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 경기지부 회장

'안보에 좌·우 없다' 취임 후 혁신 발걸음, 많은 회원들 공감·동행사재 털어서라도 회령진성에 국제자원봉사센터·힐링센터 세울것세월호 분향소 지킴이 자처, 안산 정부 합동 분향소 유일하게 지켜3차례 부도 위기 딛고 일어선 뚝심 "봉사 힘으로 지역 발전 돕겠다""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1597년) 승리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장흥 회령진성을 안보와 자원봉사의 메카로 만드는 게 소망입니다."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이하 자총) 경기지부 회장(54)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이순신과 12척의 배'를 화두로 꺼냈다. 화두라기엔 구상이 구체적이다. "이충무공의 유적이 있는 전남 고금도에 안보와 자원봉사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국제자원봉사센터와 힐링센터를 세우겠다"며 "사재를 헐어서라도 회령진성에 12척의 배를 복원해 역사관광 명소를 만든 뒤 안보·자원봉사재단을 설립해 나라를 위한 참다운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밝혔다.이유가 의미심장하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망가진 배 12척을 300여 명의 목수를 동원해 수리한 뒤 왜군의 침략으로 위기에 내몰린 민족과 나라를 구했듯이, 장흥 회령진성에서 안보정신으로 무장한 자원봉사자를 육성해 북핵과 외세 등으로 전쟁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을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왜침에 대비한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떠올랐다.최근 홍 회장의 행보는 자총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탄핵정국을 통해 '태극기 부대'로 낙인찍힌 낡고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참다운 안보단체로서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행보다. 지난해 자총 안산시지회장 시절엔 일부 회원들이 촛불집회에 맞서 서울 태극기 집회에 나가자고 주장하자 "자유총연맹은 순수 안보단체이지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단체가 아니다"라고 반대했다. 내부의 눈총과 외부의 신선한 평가가 엇갈렸다.자총 경기지부 회장 취임 이후에도 홍 회장의 자총 혁신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 8월 한국자유총연맹 경기도지부 제11대 회장 취임식에서 김구 선생의 "독립된 내 나라의 문지기가 되겠다"는 어록을 인용해 나라 지키는 일이 이념에 앞선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9월 체육대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위기가 오거든 목숨을 바쳐라"는 문구를 소개해 안보단체인 자총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보수 이념의 선봉임을 자임하던 회원들에게 나라를 위한 헌신을 강조했다. 정권 안보가 아닌 순수한 국가안보 수호가 자총이 나아갈 길임을 제시한 것이다.'안보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소신과 행보는 주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혹자는 '안보단체의 수장이 맞느냐'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그러나 홍 회장의 나라와 민족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오랜 세월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뜨거운 열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하자' '도와 달라'는 말에 함께 봉사현장을 누비거나 쌈지 돈을 털어 동행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는 "보수는 부모와 같고 진보는 자식"이라며 국가 안보를 위해선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홍 회장의 남다른 행보는 국가재난인 세월호 사태 때도 역력히 드러났다. 지난 2012년부터 올해 7월까지 6년여간 자총 안산시지회장을 역임한 홍 회장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한 그 날 저녁부터 '세월호 분향소 지킴이'를 자처해 왔다. 자총 안산시지회 회원들이 1천 일이 넘는 현재까지 안산 화랑유원지 내 정부 합동 세월호 분향소를 유일하게 지키는 것도 홍 회장의 뚝심 덕분이다.'자총이 세월호 분향소를 지킬 이유가 있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그는 "그럼 정부 합동분향소란 간판을 떼고, 정부가 파견한 서기관을 철수시키라"라고 되받았다. 이어 "국가 위기 상황에서 안보를 위해 활동하는 자총이 아니면 누가 합동분향소를 지키느냐"고 설득, 정부 유관기관의 지원을 이끌어 낸 일은 여전히 회자되는 일화로 남았다. "세월호 미수습자 귀환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합동 영결식을 마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총 안산시지회와 함께 분향소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공인의 삶'을 살며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이전, 홍 회장은 스스로 전기 노동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전기회사 CEO에서 부동산디벨로퍼로, 문화사업가로, 지금은 사회공헌 봉사가로 성장하기까지, 그 역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1963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홍 회장은 16살 때 광주특별시에 소재한 기술직업학교(전기)로 공부하러 갔다가 5·18 광주 사태 때 직업학교 부도로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의 한 전기공장에서 노동자로 지내던 그는 1985년 안산 반월시화산단의 전기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중 회사가 부도로 실업자가 됐다.이후 전기 엔지니어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홍 회장은 1988년 (주)장흥전력을 창업한다. 맨몸으로 창업한 홍 회장과 공동 창업자인 부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1995년 거래하던 건설업체의 부도로 1차 경영위기에 빠져 3년여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홍 회장은 곧 이어 닥친 IMF경제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는 투지를 보였다. 1999년 안양의 한 공원조성 사업에서 3억8천여 만원 규모의 공사를 가까스로 따낸 뒤 회생의 길을 걸으며 승승장구했다.장흥전력은 지난 2006년 반월공단 내 아파트형 공장(5만여㎡)에 투자했다가 은행으로부터 중도금 대출을 받지 못해 헐값에 부동산을 팔아야만 했다. 자금 유동성이 경색되면서 2차 경영위기로 회사까지 부도날 뻔 했다. 하지만 2008년 리먼 사태로 국제경제가 곤두박질 칠 때 홍 회장은 안산 고잔 신도시 내 영화관 건물과 맞은 편 웨딩 부지를 경매를 통해 인수하는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하지만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서 3차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관행처럼 운영해 왔던 회사의 비정상적인 경영에 세무당국이 메스를 댄 것이다. 자칫 모든 것을 날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홍 회장의 대응은 정공법이었다. 그동안 사업을 통해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세무조사를 무마하거나 세금을 깎으려 들기보다는 '자신의 경영이 뭐가 잘못됐는지'를 반성했다. 눈물을 머금고 젊은 부부의 애정이 담긴 회사의 이름을 (주)거룡전력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 선택을 홍 회장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금전적으론 수백억 원을 손해 봤지만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좋기 기회가 된 시점이었다"고 회상한다.홍 회장은 2010년 3월부터 (주)희성엔터테이먼트를 설립, 극장 등 문화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동시에 지역사회 발전에 밑거름이 될 자원봉사가로 사회공헌사업에 뛰어들었다. 올해 4월 안산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으로 선출된 홍 회장의 자원봉사 활동은 명성이 자자하다. 자총 안산시지회장을 역임하면서 안산시민을 위한 안보 캠페인 및 독거노인 후원활동,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사업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지역 자원봉사단체와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시민의 힘으로 안산이 변화할 수 있도록 봉사단체들의 플랫폼 임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했다. 안산시는 최근 '2017 제31회 안산시 문화상'(지역사회개발)을 그에게 안겼다.그는 정이 많은 리더이다. 홍 회장은 지난 6월 발생한 산불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강릉과 삼척 피해 지역 이재민 지원에 써달라며 성금 1천만 원을 쾌척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태는 것이 자원봉사"라며 "산불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분들께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일상생활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라는 맘에 강원도를 찾게 된 것"이라고 그는 애써 좋은 웃음을 지었다."지금의 나는 모두 가족과 주변 지인들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홍 회장은 "굳건한 안보로 이 민족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원봉사의 힘으로 지역사회를 발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미력한 역할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주)거룡전력 대표인 그는 안산시 생활체육협의회 해양레포츠연합회장(2010), 안산25시광장 연합회장(2011), 통합 안산시 유도회장(2017~현재) 등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지난 1987년 결혼한 (주)장흥전력 공동창업자인 부인(52) 사이에 3형제를 두고 있다. 글/전상천기자 junsch@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홍희성 한국자유총연맹 경기지부 회장은 정권 안보가 아닌 순수한 국가안보 수호가 자총이 나아갈 길임을 제시하며 "자원봉사의 힘으로 지역사회를 발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미력한 역할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17-10-10 전상천

[인터뷰… 공감]DMZ국제다큐영화제 집행위원장 배우 조재현

영화제가 힘 생기면 공격 받겠지만 그만큼 힘있는 영화제가 되기 원해사장과 알바 입장이 다른 '최저시급' 치킨집 소재 다큐로 만들고 싶어당초 목표 80%는 달성… 10주년 앞두고 강박은 없지만 새 출발점 돼야규모에 비해 사무국 인원 적어… 365일 다큐 상영하는 장소 마련 '노력'노조원 이야기에 왜 사측 입장은 보여주지 않느냐는 고등학생혐한데모 다룬 영화에서 혐일도 함께 문제 제기한 재일 한국인 감독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다큐에 대한 그의 고민9년 전, 배우 조재현은 경기도로부터 DMZ국제다큐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봄이었고, 영화제는 같은 해 가을에 열릴 예정이었다. 급조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없어지는 것도 금방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DMZ라는 장소가 가진 힘과 다큐라는 장르의 매력이 부합한다며 성장 가능성을 높이 봤다. 그렇다면 해볼만 하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그와 DMZ국제다큐영화제는 올해도 안녕히 관객과 만나고 있다.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목표를 세웠어요. 내가 위원장이 아니더라도, 경기도지사가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드는 것이었죠. 정치적으로 휩쓸려서 영화제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어요. 다큐 영화 만드는 감독들은 대부분 진보적인데, 초대 조직위원장이었던 당시의 경기도지사는 새누리당 소속이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대로 했죠. 지금 도지사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한결같이 지켜주고 있어요. 언젠가 도지사가 바뀌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고, 영화제가 힘이 생기면 공격을 받게 되기도 하겠죠. 그러나 공격받을 만큼 힘이 생긴 영화제라면 흔들기도 어려워요. 그런 영화제가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드물게 장수하고 있는 그는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만들어진 감동적인, 소소한, 의미심장한, 유쾌한, 안타까운, 곱씹게 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간직하고 있다. "재작년 청소년경쟁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영화가 학업 성적이 좋은 친구가 만든 작품이 있었는데, 제목이 '시발'이었어요. 수업과정에 대한 스트레스를 담았는데 그 한마디 제목이 시원스러웠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대학도 다큐 공부를 하는 쪽으로 갔다더라고요. 올해부터는 '영상으로 쓰는 생애 이야기'라는 실버 세대를 위한 다큐 제작 지원도 하는데, 참가하신 분들 대부분이 70대이시고, 90대인 분도 계세요. 처음으로 카메라를 만지고 촬영을 하는 거예요. 구술사와 감독의 도움을 받아서 아주 진지하게 작업하시고 계세요. 영화제 2회 때 쌍용자동차 파업을 기록한 '저 달이 차기 전에'를 상영했을 때는 관객들이 많이 울었어요. 다큐 제목은 노조원이 달을 보며 '저 달이 차기 전에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탄하는 장면에서 따온 거예요. 노조위원장이 패배를 인정하는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죠.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왜 사측의 입장은 보여주지 않느냐?'고 질문하더라고요. 그때는 학생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데 놀랐고, 한편으로는 다큐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어요. 어제 상영한 '카운터스'에는 혐한데모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요. 이들의 대장은 야쿠자였어요. 스스로 우파라고 생각하고, 혐한데모를 했던 사람이에요. 혐한데모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하지 말자고 데모를 하게 된 거예요. 영화는 혐한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재일 한국인인 감독은 한국에서의 혐일 행위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 합니다. 재일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생각과 시선이 담겨있어요. 오 아니면 엑스가 아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요."지난 9년 동안 조재현 집행위원장은 다양한 사람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나고, 이를 통해 수많은 삶의 조각을 접했다. 그 조각들은 하나도 같은 것 없이 각자의 색으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보는 그도 변했고, 세상의 변화도 실감했다. "자기 생각과 성향을 표출하는데 당당해진 것 같아요. 2002년이 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월드컵 이후부터 촛불로 표현하고 한데 뭉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죠. 그러나 서로 표현만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지 않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상대를 더 이해하고 인정하며 다양성을 길러야 합니다."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다큐멘터리가 주춧돌이 되리라고 그는 믿는다. 그런 사회가 될수록 다큐의 영역은 확장되고, 관객들에게도 더 환영받을 것이라고도. 이를 위해 자신이 직접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의향도 있다. 제목은 아마 '나는 치킨집 사장님이다'일 것이다."다양함에 대해서라면 직접 다큐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지인이 프랜차이즈 치킨 가게를 운영하는데, 굉장히 잘 되는 편이래요. 그 집에 갈 때마다 손님들이 차있어요. 장사가 잘될 때 수입이 500만원, 잘 안되면 250만원 정도 된데요. 근데 내년 최저시급이 1만원이 됐잖아요. 오른 시급으로 알바비를 주면, 장사가 잘 안되는 달에는 수입이 50만원 정도가 될 거라며 걱정하고 있어요. 청년들의 입장은 또 다르죠. 물러설 수 없는 첨예한 문제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내년이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10회를 맞는다. 세계 30여개국 62편의 작품이 참가한 가운데 첫 영화제를 시작했고, 올해는 109개국 1천187편의 출품작 중 42개국 114편이 상영된다. 경쟁부문은 국제경쟁, 아시아경쟁, 한국경쟁, 청소년경쟁 등 4개의 섹션으로 진행되며 총 11개 부문을 시상한다. 신인다큐감독 발굴을 위해 '젊은 기러기상'도 신설했다. 제작 지원을 받았던 감독들이 수상자로 돌아왔고 참가자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다양해졌다.집행위원장을 오래 할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의 목표를 달성하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기왕 여기까지 오고 나니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초대 집행위원장으로서 꼭 해야 할 일, 정착시켜 안정적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80%쯤 달성했다고 봅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먼 일이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이 영화제가 꼭 필요한 영화제로 보여지고 느껴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그는 10주년을 크게, 화려하게 해야한다는 강박은 없다고 했다. 다만 미래를 준비하는 계획의 출발점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다 단단한 조직을 만들고, 상설 상영관도 마련할 계획이다. "영화제 기간동안은 40~50명의 인원이 일을 하지만, 영화제 사무국 고정 인원은 6명이에요. 영화제 규모가 커진데 비해 너무 적죠. 일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체계적으로 업무가 연장되려면 이보다는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또한 크지는 않더라고 365일 언제든 다큐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을 해결하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다보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조재현 위원장은?-경력▲ 2009.07 ~ 현재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 현재 경성대학교 예술종합대학 영화학과 교수▲ 2012.03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문화예술대학 미디어영상연기과 학과장/ 부교수▲ 2010.08~2014.09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2009.01~2014.05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수상내역▲ 2015 S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2013 제17회 몬트리올 판타지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2011 연극열전3 어워즈 작품상▲ 2008 MBC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최우수남자연기상▲ 2001 S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1992 청룡영화제 신인연기자상▲ 1991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자상DMZ다큐영화제가 진행 중인 지난 24일 고양 일산 메가박스 백석점에서 조재현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옥상 야외테라스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을 오가면서 그와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DMZ국제다큐영화제 제공

2017-09-26 민정주

[인터뷰… 공감]곽재영 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

육상 중·장거리선수 활약40년 가까이 인천육상 이끌어 온지역 체육계 든든한 버팀목아직도 뛰고 있는 선수들 보면다리에 힘이 들어간다고◈육상 접한 계기와 기억에 남는 순간중 1학년때 잘 뛴다는 선배 권유로 시작강화 3·1절 기념대회 내가 초대 우승자◈체육계 수장으로 잊지 못 할 일육상연맹도 안될거라던 亞육상선수권2표 차로 인도 꺾고 인천유치 이끌어내◈후배 체육인들에 당부의 말씀'떠난 다음에는 말하지 말라'가 내 신조비난이 될 수 있기에 조언은 안하는 편◈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대해풀코스 국제대회로 개최위해 서둘러야대회만의 특징있는 기념품 제공도 필요인천 체육과 평생을 함께 한 곽재영(87) 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지역 체육계 원로로서 여전히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교와 대학 재학 시절 육상 중·장거리 선수로 활약했으며, 인천이 경기도에 속했던 1975년 경기도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체육 행정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40년 가까이 인천 육상을 이끈 곽 전 회장의 육상 인생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될 정도로 에피소드가 넘쳐난다.2014 인천아시안게임 유치의 밑거름이 된 제16회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2005년 개최)부터 지역 육상과 마라톤대회들까지 곽 전 회장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아직도 운동장을 달리는 선수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는 곽 전 회장에게 마라톤과도 같은 체육(육상) 인생을 들었다.-육상을 접한 시기와 계기는.당시엔 인천기계공고가 6년제였다. 숭의초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봐서 기계공고 6년제에 입학했다. 1학년 때 선배들이 한번 뛰어보라고 해서 운동장을 뛰었는데, 잘 뛴다고 육상부를 권유해서 바로 들어갔다. 일제시대 때 태어나 분위기상 운동을 할 수 없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들어간 중학교 1학년 때 육상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야구나 축구 같은 구기 종목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은 육상 뿐이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지금도 매년 강화에서 3·1절 기념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60회가 넘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첫 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1회 대회 우승자다. 60여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현재 인천 중구청 부근에서 출발해 옛 부평 경찰학교까지 돌아오는 20㎞ 코스였는데,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이 밖에도 학년별 육상대회가 있었는데, 중·장거리 종목에서 3관왕에 오르며 최우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요즘처럼 좋은 경기장에서 세련된 방식으로 경기를 한 건 아니었지만, 각 학교에서 펼친 응원전은 상당히 열광적이었다. 달리는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완주를 하면 그 괴로움은 눈이 녹듯 사라진다. 완주했을 때 느끼는 희열을 잊지 못해 지속적으로 달렸던 것 같다.-체육 행정가로 변신은 언제 한 건가.고교 졸업 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동국대로 진학을 했다. 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는 경기도육상경기연맹에 들어갔으며, 어린 나이에 경기도체육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한때 인천 제일생명 초대 지점장을 지냈으며, 10년 정도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인천시육상연맹 회장과 시체육회 이사로 활동을 시작했다.-그동안 지역 육상과 체육계의 수장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지난 2005년 9월 인천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다. 북한을 포함해 43개국이 참여했는데, 너무 자랑스러웠다. 당시 영창악기 대표가 친구였는데, 대회 관중을 위한 경품용으로 쓰기 위해 친구에게 피아노를 원가에 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고, 친구가 흔쾌히 응해서 피아노를 경품으로 내걸 수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응원전은 더욱 뜨거웠다. 대회 개최 전으로 돌아가서, 당시 안상수 시장이 대회 유치를 제안했다. 내가 공식적인 유치 활동에 나섰는데, 대한육상연맹에서는 안 될 거라고 했다. 인천 육상이 망신만 당할 것이라는 목소리들도 만만치 않게 들렸다. 내가 직접 아시아육상연맹을 찾아가 유치 운동을 벌였다. 필리핀 총회에서 대회 개최지를 선정했는데, 17-15, 단 2표 차로 인도를 꺾고 인천으로 대회를 가져왔다. 당시 깊은 관계를 맺은 아시아연맹 회장이 훗날 2014 인천아시안게임 유치 때도 도움을 많이 줬다. 지금도 모리스 니콜라스 아시아연맹 사무총장을 비롯해 다들 형제처럼 지낸다. 지역 체육계로 넓혀서 본다면,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로 편제된 후 시체육회 이사를 맡았었는데, 당시 숭의경기장 옆에 건립한 체육회관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심재홍 시장(시체육회장)이 체육회관을 짓는데 얼마가 들어가느냐고 묻길래 10억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45억원이 들어갔다. 훗날 심 시장이 나한테 거짓말 했다고 하길래, '돈 많이 든다고 했으면 짓게 했겠느냐'고 답하고는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난다.-현재 들어선 인천축구전용경기장과 주변 아파트 단지가 계획되면서 숭의경기장과 도원야구장, 체육회관은 모두 헐렸다. 체육회관 지었을 때가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으면, 헐릴 때 상당히 아쉬워했을 것 같다.2008년께 경기장과 회관이 헐렸다. 헐리기 전 회관에 입주해 있던 경기가맹단체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아쉬움의 술잔을 기울였던 생각이 난다.-지역 체육계 어른으로서 후배 체육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내 신조가 '떠난 다음에는 말하지 말라'이다. 비난이 된다. 현재 연맹 회장도 관둔 상태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조언 등은 안 하려고 한다.-오는 24일 올해 하반기 인천에서 열리는 최대 마라톤 축제인 2017 인천 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린다. 대회 설립을 주도했는데.모리스 니콜라스 아시아연맹 사무총장이 대회 설립에 도움을 많이 줬다. 만약 나와 형제처럼 지내는 모리스 사무총장이 없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상반기에 열리는 인천국제하프마라톤대회가 기존에 있는 상황에서 한 도시에 2개 국제 하프 마라톤대회를 배정하지 않았을 거다. 아시아연맹의 전 회장과 현 회장 모두 힘 써줬다.-수년 동안 송도국제마라톤대회를 지켜봤는데, 더욱 발전하기 위해선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나.송도국제도시 안에서 이뤄지는 이 대회는 코스도 좋고, 발전 가능성이 많다. 최대한 빨리 풀코스 국제 대회를 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풀코스 국제대회로 올라서면 참가 선수들부터 해서 대회의 규모와 격이 올라간다. 그리고, 해외 이름 있는 마라톤 대회들을 보면 마라톤 완주자들에게 그 대회만의 특징이 잘 반영된 의미 있는 기념품들을 제공한다. 송도국제마라톤대회도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송도국제마라톤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마라토너들을 비롯해 마라톤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마라톤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가장 정직한 운동이다. 달리면서 자아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스포츠인 마라톤을 보다 많은 시민이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대담·정리/임성훈 인천본사 문체부장·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곽재영 전 회장은? -학 력▲ 1951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경 력▲ 1975년 경기도육상경기연맹 부회장 ▲ 1976년 경우해운(주) 대표회장▲ 1978년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1981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 인천시체육회 이사▲ 1989년 인천시체육회 실무부회장▲ 1994년 인천상공회의소 부회장▲ 1996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2001년 (사)한국육상진흥회 이사▲ 2004년 제16회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2013년 1월 인천육상경기연맹 회장 이임▲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인천 체육(육상)과 평생을 함께 한 곽재영 전 인천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달리는 과정은 힘들지만, 완주하고 나면 그 괴로움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면서 "가장 정직한 운동인 마라톤을 보다 많은 사람이 접하고, 완주했을 때의 희열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7-09-19 임성훈·김영준

[인터뷰… 공감]100여개국 돌며 여행 에세이 쓴 김인자 작가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현대시학으로 등단… 결혼 후 '詩 쓰기' 시작43세때 '첫 발' 20여년간 히말라야 트레킹에 아프리카 트럭여행까지 도전휴대전화 없이 카메라만 들고 빵 한 조각 나눔의 행복 등 사람이야기 담아산문 쓰더라도 나는 '결국 시인'… 시를 쓰며 인생이 여행인 듯 흘러갈 것'엄지를 세워 보우!라고 인사하는' 아이에 대해 김인자 작가는 썼다. '잠보!'라는 인사와 '하쿠나 마타타'라는 인사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책 속에는 세마댄스를 추는 세마젠들도 있다. 치맛자락과 신발 끄는 소리로 춤은 시작된다. 무용수들은 아주 느리게 돌기 시작해 조금씩 빨라지는데 같은 동작이 10~15분간 지속된다. 이는 더 깊은 고통으로 들어가기 위한 무아의 세계, 즉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진정한 망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고('사과나무가 있는 국경' 71p.).요즘은 누구나 여행을 한다. 이번 추석 연휴동안에는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9명이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이제 여행은 특별한 것이 못된다. 여행관련 서적도 넘쳐나서 여행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여행자가 되는 동안 김 작가는 여행 에세이를 10여 편 발표했다. 모두 여행 에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지만 어떤 책은 가이드 역할을 하고, 어떤 책은 시집 같기도 하다. 올해 7월에는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이라는 제목의 '포토 에세이'를 펴냈다. 20여년 동안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그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은 글을 모았다. 여행보다는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이 담겨있는 책이다.김인자 작가는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결혼해 수원으로 와서부터 시를 썼는데 특별히 시를 배운 적은 없다고 한다. 시는 배워서 될 게 아니라고 일찌감치 생각했다. 배우기보다는 그저 다르게 보려고 애를 썼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여행은 43살에, 두 딸과 함께 했다. "그 당시에는 혼자 여행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남편은 공무원이고 저는 종부고. 여행을 시작할 때 혁명수준의 투쟁을 했어요. 혼자 처음 여행 갈 때는 패키지로 간다고 둘러대고 개인여행을 했어요." 서유럽에서 시작한 여행로는 100여 개국으로 뻗어 나갔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7차례 떠났고, 킬리만자로며 안데스 등 높다는 산 근처에는 다 가봤다. 수십 개국을 여행한 끝에 아프리카 트럭여행을 시도했다. '인류의 시원(始原)'이라는 아프리카에 꼭 가고 싶었는데, 국내 여행사에는 아프리카 여행상품이 없었다. 영국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팀을 꾸릴 수 있었다. 17명이 한 팀인데 아시아인은 김 작가 뿐이었다. 이십대 백인 청년들과 개조한 트럭을 타고 돌아다녔다. 청년들은 여행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김 작자의 경험은 여행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에서 그들은 완전히 다른 풍경과 사람들을 만났다.아프리카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여행 중에는 언제나 새롭고 놀라운 것들,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 한 번은 말라위에 갔다. 둘째 딸이 영국의 NGO단체 소속으로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 작가가 알던 둘째 딸은 지극히 평범한, 도시아이였다. "숙소에 물을 받아 놓고 쓰는 욕조가 있었어요. 죽은 쥐가 물에 떠있는 걸 보더니 딸아이가 맨손으로 건져 뒤뜰에 묻더라고요. 벌레 한 마리에 기겁하고 난리치던 아이였는데 그렇게 변한 것을 보고 놀랐죠. 또 한번 놀란 건 같이 봉사 활동하는 스텝들이 인사하러 왔을 때였어요. 마침 멸치액젓으로 김치를 담그고 있었는데 딸이 스텝들에게 김치를 먹이려는 거예요. 나는 그들이 액젓 냄새를 싫어할 것 같아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 딸은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 음식이니 우리 방식 그대로 경험하는 게 맞다고 하더라고요. 그곳에서 딸과 한달 동안 지냈는데, 딸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6대주를 두루 다니는 동안 새로운 것과 마주치면서, 김작가는 변했다. 여행을 할수록 비자를 받는 것을 비롯해 여행의 모든 절차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또한 아무리 어려워도 하려고 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배웠다.여행사 상품목록에 없는, 나만의 여행을 하면서 출판 제의도 받았고, 시집 아닌 책을 쓰기 시작했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제아무리 아름다운 절경보다도, 산해진미보다도, 더 좋은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그녀의 여행도 변했다. "여행하면서 쇼핑을 한 적이 거의 없어요. 먹고 입는 데는 돈을 잘 안 써요. 그나마 챙겨간 물건들도 줄이고 줄여서 떠날 때보다 돌아올 때 짐을 반으로 줄이곤 하는데, 한번은 베트남에서 한 소녀를 만났어요. 전통의상을 사달라고 일주일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니더라고요. 그러다 소녀의 집에 가게 됐는데 가족 전부가 아픈 거예요. 그래서 옷도 사고 가방이랑 모자까지 샀어요."여행하면서 만난 아이들은 그녀가 건넨 빵 한 조각에 행복해 했고,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은 더 행복했다고, 노인들은 인생의 정수를 품고 있다가 그녀에게 슬쩍 보여주었는데 그 때도 행복했다고, 그러니까 여행하면서 얻은 행복은 대게 사람에게서 비롯됐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사람에 올인하는 여행을 한다. 휴대전화는 가져가지 않고 카메라만 두어대 챙겨간다. 아이들을 찍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자기를 찍도록 놔두기도 한다. 정신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까운 게 없다. 호텔비로 쓸 수 있는 100달러가 생기면 5달러짜리 방에 묵고 아이들을 위해 95달러를 쓴다. 그게 재밌다. 그렇게 하기위해 여행을 한다.여행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대관령에 머무른다. 산 좋아하는 남편이 10여 년 전에 마련한 집이 있다. 숲을 좋아해 차를 한 잔 마셔도 숲에 가서 마시는데, 숲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고라니가 옆에 와서 기웃거린다고 한다. 지난해 발표한 에세이 '대관령에 오시려거든'에 대관령의 이국적인 자연과 삶을 기록했다.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이 사람에 대해 쓴 글이라면 '대관령에 오시려거든'은 자연에서의 삶에 대해 쓴, 짝을 이루는 책이에요."일 년 중 4개월쯤은 여행을 하고, 4개월쯤은 대관령의 별장에 체류하고 나머지는 수원의 집에서 지낸다. 집에서는 시를 쓴다. 마지막 시집을 출판한 것은 2004년이지만 지금도 꾸준히 시를 발표하고 있다. 여행을 이렇게 오랫동안 하리라고 생각하고 시작하지 않았지만 시는 언제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산문을 쓰더라도 나는 결국 시인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행도 시를 쓰는 과정 중의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한동안은 수원집의 책상에 붙박혀 글을 쓸 텐데, 그 시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뉴질랜드에 갈 계획이에요. 그리고 또 시를 쓰며 인생이 여행인 듯 흘러가겠죠." 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김인자 작가는?-강원도 삼척 출생-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겨울여행' 당선-시집 :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 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산문집 : ▲그대, 마르지 않는 사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대관령에 오시려거든-여행서 :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 포구 ▲걸어서 히말라야 ▲풍경 속을 걷는 즐거움, 명상산책 ▲아프리카 트럭여행 ▲남해기행 ▲사색기행 ▲나는 캠퍼밴 타고 뉴질랜드 여행한다 ▲뉴질랜드에서 온 러브레터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남미 페루의 삐삭 유적지에서 야생 야마(낙타과)의 사진을 찍고 있는 김인자 작가. /김인자 작가 제공아프리카 잠비아 오지마을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아프리카 말라위 빌리지 칸데비치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모로코 사하라 사막 앞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호주 울루루 가는 길의 붉은사막에서. /김인자 작가 제공

2017-09-12 민정주

[인터뷰… 공감]프로축구 인천유나이티드 강인덕 대표이사

광양 전지훈련서 단합 휴일도 잊은채 의욕적강등권 격차 벌릴 것 2부 리그는 생각도 안해선수·감독·프런트 갈등이 경기력에도 영향시즌 후 책임 묻고 경영진단 통해 조직 재편구단 자체 노력으로 市 지원 떳떳하게 받아야검증된 선수 이적보다 잔류 AFC 챔스 도전체육회 상임부회장 포함 도움·변화주고 떠날 것무엇보다 관중이 많이 찾았으면 시민들에 당부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1부리그) 인천유나이티드의 강인덕(60) 대표이사는 지난달 초 전임 대표이사의 사퇴로 공석이 된 대표직에 긴급 투입된 인천호(號)의 선장이다. 20여일 동안 '직무대행' 꼬리표를 달고 시즌 첫 2연승과 함께 팀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한 강 대표이사는 지난달 28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정식 대표이사로 선임됐다.강 대표이사는 4일 인천 문학월드컵경기장과 경기장 내 집무실에서 이어진 인터뷰 내내 구단의 성적과 운영적 측면에 대한 질문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어떨 땐 비장한 모습으로 '인천호'를 이끄는 선장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줬다. 경기장에선 등번호 12번이 적힌 인천 유니폼 상의를 입었다. 평소 자신을 12번째 선수로 소개하는 강 대표이사는 선수단 서포트에 충실하려는 의지를 담아 등번호 12번을 새겼다.선수단의 근황이 첫 화제였다. 3주 간의 A매치 휴식기의 마지막 주를 맞은 인천 선수단은 오는 10일 홈에서 열릴 광주FC와 일전을 준비 중이다.강 대표이사는 "지난달 25~31일 동안 전남 광양에서 진행된 전지훈련이 선수단의 단합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 "무더위 속에 경기를 치른 선수들에게 체력 회복 훈련과 함께 남은 리그 경기들을 대비한 전술 훈련까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단합하고 해보자는 분위기가 선수단에 심어졌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지난 27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와 경기 후 선수단 분위기가 많이 들떠 있었는데, 전지훈련을 다녀와서 맞은 휴일도 반납하고 훈련에 임하는 등 지나간 부분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보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덧붙였다.4일 현재 인천은 5승11무11패(승점 26)로 리그 강등권(11~12위)에서 불과 한 계단 위에 있다. 최근 선수단의 모습은 인천 구단의 당면 과제인 리그 잔류에도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강 대표이사는 "스플릿 리그를 앞두고 6경기가 남아 있는데, 승점 10점 정도 확보한다면 강등권과 격차를 벌릴 수 있다"면서 "2부 리그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자신감을 보였다.자신감의 근거는 사심없는 경영, 선수단과의 소통에 있었다. 강 대표이사는 지난달 자신의 연봉을 받지 않기로 했다. 이 돈은 선수들에게 지원하도록 했다. 이에 이기형 감독도 승리 수당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선수단의 내부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으며, 27라운드 포항전의 완벽한 승리(2-0)로 연결됐다."구단 내부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소통을 통해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하죠. 구단 대표로 일한 1달 가까운 시간 동안 선수단 전체와 4차례 만났고, 이기형 감독과는 수시로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구단 식당에선 점심만 선수단에 제공했는데, 시즌 중에는 저녁도 제공하는 걸로 바꿨습니다. 가정이 있는 선수들은 괜찮은데 자취하는 젊은 선수들의 경우 몇몇이 어울려서 대충 저녁을 사먹고 하다 보니 균형 잡힌 식사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대표이사 부임 후 소통과 함께 지난해부터 인천시체육회 상임부회장이자 인천 구단 이사로 있으면서 홈에서 열린 구단의 모든 경기를 현장에서 봤던 강 대표이사는 구단의 문제점도 명확히 짚어냈다.그는 "선수, 감독, 대표를 비롯한 프런트가 삼위일체 되지 못했다. 이에 내부 갈등이 초래되면서 선수단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다"면서 "성적만 좋지 않을 때에는 그 문제점만 찾아서 해결하면 되는데, 인천 구단에는 모든 문제들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어서 "시즌 중에 조직을 흔드는 건 좋지 않기 때문에 시즌 후 책임을 물을 것이며, 외부 업체에 경영진단을 의뢰해서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프런트를 재편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프레스 생산 업체(국일정공)를 운영하고 있는 강 대표이사는 시체육회 상임부회장이면서 인천 구단 대표이사이기도 하다. 시체육회와 축구단을 함께 이끄는 첫 인물이다. 강 대표이사의 하루 일과는 오전 6시30분에 시작된다."아침에 사업체로 가서 그날 해야 할 것들을 챙긴 후 9시 경에는 시체육회 사무처로 나옵니다. 오후 6시 이후 다시 사업체를 챙기는 일정이지요. 현재 시체육회와 축구단의 시간 배분은 6:4 정도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시체육회와 축구단 모두 내년도 예산 관련한 업무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자연스레 구단 예산으로 화제가 옮겨갔다."시민구단의 운영은 시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구단 자체적으로도 노력해서 떳떳하게 지원 받아야 해요. 자체 마케팅을 올해보다 10억여원 늘린 후 시의 지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내년에는 140억~150억원 정도 규모로 구단을 운영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시즌 후 기량이 검증된 선수들을 이적료 받고 타 구단으로 보내기 바빴지만, 구단 잔류를 원하는 선수들은 절대 내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또한 좋은 선수들을 외부에서 영입해 상위 스플릿과 시·도민 구단으로선 최초로 3위 안에 들어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노려볼 것입니다."구단 성적 보다 강 대표이사가 더욱 바라는 것은 보다 많은 시민이 축구장을 찾는 것이다."시즌권 판매를 현재의 두배 가량인 6천~7천장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지역 기관과 업체 등 인천과 관련된 곳은 모두 대상으로 올려놓고 시즌권 판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경기 당일 각종 이벤트 등을 통해 시민이 오게끔 만들어야 하고요. 이를 통해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만여석을 꽉 채우는 경기를 해보고 싶습니다."강 대표이사는 구단의 '구원 투수'이다. 구원 투수로서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언젠가는 물러나야 할 것도 알고 있다. 시체육회 상임부회장 자리도 마찬가지다.강 대표이사는 지역 체육계에서 물러날 때 '원칙을 지킨 사람'이자 '지역 체육계의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구단 대표에서 물러날 땐 '어려울 때 와서 도와주고 갔다'고 여겼으면 합니다. 체육계는 정권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정치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관련된 청탁도 거절 못하게 되고요, 사심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거죠. 또한 인천시체육회는 올해로 81년째를 맞았는데, 경영자의 마인드로서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보람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끝으로 강 대표이사는 인천 구단의 팬과 시민들에게 "경기장에 많이 와서 즐겨주시면 좋겠다"면서 "선수들은 최고의 경기력을 선사하고, 구단 프런트는 다양한 즐거움을 안겨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인덕 대표이사는?동두천 태생인 그는 ▲1988년 한국통상을 설립(대표이사 취임)하고 ▲1995년 국일프레스 인수 후 (주)국일정공 대표이사 CEO로 취임했다. 현재 ▲한국실업농구연맹 부회장 ▲인천경영자협의회 부회장 ▲인천시남구경영자협의회 회장 ▲인천시농구협회장 ▲인천시체육회 상임부회장으로 있으며, 지난달 인천유나이티드 FC 대표이사에 취임해 시민구단을 이끌고 있다.평소 자신을 12번째 선수로 소개하는 강인덕 인천유나이티드 대표이사가 지난 5일 선수단 서포트에 충실하려는 의지를 담은 등번호 12번의 인천 유니폼을 입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 대표이사는 인터뷰에서 인천 구단의 팬과 시민들에게 "경기장에 많이 와서 즐겨주시면 좋겠다"면서 "선수들은 최고의 경기력을 선사하고, 구단 프런트는 다양한 즐거움을 안겨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9-05 김영준

[인터뷰… 공감]인천 출신으로 세계적 모델 반열에 오른 도병욱

3만원짜리 셔츠, 6만원짜리 팬츠…모델 환상을 깬 수수한 청년, 이전엔 옷에 관심도 없던 그가지금은 세계 4대 패션위크 정중앙에 서있다뉴욕·밀라노·파리·런던 등의 도시에서는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가 쇼를 선보이는 '패션위크'가 해마다 열린다. 이들 도시에서 열리는 패션위크를 업계는 통상적으로 '세계 4대 패션위크'라 부른다. 3~4일 정도 집중적으로 쇼가 펼쳐지는 이 행사는 1년에 두 차례 진행된다.패션위크는 'FW시즌'(가을·겨울)과 'SS시즌'(봄·여름)으로 나뉘는데, 남성의 경우는 대략 1월이 FW, 6월이 SS시즌이고, 여성은 2월이 FW, 9월이 SS시즌이다. 패션계는 대략 1년여의 시간을 앞서간다. 특히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다음 해 전 세계 패션계의 경향과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리다.때문에 전 세계의 디자이너와 업계 종사자, 패션모델 등 전문가는 물론 관광객까지 한꺼번에 몰리며 성황을 이룬다. 세계 4대 패션위크에 참여하는 것은 소위 이 분야의 '메인 스트림'이 된다는 점에서, 모든 디자이너와 모델에게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진다.한국에서도 이 무대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1~2차례 무대에 섰다는 이들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리는데, 그 자체만으로는 이제는 뉴스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하지만, 인천 출신으로 '톱모델' 반열에 오른 도병욱(28)의 경우라면 다르다. 그는 수년간 꾸준히 세계 패션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4시즌 연속 돌체 앤 가바나의 모델로, 3시즌 연속 베르사체의 모델로, 뉴욕·밀라노·파리·런던은 물론 싱가포르·베이징 등 해외 무대를 누비고 있다.치과 진료차 한국에 들어와 휴식 중인 도병욱을 지난 22일 오후 경인일보 인천본사에서 만났다.모델이라는 직업을 가졌으니 고가 명품 브랜드의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날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3만원짜리 SPA브랜드의 흰색 '린넨셔츠'와 6만원짜리 '치노팬츠', 9만원짜리 갈색 구두를 신은 차림이었다.그는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패션모델들 사이에서는 옷을 못 입는 편에 속한다"며 수줍게 웃었다.옷이 그의 관심 분야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불과 5~6년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모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학기 초 장래희망을 적어야 할 때가 오면 솔직히 너무 힘들었죠. 그럴 때면 대충 '선생님'이라고 빈 칸을 채우곤 했어요. 아버님이 선생님이셨거든요."성장하며 특별히 '꿈'이라는 걸 가져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해 어서 빨리 꿈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강박 때문에 힘들었다.그는 "세상을 그리 깊이 있게 경험해 보지도 않은 어린아이들이 불확실한 미래의 특정 직업을 갖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니냐"며 "돌아보면 사회나 학교가 아이들에게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꿈이 없는 대신 모든 일을 열심히, 성실하고 진지하게 배우려 노력했다.평범한 초·중·고교 생활을 마치고 재수 끝에 내신성적과 수능 점수에 맞는 대학을 골라 건축학과에 진학했고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군대에서는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재미있겠다 싶어서 운전병을 가르치는 조교를 자원해 복무했다.그가 모델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은 복학 후 2011년 여름 방학 기간에 우연히 경험한 아르바이트가 계기가 됐다. 유명 의류브랜드 행사에 모델로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모델학원 출신들과 함께 엉겁결에 무대에 섰고, 그날의 짜릿한 기억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옷을 가장 처음 입고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것이 무언가 짜릿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행복했어요."2학기 내내 '모델'이라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모델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휴학했다. 3개월여를 공사장에서 일하며 모델 학원비 500만원을 마련했다. 학원에 등록하고는 착실히 수업을 받았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보다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성실히 배워나갔다.그의 해외 진출은 국제적인 모델 매니지먼트 회사 주최로 중국에서 열린 '2013 엘리트모델룩 차이나 콘테스트'에서 남자부문 1위를 차지한 것이 계기가 됐다. 수상과 동시에 이듬해 1월 바로 밀라노로 날아갔다. 부푼 꿈을 안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이제는 해외 패션위크를 내 집처럼 드나들 줄 알았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막상 도착해보니 아무도 챙겨주는 이 하나 없었고, 그저 수많은 오디션 기회만 기다리고 있을 뿐 출연이 확정된 무대도 없었다. 현지 회사에서 알려주는 오디션 일정에 맞춰 현장에 찾아가면, 언제나 자신보다 훨씬 멋진 수많은 모델이 자신의 오디션 차례를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목격해야 했다. 줄은 끝도 없이 길어서 건물 밖으로 길게 늘어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저 수많은 모델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지도를 보고 어렵게 오디션 장소를 찾아가 온종일 기다려 오디션을 치러도 단 10여초만에 '오케이, 넥스트' 소리를 듣는 일상이 2주나 반복됐다.하지만 어느 날 '오케이, 넥스트'가 아니라 다른 옷을 입어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디자이너를 만나고 면접을 보고 쇼 바로 전날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2014년 1월 '비비언웨스트우드'의 쇼를 통해 첫 무대를 밟았다. "굽어진 런 웨이를 끝도 없이 걸어갔죠. 마지막에 다다라 수백 대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나서야 실감했죠."그렇게 밀라노에서의 다른 브랜드 2곳의 쇼를 더 참여한 것으로 2014년 FW시즌을 마쳤다. 그렇게 4시즌 연속 돌체 앤 가바나의 모델로, 3시즌 연속 베르사체 모델로 활약하는 성과를 거뒀다. 싱가포르와 스페인, 뉴욕의 백화점 등에 걸린 대형 광고판에 그의 사진이 걸리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광고판을 '캠페인'이라 부르는데, 면세점에 걸린 캠페인 모델이 되는 것이 모델에게는 무척 명예로운 일이라고 한다.그는 모델이라는 직업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참고 기다려야 하는 인내의 직업이라고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도 아버지에게 배운 사자성어인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뜻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그는 "누구든지 성실하게 자신의 꿈을 찾고 우직하게 나아간다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살고 있다"며 "앞으로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는 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모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모델 도병욱은?-출생 : 1989년 1월 17일 인천 출생-학력 : 만수초등학교·만성중학교·인천남고등학교·수원대 건축공학과-신체 조건▲ 키 : 187㎝ ▲ 몸무게 : 72㎏ ▲ 허리둘레 : 30인치 ▲ 가슴둘레 : 100㎝-주요 활동 경력▲ 2013 엘리트모델룩 차이나 콘테스트 1위▲ 2014년 1월 이탈리아 밀라노 FW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 데뷔▲ 2015년 1월 밀라노 FW 시즌 베르사체쇼 독점(exclusive) 모델 선정▲ 2014 ~ 현재 뉴욕, 런던, 밀라노,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싱가포르, 중국에서 활동▲ 세계 4대 패션위크(밀라노, 뉴욕, 런던, 파리) - D&G(돌체앤가바나), 베르사체, 디스퀘어드, 발망 등 약 30개 쇼 ▲ Vogue(보그) 스페인, 독일, 일본, 한국 / GQ 영국, 중국, 한국 등 다수의 매거진 활동▲ sacoop brothers(사콥 브라더즈), sepora(세포라) 등 브랜드 캠페인 광고 ▲ D&G(돌체앤가바나), moncler(몽클레어) 카탈로그 촬영▲ ZARA(자라), Massimo dutti(마시모 두띠), Amazon(아마존) 웹페이지 촬영도병욱뉴욕·밀라노·파리·런던 등 '세계 4대 패션위크'라 불리는 패션 무대에 꾸준히 서며 '톱모델'의 위치를 다져가고 있는 모델 도병욱(29)은 아직 꿈을 찾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꿈이 없다고 해서 방안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며 "두렵더라도 주변의 작은 일부터 진지하게 도전하고 부딪히며 자신을 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29 김성호

[인터뷰… 공감]새 정부 국정운영 로드맵 진두지휘한 김진표 국회의원

■국정기획위 활동에 대해업무보고와 답사 등 500번 이상 회의70~80% 대통령 높은 지지도에 '보람'■위원장으로 가장 중점 둔 사안좋은 일자리 늘려야 소득·소비 늘어결국 '고용·성장·복지' 동시에 추진■수원비행장 이전 문제 해법기존 부지에 첨단산업 연구소 유치 등소통하며 경기서남부 발전 홍보할 것■지방분권·수도권 규제완화재정 자립 '독일식 공동세' 검토 필요최첨단산업 유치 수도권 밖에 답 없어■종교인 과세 2년 유예 법안대형교회 목사·신부 이미 세금 내 와정치인과 유착 안내려 한다는 건 오해막히는 것도 거칠 것도 없다. 특히 경제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재인정부의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새 정부의 국정운영 로드맵을 진두지휘한 김진표 의원은 21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가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80여분 간 달변가의 면모를 보여줬다. 문재인 대통령이 각본 없는 '100일 기자회견'을 했듯 김 의원은 사전 질문이나 조율 없는 인터뷰에서 부총리·장관·당 원내대표·국정기획위원장·4선 등의 경험과 연륜을 과시하듯 수치나 용어, 사례 등을 제시하며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놨다.-국정기획자문위원장 제안은 누가.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며칠 있다가 직접 전화를 했다. 참여정부 때 인수위를 했고 부총리에다 장관, 캠프 선대위원장 등을 종합해보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며 꼭 해달라 요청했다. 당연히 도와 드리겠다고 답했다. -총리설이 끊이지 않았는데.총리는 아예 생각도 안 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어느 정도 승리를 예단할 수 있어서 캠프 내부에서 총리를 누가 맡는 게 좋은지 논의가 있었다. 문 대통령이 호남 인사 푸대접을 불식시켜야 한다며 여러 차례 호남 총리를 강조한 만큼 호남 인사로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사전에 형성됐다. 앞으로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살짝 웃음).-국정기획자문위원장 60일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시피 했다고 들었다.인수위는 특성상 복잡한 요인과 변수가 많아 잠깐만 한 눈울 팔면 배가 엉뚱하게 산으로 갈 수 있다. 그러면 국정 혼선을 초래하게 된다. 누군가가 책임지고 전력투구해야 했고 내 운명이려니 하고 책임을 다했다. 업무보고, 현장 확인 등을 포함해 500번 넘게 회의를 하며 '월화수목금금금'하고 살았다. 다행인 것은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놓은 281개 공약, 829개 세부공약의 왼성도가 매우 높아 60일 내에 끝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국정기획위 활동 점수를 매긴다면.우리가 점수를 매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국민들께서 평가하시는 거다. 문 정부에서는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내 삶을 바꾸는 정권교체'라는 주제로 기존에 발표한 공약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서로 상충되는 게 있으면 조정한 뒤 단계별 시행계획·입법 계획· 재원조달 계획 등을 마련해 로드맵을 완성했다. 기본적으로 새 정부의 국정 운영 철학을 담았고 최고의 국정운영 계획서이면서 동시에 단순한 구두선언이 아닌 로드맵의 행태로 공약이행의 실효성을 높였다. 또 촛불 혁명의 정신을 담기 위해 처음으로 국민인수위원회를 구성해 16만개가 넘는 정책제안을 받았다. 요즘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이례적으로 높은 70~80% 사이여서 큰 보람을 느낀다. -위원장으로 가장 중점을 뒀던 사안은.(주저함없이)일자리 문제다. 문 정부의 경제 사회정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국정 운영 철학을 이야기하라면 단연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며 그 핵심은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좋은 일자리가 많이 늘면 소득·소비가 늘고 투자가 뒤따르고 이는 또다시 좋은 일자리 증가로 이어진다. 이런 선순환의 출발점이 바로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또 일자리는 최고의 성장 정책이면서 동시에 최상의 복지정책이다. 일자리 이상의 복지정책이 어디 있느냐. 이게 바로 고용·성장·복지가 동시에 추진되는 '골든트라이 앵글'이다. 문 대통령이 오죽했으면 집무실에 일자리 현황판을 설치해 관리하고 있겠는가. -아쉬운 분야는.금융 개혁이다.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 선진국들은 다 바뀌었는데 우리 금융은 여전히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이자의 차이에서 나오는 차익)'을 주된 수입으로 하며 담보 위주의 대출을 하고 있다. 특히 담보와 관련해 선진국들은 기술을 중심으로 유망한 벤처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인큐베이팅 금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담보에 얽매여 벤처기업이 활성화되지 못한다. 우리나라 30대 기업 중에서 당대 창업가가 운영하는 비율은 23% 밖에 안된다. 중국은 97%, 일본은 75%, 미국은 67%이며 하다못해 대만도 54%, 인도도 45%에 이른다. 우리 경제는 3·4대에 걸쳐 상속받은 재벌들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다. 그런 재벌들은 창의력이나 혁신에 한계가 있다. '요 모양 요 꼴'인 경제를 바꾸고 살리려면 젊은 피 수혈이 필수적이다. 금융을 담보에서 인큐베이팅 위주로 바꿔야 한다. -평소 지방분권을 강조해왔다.분권 개혁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야 한다. 핵심은 재정 자립도 문제인데 지방재정 양극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해소 방안으로 '독일식 공동세' 도입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수도권 규제 완화 역시 평소 강조해왔다.수도권 규제 완화는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파주 엘지디스플레이 공장은 김대중정부 때 허가가 안 나 상하이로 가려 했다. 엘지는 구미에 부지가 있었지만, 인력 유치 문제로 파주에 하려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의논해 수도권 규제 문제를 해결했다. 지금은 얼마나 효자 기업이 됐나. 세계 시장 점유율이 예전의 20%에서 60%로 3배나 높아졌다. 만약 상하이로 갔다면 지금은 중국이 세계 디스플레이 산업을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2000년에 아산으로 옮겼다. 당시 걱정이 돼 삼성 쪽에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를 확보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삼성은 잘 될 거라고 했는데 삼성과 엘지의 디스플레이 점유율이 8대2에서 지금은 4대6으로 역전됐다. 삼성은 결국 5년 전에 디스플레이산업 연구소를 수원과 기흥에 나누어 배치했다. 디스플레이 같은 최첨단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석·박사급 엔지니어를 유치해야 한다. 연봉이 수억원으로 세계 어느 기업이나 갈수 있는 이들은 절대 가족과 떨어져 살려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지역은 현재로서는 파주에서 수원까지다. 진짜 선진국이 되려면 최첨단 산업을 유치해야 하는 데 현실적으로 수도권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느냐? 수도권이 아니면 기업을 경영할 수 없는 최첨단 산업에 한해서만 수도권 규제를 완화하자는 거며 조만간 이를 위한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수원비행장 이전 난제를 풀어갈 해법이 있나.이미 법에 따라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와 별개로 소통을 통한 설득, 화성·수원이 서로 '윈윈'한다는 홍보에 나설 것이다. 일부 화성 시민들이 동탄의 주택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데 그 반대다. 이전 부지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나라 첨단 산업을 이끌어갈 IT·나노· 반도체· 바이오 산업 등을 육성하는 R&B합작 연구소가 중심이다. 최소 15만~30만명 수준의 석박사급 엔지니어가 모이면 그 사람들이 어디서 살겠는가? 동탄, 영통, 서수원이다. 소음피해도 원천적으로 없다. 이전 예정인 화옹지구는 1천400여만㎡이다. 소음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비행기도 바다로 떠서 바다로 내린다. 더군다나 수원비행장 600만㎡ 중에 75만㎡는 화성에 있는 데 전부 화약고다. 화약고 바로 주변에 병점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동탄이 있다. 화약고를 안고 도시를 개발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또 향남에서 동탄까지 철도를 연결하면 서해복선전철과 맞물려 철도로 전국 어디나 갈 수 있게 된다. 서화성은 물론 경기서남부권 발전의 획기적 계기를 만들 수 있다.-종교인 과세 2년 유예 법안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대부분의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가톨릭 신부들은 십수년전부터 법과 상관없이 세금을 내왔다. 이런 분들과 정치인이 유착해 꼼수까지 써가며 세금을 안내려 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그건 우리의 진의가 아니다. 21일 기자회견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진짜 문제다. 이를 해결해 내년부터 시행하면 된다.-대표, 장관, 의원 등 부르는 호칭이 다양하다.부르는 사람 맘이니 상관없다. 선출직으로 안해 본 것은 경기도지사는 출마 안 하니까 빼고 당 대표와 대통령이고, 임명직은 총리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다 보면 정치 인생의 대미를 장식할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믿는다. 글/김순기기자 ksg2011@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김진표 의원은?▲ 1947년 수원 출생▲ 서울대, 미(美) 위스콘신대학원 공공정책학 석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민주당 원내대표▲ 국회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 문재인 대선캠프 선대위원장▲ 문재인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장▲ 17·18·19·20대 국회의원김진표 국회의원은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좋은 일자리가 많이 늘면 소득·소비가 늘고 투자가 뒤따르고 이는 또다시 좋은 일자리 증가로 이어진다. 이런 선순환의 출발점이 바로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라고 밝혔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7-08-22 김순기

[인터뷰… 공감]해경 최초 여성 총경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1991년 '시와 의식'으로 등단… 2011년 '바다에 남겨…' 시집 발간해 인천문학상 수상하기도총경은 치안총감, 치안정감, 치안감, 경무관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다. 일선 경찰서장을 할 수 있어 '경찰의 꽃'으로 불린다. 경찰청에서는 1998년 김강자 서울남부경찰서 방범과장이 국내 최초의 여성 총경으로 승진해 서울종암경찰서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치안정감 계급의 지방경찰청장에 오른 여성경찰도 나왔다. 치안 총수인 경찰청장만 빼놓고는 여경이 오르지 못한 자리(계급)는 없었다. 하지만 여경의 총경 승진이 빨랐던 경찰청(육상경찰)과 비교하면, 그동안 해양경찰청 소속 여경은 상대적으로 소외당했다. 해경이 여경을 처음 채용한 것은 1986년이다. 경찰청이 설립 초기인 1946년부터 여경 채용을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늦은 셈이다. 당시만 해도 해경은 '여자가 배를 타면 재수 없다'는 속설 때문에 여경 채용을 미뤘다고 한다. 지난 8일 발표된 해경 총경 승진 임용 예정자 6명의 명단 중에는 해경 창설 64년 만에 첫 여성 총경이 나왔다. 주인공은 동해지방해양경찰청 박경순(55) 기획운영과장이다. 그는 "'최초'라는 방점을 찍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힘들고 어려웠지만, 늘 주위의 선배와 동료, 후배들이 도와줘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박 과장은 1986년 순경으로 해경에 첫발을 들였다. 해경이 공채로 선발한 첫 여경이었다.박 과장은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해양경찰대(해양경찰청의 옛 이름)'가 여자 경찰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며 "인천에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관심이 많았었다. 제복을 입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경찰이 되고 싶어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지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7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채용된 박 과장은 함께 합격한 동기와 함께 당시 연안부두에 있던 해양경찰대 본청 민원실에 배치됐다. 박 과장은 민원실을 찾은 사람이 그냥 돌아가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본청 민원실에 찾아오는 사람은 일선 서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이곳까지 온 경우가 많았다"며 "멀리서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내용은 물어봐서라도 민원 사안을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했다.박 과장이 말단 순경에서 경장, 경사, 경위, 경감, 경정을 거쳐 마침내 총경에 이르기까지 초고속 승진한 비결은 '일에 관한 한 최고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미친 듯이' 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직 내에서 이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일단 일이 주어지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끝장을 봤으며, 법률 서적 등을 탐독하면서 전문성을 보강했다.박 과장이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로 기억하는 것은 지난 2010년 해경에 '직장 어린이집'을 개원한 일이다. 당시 박 과장은 복지계에서 근무했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로 직장에 다녀봤기 때문에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직원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산 확보와 건물 신축 절차가 까다로웠고, 직장 내에서는 '굳이 어린이집까지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박 과장은 간부들을 설득하고, 국방부·행정안전부·경찰청 등 20여 개의 직장 어린이집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했다. 어렵게 예산을 확보했고, 마침내 직장 어린이집 문을 열 수 있었다.박 과장은 해경으로 근무하면서 한국방송통신대(국문과)를 졸업했다. 1997년 인하대에서 국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인하대 행정학 박사 과정 중이다. 그는 1991년 시 '시와 의식'으로 등단했고, 2011년에는 태안해경서 1507함 근무 당시의 경험을 담은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이라는 시집을 냈다. 이 시집에는 경비함정을 타고 불법 외국 어선을 단속하는 등 서해를 지키며 느낀 가슴 아픈 애환을 '출항', '입항' 연작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 담겨 있다. 박 과장은 이 시집으로 '제24회 인천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박 과장이 선발된 이후에도 해경은 10여 년 동안 여경을 뽑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에도 해경 홈페이지에는 '여자 해경을 뽑을 필요가 있느냐'는 글이 올라와 찬반 논란이 가열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3년 여경의 경비함정 근무가 시작되면서 '금녀(禁女)의 벽'은 하나씩 허물어졌다. 경무 기획 분야에 국한됐던 여경의 업무도 이젠 함정, 해상 안전, 파출소 등 전 분야로 확대됐다. 최근에는 여성 최초의 경비함 함장, 첫 여성 항공정비사도 탄생했다. 10년 전에는 해경에서 여경 비율이 전체의 2%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전체 해양경찰관 8천510명 중 616명(7.2%)이 여성이다. 박 과장의 승진으로 평균 20척의 경비함정을 진두지휘하는 첫 해경서장도 배출될 예정이다.박 과장은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해경이 주권 수호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절감했다"며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불법 외국 어선 한 척을 단속하기 위해 보통 14시간 정도 고생해야 하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경이 재탄생한 이 시점에 우리 해상 주권을 수호하는 강인한 해양경찰, 당당한 바다 지킴이로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는 해경이 되겠다"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려울 때 찾아오는 해경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박경순 총경은?-주요 약력▲ 1962년 인천 출생▲ 1986년 순경 임용▲ 2006년 경감 승진▲ 2011년 경정 승진▲ 2017년 총경 승진▲ 1507함 부장, 해양경찰 교육원 교수 요원, 동해청 경무계장, 본청 성과관리팀장, 태안·평택 해양안전과장▲ (현)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주요 정부 수상▲ 2013년 대통령 근정포장▲ 2007년 국무총리, 2016년 국민안전처장관 표창 등 27회 수상-문단 경력▲ 1991년 '시와 의식' 신인상으로 문단 데뷔▲ 2008년 '한국수필' 신인상, 한국예총 예술상 수상▲ 2012년 24회 인천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앉아 또 하나의 詩를 쓰고'(1997), '이제 창문 내는 일만 남았다'(2002),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2011)해양경찰 최초로 여성 총경으로 승진한 박경순(55)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은 "'최초'라는 방점을 찍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려울 때 찾아오는 해경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태안해경서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할 당시의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박경순 과장 제공태안해경서 1507함 부장(부함장)으로 근무할 당시의 박경순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 /박경순 과장 제공해양 순찰중인 박경순 과장의 모습. /박경순 과장 제공

2017-08-15 김주엽

[인터뷰… 공감]영화 '귀향' 속편 2편 개봉앞둔 조정래 감독

1년 반 동안 역사의 참상 알리려 전세계 61개 도시 상영회대종상은 할머니들께서 주신 상… 수익금도 '소녀들의 피'귀향 성공은 '착시현상' 실상 알렸는데 변한 게 없지 않나차기작은 계획없어… 恨 다 풀어드리고 나서 찍어야 도리그의 본업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영화감독이라고는 하는데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 인권운동가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영화감독이 본업은 맞는 것 같다.그것도 아주 '능력있는' 영화감독 말이다. 지난해 영화 '귀향'으로 영화계 돌풍을 일으킨 조정래(45) 감독 얘기다. '영화감독 조정래'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낯설어 할 테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그린 영화 '귀향(鬼鄕)'은 한번쯤 들어봤음직하다.지난 2016년 2월 개봉된 영화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아니고, 역사적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한 무거운 주제를 다뤘음에도 지난해 360여만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며 반짝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영화 '귀향'은 준비작업을 거쳐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장장 1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2002년 조 감독이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다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고 홀로코스트를 접한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 영화로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직접 시놉시스를 쓰고, 증언을 수집했다.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빨리 개봉해 할머니들과 만나고 관객들과도 호흡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작비 조달이 여의치 않았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크라우딩 펀드를 진행해 4만5천여명이 제작비를 후원했다. 손숙, 정인기, 오지혜 등 유명 배우와 영화 명량, 암살, 도가니 등의 제작에 참여했던 유명 스태프들의 재능기부도 이뤄져 결국 지난해 대중과 만날수 있었다."그는 영화가 흥행하고, 감독으로서 인지도도 쌓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찾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영화를 통해 할머니들의 참상을 알리느라 국내를 넘어 전세계를 돌며 일정이 더욱 빡빡해졌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1년반 가까이 전세계 61개 도시를 돌며 1천307회의 영화상영회를 가졌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전역에서 영화 상영에 대한 요청이 이뤄졌다. 상영장소만 제공되면 직접 영사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상영회를 진행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들이 있다. 'Really?' 이게 사실이냐고 묻는 질문이 정말 많았다. 상영이 끝나면 질의 응답시간도 갖는데 20분 정도 생각하다 통상 2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어답변서까지 만들었다"고 전한다.그러다보니 조 감독은 자연스레 영화 속편 제작을 결심하게 됐다. 영화를 통해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들을 전해야겠다 마음먹었고,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작업에 열을 올려 조만간 2편의 결과물을 선보이게 됐다.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부제: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와 '에움길(가제)' 등 2편이다.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영화로 보는 증언집이라 할수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영상과 미공개영상으로 구성된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다큐멘터리다. '에움길'은 올 하반기 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인데 영화 '귀향'에 결말로 넣고 싶던 것을 에필로그에 포함했다"고 귀띔한다. 최근 일제시대를 소재로한 영화가 줄을 잇는 가운데 또 한편의 기대작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얼마전 한 역사가의 발언은 그의 이런 노력을 빛바래게 했다. 심용환 역사가는 영화 '군함도'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한데 이어 '귀향'도 위안부이야기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7월28일 자신의 SNS를 통해 영화 군함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몇해전 몇 백만이 보았던 '귀향'만큼 못 만들고 위안부 이야기를 왜곡한 영화도 드물다… 강제동원의 현실은 차라리 군함도가 훨씬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조 감독은 "영화 '귀향'은 철저한 역사검증과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형식을 빌린 '증언집'이라고 할수 있다"며 심씨의 주장에 강한 어조로 반발했다. 결국 심씨는 글을 게재한 이튿날인 7월29일 '할머니들께 상처가 되었다면 모두 제 잘못입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라고 해명 글을 올렸다.조 감독은 지난해 영화 '귀향'으로 여러 상을 받게 됐고, 그중 일생 단 한번만 받을 수 있다는 신인감독상(대종상영화제)까지 거머쥐었다. "솔직히 제가 받았다기 보다는 할머니들께 주신 상이다. 영화 '귀향'의 수익도 '소녀들의 피'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실제 영화수익금 일부를 나눔의집에 기부했다. 할머니들 덕에 영화가 만들어질수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23일 별세한 김군자 할머니의 소식은 그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2002년 나눔의집을 찾을때부터 할머니를 봬 왔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평생을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데 노력하셨고, 돈 한푼 허투루 쓰지 않고 후세들만 생각하셨는데 안타까웠다. 그나마 할머니 운구를 들고 가까이서 마지막을 배웅해드릴수 있어 감사했다."차기작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없다. 우선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나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다. 영화 '귀향'이 성공했다고 하지만 착시현상 아닌가 싶다. 영화로 많은 분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됐는데 변한게 없다. 어떻게 감히 다음 영화를 한다고 말하겠나"라고 했다.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영화가 역사에 대한 문화적 증인이 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상을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으면 한다. 이제 37분이 남으셨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진정한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사진/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조정래 감독은?▲ 1973 경북 청송 출생▲ 1992~2000 중앙대 영화학 학사▲ 2000 단편영화 '종기' 데뷔▲ 2011 제13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상▲ 2012 영상물등급위원회 청소년을 위한 좋은 영상물 극영화 부문▲ 2015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김학순상▲ 2016 영화 '귀향' 개봉, 제53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 한국 영화를 빛낸 스타상 감독상, 제36회 황금촬영상 신인감독상조정래 감독은 사진 찍는 내내 웃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이 한(恨)을 풀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상황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살아생전 고(故)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지난달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분당 차병원 장례식장에 조정래 감독이 스태프들과 함께 찾아 조문하고 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김군자 할머니의 운구 행렬에 함께한 조정래 감독.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국악 고수로도 활동하며 광주 나눔의집에서 할머니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 조정래 감독.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아이클릭아트

2017-08-08 이윤희

[인터뷰… 공감]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이규훈 초대 소장

백제 풍납토성·경복궁 발굴조사와 고려 도성 기초조사 진행유물·유적 활용 등 시·군 지자체와 적극적 논의·협력할 것고려 500년 남북 학술교류 필요… 수도권 문화재연구에 온힘신라·삼국·가야·백제·마한 등 기존 지방연구소 뒤이어 고려 연구소 설립 필요성 제기돼 강화가 선택됐다.강화도에 있는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년)에 전격적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는 북산(송악산) 남쪽 기슭인 강화읍 일대에 궁궐과 관아를 세운 뒤 고려는 이때부터 1270년(원종 11년)까지 강화도를 전시(戰時) 수도로 삼았다. 강화도를 중심으로 고려는 39년간 세계 최강으로 손꼽히는 몽골의 군대와 꿋꿋하게 맞섰다. 강화도 해안가에 돈대와 외성, 궁궐을 포함한 내성, 외성과 내성 사이 중성을 쌓았고 왕실 사찰도 만들었다. 철옹성 같은 주변의 바다와 드넓은 갯벌 등 자연여건은 강화도의 또 다른 무기가 됐다. 강화도는 그렇게 고려를 품었다.사적 133호로 관리되는 고려궁지 바로 옆 옛 강화군립도서관 건물에 자리 잡은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이규훈(46) 소장을 지난달 27일 만났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상반기 강화에 둥지를 튼 인천 소재 첫 문화 관련 국립기관이다. 이규훈 소장은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중세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라며 "국가기관 차원에서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중세 연구로 학술적인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지자체와 시민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 우리나라 역사의 응축, '강화도'이규훈 소장은 강화도를 "우리나라 역사의 응축(凝縮)"이라고 정의했다. 선사시대부터 고대는 물론, 중세와 근·현대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엔 항상 강화도가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화도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고인돌이 곳곳에 있다. 남한에서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인 '강화지석묘'를 비롯해 그 숫자만 160개가 넘는다.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 삼랑성 등의 유적도 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물줄기가 합쳐져 서해로 연결되는 강화도는 삼국시대 때에도 해상무역과 군사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활용됐다. 고려 때엔 몽골과의 항쟁을 위해 39년간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고, 고려 말기에도 수도권 방어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규훈 소장은 "조선 병자호란 때엔 일부 조정 대신들이 피신한 일도 있었고, 개화기 때엔 서구 문물들이 강화도를 통해 들어오게 됐다"며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항상 강화도가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내용의 3분의 1이 강화도와 관련한 내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며 "그만큼 유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강화도의 역사를 더욱 심도 있게 조사하기 위해 강화문화재연구소가 생긴 만큼,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국립 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월 말 공식 직제가 확정돼 업무를 시작했다. 현재 이규훈 소장을 비롯해 9명이 일을 하고 있는데, 내년까지 2명 정도가 더 충원될 예정이다. 국립 문화재연구소 산하 지방연구소는 경주, 중원, 가야, 부여, 나주 연구소 등 5개가 있었다. 신라, 삼국, 가야, 백제, 마한 등이 이들 지방연구소의 주된 연구 분야였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를 연구할 연구소 설립 필요성이 제기됐고, 결국 39년간 고려의 전시 수도였던 '강화'가 그 역할을 맡게 됐다. 고려 역사 연구의 핵심이자 수도권 유일의 지방연구소인 국립 강화문화재연구소는 현재 풍납토성 발굴조사와 경복궁 발굴조사, 강화를 중심으로 한 고려 도성 기초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풍납토성과 경복궁 발굴조사는 역사 문헌과 그 문헌에 나온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고고학적 방식으로 연구된다. 고려 도성 기초조사는 내년 본격적인 발굴을 위한 말 그대로 기초적인 조사이다. 이규훈 소장은 "백제의 풍납토성과 강화에 있는 고려 도성, 조선의 경복궁 연구는 고대와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도성의 역사적 맥락을 잇는 연구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고려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중세 연구는 고대와 근대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고려의 수도가 북한의 개성이었던 만큼, 고려 관련 연구를 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의 전시 수도였던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세 연구의 핵심적인 지역이라는 게 이규훈 소장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나라 고려 문화재는 석조물이나 탱화, 칠기, 도자기, 철불 등 주로 움직일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지만, 경주나 부여처럼 건물지, 고분 등 땅 위에 고정된 유적은 적다"며 "강화도에서 고려시대 절터나 고분들, 이궁지 등을 발굴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만큼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다양한 문화재 연구활동 '기대'이규훈 소장은 문화재 연구와 관련해 인천시와 강화군 등 지자체와의 적극적인 협력 의지를 나타냈다. 인천시는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역사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해 복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강도(江都)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강화도에 남아있는 고려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해 강화도를 경주나 부여 같은 '고도(古都)'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인천시 구상이다. 고려궁궐 재건·활용, 고려 기록유산 활용, 강화 역사건조물 활용, 강화 역사유적 가치창조, 고려 건국 1천100주년 기념사업 등 5개 분야 20개 사업으로 구성됐다.인천시는 강화도 해안가에 집중돼 있는 해양관방유적과 강화지역 고려왕릉 4기(홍릉, 석릉, 가릉, 곤릉)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작업도 추진한다. 해양관방유적은 강화 해변의 보(堡)와 돈대(墩臺), 산성 등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해안 방어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군사유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강화지역 고려왕릉엔 고려의 역사·문화·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담겼다는 평가다. 이규훈 소장은 "지자체 차원에서 지역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활용해 의미 있는 자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일련의 사업을 추진하는 건 굉장히 긍정적인 일"이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 부분도 당연히 우리가 일정 부분 협조해야 할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지자체가 활용을 원하는 유물·유적이 어떤 성격인지 규명하고, 발굴해서 전시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며 "그런 과정에서 유물·유적 등 문화재가 더욱 잘 보존되는 효과도 함께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이규훈 소장은 "고려 관련 연구에 대한 남북 학술교류 필요성도 있다"고 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은 고려 역사유적 발굴과 복원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2013년엔 고려 궁궐인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국제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선사시대 이후 신라 1천 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으로 이어져 오는데, 고려의 제2 수도가 있던 강화 39년만으론 고려 500년을 밝히는 데 부족한 측면이 있다"며 "큰 틀에서도 분단 전까지 우리나라 역사는 함께 흘러온 만큼, (역사분야에 대한) 남북 간 공동연구는 필요하다"고 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최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개성 만월대 발굴사업 등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남북 학술교류의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이다. 이규훈 소장은 "초대 소장으로서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강화문화재연구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설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문화재청에서 발굴과 시굴 등의 업무를 했을 때 강화도가 담당 지역이었던 연이 있었다"면서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강화도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동시에 책임자로서 연구소를 어떻게 이끌지, 앞으로의 방향설정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 부담감도 컸다"고 했다. 그는 "강화도가 있는 인천을 비롯해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문화재 연구 국가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규훈 소장은?▲ 1971년 출생▲ 1997년 전북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1999년 문화재청 학예연구사▲ 2003년 전북대 대학원 석사(고고학)▲ 2005년 문화재청 학예연구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2007년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2008년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관▲ 2011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2014년 국립 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관·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2017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장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이규훈 소장이 강화도 고려궁지 내에 있는 외규장각 앞에서 "선사시대부터 고대는 물론, 중세와 근·현대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엔 항상 강화도가 있었다"며 우리 역사에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7-08-01 이현준

[인터뷰… 공감]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

공정성 논란·비싼 등록금에 입학전형 개선·장학금 확대법률문제 상담·재학생 소송 참여 등 현장밀착형 서비스로스쿨 출신 안숨기고 수원 최대로펌 만든 졸업생 '뿌듯'학습 효율성 개선 中企법무 관련 교류·실습기회 넓힐 것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된 지 내년이면 10년이다. '귀족학교', '돈스쿨'이라는 오명과 함께 탄생했지만, 지역과 연계해 특화 로스쿨을 만들겠다는 도입 취지는 좋았다. 어떤 지역의 로스쿨은 예술법무를, 또 다른 지역은 국제법무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저마다 개성있는 지역 대표 로스쿨로 자리 잡게 하자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곳을 찾기 힘들어졌지만 경기도에 하나뿐인 아주대학교 로스쿨은 도입 때부터 기획했던 '중소기업법무' 프로그램을 여전히 잘 유지해가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풍성해졌다. 중소기업 대부분이 경기도에 밀집해있는 지역 특성상 중소기업의 법률 여건을 향상시켜주겠다는 선한 의도가, 아주대 로스쿨을 지역민의 자부심으로 바꿔놨다. 지난 19일 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을 만나 현재 로스쿨의 위치와 지난 10년간의 역사, 앞으로의 포부 등을 들어봤다.-로스쿨 출범 10년을 앞두고 있는데 제도 전반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2009년 3월 첫 입학생을 시작으로 내년 3월 10기 입학생을 맞이하는 로스쿨은 사법시험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법률가 양성제도를 목표로 출범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원자를 선발한 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많은 수의 법률가를 양성, 국민들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그 취지다. 지난 9년여를 돌아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입학생을 맞아 교육을 통해 대량의 법률가가 배출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도입 초기에 논란을 야기했던 입학 부문의 공정성 및 투명성 논란과 비싼 등록금 문제, 3년 내에 법이론과 실무교육을 모두 마치도록 설계된 무리한 교육과정, 합격자수를 제한함에 따른 탈락자의 대량 발생, 그리고 변호사시험 준비에 몰입한 나머지 당초의 도입취지인 전문화 및 특성화교육이 실종됐다는 것은 로스쿨제도가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과제다."-입학전형에서 공정성을 위해 개선하고 있는 점이나 비싼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있나."지난해 입학전형부터 대폭 개선해나가고 있다. 우선 응시원서에 부모나 친인척의 성명, 직장명, 직업 등 신상과 관련한 정보를 넣지 않도록 기재금지 사항을 사전고지한 뒤 위반 시 실격조치 등 제재 내용도 명확히 규정해 모집요강에 담았다. 또 서류평가 시 지원자 성명, 사진, 수험번호 등 개인식별정보의 블라인드 처리를 철저히 하고 면접평가에는 가번호 부여, 무(無 )자료 면접 실시, 면접위원 구성 시 외부 면접위원 위촉 등의 방안을 도입했다. 향후 입학전형에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취약계층 등의 진학기회 확대와 입학기회에 대한 형평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등록금의 경우 실제 소요되는 비용을 기초로 설계돼 비싼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등록금 재원만으로는 운영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로스쿨도 대다수다. 그간 논란이 계속되면서 지난해 전국 로스쿨이 일률적으로 15% 가량의 등록금을 인하했고, 일부 국가재정도 투입돼 등록금 전액 대비 30%의 장학금 수혜율을 보이고 있다. 아주대 로스쿨의 장학금 수혜율은 30%를 웃돌고 있다. 특히 소득분위에 따라 0분위~2분위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의 경우 등록금 전액을 무료로 하는 것이 의무화된 만큼 등록금 때문에 로스쿨을 못 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대외장학금 유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니 법률가가 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아주대 로스쿨의 문을 두드려 줬으면 좋겠다."-경기도의 유일한 로스쿨이다. 지역사회와의 유대감을 높이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중소기업법무'를 특성화전략으로 삼았다. 경기도 내에는 56만여개 중소기업이 밀집해있지만, 대기업에 비해 여전히 법률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지역에 하나뿐인 로스쿨로서 이 같은 중소기업을 위해 양질의 현장밀착형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유능한 법률가로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특성화전략의 추진기구로써 '중소기업법무센터'를 설치하고 'Total Law & Business'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실제로 매년 상당수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중소기업법무센터를 통해 법률문제를 상담해주고 있다.'리걸클리닉센터'를 통해 재학생들이 실제 중소기업의 법률분쟁과 소송에 참여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리걸클리닉은 '지역사회에 대한 법률봉사'와 '재학생들의 실무역량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으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선점적 법률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것이 취지다. 소송지원 신청 내용 중에 공익적 목표에 부합하는 사건을 우선 선별하고, 리걸클리닉 수업을 통해 법률자문을 실시하는가 하면 필요할 경우 재학생들이 전문 변호사와 함께 실제 소송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승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벌써 많은 법조인을 배출했다. 학교를 빛내고 있는, 특히 기억에 남는 졸업생이 있다면."오늘도 함께 점심을 했다. 3기이자 졸업한 지 3년 된 변호사로, 수원에서 가장 큰 로펌을 만들어서 성장시킨 인물이다. 부장판사·검사 등 내로라하는 전관을 포함해 많은 변호사들이 수원에서 로펌을 운영해왔는데, 막상 대형 로펌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젊은 변호사니까 가능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친구가 운영하는 로펌은 8명의 로스쿨 출신 변호사로 구성돼있다. 사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정작 출신 로스쿨을 숨기기 급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부는 드러내더라도 정작 자기를 법조인으로 배출시킨 로스쿨은 숨기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하고 나면 다들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 친구는 졸업생 최초로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5천만원을 기탁했다. 경기남부지역은 곧 경기고법이 들어설 예정으로 그만큼 법률수요도 많고 법률시장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변변한 로펌 하나 없이, 대부분 법률분쟁이 생기면 서울에 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그 친구가 경기도민들이 굳이 서울로 가지 않고도 최상의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경기도에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밝혔을 때 정말 자랑스러웠다. 이런 졸업생이 많아질수록 아주대 로스쿨도 함께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사법시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로스쿨의 역할과 책임감도 막중해졌을 것 같다. 임기 내 비전을 제시해달라."지금까지는 여러 가지 장애요인으로 인해 로스쿨의 설립취지를 제대로 구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합격률에만 매몰돼 원래의 로스쿨 도입 취지대로 특성화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50% 미만에 그치는 변호사 합격률을 조금만 높이면 구체적으로 역량을 키우고 전문화, 특성화, 국제화라는 원래의 교육목표도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주대 로스쿨의 경우 누적합격률이 90%를 넘는, 그야말로 최상위 합격률을 유지하고 있지만 높은 합격률을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학년별 저성과자에 대한 학업지도를 실시할 계획이다. 단기적으로는 학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조력하는 체계를 구축하되 중장기적으로는 특성화프로그램인 중소기업법무 특성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교류 및 실습기회를 기존의 중국과 유럽에서 아시아 전역, 북미, 일본 등으로 넓혀나가려고 한다. 전문성 확보를 위해 아주대 로스쿨이 갖는 지리적 장점과 폭넓은 법률시장을 기반으로 전문박사과정도 곧 활성화될 것이다." 대담/김환기 사회부장·정리/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준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아주대 로스쿨 합격률이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높은 합격률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학년별 저성과자에 대한 학업지도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7-25 김환기·신선미

[인터뷰… 공감]민간기업 첫 블라인드 채용 도입, 한종현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

변화와 혁신 위해 서서히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도전해야4차례 인턴 200여명 모집… 사진·학력 등 삭제 양식수정인턴 도입 이유는 당사자도 회사 평가기회 필요하기때문지방대에도 문호 개방… 미쳐서 일할 사람들 만나고 싶어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증원'과 함께 '블라인드 채용'이 청년취업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블라인드 채용은 지독한 청년 취업난 속에서 학연, 지연, 혈연 등 인맥에 따라 차별받는 문화를 혁파하고 실력 중심의 채용 시장을 만들려는 문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약 중의 하나다.이에 발맞춰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 4일 '블라인드 채용' 강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다음 날 관계부처의 합동 추진방안도 공개됐다.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 회의를 통해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의 입사지원서에서 출신 지역, 가족 관계, 신체 조건과 학력 등 인적사항을 삭제하기로 했고 서류 전형은 물론 면접 전형에서도 인적사항 등을 묻지 않는 대신 실력 중심 평가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그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최근 공공기관 채용과정에서 학력과 출신지, 신체조건이 기재된 서류제출을 금지하는 내용의 '채용절차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블라인드 채용의 성공 여부는 정부의 공공부문 확대가 아닌 민간기업의 동참 여부에 달렸다고 의견을 내놓고 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아제약의 동아쏘시오그룹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1일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다고 밝혀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한종현(49) 동아쏘시오홀딩스 대표이사 사장을 동아쏘시오그룹 사옥에서 만나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게 된 배경과 기대감을 들어봤다.동아제약의 지주회사인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지난 13일부터 19일까지 인턴 사원을 모집 중이다.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이번 인턴모집에서 40명을 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4차례에 걸쳐 200여명의 인턴을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선발할 예정이다.한 사장은 올 초 40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바로 '변화와 혁신'이다.그는 "굳어진 조직엔 변화와 혁신을 적용하기 힘들겠지만, 서서히 바꿀 수 있는 부분부터 포인트를 찾아 도전을 해야 한다"며 "첫 번째 변화는 연말마다 내년도 성장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닌 회사가 준 성장목표를 달성할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고, 둘째 혁신은 블라인드 채용처럼 남들이 도전하고 있지 않은 것, 다들 어려워하는 것을 먼저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사실 동아쏘시오그룹은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면서 1959년 공채 1기부터 50년 이상 유지해온 한자를 사용한 자기소개서를 비롯해 입사지원서 양식을 전면 수정했다. 특히, 사진·학력·출신 지역·가족관계 등 불합리한 편견을 줄 수 있는 사항을 모두 삭제했다.이번 블라인드 채용에 앞서 동아쏘시오그룹은 지난 3월 '제20회 동아제약 대학생 국토대장정'의 대원 모집 때에도 기존 30항목이던 선발기준을 '가치와 삶' 등 8~9개 항목으로 단순화하는 등 열정과 패기만 보고 대원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블라인드 채용을 사전 실험 하기도 했었다.'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적폐'라고 강조한 한 사장은 "기득권만 주장하지 말고 젊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 바로 블라인드 채용"이라며 "기존에는 A, B, C밖에 없었다면 앞으로는 A부터 Z까지 펼쳐보고 D 이후는 청년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먼저 인턴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것도 가장 큰 관점에서 볼 때 회사도 사람을 평가해야 하지만 사람도 이 회사가 자기에게 맞는지 평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언했다.한 사장은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진짜 보고 싶은 것은 본인의 '열정'이라고 소개했다. 면접 그 순간은 모두 열정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발되고 나면 갑자기 없던 일이 되는 등 그저 월급쟁이로 변해 버린 모습을 자주 봤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자기 스스로 자극을 주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이나 어떤 전공을 했는데 입사 후 이런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방식으로 서술을 작성토록 할 생각이다. 면접관이 갑이더라도 을의 입장에서 '진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되묻겠다는 것이다."지방대라도 그 안에서 진주를 발견할 수 있어 문호를 개방할 것"이라는 한 사장은 "어디에 일하게 됐다는 취업이 아니라 일에 미쳐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욱 기회를 주고 싶다"고 전했다.마지막으로 한 사장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우리가 먼저 가 보는 것으로, 길이 어긋날 수도, 큰 장애물을 만날 수도, 여러 가지 악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길을 만들어 가듯 일단은 해봐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알 수가 있다"며 "동아쏘시오홀딩스만의 색깔을 만들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동아쏘시오홀딩스2013년 '동아제약' 분할시 지주회사로 설립그룹 전체 비전·목표 수립… 사업확장 추진1967년부터 제약업계 1위로서 대한민국 대표 제약기업으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1932년부터 시작된 80년 넘는 역사의 바탕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위해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2013년에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제약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혁신 신약 개발과 글로벌 경영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동아쏘시오홀딩스, 동아에스티, 동아제약으로 분할했다. 특히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지주회사로서 동아쏘시오그룹 전체의 비전과 전략적 목표를 수립하고, 전략 목표에 따른 그룹의 인적 자원 및 자금 투입 계획 등을 수립한다.이와 함께 바이오의약품 및 혁신신약 개발을 통한 미래 성장동력 확보, 치료약 위주인 제약업 중심에서 의료서비스 분야 및 신 사업군 추가 등 단계적인 사업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바이오의약품 개발을 위해 일본의 메이지세이카파마와 제휴를 맺어 인천 송도에 디엠바이오 공장 건설을 완료했으며, 혁신적인 치매 치료제 개발을 위해 치매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각 계열사의 사업 경쟁력 확보 및 시너지 추구를 위해 전체적인 조직구조를 설계하고 그룹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비전을 구상한다. 대담/이종우부장 ljw@kyeongin.com 정리/문성호기자 moon23@kyeongin.com ■한종현 사장은?-1968년 경기도 출생-수성고, 연세대학교 의용공학과,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 대학원 의공학(석사)▲ 2002.08 ~ 2008.05 동아제약 의료기기사업부 Cardiac 팀장▲ 2008.05 ~ 2009.11 동아제약 해외사업부 OTC 수출팀장▲ 2009.11 ~ 2013.01 동아제약 해외사업부 해외영업팀장▲ 2013.03 ~ 2013.07 동아에스티 해외사업부 해외영업팀장▲ 2013.07 ~ 2016 엠아이텍 대표이사▲ 2017.01 ~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한종현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은 블라인드 채용이 열정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아쏘시오홀딩스 제공한종현 사장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생명존중' 사명을 이어나가겠다고 설명했다.

2017-07-18 이종우·문성호

[인터뷰… 공감]자동차 정비 국가대표 박병일 명장

한국, 세계 5~6위 생산능력 불구 기술력 인정 못받아 하청구조 개선 시급국내 기업 中자동차 무서운 성장 대비해야… 정비 기술자 저평가 아쉬움인간적으로도 명장 되고 싶어 꾸준한 봉사… 46년 경력 車산업 발전 기여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규모는 세계 6위를 자랑한다. 최근 인도에 추월 당하기 전까지는 세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2014년 2천만대를 넘어섰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최근 수십 년 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산 차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불신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국내 시장에서 70% 안팎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불신도 적지 않다. 높은 판매량과 비례해 수출용과 내수용에 차이를 두는 등 국내 소비자를 무시한다는 불만이 있다. '급발진', '에어백 미작동' 등 현대차와 관련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다.현대차의 품질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박병일(61) 자동차 명장이다. 박 명장은 그동안 국내 자동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 결과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기도 한 그는 지난 2014년 현대차로부터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현대차는 그가 한 언론 인터뷰 9건을 문제삼았다. 박병일 명장은 국내 대형 로펌을 앞세운 현대차를 상대로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대응했다. '대기업+대형로펌'과 박병일 명장 1인의 대결에서 검찰은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박병일 명장을 지난 6일 오후 그가 대표로 있는 인천시 남동구에 위치한 정비업체 CAR123TEC 사무실에서 만났다. 46년간 자동차 정비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5~6위에 올라있지만, 자동차 기술력은 일본, 독일의 자동차기업과 비교하면 아직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기술력에는 유럽과 일본에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 기업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지적에 대해서는 분석해 수용할 것은 수용하면서 이를 토대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명장은 또한 국내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하청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자동차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이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기업이 지위를 이용한 '단가 후려치기'가 오랜 기간 만연하면서 중소기업들의 의지를 꺾어놨다"며 "초창기에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중소기업들이지만 대기업의 협력업체가 되면서 힘들어하고 심지어는 공장 문을 닫는 경우도 숱하게 봐왔다. 이러한 구조가 세계 5위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술에 대해서는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 됐다"고 진단했다.그는 지난 2002년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 부문에서 '제1호 명장'이 됐다. 그가 자동차 정비 일을 배운 지 31년 만이다. 자동차 정비 부문에서 국내 대표 전문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6남매의 첫째인 그는 학창시절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고, 자신이 미술을 하게 되면 동생들이 제대로 공부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뒀다.길을 가다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들었던 엔진 소리가 좋아서 자동차 정비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14살 때였다.자동차 명장이 된 이후에도 그는 정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외국서 자동차 관련 서적을 구입해 읽었고, 국내에 없는 차량을 직접 분해하고 구조를 살펴보기 위해서 들여온 수입차만도 100여 대다. 그는 특히 매년 중국차를 들여와 분해하고 있는데 중국 자동차의 기술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했다. 그는 "5년 전과 지금 중국차는 완전히 다른 차량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 거리에서 중국 브랜드 차량을 흔하게 보게 될 것"이라며 "현대차 등 우리나라 기업들은 중국의 발전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박 명장은 이처럼 자동차 정비와 관련한 일을 수십 년 간 해왔지만, 자동차 정비 기술자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고 했다. 현대차가 자신을 고소한 이유도 이같은 인식의 연장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현대라는 회사가 자동차 고치는 일을 하는 나를 쉽게 본 것 같다"며 "'명장'칭호를 가지고 있는 나를 쉽게 볼 정도면 기술자들 모두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변호사 없이 소송에 대응했다. 자동차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긴다면 기능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술자를 낮게 보는 시각을 뒤집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는 자동차 정비 분야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제1호 명장의 자리에 오른 데 이어, 세계 최초로 급발진 원인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지식을 후학에게 전하는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그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정비업체는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해 있다. 그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대에 다녀온 직후다. 우연히 아는 선배가 일하는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일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인천에 터를 잡는 계기가 됐다.그는 "명장이 되기 전까지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며 "명장이 된 이후에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술로 명장이 됐지만 인간으로서도 명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2006년부터 인천의 섬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단체인 '한국마이스터연합회'의 봉사활동은 10년이 넘었다. 그는 차량 정비를 맡고, 다른 회원들은 집 고치기, 가전제품 수리, 일손 돕기 등을 하고 있다. 박 명장은 "섬에 계신 분들은 특히 기능인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섬을 다니고 있다"며 "10여 년간 하면서 회원수도 1천명이 넘는 등 많은 분들이 함께하고 있다. 작은 노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봉사활동을 할 때마다 저 스스로 마음이 기쁘다"고 말했다. 그 동안 박 명장의 활동에 대해 누군가는 '투사'라고 했고, 누군가는 '진정한 전문가'라고 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박 명장을 눈엣가시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다.박 명장은 "저는 수십 년간 자동차를 고치고, 자동차를 공부했다. 지금도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기도 하다"며 "저는 힘이 닿는 데까지 자동차 관련 일을 할 것이고, 현대차를 포함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잘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명장은 대한민국 자동차 발전을 바라는 기능인이라고 했다. 그는 "저는 기능인이다. 진정한 '자동차 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제 역할이 자동차산업이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강조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박병일 명장은?-출생 : 1957년 8월 17일 서울 출생-경력▲ 1971년 자동차 정비 입문▲ 1994년 인천기능대학 자동차공학과 졸업▲ 1999년 세계 최초 자동차 급발진 분석▲ 2002년 대한민국 제 1호 자동차 명장 선정▲ 2004년~2006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2006년 기능한국인 선정▲ 2006~2010년 신성대학 겸임교수▲ 2011년 은탑산업훈장 수상▲ 2013년 한국산업인력공단 명예의 전당 헌액▲ 2000년 ~현재 CAR123 TEC 대표▲ 2007년~현재 한국마이스터연합회 이사장▲ 2008년 ~현재 JPS KOREA 기술연구소장▲ 2012년~현재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저서 : '자동차전자제어 오토매틱' 외 36권박병일 명장은 자동차 전문가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그가 현대차와의 소송에서 변호사 없이 맞선 원동력이기도 하다. 자부심만큼 인력 양성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그가 운영하는 정비공장 3층은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현대차를 미워하지 않는다. 현대차가 세계적으로 더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7-07-11 정운

[인터뷰… 공감]향토서 '수원야사' 펴낸 이창식 前 경인일보 편집국장

6·25전쟁 끝나고 '대기자가 되리라' 자신과 약속서슬퍼런 군인들 압제속에서 지역언론 지켜각종 향토사 편찬위원 활동 지역사 재정립 공로최근 수원의 숨겨진 얘기 풀어내 큰 호응구순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기자 풍모가뭄을 해갈시켜줄 단비가 내리던 지난 3일. 인터뷰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수원시 조원동에 위치한 주인공의 자택을 찾았다. 처음 인터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앞서고 떨리는 마음이 강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마냥 취재수첩과 볼펜은 이상이 없는지, 질문은 어떻게 할지 꼼꼼히 되새김해보며 점검에 나섰다.그 순간 우산을 받쳐든 노신사가 검은 가방을 둘러메고 한손에는 서류뭉치가 잔뜩 든 종이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구순을 앞둔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한 걸음걸이와 기백이 절로 머리를 숙이게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기자생활을 시작, 명실공히 경인지역 언론계 최고어른으로 불리는 이창식(88) 선생과 인터뷰가 그렇게 시작됐다.평양 출신인 그가 경인지역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53년 5월. 6·25전쟁이 발발하고 혈혈단신으로 남한에 온 그는, 당시 육군예비사관학교 육군소위로 임관해 참전하고 전쟁이 끝난 뒤 생업의 길로 들어서면서 인천일보 평기자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갓 20살에 홀로 남한에 내려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잡기까지 녹록지 않은 생활이 이어졌지만 후회는 없다고 한다."입사한 그해(1953년) 7월 휴전조인협상 반대 집회가 인천 월미도에서 열렸다. 그 집회가 첫 취재였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왜냐면 꼭 10년전인 1943년, 평양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를 다니며 경성으로 수학여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월미도를 방문했었다. 그런데 10년만에 그 꼬마가 기자로 다시 서있다니…."선생은 당시 소회를 산문집 '천국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이튿날 평양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경성시내와 고궁을 돌아보고 다음날에는 인천 월미도로 갔는데 내륙 지방에서는 볼수 없었던 등대와 아득한 수평선을 등지고 출렁이는 바다 풍경은 몹시 신비로웠다(중략)…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억하던 선머슴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월미도가 나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은 '기회의 땅'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그는 당시 '반드시 대기자가 되리라'는 다짐을 했고, 그날의 기억을 간직한 채 우리 사회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정론직필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언론사에 몸담으며 느끼는 변화와 격동의 세월은 그 어느 곳보다 살벌했고 무게감 또한 컸지만 이겨냈다.선생이 들고 나온 종이가방에는 지역언론의 역사이자 이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낸 빛바랜 신문과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중 1961년 5월17일자 신문을 꺼내들었다. '軍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내용의 1면 톱기사가 담겨 있었다. 제호 밑에는 군부 검열에 통과됐다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당시 언론인으로서의 고충이 짐작되는 대목이었다.1963년 8월31일자 신문에는 '박정희 전역'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됐는데 '이창식 특파원'이라는 바이라인이 눈에 띄었다. "신기하지요. 당시에는 해외취재가 아닌 지역을 취재할때도 특파원이라는 말을 썼다"고 일러주었다.또 눈길 끄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1960년 9월20일자 '경기도청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기사였다. 당시 경기도청은 서울 중앙청사 맞은 편에 있었다고 한다. 1967년 경기도로 도청이 오게 되기까지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그렇게 신문사의 평기자로 시작해 부장, 부국장, 편집국장에 오르고 언론에 몸담은지 20여년 되던 해, 1974년 4월7일 '신문의날'은 그에게 잊지 못할 날이 됐다.경인일보 편집국장직에서 물러난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표를 내고 떠난 후 그는 생계를 위해 목욕탕집 사장으로 깜짝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만 다시 깨닫게 됐다고 한다. 당시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글짓기와 그림 그리기는 고상한 취미지만 일단 탐욕을 부리면 곧 장사꾼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장사꾼이 되기 전에 호된 수업료만 내고 다시 글쟁이가 됐다"고 회고한다.이후 1977년11월29일 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제안이 들어와 수락한 후 '경기도사 1,2권'을 발행하며 다시 글쟁이로서의 제2의 인생을 맞게 된다.그는 '경기도사'를 시작으로 '수원상의사' '수원시사' '경기예총사' '수원시의회사' '일제강점기 민생실록-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60년사' 등 경기도와 수원지역사회 관련 향토도서만 20여권을 내놓았다. 일본어도 능통한 선생은 일본학자가 쓴 수원향토사인 '발전하는 수원' '수원' '화성지영' '수원군지지', 일본의 저명소설가가 집필한 '간난이', 출판사 의뢰로 번역한 '술병은 클수록 좋다' '인생대학에 졸업은 없다'까지 합치면 40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출간했다.사실 그가 각종 향토사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 경기지역의 향토사가 재정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원화성박물관의 한동민 관장은 "수원지역과 관련된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창식 선생이 편찬한 책들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정말 관심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셨다"고 말한다.이 선생은 "(경기도사 편찬시)당시만 하더라도 향토사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향토사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정사와 야사도 가능하다. 정사는 권력자들의 역사이고 세도가들의 이야기이다보니 야사도 필요하다고 봤다"고 한다.이런 선생이 최근 출간한 '수원야사'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수원지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소설보다 더 재밌게 풀어냈다. 고수는 고수가 알아보는 것일까. 경기도는 물론 수원 관련 역사·문화 전문가로 꼽히는 수원화성박물관 한동민 관장이 그를 알아보고 찾아와 의기투합해 '수원야사'가 빛을 보게 됐다. 그는 편찬위원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이름만 걸치지 않는다. 자료를 얻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 등 전국의 도서관을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며 손수 수백 수천장에 달하는 자료를 복사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원시사에 앞서 1천700여쪽에 달하는 수원상의사를 편찬했다. 당시만 해도 이렇다할 자료가 없어 전국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水(물 수)자가 들어간 자료를 전부 찾아내 복사하고 나중에 보니 그 자료가 4천~5천점에 달했다. '수원상의사'였지만 수원상공회의소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원에 대한 역사까지 포괄하다 보니 방대해졌다"고 한다."나의 스타일은 학문적이라기 보다는 발로 뛰는 현장주의로 쓰는 향토서다. '수원야사'며 '수원시사'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수원사람이 써야 됐는데 평양에서 온 사람이 야사를 쓴 것은 아이러니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이었다."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역을 기반으로한 인물서를 준비중이라고 귀띔하는데 아직까지 현장 기자의 면모가 풍겨나왔다. "글은 발(현장)로 써야 돼. 머리로 쓰면 안돼." 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창식 前 편집국장은?▲ 1930. 평양 출생 ▲ 1953.5 인천일보 입사▲ 1969.3 경기연합일보사(경인일보 전신) 편집국장▲ 1982. 경기도사 1권(공저) ▲ 1986. 수원상의사, 수원시사▲ 1994. 경기예총사 ▲ 1993~1999. 경기도민일보 주필▲ 1999.5 이창식 칼럼집 '천일록'▲ 2000. 수원상의90년사 ▲ 2002. 수원시의회사 ▲ 2003. 일제강점기 민생실록 -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012. 수원문협50년사(공저) ▲ 2014. 수원국악50년사▲ 2017. 수원야사(공저)경인지역 언론계 최고 어른으로 불리는 이창식(88) 선생이 빛바랜 신문을 펼쳐보이며 "기자는 기사를 발(현장)로 써야지 머리로 쓰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1971년 9월 15일 수원시 교동에서 개최된 연합신문사(현 경인일보) 사옥 기공식 모습. /경인일보DB1969년 경기연합일보가 인천에서 수원으로 오기까지 큰 역할을 한 주역 3인방. 재일교포 출신 불이무역 이현수(사진 왼쪽) 사장과 수원 7선의 이병희(오른쪽) 국회의원, 이창식(가운데) 당시 편집국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창식 전 편집국장 제공

2017-07-04 이윤희

[인터뷰… 공감]제2연평해전 참전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이해영 원사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 북한 고속정과의 사투부상자 치료하던 박 병장, 바로 옆에 있던 서 중사눈 앞에서 자식 같은 병사들을 잃었다분쟁의 바다서 살아남은 그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철책 없는 남북의 해상 경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은 늘 남북관계 긴장 국면의 중심에 있다. 크고 작은 도발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천 옹진군 서해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소연평도) 최북단 해역을 누구는 '분쟁의 바다'라고 칭하고 누구는 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꼭 15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에서 우리 해군과 북한군의 전투가 있었다. '제2연평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NLL이 분쟁의 바다임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사건이다. 서해의 평화를 얘기하려면 먼저 분쟁의 역사부터 들춰볼 필요가 있다. 제2연평해전 발생 15년이 지난 지금 그 분쟁의 바다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다.27일 오전 11시께 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서 15년 전 제2연평해전에 참전했다가 살아남은 이해영(52) 원사를 만났다. 이 원사는 "정말 치열하게 싸운 전투가 잊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움이 있다"며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6월이 되면 전사자들 생각에 마음이 찡하다"고 말했다.2002년 6월 29일 오전 5시께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상 경비작전을 수행하는 우리 해군2함대 소속 고속정 252편대(참수리 357·358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NLL 경비와 우리 꽃게잡이 어선의 보호를 위해 출항했다. 편대는 고속정 2척으로 구성된 해군의 최소 단위 전투부대인데 1척 당 28명이 탑승한다.357호 갑판장이었던 이 원사는 며칠 전부터 우리 NLL을 왔다 갔다 하며 눈치를 보는 북한 경비정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전날에도 차단 작전을 통해 북한 경비정을 퇴각시킨 터였다. 이날도 북한 고속정 '등산곶 684호'가 우리 NLL을 침범해 차단작전에 나섰는데 평소와 달리 북한 고속정이 퇴각하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갑판에서 현장 지휘 임무를 맡은 이 원사는 좌현 M60 기관총 사수에게 "준비해라...준비해라...준비해라..."라고 사격 준비 지시를 내렸다. 오전 10시 25분께 '준비해라'라는 말을 10번 정도 말할 때쯤 북한 경비정 쪽에서 굉음이 났다. 이 원사는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얼굴은 파편이 박혀 피투성이였고, 주변에서는 다친 병사들이 '갑판장님 피하세요'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소총으로 대응사격을 하고 358호가 북한 고속정을 향해 계속 공격을 퍼붓고 있었죠."의무병이자 전화수 역할을 했던 故박동혁 병장이 몸을 사리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파편에 맞았다. 이 원사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 병장은 전투 이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숨졌다. 이 원사 바로 옆에 있던 故서후원 중사도 쓰러졌다.이 원사는 이날 북한의 공격은 우발이 아닌 명백히 계획 아래 이뤄진 의도적 공격으로 기억한다. 북한 경비정은 첫 공격에서 故윤영하 소령(357호 정장)이 있는 함교를 명중시켰다. 지휘관을 잃은 357호는 집중 공격을 당했고 결국 6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경비정은 지휘관이 위치하는 곳이 외부에 노출돼 있어 북한은 이를 노리고 조준 사격을 한 것이죠. 며칠 전부터 NLL을 넘나들며 눈치를 보던 북한 고속정은 우리 군의 대응을 염탐한 것이에요. 우리가 차단작전만 할 뿐 선제 경고사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고속정에서 정장이 '아버지'라면 갑판장은 '어머니' 역할을 했다. 이 원사는 배에서 매 끼니를 챙겨 먹는 단원들을 위해 부침개도 부쳐주고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이며 김치며 아낌없이 내놓았다. 라면에 밥과 여러 부식을 넣고 함께 끓인 '라밥'이 주특기 메뉴였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357호의 최고령자였던 그는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책임지며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후임 부사관들과 병사들을 챙겼다.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식구'들이 눈앞에서 전사하는 것을 목격한 이 원사는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부상을 입고 살아남은 그는 2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군 복무 중이다.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 전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이 원사가 못내 섭섭한 점은 당시 전투에서 숨진 故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사망자 6명이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의 예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에는 '전사'와 '순직'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라 공무 중 사망이라는 기준에 따라 순직자 예우만 받았다. 2004년 관련 규정이 개정돼 군인연금법에 전사자 예우 조항이 생겼음에도 소급적용은 하지 못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를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격상하는 내용의 법안(제2연평해전 전투수행자에 대한 명예선양 및 보상에 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논의됐지만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윤 소령을 비롯한 전사자들이 전사자 예우를 받지 못해 서운한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에서 잊히는 것이 더 걱정이에요. 2002년 6월 29일은 월드컵 3·4위전이 열린 날이기도 했고 당시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도 않았죠."북한 선제공격으로 인한 지휘관 전사, 그리고 고속정 침몰. 승전이냐 패전이냐 논란이 있지만,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이 '승전'이라고 말한다."제2연평해전이 패전이라고 하는 시각도 있지만 전투에 참가한 입장에서는 절대 패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제 공격을 당하기는 했어도 같은 편대 358호의 보복 응징으로 적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357호가 전투에서 침몰한 것이 아니라 예인을 하던 중 침몰했기 때문이죠."2019년 전역이 예정된 이 원사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청수지원정 정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해상에 머물러 있는 바지선과 함정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정이다. 그는 전역 후 안보교육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제2연평해전을 통해 겪은 남북대치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다."2년 전 영화 '연평해전'이 상영되면서 국민들이 서서히 관심을 가져주시기 시작했어요. 사실 나라는 군인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지키는 거예요. 저마다 나름대로 안보의식을 갖고 국방에 대해 단합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국민으로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죠."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해영 원사는?▲ 1964년 8월 25일 출생▲ 1983년 12월 8일 해군 부사관 입대▲ 1984년 5월 26일 임관▲ 현계급 진급일 2008년 12월 1일-주요보직▲ 1984년 APD 전남함▲ 1991년 DDH 전주함▲ 2001년 FFK 전남함▲ 2002년 PKM 357정(제2 연평해전)▲ 2007년 PCC 성남함▲ 2017년 라-112호정 정장-수상경력▲ 1999년 참모총장 표창▲ 2002년 대통령 전투유공 표창이해영 원사가 27일 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 정박된 청수지원정에서 급수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이 원사는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 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호 갑판장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2017-06-27 김민재

[인터뷰… 공감]화상통화로 만난 김성중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장

증축공사 95% 진행 신축건물 유지·관리… 내년 30주년 행사준비가 목표최첨단 소음방지·소화시설에 50㎾ 태양광 발전 설비 다른 나라 부러움 사세종기지 주변은 온난화 '미미' 기온·강수량 등 상시 관측·자료 분석 중팀워크 위해 운동 프로그램인 'S리그'와 분야별 강의 '아카데미' 등 실시1988년 2월 17일. 대한민국 극지 진출의 '시발점'인 세종과학기지가 남극대륙 서북쪽 끝인 사우스쉐틀랜드 군도 킹조지섬에 문을 연 날이다. 이때부터 1년 단위로 대한민국 월동대가 세종과학기지로 파견돼 '미지의 세계' 남극과 만났고, 쉼 없는 탐험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내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30주년을 앞두고, 기지 연구동과 연구원 숙소를 대폭 증축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해 12월 세종기지에 파견돼 활동기간 절반가량이 지나고 있는 우리나라 월동대의 임무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이번 월동대 파견은 1988년 2월 이후로 꼭 30번째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남극 세종과학기지입니다. 잘 들리십니까."지난 16일 오전 10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극지종합상황실.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김성중(52)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장이 인사말을 건넸다.한반도와 세종기지는 시차가 딱 12시간이다. 남극 현지시간으로는 오후 10시, 인천에서 1만7천200㎞ 떨어진 지구의 남쪽 끝에 있는 김성중 월동대장과 극지연구소 화상통화시스템으로 연결됐다. 통화 연결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세종기지가 있는 서남극 최북단의 킹조지섬은 한반도와의 시차만큼이나 계절도 정반대다. 한반도의 겨울철에 세종기지는 가장 활동하기 좋은 여름철이고, 한반도에 푹푹 찌는 불볕더위가 찾아온 최근에는 세종기지가 한겨울이다. 세종기지의 겨울은 해가 뜨는 시간이 하루에 4~6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김성중 대장은 "남극의 겨울은 추운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고, 태풍 수준의 저기압으로 며칠씩 강풍이 불고 계속 폭설이 내린다"며 "지난주까진 블리자드(남극에서 일어나는 거세고 찬 바람을 동반한 눈보라 현상)로 고생했는데 다행히 오늘(인터뷰 당일)은 영하 5℃ 정도로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 말했다. 남극 생활은 혹독하기 그지없지만, 아름다운 순간들도 선사하곤 한다. 여름철에는 기지 주변에 펭귄, 물개, 고래 같은 다양한 동물들이 몰려다닌다. 기지 인근 바다인 마리아 소만에서 고래 떼가 물을 뿜으면서 빙하와 어울려 헤엄치는 평화로운 광경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도 남극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세종기지에는 김성중 대장을 포함해 현재 17명의 월동대원이 머물고 있다. 남극의 여름철인 올 초까지 하계연구대와 기지 증축공사팀이 기지에 있었지만, 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접어들자 지난 4월 철수했다. 17명뿐인 월동대원이 하루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야 한다. 사실상 '얼음감옥'에 갇힌 셈이다. 김성중 월동대장은 극지연구소 극지기후과학연구부 책임연구원으로 기후변화를 연구해온 전문가다. 하계연구대 소속으로 남극의 여름철 한 달 정도 세종기지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1년가량을 남극에 머무는 월동대는 처음이다. 그는 "현재 95% 진행된 세종기지 증축공사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신축건물을 유지·관리하고, 내년 세종기지 3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게 이번 월동대의 가장 큰 목표"라며 "세종기지 증축은 다음 여름철인 올해 말쯤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1988년 준공한 세종기지는 그동안의 유지·보수에도 불구하고 부식이 극심해 건물 내구성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소음과 진동에도 취약하다고 한다. 정부는 세종기지 하계연구동 2곳과 하계숙소동 2곳을 철거하고 2개의 건물로 통합하는 기지 증축을 결정해 지난해 10월 착공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세종기지 연구공간은 기존 대비 약 80% 넓어질 전망이다. 김성중 대장은 "새 건물은 외벽 단열 방식, 방과 방 사이 소음방지시설, 소화시설이 최첨단이고, 특히 새로 도입하는 50㎾ 규모 태양광 발전 설비는 인근 다른 나라 과학기지에 없다"며 "인근 다른 나라 기지 월동대원들이 최근 견학했는데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고 설명했다. 기지 증축공사로 바쁜 와중에도 세종기지 제30차 월동대는 지질·생물·고층대기(우주)·대기·기상·해양분야에서 다양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리아 소만의 빙벽이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 빙벽이 얼마나 빨리 녹아 무너지는지 관측하고 있다. 극지는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를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빙벽 또는 빙하의 후퇴를 파악하는 게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연구다.김성중 대장은 "남극지역은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기존 논문에서 많이 밝히고 있는데, 세종기지 주변은 기온이 크게 상승하지 않고 있다"며 "원인 파악을 위해 대기의 기온, 풍속, 풍향, 기압, 강수량 등을 상시 관측하고, 관측자료를 분석 중"이라고 했다. 김성중 월동대장은 대원 간 팀워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세종기지 월동대원 17명은 분야별 핵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최정예 전문가들이다. 각각의 대원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맡아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팀워크가 무너지거나 한 명이라도 건강이 좋지 않아 임무 수행이 안 되면, 나머지 대원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월동대의 화합을 다지고, 대원들의 건강을 꼼꼼히 챙기는 것은 월동대장의 주요 임무이기도 하다. 김 대장은 인터뷰 내내 대원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성중 대장은 이른바 'S리그'(세종리그)라는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어 족구, 배드민턴, 윷놀이, 장기, 컴퓨터게임 등 5종목을 두고 매주 화요일 오후에 팀별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연말에 최종 우승팀을 정한다고 해서 '리그'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게 김성중 대장 얘기다. 해가 있는 낮에는 대원끼리 주변 트레킹이나 눈썰매를 즐긴다고 한다. 대원 17명 모두가 각 분야별 전문가이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각자의 분야를 강의하는 '세종아카데미'도 열고 있다. 주변 기지 대원과의 소통을 위해 영어가 서투른 대원에게는 김성중 대장이 직접 일주일에 2번씩 영어강의도 한다. 김성중 대장은 "이달 21일에는 절기상 남극에서 가장 겨울이 긴 날이라는 '남극 동지(Midwinter's Day)' 행사가 인근 칠레 공군기지 주최로 열리는데, 주변 기지 대원들이 자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며 친목을 다지는 연중 가장 큰 행사"라며 "우리 대원들도 한복을 입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 중"이라고 말했다. 세종기지 대원들의 활동과 일상은 대원들이 매달 직접 제작해 극지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웹진 '눈나라 얼음나라'에서 볼 수 있다.최근의 지구 온난화는 45억년에 달하는 지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의 기후변화 현상이라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이 같은 숙제를 인류가 공동으로 풀어가기 위해 우리나라도 극지연구에 동참하고 있다는 김성중 대장의 자부심이 컸다. 김성중 대장은 "극지연구소로 복귀하면 남극에서 직접 관찰한 기후변화 정보를 활용해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할 계획"이라며 "현재 극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후변화가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김성중 대장은?▲1965년 충남 계룡시 출생▲충남대학교 해양학과 졸업▲미국 텍사스A&M대학교 해양물리학 석사▲미국 텍사스A&M대학교 해양물리학 박사▲2002년 캐나다 기후모형연구소 박사후 연구원▲2003년 미국 듀크대학교 전임연구원▲2008년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2014년 극지연구소 극지기후변화 연구부장▲2016년~현재 남극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장지난 16일 오전 10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극지종합상황실에서 남극 현지에 파견된 김성중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장과 경인일보 기자가 화상통화 시스템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극지연구소 제공남극 세종과학기지 전경. 오른쪽 대형 회색건물이 증축공사 중인 신축건물, 빨간색 건물들은 기존 건물. /세종과학기지 제공

2017-06-20 박경호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극지연구소 공채 전문가 17명… '연구반·지원반·유지반' 나눠 운영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는 극지연구소가 공채를 통해 선발한 분야별 전문가 17명으로 구성됐다. 몇 차례 월동대 경험이 있는 대원도 있고, 남극에 처음 파견된 대원도 있다. 세종기지 월동대장은 주변 기지 간 국제협력업무를 맡으면서 기지 운영을 총괄한다. 기지 총무는 물자 관리와 하계 연구원 지원 등 기지 운영 실무 전반을 책임지는 '살림꾼' 역할이다. 실무팀은 '연구반', '지원반', '유지반'으로 나뉜다. 연구반에는 분야별로 지질연구원, 생물연구원, 고층대기연구원, 대기연구원, 해양연구원, 기상대원이 소속돼 있다. 기상대원의 경우 기상청에서 파견된다. 지원반에는 극지연구소나 외부기지와의 유·무선 통신기기를 관리하는 통신대원, 연구 등 해상활동을 지원하는 해상안전대원, 식사를 준비하는 조리대원, 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대원이 있다. 군 특수작전 경력자여야 하는 해상안전대원은 국방부 장관 추천이 있어야 하고, 의료대원은 극지연구소와 협약을 맺은 가천대 길병원에서 파견한다.유지반은 기지의 전반적인 시설을 유지·관리하고 있다. 모두 해당 분야의 관련 자격증과 상당한 경력이 있는 전문가들로 기계설비대원 2명, 중장비대원, 전기대원, 발전담당대원이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남극 세종과학기지 제30차 월동대원. (윗줄 왼쪽부터) 서동경 의료대원, 이현수 중장비대원, 정상준 기계설비대원, 박성윤 조리대원, 이정의 기계설비대원, 김성중 대장, 백승민 총무, 윤정구 발전담당대원, 최동수 기계설비대원, 이준휘 기상대원. (아랫줄 왼쪽부터) 한동원 해양연구원, 김찬양 생물연구원, 이원석 고층대기연구원, 성대경 대기연구원, 이재일 지질연구원, 우종현 해상안전대원, 김상욱 통신대원. /세종과학기지 제공

2017-06-20 박경호

[인터뷰… 공감]'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

보험 영업으로 제2의 인생 시작했지만빚보증에 전재산 날려 방황하기도재소자와 만남이 터닝포인트로도전 메시지 전하며 치유의 힘 얻어"가난했지만, 나의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어둠의 밤하늘 등불이 나를 밝혔다. 진심과 겸손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1984년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 성장했고, 나머지 인생은 함께 더불어 사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밝혔다.LA올림픽에서 효자종목인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한 김원기 선수는 전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인기 스타로 급부상했다. 무엇보다 금메달이 꾸준한 노력과 굵은 땀방울이 이루어낸 값진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 후일담은 국민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며 인기를 누렸다. 김 회장은 "시합하다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한 게임 한 게임 이겨나간 것이 기적같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성과를 가져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직후인 1985년 1월 삼성생명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사회를 제대로 알고 배우자는 생각에서 운동팀을 떠나 필드경험에 뛰어들었던 것. 보험모집·앙케트조사 등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어쩌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경우에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려고 한다"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실제 지난 2000년 10월 삼성생명 보험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말단 보험설계일에서 총무과 대리·영업소장·본부 업무과장·교육담당 차장 등을 거칠 정도로 능력발휘를 했다.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운동밖에 몰랐던 김 회장은 사회적응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까운 사람의 빚보증 선 게 잘 못되는 바람에 전재산을 날린 것은 물론 한동안 계속 그 빚을 갚아야 했고, 막상 갈 데가 없어서 선배가 하는 세차장 등에서 수개월동안 일을 하기도 했다.하지만 김 회장은 현재 인생의 금메달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지난 2002년부터 현재까지 교도소의 재소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것.김 회장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다고 한다. 은퇴 후 주변의 도움으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이어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허전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찾은 게 재소자들과의 만남이었다. 김회장은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오랫동안 이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해왔다. 현재 '도전, 나는 나를 넘어섰다'란 주제로, 영등포·안양·인천·춘천 등 한해 수십여차례의 전국 교도소 순회 강연을 하면서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국가대표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과 자신만의 성공철학을 소개하며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한다.김 회장은 "그들에게 잘난체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과 부족한 체력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야기를 풀어주면서 재소자들의 마음을 연다"며 " 비록 가난했지만, 나의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는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실상 무료 강연을 펼치자 사람들은 제가 하는 걸 '봉사'라고 한다"며 "하지만 교도소 강연을 돌면서 내가 얻는 것이 더 많다. 그들이 손편지를 나에게 전달할 때 그 치유의 힘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밝혔다.자식이 없는 김 회장은 지난 1998년부터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는 모교 후배들을 마음으로 품고 부모역할을 하고 있다. 레슬링 선수 7명, 여자 태권도선수 2명 등 총 9명에 이른다.김 회장은 "중2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당시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며 "우리 후배들을 위해 무슨 역할을 할수 있을까 고민하다 편모·편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의 부모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자식들에게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인생계획과 인생진로 등을 함께 고민한다. 한달에 30만원씩의 지원금도 주고, 연말에는 자식들을 다불러 안산 평화의집, 을지로 거리의 천사, 음평 천사원, 태릉선수촌 등을 3박4일동안 돌며 봉사활동을 하면서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한다.10여명의 자식을 보호하는 것은 김 회장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김 대표는 "초기에는 정말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면서도 "지금은 보람을 느낀다. 최근에 첫째 아들과 셌째아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 그 무엇보다 힘든시기를 거쳐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김 회장의 지원 덕분인지 함평중학교 레슬링부가 최근 열린 제4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레슬링 대회에서 남자부문 금·은·동메달을 모두 휩쓸면서 레슬링 본고장 함평의 명예를 다시 한번 떨쳤다.김 회장은 꿈이 있다. 미래세대를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그는 자신의 경험이 쓰라렸기에 후배들은 자신과 같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김 회장은 "운동선수는 사회를 모른다. 사회를 살아 가는 전반적 지식이나 방법이 부족한 게 사실. 선수들이 언젠가는 운동을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적응 프로그램, 컨설팅 등이 없어서 답답하다"며 "그것도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 회장은 마지막으로 "길이 어두운 사람들을 위해 등불을 비춘다는 마음을 갖고 보니 제앞이 환해지는 이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글/이경진기자 lkj@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김원기 회장은?-경력▲1962년 전라남도 함평출생▲함평농업고등학교, 전남대학교 졸업▲전남대교육대학원 운동생리 석사, 경희대체육대학원 체육복지정책 박사▲삼성생명 교육차장▲함평군 레슬링협회장▲엔에스하이텍 대표이사▲꿈메달 스포츠봉사단 회장-수상▲1983 터키야사도구 국제대회 은메달(터키)▲1984 콩코드국제대회 금메달(미국)▲1984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미국)▲1985 슈퍼챔피언대회 은메달(일본)▲1984 체육훈장(청룡장)수상▲1985 대한민국 최고상 수상▲1989 성곡문화재단 체육대상 수상▲2004 선행칭찬본부 칭찬상 수상▲2011 미래지식경영원 최우수 기업 선정▲2011 창업진흥원 혁신적 기업가상 수상▲2012 재능기부 인증업체 선정▲2013 서울지방조달청 표창장▲2013 대한민국예술·문화인 대상(체육부문)▲2014 전남도지사 표창(기업봉사)▲2015 한국창조경영인협회 최우수 신창조인상 수상▲2015 신지식인 인증(문화예술부문)후배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은 "미래세대를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1984년 LA올림픽이 끝난 후 귀국한 선수단이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당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원기 선수와 어머니의 모습. /김원기 회장 제공김원기 함평군 레슬링협회장과 함평중·함평골프고 레슬링팀 선수들이 함평군 체육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원기 회장 제공

2017-06-13 이경진

[인터뷰… 공감]고려불화 그리는 월제(月齊) 혜담스님

전쟁 많던 시기 참회위해 집에 부처님 모신 듯… 조선초 불교 박해로 자취 감춰일본이 강점기때 가져다가 국보급 보물로 지정 현존 200여점 중 국내 20여점뿐아이러니하게 일본인 도움으로 300여점 재현 한국 문화재로 알리려 수십년 노력정교하고 화려해 고려 전후에 없던 미술사조… 복원 작품이라도 잘 보존했으면하얀 빛의 투명한 사라가 부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사라에 정교하게 박힌 금빛 문양이 화려한 빛을 낸다. 가늘게 뜬 긴 눈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그 생경한 모습이 낯설다. 그런데 묘하게 자꾸 시선을 잡아당긴다. 이토록 아름다운 부처를 본 적 있을까.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고려불화 중 하나인 '수월관음상'을 만났다. 그리고 월제 혜담스님을 만났다. 혜담스님은 이곳의 수월관음상을 그린 작가다. 이곳의 수월 관음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수월관음상을 혜담스님이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불화가 채 20여 점도 남아있지 않은 이 척박한 땅에서 혜담스님은 300여 점이 넘는 고려불화를 재현하는 작업을 40여년간 이어왔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938년 즈음부터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물물교환이 성행하면서 불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됐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 불화는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이 즐기는 귀족 문화였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이나 화공, 화사를 모셔와 원하는 대로 불화를 그리게 할 만큼 성행했다. 조선 초기까지 500여년 간 고려불화가 이어졌다."당시 문헌을 토대로 보면, 워낙 내란·외침이 많아 늘 전쟁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살상이 이루어지다 보니 그 죄를 참회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집 안에 부처님을 그림으로 모셔두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 수요는 어마어마 했을 거라 추정하구요."조선 초 세종 때 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불교가 말살되다시피 박해를 받았고 고려불화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절에서조차 불화를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민가의 불화들은 오죽했겠어요. 고려불화 자체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던 겁니다." 스님은 그 이후의 역사를 몹시 안타까워 했다.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고려불화를 일본으로 많이 가져갔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은 불교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문화재로서 지닌 가치를 알아차린 거죠. 그때 당시 일본 문화위원회 같은 정부조직에서 이를 가져다 국보급 보물로 지정한 게 벌써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현존하는 고려불화는 200여 점 정도다. 이 중 180여 점을 일본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려불화는 그나마도 벽화로 그려져 있거나 경서에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젊은 시절 혜담스님은 수월관음상을 책에서 접했다. 그 모습에 매료돼 고려불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고려불화 입장에선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림에 소질이 있는 스님의 눈에 띈 셈이다. "수월관음상을 보고 큰 매력을 느꼈는데, 관세음보살을 보고는 '아, 내가 불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리려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료도 거의 없고 절에는 탱화의 유형만 보존되고 있을 뿐 고려불화에 대해서는 전무했어요." 막막하던 그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일본 한 박물관의 부관장이던 오야마 노리오 씨가 자료를 보내주었다. "오야마 노리오씨가 수십년간 고려불화의 사진이나 재현하는 데 필요한 문헌 등 자료를 보내주었어요. 그 사람은 고려불화가 갖는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여겨 저를 도와 불화가 현재에도 재탄생되기를 바란 거죠. "고려불화의 특징은 매우 정교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옷 안으로 비치는 부처의 팔뚝과 몸은 고려 불화에서만 볼수 있는 섬세한 표현이다. 순금가루를 안료 삼아 문양을 그려넣었다. 서양 르네상스 시대보다 300여년을 앞서 시작됐지만 훨씬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졌다는 평을 받는다. "서양 종교화들은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되는데, 고려불화는 비단에 석채(천연안료)로 제작됐고 문양들이 매우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돼 있어요.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왕족, 귀족들이 출가를 했을 만큼 불교문화가 융성했기 때문에 고려불화도 화려하게 그려지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고려불화의 진가는 해외 미술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다. 스님은 2014년을 시작으로 3년 연속,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프랑스 국립살롱전에 초청을 받았고 해마다 특별상을 수상했다. "고려불화는 고려 전후에는 전혀 없었던 미술사조라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어떤 시기에도, 어떤 문화에도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불화는 없었어요. 해외에서도 고려불화가 가진 희소성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걸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게 참 안타깝죠."고려불화를 다시 우리 곁에 돌려놓기 위해 노력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편견이 가장 그를 힘들게 했다. "해외에 제가 재현한 고려불화를 내놓으면 아주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고려불화 자체가 일본 문화재라고 인식하거든요. 그동안 일본에서 자국의 문화재로 보존하면서 해외에도 열심히 알려왔고. 그런데 제가 나타나 한 30년 동안 미술계 뿐 아니라 국제학술대회에 나가 고려불화가 우리 문화재임을 알렸어요. 일본인들이 절 참 싫어합니다. 그래도 이제야 우리 것이라 인식하는 시선들이 좀 생겼어요. 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멀었죠."국내는 고려불화를 '문화재'보다 '종교화'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고려불화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입니다. 제가 고려불화를 알리기 위해 30년을 떠들었는데도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어쩌면 좋을까 싶습니다. 세월이 너무 흘러버려서 이제 우리 것이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도 못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그 맥을 잇기 위해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 해서 젊은 사람들이 밥벌이할 수 있을까요. 작업도 일반 미술과 다르게 매우 난해하구요. 이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헤아릴 수 없어요. 젊은 세대에게 내 길을 걸어가라고 권하며 그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은 그저 복원한 작품이라도 보존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고려불화를 그릴 수 있게 도와준 오야마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걸 다 뺏긴 이 상황 속에서 스님 혼자 어떻게든 불화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한국 정부가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스님이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있다. 한국사람들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다' 그 말이 참 아프게 다가왔지만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으니 맞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우리 것을 빼앗아 간 이들에게 듣는 쓴소리에 고개를 숙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린 게 아닌가.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혜담스님은?▲ 1980년~ 고려불화 재현▲ 1985년~ 대한불교보문종 계태사 주지▲ 2005년 12월 대통령 표창장 수상▲ 2009년 3월 수원시 공로상패 수상▲ 2009년~ 사단법인 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 이사장▲ 2009년 9월 조계종 중앙신도회(문화재환수위원회) 회장 감사장 수상▲ 2014년 11월 스리랑카 상카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취득▲ 2014~2016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국립 살롱전 초청, 특별상 수상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혜담스님이 현재 진행 중인 수월관음상을 그리고 있다.맨 위에서부터 수월관음상, 오백나한상, 관경16관변상, 열반상.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 제공

2017-06-06 공지영

[인터뷰… 공감]물범 생태연구활동 전문가 DMZ자연사랑회 진종구 서정대 교수

■물범에 관심을 둔 이유영유권 분쟁 환경자료 중요성 확인독도보존 노력 국제사회 전파 목적일제에 의한 '강치 절멸' 사실 접해뼈저린 교훈 잊지않기 위해서 연구■백령도 점박이 물범에 대해11월 전후 북상해 새끼 낳고 남하남북 해역 자유로이 헤엄쳐 다녀빙하기 무렵 옛 황하유역에 격리서해서 서식한 향상 진화 개체군■물범·어민 '불화' 공존 방법 없나미역채취 어민들 서식처 침범 심각어망 훼손 등 어민엔 '불편한 손님'인공어초로 물고기 생존환경 보장바다에 물범 휴식공간 조성도 필요■DMZ자연사랑회 소개·향후 계획학생과 함께 생태관찰·보호 캠페인경기도와 협력 민간활동 전개 계획한강청과 협조 강화 모니터링 확대중고생 이해 돕기위해 책자 발간도"점박이 물범은 남북한 해역을 자유로이 헤엄쳐 다닙니다. 그래서 남북한 공존과 화해를 상징하는 동물이라 할 수 있죠. 남북 공동연구가 이뤄지면 더욱 좋고요."진종구 교수는 현재 양주 서정대학교에서 아동청소년보육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진 교수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독도와 비무장지대(DMZ)의 생태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순수민간단체(NGO)인 DMZ자연사랑회를 만든 것도 2005년 이 무렵이다. DMZ자연사랑회는 처음엔 DMZ 주변 생태환경을 카메라에 담아 전시하는 활동으로 시작했다. 서해 NLL(북방한계선) 생태연구에 뛰어든 것은 올해 2월부터다. 이들의 연구목적에 공감한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점박이 물범과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 진 교수가 이끄는 DMZ자연사랑회는 백령도에서 어민들의 미역채취 활동으로 물범 서식처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해 상 NLL 생태보호의 시급성을 알리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두고만 보다가는 조만간 멸종위기 야생동물(2급)인 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서 아예 모습을 감출지 모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사회적 관심을 유도해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 진 교수를 최근 서정대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물범 생태연구활동과 앞으로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점박이 물범에 관심을 둔 동기는 무엇입니까?원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 관련 법을 연구하다 우연히 2002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시파단 섬 영유권 분쟁에 대해 '환경자료를 지속해서 축적해 온 말레이시아가 영유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한 판례를 찾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세계 최초의 독도 다이옥신 연구를 진행했고 결코 일본이 확보할 수 없는 환경자료를 축적했습니다. 이런 연구는 우리 국민이 독도 환경보존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국제사회에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던 중 과거 일제에 의해 독도 강치(큰 바다사자의 일종)가 절멸하게 된 사실을 접하게 됐고 이런 뼈저린 교훈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점박이 물범을 연구하게 됐습니다.-점박이 물범은 어떤 동물입니까?점박이 물범은 원래 육지에서 살았으나 천적 등을 피해 안전한 바다로 이주한 생물입니다. 오랜 세월 바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발과 뒷발이 지느러미처럼 퇴화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폐(허파)로 숨을 쉬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해양 포유류기 때문에 통상 30분 정도 잠수하면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최대 1시간까지 잠수할 수 있습니다. 또 코와 입 주위에 길게 자란 수염은 민감한 신경과 연결돼 있어 미세한 물의 파장도 감지해 물고기 등을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털갈이가 끝나는 11월을 전후해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중국 보하이만 랴오둥 반도 등지로 이동, 차디찬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다시 백령도 근해로 남하하는 회유성 특징이 있습니다. 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북극해를 중심으로 서식하는 점박이 물범 중 최남단에 서식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원래 점박이 물범은 북위 45도 이북 북극권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는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합니다.-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 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북태평양 개체군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던 점박이 물범이 빙하기 무렵 바다경계가 변화되면서 옛 황하 유역에 격리돼 서해를 중심으로 서식해 왔다고 추정됩니다. 격리된 개체군은 보하이만 북쪽 육지에 가로막힌 채 더 북상하지 못하고 그나마 제일 추운 보하이만의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먹이가 풍부한 백령도 근해로 내려와 먹이활동을 해 북태평양 개체군과는 다른 독특한 개체군으로 향상진화를 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이 한때 하늬해변과 콩돌해안 등에서도 발견됐다는데 지금은 왜 물범 바위로 휴식처를 옮겼나요?1940년대 8천여 마리에 달하던 점박이 물범이 멸종위기에 이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간섭입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많은 피난민이 백령도로 이주해 주민 숫자가 늘었고 이는 해안가 점박이 물범들에는 상당한 위협요인이 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물범을 물개로 잘못 인식해 해구신을 확보하기 위해 마구 포획했습니다. 또 해안가에 출몰하는 점박이 물범을 무장공비로 오인, 사격을 가해 점박이 물범은 사람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결국, 점박이 물범은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해안가를 벗어나 인간의 간섭이 덜한 바다 한가운데 물범 바위와 연봉, 두무진 바위 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물범 바위에 상륙하는 일이 잦아지면 물범 바위도 더는 안전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값이 나가는 '지네발 미역'을 따기 위해 많은 어민이 물범 바위를 침범하면서 점박이 물범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점박이 물범과 어민이 공존하는 방법은 없습니까?사실 어민 입장에서는 점박이 물범이 썩 달가운 이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망과 어구에 걸려든 물고기를 훔쳐 먹고 심지어 어구까지 훼손하니까요. 이러한 불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를 해소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서해 어족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첫 번째 방안으로는 인공어초(人工魚礎)를 설치해 물고기 생존환경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어획량이 늘어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중국 저인망 쌍끌이 어선의 출몰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 해경 당국의 단속활동도 필요하지만, 중국 정부와 협상을 통해 원천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물범 바위나 연봉과 같은 점박이 물범의 휴식공간을 바다에 조성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DMZ자연사랑회는 어떤 단체입니까?DMZ자연사랑회는 2005년 설립해 경기도에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처음에는 DMZ 주변 풍경을 촬영해 파주시민의 날에 전시회를 열어오다 올해 2월부터 본부를 서정대학교 안으로 옮겨 학생들과 더불어 DMZ 생태보호 캠페인과 생태관찰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전문가들과 함께 DMZ와 NLL의 자연생태를 연구하고 있고 연구활동에 드는 경비는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DMZ자연사랑회는 경기도 DMZ정책관실과 협력해 DMZ와 관련된 각종 민간활동을 벌일 계획입니다.-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물범 보호활동을 벌일 예정인지?지난 2011년부터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과 함께 백령도 점박이 물범 모니터링을 매년 2회 이상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범 보호활동은 순수 민간차원의 진행도 좋지만, 정부 당국과 공동으로 진행하면 정부의 즉각적인 대책이 마련되기 때문에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한강유역환경청과의 협조를 강화해 백령도 점박이 물범의 모니터링을 확대하고 가능하다면 물범에 위치추적기(GPS)를 부착, 회유 경로를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또한, 민간차원에서 점박이 물범 보호를 위한 캠페인을 계속 전개하기 위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점박이 물범에 대한 책자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우리 중고교생들이 점박이 물범의 생태를 이해하고 공존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최재훈·김민재기자 cjh@kyeongin.com 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진종구 교수는?▲ 전북 김제 출생▲ 고려대 정치학 석사▲ 부경대 환경공학박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으로 27년간 활동▲ 현 서정대학교 교수▲ DMZ자연사랑회 회장DMZ자연사랑회 회장 진종구 교수는 멸종위기 동물인 점박이 물범을 보호하려면 서해 북방한계선(NLL) 백령도에서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생태환경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진 교수가 점박이 물범의 활동을 연구하며 지난 2014년 발간한 모니터링 보고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멸종위기에 놓인 점박이물범의 대표 서식지인 백령도 '물범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물범들. /경인일보 DB

2017-05-30 최재훈·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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