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해경 최초 여성 총경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1991년 '시와 의식'으로 등단… 2011년 '바다에 남겨…' 시집 발간해 인천문학상 수상하기도총경은 치안총감, 치안정감, 치안감, 경무관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다. 일선 경찰서장을 할 수 있어 '경찰의 꽃'으로 불린다. 경찰청에서는 1998년 김강자 서울남부경찰서 방범과장이 국내 최초의 여성 총경으로 승진해 서울종암경찰서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치안정감 계급의 지방경찰청장에 오른 여성경찰도 나왔다. 치안 총수인 경찰청장만 빼놓고는 여경이 오르지 못한 자리(계급)는 없었다. 하지만 여경의 총경 승진이 빨랐던 경찰청(육상경찰)과 비교하면, 그동안 해양경찰청 소속 여경은 상대적으로 소외당했다. 해경이 여경을 처음 채용한 것은 1986년이다. 경찰청이 설립 초기인 1946년부터 여경 채용을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늦은 셈이다. 당시만 해도 해경은 '여자가 배를 타면 재수 없다'는 속설 때문에 여경 채용을 미뤘다고 한다. 지난 8일 발표된 해경 총경 승진 임용 예정자 6명의 명단 중에는 해경 창설 64년 만에 첫 여성 총경이 나왔다. 주인공은 동해지방해양경찰청 박경순(55) 기획운영과장이다. 그는 "'최초'라는 방점을 찍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힘들고 어려웠지만, 늘 주위의 선배와 동료, 후배들이 도와줘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박 과장은 1986년 순경으로 해경에 첫발을 들였다. 해경이 공채로 선발한 첫 여경이었다.박 과장은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해양경찰대(해양경찰청의 옛 이름)'가 여자 경찰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며 "인천에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관심이 많았었다. 제복을 입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경찰이 되고 싶어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지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7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채용된 박 과장은 함께 합격한 동기와 함께 당시 연안부두에 있던 해양경찰대 본청 민원실에 배치됐다. 박 과장은 민원실을 찾은 사람이 그냥 돌아가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본청 민원실에 찾아오는 사람은 일선 서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이곳까지 온 경우가 많았다"며 "멀리서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내용은 물어봐서라도 민원 사안을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했다.박 과장이 말단 순경에서 경장, 경사, 경위, 경감, 경정을 거쳐 마침내 총경에 이르기까지 초고속 승진한 비결은 '일에 관한 한 최고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미친 듯이' 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직 내에서 이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일단 일이 주어지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끝장을 봤으며, 법률 서적 등을 탐독하면서 전문성을 보강했다.박 과장이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로 기억하는 것은 지난 2010년 해경에 '직장 어린이집'을 개원한 일이다. 당시 박 과장은 복지계에서 근무했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로 직장에 다녀봤기 때문에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직원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산 확보와 건물 신축 절차가 까다로웠고, 직장 내에서는 '굳이 어린이집까지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박 과장은 간부들을 설득하고, 국방부·행정안전부·경찰청 등 20여 개의 직장 어린이집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했다. 어렵게 예산을 확보했고, 마침내 직장 어린이집 문을 열 수 있었다.박 과장은 해경으로 근무하면서 한국방송통신대(국문과)를 졸업했다. 1997년 인하대에서 국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인하대 행정학 박사 과정 중이다. 그는 1991년 시 '시와 의식'으로 등단했고, 2011년에는 태안해경서 1507함 근무 당시의 경험을 담은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이라는 시집을 냈다. 이 시집에는 경비함정을 타고 불법 외국 어선을 단속하는 등 서해를 지키며 느낀 가슴 아픈 애환을 '출항', '입항' 연작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 담겨 있다. 박 과장은 이 시집으로 '제24회 인천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박 과장이 선발된 이후에도 해경은 10여 년 동안 여경을 뽑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에도 해경 홈페이지에는 '여자 해경을 뽑을 필요가 있느냐'는 글이 올라와 찬반 논란이 가열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3년 여경의 경비함정 근무가 시작되면서 '금녀(禁女)의 벽'은 하나씩 허물어졌다. 경무 기획 분야에 국한됐던 여경의 업무도 이젠 함정, 해상 안전, 파출소 등 전 분야로 확대됐다. 최근에는 여성 최초의 경비함 함장, 첫 여성 항공정비사도 탄생했다. 10년 전에는 해경에서 여경 비율이 전체의 2%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전체 해양경찰관 8천510명 중 616명(7.2%)이 여성이다. 박 과장의 승진으로 평균 20척의 경비함정을 진두지휘하는 첫 해경서장도 배출될 예정이다.박 과장은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해경이 주권 수호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절감했다"며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불법 외국 어선 한 척을 단속하기 위해 보통 14시간 정도 고생해야 하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경이 재탄생한 이 시점에 우리 해상 주권을 수호하는 강인한 해양경찰, 당당한 바다 지킴이로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는 해경이 되겠다"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려울 때 찾아오는 해경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박경순 총경은?-주요 약력▲ 1962년 인천 출생▲ 1986년 순경 임용▲ 2006년 경감 승진▲ 2011년 경정 승진▲ 2017년 총경 승진▲ 1507함 부장, 해양경찰 교육원 교수 요원, 동해청 경무계장, 본청 성과관리팀장, 태안·평택 해양안전과장▲ (현)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주요 정부 수상▲ 2013년 대통령 근정포장▲ 2007년 국무총리, 2016년 국민안전처장관 표창 등 27회 수상-문단 경력▲ 1991년 '시와 의식' 신인상으로 문단 데뷔▲ 2008년 '한국수필' 신인상, 한국예총 예술상 수상▲ 2012년 24회 인천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앉아 또 하나의 詩를 쓰고'(1997), '이제 창문 내는 일만 남았다'(2002),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2011)해양경찰 최초로 여성 총경으로 승진한 박경순(55)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은 "'최초'라는 방점을 찍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려울 때 찾아오는 해경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태안해경서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할 당시의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박경순 과장 제공태안해경서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할 당시의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박경순 과장 제공해양 순찰중인 박경순 과장의 모습. /박경순 과장 제공

2017-08-15 김주엽

[인터뷰… 공감]영화 '귀향' 속편 2편 개봉앞둔 조정래 감독

1년 반 동안 역사의 참상 알리려 전세계 61개 도시 상영회대종상은 할머니들께서 주신 상… 수익금도 '소녀들의 피'귀향 성공은 '착시현상' 실상 알렸는데 변한 게 없지 않나차기작은 계획없어… 恨 다 풀어드리고 나서 찍어야 도리그의 본업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영화감독이라고는 하는데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 인권운동가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영화감독이 본업은 맞는 것 같다.그것도 아주 '능력있는' 영화감독 말이다. 지난해 영화 '귀향'으로 영화계 돌풍을 일으킨 조정래(45) 감독 얘기다. '영화감독 조정래'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낯설어 할 테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그린 영화 '귀향(鬼鄕)'은 한번쯤 들어봤음직하다.지난 2016년 2월 개봉된 영화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아니고, 역사적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한 무거운 주제를 다뤘음에도 지난해 360여만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며 반짝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영화 '귀향'은 준비작업을 거쳐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장장 1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2002년 조 감독이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다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고 홀로코스트를 접한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 영화로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직접 시놉시스를 쓰고, 증언을 수집했다.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빨리 개봉해 할머니들과 만나고 관객들과도 호흡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작비 조달이 여의치 않았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크라우딩 펀드를 진행해 4만5천여명이 제작비를 후원했다. 손숙, 정인기, 오지혜 등 유명 배우와 영화 명량, 암살, 도가니 등의 제작에 참여했던 유명 스태프들의 재능기부도 이뤄져 결국 지난해 대중과 만날수 있었다."그는 영화가 흥행하고, 감독으로서 인지도도 쌓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찾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영화를 통해 할머니들의 참상을 알리느라 국내를 넘어 전세계를 돌며 일정이 더욱 빡빡해졌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1년반 가까이 전세계 61개 도시를 돌며 1천307회의 영화상영회를 가졌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전역에서 영화 상영에 대한 요청이 이뤄졌다. 상영장소만 제공되면 직접 영사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상영회를 진행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들이 있다. 'Really?' 이게 사실이냐고 묻는 질문이 정말 많았다. 상영이 끝나면 질의 응답시간도 갖는데 20분 정도 생각하다 통상 2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어답변서까지 만들었다"고 전한다.그러다보니 조 감독은 자연스레 영화 속편 제작을 결심하게 됐다. 영화를 통해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들을 전해야겠다 마음먹었고,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작업에 열을 올려 조만간 2편의 결과물을 선보이게 됐다.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부제: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와 '에움길(가제)' 등 2편이다.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영화로 보는 증언집이라 할수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영상과 미공개영상으로 구성된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다큐멘터리다. '에움길'은 올 하반기 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인데 영화 '귀향'에 결말로 넣고 싶던 것을 에필로그에 포함했다"고 귀띔한다. 최근 일제시대를 소재로한 영화가 줄을 잇는 가운데 또 한편의 기대작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얼마전 한 역사가의 발언은 그의 이런 노력을 빛바래게 했다. 심용환 역사가는 영화 '군함도'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한데 이어 '귀향'도 위안부이야기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7월28일 자신의 SNS를 통해 영화 군함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몇해전 몇 백만이 보았던 '귀향'만큼 못 만들고 위안부 이야기를 왜곡한 영화도 드물다… 강제동원의 현실은 차라리 군함도가 훨씬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조 감독은 "영화 '귀향'은 철저한 역사검증과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형식을 빌린 '증언집'이라고 할수 있다"며 심씨의 주장에 강한 어조로 반발했다. 결국 심씨는 글을 게재한 이튿날인 7월29일 '할머니들께 상처가 되었다면 모두 제 잘못입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라고 해명 글을 올렸다.조 감독은 지난해 영화 '귀향'으로 여러 상을 받게 됐고, 그중 일생 단 한번만 받을 수 있다는 신인감독상(대종상영화제)까지 거머쥐었다. "솔직히 제가 받았다기 보다는 할머니들께 주신 상이다. 영화 '귀향'의 수익도 '소녀들의 피'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실제 영화수익금 일부를 나눔의집에 기부했다. 할머니들 덕에 영화가 만들어질수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23일 별세한 김군자 할머니의 소식은 그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2002년 나눔의집을 찾을때부터 할머니를 봬 왔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평생을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데 노력하셨고, 돈 한푼 허투루 쓰지 않고 후세들만 생각하셨는데 안타까웠다. 그나마 할머니 운구를 들고 가까이서 마지막을 배웅해드릴수 있어 감사했다."차기작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없다. 우선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나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다. 영화 '귀향'이 성공했다고 하지만 착시현상 아닌가 싶다. 영화로 많은 분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됐는데 변한게 없다. 어떻게 감히 다음 영화를 한다고 말하겠나"라고 했다.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영화가 역사에 대한 문화적 증인이 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상을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으면 한다. 이제 37분이 남으셨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진정한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사진/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조정래 감독은?▲ 1973 경북 청송 출생▲ 1992~2000 중앙대 영화학 학사▲ 2000 단편영화 '종기' 데뷔▲ 2011 제13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상▲ 2012 영상물등급위원회 청소년을 위한 좋은 영상물 극영화 부문▲ 2015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김학순상▲ 2016 영화 '귀향' 개봉, 제53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 한국 영화를 빛낸 스타상 감독상, 제36회 황금촬영상 신인감독상조정래 감독은 사진 찍는 내내 웃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이 한(恨)을 풀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상황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살아생전 고(故)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지난달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분당 차병원 장례식장에 조정래 감독이 스태프들과 함께 찾아 조문하고 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김군자 할머니의 운구 행렬에 함께한 조정래 감독.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국악 고수로도 활동하며 광주 나눔의집에서 할머니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 조정래 감독.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아이클릭아트

2017-08-08 이윤희

[인터뷰… 공감]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이규훈 초대 소장

백제 풍납토성·경복궁 발굴조사와 고려 도성 기초조사 진행유물·유적 활용 등 시·군 지자체와 적극적 논의·협력할 것고려 500년 남북 학술교류 필요… 수도권 문화재연구에 온힘신라·삼국·가야·백제·마한 등 기존 지방연구소 뒤이어 고려 연구소 설립 필요성 제기돼 강화가 선택됐다.강화도에 있는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년)에 전격적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는 북산(송악산) 남쪽 기슭인 강화읍 일대에 궁궐과 관아를 세운 뒤 고려는 이때부터 1270년(원종 11년)까지 강화도를 전시(戰時) 수도로 삼았다. 강화도를 중심으로 고려는 39년간 세계 최강으로 손꼽히는 몽골의 군대와 꿋꿋하게 맞섰다. 강화도 해안가에 돈대와 외성, 궁궐을 포함한 내성, 외성과 내성 사이 중성을 쌓았고 왕실 사찰도 만들었다. 철옹성 같은 주변의 바다와 드넓은 갯벌 등 자연여건은 강화도의 또 다른 무기가 됐다. 강화도는 그렇게 고려를 품었다.사적 133호로 관리되는 고려궁지 바로 옆 옛 강화군립도서관 건물에 자리 잡은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이규훈(46) 소장을 지난달 27일 만났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상반기 강화에 둥지를 튼 인천 소재 첫 문화 관련 국립기관이다. 이규훈 소장은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중세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라며 "국가기관 차원에서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중세 연구로 학술적인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지자체와 시민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 우리나라 역사의 응축, '강화도'이규훈 소장은 강화도를 "우리나라 역사의 응축(凝縮)"이라고 정의했다. 선사시대부터 고대는 물론, 중세와 근·현대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엔 항상 강화도가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화도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고인돌이 곳곳에 있다. 남한에서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인 '강화지석묘'를 비롯해 그 숫자만 160개가 넘는다.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 삼랑성 등의 유적도 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물줄기가 합쳐져 서해로 연결되는 강화도는 삼국시대 때에도 해상무역과 군사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활용됐다. 고려 때엔 몽골과의 항쟁을 위해 39년간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고, 고려 말기에도 수도권 방어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규훈 소장은 "조선 병자호란 때엔 일부 조정 대신들이 피신한 일도 있었고, 개화기 때엔 서구 문물들이 강화도를 통해 들어오게 됐다"며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항상 강화도가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내용의 3분의 1이 강화도와 관련한 내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며 "그만큼 유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강화도의 역사를 더욱 심도 있게 조사하기 위해 강화문화재연구소가 생긴 만큼,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국립 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월 말 공식 직제가 확정돼 업무를 시작했다. 현재 이규훈 소장을 비롯해 9명이 일을 하고 있는데, 내년까지 2명 정도가 더 충원될 예정이다. 국립 문화재연구소 산하 지방연구소는 경주, 중원, 가야, 부여, 나주 연구소 등 5개가 있었다. 신라, 삼국, 가야, 백제, 마한 등이 이들 지방연구소의 주된 연구 분야였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를 연구할 연구소 설립 필요성이 제기됐고, 결국 39년간 고려의 전시 수도였던 '강화'가 그 역할을 맡게 됐다. 고려 역사 연구의 핵심이자 수도권 유일의 지방연구소인 국립 강화문화재연구소는 현재 풍납토성 발굴조사와 경복궁 발굴조사, 강화를 중심으로 한 고려 도성 기초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풍납토성과 경복궁 발굴조사는 역사 문헌과 그 문헌에 나온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고고학적 방식으로 연구된다. 고려 도성 기초조사는 내년 본격적인 발굴을 위한 말 그대로 기초적인 조사이다. 이규훈 소장은 "백제의 풍납토성과 강화에 있는 고려 도성, 조선의 경복궁 연구는 고대와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도성의 역사적 맥락을 잇는 연구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고려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중세 연구는 고대와 근대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고려의 수도가 북한의 개성이었던 만큼, 고려 관련 연구를 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의 전시 수도였던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세 연구의 핵심적인 지역이라는 게 이규훈 소장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나라 고려 문화재는 석조물이나 탱화, 칠기, 도자기, 철불 등 주로 움직일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지만, 경주나 부여처럼 건물지, 고분 등 땅 위에 고정된 유적은 적다"며 "강화도에서 고려시대 절터나 고분들, 이궁지 등을 발굴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만큼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다양한 문화재 연구활동 '기대'이규훈 소장은 문화재 연구와 관련해 인천시와 강화군 등 지자체와의 적극적인 협력 의지를 나타냈다. 인천시는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역사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해 복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강도(江都)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강화도에 남아있는 고려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해 강화도를 경주나 부여 같은 '고도(古都)'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인천시 구상이다. 고려궁궐 재건·활용, 고려 기록유산 활용, 강화 역사건조물 활용, 강화 역사유적 가치창조, 고려 건국 1천100주년 기념사업 등 5개 분야 20개 사업으로 구성됐다.인천시는 강화도 해안가에 집중돼 있는 해양관방유적과 강화지역 고려왕릉 4기(홍릉, 석릉, 가릉, 곤릉)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작업도 추진한다. 해양관방유적은 강화 해변의 보(堡)와 돈대(墩臺), 산성 등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해안 방어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군사유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강화지역 고려왕릉엔 고려의 역사·문화·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담겼다는 평가다. 이규훈 소장은 "지자체 차원에서 지역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활용해 의미 있는 자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일련의 사업을 추진하는 건 굉장히 긍정적인 일"이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 부분도 당연히 우리가 일정 부분 협조해야 할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지자체가 활용을 원하는 유물·유적이 어떤 성격인지 규명하고, 발굴해서 전시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며 "그런 과정에서 유물·유적 등 문화재가 더욱 잘 보존되는 효과도 함께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이규훈 소장은 "고려 관련 연구에 대한 남북 학술교류 필요성도 있다"고 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은 고려 역사유적 발굴과 복원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2013년엔 고려 궁궐인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국제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선사시대 이후 신라 1천 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으로 이어져 오는데, 고려의 제2 수도가 있던 강화 39년만으론 고려 500년을 밝히는 데 부족한 측면이 있다"며 "큰 틀에서도 분단 전까지 우리나라 역사는 함께 흘러온 만큼, (역사분야에 대한) 남북 간 공동연구는 필요하다"고 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최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개성 만월대 발굴사업 등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남북 학술교류의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이다. 이규훈 소장은 "초대 소장으로서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강화문화재연구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설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문화재청에서 발굴과 시굴 등의 업무를 했을 때 강화도가 담당 지역이었던 연이 있었다"면서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강화도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동시에 책임자로서 연구소를 어떻게 이끌지, 앞으로의 방향설정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 부담감도 컸다"고 했다. 그는 "강화도가 있는 인천을 비롯해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문화재 연구 국가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규훈 소장은?▲ 1971년 출생▲ 1997년 전북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1999년 문화재청 학예연구사▲ 2003년 전북대 대학원 석사(고고학)▲ 2005년 문화재청 학예연구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2007년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2008년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관▲ 2011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2014년 국립 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관·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2017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장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이규훈 소장이 강화도 고려궁지 내에 있는 외규장각 앞에서 "선사시대부터 고대는 물론, 중세와 근·현대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엔 항상 강화도가 있었다"며 우리 역사에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7-08-01 이현준

[인터뷰… 공감]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

공정성 논란·비싼 등록금에 입학전형 개선·장학금 확대법률문제 상담·재학생 소송 참여 등 현장밀착형 서비스로스쿨 출신 안숨기고 수원 최대로펌 만든 졸업생 '뿌듯'학습 효율성 개선 中企법무 관련 교류·실습기회 넓힐 것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된 지 내년이면 10년이다. '귀족학교', '돈스쿨'이라는 오명과 함께 탄생했지만, 지역과 연계해 특화 로스쿨을 만들겠다는 도입 취지는 좋았다. 어떤 지역의 로스쿨은 예술법무를, 또 다른 지역은 국제법무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저마다 개성있는 지역 대표 로스쿨로 자리 잡게 하자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곳을 찾기 힘들어졌지만 경기도에 하나뿐인 아주대학교 로스쿨은 도입 때부터 기획했던 '중소기업법무' 프로그램을 여전히 잘 유지해가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풍성해졌다. 중소기업 대부분이 경기도에 밀집해있는 지역 특성상 중소기업의 법률 여건을 향상시켜주겠다는 선한 의도가, 아주대 로스쿨을 지역민의 자부심으로 바꿔놨다. 지난 19일 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을 만나 현재 로스쿨의 위치와 지난 10년간의 역사, 앞으로의 포부 등을 들어봤다.-로스쿨 출범 10년을 앞두고 있는데 제도 전반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2009년 3월 첫 입학생을 시작으로 내년 3월 10기 입학생을 맞이하는 로스쿨은 사법시험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법률가 양성제도를 목표로 출범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원자를 선발한 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많은 수의 법률가를 양성, 국민들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그 취지다. 지난 9년여를 돌아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입학생을 맞아 교육을 통해 대량의 법률가가 배출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도입 초기에 논란을 야기했던 입학 부문의 공정성 및 투명성 논란과 비싼 등록금 문제, 3년 내에 법이론과 실무교육을 모두 마치도록 설계된 무리한 교육과정, 합격자수를 제한함에 따른 탈락자의 대량 발생, 그리고 변호사시험 준비에 몰입한 나머지 당초의 도입취지인 전문화 및 특성화교육이 실종됐다는 것은 로스쿨제도가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과제다."-입학전형에서 공정성을 위해 개선하고 있는 점이나 비싼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있나."지난해 입학전형부터 대폭 개선해나가고 있다. 우선 응시원서에 부모나 친인척의 성명, 직장명, 직업 등 신상과 관련한 정보를 넣지 않도록 기재금지 사항을 사전고지한 뒤 위반 시 실격조치 등 제재 내용도 명확히 규정해 모집요강에 담았다. 또 서류평가 시 지원자 성명, 사진, 수험번호 등 개인식별정보의 블라인드 처리를 철저히 하고 면접평가에는 가번호 부여, 무(無 )자료 면접 실시, 면접위원 구성 시 외부 면접위원 위촉 등의 방안을 도입했다. 향후 입학전형에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취약계층 등의 진학기회 확대와 입학기회에 대한 형평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등록금의 경우 실제 소요되는 비용을 기초로 설계돼 비싼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등록금 재원만으로는 운영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로스쿨도 대다수다. 그간 논란이 계속되면서 지난해 전국 로스쿨이 일률적으로 15% 가량의 등록금을 인하했고, 일부 국가재정도 투입돼 등록금 전액 대비 30%의 장학금 수혜율을 보이고 있다. 아주대 로스쿨의 장학금 수혜율은 30%를 웃돌고 있다. 특히 소득분위에 따라 0분위~2분위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의 경우 등록금 전액을 무료로 하는 것이 의무화된 만큼 등록금 때문에 로스쿨을 못 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대외장학금 유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니 법률가가 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아주대 로스쿨의 문을 두드려 줬으면 좋겠다."-경기도의 유일한 로스쿨이다. 지역사회와의 유대감을 높이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중소기업법무'를 특성화전략으로 삼았다. 경기도 내에는 56만여개 중소기업이 밀집해있지만, 대기업에 비해 여전히 법률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지역에 하나뿐인 로스쿨로서 이 같은 중소기업을 위해 양질의 현장밀착형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유능한 법률가로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특성화전략의 추진기구로써 '중소기업법무센터'를 설치하고 'Total Law & Business'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실제로 매년 상당수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중소기업법무센터를 통해 법률문제를 상담해주고 있다.'리걸클리닉센터'를 통해 재학생들이 실제 중소기업의 법률분쟁과 소송에 참여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리걸클리닉은 '지역사회에 대한 법률봉사'와 '재학생들의 실무역량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으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선점적 법률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것이 취지다. 소송지원 신청 내용 중에 공익적 목표에 부합하는 사건을 우선 선별하고, 리걸클리닉 수업을 통해 법률자문을 실시하는가 하면 필요할 경우 재학생들이 전문 변호사와 함께 실제 소송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승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벌써 많은 법조인을 배출했다. 학교를 빛내고 있는, 특히 기억에 남는 졸업생이 있다면."오늘도 함께 점심을 했다. 3기이자 졸업한 지 3년 된 변호사로, 수원에서 가장 큰 로펌을 만들어서 성장시킨 인물이다. 부장판사·검사 등 내로라하는 전관을 포함해 많은 변호사들이 수원에서 로펌을 운영해왔는데, 막상 대형 로펌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젊은 변호사니까 가능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친구가 운영하는 로펌은 8명의 로스쿨 출신 변호사로 구성돼있다. 사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정작 출신 로스쿨을 숨기기 급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부는 드러내더라도 정작 자기를 법조인으로 배출시킨 로스쿨은 숨기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하고 나면 다들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 친구는 졸업생 최초로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5천만원을 기탁했다. 경기남부지역은 곧 경기고법이 들어설 예정으로 그만큼 법률수요도 많고 법률시장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변변한 로펌 하나 없이, 대부분 법률분쟁이 생기면 서울에 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그 친구가 경기도민들이 굳이 서울로 가지 않고도 최상의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경기도에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밝혔을 때 정말 자랑스러웠다. 이런 졸업생이 많아질수록 아주대 로스쿨도 함께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사법시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로스쿨의 역할과 책임감도 막중해졌을 것 같다. 임기 내 비전을 제시해달라."지금까지는 여러 가지 장애요인으로 인해 로스쿨의 설립취지를 제대로 구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합격률에만 매몰돼 원래의 로스쿨 도입 취지대로 특성화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50% 미만에 그치는 변호사 합격률을 조금만 높이면 구체적으로 역량을 키우고 전문화, 특성화, 국제화라는 원래의 교육목표도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주대 로스쿨의 경우 누적합격률이 90%를 넘는, 그야말로 최상위 합격률을 유지하고 있지만 높은 합격률을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학년별 저성과자에 대한 학업지도를 실시할 계획이다. 단기적으로는 학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조력하는 체계를 구축하되 중장기적으로는 특성화프로그램인 중소기업법무 특성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교류 및 실습기회를 기존의 중국과 유럽에서 아시아 전역, 북미, 일본 등으로 넓혀나가려고 한다. 전문성 확보를 위해 아주대 로스쿨이 갖는 지리적 장점과 폭넓은 법률시장을 기반으로 전문박사과정도 곧 활성화될 것이다." 대담/김환기 사회부장·정리/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아주대 로스쿨 합격률이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높은 합격률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학년별 저성과자에 대한 학업지도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7-25 김환기·신선미

[인터뷰… 공감]민간기업 첫 블라인드 채용 도입, 한종현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

변화와 혁신 위해 서서히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도전해야4차례 인턴 200여명 모집… 사진·학력 등 삭제 양식수정인턴 도입 이유는 당사자도 회사 평가기회 필요하기때문지방대에도 문호 개방… 미쳐서 일할 사람들 만나고 싶어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증원'과 함께 '블라인드 채용'이 청년취업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블라인드 채용은 지독한 청년 취업난 속에서 학연, 지연, 혈연 등 인맥에 따라 차별받는 문화를 혁파하고 실력 중심의 채용 시장을 만들려는 문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약 중의 하나다.이에 발맞춰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 4일 '블라인드 채용' 강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다음 날 관계부처의 합동 추진방안도 공개됐다.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 회의를 통해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의 입사지원서에서 출신 지역, 가족 관계, 신체 조건과 학력 등 인적사항을 삭제하기로 했고 서류 전형은 물론 면접 전형에서도 인적사항 등을 묻지 않는 대신 실력 중심 평가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그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최근 공공기관 채용과정에서 학력과 출신지, 신체조건이 기재된 서류제출을 금지하는 내용의 '채용절차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블라인드 채용의 성공 여부는 정부의 공공부문 확대가 아닌 민간기업의 동참 여부에 달렸다고 의견을 내놓고 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아제약의 동아쏘시오그룹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1일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다고 밝혀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한종현(49) 동아쏘시오홀딩스 대표이사 사장을 동아쏘시오그룹 사옥에서 만나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게 된 배경과 기대감을 들어봤다.동아제약의 지주회사인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지난 13일부터 19일까지 인턴 사원을 모집 중이다.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이번 인턴모집에서 40명을 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4차례에 걸쳐 200여명의 인턴을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선발할 예정이다.한 사장은 올 초 40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바로 '변화와 혁신'이다.그는 "굳어진 조직엔 변화와 혁신을 적용하기 힘들겠지만, 서서히 바꿀 수 있는 부분부터 포인트를 찾아 도전을 해야 한다"며 "첫 번째 변화는 연말마다 내년도 성장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닌 회사가 준 성장목표를 달성할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고, 둘째 혁신은 블라인드 채용처럼 남들이 도전하고 있지 않은 것, 다들 어려워하는 것을 먼저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사실 동아쏘시오그룹은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면서 1959년 공채 1기부터 50년 이상 유지해온 한자를 사용한 자기소개서를 비롯해 입사지원서 양식을 전면 수정했다. 특히, 사진·학력·출신 지역·가족관계 등 불합리한 편견을 줄 수 있는 사항을 모두 삭제했다.이번 블라인드 채용에 앞서 동아쏘시오그룹은 지난 3월 '제20회 동아제약 대학생 국토대장정'의 대원 모집 때에도 기존 30항목이던 선발기준을 '가치와 삶' 등 8~9개 항목으로 단순화하는 등 열정과 패기만 보고 대원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블라인드 채용을 사전 실험 하기도 했었다.'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적폐'라고 강조한 한 사장은 "기득권만 주장하지 말고 젊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 바로 블라인드 채용"이라며 "기존에는 A, B, C밖에 없었다면 앞으로는 A부터 Z까지 펼쳐보고 D 이후는 청년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먼저 인턴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것도 가장 큰 관점에서 볼 때 회사도 사람을 평가해야 하지만 사람도 이 회사가 자기에게 맞는지 평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언했다.한 사장은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진짜 보고 싶은 것은 본인의 '열정'이라고 소개했다. 면접 그 순간은 모두 열정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발되고 나면 갑자기 없던 일이 되는 등 그저 월급쟁이로 변해 버린 모습을 자주 봤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자기 스스로 자극을 주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이나 어떤 전공을 했는데 입사 후 이런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방식으로 서술을 작성토록 할 생각이다. 면접관이 갑이더라도 을의 입장에서 '진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되묻겠다는 것이다."지방대라도 그 안에서 진주를 발견할 수 있어 문호를 개방할 것"이라는 한 사장은 "어디에 일하게 됐다는 취업이 아니라 일에 미쳐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욱 기회를 주고 싶다"고 전했다.마지막으로 한 사장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우리가 먼저 가 보는 것으로, 길이 어긋날 수도, 큰 장애물을 만날 수도, 여러 가지 악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길을 만들어 가듯 일단은 해봐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알 수가 있다"며 "동아쏘시오홀딩스만의 색깔을 만들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동아쏘시오홀딩스2013년 '동아제약' 분할시 지주회사로 설립그룹 전체 비전·목표 수립… 사업확장 추진1967년부터 제약업계 1위로서 대한민국 대표 제약기업으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1932년부터 시작된 80년 넘는 역사의 바탕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위해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2013년에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제약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혁신 신약 개발과 글로벌 경영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동아쏘시오홀딩스, 동아에스티, 동아제약으로 분할했다. 특히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지주회사로서 동아쏘시오그룹 전체의 비전과 전략적 목표를 수립하고, 전략 목표에 따른 그룹의 인적 자원 및 자금 투입 계획 등을 수립한다.이와 함께 바이오의약품 및 혁신신약 개발을 통한 미래 성장동력 확보, 치료약 위주인 제약업 중심에서 의료서비스 분야 및 신 사업군 추가 등 단계적인 사업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바이오의약품 개발을 위해 일본의 메이지세이카파마와 제휴를 맺어 인천 송도에 디엠바이오 공장 건설을 완료했으며, 혁신적인 치매 치료제 개발을 위해 치매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각 계열사의 사업 경쟁력 확보 및 시너지 추구를 위해 전체적인 조직구조를 설계하고 그룹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비전을 구상한다. 대담/이종우부장 ljw@kyeongin.com 정리/문성호기자 moon23@kyeongin.com ■한종현 사장은?-1968년 경기도 출생-수성고, 연세대학교 의용공학과,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 대학원 의공학(석사)▲ 2002.08 ~ 2008.05 동아제약 의료기기사업부 Cardiac 팀장▲ 2008.05 ~ 2009.11 동아제약 해외사업부 OTC 수출팀장▲ 2009.11 ~ 2013.01 동아제약 해외사업부 해외영업팀장▲ 2013.03 ~ 2013.07 동아에스티 해외사업부 해외영업팀장▲ 2013.07 ~ 2016 엠아이텍 대표이사▲ 2017.01 ~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한종현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은 블라인드 채용이 열정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아쏘시오홀딩스 제공한종현 사장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생명존중' 사명을 이어나가겠다고 설명했다.

2017-07-18 이종우·문성호

[인터뷰… 공감]자동차 정비 국가대표 박병일 명장

한국, 세계 5~6위 생산능력 불구 기술력 인정 못받아 하청구조 개선 시급국내 기업 中자동차 무서운 성장 대비해야… 정비 기술자 저평가 아쉬움인간적으로도 명장 되고 싶어 꾸준한 봉사… 46년 경력 車산업 발전 기여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규모는 세계 6위를 자랑한다. 최근 인도에 추월 당하기 전까지는 세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2014년 2천만대를 넘어섰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최근 수십 년 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산 차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불신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국내 시장에서 70% 안팎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불신도 적지 않다. 높은 판매량과 비례해 수출용과 내수용에 차이를 두는 등 국내 소비자를 무시한다는 불만이 있다. '급발진', '에어백 미작동' 등 현대차와 관련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다.현대차의 품질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박병일(61) 자동차 명장이다. 박 명장은 그동안 국내 자동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 결과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기도 한 그는 지난 2014년 현대차로부터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현대차는 그가 한 언론 인터뷰 9건을 문제삼았다. 박병일 명장은 국내 대형 로펌을 앞세운 현대차를 상대로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대응했다. '대기업+대형로펌'과 박병일 명장 1인의 대결에서 검찰은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박병일 명장을 지난 6일 오후 그가 대표로 있는 인천시 남동구에 위치한 정비업체 CAR123TEC 사무실에서 만났다. 46년간 자동차 정비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5~6위에 올라있지만, 자동차 기술력은 일본, 독일의 자동차기업과 비교하면 아직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기술력에는 유럽과 일본에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 기업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지적에 대해서는 분석해 수용할 것은 수용하면서 이를 토대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명장은 또한 국내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하청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자동차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이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기업이 지위를 이용한 '단가 후려치기'가 오랜 기간 만연하면서 중소기업들의 의지를 꺾어놨다"며 "초창기에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중소기업들이지만 대기업의 협력업체가 되면서 힘들어하고 심지어는 공장 문을 닫는 경우도 숱하게 봐왔다. 이러한 구조가 세계 5위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술에 대해서는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 됐다"고 진단했다.그는 지난 2002년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 부문에서 '제1호 명장'이 됐다. 그가 자동차 정비 일을 배운 지 31년 만이다. 자동차 정비 부문에서 국내 대표 전문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6남매의 첫째인 그는 학창시절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고, 자신이 미술을 하게 되면 동생들이 제대로 공부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뒀다.길을 가다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들었던 엔진 소리가 좋아서 자동차 정비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14살 때였다.자동차 명장이 된 이후에도 그는 정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외국서 자동차 관련 서적을 구입해 읽었고, 국내에 없는 차량을 직접 분해하고 구조를 살펴보기 위해서 들여온 수입차만도 100여 대다. 그는 특히 매년 중국차를 들여와 분해하고 있는데 중국 자동차의 기술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했다. 그는 "5년 전과 지금 중국차는 완전히 다른 차량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 거리에서 중국 브랜드 차량을 흔하게 보게 될 것"이라며 "현대차 등 우리나라 기업들은 중국의 발전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박 명장은 이처럼 자동차 정비와 관련한 일을 수십 년 간 해왔지만, 자동차 정비 기술자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고 했다. 현대차가 자신을 고소한 이유도 이같은 인식의 연장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현대라는 회사가 자동차 고치는 일을 하는 나를 쉽게 본 것 같다"며 "'명장'칭호를 가지고 있는 나를 쉽게 볼 정도면 기술자들 모두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변호사 없이 소송에 대응했다. 자동차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긴다면 기능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술자를 낮게 보는 시각을 뒤집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는 자동차 정비 분야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제1호 명장의 자리에 오른 데 이어, 세계 최초로 급발진 원인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지식을 후학에게 전하는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그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정비업체는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해 있다. 그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대에 다녀온 직후다. 우연히 아는 선배가 일하는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일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인천에 터를 잡는 계기가 됐다.그는 "명장이 되기 전까지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며 "명장이 된 이후에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술로 명장이 됐지만 인간으로서도 명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2006년부터 인천의 섬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단체인 '한국마이스터연합회'의 봉사활동은 10년이 넘었다. 그는 차량 정비를 맡고, 다른 회원들은 집 고치기, 가전제품 수리, 일손 돕기 등을 하고 있다. 박 명장은 "섬에 계신 분들은 특히 기능인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섬을 다니고 있다"며 "10여 년간 하면서 회원수도 1천명이 넘는 등 많은 분들이 함께하고 있다. 작은 노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봉사활동을 할 때마다 저 스스로 마음이 기쁘다"고 말했다. 그 동안 박 명장의 활동에 대해 누군가는 '투사'라고 했고, 누군가는 '진정한 전문가'라고 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박 명장을 눈엣가시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다.박 명장은 "저는 수십 년간 자동차를 고치고, 자동차를 공부했다. 지금도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기도 하다"며 "저는 힘이 닿는 데까지 자동차 관련 일을 할 것이고, 현대차를 포함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잘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명장은 대한민국 자동차 발전을 바라는 기능인이라고 했다. 그는 "저는 기능인이다. 진정한 '자동차 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제 역할이 자동차산업이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강조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박병일 명장은?-출생 : 1957년 8월 17일 서울 출생-경력▲ 1971년 자동차 정비 입문▲ 1994년 인천기능대학 자동차공학과 졸업▲ 1999년 세계 최초 자동차 급발진 분석▲ 2002년 대한민국 제 1호 자동차 명장 선정▲ 2004년~2006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2006년 기능한국인 선정▲ 2006~2010년 신성대학 겸임교수▲ 2011년 은탑산업훈장 수상▲ 2013년 한국산업인력공단 명예의 전당 헌액▲ 2000년 ~현재 CAR123 TEC 대표▲ 2007년~현재 한국마이스터연합회 이사장▲ 2008년 ~현재 JPS KOREA 기술연구소장▲ 2012년~현재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저서 : '자동차전자제어 오토매틱' 외 36권박병일 명장은 자동차 전문가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그가 현대차와의 소송에서 변호사 없이 맞선 원동력이기도 하다. 자부심만큼 인력 양성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그가 운영하는 정비공장 3층은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현대차를 미워하지 않는다. 현대차가 세계적으로 더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7-07-11 정운

[인터뷰… 공감]향토서 '수원야사' 펴낸 이창식 前 경인일보 편집국장

6·25전쟁 끝나고 '대기자가 되리라' 자신과 약속서슬퍼런 군인들 압제속에서 지역언론 지켜각종 향토사 편찬위원 활동 지역사 재정립 공로최근 수원의 숨겨진 얘기 풀어내 큰 호응구순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기자 풍모가뭄을 해갈시켜줄 단비가 내리던 지난 3일. 인터뷰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수원시 조원동에 위치한 주인공의 자택을 찾았다. 처음 인터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앞서고 떨리는 마음이 강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마냥 취재수첩과 볼펜은 이상이 없는지, 질문은 어떻게 할지 꼼꼼히 되새김해보며 점검에 나섰다.그 순간 우산을 받쳐든 노신사가 검은 가방을 둘러메고 한손에는 서류뭉치가 잔뜩 든 종이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구순을 앞둔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한 걸음걸이와 기백이 절로 머리를 숙이게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기자생활을 시작, 명실공히 경인지역 언론계 최고어른으로 불리는 이창식(88) 선생과 인터뷰가 그렇게 시작됐다.평양 출신인 그가 경인지역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53년 5월. 6·25전쟁이 발발하고 혈혈단신으로 남한에 온 그는, 당시 육군예비사관학교 육군소위로 임관해 참전하고 전쟁이 끝난 뒤 생업의 길로 들어서면서 인천일보 평기자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갓 20살에 홀로 남한에 내려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잡기까지 녹록지 않은 생활이 이어졌지만 후회는 없다고 한다."입사한 그해(1953년) 7월 휴전조인협상 반대 집회가 인천 월미도에서 열렸다. 그 집회가 첫 취재였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왜냐면 꼭 10년전인 1943년, 평양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를 다니며 경성으로 수학여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월미도를 방문했었다. 그런데 10년만에 그 꼬마가 기자로 다시 서있다니…."선생은 당시 소회를 산문집 '천국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이튿날 평양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경성시내와 고궁을 돌아보고 다음날에는 인천 월미도로 갔는데 내륙 지방에서는 볼수 없었던 등대와 아득한 수평선을 등지고 출렁이는 바다 풍경은 몹시 신비로웠다(중략)…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억하던 선머슴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월미도가 나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은 '기회의 땅'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그는 당시 '반드시 대기자가 되리라'는 다짐을 했고, 그날의 기억을 간직한 채 우리 사회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정론직필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언론사에 몸담으며 느끼는 변화와 격동의 세월은 그 어느 곳보다 살벌했고 무게감 또한 컸지만 이겨냈다.선생이 들고 나온 종이가방에는 지역언론의 역사이자 이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낸 빛바랜 신문과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중 1961년 5월17일자 신문을 꺼내들었다. '軍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내용의 1면 톱기사가 담겨 있었다. 제호 밑에는 군부 검열에 통과됐다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당시 언론인으로서의 고충이 짐작되는 대목이었다.1963년 8월31일자 신문에는 '박정희 전역'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됐는데 '이창식 특파원'이라는 바이라인이 눈에 띄었다. "신기하지요. 당시에는 해외취재가 아닌 지역을 취재할때도 특파원이라는 말을 썼다"고 일러주었다.또 눈길 끄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1960년 9월20일자 '경기도청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기사였다. 당시 경기도청은 서울 중앙청사 맞은 편에 있었다고 한다. 1967년 경기도로 도청이 오게 되기까지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그렇게 신문사의 평기자로 시작해 부장, 부국장, 편집국장에 오르고 언론에 몸담은지 20여년 되던 해, 1974년 4월7일 '신문의날'은 그에게 잊지 못할 날이 됐다.경인일보 편집국장직에서 물러난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표를 내고 떠난 후 그는 생계를 위해 목욕탕집 사장으로 깜짝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만 다시 깨닫게 됐다고 한다. 당시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글짓기와 그림 그리기는 고상한 취미지만 일단 탐욕을 부리면 곧 장사꾼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장사꾼이 되기 전에 호된 수업료만 내고 다시 글쟁이가 됐다"고 회고한다.이후 1977년11월29일 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제안이 들어와 수락한 후 '경기도사 1,2권'을 발행하며 다시 글쟁이로서의 제2의 인생을 맞게 된다.그는 '경기도사'를 시작으로 '수원상의사' '수원시사' '경기예총사' '수원시의회사' '일제강점기 민생실록-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60년사' 등 경기도와 수원지역사회 관련 향토도서만 20여권을 내놓았다. 일본어도 능통한 선생은 일본학자가 쓴 수원향토사인 '발전하는 수원' '수원' '화성지영' '수원군지지', 일본의 저명소설가가 집필한 '간난이', 출판사 의뢰로 번역한 '술병은 클수록 좋다' '인생대학에 졸업은 없다'까지 합치면 40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출간했다.사실 그가 각종 향토사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 경기지역의 향토사가 재정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원화성박물관의 한동민 관장은 "수원지역과 관련된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창식 선생이 편찬한 책들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정말 관심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셨다"고 말한다.이 선생은 "(경기도사 편찬시)당시만 하더라도 향토사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향토사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정사와 야사도 가능하다. 정사는 권력자들의 역사이고 세도가들의 이야기이다보니 야사도 필요하다고 봤다"고 한다.이런 선생이 최근 출간한 '수원야사'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수원지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소설보다 더 재밌게 풀어냈다. 고수는 고수가 알아보는 것일까. 경기도는 물론 수원 관련 역사·문화 전문가로 꼽히는 수원화성박물관 한동민 관장이 그를 알아보고 찾아와 의기투합해 '수원야사'가 빛을 보게 됐다. 그는 편찬위원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이름만 걸치지 않는다. 자료를 얻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 등 전국의 도서관을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며 손수 수백 수천장에 달하는 자료를 복사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원시사에 앞서 1천700여쪽에 달하는 수원상의사를 편찬했다. 당시만 해도 이렇다할 자료가 없어 전국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水(물 수)자가 들어간 자료를 전부 찾아내 복사하고 나중에 보니 그 자료가 4천~5천점에 달했다. '수원상의사'였지만 수원상공회의소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원에 대한 역사까지 포괄하다 보니 방대해졌다"고 한다."나의 스타일은 학문적이라기 보다는 발로 뛰는 현장주의로 쓰는 향토서다. '수원야사'며 '수원시사'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수원사람이 써야 됐는데 평양에서 온 사람이 야사를 쓴 것은 아이러니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이었다."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역을 기반으로한 인물서를 준비중이라고 귀띔하는데 아직까지 현장 기자의 면모가 풍겨나왔다. "글은 발(현장)로 써야 돼. 머리로 쓰면 안돼." 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창식 前 편집국장은?▲ 1930. 평양 출생 ▲ 1953.5 인천일보 입사▲ 1969.3 경기연합일보사(경인일보 전신) 편집국장▲ 1982. 경기도사 1권(공저) ▲ 1986. 수원상의사, 수원시사▲ 1994. 경기예총사 ▲ 1993~1999. 경기도민일보 주필▲ 1999.5 이창식 칼럼집 '천일록'▲ 2000. 수원상의90년사 ▲ 2002. 수원시의회사 ▲ 2003. 일제강점기 민생실록 -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012. 수원문협50년사(공저) ▲ 2014. 수원국악50년사▲ 2017. 수원야사(공저)경인지역 언론계 최고 어른으로 불리는 이창식(88) 선생이 빛바랜 신문을 펼쳐보이며 "기자는 기사를 발(현장)로 써야지 머리로 쓰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1971년 9월 15일 수원시 교동에서 개최된 연합신문사(현 경인일보) 사옥 기공식 모습. /경인일보DB1969년 경기연합일보가 인천에서 수원으로 오기까지 큰 역할을 한 주역 3인방. 재일교포 출신 불이무역 이현수(사진 왼쪽) 사장과 수원 7선의 이병희(오른쪽) 국회의원, 이창식(가운데) 당시 편집국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창식 전 편집국장 제공

2017-07-04 이윤희

[인터뷰… 공감]제2연평해전 참전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이해영 원사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 북한 고속정과의 사투부상자 치료하던 박 병장, 바로 옆에 있던 서 중사눈 앞에서 자식 같은 병사들을 잃었다분쟁의 바다서 살아남은 그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철책 없는 남북의 해상 경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은 늘 남북관계 긴장 국면의 중심에 있다. 크고 작은 도발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천 옹진군 서해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소연평도) 최북단 해역을 누구는 '분쟁의 바다'라고 칭하고 누구는 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꼭 15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에서 우리 해군과 북한군의 전투가 있었다. '제2연평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NLL이 분쟁의 바다임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사건이다. 서해의 평화를 얘기하려면 먼저 분쟁의 역사부터 들춰볼 필요가 있다. 제2연평해전 발생 15년이 지난 지금 그 분쟁의 바다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다.27일 오전 11시께 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서 15년 전 제2연평해전에 참전했다가 살아남은 이해영(52) 원사를 만났다. 이 원사는 "정말 치열하게 싸운 전투가 잊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움이 있다"며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6월이 되면 전사자들 생각에 마음이 찡하다"고 말했다.2002년 6월 29일 오전 5시께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상 경비작전을 수행하는 우리 해군2함대 소속 고속정 252편대(참수리 357·358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NLL 경비와 우리 꽃게잡이 어선의 보호를 위해 출항했다. 편대는 고속정 2척으로 구성된 해군의 최소 단위 전투부대인데 1척 당 28명이 탑승한다.357호 갑판장이었던 이 원사는 며칠 전부터 우리 NLL을 왔다 갔다 하며 눈치를 보는 북한 경비정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전날에도 차단 작전을 통해 북한 경비정을 퇴각시킨 터였다. 이날도 북한 고속정 '등산곶 684호'가 우리 NLL을 침범해 차단작전에 나섰는데 평소와 달리 북한 고속정이 퇴각하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갑판에서 현장 지휘 임무를 맡은 이 원사는 좌현 M60 기관총 사수에게 "준비해라...준비해라...준비해라..."라고 사격 준비 지시를 내렸다. 오전 10시 25분께 '준비해라'라는 말을 10번 정도 말할 때쯤 북한 경비정 쪽에서 굉음이 났다. 이 원사는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얼굴은 파편이 박혀 피투성이였고, 주변에서는 다친 병사들이 '갑판장님 피하세요'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소총으로 대응사격을 하고 358호가 북한 고속정을 향해 계속 공격을 퍼붓고 있었죠."의무병이자 전화수 역할을 했던 故박동혁 병장이 몸을 사리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파편에 맞았다. 이 원사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 병장은 전투 이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숨졌다. 이 원사 바로 옆에 있던 故서후원 중사도 쓰러졌다.이 원사는 이날 북한의 공격은 우발이 아닌 명백히 계획 아래 이뤄진 의도적 공격으로 기억한다. 북한 경비정은 첫 공격에서 故윤영하 소령(357호 정장)이 있는 함교를 명중시켰다. 지휘관을 잃은 357호는 집중 공격을 당했고 결국 6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경비정은 지휘관이 위치하는 곳이 외부에 노출돼 있어 북한은 이를 노리고 조준 사격을 한 것이죠. 며칠 전부터 NLL을 넘나들며 눈치를 보던 북한 고속정은 우리 군의 대응을 염탐한 것이에요. 우리가 차단작전만 할 뿐 선제 경고사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고속정에서 정장이 '아버지'라면 갑판장은 '어머니' 역할을 했다. 이 원사는 배에서 매 끼니를 챙겨 먹는 단원들을 위해 부침개도 부쳐주고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이며 김치며 아낌없이 내놓았다. 라면에 밥과 여러 부식을 넣고 함께 끓인 '라밥'이 주특기 메뉴였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357호의 최고령자였던 그는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책임지며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후임 부사관들과 병사들을 챙겼다.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식구'들이 눈앞에서 전사하는 것을 목격한 이 원사는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부상을 입고 살아남은 그는 2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군 복무 중이다.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 전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이 원사가 못내 섭섭한 점은 당시 전투에서 숨진 故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사망자 6명이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의 예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에는 '전사'와 '순직'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라 공무 중 사망이라는 기준에 따라 순직자 예우만 받았다. 2004년 관련 규정이 개정돼 군인연금법에 전사자 예우 조항이 생겼음에도 소급적용은 하지 못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를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격상하는 내용의 법안(제2연평해전 전투수행자에 대한 명예선양 및 보상에 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논의됐지만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윤 소령을 비롯한 전사자들이 전사자 예우를 받지 못해 서운한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에서 잊히는 것이 더 걱정이에요. 2002년 6월 29일은 월드컵 3·4위전이 열린 날이기도 했고 당시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도 않았죠."북한 선제공격으로 인한 지휘관 전사, 그리고 고속정 침몰. 승전이냐 패전이냐 논란이 있지만,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이 '승전'이라고 말한다."제2연평해전이 패전이라고 하는 시각도 있지만 전투에 참가한 입장에서는 절대 패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제 공격을 당하기는 했어도 같은 편대 358호의 보복 응징으로 적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357호가 전투에서 침몰한 것이 아니라 예인을 하던 중 침몰했기 때문이죠."2019년 전역이 예정된 이 원사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청수지원정 정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해상에 머물러 있는 바지선과 함정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정이다. 그는 전역 후 안보교육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제2연평해전을 통해 겪은 남북대치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다."2년 전 영화 '연평해전'이 상영되면서 국민들이 서서히 관심을 가져주시기 시작했어요. 사실 나라는 군인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지키는 거예요. 저마다 나름대로 안보의식을 갖고 국방에 대해 단합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국민으로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죠."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해영 원사는?▲ 1964년 8월 25일 출생▲ 1983년 12월 8일 해군 부사관 입대▲ 1984년 5월 26일 임관▲ 현계급 진급일 2008년 12월 1일-주요보직▲ 1984년 APD 전남함▲ 1991년 DDH 전주함▲ 2001년 FFK 전남함▲ 2002년 PKM 357정(제2 연평해전)▲ 2007년 PCC 성남함▲ 2017년 라-112호정 정장-수상경력▲ 1999년 참모총장 표창▲ 2002년 대통령 전투유공 표창이해영 원사가 27일 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 정박된 청수지원정에서 급수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이 원사는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 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호 갑판장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2017-06-27 김민재

[인터뷰… 공감]화상통화로 만난 김성중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장

증축공사 95% 진행 신축건물 유지·관리… 내년 30주년 행사준비가 목표최첨단 소음방지·소화시설에 50㎾ 태양광 발전 설비 다른 나라 부러움 사세종기지 주변은 온난화 '미미' 기온·강수량 등 상시 관측·자료 분석 중팀워크 위해 운동 프로그램인 'S리그'와 분야별 강의 '아카데미' 등 실시1988년 2월 17일. 대한민국 극지 진출의 '시발점'인 세종과학기지가 남극대륙 서북쪽 끝인 사우스쉐틀랜드 군도 킹조지섬에 문을 연 날이다. 이때부터 1년 단위로 대한민국 월동대가 세종과학기지로 파견돼 '미지의 세계' 남극과 만났고, 쉼 없는 탐험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내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30주년을 앞두고, 기지 연구동과 연구원 숙소를 대폭 증축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해 12월 세종기지에 파견돼 활동기간 절반가량이 지나고 있는 우리나라 월동대의 임무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이번 월동대 파견은 1988년 2월 이후로 꼭 30번째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남극 세종과학기지입니다. 잘 들리십니까."지난 16일 오전 10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극지종합상황실.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김성중(52)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장이 인사말을 건넸다.한반도와 세종기지는 시차가 딱 12시간이다. 남극 현지시간으로는 오후 10시, 인천에서 1만7천200㎞ 떨어진 지구의 남쪽 끝에 있는 김성중 월동대장과 극지연구소 화상통화시스템으로 연결됐다. 통화 연결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세종기지가 있는 서남극 최북단의 킹조지섬은 한반도와의 시차만큼이나 계절도 정반대다. 한반도의 겨울철에 세종기지는 가장 활동하기 좋은 여름철이고, 한반도에 푹푹 찌는 불볕더위가 찾아온 최근에는 세종기지가 한겨울이다. 세종기지의 겨울은 해가 뜨는 시간이 하루에 4~6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김성중 대장은 "남극의 겨울은 추운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고, 태풍 수준의 저기압으로 며칠씩 강풍이 불고 계속 폭설이 내린다"며 "지난주까진 블리자드(남극에서 일어나는 거세고 찬 바람을 동반한 눈보라 현상)로 고생했는데 다행히 오늘(인터뷰 당일)은 영하 5℃ 정도로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 말했다. 남극 생활은 혹독하기 그지없지만, 아름다운 순간들도 선사하곤 한다. 여름철에는 기지 주변에 펭귄, 물개, 고래 같은 다양한 동물들이 몰려다닌다. 기지 인근 바다인 마리아 소만에서 고래 떼가 물을 뿜으면서 빙하와 어울려 헤엄치는 평화로운 광경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도 남극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세종기지에는 김성중 대장을 포함해 현재 17명의 월동대원이 머물고 있다. 남극의 여름철인 올 초까지 하계연구대와 기지 증축공사팀이 기지에 있었지만, 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접어들자 지난 4월 철수했다. 17명뿐인 월동대원이 하루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야 한다. 사실상 '얼음감옥'에 갇힌 셈이다. 김성중 월동대장은 극지연구소 극지기후과학연구부 책임연구원으로 기후변화를 연구해온 전문가다. 하계연구대 소속으로 남극의 여름철 한 달 정도 세종기지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1년가량을 남극에 머무는 월동대는 처음이다. 그는 "현재 95% 진행된 세종기지 증축공사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신축건물을 유지·관리하고, 내년 세종기지 3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게 이번 월동대의 가장 큰 목표"라며 "세종기지 증축은 다음 여름철인 올해 말쯤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1988년 준공한 세종기지는 그동안의 유지·보수에도 불구하고 부식이 극심해 건물 내구성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소음과 진동에도 취약하다고 한다. 정부는 세종기지 하계연구동 2곳과 하계숙소동 2곳을 철거하고 2개의 건물로 통합하는 기지 증축을 결정해 지난해 10월 착공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세종기지 연구공간은 기존 대비 약 80% 넓어질 전망이다. 김성중 대장은 "새 건물은 외벽 단열 방식, 방과 방 사이 소음방지시설, 소화시설이 최첨단이고, 특히 새로 도입하는 50㎾ 규모 태양광 발전 설비는 인근 다른 나라 과학기지에 없다"며 "인근 다른 나라 기지 월동대원들이 최근 견학했는데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고 설명했다. 기지 증축공사로 바쁜 와중에도 세종기지 제30차 월동대는 지질·생물·고층대기(우주)·대기·기상·해양분야에서 다양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리아 소만의 빙벽이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 빙벽이 얼마나 빨리 녹아 무너지는지 관측하고 있다. 극지는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를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빙벽 또는 빙하의 후퇴를 파악하는 게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연구다.김성중 대장은 "남극지역은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기존 논문에서 많이 밝히고 있는데, 세종기지 주변은 기온이 크게 상승하지 않고 있다"며 "원인 파악을 위해 대기의 기온, 풍속, 풍향, 기압, 강수량 등을 상시 관측하고, 관측자료를 분석 중"이라고 했다. 김성중 월동대장은 대원 간 팀워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세종기지 월동대원 17명은 분야별 핵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최정예 전문가들이다. 각각의 대원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맡아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팀워크가 무너지거나 한 명이라도 건강이 좋지 않아 임무 수행이 안 되면, 나머지 대원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월동대의 화합을 다지고, 대원들의 건강을 꼼꼼히 챙기는 것은 월동대장의 주요 임무이기도 하다. 김 대장은 인터뷰 내내 대원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성중 대장은 이른바 'S리그'(세종리그)라는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어 족구, 배드민턴, 윷놀이, 장기, 컴퓨터게임 등 5종목을 두고 매주 화요일 오후에 팀별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연말에 최종 우승팀을 정한다고 해서 '리그'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게 김성중 대장 얘기다. 해가 있는 낮에는 대원끼리 주변 트레킹이나 눈썰매를 즐긴다고 한다. 대원 17명 모두가 각 분야별 전문가이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각자의 분야를 강의하는 '세종아카데미'도 열고 있다. 주변 기지 대원과의 소통을 위해 영어가 서투른 대원에게는 김성중 대장이 직접 일주일에 2번씩 영어강의도 한다. 김성중 대장은 "이달 21일에는 절기상 남극에서 가장 겨울이 긴 날이라는 '남극 동지(Midwinter's Day)' 행사가 인근 칠레 공군기지 주최로 열리는데, 주변 기지 대원들이 자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며 친목을 다지는 연중 가장 큰 행사"라며 "우리 대원들도 한복을 입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 중"이라고 말했다. 세종기지 대원들의 활동과 일상은 대원들이 매달 직접 제작해 극지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웹진 '눈나라 얼음나라'에서 볼 수 있다.최근의 지구 온난화는 45억년에 달하는 지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의 기후변화 현상이라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이 같은 숙제를 인류가 공동으로 풀어가기 위해 우리나라도 극지연구에 동참하고 있다는 김성중 대장의 자부심이 컸다. 김성중 대장은 "극지연구소로 복귀하면 남극에서 직접 관찰한 기후변화 정보를 활용해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할 계획"이라며 "현재 극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후변화가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김성중 대장은?▲1965년 충남 계룡시 출생▲충남대학교 해양학과 졸업▲미국 텍사스A&M대학교 해양물리학 석사▲미국 텍사스A&M대학교 해양물리학 박사▲2002년 캐나다 기후모형연구소 박사후 연구원▲2003년 미국 듀크대학교 전임연구원▲2008년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2014년 극지연구소 극지기후변화 연구부장▲2016년~현재 남극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장지난 16일 오전 10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극지종합상황실에서 남극 현지에 파견된 김성중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장과 경인일보 기자가 화상통화 시스템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극지연구소 제공남극 세종과학기지 전경. 오른쪽 대형 회색건물이 증축공사 중인 신축건물, 빨간색 건물들은 기존 건물. /세종과학기지 제공

2017-06-20 박경호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극지연구소 공채 전문가 17명… '연구반·지원반·유지반' 나눠 운영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는 극지연구소가 공채를 통해 선발한 분야별 전문가 17명으로 구성됐다. 몇 차례 월동대 경험이 있는 대원도 있고, 남극에 처음 파견된 대원도 있다. 세종기지 월동대장은 주변 기지 간 국제협력업무를 맡으면서 기지 운영을 총괄한다. 기지 총무는 물자 관리와 하계 연구원 지원 등 기지 운영 실무 전반을 책임지는 '살림꾼' 역할이다. 실무팀은 '연구반', '지원반', '유지반'으로 나뉜다. 연구반에는 분야별로 지질연구원, 생물연구원, 고층대기연구원, 대기연구원, 해양연구원, 기상대원이 소속돼 있다. 기상대원의 경우 기상청에서 파견된다. 지원반에는 극지연구소나 외부기지와의 유·무선 통신기기를 관리하는 통신대원, 연구 등 해상활동을 지원하는 해상안전대원, 식사를 준비하는 조리대원, 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대원이 있다. 군 특수작전 경력자여야 하는 해상안전대원은 국방부 장관 추천이 있어야 하고, 의료대원은 극지연구소와 협약을 맺은 가천대 길병원에서 파견한다.유지반은 기지의 전반적인 시설을 유지·관리하고 있다. 모두 해당 분야의 관련 자격증과 상당한 경력이 있는 전문가들로 기계설비대원 2명, 중장비대원, 전기대원, 발전담당대원이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남극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원. (윗줄 왼쪽부터) 서동경 의료대원, 이현수 중장비대원, 정상준 기계설비대원, 박성윤 조리대원, 이정의 기계설비대원, 김성중 대장, 백승민 총무, 윤정구 발전담당대원, 최동수 기계설비대원, 이준휘 기상대원. (아랫줄 왼쪽부터) 한동원 해양연구원, 김찬양 생물연구원, 이원석 고층대기연구원, 성대경 대기연구원, 이재일 지질연구원, 우종현 해상안전대원, 김상욱 통신대원. /세종과학기지 제공

2017-06-20 박경호

[인터뷰… 공감]'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

보험 영업으로 제2의 인생 시작했지만빚보증에 전재산 날려 방황하기도재소자와 만남이 터닝포인트로도전 메시지 전하며 치유의 힘 얻어"가난했지만, 나의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어둠의 밤하늘 등불이 나를 밝혔다. 진심과 겸손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1984년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 성장했고, 나머지 인생은 함께 더불어 사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밝혔다.LA올림픽에서 효자종목인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한 김원기 선수는 전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인기 스타로 급부상했다. 무엇보다 금메달이 꾸준한 노력과 굵은 땀방울이 이루어낸 값진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 후일담은 국민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며 인기를 누렸다. 김 회장은 "시합하다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한 게임 한 게임 이겨나간 것이 기적같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성과를 가져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직후인 1985년 1월 삼성생명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사회를 제대로 알고 배우자는 생각에서 운동팀을 떠나 필드경험에 뛰어들었던 것. 보험모집·앙케트조사 등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어쩌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경우에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려고 한다"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실제 지난 2000년 10월 삼성생명 보험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말단 보험설계일에서 총무과 대리·영업소장·본부 업무과장·교육담당 차장 등을 거칠 정도로 능력발휘를 했다.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운동밖에 몰랐던 김 회장은 사회적응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까운 사람의 빚보증 선 게 잘 못되는 바람에 전재산을 날린 것은 물론 한동안 계속 그 빚을 갚아야 했고, 막상 갈 데가 없어서 선배가 하는 세차장 등에서 수개월동안 일을 하기도 했다.하지만 김 회장은 현재 인생의 금메달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지난 2002년부터 현재까지 교도소의 재소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것.김 회장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다고 한다. 은퇴 후 주변의 도움으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이어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허전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찾은 게 재소자들과의 만남이었다. 김회장은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오랫동안 이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해왔다. 현재 '도전, 나는 나를 넘어섰다'란 주제로, 영등포·안양·인천·춘천 등 한해 수십여차례의 전국 교도소 순회 강연을 하면서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국가대표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과 자신만의 성공철학을 소개하며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한다.김 회장은 "그들에게 잘난체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과 부족한 체력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야기를 풀어주면서 재소자들의 마음을 연다"며 " 비록 가난했지만, 나의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는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실상 무료 강연을 펼치자 사람들은 제가 하는 걸 '봉사'라고 한다"며 "하지만 교도소 강연을 돌면서 내가 얻는 것이 더 많다. 그들이 손편지를 나에게 전달할 때 그 치유의 힘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밝혔다.자식이 없는 김 회장은 지난 1998년부터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는 모교 후배들을 마음으로 품고 부모역할을 하고 있다. 레슬링 선수 7명, 여자 태권도선수 2명 등 총 9명에 이른다.김 회장은 "중2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당시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며 "우리 후배들을 위해 무슨 역할을 할수 있을까 고민하다 편모·편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의 부모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자식들에게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인생계획과 인생진로 등을 함께 고민한다. 한달에 30만원씩의 지원금도 주고, 연말에는 자식들을 다불러 안산 평화의집, 을지로 거리의 천사, 음평 천사원, 태릉선수촌 등을 3박4일동안 돌며 봉사활동을 하면서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한다.10여명의 자식을 보호하는 것은 김 회장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김 대표는 "초기에는 정말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면서도 "지금은 보람을 느낀다. 최근에 첫째 아들과 셌째아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 그 무엇보다 힘든시기를 거쳐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김 회장의 지원 덕분인지 함평중학교 레슬링부가 최근 열린 제4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레슬링 대회에서 남자부문 금·은·동메달을 모두 휩쓸면서 레슬링 본고장 함평의 명예를 다시 한번 떨쳤다.김 회장은 꿈이 있다. 미래세대를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그는 자신의 경험이 쓰라렸기에 후배들은 자신과 같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김 회장은 "운동선수는 사회를 모른다. 사회를 살아 가는 전반적 지식이나 방법이 부족한 게 사실. 선수들이 언젠가는 운동을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적응 프로그램, 컨설팅 등이 없어서 답답하다"며 "그것도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 회장은 마지막으로 "길이 어두운 사람들을 위해 등불을 비춘다는 마음을 갖고 보니 제앞이 환해지는 이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글/이경진기자 lkj@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김원기 회장은?-경력▲1962년 전라남도 함평출생▲함평농업고등학교, 전남대학교 졸업▲전남대교육대학원 운동생리 석사, 경희대체육대학원 체육복지정책 박사▲삼성생명 교육차장▲함평군 레슬링협회장▲엔에스하이텍 대표이사▲꿈메달 스포츠봉사단 회장-수상▲1983 터키야사도구 국제대회 은메달(터키)▲1984 콩코드국제대회 금메달(미국)▲1984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미국)▲1985 슈퍼챔피언대회 은메달(일본)▲1984 체육훈장(청룡장)수상▲1985 대한민국 최고상 수상▲1989 성곡문화재단 체육대상 수상▲2004 선행칭찬본부 칭찬상 수상▲2011 미래지식경영원 최우수 기업 선정▲2011 창업진흥원 혁신적 기업가상 수상▲2012 재능기부 인증업체 선정▲2013 서울지방조달청 표창장▲2013 대한민국예술·문화인 대상(체육부문)▲2014 전남도지사 표창(기업봉사)▲2015 한국창조경영인협회 최우수 신창조인상 수상▲2015 신지식인 인증(문화예술부문)후배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은 "미래세대를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1984년 LA올림픽이 끝난 후 귀국한 선수단이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당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원기 선수와 어머니의 모습. /김원기 회장 제공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장과 함평중·함평골프고 레슬링팀 선수들이 함평군 체육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원기 회장 제공

2017-06-13 이경진

[인터뷰… 공감]고려불화 그리는 월제(月齊) 혜담스님

전쟁 많던 시기 참회위해 집에 부처님 모신 듯… 조선초 불교 박해로 자취 감춰일본이 강점기때 가져다가 국보급 보물로 지정 현존 200여점 중 국내 20여점뿐아이러니하게 일본인 도움으로 300여점 재현 한국 문화재로 알리려 수십년 노력정교하고 화려해 고려 전후에 없던 미술사조… 복원 작품이라도 잘 보존했으면하얀 빛의 투명한 사라가 부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사라에 정교하게 박힌 금빛 문양이 화려한 빛을 낸다. 가늘게 뜬 긴 눈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그 생경한 모습이 낯설다. 그런데 묘하게 자꾸 시선을 잡아당긴다. 이토록 아름다운 부처를 본 적 있을까.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고려불화 중 하나인 '수월관음상'을 만났다. 그리고 월제 혜담스님을 만났다. 혜담스님은 이곳의 수월관음상을 그린 작가다. 이곳의 수월 관음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수월관음상을 혜담스님이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불화가 채 20여 점도 남아있지 않은 이 척박한 땅에서 혜담스님은 300여 점이 넘는 고려불화를 재현하는 작업을 40여년간 이어왔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938년 즈음부터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물물교환이 성행하면서 불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됐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 불화는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이 즐기는 귀족 문화였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이나 화공, 화사를 모셔와 원하는 대로 불화를 그리게 할 만큼 성행했다. 조선 초기까지 500여년 간 고려불화가 이어졌다."당시 문헌을 토대로 보면, 워낙 내란·외침이 많아 늘 전쟁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살상이 이루어지다 보니 그 죄를 참회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집 안에 부처님을 그림으로 모셔두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 수요는 어마어마 했을 거라 추정하구요."조선 초 세종 때 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불교가 말살되다시피 박해를 받았고 고려불화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절에서조차 불화를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민가의 불화들은 오죽했겠어요. 고려불화 자체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던 겁니다." 스님은 그 이후의 역사를 몹시 안타까워 했다.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고려불화를 일본으로 많이 가져갔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은 불교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문화재로서 지닌 가치를 알아차린 거죠. 그때 당시 일본 문화위원회 같은 정부조직에서 이를 가져다 국보급 보물로 지정한 게 벌써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현존하는 고려불화는 200여 점 정도다. 이 중 180여 점을 일본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려불화는 그나마도 벽화로 그려져 있거나 경서에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젊은 시절 혜담스님은 수월관음상을 책에서 접했다. 그 모습에 매료돼 고려불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고려불화 입장에선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림에 소질이 있는 스님의 눈에 띈 셈이다. "수월관음상을 보고 큰 매력을 느꼈는데, 관세음보살을 보고는 '아, 내가 불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리려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료도 거의 없고 절에는 탱화의 유형만 보존되고 있을 뿐 고려불화에 대해서는 전무했어요." 막막하던 그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일본 한 박물관의 부관장이던 오야마 노리오 씨가 자료를 보내주었다. "오야마 노리오씨가 수십년간 고려불화의 사진이나 재현하는 데 필요한 문헌 등 자료를 보내주었어요. 그 사람은 고려불화가 갖는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여겨 저를 도와 불화가 현재에도 재탄생되기를 바란 거죠. "고려불화의 특징은 매우 정교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옷 안으로 비치는 부처의 팔뚝과 몸은 고려 불화에서만 볼수 있는 섬세한 표현이다. 순금가루를 안료 삼아 문양을 그려넣었다. 서양 르네상스 시대보다 300여년을 앞서 시작됐지만 훨씬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졌다는 평을 받는다. "서양 종교화들은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되는데, 고려불화는 비단에 석채(천연안료)로 제작됐고 문양들이 매우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돼 있어요.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왕족, 귀족들이 출가를 했을 만큼 불교문화가 융성했기 때문에 고려불화도 화려하게 그려지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고려불화의 진가는 해외 미술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다. 스님은 2014년을 시작으로 3년 연속,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프랑스 국립살롱전에 초청을 받았고 해마다 특별상을 수상했다. "고려불화는 고려 전후에는 전혀 없었던 미술사조라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어떤 시기에도, 어떤 문화에도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불화는 없었어요. 해외에서도 고려불화가 가진 희소성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걸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게 참 안타깝죠."고려불화를 다시 우리 곁에 돌려놓기 위해 노력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편견이 가장 그를 힘들게 했다. "해외에 제가 재현한 고려불화를 내놓으면 아주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고려불화 자체가 일본 문화재라고 인식하거든요. 그동안 일본에서 자국의 문화재로 보존하면서 해외에도 열심히 알려왔고. 그런데 제가 나타나 한 30년 동안 미술계 뿐 아니라 국제학술대회에 나가 고려불화가 우리 문화재임을 알렸어요. 일본인들이 절 참 싫어합니다. 그래도 이제야 우리 것이라 인식하는 시선들이 좀 생겼어요. 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멀었죠."국내는 고려불화를 '문화재'보다 '종교화'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고려불화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입니다. 제가 고려불화를 알리기 위해 30년을 떠들었는데도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어쩌면 좋을까 싶습니다. 세월이 너무 흘러버려서 이제 우리 것이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도 못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그 맥을 잇기 위해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 해서 젊은 사람들이 밥벌이할 수 있을까요. 작업도 일반 미술과 다르게 매우 난해하구요. 이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헤아릴 수 없어요. 젊은 세대에게 내 길을 걸어가라고 권하며 그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은 그저 복원한 작품이라도 보존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고려불화를 그릴 수 있게 도와준 오야마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걸 다 뺏긴 이 상황 속에서 스님 혼자 어떻게든 불화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한국 정부가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스님이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있다. 한국사람들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다' 그 말이 참 아프게 다가왔지만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으니 맞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우리 것을 빼앗아 간 이들에게 듣는 쓴소리에 고개를 숙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린 게 아닌가.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혜담스님은?▲ 1980년~ 고려불화 재현▲ 1985년~ 대한불교보문종 계태사 주지▲ 2005년 12월 대통령 표창장 수상▲ 2009년 3월 수원시 공로상패 수상▲ 2009년~ 사단법인 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 이사장▲ 2009년 9월 조계종 중앙신도회(문화재환수위원회) 회장 감사장 수상▲ 2014년 11월 스리랑카 상카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취득▲ 2014~2016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국립 살롱전 초청, 특별상 수상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혜담스님이 현재 진행 중인 수월관음상을 그리고 있다.맨 위에서부터 수월관음상, 오백나한상, 관경16관변상, 열반상.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 제공

2017-06-06 공지영

[인터뷰… 공감]물범 생태연구활동 전문가 DMZ자연사랑회 진종구 서정대 교수

■물범에 관심을 둔 이유영유권 분쟁 환경자료 중요성 확인독도보존 노력 국제사회 전파 목적일제에 의한 '강치 절멸' 사실 접해뼈저린 교훈 잊지않기 위해서 연구■백령도 점박이 물범에 대해11월 전후 북상해 새끼 낳고 남하남북 해역 자유로이 헤엄쳐 다녀빙하기 무렵 옛 황하유역에 격리서해서 서식한 향상 진화 개체군■물범·어민 '불화' 공존 방법 없나미역채취 어민들 서식처 침범 심각어망 훼손 등 어민엔 '불편한 손님'인공어초로 물고기 생존환경 보장바다에 물범 휴식공간 조성도 필요■DMZ자연사랑회 소개·향후 계획학생과 함께 생태관찰·보호 캠페인경기도와 협력 민간활동 전개 계획한강청과 협조 강화 모니터링 확대중고생 이해 돕기위해 책자 발간도"점박이 물범은 남북한 해역을 자유로이 헤엄쳐 다닙니다. 그래서 남북한 공존과 화해를 상징하는 동물이라 할 수 있죠. 남북 공동연구가 이뤄지면 더욱 좋고요."진종구 교수는 현재 양주 서정대학교에서 아동청소년보육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진 교수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독도와 비무장지대(DMZ)의 생태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순수민간단체(NGO)인 DMZ자연사랑회를 만든 것도 2005년 이 무렵이다. DMZ자연사랑회는 처음엔 DMZ 주변 생태환경을 카메라에 담아 전시하는 활동으로 시작했다. 서해 NLL(북방한계선) 생태연구에 뛰어든 것은 올해 2월부터다. 이들의 연구목적에 공감한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점박이 물범과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 진 교수가 이끄는 DMZ자연사랑회는 백령도에서 어민들의 미역채취 활동으로 물범 서식처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해 상 NLL 생태보호의 시급성을 알리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두고만 보다가는 조만간 멸종위기 야생동물(2급)인 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서 아예 모습을 감출지 모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사회적 관심을 유도해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 진 교수를 최근 서정대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물범 생태연구활동과 앞으로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점박이 물범에 관심을 둔 동기는 무엇입니까?원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 관련 법을 연구하다 우연히 2002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시파단 섬 영유권 분쟁에 대해 '환경자료를 지속해서 축적해 온 말레이시아가 영유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한 판례를 찾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세계 최초의 독도 다이옥신 연구를 진행했고 결코 일본이 확보할 수 없는 환경자료를 축적했습니다. 이런 연구는 우리 국민이 독도 환경보존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국제사회에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던 중 과거 일제에 의해 독도 강치(큰 바다사자의 일종)가 절멸하게 된 사실을 접하게 됐고 이런 뼈저린 교훈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점박이 물범을 연구하게 됐습니다.-점박이 물범은 어떤 동물입니까?점박이 물범은 원래 육지에서 살았으나 천적 등을 피해 안전한 바다로 이주한 생물입니다. 오랜 세월 바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발과 뒷발이 지느러미처럼 퇴화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폐(허파)로 숨을 쉬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해양 포유류기 때문에 통상 30분 정도 잠수하면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최대 1시간까지 잠수할 수 있습니다. 또 코와 입 주위에 길게 자란 수염은 민감한 신경과 연결돼 있어 미세한 물의 파장도 감지해 물고기 등을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털갈이가 끝나는 11월을 전후해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중국 보하이만 랴오둥 반도 등지로 이동, 차디찬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다시 백령도 근해로 남하하는 회유성 특징이 있습니다. 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북극해를 중심으로 서식하는 점박이 물범 중 최남단에 서식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원래 점박이 물범은 북위 45도 이북 북극권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는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합니다.-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 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북태평양 개체군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던 점박이 물범이 빙하기 무렵 바다경계가 변화되면서 옛 황하 유역에 격리돼 서해를 중심으로 서식해 왔다고 추정됩니다. 격리된 개체군은 보하이만 북쪽 육지에 가로막힌 채 더 북상하지 못하고 그나마 제일 추운 보하이만의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먹이가 풍부한 백령도 근해로 내려와 먹이활동을 해 북태평양 개체군과는 다른 독특한 개체군으로 향상진화를 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이 한때 하늬해변과 콩돌해안 등에서도 발견됐다는데 지금은 왜 물범 바위로 휴식처를 옮겼나요?1940년대 8천여 마리에 달하던 점박이 물범이 멸종위기에 이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간섭입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많은 피난민이 백령도로 이주해 주민 숫자가 늘었고 이는 해안가 점박이 물범들에는 상당한 위협요인이 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물범을 물개로 잘못 인식해 해구신을 확보하기 위해 마구 포획했습니다. 또 해안가에 출몰하는 점박이 물범을 무장공비로 오인, 사격을 가해 점박이 물범은 사람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결국, 점박이 물범은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해안가를 벗어나 인간의 간섭이 덜한 바다 한가운데 물범 바위와 연봉, 두무진 바위 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물범 바위에 상륙하는 일이 잦아지면 물범 바위도 더는 안전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값이 나가는 '지네발 미역'을 따기 위해 많은 어민이 물범 바위를 침범하면서 점박이 물범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점박이 물범과 어민이 공존하는 방법은 없습니까?사실 어민 입장에서는 점박이 물범이 썩 달가운 이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망과 어구에 걸려든 물고기를 훔쳐 먹고 심지어 어구까지 훼손하니까요. 이러한 불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를 해소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서해 어족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첫 번째 방안으로는 인공어초(人工魚礎)를 설치해 물고기 생존환경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어획량이 늘어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중국 저인망 쌍끌이 어선의 출몰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 해경 당국의 단속활동도 필요하지만, 중국 정부와 협상을 통해 원천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물범 바위나 연봉과 같은 점박이 물범의 휴식공간을 바다에 조성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DMZ자연사랑회는 어떤 단체입니까?DMZ자연사랑회는 2005년 설립해 경기도에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처음에는 DMZ 주변 풍경을 촬영해 파주시민의 날에 전시회를 열어오다 올해 2월부터 본부를 서정대학교 안으로 옮겨 학생들과 더불어 DMZ 생태보호 캠페인과 생태관찰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전문가들과 함께 DMZ와 NLL의 자연생태를 연구하고 있고 연구활동에 드는 경비는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DMZ자연사랑회는 경기도 DMZ정책관실과 협력해 DMZ와 관련된 각종 민간활동을 벌일 계획입니다.-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물범 보호활동을 벌일 예정인지?지난 2011년부터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과 함께 백령도 점박이 물범 모니터링을 매년 2회 이상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범 보호활동은 순수 민간차원의 진행도 좋지만, 정부 당국과 공동으로 진행하면 정부의 즉각적인 대책이 마련되기 때문에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한강유역환경청과의 협조를 강화해 백령도 점박이 물범의 모니터링을 확대하고 가능하다면 물범에 위치추적기(GPS)를 부착, 회유 경로를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또한, 민간차원에서 점박이 물범 보호를 위한 캠페인을 계속 전개하기 위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점박이 물범에 대한 책자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우리 중고교생들이 점박이 물범의 생태를 이해하고 공존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최재훈·김민재기자 cjh@kyeongin.com 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진종구 교수는?▲ 전북 김제 출생▲ 고려대 정치학 석사▲ 부경대 환경공학박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으로 27년간 활동▲ 현 서정대학교 교수▲ DMZ자연사랑회 회장DMZ자연사랑회 회장 진종구 교수는 멸종위기 동물인 점박이 물범을 보호하려면 서해 북방한계선(NLL) 백령도에서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생태환경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진 교수가 점박이 물범의 활동을 연구하며 지난 2014년 발간한 모니터링 보고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멸종위기에 놓인 점박이물범의 대표 서식지인 백령도 '물범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물범들. /경인일보 DB

2017-05-30 최재훈·김민재

[인터뷰… 공감]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50년 역사와 함께한 김세레나 수녀

응급실·수술을 앞둔 환자들그들의 두려움 위로하며'괜찮다' 다독여주는 게 간호의 시작환자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고마움 전해그럴 때 힘 닿는 데까지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여세레나 수녀는 '수술실 기도하는 수녀'로 불린다백발이 성성한 수녀와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 손으로 전해지는 훈훈한 온기가 온 몸에 은근하게 퍼졌다. 백발의 수녀는 성 빈센트 병원이 이 땅에 뿌리 내릴 때부터 함께 했다. 그 세월은 온통 환자를 간호하는 데 헌신했다. 아마도 그의 손이 따뜻했던 이유는 세월이 전해 준 '사랑' 때문이리라.올해는 성빈센트 병원이 문을 연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22일 수원 지동에 위치한 병원에서 김세레나(75·본명 김정선)수녀를 만났다. 백발의 수녀는 그 오래된 세월의 고락을 가장 잘 아는 이다. 세레나 수녀는 1963년 성빈센트 병원 설립을 구상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는 사회가 너무 열악했어요.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너나할 것 없이 가난에 허덕이던 때였으니까. 병자들은 넘쳐나는데, 의료시설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으니까 당시 수원교구에서는 작은 병원이라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당시는 한창 전후 복구가 이루어질 때였다. 수도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조차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을 만큼 모두가 헐벗은 시절이었다. 당시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주교는 독일 파다본에 있는 성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선교활동을 위해 선교지역을 물색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독일 수녀회를 설득했고, 병원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수녀 지원자 9명을 독일 모원으로 파견해 수녀로 양성했다. 그것이 성 빈센트 병원의 초석이 된 성빈센트 수녀원의 출발이었다.1965년 본격적인 병원 설립을 위해 아델하이드 수녀를 비롯해 3명의 수녀가 한국에 파견됐다. 세레나 수녀는 이 3명의 수녀과 함께 병원 설립을 도왔다. 그는 "원래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병원을 짓기 위해 온 독일 수녀들을 돕기 위해 간호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독일 수녀들은 매우 원칙대로 일하시는 분들이었는데, 병원 설립을 허가받으려고 당시 관계기관을 한달 동안 찾아가서 어렵게 병원을 세웠어요. 이 병원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원칙대로 세워진 병원 입니다"라며 웃었다.1967년 6월 3일 개원한 성 빈센트 병원은 가톨릭의과대학 제5부속병원으로 195병상을 갖춘,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병원이었다. 경기남부지역 최초의 대학병원이기에 전국 각지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빈자를 위해 설립된 만큼 성빈센트 병원은 1967년부터 20병상을 책임 무료병동으로 정해 '자선진료소'를 운영했다. "수원 전역이 허허벌판일 때지만 특히 연무동, 화서동 같은 곳은 극빈층들이 많았어요. 이 곳은 홍수라도 나면 곧장 폐허가 돼 천막을 치고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죠.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이 병원에 와서 진료를 받았고 이게 소문이 나 나중엔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어요. 알코올중독증, 페니실린 쇼크 환자들이 특히 많이 왔는데, 여기서 치료를 받고 나갈 땐 혹시 밥이라도 굶을까 싶어 식구가 몇인지, 어디 사는지 등 형편을 물어보고 독일에서 들여온 물품을 챙겨주곤 했죠. 밤에는 수녀들과 함께 아예 보따리를 싸고 나가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구호물품을 나누어 주었어요." 당시는 병원 앞에 아기를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병원이라고 소문이 나다보니 병원 앞에 수시로 아기들이 버려져 있었어요. 당시 원장 수녀가 이 아이들을 전부 거둬서 정성껏 돌봐주었어요. 가난해서 벌어진 일인데, 마음이 너무 아팠죠."세레나 수녀가 간호과장으로 일하던 1978년부터 1982년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매일같이 시위를 하고 거리에는 최루탄 연기가 난무하던 때였다. "서울 뿐만 아니라 수원에서도 거의 매일 대학생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어요. 아주대 대학생들이 시위하다 경찰이 던진 최루탄을 맞고 병원에 실려오는 일이 수두룩했죠. 경찰 몰래 병상에 다친 학생들을 눕혀 치료해주는 일도 많았어요. 노동운동도 한창일 때라 간호사들이 노동쟁의에 나서기도 했어요. 병원에 고립돼 시위를 이어가던 간호사들에게 당시 교학감을 맡고 있던 수녀가 무조건 먹고 마실것을 들여 보내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간호사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어요. 다행히 며칠 지나지 않아 병원과 간호사들 간 요구사항이 합의돼 시위도 끝이 났는데, 그때도 교학감 수녀는 돌아온 간호사들을 무조건 안아주라고 하셨어요. 그때 많이 배웠어요. 사랑으로 감싸안는 일을." 세레나 수녀의 세월은 병원의 역사이기도 하고 우리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온전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기도 하다. "1995년에 병실마다 흩어져 있는 암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같이 기도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기초간호를 시작했어요. 성빈센트 병원의 '호스피스' 진료의 시초라고 볼 수 있어요. 당시만 해도 호스피스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할때 였어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 하는 암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숱하게 봐왔어요. 특히 보호자들의 경우 환자 사후에 2차적 고통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호스피스는 수녀 뿐 아니라 의사, 간호사, 보호자, 환자 모두가 한 팀이 돼 환자가 삶의 의미를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돕는 거예요." 어쩌면 삶의 끝 자락일 지 모르는 순간, 주어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도록 돕는 일은 평생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수녀가 반드시 해야 했던 숙명이었을 것이다. "우리 병원이 호스피스 진료를 하는 건 마치 '신념'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꼭 해야만 하는 운명이죠."일흔을 훌쩍 넘어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 아직도 세레나 수녀는 응급실과 수술 대기실에서 환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크게 다쳐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온 아이들이 너무 놀라서 겁에 질려 있는 걸 보았어요. 아이를 안아주며 '괜찮다' 다독였어요. 이게 간호의 시작입니다.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의 두려움을 안아주는 것. 그 모습이 안타까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인데, 환자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꼭 고마움을 말합니다. 그럴 때 더 용기가 나고 힘 닿는 데까지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수술실 기도하는 수녀'라는 별명도 붙었다. 50년의 긴 세월을 이야기 하는 세레나 수녀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그 긴 세월을 거쳐 이제 빈센트 병원은 암 병원을 개원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올해는 성빈센트 성인 탄생 400주기이면서 빈자들을 위해 이 땅에 뿌리내린 우리 병원이 50년이 되는 참 뜻깊은 해입니다.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랑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잊지 마세요."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성빈센트 병원 주요 연혁-1965년 3월 성 빈센트 병원 기공식-1967년 6월 가톨릭대학교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1967년 11월 자선진료 개시-1999년 6월 신축된 본관(현 성 빈센트 병원)으로 이전 -2009년 1월 경기도 제1호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 지정-2012년 12월 '사랑으로 하나되는 세계 속의 성빈센트' 새 비전 선포-2015년 6월 암병원 건립 및 본관 증축 기공-2017년 1월 개원 50주년 슬로건 발표성빈센트 병원이 문을 연 지 50년 동안 환자들을 위해 평생 사랑을 실천한 백발의 김세레나 수녀가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1965년 3월 성빈센트병원 기공식1965년 척박한 의료의 불모지 수원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자비의 씨앗이 뿌려졌다.1967년 6월 가톨릭대학교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총 5만3천110.7㎡ 부지에 연건평 1만5천800㎡,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8개 임상과, 195병상의 현대식 병원으로 개원했다.2009년 경기도 제1호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 지정2008년 보건복지부 말기암환자 호스피스 지원 상위기관으로 선정된 것에 이어 수준 높은 완화의료서비스를 펼치는 기관으로 인정받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으로 지정됐다.2013년 12월 다빈치Si 로봇수술 도입수원지역 최초로 최신형 다빈치Si 로봇수술 시스템을 도입해 첨단의료를 향해 한발자국 더 나아갔다.2017년 암병원 개원2017년 개원하는 암병원을 통해 환우의 육체적, 정신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까지 돌보는 '빈센트 케어 시스템'을 실현하고, 실력 있는 지역병원, 안전하고 믿음을 주는 병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2017-05-23 공지영

[인터뷰… 공감]이은구 前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1990~1992·1996~1998)

인천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다. 1962년 인천 부평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인 '새나라자동차'가 들어섰다. 비록 일본 자동차를 반제품 상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이전까지 미군 군용차 폐품을 활용한 수공업 형태의 '재생자동차'뿐인 국내 자동차산업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은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다.1966년 '신진자동차'가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을 넘겨받아 자동차 생산을 재개했다. 이후 1976년 '새한자동차', 1983년 '대우자동차'로 바뀌면서 인천 자동차산업의 계보가 이어졌다. 대우그룹 부도사태 뒤인 2002년에는 미국기업인 제너럴모터스(GM)가 대우자동차를 인수했다. 지금의 '한국지엠'이다. 대우자동차 시절 두 차례의 노동조합 위원장(1990~1992년·1996~1998년)을 지낸 이은구(56) 씨는 올해 3월 한국지엠에서 희망퇴직했다.1986년 대우자동차 조립1부에 입사한 지 31년 만이다. 이은구 씨는 노조위원장으로서 회사 측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한편으론 대우자동차가 누린 영광의 시간과 좌절의 순간을 함께 겪었다. 한국지엠의 시대도 그 출발부터 경험했다. 최근 이은구 씨를 만나 대우자동차부터 한국지엠까지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보고 느낀 소회를 들었다. 인천 자동차산업 역사의 단면을 현장 노동자의 시각으로 살피자는 차원이다. 충남 아산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은구 씨는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인천으로 왔다. 아버지는 옛 북구 서운동(현 계양구)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고등학교 등록금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학교만 마치고 17세부터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했다. 일하면서 정비 기술을 배우고, 중장비 자격증도 땄다. 군 제대 이후인 1986년 5월 대우자동차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제조업에 몸담았다. "조립1부에서 시트, 헤드램프 같은 소모품을 조립하는 의장라인에 투입돼 '르망'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입사할 당시는 대우자동차가 GM과 지분을 나눠 갖는 합작회사였어요. 르망은 수출을 위해 GM이 개발하고, 대우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생산했습니다."당시 대우자동차는 합작 관계에 있는 GM과 '월드카(World Car) 전략'이라 불린 국제적으로 분업화된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월드카란 현지 조건에 맞게 설립한 여러 나라의 공장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생산한 똑같은 차였다. 르망은 GM이 개발한 소형차 '카데트'의 국내 판매명이었다. 대우자동차는 르망을 계기로 1987년 3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했고, 내수 중심에서 벗어나 대량 수출을 이뤄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에스페로', '티코', '다마스' 같은 새로운 차량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1992년 대우자동차는 GM이 가진 지분을 모두 인수해 합작관계를 청산하며 홀로서기에 나섰다. 대우자동차는 승승장구하며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회사 내부적으로는 처우문제를 둘러싼 노사갈등이 심했다. 이은구 씨는 1987년 대우차 부평공장 파업 과정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진압을 피해 부평공장 본관 2층에서 추락해 팔다리 여러 군데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1년 동안 투병한 끝에야 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그땐 대기업이라고 해도 중소기업과 임금격차가 크지 않았고, 노동여건도 나빴다"며 "대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던 시기였다"고 했다. 이은구 씨는 1990년 11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제11대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에 선출됐다. 집행부나 대의원을 거치지 않고 평조합원에서 위원장이 된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 "열심히 싸우고 투병 생활하면서 현장에서 굳건하게 일했던 모습이 지지를 받은 것 같습니다. 대우차가 에스페로도 개발하고, 막 뻗어 나가기 시작할 시기라 노사관계가 중요했어요.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임금인상, 경제민주화, 노동자 연대 같은 이슈가 사회적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저도 1991년 2월 대우조선 파업 때 지지성명을 해서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1년 6개월 동안 광주교도소에 갇히고, 해직까지 된 이은구 씨는 계속된 노조의 투쟁으로 복직했다.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조선에서 2년간 근무하고 대우자동차에 돌아오는 게 조건이었다. 그가 대우차 부평공장에 복귀한 것은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내건 '세계경영'이 한창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던 1995년 5월께다. 이은구 씨는 이듬해 11월 제15대 대우차 노조위원장에 또다시 선출됐다. 이 시기 대우자동차는 '라노스'(1996년 출시), '누비라'(1997년 출시), '레간자'(1997년 출시) 등 자동차산업 역사상 유례없이 3개 차량 모델을 한꺼번에 개발하며 확장세를 이어갔다.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이 성공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때이고, 워낙 회사가 잘 나가서 노사관계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임금도 많이 올랐고요. 김우중 회장이 노조 이야기를 많이 들어줬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다른 재벌 총수들과는 달리 노조와 직접 소통했고, 인간적으로도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우조선에 잠깐 근무할 때도 일부러 찾아와 안부도 물었고…."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와 나눈 대담을 엮은 책인 '김우중과의 대화'(2014년 출간)에서 "순번을 정해 직원들 집에서 아침을 먹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들이 '우리 회장님 만났더니 보통 재벌 회장과 다르다'고 얘기하고 다녀요. 그러니까 직원들 생각이 바뀌었죠"라고 했다. 노조 지도자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도 언급했다. 김우중 회장은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채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하지만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그해 11월 한국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이른바 'IMF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력을 잃어갔다. "당시 대우차 노조위원장이면서 대우그룹 노조협의회 의장이었습니다. 대우그룹 16개 계열사 노조를 다 불러서 고통분담을 하기로 한 뒤 임금동결과 후생복지 반납을 먼저 제안하고 정리해고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임기가 끝난 이후인 1999년 결국 대우는 워크아웃(Workout)에 들어갔습니다. 1천800여 명 규모의 정리해고가 이어졌고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GM은 1992년 대우자동차에서 손을 뗀 지 10년 만인 2002년 대우자동차를 전격 인수하면서 국내시장으로 돌아왔다. 이은구 씨는 2006년 현장직을 그만두고, 한국지엠(당시 지엠대우)과 임직원이 함께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인 '한국지엠한마음재단'의 사무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경야독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NGO학 석사를 취득한 뒤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무직으로 옮겼다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국지엠한마음재단으로) 갔다"고 했다. 이은구 씨는 한국지엠한마음재단에서 지역 취약계층을 도우면서 대기업과 지역사회의 상생방안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에 터를 잡은 한국지엠에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김우중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지내서인지 인천경영자총협회나 인천상공회의소 같은 지역 경제단체와도 활발하게 소통했습니다. 대우그룹 본사를 송도유원지로 이전한다는 계획도 있었고요. 한국지엠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부분이 많지만, 대우차 때에 비하면 소통도 적고 조금은 아쉽습니다. 그래서인지 현재 인천시민들도 한국지엠에 대한 애정이 과거만 못한 것 같아요. 인천공장이나 군산공장 생산이 자꾸 줄어드니까 '철수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지엠은 철수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노조를 비롯한 직원들과 시민들에게 투자계획을 명확하게 밝히고, 상생방안을 구축하면서 앞으로도 한국지엠이 인천 대표기업이자 모범적인 기업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이은구 씨는 "당분간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려 한다"며 "어떠한 형태로든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을 말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은구 전 위원장은?▲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1986년 대우자동차 입사(조립1부)▲ 1990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제11대 위원장▲ 1996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제15대 위원장▲ 1998년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제2대 본부장▲ 2017년 3월 한국지엠 입사 31년 만에 희망퇴직▲ 전 인천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 측 위원▲ 현 인천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이사▲ 현 (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이은구 전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이 1986년부터 올해 3월까지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에서 근무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부평공장 서문 앞에서 인천 자동차산업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이은구 전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

2017-05-16 박경호

[인터뷰… 공감]감독·코치·선수 '트리플 챔프'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

초교 4학년때 감독 권유로 입문… 가세 기울자 '농구로 성공' 결심무릎 부상으로 방황 트레이드 거치면서 마음 다잡아 '가족이 큰 힘'팀 맡고 싸늘한 시선에 적응 쉽지 않았는데 선수들이 잘 따라와줘솔선수범 주장 양희종 고마워… 선수시절 우승보다 지금이 더 행복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은 지난 2002~2003시즌 원주 삼보(현 동부) 선수로 첫 우승을 차지했고 2007~2008시즌에는 코치로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지난 2일 감독으로 2번째 시즌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린 첫번째 농구인이 됐다.서울잠실체육관에서 진행된 챔피언결정전 6차전 경기가 끝나는 순간 김 감독은 선수들을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 화제가 됐다. 감독 2년차에 우승이라는 성과를 이뤄낸 김 감독을 7일 안양실내체육관에 위치한 인삼공사농구단 사무국에서 만나봤다. ■ 어려운 가족 위해 힘이 되고 싶었던 청소년 김승기농구팬이라면 김승기 감독을 떠올릴때 터보가드라는 애칭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코치와 감독으로서의 김 감독은 묵묵히 선수들을 지켜보는 듬직한 모습일 것이다.그런 김 감독의 농구와의 첫 인연은 우연이라고 말해야 하는게 맞는 거 같다.김 감독은 "농구를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때다. 키가 커서 조회때 뒤쪽에 서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이름을 적어가서 농구부로 부르셔서 농구를 하게 됐다. 그때는 농구가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고 회상했다.이어 김 감독은 "사실 나는 당시 복싱이나 마라톤 선수가 멋 있어 보여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농구부로 불러서 선생님의 설득으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며 "농구를 하다 보니까 관두고 싶어도 관둘 수 없는 상황이 됐다. 6학년때는 소년체전에서도 우승했고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딱 한번 질 정도로 잘했었다"고 전했다. 서서히 농구에 대한 재미를 알기 시작할 무렵이던 중학교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운 집안을 보며 김 감독은 눈물을 흘리며 농구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김 감독은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셔서 2층 주택에 살던 가족들이 지하로 이사가는 상황이 발생했다"며 "당시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지만 가족들이 힘들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농구로 성공해 꼭 집을 사드리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그는 "정말 중·고교때는 죽기살기로 농구를 했던거 같다. 용산고에 입학해서는 1학년때부터 경기에 출전했는데, 형들보다 농구를 잘하지 못하면 경기를 못 뛴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농구를 했다"며 "1학년이 선발로 뛰다 보니 2학년과 3학년 학부모들의 시기도 받았지만 농구장에 오셔서 제가 뛰는 모습을 보시며 행복해 하는 부모님의 모습만 떠올리며 농구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김 감독은 "그때에는 제 방을 갖는게 소원이었다. 중앙대에 입학해서 정말 열심히 농구를 해서 대학교 3학년때 부모님께 집을 사드렸다"고 덧붙였다.■ 이기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던 허재와 강동희김 감독은 "제가 중앙대를 나와서 허재 선배와 강동희 선배를 롤모델로 생각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며 "선수 생활을 하며 두 선배를 상대로 경기를 해 봤지만 정말 수비하기 힘든 선수였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농구실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분들이다. 한국 농구사에 이렇게 잘했던 분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공격으로는 허재 선배 같은 스타일을 따라가고 싶었고, 가드로서는 강동희 선배 스타일을 배우고 싶었다"고 덧붙였다.그는 "그분들을 롤모델로 생각했고 선배들을 이겨 보겠다는 각오로 선배들의 플레이를 연구해서 배웠다. 경쟁할 수 없는 분들이지만 그 분들을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선수시절에 발전할 수 있었던 거 같다"고 설명했다.김 감독은 "저랑 그분들과 나이 차가 있다 보니 제가 실업과 프로에서 두분을 만났을때 한번 해볼만 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며 "제 선수로서 농구 인생은 두 선배들이 있기에 긴장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던거 같다"고 전했다.■ 첫번째 위기 부상, 그리고 방황김 감독은 "삼성에 입단한 후 상무에 다녀왔다. 1997년 다시 삼성에 복귀했는데, 국가대표로 발탁돼 FIBA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며 "하지만 당시 무릎이 좋지 않았는데 치료를 받지 않고 출전하다보니 너무 나빠졌다. 정말 화려한 선수 생활이 시작되는 듯 했는데 거기까지였다"고 돌아봤다. 그는 "이후 정말 방황을 많이 했다. 당시 아내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화려하게 결혼도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운동이 안되다 보니 술도 많이 먹고, 집에도 잘 안들어가고. 마음 고생을 정말 많이 시켰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그때 완전히 모든게 망가졌다. 생각했던게 100이면 1도 안됐다. 아무것도 안됐다"며 "지금의 아내와도 결혼하는게 맞는지 고민 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방황하는 동안(1998년) 김 감독은 삼성에서 원주 나래로 트레이드 됐다. 또 2003년에는 삼보에서 울산 모비스로 트레이드 됐고 2005년 원주 삼보로 트레이드됐다. 나래와 삼보는 원주 동부의 전신이다.김 감독은 "나래와 모비스, 삼보를 거치면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장 큰 힘이 되어 준건 아내와 아이들이 이었기에 힘든 시기를 이겨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 인삼공사김 감독은 "사실 인삼공사에서의 지도자 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던거 같다"며 "제가 인삼공사와 인연을 맺은 건 전창진 감독님이 불러서인데 감독님이 좋지 않은 일로 팀을 떠나셨고 그런 상황에서 팀을 이끄는게 맞는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하지만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팀을 맡은 부분에 대해 모든 분들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들이 힘들었다"며 "코치 생활은 오래 했지만 감독은 해보지 않았기에 적응하기가 싶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상황인데 선수들이 잘 따라와줘서 지금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거 같다"고 덧붙였다.그는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이런 제 농구인생의 순간순간이 머리 속에 지나가더라. 그래서 눈물이 났던 거 같다"고 우승이 확정되던 순간을 회상했다.칭찬해 주고 싶은 선수를 묻자 주장 양희종을 꼽았다. 김 감독은 "오세근, 이정현, 데이비드 사이먼, 키퍼 사익스 등 모든 선수들이 고맙고 열심히 해줬다. 하지만 항상 팀을 위해 희생하고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양희종이 있어서 선수단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거 같다"며 "이 멤버로 다음 시즌을 맞고 계속 손발을 맞춰간다면 더 좋은 성적도 가능하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김 감독은 "선수 시절 우승을 해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1997년부터 20여년 생활을 돌아보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거 같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노력하겠다"며 "이 순간이 올 수 있도록 옆에서 든든히 믿고 기다려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KBL 제공■김승기 감독은?▲ 1972년생▲ 용산고, 중앙대-경력▲ 1994~1999 삼성전자▲ 1998~2003 원주 나래·삼보▲ 2003~2005 울산 모비스▲ 2005~2006 원주 동부▲ 2006~2009 원주 동부 코치▲ 2009~2015 부산 KT 코치▲ 2015~현재 인삼공사 코치, 감독대행, 감독-수상▲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은메달▲ 1997 농구대잔치 베스트 5 FIBA 아시아선수권 우승 ▲ 2002 애니콜 프로농구 수비 5걸 애니콜 프로농구 우수수비상▲ 2017 2016~2017 KCC 프로농구 감독상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이 2016~2017 KCC 프로농구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통합우승을 차지하며 KBL에서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컵을 들어올린 첫 농구인으로 기록됐다. 사진은 지난 9일 안양실내체육관 내 구단사무실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지난 2일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안양 KGC 선수들이 김승기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2017-05-10 김종화

[인터뷰… 공감]하윤수 제36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하윤수(54)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 있는 교총'을 강조한다. 그는 지난해 '가르칠 맛 나는 학교, 선생님이 행복해지는 파워 교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36대 교총 회장에 당선됐다. 교권 회복과 함께 국내 최대 교원 단체인 교총의 대외적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하윤수 회장은 지난달 26일 경인일보 인천본사에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반 정치꾼'이라고 농담처럼 소개했다. 실제 그는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교원지위법)상 교권 보호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국회에서 여·야 의원을 가리지 않고 만나 설득했다.하 회장은 말에 막힘이 없었고, 답변은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빠른 의사 결정과 추진력으로 '불도저'란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교육에는 답이 없다"면서도 "교사가 웃어야 아이도 따라 웃는다. 교사가 신바람 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36대 한국교총은 '교권 강화'를 지향한다. 교총 회장 취임 후 어떤 일들을 하셨나.교권 침해에 대한 가중 처벌 도입이다. 지난해 6월 취임하고 '제1호 결재'를 한 것이 '교원지위법 개정 추진'이었다. 교육의 질은 교원의 질을 넘을 수 없다. 교육자가 올바른 교육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우리 뜻에 국회도 공감했다. 국회에서 지난해 11월과 지난 2월 개정안이 발의됐다. 교육 활동 침해 행위가 위법하다고 판단되고 피해 교원이 요청할 경우 교육감이 수사기관에 고발하게 하는 것, 교육 활동 침해 학생의 보호자가 특별 교육 등을 이수하지 않을 경우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 등이 골자다. 또 전국 1천600여 학교에서 '1학교 1고문변호사 제도'를 도입했고, 매년 교권 침해 사례를 종합·정리해 발표하면서 정부에 대책 마련을 주문하고 있다. ■ 교총의 활동으로 학교 현장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교육 활동 침해에 대한 선생님들의 대응 자세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참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교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관련 절차와 지식에 대한 공부도 많이들 하고 계시고, 잘 알고 있다. 교육 활동에 자신감이 매우 높아졌다.교총에 가입하면 법률적 보호를 전문적으로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든든함에 자신 있게 학생을 대하고 수업에 임하는 경우가 큰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교총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심급별로 최대 500만원, 3심까지 최대 1천5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한국교총은 교육감 직선제 폐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교육감 직선제를 없애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지난 2월 이청연 인천시교육감이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징역 8년과 함께 법정 구속된 일이 단적인 예다. 교육감 직선제 도입 후 10년 동안 그 폐해가 엄청나다. 부정과 비리는 한두 건이 아니다. 제1기 민선교육감 16명 중 9명이 부정 선거와 비리 등으로 기소되거나 중도 하차했다. 선거 때마다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도 큰 문제다. 당선 후 선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각종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교육감 직선제는 헌법이 정한 교육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후보자도 모르는 일명 '깜깜이 선거'라는 오명을 얻었다. 2010년 출마한 16명 중 13명이 50% 미만을 득표했고, 심지어 20% 미만으로 뽑힌 경우도 있었다. 또 교육 전문성과 교육 공약 등 교육적 논리보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에 좌우되면서 특정 정치 세력과 시민 사회 세력의 선거 개입과 진출을 가속화시켰다. 이 같은 문제는 단순히 교육감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기 힘들다. 제도가 더 문제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제는 직선제를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 한국교총은 수능 절대평가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왜 필요한가.정부가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사교육비는 줄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대학 입사와 내신 경쟁에 있다. 대학 입시 제도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 2015년 개정 교육 과정에 의거 출제 과목은 공통 과목으로 한정하고, 평가 방식을 절대 평가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현행 9등급제의 상대 평가는 소수점 하나로 인해 등급이 결정되다 보니 학교 공부 외에도 과도한 사교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학 입시의 변화 없이 공교육 정상화, 사교육비 해소는 어렵다. 대입 제도 예고 3년제로 인해 당장 바꾸기는 힘들지만, 오는 7월에 정부가 개선 방안을 내놓는 '2021학년도 수능' 때부터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교육 혁신'의 방향과 세부 실행 계획은 무엇이라고 보는가.기본적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 학령기 인구 절벽 등 사회 구조 변화에 대비하는 교육 혁신이 돼야 한다.이를 위해 고등학교를 진학 교육과 직업 교육의 복선형(複線型) 체제로 개편하고, 진학과 직업 고교에 대한 맞춤형 교육 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임금차별금지법' 등을 제정해 고졸 임금 차별을 없애야 한다. 학벌 위주 사회는 능력 중심으로 전환하고, 대학 진학에서 상대적 우위를 위한 경쟁도 해소해야 한다.정책의 일관성, 안정성이 중요하다. 범정부적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고, 교육부의 역할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한다. 또, 중앙과 시·도교육청, 학교 간의 유기적인 협력과 연계가 더욱더 중요해지는 만큼 도입된 지 10년 동안 숱한 중앙부처와의 갈등을 유발하고, 부정과 비리 등 폐해만 드러난 교육감직선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교육 현장의 변화를 위해서는 교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다. 교원들의 사기 제고와 협력 도모 등을 위해 교권 침해 예방 대책을 대폭 강화하고, 차등 성과급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하윤수 회장은?▲ 1962년 경남 남해 출생▲ 1981년 남해제일고졸▲ 1986년 경성대 법학과졸▲ 1988년 동아대 대학원 법학과졸▲ 1994년 동아대 법학박사 ▲ 2004~2007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부회장▲ 2007~2008년 국공립대학교교수연합회 공동대표▲ 2007~2010년 부산지검 범죄예방봉사위원▲ 2008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분과 자문위원▲ 2009~2010년 부산교대 기획처장 겸 산학협력단장▲ 2010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현)▲ 2011~2015년 교육부 규제완화위원회 위원▲ 2013년 제6대 부산교육대학교 총장(현)▲ 2013년 한국사학진흥재단 비상임이사▲ 2013년 부산과학기술협의회 이사(현)▲ 2013년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 상임위원(현)▲ 2016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학윤리위원회 위원(현)▲ 2016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현) ▲ 2016년 전국교원양성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현) ▲ 2016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현) ▲ 2016년 제6차 ASEM 교육장관회의 자문위원(현)▲ 2016년 초등교원 양성대학교 발전위원회 위원장(현)▲ 2016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족대표하윤수 한국교총 회장의 조부와 부친은 항일 독립 운동가 출신이다. 집이 가난해 6남3녀 중 6째인 하 회장만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절대 정의롭게 살고, 가난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고 했다. 하 회장이 회장에 취임한 뒤 교총은 국정교과서에 대해 "친일·독재 미화, 건국절 제정 등 교육 현장의 여론과 배치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경우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기존의 조건부 찬성 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2017-05-02 김명래

[인터뷰… 공감]대선 레이스 '고배'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다짐

지지율 1%만 보면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끼겠나정치는 변화하는 과정 견제 선택한 국민 놀라워다당 시대 '협치' 과제… 선거구 개편·개헌 필요정치 접을 수 있다 생각하고도 고민끝에 탈당독일 우파 개혁 택한 좌파 슈뢰더의 희생처럼국가미래 위해 개인이익 포기 옳은 선택 확신경기도 새정치·경제 실험은 시대적 흐름 '자부'연정만 봐도 한국의 기준, 나라 이끈다고 생각4차 산업혁명에 日 대형서점 츠타야 접목 검토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대선 경선과정서 남 지사가 소개한 책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 中에서남경필 경기도지사는 늘 앞으로 걸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리 다섯 번을 이기고, 모두가 진다고 했던 2014년 도지사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앞으로 향하며 미래를 가리켰다. "저곳으로 가야만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외침은 경기도에서 미래 정치·경제·사회모델인 연정과 공유경제, 따복공동체를 낳았다. '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흔들리자 망설임 없이 당을 나와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내걸고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대선을 향해 나아갔다.앞으로만 걷던 그가 넘어진 채 멈춰섰다. 지지율은 1%에 머물렀고 '안방'인 경기도에서도 상대 후보에게 졌다. 도청으로 돌아온 후에도 '레임덕' 위기라는 지적에 직면했다. 그가 새롭게 깃발을 꽂은 바른정당 역시 자당 대선 후보의 사퇴를 논의할 만큼 녹록지 않다.도지사 임기가 끝나는 1년 반 뒤, 앞으로만 향하던 그의 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아쉽지만 국민은 놀라웠다"뭐, 제 한계니까."지난 20일 아침 경기도청 집무실에서 만난 남 지사는 이러한 상황에 '쿨하게' 답했다. "기본적으로 제가 부족해서 그렇고 바른정당이 처한 스탠스나 상황이 이번 대선에서 평가받기는 어려운 구조적 문제도 있었다고 봐요. 토론을 통해 나타난 실력이나 진정성,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아쉽죠."준비된 원고도 한쪽으로 치워둔 채 남 지사는 덤덤하게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대선 레이스에서 탈락한 후 가진 첫 인터뷰다. "국민들이 '도지사 열심히 해라'라고 하신 것 아니겠나"라고 운을 뗀 남 지사는 "대선 주자로서 아무래도 100% 도정에 전념하는 건 어려웠을 수 있다. 120% 도정에 전념하면서 도민께 죄송함을 갚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지지율 1%'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다. 불과 2주 전 경기도 4곳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선 바른정당이 1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보궐선거 유권자 상당수는 오히려 남 지사가 '청산의 대상'이라고 비판한 자유한국당을 선택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라는 질문에 남 지사는 "'요 대목'만 보면 국민의 선택이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저는 어느 후보와 1대1로 붙어도 훨씬 나은 미래 비전과 철학을 얘기할 수 있다. 경기도에서도 놀라운 혁신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지지율이 1%라니,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끼겠나"라고 토로했다."그러나 정치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남 지사는 말했다. 그는 "단면만 잘라놓고 보면 불합리해보일 수 있지만 전체를 보면 다르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하는 게 바른정당과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지난해 총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이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통이 있었다. 국민들은 민주당에 다수의석을 주면서도 누구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게 제3당을 만들었다. 만약 새누리당이 그렇게 안됐으면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는 구도도 안만들어졌을 것"이라며 "지금도 문재인이라는 상수와 이를 견제하기 위한 대안을 자꾸 갖다 붙인다. 국민들은 이렇게 계속 견제하는 선택을 한다. 이게 '불합리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국민의 선택은 놀라웠다"고 풀이했다.'불합리한' 국민의 선택 속 새로운 대통령도 갈림길에 놓일 것이라는 게 남 지사의 전망이다.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나눔'이다. 남 지사가 줄곧 가리켰던 '미래'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권력은 손잡이가 없는 칼 같은 거다. 임기 초에는 엄청 잘 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이 그 칼에 베인다"며 권력을 칼에 비유한 남 지사는 "서로 다른 세력과 손을 잡고 함께 갈지, '마이웨이'할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후자의 경우 국민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며 "150석(과반 의석을 차지한 1당 구도)을 넘어 180석(여러 정당 간 협치 구도)의 합의가 없으면 어려운 구도를 만든 것은 협치·연정을 하라는 과제로 이어졌다. 더 안정적으로 하려면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바른정당의 내홍도 동일하게 진단했다. '국민의 눈'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유승민 후보의 사퇴 주장이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관련, 그는 "정답이 어디 있겠나"라면서도 "과연 대한민국을 위한 결정을 한 것인가, 아니면 다음에 한번 더 당선되는데 이익이 될지를 보고 결정한 것인가. 국민들은 안다"고 말했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넘어지고 멈춰섰지만, 그에겐 오히려 '우리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남 지사는 "탈당할 때 '이걸로 정치를 접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2년 전 경기도를 찾기도 했던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에선 좌파인 슈뢰더 전 총리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우파 개혁을 하면서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정권도 뺏겼다. 그럼에도 자기는 만족한다고 했다. 이후 독일은 전성기를 이뤘다. 메르켈의 전성기는 슈뢰더의 자기 희생 덕분이라는 말이 나온다"며 "남경필이란 정치인도 20년 동안 국민들이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대한민국 정치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탈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걸어왔던 남경필의 길이, 곧 '국가의 미래를 위해 개인과 정당의 이익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슈뢰더의 길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얘기다.그러면서 "대선 과정에서 탈락은 했지만 도민들께 자랑하고 싶은 건 경기도에서 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와 경제 실험들이 앞으로 누가 집권하든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정만 봐도 경기도가 곧 대한민국의 스탠더드"라고 말한 남 지사는 "경기도의 것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고 '일자리 넘치는 안전하고 따뜻한 경기도' 만들기에 전념할 거다. 도정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투지가 불타오른다"며 웃었다. 대선 과정에서 제시했던 공약들 역시 경기도에서 최대한 시도해보겠다고 공언했다. 남 지사는 "모병제는 어렵고 수도 이전도 당장은 힘들 수 있지만, 제가 주장했던 것 중 의지만 있으면 경기도에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할 수 있는 일들을 최대한 찾아 실제로 할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대선 경선 과정에서 남 지사는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을 읽고 있다며 책의 한 구절을 소개했었다. "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요새 읽고 있는 책을 묻자 일본의 대형서점 '츠타야'를 기획해 성공시킨 마스다 무네야키의 저서 '지적자본론'을 언급했다. "츠타야라는 기업이 어마어마한 혁신의 아이콘이거든요. 4차 산업혁명에는 새로운 기술이 없어요. 기존의 것을 융합하는 게 핵심인데 우리 경기도에도 이런 '츠타야' 모델을 접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그는 '경기도'에서부터 일어나 다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려 하고 있다. 그래서 경기도의 내일을 구상하며 또 한번 미래를 가리킨다. 비록 과녁을 빗맞혔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기에.글/강기정·신지영기자 kanggj@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남경필 도지사는? ▲ 1965년 1월 20일 용인 출생▲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경인일보 사회부·정치부 기자▲ 제15~19대 국회의원 (5선)▲ 한나라당 최고위원▲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 제34대 경기도지사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선 도전 당시 밝혔던 공약들을 경기도에서 실천 가능한 것부터 이행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2017-04-25 강기정·신지영

[인터뷰… 공감]제종길 안산시장

아이 잃은 부모·이웃 잃은 시민,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 서로 보듬어야유가족과 분노하고 싸워나가고 싶었지만 '장기적으로 도움되는 일' 고민모든 행정서비스 물밑 지원… 정부, 특별법 명시된 경제활성화등 힘써야맹골수도에 잠들어있던 세월호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3년 동안 어두운 바다 밑에서 거친 조류를 고스란히 받아낸 선체는 상처투성이였다. 3년을 하루 같이 기다렸던 안산 역시 세월호처럼 상처투성이가 됐다. 세월호 현수막 철거, 추모시설 조성, 단원고 기억 교실 이전 등을 둘러싼 민·민 갈등은 증폭됐고 안산은 또 한 번 갈기갈기 찢어졌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경인일보와 만난 제종길(62) 안산시장은 상처와 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없는, 그래서 딱 가운데에서 양쪽을 바라봐야 하는 그의 가슴은 양쪽 모두의 아픔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아픔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서로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생각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쉽지 않아요.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이웃을 잃은 시민들은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서로에게 남아 있는 상흔을 서로 보살피고 보듬어야 합니다."안산은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가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이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살고 있던 도시로, 당시 2학년 학생 246명과 교사 10명이 숨졌고 현재 6명(학생 4명, 교사 2명)이 실종된 상태다. 희생 학생들이 가장 많이 살던 와동, 고잔동 일대는 충격으로 지역 공동체마저 무너졌다. 전년도에 고교 평준화가 처음 시행되면서 이 지역 학생들이 대부분 단원고로 입학한 것이 희생자가 집중되는 원인이 됐다. 한집 건너 한집에서 피해를 보면서 이웃들은 크게 웃지도, 화사한 옷을 입지도 않게 됐다. 지난 1986년 시로 승격한 이후 안산은 수도권 최대의 국가산업단지인 안산스마트허브를 중심으로 일자리가 넘치는 공업 도시였다. 하지만 슬픔은 빠르게 전염됐다. 세월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민들은 참사 후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빠졌다. 제 시장은 "세월호 참사로 국민들이 받은 충격과 슬픔, 그리고 미안함은 안산시민에게는 더욱 특별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성인으로서 세월호에서 끔찍하게 희생된 우리 단원고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그 감정은 안산을 상징하던 활력을 앗아갔다"며 "지역 경제도 많이 위축돼 안 그래도 힘들어하던 소상공인들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참사 당시 시장으로 출마를 준비했던 제 시장도 곧장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향했다. 제 시장은 "30년 넘게 거주한 안산인으로서 또 안산시장직에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충격과 슬픔, 그리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무력감과 미안함에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며 "시장 후보로서 계획했던 많은 일을 변경해 안전이 최우선으로 존중받는 생명도시, 사람의 가치가 회복되는 사람중심의 도시라는 목표를 세우게 됐다"고 당시 소회를 밝혔다. 이후 제 시장은 안산과 진도를 오가며 힘든 선거 운동을 했다. 안산에 있을 때는 하루의 첫 시작을 합동분향소에서 했고 지금도 매주 분향소를 방문하고 있다.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 등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은 온도 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가 안산에 남긴 상처를 잊지 않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과 침체한 지역 경제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사용했던 기억 교실 이전을 요구하는 신입생 학부모들과 유가족들도 마찰음을 빚었다. 집값 하락 등을 우려한 일부 시민들이 세월호 추모 시설 조성을 꺼리는 등 세월호를 둘러싼 반목과 갈등은 증폭돼 갔다.시민들의 아픔과 갈등을 봉합해야 하는 제 시장의 책임감은 커졌고 어깨도 무거워졌다. 유가족들과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인지 뒤에서 유가족들을 지원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일부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최대 피해 지역인 안산시장의 무용론마저 제기하기도 했다. 제 시장은 "유가족들과 분노하고 싸워나가고 싶었지만, 안산시장으로서 시정 운영과 장기적으로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히 유가족들을 지원해 왔고 통장, 동장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행정 서비스를 가동해 물밑에서 함께했다"고 말했다.충격으로 흩어진 공동체와 공감대를 회복하는 것도 숙제였다. 공동체 회복은 단기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차근차근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우선 공무원들과 시민들의 힘을 모아 '희망마을사업추진단'을 구성해 세월호 참사로 인한 집중 피해 지역의 공동체 회복에 나섰다. 마을별로 주민들이 묶일 수 있도록 특화된 테마사업을 선정했다. 추모 사업 추진위원회도 구성해 추모시설 조성 등을 둘러싼 민·민 갈등을 최소화하고 체계적이고 민주적인 추모 사업을 추진하도록 맡겼다.피해 가정을 보살피고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등 참사 현장에서 가족들의 곁을 지켜주는 일도 중요했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피해 가족 지원과 수습 활동을 위해 '행정 지원 돌보미' 제도를 도입했고, 참사 수습을 위한 전담기구인 '세월호사고수습지원단' 출범 등을 추진했다. '행정 지원 돌보미'는 공무원과 통장 등 3명이 1개 조를 이뤄 피해 가정을 1대 1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1천여 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동참했다. 유가족 대책 위원회를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피해 가족의 생활 안정을 위한 사업도 추진해 유가족의 일상생활 복귀도 도왔다. 3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세월호 선체가 3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안산은 새로운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 특별법)에 담긴 추모 사업, 공동체 회복, 피해 지역 경제 활성화 등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 지역을 위한 큰 과제들이 남아 있다. 제 시장은 "이 과정에서 공동체 붕괴라는 또 다른 참사를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 또한 제 임무"라며 "공동체가 회복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한 단계 성장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고의 수습뿐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 지역의 지원을 통한 회복 등 국가 차원의 책임과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정부는 세월호 특별법에 명시된 지역 경제 활성화, 국립트라우마센터 및 복합시설 건립, 추모시설 조성 사업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사업들을 처음과 같은 의지로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이런 과제를 해결하며 제 시장이 실현하려는 안산의 모습은 '생명도시'다. 그가 '생명'을 강조하는 이유는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원인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사람과 생명의 가치 상실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제 시장은 "세월호 참사는 한국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제가 응축된 모두의 아픔"이라며 "안산시가 세월호 참사를 극복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그간의 적폐를 없애고 새 나라로 거듭나는 출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김환기·조윤영기자 jyy@kyeongin.com ■제종길 안산시장은?1955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건국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해 서울대학교 대학원 해양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을 거쳐 17대 안산 단원을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도시와 자연연구소 소장, 한국생태관광협회 공동대표, 한국수중과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14년 7월 민선 6기 안산시장으로 취임했다.제종길 안산시장은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이웃을 잃은 시민들이 서로에게 남아 있는 상흔을 보살피고 보듬어야 합니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안산시 제공

2017-04-18 김환기·조윤영

[인터뷰… 공감]미하엘 그룬트 한국머크 대표이사

경기도 판교에 센터 개소후 공항·항만과 가까운 송도로 확장·이전한국 바이오 성장 잠재력은 '스피드' 특유의 속도전으로 우위 가능선행기간 필요한 제약사 대신 위탁생산·바이오시밀러 개발 등 '전략' 현명인허가 절차 간소화·규제 완화 절실… 속도 붙으면 바이오 허브로 발돋움독일 과학기술기업 머크는 1668년 설립됐다. 프레드릭 야곱 머크가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의 '천사약국(Engel pharmacy)'을 인수한 것이 기업의 시초가 됐다. 조선 현종 9년, 무신년(戊申年) 때로,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출판하며 유럽에 조선을 최초로 알린 해에 기업의 역사가 시작됐다. 머크는 과학을 기술로 전환해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내년(2018년)이면 창립 350주년을 맞는 머크는 혁신(innovation)을 멈추지 않고 성장했다. 66개국에서 임직원 4만여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의 위상을 갖췄다. 미하엘 그룬트(Michael Grund) 한국 머크 대표이사에게 혁신의 비결을 물었다. 그는 머크 본사 프로세스 개발 랩 매니저, 엔지니어링&기술 개발 디렉터, 기능성소재비즈니스(PM-Advanced Technologies Development) 부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혁신의 중심에 있었다.그룬트 대표이사가 밝힌 머크의 성장 비결은 20~30년 단위로 기업을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머크는 지난 2006년에도 큰 변화를 시작했다. 핵심 사업 분야 관련 기업은 인수했고, 연관성이 떨어지는 분야는 과감하게 정리했다. 생명과학 산업에서 선두를 다투던 미국기업인 밀리포아와 시그마알드리치를 각각 2010년과 2015년에 인수했고, 제네릭(복제약)과 전자 사업 부분은 통합 등을 통해 정리했다."혁신의 적(enemy)은 사업이 잘되는 것입니다. 경영 환경이 좋을 때 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머크도 2006년 혁신의 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럴만한 재무적인 이유가 없었습니다. 전략적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그룬트 대표에게 혁신을 시작할 '타이밍'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묻자 "자신의 능력과 판단력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리면 틀리거나 늦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와 함께 미래에는 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산업 간 결합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다른 비즈니스 사이에서 유망 비즈니스가 탄생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의료(medicine)와 전자기술(electronics)이 결합해 메디트로닉스(meditronics)가 탄생할 수 있다는 거죠. 10년 전만 해도 (머크의 사업 가운데) LCD(액정 표시 장치)가 호황을 이루다 보니 LCD에 집중하고 의약 분야를 매각하라는 조언이 있었고, LCD가 사양길에 들어간 뒤에는 LCD를 매각하고 의약 분야를 키우라고 했는데 이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머크는 바이오 의약 분야와 관련해 대(對)한국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머크의 한국 내 바이오 투자 대상지는 인천 송도국제도시다. 그룬트 대표이사는 송도를 바이오 '핫스팟(hot spot)'이라고 표현했다.머크는 지난해 10월 송도국제도시 IT센터에 국내 바이오제약기업을 대상으로 전문기술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M.Lab 협업센터(Collaboration Center)'를 개장했다. 그룬트 대표이사는 "센터에는 앞으로 6개월 동안의 예약이 모두 다 찬 상태로, 송도에 있는 바이오 대기업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바이오 기업에서도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한국머크는 지난해 11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상호발전 및 지원을 위한 투자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머크는 송도 내 투자를 확대해 부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연구·물류서비스·제조와 관련된 시설을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4년 전 (경기도) 판교에 센터를 개소한 뒤 성장하는 것을 보고 센터가 송도에 들어서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센터를 확장 이전했습니다. 앞으로 2번째 단계로 기업에 공급하는 장비 등을 취급하는 창고, 물류를 여기에 둘 계획입니다. 송도는 공항, 항만과 가까워 이 같은 기능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이후 생산 단계로 나가려고 합니다. 이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밟아나갈 계획인데, 잘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지속해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그룬트 대표이사는 한국 바이오 산업 성장의 잠재력은 '속도'에 있다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 경쟁국인 싱가포르는 오랜 바이오 산업 역사가 있고, 중국은 아시아 최대 바이오 시장이라는 강점이 있지만, 한국 특유의 속도전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도는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초고속으로 성장한 바이오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있는 곳이다.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들과 호흡을 맞춰 '임계규모(Critical Mass)'를 갖추게 되면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한국머크 대표이사로 있으면 다른 머크 지사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내부 경영진에게도 싱가포르나 중국이 아닌 한국, 송도를 왜 선택해야 하는지 설득을 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이 가장 빠르다고 내세웁니다. 우리의 가장 큰 고객(한국 바이오기업)의 성공 사례가 있고, 빠른 것이 강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는 현재 바이오의약 산업 분야에서 송도의 성장 전략은 현명하다고 평가했다. 현재 송도에서는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바이오시밀러(바이오복제약) 개발 등이 이뤄지고 있다."바이오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제약사를 추진한다고 하면 선행기간(lead time)이 10~30년 정도 걸릴 수 있어 어렵습니다. 송도의 경우 주문 제작을 하고, 오리지널 약품의 바이오시밀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현명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오의약품 생산은 화학약품 제조와는 매우 다릅니다. 공정, 방식이 달라 이를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이오 생산을 맡기는 고객 입장에서는 공정의 일관성, 품질 신뢰 등이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전자,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제조 공정이 훌륭하므로 상당히 유리합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매우 현명한 전략입니다."한국의 강점을 살리려면 인허가 절차 간소화, 규제 완화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머크의 경우 송도를 대상으로 물류·생산 관련 투자를 확대하려면 토지를 매입하고, 창고업이나 생산 관련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관련된 기관이 많다. 각 기관의 입장과 소통 방식이 다르면 사업을 추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뒤 정부기관 간 의견이 달라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정부기관에서는 규제를 다소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가 다른 쪽에서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기관에서는 투자 대상지가 괜찮다고 했는데, 다른 기관에서는 다른 부지가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듣기도 합니다. 앞으로 규제 개선 등을 통해 속도감 있게 클러스터를 구축할 수 있다면, 송도는 바이오 허브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입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룬트 대표이사는?▲ 1968년생, 도르트문트대학교 화학공학 박사▲ 1997년 본사 프로세스 개발 랩 매니저▲ 2000~2005년 본사 엔지니어링&기술 개발 디렉터 ▲ 2005~2008년 독일 게른샤임 사이트 엔지니어링&Maintenance 부사장▲ 2008~2013년 본사 PM-Advanced Technologies Development 부사장▲ 2013~2014년 한국머크 대표이사(2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 2014년 한국머크 대표이사(3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머크일렉트로닉미티리얼즈(주)▲ 2015년 한국머크 대표이사(6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머크일렉트로닉미티리얼즈(주)&씨그마알드리치코리아유한회사&씨그마알드리치홀딩주식회사&에이에프씨하이테크코리아주식회사미하엘 그룬트 한국머크 대표이사가 한국 바이오 산업 성장의 잠재력은 '속도'에 있으며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초고속으로 성장한 바이오 기업과 호흡을 맞춰 '임계규모(Critical Mass)'를 갖추게 되면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2017-04-11 홍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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