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자동차 정비 국가대표 박병일 명장

한국, 세계 5~6위 생산능력 불구 기술력 인정 못받아 하청구조 개선 시급국내 기업 中자동차 무서운 성장 대비해야… 정비 기술자 저평가 아쉬움인간적으로도 명장 되고 싶어 꾸준한 봉사… 46년 경력 車산업 발전 기여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규모는 세계 6위를 자랑한다. 최근 인도에 추월 당하기 전까지는 세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2014년 2천만대를 넘어섰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최근 수십 년 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산 차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불신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국내 시장에서 70% 안팎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불신도 적지 않다. 높은 판매량과 비례해 수출용과 내수용에 차이를 두는 등 국내 소비자를 무시한다는 불만이 있다. '급발진', '에어백 미작동' 등 현대차와 관련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다.현대차의 품질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박병일(61) 자동차 명장이다. 박 명장은 그동안 국내 자동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 결과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기도 한 그는 지난 2014년 현대차로부터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현대차는 그가 한 언론 인터뷰 9건을 문제삼았다. 박병일 명장은 국내 대형 로펌을 앞세운 현대차를 상대로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대응했다. '대기업+대형로펌'과 박병일 명장 1인의 대결에서 검찰은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박병일 명장을 지난 6일 오후 그가 대표로 있는 인천시 남동구에 위치한 정비업체 CAR123TEC 사무실에서 만났다. 46년간 자동차 정비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5~6위에 올라있지만, 자동차 기술력은 일본, 독일의 자동차기업과 비교하면 아직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기술력에는 유럽과 일본에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 기업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지적에 대해서는 분석해 수용할 것은 수용하면서 이를 토대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명장은 또한 국내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하청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자동차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이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기업이 지위를 이용한 '단가 후려치기'가 오랜 기간 만연하면서 중소기업들의 의지를 꺾어놨다"며 "초창기에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중소기업들이지만 대기업의 협력업체가 되면서 힘들어하고 심지어는 공장 문을 닫는 경우도 숱하게 봐왔다. 이러한 구조가 세계 5위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술에 대해서는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 됐다"고 진단했다.그는 지난 2002년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 부문에서 '제1호 명장'이 됐다. 그가 자동차 정비 일을 배운 지 31년 만이다. 자동차 정비 부문에서 국내 대표 전문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6남매의 첫째인 그는 학창시절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고, 자신이 미술을 하게 되면 동생들이 제대로 공부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뒀다.길을 가다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들었던 엔진 소리가 좋아서 자동차 정비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14살 때였다.자동차 명장이 된 이후에도 그는 정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외국서 자동차 관련 서적을 구입해 읽었고, 국내에 없는 차량을 직접 분해하고 구조를 살펴보기 위해서 들여온 수입차만도 100여 대다. 그는 특히 매년 중국차를 들여와 분해하고 있는데 중국 자동차의 기술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했다. 그는 "5년 전과 지금 중국차는 완전히 다른 차량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 거리에서 중국 브랜드 차량을 흔하게 보게 될 것"이라며 "현대차 등 우리나라 기업들은 중국의 발전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박 명장은 이처럼 자동차 정비와 관련한 일을 수십 년 간 해왔지만, 자동차 정비 기술자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고 했다. 현대차가 자신을 고소한 이유도 이같은 인식의 연장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현대라는 회사가 자동차 고치는 일을 하는 나를 쉽게 본 것 같다"며 "'명장'칭호를 가지고 있는 나를 쉽게 볼 정도면 기술자들 모두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변호사 없이 소송에 대응했다. 자동차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긴다면 기능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술자를 낮게 보는 시각을 뒤집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는 자동차 정비 분야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제1호 명장의 자리에 오른 데 이어, 세계 최초로 급발진 원인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지식을 후학에게 전하는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그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정비업체는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해 있다. 그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대에 다녀온 직후다. 우연히 아는 선배가 일하는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일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인천에 터를 잡는 계기가 됐다.그는 "명장이 되기 전까지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며 "명장이 된 이후에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술로 명장이 됐지만 인간으로서도 명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2006년부터 인천의 섬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단체인 '한국마이스터연합회'의 봉사활동은 10년이 넘었다. 그는 차량 정비를 맡고, 다른 회원들은 집 고치기, 가전제품 수리, 일손 돕기 등을 하고 있다. 박 명장은 "섬에 계신 분들은 특히 기능인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섬을 다니고 있다"며 "10여 년간 하면서 회원수도 1천명이 넘는 등 많은 분들이 함께하고 있다. 작은 노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봉사활동을 할 때마다 저 스스로 마음이 기쁘다"고 말했다. 그 동안 박 명장의 활동에 대해 누군가는 '투사'라고 했고, 누군가는 '진정한 전문가'라고 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박 명장을 눈엣가시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다.박 명장은 "저는 수십 년간 자동차를 고치고, 자동차를 공부했다. 지금도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기도 하다"며 "저는 힘이 닿는 데까지 자동차 관련 일을 할 것이고, 현대차를 포함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잘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명장은 대한민국 자동차 발전을 바라는 기능인이라고 했다. 그는 "저는 기능인이다. 진정한 '자동차 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제 역할이 자동차산업이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강조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박병일 명장은?-출생 : 1957년 8월 17일 서울 출생-경력▲ 1971년 자동차 정비 입문▲ 1994년 인천기능대학 자동차공학과 졸업▲ 1999년 세계 최초 자동차 급발진 분석▲ 2002년 대한민국 제 1호 자동차 명장 선정▲ 2004년~2006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2006년 기능한국인 선정▲ 2006~2010년 신성대학 겸임교수▲ 2011년 은탑산업훈장 수상▲ 2013년 한국산업인력공단 명예의 전당 헌액▲ 2000년 ~현재 CAR123 TEC 대표▲ 2007년~현재 한국마이스터연합회 이사장▲ 2008년 ~현재 JPS KOREA 기술연구소장▲ 2012년~현재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저서 : '자동차전자제어 오토매틱' 외 36권박병일 명장은 자동차 전문가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그가 현대차와의 소송에서 변호사 없이 맞선 원동력이기도 하다. 자부심만큼 인력 양성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그가 운영하는 정비공장 3층은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현대차를 미워하지 않는다. 현대차가 세계적으로 더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7-07-11 정운

[인터뷰… 공감]향토서 '수원야사' 펴낸 이창식 前 경인일보 편집국장

6·25전쟁 끝나고 '대기자가 되리라' 자신과 약속서슬퍼런 군인들 압제속에서 지역언론 지켜각종 향토사 편찬위원 활동 지역사 재정립 공로최근 수원의 숨겨진 얘기 풀어내 큰 호응구순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기자 풍모가뭄을 해갈시켜줄 단비가 내리던 지난 3일. 인터뷰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수원시 조원동에 위치한 주인공의 자택을 찾았다. 처음 인터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앞서고 떨리는 마음이 강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마냥 취재수첩과 볼펜은 이상이 없는지, 질문은 어떻게 할지 꼼꼼히 되새김해보며 점검에 나섰다.그 순간 우산을 받쳐든 노신사가 검은 가방을 둘러메고 한손에는 서류뭉치가 잔뜩 든 종이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구순을 앞둔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한 걸음걸이와 기백이 절로 머리를 숙이게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기자생활을 시작, 명실공히 경인지역 언론계 최고어른으로 불리는 이창식(88) 선생과 인터뷰가 그렇게 시작됐다.평양 출신인 그가 경인지역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53년 5월. 6·25전쟁이 발발하고 혈혈단신으로 남한에 온 그는, 당시 육군예비사관학교 육군소위로 임관해 참전하고 전쟁이 끝난 뒤 생업의 길로 들어서면서 인천일보 평기자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갓 20살에 홀로 남한에 내려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잡기까지 녹록지 않은 생활이 이어졌지만 후회는 없다고 한다."입사한 그해(1953년) 7월 휴전조인협상 반대 집회가 인천 월미도에서 열렸다. 그 집회가 첫 취재였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왜냐면 꼭 10년전인 1943년, 평양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를 다니며 경성으로 수학여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월미도를 방문했었다. 그런데 10년만에 그 꼬마가 기자로 다시 서있다니…."선생은 당시 소회를 산문집 '천국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이튿날 평양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경성시내와 고궁을 돌아보고 다음날에는 인천 월미도로 갔는데 내륙 지방에서는 볼수 없었던 등대와 아득한 수평선을 등지고 출렁이는 바다 풍경은 몹시 신비로웠다(중략)…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억하던 선머슴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월미도가 나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은 '기회의 땅'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그는 당시 '반드시 대기자가 되리라'는 다짐을 했고, 그날의 기억을 간직한 채 우리 사회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정론직필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언론사에 몸담으며 느끼는 변화와 격동의 세월은 그 어느 곳보다 살벌했고 무게감 또한 컸지만 이겨냈다.선생이 들고 나온 종이가방에는 지역언론의 역사이자 이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낸 빛바랜 신문과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중 1961년 5월17일자 신문을 꺼내들었다. '軍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내용의 1면 톱기사가 담겨 있었다. 제호 밑에는 군부 검열에 통과됐다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당시 언론인으로서의 고충이 짐작되는 대목이었다.1963년 8월31일자 신문에는 '박정희 전역'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됐는데 '이창식 특파원'이라는 바이라인이 눈에 띄었다. "신기하지요. 당시에는 해외취재가 아닌 지역을 취재할때도 특파원이라는 말을 썼다"고 일러주었다.또 눈길 끄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1960년 9월20일자 '경기도청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기사였다. 당시 경기도청은 서울 중앙청사 맞은 편에 있었다고 한다. 1967년 경기도로 도청이 오게 되기까지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그렇게 신문사의 평기자로 시작해 부장, 부국장, 편집국장에 오르고 언론에 몸담은지 20여년 되던 해, 1974년 4월7일 '신문의날'은 그에게 잊지 못할 날이 됐다.경인일보 편집국장직에서 물러난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표를 내고 떠난 후 그는 생계를 위해 목욕탕집 사장으로 깜짝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만 다시 깨닫게 됐다고 한다. 당시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글짓기와 그림 그리기는 고상한 취미지만 일단 탐욕을 부리면 곧 장사꾼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장사꾼이 되기 전에 호된 수업료만 내고 다시 글쟁이가 됐다"고 회고한다.이후 1977년11월29일 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제안이 들어와 수락한 후 '경기도사 1,2권'을 발행하며 다시 글쟁이로서의 제2의 인생을 맞게 된다.그는 '경기도사'를 시작으로 '수원상의사' '수원시사' '경기예총사' '수원시의회사' '일제강점기 민생실록-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60년사' 등 경기도와 수원지역사회 관련 향토도서만 20여권을 내놓았다. 일본어도 능통한 선생은 일본학자가 쓴 수원향토사인 '발전하는 수원' '수원' '화성지영' '수원군지지', 일본의 저명소설가가 집필한 '간난이', 출판사 의뢰로 번역한 '술병은 클수록 좋다' '인생대학에 졸업은 없다'까지 합치면 40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출간했다.사실 그가 각종 향토사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 경기지역의 향토사가 재정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원화성박물관의 한동민 관장은 "수원지역과 관련된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창식 선생이 편찬한 책들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정말 관심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셨다"고 말한다.이 선생은 "(경기도사 편찬시)당시만 하더라도 향토사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향토사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정사와 야사도 가능하다. 정사는 권력자들의 역사이고 세도가들의 이야기이다보니 야사도 필요하다고 봤다"고 한다.이런 선생이 최근 출간한 '수원야사'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수원지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소설보다 더 재밌게 풀어냈다. 고수는 고수가 알아보는 것일까. 경기도는 물론 수원 관련 역사·문화 전문가로 꼽히는 수원화성박물관 한동민 관장이 그를 알아보고 찾아와 의기투합해 '수원야사'가 빛을 보게 됐다. 그는 편찬위원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이름만 걸치지 않는다. 자료를 얻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 등 전국의 도서관을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며 손수 수백 수천장에 달하는 자료를 복사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원시사에 앞서 1천700여쪽에 달하는 수원상의사를 편찬했다. 당시만 해도 이렇다할 자료가 없어 전국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水(물 수)자가 들어간 자료를 전부 찾아내 복사하고 나중에 보니 그 자료가 4천~5천점에 달했다. '수원상의사'였지만 수원상공회의소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원에 대한 역사까지 포괄하다 보니 방대해졌다"고 한다."나의 스타일은 학문적이라기 보다는 발로 뛰는 현장주의로 쓰는 향토서다. '수원야사'며 '수원시사'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수원사람이 써야 됐는데 평양에서 온 사람이 야사를 쓴 것은 아이러니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이었다."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역을 기반으로한 인물서를 준비중이라고 귀띔하는데 아직까지 현장 기자의 면모가 풍겨나왔다. "글은 발(현장)로 써야 돼. 머리로 쓰면 안돼." 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창식 前 편집국장은?▲ 1930. 평양 출생 ▲ 1953.5 인천일보 입사▲ 1969.3 경기연합일보사(경인일보 전신) 편집국장▲ 1982. 경기도사 1권(공저) ▲ 1986. 수원상의사, 수원시사▲ 1994. 경기예총사 ▲ 1993~1999. 경기도민일보 주필▲ 1999.5 이창식 칼럼집 '천일록'▲ 2000. 수원상의90년사 ▲ 2002. 수원시의회사 ▲ 2003. 일제강점기 민생실록 -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012. 수원문협50년사(공저) ▲ 2014. 수원국악50년사▲ 2017. 수원야사(공저)경인지역 언론계 최고 어른으로 불리는 이창식(88) 선생이 빛바랜 신문을 펼쳐보이며 "기자는 기사를 발(현장)로 써야지 머리로 쓰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1971년 9월 15일 수원시 교동에서 개최된 연합신문사(현 경인일보) 사옥 기공식 모습. /경인일보DB1969년 경기연합일보가 인천에서 수원으로 오기까지 큰 역할을 한 주역 3인방. 재일교포 출신 불이무역 이현수(사진 왼쪽) 사장과 수원 7선의 이병희(오른쪽) 국회의원, 이창식(가운데) 당시 편집국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창식 전 편집국장 제공

2017-07-04 이윤희

[인터뷰… 공감]제2연평해전 참전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이해영 원사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 북한 고속정과의 사투부상자 치료하던 박 병장, 바로 옆에 있던 서 중사눈 앞에서 자식 같은 병사들을 잃었다분쟁의 바다서 살아남은 그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철책 없는 남북의 해상 경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은 늘 남북관계 긴장 국면의 중심에 있다. 크고 작은 도발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천 옹진군 서해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소연평도) 최북단 해역을 누구는 '분쟁의 바다'라고 칭하고 누구는 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꼭 15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에서 우리 해군과 북한군의 전투가 있었다. '제2연평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NLL이 분쟁의 바다임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사건이다. 서해의 평화를 얘기하려면 먼저 분쟁의 역사부터 들춰볼 필요가 있다. 제2연평해전 발생 15년이 지난 지금 그 분쟁의 바다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다.27일 오전 11시께 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서 15년 전 제2연평해전에 참전했다가 살아남은 이해영(52) 원사를 만났다. 이 원사는 "정말 치열하게 싸운 전투가 잊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움이 있다"며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6월이 되면 전사자들 생각에 마음이 찡하다"고 말했다.2002년 6월 29일 오전 5시께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상 경비작전을 수행하는 우리 해군2함대 소속 고속정 252편대(참수리 357·358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NLL 경비와 우리 꽃게잡이 어선의 보호를 위해 출항했다. 편대는 고속정 2척으로 구성된 해군의 최소 단위 전투부대인데 1척 당 28명이 탑승한다.357호 갑판장이었던 이 원사는 며칠 전부터 우리 NLL을 왔다 갔다 하며 눈치를 보는 북한 경비정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전날에도 차단 작전을 통해 북한 경비정을 퇴각시킨 터였다. 이날도 북한 고속정 '등산곶 684호'가 우리 NLL을 침범해 차단작전에 나섰는데 평소와 달리 북한 고속정이 퇴각하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갑판에서 현장 지휘 임무를 맡은 이 원사는 좌현 M60 기관총 사수에게 "준비해라...준비해라...준비해라..."라고 사격 준비 지시를 내렸다. 오전 10시 25분께 '준비해라'라는 말을 10번 정도 말할 때쯤 북한 경비정 쪽에서 굉음이 났다. 이 원사는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얼굴은 파편이 박혀 피투성이였고, 주변에서는 다친 병사들이 '갑판장님 피하세요'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소총으로 대응사격을 하고 358호가 북한 고속정을 향해 계속 공격을 퍼붓고 있었죠."의무병이자 전화수 역할을 했던 故박동혁 병장이 몸을 사리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파편에 맞았다. 이 원사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 병장은 전투 이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숨졌다. 이 원사 바로 옆에 있던 故서후원 중사도 쓰러졌다.이 원사는 이날 북한의 공격은 우발이 아닌 명백히 계획 아래 이뤄진 의도적 공격으로 기억한다. 북한 경비정은 첫 공격에서 故윤영하 소령(357호 정장)이 있는 함교를 명중시켰다. 지휘관을 잃은 357호는 집중 공격을 당했고 결국 6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경비정은 지휘관이 위치하는 곳이 외부에 노출돼 있어 북한은 이를 노리고 조준 사격을 한 것이죠. 며칠 전부터 NLL을 넘나들며 눈치를 보던 북한 고속정은 우리 군의 대응을 염탐한 것이에요. 우리가 차단작전만 할 뿐 선제 경고사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고속정에서 정장이 '아버지'라면 갑판장은 '어머니' 역할을 했다. 이 원사는 배에서 매 끼니를 챙겨 먹는 단원들을 위해 부침개도 부쳐주고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이며 김치며 아낌없이 내놓았다. 라면에 밥과 여러 부식을 넣고 함께 끓인 '라밥'이 주특기 메뉴였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357호의 최고령자였던 그는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책임지며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후임 부사관들과 병사들을 챙겼다.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식구'들이 눈앞에서 전사하는 것을 목격한 이 원사는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부상을 입고 살아남은 그는 2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군 복무 중이다.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 전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이 원사가 못내 섭섭한 점은 당시 전투에서 숨진 故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사망자 6명이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의 예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에는 '전사'와 '순직'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라 공무 중 사망이라는 기준에 따라 순직자 예우만 받았다. 2004년 관련 규정이 개정돼 군인연금법에 전사자 예우 조항이 생겼음에도 소급적용은 하지 못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를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격상하는 내용의 법안(제2연평해전 전투수행자에 대한 명예선양 및 보상에 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논의됐지만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윤 소령을 비롯한 전사자들이 전사자 예우를 받지 못해 서운한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에서 잊히는 것이 더 걱정이에요. 2002년 6월 29일은 월드컵 3·4위전이 열린 날이기도 했고 당시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도 않았죠."북한 선제공격으로 인한 지휘관 전사, 그리고 고속정 침몰. 승전이냐 패전이냐 논란이 있지만,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이 '승전'이라고 말한다."제2연평해전이 패전이라고 하는 시각도 있지만 전투에 참가한 입장에서는 절대 패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제 공격을 당하기는 했어도 같은 편대 358호의 보복 응징으로 적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357호가 전투에서 침몰한 것이 아니라 예인을 하던 중 침몰했기 때문이죠."2019년 전역이 예정된 이 원사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청수지원정 정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해상에 머물러 있는 바지선과 함정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정이다. 그는 전역 후 안보교육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제2연평해전을 통해 겪은 남북대치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다."2년 전 영화 '연평해전'이 상영되면서 국민들이 서서히 관심을 가져주시기 시작했어요. 사실 나라는 군인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지키는 거예요. 저마다 나름대로 안보의식을 갖고 국방에 대해 단합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국민으로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죠."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해영 원사는?▲ 1964년 8월 25일 출생▲ 1983년 12월 8일 해군 부사관 입대▲ 1984년 5월 26일 임관▲ 현계급 진급일 2008년 12월 1일-주요보직▲ 1984년 APD 전남함▲ 1991년 DDH 전주함▲ 2001년 FFK 전남함▲ 2002년 PKM 357정(제2 연평해전)▲ 2007년 PCC 성남함▲ 2017년 라-112호정 정장-수상경력▲ 1999년 참모총장 표창▲ 2002년 대통령 전투유공 표창이해영 원사가 27일 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 정박된 청수지원정에서 급수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이 원사는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 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호 갑판장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2017-06-27 김민재

[인터뷰… 공감]화상통화로 만난 김성중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장

증축공사 95% 진행 신축건물 유지·관리… 내년 30주년 행사준비가 목표최첨단 소음방지·소화시설에 50㎾ 태양광 발전 설비 다른 나라 부러움 사세종기지 주변은 온난화 '미미' 기온·강수량 등 상시 관측·자료 분석 중팀워크 위해 운동 프로그램인 'S리그'와 분야별 강의 '아카데미' 등 실시1988년 2월 17일. 대한민국 극지 진출의 '시발점'인 세종과학기지가 남극대륙 서북쪽 끝인 사우스쉐틀랜드 군도 킹조지섬에 문을 연 날이다. 이때부터 1년 단위로 대한민국 월동대가 세종과학기지로 파견돼 '미지의 세계' 남극과 만났고, 쉼 없는 탐험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내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30주년을 앞두고, 기지 연구동과 연구원 숙소를 대폭 증축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해 12월 세종기지에 파견돼 활동기간 절반가량이 지나고 있는 우리나라 월동대의 임무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이번 월동대 파견은 1988년 2월 이후로 꼭 30번째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남극 세종과학기지입니다. 잘 들리십니까."지난 16일 오전 10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극지종합상황실.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김성중(52)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장이 인사말을 건넸다.한반도와 세종기지는 시차가 딱 12시간이다. 남극 현지시간으로는 오후 10시, 인천에서 1만7천200㎞ 떨어진 지구의 남쪽 끝에 있는 김성중 월동대장과 극지연구소 화상통화시스템으로 연결됐다. 통화 연결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세종기지가 있는 서남극 최북단의 킹조지섬은 한반도와의 시차만큼이나 계절도 정반대다. 한반도의 겨울철에 세종기지는 가장 활동하기 좋은 여름철이고, 한반도에 푹푹 찌는 불볕더위가 찾아온 최근에는 세종기지가 한겨울이다. 세종기지의 겨울은 해가 뜨는 시간이 하루에 4~6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김성중 대장은 "남극의 겨울은 추운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고, 태풍 수준의 저기압으로 며칠씩 강풍이 불고 계속 폭설이 내린다"며 "지난주까진 블리자드(남극에서 일어나는 거세고 찬 바람을 동반한 눈보라 현상)로 고생했는데 다행히 오늘(인터뷰 당일)은 영하 5℃ 정도로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 말했다. 남극 생활은 혹독하기 그지없지만, 아름다운 순간들도 선사하곤 한다. 여름철에는 기지 주변에 펭귄, 물개, 고래 같은 다양한 동물들이 몰려다닌다. 기지 인근 바다인 마리아 소만에서 고래 떼가 물을 뿜으면서 빙하와 어울려 헤엄치는 평화로운 광경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도 남극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세종기지에는 김성중 대장을 포함해 현재 17명의 월동대원이 머물고 있다. 남극의 여름철인 올 초까지 하계연구대와 기지 증축공사팀이 기지에 있었지만, 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접어들자 지난 4월 철수했다. 17명뿐인 월동대원이 하루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야 한다. 사실상 '얼음감옥'에 갇힌 셈이다. 김성중 월동대장은 극지연구소 극지기후과학연구부 책임연구원으로 기후변화를 연구해온 전문가다. 하계연구대 소속으로 남극의 여름철 한 달 정도 세종기지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1년가량을 남극에 머무는 월동대는 처음이다. 그는 "현재 95% 진행된 세종기지 증축공사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신축건물을 유지·관리하고, 내년 세종기지 3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게 이번 월동대의 가장 큰 목표"라며 "세종기지 증축은 다음 여름철인 올해 말쯤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1988년 준공한 세종기지는 그동안의 유지·보수에도 불구하고 부식이 극심해 건물 내구성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소음과 진동에도 취약하다고 한다. 정부는 세종기지 하계연구동 2곳과 하계숙소동 2곳을 철거하고 2개의 건물로 통합하는 기지 증축을 결정해 지난해 10월 착공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세종기지 연구공간은 기존 대비 약 80% 넓어질 전망이다. 김성중 대장은 "새 건물은 외벽 단열 방식, 방과 방 사이 소음방지시설, 소화시설이 최첨단이고, 특히 새로 도입하는 50㎾ 규모 태양광 발전 설비는 인근 다른 나라 과학기지에 없다"며 "인근 다른 나라 기지 월동대원들이 최근 견학했는데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고 설명했다. 기지 증축공사로 바쁜 와중에도 세종기지 제30차 월동대는 지질·생물·고층대기(우주)·대기·기상·해양분야에서 다양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리아 소만의 빙벽이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 빙벽이 얼마나 빨리 녹아 무너지는지 관측하고 있다. 극지는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를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빙벽 또는 빙하의 후퇴를 파악하는 게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연구다.김성중 대장은 "남극지역은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기존 논문에서 많이 밝히고 있는데, 세종기지 주변은 기온이 크게 상승하지 않고 있다"며 "원인 파악을 위해 대기의 기온, 풍속, 풍향, 기압, 강수량 등을 상시 관측하고, 관측자료를 분석 중"이라고 했다. 김성중 월동대장은 대원 간 팀워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세종기지 월동대원 17명은 분야별 핵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최정예 전문가들이다. 각각의 대원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맡아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팀워크가 무너지거나 한 명이라도 건강이 좋지 않아 임무 수행이 안 되면, 나머지 대원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월동대의 화합을 다지고, 대원들의 건강을 꼼꼼히 챙기는 것은 월동대장의 주요 임무이기도 하다. 김 대장은 인터뷰 내내 대원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성중 대장은 이른바 'S리그'(세종리그)라는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어 족구, 배드민턴, 윷놀이, 장기, 컴퓨터게임 등 5종목을 두고 매주 화요일 오후에 팀별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연말에 최종 우승팀을 정한다고 해서 '리그'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게 김성중 대장 얘기다. 해가 있는 낮에는 대원끼리 주변 트레킹이나 눈썰매를 즐긴다고 한다. 대원 17명 모두가 각 분야별 전문가이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각자의 분야를 강의하는 '세종아카데미'도 열고 있다. 주변 기지 대원과의 소통을 위해 영어가 서투른 대원에게는 김성중 대장이 직접 일주일에 2번씩 영어강의도 한다. 김성중 대장은 "이달 21일에는 절기상 남극에서 가장 겨울이 긴 날이라는 '남극 동지(Midwinter's Day)' 행사가 인근 칠레 공군기지 주최로 열리는데, 주변 기지 대원들이 자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며 친목을 다지는 연중 가장 큰 행사"라며 "우리 대원들도 한복을 입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 중"이라고 말했다. 세종기지 대원들의 활동과 일상은 대원들이 매달 직접 제작해 극지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웹진 '눈나라 얼음나라'에서 볼 수 있다.최근의 지구 온난화는 45억년에 달하는 지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의 기후변화 현상이라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이 같은 숙제를 인류가 공동으로 풀어가기 위해 우리나라도 극지연구에 동참하고 있다는 김성중 대장의 자부심이 컸다. 김성중 대장은 "극지연구소로 복귀하면 남극에서 직접 관찰한 기후변화 정보를 활용해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할 계획"이라며 "현재 극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후변화가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김성중 대장은?▲1965년 충남 계룡시 출생▲충남대학교 해양학과 졸업▲미국 텍사스A&M대학교 해양물리학 석사▲미국 텍사스A&M대학교 해양물리학 박사▲2002년 캐나다 기후모형연구소 박사후 연구원▲2003년 미국 듀크대학교 전임연구원▲2008년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2014년 극지연구소 극지기후변화 연구부장▲2016년~현재 남극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장지난 16일 오전 10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극지종합상황실에서 남극 현지에 파견된 김성중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장과 경인일보 기자가 화상통화 시스템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극지연구소 제공남극 세종과학기지 전경. 오른쪽 대형 회색건물이 증축공사 중인 신축건물, 빨간색 건물들은 기존 건물. /세종과학기지 제공

2017-06-20 박경호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극지연구소 공채 전문가 17명… '연구반·지원반·유지반' 나눠 운영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는 극지연구소가 공채를 통해 선발한 분야별 전문가 17명으로 구성됐다. 몇 차례 월동대 경험이 있는 대원도 있고, 남극에 처음 파견된 대원도 있다. 세종기지 월동대장은 주변 기지 간 국제협력업무를 맡으면서 기지 운영을 총괄한다. 기지 총무는 물자 관리와 하계 연구원 지원 등 기지 운영 실무 전반을 책임지는 '살림꾼' 역할이다. 실무팀은 '연구반', '지원반', '유지반'으로 나뉜다. 연구반에는 분야별로 지질연구원, 생물연구원, 고층대기연구원, 대기연구원, 해양연구원, 기상대원이 소속돼 있다. 기상대원의 경우 기상청에서 파견된다. 지원반에는 극지연구소나 외부기지와의 유·무선 통신기기를 관리하는 통신대원, 연구 등 해상활동을 지원하는 해상안전대원, 식사를 준비하는 조리대원, 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대원이 있다. 군 특수작전 경력자여야 하는 해상안전대원은 국방부 장관 추천이 있어야 하고, 의료대원은 극지연구소와 협약을 맺은 가천대 길병원에서 파견한다.유지반은 기지의 전반적인 시설을 유지·관리하고 있다. 모두 해당 분야의 관련 자격증과 상당한 경력이 있는 전문가들로 기계설비대원 2명, 중장비대원, 전기대원, 발전담당대원이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남극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원. (윗줄 왼쪽부터) 서동경 의료대원, 이현수 중장비대원, 정상준 기계설비대원, 박성윤 조리대원, 이정의 기계설비대원, 김성중 대장, 백승민 총무, 윤정구 발전담당대원, 최동수 기계설비대원, 이준휘 기상대원. (아랫줄 왼쪽부터) 한동원 해양연구원, 김찬양 생물연구원, 이원석 고층대기연구원, 성대경 대기연구원, 이재일 지질연구원, 우종현 해상안전대원, 김상욱 통신대원. /세종과학기지 제공

2017-06-20 박경호

[인터뷰… 공감]'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

보험 영업으로 제2의 인생 시작했지만빚보증에 전재산 날려 방황하기도재소자와 만남이 터닝포인트로도전 메시지 전하며 치유의 힘 얻어"가난했지만, 나의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어둠의 밤하늘 등불이 나를 밝혔다. 진심과 겸손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1984년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 성장했고, 나머지 인생은 함께 더불어 사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밝혔다.LA올림픽에서 효자종목인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한 김원기 선수는 전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인기 스타로 급부상했다. 무엇보다 금메달이 꾸준한 노력과 굵은 땀방울이 이루어낸 값진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 후일담은 국민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며 인기를 누렸다. 김 회장은 "시합하다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한 게임 한 게임 이겨나간 것이 기적같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성과를 가져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직후인 1985년 1월 삼성생명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사회를 제대로 알고 배우자는 생각에서 운동팀을 떠나 필드경험에 뛰어들었던 것. 보험모집·앙케트조사 등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어쩌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경우에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려고 한다"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실제 지난 2000년 10월 삼성생명 보험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말단 보험설계일에서 총무과 대리·영업소장·본부 업무과장·교육담당 차장 등을 거칠 정도로 능력발휘를 했다.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운동밖에 몰랐던 김 회장은 사회적응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까운 사람의 빚보증 선 게 잘 못되는 바람에 전재산을 날린 것은 물론 한동안 계속 그 빚을 갚아야 했고, 막상 갈 데가 없어서 선배가 하는 세차장 등에서 수개월동안 일을 하기도 했다.하지만 김 회장은 현재 인생의 금메달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지난 2002년부터 현재까지 교도소의 재소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것.김 회장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다고 한다. 은퇴 후 주변의 도움으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이어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허전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찾은 게 재소자들과의 만남이었다. 김회장은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오랫동안 이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해왔다. 현재 '도전, 나는 나를 넘어섰다'란 주제로, 영등포·안양·인천·춘천 등 한해 수십여차례의 전국 교도소 순회 강연을 하면서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국가대표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과 자신만의 성공철학을 소개하며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한다.김 회장은 "그들에게 잘난체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과 부족한 체력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야기를 풀어주면서 재소자들의 마음을 연다"며 " 비록 가난했지만, 나의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는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실상 무료 강연을 펼치자 사람들은 제가 하는 걸 '봉사'라고 한다"며 "하지만 교도소 강연을 돌면서 내가 얻는 것이 더 많다. 그들이 손편지를 나에게 전달할 때 그 치유의 힘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밝혔다.자식이 없는 김 회장은 지난 1998년부터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는 모교 후배들을 마음으로 품고 부모역할을 하고 있다. 레슬링 선수 7명, 여자 태권도선수 2명 등 총 9명에 이른다.김 회장은 "중2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당시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며 "우리 후배들을 위해 무슨 역할을 할수 있을까 고민하다 편모·편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의 부모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자식들에게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인생계획과 인생진로 등을 함께 고민한다. 한달에 30만원씩의 지원금도 주고, 연말에는 자식들을 다불러 안산 평화의집, 을지로 거리의 천사, 음평 천사원, 태릉선수촌 등을 3박4일동안 돌며 봉사활동을 하면서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한다.10여명의 자식을 보호하는 것은 김 회장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김 대표는 "초기에는 정말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면서도 "지금은 보람을 느낀다. 최근에 첫째 아들과 셌째아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 그 무엇보다 힘든시기를 거쳐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김 회장의 지원 덕분인지 함평중학교 레슬링부가 최근 열린 제4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레슬링 대회에서 남자부문 금·은·동메달을 모두 휩쓸면서 레슬링 본고장 함평의 명예를 다시 한번 떨쳤다.김 회장은 꿈이 있다. 미래세대를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그는 자신의 경험이 쓰라렸기에 후배들은 자신과 같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김 회장은 "운동선수는 사회를 모른다. 사회를 살아 가는 전반적 지식이나 방법이 부족한 게 사실. 선수들이 언젠가는 운동을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적응 프로그램, 컨설팅 등이 없어서 답답하다"며 "그것도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 회장은 마지막으로 "길이 어두운 사람들을 위해 등불을 비춘다는 마음을 갖고 보니 제앞이 환해지는 이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글/이경진기자 lkj@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김원기 회장은?-경력▲1962년 전라남도 함평출생▲함평농업고등학교, 전남대학교 졸업▲전남대교육대학원 운동생리 석사, 경희대체육대학원 체육복지정책 박사▲삼성생명 교육차장▲함평군 레슬링협회장▲엔에스하이텍 대표이사▲꿈메달 스포츠봉사단 회장-수상▲1983 터키야사도구 국제대회 은메달(터키)▲1984 콩코드국제대회 금메달(미국)▲1984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미국)▲1985 슈퍼챔피언대회 은메달(일본)▲1984 체육훈장(청룡장)수상▲1985 대한민국 최고상 수상▲1989 성곡문화재단 체육대상 수상▲2004 선행칭찬본부 칭찬상 수상▲2011 미래지식경영원 최우수 기업 선정▲2011 창업진흥원 혁신적 기업가상 수상▲2012 재능기부 인증업체 선정▲2013 서울지방조달청 표창장▲2013 대한민국예술·문화인 대상(체육부문)▲2014 전남도지사 표창(기업봉사)▲2015 한국창조경영인협회 최우수 신창조인상 수상▲2015 신지식인 인증(문화예술부문)후배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은 "미래세대를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1984년 LA올림픽이 끝난 후 귀국한 선수단이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당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원기 선수와 어머니의 모습. /김원기 회장 제공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장과 함평중·함평골프고 레슬링팀 선수들이 함평군 체육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원기 회장 제공

2017-06-13 이경진

[인터뷰… 공감]고려불화 그리는 월제(月齊) 혜담스님

전쟁 많던 시기 참회위해 집에 부처님 모신 듯… 조선초 불교 박해로 자취 감춰일본이 강점기때 가져다가 국보급 보물로 지정 현존 200여점 중 국내 20여점뿐아이러니하게 일본인 도움으로 300여점 재현 한국 문화재로 알리려 수십년 노력정교하고 화려해 고려 전후에 없던 미술사조… 복원 작품이라도 잘 보존했으면하얀 빛의 투명한 사라가 부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사라에 정교하게 박힌 금빛 문양이 화려한 빛을 낸다. 가늘게 뜬 긴 눈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그 생경한 모습이 낯설다. 그런데 묘하게 자꾸 시선을 잡아당긴다. 이토록 아름다운 부처를 본 적 있을까.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고려불화 중 하나인 '수월관음상'을 만났다. 그리고 월제 혜담스님을 만났다. 혜담스님은 이곳의 수월관음상을 그린 작가다. 이곳의 수월 관음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수월관음상을 혜담스님이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불화가 채 20여 점도 남아있지 않은 이 척박한 땅에서 혜담스님은 300여 점이 넘는 고려불화를 재현하는 작업을 40여년간 이어왔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938년 즈음부터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물물교환이 성행하면서 불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됐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 불화는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이 즐기는 귀족 문화였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이나 화공, 화사를 모셔와 원하는 대로 불화를 그리게 할 만큼 성행했다. 조선 초기까지 500여년 간 고려불화가 이어졌다."당시 문헌을 토대로 보면, 워낙 내란·외침이 많아 늘 전쟁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살상이 이루어지다 보니 그 죄를 참회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집 안에 부처님을 그림으로 모셔두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 수요는 어마어마 했을 거라 추정하구요."조선 초 세종 때 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불교가 말살되다시피 박해를 받았고 고려불화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절에서조차 불화를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민가의 불화들은 오죽했겠어요. 고려불화 자체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던 겁니다." 스님은 그 이후의 역사를 몹시 안타까워 했다.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고려불화를 일본으로 많이 가져갔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은 불교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문화재로서 지닌 가치를 알아차린 거죠. 그때 당시 일본 문화위원회 같은 정부조직에서 이를 가져다 국보급 보물로 지정한 게 벌써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현존하는 고려불화는 200여 점 정도다. 이 중 180여 점을 일본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려불화는 그나마도 벽화로 그려져 있거나 경서에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젊은 시절 혜담스님은 수월관음상을 책에서 접했다. 그 모습에 매료돼 고려불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고려불화 입장에선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림에 소질이 있는 스님의 눈에 띈 셈이다. "수월관음상을 보고 큰 매력을 느꼈는데, 관세음보살을 보고는 '아, 내가 불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리려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료도 거의 없고 절에는 탱화의 유형만 보존되고 있을 뿐 고려불화에 대해서는 전무했어요." 막막하던 그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일본 한 박물관의 부관장이던 오야마 노리오 씨가 자료를 보내주었다. "오야마 노리오씨가 수십년간 고려불화의 사진이나 재현하는 데 필요한 문헌 등 자료를 보내주었어요. 그 사람은 고려불화가 갖는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여겨 저를 도와 불화가 현재에도 재탄생되기를 바란 거죠. "고려불화의 특징은 매우 정교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옷 안으로 비치는 부처의 팔뚝과 몸은 고려 불화에서만 볼수 있는 섬세한 표현이다. 순금가루를 안료 삼아 문양을 그려넣었다. 서양 르네상스 시대보다 300여년을 앞서 시작됐지만 훨씬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졌다는 평을 받는다. "서양 종교화들은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되는데, 고려불화는 비단에 석채(천연안료)로 제작됐고 문양들이 매우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돼 있어요.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왕족, 귀족들이 출가를 했을 만큼 불교문화가 융성했기 때문에 고려불화도 화려하게 그려지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고려불화의 진가는 해외 미술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다. 스님은 2014년을 시작으로 3년 연속,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프랑스 국립살롱전에 초청을 받았고 해마다 특별상을 수상했다. "고려불화는 고려 전후에는 전혀 없었던 미술사조라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어떤 시기에도, 어떤 문화에도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불화는 없었어요. 해외에서도 고려불화가 가진 희소성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걸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게 참 안타깝죠."고려불화를 다시 우리 곁에 돌려놓기 위해 노력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편견이 가장 그를 힘들게 했다. "해외에 제가 재현한 고려불화를 내놓으면 아주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고려불화 자체가 일본 문화재라고 인식하거든요. 그동안 일본에서 자국의 문화재로 보존하면서 해외에도 열심히 알려왔고. 그런데 제가 나타나 한 30년 동안 미술계 뿐 아니라 국제학술대회에 나가 고려불화가 우리 문화재임을 알렸어요. 일본인들이 절 참 싫어합니다. 그래도 이제야 우리 것이라 인식하는 시선들이 좀 생겼어요. 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멀었죠."국내는 고려불화를 '문화재'보다 '종교화'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고려불화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입니다. 제가 고려불화를 알리기 위해 30년을 떠들었는데도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어쩌면 좋을까 싶습니다. 세월이 너무 흘러버려서 이제 우리 것이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도 못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그 맥을 잇기 위해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 해서 젊은 사람들이 밥벌이할 수 있을까요. 작업도 일반 미술과 다르게 매우 난해하구요. 이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헤아릴 수 없어요. 젊은 세대에게 내 길을 걸어가라고 권하며 그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은 그저 복원한 작품이라도 보존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고려불화를 그릴 수 있게 도와준 오야마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걸 다 뺏긴 이 상황 속에서 스님 혼자 어떻게든 불화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한국 정부가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스님이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있다. 한국사람들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다' 그 말이 참 아프게 다가왔지만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으니 맞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우리 것을 빼앗아 간 이들에게 듣는 쓴소리에 고개를 숙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린 게 아닌가.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혜담스님은?▲ 1980년~ 고려불화 재현▲ 1985년~ 대한불교보문종 계태사 주지▲ 2005년 12월 대통령 표창장 수상▲ 2009년 3월 수원시 공로상패 수상▲ 2009년~ 사단법인 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 이사장▲ 2009년 9월 조계종 중앙신도회(문화재환수위원회) 회장 감사장 수상▲ 2014년 11월 스리랑카 상카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취득▲ 2014~2016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국립 살롱전 초청, 특별상 수상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혜담스님이 현재 진행 중인 수월관음상을 그리고 있다.맨 위에서부터 수월관음상, 오백나한상, 관경16관변상, 열반상.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 제공

2017-06-06 공지영

[인터뷰… 공감]물범 생태연구활동 전문가 DMZ자연사랑회 진종구 서정대 교수

■물범에 관심을 둔 이유영유권 분쟁 환경자료 중요성 확인독도보존 노력 국제사회 전파 목적일제에 의한 '강치 절멸' 사실 접해뼈저린 교훈 잊지않기 위해서 연구■백령도 점박이 물범에 대해11월 전후 북상해 새끼 낳고 남하남북 해역 자유로이 헤엄쳐 다녀빙하기 무렵 옛 황하유역에 격리서해서 서식한 향상 진화 개체군■물범·어민 '불화' 공존 방법 없나미역채취 어민들 서식처 침범 심각어망 훼손 등 어민엔 '불편한 손님'인공어초로 물고기 생존환경 보장바다에 물범 휴식공간 조성도 필요■DMZ자연사랑회 소개·향후 계획학생과 함께 생태관찰·보호 캠페인경기도와 협력 민간활동 전개 계획한강청과 협조 강화 모니터링 확대중고생 이해 돕기위해 책자 발간도"점박이 물범은 남북한 해역을 자유로이 헤엄쳐 다닙니다. 그래서 남북한 공존과 화해를 상징하는 동물이라 할 수 있죠. 남북 공동연구가 이뤄지면 더욱 좋고요."진종구 교수는 현재 양주 서정대학교에서 아동청소년보육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진 교수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독도와 비무장지대(DMZ)의 생태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순수민간단체(NGO)인 DMZ자연사랑회를 만든 것도 2005년 이 무렵이다. DMZ자연사랑회는 처음엔 DMZ 주변 생태환경을 카메라에 담아 전시하는 활동으로 시작했다. 서해 NLL(북방한계선) 생태연구에 뛰어든 것은 올해 2월부터다. 이들의 연구목적에 공감한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점박이 물범과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 진 교수가 이끄는 DMZ자연사랑회는 백령도에서 어민들의 미역채취 활동으로 물범 서식처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해 상 NLL 생태보호의 시급성을 알리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두고만 보다가는 조만간 멸종위기 야생동물(2급)인 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서 아예 모습을 감출지 모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사회적 관심을 유도해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 진 교수를 최근 서정대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물범 생태연구활동과 앞으로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점박이 물범에 관심을 둔 동기는 무엇입니까?원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 관련 법을 연구하다 우연히 2002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시파단 섬 영유권 분쟁에 대해 '환경자료를 지속해서 축적해 온 말레이시아가 영유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한 판례를 찾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세계 최초의 독도 다이옥신 연구를 진행했고 결코 일본이 확보할 수 없는 환경자료를 축적했습니다. 이런 연구는 우리 국민이 독도 환경보존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국제사회에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던 중 과거 일제에 의해 독도 강치(큰 바다사자의 일종)가 절멸하게 된 사실을 접하게 됐고 이런 뼈저린 교훈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점박이 물범을 연구하게 됐습니다.-점박이 물범은 어떤 동물입니까?점박이 물범은 원래 육지에서 살았으나 천적 등을 피해 안전한 바다로 이주한 생물입니다. 오랜 세월 바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발과 뒷발이 지느러미처럼 퇴화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폐(허파)로 숨을 쉬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해양 포유류기 때문에 통상 30분 정도 잠수하면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최대 1시간까지 잠수할 수 있습니다. 또 코와 입 주위에 길게 자란 수염은 민감한 신경과 연결돼 있어 미세한 물의 파장도 감지해 물고기 등을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털갈이가 끝나는 11월을 전후해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중국 보하이만 랴오둥 반도 등지로 이동, 차디찬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다시 백령도 근해로 남하하는 회유성 특징이 있습니다. 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북극해를 중심으로 서식하는 점박이 물범 중 최남단에 서식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원래 점박이 물범은 북위 45도 이북 북극권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는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합니다.-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 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북태평양 개체군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던 점박이 물범이 빙하기 무렵 바다경계가 변화되면서 옛 황하 유역에 격리돼 서해를 중심으로 서식해 왔다고 추정됩니다. 격리된 개체군은 보하이만 북쪽 육지에 가로막힌 채 더 북상하지 못하고 그나마 제일 추운 보하이만의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먹이가 풍부한 백령도 근해로 내려와 먹이활동을 해 북태평양 개체군과는 다른 독특한 개체군으로 향상진화를 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이 한때 하늬해변과 콩돌해안 등에서도 발견됐다는데 지금은 왜 물범 바위로 휴식처를 옮겼나요?1940년대 8천여 마리에 달하던 점박이 물범이 멸종위기에 이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간섭입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많은 피난민이 백령도로 이주해 주민 숫자가 늘었고 이는 해안가 점박이 물범들에는 상당한 위협요인이 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물범을 물개로 잘못 인식해 해구신을 확보하기 위해 마구 포획했습니다. 또 해안가에 출몰하는 점박이 물범을 무장공비로 오인, 사격을 가해 점박이 물범은 사람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결국, 점박이 물범은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해안가를 벗어나 인간의 간섭이 덜한 바다 한가운데 물범 바위와 연봉, 두무진 바위 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물범 바위에 상륙하는 일이 잦아지면 물범 바위도 더는 안전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값이 나가는 '지네발 미역'을 따기 위해 많은 어민이 물범 바위를 침범하면서 점박이 물범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점박이 물범과 어민이 공존하는 방법은 없습니까?사실 어민 입장에서는 점박이 물범이 썩 달가운 이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망과 어구에 걸려든 물고기를 훔쳐 먹고 심지어 어구까지 훼손하니까요. 이러한 불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를 해소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서해 어족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첫 번째 방안으로는 인공어초(人工魚礎)를 설치해 물고기 생존환경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어획량이 늘어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중국 저인망 쌍끌이 어선의 출몰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 해경 당국의 단속활동도 필요하지만, 중국 정부와 협상을 통해 원천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물범 바위나 연봉과 같은 점박이 물범의 휴식공간을 바다에 조성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DMZ자연사랑회는 어떤 단체입니까?DMZ자연사랑회는 2005년 설립해 경기도에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처음에는 DMZ 주변 풍경을 촬영해 파주시민의 날에 전시회를 열어오다 올해 2월부터 본부를 서정대학교 안으로 옮겨 학생들과 더불어 DMZ 생태보호 캠페인과 생태관찰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전문가들과 함께 DMZ와 NLL의 자연생태를 연구하고 있고 연구활동에 드는 경비는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DMZ자연사랑회는 경기도 DMZ정책관실과 협력해 DMZ와 관련된 각종 민간활동을 벌일 계획입니다.-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물범 보호활동을 벌일 예정인지?지난 2011년부터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과 함께 백령도 점박이 물범 모니터링을 매년 2회 이상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범 보호활동은 순수 민간차원의 진행도 좋지만, 정부 당국과 공동으로 진행하면 정부의 즉각적인 대책이 마련되기 때문에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한강유역환경청과의 협조를 강화해 백령도 점박이 물범의 모니터링을 확대하고 가능하다면 물범에 위치추적기(GPS)를 부착, 회유 경로를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또한, 민간차원에서 점박이 물범 보호를 위한 캠페인을 계속 전개하기 위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점박이 물범에 대한 책자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우리 중고교생들이 점박이 물범의 생태를 이해하고 공존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최재훈·김민재기자 cjh@kyeongin.com 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진종구 교수는?▲ 전북 김제 출생▲ 고려대 정치학 석사▲ 부경대 환경공학박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으로 27년간 활동▲ 현 서정대학교 교수▲ DMZ자연사랑회 회장DMZ자연사랑회 회장 진종구 교수는 멸종위기 동물인 점박이 물범을 보호하려면 서해 북방한계선(NLL) 백령도에서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생태환경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진 교수가 점박이 물범의 활동을 연구하며 지난 2014년 발간한 모니터링 보고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멸종위기에 놓인 점박이물범의 대표 서식지인 백령도 '물범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물범들. /경인일보 DB

2017-05-30 최재훈·김민재

[인터뷰… 공감]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50년 역사와 함께한 김세레나 수녀

응급실·수술을 앞둔 환자들그들의 두려움 위로하며'괜찮다' 다독여주는 게 간호의 시작환자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고마움 전해그럴 때 힘 닿는 데까지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여세레나 수녀는 '수술실 기도하는 수녀'로 불린다백발이 성성한 수녀와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 손으로 전해지는 훈훈한 온기가 온 몸에 은근하게 퍼졌다. 백발의 수녀는 성 빈센트 병원이 이 땅에 뿌리 내릴 때부터 함께 했다. 그 세월은 온통 환자를 간호하는 데 헌신했다. 아마도 그의 손이 따뜻했던 이유는 세월이 전해 준 '사랑' 때문이리라.올해는 성빈센트 병원이 문을 연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22일 수원 지동에 위치한 병원에서 김세레나(75·본명 김정선)수녀를 만났다. 백발의 수녀는 그 오래된 세월의 고락을 가장 잘 아는 이다. 세레나 수녀는 1963년 성빈센트 병원 설립을 구상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는 사회가 너무 열악했어요.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너나할 것 없이 가난에 허덕이던 때였으니까. 병자들은 넘쳐나는데, 의료시설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으니까 당시 수원교구에서는 작은 병원이라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당시는 한창 전후 복구가 이루어질 때였다. 수도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조차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을 만큼 모두가 헐벗은 시절이었다. 당시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주교는 독일 파다본에 있는 성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선교활동을 위해 선교지역을 물색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독일 수녀회를 설득했고, 병원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수녀 지원자 9명을 독일 모원으로 파견해 수녀로 양성했다. 그것이 성 빈센트 병원의 초석이 된 성빈센트 수녀원의 출발이었다.1965년 본격적인 병원 설립을 위해 아델하이드 수녀를 비롯해 3명의 수녀가 한국에 파견됐다. 세레나 수녀는 이 3명의 수녀과 함께 병원 설립을 도왔다. 그는 "원래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병원을 짓기 위해 온 독일 수녀들을 돕기 위해 간호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독일 수녀들은 매우 원칙대로 일하시는 분들이었는데, 병원 설립을 허가받으려고 당시 관계기관을 한달 동안 찾아가서 어렵게 병원을 세웠어요. 이 병원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원칙대로 세워진 병원 입니다"라며 웃었다.1967년 6월 3일 개원한 성 빈센트 병원은 가톨릭의과대학 제5부속병원으로 195병상을 갖춘,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병원이었다. 경기남부지역 최초의 대학병원이기에 전국 각지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빈자를 위해 설립된 만큼 성빈센트 병원은 1967년부터 20병상을 책임 무료병동으로 정해 '자선진료소'를 운영했다. "수원 전역이 허허벌판일 때지만 특히 연무동, 화서동 같은 곳은 극빈층들이 많았어요. 이 곳은 홍수라도 나면 곧장 폐허가 돼 천막을 치고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죠.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이 병원에 와서 진료를 받았고 이게 소문이 나 나중엔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어요. 알코올중독증, 페니실린 쇼크 환자들이 특히 많이 왔는데, 여기서 치료를 받고 나갈 땐 혹시 밥이라도 굶을까 싶어 식구가 몇인지, 어디 사는지 등 형편을 물어보고 독일에서 들여온 물품을 챙겨주곤 했죠. 밤에는 수녀들과 함께 아예 보따리를 싸고 나가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구호물품을 나누어 주었어요." 당시는 병원 앞에 아기를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병원이라고 소문이 나다보니 병원 앞에 수시로 아기들이 버려져 있었어요. 당시 원장 수녀가 이 아이들을 전부 거둬서 정성껏 돌봐주었어요. 가난해서 벌어진 일인데, 마음이 너무 아팠죠."세레나 수녀가 간호과장으로 일하던 1978년부터 1982년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매일같이 시위를 하고 거리에는 최루탄 연기가 난무하던 때였다. "서울 뿐만 아니라 수원에서도 거의 매일 대학생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어요. 아주대 대학생들이 시위하다 경찰이 던진 최루탄을 맞고 병원에 실려오는 일이 수두룩했죠. 경찰 몰래 병상에 다친 학생들을 눕혀 치료해주는 일도 많았어요. 노동운동도 한창일 때라 간호사들이 노동쟁의에 나서기도 했어요. 병원에 고립돼 시위를 이어가던 간호사들에게 당시 교학감을 맡고 있던 수녀가 무조건 먹고 마실것을 들여 보내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간호사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어요. 다행히 며칠 지나지 않아 병원과 간호사들 간 요구사항이 합의돼 시위도 끝이 났는데, 그때도 교학감 수녀는 돌아온 간호사들을 무조건 안아주라고 하셨어요. 그때 많이 배웠어요. 사랑으로 감싸안는 일을." 세레나 수녀의 세월은 병원의 역사이기도 하고 우리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온전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기도 하다. "1995년에 병실마다 흩어져 있는 암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같이 기도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기초간호를 시작했어요. 성빈센트 병원의 '호스피스' 진료의 시초라고 볼 수 있어요. 당시만 해도 호스피스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할때 였어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 하는 암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숱하게 봐왔어요. 특히 보호자들의 경우 환자 사후에 2차적 고통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호스피스는 수녀 뿐 아니라 의사, 간호사, 보호자, 환자 모두가 한 팀이 돼 환자가 삶의 의미를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돕는 거예요." 어쩌면 삶의 끝 자락일 지 모르는 순간, 주어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도록 돕는 일은 평생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수녀가 반드시 해야 했던 숙명이었을 것이다. "우리 병원이 호스피스 진료를 하는 건 마치 '신념'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꼭 해야만 하는 운명이죠."일흔을 훌쩍 넘어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 아직도 세레나 수녀는 응급실과 수술 대기실에서 환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크게 다쳐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온 아이들이 너무 놀라서 겁에 질려 있는 걸 보았어요. 아이를 안아주며 '괜찮다' 다독였어요. 이게 간호의 시작입니다.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의 두려움을 안아주는 것. 그 모습이 안타까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인데, 환자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꼭 고마움을 말합니다. 그럴 때 더 용기가 나고 힘 닿는 데까지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수술실 기도하는 수녀'라는 별명도 붙었다. 50년의 긴 세월을 이야기 하는 세레나 수녀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그 긴 세월을 거쳐 이제 빈센트 병원은 암 병원을 개원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올해는 성빈센트 성인 탄생 400주기이면서 빈자들을 위해 이 땅에 뿌리내린 우리 병원이 50년이 되는 참 뜻깊은 해입니다.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랑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잊지 마세요."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성빈센트 병원 주요 연혁-1965년 3월 성 빈센트 병원 기공식-1967년 6월 가톨릭대학교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1967년 11월 자선진료 개시-1999년 6월 신축된 본관(현 성 빈센트 병원)으로 이전 -2009년 1월 경기도 제1호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 지정-2012년 12월 '사랑으로 하나되는 세계 속의 성빈센트' 새 비전 선포-2015년 6월 암병원 건립 및 본관 증축 기공-2017년 1월 개원 50주년 슬로건 발표성빈센트 병원이 문을 연 지 50년 동안 환자들을 위해 평생 사랑을 실천한 백발의 김세레나 수녀가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1965년 3월 성빈센트병원 기공식1965년 척박한 의료의 불모지 수원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자비의 씨앗이 뿌려졌다.1967년 6월 가톨릭대학교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총 5만3천110.7㎡ 부지에 연건평 1만5천800㎡,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8개 임상과, 195병상의 현대식 병원으로 개원했다.2009년 경기도 제1호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 지정2008년 보건복지부 말기암환자 호스피스 지원 상위기관으로 선정된 것에 이어 수준 높은 완화의료서비스를 펼치는 기관으로 인정받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으로 지정됐다.2013년 12월 다빈치Si 로봇수술 도입수원지역 최초로 최신형 다빈치Si 로봇수술 시스템을 도입해 첨단의료를 향해 한발자국 더 나아갔다.2017년 암병원 개원2017년 개원하는 암병원을 통해 환우의 육체적, 정신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까지 돌보는 '빈센트 케어 시스템'을 실현하고, 실력 있는 지역병원, 안전하고 믿음을 주는 병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2017-05-23 공지영

[인터뷰… 공감]이은구 前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1990~1992·1996~1998)

인천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다. 1962년 인천 부평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인 '새나라자동차'가 들어섰다. 비록 일본 자동차를 반제품 상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이전까지 미군 군용차 폐품을 활용한 수공업 형태의 '재생자동차'뿐인 국내 자동차산업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은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다.1966년 '신진자동차'가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을 넘겨받아 자동차 생산을 재개했다. 이후 1976년 '새한자동차', 1983년 '대우자동차'로 바뀌면서 인천 자동차산업의 계보가 이어졌다. 대우그룹 부도사태 뒤인 2002년에는 미국기업인 제너럴모터스(GM)가 대우자동차를 인수했다. 지금의 '한국지엠'이다. 대우자동차 시절 두 차례의 노동조합 위원장(1990~1992년·1996~1998년)을 지낸 이은구(56) 씨는 올해 3월 한국지엠에서 희망퇴직했다.1986년 대우자동차 조립1부에 입사한 지 31년 만이다. 이은구 씨는 노조위원장으로서 회사 측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한편으론 대우자동차가 누린 영광의 시간과 좌절의 순간을 함께 겪었다. 한국지엠의 시대도 그 출발부터 경험했다. 최근 이은구 씨를 만나 대우자동차부터 한국지엠까지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보고 느낀 소회를 들었다. 인천 자동차산업 역사의 단면을 현장 노동자의 시각으로 살피자는 차원이다. 충남 아산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은구 씨는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인천으로 왔다. 아버지는 옛 북구 서운동(현 계양구)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고등학교 등록금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학교만 마치고 17세부터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했다. 일하면서 정비 기술을 배우고, 중장비 자격증도 땄다. 군 제대 이후인 1986년 5월 대우자동차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제조업에 몸담았다. "조립1부에서 시트, 헤드램프 같은 소모품을 조립하는 의장라인에 투입돼 '르망'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입사할 당시는 대우자동차가 GM과 지분을 나눠 갖는 합작회사였어요. 르망은 수출을 위해 GM이 개발하고, 대우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생산했습니다."당시 대우자동차는 합작 관계에 있는 GM과 '월드카(World Car) 전략'이라 불린 국제적으로 분업화된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월드카란 현지 조건에 맞게 설립한 여러 나라의 공장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생산한 똑같은 차였다. 르망은 GM이 개발한 소형차 '카데트'의 국내 판매명이었다. 대우자동차는 르망을 계기로 1987년 3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했고, 내수 중심에서 벗어나 대량 수출을 이뤄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에스페로', '티코', '다마스' 같은 새로운 차량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1992년 대우자동차는 GM이 가진 지분을 모두 인수해 합작관계를 청산하며 홀로서기에 나섰다. 대우자동차는 승승장구하며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회사 내부적으로는 처우문제를 둘러싼 노사갈등이 심했다. 이은구 씨는 1987년 대우차 부평공장 파업 과정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진압을 피해 부평공장 본관 2층에서 추락해 팔다리 여러 군데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1년 동안 투병한 끝에야 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그땐 대기업이라고 해도 중소기업과 임금격차가 크지 않았고, 노동여건도 나빴다"며 "대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던 시기였다"고 했다. 이은구 씨는 1990년 11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제11대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에 선출됐다. 집행부나 대의원을 거치지 않고 평조합원에서 위원장이 된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 "열심히 싸우고 투병 생활하면서 현장에서 굳건하게 일했던 모습이 지지를 받은 것 같습니다. 대우차가 에스페로도 개발하고, 막 뻗어 나가기 시작할 시기라 노사관계가 중요했어요.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임금인상, 경제민주화, 노동자 연대 같은 이슈가 사회적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저도 1991년 2월 대우조선 파업 때 지지성명을 해서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1년 6개월 동안 광주교도소에 갇히고, 해직까지 된 이은구 씨는 계속된 노조의 투쟁으로 복직했다.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조선에서 2년간 근무하고 대우자동차에 돌아오는 게 조건이었다. 그가 대우차 부평공장에 복귀한 것은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내건 '세계경영'이 한창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던 1995년 5월께다. 이은구 씨는 이듬해 11월 제15대 대우차 노조위원장에 또다시 선출됐다. 이 시기 대우자동차는 '라노스'(1996년 출시), '누비라'(1997년 출시), '레간자'(1997년 출시) 등 자동차산업 역사상 유례없이 3개 차량 모델을 한꺼번에 개발하며 확장세를 이어갔다.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이 성공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때이고, 워낙 회사가 잘 나가서 노사관계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임금도 많이 올랐고요. 김우중 회장이 노조 이야기를 많이 들어줬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다른 재벌 총수들과는 달리 노조와 직접 소통했고, 인간적으로도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우조선에 잠깐 근무할 때도 일부러 찾아와 안부도 물었고…."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와 나눈 대담을 엮은 책인 '김우중과의 대화'(2014년 출간)에서 "순번을 정해 직원들 집에서 아침을 먹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들이 '우리 회장님 만났더니 보통 재벌 회장과 다르다'고 얘기하고 다녀요. 그러니까 직원들 생각이 바뀌었죠"라고 했다. 노조 지도자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도 언급했다. 김우중 회장은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채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하지만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그해 11월 한국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이른바 'IMF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력을 잃어갔다. "당시 대우차 노조위원장이면서 대우그룹 노조협의회 의장이었습니다. 대우그룹 16개 계열사 노조를 다 불러서 고통분담을 하기로 한 뒤 임금동결과 후생복지 반납을 먼저 제안하고 정리해고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임기가 끝난 이후인 1999년 결국 대우는 워크아웃(Workout)에 들어갔습니다. 1천800여 명 규모의 정리해고가 이어졌고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GM은 1992년 대우자동차에서 손을 뗀 지 10년 만인 2002년 대우자동차를 전격 인수하면서 국내시장으로 돌아왔다. 이은구 씨는 2006년 현장직을 그만두고, 한국지엠(당시 지엠대우)과 임직원이 함께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인 '한국지엠한마음재단'의 사무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경야독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NGO학 석사를 취득한 뒤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무직으로 옮겼다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국지엠한마음재단으로) 갔다"고 했다. 이은구 씨는 한국지엠한마음재단에서 지역 취약계층을 도우면서 대기업과 지역사회의 상생방안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에 터를 잡은 한국지엠에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김우중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지내서인지 인천경영자총협회나 인천상공회의소 같은 지역 경제단체와도 활발하게 소통했습니다. 대우그룹 본사를 송도유원지로 이전한다는 계획도 있었고요. 한국지엠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부분이 많지만, 대우차 때에 비하면 소통도 적고 조금은 아쉽습니다. 그래서인지 현재 인천시민들도 한국지엠에 대한 애정이 과거만 못한 것 같아요. 인천공장이나 군산공장 생산이 자꾸 줄어드니까 '철수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지엠은 철수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노조를 비롯한 직원들과 시민들에게 투자계획을 명확하게 밝히고, 상생방안을 구축하면서 앞으로도 한국지엠이 인천 대표기업이자 모범적인 기업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이은구 씨는 "당분간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려 한다"며 "어떠한 형태로든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을 말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은구 전 위원장은?▲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1986년 대우자동차 입사(조립1부)▲ 1990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제11대 위원장▲ 1996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제15대 위원장▲ 1998년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제2대 본부장▲ 2017년 3월 한국지엠 입사 31년 만에 희망퇴직▲ 전 인천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 측 위원▲ 현 인천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이사▲ 현 (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이은구 전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이 1986년부터 올해 3월까지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에서 근무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부평공장 서문 앞에서 인천 자동차산업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이은구 전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

2017-05-16 박경호

[인터뷰… 공감]감독·코치·선수 '트리플 챔프'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

초교 4학년때 감독 권유로 입문… 가세 기울자 '농구로 성공' 결심무릎 부상으로 방황 트레이드 거치면서 마음 다잡아 '가족이 큰 힘'팀 맡고 싸늘한 시선에 적응 쉽지 않았는데 선수들이 잘 따라와줘솔선수범 주장 양희종 고마워… 선수시절 우승보다 지금이 더 행복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은 지난 2002~2003시즌 원주 삼보(현 동부) 선수로 첫 우승을 차지했고 2007~2008시즌에는 코치로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지난 2일 감독으로 2번째 시즌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린 첫번째 농구인이 됐다.서울잠실체육관에서 진행된 챔피언결정전 6차전 경기가 끝나는 순간 김 감독은 선수들을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 화제가 됐다. 감독 2년차에 우승이라는 성과를 이뤄낸 김 감독을 7일 안양실내체육관에 위치한 인삼공사농구단 사무국에서 만나봤다. ■ 어려운 가족 위해 힘이 되고 싶었던 청소년 김승기농구팬이라면 김승기 감독을 떠올릴때 터보가드라는 애칭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코치와 감독으로서의 김 감독은 묵묵히 선수들을 지켜보는 듬직한 모습일 것이다.그런 김 감독의 농구와의 첫 인연은 우연이라고 말해야 하는게 맞는 거 같다.김 감독은 "농구를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때다. 키가 커서 조회때 뒤쪽에 서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이름을 적어가서 농구부로 부르셔서 농구를 하게 됐다. 그때는 농구가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고 회상했다.이어 김 감독은 "사실 나는 당시 복싱이나 마라톤 선수가 멋 있어 보여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농구부로 불러서 선생님의 설득으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며 "농구를 하다 보니까 관두고 싶어도 관둘 수 없는 상황이 됐다. 6학년때는 소년체전에서도 우승했고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딱 한번 질 정도로 잘했었다"고 전했다. 서서히 농구에 대한 재미를 알기 시작할 무렵이던 중학교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운 집안을 보며 김 감독은 눈물을 흘리며 농구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김 감독은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셔서 2층 주택에 살던 가족들이 지하로 이사가는 상황이 발생했다"며 "당시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지만 가족들이 힘들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농구로 성공해 꼭 집을 사드리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그는 "정말 중·고교때는 죽기살기로 농구를 했던거 같다. 용산고에 입학해서는 1학년때부터 경기에 출전했는데, 형들보다 농구를 잘하지 못하면 경기를 못 뛴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농구를 했다"며 "1학년이 선발로 뛰다 보니 2학년과 3학년 학부모들의 시기도 받았지만 농구장에 오셔서 제가 뛰는 모습을 보시며 행복해 하는 부모님의 모습만 떠올리며 농구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김 감독은 "그때에는 제 방을 갖는게 소원이었다. 중앙대에 입학해서 정말 열심히 농구를 해서 대학교 3학년때 부모님께 집을 사드렸다"고 덧붙였다.■ 이기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던 허재와 강동희김 감독은 "제가 중앙대를 나와서 허재 선배와 강동희 선배를 롤모델로 생각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며 "선수 생활을 하며 두 선배를 상대로 경기를 해 봤지만 정말 수비하기 힘든 선수였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농구실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분들이다. 한국 농구사에 이렇게 잘했던 분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공격으로는 허재 선배 같은 스타일을 따라가고 싶었고, 가드로서는 강동희 선배 스타일을 배우고 싶었다"고 덧붙였다.그는 "그분들을 롤모델로 생각했고 선배들을 이겨 보겠다는 각오로 선배들의 플레이를 연구해서 배웠다. 경쟁할 수 없는 분들이지만 그 분들을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선수시절에 발전할 수 있었던 거 같다"고 설명했다.김 감독은 "저랑 그분들과 나이 차가 있다 보니 제가 실업과 프로에서 두분을 만났을때 한번 해볼만 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며 "제 선수로서 농구 인생은 두 선배들이 있기에 긴장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던거 같다"고 전했다.■ 첫번째 위기 부상, 그리고 방황김 감독은 "삼성에 입단한 후 상무에 다녀왔다. 1997년 다시 삼성에 복귀했는데, 국가대표로 발탁돼 FIBA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며 "하지만 당시 무릎이 좋지 않았는데 치료를 받지 않고 출전하다보니 너무 나빠졌다. 정말 화려한 선수 생활이 시작되는 듯 했는데 거기까지였다"고 돌아봤다. 그는 "이후 정말 방황을 많이 했다. 당시 아내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화려하게 결혼도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운동이 안되다 보니 술도 많이 먹고, 집에도 잘 안들어가고. 마음 고생을 정말 많이 시켰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그때 완전히 모든게 망가졌다. 생각했던게 100이면 1도 안됐다. 아무것도 안됐다"며 "지금의 아내와도 결혼하는게 맞는지 고민 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방황하는 동안(1998년) 김 감독은 삼성에서 원주 나래로 트레이드 됐다. 또 2003년에는 삼보에서 울산 모비스로 트레이드 됐고 2005년 원주 삼보로 트레이드됐다. 나래와 삼보는 원주 동부의 전신이다.김 감독은 "나래와 모비스, 삼보를 거치면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장 큰 힘이 되어 준건 아내와 아이들이 이었기에 힘든 시기를 이겨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 인삼공사김 감독은 "사실 인삼공사에서의 지도자 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던거 같다"며 "제가 인삼공사와 인연을 맺은 건 전창진 감독님이 불러서인데 감독님이 좋지 않은 일로 팀을 떠나셨고 그런 상황에서 팀을 이끄는게 맞는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하지만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팀을 맡은 부분에 대해 모든 분들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들이 힘들었다"며 "코치 생활은 오래 했지만 감독은 해보지 않았기에 적응하기가 싶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상황인데 선수들이 잘 따라와줘서 지금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거 같다"고 덧붙였다.그는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이런 제 농구인생의 순간순간이 머리 속에 지나가더라. 그래서 눈물이 났던 거 같다"고 우승이 확정되던 순간을 회상했다.칭찬해 주고 싶은 선수를 묻자 주장 양희종을 꼽았다. 김 감독은 "오세근, 이정현, 데이비드 사이먼, 키퍼 사익스 등 모든 선수들이 고맙고 열심히 해줬다. 하지만 항상 팀을 위해 희생하고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양희종이 있어서 선수단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거 같다"며 "이 멤버로 다음 시즌을 맞고 계속 손발을 맞춰간다면 더 좋은 성적도 가능하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김 감독은 "선수 시절 우승을 해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1997년부터 20여년 생활을 돌아보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거 같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노력하겠다"며 "이 순간이 올 수 있도록 옆에서 든든히 믿고 기다려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KBL 제공■김승기 감독은?▲ 1972년생▲ 용산고, 중앙대-경력▲ 1994~1999 삼성전자▲ 1998~2003 원주 나래·삼보▲ 2003~2005 울산 모비스▲ 2005~2006 원주 동부▲ 2006~2009 원주 동부 코치▲ 2009~2015 부산 KT 코치▲ 2015~현재 인삼공사 코치, 감독대행, 감독-수상▲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은메달▲ 1997 농구대잔치 베스트 5 FIBA 아시아선수권 우승 ▲ 2002 애니콜 프로농구 수비 5걸 애니콜 프로농구 우수수비상▲ 2017 2016~2017 KCC 프로농구 감독상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이 2016~2017 KCC 프로농구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통합우승을 차지하며 KBL에서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컵을 들어올린 첫 농구인으로 기록됐다. 사진은 지난 9일 안양실내체육관 내 구단사무실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지난 2일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안양 KGC 선수들이 김승기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2017-05-10 김종화

[인터뷰… 공감]하윤수 제36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하윤수(54)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 있는 교총'을 강조한다. 그는 지난해 '가르칠 맛 나는 학교, 선생님이 행복해지는 파워 교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36대 교총 회장에 당선됐다. 교권 회복과 함께 국내 최대 교원 단체인 교총의 대외적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하윤수 회장은 지난달 26일 경인일보 인천본사에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반 정치꾼'이라고 농담처럼 소개했다. 실제 그는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교원지위법)상 교권 보호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국회에서 여·야 의원을 가리지 않고 만나 설득했다.하 회장은 말에 막힘이 없었고, 답변은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빠른 의사 결정과 추진력으로 '불도저'란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교육에는 답이 없다"면서도 "교사가 웃어야 아이도 따라 웃는다. 교사가 신바람 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36대 한국교총은 '교권 강화'를 지향한다. 교총 회장 취임 후 어떤 일들을 하셨나.교권 침해에 대한 가중 처벌 도입이다. 지난해 6월 취임하고 '제1호 결재'를 한 것이 '교원지위법 개정 추진'이었다. 교육의 질은 교원의 질을 넘을 수 없다. 교육자가 올바른 교육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우리 뜻에 국회도 공감했다. 국회에서 지난해 11월과 지난 2월 개정안이 발의됐다. 교육 활동 침해 행위가 위법하다고 판단되고 피해 교원이 요청할 경우 교육감이 수사기관에 고발하게 하는 것, 교육 활동 침해 학생의 보호자가 특별 교육 등을 이수하지 않을 경우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 등이 골자다. 또 전국 1천600여 학교에서 '1학교 1고문변호사 제도'를 도입했고, 매년 교권 침해 사례를 종합·정리해 발표하면서 정부에 대책 마련을 주문하고 있다. ■ 교총의 활동으로 학교 현장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교육 활동 침해에 대한 선생님들의 대응 자세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참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교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관련 절차와 지식에 대한 공부도 많이들 하고 계시고, 잘 알고 있다. 교육 활동에 자신감이 매우 높아졌다.교총에 가입하면 법률적 보호를 전문적으로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든든함에 자신 있게 학생을 대하고 수업에 임하는 경우가 큰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교총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심급별로 최대 500만원, 3심까지 최대 1천5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한국교총은 교육감 직선제 폐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교육감 직선제를 없애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지난 2월 이청연 인천시교육감이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징역 8년과 함께 법정 구속된 일이 단적인 예다. 교육감 직선제 도입 후 10년 동안 그 폐해가 엄청나다. 부정과 비리는 한두 건이 아니다. 제1기 민선교육감 16명 중 9명이 부정 선거와 비리 등으로 기소되거나 중도 하차했다. 선거 때마다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도 큰 문제다. 당선 후 선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각종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교육감 직선제는 헌법이 정한 교육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후보자도 모르는 일명 '깜깜이 선거'라는 오명을 얻었다. 2010년 출마한 16명 중 13명이 50% 미만을 득표했고, 심지어 20% 미만으로 뽑힌 경우도 있었다. 또 교육 전문성과 교육 공약 등 교육적 논리보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에 좌우되면서 특정 정치 세력과 시민 사회 세력의 선거 개입과 진출을 가속화시켰다. 이 같은 문제는 단순히 교육감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기 힘들다. 제도가 더 문제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제는 직선제를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 한국교총은 수능 절대평가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왜 필요한가.정부가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사교육비는 줄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대학 입사와 내신 경쟁에 있다. 대학 입시 제도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 2015년 개정 교육 과정에 의거 출제 과목은 공통 과목으로 한정하고, 평가 방식을 절대 평가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현행 9등급제의 상대 평가는 소수점 하나로 인해 등급이 결정되다 보니 학교 공부 외에도 과도한 사교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학 입시의 변화 없이 공교육 정상화, 사교육비 해소는 어렵다. 대입 제도 예고 3년제로 인해 당장 바꾸기는 힘들지만, 오는 7월에 정부가 개선 방안을 내놓는 '2021학년도 수능' 때부터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교육 혁신'의 방향과 세부 실행 계획은 무엇이라고 보는가.기본적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 학령기 인구 절벽 등 사회 구조 변화에 대비하는 교육 혁신이 돼야 한다.이를 위해 고등학교를 진학 교육과 직업 교육의 복선형(複線型) 체제로 개편하고, 진학과 직업 고교에 대한 맞춤형 교육 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임금차별금지법' 등을 제정해 고졸 임금 차별을 없애야 한다. 학벌 위주 사회는 능력 중심으로 전환하고, 대학 진학에서 상대적 우위를 위한 경쟁도 해소해야 한다.정책의 일관성, 안정성이 중요하다. 범정부적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고, 교육부의 역할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한다. 또, 중앙과 시·도교육청, 학교 간의 유기적인 협력과 연계가 더욱더 중요해지는 만큼 도입된 지 10년 동안 숱한 중앙부처와의 갈등을 유발하고, 부정과 비리 등 폐해만 드러난 교육감직선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교육 현장의 변화를 위해서는 교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다. 교원들의 사기 제고와 협력 도모 등을 위해 교권 침해 예방 대책을 대폭 강화하고, 차등 성과급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하윤수 회장은?▲ 1962년 경남 남해 출생▲ 1981년 남해제일고졸▲ 1986년 경성대 법학과졸▲ 1988년 동아대 대학원 법학과졸▲ 1994년 동아대 법학박사 ▲ 2004~2007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부회장▲ 2007~2008년 국공립대학교교수연합회 공동대표▲ 2007~2010년 부산지검 범죄예방봉사위원▲ 2008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분과 자문위원▲ 2009~2010년 부산교대 기획처장 겸 산학협력단장▲ 2010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현)▲ 2011~2015년 교육부 규제완화위원회 위원▲ 2013년 제6대 부산교육대학교 총장(현)▲ 2013년 한국사학진흥재단 비상임이사▲ 2013년 부산과학기술협의회 이사(현)▲ 2013년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 상임위원(현)▲ 2016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학윤리위원회 위원(현)▲ 2016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현) ▲ 2016년 전국교원양성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현) ▲ 2016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현) ▲ 2016년 제6차 ASEM 교육장관회의 자문위원(현)▲ 2016년 초등교원 양성대학교 발전위원회 위원장(현)▲ 2016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족대표하윤수 한국교총 회장의 조부와 부친은 항일 독립 운동가 출신이다. 집이 가난해 6남3녀 중 6째인 하 회장만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절대 정의롭게 살고, 가난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고 했다. 하 회장이 회장에 취임한 뒤 교총은 국정교과서에 대해 "친일·독재 미화, 건국절 제정 등 교육 현장의 여론과 배치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경우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기존의 조건부 찬성 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2017-05-02 김명래

[인터뷰… 공감]대선 레이스 '고배'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다짐

지지율 1%만 보면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끼겠나정치는 변화하는 과정 견제 선택한 국민 놀라워다당 시대 '협치' 과제… 선거구 개편·개헌 필요정치 접을 수 있다 생각하고도 고민끝에 탈당독일 우파 개혁 택한 좌파 슈뢰더의 희생처럼국가미래 위해 개인이익 포기 옳은 선택 확신경기도 새정치·경제 실험은 시대적 흐름 '자부'연정만 봐도 한국의 기준, 나라 이끈다고 생각4차 산업혁명에 日 대형서점 츠타야 접목 검토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대선 경선과정서 남 지사가 소개한 책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 中에서남경필 경기도지사는 늘 앞으로 걸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리 다섯 번을 이기고, 모두가 진다고 했던 2014년 도지사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앞으로 향하며 미래를 가리켰다. "저곳으로 가야만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외침은 경기도에서 미래 정치·경제·사회모델인 연정과 공유경제, 따복공동체를 낳았다. '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흔들리자 망설임 없이 당을 나와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내걸고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대선을 향해 나아갔다.앞으로만 걷던 그가 넘어진 채 멈춰섰다. 지지율은 1%에 머물렀고 '안방'인 경기도에서도 상대 후보에게 졌다. 도청으로 돌아온 후에도 '레임덕' 위기라는 지적에 직면했다. 그가 새롭게 깃발을 꽂은 바른정당 역시 자당 대선 후보의 사퇴를 논의할 만큼 녹록지 않다.도지사 임기가 끝나는 1년 반 뒤, 앞으로만 향하던 그의 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아쉽지만 국민은 놀라웠다"뭐, 제 한계니까."지난 20일 아침 경기도청 집무실에서 만난 남 지사는 이러한 상황에 '쿨하게' 답했다. "기본적으로 제가 부족해서 그렇고 바른정당이 처한 스탠스나 상황이 이번 대선에서 평가받기는 어려운 구조적 문제도 있었다고 봐요. 토론을 통해 나타난 실력이나 진정성,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아쉽죠."준비된 원고도 한쪽으로 치워둔 채 남 지사는 덤덤하게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대선 레이스에서 탈락한 후 가진 첫 인터뷰다. "국민들이 '도지사 열심히 해라'라고 하신 것 아니겠나"라고 운을 뗀 남 지사는 "대선 주자로서 아무래도 100% 도정에 전념하는 건 어려웠을 수 있다. 120% 도정에 전념하면서 도민께 죄송함을 갚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지지율 1%'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다. 불과 2주 전 경기도 4곳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선 바른정당이 1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보궐선거 유권자 상당수는 오히려 남 지사가 '청산의 대상'이라고 비판한 자유한국당을 선택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라는 질문에 남 지사는 "'요 대목'만 보면 국민의 선택이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저는 어느 후보와 1대1로 붙어도 훨씬 나은 미래 비전과 철학을 얘기할 수 있다. 경기도에서도 놀라운 혁신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지지율이 1%라니,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끼겠나"라고 토로했다."그러나 정치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남 지사는 말했다. 그는 "단면만 잘라놓고 보면 불합리해보일 수 있지만 전체를 보면 다르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하는 게 바른정당과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지난해 총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이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통이 있었다. 국민들은 민주당에 다수의석을 주면서도 누구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게 제3당을 만들었다. 만약 새누리당이 그렇게 안됐으면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는 구도도 안만들어졌을 것"이라며 "지금도 문재인이라는 상수와 이를 견제하기 위한 대안을 자꾸 갖다 붙인다. 국민들은 이렇게 계속 견제하는 선택을 한다. 이게 '불합리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국민의 선택은 놀라웠다"고 풀이했다.'불합리한' 국민의 선택 속 새로운 대통령도 갈림길에 놓일 것이라는 게 남 지사의 전망이다.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나눔'이다. 남 지사가 줄곧 가리켰던 '미래'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권력은 손잡이가 없는 칼 같은 거다. 임기 초에는 엄청 잘 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이 그 칼에 베인다"며 권력을 칼에 비유한 남 지사는 "서로 다른 세력과 손을 잡고 함께 갈지, '마이웨이'할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후자의 경우 국민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며 "150석(과반 의석을 차지한 1당 구도)을 넘어 180석(여러 정당 간 협치 구도)의 합의가 없으면 어려운 구도를 만든 것은 협치·연정을 하라는 과제로 이어졌다. 더 안정적으로 하려면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바른정당의 내홍도 동일하게 진단했다. '국민의 눈'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유승민 후보의 사퇴 주장이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관련, 그는 "정답이 어디 있겠나"라면서도 "과연 대한민국을 위한 결정을 한 것인가, 아니면 다음에 한번 더 당선되는데 이익이 될지를 보고 결정한 것인가. 국민들은 안다"고 말했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넘어지고 멈춰섰지만, 그에겐 오히려 '우리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남 지사는 "탈당할 때 '이걸로 정치를 접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2년 전 경기도를 찾기도 했던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에선 좌파인 슈뢰더 전 총리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우파 개혁을 하면서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정권도 뺏겼다. 그럼에도 자기는 만족한다고 했다. 이후 독일은 전성기를 이뤘다. 메르켈의 전성기는 슈뢰더의 자기 희생 덕분이라는 말이 나온다"며 "남경필이란 정치인도 20년 동안 국민들이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대한민국 정치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탈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걸어왔던 남경필의 길이, 곧 '국가의 미래를 위해 개인과 정당의 이익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슈뢰더의 길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얘기다.그러면서 "대선 과정에서 탈락은 했지만 도민들께 자랑하고 싶은 건 경기도에서 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와 경제 실험들이 앞으로 누가 집권하든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정만 봐도 경기도가 곧 대한민국의 스탠더드"라고 말한 남 지사는 "경기도의 것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고 '일자리 넘치는 안전하고 따뜻한 경기도' 만들기에 전념할 거다. 도정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투지가 불타오른다"며 웃었다. 대선 과정에서 제시했던 공약들 역시 경기도에서 최대한 시도해보겠다고 공언했다. 남 지사는 "모병제는 어렵고 수도 이전도 당장은 힘들 수 있지만, 제가 주장했던 것 중 의지만 있으면 경기도에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할 수 있는 일들을 최대한 찾아 실제로 할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대선 경선 과정에서 남 지사는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을 읽고 있다며 책의 한 구절을 소개했었다. "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요새 읽고 있는 책을 묻자 일본의 대형서점 '츠타야'를 기획해 성공시킨 마스다 무네야키의 저서 '지적자본론'을 언급했다. "츠타야라는 기업이 어마어마한 혁신의 아이콘이거든요. 4차 산업혁명에는 새로운 기술이 없어요. 기존의 것을 융합하는 게 핵심인데 우리 경기도에도 이런 '츠타야' 모델을 접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그는 '경기도'에서부터 일어나 다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려 하고 있다. 그래서 경기도의 내일을 구상하며 또 한번 미래를 가리킨다. 비록 과녁을 빗맞혔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기에.글/강기정·신지영기자 kanggj@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남경필 도지사는? ▲ 1965년 1월 20일 용인 출생▲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경인일보 사회부·정치부 기자▲ 제15~19대 국회의원 (5선)▲ 한나라당 최고위원▲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 제34대 경기도지사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선 도전 당시 밝혔던 공약들을 경기도에서 실천 가능한 것부터 이행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2017-04-25 강기정·신지영

[인터뷰… 공감]제종길 안산시장

아이 잃은 부모·이웃 잃은 시민,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 서로 보듬어야유가족과 분노하고 싸워나가고 싶었지만 '장기적으로 도움되는 일' 고민모든 행정서비스 물밑 지원… 정부, 특별법 명시된 경제활성화등 힘써야맹골수도에 잠들어있던 세월호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3년 동안 어두운 바다 밑에서 거친 조류를 고스란히 받아낸 선체는 상처투성이였다. 3년을 하루 같이 기다렸던 안산 역시 세월호처럼 상처투성이가 됐다. 세월호 현수막 철거, 추모시설 조성, 단원고 기억 교실 이전 등을 둘러싼 민·민 갈등은 증폭됐고 안산은 또 한 번 갈기갈기 찢어졌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경인일보와 만난 제종길(62) 안산시장은 상처와 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없는, 그래서 딱 가운데에서 양쪽을 바라봐야 하는 그의 가슴은 양쪽 모두의 아픔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아픔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서로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생각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쉽지 않아요.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이웃을 잃은 시민들은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서로에게 남아 있는 상흔을 서로 보살피고 보듬어야 합니다."안산은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가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이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살고 있던 도시로, 당시 2학년 학생 246명과 교사 10명이 숨졌고 현재 6명(학생 4명, 교사 2명)이 실종된 상태다. 희생 학생들이 가장 많이 살던 와동, 고잔동 일대는 충격으로 지역 공동체마저 무너졌다. 전년도에 고교 평준화가 처음 시행되면서 이 지역 학생들이 대부분 단원고로 입학한 것이 희생자가 집중되는 원인이 됐다. 한집 건너 한집에서 피해를 보면서 이웃들은 크게 웃지도, 화사한 옷을 입지도 않게 됐다. 지난 1986년 시로 승격한 이후 안산은 수도권 최대의 국가산업단지인 안산스마트허브를 중심으로 일자리가 넘치는 공업 도시였다. 하지만 슬픔은 빠르게 전염됐다. 세월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민들은 참사 후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빠졌다. 제 시장은 "세월호 참사로 국민들이 받은 충격과 슬픔, 그리고 미안함은 안산시민에게는 더욱 특별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성인으로서 세월호에서 끔찍하게 희생된 우리 단원고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그 감정은 안산을 상징하던 활력을 앗아갔다"며 "지역 경제도 많이 위축돼 안 그래도 힘들어하던 소상공인들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참사 당시 시장으로 출마를 준비했던 제 시장도 곧장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향했다. 제 시장은 "30년 넘게 거주한 안산인으로서 또 안산시장직에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충격과 슬픔, 그리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무력감과 미안함에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며 "시장 후보로서 계획했던 많은 일을 변경해 안전이 최우선으로 존중받는 생명도시, 사람의 가치가 회복되는 사람중심의 도시라는 목표를 세우게 됐다"고 당시 소회를 밝혔다. 이후 제 시장은 안산과 진도를 오가며 힘든 선거 운동을 했다. 안산에 있을 때는 하루의 첫 시작을 합동분향소에서 했고 지금도 매주 분향소를 방문하고 있다.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 등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은 온도 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가 안산에 남긴 상처를 잊지 않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과 침체한 지역 경제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사용했던 기억 교실 이전을 요구하는 신입생 학부모들과 유가족들도 마찰음을 빚었다. 집값 하락 등을 우려한 일부 시민들이 세월호 추모 시설 조성을 꺼리는 등 세월호를 둘러싼 반목과 갈등은 증폭돼 갔다.시민들의 아픔과 갈등을 봉합해야 하는 제 시장의 책임감은 커졌고 어깨도 무거워졌다. 유가족들과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인지 뒤에서 유가족들을 지원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일부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최대 피해 지역인 안산시장의 무용론마저 제기하기도 했다. 제 시장은 "유가족들과 분노하고 싸워나가고 싶었지만, 안산시장으로서 시정 운영과 장기적으로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히 유가족들을 지원해 왔고 통장, 동장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행정 서비스를 가동해 물밑에서 함께했다"고 말했다.충격으로 흩어진 공동체와 공감대를 회복하는 것도 숙제였다. 공동체 회복은 단기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차근차근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우선 공무원들과 시민들의 힘을 모아 '희망마을사업추진단'을 구성해 세월호 참사로 인한 집중 피해 지역의 공동체 회복에 나섰다. 마을별로 주민들이 묶일 수 있도록 특화된 테마사업을 선정했다. 추모 사업 추진위원회도 구성해 추모시설 조성 등을 둘러싼 민·민 갈등을 최소화하고 체계적이고 민주적인 추모 사업을 추진하도록 맡겼다.피해 가정을 보살피고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등 참사 현장에서 가족들의 곁을 지켜주는 일도 중요했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피해 가족 지원과 수습 활동을 위해 '행정 지원 돌보미' 제도를 도입했고, 참사 수습을 위한 전담기구인 '세월호사고수습지원단' 출범 등을 추진했다. '행정 지원 돌보미'는 공무원과 통장 등 3명이 1개 조를 이뤄 피해 가정을 1대 1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1천여 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동참했다. 유가족 대책 위원회를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피해 가족의 생활 안정을 위한 사업도 추진해 유가족의 일상생활 복귀도 도왔다. 3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세월호 선체가 3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안산은 새로운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 특별법)에 담긴 추모 사업, 공동체 회복, 피해 지역 경제 활성화 등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 지역을 위한 큰 과제들이 남아 있다. 제 시장은 "이 과정에서 공동체 붕괴라는 또 다른 참사를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 또한 제 임무"라며 "공동체가 회복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한 단계 성장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고의 수습뿐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 지역의 지원을 통한 회복 등 국가 차원의 책임과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정부는 세월호 특별법에 명시된 지역 경제 활성화, 국립트라우마센터 및 복합시설 건립, 추모시설 조성 사업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사업들을 처음과 같은 의지로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이런 과제를 해결하며 제 시장이 실현하려는 안산의 모습은 '생명도시'다. 그가 '생명'을 강조하는 이유는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원인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사람과 생명의 가치 상실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제 시장은 "세월호 참사는 한국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제가 응축된 모두의 아픔"이라며 "안산시가 세월호 참사를 극복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그간의 적폐를 없애고 새 나라로 거듭나는 출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김환기·조윤영기자 jyy@kyeongin.com ■제종길 안산시장은?1955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건국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해 서울대학교 대학원 해양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을 거쳐 17대 안산 단원을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도시와 자연연구소 소장, 한국생태관광협회 공동대표, 한국수중과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14년 7월 민선 6기 안산시장으로 취임했다.제종길 안산시장은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이웃을 잃은 시민들이 서로에게 남아 있는 상흔을 보살피고 보듬어야 합니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안산시 제공

2017-04-18 김환기·조윤영

[인터뷰… 공감]미하엘 그룬트 한국머크 대표이사

경기도 판교에 센터 개소후 공항·항만과 가까운 송도로 확장·이전한국 바이오 성장 잠재력은 '스피드' 특유의 속도전으로 우위 가능선행기간 필요한 제약사 대신 위탁생산·바이오시밀러 개발 등 '전략' 현명인허가 절차 간소화·규제 완화 절실… 속도 붙으면 바이오 허브로 발돋움독일 과학기술기업 머크는 1668년 설립됐다. 프레드릭 야곱 머크가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의 '천사약국(Engel pharmacy)'을 인수한 것이 기업의 시초가 됐다. 조선 현종 9년, 무신년(戊申年) 때로,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출판하며 유럽에 조선을 최초로 알린 해에 기업의 역사가 시작됐다. 머크는 과학을 기술로 전환해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내년(2018년)이면 창립 350주년을 맞는 머크는 혁신(innovation)을 멈추지 않고 성장했다. 66개국에서 임직원 4만여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의 위상을 갖췄다. 미하엘 그룬트(Michael Grund) 한국 머크 대표이사에게 혁신의 비결을 물었다. 그는 머크 본사 프로세스 개발 랩 매니저, 엔지니어링&기술 개발 디렉터, 기능성소재비즈니스(PM-Advanced Technologies Development) 부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혁신의 중심에 있었다.그룬트 대표이사가 밝힌 머크의 성장 비결은 20~30년 단위로 기업을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머크는 지난 2006년에도 큰 변화를 시작했다. 핵심 사업 분야 관련 기업은 인수했고, 연관성이 떨어지는 분야는 과감하게 정리했다. 생명과학 산업에서 선두를 다투던 미국기업인 밀리포아와 시그마알드리치를 각각 2010년과 2015년에 인수했고, 제네릭(복제약)과 전자 사업 부분은 통합 등을 통해 정리했다."혁신의 적(enemy)은 사업이 잘되는 것입니다. 경영 환경이 좋을 때 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머크도 2006년 혁신의 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럴만한 재무적인 이유가 없었습니다. 전략적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그룬트 대표에게 혁신을 시작할 '타이밍'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묻자 "자신의 능력과 판단력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리면 틀리거나 늦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와 함께 미래에는 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산업 간 결합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다른 비즈니스 사이에서 유망 비즈니스가 탄생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의료(medicine)와 전자기술(electronics)이 결합해 메디트로닉스(meditronics)가 탄생할 수 있다는 거죠. 10년 전만 해도 (머크의 사업 가운데) LCD(액정 표시 장치)가 호황을 이루다 보니 LCD에 집중하고 의약 분야를 매각하라는 조언이 있었고, LCD가 사양길에 들어간 뒤에는 LCD를 매각하고 의약 분야를 키우라고 했는데 이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머크는 바이오 의약 분야와 관련해 대(對)한국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머크의 한국 내 바이오 투자 대상지는 인천 송도국제도시다. 그룬트 대표이사는 송도를 바이오 '핫스팟(hot spot)'이라고 표현했다.머크는 지난해 10월 송도국제도시 IT센터에 국내 바이오제약기업을 대상으로 전문기술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M.Lab 협업센터(Collaboration Center)'를 개장했다. 그룬트 대표이사는 "센터에는 앞으로 6개월 동안의 예약이 모두 다 찬 상태로, 송도에 있는 바이오 대기업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바이오 기업에서도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한국머크는 지난해 11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상호발전 및 지원을 위한 투자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머크는 송도 내 투자를 확대해 부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연구·물류서비스·제조와 관련된 시설을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4년 전 (경기도) 판교에 센터를 개소한 뒤 성장하는 것을 보고 센터가 송도에 들어서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센터를 확장 이전했습니다. 앞으로 2번째 단계로 기업에 공급하는 장비 등을 취급하는 창고, 물류를 여기에 둘 계획입니다. 송도는 공항, 항만과 가까워 이 같은 기능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이후 생산 단계로 나가려고 합니다. 이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밟아나갈 계획인데, 잘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지속해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그룬트 대표이사는 한국 바이오 산업 성장의 잠재력은 '속도'에 있다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 경쟁국인 싱가포르는 오랜 바이오 산업 역사가 있고, 중국은 아시아 최대 바이오 시장이라는 강점이 있지만, 한국 특유의 속도전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도는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초고속으로 성장한 바이오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있는 곳이다.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들과 호흡을 맞춰 '임계규모(Critical Mass)'를 갖추게 되면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한국머크 대표이사로 있으면 다른 머크 지사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내부 경영진에게도 싱가포르나 중국이 아닌 한국, 송도를 왜 선택해야 하는지 설득을 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이 가장 빠르다고 내세웁니다. 우리의 가장 큰 고객(한국 바이오기업)의 성공 사례가 있고, 빠른 것이 강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는 현재 바이오의약 산업 분야에서 송도의 성장 전략은 현명하다고 평가했다. 현재 송도에서는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바이오시밀러(바이오복제약) 개발 등이 이뤄지고 있다."바이오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제약사를 추진한다고 하면 선행기간(lead time)이 10~30년 정도 걸릴 수 있어 어렵습니다. 송도의 경우 주문 제작을 하고, 오리지널 약품의 바이오시밀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현명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오의약품 생산은 화학약품 제조와는 매우 다릅니다. 공정, 방식이 달라 이를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이오 생산을 맡기는 고객 입장에서는 공정의 일관성, 품질 신뢰 등이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전자,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제조 공정이 훌륭하므로 상당히 유리합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매우 현명한 전략입니다."한국의 강점을 살리려면 인허가 절차 간소화, 규제 완화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머크의 경우 송도를 대상으로 물류·생산 관련 투자를 확대하려면 토지를 매입하고, 창고업이나 생산 관련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관련된 기관이 많다. 각 기관의 입장과 소통 방식이 다르면 사업을 추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뒤 정부기관 간 의견이 달라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정부기관에서는 규제를 다소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가 다른 쪽에서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기관에서는 투자 대상지가 괜찮다고 했는데, 다른 기관에서는 다른 부지가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듣기도 합니다. 앞으로 규제 개선 등을 통해 속도감 있게 클러스터를 구축할 수 있다면, 송도는 바이오 허브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입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룬트 대표이사는?▲ 1968년생, 도르트문트대학교 화학공학 박사▲ 1997년 본사 프로세스 개발 랩 매니저▲ 2000~2005년 본사 엔지니어링&기술 개발 디렉터 ▲ 2005~2008년 독일 게른샤임 사이트 엔지니어링&Maintenance 부사장▲ 2008~2013년 본사 PM-Advanced Technologies Development 부사장▲ 2013~2014년 한국머크 대표이사(2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 2014년 한국머크 대표이사(3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머크일렉트로닉미티리얼즈(주)▲ 2015년 한국머크 대표이사(6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머크일렉트로닉미티리얼즈(주)&씨그마알드리치코리아유한회사&씨그마알드리치홀딩주식회사&에이에프씨하이테크코리아주식회사미하엘 그룬트 한국머크 대표이사가 한국 바이오 산업 성장의 잠재력은 '속도'에 있으며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초고속으로 성장한 바이오 기업과 호흡을 맞춰 '임계규모(Critical Mass)'를 갖추게 되면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2017-04-11 홍현기

[인터뷰… 공감]경기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27세 한승환 피넥터 대표

책 출간과 함께 '버킷리스트' 실현… 27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수험생 시절에도 봉사 이어와 중증장애인 활동보조때 많이 배워당분간 일에 전념… 블록체인기술 더 많은 적용 위해 '바쁜 나날'젊은층 살기 어렵다고 하는데 기부로 자존감 높이는 계기 됐으면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위워크 빌딩에서 경기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한승환(27) 피넥터 대표를 만났다. 1억원을 기부한 20대 청년이라니.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여유 있기에?'라는 삐딱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그만큼 여유가 없어서 못한다'는 질투 섞인 핑계도 대봤다. 하지만 그에게서 고액 기부자로서의 특별함을 찾으려 했던 것이 민망해질 만큼 그는 평범했다. 내 것을 떼어 누군가에게 나눠준다는 마음이 중요할 뿐, 기부금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너무도 당연한 그의 말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한 대표는 지난달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하면서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 경기 132호·평택 7호 회원이 됐다.아너 소사이어티는 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든 개인 고액기부자 모임으로, 한 대표는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얻었다.그는 "우연히 아너 소사이어티에 대해 알게 됐는데 많은 분들이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가입하는 모습에 감동 받아 30살 이전에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는 것을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삼았다"며 "다행히 버킷리스트를 실현했는데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것은 27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전에도 크고 작은 기부를 계속 해왔다는 한 대표는 어릴 때부터 10년 넘게 봉사활동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돕는 것이 일상처럼 자연스럽다고 했다.그는 "8살 때 부모님과 함께 어르신을 찾아가 소일거리도 도와드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렸던 게 봉사의 시작이었다"며 "이후 20살이 될 때까지 수험생 시절에도 빼놓지 않고 10여년 간 봉사를 이어왔는데, 공부보다도 봉사가 사회에 더 필요한 일이고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성인이 되고 처음 했던 사회생활 역시 봉사였다. 막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 바우처 제도가 도입되던 때로, 필요한 교육을 받은 뒤 중증장애인의 활동보조인으로 4개월 간 봉사했다. 거동이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 아예 움직임이 불가능한 중증장애인과 하루 종일 함께 하며 그들의 수족이 돼주는 것이다.그는 "옷을 갈아입히려면 알몸도 봐야 하고, 식사나 용변을 전부 도와야 하니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처음부터 친밀감을 갖고 관계가 시작되는 것 같다"며 "깊은 부분까지 공유하다 보니 가족에게도 부탁하거나 말하기 어려운 것까지 나눌 수 있게 됐는데, 나는 작은 도움을 줬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내가 더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그간의 봉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도 활동보조인 당시 만났던 중증장애인이었다. 한 대표는 "그림 그리기가 취미여서 초상화를 그려줬는데 굉장히 감동적이라며 좋아하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주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분들도 많았다. 취미 삼아 주식을 열심히 했던 분도 있었는데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중증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졌다"고 말했다.20대에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이룬 그의 다음 버킷리스트에는 어떤 항목이 오를까.한 대표는 "기부를 많이 하자는 것과 책을 쓰겠다는 2가지가 20대 초반에 세운 버킷리스트였다"며 "곧 책도 완성될 예정이어서 버킷리스트를 전부 이뤘으니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하는데, 깊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당분간은 일에 전념하면서 여건이 될 경우 언제든 기부는 계속 하겠다는 것이 다음 목표라면 목표"라고 말했다.사실 그는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가 공동대표로 운영하고 있는 피넥터는 현재 핀테크 업계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블록체인기술에 대한 연구와 개발, 컨설팅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이다.한국 시장에서 블록체인 사업을 확장시키고 해외에도 진출해 관련 산업을 건강한 방식으로 정착시키는 게 한 대표의 목표다.한 대표는 "금융기관, 기업 등에 블록체인기술이 적용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는데 이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컨설팅하는 곳은 피넥터가 유일하다"며 "곧 소비자도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금융서비스를 만들 계획이고, 블록체인기술을 더 많은 분야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고민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마지막으로 한 대표는 자신과 같은 젊은 층의 기부가 더욱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그는 "요즘은 젊은이들이 살기 어려운 때라고들 하는데, 그럴수록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많아야 한다"며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나로 인해 제3자가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결국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깨닫고 삶의 활력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1억원이라는 금액을 기부하면서 사실 이 정도로 보람을 느끼고 기쁠 줄은 몰랐다"며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최대한 많은 이들이 기부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삶의 의미가 깊어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글/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 한승환 대표는?▲ 1989년 평택 출생▲ 2008년 송탄고 졸업▲ 2017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 현) 피넥터 대표▲ 현) Tendermint 고문이사▲ 현) Cosmos 이사▲ 현) Chronobank 전략이사20대에 1억원을 기부하겠다는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면서 경기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한승환 피넥터 대표는 젊은 층의 기부가 활발해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지난달 10일 진행된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식. 한승환 대표는 경기지역 132호 회원이 됐다.

2017-04-04 신선미

[인터뷰… 공감]쇼트트랙 안현수·현준 '형제 스케이터' 길러낸 안기원씨

어린 시절 큰 형 안현수 유난히 따라… 향상된 실력 올림픽 金 향한 의지 못 꺾어러시아 귀화 빅토르 안, 소치 3관왕으로 명예회복 기뻐… 평창 이후 지도자 준비스스로 세운 목표위해 쏟는 노력 닮은 꼴… '현수 아버지' 경험으로 현준 도울 것제98회 전국동계체육대회가 지난달 초 강원도 평창 일대에서 열렸다. 당시 인천광역시 선수단은 사전 경기로 열린 빙상 종목에서만 금 4개, 은 3개, 동 3개를 획득했다. 전 대회에서 노 골드로 부진했던 인천 빙상이 부활한 것이다.특히 고교 1학년이었던 안현준(인천 신송고)은 고 2·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쇼트트랙 남고부 3천m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천 쇼트트랙 사상 첫 동계체전 남고부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1천500m 은메달리스트인 이은별을 비롯해 인천 유일 동계종목 실업선수인 천희정(인천시체육회) 등 여자 선수들이 인천 쇼트트랙을 이끌었던 가운데, 안현준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안현준은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트랙 선수인 빅토르 안(안현수)의 동생이다. 안현준이 올해 동계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자 국내 빙상계에선 '그 형의 그 동생'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형을 넘어설 재목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었다.안현준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스케이트를 탔다. 5학년에 선수 등록을 했으며, 6학년 때 전국대회 메달권에 진입했다. 일반적으로 유치원~초등학교 1학년 때 스케이트를 접한 후 4~5년 후 초등학교 고학년에 두각을 나타내는 타 선수들을 앞지르는 성장세였다. 중학교 때에는 각종 부상으로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지난해 성남에서 인천으로 전학하면서 인천 선수로 나선 첫 동계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세계적 선수인 빅토르 안에 이어 국내 정상급 선수로 커가고 있는 안현준까지 형제 스케이터 뒤에는 아버지가 있다.최근 인천 선학국제빙상경기장에서 만난 안기원씨는 "얼마 전까지 현수 아버지로 불리다가 이젠 현준이 아버지로 불리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이어서 "현수는 1년에 한 번 시즌 후 귀국해서 가족들과 만난다"면서 "예전에는 걱정돼서 러시아 집에도 찾아가고 했는데 결혼해서 가정도 꾸리면서 안 간 지 꽤 됐다. 이제 현준이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인천과 연을 맺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그는 "현준이가 선학빙상장에서 훈련을 받게 되고, 박대성 시빙상연맹 회장님과 이율기 시컬링연맹 회장님 등과 인연이 있어서 지난해 여름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면서 "현준이가 전학하면서 선학빙상장 옆 아파트로 이사왔다"고 말했다.안씨는 지난달 21일 열린 제98회 전국동계체전 인천 선수단 해단식에 참석했다. 당시,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아들을 대신해 안씨가 금메달 포상금을 받았다."인천에 와서 출전한 첫 동계체전에서 현준이가 금메달을 따줘서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인천시민으로서 시와 시빙상연맹 등에 보답했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안씨는 지난 17~19일 서울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제31회 전국남녀 종별종합쇼트트랙 선수권대회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안현준은 은메달 2개로 남고부 종합 4위를 차지했다. 종별종합대회는 500m, 1천m, 1천500m, 3천m 등 종목별로 얻은 점수를 합산한 총점으로 최고의 선수를 가리기 때문에 국내 쇼트트랙 대회 중에서도 최상급의 대회다. 안씨는 "현준이가 좋은 경험을 한 대회였다"면서 "다음 달에 있을 국가대표 선발전도 현준이에겐 좋은 선수로 커가는 데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안씨의 일과는 큰아들인 빅토르 안에 이어서 막내아들인 안현준까지 20여년 간 두 스케이터의 일상에 맞춰져 있다."빙상장은 훈련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부모의 도움이 필수인 것 같아요. 요즘 현준이의 경우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오전 6시까지 선학빙상장으로 갑니다. 일요일만 제외하고 주 6일 이어지는 일과입니다. 빙판 위 훈련과 평지에서 체력 훈련까지 3시간 정도 아침 훈련 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서울 회사로 출근합니다. 방과 후에도 3시간 정도 훈련하게 되는데, 오후 훈련은 엄마가 챙기고 있습니다. 선수 생활을 하지 않은 여타 두 자녀에겐 미안한 부분이지만, 아무래도 힘들게 운동을 하는 두 아들에게 마음이 더 갔던 것 같습니다."안현준이 스케이트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빅토르 안은 국적을 옮기면서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아들이 실력 외적으로 힘들게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아버지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현준이는 어린 시절 성남시청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하던 큰 형을 유난히 따랐습니다. 형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도 보면서 본인도 운동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했었죠. 현재 2020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세워놓고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대한빙상경기연맹도 예전에 비해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는 다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자연스레 빅토르 안에게로 화제가 옮겨졌다."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하게 된 배경에는 부상과 소속 실업팀의 해체 등 여러 요소가 작용했습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3관왕에 오르면서 실력이 없어서 국적을 바꾼 게 아니라 더 나은 여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한 부분이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명예회복을 한 현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이후에는 러시아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예정입니다."안씨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큰아들은 이미 세계적 선수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또한 성장할 것으로 조심스레 내다봤다."아들들이 스케이트를 잘 타는 비결을 주변에서 물어보시는데, 저는 학창 시절 핸드볼을 했습니다. 제 운동 능력이 아이들에게로 전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두 아들이 운동하는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건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쏟는 노력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목표 요인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안씨는 인천 선수로서의 안현준에 대한 바람도 밝혔다. 그는 "현준이가 시민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활약을 펼쳐 줬으면 한다"면서 "저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선수 2명을 길러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성적을 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현수 아버지' 안씨는 세계적 선수로 아들을 길러내면서 크나큰 영광을 안았다. 반대로 아들의 귀화 등 아픔도 느낀 인물이다. 이 같은 극단의 경험을 통해 세계 정상권 선수로 가기 위한 방향성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선수가 어떻게 노력하고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그 선수가 발전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안씨는 '현수 아버지'로서의 경험을 '현준 아버지'로 살리려 한다. 아버지의 경험에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선수의 노력이 어우러져 어떤 결실을 맺게 될 지 기대된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안기원씨는?▲ 1957년 서울 출생▲ 1989년 태광상사(의류부자재 제조·수출) 창업▲ 2006년 주식회사 태광트레이딩 법인전환(운영중)▲ 2008년 안현수 토리노 동계올림픽 1천m, 1천500m, 5천m 계주 '3관왕'▲ 2014년 빅토르 안(안현수) 소치 동계올림픽 500m, 1천m, 5천m 계주 '3관왕'▲ 2017년 안현준 제98회 전국동계체육대회 3천m 금메달세계적 쇼트트랙 선수인 빅토르 안(안현수)에 이어 국내 정상급 선수로 커가고 있는 안현준까지 형제 스케이터를 키운 안기원 씨가 인천 선학빙상장에서 세계적 선수로 아들을 길러내기까지 크나큰 영광을 안은 이면에 아들의 귀화 등으로 겪었던 아픔에 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안씨는 앞으로 "'현수 아버지'로서의 경험을 살려 '현준 아버지'로 살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2017-03-28 김영준

[인터뷰… 공감]퇴임 앞둔 조건호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각종 모임서 공직 후배인 군수·구청장에도 고개 숙이며 기부 설득대뜸 1억원 수표 건넨 '수도사 주지' 김혜운 스님 가장 기억에 남아귀하지 않은 성금은 없어… 최고의 성과 모두 인천시민에 공돌려직원들 시간 뺏을라 이임식 안해… 이곳에서 시간은 행복이었다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때 더 어렵고, 더 힘든 이웃들을 돌보자는 취지로 설립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 배지는 어느덧 나눔과 기부의 상징이 됐다. '짠물 도시' 인천에서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사랑의 열매가 인천 시민들의 가슴에 물들듯 새겨지고 있다. 지난해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인천공동모금회)는 전국 17개 지회 가운데 최고 성과를 냈다. 그 뒤에는 지난 6년간 인천공동모금회를 이끌어 온 조건호(83) 회장이 있다.1935년 옹진군 북도면 시도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1961년 대학을 졸업하고 공직에 입문했다. 경기도와 인천시 요직을 두루 거친 조 회장은 1995년 "고향 발전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민선 초대 옹진군수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됐다. 이후 2대, 3대 군수를 내리 역임한 뒤 2006년 45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2011년 3월부터 인천공동모금회를 맡은 조 회장은 6년의 임기를 마치고 오는 30일 퇴임해 평범한 인천시민의 삶으로 돌아간다.조 회장이 인천공동모금회와 인연을 맺은 2011년은 전해 발생한 공금유용사건 등으로 공동모금회의 위신과 신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때였다. 추락한 신뢰를 다시 회복해야 하는 막중한 시기에 인천공동모금회가 지역사회 원로로 꼽히는 조 회장에게 'SOS'를 친 것이다."가족들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모두가 만류했어요. 그런데 딸이 오히려 '이런 기회에 봉사하고 조직을 쇄신시키는 것이 더 보람된 일 아니냐'고 말하는 거예요. 마침 재단을 세워 지역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회장직을 수락했지요."조 회장이 인천공동모금회 회장이 된 후 느낀 것은 "인천에는 부자들이 참 많은데, 가난한 사람들도 참 많다"는 점이었다. 너도나도 힘들다고 하지만, 인천 지역의 사회지도층 먼저 기부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2011년 취임 당시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은 4명에 불과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개인 기부 활성화를 위해 2007년 12월부터 아너소사이어티 클럽을 운영해왔는데, 인천에서는 1년에 1명 꼴로 가입한 셈이었다.조 회장은 발로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가입을 권유했다. 일명 '회장님 수첩'을 만들어 가입 대상자 이름을 적은 뒤 각종 모임에 나가 끝까지 기부를 설득했다. 인천의 10개 군수·구청장이 모인 자리에 직접 찾아가 후배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아끼지 않았다. 새벽 같이 새얼아침대화와 인천경영포럼 등에 나가 사랑의 열매를 전했고, 소액이라도 정기기부에 동참하는 사업장이 있다면 직접 찾아가 감사를 전했다."연초가 되면 명단을 만들어서 일대일로 접근해 될 때까지 가입을 권유했어요. 군대로 치면 '각개전투'식이지. 보통 1~2년은 기다려야 하고, 길면 3년까지 기다린 분들도 계세요. 다들 요새 사정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면 서글플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다들 기부를 약속하시더라고요."자신의 명예와 지갑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인천공동모금회 회장 자리는 사실 무보수 명예직이라 오히려 '내 돈 써가면서 일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천의 존경 받는 원로로서 지역이 변화하길 바랐고, 어렵고 힘든 이웃들이 조금 더 나아지길 원했던 것뿐이었다.조 회장의 이 같은 노력 끝에 2016년 12월 인천에서 드디어 100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탄생했다. 지난 2008년 정석태 전 진성토건(주) 회장이 인천 지역 아너소사이어티 1호 회원으로 가입한 뒤 9년 만이다. 인천공동모금회는 100호 회원 가입을 기념해 남동구 구월동 사무실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을 개관하기도 했다. 명예의 전당에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의 핸드프린팅과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남은 빈자리를 기다리고 있다. 100호 회원 가입 이후 최근까지 3명이 더 가입해 인천의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은 103명이 됐다. 조 회장 임기 6년간 99명이 가입한 것으로 한 달에 1명 이상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늘어난 것이다. 종교인, 교수, 사업가 등 회원 면면도 다양하다. 이는 전국 어느 공동모금회 지회에서 볼 수 없는 성과다.조 회장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103명의 회원 중 31호 가입자인 '수도사 주지' 김혜운 스님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어느 날 김혜운 스님을 만나 기부를 부탁하고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권유했더니 대뜸 사무실로 오시더니 지갑에서 1억원 짜리 수표 1장을 떡하니 내놓고 나가시는 거예요. 어찌나 고맙고 기뻤는지 몰라요. 제 임기 동안 가입한 99명 모두 소중한 분이지요."조 회장은 친동생인 조상범 법사랑 위원 인천연합회(인성개발 회장) 회장의 묵묵한 도움도 잊지 않았다. 57호 회원이기도 한 조상범 회장은 부모처럼 믿고 따르는 '형님'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법무부 산하 범죄예방 봉사단체인 법사랑 위원 인천연합회 부회장 13명도 조상범 회장의 권유에 따라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에 줄줄이 가입했다.조 회장 부임 이후 인천공동모금회는 매년 지속적인 모금액 상승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임기 첫 해 72억 원이었던 모금액은 2014년 147억 원으로 2배 이상 늘었고, 2016년 160억원이라는 역대 최대 성과를 올렸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전국 공동모금회 경영성과 평가에서 3연속 최고등급을 받았고, 2016년에도 전국 최우수지회에 선정됐다. 공동모금회 성과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모금총액증가율, 아너소사이어티 신규회원 가입률, 개인 정기기부자 모금증가율, 기부자 유지율 등 거의 모든 항목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조 회장은 인천공동모금회의 성과가 모두 인천시민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라고 공을 돌렸다."땀 흘려 거리 공연을 통해 모아온 성금, 아이들의 사랑이 담긴 저금통, 여성 운전자의 택시 모금함 등 귀하지 않은 성금은 없지요. 이게 다 인천시민들 덕입니다. 인천이 사랑도 많이 생겼고, 정도 많이 넘치는 따뜻한 도시가 됐어요. 송도 신도시에 100층짜리 건물 짓는 것보다 시민 전체가 행복해지는 것이 인천 발전이라고 생각해요."30일 정든 인천공동모금회을 떠나는 조 회장은 이임식을 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점심시간 직원들과 평소 즐겨 먹던 순댓국을 먹으면서 조용히 후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 행사 준비로 직원들이 본연의 업무 시간을 빼앗길까 염려하는 마음에서다."나도 나이가 80이 넘어갔으니까 쉬고 싶어요. 주변에서는 아직 '청춘'인데 일을 더 하라고 하는데, 이제 집사람이랑 놀러 다니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인천공동모금회와 인연을 맺었으니까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여기서 일한 것이 보람도 보람이지만, 나는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조건호 회장은?▲ 1935년 인천 옹진군 북도면 출생▲ 1953년 인천중 졸업▲ 1955년 인천고 졸업▲ 1961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4년 부천군 공보실장▲ 1980년 경기도 기획담당관·안성군수▲ 1981년 인천시 재무국장·내무국장▲ 1986년 경기도 평택·송탄·안산·부천시장▲ 1991년 경기도 기획관리실장▲ 1995~2006년 인천시 옹진군 민선 1~3대 군수▲ 2011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인천지회 회장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조건호 회장이 인천공동모금회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100호 회원 가입을 기념해 남동구 구월동 사무실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개관한 아너소사이어티 '명예의 전당'에서 임기 6년간 99명이 가입한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을 이야기하며 인천공동모금회의 성과가 모두 인천시민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조건호 회장이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언론 속 아너소사이어티 기사를 설명하고 있다.

2017-03-21 김민재

[인터뷰… 공감]'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무원' 이화순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

젊은 女직원이라는 이유로 첫 직장 '감원 1호' 이후 동료 권유로 공직입문 29년 몸담아주민과 더불어 살던 구청장 시절 가장 기억에 남아… '내가 이래서 공무원이 됐지' 생각MOU 체결 기업 관계자들과 소그룹 간담회 계획 등 실제 투자로 이어질 수 있게 노력그의 걸음은 늘 처음이었다. 경기도 최초의 여성 기술감사계장, 성남 수정구청장, 도시주택실장, 기획조정실장, 의왕부시장, 화성부시장, 의회사무처장까지. 그리고 이달 초 경기도 여성 공직자로는 처음으로 1급 공무원이 되면서 또 다시 의미있는 족적을 남기게 됐다. 이화순 경기도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의 얘기다.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직 역시 여성 공직자가 맡는 것은 처음이다.누구도 밟지 않은 길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는 기분은 어떨까. 14일 경기도청에서 만난 이 청장에게 '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가 된 소감을 묻자 그는 "하하, 뭐 특별히 할 말이 있을까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서 감사하고 정말 좋습니다"라며 웃었다. 2017년 4월 그는 공직에 최초 임용된 지 29년이 된다. 이 청장이 가진 수많은 '최초'의 타이틀 속엔 울고 웃었던 29년의 시간이 묻어있다."제가 공직에 입문할 때는 여성이 적었기 때문에 '최초', '처음' 같은 수식어들이 많이 붙었지만 요새 들어오는 후배 공무원들을 보면 '내가 요즘 시험 봤으면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생각을 많이 한다"는 이 청장은 "사회가 여성, 남성에 대한 구분이 많이 엷어지고 누구나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본 토대는 마련된 것 같다. 선배가 이렇게 걸어온 길을 발판 삼아 많은 후배들이 더 크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최초 여성'1997년 3월 경인일보는 '부실시공 포도대장 떴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술 분야 여성 1호로 경기도 기술감사계장이 된 당시 이 청장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청장은 "제가 당시 건설교통부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하다 1997년 경기도에 왔다. 당시 기획감사계장을 맡게 됐는데 경인일보에 기사가 났다"며 "'나도 신문에 날 수 있구나' 싶어서 굉장히 신기했었다. 그때가 '경기도 최초 여성' ○○○ (직책) 타이틀로 기사가 나간 게 처음"이라고 회고했다.국가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여성 공직자가 적었던 시절, 줄곧 이 청장은 '처음'의 길을 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로 꼽은 성남 수정구청장 재임 기간도 마찬가지였다. 이 청장은 "공직에 들어와 경기도에서 주로 일을 했지만 정부 부처에서도 기초단체에서도 일을 했다"며 "정부 부처에서는 정책이 결정되고 법이 개정되는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고, 경기도에선 도 전체를 볼 수 있는 행정을 경험하는 등 곳곳에서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구청장을 맡았을 때"라고 했다. 벌써 15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수정구 주민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이 청장은 "구청 일은 정말 사람들이 먹고 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을 서비스해주는 것"이라며 "쓰레기를 치우고 교통을 정리하는 일 같이 사람들이 울고 웃고, 생활하는 일을 함께 하는 게 구청장의 일이더라.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통장님 이런 분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사람 사는 느낌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래서 공무원이 됐지' 라는 생각을 그 당시 정말 많이 했다"고 말했다.경기도 도시주택실장·기획조정실장, 화성시 부시장, 경기도의회 사무처장으로 재직했던 때도 빼놓지 않고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언급했다. "여러모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했다. 이 청장은 "도시주택실장을 두번했는데 그 중 2010년은 뉴타운 사업이 완전 뒤집어졌던 때였다. 민간하고 TF팀을 꾸렸었는데 3개월 동안 매일 아침 7시에 김밥 먹으면서 회의를 했었다. 기획조정실장 할 때는 도 살림을 총괄하고 도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니 의미가 있었다"며 "여러군데서 일을 참 다양하게 많이 했는데 화성시에선 '바다 행정'이라는 걸 처음 했다. 화성시는 인구도, 예산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갈등도 곳곳에 많았던, 정말 매력적이고 다이나믹한 도시였다. 도의회에선 128명의 도의원들과 호흡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배울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후배 여성 공직자·사회인들 모두 훌륭해… 제가 걸어온 길 발판이 됐으면'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가 된 이 청장에게 '여성'이란 더욱 남다른 단어일 터. 여성 고위 공직자가 흔치 않은 공무원 조직에서 그는 교육 기간 2년을 제외하고는 공직에 몸담은 29년간 공백 없이 달려왔다. "이번에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에 지원하려고 이력서를 쓰면서 보니까 교육 다녀온 것 외엔 한 번도 중간에 공백이 없었다는 점을 새삼 알게 됐다"던 이 청장은 "쉼 없이 다양한 곳에서 일해왔는데, 여성이라서 불편할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라고 털어놨다.그러면서도 "그런데 그게 꼭 단점만은 아니었다. 여성은 감성도 더 풍부하고 섬세하고 또 지구력이 있다. 의지만 가지면 여성이 잘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남자를 닮아갈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경험 역시 조직 내에서 직원들과의 관계, 민원인들과의 소통 등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게 이 청장의 설명이다. 황해경제자유구역청에서도 이러한 강점을 최대한 살리겠다고 했다. 그는 "기존 황해청과 MOU를 체결한 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소그룹을 구성해 간담회를 하려고 한다. 20~30명을 한번에 모아 회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서너명 조금씩 모여 요즘 각 회사가 어떤 상황인지, 어려운건 없는지 일일이 이야기를 들으면 실제 투자로도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제가 취임식 때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정성을 갖고 함께 일할 수 있게 발로 같이 뛰자'고 말했다. 새로운 자세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라고 밝혔다.애꿎게도 지금의 이 청장을 있게 한 건 공직에 입문하기 전 몸담았던 기업의 여성 인력 감원 방침이었다. 이 청장은 "남편과 대학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졸업 후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 당시는 젊은 여성 직원들이 '감원 1호'가 됐던 시절이었는데 저도 예외는 아니었다"며 "회사 다니다가 자유의 몸이 되니 잠깐은 홀가분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다들 앞으로 가는데 저만 거꾸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하루하루가 하릴없이 가던 그때, 1년 먼저 회사를 그만둔 직장 동료의 권유로 고시 공부를 하게 된 게 '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 이 청장을 만들었다.이 청장은 "요새 공직에서도 그렇고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후배들을 보면 똑똑하고 역량을 갖춘 분들이 많다"며 "저는 여성 공직자들이 많이 없었던 때 출발했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아도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지만 그런 발자국 하나하나가 후배 사회인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까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에 망설임 없이 발자국을 찍어왔다. 앞으로 그의 발자국은 또 어느 낯선 길에 찍히게 될까.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이화순 청장은?▲ 1961년(만 55세) 충북 보은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건축계획학) 졸업▲ 1988년 4월 최초 임용(기술고시 23회)▲ 2003년 성남시 수정구청장▲ 2004년 의왕시 부시장▲ 2006년 경기도 건설본부장▲ 2008·2010년 경기도 도시주택실장▲ 2012~2014년 국토교통부 기술안전정책관·건축정책관▲ 2014년 경기도 기획조정실장▲ 2014~2016년 화성시 부시장▲ 2016~2017년 경기도의회 사무처장▲ 2017년 3월 ~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가 된 이화순 경기도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이 "여성으로서 공직에 몸담아 다양한 분야에서 30여년 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관계자들과 소통하는 황해경제자유구역청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이화순 청장이 1997년 3월 기술 분야 여성 1호로 경기도 기술 감사계장이 됐다고 보도한 경인일보 지면. /경인일보 DB

2017-03-14 강기정

[인터뷰… 공감]한국교총 직선제 최초 여성 회장 인천교총 박승란 교장

교총 가입 강요 교장에 맞서 탈퇴 '해야할 말 못참아'이사 제의 받고 다시 인연… 교섭위원 활동 이어와'현원 대장' 전산화 등 새로운 일보다 관행 철폐 앞장현장 목소리 중요… 좋은 교육 환경 만드는 일 최선국내 최대 규모의 교원 단체인 한국교직원총연합회(한국교총) 70년 역사에서 직선제로 선출한 첫 여성 회장이 인천에서 나왔다. 인천시교원단체총연합회(인천교총) 박승란 회장(인천신광초 교장)으로 지난 달 제14대 인천교총 회장에 취임해 활동 중이다. 한국교총에 따르면 박승란 회장이 뽑히기 전까지 17개 시·도교총에서 여성으로 회장에 오른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중앙대 설립자로 초대 총장을 지낸 임영신(1899~1977년) 박사가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한국교총의 전신인 대한교육연합회 11~13대(1965~1972년) 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임 회장은 간선으로 선출됐다.초·중등 교원 성비 불균형이 매년 심화해 사회적 논란이 되는 상황이다. 교원 단체인 시·도교총의 여성 리더가 70년 만에 나왔다는 사실은 교총 내부에서도아는 이가 많지 않다.'최초의 여성 회장'이란 타이틀을 염두에 두고 지난 27일 오전 11시 인천신광초에서 박 회장을 만났다. 박 회장은 "주변에 여자 선배님들 중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많다"라면서도 "여자로서라기 보다 인천교총 활동을 오래 해왔고, 함께 활동한 분들의 권유도 있어 회장에 나섰다"고 말했다. 박승란 회장을 오랜 기간 지켜본 이들은 그녀를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박 회장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순간을 못 참는다"고 말했다. 14대 인천교총의 캐치프레이즈는 '선생님 곁에 교총'이다. 교권 보호·확립을 위해 실질적 지원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고 홍보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박 회장은 1961년 경기도 시흥시 소하리, 지금의 광명시 KTX역 부근에서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 교사였던 부친의 '외벌이'로 꾸려지는 생계가 넉넉하지 않았지만, 1960년대에 딸을 유치원에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10대 시절 역사학자가 꿈이었지만 아버지 권유로 인천교대(현 경인교대)에 진학했다. 교대를 졸업하고 1982년 초임 교사가 됐을 때 아버지에게 들은 조언은 30여년 교사 생활의 나침반이 됐다."처음 교직을 시작할 때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교장·교감에게 인정받는 교사가 되기 보다, 동료와 학부모가 자녀를 맡기고 싶어하는 교사가 되라'고. 이 이야기를 2002년 인천대 교육대학원 석사 과정 때 '장학론의 대가'인 이윤식 교수님께 들었어요. 이 교수님은 '좋은 교사상' 모델을 이렇게 설명하셨어요.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함께 하는 교사 중 가장 좋은 선생님을 꼽아봐라. 그 중에 내가 맡길 교사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 사람들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끄집어 내라'고. 저는 지금도 이런 교사상이 확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박 회장을 설명하는 키워드의 하나는 '당당함'이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 앞장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교총 탈퇴 사건'이었다. 박 회장은 두 번째 발령받은 인천석남초에서 교총 가입 강요 문제로 교장과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자신이 교총 회원이었지만 학교 교무부장 등이 '무리수를 둬가며' 후배 교사들에게 교총 가입을 유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후배 교사를 두둔했다. 마침 교무실을 찾아온 교장에게 "설득을 해야지 강요는 안 된다"고 얘기했다가 언쟁이 붙었다. 이 일로 박 회장은 교총에 탈퇴서를 냈다. 교직 경력 8~9년 차에 벌어진 일이다. 평교사가 공개된 자리에서 교장의 입장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도 드물지만, 1980년대 후반 당시에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하나의 '사건'이었다. 박 회장은 "후배교사가 '무조건 교총에 가입하라'는 말을 듣고 무척 부담스러워 해 '이건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말하고 행동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박 회장은 '엄격하지만, 아이들 마음을 읽으려는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과 노는 일을 좋아해 초임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걸스카우트 인천연맹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사로서 역량을 높이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교총과 다시 인연이 시작된 건 지난 2000년부터다. "할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박 회장에게 '교총 이사' 제의가 들어와 수락했다. 교총 이사회에 참석했고, 정책위원이 됐다. 정책위 활동을 하며 인천의 교육 정책에 눈을 떴고, 이는 인천교총 교섭위원 활동까지 이어졌다. 박 회장이 교섭위원 활동을 하는 동안 인천교총은 '직장 어린이집 개설' 등 크고 작은 성과를 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관행 철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 '현원 대장'의 전산화를 이끈 일은 흥미롭다."교감이 되면 '현원 대장'을 작업하게 돼 있어요. 전체 직원들이 언제 들어와 무엇을 하고 언제 나갔는지를 기록하는데, 이것을 한자 수기(手記) 3부를 작성하는 거에요. 현원 대장 용지까지 지정돼 있었어요. 전산으로 입력하지 않고 왜 수기로 쓰느냐고 물어보는데, 모두 당연하게 써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대안을 얘기하지 않더라구요. 인천교총 교섭을 통해 현원 대장 전산 입력을 가능하게 했는데, 그게 작년의 일이에요."박 회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인천신광초 교장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책상 옆 벽면의 한자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여일리불약제일해 생일사불약멸일사).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고, 새로운 일을 한 가지 더 하는 것은 하고 있는 한 가지 수고를 더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칭기즈 칸의 책사(策士) 야율초재(耶律楚材)가 한 말이다. 10여년 전 인천용일초에서 교무부장 시절 책에서 얻은 글귀로, 그 이후 계속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있다고 했다."제가 욕심이 많아요. 그래도 가급적이면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보다, 불편한 것을 개선해 나가면서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칭기즈 칸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는 글도 몰랐지만 경청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 저 역시 경청하는 사람이 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박 회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사의 자존감은 교사의 전문성에서 나오고,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곧 교권을 지키는 일"로 보고 "혼자보다는 조직이 교권을 강하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천교총 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회장 임기 3년간 남기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다."결국은 교권입니다. 교권이라는 게 선생님의 권리가 아니라 가르치는 권리예요. '가르치는 맛 나는 학교,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선생님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저도 학교 현장에서 어렸을 때 저항도 많이 했고, '아니다'라는 말도 많이 해봤어요. 나 혼자 교직에 있다가 점찍고 나가는 것도 좋지만, 교총이라는 조직에 들어왔고 조직의 수장으로서 우리 후배들이 좋은 교육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작은 기여라고 하고 싶습니다."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박승란 회장은? ▲ 1961년 경기도 시흥시 소하리(현 광명시) 출생▲ 1974년 인천부평서초 졸업▲ 1977년 인천부평여중 졸업▲ 1980년 인천여상 졸업▲ 1982년 경인교대 졸업, 인천청천초 부임▲ 2000년 인천교총 교섭위원(~2016년)▲ 2008년 제11대 인천교총 부회장▲ 2009년 교감 임용(인천능허대초)▲ 2013년 인천교총 교섭위원장(~2016년)▲ 2014년 제13대 인천교총 부회장▲ 2015년 교장 임용(인천신광초)▲ 2017년 제14대 인천교총 회장박승란 인천시 교원단체 총연합회 회장이 신광초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가르치는 맛 나는 학교,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선생님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밝혔다.

2017-03-07 김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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