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브리지&人

 

[아트브리지 플러스·20]그대들의 수집벽, 사람과 문화를 잇다

노트북에 새로 만든 '아트브리지' 폴더 안에 33개의 파일이 담겼다. 농부들이 들녘에서 가을걷이를 하듯 올 한해 써낸 기사를 한 곳에 모으니 4계절의 흐름과 함께 그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트브리지 人'에서 '플러스'까지전국 미술관과 박물관 30곳 소개사립 뮤지엄의 '가치' 성찰한 시간열정 담긴 수집품 보며 미래 발견경인일보 창간 52주년 연중기획 '아트브리지' 시리즈는 지난 1월 26일 용인 이영미술관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6월부터는 '아트브리지&人'에서 '아트브리지 플러스'로 이름을 바꿔 20회를 약속하고 다시 시작했다. 올 한해 경기도, 인천지역뿐 아니라 서울, 강원도, 제주도까지 전국의 사립미술관과 박물관 서른곳을 소개했다. 도내에서는 우리나라 사립뮤지엄정책에 대한 쓴소리가 많이 들려 안타까웠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그나마 경기도가 가장 잘 하고 있다는 칭찬이 들려 다행스러웠다.1년동안 뮤지엄 서른곳을 방문하는 일은 적지않은 끈기와 노력을 필요로 했다. 경기도에 등록된 사립뮤지엄만 120여곳. 등록되지 않은 곳까지 포함해 취재할 뮤지엄을 선정하고 설립자를 만나고 글로 옮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한 사람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기사 한 줄로 요약해야 할 때, 수십 수백개의 빛나는 유물 중에서 딱 2~3점을 골라 소개해야 할 때, 가는 곳마다 관장들이 똑같은 고민을 하소연할 때는 고민이 깊어졌고, 펜은 지면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도는 때가 많았다.그러나 이 서른곳으로 충분하다고는 할 수는 없다. 반드시 취재하겠노라 마음먹었던 곳 중에서도 전시회 준비로 바빠서, 뮤지엄 공사, 이전 하느라, 관장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등등의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한 곳이 여럿이다. 또한 규모가 너무 작거나, 유물이 너무 적거나, 혹은 꽁꽁 숨어있어 취재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사립뮤지엄으로서 큰 가치를 지닌 곳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한여름 무더위를 견디고, 늦여름의 비바람을 뚫고 다니며 끝까지 연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방문하는 뮤지엄마다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유물들과, 유물마다 스며있는 사연들, 그리고 우리나라 사립박물관의 희망을 직접 보고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아트브리지는 주변에 숨어있는 사립뮤지엄과 설립·운영자를 찾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중반 이후에는 이에 더해 사립뮤지엄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 보이며 희망찾기에 나섰다. 초기에 방문했던 뮤지엄 관장들에게서는 '좋아하긴 하지만 이제는 유물이 웬수같다', '주변에서 정신나갔다는 소리 많이 들었다', '나 죽고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등의 탄식 섞인 말들이 크게 들리더니, 연재가 이어질수록 사립뮤지엄이 우리 문화예술 진흥에 기여한 공로와 앞으로의 역할, 세대를 이어 발전을 계속하기위한 움직임에 더 주목하게 됐다. 지난주 게재된 좌담회를 통해 한번 더 우리 사립뮤지엄의 문제점과 앞으로 다가올 여러가지 가능성들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다. 경인일보가 가을걷이를 마친 저장고에는 서른개의 알토란 같은 대한민국 사립뮤지엄이 담겨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예술적, 교육적, 때로는 과학적 재산이다. 이들은 문화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국내 뮤지엄이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고, 앞으로 갈 길에 수많은 희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별자리이기도 하다. 아트브리지 시리즈는 숨어있는 보물섬 같은 뮤지엄을 발굴해 소개하는데서 시작해 뮤지엄의 사회·문화적 기능을 알리고 역할을 공고히 하고자하는 노력으로 마무리 됐다. 아트브리지의 주인공들 서른곳에 담긴 이야기가 밑천이 돼 사립뮤지엄이 해마다 더욱 튼튼하고 멋지게 성장해가기를 바라며 아트브리지 연재를 마친다.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11-22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9]좌담회 - 한국 사립뮤지엄을 이야기하다

이번 아트브리지플러스는 뮤지엄을 찾아가는 대신 반가운 손님들을 맞이했다. 우리나라 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의 현재를 꿰뚫고 있는 이 손님들은 그동안의 연재를 통해 드러난 사립뮤지엄의 실상을 되짚어보고 발전적 미래를 위한 제언을 하고자 지난 1일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경기문화재단 회의실로 모였다.사립뮤지엄에 관해서라면 서로 속사정까지 잘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 속시원히 얘기나 해보자고 만든 자리이건만, 손님들은 한국 사립뮤지엄 주인으로서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며 일 분, 일 초를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주었다.사립뮤지엄에 관해서라면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하계훈 교수가 좌장을 맡아 좌담회를 이끌었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 부회장인 안연민 한국미술관장, 한국사립박물관협회 부회장인 김형구 등잔박물관장,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이 아트브리지와 인연으로 좌담회에 참석했고, 경기도청 문화예술과에서 사립뮤지엄 관련업무를 담당하는 김선미 주무관이 함께 자리해 정책입안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현 재 ] 를 말하다새로 생겨나는 박물관에 비해 미술관수 현저히 적어 -안연민행정 지원만으로 꾸려가기 힘든 문화시설만의 현실 -김이환[ 문 제 ] 를 말하다'비영리' 제한 때문 수익창출 창구 좁아 방법 모색 -안연민국공립시설처럼 무료입장이라는 인식 바로잡혀야 -김이환[ 미 래 ] 를 말하다문화의식 높은 국민 분석 전략적으로 발길 잡아야 -하계훈공사립 불문 관람객 소수 젊은층 늘어 전망은 밝아 -김선미1세대 설립자 10년후 문닫을 상황 이어갈 장치 필요 -김형구■ 한국 사립뮤지엄의 현재하계훈 교수의 "눈치볼 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되, 너무 절절한 호소는 하지 말자"는 말에 모두 한바탕 웃으며 좌담회가 시작됐다. 역시 화두는 현재의 사립뮤지엄의 실상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처음 운을 뗀 안연민 관장은 "미술관 입장에서는 미술관 수가 현저히 적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한다"며 "지자체에서도 미술관보다 박물관을 쉽게 접근하고 건립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좋은 미술관이 더 많이 생기길 바란다"고 말했다.이에 김형구 관장은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이 만들어진 후 박물관이 많이 생겼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10년쯤 지나고 1세대 설립자들이 대부분 70~80대가 되면 더 끌고 나가지 못해 문을 닫는 곳이 굉장히 많을거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모가 좋아서 한 일이니 자식들은 이어서 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생활비라도 나오면 몰라도, 더군다나 시골에서 박물관하겠다고 나서는 사위나 며느리는 없다"며 현실적인 문제를 드러내 보였다.김이환 관장은 "미술관 해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같이 첫 질문이 '지원은 얼마나 받을 수 있습니까'다"라며 "행정당국의 지원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정도는 아니고, 지원만으로는 잘 될 수 없는 문화시설의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지자체에 문화시설이 많은게 좋으니 정책적으로 권장하다 우후죽순으로 늘어나자 행정당국도 박물관 미술관을 건사하기 힘들어진 상황이니 설립조건을 변경하거나 인증제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정책과 현실사이의 틈을 짚어보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김선미 주무관에 옮겨졌다. 그는 "10년 후 뮤지엄의 숫자가 줄어들것이라는 염려는 인정하지만 현재 경기도내 사립뮤지엄은 연간 10곳 이상 증가하고 있고, 뮤지엄의 설립·운영의 세대가 바뀌고 있는 최근에 등록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뮤지엄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며 "수가 줄어드는 것은 향후 경영, 운영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마케팅 등 생존 방법에 적응하는 운영자와 고전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운영자의 경쟁체계가 돼가는 분위기"라고 현장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누적된 문제하계훈 교수는 "현황에 대한 인식은 공유를 하고 있고, 미래에 대해서는 현장과 행정이 시각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결국은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경영혁신이 관건인데, 아이디어가 중요할 것 같다"며 다음 논의를 이어갔다. 안연민 관장은 "지금은 사설뮤지엄에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부분이 입장료, 아트숍 정도인데 '비영리'라는 것에서 비롯되는 제한을 풀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직접적인 수익 창출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김형구 관장이 "고급외제차 타고 온 사람이 관람료 2천원 받는다고 그냥 돌아간다"며 뮤지엄에 대한 관람객의 그릇된 태도를 지적하자 김이환 관장이 "국공립을 무료로 운영하니 박물관은 당연히 공짜인 줄 아는데 이는 바로잡아야 한다"며 이어받았다.하 교수는 "'우리 박물관에 올해 몇 만명이 방문했다'이런 데이터가 있으면 홍보도 편하고 평가지표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으니 그런게 아닌가"라며 정부의 입장을 물었다.김선미 주무관은 "국공립이 무료로 입장하면 사립은 어려움이 있으겠지만 국공립은 나름의 기능과 역할이 있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기준에서 정책을 세우는 것이며 관람객이 많이 오지 않는 것은 공사립 뮤지엄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공립을 떠나 관람객 유치를 위해서는 질적인 발전을 꾀해야 하고, 전시 증가나 교육프로그램 업그레이드를 통해 재방문율을 높이면서 존재를 알리지 않으면 곧 존재의 의미가 미미해져 운영경비부담은 점점 커질것"이라며 "사립뮤지엄의 풍부한 아이디어들이 만나면서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가올 의제가장 논의에 힘이 실린 주제는 역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하 교수는 "외국에 다녀보면 우리 국민들의 문화의식이 모자란 것 같지는 않은데, 뮤지엄으로 이끄는 전략은 부족한 것 같다"며 "협회 차원의 전략 개발과 회원사 참여 유도 등의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는 제안을 던졌다. 이에 안연민 관장은 "최근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세미나는 그에 근접해 강좌를 열었었다"며 "문화전문가가 아니라 심리학자의 분석력을 통해 일종의 소비심리 만들기를 고민하는 등 전략적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선미 주무관은 "예전보다 젊은층도 많이 관람하고 스마트폰을 통한 정보공유가 빠르니 그런 부분에서는 우리가 전망이 밝다고 본다"면서도 "그러나 외국 관람객들과 우리 관람객을 비교하면 서구인들은 천천히 관람을 즐기는 반면 일본이나 한국은 걸어가는 속도와 감상하는 속도가 같을 정도로 전시 공간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다"며 풀어놓은 것을 많이 가져갈 수 있게 하는 전략과 분석의 필요성을 언급했다.경기도의 사립뮤지엄 지원 사업에 관한 바람도 빠지지 않았다. 김이환 관장은 "지원정책도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만족도나 방법에 문제가 있는 지원은 환영받지 못한다"며 "올해 시작한 맞춤지원은 심화시키면 좋겠다"고 청했다. 김 주무관은 "관은 공급자와 수요자의 중간에 서서 양쪽 목소리를 다 듣는데 아직 사립은 개인 재산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기 때문에 문화향유기회 증대보다는 사유재산 증식으로 보는 시각도 있어 공평한 틀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며 "현장의 소리를 수용해 매년 개선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마지막으로 하 교수는 "뮤지엄의 승계를 위해서 제도 마련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안정적 세대교체에 대한 논의를 이끌었다. 김형구 관장은 "나이가 들면 가는 건 틀림없으니 한번은 액션이 필요한데, 좋은 전례도 찾기 어렵고 제도도 없으니 난감한 문제"라며 "승계시 세제 혜택과 법인화 등 귀한 유물들과 시설을 지키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이환 관장은 "뮤지엄의 특성에 맞는 특수재단을 설립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거들었다. 김선미 주무관은 "2세대가 뮤지엄을 물려받았을 때 1세대와 같은 열정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니 국가나 지자체 혹은 유사기관에 기증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며 "협회 내부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수집한 유물이 분산되지 않을 방법을 논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 교수는 "문화정책뿐 아니라 기획재정, 국세청 등 여러 기관들이 관련된 내용이니 만큼 충분한 논의와 아이디어가 모여 좋은 방법을 찾도록 노력하자"고 정리했다.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11-15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8]제주 아프리카박물관

아트브리지플러스의 마지막 방문지는 아주 먼 곳이다. 제주도에서 아프리카를 만나기. 입동을 얼마 남기지 않은 11월 초 제주도의 이국적인 야자수와 뜨거운 태양은 아프리카와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와의 멀고도 먼 정서적, 문화적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류도 늘고, 항공기 직항로가 열리며 여행객도 늘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는 '검은 원주민들이 문명을 등지고 사는 곳' 수준에 머물러있다. 제주도에서 아프리카를 만나는 것은 우리나라 유일한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지구 유일한 희망의 땅을 만나는 것이었다.父子, 대를 이어 대륙 유물들 모아관장인 아버지가 짓고 아들이 운영타문화 포용력 아직은 부족한 현실원시문명 이전 '가능성' 뿌리내린곳섬에 박물관 난립 관광자원 질 하락■ 박물관동글동글 인상 좋은 한성빈 부관장이 박물관의 유물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아프리카의 유물들을 보려면 우리가 아는 미술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0세기에 이 작품은 '우지마 운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을의 불특정 다수 민속공예가들이 제작해…." 아, 모르겠다. 우지마 운동이 뭔지, 흑단나무로 제작된 2m높이의 조각품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한 부관장의 깨알같은 설명이 외계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한 부관장도 외계인처럼 느껴진다. 그는 어디서 저런걸 다 배웠을까. 아프리카박물관의 한종훈 관장은 그의 아버지다. 건축업에 종사한 한 그는 수집 활동을 좋아했다. 카메라도 모으고 시계, DVD도 모았지만 가장 많은 애정을 쏟은 수집품은 아프리카의 유물들이다. 그래서 한 부관장은 어렸을때부터 아프리카의 공예품, 미술품,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여러 물품들을 보고 자랐다.건축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대학시절 실내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리고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아프리카학을 공부했다. 아, 미국에서 배웠구나…. 우리나라에는 아프리카를 가르치는 곳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그는 30대 중반에 귀국해 야심차게 서울 대학로에 아프리카 박물관을 오픈했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은 유물의 수보다 적었다. 다행히 부업으로 하던 식당에서 돈을 번 그는 박물관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다시 공부를 하러 가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그때 은퇴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살던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자신의 재산과 재능, 열정을 모두 쏟아부어 박물관을 지었다. 아들은 실내 인테리어와 유물 전시, 학예 업무를 맡았다. 기가막힌 조합이다. 그런데 의외로 두 사람은 대화를 잘 하지 않는단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걸까. 어쨌든 부자는 2006년 건물도 유물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나란히 앉아 일하게 됐다.■ 아프리카한 부관장은 "10년전에 비해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의 관람수준은 성숙했지만 타문화에 대한 포용력은 많이 부족하다"며 "제3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커졌어도 인종차별의식은 여전히 강하다"는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꼭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고,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는 식인풍속에 관한 학설이 생기기도 했는데, 전쟁에서 적을 겁주기 위해 인육을 먹는 경우는 있었어도 배를 채우기위해 인간을 먹는 문화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흥미위주로 왜곡된 사례중 하나"라고 설명했다.어릴적부터 아프리카의 문화자원을 자연스레 접하며 성장한 탓도 있겠지만 여러차례 방문하며 직접 보고 느낀 그는 아프리카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를 '인류가 가진 마지막 희망의 땅'이라고 여기는 한 부관장은 "자원의 보고로서 경제적 가치도 있지만 문화적 희망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며 "아프리카의 역사와 자연, 언어를 연구하면 다윈의 고리가 풀리고 통합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역시 외계어처럼 느껴졌지만 "내 세대에 아프리카 박물관이 없어지면 이제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박물관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아프리카는 국가나 대륙의 개념을 넘어선 특별한 세계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것을 입증하듯, 그는 살림하기 빠듯한 월급을 받는 부관장 신세임에도 박물관 수익의 일부를 떼어 아프리카 후원에 쓰고있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골라서 사온 물건을 파는 아트숍 수입 중 일부도 꾸준히 모아 아프리카에 결핵병동을 세웠고, 학교도 건설중이다. 희망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겸손이 아스라이 스며있다.■ 제주도제주도에는 80여개의 박물관이 있다. 우리나라 1등 관광지 답게 박물관 수도 많고 관람객도 많다. 박물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니 시너지효과도 톡톡하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듯, 제주도에는 박물관을 둘러싼 문제들도 적지않다. 제주도박물관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는 한 부관장은 "같은 테마의 박물관이 11개까지 생기기도 했다"며 "박물관 난립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아류 박물관을 지어 관광객의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비즈니스 윤리에도 벗어나고 관광자원의 일부인 박물관의 질적 하락을 초래하고 있다"며 "협회와 도의 자정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인터뷰를 마친 한 부관장은 급히 1층 아트숍으로 돌아갔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 그의 아내와 아들 한홍승주(4)군이 박물관에 왔다. 한 부관장과 똑같이 생긴 어린 아들이 그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의 유물을 보며 자라고 있다. 그를 보니 희망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포동 1833/064-738-6565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후원

2012-11-08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7]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카메라, 옹기, 악기, 민화 등 사립박물관을 채우는 유물이 다채롭듯, 그 형태도 다양하다. 국·공립만큼 번듯한 모양새는 없어도 개인의 열정이 담긴 사립박물관은 가정집에 자리잡기도 하고, 기업체의 공간 한 편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배움의 요람인 학교 안에도 사립박물관은 존재한다.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 맨 위층에 들어선 '혜정박물관'은 고지도 수집가이자 연구가인 김혜정 관장이 평생 모은 유물을 품고 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암호가 늘어선 것 같기도 한 고지도들은 혜정박물관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오래된 지도들과 40년 동고동락한 김혜정 관장프랑스 옛 지도에 반해 수집의 길 / 몇만점의 자료 통크게 기부아름다움과 과학이 접목된 유물 / 우리를 지키는 문화이자 힘■ 지도에 꽂히다김 관장은 "지도는 처음에는 보는 것이지만 보고 나면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는 자신의 '지도론'을 이야기했다. 그러고보니 지도를 보는 김 관장의 눈빛이 남다르다. 그저 종이의 표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도 안의 세계를 관찰하듯 깊고 날카롭다. 서양화 수집에 취미가 있던 김 관장은 옛날 프랑스 지도 한 점과 마주친 뒤 40년동안 줄곧 고지도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그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을만큼 서양의 고지도는 예술성이 뛰어나다. 지금의 지도처럼 산맥과 도로 위에 지명이 빼곡히 적힌 지극히 사실적인 지도가 아니라, 아직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고지도는 수집하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여기에 김 관장의 남다른 애정과 호기심이 더해져 지도에 나온 글씨 한자, 그림 하나까지 읽고 연구하다보니 그의 집은 고지도가 하나 늘면 그걸 연구하기 위한 책이 여러권 달려 오고, 그와 관계된 지도를 더 찾아 구하기를 반복하며 쌓인 고지도로 가득 찼다.김 관장은 박물관을 열기 전에 이 유물들을 제주도에 보관했었다. 그가 30대부터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재활시설인 '혜정원' 가까이에 수장고를 마련,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유물을 보관했다. 그러던 중 지금은 돌아가신 경희대 설립자의 제안으로 지금 자리에 박물관을 짓고 유물을 옮겼다. 바닷바람에 혹여 유물이 상할까 염려했던 마음을 제주도에 남겨두고 김 관장은 지난 2004년 그의 고지도들을 '혜정박물관'에 전시했다.■ 학자의 자격김 관장조차 유물의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고지도만 있는게 아니라 관련 서적과 자료만 2만점이 넘는단다. 아직 정리가 안된 자료를 합하면 7만~8만점이고 이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을 지불하고 그 많은 유물을 수집한 것도 놀라운데 그걸 통크게 기부했다니, 마음의 갈등이 있지는 않았을까 싶었지만 김 관장은 "재산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연구를 위한 자료들이기에 기증할 수 있었다"고 딱부러지게 말했다. 그는 "책이 열 권, 백 권이면 내것이지만, 천 권, 만 권이면 개인의 욕심으로 소유하거나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장사꾼이 아니라 학자라면 수집의 목적은 연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자는 연구 사료로서 유물을 소장하고 보존해야 한다"며 "유물의 개념은 바로 이런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지도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연구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유물과 사료를 수집했고, 충분한 연구를 이루었으니 더는 재산적 가치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문화재벌'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재벌'이라는 단어가 아주 오랜만에 멋이 나게 쓰인 듯하다.■ 대학박물관11년째 대학교 안에서 박물관을 운영하는 김 관장은 확실히 지금까지 만난 사립박물관 관장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다른 박물관들처럼 건물 짓는데 수억 돈을 들이거나 운영비 적자로 은행빚까지 져야하는건 아니지만, 외부 전시할 비용을 마련하느라 김 관장은 '거지노릇'을 자처한단다. 전시후원자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는 일이 가장 바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김 관장이 외부 전시를 굳이 기획하는 것은 대학의 문지방이 높아 정작 지역 주민들은 잘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외부기관이나 외국에서 학교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꼭 이곳을 들러가지만 일반 관람객은 적어서 아쉽다"며 "지도를 더욱 알리기 위해 세계고지도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그의 연구실에 걸린 세계고지도박물관의 조감도는 둥근 지구의 모양이다. 둥근 건물안에 지도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랜전 일이지만 잡힐듯 하면서도 잘 잡히지 않는 꿈이란다. 이것 말고도 지도학과를 만들고, 문화재단을 설립해 지도 연구자를 키워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김 관장이 이처럼 지도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 노력하는 것은 지도가 '기초문화'라는 믿음때문이다. 그는 "관광길잡이로서의 기능만 있는게 아니라 군사, 경영, 유통 등 세상만사 모든 것과 연결돼있다"며 "지도는 곧 우리를 지키는 힘"이라고 말했다.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표시된 일본 지도 여러점이 전시돼 있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그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고지도 수집에서 출발해 40년동안 한 가지 연구에 몰두한 김 관장은 "옛날지도는 예술이고 현재의 지도는 과학"이라며 "고로 지도는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명쾌한 결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하는 김 관장의 새로운 꿈들이 실현됐을 때, 미래 우리나라의 지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1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 4층/(031)201-2011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10-31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6]강원도 영월 조선민화박물관

잭슨 폴락의 거대한 작품 앞에서 위축되거나, 피카소가 그린 기형(?)의 여인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이라도 한폭의 우리 민화 앞에서는 '아하'하며 편안히 감상할 수 있게 마련이다. 내가 사는 곳과 똑같이 닮아있는 장거리 풍경이 담긴 그림은 어려울 것이 없고 물고기 머리가 해를 향하고 있는 조양약리도는 등용문이라는 꿈에 한걸음 가까워진 듯한 기쁨을 준다. 그것이 우리 조상들이 민화를 그린 이유다. 민화의 매력에 빠져 강원도 영월의 산골마을에 자리잡고 사는 오석환 관장은 화를 막고 복을 부른다는 민화 4천여점을 곁에 두고 살아서인지, 유독 얼굴이 맑아보였다.친근하고 맑은 기운 내뿜는 우리그림관람객 원할때까지 눈높이 맞춘 해설건강 악화로 술 못먹자 빠지게된 취미공직까지 그만두고 '꿈꾸는 삶' 실현"박물관 고을로서 노력 더 기울여야"■ 조선의 민화오 관장은 우리 민화가 오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교에서 민화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민화를 '작자를 알수 없고 해학과 풍자가 담긴 서민의 그림'이라고 알고 있지만 '모란도'는 왕비의 방을 장식했고, 공부하는 선비들은 조양약리도를 방에 걸어놓고 급제를 다짐했다"고 설명했다.그는 또한 "오방색을 기본으로 한 강렬한 채색이 눈길을 끌기도 하지만 좋은 것을 불러들이고 나쁜 것을 쫓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다"며 민화의 매력을 어필했다.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오 관장이 아니더라도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은 해설사의 재미난 민화 이야기를 통해 민화를 재발견하게 된다. '봉황도' 앞에서 해설사 하는 말이 "봉황은 암수가 같이 있어야 봉황"이라며 "봉은 수컷, 황은 암컷인데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봉잡았다'하면 남편이 그만큼 마음에 든다는 것"이라고 했다.이어 "그러나 살다보면 꿈을 깨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법. 그래서 '봉잡은 줄 알았는데 말짱 황이더라'"라는 말이 나왔는다는 설명과 함께 "이는 남성우월주의가 숨어있는 말"이라고 덧붙였다.'신선도'중 복숭아나무를 두고는 "복숭아는 꽃피는 데 3천년, 열매 맺는데 3천년, 익는데 3천년이 걸리니 신선들만 먹고 오래 살았다"며 "인간 중에 유일하게 이 복숭아를 먹은 이가 있는데 바로 '동방삭'이란다. 이 동방삭이가 복숭아를 먹고 3천갑자, 즉 18만년을 살았다며 "'십팔'이라는 욕이 원래는 욕이 아니었다"면서도 "이 고달픈 세상을 18만년 살라는건 어찌보면 욕일 수도 있으니 쓰면 안된다"는 당부도 곁들인다. 그야말로 그림속에 이야기가 '살아있다'.■ 무릉도원의 박물관젊은 시절 공무원으로 일하던 오 관장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건강이 나빠졌다. 제발 술 좀 끊어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금주를 하긴 했는데, 술을 안먹으니 할 일이 없더란다. 취미 삼아 이런저런 소일을 하다 민화를 만났다. 꽂히면 푹 빠지는 성격의 오 관장은 민화에 푹빠졌고 더이상 공무원으로 일 할 마음이 없어졌다. 마침 지인과 우연히 놀러갔던 영월 미사리골에 붉은 산딸기가 흐드러지게 열린 것을 보고 '여기가 무릉도원이구나!'싶었다. "한 번 사는거 후회하지 않게 살고 싶으니 일을 그만 두고 영월로 가서 살자"는 그의 청을 이번에는 아내가 들어주었다. 강원도 영월하고도 산골짜기에 박물관을 지으면서 그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전시해 두면 와서 보는 사람들도 나처럼 좋아할 것이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은 그때 생각이 순수한게 아니라 순진해도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안다.산속에 외지인이 박물관을 짓겠다고 하니 순박한 군청 직원들도 대번에 땅투기를 의심했다. 산골에서 일하겠다는 학예사도 없었다. 수입은 더더욱 없었다. 살 궁리끝에 오 관장은 맞춤형 해설 서비스를 제공했다. 어른,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해설 방법과 내용을 달리했고 관람객이 원하는 시간만큼 해설을 해줬다. 그는 "길게는 4시간 반까지 해설을 해준 적이 있다"며 "해설과 함께 관람객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기념품을 개발해 판매도 늘었다"며 13년 박물관 운영자로서의 수완을 밝혔다.■ 박물관고을영월은 '박물관 고을'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5년 정부가 낙후된 지자체를 대상으로 신활력사업을 통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을 때 당시 영월군수는 박물관고을이라는 문화사업을 추진했다. 다른 지역 대부분이 고장의 특산품을 활용해 사업을 진행한 데 비하면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2008년 영월군 전체가 박물관 특구로 지정됐고, 박물관 설립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폐교를 무상임대해 활용하도록 했다. 수장고 건립 비용도 지원했다. 덕분에 지금은 인구 4만이 조금 넘는 작은 군에 박물관이 자그마치 24개, 한해 박물관 관람객이 150만명이다. 이중 17개가 사립박물관이고 사립박물관 관람객만 따져도 40만명이 다녀갔다.그러나 오 관장은 아직 성패를 논하기엔 이르다고 말했다. 그는 "숫자는 늘었지만 시설과 경영 상황이 열악한 곳이 많다"며 "거짓없는 참유물은 기본이고 각각의 박물관을 특성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진짜 박물관 고을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김삿갓로 432의10(김삿갓 계곡 내)/(033)375-6100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후원

2012-10-17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5]서울 사비나미술관

머리카락 한 올 놓치지 않고 귀까지 덮어 묶은 두건이 그의 하얀 얼굴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마른 체격에 단정한 몸가짐으로 손님을 맞는 그는 얼핏 보아서는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와 닮았다. 그러나 붉게 칠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는 미술계를 종횡무진하며 쌓아온 내공이 느껴진다.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만난 (사)한국사립미술관협회 이명옥 회장은 압축적이면서도 신랄하게 한국미술계의 맥을 짚어냈다.다른 분야와 미술의 융·복합 기획 강점정체성 살리며 공공성도 지키려고 노력대중 중심·교육적 역할의 중요성 강조협회 만들고 예술계 전반 살뜰히 챙겨와미술관 법인 법제화해 공중분해 막아야■ 융·복합미술관사비나미술관은 미술계 안에서 정체성이 뚜렷하다. '융·복합 전시'를 주도한다는 점이다. 2002년 개관할 때부터, 더 길게는 1996년 기획전문 갤러리를 오픈했을 때부터 이 회장은 '쎈'기획전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개관 기념전 '1996 인간의 해석'을 시작으로 '키스전' '이발소명화전' 등, 주제전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로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여름기획전으로는 인간의 뇌를 예술과 결합한 'BRAIN:뇌안의 나'를 진행중이다. 전시작품들은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좌뇌와 우뇌가 예술이라는 하나의 지향점을 두고 작동했을때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설명한다. '완전우뇌'공간에서 '좌우뇌'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하나의 주제를 든 기획전이라는 사실을 잊게 될만큼 작품들은 극적 반전을 이룬다. 아주 단순한 형태에 강렬한 색채를 입힌 회화에서 복잡한 구조를 가진 설미치술까지, 작가의 뇌성향에 따라 어떤 작품이 나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관람객이 미술관에서 자신의 뇌 성향을 테스트해볼 수도 있어 인기가 높다. '융·복합'이라는 미술관의 정체성과 맞아떨어지면서도 공공의 흥미를 유발하고 교육적 효과도 수반하는 전시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술계의 콘텐츠 킬러이 회장의 미술관은 융·복합이라는 뚜렷한 하나의 정체성을 추구하지만 관찰대상을 이 회장으로 옮기면, 눈길끄는 경력이 여러개다. '예술계의 콘텐츠 킬러'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명함을 간소하게 꾸몄지만 미술관 관장과 협회 회장직에 더해 '과학문화융합포럼공동대표'까지 3개의 직함이 새겨져있다. 이밖에도 미술학부 교수로 활동하며 CEO,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강의에 출강하고 있다. 2006년 대한민국과학문화상 도서부문을 수상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도 미술에 국한되지 않고 명화에 담겨진 경제적 요소를 주제로 한 책이 있는가 하면 명화에 숨어있는 수학과 과학을 들춰보였다.미술계 안팎을 넘나들며 예술계 전반을 살뜰히 챙기고 있는 이 회장은 지난 2005년 자신의 손으로 협회를 만들었다. 그는 "우리나라 전체 미술관의 76%가 사립이니 한국현대미술에 사립미술관이 그만큼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것"이라며 사립미술관에 대한 정부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립'이니 궁극적으로는 자생력을 가져야 하는게 맞지만 성장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은 지원이 필요하다"며 "지금처럼 지원이 1만큼 늘면 행정업무 등으로 6~7만큼 일이 늘어나는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사립미술관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서울에서 미술관을 운영하는 이 회장은 경기도의 사립미술관장들을 부러워하는 눈치다. 그는 "문화예술정책에 관해서는 경기도가 롤모델"이라며 "앞서 나가는 경기도의 정책을 바탕으로 다른 시도에서도 발전적인 정책을 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술관 살리기인사동에서 지금의 대안공간과 성격이 비슷한 '기획전문 갤러리'를 운영할 때 이 회장은 '내돈으로 내가 하는 일'이니 하고싶은 전시를 마음껏 했다. 그러나 '미술관'으로 등록한 이후에는 '똑같이 내 돈을 들여도 관객의 눈치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콘텐츠킬러라도 미술관 관장으로서 공공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관객 중심의 전시를 기획하고 교육, 연구기능에 충실하며 정체성도 유지하려니 보통 사명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사비나를 갤러리에서 미술관으로 전환하면서 이 회장은 '공공성'의 무게를 절실히 느꼈다. 협회를 만든 것도 그 무게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전국의 사립미술관을 네트워킹해 사립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운영자들에게 대중을 위한 교육적기능을 강조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제 1세대를 마무리 지어야하는 시점에 있는 사립미술관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방안을 찾고 있다. 그는 "사립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의 근간을 이루었지만 존립이 위태한 상황"이라며 "우리 문화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안이 적극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며 '뮤지엄 법인'의 법제화를 제안했다. 미술관의 특성을 고려한 법인을 설립하도록 법제화해야 사립미술관의 공중분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앞서 만난 여러 사립미술관 관장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이에 더해 우리나라 전체 미술관을 살리는 방법도 제시했다. 이 회장은 "국공립 뮤지엄을 만들 때 보기좋은 건물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립뮤지엄이 가진 노하우를 살려 콘텐츠를 충실히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문화정책은 지자체장의 자세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있는데, 합리적인 시스템을 마련해 이에 따라 정책이 운영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159 /(02)736-4371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후원

2012-10-10 민정주·김종택

[아트브리지 플러스·14]광명 충현박물관

그는 종부의 무거운 굴레를 머리에 이고 있으면서도 바지런하고, 또한 영리했다. 23살에 시집온 후 50년동안 그는 다른 종부들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영리한 그가 다른 종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종가를 단지 가문의 것이 아닌, 국가를 위한 시설로 환골탈태시켰다는 것이다. 종가의 가치가 잊혀져가고 있는 시대의 종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오리 이원익 종가의 13대 종부이자 충현박물관 관장, 그리고 한국사립박물관협회를 이끌고 있는 함금자(72) 회장을 만났다.오리대감 유품·살림살이 보존청렴 성품 관감당 등에 묻어나박물관 운영하는 유일한 종가집안 전통 국가를 위한 역할도시설 문화교육의 장이 되어야■ 종가박물관함 회장은 "종가가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춘 유일한 종가"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오리(梧里) 이원익 대감이 살던 관감당(觀感堂)은 왕이 신하에게 하사한 집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 왕이 내린 집치고는 아담한 규모의 5칸짜리 집은 청백리로 유명한 오리대감의 성품을 그대로 닮았다. 인조대왕은 신하에게 퇴직한 이원익이 어찌 살고있는지 보고오라 일렀다. 다녀온 신하는 "비가 새고 허리를 펴지 못하는 초가에 살고 있더라"고 고했다. 명신의 궁핍한 살림이 가슴아팠던 인조는 집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3번 거절했다. 그러자 인조는 "백성들 보고 배우라고 내리는 집이니 더이상 사양 말라"는 교지를 내렸고 오리대감은 이를 받들되 "그렇다면 5칸짜리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관감당 뒤쪽으로는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고, 효종 때 지은 충현서원의 터가 남아있다. 바람이 얼마나 시원하게 잘 드는지, 이름마저 바람으로 목욕을 한다는 '풍욕대(風浴坮)'를 지나서는 오리대감의 부모와 형제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함 회장은 "몇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소실된 종가가 많다"며 "충현박물관은 조건을 잘 갖춘 유일한 종가이면서 또한 박물관으로 관리, 보존되는 유일한 종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박물관 안에는 오리대감의 유품과 함께 종가의 살림들이 세월을 입고 기품있게 손님을 맞는다. 나뭇결이 지문처럼 느껴지는 목가구부터 여인들이 가마타고 먼길 갈 때 쓰던 가마요강, 안방마님이 쓰던 화로 등의 소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고모할머니가 함 회장의 수고를 덜어주기위해 선물했다는 스테인리스로 도금한 유기그릇을 소개하는 그의 표정에서 아득한 그리움이 스쳐지나갔다.■ 새시대의 종부함씨는 대학시절 기독교모임에서 배필을 만났다. 종가집 4대 독자인 남편은 일찍 부모님을 잃었지만 종가집 종손으로서의 기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교제한 지 2년이 지나 함 회장을 집으로 초대한 남편은 이미 결혼을 작정한듯 오리대감의 묘소에 함 회장을 데리고 갔다. 함 회장은 "친정어머니가 반대하셨지만 시집오기 전에는 종가의 무게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며 "그러나 막상 시집와서 몇 년은 너무 무거운 굴레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시부모님이 안계셔서 시집살이는 없었지만 가문의 전통을 지켜야한다는 의무감 자체가 짐이었다. 다락문을 열어보니 버들고리궤에 둘둘말린 한지 뭉치가 나왔다. 오리대감이 쓴 문서들이었지만 먼지와 쥐똥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지키고자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시대는 이미 변했고, 남편의 일과 자식의 교육때문에 종가에는 관리인을 두고 서울로 거쳐를 옮겼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아들 넷을 낳았고 그 중 셋을 의사로 키웠다. 정신없이 살다 종가를 돌보러 갔을 때 함 회장은 '아차!' 싶었다. 목가구며 그릇들이 하나 둘 씩 없어지고 있었다. 고가구와 골동품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장사치들이 종가를 드나들었고 관리인들은 물건을 팔아치웠다. 함 회장은 "뒤주에 그릇을 넣고 자물쇠를 채웠으니 괜찮겠지 했는데 경첩을 뜯고 그릇을 모두 빼서 팔았더라"며 "91년부터 유물관을 만들어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03년까지 유물관으로 관리하다 남편이 퇴직하면서 박물관 등록을 하고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박물관 운영을 위해 함 회장은 숙명여대에서 문화예술행정학을 공부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예순여섯이었다. 옆에서 공부하는 것을 지켜본 남편은 숙대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A+ 줄만하게 공부하더라"며 함 회장의 노력을 인정했다. ■ 박물관의 새기능박물관 운영을 위해 오리대감의 생애를 연구하며 숨겨진 유물을 발굴해내고,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함 회장은 내친 김에 한국사립박물관협회 회장 자리에 앉았다. 2009년 부임했을 때 협회는 국가지원 한 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함 회장은 "박물관의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인데 회원관들에게 어떤 지원도 해주지 못한다면 있으나마나 하다고 생각했다"며 "국가에 적극적으로 지원요청을 해 지난해 처음으로 에듀케이터 인력지원사업비를 지원받았다"며 그간의 성과를 설명했다. 박물관의 사회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함 회장은 교사자격증 소지자 등 교육학 전공자를 박물관 에듀케이터로 활용해 문화교육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충현박물관에서만도 역사, 효, 청렴, 애국 등 교육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며 "박물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공교육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문화와 인성교육이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주5일제 수업 시행과 맞물려 박물관 에듀케이터 사업에 대한 가정과 학교의 호응이 크다"며 "교사자격을 가진 인재를 고용하는 효과도 있으니 반드시 확대 발전시켜야 할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1085의 16/(02)898-0505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10-03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3]인천 강화 전원미술관

미술관에 물감 냄새 대신 시멘트 냄새가 가득하다. 미술관 1층 한가운데를 벽돌과 시멘트가 가로지르고 있다. 벽돌, 망치, 톱 등 공사 자재들을 피해 한쪽에 놓인 그림들이 다채롭다. 지극히 한국적인 수묵화 옆에 화려하게 채색된 일본풍 그림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중국현대미술과 닮은 작품이 자리잡았다. 높은 천장은 모자이크방식으로 수놓인 작품으로 채워졌다. 전원미술관 관장 유광상(64) 화백의 인생역정만큼이나 그의 그림은 변화무쌍하다. 그리고 그는 또한번의 변화를 위해 미술관에 새 벽을 세우고 있다.변화무쌍한 작품세계 전시 유광상 화백가난한 어린시절 미대 포기 일본 유학길화려했던 16년간 타국생활 접고 한국행마흔후반 꿈에 그리던 곳에 미술관 지어중국미술 연구중 끝없이 새로움에 도전■ 화려한 시절화가로서 그는 누구보다 화려한 스펙을 지녔다.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도 20대에 개인전을 열었고, 30대에는 청와대 전속 화가로 일하며 외교사절들에게 선물할 그림을 그렸다. 유학길을 떠난 일본에서는 외국인임에도 미술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한국에서는 50이 되기도 전에 생존하는 미술 작가로서는 국내 최초로 미술관 관장이 됐다. 10년 전 진출한 중국 미술시장에서도 그의 그림은 인기가 높다. 이만하면 '이룰 건 다 이뤘다'고 여길만도 한데 유 관장은 17년 운영한 미술관에서 외국작가 초청전을 열기위해 얼마 전 내부공사를 시작했다.그는 "당시 미술관 허가 심사를 위해 방문한 문화관광부 심사위원들이 3번 놀랐다"고 회상했다. 당시만해도 길은 대부분이 비포장도로인데다 전기가 안들어 오는 곳도 있었던 강화도에 있는 미술관이라니, 갤러리 수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다가 번듯한 규모에 한 번 놀라고, 가로 15×세로 10m의 벽면을 꽉 채운 5천호짜리 그림을 보고 두번 놀랐단다. 그리고 마지막 놀라운 점은 이런 미술관의 주인이 너무 젊다는 것이다. 유 관장은 "47살에 미술관을 지었는데 당시 그 나이면 작가치고는 '신진'이나 '예비'라는 말을 앞에 붙여야 하는 애송이였다"며 "관람객 중에서도 작품을 보고 '이 작가는 언제 돌아가셨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전두환 대통령 시절, 그의 그림실력을 알고있던 지인의 소개로 외무부에 소속돼 일할 때 그는 아예 표구사 옆에 화실을 두고 살았다. 그는 "밤 12시에 대통령 비서가 전화해서 내일 아침까지 그림을 가져오라고 하면 밤새 그려서 보내기도 했다"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이지만 내 그림은 20~30개국의 외교사절단의 손에 들려 외국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가난한 고향살이17년 전, 마흔일곱의 나이에 번듯한 미술관을 갖고 있으니 그가 재벌2세쯤은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유 관장이 미대 입시를 한창 준비하던 고교 3학년 5월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4년동안 병수발을 하느라 재산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대학다닌 사람보다 낫다'는 칭찬이 따라다녔다. 자신의 화풍을 구축하며 밥벌이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천재보다는 노력파에 더 가까웠던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일본에서 그는 크게 환영받았다. 여러 사업을 하며 큰 부를 쌓은 재일교포가 그의 그림에 반해 그를 전폭 지지했다. 덕분에 유학생이었음에도 그는 방 14칸짜리 저택에서 생활하며 미술공부와 작품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10년동안 그의 그림을 지켜본 일본의 한 미술관 관장이 그를 전격 고용했다. 일개 외국인 작가인 그에게 일본인 미술관장은 3년 일한 대가로 한국에 미술관을 지어주었다. 그것이 지금의 전원미술관이다.16년 일본에서 생활하며 공모전 등에서 상을 휩쓸고, 각종 매스컴에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던 그는 어느날 그 모든 일들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숙원하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힘들때마다 금의환향하리라는 희망에 기대 버텼었다"는 유 관장은 "다시 찾은 고향에서 처음 미술관을 열었을 때는 꿈을 꾸는 것처럼 좋았다"면서도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고향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다시 세계로유 관장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짐을 싸자 미술관 관장을 비롯해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다. 그는 "당시 미술관장이 한국에 가면 한국 최초의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승승장구하다 한국으로 돌아간 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담뱃갑에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처럼 된다며 말렸고, 그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며 미술작품을 대하는 한국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50억원을 들여 건물을 지은 사람이 찾아와 '그림을 기증하라'고 요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다 실수한 거 있으면 좀 얻읍시다'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림을 절대 사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예술품에 제 값을 지불하는 다른 나라의 문화 수준과 비교하면 더욱 실망스러웠다. 그림은 제값에 팔리지 않았고 미술관을 찾는 이들은 IMF 이후 연간 3천여명 수준에 머물렀다.실망도 잠시, 그는 중국으로 진출했고 다시 일본에서 전시회를 했다. 유 관장은 "내 작품이 중국에서는 한국보다 10배 비싸게도 팔린다"며 "중국미술계의 트렌드를 연구하고 작품을 하는 노력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유 관장은 아직도 매일 그림을 그리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고, 전원미술관에는 머지않아 외국인 작가의 작품이 전시될 것이다. 17년만에 처음 겪는 변화다. 그 변화가 어떤 결과의 출발점이 될지 기대된다. 인천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561, (032)-934-3560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9-19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2]양평 잔아문학박물관

어땠을까? 평생 넝마주이로 살다 아내에게 자신의 대표작 이름을 붙인 찻집하나 남기고 간 천상병 시인이 지금도 인사동 어딘가를 거닐고 있다면…. '감자'로 유명한 자연주의 작가 김동인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양평 잔아문학박물관에 가면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 천상병 시인의 결혼사진이 걸려있고, 김동인 작가의 얼굴을 꼭 닮은 테라코타(점토를 구워 만든 조각이나 건축 장식용 제품)가 오는 이를 반긴다. 60년전 발간된 김소월 시인의 책, 1955년 1월에 창간된 현대문학 창간호 등 오래된 책만이 지닐 수 있는 책 냄새와 수많은 문인들을 재현한 테라코타 작품의 흙내음은 한국현대문학과 역사를 함께하며 구수하게 펴져나간다. 그 안에서 문학정신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사는 잔아문학박물관 관장 김용만 작가를 만났다.■ 이 시대 최후의 바보소설가 김 관장은 올해 나이 일흔셋이지만 소설 시평 수필 등의 작품을 다섯곳에 연재하고 있다. 작품쓰는 데만 집중하려고 다니던 강의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았는데 연재문의가 끊이지 않아 난감하다. 그러니 2년 반 전 문을 연 박물관은 최대의 난제다. 조용한 박물관에 할 일이 수천가지다. '더 늙기전에 작품하나라도 더 써야하는데…'라며 조바심을 드러내는 그의 눈빛이 집필에 대한 열정으로 이글거린다. 49세에 등단해 이제 소설가 경력 25년 남짓. 아직 문학계에서는 청년인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눈빛이다.'잔아'는 그의 대표작 주인공 이름이다. 또한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김 관장은 "남을 잔(殘)에 아이 아(兒)를 써서 직역하면 '남은 아이'지만 의역하면 마지막 아이를 뜻한다"며 "가치관이 뒤바뀐 인터넷 시대에 존재론과 진리에 목맨 고전적 사고를 고수하는 마지막 존재"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 여순희씨가 '그냥 아이같은 사람'이라고 정리했다. 그도 문인이 되는 데만 목을 매며 살아온 과거 자신을 '바보'라고 하며 아내의 농을 인정하는 눈치다.지독히 가난했던 유년기를 버텨내고 형사 공무원이 된 그는 순전히 소설을 쓰기위해 10년만에 그만뒀다. 그 후 변변한 직장을 가진 적이 없고 아내와 무진 고생을 한 끝에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춘천옥'이라는 보쌈막국수집을 했는데 매출이 오늘 10만원이면 내일 20만원, 모레는 40만원으로 오를 정도"였다며 "아직까지 요식업계에서 그런 매출 상승곡선을 이룬 곳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돈버느라 버린 시간이 지금 생각해도 아깝다. "재산이 1만큼 모였을 때 그만두고 작품을 썼어야 하는데 2까지 번다고 10년을 더 버렸다"며 가슴을 친다. 그렇게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다 산 후 49살에 등단을 하고 비로소 대학을 다녔다. "인생 거꾸로 살았지."책냄새와 흙내음 지켜온 작가 김용만 관장사업 뒤로하고 늦깎이 등단 '일흔셋의 청춘' 열정 불태워아내가 만든 문인 테라코타와 함께 현대문학 역사 전시후손들 '소설가 꿈' 키우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싶어■ 사랑, 아! 잔인한 사랑김 관장은 그의 소설 '능수엄마'를 통해 '나는 아내를 500원 주고 샀다'고 고백(?)했다. 강원도 양구에서 정보형사 노릇을 하던 29살때 그는 군청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던 아내 여씨를 처음 만났다. 당시는 정규직원이 되려면 신원조회가 필수였다. 김 관장은 여씨의 신원조회 업무를 맡은 동료직원에게 당시 500원하던 막걸리 한 되를 사기로 하고 자신이 여씨를 신원조회했다. 그는 "그 때는 신원조회하면 혈액형까지 다 나와서 맞선을 따로 볼 필요도 없었다"며 자신의 수완을 새삼 흐뭇해했다. 여씨의 사정은 좀 다르다. 김 관장과 만난 지 2개월쯤 됐을 때 그가 갑자기 서울로 발령이 났다. 정미소집 셋째딸인 여씨의 부모님은 그를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19살 산골소녀였던 여씨는 '손만 잡아도 시집가야되는 줄 알고' 김씨를 따라 야반도주했다. 그뒤로 3년동안 친정에 가지 못했다. 밥 한번 지어본 적 없던 여씨가 '춘천옥'을 테이블 세개짜리 식당에서 2년만에 100개로 늘려가기까지의 고생이야 말해 무엇하랴.식당은 날로 번창하는데 김 관장은 아내에게 돌연 양평행을 선언했다.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펄쩍 뛸 일이지만 여씨는 19살때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따라나섰다. 그가 먼저 양평에 가서 자리를 잡았고 2년쯤 더 서울에 머물며 식당을 정리한 뒤 아내도 갔다. 춘천옥을 프랜차이즈화 하자는 제안이 쏟아졌던 때다.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었는데 그걸 마다한 이유가 '어느날 인생이 허무해져서'다. 양평에서 여씨는 테라코타를 시작했다.김 관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끈질기게 글을 썼다. 간혹 서재에서 나와 아내에게 물었다 "나 밥 먹었나?" 글쓰기 외 모든 것에 그는 장님이고 귀머거리였다. 그는 "글쓰기는 사랑인듯 신앙인듯 열병인듯 하면서도 아닌 것이 나를 평생을 따라다녔다"며 "문학과 가당치 않은 싸움을 하며 산 인생"이라고 말했다. 여씨가 한 마디 거든다. "운명이죠."■ 문학의 미래'미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고 여기는 그는 작가들 보는 눈이 까다롭다. 그런 김 관장에게 굳이 '예쁜 작가'를 꼽아달라고 졸랐더니 조심스레 '김연수 작가'라고 답했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어릴 적 꿈도 같고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단다. 어린아이들은 김 관장의 글 쓰는 손을 멈출 수 있게 하는 손님이다. 김 관장은 "아이들에게 문인들의 이름을 알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며 "대학생들도 정 책을 읽기 싫으면 서점에 가서 만지기라도 하면 반은 읽은 것"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김 관장이 박물관을 지은 이유다. 박물관 안팎의 살림을 돌보는 여씨는 50~60년 된 책들을 잘 보관하고 싶어한다. 그는 "국공립 박물관은 전문적인 보존처리를 한다는데 작은 사립박물관에서는 할 수가 없으니 방법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박물관이, 가치있는 사립박물관들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도록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영국은 사립박물관 설립자가 나라에 기증하면 최소한 3대는 유지되도록 법으로 정했다"며 "우리도 이제 사립박물관 수가 상당한데 이런 문화재산을 보호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부는 이제부터 박물관을 열심히 키워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남편은 언젠가 박물관에 놓일 걸작을 지을 것이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얼굴을 흙으로 빚을 것이다. 그리고 잔아문학박물관을 찾는 이중 누군가는 소설가의 꿈을 키우며 우리 문학은 끊임없이 성장할 것이다.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860의2/(031)771-8577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9-06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1]가평 가일미술관

태어난 이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평생. 일생을 멋지게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하거나 남을 초인적으로 도우며 살거나 장애를 딛고 일어서고 병을 이겨낸 이들을 우리는 멋진 삶을 살았다며 부러워한다. 누군가의 생을 멋지다!고 하는 칭송에는 '그는 틀림없이 행복했으리라'는 부러움이 담겨 있다. 오늘 주인공은 부러운 사람이다. 가난과 함께 일어서고 열정과 손잡고 긍정과 함께 살아온 가일미술관 강건국(68) 관장은 '행복한가?'라는 질문 앞에 한 점 의혹없이 당당하다.■ 나의 왕국가일미술관의 평면도를 보면 쪽배 한 척을 반으로 나눠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다. 강 관장은 미술관 지을 자리를 찾아 처음 가평을 방문했을 때 배를 타고 들어왔다. 도로도 나지 않은 외진 땅을 보고 그는 탄성을 내질렀다. '여기다!' IMF 직전인 1996년 당시 주변보다 땅값이 두 배는 비쌌고 주유소로 개발이 예정돼 있던 자리라 웃돈까지 얹어 주어야 했지만 그는 그 땅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 관장은 "10여년 동안 인천 강원도 등 곳곳으로 미술관 자리를 찾아다녔는데, 좋은 땅은 이미 많이 개발이 돼서 유원지나 모텔들이 차지하고 있더라"며 "풀 한 포기 없는 땅이었지만 내 눈에는 낙원으로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강 관장은 흙을 부어 땅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덤프트럭으로 4천300대. 마을 주민들은 재벌이거나 혹은 미쳤다고 생각했단다. 건축가로, 건축과 교수로 20년이 넘게 밥벌이를 한 그는 강바람에 지지 않을 내구성과 주변의 경관에 주눅들지 않을 디자인을 갖춘 미술관을 4년 동안 지었다. 미술관과 수장고 겸 기숙사, 100석 규모의 공연장, 그리고 자신의 작업실. 건축가 강 교수는 이곳에서 강 관장, 그리고 강 작가로 탈바꿈했다. 그는 "고등학교때까지 미술반에 있었는데 그때는 가난해서 재료 살 돈이 없어 남들 유화그릴 때 나는 수채화만 그려야했다"며 "돈벌이를 위해 건축과로 진학해 돈도 벌고 가정도 꾸렸지만 가슴 한쪽은 늘 그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말했다.그는 3개월 전 작업실을 미술관 건물 지하로 옮겼다. 원래 쓰던 작업실은 카페로 개조했다. 상명대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큰아들과 막내딸이 카페를 운영한다. 좌우 어느 쪽을 봐도 물이 흐르고 나무가 숨쉬는 카페의 전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이런 환경을 포기하고 옮겨간 지하 작업실이지만 미술도구는 물론이거니와 먹을거리와 각종 기자재를 수리할 때 쓰는 공구, 그리고 책과 그림, 음악CD 등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오전 7시부터 12시간 정도 작업실에 머문다는 강 관장은 "작업실은 홍차에 코냑을 타서 마시는, 유일한 호사를 부릴 수 있는 나의 왕국"이라고 자랑했다. ■ 행복완전체인터뷰하는 내내 강 관장의 입에서는 '싫다'는 소리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와중에 "직계가족만 15명"이라는 것은 세 번쯤 말했다. 그의 부모님은 이북에서 6·25 전에 월남했다. 그의 나이 6살때였다. 강 관장은 어머니와 누나, 남동생과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님은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세 남매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따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일어난 일 중 아내와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아 사위, 며느리에 6명의 손자까지 얻은 것이 가장 고마운 일인 모양이다. 가장 뿌듯한 일은 미술관을 지은 것이다. 잘나가던 그가 돌연 모든 일을 접고 가평행을 선언했을 때 아내가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그 속내를 헤아렸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남들보다 세 배 열심히 살았다"는 강 관장은 "10년 동안 토요일, 일요일이 없었다"며 "그렇게 산 사람들은 미련없이 다음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45세에 은퇴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쉰다섯살이 돼서야 일을 그만 둘 수 있었다. 오래 참았던 강 관장은 지금 보상이라도 받는 듯 신나게 살고 있다. 강 관장처럼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지금 생활에 완전히 만족한다"고 주저없이 말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 오래 보기부부가 미술관에 자녀들과 함께 와서는 엄마는 애들이랑 관람하러 들어가고 아빠는 밖에서 담배피고 있다. 강 관장이 다가가 왜 안 들어가냐고 물어보면 "그림에 취미가 없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강 관장은 그를 굳이 끌고 들어가 쫓아다니며 그림을 일일이 설명해 준다. 강 관장은 "그렇게 하면 다음에 반드시 함께 들어가게 돼 있다"며 "미술관에 오는 것은 예술교육이 아니라 인성교육"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자세를 잘 가르치면 인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림 앞에 서 있는 시간'을 강조하는 그는 "한국사람은 그림 보는 시간이 아주 짧다"며 "여행가이드들이 여행자들을 미술관에 내려주고 1시간 만에 보고 오라고 하는데, 일본은 반나절을 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림은 오래 보는 만큼 보이고 알고 싶어 하는 만큼 알게 된다"며 "굳이 미술관에 와서 곁눈질로 보며 슥 지나가는 것은 그린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고 잘라 말했다. 강 관장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러운 나라가 '오스트리아'란다. 동네마다 주말마다 저녁마다 음악회가 열리고 골목마다 미술관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매달 자신의 공연장에서 음악회를 열고 300점이 넘는 그림을 수집했고 1년에 몇 차례씩 기획전을 여는 미술관 관장님도 부러운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오늘이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말하는 강 관장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럽고 닮고 싶은 한평생일 것이다. 가평군 청평면 삼화리 609의 6/(031)584-4722 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08-22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0]파주 영집궁시박물관

그의 고향은 '장단역'근처다. DMZ 안에 있는 이 곳은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말로 더 유명한 증기기관차가 미군의 폭격을 당한 곳이다. 1·4후퇴 이후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고향이 이남에 있지만 갈 수 없어서일까. 북녘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그의 눈매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고향에서 가까운 파주에 자리를 잡고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 영집 유영기 관장을 만났다. 그의 눈에 서글픔이 배어있는 까닭은 비단 향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촉과 살로 만드는게 아니다그저 길고 가는 것에 깃과 촉을 달아 만드는 줄 알았던 화살의 구조가 꽤나 복잡하다. 화살 각부 명칭만도 14가지. 맨 앞의 촉부터 토고리, 상사, 상사목띠를 지나, 화살의 몸통도 부위가 나뉜다. 깃을 몸통과 연결하는 깃간띠는 도피(복숭아나무 껍질)로 만들고 깃이 매달린 깃간에는 이름을 쓰는 자리도 있다. 촉의 모양도 다양하다. 화살표 모양뿐 아니라 박으로 만든 곤봉모양의 촉, 표창같이 생긴 촉, 끝이 양쪽으로 벌어진 촉도 있다. 화살이 이정도니 활은 말할 것도 없다. 유 관장이 운영하는 영집 궁시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활과 화살을 비롯해 활쏘기에 쓰이던 다양한 물건들과 전통 무기, 외국의 다양한 활이 전시돼 있다. 그의 유물들은 종종 TV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다. 대형 신기전과 화차는 유 관장이 아들과 함께 수집하고, 연구하고, 복원한 것들이다. 무형문화재로서 전통 활과 화살을 제작, 전수하는데 열정을 다하는 유 관장이지만 "활쏘기를 하는 사람들조차 외국에서 들여온 양살을 전통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우리 활쏘기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박물관을 차려놨다"며 "재료를 구해서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역사와 전통, 가치를 알고 만드는 것과는 천지차이"라고 말했다. 활과 화살은 같은 옛것이어도 옹기처럼 생활용품이 아니고, 자기처럼 예술적 가치가 드높은 것도 아니어서 어떤 면에서는 박물관에 있는 것이 썩 잘 어울린다. 그러나 동이족이었던 우리의 전통문화도 함께 박제되는 것은 아닌지 하며 혼잣말을 하는 유 관장의 날숨에서는 불안과 불만이 새어나왔다.■ 좋은시절 다시 오려나초등학생 나이 즈음 심부름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60년이 다됐다. 물 떠와라, 숯 피워라, 대나무 가져와라 하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보고 다니기를 10여년. 그가 20대에 막 들어서 본격적으로 활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는 막상 배울 것도 없었다. 3대째 가업이니, 궁시 만드는 유전자가 생겼을만도 하다. 유 관장은 궁사들의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겪어보지 않았지만, 어느 옛날이야기보다도 신이 나는 궁사들의 과거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활을 쓸 사람이 오막살이라도 직접 와서 부탁할 정도로 대우받던 직업이었다"며 "활을 하루에 3개쯤 만들 수 있는데 활과 화살 한 벌을 팔면 쌀 한가마니에 쇠고기를 살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과거제도 있을 때는 무게 부피 폭 모두 똑같이 맞춰서 만들어야 했다"며 "한 개를 잘 만들기는 쉽지만 10개를 똑같이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 경국대전에는 '궁장(조선 시대에, 군기감의 궁전색에 속하여 활과 화살을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장인)', '시장'을 '시신(矢臣)', '궁인(弓人 )'으로 존칭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지금은 양살인 '카보살'이 들어오면서 소비처도 사라지고 전통화살에 대한 관심도 미미하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떨어졌으니 생계유지는 언감생심이다. 유 관장은 "다 사라지고 내 안의 긍지만 남아있다"며 "그래도 물 흐르듯 걸었던 길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가고 있다"며 손에 든 화살을 매만졌다.■ 아버지, 아들에게 전수하다유 관장은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정부 지원도 받는다.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누릴 것 같지만, 형편은 달랐다. 유 관장은 "정부에서 전수비로 한달에 130만원을 지원해주는데 이 돈으로 전수생을 두고 가르칠 수가 없다. 나이 많은 사람은 못 두게 한다. 그러니 누가 들어오겠나"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지금 그의 전수자는 아들이다. 직장 다니던 아들이 돌연 '살일 하겠다'고 나섰을때 유 관장은 뜯어 말렸다. 그러나 전수자를 찾을 수도 없는데다 가업을 잇겠다니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형편을 알면서도 아들을 가르쳤을 때는 정말 절박해서 그런것"이라면서도 "아들도 밤낮 보고 자라서 그런지 시켜보니 가르칠 것도 없더라"며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들은 시야를 넓혀 공구, 제작과정, 삼국, 가야, 전쟁, 과거, 훈련, 궁중 등을 망라해서 연구하고 책을 펴냈다. 아버지는 기능을, 아들은 학술을 담당하니 이처럼 흐뭇한 콤비가 또 있을까.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더 못마땅한 것은 80세가 되면 더이상 전수할 수 없고 무형문화재는 '명예직'이 된다는 것이다. 몇 년 후면 그 또한 활과 함께 박제가 되는 것이다. 유 관장은 "몇년 전 청와대에서 불러 식사하며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는데, 문제는 너무 잘 알고 있더라"며 "문화에 인색해 시정이 안 되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더욱 절망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전통을 지키는데 나이가 있을 수 없고, 전수란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 흐름과 맥을 잇는 것"이라고 덧붙였다.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8-15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9]남양주 주필거미박물관

조막만한 몸통에 달린 털실 같은 다리가 꼬물꼬물 움직인다. 김주필 관장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솜털처럼 그 위를 내지른다. 손바닥 위에 있나 싶더니 어느새 손등으로, 팔목으로 질주한다. 가까이 들여다보자니 별안간 얼굴로 펄쩍 뛰어들거나 스파이더맨처럼 거미줄을 쏘아댈 것 같다. 괜히 얼굴이 간지럽다. 거미박사 김주필 동국대학교 교수는 그런 거미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무려 20년을 사는 타란튤라다. 박물관 이름 때문에 거미만 있을 줄 알고 찾아갔는데, 예상치도 못한 보물들을 잔뜩 구경할 수 있었다.■ 아라크노피아이곳의 또 다른 이름은 '아라크노피아 생태수목원'이다. 아라크노피아는 거미류를 뜻하는 'Arachnida'에 천국을 뜻하는 'Utopia'를 합친 말이다. 거미천국답게 주필거미박물관은 장소를 마련할 때부터 거미의 특성을 고려했다. 남양주에서도 깊고 깊은 숲속에 자리잡아서 찾아가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방문자보다는 거미가 우선이라는 김 관장은 "거미는 환경지표동물로, 거미가 많으면 청정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청정한 데다 경관까지 수려하니 일단 오면 밑질 것은 없어 보인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토종거미부터 세계 희귀종 거미가 표본을 포함해 5천여종이 보관돼 있다. 서울대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김 관장은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물을 연구하고자 했다. 처음 그가 연구를 시작한 것은 지렁이. 개울, 바다, 초지 등으로 지렁이를 캐러 다녔는데, 1960년대 그가 가진 장비가 허름한 탓에 갯가에서 지렁이를 파다 매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했다. 그 뒤 거미로 연구 타깃을 바꿨다. 김 관장은 "하와이 유명한 '모기 박사'가 전 세계 48종뿐인 모기로 박물관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3만종이 넘는 데다 한국에 서식하는 것만 600여종이나 되니 거미로 박물관을 만들면 되겠다 싶었다"며 그 뒤로 거미를 구하러 '안 가본 나라가 없고 안 가본 학회가 없다'고 한다. "거미에 관한 한 거미학을 개척한 셈"이라고 자부하는 김 관장은 1985년 거미연구소를 설립하고 30년을 준비해 2004년 거미박물관을 열었다. 거미에 관해 백지였던 나라에 박물관을 세웠고, 연간 5만~6만명이 방문한다니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듯하다.■ 그 밖의 엄청난 보물들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박물관이 잘된 것은 아니다. 박물관이라고 세워 놓기는 했지만 사람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와서 볼 만한' 보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설립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사실 이 박물관은 '거미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전체 10개 관에 광물실, 종유석실, 인류문화관, 수석실, 거미사육실, 화석전시실, 곤충 및 어패류실, 비취규화목관에 심지어 미술관도 있다. 이러니 1관부터 출발해서 5관 거미사육실까지 오는 동안 거미는 엑스트라로 전락한다. 김 관장이 내세우는 가장 값진 보물은 규화목이다. 규화목은 '홍수, 지진 등 자연의 급격한 변동으로 퇴적물에 묻혀 썩지 않는 환경에 놓이게 된 '나무'가 주변 퇴적물 속의 규산 성분에 의해 조직치환이 일어나 다양한 색과 성질을 가지게 된 것'이다. 2억5천만~6천500만년 전 중생대 지층대에서 발굴되고 있으며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표면은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한데 무늬는 부드러운 나무결인 데다 혈액 정화와 저항력 증가, 유해전자파 중화, 공기정화 및 살균 효과가 뛰어나다기에 만만해 보이는 걸 만져보고 있자니 김 관장이 "그건 대략 10억원 정도 나간다"고 알려준다. 손을 떼야 하나 계속 대고 있어야 하나….이 밖에도 온갖 희귀한 것들이 이곳에는 '쌓여' 있다. 길다는 것 중에서는 가장 긴 것, 오래됐다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크다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여기 다 모여있는 듯하다. 심지어 1958년 강원도 속초에서 잡힌 장수거북의 박제도 있다. 키 2m에 몸무게 800㎏, 나이는 200살이다. 이 장수거북은 동틀녘에 뭍으로 올라오다 공비로 오인받아 해안경비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동국대로 옮겨졌으나 학교측이 공간부족으로 난감해 하는 걸 보고 김 관장이 얼른 '득템'해 이곳에 전시했다.■ 유물이 곧 경쟁력유물의 규모만큼이나 김 관장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여기 와야 이걸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채워주는 것은 관람객이다. 김 관장은 "들어갈 때는 6천원이 비싸다며 투덜대던 사람이 보고 나가면서는 사과를 한다"며 "박물관이 멀어서, 외져서 오기 싫으면 마시라. 그러나 와서 보고 후회는 안 하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김 관장은 수집만 하는 게 아니다. 아직도 동국대에서 강의를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단다. 19살 때부터 가정교사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김 관장은 1960~70년대 잘나가던 스타강사였다. 그때 번 돈이 박물관의 밑천이 됐다. 한 달에 집 한 채씩을 벌었다니,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돈이 들어가는 박물관 운영에도 그는 "재산이요? 줄어들고 있겠죠" 한다. 올해 71세 된 김 관장에게 이 많은 유물이 버겁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보물을 들여오고 있다.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공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유물취급 못 받고 쌓여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인도네시아산 극락조는 거래가 절대 금지돼 있고, 중국의 고대유물은 반출하다 걸리면 사형이라는데 그게 여기 다 있다. 수십 년 전부터 수집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 관장은 "이런 건 국공립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다"며 "이런 유물은 사립박물관의 경쟁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528 (031)576-7908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8-09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8]수원 에이블아트센터

누군가는 이들의 작품을 보고 '기적'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역사에 기록된 명작을 감상할 때조차 느끼지 못한 감동을 받았다고도 한다. 장애인 작가들의 작품은 간혹 이렇게 과대평가된다.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극복하고'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대게 그런 평가는 비장애인들의 동정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몸의 불편이 예술성을 말살시키지는 못하는 법. 그러니 장애인이 놀랄 만큼 예술적인 작품을 세상에 내보인다 해도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 그래도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호들갑 떠는 이가 있다면, 장애등급판정 떼고 예술로만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는 이가 있으니, 그는 바로 (사)에이블아트센터의 장병용 이사장이다.■ 어엿한 프로작가들조민서군은 '공룡작가'다. 그의 공룡캐릭터는 지난 6월 경기도 문화의 전당 무대에 올랐다. 스케치북에 정지돼 있던 그의 공룡들은 애니메이션 작업을 거쳐 역동적인 움직임을 얻었다. 전당에 그의 작품이 상영됐을 때 큰 호응을 얻었고 지금은 그의 공룡그림이 들어간 상품이 제작, 판매되고 있다. 김태호군도 미술전시회를 준비하느라 한동안 바빴다. 에이블아트센터에서 같이 작업하는 작가들뿐 아니라 해외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경기도미술관에 전시됐다. 전시관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그의 작품은 단번에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에이블아트센터의 소속 작가들은 1년 내내 바쁘다. 전반기 공연을 끝내자마자 회화작가들은 전시회 작업을 시작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매년 열리는 대한민국 장애인 음악제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장 이사장도 동분서주한다. 음악을 공부했고, 목사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일'은 어렵기만 하다. 그들이 활동할 무대를 마련하느라 바쁜 와중에 가끔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자주 무관심에 서러워한다. 장 이사장은 "지금 모습을 갖추기까지 10년이 걸렸지만, 살림은 늘 벼랑끝이고 조금만 삐끗하면 사업이 전면 중단될 정도로 아직 불안정하다"며 "그래도 이곳이 좋다며 대구에서도 오시니 어떻게든 계속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친구장 이사장은 20대 후반까지 장애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20대 후반 친구의 죽음을 통해 그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아프게 배웠다. 그가 시골마을 부목사로 있을 때, 갈 곳 없고 가난한 친구와 함께 살게 됐다. 그림 그리는데 재능이 있는 장애인 친구였다. 3년을 함께 살다 그 친구의 재능이 아까워 여주 도자기 공장에 취직을 시켰다. 그러나 그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이사장 앞으로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동갑내기 장애인 친구가 남긴 글은 절절한 절망의 몸부림이었다. 장 이사장은 "그 일을 겪은 후 친구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봤고, 그 친구의 죽음은 구조의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죽는 게 너무나 당연한 구조였다"고 읍소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1차적인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교육, 직업, 결혼 등 현실적인 문제가 막히는 2차 장애, 이로 인한 우울증, 성격장애, 무기력증 등 정신적인 3차 장애까지 갖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며 "친구의 사례는 장애인 문제의 총체를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후 장 이사장은 일생의 목표를 정하고 지금까지 성실히 장애인 사역에 임하고 있다. 10여년 전 달랑 2천500만원 종잣돈을 들고 사업을 도모, 6년 동안 교인들과 바자회 등을 통해 에이블센터 부지를 마련했다. 후원활동을 통해 건축을 시작했지만 돈이 없어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지난해 에이블센터는 본격적인 기능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단 한 곳도 없었지만 필요없는 곳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 이사장 손에 들린 사업계획안이 참 많다. ■ 이제 한 걸음 앞으로에이블센터 상주작가들은 1주일에 3차례 수업에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작품활동하는 데 쓴다. 수업이라고 해서 그림그리거나 도자기 굽는 방법을 '배우는' 게 목적은 아니고 이것저것 다양한 활동을 하다 자신이 '꽂히는' 분야가 있으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작가라면 새로운 재료나 기법을 소개하는 정도가 에이블아트의 역할이다. 장 이사장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방안에서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자신만의 캐릭터나 부호, 글자 등을 반복해서 그리던 작가들이 많다"며 "강사와 서포터들은 이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를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곳이니 상주작가로 들어오는 것도, 강사나 서포터로 활동하는 것도 '아무나'는 안 된다. 실력은 기본이고, 예술성과 사명감은 필수다. 여기는 '미술학원'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장 이사장은 "복지관 수준의 미술 교육을 생각하면 안 된다"며 "전문작가들이 더 넓게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다음 목표"라고 말했다.지금은 에이블아트센터가 단 하나뿐이라 어디 연계해서 활동할 곳도 없지만 이곳을 모델로 정부에서도 센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단다. 최근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서 다녀갔다는데 장 이사장은 "좋은 일"이라면서도 정색하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에이블아트에 대한 철학, 정신, 개념, 방향성'을 가지고 진행하라고. "작가들이 장애를 잊고 오롯이 작가가 되는 곳을 만들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에이블아트라는 또 하나의 예술장르를 통해 즐거움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을 일일이 덧붙여야 하니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커가는 작가들 보는 즐거움에 힘들 줄 모르는 듯하다.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수원로 617번길 9 (070-8672-1077)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8-01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7]고양 테마동물원 쥬쥬

올망졸망 모여있던 꼬마 아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극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울음으로 새어나올 것만 같은 표정이다. 5~7년의 짧은생, 그토록 진하게 농축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 본 경험이 있을까? 사육사가 들고나온 도마뱀과 비단구렁이, 이구아나는 낯설어서, 아이들과 키가 비슷한 오랑우탄은 너무 비슷해서 아이들은 잠시 재잘거리기를 멈추고 그들을 바라본다. 사육사가 다가와 작은 도마뱀을 머리위에 얹어주면 숨쉬는 것마저 잊은채 긴장하다가, 이내 머리위에서 꼬물거리는 생명을 느끼며 안도한다. 이 순간이 그들 중 누군가에게 '생의 첫 기억'으로 남는다면, 차가운 비늘의 감촉보다는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평생 간직하며 살게 되지 않을까. 고양시 '테마동물원 쥬쥬'의 오후 2시 풍경이다. 단지 보는게 아니라 동물과 만나는 곳, '쥬쥬'의 살림꾼 최실경 원장을 만났다.■ 새 식구 오던 날'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이 있건만, 지난해 11월 말 새 식구 들이느라 동물원에서는 북새통이 벌어졌다. 바다코끼리 암수 한 쌍이 러시아에서 이민을 왔다. 암컷이 6개월, 수컷이 1년 6개월 됐으니 야생에서 수명이 40년인 것에 비하면 아직 어린 아이지만, 몸무게는 암수 각각 120㎏, 200㎏에 육박한다. 이 한 쌍의 '바다코끼리'가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는 크기의 수조에 150t의 물을 채우고, 북극동물이니 수온을 15℃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냉각기를 설치했다. 자기 몸무게의 최소 3%이상을 먹은 뒤에 생산한 배설물을 처리하기 위한 여과시스템을 설치했다. 수 년에 한번씩 러시아에서만 그것도 10마리가 채 못되는 수만 반출되는 바다코끼리가 이곳에 오기까지 3년이 걸렸고 5억원이 필요했다. 수조에서 유영하는 이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면서도 최 원장은 "2년만 지나도 700~800㎏이 될텐데…"라며 입으로는 걱정이다. 육지 코끼리만큼이나 커질 바다코끼리를 위해 수조를 바꾸고 냉각기와 여과기를 마련할 돈을 벌기엔 2년은 짧다.한 번 들여오면 죽을때까지 돈이 드는 데다 살아있는 것들이라 마음쓸 일도 많을텐데 이 커다란 '아기 바다코끼리'를 왜 굳이 들여왔을까? 답은 간단하다. 좋으니까. 바다코끼리 자체도 좋고 쥬쥬를 찾는 관람객들에게 이들을 보여주는 것도 좋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바다코끼리를 보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도 좋고.■ 세 번 가는 동물원우스갯소리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생 동물원에 3번 간다는 말이 있다. 어릴적 엄마아빠랑 한번, 데이트 할 때 또한번, 자식 낳아 데리고 오는게 마지막. 전국에 있는 동물원을 다 합쳐봐야 모두 13곳이고 사설동물원은 '쥬쥬'가 유일하다. 동물원이 없어서 못가는건지 사람들이 찾지를 않아 동물원이 없는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동물원법'조차 없는걸 보면 우리는 동물과 그다지 친해질 생각이 없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물 학대에 대한 논란은 최근 종종 일어나고 있다. 최 원장도 수백마리 동물의 아빠노릇을 하다보니 그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최 원장은 "동물이 사람과 가까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을 두고 학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짜 학대는 동물을 유기하고 방치하는 것"이라며 "동물은 때려서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 '체험'동물원이다보니 학대냐 조련이냐를 뭇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에대해 답답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하는 '고충'이 있지만 동물과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게 한다는 자부심은 크다. 최 원장은 "국공립 박물관에서도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사고가 한 번 있은 후로 싹 사라졌다"며 "공무원들은 민원인들의 질책과 상부의 징계가 겁이 나서 못하지만 사설동물원인 우리는 소신대로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10년동안 사설동물원을 운영하면서 현금만 150억원을 쏟아부었다고하니, 이 돈을 들여가며 동물을 학대할 리는 없지 않을까. ■ 성장하는 박물관최 원장은 오른손이 의수다.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했다 사고를 당했다. 20대부터 최 원장은 사람들의 불편한 눈초리와 편견을 감당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동물들은 편견이 없었다. 최 원장이 사랑을 주면 주는만큼 그를 따랐다. 그런 동물들에게 최 원장은 점점 더 사랑을 쏟았다. 동물원을 만들기까지는 남다른 과정을 거쳐야했다. 운영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거절당했다. 최 원장은 '그렇다면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결정하시라'는 심정으로 무작정 동물들을 공개했다. 이를 보러온 사람들로 동네 교통이 마비됐단다. 관람자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관할시청의 반응은 나빴다. 최 원장은 개토법, 농지법 등 위반으로 유치장에 갇혔다. 그래도 이 일이 알려지면서 그의 동물들이 '보존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구치소에서 사업 허가가 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설립 당시의 이야기를 하던 중 최 원장은 "사실 쥬쥬는 동물원이 아니라 '동물전문박물관'"이라고 고백(?)을 했다. 우리나라는 식물원도, 동물원도 박물관법이 적용된다. 그렇다보니 동물원에는 필수적인 시설인데, 법적으로는 불법이 되는 경우가 있다. 최 원장은 "필요한 시설이라면, 불법인지 아닌지를 실질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집행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무작정 시설물을 철거하면 동물과 이용자가 다 불편해진다"고 하소연했다.'테마동물원 쥬쥬'는 최근 개원 1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하나뿐인 최 원장의 손에는 상처와 굳은 살이 남들보다 두배는 늘었다. 그러는동안 이곳을 찾는 이들도 꾸준히 증가했고 동물들도 커갔다. 한창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특이한 박물관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290(031)962-4500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7-25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6]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헤이리예술마을은 참으로 인위적이고도 역설적인 곳이다. 철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됐고, 엄격한 통제아래 운영된다는 점이 인위적이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 조성됐음에도 직선도로가 하나도 없고 언덕과 웅덩이 하나 다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 자유분방하고 규율에 얽매이는 것을 터부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공산주의 사회 못지않게 통제된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런 인위와 역설이 지금의 헤이리를 만들어 냈다.건축물을 이어그리면 등고선이 되고, 마을길을 바람이 타고 흐르는 곳. 파주헤이리 예술마을 운영회 이경형 이사장을 만나 헤이리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왔다.# 법흥리 1652번지헤이리는 평일 한낮에는 더 없이 한가롭고 해가 지면 고요하기까지 하지만 주말이면 도시보다 시끌벅적하다. 도시에서 문화적 욕구를 다 충족하지 못한 이들이 몰려드는 시골마을 헤이리. '국내 하나뿐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독특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한 집 건너 하나씩 들어섰고,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지은 멋스러운 건축물들이 도시를 수놓고 있어 건축과 학생들에겐 천국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런 마을에 과하다 싶은 비밀이 숨어있다. '나중에 헤이리에 들어와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눈여겨 봐야하는 것이 많다.헤이리에 터를 잡으려면 우선 문화사업계획서를 제출,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비즈니스지구 내 모든 건축물은 연면적의 60%이상 문화관련 시설과 프로그램을 갖춰야한다. 상업시설이 문화시설에 밀린 것이다. 주거, 창작지구에서는 상업시설을 운영할 수 없다. 매입한 토지에 건물을 지을 때도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한다. 필지 사이에 담장은 칠 수 없고 건물 외벽에 페인트칠도 할 수 없으며 주차장은 지정된 건물위치 내에 설치해야 한다. 건축물은 폭 5.5m, 길이 30m의 지정된 패치(인공 바닥판) 안에 지어야 하며 건축 설계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헤이리가 지명한 건축가 중에서 선정해야 한다.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이것은 법규가 아니라 약속이다. 순수민간조합을 결성하고 헤이리의 정신을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낸 사람들의 정성과 믿음이 담긴 조약이다. 이들은 1998년 파주 법흥리 1652번지 땅을 한국토지공사로부터 매입했다. 49만5천750㎡짜리 한개 번지의 땅을 320필지로 나눠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분양했다. 물론 땅을 분양받은 사람들은 문화사업 계획 승인을 받아야 했고, 자기땅의 절반을 절반을 파주시에 기부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이 이사장은 "녹지와 길을 확보하기 위해 절반을 기부채납했다"며 "예술마을이면서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마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헤이리인들은 도시계획을 시작할 때부터 남달랐다. 이곳의 저수지를 흙으로 덮고 언덕을 깎아내고 나무를 뽑아 땅을 평평하게 만들고 아파트를 지었다면, 지금 그 가치는 땅값의 수십배에 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물을 그대로 두고 자신들이 그 안에 스며드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헤이리마을에는 '계획도시'답지않게 언덕과 나무가 많고 바람도 잘 통한다. 아스팔트 길도 없고 가로등 조도도 낮고 건물도 낮다. 지금의 헤이리 마을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내 집, 우리 동네이 이사장은 2003년부터 헤이리에 살았다.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23년을 근무한 이 이사장은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골치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인사동 갤러리에 가서 마음을 달랬다. 결혼기념일에는 미술품을 하나씩 장만했다. 수석논설위원 시절 헤이리를 조성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 이사장은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땅을 분양받았다. 집을 짓기위해 건축가를 선정하고 박수근 미술관을 설계한 이종호 건축가와 한달에 1~2차례 만났다. 갑과 을이 만났으니 건축설계에 대한 논의가 오갔어야 맞겠지만, 둘은 만나서 지난 삶과 앞으로의 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옮겼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지어진 집의 2층에는 퇴직한 이 이사장을 위한 서재가 큼지막하게 들어섰고, 지하에는 아내를 위한 공간이 마련됐다. 여성운동가인 아내가 동료들과 모임을 갖기에 안성맞춤이다. 중간층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있다. 자녀 3명이 다 같이 방문했을때 불편하지 않도록 큰 방에 가벽을 설치했다. 이 이사장의 인생에 맞춘 집이다. 그는 "나 살기는 딱 좋은데 호환성이 전혀 없다"며 웃는다. 부동산에 내 놔도 안팔릴 거라고 농담을 하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진짜 내 집'을 남 줄 생각은 없어보인다.예술마을이니만큼 예술가들도 많이 산다. 영화감독 박찬욱·김기덕, 가수 윤도현, 연기자 최불암씨가 이 곳에 집을 지었고, 정두홍 무술감독은 아샬아트갤러리를, 방송인 황인용씨가 음악실 '카메라타'를 운영한다. '소나무'사진의 대가 배병우 작가 등 예술인들이 매일같이 작품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이사장은 "영화감독들은 집은 있는데 집에 잘 안있더라"며 "박 감독은 몇 달씩 안보이다 가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게 보인다"며 이웃 소식을 전했다.# 도시의 품격헤이리는 늘 유혹에 시달린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다 보니 문화예술을 추구하기보다는 장사를 할 목적으로 헤이리에 들어오는 이들이 간혹 있기때문이다. 이 이사장은 "개중에 갤러리인 척 하는 전용 카페가 있을 것"이라며 "문화마을다운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지침이니만큼 마을 구성원들 사이의 약속이 잘 지켜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예술마을로서의 미래 계획을 밝혔다. 그는 "집을 다 짓는 것을 완성으로 본다면 5년후면 완성된다. 이제는 헤이리에 어떤 콘텐츠를 담아 낼 것인가를 더 고민해야 한다"며 "헤이리를 뛰어넘는 헤이리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이 이사장은 '슬로 아트(Slow Art)'를 연구중이다. '느림의 미학'에서 가치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 이사장은 "슬로아트는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손으로 만든 작품들"이라며 "짚신 삼는 것이 예전에는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짚풀공예가 됐듯이 대장간에서 낫 만드는 것, 천연염색, 유기농법까지 예술이 될 수 있다"며 새로운 예술장르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쳤다.돌아오는 길에 황인용씨가 운영하는 '카메라타'에 들렀다. 이 이사장이 강력 추천한 장소다. 문앞에서 마주친 황인용씨가 낯선 얼굴인데도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옛날 LP판에서 출발한 음악소리가 진공관 엠프를 거쳐 종이스피커를 지나 귀에 닿았다. 따뜻한 소리다. 문화적 감수성이 충만한 헤이리 주민들은 간혹 문화적 주제를 두고 논쟁을 빚기도 한단다. 예술인으로서의 고집이 표출되는 것이다. 그들의 고집 덕분에 우리는 아직 아날로그의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글┃민정주기자

2012-07-18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5]파주 세계민속악기박물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고, 예술마을 파주 헤이리인데다, 악기 박물관이라니 흥을 돋우는 악기소리를 기대하며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은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서늘했다. '저것도 악기일까?'싶을만큼 낯설게 생긴 오래된 악기들은 소리를 감춘 채 건조하고 서늘한 박물관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 천 점의 악기를 소유한 이영진 관장도 의외의 모습이었다. 키가 훤칠하고 억양이 도드라진 '경상도 사나이'였다.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악기 하나를 가리켜 연주를 부탁하자 "악기 연주는 안합니다"라며 두 번 청할 수도 없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리고는 "내 얘기말고 악기 이야기만 하자"신다. 머쓱해져서는 박물관 구경을 시작했다. 그런데 악기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 관장은 마법이라도 걸린 듯 달라졌다.# 생필품이 관장 말씀이 악기는 '연주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붙이자면, '연주도 하는 것'이다. 이 관장은 "우리나라에서는 피아노, 바이올린만 악기 대접을 받으니 악기는 당연히 연주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악기의 다양한 용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호주 원주민 '아보리진'의 악기 '블로어(bullroar)'는 비밀 의식에 사용하던 것으로, 끈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의 나무판을 공중에 휘저어 윙윙소리를 내 여자와 어린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쓰였다. 볼리비아 지역에서 병에 걸린 야마, 염소, 돼지 등의 발톱을 가죽 끈이나 막대에 연결해 만든 악기 '챠챠스(Chachas)'는 흔들면 바람소리, 혹은 빗소리가 난다. 콜롬비아 지역의 '시누플루트(SinuFlute)'는 펠리칸의 정강이 뼈로 만든 지공이 4개인 피리다. 사람의 뼈로 만든 악기도 있다. 티벳과 몽골 지역에서는 불행하게 죽은 사람의 무릎뼈로 만든 '야산갈링'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랬다. 뼈에 조각을 하거나 보석을 박아 치장하기도 했다.물론 우리가 아는대로 나무나 가죽을 사용해 만든 평범한(?) 악기들도 있다. 전사의 계급과 관련된 아프리카 지역의 '볼론(Bolon)'은 가죽으로 된 현을 가진 '하프'다. 천사의 악기인 줄 알았던 하프가 전사의 것이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줄 알았던 하프가 아프리카에서 유래됐다니, 악기에 대해 거의 무지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한동안 설명을 이어가던 이 관장은 "악기는 삶의 모든 부분과 연결돼있다"며 "숟가락, 밥그릇보다 역사가 더 길고 쓰임도 신앙, 종교, 전쟁, 통신, 국가민족관 표현 등 다양하다"는 사실과 함께 '인류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인류가 만든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물건이 관장은 "외국에서는 악기사가 인류학에 반드시 포함된다"며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인류학 자체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운을 뗐다. 인문·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며 기초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학은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모든 시기를 아우르며,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과 문화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악기가 인류의 삶과 역사를 같이했음을 아는 이 관장은 "지금 강조하는 통섭교육에 악기보다 좋은 것은 없는데 우리나라 교육자들은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한숨을 내뱉는다.이 관장은 "독일 프랑스 일본이 음악사에 강한데 이들은 모두 과거 강대국이었다"며 "비록 식민지에서 약탈해 연구한 것도 많지만 인류사 발전에는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런 반면 우리나라에는 인류학이나 민족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적고 박물관도 거의 없다. 악기에 대한 무지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 관장은 "스코틀랜드하면 백파이프만 떠올리는 등 악기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각한데, 이는 암기식 교육이 낳은 참담한 결과"라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기는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없고, 음악 교육은 기술연마에만 치중돼 있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최근 우리나라 연주자들이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상을 휩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죽어라고' 테크닉을 연습하기 때문이라는게 이 관장의 평가다. 이 관장은 "모든 음악인들이 한 곳으로 '맹목적으로 몰입'해서 그렇다"며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교수들이 자기가 배운 것만 그대로 가르치고 그게 계속 대물림 돼서 매일 같은 것만 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악기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악기사에 대해서는 이 관장을 따라잡을 '경쟁자'가 없다. 이 관장은 박물관을 찾아오는 교수들을 가르치고 학예사들에게 조언을 한다. 음악 전공을 한 적도 없고 인류학은 더더욱 배운적이 없는 이 관장이 박물관 관람객들을 위해 만든 참고용 자료가 음악 교과서에 실리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 관장은 그게 걱정이다. 이 관장은 "언젠가는 악기유물들을 인류박물관이나 민족박물관에 기증할 생각인데, 기증할 곳이 없다"며 "간혹 세계민속악기가 진열된 박물관이 있지만 이름도 틀리게 표시한 곳이 대부분"이라며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박물관장 10년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러시아어를 전공한 것이 지금 이 관장을 만들었다. 젊은 시절 이 관장은 그 당시 형편으로는 매우 드물게 외국에서 일했다. 한국 회사에서 파견을 나간 이관장은 러시아가 아닌 '소련'에 입국하기 위해 영국에 체류하며 신분세탁을 해야했다. 국가간 수교도 이뤄지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연방공화국 소속이었던 우즈베키스탄에서 '두다르'라는 악기를 구입한 것이 악기 수집의 시작이었다. 두다르를 선택한 것은 단지 재미있게 생겨서다. 기타처럼 연주하는 이 현악기는 동아시아 유목민족이 말꼬리로 만든 것으로 지금 바이올린의 전형이다. 남한사람이 소련에 있으니 이 관장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이 관장은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왕 선물을 줄거면 악기로 달라'고 부탁했다.모으는데 재미가 붙으면서 공부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류학, 악기사 책이 외국에는 있었다. 악기와 관련된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러시아어 책만 본게 아니다. 이 관장은 "그 때 공부하느라 7~8개국어를 배웠다"며 "유창하게 말을 하지는 못해도 책을 볼 수는 있는 정도"라니 수백가지 악기 이름과 유래한 민족, 얽힌 이야기, 쓰임새를 술술 뽑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겠다.한창 악기를 수집할 때 이 관장은 골동품시장 가격 상승의 원인자였고, 매일매일 뭔가가 비행기에 실려 한국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운반에 든 비행기 표 값만 40억원 정도, 사용한 여권은 10여권 정도가 된다니, '한 세상 멋지게 산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관장은 '박물관을 10년 운영한 성과'로 '악기박물관 관장이 되겠다는 학생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꼽았다. 이 관장은 "어떤 학생은 초등학생 때부터 오기 시작해서 지금은 고등학생이 됐다"며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한 이 학생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오는데 맨날 악기이야기만 하고 망가진 악기를 고치기도 잘 한다"며 자식인 양 자랑을 하신다.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악기를 모으는데 많은 재산을 썼으니 좋은 가장 소리는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악기를 넘어 한국의 인류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가져도 좋을 것 같다.첫인상은 까칠했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관장은 배짱있고 소신 충만한 대한민국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다보지 못한 악기들도 천천히, 꼼꼼히 둘러보면 인류 역사와 인간의 삶이 어렴풋이나마 그려질 듯하다. 강원도 영월에도 '세계민속악기박물관' 2호가 있다니 언젠가 들러보고 싶어졌다.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의 613(031-946-9838).http://www.e-musictour.com/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07-12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4]연천 '석장리 미술관'

'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를 의미하는 이 영어 단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동안, 이로부터 발생되는 분단, 이산, 민통선이란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는데, 이 와중에 사람의 출입조차 제한받는 민간인 통제선으로 예술을 끌고 들어간 이가 있다. 오로지 초록과 고요로 전쟁의 참상을 대변하는 이 곳에 노랑 주황 색깔을 뿌리고 음악을 울려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며, 이곳 역시 우리의 발길과 문화가 마땅히 닿아야 할 곳이라고 매년 예술제를 통해 부르짖는 석장리미술관 박시동 관장의 연천살이 20년을 듣고왔다.# 오지 미술관수원에서 출발해 연천군 백학면까지 꼬박 2시간을 달려 미술관 근처에 다다랐는데,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면서도 취재진의 불안이 고조됐다. 아무리봐도 미술관이 있을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시설은 축사뿐일 것이라는 데 거의 확신을 가질 무렵, 마을 길 끝에서 별안간 호화스러운(?) 미술관이 나타났다. 제법 넓은 부지에 카페와 펜션이 있고 무대시설도 갖춘 미술관이다. 다만 갤러리는 없다. 조각가이기도 한 박 관장은 자신의 작품을 야외 전시장에 뒀다. 그의 작품 중에는 유독 '발'을 모티브로 한 것이 많다. 박 관장은 "대부분 냄새도 나고, 몸의 가장 아래 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으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발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게 아니냐"며 "정작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게 발"이라고 자신의 예술론을 펼쳐보였다. 갤러리격인 미술관 야외 공간에서 크기나 색깔이나 모양이나 어떤 면에서든 가장 눈에 띄는 것도 발이다. 사람 키를 넘는 크기의 샛노란 발 조형물에 박 관장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발이 잔뜩 힘을 준 듯 발등이 솟아있고 발가락 10개는 쫙 벌어져 어느 방향으로 힘을 가하든 충분히 몸을 지탱해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나아갈 듯하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이들의 발은 틀림없이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보는 이의 발에도 힘을 불어넣으며 무엇이라도 시작하고자하는 충동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조각가입니까?'라는 질문에 박 관장은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나'하는 얼굴로 '나는 농사꾼'이라고 대답한다. 인터뷰가 진행된 카페 앞 테이블 밑에 자라고 있는 것은 잡풀이 아니라 질경이란다. 농약도 안주고 그저 밟히면 밟는대로, 비오면 비에 잠겼다가 가물면 햇볕을 정면으로 묵묵히 받아내며 크는 질경이와 민들레, 오디와 돌복숭아를 박 관장은 때되면 거둬 효소차를 만들어 오는 이에게 대접한다. # DMZ민통선 예술제올해 6월6일, 제 13회 DMZ 민통선 예술제(DMZ Art Festival)가 열렸다. 내년에도 같은 날 14번째 축제가 열릴 것이다. 올해는 '민통선 사람들'을 주제로 조각, 설치미술 등 국내 작가의 작품과 함께 10여개국의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해 국제 예술제로 발돋움했다. 'DMZ민통선 예술제'는 석장리미술관이 문을 연 1999년부터 시작됐다. 처음 시작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박 관장은 "첫 회 예술제를 하기 위해 무작정 한국전업작가회 도록을 보고 작품이 좋은 작가 40명에게 자필로 쓴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36명이 긍정적인 답을 보내왔다"며 "내가 인덕은 좀 있는가 싶었다"고 그 때를 떠올렸다. 작가들이 자비로 장비를 동원해 작품 50점을 운반하는데 그나마도 비포장 도로에 비가 많이 오면 길이 끊기는 곳에서의 예술제니 축제에 금전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애당초 축제의 시작은 박 관장의 마을 청소년 무료 교육에서 비롯됐다. 박 관장은 "학교 교사로 있을때 동네 주민이 토요일에 애들 미술 교육을 부탁해 무료로 지도하는데 서울 아이들과 문화 차이가 너무 심하더라"며 "지역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보여주려고 추진했다"고 예술제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외국 작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박 관장은 "민통선에서 하느라 축제 허가받기도 힘들고 사람 모으기도 어렵고 돈도 없지만 DMZ덕을 좀 보기도 한다"며 "외국작가들에게는 DMZ라는 공간 자체도 흥미로운데다 군의 협조로 통역서비스도 제공되고 철책 안에도 들어가 볼 수 있으니 좋은 기회가 아니겠나"고 말한다.외국 작품도 있고,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하려니 영상과 음향 등 돈 들 일이 하나 둘이 아닐 것 같지만 박 관장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딱잘라 말한다. 박 관장은 "돈이 많으면 사가 낀다"며 "작가들한테 '민통선예술제'에 참가한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으로 알라며 큰소리 친다"며 허허 웃는다.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미술관 내 펜션을 무료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을 만들어 도록에 첨부했다. 외국작가들한테도 이 쿠폰으로 작품 전시 비용을 대신했다. 몇 분이나 오실는지는 모르겠다며.# 전천후 생활형 예술가군이나 도에서 지원받는 것도 많지 않은데 매년 예술제를 치르면 돈은 어디서 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박 관장은 준비된 듯 바로 "전기세는 펜션 손님들이 내주시고, 밥은 대출받고 땅 잘라 판 돈으로 먹고 산다"고 대답한다. 살림은 넉넉지 않아도 받는 손님을 가린다. 박 관장은 "풀도 꽃이고 여기서는 다 효소 재료인데 그런 풀을 함부로 하거나 펜션을 모텔로 생각하고 잠깐 쉬었다 가려는 사람들, 애들 교육 잘못시켜서 조각에 매달리는 가족들은 다 내쫓는다"면서도 "가진 게 없어도 작가의 취지가 좋으면 레지던시를 후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주거니 받거니 상부상조 두레정신이 계승되는 미술관이다.대학시절 전시 여행을 다니고, 여고에서 미술교사를 하는동안 방학을 이용해 유럽 여행을 하며 '문화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박 관장은 1990년부터 이곳 연천 백학에 부지를 마련했다. 이 깊은 시골마을로 들어온 것은 '술먹자고 불러는 사람이 하도 많아 3년정도만 작품에 매진하기 위해서'였지만 처음의 생각을 바꿔 평생을 보낼 작정이다. 간신히 건축 허가를 받아 동네사람들과 소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예술제를 벌인지 13년. 처음에는 경찰과 군의 감시 대상이었고 마을사람들에게는 괴짜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동네의 자랑이 됐고, 축제때 군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는다. 박 관장은 "여기가 가깝게는 한국전쟁 수복지역이지만 멀게는 삼국시대부터 영토 분쟁지역이라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이 많은 곳"이라며 "그만큼 중요한 우리 영토인데 지금은 사람도 통제되고 문화는 말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쓴 입맛을 다셨다. 미술관이라 하면 도시 문화의 결정체라 생각되게 마련이지만 이곳 석장리 미술관에 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친환경적인 미술관이 다있나' 싶으면서도 도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문화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만 가능한, 돈은 없되 사람 냄새 나고 자연이 작품과 어우러진 미술관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같다. 박 관장은 "삶 자체가 예술이니 사람은 모두가 예술가"라며 이곳에서 오랫동안 예술가로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희망을 밝혔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석장리 875 (031)835-2859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06-28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3]파주 헤이리 '한향림 옹기박물관'

진갈색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푸릇푸릇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알싸한 향기의 열무김치.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입안이 시원해지는 듯하다. 젓가락이 닿으면 팅팅 깍쟁이 같은 소리를 내는 하얀 바탕의 꽃무늬 접시에 담긴 김치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우리 그릇에 소복이 담긴 제철 음식이 훨씬 맛깔스러워 보이게 마련이다. 질그릇이 여름에만 어울리는 건 아니다. 봄철 산나물이 그득 담긴 자배기, 늦가을 고추장 된장이 담긴 장독, 한겨울 보글보글 청국장이 끓는 뚝배기 모두 정갈하고 정겨운 맛의 기억을 불러온다.그러나 이제 우리 그릇들은 부엌 맨구석에서 이제나 저제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다. 추억속에는 있지만 현실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옹기. 그 옹기를 극진히 대접하는 곳이 있다. 감칠맛 나는 이야기가 소복소복 쌓일 것 같은 파주 '한향림옹기박물관'을 찾았다.# 다용도 新소재박물관 1층 전시관, 옹기로 만든 물건들이 고이 앉아있다. 옹기는 주방 식기정도로만 알았는데, 여기 물건은 쓰임이 다양하다. 오히려 기대했던 배부른 장독과 움푹한 밥그릇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원통형 몸에 팔이 달려 티셔츠처럼 생긴 '간수통'에 천일염을 넣어두면 6개월 정도 간수가 나온다. 두부를 만들때마다 짚으로 막아둔 양 옆 구멍을 열어 간수를 받았다. 가정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가신 중 으뜸인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단지는 귀한 것이니 만큼 좋은 재료로 만드는 줄 알았건만 이도 옹기다. 매해 햇곡식을 담아두었으며, 단지가 깨지면 집안 어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옹기로 벌통도 만들었다. 로켓처럼 생긴 벌통 아래쪽에 벌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고, 위로 뻗은 기둥모양 원통에 벌이 집을 지어 꿀이 차면 원통을 빼 꿀을 채취한다. 모기향을 덮어두던 구멍이 숭숭 뚫린 그릇은 지금도 야외에서 유용할 것 같다.장례식에도 옹기가 쓰였다. 죽은 사람의 이름, 생일, 자손 등을 새겨 무덤 앞에 묻어두던 지석(誌石)을 옹기로 만들기도 했다. 지석은 뒷날 봉분이 무너져 분묘를 잃을 것에 대비해 만들었다. 더러는 관을 옹기로 만들기도 했다. 이밖에도 필통, 연적, 벼루, 문진, 등잔, 재떨이, 화분, 화로, 요강 등 집안 안팎에서 옹기는 요긴했다. 요즘 플라스틱만큼 쓰임이 다양했으니 삼국시대부터 수천년 우리 살림을 지켜온 다용도 소재다.# 도자기 외모에 옹기같은 마음2층 카페 '리모즈(Limoges)'에서 만난 한향림 관장은 의외였다. 응당 옹기를 닮았을것이라 기대했는데, 까만 드레스에 빨간 볼레로 차림으로 맵시나게 걸어나왔다. 한 관장은 "여기서 사람을 만나면 저를 보고 당황하는 분 꽤 많다"며 자신을 도예가라 소개했다. 옹기의 윤기보다 자기의 광택과 선을 떠올리니 한 관장과 그럴듯하게 어울렸다.도자기 만드는 분이 웬일로 옹기를 모았을까. 한 관장은 "자기를 다루다 보니 도기 좋은 것도 알게 됐다"며 "좋은 전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옹기는 인간의 유전자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믿는 한 관장은 "사람들은 도시생활에 익숙해져도 흙을 보면 편안함을 느끼는데, 그래서 옹기는 사용하지 않아도 보면 친근하게 느낀다"며 "아직 옹기는 골동품도 아니고 유물도 아니지만 이제 보전을 위해 노력해야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헤이리마을 입주자 1세대인 한 관장은 남편과 함께 직접 이곳을 일궜다. 2004년 개관때는 옹기와 도자기를 함께 전시했는데, 공간이 부족해 조금 떨어진 곳에 '한향림현대도자미술관'을 하나 더 지었다. 박물관 두 곳을 운영하는 셈. 이곳 옹기박물관은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전시품인 옹기를 유리관에 넣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둔 것이 많다. 한 관장은 "옹기는 숨쉬는 용기라 가둬두지 않는 것"이라며 옹기 이야기를 본격 풀어냈다.한 관장은 "고가의 청자 백자는 아주 고운 체에 흙을 여러번 받쳐 사용하는데, 흙입자가 너무 고와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반면, 서민들이 이곳저곳에 막 쓰던 옹기는 곱지 않은 흙으로 투박하게 성형해서 구워, 굵은 입자 사이로 난 기공으로 공기가 들락거린다"며 "신기한 것이 공기는 드나들되 물은 들락거리지 못하는 구멍이라 저장 기능은 다 하면서 발효도 잘 된다"고 옹기 자랑에 신났다. 또한 "선조들이 그런 과학적 지식을 알고 만든 건 아니겠지만 발전과정에서 모양의 변화나 쓰임의 확장이 놀라울 정도"라며 지역별로 구분해놓은 옹기의 특징을 설명했다. 경상도는 문양이 별로 없고, 전라도는 무늬가 화려하다. 제주도 옹기는 붉은색을 띠는데, 화산의 영향으로 염분 많은 흙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남부지방 옹기는 입구가 좁고 배가 불룩하나 경기지방은 원통형이다. 일조량에 따라 옹기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조절해 장이 끓는 것을 막기 위한 조상의 지혜가 만들어낸 차이다.# 서민을 위한 명품어린시절 새 크레파스 뚜껑 여는 것을 좋아했다는 한 관장은 그림을 제법 잘 그려 상도 곧잘 탔다. 70년대 무렵 부상해 전망이 좋다는 말에 혹해 도예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도자기 굽는 일은 아이디어 구상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과정이 막노동 수준이다. 흙을 다지고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굽는 일을 지켜보던 남편이 안타깝게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지 그랬어….'프랑스에서 4년을 공부한 한 관장은 "현대도자는 미국 유럽이 우리보다 10년정도 발달했다"며 "우리는 전통을 고수하느라 늦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도제식으로 전수하다보니 속도는 느리고 창작이 안된다. 스승에게 배운대로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에 대한 재교육이 이뤄지기도 한단다. 박물관 카페 이름 리모즈는 한 관장이 공부했던 프랑스의 지명이다. 한 관장은 "유럽은 현대도자가 발달했지만 전통은 없고 산업 도자기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우리는 전통이 있지만 그 전통 때문에 현대적인 발전이 늦어졌고 그나마 전통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도자인으로서 의무감에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관리도 쉽지 않은 옹기를 30년가까이 끌며매며 다니고 있다는 한 관장은 "다행히 옹기는 다른 유물에 비해 값이 비싸지 않고 속아서 살 염려도 없다"고 한다. 옹기는 가짜를 만드는 데 돈이 더 든단다. 한 관장은 "20년 전에 비해 같은 옹기 값이 '0'하나는 더 붙었을 만큼 올랐어도 옹기는 아직 예술품이라기보다 '서민의 생활용품'쪽에 가깝다"며 "서민이 쓰기 적당한 가격에 이만한 품질이면 '명품'"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한 관장은 앞으로 세계 어디서나 '도자기'하면 '한국', 그리고 '한향림 뮤지엄'을 찾게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작은 체구지만 도자인으로서 자존심이 빛난다. 잊고 있던 우리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우리가 사립박물관을 찾게되는 이유 하나를 더 얻어온 시간이었다.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 예술마을. 1652-577. 070-4161-7271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06-21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2]광주 '영은미술관'

전시관에 걸린 캔버스가 눈을 끌어당긴다. 내가 살아오면서 순간순간 느꼈던 빛의 이미지가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뜨거운 여름 태양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빛의 형상들, 겨울 빛과 어우러져 한층 더 밝게 빛나던 눈빛의 촉감…. '빛'이 만들어낸 이미지라 사진에 담을 수 없었던 장면들이 마치 사진첩에서 꺼내놓은 듯 천연덕스럽게 미술관을 차지하고 있다. 기억과 작품 사이에 다른점이 있다면, 작품의 빛은 사람의 시선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한국·유럽 국제작가교류展-빛으로 가는 길(VERS LA LUMIERE)'전이 열리고 있는 광주 영은미술관을 찾았다. 단아한 풍모를 풍기는 박선주(44) 관장의 첫인상은 미대생이나 음대생이 어울릴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미술관을 이끌어 온 이야기를 듣고 보니 '캔디'에게서나 풍길듯한 들장미향이 나는 듯했다.■ 창작스튜디오미술관의 정식 명칭은 '대유문화재단 영은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박 관장의 시할아버지 고(故)이준영(1917~2007) 이사장은 이북에서 내려와 방직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익을 사회에 나누고자 1992년 대유문화재단을 설립했지만 그 해 큰 아들 고(故) 이상은(1940~1992)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소 미술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들의 뜻을 기려 자신과 아들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영은'미술관을 만들었다. 아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생의 마지막 사업을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2000년 개관한 영은미술관의 초대 관장은 김영순씨였다. 홍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 전 관장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창작스튜디오'를, 그것도 미술관과 같은 공간에 만들 것을 제안했다. 박 관장은 "스튜디오와 창작스튜디오가 한 공간에 자리잡고있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걸로 알고 있다"며 "10년 동안 90여명의 작가가 이곳에 머물다 갔고, 지금은 그들이 영은미술관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2002년부터 영은미술관을 맡아서 돌보고 있는 박 관장은 초기 미술관에 입주작가들이 기거하는 게 어색했다. 당시 잘 모르는 사람들은 큐레이터로 오해할 정도로 젊었던 박 관장에게 미술관에 미술가가 불쑥불쑥 다니고 미술관과 한 마당을 쓰는 작가 숙소에 이불 빨래가 널려있는 광경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친구, 가족, 운명공동체로 미술관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여겨진단다. 박 관장은 "일반적인 갤러리 운영자는 전시를 끝내고 나면 작가도 작품도 모두 떠나버리니 허무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영은은 전시회가 끝나도 가족처럼 그대로 남아있으니 의미있는 일을 하나 더 해냈다는 뿌듯함이 남는다"고 말했다.영은미술관 창작 스튜디오는 입주작가를 선정할 때 나이제한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젊은 작가들은 더 심사숙고해 선발한다. '젊을 때는 어디가서 고생 좀 해도 된다'는 관장의 인생관에 다양한 연령의 작가들이 어울려 살면서 얻는 이익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지혜가 만들어낸 풍습이다. 막내작가가 32살이고 78살 되신 작가분도 계시다. 박 관장은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적당히 경쟁도 이뤄진다"며 "젊은 작가가 불만을 털어놓으면 선배작가분들이 '이런 환경에서 작품활동하는게 행복인 줄 알라'며 불만을 잠재워주고, 어린 작가들은 미술계의 새 풍조를 선배들에게 전파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곳의 10년을 기억하다영은미술관의 한 축인 시아버지는 박 관장이 결혼하기 1년전에 돌아가셔서 뵌 적이 없고, 시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정주부로 10년을 살았다. 8년 전, 시할아버지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미술관을 맡아서 돌봐라'라고 말씀하셨다. 박 관장은 그 말씀 한마디에 놀람도, 두려움도 없이 바로 출근을 시작했고 두달이 지나고부터는 홍대에서 예술기획 석사과정을 수강, 2년 반만에 졸업했다. 박 관장은 "제사며 행사가 너무너무 많았던 종손집 시집살이도 결혼 전에는 한번도 안해본 것이지만 10년을 해냈는데 미술관 일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며 "무엇을 하든 '아무리 힘들어도 10년은 참고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믿고 맡겨주신게 고맙기만 했는데 해보니 힘들더라"며 "너무 힘들때는 속으로 '맡기셨으니 살게 해달라'고 감히 시할아버지께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고 말했다.지난해 영은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당연히 기념할 만한 일이지만 박 관장은 10주년 행사를 할까말까 고민했다. 박 관장은 "단순히 기념 전시회를 하면 외부인사에게 보여주는 전시가 되기 십상이었다"며 "10주년은 작가들과의 축제가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영은의 10년을 만들어낸 작가들이 '손님'이 된 느낌을 받지 않게 하기위해 박 관장은 1~8기 작가와 큐레이터를 수소문해서 축전글을 받고 도록이 아닌 영은미술관 10년사가 담긴 책을 만들었다. 물론 전시회도 했다. 영은의 작가들이 영은에서 탄생시킨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은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하면서도 눈물겨웠다. 박 관장은 "작가들로부터 '친정에 온 것 같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통했구나'싶었다"며 불과 1년전의 일을 아득한 듯 떠올렸다.10살 영은미술관과 함께 성장하면서 박 관장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캔디가 거울속의 나하고 얘기를 나누는 듯, 박 관장은 '영은'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지금 하는게 맞는걸까?'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들이 아직도 많다. 한번은 입주 작가에게 '내가 이자리에 앉아있는게 맞는지 모르겠어요'라며 푸념하니 작가가 하는 말이, '이북에서 여기까지 와서 성공하신 분이 허튼 눈으로 앉혔겠습니까'라며 위로하더란다. 참으로 유쾌해지는 대답이다. 박 관장은 "애플의 스티브잡스처럼 영은을 대표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영은'이라는 이름만 기억되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빛으로 가는 중10년이 지나니 이제는 배짱도 좀 생겼다. 박 관장은 "영은은 이제 한 사람의 손을 벗어난 것을 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예술과 예술인들에게 혜택이 되는 영은을 위해 주변 관계자들에게 제법 요구를 할 줄도 알게 됐다. '영은을 위해서 기도 좀 많이 해주세요'라고. 기도의 힘일까, 세월의 힘일까. 지금 진행 중인 전시 '빛으로 가는 길'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 같다고 한다. 늘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전시 제목은 박 관장이 가칭으로 만든 것이 작가 만장일치로 그대로 정해졌다. 해외전시는 운반, 보험 등으로 돈이 무척 많이 드는데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영은이 사설미술관인 것을 알고 자국에서 경비를 지원받아와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 박 관장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을 실감했다"며 "입주작가의 아이디어와 인맥, 영은의 이름과 역사가 일을 척척 진행시켜서, 이번 전시처럼만 되면 힘들게 하나도 없겠다"고 말했다.그러나 사설미술관 관장으로 살면서 정부가 야속하지 않을리 없다. 박 관장은 "요즘 돈 있는 사람들은 레스토랑하지 미술관 안하다"며 정부의 미술관 정책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박 관장은 "사설미술관이 양적으로는 크게 늘었으나 입장료만으로는 턱없어 전기요금도 못낼 정도로 어려운 곳이 많다"며 "운영 상황을 꼼꼼히 파악해 잘 하고 있는 곳은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우리나라 사설 미술관이 외국처럼 자리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년 적자를 면치 못하며 운영해온 박 관장은 앞으로 10년동안은 운영수지를 맞추는 것이 목표다. 박 관장은 "1년에 10%씩 수입을 맞춰 10년 후에는 나간 돈과 들어온 돈이 같아지게 하겠다"며 "설립자가 씨 뿌린 밭을 잘 일구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그 소명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말했다.박 관장은 10주년을 보내고 나서 '가늘고 길게 가야 살아남는다'는 사립미술관 선배 관장들의 조언에 귀가 쏠린단다. 하지만 아마도 씩씩하고도 튼튼하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답을 찾아 줄 영은의 말에 더 마음이 쏠려있는 듯하다. 광주시 쌍령동 8의1. (031)761-0137. http://www.youngeunmuseum.org/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6-14 민정주

[아트브리지 플러스·1]눈길 머물고 발길 멈추고… 그곳엔 '예술'이 있다

■ 프롤로그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00년이 지나면? 무엇이든 100살이 되면 완결성을 인정받는다. 100년 된 기업, 100년 된 학교, 100년 된 나무, 100년 된 도자기. 100년을 견뎌낸 존재에 대해 사람들은 안정성과 내구성, 역사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앞으로도 그 존재가 우리곁을 지키리라는 믿음을 보낸다.지난 2009년 한국의 박물관 역사는 100주년을 맞았다. 1909년 창경궁 안의 식물원·동물원과 박물관을 일반에 공개한 것이 우리 근대 박물관 역사의 효시다. 1912년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 준공됐고, 1938년에는 이 박물관 유물 중 우수한 미술품만 골라 따로 전시했다. 전시관 이름은 '이왕가미술관'이었다. '이왕가'는 '일본 천황가에 복속한 식민지의 왕가'라는 의미로 우리 근대사 대부분이 일본과 맞물려 있듯 박물관도 그렇게 시작됐다. 전쟁을 겪으며 6차례 이전끝에 용산에 자리잡은 우리나라 1호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100년 역사의 위엄을 풍기며 우리나라 대표 박물관으로 국내외에서 사랑받고 있다.100년 된 번듯한 박물관이 있는데 왜 계속 박물관은 새로 생길까. 경기도에는 용인 경기도박물관, 안산 경기도미술관을 비롯해 남양주에는 실학박물관이, 용인에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있고 어린이박물관, 선사박물관 등 50여개의 국공립 박물관 및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도는 매년 사립 박물관과 미술관을 지원하고 있다. 도내 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은 등록된 곳만 90여곳에 달하고 신규 등록 신청도 매년 10여건이 넘는다. 국제박물관회의 박물관 헌장은 박물관을 '인간 환경의 물질적인 증거를 수집, 보존, 연구해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사회의 발전에 봉사할 수 있도록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연구와 교육, 과학에 이바지하는 비영리적이고 항구적인 시설'이라고 정의했다. 박물관을 단순히 수집, 전시기능을 담당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고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교육적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보는 것이다.다양한 사람의 문화적 교육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박물관 역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민간이 운영하는 사설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국공립 박물관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유물을 선보인다면 사설 박물관은 주관적이고 특징적인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설립자 한 사람의 평생 열정이 서려있기도 하며 국공립 박물관에서 미처 찾아내지 못하는 사소하지만 가치있는 보물이 숨어있기도 하다.그렇다고 사설박물관과 미술관이 모두 영세한 것만은 아니다. 현대미술의 요람으로 불리는 뉴욕의 'MOMA(모마)'로 알려진 뉴욕현대미술관은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feller Jr.) 부인 등 3명의 여성이 중심이 돼 인상파 이후 유럽 미술을 소개하자는 목적으로 창설했다.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미술관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으로 1966년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33세 때 세운 것이다. 서화를 비롯해 자기·불상·불구(佛具)·전적(典籍)·와당·전(벽돌) 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경기도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은 용인의 '한국미술관'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대모 김윤순 관장이 운영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카메라박물관'과 섬유미술품을 전시한 '마가 미술관'이 경기도에 있고 나비, 닭, 거미, 활, 세계민속악기, 전화기 등 다양한 주제의 유물을 보유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있다.그러나 가장 오래된 미술관이라 해도 경기도내 사설 박물관·미술관의 역사는 채 30년을 넘기지 못한다.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10년이 안되거나 10년을 못넘기는 곳들이 적지않다. 운영자가 예술만 알고 경영은 몰라서 문을 닫는 곳도 있고 알려지지 않아 적자에 허덕이는 곳도 부지기수다. 경인일보 취재팀은 아트브리지를 통해 경인지역에서 문화의 일맥을 담당하는 분들을 여럿 만났다. 지난 13회 '아트브리지 인' 연재를 통해 만난 설립자들은 하나같이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공적' 사유재산으로서의 사설 박물관과 미술관 운영을 버거워했다. 그렇다고 사유재산에 공적자금을 무한 지원할 수도 없는 노릇. 취재팀은 그간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설립자와 등록과 지원 등 박물관 정책을 펴는 정부기관의 입장을 함께 담아내 관람객이 문화적 수요자로서 최대의 효용을 얻을 수 있도록 '아트브리지 인'을 '아트브리지 플러스'로 리뉴얼해 연재한다.아트브리지 플러스는 20회에 걸쳐 경기도를 비롯 전국의 사설 박물관·미술관을 소개하며 설립자의 목소리를 통해 사설 문화예술 기관으로서의 특징과 어려움,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계획이다. 등록된 사설박물관과 미술관은 물론, 등록되지 않았지만 지역에서 문화적, 교육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곳을 발굴, 독자들이 이 곳을 통해 더 풍요롭게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보다 알차고 뉴욕의 모마보다 유명한, 세계인과 함께 문화를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박물관·미술관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민정주기자

2012-06-07 민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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