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고객안전은 뒷전인 은행 군살빼기

은행권이 또다시 시끄러울 모양이다. 경기 부진의 장기화에다 저금리 여파로 시중은행들의 순이익이 2007년 15조원에서 지난해에는 8조7천억원으로 반토막난 터에 올 하반기에는 STX그룹 등 대기업 및 해외부문의 동반 부실에 기인한 대손충당금 격증이 예고된 때문이다. 은행경영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금융감독원은 수수료 인상 카드를 꺼냈다 여론의 몰매로 스타일만 구겼다. 비용 축소를 담보하는 군살빼기가 유일한 해법이다. 하나, 국민, 신한금융의 임원급여 삭감을 신호탄으로 뱅커들의 연봉 줄이기 도미노가 예고되었다. 은행원들의 평균급여는 1억원으로 지난 8년동안 무려 60%나 오른 데다 증권, 보험, 카드사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 이유이다. 인력 감축도 고려대상이다. 은행원수는 2002년 11만8천600여명에서 현재는 13만4천700여명이다. 그러나 은행노조가 반발할 가능성이 매우 커 구조조정은 시늉만으로 마무리될 개연성이 높다.점포 축소는 예정대로 진행될 전망이다. 시중은행들이 인구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7천800여 점포를 거느리고 있다는 판단이다. 영업점과 현금인출기(ATM) 이용자수가 현격히 줄어든 것은 또다른 이유이다. 인터넷뱅킹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직접적 배경이다. 그 중심에 모바일뱅킹이 자리하고 있다. 3월말 현재 국내 모바일뱅킹 등록고객수가 4천만명을 돌파해 불과 1년전에 비해 무려 70%이상 격증했다. 유무선 인터넷뱅킹 인구수는 8천940만명으로 하루 거래액수도 1조원을 능가, 전통적인 어음수표 결제규모보다 더 커졌다. 오프라인창구에서 온라인창구로, 면대면 업무에서 비대면 업무로 은행권의 결제시스템이 변한 것이다.초고속 통신망에 대한 대대적 투자와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보급 확대가 결정적이다. 시간절약은 물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접속할 수 있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은행들의 경쟁적인 인터넷뱅킹 우대전략은 금상첨화였다. 은행수지는 물론 국가경제적으로도 순기능이 커 정부도 사이버결제 제고에 한몫 거들었다.스마트폰 기능이 갈수록 업그레이드되어 조만간 '손안의 금융시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그러나 개인정보 유출이 도를 넘어선 데다 해킹과 고객을 위조 사이트에 접속하도록 유도해 돈을 가로채는 '피싱' 등 금융사기의 기승은 점입가경이다. 위변조된 무수한 모바일뱅킹 애플리케이션들이 사이버공간에 기뢰처럼 떠돌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해킹 앱을 이용한 계좌접속시도 건수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다. 특히 시중은행들은 해커들의 공세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IT보안전문가의 "신종 사이버 금융사기수법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고백은 충격적이다. "당신 돈은 밤새 안녕하신지요?"를 실감한다.공인인증서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인인증서란 전자결제와 전자정부 등 공공서비스를 이용할 때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일종의 전자인감이다. 그런데 공인인증서 구동에 필요한 '제큐어웹 엑티브엑스'에서 취약점이 발견된 것이다. 키보드 보안프로그램으로 보급한 '엔프로텍트'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안랩 창업자 안철수 의원까지 현행의 공인인증제를 개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젊은 금융소비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공인인증서 정부독점제도를 수정하는 내용의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을 발의한 상태이다. 한편에서는 현행 공인인증서제도가 국내 보안기술의 낙후를 부채질한다며 거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기관별로 제각각의 본인인증방법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 번잡과 혼란은 물론이고 중복투자에 기인한 자원낭비를 초래할 수도 있어 고민이 크다. 업계의 이해와도 맞물려 제도변경이 쉽지만은 않을 예정이다.금융업에서 신뢰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금융보안사고는 고객 개인과 금융사뿐 아니라 국가경제 기반마저 흔들 수도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소비자안전은 언감생심이고 창조경제와도 거리가 먼 은행권의 구태의연한 슬림화 타령에 실망이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07-30 이한구

'기업가 정신' 없는 사회적 기업

사회적 기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사회적 기업에 대한 기대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신(新)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적 문제를 비즈니스를 통해 해결하는 새로운 발상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몇 차례 심사위원 자격으로 사회적 비즈니스 모델의 공모전을 참관하게 되었다. 사회적 기업들은 과연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기회를 통해 큰 염려를 얻게 되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우리의 사회적 비즈니스는 과연 지속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가장 결정적인 염려는 사회적 기업은 있으나 사회적 기업가(social entrepreneur)를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놀라는 독자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적 기업 모델의 공모에 참여한 사람들이 바로 사회적 기업가가 아니겠냐고 반문할 것이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모 제안자들 중에는 상금을 노리는 소위 '공모 전문가'조차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이들은 실제 사회적 기업을 추진하지는 않고 상금만을 위해 온 동네 공모제에 참여하는 그룹이라는 것이다. 이들을 제외하고 나면 수익 모델이 성립되지 않거나 취약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측면으로 운영될 수 있지만 사회적 기업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고, 수익 모델이 성립하는 경우는 오히려 그 사업을 추진할 기업가는 없는 상황이었다.정부 지원을 통해 청년실업자와 노동취약계층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 모델은 당장 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업도 중장기적인 자립 능력이 없다면 기업으로 지속될 수 없다. 정부 지원이 없을 때를 대비하는, 그리고 자신의 사업체를 번창시킬, 그래서 현재보다 더욱 사회적 공헌을 높일 기업가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적 기업은 사회 운동과 동의어가 아니다. 사회적 기업을 복지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복지는 복지이고 기업은 기업이다. 사회적 비즈니스가 복지와 만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같은 목적의 사회적 행위는 아니다. 사회적 기업은 최소한의 자생력을 갖도록 항상 수익을 찾는 기업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의 해결과 기업으로서의 수익확보라는 두 측면을 적절히 만들어 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바로 '사회적 기업가'이다.사회적 기업을 제대로 살리려면 반드시 기업가정신을 불어넣어야 할 듯싶다. 충만한 기업가정신으로 사회적 기업을 키우고 성장시킬 능력을 가진 인력이 많아질 때, 사회적 기업의 패러다임이 우리 사회에서 한 기업유형으로서 정착하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 지원단체인 아쇼카 재단의 '빌 드레이트'가 보는 사회적 기업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정의하는 사회적 기업가는 저소득층에 일자리를 주는 기업가나 기업의 이익을 환경운동에 기부하는 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변화와 영리 활동의 산술적인 결합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사회적 기업가라 부르는 것이다.사회적 기업가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탄생해야 할 시점이다. 사회적 기업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서둘러야 할 과제로 생각된다. 세계적인 프로그램인 '어큐먼 펠로우십 프로그램'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은 사회적 기업가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목적으로 2006년에 시작되었는데, 비즈니스에 필요한 지식이나 네트워크 그리고 기능적이거나 전문적인 기술을 약 12개월 동안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선발된 사람은 7주간의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뉴욕사무소에서 받으며, 그들은 빈곤층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을 탐구하고 개인적인 네트워크, 리더십 기술 등을 연마한다고 알려진다.이 프로그램에 대해 지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본다. 초기 시점에서는 우선 대학과 연계해서 사회적 기업가 양성 프로그램을 출범시킬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사회적 기업에 '기업가정신'을 반드시 찾아 주어야 한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07-23 손동원

조선인의 발을 위해 몸바친 사람

벗은 조선인의 발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근대 복식사 연구자나 인천 연구자들에겐 익히 알려진 인천 삼성태(三成泰)의 대표 이성원(李盛園)씨가 그다. 맹인들을 위해 점자를 고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이성원을 전조선인이 각광했던 개량 신발인 '경제화'(經濟靴)와 10여종의 특허품을 발명한 '천재'로 여러 차례 특필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만능 접착제인 '만능호'의 전매특허를 받기 위해 태평양 건너 미국행까지 감행했던 인물이다. 이성원은 신발과 관련 기술에 관한한 일본인들의 기술을 능가한 장인(匠人)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기술 경쟁을 벌였던 선구적 경제인이기도 했다.이성원의 활동에 대한 관심과 환호는 세월에 묻혀 지금은 몇몇 회고담을 제외하면 잊혀진 전설이다. 그의 화려한 발명 신화가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한 원인이겠다. 또 그가 발명한 특허품에 관한 단편적 기사 외에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가 전무한 탓도 클 것이다. 그런데 이성원이 6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고일의 회고('仁川昔今')나 그가 아홉 살이 되던 해인 을미년(1895)에 인천으로 이주해 왔다는 이성원 자신의 회상기를 참고하면 그 생애는 성글게나마 복원할 수 있다.경기도 수원 태생인 이성원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5년 개항장 인천으로 이주하였다한다. 인천에 와서 관립일어학교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사정으로 입학을 포기하고 만다. 한문서당 공부도 가난 때문에 그만두고 어린 나이에 포목점과 운송회사 등에서 점원생활을 하였다. 이성원은 7년간 점원생활로 모은 돈으로 처음에는 고급가구인 목칠기(木漆器) 공장을 운영하였으나 사업이 여의치 않자 개화 문물 중의 하나인 양화점을 열기로 결심한다. 이성원이 약관의 나이에 개점한 이 양화점이 바로 한국의 근대 신발인 '경제화'를 탄생시킨 삼성태이다.이성원이 1911년에 고안한 경제화는 1913년에 특허등록이 이뤄졌다. 헝겊과 가죽을 이용한 이 발명품은 가벼우면서도 질길 뿐 아니라 값도 싸서 곧바로 전국에서 날개 돋친듯 팔려 나갔다. 짚신과 나막신으로 살았던 당시 한국인들에게 큰 인기 상품이었다. 이성원은 경제화로 상당한 돈을 벌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개량화'와 '삼성화'라는 신발을 개발하는데 투자했으며 제화에 필요한 재료의 개발에 나섰다. 그가 발명한 만능호(萬能糊)는 헝겊과 고무를 강하게 결합시키는 접착제의 일종이다. 이 접착제는 종래 실과 바늘로 신창을 붙이는 제화방식을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작비는 줄고 가격은 더욱 저렴해졌다. 그 외에도 튼튼한 신발바닥(만력저), 연결 쇠못(ㄷ자못), 신발 앞뒤에 넣는 고무(고무만주) 등을 발명하였다.그의 계속된 발명으로 동경박람회에서 수상을 하고, 일본군 병참부대에서는 공장과 제품을 조사하고 군수품으로 납품을 타진할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데 이성원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성공의 기쁨은 잠시였고 발명 자금은 늘 부족했다. 때로는 특허등록이 취소되는 커다란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한번도 특허권을 팔지 않았다. 고락을 같이한 동업자들과 공장 직원을 위해서였다. 재능과 끈기를 믿고 큰 자금을 지원한 재력가들도 있어 사세를 확장한 적도 있었지만, 재료의 개발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액을 호가하던 특허권도, 공장도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고 다시 빈손이 되었다.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의 신발을 개량하는 데 바친 그는 안타깝게도 61세 되던 해인 1947년에 쓰러지고 만다. 이 백절불굴의 삶은 어떤 성공신화보다 감동적인 기업가의 표상인 동시에 궁핍한 민족을 위해 고뇌했던 참된 지식인의 표상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성원의 삼성태가 있었던 애관극장 부근을 다시 둘러봐야겠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

2013-07-16 김창수

6·25참전 용사 터키 할아버지

터키를 여행 중이다. 지난 4일 새벽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한 이후 다시 비행기로 동남부 도시인 가지안텝을 거쳐 산르우르파에 와있다. 산르우르파는 아브라함이 태어난 도시로 성경에서 구약이 시작되는 곳이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동시에 이슬람에서도 이슬람의 선조인 이스마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래서 인근 하란과 함께 1년 내내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최대의 성지다. 산르우르파는 터키에서 가장 더운 도시 중의 하나로 오전에도 영상 40도를 넘는다.가지안텝에서 산르우르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만난 터키 청년은 우리를 낯선 도시로 안내했다. 버스터미널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어리둥절했을 우리에게는 고마움 그 이상이었다. 아들과 동갑인 26살이라는 그 청년의 반갑게 맞아주는 미소에는 으레 관광객을 향해 보여주는 형식적인 것 이상의 애정이 묻어났다. 그 청년 덕에 아브라함이 태어난 동굴과 아브라함의 연못 등 유적지들을 쉽게 돌아볼 수 있었다.며칠 전에는 배낭을 멘 채 도시를 걷다가 해가 저물어 길을 잃었다. 택시조차 보이지 않고 간간이 다니는 버스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히잡을 두른 젊은 여인이 다가왔다. 아내를 포함한 3명 분의 버스비를 내주고 호텔이 많은 시내까지 우리를 안내해줬다. 일일이 우리들이 마음에 드는 호텔을 선택할 때까지 같이 기다려주었다. 간호사로서 야간 교대근무하러 가다가 길을 헤매던 우리를 만났던 것이다. 터키인들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따스한 마음을 똑같이 나눠 가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엊그제는 호텔에서 나와 도시를 걷고 있었다. 자그마한 가게 앞에서 물 한 병씩을 사서 마시고 있는데 중년의 신사가 다가왔다. 자신의 승용차로 제법 멀리 떨어진 큰 공원에 데려다준 그는 퇴근 후 우리들을 또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공원을 산책하고, 케밥으로 점심도 때우고 터키 어린이들과 사진도 함께 찍으며 그를 기다렸다. 약속시간인 6시에 공원 앞에 나타났다. 집으로 우리 가족들을 데려갔다. 1남3녀를 둔 단란한 가정이다. 한국의 빌라와 비슷한 건물 4층에 자리 잡은 집은 아담하고 소박했지만 부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느껴졌다. 손님접대를 위해 분주해지는 가족들의 손길을 보면서 마치 한국에 와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한국전 참전 용사라는 사실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기에 우리 가족들은 따라나섰다. 왕년의 기자(?)정신이 아직도 몸에 배어서였을까?'하크 큐축'이라는 84세의 할아버지였다. 우리를 보자마자 '부산 진천 서울'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자신이 싸웠던 도시들을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6·25 전쟁 당시 1만5천명의 터키 참전 지상군 중 한 명이던 큐축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이 보내준 '평화의 사도' 증서와 훈장을 내보이며 자랑스럽게 우리를 맞았다. 산르우르파 주에서 참전용사는 할아버지를 포함해 4명이 남았단다. 얼마 전 추첨을 통해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탈락해서 아쉬웠는데 우리를 만나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한국전에서 이들은 '우스크다라'라는 터키 민요를 부르며 향수를 달랬다. 터키는 한국전에서 전사자 721명, 부상자 2천493명, 실종 175명, 포로 234명 등 총 3천623명에 이르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대한민국과 자유를 위해 흘린 피다.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때 함께 품었던 돌궐족, 고구려와 연합해 당나라를 물리쳤던 돌궐족, 6·25 참전, 2002 월드컵. 이렇게 해서 투르크(돌궐)족과 우리는 형제라고 한다. 큐축 할아버지께 아들과 같이 큰절을 올렸다. 수원에도 앙카라 공원을 만들었다고 말해줬다.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4명의 아들도 아버지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다. 이번 터키여행 중 6·25 참전용사 할아버지를 현지에서 우연히 만난 것은 여행 이상의 더 값진 것이었다./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객원논설위원

2013-07-09 이준구

똑같구나! 똑같아

정치는 피도 눈물도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는 내일 반드시 적이 된다. 국가의 미래도, 국민의 안위도 안중에 없다. 자신들의 그 알량한 정치생명, 그걸 지키기 위해 위기의 순간만 넘기면 된다. 시간이 흐르면 물러터진 국민들이 모든 것을 하얗게 잊어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번 NLL 파문으로 누가 공격을 더 잘하고 누가 역풍을 맞는지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국민들이 속으로 골병이 들고 있다는 것. 세상에 비밀은 없어 언젠가 밝혀진다는 것. 정치인은 다 똑같다는 것. 그래서 상처는 국민만 입는다는 것.국론은 이미 분열을 시작했다. 대선이 끝나고 잠시 멈칫했던 국론은 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사건을 기점으로 균열 조짐을 보이더니 NLL 논란으로 완전히 쫙 갈라졌다. 인터넷상에서는 이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내전이 진행중이다. 보수와 진보 사이트간에 목숨을 내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슈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는 저 수많은 저주의 댓글들. 여기에 언론들이 가세하고, 학자를 빙자한 정치교수들이 뛰어들고, 정치인들이 싸움을, 갈등을, 증오를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 국가정보원 국정조사로 수세에 몰려있던 정국을 NLL 논란을 통해 공세로 바꾸려다 역풍을 맞는 새누리당, 대선 패배 책임론으로 바닥까지 추락했던 분위기를 NLL 논란을 통해 극적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민주당 친노파, 밀리면 안철수 신당에 끝장이라는 위기의식을 돌파하기 위해 '갈 데까지 가보자'며 몸부림치는 민주당 비노파. 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렇게 꾸역꾸역 판을 키웠는지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NLL 파문으로 새누리당 지지율은 41%에서 37%로 떨어졌고, 민주당도 반짝 상승 후 다시 18%까지 하락했다. 양당 모두 지난 대선 이후 최저다. 그러나 지지 정당 없는 무당파는 대선 이후 최고치인 41%까지 올랐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패자고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들만 늘어났다는 뜻이다.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나는 NLL 문건 공개를 두고 국정원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은 안기부 시절부터 태생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즐기는 부류들이다.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정치인 사찰, 도청, 언론감시 등은 그들의 주특기였다. 그럼에도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북한의 대남공작을 저지하는 최후의 교두보라고 당연시여겼고 이것이 어느 정도 우리 사회에 용인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 비극의 시작이고 이를 인정한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한때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총풍이나 북풍의 진원지도 그 곳이었고, 정치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식당에 버젓이 녹음기를 설치한 것도 그 곳이었다. 유신정권, 전두환정권 때는 두말할 것도 없고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시절과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 정부시절, 그리고 노무현 정부시절에도 국정원은 버젓이 정치에 개입했었다. 문민정부 권영해, 국민의 정부 임동원, 신건 등 전직 국정원장들은 정치개입으로 감옥까지 갔다오지 않았던가.NLL 문건 공개가 문제인지 이전 정부의 국정원 선거개입이 더 큰 문제인지 일일이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한 듯한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점차 엉뚱한 곳으로 번지고 급기야 우리 사회가 두 패로 나뉘어 마치 해방정국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장 이 국론분열이 지겹다. 45일간의 국정원 국정조사 기간 내전은 얼마나 치열해질 것이며 국민들이 겪을 내상은 얼마나 클지 벌써부터 끔찍하다. 특히 남남갈등으로 인한 상처가 주홍글씨처럼 고스란히 국민의 가슴에 각인되는 게 더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정치인들 중 이번 전투로 인해 최소한 승자와 패자는 분명 없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 사이만 갈라놓고 자신들은 교묘한 협상술로 '헤쳐모여'를 하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폭풍이 지나간 후 우리에게 책임을 전가한 '한통속'의 정치인들을 찾아내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이영재 논설위원

2013-07-02 이영재

눈덩이 국가채무와 정치

선진국들의 양적완화 출구전략에 즈음해 국가부채 문제가 다시 주목되고 있다. 작금들어 각국의 나라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미국은 시퀘스터의 적용으로 향후 10년 동안 총 1조2천억 달러의 재정지출을 줄일 계획인데 천문학적인 재정적자가 직접적인 배경이다. 미국의 정부부채는 작년 말 현재 16조4천억 달러로 국가부도지경인 법정 상한선을 돌파한 것이다. 기축달러국의 지위를 이용해서 달러화를 남발한 것이 화근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경기부양을 구실로 해마다 1조 달러 이상씩 빚을 불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일본은 국가부채가 970조엔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최고(205.3%)여서 재정파탄 내지는 금리 상승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정부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눈치이다. 아소 다로 재무상의 "엔화를 찍어서 빚을 갚으면 된다"는 발언이 시사하는 바 크다.지난 4월 박근혜 정부는 대선공약 이행을 위한 재원마련을 목적으로 17조3천억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했다. 한국은행 잉여금 2천억원과 세출감액 3천억원, 세계(稅計)잉여금 3천억원을 제외한 15조8천억원은 국채발행을 통해 조달했다. 마이너스통장의 대출한도까지 융자받은 것이다. 덕분에 중앙 및 지방정부, 국민연금 등의 빚이 2003년 165조원에서 10년만에 3배 가까이 증가, 부채규모가 480조4천억원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채무비율은 36.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02.9%에 한참 못미친다.정부는 우리나라의 부채수준이 양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시장연구원 조성원 박사의 "한국과 네덜란드 등 소규모 개방경제국들은 정부부채비율을 35.2% 이내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목된다. 경제규모가 작고 금융시장이 개방된 국가일수록 외부 충격에 취약한 만큼 부채비율을 낮게 유지해야 하는 탓이다. 부채증가속도가 빨라지는 점도 걸림돌이다. 시티그룹의 경고에 눈길이 간다. 새정부가 복지예산을 늘리는 대신 사회간접자본 지출을 줄이기로 한 것은 정부부채를 더 키울 수도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지난 1일 감사원의 발표는 충격이다. 한국전력, LH(한국토지주택공사), 도로공사, 수자원공사 등 비금융 공기업 9곳의 부채가 2007년 127조9천억원에서 2011년에는 283조원으로 무려 121%나 격증한 것이다. 4대강 사업, 세종시 및 보금자리주택 건설 등 국책사업을 공기업에 떠넘긴 것이 패착이었다. 물가안정을 위한 공공요금 인상억제는 공기업의 재정건전성을 크게 훼손했다. 국회동의 등이 요구되는 국채발행에 비해 통제정도가 약한 것도 원인이었다.295개 공공기관으로 확대하면 부채규모는 2011년 기준 493조4천억원으로 점입가경이다. 2008년 290조원에 불과했던 것이 이명박정부 4년 동안에 200조원 넘게 늘어난 것이다. 공공기관의 채무는 넓은 의미의 정부의 빚이어서 이를 합치면 국가부채 토털은 1천조원에 육박한다. 또한 정부채무 대비 공공기관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현재 118.3%로 이미 경고등이 켜진 실정이다. 빚의 대물림 시비는 언감생심이고 조만간 저금리, 저물가체제가 동요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미국처럼 돈을 찍어서 빚을 상환할 수도 없고 고민이다.공공경비가 점증하는 것은 사회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양극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는 재정적자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정치인을 비롯한 관료집단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기업가들이 이윤극대화를 목표로 하듯 정치적 비즈니스맨들은 권력의 극대화에 주력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하기위해 나라 곳간을 축내는 약속들을 확대재생산한다. 더 많은 돈은 더 큰 권력을 의미하기에 관료들 또한 예산확대에 적극적이다. 심지어 관료들은 정치지도자와 대결에서도 종종 승리하곤 한다. 카터와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의 '작은 정부'공약이 공약(空約)으로 마무리된 것이 상징적인 사례이다.현대정치체제 자체가 재정적자를 부추긴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의 지적에 눈길이 가는 이유이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06-25 이한구

벤처는 한국경제의 첨병이다

한국 경제는 중소기업에 관한 몇 가지 당면과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들은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잉태되어 고착된 문제들로서 해결책이 그리 만만치 않다. 첫 번째 문제는 중소기업의 낮은 혁신성 문제이다. 중소기업의 혁신을 높이려고 해도 자체적인 혁신 능력이 부족하고 자원 확보 역량도 떨어지는 편이다. 두 번째 문제는 대·중소기업 사이의 구조적 문제이다. 오랜 하청 관행이 굳어져서 중소기업이 스스로 성장을 계획할 수 없다는 한계가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한국 경제의 성장모델이 통했던 '표준화' 시대 이후에 대한 대비 문제이다. 표준화 시대에서는 반도체 및 자동차를 비롯한 조립 산업에서 성공하고 있지만, 미래 시대가 요청하는 창조 경쟁에 관한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이 과제들은 공통적으로 중소기업의 혁신 능력이 강해질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중 99%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한국 경제의 성장 역사에서 잉태된 구조적 문제들로 인해 혁신 능력을 좀처럼 향상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중소기업의 역할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중소기업을 경제 중심에 세우기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판세를 바꿀 수 있는 선도 종(種)이 필요하다. 생태계 전체를 변화시키는 종을 생물학에서는 '생태공학자'라고 부른다. 생태공학자는 생태계 구조를 바꾸거나 다른 종들의 생존조건을 바꾸는 기능을 맡는 종자(種子)이다. 구체적으로, 한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변경시키면서 생태계 전체의 운명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생태공학자이다. 사막의 다습성 식물, 초원의 들쥐, 북태평양 연안의 해달, 땅속 공간의 지렁이 등이 잘 알려진 생태공학자들이다. 한 생태계는 생태공학자에 의해서 존립 기반이 굳어지고 미래 진로를 개척한다. 이렇듯 생태공학자는 생태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다.현재 한국 경제에서 생태공학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기업은 바로 벤처기업군(群)이다. 중소기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넓혀지기 위해서는 현재의 판도를 바꾸려고 전선에 나서는 첨병이 필요한 것이다. 창조와 혁신으로 승부하는 중소기업의 상징인 벤처기업군이 그 첨병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벤처가 첨병 역할에서 성공한다면, 중소기업을 경제의 주역으로 도약시키는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벤처는 단순히 자신만의 변화를 생각하는 종(種)이 아니며, 경제생태계 서식조건 자체를 변화시킬 역량을 갖고 있다. 한국 경제가 안고있는 당면과제인 부품소재 분야의 발전, 경제체질의 개선, 창조적 경쟁력의 공급 등의 과제들도 벤처를 통해 선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한국 경제의 바람직한 미래 진로는 대기업의 경쟁력이 유지된 상태에서 중소기업의 혁신이 커지는 진로이다. 실제로 창조경제에 들어서면서 '구글' 혹은 '페이스북'과 같은 신생 창업기업의 혁신성에 의해 산업 판도가 바뀌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신생 벤처기업에 의해 이런 혁신성이 보완되는 날이 빨리 와야 하며, 그것은 벤처에 의해 가능하다. 또한 우리가 강한 조립완제품 분야를 보더라도 일본과 독일 등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볼때, 부품소재기업의 경쟁력은 정말 중요하다. 이 부품소재 분야의 경쟁력도 벤처기업의 역량에 의해 해결된다.'벤처'가 생태공학자로서 역할을 한다면, 한국 경제의 당면과제들에 대한 해결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믿는다. 물론 현재 벤처기업군이 보여주는 단면과 기대 역할 사이에는 간격이 있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벤처의 위상 정립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중소기업을 전면에 내세우는 동력이며, 나아가 한국 경제를 도약시킬 지름길인 것이다. 하루빨리 벤처가 한국 경제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해야 하는지, 또 새롭게 맡을 역할변화를 어떻게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놀랍게도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지름길이 거기에 있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06-19 손동원

'걸어다니는 도서관'과 마을 만들기

도서관 관련 검색을 하다보니 '걸어다니는 도서관'사업을 확대한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새로운 방식의 이동도서관으로 지레짐작했는데 실은 주민들이 집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마을 도서관을 건립하는 사업이었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 아니라 '걸어서' 다니는 도서관이었다. 요즘말로 '낚인' 셈이다.진짜 '걸어다니는 도서관'은 노인들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진 것이다"라는 소말리아 속담이 있다지 않은가? 노인을 도서관에 비유한 소말리아 속담은 사람이란 사람에게 배우고 사람에 기대어 산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만든다. 사람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원천인데, 갑년(甲年)을 넘기고 살아온 분들이 온축한 경험과 지혜야말로 생생한 책이다. 꼭 공부를 많이 한 박식한 노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도서관'이라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평범하게 살아온 분들의 삶과 경험도 소중하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온 분들의 삶과 꾸밈없는 이야기가 오히려 감동적인 경우가 많다.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갈등의 조정자요, 난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설화 속의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했을 경우 '수염이 허연 백발 노인'이 나타나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경우가 많다. 마치 일상생활에서 할머니가 만능해결사였듯이. 지혜의 상징이었던 노인에 대한 존경이 급격히 옅어진 것은 농경 공동체가 해체되고 성장 만능주의사회로 바뀐 탓이다. 노인 대신 '어르신'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이나 고령(高齡)이라는 대신 '실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기실 노인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그런데 몇 년 사이 '욕망의 도시'에서 중요한 성찰의 흐름이 일고 있다. 투자의 수단으로 여기던 집과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땅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만들어 보려는 움직임이다. 아직은 침체된 부동산 경기 때문에 재개발의 대안으로 선택한 고육지책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서의 마을의 문제를 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하고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해가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마을 공동체 회복 과정에서 이야기꾼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을 이야기꾼은 마을이 변해온 이야기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음유시인이다. 한 마을에 오랫동안 살아온 분들, '걸어다니는 도서관'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마을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축제나 문화행사를 기획할 수 있다.이야기는 서로 다른 세대가 대화하는 마당이 될 수 있다. 핵가족화로 인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생활해보지 못하고 자란다. 이들은 부모세대의 지혜에만 의존해야하니 생각이나 간접체험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마을 단위로 기획해서 추진해봄직하다. 도시 곳곳에 어른들의 이야기가 꽃핀다면 그곳은 '마실'이 된다. 이런 이야기 프로젝트는 아이들에게 사유와 경험의 폭을 넓혀 줄 뿐만 아니라, 꼭 동화책이나 설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구술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직접 보고 체험한 이야기도 재미있는 이야깃 거리이다. 우리말의 특성에 맞는 생활 언어를 익히게 하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의 리듬은 사실 민요의 가락과 같다.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분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같은 구술채록사업은 지자체 단위별로 추진해야 한다. 광역시도는 광역시도, 기초 자치단체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과 별개로 마을 단위에서 진행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집안 어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걸어다니는 도서관'들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 이야기를 기록하는 구술채록 사업, 이야기를 편찬하는 마을지(誌) 사업이 마을마다 이뤄졌으면 좋겠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06-11 김창수

국어사랑은 나라사랑

"버카충은? 솔까말 화떡녀 근자감 깜놀!"어느 청소년이 휴대전화로 대화한 문자의 내용이다. 얼핏 봐서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버스카드 충전은?(버카충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솔까말) 화장 떡칠한 여자의(화떡녀) 근거없는 자신감(근자감)에 깜짝 놀랐어(깜놀!)"라는 뜻이란다. "엄마가 문상 10만원을 주셨어." 나는 어떤 어머니께서 나이 어린 학생에게 문상을 가라고 10만원씩이나 주는지 놀랐다. 그런데 '문상'이 문화상품권이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문상'이라는 단어가 상품광고에서도 문화상품권의 줄임말로 널리 쓰이고 있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의 잘못된 띄어쓰기는 아예 옛 이야기가 됐다.설명 없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해괴망측한 줄임말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인다. 이 같은 줄임말을 쓰지 않으면 서로의 대화에서 소외된단다. 오히려 시험볼 때나 대화할 때 원래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공공기관에서 우리말을 홀대하는 풍조도 여전하다. 2002년 'Hi 서울'로 영문표기를 시작한 이후 지자체마다 '다이내믹(Dynamic) 부산', '컬러풀(Colourful) 대구', '프라이드(Pride) 경북' 등 영문으로 된 구호 일색이다. 인기 드라마의 제목 '차칸 남자'가 논란을 빚은 끝에 '착한 남자'로 바로 쓴 적도 있다. KT, KB로 시작된 회사 이름의 영문표기에 따라 농협이 NH로 탈바꿈한 것에는 실소가 터졌다. 우리말과 글의 훼손 상태는 심각한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우리말의 뒤틀림 현상은 더 있다. 커피전문점에서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더니 종업원은 "7천원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이어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진하시면 물을 더 타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상대방을 높여야 할 것을 물건인 커피를 높이고 말았다. 병원에서 혈압을 잰 간호사가 "아버님, 혈압이 높게 나오시네요"라고 한다. 누구의 아버님이라는 건지 아무한테나 '아버님'이라 하고, 또 혈압이 높게 나오신단다. 보험회사 광고에서도 "벌금이 나오셨다고요?"라고 말한다. 벌금도 존칭을 받는다. 사람보다 물건을 존대하는 꼴이다. 행사장에서는 "00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라고 한다. 말씀에 존칭을 한 것은 애교일까?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영어연설을 하면서 40차례나 박수를 받은 날 대전의 어느 대학교가 국어국문학과를 폐지했다는 소식이 함께 들려왔다. 국어국문학과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과를 '한국어문학과'로 통폐합했다. 이제 이 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가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 폐지이유는 취업률이 낮아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대학뿐 아니라 이미 여러 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를 폐지하거나 통폐합했다. 어느 학교는 문화콘텐츠학과로 바꾸기도 했다. 학문은 제쳐두고 대학을 무슨 취업전문 기술학원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슬프다. 국문과를 폐지하는 대학은 점차 늘어날 태세이고, 역사교육은 왜곡되는 요즘이다.언어와 역사를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특히 국어국문학은 인문학의 기초다. 우리말을 제대로 가르치고, 올바로 익히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일제 36년간 우리말이 사라졌던 아픈 기억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하려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마침내 광복을 이뤄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루라도 문자와 언어생활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막중한 책임이다. 올해부터 22년 만에 한글날을 공휴일로 되찾은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1970년대 각급 학교 정문에 붙어 있던 '국어사랑 나라사랑'이라는 현수막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객원논설위원

2013-06-04 이준구

백령도에서 생각해본 해양설화들

지난주에 예술인들과 함께 백령도를 다녀왔다. 이번 백령도 기행은 분쟁의 현장이 된 서해의 섬들을 평화의 섬으로 전환시키려는 정부와 인천시의 사업에 예술인들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두무진의 절경과 콩돌해안의 잔자갈, 사곶해변의 탄탄한 모래밭은 서해의 파도와 해풍이 창조한 백령도의 관광자원이다.백령도의 새로운 명물인 심청각은 소설 심청전과 그 근원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관광콘텐츠이다. 맹인 심학규의 딸 심청은 아버지가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하면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화주승의 말을 믿고 시주 약속 때문에 중국 뱃사람들의 제물로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용왕의 도움으로 용궁에서 죽은 어머니를 만나고 연꽃으로 피어나 인간계로 환생하여 황후가 되고, 맹인잔치를 베풀어 재회한 아버지가 소원대로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백령도의 심청각은 효행으로 맹인이 눈을 뜨게 된다는 맹인개안(盲人開眼)이야기를 강조하여 심청이 바다에 몸을 던지는 모습의 조형물을 세우고 전시실에는 여러 효자효녀 관련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심청각의 콘텐츠는 효행의 교훈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여운은 적었다. 그것은 심청설화의 중요한 모티브인 해저 세계를 다녀온 용궁설화(龍宮說話), 그리고 저승으로 갔던 사람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환생설화(幻生說話)를 간과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백령도가 가진 스토리텔링 자원은 신라 진성여왕 때의 괴물 퇴치담인 거타지(居陀知) 설화와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되는 작제건(作帝建) 설화이다. 거타지 설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거타지는 신라 진성여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로 가던 아찬 양패의 호위 무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신라 사신 일행이 당나라로 가던 중 풍랑이 심해져서 백령도(鵠島)에 머물고 있던 중 서해의 해신인 '약'(若)이 승려의 꼴을 한 괴물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타지는 해신을 죽이려는 사미승을 쏘아 죽인다. 해신은 은혜의 보답으로 딸을 꽃으로 변신하게 해 거타지에게 준다. 당나라에서 무사히 돌아온 거타지는 해신이 준 꽃을 사람으로 변신시켜 아내로 맞이하여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이 거타지 설화는 고려 태조 왕건의 가문설화인 작제건 설화의 모티브와 흡사하다. '고려사'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왕건의 조상인 작제건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는데, 상선을 타고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서해의 용왕이라는 노인을 만났다. 용왕은 여래불(如來佛)로 변장한 요괴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작제건은 용왕의 요청으로 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인다. 용왕은 그 보답으로 딸을 주어 작제건은 용왕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승려를 가장한 요괴의 등장, 그로 인해 곤경에 빠진 해신이나 용왕, 요괴 퇴치의 보답으로 꽃으로 변신한 딸을 준다는 이야기는 작제건 설화가 거타지 설화와 뿌리가 같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두 설화에 나타나는 공통요소들, 위기에 처한 용왕이나 해신이 등장하고, 꽃을 통해 여인이 환생한다는 이야기는 다시 심청전(설화)으로 이어지고 있다. 백령도는 이들 설화의 원형에 해당하는 거타지 설화를 주목하고 백령도의 스토리로 가꿔 나갈 필요가 있다.이들 위기 극복의 설화가 모두 아름다운 백령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지금은 백령도가 분단의 볼모가 되어 남북대결의 높은 파고에 흔들리고 있지만, 거타지와 작제건, 심청과 같은 설화 속의 주인공들이 커다란 위기를 타개한 것처럼 남북의 대결, 서해 도서들이 겪고 있는 위기가 예술인들이 백령도에서 발신하는 평화의 메시지로 극복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고 보면 서해를 지켜주는 신들은 더 있다. 강화도 바람의 신 손돌, 연평도 조기잡이의 신인 임경업, 덕적군도 새우잡이의 신 망구할매 등과 같은 서해의 여러 해신들도 다시 살펴봐야 하겠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05-28 김창수

부(富)의 대물림 심화

'공시파차이(恭喜發財)''부자 되세요'란 의미로 중국인들이 요즘 가장 많이 쓰는 인사말이다. 모든 이들이 친소(親疎)를 불문하고 상대방에게 건네는 덕담인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식사하셨어요?'를 뜻하는 '치판레마(吃飯了 )'가 일반적이었는데 중국경제가 상당히 성장했다는 방증이다.국내적으로도 '부자 되세요'란 표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새해맞이 인사로 특히 압권인데 젊은층일수록 많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부자는 저승사자(?)까지 부릴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부(富)야말로 현대판 로망이자 메시아인 것이다. 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블룸버그는 올해도 어김없이 세계 10대 거부들을 선정했는데 1위는 멕시코의 통신재벌인 카를로스 슬림이다. 1940년에 레바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슬림은 26세에 부친에게서 받은 40만달러로 사업에 착수해서 세계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 되었다.기부천사 빌 게이츠가 2위, 스페인 국적의 인디텍스 회장 아만시오 오르테가가 3위를 기록했다. 오르테가는 가난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13세부터 셔츠가게 사환으로 사업과 인연을 맺은 이래 자수성가해서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ZARA)'를 세계 1위로 키웠다.4위인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은 1956년에 단돈 100달러로 주식투자에 나서 미국최고의 갑부로 등극했으며 자린고비로 유명한 이케아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17세에 사업계에 투신한 이래 조립식(DIY) 가구 생산으로 5위에 올랐다. 코크인더스트리즈의 코크형제가 각각 6위와 7위, 시스템 개발업체인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엘리슨이 8위를 기록했다.'루이비통'으로 유명한 프랑스 LVMH의 창업자 베르나르 아르노와 미국 최대 할인매장인 월마트의 상속녀 크리스틴 월튼이 각각 9위와 10위에 랭크되었는데 세계 10대 거부들 중 골드스푼을 들고 태어난 경우는 미국 석유재벌 코크형제와 크리스틴 월튼 등 3명에 불과하다. 세계최고부자의 70%가 당대에 세계정상의 거부로 등극한 것이다.일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확인된다. 유니클로의 창업자 야나이 타다시는 1984년에 부친이 운영하던 양복점 점원으로 출발해서 티셔츠를 팔아 일본최고의 부자로 부상했다. 주류메이커 산토리의 3세 오너 노부타다 사지가 2위, 한국계 교포 3세이자 소프트뱅크 창업자인 손정의가 3위를 기록했다.4위인 히로시 미키타니는 1997년에 엠디엠을 창업해서 일본최대의 인터넷쇼핑몰인 라쿠텐으로 성장시킨 이력의 소유자이다. 게임재벌 산쿄의 설립자 쿠니오 부수지마가 5위, 모리트러스트의 아키라 모리가 6위를 기록했으며 일본 파친코업계의 대부이자 역시 재일교포인 한창우가 8위에 랭크되어 있다. 일본 10대 부자 중 부를 상속한 경우는 산토리의 노부타다와 일본 부동산 거물인 모리 아키라(6위) 등 2명에 불과하다. 일본 최고부자 10명 중 8명이 당대에 치부한 것이다.일본을 비롯한 세계는 앙트레프리너(혁신적 기업가)들에겐 여전히 신천지인 것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재벌알리미 CEO Score는 국내 10대 부자로 삼성 이건희 홍라희 회장부부, 현대자동차 총수 정몽구·의선 부자, 서경배 태평양 오너와 롯데그룹의 신동빈·동주 형제, 이재현 CJ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 등을 거명했다. 삼성과 현대그룹 설립자의 직계후손들이 각각 3명이고 롯데가 2명을 기록했다. 최태원은 SK그룹 창업자 최종현의, 서경배는 태평양화학 창업자 서성환의 직계비속이다.국내에는 자수성가를 통해 당대에 '탑10'에 진입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다. 최고부자 순위를 50위까지 확대해도 세습부자 비중은 무려 78%에 달해 세계는 물론 일본의 60%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과거보다 대물림 부자비중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중산층이 빠르게 엷어지는 것은 설상가상이다. 한국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닌 것이다. 민초들의 '부자 되세요'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05-21 이한구

누가 창조경제의 주역인가

창조경제의 주역은 누구인가? '창조' 능력을 가장 잘 갖춘 기업군(群)이 주역이 될 것이다. 지난 산업화 시대에서는 대기업군이 주역이었다. 그들은 선진국을 따라잡을 경제추격의 견인차로 선택되어 자원 집중의 혜택을 받았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경제 추격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제 추격 능력의 가치는 떨어지고 오히려 창조 능력이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는 새로운 주역이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이 새로운 역할에는 '벤처기업'이 가장 적임자이다. 벤처는 혁신성으로 무장하여 신(新)성장동력에 도전하는 기업군으로서, 창조 개념과 가장 잘 어울리는 기업유형이다. 벤처가 본연의 능력만 발휘한다면 창조경제의 견인차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창조경제를 선도하는 애플, 페이스북, 구글 등과 같은 신흥 강자들 모두 벤처 출신인 것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선진경제에서는 벤처가 창조경제의 첨병으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이렇게 세계적으로 벤처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지만, 우리 벤처가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아직 미지수이다. 양적으로 보면 벤처기업은 3만개에 육박할 정도로 확대되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벤처 출신의 일류 기업은 아직 없는 실정이고, 또한 벤처생태계 조건도 좀처럼 기대하는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뒤돌아보면 우리 벤처 영역은 적지 않게 변질되어 왔다. 현재 벤처기업 중, 과연 혁신 역량 측면에서 손색이 없는 기업이 어느 정도 되는지 돌아봐야 한다. 이 점이 바로 한국벤처에 '리셋' 수준의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리셋'은 컴퓨터를 초기화하듯이, 초기 벤처의 원형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면 창조적 기술로 무장하고 도전정신이 충만한 기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며, 또 이를 통해 벤처기업군을 진정 창조경제를 견인하는 기업모델로 만들자는 제안이다.벤처 리셋의 출발은 무엇보다 벤처의 인증기준을 높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벤처 타이틀을 얻었지만 혁신능력은 약한 소위 '무늬만 벤처'를 제외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벤처 브랜드에 '명품 혁신기업'으로서 차별적 위상을 주고, 벤처가 되는 문턱에 엄격한 인증기준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벤처의 차별화' 조치는 외형상 벤처기업의 수를 줄이게 될 것이지만, 일류 혁신기업의 표본을 설정하는 의미가 크다. 이렇게 벤처를 차별적 기업군으로 만드는 것은 한국경제에서 결코 작은 의미가 아니다. 특히 우량 종(種)을 선별해서 벤처라는 브랜드를 주고 그들을 '특별하게' 대접하는 방안은 창조적 기업이란 무엇인가를 확고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낼 것으로 믿는다. 또한 선별 문턱은 엄격하게 관리하지만 일단 선별된 벤처기업에는 필요한 지원을 과감하게 제공하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일류를 일류로 선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며, 그 일류에 대해서는 과감한 지원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한국경제에서 우량 벤처기업이 부족한 이유에는 벤처정책이 그동안 시혜성 입장을 취했던 탓이 있다. 물론 일반 중소기업에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시혜성 입장이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벤처에 이런 시혜성 입장을 가질 필요는 없다. 벤처는 새로운 먹거리를 개척하는 기업 유형이므로, 성장의 견인차로서 치열한 경쟁력을 갖도록 유인해야 한다.벤처가 혁신 중소기업의 선도 종(種)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갑을(甲乙)관계 문제도 많이 해결될 수 있다. 관행처럼 굳어진 하청관계가 변하려면, 슈퍼 갑(甲)으로 행세하는 대기업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우량 을(乙)에서부터 도전이 시작되어야 한다. 벤처가 그 우월한 을로서 거래 관행의 변화를 주도한다면, 한국 경제생태계에서 새로운 대·중소기업간 거래 모델이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창조경제의 새 주역인 벤처의 '재탄생'에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05-14 손동원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대기업이 운영하는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을 폭행했다는 대기업 간부가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이 대기업 상무의 이력은 인터넷수사대에 의해 신상이 털려 그와 그의 가족은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을 빗댄 웃기면서도 서글픈 패러디물이 인터넷에서 홍수를 이뤘다. 유명 호텔 주차지배인의 뺨을 때린 제빵회사 사장 역시 끔찍한 신상털기를 당하고 결국 회사문을 닫았다. 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의 실수로 인해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공교롭게도 최근 일어난 이 두사례를 들어 언론마다 '을의 반란이 시작됐다'고 난리다.이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자. 대기업 상무와 제빵회사 사장은 과연 갑인가. 앞에 잠깐 언급했듯이 공교롭게도 라면사건이 일어난 비행기 회사나 호텔은 우리나라 10대 재벌에 들어가는 회사들이다. 단 한번도 '을'일 수 없는, 늘 '갑'의 위치에 있었던 회사인 것이다. 이면에 비행기 안에서 라면 한 그릇을 시키는 바람에 험한 꼴을 당했던 대기업 상무는 비행기를 타기 한달여 전 상무로 승진했다고 한다. 어쩌면 상무로 승진한 후 첫 외국출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장시절에도 출장은 다녔겠지만 아마도 부장 신분으로는 사내 규정상 라면을 끓여주지 않는 이코노미석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상무 승진 후 첫 해외출장에 비즈니스석을 탔을 터이고 과연 말로만 들었던 비즈니스석에서 라면을 줄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처음 먹어본 라면이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새로 끓여달라고 요구했을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다보니 승무원 입장에서 약간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언성을 높였을 것이고 급기야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제빵회사 사장도 마찬가지다. 한번 이런 가정을 해보자. 호텔에서 바이어 상담이 있었는데 그는 교통체증 때문에 늦었다. 겨우 호텔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꽤 흘렀다. 아주 중요한 상담인데 주차가 문제였다. 기사를 데리고 오지 않은걸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주차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때 호텔직원이 다가와 차를 다른 곳으로 빼달라고 했을 것이다. 굉장히 정중하게 90도로 절을 하고 빼달라고 했는지 수신호로 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호텔은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이 운영하는 호텔이다. 제빵회사 사장 입장에선 여러가지로 차를 뺄 수 없는 변명을 했을 테지만 별이 다섯개인 최고급호텔 직원과 언성이 커지고 결국 지갑으로 지배인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대기업 상무나 제빵회사 사장은 쉽게 용서할 수 없는 큰 실수를 한 것이 맞다. 이 두사람을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의 입장이 돼보자는 것이고 과연 그들이 '갑'인지 생각해보자는 거다.이 두사건을 계기로 '갑'에 억눌리며 살았던 '을'의 소리가 점차 커질 것이란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어느 정신과의사는 TV에 나와 이 사건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을'의 소리가 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빵회사 사장, 대기업 상무라는 직위만으로 갑이 된다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본의 아니게 이번 사건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던 항공사, 호텔 즉 늘, 언제나, 항상 갑이었던 두 재벌회사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번 사건을 보는 일반인들이 제빵회사 사장과 대기업 상무에 대해 '돈 좀 있다고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설쳐대는 돈벌레 쓰레기들은 소비자의 힘으로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라는 섬뜩한 구호가 인터넷 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떠돌아 다니는 게 더 무섭다. 그들도 소비자인데 말이다. 그걸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도 문제다. 도대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이영재 논설위원

2013-05-08 이영재

계절의 여왕 5월은 왔지만…

새 해인가 싶더니만 벌써 5월이다. 천지가 푸르다 못해 찬란한 빛을 발하는 5월은 자연 그대로의 축복임을 느끼게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던가. 대학가에서는 봄 축제가 펼쳐진다.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운이 온 천지를 흔들어놓는 듯하다. 꽃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의 봄과 지루한 여름의 사이에 있는 달이니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다. 5월은 우리말로 '다섯'이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닫고 서다(閉, 立)'의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인의 날 등 좋은 날이 많다. 그래서 5월을 또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반면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깐깐 5월, 미끈 6월,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 하면서 5월을 깐깐하다고 했다. 음력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어떻든 농촌에서의 5월은 이것 저것 챙길 것이 많은 달이다. 보리는 파랗게 익어가는 보릿고개인데다 모판에는 볏모가 푸른 빛으로 자라 가뜩이나 부족한 일손을 기다린다. 눈코뜰 새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얼마 있으면 라일락과 아카시아 꽃의 향기는 이제 콧 속을 마비시킬 기세다. 봄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이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산과 들로 뛰쳐나가 마음껏 봄의 계절을 만끽하고 싶은 게 모두의 심정이다.그런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5월이 왔지만 주변의 상황은 영 봄같지가 않다. 봄이 왔나 하고 외투를 벗어놨다가 다시 주워 입곤 하는 변덕스런 날씨랄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것 같다. 봄은 왔으되, 봄같지 않은 요즈음이다. 대학가에는 지난 해에 이어 어김없이 축제가 이어지지만 학교 밖에서는 청년실업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달 통계청이 집계한 3월의 20대 취업자 숫자가 작년에 비해 10만명 이상 줄어들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20대가 학교나 학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년실업의 악순환이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층의 취업이 3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점을 감안하면 청년실업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제자들의 일자리를 하나라도 만들어보기 위해 요즘의 대학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학교 측의 쉴새 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문을 나선 졸업생들의 반응은 너무도 시큰둥하다. 취업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 물론 본인이 만족해 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위험스러울 정도로 태연하다. 여기에는 부모의 책임도 일부 있다. 한 둘밖에 없는 자녀가 힘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취업하기보다는 좋은 직장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생계비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캥거루족을 양산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개성공단은 북한의 일방적인 통보로 폐쇄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이 춘래불사춘의 형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한 안보 불안은 가뜩이나 침체된 경기를 위축시키고 있다. 엔저 정책으로 인한 대일 수출감소는 현저하게 나타나 우리 기업들의 피해는 예상보다 크다고 한다. 개성공단에서 나타난 피해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날 전망이다. 민생경제 대통령, 한반도 평화 대통령이 됨으로써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던 박근혜 정부도 출범 2달 만에 첩첩산중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봄이 왔음은 고사하고 경제 한파가 더욱 깊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를 지경이다. 계절은 봄인데 봄같지가 않다고 하는 넋두리도 이제는 무책임한 말일 뿐이다. 봄을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손에 달렸다. 우리의 봄이 언제 올 것인가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종합대책을 제시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이로써 기업과 가계에 긍정 마인드가 확산되면 국민경제의 봄소식은 자연스레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을 진정한 축제로 즐겨보자는 것이다./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객원논설위원

2013-04-30 이준구

우리 내부의 비무장지대를 만들자

뉴스를 생산하는 입장에서도 요즈음 신문 읽기는 고통이다. 좋은 소식이 별로 없다. 가까스로 내각을 구성한 박근혜 정부는 국제외교의 시험대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다.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지만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에 대한 미국측의 입장은 완고하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권한을 인정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청에 정색을 하면서 반대하고 있다. 일본은 엔화를 무차별로 쏟아부으면서 한국의 수출경제를 목조르는 것도 모자라 각료와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보란듯이 참배해 대한민국을 모욕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결렬되고 한·중·일 정상회담도 불투명해졌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조정결과를 지켜보며 사태를 관망중이지만 수틀리면 언제든지 한반도 긴장조성에 나설 것이다. 중심을 잃고 헤매다간 우리 뜻과는 상관없는 우발적 위기가 언제 한반도를 강타할 지 모르는 형세다.국내로 시각을 돌려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창조경제는 원론 수준을 맴돌 뿐 각론 진입이 요원하다. 한 시사평론가는 "박근혜의 창조경제, 안철수의 새정치, 김정은의 생각을 아무도 모르는 세가지"라 농을 던졌다. 박근혜정부의 경제 철학이 벌써 희롱의 대상이 됐다니 이만한 낭패가 없다. 문제는 우리 경제에 창조적인 기운 대신 모든 경제주체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거나 관망하거나 규탄하는 이기적 기운이 싹트는데 있다. 재벌들은 계열사간 거래규제에 반발하거나 자세를 낮추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지하세원 발굴 의지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청년 백수들은 정년연장 추진에 울화통을 터트린다. 6억 이하 집 한채 못팔아 안달이던 사람들은 한숨 돌렸지만, 그 이상인 사람들은 "6억원으로 떨어질 때 까지 손가락 빨고 살아야 하느냐"고 원망이 늘어진다. 아파트 한채로 중산층이라 자위했던 세월들이 허망할 뿐이다.안팎의 불안한 기미 탓인가. 모두 제 앞가림에 급급하다. 대기업들은 대통령 앞에서 대규모 투자를 운운하지만 실제 금고 안에 쟁여 넣어 둔 현금을 선뜻 풀 태세는 아니다. 오히려 엔화 공습에 대비해 국내 투자 보다는 해외 투자로 자금을 돌릴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예측이 현실화된다면 국내 일자리는 그 만큼 줄어들게 된다. 소비자들도 지갑을 닫았다. 현재의 불경기가 내일 개선될 조짐이 없으니 지출을 줄이고 보자는 심산이다. 서민 뿐 아니다. 명품 시장에도 서리가 내렸다니 심각하다. 세금은 생산과 소비에서 발생한다. 제조업 가동률이 추락하고 소비시장이 얼어붙었으니 세금이 제대로 걷힐리 없다. 지하경제를 뒤진다지만 애먼 자영업자들만 들볶을까 걱정이다. 시중에서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5만원권은 가진 자들의 저항을 보여준다. 이제 시작하려는 이런저런 복지정책에만도 돈이 모자란 형편이다. 복지정책이 지속가능성이 깨지면 그 때는 감당할 수 없는 내부 갈등이 폭발할 수 있다.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현실이다.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 심리적 비무장지대를 설정해야 한다. 정치권은 위기극복을 위한 중대현안들은 정쟁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기업과 노조도 비무장지대에서 허심탄회하게 공존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우호적인 계층과 세대만을 대변하는 단견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의 운명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우리 내부의 비무장지대에서 위기 극복을 위해 각자 짊어져야 할 인내와 희생을 자임해야 한다. 덕수궁 대한문 앞 화단을 아무리 짓밟아봐야 일자리와 빵이 생기지 않는다.졸렬한 민족의 위기는 이기를 낳는다. 이기가 다시 위기를 증폭시키는 악순환에 빠진다. 하지만 위대한 민족의 위기는 이타를 낳는다. 이타심으로 위기를 전환시켜 기회의 문을 여는 기적을 이룬다. 이미 1998년 환란시절 금모으기로 기적을 경험한 우리다. 다시 기회의 문을 열어야 할 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윤인수 서울본부장

2013-04-24 윤인수

누가 전쟁괴담을 만드나

이런 지긋지긋한 봄날이 또 있었을까. 지천에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건만 향기가 없고 향기가 없으니 벌도 나비도 찾아보기 힘들다. 봄이 온 것을 눈치 챘는지 어제 사무실 안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제비가 사라진 후 파리가 봄을 알린다'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무실 안을 왱왱거리며 날아다니는 파리에 신경이 쓰였다.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하다. 신경을 쓸수록 파리 소리가 점차 헬리콥터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들리니 말이다. 시중에 떠도는 전쟁 괴담도 그렇게 조그맣게 시작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을 것이다. 한 시간 만에 파리는 내 손에 잡혀 죽었다.지난 대선기간 종편, 이른바 종합편성채널들이 대목을 맞았었다. 선거 6개월 전부터 종편들이 대선바람을 잡기 시작하더니 선거 100일 앞두고 4개의 종편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아리아리한 '정치평론가'들을 총망라해 앞다퉈 방송에 출연시켰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고 출연자의 발언이 강할수록 시청률이 높다는 것을 종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특정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등 일부 종편은 공정성을 포기한 듯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치우쳤다. 급기야 어떤 종편은 선거 당일 그동안 출연한 출연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누가 대통령이 될지 묻는 등 위험천만한 프로를 만들기도 했다. 선거가 종료되려면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말이다. 분명 선거법 위반 같은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후 종편은 물론이고 그 어떤 출연자도 자신의 빗나간 예측에 사과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종편들도 마찬가지다. 종편들의 이런 태도가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다.그런 종편이 요즘 또 대목을 맞았다. 북한위기 때문이다. 4개의 종편이 하루종일 경쟁하듯 쏟아내는 방송의 양이 지난 대선 못지않다. 하지만 문제는 정확성이다. 태양절인 15일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예측했지만 북한은 잠잠했다. 호들갑 떨던 종편들은 머쓱해 하기는커녕 '조용히 지나간 북한의 속셈은?'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방송을 시작했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미사일 발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하루종일 호들갑을 떨어놓고도 막상 별일 없이 넘어가자 '내일은 쏠지도 모른다'라는 멘트를 남기고 어물쩍 넘어간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의도적으로 긴장모드를 조성하는 종편도 있다.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전문가들을 출연시키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가깝다. 어느 종편은 '비상사태시 행동요령'을 방송하는가 하면, 붉은 글씨의 '뉴스 특보'라는 자막 아래 하루종일 '미사일발사 임박' '남북 긴장고조' '오늘 미사일 쏘나'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긴장감을 조성시킨다. 그러다가 문득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국민들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해선 안 된다"며 점잖게 훈계까지 한다. 적반하장이다. 이 모든 보도는 "국민의 알권리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출연자들에게 일일이 "전쟁이 날 것 같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건 예사다. 심지어 출연자들에게 '오늘 미사일을 쏜다고 생각하면 오, 아니면 엑스'라고 답하라는 프로도 있다. 이 정도면 경악할 수준 아닌가. 이게 최근 종편들의 보도 태도다.방송매체가 이렇게 불안감을 조성하니 전쟁 관련 괴담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종편들이 북한방송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3월에 '3차대전 임박' '연천서 국지전 발발' '경기도민 대피소로 피난중' 등 근거없는 전쟁괴담이 퍼졌다. 4월 들어서는 '전쟁이 나면 SUV 차량을 국가에 헌납해야 한다'거나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과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시중에 떠도는 괴담을 주제로 토론하는 종편도 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처음 듣는 얘기들이다. 종편이 시청률을 의식해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보도하는 행위는 이제 자제해야 한다. 국익이 우선되는 보도태도가 아쉽다. 4개 종편이 전문가를 불러놓고 토론하는 공통적 주제가 있다. '위기의 한반도 해법은?'이 그것이다. 나는 그 해법을 안다. 종편들이 국익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한반도를 위기에서 건져 낼 해답이다./이영재 논설위원

2013-04-17 이영재

벤처신화 부활할까

코스닥시장에서 외국인 매수세가 강해지고 있다. 지난 3월 한 달 외국인 순매수액이 9년 만에 최고를 기록한 것이다. 코스닥 지수는 올 들어 12%나 상승, 미국 나스닥의 8.2%를 능가했다. 경쟁국들의 양적 완화와 북한변수로 코스피시장이 갈수록 활력을 잃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근 미국 실리콘벨리를 비롯한 글로벌 기술투자붐이 주목되는데 특히 기술력 있는 국내 벤처기업들이 포진한 코스닥시장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시선을 끈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벤처붐이 또다시 불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 정책은 또 다른 호재였다. 창조경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육성하겠다는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여서 예단은 금물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후보시절 내내 '중기대통령'을 표방, 지난 3일에는 드디어 선물(?)보따리를 풀었다. 착한 천사투자를 활성화하고 대기업들의 기술탈취문제를 근절하며 공공조달에서는 신제품이 역차별 받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할 것을 관계기관에 지시한 것이다. 벤처기업가들의 가장 큰 애로인 투자자금의 조기회수 관련 세제지원도 언급했다.근래 들어 고용없는 성장이 고착된 국내 실정을 감안할 때 중소벤처 창업을 통한 양질의 일자리 만들기가 주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벤처시장이 다시 가열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낙관은 금물이다. 그동안 국내 벤처생태계가 형편없이 나빠진 것이다. 벤처펀드 출자 등을 목적으로 적립할 때 감세혜택을 제공하는 '기술개발준비금 손금산입'과 '투융자손실준비금 손금산입'이 2007년에 없어진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2000년 벤처붐 당시에 마련했던 주식 양도차익 비과세 대상도 대폭 축소되었다. 덕분에 은행과 증권사 등은 벤처에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벤처기업이나 벤처펀드에 출자할 경우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는 '출자액 소득공제' 비율도 엔젤투자를 뺀 나머지는 당초 30%에서 10%로 크게 축소되었다. 개인이 벤처캐피털에 출자해 확보한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비과세 규정마저 2009년에 없앴다. 정부가 세수확보에만 연연한 나머지 민간벤처 투자시장을 크게 위축시킨 것이다. 정치권도 벤처위축에 한 몫 거들었다. 스타트업 기업 및 벤처기업 전용 주식시장인 코넥스(KONEX) 신설과 대형 투자은행(IB) 육성 등을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지난 2월 국회에서 좌절된 것이다. 5곳의 대형 증권사에 한해 투자은행 업무를 허용하고 건전성 감독을 완화해 주는 것은 극소수 금융재벌들의 배만 불릴 우려가 크다는 것이 이유이다.자금난에 직면한 벤처기업들은 빈사지경이다. 핵심 자금조달창구인 자본시장마저 장기불황과 증시침체로 증자 혹은 회사채 발행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은행들은 과잉유동성으로 대출처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음에도 벤처기업의 융자호소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말이다.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벤처타령을 늘어놓곤 했으나 모두 공염불이었던 것이다.박근혜 정부는 한술 더 떴다. 올초 증권거래법과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금년 7월 이후 거래분부터 개인간 주식 장외거래내역을 세무당국에 제출할 것을 의무화했다. 주식을 장외에서 거래하면 상장, 비상장 구분 없이 거래대금의 0.5%를 거래세로, 매매차익의 10%를 양도소득세로 자진 납부해야 하는데 그동안에는 상당수 투자자들이 법을 준수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새정부가 지난 2일부로 일정을 앞당김으로써 신분 노출을 꺼린 큰손들이 지난달부터 한꺼번에 장외시장 거래를 중단했다. 상당수 개미투자자들의 추후동참은 불문가지여서 벤처캐피탈들은 망연자실이다. 기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함은 물론 향후 시드머니의 조달루트마저 봉쇄될 우려가 큰 것이다. 지하경제 양성화가 벤처환경을 더욱 척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천재 한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리스크는 더욱 확대된 반면에 대박 기회는 현격히 축소되어 오히려 혈세에 기생하는 좀비벤처만 키우지 않을까 걱정이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04-09 이한구

창조 경제 DNA를 깨워라

'창조'라는 단어가 가장 실감나는 사례는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일 것이다. 한 명의 천재가 내놓은 혁신제품이 기존 시장 판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내비게이션,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등의 업종은 엄청나게 위축된 바 있다. 이중 mp3 플레이어 산업은 우리나라가 종주국이라고 불릴 만큼 강했던 업종인데 그 업체들이 모두 업종 전환을 해야 할 정도로 큰 변화가 발생했다.이처럼 창조적인 작품 하나로 인해 모든 '게임의 법칙'이 바뀌는 세상이 되었다. 이를 창조경제시대라고 칭할 수 있으며, 창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국가경쟁력 측면에서 너무도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경제는 아직까지 어떻게 창조 능력을 키울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갖고 있지 못하다. '창조'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창조 유전자를 단련하는 작업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한국경제가 창조경쟁에서 우위에 서려면 이미 관료화 정도가 높은 대기업보다는 작지만 역동적인 벤처형 기업에 기댈 수밖에 없다. 즉, 우리도 이제 바야흐로 '작은 기업 혁신론'이 통하는 상황에 접어든 것이다. 서구(西歐)에서 시작된 '작은 기업 혁신론'은 작은 기업일수록 혁신에 적극적이지만 대기업들은 기존 성공방법을 지나치게 믿어서 혁신 역량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크리스텐슨(Christensen) 교수는 벤처기업의 파괴적 혁신 효과를 2000년대 초반부터 주장한 바 있다.당시 한국경제는 대기업들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소기업 중심의 창조경제를 구상할 여건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자체(in-house) 연구소를 구축하여 창조 능력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의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제는 기술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도전적인 기업에서 창조 DNA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들어선 것이다.돌이켜 보면, 한국경제사에서 창조 DNA가 가장 잘 표출되었던 때는 벤처정신이 살아있었을 때였다. 여기서 잠시 벤처붐 시절인 1999년을 돌아보자. 당시 한국사회는 많은 신생 벤처기업들에서 젊은 청년들이 넥타이 없이 밤늦도록 일하는 소식에 열광했었다. 당시 대기업에 실망했던 대중들은 이런 도전정신에 '벤처정신'라는 이름을 주었다. 야전 침대에서 자면서도 흥겨워서 일에 미치며 열정과 능력으로 도전하는 정신, 당당하게 부(富)를 추구하는 자신감, 자신의 손으로 성공하겠다는 도전의식, 이런 속성들이 신선한 매력이었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창조 DNA의 원형(原型)이 바로 벤처정신임을 강조하고 싶다.창조 DNA를 하루빨리 단련시키고자 한다면, 한국경제는 한때나마 열광했던 벤처의 도전정신을 살리는 방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1997년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장해온 한국벤처사를 볼 때, 진정한 창조 유전자를 갖춘 벤처들은 이미 글로벌 경쟁력이 높은 수준으로 성장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연매출 일천억원을 넘는 벤처기업은 300개를 훌쩍 넘었으며, 심지어 연매출 일조원 이상이 되는 벤처들도 등장했다. 이는 벤처정신이야말로 지난 1960~70년대의 산업화 1세대 기업가들에게서 발견되던 불굴의 도전정신을 계승하는 정통 유전자임을 다시 확인시킨다.창조 DNA는 사실상 기업가정신과 통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업가정신은 대기업이 관료화하면서 과거보다 오히려 더 취약해졌다. 그런데 이제 기업가정신도 다른 속성을 원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창조경쟁이 심해지면서 1960~70년대와 같이 창업자 개인의 기업가정신에 의존하던 시대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전 구성원이 기업가정신을 공유하는 기업이 창조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교훈 그대로, 최고 지휘자에서부터 최말단 병사까지 모두 동일한 욕망을 갖는 '상하동욕(上下同欲)'의 조직이 승리한다는 교훈이 창조 경쟁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04-02 손동원

새로운 여행 문화를 위하여

여행은 현대인이 가장 선호하는 여가활동이다. 이 현상은 소득 계층이나 성별, 연령과 무관한 분포를 보이고 있어 일반적 취향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인천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지표조사에서 30.7%가 주말의 여가활동으로 관광을 꼽았다. 평일의 여가 활동 중 1순위도 관광이었다. 물론 여행과 관광에 대한 시민들의 욕망은 시간과 비용의 제약 때문에 실현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시민들의 주말 여가는 '낮잠'(19%)이나 'TV시청'(15%)과 같은 소극적 여가활동으로 대체되고 있다. 여가실태는 다른 도시나 전국조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이러한 여가 수요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문화정책의 과제이겠다. 농촌 마을과 협력하여 저비용의 가족단위 체험형 여행프로그램, 환경운동단체들이 시도하고 있는 이동거리와 비용을 줄인 친환경 여행 프로그램, 그리고 여행지의 역사, 문학, 예술 테마를 여행과 결합시킨 역사·예술기행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대안적 여행 프로그램의 개발보다 여행과 관광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터 되돌아봐야겠다.'질주하는' 우리의 여행 문화! 여행상품의 숨가쁜 일정표는 물론 길을 나서면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욕심'이다. 여행지에서 다음 경유지를 향해 출발을 독촉하는 가이드, 다음 경유지를 향해 바삐 발길을 돌리는 한국 관광객들의 여행문화가 외국인들에게 이색적 구경거리이다. 사실 정상 정복에 급급하면 등산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어야 할 여행도 성과주의의 강박증이 역력하다. 모처럼의 여행에서 더 많이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주마간산 격으로 경유지를 훑고 지나간다면 오히려 한곳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다.길에서 보는 풍경과 풍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떠난 나그네 자신이다. 찾아야 할 것은 바쁜 일상에서 잃어버린 자아이며 회복되어야 할 것은 노동으로 쇠약해진 자신의 영혼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지를 굳이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가까운 공원과 산, 도시 안의 마을도 여유롭게 걸으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여행이란 일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되도록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고, 또 먼 곳을 다녀온 사람을 만나면 부러운 마음부터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비용과 시간이다. 유럽이나 남미를 해마다 여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이곳저곳을 일과 무관하게 시간을 내어 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화려한 외국의 관광지보다는 국내를, 자신의 삶터를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세계의 도시들을 섭렵하고도 정작 자기 나라와 도시, 이웃의 삶에는 청맹과니인 '내부실향민'이 될 수도 있다.촬영 강박증에서도 벗어나야 할 듯하다. 여행지에서 기억과 느낌을 디지털 사진이 대신해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애써 다녀온 여행에서 '남는 것이 사진 뿐'이라면 너무 쓸쓸하지 않는가? 취재나 조사목적이 아니라면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맨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여행지를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이 시작된다'는 역설은 헝가리의 미학자 루카치가 현대 소설의 내적 형식을 진정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려는 문제적 인물의 내면으로의 여행 과정으로 비유한 데서 사용한 표현이다.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입증되지만, 주인공이 추구하던 조화로운 삶의 가치는 소설이 대단원을 내린 순간에 비로소 독자들의 마음속으로 부상(浮上)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길과 여행의 아이러니는 여행 자체를 설명하는 데도 유효할 듯하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03-27 김창수

국방장관에 비육군 출신 임명?

이미 육사 출신 3명이나 주요 보직에 내정'김병관 불가론' 속 해군·공군 박탈감 고려를박근혜 정부, 군심과 민심 동시에 달랠 '카드'박근혜 정부의 내각 인선이 마무리되는가 싶더니만 군데 군데서 파열음이 들린다.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의 두 아들 병역면제 및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인한 자진 사퇴에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도 미래부 기능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국 파행을 이유로 전격적으로 내정자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이번에는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후보자가 '주식 백지신탁제도'란 복병을 만나 또 사퇴했다. 황철주 후보자의 개인적 실수도 있지만 청와대 인사시스템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인선된 3명의 공직후보자가 청문회도 열기 전에 낙마한 것이다.게다가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김병관 국방장관에 대해서는 아직 임명조차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조만간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김병관 국방장관 내정자에게 임명장을 줄 것이라는 시각이 있는 반면, 이들의 임명을 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하다. 특히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김병관 불가론'이 워낙 강해 정부조직법의 여야 합의가 이뤄진 마당에 국방장관만이라도 대통령이 양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새로운 국방장관은 비육군 출신에서 고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여론이 일고 있다.이 같은 여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박근혜 정부 권력 핵심부에 이미 육사 출신이 중용됐기 때문이다. 육사 27기인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노무현 정부 국방장관, 이명박 정부 여당 비례대표 의원을 거쳐 박근혜 정부에서 또 중용됐다. 육사 28기인 박흥렬 전 육군참모총장은 청와대 경호실장에 발탁됐다. 강창희 국회의장과 육사 동기로 25기인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은 국정원장에 내정됐다. 육사 출신이 국회와 청와대, 정보기관, 군 핵심부에 포진한 셈이다. 박 대통령의 육사 출신에 대한 신뢰가 아무리 특별하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새 정부 주요 직책에 군 출신들이 많이 포진한 것을 두고 군에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육군에 국한한다는 얘기다. 해군과 공군 내부에서는 섭섭하지 않을 리 만무다. 육해공군의 합동성을 강화해야 하는 우리 국군의 중요한 시점에서 육군 일색이자, 더욱이 육군사관학교 출신들만 새 정부 안보와 정보 주요 라인에 배치한 것은 해군과 공군에 있어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국방장관만큼은 오랜만에 비육군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군별 나눠먹기는 물론 아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육해공군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군별(軍別) 갈등과 사기(士氣)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동안 해군과 공군에서 국방장관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초대 이범석~제43대 김관진 장관에 이르는 동안 5~6차례에 불과했다. 특히 해군 출신이 국방장관을 지낸 경우는 1953년 손원일 제독과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윤광웅 장관 등 단 두 차례이고, 공군은 김정렬 주영복 이양호 장관 등 세 차례이다. 해병대 출신은 단 한 차례 1963년부터 5년간 김성은 장관이 지낸 바 있다. 민간인 출신 7명을 제외하고는 28명의 육군 출신이 국방장관을 지냈다. 군 출신별로 따지면 육군이 80%에 이른다.현대전은 지상군도 중요하지만 해군력과 공군력 그리고 특수부대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경우 점차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댜오위다오 분쟁과 일본의 허무맹랑한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을 보면서 해군력 증강에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연일 계속되는 위협에도 국방장관 임명을 놓고 대통령이 계속 고심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비육군 출신을 국방장관에 임명하는 카드를 쓴다면 박근혜 정부가 군심과 민심을 동시에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이준구 객원논설위원·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2013-03-20 이준구