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물범 생태연구활동 전문가 DMZ자연사랑회 진종구 서정대 교수

■물범에 관심을 둔 이유영유권 분쟁 환경자료 중요성 확인독도보존 노력 국제사회 전파 목적일제에 의한 '강치 절멸' 사실 접해뼈저린 교훈 잊지않기 위해서 연구■백령도 점박이 물범에 대해11월 전후 북상해 새끼 낳고 남하남북 해역 자유로이 헤엄쳐 다녀빙하기 무렵 옛 황하유역에 격리서해서 서식한 향상 진화 개체군■물범·어민 '불화' 공존 방법 없나미역채취 어민들 서식처 침범 심각어망 훼손 등 어민엔 '불편한 손님'인공어초로 물고기 생존환경 보장바다에 물범 휴식공간 조성도 필요■DMZ자연사랑회 소개·향후 계획학생과 함께 생태관찰·보호 캠페인경기도와 협력 민간활동 전개 계획한강청과 협조 강화 모니터링 확대중고생 이해 돕기위해 책자 발간도"점박이 물범은 남북한 해역을 자유로이 헤엄쳐 다닙니다. 그래서 남북한 공존과 화해를 상징하는 동물이라 할 수 있죠. 남북 공동연구가 이뤄지면 더욱 좋고요."진종구 교수는 현재 양주 서정대학교에서 아동청소년보육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진 교수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독도와 비무장지대(DMZ)의 생태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순수민간단체(NGO)인 DMZ자연사랑회를 만든 것도 2005년 이 무렵이다. DMZ자연사랑회는 처음엔 DMZ 주변 생태환경을 카메라에 담아 전시하는 활동으로 시작했다. 서해 NLL(북방한계선) 생태연구에 뛰어든 것은 올해 2월부터다. 이들의 연구목적에 공감한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점박이 물범과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 진 교수가 이끄는 DMZ자연사랑회는 백령도에서 어민들의 미역채취 활동으로 물범 서식처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해 상 NLL 생태보호의 시급성을 알리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두고만 보다가는 조만간 멸종위기 야생동물(2급)인 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서 아예 모습을 감출지 모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사회적 관심을 유도해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 진 교수를 최근 서정대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물범 생태연구활동과 앞으로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점박이 물범에 관심을 둔 동기는 무엇입니까?원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 관련 법을 연구하다 우연히 2002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시파단 섬 영유권 분쟁에 대해 '환경자료를 지속해서 축적해 온 말레이시아가 영유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한 판례를 찾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세계 최초의 독도 다이옥신 연구를 진행했고 결코 일본이 확보할 수 없는 환경자료를 축적했습니다. 이런 연구는 우리 국민이 독도 환경보존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국제사회에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던 중 과거 일제에 의해 독도 강치(큰 바다사자의 일종)가 절멸하게 된 사실을 접하게 됐고 이런 뼈저린 교훈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점박이 물범을 연구하게 됐습니다.-점박이 물범은 어떤 동물입니까?점박이 물범은 원래 육지에서 살았으나 천적 등을 피해 안전한 바다로 이주한 생물입니다. 오랜 세월 바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발과 뒷발이 지느러미처럼 퇴화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폐(허파)로 숨을 쉬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해양 포유류기 때문에 통상 30분 정도 잠수하면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최대 1시간까지 잠수할 수 있습니다. 또 코와 입 주위에 길게 자란 수염은 민감한 신경과 연결돼 있어 미세한 물의 파장도 감지해 물고기 등을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털갈이가 끝나는 11월을 전후해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중국 보하이만 랴오둥 반도 등지로 이동, 차디찬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다시 백령도 근해로 남하하는 회유성 특징이 있습니다. 백령도 점박이 물범은 북극해를 중심으로 서식하는 점박이 물범 중 최남단에 서식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원래 점박이 물범은 북위 45도 이북 북극권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는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합니다.-점박이 물범이 백령도에 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북태평양 개체군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던 점박이 물범이 빙하기 무렵 바다경계가 변화되면서 옛 황하 유역에 격리돼 서해를 중심으로 서식해 왔다고 추정됩니다. 격리된 개체군은 보하이만 북쪽 육지에 가로막힌 채 더 북상하지 못하고 그나마 제일 추운 보하이만의 얼음 위에서 새끼를 낳은 뒤 먹이가 풍부한 백령도 근해로 내려와 먹이활동을 해 북태평양 개체군과는 다른 독특한 개체군으로 향상진화를 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백령도 점박이 물범이 한때 하늬해변과 콩돌해안 등에서도 발견됐다는데 지금은 왜 물범 바위로 휴식처를 옮겼나요?1940년대 8천여 마리에 달하던 점박이 물범이 멸종위기에 이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간섭입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많은 피난민이 백령도로 이주해 주민 숫자가 늘었고 이는 해안가 점박이 물범들에는 상당한 위협요인이 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물범을 물개로 잘못 인식해 해구신을 확보하기 위해 마구 포획했습니다. 또 해안가에 출몰하는 점박이 물범을 무장공비로 오인, 사격을 가해 점박이 물범은 사람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결국, 점박이 물범은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해안가를 벗어나 인간의 간섭이 덜한 바다 한가운데 물범 바위와 연봉, 두무진 바위 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물범 바위에 상륙하는 일이 잦아지면 물범 바위도 더는 안전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값이 나가는 '지네발 미역'을 따기 위해 많은 어민이 물범 바위를 침범하면서 점박이 물범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점박이 물범과 어민이 공존하는 방법은 없습니까?사실 어민 입장에서는 점박이 물범이 썩 달가운 이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망과 어구에 걸려든 물고기를 훔쳐 먹고 심지어 어구까지 훼손하니까요. 이러한 불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를 해소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서해 어족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첫 번째 방안으로는 인공어초(人工魚礎)를 설치해 물고기 생존환경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어획량이 늘어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중국 저인망 쌍끌이 어선의 출몰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 해경 당국의 단속활동도 필요하지만, 중국 정부와 협상을 통해 원천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물범 바위나 연봉과 같은 점박이 물범의 휴식공간을 바다에 조성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DMZ자연사랑회는 어떤 단체입니까?DMZ자연사랑회는 2005년 설립해 경기도에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처음에는 DMZ 주변 풍경을 촬영해 파주시민의 날에 전시회를 열어오다 올해 2월부터 본부를 서정대학교 안으로 옮겨 학생들과 더불어 DMZ 생태보호 캠페인과 생태관찰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전문가들과 함께 DMZ와 NLL의 자연생태를 연구하고 있고 연구활동에 드는 경비는 김홍용 서정대 총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DMZ자연사랑회는 경기도 DMZ정책관실과 협력해 DMZ와 관련된 각종 민간활동을 벌일 계획입니다.-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물범 보호활동을 벌일 예정인지?지난 2011년부터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과 함께 백령도 점박이 물범 모니터링을 매년 2회 이상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범 보호활동은 순수 민간차원의 진행도 좋지만, 정부 당국과 공동으로 진행하면 정부의 즉각적인 대책이 마련되기 때문에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한강유역환경청과의 협조를 강화해 백령도 점박이 물범의 모니터링을 확대하고 가능하다면 물범에 위치추적기(GPS)를 부착, 회유 경로를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또한, 민간차원에서 점박이 물범 보호를 위한 캠페인을 계속 전개하기 위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점박이 물범에 대한 책자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우리 중고교생들이 점박이 물범의 생태를 이해하고 공존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최재훈·김민재기자 cjh@kyeongin.com 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진종구 교수는?▲ 전북 김제 출생▲ 고려대 정치학 석사▲ 부경대 환경공학박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으로 27년간 활동▲ 현 서정대학교 교수▲ DMZ자연사랑회 회장DMZ자연사랑회 회장 진종구 교수는 멸종위기 동물인 점박이 물범을 보호하려면 서해 북방한계선(NLL) 백령도에서 인간과 물범이 공존할 수 있는 생태환경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진 교수가 점박이 물범의 활동을 연구하며 지난 2014년 발간한 모니터링 보고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멸종위기에 놓인 점박이물범의 대표 서식지인 백령도 '물범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물범들. /경인일보 DB

2017-05-30 최재훈·김민재

[인터뷰… 공감]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50년 역사와 함께한 김세레나 수녀

응급실·수술을 앞둔 환자들그들의 두려움 위로하며'괜찮다' 다독여주는 게 간호의 시작환자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고마움 전해그럴 때 힘 닿는 데까지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여세레나 수녀는 '수술실 기도하는 수녀'로 불린다백발이 성성한 수녀와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 손으로 전해지는 훈훈한 온기가 온 몸에 은근하게 퍼졌다. 백발의 수녀는 성 빈센트 병원이 이 땅에 뿌리 내릴 때부터 함께 했다. 그 세월은 온통 환자를 간호하는 데 헌신했다. 아마도 그의 손이 따뜻했던 이유는 세월이 전해 준 '사랑' 때문이리라.올해는 성빈센트 병원이 문을 연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22일 수원 지동에 위치한 병원에서 김세레나(75·본명 김정선)수녀를 만났다. 백발의 수녀는 그 오래된 세월의 고락을 가장 잘 아는 이다. 세레나 수녀는 1963년 성빈센트 병원 설립을 구상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는 사회가 너무 열악했어요.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너나할 것 없이 가난에 허덕이던 때였으니까. 병자들은 넘쳐나는데, 의료시설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으니까 당시 수원교구에서는 작은 병원이라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당시는 한창 전후 복구가 이루어질 때였다. 수도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조차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을 만큼 모두가 헐벗은 시절이었다. 당시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주교는 독일 파다본에 있는 성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선교활동을 위해 선교지역을 물색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독일 수녀회를 설득했고, 병원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수녀 지원자 9명을 독일 모원으로 파견해 수녀로 양성했다. 그것이 성 빈센트 병원의 초석이 된 성빈센트 수녀원의 출발이었다.1965년 본격적인 병원 설립을 위해 아델하이드 수녀를 비롯해 3명의 수녀가 한국에 파견됐다. 세레나 수녀는 이 3명의 수녀과 함께 병원 설립을 도왔다. 그는 "원래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병원을 짓기 위해 온 독일 수녀들을 돕기 위해 간호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독일 수녀들은 매우 원칙대로 일하시는 분들이었는데, 병원 설립을 허가받으려고 당시 관계기관을 한달 동안 찾아가서 어렵게 병원을 세웠어요. 이 병원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원칙대로 세워진 병원 입니다"라며 웃었다.1967년 6월 3일 개원한 성 빈센트 병원은 가톨릭의과대학 제5부속병원으로 195병상을 갖춘,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병원이었다. 경기남부지역 최초의 대학병원이기에 전국 각지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빈자를 위해 설립된 만큼 성빈센트 병원은 1967년부터 20병상을 책임 무료병동으로 정해 '자선진료소'를 운영했다. "수원 전역이 허허벌판일 때지만 특히 연무동, 화서동 같은 곳은 극빈층들이 많았어요. 이 곳은 홍수라도 나면 곧장 폐허가 돼 천막을 치고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죠.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이 병원에 와서 진료를 받았고 이게 소문이 나 나중엔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어요. 알코올중독증, 페니실린 쇼크 환자들이 특히 많이 왔는데, 여기서 치료를 받고 나갈 땐 혹시 밥이라도 굶을까 싶어 식구가 몇인지, 어디 사는지 등 형편을 물어보고 독일에서 들여온 물품을 챙겨주곤 했죠. 밤에는 수녀들과 함께 아예 보따리를 싸고 나가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구호물품을 나누어 주었어요." 당시는 병원 앞에 아기를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병원이라고 소문이 나다보니 병원 앞에 수시로 아기들이 버려져 있었어요. 당시 원장 수녀가 이 아이들을 전부 거둬서 정성껏 돌봐주었어요. 가난해서 벌어진 일인데, 마음이 너무 아팠죠."세레나 수녀가 간호과장으로 일하던 1978년부터 1982년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매일같이 시위를 하고 거리에는 최루탄 연기가 난무하던 때였다. "서울 뿐만 아니라 수원에서도 거의 매일 대학생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어요. 아주대 대학생들이 시위하다 경찰이 던진 최루탄을 맞고 병원에 실려오는 일이 수두룩했죠. 경찰 몰래 병상에 다친 학생들을 눕혀 치료해주는 일도 많았어요. 노동운동도 한창일 때라 간호사들이 노동쟁의에 나서기도 했어요. 병원에 고립돼 시위를 이어가던 간호사들에게 당시 교학감을 맡고 있던 수녀가 무조건 먹고 마실것을 들여 보내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간호사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어요. 다행히 며칠 지나지 않아 병원과 간호사들 간 요구사항이 합의돼 시위도 끝이 났는데, 그때도 교학감 수녀는 돌아온 간호사들을 무조건 안아주라고 하셨어요. 그때 많이 배웠어요. 사랑으로 감싸안는 일을." 세레나 수녀의 세월은 병원의 역사이기도 하고 우리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온전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기도 하다. "1995년에 병실마다 흩어져 있는 암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같이 기도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기초간호를 시작했어요. 성빈센트 병원의 '호스피스' 진료의 시초라고 볼 수 있어요. 당시만 해도 호스피스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할때 였어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 하는 암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숱하게 봐왔어요. 특히 보호자들의 경우 환자 사후에 2차적 고통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호스피스는 수녀 뿐 아니라 의사, 간호사, 보호자, 환자 모두가 한 팀이 돼 환자가 삶의 의미를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돕는 거예요." 어쩌면 삶의 끝 자락일 지 모르는 순간, 주어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도록 돕는 일은 평생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수녀가 반드시 해야 했던 숙명이었을 것이다. "우리 병원이 호스피스 진료를 하는 건 마치 '신념'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꼭 해야만 하는 운명이죠."일흔을 훌쩍 넘어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 아직도 세레나 수녀는 응급실과 수술 대기실에서 환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크게 다쳐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온 아이들이 너무 놀라서 겁에 질려 있는 걸 보았어요. 아이를 안아주며 '괜찮다' 다독였어요. 이게 간호의 시작입니다.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의 두려움을 안아주는 것. 그 모습이 안타까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인데, 환자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꼭 고마움을 말합니다. 그럴 때 더 용기가 나고 힘 닿는 데까지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수술실 기도하는 수녀'라는 별명도 붙었다. 50년의 긴 세월을 이야기 하는 세레나 수녀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그 긴 세월을 거쳐 이제 빈센트 병원은 암 병원을 개원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올해는 성빈센트 성인 탄생 400주기이면서 빈자들을 위해 이 땅에 뿌리내린 우리 병원이 50년이 되는 참 뜻깊은 해입니다.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랑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잊지 마세요."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성빈센트 병원 주요 연혁-1965년 3월 성 빈센트 병원 기공식-1967년 6월 가톨릭대학교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1967년 11월 자선진료 개시-1999년 6월 신축된 본관(현 성 빈센트 병원)으로 이전 -2009년 1월 경기도 제1호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 지정-2012년 12월 '사랑으로 하나되는 세계 속의 성빈센트' 새 비전 선포-2015년 6월 암병원 건립 및 본관 증축 기공-2017년 1월 개원 50주년 슬로건 발표성빈센트 병원이 문을 연 지 50년 동안 환자들을 위해 평생 사랑을 실천한 백발의 김세레나 수녀가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1965년 3월 성빈센트병원 기공식1965년 척박한 의료의 불모지 수원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자비의 씨앗이 뿌려졌다.1967년 6월 가톨릭대학교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총 5만3천110.7㎡ 부지에 연건평 1만5천800㎡,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8개 임상과, 195병상의 현대식 병원으로 개원했다.2009년 경기도 제1호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 지정2008년 보건복지부 말기암환자 호스피스 지원 상위기관으로 선정된 것에 이어 수준 높은 완화의료서비스를 펼치는 기관으로 인정받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말기암 환자 전문의료기관'으로 지정됐다.2013년 12월 다빈치Si 로봇수술 도입수원지역 최초로 최신형 다빈치Si 로봇수술 시스템을 도입해 첨단의료를 향해 한발자국 더 나아갔다.2017년 암병원 개원2017년 개원하는 암병원을 통해 환우의 육체적, 정신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까지 돌보는 '빈센트 케어 시스템'을 실현하고, 실력 있는 지역병원, 안전하고 믿음을 주는 병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2017-05-23 공지영

[인터뷰… 공감]이은구 前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1990~1992·1996~1998)

인천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다. 1962년 인천 부평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인 '새나라자동차'가 들어섰다. 비록 일본 자동차를 반제품 상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이전까지 미군 군용차 폐품을 활용한 수공업 형태의 '재생자동차'뿐인 국내 자동차산업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은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다.1966년 '신진자동차'가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을 넘겨받아 자동차 생산을 재개했다. 이후 1976년 '새한자동차', 1983년 '대우자동차'로 바뀌면서 인천 자동차산업의 계보가 이어졌다. 대우그룹 부도사태 뒤인 2002년에는 미국기업인 제너럴모터스(GM)가 대우자동차를 인수했다. 지금의 '한국지엠'이다. 대우자동차 시절 두 차례의 노동조합 위원장(1990~1992년·1996~1998년)을 지낸 이은구(56) 씨는 올해 3월 한국지엠에서 희망퇴직했다.1986년 대우자동차 조립1부에 입사한 지 31년 만이다. 이은구 씨는 노조위원장으로서 회사 측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한편으론 대우자동차가 누린 영광의 시간과 좌절의 순간을 함께 겪었다. 한국지엠의 시대도 그 출발부터 경험했다. 최근 이은구 씨를 만나 대우자동차부터 한국지엠까지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보고 느낀 소회를 들었다. 인천 자동차산업 역사의 단면을 현장 노동자의 시각으로 살피자는 차원이다. 충남 아산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은구 씨는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인천으로 왔다. 아버지는 옛 북구 서운동(현 계양구)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고등학교 등록금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학교만 마치고 17세부터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했다. 일하면서 정비 기술을 배우고, 중장비 자격증도 땄다. 군 제대 이후인 1986년 5월 대우자동차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제조업에 몸담았다. "조립1부에서 시트, 헤드램프 같은 소모품을 조립하는 의장라인에 투입돼 '르망'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입사할 당시는 대우자동차가 GM과 지분을 나눠 갖는 합작회사였어요. 르망은 수출을 위해 GM이 개발하고, 대우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생산했습니다."당시 대우자동차는 합작 관계에 있는 GM과 '월드카(World Car) 전략'이라 불린 국제적으로 분업화된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월드카란 현지 조건에 맞게 설립한 여러 나라의 공장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생산한 똑같은 차였다. 르망은 GM이 개발한 소형차 '카데트'의 국내 판매명이었다. 대우자동차는 르망을 계기로 1987년 3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했고, 내수 중심에서 벗어나 대량 수출을 이뤄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에스페로', '티코', '다마스' 같은 새로운 차량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1992년 대우자동차는 GM이 가진 지분을 모두 인수해 합작관계를 청산하며 홀로서기에 나섰다. 대우자동차는 승승장구하며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회사 내부적으로는 처우문제를 둘러싼 노사갈등이 심했다. 이은구 씨는 1987년 대우차 부평공장 파업 과정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진압을 피해 부평공장 본관 2층에서 추락해 팔다리 여러 군데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1년 동안 투병한 끝에야 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그땐 대기업이라고 해도 중소기업과 임금격차가 크지 않았고, 노동여건도 나빴다"며 "대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던 시기였다"고 했다. 이은구 씨는 1990년 11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제11대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에 선출됐다. 집행부나 대의원을 거치지 않고 평조합원에서 위원장이 된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 "열심히 싸우고 투병 생활하면서 현장에서 굳건하게 일했던 모습이 지지를 받은 것 같습니다. 대우차가 에스페로도 개발하고, 막 뻗어 나가기 시작할 시기라 노사관계가 중요했어요.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임금인상, 경제민주화, 노동자 연대 같은 이슈가 사회적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저도 1991년 2월 대우조선 파업 때 지지성명을 해서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1년 6개월 동안 광주교도소에 갇히고, 해직까지 된 이은구 씨는 계속된 노조의 투쟁으로 복직했다.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조선에서 2년간 근무하고 대우자동차에 돌아오는 게 조건이었다. 그가 대우차 부평공장에 복귀한 것은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내건 '세계경영'이 한창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던 1995년 5월께다. 이은구 씨는 이듬해 11월 제15대 대우차 노조위원장에 또다시 선출됐다. 이 시기 대우자동차는 '라노스'(1996년 출시), '누비라'(1997년 출시), '레간자'(1997년 출시) 등 자동차산업 역사상 유례없이 3개 차량 모델을 한꺼번에 개발하며 확장세를 이어갔다.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이 성공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때이고, 워낙 회사가 잘 나가서 노사관계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임금도 많이 올랐고요. 김우중 회장이 노조 이야기를 많이 들어줬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다른 재벌 총수들과는 달리 노조와 직접 소통했고, 인간적으로도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우조선에 잠깐 근무할 때도 일부러 찾아와 안부도 물었고…."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와 나눈 대담을 엮은 책인 '김우중과의 대화'(2014년 출간)에서 "순번을 정해 직원들 집에서 아침을 먹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들이 '우리 회장님 만났더니 보통 재벌 회장과 다르다'고 얘기하고 다녀요. 그러니까 직원들 생각이 바뀌었죠"라고 했다. 노조 지도자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도 언급했다. 김우중 회장은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채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하지만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그해 11월 한국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이른바 'IMF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력을 잃어갔다. "당시 대우차 노조위원장이면서 대우그룹 노조협의회 의장이었습니다. 대우그룹 16개 계열사 노조를 다 불러서 고통분담을 하기로 한 뒤 임금동결과 후생복지 반납을 먼저 제안하고 정리해고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임기가 끝난 이후인 1999년 결국 대우는 워크아웃(Workout)에 들어갔습니다. 1천800여 명 규모의 정리해고가 이어졌고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GM은 1992년 대우자동차에서 손을 뗀 지 10년 만인 2002년 대우자동차를 전격 인수하면서 국내시장으로 돌아왔다. 이은구 씨는 2006년 현장직을 그만두고, 한국지엠(당시 지엠대우)과 임직원이 함께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인 '한국지엠한마음재단'의 사무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경야독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NGO학 석사를 취득한 뒤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무직으로 옮겼다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국지엠한마음재단으로) 갔다"고 했다. 이은구 씨는 한국지엠한마음재단에서 지역 취약계층을 도우면서 대기업과 지역사회의 상생방안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에 터를 잡은 한국지엠에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김우중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지내서인지 인천경영자총협회나 인천상공회의소 같은 지역 경제단체와도 활발하게 소통했습니다. 대우그룹 본사를 송도유원지로 이전한다는 계획도 있었고요. 한국지엠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부분이 많지만, 대우차 때에 비하면 소통도 적고 조금은 아쉽습니다. 그래서인지 현재 인천시민들도 한국지엠에 대한 애정이 과거만 못한 것 같아요. 인천공장이나 군산공장 생산이 자꾸 줄어드니까 '철수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지엠은 철수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노조를 비롯한 직원들과 시민들에게 투자계획을 명확하게 밝히고, 상생방안을 구축하면서 앞으로도 한국지엠이 인천 대표기업이자 모범적인 기업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이은구 씨는 "당분간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려 한다"며 "어떠한 형태로든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을 말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은구 전 위원장은?▲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1986년 대우자동차 입사(조립1부)▲ 1990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제11대 위원장▲ 1996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제15대 위원장▲ 1998년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제2대 본부장▲ 2017년 3월 한국지엠 입사 31년 만에 희망퇴직▲ 전 인천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 측 위원▲ 현 인천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이사▲ 현 (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이은구 전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이 1986년부터 올해 3월까지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에서 근무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부평공장 서문 앞에서 인천 자동차산업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이은구 전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

2017-05-16 박경호

[인터뷰… 공감]감독·코치·선수 '트리플 챔프'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

초교 4학년때 감독 권유로 입문… 가세 기울자 '농구로 성공' 결심무릎 부상으로 방황 트레이드 거치면서 마음 다잡아 '가족이 큰 힘'팀 맡고 싸늘한 시선에 적응 쉽지 않았는데 선수들이 잘 따라와줘솔선수범 주장 양희종 고마워… 선수시절 우승보다 지금이 더 행복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은 지난 2002~2003시즌 원주 삼보(현 동부) 선수로 첫 우승을 차지했고 2007~2008시즌에는 코치로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지난 2일 감독으로 2번째 시즌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린 첫번째 농구인이 됐다.서울잠실체육관에서 진행된 챔피언결정전 6차전 경기가 끝나는 순간 김 감독은 선수들을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 화제가 됐다. 감독 2년차에 우승이라는 성과를 이뤄낸 김 감독을 7일 안양실내체육관에 위치한 인삼공사농구단 사무국에서 만나봤다. ■ 어려운 가족 위해 힘이 되고 싶었던 청소년 김승기농구팬이라면 김승기 감독을 떠올릴때 터보가드라는 애칭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코치와 감독으로서의 김 감독은 묵묵히 선수들을 지켜보는 듬직한 모습일 것이다.그런 김 감독의 농구와의 첫 인연은 우연이라고 말해야 하는게 맞는 거 같다.김 감독은 "농구를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때다. 키가 커서 조회때 뒤쪽에 서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이름을 적어가서 농구부로 부르셔서 농구를 하게 됐다. 그때는 농구가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고 회상했다.이어 김 감독은 "사실 나는 당시 복싱이나 마라톤 선수가 멋 있어 보여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농구부로 불러서 선생님의 설득으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며 "농구를 하다 보니까 관두고 싶어도 관둘 수 없는 상황이 됐다. 6학년때는 소년체전에서도 우승했고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딱 한번 질 정도로 잘했었다"고 전했다. 서서히 농구에 대한 재미를 알기 시작할 무렵이던 중학교 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운 집안을 보며 김 감독은 눈물을 흘리며 농구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김 감독은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셔서 2층 주택에 살던 가족들이 지하로 이사가는 상황이 발생했다"며 "당시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지만 가족들이 힘들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농구로 성공해 꼭 집을 사드리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그는 "정말 중·고교때는 죽기살기로 농구를 했던거 같다. 용산고에 입학해서는 1학년때부터 경기에 출전했는데, 형들보다 농구를 잘하지 못하면 경기를 못 뛴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농구를 했다"며 "1학년이 선발로 뛰다 보니 2학년과 3학년 학부모들의 시기도 받았지만 농구장에 오셔서 제가 뛰는 모습을 보시며 행복해 하는 부모님의 모습만 떠올리며 농구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김 감독은 "그때에는 제 방을 갖는게 소원이었다. 중앙대에 입학해서 정말 열심히 농구를 해서 대학교 3학년때 부모님께 집을 사드렸다"고 덧붙였다.■ 이기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던 허재와 강동희김 감독은 "제가 중앙대를 나와서 허재 선배와 강동희 선배를 롤모델로 생각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며 "선수 생활을 하며 두 선배를 상대로 경기를 해 봤지만 정말 수비하기 힘든 선수였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농구실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분들이다. 한국 농구사에 이렇게 잘했던 분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공격으로는 허재 선배 같은 스타일을 따라가고 싶었고, 가드로서는 강동희 선배 스타일을 배우고 싶었다"고 덧붙였다.그는 "그분들을 롤모델로 생각했고 선배들을 이겨 보겠다는 각오로 선배들의 플레이를 연구해서 배웠다. 경쟁할 수 없는 분들이지만 그 분들을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선수시절에 발전할 수 있었던 거 같다"고 설명했다.김 감독은 "저랑 그분들과 나이 차가 있다 보니 제가 실업과 프로에서 두분을 만났을때 한번 해볼만 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며 "제 선수로서 농구 인생은 두 선배들이 있기에 긴장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던거 같다"고 전했다.■ 첫번째 위기 부상, 그리고 방황김 감독은 "삼성에 입단한 후 상무에 다녀왔다. 1997년 다시 삼성에 복귀했는데, 국가대표로 발탁돼 FIBA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며 "하지만 당시 무릎이 좋지 않았는데 치료를 받지 않고 출전하다보니 너무 나빠졌다. 정말 화려한 선수 생활이 시작되는 듯 했는데 거기까지였다"고 돌아봤다. 그는 "이후 정말 방황을 많이 했다. 당시 아내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화려하게 결혼도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운동이 안되다 보니 술도 많이 먹고, 집에도 잘 안들어가고. 마음 고생을 정말 많이 시켰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그때 완전히 모든게 망가졌다. 생각했던게 100이면 1도 안됐다. 아무것도 안됐다"며 "지금의 아내와도 결혼하는게 맞는지 고민 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방황하는 동안(1998년) 김 감독은 삼성에서 원주 나래로 트레이드 됐다. 또 2003년에는 삼보에서 울산 모비스로 트레이드 됐고 2005년 원주 삼보로 트레이드됐다. 나래와 삼보는 원주 동부의 전신이다.김 감독은 "나래와 모비스, 삼보를 거치면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장 큰 힘이 되어 준건 아내와 아이들이 이었기에 힘든 시기를 이겨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 인삼공사김 감독은 "사실 인삼공사에서의 지도자 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던거 같다"며 "제가 인삼공사와 인연을 맺은 건 전창진 감독님이 불러서인데 감독님이 좋지 않은 일로 팀을 떠나셨고 그런 상황에서 팀을 이끄는게 맞는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말했다.이어 김 감독은 "하지만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팀을 맡은 부분에 대해 모든 분들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들이 힘들었다"며 "코치 생활은 오래 했지만 감독은 해보지 않았기에 적응하기가 싶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상황인데 선수들이 잘 따라와줘서 지금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거 같다"고 덧붙였다.그는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이런 제 농구인생의 순간순간이 머리 속에 지나가더라. 그래서 눈물이 났던 거 같다"고 우승이 확정되던 순간을 회상했다.칭찬해 주고 싶은 선수를 묻자 주장 양희종을 꼽았다. 김 감독은 "오세근, 이정현, 데이비드 사이먼, 키퍼 사익스 등 모든 선수들이 고맙고 열심히 해줬다. 하지만 항상 팀을 위해 희생하고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양희종이 있어서 선수단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거 같다"며 "이 멤버로 다음 시즌을 맞고 계속 손발을 맞춰간다면 더 좋은 성적도 가능하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김 감독은 "선수 시절 우승을 해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1997년부터 20여년 생활을 돌아보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거 같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노력하겠다"며 "이 순간이 올 수 있도록 옆에서 든든히 믿고 기다려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KBL 제공■김승기 감독은?▲ 1972년생▲ 용산고, 중앙대-경력▲ 1994~1999 삼성전자▲ 1998~2003 원주 나래·삼보▲ 2003~2005 울산 모비스▲ 2005~2006 원주 동부▲ 2006~2009 원주 동부 코치▲ 2009~2015 부산 KT 코치▲ 2015~현재 인삼공사 코치, 감독대행, 감독-수상▲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은메달▲ 1997 농구대잔치 베스트 5 FIBA 아시아선수권 우승 ▲ 2002 애니콜 프로농구 수비 5걸 애니콜 프로농구 우수수비상▲ 2017 2016~2017 KCC 프로농구 감독상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이 2016~2017 KCC 프로농구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통합우승을 차지하며 KBL에서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컵을 들어올린 첫 농구인으로 기록됐다. 사진은 지난 9일 안양실내체육관 내 구단사무실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지난 2일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안양 KGC 선수들이 김승기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2017-05-10 김종화

[인터뷰… 공감]하윤수 제36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하윤수(54)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 있는 교총'을 강조한다. 그는 지난해 '가르칠 맛 나는 학교, 선생님이 행복해지는 파워 교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36대 교총 회장에 당선됐다. 교권 회복과 함께 국내 최대 교원 단체인 교총의 대외적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하윤수 회장은 지난달 26일 경인일보 인천본사에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반 정치꾼'이라고 농담처럼 소개했다. 실제 그는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교원지위법)상 교권 보호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국회에서 여·야 의원을 가리지 않고 만나 설득했다.하 회장은 말에 막힘이 없었고, 답변은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빠른 의사 결정과 추진력으로 '불도저'란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교육에는 답이 없다"면서도 "교사가 웃어야 아이도 따라 웃는다. 교사가 신바람 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36대 한국교총은 '교권 강화'를 지향한다. 교총 회장 취임 후 어떤 일들을 하셨나.교권 침해에 대한 가중 처벌 도입이다. 지난해 6월 취임하고 '제1호 결재'를 한 것이 '교원지위법 개정 추진'이었다. 교육의 질은 교원의 질을 넘을 수 없다. 교육자가 올바른 교육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우리 뜻에 국회도 공감했다. 국회에서 지난해 11월과 지난 2월 개정안이 발의됐다. 교육 활동 침해 행위가 위법하다고 판단되고 피해 교원이 요청할 경우 교육감이 수사기관에 고발하게 하는 것, 교육 활동 침해 학생의 보호자가 특별 교육 등을 이수하지 않을 경우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 등이 골자다. 또 전국 1천600여 학교에서 '1학교 1고문변호사 제도'를 도입했고, 매년 교권 침해 사례를 종합·정리해 발표하면서 정부에 대책 마련을 주문하고 있다. ■ 교총의 활동으로 학교 현장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교육 활동 침해에 대한 선생님들의 대응 자세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참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교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관련 절차와 지식에 대한 공부도 많이들 하고 계시고, 잘 알고 있다. 교육 활동에 자신감이 매우 높아졌다.교총에 가입하면 법률적 보호를 전문적으로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든든함에 자신 있게 학생을 대하고 수업에 임하는 경우가 큰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교총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심급별로 최대 500만원, 3심까지 최대 1천5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한국교총은 교육감 직선제 폐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교육감 직선제를 없애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지난 2월 이청연 인천시교육감이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징역 8년과 함께 법정 구속된 일이 단적인 예다. 교육감 직선제 도입 후 10년 동안 그 폐해가 엄청나다. 부정과 비리는 한두 건이 아니다. 제1기 민선교육감 16명 중 9명이 부정 선거와 비리 등으로 기소되거나 중도 하차했다. 선거 때마다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도 큰 문제다. 당선 후 선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각종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교육감 직선제는 헌법이 정한 교육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후보자도 모르는 일명 '깜깜이 선거'라는 오명을 얻었다. 2010년 출마한 16명 중 13명이 50% 미만을 득표했고, 심지어 20% 미만으로 뽑힌 경우도 있었다. 또 교육 전문성과 교육 공약 등 교육적 논리보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에 좌우되면서 특정 정치 세력과 시민 사회 세력의 선거 개입과 진출을 가속화시켰다. 이 같은 문제는 단순히 교육감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기 힘들다. 제도가 더 문제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제는 직선제를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 한국교총은 수능 절대평가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왜 필요한가.정부가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사교육비는 줄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대학 입사와 내신 경쟁에 있다. 대학 입시 제도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 2015년 개정 교육 과정에 의거 출제 과목은 공통 과목으로 한정하고, 평가 방식을 절대 평가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현행 9등급제의 상대 평가는 소수점 하나로 인해 등급이 결정되다 보니 학교 공부 외에도 과도한 사교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학 입시의 변화 없이 공교육 정상화, 사교육비 해소는 어렵다. 대입 제도 예고 3년제로 인해 당장 바꾸기는 힘들지만, 오는 7월에 정부가 개선 방안을 내놓는 '2021학년도 수능' 때부터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교육 혁신'의 방향과 세부 실행 계획은 무엇이라고 보는가.기본적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 학령기 인구 절벽 등 사회 구조 변화에 대비하는 교육 혁신이 돼야 한다.이를 위해 고등학교를 진학 교육과 직업 교육의 복선형(複線型) 체제로 개편하고, 진학과 직업 고교에 대한 맞춤형 교육 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임금차별금지법' 등을 제정해 고졸 임금 차별을 없애야 한다. 학벌 위주 사회는 능력 중심으로 전환하고, 대학 진학에서 상대적 우위를 위한 경쟁도 해소해야 한다.정책의 일관성, 안정성이 중요하다. 범정부적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고, 교육부의 역할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한다. 또, 중앙과 시·도교육청, 학교 간의 유기적인 협력과 연계가 더욱더 중요해지는 만큼 도입된 지 10년 동안 숱한 중앙부처와의 갈등을 유발하고, 부정과 비리 등 폐해만 드러난 교육감직선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교육 현장의 변화를 위해서는 교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다. 교원들의 사기 제고와 협력 도모 등을 위해 교권 침해 예방 대책을 대폭 강화하고, 차등 성과급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하윤수 회장은?▲ 1962년 경남 남해 출생▲ 1981년 남해제일고졸▲ 1986년 경성대 법학과졸▲ 1988년 동아대 대학원 법학과졸▲ 1994년 동아대 법학박사 ▲ 2004~2007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부회장▲ 2007~2008년 국공립대학교교수연합회 공동대표▲ 2007~2010년 부산지검 범죄예방봉사위원▲ 2008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분과 자문위원▲ 2009~2010년 부산교대 기획처장 겸 산학협력단장▲ 2010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현)▲ 2011~2015년 교육부 규제완화위원회 위원▲ 2013년 제6대 부산교육대학교 총장(현)▲ 2013년 한국사학진흥재단 비상임이사▲ 2013년 부산과학기술협의회 이사(현)▲ 2013년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 상임위원(현)▲ 2016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학윤리위원회 위원(현)▲ 2016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현) ▲ 2016년 전국교원양성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현) ▲ 2016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현) ▲ 2016년 제6차 ASEM 교육장관회의 자문위원(현)▲ 2016년 초등교원 양성대학교 발전위원회 위원장(현)▲ 2016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족대표하윤수 한국교총 회장의 조부와 부친은 항일 독립 운동가 출신이다. 집이 가난해 6남3녀 중 6째인 하 회장만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절대 정의롭게 살고, 가난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고 했다. 하 회장이 회장에 취임한 뒤 교총은 국정교과서에 대해 "친일·독재 미화, 건국절 제정 등 교육 현장의 여론과 배치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경우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기존의 조건부 찬성 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2017-05-02 김명래

[인터뷰… 공감]대선 레이스 '고배'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다짐

지지율 1%만 보면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끼겠나정치는 변화하는 과정 견제 선택한 국민 놀라워다당 시대 '협치' 과제… 선거구 개편·개헌 필요정치 접을 수 있다 생각하고도 고민끝에 탈당독일 우파 개혁 택한 좌파 슈뢰더의 희생처럼국가미래 위해 개인이익 포기 옳은 선택 확신경기도 새정치·경제 실험은 시대적 흐름 '자부'연정만 봐도 한국의 기준, 나라 이끈다고 생각4차 산업혁명에 日 대형서점 츠타야 접목 검토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대선 경선과정서 남 지사가 소개한 책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 中에서남경필 경기도지사는 늘 앞으로 걸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리 다섯 번을 이기고, 모두가 진다고 했던 2014년 도지사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앞으로 향하며 미래를 가리켰다. "저곳으로 가야만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외침은 경기도에서 미래 정치·경제·사회모델인 연정과 공유경제, 따복공동체를 낳았다. '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흔들리자 망설임 없이 당을 나와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내걸고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대선을 향해 나아갔다.앞으로만 걷던 그가 넘어진 채 멈춰섰다. 지지율은 1%에 머물렀고 '안방'인 경기도에서도 상대 후보에게 졌다. 도청으로 돌아온 후에도 '레임덕' 위기라는 지적에 직면했다. 그가 새롭게 깃발을 꽂은 바른정당 역시 자당 대선 후보의 사퇴를 논의할 만큼 녹록지 않다.도지사 임기가 끝나는 1년 반 뒤, 앞으로만 향하던 그의 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아쉽지만 국민은 놀라웠다"뭐, 제 한계니까."지난 20일 아침 경기도청 집무실에서 만난 남 지사는 이러한 상황에 '쿨하게' 답했다. "기본적으로 제가 부족해서 그렇고 바른정당이 처한 스탠스나 상황이 이번 대선에서 평가받기는 어려운 구조적 문제도 있었다고 봐요. 토론을 통해 나타난 실력이나 진정성,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아쉽죠."준비된 원고도 한쪽으로 치워둔 채 남 지사는 덤덤하게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대선 레이스에서 탈락한 후 가진 첫 인터뷰다. "국민들이 '도지사 열심히 해라'라고 하신 것 아니겠나"라고 운을 뗀 남 지사는 "대선 주자로서 아무래도 100% 도정에 전념하는 건 어려웠을 수 있다. 120% 도정에 전념하면서 도민께 죄송함을 갚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지지율 1%'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다. 불과 2주 전 경기도 4곳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선 바른정당이 1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보궐선거 유권자 상당수는 오히려 남 지사가 '청산의 대상'이라고 비판한 자유한국당을 선택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라는 질문에 남 지사는 "'요 대목'만 보면 국민의 선택이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저는 어느 후보와 1대1로 붙어도 훨씬 나은 미래 비전과 철학을 얘기할 수 있다. 경기도에서도 놀라운 혁신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지지율이 1%라니,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끼겠나"라고 토로했다."그러나 정치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남 지사는 말했다. 그는 "단면만 잘라놓고 보면 불합리해보일 수 있지만 전체를 보면 다르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하는 게 바른정당과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지난해 총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이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통이 있었다. 국민들은 민주당에 다수의석을 주면서도 누구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게 제3당을 만들었다. 만약 새누리당이 그렇게 안됐으면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는 구도도 안만들어졌을 것"이라며 "지금도 문재인이라는 상수와 이를 견제하기 위한 대안을 자꾸 갖다 붙인다. 국민들은 이렇게 계속 견제하는 선택을 한다. 이게 '불합리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국민의 선택은 놀라웠다"고 풀이했다.'불합리한' 국민의 선택 속 새로운 대통령도 갈림길에 놓일 것이라는 게 남 지사의 전망이다.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나눔'이다. 남 지사가 줄곧 가리켰던 '미래'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권력은 손잡이가 없는 칼 같은 거다. 임기 초에는 엄청 잘 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이 그 칼에 베인다"며 권력을 칼에 비유한 남 지사는 "서로 다른 세력과 손을 잡고 함께 갈지, '마이웨이'할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후자의 경우 국민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며 "150석(과반 의석을 차지한 1당 구도)을 넘어 180석(여러 정당 간 협치 구도)의 합의가 없으면 어려운 구도를 만든 것은 협치·연정을 하라는 과제로 이어졌다. 더 안정적으로 하려면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바른정당의 내홍도 동일하게 진단했다. '국민의 눈'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유승민 후보의 사퇴 주장이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관련, 그는 "정답이 어디 있겠나"라면서도 "과연 대한민국을 위한 결정을 한 것인가, 아니면 다음에 한번 더 당선되는데 이익이 될지를 보고 결정한 것인가. 국민들은 안다"고 말했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넘어지고 멈춰섰지만, 그에겐 오히려 '우리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남 지사는 "탈당할 때 '이걸로 정치를 접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2년 전 경기도를 찾기도 했던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에선 좌파인 슈뢰더 전 총리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우파 개혁을 하면서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정권도 뺏겼다. 그럼에도 자기는 만족한다고 했다. 이후 독일은 전성기를 이뤘다. 메르켈의 전성기는 슈뢰더의 자기 희생 덕분이라는 말이 나온다"며 "남경필이란 정치인도 20년 동안 국민들이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대한민국 정치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탈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걸어왔던 남경필의 길이, 곧 '국가의 미래를 위해 개인과 정당의 이익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슈뢰더의 길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얘기다.그러면서 "대선 과정에서 탈락은 했지만 도민들께 자랑하고 싶은 건 경기도에서 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와 경제 실험들이 앞으로 누가 집권하든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정만 봐도 경기도가 곧 대한민국의 스탠더드"라고 말한 남 지사는 "경기도의 것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고 '일자리 넘치는 안전하고 따뜻한 경기도' 만들기에 전념할 거다. 도정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투지가 불타오른다"며 웃었다. 대선 과정에서 제시했던 공약들 역시 경기도에서 최대한 시도해보겠다고 공언했다. 남 지사는 "모병제는 어렵고 수도 이전도 당장은 힘들 수 있지만, 제가 주장했던 것 중 의지만 있으면 경기도에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할 수 있는 일들을 최대한 찾아 실제로 할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대선 경선 과정에서 남 지사는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을 읽고 있다며 책의 한 구절을 소개했었다. "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겐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요새 읽고 있는 책을 묻자 일본의 대형서점 '츠타야'를 기획해 성공시킨 마스다 무네야키의 저서 '지적자본론'을 언급했다. "츠타야라는 기업이 어마어마한 혁신의 아이콘이거든요. 4차 산업혁명에는 새로운 기술이 없어요. 기존의 것을 융합하는 게 핵심인데 우리 경기도에도 이런 '츠타야' 모델을 접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그는 '경기도'에서부터 일어나 다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려 하고 있다. 그래서 경기도의 내일을 구상하며 또 한번 미래를 가리킨다. 비록 과녁을 빗맞혔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기에.글/강기정·신지영기자 kanggj@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남경필 도지사는? ▲ 1965년 1월 20일 용인 출생▲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경인일보 사회부·정치부 기자▲ 제15~19대 국회의원 (5선)▲ 한나라당 최고위원▲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 제34대 경기도지사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선 도전 당시 밝혔던 공약들을 경기도에서 실천 가능한 것부터 이행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2017-04-25 강기정·신지영

[인터뷰… 공감]제종길 안산시장

아이 잃은 부모·이웃 잃은 시민,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 서로 보듬어야유가족과 분노하고 싸워나가고 싶었지만 '장기적으로 도움되는 일' 고민모든 행정서비스 물밑 지원… 정부, 특별법 명시된 경제활성화등 힘써야맹골수도에 잠들어있던 세월호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3년 동안 어두운 바다 밑에서 거친 조류를 고스란히 받아낸 선체는 상처투성이였다. 3년을 하루 같이 기다렸던 안산 역시 세월호처럼 상처투성이가 됐다. 세월호 현수막 철거, 추모시설 조성, 단원고 기억 교실 이전 등을 둘러싼 민·민 갈등은 증폭됐고 안산은 또 한 번 갈기갈기 찢어졌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경인일보와 만난 제종길(62) 안산시장은 상처와 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없는, 그래서 딱 가운데에서 양쪽을 바라봐야 하는 그의 가슴은 양쪽 모두의 아픔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아픔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서로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생각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쉽지 않아요.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이웃을 잃은 시민들은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서로에게 남아 있는 상흔을 서로 보살피고 보듬어야 합니다."안산은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가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이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살고 있던 도시로, 당시 2학년 학생 246명과 교사 10명이 숨졌고 현재 6명(학생 4명, 교사 2명)이 실종된 상태다. 희생 학생들이 가장 많이 살던 와동, 고잔동 일대는 충격으로 지역 공동체마저 무너졌다. 전년도에 고교 평준화가 처음 시행되면서 이 지역 학생들이 대부분 단원고로 입학한 것이 희생자가 집중되는 원인이 됐다. 한집 건너 한집에서 피해를 보면서 이웃들은 크게 웃지도, 화사한 옷을 입지도 않게 됐다. 지난 1986년 시로 승격한 이후 안산은 수도권 최대의 국가산업단지인 안산스마트허브를 중심으로 일자리가 넘치는 공업 도시였다. 하지만 슬픔은 빠르게 전염됐다. 세월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민들은 참사 후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빠졌다. 제 시장은 "세월호 참사로 국민들이 받은 충격과 슬픔, 그리고 미안함은 안산시민에게는 더욱 특별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성인으로서 세월호에서 끔찍하게 희생된 우리 단원고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그 감정은 안산을 상징하던 활력을 앗아갔다"며 "지역 경제도 많이 위축돼 안 그래도 힘들어하던 소상공인들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참사 당시 시장으로 출마를 준비했던 제 시장도 곧장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향했다. 제 시장은 "30년 넘게 거주한 안산인으로서 또 안산시장직에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충격과 슬픔, 그리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무력감과 미안함에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며 "시장 후보로서 계획했던 많은 일을 변경해 안전이 최우선으로 존중받는 생명도시, 사람의 가치가 회복되는 사람중심의 도시라는 목표를 세우게 됐다"고 당시 소회를 밝혔다. 이후 제 시장은 안산과 진도를 오가며 힘든 선거 운동을 했다. 안산에 있을 때는 하루의 첫 시작을 합동분향소에서 했고 지금도 매주 분향소를 방문하고 있다.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 등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은 온도 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가 안산에 남긴 상처를 잊지 않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과 침체한 지역 경제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사용했던 기억 교실 이전을 요구하는 신입생 학부모들과 유가족들도 마찰음을 빚었다. 집값 하락 등을 우려한 일부 시민들이 세월호 추모 시설 조성을 꺼리는 등 세월호를 둘러싼 반목과 갈등은 증폭돼 갔다.시민들의 아픔과 갈등을 봉합해야 하는 제 시장의 책임감은 커졌고 어깨도 무거워졌다. 유가족들과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인지 뒤에서 유가족들을 지원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일부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최대 피해 지역인 안산시장의 무용론마저 제기하기도 했다. 제 시장은 "유가족들과 분노하고 싸워나가고 싶었지만, 안산시장으로서 시정 운영과 장기적으로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히 유가족들을 지원해 왔고 통장, 동장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행정 서비스를 가동해 물밑에서 함께했다"고 말했다.충격으로 흩어진 공동체와 공감대를 회복하는 것도 숙제였다. 공동체 회복은 단기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차근차근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우선 공무원들과 시민들의 힘을 모아 '희망마을사업추진단'을 구성해 세월호 참사로 인한 집중 피해 지역의 공동체 회복에 나섰다. 마을별로 주민들이 묶일 수 있도록 특화된 테마사업을 선정했다. 추모 사업 추진위원회도 구성해 추모시설 조성 등을 둘러싼 민·민 갈등을 최소화하고 체계적이고 민주적인 추모 사업을 추진하도록 맡겼다.피해 가정을 보살피고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등 참사 현장에서 가족들의 곁을 지켜주는 일도 중요했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피해 가족 지원과 수습 활동을 위해 '행정 지원 돌보미' 제도를 도입했고, 참사 수습을 위한 전담기구인 '세월호사고수습지원단' 출범 등을 추진했다. '행정 지원 돌보미'는 공무원과 통장 등 3명이 1개 조를 이뤄 피해 가정을 1대 1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1천여 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동참했다. 유가족 대책 위원회를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피해 가족의 생활 안정을 위한 사업도 추진해 유가족의 일상생활 복귀도 도왔다. 3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세월호 선체가 3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안산은 새로운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 특별법)에 담긴 추모 사업, 공동체 회복, 피해 지역 경제 활성화 등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 지역을 위한 큰 과제들이 남아 있다. 제 시장은 "이 과정에서 공동체 붕괴라는 또 다른 참사를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 또한 제 임무"라며 "공동체가 회복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한 단계 성장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고의 수습뿐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 지역의 지원을 통한 회복 등 국가 차원의 책임과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정부는 세월호 특별법에 명시된 지역 경제 활성화, 국립트라우마센터 및 복합시설 건립, 추모시설 조성 사업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사업들을 처음과 같은 의지로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이런 과제를 해결하며 제 시장이 실현하려는 안산의 모습은 '생명도시'다. 그가 '생명'을 강조하는 이유는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원인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사람과 생명의 가치 상실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제 시장은 "세월호 참사는 한국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제가 응축된 모두의 아픔"이라며 "안산시가 세월호 참사를 극복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그간의 적폐를 없애고 새 나라로 거듭나는 출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김환기·조윤영기자 jyy@kyeongin.com ■제종길 안산시장은?1955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건국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해 서울대학교 대학원 해양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을 거쳐 17대 안산 단원을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도시와 자연연구소 소장, 한국생태관광협회 공동대표, 한국수중과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14년 7월 민선 6기 안산시장으로 취임했다.제종길 안산시장은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이웃을 잃은 시민들이 서로에게 남아 있는 상흔을 보살피고 보듬어야 합니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안산시 제공

2017-04-18 김환기·조윤영

[인터뷰… 공감]미하엘 그룬트 한국머크 대표이사

경기도 판교에 센터 개소후 공항·항만과 가까운 송도로 확장·이전한국 바이오 성장 잠재력은 '스피드' 특유의 속도전으로 우위 가능선행기간 필요한 제약사 대신 위탁생산·바이오시밀러 개발 등 '전략' 현명인허가 절차 간소화·규제 완화 절실… 속도 붙으면 바이오 허브로 발돋움독일 과학기술기업 머크는 1668년 설립됐다. 프레드릭 야곱 머크가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의 '천사약국(Engel pharmacy)'을 인수한 것이 기업의 시초가 됐다. 조선 현종 9년, 무신년(戊申年) 때로,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출판하며 유럽에 조선을 최초로 알린 해에 기업의 역사가 시작됐다. 머크는 과학을 기술로 전환해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내년(2018년)이면 창립 350주년을 맞는 머크는 혁신(innovation)을 멈추지 않고 성장했다. 66개국에서 임직원 4만여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의 위상을 갖췄다. 미하엘 그룬트(Michael Grund) 한국 머크 대표이사에게 혁신의 비결을 물었다. 그는 머크 본사 프로세스 개발 랩 매니저, 엔지니어링&기술 개발 디렉터, 기능성소재비즈니스(PM-Advanced Technologies Development) 부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혁신의 중심에 있었다.그룬트 대표이사가 밝힌 머크의 성장 비결은 20~30년 단위로 기업을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머크는 지난 2006년에도 큰 변화를 시작했다. 핵심 사업 분야 관련 기업은 인수했고, 연관성이 떨어지는 분야는 과감하게 정리했다. 생명과학 산업에서 선두를 다투던 미국기업인 밀리포아와 시그마알드리치를 각각 2010년과 2015년에 인수했고, 제네릭(복제약)과 전자 사업 부분은 통합 등을 통해 정리했다."혁신의 적(enemy)은 사업이 잘되는 것입니다. 경영 환경이 좋을 때 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머크도 2006년 혁신의 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럴만한 재무적인 이유가 없었습니다. 전략적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그룬트 대표에게 혁신을 시작할 '타이밍'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묻자 "자신의 능력과 판단력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리면 틀리거나 늦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와 함께 미래에는 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산업 간 결합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다른 비즈니스 사이에서 유망 비즈니스가 탄생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의료(medicine)와 전자기술(electronics)이 결합해 메디트로닉스(meditronics)가 탄생할 수 있다는 거죠. 10년 전만 해도 (머크의 사업 가운데) LCD(액정 표시 장치)가 호황을 이루다 보니 LCD에 집중하고 의약 분야를 매각하라는 조언이 있었고, LCD가 사양길에 들어간 뒤에는 LCD를 매각하고 의약 분야를 키우라고 했는데 이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머크는 바이오 의약 분야와 관련해 대(對)한국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머크의 한국 내 바이오 투자 대상지는 인천 송도국제도시다. 그룬트 대표이사는 송도를 바이오 '핫스팟(hot spot)'이라고 표현했다.머크는 지난해 10월 송도국제도시 IT센터에 국내 바이오제약기업을 대상으로 전문기술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M.Lab 협업센터(Collaboration Center)'를 개장했다. 그룬트 대표이사는 "센터에는 앞으로 6개월 동안의 예약이 모두 다 찬 상태로, 송도에 있는 바이오 대기업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바이오 기업에서도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한국머크는 지난해 11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상호발전 및 지원을 위한 투자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머크는 송도 내 투자를 확대해 부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연구·물류서비스·제조와 관련된 시설을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4년 전 (경기도) 판교에 센터를 개소한 뒤 성장하는 것을 보고 센터가 송도에 들어서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센터를 확장 이전했습니다. 앞으로 2번째 단계로 기업에 공급하는 장비 등을 취급하는 창고, 물류를 여기에 둘 계획입니다. 송도는 공항, 항만과 가까워 이 같은 기능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이후 생산 단계로 나가려고 합니다. 이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밟아나갈 계획인데, 잘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지속해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그룬트 대표이사는 한국 바이오 산업 성장의 잠재력은 '속도'에 있다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 경쟁국인 싱가포르는 오랜 바이오 산업 역사가 있고, 중국은 아시아 최대 바이오 시장이라는 강점이 있지만, 한국 특유의 속도전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도는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초고속으로 성장한 바이오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있는 곳이다.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들과 호흡을 맞춰 '임계규모(Critical Mass)'를 갖추게 되면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한국머크 대표이사로 있으면 다른 머크 지사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내부 경영진에게도 싱가포르나 중국이 아닌 한국, 송도를 왜 선택해야 하는지 설득을 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이 가장 빠르다고 내세웁니다. 우리의 가장 큰 고객(한국 바이오기업)의 성공 사례가 있고, 빠른 것이 강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는 현재 바이오의약 산업 분야에서 송도의 성장 전략은 현명하다고 평가했다. 현재 송도에서는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바이오시밀러(바이오복제약) 개발 등이 이뤄지고 있다."바이오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제약사를 추진한다고 하면 선행기간(lead time)이 10~30년 정도 걸릴 수 있어 어렵습니다. 송도의 경우 주문 제작을 하고, 오리지널 약품의 바이오시밀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현명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오의약품 생산은 화학약품 제조와는 매우 다릅니다. 공정, 방식이 달라 이를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이오 생산을 맡기는 고객 입장에서는 공정의 일관성, 품질 신뢰 등이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전자,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제조 공정이 훌륭하므로 상당히 유리합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매우 현명한 전략입니다."한국의 강점을 살리려면 인허가 절차 간소화, 규제 완화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머크의 경우 송도를 대상으로 물류·생산 관련 투자를 확대하려면 토지를 매입하고, 창고업이나 생산 관련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관련된 기관이 많다. 각 기관의 입장과 소통 방식이 다르면 사업을 추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뒤 정부기관 간 의견이 달라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정부기관에서는 규제를 다소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가 다른 쪽에서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기관에서는 투자 대상지가 괜찮다고 했는데, 다른 기관에서는 다른 부지가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듣기도 합니다. 앞으로 규제 개선 등을 통해 속도감 있게 클러스터를 구축할 수 있다면, 송도는 바이오 허브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입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룬트 대표이사는?▲ 1968년생, 도르트문트대학교 화학공학 박사▲ 1997년 본사 프로세스 개발 랩 매니저▲ 2000~2005년 본사 엔지니어링&기술 개발 디렉터 ▲ 2005~2008년 독일 게른샤임 사이트 엔지니어링&Maintenance 부사장▲ 2008~2013년 본사 PM-Advanced Technologies Development 부사장▲ 2013~2014년 한국머크 대표이사(2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 2014년 한국머크 대표이사(3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머크일렉트로닉미티리얼즈(주)▲ 2015년 한국머크 대표이사(6개 법인)-머크주식회사&머크퍼포먼스미티리얼즈(주)&머크일렉트로닉미티리얼즈(주)&씨그마알드리치코리아유한회사&씨그마알드리치홀딩주식회사&에이에프씨하이테크코리아주식회사미하엘 그룬트 한국머크 대표이사가 한국 바이오 산업 성장의 잠재력은 '속도'에 있으며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초고속으로 성장한 바이오 기업과 호흡을 맞춰 '임계규모(Critical Mass)'를 갖추게 되면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2017-04-11 홍현기

[인터뷰… 공감]경기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27세 한승환 피넥터 대표

책 출간과 함께 '버킷리스트' 실현… 27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수험생 시절에도 봉사 이어와 중증장애인 활동보조때 많이 배워당분간 일에 전념… 블록체인기술 더 많은 적용 위해 '바쁜 나날'젊은층 살기 어렵다고 하는데 기부로 자존감 높이는 계기 됐으면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위워크 빌딩에서 경기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한승환(27) 피넥터 대표를 만났다. 1억원을 기부한 20대 청년이라니.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여유 있기에?'라는 삐딱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그만큼 여유가 없어서 못한다'는 질투 섞인 핑계도 대봤다. 하지만 그에게서 고액 기부자로서의 특별함을 찾으려 했던 것이 민망해질 만큼 그는 평범했다. 내 것을 떼어 누군가에게 나눠준다는 마음이 중요할 뿐, 기부금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너무도 당연한 그의 말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한 대표는 지난달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하면서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 경기 132호·평택 7호 회원이 됐다.아너 소사이어티는 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든 개인 고액기부자 모임으로, 한 대표는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얻었다.그는 "우연히 아너 소사이어티에 대해 알게 됐는데 많은 분들이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가입하는 모습에 감동 받아 30살 이전에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는 것을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삼았다"며 "다행히 버킷리스트를 실현했는데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것은 27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전에도 크고 작은 기부를 계속 해왔다는 한 대표는 어릴 때부터 10년 넘게 봉사활동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돕는 것이 일상처럼 자연스럽다고 했다.그는 "8살 때 부모님과 함께 어르신을 찾아가 소일거리도 도와드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렸던 게 봉사의 시작이었다"며 "이후 20살이 될 때까지 수험생 시절에도 빼놓지 않고 10여년 간 봉사를 이어왔는데, 공부보다도 봉사가 사회에 더 필요한 일이고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성인이 되고 처음 했던 사회생활 역시 봉사였다. 막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 바우처 제도가 도입되던 때로, 필요한 교육을 받은 뒤 중증장애인의 활동보조인으로 4개월 간 봉사했다. 거동이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 아예 움직임이 불가능한 중증장애인과 하루 종일 함께 하며 그들의 수족이 돼주는 것이다.그는 "옷을 갈아입히려면 알몸도 봐야 하고, 식사나 용변을 전부 도와야 하니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처음부터 친밀감을 갖고 관계가 시작되는 것 같다"며 "깊은 부분까지 공유하다 보니 가족에게도 부탁하거나 말하기 어려운 것까지 나눌 수 있게 됐는데, 나는 작은 도움을 줬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내가 더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그간의 봉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도 활동보조인 당시 만났던 중증장애인이었다. 한 대표는 "그림 그리기가 취미여서 초상화를 그려줬는데 굉장히 감동적이라며 좋아하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주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분들도 많았다. 취미 삼아 주식을 열심히 했던 분도 있었는데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중증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졌다"고 말했다.20대에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이룬 그의 다음 버킷리스트에는 어떤 항목이 오를까.한 대표는 "기부를 많이 하자는 것과 책을 쓰겠다는 2가지가 20대 초반에 세운 버킷리스트였다"며 "곧 책도 완성될 예정이어서 버킷리스트를 전부 이뤘으니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하는데, 깊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당분간은 일에 전념하면서 여건이 될 경우 언제든 기부는 계속 하겠다는 것이 다음 목표라면 목표"라고 말했다.사실 그는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가 공동대표로 운영하고 있는 피넥터는 현재 핀테크 업계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블록체인기술에 대한 연구와 개발, 컨설팅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이다.한국 시장에서 블록체인 사업을 확장시키고 해외에도 진출해 관련 산업을 건강한 방식으로 정착시키는 게 한 대표의 목표다.한 대표는 "금융기관, 기업 등에 블록체인기술이 적용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는데 이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컨설팅하는 곳은 피넥터가 유일하다"며 "곧 소비자도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금융서비스를 만들 계획이고, 블록체인기술을 더 많은 분야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고민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마지막으로 한 대표는 자신과 같은 젊은 층의 기부가 더욱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그는 "요즘은 젊은이들이 살기 어려운 때라고들 하는데, 그럴수록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많아야 한다"며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나로 인해 제3자가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결국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깨닫고 삶의 활력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1억원이라는 금액을 기부하면서 사실 이 정도로 보람을 느끼고 기쁠 줄은 몰랐다"며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최대한 많은 이들이 기부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삶의 의미가 깊어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글/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 한승환 대표는?▲ 1989년 평택 출생▲ 2008년 송탄고 졸업▲ 2017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 현) 피넥터 대표▲ 현) Tendermint 고문이사▲ 현) Cosmos 이사▲ 현) Chronobank 전략이사20대에 1억원을 기부하겠다는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면서 경기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한승환 피넥터 대표는 젊은 층의 기부가 활발해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지난달 10일 진행된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식. 한승환 대표는 경기지역 132호 회원이 됐다.

2017-04-04 신선미

[인터뷰… 공감]쇼트트랙 안현수·현준 '형제 스케이터' 길러낸 안기원씨

어린 시절 큰 형 안현수 유난히 따라… 향상된 실력 올림픽 金 향한 의지 못 꺾어러시아 귀화 빅토르 안, 소치 3관왕으로 명예회복 기뻐… 평창 이후 지도자 준비스스로 세운 목표위해 쏟는 노력 닮은 꼴… '현수 아버지' 경험으로 현준 도울 것제98회 전국동계체육대회가 지난달 초 강원도 평창 일대에서 열렸다. 당시 인천광역시 선수단은 사전 경기로 열린 빙상 종목에서만 금 4개, 은 3개, 동 3개를 획득했다. 전 대회에서 노 골드로 부진했던 인천 빙상이 부활한 것이다.특히 고교 1학년이었던 안현준(인천 신송고)은 고 2·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쇼트트랙 남고부 3천m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천 쇼트트랙 사상 첫 동계체전 남고부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1천500m 은메달리스트인 이은별을 비롯해 인천 유일 동계종목 실업선수인 천희정(인천시체육회) 등 여자 선수들이 인천 쇼트트랙을 이끌었던 가운데, 안현준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안현준은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트랙 선수인 빅토르 안(안현수)의 동생이다. 안현준이 올해 동계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자 국내 빙상계에선 '그 형의 그 동생'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형을 넘어설 재목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었다.안현준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스케이트를 탔다. 5학년에 선수 등록을 했으며, 6학년 때 전국대회 메달권에 진입했다. 일반적으로 유치원~초등학교 1학년 때 스케이트를 접한 후 4~5년 후 초등학교 고학년에 두각을 나타내는 타 선수들을 앞지르는 성장세였다. 중학교 때에는 각종 부상으로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지난해 성남에서 인천으로 전학하면서 인천 선수로 나선 첫 동계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세계적 선수인 빅토르 안에 이어 국내 정상급 선수로 커가고 있는 안현준까지 형제 스케이터 뒤에는 아버지가 있다.최근 인천 선학국제빙상경기장에서 만난 안기원씨는 "얼마 전까지 현수 아버지로 불리다가 이젠 현준이 아버지로 불리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이어서 "현수는 1년에 한 번 시즌 후 귀국해서 가족들과 만난다"면서 "예전에는 걱정돼서 러시아 집에도 찾아가고 했는데 결혼해서 가정도 꾸리면서 안 간 지 꽤 됐다. 이제 현준이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인천과 연을 맺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그는 "현준이가 선학빙상장에서 훈련을 받게 되고, 박대성 시빙상연맹 회장님과 이율기 시컬링연맹 회장님 등과 인연이 있어서 지난해 여름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면서 "현준이가 전학하면서 선학빙상장 옆 아파트로 이사왔다"고 말했다.안씨는 지난달 21일 열린 제98회 전국동계체전 인천 선수단 해단식에 참석했다. 당시,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아들을 대신해 안씨가 금메달 포상금을 받았다."인천에 와서 출전한 첫 동계체전에서 현준이가 금메달을 따줘서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인천시민으로서 시와 시빙상연맹 등에 보답했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안씨는 지난 17~19일 서울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제31회 전국남녀 종별종합쇼트트랙 선수권대회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안현준은 은메달 2개로 남고부 종합 4위를 차지했다. 종별종합대회는 500m, 1천m, 1천500m, 3천m 등 종목별로 얻은 점수를 합산한 총점으로 최고의 선수를 가리기 때문에 국내 쇼트트랙 대회 중에서도 최상급의 대회다. 안씨는 "현준이가 좋은 경험을 한 대회였다"면서 "다음 달에 있을 국가대표 선발전도 현준이에겐 좋은 선수로 커가는 데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안씨의 일과는 큰아들인 빅토르 안에 이어서 막내아들인 안현준까지 20여년 간 두 스케이터의 일상에 맞춰져 있다."빙상장은 훈련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부모의 도움이 필수인 것 같아요. 요즘 현준이의 경우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오전 6시까지 선학빙상장으로 갑니다. 일요일만 제외하고 주 6일 이어지는 일과입니다. 빙판 위 훈련과 평지에서 체력 훈련까지 3시간 정도 아침 훈련 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서울 회사로 출근합니다. 방과 후에도 3시간 정도 훈련하게 되는데, 오후 훈련은 엄마가 챙기고 있습니다. 선수 생활을 하지 않은 여타 두 자녀에겐 미안한 부분이지만, 아무래도 힘들게 운동을 하는 두 아들에게 마음이 더 갔던 것 같습니다."안현준이 스케이트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빅토르 안은 국적을 옮기면서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아들이 실력 외적으로 힘들게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아버지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현준이는 어린 시절 성남시청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하던 큰 형을 유난히 따랐습니다. 형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도 보면서 본인도 운동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했었죠. 현재 2020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세워놓고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대한빙상경기연맹도 예전에 비해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는 다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자연스레 빅토르 안에게로 화제가 옮겨졌다."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하게 된 배경에는 부상과 소속 실업팀의 해체 등 여러 요소가 작용했습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3관왕에 오르면서 실력이 없어서 국적을 바꾼 게 아니라 더 나은 여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한 부분이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명예회복을 한 현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이후에는 러시아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예정입니다."안씨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큰아들은 이미 세계적 선수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또한 성장할 것으로 조심스레 내다봤다."아들들이 스케이트를 잘 타는 비결을 주변에서 물어보시는데, 저는 학창 시절 핸드볼을 했습니다. 제 운동 능력이 아이들에게로 전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두 아들이 운동하는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건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쏟는 노력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목표 요인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안씨는 인천 선수로서의 안현준에 대한 바람도 밝혔다. 그는 "현준이가 시민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활약을 펼쳐 줬으면 한다"면서 "저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선수 2명을 길러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성적을 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현수 아버지' 안씨는 세계적 선수로 아들을 길러내면서 크나큰 영광을 안았다. 반대로 아들의 귀화 등 아픔도 느낀 인물이다. 이 같은 극단의 경험을 통해 세계 정상권 선수로 가기 위한 방향성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선수가 어떻게 노력하고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그 선수가 발전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안씨는 '현수 아버지'로서의 경험을 '현준 아버지'로 살리려 한다. 아버지의 경험에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선수의 노력이 어우러져 어떤 결실을 맺게 될 지 기대된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안기원씨는?▲ 1957년 서울 출생▲ 1989년 태광상사(의류부자재 제조·수출) 창업▲ 2006년 주식회사 태광트레이딩 법인전환(운영중)▲ 2008년 안현수 토리노 동계올림픽 1천m, 1천500m, 5천m 계주 '3관왕'▲ 2014년 빅토르 안(안현수) 소치 동계올림픽 500m, 1천m, 5천m 계주 '3관왕'▲ 2017년 안현준 제98회 전국동계체육대회 3천m 금메달세계적 쇼트트랙 선수인 빅토르 안(안현수)에 이어 국내 정상급 선수로 커가고 있는 안현준까지 형제 스케이터를 키운 안기원 씨가 인천 선학빙상장에서 세계적 선수로 아들을 길러내기까지 크나큰 영광을 안은 이면에 아들의 귀화 등으로 겪었던 아픔에 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안씨는 앞으로 "'현수 아버지'로서의 경험을 살려 '현준 아버지'로 살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2017-03-28 김영준

[인터뷰… 공감]퇴임 앞둔 조건호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각종 모임서 공직 후배인 군수·구청장에도 고개 숙이며 기부 설득대뜸 1억원 수표 건넨 '수도사 주지' 김혜운 스님 가장 기억에 남아귀하지 않은 성금은 없어… 최고의 성과 모두 인천시민에 공돌려직원들 시간 뺏을라 이임식 안해… 이곳에서 시간은 행복이었다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때 더 어렵고, 더 힘든 이웃들을 돌보자는 취지로 설립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 배지는 어느덧 나눔과 기부의 상징이 됐다. '짠물 도시' 인천에서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사랑의 열매가 인천 시민들의 가슴에 물들듯 새겨지고 있다. 지난해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인천공동모금회)는 전국 17개 지회 가운데 최고 성과를 냈다. 그 뒤에는 지난 6년간 인천공동모금회를 이끌어 온 조건호(83) 회장이 있다.1935년 옹진군 북도면 시도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1961년 대학을 졸업하고 공직에 입문했다. 경기도와 인천시 요직을 두루 거친 조 회장은 1995년 "고향 발전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민선 초대 옹진군수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됐다. 이후 2대, 3대 군수를 내리 역임한 뒤 2006년 45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2011년 3월부터 인천공동모금회를 맡은 조 회장은 6년의 임기를 마치고 오는 30일 퇴임해 평범한 인천시민의 삶으로 돌아간다.조 회장이 인천공동모금회와 인연을 맺은 2011년은 전해 발생한 공금유용사건 등으로 공동모금회의 위신과 신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때였다. 추락한 신뢰를 다시 회복해야 하는 막중한 시기에 인천공동모금회가 지역사회 원로로 꼽히는 조 회장에게 'SOS'를 친 것이다."가족들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모두가 만류했어요. 그런데 딸이 오히려 '이런 기회에 봉사하고 조직을 쇄신시키는 것이 더 보람된 일 아니냐'고 말하는 거예요. 마침 재단을 세워 지역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회장직을 수락했지요."조 회장이 인천공동모금회 회장이 된 후 느낀 것은 "인천에는 부자들이 참 많은데, 가난한 사람들도 참 많다"는 점이었다. 너도나도 힘들다고 하지만, 인천 지역의 사회지도층 먼저 기부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2011년 취임 당시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은 4명에 불과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개인 기부 활성화를 위해 2007년 12월부터 아너소사이어티 클럽을 운영해왔는데, 인천에서는 1년에 1명 꼴로 가입한 셈이었다.조 회장은 발로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가입을 권유했다. 일명 '회장님 수첩'을 만들어 가입 대상자 이름을 적은 뒤 각종 모임에 나가 끝까지 기부를 설득했다. 인천의 10개 군수·구청장이 모인 자리에 직접 찾아가 후배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아끼지 않았다. 새벽 같이 새얼아침대화와 인천경영포럼 등에 나가 사랑의 열매를 전했고, 소액이라도 정기기부에 동참하는 사업장이 있다면 직접 찾아가 감사를 전했다."연초가 되면 명단을 만들어서 일대일로 접근해 될 때까지 가입을 권유했어요. 군대로 치면 '각개전투'식이지. 보통 1~2년은 기다려야 하고, 길면 3년까지 기다린 분들도 계세요. 다들 요새 사정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면 서글플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다들 기부를 약속하시더라고요."자신의 명예와 지갑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인천공동모금회 회장 자리는 사실 무보수 명예직이라 오히려 '내 돈 써가면서 일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천의 존경 받는 원로로서 지역이 변화하길 바랐고, 어렵고 힘든 이웃들이 조금 더 나아지길 원했던 것뿐이었다.조 회장의 이 같은 노력 끝에 2016년 12월 인천에서 드디어 100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탄생했다. 지난 2008년 정석태 전 진성토건(주) 회장이 인천 지역 아너소사이어티 1호 회원으로 가입한 뒤 9년 만이다. 인천공동모금회는 100호 회원 가입을 기념해 남동구 구월동 사무실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을 개관하기도 했다. 명예의 전당에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의 핸드프린팅과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남은 빈자리를 기다리고 있다. 100호 회원 가입 이후 최근까지 3명이 더 가입해 인천의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은 103명이 됐다. 조 회장 임기 6년간 99명이 가입한 것으로 한 달에 1명 이상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늘어난 것이다. 종교인, 교수, 사업가 등 회원 면면도 다양하다. 이는 전국 어느 공동모금회 지회에서 볼 수 없는 성과다.조 회장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103명의 회원 중 31호 가입자인 '수도사 주지' 김혜운 스님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어느 날 김혜운 스님을 만나 기부를 부탁하고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권유했더니 대뜸 사무실로 오시더니 지갑에서 1억원 짜리 수표 1장을 떡하니 내놓고 나가시는 거예요. 어찌나 고맙고 기뻤는지 몰라요. 제 임기 동안 가입한 99명 모두 소중한 분이지요."조 회장은 친동생인 조상범 법사랑 위원 인천연합회(인성개발 회장) 회장의 묵묵한 도움도 잊지 않았다. 57호 회원이기도 한 조상범 회장은 부모처럼 믿고 따르는 '형님'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법무부 산하 범죄예방 봉사단체인 법사랑 위원 인천연합회 부회장 13명도 조상범 회장의 권유에 따라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에 줄줄이 가입했다.조 회장 부임 이후 인천공동모금회는 매년 지속적인 모금액 상승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임기 첫 해 72억 원이었던 모금액은 2014년 147억 원으로 2배 이상 늘었고, 2016년 160억원이라는 역대 최대 성과를 올렸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전국 공동모금회 경영성과 평가에서 3연속 최고등급을 받았고, 2016년에도 전국 최우수지회에 선정됐다. 공동모금회 성과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모금총액증가율, 아너소사이어티 신규회원 가입률, 개인 정기기부자 모금증가율, 기부자 유지율 등 거의 모든 항목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조 회장은 인천공동모금회의 성과가 모두 인천시민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라고 공을 돌렸다."땀 흘려 거리 공연을 통해 모아온 성금, 아이들의 사랑이 담긴 저금통, 여성 운전자의 택시 모금함 등 귀하지 않은 성금은 없지요. 이게 다 인천시민들 덕입니다. 인천이 사랑도 많이 생겼고, 정도 많이 넘치는 따뜻한 도시가 됐어요. 송도 신도시에 100층짜리 건물 짓는 것보다 시민 전체가 행복해지는 것이 인천 발전이라고 생각해요."30일 정든 인천공동모금회을 떠나는 조 회장은 이임식을 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점심시간 직원들과 평소 즐겨 먹던 순댓국을 먹으면서 조용히 후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 행사 준비로 직원들이 본연의 업무 시간을 빼앗길까 염려하는 마음에서다."나도 나이가 80이 넘어갔으니까 쉬고 싶어요. 주변에서는 아직 '청춘'인데 일을 더 하라고 하는데, 이제 집사람이랑 놀러 다니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인천공동모금회와 인연을 맺었으니까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여기서 일한 것이 보람도 보람이지만, 나는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조건호 회장은?▲ 1935년 인천 옹진군 북도면 출생▲ 1953년 인천중 졸업▲ 1955년 인천고 졸업▲ 1961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4년 부천군 공보실장▲ 1980년 경기도 기획담당관·안성군수▲ 1981년 인천시 재무국장·내무국장▲ 1986년 경기도 평택·송탄·안산·부천시장▲ 1991년 경기도 기획관리실장▲ 1995~2006년 인천시 옹진군 민선 1~3대 군수▲ 2011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인천지회 회장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조건호 회장이 인천공동모금회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100호 회원 가입을 기념해 남동구 구월동 사무실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개관한 아너소사이어티 '명예의 전당'에서 임기 6년간 99명이 가입한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을 이야기하며 인천공동모금회의 성과가 모두 인천시민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조건호 회장이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언론 속 아너소사이어티 기사를 설명하고 있다.

2017-03-21 김민재

[인터뷰… 공감]'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무원' 이화순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

젊은 女직원이라는 이유로 첫 직장 '감원 1호' 이후 동료 권유로 공직입문 29년 몸담아주민과 더불어 살던 구청장 시절 가장 기억에 남아… '내가 이래서 공무원이 됐지' 생각MOU 체결 기업 관계자들과 소그룹 간담회 계획 등 실제 투자로 이어질 수 있게 노력그의 걸음은 늘 처음이었다. 경기도 최초의 여성 기술감사계장, 성남 수정구청장, 도시주택실장, 기획조정실장, 의왕부시장, 화성부시장, 의회사무처장까지. 그리고 이달 초 경기도 여성 공직자로는 처음으로 1급 공무원이 되면서 또 다시 의미있는 족적을 남기게 됐다. 이화순 경기도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의 얘기다.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직 역시 여성 공직자가 맡는 것은 처음이다.누구도 밟지 않은 길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는 기분은 어떨까. 14일 경기도청에서 만난 이 청장에게 '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가 된 소감을 묻자 그는 "하하, 뭐 특별히 할 말이 있을까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서 감사하고 정말 좋습니다"라며 웃었다. 2017년 4월 그는 공직에 최초 임용된 지 29년이 된다. 이 청장이 가진 수많은 '최초'의 타이틀 속엔 울고 웃었던 29년의 시간이 묻어있다."제가 공직에 입문할 때는 여성이 적었기 때문에 '최초', '처음' 같은 수식어들이 많이 붙었지만 요새 들어오는 후배 공무원들을 보면 '내가 요즘 시험 봤으면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생각을 많이 한다"는 이 청장은 "사회가 여성, 남성에 대한 구분이 많이 엷어지고 누구나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본 토대는 마련된 것 같다. 선배가 이렇게 걸어온 길을 발판 삼아 많은 후배들이 더 크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최초 여성'1997년 3월 경인일보는 '부실시공 포도대장 떴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술 분야 여성 1호로 경기도 기술감사계장이 된 당시 이 청장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청장은 "제가 당시 건설교통부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하다 1997년 경기도에 왔다. 당시 기획감사계장을 맡게 됐는데 경인일보에 기사가 났다"며 "'나도 신문에 날 수 있구나' 싶어서 굉장히 신기했었다. 그때가 '경기도 최초 여성' ○○○ (직책) 타이틀로 기사가 나간 게 처음"이라고 회고했다.국가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여성 공직자가 적었던 시절, 줄곧 이 청장은 '처음'의 길을 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로 꼽은 성남 수정구청장 재임 기간도 마찬가지였다. 이 청장은 "공직에 들어와 경기도에서 주로 일을 했지만 정부 부처에서도 기초단체에서도 일을 했다"며 "정부 부처에서는 정책이 결정되고 법이 개정되는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고, 경기도에선 도 전체를 볼 수 있는 행정을 경험하는 등 곳곳에서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구청장을 맡았을 때"라고 했다. 벌써 15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수정구 주민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이 청장은 "구청 일은 정말 사람들이 먹고 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을 서비스해주는 것"이라며 "쓰레기를 치우고 교통을 정리하는 일 같이 사람들이 울고 웃고, 생활하는 일을 함께 하는 게 구청장의 일이더라.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통장님 이런 분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사람 사는 느낌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래서 공무원이 됐지' 라는 생각을 그 당시 정말 많이 했다"고 말했다.경기도 도시주택실장·기획조정실장, 화성시 부시장, 경기도의회 사무처장으로 재직했던 때도 빼놓지 않고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언급했다. "여러모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했다. 이 청장은 "도시주택실장을 두번했는데 그 중 2010년은 뉴타운 사업이 완전 뒤집어졌던 때였다. 민간하고 TF팀을 꾸렸었는데 3개월 동안 매일 아침 7시에 김밥 먹으면서 회의를 했었다. 기획조정실장 할 때는 도 살림을 총괄하고 도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니 의미가 있었다"며 "여러군데서 일을 참 다양하게 많이 했는데 화성시에선 '바다 행정'이라는 걸 처음 했다. 화성시는 인구도, 예산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갈등도 곳곳에 많았던, 정말 매력적이고 다이나믹한 도시였다. 도의회에선 128명의 도의원들과 호흡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배울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후배 여성 공직자·사회인들 모두 훌륭해… 제가 걸어온 길 발판이 됐으면'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가 된 이 청장에게 '여성'이란 더욱 남다른 단어일 터. 여성 고위 공직자가 흔치 않은 공무원 조직에서 그는 교육 기간 2년을 제외하고는 공직에 몸담은 29년간 공백 없이 달려왔다. "이번에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에 지원하려고 이력서를 쓰면서 보니까 교육 다녀온 것 외엔 한 번도 중간에 공백이 없었다는 점을 새삼 알게 됐다"던 이 청장은 "쉼 없이 다양한 곳에서 일해왔는데, 여성이라서 불편할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라고 털어놨다.그러면서도 "그런데 그게 꼭 단점만은 아니었다. 여성은 감성도 더 풍부하고 섬세하고 또 지구력이 있다. 의지만 가지면 여성이 잘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남자를 닮아갈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경험 역시 조직 내에서 직원들과의 관계, 민원인들과의 소통 등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게 이 청장의 설명이다. 황해경제자유구역청에서도 이러한 강점을 최대한 살리겠다고 했다. 그는 "기존 황해청과 MOU를 체결한 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소그룹을 구성해 간담회를 하려고 한다. 20~30명을 한번에 모아 회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서너명 조금씩 모여 요즘 각 회사가 어떤 상황인지, 어려운건 없는지 일일이 이야기를 들으면 실제 투자로도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제가 취임식 때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정성을 갖고 함께 일할 수 있게 발로 같이 뛰자'고 말했다. 새로운 자세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라고 밝혔다.애꿎게도 지금의 이 청장을 있게 한 건 공직에 입문하기 전 몸담았던 기업의 여성 인력 감원 방침이었다. 이 청장은 "남편과 대학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졸업 후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 당시는 젊은 여성 직원들이 '감원 1호'가 됐던 시절이었는데 저도 예외는 아니었다"며 "회사 다니다가 자유의 몸이 되니 잠깐은 홀가분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다들 앞으로 가는데 저만 거꾸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하루하루가 하릴없이 가던 그때, 1년 먼저 회사를 그만둔 직장 동료의 권유로 고시 공부를 하게 된 게 '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 이 청장을 만들었다.이 청장은 "요새 공직에서도 그렇고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후배들을 보면 똑똑하고 역량을 갖춘 분들이 많다"며 "저는 여성 공직자들이 많이 없었던 때 출발했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아도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지만 그런 발자국 하나하나가 후배 사회인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까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에 망설임 없이 발자국을 찍어왔다. 앞으로 그의 발자국은 또 어느 낯선 길에 찍히게 될까.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이화순 청장은?▲ 1961년(만 55세) 충북 보은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건축계획학) 졸업▲ 1988년 4월 최초 임용(기술고시 23회)▲ 2003년 성남시 수정구청장▲ 2004년 의왕시 부시장▲ 2006년 경기도 건설본부장▲ 2008·2010년 경기도 도시주택실장▲ 2012~2014년 국토교통부 기술안전정책관·건축정책관▲ 2014년 경기도 기획조정실장▲ 2014~2016년 화성시 부시장▲ 2016~2017년 경기도의회 사무처장▲ 2017년 3월 ~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경기도 최초 여성 1급 공직자가 된 이화순 경기도 황해경제자유구역청장이 "여성으로서 공직에 몸담아 다양한 분야에서 30여년 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관계자들과 소통하는 황해경제자유구역청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이화순 청장이 1997년 3월 기술 분야 여성 1호로 경기도 기술 감사계장이 됐다고 보도한 경인일보 지면. /경인일보 DB

2017-03-14 강기정

[인터뷰… 공감]한국교총 직선제 최초 여성 회장 인천교총 박승란 교장

교총 가입 강요 교장에 맞서 탈퇴 '해야할 말 못참아'이사 제의 받고 다시 인연… 교섭위원 활동 이어와'현원 대장' 전산화 등 새로운 일보다 관행 철폐 앞장현장 목소리 중요… 좋은 교육 환경 만드는 일 최선국내 최대 규모의 교원 단체인 한국교직원총연합회(한국교총) 70년 역사에서 직선제로 선출한 첫 여성 회장이 인천에서 나왔다. 인천시교원단체총연합회(인천교총) 박승란 회장(인천신광초 교장)으로 지난 달 제14대 인천교총 회장에 취임해 활동 중이다. 한국교총에 따르면 박승란 회장이 뽑히기 전까지 17개 시·도교총에서 여성으로 회장에 오른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중앙대 설립자로 초대 총장을 지낸 임영신(1899~1977년) 박사가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한국교총의 전신인 대한교육연합회 11~13대(1965~1972년) 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임 회장은 간선으로 선출됐다.초·중등 교원 성비 불균형이 매년 심화해 사회적 논란이 되는 상황이다. 교원 단체인 시·도교총의 여성 리더가 70년 만에 나왔다는 사실은 교총 내부에서도아는 이가 많지 않다.'최초의 여성 회장'이란 타이틀을 염두에 두고 지난 27일 오전 11시 인천신광초에서 박 회장을 만났다. 박 회장은 "주변에 여자 선배님들 중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많다"라면서도 "여자로서라기 보다 인천교총 활동을 오래 해왔고, 함께 활동한 분들의 권유도 있어 회장에 나섰다"고 말했다. 박승란 회장을 오랜 기간 지켜본 이들은 그녀를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박 회장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순간을 못 참는다"고 말했다. 14대 인천교총의 캐치프레이즈는 '선생님 곁에 교총'이다. 교권 보호·확립을 위해 실질적 지원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고 홍보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박 회장은 1961년 경기도 시흥시 소하리, 지금의 광명시 KTX역 부근에서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 교사였던 부친의 '외벌이'로 꾸려지는 생계가 넉넉하지 않았지만, 1960년대에 딸을 유치원에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10대 시절 역사학자가 꿈이었지만 아버지 권유로 인천교대(현 경인교대)에 진학했다. 교대를 졸업하고 1982년 초임 교사가 됐을 때 아버지에게 들은 조언은 30여년 교사 생활의 나침반이 됐다."처음 교직을 시작할 때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교장·교감에게 인정받는 교사가 되기 보다, 동료와 학부모가 자녀를 맡기고 싶어하는 교사가 되라'고. 이 이야기를 2002년 인천대 교육대학원 석사 과정 때 '장학론의 대가'인 이윤식 교수님께 들었어요. 이 교수님은 '좋은 교사상' 모델을 이렇게 설명하셨어요.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함께 하는 교사 중 가장 좋은 선생님을 꼽아봐라. 그 중에 내가 맡길 교사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 사람들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끄집어 내라'고. 저는 지금도 이런 교사상이 확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박 회장을 설명하는 키워드의 하나는 '당당함'이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 앞장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교총 탈퇴 사건'이었다. 박 회장은 두 번째 발령받은 인천석남초에서 교총 가입 강요 문제로 교장과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자신이 교총 회원이었지만 학교 교무부장 등이 '무리수를 둬가며' 후배 교사들에게 교총 가입을 유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후배 교사를 두둔했다. 마침 교무실을 찾아온 교장에게 "설득을 해야지 강요는 안 된다"고 얘기했다가 언쟁이 붙었다. 이 일로 박 회장은 교총에 탈퇴서를 냈다. 교직 경력 8~9년 차에 벌어진 일이다. 평교사가 공개된 자리에서 교장의 입장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도 드물지만, 1980년대 후반 당시에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하나의 '사건'이었다. 박 회장은 "후배교사가 '무조건 교총에 가입하라'는 말을 듣고 무척 부담스러워 해 '이건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말하고 행동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박 회장은 '엄격하지만, 아이들 마음을 읽으려는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과 노는 일을 좋아해 초임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걸스카우트 인천연맹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사로서 역량을 높이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교총과 다시 인연이 시작된 건 지난 2000년부터다. "할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박 회장에게 '교총 이사' 제의가 들어와 수락했다. 교총 이사회에 참석했고, 정책위원이 됐다. 정책위 활동을 하며 인천의 교육 정책에 눈을 떴고, 이는 인천교총 교섭위원 활동까지 이어졌다. 박 회장이 교섭위원 활동을 하는 동안 인천교총은 '직장 어린이집 개설' 등 크고 작은 성과를 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관행 철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 '현원 대장'의 전산화를 이끈 일은 흥미롭다."교감이 되면 '현원 대장'을 작업하게 돼 있어요. 전체 직원들이 언제 들어와 무엇을 하고 언제 나갔는지를 기록하는데, 이것을 한자 수기(手記) 3부를 작성하는 거에요. 현원 대장 용지까지 지정돼 있었어요. 전산으로 입력하지 않고 왜 수기로 쓰느냐고 물어보는데, 모두 당연하게 써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대안을 얘기하지 않더라구요. 인천교총 교섭을 통해 현원 대장 전산 입력을 가능하게 했는데, 그게 작년의 일이에요."박 회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인천신광초 교장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책상 옆 벽면의 한자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여일리불약제일해 생일사불약멸일사).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고, 새로운 일을 한 가지 더 하는 것은 하고 있는 한 가지 수고를 더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칭기즈 칸의 책사(策士) 야율초재(耶律楚材)가 한 말이다. 10여년 전 인천용일초에서 교무부장 시절 책에서 얻은 글귀로, 그 이후 계속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있다고 했다."제가 욕심이 많아요. 그래도 가급적이면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보다, 불편한 것을 개선해 나가면서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칭기즈 칸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는 글도 몰랐지만 경청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 저 역시 경청하는 사람이 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박 회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사의 자존감은 교사의 전문성에서 나오고,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곧 교권을 지키는 일"로 보고 "혼자보다는 조직이 교권을 강하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천교총 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회장 임기 3년간 남기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다."결국은 교권입니다. 교권이라는 게 선생님의 권리가 아니라 가르치는 권리예요. '가르치는 맛 나는 학교,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선생님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저도 학교 현장에서 어렸을 때 저항도 많이 했고, '아니다'라는 말도 많이 해봤어요. 나 혼자 교직에 있다가 점찍고 나가는 것도 좋지만, 교총이라는 조직에 들어왔고 조직의 수장으로서 우리 후배들이 좋은 교육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작은 기여라고 하고 싶습니다."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박승란 회장은? ▲ 1961년 경기도 시흥시 소하리(현 광명시) 출생▲ 1974년 인천부평서초 졸업▲ 1977년 인천부평여중 졸업▲ 1980년 인천여상 졸업▲ 1982년 경인교대 졸업, 인천청천초 부임▲ 2000년 인천교총 교섭위원(~2016년)▲ 2008년 제11대 인천교총 부회장▲ 2009년 교감 임용(인천능허대초)▲ 2013년 인천교총 교섭위원장(~2016년)▲ 2014년 제13대 인천교총 부회장▲ 2015년 교장 임용(인천신광초)▲ 2017년 제14대 인천교총 회장박승란 인천시 교원단체 총연합회 회장이 신광초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가르치는 맛 나는 학교,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선생님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밝혔다.

2017-03-07 김명래

[인터뷰… 공감]안신권 광주 나눔의 집 소장

정부 합의 반대하자 지원 끊겨 흉상제작 중단 '씁쓸'… 예산 빌미 좌지우지하면 안돼'귀향' 개봉 후 후원금 급증… 유재석 등 유명인 기부 색깔몰이·대기업 무관심 아쉬워살아 생전 진정성 어린 사과 받게 해드리고 싶어… '아시아 인권 허브'로 발돋움할 것수학 전공한 그가 17년전 사회복지대학원을 다닐때 우연히 받은 권유, 아내 응원 힘입어 인연맺어정치인들이 시즌만 되면 찾아와 허리를 굽히는 곳. 항상 할머니들의 손을 꼭 잡으며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곳.하지만 (정치인에 의해)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정치논리에 의해 소외 당하기 십상인 곳. 바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 소재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 집'이다.나눔의 집은 그 시설만 놓고 보면 사회복지시설이다. 만65세 이상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양로원이다. 일반 양로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 부대시설로 역사교육을 위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한 인권박물관)과 '국제평화인권센터'가 운영중이다.이곳의 운영을 맡고 있는 안신권(56) 소장은 나눔의 집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잡기까지 궂은 일을 도맡아 한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방문해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17년, 안 소장은 막연한 선입견으로 이곳을 바라봤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2000년 12월이었던 듯하다. 아내와 우연한 기회에 나눔의 집을 찾았다. 당시에도 이곳은 아픔을 간직한 할머니들이 모여 계시는 곳으로 언론에 오르내릴때라 호기심반 기대감 반으로 찾았다"는 안 소장은 이곳에서 만난 일본 여성에 강렬한 인상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단국대에 도예를 배우러 온 일본 여성분이셨는데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꿋꿋이 봉사하는 모습에 느낀 바가 많았다"고 회상했다.그러던 중 나눔의 집 관련 스님 한 분이 '이곳에 사회복지전문가가 없으니 일을 도와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고, 안 소장은 고심을 거듭했다."당시 사회복지대학원(석사과정)을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논문학기라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근무조건을 따질 수밖에 없었고, 머뭇하는 순간 아내가 힘을 불어넣어줬다"는 안 소장은 '여성인권을 다루는 의미있는 일이니 한번 해보라'는 아내의 말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나눔의 집과 인연을 맺었다.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할머니들을 대하는 것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처음엔 할머니들이 남성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뒤 알게 됐다. 기우라는 것을. 처음 할머니들을 뵙던 날, 아들같이 대해주시고 잘 따라주셨다. 남성중심문화의 시대에 자라셔서 일부 영향이 미쳤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거부감 없이 따뜻하게 대해주셔 감동이었다. 더 잘 보살펴 드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배가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한다.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한 안 소장은 본인이 사회복지분야에 이렇게까지 몸담을 줄은 몰랐다고 한다. 몇년 전에는 전문성을 더 갖추고자 박사까지 도전했다. 안 소장의 노력은 지난 2015년 2월, 결실을 맺게 돼 동국대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생애사 연구(인권과 복지권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사회복지 박사학위를 받았다."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얘기하면서 그들의 생애사를 다룬 연구가 많지 않아(사회복지분야적 접근) 정리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며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에 힘을 보태고, 일본으로부터 제대로된 사과를 받아내 문제 해결에 나서고 싶었다"고 강조했다.하지만 그해 12월 정부는 일본과 '한일 위안부 합의'(2015.12.28)라는 것을 했고, 안 소장은 자괴감을 느꼈다."이 문제는 단순한 피해자 문제가 아니고 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되돌아봐야 한다. 합의 과정에 당연히 할머니들이 참여하고 원하는 것들을 반영했어야 했다. 내용상, 절차상 문제가 있기에 당연히 폐기하고 (치유·화해)재단도 해체하고 10억엔도 돌려줘야 한다"며 "피해자가 살아 계실 때 원하는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안 소장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방향은 확실하다. 이른바 이원화 전략. "정부는 예산을 지원하고, 체계적 연구를 통해 자료 및 활동을 해온 전문성을 갖춘 민간에게 그 역할을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부는 예산을 빌미로 단체를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는게 그의 생각이다.그러나 정부는 반대로 가는 모양새다.여성가족부는 지난해부터 광주 나눔의 집을 비롯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이른바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당시 나눔의 집은 피해자 상의없이 잘못된 합의, 일본측의 진정한 사과가 없던 합의라고 반발했음)했던 단체들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했다. 여가부는 의도적 중단이 아닌 예산부족이 이유라고 설명하지만, 나눔의 집의 경우 연간 1천만원에 불과한 지원을 끊은데 대해 일부에서 보복성 중단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011년부터 여가부의 '여성단체 공동협력 사업' 일환으로 지원을 받아 위안부 할머니 흉상을 제작해왔다. 2014년까지 모두 5개의 흉상을 제작했는데 지난해 지원이 끊긴후 2014~2016년 고인이 된 배춘희, 유희남 할머니 등 3분의 흉상 제작이 중단된 상태"라고 밝혔다.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일부 지원은 끊겼지만 지난 2015년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이후 나눔의 집 후원자와 방문자는 50% 정도 늘었다. 일본 방문객이 늘어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한일합의안이 발표되고 몇 달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다룬 영화 귀향이 개봉되며 할머니들에 대한 공감대가 커져서인지 방문객은 물론 후원금의 경우 100% 넘게 증가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도 거론했다. "여러 후원자들이 계시지만 유명인들의 후원도 이어지고 있다. 유재석씨는 1억6천만원이나 기부했고, 김구라씨도 후원과 함께 꾸준히 나눔의 집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유명인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안 소장은 "하지만 일부 네티즌이 이들을 색깔론으로 몰아가며 공격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프다"고 토로했다.개인들의 후원이 크게 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대기업 후원은 전무한 실정이다. 한국야쿠르트에서 매달 200만원을 지원하는 것이 전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게 안 소장의 말이다. 나눔의 집은 현재 부지 뒤편에 유품전시관 및 추모관 공사가 한창이며 김화선 인권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도 계속 진행중이다.나눔의 집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사이 웃지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사실 '나눔의집'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하는 의미가 커 브랜드 차원에서 관리라든가 하는 것을 따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보면 그게 아닌것 같다"는 안 소장은 "얼마전 사무실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다짜고짜 '요즘 나눔의집 운영이 그렇게 힘드냐'는 말과 함께 '이런 김치를 팔면 어떡하느냐'는 항의를 받았다. 알고보니 나눔의집 브랜드를 본딴 시설이 여기저기 생겨나면서 오해를 빚게 되는 상황이 생겨났다"고 한다.나눔의 집은 현재 10분의 할머니들이 생활하고 계신다. 평균연령이 90세를 훌쩍 뛰어넘은 가운데 하수임(87) 할머니가 막내이고, 정복수(101) 할머니가 최고령이다. 안 소장의 중심은 언제나 할머니들이다."할머니들 말씀을 들어보면 '그땐 위안부문제를 말하기도 쉽지 않았고, (당한 수모가) 인권침해인지도 몰랐다. 그저 타고난 운명이겠거니하고 운명 탓을 했다'고 하신다"며 "건강히 오래 사셔서 할머니들 살아 생전에 일본의 진정성 어린 사과를 받게 해드리고 싶다. 부디 그날까지 건강히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겠다"고 되뇌었다.끝으로 이곳을 '아시아의 인권 허브'로 발돋움시켜나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인권관련 증언을 위해 할머니들을 모시고 미국에 가보면 홀로코스트센터가 미국인들에게 역사나 인권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교육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들의 산 역사가 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아시아의 많은 이들에게 인권의 소중함과 역사의 중요성을 알리는 장이 될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안신권 소장은?▲ 1961년 강원도 고성 출생▲ 1980년 속초고 졸업▲ 1985년 관동대 수학교육학과 졸업▲ 2001년 국민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 석사▲ 2001년 나눔의 집 소장▲ 2011년 제1회 청호불교복지대상 우수상▲ 2012년 보건복지부 장관상▲ 2013년 경복대 겸임교수▲ 2015년 동국대 대학원 사회복지 박사▲ 2015년 동원대 겸임교수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 집'의 운영을 맡고 있는 안신권(56) 소장이 위안부 할머니의 피해 실상을 묘사한 그림 앞에서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에 힘을 보태고,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고 말하고 있다.위안부 할머니 흉상.

2017-02-28 이윤희

[인터뷰… 공감]병상에 누운 장용석 전 경장 13년째 지키는 사람들

천차만별의 직업 중 위험한 일이 여럿 있다. 경찰 직업도 그중 하나다. 한때 '권위'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진 않지만 갈수록 '치안 서비스'가 강조되면서 경찰은 어느덧 위험 직종이 돼 버렸다. 9천519명. 최근 5년간 근무 중 부상당한 경찰관의 숫자다. 이 중 피의자 등의 피습으로 인한 부상자가 2천730명에 달하고, 각종 안전사고에 의한 부상자는 4천224명이나 된다. 장용석(47) 전 경장은 13년전 현장에 출동했다가 의식을 잃었고 지금도 병상에 누워있다. 그 사이 3살이었던 그의 아들은 지난 10일 중학교를 졸업했다. 장 전 경장도 그렇지만 그의 가족이 꿋꿋이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경찰 동료들의 지원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장 전 경장을 잊지 말자며 그의 이름을 단 '장용석 카페'를 열었고 '아빠 역할'도 대신하고 있다. 동료들은 늘 장 경장의 상태가 호전됐는지에 관심을 두고, 아들의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딸의 생일이 언제인지를 줄줄이 꿰고 있다.물론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에 쫓기며 그를 잠시 잊기도 했다. 하지만 장 경장이 병상에 누운 지 만 10년이 되던 해, 수원중부경찰서장으로 부임한 고기철 서장의 의지와 직원들의 마음이 더해지면서 다시 그가 동료들의 곁에 왔고, 그들의 내민 손길은 따뜻하다 못해 그야말로 뜨겁다.장 경장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만났다. 고기철 전 서장과 조상만 수원중부서 경리계장, 이영희 복지담당 행정관이 20일 오전 수원중부경찰서 내에 있는 '장용석 카페'로 모였다.-장 경장이 부상당했을 때 상황은.조상만(이하 조) : 2004년 당시에는 서호파출소가 지금의 수원서부경찰서가 아닌 수원중부서 관내였다. 장 경장이 서호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중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다가 떠밀려 넘어졌다. 하필이면 인도 경계석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곧바로 의식을 잃었고,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급히 이송됐지만 회복이 어려웠다.이영희(이하 이) : 당시 동료들이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 현장에 장 경장이 아니었다면 본인이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잊혔던 장 경장을 다시 돕게 된 계기가 있다면.고기철(이하 고) : 2014년에 발령받아 수원중부서에 왔는데, 경찰의 날에 보도된 장 경장의 부인 인터뷰를 읽었다. 서장으로 부임 전에도 직원들이 장 경장에게 간헐적으로 도움을 주긴 했지만, 금전적인 도움보다도 가장의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자녀가 있는 상황에서 장 경장의 아이들이 상실감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아빠 노릇'을 대신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조 : 당시 실무 담당자였는데, 상조회 정관에 장 경장의 지원안이 추가돼 공식적이면서도 정기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됐다. 아이들의 생일 등 경조사를 챙기고, 입학과 졸업 등 부모가 동행해야 하는 각종 행사에 정복을 입고 찾아갔다. 장 경장의 딸 혜리(14)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을 때 걱정도 됐는데 혜리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뭉클하면서도 뿌듯했다. 매년 상조회에서 그 해 장 경장을 도울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또 어떤 도움들을 줬나.고 : 'S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장 경장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장 경장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전 직원에게 알리기도 하고 병문안도 권장하며 그의 상황에 공감(sympathy)하자는 의미의 'S'자다. 또 1년 동안의 평가를 통해 수원중부서가 S등급을 받으면 그 성과급의 일부를 장 경장을 위한 기금으로 나누자(share)는 의미의 '3S'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실제로 S등급을 받아 장 경장 이외에도 불우한 상황의 동료 경찰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됐다.이 : 장 경장은 병상에 있고 부인은 일을 해야 해 아이들 학업이 걱정스러웠다. 의무경찰로 군 복무 중인 친구들 중 일부가 교육봉사로 매주 토요일에 혜리 과외 공부를 시켰는데, 자신감도 생기고 학업에도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았다. 과외는 혜리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지속됐다.조 : 장 경장의 아들 연호(16)의 꿈이 축구선수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주말에 야구, 축구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kt 위즈파크 개막전에서 시구도 하고 수원FC 경기에 시축하는 기회도 지원했고, 연호의 경우 수원FC 축구단 훈련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장용석 카페에 대한 동료들의 호응이 좋다는데.조 : 장 경장의 투철한 사명감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1월 1일부터 운영되기 시작했다. 작게나마 현판식도 가졌는데, 장 경장의 가족들이 참석해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잠깐 쉬기도 하고 민원인도 만날 수 있는 데다 커피도 맛있어 직원들이 카페를 자주 이용하는 것 같다.이 : 운영은 경찰서 복지위원회가 하는데 수익금은 주로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쓰인다. 식대로도 지원하고, 장 경장이나 동료 경찰을 도울 일이 있을 때 그에 대한 자원으로 쓰이기도 한다. 수원중부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장용석 카페는 영원할 것이다.-만약 장 경장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지.고 : 당시 파출소에 근무했는데, 지금쯤이면 최소한 출동 팀장이었을 것 같다. 부인 말로는 장 경장이 원래 생일이 아닌 경찰의 날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경찰이라는 직업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아마 '열혈 경찰'로 다양한 활동을 했을 것 같다.조 : 장 경장의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예전에는 누가 병문안을 가도 표정변화가 없었다면, 요즘은 아는 이의 얼굴이 보이면 티가 나도록 웃는다. 강한 정신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 텐데 가족들과 주변 동료들의 진심이 장 경장에게 큰 힘이 됐으면 한다.-상태가 많이 호전된 장 경장과 가족들에게 응원의 말을 전한다면.이 : 연호와 혜리 둘 다 착하고 바르게 크고 있어서 참 감사한 일이다. 장 경장의 뒤를 이어 자녀들이 경찰이 되는 상상도 해봤는데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장 경장의 부인께도 같은 여자이자 엄마로서 대단하고 존경스럽다는 말 전하고 싶다.조 : 수원중부서에 장용석 경장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든 동료들에게 귀감이 되는 동시에 직원들도 장 경장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있으니 이 같은 관심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달됐으면 좋겠다.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고 : 좋은 일, 궂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한 의인들도 가족의 입장에서는 큰 시련이다. 하지만 장 경장의 사연은 모든 경찰관에게 자신의 사연이나 다름 없을 만큼 공감을 얻고 있다. 동료들이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으니 아이들도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함께 따뜻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글/신선미·권준우기자 ssunmi@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지난 2004년 현장에서 다쳐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는 장용석 전 경장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고기철 전 수원중부경찰서장(경기남부지방경찰청 형사과장), 조상만 수원중부경찰서 경리계장, 이영희 복지담당 행정관이 수원중부경찰서 내에 마련된 장용석 카페에서 장 전 경장의 투철한 직업 의식을 되새기며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

2017-02-21 신선미·권준우

[인터뷰… 공감]김세훈 인천 청학숲유치원 이사장

유복한 환경서 경기고 나왔지만 SKY 못들어가 사업으로 보여줘야겠다 다짐주변서 말렸던 해수욕장 인근 수영장·도심 아닌 산골 유치원 등 '믿음의 결실'자전거로 전세계 누비고 팝송 음반도 발매… 젊은이들도 끊임없이 시도하길48년전 산기슭 야외풀장은 대박이 났고 그 옆 유치원은 숲교육 모델이 됐다세월이 흘러 장로합창단원이 된 그는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에도 섰다김세훈(72) 인천 청학숲유치원 이사장은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모험왕'이다. 1969년, 그가 국민관광지로 이름났던 해수욕장인 송도유원지 인근 연경산 기슭에 인천 첫 야외풀장인 청학풀장을 개장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 모두 "미쳤다"며 혀를 내둘렀다. 1982년 야외풀장 바로 옆에 청학숲유치원을 세웠을 때도 "어느 학부모가 산비탈을 올라야 갈 수 있는 유치원에 자녀를 맡기겠느냐"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청학풀장은 48년 넘게 인천시민의 추억이 깃든 공간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청학숲유치원도 생태체험교육으로 현재 인천에서 가장 입학 경쟁이 치열한 사립 유치원으로 성장했다.김세훈 이사장의 인생은 이렇듯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그는 지난해 9월 18일 미국 뉴욕에 있는 카네기홀(Carnegie Hall)에서 공연을 펼쳤다. 뉴욕기독교방송(CBSN)이 주최한 찬양대합창제에 참가한 인천장로성가단의 일원으로 전 세계 음악가들이 평생에 꼭 한 번은 밟길 원하는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에 우뚝 섰다. 김세훈 이사장을 비롯해 머리가 희끗희끗한 60~70대가 대다수인 인천장로합창단원들은 '꿈의 무대'에 오르기 위해 매주 토요일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연습에 매진했다고 한다. "4년 전부터 노래학원에 다니면서 실력을 갈고닦았고, 지난해 초 오디션을 통해 인천지역 교회 장로들이 교파를 초월해 구성한 인천장로성가단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카네기홀이라는 세계적인 무대에서의 공연이 확정됐을 때 느낀 설렘, 공연장 2천500석을 가득 메운 관객 앞에 섰을 때의 떨림, 2곡의 합창곡을 부른 뒤 온몸에 감돈 전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김세훈 이사장은 1945년 3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해방둥이다. 그가 5살이던 한국전쟁 당시 1·4후퇴로 가족 모두가 인천으로 피란 온 실향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나온 조부가 해주와 인천 동구 중앙시장 인근에서 치과를 운영한 덕분에 제법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인천 창영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를 졸업한 김세훈 이사장은 서울의 명문고등학교인 경기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경기고에 입학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모였다는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성적이 좋질 않아서 소위 SKY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며 "명문대학교에 진학해 고위직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입사한 동기들을 보면서 일종의 열등의식을 느끼곤 했는데, 당시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선 사업으로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세훈 이사장은 1960년대 중반 서울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아래에 야외 목욕탕이 조성돼 돈을 받고 입장시키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주로 노인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조부 별장에 있는 인천 청학동 연경산 아래 인공연못이 떠올랐다.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야외 수영장을 첫 번째 '사업 아이템'으로 구상하게 된 것이다. "야외 수영장이란 개념이 낯선 시절인지라 구청에서 공중목욕탕으로 허가를 내줬습니다. 도로조차 나지 않은 산기슭에, 그것도 여름이면 수만 명의 피서객이 몰리는 송도해수욕장 근방에 야외 수영장을 차린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은 물론 가족까지도 '정신 나간 짓'이라며 말렸습니다."그렇게 문을 연 인천 최초의 야외 수영장인 청학풀장은 1969년 8월 개장 첫날 손님이 3명에 불과했다. 김세훈 이사장은 인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계모임 등을 대상으로 "깨끗한 물에서 피서를 즐기고 싶다면 송도유원지가 아닌 청학풀장을 찾아달라"고 홍보했다. 청학풀장은 입소문을 타면서 하루에 800여 명이 방문할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김세훈 이사장은 1982년 청학풀장 바로 옆에 청학숲유치원을 설립했다. 도심이 아닌 산골에 유치원을 차린 것도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5살도 안 된 어린 시절이지만, 황해도 해주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과수원을 거닐고 토종닭을 기르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며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자연과 농촌의 소중함을 알도록 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유치원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도 수업 전 아이들이 연경산 둘레길을 걸으며 사계절의 변화를 체험하도록 한다. 흙바닥에서 뒹굴고, 나뭇가지를 이용해 도구를 만들거나 집을 짓고, 농작물을 기르는 법을 배우는 등 요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는 '숲교육'을 선구적으로 시도한 셈이다."유치원을 시작할 때 만해도 원생이 많이 모이질 않았습니다. 지금은 유명 연예인이 자녀를 맡길 정도로 인기가 높고, 중국에서도 아동에 대한 '숲교육'을 벤치마킹하러 방문합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저는 끝까지 '된다'고 믿었어요. 그러한 믿음이 결실을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세훈 이사장은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도전에 심취해 있다. 사업에 열중하느라 여행 한 번 제대로 가보지 않았던 그는 8년 전부터 자전거를 타고 국내외를 누비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출발해 전남 목포, 신안까지 서해안을 완주했고, 금강에서부터 낙동강을 거쳐 부산까지 강을 따라 질주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파리 등을 15일 동안 횡단했다. 성지순례길로 유명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900㎞ 거리를 11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해발 1천400m에 달하는 스페인 피레네산맥도 넘었다. 환갑을 넘긴 적지 않은 나이지만 하루 80~100㎞ 거리를 달려야 하는 강행군을 소화했다. 김세훈 이사장은 "앞으로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지역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볼 계획"이라며 "나이가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제2의 인생을 산다는 기분으로 전 세계를 달리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노래학원 강사의 권유로 12곡으로 채워진 팝송 음반까지 냈다. 전문적인 가수가 아니라서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평소 노래를 즐기는 그의 도전의식의 산물이다. 김세훈 이사장은 "세상이 어지럽고, 경제도 어렵다는 요즘 시대에 젊은 세대들이 살아가기가 많이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며 "나같이 나이 든 사람도 인생에서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듯이 젊은 세대들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세훈 이사장은?▲1945년 황해도 해주 출생▲서울 경기고등학교 졸▲건국대학교 축산학과 졸▲청학숲유치원 이사장▲청학풀장 대표인천 최초의 야외 수영장을 개장한 김세훈 청학숲유치원 이사장이 도전의 연속이었던 그의 인생사를 이야기하고 있다.눈밭이 된 유치원에서 원생들과 함께하고 있는 김세훈 이사장.2009년 유럽 자전거 횡단 때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찾은 김세훈 이사장.지난해 9월 김세훈 이사장이 속한 인천장로성가단의 카네기홀 무대.

2017-02-14 박경호

[인터뷰… 공감]라오스서 희망 전하는 '야구 천사' 이만수 감독

SK 떠날때 '야구 전도사 활동 왜 머뭇 거리냐' 아내 질책에 라오스로 걸음 옮겨현지 청소년들 꿈을 위해 야구장·숙소·학교 건립 등 앞으로 20년은 더 활동해야더 많은 분들의 관심으로 '한국 방문' 원하는 아이들에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야구팬들이 기억하는 야구인 이만수는 선수시절 삼성라이온즈를 이끈 강타자, 메이저리그 지도자로서 활약한 후 국내 프로야구로 돌아와 팬들 곁으로 다가서는 감독의 모습일 것이다. 또 최근에는 자신이 가장 열심히 했던 야구를 통해 재능기부를 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지고 있다. 특히 라오스라는 야구불모지에서 청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며 꿈을 심어주고 있다. 화려한 선수시절,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현장 감독을 떠나 기부단체인 헐크파운데이션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야구 천사'라는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는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을 지난 7일 만나봤다.# 라오스와의 인연은 '가족의 힘으로'최근 라오스를 방문하고 귀국한 이 감독은 인터뷰 시작부터 라오스 이야기를 꺼냈다.이 감독은 "이제 아이들이 희생번트와 희생타도 이해해요. 야구의 룰을 배워나가고 또 하나하나 이해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오니 너무 행복하다"고 말을 꺼냈다.그는 "왜 이말부터 꺼냈냐면요, 사실 야구 규칙이 다른 종목에 비해 너무 복잡하고 어렵거든요.근데 아이들이 야구의 룰을 이해하고 야구인이 돼가는 모습을 보니 행복해서 대뜸 라오스 이야기부터 꺼냈다"고 말했다.이 감독이 라오스에 야구 전도사 활동을 구상한 건 SK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부터다.우연히 지인에게 라오스 청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쳐 보는 건 어떻냐고 제안을 받았고 감독 시절 유니폼과 장비를 전달하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그리고 SK의 감독을 물러나며 부인 이신화씨가 '지도자 시절 약속했던 야구 전도사 활동을 왜 하지 않고 머뭇 거리냐'는 질책(?)을 했다. 선수생활과 미국 야구 연수, 그리고 한국 지도자 생활까지 항상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던 부인 이씨의 질책성 질문을 받은 이 감독은 유럽 가족여행을 취소하고 라오스로 향했다.당시 이 감독이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는 야구 인프라는 커녕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어서 막막했었다. 이 감독은 "선수들에게 희생번트를 가르쳤을때 왜 다른 선수가 베이스를 이동하기 위해 희생을 해야 하냐고 물어 올 정도로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며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이 감독의 라오스 야구 보급 활동은 청소년에게 야구를 가르치는데만 국한하지 않고 있다. 더 많은 청소년들이 야구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야구장을 비롯한 인프라 구축에도 관심을 갖고 추진해 나가고 있다. 그는 "지금 내가 60살이니까 앞으로 20년은 더 해야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20년 동안 야구장도 짓고, 선수들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웨이트장과 숙소, 학교까지 만들어 주고 싶다"며 "20년 동안 이런 인프라적인 부분을 완성해 놓고 한국 지도자들이 와서 나 보다는 더 편안한 환경에서 라오스 청소년들을 지도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야구인으로서 팬들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라오스 이야기를 하던 이 감독은 이런 모든 활동들이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 생활까지 이어지며 꾸준히 생각하다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제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어린시절부터 꾸준히 해 오고 있는 두가지 일들에서 시작됐다"며 "그 중 하나인 일기 쓰는 습관이 제가 어떤 목표를 갖고 추진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고 말했다.40여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다는 이 감독은 "매일 적어 놓은 내용들을 찾아 보기도 하고, 그런 내용을 정리해 SK감독을 물러날때 꼭 실천하고 싶은 22가지를 정해 놨었다"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야구 보급 사업이나 재능기부, 책이나 칼럼 쓰는 일 등 모든 것이 그때 정리해 놓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며 "라오스의 활동도 그 중 하나인데 라오스에서 여러 활동을 하다보니까 현재는 27가지로 목표가 늘어났다"고 귀띔했다. 이 감독은 "40여년간 그라운드에 있으면서 팬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며 "선수시절부터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항상 팬들이 주신 사랑을 꼭 여러 사회활동으로 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사회에 돌려 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늘 보다는 내일을,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기를이 감독은 후배 선수들을 비롯해 지도자들이 오늘 보다는 내일을, 그리고 먼 미래를 위한 꿈을 갖고 노력해 나갔으면 하는 마음을 전했다. 그는 "믿지 못하시겠지만 솔직히 저는 재능을 타고난 선수는 아니었다"며 "14살때 야구선수 이만수는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거나 벤치에서 동료 선수들이 열심히 뛸 수 있도록 파이팅을 외치는 그냥 평범한 선수였다"고 말했다.이어 이 감독은 "하지만 너무 야구가 좋았고 야구를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못하는 장거리 달리기와 체력을 늘리기 위해 매일 새벽 왕복 10km 정도 되는 대구 수성못까지 달리기를 했고 4시간만 자면서 운동을 했다"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2학년때까지도 실력이 늘지 않았지만 10년 뒤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로 노력했고 서서히 실력이 향상되며 여러분이 아는 이만수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이 감독은 "제가 만약 중학교 2학년때 기량이 안는다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며 "지도자들도 선수가 오늘 당장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 보다는 일정기간 목표를 세우고 선수가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후배 야구인들을 위한 조언을 이어가던 이 감독은 다시 라오스 이야기를 꺼냈다. 이 감독은 "지난해 모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으로 라오스 청소년과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발전한 모습과 야구 분위기를 느끼며 많은 것을 배우고 갔다"며 "지난해 방문하지 못했던 청소년들의 한국 방문을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그는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야구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싶은 청소년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며 "앞으로도 더 많은 라오스 청소년들이 야구를 통해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뛰겠다"고 말했다. 글/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이만수 감독은? ▲ 1958년 생▲ 한양대학교 학사▲ 삼성 라이온즈(1982~1997년)▲ 애크론 애로스 코치(1998년 3월)▲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1999년 12월~2006년)▲ SK 와이번스 수석코치(2006년 10월~2010년 6월)▲ SK 와이번스 2군 감독(2010년 6월~2010년 8월)▲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2010년 8월~2011년 3월)▲ SK 와이번스 2군 감독(2011년 3월~2011년 8월)▲ SK 와이번스 감독대행(2011년 8월~2011년 10월)▲ SK 와이번스 감독(2011년 11월~2014년)지난 5일 경인일보 본사 소회의실에서 야구 재능이 없었던 선수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거쳐 SK 와이번스 감독까지 이룬 후 이제는 야구불모지 라오스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있는 이만수 감독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이만수 전 감독은 라오스 야구보급활동 외에도 최근에는 피칭머신제작업체와 홍보 모델 계약금으로 받은 전액을 아마추어 야구팀 지원을 위해 기부(오른쪽 사진)해 화제가 됐고 지난달에는 재미교포들을 위한 재능기부 행사를 가졌다.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2017-02-07 김종화

[인터뷰… 공감]독도 소녀상 건립 앞장선 민경선 경기도의원

소중한 영토 지켜내기위한 사명감으로 '독도사랑·국토사랑회' 만들어日 보수여론 자극 위안부 문제에 악영향 등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혹'영토주권 행사·위안부 문제, 정부 외교 전략이 옳은지 생각해보는 계기모금 문의 등 응원 목소리도 많아 포기못해… 서두르지 않고 나아갈 것인기 얻으려고 하냐는 등곱지않은 시선 이해하지만실효 지배 우리땅인데소녀상이든 방파제든뭐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 땅(독도)과 못다 핀 꽃(위안부 피해 문제)…그의 마음을 울리다각양각색의 도의원들 중에서도 그는 가슴이 뜨겁고, 그만큼 끈질긴 것으로 유명하다. 초선 의원이었던 2012년엔 서울~문산 민자고속도로 백지화를 주장하며 과천정부청사 앞에서 79일간, 국회 앞에서 62일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인 시위를 했다. 최근에도 서울 은평구청 앞에서 고양시에 피해를 줄 수 있는 폐기물 처리 시설 설치를 막기 위해 68일간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번엔 독도에 소녀상을 세우는 일에 그의 열정과 인내가 집중됐다. 지난해 5월 독도문화축제가 첫 단추였다. 우리나라 가장 동쪽 끝에 발을 내딛었을 때 그가 느꼈던 건 일종의 '사명감'이었다고 했다. 민 의원은 "경기도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맏형이고 도의회도 광역의회 중 큰형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소중한 영토를 지켜내기 위해 최대 광역의회인 도의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는 숙제가 마음에 남았다"고 말했다. 동행했던 당시 윤화섭(민·안산5) 의장은 독도 사랑을 실천할 연구단체 구성을 민 의원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독도사랑·국토사랑회가 그해 10월 발족됐다.그의 가슴을 결정적으로 울린 것은 영화 '귀향'이었다. 스크린을 통해 잠시나마 지켜본 위안부 피해자들의 참상은 마흔여섯인 민 의원을 엉엉 울게 했다. 그리고 그가 독도에서 가져온 숙제의 해답을 찾았다. 평화의 소녀상을 세워 일본의 전쟁 범죄를 소중한 우리 땅 독도에서 또렷이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민 의원은 "독도,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맞닿아있다. 독도는 우리의 영토 주권을 나타내면서도 평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이고, 위안부 문제는 우리의 아픈 역사임과 동시에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매년 '다케시마의 날' 전후로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벌어지고 위안부 문제 합의도 당사자인 할머니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데 정부는 미온적이기만 하다. 그렇다면 도의회에서라도 뭔가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철 없는 정치인, 소신 있는 정치인…"서두르지 않고 나아갈 것"지난달 16일 모금 활동을 시작한 후 인터뷰가 진행된 이날까지 민 의원의 열흘은 그야말로 폭풍 같았다. 바로 다음 날인 17일 기시다 일본 외무상이 "다케시마(竹島·일본이 독도를 부르는 명칭)는 일본 고유의 영토로 소녀상 설치를 허용할 수 없다"고 도발하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일본 여론도 요동쳤다. 정부는 "서로 다른 사항인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를 연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밝혔고 도의회가 직접 모금활동을 하는 것은 현행 법에 어긋난다며 제동을 걸었다. 민 의원은 "한국은 물론 일본 언론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이어지는 등 관심이 쏟아졌지만 정작 모금 자체는 법적 문제로 사흘 밖에 진행하지 못했다. '3일 천하'였던 셈"이라고 씁쓸해했다.독도 소녀상 추진에 마냥 찬사만 쏟아졌던 건 아니다. 일본 보수여론을 자극해 아베 정권을 공고히하는 효과만 낳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는 일을 어렵게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투트랙으로 접근해야 할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를 결합시키는 바람에 한·일 갈등의 중심이 '위안부 피해'에서 '독도 문제'로 옮겨가 논란을 희석시켰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1년 뒤에 있을 선거를 의식해 이름 한번 알려보려고 정치인들이 철없는 짓을 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다. "난관이 없으리라는 생각은 안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빨리, 또 많이 부각돼 당혹스러웠다"고 말한 민 의원은 "당장 며칠 내에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짧게는 1년을 잡고 모금 운동을 시작점으로 천천히, 차근차근 공론화를 거쳐 추진하려던 것인데 오히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괴롭게 한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고 토로했다.그러나 "포기하진 않겠다"는 게 민 의원의 다짐이다. 그는 "인기를 얻으려는 수단 아니냐, 왜 경북도의회가 아니라 애먼 경기도의회가 하냐 등등 다양한 지적이 나온다. 다 이해할 수 있다"며 "그러나 독도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과연 해결되는 문제일지는 의문이다. 실효 지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럼 독도에 소녀상을 세우든 방파제를 세우든 할수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독도 소녀상 추진으로 우리가 영토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지, 과연 위안부 피해 문제를 우리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하려고 하는지 자성해보고, 과연 지금의 외교 전략으로 어떤 실익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고 역설했다. "국민들은 답답하거든요. 우리가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독도에 대해서 우리 정부가 얼마나 당당한지, 할머니들은 동의한 적 없다는 위안부 합의를 했다는 게 과연 우리 정부인지. 우리의 움직임이 설익었다, 섣불렀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제는 그런 질문을 우리 스스로 던져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비판 못지 않게 응원의 목소리가 크다는 점도 민 의원이 독도 소녀상 추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다. 실제로 모금 활동을 시작한 후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모금 계좌를 알려달라"는 문의가 이어졌다. 도의회 앞과 독도에 소녀상을 설치할 수 있는 비용 일체를 기부하겠다는 독지가부터, 독도 소녀상 추진에 반대의사를 밝힌 정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도민까지 많은 이들이 독도 소녀상 추진에 성원을 보냈다. 민 의원은 "얼마 전엔 가평에 사는 한 어르신께 전화를 받았다. 경상북도와 도의회, 정부에 '이렇게 뜻깊은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가로막고 나서냐'고 일일이 항의하셨다면서 '꼭 성사시켜달라'고 당부하셨다"며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소속 의원들 모두 선거를 의식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역에선 '지역 일도 산적해있는데 애먼데 신경쓴다'면서 곱지 않게 보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응원해주는 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포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차근차근 해나가다보면 저희들의 진정성도 알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밟아 나가야죠."붉은 닭의 울음소리가 새벽을 울렸듯 대한민국 최대 광역의회인 경기도의회가 정유년 새해의 벽두를 울렸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을 독도에 세우겠다며 지난 1월 16일 모금 활동을 시작한 게 단초였다.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한·일 외교 갈등은 이른바 '독도 소녀상' 설치 문제로 다시 불붙었고, 갈등의 중심 역시 소녀상에서 독도로 옮겨붙었다.한국을 넘어 일본까지 뒤흔든 독도 소녀상 설치 움직임에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맨 처음 이를 공식 제안한 경기도의회 연구단체 독도사랑·국토사랑회 민경선(민·고양3) 회장이다. 지난해 12월 14일 그는 도의회 제315회 정례회 본회의 5분발언을 통해 도의회 앞과 독도에 소녀상을 설치하자고 제안했고 한달 뒤 모금 활동을 본격화했다. 응원도 쏟아졌지만 비판도 그만큼 거셌다. '소신 있는 정치인'과 '이름 한번 알려보려는 철 없는 정치인'이라는 평가 사이에 서있는 민경선 의원을 설 연휴를 코앞에 둔 1월 25일 도의회에서 만났다.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민경선 도의원은?-1971년생. 전북 정읍 출생-서강대 금융경제학 석사-2000~2003년 동대문신문사 편집국장-2006~2008년 최성 국회의원 보좌관-2008~2010년 (사) 한반도평화경제연구원 사무국장/책임연구원-2010년 6월~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고양3)'독도 소녀상' 설치를 주도하고 있는 경기도의회 민경선 의원(독도사랑·국토사랑회 회장)이 " 충분한 논의와 함께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어려움이 있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소녀상을 설치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2017-01-31 강기정

[인터뷰… 공감]한의녕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초대 원장

'창업 → R&D → 성장 → 강소기업' 비즈니스 체계 구축 '일자리·경제' 투트랙 노력타운홀미팅 등 직원들과 소통 프로그램 운영… 양 기관 불협화음 해소·관행개선 의지시장동향 등 지식공유·정보 분석통해 선제적 대응… 일하는 문화도 실행력 중심으로道 경제예산 70% 차지 통합기관 수장에 비관료 기업인 영입, 그가 주목받는 이유다."경제와 과학의 통합 기관이 된 만큼,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첨병 역할을 하겠습니다."한의녕(58)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이하 진흥원) 초대 원장은 정유년 경기도 경제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의 인물이다.경기과학기술진흥원과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가 통합돼 올해 새롭게 출범한 진흥원은 한 해 예산만 무려 2천100억원에 육박하며 조직원도 243명에 달하는 매머드급 기관이다. 경기도 경제 예산 3천억여원 가운데 70%가량이 진흥원을 통해 사용되는 셈이다. 이 같은 기관의 초대 원장을 맡았으니, 세간의 관심을 끌만도 하다.기관 통합으로 진흥원 원장 자리가 경기도의 경제 부총리급 정도로 격상됐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한 원장의 발탁과정도 파격적이다. 남경필 경기지사의 측근도, 화려한 경력의 관료 출신도 아니다. 순수 민간업체에서 잔뼈가 굵은 기업인 영입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한 원장은 SAP 등 글로벌 다국적 기업에서 ICT(정보통신기술)분야와 테크놀로지 및 경영컨설팅 등 과학과 경제의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진흥원은 중소기업의 신기술 개발과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융합, 기업경쟁력 강화와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 과제를 맡는다. 과학기술정책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만들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특히 도는 국내 총생산의 22%를 차지하고 연구개발 인력의 36%가 집적된 우리나라 경제·혁신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한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원장이 원장으로 선임된 후, 적임자를 뽑았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진흥원 사무실에서 만난 한 원장은 우선 통합조직의 시너지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조직의 혁신을 시도하겠다고 강조했다. 진흥원은 최근 11본부 41부서(정원 243명)를 9본부 1센터 36부서로 조직개편을 진행했다. 그는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생존과 성장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실질적인 지원군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하고 준비해야 한다"며 "통합 기관으로 새롭게 출범한 만큼 무거운 책임감으로 과감한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 내고 활발한 대내외 소통으로 투명 경영을 추진해 화합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올 상반기 중 지속적인 업무 혁신과 내부 소통 활동 강화로 기관의 물리적·문화적 통합을 완성해 통합 시너지를 위한 기반을 완성하도록 하고, 하반기에는 통합 비전 선포와 함께 진흥원의 리빌딩을 통해 조기 성과 창출에 힘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현재 비즈니스 지원시스템에서 과학기술R&D를 통합함으로써 '창업→R&D→사업·성장→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이어지는 비즈니스 체계를 통해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을 통한 일자리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포부다. 한 원장이 통합기관의 시너지를 강조하는 이유는 양 기관의 불협화음이 나오며 통합작업에 난항을 겪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지난해 9월 '경기도 출연기관의 통폐합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이 통과된 것을 근거로, 통합을 이뤘지만 양 기관의 직급 및 보수체계와 주무관청 문제 등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특히 효율적 경영을 위해 통합을 추진했으나 비대한 조직이 갖기 쉬운 대응체제, 소통의 부재, 책임의 불명확성 등은 항상 노출돼 있다.통합의 시너지를 내기 위한 구체적 계획도 제시했다. 한 원장은 "'영보드(Young Board)'나 '타운홀미팅(Town Hall Meeting)', '얼리버드(Early Bird)' 등 직원들과 수평으로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기적인 소통의 자리를 통해 사내 비효율적인 제도 및 관행 개선 방안을 자유롭게 논의하고, 직원 간 친목을 도모함으로써 조직 간 화합을 이끌겠다는 의지다.건전한 소통을 위해 '두드림(Do Dream)'이라는 이름의 릴레이 메일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그는 "'감동을 주거나 격동시키다'라는 뜻이 있고, 'Do Dream'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진흥원의 미래에 최대한 빨리 도달해 보자는 뜻으로, 직원 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한 활발한 소통은 임직원들의 조직 내 만족도 향상은 물론 애사심 고취로 이어진다"고 말했다.한 원장은 올 상반기까지 직의 안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경기도는 물론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기관이 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중소기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나 단점을 되레 장점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그는 "글로벌 기업에 비해 정보력이 취약한 중소기업들을 위해 글로벌 시장 동향과 신기술 관련 최신정보를 기업에 제공하는 등 지식 공유의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수집된 정보를 정밀하게 분석해 국내외 기업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 수혜가 예상되는 분야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피해가 예상되는 기업들은 선제적으로 방어할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실행력 중심으로 일하는 문화도 스마트하게 변모시킬 계획이며, 회의 주제도 결과 보고가 아닌 구체적인 실행방법에 집중하게 해 효과적인 문제점 개선 방안들을 도출하겠다는 방침도 세웠다.한 원장은 "비전도 실행이 없다면 결국 단순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며 "실행문화의 뿌리가 진흥원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고 중소기업에까지 전파될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진흥원의 서비스가 중소기업들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수 있도록 업무 프로세스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는 "경기도 미래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지원과 과학기술의 통합플랫폼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갖고 중소기업의 실질적인 지원군이 되기 위해 늘 노력할 것"이라며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글/이경진기자 lkj@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한의녕 원장은?▲ 1958년 인천 부평 출생(만 59세)▲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 졸▲ 1983.07~2001.03 한국IBM 부장▲ 2002.11~2008.06 SAP KOREA 대표이사▲ 2008.10~2010.12 삼성 오픈타이드코리아 대표이사▲ 2011.10~2013.04 송도 U라이프 솔루션즈 대표이사▲ 2013.03~2016.02 대한방직(THTC) 부회장/고문▲ 2016.04~2016.12 원클릭 코리아 회장한의녕(58)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이하 진흥원) 초대 원장은 "글로벌 기업에 비해 정보력이 취약한 중소기업들을 위해 글로벌 시장 동향과 신기술 관련 최신정보를 기업에 제공하는 등 지식 공유의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7-01-24 이경진

[인터뷰… 공감]김홍용 서정대학교 총장

국립대 의대 정교수 내려놓고 모친 유지따라 경영자의 길 걸어교육 불모지 양주서 3개 학부·5천명 개교 15년만에 기적같은 성장 일궈자격증 취득 지원 장학금 '눈길' 1명이 3~4개씩 따 등록금 내고 남아2005년부터 취업률 수도권 상위권 지켜 이제는 취업의 질 고민할때전임교수중 3명이 명장 국내 최다… 인성 포함한 실력 키우기 초점연구개발 협력분야 확대·군부대 심리상담 등 지역사회와 공존 노력김홍용(58) 서정대학교 총장은 지금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원래 의사인 그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는 국립대 의대 정교수 자리에까지 오르며 탄탄대로의 삶을 살았다. 이런 그가 별안간 인생 항로를 바꾼 건 서정대의 설립자이자 어머니인 고 김상우 박사가 남긴 유언 때문이다. 김 박사는 타계하기 전 장남인 김 총장에게 학교를 부탁했다.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김 총장은 의사 가운을 벗고 대학 경영자의 길로 들어선다. 적자생존의 살벌한 현 대학생태계에서 신생 사립대학을 이끈다는 것은 '사지(死地)에서 살아남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듯 많은 사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서정대는 개교 15년 만에 3개 학부, 학생 수 5천 명이 넘는 대학으로 성장해 대입에서 수험생과 학부모가 주목하는 '관심 대학'으로 떠올랐다. 2002년 고등학교도 부족했던 '교육의 불모지' 양주에 터를 잡을 때만 해도 비관적인 시선이 팽배했다. 이름 있는 대학도 아니고 신생 대학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주민들도 냉랭했다. 이런 대학이 불과 1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졸업생 취업률이 수도권 최상위로 치닫고, 절반이 넘는 학생이 자격증을 소지하고 가고 싶은 기업을 골라 취업하는 기적 같은 성장을 이뤄냈다. 이처럼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서정대 김홍용 총장을 만나 그의 교육철학과 대학 경영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총장으로서 저의 역할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생이 맘껏 공부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학교에선 공부만 할 수 있게 하겠다"는 김 총장의 우직한 다짐은 캠퍼스에서 현실화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자격증 취득지원 장학금'. 자격증을 따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다. 김 총장이 '학비 걱정 없는 학교'를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실천한 일이다. 이 독특한 장학금은 학교에 '자격증 붐'을 일으켰다. 지난해 학생들이 딴 자격증 수는 모두 3천420개를 넘었다. 3~4개의 자격증을 따 등록금을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둘이 아니다. 김 총장은 "우리 학교에서는 학업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했다.서정대는 요즈음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으로 꼽힌다. 청년실업 시대에 취업률은 '좋은 대학'을 결정짓는 최고의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서정대는 2005년부터 취업률에서 수도권 상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김 총장은 "이제 취업률이 아니라 취업의 질을 고민할 때"라며 달라지고 있는 학교의 취업정책을 소개했다. "졸업생의 취업 현장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고민하다가 '취업 질 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됐어요. 쉽게 말하자면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안정성, 수익성, 성장성을 갖춘 기업을 매치시키는 것입니다."적합한 인재를 찾는 기업과 좋은 기업을 원하는 학생이 서로가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학교가 중계자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학과별로 근로조건, 급여, 기업 규모와 성장성 등 조건을 두루 따졌습니다. 공개된 정보를 활용하고 직접 교수들이 발품을 팔아 기업을 돌아다녔어요. 그리고 좋은 업체라고 판단되면 이 회사가 요구하는 교육을 맞춤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여기다 산업기사 등 자격증이나 어학능력, 경진대회 수상 등 누구나 인정하고 실용적인 '스팩'을 갖추도록 했습니다."김 총장은 자격증 취득을 취업의 질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개인의 실력을 자격증만큼 객관적이며 합리적으로 증명해주는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호텔경영과, 호텔조리과, 관광과 졸업생의 3분의 2가 '특1급 호텔'에 취업하고 있습니다. 질적 취업률이 높아진 것이지요. 학생들이 자격증에 도전하면서 좋은 직장을 골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자격증 외에 김 총장이 취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공을 들인 부분이 교수진 구성이다. 서정대 강단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숙련 기술을 보유한 '명장'이 포진하고 있다. 김 총장은 명장을 통해 학생들이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고급 기술을 전수받을 기회를 만들었다. 현재 서정대에는 조리명장(문문술·호텔조리과), 자동차정비명장(김웅환·자동차과), 미용명장(정매자·뷰티아트과) 등 3명의 명장이 전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명장 교수를 가장 많이 보유한 대학이다. "강의실에서 명장이 직접 자신의 고급 기술이나 비법을 가르치는 곳은 전국에서도 찾기 드뭅니다. 이것이 우리 학교가 기능장, 산업기사, 국제대회 국가대표, 국가기관장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는 이유입니다. 기능분야 교과목을 담당하는 교수도 산업기능장이나 명인, 또는 해당 분야 20년 이상 경력자를 모셔 질 높은 심화교육이 이뤄지도록 하고 있습니다."김 총장은 "자격증 취득과 명장 교수는 취업으로 이어져 서정대가 최근 8년 연속 질적 취업률 최상위 그룹에 들게 됐다"며 "학생의 역량을 키워 질 좋은 일자리에 취업시키는 게 총장으로서 가장 큰 보람"이라고 흐뭇해 했다.서정대는 김 총장의 특별지시로 평일 야간과 토요일에도 많은 강의가 열린다. 배움의 열정을 높이 사는 김 총장은 "우리 학교는 직장인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도 언제든 와서 공부할 수 있게 강의실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다"고 강조했다.'힘을 기르자'는 서정대의 교훈이자 김 총장의 교육철학이기도 하다. 여기서 힘은 '기술과 능력'을 의미한다고 김 총장은 설명했다. 그는 "기술과 능력은 사회에서 당당히 살 수 있는 자질을 의미한다"며 "'힘' 안에는 인성과 교양도 포함되며 이 또한 성공적인 사회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열변했다."우리 대학 응급구조과 학생들을 예로 들자면 4년제 출신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서울대병원과 삼성병원에 척척 취업하고 있어요. 현장경험이 풍부한 교수들이 학생들의 실력은 물론 질적 취업까지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학교와 학생들이 가진 위력이라고 할 수 있죠."김 총장은 "대학에 진학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실력을 쌓기 위해서"라며 "직업으로서의 실력, 인성으로서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어 "인성과 교양은 실무 능력과 함께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나가는 데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며 무엇보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교수진이 사회인이 갖춰야 할 자세나 품성 등을 우선 지도하고 특히 학생들의 감성이 메마르지 않도록 캠퍼스 조성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서정대는 양주시에 가장 먼저 '대학 캠퍼스 시대'를 열며 여러 협력을 통해 지역사회와 공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위 스타트 마을', '꿈나무 안심학교',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등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엔 '센서제어형 전동식 제설기 개발'과 'LED 가로등 모듈 시스템 개발' 등 산업 연구개발로 협력 분야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김 총장은 "지난해는 23억원 규모의 공동 연구개발 사업을 진행했다"며 "올해는 40억원 규모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서정대의 지역사회 기여는 지역 군부대와 기업으로도 번지고 있다.김 총장은 "지역사회 기여는 대학의 의무이기도 하다"며 "군부대를 찾아가 장병들에게 심리상담을 해주고 기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야간수업을 하는 등 우리 대학이 지역사회와 주민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끝으로 김 총장은 대학진학을 앞둔 청소년들에게 "대학 진학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꿈'에 기초해 미래에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며 "대학에 진학하는 것, 직업을 얻는 것이 인생 전부는 아니며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면서 진정한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앞으로 사회적인 흐름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글·사진/최재훈(양주)기자 cjh@kyeongin.com■김홍용 총장은?▲ 경희대 의대 의학박사▲ 前 길병원·이화여대 병원 의사▲ 前 예일대 파견교수, 전북대 의대교수▲ 서정대 총장(2003년~현재)김홍용 서정대학교 총장은 국립대학교 전임 교수가 보장된 의사생활을 포기하고 사립대학 경영자로 인생 진로를 전환했다. 김 총장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가장 큰 목표"라고 강조했다.

2017-01-10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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