오죽하면 짝이 대신 그림을 그려줬어요."어린 시절 '재능'을 묻기 위해 던진 질문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이성근 화백은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표주자로 평가받는다. 중학생 때부터 한국 근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당 김은호 선생에게 사사 받았고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선진국 미술시장에서 인정받는 이인데, 미술 낙제생이라니.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나는 좀 이상하게 보였을 거예요. 벽을 그리라 했는데, 하얀 벽이지만 검게 칠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파란 하늘인데, 빨갛게 그려버리고. 그저 느낀 그대로 표현한 건데, 선생님의 기준에서는 낙제지. 못 그린 그림." 지금 와서 보면 그는 '추상'적 감각을 타고 났을지 모른다. 이 화백은 사실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재능이 있는 줄도 몰랐단다. 그의 매형이 그림을 보고 재능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조금 독특한, 괴짜 아이였다. "우리 매형이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침 매형이 우리 선생님(김은호)을 알고 있었는데, 나를 그곳에 보내 공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지금도 대단하시지만, 예전에 선생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시험도 보고 들어가야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험을 통과했더라고. 그때가 중학교 3학년 즈음이었는데, 그렇게 매일 방학만 되면 선생님 집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어린 나이였지만, 대단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선생님은 손이 붓도록 그림을 그리셨다고 해요. 정말 엄청난 양의 노력을 하신 거지. 그 말을 듣고 너무 감명받아서, 나도 그렇게 해봐야겠다 싶어 정말로 열심히 그렸거든요. 그런데 나는 손이 붓질 않는거야. 진짜 많이 그림을 그렸는데도." 그래서일까. 스승은 어린 제자에 칭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잘하고 있다, 고생했다' 한마디 하지 않았고, 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선생님이 나에게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으니까, 내가 재능이 있는 건 맞는지,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어린 마음에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 집에 친구 분이 오셔서 내가 차 심부름을 하게 됐거든. 차를 가지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문 너머로 대화가 들리는 거야. '어린 놈이 그림을 잘 그린다. 내가 두고 보고 있는데, 아마 관심을 안 가지는 것 같이 보여 그 놈이 힘들 것이다'. 선생님의 그 말이 그때 참 용기가 되더라고." 그건 이당 김은호의 교육방식이었다. '틀에 얽매이지 마라' "스승이지만, 그 틀에 묶이지 말라는 거예요. 선생님 말씀, 그 칭찬에 내가 묶이면 안되는 거지. 선생님은 손이 부었지만 나는 손이 붓지 않는 것도 그건 선생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지. 스승의 틀에 묶인 나에서 벗어나라. 나는 나다. 이게 배움이에요. 그 시절 깨달음이고."그때 얻은 깨달음은 지금의 이성근을 만든 지지대였다. 그는 그림보다 그림을 그린 이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미술가가 되길 원해요. '미(美)'를 이야기하는 사람. 궁극적인 미란 무엇인가를 많이 고민하는데, 우리는 보이는 것들의 미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해요. 우리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그 틀을 깨고 나오면 한계가 사라지죠. 형식이고, 틀이고, 기준이고, 사실은 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것들에서 벗어나는 것도 나의 몫이구요." 예전에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예술가로서의 고집도 있었고, 자존심도 강했다. 화백은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 괴로운 나날을 보낸 적도 있다고 술회했다. "한번은 그림을 그리다 잘못해서 물감을 작품에 쏟은 적이 있었어요. 내가 구상한 것들이 쏟아진 물감으로 다 망가졌다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림을 버리려고 했어요. 그때 가만히 앉아 엉망이 된 그림을 보니, 헝클어진 그 속에서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보였어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냥 그 자체도 작품이었어요." 그는 그 순간 든 생각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림은 내 존재를 표현하는 소산인데, 내 생각과 철학, 인생이 아름답다면 그림은 자연히 아름다워지겠구나 라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무엇이든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어요."그의 작업은 정해진 규칙이 없다. 그의 붓이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휘몰아친다. 누군가는 그것을 '쇼'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의 본능에 충실한 것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순수하고, 허물이 없고, 자유분방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표현했지만 여느 현대미술 작품들 같지 않게 보는 이들에게 그 진심이 잘 전달된다."화가는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림에 제목을 붙이고 화가가 그림을 설명해 버리면, 제목과 설명에 묶여서 관객의 느낌이 제한돼 버려요. 그림도 한계를 가지고요. 사람마다 얼굴이 다 다르듯이 느낌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나, 그림이나, 보는 이들 모두 자유를 가져야 돼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게."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그이지만, 그래도 그를 대표하는 것은 '추상'이다. 그는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 좋아 작품 속에 추상만 고집하진 않는다. 구상적 요소도 함께 넣어 모두가 예술을 즐기도록 노력한다. 특히 그의 작품은 먹이나 동양물감을 활용해 동서양이 조화된 오묘한 인상이 강하고, 강력하게 뻗어 나가는 강렬한 붓 터치가 특징이다. 이 매력 덕에 현대미술의 근거지인 서구에서 열렬한 러브콜을 받는다. 그의 작품은 이미 미국 뉴욕 UN본부와 영국 왕실에 걸렸고,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의 취임선물로 그의 작품 '군마'가 보내진 것은 유명한 일화다. 또한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선진 10개국에서 50여 회에 달하는 개인전 및 초대전을 열어 국제적 명성을 얻기도 했다.이 정도 명성이라면, 조금 나태해지거나 쉴 법도 한데, 그는 붓을 놓지 않는다. 어디서든 그가 추구하는 '느낌'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보는 이들 입장에선, 추상이 많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추상작품을 추구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진실찾기'이기 때문이에요. 나의 생각과 느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추상인데, 그것이 참 어렵고 힘든 과정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순수해지지 않거든요. 생각해보세요. 피카소, 칸딘스키와 같이 추상의 세계적 거장들 모두가 그림을 그려도, 5살 아이를 못 따라갑니다. 아이들은 정말로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거든요. 제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그래서 항상 제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아요." 맑게 웃는 화백의 미소 안에 예술가의 진심이 묻어난다. 예술은 무엇인가.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성근 화백은?▲서울 출생▲제 6회 이당 미술상 수상▲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건국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오스트리아 빈 로이쉬 갤러리, 프랑스 파리 베가 마테 갤러리 및 파리 문화센터 등 유수 해외 갤러리 초대 개인전▲대한민국 청와대, 미국 뉴욕 UN본부, 영국 왕실, 미국 국방부(펜타곤), 필리핀 말라까냥 대통령 궁, 파리 에리메스, 공동경비구역 귀빈실 등 국내외 16여 곳에서 그의 작품 소장 중.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표주자 이성근 화백은 예술가들이 추상작품을 추구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진실찾기'이며 나의 생각과 느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할수 있는 장르가 추상이지만 그것이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성근의 작품 가족(사진 위)과 군마.지난 19일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진행 중인 '이성근 화백 개인전'에서 이 화백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8-03-20 공지영

[인터뷰… 공감]문승 한국지엠 부품협력업체 비상대책위원장

인천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인 한국지엠이 휘청거리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가 군산공장 폐쇄를 결정한 이후 한국지엠 본사가 있는 인천 부평공장 등 경인지역 사업장에도 구조조정 여파가 미치고 있다.한국지엠 부평공장이 인천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인천시가 집계한 2016년 말 기준 인천지역 전체 GRDP(지역 내 총생산)는 80조9천억원으로 이 중에서 약 15%를 부평공장이 담당한다. 또 수출액으로 보면 인천 전체(2016년 말 39조2천억원)의 22%를 차지하기도 한다. 한국지엠에 생계가 달린 지역 고용인력도 수만명에 달한다. 인천상공회의소는 최근 한국지엠 종사자가 인천에만 1만1천500명에 이르며, 인천 1차 협력업체만 해도 50여개사에 2만7천명이 일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2차 협력업체는 170여개에 8천명, 3차 협력업체는 300여개에 4천500명이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당장 한국지엠에 부품을 대는 협력업체들부터 '직격탄'을 맞았다. 시중은행까지 '돈줄'을 죄기 시작하면서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 일부 협력업체는 이미 인력 감원에 나섰다고 한다.한국지엠 1차 협력업체 모임인 '협신회'는 급기야 '한국지엠 부품협력업체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인천 남동구에 있는 (주)다성의 대표이사인 문승(58) 비대위원장은 지난 12일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지엠 사태 해법을 신속히 찾지 못하면 협력업체들이 다 죽는다"며 "한국지엠 철수는 협력업체들에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다"고 강조했다.GM이 지난 2013년 쉐보레 브랜드를 유럽시장에서 철수하면서 한국지엠과 협력업체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유럽에 수출을 많이 하던 한국지엠의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덩달아 협력업체들도 기업의 존폐를 걱정할 만큼 납품량이 큰 폭으로 줄었다고 문 위원장은 토로했다.한국자동차협동조합에 따르면 한국지엠의 1차 협력업체가 한국지엠에 납품한 금액(1개사 평균)은 2012년 244억원에서 2016년 164억원으로 떨어졌다. 올 들어 협력업체들의 사정은 더욱 악화했다. 1차 협력업체의 2월 기준 공장가동률은 50~70% 떨어졌고, 1~2월 매출액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30%가량 급감했다고 자동차협동조합은 밝혔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은행권마저 협력업체들의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문 위원장은 "시중은행들이 어음(외상매출채권) 할인을 거부하고 각종 신규 대출도 사실상 중단했다"며 "어음 할인과 신규 대출이 막히면서 협력업체들이 운영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문 위원장은 한국지엠이 1차 협력업체 300여곳에 납품 대금으로 현금 대신 60일 만기 전자어음을 줬다고 했다. 이들 업체는 이 어음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형식(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으로 3%가량 할인한 돈을 받아 운영 자금으로 써 왔다.GM의 군산공장 폐쇄 결정 발표가 나오자 은행들은 협력업체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문 위원장은 전했다. 그는 "예전에는 신용만으로 은행과의 거래가 이뤄졌는데 최근에는 담보를 설정해야 돈을 줄 수 있다는 은행이 늘고 있다"며 "아직 구체적인 조사는 진행하지 않았지만, 자금 압박을 받는 업체들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했다.1차 협력업체들의 자금난이 2·3차 협력업체들에까지 번지는 건 시간문제. 문 위원장은 "조만간 1차 협력업체가 2·3차 업체들에 끊어준 60일짜리 어음도 할인이 거부될 가능성이 높다"며 "1차 협력업체보다 영세한 2·3차 협력업체들은 더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어 그는 "이 같은 상황이 장기간 이어진다면 한국지엠 경영이 정상궤도에 오르기 전에 협력업체들이 먼저 쓰러지게 된다"고 했다.문 위원장은 한국지엠 철수나 공장 축소 등으로 납품이 중단되면 GM의 전 세계 사업장에 수출하던 물량도 급감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가 운영하는 (주)다성은 자동차 스탬핑(차체 만들기) 부품을 주로 제작하고 있다. 현재 GM 공장이 있는 브라질과 미국 등 7개국에 부품을 수출하고 있다. 문 위원장은 "우리 회사의 경우 전체 생산량 중 절반이 수출 물량인데 한국지엠에 납품하지 못하면 (수출 물량이) 60%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고 했다."한국지엠에 납품하지 않았다면 GM의 해외공장에도 물건을 납품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문 위원장은 "한국지엠에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라는 것만으로 품질에 대한 보증을 받게 됐다. 이를 통해 다른 나라로 수출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처음 구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조그마한 협력업체가 세계 굴지의 자동차 부품 업체들 틈에서 이 정도의 수출 실적을 유지하는 것도 그 덕분"이라고 덧붙였다.비대위는 정부가 실사 기간을 최대한 줄여 한국지엠에 대한 지원 결정을 조속히 내려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3개월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는 실사기간은 경영난을 겪는 협력업체가 버텨내기 어려우며, GM의 신차 배정이 끝난 이후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는 게 문 위원장의 설명이다. 이것이 수년간 이어진 한국지엠 철수설에도 숨죽여 지내오던 그들이 단체를 만들어 전면에 나서게 된 가장 큰 이유다.문 위원장은 "신차가 배정되지 않으면 구형 차종의 판매량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생산량은 감소한다"며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야 속도를 내며 계속 나갈 수 있듯이 생산량이 줄어든 공장은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신차를 계속 가져와서 개발해야 협력업체가 살 수 있다"며 "어떻게든 살려내지 않으면 협력업체들이 줄 도산에 빠질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문 위원장은 "군산공장 폐쇄 이후 한국지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지엠이 현재 지탱하고 있는 일자리를 생각한다면 정부의 지원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한국지엠은 국내 공장과 협력업체 등을 포함해 15만6천명의 고용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장 인근의 소상공인까지 합친다면 한국지엠 철수로 20만명에 가까운 일자리가 사라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문 위원장은 비대위 활동에서 한국지엠과 협력업체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그는 "GM을 마치 '먹튀'나 '고리대금 업체' 등으로 묘사하는 부정적인 인식이 많지만, GM이 인천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준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지엠과 협력업체가 함께 살아남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GM은 군산공장 폐쇄 결정을 발표하며 정부의 재정지원이 없으면 한국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정부는 GM 측이 실사에 성실히 임하고, 신차 배정 등 구체적이고 중장기적인 신규 투자 계획 등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문승 비상대책위원장은?▲1959년 전남 보성 출생▲한양대 금속공학과졸업、 인하대학교 대학원 무역학과 졸업(박사)▲1995년 (주)다아 대표이사▲1998년~현재 (주)다성 대표이사▲1998년 대우자동차 자주개선 경진대회 최우수상▲2016년 산업포장 수상▲2018년 한국GM 협신회 부회장、 한국GM 부품협력업체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한국지엠 부품협력업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주)다성의 문승 대표이사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지엠이 현재 지탱하고 있는 일자리를 생각한다면 정부의 지원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3-13 김주엽

[인터뷰… 공감]프로복싱 신인 발굴 나선 버팔로프로모션 유명우 대표

"국민에게 사랑받는 복싱 선수 육성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1980년대 복싱은 한국의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대중적인 스포츠였다. 축구 못지 않게 복싱 경기가 있는 날이면 TV 앞에 가족이 모여 응원했고, 우리나라 선수가 챔피언에 오르면 모두가 즐거워했다.당시 '소나기 펀치'로 상대를 쓰러트리며 챔피언에 오른 '한국 복싱계의 살아있는 전설' 유명우(54)도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다. 이런 유명우가 YMW버팔로프로모션 대표로 신인 선수 발굴에 앞장선다. 그는 오는 11일 수원 호텔 캐슬 그랜드볼룸 특설링에서 프로복싱 신인 발굴 프로젝트 '제1회 휴먼크루즈 배틀서바이벌'을 개최한다. 유 대표를 6일 만나봤다.유 대표는 "오는 11일 수원에서 프로신인 선수를 발굴하는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며 "아직 부족하지만 한국 선수가 세계적인 챔피언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이번 대회는 10체급에서 단일 규모로는 역대 최대 규모인 40명의 신인 복서가 참가한다. 올해 초 베트남 호찌민에 복싱체육관을 개관한 버팔로프로모션은 이번 대회에 베트남 선수 3명과 러시아 선수 1명을 출전시킨다. 최고 기량을 펼친 최우수선수(MVP)에게는 1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지고, 우수선수상에는 50만원, 감투상에는 30만원(5명)이 주어진다. 또 가장 감동적인 경기를 펼친 선수에게는 베스트파이트상과 함께 상금 50만원이 전달되고 KO로 승리하면 20만원도 준다.특히 이번 대회 메인 이벤트로는 국내 중량급 강타자 서인덕과 러시아 출신 드미트리 바실로프의 웰터급 국제전도 열린다.유 대표는 지난 2013년부터 버팔로프로모션을 운영하며 신인 선수 발굴에 앞장서왔다. 그가 프로모션을 차린 이유는 그동안 국민들에게 받아온 사랑을 이제는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다. 무엇보다 국내 남자 프로복싱계에 세계 챔피언이 없다는 슬픈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직접 나섰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복싱의 활로를 열어주고 싶어 대회를 열게 됐다. 내가 가진 장점을 이제는 국가에 환원하고 나아가 한국 복싱을 다시 전성기로 만들고 싶어 프로모션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유 대표는 현재까지 신인 선수 10여명을 육성했다. 특히 동양챔피언 김민욱을 비롯해 김예준, 김동혁 등 걸출한 스타 선수를 키워냈고, 3년 내 세계 챔피언 등극도 노리고 있다.유 대표는 "지난 5년간 신인 선수들을 꾸준히 육성해왔지만, 복싱이 비인기 종목이어서 선수들이 훈련하는데 힘들어했다"면서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선수들이 경기에 대한 흥미를 갖고 나아가 팬들에게 사랑받는 복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이어 "국내 복싱이 침체기를 겪고 있는 것은 대회 자체가 많지 않고 TV 중계나 협찬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현재 한국 남자 복싱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한 명도 보유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강조했다.유 대표의 말대로라면 한국 남자 복싱은 팬들의 외면과 협찬사의 부재 등으로 대회 자체를 열기가 쉽지 않다. 그는 "실제 이번 대회도 이완모 대회위원장과 최창수 버팔로프로모션 회장 등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치르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수원에서 이 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유 대표는 이번 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3차례 대회를 더 치를 예정이다. 또 내년 5월께 사상 처음으로 크루즈 유람선에서 복싱 대회를 개최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는 "선수들과 국내 팬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선상에서 즐기는 복싱 대회를 열 것"이라며 "앞으로도 다양한 이벤트와 복싱이 어우러지는 축제를 기획해 복싱 붐 조성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유 대표는 선수 시절 163㎝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복싱 스타일로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의 신화를 썼다. 한국 프로권투 사상 최다 연승(36연승), 가장 오랜 기간 타이틀 보유(6년 9일), 최단 시간 KO승(1라운드 2분46초), 최다 방어 기록(17차). 이 모든 게 유 대표가 세운 기록이다. 프로통산 전적은 39전38승(14KO) 1패다.이를 입증하듯 그는 지난 2013년 미국 뉴욕주 캐너스토타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명예의 전당에는 초대 헌액자인 무하마드 알리를 비롯해 슈거 레이 레너드, 마이크 타이슨, 로베르토 두란 등 기라성 같은 복싱 챔피언은 물론 영화배우 실베스타 스탤론, 트레이너 안젤로 던디 등 세계 복싱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만이 입성할 수 있다. 특히 아시아에선 일본의 초대 세계챔피언인 하라다 마사히코와 태국의 전설 카오사이 갤럭시 그리고 2009년 한국의 장정구가 등극했고, 유 대표가 반열에 올랐다.유 대표는 "지난 2013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한 뒤 수원에서 후배 양성을 위해 온 힘을 쏟겠다고 한 것이 엊그제 같다"면서 "앞으로도 나의 목표는 한 가지다. 후배 양성과 세계 챔피언을 배출해 내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유 대표는 올 초 김상범(커키 버팔로프로모션) 대표, 필리핀 복싱영웅 파퀴아오와 장기 계획도 세웠다. 그는 "파퀴아오의 MP프로모션과 협력해 3년 후 한국 프로복싱을 이끌어 갈 신인 유망주를 발굴할 계획"이라며 "이렇게 되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에서 국제 대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끝으로 그는 "꿈나무들이 어려움이 있더라고 좌절하지 말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며 "신인 선수들이 더 큰 뜻을 품고 한국 복싱을 다시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국민 여러분께서도 한국 복싱이 재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언론에서도 복싱에 대한 보도를 많이 해달라"고 당부했다. 글/신창윤기자 shincy21@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유명우 대표는?▲1964년 1월10일 서울 출생▲삼성초등학교-한강중학교-인천체육고등학교▲1982년 프로 입문▲1985년 WBA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1991년 세계권투협회 선정 올해의 복서상▲2009년 한국권투위원회 사무총장▲2013년 국제복싱명예의전당 헌액▲2013년 YMW버팔로프로모션 대표'한국 복싱계의 살아있는 전설' 유명우 YMW버팔로프로모션 대표가 "프로신인 선수 발굴을 통해 세계 챔피언을 배출해 한국 복싱이 재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8-03-06 신창윤

[인터뷰… 공감]이율기 인천시컬링경기연맹·장애인컬링협회 회장

돈 없는 市 대신 후원기업 직접 발굴최초 민·관 장애인체육 실업팀 창단선인중 동계체전 金 획득 밑거름 역할선수 경력 아들 덕에 빙상종목과 인연장애인 컬링 베이징선 인천도 노려볼만인천엔 고교팀 없어 제도 뒷받침 절실#인천시장애인체육회 휠체어컬링팀이 2016년 11월 25일 인천교통공사 대회의실에서 창단식을 갖고 출범을 알렸다. 전국 최초로 민·관이 함께 만든 장애인체육 실업팀이었다. 2015년 대한장애인체육회는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에 맞춰 관련 종목 실업팀 창단 지원안을 발표했다. 지자체와 향후 3년 동안 실업팀 운영 예산을 1대1로 매칭 지원한다는 제안이었다.2014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지어진 선학국제빙상경기장으로 인해 동계 종목 발전의 주춧돌이 놓인 상황이었지만,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인천시 입장에서는 이 제안을 수용하지 못했다.이때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가 나서서 후원 기업 4곳을 찾았고, 이를 통해 전국 최초로 민간이 지원한 장애인체육 실업팀을 창단할 수 있었다.#인천 선인중 컬링팀은 2017년 1월 25일 이천훈련원 컬링경기장에서 열린 제98회 전국 동계체육대회 컬링 남중부 결승에서 서울 신구중을 11-3으로 완파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천 컬링 사상 처음으로 동계체전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선인중 컬링이 당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며 의미를 더했다. 정규 수업을 마치고 방과 후를 활용한 훈련을 통해 동계체전 금메달을 획득한 데에는 인천시컬링경기연맹의 지원과 지도자들의 헌신적 지도가 크게 작용했다고 지역 체육계는 분석했다.인천 컬링사(史)를 새로 쓴 사건들이 몇 년 사이에 벌어졌다. 그 중심에는 이율기(58)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 겸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 회장이 있었다.컬링 여자 국가대표팀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어느 때보다 국내에서 컬링에 대한 인기가 치솟고 있는 가운데, 이율기 회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 26일 오후 선학국제빙상경기장 지하에 위치한 컬링경기장을 찾았다.코멕스전자(주) 대표이기도 한 이 회장은 이날 오후 6시께 컬링장을 찾아 훈련 중인 지역 선수들을 챙기고, 경기장을 꼼꼼히 살폈다.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컬링 지원단장도 맡고 있는 터라 다음 달 9일 개막하는 평창 동계패럴림픽을 앞두고 방한해 선학컬링장에서 훈련할 캐나다와 영국 등 해외 선수들을 위해 시장애인컬링협회 임원들과 경기장을 살핀 것이다. 문제가 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관계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야 인터뷰를 위해 이 회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이 회장은 "동계패럴림픽에 출전하는 캐나다 컬링 대표 선수들이 3월 3일 이 곳을 찾을 예정인데, 올 겨울 추위에 수도관이 동파하면서 거기서 샌 물 일부가 경기장으로 흘러든 것 같다"면서 "일반 빙상장 보다 컬링장은 빙판의 수평도가 중요하다. 머리카락 하나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물이 샌 부분에 대해 조치가 필요한 상태"라고 설명했다.이내 전날 막을 내린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화제를 옮겼다."지난 14일에 열린 우리 여자 선수들과 중국의 예선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봤습니다. 당시 경기에서 우리가 대승을 거뒀죠. 그리고 우리 승리에 환호하는 관중의 모습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이 회장은 우리 컬링 선수단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온 국민이 컬링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단다."2003년부터 한국초등학교 빙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았어요. 제가 연맹 회장으로 있을 당시 국내 초교 빙상 무대에 김연아, 이상화, 모태범을 비롯해 쇼트트랙의 곽윤기 등이 있었어요. 이 선수들이 성장해서 출전한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세계 최초로 빙상 그랜드슬램(피겨,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등 빙상 전 종목에서 금메달 획득)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당시 박용성 대한체육회장과 김연아를 전담했던 브라이언 오서 코치 등과 기분 좋게 축하주를 나눴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가운데, 컬링이 이번 올림픽을 통해 전 국민의 스포츠로 부상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제가 맡으면 잘 된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웃음)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으며, 기업가인 이 회장이 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배경이 궁금했다.이 회장은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빙상 종목 선수로 활동했다"면서 "동계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지만, 중학교 진학하면서 운동은 그만뒀고 그 인연으로 1997년에 인천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을 맡았다"고 설명했다.이어서 한국초등학교 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2011년 인천시컬링경기연맹에 이어 2015년부터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컬링 지원단장도 맡고 있는 이 회장은 최근 대표 선수들이 훈련하고 있는 이천 훈련원을 찾아 개당 50만원에 달하는 욕창 방지 방석 5개를 선수들에게 전달하며 격려했다. 동계패럴림픽까지 끝나면 지역 선수들에 지원을 집중할 예정이다. 그는 "국내 컬링 역사가 짧기 때문에 컬링을 경험한 사람들이 드물고, 그만큼 좋은 지도자가 많지 않다"면서 "현재 좋은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올림픽과 패럴림픽에 투입된 상황이기 때문에 대회 후 좋은 지도자를 찾아서 선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이 회장은 인천의 비장애인 선수가 태극마크 달기까진 시간이 필요하며, 장애인 컬링은 2022년 베이징 패릴림픽을 노려볼 만 하다고 분석했다."컬링은 네 선수의 고른 실력과 호흡이 중요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은 의성여중 재학 때부터 고교, 실업팀까지 12년 넘게 호흡을 맞춘 선수들입니다. 현재 선인중(남)과 석정중(여) 선수들이 훈련 중인데, 지역 고교에 컬링팀이 없기 때문에 이 선수들이 고교 진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선수단 지원은 연맹에서 할 수 있는데, 교육 관계 기관의 제도적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의성 마늘 소녀'가 나오긴 힘든 상황입니다. 장애인 팀의 경우는 좋은 지도자를 영입해 지역 실업팀 위주로 훈련을 한다면 다가올 올림픽에 나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이 회장이 보는 컬링의 매력은 근력과 지구력 등 힘을 앞세운 여타 운동과 달리 전략 종목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서양에선 컬링을 '빙판 위 체스'로 칭하기도 한다."바둑, 당구, 볼링 등이 합쳐진 컬링은 한국 사람들에게 딱 맞는 종목이라고 생각됩니다. 힘을 쓰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노인과 장애인 등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소통하며 즐길 수 있는 종목도 컬링 뿐이지요.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컬링을 했지 몸으로 하는 컬링을 한 것은 아닙니다. 북유럽 현지에서 보면 선수들처럼 딜리버리 하지 않고 편하게 공 굴리듯이 딜리버리 합니다. 쉽게 접근하면 매우 쉬운 경기입니다. 앞으로 지역의 컬링 동호인 수를 늘려서 컬링의 저변을 넓히는데 더욱 힘을 쏟을 것입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율기 회장은?경북 청도 태생인 그는 대구 달성고와 건국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코리아 메카트로닉스를 설립했으며 2007년 코멕스전자(주)로 법인 전환 후 대표로 재임 중이다. 스포츠계에는 1997년 인천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에 부임하면서 첫 발을 디뎠다. 2003년에는 대한빙상경기연맹 산하 한국초등학교 빙상경기연맹 회장으로 부임했다. 12년 동안 연맹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2011년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과 2015년에 인천시장애인컬링협회 회장으로 취임해 인천지역 양대 컬링 단체를 이끌고 있다.인천 컬링사(史)를 새로 쓰는데 중심에 섰던 이율기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 겸 시장애인컬링협회장은 지난 26일 인천 선학컬링장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경기에 대한 소회와 함께 "지역 컬링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율기 인천시컬링경기연맹 회장 겸 시장애인컬링협회장은 지난 26일 오후 인천 선학컬링장에서 훈련 중인 석정중학교 선수들에게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처럼 열심히 연습한다면 우리도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말하며 응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2-27 김영준

[인터뷰… 공감]8번째 지방선거 앞둔 우근학 경기도선관위 상임위원

1987 개헌 투표 시작으로 30여년 외길관리만 하던 예전엔 불법 심했지만…선관위 권한 강화·사전투표로 진일보무탈했던 '조기 대선' 등 기억에 남아안정적 시스템 입증 자부심 가질만해경기도 투표율 높지않아 어깨 무거워'처음'이란 누구에게나 설레고 잊지 못할 순간이다. 상인에겐 첫 손님, 배우에겐 첫 무대, 기자에겐 첫 기사의 기억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직원들에게는 처음으로 관리한 '첫 선거(투표)'가 그렇다. 일평생 선관위에서 일한 우근학(58) 경기도선관위 상임위원에게도 첫 선거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귀중한 조각이다.1986년 입사한 그의 첫 선거(투표)는 대통령 직선제를 결정한 1987년 10월 27일 9차 개헌 국민투표였다(투표는 찬성·반대 의사 표시를 묻는 것, 선거는 투표를 통해 공직자를 결정하는 절차로 사전적 의미가 다르다). 두달 뒤인 12월 16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대통령을 뽑은 13대 대통령 선거는 그가 관리한 두 번째 선거였다. 7번의 대통령 선거와 8번의 국회의원 총선거, 7번의 지방선거, 40여차례의 재보궐선거. 선관위 막내 직원이었던 그가 1급 상임위원이 될 때까지 30년 넘게 치러온 수많은 선거는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이기도 했다.2018년 6월 13일 우 상임위원은 경기도선관위에서 8번째 지방선거를 치르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가 이뤄지면 31년 만에 2번째 국민투표를 지켜보게 된다. 특히 올해는 대한민국에서 선거가 실시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방선거를 4개월여 앞둔 지난 8일 경기도선관위에서 우 상임위원을 만난 이유다.# '1987'에서 '2018'까지"격세지감이죠." 대한민국 선거의 산 증인으로 꼽히는 우 상임위원에게 30년 전과 지금의 선거를 비교해보면 어떻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 상임위원의 첫 선거는 혼란스러웠다. 9차 개헌 국민투표에 이어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는 16년 만에 부활된 대통령 직선제였다. 선거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만큼 과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는 오프라인 선거 운동만 있었으니까 후보들 간 청중들을 동원하는 형태의 '세 대결'이 어마어마했다. 몸싸움도 벌어지고 버스가 전복되기까지 했다. 유권자들도 (불법 선거 등에 대해) 죄의식을 덜 느꼈다"고 첫 선거 분위기를 회상한 우 상임위원은 "그때는 지금처럼 선관위에 감시·단속 권한이 없었다. 정말 선거를 '단순 관리'하는 일만 했었다. 제재가 미약하다보니 후보자도, 유권자들의 긴장도도 덜했다"고 말했다.선거를 치르면 치를수록 선관위의 권한은 강화됐고 선거판에서도 금품과 청중 동원 등이 서서히 사라졌다. 1989년 선관위에서 선거범죄에 대한 단속 업무를 처음 실시하게 됐고, 1997년에서야 실질적인 단속 권한이 주어졌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든 사전에 투표를 해도 엄정하게 관리될 정도로 선거 분위기와 시스템이 진일보했다는 게 '선거 관리 외길'을 걸어온 우 상임위원의 자부심이다.수십 차례 관리했던 선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거를 질문하니 2014년 지방선거와 지난해 조기대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 상임위원은 "2014년 지방선거는 사전투표가 전국 단위로는 처음 실시됐던 선거다. 수원시민이 부산에 가서 수원시장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이런 시스템은 없다. 도입 전에는 제대로 관리가 될 지 의문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당연히 관리자 입장에선 긴장도, 걱정도 많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 때는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날까 직원들과 확인하고, 또 수없이 점검하며 고생을 정말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고 털어놨다.역사상 처음 실시된 조기 대선은 선거 전문가인 그 역시 처음 경험해보는 선거였다. 탄핵 후 사회가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던 와중에도 '장미 대선'은 많은 유권자의 관심을 받으며 무탈하게 치러졌다. 민주화의 봄이 오며 혼란스러운 첫 선거를 치렀던 만큼 촛불혁명 후 무리없이 이뤄진 조기 대선이 인상에 깊이 남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우리나라는 3권 분립 국가잖아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의결했고, 사법부의 한 축인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을 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역시 헌법 기관인 선관위 관리 하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갖고 있는 국가가 몇이나 될까요? 그야말로 시스템으로 빠르게 안정됐습니다. 상당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6월 13일'그는 이제 또 하나의 선거를 준비 중이다. 전국에서 가장 유권자도 많고, 후보자도 많은데다 지역 특색도 다양해 경기도는 가장 관리하기 까다로운 지역으로 꼽힌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며 예측하기 쉽지 않은, 위법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선거 범죄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도의 투표율은 결코 높은 편이 아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둔 우 상임위원의 어깨는 가볍지 않다.우 상임위원은 "다른 건 몰라도 지연, 혈연, 학연에 얽매이는 선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방선거의 투표용지는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비례대표 광역의원, 비례대표 기초의원까지 모두 7장이다. 6·13 지방선거와 더불어 국민 개헌투표까지 동시에 실시하는 게 확정되면 투표용지만 무려 8장이 된다. 투표용지가 많을수록 후보와 공약을 꼼꼼히 살피지 않고 한 정당에만 몰아주는, 이른바 '줄투표'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게 그가 우려하는 점이다. 우 상임위원은 "지방선거는 도선관위 입장에서 가장 관리하기 어려운 선거지만 주민들 입장에선 우리 동네를 바꿀, 내 일상을 바꿀 풀뿌리 일꾼을 뽑는 가장 중요한 선거"라며 "주민이 주인이 되는 '동네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유권자들도 후보와 공약을 세세하게 살펴 한 표를 던져야 한다. 선관위도 유권자들의 선거 편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6월 13일에는 그 역시 한 명의 유권자로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어떤 후보를 뽑겠냐는 물음에 "정책과 공약을 꼼꼼하게 본 다음 결정하겠다"며 빙긋 웃었다. "선거 당일에는 선관위가 아무래도 바쁘고 긴장돼서요. 저도 사전투표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바쁘고 시간 없으셔도 어디서든 사전투표, 아시죠?"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우근학 상임위원은?▲1959년 용인시 출생▲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도시 및 지방행정학 석사▲1978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 생활 시작, 1986년 선거관리위원회 입사▲2013~2014년 중앙선관위 기획국장▲2015년 경기도선관위 사무처장▲2016~2017년 충청남도선관위 상임위원▲2018년 1월 ~ 경기도선관위 상임위원▲2010년 근정포장우근학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후보와 공약을 꼼꼼히 살펴 주민이 주인이 되는 '동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소중한 한표를 행사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8-02-20 강기정

[인터뷰… 공감]'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 운영' 남인천중·고 윤국진 교장

배움에 한 맺힌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인천에는 '만학도(晩學徒)'들을 위한 학교는 없었을 것이다. 신포동에서 '메리야스' 장사를 하던 청년은 그 옛날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던 '공순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를 지키고 있다.인천 유일의 학력인증 평생학습 기관 '남인천중·고등학교' 윤국진(73) 교장은 "단 1명의 만학도가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 최초 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을 개설해 배움에 목말랐던 만학도의 꿈을 이뤄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월 31일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국민훈장에 준하는 국민포장은 각계각층에서 묵묵히 국민을 위해 헌신한 유공자에 수여하는 포상으로 대통령표창보다 한 단계 높다.윤 교장은 해방을 한 해 앞둔 1945년 충북 괴산의 농촌에서 10마지기의 논과 2천 평의 밭을 가진 부농의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남부러울 것 없던 그의 유년기는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산산조각 났다. 제대하고 돌아온 형은 집과 땅을 몰래 팔아치웠고 윤 교장은 어머니, 누나와 함께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학교는 다녔는데 점심을 싸가지 못하니까 물로 배를 채우고, 결국에는 수업료를 내지도 못해 국민학교 졸업장도 따지 못했어요. 누나와 산에 가서 땔감용 솔방울을 따다가 8㎞ 떨어진 증평에 팔면서 끼니를 때웠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도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리셔서 '왜 어린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나' 하늘을 원망했어요."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먹고 사는 게 우선이었다. 보리쌀과 풀죽을 쑤어먹으며 살았던 그는 어머니를 시집간 누나의 집에 맡기고 13살의 나이에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 인천에 먼저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는 동네 형이 고향에 내려와서는 "인천에 오면 취직도 시켜주고 먹고 살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함께 인천에 가자고 했던 형은 연락을 끊고 사라졌고, 먼 친척에게서 150환을 얻어 인천으로 떠났다."기차표를 사려니까 돈이 부족해 영등포행 표를 산 뒤 인천까지 무임승차로 가다가 역무원에게 걸렸어요. 이를 딱하게 여긴 동인천역 역무원이 하루를 재워주고 역전에서 신문보급소를 하는 지인을 소개해줘 그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지요."그 뒤로 윤 교장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과자공장, 구두닦이, 도넛가게 점원,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돈 되는 일은 다 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배움을 잊고 살던 그에게 지나던 대학생이 건넨 말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돈 벌어서 한다는 놈치고 공부하는 놈을 못 봤다"는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 윤 교장은 대학생 형이 소개해준 독학 교과서인 '서울강의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넛가게에서 손님으로 만난 고학생을 따라 경동사거리의 한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고아가 된 학생, 섬에서 온 학생,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꿈을 키우는 소년들이었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윤 교장을 우연히 본 당시 영화중고등학교(현 대건고등학교) 교사가 야간학부로 오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이어가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하니 23살이 됐고 군 입대를 하게 됐다.제대 후 아내를 만나 결혼한 그는 가난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불우청소년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다."직장을 다니기는 했는데 월급으로는 턱도 없으니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70년 당시 코오롱에서 나오던 '메리야스'인 '88나이롱'을 구로동에서 가져다 신포시장에서 팔았죠. 백화점 물건과 차이는 없는데 가격이 싸니 잘 팔렸었죠." 10년 뒤 그는 '현대의류백화점'이라는 번듯한 의류판매업소를 열어 제법 큰 돈을 벌었다.윤 교장은 1984년 7월 중구 선린동 인천역 앞에 있는 2층 규모 연립주택을 학교로 개조해 '남인천새마을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오랜 꿈을 이룬 순간이다. 새마을금고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인수해 '공순이'라고 불리던 근로 청소년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4개의 교실과 기숙사를 만들고 10명의 교사를 채용했다. 사재를 털어 타자기와 실습기자재를 사들였고 은행 대출을 받아 학교를 운영했다.문제는 근로 청소년들의 졸업장이었다. 이들은 학교를 수료해도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해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중·고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당시 정권 실세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종로 사무실을 막무가내로 찾아갔어요. 비슷한 처지인 부산부경보건고교 권성태 교장과 함께 우리 같은 사회교육시설도 학력을 인정 해달라고 요청했죠. 결국, 대통령 공약사항에 포함됐고 1986년부터는 검정고시 없이도 학력인정을 받는 학교로 탈바꿈 할 수 있었어요."학생 수가 점차 늘어나 선린동 연립주택으로는 800여 명의 학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용현동의 쇼핑센터를 빌려 학교로 사용하다가 1990년 남구 학익동 지금의 학교 부지(6천890㎡)로 이전하게 됐다.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한 뒤 국유지를 매입해 복지관과 학교 건물을 지었다. 복지법인 전 재산은 사회에 환원했다. 이어 문교부로부터 전 과목 학력인정을 받아 교명을 남인여자상업고등학교 개명했다. 학교가 점차 자리 잡자 그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장년층에게도 졸업장을 딸 기회를 주고자 했다. 여자라서 또는 막내라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무학(無學)의 한을 풀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만학도의 꿈을 이룰 성인 대상 정규 중·고교 과정은 1999년 개설됐다. 인천 최초의 성인 대상 학력인증 학교였다."1950~60년대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못 배운 사람이 많은데 부끄러워서 이를 밝히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내 또래 어른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자는 생각에 성인반을 개설하게 됐죠."1년 3학기제의 단기 코스로 교육청 인가를 받아 2년 과정의 중·고교반을 개설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5천700명의 성인 학생을 배출해 이들이 제2의 인생을 살도록 도왔다. 특히, 올해부터는 인천대학교 평생교육원과의 업무협약 체결로 남인천중고등학교 졸업생이 인천대에서 전문학사 취득과 학사과정 편입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윤 교장은 건강을 유독 챙긴다. 자신이 없으면 학교가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인 학교의 인가를 윤 교장 개인 명의로 받았고, 이는 승계가 되지 않기 때문에 윤 교장이 곧 학교를 의미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5번이나 완주할 정도로 운동광인 그는 관교동 집에서 학익동까지 매일 걸어서 출퇴근한다."인천에 중·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는 학교를 운영해야 합니다. 이번에 받은 국민포장은 저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배움의 한을 풀어준 우리 학교, 학교 구성원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록수' 정신으로 더 정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죠."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윤국진 교장은?-약력▲1945년 충북 괴산 출생▲1957년 인천으로 이주▲1970년 신포시장에서 내의가게 운영▲1980~2010년 현대의류백화점 운영▲1984년 남인천새마을실업학교 설립(교장 취임)▲1988년 사회복지법인 백암한마음봉사회 설립(대표이사 취임)▲1991년 인천종합사회복지관 초대관장▲1991년 백암어린이집 초대원장▲2000년~ 남인천중고등학교 교장-상훈▲1988년 인천시민상(사회봉사부문) 수상▲1990년 인천교육대상 수상▲2018년 대한민국 국민포장 수상인천 유일의 학력인정 평생학습 기관인 '남인천중·고등학교' 윤국진 교장이 인천시 남구 학익동 학교 현관에서 "단 1명의 만학도가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며 학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1984년 7월 20일 윤국진 교장이 부인 이혜숙 여사와 함께 인천 중구 선린동 남인천새마을실업고등학교 현판을 달고 있다. /윤국진 교장 제공인천 중구 선린동 연립주택을 개조해 설립한 학교 전경. /윤국진 교장 제공

2018-02-13 김민재

[인터뷰… 공감]야구 인프라 전략 발표 류준열 SK 와이번스 대표이사

프로야구 SK 와이번스는 2018년 새해 들어서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을 발표했다.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SK 구단이 가진 자산 및 역량에 연고지인 인천 지역의 기업과 관공서, 각종 단체들의 참여를 결합해 지역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사회·경제적 가치 창출을 하려는 것이다.2007년 당시 막내 구단이었던 SK는 '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로 바람을 일으켰다.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인 '스포테인먼트'는 구단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당시 타 구단들이 무형의 홍보 효과에만 의존하던 상황에서 SK는 팬 중심(Fan first) 사고를 기반으로 혁신에 나섰다. SK의 스포테인먼트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의 제공에서 출발했다. SK는 그해 창단 첫 우승도 달성했다. 이후 스포테인먼트는 관객들의 관람시설 개선, 경기장의 체험 및 스토리 기반의 복합 여가 공간 구축, 프로 구단의 사회적 책임 이행에 이르기까지 진화해왔다올해 구단 마케팅 중심에도 기업사회공헌(CSR) 활동을 두었다. 기존 CSR 활동에 연고 지역을 결합시켜 공익과 함께 보다 인천과 팬들에게 다가서겠다는 의지를 내세웠다.'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과 진화하는 구단 마케팅,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류준열(54) SK 와이번스 대표이사를 최근 집무실에서 만났다. 류 대표이사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 전문가이기도 하다.류 대표이사는 새 구단 점퍼를 입고 취재진을 맞았다. 아직 공식 발표 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 점퍼가 첫 화제로 올랐다. 류 대표이사는 "선수들이 입고 싶은 옷이 아닌 팬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디자이너를 위촉해 새롭게 디자인했다"며 "야구장에서만 입는 옷이 아닌 생활 속에서도 즐겨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빨간색을 줄였다"고 설명했다.이내 화제를 바꿔서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에 대한 류 대표이사의 설명을 청했다."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구단에서 진행한 20회에 달하는 CSR 활동들 중 인천 서구 지역 발달 장애 아동들 15~20명을 대상으로 20차례에 걸쳐 야구 교실을 진행한 바 있는데, 구단에선 코치를 파견했습니다. 지역에선 발달 장애 아동들을 추천해줬고, 서구 지역에 기반을 둔 SK 석유화학은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펀딩)을 보태면서 3자가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소외계층 대상의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이처럼 구단이 가진 야구 인프라(선수와 지도자, 야구 경기장, 응원단 등)를 지역 사회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는 것이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의 핵심입니다. 이전 CSR 활동이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추진된 프로젝트였다면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지역 기업과 행정기관, 사회복지 관련 기관 등에 항시 열어놓고 활용할 의향을 얘기해 달라는 것입니다."류 대표이사는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의 아이디어를 미국에서 얻었단다."지난해 미국 구단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워싱턴 내셔널스의 CSR 총괄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커뮤니티 플랫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죠. 워싱턴 DC는 미국 내에서 노숙인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이 담당자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을 플랫폼화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단편적으로 진행되는 CSR 활동 보다는 개방해서 플랫폼화 하면 많은 아이디어와 함께 여러 주체들의 참여도 이끌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시너지 효과도 클 것이라는 확신도 있습니다."'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야구장을 찾는 팬과 인천시민에게 행복한 기억과 스토리를 만들어주자는 측면에서 스포테인먼트와도 맞닿아 있었다. 류 대표이사는 "지금까지 진행한 CSR 활동도 그렇고, 야구장을 찾은 고객에게 즐거운 추억과 스토리를 전해 주려는 지향점은 같다"면서 "하지만, 스포테인먼트가 우리가 기획해서 보여주고 팬들이나 시민은 그저 즐기는 이분법적 관계였다면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은 함께 체험하는 형태여서 스토리의 강도는 훨씬 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올해로 부임 3년 차를 맞는 류 대표이사가 꼽는 부임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구단의 CSR 활동 중 하나였던 '희망 더하기 이벤트'이다."2016년 처음 시작했을 때 실종(10년 이상)된 자식을 마음에 품은 부모 5분을 찾아 뵈었고, 그 분들의 마음을 영상으로 담아서 홈 경기 당일 빅보드를 통해 보여줬습니다. 당시 관중과 선수 모두 부모님들의 염원을 느끼면서 뭉클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프로 야구단이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했던 때인데,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겠구나'하는 결심을 하게 만든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벤트를 하면 선수들이 귀찮아하진 않을까'하는 우려도 했었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2017년에는 실종아동에 머물지 않고 입양아동으로 확대했고, 몇몇 구단도 동참해줬습니다. 여타 종목의 스포츠 스타들도 뜻을 같이했고요. 대상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올해도 '희망 더하기'는 이어집니다."프로구단으로서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구단의 성적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류 대표이사도 공감을 표시했다."성적이 좋으면 관중이 늘죠. 하지만 성적만 좋다고 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는 통쾌함과 함께 4시간 정도 야구장에 있으면서 보고, 먹고, 상품을 사고, 체험하는 모든 것들이 누적되어서 스토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적과 관중, 두 부분 모두 고민하고 있습니다. 트레이 힐만 감독과 염경엽 단장이 올해 두 번째 시즌을 맞게 되는데, 두 분 모두 지난해 보다는 나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고민 많이 하실 겁니다. 지난해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올해에는 홈에서 포스트시즌을 치르자는 목표를 세워놓았습니다. 우승 목표는 앞으로 2~3년 내로 잡았습니다."우승을 하고, 좋은 성적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SK가 택한 부분은 '우수한 코치'이다. SK는 코치 육성 시스템을 두고 있다.류 대표이사는 "우수한 선수가 나오기 위해선 코치가 유능해야 한다"면서 "지난해부터 코치들은 미국 등 외부에서 진행되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접하게 하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염경엽 단장이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끝으로 류 대표이사는 시즌 개막을 기다리고 있는 야구팬들과 시민에게 자신감 넘치고 희망에 찬 메시지를 전했다. "올해도 홈런 군단의 이미지를 가져갈 것입니다. 여기에 김광현 등 좋은 투수들도 가세하기 때문에 지난해보다 더욱 강한 팀이 될 것이고, 그만큼 경기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수와 팬이 함께 만드는 이벤트들도 많이 만들고, 팬들이 주체가 되는 야구장을 만들어서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릴 것입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류준열 대표이사는?전북 전주 태생인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 학사,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SK 텔레콤 입사 후 2010년 전략기획그룹장, 2011년 미국 플랫폼 사업본부장, 2012년 서비스탑 대표이사, 2015년 성장전략실 실장을 역임했으며 2016년 1월 SK 와이번스 대표이사로 부임했다.류준열 대표이사는 야구팬과 시민들에게 "야구장에 많이 오셔서 즐겨주시면 좋겠다"면서 "관중이 주체가 되는 야구장을 만들어서 경기장을 찾은 모든 분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리겠다"고 다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류준열 SK 와이번스 대표이사가 올 시즌을 앞두고 새롭게 선보인 구단 점퍼를 입고 인터뷰를 했다. 류 대표이사는 "프로야구단은 연고 지역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구단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것이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생각했다. '야구 공유 인프라 전략'에 대한 각계각층의 참여를 통해 함께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1-30 김영준

[인터뷰… 공감]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윤수천 작가

대부분 '영감' 버스에서 얻어매일 눈 뜨는 게 너무 신나시간 많은 노인에겐 최고의 놀잇감내가 글 쓰는 사람인 건 행운할아버지는 바람이 매섭게 부는 한겨울에도 버스 타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버스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떠오르는 공상을 수집하는 일이,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은 '창작여행'이라 즐겁기만 하단다. 그것이 평생 80여 권의 가슴 따뜻한 동화를 아이들에게 선물한 거장의 숨겨둔 비결이리라.한국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어린이들의 친구인 윤수천 작가는 인터뷰가 약속된 날(지난 17일)도 버스를 탔다. 추운 날씨에 건강을 걱정했더니 "나는 버스 타는 일이 정말 즐거워요. 아무 일이 없어도 버스를 타고 세상 한바퀴를 돌기도 해요. 혼자 가만히 앉아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 버스만큼 좋은 게 없지요. 내 동화의 영감은 대부분 버스에서 나왔어요"라며 맑게 웃었다.윤수천 작가는 올해로 76세다.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윤 작가에게 나이는 정말 숫자일 뿐이다. 쉼없는 작품 활동이 이를 방증한다. 그는 지금도 매일 글을 쓴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너무 신이 납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무슨 글을 쓸까 고민하는 일이 설레거든요. 나같이 시간 많은 노인은 놀잇감이 필요해요. 혼자서도 잘 놀수 있는 일 중에 글 만한 것이 없어요. 나는 내가 글쓰는 사람인 것이 몹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사실 윤 작가의 삶은 '글' 쓰는 것이 좋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님이 나를 너무 귀여워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어요. 심지어 물가가 위험하다며 가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지금도 수영을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너무 귀하게만 키우셔서 오히려 모험에 대한 갈증이 강했던 것 같아요. 행동으로 옮기질 못하니,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그걸 글로 표현하는 게 즐거웠어요. 문학은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윤 작가에게 글은 가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케 해주는 친구가 됐고, 나이가 들수록 재능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중학교 작문시간에 내가 쓴 작품을 가지고 선생님이 한 시간 동안 수업을 한 적도 있어요. 고등학교 때는 전국문예대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구요. 그때부터 평생 글쓰는 일은 놓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 같아요. 비록 밥벌이로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글 쓰는 일을 놓아본 적은 없습니다."당시 체신국(지금의 우정청)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국방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으로 일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모두 글과 연결돼 있다. "다른 공무원은 승진이 중요한 가치였지만, 나는 승진을 바라지 않았어요. 글쓰는 데 시간을 할애하기에도 바빴으니까요. 국방부 정훈국에 간 것도 내가 흠모하던 소설가 선우휘씨가 정훈장교 출신이어서 막연히 정훈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렇게 10여 년 국방부 본부에서 근무를 했고, 승진하기 싫어서 국방일보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곳에선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한평생 글을 써도 대표작 하나 내기 힘든데,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여섯 작품이 실렸을 만큼 대표작이 많다. 올해에도 그가 2011년에 쓴 '할아버지와 보청기'가 초등학교 4학년 국어활동 교과서에 실린다. 그의 작품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나는 삶이 소설 같지 않았어요. 사납게 살지를 못했어요. 젊었을 때야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워낙에 정을 많이 받고 자라 삶이 동화 같아요. 동화를 써야 하는 게 내 그릇이죠. 나는 아동문학의 궁극적 목표가 희망과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절망이 있어도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희망의 씨앗을 보여줍니다." 그의 동화는 어른이 보아도 가슴 한 구석에 '쿵'하는 울림이 전해진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를 주인공 삼아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잊고 있었던 '속사정'을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할아버지와 보청기만 해도 '소통불가'로 치부해버린 노인의 세계를 아이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로당 앞에서 보청기를 슬그머니 빼 주머니에 넣은 할아버지를 의아해 하던 손자에게 뻥튀기 할아버지가 넌지시 속사정을 말해준다. '할아버지들이 너희처럼 귀가 밝아서 남이 한 말을 제때제때 알아들으면 하루해가 얼마나 길겠니.'그가 애착을 갖는 작품도 그런 유다. 2008년 작 '나쁜 엄마'는 뺑소니로 아버지를 잃고 하루아침에 두 딸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생선장수 엄마를 미워하던 딸 난희가 거친 엄마의 손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며 마음 속의 응어리를 푼다. "동화라는 것이 대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가급적 소외된 아이들을 밖으로 꺼내 따뜻하게 감싸주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편부모 가정에서 어렵게 사는 난희도 그렇고, 뇌성마비 아이가 상상 속에서 고래를 그리는 희망을 노래한 '고래를 그리는 아이'나 몸집이 크고 행동이 굼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고릴라와 세희의 우정을 그린 '내 짝꿍은 고릴라'도 사회의 그늘 속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 그 아이들의 진짜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줬죠."그는 동화의 효용을 어린이에 국한하지 않았다. "어린이가 늘 어린 상태로 있지 않아요. 동화의 주 독자가 어린이지만, 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동화는 어른이 읽어도 유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의 마음 속에도 어린이가 있어요. 동화만이 갖는 전파력이 어른에게도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반영하는데 주저하지 않아요." 살다보면 다 큰 어른도 위로받고 싶다. 작가는 '행복한 지게'를 통해 어리숙한 아들이 나이 든 아버지를 업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는 모습이 우습지만, 아버지가 즐겁고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이 시대 어른들을 다독인다. 오는 3월에 내놓을 신작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봇 가사 도우미가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있는 엄마를 깨우는 '로봇 은희'와 치매 걸린 노모를 등에 업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곧잘 해주던 기차놀이를 하는 아들(가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이 등장하는데 현실에 지친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그의 동화는 가슴 따뜻하게 독자를 안아준다."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동화의 궁극적 목표지만, 시대가 달라지면 꿈을 표현하는 동화의 방식도 달라져야 해요. 옛날의 효와 오늘날의 효가 전혀 다르고, 아이들이 겪는 문제와 그 세계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이웃이라 말하더라도 이제는 전세계가 이웃인 세상이에요. 동화도 시대에 맞게 아이들이 꿈을 찾아갈 수 있는 방향타가 돼줘야 합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넓혀주고 다양한 시각을 많이 보여줘야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관찰해서 그에 맞게 동화를 쓸 생각이에요."동화를 쓰는 일 말고도 그는 글쓰기에 관련된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원 중앙도서관에서 13년째 하고 있는 '행복한 글쓰기'는 물론 기업, 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쓰기 강의 요청이 있으면 나선다. "요즘 시대 사람들이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그만큼 마음 속에 쌓인 것들이 많은 거겠죠. 그 욕구를 표현하는 데 글 만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늘 강의에 나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글을 곁에 두고 있어 행복함을 느낀다고. 글쓰기 위해 사색하고 생각을 다듬는 일이 즐겁다고요.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겠죠." 문득 윤수천 작가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우리 곁에 남아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도 기댈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한 법이다.■윤수천 작가는?-주요 약력- ▲1942년 7월 29일(음력) 충북 영동 출생 ▲1954년 11살 되던 해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 ▲1960년 19세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주최 전국 고교생 한글시 백일장에서 장원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항아리'로 당선 ▲1981년 첫 동화집 '예뻐지는 병원' 출간 ▲199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심사위원 -주요 작품- ▲별에서 온 은실이 ▲행복한 지게 ▲꺼벙이 억수 ▲엄마와 딸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 ▲고래를 그리는 아이 등 동화와 동시 80여 편-수상 내역- ▲소년중앙문학상 '산마을아이' '아침' 우수작 ▲경기도문화상 ▲한국아동문학상 '꽃가게 손님' ▲방정환문학상 '돈키호테 소방관' 등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찬 바람이 매섭게 불던 지난 17일, 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윤수천 동화 작가를 경인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그는 "매일 아침 오늘 무얼 쓸까 고민하는 것이 즐겁고 설렌다"며 소년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2018-01-23 공지영

[인터뷰… 공감]제2여객터미널 개장 앞둔 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제2터미널 개장으로 인천공항은 연간 7천200만명의 여객과 500만t의 화물 처리 능력을 갖추게 돼 명실상부한 동북아 지역 대표 공항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인천공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제2터미널을 포함한 3단계 사업(사업비 4조9천300억 원)을 마치자마자 4단계 사업을 추진한다. 제2터미널을 확장하고, 제4활주로를 조성해 연간 여객 처리 능력을 1억명 수준까지 확대한다. 인천공항은 셀프·자동화 서비스 확대, 첨단 ICT(정보통신기술), AI(인공지능) 등을 공항 곳곳에 적용해 '스마트 리딩(leading) 공항'으로도 거듭나고 있다. 세계공항서비스평가 12연패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보유한 인천공항은 더 높이 비상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인천국제공항공사 정일영 사장은 막바지 제2터미널 개장 준비 상황 점검을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2터미널 현장으로 출근해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며 성공적인 개장을 위해 전력하고 있다. 15일 오후 제2터미널 점검회의를 마치고 나온 정일영 사장을 만나 개장 준비 상황에 대해 들었다. 제2터미널 개장 준비로 바쁜 정 사장을 고려해 미리 질문지를 보내놓고 서면으로도 답변을 들었다. 그는 화장실 다녀올 시간도 없었던지 인터뷰용 사진 촬영 중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뜨기도 했다. 정 사장은 "개항을 위한 준비를 다 마쳤고, 이제는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에 대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제2터미널에 올 때도 일부러 공항철도를 이용했다. 공항 이용객의 입장에서 불편한 부분이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인천공항공사는 지난 2015년 12월 제2터미널 오픈과 관련한 전담조직을 구성하고, 운영·오픈 준비와 관련한 통합관리를 시작했다. 25개 분야 3천 개 세부 추진과제를 도출해 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실제 운영 상황을 가정한 시험운영도 벌여왔다. 그동안 투입된 가상여객만 2만2천 명에 달한다. 가상수하물 7만7천 개, 항공기 7대 등도 시험 운영에 동원됐다. 1만2천여 명에 달하는 운영인력이 새로운 시설과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 관숙화, 이전 준비 등의 작업도 했다. 정 사장은 "마지막까지 고객 혼선 예방 취약 분야, 미비 분야 중심으로 반복훈련과 개선을 지속해서 진행 중"이라며 "오픈 당일부터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제2터미널 개장을 준비하면서 정 사장은 여객 편의 향상을 강조해왔다. 제2터미널은 설계 단계부터 여객을 중심에 두고 시설을 배치했다는 평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가야 하는 교통센터와 여객터미널 간 거리는 59m로, 제1터미널(223m)보다 크게 단축됐다. 제2터미널은 입·출국장을 통합해 대기시간은 줄이고, 대기공간은 3배 가까이 확대했다. 출국 층 중앙에는 셀프체크인(여객이 스스로 탑승권 발급), 셀프백드롭(여객이 직접 수하물 위탁) 기기를 집중 배치한 '출국수속자동화구역'과 여객이 편리하게 민원 처리를 할 수 있도록 '정부기관 통합민원센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환승 관련 시설을 인접 배치한 환승 집적화와 차별화된 환승 편의지역 조성으로 허브공항에 걸맞은 환승 인프라도 구축했다. 양방향 정보안내 시스템, 안내로봇 운영, 최신형 원형보안검색기 설치 등 스마트기술을 도입한 제2터미널은 스마트공항으로 거듭났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외에 상업시설 중앙 집중 배치, 상설문화공간 조성, 국내외 대표적 미술품 배치, 전망대·홍보관 운영 등으로 여객이 편리하고 즐겁게 공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제2터미널 개장 준비에 전력해 온 정일영 사장은 세세한 부분까지 꿰고 있었다. 이날도 기자에게 제2터미널에 입점한 '쉑쉑버거'를 맛보고 가라고 했다. 제2터미널과 교통센터에는 미국 프리미엄 버거인 '쉑쉑버거(쉐이크쉑·SHAKE SHACK)'뿐만 아니라 한국 팔도의 맛집으로 구성된 푸드코트 '한식미담길' 등이 조성됐다. 그는 제2터미널 앞에 심어진 장송(長松) 등을 언급하며 "터미널 자체가 오고 싶은 곳이 될 것이다. 봄이 되면 터미널 앞길이 데이트코스로도 큰 인기가 있을 것 같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실제로 제2터미널이 정식 개장하기 전인 이날도 터미널을 구경하기 위해 온 시민이 많았다.제2터미널은 해외로 떠나거나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환승객 등이 잠시 거쳐 가는 장소를 넘어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공항공사는 제2터미널을 차별화된 문화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 '아트포트(Art Port)'로 조성했다.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 프랑스), 율리어스 포프(Julius Popp, 독일), 김병주, 지니 서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예술작품 16종 33개를 배치하기도 했다. 정 사장은 "연간 6천 회가 넘는 문화공연을 실시해 인천공항에 머무르는 모든 시간이 즐거움과 감동으로 가득하도록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특히 터미널 내 국내외 대표작가가 한국의 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을 배치해 국내외 여객에게 품격 있고 아름다운 한국의 이미지를 각인하고 우리 국민의 문화적 향유기회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천공항이지만,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복수(2개) 터미널 운영에 따라 여객이 혼선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은 걱정되는 부분이다. 정 사장도 터미널을 착각하는 '오도착' 승객이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제2터미널로 이전하는 대한항공, 델타, 에어프랑스, KLM 등 4개 항공사와 함께 예방책 마련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항공사와 함께 문자메시지, 이티켓(e-ticket)을 통해 여객에게 이용 터미널을 알리는 사전 안내문을 발송한다. 고속도로와 공항 안내표지 체계 정비, 외국인 여객을 위한 해외 온라인 홍보, 대중교통 이용 안내 등도 진행하고 있다. 정 사장은 특히 탑승권 판매 항공사와 실제 항공기 운항 항공사가 다른 '공동운항(코드셰어)'의 경우 여객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정 사장은 "여객 오도착을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체계적으로 홍보와 안내를 하는 등 다각적인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객들의 인식이다. 인천공항 이용객은 출발 전에 반드시 본인이 가야 할 터미널을 확인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인천공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승객과 화물을 집결하고 분산시키는 '항공네트워크 중심 공항'으로서 허브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도 하고 있다. 항공네트워크를 동북아시아 공항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고, 복합리조트와 골프장 등 새로운 여객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공항복합도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항공정비(MRO) 특화단지 유치, 해외공항 사업 확대 등 신성장 동력 발굴에도 매진하고 있다. 정 사장은 "중국, 일본 등 경쟁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인구나 경제 규모가 제한돼 직항수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허브 경쟁력 확보를 통해서 공항의 성장이 가능하다"며 "주변국의 공항 투자 확대 등 허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다양한 노선'과 '고품질 서비스 제공' 등 차별화 전략으로 동북아와 제3국 간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는 허브공항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정 사장은 2023년까지 4단계 건설사업을 마무리해 '글로벌 메가 허브'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정 사장은 2020년까지 110개 이상 취항 항공사 유치, 1천만 명 이상 환승객 유치, 300만t 수준으로 물동량 확대, 인프라 확충 등을 통해 인천공항을 동북아 항공·물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정 사장은 "앞으로 공항 그 이상의 가치를 국민들께 되돌려주겠다. 더욱 활기차게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이 실현되는 인천공항이 되도록 하겠다"면서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되고 설렘이 감동이 되도록 공항가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정일영 사장은?▲1957년 충남 보령 출생▲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 영국 옥스포드대 발전경제학 석사, 영국 리즈대 경제학 박사▲1979년 행정고시 23회▲2000년 6월∼2001년 11월 건설교통부 국제항공협력관▲2001년 11월~2004년 11월 UN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2007년 1월~2008년 3월 건설교통부 항공기획관▲2008년 3월~2009년 1월 국토해양부 항공·철도국장▲2009년 1~5월 국토해양부 항공안전본부장▲2009년 5월~2010년 9월 국토해양부 항공정책실장▲2010년 9월∼2011년 7월 국토해양부 교통정책실장▲2011년 8월∼2014년 10월 교통안전공단 이사장▲2014년 11월∼2016년 1월 한국항공대학교 항공경영대학원 초빙교수▲2016년 2월~현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2016년 3월∼현재 국제공항협의회 이사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지난 15일 오후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4층 중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 사장은 18일 제2터미널 성공적 개장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면서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해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 12일 열린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그랜드 오프닝' 행사에서 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2여객터미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출국 층 중앙에 위치한 셀프체크인(여객이 스스로 탑승권 발급) 기기.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1-16 홍현기

[인터뷰… 공감]사재 털어 '세터상' 만드는 프로배구 신영철 한국전력 前 감독

수원 한국전력 신영철 전 감독은 배구팬들에게 80년대 한국 남자배구 최고의 세터로 평가 받는다.지도자로서도 인천 대한항공의 2010~2011 V리그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어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대한항공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건 2010~2011시즌이 처음이다. 또 만년 하위권팀으로 인식 되어 있는 한국전력도 4시즌 동안 사령탑을 맡아 정규리그 3위 2번 KOVO컵 정상 1번 등을 일궈내며 신흥 강호 대열로 이끌었다. 모교인 경기대에서 배구 트레이닝에 관한 박사 학위를 받으며 공부하는 지도자로도 알려져 있다. 명세터, 명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신 감독에게 별명이 하나 더 추가될 것 같다. #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는 선배가 되고 싶은 신영철신 전 감독은 2018년 시작과 함께 한국 배구계와 스포츠계에 화두를 던졌다. 그가 배구계와 스포츠계에 던진 화두는 '나눔'과 '관심'이다.그는 지난해 세터상을 만들기 위해 사재를 내놓기로 결심하고 대한배구협회 산하 단체인 한국중고배구연맹(이하 중고연맹)과 협의를 마쳤다. 신 전 감독은 "이름을 알리기 위해 그런건 아닌데, 관심을 가져 주시니 너무 감사하다"며 손사래를 쳤다.사실 신 전 감독이 세터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건 대한항공의 사령탑을 맡고 정규리그 정상에 오른 2011년 봄이다.당시 여러가지 상황상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고, 이후 한국전력 감독 시절에도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다.그리고 지난해 한국전력 감독에서 물러난 후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로 했다.신 전 감독은 "배구 선배로서 유망주들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프로선수를 꿈꾸는 유망주들에게 동기 부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중고연맹과 논의를 거쳐 올해 대통령배 대회부터 세터상을 만들게 됐다. 상금은 중고연맹과 협의해 금액을 정하려 한다"고 전했다.이어 신 전 감독은 "제가 만든 세터상은 남고생들에게 주는 상이다. 제가 이 상을 운영하다 보면 다른분들도 여고생들을 위한 상을 만들어 주실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아마추어 유망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에 나서 주실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배구인이 사재를 털어서 상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종목을 봐도 흔치 않은 일이다.신 전 감독은 "제가 선수로서 받았던 팬들의 사랑, 그리고 지도자로서 받았던 관심과 사랑을 후배들에게 돌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 세터상을 만들게 됐다. 열악해져 가는 아마추어 배구계에 작지만 힘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이어 신 전 감독은 "가족들 모두 세터상을 만든거에 대해 기뻐해 주고 있다. 아이들 제가 죽으면 자기들이 상을 이어가겠다는 말을 한다"고 귀띔했다.# 굴곡 많은 선수시절과 지도자 시절신 전 감독이 배구를 시작한 건 고향인 울진에서다. 울진 후포동부초등학교 재학시절 남들보다 키가 커 배구를 시작하게 됐고 각종 지역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대구 수성초등학교로 스카우트돼 전학가게 됐다.배구를 위해 대구 유학을 시작한 신 전 감독은 각종 전국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독식하며 경기대에 입학했다.순탄할거 같던 신 전감독의 배구 인생은 대학 진학부터 삐끄덕됐다. 신 전 감독은 "경북사대부고에서 함께 운동하던 동기들과 함께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특히 동기인 노진수 전 LG화재(현 KB손해보험) 감독과 함께 운동하기로 하고 성균관대 진학을 원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경기대에 가게 됐다"고 전했다.경기대에서도 신 전 감독은 한국 배구를 이끌 세터 자원으로 인정 받았다.이로인해 경기대 4학년 시절 금성과 현대자동차 등 4개팀이 스카우트전에 뛰어들었다.신 전 감독의 몸값이 폭등하자 이들 4개팀이 영입을 하지 않기로 합의해 배구선수로서의 삶을 위해 한국전력 유니폼을 입었다.그는 "일부팀에서는 강남에 아파트 3~4채 살 수 있는 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돈 보다는 함께 뛰고 싶은 선수와 함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며 "이런 문제들이 내 발목을 잡은거 같다.그러나 한전에 입단해서도 좋은 기회가 많았다"고 전했다.비록 약체 한전 유니폼을 입었지만 세터로서의 기량은 줄지 않았고 국가대표로 발탁돼 활약했다.또 1996년에는 신치용 감독을 따라 삼성화재로 옮겨 플레잉 코치로 활약한 후 은퇴했다.대한항공과 한전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신 전 감독은 감독으로 처음 맡았던 구미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에서는 선수 폭행으로 6개월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신 전 감독은 "사실이다. 당시 선수단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제가 감독으로 가면서 영입한 선수 2명에게 각각 엉덩이 1대씩 때렸다. 때린건 사실이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이어 신 전 감독은 "구단과의 마찰이 있어서 더 크게 부각됐던거 같다"며 "선수들에게 열정적인 플레이를 요구한다. 프로선수들이고, 성인이기에 자신의 플레이에 책임을 지게 한다"고 덧붙였다.# 생각하는 지도자, 팬의 사랑을 잊지 않는 선수신 전 감독은 "중고교 시절 선수 치고는 작은 키로 고민을 했다. 하지만 '하면 된다'라는 문구를 써 놓고 계속 노력했다. 안되면 될때까지 노력했다. 경기에서 안좋은 상황이 나오면 동료들에게 책임을 넘기기 보다는 나 스스로를 돌아 보고 개선해 나가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는 '열정', '신뢰', '책임감', '역지사지'를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생활하고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고, 선수들과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코트에서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열정적인 경기를 보여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배구를 위해 초등학생 시절부터 객지 생활을 했던 신 전 감독에게 운동 외에 또다른 관심은 책이었다.특히 신 전 감독은 중학교 재학시절 우연히 읽게 된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책을 보며 "나한테 철마는 다리다. 남들 보다 잘하려면 열심히 러닝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됐고 선수 시절 단체 운동을 시작하기 전 개인 훈련으로 러닝을 꾸준히 했다.신 전 감독은 "배구를 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가 중요하다. 자기계발에도 게을러서는 안된다"며 "선수나 지도자나 운동을 하면서 자기계발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내가 왜 이 운동을 하는지, 나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그는 "팬이 없는 스포츠는 의미가 없다. 코트 안에서 멋진 경기를 보여줄때 팬들이 박수를 보낸다"며 "항상 발전하는 배구, 팬들과 함께하는 배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신영철 감독은?▲경북 울진 출생(1964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경기대학교(박사) ▲1988~1996 한국전력 선수 ▲1996~1999 삼성화재 선수 ▲1999~2004 삼성화재 코치 ▲2004.02 ~ 2007.03 구미 LIG 손해보험 그레이터스 감독 ▲2009.12 ~ 2010.02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감독대행 ▲2010.02 ~ 2013.01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감독 ▲2013.04 ~ 2017.3 수원 한국전력 감독'명세터·명감독' 출신인 신영철 전 수원 한국전력 감독이 굴곡진 40여년의 배구 인생을 담아 세터상을 만들었다. 신 전 감독은 '발전하는 배구, 팬들과 함께하는 배구'를 위한 첫 걸음이며 2018년 시작과 함께 배구계에 '나눔'과 '관심'으로 후배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2018-01-09 김종화

[인터뷰… 공감]'인천시 산업평화대상'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김성태 위원장

도로위 4800여 조합원에 수상 영광 돌려1975년 고속지부 조직부 노동운동 첫발1980년 강제해산 재설립까지 8년 '공백'취임 초기 계약직 전환·임금체불 '심각'준공영제 도입 정규직 비율 80%로 올려근로조건 개선으로 서비스 질 향상 뿌듯동네 방방곡곡에 실핏줄처럼 퍼져 시민의 발이 되어주고 있는 시내버스는 그 어떤 사업장보다도 노사관계가 중요하다. 버스 노동자와 사용자 간 관계가 어긋난다면 매일 버스를 타는 시민들이 정상적인 일상을 누리기 어려워질 수 있다. 특히 2009년 인천시가 인천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도입한 이후 버스운송사업의 공공성은 더욱 커졌다. 인천시는 건전한 노사관계로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단체의 공로를 기리는 취지로 매년 '인천시 산업평화대상'을 수여하고 있다. 2017년 제27회 수상자로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이 선정됐다. 운수분야 노동단체가 개인이 아닌 단체자격으로 인천시 산업평화대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는 총 29개 지부(시내버스 23개, 시외버스 5개, 화물 1개)를 뒀고, 조합원은 4천800명에 달한다. 인천 버스노동자의 95%가 조합원이라서 교섭대표권을 가진 노조다.김성태(70)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 위원장은 "시내버스 준공영제 시행 이후 대중교통문화 정착과 인천지역 경제발전을 위해 더욱 전력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산업평화대상 수상의 영광은 열악한 근로여건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도로 위에서 고생하는 4천800여 조합원에게 돌린다"고 소감을 밝혔다.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는 1988년 9월 설립돼 올해로 꼭 30년째를 맞았다. 당시 9개 회사의 노동조합에 조합원 1천300여 명으로 출범해 지금의 규모로 확대됐다. 하지만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의 역사는 30년에 그치지 않는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는 전두환 정권 초기에 단행한 '노동조합 정화지침' 중 '지역지부 폐지' 명령에 따라 1980년 해산된 바 있다. 김성태 위원장은 1975년 3월 전국자동차노련 고속지부 조직부에 입사해 지역지부 폐지 조치 당시 인천노조에서 일하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전국자동차노련 고속지부 차장으로 인천에서 노동운동의 첫걸음을 뗐습니다. 새벽 5시에 시내버스 노선에 나가 조합원인 운전기사들에게 자동차노보를 나눠주면서 조합원들의 고충을 실감할 수 있었어요. 새벽 4시에 출근해 자정까지 운전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운수노동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고군분투하겠다고 결심한 게 40년 넘게 노동운동에 투신한 원동력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정화 조치로 인천노조가 강제 해산됐을 땐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좌절하지 않고 전국자동차노련 인천연락협의위원회(인천지역협의위원회)를 구성해 사무국장을 맡았어요."노조를 재설립하기까지 8년간의 공백기는 인천지역 운수종사자들의 암흑기나 마찬가지였다. 군사정권 속 인천연락협의위원회는 조합비를 걷을 수조차 없어 형편이 어려웠지만, 운수종사자들의 저임금 문제와 열악한 근무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1983년부터 소비조합을 열어 조합원에게 생필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을 저렴하게 공급해 간접적으로나마 임금인상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화물운전기사 조합원이 교통사고로 숨졌는데, 장례비가 없어 유가족이 어려움을 겪자 김성태 위원장이 직접 염(殮·시신을 수의로 갈아입혀 베로 싸는 의식)을 한 적도 있다."그때만 해도 운수분야가 차종별로 특수성이 있어서 버스는 동료가 죽으면 가지만, 화물은 잘 안 갔어요. 다들 어렵게 살 때니까. 조합원이 죽고 나서 염을 몇 번이나 하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김성태 위원장은 1985년 쌍마교통을 시작으로 인천지역 택시업계 노동조합 설립에 적극 나섰다. 현재 택시노조는 전국자동차노련에서 분리됐지만, 1988년까지 인천에는 43개 택시회사에서 노조가 탄생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1987년 택시노동운동에 뛰어든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국회의원과도 이때 인연을 맺었다. 김성태 위원장은 "송영길 국회의원, 한국노총 출신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해 노동운동하다 만난 노동계 출신 정치인들과는 여야 가릴 것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라고 했다. 김성태 위원장은 전국자동차노련 간사장을 거쳐 2000년 5월 인천노조 위원장에 당선돼 현재까지 연임하고 있다. 위원장을 맡자마자 인천지역 버스회사들이 소속 운전기사들을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임금 체불 문제도 심각했다. 김성태 위원장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2001년 6월 버스운송사업조합 사무실에서 점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다음 날인 2001년 6월 29일 밀린 임금을 지급하기로 사업주들과 극적으로 합의해 점거농성은 일단락됐다. "위원장을 맡아 10일 동안 사측인 버스운송사업조합을 점거하면서 강력하게 투쟁했고, 한국노총 중앙협의회도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사무실에서 개최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사업주와 인천시를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확산하는 것을 막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2002년 임단협 체결 때 인천지역 시내버스 경영악화로 인천에서 가장 큰 제물포버스 등 일부 회사의 부도위기로 조합원 상여금을 2년간 반납한 적도 있었고요. 조합원 모두가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이 있었지만, 회사가 부도나면 조합원이 일자리를 잃기 때문에 버스회사를 회생하는 데에 앞장서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부도위기 속 기사회생해 지금까지 노사분규 없이 건전한 노사관계로 발전했습니다."김성태 위원장은 시내버스 민영제에서 일어난 '경영악화~체불임금~서비스 저하'라는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댄 시내버스 준공영제 도입을 소중한 성과로 꼽았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가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요구한 것은 2004년 임단협 교섭부터다. 사측과 노조, 인천시 간 협상과 연구를 이어오다가 2009년 도입했다. 버스 준공영제 시행으로 75%가 비정규직이던 시내버스 운전기사의 정규직 비율은 80%까지 올랐다. "이미 8년 전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시작해 문재인 정부보다 한발 앞선 정책의 결실이었다"고 김성태 위원장은 강조했다. 근무여건도 격일제에서 1일 2교대로 바꿔 근무시간을 단축했다. 버스 1대당 운전기사 수는 평균 1.9명에서 2.35명으로 늘었다. 인천 시내버스 교통사고율은 19% 줄어 운전기사 처우 개선과 시내버스 서비스 향상에 모두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2016년에는 임단협을 통해 월 24일 근무에서 임금을 보존한 월 23일 근무로 전국 최초로 근무일을 1일 줄였다. "버스 준공영제의 핵심은 그동안 부실경영에 찌든 버스업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경영 효율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버스 운전기사 등 내부 구성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대(對) 시민 서비스 질의 향상으로 나타납니다. 대중교통정책은 복지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2016년 7월 말 인천도시철도 2호선 개통에 맞춰 시내버스 노선이 전면 개편됐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노선 개편으로 현재 시내버스 수입금이 200억원 이상 줄었습니다. 자연스레 준공영제 재정지원액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준공영제의 제도가 잘못돼 재정지원이 증가한다고들 하지만, 오해가 있습니다."김성태 위원장은 시내버스 운행은 '대중교통복지'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시내버스 준공영제는 사업주가 이윤추구에 몰두해서도, 인천시가 수익성만 따져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김성태 위원장은 "시내버스 준공영제가 인천시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만큼 법률에 근거한 행정관리로 사용자에 대한 지원 예산은 정확한 용역을 통해 해야 한다"며 "철저한 관리·감독으로 세금이 헛되이 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운수종사자들은 인천시민이 불편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에 역점을 두겠다"고 다짐했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사무실은 인천 남구 수봉공원 쪽에 있다. 1980년에 지어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노조위원장실 안에 있는 소파부터 메모함까지 사무실 건물과 나이가 같다. 김성태 위원장은 "조합원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노조를 운영하기 때문에 메모함 하나라도 쉽게 바꾸지 않으려 한다"며 "앞으로도 지속해서 장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하고, 운전자의 충분한 휴식시간이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성태 위원장은?▲1948년 충남 서산 출생▲인천 송도고 졸업,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 수료▲1975년 전국자동차노련 고속지부 조직부 입사(사진)▲1980년 전국자동차노련 인천지역협의위원회 사무국장▲1987년 전국자동차노련 간사장▲2000년~현재 전국자동차노련 인천지역노조 위원장▲2000년~현재 한국노총 인천본부 부의장·지도위원▲2001년~현재 전국자동차노련 부위원장▲2002~2017년 인천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2012년~현재 인천시 수입금공동관리위원회 위원▲1990년~현재 새얼문화재단 운영위원김성태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 위원장이 "시내버스 준공영제 시행 이후 대중교통문화 정착과 인천지역 경제발전을 위해 더욱 전력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산업평화대상 수상의 영광은 열악한 근로여건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도로 위에서 고생하는 4천800여 조합원에게 돌린다"고 소감을 밝히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성태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 위원장(가운데)이 2001년 인천시 버스운송사업조합 사무실 점거농성 당시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전국자동차노련 인천노조 제공

2018-01-03 박경호

[인터뷰… 공감]42년 공직생활 마감 앞둔 홍승표 경기관광공사 사장

문학소년, 가정형편 어려워 대학진학 대신 택한 길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이후 비서실로 자리옮겨열심히 산 덕에 선·후배 신망 높아… 명퇴 후 비서실장 복귀흑자 전환 등 성과로 화답… 이제 글 많이 쓰고 싶어평생 글쟁이로 살고 싶었다. 절절한 시구처럼, 시를 위해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꿈처럼 살 수만은 없었다. 그 시대는 다 그랬다. 전쟁이 막 끝난 1956년, 경기도 광주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홍승표는 하고 싶은 공부를 다할 수 없었다. 특히 시를 사랑하는, 심성 착한 문학소년은 내 욕심만 부릴 수 없었다. 홍승표 경기관광공사 사장은 오는 29일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다. 글쟁이로 살고 싶었던 문학소년이 생계를 위해 공직에 입문한 지, 42년 5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반세기에 가까운,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첫머리로 그는 문학소년이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연세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등학생 문예콩쿠르가 있었어요. 난 시조를 써 냈는데 장원을 했지. 그 문예콩쿠르는 국문학과 장학 특전도 있어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형은 군대에 가 있고, 밑으로 딸린 동생들이 수두룩해 집안 형편상 차마 대학 가겠단 말을 못하겠더라고. 학교 선생님들이 학비를 지원해준다 했지만, 광주 시골에서 서울까지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때마침 광주시 공무원 채용공고가 났는데, 그는 혹시 하는 생각에 가볍게 시험을 봤단다. 그리고 덜컥 합격을 하면서 공직에 들어섰다. "대학은 나중에라도 갈 수 있으니, 일단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미안하셨는지, 공무원을 반대하시더라고.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공직생활이지만, 글 짓는 재주 덕에 공보실로 발령받아 보도자료 쓰는 일을 했다. "공직생활을 돌아보면 홍보와 인연이 깊어요. 처음 공보실로 발령받고 보도자료를 썼는데, 그래도 잘 썼는지 내가 쓴 대로 신문에 나는 적도 많았어요. 전입시험을 봐 도청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공보실에서 일했는데 그때도 계속 보도자료를 썼어요. 공무원 되고 내리 3년은 보도자료만 작성한 것 같아요." 업무에서도 계속 재주를 써먹은 덕일까. 198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새벽, 숲길에서'로 당선됐다. 공무원 홍승표 이름 뒤에,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글 잘쓰는 공무원으로 소문이 난 덕에 그의 공무원 인생에 변화가 일었다. 비서실 근무가 계기다. 당시는 임명제인 관선 도지사 시절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각 과에서 도지사의 기념사를 준비했는데 그 수준이 형편없었단다. '글 잘 쓰는 놈'을 골라오라는 도지사의 엄포에, 마침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서실로 끌려갔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도지사를 수행하는 비서실 근무를 연이어 했다. 관선시절 임사빈 지사를 시작으로 이재창, 윤세달, 심재홍, 임경호 지사의 비서실에서 일한 데 이어 민선 도지사인 임창열 지사와 남경필 지사까지 총 7명의 도지사를 보좌했다. 경기도를 이끄는 수장의 곁을 지키는 일은 보람되지만, 고달픈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문화정책, 관광, 총무, 자치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고 과천시·파주시 부시장, 자치행정국장, 도의회 사무처장, 용인시 부시장 등을 역임하며 동료, 선후배들의 신망을 쌓았다. "당시 인사계에 와서 인사기록카드를 보니 광주시와 달리 도는 대학 나온 사람도 많고 행정고시 출신도 많았어요. 뒷배도 없고, 학력도 짧은 시골 촌놈 입장에선 황당하더라구요. 큰일 났다 싶어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매일 제일 먼저 새벽 출근해서 가장 늦게까지 일했어요. 성실함을 좋게 봐준 덕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특히 그는 동료와 후배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공무원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7급 봉급이 봉지쌀로 6개, 연탄 20장 살 돈 밖에 안되는 월급이었어요. 내가 힘들었던 만큼, 주사보 이하 후배들은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간부가 돼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래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 밥은 무조건 제가 사줬어요. 지갑을 못 열게 했죠. 또 총무과장을 할 때, 도지사를 설득해 도청 공무원 건강검진에 암 검진을 항목에 넣었어요. 그때 실제로 10명 가량의 직원들에게서 암이 발견됐고 치료를 받았어요." '경기도를 빛낸 영웅' 선정, '다산대상 청렴봉사 대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지만, 도청 공무원들이 직접 선정한 '함께 근무하고 싶은 베스트 간부 공무원'에 4년 연속 선정된 것이 가장 보람차다. 그 마음 때문일까. 그는 2013년 용인시 부시장을 끝으로 명예퇴직을 했지만, 세간의 시선을 무릅쓰고 남경필 지사와 후배 공무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비서실장을 했다. 1급 관리로 퇴직한 그가 4급으로 돌아왔고, 연금도 전부 중지되고 퇴직금도 반납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서는 30년을 몸담은 도청 식구들과 새 도지사가 화합해 도민을 위한 도정을 꾸리는 데 도움이 돼야겠다는 한가지 마음 뿐이었다.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일했던 지난 2년의 시간도 그는 허투루 쓴 적이 없다. 비싼 관용차 타고 '사장' 역할만 하지 않았다. 경기도 산하기관장이 직접 도내 31개 시군을 돌아다니며 공동 관광 마케팅과 상품개발 협력을 위해 뛰었다. 덕분에 31개 시군과 관광마케팅을 진행하고, 연천군과 연강 갤러리·그리팅 맨 설치사업을, 수원시와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협업을 해냈다. 또 민간업계와 적극적인 스킨십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다양한 프로모션을 추진했다. 임기 마지막 달인 12월에도 그의 일정은 일거리로 빠듯했다. 아시아나와 협력해 대만 관광 프로모션을 성대하게 진행해 타지역 관광공사들로부터 시샘을 받았다."산하기관장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이 많아요. 공무원 시절엔 사실 비행기 탈 기회도 없는데, 기관장이 되니 비행기 탈 기회도 많구요. 하지만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직원들을 보냈어요. 비즈니스 좌석을 바꿔 이코노미로 타고 줄인 비용으로 직원을 더 데리고 갔죠. 생각해보세요. 나는 임기가 끝나면, 갈 사람이지만 직원들은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관광공사를 책임지고 사장까지 해야 돼요. 그 토대를 마련해주려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매일 적자였던 공사는 홍 사장의 취임 후 15억 흑자 기관으로 바뀌었고, 다양한 사업을 통해 경상비용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전국 공공기관 내부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그간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천생 공무원이다. 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선배다. "공무원은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국민이 위임한 일을 심부름하는 역할입니다. 일부 선후배 공무원들이 그것을 권력이라 착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은퇴 후에 결코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어요. 공무원은 내가 맡은 이 업무가 국민의 불편을 덜게 하는데 쓰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후배 공무원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며 그가 후배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간결하지만, 정확하다.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묻는 질문에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무조건 쉴 것'이라고 답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해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법하다. "이제 두달 간은 아무 생각없이 쉬어보려고 합니다. 그 후의 일은 또 연이 닿는 만큼 해봐야죠. 적십자나 공동모금회 같은 봉사단체에서도 일하고 싶고, 무엇보다 글을 많이 쓰고 싶어요." 쉬겠다면서도 그는 또 꿈을 꾼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반짝이게 하는 원동력이리라.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홍승표 사장은 누구?▲1956년 경기 광주 출생▲광주상업고-국제사이버대학 법률행정학사-경기대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석사▲1975년 경기 광주 공보실에서 공직생활 시작▲과천시부시장-파주시 부시장-경기도 자치행정국장-경기도의회사무처장-용인시 부시장▲2014년 7월~12월 경기도 비서실장▲2015년 1월~ 경기관광공사 사장 - 수상경력▲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1988)▲정부 모범 공무원(1986)▲국무총리 표창(2003)▲다산대상 청렴봉사부문 대상(2010)홍승표 경기관광공사 사장은 반세기에 가까운 공직생활을 회상하며 "공무원은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며 국민이 위임한 일을 심부름하는 역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7-12-26 공지영

[인터뷰… 공감]'모던 인천 시리즈 1' 펴낸 일본인 건축가 도미이 마사노리 교수

1930년대 조감도·사진첩 토대 지역별로 기록… 세밀함에 놀라관동갤러리 리모델링 작업 참여… 부평 영단주택 주제로 강연도학생들 열정에 반해 한국 정착… 월미도·인천항·강화도에 관심일본식 건축구조에 온돌 접목 등 독특한 특성 연구에 힘보탤 것인천은 일제 시대 지어진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1883년 개항이 이뤄지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살았고, 이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건축물을 지어 생활했다. 이 건축물들은 하역사 사무소, 주택 등으로 활용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식 건축물은 잇따라 지어졌고 이러한 흔적은 인천 중구, 부평구 등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인천 곳곳에 스며 있다. 도미이 마사노리(富井 正憲·69) 한양대 객원교수(건축학과)는 이러한 인천의 매력에 빠진 일본인 건축가다.그는 지난 8월 1930년대 인천의 모습을 담은 책 '모던 인천 시리즈 1'을 펴냈다. 김용하 전 인천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인천에 사는 일본인 작가 도다 이쿠코 등이 공저자다. 1930년대 조선신문사가 발행한 조감도 '대경성부대관'과 사진첩 '대경성도시대관'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책은 당시 인천을 소개하고 있다. 조감도와 사진첩의 '인천부' 부분을 바탕으로 인천 중구 관동, 사동, 율목동, 북성동, 해안동 등 각 지역별로 1930년대 인천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사진첩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인천의 명승지나 사찰, 관공서, 학교, 병원, 민간회사, 상점, 공장 등을 망라해 간단한 설명을 붙였다. 이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 용도와 상호 등을 넣어 현재와 과거 인천을 비교할 수 있도록 도왔다.그는 "사진첩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조감도인 대경성부대관은 오랫동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며 "처음으로 조감도 존재를 안 시기는 2011년이며, 그 세밀함과 아름다움에 놀랐다"고 했다.이어 "인천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거주했던 지역과 한국인이 살았던 지역이 확연하게 구분되며, 조감도에 이러한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며 "또한 개항장 뿐 아니라 부평 등 근대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이 곳곳에 있다. 이러한 건축물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역사이기도 한만큼 가능하면 남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도미이 교수는 2015년 인천 중구 개항장에 있는 근대건축물 '관동갤러리'의 리모델링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개항장 뿐 아니라 부평 영단주택 등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도 한국과 대만, 중국의 영단주택을 비교·분석한 내용이 주제다. 최근 부평지역 시민들을 대상으로 '부평 산곡동 영단주택의 건축학적 조명'을 주제로 강연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그는 "당시 백마장이라고 불렸던 산곡동 영단주택은 다른 나라의 영단주택과는 달리 한국인을 위한 구조로 설계됐다는 특징이 있다"며 "이는 당시 한국인이 설계와 감리를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이 지역은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지만, 일부라도 현재 자리에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어 "산곡동 영단주택은 당시엔 드물게 700호에 이르는 공동주택일 뿐 아니라, 일본식 건축구조에 온돌이 접목되는 등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그는 또한 한국의 근대건축과 관련한 자료이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일본에 많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인천에 살다가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포스터, 그림, 엽서, 지도, 사진, 도면, 스케치 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도미이 교수는 "한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고, 그들은 당시 한국의 모습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 아들이나 손자 등은 그 자료에 대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소중한 자료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는 인천시와 인천 지역 연구자들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그가 김용하 박사와 펴낸 '모던 인천시리즈 1'과 같은 책은 지역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천시나 중구, 인천지역에 있는 대학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며 "인천은 많은 역사 자산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앞으로 인천을 조명하는 작업이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할 것이며, 그 주체는 지역의 연구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한국과 처음 연을 맺은 것은 1983년이다. 이후 논문을 집필하기 위해서 3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연구를 했다. 이후 한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2004년부터. 한양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지내면서 한국에 살게 됐다. 이후 같은 학교에서 전임교수를 거쳐 객원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도미이 교수는 한국에 정착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일본학생과는 다른 한국 학생들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학생들이 유학을 하지 않고도 일본의 건축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서 13년간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다. 당시 일본에 남아 있으라는 주변의 이야기를 뿌리치고 한국 정착을 결심했다.그는 "제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인천의 젊은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최근에는 대한건축사회 인천시건축사회와 요코하마건축사협회가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고 생각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아직 그 시기가 언제 올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도미이 교수는 최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은 월미도, 인천항, 강화도라고 했다.월미도는 좁은 공간에 유원지시설과 군사시설이 모여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가장 상반되는 시설이 한 공간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인천항에 대한 관심은 인천 바다의 조차와 관련돼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9m에 이르는 바다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인천에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갑문이라는 구조물이 생기기도 했다. 도미이 교수는 인천바다의 조차로 인해서 생긴 건축물과 생활양식 등이 흥미로운 연구주제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강화도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역사자산을 품고 있는 곳이다. 도미이 교수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고려시대 자산과 강화성공회교회와 같은 근대 건축물 등이다. 도미이 교수는 "인천은 다양한 역사자산과 상반되는 특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라며 "제가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연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천의 젊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부분 등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그는 건축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최근 경상북도 경주와 경기도 용인시 등의 주택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에 지은 주택에 대해서는 마당의 쓰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며 "건축하는 모든 부지는 생활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당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느냐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근대건축물에 대한 책을 펴냈지만, 건축가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조망하고 대비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며 "저의 연구와 건축·설계 등 작업이 미래 세대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도미이 마사노리 교수는?▲일본 도쿄 출생 (1948년)▲1973~2008년 가나가와대학 재직▲ 1986~1987년 서울대학교 연구원▲1996년 도쿄대학 박사학위▲1997~2009년 동경대학 생활기술연구소 연구원▲2004~ 현재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도미이 마사노리 교수가 2015년 리모델링 작업에 참여한 인천 중구 근대건축물 '관동갤러리'. 이 건물은 여러 세대가 지붕과 벽체를 공유하는 전형적인 '나가야(町屋)' 형식의 일제시대 서민 주택이다. 왼쪽은 관장 부부가 사는 살림집으로, 오른쪽은 갤러리로 쓰이고 있다. 사진은 건물 전경과 도면. /경인일보DB1930년대 인천의 모습을 담은 책 '모던 인천 시리즈 1'을 펴낸 도미이 마사노리(富井 正憲·69) 한양대 객원교수는 "인천은 다양한 역사자산과 상반되는 특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라며 "인천의 젊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부분 등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다면 자신이 도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7-12-19 정운

[인터뷰… 공감]에버트 인권상 대표 수상 수원 동남보건대 응급구조학과 장애진씨

안도의 손길 내민 응급구조사에 고마움 느껴보육교사에서 사람 살리는 쪽으로 진로 바꿔아직도 친자매 같던 친구들 떠올라 괴롭지만용기 북돋아 준 아버지 있어 세상밖으로 나와실습중 배운 대로 했더니 심정지 환자 살아나기억하기 싫은 역사도 반복 막기위해 상기해야앳된 얼굴의 스무살 소녀가 대한민국 1천700만 촛불 시민을 대표해 연단에 섰다.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수여하는 '에버트 인권상' 대표 수상자, 장애진(20)씨다.세월호 생존자로도 잘 알려진 장씨는 현재 수원 동남보건대학교 응급구조학과에 재학 중인 '예비 응급구조사'다.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꿈을 꾸는 장씨를 지난 11일 동남보건대 사담기념관에서 만났다.장씨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며 응급구조학과에 진학했다. 아이들을 좋아해 보육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지금은 응급구조사를 꿈꾸고 있으니, 세월호가 장씨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참사 당시 장씨는 SP-1(세월호 다인실 격실) 구역에서 같은 반 친구 7명과 함께 구명조끼를 입고 해경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점점 더 기울고 급기야 칸막이 대용으로 설치된 캐비닛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벽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출입문은 천장으로 올라갔다.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극적으로 몇몇 친구들과 함께 탈출했지만 해경 보트를 타고 큰 배로 옮겨타는 순간의 기억은 희미하다. 서거차도에 발을 딛고 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장씨 곁을 지켜준 고마운 이가 급파된 119 응급구조사였다. 당시 따뜻한 담요와 말 한마디로 자신을 위로하며 안도의 손길을 내밀었던 응급구조사처럼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장씨의 꿈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고 지켜낸 소중한 삶을 이제는 다른 이를 돕는 데 쓰고 싶다는 것이다.아직도 해가 지고 나면 중학교 때부터 친자매처럼 지냈던 민정이와 민지 생각에 괴롭다. 단짝 2명을 비롯해 한순간에 반 친구 18명과 담임 선생님을 잃었고, 세월호가 인양된 뒤에야 돌아온 친구도 있다. 견뎌내기 힘든 아픔이자 영영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그곳에 있었던 누군가는 증언해야 했다.공개적인 장소에서 한 발언은 지난 1월 세월호 참사 1천일이 되는 날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가 처음이었다. 장씨는 "저희는 구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탈출했다"며 "저희만 살아나온 것이 유족 분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참사 이후 생존자와 유족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정치꾼'들의 발언도 장씨를 세상에 나서게 한 동기가 됐다. 참사 당시 트라우마에 더해 당사자들을 배제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장씨의 친구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시도까지 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그는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못 나온 것 같다거나 단순 해상 교통사고에 정치색을 입히지 말라는 말들에 화가 났다"며 "앞으로 친구들을 데려간 참사 진상규명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가족들도 장씨의 든든한 지원군이다.안산 원시동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장동원씨는 참사 이후 선박 운전 면허를 취득해 유족들과 함께 현장을 누볐고 세월호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 팀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공교롭게 민주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에 태어난 장씨는 아버지 손을 붙잡고 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집회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용기를 북돋아 준 아버지가 있었기에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세월호 생존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김순덕씨도 단원고 유가족과 함께 '그녀들의 옷장'이라는 치유연극에 출연해 아픔을 씻어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에버트 인권상 대표 수상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23차에 걸쳐 진행된 촛불집회에 참석한 횟수가 4번뿐이라서 겸손히 고사했지만 촛불 비상국민행동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로 장씨를 대표 수상자로 추천했다. 장씨는 "대한민국 국민 대표로 에버트 인권상을 받게 돼 영광"이라며 "촛불을 든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최근 인천국제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실습을 한 장씨는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선배 응급구조사들과 함께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에게 새 삶을 선물한 것이다.그는 "60대 남성 환자가 심정지 상태로 다른 병원에서 이송돼왔는데 소생 직후 재차 심장이 안 뛰어서 심폐소생술과 제세동기 가동을 번갈아 가며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더니 기적처럼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고 말했다.실습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장씨는 의학용어 암기와 심전도 실습에 매진하고 있다. 현장에서 가장 먼저 위급한 환자를 만나 즉각 대처할 수 있는 119 구급대원이 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특유의 명랑함으로 남은 대학 생활을 보내고 응급구조사 국가고시에도 도전할 계획이다.고봉연 동남보건대 응급구조학과장은 "단원고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이 있다고 들었지만 애진이가 정말 밝고 명랑해 아픔이 있는 줄 면담 전까진 몰랐다"며 "참사를 겪으면서 응급구조사로 일을 해야만 하는 확실한 동기가 생긴 만큼 최고의 응급구조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세월호 생존자들은 개인적인 꿈을 위해서 삶을 살아내면서도 사라지는 아픔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 발 앞에 선 장씨는 "제가 받은 도움을 나눠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며 "당장 도움이 필요한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도 반복을 막기 위해선 곁에 두고 계속 상기해야 한다"며 "그간 기억교실은 물론이고 시민안전공원 건립에도 걸림돌이 생기면서 잊혀지는 것이 슬프다"고 덧붙였다.■에버트 인권상은?독일 민간 비영리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세계 각지에서 인권 증진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할 목적으로 지난 1994년 제정한 인권상으로 시상식은 매년 12월 5일 베를린에서 진행되며 상패와 함께 2만 유로의 상금이 수여된다.에버트 재단은 대한민국의 평화적 집회와 장기간 지속된 비폭력 시위에 참여하고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신생 민주주의 대한민국 법치국가의 실현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촛불시민에게 에버트 인권상을 수여했다.다수 국민이 에버트 인권상을 받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단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집회가 민주주의의 필수적 구성요소인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를 생동하게 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글/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11일 오후 수원 정자동 동남보건대학교 사담기념관에서 세월호 단원고 생존자 장애진(20)씨가 대한민국 촛불시민을 대표해 '2017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 수상 소감을 밝히며 미소 짓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11일 오후 수원 정자동 동남보건대학교 응급구조학과 실습실에서 세월호 단원고 생존자 장애진(20)씨가 응급구조 실습 모형을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씨는 참사 직후 서거차도에서 만난 119 구급대원에게 받은 도움을 갚기 위해 응급구조사가 되려는 꿈을 꾸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5일 오후 7시(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 세월호 단원고 생존자인 장애진(20)씨와 박석운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 공동대표가 쿠르트 벡 에버트 재단 대표에게 '2017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2017-12-12 손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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