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생애 첫 수필집 '뜨거운 빙수' 펴낸 이영옥 수필가

평범했던 삶 '문학 소녀의 꿈을 이루세요' 공모전 문구에 마음 움직여입상 후 일기 대신 습작… 매달 2~3편씩 300여편 노트 20여권에 담아이혼하고 싶은 마음·경제적인 고통도 펜으로 풀어… 일터와 집이 글감창피한 내용이지만 글쓰기는 삶의 일부… 정년도 없어 평생하고 싶어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매일 작업하지 않고 피아노나 노래를 배울 수 있습니까.어쩌다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리베카 솔닛학창시절 수많은 문학소년·소녀들이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그렇게 꿈을 꾸는 이들이 오래도록 그것을 간직하고 실제 이루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서, 먹고 산다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대개는 그 꿈을 포기하고 글쓰기와 담을 쌓은 채 산다.글을 쓰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글을 쓰지 않고 살아도 평범한 삶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그 흔하디흔한 문학 소년·소녀들이 그렇게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인천에서 30년 가까이 산 이영옥(56)씨도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다고 했다. 그는 "적어도 환갑이 될 즈음이면, 내 글로 채워진 책 한 권쯤을 세상에 내놓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었다고 한다.그는 그 꿈을 잊지 않았고 계속 글을 썼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첫 수필집을 세상에 내놓으며 그 꿈을 이뤘다.20여년을 '커피 아줌마'로, 최근에는 인천대공원에서 기간제 청소 노동자로 일해온 주부 이씨가 펴낸 수필집 '뜨거운 빙수'(에세이문학출판부 刊)는 평범한 이들이 잊고 사는 꿈을 이뤄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해 보인다.지난 3일 오후 불과 며칠 전 까지 자신이 일했다는 인천대공원에서 그를 만났다.첫 에세이집을 펴낸 소감을 묻자 이씨는 "어쭙잖은 글들이 활자화되니 가슴 벅차기도 하고 떨리기도 한데, 삶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써 놓고 보니 발가벗은 듯해 부끄럽기도 하다"며 "글을 읽고 한두 명이라도 공감할 독자가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지금의 솔직한 바람"이라고 말했다.그는 "누구에게나 글을 쓰는 이유가 있고 저마다 그 이유는 다르겠지만, 특히 나에게 글쓰기는 숨구멍이자 삶의 위로였고, 힘들 때 다시 일어서게 한 이유가 됐다"며 "숨어서 울 곳을 찾다가 글을 만났고, 사는 것이 힘들어 앞날이 아득해지고 캄캄할 때 펜을 들고 노트를 펼치곤 했던 것이 작품집이라는 결실로 이어져 기쁘고 설렌다"고 말했다.1961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3~4년 직장일을 하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전담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은 1994년 동서커피문학상(현 동서문학상)에 입상하면서였다. 이전까지 그의 글쓰기는 일기 쓰기가 전부였다고 한다.인천에 있는 동서식품에 다니던 때였는데, 전업주부이던 그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1992년부터 그곳에서 20여년 넘게 '커피 아줌마'로 일했다. 대형 마트나 소매점에서 판촉 행사를 하는 일이었다."어느날 커피문학상 공모 포스터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여고 시절 문학 소녀의 꿈을 이루려면 도전하라는 내용이었죠. 여고 시절 책을 써야겠다는 꿈이 생각났고, 바로 시아버님께 아침마다 커피를 타고 마시며 나눈 이야기들을 글로 써 며칠을 고쳐 '아버님과 커피'라는 작품을 보냈죠."결과는 입상이었고 입상하고 나자, 매일 쓰던 일기 대신 본격적인 습작이 시작됐다. 같은 해 인천노동자예술제에 보낸 수필이 상을 받기도 하며 그는 방송통신대학교에도 진학해 꿈을 키워갔다.힘든 직장생활과 남편의 방황에도, 힘든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글로 쓰고 나면 마음이 정리되고, 그러고 나면 고통도 이겨낼 만한 일들이 됐다고 한다.사업에 실패하고 무력한 삶을 이어가는 남편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이혼을 결심하던 때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남에게 말 못할 이야기를 나에게 글로 쓰면 이내 풀렸다."하루는 이혼을 작심하고 차분히 글로 남편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해 봤어요. 결국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 단점도 결국엔 장점이더라고요."피아노를 갖고 싶어 하던 딸 아이가 디지털 피아노를 사려고 모은 용돈을 고등학교 수업료로 내야 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글쓰기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그는 그렇게 매달 2~3편의 에세이를 완성하려고 노력했고 모두 노트에 남겼다. 그렇게 쓴 300여편의 작품이 20여권의 노트에 남아있는데 이젠 그만의 보물이 됐다."물론 다시 돌아보면 작품이라고 하기에 창피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글 쓰기는 제 삶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그에게는 언제나 일터와 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주로 글감이 된다.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커피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른 새벽 공원의 숲 속 향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출퇴근길 도로 위의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가 나기도 한다. 물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픔도 드러난다. 그렇게 쓴 47편의 작품이 이번 수필집에 담겼다.그는 자신의 첫 수필집을 두고 "발가벗은 듯 부끄럽다"고 했지만,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딸은 엄마의 첫 시집에 한 컷 한 컷 삽화를 그려 넣으며 용기를 줬다.첫 작품집을 펴낸 그의 바람은 딱 한가지다. 평생 글을 쓰는 것."다른 일에는 정년이 있지만, 글을 쓰는 일에는 정년이 없다고 생각해요. 글쓰기가 일이 아니고 삶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요."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영옥 수필가는?▲충청남도 보령 출생(1961년) ▲황교초등학교·웅천중학교·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1994년 동서커피문학상 입상▲2006년 <에세이문학>겨울호 '갑골 무늬를 찾아서'로 등단▲에세이문학작가회·동서문학회 회원으로 활동▲첫 수필집 '뜨거운 빙수' 펴냄생애 첫 수필집을 펴낸 이영옥 수필가가 불과 며칠 전까지 기간제 청소 노동자로 일해온 인천대공원 메타세쿼이아길을 걷고 있다. 그는 "삶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써 놓고 보니 발가벗은 듯해 부끄럽기도 하다"며 "글을 읽고 한 두 명이라도 공감할 독자가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지금의 솔직한 바람"이라고 밝혔다.

2017-12-05 김성호

[인터뷰… 공감]박해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

■신보 이사장 연임 어떻게 가능했나처우 개선하니 사기 오르고 실적 따라와자연스레 신뢰 얻고 행감서도 칭찬 받아■함께 일한 3명의 도지사 차이점은孫 준비된 지도자형… 金 청렴한 일꾼南 미래 내다보는 눈 남다르고 개혁적■경과원 조직 내부 갈등 묘책 있나나 포함 모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쪼개진 노조부터 하나돼야 변화 가능■경기도는 어떤 의미인가군사력·중소기업·핵심기술 등 집중돼한국 동력이자 미래, 위기의식 가져야박해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은 경기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자 공공기관의 신화로 불린다. 농협중앙회 경기지역본부장, 농협중앙회 금융대표 부회장, 농협대학교 총장,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 민주평통 경기지역회의 부의장 등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항상 신기록과 기관의 한 단계 도약이 있었다.특히 경기도지사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경기신보 이사장을 4번이나 연임한 것은 박 이사장에 대한 도민들의 신뢰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런 공로로 산업포장,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기도 했다. 그런 박 이사장이 최근 통합을 통해 초대형 공공기관이 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이하 경과원)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다시 한번 화제의 인물이 됐다.그의 경험과 노하우가 신생 통합기관에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서다.박 이사장을 만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2012년 경기신보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5년 만에 다시 공공기관에 복귀했다. 소감은 어떤가."공직 생활 45년 정도했고, 그 중 30여 년을 경기도에서 했다. 농협 경기본부장을 비롯해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을 4번 연임했다. 5번째도 나한테 하라고 하는 걸 사양했다. 당시 손학규 도지사를 통해 발탁됐고 김문수 지사의 신뢰를 받아 연임했다. 임기가 끝나고 민주평통 경기도 부의장이 됐다. 대통령이 의장이고 각 광역단체마다 부의장이 있는데, 전국 부의장회 회장도 맡았다. 민주평통은 대통령 자문 헌법기관으로 청와대 회의에 들어가면 모두 발언을 했다. 사실은 부의장만 한 게 아니고 전체 평통을 이끌다시피 했다. 민주평통이 7월로 끝났다. 그래서 이제는 자유로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경과원 이사장 제의를 받았다. 사양을 하려 했지만, 상근직이 아니고 명예직인데다 마지막 봉사를 해야 하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 수락을 했다. 사실 마음이 무겁다. 아이디어나 비전이나 방향 제시를 통해 기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경기신보 이사장을 4번이나 연임한 경기도 공공기관의 신화이자 입지적 인물이다. 비결은 무엇인가."과대 평가를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기도를 잘 아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사실 경기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건 틀림 없다. 경기도의 농업 부문부터 IMF 시절에는 농협 은행장을 하며 중소기업을 살폈다. 경기신보 이사장 당시 그때 경험을 많이 써먹었다. 정부에서 5천700억원, 경기도에 1천700억원 정도를 지원받아 노점상과 포장마차 등 어려운 사람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일했다. 또 하나의 비결은 직원들과 소통이다. 상사와 직원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아직 경과원 직원들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경기신보 직원들은 나를 편하게 생각했다. 떠난 뒤에 직원들에게 평가를 들어보면 만족할만 했다. 리더가 가장 중요한게 소통이다. 직원들이 나를 따르게 하는 기술, 직원들과의 마음의 벽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신뢰하고 믿고 귀중하게 생각했다. 제 경영철학이 '인건비 아끼지 말자'다. 한 해에 20% 이상 급여를 올렸다. 당시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보다 직원들의 처우가 좋아졌다. 그러자 280억 원 적자 나던 게 60억 원으로 줄었고, 그 다음 해에 흑자로 전환됐다. 보증기관이 흑자를 냈다. 그러니, 자연스레 연임 부탁이 왔다. 매년 경기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칭찬만 받았다.직원 처우를 그렇게 올려주고도 직원들이 450% 성과금을 받았다. 평균 3천만원 씩 성과금을 받았다. 처우를 개선하고 경영을 하니 사기가 오르고 실적이 나더라.박해진 개인이 잘한 게 아니다. 직원들이 잘해줘서 박해진이 있는거다. 1월1일 남들은 시무식 할때, 우리는 오전 8시 야외에서 새해 목소리를 냈다. (웃으며)경인일보 1면에도 나고 그랬다. 지금도 경기신보는 처우가 좋고 복지도 최고다."-3번째 도지사와 함께 일하게 됐다. 손학규·김문수·남경필 지사는 어떻게 다른가."손학규 전 지사는 대한민국 지도자 중 가장 준비가 많이 됐다. 학력, 민주화 운동 등 이 양반은 보수 생각이면서도 개혁에 대한 면도 강하다. 옥스포드에서 공부하고 와서 운동권에서 벗어 났다. 지도자가 가져야 할 훌륭한 자질과 결단력을 다 갖췄다. 제대로 된 평가를 못받았다. 지금도 그 만한 사람 없다. 김문수 전 지사는 지도자 중 서민의 아픔을 안다. 제일 어렵게 산 사람, 밥을 굶고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니까. 이 사람처럼 서민의 아픔을 안 사람은 없다. 민주화 운동도 감옥을 4번 갔다오고 누구보다 서민의 아픔을 알고 가장 청렴한 사람이 김문수 지사다. 도지사 재선 시 후원금 29억원이 들어왔는데 국고에다 20억원을 반납한 사람이다. 결단력이 있다. 10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는다. 안보의식도 투철하다.남경필 지사는 두 양반 만큼 어려움을 겪진 않은 것 같다. 젊다. 그러나 남에게 없는 미래에 대한 통찰이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지도자들이 근시안적인데 내다보는 눈이 누가 얘기하면 대충 듣지 않고 자기걸로 소화한다. '나한테도 지혜를 주십시오'하며 거기서도 새로운 걸 얻는 스타일이다. 여과없이 경험한 거 이런거 막 얘기한다.아울러 혁신적인 사고가 있다. 정치인들이 말로는 혁신하지만 남 지사는 혁신을 현실에 이행한다. 개혁적인 보수이며 차세대 지도자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경과원은 기관 통합 후 조직 내부의 갈등을 빚고 있다. 이사장으로서 묘책은 있나."경과원은 두뇌와 현장을 모두 알아야 한다.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도록 잘 조합하면 상승효과를 가질 수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직원들이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나부터도 마찬가지지만 원장부터 본부장 직원들까지 모두 노력을 해야 한다. 말로만 하나가 되자 통합되자 이걸론 안된다. 프로그램을 물리적 통합만 했지 화학적 통합은 안됐다.진짜 같이 하려면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합동으로 바깥 행사를 하는 프로그램, 지금까지 그런 노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나. 많이 부족했다. 우선 노조가 하나 돼야 한다.(현재 경과원은 복수 노조). 노조가 다른 모습을 보여야 처우가 개선된다. 이사장으로서 너무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다. 우선 아이디어만 주고 싶다."-경기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경기도는 어떤 의미인가."경기도에서 30년 넘게 일했다. 경기도는 대한민국 안보의 중심이다. 군사력의 75%가 있다. 장성의 80%도 경기도에 있다. 경제적으로는 중소기업 소상공인 30%가 경기도에 있다.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 핵심 기술의 80%가 경기도에 있다고 본다. 판교테크노밸리는 미래의 경기도다. 지방으로 가면 기술인력들이 이동하지 않는다. 경기도는 그런 특수성이 있다. 경기도가 대한민국의 동력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공직자도 다른 지역과 달라야 한다. 경기도가 잘못되면 대체 방법이 없다. 중국이 한국 기술을 뛰어넘고 있는데 이 위기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지리적으로도 발전성도 있지만 현재도 중요한 위치고 앞으로 미래도 경기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글/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박해진 이사장은?▲경기도 이천 출생(1945년)▲용산고·고려대 법학과·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과정 수료▲농협중앙회 경기지역본부장▲농협중앙회 신용사업담당 부회장▲농협대학 학장▲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박해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시장은 경제발전 등의 공로를 통해 30년 가까이 각 기관의 수장 역할을 하며 경기도의 입지적 인물이자, 신화가 된 인물이다. 최근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으로 다시 공공기관에 컴백하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경인일보DB

2017-11-28 김태성·신지영

[인터뷰… 공감]김교흥 국회 사무총장

■신뢰받는 국회 만들기 구상은불체포 남용 방지 등 특권 내려놓기민원 적극 검토 국민입법 실현 초점■개헌 방향성과 공감대 형성은국민기본권 강화 지방분권도 담아야100회 이상 전문가와 의견 청취 수렴■'수도권 족쇄' 규제 완화 입장은경제자유구역 국내 대기업 유치 절실법개정 등 엉킨 것 풀고 끊긴 곳 이어야제17대 국회의원(인천 서구 강화 갑)을 시작으로 민주당 수석사무부총장, 인천시 정무부시장, 국회의장 비서실장 등 인천과 중앙 정치권을 넘나들며 활동 무대를 넓혀온 김교흥 전 의원이 최근 장관급인 국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국회사무처는 국회의원의 법제 업무를 지원하고 의원 외교, 의정 연수 등 국회 내 모든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곳으로 의원 보좌진을 포함해 4천여 명의 직원이 상주하는 입법부의 중심 기구다. 지난 16일 오전 국회 본관 3층 사무총장실에서 만난 그는 취임 이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여의도를 누비고 있다고 했다. 지난 1일 취임 이후 사무처 업무보고를 시작으로 국정감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준비하는데 온통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회에서 심사 중인 내년 정부 예산안도 원만히 통과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역량을 모으고 있다고도 했다.24시간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의 마음과 머리는 항상 인천을 향하고 있다. 김교흥 사무총장은 인천과 경기도 등 수도권 지역 발전의 족쇄로 지적받고 있는 수도권정비계획법을 포함한 많은 규제를 손봐야 한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게 인천 송도를 비롯한 경제자유구역에 국내 대기업이 들어올 수 있도록 관련 법규가 개정돼야 하는 거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국회 내 가장 큰 현안 중 하나인 개헌 문제와 관련해서는 개헌의 추동력은 오직 국민이라며 여야 정치권을 떠나 국민의 공감대를 힘으로 개헌이 이뤄질 수 있도록 총력을 쏟겠다고 강조했다.특히 여권 내 인천시장 출마 후보군에 늘 이름을 올리고 있는 그는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내가 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분위기와 명분이 돼야 뜻을 이룰 수 있다"며 "우선 사무총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에 인천 시민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그때 가서 고민해 보겠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중요한 시기에 국회 사무총장을 맡게 된 소감은부족한 것이 많은데 입법부 사무처를 책임지는 중책을 맡게 됐다. 무엇보다 그동안 인천시민들이 많은 힘과 지혜를 모아줘 막중한 소임을 맡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국민에게 신뢰받고 힘이 되는 국회가 될 수 있도록 맡은 소임을 다하겠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구상은국회 사무총장으로서 불체포 특권 남용 방지를 비롯해 친인척 보좌진 채용 제한, 묻지 마 증인채택 제한 등 국회의 특권 내려놓기 작업에 힘을 쏟겠다. 국회 사무처는 정세균 의장을 중심으로 여야 국회의원들과 모두 함께 '신뢰받는 국회', '힘이 되는 국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와 함께 국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반영하기 위해 소통창구는 더 크게 만들고 문턱은 낮추겠다. 현재 '국회 민원 지원센터'와 '온라인 민원창구'를 통해 접수되고 있는 의견은 국회 사무처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각 상임위에 배분해 국민의 요구와 제안으로 만들어지는 국민입법을 실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국회 사무총장으로서 개헌에 대한 견해·방향성은내년 지방선거 기간은 민주적 개헌을 위한 최적기다. 정세균 의장은 '포괄적 개헌'을 주창하고 있다. 이는 권력구조 개편은 물론 국민 기본권을 강화하고 지방분권이라는 시대 정신도 담아내야 한다는 개념이다. 지방 분권형 개헌은 현재 총론에서 큰 이견은 없는 듯하지만 자치입법권과 자치재정권, 조직권 등 각론으로 들어가면 의견 차이가 난다.국회는 개헌이라는 국민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30년 만에 개헌특위를 구성, 국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왔다. 특히 이달 중 개헌특위 자문위가 제출한 개헌안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조문 작업에 착수할 방침이다. 국회의 개헌 로드맵은 올해 헌법 개정을 위한 기초 소위를 구성하고 내년 2월까지 개헌안을 완성시킬 방침이다. 3월엔 국회 개헌안이 발의되고 5월에는 국회 표결을 거쳐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이다.-개헌은 국민 공감대가 우선돼야 한다. 이를 위한 국회의 노력은그렇다. 개헌은 국민의 공감대가 가장 중요하다. 국회는 개헌특위를 만들어 지난 1월부터 가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25차례 회의를 했으며 각계 전문가와 관심 있는 국민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도 꾸려 100회 이상 의견을 모으는 과정을 거쳤다. 국회 개헌특위가 주최하는 국민토론회 또한 지난 8월 부산을 시작으로 11개 지역에서 진행했다.이제는 개헌과 관련한 주요 쟁점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를 이뤄가야 할 시점이다. 이런 합의는 내년 2월까지 늦어도 3월까지는 마무리돼야 한다. 국민에 의한, 국민의 삶을 바꾸는 개헌이 돼야 할 것이며 개헌의 추진 동력은 오직 국민이라고 생각한다.-인천과 경기도 등 수도권 발전의 족쇄로 지적받고 있는 각종 규제 완화 입장은수도권 역차별 현상이 심각한 지역 중 한 곳이 인천이다. 인천이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추는데 선행돼야 할 것이 규제개혁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경우 수도권정비계획법을 비롯한 강력한 수도권 규제에 묶인 탓에 국내 기업의 입주가 어렵고 이는 결국 외국 투자 유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대기업도 없는 곳에 외국 기업이 무엇을 보고 들어오겠는가.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수도권정비계획법상 성장관리권역으로 지정돼 있어 대기업 공장의 신·증설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연면적 500㎡ 이상 공장의 신·증설도 공장총량제의 적용을 받는다. 국내 대기업의 경제자유구역 입주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할 열쇠라면 충분히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엉킨 것은 풀고, 끊긴 곳은 이어야 한다.-내년 인천시장 선거 출마 의향은나는 인천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인천에서 학교를 나왔고 인천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인천지역 국회의원, 인천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하면서 인천의 현안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고, 인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미래비전을 그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국회 사무총장이라는 중책을 잘 수행해 국회가 국민에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도록 만드는 것에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기라고 본다. 국회 사무총장으로서 역할과 소임을 다한 다음 인천시민들의 엄중한 평가를 받겠다. 그때 가서 인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인천, 경기 시민들을 포함한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제가 인천에서 정치를 하면서 인천시민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시민들의 사랑으로 국회의원, 인천시 정무부시장이 됐고 그 덕에 입법부의 중책인 국회사무총장까지 맡게 됐다.시민들께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겠다.국회 사무총장으로서 신뢰받는 국회상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소통을 바탕에 둔 협치로 국회에 대한 국민 신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소통은 만남에서, 마주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신뢰받는 국회가 되기 위해서 여야가 마음과 뜻은 다르더라도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사무총장으로서 필요하다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찾아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마당쇠' 같은 사무총장이 되겠다.글/김순기·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교흥 사무총장은?▲경기도 여주 출생(1960년) ▲인천대, 인천대 대학원 졸업 ▲前 중소기업연구원장 ▲前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제17대 국회의원 ▲前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 ▲前 국회의장 비서실장김교흥 국회 사무총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인천시민들이 많은 힘과 지혜를 모아줘 막중한 소임을 맡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국회 사무총장으로서 신뢰받는 국회상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1-21 김순기·김명호

[인터뷰… 공감]'포천 군사시설 피해대책 마련 촉구' 이길연 범대위 위원장

야간 사격만이라도 줄여달라 했지만 개선 안돼사격 안할때 포함한 소음측정 평균치 어이없어재발방지 약속에도 목숨 위협 도비탄 사고 계속외부단체 참여 차단 불구 왜곡·호도 분통 터져보상 앞서 주민 목소리 귀기울이는 진정성 필요우르르 쾅! 펑! 펑! 펑!아직 시계는 정오도 가리키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사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에 위치한 미군사격훈련장인 '로드리게스 사격훈련장(Rodriguez Live Fire Complex·이하 영평사격장) 정문 앞에 거주하는 주민 대다수의 스마트폰에는 소음측정용 애플리케이션이 설치돼 있다.영평리 마을회관 옥상에도 소음측정기가 설치돼 상시 소음을 측정한다. 한 주민이 스마트폰을 꺼내 포 사격 순간 소음 측정치를 보여줬다. 결과는 75㏈.도심 도로변 아파트 실내에서 들리는 주간 소음 최대 기준치가 65㏈인 점을 고려하면 시내서 동떨어진 산골짜기 소음치고는 꽤나 큰 편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영중면 영평리 주민들에게 낮에 들리는 이런 사격 소음은 일상이 된지 오래다.지난 2014년 영평사격장 등 군사시설 피해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조직된 '포천시 사격장 등 군 관련 시설 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이길연(61) 위원장은 "만약 도시에서 이런 소음이 1년 365일, 24시간 들린다면 어느 누가 참을 수 있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그나마 낮 시간에 들리는 사격 소음은 참을 만하다. 주민들이 직접 측정한 야간사격 소음은 거의 매일 100㏈을 넘긴다.기차 철로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소음이 약 90㏈이고 건설공사 현장 반경 10m에서 나는 소음이 약 100㏈ 수준이다. 사실상 사격장 일대 주민들의 일상은 소음으로 시작해 소음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위원장은 "이곳 주민들은 평생을 사격 소음 속에 살면서도 한·미동맹과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왔지만 야간사격만이라도 조금만 줄여달라고 요구한 지가 언 10년이 넘었다"며 "국방부와 주한미군이 나서서 주민들과 MOU까지 체결했지만 전혀 개선된 점이 없어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피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주민 항의가 갈수록 거세지자 국방부 차관도 현장을 직접 찾는 등 정부의 관심이 쏠리긴 했지만 좀처럼 주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이 위원장은 "올해 초 차관을 비롯한 국방부 관계자들이 몇 차례 영평사격장을 직접 찾으면서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국방부가 진행 중인 피해 대책 마련을 위한 용역 역시 날림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포 사격 순간 소음이 100㏈을 넘나드는데 이를 무시한 채 사격이 없는 시간의 소음까지 측정해 평균치를 결과물로 보여준다"며 "이런 결과물이 정부와 청와대에 전달되면 우리 주민들을 생떼나 쓰는 어린애 취급할 것이 아니냐"고 격분했다.주민들의 피해는 소음만이 아니다. 영평사격장 일대 창수면 운산리와 오가리를 비롯한 영중면 영평·성동리, 영북면 야미리 등 사격장 인접 주민들은 잊을 만 하면 날아드는 주먹 만한 탄환에 목숨까지 위협받는 실정이다.아파치 헬기와 각종 중화기에서 쏟아내는 탄환이 사격장 내 탄착지에 맞고 튕겨 나가는 도비탄이 날아드는 것이다.도비탄은 지붕을 뚫고 거실로 떨어지고 축사에 날아들고, 주민들이 일하는 밭에 꽂히곤 한다. 이런 도비탄 사고도 10차례가 훌쩍 넘어섰고 정부와 미군은 그때마다 재발 방지와 시설 개선을 약속했지만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주민들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60년이 넘도록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이런 상황을 견뎌왔다.그러나 최근 이곳 주민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올해로 4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범대위를 반미세력으로 호도하는 일부 그릇된 인식 때문이다.이 위원장은 "주민들을 제외한 외부 단체나 조직이 범대위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데다 주민들은 항상 정부와 미군, 주민들의 상생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곳 주민 여럿이 공산당이 싫어 북한 떠난 실향민인 데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최대한 불편도 감수하면서 살고 있는데 우리를 두고 반미세력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아주 큰 실수"라고 주장했다.실제 이곳 주민들은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계기로 반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던 지난 2003년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영평사격장을 난입한 사건이 있을 때도 학생들을 뜯어말리는 입장이었다.더욱이 범대위를 이끌고 있는 이 위원장은 '전농'으로 불리는 대표적 진보성향 시민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 경기지역 부의장을 맡고 있어 언제든 대형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이 위원장은 "주민들이 나서 범대위를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전농 대표단은 물론 여러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아 피해를 공감하고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며 "순전히 주민 힘으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우리를 순해 빠진 시골 촌놈으로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를 반미세력으로까지 몰고 가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이런 섭섭함을 표한 이 위원장은 최근 사드(THAAD)문제가 불거진 경상북도 성주군의 사례를 들었다.그는 "성주 사드문제가 전국적으로 불거지자 정부는 이를 감싸주기 위해 수조원에 달하는 지원안을 속속 내놓고 있는데 정작 미군에 의한 피해를 수십년이 넘도록 참아온 영평사격장 주민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며 "내년도 미군공여지 주변지역 지원사업에서도 영평사격장 피해 주민들을 위한 대책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범대위는 애초 야간사격으로 잠을 설쳐야 하는 상황을 개선해 주고, 도비탄 사고에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할 뿐이었다.그러나 이런 주민 요구에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자 이들은 '영평사격장 폐쇄'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영평사격장 주변 주민들의 이런 목소리가 정부에 전달되기만을 바라면서 시작한 영평사격장 앞 1인 시위가 오늘로 764일째를 맞는다.2년이 훌쩍 넘는 기간이다.이 위원장은 "주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희생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며 "정부가 주민들의 순수한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부터 영평사격장 폐쇄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이렇게 참다못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왜곡돼 반미세력으로까지 비쳐지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강력히 밝히고 나섰다.이 위원장은 "어차피 반미세력으로 낙인 찍힌 마당에 정부까지 주민들의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진짜 반미세력이 뭔지 보여줘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라며 "영평사격장 주변이 반미의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곳으로 변해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이어 이 위원장은 "정부가 다짜고짜 보상안만을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주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글=포천/최재훈·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 사진=포천/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지난 13일 이길연 위원장이 1인 시위가 762일째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지난 4월 1일 영중면 성동리의 한 농가에 영평사격장에서 날아든 길이 10cm에 달하는 중화기 탄두가 떨어졌다. /범대위 제공지난 3월 21일 영평사격장 입구 1인시위 현장을 찾은 황인무 전 국방부 차관을 향해 한 여성이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지난 3월 28일 영중면 영평리 영평사격장 입구에서 진행된 사격장 피해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에서 주민들이 상여를 들고 사격장 입구를 돌아나오고 있다.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지난 3월 28일 영중면 영평리 영평사격장 입구에서 진행된 사격장 피해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 당시 모습.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포천시 영중면 영평리에 위치한 미군 사격훈련장인 영평사격장 정문 앞 1인시위 현장 위로 미군의 헬리콥터가 유유히 저공 비행해 날아가고 있다. /정재훈기자 jjh2@kyeongin.com

2017-11-14 최재훈·정재훈

[인터뷰… 공감]영화 '대장 김창수' 연출 이원태 감독

■개항기 인천에 대한 접근과 주요 장면 고증은?서양과 동양·봉건시대와 근대 등 충돌하는 공간 표현건축물 옆 판잣집처럼 부조화 이미지도 꼼꼼히 묘사백범일지 셀 수 없이 읽고 수차례 답사 디테일 살려■사실 아닌 '경인선 부설공사 노역' 다룬 이유는?곡식·광물 이어 위안부·노동자까지 실어나른 '만행'일제수탈의 현장 국민들에 알리기 위해 역사 재구성소설 아편전쟁 등 개항장 소재 이야깃거리 더 있어인천은 청년 '김창수(金昌洙)'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 '백범(白凡) 김구(金九)'로 다시 태어나는 전환점을 맞은 공간이다. 김구는 인천에서 2차례의 감옥살이를 했다. 국모 시해(을미사변)를 보복한다며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인천감리서에 투옥된 게 첫 번째 옥살이다. 당시 21살이던 김창수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얼마 후 인천 감옥에서 탈출했다. 이름을 고친 김구는 독립운동을 위한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 움직임과 관련된 '안악 사건'으로 1911년 서울에서 또다시 옥살이하다가 39세 때인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된다. 두 번째 인천 옥살이에서 백범은 인천항 축항 공사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김구는 이때 옥중에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백범'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떠나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을 때까지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지난달 19일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는 백범의 일대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이나 '해방 후 남북 분단의 격동기'를 다루지 않았다.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백범의 인천에서의 감옥살이를 이야기했다. 영화 '대장 김창수'가 백범의 20대 초반 청년 시절, 그중에서도 인천감리서에 사형수로 투옥된 시기를 스크린에 투영한 이유는 뭘까. 지난 2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압구정 CGV에서 '대장 김창수'를 연출한 이원태(49) 감독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다. 이원태 감독은 이날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오후 9시 30분부터 진행한 '관객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프로그램 연출자 출신인 이원태 감독은 지난 10여 년 동안 다수의 영화와 소설을 기획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인천 개항장을 배경으로 쓴 '아편전쟁'(2016)은 소설가 김탁환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영화 '대장 김창수'의 소설 버전도 김탁환 작가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왜 백범 김구의 인천 감옥살이를 영화화했나."2012년 겨울 상하이 여행 때 임시정부를 들렀다. 너무 작고 초라한 상하이 임시정부를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반면 다른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전시회 관람하듯 쓱 지나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백범 김구 선생을 잘 몰라서 느낌이 없다고 생각해서 백범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백범 선생의 인생을 일제강점기 직전, 상하이 독립운동, 해방 후로 크게 3개 지점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첫 지점이 인천이다. 김창수는 사형수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다가 살아 돌아왔다. 이후 민족의 지도자가 됐다.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죽음을 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내던질 용기가 생긴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가 있듯 '김구 비긴즈'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적으로도 을미사변 직후의 들끓는 민심 속에서 대형사고를 친 사람이니 드라마틱한 면이 있고, 감옥 또는 탈옥을 그린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김창수의 옥살이에는 휴머니즘이 있다."-영화 속 개항기 인천을 우리나라 사람과 서양인, 중국인, 일본인이 공존하는 국제도시로 그렸다. 그러면서도 서양식 근대건축물과 전통한옥인 인천감리서, 서양식 복장의 감리서 간수와 전통복장의 죄수 간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영화를 준비하면서 공부한 인천 개항장이란 공간에 매료됐다. 백범이 인천감리서 감옥에 갇힌 시기 인천은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로 충돌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공간이었다고 본다. 서양과 동양이 부딪치고, 봉건시대와 근대가 부딪치고, 문명과 문명이 부딪치고, 시대와 시대가 부딪치는 속에서 인천사람들이 살았던 것이다. 당시 인천 개항장 거리의 풍경이 영화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지만, 그 충돌의 이미지를 꼼꼼히 묘사하려고 애썼다. 또 개항기 인천에서는 부조화의 이미지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근대가 밀려 들어왔다. 억지로 밀려 들어오니까 조화롭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 속에는 당시 인천의 모습처럼 서양식 근대건축물 바로 옆에 누추한 판잣집 가게가 붙어있고, 양복을 입은 서양인과 누더기 한복을 입은 인천사람들이 섞여 있다. 간수들과 죄수들의 복장도 마주 서면 동시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차이를 뒀다. 미술감독, 촬영감독과 영화 콘셉트를 짤 때 개항기 인천이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었다는 걸 강조했다."-개항장 거리, 인천감리서 감옥, 경인선 부설공사 현장 같은 영화의 줄거리를 이끄는 주요 장면은 어떻게 고증했나.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읽었고, 인천 중구의 옛 개항장과 감리서 터 일대 답사도 여러 차례 했다. 답사는 고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 김구 선생의 심경을 현장에서 직접 느껴보자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인천감리서 터가 표지판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점은 무척 안타까웠다. 인천 개항장이나 김구 선생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찾아낼 수 있는 '디테일'도 영화 속에 많이 숨어있다. 영화 속 김창수가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기 전 간수들이 옥에서 압수한 책 가운데는 실제로 그에게 신문물을 일깨워준 '태서신사(泰西新史)'를 넣었다. 경인선 부설공사 현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중국인이 짜장면을 나눠주는 장면도 '디테일'을 살리자는 차원에서 재현했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놈들 등쌀에 못 살겠네'라는 가사의 '인천아리랑'를 경인선 부설공사 장면에서 노동요로 쓰기 위해 고증에 공들였다." -백범의 강제노역에 동원된 것은 두 번째 옥살이 때고, 실제로는 인천항 축항 공사현장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첫 번째 옥살이'로 '경인선 부설공사 노역'으로 바꾼 이유는."경인선 철도 부설은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역사라고 생각해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인천과 서울을 이은 이유는 인천이 개항장이었기 때문이다. 수탈의 심장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철도라는 혈관을 뚫어야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때부터 우리나라를 완전히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도 나오지만, 우리나라 백성들이 다치고 죽고 하면서 만든 경인선 철도로 우리나라의 곡식, 광물,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노동자까지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백범이 실제로 노역에 동원된 인천항 축항 공사도 의미가 크지만, 경인선이 주는 역사적 상징이 더 크다는 판단이었다."-소설가 김탁환과 함께 '대장 김창수'를 포함해 인천 개항장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기획하거나 공동 집필했다. '대장 김창수' 외 다른 작품도 영화화할 계획이 있나."김탁환 작가와는 창작집단 '원탁'을 만들어 공동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소설·영화 '대장 김창수'에 앞서 김탁환 작가와 공동작업으로 지난해 출간한 소설 '아편전쟁'은 작품 속 배경의 99%가 인천 개항장이다. 실제 작품 기획은 '대장 김창수'가 앞섰는데, 영화 제작기간이 4년이나 되다 보니까 중간에 '아편전쟁'이라는 개항장 배경의 범죄소설을 기획했다. 그 시기 중국은 아편으로 무너지고 있었는데, 중국과 가장 가까우면서 왕래가 활발한 인천도 아편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당시 인천에만 유일하게 청나라 조계가 형성돼 있었고, 청나라 상인과 노동자들이 인천에 들어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편전쟁'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의 출발점이다. '아편전쟁'은 이미 영화화가 추진되고 있는데, 직접 참여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인천 개항장을 소재로 한 이야깃거리 몇 가지가 머릿속에 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 2일 서울 압구정 CGV에서 만난 영화 '대장 김창수'의 이원태 감독. 이날 '관객과의 대화(GV)' 행사에 참석한 이원태 감독은 "관객들이 잘 몰랐던 백범 김구 선생의 청년시절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알게 됐다며 고맙다는 반응이 많다"고 말했다.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일본인 살해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서 재판받고 있는 청년시절의 김구 선생. /딜라이트 제공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인천감리서 감옥소장 역할을 맡은 배우 송승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원태 감독. /딜라이트 제공

2017-11-07 박경호

[인터뷰… 공감]'전국체전 경기도선수단 총감독' 최규진 道체육회 사무처장

■체육인·정치인으로서 걸어온 길집안 형편 탓 야구 대신 중·고교 시절 태권도 선수 활약수원시체조협회장 역임 후 도의원으로 소관 상임위 활동산악연맹회장땐 도지사 설득해 히말라야 원정대 파견도■도체육회 사무처장의 고민18연패 새목표 지금 성적 만족하지 않고 발전방안 모색통합 성공 체육회 흔들림 없는 단체로 거듭나는 게 과제"16연패에 대한 기쁨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경기도는 제9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종합우승을 달성하며 대회 종합우승 최다연속 기록인 16연패를 달성했다. 도선수단 총감독을 맡았던 최규진 도체육회 사무처장은 "16연패를 달성했다는 것은 기쁘지만 생각해 볼게 많아졌다"고 말한다.최 사무처장은 종합점수와 메달수가 전년도 보다 낮아진 것을 고민하는게 아니었다. 인구 1천300만명의 한국 최대 광역단체인 도의 규모와 위상에 맞는 성적을 냈는지, 그리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다. 16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최 사무처장이 경기체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그도 체육인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첫번째 인연, 야구를 하고 싶었던 어린이 태권도 선수 되다"경기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체육인인가요?"처음 최 사무처장을 만나는 사람은 그의 범상치 않은 체격으로 인해 이런 생각을 갖고는 한다.3선 도의원 출신이라 정치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있는 최 사무처장이기에 혹자들은 그를 체육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하지만 최 사무처장은 중·고교 시절 태권도 선수로 활약했었다.그는 "청소년시절 태권도를 했었다. 소년체전이나 전국체전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지역대회에서는 입상한 적도 있었다"고 밝혔다.수원북중에 재학 당시 서울에 있는 모고교 태권도부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최 사무처장은 "어렸을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지동초등학교에 입학했을때 막 야구부가 생겨서 가입해서 훈련도 했었지만 당시 집안 형편이 여유가 없어서 못했다"며 "가끔은 내가 그때 계속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고 전했다.이어 최 사무처장은 "야구는 못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태권도를 하게 됐고 중학교때는 지역 대회에서 1등을 한적도 있다"며 "또 서울지역의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지만 하숙을 하며 운동을 하는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서 수원에서 운동을 했다"고 말했다.#두번째 인연, 도의원으로 다시 만난 경기 체육고등학교까지 선수 생활을 했던 최 사무처장은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생활체육으로 여러 종목을 즐겼다.그러다 2000년 고교 선배들의 제안으로 수원시체조협회장을 맡으며 지역 체육계에 잠시 인연을 맺었고 그 무렵 제5대 도의회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활동을 했다.2002년에는 제6대 도의회 전반기 문화여성공보위원회 위원장과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 이사도 맡았다.2007년에는 지인들의 추천으로 도산악연맹회장도 맡아서 활동했다.최 사무처장은 "제 모교인 수원농고에 체조부가 있는데, 그렇다 보니 체조계에 선배들이 많다. 그분들이 제안해 체조협회장을 맡아 활동 했었다"며 "도산악연맹은 두번째 가맹경기단체장 활동이다 보니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그는 "당시 다른 지역의 경우 지역을 홍보하기 위해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경기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이 문제는 지역 산악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경기도의 자존심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해결해 보고 싶었다"고 전했다.이어 최 사무처장은 "어떻게 됐냐고요? 인연이 있던 김문수 도지사에게 달려가 '도가 한국체육의 중심이라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해내는 것을 왜 우리가 못 하냐'며 부탁했고 2차례에 걸쳐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위한 원정대를 파견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세번째 인연, 함께 고민하는 사무처장이 되다최 사무처장이 다시 지역 체육계와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건 바로 도체육회 사무처장을 맡고 나서다.그는 "선수 출신이라고 해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제가 도체육회 사무처장을 맡게 된건 제 개인적으로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체육인을 비롯해 도체육회 직원들과 소통하는 사무처장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이어 최 사무처장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이 성적을 내는 선수들, 그들이 기량을 펼 수 있도록 묵묵히 뒤에서 역할을 하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며 "이번 16연패도 그런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뤄낸 결과였다"고 전했다.최 사무처장은 "전국체전 기간 동안 선수와 지도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경기장을 다니며 현장에서 도가 한국체육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며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발굴해 낸다는 점에서는 뿌듯했지만 우리 지역 선수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지역을 떠나서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또 최 사무처장은 "100회 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개최도시 이점 등을 생각한다면 18연패 달성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꼭 18연패를 이뤄내기 위해서가 아닌 경기 체육의 성장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성적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그는 "다른 시도체육회 사무처장들은 경기도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활체육회와 체육회의 통합을 성공적으로 마친데 대해 부러움을 보내고는 한다"며 "통합체육회가 발족했지만 흔들림 없는 하나의 단체로 성숙된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인거 같다"고 덧붙였다.마지막으로 최 사무처장은 "이런 고민을 혼자 하는게 아닌 도체육회 임직원, 그리고 체육인들과 함께 해 방안을 모색해 나가려고 한다"며 "오늘이 아닌 내일이 밝은 도체육회와 경기체육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최규진 사무처장은?-학력▲ 1978년 수원 북중학교 졸업▲ 1981년 수원농립고등학교 졸업▲ 1989년 경희대학교 환경학과 졸업-경력▲ 2000년 6월~2008년1월 제5,6,7대 경기도의원▲ 2002년 7월~2004년 6월 제6대 경기도의회 전반기 문화여성공보위원회 위원장▲ 2007년 1월~2008년 1월 제7대 경기도산악연맹회장▲ 2009년 7월~2010년 3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원시협의회장▲ 2010년 7월~2011년 7월 한나라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2012년 2월~2014년 1월 한국환경공단 환경시설본부장▲ 2015년 1월~현재 경기도체육회 사무처장지난 30일 경기도생활체육대축전이 열린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만난 최규진 경기도체육회 사무처장이 인터뷰를 끝낸 후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2017-10-31 김종화

[인터뷰… 공감]붓으로 한글지도 그리는 '세계평화작가' 한한국 작가

20대때 이름 걸맞은 정체성 찾던 중 세종대왕 메시지 꿈 꿔 기획·제작20여년간 1㎝ 200만자 38개 작품 완성… UN본부 22개국·북한서 전시팔·무릎 피범벅 고통 속 자음·모음 화합의 원리처럼 한반도 통일 염원이산가족 아픔 담아 8년간 만든 '우리는 하나' 北도 예의 갖춰 가져가"본명이세요?"그를 만나면 많은 이들이 물어보는 말이다. 그의 이름은 '한한국(50)'. 본명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름에 나라가 3개(나라 한(韓), 나라 한(韓), 나라 국(國))나 들어가 있고, 전남 화순의 필봉산(筆峰山) 자락에서 태어나 한석봉의 후예(33대손)로 그 기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붓 하나로 한국을 전파하고 세계평화를 얘기하는 '세계평화작가'라는 타이틀이 억지스럽다거나 어색하지 않고, 그의 운명인 양 자연스럽기만 하다. # 내 이름은 '한국', 정체성 찾다 한글지도 제작의 길로… 그가 하는 일은 한글로 세계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한지를 수차례 배접하여 만든 대형한지 위에 세계평화의 염원이 담긴 글을 한글로 한자한자 빼곡히 담아낸다. 그의 작품은 각 나라의 지도에 마치 점처럼 한글을 채워넣는 것이 특징이다. 채색 대신 한글을 넣는 것이다. 한글 내용은 그 나라의 역사나 특징, 때론 문학작품이 들어가기도 한다. 글자는 1㎝의 작은 붓글씨로 채워가게 되는데 한번 오탈자가 나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글씨를 잘쓰는 것은 기본이고, 글자체와 형태 글씨의 강약과 전체적인 줄이 0.1㎜도 틀리지 않게 써야 한다. 어지간한 집중력과 체력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짧게는 5개월, 길게는 수년의 작업시간이 든다. 그 시간을 온전히 쭈그린 자세로 집중해야 하니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수련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연장이 남다른 것도 아니다. 작품활동을 할 때 사용하는 붓은 '대형 붓'을 제외하곤 세필붓(1㎝ 그릴때 쓰는 붓) 등은 모두 주변에서 쉽게 구입할수 있다.그와 붓과의 인연은 어릴적 부터 시작됐다. "8살에 붓을 잡고 한학을 공부했다. 군대에서도 모필병(毛筆兵, 상장·표창·각종 차트 등 글씨쓰는 일 담당)을 맡아 붓과 떼려야 뗄수 없는 생활을 했다"는 그는 1993년의 어느 날 문득 계시와도 같은 꿈을 꾼 뒤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당시 1993년은 세계화 붐이 막 일기 시작했던 때였다. 20대 청년이었던 내게 불현듯 든 생각이 '내 이름이 '한국'인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정체성 찾기에 나섰고 전국의 교회, 사찰 등을 돌며 일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세종대왕님이 나오셨다. 한글로 지도를 만들어라. 평화지도로 해라. 이러한 메시지를 준 꿈이었는데 꿈이 너무 선명해 그 길로 도서관을 찾았다." 그날 이후 그는 그 어디에서도 본적 없고, 시도되지도 않았던 '한글지도' 제작에 들어갔다.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하겠다 하자 주변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했고, 그의 깊은 뜻을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다. 기본 1m에서 10m를 아우르는 한지 위에 한글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고되고 또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깊었다."자음과 모음이 만나 글자를 이루는 것이 한글이다. 북한에서도 한글을 쓰고 있고, 남한에서도 한글을 쓰고 있다. 이 한글로써 우리는 하나가 된다. 자음과 모음이 통일되고 화합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화합의 원리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한글의 원리처럼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마음으로 평화지도를 제작하고 있다."그의 이러한 작품세계는 그가 하나둘 대작을 선보이면서 시선이 달라졌다. 한지 위에 한땀한땀 피땀서린 한글로 만들어진 세계 여러나라의 지도가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내자 의구심은 어느 순간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 피와 땀으로 점철된 작품세계, 북측도 예의 다해"눈을 가리고 쓰는 훈련을 한다. 마치 한석봉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에서나 하던 포복훈련도 한다. 대형 한지 위에서 작업하다보면 몇날몇일을 쭈그려 작업하는 날이 많다. 그러다보면 다리와 양팔의 통증이 심해진다. 종이 위를 기다보면 양팔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배어나오는 일도 예사로 벌어진다."이렇게 고된 고통과 피, 땀으로 완성된 지도가 38개 작품이다. 20여년간 작품에 쓰인 한글이 무려 200만자가 넘는다. 그의 작품은 UN본부 22개 대표국가(2008년)에도 가있고, 북한 묘향산에도 그의 작품('우리는 하나')이 전시돼 있다. 그가 팔과 무릎이 피범벅이 되어도 작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글과 한국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그의 마음가짐에 있다. "지구상 어느 국가에선가는 이런 평화의 지도를 그리고 염원해야 한다. 어렵고 힘든 작업이지만 내가 하고 있다는데 자부심도 느껴지고 영광스럽다."많은 작품중에서도 그가 특히 애착을 갖는 작품은 2000년대 초 제작한 '우리는 하나'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두점을 제작했는데 한글이 12만자가 들어갔다. 무려 8년의 제작과정이 걸렸으며, 남북한 대표시인들의 작품과 이산가족들의 수기가 한글로 만들어졌다. 이중 하나의 원본이 지난 2008년 통일부의 승인하에 북한에 전달돼 전시 중이다."현재 북한 묘향산에 있는 '우리는 하나'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 제작과정이 힘들었다. 한반도를 그린 이 작품은 이산가족수기와 평화염원이 담겨 있다. 지도상 3·8선을 그릴때 특히 힘들었다. 그런데 그 지점의 한글문구가 '어머니, 살아는 계십니까. 살아 생전 밥한번 해드리는게 소원입니다'라는 어느 이산가족의 수기였다. 이 문구를 쓰면서 3·8선을 넘었다. 그 글을 보면서 멈출수가 없었다. 양팔, 다리가 멍들고 붉게 물들었지만 지체할수가 없었다."이 작품은 한 작가 본인에게도 의미있는 것이지만 북한측에도 의미가 남달랐던 것 같다. 북한은 작품을 받으며 조건을 얘기하라했고, 한 작가는 "조건이 없는게 조건이다. 남북평화통일을 위해서"라고 일축했다. 이에 북측은 감사장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자칫 국가보안법에 위반될 소지가 있어 북한 문화성 직인이 찍힌 '인수증'과 함께 '기본합의서'라는 것을 만들어 북측은 한 작가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했다.한 작가는 북측에 작품을 제공하기 전 한가지 제안을 하기도 했다. 작품을 우리의 한이 서려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평화기원제를 지낸 뒤 전달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민족 염원의 넋을 담아 보내고픈게 한 작가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북측은 다른 곳을 찾으라했고, 그렇게 해서 5·18국립묘지에서 평화기원제를 한 뒤 북으로 보내졌다. 북측은 작품을 가져가면서도 예의를 다했다. 접촉장소인 중국에 고려항공기 특별기를 띄워 안전하게 가져간 것이다. 한달간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도 이뤄졌다.# 통일을 말하다! "평화는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적도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정서상 지금 통일을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북한의 계속되는 핵 위협과 국제 정세의 불안상황. 그럼에도 한 작가는 통일을 얘기한다. 한발 더 나아가 평양전시를 꿈꾼다."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언제든 전시회를 할수 있다. 하지만 관계가 안좋을 때 진정한 통일의 염원을 담아 진행하는 것에 의미가 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한에서 갖고 있는 '통일'이라는 작품도 빨리 전시가 돼서 많은 이들이 '통일'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남북평화통일을 염원하고 기원했으면 좋겠다"는 그는 "작품을 보며 좀더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통일에 대해 생각해볼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한한국 작가 제공■한한국 작가는?-약력▲ 세계평화사랑연맹 이사장▲ 중국 연변대학(예술대학) 객좌교수▲ (사)한국기록진흥원 원장▲ 8천만서명운동본부 이사장▲ 국제언론인클럽 상임고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역임)▲ 조선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역임)-수상내역▲ 2017 경기도를 빛낸 자랑스런 도민▲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물 대상(2회 선정)▲ 제5회 대한민국신창조인대상 ▲ 2017글로벌평화공헌대상▲ 2017국제평화대상▲ 2017한국을 빛낸 사람들 대상(미술부문) 등 다수 -작품세계▲ 2004~2009 '중국평화지도' 및 '희망대한민국' 대작 완성▲ 2002~2007 세계에서 가장 큰 '한반도평화지도' 대작 완성▲ 2002~2005 'UN헌장평화지도' 완성▲ 1995~1998 '한글십자가' 완성▲ 1994~2013 세계 34개국 한글세계평화지도 완성▲ 1996~2002 대한민국 9개도 '대한민국 평화·화합의 지도' 완성붓 하나로 세계평화를 전하는 한한국 작가. 그는 한글로 세계평화지도를 제작해 한글의 우수성은 물론 남북평화통일, 더 나아가 세계평화 염원의 뜻을 전하고 있다. 대형 한지 위에 1㎝ 간격의 한글을 채워넣는 작업은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다. 그의 작품은 UN대표국가를 비롯 북한에 까지 전시되며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평화작가'로 그 이름을 더 공고히 하고 있다.

2017-10-24 이윤희

[인터뷰… 공감]마지막 가곡집 7권 발간 강화 출신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600여곡 작곡 슈베르트만큼 쓰겠다던 목표 이뤄… 도움 준 많은 분들께 감사초교때 처음 들은 노래 단번에 외우는 등 인천서 작곡가로서의 숙명과 만나인천중학교 밴드부서 실력발휘 다양한 악기 섭렵… 고 2때 작품 발표회 가져식민시절 아픔도 생생하지만 인생의 '노른자위' 고향서 기악곡 정리 바람도인천 강화 출신의 작곡가 최영섭(88)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수식어는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다. 같은 강화 태생의 시인 한상억(1915~1992)의 시에 최영섭 작곡가가 곡을 붙여 만든 이 가곡은 한국 음악 역사에서 가장 자주 애창되는 가곡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누구도 이견이 없다.인천의 작곡가 최영섭이 1947년부터 70년 동안 작곡한 665곡의 가곡이 마지막 143곡을 수록한 가곡집 7권(아브라함 음악사) 발간으로 모두 책에 정리됐다. 그의 작곡인생 꼭 70주년이자, 지난 2010년부터 정리 작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인 올해 마무리된 작업이다.가곡 정리작업은 2010년 210곡을 담은 1~3권을 시작으로, 2012년 70곡과 111곡을 각각 정리한 4·5권, 2015년 131곡을 실은 6권에 이어 올해 143곡을 담은 7권으로 마무리됐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가까이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그를 만났다.최영섭 작곡가는 "가곡을 600여곡 작곡했다는 슈베르트만큼 곡을 남기겠다며 다짐한 중학교 시절의 바람이 이제 이뤄졌다고 생각하니 흐뭇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며 "남은 여생은 관현악곡과 칸타타, 오페라, 합창곡 등을 정리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또 "작곡하는 사람은 세상에 남겨 놔야 한다는 소명 때문에 시작한 일인데, 건강이나 생각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보살펴 준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이뤄내지 못했을 일"이라며 "어쩌면 마지막 가곡집이 될 지 모를 작업에 관심을 가져주고 도움을 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이번 작곡집에는 좀 더 쉽게 부를 수 있게 고친 '그리운 금강산 개정판'의 악보와 고은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광교 적설' 등 가곡과 성가곡, 찬송가 등이 수록됐다. 그가 손으로 쓴 자필 악보도 30여편이 실렸다.한 곡 만들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70여년 동안 665곡을 남기며 오로지 음악을 위해 작품혼을 불태운 그의 노력을 제대로 살피고 평가하는 것은 이제 후대의 몫으로 남겨졌다.작곡가 최영섭은 고향 인천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그의 말을 빌리자면 1929년 태어나 1963년 인천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30여년을 보낸 인천에서의 삶이 자신의 인생의 '노른자위'였다고 했다.돌이켜보면 그는 인천에서 작곡가로서의 숙명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어릴적 그는 하모니카와 피리에 재주가 많았는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악보 한 번 보지 못한 초등학생이 반달, 고향의 봄, 오빠 생각 등의 동요를 연주할 정도였다고 한다.그는 "선율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곤 했는데, 어머님이 사내놈이 눈물을 흘리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셨다"고 했다.창영초 재학시절에는 처음 들은 노래를 단번에 외워버려 학교를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일본 육군 대장이 창영초를 갑자기 방문할 일이 생겼는데, 그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학교 대표로 뽑혔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다가 교실로 불려간 그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지정곡을 단 두 번 연주를 듣고 '다 외웠다'고 대답해 학교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그는 자신이 음악가로 평생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시절 밴드부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했다."인천중학교에 입학 후 밴드부에 지원했어요. 저는 플루트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는데, 5학년 선배가 경쟁률이 높으니 한번 불어보라고 했죠. 저는 처음 만져본 플루트를 그럴듯하게 연주했고, 당연히 합격했죠. 당연히 선배는 어디서 배워본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고,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어요."행진곡 위주인 중학교 밴드부 레퍼토리를 익히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는 클라리넷, 오보에, 트럼펫, 트롬본 등 다른 악기를 혼자 연습하며 섭렵했다.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재미에 그는 제일 늦게 하교했다.또 학교 강당에 있던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를 혼자 독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아무도 손대지 않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강당의 피아노를 집에서 기름 걸레를 가져와 깨끗이 닦아놨는데, 이를 기특하게 본 선생님이 피아노 열쇠를 내어줘 마음껏 연습했다고 한다.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 경복중학교로 전학해 인천에서 통학하며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이론을 배웠고, 고교 2학년 때인 1947년 자신이 작곡한 곡으로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노른자위 같은 인천에서의 과정은 좋은 추억도 많았지만 일본 식민시절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도 생생하게 남아있다.지금도 일본 NHK의 뉴스가 더 듣기 편하다는 그는 특히 인천중학교재학시절 혹독하기 그지없던 교련 수업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교련 수업 시간에 비행기 조종간 모형을 쥐고 비행기 조종술을 배운 기억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가미카제가 되는 거냐며 우울해했다고 한다.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어야 했던 교련 수업시간도 생생하다고 했다."하루는 일부러 도시락을 운동장에 내팽개치며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시 조선 학생은 물론 일본 학생들도 우물쭈물 댔지만 결국 다 주워 먹었죠."그는 자신의 인생이 길어야 1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며 두 가지 바람을 전했다."그리운 금강산이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가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었죠. 금세 통일이 될 것으로 알았지만 벌써 40년이 더 지났습니다. 하루 빨리 평화 통일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또 인생의 노른자위를 보낸 인천에서 남은 여생 못다 정리한 기악곡 정리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은 바람도 있습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최영섭 작곡가는?▲ 1929년 11월 인천시 화도면 사기리 77번지 출생▲ 창영초·인천중·경복고·서울대 음대·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1961년 그리운 금강산 작곡▲ 1995년 광복50주년 기념 칸타타 '오! 사랑하는 나의조국' 24장 발표▲ 2000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건립▲ 인천여중고, 인천여자상업고, 이화여자고, 한양대 음대, 상명여대 음악과, 세종대 음악과 등에서 교직 생활▲ 상훈-인천시문화상(1959년)-경기도 문화상(1961년)-세종문화상 대통령상(1998년)-서울시 문화상(2001년)-이승휴 문화상(2015년)국민 가곡으로 불리는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인천 강화 태생의 최영섭(88) 작곡가가 평생 작곡한 665곡의 가곡을 정리한 악보집 발간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인천에서 성장하며 보낸 시간이 내 인생의 노른자위였다"며 "작곡가로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를 준 고향 인천에서 남은 작업을 진행하며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7-10-17 김성호

[인터뷰… 공감]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 경기지부 회장

'안보에 좌·우 없다' 취임 후 혁신 발걸음, 많은 회원들 공감·동행사재 털어서라도 회령진성에 국제자원봉사센터·힐링센터 세울것세월호 분향소 지킴이 자처, 안산 정부 합동 분향소 유일하게 지켜3차례 부도 위기 딛고 일어선 뚝심 "봉사 힘으로 지역 발전 돕겠다""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1597년) 승리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장흥 회령진성을 안보와 자원봉사의 메카로 만드는 게 소망입니다."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이하 자총) 경기지부 회장(54)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이순신과 12척의 배'를 화두로 꺼냈다. 화두라기엔 구상이 구체적이다. "이충무공의 유적이 있는 전남 고금도에 안보와 자원봉사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국제자원봉사센터와 힐링센터를 세우겠다"며 "사재를 헐어서라도 회령진성에 12척의 배를 복원해 역사관광 명소를 만든 뒤 안보·자원봉사재단을 설립해 나라를 위한 참다운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밝혔다.이유가 의미심장하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망가진 배 12척을 300여 명의 목수를 동원해 수리한 뒤 왜군의 침략으로 위기에 내몰린 민족과 나라를 구했듯이, 장흥 회령진성에서 안보정신으로 무장한 자원봉사자를 육성해 북핵과 외세 등으로 전쟁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을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왜침에 대비한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떠올랐다.최근 홍 회장의 행보는 자총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탄핵정국을 통해 '태극기 부대'로 낙인찍힌 낡고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참다운 안보단체로서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행보다. 지난해 자총 안산시지회장 시절엔 일부 회원들이 촛불집회에 맞서 서울 태극기 집회에 나가자고 주장하자 "자유총연맹은 순수 안보단체이지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단체가 아니다"라고 반대했다. 내부의 눈총과 외부의 신선한 평가가 엇갈렸다.자총 경기지부 회장 취임 이후에도 홍 회장의 자총 혁신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 8월 한국자유총연맹 경기도지부 제11대 회장 취임식에서 김구 선생의 "독립된 내 나라의 문지기가 되겠다"는 어록을 인용해 나라 지키는 일이 이념에 앞선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9월 체육대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위기가 오거든 목숨을 바쳐라"는 문구를 소개해 안보단체인 자총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보수 이념의 선봉임을 자임하던 회원들에게 나라를 위한 헌신을 강조했다. 정권 안보가 아닌 순수한 국가안보 수호가 자총이 나아갈 길임을 제시한 것이다.'안보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소신과 행보는 주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혹자는 '안보단체의 수장이 맞느냐'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그러나 홍 회장의 나라와 민족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오랜 세월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뜨거운 열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하자' '도와 달라'는 말에 함께 봉사현장을 누비거나 쌈지 돈을 털어 동행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는 "보수는 부모와 같고 진보는 자식"이라며 국가 안보를 위해선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홍 회장의 남다른 행보는 국가재난인 세월호 사태 때도 역력히 드러났다. 지난 2012년부터 올해 7월까지 6년여간 자총 안산시지회장을 역임한 홍 회장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한 그 날 저녁부터 '세월호 분향소 지킴이'를 자처해 왔다. 자총 안산시지회 회원들이 1천 일이 넘는 현재까지 안산 화랑유원지 내 정부 합동 세월호 분향소를 유일하게 지키는 것도 홍 회장의 뚝심 덕분이다.'자총이 세월호 분향소를 지킬 이유가 있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그는 "그럼 정부 합동분향소란 간판을 떼고, 정부가 파견한 서기관을 철수시키라"라고 되받았다. 이어 "국가 위기 상황에서 안보를 위해 활동하는 자총이 아니면 누가 합동분향소를 지키느냐"고 설득, 정부 유관기관의 지원을 이끌어 낸 일은 여전히 회자되는 일화로 남았다. "세월호 미수습자 귀환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합동 영결식을 마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총 안산시지회와 함께 분향소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공인의 삶'을 살며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이전, 홍 회장은 스스로 전기 노동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전기회사 CEO에서 부동산디벨로퍼로, 문화사업가로, 지금은 사회공헌 봉사가로 성장하기까지, 그 역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1963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홍 회장은 16살 때 광주특별시에 소재한 기술직업학교(전기)로 공부하러 갔다가 5·18 광주 사태 때 직업학교 부도로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의 한 전기공장에서 노동자로 지내던 그는 1985년 안산 반월시화산단의 전기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중 회사가 부도로 실업자가 됐다.이후 전기 엔지니어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홍 회장은 1988년 (주)장흥전력을 창업한다. 맨몸으로 창업한 홍 회장과 공동 창업자인 부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1995년 거래하던 건설업체의 부도로 1차 경영위기에 빠져 3년여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홍 회장은 곧 이어 닥친 IMF경제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는 투지를 보였다. 1999년 안양의 한 공원조성 사업에서 3억8천여 만원 규모의 공사를 가까스로 따낸 뒤 회생의 길을 걸으며 승승장구했다.장흥전력은 지난 2006년 반월공단 내 아파트형 공장(5만여㎡)에 투자했다가 은행으로부터 중도금 대출을 받지 못해 헐값에 부동산을 팔아야만 했다. 자금 유동성이 경색되면서 2차 경영위기로 회사까지 부도날 뻔 했다. 하지만 2008년 리먼 사태로 국제경제가 곤두박질 칠 때 홍 회장은 안산 고잔 신도시 내 영화관 건물과 맞은 편 웨딩 부지를 경매를 통해 인수하는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하지만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서 3차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관행처럼 운영해 왔던 회사의 비정상적인 경영에 세무당국이 메스를 댄 것이다. 자칫 모든 것을 날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홍 회장의 대응은 정공법이었다. 그동안 사업을 통해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세무조사를 무마하거나 세금을 깎으려 들기보다는 '자신의 경영이 뭐가 잘못됐는지'를 반성했다. 눈물을 머금고 젊은 부부의 애정이 담긴 회사의 이름을 (주)거룡전력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 선택을 홍 회장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금전적으론 수백억 원을 손해 봤지만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좋기 기회가 된 시점이었다"고 회상한다.홍 회장은 2010년 3월부터 (주)희성엔터테이먼트를 설립, 극장 등 문화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동시에 지역사회 발전에 밑거름이 될 자원봉사가로 사회공헌사업에 뛰어들었다. 올해 4월 안산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으로 선출된 홍 회장의 자원봉사 활동은 명성이 자자하다. 자총 안산시지회장을 역임하면서 안산시민을 위한 안보 캠페인 및 독거노인 후원활동,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사업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지역 자원봉사단체와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시민의 힘으로 안산이 변화할 수 있도록 봉사단체들의 플랫폼 임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했다. 안산시는 최근 '2017 제31회 안산시 문화상'(지역사회개발)을 그에게 안겼다.그는 정이 많은 리더이다. 홍 회장은 지난 6월 발생한 산불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강릉과 삼척 피해 지역 이재민 지원에 써달라며 성금 1천만 원을 쾌척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태는 것이 자원봉사"라며 "산불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분들께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일상생활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라는 맘에 강원도를 찾게 된 것"이라고 그는 애써 좋은 웃음을 지었다."지금의 나는 모두 가족과 주변 지인들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홍 회장은 "굳건한 안보로 이 민족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원봉사의 힘으로 지역사회를 발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미력한 역할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주)거룡전력 대표인 그는 안산시 생활체육협의회 해양레포츠연합회장(2010), 안산25시광장 연합회장(2011), 통합 안산시 유도회장(2017~현재) 등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지난 1987년 결혼한 (주)장흥전력 공동창업자인 부인(52) 사이에 3형제를 두고 있다. 글/전상천기자 junsch@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 경기지부 회장은 정권 안보가 아닌 순수한 국가안보 수호가 자총이 나아갈 길임을 제시하며 "자원봉사의 힘으로 지역사회를 발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미력한 역할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17-10-10 전상천

[인터뷰… 공감]DMZ국제다큐영화제 집행위원장 배우 조재현

영화제가 힘 생기면 공격 받겠지만 그만큼 힘있는 영화제가 되기 원해사장과 알바 입장이 다른 '최저시급' 치킨집 소재 다큐로 만들고 싶어당초 목표 80%는 달성… 10주년 앞두고 강박은 없지만 새 출발점 돼야규모에 비해 사무국 인원 적어… 365일 다큐 상영하는 장소 마련 '노력'노조원 이야기에 왜 사측 입장은 보여주지 않느냐는 고등학생혐한데모 다룬 영화에서 혐일도 함께 문제 제기한 재일 한국인 감독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다큐에 대한 그의 고민9년 전, 배우 조재현은 경기도로부터 DMZ국제다큐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봄이었고, 영화제는 같은 해 가을에 열릴 예정이었다. 급조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없어지는 것도 금방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DMZ라는 장소가 가진 힘과 다큐라는 장르의 매력이 부합한다며 성장 가능성을 높이 봤다. 그렇다면 해볼만 하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그와 DMZ국제다큐영화제는 올해도 안녕히 관객과 만나고 있다.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목표를 세웠어요. 내가 위원장이 아니더라도, 경기도지사가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드는 것이었죠. 정치적으로 휩쓸려서 영화제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어요. 다큐 영화 만드는 감독들은 대부분 진보적인데, 초대 조직위원장이었던 당시의 경기도지사는 새누리당 소속이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대로 했죠. 지금 도지사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한결같이 지켜주고 있어요. 언젠가 도지사가 바뀌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고, 영화제가 힘이 생기면 공격을 받게 되기도 하겠죠. 그러나 공격받을 만큼 힘이 생긴 영화제라면 흔들기도 어려워요. 그런 영화제가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드물게 장수하고 있는 그는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만들어진 감동적인, 소소한, 의미심장한, 유쾌한, 안타까운, 곱씹게 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간직하고 있다. "재작년 청소년경쟁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영화가 학업 성적이 좋은 친구가 만든 작품이 있었는데, 제목이 '시발'이었어요. 수업과정에 대한 스트레스를 담았는데 그 한마디 제목이 시원스러웠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대학도 다큐 공부를 하는 쪽으로 갔다더라고요. 올해부터는 '영상으로 쓰는 생애 이야기'라는 실버 세대를 위한 다큐 제작 지원도 하는데, 참가하신 분들 대부분이 70대이시고, 90대인 분도 계세요. 처음으로 카메라를 만지고 촬영을 하는 거예요. 구술사와 감독의 도움을 받아서 아주 진지하게 작업하시고 계세요. 영화제 2회 때 쌍용자동차 파업을 기록한 '저 달이 차기 전에'를 상영했을 때는 관객들이 많이 울었어요. 다큐 제목은 노조원이 달을 보며 '저 달이 차기 전에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탄하는 장면에서 따온 거예요. 노조위원장이 패배를 인정하는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죠.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왜 사측의 입장은 보여주지 않느냐?'고 질문하더라고요. 그때는 학생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데 놀랐고, 한편으로는 다큐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어요. 어제 상영한 '카운터스'에는 혐한데모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요. 이들의 대장은 야쿠자였어요. 스스로 우파라고 생각하고, 혐한데모를 했던 사람이에요. 혐한데모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하지 말자고 데모를 하게 된 거예요. 영화는 혐한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재일 한국인인 감독은 한국에서의 혐일 행위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 합니다. 재일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생각과 시선이 담겨있어요. 오 아니면 엑스가 아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요."지난 9년 동안 조재현 집행위원장은 다양한 사람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나고, 이를 통해 수많은 삶의 조각을 접했다. 그 조각들은 하나도 같은 것 없이 각자의 색으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보는 그도 변했고, 세상의 변화도 실감했다. "자기 생각과 성향을 표출하는데 당당해진 것 같아요. 2002년이 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월드컵 이후부터 촛불로 표현하고 한데 뭉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죠. 그러나 서로 표현만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지 않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상대를 더 이해하고 인정하며 다양성을 길러야 합니다."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다큐멘터리가 주춧돌이 되리라고 그는 믿는다. 그런 사회가 될수록 다큐의 영역은 확장되고, 관객들에게도 더 환영받을 것이라고도. 이를 위해 자신이 직접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의향도 있다. 제목은 아마 '나는 치킨집 사장님이다'일 것이다."다양함에 대해서라면 직접 다큐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지인이 프랜차이즈 치킨 가게를 운영하는데, 굉장히 잘 되는 편이래요. 그 집에 갈 때마다 손님들이 차있어요. 장사가 잘될 때 수입이 500만원, 잘 안되면 250만원 정도 된데요. 근데 내년 최저시급이 1만원이 됐잖아요. 오른 시급으로 알바비를 주면, 장사가 잘 안되는 달에는 수입이 50만원 정도가 될 거라며 걱정하고 있어요. 청년들의 입장은 또 다르죠. 물러설 수 없는 첨예한 문제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내년이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10회를 맞는다. 세계 30여개국 62편의 작품이 참가한 가운데 첫 영화제를 시작했고, 올해는 109개국 1천187편의 출품작 중 42개국 114편이 상영된다. 경쟁부문은 국제경쟁, 아시아경쟁, 한국경쟁, 청소년경쟁 등 4개의 섹션으로 진행되며 총 11개 부문을 시상한다. 신인다큐감독 발굴을 위해 '젊은 기러기상'도 신설했다. 제작 지원을 받았던 감독들이 수상자로 돌아왔고 참가자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다양해졌다.집행위원장을 오래 할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의 목표를 달성하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기왕 여기까지 오고 나니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초대 집행위원장으로서 꼭 해야 할 일, 정착시켜 안정적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80%쯤 달성했다고 봅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먼 일이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이 영화제가 꼭 필요한 영화제로 보여지고 느껴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그는 10주년을 크게, 화려하게 해야한다는 강박은 없다고 했다. 다만 미래를 준비하는 계획의 출발점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다 단단한 조직을 만들고, 상설 상영관도 마련할 계획이다. "영화제 기간동안은 40~50명의 인원이 일을 하지만, 영화제 사무국 고정 인원은 6명이에요. 영화제 규모가 커진데 비해 너무 적죠. 일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체계적으로 업무가 연장되려면 이보다는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또한 크지는 않더라고 365일 언제든 다큐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을 해결하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다보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조재현 위원장은?-경력▲ 2009.07 ~ 현재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 현재 경성대학교 예술종합대학 영화학과 교수▲ 2012.03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문화예술대학 미디어영상연기과 학과장/ 부교수▲ 2010.08~2014.09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2009.01~2014.05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수상내역▲ 2015 S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2013 제17회 몬트리올 판타지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2011 연극열전3 어워즈 작품상▲ 2008 MBC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최우수남자연기상▲ 2001 S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1992 청룡영화제 신인연기자상▲ 1991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자상DMZ다큐영화제가 진행 중인 지난 24일 고양 일산 메가박스 백석점에서 조재현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옥상 야외테라스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을 오가면서 그와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DMZ국제다큐영화제 제공

2017-09-26 민정주

[인터뷰… 공감]곽재영 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

육상 중·장거리선수 활약40년 가까이 인천육상 이끌어 온지역 체육계 든든한 버팀목아직도 뛰고 있는 선수들 보면다리에 힘이 들어간다고◈육상 접한 계기와 기억에 남는 순간중 1학년때 잘 뛴다는 선배 권유로 시작강화 3·1절 기념대회 내가 초대 우승자◈체육계 수장으로 잊지 못 할 일육상연맹도 안될거라던 亞육상선수권2표 차로 인도 꺾고 인천유치 이끌어내◈후배 체육인들에 당부의 말씀'떠난 다음에는 말하지 말라'가 내 신조비난이 될 수 있기에 조언은 안하는 편◈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대해풀코스 국제대회로 개최위해 서둘러야대회만의 특징있는 기념품 제공도 필요인천 체육과 평생을 함께 한 곽재영(87) 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지역 체육계 원로로서 여전히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교와 대학 재학 시절 육상 중·장거리 선수로 활약했으며, 인천이 경기도에 속했던 1975년 경기도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체육 행정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40년 가까이 인천 육상을 이끈 곽 전 회장의 육상 인생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될 정도로 에피소드가 넘쳐난다.2014 인천아시안게임 유치의 밑거름이 된 제16회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2005년 개최)부터 지역 육상과 마라톤대회들까지 곽 전 회장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아직도 운동장을 달리는 선수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는 곽 전 회장에게 마라톤과도 같은 체육(육상) 인생을 들었다.-육상을 접한 시기와 계기는.당시엔 인천기계공고가 6년제였다. 숭의초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봐서 기계공고 6년제에 입학했다. 1학년 때 선배들이 한번 뛰어보라고 해서 운동장을 뛰었는데, 잘 뛴다고 육상부를 권유해서 바로 들어갔다. 일제시대 때 태어나 분위기상 운동을 할 수 없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들어간 중학교 1학년 때 육상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야구나 축구 같은 구기 종목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은 육상 뿐이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지금도 매년 강화에서 3·1절 기념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60회가 넘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첫 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1회 대회 우승자다. 60여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현재 인천 중구청 부근에서 출발해 옛 부평 경찰학교까지 돌아오는 20㎞ 코스였는데,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이 밖에도 학년별 육상대회가 있었는데, 중·장거리 종목에서 3관왕에 오르며 최우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요즘처럼 좋은 경기장에서 세련된 방식으로 경기를 한 건 아니었지만, 각 학교에서 펼친 응원전은 상당히 열광적이었다. 달리는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완주를 하면 그 괴로움은 눈이 녹듯 사라진다. 완주했을 때 느끼는 희열을 잊지 못해 지속적으로 달렸던 것 같다.-체육 행정가로 변신은 언제 한 건가.고교 졸업 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동국대로 진학을 했다. 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는 경기도육상경기연맹에 들어갔으며, 어린 나이에 경기도체육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한때 인천 제일생명 초대 지점장을 지냈으며, 10년 정도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인천시육상연맹 회장과 시체육회 이사로 활동을 시작했다.-그동안 지역 육상과 체육계의 수장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지난 2005년 9월 인천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다. 북한을 포함해 43개국이 참여했는데, 너무 자랑스러웠다. 당시 영창악기 대표가 친구였는데, 대회 관중을 위한 경품용으로 쓰기 위해 친구에게 피아노를 원가에 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고, 친구가 흔쾌히 응해서 피아노를 경품으로 내걸 수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응원전은 더욱 뜨거웠다. 대회 개최 전으로 돌아가서, 당시 안상수 시장이 대회 유치를 제안했다. 내가 공식적인 유치 활동에 나섰는데, 대한육상연맹에서는 안 될 거라고 했다. 인천 육상이 망신만 당할 것이라는 목소리들도 만만치 않게 들렸다. 내가 직접 아시아육상연맹을 찾아가 유치 운동을 벌였다. 필리핀 총회에서 대회 개최지를 선정했는데, 17-15, 단 2표 차로 인도를 꺾고 인천으로 대회를 가져왔다. 당시 깊은 관계를 맺은 아시아연맹 회장이 훗날 2014 인천아시안게임 유치 때도 도움을 많이 줬다. 지금도 모리스 니콜라스 아시아연맹 사무총장을 비롯해 다들 형제처럼 지낸다. 지역 체육계로 넓혀서 본다면,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로 편제된 후 시체육회 이사를 맡았었는데, 당시 숭의경기장 옆에 건립한 체육회관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심재홍 시장(시체육회장)이 체육회관을 짓는데 얼마가 들어가느냐고 묻길래 10억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45억원이 들어갔다. 훗날 심 시장이 나한테 거짓말 했다고 하길래, '돈 많이 든다고 했으면 짓게 했겠느냐'고 답하고는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난다.-현재 들어선 인천축구전용경기장과 주변 아파트 단지가 계획되면서 숭의경기장과 도원야구장, 체육회관은 모두 헐렸다. 체육회관 지었을 때가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으면, 헐릴 때 상당히 아쉬워했을 것 같다.2008년께 경기장과 회관이 헐렸다. 헐리기 전 회관에 입주해 있던 경기가맹단체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아쉬움의 술잔을 기울였던 생각이 난다.-지역 체육계 어른으로서 후배 체육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내 신조가 '떠난 다음에는 말하지 말라'이다. 비난이 된다. 현재 연맹 회장도 관둔 상태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조언 등은 안 하려고 한다.-오는 24일 올해 하반기 인천에서 열리는 최대 마라톤 축제인 2017 인천 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린다. 대회 설립을 주도했는데.모리스 니콜라스 아시아연맹 사무총장이 대회 설립에 도움을 많이 줬다. 만약 나와 형제처럼 지내는 모리스 사무총장이 없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상반기에 열리는 인천국제하프마라톤대회가 기존에 있는 상황에서 한 도시에 2개 국제 하프 마라톤대회를 배정하지 않았을 거다. 아시아연맹의 전 회장과 현 회장 모두 힘 써줬다.-수년 동안 송도국제마라톤대회를 지켜봤는데, 더욱 발전하기 위해선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나.송도국제도시 안에서 이뤄지는 이 대회는 코스도 좋고, 발전 가능성이 많다. 최대한 빨리 풀코스 국제 대회를 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풀코스 국제대회로 올라서면 참가 선수들부터 해서 대회의 규모와 격이 올라간다. 그리고, 해외 이름 있는 마라톤 대회들을 보면 마라톤 완주자들에게 그 대회만의 특징이 잘 반영된 의미 있는 기념품들을 제공한다. 송도국제마라톤대회도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송도국제마라톤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마라토너들을 비롯해 마라톤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마라톤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가장 정직한 운동이다. 달리면서 자아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스포츠인 마라톤을 보다 많은 시민이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대담·정리/임성훈 인천본사 문체부장·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곽재영 전 회장은? -학 력▲ 1951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경 력▲ 1975년 경기도육상경기연맹 부회장 ▲ 1976년 경우해운(주) 대표회장▲ 1978년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1981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 인천시체육회 이사▲ 1989년 인천시체육회 실무부회장▲ 1994년 인천상공회의소 부회장▲ 1996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2001년 (사)한국육상진흥회 이사▲ 2004년 제16회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2013년 1월 인천육상경기연맹 회장 이임▲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인천 체육(육상)과 평생을 함께 한 곽재영 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달리는 과정은 힘들지만, 완주하고 나면 그 괴로움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면서 "가장 정직한 운동인 마라톤을 보다 많은 사람이 접하고, 완주했을 때의 희열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7-09-19 임성훈·김영준

[인터뷰… 공감]100여개국 돌며 여행 에세이 쓴 김인자 작가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현대시학으로 등단… 결혼 후 '詩 쓰기' 시작43세때 '첫 발' 20여년간 히말라야 트레킹에 아프리카 트럭여행까지 도전휴대전화 없이 카메라만 들고 빵 한 조각 나눔의 행복 등 사람이야기 담아산문 쓰더라도 나는 '결국 시인'… 시를 쓰며 인생이 여행인 듯 흘러갈 것'엄지를 세워 보우!라고 인사하는' 아이에 대해 김인자 작가는 썼다. '잠보!'라는 인사와 '하쿠나 마타타'라는 인사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책 속에는 세마댄스를 추는 세마젠들도 있다. 치맛자락과 신발 끄는 소리로 춤은 시작된다. 무용수들은 아주 느리게 돌기 시작해 조금씩 빨라지는데 같은 동작이 10~15분간 지속된다. 이는 더 깊은 고통으로 들어가기 위한 무아의 세계, 즉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진정한 망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고('사과나무가 있는 국경' 71p.).요즘은 누구나 여행을 한다. 이번 추석 연휴동안에는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9명이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이제 여행은 특별한 것이 못된다. 여행관련 서적도 넘쳐나서 여행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여행자가 되는 동안 김 작가는 여행 에세이를 10여 편 발표했다. 모두 여행 에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지만 어떤 책은 가이드 역할을 하고, 어떤 책은 시집 같기도 하다. 올해 7월에는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이라는 제목의 '포토 에세이'를 펴냈다. 20여년 동안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그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은 글을 모았다. 여행보다는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이 담겨있는 책이다.김인자 작가는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결혼해 수원으로 와서부터 시를 썼는데 특별히 시를 배운 적은 없다고 한다. 시는 배워서 될 게 아니라고 일찌감치 생각했다. 배우기보다는 그저 다르게 보려고 애를 썼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여행은 43살에, 두 딸과 함께 했다. "그 당시에는 혼자 여행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남편은 공무원이고 저는 종부고. 여행을 시작할 때 혁명수준의 투쟁을 했어요. 혼자 처음 여행 갈 때는 패키지로 간다고 둘러대고 개인여행을 했어요." 서유럽에서 시작한 여행로는 100여 개국으로 뻗어 나갔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7차례 떠났고, 킬리만자로며 안데스 등 높다는 산 근처에는 다 가봤다. 수십 개국을 여행한 끝에 아프리카 트럭여행을 시도했다. '인류의 시원(始原)'이라는 아프리카에 꼭 가고 싶었는데, 국내 여행사에는 아프리카 여행상품이 없었다. 영국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팀을 꾸릴 수 있었다. 17명이 한 팀인데 아시아인은 김 작가 뿐이었다. 이십대 백인 청년들과 개조한 트럭을 타고 돌아다녔다. 청년들은 여행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김 작자의 경험은 여행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에서 그들은 완전히 다른 풍경과 사람들을 만났다.아프리카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여행 중에는 언제나 새롭고 놀라운 것들,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 한 번은 말라위에 갔다. 둘째 딸이 영국의 NGO단체 소속으로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 작가가 알던 둘째 딸은 지극히 평범한, 도시아이였다. "숙소에 물을 받아 놓고 쓰는 욕조가 있었어요. 죽은 쥐가 물에 떠있는 걸 보더니 딸아이가 맨손으로 건져 뒤뜰에 묻더라고요. 벌레 한 마리에 기겁하고 난리치던 아이였는데 그렇게 변한 것을 보고 놀랐죠. 또 한번 놀란 건 같이 봉사 활동하는 스텝들이 인사하러 왔을 때였어요. 마침 멸치액젓으로 김치를 담그고 있었는데 딸이 스텝들에게 김치를 먹이려는 거예요. 나는 그들이 액젓 냄새를 싫어할 것 같아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 딸은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 음식이니 우리 방식 그대로 경험하는 게 맞다고 하더라고요. 그곳에서 딸과 한달 동안 지냈는데, 딸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6대주를 두루 다니는 동안 새로운 것과 마주치면서, 김작가는 변했다. 여행을 할수록 비자를 받는 것을 비롯해 여행의 모든 절차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또한 아무리 어려워도 하려고 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배웠다.여행사 상품목록에 없는, 나만의 여행을 하면서 출판 제의도 받았고, 시집 아닌 책을 쓰기 시작했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제아무리 아름다운 절경보다도, 산해진미보다도, 더 좋은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그녀의 여행도 변했다. "여행하면서 쇼핑을 한 적이 거의 없어요. 먹고 입는 데는 돈을 잘 안 써요. 그나마 챙겨간 물건들도 줄이고 줄여서 떠날 때보다 돌아올 때 짐을 반으로 줄이곤 하는데, 한번은 베트남에서 한 소녀를 만났어요. 전통의상을 사달라고 일주일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니더라고요. 그러다 소녀의 집에 가게 됐는데 가족 전부가 아픈 거예요. 그래서 옷도 사고 가방이랑 모자까지 샀어요."여행하면서 만난 아이들은 그녀가 건넨 빵 한 조각에 행복해 했고,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은 더 행복했다고, 노인들은 인생의 정수를 품고 있다가 그녀에게 슬쩍 보여주었는데 그 때도 행복했다고, 그러니까 여행하면서 얻은 행복은 대게 사람에게서 비롯됐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사람에 올인하는 여행을 한다. 휴대전화는 가져가지 않고 카메라만 두어대 챙겨간다. 아이들을 찍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자기를 찍도록 놔두기도 한다. 정신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까운 게 없다. 호텔비로 쓸 수 있는 100달러가 생기면 5달러짜리 방에 묵고 아이들을 위해 95달러를 쓴다. 그게 재밌다. 그렇게 하기위해 여행을 한다.여행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대관령에 머무른다. 산 좋아하는 남편이 10여 년 전에 마련한 집이 있다. 숲을 좋아해 차를 한 잔 마셔도 숲에 가서 마시는데, 숲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고라니가 옆에 와서 기웃거린다고 한다. 지난해 발표한 에세이 '대관령에 오시려거든'에 대관령의 이국적인 자연과 삶을 기록했다.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이 사람에 대해 쓴 글이라면 '대관령에 오시려거든'은 자연에서의 삶에 대해 쓴, 짝을 이루는 책이에요."일 년 중 4개월쯤은 여행을 하고, 4개월쯤은 대관령의 별장에 체류하고 나머지는 수원의 집에서 지낸다. 집에서는 시를 쓴다. 마지막 시집을 출판한 것은 2004년이지만 지금도 꾸준히 시를 발표하고 있다. 여행을 이렇게 오랫동안 하리라고 생각하고 시작하지 않았지만 시는 언제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산문을 쓰더라도 나는 결국 시인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행도 시를 쓰는 과정 중의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한동안은 수원집의 책상에 붙박혀 글을 쓸 텐데, 그 시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뉴질랜드에 갈 계획이에요. 그리고 또 시를 쓰며 인생이 여행인 듯 흘러가겠죠." 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김인자 작가는?-강원도 삼척 출생-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겨울여행' 당선-시집 :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 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산문집 : ▲그대, 마르지 않는 사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대관령에 오시려거든-여행서 :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 포구 ▲걸어서 히말라야 ▲풍경 속을 걷는 즐거움, 명상산책 ▲아프리카 트럭여행 ▲남해기행 ▲사색기행 ▲나는 캠퍼밴 타고 뉴질랜드 여행한다 ▲뉴질랜드에서 온 러브레터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남미 페루의 삐삭 유적지에서 야생 야마(낙타과)의 사진을 찍고 있는 김인자 작가. /김인자 작가 제공아프리카 잠비아 오지마을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아프리카 말라위 빌리지 칸데비치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모로코 사하라 사막 앞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호주 울루루 가는 길의 붉은사막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

2017-09-12 민정주

[인터뷰… 공감]프로축구 인천유나이티드 강인덕 대표이사

광양 전지훈련서 단합 휴일도 잊은채 의욕적강등권 격차 벌릴 것 2부 리그는 생각도 안해선수·감독·프런트 갈등이 경기력에도 영향시즌 후 책임 묻고 경영진단 통해 조직 재편구단 자체 노력으로 市 지원 떳떳하게 받아야검증된 선수 이적보다 잔류 AFC 챔스 도전체육회 상임부회장 포함 도움·변화주고 떠날 것무엇보다 관중이 많이 찾았으면 시민들에 당부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1부리그) 인천유나이티드의 강인덕(60) 대표이사는 지난달 초 전임 대표이사의 사퇴로 공석이 된 대표직에 긴급 투입된 인천호(號)의 선장이다. 20여일 동안 '직무대행' 꼬리표를 달고 시즌 첫 2연승과 함께 팀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한 강 대표이사는 지난달 28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정식 대표이사로 선임됐다.강 대표이사는 4일 인천 문학월드컵경기장과 경기장 내 집무실에서 이어진 인터뷰 내내 구단의 성적과 운영적 측면에 대한 질문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어떨 땐 비장한 모습으로 '인천호'를 이끄는 선장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줬다. 경기장에선 등번호 12번이 적힌 인천 유니폼 상의를 입었다. 평소 자신을 12번째 선수로 소개하는 강 대표이사는 선수단 서포트에 충실하려는 의지를 담아 등번호 12번을 새겼다.선수단의 근황이 첫 화제였다. 3주 간의 A매치 휴식기의 마지막 주를 맞은 인천 선수단은 오는 10일 홈에서 열릴 광주FC와 일전을 준비 중이다.강 대표이사는 "지난달 25~31일 동안 전남 광양에서 진행된 전지훈련이 선수단의 단합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 "무더위 속에 경기를 치른 선수들에게 체력 회복 훈련과 함께 남은 리그 경기들을 대비한 전술 훈련까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단합하고 해보자는 분위기가 선수단에 심어졌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지난 27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와 경기 후 선수단 분위기가 많이 들떠 있었는데, 전지훈련을 다녀와서 맞은 휴일도 반납하고 훈련에 임하는 등 지나간 부분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보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덧붙였다.4일 현재 인천은 5승11무11패(승점 26)로 리그 강등권(11~12위)에서 불과 한 계단 위에 있다. 최근 선수단의 모습은 인천 구단의 당면 과제인 리그 잔류에도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강 대표이사는 "스플릿 리그를 앞두고 6경기가 남아 있는데, 승점 10점 정도 확보한다면 강등권과 격차를 벌릴 수 있다"면서 "2부 리그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자신감을 보였다.자신감의 근거는 사심없는 경영, 선수단과의 소통에 있었다. 강 대표이사는 지난달 자신의 연봉을 받지 않기로 했다. 이 돈은 선수들에게 지원하도록 했다. 이에 이기형 감독도 승리 수당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선수단의 내부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으며, 27라운드 포항전의 완벽한 승리(2-0)로 연결됐다."구단 내부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소통을 통해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하죠. 구단 대표로 일한 1달 가까운 시간 동안 선수단 전체와 4차례 만났고, 이기형 감독과는 수시로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구단 식당에선 점심만 선수단에 제공했는데, 시즌 중에는 저녁도 제공하는 걸로 바꿨습니다. 가정이 있는 선수들은 괜찮은데 자취하는 젊은 선수들의 경우 몇몇이 어울려서 대충 저녁을 사먹고 하다 보니 균형 잡힌 식사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대표이사 부임 후 소통과 함께 지난해부터 인천시체육회 상임부회장이자 인천 구단 이사로 있으면서 홈에서 열린 구단의 모든 경기를 현장에서 봤던 강 대표이사는 구단의 문제점도 명확히 짚어냈다.그는 "선수, 감독, 대표를 비롯한 프런트가 삼위일체 되지 못했다. 이에 내부 갈등이 초래되면서 선수단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다"면서 "성적만 좋지 않을 때에는 그 문제점만 찾아서 해결하면 되는데, 인천 구단에는 모든 문제들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어서 "시즌 중에 조직을 흔드는 건 좋지 않기 때문에 시즌 후 책임을 물을 것이며, 외부 업체에 경영진단을 의뢰해서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프런트를 재편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프레스 생산 업체(국일정공)를 운영하고 있는 강 대표이사는 시체육회 상임부회장이면서 인천 구단 대표이사이기도 하다. 시체육회와 축구단을 함께 이끄는 첫 인물이다. 강 대표이사의 하루 일과는 오전 6시30분에 시작된다."아침에 사업체로 가서 그날 해야 할 것들을 챙긴 후 9시 경에는 시체육회 사무처로 나옵니다. 오후 6시 이후 다시 사업체를 챙기는 일정이지요. 현재 시체육회와 축구단의 시간 배분은 6:4 정도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시체육회와 축구단 모두 내년도 예산 관련한 업무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자연스레 구단 예산으로 화제가 옮겨갔다."시민구단의 운영은 시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구단 자체적으로도 노력해서 떳떳하게 지원 받아야 해요. 자체 마케팅을 올해보다 10억여원 늘린 후 시의 지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내년에는 140억~150억원 정도 규모로 구단을 운영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시즌 후 기량이 검증된 선수들을 이적료 받고 타 구단으로 보내기 바빴지만, 구단 잔류를 원하는 선수들은 절대 내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또한 좋은 선수들을 외부에서 영입해 상위 스플릿과 시·도민 구단으로선 최초로 3위 안에 들어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노려볼 것입니다."구단 성적 보다 강 대표이사가 더욱 바라는 것은 보다 많은 시민이 축구장을 찾는 것이다."시즌권 판매를 현재의 두배 가량인 6천~7천장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지역 기관과 업체 등 인천과 관련된 곳은 모두 대상으로 올려놓고 시즌권 판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경기 당일 각종 이벤트 등을 통해 시민이 오게끔 만들어야 하고요. 이를 통해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만여석을 꽉 채우는 경기를 해보고 싶습니다."강 대표이사는 구단의 '구원 투수'이다. 구원 투수로서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언젠가는 물러나야 할 것도 알고 있다. 시체육회 상임부회장 자리도 마찬가지다.강 대표이사는 지역 체육계에서 물러날 때 '원칙을 지킨 사람'이자 '지역 체육계의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구단 대표에서 물러날 땐 '어려울 때 와서 도와주고 갔다'고 여겼으면 합니다. 체육계는 정권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정치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관련된 청탁도 거절 못하게 되고요, 사심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거죠. 또한 인천시체육회는 올해로 81년째를 맞았는데, 경영자의 마인드로서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보람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끝으로 강 대표이사는 인천 구단의 팬과 시민들에게 "경기장에 많이 와서 즐겨주시면 좋겠다"면서 "선수들은 최고의 경기력을 선사하고, 구단 프런트는 다양한 즐거움을 안겨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인덕 대표이사는?동두천 태생인 그는 ▲1988년 한국통상을 설립(대표이사 취임)하고 ▲1995년 국일프레스 인수 후 (주)국일정공 대표이사 CEO로 취임했다. 현재 ▲한국실업농구연맹 부회장 ▲인천경영자협의회 부회장 ▲인천시남구경영자협의회 회장 ▲인천시농구협회장 ▲인천시체육회 상임부회장으로 있으며, 지난달 인천유나이티드 FC 대표이사에 취임해 시민구단을 이끌고 있다.평소 자신을 12번째 선수로 소개하는 강인덕 인천유나이티드 대표이사가 지난 5일 선수단 서포트에 충실하려는 의지를 담은 등번호 12번의 인천 유니폼을 입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 대표이사는 인터뷰에서 인천 구단의 팬과 시민들에게 "경기장에 많이 와서 즐겨주시면 좋겠다"면서 "선수들은 최고의 경기력을 선사하고, 구단 프런트는 다양한 즐거움을 안겨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9-05 김영준

[인터뷰… 공감]인천 출신으로 세계적 모델 반열에 오른 도병욱

3만원짜리 셔츠, 6만원짜리 팬츠…모델 환상을 깬 수수한 청년, 이전엔 옷에 관심도 없던 그가지금은 세계 4대 패션위크 정중앙에 서있다뉴욕·밀라노·파리·런던 등의 도시에서는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가 쇼를 선보이는 '패션위크'가 해마다 열린다. 이들 도시에서 열리는 패션위크를 업계는 통상적으로 '세계 4대 패션위크'라 부른다. 3~4일 정도 집중적으로 쇼가 펼쳐지는 이 행사는 1년에 두 차례 진행된다.패션위크는 'FW시즌'(가을·겨울)과 'SS시즌'(봄·여름)으로 나뉘는데, 남성의 경우는 대략 1월이 FW, 6월이 SS시즌이고, 여성은 2월이 FW, 9월이 SS시즌이다. 패션계는 대략 1년여의 시간을 앞서간다. 특히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다음 해 전 세계 패션계의 경향과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리다.때문에 전 세계의 디자이너와 업계 종사자, 패션모델 등 전문가는 물론 관광객까지 한꺼번에 몰리며 성황을 이룬다. 세계 4대 패션위크에 참여하는 것은 소위 이 분야의 '메인 스트림'이 된다는 점에서, 모든 디자이너와 모델에게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진다.한국에서도 이 무대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1~2차례 무대에 섰다는 이들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리는데, 그 자체만으로는 이제는 뉴스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하지만, 인천 출신으로 '톱모델' 반열에 오른 도병욱(28)의 경우라면 다르다. 그는 수년간 꾸준히 세계 패션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4시즌 연속 돌체 앤 가바나의 모델로, 3시즌 연속 베르사체의 모델로, 뉴욕·밀라노·파리·런던은 물론 싱가포르·베이징 등 해외 무대를 누비고 있다.치과 진료차 한국에 들어와 휴식 중인 도병욱을 지난 22일 오후 경인일보 인천본사에서 만났다.모델이라는 직업을 가졌으니 고가 명품 브랜드의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날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3만원짜리 SPA브랜드의 흰색 '린넨셔츠'와 6만원짜리 '치노팬츠', 9만원짜리 갈색 구두를 신은 차림이었다.그는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패션모델들 사이에서는 옷을 못 입는 편에 속한다"며 수줍게 웃었다.옷이 그의 관심 분야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불과 5~6년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모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학기 초 장래희망을 적어야 할 때가 오면 솔직히 너무 힘들었죠. 그럴 때면 대충 '선생님'이라고 빈 칸을 채우곤 했어요. 아버님이 선생님이셨거든요."성장하며 특별히 '꿈'이라는 걸 가져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해 어서 빨리 꿈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강박 때문에 힘들었다.그는 "세상을 그리 깊이 있게 경험해 보지도 않은 어린아이들이 불확실한 미래의 특정 직업을 갖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니냐"며 "돌아보면 사회나 학교가 아이들에게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꿈이 없는 대신 모든 일을 열심히, 성실하고 진지하게 배우려 노력했다.평범한 초·중·고교 생활을 마치고 재수 끝에 내신성적과 수능 점수에 맞는 대학을 골라 건축학과에 진학했고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군대에서는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재미있겠다 싶어서 운전병을 가르치는 조교를 자원해 복무했다.그가 모델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은 복학 후 2011년 여름 방학 기간에 우연히 경험한 아르바이트가 계기가 됐다. 유명 의류브랜드 행사에 모델로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모델학원 출신들과 함께 엉겁결에 무대에 섰고, 그날의 짜릿한 기억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옷을 가장 처음 입고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것이 무언가 짜릿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행복했어요."2학기 내내 '모델'이라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모델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휴학했다. 3개월여를 공사장에서 일하며 모델 학원비 500만원을 마련했다. 학원에 등록하고는 착실히 수업을 받았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보다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성실히 배워나갔다.그의 해외 진출은 국제적인 모델 매니지먼트 회사 주최로 중국에서 열린 '2013 엘리트모델룩 차이나 콘테스트'에서 남자부문 1위를 차지한 것이 계기가 됐다. 수상과 동시에 이듬해 1월 바로 밀라노로 날아갔다. 부푼 꿈을 안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이제는 해외 패션위크를 내 집처럼 드나들 줄 알았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막상 도착해보니 아무도 챙겨주는 이 하나 없었고, 그저 수많은 오디션 기회만 기다리고 있을 뿐 출연이 확정된 무대도 없었다. 현지 회사에서 알려주는 오디션 일정에 맞춰 현장에 찾아가면, 언제나 자신보다 훨씬 멋진 수많은 모델이 자신의 오디션 차례를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목격해야 했다. 줄은 끝도 없이 길어서 건물 밖으로 길게 늘어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저 수많은 모델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지도를 보고 어렵게 오디션 장소를 찾아가 온종일 기다려 오디션을 치러도 단 10여초만에 '오케이, 넥스트' 소리를 듣는 일상이 2주나 반복됐다.하지만 어느 날 '오케이, 넥스트'가 아니라 다른 옷을 입어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디자이너를 만나고 면접을 보고 쇼 바로 전날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2014년 1월 '비비언웨스트우드'의 쇼를 통해 첫 무대를 밟았다. "굽어진 런 웨이를 끝도 없이 걸어갔죠. 마지막에 다다라 수백 대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나서야 실감했죠."그렇게 밀라노에서의 다른 브랜드 2곳의 쇼를 더 참여한 것으로 2014년 FW시즌을 마쳤다. 그렇게 4시즌 연속 돌체 앤 가바나의 모델로, 3시즌 연속 베르사체 모델로 활약하는 성과를 거뒀다. 싱가포르와 스페인, 뉴욕의 백화점 등에 걸린 대형 광고판에 그의 사진이 걸리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광고판을 '캠페인'이라 부르는데, 면세점에 걸린 캠페인 모델이 되는 것이 모델에게는 무척 명예로운 일이라고 한다.그는 모델이라는 직업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참고 기다려야 하는 인내의 직업이라고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도 아버지에게 배운 사자성어인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뜻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그는 "누구든지 성실하게 자신의 꿈을 찾고 우직하게 나아간다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살고 있다"며 "앞으로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는 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모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모델 도병욱은?-출생 : 1989년 1월 17일 인천 출생-학력 : 만수초등학교·만성중학교·인천남고등학교·수원대 건축공학과-신체 조건▲ 키 : 187㎝ ▲ 몸무게 : 72㎏ ▲ 허리둘레 : 30인치 ▲ 가슴둘레 : 100㎝-주요 활동 경력▲ 2013 엘리트모델룩 차이나 콘테스트 1위▲ 2014년 1월 이탈리아 밀라노 FW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 데뷔▲ 2015년 1월 밀라노 FW 시즌 베르사체쇼 독점(exclusive) 모델 선정▲ 2014 ~ 현재 뉴욕, 런던, 밀라노,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싱가포르, 중국에서 활동▲ 세계 4대 패션위크(밀라노, 뉴욕, 런던, 파리) - D&G(돌체앤가바나), 베르사체, 디스퀘어드, 발망 등 약 30개 쇼 ▲ Vogue(보그) 스페인, 독일, 일본, 한국 / GQ 영국, 중국, 한국 등 다수의 매거진 활동▲ sacoop brothers(사콥 브라더즈), sepora(세포라) 등 브랜드 캠페인 광고 ▲ D&G(돌체앤가바나), moncler(몽클레어) 카탈로그 촬영▲ ZARA(자라), Massimo dutti(마시모 두띠), Amazon(아마존) 웹페이지 촬영도병욱뉴욕·밀라노·파리·런던 등 '세계 4대 패션위크'라 불리는 패션 무대에 꾸준히 서며 '톱모델'의 위치를 다져가고 있는 모델 도병욱(29)은 아직 꿈을 찾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꿈이 없다고 해서 방안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며 "두렵더라도 주변의 작은 일부터 진지하게 도전하고 부딪히며 자신을 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29 김성호

[인터뷰… 공감]새 정부 국정운영 로드맵 진두지휘한 김진표 국회의원

■국정기획위 활동에 대해업무보고와 답사 등 500번 이상 회의70~80% 대통령 높은 지지도에 '보람'■위원장으로 가장 중점 둔 사안좋은 일자리 늘려야 소득·소비 늘어결국 '고용·성장·복지' 동시에 추진■수원비행장 이전 문제 해법기존 부지에 첨단산업 연구소 유치 등소통하며 경기서남부 발전 홍보할 것■지방분권·수도권 규제완화재정 자립 '독일식 공동세' 검토 필요최첨단산업 유치 수도권 밖에 답 없어■종교인 과세 2년 유예 법안대형교회 목사·신부 이미 세금 내 와정치인과 유착 안내려 한다는 건 오해막히는 것도 거칠 것도 없다. 특히 경제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재인정부의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새 정부의 국정운영 로드맵을 진두지휘한 김진표 의원은 21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가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80여분 간 달변가의 면모를 보여줬다. 문재인 대통령이 각본 없는 '100일 기자회견'을 했듯 김 의원은 사전 질문이나 조율 없는 인터뷰에서 부총리·장관·당 원내대표·국정기획위원장·4선 등의 경험과 연륜을 과시하듯 수치나 용어, 사례 등을 제시하며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놨다.-국정기획자문위원장 제안은 누가.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며칠 있다가 직접 전화를 했다. 참여정부 때 인수위를 했고 부총리에다 장관, 캠프 선대위원장 등을 종합해보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며 꼭 해달라 요청했다. 당연히 도와 드리겠다고 답했다. -총리설이 끊이지 않았는데.총리는 아예 생각도 안 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어느 정도 승리를 예단할 수 있어서 캠프 내부에서 총리를 누가 맡는 게 좋은지 논의가 있었다. 문 대통령이 호남 인사 푸대접을 불식시켜야 한다며 여러 차례 호남 총리를 강조한 만큼 호남 인사로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사전에 형성됐다. 앞으로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살짝 웃음).-국정기획자문위원장 60일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시피 했다고 들었다.인수위는 특성상 복잡한 요인과 변수가 많아 잠깐만 한 눈울 팔면 배가 엉뚱하게 산으로 갈 수 있다. 그러면 국정 혼선을 초래하게 된다. 누군가가 책임지고 전력투구해야 했고 내 운명이려니 하고 책임을 다했다. 업무보고, 현장 확인 등을 포함해 500번 넘게 회의를 하며 '월화수목금금금'하고 살았다. 다행인 것은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놓은 281개 공약, 829개 세부공약의 왼성도가 매우 높아 60일 내에 끝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국정기획위 활동 점수를 매긴다면.우리가 점수를 매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국민들께서 평가하시는 거다. 문 정부에서는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내 삶을 바꾸는 정권교체'라는 주제로 기존에 발표한 공약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서로 상충되는 게 있으면 조정한 뒤 단계별 시행계획·입법 계획· 재원조달 계획 등을 마련해 로드맵을 완성했다. 기본적으로 새 정부의 국정 운영 철학을 담았고 최고의 국정운영 계획서이면서 동시에 단순한 구두선언이 아닌 로드맵의 행태로 공약이행의 실효성을 높였다. 또 촛불 혁명의 정신을 담기 위해 처음으로 국민인수위원회를 구성해 16만개가 넘는 정책제안을 받았다. 요즘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이례적으로 높은 70~80% 사이여서 큰 보람을 느낀다. -위원장으로 가장 중점을 뒀던 사안은.(주저함없이)일자리 문제다. 문 정부의 경제 사회정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국정 운영 철학을 이야기하라면 단연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며 그 핵심은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좋은 일자리가 많이 늘면 소득·소비가 늘고 투자가 뒤따르고 이는 또다시 좋은 일자리 증가로 이어진다. 이런 선순환의 출발점이 바로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또 일자리는 최고의 성장 정책이면서 동시에 최상의 복지정책이다. 일자리 이상의 복지정책이 어디 있느냐. 이게 바로 고용·성장·복지가 동시에 추진되는 '골든트라이 앵글'이다. 문 대통령이 오죽했으면 집무실에 일자리 현황판을 설치해 관리하고 있겠는가. -아쉬운 분야는.금융 개혁이다.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 선진국들은 다 바뀌었는데 우리 금융은 여전히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이자의 차이에서 나오는 차익)'을 주된 수입으로 하며 담보 위주의 대출을 하고 있다. 특히 담보와 관련해 선진국들은 기술을 중심으로 유망한 벤처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인큐베이팅 금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담보에 얽매여 벤처기업이 활성화되지 못한다. 우리나라 30대 기업 중에서 당대 창업가가 운영하는 비율은 23% 밖에 안된다. 중국은 97%, 일본은 75%, 미국은 67%이며 하다못해 대만도 54%, 인도도 45%에 이른다. 우리 경제는 3·4대에 걸쳐 상속받은 재벌들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다. 그런 재벌들은 창의력이나 혁신에 한계가 있다. '요 모양 요 꼴'인 경제를 바꾸고 살리려면 젊은 피 수혈이 필수적이다. 금융을 담보에서 인큐베이팅 위주로 바꿔야 한다. -평소 지방분권을 강조해왔다.분권 개혁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야 한다. 핵심은 재정 자립도 문제인데 지방재정 양극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해소 방안으로 '독일식 공동세' 도입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수도권 규제 완화 역시 평소 강조해왔다.수도권 규제 완화는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파주 엘지디스플레이 공장은 김대중정부 때 허가가 안 나 상하이로 가려 했다. 엘지는 구미에 부지가 있었지만, 인력 유치 문제로 파주에 하려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의논해 수도권 규제 문제를 해결했다. 지금은 얼마나 효자 기업이 됐나. 세계 시장 점유율이 예전의 20%에서 60%로 3배나 높아졌다. 만약 상하이로 갔다면 지금은 중국이 세계 디스플레이 산업을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2000년에 아산으로 옮겼다. 당시 걱정이 돼 삼성 쪽에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를 확보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삼성은 잘 될 거라고 했는데 삼성과 엘지의 디스플레이 점유율이 8대2에서 지금은 4대6으로 역전됐다. 삼성은 결국 5년 전에 디스플레이산업 연구소를 수원과 기흥에 나누어 배치했다. 디스플레이 같은 최첨단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석·박사급 엔지니어를 유치해야 한다. 연봉이 수억원으로 세계 어느 기업이나 갈수 있는 이들은 절대 가족과 떨어져 살려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지역은 현재로서는 파주에서 수원까지다. 진짜 선진국이 되려면 최첨단 산업을 유치해야 하는 데 현실적으로 수도권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느냐? 수도권이 아니면 기업을 경영할 수 없는 최첨단 산업에 한해서만 수도권 규제를 완화하자는 거며 조만간 이를 위한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수원비행장 이전 난제를 풀어갈 해법이 있나.이미 법에 따라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와 별개로 소통을 통한 설득, 화성·수원이 서로 '윈윈'한다는 홍보에 나설 것이다. 일부 화성 시민들이 동탄의 주택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데 그 반대다. 이전 부지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나라 첨단 산업을 이끌어갈 IT·나노· 반도체· 바이오 산업 등을 육성하는 R&B합작 연구소가 중심이다. 최소 15만~30만명 수준의 석박사급 엔지니어가 모이면 그 사람들이 어디서 살겠는가? 동탄, 영통, 서수원이다. 소음피해도 원천적으로 없다. 이전 예정인 화옹지구는 1천400여만㎡이다. 소음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비행기도 바다로 떠서 바다로 내린다. 더군다나 수원비행장 600만㎡ 중에 75만㎡는 화성에 있는 데 전부 화약고다. 화약고 바로 주변에 병점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동탄이 있다. 화약고를 안고 도시를 개발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또 향남에서 동탄까지 철도를 연결하면 서해복선전철과 맞물려 철도로 전국 어디나 갈 수 있게 된다. 서화성은 물론 경기서남부권 발전의 획기적 계기를 만들 수 있다.-종교인 과세 2년 유예 법안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대부분의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가톨릭 신부들은 십수년전부터 법과 상관없이 세금을 내왔다. 이런 분들과 정치인이 유착해 꼼수까지 써가며 세금을 안내려 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그건 우리의 진의가 아니다. 21일 기자회견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진짜 문제다. 이를 해결해 내년부터 시행하면 된다.-대표, 장관, 의원 등 부르는 호칭이 다양하다.부르는 사람 맘이니 상관없다. 선출직으로 안해 본 것은 경기도지사는 출마 안 하니까 빼고 당 대표와 대통령이고, 임명직은 총리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다 보면 정치 인생의 대미를 장식할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믿는다. 글/김순기기자 ksg2011@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김진표 의원은?▲ 1947년 수원 출생▲ 서울대, 미(美) 위스콘신대학원 공공정책학 석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민주당 원내대표▲ 국회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 문재인 대선캠프 선대위원장▲ 문재인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장▲ 17·18·19·20대 국회의원김진표 국회의원은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좋은 일자리가 많이 늘면 소득·소비가 늘고 투자가 뒤따르고 이는 또다시 좋은 일자리 증가로 이어진다. 이런 선순환의 출발점이 바로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라고 밝혔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7-08-22 김순기

[인터뷰… 공감]해경 최초 여성 총경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1991년 '시와 의식'으로 등단… 2011년 '바다에 남겨…' 시집 발간해 인천문학상 수상하기도총경은 치안총감, 치안정감, 치안감, 경무관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다. 일선 경찰서장을 할 수 있어 '경찰의 꽃'으로 불린다. 경찰청에서는 1998년 김강자 서울남부경찰서 방범과장이 국내 최초의 여성 총경으로 승진해 서울종암경찰서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치안정감 계급의 지방경찰청장에 오른 여성경찰도 나왔다. 치안 총수인 경찰청장만 빼놓고는 여경이 오르지 못한 자리(계급)는 없었다. 하지만 여경의 총경 승진이 빨랐던 경찰청(육상경찰)과 비교하면, 그동안 해양경찰청 소속 여경은 상대적으로 소외당했다. 해경이 여경을 처음 채용한 것은 1986년이다. 경찰청이 설립 초기인 1946년부터 여경 채용을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늦은 셈이다. 당시만 해도 해경은 '여자가 배를 타면 재수 없다'는 속설 때문에 여경 채용을 미뤘다고 한다. 지난 8일 발표된 해경 총경 승진 임용 예정자 6명의 명단 중에는 해경 창설 64년 만에 첫 여성 총경이 나왔다. 주인공은 동해지방해양경찰청 박경순(55) 기획운영과장이다. 그는 "'최초'라는 방점을 찍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힘들고 어려웠지만, 늘 주위의 선배와 동료, 후배들이 도와줘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박 과장은 1986년 순경으로 해경에 첫발을 들였다. 해경이 공채로 선발한 첫 여경이었다.박 과장은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해양경찰대(해양경찰청의 옛 이름)'가 여자 경찰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며 "인천에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관심이 많았었다. 제복을 입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경찰이 되고 싶어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지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7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채용된 박 과장은 함께 합격한 동기와 함께 당시 연안부두에 있던 해양경찰대 본청 민원실에 배치됐다. 박 과장은 민원실을 찾은 사람이 그냥 돌아가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본청 민원실에 찾아오는 사람은 일선 서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이곳까지 온 경우가 많았다"며 "멀리서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내용은 물어봐서라도 민원 사안을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했다.박 과장이 말단 순경에서 경장, 경사, 경위, 경감, 경정을 거쳐 마침내 총경에 이르기까지 초고속 승진한 비결은 '일에 관한 한 최고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미친 듯이' 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직 내에서 이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일단 일이 주어지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끝장을 봤으며, 법률 서적 등을 탐독하면서 전문성을 보강했다.박 과장이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로 기억하는 것은 지난 2010년 해경에 '직장 어린이집'을 개원한 일이다. 당시 박 과장은 복지계에서 근무했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로 직장에 다녀봤기 때문에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직원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산 확보와 건물 신축 절차가 까다로웠고, 직장 내에서는 '굳이 어린이집까지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박 과장은 간부들을 설득하고, 국방부·행정안전부·경찰청 등 20여 개의 직장 어린이집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했다. 어렵게 예산을 확보했고, 마침내 직장 어린이집 문을 열 수 있었다.박 과장은 해경으로 근무하면서 한국방송통신대(국문과)를 졸업했다. 1997년 인하대에서 국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인하대 행정학 박사 과정 중이다. 그는 1991년 시 '시와 의식'으로 등단했고, 2011년에는 태안해경서 1507함 근무 당시의 경험을 담은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이라는 시집을 냈다. 이 시집에는 경비함정을 타고 불법 외국 어선을 단속하는 등 서해를 지키며 느낀 가슴 아픈 애환을 '출항', '입항' 연작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 담겨 있다. 박 과장은 이 시집으로 '제24회 인천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박 과장이 선발된 이후에도 해경은 10여 년 동안 여경을 뽑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에도 해경 홈페이지에는 '여자 해경을 뽑을 필요가 있느냐'는 글이 올라와 찬반 논란이 가열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3년 여경의 경비함정 근무가 시작되면서 '금녀(禁女)의 벽'은 하나씩 허물어졌다. 경무 기획 분야에 국한됐던 여경의 업무도 이젠 함정, 해상 안전, 파출소 등 전 분야로 확대됐다. 최근에는 여성 최초의 경비함 함장, 첫 여성 항공정비사도 탄생했다. 10년 전에는 해경에서 여경 비율이 전체의 2%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전체 해양경찰관 8천510명 중 616명(7.2%)이 여성이다. 박 과장의 승진으로 평균 20척의 경비함정을 진두지휘하는 첫 해경서장도 배출될 예정이다.박 과장은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해경이 주권 수호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절감했다"며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불법 외국 어선 한 척을 단속하기 위해 보통 14시간 정도 고생해야 하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경이 재탄생한 이 시점에 우리 해상 주권을 수호하는 강인한 해양경찰, 당당한 바다 지킴이로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는 해경이 되겠다"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려울 때 찾아오는 해경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박경순 총경은?-주요 약력▲ 1962년 인천 출생▲ 1986년 순경 임용▲ 2006년 경감 승진▲ 2011년 경정 승진▲ 2017년 총경 승진▲ 1507함 부장, 해양경찰 교육원 교수 요원, 동해청 경무계장, 본청 성과관리팀장, 태안·평택 해양안전과장▲ (현)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주요 정부 수상▲ 2013년 대통령 근정포장▲ 2007년 국무총리, 2016년 국민안전처장관 표창 등 27회 수상-문단 경력▲ 1991년 '시와 의식' 신인상으로 문단 데뷔▲ 2008년 '한국수필' 신인상, 한국예총 예술상 수상▲ 2012년 24회 인천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앉아 또 하나의 詩를 쓰고'(1997), '이제 창문 내는 일만 남았다'(2002),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2011)해양경찰 최초로 여성 총경으로 승진한 박경순(55)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은 "'최초'라는 방점을 찍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려울 때 찾아오는 해경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태안해경서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할 당시의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박경순 과장 제공태안해경서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할 당시의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박경순 과장 제공해양 순찰중인 박경순 과장의 모습. /박경순 과장 제공

2017-08-15 김주엽

[인터뷰… 공감]영화 '귀향' 속편 2편 개봉앞둔 조정래 감독

1년 반 동안 역사의 참상 알리려 전세계 61개 도시 상영회대종상은 할머니들께서 주신 상… 수익금도 '소녀들의 피'귀향 성공은 '착시현상' 실상 알렸는데 변한 게 없지 않나차기작은 계획없어… 恨 다 풀어드리고 나서 찍어야 도리그의 본업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영화감독이라고는 하는데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 인권운동가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영화감독이 본업은 맞는 것 같다.그것도 아주 '능력있는' 영화감독 말이다. 지난해 영화 '귀향'으로 영화계 돌풍을 일으킨 조정래(45) 감독 얘기다. '영화감독 조정래'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낯설어 할 테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그린 영화 '귀향(鬼鄕)'은 한번쯤 들어봤음직하다.지난 2016년 2월 개봉된 영화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아니고, 역사적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한 무거운 주제를 다뤘음에도 지난해 360여만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며 반짝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영화 '귀향'은 준비작업을 거쳐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장장 1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2002년 조 감독이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다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고 홀로코스트를 접한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 영화로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직접 시놉시스를 쓰고, 증언을 수집했다.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빨리 개봉해 할머니들과 만나고 관객들과도 호흡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작비 조달이 여의치 않았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크라우딩 펀드를 진행해 4만5천여명이 제작비를 후원했다. 손숙, 정인기, 오지혜 등 유명 배우와 영화 명량, 암살, 도가니 등의 제작에 참여했던 유명 스태프들의 재능기부도 이뤄져 결국 지난해 대중과 만날수 있었다."그는 영화가 흥행하고, 감독으로서 인지도도 쌓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찾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영화를 통해 할머니들의 참상을 알리느라 국내를 넘어 전세계를 돌며 일정이 더욱 빡빡해졌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1년반 가까이 전세계 61개 도시를 돌며 1천307회의 영화상영회를 가졌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전역에서 영화 상영에 대한 요청이 이뤄졌다. 상영장소만 제공되면 직접 영사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상영회를 진행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들이 있다. 'Really?' 이게 사실이냐고 묻는 질문이 정말 많았다. 상영이 끝나면 질의 응답시간도 갖는데 20분 정도 생각하다 통상 2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어답변서까지 만들었다"고 전한다.그러다보니 조 감독은 자연스레 영화 속편 제작을 결심하게 됐다. 영화를 통해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들을 전해야겠다 마음먹었고,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작업에 열을 올려 조만간 2편의 결과물을 선보이게 됐다.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부제: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와 '에움길(가제)' 등 2편이다.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영화로 보는 증언집이라 할수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영상과 미공개영상으로 구성된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다큐멘터리다. '에움길'은 올 하반기 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인데 영화 '귀향'에 결말로 넣고 싶던 것을 에필로그에 포함했다"고 귀띔한다. 최근 일제시대를 소재로한 영화가 줄을 잇는 가운데 또 한편의 기대작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얼마전 한 역사가의 발언은 그의 이런 노력을 빛바래게 했다. 심용환 역사가는 영화 '군함도'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한데 이어 '귀향'도 위안부이야기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7월28일 자신의 SNS를 통해 영화 군함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몇해전 몇 백만이 보았던 '귀향'만큼 못 만들고 위안부 이야기를 왜곡한 영화도 드물다… 강제동원의 현실은 차라리 군함도가 훨씬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조 감독은 "영화 '귀향'은 철저한 역사검증과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형식을 빌린 '증언집'이라고 할수 있다"며 심씨의 주장에 강한 어조로 반발했다. 결국 심씨는 글을 게재한 이튿날인 7월29일 '할머니들께 상처가 되었다면 모두 제 잘못입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라고 해명 글을 올렸다.조 감독은 지난해 영화 '귀향'으로 여러 상을 받게 됐고, 그중 일생 단 한번만 받을 수 있다는 신인감독상(대종상영화제)까지 거머쥐었다. "솔직히 제가 받았다기 보다는 할머니들께 주신 상이다. 영화 '귀향'의 수익도 '소녀들의 피'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실제 영화수익금 일부를 나눔의집에 기부했다. 할머니들 덕에 영화가 만들어질수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23일 별세한 김군자 할머니의 소식은 그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2002년 나눔의집을 찾을때부터 할머니를 봬 왔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평생을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데 노력하셨고, 돈 한푼 허투루 쓰지 않고 후세들만 생각하셨는데 안타까웠다. 그나마 할머니 운구를 들고 가까이서 마지막을 배웅해드릴수 있어 감사했다."차기작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없다. 우선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나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다. 영화 '귀향'이 성공했다고 하지만 착시현상 아닌가 싶다. 영화로 많은 분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됐는데 변한게 없다. 어떻게 감히 다음 영화를 한다고 말하겠나"라고 했다.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영화가 역사에 대한 문화적 증인이 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상을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으면 한다. 이제 37분이 남으셨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진정한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사진/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조정래 감독은?▲ 1973 경북 청송 출생▲ 1992~2000 중앙대 영화학 학사▲ 2000 단편영화 '종기' 데뷔▲ 2011 제13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상▲ 2012 영상물등급위원회 청소년을 위한 좋은 영상물 극영화 부문▲ 2015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김학순상▲ 2016 영화 '귀향' 개봉, 제53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 한국 영화를 빛낸 스타상 감독상, 제36회 황금촬영상 신인감독상조정래 감독은 사진 찍는 내내 웃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이 한(恨)을 풀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상황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살아생전 고(故)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지난달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분당 차병원 장례식장에 조정래 감독이 스태프들과 함께 찾아 조문하고 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김군자 할머니의 운구 행렬에 함께한 조정래 감독.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국악 고수로도 활동하며 광주 나눔의집에서 할머니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 조정래 감독.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아이클릭아트

2017-08-08 이윤희

[인터뷰… 공감]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이규훈 초대 소장

백제 풍납토성·경복궁 발굴조사와 고려 도성 기초조사 진행유물·유적 활용 등 시·군 지자체와 적극적 논의·협력할 것고려 500년 남북 학술교류 필요… 수도권 문화재연구에 온힘신라·삼국·가야·백제·마한 등 기존 지방연구소 뒤이어 고려 연구소 설립 필요성 제기돼 강화가 선택됐다.강화도에 있는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년)에 전격적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는 북산(송악산) 남쪽 기슭인 강화읍 일대에 궁궐과 관아를 세운 뒤 고려는 이때부터 1270년(원종 11년)까지 강화도를 전시(戰時) 수도로 삼았다. 강화도를 중심으로 고려는 39년간 세계 최강으로 손꼽히는 몽골의 군대와 꿋꿋하게 맞섰다. 강화도 해안가에 돈대와 외성, 궁궐을 포함한 내성, 외성과 내성 사이 중성을 쌓았고 왕실 사찰도 만들었다. 철옹성 같은 주변의 바다와 드넓은 갯벌 등 자연여건은 강화도의 또 다른 무기가 됐다. 강화도는 그렇게 고려를 품었다.사적 133호로 관리되는 고려궁지 바로 옆 옛 강화군립도서관 건물에 자리 잡은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이규훈(46) 소장을 지난달 27일 만났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상반기 강화에 둥지를 튼 인천 소재 첫 문화 관련 국립기관이다. 이규훈 소장은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중세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라며 "국가기관 차원에서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중세 연구로 학술적인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지자체와 시민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 우리나라 역사의 응축, '강화도'이규훈 소장은 강화도를 "우리나라 역사의 응축(凝縮)"이라고 정의했다. 선사시대부터 고대는 물론, 중세와 근·현대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엔 항상 강화도가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화도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고인돌이 곳곳에 있다. 남한에서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인 '강화지석묘'를 비롯해 그 숫자만 160개가 넘는다.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 삼랑성 등의 유적도 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물줄기가 합쳐져 서해로 연결되는 강화도는 삼국시대 때에도 해상무역과 군사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활용됐다. 고려 때엔 몽골과의 항쟁을 위해 39년간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고, 고려 말기에도 수도권 방어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규훈 소장은 "조선 병자호란 때엔 일부 조정 대신들이 피신한 일도 있었고, 개화기 때엔 서구 문물들이 강화도를 통해 들어오게 됐다"며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항상 강화도가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내용의 3분의 1이 강화도와 관련한 내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며 "그만큼 유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강화도의 역사를 더욱 심도 있게 조사하기 위해 강화문화재연구소가 생긴 만큼,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국립 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월 말 공식 직제가 확정돼 업무를 시작했다. 현재 이규훈 소장을 비롯해 9명이 일을 하고 있는데, 내년까지 2명 정도가 더 충원될 예정이다. 국립 문화재연구소 산하 지방연구소는 경주, 중원, 가야, 부여, 나주 연구소 등 5개가 있었다. 신라, 삼국, 가야, 백제, 마한 등이 이들 지방연구소의 주된 연구 분야였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를 연구할 연구소 설립 필요성이 제기됐고, 결국 39년간 고려의 전시 수도였던 '강화'가 그 역할을 맡게 됐다. 고려 역사 연구의 핵심이자 수도권 유일의 지방연구소인 국립 강화문화재연구소는 현재 풍납토성 발굴조사와 경복궁 발굴조사, 강화를 중심으로 한 고려 도성 기초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풍납토성과 경복궁 발굴조사는 역사 문헌과 그 문헌에 나온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고고학적 방식으로 연구된다. 고려 도성 기초조사는 내년 본격적인 발굴을 위한 말 그대로 기초적인 조사이다. 이규훈 소장은 "백제의 풍납토성과 강화에 있는 고려 도성, 조선의 경복궁 연구는 고대와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도성의 역사적 맥락을 잇는 연구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고려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중세 연구는 고대와 근대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고려의 수도가 북한의 개성이었던 만큼, 고려 관련 연구를 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의 전시 수도였던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세 연구의 핵심적인 지역이라는 게 이규훈 소장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나라 고려 문화재는 석조물이나 탱화, 칠기, 도자기, 철불 등 주로 움직일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지만, 경주나 부여처럼 건물지, 고분 등 땅 위에 고정된 유적은 적다"며 "강화도에서 고려시대 절터나 고분들, 이궁지 등을 발굴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만큼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다양한 문화재 연구활동 '기대'이규훈 소장은 문화재 연구와 관련해 인천시와 강화군 등 지자체와의 적극적인 협력 의지를 나타냈다. 인천시는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역사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해 복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강도(江都)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강화도에 남아있는 고려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해 강화도를 경주나 부여 같은 '고도(古都)'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인천시 구상이다. 고려궁궐 재건·활용, 고려 기록유산 활용, 강화 역사건조물 활용, 강화 역사유적 가치창조, 고려 건국 1천100주년 기념사업 등 5개 분야 20개 사업으로 구성됐다.인천시는 강화도 해안가에 집중돼 있는 해양관방유적과 강화지역 고려왕릉 4기(홍릉, 석릉, 가릉, 곤릉)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작업도 추진한다. 해양관방유적은 강화 해변의 보(堡)와 돈대(墩臺), 산성 등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해안 방어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군사유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강화지역 고려왕릉엔 고려의 역사·문화·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담겼다는 평가다. 이규훈 소장은 "지자체 차원에서 지역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활용해 의미 있는 자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일련의 사업을 추진하는 건 굉장히 긍정적인 일"이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 부분도 당연히 우리가 일정 부분 협조해야 할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지자체가 활용을 원하는 유물·유적이 어떤 성격인지 규명하고, 발굴해서 전시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며 "그런 과정에서 유물·유적 등 문화재가 더욱 잘 보존되는 효과도 함께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이규훈 소장은 "고려 관련 연구에 대한 남북 학술교류 필요성도 있다"고 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은 고려 역사유적 발굴과 복원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2013년엔 고려 궁궐인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국제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선사시대 이후 신라 1천 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으로 이어져 오는데, 고려의 제2 수도가 있던 강화 39년만으론 고려 500년을 밝히는 데 부족한 측면이 있다"며 "큰 틀에서도 분단 전까지 우리나라 역사는 함께 흘러온 만큼, (역사분야에 대한) 남북 간 공동연구는 필요하다"고 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최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개성 만월대 발굴사업 등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남북 학술교류의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이다. 이규훈 소장은 "초대 소장으로서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강화문화재연구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설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문화재청에서 발굴과 시굴 등의 업무를 했을 때 강화도가 담당 지역이었던 연이 있었다"면서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강화도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동시에 책임자로서 연구소를 어떻게 이끌지, 앞으로의 방향설정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 부담감도 컸다"고 했다. 그는 "강화도가 있는 인천을 비롯해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문화재 연구 국가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규훈 소장은?▲ 1971년 출생▲ 1997년 전북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1999년 문화재청 학예연구사▲ 2003년 전북대 대학원 석사(고고학)▲ 2005년 문화재청 학예연구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2007년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2008년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관▲ 2011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2014년 국립 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관·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2017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장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이규훈 소장이 강화도 고려궁지 내에 있는 외규장각 앞에서 "선사시대부터 고대는 물론, 중세와 근·현대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엔 항상 강화도가 있었다"며 우리 역사에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7-08-01 이현준

[인터뷰… 공감]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

공정성 논란·비싼 등록금에 입학전형 개선·장학금 확대법률문제 상담·재학생 소송 참여 등 현장밀착형 서비스로스쿨 출신 안숨기고 수원 최대로펌 만든 졸업생 '뿌듯'학습 효율성 개선 中企법무 관련 교류·실습기회 넓힐 것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된 지 내년이면 10년이다. '귀족학교', '돈스쿨'이라는 오명과 함께 탄생했지만, 지역과 연계해 특화 로스쿨을 만들겠다는 도입 취지는 좋았다. 어떤 지역의 로스쿨은 예술법무를, 또 다른 지역은 국제법무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저마다 개성있는 지역 대표 로스쿨로 자리 잡게 하자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곳을 찾기 힘들어졌지만 경기도에 하나뿐인 아주대학교 로스쿨은 도입 때부터 기획했던 '중소기업법무' 프로그램을 여전히 잘 유지해가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풍성해졌다. 중소기업 대부분이 경기도에 밀집해있는 지역 특성상 중소기업의 법률 여건을 향상시켜주겠다는 선한 의도가, 아주대 로스쿨을 지역민의 자부심으로 바꿔놨다. 지난 19일 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을 만나 현재 로스쿨의 위치와 지난 10년간의 역사, 앞으로의 포부 등을 들어봤다.-로스쿨 출범 10년을 앞두고 있는데 제도 전반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2009년 3월 첫 입학생을 시작으로 내년 3월 10기 입학생을 맞이하는 로스쿨은 사법시험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법률가 양성제도를 목표로 출범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원자를 선발한 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많은 수의 법률가를 양성, 국민들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그 취지다. 지난 9년여를 돌아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입학생을 맞아 교육을 통해 대량의 법률가가 배출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도입 초기에 논란을 야기했던 입학 부문의 공정성 및 투명성 논란과 비싼 등록금 문제, 3년 내에 법이론과 실무교육을 모두 마치도록 설계된 무리한 교육과정, 합격자수를 제한함에 따른 탈락자의 대량 발생, 그리고 변호사시험 준비에 몰입한 나머지 당초의 도입취지인 전문화 및 특성화교육이 실종됐다는 것은 로스쿨제도가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과제다."-입학전형에서 공정성을 위해 개선하고 있는 점이나 비싼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있나."지난해 입학전형부터 대폭 개선해나가고 있다. 우선 응시원서에 부모나 친인척의 성명, 직장명, 직업 등 신상과 관련한 정보를 넣지 않도록 기재금지 사항을 사전고지한 뒤 위반 시 실격조치 등 제재 내용도 명확히 규정해 모집요강에 담았다. 또 서류평가 시 지원자 성명, 사진, 수험번호 등 개인식별정보의 블라인드 처리를 철저히 하고 면접평가에는 가번호 부여, 무(無 )자료 면접 실시, 면접위원 구성 시 외부 면접위원 위촉 등의 방안을 도입했다. 향후 입학전형에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취약계층 등의 진학기회 확대와 입학기회에 대한 형평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등록금의 경우 실제 소요되는 비용을 기초로 설계돼 비싼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등록금 재원만으로는 운영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로스쿨도 대다수다. 그간 논란이 계속되면서 지난해 전국 로스쿨이 일률적으로 15% 가량의 등록금을 인하했고, 일부 국가재정도 투입돼 등록금 전액 대비 30%의 장학금 수혜율을 보이고 있다. 아주대 로스쿨의 장학금 수혜율은 30%를 웃돌고 있다. 특히 소득분위에 따라 0분위~2분위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의 경우 등록금 전액을 무료로 하는 것이 의무화된 만큼 등록금 때문에 로스쿨을 못 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대외장학금 유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니 법률가가 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아주대 로스쿨의 문을 두드려 줬으면 좋겠다."-경기도의 유일한 로스쿨이다. 지역사회와의 유대감을 높이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중소기업법무'를 특성화전략으로 삼았다. 경기도 내에는 56만여개 중소기업이 밀집해있지만, 대기업에 비해 여전히 법률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지역에 하나뿐인 로스쿨로서 이 같은 중소기업을 위해 양질의 현장밀착형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유능한 법률가로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특성화전략의 추진기구로써 '중소기업법무센터'를 설치하고 'Total Law & Business'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실제로 매년 상당수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중소기업법무센터를 통해 법률문제를 상담해주고 있다.'리걸클리닉센터'를 통해 재학생들이 실제 중소기업의 법률분쟁과 소송에 참여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리걸클리닉은 '지역사회에 대한 법률봉사'와 '재학생들의 실무역량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으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선점적 법률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것이 취지다. 소송지원 신청 내용 중에 공익적 목표에 부합하는 사건을 우선 선별하고, 리걸클리닉 수업을 통해 법률자문을 실시하는가 하면 필요할 경우 재학생들이 전문 변호사와 함께 실제 소송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승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벌써 많은 법조인을 배출했다. 학교를 빛내고 있는, 특히 기억에 남는 졸업생이 있다면."오늘도 함께 점심을 했다. 3기이자 졸업한 지 3년 된 변호사로, 수원에서 가장 큰 로펌을 만들어서 성장시킨 인물이다. 부장판사·검사 등 내로라하는 전관을 포함해 많은 변호사들이 수원에서 로펌을 운영해왔는데, 막상 대형 로펌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젊은 변호사니까 가능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친구가 운영하는 로펌은 8명의 로스쿨 출신 변호사로 구성돼있다. 사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정작 출신 로스쿨을 숨기기 급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부는 드러내더라도 정작 자기를 법조인으로 배출시킨 로스쿨은 숨기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하고 나면 다들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 친구는 졸업생 최초로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5천만원을 기탁했다. 경기남부지역은 곧 경기고법이 들어설 예정으로 그만큼 법률수요도 많고 법률시장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변변한 로펌 하나 없이, 대부분 법률분쟁이 생기면 서울에 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그 친구가 경기도민들이 굳이 서울로 가지 않고도 최상의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경기도에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밝혔을 때 정말 자랑스러웠다. 이런 졸업생이 많아질수록 아주대 로스쿨도 함께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사법시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로스쿨의 역할과 책임감도 막중해졌을 것 같다. 임기 내 비전을 제시해달라."지금까지는 여러 가지 장애요인으로 인해 로스쿨의 설립취지를 제대로 구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합격률에만 매몰돼 원래의 로스쿨 도입 취지대로 특성화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50% 미만에 그치는 변호사 합격률을 조금만 높이면 구체적으로 역량을 키우고 전문화, 특성화, 국제화라는 원래의 교육목표도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주대 로스쿨의 경우 누적합격률이 90%를 넘는, 그야말로 최상위 합격률을 유지하고 있지만 높은 합격률을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학년별 저성과자에 대한 학업지도를 실시할 계획이다. 단기적으로는 학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조력하는 체계를 구축하되 중장기적으로는 특성화프로그램인 중소기업법무 특성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교류 및 실습기회를 기존의 중국과 유럽에서 아시아 전역, 북미, 일본 등으로 넓혀나가려고 한다. 전문성 확보를 위해 아주대 로스쿨이 갖는 지리적 장점과 폭넓은 법률시장을 기반으로 전문박사과정도 곧 활성화될 것이다." 대담/김환기 사회부장·정리/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아주대 로스쿨 합격률이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높은 합격률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학년별 저성과자에 대한 학업지도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7-25 김환기·신선미

[인터뷰… 공감]민간기업 첫 블라인드 채용 도입, 한종현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

변화와 혁신 위해 서서히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도전해야4차례 인턴 200여명 모집… 사진·학력 등 삭제 양식수정인턴 도입 이유는 당사자도 회사 평가기회 필요하기때문지방대에도 문호 개방… 미쳐서 일할 사람들 만나고 싶어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증원'과 함께 '블라인드 채용'이 청년취업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블라인드 채용은 지독한 청년 취업난 속에서 학연, 지연, 혈연 등 인맥에 따라 차별받는 문화를 혁파하고 실력 중심의 채용 시장을 만들려는 문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약 중의 하나다.이에 발맞춰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 4일 '블라인드 채용' 강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다음 날 관계부처의 합동 추진방안도 공개됐다.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 회의를 통해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의 입사지원서에서 출신 지역, 가족 관계, 신체 조건과 학력 등 인적사항을 삭제하기로 했고 서류 전형은 물론 면접 전형에서도 인적사항 등을 묻지 않는 대신 실력 중심 평가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그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최근 공공기관 채용과정에서 학력과 출신지, 신체조건이 기재된 서류제출을 금지하는 내용의 '채용절차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블라인드 채용의 성공 여부는 정부의 공공부문 확대가 아닌 민간기업의 동참 여부에 달렸다고 의견을 내놓고 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아제약의 동아쏘시오그룹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1일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다고 밝혀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한종현(49) 동아쏘시오홀딩스 대표이사 사장을 동아쏘시오그룹 사옥에서 만나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게 된 배경과 기대감을 들어봤다.동아제약의 지주회사인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지난 13일부터 19일까지 인턴 사원을 모집 중이다.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이번 인턴모집에서 40명을 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4차례에 걸쳐 200여명의 인턴을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선발할 예정이다.한 사장은 올 초 40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바로 '변화와 혁신'이다.그는 "굳어진 조직엔 변화와 혁신을 적용하기 힘들겠지만, 서서히 바꿀 수 있는 부분부터 포인트를 찾아 도전을 해야 한다"며 "첫 번째 변화는 연말마다 내년도 성장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닌 회사가 준 성장목표를 달성할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고, 둘째 혁신은 블라인드 채용처럼 남들이 도전하고 있지 않은 것, 다들 어려워하는 것을 먼저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사실 동아쏘시오그룹은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면서 1959년 공채 1기부터 50년 이상 유지해온 한자를 사용한 자기소개서를 비롯해 입사지원서 양식을 전면 수정했다. 특히, 사진·학력·출신 지역·가족관계 등 불합리한 편견을 줄 수 있는 사항을 모두 삭제했다.이번 블라인드 채용에 앞서 동아쏘시오그룹은 지난 3월 '제20회 동아제약 대학생 국토대장정'의 대원 모집 때에도 기존 30항목이던 선발기준을 '가치와 삶' 등 8~9개 항목으로 단순화하는 등 열정과 패기만 보고 대원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블라인드 채용을 사전 실험 하기도 했었다.'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적폐'라고 강조한 한 사장은 "기득권만 주장하지 말고 젊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 바로 블라인드 채용"이라며 "기존에는 A, B, C밖에 없었다면 앞으로는 A부터 Z까지 펼쳐보고 D 이후는 청년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먼저 인턴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것도 가장 큰 관점에서 볼 때 회사도 사람을 평가해야 하지만 사람도 이 회사가 자기에게 맞는지 평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언했다.한 사장은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진짜 보고 싶은 것은 본인의 '열정'이라고 소개했다. 면접 그 순간은 모두 열정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발되고 나면 갑자기 없던 일이 되는 등 그저 월급쟁이로 변해 버린 모습을 자주 봤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자기 스스로 자극을 주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이나 어떤 전공을 했는데 입사 후 이런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방식으로 서술을 작성토록 할 생각이다. 면접관이 갑이더라도 을의 입장에서 '진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되묻겠다는 것이다."지방대라도 그 안에서 진주를 발견할 수 있어 문호를 개방할 것"이라는 한 사장은 "어디에 일하게 됐다는 취업이 아니라 일에 미쳐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욱 기회를 주고 싶다"고 전했다.마지막으로 한 사장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우리가 먼저 가 보는 것으로, 길이 어긋날 수도, 큰 장애물을 만날 수도, 여러 가지 악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길을 만들어 가듯 일단은 해봐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알 수가 있다"며 "동아쏘시오홀딩스만의 색깔을 만들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동아쏘시오홀딩스2013년 '동아제약' 분할시 지주회사로 설립그룹 전체 비전·목표 수립… 사업확장 추진1967년부터 제약업계 1위로서 대한민국 대표 제약기업으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1932년부터 시작된 80년 넘는 역사의 바탕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위해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2013년에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제약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혁신 신약 개발과 글로벌 경영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동아쏘시오홀딩스, 동아에스티, 동아제약으로 분할했다. 특히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지주회사로서 동아쏘시오그룹 전체의 비전과 전략적 목표를 수립하고, 전략 목표에 따른 그룹의 인적 자원 및 자금 투입 계획 등을 수립한다.이와 함께 바이오의약품 및 혁신신약 개발을 통한 미래 성장동력 확보, 치료약 위주인 제약업 중심에서 의료서비스 분야 및 신 사업군 추가 등 단계적인 사업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바이오의약품 개발을 위해 일본의 메이지세이카파마와 제휴를 맺어 인천 송도에 디엠바이오 공장 건설을 완료했으며, 혁신적인 치매 치료제 개발을 위해 치매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각 계열사의 사업 경쟁력 확보 및 시너지 추구를 위해 전체적인 조직구조를 설계하고 그룹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비전을 구상한다. 대담/이종우부장 ljw@kyeongin.com 정리/문성호기자 moon23@kyeongin.com ■한종현 사장은?-1968년 경기도 출생-수성고, 연세대학교 의용공학과,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 대학원 의공학(석사)▲ 2002.08 ~ 2008.05 동아제약 의료기기사업부 Cardiac 팀장▲ 2008.05 ~ 2009.11 동아제약 해외사업부 OTC 수출팀장▲ 2009.11 ~ 2013.01 동아제약 해외사업부 해외영업팀장▲ 2013.03 ~ 2013.07 동아에스티 해외사업부 해외영업팀장▲ 2013.07 ~ 2016 엠아이텍 대표이사▲ 2017.01 ~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한종현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은 블라인드 채용이 열정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아쏘시오홀딩스 제공한종현 사장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생명존중' 사명을 이어나가겠다고 설명했다.

2017-07-18 이종우·문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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