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공동체 이야기

 

[마을;공동체 이야기] 열 번째 ┃에필로그

교육·경제·생활문화예술 3개분야 8개 공동체 가능성 엿봐자생위한 강한의지 중요 “정부 지원에 길들여지지 말라” 경고피한방울 안섞인 타인들 강요보다 ‘느슨한 연대’로 접근해야사소함이 가져온 무서운 변화 “다같이 잘먹고 잘살자” 여운 남겨마을이 사라졌다. 이웃사촌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개인주의가 현대인의 상징인양 자랑스레 여겨졌지만, 우리 마음속 어딘가는 공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을 공동체이야기’는 그 공허함을 위로받고자 시작됐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당연한 시대에 다같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스스로 용기를 낸 이들의 이야기였다.지난 3개월 간 경기도 내 8곳의 마을 공동체를 만났다. 교육과 경제, 생활문화예술 등 크게 3가지 분야로 이동하면서 마을과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지면을 통해 대부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마을을 소개했지만, 취재 중 만난 모든 공동체가 좋은 결과를 얻은 건 아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례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로애락 속에서 우리는 마을 공동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꼭 맞다. ‘문탁네트워크’와 ‘무지개교육마을’, ‘행복한 칠보산마을공동체’는 시대의 철학과 교육에 대한 깊은 갈증에서 비롯됐다. 밥벌이를 고민하던 주민끼리 힘을 모아 탄생한 곳이 ‘잔다리마을’과 남양주 ‘아낙네’다. ‘혼밥’이 일상이 된 젊은이들과 세월의 흐름에 황폐화 돼버린 마을주민들의 고독은 한양대 자토펙토와 이웃문화생활협동조합을 탄생시켰다. 목적과 이유는 다르지만, 이들 공동체가 지금까지 무사히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 ‘자생(自生)’을 향한 강한 의지와 느슨한 연대다. 이들의 시작점을 살펴보면, 지자체와 정부의 도움 없이 주민들의 힘만으로 시작한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상당수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거나, 성장의 과정에 물밑 지원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외부의 물질적 지원은 마을 공동체가 제 모습을 갖추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공동체들은 하나같이 ‘정부 지원에 길들여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한 포천 교동마을 구제 프로젝트를 지휘한 ‘문화살롱공’의 박이창식 대표도 “정부가 주는 달콤한 열매에 맛을 들이면 외부의 도움 없이는 마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필요 이상의 외부 지원에 대해 마을 주민 스스로 냉정해져야 하고 자생하려는 의지가 강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담그는 마을 기업을 운영하는 남양주 ‘아낙네’의 주민들도 “정부 지원을 받던 시기보다 우리가 투자한 농산물과 자본으로 사업을 하는 지금의 만족감이 훨씬 높다”고 이야기했고, 행복한 칠보산마을공동체는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았던 한가위축제 운영비를 몇해 전부터 우리 스스로 끊어버렸다. 대신 우리끼리 십시일반 모아 축제를 진행하니 즐거움은 두배가 됐다”고 털어놨다.느슨한 연대는 의외의 결론일 것이다. 피 한방울 안 섞인 ‘남’과 함께 길을 가야 하는데, 단단해도 모자랄 판에 느슨함이라니. 여기서 되짚어봐야 할 지점은 공동체 구성원들은 ‘피가 안 섞인’ 타인들의 연대라는 것이다. 문탁네트워크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보면, “상황에 따라 필요한 규칙을 발명한다. 대의제를 차용하지도, 매뉴얼을 정하지도 않은 채 현장에서 논의하고 방법을 찾는다”고 말하며 공동체 규칙의 성질이 단단하지 않아 끈 같으면서, 연기 같다고도 표현했다. 10여개 공동체가 연합된 칠보산마을공동체도 “절대 함께 하길 강요하거나 억지로 상황에 맞추려고 하진 않는다. 공동체로 뭉쳐 있다지만, 사실 가족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공동체 스스로 뭉칠 필요가 있다고 느끼면 자연스레 하나로 모이는데, 15년간 함께 한 주민 간 이어져 온 정서적 공감대가 그 원동력이다”고 말했다.이들과의 만남을 돌이켜 보면 사소함이 가져온 무서운 변화들에 새삼 놀라게 된다. 비슷한 목마름을 가진 이들이 모여 미약하게 공동체를 창조했지만, 이들 삶의 변화가 주변의 삶으로 번져가는 양상은 심히 창대했다. 공부와 게임밖에 모르던 아이가 지나가는 마을 어른에게 자연스레 인사하는 작은 변화가 어른들의 삶에 주는 변화를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소심한 관심들이 모여 이들 공동체를 배우고 따라 하려는 실천 속에 더 많은 마을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진짜 사람 사는 ‘내’가 퍼져나가고 있다. 아주 단순하지만 진리처럼 이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 욕심 내지 말고,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글=공지영기자

2015-03-31 공지영

[마을;공동체 이야기] 아홉 번째┃의정부 ‘문화살롱공’

2008년 박이창식 대표 중심 ‘카페 공간’서 작품·전시활동 시작 사진·영상 등 활용 수몰위기지역 주민간 가교로 사회적 역할‘금이 간 유리그릇 붙이는 접착제’ 척박한 땅 문화예술 씨뿌려유리로 만든 그릇은 항상 깨질까 조심스럽다. 제 아무리 내구성 강하게 만들었다 자부해도, 유리가 가진 소재의 성질 자체가 깨지게 마련이다. 사람을 담는 공동체도 유리그릇과 다를 게 없다. 누구보다 단단하게 다져진 세월을 자랑해도, 인간관계 속성상 아주 작은 균열에도 흔들리고 금이 가는 게 공동체다. 수십 년을 동고동락하고, 수백 년 조상 대대로 같은 성을 가진 가족끼리 모여 사는 마을도 외부의 충격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미 금이 가버린 마을 공동체로 뛰어들어 균열을 메우고 상처를 보듬으려 노력했던 예술가 공동체의 이야기다.의정부에 ‘공간’이란 이름의 작은 카페가 있다. 이곳은 뜻 맞는 예술가들의 공동체 ‘문화살롱공’의 소통창구다. 문화살롱공 박이창식 대표는 2008년 이 곳 지하실에 작품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2003년부터 ‘스폰치’라는 이름으로 그룹 예술활동을 했는데, 주로 사회적 고민들이 깃든 현장에 개입해 의미를 던질 수 있는 예술적 행위를 해왔어요. 그 와중에 작가들이 함께 모여 작품을 고민하고 때로는 전시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다 싶더라구요.”그렇게 문화살롱공은 ‘작가중심의 공간’으로 출발했다. 1년이 지난 2009년, 지하뿐 아니라 1층까지 작품 공간으로 사용키로 하고 올라와 보니 마을이 보였다. “마치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온 느낌이었죠. 지하에 있던 시간은 그저 우리 작품에만 집중했던 시간이었는데, 1층에 올라오니 전면 창을 통해 지나가는 주민들이 보이고 마을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무언가 마을에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경기북부를 안고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그때부터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경기 북부 일부 지역에 우연히 수몰지가 형성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2000년부터 추진된 한탄강 홍수조절용댐 건설로, 연천군 고문리와 포천 교동마을이 수몰 위기에 처해 있었다.문화살롱공은 연천 고문리로 찾아갔다. 오랜 시간 한 마을에서 형님, 아우로 살아왔던 그들이라 했다. 그러나 이미 댐 건설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갈려 주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함께 정을 나누며 살아온 마을 공동체는 붕괴 직전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문화예술이 균열이 시작된 공동체를 붙이는 접착제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2009년 9월 ‘재인 폭포상회’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언론을 통해 서로 갈등만 부추기는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 주민들도, 수자원공사도 모두 예민해진 상태였어요. 우리는 갈등을 봉합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려는 것이니까 최대한 객관성을 가지고 모두의 이야기를 담기로 했죠.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수자원공사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아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수몰되면 사라져버리는 마을의 역사도 담아냈어요. 그렇게 속 깊은 이야기를 보자 ‘형님한테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아우가 이런 생각이었구나’ 반응이 왔죠. 완전하진 않았지만, 주민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오해도 조금씩 풀었어요.”연천의 프로젝트가 무르익어갈 무렵, 댐이 건설되는 상류에 더 크게 수몰되는 마을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포천 관인면의 교동마을이다. 이 마을은 이씨 집성촌으로, 한 집 건너 피로 얽힌 친척들이 모인 곳이다. 하지만 갈등은 이웃사촌이었던 연천보다 정도가 심했다. 각자의 입장을 들려주는 정도로는 풀릴 것 같지 않았다.수몰되는 땅만큼 무너져버린 주민들의 마음을 모을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때 슬래브지붕 사이로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전부 현대식으로 집을 개조했지만, 유일하게 50년이 넘게 옛날 집을 고수하는 이수하·김영자 부부의 집이었다. 게다가 마을의 ‘어르신’이었던 이들 부부는 공동체의 반목이 못마땅하던 차였다. 작가들은 이들 부부에게 집을 해체하고 이주하는 곳에 복원해 마을박물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루가 다르게 갈등만 늘어가는 이 마을에 가장 오래도록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집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이를 구심점 삼아 서로의 상처를 보듬자고 제안했죠. 다행히 어르신은 허락해주셨고, 이 집이 서 있는 땅의 이름인 도롱뇽길을 따 ‘도롱이집 이주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도롱이집 이주프로젝트는 2010년 시작해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문화살롱공의 작가뿐 아니라 이들의 취지에 공감한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도롱이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한옥 전문가와 건축가들이 힘을 보탰고, 마을 동식물의 학술적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식물 전문가들이 나서 식생조사를 실시했다. 사진작가와 영화감독들은 삶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하지만 문화살롱공의 노력이 모두 성공하진 못했다. 아직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새롭게 이주하는 곳에 친환경 생태마을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처음엔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죠.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나 지자체에서 수십억원의 지원금을 준다, 체험형 마을을 만들어라 등 외부의 바람이 불어오자 하나 둘 욕심에 끌려 포기했죠.”박 대표는 그때를 회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잖아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죠. 몇 년을 들락날락하며 친부모만큼 정이 든 도롱이집 노부부와 이야기하던 중 아버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이주터에) 땅 분양받고 집 지어야 되는 데, 정부 보상금은 턱도 없고 아들놈한테 얹혀 살아야 하나. 그냥 나무로 조그맣게 집이나 지어야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선뜻 ‘아버님, 저희랑 같이 집 지어요’라고 약속해버렸어요.”이주터에 도롱이집 노부부를 위한 집을 지었다. 볏짚을 활용했고, 황토를 깔았다. 친환경 자재만을 사용해 문화살롱공의 작가들이 6개월을 이른바 ‘막노동’ 했다.집의 첫번째 기둥이 세워지는 날, 얼큰하게 취해 기둥을 바라보던 이수하씨는 박 대표의 손을 잡고 “우리가 갈 데가 없어 막막한데, 수 십 년을 같이 산 마을 놈들과 자식새끼들도 돈에 눈이 멀어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데…. 고맙네”라며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마을 박물관으로 만들겠다던 도롱이집은 아직 복원하지 못한 채 자재와 설계도면만 남아 있다. 수십억원을 지원하겠다, 체험마을을 만들자고 했던 정부의 약속은 온데간데 없다. 새롭게 이주한 곳에는 아직 마음의 불씨들이 남아있고 균열의 틈은 완전하게 메워지지 못했다.“공동체가 유지되려면, 본인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죠. 우리 작가들도 문화예술을 통해 이들 주민의 갈등과 상처를 보듬고 문화예술계에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픈 의지가 있었고 그래서 긴 세월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만난 마을주민들도 마찬가지죠. 수 십 년 이어져 온 마을 공동체지만, 누군가 다 해주길 기다리고 외부의 지원에만 익숙해져 버린다면 공동체는 무너지기 쉬워요.”문화살롱공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경기북부의 환경, 먹거리, 농업문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 여전히 교동마을의 역사 기록하기도 계속되고 있다.좀처럼 예술이 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북부의 메마른 땅에도 미약하게나마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예술가의 집단이 지역에 눈을 돌리고, 지역 공동체를 위해 줄기를 뻗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죠.” 비록 금이 간 유리그릇이지만, 공동체가 의지를 갖고 소중히 사용한다면 부서져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글=공지영기자·사진=유은총기자·문화살롱공 제공▲ 문화살롱공 박이창식 대표.▲ 그래픽/박성현기자·아이클릭아트▲ 포천 도롱이집 이주프로젝트 ‘마을문화기록관’.▲ 이수하·김영자 부부의 새집 집들이 행사 모습.▲ 이수하·김영자 부부의 친환경집 짓는 작가들.▲ 마을문화기록관에서 주민들의 사진을 유심히 지켜보는 관람객.

2015-03-17 공지영

[마을;공동체 이야기] 여덟 번째┃수원 ‘행복한 칠보산마을 공동체’

어린이집·대안학교 설립 등공동육아 목적으로 첫 발부모들도 아이와 함께 성장초창기 교육모델 벗어나사회적 공동체 하나 둘 생겨대보름 행사 등으로 결속마을신문 통해 주민들과 공유지역문제도 함께 해법 모색삶의 가치 ‘개인 → 공공’ 변화지난 1일 오후 4시 수원시 호매실동 자목마을에 펼쳐진 논. 달력은 봄을 알렸지만 여전히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의미의 ‘정월대보름 축제’를 위해 삼삼오오 모인 주민들이 볏짚을 쌓고 쥐불놀이를 하기위해 깡통에 구멍을 뚫는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주민들과 아이들은 꽤 익숙한 듯했다. 제법 큰 아이들이 모여 앉아 볏짚을 꼬아 줄을 만들자 꼬마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지 위에 소원을 담은 그림을 그려 줄에 매달았다. 아이와 함께 축제에 나온 한규성 (44)씨의 말이 인상 깊다. “마을 사람들 얼굴 보러 나왔죠. 이 많은 사람들이 날씨도 추운데, 고생스럽게 아이까지 데리고 이 곳에 나온 건 서로 보고 싶으니까 나온 거예요.” 겨울 끝자락 바람이 매서웠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이미 봄이 번지고 있었다.뿌리가 깊은 나무는 강한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위기가 지나고 나면, 깊은 뿌리를 토대로 여러 갈래 줄기를 뻗고 열매도 맺을 것이다.이날 자목마을에서 만난 ‘행복한 칠보산마을 공동체(이하 칠보산 마을)’는 15년을 이어 온 뿌리 깊은 공동체다. 보통 마을공동체의 시작이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에서 비롯되기 쉬운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소수 주민들이 자발적 의지로 공동체를 출발시켰다. 어떻게 15년을 이어왔을까. 호기심보다는 의구심이 앞섰다.칠보산 마을의 마을신문을 만들고 있는 최창규 (45)씨의 답이 꽤 명쾌하다. “15년을 쌓아온 인맥이 원동력이죠. 아이들 교육문제로 시작했지만,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만큼 부모들도 성장했어요. 그 성장의 밑거름은 주민들이 끈끈하게 엮어 온 신뢰와 정이에요.”현재 칠보산 마을 속 공동체는 10여 개에 이른다. 칠보산 마을의 시초가 된 공동 육아 협동조합 ‘사이좋은 어린이집’과 ‘사이좋은 방과후’, 대안학교인 ‘자유학교’ 등 교육공동체를 비롯해 도토리교실, 한살림지역모임, 청소년 공부방, 마을신문, 꽃밥상, 마을연구소 등 문화공동체들이 연합돼 있다. 또 이 곳에서 줄기를 뻗은 칠보농악전수회, 술빚기 모임 등 동아리 성격의 소모임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1990년대 중후반부터 공동육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여기저기서 부모들끼리 공동육아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2000년 칠보산 마을에서도 공동육아 공동체를 시작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죠. 이후 2001년에 ‘사이좋은 어린이집’이 문을 열고 이 곳에서 함께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성장하잖아요. 어린이집 만으론 안 되겠다, 같이 또 다른 걸 만들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 다음 해인 2002년에는 ‘사이좋은 방과후’를, 2005년에는 아예 대안학교인 ‘자유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함께 교육했어요.”칠보산 마을은 ‘다 같이 아이를 키우자’는 부모들의 의지에서 비롯됐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 부모들이 직접 교사를 선발하고, 교육과정을 의논했다. 우리의 전통문화도 알려주고 싶었고, 자연을 벗 삼아 자유롭게 뛰노는 방법도 가르치고 싶었다.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사는 방법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그 방법을 논의하다 보니 부모들이 공동체의 삶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가 한 뼘씩 성장할수록 부모들도 건강한 삶의 가치를 쌓아나갔다.“어느 정도 교육 공동체들이 기틀을 잡고, 아이들도 중고등학생이 되자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게 익숙해진 초창기 부모들이 교육을 벗어나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됐어요. 2008년 정도에 초창기 부모들이 모여 ‘OB모임’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교육공동체의 틀을 벗어나 사회적 공동체들이 하나 둘 생겨나는 계기가 됐죠.”먹거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한살림 지역모임을 결성했고, 자유학교 교사들이 도토리 학교를 만들어 생태교육을 위한 작업장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공동체가 늘어나자 마을의 화두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면 하나로 뭉쳐볼까’로 떠올랐다. “전통문화 교육을 위해 공동체 초창기부터 매년 ‘한가위’와 ‘정월대보름’ 행사를 해왔어요. 뭉치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이 두 행사가 떠올랐죠. 그럼 다 같이 행사를 준비하고 즐겨보자. 각각의 공동체 대표들과 실무진을 선발해 해마다 4~5차례씩 만나면서 함께 하는 행사를 어떻게 잘 해볼까 논의하기 시작했어요.”단순히 2번의 축제를 같이하는 것만으로 의미는 끝나지 않았다. 축제를 함께 준비하니 ‘다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강해졌고 공동체 구성원들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까지 의식의 범위가 넓어졌다. 한가위 행사에 일반 주민들을 초대하고, 마을신문을 창간해 마을 이야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일반주민을 대상으로 ‘주민기자학교’를 열어 참여의 기회도 확대했다.공동체로 묶인 주민뿐 아니라, 일반 주민까지 칠보산 자락 밑 ‘공통의 마을정신’이 형성됐다. 우리끼리 잘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는 데 앞장섰다.마을신문 편집장인 이계순(41·여)씨는 공동체 활동을 통해 삶의 가치가 ‘개인’에서 ‘공공’으로 넓어진 경험을 소개했다. “아이를 자유학교에 보내고 싶어 이 곳에 왔어요. 마을신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자유학교 학부모들과만 교류했겠죠. 마을신문을 편집하면서 우리 마을에 대해 더 잘 알게 됐고 마을의 당면과제를 고민하게 됐어요. 한창 서수원이 개발되면서 우리 마을은 택지개발로 들썩였고, 대형마트를 앞세워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자 칠보상인들이 구도심, 구상권으로 전락해 어려움에 처했어요. 마을신문이 이 문제를 수면 위에 올리자, 공동체들이 함께 머리를 모았고 구상권에 주민문화공간을 만들자는 대책이 나왔죠.”그 대책으로 구상권에 ‘칠보문화놀이터’를 만들었다. 구상권에 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주민들도 계속 구상권을 찾을 것이다. “칠보상인회 대책협의회 사무실을 놀이터로 만들기로 하고 수원시 마을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2천만원을 지원받았어요. 하지만 리모델링하는데 총 4천만원이 필요했어요. 모자라는 2천만원을 어떻게 해야하나 논의했는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1천만원을 기부했고 펀드를 모집해 또 1천만원을 모아 비용을 충당했죠. 10년을 넘게 쌓아온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깁니다.” 칠보문화놀이터는 365일, 24시간 주민 공간이 돼 다양한 동아리 활동부터 모임장소, 강의실로 활용되고 지난해부터는 구도심을 연구하는 ‘마을연구소’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칠보산 마을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삶이 단순히 이어가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건강한 기운을 얻었다. 자유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이 곳으로 이사 왔다는 공동체 2년차 한 학부모는 이날 대보름 축제에 처음 참여했다. 주민들을 잘 모르는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여러 명이 다가가 말을 건넨다. 아마 다음 해, 그는 자유학교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 참여해 1년 전 자신처럼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입생’에게 말을 걸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이 들었다./글=공지영기자·사진=하태황기자·칠보산 마을 제공▲ 지난 1일 ‘정월대보름’ 축제를 즐기기 위해 수원시 호매실동 자목마을에 모인 ‘칠보산 마을’ 주민들. 아이들이 마을주민들과 함께 새해맞이 윷점을 보고, 연을 날리며, 곱게 땋은 볏짚 줄에 소원을 담은 쪽지를 걸고 있다.▲ 지난 1일 ‘정월대보름’ 축제를 즐기기 위해 수원시 호매실동 자목마을에 모인 ‘칠보산 마을’ 주민들. 아이들이 마을주민들과 함께 새해맞이 윷점을 보고, 연을 날리며, 곱게 땋은 볏짚 줄에 소원을 담은 쪽지를 걸고 있다.▲ 지난 1일 ‘정월대보름’ 축제를 즐기기 위해 수원시 호매실동 자목마을에 모인 ‘칠보산 마을’ 주민들. 아이들이 마을주민들과 함께 새해맞이 윷점을 보고, 연을 날리며, 곱게 땋은 볏짚 줄에 소원을 담은 쪽지를 걸고 있다.▲ 2010년 한가위 행사.▲ 사이좋은 방과후 자전거 여행.▲ 두꺼비 논축제 현장.

2015-03-03 공지영

[마을;공동체 이야기] 일곱 번째┃수원 ‘이웃문화협동조합’

주식회사로 첫발 시행착오… 협동조합으로 ‘판’ 바꿔 다시 시작공연·전시 원하는 소비자들 직접 예술가 끌어들이는 형태지동서 폐가 꾸며 상설공간 만들자 마을에도 활기 ‘작은 기적’도예·목공 등 주민·조합원간 공유… “문화예술 생태계 만들고 싶어”여럿이 함께 걷다 보면 걸음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걷는 모양새며 성격도 제각각이니 보폭의 차이는 당연하고, 서로 합을 맞춰 함께 걸으려면 평소보다 조금 늦게 걷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이란 구성원 개개인의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를 거쳐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보폭을 맞춰 함께 걷는 일처럼 걸어온 거리는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야 함께 걷는 이들은 행복할 수 있다.수원 지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을 공동체 ‘이웃문화협동조합(이하 이문협)’을 만났다. 이들의 좌우명은 ‘다함께 잘 놀고 잘 살자’다. 실제로 이문협은 2010년 잘 놀고 싶은 청년들이 ‘문화 프로젝트팀’을 결성해 시작한 조직이다. 서울에선 이미 ‘좀 논다는’ 사람들이 홍대, 대학로 등 이른바 핫플레이스에 모여 재밌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서울을 벗어나면 청년들이 신명나게 놀 수 있는 ‘판’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수원에서도, 특히 지동엔 버려진 집들이 많았다. 한때는 수원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노인과 값싼 방을 찾아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청년들은 이곳에 ‘문화사랑방’을 만들기로 했다.하지만 순탄치는 않았다. 다같이 놀기위해 ‘공간’을 운영했는데, 주식회사로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회사이다 보니 사장과 직원이라는 계급이 생겼고 각자 자리에서 회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이대로는 놀자고 시작한 사랑방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청년들은 판을 바꿨다. 주식회사를 버리고 사장과 직원이란 이름도 휴지통에 넣었다. 2012년 협동조합으로 형태를 바꿔 모두가 조합원이 됐다. 다함께 잘 놀고 잘 살기 위해 동등한 위치에서 다시 시작한 것.최연지(27·여)씨는 이문협 창립시기부터 함께 했다. 사는 곳도 수원이 아니고 학교도 서울에서 다녔다. 대학시절 우연히 ‘인턴’으로 이 곳에 왔다 지금은 사무국에서 조합원이자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 “2013년 4월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이문협이 탄생했어요. 기존 멤버들뿐 아니라 평소 협동조합에 관심있는 청년들이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하나 둘 모여들었죠. 다들 처음부터 ‘우리가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큰 기대를 하고 들어온 건 아니에요. 주식회사로 운영하면서 책임에서 오는 부담감에 대해 다들 많은 생각이 있었고, 서로 책임을 나누자는 생각들이 모이다보니 점점 공동체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어요.”주식회사를 버리면서 욕심도 버렸다. 그저 잘 놀고 싶었을 뿐이니 활동 가짓수와 연속성에 대한 부담도 버렸다. 청년들 스스로 다함께 놀 수 있는 판을 벌이는 일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이문협은 문화를 생산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가 아니에요. 공연이든, 전시든, 문화를 즐기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모여 만든 ‘문화향유자’들의 공동체죠. 그래서 우리가 즐기고 싶은 문화 예술가를 지동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가장 많이 하고 있어요.”‘노마드프로젝트’도 그 일환이었다. 행위예술, 음악, 미술 등 모두 다른 분야의 예술가 5명이 두달 동안 지동과 창룡문 일대를 돌아다니며 예술활동을 펼쳤다. 2013년 9월에는 판을 키웠다. 아예 ‘오가닉아트페스티벌(이하 오아페)’이라는 축제를 만들었다. 미술, 음악과 같은 정통 예술분야 뿐 아니라 농부와 요리사, 인문학자, 활동가 등 지역의 다양한 인재들이 ‘아트’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드로잉 퍼포먼스, 알핀로제요들단, 칠보산 도토리 시민농장….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명단만 살펴봐도 제대로 놀고 싶은 청년들의 열정이 눈에 선하다.“오아페는 예술 플리마켓으로 시작했어요. 문화향유자와 생산자의 접촉점이 되는 공간인거죠. 그렇게 2013년 9월에 크게 한판을 벌이고 나니, 한달에 한번씩 상시 운영해보는 게 좋겠다는 의견들이 나왔어요. 하지만 매번 외부공간을 빌려서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아예 공간을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이문협 청년들에게 지동에 버려진 집들은 최고의 ‘판’이 되었다. 상설 오아페를 운영하기 위해 수년 전 불이 난 뒤 방치된 폐가를 선택했다. 청년들이 예쁘게 리모델링을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집주인은 흔쾌히 무상임대를 허락했다.이문협 조합원들의 정성어린 페인트칠과 지역 건축사의 재능기부로 흉물로 방치됐던 폐가는 ‘제작공간 다시’라는 간판을 걸고 재탄생했다. 이 곳에서 조합원들과 시민들은 함께 향초도 만들고, 공연도 보고, 쿠키도 굽고 있다.작은 기적. ‘다시’가 생기면서 지동도 다시 살아났다. 갑자기 동네에 쳐(?)들어와 어슬렁거리던 청년들과 지역노인들이 안면을 트자 지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동 어르신’에게 직접 듣는 ‘지동마실 가는 길’과 ‘지동마을 조사 자료집’이 책으로 출간되고 ‘지동 어르신’들의 재능기부로 이루어진 ‘옹달샘학교’도 진행됐다.“동네에 계시던 ‘자수장인’이 직접 전통자수 수업을 10개월 가까이 운영했고, 영동시장에서 커튼 가게를 하는 사장님이 직접 미싱을 가르쳤어요. 마을 르네상스 공동체 활동이죠. 또 조합원들 중에 도예, 목공, 요리 등 재능있는 분들이 직접 강사로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해요. 서로 스승과 제자로 번갈아 변신하면서 각자가 지닌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거죠.”지금 이문협의 조합원은 80여명이다. 20대 청년들도 있지만, 그들만 다가 아니다. 40대 주부도 있고 직장인들도 수두룩하다.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운동가들도 참여하고 있다. 문화를 함께 누리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지금의 조합원들도 그 마음 하나 가지고 알음알음 찾아왔다.“사무국에서 상주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3명에서 5명뿐이에요. 어차피 이사회와 총회를 통해 조합원들의 종합적인 의견과 합의를 거쳐 우리 활동이 결정되면 조합원들 스스로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세요. 진심을 가지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나누는 거죠. 가장 좋은 건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놀자 판’을 벌였을 때 선배 조합원들이 한 발 뒤로 물러나 물밑 지원과 응원을 해주시는 게 든든한 힘이 되죠.”올해는 도시텃밭프로그램도 새로 기획하고 있다. 수원시평생학습관과 연계해 상자 텃밭을 일구고 인문학 프로그램도 병행한다는 계획이다. 일년에 하나씩 새로운 놀이판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이문협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공동체이긴 해요. 무언가를 생산해서 판매하는 경제공동체도 아니고, 교육과 같이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저 생활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문화를 즐기고 즐겁게 놀고 싶은 소비자들이 모인 ‘생활문화공동체’ 정도가 맞을 듯합니다. 우리가 문화를 창조할 순 없지만 모두가 건강하게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어요. 그것 말고 큰 욕심은 없습니다. 모두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글=공지영기자·사진=이웃문화협동조합 제공▲ 예술 플리마켓으로 시작한 이문협의 ‘오가닉아트페스티벌’ 행사 모습.▲ 예술 플리마켓으로 시작한 이문협의 ‘오가닉아트페스티벌’ 행사 모습.▲ 예술 플리마켓으로 시작한 이문협의 ‘오가닉아트페스티벌’ 행사 모습.▲ ‘제작공간 다시’에서 열린 목공예 워크숍.▲ 이문협 정기총회.▲ 이문협의 사무국이 위치한 ‘핑퐁음악다방’.

2015-02-24 공지영

[마을;공동체 이야기]여섯 번째┃남양주 마을기업 ‘아낙네’

아낙네 9명 영농조합법인 설립 ‘첫 발’콩 한가마씩 투자해 된장 담그기 시작시장보다 후한 납품가 주민 작물 구매히트상품 ‘깻순 장아찌’ 등 15가지 판매전국 각지서 견학 농한기도 활기 넘쳐전통음식 체험·장독대 분양까지 확대마을 기업은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가 만든 ‘허울 좋은’ 이름일지 모른다. 기업이라면 응당 이윤 극대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효율성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하는데, 성공했다는 마을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지도, 효율성을 높은 가치에 두지도 않는다. 기업이라지만 영리보다는 마을 공동체 공존의 터전이라는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남양주 조안면에 꽤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마을기업 ‘아낙네’도 마찬가지다. ‘아낙네’ 영농조합법인은 고추장과 된장, 장아찌를 담그는 마을 기업이다. 마을에서 나는 작물만 고집하고, 시어머니한테 배운 재래식 손맛을 원칙으로 삼았다.아낙네 창립때부터 함께 해 온 홍순복(54·여)씨의 말이 재밌다. “행정자치부에서 우수기업 선정하는데, 저희도 선정 대상자가 됐더라구요. 그런데 최종적으론 떨어졌어요. 일자리 창출 부분에서 점수가 낮았대요. 우리끼리는 웃었죠. 일거리 없는 겨울을 잘 지내보려는 마음들이 맞아서 시작했고, 우리 스스로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동체를 결성했으니까요.” 더 많이 벌려면, 규모를 키워야 하고 불필요한 비용들을 없애야 하지만, 아낙네는 ‘지금 이 정도’가 좋단다.시작은 미미했다. 농촌 아낙네들은 겨울이 되면, 거리로 나섰다. 농번기에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정신없이 지내지만, 흔한 비닐하우스도 없어 겨울엔 손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식당, 공장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찾아 몇 푼 안 되는 돈을 손에 쥐면서, 아낙네들은 숱한 겨울을 보냈다.그러던 중 2009년, 정부가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을 시작했다. 남양주시 조안면이 정부 지원 사업의 대상지로 선정됐고, 차량 드나들기도 어려웠던 거친 흙길에 아스팔트가 깔렸다. 도로 형편이 나아지자 마을 모양새도 점점 좋아졌다. 깜깜했던 시골 마을이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낙네들도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야릇한 도전의식이 피어났다.그러고 보니, 시골의 촌부로 산다는 공통점 때문에, 다들 고추장·된장 정도는 담글 줄 아는 손맛을 갖고 있었고, 틈틈이 도시에 사는 지인들에게 고추장, 된장을 담가주는 ‘부업’도 하고 있었다.“이거다 싶었어요. 혼자 집에서 하던 일을 우리, 다같이 해보자며 한마음이 됐어요. 공평하게 자기가 농사지은 콩 1가마씩을 출자했고, 9가마가 모이자 된장을 담근거죠.” 그렇게 남양주 조안면의 마을 경제 공동체, ‘아낙네’의 첫 상품이 세상에 나왔다.아낙네는 조안면에 사는 젊은 아낙네 9명이 모여 시작한 경제 공동체다. 콩 1가마씩 출자금 삼아 투자해 아낙네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했고,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마을 기업에 도전했다. 지난해, 지자체의 지도를 받는 단계를 졸업(?)하고, 지금은 자립형 마을기업으로 자생하고 있다.성공의 비결은 단순하다. 현재 아낙네 총무인 김현옥(48·여)씨는 “우리끼리 약속한 원칙이 있어요. ‘우리 마을에서 나는 작물만 사용하고 우리 어머니께 배운 손맛으로 전통음식을 만들자.’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 가장 많이 나는 ‘깻순’을 사용해 장아찌를 담갔고, 콩 농사 지은 걸로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었어요.” 단순하지만 가치있는 아낙네의 원칙이다.실제로 아낙네는 마을에서 나는 농작물만 고집하고 있다. 아낙네 회원들과 동네 주민들이 봄부터 농사지은 작물을 시장에 납품하는 값보다 더 값을 쳐 구매한다. 주민들이 땀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가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한다는 믿음에서다.“어차피 함께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잖아요. 다들 고생해서 농사짓는 모습을 서로서로 봐왔는데, 우리라도 값을 제대로 쳐줘야죠. 또 우리 마을 농작물에 대한 자부심도 지켜야 하구요.”마을에서 나는 작물을 모두 소화하다 보니, 아낙네의 대표 상품은 15가지에 이른다. 오늘의 아낙네를 만든 1등 공신 고추장과 된장은 보리고추장부터 막장까지 종류별로 구비돼 있고, 히트상품인 깻순 장아찌를 비롯해 머위·취·뽕잎·오가피·질경이·민들레 등 각종 장아찌가 불티나게 판매되고 있다. 여기에 마을 야산에서 채취한 야생 꽃차들과 재래식으로 만든 청국장까지 더하면 아낙네 상품으로만 한 상을 차려도 상이 모자랄 지경이다.“우리 제품은 자연에서 나는 재료를 재래식 방법으로 만드는 데다, 우리 마을은 원래 물이 좋고, 햇볕도 좋아 장을 담그면 맛이 일품이에요. 장아찌는 식당에 납품할 만큼 인기가 좋아요. 보통 장아찌를 만들어 두면 다음 봄이 올 때까지는 판매해야 하는데 벌써 동이 나 버렸어요.”아낙네로 인한 마을의 변화도 의미있다. 한가하기만 했던 마을의 겨울 풍경도 달라졌다. 사계절 내내 마을엔 손님들이 찾아왔다. 전국 각지에서 아낙네의 경영비법을 전수받으러 견학을 오기도 하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 장 담그는 체험을 하기 위해 마을을 드나들고 있다.성공 비결은 단순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작은 사업이지만 ‘일하는 재미’ 덕에 아이디어들이 하나하나 보태지면서 상품 가짓수도 늘어났고 그만큼 일감도 늘어났다. 우리 음식 맛을 알아주는 그 맛에 직접 전통음식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체험장도 따로 만들었고, 손님들이 직접 담근 장을 장독대에 넣어두는 ‘장독대 분양’ 사업까지 실시하면서 ‘일복’이 터진 것. 그런데 일손이 줄어들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홍순복씨는 그때의 사연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9명으로 시작한 아낙네가 지금은 6명이 남아있어요. 처음에 소소하게 우리끼리 마음맞아 시작한 사업이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잘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 마음 속에 욕심이란 게 생기더라구요. 우리는 다같이 투자하고 일한 만큼 소득으로 가져가자는 원칙이 있는데 장사가 잘 되니 그게 다 ‘내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들이 생겼나봐요. 결국 몇 사람이 혼자 사업을 하겠다며 아낙네를 나갔고 그 후에도 몇 번의 조합원 교체를 거쳐 지금의 아낙네가 됐습니다.”여러차례 부침을 겪으며 마음의 상처도 컸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변하지 않는 약속 하나가 자리잡았다. ‘열심히 일한 만큼, 노동의 대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아낙네’의 약속은 더 단단해졌다.“마을기업을 시작하시려는 분들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많이 찾아오세요.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고생하며 얻은 노하우들을 아낌없이 나눠드리고 있죠. 하지만 운영해보니 가장 중요한 건 ‘팀 워크’에요. 서로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야 하고 내가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려야 돼요. 어차피 함께 살자고 시작한 사업이니까요. 아낙네도 늘 다짐하고 있습니다. 일한 만큼의 대가만 받으면 된다고 말이죠.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려고 재미있게 시작한 일이니 그 초심을 잊지 말아야죠.” /글=공지영기자 · 사진=아낙네 영농조합법인 제공▲ 경북 문경에서 열린 ‘2012 대한민국 마을기업 박람회’에 참가한 아낙네 영농조합법인.▲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아낙네 장독대 풍경.▲ 아낙네 대표 상품인 장아찌류.▲ 된장 밑재료인 메주를 만드는 모습.▲ 지난 2013년 남양주에서 열린 슬로푸드 국제대회에 참가한 아낙네. 시민들과 함께 깻순장아찌를 만드는 모습.

2015-02-10 공지영

[마을;공동체 이야기]다섯번째┃오산 ‘잔다리마을공동체’

수입콩 거부 ‘전두부’ 생산마을 어른들 투자로 일궈행안부 지원 받았지만비싼 탓 판로확보 어려움TV 전파 타자 주문 폭주정직하고 좋은 콩 생산 노력주부들 식생활 교육 등사회적 기업 살리기 앞장시민이 주인인 기업 만들고파성공한 기업의 기준은 무엇일까? 매년 매출 신기록을 달성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유능한 인력을 다수 보유한, 인재가 제발로 찾아와 창의력을 불태우며 일하는 기업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기업을 지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한 마을기업 대표 홍진이(40)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성공 후에도 성공의 비결을 지켜내는 기업이 진짜 성공한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다리마을공동체 농업법인(주) 홍진이 대표로부터 마을기업의 성공 비결을 들었다.“사정이 너무 안 좋을 때는 수입콩을 쓰자는 의견도 있었고, 전두부가 아닌 일반 두부를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어요. 문을 닫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지금의 잔다리는 없을지도 몰라요.”홍 대표가 꾸려가고 있는 잔다리마을공동체는 마을주민들이 투자해 만든 마을 기업이다. 지난 2011년 행정안전부 마을기업으로 선정되면서 설립했다. 선정되기까지 시와 도 단위로 치러진 경합을 거쳤다. 오산시에서 마을기업을 공모할 때 40여개의 업체가 몰렸다. 홍 대표는 그 당시 남편 홍성권씨와 세교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셔서 그런지, 저도 농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연히 먹거리는 우리 지역 농산물, 우리 손으로 키워낸 작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마을에서 난 재료만 사용했어요.” 마을기업 창업 아이템은 두부였다. 매일 먹는 식재료인데다, 여타의 마을기업 인기 아이템이던 고추장이나 김치보다 값도 저렴하니 판매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업’을 만들고 경영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두부를 만들려면 콩을 불려 갈아야 하잖아요. 콩 불린 물도, 두부를 만들고 남은 콩 찌꺼기도 폐기물이라 처리시설을 해야 했어요. 마을 어른들이 십시일반 투자한 돈으로는 제품 만들 설비를 갖추기도 빠듯했죠.”홍 대표는 남편과 함께 방법을 찾았다. 일반 두부와는 제조방식이 다른, 폐기물이 최소한으로 나오고 두유의 영양소를 전부 함유하고있는 전두부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콩을 불리지 않고 그대로 갈아내는 기계도 들여왔다. 최종적으로 행안부의 마을 기업에 선정돼 2년 동안 지원금 8천만원을 받았다.선정되면 판매는 쉬울 거라 생각했다. 행안부는 몰라도 오산시에서 급식소나 학교 급식 판매를 도와줄 거라는 순진한 기대를 했다. “제조 방식이나 식자재 원가 때문에 일반 두부보다 잔다리 전두부가 비싸요. 그러니 학교에도 시에도 납품할 수가 없었죠. 개인 판매 밖에 길이 없었어요. 지원금을 받고도 회사 설립과 공장 설비에 1억원이 넘는 돈이 들었지만 2013년도 매출이 5천800만원이었어요.”잔다리마을기업의 신조는 ‘지역민에게 좋은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었다. 잔다리마을이 있는 오산 세교동은 예부터 남양 홍씨 일가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그야말로 ‘내 가족에게 먹이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두부와 두유를 만들었다. 쓰이는 재료는 콩과 물, 간수가 전부다. 콩은 오산에서 나는 것을 우선 쓰고, 물량이 부족하면 인접한 화성, 안성에서 난 콩을 구했다. 두유에는 곱게 간 콩가루와 물만 들어간다. 우리가 가게에서 사 먹는 두유와는 맛과 영양이 완전히 다르다. 전두부는 일반 두부보다 훨씬 부드럽다. 콩이 본래 지닌 단맛과 고소함이 어우러져 두부만 먹어도 부족함이 없다. 재료 조달 이상으로 신경 쓰는 것은 위생이다. 장사가 되든 안되든 잔다리 공장의 청소시간은 3시간이다. 4년 동안 사용한 기계가 여전히 새것처럼 반질거릴 정도로 잘 관리했다. 그래도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다. 배달시키거나 인터넷으로 사 먹는 고객들은 이런 노력과 정성을 알지 못했다. “남매 둘을 키우는데 적자를 견디느라 지난해 2월에 40평대 집을 팔았어요. 5월에 19평짜리 월셋집으로 옮겼죠. 아들은 방이 없어 거실에서 자야 했어요. 그만둘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조금만 더 해보자며 가진 것을 쥐어 짜내며 버텼죠.” 힘든 시절을 떠올리던 홍 대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해 4월에 한 가닥 희망이 보였던 게, 서울 사립학교에 식품을 납품하는 유통업자라며 사람이 찾아왔어요. 사립학교 엄마들 입맛에 맞는 무첨가 두유를 찾고 있다며 여러 차례 와서 이런저런 자료를 요구했어요. 심하다 싶을 정도로요. 그러나 성사되면 1주일에 두유 4천 개를 주문하겠다고 했어요. 간절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착한 먹거리를 찾는 방송 프로그램 PD였어요. 그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허탈했죠. 4천 개를 못 파는 거잖아요.”잔다리마을기업의 제품을 소개한 방송은 지난해 5월 24일 전파를 탔다. 방송 다음 날은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문의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해서 다음 날 이사하는 건 보지도 못했어요. 전화는 쉼 없이 울렸고, 두유를 사려는 사람들이 무작정 돈부터 입금했어요. 3일 동안 2만~3만원씩 입금된 총액이 1억원이 넘었어요. 3일치 주문을 모두 소화하는데 2달이 걸렸고요. 배송이 늦어지자 직접 사겠다고 찾아온 사람들로 조용하던 동네가 들썩였죠.”지난해 매출은 10배가 뛰었다. 그야말로 드라마같은 성공담이다. 그러나 홍 대표는 마을기업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하지 마시라’고 조언한다. “마을 주민들과 뜻을 모아서 하든, 취지가 얼마나 좋든, 제품이 우수하다고 정부가 인정을 해주든, 마을 기업의 본질은 ‘기업’이에요. 좋은 걸 만들어서 잘 팔아야 운영이 되죠. 2년 동안 지원금 8천만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지원받는 거 없어요.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열심히 팔았다고 자부하지만, TV에 소개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죠. 그만큼 영세한 마을기업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잔다리마을이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그러나 설립 이후 마을 사람들은 정직하게 좋은 콩을 생산해 냈고, 홍 대표는 지역에서 주부들을 대상으로 식생활 교육을 벌이며 기업의 취지를 살리려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사회적 기업 살리는 방법을 알리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지난해 말에 도지사가 참여하는 토크쇼에 편지를 써서 찾아갔어요.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할 기회가 주어지면 발언을 하고, 안되면 편지라도 전달하려고요. 줄곧 손을 들고 있었더니 마지막 질문자로 지목됐죠. 도지사님께 사회적 기업이 만든 건강한 식재료를 영유아 보육시설에도 납품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경기도는 학교 급식에 친환경 식재료를 사용하느라 추가로 드는 비용을 보조해 주는데, 영유아 보육시설은 그게 안돼요. 보육시설에는 영세기업도 직접 영업할 수 있어 도움이 되거든요. 그 때는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해결이 안 돼서 자주 도청에 전화해 독촉하고 있죠.”홍 대표는 마을기업, 좋은 마을 만들기에 쓰이는 정부의 돈을 경계한다. “받아서 써보니 돈을 받은 만큼 행정적 업무가 생겨요. 돈 때문에 끌려다니게 된다면 안 받는 게 나을 수도 있죠. 그리고 잘못 쓰인 돈은 오히려 기업에 독이 돼요. 자력으로 운영할 힘이 없다면 버려지는 돈이나 다름없죠.” 잔다리마을의 꿈은 처음 설립된 때나, 눈물나게 힘들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시민이 주인인 기업을 만들고 싶어요. 잔다리 협동조합을 구성하고, 식생활 교육팀 엄마들이 모두 인적자원인데, 이들에게 일자리도 만들어주며 건강한 우리 마을을 만드는 일을 지금부터 해나갈 것입니다.”/글=민정주기자·사진=김종택기자 ·잔다리마을▲ 잔다리마을공동체 농업법인(주) 홍진이 대표.

2015-02-03 민정주

[마을;공동체 이야기]네번째┃안산 대학동 '자토팩토리'

한양대 에리카캠 교수와 학생인근 마을 정비사업으로 첫발안산시 지원센터 뒤이어 개소이후 학생들 마을동아리 구성쓰레기 무단투기 차단 캠페인벽화그리기·집밥 프로젝트도시행착오 끝 어엿한 공동체로방학이라 한적한 대학 캠퍼스의 한 교수실에 교수와 학생들이 둘러앉았다. 이들은 안산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인근 마을에서 벌어진 지난 9년간의 변화에 대해 들려주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교수가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학생들이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변화는 안산 선부동에서부터 시작됐다. 2006년 어느날 갑자기 YMCA활동가들이 김용승 교수(한양대 건축학과)를 찾아오면서 부터다.YMCA활동가들은 마을 정비사업을 하고자 했으나 구체적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한양대 캠퍼스가 있었고, 교수들은 방법을 알겠거니 생각하고 무작정 김교수를 찾아왔다. "인상 좋아보여서 거절은 안하겠다 싶어 찾아왔다더군요. 대학원 연구생 서너명과 함께 사동에 있는 어린이집 주변에 시범삼아 정원만들기를 진행했어요. 정원이라지만 거창한 건 아니고 녹색지대가 없는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 약간의 채색을 한 셈이죠."워밍업을 끝낸 팀은 지원금을 받아 본격적인 정비 활동을 벌였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선부동일대 주택밀집지역에 15개의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주민들과 손잡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 작업은 주민들과 상관없이 진행해도 됐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마을 정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마을에서 매일 생활하는 주민들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걸 배우게 됐죠." 다가구주택 사잇공간과 앞·뒤 공간, 주차장 등의 공간을 정비하려면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했다. "귀찮아 하시고요,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하시고, 혹시 집이 상할까봐 걱정하시더라고요. 이런 일을 하겠다던 사람이 그동안 없었고,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진행하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안하겠다고 손사래 치던 주민들이 산뜻해진 동네를 보고 동참했다. 변화를 이끌어낸 의미있는 첫걸음이었다.다음 걸음은 안산시에서 이어받았다. 2008년 '좋은마을만들기지원센터'를 만들었다. 전국 최초로 문을 연 마을지원센터다.센터가 생기고 난 이후의 가장 큰 변화는 마을의 하드웨어를 바꾸는 것 못지않게 소프트웨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주민의식을 바꾸기 위해 동네 반상회 모임, 아파트 단지내 모임, 주민자취위원회 등 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홍보를 하고 프로젝트를 공모했다. 다양한 지원서가 센터에 도착했다. 집앞 작은 습지에 생태학습공간을 만든다든지, 옛 우물터를 복원해 마을빨래터로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과 팀을 꾸렸다. 교수와 학생, 주민 등 15명 안팎으로 구성된 4~5팀이 주말마다 현장답사를 하고, 학교에 모여 답사 결과를 분석하고 디자인을 계획했다. 이른바 '마을디자인대학'이다. 장소는 한양대가 제공했고, 교수들은 자문역할을 담당했다. 주민들은 열성적으로 자기마을의 변화를 주도했다. 4~5주간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이수증도 수여했다.학생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몇몇 학생들이 모여 동아리를 구성했다. 이름하여 마을동아리 '자토팩토리(자취토끼팩토리-자취토끼들의 대학동 문화공장)'다. 한양대 에리카켐퍼스 앞 자취촌 일대인 '대학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2012년 처음 동아리가 만들어졌을 때는 건축과 학생들이 중심이 됐지만, 지금은 다양한 학과의 학생이 참여하고 있다. 김민지(건축학과 4학년)씨는 '자취생도 주민이다'라는 자토팩토리의 모토를 밝히며 동아리의 활동내용을 소개했다. "마을만들기 활동을 지켜보면서 비록 자취생활이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이 도시가 그냥 스쳐지나는 곳이 아니라 나름의 고향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생들끼리의 교내 동아리가 아닌, 마을주민들과 함께 하는 활동을 구상했죠."그들이 처음 진행한 프로젝트는 '천개의 풍선, 천개의 물음표'다. 학생들 스스로 주민의식이 없어 거리에 쓰레기를 마구 내다버린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물음표가 쓰인 풍선을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 매달았다. 주민과 학생들은 그들의 정체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으며, 쓰레기 무단투기에 더욱 조심하게(?)됐다. 2013년부터는 '벽화그리기'를 시작했다. 다세대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선 자취촌 담벼락에 자토팩토리의 캐릭터 토끼를 그려넣었다. 갈라진 틈새가 무늬처럼 번진 회색빛 담벼락에 주민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토끼 캐릭터를 중심으로 대학동의 이야기가 담긴 도안을 만들었어요. 첫 해에 14개의 벽면에 30명의 회원이 작업했는데 예상보다 계속 늦어졌어요. 기획하고 실행하는데 3개월, 벽화를 실제로 그리는 데 두 달, 작업이 끝날 때 쯤엔 겨울이 돼있었죠." 오래걸린 대신 그들은 좀 더 깊이 있는 것을 얻었다. 수 개월동안 대학동 사람들로서의 주민의식과 함께 한다는 즐거움, 벽에 그려진 그림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변화에 이들은 감동했다.최근에는 '집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혼밥(혼자 밥 먹음)하는 이들과 홈(Home)밥을 먹는다는 취지다. 회의를 통해 테마를 정하고, 테마별로 초청 게스트가 포함된 소규모의 인원을 모집한다. 이들이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먹으면서 사람사는 맛을 느낀다.지난 해 입학한 박소연(일어일문학과)씨는 "이제 대학동이 우리동네 같다"며 지난 1년간의 소회를 전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교내 모든 행사가 취소됐어요. 낯선 동네인데 엄청난 사건까지 겪으니 정말 우울했죠. 안그래도 범죄가 많은 동네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부모님도 걱정이 많으셨고요. 그런데 벽화그리기, 집밥 같은 활동을 하면서 애착이 많이 생겼어요. 마주치면 인사하는 주민들도 생기고, 학생들 안전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도 계셔서 이제 우리 동네라는 느낌이 들어요."자토팩토리 학생들은 마을지원센터 공모를 통해 활동 지원금을 받고있다. 어엿한 주민공동체가 된 것이다. 올해는 학생주민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주민간의 문화사업도 기획하고 있다. 다같이 모여서 영화를 보는 상영회를 열고, 주변 상권과 함께하는 축제도 기획해 볼 생각이다.이들이 처음부터 대학동에 가장 적합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척척 실행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노라고 거듭 강조하는 걸 보니 고생을 깨나 한 모양이다. 그래도 이들에게 자토팩토리는 매우 적합한 공간이다.마을만들기에 적극적인 안산시와 마을센터가 있고 이에 호응하는 주민들, 그리고 그들을 든든히 지원하는 교수들이 있다. 김교수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학생들이 스스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고 주민들과 동화돼가는 모습은 정말 보기좋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은 좋은 일에 참여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전문지식을 배움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것을 보며 사회적 활동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주변의 지원군들을 잘 활용하면 더 좋을 거예요. 센터도 그렇고, 교수들에게도 상의하며 더 좋은 방법을 찾아가길 바랍니다."전문가로서 마을만들기 사업에 대한 견해도 내보였다. "시와의 협력을 통해야 가능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안산시가 마을만들기사업에 적극적이라는 것이 다행이지요. 그러나 불편한 점도 물론 있습니다. 마을만들기 관련 사업을 진행하려면 도시과·건축과 등 여러 부서가 얽히게 마련인데, 이들 업무를 통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좋겠죠. 공무원들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도와주면 좋겠고요."글=민정주·유은총기자 사진=임열수기자·자토팩토리▲ 김용승 교수가 좋은 마을을 만들기위해 학교와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5-01-27 민정주·유은총

[마을;공동체 이야기]세번째┃무지개교육마을

초·중등 대안학교 운영과천지역 교육공동체30명 모여 10년간 성장장애·비장애 경계없고의·식·주 주제로 공부부모도 교육받으며 변화저소득층 돕는 봉사 등지역민과의 연대도 중시각종 사업·활동도 활발대안학교 성공위한 조건자발성·리더 양성 손꼽아"사업 아닌 사람에 투자를"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는 언제나 긴장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예사로 튀어나오고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그런데 손수민(15)양과의 대화를 마친 후에는 청량감이 느껴져 미소가 절로 나왔다. 참 반듯하면서도 말랑한 아이였다. 손양과의 대화는 '무지개학교'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키웠다.'무지개학교'는 과천시에 있는 대안학교다. 공원마을길에 초등무지개학교가 있고, 샛말로에 중등무지개학교가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무지개교육마을'이 존재한다. 지난 주 소개한 '문탁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교육공동체마을이다. 다른 점은 문탁이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주체라면, 무지개교육마을은 공부를 시키려는 사람들, 학부모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녀교육이 경쟁 일색, 사교육 지향이라는 큰길로 뻗어가는 동안, 이들은 좁은 샛길을 개척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모토는 '삶과 교육은 하나'다. 이 모토를 상식으로 여기는 30여명의 주민이 모였다. 2003년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운영철학을 세웠다. 2007년부터는 교육과정을 정립하고 마을 조직을 체계화 하는데 힘을 모았다. 2011년에는 6년과정의 중등학교를 설립했다. 역사가 10년이 넘었다. 무지개교육마을은 이제 견고한 다리처럼 사람과 지역사회를 연결하고 있다.수민이는 8년동안 무지개학교에 다녔다. 올해 중등학교 3학년이 된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직접 만든 옷을 선보였다. 초등3학년부터 진행되는 살림반 수업에서는 '의', '식', '주'를 주제로 공부를 한다. 이는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주제이며 삶의 근본이 되는 것들이다. 무지개마을 아이들은 학교에서 이런 것들도 배운다. 수민이는 이중에서도 의복에 관심을 더 두었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다. 장래희망은 이것 말고도 많다. 사육사도 되고 싶고, 보육원 선생님도 되고싶고, 해외봉사가, 요리사, 사업가도 염두에 두고 있다. 누군가 옷을 사는 만큼 기부가 되는 의류회사를 구상했단다. 이 모든 장래희망은 나눔과 연관돼 있다. 배움과 삶이 하나인 것처럼 아이들의 일상은 나눔과 분리되지 않는다.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이 비결이다. 아이들은 장애가 있다고 해서 너와 나를 나누지도 않고, 상호 배움과 경험을 골고루 나누며 성장하고 있다. "내가 가진 능력을 부족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 싶어요." 이게 수민이의 궁극적인 꿈이다. 이번 겨울 방학 계획은 '휴대전화 안 쓰기'다. "휴대전화랑 너무 친한 것 같아서 방학 동안 만이라도 없이 살아보면 어떨까 싶어서 시작했어요. 2~3일정도는 불안하기도 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책을 읽을 시간도 많아지고,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따른 선한 효과를 발견한다. 수민이의 학창시절 목표는 수학 1등이나 서울대 진학이 아니라 '한 가지 일에 깊이 파고드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무지개교육마을 주민들은 아이를 잘 키우려면 어른도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마을 주민이 돼야 아이를 무지개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다. 주민이 되려면 부모도 일정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 최소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야 한다. 이렇게 배우는 동안 어른도 변한다. 마을 이장 손승택(52)씨의 별명은 '고래'다. 마을 사람들끼리는 지역·문화·연령의 장벽을 없애고 친밀감을 높이고자 서로 별명을 부른다. 고향이 부산이기도 하고, 넉넉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 '고래 이장님'으로 통한다. 18년 전부터 과천에 거주했고, 2006년 무지개 마을 주민이 됐다. 자영업을 하는 평범한 가장이며 아버지다. "원래는 좀 독단적이고 고집있는 성격이었어요. 여기 주민이 되고, 지난해부터 이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소통하고 참여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죠." 그는 무지개마을을 고향으로 여기며 산다. "마을의 아이들이 어른들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자신도 안정감과 따뜻함을 느껴요. 부산에 부모님이 계시지만 돌아가시고 나면 잘 가지 않게 될텐데 그러면 여기가 고향이지요. 특히 정서적인 면에서는 지역공동체가 고향의 역할을 하게 되리라 봅니다."사람이 만든 마을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리고 이들은 마을 밖의 환경을 바꾸기도 한다. 마을 행정 간사 '지붕(박미봉)'씨는 이런 변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과천 안에는 무지개 마을 말고도 대안학교와 육아공동체가 여럿 있는데, 이들로 인해 공교육도 변화가 생겼어요. 학부모운영위원들의 참여도가 높아졌고, 건강한 교육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고." 무지개마을은 다른 공동체마을 사이의 연대뿐 아니라 지역민과의 연대도 중시한다. 과천지역내 독거노인 주거 개량사업도 펼치고 장애인 복지관과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를 돕기도 한다. 도배를 도맡아 하는 주민도 있고, 수도 배관공사를 척척 해내는 주민도 있다. 학생들도 스스로 봉사활동을 찾아서 한다. 마을 사람 누구나 우리가 사는 곳에 배움과 삶이 있고, 더불어 살아야 더욱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많은 사람들이 알면서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사실을 이들은 실천을 통해 삶 속에 녹였다.지난 2013년, 무지개교육마을은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 한마당'을 열어 이를 축하했다. '이야기 한마당'은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를 계획하는 자리였다. 정책 간사 '노래(주민화)'씨는 "10년이 지나니 숙제가 많아지더라"고 운을 뗐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30명으로 시작한 주민은 270여명으로 늘었다. 16명이던 학생도 초·중등 모두 합쳐 150명이 넘는다. 교육사업 외에도 품이나 재화 등을 주고받는 '어울림 품앗이', 텃밭을 일구는 '텃밭 노작' 등의 마을 사업과 지방자치단체 예산감시활동, 지역신문 발간 지원 등 지역 연대 실천활동 등을 벌여왔다. 외연의 확장은 밀도를 낮추게 마련이다. 노래씨는 내실을 다져야한다고 말했다. "마을 학교를 효율적으로 관리 운영하는 조직을 정비하고 구체적인 재정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역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무료로 마을학교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마을에서 적립하고 있는 지역방과후기금을 사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대안학교의 경제적, 문화적 문턱에 대해서도 생각할 때예요." 1년이 더 지난 시점의 이야기지만 노래씨의 말에서는 여전히 역동성이 느껴진다. 단지 흘러가버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최근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고, 대안학교의 인기도 높아졌다. 무지개학교의 10년 운영 노하우를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래씨와 지붕씨는 이구동성 강조했다. "사람이 있으면 성공하고, 없으면 실패해요." 공동체가 지속가능하려면 주민들의 자발성과 더불어 활동가를 양성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실패하는 공동체를 보면, 대부분 공동체의 원리를 실천하고 운영할 사람이 없어요. 키워내지 못하는거죠. 돈을 아무리 써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소용이 없죠. 사업에 투자하지 말고 사람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어요."/글 = 민정주기자 사진 = 무지개교육마을 제공▲ 과천시 문원동 '무지개의 날' 행사▲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마을학교 사업'얘들아, 나들이가자'▲ '백두대간 산행팀'의 관악산 나들이

2015-01-13 민정주

[마을;공동체 이야기]두번째┃문탁 네트워크

국가나 자본에 포획당하는 나의 시간을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머리 맞대 공부하는 것이 공동체가 있는 이유삶을 바꾼다는 목표 '인문학 공간'이 핵심경제활동 펼치는 '마을 작업장' 갖추고지역사회와 소통·교류위한 '카페'도 운영이희경 대표 중심 5년전 9명서 100여명으로고정된 이미지 거부 '별도 규칙' 안세워강좌·토론회에 자립프로젝트까지 영역 넓혀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어느 골목의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주소가 큼직하게 쓰인 카페가 보인다. '874-6'이라고 쓰고, '파지사유'라고 읽는다. 숫자 아래로 '마을 공유지'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곳은 말하자면, '마을회관' 같은 공간이다. 얼핏 보면 그냥 카페지만, 뒤쪽으로 대형 세미나실이 있고, 밥과 반찬과 빵을 만들 수 있는 조리실도 있다. 필요한 사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다. 마을회관이 있으니 당연히 마을이 있다. 파지사유 맞은편 건물 1층에 '월든'이라는 마을 작업장이 있고, 계단으로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이 마을의 핵심 본거지인 '인문학 공간'이 드러난다. 이 곳이 바로 '문탁 네트워크(이하 문탁)'다.문탁은 이렇게 세 공간으로 구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있으니 마을 운영의 원칙이나 구성원이 지켜야 할 규칙이 있을 터, 이희경 대표를 만나 이를 물었다. "규칙이요? 우린 그런 거 없어요. 규칙 없는 게 규칙이에요." 사실 본인은 마을 대표도 아니란다. 문탁의 탄생을 주동한 인물이라 대표격으로 활동하는 것 뿐이다. 문탁 식구는 100여명이다. 1년동안 세미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원만 그정도다. 5년전 9명이 모여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던 것에 비하면 10배 이상 늘었다. 어느 조직이나 덩치가 커지면 일이 생기고, 이를 처리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해진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필요한 규칙을 발명해서 써요. 대의제를 차용하지도, 매뉴얼을 정하지도 않죠. 현장에서 논의를 하고 방법을 찾아서 해결하는 거예요. 규칙의 성질이 단단하지 않고 끈 같다거나, 심지어 연기의 형태라고 할 수 있죠. 매번 논의해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피곤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매뉴얼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합니다."마을 이름만 봐도 문탁이 얼마나 관성과 고정된 이미지를 거부하는 지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마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지자체에서 마을 관련 사업을 시작하자 관료적인 인상이 덧씌워질까봐 '공동체'라는 이름을 썼고, 그리고 다시 '공유지'로, 최근에는 '공통체'라는 말로 문탁을 소개한다.규칙은 없어도 마을 안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통체로 묶어주는 근본 원리는 있다. 바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이다. 문탁 식구들이 공부는 정말 '제대로' 한다. 머리를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삶을 바꾼다'는 목표를 두고 공부를 한다. "고급한 '취미'정도로 하는 공부가 아니에요. 취미와 교양의 수준에서 공부하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 주지는 못해요. 옛날 선비들은 가난을 감수하며 한 평생을 두고 공부를 했죠. 농부들이 잘 살아보자고 힘들어도 열심히 일하는 것과 같아요. 이들이 힘들게 일하는 것처럼 공부도 힘들게 해야 돼요. 그래야 삶이 바뀌죠. 내가 바뀌는 만큼 세상도 바뀌는 겁니다."처음 문탁의 구성원은 9명이었다. 지난 2009년, 이희경씨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의 생활을 접고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의 마음은 '세상을 구원하기 전에 내 자신부터 구원하자'였다. 그 구원의 방법이 공부였다. 함께 모여 공부를 하다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씨의 집 거실에 접이식 테이블을 두고 철학자 '일리히'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동네 시설 청소년들과도 인문학 공부를 하게 됐고, 공부의 범위도 넓어졌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나 한미FTA같은 일이 생기면 전문가를 모셔다가 마을공개강좌를 연다. '통합 진보당 사태,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마을 100분 토론'을 열기도 하고 '밀양 송전탑 반대를 위한 용인시민 촛불집회'같은 '골목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활동 영역을 넓혀 동아리 활동을 하다 자립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마을과 경제'라는 세미나로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마을과 경제 사업단'을 꾸려 돈을 버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과 기술을 활용해 시장과 화폐, 외부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마을작업장 '월든'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별걸 다 만든다. '신목수 목공소' '자누리 화장품' '봄날 길쌈방' '노라찬방' '담쟁이 베이커리'는 시장에서 배제된 '그림자 노동'을 삶의 생산능력으로 재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마을 살림을 든든히 살찌운다. '월든 중고장터'는 숨어있던 물건들을 다시 순환시킨다. '복'이라는 마을화폐도 통용된다. 배움을 토대로 변화를 추구한다는 원리는 그야말로 문탁 안에서 돌고 돈다. 문탁이 변하는 동안, 문탁 안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삶도 변해갔다. 그리고 변화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문탁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렇게 문탁은 번듯한 마을로 우리사회의 한 부분을 밝히고 있다.5년동안의 외적 성장과 내적 성숙은 다른 여러 마을에 모범이 됐다. 그러나 그만큼 성장통을 겪고 있기도 하다. 덩치가 커진만큼 내부를 횡단하며 활동할 수 있는 힘은 상대적으로 부족해진다. "규모가 크든 작든 마을 안에서 일은 매일 벌어져요. 그게 공동체죠. 잘못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들이에요. 이런 문제들을 알고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규모가 너무 커지면 문제 자체를 모르게 된다는 게 진짜 문제죠. 전체가 커지니까 문제들이 '국지화'되고, 드러나지 못하고 덮여요. 덮이면 곪고, 결국 터지죠. 그래서 외연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서로서로 더 많이 섞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갈 겁니다."문탁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친구와 함께 공부를 통해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작고 단단한 네트워크. 우리의 공부가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공부가 되기를 꿈꾸는 곳. 수 천 개의 공부가 수천 개의 삶으로 창안되는 곳'. 공부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정도면 가볼 만하다. 그러나 같은 뜻을 품은 공동체 마을 안에서의 삶이 100% 만족스럽더라도 세상과 단절하고 그 안에서만 살 수는 없다. 문탁 역시 지역과의 소통과 교류를 지향한다. 1년 전 카페 파지사유를 만들 때 이 곳을 통해 지역민들과 더 가까워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지역민들의 발걸음은 뜸했다. 섞일 줄 알았던 지점에서 오히려 경계가 뚜렷하게 나뉘었다. "공동체가 가진 특성이 풍기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사람들은 감지해요. 카페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전문점 수준의 커피맛을 내든가, 가격이 아주 저렴해야 하겠더라고요. 일반적인 경제논리가 필요한거죠."그렇다고 해서 문탁이 사회적으로 가지는 가치를 낮게 볼 수는 없다. 카페는 뭇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더라도, 문탁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문탁을 닮은 공동체 마을도 계속해서 탄생하고 있다. "공동체가 많아지는 것도 좋겠죠. 하지만 공동체가 많고적고보다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바꾼 개인들의 더 많은 사례가 필요해요. 공동체의 일원이 많아지는 지금 현실은 다르고 살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가 충만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르게 살아보려는 수많은 실험들이 진행되는거죠. 공동체 회원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국가나 자본에 포획당하는 나의 시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를 머리 맞대 공부하는 것이 공동체가 있는 이유입니다."/글 = 민정주기자·사진 = 하태황기자▲ 문탁 네트워크의 인문학 공간▲ 마을작업장 월든의 길쌈방▲ 카페 파지사유

2015-01-06 민정주

[마을;공동체 이야기]첫번째┃프롤로그

전통마을과 달리 틀 깨고 생겨'씨족체' 아닌 '공동체' 차이점교육·학습이나 경제·문화예술 등같은 목표·삶의 지향점 추구'축제'처럼 전시행정 부작용 우려지자체 정책적 조직 찬반 논란도'…그 당시 마꼰도는 선사시대의 알처럼 매끈하고, 하얗고, 거대한 돌들이 깔린 하상으로 투명한 물이 콸콸 흐르던 강가에 진흙과 갈대로 지은 집 스무채가 들어서 있던 마을이었다. 세상이 생긴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아직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지칭하려면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만 했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中)최근 수 많은 손가락들이 성공한 '마을'을 지목하고 있다. 주변에 마을 주민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지인도 여럿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마을을 구상하는 것을 소일 삼아 즐기는 이도 간혹 만날 수 있었다. 요컨대, 마을이 대세다. 요즘의 마을은 물론, 넓은벌 동쪽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전통적인 마을과는 다르다. 전통의 마을들이 자연환경에 따라 생겨났다면, 요즘 마을들은 환경을 부수고 탄생한다. 산업화, 도시화, 개인화가 집약된, 넓은 벌판도 모자라 허공까지 꽉 채운 아파트와,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배타주의 밖으로 걸어나온 사람들이 마을을 만든다. 전통 마을의 구성원이 '씨족체'라면, 요즘 마을은 '공동체'가 핵심이다. 같은 목표나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육이나 학습, 경제 활동, 문화예술활동을 마을 안에서 함께 한다. 90년대 중반께부터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공동체의 마을은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우리 사회의 한 귀퉁이를 물들였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대세'가 됐다. 마을의 수가 많아진 것은 물론 각 마을의 특성도 다양해 졌으며, 마을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별나다'에서 '부럽다'로. 선망과 호기심을 품고 '거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라며 슬쩍 문틈을 들여다 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아이를 나으면 육아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다'거나 '퇴직하면 공동체에서 공부를 해볼까'하는 식으로 누군가의 장래희망이 되기도 한다.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시선도 있다. '저러다 축제 꼴 나지.' 90년대,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무수한 축제를 양산했다. 화려하고 요란한 축제는 지자체장의 업적을 치장하기에 좋은 아이템이었다. 지자체가 시행하는 축제의 일부는 전시 행정이라는 비판속에 사라지거나, 바가지 상술이 난무하는 장터로 전락하는 등 부작용을 낳았다.최근 두드러진 마을의 번성 뒤에도 지자체가 있다. 이미 마을 여럿이 이들의 돈과 정책에 힘입어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경기도가 대대적으로 '따뜻하고 복된 마을 공동체'만들기를 예고했다. 정책적으로 공동체가 조직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찬반 논란도 시작됐다.이에 경인일보는 공동체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활동과 마을 운영의 원리, 주민들 삶의 변화를 직접 보고 들으며 지자체와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수 있는 묘수를 함께 고민하려 한다. 글 = 민정주기자 그래픽/박성현기자 /아이클릭아트

2014-12-30 민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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