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7] 에필로그|끝

2년8개월간 경기·인천지역 곳곳 탐방 산비탈·골짜기 버려진 건물 마음 아파 좋은 집터는 ‘살고 싶은 끌림’이 있어 명당중엔 정몽주·이석형의 묘 인상적 우리가 어디서 살고 묻힐지 고민 나눠 자연의 기운이 산과 물을 따라 모이고 또 흐르니, 산수를 보고 터를 잡아 자연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면 복이 찾아와 자손까지 이어진다네. 지난 2013년 1월 프롤로그로 독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어 남양주~양평~여주를 둘러보는 여행을 시작으로 2년8개월간 경기·인천지역 곳곳을 둘러보았다. 26회의 시리즈로 독자들을 찾았고, 이제 아쉬움을 남기며 긴 여행을 마무리한다. 그동안 취재팀은 산을 보고 물을 보며 풍수를 따졌다. 사람이 사는 곳은 산이 있고 물이 있으니, 산과 물의 모양과 흐름에서 기운이 흐르고 멈추는 곳을 찾는 것이 풍수였다. 광활한 초원이나 높은 산맥이 있는 땅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산이 많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는 곳이 우리 땅이어서, 어디를 가도 좋은 터와 나쁜 터가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취재팀은 그렇게 풍수의 이치를 따지며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우리 여행의 화두를 직접 확인했다. 어느 곳에서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기며 돌아섰고, 어느 곳에서는 놀라고 감탄하며 한참을 머물렀다. ■ 안타까웠던 첫 여행 첫번째 둘러보기 여행에서 조광 선생은 ‘풍수를 거스르면 어려움이 닥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한때 수도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데이트 코스’로 꼽혔던 서울~하남~남양주~양평으로 이어지는 강변길. 강변 양쪽으로 늘어선 카페와 음식점들은 한강 일대를 대표하는 명소들이었다. 너나없이 자가용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게 되면서 운치 있게 탁 트인 강변에 자리 잡은 카페와 식당들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그렇게 호황을 누렸던 강변의 카페와 식당들은 오래지 않아 줄줄이 문을 닫거나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강변을 내려다 보던 커다란 유리창에는 ‘임대’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조광 선생은 이를 “풍수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낳은 결과”라고 했다. 풍수의 기본 중에 기본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역행해 안정을 잃고 좋은 기운이 뒤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카페와 식당들이 도로와 강 사이에 자리를 잡았는데, 드나들기 쉽도록 도로 쪽으로 출입구를 내고 강 쪽으로 창을 내다보니 풍수로 따지자면 ‘거꾸로’ 들어앉은 셈이다. 언덕길이나 평지에 지어진 집들도 산을 뒤로 두고 앞을 바라보는 집들이 별로 없었다. 도로를 바라보고 건물을 짓다 보니 생긴 문제였다. 배산임수를 지킨듯 보이는 집들도 골짜기에 들어 앉았거나 산비탈을 깎아 축대를 쌓아 지어진 집들이 많아서, 역시나 같은 운명에 처했다. 골짜기마다 산비탈마다 버려져 흉물로 전락한 폐건물들은 취재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런 상황은 남양주를 지나 양평까지 가도록 계속 이어졌다. “여기만 그런게 아니고 전국이 다 똑같다”는 조광 선생의 말에서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 잘되는 집은 이유가 있다 같은 지역에 비슷한 식당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어느 집은 손님이 줄을 잇고 다른 집들은 장사가 안돼 허덕이는 모습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취재를 다니며 주차장에 차들이 미어터지게 서 있는 식당들을 눈여겨 보았다. 무엇이 다를까? 풍수에서는 돈을 벌게 해주는 산으로 부봉(富峰)을 꼽는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둥글게 솟은 산이다.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남양주의 순두부집, 여주의 막국수집, 광주의 한식집, 가평의 매운탕집 등은 하나같이 부봉을 끼고 있었다. 누구는 곡식을 쌓아놓은 모양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어머니의 가슴 같다고도 하는 부봉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산이다. 풍수에서 재물과 연결되는 또 하나로 ‘백호(白虎)’를 꼽는다. 배산임수를 지킨 곳에 백호가 오른쪽으로 감아 돌았다면 재물이 들어온다고 했다. 여주의 유명한 막국수집은 백호가 좋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뒤에서 시작한 나지막한 언덕자락이 식당 오른쪽을 돌아 바로 앞까지 뻗어나왔다. 남양주의 순두부집은 큰길가에 있는데도 주변의 여느 식당들처럼 도로를 바라보지 않고 출입문을 옆쪽으로 냈다. 길옆으로 불쑥 솟은 언덕이 길과 나란하게 산자락을 펼쳤는데, 그렇게 돌려 앉으면서 배산임수를 지키고 오른쪽으로 백호를 두게 됐다. 한때 잘나가던 식당이 갑자기 어려워진 곳도 있었다. 새로 난 큰 길이 식당 뒤를 비스듬히 지나면서 백호를 가르고 주산에서 내려오는 기운을 끊었다. 거짓말처럼 그많던 손님들이 사라졌다고 했다. 잘되는 집, 안되는 집은 이유가 있었다. ■ 명당을 보다 명당 중에 명당으로 꼽히는 곳에는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유명한 묘역은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 음택(陰宅)의 기본을 배우고, 가문의 번영을 풍수로 해석하는 것을 배운다. 취재팀은 그동안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을 여러 곳 둘러보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을 수 있는 곳은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자리잡은 포은 정몽주와 이석형의 묘였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단심가’를 남긴 고려말의 충신으로 유명하다. 정몽주의 묘 옆에는 연안이씨의 거두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저헌 이석형(李石亨·1415 ~ 1477)의 묘가 자리해 있다. 이석형은 정몽주의 증손녀를 정경부인으로 맞은 남다른 인연으로 정몽주와 음택을 나란히 하게 됐다. 정몽주와 이석형의 묘역은 멀리 앞쪽으로 일자문성이 듬직하게 자리해 있고 좌청룡·우백호가 기운차게 묘역 앞쪽으로 뻗으며 감아돌아 ‘명당의 교과서’와 같은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두 묘가 모두 맥을 잘 타고 자리를 잡은 데다가, 사방을 둘러싼 산들이 한결같이 부드럽고 예뻐서 흉한 기운이 없었다. 조광 선생은 “옛날에는 이곳이 첩첩산중 시골이었을 텐데, 이런 명당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라며 “몇번을 다시 봐도 감탄할만한 명당”이라고 칭찬했다. 취재팀은 이렇게 잘 알려진 명당 외에도 숨어있는 명당들도 여럿 만났다. 그중 신북면 만세교리에 자리한 ‘조경 선생 묘’는 큰 기대 없이 찾아간 취재팀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적한 마을에서 한참을 들어간 곳에 숨은 듯 자리한 조경 선생의 묘는 그야말로 풍수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던 조경 선생의 기품을 보여주듯, 인공적인 꾸밈을 거의 하지 않고 정갈하게 가꾼 묘역의 모습으로 또다른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 자연은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2년8개월간 여러곳을 둘러보면서 취재팀은 결국 처음의 화두로 다시 돌아갔다. 흥망성쇠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 자연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면 편안하고 복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무지와 욕심으로 자연을 거스르면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확인했다. 취재를 다니면서도 좋은 집터, 좋은 묏자리에 서면 한겨울에도 푸근하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반면 자연을 무너뜨리거나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 개발한 곳은 서둘러 떠나고 싶어졌다. 잠시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은 나쁜 기운이 흐르거나 기가 빠져나가기 때문이니, 그런 곳에 자리를 잡고 살거나 조상을 모신다면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당연해 보였다. 두번째로 취재를 나갔던 가평에서 조광 선생은 군수를 배출한 좋은 양택(陽宅)을 보여주었다. 가평읍 산유리 넓은 평지 끝에 자리한 집은 그리 크다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시골집이었다. 하지만, 높지도 낮지도 않은 땅에 차분하게 들어앉은 이 평범한 집은 2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생각이 떠오른다. 그 집에서는 그만큼 ‘살고 싶은 끌림’이 있었다. 반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골짜기에 지어진 건물, 산비탈을 깎아 짓고 있는 전원주택단지들도 수없이 보았다. 그중 적지 않은 곳들은 공사조차 마치지 못한채 콘크리트 뼈대만 남은 건물로 버려지거나, 축대만 잔뜩 쌓아 놓고 집을 짓지 못해 썰렁한 모습이었다. 건물을 지어서는 안되는 땅에 건물을 지었으니, 결국 욕심이 화를 자초한 셈이다. 취재를 마치며 돌아보니, 우리는 어디에 살고 어디에 묻혀야 하는지를 따지고 확인하며 2년8개월을 보냈다. 조광 선생은 “자연을 끌어안고 욕심을 버려야 풍수를 보는 눈이 생긴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풍수를 보는 눈을 길러 이땅에서 안타까운 실패, 안타까운 질병, 안타까운 싸움을 줄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긴 한마디로 긴 여행을 마무리 했다. /글·사진=박상일기자 metro@kyeongin.com▲ 명당중에 명당으로 꼽히는 정몽주 묘역.▲ 손님이 많기로 유명한 광주 퇴촌의 식당. 뒤쪽으로 부봉이 보인다.▲ 2년 8개월간 풍수기행을 함께 한 풍수지리학자 조광 선생.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가평군수를 배출한 가평읍 산유리의 시골집.▲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버려진 건물들.

2015-09-14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6] 다시 돌아보는 사찰과 명당 <下>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안성 칠장사임꺽정·어사 박문수 등 이야기 ‘가득’주산 오른쪽에 돌려앉은 이천 영월암풍수적으로 좌우 균형 안맞아 아쉬움고려초 지어진 국가사적 하남 ‘동사지’고속도로·송전탑에 기 흩어지는 형국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들이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니、땅이 그리 만들기도 하지만사람의 손에 운명이 바뀌기도 하는구나。취재팀은 2년여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산과 물이 만들어내는 기운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풍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음택(陰宅)을 둘러보는데 힘을 쏟았고, 사찰과 주택과 상가 등 양택(陽宅)도 눈여겨 보았다. 여러 인물들을 배출한 집자리들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각 지역마다 이름난 사찰들도 여러 곳 둘러보았다. 역사가 오래된 사찰들은 풍수적으로도 안정된 곳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회암사지와 고달사지를 둘러보며 느꼈던 것처럼, 일부 사찰들은 풍수적으로 부족한 곳에 자리를 잡아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 좋은 봉우리들이 솟은 안성 청룡사안성시 서운면에 자리한 유서 깊은 사찰 청룡사(靑龍寺)는 지금도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경기 남부지역의 명찰(名刹)이다. 고려 원종 6년(1265) 창건되고, 공민왕 13년(1364)에 나옹에 의해 중창됐다는 청룡사는 당초 ‘대장암’이라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나옹에 의해 크게 중창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서기가 가득한 가운데 청룡이 나타나 오르내려, 청룡사라 고쳐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신도들로 북적이는 청룡사를 찾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웬만한 명당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청룡이나 백호가 거의 없어 의외였다. 청룡과 백호는 터의 좌우를 감싸고 돌며 나쁜 기운이 들어오고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때문에 청룡과 백호가 좋은 터는 아늑하고 평온하다. “청룡과 백호까지 잘 감아 돌았으면 명당 중의 명당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청룡·백호가 없는 대신, 주변에 좋은 산들이 많아서 좋은 기운을 끊임없이 전해주고 있어요. 게다가 이런 좋은 산들이 겹쳐지거나 출렁이지 않고 각각의 봉우리들이 하나씩 딱딱 떨어지는 형태여서 풍수적으로 더 좋아요.”조광 선생의 설명처럼 청룡사 대웅전 앞에서 둘러보니 왼쪽 뒤와 오른쪽 앞으로 토체(土體)들이 줄지어 서 있다. 멀리 앞쪽에는 뾰족한 모양의 문필봉(文筆峰)이 서 있어 수양하기 좋은 곳임을 알려주었다. 영상사(領相砂)와 부봉(富峰)들도 여럿 서 있다. 덕분에 청룡사는 옛날부터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풍족함을 누려왔다. 천대받던 안성 남사당패를 겨울마다 거둬들여 따뜻하게 돌봤던 것도 이런 풍족함 덕이다. 흉하거나 거칠게 생긴 산이 없이 부드럽고 풍족한 모양의 산들로 둘러싸인 청룡사는 그런 산들처럼 따뜻한 인정을 갖게 된 것이다. ■ 명당에 자리한 칠장사안성을 둘러 보면서 청룡사와 더불어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곳이 유명한 고찰(古刹) 칠장사(七長寺)였다. 칠장사는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고찰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안성지역의 명소이기도 하다. 국보 제296호 칠장사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과 보물 제488호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는 이 사찰이 오랫동안 얼마나 중요시 여겨졌는지를 짐작케 한다. 안성 죽산면에 자리한 칠장사는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묵직하고 안정된 느낌이 든다. 신도들로 북적이는 청룡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곳에는 칠장사와 칠현산의 이름 유래가 담긴 혜소국사 이야기를 비롯해, 병해대사가 이곳에서 임꺽정에게 무술과 글을 가르친 이야기, 어사 박문수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장원급제를 했다는 이야기 등 책 한 권을 엮어도 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특히 어사 박문수 이야기 때문에 칠장사에는 입시 때마다 많은 학부모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칠장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풍수적으로 명당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주산인 칠현산 자락이 팔을 뻗어 좌청룡·우백호를 이루고 있는데, 일부러 깎아 놓은 듯 적당한 높이로 사찰을 품어 안으며 곳곳에서 영상사와 토체와 일자문성(一字文星)을 이루고 있다. 특히 멀리 앞쪽으로 그린 듯 삼각형으로 솟아있는 영상사는 조광 선생도 감탄 할 만큼 일품이다. 이런 명당에 오밀조밀 들어앉은 대웅전과 법당들은 더할 나위 없이 푸근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조광 선생은 “전국의 여러 사찰을 다녀봤지만, 이곳 칠장사는 올 때마다 감탄을 하게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아쉬움 남긴 영월암이천 시가지의 서쪽편에 솟은 이천의 진산(鎭山) 설봉산에는 유서 깊은 사찰인 영월암(映月庵)이 자리해 있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사찰로, 대웅전 뒤쪽으로 온화하게 서 있는 영월암마애여래입상(보물 제882호)이 오랜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하지만 영월암의 대웅전은 설봉산의 동쪽편 산비탈에 마애여래입상이 서 있는 작은 언덕을 뒤로 두고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대부분의 명당이 주산을 뒤로 놓고 탁트인 앞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과 달리 주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돌려앉은 모양새다. 때문에 오른쪽 위로 솟은 설봉산의 주봉 희망봉이 커다란 백호를 이루고 있고, 왼쪽은 청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내리막 비탈이 되었다. “풍수적으로 볼때 균형이 맞지 않는 형국이지요. 청룡은 명예를 상징하는데, 이처럼 청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름을 떨치기 어려울 수 밖에 없어요. 아쉬움이 남는 곳이네요.”■ 사람이 망가뜨린 하남 춘궁동 동사지하남시에는 한때 일대에서 손꼽히던 사찰이었다가 지금은 흔적만 남은 춘궁동 동사지(桐寺址)를 찾아갔다. 고려 초기에 창건된 동사는 넓은 터에 옛 영화를 짐작케 하는 유물들이 일부 남아있어 지금도 국가사적(사적 제352호)으로 지정돼 있다. 지금은 같은 이름을 가진 작은 절이 자리해 있는데, 절 마당에 놓여있는 커다란 초석들로 짐작할 때 옛 동사는 금당의 규모가 경주 황룡사 못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넓은 절터 한쪽에 당당히 서 있는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도 예전의 위세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절터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뒤쪽으로 주산이 우뚝 서 지켜주고 있는 데다가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고 있어요. 주춧돌을 보니 중심 건물이 딱 좋은 자리에 서 있었고, 가운데 커다란 제단이나 부처님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8각형 구조물이 있는데 풍수를 잘 따져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하지만 동사지를 둘러보는 동안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보다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사찰의 바로 앞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커다란 송전탑까지 서 있는데다가, 한쪽 옆으로는 고철 처리장까지 있어 좋은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풍수적으로 좋은 곳이라도 길을 내면서 산을 허물고 산에 송전탑 같은 커다란 구조물을 세우면 의미가 없어지는 법이지요. 자연이 만든 좋은 땅을 사람이 망가뜨린 셈입니다.”조광 선생과 취재팀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동사지를 나서야 했다. /글·사진=박상일 기자 metro@kyeongin.com▲ 토체와 문필봉, 영상사 등 좋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안성 청룡사.▲ 명당의 요건을 두루 갖춘 유서깊은 고찰 칠장사.▲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 이천 설봉산 영월암.▲ 각각 보물 제 12호와 13호로 지정된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2015-08-17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 좋은 기운이 있는 거실

거실은 가족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특히 지금의 주택들은 구조적으로 거실이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집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만큼 거실에는 좋은 기운이 가득해야 가정이 화목하고 재물이 들어오게 된다. 풍수에서도 거실은 그 집의 무게중심이요 혈(穴)로 보는데, 거실에 가장 좋은 기가 흘러야 가족들이 부귀와 화목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거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깨끗하고 부드럽고 따뜻해야 한다. 따라서 벽지는 가족 모두의 기가 고루 형성될 수 있는 연한 아이보리색을 쓰는 것이 좋다. 가구도 나무색이나 분홍색 등 밝은 색이 좋다. 거실은 텔레비전과 오디오 등 전자제품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이다. 전자제품에서 나오는 전자파로 인해 기가 손실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데, 전자제품은 가능하면 가구에 수납해야 흉한 기운을 중화할 수 있다. 대개의 전자제품은 검정색이고 사각형 모양이므로, 나무색이나 베이지색 계열의 패브릭으로 장식하거나 곡선의 흐름이 좋은 난 등의 화분을 놓아 흉한 기를 중화시키고 제압해야 한다. 거실의 조명은 흔히 형광등이나 LED등 같은 밝은 기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백열등을 천장을 향해 설치해 간접조명을 하는 것이 훨씬 좋다. 거실이 어두운 것은 집안의 기운을 떨어뜨리므로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에는 거실의 조명을 모두 켜 두는 것이 좋으며, 이때 켜지지 않는 전구가 있다면 당장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 거실과 직접 연결된 현관쪽에는 그집 가장(家長)의 키만한 조명들을 켜두는 것이 좋다. 이것은 가장의 사회횔동이나 승진, 건강 등에 간접효과를 주게된다. 소파 옆에도 키가 큰 스탠드를 놓으면 불화를 예방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2015-08-17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5] 다시 돌아보는 사찰과 명당 <上>

■산 좋고 물 좋은 신륵사아늑한 산들에 둘러싸여 명예·권력 모여앞쪽에 휘둘러 흐르는 남한강 ‘금상첨화’아름다운 자연 어우러져 ‘천년고찰’ 명성■옛 영광만 남은 고달사지·회암사지골짜기 안쪽에 잡은 터 “이해 못할 선택”결국 유학자들의 숭유억불로 인해 ‘폐사’그나마 천보산 맥 받는 회암사 뒤늦게 빛당대의 고승들이 터를 잡았으나 풍수의 기운을 따라 각각 흥망성쇠가 갈렸으니, 쓸쓸히 터만 남은 대사찰(大寺刹)의 옛 영화가 그립구나.지난 2013년 3월 조광선생과 함께 풍수테마기행을 시작한 이래 2년여 동안 취재팀은 경기도와 인천 곳곳을 누비며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어느 곳에서는 ‘명당중에 명당’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고, 어느 곳에서는 잘못 쓰거나 훼손된 터를 만나기도 했다. 100여곳의 양택과 음택을 둘러보는 동안 취재팀은 그렇게 다양한 상황을 만났고, 그에 따라 웃기도 하고 안타까움을 삭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렇게 제각각 다른 곳들을 둘러보면서도 늘 취재팀을 따라다니며 다시 새겨지고 새겨졌던 하나의 ‘화두’가 있었으니, 첫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에 조광선생이 던진 “흥망성쇠(興亡盛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짧은 말이었다. 크게는 한 나라에서부터 작게는 집안이나 개인까지, 과거의 역사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까지도 풍수를 통해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이 이야기는 그동안의 둘러보기에서 만난 음택이며 양택에 모두 한결같이 적용됐다. 당대의 고승들이 창건했다는 여러 곳의 사찰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학문과 깨달음이 깊은 당대의 고승들은 풍수지리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찾아가 둘러본 사찰들의 터는 모두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터의 기운을 따라 대사찰들의 운명과 역사가 갈렸으니, “흥망성쇠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말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닿았다.■ ‘명당의 교본’ 신륵사 = 여주의 이름난 사찰인 신륵사(神勒寺)는 조광선생이 ‘명당의 기본이 잘 갖춰진 곳’으로 손꼽은 곳이다. 산이 아름답고 물이 좋기로 소문난 여주에서도 고르고 고른 곳에 터를 잡았으니, 오랫동안 이름을 떨쳐왔고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그야말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신륵사는 풍요롭게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신륵사는 청룡과 백호가 아주 좋아요. 풍수에서는 백호가 여성과 부를 상징하고, 청룡은 남성과 명예를 상징해요. 신륵사의 경우에는 백호도 잘 둘러쳐 있지만, 청룡이 더 잘 감싸고 있어서 큰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풍수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바로 물인데, 신륵사는 앞쪽으로 남한강이 휘둘러 지나가니 금상첨화격이에요.”신륵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 앞에 서면 앞이 트이고 삼면은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기 그지없다. 멀리 앞쪽으로 명예와 권력을 불러들인다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이 길게 이어진다. 일자문성이 마치 낮은 성벽을 둘러친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신륵사는 그렇게 명당이다. ■ 골짜기에 들어앉은 고달사지 = 여주에는 한때 신륵사보다도 더 큰 규모를 자랑했던 대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빈 터만 남은 고달사(高達寺)다.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高達寺址·사적 제382호)에는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대사찰 고달사의 흔적이 남아있다.사적지 면적만도 6만㎡에 달하는 넓은 고달사지는 발굴조사 후 건물터들을 흙으로 조금 높게 덮어 평지와 구분지어 놓았다. 수많은 건물지들과 군데군데 커다란 석조 문화재들이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최근에 복원해 놓은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만 보아도 높이가 5m가 넘는 대단한 규모다. 고달사는 한때는 머물던 승려만도 수백명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폐사와 관련된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이 커다란 사찰은 영광의 시대를 끝내고 말았다.“풍수적으로 볼 때 고달사는 신륵사와 완전히 비교가 되네요. 신륵사가 명당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데 반해, 고달사는 어째서 이런 곳에 터를 잡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완전히 골짜기에 절을 지었고, 주변에 좋은 산들도 없어요. 게다가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이 여럿 보이네요. 규봉이 있다는 것은 넘보며 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는 뜻이죠. 아마도 폐사의 원인이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같은 불교 사찰이고 비슷한 지역에 있는데, 유독 신륵사는 이어지고 고달사는 몰락했다는 것은 무언가가 달랐다는 뜻이에요.”고달사를 둘러본 후 폐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조선후기 문인 김병익이 남긴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牧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 불교를 탄압하던 시기에 유학자들에 의해 사찰들이 폐사됐으나, 신륵사는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에 폐사를 모면했다는 내용이다. ■ 고달사지와 닮은 회암사지 = 양주 천보산 자락에는 조선시대 최대의 국찰이었던 회암사(檜巖寺)의 터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가 남아있다. 회암사는 여러 면에서 여주 고달사와 닮았다. 두 사찰은 모두 한때 승려와 신도 수천명이 머물 만큼 번성했다가, 조선후기에 갑자기 몰락해 사라졌다.“회암사는 천보산을 주산으로 하고 터를 잡았어요. 하지만 천보산은 한눈에도 돌이 많고 거친 산이어서 풍수적으로 부족함이 많아요. 터가 넓다고는 하지만 고달사지처럼 골짜기가 진 곳에 자리를 잡았고, 토체와 일자문성도 완전하지 않아요. 더욱이 뒤쪽으로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도 보이니, 회암사 역시 늘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결국 고달사와 회암사는 풍수적으로 비슷한 조건을 가진 곳에 절이 지어졌고,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몰락의 원인이 된 것 같아요.”그나마 회암사가 고달사보다 나은 것은, 이 절을 만들고 중창하고 지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승려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천보산의 맥을 타고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다. 회암사지가 늦게나마 발굴이 되고 박물관까지 세워지면서 다시 빛을 보고 있는 것과, 회암사지 뒤쪽에 다시 세워진 지금의 회암사가 점점 번창하고 있는 것도 그로부터 힘을 얻은게 아닐까 싶다. /글·사진=박상일기자·metro@kyeongin.com▲ 신륵사 전경-경기남부에서 손꼽히는 명찰인 여주 신륵사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여주 고달사지는 넓은 빈터와 몇개의 유물만 남아 대사찰의 면모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2015-07-20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 복을 부르는 화장실

화장실은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화장실을 보고 주인 또는 회사의 능력과 길흉을 판단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따라서 화장실을 만들고 꾸밀 때 공을 들여야 하고, 사후 관리에도 힘을 써야 복을 부를 수 있다.화장실에서 가장 보편적인 존재는 ‘물’이다. 물이 많은 곳인 만큼 다른 곳보다 습하고, 무거운 기류를 만들어 낸다. 이 때문에 화장실은 환기와 통풍이 잘되는 구조로 만들어야 기의 흐름이 원활해지고 건강운과 재물운이 들어온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할 때 가장 이상적인 화장실 형태는 큰 사각형 구조다. 화장실이 삼각형이거나 복잡한 기형인 것은 좋지 않다. 그리고 공간 여유가 있다면 화장실의 크기는 큰 것이 좋다. 화장실은 환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창문이 꼭 필요하다. 화장실이 방 안쪽에 딸려 있는 경우에는 화장실의 높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화장실 바닥이 침실 바닥보다 높지 않아야 하며, 특히 욕조가 높은 곳에 위치해서는 안된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화장실 바닥과 욕조가 높은 집에 살게 되면 습한 기운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내분비계통의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화장실의 방향은 집이나 건물의 가장자리 쪽이면서 정동향이나 남동향이 가장 좋다. 이 두 방향은 ‘나무(木)’에 속하는데, 화장실의 물의 기운이 나무의 기와 오행을 왕성하게 해준다. 반대로 물과 상극인 ‘흙(土)’을 의미하는 북동향이나 남서향은 화장실의 방향으로 좋지 않다.화장실 내부 배치에서는 변기의 위치가 중요하게 꼽힌다. 변기는 화장실 출입구에서 직접 보이지 않고 거울에도 비치지 않는 곳이 좋다. 변기의 방향은 화장실 문과 정면으로 마주해서는 안 되며 문과 수직이 되는 것이 좋다. 아울러 화장실 내부는 최대한 간결한 것이 좋다. 그래야 기의 흐름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2015-07-20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4] 송도, 신도시와 구도시

■신도시초고층 빌딩·공원 늘어선 부유한 지역속내를 보면 아직은 빈땅 많은 ‘미완성’■구도시옥련동 일대 들어서니 옛 유원지터 반겨.골목길 마다 들어찬 맛집·행인 ‘인상적’송도신도시는 바다를 메워 넓은 택지를 만들고, 그 위에 조성한 지극히 ‘인공적인’ 도시다. 애초 산이 없던 곳이니, 송도신도시 넓은 땅은 온통 평평한 평지 뿐이다. 사통팔달 시원시원하게 길을 내고 초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선 데다가 군데군데 커다란 공원까지 자리를 잡은 모습은 영락없이 돈과 사람이 넘치는 부유한 도시로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송도신도시는 아직까지 빈 땅이 많은 ‘미완성’의 도시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여야 할 중심 상업지역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아 썰렁한 바람이 감도는 도시이기도 하다. “송도신도시가 바다를 메워 만들어진 탓에 산이 없고, 그래서 땅에 기운이 없다는 말은 지난번에도 했지요. 그래서 송도신도시가 활력을 찾으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요번에 송도신도시를 둘러보다 보니 새로 들어서는 대학교들이 참 많네요. 그런데 대학교들 역시 산의 기운을 받지 못하는 넓은 평지에 자리 잡았으니, 활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학들을 보아도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는 안산, 고려대학교는 개운산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경희대학교는 천장산, 성균관대학교는 북악산… 대부분 이렇게 자리를 잡았지요. 송도신도시의 대학들은 그런 자연의 기운을 얻지 못해 풍수적으로 아쉬워요. 하지만 그대신 좋은 교통과 잘 갖춰진 도시기반시설, 전국적인 송도의 명성 등을 무기로 갖게 된 셈이네요. 어쨌든 송도의 대학교들이 부족한 점을 딛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신도시와 손을 잡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조광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둘러본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와 해외 대학들의 글로벌캠퍼스는 역시나 아직 활기가 부족해 보였다. 글로벌캠퍼스는 한쪽의 커다란 건물이 아직도 ‘공사중’이다. 이곳에는 뉴욕주립대, 조지메이슨대, 겐트대, 유타대 등 쟁쟁한 대학들이 들어와 있지만, 송도신도시가 아직 ‘미완성’인 만큼 글로벌 대학들도 자리를 잡기 위한 노력이 한창인 것으로 보였다. 글로벌캠퍼스를 나와 곧게 뻗은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3㎞쯤 가니 재작년 국립대로 ‘새 출발’을 한 인천대학교가 있다. 인천대학교는 지난 2009년에 일찌감치 송도캠퍼스를 준공하고 옮겨왔지만, 이곳도 캠퍼스 안쪽만 학생들이 오갈 뿐 주변은 썰렁한 분위기여서 아쉬움을 주었다. “송도신도시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역시 부족한 점이 많지요. 그러면 한번 송도 신도시가 생기기 전에 원래 송도로 불렸던 곳으로 가보죠. 이곳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이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를 겁니다.”인천대 송도캠퍼스를 나선 취재팀은 구(舊) 송도로 불리는 연수구 옥련동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리를 건너기도 전에 듬직한 산 하나가 눈앞에 토체(土體)를 이루며 솟아있다. 구 송도를 뒤에서 든든히 받치고 있는 청량산(171m)이다. 고려 우왕때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이 이곳에 절을 짓고 경관이 하도 수려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하면서 산 이름도 청량산이 되었다고 한다. 송도신도시를 빠져나가는 다리 위 표지판에는 청량산 방향으로 ‘송도유원지’가 표시돼 있다. 송도유원지는 지난 1963년 문을 연 후 인천을 대표하는 유원지 중 하나로 50년 가까이 운영되다가 지난 2011년 문을 닫았다. 하지만, 송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수많은 추억을 전해주는 곳이어서 일까? 유원지가 문을 닫은지 4년이 지난 지금도 표지판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송도유원지’라는 말이 정겹기만 하다. 다리를 건너 송도유원지 입구가 있던 송도로터리쪽으로 향하자 ‘송도특색음식거리’라는 커다란 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 옥련동 일대는 맛있는 식당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지금도 명성이 자자하다. 골목마다 구석구석 줄지어 있는 수많은 식당들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리 건너편 신도시와 꽤나 다른 느낌이다. 송도로터리 앞 유원지 입구에 도착하자, 커다란 철문이 닫히고 ‘매표소’ 글자가 떨어져 나간 모습의 옛 출입구가 을씨년스럽게 취재팀을 맞는다. 빠끔히 열린 틈새로 줄줄이 늘어선 자동차들이 보인다. 송도유원지가 5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진 넓은 공터에는 중고차 수출단지가 들어섰다. 송도유원지와 송도해수욕장은 이제 모습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추억 속의 장소’가 됐다. “유원지가 문을 닫은 것은 그만큼의 이유가 있겠지요. 바다를 뒤로 하고 산을 바라보며 입구를 냈으니, 유원지는 배산임수를 거스른 셈이네요. 유원지 입구도 비탈진 곳에 조금 삐딱하게 자리해 있는데, 산을 등지지 않고 이렇게 비탈을 따라 옆으로 놓여있는 것을 풍수에서는 좋지 않게 봅니다.”로터리에서 반대편으로 돌아 나와 청량산 방향으로 비탈길을 오르니 정면에 인천상륙작전기념탑공원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멀리 신도시 쪽에서 볼 때는 토체를 이루고 있던 청량산이 이곳에서 보면 기념탑 뒤로 삼각형의 영상사를 뚜렷하게 이룬 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념탑공원 왼쪽으로는 인천시립박물관이 자리해 있고, 오른쪽으로는 가천박물관과 흥륜사가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마치 청량산 중턱을 따라 중요한 시설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이다. 그중 중간쯤에 자리를 잡은 가천박물관은 가천길재단 이길여 이사장이 20년전인 1995년 설립한 박물관인데, 인천지역 유일의 국보이자 고려대장경의 뛰어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초조본유가사지론(국보 제276호)을 비롯한 귀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좁은 길을 따라 박물관 앞에 도착해 정문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박물관 본관 앞에 이른다. 본관 앞 뜰에서 뒤를 돌아 박물관을 보니 청량산을 뒤로 하고 청룡·백호가 적당히 좌우를 감싼 곳에 본관이 푸근하게 안겨 있다. 앞쪽으로는 거침없이 전망이 트여 멀리 송도신도시와 바다까지 한눈에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명성을 얻을 수 밖에 없는 자리다. “불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요. 사람이 자연을 알고 조화롭게 터를 잡느냐, 그렇지 않고 사람이 마음대로 깎고 메워서 터를 만드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겁니다. 사람의 힘으로 도시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풍수는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니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교훈인 셈이지요.”결국 송도를 둘러보는 것은 또 한번 교훈을 새기는 여행이 됐다. 조광 선생은 “새롭게 만드는 것일수록 풍수에서 멀어져가는 모습이 아쉽고 섭섭하다”는 말로 이번 송도 둘러보기를 마무리 했다. /박상일기자 metro@kyeongin.com▲ 뉴욕주립대를 비롯한 해외 유수의 대학들이 조성한 송도 글로벌캠퍼스 전경. 주변이 아직까지 황량한 공터로 남아있고 캠퍼스 일부 건물은 공사가 한창이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송도신도시쪽에서 바라본 청량산. 높이 171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토체를 이루며 옥련동 옛 송도 일대의 주산이 되고 있다.▲ 50년 가까이 수도권 주민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다가 지난 2011년 폐장한 송도유원지 입구가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청량산 중턱에 푸근하게 안겨있는 가천박물관.

2015-06-22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 ‘집의 중요공간’ 주방과 풍수

주방 또는 부엌은 대문(현관), 안방과 함께 집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꼽힌다. 특히 주방은 물과 불을 사용하는 곳이며, 칼을 비롯한 많은 도구들과 그릇들이 가득 차 있는 곳이어서 위치를 잘 잡고 정리도 늘 신경 써야 한다. 주방의 위치는 현관에서 마주 보이지 않고, 서쪽의 햇볕이 들지 않아야 한다.주방은 풍수에서 재물을 의미하는 ‘물’을 사용하고 많은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다.만일 주방이 서남향으로 있다면 채광은 좋으나 배수를 귀문인 서남쪽으로 처리하게 되어 좋지 않다. 서남향은 여름에 석양을 받아 기온이 높아지면서 음식물이 상하기도 쉽고, 남풍이 불어들어와 조리시 발생하는 연기가 실내를 더럽히고 습기도 많아진다.따라서 주방의 위치는 서남향 보다는 동향이나 동남향이 좋다.주방에서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가족들이 모여드는 곳이 식탁인데, 공간이 넓든 좁든 식탁은 가능하면 벽에 고정 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벽이 기의 흐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공간이 좁아서 벽에 붙이지 않고서는 식탁을 놓을 수 없는 경우, 차라리 상을 펴고 밥을 먹는 것이 더 낫다. 주방 식탁 위 조명은 밝을수록 좋다.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풍수에서 볼 때는 좋지 않다. 싱크대의 색은 자연스러운 원목 톤이 가장 좋다. 또는 연분홍이나 연녹, 흰색 등 은은한 색상 계열의 나뭇결 무늬를 선택한다. 거실과 주방 사이에 격자 칸막이 등을 놓아 주방이 직접 보이지 않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의 원활한 흐름을 가로막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2015-06-22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3] 인천 송도

바닷물이 들어오던갯벌을 메워신도시를 꾸몄으니사방이 평평한 땅에온통 사람들이 만든 것들만무성하구나초고층아파트·인공수로 품안은 공원 ‘제2의 강남’초현대식 건물과 잔디밭 시민… 외국여행지 방불산 없는 평지에 인공적으로 만든 땅 ‘태생적 한계’넓은 도로 사람 모임 방해 … 도시공간 조화 절실송도신도시는 전국의 신도시들 중에서도 관심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이른바 ‘핫 플레이스’다. 정식 명칭인 ‘송도국제도시’로 불리는 것이 맞지만, 이미 사람들의 입에는 ‘송도신도시’라는 말이 자리를 잡았다. 최근 KBS2TV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탤런트 송일국과 세쌍둥이가 사는 곳으로 방송을 타면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송도신도시는 초고층 아파트와 개성적인 건축물, 인공 수로가 펼쳐진 넓은 공원, 잘 조성된 상업시설 등이 잘 갖춰져 전국에서도 ‘이사가고 싶은 도시’로 꼽힌다. 부동산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사람들의 입에서 ‘제2의 강남’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참으로 대단한 도시예요. 바다를 메워 도시를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수 있겠네요. 아니,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것이 아니라 바다가 도시로 바뀐 것이니, 오히려 상전벽해의 의미보다도 더 놀라운 변화가 되겠네요. 게다가 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다니, 앞으로 더 놀랄 일이 많아지겠어요.”조광 선생은 송도신도시 조성은 정말 놀랄만한 일이라는 감탄 섞인 말로 송도신도시 둘러보기를 시작했다. 이미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버린 송도의 모습을 눈앞에서 본다면 누구라도 나올만한 감탄이다. 취재팀은 가장 먼저 송도의 명소 중 하나로 꼽히는 센트럴파크를 찾았다. 공원 입구에서 송도신도시 시내쪽을 돌아보니, 세쌍둥이네와 야구선수 류현진 등이 사는 곳이라는 초고층 주상복합을 시작으로 60층이 넘는 주상복합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65층짜리 동북아트레이드타워 등이 줄줄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송도신도시는 이런 곳’이라고 자랑하며 서 있는 듯 당당한 모습이다. 반면 센트럴파크쪽으로 눈길을 옮기면, 강처럼 널찍한 인공수로 위를 크고 작은 배가 오가고, 시민들이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여행지를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공원 한쪽에는 커다란 조형물이자 공연장인 ‘트라이볼’이 자태를 뽐낸다. 거대한 초현대식 건물들과 잘 가꿔진 공원이 어우러진,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다.“참 보기가 좋지요. 하지만 송도신도시는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는 점에서 풍수적으로 분명한 약점을 갖고 있어요. 풍수에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자연에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자연과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고, 산과 물이 잘 조화된 곳에 자리를 잡아야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송도는 자연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든 땅 위에 세워졌고, 산이 없는 평지 뿐이니, 풍수에서 볼때 부족한 땅이 될 수밖에 없어요.”조광 선생은 송도신도시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부족함을 화두로 끄집어 냈다. 역시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곳이니 어쩔 수 없는 한계인 셈이다.“풍수에서는 자연의 에너지가 산의 맥을 타고 흐른다고 하지요. 결국 산이 있어야 에너지가 있는 것인데, 이렇게 산이 없고 평지만 있는 땅은 그런 에너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결국은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직도 송도국제도시 조성사업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차근차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리고 이렇게 평지만 있어 에너지가 부족한 곳에서는 여성들의 힘이 강해지기 마련이에요. 자칫하면 경제자유구역이자 국제도시라는 목표했던 면모 보다는 주거도시로서의 면모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지요.”센트럴파크를 천천히 걸으며 송도신도시의 풍수를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눈앞에 이달 초 문을 연 국내 최대규모의 한옥호텔 ‘경원재 앰배서더’의 자태가 펼쳐진다. 명장들의 손으로 지어졌다는 한옥호텔은 공원쪽에 자리한 2층짜리 커다란 누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른 곳이었다면 지나치다고 했을 만한 규모의 기와지붕 누각이었지만, 고층 빌딩이 즐비한 송도에서는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다. 한옥호텔은 육지를 뒤로 하고 바다쪽으로 정문을 두었다. 풍수의 기본인 배산임수를 지킨 셈이다.한옥호텔의 뒤쪽은 센트럴파크의 커다란 수로가 감아 돈다. 관광선과 놀이배가 오가는 수로는 국내 최초로 공원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길이만도 1.8㎞에 달하고, 폭은 넓은 곳이 100m를 넘는다니, 공원 가운데에 커다란 운하가 만들어진 셈이다.넓이가 40만㎡에 이른다는 센트럴파크를 빠져나오자 눈앞에 동북아트레이드타워가 우뚝 서 있다. 높이가 305m로 국내 최고인 이 건물의 상층부 절반은 오크우드 프리미어 호텔이 입주해 손님들을 맞고 있다. 초고층 빌딩의 호텔과 공원의 한옥호텔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송도에 이처럼 화려하고 커다란 호텔들이 들어서는 것은 송도가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오가면서 살펴보면 아직까지 송도는 활기가 부족한 모습이에요. 국제도시로 자리를 잡으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부동산 가격도 지나치게 높아서, 자칫하면 송도가 기대했던 모습까지 발전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요. 겉모습만 화려하기 보다는 내실을 기하는 게 필요할 것 같네요.”동북아트레이드타워를 지나자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의 송도컨벤시아가 등장한다. 송도컨벤시아는 각종 전시와 회의 등을 하는 곳으로, 국제도시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시설이다. 인천시는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올해 말부터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이런 이야기를 조광 선생에게 하자 선생이 한마디를 던진다.“마음이 급하고 너무 큰 것만 좋아해요. 도시가 발전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살펴보면서 사업들을 맞춰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이제는 조금 다른 눈으로 송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커다란 건물과 넓은 도로가 멋지게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빈틈이 너무 많아요. 잘 보세요. 넓은 도로는 이동에는 편하지만, 멈춤이 없어요.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가 쉴 새 없이 지나치기만 한다는 뜻이지요. 즐비한 상가들이 하나같이 썰렁한 것은 이런 이치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어야 하고, 빠름이 있으면 멈춤이 있어야 하고, 높음이 있으면 낮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조화가 이뤄지고 에너지가 돌게 되는 것이에요. 도시를 만들때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해야 해요. 물론 전문가들이 잘 살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조광 선생의 이야기처럼 송도신도시의 거리에는 사람이 부족해 보였다. 가장 상가가 발달해 있다는 해양경비안전본부 주변도 크게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국제도시로서의 면모가 다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도시를 휘감아 도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둘러보는 사이 ‘송도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박상일기자 metro@kyeongin.com▲ 공원 한가운데로 넓은 인공수로가 만들어진 송도 센트럴파크와 송도국제도시 시가지 내에 줄지어 서 있는 초고층 빌딩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초고층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인천 송도국제도시 전경.▲ 전시·회의 전문시설인 송도 컨벤시아는 올해 말부터 2단계 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다.▲ 최근 문을 연 국내 최대규모의 한옥호텔 경원재 앰배서더.

2015-05-18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좋은 사업장의 위치

막힌 골목·철도 피하고주변길보다 낮은곳 적합사업이나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무실이나 가게와 같은 사업장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보통 사업장으로 쓰일 건물이나 땅, 상가 등을 보러 다닐때 ‘목이 좋은 곳’을 많이 찾는다.큰 도로나 대중교통 정류장·역 등과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에 거주시설과 상업시설이 많아 오가는 사람들이 많고, 관공서 및 은행과 같은 업무와 관련된 곳을 가기도 쉬운 곳이 흔히 이야기하는 ‘목이 좋은 곳’이다.하지만 풍수에서는 사업장의 위치를 이야기할 때 바람(風)과 물(水)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이중에서도 ‘물’은 ‘부(富)’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것을 잘 살펴야 한다.‘물’이라고 하면 하천이나 개울 등을 생각하기 쉬운데, 도시에서는 도로도 ‘물’의 개념에 포함시킨다.아울러 주변보다 지형이 높은지 낮은지도 주의깊게 살피는데, 보통 ‘물’은 주변보다 지형이 조금 낮은 쪽으로 모이기 때문이다.풍수적으로 볼때 좋은 사업장의 위치는 ▲사업장이 주변 도로보다 조금 낮은 곳 ▲막다른 골목에 있거나 정면으로 도로가 달려오지 않는 곳 ▲도로와의 간격이 지나치게 가깝지 않은 곳 ▲주변에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는 큰 도로나 기차가 지나는 철도가 없는 곳(빠르게 달리는 차량은 기운을 흩어 놓는다) ▲주변에 자신의 사업장을 압도하며 굽어보는 위압적인 건물이 없는 곳 ▲내 사업장이 다른 사업장을 거느리듯 중심을 잡고 있는 곳 ▲옆에 똑같이 생긴 쌍둥이 건물이 없는 곳(쌍둥이 건물은 하나의 기운을 둘로 흩어지게 한다) 등이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2015-05-18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2] 과천시

좋은 곳에 터를 잡고도이를 버리고 떠나니、무엇이 급하더냐아쉽고도 아쉽구나…관악산 주산으로 ‘富를 불러들이는 곳’주변과 조화 아담한 시청건물 ‘인상적’배산임수 국립현대미술관·서울랜드 등문화·관광도시로 가꿔나가면 전화위복과천시는 작은 도시다. 면적 35.86㎢에 인구는 7만이 조금 넘는다. 면적으로 따져서는 경기도 면적의 0.35%에 지나지 않고, 인구는 아직 시(市)가 되지 못한 양평군(10만5천명)보다도 적다. 하지만 과천은 많지 않은 인구로도 30년 전에 벌써 시가 되었고, 경기도내 31개 시군 중에서도 살기 좋은 도시로 꼽혀왔다. 관악산과 청계산 아래 산 좋고 물 좋은 땅에, 교통 편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있는 도시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취재팀이 찾아간 과천시 정부종합청사 일대는 화창한 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활기 넘치던 모습이 사라지고 왠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과천의 심장부나 다름없던 정부종합청사의 각 부처들이 옮겨간 영향이 적지 않은 듯 했다. 새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기운찬 관악산 줄기를 병풍처럼 두르고 여전히 당당하게 서 있는 정부종합청사의 커다란 건물들이 무색했다. 지난 1985년까지 시흥시에 딸린 일개 면(面)이었던 과천을 1986년 1월에 단번에 시(市)로 올려놓은 것이 정부종합청사 이전의 효과였으니, ‘알맹이’가 빠져나간 여파가 작을 리 없었다.“과천 정부종합청사는 풍수적으로 좋은 곳에 터를 잡았어요. 관악산을 주산으로 두어 좋은 기운을 받으면서 앞이 넓게 잘 트인 곳이에요. 이런 곳을 찾기가 쉽지 않지요. 특히, 정부청사 쪽에서 보면 관악산 봉우리들이 영상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여럿 보이고,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자리 잡고 있어 기본이 잘 갖춰졌다고 볼 수 있어요. 청룡 보다는 백호가 좀 더 잘 뻗었으니, 명예도 좋지만 부(富)를 더 잘 불러들이는 곳이라고 하겠네요.”조광 선생 설명대로 정부종합청사 뒤로 힘차게 이어진 관악산 줄기 곳곳이 보기좋게 삼각형으로 솟아 영상사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들이 많고 꼭대기가 거칠게 솟아있어 대표적인 화성산(火星山)으로 꼽히는 관악산을 주산으로 두었다는게 마음에 걸린다. “그렇죠. 관악산은 대표적인 화성산이에요. 그래서 서울을 도읍으로 정할 때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광화문 앞에 불을 먹는 해태상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하지만 산이라는 것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형태가 달라지게 마련이에요. 관악산은 서울 쪽에서 바라보면 불의 기운이 강한 화성산이지만, 과천쪽에서 바라보면 다른 모습이에요. 바위들이 많아도, 나쁜 기운을 가진 거친 돌들이 아니라 좋은 기운을 가진 귀석(貴石)들이 많아서 그 또한 나쁘지 않고요. 그러니 여러 면에서 볼 때 정부종합청사와 과천시청은 당시 참 좋은 터를 찾아 쓴 것이죠.”과천청사를 둘러보다가 귀에 익은 확성기 소리를 만났다. 청사 앞길 한쪽에 스피커가 달린 차를 대놓고 ‘노동가요’를 틀어놓았다. 차에 붙어있는 글을 보니 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인 듯 싶다. 하지만 듣는 이들도 없고, 시위하는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거의 매일같이 집회나 시위로 와글거렸던 예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다. 시끄러운게 없어져서 좋다고 하기에는 허전함이 너무 크다. 조광 선생도 마음이 불편한 듯 한마디를 던진다. “이렇게 좋은 터를 잡아 커다란 종합청사를 만들어 놓고도, 불과 30년만에 이곳을 버리듯이 하고 다른 곳으로 청사를 옮겨간다는게 이해가 안돼요. 게다가 세종시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억지로 만든 도시니, 기운이 모이지 않고 바람을 많이 탈 수밖에 없어요. 골고루 잘 사는 균형발전도 좋지만, 풍수적으로 볼 때 좋은 것을 버리고 좋지 않은 것을 택한 셈이어서 안타깝기만 하네요. 이로인해 나라가 어려워질까봐 걱정이에요.”정부종합청사 바로 옆에 자리한 과천시청은 요즘 시청 건물치고는 아담하기만 하다. 다들 옛날 청사를 허물고 높고 크게 새 청사를 짓는 것이 유행인데도, 과천시는 3층짜리 아담한 ‘빨간벽돌’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하지만 여러 도시들이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지지 않는 독불장군식 청사를 지어 오히려 나쁜 영향을 받고 있는 것과 달리, 과천시청은 주변의 산과 나무들과 같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다. 조광 선생도 “건물이 좀 작아서 불편할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튀지 않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 좋은 건물이에요. 시청 건물을 크게 지어 도시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고 요란을 떤 자치단체들이, 결국 겉만 번지르르 하고 속으로는 어려움에 빠져 끙끙대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 옳은지를 쉽게 알 수 있어요”라며 칭찬을 더해준다. 시청을 나와 이번에는 서울랜드 쪽으로 향했다. 과천저수지를 끼고 서울랜드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대공원이 차례로 자리를 잡은 이곳은 수도권 주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로 꼽히는 곳이다. 여기에 국립과천과학관도 주차장 건너편에 새롭게 조성됐고, 인근에 자리한 렛츠런파크(경마공원)까지 더해져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취재팀은 커다란 대공원주차장 옆을 지나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갔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벚꽃이 손님들을 반갑게 맞는다. 미술관에는 아이들이며 젊은 연인들이며 가족들이 가득하다.“미술관이 자리한 곳은 사실 골짜기 입구예요. 골짜기를 막거나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앉았다면 풍수적으로 안좋을 수밖에 없는 곳이지요. 다행히도 미술관은 옆으로 돌려 산자락 쪽으로 붙여서 지었어요. 덕분에 앞쪽으로 자연스럽게 호수가 만들어지면서 배산임수가 되었고, 건너편 산은 안산(案山)이 되었어요. 게다가 미술관 왼쪽으로 뻗어 올라간 산이 토체(土體)를 이뤘네요. 비록 백호가 없어 재물이 모이지는 못하지만, 토체가 있고 청룡이 좋으니 명성을 쌓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안산도 부드럽고 예쁘니 풍파를 막아주겠어요. 원래 터는 좋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최대한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한게 보입니다.”미술관에 이어 서울랜드와 렛츠런파크 등을 둘러본 조광 선생은 정부종합청사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조금 풀리는 듯한 표정이다. “오늘 둘러보니 과천은 휴양과 관광쪽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듯 해요. 원래 과천이 살기에는 좋은 땅이었으니, 이곳의 장점을 잘 살려서 문화와 관광이 어우러진 도시로 가꿔 나간다면 과천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조광 선생은 마지막으로 “어쨌든 과천은 복 받은 도시”라며 “정부종합청사가 빠져나간 것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과천이 아름답고 행복한 도시로 오랫동안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취재를 마무리했다. /글·사진=박상일기자▲ 과천 정부종합청사와 관악산. 과천쪽에서 바라본 관악산은 곳곳에서 영상사를 이루고 귀석(貴石)들이 많아 좋은 기운을 내려보낸다.▲ 3층의 아담한 과천시청 청사는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진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15-04-20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성공을 부르는 침실

수면중 새로운 기운 흡수직업·사업운 영향 미쳐인형·드라이플라워 ‘NO’풍수에서는 집을 볼때 침실을 현관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긴다. 침실은 사람이 하루 3분의 1 이상을 지내는 공간이자, 잠을 자면서 낮에 쌓였던 나쁜 기운을 내보내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일이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이다.이런 중요함 때문에 침실의 상태는 주인의 전체 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침실은 특히 직장운(직업운)과 사업운에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에,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침실에 신경을 써야 한다. 침실에서 중요한 것은 청결이다. 침실이 벗어놓은 옷가지 등으로 어지럽혀져 있거나,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 있거나, 커튼 및 침구 등이 더러울 경우 주인의 운이 상승하는 것을 막게 된다. 침실은 아주 깜깜해야 잠이 잘 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풍수에서는 침실이 지나치게 깜깜한 것 보다 간접조명이나 수면등으로 부드럽게 빛을 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하지만, 침실을 밝게 한다고 너무 얇은 커튼을 치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커튼이 너무 얇으면 왕성한 기운들이 창문으로 흘러나가게 되기 때문이다.여성들이나 아이들의 방에 인형이 가득한 경우가 많은데, 풍수에서는 이것도 좋지 않게 본다. 특히 작은 인형들을 머리맡에 가득 놓아두는 것은 운기를 놓치는 원인이 된다.만일 인형을 놓고 싶다면 큰 인형을 2~3개 정도만 놓도록 한다.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 침실에 꽃을 놓는 것은 풍수적으로 좋다. 요란하지 않은 작은 꽃이나 관엽식물 등을 놓아두면 침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하지만 드라이플라워는 죽은 꽃이어서 역효과를 낳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책 ‘좌청룡 우백호’(조광 지음, 도서출판 아침 펴냄)

2015-04-20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1] 양평 추읍산·여주 고달사지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인물이 날 곳에서 인물이 나고、흥할 수 없는 자리에서는 사라져 갈 뿐이네。가까이 보면 산정상 잘린 ‘토체’ 형상묘자리·집터 쓰면 명예·돈 불러 들여신라때 창건 고려 전성기 대사찰 유적 골짜기 안쪽에 자리잡아 몰락 ‘흔적만’지난번 양평과 여주를 둘러보았지만, 중요한 두 곳을 건너뛰었다. 한 곳은 풍수가들 뿐 아니라 등산객들까지 발길이 끊이지 않는 양평의 명산 ‘추읍산(趨揖山·583m)’이고, 한 곳은 고려시대 전성기를 누렸던 대형 사찰 여주 ‘고달사지’다. 두 곳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이번에는 일부러 시간을 마련했다.추읍산을 보기 위해 양평 개군면을 찾아간 날, 조금 덥다는 생각이 들 만큼 따뜻한 봄 날씨였지만 미세먼지로 뿌옇게 흐려진 하늘이 야속했다.하지만 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추읍산은 ‘용문산이 부럽지 않은 명산’이라는 평에 걸맞게 신비한 모양새로 취재팀을 맞아 주었다.비록 용문산의 유명세에 밀려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방 어디에서 보더라도 눈길을 끌어당기는 자태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추읍산은 또 다른 이름인 ‘칠읍산(七邑山)’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맑은 날 산꼭대기에 서면 일곱 고을이 내려다 보인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죠. 다시 말하면 양평 일대 일곱 고을에서 볼 수 있는 산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추읍산 정상에서 보이는 고을이 양근, 지평, 양주, 여주, 이천, 광주, 장호원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가까운 양평이나 여주는 물론 멀리 이천이나 광주 쪽에서도 추읍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산이라고 할 수 있죠.”개군면 소재지를 지나 추읍산 쪽을 향해 가니 도로에서 산의 모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워낙 여느 산들과 달라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구별해 낼 수 있을 듯하다. 개군면 소재지 쪽에서 보이는 모양은 정말로 잘 생긴 부봉(富峰)이다. 마치 둥근 밥공기를 엎어 놓은 듯 둥글게 솟아오른 모양은, ‘일부러 만들지 않고 어떻게 저절로 저렇게 됐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추읍산은 이쪽에서 보면 영락없이 예쁜 부봉이지만, 가까이 가서 볼 때와 다른 쪽에서 볼 때에는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요. 내리 쪽으로 들어가 추읍산 아래까지 가서 올려다보면 산정상 부분이 잘려지면서 토체를 이뤄요. 그리고 양평 방향으로 멀리 나가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등장하는데, 하나하나가 감탄할 만한 모습들이에요.”개군면 쪽에서 추읍산을 바라보며 가다가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내리 쪽으로 들어갔다. 내리 쪽은 추읍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산행의 출발점으로 많이 삼는 곳이다. 내리 일대는 산수유가 많아 매년 4월 초에 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내리 마을을 향해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가며 풍광을 감상하는데 조광 선생이 잠시 차를 멈추게 한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담한 벽돌집이 한 채 서 있다. 잘 관리를 하는 듯 깨끗하고 단정한 모양이지만, 전형적인 시골집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집이다. 조광 선생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현역 정치인의 집”이라며 “인물이 충분히 배출될 좋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설명한다. 자세히 보니 그야말로 풍수의 정석에 딱 맞는 집터다. 뒤로는 위압적이지 않은 조그만 언덕이 주산(主山)이 되고 있는데, 영상사를 이루며 좋은 기운을 내려보내고 있다. 앞쪽은 살짝 비탈져 내려와 훤히 트였고, 좌청룡·우백호가 길게 뻗어 내려오다가 안쪽으로 감아들어 돈과 명예를 모두 끌어들이는 모양새다. 딱 그 한가운데에 집이 지어졌으니, 보통 안목으로 집자리를 잡은 게 아님을 짐작케 한다.“이 집은 추읍산 자락이 길게 내려 뻗은 끄트머리에 자리해 있어요. 그야말로 추읍산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죠. 북동쪽 방향으로 추읍산이 한눈에 보이는데, 아주 예쁜 부봉의 모습이어서 이 집의 주인은 평생 재물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게다가 집 앞에 청룡이 기가 막히게 휘감아 들었으니, 명예 또한 타고 난 셈이지요. 결국 이곳에서 큰 정치인이 나왔으니, 인물이 나올 곳에서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사례가 되겠네요.”한참 동안 추읍산과 집터에 대한 칭찬을 이어가던 조광 선생은 끝머리에 아쉬움을 살짝 붙인다.“그런데, 추읍산이 뛰어난 반면 주변의 산들은 영 모양이 나오지를 않아요. 울퉁불퉁하고 바위가 많고 삐죽삐죽 솟은 산들이 추읍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죠. 결국 추읍산이 이 주변에서 유달리 도드라지고 있는 모양새인데, 이런 곳에서는 큰 인물이 나오되, ‘독불장군’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주변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고, 남과 어우러지기 보다는 자신의 뛰어남을 강조하는 사람이 나오는 형국이지요.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지만, 추읍산이 주변과 잘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것은 아쉽고도 아쉬운 부분이에요.”내리 마을을 가로질러 추읍산을 오르는 좁은 길로 쭉 들어가자 바로 눈 앞에 추읍산의 본체가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이쪽에서 보는 추읍산은 산 정상이 똑바로 잘려나간 ‘토체’ 형상이다. 토체가 있는 곳에 음택(묘)이나 양택(집)을 쓰면 높은 사람을 상대하게 된다고 하니, 곧 명예를 얻게 된다는 의미다.추읍산의 또 다른 모양을 보기 위해 개군면 쪽으로 나와 양평시내쪽으로 차를 달렸다. 신내해장국으로 유명한 공세리에서 동쪽을 향해 뒤돌아 추읍산을 바라보니, 남쪽 개군면 소재지 쪽에서 바라보는 모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며 낮아지다가, 북쪽 편에서 살짝 다시 솟아올랐다. 조광 선생은 “코끼리가 엎드린 모습”이라고 했다. 과연 북쪽을 향해 잔뜩 엎드린 코끼리 모양이다. 아마도 이 모양을 두고 추읍산이 용문산을 향해 절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 듯 하다.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며 추읍산을 살펴보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서둘러 여주 쪽으로 넘어가 고달사지로 내달렸다.고달사지(高達寺址·사적 제382호)는 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대사찰 고달사의 터다.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폐사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폐사 시기와 이유가 베일에 싸여있다. 전성기 때의 위용을 짐작하게 하는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보물 제6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 석불대좌(보물 제8호) 등 귀중한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지난해 10월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던 원종대사탑비의 비신을 복원해 당초 모양대로 탑비를 세워놓았다. 한때 이름을 날렸던 대사찰의 터여서 기대를 많이 했지만, 조광 선생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한탄을 한다.“아이구… 완전히 골짜기에 절을 지었네요. 오래된 사찰들이 대부분 풍수를 잘 보고 터를 잡았는데, 이곳은 어째서 이렇게 터를 잡았는지 모르겠네요.”조광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고달사지는 좌우가 넓기는 하지만 영락없이 골짜기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골이 진 곳에는 양택이든 음택이든 써서 좋을 것이 없다.“주변의 산들도 둘러보니 좋지가 않네요. 일단 눈에 들어오는 영상사나 토체 같은 좋은 산이 없어요. 게다가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이 여럿 보이니, 늘 좋지 않게 넘보며 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아마 이런 이유로 나쁜 일을 당해 폐사를 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고달사지를 둘러보면서 지난번에 살펴 보았던 신륵사가 떠올랐다. 풍수적으로 명당의 조건들을 잘 갖춘 곳에 자리를 잡은 신륵사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사찰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반면 더 크고 번창했던 양주 회암사나 여주 고달사는 이렇게 몰락해 흔적만 남은 모습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지나간 역사인 것을…. 취재팀은 “풍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사람이 이를 모를 뿐”이라는 조광 선생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아쉬움 속에 발길을 돌렸다. /글·사진=박상일기자▲ 양평 개군면 소재지 쪽에서 바라본 추읍산은 부봉의 형태가 뚜렷하다.▲ 여주 고달사지 전경. 4만㎡ 가 넘는 넓은 절터에는 옛 영화를 증명하듯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보물 제6호), 고달사지 석불대좌(보물 제8호) 등이 커다란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작년 10월 복원돼 제모습을 찾은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2015-03-23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재물이 들어오게 하려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재물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고 재물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자기 몸에 부착하는 액세서리나 집안의 사소한 인테리어도 재물의 들어오고 나감에 연관이 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몸에 부착하는 반지나 귀고리, 팔찌 등은 은으로 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현란한 것은 오히려 재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집안의 가구는 둥근 모양이 좋다. 가구의 모서리가 돌출돼 있거나 지나치게 예리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도 재물이 들어오는 길을 막는다.따라서 화장대나 장롱, 가전제품 등은 비교적 원만한 느낌이 들면서 부드럽게 디자인 된 것을 고른다. 온종일 쉴 틈 없이 일하는데도 도무지 돈을 만져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런 때는 금전운을 상승시켜야 한다.집안이나 사무실의 동쪽에 빨간색의 옷이나 문구류를 놓는 것이 방법이다. 또 서쪽 방향에는 황금색의 장식장을 놓거나 노란색의 커튼, 노란색 꽃을 심은 화분 등을 놓아 금전운을 더욱 배가시키도록 한다. 통상적으로 집문서나 귀금속, 통장 등을 넣어두는 장롱은 비밀, 감춤, 저축, 안전 등을 상징하는 북쪽 방위에 놓도록 한다. 아울러 인감도장이나 신용카드, 통장, 귀금속 등을 초록색 천으로 잘 싸서 보관해야 금전운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http://cafe.naver.com/mirpoongsu), 책 ‘좌청룡 우백호’(조광 지음, 도서출판 아침 펴냄)

2015-03-23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양지바른 묏자리

야트막한 산 아래나 중턱의 햇볕이 잘드는 자리를 보면 흔히 "양지 바르고 산이 험하지 않아 산소 쓰기에 딱 좋겠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조상을 모실때 생전 살았던 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마을 뒷산 양지바른 곳을 찾아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햇볕이 따뜻하게 잘 드는 곳은 맞지만, 낮은 구릉의 옆구리나 골짜기에 쓴 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은 명당이라는 단편적인 풍수사상이 빚어낸 결과라 할 수 있겠다.마을 주변의 산들은 대체로 기운이 순조롭고 부드럽게 전해지기에 명당은 아니더라도 좋은 터를 찾기에 부족함이 없다. 반대로 산악이 험하고 높으면 에너지가 넘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큰 인물이 나기에 적합하지 않다. 높이 위로 솟은 산들은 보기에는 좋은지 모르나 땅으로 흘러야 하는 생기가 하늘로 솟고 생기가 멈춰있기 때문이다. '명산(名山)엔 명당(明堂)이 없다'는 말도 이로부터 유래한다.마을 뒷산에 묘를 쓸 때는 양지바른 곳만 찾다가 맥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맥은 산의 에너지(생기)가 움직이는 통로이기 때문에 묘를 쓸때는 맥을 이어받을 수 있는 곳에 써야 한다. 맥을 이어받지 못하는 곳에 묘를 쓴 것을 '사맥에 썼다'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볕이 잘드는 자리라고 해도 파묘를 해 보면 묘 안에 물이 꽉차거나 냉혈인 경우가 상당수다.맥을 아예 무시하고 쓴 묘들 중에는 골짜기에 쓴 경우도 많은데, 이런 골에 쓴 묘는 풍수적으로 가장 나쁜 경우로 꼽는다. 이는 양택(집)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골은 바람과 물의 나쁜 영향을 가장 많이 받기 때문이다.때로는 이같은 골에 묘 또는 집을 쓰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놓은 경우도 있는데, 이처럼 풍수적으로 부족하지만 사람의 노력을 통해 이를 메워보려 하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이런 비보사상을 전국에 펼쳐 응용한 이가 바로 도선스님이다. 비보풍수는 땅의 기운을 인간의 삶과 조화되도록 하자는 이론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의 노력이 만들어 내는 영향력은 불확실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만 하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http://cafe.naver.com/mirpoongsu), 책 '좌청룡 우백호'(조광 지음, 도서출판 아침 펴냄).

2015-01-19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0]하남

자연이 만든 땅、 조상들이 찾은 터를후손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그저 안타까울 뿐이네。백제 수도로 이성산성 역사적가치 불구난개발 우후죽순 유적지 흔적 찾기조차 힘들어도심복판 고속도로·송전탑도 氣 흩어놔경기도의 한가운데, 한강을 끼고 검단산과 남한산 자락이 남쪽을 둘러싼 널찍한 터에 자리를 잡은 하남시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의 선택을 받은 풍요로운 도시다. 지금은 93㎢의 면적에 인구 14만5천명이 사는 중소도시에 머물고 있지만, 1962년에 발견돼 대대적인 발굴이 이뤄진 미사리선사유적지(사적 제269호)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는 물론 백제시대의 유물까지 쏟아져 나온 것만 보아도 하남시 일대는 예부터 '혜택받은 땅'이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하남시 일대는 백제를 건국한 온조가 하남위례성을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중심지로 알려져 있어, 한 나라의 도읍이 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땅으로 꼽혀왔다."하남시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워낙 많은 변화를 겪은 곳이어서 풍수적으로 어떨지 모르겠네요. 남겨 놓아야 할 곳을 남겨놓고 살릴 것은 살려야 하는데, 대규모로 개발이 되거나 난개발이 되다보면 풍수적으로 중요한 부분들이 잘리거나 사라지게 되는게 보통이에요."조광 선생은 둘러보기를 시작하면서 의미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미 몇차례나 취재과정에서 그런 모습들을 보아온 터여서 기대감이 한풀 꺾인다. 취재팀은 우선 하남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이성산성(사적 제422호)을 오르기로 했다. 이성산성은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208m)에 세워진 둘레 1.84㎞의 산성이다. 시가지의 서쪽편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이성산성에 오르면 하남시 동쪽에 우뚝 솟은 하남의 진산(鎭山) 검단산(657m)부터 남쪽으로 이어진 남한산 자락과 하남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음식점들이 모여있는 곳의 뒤쪽으로 돌아가야 만날 수 있는 이성산성 입구에서 산비탈을 조금 오르자 금세 이성산성의 성벽 일부와 커다란 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한양대학교박물관을 통해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15년 가까이 걸려 발굴해 놓은 것들이다. 여기서부터 가파른 산비탈을 다시 10분 가량 오르면 이성산성 중심부의 여러 건물지와 동문지를 만난다. 이성산성의 건물지는 일반적인 직사각형의 건물지뿐 아니라 8각·9각·12각 건물지도 포함돼 있어 특이하다. 9각 건물지에서는 인근 주민인듯한 아주머니가 초석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모습을 만났다. 아마도 이들 8각·9각 건물지가 옛날 제를 올리던 건물이었다는 이야기 때문이리라. 9각 건물지를 지나면 눈앞이 훤히 트인 언덕끝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이 하남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성산성 동문지(東門址)다. 동문지 성벽 위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멀리 솟은 검단산을 향해 중부고속도로가 길게 뻗어있고, 그 왼쪽으로 시가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고속도로 오른편은 춘궁동·교산동·하사창동 일대가 멀리 남한산 아래까지 이어지는데, 온통 창고와 비닐하우스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개발제한으로 인해 정식 건물이 들어서지 못하고 창고시설이 몰려있는 듯했다. 조광 선생이 혀를 찬다."아이구… 이렇게 넓은 곳에 온통 창고들이 가득차 있는 것은 처음 보네요. 거의 '창고도시'라 불러도 될 만큼 창고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산자락 아래 좋은 터들이 많을텐데… 다 못쓰게 됐겠네요."조광 선생은 전체적인 하남시의 풍수에 대해서도 한마디 더했다."진산인 검단산은 그리 풍수적으로 잘생긴 산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빙 둘러 보아도 잘생긴 산이 별로 안보여요. 전체적인 도시 모양은 한강을 뒤로 두고 있는 모양새인데, 풍수에서는 강이 앞쪽에 있는게 좋아요. 게다가 고속도로가 가운데를 가로질러 기를 흩어놓으니, 전체적으로 도시가 안정되지 않고 큰 인물도 나오기 어렵다고 봐야겠어요."이성산성을 둘러본 취재팀은 미사리선사유적지, 이성산성에 이어 또하나의 국가사적인 춘궁동 동사지(桐寺址·사적 제352호)를 찾았다. 고려 초기에 창건된 커다란 절이 있던 터로, 당시 금당의 규모가 경주 황룡사 금당에 못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같은 이름의 조그만 절이 옛 절터에 자리해 있는데, 넓은 절터 한쪽에 당당히 서 있는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이 당시의 위세를 전해주는 듯했다."원래 사찰은 규모가 굉장히 컸겠네요. 비록 절터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뒤쪽으로 주산이 우뚝 서 지켜주고 있는 데다가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고 있어요. 주춧돌을 보니 중심 건물이 딱 좋은 자리에 서 있었고, 가운데 커다란 제단이나 부처님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8각형 구조물이 있는데 풍수를 잘 따져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문제는 지금 바로 앞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송전탑까지 서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기운이 흩어질 수밖에 없어 너무 아쉽네요."동사지 오층석탑과 삼층석탑이 서 있는 앞쪽에는 이곳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지임을 알리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4만5천여㎡에 달하는 문화재보호구역과 주변에는 허가없이 건축물이나 각종 시설물을 설치·증개축할 수 없으며 위반시 중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경고문에서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송전탑이 서 있고, 고철 처리장까지 있는 모습을 보니 이런 경고문구가 무색하기만 하다.무거운 마음으로 동사지를 나와 인근의 교산동 건물지(향토유적 제5호)로 향했다. 이곳은 커다란 건물 주춧돌들로 인해 오랫동안 하남위례성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주목받아오다가, 1999~2002년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관청으로 사용됐음이 확인된 중요한 유적지다. 하지만 유적지 인근에 도착한 취재팀은 건물지를 찾느라 한참을 헤매야 했다. 유적지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어디에도 없다. 겨우 주민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건물지는 안내판이 낡아 너덜거리고 주변이 지저분했다. 그나마 유적지 내부는 정리가 되어 있어 다행이다. "뒤로 문필봉을 이룬 주산이 우뚝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 백호가 힘차게 뻗어있어요. 왼쪽으로 청룡도 잘 감고 있고, 앞쪽으로 작은 부봉이 안산을 이루며 서 있네요. 왼쪽으로 멀리 모양이 좋은 영상사도 두개나 있고요. 한눈에도 참 좋은 터라는 걸 알 수 있으니, 오랫동안 커다란 관청이 있기에 부족하지 않네요."교산동 건물지에서 위안을 받은 취재팀은 바로 인근 하사창동의 천왕사지로 향했다. 천왕사지는 규모가 1만평이 넘는 대규모 사찰이 있던 곳으로, 발굴조사에서 높이만 288㎝에 달하는 '광주철불'(보물 제33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도착한 곳에는 비닐하우스와 창고건물들이 빼곡해 도무지 절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최근의 언론 기사나 답사기에 '대형 사리공 석재가 밭 구석에 무방비로 방치돼 있고 주변이 이미 개발돼 절터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현실은 더 심각했다. 사방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대형 창고 건물들로 인해 주변 지형을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이성산성에서 보았던 창고들이네요. 풍수적으로 볼때 저쪽 산자락 아래에 사찰의 중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창고천지가 됐으니 아무 의미가 없지요. 물론 개발제한 같은 이유가 있겠지만, 좋은 땅들을 옛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게 이렇게 망가뜨리니 답답할 따름입니다."한때 한성백제의 중심지였고, 초대형 사찰지와 건물지들도 전해지기에 하남시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취재팀은 몇몇 곳들을 더 돌아보며 아쉬움만을 거듭 확인해야 했다. "풍수적으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도시의 자연과 역사와 문화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과 정신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남시가 자체적인 문화도 역사도 잃어가면서 서울에 딸린 '잠만 자는 도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서둘러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광 선생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교훈을 전해주며 이날 취재를 마무리했다. 글/박상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이성산성에서 바라본 하남시 - 이성산성 동문지에서 내려다본 하남시 일대. 중부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고층건물과 아파트가 늘어선 시가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창고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춘궁동·교산동·하사창동 일대가 보인다.▲ 동사지 3층석탑과 5층석탑 - 고려초 대형 사찰이었던 동사지에는 3층석탑과 5층석탑이 남아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한다.▲ 교산동 건물지 - 발굴이 끝난 교산동 건물지에는 커다란 초석들이 줄지어 서있다.

2015-01-19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집과 정원

요즘은 아파트가 워낙 많아지고 땅값도 비싸서 도시에서는 웬만해서 정원을 갖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거나 은퇴를 하게 되면, 변두리에 예쁜 집을 짓고 마당에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사는 것이 유행이 됐다. 특히 정원은 집의 경관을 아름답게 하고 마음의 여유를 느끼게 하기 때문에 비용을 들여서라도 꾸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원을 꾸밀때도 집과 조화를 이루고 주인의 생활이나 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정원을 꾸미면서 나무를 많이 심거나 연못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습기가 많은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상학에서는 이를 피하도록 권하고 있다. 가상학에서는 정원에 큰 나무를 심는 것, 특히 귀문(동북)이나 이귀문(남서)에 큰 나무를 심는 것을 흉상의 상징으로 여긴다. 이는 채광 및 통기성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정원에 꼭 나무를 많이 심고 싶다면 키가 작은 나무나 화초를 심는 것이 좋다. 진달래와 같이 성장이 느리고 경관을 해치지 않는 종류가 좋으며, 분재나 화초를 두는 것도 정원의 단조로움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연못 역시 면적을 많이 차지하고 습기도 많이 발생시킨다. 더구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기가 많아지기 때문에 항상 물을 깨끗이 갈아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못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수 및 급수설비에 신경을 써 손쉽게 물을 빼고 채워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정원을 꾸밀때 커다란 정원석도 많이 쓰는데, 정원석은 정원의 넓이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좁은 정원에 정원석이 너무 많으면 가상학에서는 음을 불러들여 쇠퇴하게 된다고 한다. 본디 정원석은 띄엄띄엄 두는 것이 바람직하며 정원을 돌로 막아 높이면 토의 기가 눌리고 돌 밑에 음기가 모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뿐 아니라 돌의 성질에 따른 영향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운 날에는 정원석이 햇빛을 반사시키고 열을 흡수해 달궈지기 때문에 정원석이 많으면 주변 온도가 크게 올라간다. 또한 돌은 보온력이 강하기 때문에 밤이 되어도 좀처럼 식지 않아 더위를 가중시킨다. 반대로 겨울에는 한낮의 열을 흡수하여 주위와의 온도차가 생기기 때문에 오히려 한기를 더하게 되고, 우기에는 돌이 수분의 증발을 막아 습기가 많아지게 된다.※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책 '좌청룡 우백호'(조광 지음, 도서출판 아침 펴냄)

2014-12-22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19]구리 동구릉

조선왕조 9기의 능에 7명의 왕·10명의 왕비 안장일자문성·좌청룡 우백호 겹겹이 호위단정하고 예쁜 산 명당으로 손색없어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이 한곳에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지정된 조선왕릉들 중에서도백미 중 백미로 꼽히는 곳.구리 동구릉(東九陵)을찾아가는 날,새벽까지 소복하게 눈이 내렸다. 고속도로와 구리 시내 큰길에는 밤새 뿌려댄 염화칼슘으로벌써 눈이 흔적도 없이 녹았다. 하지만 동구릉은주차장부터 하얀 눈이 녹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손님들을 반긴다. 아름다운 겨울 풍경으로 소문난 왕릉의 설경(雪景)을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매표소가 있는 입구로 향한다. 구리 동구릉은 남북한을 합쳐 총 42기가 남아있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 중 9기가 모여있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부터 조선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까지 시대별로 들어선 9기의 능에는 모두 합쳐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다. 전체 면적만 196만9천여㎡에 달하는 동구릉은 1408년 태조 이성계가 건원릉에 가장 먼저 안장된 후, 1904년 경릉 헌종의 곁에 효정왕후가 마지막으로 안장될 때까지 장장 500년의 세월을 두고 왕과 왕비가 모셔졌다. 그것만으로도 동구릉은 조선 왕실에서 가장 사랑 받은 명당으로 손꼽힐 만하다.정문 매표소와 역사문화관을 지나 하얀 눈길을 밟으며 조금 걸어가니 능역의 입구를 알리는 홍살문이 가장 먼저 반긴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던 커다란 소나무들은 가지마다 흰 눈이 묵직하게 쌓였다. 키작은 관목들과 잎이 떨어진 활엽수들의 가지에는 눈부신 눈꽃이 피었다. 홍살문 안쪽으로 들어서니 겹겹이 둘러싼 구릉들 덕분에 살을 에는 듯하던 바람도 한결 잦아든다. 한바탕 눈이 내린 후 새파랗게 갠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제례 준비를 하던 재실(齋室)을 지나자 가장 먼저 수릉(綏陵)이 위용을 드러낸다. 수릉은 헌종의 부친으로 22세에 요절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후에 추존된 문조(文祖·1809~1830)와 신정황후의 능이다. 높고 힘차지는 않지만 선명하게 뻗은 맥을 타고 안정되게 자리를 잡았다. 능침(봉분) 부근에 올라 주변의 산세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눈이 적지않게 쌓인데다가 정자각 위쪽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어서 호기심을 누르며 아래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일반인의 묘들이 한눈에 조산과 주산, 좌청룡, 우백호 등등을 따질 수 있는 것과 달리 왕릉들은 훨씬 규모가 커서 좀 다르게 봐야 해요. 동구릉은 들어오면서 금세 느껴지듯이 일자문성을 이루는 구릉들이 겹겹이 둘러있고, 그 안쪽에 사방으로 맥이 뻗어있어 마치 천연의 요새 안에 자리해 있는 모양이지요. 좌청룡·우백호가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묵직한 맥을 타고 모셨으니, 하나하나가 명당으로 손색이 없어요."흰 눈이 눈부시게 쌓인 수릉을 잠시 둘러본 취재팀은 서둘러 건원릉쪽으로 이동했다. 동구릉의 중심선을 따라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건원릉은 1408년 5월 24일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아들 태종이 여러곳의 명당을 알아보고 비교한 끝에 선택한 곳이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했으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이곳에 태조를 모셨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각별했던 애정만큼이나 신덕왕후와 불편한 관계였던 태종은 곧이어 눈앞의 가시 같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겨버렸다. 부왕을 정릉에 안장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니, 결국 건원릉은 태종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부왕을 모신 명당이기도 하지만, 신덕왕후와 부왕에 대한 복수의 산물이기도 한 셈이다. 이런 복잡한 역사를 배경으로 서 있는 건원릉은 능침에 잔디 대신 억새풀이 자라고 있는 '특별한' 능으로도 유명한데,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한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함경도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벌써 600년이 넘은 옛 이야기를 품은 건원릉은 태조의 명성 만큼이나 당당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한낮의 겨울 햇살이 능침 주변을 따뜻하게 비추며 한겨울 추위를 잊게 한다. 수릉보다 훨씬 묵직하게 뻗은 맥을 타고 조성된 건원릉은 마치 수천명의 군사들이 에워싼듯 낮은 구릉들이 일자문성을 이루며 겹겹이 호위하고 있다.내청룡 격인 왼쪽의 가장 가까운 구릉은 조금 앞쪽에서 묵직하게 모여 영상사를 이뤘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길이 홍살문 앞을 잔잔히 흐른다. "이것저것 따질 필요도 없이 훌륭한 곳이에요. 주변의 산들을 보아도 어느 하나 못생기거나 험한 게 없고 부드럽고 모양이 좋아요. 참으로 더없이 좋은 곳이네요."조광 선생의 감탄을 들으며 건원릉 옆 목릉(穆陵)으로 향했다. 목릉은 조선 제14대 선조(1552~1608)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를 모신 능이다. 건원릉보다 더 뒤쪽으로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해 있다. 동구릉의 능들은 대부분 하나의 곡장(능침을 둘러싼 담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침을 나란히 모셨는데, 목릉과 현릉(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은 왕과 왕비의 능이 별도로 조성돼 있다. 그 덕분에 목릉은 건원릉에 비해 훨씬 널찍하게 앞이 트여 시원스럽다. 좌우로 빽빽하게 청룡·백호가 에워싼 건원릉보다 좌우도 여유가 있다. "조선의 왕릉들은 좋은 명당을 찾아 선택한데다가 건축양식과 부속건물은 물론 각종 석물들까지 엄격한 규칙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양이나 느낌이 비슷해요. 능선과 숲이 호위하듯 둘러싸여 있으니, 전체적인 모양을 보려면 위성사진이나 지형도를 참고하는 곳도 좋은 방법이지요. 어쨌든 높이가 200m도 안되는 검암산 자락에 이렇게 좋은 명당들이 자리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에요."목릉을 둘러보고 돌아나오는 길에 원릉(元陵)으로 향했다. 원릉은 조선의 최장수 왕이었던 제21대 영조(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저기를 봐요. 산이 참 잘생겼지요. 저렇게 단정하고 예쁘게 생긴 산을 주변에 두어야 좋은 명당이라고 할 수 있지요."조광 선생이 가리키는 원릉 뒤편에는 아담하고 둥근 산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 원릉의 혈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낙산(落山)이다. 또 그 옆으로는 부드러운 삼각형 형태의 영상사가 솟아 든든하게 뒤를 지킨다. 원릉 역시 건원릉보다는 좌우가 트였으나, 사방으로 일자문성을 이룬 구릉들이 겹겹이 둘러싼 모양은 다르지 않다. "지금은 사방으로 큰 도로가 지나고 남쪽으로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는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했던 이곳이 더없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겠지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이렇게 커다란 왕릉들이 자리를 잡고,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훼손되지 않은 채 500여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어찌보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어요. 풍수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에게 남겨진 아름다운 보물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지요."동구릉을 둘러보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아름다운 왕릉을 구경하는 관람객들을 여럿 만났다. 다들 추운 날씨도 잊은 채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이들의 머리위로 나무들마다 반짝이는 눈꽃이 눈부시다. 그 아름다움만으로도 동구릉은 우리에게 행복이고 축복이다. 글=박상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동구릉의 첫 주인 건원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안장된 건원릉은 동구릉 9개 능 중에서도 가장 묵직한 맥을 타고 주위의 산과 나무들이 겹겹이 둘러싼 곳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원릉을 지키는 산' 영조와 정순왕후가 안장된 원릉 뒤편에 솟은 영상사.▲ '흰 눈에 덮인 동구릉' 동구릉 진입로와 수목들에 쌓인 흰눈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2014-12-22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대문과 현관

문만 크고 작은 집은 '흉상'안쪽으로 열려야 '복' 생겨대문과 현관은 집의 안과 밖을 이어주는 통로로 사람과 기운이 드나드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처음 만나게 되기 때문에 그 집의 얼굴과도 같은 존재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최근 각지에 지어지고 있는 집들을 보면 대문이나 현관을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집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대문과 현관은 오히려 흉을 불러올 수 있다.풍수에서는 문(현관 포함)이 크고 집이 작은 것을 흉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보는 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신분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집의 대문이나 담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를 알 수가 있었다. 그러하기에 신분에 맞지않게 호화스럽고 커다란 대문은 금령(禁令)에 반할 뿐 아니라 대흉을 초래한다고 여겼다. 지금은 이같은 신분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불필요하게 화려한 문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거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두번째 문제는 집과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은 집의 일부분으로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는 것이 좋다. 조화가 이뤄지지 않고 대문의 기운이 집과 주인의 기운을 누르면 집안이 편안하지 않고 흉한 일이 자주 생기게 마련이다. 아울러 대문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집들을 보면, 문 공사를 하는데 필요 이상의 비용을 들이느라 정작 중요한 내부 공사비용을 절약해서 내부 공사는 오히려 소홀히 한 경우가 많다. 현대주택에서 대문(현관)은 일종의 장식에 불과한 만큼, 가능한 한 간소화시켜 실용성을 중시하는게 좋다.대문이나 현관을 만들 때는 평탄하고 안정되며 중심이 잘 잡힌 자리에 만들어야 한다. 특히 대문 한쪽이 심하게 경사진 지역은 피하는 것이 좋으며, 건물이나 담장의 모서리 부분도 센 바람이 불어 안정감이 없으므로 좋지 않다. 대문은 좌우가 밝고 안정된 곳에 있어야 한다. 만일 대문이 건물 한쪽 또는 처마 밑을 통과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 대문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 덧붙여 대문은 바깥쪽으로 열리는 것보다 안쪽으로 열리도록 만들어야 복을 불러들일 수 있다. ※출처: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책 '좌청룡 우백호'(조광 지음, 도서출판 아침 펴냄)

2014-11-24 경인일보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18]양주

화려했던 옛날의 영화는 어디가고 빈터와 자취만 남아있으나산과 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그 시절을 되짚어 보게 하는구나회암사지 터, 골짜기·규봉 등 아쉬워양주관아지, 좋은 터의 기본… 시청 위치했다면 좋았을 것장흥 자리한 권율장군묘, 좋은 맥 타고 당당하게 조성 '감탄'서울의 북쪽, 경기도의 중북부에 자리한 양주시는 인구 20만이 조금 넘는 크지 않은 도시다. 요즘에는 서울 북쪽의 한적한 위성도시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양주는 경기북부지역의 '맏형' 같은 존재였다. 사실 양주가 중소도시가 된 것은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것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경기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군사와 교통·교역의 요충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양주(楊州)라는 지명도 '고려 초기 문종 때 서울이 될 만한 역사적 배경과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하여 '양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니, 경기북부의 자존심으로 꼽힐 만하다. 이런 역사에 걸맞게 양주시에는 굵직굵직한 유적지와 묘역 등이 곳곳에 자리해 있다. 취재팀은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최대 국찰로 왕실의 사랑을 받다가 사라진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를 먼저 찾았다. 회암사지는 인도의 승려 지공과 그의 제자인 나옹, 그리고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가 얽힌 역사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특히 당대 최고의 명승이었던 지공이 고려를 찾았을때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아란타절과 같다"고 하였고, 이후 원나라까지 찾아와 제자가 된 나옹에게 "고려로 돌아가서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고 하여 나옹이 회암사 중창에 나서게 했으니, 옛 고승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의 절이 있던 곳으로는 정말 규모가 엄청나네요. 풍수에 능했던 옛 고승들께서 고르고 고른 사찰이고, 조선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면 좋은 터에 지어졌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한때 대단한 영화를 누렸던 사찰이 한순간에 사라져 폐허가 됐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풍수적으로 부족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좋은 터에 지어졌다면 오래오래 영화가 이어져야겠지요."드넓은 회암사지 일대를 둘러본 조광 선생은 예상대로 아쉬움을 표시했다. "우선 주산인 천보산을 볼때 돌이 많고 거친 산이어서 부족함이 많아요. 터가 넓다고 하지만 골짜기가 진 곳이고, 뒤쪽에 자리한 토체와 앞쪽을 두르고 있는 일자문성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주변을 멀리 둘러보아도 유서깊은 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사나 토체들이 많이 보이지 않네요. 게다가 뒤쪽으로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도 보이니, 옛 회암사는 늘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있었다고 봐야겠어요. 아마도 큰 절이 한순간에 폐허가 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나옹이 본격적인 중창에 나선 이래 한때 262칸에 이르는 전각에 3천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있을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회암사는 명종 21년 실록에 '성난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이 돌아 왕이 그들을 타이르도록 명을 내렸다'는 기록을 남긴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후 약 30년 후인 선조 28년 실록에는 '회암사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불에 탔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몰락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회암사지는 1997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발굴작업을 통해 옛 건물터들과 수많은 기와, 도자기, 불상 등이 확인됐고, 그로인해 400년 넘게 묻혀있던 옛 모습과 이야기들도 세상의 빛을 보게 됐으니, 회암사지 뒤 천보산의 맥을 타고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세운 덕이 아닐까 싶었다. 회암사지를 내려와 새로 지어진 박물관을 둘러본 취재팀은 유양동의 양주관아지(경기도기념물 제167호)를 찾았다. 이곳은 중종 1년(1506년)때 관아가 설치된 이래 417년간이나 양주목을 관할했던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후 양주관아는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1922년에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동)으로 이전하였고, 이곳에 남아있던 관아 건물들은 한국전쟁때 파괴돼 옛 모습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는 옛 동헌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동헌 건물 한동만 복원돼 썰렁했지만, 조광 선생은 주위를 둘러보며 환한 웃음을 전했다. "이곳은 우리 선조들이 좋은 터를 잡는 기본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불곡산에서 이어진 부드러운 산자락 앞에 푸근하게 안겨있는데다가, 앞쪽으로 일자문성이 뚜렷하게 자리해 있어요. 멀리 오른쪽으로도 일자문성과 토체가 보이고, 왼쪽으로도 멀리 영상사와 토체가 자리해 있어요. 특히 양주 일대가 산이 험한 편인데, 이곳에서 보이는 산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모양이 좋아요. 관아터 뿐 아니라 그 옆에 자리잡은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나 양주향교 일대가 아늑하고 푸근한 것이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겠어요."양주관아가 좋은 자리에 있어서 양주목사들도 선정을 많이 베풀었는지, 관아지 한쪽에 10여기의 송덕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조광 선생은 "풍수적으로만 본다면 이곳에 시청이 왔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빈터로 남아있는 현재의 상황을 아쉬워했다. 양주관아지를 나서 이번에는 멀리 남서쪽 장흥면에 자리한 권율장군묘(경기도기념물 제2호)를 찾았다.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장흥면은 장흥관광지와 송추계곡으로 수도권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권율장군묘는 장흥관광지 안쪽으로 자리해 있어서 미술관과 조각공원, 카페 등이 즐비한 관광지를 구경하며 지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지나면서 곧바로 한눈에 보이는 권율장군묘는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의 명성에 걸맞게 넓은 묘역이 잘 정돈돼 있다. "지금이야 관광지가 조성돼 번잡하지만 옛날 이곳에 묘를 쓸 때는 첩첩산중이었을텐데 어떻게 이런 좋은 자리를 찾아 썼는지 참 신기하기도 해요.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맥을 타고 당당하게 조성된 묘가 감탄스럽네요."바닥에서 보기에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한 권율장군의 묘역에 올라 앞과 좌우를 바라보니 기운찬 산들이 주위를 겹겹이 감싸고 있다. 특히 오른쪽에 자리한 거대한 영상사는 안동권씨 가문의 위세를 대변하는 듯하다. 영상사에서 뻗어나와 크게 감싸고 돌아들어오는 외백호가 일품인데, 그 바깥쪽으로 멀리 또 잘생긴 영상사가 자리해 있다. 좌청룡 또한 묘 앞쪽까지 선명하게 뻗어있고, 그 바깥으로 외청룡이 감싸고 돈다. 외청룡 너머로는 멀리 영상사와 일자문성이 듬직하게 보이고, 발 아래로 눈을 돌리면 장흥계곡의 물이 돌아 지나가면서 좋은 음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했다. /글=박상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양주 장흥관광지에 자리한 권율장군묘는 잘 꾸며진 묘역과 좋은 터가 주인의 권세를 상징하는 듯하다.▲ 조선 중종때부터 현대까지 양주관아가 있던 양주관아지는 풍수적으로 좋은 터에 자리를 잡았다.▲ 회암사지 뒤로 천보산의 맥을 타고 자리한 무학대사탑과 쌍사자석등. 위쪽으로는 지공과 나옹의 부도가 있다.

2014-11-24 박상일

[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마을과 아파트

풍수는 묘 터를 잡는 음택 풍수, 집 터를 잡는 양택 풍수, 도읍이나 도시·마을의 터를 잡는 양기(陽基) 풍수로 구분하는데, 음택이나 양택이나 양기나 보는 원리들은 모두 같다. 단지 지세가 넓고 좁음의 차이일 뿐인데, 산에 에워싸여서 에너지장이 형성된 곳이 작으면 음택이 되고, 크면 마을이 형성되고, 아주 크면 도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에너지장의 바깥쪽에 음택이나 양택이 들어서면 여러 가지 폐해가 생기기 때문에 사람은 반드시 에너지장의 안쪽에 살아야 한다. 마을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건축물을 지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벌판 한가운데 건물을 짓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벌판은 생산의 장소이며 활동의 공간이 돼야 하고, 집은 산을 등지고 열린 벌판을 바라보는 위치에 지어져야 휴식과 화목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곳에 마을이 만들어지면 대대손손 편안하고 좋은 인물이 배출된다. 하지만 요즘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는 대규모 개발로 평지를 만들고 아파트를 지어 마을의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아파트나 다가구 건물의 경우 위치, 지형, 지세, 방위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록 지형이나 지세가 달라졌다고 해도, 풍수를 보는 눈이 있으면 애초의 지형과 지세를 찾아낼 수 있다. 집을 볼 때는 집이 향한 방향도 중요한데 풍수에서는 양택의 방위를 집의 열려있는 방향으로 본다. 흔히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베란다가 있는 쪽을 집이 향한 방향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드나드는 문의 방향이 그 집의 방향이 된다. 아파트의 베란다가 남향이라고 해서 남향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이는 건설업자들이 햇볕이 많이 드는 쪽을 기준으로 베란다를 만들고 이를 방향의 기준으로 정한 것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고를 때 방향을 많이 따진다. 하지만 방위보다 중요한 것은 지형이다. 방위는 산세지형에 따라 정하는 것이지, 음양오행이나 햇볕을 고려해 남향만을 고집하는 것은 큰 실수다. 우리나라 국토의 특성상 지형에서 오는 에너지의 양이 방위에서 오는 에너지의 양보다 몇 배나 강하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 (http://cafe.naver.com/mirpoongsu), 책 '좌청룡 우백호'(조광 지음, 도서출판 아침 펴냄)

2014-10-20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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