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어둠의 마을을 밝힌 예술가 이야기

리우칸 마을 '인공 태양거울' 설치예술가 제안'청계천 생태복원' 소설가 故박경리 선생 제시기존 공간에 대한 관심과 창의적 표현력 강해지난해 가을 감동적 뉴스 중의 하나는 노르웨이 리우칸 마을 이야기였다. 화제의 마을은 주민 3천명가량의 작은 도시로 산간 협곡에 위치해 있어서, 해마다 9월과 3월 사이에는 해발 1천883m의 산그늘에 가려 어둠의 마을이 된다. 마을 주민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햇볕을 쬐기 위해 곤돌라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했다. 햇볕을 쬐지 않으면 비타민 부족으로 구루병에 걸리고 우울증도 심해지기 때문이다. 2005년에 이 마을로 이사온 마르틴 안드레센이라는 설치예술가는 햇볕을 쬐러 산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주민들을 보면서 산중턱에 거울을 설치하여 마을을 비추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처음 마을 사람들은 실현 가능성도 믿기지 않는데다 큰 예산이 투입되는 것도 탐탁지않게 여겨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차츰 안드레센의 아이디어에 대한 예술가들과 주민들의 지지가 늘어나면서 마침내 인공태양거울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기획단이 꾸려졌다. 리우칸 시장도 태양거울 프로젝트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약 9억원에 달하는 모금이 이뤄져 결국 실험은 성공하였고, 리우칸 마을은 어둠에서 해방되었다. 리우칸 마을의 인공태양거울 이야기가 노르웨이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알려지면서 이를 보러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이 늘고 있다. 어둠의 마을이 일약 관광명소로 바뀌어 거울이 주민 소득에도 보탬이 되는 일석이조가 된 것이다.리우칸 마을의 인공태양거울프로젝트는 한 예술가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였지만 자신의 이웃과 삶터에 대한 배려와 고민의 결과이다. 이처럼 문화예술인의 상상력이 도시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사례가 적지 않다. 상당수의 예술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과 장소를 관조하고 투시하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도시 공학자만큼이나 자신의 삶터를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인들이 도시와 마을 공간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의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고 시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돌아가신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년에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선 박경리 선생은 청계천을 생태하천으로 복원하는 시민모임을 오래 이끌었는데, 을씨년스런 고가도로를 철거하는 대신 청계천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안을 제시했다. 박경리 선생이 꿈꾸었던 청계천은 시냇물을 복원하여 수달과 너구리가 살 수 있고, 천변에는 상추를 심고, 한국적인 주택을 세워 우리문화, 생명 존중의 자연주의적 공간을 수도 한복판에 만드는 것이었다.최근 욕망의 정글로만 여겨온 도시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마을 만들기' 사업이 그것이다. 그동안 투자의 수단으로 여기던 주택과 투기의 눈으로만 바라보던 구도심 지역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침체된 부동산 경기 때문에 중단된 재개발 사업의 대안으로 선택한 고육지책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서 마을의 문제를 지역운동가들과 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공동체를 회복해가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예술가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기존의 공간을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새롭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 예술가들의 활동은 그 자체로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되며, 이들의 자유로운 표현과 행동도 주민들의 관습화된 일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예술인과 마을의 관계가 늘 조화로운 것은 아니다. 예술인들의 활동이 주민들과 갈등을 빚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홍대 앞을 문화의 거리로 만든 예술가들처럼, 예술인들의 활동으로 쇠락한 도심이 활성화되게 되면 높아진 작업실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해 쫓겨나는 역설적 상황도 발생한다. 이런 역설을 알면서도 구도심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마을 예술가'들이 있다. 새해에는 마을 예술가들처럼, 리우칸 마을을 밝힌 안드레센처럼, 시민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와 마을을 찬찬히 되돌아 봤으면 좋겠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12-31 김창수

그대, 고향에 가지 못하리

65년 길고 긴 고향길 그리다 돌아가신 큰아버지北 다녀온 두 전직대통령, 가족생사 확인 안해줘실향민 1세대 위로조차 못받고 지금도 세상떠나평생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두 눈이 짓물렀던 백부께서 지난달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사실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다.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었고, 두 달 전 폐렴진단을 받아 병원치료중이었으며, 무엇보다 백부의 연세는 87세였다. 100세시대라는데 87세에 명을 달리 하신게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늘 슬픈 법이다. 백부는 3년 전 기독교에 귀의했다. 젊은 시절 그때 지식인들이 그랬듯 마르크스에 심취하기도 했을 정도로 지적 욕구에 충만하던 분이었다. 교회에 그저 건성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은 분명할 터, 마치 종교연구가처럼 성서를 탐독했고 '성서읽기'를 신앙의 의미로나 학문의 의미로나 꽤 충실하게 독파했다. 하지만 나는 백부가 백발이 성성한 늦은 나이에 교회를 찾아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문을 외우고 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백부는 임종시 "나 천국으로 먼저 갈래"라고 말했다고 현장에 있었던 목사가 말했다. 백부에게 문병을 왔다가 졸지에 임종을 지켜보게 된 목사는 절박한 순간에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튼실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홍조띤 얼굴로 "기적이… 기적이…"라며 말했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서 임종을 지켜본 사촌매형의 의견은 달랐다. 백부께서 '나 고향으로 돌아갈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귀향'에 병적이리만큼 집착했던 백부의 마음을 잘 알고있는 나는 어쩌면 사촌매형의 말이 맞을 줄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긴 천국이면 어떻고 고향이면 어떻단 말인가. 백부의 고향은 영변이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한 귀절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의 그 영변, 아니다. 남한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핵시설로 더 유명한 그 곳. 정확히 말해 평안북도 영변군 남송면 천수동 107.백부는 서울에 가고 싶었다. 1주일만이라도 도대체 남한의 분위기가 어떤지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풍문만이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했고, 당신이 직접 별천지라는 서울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렵게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떠나는 날, 아홉 살 막내 동생이 같이 가겠다며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꼭 잡고 집을 떠나는데 동생은 동네 어귀에서 갑자기 형의 손을 뿌리치며 "형만 갔다 와! 나 안 갈래, 난 엄마랑 있을거야!"라며 뒤도 안보고 집 앞에서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는 어머니한테 뛰어갔다는 것이다. 고향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게 꼭 65년 전 일이었다. 등을 보이며 뛰어가던 동생의 모습이 평생 가슴에 사무쳤다고 백부는 늘 말하곤 했다. 그때 그 막내의 손을 꽉 잡고 있었더라면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그말을 할 때마다 바로 아래 동생, 즉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2000년 8월 15일. 평양시민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순안공항에 도착하던 날, 백부는 무척 흥분된 모습이었다. "이제 고향에 갈 날이 며칠 안 남았다. 고향에 못가도 식구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생사는 확인해 주겠지"라고 백부는 굳게 믿었다. 남한의 대통령을 평양까지 불러들이는 '햇볕정책'의 위력이 저럴진대, 생사 확인 정도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감감무소식이었다. 서신 교환까지 바란건 언감생심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 그후 노무현 등 좌파정권 10년동안 누구도 백부에게, 이 땅의 실향민 1세대들에게 '당신들이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해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국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점 사과한다'라고 말하며 위로해 준 대통령은 없었다.백부께서 천국에 갔는지 고향으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장장 65년의 길고 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3년의 절절한 신앙생활에서 터득한 천국의 존재 중 어느 것이 가슴속에 더 사무칠지도 헤아리기 어렵다. 분명한 건 백부가 이제 우리 곁에 없다는 것. 현재 생존해 있는 실향민 1세대들은 5만명 남짓이라고 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하는 실향민도 있을 것이다. 이번 장성택 사태로 실향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요동을 치고 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통일은 벼락같이 올 것'이라는 백부의 말처럼 북한 사태가 통일의 물꼬를 터줄지 지금 실향민들의 손은 떨리고 있다./이영재 논설위원

2013-12-18 이영재

프레임 대 프레임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치권에서 많이 등장하는 용어 중 '프레임'이라는 말이 있다. 뼈대나 골격을 의미하는 프레임이 정치에서는 정치를 관통하는 기본 구조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종북' 프레임, '안보' 프레임, '대선불복' 프레임 등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용어로서 '전쟁'이란 용어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예산' 전쟁, '입법' 전쟁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정치의 정의가 갈등의 조정이고, 어느 학자의 말처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할지라도 정치란 세력 대 세력의 쟁투 과정임이 분명하고, 종국에는 권력의 획득이 목적이다. 전자가 규범적 의미라면, 후자는 정치현실에서 권력정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정치는 양자의 적절한 조화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치에서 전쟁의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면 국민의 삶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프레임은 객관적 의미에서 분석을 위한 틀로서가 아니라 정국의 핵심 쟁점을 호도하고, 정파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하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프레임 전쟁이다.지난 대선을 전후해서 프레임의 대표 주자는 단연 안보 프레임이다. 그 뒤를 잇는 것이 대선불복 프레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안보 프레임은 종북 프레임으로 연결된다. 이 프레임의 매개변수가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이다. 일견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과 종북 논란이 무관해 보이나 국정원의 댓글 개입 의혹이 출발이었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여부가 쟁점이었기에 직간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가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검찰 수사를 둘러싼 여야의 인식 차이, 지난 대선의 공정성 여부를 문제 삼는 일부 종교계의 비판과 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선언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주장 등이 얽히고 있다. 국가기관의 대선 관련 의혹의 얼개가 안보 관련 사안이며, 사이버 상에서의 유포와 게시가 의혹의 중심이고 보면, '종북'과 '대선불복' 프레임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그런데 프레임은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종북 프레임과 대선불복 프레임은 주로 여권이 구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민주당은 대선불복이 아니라고 하는데 새누리당은 대선불복의 틀로 야권을 몰아가려 하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물론 민주당의 애매한 태도도 이러한 프레임을 키우는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여권 핵심부의 태도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수사 방해, 검찰총장 '찍어내기' 논란 등으로 축소·은폐 의혹을 키운 측면이 크다. 여권의 입장은 알려진대로 '재판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재판은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야권 일각과 종교계 일부, 비판적 시민단체에서 간헐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대선 불복 언급은 비판받아 마땅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발언이다. 정황적 근거가 '합리적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해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도 아직은 의혹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의 관련성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대선 불복과 박 대통령 사퇴 주장은 국민정서상으로나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하면 된다. 국민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 또한 민주주의다. 국정원 개혁 특위 가동 자체를 여권이 연기할 일은 더욱 아니다. 여권의 과잉 반응은 적절치 않다. 이쯤에서 이른바 '프레임 전쟁'은 멈춰야 한다. '전쟁'이 '정쟁'으로 구체화되면서 여야, 모두 패자이다. 여권이 프레임을 활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이 그 적기(適期)다. 상생의 길을 제껴두고, 왜 공멸의 길로 가려 하는가./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2013-12-10 최창렬

지속가능성장의 조건

계사년 끝자락에 즈음해서 내년도 국내외 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세계경기의 바닥이 차츰 확인되는 때문이다. 중국경제의 평년작 전망에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그리고 유럽경제에서 긍정적인 조짐들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베노믹스의 엔저효과가 내년 중에 본격화할 개연성도 커 보인다.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신흥국들의 명년실적이 최소 금년만큼은 될 것이라며 세계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한국경제는 올해보다 약간 호전될 것으로 예측했다. 대외의존도가 G20국가들 중 최고여서 세계경기와의 동조화경향이 한층 커진 때문이다. 갈수록 엥겔계수가 커지는 서민가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금상첨화이다. 신년운수 점처럼 적중하면 좋고 설사 잘못되더라도 책임추궁 당할 리도 없으니 말이다. 일자리 창출이 당면현안이나 동북아 긴장국면, 가계부채, 환율폭탄 등 곳곳에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어 편치만은 않을 예정이다. 경제입법과 관련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해묵은 성장논쟁이 재연될 조짐이다. 박근혜정부가 경제활성화에 방점을 찍은 터에 대기업들은 그동안 쌓아놓기만 했던 막대한 규모의 현금을 풀어 투자를 늘리겠다며 '손톱 밑 가시' 제거를 주문한 것이다. 새누리당은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는 규제 해소에 팔을 걷어붙였다. 여당의 대선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아예 실종된 듯하다. 그러나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주장은 정반대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상기될 정도로 민간소비 부진이 매우 심각해 대기업을 더욱 옭아매야 한다는 것이다. 내수 진작이 키포인트이다. 분배구조 악화에 따른 민간소비 위축이 한국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최대요인으로 부상한 것이다. 반세기동안 일관되게 지속된 성장지상주의가 낳은 부산물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주주자본주의의 강요는 설상가상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배금주의와 이기주의의 노예로 전락한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근면과 정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보로 취급되는 실정이니 말이다. 성공한 기업인들이 국민적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과도 상관관계가 높다. 더 큰 문제는 효율과 형평간의 양립이 곤란하다는 뿌리 깊은 인식이다. 심지어 형평이 '공공의 적'으로 매도되는 형국이다. 성장과 분배가 상충관계에 있다는 것은 고전학파 이래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명제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공정분배를 균등분배로 잘못 파악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균등분배가 성장의 지속에 질곡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20세기말 동구권 몰락이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효율과 형평은 상호 보완관계일 수도 있다. 사회계약주의 철학자 롤스(J. Rawls)의 경제정의론에 눈길이 간다. 타인을 사회생활의 동료로 간주,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즐거움이 자신의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는 공동체적 인식이 출발점이다. 한편 후생경제학에선 생산의 효율성과 분배의 형평성이 모두 충족되었을 때 국민들의 경제적 후생이 극대화된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경제정의란 효율성과 형평성이 모두 충족된 상태를 의미한다. 문제는 공정한 분배인데 이는 생산에 기여한 정도에 비례해서 각자의 몫을 결정하는 것이다. 즉 성과에 따른 차등분배이다. 균등한 기회의 제공도 필수요건이다. 참여기회를 갖지 못한 자에게 차별적 결과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정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롤스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산과 관련해서 자신의 능력과 창의력이 발휘되도록 동등한 기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지속가능성장을 위해서는 올바른 시장규범 확립을 통한 지하경제 최소화와 음성소득 차단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제도경제학 개조(開祖) 베블렌(T. Veblen)은 놀고먹는 유한계급이 많을수록 창조경제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 바 있다. 낙수효과에 의존할수록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자본주의의 건강성 담보 없는 '코리안 드림'은 공염불인 것이다. 투자유인 제고와 내수활성화가 조화된 청말띠 해를 기대해 본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12-04 이한구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반대말이 아니다

중소기업을 살려서 한국경제를 도약시키자고 말하면, '대기업의 주도력을 빼앗자는 것이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중소기업을 키우다가는 대기업이 쌓아 온 기업가정신을 낮출 수 있다고 말하는 편견도 나온다. 아마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서로 제한된 자원을 나누는 경쟁자로 생각하는 듯싶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이해이다. 중소기업을 육성하자는 것은 대기업을 버리자는 뜻이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를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대립으로 보는 것은 불필요한 이념 과잉의 하나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반목과 경쟁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 동일한 목표를 향해 가는 전우(戰友)이다. 분명하게도 한국경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이라는 양대 축(軸)이 살아나야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한국경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대기업 중심으로 꾸려왔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위상을 높이자는 주장에 염려가 나올 수는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 쪽의 혁신 없이는 이제 경제발전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현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중소기업들이 만드는 부품에서부터 혁신이 발생해야 대기업의 경쟁력이 더 높아질 수 있다. 즉, 창조적인 스마트폰 부품 없이 대기업이 주도하는 스마트폰 산업의 경쟁력을 키울 수는 없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호흡을 맞춰 탱고를 추는 협력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을 견인하기도 할 것이며, 다른 경우 중소기업의 혁신이 대기업의 성장을 견인하게도 될 것이다.글로벌 시장 판세를 볼 때에도 부품소재 영역의 강소(强小)기업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독일 경제가 '히든 챔피언' 기업들을 토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히든 챔피언 기업들은 부품·소재를 취급하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상당한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가진 중소기업들인데, 그들의 창조적 역량에 의해 국가경제에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부터의 중소기업 육성은 우량 중소기업들의 실력이 쭉쭉 뻗어나가야 한다.강소기업을 키울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강소기업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하청관계도 변화해야 한다. 한국경제는 조립 산업에서 강했었는데, 그 성장 과정에서 중소 부품업체들은 대기업이 구축한 먹이사슬의 하단에 위치했었다. 강소기업은 그 하청구조에 종속되지 않고 글로벌 시장을 상대하는 독립전문기업이 되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강소기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범용 기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력을 가져야 독립전문기업이 될 수 있다. 이런 수준에 올라야만 대기업에게 동급의 파트너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강소기업이 늘어나게 되면 한국경제는 변하게 될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생태계 조건을 바꾸는 종(種)을 '생태공학자'라고 부르는데, 강소기업들이야말로 한국경제에서 생태공학자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종이다. 강소기업들의 성공은 다른 중소기업들의 모델이 될 것이며, 결국 중소기업 전체로 혁신성이 퍼지는 효과를 만들어 낼 것으로 믿는다.이런 의미에서 중소기업 정책에서도 새로운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중소기업에게 혜택을 늘려주는 정책에서 벗어나, 우량 중소기업, 즉 강소기업을 늘리는 정책에 눈을 돌려볼만 하다. 기존 중소기업 정책의 골격인 시혜적(施惠的) 입장을 다시 돌아볼 필요도 있다. 특히 첨단기술 중소기업들에게는 체질 강화를 할 수 있는 정책이 중요하다. 이들마저 나약하게 보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중소기업 정책은 '시혜'와 '경쟁' 사이의 묘수풀이에서 성패(成敗)가 판명날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퍼즐이지만 일단 성공적으로 풀어낸다면, 우리가 그동안 쌓아 놓은 대기업의 경쟁력 위에 중소기업에서 성장한 강소기업의 힘에 추가되어 진정으로 강한 국가경쟁력을 만들어 낼 것이다. 중소기업을 키우는 가치는 이처럼 크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11-27 손동원

생활문화 지원정책 절실하다

국내 도시들은 비중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문화도시를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문화예술을 발전시켜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도시발전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문화도시란 시민들의 문화향유의 양적 질적 확대는 물론 대다수의 시민들이 문화 창조의 주체가 되어 자율적이고 일상적인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정부와 지자체의 문화정책은 문화예술 인프라 확충을 통한 문화예술 향유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하드웨어 위주의 '고색창연한' 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예술인들은 문화예술 작품을 창작(생산)하고 시민들은 그 생산물을 향유(소비)하며 정부를 비롯한 공공영역은 이 향유 활동을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인 문화시설을 확충한다는 전략인 것이다.이 같은 공급자 중심의 정책은 대다수의 시민들이 문화 예술의 수동적 소비자로만 머물러 있게 만든다. 시민은 문화예술을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소비자를 넘어 문화예술의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화예술 지원 정책에서 문화예술 활동 주체를 기준으로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문화예술가나 그 활동과 아마추어적 문화예술로 구별하고 있지만, 문화예술 활동 현장에서 그 차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문화예술 통계를 보면 인천시민의 경우 동호회 참여 경험은 8.7%이며, 문화예술 동호회 활동을 희망하는 비율은 약 30%에 달하고 있다. 시민문화 활성화는 이러한 시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어떻게 지원하는가에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지원정책은 아직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생활문화에 대한 관심 부족은 현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생활체육에 대한 관심이나 지원규모와 비교해 보면 전무하다고 해도 좋다.이제 문화예술의 향유자나 대중문화의 소비자, 객체에 머물러 있는 시민들을 문화예술의 능동적 주체, 생산의 주체가 되도록 지원하는 일을 문화예술 정책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해야 할 시점이다. 생활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시민들은 물질적 성공신화의 유혹, 속도에 대한 강박증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성찰하며 대안적 생활 스타일을 만들어나가며 스스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시민문화의 활성화는 시민들의 취미활동을 지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쇠퇴한 구도심을 재생하는 동력으로, 창조경제와 관광을 활성화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일본 가나자와시(金澤市)는 시민문화 활성화를 통해 도시 발전을 이룬 대표적 사례이다. 가나자와시는 시민생활문화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섬유산업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시민예술촌을 조성한 뒤 시민들에게 제공하였다. 시민예술촌은 창작연습과 발표공간 등 다양한 장르의 공방으로 꾸며 시민들이 연중 무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자나와 시민예술촌은 시민들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가 되는 거점, '창조계급의 산실'을 만들어 낸 사례이며, 이 창조적 에너지는 지역의 공예산업과 문화산업으로 연쇄 파급되고 있으며, 시민예술촌 자체가 외지인의 중요한 방문 장소가 되어 관광산업에 미치는 효과도 막대하다.시민생활예술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실태조사를 통해 시민들의 자발적 문화활동 현황과 정책 수요를 조사한 다음 필요한 제도적 정비와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문화예술활동에 가장 기초적인 지원은 창작 교육, 연습, 공방, 발표에 필요한 복합문화공간(시민예술촌)을 지원하는 것일 터이다. 다만 이러한 시민예술촌 조성 사업은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므로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체육시설과 유휴공간이나 폐공장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민생활문화에 대한 지원을 통해 더 많은 시민들이 창조적 예술활동을 하고, 예술활동이 생활화할 수 있는 효과적 지원 정책이 절실한 시점이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11-20 김창수

취업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취업 시즌이다. 올해의 막바지 취업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경기불황이 지속되면서 해가 갈수록 취업이 어렵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경쟁률은 수십대1을 넘어, 100대1을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공무원 시험은 수백대1이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조사 결과 올해 신입사원들의 대기업 평균 경쟁률은 31.3대1이다. 중소기업은 6대1로 대기업 선호현상이 여전하다. 무선통신 대기업 L사는 100명 모집에 1만8천명이 응시해 180대1의 최고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만 봐도 으스스하다.대학을 졸업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해 사회적 기반을 잡아가는 게 순리다. 부모들 역시 자녀의 취업 걱정에 노심초사한다. 취업을 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계속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때로는 기성세대와 신흥세대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한다. IMF 이전만 하더라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큰 어려움없이 괜찮다는 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하지만 IMF 이후 한국 경제가 내리막 길을 걸으면서 대학과 사회구조 등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지원자가 폭증하다보니 주요 기업들은 취업준비생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다양한 스펙을 요구하고 인·적성검사 등 각종 시험을 부과한다. 그래서 입사시험준비를 하는 사설학원도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대학입시 이상의 또다른 시험이 청년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대학들도 비상이 걸리기는 마찬가지다. 교육부의 대학평가 지표에 취업률 통계가 20%를 차지하면서 졸업생들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를 기준으로 부실 대학이 가려지고 각종 정부 지원에서도 제외된다. 각 대학들이 마음을 졸이는 이유다. 그러나 학생들이 갖고있는 취업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크다보니 성과가 생각만큼 나타나지 않아 대학이나 학생, 모두의 고민이 크다.대학도 시대에 맞춰 발빠르게 변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의 모든 역량을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생산·공급'하는 것에 집중해서는 곤란하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렵다고 해서 대학을 취업학원이나 기업의 인력공급처로만 인식한다면 슬픈 일이라는 의미다. 대학은 진리 탐구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학문 연구와 교수 활동이 이뤄지는 고등교육기관이라는 본래 의미를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현대사회는 인문학적 소양을 비롯한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만 진정한 리더로 성장할 수 있다. 어느 시중은행 입사서류는 오로지 졸업장이었다. 읽은 도서를 중심으로 토론을 통해 신입 행원을 선발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선한 발상이었다. 반응도 좋아 이같은 전형방법은 점차 기업에서 각광을 받을 전망이다.현대는 100세를 살 수 있는 시대다. "청년들이여, 당장의 취업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마라! 가슴을 활짝 펴고 미래의 꿈을 펼쳐라"하면서 나는 아직도 학생들에게 책을 많이 읽고,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데 젊음을 투자하라고 강조하고 있다.'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무엇때문에 대학에서 학문을 하는가?'젊은이들이 자신에게 해야 할 끝없는 질문이다. 취업뿐만 아니라 취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평생 본인에게 던져봐야 하는 질문이다. 인생의 한 과정을 겪고있는 때다. 가슴쓰린 추억이, 때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지나갈 것이고 지나가면 또 그리워지는 게 젊음이다. 당장에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 것은 20대 젊음의 특권이다. 가슴을 활짝 펴고 머나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자./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객원논설위원

2013-11-12 이준구

누구를 위한 국정감사였나

국정감사가 끝났다. 역대 국감중 '최대 성과'를 거두며 막을 내렸다. 여기서 '최대 성과'란 '시간 버리고 예산을 축내는 이런 국정감사를 계속해선 안된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해주는 성과를 거뒀다는 뜻이다. 국정감사는 여당보다는 야당에게 유리한, 야당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그러나 야당은 '국정원 댓글공방'의 망령을 뒤집어 쓰고 스스로 진영논리를 만들면서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번 국감은 그만큼 야당에게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여당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역대 국감중 이번처럼 여당의 존재가 신기루 같았던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이번 국정감사의 압권은 10월15일 정무위 공정거래위원회 국감에서 일어났다. 증인으로 출석한 임준성 한성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수입차 업계의 부품가격 담합에 대한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임 대표 왈, "저희는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회사이고, 자동차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국정감사장은 순간 얼어 붙었다. 민주당 의원이 수입차 한성모터스 사장을 부른다는 것을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는 같은 이름의 다른 회사 대표를 부른 것이다. 위장하도급 불법파견 문제로 출석한 삼성전자 서비스대표도 엉뚱한 질문을 받고 당혹감에 빠졌다. "삼성전자 서비스는 AS때 사용되는 부품을 삼성전자로 부터 받느냐"라는 엉뚱한 질문 때문이다. 국감장은 멘붕에 빠졌다. 전문성이 부족한 국회의원들 때문이다.더 놀라운 것은 기업대표가 무려 3시간을 기다려 받은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14일 환노위 국감에서는 늦은 밤 11시40분 위원장은 증인과 참고인이 자리에 있는지 출석을 체크하는 일도 벌어졌다. 갑의 횡포를 따지는 국감장에서 국회의원들이 최대 슈퍼갑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국감에 불려나온 기업인들의 입에서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소환된 기업 대표들마다 "이미 공정위에서 시정명령 요구를 받은 대로 조치를 취했는데 왜 국감장에 와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간다"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고 아우성쳤다. 한 외국기업 대표는 "자정까지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끝내줘서 다행"이라며 한국 국회의원들의 서슬퍼런 권위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이번 국감은 피감기관이 628곳 이었다. 국감이 부활된 지 25년 중 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러니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포장해서 벌어진 일이다. 우리 국회의원의 전문성과 능력에 비해서는 절대 할 수 없었지만 밀어붙였다. 애초부터 답변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 의미없는 질문들이 넘쳐났다. 최악의 국감답게 '이런 국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며 국감폐지론을 주장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국감폐지가 불가능하다면 상시국감도 하나의 대안이 될수 있지않겠냐는 의견도 개진됐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 과연 상시국감을 감내할 수 있을 지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만일 상시 국감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 국회의 수준에 비추어 볼때 대한민국은 일년 내내 국감을 치르다 결딴이 날 것이다. 상시국감이라는 것이 사안이 발생하면 해당 상임위에서 즉시 감사를 하는 것인데, 우리 정치수준으로 볼때 일부러 감사거리를 만들어 정쟁의 장으로 삼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국감을 받아야 하는 피감기관의 입장에서 볼때 자칫 업무가 마비되고, 기업은 제대로 돌아갈 지도 의심스럽다. 국정감사 망국론이 나오는 이유다.국회의원들이야 피감기관으로부터 깍듯한 대우을 받아 잘 모르겠지만 25년동안 단 몇 번을 제외하곤 늘 치욕스런 구태가 재현되고 있는 것은 국가나 국민들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다. 공무원이건 기업인이건 피감기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의원들로부터 호통을 듣고, 반말이 섞인 멸시와 조롱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년 되풀이되는 '국회의원을 위한 국감'이라면, 이런 국감은 차라리 폐지하는 게 옳다. 만일 폐지가 어렵다면 면책권 뒤에 숨어서 막말을 일삼는 의원들의 그 잘난 특권을 박탈하고, 국감이 끝난후 의원들의 순위를 매겨 하위 50등 의원들을 대상으로 낙선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래야 국회의원들도 국감장에 빈 가방을 들고 출근하지 않을테니 말이다./이영재 논설위원

2013-11-05 이영재

집권당의 역할

집권당과 야당의 대립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또한 정치의 본질은 갈등의 표출이며 갈등을 제도화 한 것이 민주주의이다. 갈등을 여하히 집약시키고 제도화해서 최소화 하느냐에 정치력이 달려있다. 그러나 대선 이후 여야의 대립은 건강한 갈등과 대치의 수준을 넘는 것이다. 대선 국면에서 불거진 대화록 유출 의혹, 남북정상회담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여부, 대화록 공개를 둘러싼 갈등으로부터 검찰총장의 사퇴 파동 등 국면과 현안을 달리하면서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공히 여야가 정파적 계산하에서 행위하고 정쟁으로 연결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국가 기관들의 일탈 행위에 대한 문제 제기를 정쟁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일련의 정치적 쟁점의 본질은 국정원의 댓글과 트윗 등 여론 조작 의혹이며 이것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느냐의 여부이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외압설이 제기되고, 검찰총장과 특수수사팀장의 사퇴 및 경질이란 사태도 불거졌다. 각종 사안의 본질이 가려지고, 사실 관계의 규명이란 명분으로 진실이 호도되어서는 더욱 안된다.정홍원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의 형식을 빌려 박근혜 대통령은 지루하게 이어지는 정쟁적 측면의 해법을 제시했다. 총리의 대독(代讀)형식을 논하기 앞서 내용에서 진전된 바가 없다.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챙기는데 협조해 달라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국정원 댓글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구조 개혁 등의 현안들을 정쟁으로 보는 관점에서 사태 해결의 단초를 찾는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청와대의 인식이 바뀌지 않고, 최고 권력의 의중과 심기를 살피는 무력한 집권당의 존재가 계속 된다면 총리의 담화에서 밝힌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더라도 정국 대치와 민생 챙기기는 요원해질 수 있다. 여야의 시국을 보는 인식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야당의 문제 제기를 정치적 공세로 보고, 정쟁으로 치환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전향적으로 사태의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 국회 의석 반수를 넘는 집권당이 국민의 대표자격으로 청와대에 정국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야당에게도 정쟁적 요소를 삼가고, 대선 불복으로 비칠 수 있는 발언과 행동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야당을 대선 불복 프레임으로 가두려는 시도를 접어야 하고, 야당도 헌법 불복 프레임으로 여당을 몰고 가려는 자세를 중단해야 한다. 두 프레임은 공히 설득력도 없고, 효력도 없는 지극히 정쟁적 요소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정권 출범 8개월이 넘도록 한 치의 진전도 없는 지루한 공방의 터널을 벗어나고, 여야 정치인들의 진부한 '민생' 주장이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당이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비판적 성찰에 근거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밝혔듯이 박근혜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에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 의혹도 지난 정권의 일이라는 데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정권의 일탈 행위를 호도하려 하거나, 행여 수사의 축소나 은폐에 대해 방조하거나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순간 이는 현 정권의 과오로 치환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런 귀책 사유가 없는 정권이 국정원 등 국가기구들의 여론 조작 의혹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도 현재 나타난 정황 증거들을 바탕으로 책임자 처벌과 국정원 개혁 등에 대해 원론적 수준이나마 의지를 보이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유감을 표명할 때 사태 해결의 단초가 보인다. 여권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정치적 공세로만 일관한다면 역풍은 야당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상식이다. 해법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해결의 키는 여권이 가지고 있다. 대선 불복 논란이 정치적 쟁점화한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되지 않지만, 이것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정국에 대한 반증(反證)이다. 또 다시 집권 1년을 정쟁으로 허비할 것인가./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2013-10-29 최창렬

재벌들의 구태(舊態)경영

"S그룹의 모 회장은 자동차광이다. 한때 재규어, BMW, 벤츠, 로터스, 람보르기니에 이르기까지 20여대의 자동차를 소유했고, 그래서 번듯한 디자인팀이나 판매망도 없이 이미 과잉인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40억 달러를 쏟아부어 만든 자동차회사를 단 한 푼도 못받고 경쟁업체에 넘겼다."1997년 외환위기가 한창일 무렵의 모 일간지의 기사내용이다. 재벌총수의 브레이크 없는 권력 남용이 초래한 해프닝이었다.당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302억 달러를 지원받아 급한 불을 끄는 대신 경제주권을 통째로 IMF에 넘겼다. 이후부터 경제주체들은 살인적인 고금리와 고환율로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 시중은행을 비롯한 수많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헐값에 외국인에 팔렸다. 대마불사의 신화도 깨져 대우그룹을 비롯한 30대 재벌의 절반가량이 좌초되었으며 수백만명의 직장인들이 한꺼번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이후 최대의 국난(國難)으로 치부될 만큼 국민 모두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정부는 금융기관 및 대기업들의 부채청산에 혈세 64조원을 투입하는 대신 재벌개혁을 요구했다. 결합재무제표 도입, 상호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주력업종 선정, 지배주주와 경영진 책임강화 등이었다. 외부감사기능을 한층 강화하고 사외이사수 확대 및 감사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했다. 지주회사제도 이때 도입되었다.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도고 놀란다 했다. 웅진, STX, 동양그룹 등 중견재벌들의 잇따른 부도가 15년 전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구태(舊態)경영도 재확인되었다. 진작 청산되었어야할 고질적인 악습들이 여전한 것이다.중견재벌들 좌초의 결정적 이유는 유동성 부족이다. 장기간의 부동산경기 위축에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가세해 사업전망이 매우 불투명한 터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부실기업들을 연이어 인수한 때문이다. 부채비율의 경우 동양그룹은 2007년의 147%에서 작년 말에는 무려 1천231.7%로 수직상승했으며 같은 기간 STX는 170%에서 256.7%로 늘어 30대 재벌 평균 83.2%를 크게 상회했다. 웅진은 빚만 무려 10조원에 달한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제대로 상환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른 것이다. 문어발 경영이 자기 발등을 찍은 꼴이다.더욱 안타까운 것은 경영진들의 늑장대응이다. 2, 3년 전부터 이상신호가 감지되는 등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오너경영인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동양그룹은 동양증권, 동양매직, 한일합섬, 레미콘, IT사업 등의 매각을 통한 유동성 조기확보 의견을 묵살하고 기업어음(CP) 불완전판매로 버텼다. 또한 작년 3월부터 최근 법정관리를 신청할 때까지 구조조정 전담부서장을 업무파악도 전에 수시로 갈아치워 시간만 허비했다는 지적이다. 모그룹의 회장은 임직원들의 직언(直言)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무능한 아첨꾼들이 회장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친 탓에 판단을 흐려 낭패보고 말았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돈다.오너경영인의 무소불위 권력이 화근이다. 2009년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는 금상첨화였다. 전제주의 경영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삼는 만큼 신속성과 일사불란한 조직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경영은 대체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크다. 제왕적 경영자가 전지전능할 수는 없는 탓이다. 총수들이 순환출자를 이용해서 1%도 못되는 주식지분으로 그룹경영을 전횡하는 것은 또 다른 고질이다.사외이사제와 감사위원회는 무용지물이며 외부감사제 강화도 말뿐이다.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장치도 부실하긴 마찬가지이다. 600조원에 육박하는 30대 재벌의 눈덩이 채무와 경제력집중 심화는 또 다른 주목대상이다.천문학적인 수업료를 지불한 대가치곤 성과가 너무 초라하다. 국회에서 상법 개정안을 어찌 처리할지 지켜볼 것이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10-22 이한구

세계 100대 혁신기업이 많아지려면

며칠 전 미국의 톰슨 로이터가 2013년 세계 100대 혁신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우리 기업 중에는 삼성전자, LG전자, LS산전 등 3곳이 선정되었는데, 28개 기업이 선정된 일본에 비해 9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망과 염려가 적지 않다. 이번 발표를 보니 우리가 그동안 삼성전자의 실적에 의해 착시(錯視) 속에서 살고 있었던 듯싶다. 즉, 삼성전자 외 다른 모든 곳에서도 일본을 추월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아직 일본에 비해 혁신수준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종(警鐘)이었다. 우리는 이 경종을 계기로 최소한 두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첫번째는 많은 업종에서 아직 추격 전략의 가치는 높다는 교훈이다. 한국경제의 성장에서 추격(catch-up)이라는 단어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글로벌 선도 기업을 타깃으로 설정하고 그들을 추월하는 것이 바로 추격 전략인데, 우리는 그 추격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성장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최근 삼성전자를 비롯한 몇몇 글로벌 초우량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경제전략 전체를 추격 전략에서 혁신선도 전략으로 옮기려는 분위기가 등장했다. 그런데 그렇게 전체적으로 전략 축을 옮길 일이 아니다. 혁신과 창조의 경쟁 시대로 접어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아직 모든 곳에서 추격 전략을 버릴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이다. 추격 전략을 벗어 던질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서의 고민은 소정의 초우량 기업에만 해당한다. 우리는 현재 혁신선도 전략과 추격 전략을 모두 추진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두번째 교훈도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혁신을 말할 때 주로 대기업 위주의 혁신을 말한다. 그러나 대기업들에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중소기업 쪽의 혁신 성과가 없으면 밑힘이 부족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지난 몇 년간의 세계 혁신기업 리스트에 우리는 몇 개의 대기업이 고정적으로 올라섰을 뿐이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대기업만으로는 혁신기업 숫자가 늘어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중소기업의 혁신은 중소기업만의 이슈가 아니다. 중소기업 제품을 부품으로 구입하는 대기업에도 큰 혁신을 준다. 부품 쪽의 혁신은 대기업의 자체 혁신만으로 얻을 수 없던 새로운 경쟁력을 주는 일이다. 어쩌면 한국경제가 이제부터 얻을 수 있는 혁신 중 가장 많은 분량의 혁신이 나올 영역일 수 있다. 대기업 쪽에서도 중소기업의 부품소재 연구개발 실력이 높아지는 것이 자신들의 혁신 역량을 높인다는 인식의 전환을 확실히 해야 한다.물론 중소기업의 혁신에는 조심해야 할 염려거리도 있다. 중소기업 쪽에서 대기업들이 자체(in-house) 연구소를 활용했던 실적을 모방하여 사내 연구소 설립에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그래서 사내 연구소를 가질 만한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들도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곤 했다. 때마침 중소기업 연구소에 대한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그 추세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런데 정부 지원금을 확보하기 위해 유명무실한 수준의 연구소가 늘어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위험을 낳을 수 있다.문제는 정부의 R&D 지원이 사내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중소기업의 연구개발을 돕는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의 연구개발 능력을 키운다는 취지는 유지하더라도 정책 시행은 얼마든지 운영의 묘(妙)에 의해 성과가 달라질 수 있다. 능력 있는 중소기업이 사내 연구소를 갖고자 하는 의도를 말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권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들까지 정부가 연구소를 설립하도록 유인할 필요는 없다. 중소기업의 혁신은 대기업과 같이 자체 연구소를 세워야만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중소기업에 연구개발을 유인할 때 대학을 매개체로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가 클 것이다. 대학과 공동연구를 유인하는 쪽으로 지원 방향을 설정한다면, 중소기업은 실질적인 혁신을 얻으면서 동시에 연구소 설립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10-15 손동원

한국 발(發) 인문주의의 과제

최근 우리정부의 정책을 보면 수세기전 유럽을 풍미했던 문예부흥기를 방불케 한다. 르네상스를 관류하는 정신 중의 하나는 인문주의라 할 수 있는데, 현정부 들어서서 인문정신은 국정과제인 '문화융성'을 실현하는 과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간 인문유대 강화활동을 제안하여 이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인문학 활성화와 문화 융성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한국연구재단이 매년 420억원의 연구비를 대학에 지원하고 있는 인문한국(HK) 프로젝트까지 감안한다면 최근 정부의 인문정신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주목할만하다. 인문정신과 관련한 더 중요한 움직임은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국회에 제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인문정신문화 진흥법'제정 작업일 것이다. 인문정신문화 진흥법은 우리 사회의 인문적 전통과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고양하여 삶을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인문정신문화의 진흥과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14, 15세기 르네상스기의 인문주의가 신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성을 옹호하고 수호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면, 21세기 한국발 인문주의는 물신주의로부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가치관 정립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눈부시게 발전한 미디어와 정보 혁명은 역설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을 개인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공동체의 회복이 절실한 시점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전례 없이 빠른 산업화 과정을 거쳐 온 것도 한 배경이 된다, 이로 인해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최소의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물량적 생산과 속도가 지상과제인 시대,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인사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창조성이 사회 각 분야의 화두가 되고 있는데, 특히 성장동력이 떨어진 한국경제의 혁신을 위한 핵심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정부는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창조경제'에서 찾고 있다.이처럼 인문정신을 강조하는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시대가 문화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방증이며 자본주의 축적의 위기의 시대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인문정신의 강조는 인문학과 같은 특정한 학문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변화, 다시 말해 철학의 대전환에 방점을 찍어야 하고 그럴 경우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다만 인문정신의 강조는 목표와 방법 과정에서 인문적이어야 한다. 인문주의의 목표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진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민주주의적 가치와 전통을 확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야 하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의로 흐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인문정신의 강조가 계몽주의로 흘러가는 것도 특히 경계해야 한다. 정부의 인문정신 관련 정책이 우리사회 전반의 인문학 열풍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기는 하나 다분히 국민교양 방식이다. 위로부터의 문화운동은 성공한 사례가 흔치 않다.한중문화교류에서 인문유대의 강화 역시 추상화 되면 두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한자문화나 유교문화를 매개로 한 교류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어쩌면 교류의 출발점은 공통문화요소에서 찾되 그 목표는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여 자국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자원으로 삼아나가는 데 둘 필요가 있다. 또 국가 단위보다는 도시나 분야, 부문별 교류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인문정신의 회복이 가장 절실한 곳은 한국의 정치현실인지도 모른다. 정치쟁점이 되고 있는 대통령기록물 문제를 보면 대통령기록물이 제도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오직 상대당을 공략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10-08 김창수

화성시민은 '핫바지'가 아니다

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1970년대 말부터 덩샤오핑이 취한 중국의 경제정책이다. 실용주의를 비유한 표현으로 중국을 발전시키는 데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무관하다고 주장한 그는 이 이론을 내세우며 실용주의적 노선을 제시했다. 이달 말 치러질 화성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도 지역 발전을 위해 누가 더 잘할 것인지 토박이든, 낙하산이든 관계없다는 논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경기도민과 화성시민들은 지금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혼외아들 의혹으로 물러난 것이나,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표를 내던진 것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화성갑 지역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누가 공천될지에 관심이 쏠려있다. 친박계 '거물'인 서청원 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표가 이 지역에 출사표를 던져 유력한 여당 공천 후보자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현재는 서 전 대표와 김성회 전 의원으로 최종 압축된 상태로 이번 주 내로 공천자가 발표될 예정이다.이를 놓고 화성 토박이 출신인 김 전 의원은 "화성에 단 한 달이라도 살아 봤느냐"며 "보궐선거 출마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또한 "서 전 대표의 정치 재개를 두고 야당의 공세가 이미 시작됐다"면서 "정치 혁신을 해 온 새누리당과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주고 있다"고 서 전 대표를 압박했다. 서 전 대표의 주장도 만만찮다. "내가 나서야 당내 화합과 소통을 할 수 있다. 애초부터 보선에 출마한다면 수도권에서 당당하게 심판을 받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송산그린시티 및 유니버설스튜디오, 동서연결 고속화도로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데는 큰 정치를 해본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낙하산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외가가 화성으로, 본인도 6·25때 화성군 일왕면(현 의왕시 왕곡동) 외가에서 피란생활을 했다고 한다.공직자추천심사위원장인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지난달 23일 라디오에 출연해 이런 말을 했다. "서 전 대표와 같은 전국적인 스코프(scope·범위)를 가진 분이 와서 화성을 좀 키워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충청 출신인 서 전 대표도 이곳에 외가의 연고가 있다"고 했다. 심사위원장인 당 사무총장이 이렇게 말했을 정도면 서 전 대표로 기울어졌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홍 사무총장은 본인이 한 말에 아차 싶었는지 엊그제는 한 라디오에서 '청와대에서 내정을 했다느니 하는 서청원 전략공천설'에 대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인하면서 한 발 물러섰다.이러한 가운데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지난달 29일 귀국해 화성갑 보선 출마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청원 전 대표가 공천을 받는다면 그 대항마로 경기도지사를 지낸 손 고문을 지목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화성갑 지역은 전통적으로 농촌지역이다. 여권 강세지역이기는 하다. 그러나 옛날처럼 핫바지가 아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시골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략공천으로 서청원 전 대표나 손학규 상임고문의 빅매치가 이뤄진다 해도 표심이 어디로 갈지는 누구도 모른다. 자고로 시험에 붙고 떨어지는 것이나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송산그린시티나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큰 인물이 없어 늦어지는 게 아니다. 국가의 곳간이 비고, 경기침체로 민간사업시행자가 돈이 없어 지지부진할 뿐이다.본래 경기도내 대도시나 신도시 지역에는 지역 출신이 아니더라도 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을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민들 자체가 외지에서 많이 와서 살고 있는 이유도 있고, 정치적인 성향이 같아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화성갑 지역은 토박이들이 대부분 살고 있는 지역이다. 물론 토박이 주민들 중에도 '흑묘백묘(黑猫白猫)'의 논리를 가진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새누리당이든, 민주당이든, 민심은 천심이다. 다른 당이든 아니면 무소속이든 지역발전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신이나 재기를 위해 이리 저리 기웃거리는 모양새는 안 된다.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기를 두는 식으로 누구는 어디에 보내고 누구는 어디로 공천을 결정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미국은 동네에서 최소 5년은 살아야 연방의원 후보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김창준 전 미연방 의원의 말이 생각나는 요즈음이다./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객원논설위원

2013-10-01 이준구

민주당은 정말 정권을 잡고 싶은걸까

두 살기가 팍팍한 모양이다. 지난해 추석, 카톡을 가득 메웠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따위의 격려성 메시지가 올해는 반으로 푹 줄었다. 무엇보다 그만큼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는 얘기도 된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 걱정할 여유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정치? 그 신물 나는 정치가 하늘에서 뚝하고 스팸 선물세트를 떨어뜨려 주는 것도 아니고, 국정원 개혁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다. 이석기 내란음모? 그것도 채동욱에 묻혀서 긴장감도 크게 떨어졌다. 그러니 야당대표가 서울시청 앞에서 노숙을 하면서 대통령의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한들, 그게 그렇게 국민들의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을리 없다. 이말은 뒤집으면 민주당이 아직도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지난 MB정부시절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광우병 촛불시위대의 너울거리는 불빛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까.민주당이 '원내 복귀'를 선언했다. '국회선진화법'을 무기로 국회에서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때를 놓쳤다. 만일 대통령과의 3자회담이 열렸던 그날, 수첩에 적어간 일곱가지의 요구사항이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대통령을 비난했던 그날, 차라리 "대통령의 사과를 받지 못해 국민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로 국회로 복귀한다. 우리의 투쟁은 국정감사를 통해, 두 눈 부릅뜨고 정부를 감시하는 것으로 국회안에서 계속될 것이다"라며 국회로 돌아갔다면 국민들은 김한길 대표와 민주당을 다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추석 연휴 내내 '한가위의 위력'을 새삼 느끼며 '민주당 재해석'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성숙한 야당의 정치의식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번에 100% 원내복귀가 아니라 장 내외 병행투쟁을 선택하면서 또다시 국민에게 감동을 줄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다. 마침내 민주당이 들어 온 국회가 어떤 모습일지 눈에 선하다.누가 뭐래도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동안 국정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 수권정당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행동들은 과거 야당들이 보여줬던 구태의연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면책 특권 뒤에 숨어 수준 이하의 막말의 성찬에 스스로 취하고, 심각한 균형감각의 결여로 국민의 신망을 얻기 어렵다. 국민들의 정치 안목이 꽤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은 이정희 후보의 2차 TV토론에서 "나는 박근혜 대표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고 한 그 한마디였다. 만일 그 자리에서 문재인 후보가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어른의 입장에서 이 후보의 천박한 발언에 대해 호된 꾸지람을 했다면 대권의 방향은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번 이석기 의원 구속도 그렇다. 어찌됐건 그가 국회의원이 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야권단일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국민에게 먼저 사과하는 게 도리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패배도 따지고 보면 국민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종북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김대중 노무현 10년, 이명박 박근혜 10년 이른바 '정권 10년 주기설'이 맞다면 다음 정권은 야당으로 넘어가는 게 순서다. 여·야가 서로 정권을 주고 받으며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도 나쁠 게 없다. 정당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권 창출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전략이 스스로의 반성없이 남의 트집만 잡는 지금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결코 정권을 잡을 수가 없다. 리얼미터가 지난 23일 발표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신당을 만든다고 가정할 경우의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새누리당이 44.2%, 신당 21.5%, 민주당 17.0%, 정의당 1.8%, 통진당 0.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실체도 없는 신당의 지지율이 민주당을 앞서고 있는 것이다. 비 내리는 서울광장에서 서슬퍼런 표정으로 '전국순회 장외출정식'을 갖는 민주당의 모습에서 국민들은 여전히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는 60년 전통의 민주당이 이런 식으로 가다가 안철수 신당에도 뒤처질까 두렵다. 민주당은 정말 정권을 잡고 싶은 걸까?/이영재 논설위원

2013-09-24 이영재

국정원의 '의제설정' 능력

언젠가부터 국가정보원이 뉴스의 중심이다. 지난 해 대선 이후 정국을 쥐락펴락하는 파워 집단으로 화려하게 정치권에 데뷔했다. 과거 국정원의 모토였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국정원을 대상으로 한 국정조사도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말을 믿는다면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단독으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대화록을 공개해서 일거에 정국을 반전(反轉)시킨 예도 흔치 않다. 지난 달 공개된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사건으로 국정원의 존재감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국정원과 통합진보당의 대결 구도로 짜여진 대진표 앞에서 정치권은 망연자실(茫然自失) 그 자체다. 민주당과 진보정의당은 물론이고, 새누리당이라 해서 사정이 나을 것이 없다.대의제에서 정치의 중심은 정당이라야 한다. 다양한 사회의 균열 구조와 갈등을 대표하고, 정권의 획득을 위해 합법적 공간에서 선거경쟁을 통해 승부하는 기제가 정당정치이며, 정당의 구성과 행동양식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게 짜여진 것이 정당체제이다. 그러나 대선 이후 집권당인 새누리당과 제1야당인 민주당의 존재감은 국정원이 주도하는 정치환경속에서 여지없이 형해(形骸)화 되고 있다.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은 정치 부재의 종결자다. 정기국회 회기 중이지만 이석기 의원 제명 여부와 통진당 해산까지 여야 공방의 소재로 등장하면서 정치 실종은 좀처럼 치유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지난 달 말까지 결산 국회가 끝났어야 하나 공안 정국속에서 결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분위기 파악이 안되는 '푼수'같아 보인다고나 할까.이석기 의원이 구속되고, 통진당의 관련 인사들로 수사망도 확대되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이 사건 수사의 공조 형태를 띠고 있으나 수사의 중심이 국정원에서 검찰로 전환되어야 한다. 사안의 성격상 내사와 초기 공개 수사 단계에서 국정원의 수사는 불가피하며, 효율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석기 의원이 구속된 상황에서 국정원이 수사를 통해서 정치권의 전면에 노출되어 있는 모양새는 정국을 경직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대선 개입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고, 3년 가까이 내사해 왔다던 내란음모사건을 국정원 개혁이 논의되는 시점에 공개수사로 전환한 것에 대한 의구심도 일리 있는 추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석기 의원 등과 통진당이 한 목소리로 국정원의 수사결과를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누리당은 이석기 의원 제명안을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종북 논란에 휩싸일까 곤혹스러워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통진당의 주장과 해명은 앞뒤가 맞지 않고,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검증은 되어야 할 대목이다.내란음모 사건이 아무리 위중하다해도 적어도 최소한의 사법적 절차에 따라 정치적 판단이 내려져야 한다. 그러나 국정원이 계속 수사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 공안 분위기는 불가피하게 강화될 수밖에 없으며, 국회에서도 이석기 의원 제명을 둘러싼 정치공방이 치열해지는 등 공안정국이 장기화 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정치가 공안에 가위 눌리는 형국을 의미하는 것이며 10월 재보선에서 색깔공세가 선거전략으로 등장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대화 단절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던 중 밝혀진 이석기 사건이 이미 블랙홀이 되어 있는 형국에서 이석기 의원 제명과 통진당 해산 등의 의제가 정치권의 메가톤급 정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국정원이 정치에 계속 노출된다면 국정원 개혁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비칠 수 있다. 전격적인 내란음모사건 발표 등 국정원의 전광석화 같은 일련의 행동이 정략적이라는, 음모론적 시각의 해소는 국정원에 달려 있다. 이석기 사건은 더욱 치밀하고 강도 높게 수사가 진행되어야 하나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강도 높은 수사와는 별개로 국정원의 행보는 조심스러워야 한다./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2013-09-10 최창렬

금융소외자 증가가 대세인데

가계부채가 역대 최대치인 980조원을 기록했다. 실제는 이보다 훨씬 높아 심지어 1천500조원이란 설까지 들린다. 전월세 가격이 폭등하면서 관련 대출이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이 결정적이다. 400만에 달하는 저소득 가구 중 150만 가구가 빚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채무의 질도 갈수록 나빠지는 추세이다. 가계대출 중 비은행권 대출과 다중채무자가 각각 증가한 것이다. 원금상환 없이 이자만 내고 있는 가구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신용불량자수 누증(累增)은 설상가상이어서 지난해 말 기준 120만~130만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5%에 육박한다.일전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은 우리나라 가계부채 위험점수가 148점으로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의 154.4점에 근접했다고 경고했다. 정부는 경기부양과 빚 권하는 부동산대책을 이어갈 예정이어서 가계수지는 더욱 나빠질 전망이다. 핵폭탄에 비견되는 미국의 금리인상은 차치하더라도 당장 서민생활 핍박이 큰일이다. 과도한 채무부담이 소비 위축을 초래해서 경기회복을 지연시킬 공산이 큰 탓이다. 금융소외자 공적 지원기구인 미소금융, 햇살론, 바꿔드림론 등 서민금융지원 3종 세트에 눈길이 간다.이명박 정부는 삼성, 현대차, LG, 포스코 등 대기업과 은행 및 보험사 등으로부터 10년간 총 2조2천억원의 재원기부약속을 담보로 2008년 7월부터 신용등급 7등급 이하 저소득층에 창업자금과 운영자금 등 5천만원까지 연 4.5% 저리로 대출해 준 결과 지난해 말 기준 총 7천억원의 대출실적에다 이용자수만 8만여명에 이른다. 빈곤층 자활지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그러나 장기간의 내수부진에 돈이 된다 싶으면 불문곡직하고 덤벼드는 대기업의 등쌀에 소자본 창업열기가 식으면서 올해 들어 대출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연체율 증가에 따른 건전성 악화도 주목대상이다. 더욱 걱정은 작년 8월 대법원이 휴면예금 활용을 금지하는 판결로 미소금융의 가장 큰 돈줄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대기업의 추가재원 염출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동안 정부의 강요로 마지못해 출연했었는데 현 정부가 '나몰라' 하는 식이니 말이다. MB 정부의 대표 아이콘인 미소금융이 고사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한국판 그라민은행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마무리될 개연성이 크다.6등급 이하의 저신용자에게 지역신용보증재단의 보증을 통해 연리 10%대의 5천만원 이하 생계형 자금 대출상품인 햇살론의 파행 운영은 점입가경이다. 저축은행을 위시한 서민금융기관들의 대출실적이 올 7월 기준 무려 1조원에 육박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무려 5배나 신장한 것이다. 정부가 작년 8월에 보증비율을 85%에서 95%로 높인 결과이다. 햇살론은 대출자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민관합동으로 마련한 2조원의 보증자금이 대신 갚아주는 구조여서 부실 저축은행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묻지마 대출'로 연체율이 무려 10%에 이른다.고금리 채무를 10%대의 은행권 이자로 대환해 주는 자산관리공사의 바꿔드림론의 인기는 대단하다. 최근 하루 평균 신청자수가 최고 64%까지 증가하는 등 현재까지 총 18만건이 접수되었다. 새 정부의 금융구제 코드와도 부합해 연말까지 20만건 돌파는 무난할 전망이다. 그러나 이용조건이 까다로운 데다 건전성 또한 빠르게 훼손되는 중이다.기관별로 유사한 프로그램들을 중구난방으로 운영하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지고 부실 규모도 점차 확대된 것이다. 원금보전은 언감생심이고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정부드라이브에 기인한 바 크다. 저소득층 금융지원 수요 대비 시드머니도 턱없이 부족한 데다 수혜조건 또한 극히 제한되어 이용률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의 출구전략 임박과 중국의 경기둔화 우려 등 대외악재들까지 염두에 두면 '전(前) 정부의 치적 들러리'로 폄하할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한계가계의 수지개선 필요성이 한층 강조되는 이유이다. '새 술은 새 부대'란 후진 인식부터 청산해야 할 것이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09-03 이한구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창조, 요즘 이것만큼 뜨거운 단어도 없을 듯싶다. 모든 국정 이슈의 한복판에 '창조'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창조'를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일부 천재들의 몫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창조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천재 안무가(按舞家)로 꼽히는 트와일라 타프(Twyla Tharp)에 의하면, 창조적 소질은 천재 DNA와 같이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경험한 창조는 오직 준비하는 습관과 성실함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다. 창조적인 춤 예술로 인정받은 그녀의 초우량 작품들도 알고 보면 기존 아이디어의 변형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에 꾸준히 자신의 색깔을 입혀서 창조작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타프의 말을 들으면 창조가 천재들만의 전유물이 분명 아니며 누구든지 노력 여부에 따라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면 창조 방법은 어떤가. 창조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마치 요리(cooking)와 같다. 실제로 요리사 100인에게 계란과 토마토와 같은 오믈렛 재료를 전해주면, 다양한 유형의 오믈렛이 나오고 또 그중에 몇 명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오믈렛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이처럼 다양한 요리 재료의 묘합(妙合)과 새로운 조리법에 의해 창조적 음식이 탄생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창조적 인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0년 동안 피렌체의 스포르차 궁(宮)의 요리책임자였던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는 오랜 요리 경력을 통해 창조 능력을 키웠다고 알려지는데, 실제로 그는 스파게티라는 음식을 창조하고 제대로 먹기 위해 삼지창 포크를 개발했다고 한다. 다빈치 같은 천재가 요리에서 창조적 힘을 키웠다는 것은 요리야말로 창조를 가장 쉽게 생각하게 하는 메타포임을 알려준다.창조에 대한 '요리 메타포'는 경제학자인 슘페터(Schumpeter)의 귀중한 통찰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슘페터에 의하면 창조는 기존 자원의 교환과 합성의 결과일 뿐이다. 그가 보는 창조는 세상에 없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존재하는 자원들을 제대로 혼합하는 것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21세기 창조의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남긴 "창조는 연결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라는 압축된 메시지도 슘페터의 입장을 지지한다. 이렇듯 '교류와 합성'은 창조를 낳는 모태이다.즉, 교류에 의해 다양한 지식들을 얻고 또 그들을 잘 혼합하면 창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양한 교류 네트워킹의 효과가 창조 영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교류하는 내용이 다양하고 참신하다면 기대 이상의 엄청난 창조물을 얻을 수도 있다.'어떻게 창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면, 우선 '요리 메타포'와 '교류와 합성'이라는 두 메시지를 떠올리길 권장한다. 특히 창조 능력을 키우고 싶은 기업들에게는 더욱 강하게 권하고 싶다. 한 기업이 우월한 창조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성원 사이의 교류를 위한 '장(場)'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고, 참여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교류하도록 유인하는 인센티브 체계를 제공해야함을 알려준다. 이런 조건들이 선결되어야 조직구성원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다양한 아이디어의 합성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면서 구성원 사이의 신뢰도 더욱 높아져야 한다. 높은 신뢰에서 양질의 협력규범이 조성될 수 있고, 신뢰와 협력이 높은 곳에서 다시 창조의 원동력인 교류와 합성이 활발해질 것이다.'요리 메타포'와 '교류와 합성'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바로 창조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과연 참신한 재료들을 갖고 있는지 또 적합한 교류와 합성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근본이다. 창조는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항상 근본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네 범부(凡夫)도 얼마든지 창조경제의 리더로 거듭날 수 있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08-27 손동원

잠들어 있는 지방기록물 관리법

검찰이 경기도 성남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압수 수색한 지 나흘째이지만 대통령기록물을 확인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논란이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논란으로 옮겨 붙자, 국정원에서 대화록 사본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이후 대화록 실종사건으로 번진 것이다. 국정원 대선개입 관련 국회의 국정조사는 여야 사이의 설전만 오갈 뿐 사실관계가 규명될 조짐은 없어 보인다. 결국 대통령기록물 실종이라는 국가적 망신만 부각된 셈이다.일련의 사태 전개에서 국가기록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기록물 관리 수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특히 국가기록물을 정쟁의 재료로 사용하려는 의도는 우려스럽다. 이번 논란으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제정한 취지가 크게 훼손되었으며, 이번 대화록 공개로 대통령들은 가급적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기록물 관리 차원에서 보면 커다란 손실이다. 여야는 정파적 관점에서 물러나 국가기록물을 역사의 '귀감(龜鑑)'으로 삼으려 했던 본연의 취지를 되돌아보고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면 보완해야 할 것이다.지방의 기록물 관리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지방자치단체의 기록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기록보존소는 물론 관리를 위한 기구나 예산, 전문인력도 배치되지 않고 있다. 지방의 기록관리는 증명서 발급에 필요한 근거문서뿐이다. 공공기관이 생산한 문서의 대부분은 보존기간이 지나면 대부분 폐기되고 일부 영구보존문서만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된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지 20년이 되어가는데도 아직 기록의 지방자치화는 요원하다. 지방 자신의 기억을 중앙(정부)에 맡겨 두고 있는 셈이다. 지방 아카이브는 우리가 만들고 있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박물관이자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지방을 운영하면서 생산된 행정기록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 시민생활 기록물들이 체계적으로 수집, 분류, 보관된다면 행정업무의 효율화와 투명화, 그리고 시민들의 지방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지방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사실 지방기록물 관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2007년에 개정하면서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에 전국 16개 광역시도는 시·도 기록물관리기관의 설치를 의무화하고 기본계획을 수립할 것을 명시하였다. 지방기록물관리기관 설치와 운영에 필요한 경비 일부를 국가가 보조할 수 있다는 재정지원 근거도 명문화되어 있으며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을 배치하라는 추진 일정도 명시되어 있다. 지방기록보존소 설립 논의는 법 제정까지만 이뤄지다가 법 제정 이후 실종되고 만 것이다. 기록물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인식이나 의지부족이 한 요인이지만 재원부족을 내세워 지방정부의 계획을 반려한 중앙정부의 탓이 크다. 잠들어 있던 이 법을 깨운 것은 서울시이다. 박원순 시장이 열린 시정을 위한 주요 사업 중의 하나로 전국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기록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총예산 1천억원 중 500억원의 국비지원을 받는 문제로 정부와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기록 관리를 철저히 하게 되면 투명하고 책임있는 행정이 가능하다. 누구나 지방행정과 관련되는 기록을 열람할 수 있고, 그 기록을 토대로 연구자는 더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정한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는 첩경이다. 기록물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관리하지 않고서는 선진사회로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점은 최근의 대통령기록물 논란에서도 확인되었다. 지방 기록문화유산과 지방정부가 생산되고 있는 기록들을 과학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기록보존소 설립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이다. 정부는 법 제정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지방정부의 기록물관리기관 설립 요청에 적극적 지원으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08-20 김창수

감사할 줄 아는 나라

'물고기는 물을 얻어 헤엄치되 물을 잊어 버리고, 새는 바람을 타고 날되 바람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魚得水逝 而相忘乎水 鳥乘風飛 而不知有風) 중국 명나라 때의 고전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 역시 공기 속에 살면서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우리는 작은 것에 감사할줄 모르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아니, 작은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도 큰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어렸을 적 어른들로부터 6·25 전쟁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이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제 이 마저도 잊혀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런 생각도 든다.한국전쟁 당시 풀과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라면을 끓여 먹지, 왜 그걸 먹었느냐고 손자가 반문했다는 얘기를 듣노라면 할 말을 잃는다. 지난 달 정전 63주년을 맞아 국가와 민간단체들이 주도하는 각종 기념사업들이 펼쳐졌다. 특히 해외 참전 용사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눈길을 끌었다. 국군은 물론이거니와 유엔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발전된 대한민국이 은혜를 갚을 때가 왔다. 60여년 전 당시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현재 세계에서 경제 강국으로 자랑스럽게 남아 있을 수 있게 한 것도 모두 이들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6·25 당시 우리를 도왔던 해외 참전국은 전투지원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 등 모두 21개국 약 194만명이다. 이 중 필리핀 태국 에티오피아 남아공 콜롬비아 터키 등 일부 국가들은 현재 우리보다 형편이 많이 어렵다. 적어도 이런 국가 출신 참전 용사들만이라도 어떻게든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적극 마련해야 한다. 지난 달 터키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전 참전용사 큐축(83) 할아버지도 한국방문을 열망하고 있었다. 매년 추첨을 통해 방문자를 선정하지만 올해도 탈락해 무척 아쉬워 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으로부터 받은 '평화의 사도' 증서와 기념 메달 등을 보여주며 가보(家寶) 이상으로 자랑했다.1951년 1월 25~27일까지 용인 김량장에서 벌어졌던 중공군과의 전투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터키군 1개 여단과 중공군 2개 사단이 맞붙은 전투로 터키군은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병사 1명당 40명의 적을 무찔러 '백병전의 터키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3일간의 전투에서 확인한 중공군의 시체는 474명이고, 그들 대부분이 개머리판에 의해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린 모습이었다고 했다. 당시 터키군이 151고지에서 압승한 30분간의 백병전 상황은 UPI 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1953년에는 수원에 1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터키 장병들은 늘어나는 전쟁 고아들을 위해 군수품을 아껴 '앙카라'라는 고아원 겸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최근 수원시는 서둔동 341의 1(서호초등학교 인근)에 앙카라 학교공원 복원 조성공사를 마치고 6월 25일 개장식을 갖기도 했다.80~90세가 된 이들 벽안(碧眼)의 노병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사람들이다. 터키에서는 한국전 참전이 조금 늦어지자 '왜 형제의 나라를 빨리 돕지 않느냐'며 시위까지 벌였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2006년 삼성과 LG가 주미 대사관을 통해 6·25 참전용사들에게 2천대의 휴대전화를 제공해 화제가 됐었다. 롯데는 태국 현지 참전용사가 사는 '람인트라' 지역에 복지센터를 지어주고 태국 참전용사 보훈활동에 7억여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은 계속돼야 한다.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긍지를 훈장처럼 여기며 사는 이들에게 그 감사함을 두고두고 잊어서는 안 된다. 광복을 위해 청춘을 이 땅에 불살랐던 순국선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감사함이 있어야 우리의 역사와 우리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객원논설위원

2013-08-13 이준구

치킨게임 하는 여야, 답답한 국민들

49일간 계속됐던 장마가 끝났다. 이제 낮에는 35도가 넘는 폭염으로 가슴이 턱턱 막히고, 밤에는 지난해 우리가 익히 경험했던 '열대야 현상'이 우리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 것이다. 장마가 끝났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이제 '국지성 호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순식간에 쏟아져 이곳 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릴라성 국지성 호우, 예고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것만으로도 장맛비보다 더 강력하고 더 무서운 존재다. 장마가 끝나니 폭염이 오고 폭염은 열대야를, 열대야는 불쾌지수와 스트레스를 부르니 서로 연쇄작용처럼 맞물려 여름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변화무쌍한 요즘 날씨가 우리 정치판을 닮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8개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지 5개월이 지났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 국정원 여직원이 감금되었다는 뉴스로 대선 정국이 시끄러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8개월 전의 일이다. 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취임한지 5개월이 지났는데 그 국정원 여직원 사건은 지금도 대한민국 정치의 한 복판에서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웅크리고 있다. 누가 불어 넣었는지 모르지만 대단하게 질긴 생명력이다. 이런 와중에 국정원장이 불쑥 NLL 대화록을 공개함으로써 정치판은 노무현 전 대통령 NLL 포기발언으로 비화되고 정국은 큰 혼란 속에 빠져 버렸다. 결국 국정원 국정조사로 비화된 이 사건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침내 민주당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천막당사를 차리고 장외투쟁을 시작하는 것으로 비화됐다. 지난 토요일에는 서울 청계광장에서 '민주주의 회복 및 국정원 개혁촉구 국민보고대회'를 열며 마침내 촛불까지 들었다.이제 9월 정기국회가 어떻게 진행될지 이제 불을 보듯 뻔하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출몰해 이곳저곳을 깨부수는 국지성 호우처럼 정국은 또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혼미속에 빠져 들면서 순간 순간 국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결국 애꿎은 서민들만 열대야로 인한 불쾌지수성 스트레스에 정치성 스트레스까지 합해져 최악의 여름을 보낼 가능성이 높아졌다.왜 이러는 걸까. 우리 정치는 왜 이렇게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왜 국민들을 이렇게 복잡한 사건의 공범이 되도록 강요하는 걸까.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광우병 촛불시위로, 노무현 정부 때는 탄핵으로 정국은 지리멸렬했던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왜 서로 헐뜯고 깎아내리는데 당력을 소비하고 국민까지 끌어들여 국론을 분열시키는 걸까.미국이 대통령까지 나서서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고, 일본 아베 정부가 개헌을 불사하며 우경화 정책을 진행중인데 우리는 대통령선거가 종료된지 5개월이 지났는데 여전히 정쟁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이는 태생적인 문제에서 풀어야 할 것 같다. 연산군 4년인 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촉발했던 무오사화에서 숙청된 사람은 52명, 그중 사림 6명이 사형을 당했다. 승기를 잡은 훈구파는 환호작약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던 연산군이 훈구파를 그냥 둘리 없다. 6년뒤 갑자사화에선 숙청된 239명중 122명이 사형이나 부관참시를 당했다. 이번엔 훈구파가 거의 전멸됐다. 이후 이어진 기묘사화나 을사사화때도 사림파와 훈구파는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 구체적인 증거보다 '유학에 비추어볼 때 간신'이라는 식으로, 소문이 이러니 벌을 주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풍문탄핵'으로 정적을 공격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당파 싸움도 전통이라고 그것이 이어져 현재까지 내려온 것은 아닐까. '밀리면 죽는다'라는 생각이 정치인들을 막말로 무장한 전사로 만들어 서로 피를 봐야만 만족하는 근성을 갖게 만든 것은 아닐까. 500년된 망령들이 정치인들의 몸속에 들어가 좀비처럼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작금의 정치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개탄스러울 뿐이다./이영재 논설위원

2013-08-06 이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