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브리지&人

 

[아트브리지&人·14]인천 동구 '한점갤러리'

과거 행정과 상권의 중심지였던 인천시 중구 지역이 근대 건축물로 대표된다면 주거지가 형성됐던 동구 지역은 인천시민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점한다.인천 근대문화의 보고(寶庫)인 동구 배다리 일대에선 2008년부터 매년 5월 '배다리문화축전'이 열린다.오랜 기간 서민문화의 중심지로, 유형문화재가 밀집해 있으며 한국전쟁 후 자연스럽게 형성된 헌책방 거리와 양조장 등으로 유명한 배다리에서 지역문화예술인들과 주민들이 문화축제를 열고 있는 것이다.5회째를 맞는 올해 축제는 지난 12~13일 개최됐다. 상당수 지역 축제들이 관과 기획사들이 주축이 돼 유명가수 초청과 같은 볼거리 제공 위주의 문화축제를 개최하지만, 배다리문화축전은 차별화된 길을 고수하고 있다.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문화 단체(개인)들은 직접 기획을 해서 진행자를 선출하고 각자의 공간에서 하는 활동을 엮는 등 모두 함께 프로그램을 짰다.주민과 이 곳에 거주하는 문화예술인들 간에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축제의 동력을 얻고 있으며, 올해 축제도 잘 치러냈다.요즘 이 지역은 근대 문화를 접하려는 트레커들의 주요 코스이기도 하다.아래쪽의 헌책방 아벨서점과 대안공간 스페이스빔, 위쪽의 창영초교, 여선교사 기숙사 등이 우각로에 면해 있다.그리고 우각로 중간쯤에 작은 갤러리인 한점갤러리가 있다. 이후 인근에 띠 갤러리가 자리잡으면서 주민들은 물론 트레커들의 발걸음에 여유를 선사하는 문화 휴식처로 자리잡았다.■ 한점 갤러리초여름 더위가 잠시 주춤했던 평일 오후 시간에 한점갤러리를 찾았다. 교양있는 부유층의 전유물로 떠올리던 여느 갤러리의 모습과 다른 곳이다. 지난해 5월 10일 한점갤러리는 문턱을 낮추고 동네 어귀에 자리잡았다.갤러리의 윤미경(44) 대표는 갤러리의 명칭처럼 소박하게 '한 점'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개관했다.큰 작품은 5점, 중간 작품은 7점 정도 걸 수 있는 규모이다.평소 지역에서 열심히 작업 활동을 펴고 있는 작가들과 함께 하는 공간을 꾸미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윤 대표는 1년 전 이 공간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덜컥 계약했다."전문 큐레이터도 아니면서" "공간만 열어놨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아버리는 건 아닌가" 등 주위에서 걱정하는 소리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작은 갤러리 공간을 꾸미는 것이 윤 대표의 꿈이었으며, 특히 배다리 지역에 애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현재까지 한점 갤러리의 전시회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작가들에게 무료로 공간을 열어 주고 있는 한점 갤러리에는 지금까지 평균 한 달에 1회꼴로 전시회가 진행됐다.크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에 작가들이 부담을 갖지 않고 몇 작품을 내걸 수 있었으며, 특히 배다리라는 공간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이 갤러리의 문을 두드렸다.한점 갤러리는 장소 특성상 우리의 삶을 보여 주는 작품 위주로 전시회를 진행했다.지난해 8월 한점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서양화가 안성진씨는 "평소 소외된 것들을 주요 창작 소재로 삼다 보니 배다리에 위치한 한점 갤러리에서 전시 제의가 왔을 때 흔쾌히 승낙했다"며 "이 거리와 공간은 현재 잘 볼 수 없는 옛 시절의 삶과 추억을 머금고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한점 갤러리의 개관 테이프를 끊은 박선영 작가 또한 어린 시절에 경험한 소재들로 완성된 작품들을 전시회에 출품했다.박씨는 "이 작은 공간이 큰 세계가 될 수 있다고 본다"며 "배다리 주민들이 갤러리를 스치면서 꿈을 키울 수 있는 바로 꿈의 공간이다"고 말했다.■ 개관 후 1년거리를 오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한점 갤러리에선 현재 플로리스트 서옥선씨의 '꽃' 展이 진행중이다.1년간 전시회를 진행해 온 갤러리는 화려하지 않은 모습으로, 잔잔하게 오래된 거리와 어우러지며 주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자리잡았다.주민들은 물론 인근 영화여자정보고 학생들과 창영초 어린이 관람객, 주말이면 창영교회를 찾는 신자들까지 갤러리에 드나든다.갤러리에서 마주한 윤 대표와 지난 1년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윤 대표는 1996년부터 운영중인 출판사 다인아트에서 도록을 만들면서 맺었던 인연 등으로 작가를 섭외하고 운영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이 곳이 엄청난 파급은 없지만 전시회를 연 작가들은 다들 '향수를 자극하고, 잔잔한 재미를 주는 곳이었다' '다양성을 보게 해 줬다'는 등의 평가를 해 주더군요. 이를 통해 주민들에게도 '갤러리가 무거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것 같아요."17년째 운영중인 출판사는 한점 갤러리를 여는 데 정신적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윤 대표는 인천 관련 책을 펴내면서 지역 공부를 많이 했다. 인천이 광역화되면서 곳곳에 산재된 예술가들의 '소통의 필요성'을 안 윤 대표는 갤러리의 최적지로 배다리를 꼽았다."강한 책임감 같은 것은 아니지만, 소통의 통로가 단절되면 지역 문화·예술이 정체된다고 판단했어요. 배다리가 지역 예술의 연결 통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봤습니다."또한 개관 시기에 앞서 수원에 가서 보고 온 대안공간 눈도 한점 갤러리의 개관에 기여했다."수원 구도심에 자리잡은 대안공간 눈은 제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모습이었어요. 현지 분위기가 배다리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죠."윤 대표는 한점 갤러리의 앞으로 운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공간적 측면에서 변경될 부분은 없을 것으로 보이며, 지역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기획해 전시회를 열 생각도 있습니다."■ 소통의 다른 창구윤 대표는 1996년 현재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근 구월동에 '다인아트 갤러리'를 열었다.당시 미술 영역이 대중화되지 못했으며, 문화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데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에 무리라고 절감한 윤 대표는 IMF까지 겹치는 통에 2년여 만에 갤러리의 문을 닫았다.대신 출판사 일에 매진했다.지역 문화·예술에 대해 고민하던 윤 대표는 인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 보기로 했다.다인아트 출판사의 책들은 모두 인천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원식 교수의 '왜 다시 인천인가'와 '황해에 부는 바람',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의 '인천 이야기'와 '인천인물 100人', 윤진현의 '행복한 인천연극' 등 셀 수 없이 많다.윤 대표는 "책을 몇 권이나 출판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역에서 콘텐츠가 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잘 엮어 기록으로 남기는 게 지역 출판사의 몫"이라고 말했다.출판사와 갤러리 외에 윤 대표는 다른 '소통 창구'를 모색중이다.비평가와 예술가들이 글로 서로 교류하고 대화하는 공론의 장이자 기록의 장을 열어 줄 지역 문화·예술 잡지를 만드는 일이다.이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 문제를 돌아보고 서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윤 대표는 "문화·예술 분야는 물론 모든 곳에서 금전적 산술이 만연해 있다"며 "한점 갤러리는 대관료도 없는 상태이며, 돈과 무관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시 동구 창영동 15의 7(우각로 창영초교 옆). 010-2778-0268글·사진┃김영준기자

2012-05-16 김영준

[아트브리지&人·13]과천 '아해박물관'

모르는 게 없는 세상이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사이트마다 앞다퉈 지식을 대령한다. 인터넷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을 필요도 없어졌다. 스마트폰은 화장실에 앉아서도 지식을 섭취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배운다. 지식에 앞서 배워야 할 것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요즘 세상에서는 배움을 통해 보다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를 기대한다.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은 보통 예술을 통해 암암리에(?) 교육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 와중에 교육전문가가 교육적 기능을 전면에 내세워 운영하는 전통문화어린이 박물관이 있다니 오히려 신선하다. 개관한 지 1년이 갓 넘었다니 더욱 푸릇푸릇해 보인다. 서울여자대학교 아동학과 문미옥 교수가 지난 1년 동안 박물관 관장으로 살며 배운 것들을 이야기했다. 잘 여문 꿈이 꽃망울처럼 툭툭 터지며 박물관을 채우는 듯한 시간이었다.■ 아해박물관은…아해는 어린이를 칭하는 옛 우리말로, 조선시대 세종 29년의 석보상절에 최초로 기록돼있다. 지난해 2월 개관한 아해한국전통어린이 박물관은 우리 전통놀잇감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수집, 보존해 전시하고 체험교육을 함으로써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놀이 속에 담긴 교육적 가치를 어린이, 성인, 교육전문가들에게 전한다. 28년동안 교수로 재직하며 어린이 교육에 공헌한 문미옥 관장(서울여자대학교 아동학과·문학박사)이 직접 운영하며 연구기반의 유물 전시와 체험을 통해 전통문화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전시연계 체험교육은 어린이, 개인 및 단체뿐 아니라 가족 단위의 신청자를 대상으로 상설전시 관람 후 전시와 관련된 놀이를 직접 체험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학예사와 전문가의 진행으로 이뤄진다.한편 지난해 7월 시작된 기획전 '팽이!과학을 만나다. 그 첫번째 이야기'가 관람객과 교육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오픈런 중이며 오는 7월30일부터 '방패연!세계를 날다'기획전을 열 계획이다. (02)3418-5501~3■ Nice! 조상님전통놀잇감이 전시된 1층 상설전시장을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것은 아이들 놀잇감이 아니라 아이를 낳은 부모들이 만든 물건이다. 백 조각의 흰 천을 엮어 만든 '백쪽저고리'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어머니들의 정성이 배어 있다. '천인천자문'은 아기가 태어나면 1년 동안 지인 1천명을 찾아다니며 1자 쓰고 지인의 이름을 남겨 만든 천자문책이다. 장차 학문에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며 돌잡이로 놓았다. 문 관장은 "한국 육아문화의 기품을 보여주는 공간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했다.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놀이에 사용된 공기며 팽이, 윷 등이 전시돼 있다. 여러 종류 연과 얼레, 썰매와 서당에서 쓰던 책들. 민속박물관에 가면 전시장 한 쪽을 차지하던 것들이 아해박물관에서는 전시장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모든 게 손으로 만들어져 똑같이 '썰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같은 게 하나도 없다. 문 관장은 "툭툭 잘라 끼워 만든 질박함 속에 조형감이 넘쳐난다"며 "다 다른데 예쁘지 않은 게 없더라"며 조상님들의 솜씨를 칭찬했다.어쩌면 누구나 지금도 구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전시된 모양새와 문 관장의 설명이 유물을 더 번듯해 보이게 했다. 가치있는 유물을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로 돋보이게 전시하는 데도 꽤 많은 공을 들였다는 문 관장은 "옛날 물건이라고 너무 낡아보이면 아이들이 '우리 조상님들은 꼬질꼬질하게 살았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우리 전통문화를 통한 교육이 성공하려면 조상님에 대한 감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잘 놀면 공부도 잘한다'공깃돌' 전시 품목이 10여종이다. 지역마다 공깃돌 재료가 다르다. 제주도는 현무암, 경북은 규암, 전북은 역암, 경기 포천은 화강암. 우리나라 지질도에 따라 공깃돌이 질감과 모양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닷가에서는 소라나 고동이 공기로 쓰였고 섬마을은 산호를, 산간지역에서는 기와를 갈아 공기를 만든었다. 복숭아씨, 오리나무 열매, 동백씨로도 공기 놀이를 할 수 있는 모양이다. 문 관장은 "놀잇감의 소재가 열려 있었다"며 "문방구에서 매번 똑같은 공기를 사는 게 아니라 무엇이 공깃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창의성이 길러진다"고 말했다.팽이도 바가지 가운데 구멍을 뚫어 심을 꽂은 바가지팽이, 팽이의 원조 도토리팽이, 얇은 소나무껍질팽이, 양쪽으로 연주하는 장구처럼 양쪽으로 돌릴 수 있는 장구팽이 등 종류가 다양하다. 육각원통에 숫자가 쓰여 있는 숫자팽이는 승람도 놀이에 쓰였다. 승람도 놀이는 주사위 숫자에 따라 말을 옮기며 세계를 여행하는 블루마블 게임과 비슷한 전통놀이다. 조상들은 승람도 놀이로 팔도를 여행하며 우리나라 각지를 익히고 지역의 특색을 배웠다. 비슷한 형식의 승경도 놀이도 있었는데, 이는 벼슬에 오르는 놀이로 영의정, 좌의정 등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이 이긴다. 말을 잘못 옮기면 사약을 받게 될 수도 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아이들은 다 한번쯤은 하던 놀이라고 한다.문 관장은 "전통놀이는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에 발맞춰 창의성을 기르는 데 유용하다"며 "교육전문가로서 전통놀이를 교육과정에 넣을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이 올해의 역점 사업"이라고 말했다.■박물관 운영 5개년 계획문 관장은 만 25세에 교수가 됐다. 젊은 혈기의 문 교수는 서양학자를 만나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루소, 피아제, 프뢰벨은 아는데 우리의 교육자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다. 우리 조상들이 교육을 안 했을 리 없건만 대학에서 배우는 건 서양학자들뿐이었다. 그래서 서양의 학자들에게 우리의 전통 교육문화를 보여 주기 위해 유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금 박물관 자리에 약 132㎡ 크기의 연구실을 짓고 외국인 교수들에게 보여 줄 만한 정도의 유물을 전시할 요량이었으나 아이들도 들어가서 보고 배울 수 있게 해 달라는 주변의 열화와 같은 요청을 문 관장은 내치지 않았다.박물관을 처음 설립할 당시 문 관장은 "내가 운영을 해내지 못하면 대한민국 사립박물관 제도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라며 배짱좋게 시작했다. 박물관 부지가 있고 수십년간의 교수 경력에 석·박사 인력풀을 가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문 관장은 "1년 운영을 해 보니 건방진 생각이었구나 싶다"며 "봉사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건 알고 시작했지만 문을 여는 만큼 경제적 손실이 생기니 인간적인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고 털어놓았다.그래서 문 관장은 힘들 때마다 "하다 안되면 문닫고 말지"라고 말한다. 다행히 마음보를 크게 갖고 배짱있게 해 보자는 의지가 담긴 말이다. 문 관장은 "5년 동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고 결심하고 신나게 또 일을 벌이는 중"이라는 말로 안심을 시켰다. 지난 1년 동안 박물관에서 벌어진 일들을 묻자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설명하는 문 관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의외로 답이 간단하다. 문 관장은 "10년 혹은 20년 후에는 인류의 전통 놀잇감은 다 모으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며 "'전통놀이' 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20여년 전 유물을 처음 모으기 시작할 때도 이처럼 눈을 빛내며 골동품 가게를 뒤지고 다녔을 문 관장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5-10 민정주

[아트브리지&人·12]시흥 '창조자연사박물관'

1994년 제작된 브라이언 레번트 감독의 미국 영화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은 석기시대를 사는 인간의 모습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쓰레기통 역할의 돼지, 샤워용 맘모스 등 기발한 등장인물(?)들은 영화에 재미를 더해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나는 건 인간 언저리에서 함께 살았던 공룡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에 따르면 공룡은 6천500만년 전 지구에서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그리고 인간이 출현한 것은 200만년 전이다. 공룡이 사라지고 나서도 6천300만년 후에나 나타난 인간과 공룡이 공존하는 것은 단지 이 영화의 감독이 상상력을 발휘했기 때문일까? 시흥시 신천동의 '창조자연사박물관' 박승식 관장은 '지적설계론'을 근거로 인간과 공룡의 공존은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교회 박물관박승식 관장은 '시골출신'이다. 시골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교회를 '우리(동네) 교회'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여겼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닌 박 관장은 신학대학에 진학하면서 경기도에 터를 잡았다. 1984년 5월 결혼하고 결혼식 다음날 개척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도시사람들은 교회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우리동네 교회'라는 말은 없고 '저 교회는…'이라는 말 뒤에 따라붙는 서술어가 냉랭했다. 박 관장은 "교회가 욕을 참 많이 먹더라"며 "교회가 지역주민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문화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교인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고 지역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찾다 박물관을 세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창조자연사박물관은 박 관장이 처음 교회를 세운 지 20년 되던 해 문을 열어 7년째 운영되고 있다. 연간 3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한다. 국내에 하나뿐인 '창조'자연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라지만 동네 안팎으로 찾는 이들이 많다. 10년 전부터 수집했다는 유물들의 숫자와 수준이 상당하다. 본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해백합(바다나리)' 화석을 소개하며 박 관장은 "지금은 우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국가적인 보물"이라며 "언젠가는 국가에 기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적설계론국내에서는 생소한 '창조'자연사박물관이다 보니 진화론에 바탕을 둔 자연사박물관과 다른 특별한 유물을 찾게 됐다.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공룡랜드의 배경에 아담과 이브가 그려져 있다. 박 관장은 "성경에 따르면 공룡은 종류대로 창조됐고, 사람과 함께 살았다"며 "고서에 공룡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했다는 것이 공존의 증거"라고 말했다. 화석광물관에도 '창조'의 증거가 되는 광물이 전시돼 있다. 박 관장은 "요한계시록 21장에 12보석이 등장한다"며 "흔히 과학과 신앙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 창조론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그는 "갈릴레이를 비롯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 역시 '창조과학자'였다"며 "과학이 이루어낸 모든 발명품은 자연에서 모방된 것이며 자연은 창조된 것"이라고 '지적설계론'에 대해 운을 뗐다. '지적설계론'이란 탐구 대상이 '의도적 존재'인지 '우연적 존재'인지를 규명하려는 탐구이다. '지적존재'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계, 즉 만들어냈다는 이론으로 19세기 초부터 주장됐다. 넓은 의미의 지적설계론은 지적존재가 신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단지 자연이 설계됐음을 규명한다. 그러나 창조론은 지적존재가 신이라고 주장한다. 박 관장은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지만 진화론에는 종과 종으로 넘어가는 중간 화석이 없다는 맹점이 있다"며 "진화론만이 진리는 아니다"고 말했다.■ '창조'자연사박물관박 관장은 "창조자연사박물관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의 존재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신앙적인 면보다는 교육적 기능을 고려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관장은 교회의 목사이고 평생을 신을 믿으며 살아온 사람이지만 서울대학교 과학정책 연구과정을 이수하며 쓴 논문이 우수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과학적 연구과정을 요구하는 논문을 통해 박 관장은 창조론이 신을 믿는 사람들끼리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창조론은 아이들에게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고 주장한다. 박 관장은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원소기호가 같지만 구성이 달라 전혀 다른 자연물이 됐다"며 "인간은 어떤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 다른 인물이 되는 만큼 다양한 사고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의 '신앙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 과학없는 신앙은 장님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박 관장은 "창조론은 비과학이나 신화가 아니라 현대과학이 아직 입증하지 못한 초과학"이라며 "미래에는 인간의 지성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창조자연사박물관은…학회 인증받은 유물 다수 전시 '창조과학 프로그램' 정기 운영창조자연사박물관은 1만1천560㎡의 대지위에 수 백여종의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도심속에 있는 친환경적인 자연교육의 장이며 휴식 공간이다. 본관 1층의 공룡랜드·골격공룡관·블랙홀·화석광물관·종유동굴관과 2층 전시관의 해양생태관·해양패류관·창조과학관·조류관·나비곤충관·액침표본관·인체관·식물표본관·수목표본관으로 구성됐으며 20여종의 움직이는 공룡과 골격공룡, 초대형 해백합 화석을 비롯해 화석 180여점, 광물 190여점, 어류 180여점, 패류 200종 6천100여점, 나비곤충 264종 500여점, 조류 60여점, 액침표본 110여점, 식물과 나무 60여점의 유물을 전시, 보유하고 있다. 330㎡의 비닐하우스에 마련된 야외 생태자연학습관에는 40여종의 한국 토종 야생물고기 수족관이 있으며 살아움직이는 곤충과 파충류를 직접 관찰하고 체험할 수 있다. 나무화석공원·수목공원 등도 있다.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석과 광물의 원산지 및 학명은 사단법인 미래자연사환경학회의 인증을 받았으며, 1천여명의 석박사급 과학자, 의사, 교수, 교사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창조과학회의 인증과 함께 정식 조인해 지속적으로 자연사와 창조과학의 정보를 지원받고 있다. 또한 전문강사를 세워 정기적인 창조과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화석 발굴, 찰흙공룡액자만들기, 쪼갠화석액자만들기 등의 체험학습이 가능하다. (031)435-1009 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05-03 민정주

[아트브리지&人·11]용인 모현면 '마가미술관'

어릴 적부터 한 번도 흔들림 없이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인 소년이 있었다. 집안 종손을 그림쟁이로 키우지 않으려던 부모님을 설득해 화가가 된 소년은 그 꿈을 계속 키워나갔다. 화가로 산지 50년, 화가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은 일흔이 됐고, 이제는 그 끝을 가늠해 보기 어려울 만큼 크고 여문 꿈을 가지게 됐다. 용인 마가미술관 송번수 관장의 꿈을 담아낸 작품과 미술관 이야기를 들어보자.■ 타피스트리? 타피스트리!탁 트인 공간에 걸려있는 작품을 멀리서 보니 컴퓨터로 작업한 듯 그려진 선들이 오차없이 매끄럽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작품은 거친 섬유의 질감을 드러내고 매끄럽던 선은 계단모양으로 꺾인다. 컴퓨터는커녕, 붓도 없이 오직 손으로만 실을 꿰어 날렵한 선을 그어냈다. 타피스트리는 길다란 지지대 위에 날줄을 걸고 색실로 씨줄을 엮어가며 한 땀 한 땀 짜서 회화적 주제를 표현하는 미술양식이다. 굵고 질긴 실로 짜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와 질감, 명암은 선명하고 매끄럽고 명확하게 작품에 드러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작품의 규모에 있다. 타피스트리 작품은 보통 500호 정도로, 1호가 엽서 한 장 크기니 작품의 규모면에서는 타 장르의 추종을 불허한다. 송 관장은 가로 세로 각 4m에 달하는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단다. 한 작품을 만드는데는 하루 6시간씩 꼬박 1~2년이 걸린다. 십자수나 뜨개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나 어깨에서 뻐근함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송 관장이 "타피스트리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이요, 타피스트리의 매력은 '한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의 희열'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장인의 기운이 느껴졌다.홍대 염직공예과(현 섬유미술과) 61학번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한 송 관장은 초기에는 판화가 주종목이었다. 판화로 국내에서 주는 상은 다 휩쓸어 더이상 받고싶은 상이 없었던 송 관장은 일찌감치 대학 교수자리까지 꿰찬 전도유망한 화가였다. 그러나 돌연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중 보배의 미술관에서 타피스트리 작품을 보고 송 관장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송 관장은 "생전 처음 본 타피스트리에서 느낀 진지함과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그 길로 타피스트리 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지금까지 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가 먼저 인정했다!송 관장은 지난 2001년 '헝가리 개국 천년 기념 국제 타피스트리 공모전'에서 1등상인 '황금양모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송 관장의 작품을 보자마자 1등 작품으로 결정하고 나머지 작품을 심사했다고 한다. 내년 5월부터는 미국에서 전시회를 연다. 미국의 한 큐레이터가 6개 도시 순회전시회를 기획하고 전세계 타피스트리 작가 중 30명을 선정했는데 여기에 송 관장이 출품하게 된 것.국내에는 타피스트리라는 미술 양식 자체가 널리 알려져있지 않으니 타국에서 인정받는 것이 더 빠르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피스트리는 중세 초기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다수의 화려한 작품이 제작됐고 서양에는 로마네스크 시대에 전파돼 17~18세기 프랑스에서 기교적인 황금시기를 맞이한 역사 깊은 예술장르인 것을 감안하면 불모지에 가까운 우리나라 작가가 이런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다.송 관장의 타피스트리 작품은 스위스 제네바의 한국 UN 본부에도 전시돼 있다. 200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국 섬유 미술전' 에서는 유독 송 관장의 '이라크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 사람들이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무엇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걸까?작품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심상, 밀도를 더 중시한다는 송 관장은 "작가의 힘이 미미할지라도 시대를 기록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송 관장의 작품에는 삶의 역사, 모순에 대한 고발, 지적과 계몽을 테마로 하고, 기록에 역점을 둔 작품이 많다. '이라크에서 온 편지'는 이라크 전쟁 당시 발생한 민중의 고통과 자살폭탄테러로 인한 상처 등 전쟁이 뿜어내는 인상을 심도있게 표현하고 있다. 뾰족한 가시가 천을 뚫고 나오려는 이미지를 담은 이 작품은 기술적인 면에서도 타피스트리 기술의 최고치를 요구하는 작품이라니 작품이 지녀야 할 미덕을 고루 갖추었다 할 수 있겠다.■ 미술관보다는 작업실6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해 50년 타피스트리 작품을 만들고 20여회 개인전을 연 송 관장이 미술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미술관을 설립한 이유가 재밌다. 무대막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는데 작업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경기도까지 와서 작업할 곳을 찾다 아예 부지를 사들여 1984년 작업장을 만들었고 98년에는 작업실을 증축해 미술관을 개관했다. 송 관장은 "타피스트리 작품 상설전시공간이 없던 차에 제자들과 함께 지금의 마가미술관을 만들었다"며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라고 말했다. 홍대 미대 교수로 재작년 퇴직할 때까지 송 관장은 수천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제자만 34명이고 타피스트리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도 여럿이다. 송 관장은 미술관을 지어 문화예술계 발전에 일조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면서도 후학 양성과 우리나라 미술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했음은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유일의 타피스트리 미술관 운영과 관계없이 한국 섬유미술가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음은 그동안의 삶의 족적이 말해주고 있었다. 퇴직후 2009년 대전시립미술관장으로 선임됐던 송 관장은 1년후 관장직을 그만 두고 다시 용인으로 돌아왔다. 작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미술 작업을 하고 있다는 그의 얼굴이 밝아보인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멋진 모습의 인생을 살고있는 송 관장의 꿈은 여전히 싱싱하다.■ 용인 마가미술관은…국내 유일 섬유미술 전문 전시 한지 공예 등 체험수업도 진행용인시 모현면 동림리에 자리잡은 마가미술관은 1998년 개관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뿐인 섬유미술 전문 미술관으로 타피스트리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마가미술관은 1, 2층 각각 131.5㎡ 규모의 실내전시장과 900㎡의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2층 실내 전시장은 높은 벽면과 자연광이 직접 조명되는 채광창이 설치돼 시원한 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있으며 잔디가 깔린 야외전시장은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진 수려한 자연미를 자랑한다. 실내외의 복합공간으로 조성된 전시실은 평면작업은 물론 입체작품 및 설치작업의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공간을 제공한다.교육프로그램으로 '한지 캐스팅'이 있는데 한지를 이용해 입체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현대미술 분야로 독특한 질감과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미술관에서 개최중인 특별기획전 '일리암 맥닐(William Mcneil) 사진전 The Namibian Portfolio Oshana region'과 연계해 일리암 맥닐 작가가 영어로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작품 속 조형원리를 체험해 보는 수업도 진행된다. 대상은 초등학생이며 5월20일까지 접수 가능하다. 관람시간 3~10월 오전 10시~오후 6시, 11월~2월 오전 11시~오후 5시. 매주 월·화, 1월1일 및 설·추석 연휴 휴관. (031)334-0365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4-19 민정주

[아트브리지&人·10] 용인 '한택식물원'

이번에 찾아간 아트브릿지&人의 예술 작품들은 싹을 틔우고 자라고 향기를 내뿜고 바람에 흔들린다. 용인 '한택식물원'을 찾아가려면 고속도로와 국도를 지나 한적한 시골길을 한참 달려야 하지만 연간 방문자 수가 무려 25만명이란다. '식물원의 진수' 한택식물원은 우선 규모가 동양에서 가장 큰 73만3천262㎡에 달해 부지런히 돌면 2시간, 꼼꼼히 보면 하루가 모자란다니 식물원계 디즈니랜드 정도 되겠다. 큰 한(韓)자에 집택(宅)자를 쓴 큰집이라는 뜻의 한택식물원 작품들과 이택주 원장을 만나보자.■ 식물원은 수목원, 유원지와 다르다한택식물원 동원(East Garden) 중간쯤 호주온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무냄새가 코를 덮친다. 뒤이어 포근한 공기가 온 몸을 감싼다. 한택식물원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바오밥나무(The Bottle Tree)가 안정감있는 자태로 서 있다. 남아프리카 온실의 백미는 나무알로에(Aloe Dichotoma)로 100년을 산다는 이 식물은 옅은 갈색의 기둥 위에 초록색 알로에가 돋아 있다. 뿌리가 초록색인 나무가 땅에 거꾸로 처박힌 듯하다. 온실로 이동하는 동안 보이는 모든 흙 위에는 뾰족뾰족, 몽실몽실 새순이 돋아 있다. 올해는 어떤 작품이 얼마나 탄생할까.이택주 원장은 '식물원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힘주어 말한다. "식물원은 단순히 화려한 식물을 보여주는 공원이나 유원지가 아니다. 인류에게 유용한, 그리고 잠재적 가치를 지닌 식물유전자원을 확보해 연구, 전시, 교육을 하는 곳이다."식물의 중요성도 목 놓아 외친다. "식물 없이는 동물도 살아갈 수 없듯 생태계의 기본이자 기초과학이 식물이다. 식물 종 확보·관리 및 교육·연구하는 식물원은 대학마다 반드시 있어야 한다. OECD 가입국 중 대학에 식물원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한택식물원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적 재배 및 관리로 건강한 생태계, 생물종 다양성을 실현하고 있다'는 자랑도 살짝 곁들이는 이 원장은 예술인이기보다 과학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식물들과의 분투기는 여느 예술가의 사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깽깽이풀에 홀리다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한 이 원장은 당시엔 보통 젊은이처럼 식물에 관심이 없었다. 특근수당을 받으려 새벽 4시반에 출근하고 통금을 겨우 피하고 퇴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깨알같이 모으는 재미에 빠져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던 차 그에게 인생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나 짓고' 한가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때마침 종중어른이 지금 식물원 자리 일부의 땅을 사라고 권했다.땅을 사서 초지를 조성하고 소를 키웠다. 젖소는 키울 만했지만 당시 마리당 150만원 하던 한우가 1년 만에 90만원으로 곤두박칠쳤다. 업종을 바꿔 관상수를 심었지만 자꾸 죽었다. 나무에 대해 배워 보려고 유럽까지 답사갔다. 그런데 유럽은 우리나라에는 단 한 개도 없는 식물원이 도시나 대학마다 있었다. 우리나라는 당시 유엔 가입국 중 식물원 없는 유일한 나라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잘살아 보자'며 먹고살기 바빠 기초과학인 식물을 다루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을 만들겠다고 1979년 일을 벌였다.그런데 우리나라 토종 식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야생화는 정말 야생에만 있었다. 이 원장은 전국을 다니며 야생화를 채집·수집하고 한국인 최초로 야생화를 길러냈다. 지금 전국에 퍼진 야생화는 다 한택식물원이 고향이다. 북한식물은 베이징식물원과 업무협약을 맺고 중국에서 구했다. 한라산에서만, 설악산에서만, 계곡에서만 나는 식물을 찾아서 채집해서 길러내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식물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이 원장은 "한참 식물을 찾아다니던 1980년대 식목일, 광릉의 어느 계곡 언저리에 융단처럼 깔려 있던 보라색 깽깽이풀 꽃이 주저앉을 만큼 아름다웠다"며 회고했다.그러나 10년 넘게 식물원 만들기를 하는 동안 남은 것은 주위 사람들의 질책과 비참한 통장잔고뿐이었다. 1980년대 말 힘에 부친 이 원장은 벼랑끝까지 몰렸다. 애지중지 키워온 게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운명의 여신이 축복을 내리기라도 한 듯 야생화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먼저 일어난 야생화 열풍이 들어오면서 이 원장은 소위 '떴다'. 당시 방송·신문 등 거의 모든 언론에서 이곳을 취재했다. 이후 2003년 일반에 개방해 지금까지 꾸려왔다.■ 인류를 사랑하는 법식물원 일은 1년 내내 고되다. 평소 물주기, 풀뽑기 등은 물론 장마나 가뭄이 들면 더 바쁘다. 가을 방문객이 줄어들면 한가할까 하지만 화재예방을 위해 자고 나면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을 치워야 한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 힘든 건 운영 수지가 안 맞는 것. 동양 최대 식물원 주인이지만 직원 월급날이면 가슴이 오그라든다.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다면 식물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 원장은 "유럽 관광객들은 식물의 학명을 안다. 식물을 어디서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유럽 관광객만도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며 "유럽은 10명의 식물 전문가를 길러내기 위해 10만명의 학생에게 많은 돈을 들여 식물을 가르치더라"고 말했다. 식물자원에 대한 관심이 높은 유럽의 학교나 연구기관에서 이 원장에게 식물키우는 노하우를 묻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 원장은 "식물키우는 노하우는 순전히 경험이다. 우리나라 전역을 다니며 배우고 산에서 배운 것, 체험을 식물원에서 재현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풀 먹고 살다 병이 나면 또 약초를 먹고 살아남은 민족이다. 식물을 사랑하는 것이 동물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하는 길"이라고 마무리했다. 그는 과학자·예술가보다 '식물왕' 정도가 어울릴 듯하다.한택식물원은…1979년 설립 이래 다양한 식물종의 확보, 보호 및 대량 번식 등을 위해 노력해 왔다. 현재 66만1천㎡ 규모에 36개의 테마정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자생식물 2천400여종과 외래식물 7천300여종 등 총 9천700여종, 1천여만본의 식물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종합식물원이다.2001년 환경부 지정 '희귀, 멸종위기식물 서식지외 보전기관'으로서 자생식물 및 해외식물 유전자원 보전에 앞장서고 있으며 '원예조경학교', '자연생태학교' 등을 통해 식물 교육을 선도하고 있다.'Bloom & Love 한택식물원 봄꽃페스티벌' (4월 28일~5월 15일), '국화단풍페스티벌'(10월) 등 다양한 축제도 열린다.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4-05 민정주

[아트브리지&人·9]수원 세류동 '사랑나눔갤러리'

8절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조심스럽게 그려나간 그림이 수줍은 듯 혹은 천진난만한 자태로 벽면을 채우고 있는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사랑나눔 갤러리'를 찾았다. 보통의 갤러리에서는 솜씨 좋게 붓질한 유화나 투명하게 빛을 반사해 낼 것 같은 수채화, 세필로 그려낸 듯 정교한 판화 등 '수준급' 작품을 볼 수 있지만, 사랑나눔갤러리의 주인 신현옥 회장(치매미술치료협회)이 액자에 담아둔 것은 '기억'이었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이 아직 잊지 않은 기억을 도화지에 옮기도록 돕는 일을 26년동안 계속해 온 신 회장은 기억으로 그려낸 그 그림들에서 그들의 사랑을 본다.■ 갤러리신 회장은 2007년 수원 세류동 자신의 집을 개조해 동내 사랑방 격인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기왕에 '갤러리'라는 타이틀을 붙일 작정이었다면 금전적으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목 좋은 곳에 번쩍거리게 지으려 할 만도 한데, 신 회장은 갤러리를 골목이 꼬불꼬불한 주택가 끝집에 차렸다. "젊은 사람들이 오는 갤러리면 교통도 좋고 번들거리는 현대식 건물이 좋지만 노인분들한테는 그게 불편하고 어려울 수 있거든요"라고 갤러리 입지 선정 이유를 설명한 신 회장은 "어르신들이 편한 대로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기도 하고 힘드실 땐 누울 수도 있는 점이 우리 갤러리의 자랑"이라고 덧붙였다. 2층짜리 갤러리에는 입식 시설이 갖춰진 거실, 응접실, 사무실과 좌식으로 된 방이 있다. 주방도 있다. 화장실도 실내다. 가정집에 그림만 걸어놓은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모든 벽면은 물론이고 현관과 마당, 담장까지 그림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실에는 미술치료를 받으러 오는 어른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제껏 본 갤러리 중 가장 파격적이다.8절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려진 전시작품들은 초등학생들이 학교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인가 싶으면서도 어딘가 다르게 분위기가 있다. 세월이 담긴, 묵은 기억이 풍겨내는 분위기다. 작가의 작품은 치료 효과를 보여주는 진료 차트이기도 하다. 심한 치매 증세로 흰 도화지에 아무 것도 그리지 못하거나 알 수 없는 선들을 그어대기만 하던 어르신들이 이내 사과를 그리고, 산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면서 자신의 생을, 생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과정을 작품은 담고 있다. 치매노인의 손끝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그 순간 신 회장은 '보람이 아니라 전율'을 느끼며 26년을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사랑치매미술치료는 그림그리기를 통해 치매환자가 남아있는 기억을 최대한 활용해 현재의 나를 찾아가게 하는 것이다. 약물이나 의료기관에서 행하는 요법이 아닌 그림그리기가 '치료'의 효과가 있을까? 신 회장의 미술치료를 받던 치매환자 중 대소변을 못 가릴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던 할머니가 계셨다. 당연히 그림은 그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그림그리기를 시도하며 사물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그리기가 가능해졌을 때 할머니에게 첫사랑을 그려보라는 처방이 내려졌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할머니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후로 몸단장을 시작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했다. 신 회장의 시어머니는 치매를 앓으셨다. 젊은 새댁 신 회장이 성당에 갔다가 신도들과 함께 집에 오면 집안 벽에 똥칠이 돼 있어 신도들을 황급히 돌려보내고 혼자 울며 청소를 해야 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신 회장은 시어머니와 함께 집에 들어앉았다. 외출을 삼가고 시어머니를 지켜봐야 했다. 그림을 좋아했던 신 회장은 시어머니에게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병수발 5년 끝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림을 그린 후 병세가 호전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게 치매미술치료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아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신 회장은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릴 만큼 약해져 있었다. 사는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치매환자 보호자로 살아본 사람으로서,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차 한 잔 마실 여유'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신 회장을 움직였다. '우울증 있는 사람은 치매 할머니들께 봉사를 해라'는 신 회장의 신조다. 봉사로 시작한 미술치료는 환자뿐 아니라 신 회장도 치료해 주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치매라는 말도 없던 때라 '노망난 늙은이'들을 쫓아다니는 일이었다. 그림에는 관심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알록달록한 색깔의 초콜릿을 나눠드리며 치료해 주면서도 구걸하듯, 스스로 더 간절하게 매달리면서 신 회장은 치매 치료의 획기적인 한 분야를 열어갔다.■ 나눔26년차 치매미술치료전문가 신 회장이 한 달에 만나는 치매환자만 150여명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치매환자보호시설에 가서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갤러리에서 개별수업을 하거나 치매환자의 가족을 만난다. 보훈복지센터에서 치매치료 수업을 하거나 간호대학, 치매지원센터, 대한적십자사 등의 기관에서 미술치료 강의를 하기도 한다. 치매치료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강의도 계속하고 있다. 분주한 생활이다. 이 가운데 막 저지르는 행사치레도 많다. 어느 할머니 생신이라서 잔치, 어버이날이라서 잔치, 명절이라 잔치….1층집을 2층으로 올리고 전시회를 열고 잔치를 벌이니 치매미술치료로 돈을 제법 벌어들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신 회장은 통장이 늘 마이너스란다. 갤러리 증축할 때 든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있고 돈이 들어올 때마다 잔치를 치러 다 없앤다. 갤러리 운영비용은 신 회장이 개인전을 열어 충당한다. 신 회장은 개인전을 19차례 연 중견급 화가이기도 하다. 신 회장의 갤러리 이름이 '사랑 나눔'인 것이 당연해 보인다. 정말 많이 나누며 살았다. 그런 사람에게 으레 따라붙는 오해를 피하지는 못했다. 수원시에서 지원금을 받는 게 아니냐는 소리도 듣고 노인층의 표를 얻어 정계진출을 노린 꼼수가 아니냐는 시선도 받았다. 신 회장은 "노인나라 대통령을 뽑는 거라면 가능성은 있겠다"며 밝게 웃으면서도 "미술치료의 겉모습만 따라해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며 안타까워 한다.치매치료에 관해서는 장수국 일본의 전문가 니시다 원장에게 인정을 받기도 한 신 회장은 젊은 사람에게도 치매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신 회장은 "치매는 정이 모자라서 생기는 병"이라며 "혼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오랜 시간 생활하는 요즘 젊은층들은 위태로워 보인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를 둔 가족에게도 한 마디 남겼다. "치매 환자는 가정이 책임지기 어렵다"며 "시설에 모시는 게 당연한 것이니 가두지 말고 서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3-29 민정주

아트브리지&人·8] 김포시 고촌(高村) 보름산미술관

◎보름산미술관은…高村 대표 '지역문화공간' 유망작가 아낌없는 지원도보름산미술관은 김포시 고촌(高村) 보름산 자락에 자리잡은 '지역문화공간'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목가구와 석물 그리고 옛기와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차를 마시고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작은 음악회를 만날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1일부터 '보름산미술관 소장품展'이 진행중이다. 장정웅 관장은 "제아무리 훌륭한 수집이라도 수집의 운명이 참으로 덧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며 "다른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창고 깊숙이 꼭꼭 가둬두는 수집을 하는 것은 수집을 개인의 재산이라 여기는 경향이 너무 강한 탓"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작품들을 공공의 영역으로 이전한다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여러 다양한 뜻있는 역할을 수행해 줄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보름산미술관을 세웠다.보름산미술관은 역량있고 유망한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모든 시각예술분야의 지원을 받지만 지원 자격은 '현재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자'로 제한했다. 전시 공간을 제공하고, 전시 홍보를 지원한다. 예술지상의 열정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 여러분들이 포트폴리오와 전시계획서를 들고오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전시장 관람시간 하절기(4~10월) 오전 10시~오후 6시, 동절기(11~3월) 오전 10시~오후 5시. 일요일은 오후 1시 개관.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설과 추석은 쉼. (031)985-0005. www.boroomsan.com미술관 주변 경관이 가관이다. 딱 반으로 갈라 한 쪽은 재개발로 사람냄새가 지워져가는 빈집들이 휑뎅그레하다. 맞은편엔 높이 솟은 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 틈바구니에 보름산 미술관이 두둥실 떠있다. 그것들을 마주보듯 혹은 숨어있듯, 어쩌면 그것들을 내려다보듯. 40년 전 미술관 건립이 꿈이던 젊은이는 미술학도가 되고 사업가도 되고 아버지를 거쳐 할아버지가 되는 동안 마침내 번듯한 미술관 주인이 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스케치북만한 수묵화를 보고 반해 평생 그림쟁이가 됐다는 장정웅 화백은 눈가의 주름 한 줄, 하얗게 쇤 머리카락 한가닥, 손등의 굴곡 하나에까지 아직 낭만이 서려있다. 그런 그가 풀 한포기 기와 한 장까지 제 품팔아 지어낸 김포시 고촌의 보름산 미술관에서 예술가가 미술관을 차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역마살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수집'하는 사람들이라면 저마다 '돌아다닌 이야기' 한가락씩은 한다. 우리나라 작은 땅덩어리를 넘어 해외의 낯선 이름까지 제집 주소 부르듯 읊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장 화백은 '급'이 다르다. "민속품 모으느라 면단위로 다니며 온나라를 뒤지고 다녔지. 70년대에 빈집 돌아다니면서 쑤시고 다니다 간첩으로 오해받아 파출소로 끌려간 것도 몇번이나 돼." 장 화백이 대학생이었던 60~70년대는 헌것은 다 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우리나라 1호 사립박물관인 '온양 민속박물관'이 문을 열었는데 장 화백에게 이 박물관은 충격이었다. 다들 내다 버리는 오래된 민속품을 모아 '전시'를 한 것이다. 미술품의 범위와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장 화백은 이 때부터 열심히 모으기를 시작했다.다 같이 없이 살던 시절에 그는 자신의 보물을 '얻어서' 모았다. 엿장수가 다니면 리어카에 실린 물건을 유심히 보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고철과 바꿨다.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를 찾아가 막걸리 한사발을 나누어 마시며 동네이야기를 하다 '어느 집에 무슨무슨 물건이 있다더라'하면 달려가 사정해 얻었다. 첫 수집품은 도자기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부천의 공동묘지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게 됐다. 공사가 시작되고 땅을 파는데 포클레인이 지나간 자리에서 도자기며 그릇들이 삭은 뼛조각처럼 부서져 나가는 게 보였다. 아이고 저 귀하고 예쁜 것들이….작업 반장한테 술 한잔 사주며 작업(?)을 한 끝에 청자 서너점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했으니 계속 그렇게 했다. 미술작품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른 작가의 전시품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작가와 협상해 자신의 그림과 맞바꿨다. 그런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찾아헤맨 것이 따로 있었는데 돈으로 사기에는 애매한 것이었다.■ 망와장 화백을 면단위로 국토 대장정하게 만든 것은 '망와(望瓦)'다. 망와의 사전적 의미는 '용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다. 그러나 장 화백에게 망와란 "한자로 바랄 망에 기와와자를 쓰는 망와는 집집마다 바라는 것을 문양으로 새겨 직접 손으로 찍어 만든 단 하나뿐인 그 집의 문패이자 얼굴"이며 "특히 우리나라 망와에는 전통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가 융합된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한옥의 디자인포인트라 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평생을 바친 열정과 희망의 상징"이다.자신을 망와 작가라고 칭하는 장 화백은 망와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주름이 펴지는 듯했다. "한국식 기와집의 마무리 기와로, 기와 지붕 한 채에 6개가 올라가는데 망와에 새긴 문양이 아주 다양하지. 글자도 있고, 사람 얼굴 모양에 동물, 꽃에 지금 봐도 현대적 감각이 느껴지는 형이상학적 무늬까지…얼마나 예쁜지 몰라." 망와를 찾아다니며 속상한 때도 많았다. "망와가 공사판에서 깨져나가고, 노인들만 남은 시골 집에서 관리는 고사하고 이끼와 곰팡이에 형체를 잃어가는게 안타깝지. 남의 집 지붕에 있는 걸 막무가내로 떼올 수도 없고… 한 번은 암자의 기와 한 장을 보려고 한 여름 몇 시간 산을 탔는데 막상 가보니 양철지붕으로 바뀌어 있기도 하고 그랬지."30년 전부터 수집한 망와가 지금은 400여점이나 된다. 가져올 수 없는 것들은 사진을 찍어 자료로 남겼다. 대학원 논문 주제도 망와였고 요즘은 망와를 모티브로 한 그림작업에 푹 빠져 지낸다. 변덕많고 까다롭고 예민함의 대명사로 여겨지는게 예술가건만 장 화백의 한결같은 망와사랑이 별나다 싶더니 예술가 후배들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예술 좀 한다는 이들에게"의사는 사람 병 고치려 공부하고 목사는 포교위해 공부하는건데, 그렇다면 예술가는 무엇을 할 것이냐. 세상을 아름답게 해야하지 않겠나.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재능을 사회에 환원해야지. 공부의 값어치는 거기에 있는 거야." 예술가로 40년을 산 장 화백은 예술가들이 자기만 아는 옹고집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예술은 다 같이 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실천의 일환으로 보름산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관람객이 한달에 300~400명에 달하는 나름 잘나가는 미술관이 된 것은 무료입장의 힘이 아니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지론을 가진 장 화백은 미술관이라 이름은 붙였지만 미술작품 전시실옆에 민속품 전시관을 지어두었고 그 옆에는 찻집과 책방을 꾸미고 그 아래는 문화교실을 차렸다. "이제는 미술관의 개념이 달라져야 해. 과거에는 소장품 관람하고 가는걸로 끝났지만 그게 무슨 의미야. 사회교육, 학교에서 배제된 교육을 지역 미술관이 담당하면 여러가지 사회문제도 해결되는거야. 미술관 만든 목적도 거기 있지." 다소 계몽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나 싶더니 마지막 덧붙인 한마디가 역시 예술가구나 싶다."기부문화가 싹트고 있지만 배고픈 사람, 아픈 사람 한테만 도와주는게 기부가 아니야. 외국에는 박물관, 미술관에 유산을 남기는 경우가 많지. 먹는데 기부하면 먹어서 다 없어지지만 예술에 기부하면 미술관이 존재하는 한 기부자의 뜻도 사라지지 않아. 이렇게 하면 영원한 기부가 되는 것이지." 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03-15 민정주

[아트브리지&人·7] 인천 중구 '혜명단청박물관'

숭례문이 화마에 소실된 지 꼭 4년이 되었던 지난달 10일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구공사 현황 설명차 취재진에게 현장을 공개했다.당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 홍창원씨 등 숭례문 복구공사에 참여한 분야별 장인들도 동석했다.단청 공사 계획 브리핑에서 홍창원씨는 "숭례문 복구공사의 단청 양식은 (숭례문이 창건된) 조선 초기의 양식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1963년도 단청을 따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면 닦기(단청을 칠할 목재 단면을 손질하는 것), 출초(出草, 초지를 오려 단청 문양을 그리는 것), 조채(안료 만들기), 타분(목재 단면에 초지본을 대고 백분 뭉치로 두드려 문양이 그려지도록 하는 것), 채화(도료를 칠하는 것) 등으로 이어지는 단청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다른 장인들이 직접 채화 과정도 시연했다. 문화재청은 이날 취재진에게 숭례문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알렸다. 또한 옛 장인들의 숨결을 재현하는 현 시대 장인의 모습들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도 일깨웠다.■ 혜명단청박물관봄 햇살이 제법 내리쬐던 평일 오후 시간에 인천시 중구 중앙동3가 중구 역사·문화의 거리 한 편에 자리잡은 혜명단청박물관을 찾았다.이 박물관의 정성길(55) 관장은 이날에도 박물관을 찾은 초로의 관람객 두 분에게 단청과 박물관의 유물에 대해 열심히 설명 중이었다.정 관장과 대화는 잠시 뒤로 미루고 박물관을 둘러봤다.관람객들과 함께 정 관장의 설명을 들어보기도 했으며, 관람객의 동선에서 이탈해 홀로 여유롭게 유물들을 바라봤다.시간을 수백년전으로 돌려놓은 듯한 박물관 공간은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단청 만을 주제로 한 사설박물관인 이 곳은 지상 2층, 연면적 148.8㎡ 규모로 제1·2 전시실, 단청체험장 등으로 구성됐다. 주요 유물은 단청이 그려진 각종 목재와 불화, 불상, 무속도 등 2천여점으로, 인천시지정무형문화재 14호 단청장 기능보유자이기도 한 정 관장이 전국을 다니며 모은 것들이다.전통 목조건물 지붕 기둥머리에 그려진 단청과 법당에 걸어놓았던 불화, 불상에서 나온 복장물 일체 등이 전시되어 있다.특히 박물관에서는 대웅전 용머리조각·연봉형두공첨자 등 유명 단청부터 정 관장이 직접 작업한 단청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정 관장은 관람객들에게 설명 말미에 "박물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국 각지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단청들을 엄선해 전시했기 때문에 작품의 질 만큼은 자부합니다. 이 공간을 통해 단청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관람객들이 박물관 문을 나서고 정 관장은 기자와 마주 앉았다.■ 목조 건물에 생명 불어넣는 단청장정 관장은 40년 가까이 단청에 몰두해왔다.인천 영종도에서 태어난 정 관장은 불교신자였던 어머니와 함께 집 인근의 용궁사를 자주 찾았다. 그는 용궁사의 서까래를 장식한 단청에 한 눈에 반했다.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면서 자연스레 단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정 관장이 18세 되던 해에 우연한 일이 생겼다. 당시 동네의 친한 형이 경남 양산의 통도사에 단청 그리는 일을 하러 가자는 제안을 한 것. 이를 계기로 정 관장은 혜각 스님 문중에 입문해 단청 화공이 되었다.당시 국내는 섬유·직물 산업이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정 관장의 가족이나 지인들은 재단사나 재봉사가 될 것을 권했다. 재단사 일당이 1천500원인 반면, 단청작업을 하면서 정 관장이 받는 일당은 150원이었다.하지만 정 관장은 붓을 놓지 않았다. 일당을 모아서 쌀과 연탄만 사다놓고 2~3개월씩 단청작업에 매달렸다.정 관장은 혜각 스님 문하에서 단청을 한 이래 30여년간 국내 200여개 사찰 단청과 궁궐 단청, 관아 단청 등 문화재 단청에 참여했다.인천 지역의 수도사 삼천불전 단청을 비롯해 무량사 단청, 약사사·도선사 단청 등 직접 화원들을 데리고 시공한 것도 많다. 강화를 포함한 인천지역 건축물들의 단청은 정 관장의 손을 거친 것이 대부분이다.작품의 예술성 등 모든 면에서 완숙한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받고 있는 정 관장은 2004년에 인천시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받았다.■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지난해 4월 개관 2주년을 맞은 혜명단청박물관은 강화 전등사와 정수사 대웅보전의 단청 비교전시를 비롯해 꽃살 창호 단독문양 전시 등 특별기획전을 마련했다. 이 전시회는 지역 주민들에게 전통 단청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이끌어내는 장이 됐다.정 관장은 어린시절 우표, 옛날 동전, 돌멩이 등 무엇이든 수집하길 좋아했다.단청에 빠지면서 옛 단청자료가 아무렇게나 취급되고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문화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또 절의 보수공사에 참여하다 보니 절을 허물면 다 태워 버리는데 그게 아까워서 모으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모아진 유물은 2천여점, 자료만 해도 수천점에 이른다.정 관장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전통 문화인 단청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박물관을 열었다.그는 단청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이 박물관에 와 단청을 접하고 오방색에 대해 알고 가는 것만으로도 뿌듯해 한다.정 관장은 단청 작업을 하며 얻은 수익을 박물관 운영비로 보태고 있다. 그는 "정부와 지자체에서 국공립 박물관을 많이 짓는 것도 좋지만, 우리 문화를 지켜나가고 알리는데 힘쓰는 의미있는 사설 박물관에도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털어놓았다.혜명단청박물관은 박물관 내의 수장고가 넘쳐서 인근 창고에 세를 얻어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는 "중구지역을 찾는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 문화를 느끼기 위해 박물관에 종종 들르지만 이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줄 수 없어서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며 "자금 사정으로 인해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며,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깊은 큐레이터를 구하지 못하는 부분 등 사설 박물관의 운영 부분에 정부와 지자체가 신경을 써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집 격조 높이고 목재 수명 늘리는 단청단청의 역사는 선사시대 토기를 채색하는 데서부터 시작, 사람의 몸에 색칠을 하거나 문신하기 시작한 데서 찾는다.단청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목조건물을 장식하는 것을 떠올리나, 불화를 그리는 것도 단청에 포함된다.건축물에 단청을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첫째는 집의 격조를 높이기 위한 수단, 둘째는 썩기 쉬운 목재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일, 셋째는 집의 구조가 착시로 비틀리거나 처져 보이지 않게 교정하기 위해서다.단청무늬는 긋기, 모루, 긋기모루, 금모루, 금단청 등 다섯 가지로 나뉘는데, 그 차이는 집의 격조에 따라 달라진다.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색을 내는 재료는 천연에서 채취되는 광물성 안료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나 식물성 안료도 쓴다.작업과정은 처음 단청할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가칠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칠은 끓인 아교를 엷게 물에 타서 표면에 골고루 바른 다음 그 위에 흰색 안료를 칠한다. 여기에 다시 아교물을 먹인 후에 쇠녹이나 석간주색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번 거듭하면 단청할 바탕이 조성된다. 가칠로 바탕이 완성되면 초상을 한다. 종이에 그려진 무늬에 따라 돗바늘로 구멍을 뚫어 만든 화안을 대고 흰 가루 주머니를 두들겨 가칠 바탕에 무늬 초안이 나타나게 한다. 이후 선을 따라 각기 맞는 색을 칠한다.글·사진┃김영준기자

2012-03-08 김영준

[아트브리지&人·6] 광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캔버스의 대부분을 새파란 망망대해가 차지하고 있다. 너무 새파래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바다다. 캔버스 왼쪽에는 시커먼 배가 떠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조선의 처녀들이 그 배에 타고 있다. '끌려가는 조선처녀'라는 제목의 이 그림을 그린 이용녀 할머니도 그 배에 타고 계셨으리라….이 그림이 다만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 예술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지는 명화였다.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어느 예술가의 그림에서도 이런 명확함은 느낄 수 없었다. '정신대', '위안부'라는 말을 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그림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림에서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배어나왔다.역사가 예술이 돼 숨쉬는 곳, 광주시 퇴촌면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과 안신권 소장이 이번 '아트브리지 人'의 주인공이다.■ 역사관에서의 10년안 소장은 2001년 역사관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건설업계에 종사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언론에 보도되는 만큼만 알고 있었다. 그해 12월, 알고지내던 스님과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딱했다. 1998년 만들어진 역사관의 행정업무를 전문적으로 맡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박봉에 주말없이 매일 야근을 감내하며 일할 사회복지사를 찾는 것이었다. 오히려 봉사하는 마음으로 찾아와 일하겠다는 일본인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안 소장이 온 뒤 전반적으로 운영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10년째 이곳 살림을 도맡아 나눔의집에서 할머니들을 돌보고, 역사관을 관리하고 행정업무에 대외활동까지 해내고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남성들한테 고통받는 할머니들을 대하기가 편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들은 안 소장을 무척 예뻐하신다. 일부러 식당에 가서 '안 소장 밥 많이 주라'고 말씀을 넣어두시기도 하고 일하고 있는 안 소장을 보면 "일본놈들한테 항의편지 쓰느라 고생한다"며 응원을 해주시기도 한다. 오히려 여성 사회복지사들이 혹독한 시집살이(?)를 못 견디고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며 은근히 자랑을 한다.그러나 역사관을 운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전문지식이 부족했다. 1998년 역사관에 다녀간 오키나와 향토사 연구자 쿠니요시 이사무 등이 삿쿠(콘돔), 군표(군용수표) 등을 자료로 기증했다. 귀한 자료였다. 그러나 2002년 다시 방문한 기증자에게 크게 질타를 받았다. 보관이 허술해서였다. 지금은 이중 유리관에 보관하고있다. 다른 유물들을 위해서도 항온항습 기능을 갖춘 수장고를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오사카 인권 박물관에 그림을 전시할 때도 안 소장은 일본인들에게 놀랐다. 작품 원본을 공수하겠다기에 훼손 우려가 있어 거절했다. 그러자 보험은 물론 미술품 전용 운반상자에 작품을 담아 이동하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상자를 역사관에 기증했다. 안 소장은 "전문성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운영하며 실수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과 교류하며 발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10년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안 소장이지만 한 해 한 해가 아쉽기만 한 이유는 우리 국민에게 역사교육의 장이 되도록 만든 역사관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해 우리나라 관광객 7천명 중 6천명이 봉사활동이나 견학을 온 중고등학생이다. 나머지 1천여명은 교사, 교수이거나 단체 등이 온다. 일반 나눔의 집 방문자들은 관람료를 내야한다는 이유로 역사관을 외면하기 일쑤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해 2천명이 넘게 찾아온다. 얄밉게도 이들은 공부도 많이 해오고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로 자료 하나하나를 뜯어 보며 제대로 알고 간다. 어떤 일본인은 "피해자가 생존해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살아있는 역사관"이라며 극찬을 하고 갔다고 한다. 안 소장은 "역사관은 예술적이든 역사적이든 가치를 따질 수 없을만큼 중요한 기록의 장"이라며 "우리가 바로 알고 아껴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아직 현재 진행형인 역사의 기록1995년 광주시 퇴촌면 지금의 자리에 일본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생활시설인 '나눔의 집'이 옮겨 오고 3년 후,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사관이 건립됐다. 아픈 우리의 역사와 그 역사의 피해자들이 마주보고 살고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들은 역사관에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말씀처럼, 이 역사관은 할머니들의 힘과 용기가 없었다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안 소장은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피해 상황을 알리고 힘을 모아야 하는데 증언자인 할머니들이 건강상태도 좋지 않고 국내에는 관련 자료도 부족했다"며 "특히, 일본인 방문자들에게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역사관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역사관 장소로는 실제로 위안소로 쓰였던 곳이 가장 좋겠지만 국내 위안소는 지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할머니들이 계신 이 곳에 역사관을 짓게 됐다"고 역사관 장소 선정의 배경을 설명했다.역사관에 전시된 할머니들의 작품은 나눔의 집이 서울 서교동에 있을때 시작한 그림교실에서 탄생했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할머니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이름조차도 쓸 수 없던 상황이었다. 자원봉사자 이경신 화가의 도움으로 나눔의 집 할머니들 모두 그림교실에 참가했다. 그 중에서도 김순덕, 강덕경, 이용녀 할머니는 끈기있게 그림에 몰두했다. 할머니들은 단순하게 사실을 묘사하는 수준부터 시작해, 차츰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지금 역사관에 전시된 그림은 1993~95년 사이 그려졌다. 할머니들은 이제 더이상 그림을 그릴 기력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들은 여전히 역사의 증인이고 살아있는 역사다. 93주년 3·1절이 돌아왔다. 올 봄에는 할머니들이 간절히 바라는 그 한마디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韓·日 시민들 모금으로 설립 세계 최초 성노예 인권박물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세계 최초의 성노예 테마 인권박물관으로서, 잊혀져 가는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를 고발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회복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지난 1998년 8월 14일 개관했다. 지상 2층, 지하 1층, 모두 343㎡ 규모로 마련된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건설업체 회장이 건물을 기증하고 한국·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순수 민간의 힘으로 설립·운영되고 있다. 잊혀진 역사를 바로 세워 후대에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다양한 교육사업, 연구조사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앞으로 추모관과 국제평화인권센터 건립 등을 계획하고 있다.역사관은 제1~6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기초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시한 '증언의 장', 위안소 모형을 복원한 '체험의 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과 단체 등을 알리는 '기록의 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이 그린 그림과 관련 작품이 전시된 '고발의 장',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핸드프린트 패널이 걸린 '정리의 장' 등으로 정리돼 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3-01 민정주

[아트브리지&人·5] 과천 막계동 '한국카메라박물관'

○한국카메라박물관은…지하철 4호선 과천 서울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20m떨어진 곳에 3층짜리 카메라를 닮은 건물이 바로 '한국 카메라박물관'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공원으로 들어가며 무심히 지나쳤을 이 박물관은 세계 개인 카메라박물관 중 제일 많은 소장품을 자랑한다. 지상 3층, 지하 1층짜리 건물에 3천여점 이상의 카메라와 6천여점의 각종 렌즈를 비롯 유리원판 필름, 초기 환등기, 사진 인화기, 각종 액세서리 등 1만5천여점의 유물이 전시, 보관돼 있다.박물관 1층 제1전시실에는 카메라와 렌즈, 부속 기자재들을 테마와 이야기별로 나눠 기획 전시하며, 개관 이후 10여차례 특별전을 개최했다.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전시물은 소장품의 10%수준으로 미공개된 소장품들은 매년 2~3회 특별전을 개최해 순환 전시할 예정이다.2층 상설전시실은 카메라가 처음 세상에 나온 1839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단위로 카메라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500여점의 카메라를 전시했다. 카메라의 원조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와 '루시다( Lucida)', 그리고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등 카메라 발달사에 기여한 다양한 종류의 역사적인 카메라들을 연대별로 만날 수 있다. 갤러리로도 사용되는 지하 1층 제3전시실은 사진인구 저변 확대를 위한 문화강좌, 사진전시, 스튜디오, 암실 등 다목적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기획전 등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둘만한 많은 작업이 이뤄진다.○'웬수같은 카메라' 아끼는 김종세 관장英 경매장·해외 지인 통해 한 점씩 수집 렌즈만 6천여점… "박물관 세운 원동력" "일반인·전문가 아우르는 전시 준비 중"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온기가 스며있다. 하늘은 눈을 거두고 비를 뿌린다. 꽃샘추위가 무섭다지만 그래봐야 이미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성급한 이들은 벌써 겨우내 꽁꽁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카메라 가방을 둘러멘다. 어디로 갈 것인가. 시선을 낮춰 카메라에 눈을 돌려보자. 출사 나서기 전 하루쯤 어디서 무엇을 찍을까에 앞서 내가 무엇으로 찍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이다. 과천시 막계동 어린이대공원 3번 주차장에서 길 건너편을 바라보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건물이 나타난다. 3층짜리 '한국 카메라 박물관' 건물은 누가 카메라 박물관 아니랄까봐 건물 중앙에 렌즈 단면 모형을 달아놨다. 셔터만 있다면 건물로 사진이라도 찍을 기세인 한국카메라박물관 김종세 관장을 만나봤다.■ 카메라, 카메라, 카메라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1층 순으로 관람하도록 구성돼있다. 지하에 들어서서 오른쪽을 바라보니 염전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한 장 한 장 이어지는 사진을 보고있노라면 눈이 점점 커진다. 1천300여년 전 만들어졌다는 차마고도의 천년 염전이다. 사진을 따라 방을 한바퀴 돌아 간신히 사진에서 눈을 떼면 전시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입이 떡 벌어진다. 사진기에 친숙하지 않거나 스스로를 기계치라고 규정해 버린 사람이라면 선뜻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웅장하고 희한한 카메라들이 그야말로 즐비하다. 모양, 색깔, 크기, 제조사, 제조 시기가 다 다르다. 보고있자니 카메라가, 무엇에 쓰는 물건이더라…싶다.김종세 관장을 만나 박물관 자랑을 해달라고 했더니 거침없이 '개인이 만든 박물관 중에서는 양과 질 모두 국내에서는 최고 수준,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다"라고 자랑을 야무지게 한다.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카메라를 모으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김 관장은 "일제 강점기에 라이카, 콘탁스 카메라 한 대가 성북동이나 가회동의 방 서너칸 집 한채 값에 달했다"며 "대중이 사용하기는 불가능했고 국내에서 생산된지도 얼마 안돼 해외에서 물건을 구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주로 영국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직접 구입하거나 해외에 거주하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 점 한 점 카메라와 렌즈를 장만했단다.■ 오! 나의 카메라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카메라가 없겠지만 3천 점이 넘는 유물 중에서도 특히 예쁜(?) 카메라가 있을 것이다. 김 관장은 "이 카메라를 손에 넣었다는게 엄청난 행운으로 여겨진다"며 오래된 카메라 두 점을 소개했다. 첫번째 카메라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4대 제작된 콘탁스Ⅱ 라이플(CONTAX Ⅱ RIFLE)이다. 카메라 본체를 장총의 개머리판 부분과 연결해 방아쇠를 당기면 사진이 찍히도록 제작된 이 카메라는 선수들의 빠른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구입 당시 독일인 판매자는 "박물관으로 가는게 아니면 팔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귀한 카메라다. 어쩌면 이 카메라가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 장면을 찍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콘탁스 라이플이 남성적 매력을 풍기는 반면 두 번째 소개한 소호 리플렉스(SOHO TROPICAL REFLEX)는 귀족적 매력을 지녔다. 1907년 영국 런던의 Marion사가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든 제품으로 김 관장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카메라점에서 발견하고 흥분해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 관장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너무 사고싶었지만 놓쳐버린 카메라였는데 그보다 더 상태가 훌륭한 보물을 만난 것"이라며 "우리나라 보물로 따지자면 고려시대 청자급"이라고 설명했다.김 관장이 죽고 못사는 것 하나가 더 있는데 바로 카메라 렌즈다. 김 관장은 "카메라는 그저 '깜깜한 방'일뿐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렌즈가 중요하다"며 "사실 렌즈에 대한 애정이 박물관을 만들게 했다"고 말했다. 카메라 렌즈를 6천개도 넘게 가지고 있지만 김 관장은 늘 한 가지 렌즈를 쓴다. 1950년대 독일에서 생산된 아포란터(APO-LANTHAR)다. 김 관장은 "아무리 많은 렌즈, 카메라를 써봤어도 아포란터 만큼 내가 원하는 감성을 원하는 만큼 표현해주는 렌즈는 없더라"며 "디지털카메라에도 이 렌즈를 장착해서 쓴다"고 말했다.■ 웬수같은 카메라카메라 자랑을 너무 야무지고 끝도 없이 하길래 "도대체 카메라가 얼마나 좋으시냐"고 물었더니 김 관장은 급 정색을 하며 "웬수같다"고 말한다. 2000년 10월 관악구 신림동 지하에서 수장고 형태로 보관해오던 카메라를 동호인 등 일부 사람들에게 공개하면서 김 관장의 박물관지기 노릇이 시작됐다. 젊은 시절 돈도 원없이 벌었던 김 관장은 사회에 공헌을 하고자 박물관을 제대로 만들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사회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박물관 자리인 과천에 박물관 용으로 땅을 매입하려니 투기를 목적으로 허위 매입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박물관을 운영중이며 박물관 외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 것을 확인받고서야 박물관 건립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고향에 내려가 조그맣게 박물관을 내고 사진 일이나 하며 노년을 보내려 했지만 어느새 일이 너무 커져 카메라에 발목을 잡혔다는 김 관장은 이왕 이렇게 된거, 제대로 한 번 해볼 생각이란다. 김 관장은 "이 박물관은 사실 카메라를 어느 정도 알고 관심있는 사람들이 보기 편하게 구성돼 있어 일반인은 모양 변하는 것 정도를 볼 수 있다"며 앞으로 "일반인과 전문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전시를 준비중"이라며 웬수같은 카메라를 고이 어루만졌다.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2012-02-22 민정주

[아트브리지&人·4] 용인시 마북동 '한국미술관'

매서운 추위가 사그라들면서 하늘이 파랗던 날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한국미술관을 찾았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마당에 간판을 대신하는 듯 '이곳은 미술관입니다'라는 팻말과 함께 작품 몇 점이 방문자를 반갑게 맞았다. 하얀 미술관 건물은 따스한 겨울 햇빛을 받아 더 없이 단정하고 온화했다. 한국미술계의 대모 김윤순 관장이 30년동안 꾸려온 한국미술관의 첫인상이었다.김 관장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인터뷰보다 미술관 관람을 먼저 권했다. 영락없는 '미술관 안주인'의 몸가짐이었다. 본관 1층 전시관에는 고(故) 백남준씨와 그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씨의 판화와 비디오 작품들이 있었다. 신관에는 '고려의 1세의 기도'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장성우 작가의 작품과 구성초등학교 학생들의 콜라주 작품이 눈에 띄었다. 콜라주는 이우열 평론가의 극찬을 받았다며 학생들의 표현능력을 대견해 했다. 이곳이 인사동의 작고 고풍스러운 갤러리 수준일 거란 예단은 금물이다. 30년 역사를 가진 만큼 한국미술관은 시대의 변화와 발맞춰왔다. 예술인뿐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말을 아는 그 누구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김 관장은 아끼는 작품 몇 점을 더 소개하고 나서야 미술관 이야기를 시작했다.○'한국 미술계 대모' 김윤순 관장1983년 사설미술관 1호로 개관, 저변확대 위해 아카데미도 운영, 日오가며 공부 매진 직접 강의도, "미술은 내 운명… 아직도 즐거워"■ 30년, 한국 사설미술관의 역사"1983년 3월 6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하지만 한국미술을 아끼는 모든 예술인에게도 중요한 날입니다." 김 관장은 아직도 한국미술관 개관일을 정확히 기억한다. 김 관장은 "사설미술관 1호로 서울 가회동에서 개관했다"며 "당시 척박한 우리 미술문화 토양을 옥토로 개간하고자 하는 출발의 의미와 문화예술의 양적, 질적 성장에 대한 가시적인 압력으로써 우리 문화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미술관 운영방법으로는 생소했던 회원제를 도입한 데다 운영멤버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서 미술관에 거는 관심과 기대 또한 컸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미술관을 옮긴 뒤로도 한국의 어제와 오늘, 여성, 아시아, 경기도, 백남준 등을 주제로 한 의미있는 작품들이 미술관에 들어섰다. 그러는 사이 김 관장은 '대모'라는 이름을 얻었고 한국미술관은 한국의 대표미술관으로 자리잡았다.김 관장이 미술계와 연을 맺게 된 건 미술관 관장이 되기 불과 5년 전. 1978년 전업주부로 살던 중년의 나이에 국립현대미술관 상임이사로 부임했다. 48세 때까지 미술공부를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미술이 좋았고 오래 관심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당차게 직무를 수행했다. 1981년에는 미술의 저변 확대를 위한 사회재교육 프로그램으로 '현대미술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 情, 사람을 배우는 아카데미한국미술관은 개관과 동시에 아카데미를 개설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작품 전시 및 아카데미 준비 중 어느 것에 마음이 더 쓰이냐는 질문에 김 관장은 고민없이 '아카데미'라고 대답했다. 전시는 전문가들이 하는 게 맞다고 말하는 김 관장은 "좋은 강사를 찾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에게 강의를 부탁하기도 하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배운다"며 강의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강사의 자질을 보는 눈이 트였다는 것이다. "강의 3분만 들으면 강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김 관장은 직접 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김 관장은 1976년 일본의 '화력(話力·말의 힘)' 강의를 처음 듣고 반해서 3년동안 일본을 오가며 공부해 자격증을 따고 '파워스피치'라는 강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김 관장의 강의에 대한 열정에 비해 결과는 늘 아쉽다. 김 관장은 "초기에는 아카데미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요즘은 도립, 시립 시설에서 무료로 해주는 강의가 많다 보니 수강생이 줄어들었다"며 "1년 회비 10만원이면 미술관 무료관람에 강의까지 들을 수 있지만 미술관 위치가 교통도 불편하고 외지다 보니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아 아쉽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올해는 작가 백남준씨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자 백남준 특강을 준비하고 있다. 교육청으로부터 미술교육기관으로 선정돼 학생들을 위한 실기 수업도 진행한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강의의 차원을 높여 즐기면서 배울 수 있는 강의를 만들겠다'는 그의 다짐은 다부지고 확고했다.■ 꿈, 김윤순과 미술'나는 내가 만든 작은 문화 마당 '한국미술관'에서 아직도 꿈을 꾸며 즐겁게 놀고 있다'.재작년 여든을 넘긴 김 관장은 뭇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나이에 여전히 꿈꾸며 즐겁게 놀고 있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어릴 적 일본 도쿄 유학중 한국을 방문한 오빠의 책갈피에서 발견한 최승희 무용가의 사진을 보고 무용가를 꿈꾸던 소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중년이 돼서는 미술계의 중심에 섰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오며 미술계 대모로 명성을 쌓아온 것은 많이 알아서도 아니고 예술적 능력이 탁월해서도 아니었다. 미술을 좋아하고 일로 여기기보다는 즐기는 마음, 미술을 통해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비결이었다. 고(故) 백남준씨의 아내 구보다 시게코씨와는 2006년 49제를 계기로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도 함께 작업을 도우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무려 40여년 전 권진규 작가와 인연이 닿아 구입하게 된 '지원의 얼굴'이라는 작품이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애장품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미술을 대했지만 세월이 흘러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함께 미술관을 운영하는 며느리도 환갑이 다 됐다. 그러나 김 관장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미술이 내 운명이 아니었다면 이 나이까지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는 "문턱이 낮아 놀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 되도록 죽는 날까지 노력하겠다"며 푸릇푸릇한 꿈을 내비쳤다. ○한국미술관은…미술이론·도예 등 강좌 '백미', 회원중심 전시·문화활동 활발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은 한국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자취가 진하게 배어있다. 프랑스 문화부 고문건축가를 지내고, 미국 로드아일랜드와 하버드대학 교수로도 활약했던 건축가 고(故) 김중업씨가 한국에서 두번째로 지은 서울시 가회동 건물로 첫 문을 연 한국미술관은 대지 1천652㎡, 건평 1천156㎡ 규모로 고풍스럽고 세련된 멋을 지녀 당시 한국 미술계의 자랑으로 여겨졌다. 1994년 3월 옮겨온 지금의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건물은 2천281㎡의 부지에 실내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돼 있고, 건물 연면적은 400㎡로 내부에 세 개의 전시실, 수장고, 사무실, 실습실(도자기실), 강의실 겸 도서실, 아트숍 등이 있다.개관과 동시에 '한국미술관 문화예술아카데미'를 개설해 미술이론, 도예교실 실기반을 운영하면서 회원전을 개최했다. 지금까지 문화예술아카데미 회원들을 중심으로한 강좌와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있다. 전시회의 경우 첫 전시인 '한국인상전'을 시작으로 '현대미술인전', '한국화 어제와 오늘전', '현대조각전', '국제현대미술전', '23인의 페미니즘 전', '故백남준 추모 특별전' 등 지난해까지 200여회의 국내·외 기획전을 개최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hartm.com) 참조. 031-283-6418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2-15 민정주

[아트브리지&人·3] 여주 목아(木芽)박물관

○…'박물관 정신' 강조하는 박찬수 관장어린시절 동네 유명 조각가 보며 운명의 첫 발, 日유학후 민족 문화 지키기 위해 박물관 열어…여주의 목아박물관. 사립박물관이라고는 하나 워낙 매스컴을 통해 많이 소개된 터라 이름이 낯설지 않다. 자비를 들어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이 정도의 인지도를 쌓고 이름을 알렸다면 일단 성공한 사례일 것이다. 이렇다할 검증이 없어도 '아트브리지&사람'의 기획에 적합하리라는 생각에 이곳을 찾았다.결론부터 말하자면, 목아박물관의 설립취지 및 운영도 그렇고 박찬수 관장 자체도 그렇고, '퍼펙트' 그 자체였다.■ 한국사립박물관의 역사와 함께해온 박찬수 관장여주군 강천면 이호리에 위치한 목아박물관, 다소 외진 곳에 자리했지만 이곳에 연간 10만여명이 다녀간다.정문을 통해 박물관에 들어서면 마치 외국의 사원에 온듯 웅장한 스케일과 고풍스런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압도당하며 경건해진다.직원의 안내로 이곳의 주인장이자 박물관 설립자인 박찬수 목아박물관 관장을 만나러 박물관 한편에 자리한 작업실로 들어갔다.마치 신선과도 같은 신령스런 외모 때문인지 그가 내뿜는 아우라에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시작했다.대중과 소통하고, 문화적 교감을 통해 문화적 강국을 이루는데 밑거름이자 첨병이 되고 있는 사립 전시관을 찾아가는 것이 이번 기획의도라고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1시간 넘게 쉼없이 얘기를 이어나간다. 목아박물관은 1989년에 문을 열었다. 당초에는 박물관 법이 없었다. 그래서 박물관/미술관 진흥법이 제정된 후 1992년에 정식 등록을 거쳐 박물관을 개관했다. 사실상 한국사립박물관의 태동이 여기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 박물관법이 생기게 된 얘기부터 시작해 박물관이 지녀야할 가치, 현대인들이 살아가며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 우리의 정체성, 종교적 가치,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등 더 나아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하는지까지 얘기가 커져만 갔다.박 관장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심사숙고하고 마음을 담아 토로해 어느 하나 버릴것 없었지만,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하나 기자로서의 고민이 밀려왔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의 얘기는 모두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박물관 정신'. 박물관문화는 인성의 역사이고, 사람의 인성이 문화를 만든다는 것이다.그러면서 그는 "사실 이 규모의 공간이고, 위치이면 음식점이나 예식장을 하면 대박이 날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은 자존심이다. 선진국 문화대국이 되려면 문화에 대한 인식이 마음깊이 자리해야 한다"며 "꿋꿋하게 한민족의 긍지와 정신을 지키는 문화운동은 마치 제2의 독립운동과 같다"고 말한다. 문화관련 얘기만 하다보니 정작 박 관장, 본인의 얘기는 뒷전이 됐다. 어떻게 박물관을 세우게 됐는지 물었다.1970년대 중반, 박 관장의 나이로 30대, 일본에서 유학하던 그는 골목골목을 돌며 작품 제작에 참고하기 위해 공예, 민속품들을 수집했다. 그러면서 박물관들이 일본의 문화와 정신을 지키고 이어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아온 유물과 그의 작품을 모아 목아불교박물관을 열었다.불교박물관이지만 종교를 초월해 단군과 예수·마리아상, 무속과 민속 유물도 함께 전시했다. '종교는 달라도 진리는 하나고, 그것이 모두 뭉뚱그려져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이룬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나무에 싹을 틔우는 목조각장그는 목아박물관의 관장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으로도 유명하다.그의 명성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그의 작품은 전세계 대기업 총수를 비롯 수상, 총리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고객들이 즐비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작품성은 물론 소장가치도 뛰어나다는 평이다.그가 조각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남 산청의 가난한 집안에서 상촌놈으로 태어났고,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촌놈이 서울에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고 집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운명인지 집 인근에 유명한 조각가가 살았고 그를 보며 목조각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성수 선생에게 전통공예를, 이운식 선생에게 현대조각을, 신상균 선생에게 불교 목조각을 사사했다.그는 목조각을 하면서 사포를 쓰지 않는다. 목조각을 하면서 사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는 작품에 나무 그대로의 숨결을 담아 나뭇결의 거친 면과 조각칼의 흔적을 그대로 살린다.이런 그의 작품은 오히려 세상에 신선한 충격이 됐고 박 관장은 198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만해상 등 내로라하는 상을 잇달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박 관장은 목조각 작품 활동을 하며, 얻은 수익을 모두 박물관 운영비로 보태지만 해마다 적자다. 개관이래 휴관이라는 게 없었지만 지난해말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 부득이 월·화 휴관하게 됐다.그는 "정부에서 국공립 박물관을 많이 짓는 것도 좋지만 한국문화를 지켜나가고 알리는데 힘쓰는 실력있는 곳에는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털어놓는다.'박물관은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사는 집'이기에 그만둘 수도 없다. 그는 "독립운동은 독립을 하면 끝나지만 문화와 정신은 계속 돌보고 가꿔야 한다"고 주장한다.목아박물관의 '목아(木芽)'는 나무에 싹을 틔운다는 뜻이다. 죽은 나무에 또 다른 숨을 불어넣고 새로운 존재로서의 싹을 틔우는 것이다. 목아는 박찬수 관장의 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그의 행보를 축약하는 말이기도 하다.○…목아(木芽)박물관은…불교 유물 6만여점 등 보유, 전통예술학교서 전수 교육목아박물관은 목조각장 박찬수 선생이 1989년 전통 목조각 및 불교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설립한 전문사립박물관(1992. 문화관광부 제28호 등록)이다.매년 아시아 및 유럽 각 지역의 외국인 관람객을 포함해 연간 10만명 이상 꾸준히 방문하고 있는 목아박물관은 목아 박찬수 선생의 목조각품 및 국가지정 보물 3점과 6만여점에 달하는 불교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작품 및 유물들은 매년 특별전시 및 상설전시를 통해 교체 전시되고 있으며, 사립박물관으로서는 드물게 해외 전시도 열어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함을 알리는데 이바지하고 있다.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인 박물관의 주전시관에는 박 관장의 작품과 유물 500여점이 전시돼 있다. 3층에는 박 관장이 40여년간 조각한 작품 200여점이, 2층 불교유물실에는 통일신라시대 청동여래입상, 조선시대 소조보살좌상 등과 일본·태국·베트남 등 해외 불상이 전시돼 있다. 특히 1층 티베트 전시관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달라이 라마가 직접 금으로 쓴 글씨도 볼 수 있다. 주전시관 외에 단군신화와 관련된 조각상을 모은 '한얼울늘집'과 500개의 나한상이 있는 '큰 말씀의 집', 사천왕상이 있는 '마음의 문'이 있다. 또 7~8m 높이의 미륵삼존불입상 등 대형 조각품이 곳곳에 서 있다.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 학교, 부처님 그리기대회 등도 진행해 지역 발전과 아이들을 위한 문화 교육에 앞장서고 있으며, 다양한 목조각 체험교실도 운영하고 있다.특히 박물관에서 운영되는 목아전통예술학교는 학점은행제와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교육을 연계, 목조각 교육을 받은 학습자에게 학점을 인정해 준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교육개발원으로부터 인정받은 학점인정기관으로 일정 수준 이상 학점 취득시 학사 취득도 가능하다.한편 목아박물관과는 별도로 많은 이들의 관심속에 운영되고 있는 목아동심장학회는 소외받고 있는 아이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주고자 설립된 장학회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031-885-9952~4글┃이윤희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2-08 이윤희

[아트브리지&人·2] 우석헌 자연사박물관

"솔직히 (설립자가) 미치지 않고선 여기까지 올수 없었겠죠. 생사고비도 수없이 넘겼고, 미쳤다는 얘길 수없이 들어서 '돌아이'라는 말이 익숙하기까지 합니다." (우석헌자연사박물관 한국희 관장)"생사고비를 몇번 넘긴게 뭐 중요합니까.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으로 자랑할수 있는 자연사적 가치를 지닌 광물과 화석을 가지고 있다는게 중요하지요."(우석헌자연사박물관 설립자 김정우)학술적 가치로 따져 국내 최고, 여기에 더해 세계적으로도 단일 최대규모,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소장품이 한개도 아닌 수십, 수백여개에 이르는 자연사박물관이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다. 소장품의 규모를 보고 많은 이들은 국공립 박물관으로 생각하지만, 이곳은 나랏돈을 들여 만든 곳이 아닌 온전히 개인이 하나하나 수집해 그야말로 땀의 결실로 이뤄낸 곳이다.학자들조차 공부하러 오는 박물관, 바로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이다.설립자, 남편 김정우 : 광물·화석 찾아 비행만 800여회… 오지탐험 마다않는 '열혈 수집가'관장, 아내 한국희 : '나눔' 염두에 둔 남편 지켜보며 박물관 설립 큰 뜻 동참 결정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평소 언론노출을 꺼리는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의 설립자 김정우씨와 그의 부인이자 이곳의 관장인 한국희씨를 함께 만났다.단도직입적으로 박물관 설립이유를 물었다. "이 질문은 비방용으로 해야 재밌는데…. 언론에 그냥 설립했다고 말할수도 없고…"라며 설립자 김정우씨는 한바탕 호탕하게 '껄껄껄' 웃어젖힌다. 그는 "박물관은 선대에 걸쳐 광물과 화석을 수집하는 것을 곁에서 보아온 한 관장이 움직여 설립에 이르렀고, (본인은) 그저 각지를 돌며 수집에만 열을 올렸을 뿐"이라고 공을 돌린다.한국희 관장은 "처음엔 그저 본인이 좋아 수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니 죽을고비를 몇차례나 넘기며 어렵게 수집하면서도 '혼자보기 아깝다' '교육적으로 이걸 활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선진국에선 어릴때부터 수준높은 교재를 사용하니 얼마나 좋겠냐'는 말을 달고 사는 것을 보며 이 양반이 혼자 욕심에 수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항상 '나눔'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는 남편과 선대의 뜻을 받들어 박물관을 설립하게 됐다"고 말한다.■ '자료가 없으면 우석헌에 가봐라'이 분야 학자들 사이에선 이런 얘기가 있다. "샘플을 찾다 못찾으면 우석헌에 가봐라." 그만큼 방대한 양과 질적 가치를 지닌 소장품을 자랑하는게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이다.설립자가 수집품을 혼자만의 것으로 생각했다면 학자들이며 일반인들이 이런 학술적 가치가 높은 자료를 구경조차 못했을 터이고, 소장품은 어느 창고엔가 잠들어 있었으리라. 이 정도 수준의 소장품이 축적되기까지는 목숨 걸고, 세계 오지를 찾아 헤맨 설립자 김정우의 땀과 노력 없이는 가능하지 못했다.오지라하면 브라질 아마존 정글은 물론 아프리카, 인도, 마다가스카르섬, 볼리비아, 인도네시아, 중국 등 세계 30여개국을 돌았으며 그가 비행기를 탄 횟수만 800여회에 이른다. 죽음의 상황에 접한 일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인도네시아에 큰나무화석을 구하러 들어간 얘기는 스펙터클 어드벤처 영화를 방불케한다.2006년 그는 인도네시아에 큰나무화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중간에 '보고르'라는 지역에 도착한 그는 가이드와 운전사를 고용해 길을 나섰다. 오지에서는 달러도 통하지 않고 오직 현지 화폐로 거래를 해야하는 만큼 1만달러를 현지 돈으로 환전해 가방에 담았다. 007가방 한가득 돈이 담겼고 오지인 보고르에서 또 8시간을 차로 이동해 더 오지로 들어갔다. 그 어느 누구도 치안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돈가방으로 인해 매순간 위협이 다가왔고,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해 위험을 모면했다. 그러나 위험속에서도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원시림에서 나무화석을 발견했을때 정신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던 순간의 기쁨은 그간의 노고를 눈녹듯 잊게 했다.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로 들어가는 이유를 묻자 그는 "광물을 산지시장에서 구입하려면 우리가 일본, 독일 등 강대국과 경쟁해야하는데 화폐가치에 있어 경쟁력이 떨어져 오지까지 가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며 "좋은 자원을 찾기 위해선 오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까지 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한번은 한국희 관장이 이런 남편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그동안 모은 가산을 광물 수집하는데 다 탕진했다"고 했더니 그 얘길 들은 한 학자분이 정색을 하며 "이게 얼마나 학술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인데 '탕진'이라는 말을 하냐"며 "'투자'로 해야한다"고 정정을 요구한 일도 있다고 한다.김정우의 땀과 열정이 담긴 '투자'로 이뤄진 우석헌자연사박물관에는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규모의 희귀 화석과 각종 광물 등이 전시돼 있다.공룡화석, 나무화석, 절지동물과 척추동물 화석 등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유물들이 이곳에 있으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다양한 광석들과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암모나이트, 각종 원석 등 2천여점이 전시돼 있다. 장소 문제로 전시하지 못한 소장품만 10만여점에 이른다.국가생물다양성기관에서 매년 2천~3천개씩을 DB작업화하고 있는데 10만점을 다하려면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다. 소장품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들은 서울대 교재로 사용된바 있으며 국립박물관에서는 조흔색 자료로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다. 보통 박물관의 수장고는 공개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만은 예외다. 설립자의 사무실 옆에 있는 수장고는 언제나 열려있다. 수장고에 들어서는 순간, 요즘 아이들말로 '대박'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한 관장은 말한다. "박물관의 심장과 같은 수장고는 대부분 보여주지 않지만 설립자는 관람객들이 '와~'하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힘들지만 또 오지를 찾아 헤매며 수집활동을 계속하는 것 같다고 얘기한다. ■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국내서 보기힘든 10만여점 자료 집대성우석헌자연사박물관의 '우석헌'을 사람이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석헌은 설립자 김정우씨의 아호 '우석(愚石)'(우직한 또는 어리석지만 아름다운 돌)에 집을 뜻하는 '헌(軒)'이 합쳐진 말로, 우직한 돌집이나 어리석지만 아름다운 돌집쯤으로 해석된다. 설립자가 40년 가까이 수집한 화석과 광물 등 자연사 자료로 꾸며졌으며, 그 규모만 해도 여느 국공립 시설을 능가해 10만여점이 넘는다.2003년 12월 개관한 이래 매년 수만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최근에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수준 높은 박물관 운영으로 교육과학기술부 주관 '교육기부기관'에 선정되기도 했다.박물관은 상설전시실과 야외전시실, 기획전시실, 교육실, 수장고 등으로 꾸며졌으며,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6가지 색상의 전시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6가지 색을 따라가면 지구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46억년의 지구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은 다른 박물관과 달리 전시의 입체성을 높여 사방에서 전시물을 살펴볼 수 있는 사면관찰이 가능한 게 특징이다.상설전시실을 나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구상에서 몸집이 가장 컸던 공룡에 대한 이야기가 구불구불 미로를 따라 펼쳐진 야외전시실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공룡들을 만날 수 있다. 이어 연간 1~2회씩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기획전시실을 만나게 된다. 기획전시실 맞은편에는 전 세계를 40년 가까이 탐험하며 수집한 수많은 표본들이 놓여 있는 열린 수장고에서 설립자의 노고를 한땀한땀 느낄 수 있다. (031)572-9555, www.geomuseum.org 글┃이윤희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2-01 이윤희

[아트브리지&人·1] 용인 흥덕지구 '이영미술관'

문화강국을 표방하는 대한민국. 그러나 우리 사회는 문화적 욕구에 비해 경제적, 시간적, 공간적 이유 등 여러 문제로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문화활동'이라는 단어 자체조차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할 만큼 소외돼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가운데 꼭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눔으로써 세상을 밝히는 문화조력자 및 공간이 있어 우리 사회 희망은 있다. 작지만 이러한 노력은 문화생활을 향유할 기회를 늘림으로써 문화적 차이를 줄이고 나아가 문화소통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할 것이다.'아트브릿지', 얼핏 생소하고 낯선 단어지만, 일반인에게 문화·예술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이들이나 장소라고 본다면 좀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경인일보는 연중기획으로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이러한 곳(사람)을 찾아 소개하고, 그 뒷얘기를 들어보려 한다. 여기에 덤으로, 주말이면 어디를 가야할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야기가 담긴 보물섬과 같은 장소를 추천한다. ┃편집자 주■ 돈사에서 탄생한 이영미술관경기·인천 등 수도권내 위치한 미술관, 박물관 등 전시관은 국·공립, 사립을 포함해 500여개에 이른다. 이중 국·공립을 제외하고 이름이라도 들어본 곳은 얼마나 될까.적어도 우리가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곳이라면, 건물이나 주변경관 등 하드웨어적인 요소가 뛰어나 기억에 남는다거나, 아니면 갖고 있는 소장품(소프트웨어)이 눈길을 끌어 이름이 난 곳일 게다.용인 흥덕지구내 자리한 '이영미술관'을 아는가. 이곳을 아는 이라면, 돼지를 키우는 돈사를 개조해서 출발한 미술관이라는 하드웨어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고, 박생광·전혁림·정상화로 이어지는 대가들의 대작을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개인이 만든 미술관이 어떻게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적 측면에서 이렇게 이름난 장소가 됐을까.이영박물관의 김이환(78) 관장을 만나면 실오라기처럼 그 실마리가 풀어지면서 미술관도 미술관이지만, 이러한 대작을 엮어낸 관장의 노력에 감탄이 절로 난다.그는 1935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부산대학,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스무해 넘게 공직에 몸 담다가 이후 대기업 임원으로 봉직했다. 그러다 1977년 44세에 내고 박생광을 처음으로 만나 1985년 내고가 세상을 뜰 때까지 8년동안 그의 예술 활동을 물심으로 지원했다. 내고가 죽고 10년이 흐른 뒤 예순의 나이로 일본 와세다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예술학을 공부했으며,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2001년 내고의 작품을 근간으로 미술관을 설립했다.장소는 1980년대 김 관장이 한때 3천여마리의 돼지를 키우는 축산농으로 활동할 당시의 돈사를 개조했고, 이름은 김이환 관장과 부인 신영숙 여사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이영미술관'으로 명했다. 돈사를 개조했다고 해서 미술관이 후졌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김 관장의 타고난 성미 탓에 돈사 짓는 데에도 갖은 정성을 다 쏟아 맞배지붕으로 창고같이 지었지만 콘크리트로 기초를 잘 쳤고, 특히 환기에 유념해 미술관을 생각하고 지은 것도 아닌데 그 견고함이란… 여기에 미니멀한 느낌이 압권이었다.이곳은 지난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사전 연락없이 깜짝 방문하기도 했다. 전혁림 화백의 '구십, 아직은 젊다' 전이 열릴 당시 전시를 관람한 노 전 대통령은 전시 관람후 1천호(가로 7m, 세로 2.8m) 크기의 '통영항' 그림을 구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노 대통령 재직 시절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는 청와대 인왕홀을 장식하기도 했다.고속도로가 생기며 부득이하게 이영미술관은 2008년 용인 흥덕지구내 현재의 이곳으로 이전했지만 여전히 명물이다.삭막한 택지개발지구 사이로 자연을 벗삼아 자연스럽게 하나된 미술관과 작품들을 만날 수 있고, 웬만한 국·공립미술관을 압도하는 수준높은 소장작품들을 언제든 볼 수 있다.날이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미술관을 둘러보다 김 관장을 만나 작가들과 맺은 가슴 저미게 하는 특별한 인연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기회도 언제든 열려 있다.기자를 만난 날은 은발에 멋진 차림으로 등장해 외국배우 숀 코너리를 연상케 했지만, 날이 춥지만 않으면 작업복 차림에 미술관을 가꾸고, 돌보느라 관람객들이 허드렛일하는 인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예술 향한 집념의 결정체, 미술관대가들의 후원자이자 탁월한 컬렉터로 자신의 삶을 살아온 지 올해로 30여년이 넘은 김 관장은 작품에 대한 열정 탓인지 여든이 가까웠다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열적이고 화통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전시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묻자 전혁림의 새 만다라를 꼽는다. 화엄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 작품을 위해 김 관장 부부는 전혁림 작가를 만나러 4년8개월을 매주 통영을 찾아간 끝에 얘기를 담았다. 작가는 전혁림이지만 사실 이들 부부의 노력 없이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작품이다.취재진은 어떻게 이런 과업을 이루었는지, 자신만의 작품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텐데 사재까지 털어가며 미술관을 건립하고 작품을 개방해 이웃들과 함께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얘기를 끌어나갔다. 그런데 김 관장은 소장작품의 작가인 전혁림 선생과 박생광, 한용진, 정용화 작가의 이야기로 자꾸 샛길로 빠진다.미술관을 이루는데 단순히 소장한 작품이 많아 미술관을 건립했다기보다는 작가와의 끊임없는 교감과 교류를 통해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술관을 구축했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작가와 소장가와의 작품을 통한 정신적 교류가 어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박생광도 그렇지만 전혁림의 말년도 이들 부부가 없었다면, 이들의 예술을 향한 끈질긴 집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문해 보게 된다. 이들 예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걸작이 나올 수 있었을까.이영미술관은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 번듯하게 지은 국·공립미술관 못지않게 수준 높은 작품과 시설을 자랑한다.하지만 개인 혼자 여기에 들어가는 전기료, 수도요금, 방호시스템 등 시설비이며 각종 세금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가를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지원 한 푼 없어 운영비를 아끼고자 본인은 힘든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젠 정부가 나서줘야 할 때가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일흔을 넘어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그는 서울에서 이곳 용인에 위치한 미술관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한다. 관장이라면 자동차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흔한 개인소유 자동차 한 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아껴 미술관 운영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속뜻이 담겨 있다."작품을 혼자 본다면 그 기쁨은 작았을 테지만 함께 함으로써 나 개인은 물론 작가들도 행복해 할 것"이라며 나지막히 말하는 그는 "지난 2003년, 자신의 '명성황후'를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견주어보고 싶다던 생전의 박생광의 꿈이 현실이 된 스페인 바르셀로나 '박생광 특별전'에 이어 오방색의 화가, 색채마술사 '전혁림'을 해외에 소개해 한국현대미술과 그의 예술혼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한다. 글┃이윤희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1-25 이윤희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